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SANTOSUBEDENIVELCONNIGROMANCIA / Chapter 13 - 120-130

Chapter 13 - 120-130

120화 똑바로 일해라, 기연 탐색기(1)

마력과 육체, 그리고 신력을 일체화시키는 순간.

하얀 섬광과 함께 일어난 폭발이 칼날에 깃든 오러를 짜부시켰다.

뒷짐을 진 채 구경하던 용병단 고문인 김미정이 화들짝 놀랄 정도의 위력!

옆에 서 있던 민상진이 추가로 오러를 구현, 충격파를 해소하지 않았으면 팀원이 크게 부상당했을지도 몰랐다.

"와 형씨. 방금 뭐한 거요?"

"잔재주일 뿐입니다."

"거, 잔재주 두 번 부리면 우리 애 잡겠네. 잡겠어."

민상진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처음 보는 것 마냥 행세하며 판을 깔아준 건 그였지만, 이렇게까지 화끈한 걸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내가 전력으로 오러를 전개한 수준이라고?'

잔잔하게 떨리는 도끼날.

본능적으로 오러를 최대까지 끌어 올렸는데도 충격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민상진은 허,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코찔찔, 아니. 용병단장.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아. 김미정 고문님."

"씨이, 고문. 그래. 명칭은 됐고. 오러는 아니었잖아. 그거."

"예. 마력에 가호를 더해서 일거에 터트린 겁니다."

웅성웅성-.

"가호라고?!"

"벽도 못 넘은 헌터가 배후성이 있다니."

"성좌가 주목할 만큼 대단한 인재라는 건가."

장내가 다시 한번 시끌벅적해지려고 하자, 김미정이 카악! 하고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단장. 지금 되게 터무니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거 알아?"

"어, 그렇습니까."

"가호도 놀라운데 그걸 마력이랑 같이? 너 3성이잖아."

"뭐어, 그렇죠."

"시, 아오. 이 놈의 주둥이. 아무튼 그 정도면 한계 레벨 찍는 순간 바로 4성 되겠네."

김미정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흥미 가는 상대를 찾았을 때 나타나는 무의식적인 습관.

"천하의 미친개가 3성 헌터에게 관심을 가질 줄이야."

"용병단장. 허당이 아니잖아."

"잠깐. 그보다, 방금 전에 용병단 고문이라고 하지 않았어?"

"미친개가 용병단 간부라니!"

3성 헌터가 성좌의 가호를 받은 것도 놀라운데.

배후에 김미정이 있다고 하자 용병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언제 반발했냐는 듯 한 분위기.

강민호가 보여준 신기와 용병단 고문의 존재감이 그들의 불만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강민호 용병단장. 앞으로 잘 부탁하겠수."

민상진이 히죽 웃으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사내는 강민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손을 마주 잡은 강민호.

유진은 픽- 짧게 웃었다.

'거 참. 나설 틈도 없네.'

용병들의 기를 눌러줄 계획을 세 가지는 준비했는데 말이야.

생각도 못한 조력자가 나타나긴 했지만.

어찌 됐든 용병들을 납득시킨 건 강민호의 능력이었다.

'내 생각보다 더 깔끔하게 분위기가 잡혔어.'

뽀시래기 용병단.

첫 단추는 유진이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하게 꿰어졌다.

*

용병단 체계를 잡는 건 뽀시래기 팀과 임재백에게 맡겼다.

"부탁 좀 할게."

"그러실 줄 알고 대략적인 틀은 짜놨습니다."

"진짜? 감동받을 것 같아."

"암상에도 도움을 요청해두었고요."

빈틈이 없군.

무장 해제하고 무인도까지 가서 임재백을 구한 보람이 느껴진다.

사람은 역시 착하게 살아야지.

덕을 베풀면 다 보답 받는 법이다.

〔다 계산하고 한 행위면서 무슨 덕을 베풀었다는 게냐.〕

'사람 구해줬으면 됐지. 임 이사를 강제로 부려먹는 것도 아니잖아.'

은혜를 갚겠다고 자청하는 사람에게 월급도 주고.

귀히 써먹는 건데 뭐가 문제인가.

번거로운 일은 임재백에게 모두 넘긴 후, 건물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주머니에서 꺼낸 회중시계.

유진은 기대 섞인 눈으로 멈춰버린 시침을 바라봤다.

'참 오래 기다렸다.'

〔호오.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느냐?〕

'벌써는 무슨. 쿨타임 기다리느라 눈 빠지는 줄 알았거든.'

사물이나 생명의 기억을 읽어내는 신성 주문. 메멘토.

회귀 전의 시간대를 읽어내는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크로노스가 유진을 위해 튜닝한 '기연 탐색기'의 사용 쿨타임이 드디어 돌아왔다.

'기연 탐색기야. 제발 좋은 것 좀 알려주라.'

〔지금껏 얻은 정보들이 대단치 않은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 그건 아닌데 또 모르잖아.'

〔짐에게 간절히 빌며 경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사용하여라.〕

크로노스의 타박을 한 귀로 흘리며 회중시계에 손을 얹었다.

[메멘토를 사용합니다.]

[대상 –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푸른 초목이 대지의 굴곡을 따라 오르내리락하는 산지.

단면만 봐서는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쿵- 쿵-.

육중한 발자국 소리가 나고, 잠시 후 괴물 한 마리가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몸 길이가 10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도마뱀.

갈색 피부는 바위처럼 거칠었고.

발톱은 강철조차 찢어버릴 정도로 날카롭고, 또한 단단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쭉 찢어진 노란 동공에 아른거리는 사이한 기운까지.

'바실리스크라.'

국내에 바실리스크가 생성되는 지역이 있던가?

턱을 만지작거리던 중 아- 하고는 무심결에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유진이 탄식을 내뱉는 타이밍에 맞춰 몸을 비트는 바실리스크.

긴 동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동굴이 드러났다.

동굴 안에 놓인 책 한 권.

[군주의 위엄]이라고 적힌 스킬북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환상이 끝났다.

[2026/01/19일]

[파주의 기억을 읽었습니다.]

두 눈을 끔벅인 후, [메멘토]가 보여준 환상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맘때에 한국에서 저 기연을 획득했던 사람이 있던가?

몇 번이나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누군가가 기연을 얻었지만, 허무하게 죽었나 보군.'

〔왜 그리 생각하느냐?〕

'군주의 위엄은 구하기 어려운 지휘 계통 스킬이거든.'

지휘 버프는 신성 주문과 겹치지 않고 다수에게 적용된다는 장점이 있다.

〔네크로맨시에도 비슷한 주문이 있지 않던가?〕

'언데드 커맨드 말이구나.'

〔그렇도다.〕

'지휘 스킬의 이점을 마법으로 흉내 낸 거다. 원류에 비해서는 좀 떨어져.'

범위가 100미터밖에 안 되는 데다, 성력이 짙은 곳에서는 발동 자체가 안 된다.

흉내 낸 게 이 정도면 칭찬할 만하지만.

제대로 된 지휘 스킬에 비하면 아쉬운 성능이지.

〔그대에게 알맞은 기연을 찾아주었구나.〕

'어. 먹고 죽어야 할 만큼 매력적인 기연이야. 그래서 고민이 돼.'

〔바실리스크가 두려운 게냐?〕

'작정하고 싸우면 해볼 만해.'

바실리스크의 성위는 6성.

강철보다 단단한 피부와 덩치에서 나오는 괴력도 무시무시하지만.

보기만 해도 생물체를 굳게 만드는 석화의 마안과 마비 독을 품고 있어서 6성급 몬스터들 중 까다로운 축에 속한다.

〔이야기만 들으면 상대하기 번거로워 보인다만?〕

'내 주력은 언데드다. 마안의 대상이 아니야.'

석화의 마안이 굳게 만드는 것은 생물체뿐.

마비 독도 시체한테는 효과가 덜하다.

단단한 가죽?

파프너의 주먹이면 충분하지.

〔하면 거리낄 게 없지 않느냐.〕

'바실리스크의 영역 근처에는 그 놈이 산다.'

〔그 놈?〕

'애꾸눈.'

7성에 도달한 변종 오우거, 애꾸눈.

오러 블레이드와 마법을 동시에 다루는 데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는 강력한 스펙을 지닌 괴물이다.

〔애꾸눈이라는 괴물과 조우할 것을 상정하고 대비하면 되지 않느냐.〕

'못 이겨.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그대가 약한 소리를 내뱉다니. 어울리지 않도다.〕

'내가 일을 막 벌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해볼 만하니까 하는 거야.'

애꾸눈이 아닌, 다른 7성 괴물이었으면 가능성이 1%라도 있다.

마법계 괴물은 인근의 마력 분포를 인위적으로 낮추거나 마법 전개에 개입하는 등, 싸움에 유리한 환경을 구축하면 되고.

무투계도 함정을 세팅하거나 온갖 독이나 디버프를 준비하면 해볼 만했다.

〔하면 왜 그 괴물은 안 된다는 게냐?〕

'오우거는 태생적으로 저항력이 높고 위기 감지 능력도 뛰어나.'

함정 같은 걸 세팅해봐야 본능적으로 알아챌 거고.

정면승부로는 가능성이 없다.

발도 빨라서 도주조차 쉽지 않지.

〔포기할 셈인가?〕

'설마. 못 먹어도 가야지.'

〔크하하핫! 이래야 짐의 계약자답지.〕

'충동질해놓고 그렇게 말하냐.'

〔위기와 기회는 표리일체. 도전정신도 영웅의 풍모이니라.〕

으휴.

그 놈의 영웅 타령은 왜 안 하나 했다.

바실리스크 사냥에 애꾸눈과 충돌할 것까지 대비해야 한다, 라.

'준비가 필요하겠어.'

*

뽀시래기 용병단 관련 업무가 자리 잡아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네크로폴리스로 돌아왔다.

"송명석. 네크로폴리스 방어 총괄을 맡기마."

[보았습니까? 주군께서 가장 신용하는 하수인은 바로 나입니다.]

"아. 그건 아니고. 파프너는 바실리스크 사냥에 필수인데 넌 아니거든."

바실리스크는 오우거보다 거대한 몬스터.

오우거나 브루탈한테도 고전하는 송명석이 나설 차례가 아니다.

[주구우우운!!!]

[후후후. 넌 적임자가 아니라고 하잖아. 어쩔 수 없지.]

파프너의 낮은 웃음에 송명석이 푸른 귀화를 거세게 불태웠다.

브루탈 한 구는 흑암의 반지에 보관해두었다.

[둘 가지고 되겠어?]

"자신 없으면 말고."

[바실리스크는 6성에 대형종이잖아. 혹시 몰라서 그렇지.]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바실리스크가 아니다."

애꾸눈의 활동 범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

브루탈처럼 덩치가 큰 언데드가 움직이면 놈의 시선을 끌기 십상이다.

"뭐, 블러드 골렘도 있으니까 전력은 모자라지 않아."

[역시 주인은 계획이 다 있었구나.]

"송명석아. 형 돌아올 때까지 집 잘 지키고 있어라."

[존명.]

브루탈 4구.

다크 미니언 39구.

그 외에도 수백 구나 되는 하급 언데드들까지.

인간사냥꾼이 전력을 다하거나, 혹은 애꾸눈이 쳐들어오지 않는 한은 버틸 수 있으리라.

"조승철아. 넌 다른 애들 레이즈 언데드 숙련도 20%까지 만들어놓고."

[그겔. 알겠습니다. 주인님.]

"한 놈이라도 미달되면 대가리 박을 생각하고."

[게으른 놈들! 어서 주문 연습해라!]

다크 미니언들을 채찍질하는 조승철.

전처럼 오랜 시간 동안 네크로폴리스를 비워둘 것도 아니라서 간단한 지시 위주로 내린 후 접경지역 안쪽으로 향했다.

[근데 웬 바실리스크냐?]

"내 성좌님이 좋은 신성 주문을 내려주었거든. 기연 탐색기라고."

[기연 탐색?]

회귀 전의 시간선을 읽어내어 누군가가 손에 넣은 기연을 파악하는 주문.

매커니즘을 모두 설명해줄 순 없으니 두루뭉술하게 말해주었다.

"이번에 주문을 사용해보니 바실리스크가 있는 곳에 스킬북 하나가 있다더라."

[주인이 모시는 성좌님은 참 특이한 것 같아.]

"어느 부분이?"

[굉장히 세속적이잖아. 신성 주문치곤.]

파프너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흐흐. 그렇다고 하네요. 성좌 나으리.

[다크 콜링을 사용합니다.]

북쪽으로 올라가던 중에 몬스터 몇 마리와 조우.

유진이 나설 것도 없이 파프너 선에서 모조리 정리가 되었고.

쓰러트린 몬스터의 혼백에 저주의 낙인을 찍어 망령으로 만든 후 정찰병으로 사용했다.

[그 소소한 디버프 효과는 여전하지?]

"탐색용도가 더 크지."

망령 여러 마리를 퍼트리고는 [고스트 아이]로 주위 지형을 살폈다.

[메멘토]가 보여준 지형이 어디에 있을까 눈을 돌리던 중.

"어. 잠깐. 저기인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본 토굴과 흡사하게 생긴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후두두둑, 땅을 파헤치면서 나온 10미터 크기의 도마뱀이 하늘 위로 눈을 부라렸다.

[고스트 아이를 해제합니다.]

[망령 1구가 소멸했습니다.]

"와, 씨. 큰일 날 뻔했네."

[무슨 일이야?]

"바실리스크가 영체를 보고는 곧바로 석화를 사용했다."

망령과 동조되어 있는 상태에서 마안의 저주를 뒤집어썼다면 유진에게도 타격이 넘어왔을 거다.

시야 공유 주문을 1초라도 늦게 해제했으면 꽤나 아팠겠어.

"찾았으니 됐어."

[어디로 가면 되나?]

"10시 방향."

누가 손에 넣은 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게, 잘 써먹어주마.

121화 똑바로 일해라, 기연 탐색기(2)

땅에 남은 커다란 족적.

망령이 소멸한 방향으로 가다 보니 바실리스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견한 토굴.

바실리스크는 그 앞에서 한가로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주인 버프는 받을 때마다 참 힘이 난단 말이지!]

분기탱천한 사념을 토해낸 파프너가 정면으로 돌진.

하품을 뱉으며 나른함에 젖어든 바실리스크가 살기를 인지하자마자 동공을 수축시켰다.

눈에 아른거리는 강력한 마력.

[석화의 마안]

번쩍!

용린갑을 획득했던 게이트, [잊힌 사원]에서 마주쳤던 '악마의 눈'이 쏘아 보낸 광선처럼.

즉시발동 형 스킬인 마안(魔眼)이 파프너를 향해 쇄도했다.

"크라락?"

[후후. 눈이 꽤 따갑네.]

생명력을 역전시켜서 돌로 만들어버리는 석화의 저주.

이미 피가 말라버린 망자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한 발 늦게 불청객의 정체가 언데드라고 확인한 바실리스크가 몸을 일으켰다.

"크라라라!!"

[목청 좋네. 노래도 잘 부르겠어.]

네 발을 좌우로 움직이며 돌진하는 바실리스크.

지축이 비명을 지르고.

그 여파로 수풀이 거세게 흔들리거나 넘어지는 등, 힘을 주어 뛰는 것만으로 인근 지형이 비틀렸다.

[흐음. 대형종은 역시 다르단 건가!]

파프너의 안광이 거세게 타올랐다.

넘치는 호승심.

바실리스크는 분류 상 6성이지만, 실제 전투력은 준7성에 가까운 괴물이다.

6.5성 정도라고 해야 할까.

6성 절정의 헌터도 정면승부를 벌이기 꺼려하는 강적!

'정면 싸움은 밀리겠어.'

바실리스크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강렬한 기파.

손속을 겨뤄보지 않아도 서로의 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발을 허리 근처까지 들어 올렸다가 [암흑 투기]를 두른 채 전력으로 쾅- 지면에 내리찍었다.

저저적-!

바실리스크가 돌진하는 여파로 발생한 충격파하곤 본질적으로 달랐다.

파프너의 진각은 충격 에너지를 사방으로 퍼트리지 않고 전방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니.

발을 중심으로 삼각형 형태로 일어난 균열로 지면이 들썩거렸다.

달려오던 바실리스크가 순간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릴 정도.

"크라라락?"

주춤거리며 돌진을 멈춘 바실리스크.

성과는 그게 전부였다.

진각으로 땅을 흔들 때 상당한 영력을 퍼부었지만 바실리스크에게 생채기 하나 못 냈다.

돌 파편으로는 쇠보다 단단한 거죽에 흠집도 새기지 못했으니.

"잘했다."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낯선 사내의 음성.

미리 나무 위로 올라간 유진이 바실리스크가 멈춘 틈을 놓치지 않고 도약했다.

[흑암의 반지에 보관 중인 시체를 꺼냅니다.]

바실리스크의 위에 드리운 시커먼 음영.

등 위로 도약한 유진은 브루탈을 공중에 해방했다.

그대로 낙하하는 6미터 크기의 거인.

우직, 뼈와 피륙이 뭉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기발한 건지. 아니면 무모한 건지.]

"이왕이면 담대하다고 해줘. 같은 뜻이잖아."

[마법계 헌터가 적한테 뛰어드는 건 무모하단 말이 더 맞아.]

바실리스크 위에 떨어진 브루탈.

오우거를 베이스로 삼은 데다 여러 괴물의 살점과 트롤의 뼈를 덧대면서 생전보다 무게가 더 올라갔다.

수 톤이나 되는 괴물을 허리로 떨어트렸으니.

바실리스크는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정도 질량이면 폭탄을 투하한 거나 마찬가지겠어.]

브루탈에게 눌린 채 팔 다리를 허우적대는 바실리스크.

맞은 부위가 치명적이다 보니 몸을 움직이는 것도 시원찮았다.

-그우우우!!

바실리스크 위에 올라탄 브루탈이 깍지 낀 양손을 크게 휘둘렀다.

콰직, 콰직, 양손이 포물선을 그릴 때마다 거대한 동체가 이리저리 요동쳤다.

"크라라락!"

브루탈의 허리를 휘감는 기다란 꼬리.

두 다리에 힘을 준 바실리스크가 상체를 앞으로 내미는 동시에 꼬리를 뒤로 홱 밀어냈다.

자신의 몸을 튕겨냄으로써 생긴 관성.

그 힘으로 브루탈을 내동댕이치며 자유를 되찾았다.

[파충류 특유의 유연함을 이용할 줄 아는군.]

"그래봐야 도마뱀 새끼지."

강철보다도 단단한 바실리스크의 가죽.

유일한 약점은 늘상 땅에 붙어있는 뱃가죽의 비늘이다.

방어력이 다른 부위보다 1/3 이하.

허리 위에 올라탄 브루탈을 밀어낸답시고 파프너 앞에 그 약점을 드러내버린 것이다.

[다 주인 뜻대로 되네.]

[케넥 전투술]

[4장]

[정권 찌르기]

암흑 투기가 건물의 기둥만큼이나 두껍고 견고한 팔뚝을 휘감는다.

곧이어, 주먹을 축 삼아 일점으로 집중되고는.

바실리스크의 뱃가죽을 가격했다.

"크라라라락!!!!"

바실리스크의 아가리에서 튀어 나온 비명 소리.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브루탈을 튕겨내던 때와 정반대로 허리를 굽힌 채 바들거렸다.

찢겨나간 뱃가죽 사이로 부러진 뼈가 보였고.

뭉개진 내장과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인의 설계. 참 무서워.]

"몬스터의 습관을 알고 있으니 계획도 맞춤형으로 짠 것뿐이다."

[보면 헌터 활동 35년은 한 것 같아.]

...예리하군.

하여간 쓸데없는 곳에서 감이 좋아.

"놈은 안 죽었다. 집중하자."

"크라라락!"

[도마뱀. 몸에 힘 좀 빼. 그렇게 안 하면 많이 아플 거야.]

파프너가 다시 한번 주먹을 꽉 쥐었다.

*

"크락...."

혀를 내밀고 고꾸라진 바실리스크.

초장에 허리를 무너트린 덕에 큰 변수 없이 사냥을 마쳤다.

[막대한 경험치를 습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허 참. 바실리스크를 이렇게 쉽게 죽이다니.]

"놈을 상대해본 적 있어?"

[몬스터 웨이브 때였지. 눈 안 마주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원.]

"눈을 안 마주치고 어떻게 싸웠대."

[마력의 파장이랑. 놈의 발이 움직이는 걸 보고.]

제가 볼 땐 그게 더 괴물 같은데요.

평범하게 정면 승부를 걸었다면 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석화의 마안과 독을 빼더라도 말이야.

그걸 단독으로.

시야조차 제한한 상태로 이겼다고?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군.'

속으로 짧게 웃고는 바실리스크의 시체를 회수했다.

[그건 무슨 언데드로 되살릴 거야?]

"후보군이 좀 있긴 한데. 뭐가 됐든 당장은 제작 못해."

[재료가 모자라나.]

"아니. 내 경지가 안 되거든."

[그러고 보니 주인, 아직 3성이었지.]

"벽도 못 넘었다고 핀잔 주는 거냐?"

[가끔은 주인의 능력이 대단하다 보니 성위도 잊어버린다.]

3성 주제에 순수 스펙만 5성 절정의 소환수(파프너)를 부리질 않나.

검은 방첨탑의 보조가 있다지만, 수백이나 되는 언데드를 사역하는 건 해당 성위의 능력을 아득하게 초월했다.

[흑암의 반지]의 보조.

또 회귀자의 경험이 더해져서 변칙에 변칙을 거듭하다 보니 가능한 일.

"싱겁긴."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없기에, 가볍게 웃으며 파프너의 감탄을 일축했다.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말아라.〕

'설마. 잊어버리겠나.'

애꾸눈의 활동 영역으로 들어오는 위험까지 감수했는걸.

바실리스크 시체도 큰 성과지만.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로 본 기연을 얻으려면 싸움터 안쪽에 있는 토굴로 들어가야 한다.

"주위 경계는 맡기마."

[알겠다.]

[메멘토]가 보여준 환상대로라면 토굴 안에 위험요소는 없었다.

문제는 외부 요인.

토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외부가 막힌다면?

'그대로 퇴로가 막히는 거지.'

하수인들 중 가장 강력하며 신뢰할 수 있는 파프너를 데려온 이유다.

토굴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든 짧든, 위험요소가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저벅- 저벅-.

햇볕이 희미하게 닿는 토굴로 들어가니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몇 걸음을 더 걸었을 때, [메멘토]의 끝부분에 보인 책 하나가 유진의 망막에 비쳐졌다.

〔크하하핫! 짐이 하사한 신성 주문의 힘을 목도하라!〕

'예예. 감사합니다. 성좌 나으리.'

〔더 찬미하여라. 존귀한 그 이름, 역천의 거인을!〕

'아무렴요. 그렇고말고요.'

영혼 없는 대꾸를 하며 스킬 북을 회수했다.

[군주의 지휘]

등급 : 유니크

분류 : 스킬 북

내구도 : 1/1

제한 : 없음

'군주의 지휘' 스킬의 사용법이 기록된 책입니다.

히야.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제일 마음에 드는 요소는 고등급 지휘 스킬이란 것이고.

두 번째로 좋은 건 습득 제한이 없었다.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더냐?〕

'내가 못 익혀도 하수인들한테 습득시키면 되잖아.'

효율은 좀 떨어지겠지만 말이지.

그것보다 중요한 건 상당히 준수한 '지휘' 스킬을 손쉽게 얻었다는 거다.

[메멘토] 덕에 어떤 스킬 북인지야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그걸 '안다'와 두 눈으로 '확인'하는 건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다.

'시간도 아슬아슬했어. 10일 후에 누군가가 이 책을 손에 넣을 예정이었잖아.

스킬북에 드리운 짙은 음영.

분명 사람의 그림자였다.

그래서 애꾸눈의 영역에 급히 진입한 거였고.

위험했지만 도박을 한 보람은 있다.

[군주의 지휘 스킬북을 사용합니다.]

[스킬의 요체가 머릿속에 새겨집니다.]

푸스스스-.

가루가 된 책.

스킬 북에 기록되어 있는 지휘 스킬의 요체가 머릿속에 새겨진다.

[군주의 지휘]

분류 : 지휘

등급 : A

사용자와 같은 소속(길드, 가문)이거나 하수인, 혹은 계약 관계인 이들의 능력치 중 가장 높은 2가지를 20% 증가시킵니다.

또한, 전투 중에 두려움을 느낄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군주의 지휘의 영향범위는 사용자를 중심으로 10km입니다.

스탯 증가와 사기 보정.

두 번째 옵션은 망자들을 하수인으로 부리는 입장에서 큰 혜택이 아니지만.

가장 높은 스탯 두 개를 20%씩 늘려주는 효과가 핵심이다.

〔이왕지사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면 좋았으려니와.〕

'거 욕심도 많으시네.'

반경 10킬로미터 안에 있기만 하면 버프를 제공하는데.

올 스탯 같은 소리 하면 혼나요.

힘이나 민첩, 혹은 마력 같은 핵심 능력치를 고정적으로 늘려주는 옵션도 괜찮지만.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주력 스탯을 늘려주는 혜택이 훨씬 좋지.

'지휘를 유지할 때 소모 값이 얼마나 되려나.'

시험 삼아 [군주의 지휘]를 발동시켜보니 영력이 조금씩 깎이기 시작했다.

광역버프 스킬인 [언홀리 커맨드]보단 소모가 좀 큰 편이지만.

어마어마한 범위와 스탯 증가 효과까지 감안하면 부담스러운 정돈 아니다.

'라이프 드레인이나 언홀리 커맨드로 충당하면 돼.'

회귀 전에는 성위가 낮을 때 영력 관리하느라 머리 쪼개지는 줄 알았다.

언데드가 가성비 좋은 소환수인 건 사실이다.

그래도 제작 및 유지에는 꾸준히 영력을 소모해줘야 하니.

이젠 생기 / 영력 / 체력을 치환해주는 사기 주문, [라이프 드레인]이 있으니 부담이 덜했다.

〔크하하핫! 모두 짐의 은덕이로구나.〕

'예. 그럼요. 당연하죠.'

〔그대의 솔직한 발언. 마음에 들도다.〕

하아.

오늘따라 성좌 나으리가 왜 이렇게 하이텐션일까.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를 떨쳐내려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주인. 빨리 나와야 할 것 같다.]

"누가 다가오나?"

[급속으로 접근하는 괴물이 있다.]

"놈과 마주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1....]

1분이라.

조금은 여유가 있군.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쿠우우웅-! 토굴까지 전해지는 충격파에 휘청거렸다.

[0.]

숫자 뒤에 '초'나 '분' 같은 단위를 붙여야지.

황당한 마음에 파프너를 힐난하려 바깥을 보는 순간.

"어?"

입이 쩍 벌어졌다.

파프너와 대치하고 있는 커다란 오우거.

신장은 약 8미터쯤 되며 오른쪽 눈 위를 뒤덮은 기다란 흉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 그 놈 맞지?]

"맞아."

허.

큰일 났네.

기연도 얻었겠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나 했더니.

접경지역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괴물과 마주하고 말았다.

"애꾸눈."

벌어진 입 사이로 힘없는 음색이 새어 나왔다.

122화 똑바로 일해라, 기연 탐색기(3)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도래할지니, 이는 필연이라.〕

'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쇼.'

〔허세 부릴 여유도 있느냐?〕

'안 그래도 생각 복잡하거든. 지방 방송은 좀 꺼둬.'

변종 오우거 애꾸눈.

전생에도 만난 적 있는 인연(?)이다.

썩 반갑지 않은 재회라서 그렇지.

'놈의 무력은 예전의 기억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군.'

근육질로 된 몸에서 흘러나오는 파장을 읽고 있자니, 전신의 솜털이 삐쭉삐쭉 섰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싶은 기분.

상대의 경지를 파악하는 건 좋지만 지금처럼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이 꺾이는 수도 있다.

"쿠후후. 시체들. 뭐냐. 재미있다."

"이 녀석들한테 흥미 있나?"

"쿠훅, 인간. 넌 뭐냐. 약하다. 재미없다."

"원하면 모두 놓고 갈 수도 있다."

태연한 유진의 대답에 애꾸눈이 하나만 남은 눈꺼풀을 위 아래로 움직였다.

"쿠후훅. 너. 재미있어졌다."

"난 재미없는데."

"저쪽의 인간들. 너. 다르다. 썩은 내. 그래도 재밌다."

쩝.

아쉽군.

파프너랑 브루탈을 던져주고 쉽게 빠져나가나 했더니.

그대로 보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주인.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뒤도 보지 말고 도망쳐라.]

"말처럼 쉽게 될까."

눈깔이 하나만 있는 녀석이 보내줄지 의문이군.

브루탈과 파프너에게 맡긴 채 전력으로 도망친다?

글쎄다.

방해 없이 직선거리로 달려도 네크로폴리스까진 20분 이상 걸린다.

그 시간이면 애꾸눈이 두 언데드를 정리하고 유진을 쫓아와서 천/유/진 으로 나누고도 남을 시간인 걸.

"곤충의 몸을 셋으로 나누면 죽는 것처럼."

[머리, 가슴, 배 아니었나?]

"오. 공부 열심히 했나봐. 난 기억도 안 나서."

헛소리를 나누는 와중에도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인다.

인근의 지형지물.

두 언데드의 위치.

애꾸눈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으며, 마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등.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고 빠르게 재조합한다.

"파프너."

[명령만 내려라. 주인.]

"가장 센 공격으로 준비해라."

[정면승부?]

"어."

[한 방에 끝날 수도 있어. 내가 말이야.]

"걱정 말고. 최강의 일격을 먹인다는 생각으로 해."

[군주의 지휘를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지시를 받는 이들의 스탯 중 가장 높은 것 2개가 20% 상승합니다.]

[마음이 두려움에 꺾이지 않습니다.]

[오. 새로운 버프. 이번에 얻은 기연이야?]

"그래."

[나도 힘 좀 내야겠네.]

파프너는 애꾸눈을 향해 다가갔다.

느린 속도.

그렇지만.

두려움이나 망설임 같은 마음가짐이 느껴지지 않는 당당한 걸음이다.

"쿠후훅. 냄새나는 도마뱀. 재미있다."

포식자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기죽지 않고 달려드는 자가 얼마 만이던가?

수년 넘게 대적할 자를 찾지 못했던 괴물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애꾸눈은 파프너가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 더럽게 센 녀석이랑 주먹다짐이라.]

파프너는 천천히 다가가며 심장을 자극했다.

본래 멈췄어야 할 심장.

용족의 권능이며 힘을 상징하는 '드래곤 하트'가 거세게 펌프질하며 전신으로 영력을 보냈다.

죽은 몸뚱이인데도 감각이 되살아난다.

'참. 대단하단 말이야. 이 몸뚱이.'

드래고니안의 사체.

반쪽이긴 해도 용족이다.

타고난 마력 회로나 운용 능력, 그 외에도 모두 최상급 자질을 보유한 몸뚱이인 셈.

[고대의 시험]의 여파로 신체능력이 2성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마석들을 꾸준히 먹은 덕에 본래 능력치의 60% 정도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생전의 내 몸도 이만큼은 아니었어.'

반응 속도.

영력을 발출할 때의 감각.

그것 말고도 온갖 부분에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났다.

더 놀라운 점은 드래고니안이 생전에 지녔을 그 장점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

'주인의 실력이 대단하단 거겠지.'

더 빨리.

더 강하게.

육체의 힘이 100이라면.

그걸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200도, 300도 될 수 있다.

'영력과 혼백, 그리고 신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맞추어서 최대의 위력을 짜내는 거다.'

어깨에서 솟구친 검은 기류가 천천히 하강하면서 팔뚝까지 감싼다.

상대는 7성의 괴물.

'벽'을 한 번 더 넘어서서 마력을 유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형상까지 구현하는 영역, [오러 블레이드]를 발현할 수 있는 상대다.

'저 괴물이 초장부터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하면 두 손 놔야지, 뭐.'

놈이 드러내는 감정은 호기심.

장난감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와 같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이용, 방심한 애꾸눈에게 터럭만큼이라도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주인이 생각할 몫.'

모르겠다.

그저.

파프너는 지시받은 대로 행동하고.

그 명령을 내린 주인을 굳게 믿을 뿐이다.

신경 써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내가 펼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사용하는 거야.'

[케넥 전투술]

[10장]

[구결집합권]

케넥 전투술은 본디 드래고니안에게 전해지는 체술.

파프너는 천재적인 오감을 바탕 삼아 구결을 해석, 동작 대부분을 높은 숙련도로 펼칠 수 있었다.

마지막 기예인 [구결집합권]을 빼곤.

'아홉 기술의 요체를 합친 주먹이라고 했어.'

되살아나고 나서 강적과 마주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잊힌 신전]의 보스 몬스터 가면마수.

붉은 거미 간부인 최형태.

최근에 손속을 겨루었던 6성 절정의 헌터, 김미정까지.

그렇지만.

모든 감각을 오롯이 적에게만 집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은 할 수 있다!'

드래고니안 사체에 깃든 모든 가능성을 이끌어낸 지금이야말로.

케넥 전투술의 마지막 장을 온전히 펼칠 때였다.

파프너는 영력, 신체, 그리고 정신을 해당 동작에 일체화시키며.

드래고니안 사체에 남은 '기억'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쿠후훅."

한쪽만 남은 애꾸눈의 동공 위로 놀라움의 기색이 번졌고.

주먹에 맺힌 푸른 오러가 혼신의 힘을 담아낸 검은 기류와 충돌하는 순간.

"어?"

유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

유진의 계획은 단순했다.

'파프너를 던져주고 부리나케 도망친다.'

〔참으로 파렴치하며 후안무치한 계획이로구나.〕

'별수 없잖아.'

〔한데 그 계획은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떻게 발을 묶느냐의 차이다.'

회귀 전에도 애꾸눈과 몇 번 겨뤄본 적이 있다.

그때는 인간사냥꾼에게 길들여진 입장이었지만, 7성에 이른 괴물인지라 완전히 굴복시키진 못했다.

'애꾸눈은 권태에 젖어있다.'

〔흥. 게이트가 빚어낸 반쪽짜리 미물 주제에 절대자 흉내를 내는구나.〕

'틀린 말도 아니야. 현 시점에서는 국내의 헌터 중 그 누구도 1대1로 붙었을 때 승리를 자신할 수 없을걸.'

7성 절정의 무위.

대형종이라서 스펙 기본값도 인간을 뛰어넘는 몬스터다.

아라한 길드 마스터 이신우라도 저 외눈의 괴물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접경지역에서 왕처럼 살면서 지루함을 못 견뎠던 놈이다.'

전력 차는 확실했다.

오래간만에 마주한 장난감을 빨리 부수고 싶을까.

그렇지 않을걸.

회귀 전에 손속을 겨뤄본 유진은 확신했다.

'녀석은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오지 않을 거다.'

애꾸눈의 방심을 이용해서 기동력에 제한을 걸어둘 심산.

파프너에게 걸어둔 [응징의 쐐기]를 적절한 타이밍에 해방하고.

[부정 충격 방패]로 힘을 역이용해서 빈틈을 만들고 브루탈로 덮친다.

'애꾸눈을 상대로 조금은 시간은 벌 수 있을 거다.'

〔계약자. 이럴 때를 대비해서 주문 슬롯을 비워둔 것 아니더냐?〕

'넉넉하게 비워두긴 했지만 안 돼. 오우거는 기본적으로 마력 저항이 어마어마하게 높단 말이야.'

오러 블레이드까지 전개할 줄 아는 변종 오우거.

3성 수준의 마법으로는 발목을 붙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강령술로 변수를 만들자니, 시체라고는 막 거둔 바실리스크 뿐.

놈을 좀비로 만들어봐야 주먹 한 방에 뭉개져버릴 거고. 시체 폭발도 가죽을 뚫지 못할 것이다.

〔하면 도주는 어찌 하려느냐?〕

'블러드 골렘을 써야지.'

블러드 골렘에 탑승해서 도주.

이동 중에 몬스터들과 조우하면 강행돌파하거나 발을 묶게 하고 개별 행동을 개시하는 게 유진의 계획이었다.

손 안에 쥔 패를 모두 쓰면 네크로폴리스까지 돌아갈 확률이 70% 정도 되려나.

'뒤를 잡히지 않았어도 90%는 됐을 건데.'

〔그럼에도 100%는 아니로구나.〕

'놈이 변덕을 부리면 끝. 절대 못 도망쳐.'

뭐, 그렇게 되면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파프너가 애꾸눈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길 기다리며 성력을 한껏 끌어올렸을 때.

계획에 없는 변수가 나타났다.

콰직!

반대 방향으로 꺾여버린 애꾸눈의 팔.

오러끼리 충돌한 직후, 푸른 기류가 빠른 속도로 소멸하면서 그 여파를 받아낸 결과물이었다.

'놈이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을 건 예상했었어.'

처음부터 전력으로 주먹을 뻗었으면 파프너의 몸뚱이가 터져버려서 수십 조각으로 찢겨졌겠지.

문제는 '오러' 끼리 충돌해도 벽을 한 단계 더 넘어선 데다 스펙도 우월한 애꾸눈이 밀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돼?'

회귀 전 · 후를 합하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유진조차도.

드래고니안의 몸에 깃든 체술, [케넥 전투술]의 진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케넥 전투술 10장.

'구결집합권'은 아홉 가지 성질을 모두 욱여넣은 기예다.

모든 묘리를 내포한 체술이면 위력이 증대되어서 훨씬 좋은 거 아니냐고?

예를 들어보자.

곡선처럼 휘는 직선을 그릴 수 있는가.

케넥 전투술의 아홉 가지 성질을 합친다는 건 이와 비슷한 의미다.

-강(强), 유(流), 환(幻), 변(變), 쾌(快), 중(重), 충(衝), 탄(彈), 흡(吸).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성질을 마력(영력)으로 층층이 구현.

한 번에 터트린다?

[케넥 전투술]을 숙달한 드래고니안조차 마지막 초식을 완벽하게 펼치기 어려워했다.

위대하다고 자부하는 용족들조차 극히 일부만 펼칠 수 있는 비기.

변종 오우거의 팔이 꺾여나간 이유였다.

"쿠후후훅?!"

[어?]

애꾸눈은 오랜 세월 동안 느껴본 적 없는 통증에 외눈을 부릅떴고.

주먹을 맞댄 파프너도 믿기지 않는 투로 자신이 행한 결과물을 바라보았다.

"브루탈. 나를 태우고 6시 방향으로 달려가라."

-그어어억!

유진의 곁으로 다가온 브루탈이 손을 내밀자, 망설이지 않고 올라탔다.

〔처음에 세운 계획은 어찌하고?〕

'더 좋은 상황이 벌어졌잖아. 당연히 폐기해야지.'

봐라.

애꾸눈의 시선은 파프너한테서 떼어질 줄을 몰랐다.

-파프너.

[저 녀석의 시선을 최대한 붙들어놓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아네.

[그 정도 센스는 있어. 있는 힘껏 애꾸눈한테서 도망쳐볼게.]

-미안하다.

유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두개골이 부서지면 소멸하는 평범한 언데드와 달리, 파프너는 [라이프 포스 베슬]만 멀쩡하면 언제든 되살릴 수 있다.

리치와 마찬가지로 생명력을 봉해놓은 언데드.

엘드리치 드래곤이라서 가능한 일.

'그래도 본인이 받아들이는 건 다르겠지.'

수십 년 동안 지박령 신세가 되어서 고독함을 맛보았다.

또 죽어달라고 하는 명령.

거부감이 들 만한데도 파프너는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시간낭비하지 말고 빨리 가.]

-...알았다.

유진이 브루탈에 올라탄 채 전장에서 이탈할 때.

파프너는 영력을 두 다리에 집중시켰다.

'남은 영력은 반절인가. 소모가 크네.'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구결집합권.

대신 소모되는 영력의 양도 그에 못지 않았다.

[마투사] 특성과 드래고니안의 스탯 보정까지 있는데 순간 드래곤 하트에서 허한 느낌이 들 정도.

"쿠훅. 너. 재미있다."

[이번에는 놀이 방식을 바꿔 보자고.]

파팟!

지면을 박차면서 도약하는 파프너.

애꾸눈은 도주 중인 유진에게 시선 한번 두지 않고 그 뒤를 쫓았다.

10분 뒤.

[엘드리치 드래곤(미완성) - 파프너가 소멸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유진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123화 네 번째 별(1)

파프너와의 연결이 끊어진 후.

뒤를 돌아봤지만 흉포한 기세가 느껴지진 않았다.

'휴. 뒈지는 줄 알았네.'

축축해진 등.

회귀 후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군.

망령들과 시야를 공유해서 이중으로 확인해보니 더 쫓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대의 대전사를 허무하게 잃었구나.〕

'또 그럴 일은 많이 없을 거다.'

〔아예 없을 거라며 각오를 다져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살다 보면 100%가 없어요. 자신 없는 말은 내뱉는 게 아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파프너에게 뒤를 맡길 거다.

가장 신뢰하는 하수인이며.

완파되어도 복구가 가능한 덕에 실질적인 손해가 크지 않다.

'그래도 이런 상황을 자주 맛보고 싶진 않군.'

까득-.

오래간만이다.

속절없이 적에게 등을 보여야 하는 상황.

마음을 좀먹는 굴욕감과 분노에 싸늘한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크하하핫. 그대가 낭패를 보는 건 처음이로구나.〕

'회귀 전에는 자주 봤어.'

최초의 네크로맨서.

정식 루트가 아닌, [흑암의 반지]의 조건을 우회하면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스킬이야 [지식의 도서관] 덕에 수월하게 익혔지만.

홀로 걸어가다 보니 직접 몸으로 부딪쳐가며 강령술에 익숙해져야 했다.

'살아남기만 하면 돼. 그럼 다음이 있다.'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 이또한 영웅이 가져야 할 덕목일지니.〕

'아. 그 놈의 영웅타령. 왜 안 하나 했다.'

브루탈의 돌파력으로 네크로폴리스까지 무사 귀환.

곧바로 언데드들을 집합시켰다.

"하던 일 멈추고 모두 방어 태세를 갖춰라."

[조, 존명.]

마음을 놓을 순 없다.

애꾸눈이 마음을 바꿔 유진의 흔적을 쫓아오면 대응할 방법이 마땅찮다.

최선은 네크로폴리스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줘서 제 발로 물러나게 하는 것.

〔만일 돌아가지 않으면 어찌 하려느냐?〕

'방첨탑 하나는 내줘야지.'

그냥 내줄 생각은 없다.

매운맛을 보여줘서 당분간 이쪽은 보기도 싫을 만큼 괴롭혀줘야지.

혹시 하는 마음에 몇 시간을 기다렸지만 애꾸눈이 네크로폴리스로 들이닥치진 않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긴장을 풀고 언데드들을 해산시켰다.

[파프너를 쓰러트린 괴물. 제 칼로 베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원하면 그쪽으로 보내줄 수 있다."

[핫. 복수는 자신의 손으로 해야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파프너에게 양보하겠습니다.]

자신 없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됐고. 몬스터들이나 잡아와라."

[생사불문입니까?]

"아니. 숨은 반드시 붙여놔야 한다."

[존명.]

몬스터 포획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크로폴리스가 선 곳은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침식지대.

막 생성된 몬스터를 토벌하는 건 일상이다.

영지에서 멀리 나갈 것도 없이 희끄무레한 안개만 돌아다녀도 숨이 붙어있는 괴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좋아. 계속 붙들어둬라."

아공간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어둔 구슬.

[다크니스 오브]를 꺼내고는 제압된 몬스터의 피부에 밀착시켰다.

"쿠륵?!"

기묘한 감각에 화들짝 놀란 오크가 거세게 코를 벌름거렸다.

금이 간 유리컵에 물을 담으면 틈새로 새어나오듯, 본래 몬스터의 육신에 담겨 있어야 할 생기가 다크니스 오브로 흘러갔다.

시커먼 구슬 내부에 아른거리는 녹광.

방금 앗아간 몬스터의 생명력이다.

"150마리 정도 필요하겠어. 리치보다 회복에 필요한 생명력이 훨씬 많군."

[주군. 몬스터를 더 잡아오겠습니다.]

"아. 아직 안 갔어?"

[...갑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생기를 빨아들인 다크니스 오브가 파르르 떨었다.

유진은 정해진 술식을 다크니스 오브에 불어넣었다.

화아아악-!

구슬에 축적된 생명력이 점성 있는 액체가 되어 쏟아지더니 어린아이가 점토를 만지작거리듯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얼마 정도를 꿈틀거렸을까.

3미터까지 쌓인 액체는 이윽고 굳어지면서 눈에 익은 모습으로 변했고.

[와. 죽는 줄 알았어!]

재구성을 마친 파프너가 크게 사념을 퍼트렸다.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너는 이미 두 번 죽었다."

[꼭 말을 해도 그렇게 하냐.]

"생각보다 오래 버텼군."

[아. 그 외눈박이 녀석이 오러 블레이드는 안 쓰고 쫓아오더라고.]

그래도 그렇지.

오러 블레이드를 안 펼쳐도 기본 스펙 차가 얼마나 나는데.

파프너의 요령이 뛰어났다는 방증이다.

"덕분에 살았다."

[주인을 지키는 건 내 사명이다. 그래도 또 죽고 싶진 않네.]

"이런 상황은 최대한 피해가도록 노력하마."

[후후후. 복수전은 언제 할 거야?]

복수전이라.

당연히 해야지.

그렇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더 강해져야지."

강해지는 방법은 여럿이지만.

제일 단순하면서도 빠른 길은 한 가지뿐이다.

"당분간은 레벨을 올리는 데 집중하자."

[벽을 마주하면 어떻게 하려고?]

"내가 그런 거, 신경 쓸 것 같냐."

[주인이라면 한계레벨 되자마자 벽을 깨부술 것 같네.]

파프너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

[천유진]

[레벨 : 34(3성)]

폭발적으로 오르던 레벨.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경험치 획득 속도가 느려지더니 거의 정체 수준에 들어섰다.

'일이 많아서 크게 신경을 못 썼군.'

굵직한 싸움을 몇 번 치른 덕에 레벨도 꽤 올라 있었지만.

블랙 컴퍼니 창설이나 [성자의 눈물] 시연식, 그리고 신성을 띤 언데드 연구 등 다양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경험치 올릴 시간이 없었다.

"송명석, 그리고 최형태가 따라와라."

[주인. 나는?]

"요단강 막 건넜다가 온 사람... 은 아닌가. 어쨌든 그렇게 부려먹을 만큼 박한 사람은 아니다."

[흐음.]

"애꾸눈이 시간을 두고 쳐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면 믿을 건 너야."

[후후.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군.]

"겸사겸사 케넥 전투술도 수련 좀 하고."

[그게 본 목적이었냐!]

파프너의 사념이 일그러졌다.

거 참.

사람 마음을 너무 몰라주네.

"애꾸눈을 밀어냈던 기술. 10번에 1번 성공할까 말까지?"

[헹. 틀렸지.]

"그럼 5번에 한 번이냐?"

[100번에 1번.]

"...."

야잇.

파프너를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본 네크로맨서는 하수인에게 실망했다."

[웃기지도 않거든.]

"너 정도의 실력자가 성공 확률이 1%밖에 안 되다니. 꽤 어려운가 봐."

[이제 막 요체를 깨우쳤으니까 그래. 좀만 기다려봐.]

파프너가 가슴을 탕- 탕- 쳤다.

그 모습에 송명석이 안광을 흐리게 뜨곤 짧게 웃음을 흘렸다.

[주군의 대전사 칭호는 이제 제게 양보하는 게 어떻습니까?]

[응. 나 한번이라도 이기고 말해봐.]

[크으읏!!]

[한 번도 못 이기는 허접이죠?]

[비겁하게 팩트를...!!]

송명석은 괜히 찔러봤다가 안광을 거세게 불태우며 신음을 흘렸다.

이겨먹지도 못하면서 늘 덤비는군.

파프너를 라이벌로 여기는 듯한데, 말빨과 실력 모두 부족해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모양새였다.

[애꾸눈이랑 또 마주치면 어떻게 하려고?]

"놈의 활동 영역보다 위로 올라갈 거다."

강원도 철원 근처면 괜찮을 거다.

상위 포식자들은 제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습성이 있거든.

[그래도 놈은 변종이잖아.]

"오우거는 추운 곳을 안 좋아해."

[아. 철원이면 인정이지.]

걱정하던 파프너가 그 한 마디에 곧바로 납득했다.

1월의 철원.

국내에서 가장 춥기로 소문난 지역을 뭐가 좋다고 애꾸눈이 들락날락하겠어.

"아. 깜박할 뻔했네."

흑암의 반지에 담아둔 바실리스크 시체를 꺼냈다.

기연 획득 과정에서 1+1 느낌으로 얻은 시체.

덤으로 받았다고 해서 소홀하게 여길 마음은 1그램도 없었다.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꾸드득, 바실리스크의 살점과 비늘을 분리하는데 상당한 영력이 소모되었다.

어마어마한 양.

그리고 바실리스크의 신체에 내재된 마력 양이 대단해서 강령술로 조종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바실리스크 시체는 쓸 데가 많다.'

비늘은 갑주 제작이나 언데드 강화용으로.

살덩어리와 피는 마법 시약으로 쓸 수 있다.

아니면 언데드 개조에 써도 되겠군.

"신준석한테 네크로폴리스에 출장 좀 와달라고 해줘."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바실리스크 피랑 살점 있다고 해."

[가만 보면 언데드만 잘 굴리는 게 아니라 사람도 부려먹어.]

보관은 미래의 대연금술사님께서 알아서 해주겠지.

뼈는 불경스러운 묘지에 안치했다.

영력을 축적시켜주며 부패까지 막아주니 일석이조.

"그럼 다녀올게."

[네크로폴리스는 걱정 하지 마.]

"오냐."

유진은 타이런트와 스켈레톤 나이트를 대동한 채, 북동쪽으로 향했다.

국내에서 가장 추운 땅.

혹한의 냉기가 감도는 영역, 철원으로.

*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침식지대.

일명 접경지역에서 가장 몬스터 사냥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지역은 둘이다.

-개성 ~ 문산 축선

-철원 축선

두 지역은 대격변 이전, 북한이 남하를 시도할 만한 루트였고.

지금은 몬스터들이나 헌터들이 들락거릴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뒤집어서 말하면 괴물들이 몰리는 지역이라는 의미.

[그건 알겠습니다만. 편한 길을 마다하고 왜 산길 따라 북진합니까?]

"몬스터 사냥도 겸사겸사 해야지."

공교롭게도 유진의 루트는 과거 나찰 집단군이 남하할 때 사용했던 길과 상당부분 겹쳤다.

수색대원들이 닦아놓은 오솔길.

지력을 마음껏 빨아들인 잡초들이 무성하게 있는 곳을 헤치는 것보단 이 편이 나았으니까.

"흐레렉! 흐렉!"

[제가 해치우겠습니다.]

[광뇌보]

[분광검]

[5초식 - 적광검]

발바닥에 집중한 암흑 투기를 일시에 방출.

괴물의 두 눈동자가 송명석의 움직임을 쫓았을 땐, 붉게 물든 검이 몸뚱이를 반으로 가른 뒤였다.

[느리군요. 죽음을 인지하는 것조차.]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자 칼날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송명석은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안광을 빛냈다.

[어떻습니까?]

"어떻고 자시고. 넌 왜 이렇게 학습능력이 없냐."

[예?]

"반으로 갈라서 죽이면 언데드로 되살릴 수가 없잖아. 이 멍청아!"

돌아오는 건 힐난 섞인 유진의 호통.

거세게 타오르던 송명석의 안광이 한순간 사그라졌다.

"으휴. 무능한 놈."

[....]

"차라리 파프너를 데려올 걸 그랬어."

[....]

"저기 봐라. 네 후배는 얼마나 착실하게 일하고 있어?"

우드드득-!

리터너를 개조해서 만든 중위 언데드.

타이런트로 되살아난 최형태는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팔이나 다리를 묵묵히 뽑아버렸다.

[시신이 크게 훼손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팔 다리 정도는 괜찮거든."

훼손 부위가 크지 않으면 영력으로 커버가 가능했다.

더 깔끔하게 죽이면 편하겠지만.

힘과 맷집에 특화되어 있는 타이런트한테 세심함을 기대하진 말자.

"문제는 너다. 너."

[크으으읏!]

파프너에 이어 최형태한테 승부욕을 불태우는 송명석.

이 녀석한테는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지.

유진은 전생의 구룡 중 하나를 어떻게 해야 잘 부릴 수 있는지 습득했다.

"내 부름에 답하라."

[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레이즈 데드를 사용합니다.]

리터너와 스켈레톤 메이지로 구성된 언데드 군대.

트롤 같은 대형종은 합일을 마친 둘에게 전담시켰고.

군락을 이루며 사는 몬스터들은 북진 중에 구성한 언데드들로 상대했다.

"시체 폭발."

쿠아아아앙-!!

살점과 핏방울, 그리고 뼈가 비산할 때마다 몬스터들이 볏짚처럼 쓰러졌다.

전투 중에 병력 손실도 만만찮게 발생했지만.

"내 부름에 답하라."

군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징집하면 되었다.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서 문제였을 뿐.

"이제 근방을 소탕하자."

[철원으로 가려면 아직 10킬로미터는 가야 합니다.]

"꼭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건 아니다."

철원을 목적지로 삼았던 이유는 몬스터들을 더 사냥하기 위함.

현재 유진이 멈춘 곳은 파주와 철원의 중간 지점이었다.

"망령들로 보니 군락을 지어 사는 몬스터들이 꽤 많이 있더라고."

무리 지어 사는 괴물들만 쓸어버려도 50레벨까지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뒷말을 붙인 유진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로부터 2주 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50입니다.]

[한계를 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갑니다.]

124화 네 번째 별(2)

한계레벨.

1성과 2성 땐 경험치가 최대에 도달하자마자 다음 성위로 넘어가지만.

3성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수동적으로 마력을 움직이기만 해선 네 번째 별을 획득할 수 없으니.

일명 '벽'이 헌터들의 앞을 막아선다.

'깨달음이 없으면 다음 성위로 나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5성이나 6성 때도 벽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헌터들이 '벽'을 언급할 때 4성을 떠올리는 건 [오러]나 [다중 연산] 같은 극적인 변화가 있기 때문이겠지.

다수의 헌터가 처음으로 마주한 벽에 부딪쳐서 좌절을 경험하는 이유다.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4성으로 승급합니다.]

'난 상관 없지만 말이야.'

깨달음은 이미 충분했다.

아니.

충분했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라군.

9성에 닿은 깨달음이 있으니 성위를 초월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대가 호언장담한대로구나.〕

'왜. 고생이라도 하길 바랐나 봐.'

〔흐으음. 나름대로 고뇌하는 모습을 비출 줄 알았건만.〕

우린 운명공동체라니까.

배후성 주제에 후원하는 필멸자가 고생하기를 바라고 말이야.

틀려먹었어.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는 법이니라.〕

'전생에서 지긋지긋하게 했다고요.'

〔참으로 아쉽구나. 온갖 고난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지 못하다니.〕

'내가 개처럼 구르는 거 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시지?'

〔흐으으으음.〕

이 새ㄲ, 아니 성좌님 보소.

남이 고생하는 거 직관하고 싶다고 양심고백하는 거지?

〔그럴 리 있겠느냐!〕

크로노스가 고함을 질렀다.

저렇게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걸 보니 더 수상한걸.

뭐, 그렇다 칩시다.

마음에 피어나는 의구심은 잠시 내려놓았다.

지금은 성위를 넘어서면서 바뀐 능력치를 확인해봐야지.

"상태창."

이름 - 천유진

성별 - 남

레벨 - 1(4성)

◎스테이터스

*힘 : 107.5 → 412.4

*민첩 : 100.1 → 397.1

*체력 : 85.2 → 405.3

*맷집 : 79.4 → 385.9

*영력 : 493.5 → 1971.8

◎특성

클리어 마인드[고유] / 백야[고유] / 죽음의 인도자[고유] / 다중 연산[B] / 기적[B] / 미숙한 경계자(C+)

◎스킬

군주의 지휘[A] / 암흑 투기[B] / 블랙 스피어[C] / 시체 폭발[C] / 골렘 연성[C] / 언홀리 커맨드[C] / 본 스피어[D] / 본 스파이크[D] / 다크 블러드[D]....

(이하는 접힘. 펼치려면 상세 확인을 마음으로 외칠 것.)

◎문장

인내의 문장

신앙의 문장

용맹의 문장

2성 때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스탯.

보너스 능력치는 모조리 영력(성력)에 투자했고.

신체능력이야, [라이프 드레인]을 꾸준하게 사용한 덕에 동일 성위 무투계 헌터보다 조금 앞서는 수준이다.

'주력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야.'

유진이 익힌 무투계 스킬이라고 해봐야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뿐.

마법계의 싸움도 주력 속성이나 익힌 마법의 개수에 따라 무수한 변수가 생겨나듯.

신체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려주는 건 무투계 스킬이다.

틈틈이 파프너한테 조련, 아니 훈련을 받은 덕에 창법에도 꽤 익숙해졌지만.

같은 성위의 무투계 헌터를 상대한다면 필승을 장담하긴 어려웠다.

'비장의 수단이 하나 생겼다고 여기면 편하지.'

그 다음으로 볼 건 추가된 특성.

마법계는 네 번째 성위에 진입하는 순간 [다중 영창]을 습득한다.

*다중 영창

등급 : B

마력을 동시에 여럿 재배열 할 수 있습니다. 주문을 겹쳐서 사용하면 마력 소모가 늘어납니다.

무투계의 전투력을 몇 단계나 올려주는 비기, [오러]만큼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진 않는다.

평범한 상황에서는 마력 소모 페널티를 감수하고 쓸 일이 없으니.

다중 영창의 진가는 위급한 상황이나 화력을 극대화할 때, 혹은 동일한 마법계 괴물이나 헌터와 싸울 때다.

'수 싸움에서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

다중 영창에는 설명에 나오지 않은 숨겨진 페널티가 하나 더 있다.

주문을 동시에 펼치면 재배열 속도가 떨어지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숙련도 차이에 따라 재배열 속도가 느려진다.

'반대로 숙련도가 높으면 추가 마력 소모도 거의 없다.'

무투계는 단순히 마력 운용 능력을 숙달하면 오러의 위력이 강해지지만.

마법계 헌터는 마력 구조 이해와 제어 능력에 더해 사용하는 주문의 숙련도까지 높아야 한다.

〔조건을 꽤 많이 타는구나.〕

'대신 전투에서 변수 창출에 용이하지.'

네크로맨서도 근본적으로는 마법계의 하위 직업군.

유진은 [다중 영창]의 효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최강의 마법사였다.

그에 비견될 만한 헌터는 마법왕뿐.

'다음으로는 미숙한 경계자인가.'

〔그 특성은 무엇이더냐?〕

'무투계요.'

오러(암흑 투기) 발현 시 위력이 떨어지는 불필요한 특성.

편법으로 벽을 넘어선 존재라서 생긴 페널티다.

하위 용족들의 시체를 토대로 만든 언데드 '레버넌트'도 이 특성을 지녔지.

무투계 직업군도 아니고 관련 특성도 없는데 왜일까.

〔그대가 오러를 다루기 때문 아니겠느냐?〕

'시스템이 그렇게 편의를 봐줄 만큼 친절하던가.'

〔이 시스템이라는 것도 결국 만신전에 기인한 것. 그대가 한계를 넘어선 것을 후에 책정했을 것이라.〕

특성으로 보정이 되면 이득이긴 하지.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니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신관계 특성인데. 이건 감이 안 오네.'

[백야의 성자]는 듀얼 클래스.

[마검사]나 [성기사] 같은 케이스도 있다 보니 신관계 특성을 얻는 건 예상범위 내였다.

*기적

등급 : B

숭배하는 성단 / 성좌의 계통에 따라 기적을 펼칩니다.

거창한 특성 이름.

실제 효과는 각 성단마다 다르지만, 쿨타임이 긴 강력한 신성 주문 정도다.

예시로 올림포스 성단은 대(大)회복을.

아스가르드 성단은 전투 속행 버프를 부여하는 식이다.

'성좌 나으리.'

〔왜 그러느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기적의 성질이 뭔지 아십니까.'

〔크하하핫! 궁금하느냐.〕

'예.'

〔직접 사용해보아라. 아주 놀랄 터이니.〕

뭐지?

이 나사 빠진 성좌가 무슨 짓을 벌인 걸까.

기대감으로 젖은 사념.

몇 번 더 물어보면 못 이기는 척 알려줄 것 같은데....

'그건 좀 싫군.'

크로노스가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은 보기 싫단 말이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럴 땐 직접 써보는 게 답이군.

"아머드 스켈레톤. 하나만 이리로 와라."

-그겔.

우두커니 선 갑옷 입은 해골.

놈의 투구에 오른손을 얹고는 머릿속에 새겨진 능력을 발현했다.

[기적을 사용합니다.]

손바닥에 응축되는 강대한 기운.

유진의 눈가가 번쩍 뜨이는 순간, 강렬한 섬광과 함께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

지면에 새겨진 기다란 고랑.

수풀이고 나무고 할 것 없이, 별안간 솟구친 백광에 닿는 순간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가루로 변했다.

〔크하하핫!!! 짐이 하사한 기적을 목도한 소감을 말해보아라.〕

'씨X. 이게 뭐야.'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기적]의 흔적을 바라봤다.

큰 생각 없이 [기적]을 발현하는 순간.

동시에 구현된 영력과 성력이 손바닥 위를 축 삼아 빙글빙글 회전했다.

같은 진원을 두었으되 극단을 이루는 두 에너지.

폭발하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돌며 기운을 불려나갔고.

마침내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짐은 오랫동안 고심했도다. 단 하나뿐인 계약자이자 대리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꼬.〕

'그래서?'

〔한데 애꾸눈이란 괴물을 마주했을 때를 반추해보니 그대에겐 한 가지 모자람이 있더구나.〕

필살기.

혹은 성명절기.

일정한 경지를 넘어선 실력자들은 모두 최후의 수단을 하나씩은 마련해둔다.

파프너가 우연히 성공시킨 '케넥 전투술'의 10번째 식처럼.

〔모자란 부분을 찾아내었으니, 이젠 채울 방도만 찾아내면 되는 법.〕

'대칭되는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게 그 해결책이었군.'

〔잠깐. 어이하여 그 사실을 안 게냐!〕

'기적을 발현한 게 누구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척 보면 알지.

유진의 반응에 장황한 설명을 준비했던 크로노스는 김빠진 투로 중얼거렸다.

〔짐이 고심 끝에 만든 비장의 수를 단번에 간파하다니.〕

'안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건 아니야.'

반발하는 두 성질을 안정화시키는 게 쉬운 줄 아나.

신성을 지닌 언데드를 만들 때도 온갖 안전장치와 촉매의 도움을 받았다.

크로노스의 개입과 시스템 보정 덕에 펼칠 수 있는 소규모 기적.

'이걸 성좌님 도움 없이 쓰려면 못해도 7성은 되어야겠어.'

기적이라.

생각하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군.

유진은 수십 미터 길이로 새겨진 고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괴력만 놓고 보면 소멸 마법 디스인티그레이트 정도.'

5성 마법 중에서 순수하게 파괴력만 놓고 보면 1, 2위를 다투는 마법.

이승연이 지닌 비장의 수단. [익스플로젼]도 한 수 접어줘야 한다.

성력과 영력의 반발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니 이만한 위력이 나오는군.

'직접 피해 사거리는 50미터. 쓸 만하잖아.'

50미터가 넘어가도 에너지가 곧바로 흩어지지 않으니, 실 사거리는 100미터 이상이라고 봐야한다.

발동 속도도 준수했다.

유진이 [기적]을 발현하는 순간, 매커니즘을 곧바로 이해하기도 전에 방출되었으니까.

손에 남은 기적의 잔향을 분석하지 않았으면 발동 원리를 이해하지도 못했을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다.

'비장의 수로 딱 맞네.'

〔계약자의 마음에 드느냐?〕

'어. 굉장히.'

〔크하핫! 짐에 대한 헌사가 부족하구나.〕

'예예.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공중제비라도 돌고 싶은 마음입니다.'

〔진심은 표현해야 아는 법.〕

허.

진짜로 공중제비 돌아보라고?

크로노스는 묵묵히 유진이 점프하기를 기다렸다.

이 양반 보소.

'내가 맞춰준다, 맞춰줘.'

[라이프 드레인] 덕에 스펙도 올랐으니, 공중제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지못해 발을 떼며 공중으로 도약하려는 순간.

휘청-.

전신의 힘이 빠지면서 크게 비틀거렸다.

"어?"

〔한 가지 일러주는 것을 망각하였구나.〕

방금 전까지 의기양양했던 크로노스가 사념의 크기를 확 줄였다.

〔짐이 그대에게 부여한 기적은 남은 성력과 체력을 모두 소모하여 발현하는 것이니라.〕

'야, 씨.'

변방 잡귀야!!!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별명을 내뱉으며 지면에 고꾸라졌다.

*

낯선 천장, 아니 하늘이다.

멀어졌던 의식을 되돌린 것은 볼을 적시고 있는 뜨끈한 침이었다.

1월의 철원.

추위를 동반한 강풍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탓인지, 인간을 반쯤 넘어선 초인의 육체인데도 입이 돌아가 버렸다.

"아으으, 아으."

[주군. 안 그래도 깨워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송명철아. 사람이 이 날씨에 기절해 있으면 당연히 깨워야 하는 거 아니냐?"

[다 깊은 뜻이 있겠거니 하고 그만.]

"내가 뒈지면 혼백이 종속되어 있는 너도 죽어요."

[그, 그런 겁니까!]

어쭈.

죽는 걸 방조라도 할 생각이었니.

마법왕 드미트리도 끊지 못한 목숨이에요.

추위 따위에 끊어질 것 같냐.

유진은 옷가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깼느냐?〕

'주의사항은 일찍 말하라고. 이 무능 성좌야.'

〔사소한 실수쯤은 넘어가는 것도 영웅의 심성이니라.〕

'그러니까 난 영웅 아니거든요.'

크로노스한테 으르렁거리면서도 한편으론 납득이 되었다.

하긴.

반발하는 두 기운을 뭉쳐서 유리한 부분만 쏙 빼먹었다.

그 대가가 셀 것쯤은 예측했어야지.

테스트도 해볼 겸, 다시 기적을 사용하려고 손바닥을 펼쳤다.

[기적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재사용시간 - 167:51:09]

쩝.

남발은 안 된다는 건가.

'라이프 드레인으로 체력이랑 성력 충당해서 쓰려고 했더니.'

쿨타임은 1주일.

말 그대로 필살의 일격이다.

〔아무래도 형평성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더구나.〕

'성좌나 시스템도 만능은 아니니까.'

금세 납득했다.

이 정도 페널티는 있어야 납득이 되는 특성이지.

'아직 말 안 한 거 남았나?'

〔기적의 파괴력은 성력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최대? 아니면 현재.'

〔당연히 현재 보유량이지 않겠느냐.〕

오호.

버프나 포션 복용으로 성력의 양을 일시적으로 늘리면 [기적]의 파괴력도 비례해서 올라가겠군.

일반적인 신관계 헌터라면 성력 스탯을 도핑할 방법이 마땅찮지만.

[백야] 특성으로 영력/성력 스위칭이 가능한 유진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적은 시간을 들여 연구해봐야겠어.'

〔하면 이제 돌아가려느냐?〕

'그래야지. 할 일이 많아.'

남쪽으로 향하는 길.

2주 전보다 발걸음이 훨씬 가벼웠다.

125화 독이냐 저주냐 그것이 문제로다

네크로폴리스로 돌아가는 길.

유진은 기분 좋은 고민에 빠졌다.

〔슬슬 새로 익힐 분야를 골라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게. 뭘 할까.'

〔후보군이 독과 저주라고 하였던가.〕

'응.'

〔모두 영웅답지 못한 선택지로구나. 독은 비겁한 자들의 전유물이요, 저주는 삿된 의지의 발현일진대.〕

'싫으면 어쩌실 건데요.'

퉁명스러운 유진의 답변에 크로노스가 사념을 흐렸다.

〔짐의 기호가 그렇단 것이니라. 흠흠.〕

'누구는 고민하느라 바쁜데 옆에서 초 치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요.'

〔허흠, 그래서 무엇을 고를지 내정하였느냐?〕

'이제는 결정해야지.'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독과 저주.

둘 다 네크로맨서에게는 준 필수 급인 분야다.

저주는 단일, 혹은 다수의 적에게 능력치 감소나 정신 오염 등 여러 종류의 디버프를 걸 수 있고.

독은 간섭 영역이 신체에 한정되지만 효과가 더 직접적이며 위력도 뛰어났다.

〔설명만 들으면 둘 다 그대에게 유용했을 터인데. 어이하여 우선순위에서 밀렸을꼬?〕

'그때 상황이 그랬으니까.'

연금술은 골렘 제작과 점화 회로, 그리고 휘하 언데드를 강화시키는 등 전력 강화에 도움이 되었고.

암흑 분야는 모자란 원거리 공격 방법이나 해양 언데드인 [스칼라]를 제작할 핵심 주문을 포함하고 있었다.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그러다 보니 후순위가 되었네.'

〔흐으음. 그러고 보면 두 분야는 성질도 겹치는구나.〕

'깊이 따져보면 저주는 유틸성이 뛰어나다. 독은 치명적이지.'

디버프라는 측면에서 보면 독이 훨씬 강력하다.

그 대신 상대를 적중시켜야 효과가 발휘된다는 단점이 있고.

저주는 대상이 범위 안에 있으면 즉시 발동이 가능해서 편의성이 뛰어났다.

〔그대의 성향을 감안하면 변칙을 만들어낼 요소가 다분한 저주 분야를 선택하겠구나.〕

'아. 모든 저주가 다 그런 건 아니야. 강력한 저주는 사전에 발동 조건을 충족시키든지 해야 해.'

저주는 유진이 애용하는 무장, [그림자 가면] 같은 액막이는 필수요소요.

발동 조건이 없는 저주는 위력이 약하고.

디버프 효과가 강력한 주문은 소모되는 재료나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서로 분야가 어느 정도 겹치는 만큼 장단점이 있단 말이지.

한 가지 더.

'저주는 영혼과 관련된 강령술과 시너지 효과가 있다.'

〔시너지?〕

'특정 저주로 타락시킨 영혼으로만 제작 가능한 언데드가 있어.'

스펙터나 레이스처럼 망령보다 상위 등급의 유령 계열 언데드를 만들기 위해선 수준 높은 저주가 필요했다.

〔그대에게 사전 준비는 별것 아닌 문제일 터.〕

'틀린 말은 아니지.'

〔해답은 진즉에 나와 있을진대 왜 그리 고심하느냐?〕

'주문끼리의 시너지 효과 때문에.'

〔시너지라.〕

'독 분야는 지금까지 습득한 주문들의 효과를 증폭시켜주거든.'

총 정리를 해보자면.

디버프 활용 범위가 넓고 유령 계 언데드를 전문적으로 부리기 위해선 저주가.

주문 연계성과 디버프 효과만 놓고 보면 독 분야가 뛰어났다.

'둘 다 좋아서 고민이 된단 말이야.'

〔그대답지 않구나.〕

'뭐가?'

〔변수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그대가 즐겨하는 것.〕

'저주 분야를 고르란 말인가.'

〔혼백을 타락시켜 하수인으로 부르는 것도 큰 이득이지 않느냐.〕

'좋아. 독으로 결정했다.'

크로노스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이, 이 후안무치한 자가!!! 이건 신성 모독이다!!!〕

'덕분에 잘 골랐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

〔짐이 오랫동안 고심하여 현명한 답을 제시했건만, 반대를 고르지 않았느냐!〕

'아. 진짜로 성좌님 덕에 잘 골랐다니까.'

〔신성모독이다!〕

너무하네.

진심도 못 알아주고.

〔어느 구절을 듣고 그리 판단하였는지 소상히 설명해보아라!〕

'저주로 망령들을 부릴 수 있다는 걸 짚어줬잖아.'

〔분명 그리하였지.〕

'그 정도로 쓸 만한 녀석이면 합일로 일체화시켜서 부려먹는 게 나으니까.'

오리지널 술식, 합일.

망자의 육신과 파장이 맞는 혼백(보통은 죽은 본인)을 일체화시켜 강화시키는 강령술 주문이다.

합일 주문은 영체로서의 존재감이나 힘이 약한 망령으로 펼쳐야 성공 확률이 높았으니.

'전황을 좌우할 만한 혼백 계 언데드는 5성이 넘어서나 만들 수 있다.'

〔그대가 애용하는 가면으로 저주를 펼칠 수 있다는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만.〕

'뭐, 반은 맞지.'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에 손이 갔다.

가면마수를 쓰러트리고 획득한 아티팩트, [그림자 가면]은 단순한 액막이가 아니다.

미리 새긴 저주 술식을 발동시키는 능력.

[지식의 도서관]에서 저주 분야를 전승하지 않았음에도, 유진이 몇몇 저주를 다룰 수 있는 이유다.

'더 복잡한 술식은 새길 수 없어서 한계가 명확하지만 말이야.'

〔선택과 집중이라.〕

'역시 위대한 성좌님의 조언은 달라. 한 마디 한 마디가 뼈가 되고 살이 되네.'

〔크하하하핫! 이제야 짐의 혜안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달았구나.〕

아.

실은 반대를 위한 반대도 하고 싶은 마음이 1그램 정도는 있었는데요.

흥에 취한 크로노스의 마음을 한 번 더 흔들어보고 싶은 유혹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더 건들면 진짜로 삐칠 것 같거든.

호쾌하게 웃는 크로노스를 뒤로하고 흑암의 반지에 왼손을 포갰다.

[지식의 도서관을 사용합니다.]

[선대 죽음의 주인들이 남겨놓은 지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저주 / 독 / 생체 분야 중 하나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감격스럽구먼.

남은 분야가 셋뿐이라니.

6성에 도달하면 이론상 [지식의 도서관]에 담긴 모든 분야의 지식을 열어볼 수 있다.

개수 제한이 걸려 있어서 7성이 되기 전까진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만 골라내야 하는 게 불편해도.

어쨌든 분야를 막론하고 원하는 주문을 전승받는 건 큰 이득이지.

〔그러고 보니 생체라는 분야가 하나 더 있건만, 왜 언급하지 않는 게냐?〕

'키메라 공학이야. 어디까지나 강령술 보조 역할 쪽이라 주력으로 삼을 분야는 아니거든.'

키메라를 언데드로 만들거나.

이미 죽은 시체에 반응을 일으켜서 강화시키거나.

강령술에 접목시키면 시너지 효과가 좋긴 한데, 그건 독이나 저주도 마찬가지라 고민도 하지 않았다.

'독 분야를 계승하겠다.'

[독 분야의 지식이 사용자의 혼에 새겨집니다.]

흑암의 반지에서 음산한 빛이 새어 나왔다.

*

4성에 오른 덕에 저주를 뺀 모든 분야의 주문을 전승할 수 있다.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선택지.

회귀 직후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 같구먼.

〔현재 전승 가능한 주문 슬롯은 얼마나 되느냐?〕

'11개.'

〔많이도 쌓아두었구나. 변수 창출에 그만큼이나 여유를 둘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만.〕

'벽을 넘으면 쓸 수 있는 주문 중에 필요한 게 있거든.'

강령술에 있어서도 4성은 의미가 크다.

변칙 없이 중급 언데드를 제작하려면 반드시 4성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야 개조나 합일 등 온갖 꼼수로 언데드를 강화시켜서 오버 스펙의 하수인들을 부릴 수 있었지만.

'변칙에도 한계는 있는 법.'

〔그대가 한 행위를 보면 딱히 한계가 느껴지지 않는다만?〕

'다 싹수 노란 놈들만 골라내서 그렇지.'

언데드 개조 시술도 아무한테나 할 게 못 된다.

죽기 전의 성취가 높은데도 하급 언데드로 되살아난 망자.

아니면 조승철이나 송명석처럼 잠재능력이 뛰어난 이들이나 [합일]과 개조 시술로 승급이 가능했다.

다크 미니언을 대량으로 만들었을 때도 성공 확률이 있었잖아?

'재능이 일천한 녀석들은 아무리 개조를 해줘도 안 돼요.'

그런 놈들은 공들여 [합일]로 잠재능력을 개화하기보다 수준 높은 강령술을 사용하는 편이 나았다.

유진이 판단하기에 '애매하다' 수준의 주검은 중급 강령술의 대상 범위에 포함되니.

'처음 익힐 주문은 정해져 있지.'

리바이브

분류 : 강령술

등급 : C

시체의 원형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일으킵니다. 사후강직을 방지하여 죽기 전의 신체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만듭니다.

리바이브의 대상은 되살아난 직후부터 육신이 부패합니다.

언데드 라이즈

분류 : 강령술

등급 : C

영혼이 떠난 시체를 중급 언데드로 제작합니다.

제작한 언데드의 질은 베이스가 된 사체의 능력과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결정됩니다.

크.

드디어 편법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방법으로 중급 언데드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구나!

벅찬 감격에 미소가 지어졌다.

〔계약자여. 방금 전승한 주문은 두 개이지 않느냐.〕

'아. 리바이브도 있지.'

〔언뜻 보면 좀비와 다를 바 없게 느껴지는구나.〕

'조금은 달라. 무투계에 한해서지만, 생전과 비슷한 스펙을 유지하거든.'

리바이브로 되살린 망자들은 스펙이 크게 하락하지 않는다.

7성.

그러니까 두 번째 벽을 넘어선 존재라면 모를까.

6성 이하의 무투계 헌터나 몬스터들을 리바이브로 되살리면 전투력 손실이 거의 없다.

'따지고 보면 스킬 같은 건 못 쓰고 본능에 따라 움직여서 100% 동일하다고 하긴 그러네.'

〔보아하니 지속시간도 있는 것 같던데. 장점보다 단점이 더 커 보이는구나.〕

'뭐,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네.'

접경지역에 널린 게 몬스터 시체다.

성유물의 보조로 언데드를 200구 이상 끌고 다니니, 인근 지역의 괴물들이 더 몰려들기도 했고.

"내 부름에 답하라."

[리바이브를 사용합니다.]

[망자의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시체 하나가 들썩거리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볍게 보면 좀비와 다를 것 없는 외형.

철퍽-.

허벅지의 살점이 한 움큼 바닥에 떨어졌다.

[리바이브의 지속시간은 120분입니다.]

[지속시간이 다 된 시체는 완전히 소멸합니다.]

[리바이브 대상이 된 시체를 언데드로 제작할 순 없습니다.]

되살린 직후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육신도 붕괴했다.

지속시간이 지나는 순간 파괴되는 게 아니라, 최대 유지시간이라고 봐야겠지.

〔2시간이라. 애매한 시간이로구나.〕

'숙련도 0이면 10분이야. 내가 대단한 거라고.'

영력으로 시체를 개조.

본래의 능력 이상을 끌어내면 스킬을 못 쓴다는 페널티도 어느 정도 상쇄된다.

이 정도면 중급 언데드로 만드는 것보다 전투력도 높은 편.

혼란한 전장에서 아군이 되살아나서 덤벼든다?

'아주 좋아 죽겠지.'

〔흐으음. 그대의 표현은 가끔 이해가 가지 않는도다.〕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니까 그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지.'

리바이브의 장점은 한 가지 더 있다.

'언데드 제작'이 불가능한 시체로 취급된다는 점.

〔리바이브의 대상인 망자는 언데드로 다시 만들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언데드 제작은 안 돼. 그러면 다른 건 되겠지.'

[시체 폭발을 사용합니다.]

쿠아아앙-!

선 채로 터져버린 망자.

언데드로 제작한 시체는 강령술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리바이브는 조금 다르다.

언데드 제작만 안 될 뿐, 시체를 매개체로 삼는 주문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전력으로 써먹다가 터트리면 어떻겠어?'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행동이로다.〕

'뭐, 어때. 네크로맨서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고인을 존중할 마음이 있으면 이 짓을 하겠나.

4성으로 오르면 반드시 익히기로 마음먹은 두 주문도 익혔겠다.

다음은 독 분야의 주문이다.

애시드 자벨린

분류 : 마법

등급 : C

산성 독을 뭉쳐서 만든 창입니다. 대상을 관통하여 녹여버립니다.

독혈(毒血)

분류 : 마법

등급 : C

피에 독성을 부여합니다. 출혈이 난 부위에 사용하면 대상을 중독시킬 수 있습니다.

확산하는 독성

분류 : 마법

등급 : C

독 기운을 넓게 확산시킵니다. 범위가 넓어지는 대신 위력이 낮아집니다.

부패의 독

분류 : 마법

등급 : D

시체에게 감도는 시독(屍毒)을 강화하여 더 넓게 퍼트립니다.

유진이 선택한 주문은 4개.

독혈(毒血)은 독 분야에서 몇 없는 즉시 발동형 주문이고.

애시드 자벨린은 독의 성질 일부인 '산성'만을 강화해서 물리적인 피해를 주는 스킬이다.

남은 두 주문은 독을 직접 사용하기보다 보조 역할에 치중된 편이고.

〔고심한 것 치고는 시시한 주문들이로구나.〕

'이 성좌님이 뭘 모르시네.'

애시드 자벨린을 빼면 실전 활용도가 높지 않은 주문들이지.

근데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쓸데없는 짓 한 적이 있었어?'

기대하라고.

이 주문들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126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새 주문을 시연할 때는 금방 찾아왔다.

언데드 군대를 뒤로 돌리고 전위에 섰더니, 괴물들이 바로 미끼를 물었다.

"카룩, 카루룩."

곰과 올빼미를 섞은 것 같은 3미터 크기의 괴물.

올빼미야수 여럿이 두 눈을 부라리며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특성 - 다중 연산]

마력(영력)을 동시에 재배열하게 해주는 마법계 헌터의 특성.

그래.

이 맛이지.

[강령술]의 특징상 주문 한 번으로 다수의 대상을 일으킬 수 있어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마법을 동시에 시전할 수 없어서 알게 모르게 답답했단 말이야.

'고작 1 - 3성 마법을 동시에 전개하는 것쯤은.'

[블랙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애시드 자벨린을 사용합니다.]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영력에 기반을 둔 '독'과 '강령술' 주문.

흑마력으로 발현하는 암흑 마법.

성질이 다른 주문을 동시에 전개하면서도, 유진은 힘겨운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허공 위에 떠오른 창 세 발.

〔저번과 마찬가지로 창을 합치려느냐?〕

'맞아.'

[저주받은 이빨]에 포개어지는 시커먼 창.

여기까지는 전과 동일하지만.

그 위에 애시드 자벨린을 한번 더 섞어내자 마법 무장이 파르르 떨렸다.

영력으로 구현한 강산성 창.

블랙 스피어로 코팅하지 않았으면 순식간에 녹아내렸을 것이다.

'기원에 따라 파장을 맞춘다.'

세 마법의 기원은 창.

마법이란, 세계를 구성하는 마력을 인위적으로 비틀어서 형(形)을 부여하는 행위다.

규칙에 간섭하여 만든 이적에 형태를 확정하는 건 시동어.

모두 '창'에 기원을 둔 마법이 유진의 제어 능력에 힘입어 융합되었다.

[성질이 다른 세 종류의 마법을 엮어냈습니다.]

[안정도가 높습니다.]

[새 주문을 등록하시겠습니까?]

변칙에서 끝나는 게 아닌, 시스템마저 정식으로 '스킬'이라 인정하는 수준!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끝이 아니야.'

저주받은 이빨을 축 삼아 맹렬하게 회전하는 영력.

거듭 회전하자 동화된 흑마력과 독기가 맞물리며 결속력이 강화되었다.

일점으로 모이는 세 기운.

관통력까지 강화되면서 한데 엮인 기운들이 제 위치를 찾은 퍼즐 마냥 딱 맞아떨어졌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손짓에 따라 허공을 가로지르는 한 자루의 창.

검은색과 녹광, 그리고 희끄무레한 기류가 한데 엮어지며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가장 앞에 선 올빼미야수의 가슴팍에 박혔다.

"카, 룩."

가슴팍에 생긴 커다란 구멍.

'창'이라는 개념으로 엮어낸 독 + 암흑 + 영력이 빚어낸 시너지는 3성 괴물의 가슴팍에 구멍을 뚫어낼 정도였다.

쇄액-!

기세가 크게 줄어들지 않은 창은 뒤따라오던 올빼미야수 두 마리의 몸뚱이에 주먹 크기의 구멍을 낸 뒤에야 사그라졌다.

"카루루룩?!"

"카룩! 카룩!"

정면으로 쇄도하던 올빼미야수 무리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타고난 마법 저항력이 높은 괴물들.

3성 수준의 마법은 힘을 살짝 주기만 해도 튕겨낼 수 있다.

각 마법에서 느껴지는 마력 총량은 그렇게 높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동족을 셋이나 꿰뚫은 걸까.

올빼미야수들은 시간을 더 주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사력을 다해 돌진했다.

"녀석들. 눈치 한 번 빠르네."

[주군.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넌 구경이나 해라."

4성이 된 기념으로 힘 좀 발휘하려는데.

훼방 놓으면 곤란하지.

[특성 - 다중 연산을 사용합니다.]

[독혈을 사용합니다.]

막 숨을 거둔 올빼미야수의 피에 독성이 깃들었고.

[부패한 독을 사용합니다.]

시체의 분해를 도와 아직 사후경직도 오지 않은 괴물의 몸뚱이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으며.

[확산하는 독성을 사용합니다.]

독 성질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확산시키는 마법이 깃들었다.

0.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올빼미야수의 사체에 중첩된 마법.

유진은 주문에 담긴 영력을 곧바로 해방하지 않고 억누른 채, 다음 마법을 사용했다.

"시체 폭발."

쿠아아아앙-!!!

한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이 터져 나오고.

발을 재촉하던 올빼미야수 무리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시커먼 연기에 휩싸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고약한 냄새에 코가 절로 씰룩거린다.

〔시체 폭발의 위력이 이리도 강력했더냐?〕

'몇 개나 되는 마법을 중첩시켰는데. 같으면 억울하지.'

아무렴.

[시독]과 [독혈]로 시체에 '독'의 개념을 강화한 후.

[확산] 개념에 폭발을 섞어서 폭발력 및 범위를 증대시켰다.

단순히 순차적으로 주문을 전개한 게 아닌, 고도의 계산으로 술식을 벽돌 쌓듯이 차곡차곡 겹치게 한 것.

시체 폭발의 위력, 범위, 그리고 부차적인 효과(독)까지 모조리 강화한 술식인 것이다.

'10배 정도는 강해졌을 거다.'

독 분야의 주문들도 쓸 만하지만.

유진의 진짜 목적은 주력인 강령술과의 시너지.

특히 [시체 폭발] 같은 스킬은 독 주문과 결합해서 사용하면 효과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간다.

[저놈들. 생긴 것만 무섭고 실은 약골 아니야?]

[모르는 소리. 3.5성급 괴물. 올빼미야수. 절대 약한 상대 아니다.]

타이런트로 되살린 붉은 거미 간부, 최형태가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사념을 흘렸다.

블랙허브 농장을 비롯하여 대북 사업을 여럿 관리했던 붉은 거미.

최형태 역시 접경지역을 들락날락한 적이 여럿 있었다.

올빼미야수는 3성으로 분류되지만, 벽을 넘은 4성 헌터도 방심할 수 없는 몬스터.

[그런 괴물. 주인. 마법 두 번으로 쓸어버렸다.]

유진에게 종속되어 있는 몸.

혼도, 육체도 매여 있는 탓에 거스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최형태는 저렇게나 무서운 상대를 적으로 두었단 사실에 몸서리를 쳤다.

[나. 죽은 거 맞나?]

[뼈만 남아서 달그락거려보면 실감이 좀 날 것입니다.]

[음. 소름. 돋아서. 물어봤다.]

파프너처럼 감각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무심결에 생전의 감각을 떠올린 최형태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절대로.

무지막지한 주인에게 대항할 생각은 품지 않으리라.

푸른 안광에 아른거리는 사념이었다.

*

[스킬 - 데스 스피어가 등록됩니다.]

데스 스피어

분류 : 암흑 마법

등급 : B+

제한 : 4성 이상, [암흑] 특성 소유자.

흑마력을 축 삼아 독과 영력을 융합한 창을 만들어 투척합니다.

[죽음]이나 [독기 제어] 관련 특성을 보유하고 있으면 파괴력이 증대됩니다.

[스킬 - 시체 폭발(改)이 등록됩니다.]

시체 폭발(改)

분류 : 강령술

등급 : B+

제한 : 4성 이상, [강령] 특성, [독기 제어] 특성 소유자.

시체에 독기와 영력을 불어넣어서 폭발시킵니다. 뼈와 살점, 그리고 독이 비산하면서 주변에 피해를 입히며 독 연기가 발생해 추가 대미지를 줍니다.

시스템에서 인정한 스킬.

전 세계 헌터를 통틀어 봐도 자체적으로 개발한 주문을 인정받은 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참으로 놀랍구나. 그 어려운 행위를 어찌 해냈을꼬.〕

'이런 건 회귀 전에는 자주 들었던 메시지야.'

〔흠. 그대가 이룬 업적을 너무 폄하하는 거 아닌가?〕

'폄하는 무슨.'

전 세계의 헌터들이 들으면 화낼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린 후, 시체 폭발로 초토화된 장소로 다가갔다.

시체 폭발에 휩쓸린 올빼미야수들의 시체들.

유진은 낮게 웃었다.

"내 부름에 답하라."

[언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스스스슷-!

농밀한 영력이 고꾸라진 올빼미야수들의 몸뚱이에 스며들고.

죽은 이들의 체구와 특성, 그리고 보존 상태에 맞춰 적합한 언데드가 선정된다.

'평범한 언데드를 만들 생각은 없어.'

하급 언데드 때와 동일하게 영력으로 시체를 개조.

복잡한 것도 아니다.

그저, 주문을 발동할 때 영력이 더 많이 스며들고 원활하게 움직이는 정도.

〔정말로 그리 생각하느냐?〕

'갓 4성에 들어선 네크로맨서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작업이다.'

〔흐음. 그리 발언하는 것 치곤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한 시체당 10분 정도 들여야겠지만.'

이론은 쉽지만 실전에서 활용하기 어려운 기술.

강령술로 언데드를 개조한다는 의미다.

유진은 네크로맨서 수십 명이 달라붙어야 할 작업량을 홀로, 그것도 1초 남짓한 시간 만에 끝냈다.

[타이런트 11구를 제작했습니다.]

[타이런트의 완성도가 매우 높아서 잠재력의 한계를 돌파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6.3% 상승합니다.]

후-.

4성에 도달한 덕에 영력 제어 능력이 한층 더 올라갔다.

전성기와 비교하면 여전히 부족했다.

그래도 개조치가 100%를 넘어섰다는 게 중요했다.

〔중요하다고 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시스템이 정해놓은 한계를 넘어선 거니까.'

대격변 이후.

공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마력'을 인지한 사람들은 헌터로 각성하게 되었다.

시스템은 헌터를 빠른 속도로 강하게 만들어주는 기연이지만.

동시에 제약이기도 했다.

〔하기야 작은 인간 주제에 괴물을 사냥했다고 한없이 강해지는 건 인과에 맞지 않는 일이구나.〕

'4성 수준의 헌터 중 시스템이 그어놓은 한계를 넘어선 자는 손에 꼽을 거다.'

7대 명가의 가주들.

그리고.

회귀 전의 유진 외에는 해낸 이가 없었으니, 이쯤 되면 불가능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인님. 이 언데드들. 저와 같은 종이군요.]

"걱정 마라. 너보다는 질이 떨어지니까."

[다행입, 니다.]

생전에 다섯 개의 별을 완성시킨 최형태.

4성 언데드인 타이런트로는 전성기 때의 힘을 내지 못했다.

더 수준 높은 강령술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조만간 개조하든 해야지.

[큿. 분발하십시오]

"너야말로. 스켈레톤 나이트도 양산 가능하거든?"

[주군. 고작 이런 잡졸들과 저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시는 겁니까!]

"응. 타이런트와 스켈레톤 나이트들도 암흑 투기도 쓸 줄 알거든."

조건이 맞는 시체만 충분하면 강력한 병사를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

이게 바로 네크로맨서의 진가.

전장을 지배하는 1인 군단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뭐, 나처럼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말이야."

[크으읏. 어쩌다가 저런 품성의 주군을 섬기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택이었냐?"

[빌어먹을, 입니다.]

"그러니 분발하라고. 뒤처지기 싫으면."

분한 듯, 송명석이 신음을 가볍게 흘리다가 안으로 삼켰다.

〔계약자. 저 하수인은 8성에 도달했던 실력자라고 하지 않았느냐.〕

'맞아. 가만 둬도 알아서 성장하겠지.'

송명석의 자질은 대단했다.

이미 파프너를 9성까지 성장시켜본 경험이 있지 않던가.

천골(天骨) 특성을 지닌 녀석이니, 마찬가지로 초월의 경지를 노려볼 만했다.

'놈을 성장시키는 건 열등감이다.'

〔열등감?〕

'타인에게 뒤처지기 싫다는 향상심.'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순간 발전을 멈추고 도태되는 체질.

그러니 외부에서 계속 자극을 주어 자만하지 않고 나아가게 만들어줘야 한다.

〔채찍이 과해서 쓰러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느냐?〕

'가만 두면 알아서 회복할 놈이다.'

송명석의 자만심이 원체 강해야지.

이 자리에 파프너가 없다고 최형태한테 무게 잡는 거 봐라.

본질이 교만한 녀석인 만큼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콧대를 뭉개줘야 한다.

〔너무 휘었다가는 부러지기도 하는 법이다. 잊지 말아라. 짐은 그 조절을 하지 못하여 부러트려보았고, 부러지기도 하였구나.〕

자조 어린 크로노스의 사념.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을 삼키고 폭정을 일삼았다가 폐위된 신의 넋두리였다.

"송명석아."

[예. 주군.]

"보다시피 더 수준 높은 언데드 제작 스킬을 얻었다."

[그러신 것 같습니다.]

"이왕 나온 김에 전력을 충원하는 게 좋겠지?"

검지를 쭉 펴서 올빼미야수들이 나온 방향을 가리킨 유진.

"타이런트들을 데리고 가서 올빼미야수를 사냥해라."

[제게 선봉을 맡겨주시는 겁니까?]

"그래도 네가 언데드 군대에서 파프너 다음으로 세잖냐."

[주, 주군!!!]

텅 빈 동공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거세게 일렁였다.

의욕에 가득 찬 눈빛을 띤 송명석은 통제 권한을 위임 받은 타이런트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출발했다.

'부러지지 않을 정도라고 했지.'

〔짐의 조언대로 하수인을 부리는 게냐?〕

'뭐, 참고는 해보려고.'

뒷짐을 진 유진은 느긋하게 송명석이 앞서 나간 길을 걸었다.

127화 일해라 노예들아(1)

희끄무레한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는 땅.

네크로폴리스에 발을 딛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주인. 못 보던 사이에 친구들을 많이 늘려서 왔네?]

"4성에 도달했거든."

-타이런트 104구.

-스켈레톤 나이트 89구.

-듀라한 5구.

철원 쪽에서 내려오는 중에 접경지역을 들쑤셔서 제작한 언데드들이다.

그 때문에 1주일이나 걸렸지만, 보람은 있었지.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참 무시무시하네.]

"걱정 마라. 대전사를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확정 짓진 말아주십쇼. 주군.]

언데드 군대 선두에 있는 송명석이 으스댔다.

1주 동안 무수히 검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칼날에 비친 암흑 투기가 정순해지고 발현 속도도 1/2 가까이 줄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재능.

'이 녀석을 죽일 기회가 일찍 와서 다행이었다.'

장미선을 쓰러트리기 위해 판 함정.

이중 게이트는 한번 전개하면 [쐐기돌]을 쥔 자 말곤 제어가 불가능했다.

송명석이 그걸 쥐고 들어갔으니.

제 발로 증거까지 유진에게 바친 셈.

회귀 후에 나름대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녀석을 조기에 해치우고 언데드로 되살린 것은 최고의 행운이었다.

〔저 작은 인간에게는 최악의 불운일 테고 말이니라.〕

'어쩌겠어. 지 운명인걸.'

뼈가 닳다 못해 가루로 변할 때까지 부려 먹어주마.

송명석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느낌이 이상합니다.]

[뼈만 남아서 추위를 타는 거 아닐까?]

[스켈레톤한테 무슨 감각이 남아있어서 그러겠습니까.]

"파프너야. 별 일은 없었냐."

[특별한 건 없었어.]

네크로폴리스가 접경지역에 자리를 잡은 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처음에는 몬스터들이 주기적으로 공격해왔지만 요새 들어선 안개만 봐도 뒷걸음질 쳤다.

"쿠륵, 저기. 죽은 놈들 땅이다."

"쉬쉬쉿. 안개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자가 없다."

괴물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 나간 네크로폴리스의 악명.

영역 안쪽에서 생성되는 몬스터들이야, 악명을 듣기도 전에 망자들이나 [뼈탑]의 포격으로 죽어나갔지만.

희끄무레한 안개 너머에 군락을 형성한 몬스터들은 네크로폴리스로 오길 꺼려했다.

"애꾸눈이 네크로폴리스를 기웃거리진 않았고?"

[끔찍한 소리를 태연하게 하네.]

파프너가 몸서리를 쳤다.

애꾸눈한테서 도망치던 경험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놈의 흥미를 끌면서도 잡히지 않으려 힘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들었던가.

[누구한테 장난감 취급 당해본 건 처음이야.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어.]

"덕분에 내가 살았잖아."

[후후. 어쨌든 두 번은 안 당하려고 노력 중이야.]

"조만간 빚 상환할 거니까 열심히 해."

파프너의 어깨를 두드려 주니 입매가 기대감으로 씰룩였다.

저 얼굴 표정만 보면 살아있다고 해도 믿겠다니까.

[이제 하급 언데드는 필요 없는 건가?]

"그렇진 않아."

중급 언데드는 사역할 때 소모되는 영력이 훨씬 높다.

스켈레톤 나이트 한 마리의 유지력은 스켈레톤 50구에 버금가는 수준.

"암흑 투기까지 사용하면 더 심하지."

[아. 전에 내가 주인의 기운을 빌려간 것처럼?]

"맞아. 저 녀석들이 모두 암흑 투기를 발현하면 내 영력이 5분도 안 돼서 바닥나버릴 거다."

언데드 사역 숫자의 한계도 중요하지만.

중급 언데드부터는 부릴 때 소모되는 영력도 어마어마하기에, 영력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조승철아."

[그겔겔.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형이 시킨 거 결과 보고해야지."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한 결과를 말해봐."

[1, 17구가······.]

"17구나 목표를 달성했나?"

[레이즈 언데드 숙련도 30%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주인님.]

아.

그러니까 반대구나.

"무능한 놈들."

[······.]

"좋은 스승한테 배워놓고 성과도 못 내다니."

[······.]

조승철을 포함한 다크 미니언 일동은 턱뼈를 위에 고정했다.

한 마디라도 잘못 꺼냈다간 더 많은 잔소리가 돌아올 것임을 학습해서였다.

"레이즈 언데드 숙련도 30을 넘긴 놈들만 앞으로 나와라."

[그겔. 명을 받듭니다.]

"나머지는 다른 짓 말고 수련에 힘써라."

[그 애들은 어디에 쓰게?]

파프너의 질문에 유진이 히죽 웃었다.

"노가다."

*

피의 발렌타인까지 남은 시간은 2주.

느긋하게 쉴 틈은 없었다.

[주인님. 어디 가십니까?]

"불경스러운 묘지."

첫 번째 검은 방첨탑이 우뚝 솟은 언덕.

조금 내려가면 음산한 기운으로 뒤덮인 묘지가 나온다.

불경스러운 묘지.

유진이 검은 방첨탑 다음으로 세운 구조물이다.

"바실리스크의 시체를 꺼내라."

-그워억.

경비를 서던 리터너와 아머드 스켈레톤 무리가 묘지를 파헤쳤다.

사방으로 튀는 흙.

몇 미터 정도 내려가니 뼈만 남은 바실리스크 시체가 육안에 보였다.

대지 위로 끄집어 올린 대형종의 시체.

살점을 모두 발라냈는데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덩치다.

"조승철아. 레이즈 언데드 한번 써봐라."

[그겔. 내 부름에 답하라.]

뼈 마디마디를 휘감는 조승철의 영력.

살짝 들썩거리는 것 같더니 재배열을 마친 영력 구조가 맥없이 흩어지면서 뼈에 스며들었다.

[그게겔? 시체가 주문에 반발합니다.]

"네 영력은 회수되었나?"

[뼈에 흡수됐습니다.]

"그렇군."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냐. 내가 원하는 대로다."

크흐흐.

만족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대여. 어이하여 실패를 즐거워하느뇨?〕

'바실리스크처럼 강력한 괴물은 죽어도 사념을 남긴다.'

수준 낮은 강령술로는 생전에 강력한 힘을 지닌 시체의 잔류 사념을 몰아내지 못한다.

바실리스크도 마찬가지.

레이즈 언데드 같은 주문으로는 바실리스크를 종복으로 부릴 수 없다.

〔그대도 포함인 게냐?〕

'난 예외지. 숙련도 100을 얕보지 마.'

〔하면 그대의 하수인들을 부릴 게 아니요. 직접 나서면 되었거늘.〕

'성공하면 안 되니까 이 녀석들을 시켰지.'

바실리스크 시체로 무슨 언데드를 만들어야 잘 제작했다고 소문이 날까.

네크로폴리스로 무사히 귀환하고 나서 쭉 해온 고민이다.

〔그대가 벽을 넘었으니 더 강력한 주문을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

'중급 강령술로도 안 돼.'

〔뱀 주제에 꽤나 까다롭게 구는구나.〕

'나름대로 용족이니까.'

레리크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격을 지닌 괴물.

파프너한테 용족의 정수를 먹이는 선택지도 있지만.

3주 뒤를 감안하면 바실리스크 시체를 어떤 식으로든 언데드로 되살리는 게 낫다.

'그래서 필요한 거다. 어설프게 강령술을 익힌 녀석들이.'

조승철은 유진의 반응에 당황한 듯 턱뼈를 연신 딱딱거렸다.

소리가 거슬리긴 해도 지금은 봐주마.

"너. 지금 레이즈 언데드 숙련도가 얼마냐?"

[47입니다. 주인님.]

"좋아. 그럼 30 겨우 넘긴 놈 거수."

앙상한 뼈를 드는 두 다크 미니언.

그 중 가까이에 있는 녀석을 지목해서 다시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하게 했다.

[크, 읏.]

"불어넣은 영력이 너한테 되돌아왔나?"

[그렇, 습, 니다.]

주문이 취소당한 반동으로 전신을 떠는 다크 미니언.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몇 번 더 실험해보니 주문에 사용한 영력이 반사되지 않고 뼈에 흡수되는 비율을 알아낼 수 있었다.

'34에서 47 이상. 뭐, 47을 넘기는 녀석은 파프너뿐이니 상관없겠어.'

〔당최 무엇을 확인하는 건지 알 수 없구나.〕

'주문의 반동이 오지 않는 선에서 발동 취소가 되는 범위.'

〔리바운드가 오든 안 오든, 결괏값은 똑같거늘.〕

'흡수와 반사의 차이지.'

불경스러운 묘지에 바실리스크 시체를 안치하고 2주가 지났다.

영맥에서 흘러나오는 영력을 축적.

딱 이맘때면 불경스러운 묘지에 묻어놓은 시체의 영력 분포도가 최대치까지 차오른다.

'이걸 보고 적당히 숙성되었다고 한다.'

〔숙성이라. 강령술을 펼치기에 적합한 상태란 의미로구나.〕

'오. 제법이야. 성좌 나으리.'

〔묘지에 두어 숙성시킨 괴물의 사체. 거기에 주문에 완전히 저항하지 못한 여파로 흩어진 영력까지 빨아들이면······.〕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준비하고 있는 변칙의 핵심을 읽어냈을 줄이야.

솔직히 놀랐다.

'설명도 안 해줬는데 벌써 그 부분까지 유추한 거야?'

〔짐도 한때는 신왕의 좌(座)에 군림했던 성좌. 온 삼라만상을 주관하며 굽어 살핀 존재이니라.〕

'칭찬 한 번 해줬다고 어디까지 가는 건지.'

〔그렇다 한들, 여전히 풀리지 않은 과제가 하나 남아있구나.〕

'뭔데?'

〔강령술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어서 주검에 깃든 잔류사념을 억누른다 한들, 더 높은 경지의 언데드로 만들지는 못하지 않겠느냐.〕

정답이다.

연금, 아니 성좌 나으리.

바실리스크 시체의 잠재력을 100% 살리려면 못해도 상급 언데드로 제작해야 한다.

근데 [합일]도 안 된 녀석을 아무리 개조해봐야 안 된단 말이지.

크로노스의 지적에 유진이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계십쇼.'

[레이즈 언데드] 숙련도가 34에서 47 사이인 다크 미니언들이 바실리스크 시체를 감쌌다.

"지금부터 영력이 바닥날 때까지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한다."

[명을 따릅니다.]

불경스러운 묘지에서 영력을 충분히 쌓아놓은 바실리스크 시체.

다크 미니언들이 방출한 주문에 담긴 힘을 추가로 흡수하면서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

저저적- 저적-.

뼈 여기저기에 새겨진 금.

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바실리스크의 뼈가 얼마나 단단한데.

이 정도로 부러질 거였으면 브루탈이 올라탔을 때 이미 허리디스크로 폭삭 주저앉았을 거다.

"파프너. 혹시 비축해놓은 대형종의 시체 있나?"

[어제 사냥한 오우거 두 마리. 바실리스크 옆에 묻어놨어.]

"둘이면 조금 아슬아슬하겠는걸."

[꺼낼까?]

"어. 손상 없이 꺼내줘."

죽은 지 하루밖에 안 돼서 부패가 거의 일어나지 않은 시체.

마침 대형종의 살점이 필요했는데 발품을 안 팔아도 돼서 다행이다.

"최형태야. 바실리스크 목 위로 올라타라."

[예. 주인님.]

기병이 말의 등에 엉덩이를 붙이듯.

최형태가 큼지막한 목뼈에 걸터앉으며 두 다리로 감쌌다.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영력을 대량으로 퍼부어서 오우거 두 마리의 살점과 근육을 모조리 벗겨낸 후.

군데군데에 실금이 그어진 바실리스크의 뼈를 빼곡하게 뒤덮었다.

목 위에 앉아있던 최형태의 하반신도 살점에 파묻혔으니.

'서로의 육체가 연결된 것처럼 만들어주는 거다.'

변칙이지만 말이야.

조건은 모두 충족되었다.

후, 길게 심호흡을 내뱉은 후 입술을 떼어 천천히 외쳤다.

"내 부름에 답하라."

[언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데스 카발리에 1구를 제작합니다.]

돌진과 기동전에 특화된 죽음의 기병.

뼈 말과 기병이 혼연일체를 이루어 둘을 1구로 취급하는 언데드다.

최형태의 다리를 살점으로 덮어버린 것도 그 이유.

웅- 우웅-.

영력을 한계 이상으로 품어서 금이 갔던 뼈가 덕지덕지 붙여놓은 살점을 빨아들였다.

메워지는 균열.

그 과정에서 오우거들의 살점과 근육이 바실리스크 시체의 본래 육체처럼 인식이 되었고.

최형태도 한 몸처럼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끝나면 섭섭하지.'

굵직굵직한 뼈에 깃든 바실리스크의 잔류 사념과 용족의 힘.

과충전 된 뼈가 그 개념을 아낌없이 토해내고.

우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망자로 되살아나는 과정에 개입했다.

[어. 좀 위험해 보이는데, 주인.]

"걱정 마. 예상대로다."

폭주하려는 영력을 가뿐히 제압하고는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한다.

용족의 격과 잔류 사념이 육체를 재구성하도록.

쉴 새 없이 들썩거리던 바실리스크 시체.

뼈를 덮어놓은 고깃덩어리가 시커멓게 물들더니 파충류의 비늘처럼 단단해지고.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던 최형태의 입이 쭉 늘어나면서 도마뱀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했다.

[지식의 도서관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언데드를 제작했습니다.]

[언데드 제작 - 죽음 용기병(미완성)]

[사용자의 위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업적! 해당 지식이 지식의 도서관에 기록됩니다.]

[내가 돌아왔다.]

거세게 불타오르는 최형태의 안광.

쿵, 쿵, 살을 덧대어 두꺼워진 바실리스크 시체의 다리가 지면을 굴렀다.

128화 일해라 노예들아(2)

[죽음 용기병(최형태)]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힘 : 2,740(-1,375)

민첩 : 2,123(-1,061)

체력 : 2,384(-1,197)

맷집 : 2,851(-1,425)

영력 : 1,938(-969)

◎특성

▷용의 혈통[A] / 불사의 존재[B+] / 괴력난신[B+] / 암흑 투기[B] / 철갑[B]

◎스킬

▷죽음의 돌진[A] / 신속[B+] / 거력[B+]

*강제로 올라간 격과 혼백의 불일치로 인해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대형종의 스탯 가중치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융합을 마친 최형태와 바실리스크 시체.

일인일마가 한 몸으로 취급되는 망자, [데스 카발리에]의 개념에 용족의 힘을 더해 상위 언데드를 빚어내는 데 성공했다.

화륵, 거세게 타오르는 푸른 겁화.

파프너의 안광보다도 더 깊어서 도무지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는 심연 같았다.

"기분은 어때?"

[좋습니다.]

[좋습니다.]

목뼈 위에 붙어서 일체화된 최형태와 바실리스크의 잔류 사념이 겹쳐져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사념에 깃든 강렬한 기파.

파프너가 순간 전의를 일으킬 만큼 패도적인 기운이 퍼져 나갔다.

[와. 뭘 만든 거야?]

"죽음 용기병."

[용기병? 용 타고 다니는 기사?]

"그래. 바실리스크에 깃든 용의 인자와 개념을 살린 거다."

[엄청나게 세 보이네.]

"준 7성. 버프까지 쓰면 7성 초입까지는 해볼 만할걸."

[오러 블레이드도 구현할 수 있어?]

"그거는 아닌데. 덩치가 크잖아."

오러 블레이드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없는 상대에 한해서 가능하단 거다.

벨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니 압도적인 힘으로 뭉개버리는 것.

당연히.

애꾸눈 같은 7성 절정의 괴물한테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다.

[주인. 내가 매번 물어보는 것 같은데 진짜 4성 맞아?]

"아티팩트 덕분이다."

흑암의 반지를 낀 오른손을 흔들자 파프너가 끙,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상식에서 아득하게 벗어난 유진의 강령술 솜씨.

이내 생각하기를 관둔 후, 새로 나타난 강자에게 호승심을 드러냈다.

[붙어 봐도 되나?]

"안 돼. 아직 세부조정을 해야 한다."

죽음 용기병은 아직 미완성된 상태다.

억지로 결합한 최형태의 혼백과 바실리스크 사체.

파프너도 드래고니안 사체와 온전하게 링크시키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생전에 [마투사]란 사기적인 고유 특성을 보유하지 않았더라면.

용족 사체와 파장이 잘 맞지 않았다면.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엘드리치 드래곤을 만들지 못했으리라.

[흑암의 반지에 보관합니다.]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언데드가 한 줌의 기류로 화해 반지로 들어갔다.

[조정해야 한다며?]

"일단 혼백이 육체에 적응할 시간부터 줘야 하거든."

짧으면 2주.

길면 3주 정도 기다려야겠군.

[메멘토]가 보여준 기연, 아니 비극을 알고 있는 크로노스는 짧게 뇌까렸다.

〔새로 빚어낸 하수인을 기한 내에 투입할 수 있겠느냐?〕

'이것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파프너나 송명석을 죽음 용기병의 기수로 세울 순 없었다.

한번 바실리스크 시체와 융합한 혼백은 다시 분리시키기가 어려웠다.

회귀 전 9성과 8성에 도달했던 강자들.

용기병으로 만들어버리면 한계가 정해져버리는데, 그럼 손해지.

두 언데드를 제외하면 가장 센 녀석이 최형태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피의 발렌타인' 사태 직전에 겨우 완성시킬 수 있겠어.'

〔아슬아슬하구나.〕

'써먹을 수 있는 게 어디야.'

최형태의 혼백이 바실리스크의 육체에 익숙해져도.

바로 써먹진 못하고 추가 조정을 해야겠지만.

뭐, 설마 악마들이 코앞에 들이닥쳤을 때 작업을 마무리해야겠어?

유진은 손가락으로 볼을 가볍게 긁었다.

*

죽음 용기병 제작 말고도 할 일은 많았다.

"인근의 몬스터들을 토벌한다."

[잡초처럼 계속 나오는 놈들입니다. 죽여 봐야 가치 없는 일입니다.]

"송명석아. 왜 이렇게 혀가 길어. 혹시 겁먹었냐?"

[제, 제가 말입니까!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싸움을 피하려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오해할 뻔했네."

[두고 보십쇼. 몬스터를 제일 많이 도륙하는 것은 제가 될 겁니다!]

응.

그래.

열심히 일해라.

*1군 – 파프너, 브루탈 1구, 다크 미니언 5구, 하급 언데드 100구.

*2군 – 송명석, 브루탈 3구, 다크 미니언 5구, 하급 언데드 200구.

둘로 나눈 토벌대는 동 / 서로 갈라져서 몬스터 군락들을 휩쓸었다.

쓰러트린 몬스터들 사체는 모두 네크로폴리스로 운송.

영지 곳곳에 차곡차곡 쌓였다.

"센 놈들은 따로 분리해둬라."

[언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타이런트 27구를 제작했습니다.]

[스켈레톤 나이트 25구를 제작했습니다.]

[데스 카발리에.....]

....

생전에 어느 정도는 강해야 중급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다.

'벽'을 한 단계 넘어선 언데드.

쉽게 만들 수 있으면 그게 밸런스 파괴지.

[충분히 사기적인 능력인데?]

"내가 잘나서 그래. 언데드의 전투력은 원래 산 자들보다 떨어진다고."

언데드는 동일 성위 기준으로 무력이 한 단계 떨어진다.

부상을 입어도 전투력 손실이 없고.

정신 간섭이나 독에 효과를 크게 보지 않는다는 강점이 있지만,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동작이 단순했다.

거기에 평균 스펙도 떨어지는 편.

유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영력으로 시체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술자는 회귀 전에도 흔하지 않았다.

[근데 버려지는 시체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너희가 시체 수준을 볼 안목이 없으니 별수 없잖냐."

[우린 망자니까 냄새가 나든 전염병이 돌든 상관없지만 주인이나 뽀시래기 친구들은 아니잖아.]

파프너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고대 – 중세에 이르기까지, 시체는 여러 질병을 담아놓은 보관소나 마찬가지였다.

네크로맨서인 유진이야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 쳐도.

접경지역을 자주 들락거리는 뽀시래기 팀한테는 건강 상 안 좋겠지.

한둘도 아니고 수백의 시체를 쌓아놓으면 말이야.

"이왕 시체도 얻었겠다. 그냥 썩힐 생각은 없다."

[주인은 역시 계획이 다 있구나.]

단기적인 전력 강화도 중요하지만.

장기 플랜도 세워야지.

네크로폴리스에 수북이 쌓인 괴물들의 시체들은 이미 쓸 곳을 정해두었다.

유진은 검은 방첨탑에 손을 얹고 영지 정보를 확인했다.

[영지 규모 - 2]

[강령술 증폭 범위 - 3km]

[사역 가능 언데드 개체 수 - 492/500]

[영력 농도 – 3]

[구조물]

-검은 방첨탑(Link - 5)

-불경스러운 묘지(1)

-죽음의 전당(1)

-강령술 연구소(1)

-거인의 묘소(1)

-망자의 골탑(4)

'빈약하군.'

시체 보관과 전력 확보 위주로 구조물들을 짓다 보니 내실은 부족했다.

다행인 건 영맥에 흐르는 거대한 힘을 꾸준히 축적했다는 점.

짧은 시간에 구조물을 연속으로 지으면 검은 방첨탑에 쌓아놓은 영력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비축해놓은 영력이 꽤 되니, 연속으로 건축을 해도 되었다.

"조승철. 강령술 실력이 뛰어난 놈들 10마리를 추려서 연구소로 가라."

[그겔. 알겠습니다.]

[강령술 연구소에 네크로맨서 자격을 지닌 마법사가 11명 배치되었습니다.]

[연구 효율이 올라갑니다.]

연구는 참여 인원이 많을수록 빨라지는 법.

지금까지야 강령술을 습득한 하수인이 적어서 다수를 투입할 수 없었지만.

강령술 기초 주문 [레이즈 언데드]의 숙련도를 어느 정도 올린 다크 미니언들은 연구소에 투입할 만한 수준이 되었다.

또한.

유진이 다크 미니언들을 급작스럽게 투입한 이유는 효율만이 아니었다.

[강령술 연구소 등급 상승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업그레이드 조건

-강령술 연구소 Lv1

-배치되어 있는 네크로맨서 10명 이상.

-뼈 400kg.

-영력이 축적된 흙 666kg.

〔구조물의 등급이 올라가면 무슨 효과가 있느냐?〕

'연구 폭이나 깊이, 그리고 배치 가능 인원 숫자가 늘어난다.'

〔미래를 위한 투자로구나.〕

'특정 건물들은 강령술 연구소에서 연구를 해야 지을 수 있기도 하고.'

나찰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벌인 [망자의 골탑]처럼 말이지.

강령술 연구소는 장기적인 영지 발전을 위해 꾸준하게 투자해줘야 하는 건물이다.

'지금까지는 후순위로 두었지만 이젠 다를 거다.'

검은 방첨탑에 축적된 영력을 체크했다.

아직은 꽤 여유롭군.

다섯 개나 링크를 해놓은 덕에 비축되어 있는 양이 상당했다.

'업그레이드는 영력 소모가 적기도 하고.'

하나, 아니 둘은 더 지을 수 있겠어.

머릿속으로 네크로폴리스 발전에 필요한 구조물이 여럿 떠올랐다.

그 중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을 취사 선택.

영혼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검은 방첨탑에 다음 구조물 건설을 지시했다.

*

[귀신 들린 채굴소를 건설했습니다.]

[강령술 증폭기를 건설했습니다.]

▷망령이 드리운 광맥 Lv1

영맥에 간섭하여 영력 추출 속도를 줄여주고 저장량을 늘립니다.

▷강령술 증폭기 Lv1

검은 방첨탑의 범위 안에서 강령술을 사용할 경우, 효율이 10% 증가하며 언데드 제작 속도가 10% 감소합니다.

[망령이 드리운 광맥]은 네크로폴리스 안에서 영력 축적 효율을 늘려주고.

[강령술 증폭기]는 검은 방첨탑과 연계해서 네크로맨서의 능력에 버프 효과를 부여한다.

〔증폭이라고 한들, 그대는 이미 강령술의 한계를 넘기지 않았느냐.〕

'맞아. 강령술 증폭기라고 해도 100%가 넘으면 효과 적용이 안 되거든.'

〔그대에게 필수가 아닌 구조물을 먼저 건설한 이유가 있느냐?〕

'나 말고 다른 녀석들이 있잖아.'

영지 운영의 핵심이 될 다크 미니언들.

네크로맨서들을 굴리는 것보단 효율이 떨어지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지.

정말이지.

나찰 집단군, 아니. 이번 침략을 뒤에서 조장한 아라한 길드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어.

아낌없이 주는 백성현 부사장님,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그 작은 인간은 썩 반기지 않을 것 같구나.〕

'무슨 말이야. 진심은 통하게 되어 있어.'

아무렴.

지금쯤이면 너무 좋아서 온몸을 비틀고 있을 거다.

나찰 길드와 밀월 관계라는 의혹.

한 마디 거짓말에 반박하려면 100마디의 말이 필요하다고 하잖아.

심지어 미친개의 발언은 진짜이기도 하고.

그 정도로 무너지진 않겠지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바동거릴 거다.

'니콜라이 방문 건도 있고 말이야.'

〔아. 그대를 들여다보려 했던 발칙한 작은 인간 말이로구나.〕

'비밀리에 로마노프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는데, 나랑 공개적으로 만났잖아.'

정치적 메시지가 다분한 니콜라이의 행보.

골치깨나 아플 거다.

[그 많던 시체가 다 사라져버렸네.]

"비축했던 영력도 거의 다 썼다."

[망령이 드리운 광맥]을 건축하려면 많은 시체와 영력이 필요했다.

투자 효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영맥에서 뽑아내는 힘이 증대되었고, 저장 가능한 양도 확연하게 늘어났으니.

"고생 좀 더 해라."

[시키면 해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며칠 동안 네크로폴리스에 머무르면서 중급 언데드들을 추가로 제작.

언데드 제어 숫자를 꽉 채운 후, 추가 생산한 하수인들은 검은 방첨탑에 예속시켰다.

또한.

영력과 시체가 쌓이는 족족 새로운 구조물을 건설했다.

▷뼈 개조실 Lv1

사체의 뼈를 분해하거나 재조립, 혹은 원하는 모습으로 깎거나 붙일 수 있습니다. 형태를 바꾸거나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추가 촉매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혼령 감시탑 Lv1 x 3

네크로폴리스 주위의 혼령들과 시야를 공유해서 정보를 획득합니다.

▷영혼의 감옥 Lv1

혼백이 떠나가지 못하게 속박하는 감옥입니다. 감옥에 갇힌 영혼은 주기적으로 영력을 공급합니다.

▷뼈 대장간 Lv1 x 5

언데드 전용 무장을 제작하는 대장간입니다.

시야 확보와 병력 강화.

그리고 쓸 만한 혼백을 잡아두기 위한 감옥 등.

네크로폴리스는 불과 며칠 만에 상당한 인프라를 갖추게 되었다.

[강령술 연구는 왜 끝이 없는 거지?]

[이러다가 뼈가 닳을 거 같다.]

[그극, 지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쉬고 싶다.]

몬스터 시체를 공급하는 언데드들과 영지 안에 머무르며 수련 혹은 연구 중인 다크 미니언들이 곡소리를 냈다.

"안 돼. 쉬는 건 죽어서도 할 수 있다."

[주인님. 전 이미 죽었습니다. 그겔.]

"두 번째로 죽고 난 후에 푹 쉬면 되겠어. 그렇지?"

밥도 필요 없고 잠이나 휴식을 취하지도 않으며 주인에게 복종하는 완벽한 일꾼!

주인의 따스한(?) 눈빛을 받으며, 언데드들은 뼈가 으스러져라 일했다.

129화 명분

네크로폴리스 발전과 언데드 군대 강화.

'피의 발렌타인'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을 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스승님!"

[오. 마력 파장이 더 안정됐어.]

"저번에 해준 조언이 도움 되었어. 모두 스승님 덕이에요."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흑발.

나긋나긋한 말투와 달리, 잘 벼려낸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드러내는 여인.

장미선이 환하게 웃으면서 네크로폴리스로 들어왔다.

"넌 뭐하러 왔냐."

"에이. 자유롭게 들락거리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요."

"놀러오라고는 안 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잘 됐잖나. 주인. 요새 훈련도 영 안 했잖아.]

그래서 더 싫다고.

최근에는 영지 발전에 [언데드 라이즈]로 중급 언데드 제작하랴, 다크 미니언들한테 짬짬이 강령술 강의도 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편하게 누워서 손가락만 까딱거리고 싶은데.

"이미 그런 거 아니에요?"

장미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뼈로 만든 흔들의자에 앉아서 할 말로는 적합하지 않냐, 라는 눈빛.

유진은 흠, 짧게 헛기침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헛소리할 거면 돌아가라."

"나 여기 출입 허가 받았거든요."

"안 돼. 돌아가."

"오늘은 그냥 온 거 아니라니까."

"시답잖은 이야기면 진짜 돌려보낸다."

"불사조 길드에서 유진 님한테 드릴 제안이 있어요."

확 가라앉은 장미선의 목소리 톤.

갑자기 진지한 분위기를 내면 어떻게 하니.

"새벽 길드 아시죠?"

"국내 3강이잖아. 모르면 한국 사람도 아니지."

"오. 유진 님이면 그런 거 안 들어봤다고 오리발 내밀 줄 알았지."

"근데 새벽은 왜 나오냐."

"불사조랑 새벽 길드는 매해 합동훈련을 하거든요."

국내 2위와 3위 길드의 합동훈련.

대격변이나 몬스터 웨이브 같은 미증유의 사태에 대비해서 팀워크를 맞춘다는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부동의 1위인 아라한 길드를 견제하려는 액션이다.

"합동훈련 전에 파프너한테 특훈이라도 받게?"

"에이. 그건 평소에도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뭔데."

"1주 뒤로 예정된 합동훈련에 유진 님도 참여해주십사 하고."

"불사조 측에서?"

"아뇨. 블랙 컴퍼니까지 해서 세 단체가 합동훈련하자는 제안이에요."

흠?

의외군.

불사조는 늘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해서 그렇다 쳐도, 새벽 길드가 그런 제안을 할 줄이야.

국내 3강이라는 자존심.

최근에 파랑을 일으키고 있는 블랙 컴퍼니라고 해도, 아직 국내 3강과 같은 무대에 설 만큼 세력을 키우진 못했다.

"마스터가 설득한 거죠. 뭐."

"새벽 길드의 동의를 얻어내려면 맨입으론 안 됐겠어."

"거기까지는 모르죠. 난 말단이잖아요."

"차기 검성이 말단이라고 하면 퍽이나 믿겠어."

불사조와 새벽의 합동훈련이라.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이중 게이트 때나 아라한의 공동 공략 제안 때하고는 입장이 달라졌으니.

3강 중 두 길드가 주최 및 주관하는 훈련에서 블랙 컴퍼니가 동등한 입장으로 참여한다?

대외적으로는 블랙 컴퍼니의 입지를 늘릴 기회이며.

강화한 언데드 군대의 위력을 가늠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안 될 것 같다."

″진짜요? 이거 완전 좋은 기회잖아요."

"바쁜 거 안 보이냐. 인간사냥꾼 혼내주려면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의자라도 치웠으면 설득력이 조금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장미선의 힐난에도 유진은 킬킬거릴 뿐, 대꾸하지 않았다.

1주 후라.

탐 나는 제안이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피의 발렌타인 때문이더냐?]

'합동훈련을 마치고 바로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촉박해.'

훈련 일정이 끝나는 날과 피의 발렌타인은 고작 하루 차이.

피로도는 [라이프 드레인]으로 어느 정도 충당한다 쳐도 준비할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요오오오오?"

"뭘 그렇게 아쉬워하나."

"스승님이랑 붙어보나 해서 그렇죠."

"너 순번 오기 전에 불사조의 주력이 우릴 정리하지 않겠냐."

"헤헤. 그게 합동훈련이라고 해서 다 싸우는 건 아니에요."

4성 이하 대전.

그리고 총력전.

불사조와 새벽 길드의 합동훈련은 두 번을 치른다고 한다.

"내가 4성 이하로 가면 생태계 교란 아닌가?"

"스승님만 봐도 그렇긴 한데. 어쨌든 마스터가 유진 님도 초대하라고 했으니까요."

"어쨌든 바빠."

"속초에서 순대나 먹고 가시지."

잠깐만.

단어 하나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데.

"속초?"

"그 옛날 통일전망대 알죠? 파주 말고 고성이요."

"이름이야 알지."

"이번 합동훈련 장소가 거기거든요. 근처 몬스터들도 토벌할 겸 해서."

속초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곳.

이거 참.

오늘이 혹시 크리스마스라도 되나?

산타 할아버지도 아니고 갑자기 선물을 주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그러니까 이렇게 보답을 받잖아.'

〔그대의 도덕관념이 평범함과 다른 것은 알고 있었다만, 방금 전 발언은 도를 넘어섰구나.〕

안 그래도 속초로 갈 만한 명분을 슬슬 생각하려던 참이었다.

송명석과 파프너 같은 최정예 하수인들만 데리고 가기에는 [메멘토]가 보여준 비전이 너무 살벌했거든.

'미리 제작해놓은 언데드 군대를 수송할 핑계로 뭐가 괜찮을까 고민했거든.'

〔하기야. 연고지도 아닌 곳을 방문하는 건 그렇다 쳐도 망자들까지 옮길 구실이 마땅찮았겠구나.〕

'안 되면 창고 하나 대여해서 밤에 옮겨놓으려고도 했었지.'

오히려 좋아.

구) 통일전망대면 속초에서 차량으로 30분 거리.

언데드 군대를 합법적으로 옮길 명분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다.

"아바이순대는 좀 끌리는군."

"진짜요?"

"한 번 먹어보고 싶었어. 기회가 없었지."

"오오, 오오오오!"

장미선의 눈가에 생기가 반짝였다.

"속초에서 아바이순대 맛있는 곳 알거든요. 사드릴게요!"

"먹을 걸로 영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능성이 0은 아니잖아요. 스승님도 함께 가는 거죠."

"장미선 씨. 언데드한테 먹을 거 사준다고 하면 고인능욕 아니냐."

"에이. 저번에 들어보니 맛보는 방법도 있다더만."

유진이 슬며시 옆을 흘겨보자 파프너가 다른 곳을 바라봤다.

이 녀석.

그런 쓸데없는 정보는 언제 이야기한 거냐.

"뽀시래기 팀 데려가도 되나?"

"지갑이 좀 위태롭긴 한데, 에이. 기분이다. 내가 한 턱 쏠게요."

"그럼 합동훈련 참여하지."

"좋았어!"

두 주먹을 쥔 장미선이 환호성을 질렀다.

"근데 맨입으로?"

"아바이순대 먹기로 했잖아요."

"네가 사주는 거 말고. 초대는 불사조 길드에서 하는 거잖아."

"...음. 마스터가 길드 창고에서 원하는 물건 하나 골라가는 걸 말씀하시긴 했어요."

그럼 그렇지.

어디서 입을 싹 씻으려고 해?

"수락한다고 전해줘."

속초 근처로 넘어갈 명분도 생겼고 아이템까지 하나 얻겠군.

김영수 씨.

회귀 전에도 친하게 지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긴밀한 사이가 되어 봅시다.

*

드르륵, 드륵-.

김영수는 평소 일과 중 하나인 티타임을 가졌다.

드립 커피를 내리는 것은 취미이자, 업무 루틴 중에 하나로 자리를 잡을 만큼 중요했다.

"이 소리만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수동으로 원두를 갈은 후, 분쇄한 커피가루를 필터에 올려놔서 물을 따른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검은 액체.

잔이 어느 정도 차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손을 뻗었다.

여유롭게 커피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콰앙-!

뜯겨나갈 기세로 열린 문.

한 여인이 장발을 이리저리 흔들며 집무실로 불쑥 들어왔다.

"마스터. 천유진 씨가 합동훈련에 참석한대요!"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니?"

"뭐를요?"

"문은 부수는 게 아니라 여는 거라고."

"아. 마스터가 소식 들으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해서 급히 연 건데요."

후우-.

이래서야 커피의 풍미를 즐기지도 못하겠다.

공들여 내린 드립커피 한 잔을 단번에 털어버린 김영수가 소파에 앉았다.

"보상 이야기는 안 하고 잘 넘어갔나?"

"아니요. 천유진 씨가 보통 사람이에요. 어디. 다 벗겨먹던데요."

"네 표정이 좋아서 물어보는 거란다."

"그래요? 좋은 일은 딱히 없었는데. 뭐지."

말하는 것과 달리, 장미선은 계속해서 히죽거렸다.

합동훈련 참여 답변을 받은 후, 파프너의 권유로 벌인 대련.

보상 운운하면서 얄밉게 웃는 유진을 합법적으로 패줄... 아니, 시원하게 손속을 겨룰 수 있어서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갔다.

"천유진 헌터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한 건 아니겠지?"

"에, 에이.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무슨 실례를 해요."

"나는 우리 미선이를 믿어요."

훅 들어온 양심의 가책에 마음이 쿡쿡 찔렸지만, 장미선은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김영수는 그 모습을 관찰하며 웃음을 삼켰다.

"보상 이야기를 잘 넘어가면 네게 준다고 했는데 아쉽겠구나."

"그러게요. 제 순번이 아니었나 보죠."

국내 2위 길드의 아이템 창고.

유니크 등급 장비만 10개가 넘게 보관되어 있고.

개중에는 억만금을 불러도 매물이 없어서 구할 수 없다는 희귀한 아티팩트까지 있으니.

"마스터."

"너무 값진 것을 내주는 거 아니냐, 고 물어보려는 거지?"

"길드에서도 이야기가 많던걸요."

"판을 뒤엎는 값이라고 생각하면 비싸지 않단다."

장미선의 머리 위에 떠오른 물음표.

김영수는 느린 동작으로 찻잔을 잡았다가 몇 방울 남은 커피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국내 3강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전력차는 꽤 큰 편이란다."

"길드원 앞에서 그런 말 해도 돼요?"

"어때. 다들 알음알음 눈치 채고 있는 부분이잖니."

"마스터가 그러면 무게감이 다르니 그렇죠."

"어쨌든, 견고하기만 했던 아라한의 입지가 흔들리니 더 바람을 불어야지."

두 길드의 합동훈련에 블랙 컴퍼니가 참여한다?

언론에 정보를 흘리기만 해도 아라한 길드를 더 흔들어놓을 수 있다.

마법 명가 로마노프에서도 주목하는 기업!

불사조와 새벽과도 가까이 지내면 아라한 길드 입장에선 파고들 틈이 없을 터.

아라한 길드와 로마노프 가문 사이에 오고간 거래까진 알지 못했지만, 그 무게감은 확실히 이해했다.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 정도면 싸게 먹힌 거란다."

"흐으으으음."

"너도 욕심이 나니?"

"길드의 지원을 빵빵하게 받은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당연히 나죠."

천유진 씨한테는 갚아야 할 빚도 있고 말이죠, 라며 장미선은 뒷말을 붙였다.

짧게 웃는 김영수.

대구에서 발생한 이중 게이트 사태를 생각하면 그 역시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새벽이 협조적으로 나와서 다행이란다."

"합동훈련. 원래 5월이었잖아요."

"그쪽도 우리 의도를 알아채고 판을 깔아주겠단 거지."

"새벽 길드도 천유진 씨한테 협조적일까요?"

"박정연의 성격이라면... 글쎄다."

새벽 길드는 자유분방한 불사조와 정반대 성향이었다.

박정연 길드장의 성격상 합동훈련 때 주도권을 쥐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

"블랙 컴퍼니를 협업 대상보단 산하로 두려 하겠지."

"으으음. 재밌겠네요."

"분위기가 꽤 험악할 텐데?"

"제가 고생하는 건가요, 뭐. 천유진 씨도 진땀 좀 흘려봐야지."

남 일 말하듯 뇌까리는 장미선.

목소리는 경쾌했지만.

'정말로 그 사람이 진땀을 흘릴까?'

여태까지 보여준 믿기지 않는 행보.

국내 1위 헌터 길드가 각성 1년차 헌터에게 휘청거리질 않나.

접경지역에 세력을 펼쳤고.

개성 인근의 패권을 쥔 제5 혁명군과 전면전을 선포하기까지 했다.

'새벽 길드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장미선은 무심결에 떠오른 생각에 풋, 하고 웃었다.

130화 속초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