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재개발
-으어어어.
해일처럼 몰려온 망자들이 개성을 휩쓴다.
주둔 중인 괴물들이 산발적으로 저항했지만 언데드로 이루어진 파도 앞에서 힘없이 휩쓸릴 뿐.
외부를 지키던 인간사냥꾼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합류하기도 했지만.
[당신들의 수준. 잘 알았습니다.]
서걱-.
키가 30센티미터 정도 낮아져버린 인간사냥꾼.
붕 떠오른 머리를 힐끗거린 송명석은 칼을 납검했다.
[시시해서 죽고 싶습니다.]
정예 병력은 개활지에서 몰살당했다.
인간사냥꾼 일부는 [서브스튜드]로 전장에서 이탈했지만.
대타로 지정해놓은 괴물들이 있는 곳에 김미정을 잠입시켜놨으니, 어떤 결말이 났을지는 안 봐도 VOD였다.
"선물."
"깜찍하게도 챙겨왔군."
툭-.
굴비처럼 엮어놓은 인간사냥꾼들의 머리.
핵심 멤버인 주씨 남매도 끼어 있었다.
"나머지는 어디 있나."
"몸통도 챙겨와주기를 바란 거야? 완전 날강도네."
"내 특기가 뭔지 잊어버렸나 본데."
6성 테이머의 시체는 구하기 어렵다고.
테이머가 희귀하냐고?
현 시간대에는 그렇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테이머로 전직할 수 있는 게이트가 개성 북쪽에 열렸으니까.'
인간사냥꾼 다수가 괴물을 사육할 수 있었던 비법.
헌터보다 괴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옛 북한 땅에서는 최고의 선택지였으리라.
"싹 챙겨와."
"염병."
김미정은 투덜거리면서 남은 시체 부위도 챙겨왔다.
"파프너야. 북쪽으로 가면 인간사냥꾼 잔당이 남아 있을 거다."
[항구가 더 급하지 않아?]
"거긴 유령선단을 배치해두었다."
30척까지 늘어난 선단.
이제는 함대라고 불러야 할 만한 규모로 성장했다.
작은 어선 따위로 유령선 함대를 지나가겠다고?
응. 마음대로 해봐라.
죽기를 희망한다면 차라리 접싯물에 코 박기를 추천해주겠다.
"그 편이 쉽고 고통도 덜하잖아."
[말본새하곤.]
"유령선에 잡혀서 영원히 노역하는 것보단 나을걸."
[블랙 컴퍼니라는 사명을 괜히 붙인 게 아니야.]
"그건 무슨 의미냐."
[북쪽으로 간다!]
저, 저저저.
하던 말은 끝까지 하고 가야지.
"사람이 거의 없군요."
"인간사냥꾼들이 먹이로 던져줬을 거다."
"끔찍한 작자들입니다."
강민호가 혀를 내둘렀다.
사람을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준다는 발상을 어떻게 했을까.
죽은 자들을 망자로 일으키는 유진이 훨씬 인도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형. 언데드들은 그대로 둘 거야?"
"저 친구들. 내 말 안 듣는다."
"이러다가 도시가 싹 밀리겠어."
"괜찮아. 어차피 밀어버릴 생각이었다."
"헐."
"왜 그렇게 놀라."
"고려의 수도였던 곳이잖아요. 다 밀어도 돼?"
"이미 개판이 된 곳이다. 차라리 밀어버리는 게 나아."
회귀 전에는 강민영이 말한 부분을 신경 썼지만, 남은 게 거의 없었다.
남대문 빼고는 모두 초토화 되었다니까?
설명해주는 것도 입 아프니 대충 둘러대고는 [데스 에어리어]를 다시 조작했다.
"북쪽으로 가라."
4만이나 되는 언데드 군대.
현재 유진의 제어능력으로는 모두 지배할 수 없다.
개성에 네크로폴리스를 세워도 수용 불가능한 숫자이니.
"근처 괴물들이랑 치고받다 보면 알아서 숫자가 줄어들겠지."
"오. 차도살인이라는 말임까."
"어려운 말을 잘도 쓰네."
네임드 언데드들은 모두 빼돌려두었다.
총 13구.
모두 중급 언데드이니 개성 방어에 투입하면 딱 맞겠어.
'여기까지 오는 데 1년 좀 안 걸렸나.'
개성.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시간을 되돌리기 전, 20년 가까운 시간을 머문 도시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검은 방첨탑을 무효화시키지만 않았어도.
그렇게까지 쉽게 패퇴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는 어긋나버린 시간선이니라.〕
'옛날 생각 좀 할 수도 있지. 그렇게 면박을 주냐.'
〔계약자여. 잊지 말지어다. 짐을 공경할 만한 영토를 획득하였으니.〕
'알았어. 신전 지어주면 되잖아.'
주는 것도 없으면서 바라는 건 많아요.
[역천의 가호] 이후로 입 싹 씻고 있으면서 말이야.
500년 역사를 품은 나라의 수도.
신전 터로 삼을 만한 땅은 넘치고도 남았다.
연평도처럼 형식만 겨우 맞춘 신전이 아닌, 제대로 된 건물을 지어줄 수 있을 터.
"태평들 하네. 적진 한가운데서."
"몸이 덜 풀렸나? 고문 나리께서는."
"흥. 그래도 손맛이 괜찮았어. 놈이 만전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김미정은 아쉬운 듯이 칼을 빙그르르 돌렸다.
하여간 전투광 기질은 여전하군.
연전으로 체력을 소모한 주영민으로는 싸움 욕구를 모두 해소하지 못한 듯했다.
"잔당 소탕은 언데드들이 알아서 해줄 거다."
나머지 인간사냥꾼은 말 그대로 잡졸뿐.
주의해야 할 건 북쪽에 있는 2군인데.
파프너 선에서 정리될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단 말씀.
"잘나셨어. 아주."
"내가 좀 대단하긴 해."
"염병할."
반박 못하겠죠?
콩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진 김미정을 향해 픽 웃어주었다.
"성민아. 그거 준비해라."
"예? 정말임까?"
"동업자 님. 또 뭘 하려고 그러십니까."
신준석이 불안한 표정으로 힐끗거렸다.
이 사람 봐라.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어.
척- 척-.
아공간에서 쉴 새 없이 나오는 캠핑 용품에 김미정과 신준석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이게 뭐야."
"동업자님?"
"밥 좀 먹고 하자. 급할 거 없잖아."
한국인은 밥심이야, 밥심.
이미 적 수뇌부는 모두 제거했고.
잔당은 파프너와 유령 함대, 그리고 망자들이 쓸어줄 것이다.
"인간사냥꾼을 몰아냈다고 끝이 아니다. 힘 쓸 일은 이제부터야."
"그러니까 꼭 최후의 만찬 같슴다."
"불길한 소리는 하지도 마라."
해치웠나, 랑 다를 게 뭐니.
짧게 투덜거린 유진은 차곡차곡 쌓인 식재료를 조리하기 시작했다.
*
파주 임진각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커다란 다리.
남과 북을 이어주는 가교, 통일대교는 많은 차량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정말로 인간사냥꾼을 몰아내다니."
"대장 셋을 모두 죽였대잖아. 몰아낸 정도가 아니지."
"잔당도 대부분 사망했다더군."
"국내 3강도 하지 못한 일을...."
대한제약과 성천 그룹에 고용된 헌터들은 쉼 없이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제5 혁명군.
개성에 똬리를 튼 군벌은 대격변 이후 한국을 종종 위협했다.
대표적인 것이 몬스터 웨이브였다.
"아라한 주가 떨어진 거 봤나?"
"하. 그 이야기는 왜 해."
헌터 한 명이 표정을 구기더니 전자담배를 물었다.
바람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연기처럼 떨리는 눈빛.
쯔쯧, 누군가가 혀를 찼다.
"애사심 가지고 투자해야지."
"주식 사면 거기도 내 회사거든? 주주잖아. 주주."
"그래서 다 잃었죠? 물 타야 하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각성 1년차가 인간사냥꾼을 밀어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믿냐."
아라한 길드의 선발대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반면, 유진과 블랙 컴퍼니는 10년 넘게 한반도 남쪽의 우환거리였던 인간사냥꾼을 단번에 토벌했으니.
대한제약과 성천 그룹의 주가는 폭증했고.
아라한 길드 관련 주는 미친 듯이 하락했다.
"요즘 한강 물 온도는 얼마나 되려나."
오늘따라 담배가 왜 이렇게 맛이 없니, 라고 헌터가 중얼거렸다.
물론.
개성행에 참여한 헌터 중 울상을 짓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모두 네 덕분이구나."
중절모를 쓴 노년의 신사.
성천 그룹 회장인 진성현은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회장님의 인복인 거죠."
"그 복을 물어다준 것이 현정이, 너란다."
마담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름으로 불려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슬슬 위험한 일에서 발을 떼는 게 어떠니."
"회장님.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진상을 파헤치고 있는 게냐."
"공적인 자리잖아요.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선을 긋는 마담의 말에 진성현은 허흠,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구나."
딸의 치료 의뢰 덕에 겨우 이어진 인연.
진성현은 더 조심스럽게 말할걸, 이라고 자책했다.
"뭘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래?"
"바깥양반 간호는 어찌 하고 왔누."
"이제 쌩쌩해."
정순임.
대한제약 회장도 이번 개성행에 참여했다.
"엉덩이도 무거운 사람이 현장에 나오니까 그렇지."
"호홋.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 차리겠어."
진성현과 정순임은 기업의 CEO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헌터이기도 했다.
7성과 6성.
두 사람이 참여한 것만으로도 개성 개발의 첫 삽이 성공할 확률이 대폭 상승했다.
'그만큼 큰 사안이라는 거죠.'
마담은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개성 쪽을 흘겨보았다.
블랙 컴퍼니, 그리고 천유진.
뽀시래기 팀만큼이나 그의 행보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마담이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야.'
혈석 채집에 딴죽을 걸 때만 해도 유망주라고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거미 사냥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남은 유산까지 탐욕스럽게 먹어치웠으며.
미친개 김미정에게 목줄을 채워놓고.
인간사냥꾼을 토벌해서 개성으로 향하는 길까지 열었다.
'더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그 사람에 의해.'
은하수 펍도 하루가 다르게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부산 쪽을 제외한 음지의 의뢰는 대부분 그녀의 손을 거쳐 지나갔고.
정보망은 더 넓어졌는데도 촘촘해지기까지 했다.
"근데 아가야. 너는 왜 넘어가니?"
"천 대표님께 직접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답니다."
"그렇구나. 잘 되기를 비마."
"호호. 오해하지 마세요."
갑자기 훅 들어온 정순임의 말에 마담이 웃음을 흘리며 넘겼다.
'이상한 말씀하시기는.'
둘 사이는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
처음 만났을 때 도움을 받긴 했지만, 서로에게 어떤 감정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정순임의 말 때문일까.
괜히 볼이 화끈거렸지만, 마담은 금세 마음을 가라앉혔다.
"언데드들이 길을 지키고 있다니. 살다 살다 신기한 걸 다 보는군."
"성자가 언데드를 사역하다니. 아이러니야."
두 회장은 길가 양 옆에 선 언데드들을 보며 감탄과 경악이 뒤섞인 말을 주고받았다.
간혹 막 생성된 몬스터가 출몰하기도 했지만 호위 병력이 나설 틈도 없이 언데드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내가 나설 차례가 없군."
진성현은 마법 지팡이를 슬쩍 내려놓았다.
큰 전투 없이 개성 공단까지 무사히 도달한 선행 팀.
개성 일대는 인간사냥꾼들이 게이트를 관리한 덕에 침식되지 않았다.
"쓸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문제이지만."
"배부른 소리. 몬스터가 안 나오는 게 어디야?"
"그도 그렇지."
대격변 이후 수십 년 동안 방치된 개성 공단.
멀쩡하게 서 있는 건물은 하나도 없고.
기계도 망가져서 고철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회사의 대표가 황폐화 된 개성 공단을 둘러보고 있을 때.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 천 대표!"
"직접 보는 건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유진이 대한그룹&성천 그룹 선행 팀을 마중 나왔다.
"괜히 바쁜 사람 불러낸 것 같구먼."
"이렇게 빠져나와야 저도 좀 쉬지 않겠습니까."
진심이다.
개성 일대를 네크로폴리스로 만드는 대공사.
파프너와 송명석을 비롯한 [합일]로 자의식을 가진 언데드들이 노동에 힘쓰고 있으며.
미래의 대연금술사께서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라는 울부짖음과 함께 도시 곳곳에 마력 회로를 새기는 중이었다.
뽀시래기 팀도 개성 인근을 순찰하며 인간사냥꾼의 흔적을 찾거나 몬스터를 토벌하는 등, 한시도 쉬지 못하고 있으니.
"허허. 그래도 적당히 쉬면서 하시게. 몸이 제일 소중한 자산이니."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진성현은 허허로이 웃으며 유진의 건강을 염려했다.
"대표님."
"마담?"
뜻밖의 인물이 개성 개발 선행팀에 끼어 있는 것을 보고 유진이 놀라서 대꾸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직접 왔어요."
"꽤 급한 일인가 보네."
"1주일 전, 나찰 길드에서 움직인 정황이 포착됐어요."
유진의 뺨이 잘게 떨렸다.
191화 허수아비
"아. 나찰 길드?"
"생각만큼 안 놀라시네요."
"와아. 너무 놀라워라. 지금 놀라서 볼 떨리는 거 안 보이나봐."
"놀라는 게 아니라 웃는 거죠. 그건."
"티 났나."
유진은 크흐흐흐, 하고 낮게 웃었다.
나찰 길드?
와 보라지.
저번에 혼쭐난 걸로 모자랐나보군.
"너무 여유 부리시는 것 아닌가요."
"왜. 전력 1/3을 말아먹은 녀석들이 또 와봤자 재미나 보겠어."
"그때는 대표님이 있었죠."
"맞는 말이네."
유진은 순순히 수긍했다.
"아라한에서 쓸 수 있는 패는 한정되어 있다. 그건 예상 범위 내야."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인가요?"
"섭섭하지 않을 정도는."
유진이 히죽거리고 있을 때.
접경지역에 위치한 네크로폴리스에서는 피 튀기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주인님의 명령입니다. 죽어주십시오.]
[익스플로전]
주황색 빛줄기가 타원 형태로 퍼져 나간다.
5성 화염 마법 중 파괴력만 놓고 보면 수위에 꼽히는 마법.
익스플로전에 휘말린 나찰 소속 헌터들은 뼈도 남기지 못하고 가루가 되었다.
"저 해골부터 죽여!"
[돌진]
[맹렬한 도약]
광역 공격 후에 무력화된 술자를 노리는 헌터들.
촤라락.
헌터들의 공격이 닿기 직전, 뒤에서 솟구친 나뭇가지가 이승연의 허리를 휘감았다.
쿵, 지면을 찍은 망치가 공허한 소리를 토해냈다.
"빈집이라며? 빈집이라며!"
"저 괴물은 뭐야!"
"나무??"
변종 생장목을 베이스로 한 시체 나무.
원래는 공격 기능 따위 없었지만, 모체가 된 나무의 영향을 받아 필리핀 때와 동일한 능력을 얻었다.
유진 일행을 고전시켰던 만큼의 전투력은 아니지만.
전장에 화력을 투사하기보다 수비 담당 언데드 부대 보조에 전념했다.
[안광]
사이클롭스의 원거리 공격도 만만치 않은 위협이었다.
초음속으로 날아드는 검은 광선.
미리 방어하지 않으면 4성급 무투계 헌터도 뼈를 추리기 어려울 만큼 강력했다.
"어떻게든 뚫어!"
"성수를 사용해라."
"신성 주문이 담긴 스크롤도 있다."
나찰 길드처럼 불법적인 영업을 주력 삼는 조직은 신관계를 영입하기 어렵다.
신관계는 모시는 성단이나 성좌에게서 힘을 받는 직업군.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면 능력치가 하락하거나 주문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돈으로 해결하면 돼."
아라한 길드에서 공수한 대책.
신성 스크롤.
양피지를 뜯자 환한 빛이 드리우면서 안개를 몰아냈다.
산 자에게는 활기를.
언데드한테는 무기력함을 선사하는 빛이 전장 일대를 휘감았다.
"침착하게 전진해."
"대형을 갖춘다. 방어 마법과 스킬로 저 눈깔 빔을 막아."
나찰 길드 헌터들은 대열을 갖춰 천천히 전진했다.
골탑에서 날아온 포탄도 튕겨내고.
사이클롭스의 안광 공격도 어찌어찌 버텨가며 느리지만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을 때.
시체 나무에 붙어서 영력을 회복한 이승연이 휙, 날아들었다.
[익스플로전]
나뭇가지를 허리에 감은 채로 수십 미터를 훌쩍 뛰어넘어 접근.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키자 밀집해 있던 헌터들이 폭발 반경에 휘말렸다.
신성 스크롤로 일으킨 순백의 막이 찢어발겨지고.
방어마법이 사시나무 흔들리듯 파르르 떨렸다.
[안광]
대열이 흐트러진 것을 놓치지 않는 사이클롭스들.
"커헉."
"켁."
뭉쳤다가 더 큰 피해를 본 나찰 길드.
간격을 두고 날아든 시체 나무의 가지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쏙 빼갔다.
"씨X. 번지점프도 아니고."
"놀이기구는 다른 곳에서 타라고!"
안으로 파고들어야 하는데.
네크로폴리스 수비군의 화망이 워낙 촘촘해서 틈을 찾지 못했다.
전방에는 하급 언데드들이 길을 막고 있고.
길가 곳곳에 세워진 본 월들이 이동을 제한하고 있으니.
나찰 길드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광역 마법으로 전방의 언데드를 쓸어버리는 건?"
"더 있을 가능성도."
"빌어먹을 안개."
신성 스크롤로 안개를 최대한 걷어내고.
안개를 꿰뚫는 고유 특성이나 마법을 사용해도.
전장 전역을 살펴볼 수 없어서 네크로폴리수 수비 병력이 얼마인지 파악이 안 됐다.
[안광]
콰아앙!
무투계 헌터 한 명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나풀거리며 고꾸라졌다.
이미 접경지역을 뚫고 오느라 피로도가 상당히 누적되었다.
만전의 상태도 아닌데, 상대는 홈그라운드의 이점까지 철저하게 이용하니.
'형. 이거 맞는 거야?'
나찰 길드장 박진수는 이를 바득 갈았다.
인간사냥꾼과 대전을 벌이는 동안 텅텅 비었을 거라고 한 네크로폴리스.
한데.
이만한 전력을 두고 갔다고?
나찰 길드가 올 줄 알고 함정을 판 모양새다.
"두목!"
산발 된 머리로 헐레벌떡 달려오는 여인.
불타는 산 쪽으로 파견한 헌터였다.
"Yo. 브로."
"인간사냥꾼 놈들. 다 뒈졌는데요?"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안개에서는 통신 안 된다고 뛰어오라고 했잖아요."
아, 그랬지.
발이 빠른 조직원을 전장 근처로 잠입시켜서 상황을 살펴보라고 했었다.
접경지역을 가로질러서 용케도 온 길드원.
칭찬해야 할 일이지만, 박진수에게는 그만한 여유도 없었다.
"텄네."
"네?"
"망했다고. 다들 엉덩이에 땀띠 나게 튈 준비 해."
인간사냥꾼이 졌다?
두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식.
부하가 거짓을 고할 리 없으니, 박진수는 판단을 빠르게 내렸다.
"적 본대가 오면 다 뒈지니까. 큰 거 한 방 쏘고 튄다."
거침없는 판단.
함정이 아니라면.
더 심각한 상황이다.
인간사냥꾼은 배다른 형인 이신우의 조력으로 애꾸눈까지 길들였을 터.
그런 적을 물리친 본대가 회군하면.
확실하게 죽는다.
"두목. 그래도 조금 더 몰아치면 뚫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뒈지면 무슨 소용이야. 브로?"
네크로폴리스 수비군은 까다로운 상대다.
그렇다 해도.
나찰 길드에서 피해를 감수하고 돌파하면 못 이기진 않을 것이다.
인간사냥꾼이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방어 병력이 많지 않다는 의미니까.
"저 친구들 꼴 나기 싫으면 돌아가자고."
박진수가 침을 질질 흘리는 좀비를 가리켰다.
"...예."
"큰 거 한방 부탁~ 해요."
[전격계 - 5성]
[라이트닝 보텍스]
하늘에서 내리 꽂히는 세 갈래의 노란 번개.
나찰 길드 별동대를 향해 다가오던 언데드들이 뇌전에 휩쓸려서 바싹 구워졌다.
"튀어!"
한 마디 외침과 함께 뒤도 안 보고 뛰는 박진수.
나찰 길드원들은 그 모습이 익숙한 듯 한숨을 쉬고는 전장을 이탈했다.
[적. 도망간다.]
이승연의 허무한 사념이 공기를 맴돌았다.
*
네크로폴리스를 침공했던 나찰 길드가 수비군에게 막혀 패퇴했을 때.
유진은 개성 개발에 신경을 집중했다.
[너무 태연한 거 아니야?]
"검은 방첨탑이 무너졌으면 신호가 올 거다."
링크되어 있는 검은 방첨탑.
하나만 부서져도 연결된 모든 방첨탑이 마비된다.
꽤 치명적인 페널티지만, 이 근방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였던 애꾸눈과 인간사냥꾼을 처치한 마당이니 조금은 안이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은 개성 개발에 집중하자고."
[태평하기는.]
망자들은 북쪽으로 향했다.
죽은 자들의 발에 짓밟혀서 깨끗하게 밀려버린 개성.
유진의 머릿속에는 재개발의 청사진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과거에 세운 형태 말이더냐?〕
'조금 바꿀 거야.'
회귀 전에 세운 네크로폴리스는 기습에 취약했다.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말랑말랑한 배가 노출되는 형태.
검은 방첨탑 하나만 무효화하면 영지 전역에 드리운 버프가 사라지니, 그 약점은 치명적이다.
〔공단 쪽을 작은 인간들에게 내준 것은 그 때문이로구나.〕
'오. 척하면 척이네.'
공단 일대는 네크로폴리스로 진입할 길목이자, 방파제 역할을 해줄 것이다.
〔계약자처럼 욕심이 과한 작은 인간이 자신의 몫을 양보할 때 알아봐야 했거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매사를 비뚤어진 눈으로 보셔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성좌 나리.
본격적으로 개성을 재개발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지."
유진은 손을 비볐다.
"형. 다 되살릴 거야?"
"새삼스럽게 왜 물어보냐."
"음. 사람을 먹이로 던져준 자들이잖아요. 느낌이 좀 거시기해서."
"그러니까 더 봉사해야 하는 거다."
뼈가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할 때까지 부려먹어야지.
합일로 의식을 살려놓으면 그 편이 더 고통스러울 거다.
"여기 젠장무새도 하나 있잖아."
[제기랄.]
메이 샤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인간사냥꾼 시체는 약 50구.
훼손이 심한 것들을 제외한 숫자다.
'김봉효도 언데드로 만들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놈의 시체는 토마토 캐첩처럼 으깨져버렸다.
지박거인으로 암흑 투기까지 일으켜서 뭉개버렸으니.
온전한 형태가 남아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반 토막 나버린 [왕의 피리]와 머리를 건진 게 고작이라고.
〔머리만으로 제작 가능한 언데드는 없느냐?〕
'다른 곳에 쓸 데는 있지만 단독 개체로써는 의미가 없어.'
김봉효의 머리는 킵.
남은 건 주씨 남매를 포함한 인간사냥꾼들이다.
"이리로 오라."
[다크 콜링을 사용합니다.]
사체 곁을 돌고 있던 남매의 혼백에 저주의 낙인이 찍혔다.
-끼아아악!
-카학!
생전에 6성의 경지까지 올라갔던 강자들.
혼을 좀먹는 저주에 비명을 지르며 힘껏 저항하지만.
저주를 거는 사람이 유진인 만큼 금세 잠잠해졌다.
"격이 떨어지는 경험은 어떨지 모르겠네."
-카하학, 칵.
"아. 너무 좋다고?"
-카흐흐흑.
망령은 최하 등급의 유령.
둘의 영혼이라면 스펙터를 넘어 상위 악령인 네크로조마도 만들 수 있을 거다.
'지금은 합일이 목적이니, 그럴 필요는 없지.'
흠흠-.
짧은 헛기침과 함께 집중력을 끌어올린 유진은 지팡이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내 부름에 답하라."
[언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50구에 달하는 망자들이 어기적거리면서 일어난다.
초점 없는 동공.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나 가래, 혹은 피가 흘러 나왔고.
뚫린 심장이 훤하게 드러나는데도 태연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영락없는 망자였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데?]
"생김새는 그냥 좀비지."
이번에 제작한 언데드는 조금 특이한 종이다.
[좀비 스케어클로]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150 / 민첩 : 123 / 체력 : 174 / 맷집 : 132 / 영력 : 580
◎특성
▷죽음 전파사[B] / 불사의 존재[B-]
◎스킬
▷죽음의 행군[B] / 죽음의 발자취[B]
4성이면서 스탯은 2성 몬스터가 툭 쳐도 죽을 만큼 허약하고.
고유 특성과 스킬도 빈약하다.
[이름대로 허수아비잖아.]
"그래. 이 녀석의 역할은 허수아비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하는 언데드.
그게 좀비 스케어클로다.
특성으로 붙은 죽음 전파사는 좀비 스케어클로 전용인데, 반경 500미터에 언데드 전용 버프를 제공해주고.
죽음의 행군은 영력을 소진해서 추가 버프 효과까지 부여.
마지막으로 죽음의 발자취는 버프 대상으로 들어온 언데드들이 밟은 땅을 네크로폴리스처럼 만드는 효과가 있다.
[뭐야. 영지 바깥에서 싸우면 3중 버프를 주는 거네?]
"죽음의 행군은 영력 소모가 심하지 않아. 전투 지속력도 괜찮다."
[와. 또 뭔 괴물을 만든 거야.]
글쎄.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한걸.
좀비 스케어클로 중 확실하게 [합일]이 가능한 건 두 개체.
나머지 혼백도 차례차례 타락시켜서 싱크를 맞춰봐야겠지만.
더 강화된 녀석을 보면 입이 쩍 벌어질 거다.
192화 첫 삽은 크게
[합일을 사용합니다.]
주씨 남매를 필두로 육과 혼이 겹쳐진 언데드는 총 17구.
생각보다 많이 건졌다.
-크억, 컥. 으으으. 네가 원망스럽다.
"거슬리는 사투리 안 써서 마음에 드네."
말투는 지배력으로 강제 교정.
원망 섞인 흐느낌이 오히려 선녀처럼 들린다.
"귀곡성을 즐기다니. 역시 형은 보통이 아니야."
"선배. 하루 이틀 아니지 말임다."
"정신과에 예약이라도 잡아둘까."
"다 들린다."
뭐?
정신과가 어째?
두 사람은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며 유진의 시선을 피했다.
"처신 잘해."
"옙."
경고 한 마디 남기고는 개성 남대문 앞에 섰다.
'일단은 검은 방첨탑부터.'
발아래에 흐르는 강력한 영력의 흐름.
오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지리적 위치가 합해진 결과물이다.
"동업자님."
"왜?"
"남대문 말입니다.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곳 아닙니까."
"그래서 더 적합한 거다."
영맥의 흐름이 가장 센 곳.
로마노프 가문이 쳐들어오면 어차피 부서질 텐데.
미리 부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그대는 이미 미래를 꽤 바꾸었느니라. 공존의 길을 모색할 수도 있을 터인데.〕
'안 돼. 그 놈들은 틀려 먹었어.'
로마노프 가문은 모든 신비와 마법에서 정상에 서기를 원한다.
화해?
공존?
그딴 건 있을 수 없어.
선택지는 무릎을 꿇거나 저항하는 것뿐.
'올림포스에도 똥칠해야 한다며.'
〔호오. 짐과 나눈 언약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안 잊어버려.'
카리만리스 가문.
그리스에 위치한 7대 명가이자, 제우스를 수호성으로 두었다.
같은 7대 명가인 로마노프가 호시탐탐 흑해 아래를 노린 탓에 반쯤 종속되어 있지만.
'아직은 아니던가.'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나비효과고 뭐고.
두 가문의 상하관계는 확정된 미래나 마찬가지다.
마법왕은 세븐 스타 중에서 최강의 존재.
세월이 흐르면서 7대 명가의 수장 전원이 9성에 도달하지만, 그 중에서도 무왕 창 우페이 말고는 대적할 이가 없었다.
〔그대는 어떠했느냐?〕
'아우라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겼지.'
〔진실로 그리 생각하는고.〕
'아잇, X팔.'
영력 기반 모든 능력이 90% 경감되는 꼴 한번 볼래?
크로노스의 도발에 미간을 찌푸린 후, 검은 방첨탑을 건설했다.
개성 남대문을 밀어버리면서 솟구친 불길한 탑.
[영지 규모 - 1]
[강령술 증폭 범위 - 1km]
[사역 가능 언데드 개체 수 - 100]
[영력 농도 – 5]
땅 아래로 흐르는 강대한 영력이 검은 방첨탑과 연결되었다.
잘게 흔들리는 탑.
영력의 흐름이 너무 강해서 구조물의 내구도가 깎여나갈 정도였다.
"링크한다."
[검은 방첨탑 네트워크 - 12]
왜 11이 아니라 12냐고?
이럴 줄 알고 전장으로 삼은 개활지에 방첨탑 하나를 세워두고 왔다.
불타는 산 - 개활지 - 개성으로 이어지는 방첨탑 네트워크.
거세게 몰아치던 영력의 파도가 서서히 안정을 되찾는다.
"좋아.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7천가량 남은 언데드 군대를 검은 방첨탑에 귀속시키고.
언데드들과 좀비 스케어클로 수십을 도시 각지에 흩어놓았다.
시커멓게 물드는 대지.
검은 방첨탑 하나로는 네크로폴리스의 영역을 넓게 퍼트릴 수 없지만.
좀비 스케어클로의 영향권 안에 들어온 언데드들이 땅을 밟으면서 확장된 것이다.
[영지 규모 - 1(3)]
[강령술 증폭 범위 - 1(15)km]
일시적으로 늘어난 네크로폴리스.
딸랑 검은 방첨탑 하나 지어놨는데 여태 본진으로 삼았던 곳보다 더 넓은 범위를 지배하게 되었다.
[주인. 영역 넓힌 건 좋은데. 아무것도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방첨탑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영력 차이가 있지."
좀비 스케어클로를 거둬내면 도로 줄어드는 영향력.
그렇지만.
이 상태를 유지하면 퍼올릴 수 있는 영력의 양이 훨씬 늘어난다.
"재료만 있으면 영지를 빠르게 구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호.]
"그러면 할 일은 정해져 있지 않겠어?"
[일 시킨다는 말을 잘도 하네.]
"너희도 다녀와라. 밥 먹은 값은 해야지."
"예."
"동업자 양반은 빼고. 나랑 할 일이 아주 많아."
뽀시래기 팀에 껴서 슬쩍 빠지려던 신준석이 쯧, 하고 혀를 찼다.
*
[마력 회로]
땅 아래에 새겨지는 마력의 통로.
신준석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훑었다.
"이제 끝입니까?"
"동쪽은."
"아. 잠깐."
"남쪽은 개성 공단이니까 빼고. 북쪽이랑 서쪽만 하면 되겠다."
"저기. 동업자님?"
"수고해줘."
"야!"
미래의 대연금술사는 역시 달라.
고작 반나절 만에 그 방대한 마력 회로를 깔아놓다니.
덕분에 영맥의 출력이 12% 상승했다.
개성 전역에 깔아놓으면 40%까지도 기대할 수 있겠어.
[옜다.]
"난 아직 배고프다."
[우리. 인간사냥꾼 몰아내고 한 번도 안 쉰 거 알지?]
[주군의 명령입니다. 뼈가 닳도록 일해야지, 그게 무슨 망언입니까.]
참 충성스럽구나.
너무 믿음이 간다, 가.
[응. 간신배의 말 잘 들었고요.]
[파프너. 그대가 언제까지고 주군의 대전사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냥 얘 시켜줘. 너무 시끄럽잖아.]
대전사라고 불려도 특별히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송명석이 왜 저 호칭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놈이 원하는 걸 쉽게 주면 그렇지.
"파프너보다 더 많은 사냥감을 가지고 오면 인정해주마."
[크크. 들었습니까?]
[음. 그게 될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입니다. 각오하십시오!]
파프너가 원망 섞인 눈으로 유진을 흘겨 보았다.
왜.
대전사 호칭 넘겨주잖아.
조건부이긴 해도 말이야.
[더 귀찮아졌네.]
"그럼 져주든가."
[아. 그건 좀 싫지. 승부라고 하면 이야기가 다르잖아.]
호승심 하면 파프너도 빠지지 않는다.
성위 자체가 다르고.
비행까지 가능한 파프너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하여간 짓궂어.]
"동기부여지. 사소한."
[두 번만 하면 사람도 죽이겠어.]
개성은 영력이 충만한 땅.
처음 네크로폴리스를 세울 때와 달리, 유진의 성위도 꽤 올랐다.
구조물을 세우는 데 필요한 살점과 피, 그리고 뼈만 있으면 무한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
"당분간 쉴 생각은 마."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죽음의 전당을 완성했습니다.]
[강령술 연구소를 완성했습니다.]
[거인의 묘소를 완성했습니다.]
[불경스러운 묘지를 완성했습니다.]
....
파주 북쪽에 지었던 구조물들을 모두 개성에 재현하는 건 기본이요.
[희생의 구덩이 x 3을 완성했습니다.]
-시체를 영력으로 숙성시키는 구덩이입니다.
[도살장 x 2를 완성했습니다.]
-뼈와 살점을 이용해서 각종 기구를 제작합니다.
[흉물의 조각상 x 15를 완성했습니다.]
-시체를 덕지덕지 붙여 만든 조각상입니다. 영력 출력을 상승시켜줍니다.
불경스러운 묘지의 상위 테크이자, 숙성 효과가 더 뛰어난 희생의 구덩이들.
시체 마차 같은 기초적인 기구를 넘어 공성 병기급 언데드(기구)를 제작하는 도살장도 짓고.
영력을 증폭시켜주는 흉물의 조각상은 개성 여기저기에 박아놓았다.
〔짐이 거할 처소가 없구나.〕
'거 참. 있어봐. 신전은 이따 지어준다고.'
〔언제까지고 기다리란 말만 할 게냐!〕
으휴.
크로노스의 잔소리에 못 이겨 개성 근처의 영령지를 찾아보았다.
가장 좋은 터는 고려 시대에 건설되었던 보제사의 터.
왜 터라고 지칭하냐, 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훌륭하도다. 예로부터 남아 있는 정기가 충만하여 영령지로서 최적의 입지로구나.〕
'명색이 한반도 최고의 절, 이었던 장소니까.'
고려 때의 일이지만 말이야.
불타버린 지 수백 년은 되어 있어서 성단의 항의가 올 일도 없다.
입지의 조건만 놓고 보면 최상이군.
〔계약자여.〕
'뭔 말 하려고 분위기를 잡아.'
〔뼈나 살점 같은 것으로 짐의 처소를 꾸미려 한다면 좌시하지 않겠도다.〕
'네크로맨서한테 뭘 기대하는 거야!'
〔그대는 짐을 섬기는 유일한 신자이자, 성자이다. 잊지 말아라.〕
크로노스의 요구사항은 많았다.
적합한 영령지를 선정해서 뚝딱 세우면 끝날 줄 알았건만.
신도들이 아닌, 무관계자가 봐도 존경심이 무럭무럭 샘솟는 아름다운 신전이어야 한다나.
"진 회장님. 사람 좀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어느 분야인지 말씀해주시죠."
"신전을 지어야 합니다."
"성자님께서 모시는 분을 기리기 위함인가보군요."
"뭐, 그렇죠."
진성현은 흘흘 웃었다.
"건설사 하나를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그, 성좌 나리의 요구사항이 좀 많아서요. 까탈스러울 겁니다."
"딸아이를 구해주신 성좌님 아닙니까. 어떤 주문을 하시더라도 맞춰드려야지요."
목내이병을 치료한 결정적인 포인트는 유진의 회귀 전 지식이지만.
진 회장 입장에서는 크로노스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금액도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너무 통 크신 거 아닙니까?"
"흘흘흘. 저한테 기회를 주시니 그게 더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사양하면 안 되겠군!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려는 것을 꾹 참으며 감사를 표했다.
마침 개성 공단 개발을 위해 관계사의 직원들이 올라와 있는 상황.
관계자들과 미팅을 바로 가질 수 있었다.
"천 대표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크흐흐. 감사합니다. 개성에서 일하시는 건 괜찮으신가요?"
"몬스터들은 대표님이 막아주시니 할 만하죠."
가벼운 덕담을 나눈 후,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진 회장님께 말씀은 들었습니다. 신전을 지으시겠다고."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아십니까?"
"모를 수 없죠. 그런 스타일을 원하시는 모양이군요."
"세세하게 들어가면 조금 다르지만요."
파르테논 신전은 강민호의 배후성인 아테나를 모시는 곳.
고고한 티탄 신족의 취향은 좀 다르단다.
어휴.
〔왜 한숨을 쉬느냐!〕
'울어버릴 순 없잖아.'
아.
눈물 난다.
크로노스가 불러주는 요구사항을 뇌에 걸치지 않고 바로 이야기해주었다.
잠자코 유진의 말을 듣던 건설사 쪽 사람은 음- 음- 하고 추임새를 계속 넣더니.
"느낌이 오는군요."
"예?"
아니. 그걸 듣고 어떻게 느낌이 와.
어안이 벙벙한 유진의 반응에 건설사 쪽 사람이 자신 있게 답했다.
"맡겨주십시오. 예시 이미지 하나 뽑아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노트북까지 가져와서 브리핑하는 건설사.
크로노스는 프로그램으로 만든 신전의 이미지를 보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훌륭하구나! 짐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것 같은 모습이니라.〕
'내가 볼 땐 파르테논 신전이랑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세세하게 보면 다르지 않느냐.〕
아 몰라요.
그렇게 말해줘도 그 놈이 그놈처럼 보인다고.
"...성좌 나리는 마음에 드신다네요."
"다행이군요."
"바로 시공 들어갈 수 있습니까?"
"공단 쪽 인원은 빼기가 어려우니 본사에 요청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전이라.
연평도에 세운 신전이 있으니, 후순위로 생각했는데.
크로노스가 성화를 부려 엉겁결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성자 노릇을 하려면 제대로 된 신전이 있는 게 낫겠지.'
오히려 좋아.
개성 공단도 오픈한 마당이니.
네크로폴리스 안에 신전 하나 더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일까.
신전이 지어지면 〔역천의 거인〕 홍보도 할 수 있고.
혹시 알아?
크로노스를 모시는 신관이 생길지도.
193화 2달이면 강산이 변한다
인간사냥꾼이 토벌되고 2달이 지났다.
"와. 벌써 건물이 들어섰네."
강민영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개성 공단 부지를 둘러보았다.
하늘 높이... 는 과장이지만 10층이나 되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은 꽤나 이질적이었다.
"요즘은 마도공학과 공법을 섞어서 금방 세운다더라."
고작 2달 가지고 놀라기는.
회귀 전에는 2달이 뭐야. 2주면 빌딩 하나를 올리더라.
"형. 우리 사무실은 어디예요?"
"저기 있다."
검지를 뻗는 유진.
앞서 본 건물보다 조금 작지만, 그래도 7층이나 되었다.
"형님. 저희는 몇 층을 쓰면 됩니까."
"몇 층? 다 너희 거다."
"예?"
"뭘 되물어. 용병단 규모가 있는데 한 층으로 되겠냐."
강민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혀, 형님!!!"
"그라운드 제로에 본부 두면 눈치도 보이잖냐."
"어떻게 건물을 통째로!"
"헐. 우리 조물주 위에 있는 건물주 된 거야?"
거울 사냥꾼으로 불렸던 남매는 서로를 잡고 방방 뛰었다.
허 참.
이런 걸로 좋아하긴.
"너희가 작정하고 벌면 금방 사거든?"
"아. 그래도. 감동 깨지 마. 형."
"건물주란 단어는 사나이의 마음을 울리는 진동이 있습니다."
으으음.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뽀시래기 용병단 수입만 달에 10억 단위요.
회사 간부인 두 사람한테 돌아가는 돈도 어마어마한데.
네크로맨서가 된 뒤로 늘 건물주(?)로 보낸 유진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저는 뭐 없슴까!"
"무슨 소리야. 너도 당연히 공동소유지."
"야호오오!!!"
거 참.
아주 검소(?)한 친구들이야.
대한제약과 성천 그룹이 합동 투자해서 개발한 공단.
환골탈태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바뀌었다.
고층 건물.
아이템 제작 공장.
그 외에도 여러 사업체들이 빠르게 입점했고.
지금도 땅을 갈아엎으며 새 건물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참. 형은 무슨 일로 왔어?"
"티가 나냐."
"건물 소개만 해주려고 온 것 같진 않아서."
"협회에서 보자더라고."
"헌터 협회?"
"다른 쪽에서 볼 일은 없지."
헌터 협회도 신축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들였다.
이른바 개성 지부.
잃어버린 고토 회복의 거점으로 개성을 삼겠다는 의도가 또렷하게 보였다.
"또 뵙는군요."
"그러게요. 양성수 개발부장님."
"허허. 이름까지 기억해주실 줄은. 영광입니다."
전생에도 알던 사이인 걸.
"그... 동행하신 분은?"
"우리. 구면인데."
"죄송합니다. 어디서 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군요."
"내 명예를 당신이 회복시켜줬잖아."
"...아?"
양성수 부장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박하늘 님?"
"기억하고 있네."
"근육이 많이 빠지셨습니다."
"다이어트 좀 했어."
천연덕스러운 파프너의 말에 양성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저도 다이어트 비법 좀 알려주시죠."
"기회가 되면."
얼마나 다이어트를 해야 그 정도까지 뺄 수 있는 거니.
파프너를 힐끗 봤지만 못 본 척 능청을 떨었다.
"늦었지만 인간사냥꾼 토벌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년을 말씀하셨을 때도 다들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는데, 반년도 안 돼서 해내셨군요."
"제가 능력이 좀 됩니다."
"한국의 그 누구도 천 대표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양성수의 눈에는 호감이 듬뿍 묻어났다.
"참. 바쁜 분 모셔다놓고 잡설이 길었군요."
"윗선에서 개성 개발권을 두고 말이 나온 겁니까?"
"그건 제 선에서 막을 수 있습니다."
책임진다는 말.
양성수는 과거에 했던 말을 뚝심 있게 지켰다.
그렇다면....
"개성 너머의 재개발과 관련된 문제군요."
"예. 말씀하신대로입니다."
"너무 잘난 것도 문제네요."
"높으신 분들도 인간사냥꾼을 단독으로 몰아낼 줄은 몰랐던 거죠."
정부에서 약조한 권한은 다음과 같다.
-유진이 토벌한 영역에 대해서는 개발 권한을 보장한다.
다시 봐도 파격적인 권한이지?
아라한 길드도 단독으로 북진을 벌일 만한 힘이 부족한데.
각성 1년차 헌터가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이벤트성으로 허용한 것이다.
문제는.
"개성 너머에서도 같은 룰이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네.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부에서는 향후 대표님의 방향성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입찰할 곳을 알려달라?"
"예."
양성수가 말을 돌려서 했지만, 말하는 건 뻔했다.
북진 때 정부나 민간단체가 오갈 수 있는 루트를 완전히 봉쇄하지 말아달란 것.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어떻답니까?"
"제가 그 분들 대변할 정도의 직급은 안 됩니다."
"양 부장님. 짐작은 하잖아요."
"서해를 끼고 해주를 탈환, 평양까지 길을 확보하고 싶어 하실 겁니다."
"역시 그렇겠죠?"
옛 북한 땅은 남한보다 더 산지가 많다.
게이트 초동 관리도 실패해서 50% 이상이 침식지역이기도 한 상황.
산지에서 몬스터까지 나온다?
이북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긴 어렵다.
"좋습니다. 그럼 양보하죠."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맨입으로는 안 합니다."
"교섭의 여지가 있다는 걸 높으신 분들에게 어필할 수 있기만 해도 됩니다."
헌터협회는 정부에서 관리 중인 공기업.
부장 급이면 꽤 높은 위치지만, 정부를 대변하기에는 모자랐다.
유진과 안면을 튼 사이이니 찍먹 해볼 겸 보낸 상황.
'이 양반하고는 얼굴 붉힐 필요 없으니까.'
회귀 전에도 자신의 편의를 제법 봐주었던 사람이다.
이번에도 제법 힘을 썼을 테고.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대답지 않은 태도로다.〕
'높으신 분이 직접 행차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아무렴.
그때에는 최대한 벗겨 먹을 것이다.
다른 노림수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지켜보면 알 터.
〔한데 이번 생에서는 네크로폴리스를 넓게 확장한다 하지 않았느냐?〕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 거기만 있는 건 아니야.'
산지를 관통하면 황해도 내륙에 위치한 사리원 시가 나온다.
조금 더 올라가면 바로 평양이고.
해주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는 루트를 확보하겠다?
글쎄.
직선거리로는 산지를 통과하는 게 더 빠를 텐데.
평양에 먼저 도달하는 건 누가 될까.
"높으신 분들이 참 좋아하겠군요."
"저야 월급쟁이지만 말입니다."
높으신 분이 오면 뭘 뜯어내야 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
인간사냥꾼 치하의 개성은 말 그대로 거지꼴이었다.
괴물의 먹이로 잡혀온 사람들이 남긴 생활 쓰레기나 분뇨.(망자들이 도시를 덮쳤을 땐 몬스터의 밥으로 모두 던져줘서 아무도 없었다)
혹은 게이트가 빚어낸 몬스터들이 수용실에 갇혀 있었고.
민가 대부분은 방치되어 반쯤 폐허나 마찬가지.
유진이 개성의 새로운 집주인으로 입주하고 2달이 지났을 땐,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 눈에는 거지꼴이 나아 보일걸.]
"왜. 이 웅장한 모습을 보라고."
[온통 시커멓잖아.]
먹물을 쫙 뿌려놓은 것처럼 시커멓게 물든 도시.
고려 왕조의 전통이 숨쉬... 진 않고, 인간사냥꾼들이 파헤쳐서 옛 흔적이 얼마 남아있지 않던 도시는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나름대로 고층 빌딩도 세웠다."
[아. 마탑.]
개성 남대문이 있었던 자리 옆에 지어진 100미터 높이의 구조물.
흑색 마탑, 네크로맨시와 암흑 분야 마법에 특화된 건물이다.
[저거 만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결과가 좋으면 된 거야."
뼈와 살점, 그리고 영력에 물든 흙만 있으면 척척 완성되는 네크로폴리스의 구조물.
흑색 마탑은 건물 규모가 크고 내부에 조율해야 할 요소가 많아서 자동 공정으로만 맡겨둘 수 없었다.
"시체 나무도 조만간 옮겨 심든, 묘목을 심어놓든 해야지."
[뼈 가공한다고 왔다갔다 엄청 했잖아.]
주춧돌을 대신하는 뼈.
축을 맡은 뼈.
그 외에도 마탑의 구조에 필요한 뼈는 세심한 가공이 필요했다.
유진이 하나하나 붙들었다가는 한 세월이 걸렸을 터.
하면 어떻게든 결과가 나왔겠지만,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엄청 쌓여있어서 시체 나무에 가공을 맡겨놓았다.
그 뼈를 수송한 게 파프너였고.
"동업자 양반도 엄청 고생했지."
[불쌍하더라.]
"왜. 본인도 좋아했으니 된 거 아닐까?"
[너어는 진짜.]
흑색 마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마법을 전수하는 곳이자.
공방이기도 하고.
강력한 방어탑 역할도 겸한다.
[나선 회로]
영력의 흐름을 꼬아 제곱으로 강화시키는 패스.
[리버스 마나 플로우]
첫 번째 검은 방첨탑을 건설할 때 응용했던 영력 반전 진.
[더블 코어]
영력 순환계를 둘로 늘리는 등.
마탑의 뼈대를 올리자마자 수시로 들락거리며 연금술을 사용했다.
"오! 이런 방식이?"
"동업자님! 대단합니다!"
마탑에 들어갈 때는 죽을상이지만, 나올 땐 눈이 반짝여지는 것은 덤이었고.
부쩍부쩍 솜씨가 느는 것을 보니 조만간 5성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다.
"온종일 괴물 사냥만 하는 뽀시래기 팀보다 성장 속도가 빠른 게 말이 되나."
[주인. 나 없는 사이에 양심 어디에 팔고 왔어?]
"왜. 내 양심은 늘 삼각형인데."
[모두 닳아서 동그라미가 됐겠지. 각성 1년차에 5성까지 간 양반이.]
왜.
뭐요.
다 2회차 특전이라고.
흑색 마탑 앞으로 천천히 하강하는 파프너.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곧바로 그녀의 등 위에서 내려왔다.
[폴리모프]
"하. 역시 사람 모습이 좋아."
"등에 올라타는 거 싫다고 눈치 좀 그만 주라."
"주인도 생각해봐. 사람을 목마 태우고 다니면 어깨가 얼마나 아파?"
"네 덩치 생각하면 인형을 목에 건 수준 아니냐."
"어머. 숙녀한테 농담이 심하다."
퍼억!
화끈해진 등짝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시X. 박하늘 씨가 여자인지 몰랐다고!!!'
회귀 전에는 소통이 부족했나보다.
흑.
"...들어가자."
두 사람은 마탑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겔. 어렵다. 이 마법.]
[거기서는 영력을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
[아. 그렇군.]
시끌벅적한 마탑 내부.
강령술이 기록된 저서가 사락- 사락- 넘어가고.
한 쪽에서는 시체를 대상으로 주문 연습을 하고 있다.
몇몇은 네크로맨시 주문 하나를 공동으로 연구하는 중이니.
학구열이 불타다 못해 산화할 것 같은 모습이다.
"언데드들이 공부하는 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돼."
파프너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
저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는 자들은 모두 다크 미니언들이었다.
[그게겔. 오셨습니까. 주인님.]
"오냐. 조승철아."
[이번에 언데드 라이즈를 습득했습니다. 겔겔겔.]
4성 강령술 주문인 언데드 라이즈.
중급 언데드를 제작할 수 있어, 네크로맨서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스킬북 없이 공부만 해도 마법을 익힐 수 있다니."
"왜. 너도 강령술 전수받았잖아."
"그거야 주인 숙련도가 100이라 가능한 거고. 마탑은 책만 봐도 되니까."
네크로폴리스의 기반을 다지자마자 곧바로 마탑을 세운 이유.
[지식의 도서관]에 새겨진 네크로맨시 지식을 보관해서 책으로 만들고, 마법사들에게 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승철아. 딱히 어려운 건 없냐?"
[예. 마탑에 기록된 지식만으로 충분합니다.]
호오.
이 녀석. 정말로 네크로맨시에 재능이 있었던 건가?
주력이었던 화염 마법보다 강령술 습득 속도와 응용력이 뛰어났다.
'베이스가 다크 미니언이라 한계는 있겠지만.'
슬슬 이 녀석도 몸을 갈아탈 때가 되었군.
제대로 키워서 영지 운영의 축으로 굴려야겠다.
내친 김에 조승철의 강령술을 봐주고 있을 때, 송명석이 마탑으로 들어왔다.
[주군. 마담에게서 통신이 왔습니다.]
"뭐라고?"
[아라한이 개성을 지나 북진을 계획할 것 같다, 라고 합니다.]
이야.
양성수 부장이랑 타협점 보고 몇 시간이나 됐다고 벌써 수작질이래.
"몸 좀 풀겠네."
"너는 벌써 싸울 생각이냐."
"그러면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야?"
"설마."
아라한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몄는지.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194화 오히려 좋아
-...말씀하신 부분은 잘 해결되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김 의원님."
-무운을 빕니다.
뚝-.
휴대전화를 귀에서 뗀 백성현이 뺨을 일그러트렸다.
"받아먹을 땐 배도 깔 것 같던 작자들이. 아주 잘나셨습니다."
아라한 길드의 후원을 받은 국회의원이 한 둘이던가.
블랙 컴퍼니가 인간사냥꾼을 토벌했다고 해서 바로 거리를 벌리다니.
정치인이라는 생물이야 늘 그랬으니 화가 크게 나진 않았다.
문제는 이 자리에 길드 마스터인 이신우가 함께한다는 것.
"신경 쓸 것 없다."
"부끄럽습니다. 마스터."
"계획대로 되었으니 상관없다."
아라한 길드에 우호적인 국회의원들은 헌터협회를 은근히 압박했다.
한 길드가 대북 사업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
국내 3강에도 동일한 권리를 부여해야 개성 너머를 적극적으로 개척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헌터협회에 어깃장을 놓았다.
"유명무실해진 고속도로를 돌파해서 사리원으로 직행한다, 라."
"천유진의 추가 북진은 당분간 어려울 겁니다."
"좋은 수완이다. 부사장."
유진의 발을 묶고.
아라한이 개성으로 전력을 투사할 명분도 세웠다.
간단한 수작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절묘한 수.
"언제쯤 개성을 칠 수 있지?"
"곧 준비가 끝납니다."
해주 토벌?
북진?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천유진이 더 성장하도록 둘 수는 없다."
"마스터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불사조? 그 작자들은 불필요한 대의에 집착하는 자들이지."
"새벽 길드는 저희를 따라잡을 수 없죠."
"천유진은 다르다."
접경지역에서 쓸쓸하게 죽은 박하늘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가슴에 스며드는 패배감.
이신우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다른 의견 있는가?"
"없습니다. 저도 우선순위를 천유진으로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군."
"나찰 길드는 어떻습니까?"
"진수가 겁을 잔뜩 먹었더군."
"...그렇습니까."
이신우와 배다른 동생인 나찰 길드장 박진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태 배후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이신우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면 배제하는 게 맞았다.
"인간사냥꾼과 진수를 동시에 상대할 전력이라."
"다른 곳도 아니고 접경지역이지 않습니까. 나찰의 전력도 꽤 상했을 겁니다."
"인간사냥꾼에게는 애꾸눈이 있었다."
애꾸눈.
접경지역의 패자이자 한국 북부의 안전을 위협하는 제1요소.
이신우는 룬 스톤으로 인간사냥꾼과 소통, 그들에게 애꾸눈을 포획하게 도와주었다.
"근데 졌지."
"애꾸눈도 만전이 아니었습니다."
"힘은 꽤 빠졌겠지만, 결정적일 정도는 아니다."
유진의 가슴에 꽂으려고 날카롭게 벼려낸 비수 한 자루.
전력 손실이 없게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인계했다.
체력이나 마력을 꽤 소진했지만, 변종 오우거에게 체력은 의미 없는 단어일 뿐.
"천유진의 전력을 상향 조정해야겠군요."
"판은 부사장이 짜보게."
"알겠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아라한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나찰 길드나 인간사냥꾼, 혹은 송명석 같은 신예를 동원했을 뿐.
'이제는 다를 것이다.'
늘 예측을 뛰어넘는 성과를 내면서 승승장구했던 천유진이지만.
이번만큼은 그 뜻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백성현의 눈가 위로 흉흉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
[아라한 길드, 블랙 컴퍼니가 연 북진 대열에 합류 결정!]
[국내 헌터 랭킹 1위. 이신우 길드장이 선두를 맡기로 해....]
[목표는 해주!]
....
"기사가 하루도 안 돼서 쏟아지는군."
휴대전화에 떠오른 무수한 기사.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노골적이네."
"그렇지?"
[속하, 그 자들의 꿍꿍이를 모르겠습니다만.]
"해주로 넘어가려면 어딜 통해야 할까."
[개성이지 않습니까.]
"해주를 공격하러 가던 중에 우연히, 네크로폴리스의 언데드들이 폭주하면?"
[아.]
선후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아라한 길드가 네크로폴리스를 먼저 공격한 후에, '선제공격을 당했다.'라고 주장하면 그만인 일.
"놈들도 작정했다고 봐야지."
"주인. 괜찮겠어? 상대는 국내 1위 길드라고."
"두렵나. 파프너?"
"아니. 당장이라도 싸우게 해줘."
파프너는 후후, 하고 웃음을 흘렸다.
"넌 받아야 할 빚이 있었지."
"이자까지 톡톡하게 치르게 해줄 거야."
"쉽지 않을 거다."
"언제는 쉬운 싸움만 했나?"
"이신우는 최소 애꾸눈과 동급이라고 생각해."
회귀 전.
이신우가 완성시킨 별의 개수는 8개였다.
온전한 8성이냐, 하면 아니었지만.
전투력만큼은 애꾸눈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회귀 전보다 더 빠르게 맞붙는 것 아니더냐?〕
'어. 그렇지.'
〔한데 왜 그리 판단하느뇨.〕
'이신우가 애꾸눈 포획에 나섰으니까.'
놈의 고유 특성은 분노할수록 강해진다.
문제는 성위가 올라갈수록, 분노에 삼켜져서 피아를 가리지 않고 날뛰는 것.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대외적인 활동은 모두 백성현에게 일임한 채, 난이도가 높은 게이트를 돌며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괴물을 포획한 것과 깨달음은 관계가 없지 않느냐.〕
'이신우가 광증을 제어하게 된 건 8성이야.'
7성 끄트머리의 이신우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애꾸눈을 붙드는 행위?
싸우는 중에 그 정도의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폐관 수련하듯 스스로를 혹사시킬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감당 가능하겠느냐?〕
'해봐야지.'
뭐, 8성에 근접했다고는 해도 온전한 8성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애꾸눈을 포획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번잡한 짓을 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들었을 테니.
"대한제약과 성천 그룹에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기사 뜬 순간부터 알았을 거다."
아라한 길드의 승부수.
더 이상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인다.
"개성을 지나치는 척하며 북쪽에서 공격해올 거니. 공단 쪽이 휘말리진 않을 거야."
"적의 공세 루트가 한정되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네."
"아무래도 개성은 수비에 적합한 땅은 아니니 말이야."
개성 일대는 산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사냥꾼들을 토벌할 때에도 대규모 회전(會戰)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힘 대 힘.
꼼수가 통하지 않는 정면승부에서 진군 방향 한쪽을 배제한다는 것은 큰 이점이다.
"주인. 뭐 준비하면 될까?"
"쉬어둬라."
"웬일이래."
"너는 최강의 전력이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이신우를 붙들어줘야 해."
흐으응, 파프너는 비음을 살짝 흘렸다.
"수련이나 해야겠다."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군."
용언(龍言).
레서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하위 용족이 아닌, 진정한 용족에게 허락된 권능이다.
파프너는 사룡으로 거듭나면서 용언을 근원에 둔 원시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난 주인이 뭐든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용언은 모르나봐."
"흑암의 반지에 그쪽 지식은 없으니까."
유진은 손을 휘휘 흔들었다.
현대 마법은 대부분 오딘이 제창한 [룬 마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협소설 보면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잖아?
어느 마법을 익히든 궁극적으로는 뿌리가 같다 보니 깨달음이 깊으면 다른 분야의 재배열 구조도 어느 정도 보인다.
그런데.
원시 마법은 아니다.
'계산이 아니라 본능에 의거한 마법이라.'
파프너가 종종 원시 마법을 보여주었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멋대로인 마력 배열 구조.
몇 번을 분석해봤지만 '어떻게 마법으로 발현이 되는 거지?'라는 결과만 나왔다.
〔크하하하핫. 그대도 이번 기회에 겸손함을 배워 보아라.〕
'지랄 맞네.'
와.
전직 9성의 초월자가 마법 하나 분석을 못 한다고?
드미트리만큼은 아니지만, 유진 역시 세계의 섭리를 비틀었던 마법계 초월자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회귀 전 경험과 지식도 들어 있으니, 현 시점에서의 드미트리조차 단순히 지식만 비교해보면 상대가 안 될걸?
'누가 와도 저건 못 해.'
〔신포도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고?〕
'그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은 거요. 성좌 나리.'
크로노스는 침묵했다.
여우와 포도 이야기를 써먹다니.
점점 현대 문명에 익숙해지는 것 같은데, 그 루트를 모르겠단 말이야.
[주군. 저에게도 임무를 주십시오.]
"너도 수련해라."
정석적인 방법으로 만든 용아병은 7성.
온갖 기행과 유진의 지식을 응용해서 껍데기는 그럴싸하게 만들었지만.
파일럿인 송명석의 경지와 깨달음이 모자라서 용아병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
[조, 존명.]
"너무 태평한 거 아니야?"
파프너의 핀잔에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다."
2달 동안 낮밤 가리지 않고 네크로폴리스를 발전시켰다.
방어 포탑만 백 단위로 둘러놓았고.
인간사냥꾼 토벌에서 소모했던 언데드 군대는 재건 수준이 아니라 병력 질과 숫자를 두 배 이상으로 강화했다.
"강령술 노예들은 지금도 열심히 갈리고 있고."
여기에서 뭘 더 해.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점심은 방금 전에 먹었잖아."
"성좌 나리의 은혜."
"아. 그 기연 탐색기?"
유진은 품속에 넣어둔 회중시계를 꺼냈다.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가 남겨두고 간 유일한 흔적.
또한, 시간을 주관했던 모 성좌의 힘이 깃든 [크로노스의 망가진 회중시계]다.
〔그 모 성좌란 표현. 거슬리는구나.〕
'익명을 희망하는 거 아니었나?'
올림포스는 만신전에 있는 여러 성단 중에서 수위를 다투는 강력한 세력.
신좌를 찬탈한 재우스가 알면 참 좋아하겠어. 그렇지?
〔고얀 것.〕
'이번에는 그럴싸한 정보 좀 주라고.'
〔헛된 것은 한 번뿐이었느니라.〕
네크로폴리스를 발전시키던 도중, 1달 쿨타임이 끝나서 곧바로 [메멘토]를 사용했다.
결과는 허탕이었지만.
'3일 뒤에 나타날 기연을 알려주고 말이야.'
기연 위치도 나빴다.
후지산.
대격변 이후 출입 조건이 6성 이상인 게이트가 생성된 곳이다.
'6성이라고. 6성.'
〔그대의 힘이 모자란 것을 왜 짐에게 탓하느냐.〕
'못 먹을 감을 왜 보여주냐!'
이런 게 신포도지.
'잘 좀 합시다. 성좌 나리.'
〔주문은 어디까지나 그대의 능력일....〕
'안 들려요. 어버버법.'
〔무례한지고.〕
역천의 거인이시여.
제발.
부디.
쓸 만한 기연 좀 알려주세요.
[메멘토를 사용합니다.]
[대상 - 크로노스의 망가진 회중시계]
째깍째깍-.
멈춰 있던 분침과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휙 바뀌는 풍경.
시커먼 하늘 아래로 반쯤 무너진 건물이 보인다.
웅장했을, 그렇지만 이제는 흉물스럽게 보이는 건물에는 하얀 털로 뒤덮인 수인들이 가득했다.
'라이칸스로프군.'
뱀파이어와 대척점에 선 괴물.
짐승과 인간의 형질을 같이 보유한 수인(獸人)이다.
〔이중 게이트에서 본 것들과 흡사하구나.〕
'늑대인간? 그 친구들이랑 비교하면 섭섭하지.'
늑대인간은 라이칸스로프의 아종.
메멘토가 보여준 환상 속 괴물들은 최소 5성 수준의 괴물들이다.
그 숫자만 대충 봐도 수백 단위.
늑대나 곰, 여우 등 종류도 다양했다.
"크르르르. 이 심장을 바침으로써, 나는 완전해진다."
늑대 형 라이칸스로프가 두근, 두근, 하면서 뛰고 있는 심장을 추켜세웠다.
[2028/7/4일]
[금수산태양궁전의 기억을 읽었습니다.]
"염병."
설마 했는데.
진짜로 거기였네.
〔저번처럼 취하지 못할 기연인 게냐?〕
'그건 아닌데. 좀 빡세네.'
금수산태양... 에잇, 더럽게 기네.
그냥 줄여서 주석궁이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니까 한 번쯤은 들어본 것 같지?
'김씨 왕조를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그 김씨 왕조란 무엇이더냐.〕
'한반도 이북을 망가트린 독재자들.'
그러니까.
메멘토가 보여준 환상의 장소는 평양이라는 거다.
2달 안에 평양으로 가려면 해주를 경유하기보다 사리원 직행 길을 뚫는 게 낫겠지.
'오히려 좋... 아?'
유진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한데 그 기연이라는 것은 무엇이더냐?〕
'그건 말이지.'
195화 신장개업
배교자의 심장.
반쯤 무너진 주석궁에서 팔딱거리던 심장의 이름이다.
〔무엇에서 등을 돌렸다는 의미인고?〕
'엘리시온 성단.'
천사장 메타트론이 주관하는 천사들의 성단.
성지 바티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성당기사단은 모두 엘리시온 성단 소속이다.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흡혈귀인 블라드 3세는 배교자 출신이라고 한다.'
〔하면 저 심장이 그 최초의 모기에게서 추출한 것이렸다?〕
'뭐, 그렇다고 해야겠지.'
〔어중간한 대답이로구나.〕
배교자의 심장은 최초의 흡혈귀인 블라드 3세 → 노스페라투(개명)의 '기원'을 흉내 낸 모조품이다.
노스페라투의 직계 혈족인 진조, 혹은 진혈의 피를 엘리시온 성단을 탈퇴한 배교자의 심장에 떨어트리면.
'바벨탑에 새겨진 노스페라투의 기원을 덧씌울 수 있다.'
〔호오. 탑이라 함은 악신 성좌란 말일진대. 그 개념을 참으로 쉽게 빌려올 수 있구나.〕
'쉽다고?'
뭘 모르는 소리.
진혈의 일족은 최소 7성이요.
그 피를 입수해도 엘리시온 성단에서 탈퇴한 신관 / 성기사 직업군 헌터를 찾는 건 더더욱 어렵다.
'직접 만들었다기보단... 게이트에서 얻었나.'
흠-.
이왕이면 [배교자의 심장]이 나온 게이트를 알려주지.
먼저 가로챌 수 없으니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하잖아?
〔저 심장은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
'불사자의 관도 있겠다. 뱀파이어 하나 만들면 되겠어.'
뱀파이어.
종족 전용 기술인 [혈마법]을 사용하고 육체능력도 뛰어나며, 변신도 하는 등 다재다능한 종족이다.
불, 성력, 그리고 은에 약하다는 건 언데드와 공통되기도 하고.
특성만 보면 언데드 친척 급이지.
'불사자의 관도 얻었겠다. 흡혈귀 하나 키우려고 했는데 잘 됐어.'
〔그대는 이미 무수한 하수인을 부리지 않느냐?〕
'흡혈귀는 결이 다르니까.'
본신의 강력함도 있지만, 잠입과 첩보에도 능해서 다방면에 써먹을 수 있다.
누굴 흡혈귀로 만들지는 고민해봐야겠지만.
〔저 심장을 강탈해야 가능하니. 그대는 헛물켜는 일이 없도록 준비하여라.〕
'예. 예. 덕담 감사합니다.'
〔한데 작은 늑대는 심장으로 무얼 하려는 건지.〕
'배교자의 심장은 두 성질을 공존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공존?〕
'저 라이칸스로프는 평양 군벌 수장인 김정민이다.'
회귀 전.
김정민은 흡혈귀와 라이칸스로프의 능력을 동시에 사용했다.
배교자의 심장을 이용한 모종의 대법.
서로의 피가 독으로 작용하는 두 종을 엮어냈으니, 필시 성좌가 개입했으리라.
〔하면 2달 후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심장을 쓸 수 있지 않겠느냐?〕
'반발하는 두 성질을 합치려면 조건이 붙을 거다.'
단순히 성좌의 가호라고 퉁칠 문제가 아니다.
전제조건이 엄청나게 까다로울 걸.
배교자의 심장과 정해진 시간.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소를 충족시켜야 라이칸스로프 + 흡혈귀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부지런히 움직이자꾸나.〕
'그러게.'
배교자의 심장.
손에 넣으면 강력한 패가 한 장 더 들어오는 거고.
평양에 똬리를 튼 군벌의 전력이 강화되기 전이기도 하니.
타이밍만 맞추면 도랑치고 가재도 잡을 수 있을지도.
"아. 천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드디어 완공되었습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건설사 쪽 사람.
〔오, 오오오오오!!!!!〕
강렬한 사념이 머리를 강타했다.
일순 시야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에 힘을 주어 버텨야 했다.
'야잇, 빌어먹을 성좌 나리야!'
〔드디어 그 누추한 곳을 벗어나 짐이 거처할 공간이 완성되었도다!〕
감격으로 가득 찬 크로노스의 사념.
...연평도의 신전이 그렇게까지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
옛 절터에 지어진 신전.
대리석을 깎아 세운 기둥이 천장을 지탱하고 있으며.
낫을 든 노인 조각상들은 입구로 향하는 길을 호위하듯 배치되었다.
'취향하고는.'
〔짐이 무의미한 주문을 하였다고 여기느냐?〕
'아직까진 그렇지.'
〔크하핫. 잠자코 지켜보아라.〕
네이, 네이.
말씀하시는 대로 가만히 있겠습니다.
"성좌 나리가 주문하는 게 너무 많았지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는 편이 저희 입장에서도 낫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성좌 나리 기고만장해진다고.
하아.
유진은 미간이 씰룩거리려는 것을 혼신의 힘으로 참았다.
"이야. 뭐가 이렇게 반짝거리나."
바닥은 과장 조금 보태서 거울 대용으로 써도 될 만큼 반들거렸다.
"영구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서 청소를 안 해도 됩니다."
"그거는 좀 편리하네요."
영구 보존이라고 해봐야 얼룩이나 먼지가 잘 묻지 않는 정도다.
언데드들은 청소 같은 섬세한 일에 잼병이니.
그 정도 처리도 감지덕지다.
"신전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도실 - 신도들이 머무는 곳. 입구를 기준으로 좌측.
도서관 - 신성 주문 지식이 담긴 책들을 보관하는 곳. 입구 기준 우측.
추모관 - 부활 주문을 수련하는 곳. 입구 기준 우측.
본관 - 성좌 〔역천의 거인〕이 머무는 곳. 건물의 가장 안쪽.
〔짐이 구상하였던 모습대로 되었구나!〕
'그러게.'
크로노스의 요구를 건설사 측에 말해준 사람이 유진이다.
직접 성좌와 소통 가능한 것은 자신뿐이니.
그 덕분에 신전 구상도는 유진의 머릿속에도 그려져 있었다.
'부활 주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켜보면 알 것이니라.〕
유진의 눈을 통해 신전 구석구석을 살펴본 크로노스가 만족스러움을 드러냈다.
〔과거에는 이만한 신전을 짓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느니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는 왜 해.'
현대 기술은 수천 년 전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진보를 이루었다.
그뿐이랴.
대격변 이후 마법과 과학을 결합한 마도공학 분야가 크게 발전했고.
건설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잡아먹는 터다지기를 순식간에 마칠 수 있어서, 건설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성좌 나리께서 만족하신다는군요."
"다행입니다."
건설사 측 사람은 신전을 천천히 살펴보라는 배려로 먼저 나갔다.
홀로 남은 유진은 신전 최심부에 위치한 본관으로 갔다.
'큰 옥좌라.'
〔본래에 짐이 사용하던 것에 비해서는 훨씬 작다만.〕
'더 큰 걸로 바꿔드려?'
그럼 천장을 터야겠지.
유진의 말에 담긴 가시를 알아챈 크로노스가 곧장 태도를 바꾸었다.
〔소박한 것도 나름 청취가 있구나.〕
'그럼 뭐해. 입주해야지.'
〔보채지 않아도 그리 할 것이로다.〕
빈 옥좌 앞에 무릎을 꿇은 유진은 성력을 피워 올렸다.
"역천의 거인이시여. 이곳을 당신에게 헌상하나이다. 부족함이 많으나 갸륵하게 받아주소서."
연평도 신전 때와 동일한 행위.
영령지에 지어진 건물을 크로노스에게 봉헌함으로써.
그리스 풍 건물은 비로소 신전이 된다.
화아아-!
영령지를 중심으로 솟구친 희끄무레한 기운.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의 주관자, 〔역천의 거인〕의 성력이 구조물을 감싸기 시작했다.
*
[성좌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전을 건설했습니다.]
연평도 때와 마찬가지로 추가로 문장을 얻을 수 있나 했지만.
시스템의 반응은 없다.
'그럴 줄 알았다.'
유진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신전 지을 때마다 문장을 얻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문장은 정말 특수한 경우, 혹은 위업을 세웠을 때나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성좌 나리. 어때?'
〔....〕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요.'
〔크흡.〕
어럽쇼.
'야. 우냐. 울어?'
〔그럴 리 없지 않느냐! 지, 짐이 눈물 따위를! 크흡!!〕
'크흐흐흐. 아무렴. 티탄 신족의 왕께서 이런 걸로 질질 짜거나 하진 않겠지.'
〔고얀 것!〕
'설마 진짜로 우는 거냐?'
크로노스는 답하지 않았다.
아.
재밌다.
'더 놀렸다간 정말로 경을 치겠군.'
열심히 쳤으니 이제는 빠질 때.
더 추궁하지 않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추모관은 뭐야?'
〔말 그대로 부활 주문을 수련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성좌 나리가 부여한 신성 주문 중에 부활 관련은 없잖아.'
부활.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의미.
현 시대에 '부활'의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성지 바티칸의 교황뿐이다.
그마저도 성지에서만 발현할 수 있는 기적이고.
시체의 손상도가 1/3을 넘어서면 부활시킬 수 없는 등, 조건도 굉장히 까다롭다.
〔흠. 엄밀히 말하면 그대가 생각하는 부활은 아니니라.〕
'그러면 뭐야?'
〔망자, 곧 언데드로 되살리는 신성 주문이다.〕
저.
선생님?
신성 주문이라면서요.
언데드 제작은 네크로맨시로 충분한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대는 짐의 유일한 신자이니라.〕
'뭘 새삼스럽게.'
〔짐은 성좌. 더 많은 신도들이 짐에게 기도할수록 별빛도 강해진단다.〕
성좌의 존재력은 별자리에 새겨진 위업이 대단할수록.
또, 성좌를 모시는 이가 많을수록 늘어난다.
전자는 헌터를 배후성으로 두어 위업 일부를 자신에게 옮겨오는 식으로 충당하고.
후자는 신도를 늘리면 된다.
〔계약자의 활약은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하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지.〕
'신전도 차렸으니 본격적으로 신도를 늘리시겠다?'
〔그러하도다.〕
'다 좋은데 왜 언데드 제작이야.'
〔계약자를 상징하는 것이 망자이지 않느뇨.〕
세간에 알려진 유진의 직업은 신관계.
크로노스를 섬기러 오는 신관들도 유진처럼 되기를 희망하리라.
'에이. 나처럼은 못 되지.'
〔그대는 짐의 성자이니. 변명은 가능하지 않겠느냐.〕
'자세하게도 설정해두었네?'
〔오랜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니라.〕
일리가... 있어!
'어쩐지 새 주문을 요새 통 안 주더라.'
〔계약자가 신성 기반의 언데드를 제작할 때 떠올린 것이니라.〕
우리 성좌 나리.
깜찍한 생각을 하고 계셨네?
의논 없이 자신이 헌납하는 존재력과 영성 사용처를 정한 것은 괘씸했지만.
금방 납득했다.
'이 정도 횡령은 이해해줘야겠군.'
크로노스가 강해질수록.
대행자인 유진도 더욱 강해진다.
마법왕 드미트리에게 닿으려면, 배후성인 크로노스의 수준이 더 올라가야 했다.
'내 강령술이 모자라서 진 게 아니니까.'
마력 기반 공격을 90% 경감시키는 〔아우라〕.
크로노스가 부여한 가호는 막강하지만, 활용 방법이 까다로웠다.
가호 레벨도 아직 낮은 상황.
크로노스의 존재력이 올라가면 부여할 수 있는 가호도 더 강해질 터.
'아직 주문을 만든 건 아니잖아?'
〔그러하다만, 짐을 설득하려 하지는 말아라.〕
'아니. 반대 안 하니까 성좌 나리가 구상한 주문의 구결을 읊어봐.'
회귀 전에 불사왕이라고 불렸던 몸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언데드 전문가!
마법과 신성 주문은 결이 완전 다르지만, 같은 [죽음을 거스르는] 성질을 공유하는 만큼 조언이나 개선점을 짚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오. 그대의 조력이라.〕
'마음에 안 들면 말고.'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로다. 빨리 지혜를 나누자꾸나.〕
크로노스는 미리 구상해둔 신성 주문의 구결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이건 어떻게 작용하는 거야?'
〔짐이 주관하는 영역을 성력으로 끌어와서 적용하면....〕
'아. 그럼 안 되지. 효율이 이 부분에서 떨어지잖아. 성력의 흐름을 이쪽으로 옮기면.'
〔그렇구나. 조언대로 하니 효율이 올라갔도다.〕
유진은 신전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나절이 지나도록 크로노스와 토론을 했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때 즈음.
'이 정도면 되겠어.'
〔그대에게도 유용할 만큼 개선되었구나.〕
좋아.
그러면 나팔을 좀 불어볼까.
개성 공단으로 내려간 유진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소문 하나만 내주라."
-호호호. 어떤 소문이지요?
"신장개업."
196화 알면서 가야하는 함정
유진의 설명을 묵묵히 들은 마담.
첫 마디는 감탄(?)이었다.
-아라한 길드에서 전면전을 준비 중인데, 그런 걸 준비하셨어요?
"말이 심하네. 그런 거라니."
-신관들을 받아들여도, 당장 전력에 도움이 되진 않을 거예요.
"기대도 안 한다."
신관들이 전투에 참여해?
못 보던 사이에 농담이 꽤 늘었어.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전쟁은 평소부터 준비해왔던 거고."
2달 동안 네크로폴리스 발전에 목을 매단 이유가 뭔데.
아라한 길드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나 마찬가지다.
"이신우는 배후에서 인간사냥꾼을 도왔다."
-애꾸눈 포획 건은 마침 물증을 찾았답니다.
"대단하군. 용케 그 흔적을 찾았어."
-한국에서는 제 눈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없어요.
마담도 유진과 만나면서 꽤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본래 그녀가 추구하는 사업 방식은 외부에 드러나기보다 음지를 지향하는 것.
이런 상황에서도 본인의 능력을 어필하기보다, 겸양을 떨며 발 한 쪽을 빼는 것이 마담의 성향이었다.
'자신만만한 모습도 좋네.'
마담이 왜 그렇게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인가.
그녀에게 사연이 있다는 것쯤,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회귀 전에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
두 사람은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였고, 훌륭한 파트너였다.
이번 생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
-자료 넘겨드릴까요?
"됐어. 일단 둬."
-아라한 길드를 압박하는 재료로 쓸 수 있을 건데요.
"놈들은 이미 검을 빼냈다. 뭘 썰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거다."
반대쪽 칼날에 눌려서 자기 자신이 베일지라도.
아라한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가 더 도울 일이 있을까요?
"하던 대로만 해줘."
-아라한 길드의 동향은 주기적으로 보고드릴게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마담뿐이지."
-별 말씀을.
통화를 끊은 유진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회귀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이신우가 나섰으니까.'
놈의 특성은 광증.
애꾸눈 포획에 직접 나섰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두 번이나 실패하면 진짜로 눈이 돌아가 버릴걸.
이신우가 온전한 상태로 8성에 올랐다면 모를까.
〔만약 그러하다면?〕
'어쩌긴. 뒤지는 거지.'
운명에게 억까 당하면 어쩔 수 없지, 는 농담이고.
못 버틸 것 같으면 네크로폴리스를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사용해서 과거로 돌아온 지 어느덧 1년 가까이 지났다.
전 세계를 놓고 보면 나비효과가 크지 않지만.
범위를 한국으로 좁혀보면 회귀 전과 비교했을 때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중 게이트에서 죽었어야 할 차기 검성, 장미선이 살아있고.'
〔미래가 창창했던 인물이 그대의 하수인으로 되살아났지.〕
'그것 말고도 많은 일이 바뀌었어.'
붉은 거미 두목은 난데없이 구룡 중 하나가 되었다.
그뿐이랴.
인간사냥꾼 토벌이 몇 년 앞당겨졌고.
아라한 길드는 회귀 전보다 빠르게 인망을 잃었다.
'내가 회귀 전에 깨달은 게 하나가 있어.'
〔무엇이더냐?〕
'선빵 필승.'
진심이다.
유진이 허무하게 개성을 내주고 서울까지 밀릴 수밖에 없었던 건.
로마노프 가문에서 해안가를 타고 기습적으로 공격.
검은 방첨탑이 조기에 파괴되면서 네트워크를 먹통으로 만든 탓이다.
'전력은 내가 위였다.'
본 드래곤을 위시한 망자의 군대.
단독으로 7대 명가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헌터가 유진이었다.
네크로폴리스의 홈 어드밴티지는 특히 막강한 편.
마법왕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방법이 없었으니, 결국 패배했겠지만.
그럼에도 쉽게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약자. 스스로를 과대평가 하는 것은 아니느냐?〕
'난 냉정하거든요.'
싸움에서 이기려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그대의 발언에 모순점이 있다는 사실. 아느냐?〕
'선제공격해야 한다면서 왜 방어를 하냐고?'
〔잘 아는구나.〕
'아라한이 개성으로 오는 게 자의일까.'
〔작은 인간들이 두뇌를 혹사시켜 골라낸 최선의 선택 아니겠느냐.〕
아.
그건 맞는 말이지.
하지만.
아라한이 선택지를 좁힐 수밖에 없는 요인은 따로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아라한 길드가 어디에 연을 대고 있는지.
숨겨놓은 패는 무엇인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정보가 유진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회귀 전에는 목숨 걸고 싸웠으니까.'
어떻게 잊어버리겠나.
불사조 길드와 손을 잡고 아라한 길드의 영향력을 지워냈다 싶었는데.
나찰 길드가 음지에서 수작질을 걸어 불사조 헌터 팀 하나가 전멸해버리기도 했고.
인간사냥꾼들은 접경지역의 폭군을 길들여서 유진과 싸웠다.
아라한 길드와 관련된 정보는 모두 맞아가면서 몸에 습득한 것.
그러니까.
'이신우든, 백성현이든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는 뻔하다는 거다.'
포커로 치면 상대의 패를 들여다보고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강한 패를 들고 있으면 죽어주면 되고.
내가 더 세면 곧바로 레이스를 불러서 판돈을 올린다.
참으로 불공정한 싸움 아닌가?
〔그리 말하는 것치고는 표정이 아주 밝아.〕
'헛되지 않았으니까. 그때 한 고생이.'
시간대가 달라져도.
아라한 길드가 손에 든 패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유리한 흐름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선제공격을 하는 건데. 이러면 의미가 퇴색되지.'
아라한 길드는 제 발로 무덤을 향해 뛰어가는 중이다.
두 다리에 힘을 주는 것은 제 의지.
그렇지만.
무덤이라는 방향을 인도한 것은 유진이다.
〔그대가 호언장담한 대로 풀릴지, 한번 지켜보자꾸나.〕
'안 풀리면 성좌 나리 신전도 끝인데?'
〔반드시 승리하여라.〕
크로노스의 사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
마담은 유진의 부탁대로 '〔역천의 거인〕을 모신 신전'에 대한 소문을 퍼트렸다.
[개성에 새로운 성좌를 모시는 신전이 건설되다!]
[천유진, 〔역천의 거인〕이 대리인으로 지정한 성자로 밝혀져!]
[〔역천의 거인〕, 언데드 사역의 비밀은 성좌에게 있었나?]
여러 신문 매체에서 기사를 쏟아냈고.
[천유진이 신전 지은 거 들음?]
그 신전 가면 나도 언데드 부릴 수 있나.
헌터넷에는 물론이요.
평범한 인터넷 사이트에서조차 개성에 지어진 신전 관련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성자, 라."
불사조 길드장 김영수는 인터넷 기사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하지 않아요?"
"뭐가."
"천유진 씨요. 성자라니. 그러니까 엄청 셌구나."
"미선아.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된단다."
장미선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교묘해. 아주 재미있는 프레임을 짰어."
"프레임이요?"
"천유진 헌터는 전 세계를 뒤져봐도 유래가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음. 그렇죠."
"성자라는 프레임은 규격 외의 강함을 설명하기 위해 내놓은 패다."
유진이 성좌의 대리인으로 활동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김영수는 최근 일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성천 그룹과 대한제약.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 했더니 이거였나 보구나."
"두 기업은 여기서 왜 나와요?"
"대한제약은 성자 시리즈를 내고 있잖니."
"아."
"성천 그룹은 최근에 막내딸이 목내이병을 털고 일어났다고 했으니."
그림이 맞추어진다.
인간사냥꾼 토벌로 유진의 몸값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신전을 봉헌하고 자신의 신앙까지 퍼트린다면?
"막 전직한 신관계가 많이 가겠죠."
"그렇겠지."
"천유진 씨처럼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의적절한 타이밍이다."
이 순간을 위해 [성자]라는 직업을 밝히지 않고 있었으리라.
철저하게 계산된 타이밍이라는 사실을 한 발 늦게 깨달은 장미선이 입을 크게 벌렸다.
"대단하네요. 정말."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또 뭐가 더 있어요?"
"아라한."
"거긴 왜요."
"이렇게 되면 뽑은 칼을 넣을 수 없게 되었다."
"칼은 또 뭐예요. 자세하게 말해줘요."
김영수는 유진이 크로노스에게 해줬던 말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단어나 어감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같았다.
"와...."
"차라리 잘 됐구나. 우리의 품으로 끌어들이길 포기한 것이."
너무 커져버린 유진의 체급.
어쭙잖게 포섭하려고 했다간 탈이 날 뻔했다.
동맹을 맺자고 접근하길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강력한 경쟁자를 하나 만들 뻔했다.
"천유진 씨를 너무 고평가하는 것 아니에요?"
"과소평가가 아니라?"
"우리 길드도 국내 3강이잖아요."
"저번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구나."
개성 탈환과 인간사냥꾼 토벌.
대격변 이후 한국의 숙원사업 중 하나를 각성 1년차 헌터가 뚝딱 해냈다.
-국내 3강은 뭐함?
알음알음 나오는 불만.
아라한 길드가 대표로 두들겨 맞고 있지만, 새벽과 불사조도 마냥 분위기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소모전에서는 인간사냥꾼을 압도하는 천유진 헌터의 능력 덕이지.'
인간사냥꾼이 무서운 것은 괴물을 전력으로 삼는 것이다.
전투에서 병력을 소모해도.
시간을 조금만 주면 게이트가 빚어낸 괴물들을 다시 테이밍해서 전선에 투입했다.
국내 3강의 힘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희생을 각오하면 인간사냥꾼을 개성에서 몰아내는 것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후환이 생길 것이 두려웠다.'
몬스터들을 방패막이 삼아 개성에서 도망치면?
인간사냥꾼들은 쉼 없이 개성을 두드려서 희생을 강요할 것이다.
몬스터는 끝이 없지만.
헌터는 숨풍숨풍 솟아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뿌리를 뽑지 못하면.
헤어나지 못하는 수렁에 빠져서 평생을 허우적대야 한다.
국내 3강이 인간사냥꾼을 토벌하지 못한 배경이다.
"사정이야 어쨌든, 그걸 해냈다."
"그러니 아라한에서 천유진 씨를 공격할 거라는 거죠?"
"내가 백성현이라면 그러겠지."
장미선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말이라도 해줘야죠."
"천유진 헌터가 그걸 모를까."
판을 읽고 짜는 능력.
유진에게는 그게 있다.
"구경만 하진 않을 거예요. 입은 은혜도 있고."
"대놓고 움직였다간 아라한 길드가 알아챌 것이다."
김영수의 말에 섞인 묘한 뉘앙스.
"그럼요?"
"TF팀을 꾸려야지."
아라한 길드의 대들보를 뺄 절호의 기회.
김영수는 이번 판에서 관전자로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
개성에 지어진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전.
소문이 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각성한 헌터 중 일부는 북쪽으로 향했다.
"나도 언데드를 부릴 수 있다!"
"제2의 천유진이 되는 것도 꿈이 아니야!"
세례 한번 받고 성좌를 모신다고 해서 유진처럼 되진 못했다.
당연히.
그 사실을 모두 알았지만, 지금까지 유진이 보여준 파천황적인 행보에 매료된 헌터들은 개성 행 버스에 탑승했다.
우지직! 우직!
통일대교를 건너자마자 확 바뀐 분위기.
땅에서 솟아난 괴물이 차량에 달려들려고 할 때.
길가 옆에 선 언데드가 살점을 물어뜯었다.
"오우."
"미친."
아직 숭배 대상을 정하지 않은 신관들은 감탄과 경악 섞인 탄성을 내질렀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언데드 사역.
차량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몬스터만 콕 찝어 공격하니, 더 신빙성이 느껴졌다.
개성 공단에 도착하니 [역천의 신전 행] 운송수단이 따로 있었다.
-역천, 의 신전. 으로. 가는 사람. 여기로.
뼈를 엮어서 만든 거대한 마차.
살풍경한 모습이지만, 예비 신관들은 꺼림칙한 기분을 이겨내며 탑승했다.
달그락- 달그락-.
한창 개발 중인 네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뼈 마차.
목적지에 도달한 예비 신관들은 그리스 풍 신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역천의 거인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역천의 거인은 당신을 권속으로 거두고자 합니다.]
"지, 진짜라고?!!"
크로노스를 영접한 신관들은 입을 크게 벌렸다.
197화 신성 언데드 맛좀 봐라
두 번째 신전을 완공한 후.
유진과 크로노스는 새로운 신성 주문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누었다.
핵심은 두 가지.
신관계 헌터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유진에게도 충분히 쓸 만해야 한다.
〔욕심도 많구나.〕
'남 좋은 일만 할 순 없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주문은 모두 3가지.
▷호플리테스
분류 : 신성 주문
등급 : C
시체를 되살려서 권속으로 삼습니다. 이때 대상의 수준이 높으면 사용자의 성위 + 1성까지 보정을 받습니다.
한 번 권속으로 일으킨 망자는 자유롭게 소환 및 역소환이 가능합니다.
신성 무장을 추가하면 호플리테스의 전투력이 상승합니다.
▷언홀리 웨폰
분류 : 신성 주문
등급 : D+
성력으로 무기를 강화합니다.
▷언홀리 아머
분류 : 신성 주문
등급 : D+
성력으로 방어구를 강화합니다.
〔역천의 거인〕을 모시기로 한 신관은 도서관에 비치된 책을 보고 경악 섞인 비명을 질렀다.
"내 성위보다 높은 사역마를 부릴 수 있다니!"
성위를 올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막 각성한 헌터가 2성까지 올라가는 데 평균 6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 올라가기가 힘들어지며.
4성부터는 몬스터를 백날 잡아도 깨달음이 없으면 벽을 넘지 못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역마로 부릴 시체만 잘 고르면 성위 보정을 받을 수 있다.
역으로 베이스가 되는 시체의 능력이 떨어지면 권속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지만.
'괴물 시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헌터마켓만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게 괴물 시체다.
2성, 그러니까 오크 사체만 구매해도 든든한 전투요원을 획득하는 셈.
-네크로맨서는 첫 시체 구하기가 어렵다.
...라는 유진의 피 땀 눈물 섞인 경험담에서 비롯한 신성 주문이다.
그뿐이랴.
신성 주문으로 빚어낸 언데드, [호플리테스]에는 한 가지 기능이 더 있다.
"성력이 깃든 무장을 사용하면 능력치가 올라가잖아. 그럼...."
막 〔역천의 거인〕의 교단에 입교한 신관은 [언홀리 웨폰]과 [언홀리 아머] 주문 정보를 몇 번이나 곱씹었다.
무기와 방어구에 신성을 부여하는 주문.
그렇다면.
적당한 무장을 채워준 다음 언홀리 웨폰 / 아머를 걸어주면 호플리테스가 강화된다는 의미 아닌가!
"미쳤다."
파격적이다.
유진이 1성 때부터 아라한 길드의 신예를 쥐어 패고 다녔는지 이해(?)가 되는 신성 주문이다.
물론.
천, 아니 만 단위의 언데드를 부리는 주문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수준이 올라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니야. 성자 특전일 수도 있어.'
도서관에 있는 스킬북의 가치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근데 다른 주문은 없나?"
라이프 드레인이나 부정 충격 방패 등, 유진이 과거에 습득했던 주문들도 스킬북 화 되어 있지만.
다른 교단에 비해서는 신성 주문의 개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신관이 이상한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할 때.
-너. 수준. 모자란다.
"아오. 깜짝이야."
-더. 강해지면. 주문. 보인다.
"뭐야. 언데드가 신성을 품고 있어?"
디파일러.
연평도 신전에서 제작한 신성을 품은 언데드들은 빗자루를 들고 청소 중이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일까. 대체."
신관계 헌터는 감탄과 경악이 뒤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
[성좌 〔역천의 거인〕의 신도가 1명 늘었습니다.]
[성좌 〔역천의 거인〕의 신도가 1명....]
....
〔크하하하핫!!! 짐의 별빛이 더욱 진해지고 있구나!!〕
아오. 시끄러워.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 조용히 좀 웃으시지. 성좌 나리.'
〔시라도 읊고 싶은 심정이니라.〕
'댁이 시 같은 걸 읊은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
〔그만큼 짐의 마음이 흡족하였다는 표현이니라.〕
소문을 내자마자 개성으로 달려온 헌터만 10명이 넘는다.
전체 신관계에 비하면 한 줌 수준이지만.
일반적인 신관계 헌터는 직업군을 정한 후, 곧바로 만신전에 가서 숭배할 성단을 고르기 때문에 충분히 많은 숫자다.
〔한데 저 치들은 청소부로 불러온 게냐?〕
디파일러.
최초로 만들어낸 신성을 품은 언데드다.
회귀 전, 후를 통틀어서 손에 꼽힐 만 한 결과물.
그렇지만.
막상 제작한 후에는 빈약한 스펙 때문에 전투에 활용하지 않고 연평도에 박아두었던 녀석들이다.
'신성 주문이 늘었잖아. 이제 써먹어야지.'
언데드에게 신성을 담았지만, 막상 활용할 방법이 없어서 방치했다.
제대로 굴리려면 각 잡고 연구해야 했는데.
그럴 틈이 있어야지.
[메멘토]로 기연 찾아다니랴.
네크로폴리스 개발하랴.
인간사냥꾼 토벌 준비에, 블랙 컴퍼니 사업 관리까지.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디파일러의 가능성을 연구할 틈이 없었다.
〔농지거리가 수준급이로구나.〕
'왜. 뭐요.'
〔그대가 사업 관리에 언제 신경을 썼다고.〕
'아. 나름 보고 받거든?'
〔번거로운 일은 모두 임재백이란 작은 인간에게 미뤄두지 않았느냐.〕
'최종 결재는 내가 해야 한다고!'
크로노스의 말에 찔린 유진이 발끈했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라서 반박할 수 없었다.
'제길. 크로노스의 말빨이 더 좋아지고 있어.'
아.
신전 터에서 훌쩍이던 크로노스님이 그립습니다.
근엄(?)하던 티탄 신족의 왕께서는 어디로 가시고 협잡꾼만 남은 거니.
크로노스를 바꾼 것이 자신인지도 모른 채, 유진은 꿍얼거렸다.
〔한데 연구가 필요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신전도 크게 세웠잖아. 주문을 전수하면 돼.'
디파일러는 일반적인 언데드가 아니다.
신성을 품었기에, 망자 계통 스킬은 쓸 수 없다.
뒤집어서 말하면 성력 기반인 신성 주문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
그럼 특별히 연구할 필요가 없다.
신전에서 잡일을 시키며 신성을 몸에 더 축적시키고.
도서관에 비치해둔 스킬북을 익히면 되지.
'근데 수지타산은 좀 맞아?'
〔스킬북 말이로구나.〕
신관계 헌터는 다른 직업군과 달리, 성단에서 부여하는 주문을 사용한다.
도서관에 둔 스킬북들은 모두 크로노스가 빚어낸 물건.
스킬을 전수하면 크로노스가 쌓아놓은 영성이 조금 소모되는 방식이다.
'이건 확실히 짚고 갑시다.'
〔무엇이더냐?〕
'성좌 나리가 쌓은 게 아니라 내가 한 거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만 쏙 빼가려고?
따질 건 따져야지.
〔그대는 짐의 유일한 대리인. 짐을 향해 공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니라.〕
'생색 내지 마시라는 거다.'
〔크하하핫. 참고하마.〕
뭔 말을 해도 통하지를 않는군.
크로노스의 텐션은 하늘 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신도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니 노림수가 잘 통한 것 같구나.〕
'아무렴. 누구 아이디어인데?'
호플리테스는 고대 그리스 중장보병을 부르는 단어다.
무릇 이름에는 힘이 실리는 법.
유진이 신성 주문 이름을 '호플리테스'로 지은 건 이유가 있다.
〔성력을 공명시켜서 강화한다, 라. 훌륭한 계획이도다.〕
[호플리테스]와 함께 추가한 두 버프 주문.
사실 효과만 놓고 보면 [부정한 축복]이나 [응징의 쐐기]에 비해 한 수 모자랐다.
언홀리 웨폰은 공격력 증가.
언홀리 아머는 방어력을 늘려주는데.
크로노스가 초기에 부여한 버프 주문은 올 스탯 증가라서 전투력 총합에서는 두 주문이 앞섰다.
그럼에도.
언홀리 웨폰 + 아머를 만든 것은.
'신성 언데드를 성력 깃든 무기로 보조하면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새 망자에게 중장보병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
언홀리 웨폰과 아머는 호플리테스의 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만든 주문이다.
'시체만 잘 고르면 1성 보정에, 두 버프까지 더하면 1.5성 정도는 강해진다고 봐야지.'
이 정도면 신관계 헌터가 파티 없이 홀로 게이트 사냥에 나서도 될 걸.
엄청난 메리트다.
저 파릇파릇한 신관계 친구들은 걸어 다니는 입간판이다.
서울로 돌아가서 게이트를 들락날락 하다 보면 지원자들도 더 늘어날 것이다.
〔한데 그 뒤는 어찌 하려느냐?〕
'새 주문 빨리 만들어야지. 왜 나한테 물어봐.'
〔짐의 신봉자들이 배움을 갈구하고 있도다. 하나, 새 주문이 없으니.〕
디파일러를 배치한 또 하나의 이유.
신성 주문이 적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 신관이 나오면 정해진 말로 화제를 돌리게 했다.
〔신봉자들이 빠르게 성장하면 어이 할꼬.〕
'모든 신관이 다 나인 줄 알아?'
재미있는 말을 하네.
[호플리테스]와 신성 주문 조합이 성위를 뛰어넘긴 해도.
모든 헌터가 유진이나 뽀시래기 팀처럼 게이트를 들락거리지는 않는다.
아무리 빨라도 2성까지 오르는 데 최소 3개월은 걸릴걸.
'3달 안에 새 주문 만들 자신 없어?'
〔고얀지고. 짐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퇴물 성좌였던 양반.'
변방 잡귀보다는 퇴물이 낫잖아.
음.
그래, 퇴물. 어감 참 좋네.
〔두고 보아라. 신봉자들과 그대의 입이 쩍 벌어질 만한 주문을 선사해줄 터이니!〕
크로노스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
리틀 엔젤스.
캘리포니아 일대를 주름잡는 길드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제작된 [성자 시리즈] 유통에도 참여하며, 미국 서부에서 영향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성자 시리즈 유통의 주역.
부 길드 마스터인 앨리스 킴은 의아한 눈으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카락.
목 아래쪽에 붙어 있는 비늘과 마름모꼴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은 매서운 눈빛으로 앨리스 킴을 바라봤다.
"성자 시리즈를 유통한 게 당신이라고."
"그래요."
"혹시 그 성자. 만날 수 있을까?"
"저보고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시는 건가요."
"오. 말이 통하잖아!"
앨리스 킴은 미간을 찌푸렸다.
길드 사무실에 다짜고짜 찾아온 불청객.
이름값만 아니었으면 곧바로 엉덩이를 걷어 찼을 텐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불쾌한 마음을 꾹 누른 채 다시 한번 입술을 떼었다.
"그건 어려운 부탁이네요."
"왜애애애."
"제게는 비즈니스 파트너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요. 당신이 그 유명한 용기사일지라도."
용기사.
전 세계에서 유일한 직업으로, 용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전장을 누비는 강력한 능력을 지녔다.
직업 이름 = 고유명사인 셈.
"에이. 딱딱하게 그러지 말고. 제인이라고 불러."
"저희가 그렇게 친하진 않잖아요. 용기사 님."
용기사 제인.
7번째 별을 완성시킨 강자로, 미국에서 꽤 유명한 헌터다.
늘 와이번이나 드레이크 같은 용족에 탑승해서 싸우기에, 실질적인 무력은 8성 수준으로 평가 받았다.
"하. 곤란한데."
제인은 한숨을 내뱉었다.
꿀꺽-.
접객실에 있는 경비들이 침을 삼켰다.
용기사는 여러 의미로 미국에서 유명했다.
강한 무력.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자유분방한 성격.
참고로 '자유분방함'이라는 단어는 여러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뉘앙스와 다르게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맹약으로 이어진 존재가 당신을 책망합니다.]
[맹약으로 이어진 존재는 당신에게 조속히 결과를 내기를 촉구합니다.]
"시끄러워. 좀만 있어봐."
용기사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휘 젓자, 내부 공기가 1도 더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저, 용기사님."
"솔직하게 말할게. 내가 용이랑 계약한 건 다들 알잖아."
"그건 유명한 이야기죠."
용기사는 [성좌]를 모시는 게 아닌, 용 군단과 계약을 맺은 사람에게만 허용된 직업이다.
용족을 쉽게 길들일 수 있고.
탑승 시 추가 버프를 받는 등 엄청난 어드밴티지를 받지만.
반대로 성좌의 후원을 받을 수 없다는 디메리트가 있다.
"나한테 힘 준 양반이 사람 하나 찾아달라고 해서."
"그런데요?"
"성자 시리즈를 만든 사람이 그 자인 것 같거든."
용기사의 입가가 위로 쭉 올라갔다.
"다시 한번 부탁할게. 도와줄 수 있겠어?"
198화 호구를 판에 앉히자
미국에서 활동 중인 용기사가 자신을 찾는 지도 모른 채.
유진은 흑색 마탑 정상에서 활성화 된 네크로폴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은 역시 최고야.'
〔중증의 나르시시즘이로구나.〕
'나르키소스는 성좌 나리가 활동하던 시기에 없었잖아.'
〔짐도 귀가 있고 눈이 있느니라.〕
미친놈과 잘난 사람은 높은 곳을 좋아한다잖냐.
로마노프 가문에게 짓밟히기 전의 풍경에 비하면 모자라도.
회귀 후 1년 만에 이룩한 성과이니.
당연히 자랑스럽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나르키소스랑 비벼?
〔하기야. 그대의 외모는....〕
'선은 넘지 맙시다. 성좌 나리.'
왜.
뭐요.
이 정도면 못 봐줄 정도는 아니지.
〔짐의 시중을 들던 작은 인간들에 비하면 모자라니라.〕
혹시.
그쪽 취향이셨어요?
〔고, 고얀 것!〕
'내가 팔팔한 친구는 못 구해도 망자 중에 괜찮은 녀석 있으면 신전에 둘게.'
〔그런 게 아니니라. 감히 짐을 무엇으로 보느냐!〕
'올림포스 소속 성좌들 중에는 이상성욕자들이 많으니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색을 최고로 쳤다며.
어질어질하다.
취향은 존중하는데, 요구까지는 하지 맙시다.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인정해준다는데도 뭘 그렇게 억울하게 생각해.'
〔절대! 아니니라!〕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라고 했다.
성좌 나리의 취향.
잘 알겠다.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주인. 또 여기 왔어?"
"이렇게 있으면 기분이 좋거든."
"별나기는."
파프너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좌우로 흔들린다.
"하나 물어봐도 돼?"
"실례되는 질문만 아니면."
"방지턱 한번 높네."
"뭐든 물어봐. 답은 안 해줄 수도 있지만."
유진은 등을 돌려 파프너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랑 계약할 때. 기억나나."
"지박령 시절?"
"어."
"그걸 어떻게 잊겠어."
파프너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절반은 용이고.
또 다른 면으로는 언데드의 성질을 지닌 이질적인 존재.
사룡으로 거듭나면서 숨을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내뱉을 수 있게 됐다.
"하루하루가 아주 빌어먹을 나날이었지."
"너답지 않은 표현이군."
"생각해봐. 오크가 똥 싸고 여기저기에 쉬를...."
"미안하다. 질문을 잘못 한 것 같다."
"나 이제 좀 말하려고 하거든? 좀 들어주세요."
죄송합니다.
싸울 때 빼고는 늘 장난스럽고 온화한 성격의 파프너였지만.
지금은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물 대신 욕지거리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혹시.
이 질문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건 아닐까.
파프너는 한동안 지박령 시절 때 본 꼴사나운 이야기를 마구 퍼부었다.
"...속은 좀 시원하나?"
"후우. 덕분에 풀렸어. 요즘은 감정이 막 샘솟는다니까."
"사룡이 된 영향일 거다."
"난 언데드였던 시절에도 판단과 감정을 모두 가지고 있었어."
"조금 달라."
감정도 학습된다.
사람마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감정이 들 듯.
타고난 성정도 있지만 축적되는 경험에 따라 생각도 따라가는 법이다.
"네가 판단하고 느낄 순 있어도 온전한 감정이라고 말할 순 없다."
"심리학에도 능통하네. 우리 주인은."
"언데드를 자주 만지작거리다보니 알게 되는 것이다."
송명석의 경우를 보자.
녀석이 왜 대전사 호칭에 목을 매고 있을까?
생전에도 인정욕구와 상승에 대한 갈망이 강했기 때문이다.
"망자는 죽기 전에 집착했던 것을 쫓는 법이지."
"그 말대로라면 나도 뭔가에 집착하겠네?"
"복수, 라고 말하면 반쪽짜리 답일 거다."
"헤. 나머지는 뭔데?"
"싸움 자체."
복수에 미쳐 있었으면 파프너가 이렇게까지 얌전히 있었겠는가.
그랬으면 아라한 길드만 봐도 눈이 돌아갔을 걸.
회귀 전의 박하늘 씨하고는 조금 달랐다.
'그때의 넌 복수만이 되살아난 삶에서 가진 유일한 목적이었다.'
생전 기억과 생각, 그리고 감정이 모두 풍화된 지박령.
오죽하면 박하늘 씨가 여자인지도 몰랐다고.
폴리모프를 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감정에 대한 일장연설도 질문과 관련된 거겠지?"
"너와 맺었던 계약을 이룰 기회가 조만간 찾아올 거다."
싱글벙글 웃던 파프너의 입가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복수 대상인 두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이성을 놓지 않을 자신이 있나?"
"흠. 어려운 질문이네."
"너는 대전사다. 네크로폴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이기도 하고."
사룡이 된 파프너는 준 8성 괴물인 애꾸눈의 발을 묶을 만큼 전투력이 상승했다.
네크로맨시로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유진도 해석할 수 없는 원시 마법.
공중을 날아다니면서 기동력도 엄청나게 올라갔고.
용의 힘을 온전히 이해하면서 암흑 강기까지 펼칠 수 있게 되었다.
"1달 안에 아라한을 지워버릴 생각이다."
"꽤 구체적인 일정이네. 얼마 남지 않았기도 하고."
"바빠질 이유가 있어서."
2달 뒤, 평양 주석궁에 나타나는 배교자의 심장.
평양으로 길을 내려면 먼저 사리원을 함락시켜야 한다.
사리원에서 평양까지는 금방이니.
"성좌 님이 보여준 기연이구나?"
"응. 2달이면 촉박하지."
"사리원을 손에 넣으면 아라한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놈들이 오는 건 이미 확정적이잖아."
전면전은 이미 피할 수 없다.
블랙 컴퍼니 소속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간을 앞당기는 거지."
"아. 양면전선을 피하려는 거구나."
이래서 파프너는 편하다.
몇 마디를 나누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을 쏙쏙 짚어냈다.
"그래서 묻는 거다."
"으으으으음."
파프너는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지시를 해줘."
"우리가 나눈 계약을 잊지 마."
망자와 계약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특히 네크로맨서라면.
시신과 혼백을 부려 자신의 힘으로 삼는 족속들.
주문으로 억누르면 모를까.
파프너처럼 계약을 걸고 되살린 망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신우와 백성현. 네 손으로 죽이고 싶잖아."
"맞아."
"상황이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
비행 능력을 지닌 파프너는 전장의 변수를 일으킬 강력한 패다.
전투가 벌어지면 높은 확률로 이신우의 발을 묶는 데 투입하겠지만.
시시각각 전황이 오락가락하는 전장에서 한 역할만 맡기기에는 파프너가 너무 유능했다.
"백성현은 못 죽일 수도 있어."
"...싫은 걸."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느냐, 를 물어보는 거다."
제 손으로 복수를 해내지 못하면?
두고두고 한이 되어 파프너의 혼백을 좀먹을 것이다.
회귀 전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스켈레톤 나이트로 되살린 박하늘 씨.
개조를 통해 데스 나이트로, 그 뒤로는 둠 나이트에서 최종적으로 9성 급인 헬 나이트로 강화되었지만.
생전 기억과 감정이 대부분 흐려져서 한을 모두 해소하지 못한 게 힘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아니야.'
회귀 전보다 몇 년이나 앞당긴 만남.
사룡이 되면서 굳어 있던 감정을 온전히 일깨우기까지 했다.
한을 모두 풀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데스 나이트 때처럼 호재로 작용하진 않을 걸.'
그러니.
확실하게 짚고 가야 한다.
"네 복수 대상을 더 넓게 생각하면 어떨까."
"어떻게?"
"이신우와 백성현이 너를 죽인 건 아라한 길드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국내 1위.
두 사람은 아라한 길드를 부동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갖가지 모략을 사용했다.
물밑에서 로마노프 가문과 협약을 맺은 것도 그 이유.
"아라한 길드를 지우는 게 최고의 복수 아닐까."
파프너는 잠시 침묵했다.
"...이 말을 왜 해주는 거야?"
"아라한과의 전쟁에서 네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그렇게까지 나를 배려해주는데. 그 말에 따라야지."
휴.
다행이군.
그럼 본인의 동의도 구했겠다.
"바로 출발하자."
"어디를 가?"
"아라한 길드의 발등에 불을 놓으러 가야지."
평양으로 가는 길.
사리원 시를 함락시키러 가야지.
"우리 둘이서?"
"소수로 움직이는 게 나아."
비행 가능한 파프너는 몬스터로 가득한 옛 도로를 건너뛰어 곧장 사리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사리원 시를 먼저 정리하고 길을 내도 늦지 않는다.
중요한 건 아라한 길드를 도발하는 거니까.
"나 부려먹으려고 밑밥을 깔았고만?"
"그런 건 아닌데, 겸사겸사지."
"어쩐지. 주인이 왜 나를 배려해주나 했다."
한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대는 유독 대전사에게 관대하구나.〕
어쩔 수 없잖아.
파프너는 전생에도, 현생에도 유진에게 소중한 인연이다.
수중에 쥔 패 중에서 가장 강력하기도 하고.
"아라한을 끌어들일 준비를 하자."
"알았어."
흑탑 정상에서 몸을 아래로 던지는 파프너.
[폴리모프]
강렬한 빛과 함께 5미터 크기의 용으로 변해 탑 위로 날아왔다.
*
평양에 자리 잡은 군벌.
일명 짐승 군대는 옛 북한의 행정 구역인 황해북도와 평안남도 상당수를 지배하에 두고 있다.
사리원 시는 평안남도의 영역.
즉, 짐승 군대가 다스리고 있는 땅이다.
"저거 뭐래."
"룡 아닌가."
"제5 혁명군이 룡도 길들였네?"
"쉰 소리 말라. 그 애미나이들 뒈진 지 오래라."
인간과 짐승이 섞인 모습의 군인들.
라이칸스로프들은 하늘 위를 올려다보며 떠들었다.
그 순간.
스으으읍-.
콰아아아아!!!!!
파멸의 숨결과 원시 마법들이 지상을 덮쳤다.
무방비하게 파프너를 바라본 라이칸스로프들은 브레스에 뼈도 못 추리고 소멸했다.
데엥! 데엥!
"공격이래!"
"다 듁이라우!"
"어디서 왔나?"
"하늘에서 날아왔대!"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도시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늦었어.]
빗발치는 광선 세례에 가슴이나 머리가 뚫린 수인들.
유진은 곧바로 입술을 달싹였다.
"내 부름에 답하라."
전장 여기저기서 되살아난 망자들이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자를 덮친다.
이북에서 꽤 발전된 도시로 꼽히는 사리원 시.
규모가 상당하기에, 시 전체를 보면 피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짐승 군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혼란을 가속화한다.'
난전으로 가면 반드시 승리한다.
네크로맨서만큼 난전에서 힘을 발휘하는 직업군은 많지 않다.
[주인. 영력은 괜찮아?]
"괜찮아. 알아서 관리하고 있다."
라이프 드레인과 역천의 가호가 있으니, 장기전으로 가도 버틸 만 했다.
적의 숫자가 많다 싶으면 [데스 에어리어]를 전개하든 해야지.
유진과 파프너가 사리원을 불사르고 있을 때.
-으어어.
-전진. 전진.
-노를 저어라. 노예야.
연평도 근처를 배회하던 유령 함대도 북상을 시작했다.
헌터협회에서 제제한 것은 해주로 향하는 길.
그렇지만.
해로는 딱히 제한에 두지 않았다.
[주군께서 내게 단독 임무를 주셨으니,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송명석은 유령선 갑판을 밟고 폼을 잡았다.
1차 목표는 서해 5도 제압.
백령도까지 제압하면 황해도 인근의 바다를 장악할 수 있고.
그 위에 있는 초도를 함락시키면 평양까지의 해로가 열린다.
[파프너. 이제 대전사라는 이름을 반납할 준비나 하시죠!]
유진이 파프너를 동행시켜서 단독 행동에 나선다는 것을 모른 채.
송명석은 자신이 신뢰받는다는 기분에 어깨가 으쓱거렸다.
1주일 뒤.
유진은 사리원과 황해도의 바다를 제압해서 평양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었다.
199화 끔찍한 혼종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50입니다.]
[한계를 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갑니다.]
후.
드디어 6성인가.
[주인. 방금... 무슨 일 있었지?]
"6성이 되었다."
파프너는 비행 중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황당함으로 물든 눈동자.
잠깐 동안 멍하니 유진을 보더니.
[편의점에서 담배 사오는 것처럼 말하지 마!]
분노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왜 그래?"
[내가 어지간해서는 뭐라고 안 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6성으로 올라가면 기뻐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충분히 기쁘다만?"
[아오!]
파프너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생전에 그녀와 동일한 성취를 1년 만에 이룬 것도 믿기지 않는데.
그 대단한 위업을 이룬 당사자는 심드렁했다.
[혹시 내가 7성이니까 6성이 대단하게 안 느껴지는 거야?]
"에이. 설마 그러겠어."
유진은 곧바로 부정했다.
6성?
회귀 전에는 초월의 경지에 올라 불사왕이라고 불린 몸이다.
시스템에서 '왕'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은 9성에 이른 헌터뿐이다.
한 번 정점에 도달해봤으니 감흥이 없을 뿐.
물론.
파프너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다.
[흥.]
"왜 이러실까. 우리 대전사님."
[가끔 보면 재수 없는 거 알지?]
"너무 잘나도 피곤한 법이지."
[한 마디를 안 져요.]
파프너는 투덜거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콰아아!
지면에 새겨지는 기다란 고랑.
브레스에 휘말린 몬스터들은 뼈도 못 추리고 쓰러졌다.
'가까이 있으면 경험치가 오르긴 해.'
엘드리치 드래곤에서 사룡으로 변한 파프너.
독립된 개체가 된 후로는 경험치 공유가 안 될 줄 알았다.
한데, 밀착한 채로 2주 간 돌아다니며 괴물들을 학살하다 보니 경험치가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다.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란 거군.'
파프너를 엘드리치 드래곤으로 사역하고 있을 땐 강제로 명령을 내리는 게 가능했다.
이론상으로 가능하다 뿐.
실제로 그녀의 의지를 꺾을 일은 없었지만.
정룡 아성체들의 정수를 흡수하면서 진정한 용족이 된 후로는 강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어쨌든 경험치가 들어오는 게 어디야?'
사리원에 있는 짐승 군대를 몰아낸 후에도 전투는 끊이지 않았다.
평양의 본대가 직접 몰려오지는 않았지만.
이틀 간격으로 정찰대를 보내 사리원의 정황을 살피려 했고.
몬스터들도 내려왔다.
[쉴 틈이 없네.]
"그래도 네 덕분에 수월하게 풀어가고 있다."
[말은 잘해요.]
진심인데요?
파프너의 압도적인 기동력이 없었으면, 사리원을 공격할 시도도 안 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적을 요격할 방법은 한정되어 있다.
전쟁에서 왜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일방적인 딜 교환.
거기에 정보의 이점까지.
파프너의 위에 타고 다니니 비행이라는 장점이 극대화되었다.
"내 부름에 답하라."
비교적 멀쩡한 시체는 언데드로 되살려서 병사로 써먹었다.
사리원의 짐승 군대를 몰아내고도 할 일은 넘쳐났다.
먼저 평양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려면 옛 도로에 넘쳐나는 괴물들을 쓸어버려야 했다.
유진이 획득한 어마어마한 경험치의 원 주인들.
파프너가 원시 마법으로 괴물들을 몰살시키면, 언데드로 되살려서 길을 열었다.
[근데 몬스터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타나잖아.]
"숫자를 줄이는 데 의의가 있는 거다."
오크처럼 본능적으로 군락을 지어 사는 괴물들은 수를 줄여두면 힘도 감소한다.
정면 대결보다 각개격파 하는 게 소모도 덜하잖아.
언데드 군대를 사리원으로 보내려면 주기적으로 길 정비를 해줘야 한다.
[근데 해안가까지 장악했으면 강을 타고 올라가는 게 낫지 않아?]
"수송이 얼마나 큰 일인데."
약 30척에 다다르는 유령 함대.
절반은 미스터 블랙에게 대여, 해상 무역(밀수)에 동원되었다.
남은 15척을 모두 수송에 동원해도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뿐이랴.
브루탈이나 사이클롭스 같은 대형종은 아예 수송이 불가능하다고.
"상륙 작전이 어려운 건 너도 겪어봐서 알잖아."
[아. 그렇지. 인간사냥꾼 놈들.]
연평도 기습.
인간사냥꾼 3대장 주영민이 오우거와 트롤을 싣고 공격을 강행했지만.
해안가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괴물들을 물고기 밥으로 주고 후퇴했다.
[그땐 주인이 있었으니 버텼지.]
"객관적인 전력은 우리가 열세였어."
상륙작전은 예로부터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았다.
현지 주민의 협력이 있거나, 적의 시선을 돌리는 등 여러 공작을 벌여야 한다고.
[현지의 협력을 얻는 건 주인이 잘하는 거잖아.]
"내가?"
그런 재주를 부린 적이 있던가.
[언데드로 만들어서 잘도 부려먹더만.]
"협력을 얻어낸다는 표현이 언제부터 그렇게 쓰였지."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평양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마담이 나팔 꽤 불어놨을 거다."
[정말 믿기지가 않아. 아라한 길드 훈련장에서 주먹을 맞댔을 때만 해도 이 순간이 올까 했어.]
누구였더라.
보육원 때 엮인 악연을 정리할 때를 말하는 것이군.
회귀 전의 기억이 강렬하다 보니, 보육원 때 기억은 대부분 휘발되어버렸다.
'미래에 이름도 남기지 못한 사람을 기억해줄 필요가 있나.'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슬슬 돌아가자."
[몬스터 정리가 덜 끝났는데?]
"6성으로 올라갔으니 일 좀 해야지."
파프너는 콧김을 킁- 하고 불더니 남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
네크로폴리스로 돌아온 유진은 희생의 구덩이로 향했다.
[희생의 구덩이]
건물 규모 - Lv3
시체에 대량의 영력을 불어넣어 숙성시키는 구덩이입니다.
푹 파인 구덩이에는 초록색 피부의 외눈 괴물이 누워 있었다.
애꾸눈.
접경지역의 폭군으로 군림하다가 인간사냥꾼에게 붙잡혔고.
끝에는 유진에게 살해당했지만, 그 강함은 퇴식되지 않았다.
'온전하게 시체를 보관한 것만 봐도 알잖아.'
5성 수준으로는 애꾸눈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
못해도 상급 네크로맨시 주문은 사용해야 애꾸눈의 전력을 끌어낼 수 있다.
〔호오. 드디어 저 괴물을 그대의 하수인으로 되살리려는구나.〕
'그렇긴 한데, 실험을 하나 할 거다.'
〔실험이라?〕
'성좌 나리가 하사한 주문을 써봐야지.'
〔호플리테스 말이더냐.〕
그래.
한 마리만 사역할 수 있지만, 성위를 뛰어넘는 강력함을 자랑하는 소환수.
'상급 강령술과 겹쳐서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마력(영력)과 성력은 섞이지 않는다.
이 상식은 몇 번이나 무너졌다.
크로노스가 부여한 힘, [역천의 가호]는 에너지를 손실 없이 치환하는 능력을 보유했다.
〔꽤 흥미로운 가정이로구나.〕
'그렇지?'
〔하나, 쉽진 않을 것이다.〕
크로노스는 흠,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대가 상반되는 힘을 다룰 수 있는 건 짐의 성자이기 때문이니라.〕
백야의 성자.
회귀 전, 후를 통틀어보아도 이만큼 이질적인 능력은 들어본 적이 없다.
마력과 성력을 치환해서 양쪽 기술 모두 쓸 수 있게 해주는 어마어마한 특성.
그렇지만.
한계도 있다.
〔두 힘을 공존시킬 수 없을진대, 무슨 수로 동시에 주문을 사용하려느냐?〕
크로노스의 지적은 타당했다.
유진은 중급 언데드를 부릴 때, [백야] 특성으로 영력 / 성력을 치환하는 순간 언데드 군대가 크게 휘청거렸던 경험을 했다.
사역 중인 언데드는 술자의 영력으로 움직인다.
영력을 성력으로 치환했으니, 영력 공급이 끊긴 중급 언데드들이 순간적으로 무력화 된 것이었다.
'백야 특성으로 치환하는 건 능력치다.'
〔그렇지.〕
'스탯 변경과 주문사용은 별개라는 거지.'
〔구태여 동일한 말을 반복하는 연고가 있느냐?〕
'내 참. 성좌 나리가 준 가호를 까먹으면 어떻게 해.'
〔역천의 가호〕
힘을 분석,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해서 방출하는 전대미문의 가호다.
인간사냥꾼 토벌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활용.
수괴인 김봉효의 전력을 상당수 날려버렸다.
'두 힘을 공존시켜서 주문을 사용하면 된다.'
〔과연. 역발상이로구나.〕
결과는 유진도 장담할 수 없다.
신성 주문으로 언데드를 만드는 건 회귀 전에 없었던 일.
그럼에도.
유진은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성을 품은 언데드도 만들어봤다. 안 될 건 없잖아.'
두 주문을 동시에 애꾸눈에게 사용하면.
어느 쪽이든 반발을 일으킬 것이다.
그 반발을 억누르는 것은 자신의 역할.
성공하면.
두 성질이 공존하는 언데드를 최초로 제작하는 것이다.
'업적은 못 참지.'
회귀 전의 연구 성과만으로도 [흑암의 반지]의 역대 주인들을 앞섰지만.
유진은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역천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네크로맨시의 새 역사를 써보는 거다.'
묘한 흥분감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렇다.
이 맛에 네크로맨시를 연구했지.
[언데드 리본 주문을 습득합니다.]
[생체 변환 주문을 습득합니다.]
▷언데드 리본
분류 : 강령술
등급 : A
제한 : 6성 이상
영혼이 떠난 시체를 상급 언데드로 제작합니다.
제작한 언데드의 질은 베이스가 된 사체의 능력과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달라집니다.
▷생체 변환
분류 : 생체 마법
등급 : C
제한 : 5성 이상
피와 살에 마력을 부여해서 형태를 개조합니다.
6성부터는 데스 나이트나 리치 같은 상급 언데드를 제작할 수 있다.
데스 나이트는 오러 블레이드와 동급인 암흑 강기를 무기에 불어넣을 수 있으며.
리치는 암흑 마법에 능통한 강력한 마법계 언데드다.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말이야.'
리치는 산 자의 생기를 추출해서 언데드로 만드는 비술.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리치가 된다.
하수인으로 부려먹으려면 칼 들고 협박해야 가능하단 거지.
'잡생각은 여기까지.'
먼저 손바닥에 끌어올린 영력을 [역천의 가호]로 흡수.
에너지를 재구축해서 크로노스의 성력으로 치환하기까지는 무난하게 성공했다.
그 다음이 문제군.
영력을 천천히 재배열해서 사용 준비를 마치고는.
"내 부름에 답하라."
힘 있는 음성으로 외치며, 마음속으로는 신성 주문인 호플리테스를 읊었다.
대상은 하나.
발동되는 주문은 둘이다.
성력과 영력이 동시에 스며들자, 미동 하나 없던 애꾸눈의 시체가 크게 들썩거렸다.
"오. 뭐야. 주인?"
말 걸지 마라.
지금은 한 순간도 정신을 놓을 수 없다.
'두 성질은 어떻게든 반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충돌이 아닌, 서로 경계를 그어버리자.
몸을 지탱하는 요소, 뼈는 영력이 머무는 곳으로 두고.
근육과 피부에는 성력을 덮는다.
서로 접촉하는 부분에 [생체 변환]을 사용해서 분리하면.
'...된다.'
반발은 최소한으로 억누르고.
두 성질이 애꾸눈의 시체를 물들이며 실시간으로 변화시켰다.
[데스 나이트&호플리테스를 제작합니다.]
[상반된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두 기운이 충돌하여 폭주합니다.]
[두 기운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폭주가 잦아듭니다.]
애꾸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나만 남은 눈동자에서 푸른 귀기가 감돌았고.
성력으로 강화된 피부 위로 시커먼 기운이 일어나서 갑주처럼 전신을 감쌌다.
"암흑 강기로 몸을 둘러?"
파프너의 감탄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아냐.
이 녀석의 진가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다.
호플리테스는 '갑주'를 입은 것으로 판정받으면 능력치가 상승한다.
암흑 강기로 만든 갑옷도 판정으로 들어갈까?
[데스 나이트&호플리테스가 완전 무장을 갖추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성공이다."
와.
이게 되네.
유진은 감탄사와 함께 권속으로 되살아난 애꾸눈의 스펙을 확인했다.
200화 한 판 붙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