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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 210-220

210화 용군단

-용기사.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구먼.

공중항모 여기저기서 퍼지는 중후한 목소리.

드미트리의 음색이다.

"자기소개는 좀 해주지?"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뭔 이름이 그렇게 길, 로마노프, 로마노프?"

용기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유명한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님이 왜 한국에 있어?"

-장래가 창창한 헌터에게 관심이 있어서 말일세.

"납치하려고 왔겠지."

-허허. 섭외나 포섭이라고 해주게나.

로마노프 가문의 인재 섭외 욕심은 미국과 유렵 일대에서 유명했다.

마법에 재능이 있는 헌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섭.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납치(?)해서 굴린다고 말이야.

"저기. 용기사 씨. 나 찾아온 거 맞지?"

파프너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한테서 용의 냄새가 진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아."

"그럼 내려와서 이야기해. 목 아프니까."

파프너의 당돌한 말에 신준석이 눈치를 살폈다.

"여긴 로마노프 가문의 공중항모인데요."

"명색이 전 세계에서 최강의 헌터이신데. 그 정도는 괜찮으시겠지."

이야.

먹이는 솜씨 보소.

-용기사. 그대를 우리의 위대한 군함,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항공모함에 초대하겠네.

"좋아."

슈아아악!

역소환되는 드레이크.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공중항모 갑판 위로 떨어졌다.

쿵- 가벼운 충격 소리를 내며 착지한 제인.

"와우. 슈퍼히어로 랜딩."

파프너가 박수를 쳤다.

'나도 제정신은 아니지만....'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회귀 전에 과묵했던 박하늘 씨가 그리운 건 왜일까.

아.

블리자드의 여파가 사라지면서 맑아진 하늘을 보니 괜히 코가 시큰거렸다.

*

다시 함장실에 모인 유진 일행.

주인석에 앉은 드미트리를 사이로 제인과 일행이 마주치고 있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래. 용기사께서는 이곳에 무슨 일로 오셨는가?"

"용군단에서 저 친구를 원해."

제인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파프너를 가리켰다.

"음. 당신. 뭐라고 불러야 해?"

"제인. 편하게 불러도 돼."

"편하게 말하라고 하니 그럼 솔직하게 말할게."

파프너는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난 물건이 아니야. 초면에 헛소리 할 거면 미국으로 돌아가."

어우.

세다, 세.

제인은 면전에서 욕을 먹고도 표정 하나 구기지 않았다.

"깔깔. 재밌다. 너."

"난 당신 같은 마이페이스 싫어해."

옆에서 듣고 있던 유진의 뺨이 살짝 일그러졌다.

욕 먹은 건 제인인데.

마음이 아픈 건 왜 자신일까.

〔그대에게 양심의 삼각형이 아직 남아있다는 증거이니라.〕

'내 양심은 늘 안녕하다고.'

〔진실로 그리 생각하느냐? 조만간 모두 닳아서 동그라미만 남겠구나.〕

이상한 비유는 어디서 배워오셨대. 성좌 나리.

"그리고 말이야. 나한테는 결정권이 없어."

"무슨 의미지?"

"내 주인에게 물어봐."

찌릿.

'갑자기 왜 날 노려보시는 건데.'

유진은 마름모꼴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을 직시했다.

"위대한 용족은 주인을 모시지 않아."

"그건 용군단의 견해인가?"

"뭐, 그렇지."

"파프너와 나는 영혼의 파트너다. 용군단의 가치관으로 얽매려 하지 않았으면 하는군."

제인은 실소를 내뱉었다.

"그럴 줄 알았어."

"의외로 포기가 빠르군."

"뭐, 일단은 용군단의 사자로 왔잖아. 전해달란 메시지는 왜곡 없이 말해야지."

"당신의 계약자가 반발하지는 않는가?"

"말도 마. 지금 엄청 시끄러워."

[금색 용군단의 참모가 당신을 독촉합니다.]

[금색 용군단의 참모가 당신을 독촉합니다.]

[금색 용군단의 참모가 당신을 독촉합니다.]

....

보여줄 수만 있으면 용군단에서 내려오는 메시지를 이들에게 보여주리라.

짧게 한숨을 쉰 제인.

드미트리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볼 일은 끝난 겐가?"

"아니. 그냥 가면 용기사 박탈될지도 몰라."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다.

제인은 용군단의 대리인이 되면서 많은 수혜를 받았다.

여태까지 받아온 게 있는데 나몰라라 하고 갈 수도 없는 법.

"새로운 진룡족의 주인이라는 분?"

"그렇게나 거창한 칭호를 붙이면서 다시 말하는 이유가 뭐지."

"용군단에서는 그 친구가 합류하기를 바라. 근데 안 풀어줄 거잖아."

"그렇지. 내가 죽을 때까지는 맹약이 이어질 거다."

"필멸자가 살아봐야 수십 년 정도고."

"인간의 평균 수명은 100살이 안 되니 그렇겠지."

용군단의 높으신 분들에게 들으라는 듯.

제인은 뻔한 내용을 물어보았다.

"용군단에서 관심이 있는 건 새로운 용족의 힘이야."

"사룡족. 그러니까 원시 시대 이후로 사멸된 일족이 부활했으니 말이군."

"잘 아네. 용군단 쪽 사정도."

"대충은."

"새 용족, 그러니까 파프너 씨는 당신 곁에 있고 싶어하잖아."

파프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당신들이랑 같이 있으면 모두 해결되겠네."

"...음?"

유진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잘 가다가 이상한 결론으로 가는군."

"나는 용군단의 대리인이야. 이 눈으로 보는 건 높으신 분들에게도 공유가 된단 말씀."

"당신이 파프너를 관찰하면 용군단에 합류하지 않아도 된다?"

"오. 이해가 빨라."

"거절하지."

유진은 칼 같이 쳐냈다.

제어하기 힘든 건 김미정으로 충분했다.

'김미정은 무력으로 제압한 다음 계약서에 도장이라도 찍었지.'

용기사 제인.

회귀 전 · 후의 행보만 보면 김미정의 상위 호환격인 여자다.

흥미를 찾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싸움꾼.

용군단의 대리인은 한 명밖에 존재할 수 없기에, 가문을 따로 만들진 않았지만.

단신 무력만으로는 7대 명가의 가주들에 버금갔다.

〔오딘의 계약자도 상대할 정도로 강한 게냐?〕

'그 정도는 아니지.'

무왕이랑 드미트리는 천외천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드미트리 역시 생각이 복잡해졌다.

'용군단의 관심을 끈다, 라.'

유진이 던진 발칙한 제안.

몇 번을 고민해봤지만 결론은 동일했다.

-네크로맨시 정보를 빼갈 수 있으면 해보시던가.

네크로맨시를 분석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자신감?

아니면 능력의 기원이 성좌에게 있기 때문에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인가.

어느 쪽이 되었든 유진의 태도에는 확신이 있었다.

'최후의 수단으로는 로마노프 가문으로 데려온다는 생각도 했지만.'

용기사 제인 때문에 모든 선택지가 엉망이 되었다.

"이보게. 역천의 거인의 성자여."

"말씀하십쇼."

"그대가 건넨 제안. 고맙지만 당장은 어려울 것 같구먼."

"로마노프 가문의 조력이 있으면 훨씬 연구가 빨라질 텐데. 아쉽군요."

"현 시점에서는 반중력 엔진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게 올바르다고 여겨지더군."

거짓말이다.

이 순간에도.

드미트리를 후원하는 성좌, 오딘은 네크로맨시의 매커니즘을 파악해야 한다며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용군단까지 엮여버렸으니 무력을 동원하기가 껄끄러워졌다.

"어쩔 수 없군요. 로마노프 가문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껄껄껄. 시간 되면 초대장을 보낼 테니 한 번 조국에 방문해주게나."

막 건조를 완료한 공중항모의 위엄을 전 세계에 알릴 겸.

네크로맨시의 비밀을 파헤치려 극동의 작은 나라에 방문했지만.

얻은 것은 크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애써 쓰린 속을 달랬다.

*

우우우우웅-.

반중력 엔진에서 푸른 입자가 흘러나오고.

수만 톤이나 되는 강철의 성이 하늘 위로 비상한다.

부드러운 축객령을 내린 드미트리는 일행이 나가자마자 공중항모를 움직였다.

'한 고비는 넘겼네.'

등허리가 축축하다.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

마법왕 본인이 직접 한국으로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저 작은 인간이 그대의 흉중을 못 알아챘으리라 여기느냐?〕

'아니. 짐작은 했을 거다.'

〔요행이 따랐구나.〕

'갑자기 용기사가 오지 않았으면 조금 더 귀찮았을 거야.'

이번에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고난을 넘긴 덕분일까.

나름대로 이득도 꽤 보았고 말이야.

가장 큰 수확은 공중항모를 보고 솟구치는 영감에 정신을 못 차리는 신준석이다.

항모를 보호하는 마법진.

백 문이 넘는 마법 포탑 등.

신준석의 영감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넘쳐났으니.

"동업자 양반."

"예."

"비행 가능하고 소형화한 포탑을 단 골렘. 제작 가능하겠어?"

"본인이 하시지 그렇습니까."

"난 못해. 성직자잖아."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장은 아닙니다."

그래.

충분했다.

회귀 전을 기준 삼으면 앞으로 20년 뒤에나 비행 가능한 전투 골렘을 제작한다.

공중항모를 봤으니.

전투 골렘 제작까지 못해도 몇 년은 단축될 것이다.

"사룡의 주인."

"왜?"

"내가 당신 도와준 것 같은데. 맞지?"

"훼방이나 안 놓았으면 다행이지."

"에이. 마법왕의 눈에서 아주 욕심이 뚝뚝 떨어지더라."

알면서 태클을 놓은 거군.

뭐,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다.

"거래를 다시 할 생각인가?"

"이건 서비스. 명세서에 넣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원하는 게 정말로 우리를 관찰하는 건가?"

"응. 훼방은 안 할게."

용군단의 대리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경 쓰인다.

본 드래곤이나 용기병 등.

용족 시체와 정수를 이용해서 언데드를 제작할 건데.

용군단이 직관 중이라고 하면 불편하잖아.

-주인. 나한테 맡겨.

파프너의 사념에 고개가 확 돌아갔다.

어떻게 하려는 거지?

"나를 관찰할 거라고 했잖아."

"응. 그 이상은 타협할 수 없어."

"잘 됐네."

"뭐가?"

"내가 용족이 되긴 했어도 제대로 힘을 다루지 못하거든."

파프너는 허공에 알 수 없는 글자를 새겼다.

용언.

근원에 닿아 있는 문자다.

"내 용언하고 달라. 대체 뭐지?"

"사룡으로 거듭나면서 쓸 수 있게 된 용언이야."

"와. 높으신 분들도 난리 났어."

제인은 귀찮다는 듯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막는다고 해서 용군단의 직통을 막을 순 없겠지만.

"이 힘. 제대로 쓰고 싶어."

"수련을 도와 달라?"

"어때. 그럼 서로 원하는 바가 같아지잖아."

"음, 좋아."

파프너는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수련 겸, 귀찮은 혹을 떼어줄 테니 유진의 마음대로 하라는 눈빛.

'최선의 선택이군.'

유진은 파프너의 생각을 존중했다.

"파프너. 한 달만 다녀와라."

"또 무슨 일 벌이게?"

"평양 수복해야지."

"아. 그쪽에도 볼 일이 있었지."

메멘토로 본 비전.

평양 군벌의 총수가 [배교자의 심장]을 먹어치우기까진 50일 정도 남았다.

"그러면 파프너를 잘 부탁하지."

"잡아먹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제인은 드레이크를 재소환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폴리모프를 해제한 파프너가 그 뒤를 따르고.

방금 전까지의 소란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개활지가 고요해졌다.

[주, 주군. 이건 대체.]

"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송명석."

[예!]

"아라한 길드 헌터들의 시체를 모두 수습해와라."

마법왕이 자신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회전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한 시간의 수레바퀴.

움직임을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

'깔리거나. 아니면 더 빠르게 뛰거나.'

유진은 손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쏜살 같이 지나갔다.

211화 국내 정리(1)

사리원.

한반도 이북에서 교통의 요지로 불렸던 도시.

이젠 희끄무레한 안개에 휩싸인 채 죽음이 교차하는 땅이 되었다.

-으우우우.

-그억.

짐승 군벌을 토벌한 후, 사리원에 남은 생존자들은 모두 남쪽으로 보내놓았다.

그 덕에 언데드의 물결이 도심을 통과해서 북진하는 중에도 인명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주인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조승철의 사념이 유진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바뀐 몸은 어떤가?"

[강대한 영력에 적응하느라 고생했지만, 이젠 괜찮습니다.]

다크 미니언 때보다 훨씬 짙어진 흑색 기운.

조승철의 육신에는 눈에 띠는 변화가 여럿 생겼다.

사슬 몇 가닥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쉼 없이 회전했고.

양 어깨에는 임프의 머리를 깎아서 달아둔 뼈 얼굴 두 개가 쉼 없이 딱딱거린다.

넘실거리는 영력을 로브처럼 전신에 두른 채, 훨씬 짙어진 푸른 불꽃이 잔광을 남기며 사방에 빛을 만들어냈다.

"어때. 리치가 된 기분은?"

[새 육신으로 주인님께 봉사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헛소리는 그만."

[생전의 저였으면 도달하지 못했을 지고의 경지. 이렇게라도 밟아보니 기분 좋군요.]

이 녀석도 송명석보단 덜하지만, 은근히 아부를 많이 한단 말이지?

샐쭉한 눈으로 바라보던 유진은 피식 웃었다.

'넌 원래 7성까진 갔었어.'

퀵 리로드.

강력한 특성을 보유했으며 재능도 뛰어나서 붉은 거미 간부까지 올라갔던 게 조승철이다.

확정 7성급 인재이니 당연히 리치로 만들어서 굴려줘야지.

척- 척-.

시커먼 갑주를 입은 망자들이 유진의 뒤에 도열했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흉흉한 기운.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기운을 접하는 것만으로 기절할까 싶을 정도다.

손에 쥐고 있는 병장기들은 모두 영력에 휘감겨서 강화되어 있었고.

갑주에 새겨진 온갖 방어 마법들은 어지간한 간섭에도 휘둘리지 않을 만큼 굳건했다.

데스 나이트.

상급 언데드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괴물들이 등장한 것만으로 인근 온도가 1도는 떨어졌다.

[모두 준비를 마쳤습니다.]

"수고했다."

유진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보름달처럼 휘어진 눈동자.

조소가 입술을 물들였다.

"다시 태어난 기분은 어떤가. 이신우?"

[....]

"너무 감동적이라서 말도 안 나오나보군."

[제게 허락된 생각은 오직 주인에 대한 충절뿐입니다.]

"아. 진심을 내뱉을 수 없으니 그렇게 말한다, 라고 해석해도 되나?"

[....]

두 번이나 유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 데스 나이트.

생전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였으며, 최초로 여덟 번째 성위에 올랐던 자는 숨이 끊어진 후에도 자유를 찾지 못했다.

성좌의 가호를 받긴 했으나 성직자는 아니었기에.

네크로맨시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혼백을 꺾는 데만 꼬박 3주가 걸렸다고.'

8성 무인의 정신을 굴복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해보지 않으면 모를 거다.

상급 언데드는 육신과 혼백이 일치되어야 제작할 수 있다.

이신우와 다른 7성 헌터들의 의지를 꺾어내지 않으면.

데스 나이트로 제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대가 여태 오리지널 술법이라고 자랑하던 합일은 상급 언데드에게 큰 의미가 없지 않느냐.〕

'원래 상급 언데드에게나 써먹을 제작 방법을 당겨온 거 자체가 엄청난 일이지.'

하여간 아는 게 없어요.

이래놓고 무슨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을 주관한다는 건지.

아라한 길드 정예 헌터들의 영혼은 대부분 전장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네크로폴리스는 영역 안에 있는 혼백들에게도 직 ·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생전에 6성 이상에 도달했던 작자들이라 몇 년이고 억류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마법왕과 용기사의 방문이란 역대급 이벤트를 수습할 때까지 잡아두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단 말이다.

유진은 그 혼백들을 붙들어서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시전.

자발적(?)으로 생전의 육신에 들어가서 언데드로 되살아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크하하핫. 그게 자발적이라면, 짐은 평화적인 협의 끝에 제우스에게 선양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겠구나.〕

'아. 그럼 힘으로 뺏긴 거였어? 와. 무능하다. 무능해.'

크로노스 호 침몰.

마법계 헌터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7성 헌터만 넷.

백성현은 특히 써먹을 데가 많은 작자였다.

간계를 잘 꾸미고 운영도 잘한다.

마법능력까지 뛰어나니 네크로폴리스를 굴릴 노예로 최적의 인재인 셈.

문제는 파프너가 놈의 육신을 가루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미 죽인 시점에서 리치로 만들기는 어렵고.'

리치는 데스 나이트처럼 사후에 동의(?)만 구하면 만들 수 있는 언데드가 아니다.

마법사가 자신의 생명력을 봉인해서 영생을 구가하는 행위.

간혹 한을 못 버린 기사의 혼령이 몸뚱이에 들러붙어서 데스 나이트가 자연발생하기도 한다지만.

리치는 제작 매커니즘이 완전히 다르기에 자연발생은 불가능했다.

〔한데 그대의 하수인 중 하나는 리치가 되지 않았느뇨.〕

'그 짓 하느라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조승철을 리치로 개조하는데 들어간 자금만 백 억 단위.

암상에 의뢰해서 온갖 희귀한 촉매와 약재들을 구매했고.

대형 몬스터들을 포획, 곧바로 죽이지 않고 생명력을 바닥까지 짜내어 압축했다.

그 생기를 조승철의 몸뚱이와 링크.

동시에 온갖 촉매와 약재를 갈아서 만든 10중첩 마법진을 발동해서 조승철의 성위를 강제로 끌어 올렸다.

타인의 생명력을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는 마법진.

말은 쉽지만, 온갖 반발력을 억누르고 조승철의 혼백마저 속여야 했기에 대법을 마친 후에 하루 동안 곯아떨어졌다.

'그나마도 육체가 남아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고.'

〔하면 그 작은 인간은 리치로 만들 수 없단 의미더냐?〕

'당장은 그래.'

뭐, 재료만 수급해오면 어떤 식으로든 만들 순 있다.

싱크로율이 맞아 떨어지는 시체를 구해서 백성현의 영혼을 쑤셔넣고.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면 조승철에게 사용한 대법을 다시 실시.

리치로 되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뭐, 급한 것도 아니고. 놈은 싹수가 노래서 바로 할 수 있어도 안 할 거야.'

리치는 데스 나이트와 다르다.

혼백으로 엮여 있는 게 아닌, 단독으로 유지가 가능한 독립된 개체.

유진이 조승철을 안심하고 부릴 수 있는 건 라이프 포스 베슬을 쥐고 있어서다.

허튼 짓 하면 곧바로 요단강 건너게 할 수 있거든.

'백성현은 심계에 능하지. 지금 리치로 만들면 어떻게든 뒤통수를 치려고 수작질을 부릴 거다.'

위험 부담을 안고 녀석을 부려야 할 만큼 상황이 나쁘진 않았다.

〔마법왕이 그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느냐. 짐은 그 부분이 우려된다만.〕

'용기사까지 왔잖아.'

용기사 제인의 등장은 유진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꽤나 혼란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유진에게 득이면 득이지, 손해는 아니었다.

용군단의 이름값을 빌려서 로마노프 가문을 억제할 수 있으면 땡큐지.

'백성현의 혼백은 네크로폴리스에 박아 놨다.'

지금쯤 강령술 연산을 돕느라 머리가 터져 나가고 있을 거다.

남은 7성 마법계 헌터들도 같은 신세가 되었으니.

평양까지 정리하면 리치로 되살릴 준비를 천천히 해야겠다.

[주군. 하늘 위에서 흉포한 기세가 느껴집니다.]

"시간에 맞춰 왔군."

[폴리모프]

빛줄기와 함께 나타난 여인이 유진의 곁에 내려왔다.

파프너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녀왔어."

"성과는 좀 있었나?"

"제인 씨가 가르치는 재주는 영 없더라고. 그래도 재주껏 배워 왔어."

벌써 씨, 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친해진 건가.

파프너의 모나지 않은 성격이라면 어느 누구와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뭐어어어? 재주가 없다고오오??"

하늘 위에서 들리는 쩌렁쩌렁한 음성.

1달 전과 마찬가지로 드레이크 위에 탑승한 용기사는 소리를 질렀다.

"어머. 들켰네."

"내애애애가!! 얼마나 고생했는데에에!!!"

"틀린 말은 안 했잖아. 제인 씨."

용기사는 반박하지 못했다.

홀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기술도 감각적으로 사용했다.

파프너의 능력을 분석할 겸, 수련을 도왔지만 두루뭉술한 조언만 했다.

[무신의 눈]이란 희대의 사기 능력을 보유한 파프너여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용기사의 가르침에 학을 떼었으리라.

"당신은 거기서 구경하고 있을 텐가?"

"너희 싸움에 어울려줄 도리는 없어."

기대하지도 않았다.

용기사가 제 시간에 파프너를 돌려보내주기만 해도 감사할 뿐.

"난 파프너를 관찰할 거야. 신경 쓰지 마."

팔짱을 낀 용기사가 도도하게 외쳤다.

음.

그러시던지.

*

사리원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파프너를 통해 한번 구축해놓았다.

대규모 침식지역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병력을 위로 올려 보내는 과정에서 피해가 강요되긴 하지만.

언데드를 부리는 입장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겔. 일어나라.]

[데드 라이즈]

한 달 동안 흑탑에서 수련한 다크 미니언들은 겁 없이 달려든 몬스터들을 죽이고 언데드로 되살렸다.

언데드 군대에 자진입대하는 몬스터들.

네크로폴리스의 영역도 대폭 확장해서 이젠 사역 가능한 숫자가 4만까지 늘어났다.

"진격해라."

이신우를 필두로 한 데스 나이트들이 선두를 맡았다.

최형태가 이끄는 데스 카발리에 부대도 돌파력이 어마어마하지만.

안정성까지 고려해보면 데스 나이트들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암흑 강기]

서거걱-.

검은 기류가 몬스터들을 도륙하고.

병장기에 쓰러진 괴물들은 언데드로 되살아났다.

데스 나이트에게 죽은 자들은 하급 언데드로 되살아나기에.

언데드 군대는 착실하게 숫자를 불려 나갔다.

"크르륵. 적이다."

"사리원을 쑥대밭으로 만든 자들인가!"

평양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는 막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짐승 군벌이 세운 기지.

라이칸스로프들은 언데드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변이해서 달려들었다.

[짖지 마라. 시끄럽다.]

우드득-.

데스 나이트의 선두를 맡은 이신우가 라이칸스로프를 반으로 찢어 죽였다.

사방으로 튀는 피.

푸른 안광은 더 진해졌다.

생전의 능력을 대부분 이식받은 이신우.

오딘에게 받은 가호를 살리진 못했지만, 본신의 능력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7성에 도달하면 둠 나이트로 업그레이드해줘야지.'

데스 나이트의 무력은 7성.

생전에 8성까지 도달했던 이신우의 무력을 100% 살려줄 수 없다.

제대로 부려먹으려면 추가 개조를 통해 둠 나이트로 만들어주면 그만이고.

운이 좋으면 회귀 전의 박하늘 씨처럼 9성급 무력을 소유한 헬 나이트로도 강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신우를 필두로 한 데스 나이트들은 평양까지 가는 길을 쭉 뚫어버렸고.

총 4만이나 되는 언데드 군대는 쉬지 않고 진격해서 순식간에 옛 북한의 수도까지 쾌속으로 나아갔다.

본체로 돌아간 파프너는 평양을 한 차례 순회하고 와서 짐승 군벌의 전력을 이야기했다.

[라이칸스로프는 5천이야.]

"꽤 많이도 모았네."

[정면으로 갈 거야?]

"시간 끌 필요 없잖아."

평양까지 손에 넣으면.

남은 이북 쪽 군벌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로마노프 가문의 주목을 원 역사보다 빨리 받게 되었으니.

더 숨죽이고 있을 필요는 없다.

"오늘 안에 끝내자."

유진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언데드 군대가 평양을 향해 전진했다.

212화 국내 정리(2)

짐승 군벌의 수장.

김정민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주석궁 남쪽을 바라보았다.

평양 시가지까지 입성한 망자들.

퀴퀴한 시체 냄새 때문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이가 없네."

"대장 동무. 어찌 합네까?"

"강 건너면 모두 조지라."

"알겠습네다."

김정민은 오른손으로 코를 북북 문댔다.

'간나새끼가 돌았나.'

유진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개성 제5 혁명군과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짐승 군벌과 간간히 소식을 공유했다.

그렇기에.

불타는 산에서 벌어진 전초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전면전 때 도망친 소수의 제5 혁명군 잔당들은 짐승 군벌에 합류해서 당시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내래 쉬운 상대가 아니라.'

제5 혁명군?

그 작자들은 피라미에 불과했다.

본신의 능력보다 몬스터를 길들이는 데 눈이 벌개졌던 괴물성애자들 따위.

짐승 군벌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우리 군벌은 모두 정예라. 다 찢어불끼다.'

라이칸스로프.

뱀파이어와 마찬가지로 타액을 침입시켜서 동족을 늘리는 종족이다.

인간에서 반인반수의 괴물로 종 자체가 바뀌며 능력치도 어마어마하게 상승, 평범한 헌터하고는 전투력 비교가 무의미할 만큼 강해진다.

대신 마법 능력을 쓸 수 없고.

오러를 발출할 때 소모량이 커지며 제어가 어려워지는 페널티가 있지만.

낮은 성위의 헌터들도 급속도로 강해지고, 헌터가 아닌 민간인들에게 각성 능력을 부여할 수 있어서 전력 확보도 굉장히 쉬웠다.

'5천이다. 5천.'

언데드 군대가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격하게 덩치를 불린 군벌.

라이칸스로프가 되면 식량 소비량이 몇 배로 늘어나고, 추가로 마석까지 섭취해야 해서 개체수를 2천 정도에 맞추었지만.

결전이 다가오다 보니 허겁지겁 벌크업을 해서 배 이상 병력을 확보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상당수는 죽을 테니 장기적인 식량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살아남은 자들은 더욱 강해질기고.'

짐승 군벌은 쓰러지지 않는다.

싸울수록.

동료의 피를 거름 삼아 더욱 강해지리라.

"대장 동무! 옵니다!"

"어디서 오나."

"하늘입네다!"

고개를 위로 든 김정민의 노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게 뭐이가?"

시커먼 비늘로 뒤덮인 드래곤.

파프너가 유유히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날았고.

그 옆에는 뼈만 남은 용이 푸른 귀화를 좌우로 흩뿌리며 콰루루루- 하고 괴성을 토해냈다.

체고는 약 15미터.

파프너보다 3배 가까이 큰 덩치에 뼈 곳곳에 감도는 한기가 주위의 온도를 1도 떨어트렸다.

레리크 사체들을 최대한 끌어 모아서 제작한 최상급 언데드.

용족의 정수가 모자라고.

뼈를 아무리 개조하고 이어 붙여도 덩치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어서, 실질적인 무력은 7성 수준이다.

정규적인 방법으로 만든 본 드래곤의 무력이 8성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페널티를 입은 셈.

그럼에도.

유진은 1달 동안 틈틈이 작업을 해서 본 드래곤 하나를 완성시켰다.

'공중 기동이 되면 7.5성이라고 봐도 된다.'

원하는 전장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적의 기동력이 모자라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힐 수 있으니.

성위가 떨어지는 페널티가 있어도, 수고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콰루루루!!]

주석궁 앞에 도열한 라이칸스로프들의 눈가에 당혹감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시작을 알리는 건 우리가 한다.]

[공허의 숨결]

[아이스 브레스]

검은 빛줄기와 하얀 서리가 라이칸스로프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지면에 새겨지는 기다란 고랑.

공허의 숨결에 휩쓸린 라이칸스로프는 가루로 변해서 시체도 남지 않았고.

본 드래곤이 내뱉은 혹한의 추위에 노출된 자들은 얼어붙었다.

"칵! 칵!"

김정민은 땅을 차고 도약.

주석궁 여기저기를 밟으며 백 미터 넘게 점프했다.

[오러 블레이드]

[엑스 크로스]

X자 형태로 사출된 오러 블레이드.

수십 미터 넘게 날아가도 형태를 유지했지만.

김정민이 반격을 시도했을 땐 이미 본 드래곤과 파프너가 고도를 높이고 있어서 허탕만 쳤다.

"당장 내려오라! 간나새끼!"

[헹. 싫은데.]

파프너와 공중을 선회한 본 드래곤이 다시 한번 입을 벌렸다.

입가에 아른거리는 한기.

무투계 헌터조차 상회하는 능력을 얻은 대신, 마법 쪽에 문외안인 라이칸스로프 입장에서는 딱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내래 막겄다!"

김정민은 다시 한번 땅을 박차면서 오러 블레이드를 방출했다.

아이스 브레스가 지면에 닿기 전에 상쇄하겠다는 움직임.

본 드래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엉뚱한 곳으로 한기를 방출했다.

저저저저적!

얼어붙은 물.

평양 시를 관통하는 대동강 일부가 혹한의 숨결에 닿자마자 꽁꽁 얼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전진해라."

[쿠훅. 모두 죽인다.]

[주인님의 뜻대로.]

[승리의 영광을 주군께 헌상하겠나이다!]

데스 나이트 무리.

최형태를 위시한 데스 카발리에 부대.

정예 언데드를 이끄는 송명석.

그 외에도 4만이나 되는 언데드들이 브레스에 맞아 얼어붙은 강을 밟고 평양 북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

도강. 전쟁에서 강을 건너가는 행위는 큰 위험을 동반한다.

강 깊이가 낮아도 어려운데.

대동강처럼 수심이 10미터가 넘는 강을 건너가려면 반드시 배가 필요했다.

다리는 없냐고?

짐승 군벌에서 이미 평양 북쪽으로 넘어오는 다리를 모두 부숴버렸다.

대동강 상류로 돌아서 가는 방법도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기간이면 김정식이 준비하는 모종의 대법이 발동되어서 [배교자의 심장]을 얻기 어려웠다.

유진이 선택한 건 강을 얼려버리는 것이었다.

"조지라!"

강 너머에서 대기하던 짐승 군벌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리적 이점은 방금 전 브레스로 상실했다.

불 마법을 집중하면 인위적으로 얼린 강을 다시 녹일 수 있겠지만.

짐승 군벌의 빈약한 마법 전력 가지고는 대동강을 원래대로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

적의 예봉을 꺾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판단이 바로 섰다.

"컹! 컹!"

호랑이 / 늑대 / 곰 수인 세 마리가 각자 무리를 이끌고 선두에 나섰다.

김정민과 마찬가지로 7성에 도달한 강자.

라이칸스로프 특유의 신체능력이 더해지면서 동일 성위 무투계 헌터쯤은 2대 1도 버틸 수 있는 능력자다.

[검을 맞댈 상대. 발견.]

[합류해라. 죽음의 군대로.]

파츠츠츠!

데스 나이트들이 암흑 강기를 일으키며 라이칸스로프 3대장을 저지했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혼백만 남은 상태로 모진 고문을 겪으면서 의지를 꺾고 유진의 하수인이 되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유진의 장악 능력이 원체 뛰어나서 불만도 표출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행위는 하나 뿐.

비슷한 입장의 동료를 '자진입대' 시켜서 억울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컹? 오러 블레이드?"

"크아아앙!"

짐승 군벌 간부들은 괴성과 함께 오러 블레이드를 흩뿌렸다.

몇 달 전에 제5 혁명군을 밀어내놓고 이만한 전력을 확보했다고?

김정민이야 제5 혁명군, 그러니까 인간사냥꾼을 폄하했지만 휘하 간부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 애미나이들 얼마나 됵한디?'

'전사가 이리 있을 리 없다!'

'어찌 된 영문이고!'

7성 소환수를 땅에서 뽑아낸 것도 아닐 텐데.

데스 나이트들의 맹공을 받아낸 라이칸스로프 간부들은 전선을 유지하기도 벅찼다.

그 중에서도 중앙을 맡은 호랑이 수인은 데스 나이트 셋을 마주하면서 손발이 점점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수치스럽다.]

데스 나이트 중에서도 불길한 기운을 흩뿌리는 존재.

생전에 8성이란 성취를 이루어낸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 이신우는 영력을 혈기처럼 응용했다.

그뿐이랴.

이신우가 뿜어내는 영력은 그의 본질인 광기에 맞닿아 있어서 본신의 능력을 올려주고, 상대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디버프 효과까지 겸하였다.

[이 굴욕감. 너도 함께 맛보아라.]

"애미나이. 미쳤네!"

두두두둑.

근육을 한껏 부풀린 호랑이 수인이 크게 팔을 휘둘렀지만.

찰떡처럼 달라붙은 이신우를 떨쳐내진 못했다.

간부 셋이 묶여 있는 동안 최형태는 데스 카발리에들을 이끌고 짐승 군벌을 크게 우회.

훤히 노출된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죽어라.]

일점으로 집중된 죽음의 돌진이 라이칸스로프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막 얼어붙은 강 위로 올라온 이들과 선두가 갈라지면서 한순간 진형이 고립되었다.

벌어진 틈을 메운 것은 언데드들이었다.

-으어어억.

-구억!

하늘 위에서는 파프너와 본 드래곤이 순회하며 빈틈을 노리고 있고.

쉼 없이 몰려드는 언데드 군대는 짐승 군벌의 전력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마, 말도 안 된다."

김정민은 빠르게 기우는 전세를 두 눈으로 보는데도 부정했다.

평양 일대를 지배하는 막강한 군벌.

급격하게 체급을 불렸지만, 보급 걱정 없이 남하하면 경기도 일대를 초토화시킬 자신도 있었다.

[쿠훅. 찾았다.]

"니보라우. 내래 기분이 안 됴아. 당장 끄지라!"

[쿠후훅. 주인. 너. 죽이라고 했다.]

데스 나이트 + 호플리테스.

영력과 신성을 동시에 지닌 이질적인 언데드, 애꾸눈이 혼란스러운 전장을 일직선으로 돌파해서 김정민의 앞까지 도달했다.

성력으로 빚어낸 갑주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고.

한 쪽만 남은 눈에서 번쩍이는 푸른 안광은 날로 기운이 강해지고 있었다.

"내래 간나새끼 찢어죽이고 텬유딘이란 닥댜도 죽이뿌겠어."

[쿠후훅. 전력으로 덤벼라.]

[변신]

하얀색 늑대로 변한 김정민이 애꾸눈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검보다도 굵은 손톱 위로 올올이 솟구치는 오러 블레이드.

오러 응용능력이 떨어진다는 라이칸스로프의 단점이 김정민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간부들보다도 훨씬 굵고 기다란 오러 블레이드.

애꾸눈도 암흑 강기를 전신에 둘렀다.

콰아앙!

푸른빛과 어둠이 한 차례 격돌했다.

휘청거리면서 뒷걸음질 치는 김정민.

반면에 애꾸눈은 히죽 웃으며 손을 좌우로 털었다.

[쿠훅. 너. 주인 말대로 재밌다.]

"니, 니보라우. 무슨 힘이 이리 장사이가?"

[쿠후훅. 나. 오우거. 너. 짐승. 당연히 내가 이긴다.]

"애미나이가 그 애꾸눈이래?"

[쿠훅. 그렇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

서로 공격이 상쇄되는 순간,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흔들렸다.

찢어진 근육이야 라이칸스로프 특유의 재생능력으로 금세 회복시켰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월한 신체능력이란 전제조건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내래 쉽게 안 진다!"

힘이 모자라면 기동력에서 압도하겠다!

김정민은 네 발로 뛰면서 애꾸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분신]

[가속]

수십으로 늘어난 잔상.

이동 속도마저 빠르니 눈으로는 뭐가 진짜인지 알아챌 수 없었다.

김정민은 체취와 마력까지 분신에 담아내어 애꾸눈의 감각을 교란시켰다.

[쿠훅. 재주도 좋네.]

[대지 계열]

[어스퀘이크]

쿠쿠쿠쿵!

지축이 흔들린다.

인위적으로 지면의 판을 충돌시켜서 국지적인 지진을 일으키는 6성 마법.

반쯤 무너진 주석궁이 애처롭게 비명을 질렀고.

근처에 있던 라이칸스로프들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김정민은 압도적인 신체능력으로 넘어지지 않고 버텼지만.

눈으로 쫓기 어려울 만큼의 속도감이 확 줄어들었다.

[암흑 강기]

콰아아앙!

북 치는 소리와 함께 수십 미터 뒤로 나가 떨어진 김정민의 신형.

애꾸눈은 짜릿한 손맛에 쿠훅, 하고 웃었다.

'모, 못 이긴다.'

김정민은 절망했고.

그 날.

불타고 있는 주석궁을 배경 삼아 짐승 군벌은 해체되었다.

213화 국내 정리(3)

꽁꽁 얼어붙은 강가 위로 쌓인 붉은 층이 이중으로 쌓였다.

라이칸스로프 사체에서 흘러나온 피다.

[시체 먹지 마라.]

[땅으로 옮긴다.]

데스 나이트들은 시체 주위에 선 언데드들을 통제했다.

산 자에 대한 증오와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굶주림으로만 움직이는 하급 언데드.

그렇지만.

서슬 퍼런 데스 나이트의 안광은 하급 언데드들에게 있어 절대적이었다.

"역시 언데드 군대 하면 데스 나이트지."

유진은 기지개를 쭉 폈다.

여태까지는 대규모 군대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지휘관급 언데드들도 있지만,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으니.

파프너는 단독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잦았고.

최형태 역시 데스 카발리에 부대를 맡기 전에는 일점돌파를 위해 혼자 별동대처럼 움직였다.

송명석이 그나마 대규모 군대의 선두를 맡은 경력이 있다지만.

그게 지휘라고 할 수 있으려나.

〔마법을 쓰는 하수인들도 조율에 참여하지 않았느냐.〕

'다크 미니언은 지휘 능력이 그렇게까지 높지 않아.'

예전이야 네크로폴리스의 크기가 작아서 다크 미니언들도 적극적으로 지휘에 동참시켰지만.

지금은 규모도 늘었고, 부리는 언데드 숫자도 너무 늘어나서 후방 지원으로 돌렸다.

데스 나이트라는 상위 호환이 있는데 굳이 지휘관으로 써먹을 필요는 없다.

"조승철아."

[예. 주인님.]

"강가 옆에 검은 방첨탑 짓고. 주석궁은 그대로 둬라."

[알겠습니다.]

주석궁에는 무수한 원념이 쌓여 있다.

인민들의 피와 눈물로 쌓아 올린 김씨 왕조.

그 정점에 도달한 구조물이 바로 주석궁이었으니.

〔어디에 사용하려는 게냐?〕

'죽음의 요새로 만들려고.'

〔호오. 이름은 꽤 그럴싸한 구조물이로구나.〕

'기대해도 좋아.'

짐승 군벌의 주력은 무너졌다.

그렇지만.

싸움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우리와 같은 신세로 만들어줘라.]

이신우와 데스 나이트 한 구는 잔당 소탕에 나섰다.

평양은 넓다.

한반도가 둘로 쪼개지기 전까지만 해도 제2의 수도 소리를 들었던 곳이고.

북한이 들어선 후에도 모든 인프라가 집중되어 있는 대도시다.

전투 중에 패색이 짙어지자 몸을 뺀 탈주병들.

세력을 유지하려고 남겨둔 최소한의 병력도 있다.

구구구궁!

뼈와 살점, 그리고 피로 세워진 검은 방첨탑.

리치가 된 조승철은 네크로폴리스를 세울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가 되었다.

매번 영토 확장할 때마다 수고를 들여야 했는데.

손이 둘로 늘어나니 참 편해.

〔둘? 그대가 요즘 네크로폴리스 확장 때 힘쓰는 모습은 못 본 것 같다만.〕

'내가 좀 바빠서.'

〔하수인들만 불쌍한 노릇이구나.〕

'놀고 있는 거 아니거든?'

유진은 쌍심지를 켰다.

지난 1달 동안 얼마나 바빴던가.

레리크 사체들을 개성으로 옮겨서 뼈를 일일이 가공하고.

네크로폴리스의 도움까지 받아서 최소 사이즈의 본 드래곤을 만들었다.

'그거만 일이야? 바빠서 잠 잘 틈도 없었고만.'

신준석도 작업에 합류했다.

새 성자 시리즈도 만들어야 했고.

본인이 골렘 양산에 대해 본격적으로 욕심을 내는 터라, [흑암의 반지]에 기록된 정보도 알려주었다.

〔한데 왜 실전에 투입하지는 않은 게냐?〕

'전투력이 모자라.'

엔진 수급 자체는 쉬웠다.

블러드 골렘의 핵으로 삼은 MIS - 4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미쓰 사의 주식은 그야말로 곤두박질 쳤다.

MIS - 4 엔진의 가격도 어마어마하게 떨어졌고.

신준석은 그 엔진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국내로 반입했다.

엔진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양산만 하면 되는데....

'문제점을 개량해도 성능이 4성 무투계 수준이니까 말이야.'

무투계 4성 헌터 수준의 골렘을 양산 가능하다?

이 소식이 퍼지면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일으키겠지.

핵으로 삼은 MIS - 4 엔진만 상하지 않으면 반쯤 영구동력이나 마찬가지다.

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해서 힘으로 삼으니까.

출력을 과하게 끌어내거나 파손이 심하지만 않으면 무한으로 굴릴 수 있다.

문제는 가상으로 설정한 적이 로마노프 가문이라는 것이다.

〔그 작은 인간은 용케 무리한 가정을 받아들였구나.〕

'목표는 클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말이야.

로마노프 가문의 인재 납치, 아니 스카우트는 이 시대에도 악명이 자자했다.

이미 로마노프 가문에 얼굴도장도 찍었겠다.

섣부르게 골렘 제작 소식을 퍼트렸다가는 로마노프 가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소 5성급 무력은 내야 세상에 공개할 겁니다.

신준석은 의욕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눈가에 아른거리는 다크 서클만 빼면 더 멋졌을 텐데.

유진은 신준석의 모습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

유진이 짐승 군벌을 정리하고 있을 때.

뽀시래기 팀도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음머, 음머어어억."

쿵-.

지면에 머리를 박은 미노타우루스 가드.

6성급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린 강민호가 후욱,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 빠지는 줄 알았네."

"엄살 피우지 마. 막타만 쳐놓고."

"네 공격은 미노타우루스한테 거의 먹히지도 않거든?"

오러로도 잘 뚫리지 않는 거죽.

미노타우루스 가드의 시체 곳곳에 화살이 박혀 있지만, 치명상은 거의 없었다.

"와. 내가 눈 안 날렸으면 오빠 지금쯤 세상에 없다?"

"막으면 됐다."

"그럼 마무리를 못하셨겠지."

미노타우루스의 눈동자에 박힌 화살 하나.

강민영의 솜씨였다.

한쪽 눈을 잃은 미노타우루스 가드가 무의미하게 팔을 휘두르는 순간.

강민호가 신력 - 마력 - 힘을 일점으로 모은 일격을 터트려서 심장을 짓눌렀고.

미노타우루스 가드를 사냥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선배님들. 저도 한 손 거들었지 말임다."

"넌 조용히 해!"

"후배. 지금은 남매끼리 합의를 봐야 할 때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다가도 이성민이 끼자마자 화살을 돌렸다.

"으휴. 시끄러워."

"김 고문이 볼 때는 누구 활약이 더 컸습니까?"

"언니. 솔직하게 나라고 해."

김미정도 한숨을 쉬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유진의 말대로 세 사람 뒤치다꺼리하는 건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다.

지금처럼 유치한 싸움을 중재할 때 빼곤.

"너희 중 한 놈만 없었어도 미노타우루스 가드의 밥 신세였거든?"

"지분은 따질 수 있잖아요. 언니."

"그 놈의 언니는. 난 너 같은 동생 없어."

"에이. 참. 우리가 목욕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웃기지도 않는 성대모사는 관두고."

김미정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의뢰 받은 게이트 공략을 마치고 나오니, 용병단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집합했나?"

강민영과 다툴 때하고는 180도 다른 목소리.

이제는 근엄함마저 느껴지는 강민호의 음색에 용병단원들이 예! 하고 대답했다.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유진도 예상하지 못했던 강민호의 모습이었다.

회귀 전만 해도 쌍둥이 동생하고만 팀을 꾸렸던 강민호.

용병단장을 맡은 지 몇 개월이 지나니, 의외로 리더 역할을 잘 소화했다.

"이제 나찰 길드의 돈줄은 모두 정리했다."

사라져가는 균열.

방금 전, 뽀시래기 팀이 폐쇄한 게이트는 나찰 길드의 돈줄 중 하나인 [지하 궁전]이었다.

이곳에서는 레어메탈로 불리는 광물, [이레듐]이 발견되어서 일부러 공략을 하지 않고 채집만 했다.

과거 붉은 거미가 혈석을 채집했듯이.

물론.

6성 게이트인 만큼 채집 난이도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서 실질적인 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나찰 길드의 고정적인 수입원을 박살냈다는 의의가 더 컸다.

"다들 의뢰 내용은 잘 숙지하고 있나."

"예. 나찰 길드를 무너트리는 겁니다."

"좋아. 오늘 이후로 나찰이라는 이름을 쓰는 길드는 한국에서 사라진다."

의뢰주는 유진이었다.

아라한 길드는 패망했어도, 아직 그 흔적은 남아있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했듯.

껍데기만 남은 아라한 길드조차 남아있는 이들이 살아남으려고 발악했고.

나찰 길드는 더 심했다.

-평양 밀어버릴 때까지 나찰 정리 좀 해줘.

강민호는 유진의 의뢰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 의뢰를 수행하려고 동원한 용병은 모두 200명.

뽀시래기 용병단의 전력을 대부분 투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자."

"예."

무장을 점검한 용병들이 나찰 길드의 본거지로 향했다.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는 강민호.

김미정이 옆에 붙었다.

"단장. 겁내는 건 아니지?"

"손에 피를 묻힐 각오는 진즉에 했습니다."

"그래도 처음이잖아."

"...예."

"저 친구들이 너보다 약해도 칼밥 먹어본 애들이야. 그러니 잘 봐둬."

"고문께서는 어떻게 하시려고."

"난 그래도 옛날에 신세 져서. 피 묻히긴 좀 그렇잖아."

"당신에게 그런 감성이 남아있었습니까?"

"은혜 정도는 알아. 누굴 검은 머리 짐승으로 아니."

아니었습니까, 라는 말이 목청에 걸렸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나찰 길드와의 전면전을 앞둔 상황.

평소처럼 김미정을 자극해서 좋을 건 없었다.

마침 나찰 길드의 본거지는 방금 폐쇄한 게이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인적이 드문 조용한 항만.

부산에서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시골의 작은 부두가 나찰 길드의 진짜 사무실이었다.

챙! 채챙!

콰아앙-!

뽀시래기 용병단과 나찰 길드원들이 본격적으로 충돌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폭음과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

강민영은 마력을 회복하자마자 바로 개입했다.

허공 위에 떠오른 20개의 석궁.

이번에 5성이 되면서 염동력과 관련된 특성을 하나 더 깨우쳤고.

기존보다 두 배나 되는 양을 다루면서 컨트롤도 정교해졌다.

피융!

갑주의 빈틈을 여지없이 파고드는 화살.

굳이 오러를 쓰지 않아도.

방어구가 없는 부위에 박히면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컥! 방어 마법을 쳐!"

"제길. 어디서 날아오는 거야?"

"귀신이라도 들렸나!"

다각도에서 날아드는 화살들.

예측이 불가능하고.

방어 마법의 빈틈을 파고드는 집요함에, 오러를 둘러서 방어하자니 가성비가 안 좋았다.

"선배만 재미 보게 할 순 없슴다."

이성민도 별도의 [공간]에 넣어둔 물건들을 꺼냈다.

마법 스크롤에 이어 마력이 깃든 아티팩트들을 방출.

사전에 가속 마법을 걸어둬서 빠르게 날아드는 무기들은 오러를 두르지 않은 화살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쾅! 쾅!

헌터들을 가격한 아티팩트들은 곧바로 [공간] 능력으로 회수.

추가 마법을 걸어주고는 다시 던져서 재활용했다.

"너희 때문에 나도 뒤질 뻔했어유."

용병단의 선두를 담당한 민상진이 으르렁거렸다.

그가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나찰 길드 헌터들이 나풀거리며 하늘 위로 떠올랐다.

나찰 길드와 함께 일하다가 접경지역에서 죽을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이가 덜덜 떨렸다.

'이거야 원. 내가 나설 틈도 없네.'

급격하게 세를 불린 뽀시래기 용병단.

세 사람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그 배경인 유진의 이름값 덕분에 실력 있는 헌터들이 많이 투신했다.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용병단 수준까지 규모를 키웠으니.

무리하게 유진을 노렸다가 전력을 상당수 잃은 나찰 길드 입장에서는 정면승부가 안 됐다.

'옛 인연도 있으니, 길드장은 내 손으로 보내줘야겠어.'

김미정은 유진의 잔혹함을 안다.

만약.

뽀시래기 팀에 걸려서 최후를 맞이하거나 잡히면.

죽은 뒤에도 자유를 찾지 못하고 유진을 위해 봉사하는 꼴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손으로 숨통을 끊어주는 게 마지막 예의 아닐까.

단검을 쥔 김미정이 전장에 스며들었다.

214화 죽음의 요새

끼릭, 끼릭.

브루탈이 뼈 마차를 끌고 반쯤 무너진 주석궁 앞에 섰다.

"거기에 내려놔라."

쿵-.

뼈 마차는 모두 4대.

브루탈이 손잡이를 놓으니 묵직한 소리를 내며 살짝 아래로 가라앉았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 아니더냐?〕

'오. 그걸 기억하네.'

〔그대가 망자들을 강화할 때 자주 사용하였으니 망각하면 이상한 일이니라.〕

'대단하십니다.'

〔짐을 조롱하려는 게냐!〕

'아니. 진심인걸.'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

과거 아라한 길드와 공동 공략을 했을 때 얻은 전리품이다.

송명석의 푸른 귀화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크으으.]

"옛날 생각나서 좋지?"

[하, 하하핫. 주군이 상대였으니 패배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얼굴이 아주 시뻘개졌던데."

[흠. 흐흠. 흠.]

지금도 살아 있었으면 딱히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이번 생에서 송명석과 처음으로 엮였던 사건.

충주에 열린 게이트, [철의 무덤]에서 획득한 전리품이다.

아라한의 초신성이라고 불렸던 송명석의 콧대가 거기서 박살 나버렸지.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의 총량은 17톤.

언데드를 강화하거나 개조하면서 틈틈이 썼는데도 절반 넘게 남아있다.

"주인. 새 언데드를 만들 거야?"

"아니. 이건 죽음의 요새를 세우는 데 쓸 거다."

"또 이상한 걸 만들려고 하나 보네."

"기대해도 좋아."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동 · 서 · 남 · 북으로 일컬어지는 방위에 배치해두었다.

"조승철. 다크 미니언들을 이리로 모아라."

[알겠습니다.]

리치 1기.

그리고 다크 미니언 수십이 유진의 뒤에 섰고.

좀비 스케어클로들은 주석궁을 감싸듯 넓게 퍼졌다.

스스스슷!

검게 물드는 땅.

네크로폴리스처럼 영력이 깃든 땅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좀비 스케어클로의 능력이다.

개성을 죽음의 영지로 개발할 때에도 좀비 스케어클로들을 활용.

최소 몇 달은 걸릴 만한 작업을 1달 만에 끝냈던 적이 있는 만큼, 유진은 그 능력을 전투에 국한해서 쓸 생각이 없었다.

'이쯤이면 됐나.'

땅에 충분히 영력이 스며든 것을 확인한 유진은 [흑암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죽음의 요새에 대한 지식을 보여 다오.'

[죽음의 요새]

네크로폴리스의 영역을 확장시키며 방어를 겸하는 구조물입니다.

▷건설 조건

-해당 네크로폴리스의 영력 농도 5.

-네크로맨서의 경지가 최소 7성.

평양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땅.

김씨 왕조가 들어서면서 더 많은 피와 원념이 쌓였다.

그 덕에 영력 수치는 충분했다.

문제는 최소 7성이라는 조건인데.

'다 방법이 있지.'

언제는 저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면서 살아왔던가.

변칙과 꼼수는 회귀자의 특권이다.

"조승철. 다중 링크 마법진을 발동해라."

[명을 따릅니다.]

차르르릉-!

사슬이 팔뚝을 타고 움직인다.

마법 발동의 전조.

리치는 꼴에 고위 마법사라고, 주문을 사용할 때마다 온갖 폼을 다 잡는다.

[공간계 - 멀티 링크]

마력 방출과 재배열을 공유하는 대규모 술법.

로마노프 가문, 정확히는 오딘이 하사한 주문인 [절대주언]과 비슷한 효과지만.

엄밀히 말하면 마법의 시초인 룬 마법인 절대주언을 흉내 낸 주문에 불과하다.

'하위 호환이어도 어디야.'

유진의 경지로는 쓸 수 없는 대단위 주문이나 마법, 혹은 술법을 응용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조승철이 펼친 술법은 다크 미니언 수십과 자신을 유진에게 연결시켰다.

[흑암의 반지의 지식을 해방합니다.]

7성 하나.

4성 수십.

그리고 유진까지.

멀티 링크로 연결되는 순간, 막대한 영력의 파도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위호환이라고 한 것 치고는 꽤 대단하지 않느냐.〕

'실제로 다룰 수 있는 건 일부야.'

멀티 링크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손실되는 마력(영력)도 늘어난다.

이 정도 규모면 1/5나 살리면 잘 했다고 봐야겠지.

〔그리 손실이 큰 게냐?〕

'조승철의 마법 숙련도가 떨어지니까. 어쩔 수 없어.'

손실은 감안하고 있었다.

본 성위를 넘어선 힘을 다루는데 아무 페널티도 없다면 그게 더 수상하지.

'죽음의 요새를 건설한다.'

구구구궁-!

좀비 스케어클로들이 물들인 흙이 위로 쭉 올라오면서 반쯤 부서진 주석궁을 감싼다.

두개골을 흔드는 다크 미니언들.

흙을 퍼내고.

정해진 공정대로 움직이려면 복잡한 연산 과정이 필수였다.

〔여태까지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만.〕

'당연히 내가 다 했지.'

현장에 맞춰서 일일이 대응.

구조 술식을 변경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전생에 9번째 성위를 달성했던 유진에게는 큰 부담이 되지 않지만.

[죽음의 요새]는 네크로폴리스의 구조물 중에서도 최상위 티어인 만큼 홀로 모든 연산을 하긴 어려웠다.

[그겔.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

[주인의 명이다. 계산을 소화해라.]

머릿수가 얼마나 되는데.

엄살 피우는 다크 미니언들을 한번 흘겨봐준 후, 영력을 계산해보았다.

'이쯤이면 슬슬 무리가 가겠군.'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강가에 세워둔 검은 방첨탑이 쉴 새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온갖 변칙으로 끌어올린 네크로폴리스 단계.

당연히.

검은 방첨탑 하나만으로는 평양에 흐르는 영맥을 온전하게 컨트롤 할 수 없었다.

〔대규모 술법을 준비한 이유가 여럿이로구나.〕

'변칙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

멀티 링크의 역할은 [흑암의 반지]에서 지식을 꺼내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무리해서 퍼온 영맥의 힘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려면.

편법을 사용해야 한다.

'검은 방첨탑에서 소화해야 할 영력 일부를 대기에 뿌려둔다.'

스아아아앗!

하얀 기류가 더욱 짙어진다.

이제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진해졌다.

잦아드는 검은 방첨탑의 진동.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이지 않느냐.〕

'누가 그래?'

〔넘쳐나는 기운을 흩뿌린다, 기발한 발상이긴 하나 쉬운 해결 방식이니라.〕

'핵심을 놓치네. 이 성좌 나리께서는.'

죽음의 요새를 지으려면 막대한 영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단순히 영력을 허공에 뿌리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말씀.

'뿌려놓은 영력까지도 조종해서 건축에 활용해야 해.'

유진은 대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영력을 조종했다.

멀티 링크로 상승한 제어 능력을 활용할 때.

[다중 연산]

마법계 특성의 보조를 받아 순식간에 여러 술식을 응용해서 대기 중에 흩어놓은 영력을 건설에 투입했다.

*

흙더미들이 주석궁을 뒤덮을 때.

미리 수송해놓은 대형 몬스터들의 뼈다귀들이 둥실 떠올라서 여기저기에 배치되었다.

〔이전처럼 구조물을 지탱할 축 역할을 하는 게로구나.〕

'메인은 아니야.'

죽음의 요새는 네크로폴리스의 영토를 넓히는 핵심 건물인 동시에 강력한 방어 구조물이다.

대형 몬스터의 뼈만으로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만한 건물을 지탱할 수 없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

'쇠 정도는 되어야 버텨주지.'

흑암의 반지에 기록되어 있는 구조대로 변형.

건물 축과 마력 회로, 그리고 일부는 사슬로 변해 구조물 여기저기를 결합했다.

원 형태를 잃어가는 주석궁.

겉모양 뿐만이 아니었다.

내부 구조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되었고.

더 이상은 주석궁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한데 저 흉물은 왜 가만히 둔 게냐?〕

'말했잖아. 피와 한이 담겨 있다고.'

구조물 자체를 변형시킴으로써.

주석궁이 품고 있는 갖가지 부정적인 에너지를 거두었다.

만약 저런 건물이 없었더라면.

죽음의 요새를 만들기 위해 훨씬 많은 자원이 필요했을 터.

'현 수준으로는 공급이 어려워.'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전생에는 평양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폭삭 주저앉은 탓에 죽음의 요새로 개조할 시도도 하지 못했다.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삼각 구조.

커다란 구조물 주위에는 뼈로 만든 드래곤 조각이 여럿 떠있었다.

그 조각들을 한데 묶은 것이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로 만든 쇠사슬이었으니.

[주인이시여.]

"어. 다 됐으니까 조금만 참아."

[그 말씀만 지금 50번째인 것을 아십니까.]

"에이. 그 정도나 됐어?"

"사실은 51번째야."

파프너의 첨언에 유진은 볼을 긁었다.

아니.

뭐, 조금이라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잖아?

그리고 말이야.

"이번에는 진짜라고."

슈우우욱.

간헐적으로 떨리던 검은 방첨탑의 진동이 완전히 멈추었다.

5레벨에 해당하는 영맥도 몇 시간 동안 막대한 영력을 퍼내서인지 바닥까지 말라버렸으니.

구조물을 지으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더 할 것도 없지만 말이야."

구우우우웅!

뱃고동 소리와 흡사한 낮은 진동음이 평양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파프너를 따라 만든 뼈 조각상들이 음침한 빛을 흩뿌렸고.

지축이 마구 흔들리더니 주석궁, 아니 피라미드가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뭘 만든 거야?"

"네크로폴리스의 최종 테크."

반중력 엔진?

네크로맨서에게는 그런 게 필요없어요.

로마노프 가문이 동원했던 공중항모보다 더 커다란 구조물.

죽음의 요새는 지상에서 100미터 위치까지 떠오르더니 검은 연기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힘이 넘칩니다. 주군.]

송명석의 눈가에 감도는 빛이 한층 진해졌다.

반경 20킬로미터를 뒤덮는 연기.

고요한 호수에 파문이 한번 일어난 것처럼, 새카만 기운은 요란하게 퍼지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효과는 적용되었다.

[죽음의 요새를 완성했습니다.]

[위계를 뛰어넘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의 신화에 한 자락이 추가됩니다.]

[구조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반으로 삼은 땅의 한과 업을 흡수했습니다. 성능이 100% 상승합니다.]

이거지!

크.

유진은 손을 말아 쥐었다.

[죽음의 요새가 완성됨으로써 영지의 규모가 확장됩니다.]

[요새 영역 안에서는 네크로폴리스의 영지 규모가 최대치로 보정됩니다.]

[사역 가능한 언데드의 개체수가 50,000으로 늘어납니다.]

[언데드 강화 범위 및 수치가 증가합니다.]

[범위 내 네크로맨시의 효율이 상승하며, 유지에 소모되는 영력이 추가로 줄어듭니다.]

[영지에 건설 가능한 구조물이 추가됩니다.]

공중요새?

응. 우리도 있어.

딱히, 로마노프 가문의 자랑 때문에 죽음의 요새를 만든 것은 아니다.

"진짜야?"

"네 주인의 뜻을 의심치 말지어다."

"성직자처럼 말하네. 아, 주인 성자였지."

죽음의 요새는 말 그대로 이동하는 네크로폴리스다.

반경 20킬로미터를 죽음의 영지로 선언할 수 있고.

지배영역 안에서 죽은 시체들은 자동적으로 언데드로 부활하고, 혼백도 망령이 되어 죽음의 요새에 속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요새 내부에서 상급 언데드를 제작할 수 있고.

7성에 해당하는 방어 마법과 요격 기능까지 지녀서 공격과 방어에 모두 동원 가능한 전천후 건물이다.

'회귀 전에는 각성 후 17년 뒤에나 겨우 만들 수 있었는데.'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16년이나 앞당긴 시간.

로마노프 가문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빨라졌지만.

그 리스크를 상회하는 이득을 거두었다.

'죽음의 요새를 이용하면 한반도 북쪽까지도 금방 정리할 수 있다.'

만주에는 용의 계곡이 있고.

그 외에도 드레이크나 바실리스크 같은 용족의 서식지도 꽤 존재한다.

크흐흐흐.

죽음의 요새로 만주를 슬쩍 찔러주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계약자여. 한 가지를 잊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어.'

[배교자의 심장]

짐승 군벌을 빠르게 토벌했던 이유다.

혼란한 전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최우선으로 챙긴 아티팩트.

'줄 사람은 이미 정해놨으니까.'

유진은 한 사람을 떠올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215화 흡혈귀의 시조

메멘토로 배교자의 심장의 위치를 알아낸 후.

유진은 기연의 사용처를 바로 정했다.

"어머. 평양을 재개발하느라 바쁘신 분께서 시간을 다 내주시고."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는 여인.

마담의 눈동자에는 의아함의 빛이 감돌았다.

'기분이 이상하군.'

〔위화감을 느낄 만한 부분은 느껴지지 않다만?〕

'마담은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야.'

회귀 전.

비즈니스 파트너로 가까이 지냈지만, 유진도 바로 알 만큼 감정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연의 끈을 당긴 것에 대한 나비 효과일까.

〔그대는 혹시 미움 받는 것을 즐기느냐?〕

'딱히 남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은 안 해도 즐기진 않지.'

〔이 작은 인간이 계약자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음을 감사하진 못할망정 배부른 소리를 하니 묻는 것이니라.〕

'성좌 나리는 꼭 표현을 해도.'

유진은 볼을 긁었다.

"줄 것이 있어서 보자고 했다."

"어머나. 남자에게 선물은 오래간만에 받네요."

선물, 인가.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 살풍경한 물건인데.

흠,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딸깍-.

"꽤 특이한 선물이네요."

"이런 건 못 받아봤지?"

"네. 평생 동안 못 받아도 될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는다."

"진한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니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요."

"배교자의 심장이다."

마담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이걸 어디서, 아니. 그건 이제 와서 중요한 게 아니죠."

"효과는 알고 있나?"

"네. 피와 관련된 스킬의 효과를 증폭시켜주거나 영약으로도 쓸 수 있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지."

"뱀파이어."

역시 마담이다.

배교자의 심장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

현 시대만 해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급 정보다.

"저보고 인간을 관두란 말씀인가요?"

"맞아."

"터무니없는 제안을 쉽게도 하시네요."

아니.

당신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황당한 제안도 아닐 것이다.

〔그리 확신하는 이유가 있느뇨.〕

'하프거든. 마담은.'

하프, 우리말로는 혼혈.

인간과 다른 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밤에 쓸 수 있는 기술, [달의 주술]이란 이질적인 특성은 마담의 출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이해가 가능하다.

탁-.

소리 나게 상자를 닫은 마담은 엉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기 바빴다.

'뭔가. 알고 있다는 눈치야.'

직업군 변환도 아니고.

종족 자체를 바꾸는 일인데도 너무 가벼운 투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아는 듯한 태도.

'말도 안 돼.'

생각이 과했다.

이 세상에서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정 노인 뿐.

아버지와 가까운 관계인 진 회장도 모른다.

"천 대표님 말씀대로 한다 치죠."

"의외로 긍정적이군."

"뱀파이어가 되겠단 말은 아니랍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랍니다."

"좋아. 가정이라고 치고."

"그러면 제게 생기는 이득은 무엇일까요?"

"무력 상승. 권속 생성을 통한 정보력의 이득."

뱀파이어의 이명은 밤의 귀족.

여러 동물들을 권속들로 부려 정보를 수집하거나.

혈주술에도 능하고.

밤 한정으로는 전투력 증가 버프까지 받으니, 전투력도 상승한다.

더불어 클랜 마스터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기까지.

"정보수집에 딱 맞는 종족 아닌가?"

"학교 진로도 그렇게 뚝딱 결정하지는 않겠네요."

"뭐,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어설프게 손을 쓸 생각은 없다."

"어떤 의미인 거죠?"

"수락한다면 진혈의 일족으로 만들어주마."

유진은 히죽 웃었다.

*

영업을 마친 은하수 펍.

잔을 닦고 있는 정 노인의 앞에 불쑥 나타난 마담이 그대로 앉았다.

"고민이 있으십니까?"

"천 대표 말이야. 나보고 뱀파이어가 되래."

"허허. 농담이 참 구체적이군요."

정 노인은 너털웃음을 짓다가 표정을 굳혔다.

"진짜입니까?"

"내가 그런 농담은 안 하잖아."

"흠. 그렇지요."

"어떻게 생각해."

"전 아가씨의 생각을 존중할 뿐입니다."

"그래도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마담은 정 노인이 닦던 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었다.

고혹적인 모습이지만, 마주 앉은 정 노인의 눈에는 한 점의 사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장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겠습니까. 형태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이미 들은 말이야."

"흘흘흘. 저도 대장이랑 생각하는 게 비슷해졌나 봅니다."

정 노인이 대장이라고 부르는 존재.

마담의 아버지이자, 대한민국 1세대 헌터 중 용병업계에서 명성을 떨쳤던 오진우다.

"그때 선택. 후회하지 않아?"

"아가씨를 모시기로 한 것이라면 후회 없습니다."

"모든 걸 버렸잖아."

"대장한테 받은 은혜도 다 못 갚았습니다."

정 노인은 오진우에게 목숨의 빚을 여러 번이나 졌었다.

마담을 구한 후, 모든 터전을 버리고 음지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그는 당시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 난 사탄교가 무너지는 걸 보기만 해도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어."

마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타인에게는 한 번도 비추지 않은 감정.

정제되지 않은 강렬한 분노와 증오가 그녀의 눈 위에 투영되었다.

"대장과 사모님의 복수를 위해 음지에 투신하셨지요."

"음지 쪽 정보를 손에 넣으면 사탄교에게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

-돈으로 헌터를 부려서 사탄교를 무너트리겠다.

은하수 펍을 차리고 음지에 대규모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은 모두 사탄교의 꼬리를 찾기 위함이었다.

"근데 천 대표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네."

"아가씨께서 굳이 인간을 벗어나서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습니다."

"어머. 그게 아저씨의 진짜 마음이었구나."

"...물론 어느 쪽이 되었든 전 아가씨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순수 인간도 아닌걸."

마담은 인간과 악마의 혼혈인 반인반마 '네피림'이었다.

원래 천사와 인간 혼혈을 뜻하는 의미지만 [만신전]이 등장함으로써 신화와 인간의 시대가 다시 이어진 후로는 신, 마 혼혈을 모두 통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알잖아. 내 능력도 엄마한테서 받았다는 걸."

달의 주술.

햇빛이 없는 곳에서만 쓸 수 있다는 살인적인 제약이 걸려 있지만.

여타 주술을 아득히 초월하는 위력 덕에 밤 한정으로는 성위를 뛰어넘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마담만이 발휘할 수 있는 특성.

그녀의 아버지가 10대 마경 중 하나인 [판데모니엄]에서 만난 악마에게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이야. 천 대표가 심장 내밀면서 이야기했을 땐 철렁했다?"

"천 대표님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는데 말이죠."

"웃기지. 늘 세상을 겉돌겠노라고 다짐했는데 나도 인간인가 봐."

"아가씨는 사람입니다."

정 노인의 말은 아까 했던 말과 일맥상통했다.

마담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괜찮지 않을까? 형태보다 마음이 중요한 거라면, 난 아직 사람이니까."

정 노인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반인반마.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 중 절반은 악마의 기운이 섞여 있다.

그럼에도.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종을 바꾸어도 마음을 잃지만 않으면 결국 사람으로 남을 수 있으리라.

"덕분에 생각 정리가 됐어. 고마워."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마담의 눈가에서 망설임은 사라졌다.

관전자가 아닌.

직접 사건의 당사자가 되기로 결정했으니.

이제부터는 1분 1초가 아까웠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

은하수 펍 VIP룸.

문을 닫는 순간 5중으로 설계된 방어마법이 작동했다.

"누가 들어올 일은 없지?"

"호호호. 나름대로 돈을 쓴 곳이랍니다. 잘 아시잖아요."

"요즘 자주 와서. 실감이 안 나네."

VIP 룸은 1년에 1번 정도나 사용될까 말까 하는 공간이다.

요즘 굵직한 일들이 원체 많이 있다보니 자주 열게 된 것이지만.

유진의 묘한 말투에 마담이 살포시 웃었다.

"그럼 다른 곳 알아볼까요?"

"무섭게 왜 그렇게 웃어."

거 참.

농담 좀 했다고 살벌하게 웃기는.

〔이토록 아름다운 미소를 보고 왜 그리 벌벌 떠느냐.〕

'마담이 저렇게 웃으면 어떻게든 보복하더라고.'

회귀 전에도 저 웃음에 속아서 인생 나락으로 간 헌터들을 여럿 보았다.

"알겠지만 한 번 시작하면 무를 수 없다."

"네. 각오한 바예요."

"인간을 관두는 건데도 괜찮겠나?"

"껍데기보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당신 같은 미인이 그런 말을 하면 좀 신빙성이 떨어지는데.

유진은 속마음을 꾹 내린 후, 아공간 주머니에서 흑색 관을 꺼냈다.

"불사자의 관. 구하기 어려운 걸 용케 소유하고 계시네요."

"악마 추종자들한테 얻어낸 거다."

"배교자의 심장에 불사자의 관. 누가 악마 추종자인지 모르겠는걸요."

"만신전에 등록된 성좌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성자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유진은 낮게 웃었다.

"혈액 팩은 준비했나?"

"넉넉하게요."

"피로 목욕을 몇 번 할 거다. 모자랄 수 있으니 정 노인한테 이야기해놔."

스르릉-.

관 뚜껑을 옆으로 민 후, 혈액 팩에 담겨 있는 피를 붓기 시작했다.

20팩 가까이 뜯어야 겨우 불사자의 관을 절반 정도 채울 수 있었다.

"여기로 들어가라."

"임사체험이라도 해야 하나요?"

"말했잖아. 피로 목욕해야 한다고."

마담은 어, 음 하며 잠깐 동안 말문이 막혔다.

"비유적인 거 아니었나요?"

"진짜야."

"피로 목욕이라니. 천 대표님 덕에 진귀한 경험 많이 해보네요."

"바토리의 개념을 빌려오려면 이게 최선이다."

아- 하는 탄성을 내뱉은 마담.

"바토리 에르제베트. 뱀파이어의 여왕 말씀이시죠?"

"어. 불로불사를 위해 여인의 피로 목욕을 한 전설을 별빛에 새긴 악신 성좌의 개념을 당신에게 적용할 거다."

잠잠히 시술 과정을 지켜보던 크로노스가 의아한 투로 물었다.

〔뱀파이어의 시조라 함은 노스페라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쪽을 정통이라고 보는데. 여왕은 좀 개념이 달라.'

뱀파이어의 인식을 넓게 퍼트린 건 노스페라투, 그러니까 역사에서는 왈라키아 공국을 지배했던 블라드 3세다.

그렇지만.

별에 새긴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흡혈귀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자가 바토리 에르제베트다.

'노스페라투하고는 계통이 다르다고 해야겠지?'

배교자의 심장은 노스페라투에게 기원이 닿아 있는 아티팩트다.

유진도 [불사자의 관]이 없으면 노스페라투의 직계 혈속 정도의 능력을 부여하는 게 최선이겠지.

그렇지만.

피를 정제해서 순수한 정수만 뽑아낼 수 있는 [불사자의 관]이 있으니, 배교자의 심장을 매개 삼아 노스페라투와 맞먹는 강자의 기원을 빌려올 수 있게 되었다.

"심장을 쥐고 누워 있어라."

"그 외에 할 일은요?"

"의식 조정은 내가 바깥에서 할 테니. 그냥 누워있기만 하면 돼."

빛 한 점 없는 관에 누워서 피를 전신으로 받아들이는 것만 해도 큰일이니까 말이야.

마담은 굳은 표정으로 관 안에 몸을 눕혔다.

"으. 느낌이 영 아니네요."

"그럼 이따가 보자고."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최소 한나절."

"더 빨리 끝나면 좋겠네요. 바빠서."

유진은 [불사자의 관]을 영력으로 조정하면서 틈틈이 피를 부어넣었다.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구구구궁-.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관 뚜껑이 옆으로 밀리면서 자동으로 열렸다.

동시에 코를 자극하는 어마어마한 혈향이 VIP 룸을 가득 채웠다.

지금까지 들이부은 피 냄새를 상회하는 어마어마한 향.

[마담 오현정]

[종족 : 네피림 → 흡혈귀의 시조(불완전)]

뚜껑을 열고 나온 마담은 붉게 물든 눈동자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216화 스며드는 어둠

바짝 서는 솜털.

피 냄새에 섞여 있는 농밀한 마력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위험하다.

본능이 울리는 경종을 애써 무시하고는 마담과 눈을 마주쳤다.

"힘 좀 빼지."

"어머나.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마담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VIP룸을 가득 메웠던 혈향이 사라지고.

6성에 오른 유진을 긴장하게 만들 정도의 진한 마력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단하군.'

뱀파이어가 되자마자 혈류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이야.

흡혈귀 중 최고의 혈족으로 불리는 진혈조차 갓 태어났을 땐 능력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갓난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뚜벅뚜벅 걷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능력 계통과 메커니즘이 완전히 다른 탓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마담은 빠르게 능력에 적응했다.

'뱀파이어도 결국은 마의 일족. 하프라서 그런가, 다르긴 다르네.'

역시.

[배교자의 심장]을 마담에 준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몸은 어때."

"음. 좋은 걸요?"

"구체적으로. 부작용 같은 건 없는지."

"배고픈 거 말고는 괜찮답니다."

"나 먹으면 안 된다."

"호호."

웃지만 말라고.

뱀파이어가 되면 자유로워질 수 없는 흡혈 욕구.

밀폐된 공간에서 배고프다고 하면 섬뜩하단 말이다.

실제로.

유진이 걱정하는 대로, 마담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허기를 억누르는 데 신경을 할애하고 있었다.

"이거라도 먹어라."

"혈액 팩은 저 안에서 실컷 맛보았는데요."

"그래도 좀 나을 걸."

팩에 담긴 피를 한 번에 들이마시니 창백해진 피부 위로 혈색이 살짝 돌았다.

"좀 낫네요."

마담은 흡혈귀로 변해버린 후에 찾아온 변화를 짧게 설명해주었다.

가장 큰 변화는 성위의 상승.

4성 → 7성.

유진조차 경험한 적 없는 급격한 격의 상승이 이루어졌다.

"실감은 딱히 안 되지만요."

"그 힘을 실전에서 써보면 느낌이 오겠지."

성위를 올리기 위해선 깨달음이 필요하지 않냐고?

뭐, 일반적인 필멸자라면 그렇다.

뱀파이어.

그것도 아티팩트들을 활용해서 흡혈귀의 여왕이라 불린 바토리의 개념을 덧입었으니 혼의 격도 덩달아 상승한 셈.

물론.

성위가 올랐을 뿐, 그 힘을 제대로 다루려면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호호. 그렇겠죠."

마담은 손가락을 뻗었다.

파츠츠츳!

손끝에 맺힌 붉은 기운이 3미터 가량 뻗어나갔다.

피를 극한으로 응축한 기운.

단순히 피만 압축한 게 아니라, 안에 담긴 마력도 뭉친 거라 오러 블레이드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녔다.

"그거 휘두르지 마라."

"VIP 룸 날려먹을 일 있나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

조심하라고.

이런 데서 비명횡사하면 포브스 선정 전 세계에서 제일 허무하게 뒤진 회귀자로 선정될 텐데.

스펙도 7성에 걸맞는 수준으로 올랐단다.

신체능력과 마력 양쪽 모두 극한까지 올랐다나.

뱀파이어는 육체와 마법 능력 모두 뛰어난 종이니 그럴 만 했다.

"혈능력은 시험을 해봐야 알겠네요."

"그건 내가 딱히 해줄 조언이 없군."

"밥상을 차려줬는데 숟가락까지 달라고 하면 양심이 없겠죠."

걱정은 되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미 혈기를 수족처럼 다루었으니 적응은 금방 할 것이다.

"천 대표님이 맨입으로 이런 선물을 주신 건 아닐 테고."

"아니. 하던 대로 일 잘하라는 의미인데?"

"호호호. 정말요?"

"마담한테 더 요구할 것도 없어."

"그럼 재미가 없는데."

어디 보자, 라며 장난스러운 투로 이야기하던 마담이 피 한 방울을 톡 꺼냈다.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핏방울은 유진의 손등 위에 안착했다.

"이건 뭐지?"

"맹약이랍니다."

-나, 오현정은 목숨이 위험할 만한 일이 아니라면 천유진의 지시에 긍정적으로 임하겠다.

피로 써진 글자가 나타나더니 피부에 스며들었다.

유진은 놀란 눈으로 글자가 스며든 손등을 바라봤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저도 맨입으로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부당한 짓을 시키면 어쩌려고."

"호호. 느슨하게 걸어둔 제약이랍니다. 호의라고 생각해주세요."

피로 맺은 언약.

마담이 이야기한대로 강한 구속력은 없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권고 수준의 제약.

유진이 말하면 '좋은' 생각이 드는 정도의 가벼운 맹약이다.

'자발적으로 했다는 게 중요한 거다.'

유진의 선물에 대한 확실한 보답.

이 맹약이 있는 한.

마담이 악의를 품고 유진을 해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내가 할 말이다."

두 사람은 처음에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악수를 했다.

*

상하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 마천루의 숲.

그리고 빛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의 도시이며.

도시를 화려하게 수놓은 불빛의 이면에 무수한 어둠과 욕망을 품고 있는 곳이다.

전직 붉은 거미의 두목.

현 구룡 중 하나인 김재우는 고층 빌딩 펜트하우스에서 무수한 빛이 얽혀서 만들어내는 장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스."

"사장님이라고 해라."

김재우의 노기 섞인 목소리에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 놈의 사장 타령은.'

붉은 거미 때부터 포기하지 않은 일관적인 취향이다.

"준비는 잘 되어가나?"

"그게 말입니다. 한국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나찰 길드가 무너진 건 알고 있다."

"암흑가에 발을 걸친 조직들 상당수가 무너진 것도 아십니까?"

"그건 처음 듣는군."

구룡방은 동아시아에서 제일 큰 음지 세력.

상인 단체인 '흑상'도 구룡방과 협력하고 있어서 군사력과 자금 양면에서 가장 컸다.

한국을 본부로 둔 암상 때문에 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삼진 못하고 있지만.

돈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 암상의 영역 안에서도 자금을 뿌려서 여러 눈과 귀를 만들어두었다.

"나찰이 무너졌으니. 그에 따른 혼란 아니겠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큽니다."

음지는 늘 있는 법.

법이 통하지 않는 어둠은 시대를 막론하고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었다.

나찰이 사라지면서 생긴 혼란이야, 시간이 지나면 금세 진정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무슨 일인가."

"만주와 산둥반도도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만주 일대는 저번 사태로 힘의 공백이 생겼으니 당연한 일 아니겠나."

"구룡방을 밀어낸 조직이 생겼다는데요."

김재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지금은 한국 쪽 판로를 뚫는 것을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말입니다. 저희를 돕기로 했던 조직들도 공격을 당해서...."

이상했다.

한국의 암흑가는 그렇다 쳐도.

중국 쪽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구룡방이 중국의 암흑가를 장악하고 있다지만, 실제로 보면 100% 손에 쥐지는 못했다.

넓은 땅.

그리고 넘쳐나는 사람들.

어느 한 조직이 독점하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구룡방이 왜 아홉 머리라는 시스템을 구축했던가?

처음 조직을 창설할 때, 각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조직 아홉 개가 결합했다는 의미로 구룡(九龍)이란 이름을 붙였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기존의 아홉 용 중 여럿이 은퇴하거나 밀려났고.

초창기에 비해 조직이 탄탄해지면서 하나의 단체로 자리 잡았지만.

중국 전역의 음지를 장악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다른 구룡의 수작질이지 않겠나?"

"그렇기에는... 너무 집요합니다."

"작은 일에 신경 쓸 틈이 없다."

김재우는 부하의 의혹을 일축했다.

구룡 중 넷이 자신을 축출할 기회만 노리는 상황.

한국으로 돌아가야 그의 자리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

"일에 지장이 얼마나 생겼나?"

"그, 3주 정도는 시간을 더 주셔야 합니다."

"2주 주마."

"...알겠습니다."

만주?

산둥반도?

그 쪽에 생긴 이변은 다른 구룡이 신경 쓰겠지.

김재우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제길. 별 놈들이 신경 쓰게 만드는군."

욕지거리와 함께 술을 들이마시는 김재우.

무심코 그라운드 제로에서 도망쳤던 순간을 떠올리고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마담.

그리고 천유진.

접경지역에서 붉은 거미의 세력을 반 가까이 날린 게 유진이라는 것을 안 것도 최근의 일이다.

'술 맛 떨어지게.'

하필이면.

이 순간에 두 사람이 왜 떠올랐을까.

김재우는 오른손을 허우적거렸다.

"술 더 가져와."

"예!"

부하가 가져온 술병 목을 오른손으로 쳐내고는 상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콸콸 목에 부었다.

*

비슷한 시각.

만주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선양'에 스며든 이방인들은 거침없이 골목을 누볐다.

[염병. 내가 왜 이런 짓을.]

메이 샤오는 버릇처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머나. 생전에 몸담았던 조직을 배반해서 마음이 안 좋은가요?"

[나랑 한 판 해보자는 거냐. 여자!]

"설마요. 이렇게 소중한 길잡이를 잃을 순 없답니다."

후드 사이에 비치는 붉은 눈동자.

마담이었다.

뱀파이어로 종족을 바꾼 직후.

마담은 유진에게 한 가지를 요청했다.

'구룡방의 사정에 밝은 분을 빌려주세요.'

'정보는 나보다 당신이 전문 분야일 건데?'

'호호. 만주에서 일했던 사람만큼 자세히 알까요.'

마담은 진즉에 유진의 하수인인 메이 샤오가 만주 구룡방 지부 간부 출신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구룡방이 한국으로 진출하려고 암암리에 준비 중이란 것쯤은 진즉에 알았으니.

역으로 먼저 손을 쓸 생각을 한 것이다.

'직접 움직이려고?'

'믿을 수 있는 친구 만드는 방법을 최근에 배웠답니다.'

흡혈과 종속.

바토리의 개념을 덧입으면서 불완전하지만 시초급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났다.

마담이 피를 빨아서 만든 뱀파이어들은 절대로 그녀를 배신하지 못했다.

'과감하군.'

유진은 혀를 내둘렀다.

현지 사정에 밝은 메이 샤오의 정보를 이용.

구룡방 만주 지부를 통째로 집어삼킨다는 계획이라.

뱀파이어가 되자마자 제 능력을 활용할 방법까지 떠올리고, 실천까지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마담이 은하수 펍을 떠나 만주로 오게 된 배경이다.

[하얼빈의 조직을 고작 이틀 만에 먹어 치우다니.]

"호호. 과찬이랍니다."

하얼빈 지부를 습격한 마담은 간부 중 일부에게 피를 조금 나누어줘서 진혈 급 흡혈귀로 만들었다.

구룡방에서 은하수 펍으로 소속을 이전한 전직 간부들은 끓어오르는 충성심에 자발적으로 예전 직장의 기반을 마담에게 바쳤다.

[그 놈들도 데리고 오지 그랬어?]

"중국은 넓지요. 하얼빈을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을 짜려면 해줄 일이 많아요."

[여유 부리긴. 선양 쪽 조직은 당신 생각처럼 쉽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메이 샤오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만주 지부에서 가장 센 간부는 6성.

반면에 마담의 능력은 7성 급이다.

혈능력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제 힘을 내진 못하지만.

어쭙잖은 간부들은 싸움도 안 될 게 분명했다.

"여기인가요?"

[그래.]

한 건물 앞에 멈춰선 두 사람.

마담은 어금니로 손목을 살짝 깨물었다.

피가 몽글몽글 솟아나더니 허공으로 스며들었고.

잠시 후에는 불그스름한 안개가 이 일대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달의 주술]

[호접지몽(胡蝶之夢)]

혈능력과 결합해서 더욱 강해진 달의 주술.

핏빛 안개 안에서는 그 누구도 마담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밤이 가기 전에 끝냈으면 좋겠네요."

산책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가는 마담.

그 날.

선양에 자리 잡은 구룡방 지부가 통째로 은하수 펍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217화 대륙으로

마담이 이북 일대에 권속을 심어두는 동안, 유진도 손가락만 빨지는 않았다.

'이미 역사는 크게 비틀렸다.'

회귀 전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가속하고 있는 시간의 흐름.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

예전에 크로노스한테도 말했듯, 그 흐름에 휘둘리기보다 원하는 방향으로 틀어서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

〔그 방안은 무엇이더냐.〕

'늘 하던 거지.'

별거 있나.

세력 확장과 언데드 제작.

전생보다 10년 넘게 빨리 세운 죽음의 요새.

평양에서 네크로폴리스 구축에 필수적인 건물만 빠르게 지은 후, 죽음의 요새를 이끌고 북상했다.

[내가 바로 죽음이다!]

[원시 마법]

[죽음의 위상]

선행한 파프너의 전신이 더욱 검게 물든다.

비늘을 한 겹 덮은 영력.

중세 기사가 입는 중갑처럼 견고한 형태로 맺힌다.

용기사 제인에게 수련을 받으면서 터득한 새로운 형태의 원시 마법이다.

"아직 멀었어. 의념을 더 실어보라고."

죽음의 성채에 올라탄 제인이 크게 외쳤다.

[잔소리 멈춰!]

"내가 이렇게 알려줬는데 그거밖에 못 하잖아."

[선생이 잘못 알려줬겠지.]

파프너는 투덜대면서도 입술을 다시 한번 달싹였다.

[원시 마법]

[형상 변환 - 분쇄자]

전신을 감싼 영력이 뾰족뾰족한 형태로 일어난다.

파프너는 그 상태로 빠르게 하강.

지면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비행하며 땅 위에 발을 딛고 선 괴물들을 들이받았다.

쾅! 콰쾅!

압도적인 힘.

대형 트럭이 풀 액셀을 밟은 것처럼 어마어마한 기세로 돌진하는 파프너.

무엇이 그 앞에 있든, 부딪치는 순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 건 동일했다.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비행 중에 오른쪽 날개를 크게 휘두르자 전신이 빙글빙글 회전한다.

동시에 발동한 파프너의 원시 마법.

몇 번이고 봤던 광선 세례가 쏟아졌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전신에서 돋아난 뿔이 마법 발동의 축이 되었고.

회전하면서 방출한 덕에 사방으로 쏘아진 검은 광선이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엄청나군.'

죽음의 요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은 신음을 삼켰다.

〔공격 범위가 넓어진 만큼 위력은 줄어들지 않았겠느냐. 그리 대단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다만.〕

'꼭 그렇지도 않아.'

육신을 매개 삼아 발현시킨 [죽음의 위상].

비늘 전체를 감싼 영력을 [형태 변환]으로 바꾸니.

뿔 하나하나가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구 겸 분쇄하는 창, 거기에 마력 포대 역할까지 겸했다.

'그냥 사룡의 비상을 쓰는 것보다 위력이 3배는 셀 거다.'

빙글빙글 도는 퍼포먼스로 화력 투사 범위까지 훨씬 증대시켰으니.

이 정도면 자연재해급의 파괴력이란 말이 아깝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여기서 머무를 거면 집주인 허락 정도는 맡아야 하지 않겠나?"

"난 딱히 어디에 얽매이지 않아서 괜찮아."

"나는 괜찮다고 안 했다."

"용군단에서 관심 가지고 있으니까 불편해도 참아."

유진의 추궁에 제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용군단의 여섯 군주 중에서는 원시의 힘을 내포한 새로운 용족이 인간의 하수인 노릇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자도 있었다.

"강경파 쪽 어르신은 납치하라고 성화 부린단 말이야."

"본인한테 말해줘도 되겠나?"

"에이. 난 원망 사고 싶지 않아."

일곱 번째 진룡족.

파프너가 기량을 쌓아 필멸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잘 풀리면 용군단의 일곱 번째 군주가 될지도 모른다.

"꽤나 긍정적이군."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은 안 해. 그래도 내 상관이 될 가능성은 있잖아."

"미움 받을 짓은 안 하겠다, 라."

"그러니까 댁도 이 정도에서 만족해. 나도 이 음침한 곳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고."

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늘 우중충한 하늘.

영력으로 만들어낸 희끄무레한 안개를 보고 있자니 마음도 축 처졌다.

코에 아른거리는 시체 냄새는 또 어떤가.

용군단의 지시.

그리고 파프너를 지켜보면서 흥미가 생기지 않았으면.

이런 곳은 돈을 주고 머무르라고 해도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용들이 주시한다라, 썩 달갑진 않구나.〕

'성좌 나리는 용을 좋아하지 않나 봐?'

〔짐은 관조하는 자이지,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 존재는 아니니라.〕

'이해해야지. 별수 있나.'

〔호오. 그대답지 않은걸.〕

'오히려 좋아.'

과거 신들의 대적자라고 불렸을 만큼 강대한 종족.

만신전에 매여 있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를 구축해서 협력 관계로 자리매김했다.

'용군단이 주시하고 있으면 로마노프 가문도 과격한 수를 쓸 수 없을 거다.'

〔과연. 노림수가 있으니 잠자코 있는 것이로구나.〕

'귀찮긴 해도 보험이라고 생각해야지.'

〔그대의 능력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셈인데. 괜찮겠느냐?〕

'이미 어그로는 잔뜩 끌었어.'

크로노스가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을 주관하고.

새로운 용족까지 빚어냈다.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은 로마노프 가문(아스가르드)과 용군단뿐이지만.

여러 성단에서 유진과 파프너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성좌 나리야말로 제우스한테 안 들키게 조심하라고.'

〔크하하핫. 짐의 영역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성좌는 없으니 걱정 말아라.〕

'그런데 짜잔, 절대라는 건 없더군요. 같은 소리 나중에 하기만 해봐.'

불길하게 플래그 세우고 있어.

파프너의 순회공연이 끝나면 죽음의 요새를 땅으로 착륙.

짐승 군단을 무너트리면서 새로 합류한 언데드, [비스트보그]들이 네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빠르게 달렸다.

-컹! 컹!

라이칸스로프나 짐승 타입 시체를 기반 삼아 만들 수 있는 언데드.

정확히 말하면 레버넌트와 마찬가지로 [타이런트]의 개조 변형 타입이다.

5성 수준의 전투력을 보유했고.

팔이나 다리가 끊어져도 영력 부여 없이 자동으로 복구되며.

민첩하기까지 해서 속공에 능한 언데드이다.

'단점은 지속력이 떨어진다는 거지만.'

자체 수복능력에 폭발적인 돌진력, 그리고 수준급 전투능력까지.

이렇게 말하면 팔방미인 같지만 영력 소모가 심하고 전투를 지속할수록 능력치가 떨어져서 후위로 빼야 한다.

속도전에 특화되어 있는 언데드.

파프너가 헤집어놓은 전장을 정리하기에 딱 알맞았다.

"조승철. 여기에 검은 방첨탑을 지어 놔라."

[예. 주인님.]

거점 제작은 조승철에게 맡겨두고 병력 일부를 회수.

다시 이동해서 몬스터들을 쓸어버린 후 검은 방첨탑을 만들었다.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향하는 길 여기저기에 거점이 될 구조물들을 세워두고.

모두 하나의 링크로 연결해두지 않고 지역별로 구분해서 10개씩 묶어두어 한 곳이 무력화되어도 전부 먹통이 되는 일은 막았다.

[이러면 한반도 전역을 토벌했다고는 못 하겠는걸.]

"그건 천천히 해도 돼."

이북을 모두 죽음의 땅으로 만들 수도 없는 법이다.

네크로폴리스는 산 자를 거부하는 영역.

평범한 사람이 오래 머무르면 생기를 빼앗겨서 시름시름 앓기 십상이다.

그뿐이랴.

24시간 내내 감도는 안개 때문에 햇볕 쬐기도 어렵고.

죽기 딱 좋은 날씨란 말이지.

"너무 많이 먹으면 탈 나는 법. 적당히 먹고 나머지는 한국 정부에 양보할 거다."

[주인답지 않은 생각이네.]

왜.

뭐요.

양보라는 말이 그렇게 안 어울리니.

회귀 전처럼 사람들에게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숨구멍은 열어줘야 공생이 가능하지.

언데드들을 생산적인 활동에 써먹기는 어렵거든.

단순 노동 쪽은 괜찮아도.

부려먹을 수 있는 분야가 한정되어 있어서 결국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그럼 그렇지. 주인이 괜히 양보할 리 없어.]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하기에."

[악덕 업주. 무급으로 부려먹는 사람만 얼마야?]

파프너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블랙 컴퍼니에 자진해서 입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신우랑 백성현도 이번에 우리 회사에 들어왔잖아. 내가 악덕 업주면 안 그러겠지."

[그런 논리면 전쟁도 평화적인 합병이겠어.]

안슐루스(강제 합병) 마렵게 그러지 마라.

그렇게.

마담이 중국의 암흑가에 마수를 뻗고 있는 동안.

유진도 대륙으로 향하는 길을 닦아놓았다.

*

대격변 이후, 한국 정세가 이렇게 급변했던 적이 얼마나 있을까.

국내 3강 중 첫 번째를 놓치지 않았던 강자. 아라한이 1년도 안 돼서 폭삭 주저앉아버렸고.

접경지역의 위험 요소인 인간사냥꾼이 뿌리가 뽑혀버렸으며.

6.25 전쟁 이후로 남의 나라였던 평양까지 한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로마노프 가문이 관심을 가진다던데?"

"이러다 진짜 우리나라에서 8번째 명가가 나오는 거 아닌가."

"천유진?"

"천 대표 말고 다른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런데 소문에는 음지에도 발을 딛고 있다고 하더라."

"음지고 뭐고. 옛날 북한 땅도 되찾은 헌터한테 그게 흠이겠냐."

전 세계 어디를 뒤져봐도 유래가 없는 파격적인 행보!

로마노프 가문의 수장인 마법왕 드미트리가 직접 찾아올 정도로 관심을 가지니, 일반 시민 입장에서는 가슴이 웅장해졌다.

헌터 업계도 수십 년간 없었던 일대 지각변동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번에 평양 인근 토벌 및 개발은 우리가 맡기로 했다."

불사조 길드장 김영수의 눈가가 대중을 찬찬히 훑었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길드원들의 눈동자.

평양 개발!

어마어마한 사업을 주관하게 되었으니, 불사조 길드가 국내 2번째 길드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확실하리라.

왜 첫 번째가 아니냐고?

'천유진 씨 때문에 틀려먹었죠.'

장미선은 평양 개발 일정을 공유 중인 김영수를 보며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평양 개발이란 사업을 통으로 따낸 것도 유진의 양보 덕분이었다.

신의주로 향하는 길을 열고 나머지 이권은 모두 불사조에게 넘겨준 상황.

그 중개인이 된 장미선은 습관적으로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중국 진출 땐 나도 끼워달라고 해야 할까.'

대구에서 열린 이중 게이트 사태 때만 해도 경쟁심을 불태웠는데.

이제는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질투심은 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물들인 것은 호승심뿐.

'뽀시래기 팀한테는 질 수 없잖아.'

평양 인근을 개발하면서 얼마나 많은 싸움을 벌일지는 알 수 없다.

유진이 이북 쪽 몬스터들을 소탕한 것은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침식지역의 특성상 괴물이 쉼 없이 재생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토벌해줘야 하고.

평양 인근을 개발하려면 하루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야 할 것이다.

'더 강해지겠어.'

그래서.

유진에게 닿을 정도는 아니어도, 뽀시래기 팀한테 지는 꼴은 면할 것이다.

당사자들도 없는 곳에서 홀로 마음을 불태우는 장미선이었다.

*

신의주시 상공에 붕 떠 있는 커다란 구조물.

박쥐 한 마리가 죽음의 요새에 날아들었다.

푸드득-.

허공에서 날개를 움직이던 박쥐가 돌연 붉은빛에 감싸이더니.

그 자리에서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귀인을 뵙습니다."

"마담은 바쁜가보군."

"예. 클랜 마스터께서는 직접 찾아오지 못하여 죄송하다고 하셨습니다."

"괜찮다. 이야기만 잘 전달해주면 되니."

진혈의 뱀파이어라.

6성 수준은 되겠군.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수준 높은 권속들을 잘도 부리고 있다.

마담의 수완이 얼마나 대단한지,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천무문주에게 하나만 전해줘라."

"어떤 말씀을."

"용의 계곡 때 만났던 사람이 한번 보자고 한다고."

218화 한 템포 늦춰가도 돼

7대 명가.

로마노프나 카리만리스, 혹은 록펠러 등 전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문 중에서 정점에 이른 일곱 가문을 일컫는 말이다.

헌터의 힘 = 국력이 된 시대.

그 정점에 선 '명가'는 정부를 넘어서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의 천무문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징 근교에 위치한 도시.

중국 정부에서 천무문에게 헌상한 부지로, 고전풍으로 지어진 커다란 저택을 중심 삼아 무수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건축된 지 20년도 안 되는, 중국 도시 중에서는 신식 구조로 된 구조물들.

천무문이 이 곳에 자리를 잡은 후에 들어섰다.

쿵- 쿵-.

"여기로 날라."

"형씨. 조심하라고."

끊임없이 확장하는 도시.

20년 전만 해도 황무지였던 땅은 천무문이 생긴 이후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었다.

정작.

그 발전과 권력, 그리고 힘의 중심에 위치한 천무문주는 도시의 변화에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모자라다.'

무왕 창 우페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 9성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헌터이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창 우페이는 온전한 초월의 영역에 발을 딛지 못했다.

'앞으로 한 걸음만 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건만.'

대외적으로는 마법왕 드미트리와 함께 유이한 9성급 헌터로 알려졌으나.

스스로 느끼기에는 9번째 별을 온전하게 완성시키지 못했다.

힘에 대한 갈망.

눈앞에 아른거리는 깨달음.

그걸 잡기 위해 10대 마경 중 하나인 용의 계곡에 들어가서 수련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잡을 수 없었다.

천무문을 세운 이유가 무엇인가.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아니다.

창 우페이는 드미트리처럼 성세를 확장시키는 데 관심이 크게 없었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무의 궁극을 보는 것뿐.

〔찬란한 자가 조급한 마음으로는 대업을 이룰 수 없다고 조언합니다.〕

천무문의 수호성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창 우페이는 구겨진 표정을 좀처럼 펴지 않았다.

〔찬란한 자는 당신의 성취가 이미 눈부시다고 칭찬합니다.〕

〔찬란한 자는 인내도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찬란한 자 - 시바.

세간에는 그 이명보다 '파괴의 신'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베다의 신이다.

인도 신화로 대표되는 성단 베다.

삼주신 중 한 명인 시바는 본신의 무력만 놓고 보면 비슈누나 브라흐마보다도 더 강력한 베다 최강의 성좌다.

파괴에 의한 재생.

삿되거나 부정한 것들을 모두 부수어 새로운 질서가 나타날 터를 마련한다는 의미의 파괴를 주관하는 신.

그렇기에.

시바는 무에 재능이 뛰어난 헌터가 보이면 아낌없이 후원을 베풀었다.

〔찬란한 자는 자신이 후원하는 필멸자 중 당신의 재능이 첫 번째라고 말합니다.〕

창 우페이는 손을 말아 쥐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거력.

마디에 담긴 힘을 쏟아 부으면 건물 하나가 통째로 날아갈 정도의 에너지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당신이 후원하지 않은 자 중에서 나만한 재능을 가진 자는 없던가?"

〔찬란한 자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있었다, 라."

창 우페이의 입가가 쓴웃음으로 물들었다.

질투가 아니다.

만약.

자신에 버금가는 헌터가 있다면.

서로 끊임없이 겨루며 단련, 그토록 원하는 궁극의 깨달음을 온전히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한숨을 뱉어낸 창 우페이.

그는 돌연 일어나서 창으로 다가가더니 덜컥- 양쪽으로 젖혀서 문을 열었다.

"야심한 시각에 손님이 찾아오는 건 오래간만이군."

"호호. 반겨주시니 영광이네요."

"반겨준다? 그건 앞으로 네 언행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푸드드득-.

열린 창문 안쪽으로 들어온 박쥐는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은하수 펍의 마담이라고 해요."

붉은 눈동자와 매혹적인 외모, 그에 어울리지 않는 청아한 음색까지.

늘 무뚝뚝한 표정을 짓던 창 우페이마저 잠깐 눈가를 꿈틀거렸다.

"위험하군."

"어머나. 무왕께서 손 한번 뻗으시면 죽을 몸인걸요."

"꽤 겸손하군."

"객관적으로 자신을 파악하는 것뿐이랍니다."

창 우페이의 눈가 위로 흥미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7대 명가 중 하나인 천무문의 본관.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이부어서 만든 방어 마법진은 물론이요.

여러 진법까지 쳐져 있어 허락받지 않은 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결계를 돌파하는 건 어찌어찌 한다 쳐도.

그 과정에서 침입자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창 우페이는 창가 너머로 비쳐지는 달을 바라봤다.

"달을 매개 삼아 발동하는 주술이라."

"호호호. 역시 무왕이시네요. 한 번에 제 능력을 파악하실 줄은."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혈마법과 혈능력을 모두 사용해서 결계가 뚫리는 반동을 가라앉혔어."

이번에는 마담이 놀랄 차례였다.

'몇 초나 되었다고 내 능력을 모두 파악한 거야?'

철옹성 같은 천무문의 방어 결계를 피해 안족으로 파고들려면 마담도 모든 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흡혈귀의 시조는 모든 뱀파이어 종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먼저 [달의 주술]로 결계의 감응력을 낮춘 후.

혈능력 셋을 동시에 응용해서 몇 겹으로 된 방어마법을 갈랐으며.

혈마법으로 진법을 무효화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달의 주술]로 이변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밤 한정으로는 준 8성급 무력을 지니게 된 마담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문제는 그 방법을 몇 초도 안 돼서 간파해낸 사람이 있다는 거지.

"재미있군."

슬며시 웃는 무왕.

7대 명가에서 수위를 다투는 헌터의 진면목을 가까이에서 보니 경외심마저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영광이랍니다."

"나를 즐겁게 해주었으니 무례는 따지지 않겠다."

창 우페이는 자리에 앉았다.

본론을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마담이 입술을 달싹였다.

"야심한 밤에 무왕을 배알하고자 한 건 먼저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에요."

"난 그대가 누군지도 잘 모른다만?"

"이번에 만주에서 구룡방의 영역을 양도 받아 새로 영업하게 되었답니다."

"그런 이유인가."

창 우페이는 코웃음을 쳤다.

혈능력과 달의 주술, 그리고 혈마법이라는 이질적인 능력을 구사하는 상대가 나타났다.

마담이 '흡혈귀의 시조'란 것까지는 몰랐어도.

저 능력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이야 간파했으니 흥미가 동했건만.

막상 본론으로 들어오니 마음이 차게 식었다.

"난 구룡방과 그대, 양쪽의 손 중 하나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답니다. 무왕께서는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신다는 걸요."

중국에서 무왕 창 우페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거대한 음지를 장악한 구룡방조차 창 우페이의 눈치를 보고 먼저 배를 까서 헥헥댈 정도.

만약.

창 우페이라는 거목이 구룡방 대신 다른 암흑가를 밀어주기로 마음먹는다면.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한 조직조차 1년 안에 뿌리 뽑혀서 존재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마담은 처음부터 무왕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포인트는 이번 '침투'를 통해 무왕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밑천을 이렇게까지 빨리 털릴 건 계획 밖의 일이었지만.

누그러진 무왕의 반응을 보면 이조차도 나쁘지 않았다.

"인사는 받아주지. 이만 가보게."

"참. 한 가지, 전달드릴 말씀이 있었는데요."

"무엇이지?"

"제 고용주가 용의 계곡, 이라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네요."

용의 계곡.

무슨 의미일까, 하고 2초 정도 생각한 창 우페이의 눈동자가 번쩍 떠졌다.

"그렇군."

마담, 그리고 용의 계곡.

창 우페이는 이제야 둘 사이의 교집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천유진이 그대의 뒷배였군."

"동업자라고 해주시겠어요?"

"좋다. 그대의 동업자에게 한 번 보자고 전해주게."

창 우페이의 호탕한 대답을 들은 마담도 궁금증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용의 계곡이란 한 마디로 무왕이란 거물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저번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머릿속에 있는 무수한 정보들을 교차 검증해봤지만.

창 우페이의 심리를 읽어낼 수 없었다.

마담이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유진을 만나겠다고 한 것은 '궁극의 무'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는 창 우페이의 변덕이었으니까.

그 변덕 또한.

유진의 노림수였다는 것까지도.

미래를 경험하고 온 회귀자의 정보는 마담도 가늠하지 못했다.

*

개성 탈환부터 평양 짐승 군벌 토벌, 그리고 신의주까지 일직선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기까지.

유진을 위시한 블랙 컴퍼니 사워들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먼저 뽀시래기 용병단은 나찰 길드를 정리했다.

붕 떠버린 한반도 남부의 음지의 흐름.

암상은 몇몇 단체를 밀어주며 상권을 확보하고는 그 혼란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유령함대를 더 대여해달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미스터 블랙은 넘쳐나는 일거리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반도 남부의 음지를 장악한 덕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일대의 해양 루트를 대부분 손에 넣었다.

암상하고 경쟁 중인 흑상은 내륙 쪽 밀수에 특화되어 있으니.

더 이상 암상의 확장을 견제할 세력은 없었다.

블랙 컴퍼니 본사도 쉴 새 없이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임재백은 하늘 높이 쌓인 서류의 산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많은 건 좋지만."

블랙 컴퍼니가 총괄 중인 이북 개발 사업.

정부에서 얻어낸 '토벌 범위 내 개발 권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스노우볼이 어마어마하게 굴러갔다.

처음 그 협약을 할 때만 해도 개성 탈환의 동기부여 정도로만 생각했던 정부.

그렇지만.

불과 1년도 안 돼서 신의주까지 향하는 길을 유진이 프리패스로 뚫어버리면서 블랙 컴퍼니가 어마어마한 이권을 손에 넣었다.

이 순간에도.

블랙 컴퍼니에 협업을 요청하는 기업들이 줄을 지어 찾아왔고.

국내에서 유수의 헌터 길드들도 선을 대려고 노력했다.

불사조 길드에게 권한 일부를 주지 않았으면 감당할 수 없는 일감에 짓눌려서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형. 커피 좀 먹으면서 해."

"나는 괜찮아. 체력은 넘쳐난다. 네 걱정이나 해."

진심이다.

임재백은 각성자라 일반인보다 체력이 월등하게 뛰어났다.

반면 동생은 평범한 사람이니.

걱정할 순번이 잘못 되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은 임재백은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때.

쿵!

요란하게 젖혀진 문 사이로 유진이 나타났다.

"다들 고생이 많아."

"천 대표님? 갑자기 여긴 어떻게!"

"급한 일은 마무리해서 왔지."

침울하게 잠겨 있던 임재백의 눈동자 위로 빛이 감돌았다.

이 서류지옥을 끝내줄 유일한 사람!

유진은 그 간절한 눈빛에 마음 한구석이 쿡쿡 찔려왔다.

"내 결재가 필요한 서류들 넘겨줘."

"알겠습니다."

사양 한 번 안하는구먼.

탁자에 쌓인 서류 더미 중 일부가 유진의 앞으로 옮겨지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근데 대표님께서 신의주를 비워두어도 괜찮으신 겁니까?"

"송명석이 지키고 있다. 걱정 안 해도 돼."

무왕과의 만남도 성사되었다.

신의주까지 길을 열어놨으니.

창 우페이를 직접 만나서 몇 가지 논의를 하기까지는 급한 일이 없다.

구룡방의 움직임은 마담에게 일임해두었으니.

'벌려놓은 일을 수습할 타이밍이다.'

조금이라도 짬이 날 때.

블랙 컴퍼니의 내실을 더 다져두어야 한다.

유진은 몇몇 인물들을 떠올리며 바쁘게 서류를 살폈다.

219화 숨고르기

"으아아아."

의자에 몸을 기댄 유진이 두 팔을 쭉 뻗었다.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와서 이틀 동안 사무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임재백에게 대부분의 업무를 넘겼지만.

자신의 결재가 필요한 굵직한 사안이 엄청나게 있어서 쉽게 일을 끝내지 못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뭘. 임 이사가 훨씬 애쓰지."

"알아주시니 감사하군요."

전에는 겸양이라도 떨었는데.

임재백의 바뀐 태도에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다들 모였나?"

"예. 대표님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타이밍 좋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사양하지 않으마."

블랙 컴퍼니 본사 식당에는 먼저 온 손님들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형.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

"우리도 요즘 바빴지 말입니다."

뽀시래기 팀은 이미 음식을 퍼와서 와구와구 먹는 중이었고.

"품위가 없군."

미스터 블랙은 와인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동업자님. 저 바쁩니다."

칭얼거리는 신준석.

마담은 호호, 하고 웃더니 혈액 팩을 잔에 따랐다.

"모두 모였군."

"그래서 바쁜 사람들 왜 모으신 겁니까."

"친목 모임."

"예?"

"앞으로는 쉴 시간 없으니까. 얼굴 좀 비추고 서로 친해지라고 부른 거다."

개성 탈환부터 신의주까지 일직선으로 통로를 내기까지.

유진만 바쁜 게 아닌, 블랙 컴퍼니 산하의 모든 조직이 급격하게 팽창했다.

뽀시래기 용병단은 국내에서 헌터 업계에 뒷전이 되어 크게 성장하지 못한 PMC 분야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고.

암상은 한반도 남부의 음지까지 꿀꺽 했으며.

신준석의 연금술 공방도 확장을 거듭해서 파주 일대에 그치지 않고 개성 공단 쪽에도 공장을 지었다.

"근데 전 관계자가 아닌데요."

불쑥 손을 든 여인.

장미선의 말에 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싫으면 돌아가던가."

"에이. 협력사라고 말해줘요."

불사조 길드의 대리인으로 참여한 장미선.

말은 나긋나긋해도 전신에서 흘러 나오는 마력이 한층 더 벼려져 있다.

보아하니 5성에 도달한 모양.

유진은 허, 하고는 신음을 삼켰다.

'내 참. 역시 차기 검성은 다른 건가.'

〔그대는 이미 여섯 번째 성위를 이룩하였으며, 동료들도 5성에 도달하였도다. 놀랄 일은 아니지 않느냐.〕

'어허. 회귀자랑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면 쓰나.'

뽀시래기 팀도 마찬가지다.

회귀 전, 거울 사냥꾼으로 위명이 자자했던 두 사람은 유진의 지도 덕에 능력 활용 방법을 빠르게 습득했으니.

이성민만 4성에 머무르고 있는 걸 보면 견적이 나오잖아.

물론, 이성민도 유진의 조언을 받아 [공간] 능력을 100% 써먹고 있어서 성장 속도가 훨씬 빠른 축에 속했다.

'장미선은 그런 조언도 안 받고 5성에 도달했으니 대단한 거다.'

회귀 전에는 아라한 길드의 함정에 빠져서 재능을 피우기도 전에 스러져간 헌터.

이번에는 달랐다.

흠.

불사조 길드하고는 두 번째 삶에서도 호의적인 포지션이니,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굴려볼까?

"주인. 엉뚱한 사람 갈구지 말고 빨리 먹어."

"파프너야. 나 안 기다리고 벌써부터 먹고 있었냐."

"사람답게 먹어본 게 얼마인지 기억도 안 나거든? 언제 배부르게 먹어두겠어."

접시를 수북하게 쌓아둔 파프너.

엘드리치 드래곤 시절에는 맛을 느끼지 못해서 강민영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사룡족으로 거듭난 후에는 혼자서도 식도락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안 먹어도 괜찮으면서."

"맛은 느낄 수 있거든?"

"그래. 마음껏 즐겨라."

드래곤하트는 영구기관.

먹지 않아도 힘이 자동적으로 채워지고 마력도 솟아난다.

그러니까.

파프너가 먹을 것에 매달리는 건 순수한 식탐 때문인 셈.

"사람이 바뀌었어. 언제는 나한테 맛 느끼게 해준다고 생색을 다 내더니."

"그건 네가 언데드였을 때고."

"흥. 밥 하나 안 주면서 사람 부려먹으면 안 돼."

신의주까지 길을 쭉 내는 과정에서 활약한 일등공신.

애꾸눈도 돌파력만큼은 파프너보다 한 수 뒤쳐졌다.

길을 내는 과정에서 밥 한 끼 안 챙겨줬다고 입술이 저렇게까지 나오다니.

아아.

과묵했던 박하늘 씨가 그립읍니다.

"주인도 거기서 멍하니 있지 말고 좀 먹어."

"그래."

유진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을 지으며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

시끌벅적한 만찬이 끝난 후.

유진은 단상 앞에 섰다.

"귀한 발걸음을 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동업자 님. 언제부터 고운 말 쓰셨다고 그럽니까?"

"형. 어울리지 않는 말 쓰지 마요."

"호호. 모처럼 다들 마음이 통한 것 같네요."

한 마디 내뱉자마자 우수수 달려드는 피라냐들.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X. 분위기 좀 잡으려고 하는데 다들 초치지 말라고."

"대표님. 솔직히 안 어울립니다."

임 이사.

당신까지 그러면 안 되지!

"쩝쩝. 그래서 본론이 뭡니까?"

"미스터 블랙. 입에 있는 건 모두 씹은 뒤에 말해주었으면 하는데."

"남 먹고 있는 거 신경 안 쓰고 나온 건 천 대표님입니다."

하아.

유진은 한숨을 삼켰다.

'내 편이 한 명도 없네.'

〔그대가 만든 결과물이니라.〕

왜.

뭐요.

믿을 사람, 아니 성좌 하나 없군.

"제길. 다들 도와주지를 않네."

"언제부터 주인이 사람들한테 존댓말 썼다고. 어설프게 그러지 마."

파프너의 말에 모두 와하하- 하고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블랙 컴퍼니가 급격하게 사업 규모를 확장시키면서 다들 얼굴 볼 일 없으니 자리 만든 거다."

"새삼스럽군요."

"뭐가 새삼스러운데."

"우리는 이미 블랙 컴퍼니 안에서 협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스터 블랙은 잔잔한 투로 대꾸했다.

"한반도 남쪽 루트를 암상 홀로 관리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까?"

"암상 능력이면 되지 않나."

"우리는 상인입니다. 무력은 주가 아닙니다."

암상은 뽀시래기 용병단에서 헌터들을 고용.

나찰 길드의 빈자리를 꿀꺽 하면서 생긴 이득을 지키는 데 쓰고 있다.

"동업자 양반은?"

"저도 뭐 성천 그룹이랑 대한제약에서 필요한 건 계속 조달받고 있는걸요."

신준석은 유진 덕에 몸집을 불리는 데 성공했고.

이젠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연금술 공방을 키워냈단다.

"필요한 건 미스터 블랙 덕에 잘 구하고 있습니다."

"그쪽은 비쌀 텐데."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가 양지에서만 얻을 수 있진 않거든요."

뭐야.

이미 잘 하고 있었잖아.

그 외에도 사업 몇 개를 점검해봤는데 블랙 컴퍼니 산하 업체들은 나름대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좋아해야 하는 게 맞는데.

왜 이렇게 배알이 꼬이냐.

"호호호. 너무 사업에 무신경하신 것 아닌가요?"

"내가 좀 바쁘잖아."

"여기에 한가한 분은 아무도 없답니다."

마담의 일침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허 참.

더 이야기해봐야 본전도 못 찾겠다.

"그럼 다들 즐깁시다."

유진은 단상에서 내려왔다.

"동업자님."

"왜. 뭐요."

"아니. 사람 속이 그렇게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작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내가 뭘."

"그러지 말고 이거나 한번 봐주십쇼."

신준석이 내민 태블릿을 보니 골렘 제작도가 띄워져 있었다.

유진은 슬쩍 제작도를 보더니 음, 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5성 급 출력이군."

"예. 아직 그것밖에 안 됩니다."

"5성을 그렇게 폄하하는 건 동업자 양반 밖에 없을 거다."

"그게 아니죠. 30억을 투자해야 한 기를 만들 수 있는데 5성이면 손해인 겁니다."

30억에 5성급 헌터 수준의 무인 병기를 만들 수 있다고 하면 어느 기업이든 사양하지 않을 건데.

누가 미래의 대연금술사가 아니랄까, 목표 한번 높게 잡았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뭔데?"

"하체 구간으로 넘어가는 순간 출력이 감소하거든요. 보정하려면 뭐가 더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평범한 재료로는 안 돼. 미스릴 같은 촉매를 넣어야 할 거다."

"그럼 개당 단가가 너무 비싸지 않겠습니까?"

"회로에만 세팅해줄 거면 100그램 정도만 있어도 돼."

"아!"

"그리고 생각을 바꿔. 6성 이상은 고급형으로 만들고 양산형으로 4성이나 5성급을 만들면 되지."

신준석이 추구하는 골렘은 흔히 말하는 오버스펙이다.

마력 엔진의 출력도 아슬아슬한데, 그걸 낭비 없이 모두 써먹으려고 하니 원하는 성능이 나올 리 없지.

유진의 지적에 신준석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역시 동업자님입니다!"

"공장은 언제쯤 돌릴 수 있겠나?"

"당장이라도 시제품을 뽑아낼 준비를 끝냈습니다."

"도면 수정해야 하잖아."

"말씀하신 대로 하면 공정에서 손 댈 부분은 없어서요."

원 역사보다 훨씬 빨라진 골렘 생산.

로마노프 가문에서 알게 되면 배 아파서 숨지려고 하겠군.

회귀 전, 최초로 골렘 양산에 성공한 것은 로마노프 가문이니 말이야.

"사부우우!!"

"잘 지냈어?"

"헤헤. 한 판 붙어봐요."

"나 많이 세져서 감당이 될까 모르겠네."

"그러면 더 좋죠."

장미선은 파프너한테 인사하자마자 바로 대련을 신청했다.

몇 마디 나누고는 바로 나가는 두 사람.

불사조 길드의 동향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사라져버렸네.

"나라 잃은 사람 같은 표정은 왜 지으세요?"

"마담. 우리는 요새 자주 봤잖아."

"그래서 싫으신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이렇게 되었으니 미스터 블랙과 사업 구상 좀 같이 하시게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미스터 블랙이 이제야 흠흠- 헛기침을 했다.

"마담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구룡방과 흑상을 완전히 배제할 생각이시라고."

유진은 두 눈을 끔뻑였다.

누구.

제가요?

'스케일이 확 커졌는데.'

마담, 이 아주머니가 왜 이럴까.

과잉충성이라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딱히 손해 볼 것도 아니라서 부정하지 않았다.

"흑상의 영향력을 낮추려면 동남아시아 루트를 끊어야 합니다."

"가능하겠나?"

"유령 함대를 더 빌려주신다면."

"각 선박의 전투력은 5성급이다. 30척을 모두 동원해도 절대적인 강자 앞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해."

해상전투에 한해서는 준 6성급 무력을 자랑하는 유령함대.

그래도.

7성 수준의 강자가 작정하고 유령함대와 맞붙으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다.

미스터 블랙은 핫, 하고는 짧게 웃었다.

"모르셨군요. 천 대표님이 옛 북한 땅에 계시는 동안 유령함대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변화?"

"예. 오호츠크 해 일대를 장악한 일본의 해적들을 편입시켜서 전력이 늘어났습니다."

"함대 숫자가 늘어나도 어려울 걸."

"유령선이 강화되던데요. 덩치 큰 군함을 삼키더니."

잠깐.

군함을 삼켰다고라?

유진은 혼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유령함대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고스트 드레드노트]

성위 : ★★★★★★★

평범한 유령선을 넘어선 개체.

드레드노트급 전함에서 이름을 그대로 따온 듯한 유령 군함이 함대에 추가되어 있었다.

"...이건 뭔 일이람."

"자위대에서 탈영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던 해양 군벌이 유령함대와 붙었습니다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피해가 상당했을 텐데."

왜 이렇게나 중요한 일을 보고하지 않았냐는 질책에 미스터 블랙이 허허로이 웃었다.

"대표님이 시간을 내주셔야죠."

"...."

고스트 드레드노트라.

참.

오래간만에 보니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았다.

진즉에 숨을 고를 시간을 가졌어야 했나.

생각 이상으로 규모를 키운 블랙 컴퍼니의 힘을 100% 활용하려면.

이번 미팅 때 정보를 최대한 갈무리해야겠다.

"나눌 이야기가 많겠어."

유진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220화 다시 보니 반갑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