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폭풍전야
[블랙 컴퍼니, 개성 탈환 일정 구체적으로 발표]
블랙 컴퍼니의 천유진 대표는 돌아오는 5월 첫째 주에 개성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이번 북진은 6.25 이후 처음으로 시도되는 이북 진출이며, 우리나라가 대격변 이후 안정된 사회를 구축했다는 증표....
(중략)
└ 진짜 간다고?
└ 개성 가즈아아.
└ 아라한 견제구 날리는 거 아님?
└ 네 다음 아라한 알바.
└ 개성 찾으면 뭐가 좋음?
└ 핑프야. 모르면 검색해봐.
└ 뭐래.
└ 개성 열리면 평양까지 스트레이트임.
└ 그러면 평양도 갈 수 있을거임.
└ 평양 군벌은 손가락 빨고 있냐.
└ 난 아라한이 더 신뢰 가던데.
└ ㅇㅇ. 고작 각성 1년차 아님?
└ 잡았다. 알바.
└ 응. 선발대 전멸했죠?
각성 1년차 헌터라고 유진을 무시하는 여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피의 발렌타인.
사탄교 마인들의 준동을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낸 업적 덕에 유진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부사장. 어떻게 생각하나?"
기사를 비춘 태블릿을 슬쩍 앞으로 미는 이신우.
맞은 편에 앉은 백성현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다 제 불민함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오해하지 마라. 책망하는 게 아니다. 지금은 그렇게 화가 나지도 않고."
백성현의 눈가 위로 감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라한 길드의 마스터이자, 현 시점에서 국내 최강자로 언급되는 존재.
이신우가 대외 활동을 극도로 줄인 것은 그의 특성 때문이었다.
'강해질수록 분노를 참기 어려운 특성.'
분노가 거세질수록 강해지지만.
그걸 스스로 억제할 수 없으니, 길드 마스터가 강해진다는 게 양날의 칼로 작용되었다.
이신우는 그 분노를 억누를 겸 8성에 도달하려고 게이트 폐관 수련을 자처했고.
아라한 길드의 업무는 자연스럽게 백성현이 도맡았다.
'마스터께서 분노를 지배하고 계신다.'
참는 게 아니다.
분노라는 감정을 억제하다 보면 결국 터지는 법.
귀환하자마자 한 말대로, 이신우는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지배하려 했다.
"...너무 뜸을 들이진 말게."
"아, 죄송합니다. 마스터. 너무 감격에 차서."
"내가 금쪽이도 아니고."
"강한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마스터께서는 그 짐을 어깨에 짊어지신 것뿐입니다."
"입 발린 소리는 됐네."
이신우의 뺨이 살짝 씰룩거렸다.
"1주 뒤에 북진한다는 건 사실일 겁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대한제약과 성천 그룹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블랙 컴퍼니와 선을 대고 있는 자들."
"예. 물류의 흐름으로 보건대 개성 재개발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이신우는 쓰게 웃었다.
각성 1년 차 헌터가 벽을 넘은 것도 모자라서 국내 3강도 나서지 못한 개성 수복에 도전한다?
복종시켰다고 생각한 분노가 다시금 치밀어 오르면서 눈가가 붉어졌다.
"참 눈부신 재능이다. 그렇지 않은가?"
"재능만을 믿고 날뛰다가 고꾸라진 이들도 많지요."
"마치 그 여자처럼.
"이제는 썩어서 뼈도 안 남았을 겁니다."
박하늘.
그 어떤 헌터들보다도 찬란하게 빛났고, 또 고귀했던 별.
대격변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오직 사람들을 구하는 것만 관심사였던 여인.
아라한이 국내 최고의 길드가 되려면.
그 별을 떨어트려야 했다.
백성현은 그녀가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을 팠고, 그 뒤에 막대한 자금까지 풀어서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게끔 기록을 조작했다.
더 이상 이신우가 집착하지 못하도록.
'천유진이 접경지역에 남은 박하늘의 흔적을 수습했다는 건 말씀드리지 않아야겠어.'
그건 도화선이다.
불 붙는 순간 이신우를 확실하게 터트릴 수 있는.
백성현은 표정을 관리했다.
"가능성은 얼마라고 보는가?"
"20% 정도로 예상됩니다."
"꽤 높은 수치군."
"만주에서 6성 수준의 언데드 소환수가 확인되었습니다."
"천유진의 대전사, 파프너인가."
"그 소환수는 주먹을 사용합니다. 이번에 등장한 6성급 소환수는 주력 무기가 쌍검이라고 하더군요."
쌍검, 이라는 말을 내뱉은 백성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망자를 다루는 천유진.
새로 나타난 쌍검을 다루는 소환수.
두 요소의 교집합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어서였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나?"
"아닙니다."
"확인된 전력은 6성 둘인가."
"더 있습니다. 피의 발렌타인 사태에서 바실리스크와 인간을 섞은 언데드가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6성급이 셋, 아니 김미정까지 넷인가. 그렇다고 해도 인간사냥꾼과 정면승부를 벌이긴 모자란 전력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천유진입니다."
이신우는 손바닥에 올린 호두를 가볍게 굴렸다.
"꽤나 고평가를 하는구나."
"나찰이 당할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으니까요."
"전략팀에서는 나찰 집단군의 패배 확률을 얼마로 예상했나?"
"1% 미만입니다."
"예상을 상회한다는 의미에서 10%를 불렀군."
"네. 객관적인 전력만 비교하면 인간사냥꾼이 승리할 가능성이 99%입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
인간사냥꾼이 무서운 건 소모전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단 것이다.
접경지역을 통과해서 개성까지 가야 하는 원정대.
무작위로 생성되는 몬스터 때문에 전진 및 보급도 쉽지 않고.
인간사냥꾼은 그 괴물들을 테이밍해서 아군으로 부리기까지 하니, 단기결전으로 끝내지 못하면 개성을 수복할 수 없다.
"몬스터 웨이브 때도 꽤 귀찮았지."
"그랬지요."
두 사람은 25년 전을 떠올리며 회환에 잠겼다.
몬스터 웨이브 일부를 조종해서 큰 피해를 입혔던 인간사냥꾼.
국내 3강을 포함한 대형 길드들이 인간사냥꾼 토벌을 피하는 건 과거의 기억도 한 몫 했다.
"젊은 건 참 좋아. 그렇지 않나?"
"예."
"재미없긴. 어쨌든 부사장이 볼 땐 10%는 된다는 말이잖나."
"상대는 천유진입니다."
아라한의 행보를 몇 번이고 막아선 자.
두 세력의 전력 차이와 온갖 변수를 고려해서 최상의 결과를 냈을 때와.
천유진이라는 기상천외한 존재 자체에 점수를 매기면 10%라는 수치가 나온다.
"길드 차원에서 훼방을 놓을 순 없나."
"1주라는 시간이 문제입니다. 당장 북벌을 준비해도 최소 2주는 걸립니다."
"우리의 반응을 고려한 것 같군."
"명분에서도 뒤지는 입장이지요. 후발주자로 움직이면."
"길드의 숨겨진 전력을 사용하는 건?"
"불사조와 마담의 시선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불사조 길드는 유진의 편을 들어 적극적으로 아라한을 견제했다.
객관적인 전력은 아라한이 앞서지만, 일부 인원만 빼서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나찰을 다시 움직여야겠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런 때를 위해 키운 게 나찰 아니겠는가. 동생에게는 내가 직접 이야기하겠네."
부산 일대 암흑가의 통제권을 겨우 수복한 나찰 길드.
이 타이밍에 대규모 인원을 뺀다면 근간마저 흔들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이신우는 개의치 않았다.
길드 비자금을 이용해서 나찰을 성장시킨 것은 위험한 순간에 비수로 쓰기 위함이었으니.
"계획을 더 앞당겨야겠어."
"마스터께서 직접 나서려고 하십니까?"
"제일 확실한 수단을 사용해야지. 이길 확률이 10%나 된다고 하지 않았나."
단독행동이 눈에 띄지 않기도 하고, 라며 뒷말을 붙인 이신우가 노란 돌을 손에 쥐었다.
룬 스톤.
인간사냥꾼과 직접 통화하게 해주는 마도구였다.
*
블랙 컴퍼니의 북진 소식으로 떠들썩해진 한국 사회.
헌터협회에서도 유진을 찾아와서 잘 부탁한다고 읍소했고.
무수한 기업들이 블랙 컴퍼니에 투자 의사를 밝히면서 임재백의 휴대전화가 불에 탈 것처럼 뜨거워졌다.
원정 중심부인 네크로폴리스도 겉으로 볼 때는 침묵에 잠겨 있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잘 짜인 톱니바퀴가 쉬지 않고 돌아가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선배. 이렇게 쉬어도 되는 검까?"
이성민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움직이는 망자들을 힐끗거렸다.
접경지역 곳곳에서 생성된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무리.
시체를 불경스러운 묘지나 시체 나무, 혹은 거인의 묘소로 옮기는 무리.
강령술로 시체를 되살리는 무리 등.
소리만 나지 않을 뿐, 언데드들은 쉬지 않고 노동을 했다.
"형님이 쉬는 것도 일이라고 했어. 긴장 풀고 있어라."
"방패부터 내려놓고 말해. 그게 쉬는 거야?"
쌍둥이 동생의 타박에 기운 운용을 수련 중이던 강민호가 멋쩍게 웃었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오빠랑 달리 난 오러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거든."
강민영의 턱 아래로 떨어지는 땀 한 방울.
벽을 넘어섰지만, 그녀는 오러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유진이 알려준 [동조]의 진정한 활용법은 [염력]과 같이 활용하는 것.
강민영은 무기 여럿을 동시에 움직여서 다각도에서 적을 노리는 전투방식으로 스타일을 바꿨다.
문제는 오러의 발현 주체가 자신이라는 것.
"뭐가 문제야?"
"동조로 마력을 흘려보내면 손실이 발생한단 말이야."
안 되는 건 아니다.
[동조]와 [염력]으로 이어진 무기는 거리가 벌어져도 한 몸으로 인지가 되어서 마력이 전달됐다.
이동 과정에서 마력 손실이 심해서 문제이지.
"얼마나 손실이 있는데?"
"30% 정도."
"생각보단 적네."
"그거만 문제가 아니야. 화살에 오러를 담아도 사거리가 길지 않다고."
오러의 근원은 마력.
발현하는 주체에서 멀어질수록 불어넣은 의념이 휘발되고, 금세 자연으로 흩어진다.
원거리 특화 헌터의 성위가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이유.
"김 고문한테 물어보지."
"몰라. 그 아줌마도 화살은 자기 분야가 아니래."
강민호의 실력이 일취월장한 데는 김미정의 조력이 컸다.
오러와 물리적인 힘, 그리고 신성을 겹쳐서 일점으로 폭발시키는 기예.
그 능력에 흥미를 드러낸 김미정은 틈이 나면 강민호한테 붙어서 단련시켜주었으니.
반면 강민영의 능력은 원체 이질적이다 보니 도움이 1그램도 되지 않았다.
"이 녀석이 도와줄 거다."
"형?"
불쑥 대화에 끼어든 유진이 뒤를 가리켰다.
음울한 안색을 띤 언데드.
데스 레인저로 되살아난 메이 샤오는 푸른 안광을 좌우로 흔들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원거리 공격 전문 강사님이다."
메이 샤오가 제기랄, 이라는 사념을 흘렸지만 강민영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형. 바쁘잖아."
"바빠도 너희는 챙겨야지. 내 첫 부... 아니, 동료인데."
회귀 전에 손속을 겨뤘던 때를 생각하면 특별한 조력 없이도 해결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래도.
궁술 쪽으로 조언해줄 만한 멘토를 붙여주면 더 빠르게 답을 얻겠지.
"혀, 형!"
감격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달려드는 쌍둥이 동생을 강민호가 제지했다.
"형님.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도 진정하고."
"당연한 걸 가지고."
순간 화력은 오러 블레이드 수준에, 탱킹까지 능한 강민호.
강민영은 다각도에서 화력을 쏟아 부을 수 있고.
[공간]으로 쟁여놓은 아이템을 꺼내 여러 상황에 대처 가능한 이성민의 능력까지.
변수 창출에 뛰어난 뽀시래기 팀의 저력은 단순한 4성 따위가 아니었다.
[주인. 시체 나무가 막 기운을 차렸다.]
"어. 바로 다음 시체 넣어."
[오우거 넣으면 되지?]
"창고에 쟁여놓은 악마의 눈도 같이 흡수시켜."
[하나면 돼?]
"아니. 손실 가능성이 있으니 셋은 넣어라."
뽀시래기 팀의 훈련을 봐주고.
새 언데드 제작 과정에 관여하는 등.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유진의 일상과 달리.
네크로폴리스는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1주 후에 불어닥칠 폭풍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181화 인생이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란다(1)
불타는 산 아래에 자리 잡은 검은 방첨탑.
편법으로 바실리스크와 융합시킨 죽음 용기병, 최형태는 네 발을 꿇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큰 손실은 없군."
비늘 여기저기가 깨어지고 푹 파인 상처들도 여럿 새겨졌다.
불타는 산 아래에 알박기 한 영지를 지키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
전투력이 떨어질 생길 만큼의 피해를 입진 않았으니, 유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리 와라."
달그락- 달그락-.
뼈로 만든 마차에서 시체의 뼈와 살점 등을 조종.
손상된 부위에 얹고는 영력을 실과 바늘처럼 가늘게 만들어서 꿰어냈다.
〔평소처럼 영력을 재배열해서 한 번에 끝내면 되지 않느냐.〕
'죽음 용기병은 세세한 조율이 필요해.'
준 7성급 괴물인 죽음 용기병.
편법으로 만들어내서 스펙이 이 정도에서 멈춘 거지, 제대로 만들었으면 두 번째 벽을 넘어서는 언데드다.
규칙 외 수단으로 만들었으니 밸런스가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스펙이 확 깎이고.
영력을 한 가닥씩 뽑아내어 잇는 것도 거부 반응을 줄이기 위함이다.
[주인. 이 기둥들은 어디에 놔?]
"화살이야. 그건 메이 샤오한테 전담해라."
보급용 뼈 마차에 실어놓은 기둥, 아니 화살더미.
초장거리 저격용으로 주문 제작한 물건이다.
[제기랄.]
"최대 사거리는 얼마나 되지?"
[뒤지면서 힘이 줄어들었다. 최대 3킬로미터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해."
초장거리 저격은 6성 스펙인 송명석도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강력했다.
유진의 꼼수가 아니었으면 일방적으로 당했을 만한 화력.
생전보다 한 단계 내려간 성위로 인해 그만큼의 힘은 나오지 않겠지만.
이번 전장에서 큰 힘이 될 것임은 확실했다.
"스네이크 아이."
"예. 은인."
"아래로 내려가서 몬스터나 인간의 흔적을 찾아라."
녹색 후드로 머리를 감싼 스네이크 아이는 양손에 소드 브레이커를 든 채 영지 아래로 향했다.
〔저 작은 아이를 귀히 써도 되겠느냐?〕
'당장은.'
스네이크 아이한테 배신당한 경험이 있지만.
그건 회귀 전의 일이다.
사람의 본질은 안 바뀐다지만 당장은 그 능력이 블랙 컴퍼니에 도움이 되니, 바로 내치기도 그렇고.
'놈이 제 입으로 약점을 불기도 했잖아.'
〔그 딸을 인질 삼을 셈이더냐? 참으로 고약한지고.〕
'누가 그런대?'
회귀 전과 달라진 스네이크 아이의 가정사.
아마도.
스네이크 아이가 돈에 집착하게 된 것은 딸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는 건 의외로 자주 발생하는 일이거든.
〔그대답지 않은 관대함이로구나.〕
'뒤통수 칠 것 같으면 죽여서 부려먹을 거다.'
언데드로 되살리면 감각이 없어지니 길잡이 능력도 쇠퇴하겠지만 말이야.
잘 합시다. 스네이크 아이 씨.
망자가 되어 은혜를 갚고 싶지 않다면.
[주군. 1차로 언데드 3천 구 이동을 모두 완료했습니다.]
"수고했다."
검은 방첨탑을 중심으로 부쩍 늘어난 언데드 군대.
숫자는 늘어났지만, 각 개체의 능력은 유진이 혼자 만들었던 시절보다 많이 떨어졌다.
다크 미니언들이 제작한 언데드들은 검은 방첨탑의 보조 효과를 받았음에도 스펙 증가가 50%를 넘기 어려웠으니.
'언제까지고 하급 언데드를 일일이 만들 순 없어.'
그래도 다크 미니언들에게 계속 일을 시켜야 강령술 숙련도도 빠르게 올릴 수 있다.
중급 언데드들은 자신이 손을 봤으니, 전투력 손실도 없고.
머릿수를 채워줄 하급 언데드들을 일일이 공들여 만드는 건 시간과 인력 낭비다.
[근데 2차와 3차를 왜 나누신 겁니까?]
링크된 검은 방첨탑들은 귀속시킬 수 있는 병력 숫자까지도 공유된다.
현재 네크로폴리스에서 수용 중인 언데드는 1만 구 이상.
송명석의 질문은 언데드 대군을 한 번에 동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냐는 의미.
"네크로맨시도 그렇게 형편 좋은 기술은 아니거든."
[예?]
"병력을 한 번에 동원하면 이쪽 검은 방첨탑의 영력이 고갈되어 버린다."
자연 발생한 언데드가 아닌, 네크로맨서가 만든 존재는 반드시 영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하급이야 유지 코스트가 높지 않지만.
중급만 돼도 전투 때 소모하는 영력이 어마어마했다.
"링크했다고 해서 검은 방첨탑의 영력 총량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이곳은 화기가 강해서 영력이 낮다고 하셨지요.]
"그래. 잘 기억하는군."
[주군의 말씀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합니다.]
이거야 원.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생전의 일을 완전히 까먹을 리 없는데도, 송명석은 과하다 싶을 만큼 딸랑거렸다.
〔그대가 저 작은 인간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단 방증일 터.〕
'없는 충성심까지 끌어낼 정도는 아니거든요?'
〔저 과잉 충성이 마음에서 우러났다는 말이더냐.〕
'반감은 억제시켜도 충심을 끌어내진 못해.'
합일 의식의 부작용.
자의식이 강해지는 만큼 언데드 특유의 충성도를 기대할 순 없다.
대신 전투능력이 향상되고 생전의 고유 특성을 이전하는 등, 이점이 훨씬 많아서 단점이 부각되지 않는 거지.
'적극적이면 된 거잖아.'
〔그대의 발꿈치를 물지 않으면 상관은 없을 터.〕
'내 제어 능력은 완벽해.'
전직 9성의 초월자를 얕보지 마시라.
합일로 자의식이 생긴 하수인에게서 충성심까진 못 이끌어내도.
반감이나 역심 정도는 완벽하게 누를 수 있다.
최근에 합류한 메이 샤오도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시킨 일을 다 하잖아.
〔크하하핫. 너무 마음 놓지는 말아라. 인생이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
'예. 예.'
필멸자들을 굽어 살펴보며 우월감에 젖어 있던 성좌가 이런 말을 하다니.
유진의 입가가 조소로 물들었다.
"은인. 다녀왔습니다."
"상황은 어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단 건가."
"예. 깔끔하게 지워졌습니다."
흠-.
유진은 짧게 신음하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그대가 올 것을 예견이라도 한 모습이로구나.〕
'귀띔을 받았을 거다.'
〔인간사냥꾼은 고립된 단체 아니더냐.〕
'아라한 길드와 밀약을 맺었다고 말했었잖아.'
아라한과 인간사냥꾼의 비밀 동맹.
회귀 전에도 경험해본 일이라서 크게 놀라진 않았다.
한 가지 특이점은 동맹 시기가 당겨졌다는 것.
아라한 길드에 압박을 가하는 때가 빨라져서 그런 건가, 라며 유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아라한도 행동을 개시하겠구나.〕
'쉽지는 않을 거다. 끽해봐야 소수 정예로 움직이겠지.'
불사조 길드는 유진이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아라한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며 간간히 소식을 전달해주었다.
-우리 길드장님 호의예요. 그냥 받아요.
...라는 장미선의 뒷말과 함께.
회귀 전에도 겪어본 일이라서 크게 놀랍진 않았다.
〔그대여. 판단의 때로구나.〕
'우리나라 속담에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란 말이 있다.'
〔강행할 셈인가.〕
'당연하지. 여기서 시간을 주면 놈들에게 더 유리하다.'
시간은 적의 편.
아라한과 인간사냥꾼이 접선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손에 쥔 것으로 충분하다.
[주군. 선봉대는 부디 속하에게 맡겨주십시오.]
"그래라."
[충!]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 송명석이 칼을 앞으로 휘둘렀다.
[모두 전진!]
끄떡도 하지 않는 언데드 군대.
송명석아.
진영의 선두를 맡으라고 했지, 언제 지휘권을 준다고 했니.
유진은 손을 까딱였다.
"하급 언데드부터 앞으로 가라."
아머드 시리즈와 리터너, 그리고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키룩, 키룩.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비행종 괴물, 크로스트가 기이한 울음을 흘린다.
인간사냥꾼이 사육 중인 괴물.
크로스트와 시야를 공유한 인간사냥꾼 한 명이 상황을 중계했다.
"2대장 동무. 죽다 만 놈들이 옵니더."
"됴야. 모두 계획대로다."
깡마른 여인.
자칭 제5 혁명군에서 두 번째 대장으로 임명된 주영숙이 히죽거렸다.
불타는 산을 끼고 벌인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주영숙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수는?"
"3천은 되는 것 같수."
불타는 산 전투 때보다 확연하게 늘어난 숫자.
주영숙의 입가가 한층 더 비틀렸다.
"내래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대장 동무. 어찌 합네까?"
"니들은 가만 있으라."
개성은 사면이 넓게 펼쳐진 개활지.
몬스터들을 부리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주영숙은 미리 길들여놓은 우두머리급 몬스터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크 1만.
-하이 오크 200.
-늑대 기수 1천.
한 종족으로 통일된 군대.
불타는 산 때처럼 몬스터 종족을 섞어서 지휘체계가 무너졌을 때 상잔하는 꼴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도야지들은 번식력이 됴티."
비틀어진 웃음을 짓는 주영숙.
오크는 군집을 이루었을 때 전투력이 상승하는 괴물이다.
늑대 기수의 기동력은 적의 허를 찌르기에 적합하고.
상위종인 하이 오크는 지휘 숫자가 많을수록 버프를 받아 실질적으로 4성의 전투력을 보유했다.
"리번에는 다를 기다."
쿠르륵!!
맑은 날에 느닷없이 일어난 흙먼지가 공중을 뿌옇게 만들었다.
오크들의 돌진.
부족장 위주로 길들여놓은 상황이라 대오를 맞추기는커녕 달려가는 중에 발이 엉켜서 깔리지 않는 게 고작이었지만.
1만이나 되는 숫자가 우르르 몰려드는 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우리는 서서 죽는 겁니다.]
스릉-.
길이가 다른 검 두 자루를 쥔 송명석이 앞장서서 오크들에게 돌진했다.
개성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
언데드들은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갔고.
오크들도 전투 본능에 몸을 맡긴 채 병장기를 마구 휘둘렀다.
"쿠륵! 쿠륵!"
"쿠르륵! 주인님께 영광을!"
본 아머로 강화한 아머드 스켈레톤의 갑주가 도끼에 쪼개지고.
3성 언데드인 스켈레톤 워리어도 군데군데가 파손된 채 비틀거린다.
투쟁의 화신인 오크들은 죽음의 군세 앞에서도 마음이 꺾이지 않고 마구 돌진했다.
[주군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허무하게 밀리지 마십시오.]
촤라락!
한 줄기 섬광이 오크 수십을 휩쓸어버렸다.
송명석은 오러 한 줌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육체 능력으로 오크들을 도륙했다.
축복 받은 용아병의 신체.
변칙으로 만들어냈지만, 시스템이 인정한 스파토이의 몸뚱이는 오크의 무기 따위에 상하지 않았다.
한 순간 진형 중심부에 생긴 커다란 구멍.
언데드들은 그 사이를 비집으며 수적 열세를 극복하려 했다.
-그우우우.
-그억. 그억.
-그게게겔.
머리를 부수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 언데드들.
두 다리가 잘린 리터너는 양팔을 벌려 오크의 다리를 붙들었고.
상체만 남은 스켈레톤 워리어도 칼을 휘둘러서 기다란 상흔을 새겼다.
망자 대 오크의 교환비는 1:1.5
전투력은 언데드들이 위였지만, 수적 열세 때문에 서서히 밀리는 추세였다.
"크르릉! 컹!"
"쿠륵. 모두 죽여라."
기동력이 뛰어난 늑대 기수가 언데드 군대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대규모 전장에서는 4성의 힘을 발휘하는 하이 오크들이 곳곳에서 활약한 탓에 피해가 빠르게 누적되었다.
"저 간나새끼. 일 재미없게 하네."
갸름하게 뜬 주영숙의 눈자위 위로 송명석이 비추어졌다.
진즉에 무너졌어야 할 언데드 군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전장 곳곳을 누비는 송명석의 활약 덕분이었다.
"내래 직접 처리하겠다."
주영숙의 수하는 오크만이 아니다.
2파, 3파도 준비해놓은 상황.
소모전으로는 국내 3강도 인간사냥꾼을 이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대장 동무. 위험합네다."
"간나새끼의 힘은 저게 끝이 아니다."
망자를 부리는 기묘한 술법.
시체 폭발.
그 외에도 강력한 소환수들까지.
유진이 수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 주영숙은 전장으로 조금 다가갔다.
그 순간.
[암흑 투기]
[스프레이트 샷]
[초정밀 사격]
화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것이 수 킬로미터를 넘어 주영숙에게 쇄도했다.
182화 인생이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란다(2)
마하 40.
3킬로미터라는 거리를 0.2초 만에 좁혀버린 특대형 화살이 주영숙의 심장을 노린다.
어지간한 헌터라면 살기조차 느끼지 못한 채 어- 하고 맞았을 속도.
스탯을 마력 위주로 분배한 주영숙도 초장거리 저격에 반응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테이밍 스킬]
[서브스튜드]
흐려지는 주영숙의 신체.
그 자리에 다른 형상이 덧대어진다.
특대형 화살이 주영숙의 가슴팍을 관통하기 직전, 돌연 나타난 오우거가 공격을 받아냈다.
"쿠오오오!"
인간보다 3배가량 큰 오우거.
저격 포인트는 주영숙의 심장이었으니, 오우거로 치면 하반신에 해당하는 부위가 꿰뚫렸다.
허전해진 아랫도리.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멀리서 보던 유진이 허어- 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아랫도리에 감각이 없겠어."
무언가를 상실한 듯 양손으로 가랑이 사이를 가리는 오우거.
음.
형이 미안해.
뭔지는 모르겠지만, 소중한 것을 앗아간 기분이야.
[제길! 어떻게 된 거야!]
"테이머 전용 스킬인 서브스튜드. 확정적으로 사망에 이를 만한 공격이 다가오면 미리 지정해둔 대타와 위치를 바꾸는 거다."
[내가! 내가 적을 한 번에 못 죽였다고?]
"새삼스럽지도 않으면서."
[....]
메이 샤오는 분개한 듯 안광을 불태웠다.
'싸게 뺐군.'
인간사냥꾼은 회귀 전에도 붙어본 적이 있는 상대다.
대타를 불러내어 생명 연장할 건 예상한 바.
〔아군도 비장의 수를 하나 교환한 셈이니, 아쉽지 않느냐.〕
'꼭 그렇진 않아.'
인간사냥꾼 3대장 중 둘은 무투 / 하이브리드 스타일로 능력치를 배분했다.
저격 한 번으로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건 대규모 테이밍에 특화되어 있는 주영숙뿐.
'대타를 불러내는 건 1달 쿨타임이 있다.'
〔두 번은 없단 말이로구나.〕
'소모전에서 제일 걸림돌인 게 주영숙이니. 여기서 한번 예비 목숨을 빼놓으면 전선에 나서긴 어렵지.'
〔어차피 길들인 괴물들을 앞장세우지 않겠느냐.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만.〕
'테이밍한 몬스터의 지배력이나 버프를 주려면 거리는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해.'
한 순간이지만 주영숙을 전장에서 이탈시키고.
예비 목숨까지 뺐다.
거기에 초장거리 저격이란 수단을 드러냄으로써 상대를 억제하게 되었다.
들고 있기만 해도 강력한 패.
초장거리 저격의 의의다.
'방해물도 치웠으니 슬슬 실력 발휘를 해볼까.'
고스트 아이로 전장을 살펴보고 있던 유진은 손을 풀며 개활지로 내려가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우웅, 불어넣은 영력에 반응해서 옅은 진동음을 내는 흑암의 반지.
전승할 수 있는 스킬 슬롯은 넉넉했다.
[지박의 제물 주문을 습득합니다.]
[지박의 제물]
분류 : 저주
등급 : B
제한 : 5성 이상, 숙련도 100에 도달한 저주 3개 이상.
원령들을 땅에 묶어놓아 인공적인 망자의 영역을 만들어냅니다.
〔5성에 오른 지도 며칠 되었거늘. 이제 와서 새 주문을 습득하는 게냐?〕
'내가 일부러 슬롯 비워놨다고 했잖아.'
이래서 높으신 분들은 안 된다.
실무자들의 고충을 모르지.
언데드 군대 후방에 선 유진은 그림자 가면에 손을 얹으면서 영력을 끌어 올렸다.
"스러져간 이들의 피를 제물로 바치니. 땅이여. 죽은 자들을 속박하라."
그림자 가면에서 피가 뚝뚝 흘러 내렸다.
[죽음], [피], [땅], 그리고 [속박].
네 가지 단어를 축으로 삼는 대규모 저주를 발현하는 것만으로 액막이에 충격이 올 정도.
무수한 생물의 피와 혼백을 거름 삼아 [지박의 제물]이 발동되었다.
스아아아앗!
키히힉!
음산한 기류와 함께 여기저기서 솟구치는 원령의 비명.
막 숨이 끊어진 오크들의 반쪽짜리 혼령이 땅에 속박되어서 산 자들을 괴롭혔다.
산 자의 힘을 빼앗는 대단위 저주가 드리웠지만, 유진은 쉬지 않고 추가로 저주의 음성을 말했다.
[지박의 제물을 사용합니다.]
[지박의 제물을 사용합니다.]
....
저주의 촉매인 피와 원한, 그리고 혼백은 넘쳐났다.
몇 시간 동안 오크들이 흘린 피가 지면에 스며들면서 땅이 질척거릴 정도가 되었으니까.
순식간에 넓어진 저주의 영역.
[체력 소모가 10% 늘어납니다.]
[민첩이 10% 감소합니다.]
[힘이 10% 감소합니다.]
[....]
디버프 종합 세트.
개별 효과는 낮지만 범위 안에 있는 천 단위의 오크들이 모두 저주의 영향을 받았다.
〔이 정도로는 전황을 바꾸지 못할 것 같구나.〕
'누가 끝이래?'
이번에는 지팡이를 높게 치켜세웠다.
공허의 돌에 부여된 대규모 영력이 재배열되고.
이 세상을 구성하는 섭리 일부가 비틀어지면서 이적을 빚어낸다.
[다중 영창을 사용합니다.]
[데스 필드 X 7을 사용합니다.]
드라이아이스처럼 지면에 깔린 시커먼 안개.
산 자의 힘을 빼앗고 망자를 강화시키는 강령술이 전장을 뒤덮었다.
[가파른 영력 소모로 집중력이 흐트러집니다.]
쯧.
대단위 저주와 네크로맨시를 연달아 펼친 탓에 영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비틀거린 유진이 지팡이에 몸을 기댔다.
〔꽤나 무리하는구나.〕
'안 끝났어.'
대단위 저주와 강령술로 물들어버린 대지.
효과는 뛰어나지만 기울어지는 전황을 바꿀 정도는 아니다.
이 순간에도 언데드 군대의 선봉에서 활약 중인 송명석 덕에 전선이 유지되는 것이지.
디버프를 끼얹어도 이만한 전력 차가 뒤집어지지는 않는다.
'진짜는 이제부터다.'
끼기기기긱.
데스 필드의 구조를 일부 비틀어서 저주의 힘과 엮어낸다.
두 주문이 공유하는 성질인 [죽음].
이미 전개한 마법을 개정하여 지박의 제물의 발동원인 [피]를 끼워 넣는다.
[데스 필드]
[지박의 제물]
[융합기 – 데스 에어리어]
즉석에서 개변을 마치고 뒤섞여서 강화된 네크로맨시.
혼백을 땅에 붙들어서 산 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성질이 강령술에도 적용되었다.
데스 에어리어의 성질은 혼백만이 아니라 죽은 몸뚱이마저 종속시키는 것.
"내 부름에 답하라."
유진의 중얼거림과 함께 쓰러진 오크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
개성 남대문.
북한이 국가로서 기능했을 땐 개성 직할시의 랜드마크였으며, 지금은 인간사냥꾼 캠프가 들어선 곳이다.
고풍스러운 성문 앞에 끊임없이 늘어져 있는 몬스터 사육소.
그 중 한 곳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허억! 헉!"
주영숙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옆에 있던 오우거는 갑자기 나타난 인간을 보고 쿠오오오! 하고 울부짖었으나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자 금세 고개를 푹 숙였다.
몬스터에게 위압감을 주는 테이머 전용 스킬의 효과였다.
"내래 듁을 뻔한 기가?"
스킬이 발동되는 순간이 되어서야 주영숙은 위험이 들이닥쳤음을 인지했다.
미리 지정해놓은 대타와 위치를 바꾸는 순간, 한없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면서 자신을 노리던 화살을 볼 수 있었다.
"니보라우. 아무도 없간?"
휑한 거리.
인간사냥꾼 다수는 현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제5 군단의 대업을 위해.
그리고 혹시 모를 적의 습격을 대비하려고 본부를 거의 비워두다시피 했다.
'디미럴. 현장에서 멀어졌구먼.'
다시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서브스튜드]가 발동했다는 건 확실하게 죽는단 의미.
공격당한다는 인식조차 못하고 죽을 뻔했다.
'간나새끼. 리런 꿍꿍이였어?'
일부러 불리한 상황을 연출해서 자신을 유인.
초장거리 저격이란 비겁한 수단으로 단번에 승부를 내려 하다니.
유진의 간악한(?) 술수에 이를 간 주영숙은 미리 지배해놓은 몬스터들을 추가로 보냈다.
-오우거 30.
-코카트리스 20.
대형종 괴수 중에서도 기동력이 뛰어난 종만 엄선.
불타는 산 후미로 돌아가서 유진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무슨 꿍꿍이가 맀어도 상관없네. 다 디지는기라.'
최전선에서 활약 중인 6성 소환수는 오크들에게 둘러싸여서 발이 묶였다.
아라한 길드에서 알려준 정보가 옳다면 쌍검을 든 소환수가 유진의 측근 중 하나일 터.
용인처럼 생긴 언데드 소환수가 한 마리 더 있지만.
대형종 50마리가 불시에 들이닥치면 주도권을 확실하게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됴아.'
흉하게 웃은 주영숙은 눈이 되어줄 동무를 찾아 돌아다녔다.
[사육사]의 눈의 사거리는 최대 10킬로.
대타로 지정한 오우거가 더 먼 곳에 위치해 있어서 테이밍한 다른 몬스터들의 시야를 빌릴 수 없었다.
얼마 후, 그녀가 [서브스튜드]로 귀환한 것을 확인한 일행이 돌아왔다.
"2대장 동무!!"
"내래 괜찮다."
"기, 기게 아니라 대장 동무 피난 오고 큰일 났디요!"
"경거망동 말고 말하라."
"직접 보시라우."
[영혼의 심복]
[시야 공유]
한 기를 지정해서 특수 강화시키는 테이밍 스킬.
인간사냥꾼은 크로스트의 시야를 다시 한번 빌려서 주영숙에게 보여주었다.
"니게 뭔 일이래?!"
그녀가 전장에서 튕겨난 것은 불과 30분 전.
초장거리 저격을 맞기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 군대가 승기를 잡고 있었다.
한데.
비행형 괴물의 눈에 비친 장면은 주영숙의 기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으어억.
-구욱.
막 숨을 거둔 오크의 눈자위가 뒤집어지면서 곧바로 좀비가 되더니 동료를 물어뜯었고.
지면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은 흐느적거리면서 일어났다.
대단위로 전개되는 강령술.
데스 에어리어의 범위는 전장을 모두 커버했고.
그 안에서 죽어간 자들은 언데드로 되살아나 생전의 동료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니, 니보라우. 이게 무슨 일이간?"
"2대장 동무가 피난하고 간나새끼가 리상한 술법을 썼댔습니다."
"말이 되간? 저 간나새끼는 별이 넷에서 다섯 개라우!"
본 성위를 뛰어넘는다?
그것도 경우가 있는 법이다.
크로스트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서 술법의 규모를 정확하게 가늠할 순 없지만.
유진이 발동한 대강령술은 못해도 6성 수준은 되어 보였다.
"남조선 그 애미나이들이 헛소리 했네?"
"기릴 리 럾다고 1대장 동무가 말했지 않습니까."
1만이 넘었던 오크 군세는 어느새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고.
데스 에어리어의 영향권 안에서 되살아난 시체들은 처음보다 늘어나면서 수적 균형도 어느 정도 맞춰졌다.
"쿠오오오!"
"코라락!"
때를 맞춰 후면으로 돌아온 오우거와 코카트리스가 지팡이에 의지 중인 유진을 습격하기 위해 나타났다.
두 손을 꽉 말아 쥐는 주영숙.
성위를 넘어선 대규모 술법을 연거푸 시전하고 지친 기색인 유진을 없앨 절호의 기회였다.
[주인. 이제 내 차례야?]
용인 형태를 취한 파프너는 양손에 깍지를 끼며 케넥 전투술의 묘리를 한 점에 담아낸 후에 일제히 해방했다.
소용돌이치는 암흑 투기.
전방의 오우거들이 수십 조각으로 잘리면서 흩어졌고.
[배제하겠습니다.]
[죽음의 돌진]
[신속]
돌진에 추가로 속도를 올린 죽음 용기병이 코카트리스 무리를 들이받았다.
기습 공격도 실패.
주영숙은 입술을 깨물면서 추가 병력을 투입했다.
"저 간나새끼도 린간이네. 반드시 지칠 거다."
"1대장 동무는 시간을 벌라 하셨습니다."
"내래 시간 끄는 거 안 보이나?"
주영숙의 특기는 소모전.
유진과 다시 싸울 날을 대비해서 평소보다 더 많은 지휘관 급 몬스터들을 길들이고 절묘하게 배치했다.
개성 인근에서 대기 중인 괴물만 물경 6만 마리.
오크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래 저 간나새끼의 힘을 빼갔어."
축차투입으로 언데드들의 수를 줄이고.
대업을 이루기 위해 자리를 비운 두 대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승부수를 띄운다고 접근했다가 험한 꼴 당할 바에는 원래의 계획을 수행하는 게 나았다.
"누가 먼뎌 디티는디 보댜."
몬스터는 넘쳐났고.
유진의 힘은 언젠가 떨어지리라.
주영숙은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183화 인생이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란다(3)
데스 에어리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
대규모 강령지에서 되살아난 언데드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자연 발생한 망자로 취급된다.
사역 숫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장점이지만, 반대로 지시를 내릴 수 없다.
〔피아 구분이 안 된다는 이야기로구나.〕
'그렇지.'
언데드들의 행동 원리는 오직 산 자에 대한 증오뿐.
유진이 사역 중이거나 네크로폴리스에 속해 있는 망자들을 공격하지 않는 건 생기를 품지 않아서였다.
'나도 저기 들어가면 열렬한 환영을 받을 거다.'
허벅지 살 하나는 기념품으로 주고 와야 될걸, 이라는 뒷말과 함께 실실거리는 유진.
〔참으로 무용하도다. 기력을 쥐어짜내어 만든 게 주인도 못 알아보는 개들이라니.〕
'각 개체를 지목하면 내 소유로 옮길 순 있다.'
〔잡졸들을 거둔다고 의미가 있느냐?〕
'자연 발생 취급하는 언데드 중에는 변종이 나오기도 하거든.'
데스 에어이러의 두 번째 특징.
강화형 언데드인 [변종]을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네크로맨서가 제작하는 언데드에는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
영력으로 시체를 연단해서 개조치를 올릴 순 있지만, 변종 레리크나 애꾸눈처럼 강력한 언데드는 만들 수 없다.
'봐. 저기 있네.'
-스켈레톤 로얄가드 들창코.
-좀비 제너럴 넓적뼈.
중급 언데드인 스켈레톤 나이트, 그리고 타이런트의 변종.
스펙도 일반 기종에 비해 2배 정도 높다.
하이 오크 중에서 보스급 강자들은 5성 수준의 네임드 언데드로 재탄생.
생전의 동료에게 서슴없이 손톱을 박아 넣었다.
[들창코를 제어 하에 둡니다.]
[넓적뼈를 제어 하에 둡니다.]
데스 에어리어에서 되살아난 언데드만 수천.
네임드 변종은 그 외에도 몇이 더 있었지만 하급 수준이라서 거두지 않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숫자는 어느새 역전되었고.
디버프의 영향으로 숨을 헐떡이던 오크들은 더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한데 저 치들은 가만히 두는 게냐?〕
'왜 가만 둬. 써먹어야지.'
〔그대의 소유가 아니니 명령도 듣지 않을 터.〕
'방향 정도는 틀어줄 수 있어.'
두 주문을 엮은 매개체인 [피]는 흐르는 성질.
지면에 스며들기도 하지만 어딘가를 향해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피]의 성질로 지박(地縛)의 범위를 재조정하면.
'언데드 군대의 진로는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죽음의 물결이로구나.〕
'당장 손을 댈 필요는 없겠어.'
지평선 너머에서 흙먼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뿌연 기류 사이에 보이는 시커먼 음영.
못해도 수천은 되지 않을까 싶은 몬스터들의 군세가 전장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다.
[우리 군단에 자진입대하러 오네.]
"자진입대는 언제나 환영이다."
[그런데 말이야. 주인, 뭔가 이상하지 않아?]
"적의 주력이 나오지 않고 있지."
[소모전이 인간사냥꾼의 특기인 건 알아. 그래도 주인의 능력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건 마치....]
"시간을 끌고 있다."
[그 말이 하고 싶었어.]
막 오우거를 정리하고 온 파프너가 의구심을 드러냈다.
시체를 부리는 네크로맨서.
연평도와 불타는 산에서 유진의 전투 방식을 맛본 인간사냥꾼들치곤 이해가 안 되는 반응이었다.
[본 모습으로 돌아와서 정찰을 할까?]
"아니. 그 패는 아껴두자."
[인간사냥꾼이 시간을 끄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당장 저 몬스터들을 돌파해서 개성으로 진입하기도 어려워."
군대 단위의 테이밍에 적합한 주영숙의 능력.
못해도 수만 단위의 몬스터들을 근처에 대기시키고 있을 것이다.
전부 쓰러트리지 않고 길만 트는 식으로 강행 돌파하는 방법도 있지만, 배후가 막히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인간사냥꾼들의 노림수가 뭔지 짐작도 가고."
[정말?]
"결전에 대비해서 애꾸눈을 테이밍하러 갔을 거다."
3대장 주영민 같은 호전적인 사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 개성에 없다고 유추하는 게 정답이겠지.
[헐. 그게 돼?]
"아라한 길드에서 힘을 보탠다면."
[얼마 없는 근거로 거기까지 추리하다니. 역시 주인이야.]
별것 아니다.
회귀 전의 일과 현재를 대조하면서 상황을 유추하는 것뿐.
문제풀이집을 옆에 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않아?]
"오히려 좋아."
몬스터 군대를 만들었지만, 종이 다른 괴물들을 붙여놓으면 내부에서 무너지기 때문에 축차투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주영숙이 소모전을 유도하는 진짜 이유.
"녀석의 계획에 어울려주자고."
어느 누구나 그럴 듯한 계획은 세우기 마련이다.
처 맞기 전까지는 모를 뿐.
그래.
어디 한번 너희들의 의도대로 놀아나주마.
감당할 자신. 있니?
*
해가 기울어질 때 즈음 몰려오는 2파.
"오크 다음은 놀인가."
개머리 수인.
여러 병장기를 사용하며 집단행동에 특화된 괴물이다.
1만에 달하는 숫자.
송명석은 칼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하루 종일도 싸울 수 있습니다.]
"저놈들도 마침 우릴 재워줄 생각 없는 것 같다."
"크커컹!"
놀 군대의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다시 한번 격돌하는 산 자와 망자들.
군데군데에서 비명이 난무하고.
피와 살점이 튀며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테이밍의 여파로 좀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몬스터들은 부상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언데드 군대는 산 자에 대한 본능적인 증오에 몸을 맡겼다.
"커, 컥."
오크보다 단단한 조직력과 대형을 갖춘 놀 군대였지만, 이미 몸집을 불린 망자들의 행진 앞에선 휩쓸리지 않는 게 고작이었고.
도리어 전장에서 쓰러져간 동족이 언데드로 되살아난 탓에 피해가 누적되었다.
[오크보다 빠른 것 같은데?]
"수가 늘었잖아."
3천에서 1천까지 줄었던 언데드는 오크 군대를 잡아먹으면서 7천까지 늘었고.
놀 군대를 전멸시켰을 땐 1만4천까지 불어났다.
제3파도.
제4파도.
규모가 수배로 늘어난 언데드 군대에게 정면으로 돌진하는 건 달걀로 바위를 때리는 격이었다.
먼 거리에서 전황을 바라보던 주영숙은 초조한 기색으로 질근질근, 이빨을 물어뜯었다.
"2대장 동무? 괜찮습니까?"
"일 없다."
인간사냥꾼의 주특기인 소모전.
개성에 터를 잡을 때나 몬스터 웨이브 당시에도 유용한 전략이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지 못하듯.
낮은 성위의 몬스터라고 해도 떼로 몰려들면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대업을 위해 주력 부대가 개성을 떠날 때도 주영숙만 남아서 소모전으로 끌고 갈 계획이었다.
'아라한, 그 간나새끼들! 혁명군을 속였간!'
교전 초기에도 품었던 의심이지만.
한나절이 지난 시점에서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5성 나부랭이가 언데드 군대 수만을 일으켜 세우고 하수인으로 부린다고?
마력에 스탯을 모두 투자한 데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주영숙조차 다수의 몬스터를 부리기 위해 지휘관급만 길들여야 했다.
"고조 저 애미나이 디티질 않수."
"디금이라도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네?"
"동무들. 아가리 닫으라."
이미 그릇된 판단으로 인한 스노우볼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렇다면.
처음 계획대로 시간을 번다는 목적 자체만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판단했다.
"니게 마지막이래."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저물고 다시 지평선 너머로 올라오는 순간까지도.
피로 물든 땅 위에서 벌어진 처절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으우우우움.
-그억. 그억.
목구멍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바람 빠진 소리를 낸 시체들이 팔을 허우적거린다.
제5파로 몰려온 괴물.
거대 개미들이 날카로운 턱을 좌우로 움직여 좀비를 절단 내 버렸지만.
하나를 쓰러트리면 둘이 밀려오고.
두 마리를 죽이면 셋으로 늘어난 언데드들이 거대 개미를 붙들었다.
-머, 먹는다.
우지직.
반 토막 낸 좀비는 상체를 움직여 거대 개미의 갑각을 물었다.
피아가 뒤섞인 난전.
거대 개미들은 특유의 페로몬을 뿌려서 아군과 적을 구분, 효율적으로 싸웠지만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뎠다."
시야 공유로 전장을 중계하던 인간사냥꾼이 탄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6만이나 되는 몬스터 군대가 하루 만에 전멸했다.
비장의 수단이었던 거대 개미들조차 망자들의 물결에 힘없이 휩쓸려버렸다.
"끝 안 났다."
주영숙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6만 군대?
그녀에게 있어, 6만이란 숫자는 큰 피해이긴 해도 복구가 가능한 숫자다.
개성 인근은 몬스터가 잡초 마냥 솟아나는 침식지역.
보름이면 얼추 80% 가까이 회복할 수 있으니 소모전에서 압도적인 가성비를 자랑했다.
"2대장 동무. 타라리 한 번에 공격했으면."
"니보라우. 동무. 뭘 알고 그러나?"
"되, 되송합니다. 대장 동무."
"내래 길들인 괴물은 다른 씨랑 만나면 지들끼리 치고받는기라."
한 종족만 규모를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가장 큰 건 식량문제.
땅에서 솟아나는 다른 종족을 사냥해서 먹여야 하는데, 종을 하나로 고정시키면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긴다.
인간사냥꾼이 총력전보다는 소모전에 강한 이유이기도 했다.
"디미럴."
몬스터 웨이브나 서울에서 북진을 시도했던 헌터들을 상대할 때.
2년 전 평양 군벌과 전면전을 벌인 적에도 유효했던 전술이 유진의 정체 모를 술법에 의해 파훼되었다.
'1대장 동무를 볼 면이 없다.'
주영숙은 분한 마음에 눈물을 꾹 삼켰다.
크로스트의 시야를 통해 보이는 언데드의 숫자만 약 4만.
전투 도중 파괴된 것을 제외한 모든 시체들이 망자로 되살아났다.
철컥-.
정교하게 배열된 영력이 결합된 두 주문의 구조에 간섭한다.
[피]라는 속성을 매개 삼아 지면에 붙들어놓은 대규모 강령술의 방향성을 수정.
모든 산 자를 쓰러트린 후에 멍하니 있던 언데드들이 어기적거리며 발을 떼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향하는 망자의 행진.
개성.
죽음의 물결은 인간사냥꾼들의 본진을 향해 천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남조선 애미나이들이 사기를 친 기라!'
주영숙은 알지 못했다.
유진이 그녀의 능력 계통과 특기, 그리고 즐겨 쓰는 전술까지 통달했다는 것을.
회귀 전에 몇 번을 겨루면서 [데스 필드]와 [지박의 제물]을 엮어낸 새로운 주문을 만들었다는 사실까지도.
소모전에 대응하는 완벽한 카운터 주문이 탄생한 배경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2대장 동무. 어찌 합니까?"
"빨리 대책을!"
"리 속도면 한 디간 안에 오겄수."
낯빛이 새하얗게 변한 인간사냥꾼 부하들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병력 대부분을 개성 외곽으로 배치한 상황.
그나마 항구나 북쪽에 배치되어 있는 인간사냥꾼들은 1시간 안에 돌아올 수 있지만.
진짜 주력인 1, 3대장과 정예 병력은 파주 북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애꾸눈 사냥에 나선 상황이었다.
-정보의 불균형.
개성 인간사냥꾼과 지긋지긋하게 싸워본 경험이 있는 유진.
반면에 아라한 길드의 정보에 의지했던 인간사냥꾼은 개성으로 향하는 길을 속수무책으로 열어주었다.
주영숙이 분노와 좌절감에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을 때.
유진 일행은 행군 중인 망자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 됐군."
[너무 쉬운 거 아니야?]
"인간사냥꾼의 주력이 이탈해 있어서 잘 풀린 거다."
[주군. 제 활약도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오냐. 기억해두마."
송명석은 푸른 안광을 힐끗거렸다.
코웃음 치는 파프너.
넌 대체 라이벌을 몇 명이나 두는 거니?
[주군의 혜안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보시는 건지, 속하는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아첨해도 나오는 거 없다."
[모두 주군의 생각대로 풀려가고 있으니 무슨 변수가 있겠습니까.]
어.
잠깐.
플래그 세우지 마라.
괜히 불길한 마음에 송명석에게 입을 다물라고 말하려는 찰나.
쿠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선두에 있던 망자들이 수 미터 위로 솟구쳤다.
큰 충격에 의한 반동.
하늘 위로 떠올랐던 언데드들이 지면에 콰직, 콰직, 처박히고.
7미터 크기의 괴물이 흙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대로 풀리긴 개뿔."
애꾸눈.
접경지역의 폭군이 전장에 난입했다.
184화 비슷하지만 다른 것 (1)
기시감이라는 표현이 있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는데, 마치 경험해본 일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다.
데자뷰라는 단어와 비슷한 의미지.
'이건 좀 다른가?'
유진은 망자들의 행군을 막아선 괴물을 빤히 바라봤다.
"쿠오오오오!!!"
평범한 오우거보다 머리통 두 개는 더 큰 괴물.
놈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망자 수십 구가 찢겨졌고.
다리에 힘을 주어 쿵- 땅을 치면 충격의 여파로 하급 언데드 여럿이 솟구쳤다.
"쿠후훅. 썩은 시체. 재미없다."
접경지역의 폭군.
오우거 변종으로 태어나 일곱 번째 벽을 넘어섰고.
트윈 헤드도 아니면서 마법과 오러 블레이드를 동시에 다룰 줄 아는 괴물 중의 괴물.
백 미터 넘는 거리를 한 번에 도약해서 날아온 애꾸눈을 보면서 느껴진 기시감에 턱을 만지작거렸다.
[저 녀석이 왜?]
"인간사냥꾼이 애꾸눈을 테이밍하는 데 성공한 거다."
[무슨 수로 길들인 걸까. 인간사냥꾼이 강하긴 해도 애꾸눈을 일방적으로 무력화시키진 못했을 것 같은데.]
"이신우라도 와서 도왔나보지."
[에이. 농담도 참.]
파프너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진심이야?]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야."
파프너에게는 가능성이라고 했지만, 회귀 전 사건을 되짚어보면 99% 맞을 것이다.
아라한 길드장 이신우가 애꾸눈 포획 작전에 참여했던 건 진짜로 벌어진 사건이거든.
[해치울까, 주인?]
"참아줘. 적은 애꾸눈만이 아니다."
인간사냥꾼은 옛 북한 땅에 터를 잡은 군벌.
6만의 몬스터 군대?
그건 일부에 불과하다.
3대장인 주영민은 6성 절정의 무투계 헌터보다 뛰어난 근접전 실력을 보유했고.
제5 혁명군 대장을 자칭하는 김봉효는 무투 / 마법 하이브리드 스타일로 능력치를 배분해서 직접 전투능력이 떨어지지만, 사역 중인 몬스터의 질이 하나같이 대단하다.
"양반은 못 되는군."
등 뒤에 드리우는 진한 그림자.
놈을 포획하는데 동원되었던 인간사냥꾼 정예가 불타는 산 쪽으로 우회해서 뒤를 점한 것이다.
완전무장을 갖춘 미노타우루스.
마법 보주 세 개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뱀 인간, 매직 비스트 라미아.
인간사냥꾼이 자랑하는 6성급 괴물 두 마리를 비롯해서 애꾸눈 수준은 아니지만 평범한 몬스터를 넘어선 [변종] 여럿이 서 있다.
몬스터 군대 올스타전도 아니고 말이야.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애꾸눈과 드잡이질하고 바로 왔으니 그럴 거다."
위안이 되는 이야기지?
송명석은 납검해두었던 쌍검을 다시 쥐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고조, 내래 구면이간데?"
정예 몬스터들 사이에 서 있는 사내가 크로스트의 눈을 통해 비쳐지는 풍경 속에서 흉흉하게 웃었다.
"주영민."
"기억해듀니 영광이네. 남조선에서 류명한 애미나이. 텬유딘."
"남의 이름은 제대로 불러주지?"
주영민은 옆구리를 슬쩍 만지작거리며 킬킬거렸다.
강화한 본 스피어로 가격했던 위치였다.
"리 순간을 기다렸어."
"유감이네. 난 별로 기대 안 했거든."
"내래 린민의 듀먹 맛을 보여주갔...."
"3대장 동무."
나지막한 음색
낮은 톤이지만, 거리를 넘어서 귀에 쏙 들어오는 목소리였다.
"대장 동무."
"즐거워 보이는데 미안하군. 나도 이야기를 해야겠다."
몬스터들의 호위를 받으며 앞으로 나선 사내.
개성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자칭 [제5 혁명군], 타칭 인간사냥꾼이란 단체를 일구어낸 김봉효가 유진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로군."
"초면에 말 편하게 하시네. 사투리도 안 쓰고. 한국 드라마 좀 봤나봐?"
"난 제5 혁명군 대장 김봉효다."
"데이트도 아니고 무슨 통성명이야. 낯간지럽게."
유진이 손사레를 치자 김봉효가 호탕하게 웃었다.
"간이 커."
"어차피 싸울 건데 무슨 대화까지 해."
"접경지역의 폭군을 보고도 싸우려 하는 건가? 용감하기도 해."
"너희는 용감하지 않고. 이신우의 조력이 없었으면 애꾸눈을 포획할 생각도 못 했을 거잖아."
"그걸 어떻게 알았지?"
"넘겨짚었는데 순순히 말해줘서 고맙다."
김봉효는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지웠다.
"후회할 거다."
"내가 요즘 후회란 단어를 떠올려본 적이 없어서."
"그 여유. 허세라고 볼 수 있겠군."
정면에서는 애꾸눈이 일기당천의 기세로 망자들을 쓸어버렸고.
뒤를 잡은 인간사냥꾼 정예는 퇴로를 빈틈 없이 막았다.
망자의 군대가 4만까지 불어나고 주영숙의 괴물들이 전멸한 건 계획 밖의 이야기지만.
"놈. 도망갈 곳은 없다."
김봉효는 승리를 자신했다.
애꾸눈 포획 과정에서 상당한 전력을 소모했지만 정예 병력은 건재했다.
룬 스톤으로 연락해온 상대, 이신우의 도움도 있었고.
'겁쟁이 녀석. 애꾸눈만 잡아주고 발을 빼다니.'
이신우가 순수한 마음에서 제5 혁명군을 도왔을 리 없다.
눈앞의 상대.
천유진과 공멸하거나, 최소한 놈을 대신해서 해치우길 바라서겠지.
언짢은 기분이 들었지만 금세 내려놓았다.
'그 애미나이도 나중에 죽이면 된다.'
애꾸눈의 무력은 준 8성.
실제 8성에 비해서는 한 수 모자라지만, 7성 헌터가 둘이 붙어도 이기지 못하는 괴물이다.
테이밍 스킬로 강화하면 8성에 거의 근접한 수준이다.
애꾸눈만 있으면 개성 일대를 지배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평양으로도 진출 가능하리라.
"도망? 내가?"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대장 나리. 조금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오해?"
"포위된 게 나라고 생각하나 봐."
쿵- 쿵-.
불타는 산 쪽에서 들리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
오우거들이 단체로 움직이는 것처럼 지축을 흔드는 파장이 연이어 울려 퍼졌고.
대형 언데드들과 수천에 달하는 망자들이 정예 인간사냥꾼 무리의 뒤에 나타났다.
[그게겔. 후발대 도착했습니다.]
"형님. 저희도 왔습니다."
선발대보다 3배나 많은 브루탈과 사이클롭스.
그리고 2달 동안 다크 미니언들이 만들어낸 중 · 하급 언데드들이 전장에 합류한 것이다.
"대장 동무. 저 애미나이 보통이 아닙네다."
주영민은 내뱉은 말과 어울리지 않게 이를 히죽 드러내며 웃었다.
서로가 꼬리를 물고 있는 상황.
어느 한 쪽의 축이 무너지는 때가 승패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양쪽 모두 알았다.
"단숨에 끝내야겠군."
휘이이익-.
김봉효의 휘파람 소리가 애꾸눈의 심령을 자극했다.
분풀이 하듯 언데드들을 찢어발기던 외눈 괴물은 돌연 전투를 멈추고는 다리를 살짝 웅크리더니 크게 도약했다.
쿵! 쿵!
지면에 널려 있는 언데드들을 무시한 점프.
애꾸눈의 발에 깔린 망자는 산산조각 나 버렸다.
공격을 도외시하고 도약하다 보니 유진 일행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어찌 할 텐가?"
"뭘 어째."
비장의 수단을 쓸 때가 온 거지.
[폴리모프]
강렬한 빛과 함께 용인의 형상에서 본체로 돌아온 파프너가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막 도약해서 허공에 떠 있던 애꾸눈을 덮치는 검은 용.
쿠다당, 공중에서 마주친 두 괴물은 그대로 지면에 추락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번하고는 다를 걸?]
"쿠후훅. 너. 재미있다."
체고 5미터인 파프너는 애꾸눈보다 조금 작았지만, 날개를 모두 펼치니 꿀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한 순간의 충돌로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인지한 애꾸눈.
추가로 도약하는 대신 살기어린 눈동자로 파프너를 주시했다.
"체급은 맞춰 드려야지."
따악!
경쾌한 핑거 스냅을 신호탄 삼아 언데드 군대가 진군을 개시했다.
*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땅.
"쿠오오오!"
-으무우우우!
2층 건물 크기의 괴물들이 마주한 채 힘겨루기를 한다.
우드득, 한껏 팽창된 근육에서 나는 소리가 마치 쇠를 비트는 것처럼 요란하게 들렸고.
괴물끼리 충돌하는 순간 딛고 있던 지면이 깨어진다.
[가혹한 지휘]
[사기 고양]
[배틀 로어]
....
채찍질과 고성, 혹은 쓰다듬는 등의 행위로 부여되는 버프.
길들인 몬스터에게만 효과가 있는 테이머 전용 스킬들이 적용되었다.
이미 풍선처럼 부풀었던 오우거의 근육이 더 두꺼워지고.
라미아의 눈가에 감도는 이채가 한층 진해졌다.
콰득-.
반대 방향으로 꺾이는 브루탈의 팔.
게이트가 빚어내는 몬스터 중에 강력한 놈들만 엄선했고, 버프까지 더해진 오우거의 능력은 브루탈을 앞섰다.
반면 언데드들은 네크로폴리스에서 멀어져서 버프 효과도 누리지 못했다.
유진이 공들여서 제작한 망자가 아니라면.
정면 승부로는 힘에 부쳤다.
[빙결계 – 프로즌 서클]
[전격계 – 라이트닝 블래스트]
후위에 있는 라미아들도 연신 재배열한 마력을 해방했다.
얼음으로 된 원이 브루탈을 속박했고.
뇌전 줄기가 직선으로 나아가며 갈색 피부를 태우고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천지가 울리는 듯 한 전쟁.
[주군. 인간사냥꾼들의 공세가 이쪽으로 몰려옵니다.]
"나만 잡으면 끝나는 승부니까."
[절 믿어주십시오.]
"오냐. 기대하마."
유진은 마지못해 형식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저 작은 인간. 굉장히 침착하구나.〕
'나름대로 군벌을 이끄는 녀석이다. 수완은 있어.'
〔하면 어찌 하려느냐?〕
'이만한 규모의 전투에서 5성 신관이 뭘 어쩌겠어.'
〔어울리지도 않는 겸손은.〕
들켰나?
[고유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영력 → 성력]
대규모 강령술을 전개하면서 소모한 영력(성력)은 밤 동안 회복된 지 오래.
컨디션은 만전이다.
대형 몬스터가 백 단위로 얽혀서 싸우고 있는 전장에서 5성 신관 / 마법사 하나가 상황을 바꾸긴 어렵다.
그렇지만.
'어려울 뿐, 불가능한 건 아니지.'
싸움이라는 건 말이야.
작은 요소 하나하나를 쌓아서 결과까지도 바꿀 수 있거든.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주먹을 내지르던 오우거의 앞에 나타난 육각형 결계.
콰직, 일격에 부서졌지만 되돌려진 힘에 손가락들이 반대로 꺾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덤벼드는 브루탈.
손가락이 꺾인 오우거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멀쩡한 팔을 휘둘렀다.
〔전황을 뒤엎기에는 너무 소소한 것 아니더냐.〕
크로노스의 핀잔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다음 주문을 사용했다.
[빙결계 - 아이시클 웨이브]
마법 발현 지점에서 응축된 냉기를 폭발시키는 주문.
즉발형이지만, 사용 후 마력이 모이기까지 약간의 시차가 존재한다.
"사이클롭스. 저 점을 노려라."
[안광]
시커먼 광선이 일직선으로 뻗으면서 응축되는 일점을 관통.
미처 힘을 모으지 못한 냉기가 조기에 폭발하면서 위력이 1/10 수준으로 떨어졌다.
거대한 전장에서는 아주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유진은 하나하나 변수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
"대장 동무. 내래 가겄소."
"기다리라."
서로 앞뒤를 물고 있는 상황.
주영숙의 몬스터 군대를 대부분 흡수한 유진이 총 전력에서 앞섰지만.
현재 상황은 인간사냥꾼 측이 유리했다.
"언데드 군대의 움직임을 보라."
"뭘 봅네까?"
"단순하다. 그저 전진하는 것뿐."
김봉효는 전장에 난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데스 에어리어]의 특성 일부를 유추했다.
2대장 주영숙이 패닉 상태에 빠져서 놓친 맥락을 빠르게 읽어낸 통찰력.
그는 소수 인원으로 개성 일대를 지배하는 군벌을 이끈 사내답게 유진의 허실을 파악했다.
"3대장 동무가 나설 순간이 곧 올 것이다."
"기대하겄소."
애꾸눈의 발목을 잡을 만한 강자가 있다는 건 계산 밖의 일.
그럼에도.
아군에게 승기가 있다고 확신한 김봉효는 느긋하게 버프 스킬을 사용했다.
"이상하군."
"무에 리상합니까. 대장 동무."
"잘 보아라. 아군이 밀지 못하고 있다."
인간사냥꾼 본대가 전투에 돌입하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뒤를 잡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유진의 본대는 전선을 팽팽하게 유지했다.
"내래 지금 갑니까?"
"아니다. 동무는 나서지 마라."
김봉효는 품속에서 단소를 꺼냈다.
테이머 전용 아티팩트.
[왕의 피리]를 입에 갖다 댄 후, 복부에서 끌어 올린 호흡을 그대로 밀어 넣었다.
필릴리~♬
185화 비슷하지만 다른 것 (2)
전장의 반대편.
본 모습으로 돌아온 파프너는 한쪽 눈만 남은 괴물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렇게 빨리 복수전을 할 줄 몰랐지.]
"쿠훅, 나를 아나?"
[생김새가 달라져서 모르나.]
뭐, 상관없지. 라는 말을 중얼거린 파프너가 등을 살짝 숙이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차면서 사선으로 도약.
날개에 불어넣은 영력을 방출해서 추가로 가속하더니 순식간에 애꾸눈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메이 샤오의 초장거리 저격을 연상시키는 쾌속.
[케넥 전투술]
[8장]
[하늘 긋기]
전신을 한 바퀴 돌면서 더해진 힘으로 오른손을 세게 휘둘렀다.
시커멓게 물든 손톱.
하나 뿐인 눈동자가 파프너의 동선을 놓치지 않고 쫓더니, 오러로 강화한 팔을 비스듬히 들었다.
"쿠후훅?"
푸른 핏방울이 허공에 비산했다.
손톱에 깃든 암흑 투기가 푸른 기류를 베어내고.
강철보다 단단한 애꾸눈의 피부와 근육을 헤집으며 기다란 상흔이 새겨졌다.
[케넥 전투술]
[3장]
[땅 휩쓸기]
기세를 죽이지 않고 몸을 더 비튼 파프너는 원심력을 더해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옆구리에 파고드는 두툼한 꼬리를 보고도 방어 대신 주먹을 말아 쥔 애꾸눈.
[어포인티드 리퍼슬 실드]
옆구리를 감싸듯이 생성된 범위 지정 방어막.
날아드는 꼬리의 궤적에 맞춰 나타난 푸른 결계가 와장창, 깨지면서 충격 대부분을 흡수했다.
후웅-.
집채만 한 크기의 주먹이 파프너의 정수리를 노린다.
섬뜩하게 빛나는 오러가 시시각각 가까워질 때.
등 뒤에 달린 날개 두 장이 펄럭이며 파프너의 신형이 급속도로 멀어졌다.
놓치지 않고 쫓는 애꾸눈의 주먹.
지척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공격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지만, 파프너는 날개에도 실어낸 오러를 광범위하게 흩뿌리며 가속과 상대의 움직임에 제동을 동시에 걸었다.
"쿠후훅. 너. 재미있다."
[누가 할 소릴.]
오러를 끌어내는 동시에 무영창으로 마법을 준비.
최소한으로 피해를 막아내며 공세의 주도권까지 빼앗았다.
반격에 대비해서 일찍 오러를 끌어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꽤 아팠을지도.
[이 정도는 되어야 전력을 다할 맛이 나지.]
파프너는 뺨을 씰룩였다.
[불사자의 관]으로 정제한 피를 통해 용의 인자를 모두 채우고.
유진이 모아 온 용족의 정수까지 받아들이면서 진정한 용으로 거듭난 후, 제대로 된 적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쿠훅, 쿠후훅."
애꾸눈은 기다란 상흔이 새겨진 오른팔을 흔들며 파이팅 자세 취하듯 들어 올렸다.
꾸드드득, 근육에 힘을 주어 상처를 틀어막는다.
완치(?)된 팔에 맺힌 오러가 타오르듯이 거세게 용솟음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을 되찾으면서 칼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었다.
[오러 블레이드]
세계의 이치나 규칙마저도 벨 수 있는 전가의 보도.
7성이라는 벽을 넘어선 존재에게만 허락되는 권능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훅, 나. 아까 힘 다 못 썼다. 이번에 다 쓴다."
애꾸눈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자아를 각성한 변종.
7성 절정이라는 경지에 오르기도 한 덕에 테이밍 된 상황에서도 강력한 자아를 유지했다.
김봉효가 애꾸눈을 단독 운용한 것에는 언데드 군대의 진로를 막으려는 의도도 있지만, 제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전 전투에서 체력과 마력을 꽤 소모했음에도.
애꾸눈은 지친 기색 없이 잠깐의 집중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구현해냈다.
[참 감회가 새롭네.]
접경지여에서 만났을 땐 모든 힘을 쥐어짜낸 공격, [구결집합권]으로도 애꾸눈의 전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오러 블레이드?
마법?
애꾸눈이 둘 중 하나만 사용했어도 1분이 아니라 30초도 못 버티고 소멸했을 것이다.
[나도 좋은 걸 보여줄게.]
파프너는 씩 웃으며 암흑 투기를 끌어 올렸다.
손톱에 맺히는 검은 기운.
영력(마력)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한 암흑 투기가 맺히더니 수십, 수백 개의 가닥으로 분할되었다가 한데 엮이면서 뭉치기 시작한다.
파츠츠츠츳!
극한까지 압축된 암흑 투기.
눈에 보이는 수준을 넘어 물질화를 이루어낸 기운이 서슬 퍼런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암흑 투기를 무수히 벼려내어 만들어낸 상위 개념, 암흑 강기였다.
"쿠후훅?"
[발현하는 기운의 주체만 다르지. 같은 개념이야.]
성력으로 빚어내면 성광기.
마력은 오러 블레이드.
그 외에도 여러 명칭으로 불리지만, 근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파괴력이나 상성, 그리고 섬세함 같은 세세한 부분으로 파고들면 복잡해지지만.
이 상황에서는 굳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정말이지. 새 육체에 적응했다고 벽을 넘어설 줄은.'
두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파프너는 쉬지 않고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불사자의 관으로 정제한 레리크의 피를 먹고 강제성장.
그 후에는 용족의 정수를 받아들이면서 엘드리치 드래곤이 아닌, 진정한 의미로 드래곤이 되었다.
변화한 육체에 적응했다 싶은 순간에 또 한 번의 성장을 이루었고.
그 힘을 갈무리하고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데만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날개와 꼬리에 익숙해지고 오러를 일으키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진룡.
시스템에서 인정한 진정한 용족.
마력을 축적하고 나이만 먹어도 경지가 오르는 불멸의 존재다.
파프너는 그 육신에 새겨진 기원을 이해함으로써, 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암흑 강기(오러 블레이드)를 일으키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지만, 그건 애꾸눈도 마찬가지.
[몸도 풀렸으니 제대로 해보자고.]
파프너는 두 장의 피막에 응축시킨 영력을 분사하면서 빠르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100미터 높이까지 올라간 검은 용.
애꾸눈은 입술을 달싹였다.
"플레임 하베스트."
어눌한 발음과 달리, 마법은 확실하게 발현되었다.
낫 모양의 화염이 무수히 솟구치며 파프너의 날개를 노렸다.
[마법과 무투. 양쪽에서 극에 도달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나 봐.]
5성 마법을 거의 무영창 수준으로 완성시킨 실력.
날카롭게 벼려진 오러를 두르지 않으면 화염 줄기 하나만 맞아도 날개가 타버릴 정도의 화력이 담겨 있다.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옛적에나 쓰일 법한 고대 갑골문자가 활짝 펼쳐진 피막을 뒤덮었다.
룬 문자하고는 다른 방식의 마법.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는 드래곤, 그 중에서도 기원에 맞닿은 원시의 방식이 파프너를 통해 재현되었다.
[黑光]
각 문자에서 쏘아지는 검은 광선.
수십이나 되는 빛줄기가 허공을 격하며 날아드는 화염의 낫을 모조리 소멸시킨 후, 애꾸눈을 덮쳤다.
외눈의 괴물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
광선 세례를 어렵지 않게 막아낸 후 가라앉은 눈으로 파프너를 올려다보았다.
"쿠훅. 그 힘. 이질적이다."
[왜. 뭐가 잘 안 돼?]
어느새 주인의 말투를 따라한 파프너는 곧바로 낙하.
두 손에 맺힌 암흑 강기를 최대치로 전개하며 애꾸눈에게 돌진했다.
채앵! 챙!
오러 블레이드와 암흑 강기의 격돌.
의지를 겨루는 싸움이 1초 동안 10번 넘게 오갔고.
둘 다 서로의 기량이 만만찮음을 깨달은 채, 눈에 띠는 피해 없이 거리를 다시 벌렸다.
'썩어도 준치라고.'
파프너는 히죽 웃었다.
상대가 만전이 아니란 것쯤은 첫 돌진 때 눈치 챘다.
원인이야, 싸우기 전에 유진이 설명했고.
큰 부상은 없지만 상당히 체력을 소모했고, 접경지역 때 겨뤘던 때보다 반응속도가 조금 떨어졌다.
'그런데도 꽤 밀린단 말이야?'
암흑 강기와 오러 블레이드의 파괴력은 백중세.
문제는 충돌 직후에 소모된 만큼 다시 끌어올리는 것이다.
파프너가 7성의 벽을 넘어섰다지만.
오랜 세월 동안 접경지역에 군림하면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한 애꾸눈에 비해서는 숙련도가 모자랐다.
[재미있어.]
"쿠훅, 난 슬슬 재미가 없어진다."
[그러지 말고 좀 더 어울려보자고.]
"너. 죽인다."
괴수끼리의 격돌.
망자들이 바글바글한 전장이었지만, 누구도 둘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었다.
*
필릴리~!
[왕의 피리 내장 스킬 – 충성 증명]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 – Lv 3]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청아한 음색.
전장 한복판과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선율이었지만, 그 소리에 담긴 힘은 세계의 규칙을 비틀 만큼 강대했다.
"피리 부는 사내, 니콜라스의 가호."
"본인의 성좌에 대해 알고 있나 보군?"
"알다마다. 몬스터나 동물에게 힘을 부여하는 성가신 능력이지."
"귀찮다, 라."
[하멜른의 악사가 분노합니다.]
[하멜른의 악사는 신성 모독하는 자를 처벌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안 떠들어도 할 거다."
화아아아악!
동화 '피리 부는 사내'의 원전이 되는 사내, 니콜라스.
피리로 쥐 떼를 유인하여 강에 빠트리고.
약속했던 보상을 받지 못하자 어린 아이들을 꾀었단 일화는 뭇 별 위에 이름을 새길 만큼 강력했다.
두근- 두근-.
[테이밍 중인 몬스터의 능력이 120% 상승합니다.]
[테이밍 중인 몬스터가 어떤 충격을 받아도 경직되지 않고 마법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테이밍 중인 몬스터는 정신공격에 완전내성을 부여받습니다.]
왕의 피리의 효과는 원래 스탯 20% 상승과 경직 저항이 끝.
유니크 등급에 어울리는 강력한 효과이긴 해도,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가 더해지면서 능력치 상승 폭이 어마어마하게 올랐다.
"쿠오오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전선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경스러운 묘소]에 숙성시켜서 강화시키고, [사신의 낫] 효과 덕에 능력치가 오른 브루탈의 팔이 반대로 꺾이고.
한층 강력해진 라미아의 마법은 중급 언데드들을 개미 털어내듯 손쉽게 쳐냈다.
"쉿! 쉬쉿!"
"쿠오오오!"
더욱 커지는 괴성.
버프의 힘으로 앞뒤에서 몰려오는 언데드 군대를 역으로 밀어내는데 성공.
곧장 유진에게 향하는 길을 열기 시작했다.
[그게겔. 주군이 위험하다.]
2군의 지휘를 맡은 조승철이 턱뼈를 들썩이며 언데드들을 독촉했다.
선발대보다 더 많은 언데드가 넓게 진형을 펼치면서 몬스터들을 압박했지만.
네크로폴리스도 아닌 데다 성유물 버프도 받지 못해서 가호를 받은 몬스터를 압도할 순간적인 화력을 내지 못했다.
'놈. 포위했다고 해서 승리를 떠올렸겠다?'
김봉효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피리가 없으면 발동할 수 없는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
운 좋게 입수한 [왕의 피리] 덕에 가호를 최대치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전략적인 안목에 성좌의 능력이 더해지면?
"대장 동무. 력시 대단합네다."
"동무가 나설 틈이 있을지 모르겠군."
[왕의 피리]와 가호의 대상은 김봉효가 길들인 몬스터 뿐.
전선을 뭉개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괴물은 일부에 불과했지만, 한 번 구멍이 났다는 게 중요했다.
'애꾸눈은 거리가 멀어서 효과 대상이 되지 않는가.'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애꾸눈을 반대편에 두지 않았으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이 비행 능력을 십분 활용해서 공격했으리라.
남한 쪽 인간의 힘을 빌렸다는 사실이 불쾌했지만, 그럴 가치는 있었다.
"가서 놈을 찢어버려라."
"무우우우!!!"
완전 무장을 갖춘 미노타우루스가 대형 언데드들을 제치고 돌진하는데 성공했다.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송명석이 검 두 자루를 동시에 휘둘러서 미노타우루스의 발목을 베어냈지만.
망자도 아닌 주제에 버프의 효과로 주저앉지 않고 유진을 향해 멈추지 않고 돌진했다.
"무우우우우!!"
위로 추켜세운 도끼가 유진의 정수리를 향했다.
김봉효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을 때.
"너무 빨리 웃는 거 아닌가?"
유진은 히죽거리며 지팡이 대신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186화 비슷하지만 다른 것 (3)
테이밍과 네크로맨시.
전자는 숨을 쉬는 몬스터를 지배해서 수족으로 다루고.
후자는 생기가 꺼진 시체를 일으켜서 하수인으로 부려먹는다.
정반대의 매커니즘이면서도 운용 스타일이 능력 계통.
〔그게 중요한가?〕
'뭘 노릴지는 뻔하단 거지.'
제5 혁명군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하는 짓은 인간 이하만 모인 집단.
그럼에도.
개성 일대를 지배하는 군벌로 자리 잡을 수 있던 것은 저 사내의 능력 덕분이다.
'유능하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훤히 보인단 말이야.'
유진이 반대편 입장이었다면 다소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술자를 노렸을 것이다.
네크로맨서만 쓰러트리면 망자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테니.
세간에 알려진 자신의 직업군은 신관이지만, 지명하는 용어 차이일 뿐, 하수인들을 부린다는 건 동일했다.
〔다 아는 것처럼 발언한 것 치고는 꽤 위험하지 않느냐.〕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도끼.
6성 몬스터인 미노타우루스의 변종이 성좌의 가호까지 받아서 강화되었으니.
정면으로 맞으면 반으로 갈려서 죽겠지.
[부정 충격 방패 X 10을 사용합니다.]
와지지지직!
충격 일부를 되돌리는 신성 결계로도 도끼를 막을 수 없었다.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로 강화된 통증 및 경직무효 효과.
10겹으로 덧대어진 부정 충격 방패를 단숨에 부수고도 조금 느려질 뿐, 흔들리지 않는 궤적으로 유진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지금이다."
-키키키키킷!
유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등장한 영체.
스펙터 5기는 해골의 머리만 따놓은 모습으로 변해서 미노타우루스의 전신을 물었다.
"음모오오오?"
칼로 물을 베듯, 무언가의 저항을 받은 도끼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졌다.
영체인 스펙터에게 잠식당한 육체는 바다에 빠진 것과 같은 감각에 젖어든다.
'정신공격에 면역일 뿐. 디버프 자체는 무시할 수 없다.'
고농도의 영력으로 이루어진 몸.
마력이 실린 공격이 아니면 피해를 입힐 수 없고.
설령 오러 같은 기예를 사용해도 대미지가 경감된다.
성력을 담은 무기나 신성 주문이 아니면 대응하기 까다로운 괴물.
〔잘난 척할 틈이 있느냐! 그대의 머리가 쪼개지기 직전이니라!〕
'왜. 성좌 나리가 좋아하는 위기잖아.'
〔태연하게 굴지 말고 그 잘난 네크로맨시로 위기를 멋지게 극복해보아라!〕
매번 영웅 타령 할 때는 언제고.
하여간 솔직하지를 못해요.
"반으로 갈라져서 죽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겠지."
태연하게 중얼거린 유진은 지팡이 대신 유니콘 뿔 창을 쥐었다.
불사조 길드의 보고에서 얻은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
파프너의 도움을 받아서 창조한 낫 기예는 쓸 수 없지만.
저 무지막지한 도끼를 받아내려면 내구력이 떨어지는 사신의 낫보다 유니콘 뿔 창이 나았다.
[용린갑 - 중갑 형태]
[방어 Lv 20 → 87]
[충격 흡수 Lv 15 → 75]
[충격 반사 Lv 35]
[민첩 - 20%]
차르르르륵!
진룡으로 거듭난 파프너는 더 이상 갑주가 필요하지 않았다.
원래 주인의 곁으로 돌아온 용린갑.
방어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형태로 변환시켰다.
'민첩 페널티는 상관없다. 한 번이면 돼.'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제6식 - 전력 찌르기를 사용합니다.]
창에 파인 홈을 타고 회전을 거듭하는 오러.
한 번 회전할 때 오러가 소모되지만, 그만큼 위력도 강해진다.
[역천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오러 위에 가호를 두른 채, 느려졌음에도 여전히 위력적인 도끼를 향해 있는 힘껏 내지른다.
콰아아아앙! 근처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귀가 멍해지더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대여. 양쪽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느니라!〕
아.
고막이 터진 거였군.
쥐고 있던 유니콘 뿔 창이 아래로 푹 꺼지고.
양팔의 근육은 찢어졌으며, 용린갑으로도 모두 흡수하지 못한 충격에 속이 진탕되었다.
'그래도 살았죠?'
〔어이하여 무모한 행위를 한 게냐.〕
다 계획이 있다니까.
6성 괴물인 미노타우루스의 변종.
거기에 [왕의 피리]와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로 2배 이상 강해진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스펙터로 약화를 조금 시켰다지만.
충돌 때 해소하지 못한 힘으로 인해 오러가 깨어지고 용린갑의 내구도가 훅 떨어지고 몸에도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역천의 가호로 에너지를 흡수했습니다.]
그 막대한 힘 + 마력을.
직접 받아냄으로써 크로노스의 가호로 거두었고.
영력으로 치환하면 유진이 보유한 양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수준이 되었으니.
'내 힘이 되어라.'
흡수 - 이해의 과정은 끝.
다음은 재구축이다.
직접 받아내면서 축적한 에너지를 영력으로 치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
〔역천의 가호를 사용하기 위해 일부로 공격을 받아낸 게냐?〕
'한 번에 안 뒤져서 다행이지.'
〔무모한 짓을 잘도 하였구나. 말세로다, 말세야.〕
재구축도 마쳤겠다.
마지막으로 발현을 하면 입맛대로 재구축한 영력이 쏘아진다.
그렇지만.
유진은 그 과정을 생략한 후 가용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선 영력까지 몸으로 받아들였다.
'역천의 가호로 바꾼 영력은 마력 부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다.'
다시 지팡이를 든 유진이 공허의 파편을 전장으로 겨누었다.
재구축을 마쳐서 영력으로 치환된 힘이 파도가 몰아치듯 지팡이 끝에 집중되었고.
"기적."
역천의 가호로 뻥튀기 된 영력이 한 점으로 응축, 일직선으로 방출되면서 회색 광선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음ㅁ...!"
스펙터에게 붙들려서 허우적대던 미노타우루스의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6성 괴물의 심장을 관통하고도 남은 막대한 에너지는 붕괴된 전선으로 밀고 들어오던 김봉효의 몬스터들을 연달아 꿰뚫었다.
쿠콰콰콰콰!!!
사용자의 영력과 체력을 모두 기적의 빛으로 치환.
일거에 쏟아 붓는 파괴광선이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관에게 허락된 기적이다.
파괴력만 놓고 보면 마력을 비틀어 섭리에 간섭하는 마법보다도 한 수 위.
[역천의 가호]로 에너지를 변환.
평소 유진의 성력(영력)보다 몇 배나 되는 양을 퍼부었으니 기적도 비례해서 강해졌다.
-참으로 운이 좋구나. 일직선으로만 방출할 수 있는 기적일진대, 괴물이 줄지어 달려오고.
'그걸 왜 운이라고 생각하나?'
말했잖아.
부하를 손발처럼 사용하는 건 네크로맨서나 테이머나 마찬가지.
김봉효가 뭘 노리는지 직접 물어보거나 머리를 열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니까?
-하면 저 작은 인간이 가호를 사용할 것도....
'그거야 회귀 전에 붙어봐서 알았지.'
정보의 불균형.
김봉효가 지닌 비장의 수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놈의 행동 원리와 노림수까지도.
팽팽했던 전장 일부가 빠르게 무너진 것까지 유진의 계획이었으니.
줄지어 달려들던 괴물들이 기적의 궤적에 휘말려서 모조리 고꾸라졌다.
"마음대로 날뛰어라."
*
"허."
김봉효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온갖 버프로 강화한 정예 몬스터 수십이 일격에 쓰러졌다.
"대장 동무!"
"괜찮다."
아니.
실은 괜찮지 않았다.
김봉효는 정예 몬스터만을 주력으로 양육한 테이머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까지 사용해서 강화한 변종 괴물 반 이상이 쓰러지거나 전투 불능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은 아니다.'
주도권은 여전히 제5 혁명군에게 있다.
한계 이상으로 응축된 성력이 일직선으로 쏘아지면서 괴물들을 도륙했지만.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로 이미 전선 일부가 무너져 있었고.
유진 휘하의 언데드 군대는 피해가 누적되면서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뱀 여자. 화력을 양 날개에 집중해라."
"대장 동무. 듕앙을 미는 게 낫지 않겠소?"
"함정에 당하지 않았나. 방금."
먼 거리에 있었는데도 한 순간 피부가 오싹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저런 기예를 마구잡이로 쓸 수는 없겠지만.
유진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입장에서는 한 발 정도 더 쏠 수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았다.
"3대장 동무."
"내래 드디어 나설 타례인가!"
"동무는 왼쪽을 치라."
일점으로 돌파가 안 되면 삼면에서 몰아친다.
등 뒤에서 몰려오는 언데드 군대가 전력을 갉아먹고 있지만, 버틸 만했다.
압도적인 화력의 부재.
대형 괴물끼리 엉겨붙어서 싸우니 중, 소형 몬스터들은 충돌의 여파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언데드 군대의 가장 큰 장점인 숫자와 전투 지속성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차라리 심리학을 전공하는 게 어떻겠느냐?〕
'이미 붙어본 상대이고. 노리는 게 비슷하니까 아는 거거든요.'
말했잖아.
적당히 유능하니까 생각을 읽기가 쉽다고.
유진은 전략, 전술의 귀재가 아니다.
병력 운용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감각과 시야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장의 흐름을 읽어내어 맥을 찌르는 거지.
제갈량 같은 책사처럼 신묘한 계책을 척척 꺼내지는 못한다고.
'전면전에서는 먼저 패가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 거야.'
김봉효가 꺼낸 [하멜른의 악사]라는 패.
유진은 그에 맞서 기적과 가호를 내밀었다.
각자 패를 1대1로 교환했을 때 자신이 이득을 좀 더 본 상황.
〔그렇다면 저 작은 인간들의 남은 패가 무엇인지도 알겠구나.〕
'주영민으로 옆구리를 칠 거다.'
유진이 그 말을 내뱉자마자 대기 중이던 주영민이 몬스터 몇을 이끌고 대열에서 이탈했다.
"송명석아."
[ㅇ, 예. 주군.]
"저 녀석 막을 수 있겠냐?"
[반드시 저 인간의 수급을 베어 주군께 바치겠나이다!]
미노타우루스를 놓친 송명석은 기합이 팍 들어가 있었다.
"발을 잡는 걸로 충분하다."
[속하가 목숨을 걸고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겠습니다!]
주영민은 테이밍 스킬을 최소한으로 찍고 무투계처럼 스탯 분배를 했다.
강화한 본 스피어로도 생채기 좀 입히는 게 고작인 녀석.
송명석이 용아병으로 육신을 갈아타면서 6성의 능력을 얻었지만, 동일 성위의 절정에 올라서 수 년 동안 실전을 끊임없이 벌여온 적을 상대하기는 모자랐다.
"가라."
[예! 주군!]
다시 한번 패를 하나씩 서로 교환했다.
주영민과 송명석.
돌파에 특화된 6성 전력이 외곽으로 빠졌다.
이 시점에서 인간사냥꾼이 가용할 수 있는 패는 거의 없을 터.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후. 이제 좀 살겠다."
터무니없는 위력을 자랑하는 기적.
성좌의 가호와 테이밍 스킬로 강화된 대형 몬스터들을 줄지어 꿰뚫었던 만큼.
그 대가도 굉장히 컸다.
사용하면 체력과 성력(영력)이 무조건 바닥나는 기술.
30일이라는 재사용시간도 걸려 있어서 말 그대로 일격필살의 기술이다.
〔일격필살이라고 말한 것치곤 성급하게 사용하지 않았느냐.〕
'적은 모르잖아.'
위력이 강한 만큼 그에 준하는 페널티가 있다는 건, 김봉효도 짐작하고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30일 사용 불가 제한까지 파악하지는 못할 것이다.
혹, 지레짐작하고 병력을 다시 한번 줄지어 돌진시켰다가 꼬치에 고기 꿰어놓듯 당해버리면?
정보의 불균형이 이래서 무서운 거다.
"최형태야. 가서 빈 곳 막아라."
[예.]
기동력이 뛰어난 최형태로 전장의 구멍을 메워주고.
마저 체력과 영력을 충분히 회복한 후,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에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도다.〕
'성좌의 가호가 껌은 아니잖아.'
김봉효가 테이밍한 괴물들을 최대한 끌어들였는데도, 상당한 숫자가 남아 있어서 전장을 흔들어놓았다.
무장을 지팡이로 교체한 유진은 후욱- 길게 심호흡을 내뱉은 후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내 부름에 답하라."
[리바이브를 사용합니다.]
망자의 성질을 고스란히 유지시켜 되살리는 강령술.
회색 광선의 궤적에 닿아 구멍이 뚫린 채 쓰러진 대형종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속시간은 2시간. 일회용으로 쓰기는 아까운 시체들이지만 여유를 부릴 상대가 아니었다.
"너희 주인에게로 돌아가라."
되살아난 괴물들은 흐릿해진 동공을 움직이며 김봉효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187화 승부처
다시 팽팽해진 전선.
리바이브로 되살아난 정예 몬스터들은 김봉효의 버프를 받지 못해 이전처럼 괴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한 기 한 기 모두 변종에, 좋은 것만 먹이고 키워낸 괴물들이라서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로 뚫렸던 전선의 구멍이 금세 메워졌다.
[죽음의 돌진]
[신속]
쿠아아앙!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듯, 어마어마한 기세로 전장 곳곳을 누비는 최형태의 활약도 한 몫 했다.
"아직 부족해."
전선을 유지해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
파프너가 애꾸눈을 맡아주고 있지만, 버티는 게 고작일 터.
진정한 용족으로 거듭나면서 전투력이 몰라보게 상승했지만, 그래도 상대는 애꾸눈이다.
'소모전으로 갔을 때 누가 유리할지는 가늠이 안 된다.'
꼬리를 물고 압박 중인 2군이 돌파할지.
애꾸눈이 파프너를 제치고 파고들지.
정보의 불균형을 토대로 여기까지 판을 짠 유진이지만, 회귀 전과 많이 달라진 상황 때문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실행할 뿐.
아- 아- 아-.
청량한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마력 담긴 음으로 재배열 과정을 수행하는 라미아의 목소리다.
아군에게 모자란 것은 원거리 화력.
시체 나무로 오우거나 트롤의 시체를 마개조, 사이클롭스를 여럿 만들었지만 지속적인 화력에서 한 수 뒤처졌다.
그렇다면.
[다중 연산]
[본 미사일 X 5를 사용합니다.]
호흡을 빼앗는다.
통나무만 한 크기의 뼈들이 대각선 방향으로 날아갔다.
마법의 사거리는 약 500미터.
전선 유지 중인 대형종들을 빼더라도, 라미아 무리에게 닿지 않을 거리다.
[점화 회로 - 발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본 미사일들은 미리 입력해놓은 시간에 맞춰 폭발.
땅에서 100미터 위치까지 떨어진 뼈가 수백 갈래로 쪼개지면서 라미아 무리를 덮쳤다.
"쉿, 쉬쉿. 아쿠아 배리어."
"프리징 체인."
마력으로 구현한 물을 수 겹으로 덧대어 구축한 방어막.
얼음 사슬들이 결계를 감싸며 융화, 마력 구조를 개량해서 몇 배나 강화시켰다.
그 위를 덮치는 뼈의 비.
타타타타탕, 넓게 펼쳐진 화망으로는 연계 마법으로 강화한 얼음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쉿, 쉬쉿. 반격해라."
아- 아- 아-.
음에 마력을 담아내어 마법을 구현하는 라미아.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온 마법사들도 타이밍을 맞추기 힘든 연계 마법을 척척 사용했다.
[타겟 픽션]
[인핸스드 레인지]
[소닉 블레이드]
대상을 고정시키는 지표 마법.
발현 후 자연으로 흩어져 가는 마력 구조를 인위적으로 붙드는 사거리 증가 속성에.
단일 대상으로 강력한 살상력을 자랑하는 초음속의 검이 쏘아진다.
[고유 특성 - 백야]
[영력 → 성력]
[부정 충격 방패 X 10을 사용합니다.]
초음속?
눈에 보이지 않아?
오히려 좋아.
지정 대상만을 쫓는 [타겟 픽션].
장애물을 피하면서 최단 거리로 날아드는 마법 쯤.
어디로 올지 뻔했다.
콰지지지직!
펼친 손바닥과 겹쳐서 전개한 부정 충격 방패가 순식간에 깨어졌지만.
유진은 결계와 마법이 부딪친 찰나의 순간에 [역천의 가호]를 운용, 소닉 블레이드의 마력 구조에 간섭해서 해체해버렸다.
〔재구축과 발현은 하지 않는 게냐?〕
'바람 속성은 섞을 곳이 마땅찮아. 사거리도 길지 않고.'
재구축을 거쳐 발현하려면 상당한 집중력을 사용해야 한다.
라미아 무리가 인근에 있으면 모를까.
그 시간에 강령술을 한 번이라도 더 사용하는 게 낫다.
"쉬쉿? 왜 마법이 사라진 거냐!"
"우리의 마법. 해체됐다."
"쉿. 불가능해."
라미아들은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녹아버린 소닉 블레이드를 부정했다.
이미 재배열을 끝낸 마력에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좌의 권능이 스며든 아티팩트나 가호로 펼친 [디스펠]이면 모를까.
김봉효의 버프 효과로 당황하지 않게 된 라미아 무리는 방금 전의 기이한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부정함으로써 빠르게 넘겼다.
[다중 연산]
[본 미사일 X 4를 사용합니다.]
다시 한번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뼈들.
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만, 대각선으로 쏘아 올린 뼈들은 라미아 무리가 선 위치에 정확하게 떨어진다.
[아쿠아 배리어]
[프리징 체인]
라미아 무리는 같은 방법으로 쪼개진 뼈 파편을 막아냈다.
각 개체가 6성급 마법사 수준인 괴물이다.
음성을 매개 삼아 마력을 재배열하기에, 마법사 여럿이 병렬로 연결되어 마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전개 속도가 빨라졌다.
〔5성인 그대가 마법계 괴물 여럿의 발을 묶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성과 아니겠느냐.〕
'에이. 그 정도 가지고는 만족 못하지.'
한 번 막힌 공격을 왜 또 했겠어.
[암흑 투기]
[스프레이트 샷]
[초정밀 사격]
마하 40으로 쏘아진 미사일, 아니 특대형 화살은 대형 괴물들이 구축한 전선을 스쳐 지나 라미아 무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쉭!"
한 줄기 비명을 내뱉은 라미아가 수 미터 뒤로 튕겨나서 지면에 고꾸라졌다.
가슴에 박힌 화살.
초장거리 저격에 반응도 하지 못하고 심장이 터져서 즉사했다.
"쉬쉿. 어떻게?"
"쉿. 우리 방어. 밀도 낮게 유도했다."
"쉬쉿. 조심해라."
라미아들은 환장할 것 같았다.
두 집단의 거리는 약 2킬로미터.
마법은 발현 지점에서 멀어질수록 급격하게 위력이 약해진다.
직선으로 공격하자니, 벽을 이룬 대형 몬스터들 때문에 불가능했고.
반면에 영력을 뼈에 실어내어 최대 사거리 너머로 쏘아 보낸 공격에도 충분한 힘을 실어낸 유진은 라미아에게 타격이 가능했다.
"쉿. 위력적이진 않다."
"쉬쉿. 방어 가능."
"쉿. 그렇다고 무시도 못 한다."
라미아 무리의 호흡을 절묘하게 파고드는 공세.
초장거리 저격까지 더해지니 의식을 안 할 수가 없다.
5성 헌터가 6성 마법계 다수를 상대로 마법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라미아들은 분노와 당혹감에 쉬쉿 거릴 뿐, 맞설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채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마법 지원이 줄어들자 신이 난 것은 사이클롭스들이었다.
[안광]
검은 광선이 번쩍이면 오우거나 트롤의 팔뚝에 구멍이 뻥 뚫렸다.
영력이 떨어진 사이클롭스는 바위를 뽑아서 투척했다.
시체 나무를 통해 원형이 되는 시체보다 1.5배 정도 늘여놓은 팔.
무언가를 던지는 행위에 특화되어 있는 신체구조를 최대한 활용해서 바위를 던졌다.
-음무우우우.
리바이브로 되살린 정예 몬스터 군대까지 합류.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그어진 전선 여기저기에서 잡음이 새어 나오고.
좀처럼 두려움을 모른다는 오우거의 발이 타의에 의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걸까.
김봉효는 한 쪽 다리로 지면을 툭- 툭- 치며 생각했다.
'뜻대로 되질 않는군.'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이다.
비장의 수단인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를 사용했는데도.
적 전열을 돌파하다가 역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수습할 수 있는 정도였다.'
아까 중얼거렸듯,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김봉효는 여전히 강화된 몬스터들을 부렸으며.
반대 측으로 투입한 애꾸눈은 차근차근 유진이 있는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애꾸눈의 발을 붙들 수 있는 강자가 있다는 게 의외였지만.
그래.
여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흐름이 바뀌었다.'
괴 광선으로 정예 몬스터 상당수를 잃은 후, 전선은 다시 팽팽하게 유지 되었다.
스펙은 제5 혁명군이 위였지만.
대형종의 숫자는 유진 측이 앞서서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홀로 라미아들의 발을 묶을 줄이야.'
[왕의 피리]와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 덕에 두려움을 모르고 마법 방해도 통하지 않는 라미아들이다.
무슨 마법을 사용한 걸까.
한 기 한 기가 강력한 마법 사용자인 라미아들을.
고작 5성 신관계 하나가 막아낸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괴물.
김봉효는 상식선에서 유진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뒤늦은 판단이었다.
진즉 이런 생각을 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더라면.
양면전선을 펼쳐서 화력이 분산되는 상황은 피해갔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진다.'
이 상황이 길어지면 유진 측에게 유리해진다.
인간사냥꾼이 소모전에서 강하긴 해도, 병력을 보충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반대로 유진은 즉석에서 군대를 보충할 수 있으니.
소모전에서 강하다는 인간사냥꾼의 장점이 무색해진 상황!
'이건 도박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군.'
전선을 유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패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꾸눈이 합류하기만 하면.
남은 망자가 얼마나 있든 간에 자신의 승리로 끝난다.
김봉효가 극단적인 방법을 떠올린 건 전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두 유진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3대장 동무."
"...."
틀렸다.
주영민은 무엇으로 만든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 언데드에게 붙들려 있었다.
현 시점에서 가용할 수 있는 으뜸패를 미리 써버린 상황.
그렇다면.
남은 병력을 최대한 수습해서 다시 한번 뚫어보는 수밖에.
'그 광선을 두 번 쓰지 못하는 쪽에 걸어본다.'
한 번 결정을 내리니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애꾸눈 포획에 나섰던 인간사냥꾼들에게는 전선을 사수하라고 지시.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로 오버 스펙이 된 정예 괴물을 하나씩 빼서 중앙으로 돌렸다.
병력 일부를 빼도 전선이 당장 무너지지는 않았다.
충분한 숫자를 모으자마자 라미아 무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큰 거 준비해라."
"쉬쉿. 타이들 웨이브와 아이스 에이지 말입니까."
"그렇다. 꼬부랑 말은 어렵군."
"쉿. 적의 견제가 너무 거셉니다."
"죽더라도 해라."
6성 수계 마법인 타이들 웨이브.
마찬가지로 6성 빙계 주문인 아이스 에이지를 동시에 준비하면 유진의 마법 공세를 막을 방법이 없어진다.
대놓고 죽으라는 김봉효의 지시에도 라미아 무리는 거절하지 못했다.
"쉬쉬쉿."
대단위로 움직이는 마력.
인근의 공기가 크게 출렁이고 회오리가 몰아칠 정도였다.
마력의 ㅁ자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쇄애애애액!
초장거리 저격이 라미아의 숨통을 추가로 끊었고.
머리 위에서 폭발한 뼈들은 이전처럼 수천 갈래로 쪼개지지 않고 큼지막한 덩어리가 되어 라미아들을 덮쳤다.
빈틈을 드러내자마자 노리는 집요함.
1/3이나 되는 라미아가 고꾸라졌다.
"이미 늦었다."
전장 한가운데서 생성된 파도.
쿠콰콰콰콰! 지면에 스며든 피와 대기에 분포되어 있는 수분을 모조리 쥐어짜내 만든 물의 벽이 전선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뒤이어 들이닥치는 엄동설한의 추위.
저저저적, 물을 매개체 삼아 퍼진 냉기는 얽혀 있는 몬스터와 언데드를 모조리 얼려버렸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잔혹한 수법.
그 효과는 확실했다.
"돌진."
미노타우루스의 어깨에 올라탄 김봉효는 친히 괴물들을 이끌고 얼어붙은 전선 한복판을 가로질러 갔다.
직선거리 2킬로.
강화된 대형 몬스터에게는 그렇게 긴 거리도 아니었다.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고.
흐릿하게 보이던 유진의 모습이 육안으로 확인할 만큼 가까워졌다.
"넌 내가 죽인다."
김봉효는 한 마디 마디마다 분노를 담아 외쳤다.
더 이상 반격할 수단은 없으리라.
출혈을 감수하고 꺼낸 최후의 수단.
받아칠 수 있을 리 없다.
[공간 – 방출]
[마법 스크롤 : 디그 X 150]
전조도 없이 땅이 꺼지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188화 지박거인
20미터 가량 푹 꺼져버린 땅.
전선 중심부를 돌파해서 직선거리로 달려오던 정예 괴물들의 신형이 한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음무우우우!"
바닥에 착지한 미노타우루스가 분노를 터트렸다.
낙하하면서 생긴 피해?
20미터라고 해도 대형종에게는 그리 깊지도 않은 높이다.
갑자기 땅이 꺼지긴 했어도 반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잔꾀를 부려봤자."
대형종들의 발을 잠깐 동안 묶는 게 고작인 수단.
되도 않는 방법을 써야 할 만큼 상황이 안 좋다고 느낀 건가.
김봉효는 입술을 비죽였다.
"가라."
"음무우우우!"
다리를 살짝 웅크린 미노타우루스가 힘껏 땅을 박찼다.
디그 100중첩으로 만든 구덩이가 도약 한 번에 무력화되었다.
푹 파인 땅이 아닌, 개활지가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새하얀 빛이 김봉효의 망막을 때렸다.
[이동요새]
[오러]
[미네르바의 올빼미의 가호 – Lv 1]
신력과 오러, 그리고 고유 특성의 조화.
일점으로 모인 에너지가 해방되는 지점에서 눈부신 광채가 솟구쳤고.
파괴의 빛을 고스란히 뒤집어 쓴 미노타우루스의 양팔이 우드득, 반대로 꺾였다.
김봉효가 적의 공세를 인지하는 순간 방어하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으면.
양팔이 아니라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후욱, 이걸 막네."
강민호는 숨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인간사냥꾼 대가리다. 네 공격에 당할 거였으면 그 위치까지도 못 갔지."
"정말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선두에 섰군요."
까드득, 위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김봉효가 이를 갈았다.
"간나새끼가."
"이제야 사투리를 쓰네."
"올라가면 네 놈의 피부를 모두 벗겨서...."
김봉효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허공에 떠오른 석궁 10기.
방아쇠를 당기니 한껏 팽창했던 시위가 수축하면서 앞으로 화살을 밀어냈고.
푸른 기류에 휘감긴 화살촉이 구덩이 아래로 쏟아졌다.
[테이밍 스킬]
[철벽의 자세]
대형 괴물들은 양팔을 위로 올렸다.
회색으로 물드는 피부.
방어 태세를 갖춰서 맷집 스탯을 증가시키는 대신 민첩 페널티가 붙는 테이밍 스킬이다.
푹! 푸푹! 오러를 담아낸 화살은 강철보다 질긴 오우거나 미노타우루스의 피부도 어렵지 않게 찢어발겼다.
치명적이진 않았다.
급소는 팔로 막았고, 일반 규격 화살로는 대형종의 육신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한 번에 도약한다."
화살의 허와 실을 파악한 김봉효는 대형종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급소 부위만 안 맞으면 된다.
오러를 담아낸 시점에서 충분히 위력적이지만, 전투 속행이 불가능하진 않다.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는 지금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니.
"뛰어라."
쿠우우웅!
일제히 도약하는 괴물들.
강민호가 다시 한번 합체기를 사용했으나 1/3 정도만 구덩이 아래로 추락했다.
[넌 못 지나간다.]
전선 중심부가 돌파 당하자 유진의 곁으로 돌아온 죽음 용기병도 몬스터 무리를 향해 돌진.
또 1/3 정도가 충격을 받고 추락했지만, 남은 1/3은 무사히 구덩이를 벗어났다.
"놈. 죽여주마!"
새빨갛게 물든 눈동자가 좌우로 돌아가며 유진을 찾는다.
한데.
구덩이에 빠지기 전만 해도 멀리 있지 않던 유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나타난 것은....
"뭐, 냐. 저건."
전신이 뼈로 된 거인이었다.
*
〔작은 인간이 전선을 돌파하였구나.〕
'그러게.'
〔어찌 그리 태연한지고.〕
'영웅이라면 겪어야 할 시련 아니겠나?'
〔그만하지 못할까.〕
몇 번을 말하게 하네.
전쟁은 결국 들고 있는 패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 라는 것을.
먼저 카드를 꺼낸 시점에서 놈은 패배한 거다.
〔대응할 방법은 있나?〕
'물론.'
유진은 땅에 감도는 으스스한 한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충분하다.
땅에 괴물들의 피가 스며들고.
원한이 공기를 충만하게 채우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원정 때 준비해놓은 시체 마차.
본 미사일을 담아두었던 마차가 아닌, 뒤에 따로 빼놓은 마차에 담아놓은 뼈들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다다다닥, 인간형으로 재조립되는 뼈들.
[연금술식]
[강화 회로를 사용합니다.]
뼈 무더기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미리 새겨놓은 강화 회로가 파직, 강한 빛을 흩뿌리며 점화되었다.
시체 마차 10대분.
10톤이 넘는 뼈를 들어 올리고 강화 회로를 재가동시키는 데만 총 영력 중 20%가 넘게 소모되었다.
〔보기에는 그럴싸하구나. 하여?〕
크로노스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강화한 뼈 무더기를 던진들,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며 돌진하는 괴물들을 어떻게 막아.
[지박의 제물을 사용합니다.]
〔그 뼈들을 망자로 되살릴 셈이더냐?〕
'비슷한데. 데스 에어리어는 아니야.'
유진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었다.
[피의 낙인 주문을 습득합니다.]
[피의 낙인]
분류 : 저주
등급 : D
제한 : 3성 이상
피를 소모해서 저주의 범위나 대상을 한정짓습니다.
효과 자체는 별것 없다.
자체적인 능력은 없고 저주의 흐름에 간섭하는 보조 주술.
대상을 옮기려면 부두 인형이 나아서 실용성을 찾아보기 힘든 쓸모없는 주문이다.
'개똥도 약에 쓴다고 하잖아?'
[피의 낙인을 사용합니다.]
D급 스킬.
낮은 등급답게 사용법도 어렵지 않은 저주다.
단지.
그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을 뿐.
[피의 낙인] 저주의 대상으로 지정한 범위는 10킬로미터.
라이프 드레인으로 소모한 영력을 꽤 회복했지만, [본 컨트롤]과 [강화 회로]를 사용한 탓에 도로 바닥을 드러냈다.
'아직 한 발 남았다.'
지박의 제물로 옭아맨 전장의 귀기와 땅에 스며든 피.
주술 범위를 뼈 무더기로 한정.
막대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골렘 연성을 사용합니다.]
연금술 주문은 트리거일 뿐.
뼈 무더기와 귀기만으로는 제대로 된 골렘을 만들 수 없다.
사전에 발동해둔 [강화 회로]로 [골렘 연성]에 [지박의 제물] 술식을 끼워 넣음으로써 주문을 개변.
땅(地)에 붙들린(縛) 거인(Golem)을 빚어냈다.
[지박거인을 제작했습니다.]
전고 12미터.
무수한 뼈가 결합되어서 만들어진 지박거인은 우두커니 서서 유진을 내려다 보았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두 주문을 결합해서 만들어낸 뼈들의 결집체.
하나의 존재로 인식이 된 뼈, 그러니까 지박거인은 본 컨트롤 같은 외부의 영향에 면역이지만.
제작 주체인 유진만큼은 예외였다.
유진은 큼지막한 손바닥을 내리게 하곤, 그 위에 타서 가슴팍으로 이동시켰다.
촤라락-.
좌우로 갈라지면서 열린 가슴팍 안으로 서슴없이 들어간 유진.
이번에는 내부의 뼈들을 조종해서 팔과 다리를 옭아매게 했다.
〔그런 취향이었느냐?〕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웠네. 성좌 나리.'
〔제 발로 뼈에 구속되는 것을 택하였으니 의심은 당연하니라.〕
'지박거인은 골렘이 아니야.'
명령을 수행할 지능 따위는 없다.
팔, 혹은 다리를 움직일 때 뼈와 마력의 흐름을 계산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지박거인은 파일럿이 필요하다.
'이 상태에서는 마법도 쓸 수 없지.'
[지박의 제물]이라는 대규모 저주를 [피의 낙인]으로 간섭.
막대한 귀기를 컨트롤해야 하고.
[골렘 연성] 주문에 간섭해서 만드는 것 치고는 불편한 게 많은 게 지박거인이다.
[날 찾나?]
"거기 안에 있구나!"
김봉효를 태운 미노타우루스가 정수리를 수직으로 숙인 채로 돌진한다.
축 늘어진 팔 대신 뿔로 꿰뚫겠다는 수작.
유진과 일체화된 지박거인은 파리를 내쫓듯 귀찮다는 듯이 팔을 휘둘렀다.
퍼엉-.
북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멀리 튕겨나는 미노타우루스.
충돌 직전에 도약한 김봉효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애꾸눈도 붙들었던 내 수하를... 어떻게!"
[스펙은 애꾸눈보다도 높거든.]
"무슨 사술을 부린 거냐!"
북한 출신이면서 무협지라도 많이 본 거니.
애꾸눈보다 강하다는 말은 그냥 내뱉은 게 아니다.
회귀 전에 직접 실험해봤으니까 말이야.
믿든지 말든지, 그건 자유지만.
"벼, 변신 로봇이다!"
"합체잖아. 이 멍청아."
"선배님들. 변신이든 합체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말임다."
"합체는 남자의 로망. 매우 중요해."
강민호의 진지한 목소리에 쌍둥이 동생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러한 수가 있었으면 진즉에 사용하지 그랬느냐.〕
'조건이 맞아야 쓰지.'
지박거인은 유진이 준비한 마지막 패였다.
수만 개나 되는 뼈에 일일이 강화 회로를 새겨줘야 하고 골조를 담당할 뼈는 시체 나무로 개조했다.
[지박의 제물]을 발동시킬 조건도 충족시켜야 하며.
'이걸 운용하면 마법은 못 쓴다고.'
지박거인을 만들어놓고도 이기지 못하면 정말 끝이다.
거대한 뼈의 거인은 유진의 무덤이 되겠지.
참 성대한 무덤이야.
[지박거인까지 쓰게 만들 줄은 몰랐어. 제법이야.]
"빌어먹을 간나새끼가!"
[칭찬을 해줘도 불평이네.]
검은 머리 짐승은 이래서 안 돼요.
지박거인(feat. 유진)은 압도적인 체급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뒤따라 올라온 트윈 헤드 오우거를 양손으로 붙잡은 후, 순수한 악력만으로 쭈욱- 반토막을 내버렸고.
변종 트롤은 재생력을 발휘할 틈도 없이 발에 짓눌려서 원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쿠오오오!"
"쉬쉿!"
미노타우루스 두 마리가 하반신을 붙들고.
있는 힘껏 도약한 오우거 둘이 손에 쥔 해머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고층 건물도 두부처럼 으깨버릴 만한 공격.
[암흑 투기를 사용합니다.]
태애애앵!
이게 되네?
〔무지한 것처럼 발언하는 게냐. 모두 그대의 안배였을 터.〕
'회귀 전에는 오러 같은 거 못 다뤘거든요.'
진짜라고.
마법을 봉인당하니 위기 상황에서 버티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해둔 거였다.
대형 몬스터가 상대면 오러 없이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오러(암흑 투기)도 다룰 수 있으면?
[이 전쟁. 슬슬 끝내자.]
압도적인 신체능력에 오러를 더하니 대형 몬스터들이 종이처럼 찢겨 나간다.
2회차에서는 파프너에게 단련을 받아서 전투 센스도 갈고닦았다.
지박거인의 스펙을 활용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이, 이이이이익!!"
분노와 억울함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김봉효가 철퇴를 들었다.
7성 헌터.
깨달음을 얻어 두 번째 벽을 넘어선 만큼, 그도 오러 블레이드를 다룰 수 있었다.
파츠츠츠!
철퇴 위로 솟구치는 푸른 빛.
애꾸눈이 전개한 오러 블레이드보다는 흐릿했다.
[그거 반쪽짜리잖아.]
김봉효의 클래스는 테이머.
벽을 넘긴 했지만, 무투계 방면에서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었다.
괴물을 길들이고 부리던 중에 경지를 넘어섰으니.
테이머가 하이브리드 직업군인 덕에 오러 블레이드도 구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온전한 깨달음이 아닌 만큼 불완전했다.
"간나새끼가!"
[할 줄 아는 욕은 그거밖에 없냐.]
사선으로 도약한 김봉효.
유진은 지박거인의 팔에 암흑 투기를 구현, 주먹을 말아 쥔 채 푸른빛을 정면으로 가격했다.
콰아아아앙!
반쪽짜리여도 오러 블레이드는 강했다.
암흑 투기가 뭉개지고.
지박거인의 오른손이 충격에 산산조각 났다.
손을 구성하던 뼈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가면서 투투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끅, 끄윽."
지면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
오러 블레이드로 지박거인의 암흑 투기를 깨부수는데 성공했지만.
질량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힘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지박거인의 손을 박살내고도 땅에 처박힌 신세.
김봉효는 억울했다.
'왜. 대업을 이룬 직후에. 이런 괴물을.'
자신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하듯 짜인 판.
고작.
각성 1년차 헌터한테.
이렇게 패배한다고?
"가, 간나. 새...."
[참신한 욕 하라고 했잖아.]
지박거인의 커다란 발이 햇빛을 가리고.
개성 일대를 지배했던 군벌, 자칭 제5 군단의 수장은 무수한 뼈에 짓눌렸다.
189화 모두 계획대로
[텐터클 블레이드]
[분광검 - 4식 녹광검 X 5]
전선 우측으로 빠진 송명석은 쉴 새 없이 암흑 투기를 피워 올려서 맹공을 펼쳤다.
[훨 윈드]
도끼가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리고.
따다다당, 텐터클 블레이드로 일으킨 녹색 광채 여럿이 푸른 궤적에 휘말리자마자 튕겨나간다.
[빌어먹을, 입니다.]
광뇌보로 거리를 벌린 송명석은 욕지거리와 함께 다시 한번 쌍검을 휘둘렀다.
암흑 투기가 수 미터를 뛰어넘어 주영민의 급소를 동시다발적으로 노리지만, 최소한으로 펼친 오러에 막혀 소멸한다.
"가만 있으라!"
[당신이라면 가만히 서 있겠습니까?]
송명석은 몇 합을 주고받은 후, 상대의 강함을 빠르게 인정했다.
용아병으로 갈아타면서 몇 배로 강해졌는데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길 수 없다면 시킨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이중 게이트에서 유진에게 죽고.
스켈레톤 워리어로 되살아난 후, 지금까지 온갖 굴욕과 수모를 경험했다.
그 덕분일까.
송명석은 이전처럼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실리를 고를 줄 아는 지혜가 생겼다.
따당, 따다다당.
쉴 틈 없이 솟구치는 암흑 투기 다발.
용아병이 되면서 영력 수치가 어마어마하게 올랐고.
영력 소모가 많은 텐터클 블레이드를 여러 번 전개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쓰러트릴 수 없다면 발이라도 묶겠습니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소모전을 강요하는 것.
송명석이 찾은 해답이었다.
"애미나이가 재미없네."
일그러진 주영민의 표정은 그 해답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오러 사용자이며 동시에 괴물을 부리는 자.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주영민의 클래스는 테이머다.
광뇌보처럼 [무투계] 제약이 걸린 스킬북은 익힐 수 없다는 점.
오러 응용 능력은 송명석을 아득히 뛰어넘지만.
변변한 이동기나 돌진기가 없으니 작정하고 거리를 두니 잡을 수가 없었다.
"답히면 디지는기다."
[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 둔한 몸놀림으로.]
"간나새끼. 대간 둄 부린다고 나대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주영민이지만, 분노가 치미는 것과 별개로 마음은 급하지 않았다.
'대장 동무 디시대로 하고 있대.'
김봉효의 노림수는 중앙 돌파.
암흑 투기를 흩뿌려대는 송명석 같은 강자를 외부로 뺀 것만으로 목적을 반쯤 달성한 셈이다.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품은 망자와 인간은 술래잡기를 벌였다.
[그만 쓰러지십시오!]
"도망가지 말라!"
술래와 도망치는 사람, 아니 언데드 모두 유쾌하지 않은 게임이었지만.
그렇게.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추격전이 끝난 것은.
[적장. 해치웠다!]
전장의 소음을 모조리 날려버릴 만큼 강대하고, 음산하기까지 한 사념이었다.
*
지박거인의 영력을 바탕 삼아 쩌렁쩌렁하게 퍼져 나가는 유진의 사념.
부러진 [왕의 피리]와 김봉효가 타고 다니던 미노타우루스의 머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왜 피리더냐?〕
'그나마 멀쩡한 게 이거라서.'
송명석 때처럼 송/명/석으로 나누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힘이 너무 과했는지 다진 고기가 되어서 육안으로는 본인 확인을 할 수 없었다.
〔그 위기 탈출 스킬인가 하는 건 어쩌고.〕
'김봉효는 일부러 안 익혔다.'
무릇 군단의 지도자라면 도망칠 생각을 품으면 안 된다나, 어쩐다나.
개똥철학을 자랑스럽다는 듯 부하들에게 이야기해서 사기를 끌어 올렸지만 결과는 이 모양이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지.
쿵! 쿵!
지박거인(feat. 유진)은 주인 잃은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찢어발긴 후, 송명석이 있는 전장으로 향했다.
"기, 기건!!!"
[알아볼 줄 알았어.]
"대장 동무! 간나새끼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주영민이 욕설과 함께 격한 반응을 표출했다.
[소리 지르지 마. 약해 보이니까.]
주영민에게 드리우는 기다란 그림자.
뼈로 된 거인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쾅, 놈을 밟아버렸다.
[해치웠나?]
너.
그 말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부활 주문 참 좋아하네.]
[앗.]
[네가 그 말을 내뱉어서 죽을 놈이 살아났잖냐.]
[정말입니까?!]
[봐라. 놈의 시체가 없잖아.]
땅에 새겨진 커다란 족적.
지박거인의 발자국이 남은 곳에는 트롤의 시체가 남아 있었다.
[서브스튜드]
죽을 위기에 처하면 발동하는 탈출기.
대상으로 지정해놓은 괴물과 위치를 바꾸는 테이머의 비기다.
몬스터 군대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주영숙도 저격 맞고 개성으로 날아가 버렸지.
〔후환을 남겨두다니. 그대답지 않구나.〕
'글쎄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유진은 지박거인을 다시 한번 움직였다.
김봉효와 주영민을 제거(혹은 이탈)했으니 이쪽 전장에서 볼 일은 더 없다.
〔아직 괴물을 다루는 작은 인간들이 남아 있다만?〕
'조무래기들은 부하 선에서 컷 해야지.'
그 녀석들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정면에는 송명석과 최형재가 버티고 있고.
등 뒤로는 조승철이 인솔해온 대형 언데드들이 바글바글했다.
양면전선이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버텼으면 대가를 치러야 할 것 아니겠나.
쿵! 쿵!
행군 중인 망자들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지박거인.
4만에 이르는 대군이 개활지를 덮고 있다 보니 일일이 피해서 갈 수 없었다.
얼마 정도를 달렸을까.
[...이게 무슨.]
느려지는 지박거인의 발걸음.
뜻밖의 상황을 목도한 유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용호상박?
괴수 대전?
정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둘 중 하나는 맞지 않을까.
"쿠훅. 죽어라. 도마뱀!"
[버스트 플레임]
[거스트 윈드]
화염 줄기와 강풍이 휘몰아치고.
[원시 마법]
[사룡의 비행]
현대 마법과 완전히 다른 매커니즘으로 구현된 잿빛 광선이 쏟아진다.
쩌어어엉!
오러 블레이드와 암흑 강기.
기원이 다를 뿐, 구현되는 원리는 동일한 힘이 충돌할 때마다 강풍이 휘몰아쳤다.
'암흑 강기에 원시 마법이라니.'
파프너야.
이런 건 언제 습득한 거니?
사룡이란 존재는 회귀 전에 없는 변수.
용족 사체를 활용해서 만든 언데드라고 해봐야, 본 드래곤이 최대였다.
사룡은커녕 엘드리치 드래곤의 그림자도 못 봤다고.
쩌엉!
다시 한번 발생한 충격파에 언데드들이 고꾸라졌다.
〔그대의 대전사가 밀리는 것 같구나.〕
'애꾸눈은 7성 절정에 올라선 지 10년도 넘은 괴물이다.'
파프너가 7대 명가 가주들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녔고.
용의 정수를 흡수해서 진룡으로 거듭났다지만.
세월의 차이를 한순간에 좁힐 수는 없었다.
아니.
그만한 천재니까, 이만큼이나 버틴 거겠지.
[주인. 못 보던 재주가 또 생겼네?]
[어떻게 알아봤대.]
[뼈 무더기 안에서 주인의 존재감이 느껴져.]
막 애꾸눈을 덮친 후 다시 비상한 파프너가 태연하게 말했다.
일격이탈.
정면 힘겨루기로는 상대가 안 되니 비행이 가능하단 장점을 최대로 활용했다.
"쿠후훅. 너. 잡히면 죽는다."
단숨에 수십 미터를 점프하는 애꾸눈이지만, 번번이 잡지 못했고.
파프너가 하강하는 순간에 맞춰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 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가속에 회전력까지 더해야 애꾸눈과 겨우 비등한 상황.
마법전도 백중세여서 김봉효가 쓰러지는 순간까지 공방을 주고받았다.
[내가 뭘 해주면 될까.]
[10초만 붙들어줘.]
[그 정도면 돼?]
[왠지는 몰라도 조금 약해졌어.]
아.
그러고 보니 김봉효가 죽었지.
[왕의 피리]나 [하멜른의 악사]의 가호 효과는 받지 못했지만.
테이머인 김봉효의 영향을 받아 능력치가 상승해 있던 애꾸눈이었다.
주인이 사망했으니, 버프 효과도 사라졌겠지.
이미 접경지역에서 체력을 상당히 소모했겠다, 버프도 풀렸으니 해볼 만 했다.
[10초라. 까짓 거 한번 해보마.]
지박거인이 성큼성큼 다가간다.
애꾸눈도 새로운 적의 등장에 경계 섞인 눈을 번뜩이다가 마주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구 흔들리는 지축.
체고가 8미터인 애꾸눈은 지박거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고 양팔을 벌리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우지지직.
"쿠훅. 너. 힘 좀 쓴다."
[별 말씀을.]
파르르 떨리며 반대쪽으로 꺾이려는 애꾸눈의 손가락.
지박거인이 순수 스펙에서 앞선 것은 회귀 전에도 증명이 된 바였다.
힘에서 밀리자마자 바로 오러를 끌어 올리는 애꾸눈.
지박거인도 암흑 투기를 피워내며 푸른 기류에 대항했다.
"쿠훅, 이걸로 안 되면."
파츠츠츠!!
손가락 위로 구현되는 오러 블레이드.
암흑 투기가 빠르게 사그라지고, 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지박거인의 손목 위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
'5초를 더 벌어줘야 한다.'
산산조각 난 양손이야 금세 회복할 수 있다.
뼈 마디마디마다 강화 회로를 새겨놓은 건 폼이 아니라고.
다만.
양손을 재생하기 위해 뒤로 뺐다간 파프너가 말한 시간을 벌어줄 수 없다.
'이럴 땐 부하를 믿어야지.'
촤라락, 지박거인의 팔이 몇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물처럼 펼쳐진 양팔을 펴서 애꾸눈을 그대로 꽉 안았다.
"쿠훅?"
뼈 하나하나에 깃든 암흑 투기가 살가죽을 찢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전신에서 흐르는 푸른 피.
"쿠훅. 너. 귀찮다."
따끔하기만 할 뿐, 치명적이지는 않다.
애꾸눈은 짜증 섞인 외침과 함께 오러 블레이드로 뼈 무더기를 파헤쳤다.
와장창, 거인의 몸을 구성하는 뼈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놈을 구속하는 힘이 약해진다.
유진은 지박거인의 구성 요소마저 비틀어 애꾸눈을 붙드는 감옥처럼 변형시켰다.
[아이언 메이든이라고 들어봤나?]
사방에서 파고드는 뼈.
피로 목욕을 한 모양새가 된 애꾸눈은 더욱 크게 울부짖으며 뼈 그물을 하나하나 뜯어냈다.
10초가 이렇게도 길었던가.
지박거인의 구조를 변형하면서 최대한 놈의 힘을 빼고 있었을 때.
[피해. 주인.]
아기다리 고기다리... 어쨌든 간절하게 기다려온 순간이 찾아왔다.
등 쪽 뼈들을 좌우로 밀어낸 후 지박거인의 몸에서 빠져나온 유진.
파프너는 입을 크게 벌렸다.
[보이드 브레스]
콰아아아아아!!
밤하늘의 어둠보다 짙은 흑암이 쏟아진다.
용족의 권능.
암흑 투기를 불어넣은 뼈들이 운신을 방해해서 피할 수 없다.
애꾸눈은 X자로 팔을 모으며 오러 블레이드로 보호했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흑암에 삼켜지는 푸른빛.
애꾸눈은 부랴부랴 오러를 추가로 일으켰지만, 오러 블레이드로도 대항하지 못한 파괴의 힘 앞에서는 발악에 불과했다.
두 팔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뒤이어 몰아치는 흑색 광선이 심장을 꿰뚫었다.
"쿠후, 후욱."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고꾸라진 애꾸눈.
오랜 세월 동안 접경지역의 폭군으로 군림했던 괴물은 하나 남은 눈을 부릅뜬 채 최후를 맞이했다.
*
"헉, 허억."
주영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서브스튜드]로 위기를 벗어났지만, 흔들린 정신을 다잡지는 못했다.
"대, 대장 동무가. 기릴 리 없는디!"
부러진 왕의 피리.
김봉효의 상징이 반으로 잘린 의미가 무엇인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령민이. 무슨 일이가!"
"내, 내래 대타 뎍분에 살았소."
"뎐당은 어찌 되었어?"
"그기...."
주영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는데, 그 말을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돌아왔다.
"어떻게 되긴. 다 죽었나보네."
[고유 특성 - 도적의 7가지 도구]
[②. 길이를 재는 자]
푸아아악!
사각에서 날아든 단검.
길게 방출된 오러가 주영민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크으으윽!"
살기를 느끼자마자 몸을 비튼 주영민.
부랴부랴 오러도 끌어올렸지만 밀집도에서 차이가 난 탓에 방어하지 못했다.
"키하. 심장을 노렸는데 그걸 피해?"
단검을 든 여인.
뽀시래기 용병단 고문 김미정은 히죽 웃으며 단검을 잡았다.
"그냥 있지 그랬어. 고통만 더 길어질 뿐인데."
"간나새끼가! 려기가 어디라고!"
주영숙이 파르르 떨며 분노를 터트렸다.
"곧 없어질 인간사냥꾼 본거지잖아."
"어찌 왔네?"
"빌어먹을 고용주가 샛길을 잘 알더라고."
인간사냥꾼이 [서브스튜드]로 지정해놓은 몬스터들을 어디에 모아두는지.
회귀 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유진은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김미정을 잠입시켰다.
"이야. 새 고용주 말 따르기를 잘했어."
재미있잖아, 라고 중얼거린 김미정은 단검에 묻은 피를 핥았다.
인간사냥꾼의 주력은 이미 괴멸했다.
남은 인원은 영역 유지와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바깥에 나가 있는 상황.
몬스터를 다 잃고 부상까지 입은 주씨 남매의 입장에서는 김미정이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내래, 쉽게 안 듁는다."
"응. 반항 좀 해줘. 그래야 나도 즐기지 않겠어?"
개성 일대를 지배하는 군벌.
제5 혁명군의 대들보가 뽑히는 순간이었다.
190화 재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