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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 140-150

140화 피의 발렌타인(4)

바닷물이 증발하고 땅바닥에 기다란 고랑이 새겨진다.

서로의 의지가 부딪치는 순간, 충격의 여파로 인해 발생한 강풍이 항만 근처 건물들의 유리를 깨트렸다.

악신 성좌의 가호를 받아들임으로써 6성의 힘을 얻은 사탄교 신자.

필멸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의 경지에 걸친 존재, 일명 마인이 된 신자들은 가공할 만한 흑마력을 마구 발산했다.

[케넥 전투술]

[7장 – 10발 난타]

빗발치는 암흑 투기가 검붉은 기류를 빠르게 벗겨낸다.

채채챙, 마투기로 강화된 칼날이 주먹과 쉴 새 없이 부딪친다.

[재밌네. 더 해봐.]

"빌어먹을 것! 데스 나이트라도 되는 거냐!"

마인은 양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치를 떨었다.

넘쳐나는 힘.

성위로 치면 6성에 해당하는 경지로 순식간에 올라섰고, 흑마력도 넘쳐났다.

단순 스탯으로는 7성에 준하는 어마어마한 흑마력.

그럼에도.

파프너의 맹공을 떨쳐내지 못하고 오히려 수세에 몰렸다.

"언데드 하나 못 당해내는 거냐!"

철퇴를 든 마인이 파프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려 할 때, 서걱- 붉은 섬광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의 상대는 나입니다.]

"뼈만 남은 언데드 주제에 나를 상대하겠다고!"

[나 혼자서는 무리겠지요.]

송명석의 푸른 귀화가 호선을 그렸다.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스켈레톤인데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비웃음이란 감정.

척, 척, 스켈레톤 나이트 50구가 그의 뒤에 도열했다.

[우리는 군단입니다. 당신 혼자 우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개 먹이로도 못 줄 뼈다귀 새끼가!!!!

암흑 투기를 휘감은 검들이 쇄도한다.

4성 수준의 능력치.

속도는 느리고 검을 휘두를 때의 묘리나 공격 패턴 모두 단순했다.

제 능력을 갈고닦아 올바른 방법으로 6성에 도달한 헌터라면 쉽게 떨쳐낼 만한 힘.

그렇지만.

마인 역시 얼치기로 획득한 능력을 사용하기에 급급한 상황이었으니.

송명석과 그의 통제하에 있는 스켈레톤 나이트들의 협공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한편, 죽음 용기병의 돌진에 위협을 느낀 마누엘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죽다 만 언데드 따위한테!"

[다중 연산]

[게헤나의 불꽃]

[다크 베일]

[블랙 스피어 x 3]

심연의 불꽃이 퍼져 나가지 않게 방어벽에 고착.

죽음 용기병이 달려드는 것을 막아서는 동시에 검은 창 세 발을 발사했다.

창끝이 노리는 것은 이 사태의 원흉.

유진이었다.

〔그대를 노리다니. 위험하구나.〕

위험 같은 소리.

막아내는데 영력을 소모하기도 아깝다.

타이런트 몇 마리를 방패로 내세운 후, 곧바로 [리바이브]를 사용했다.

시체는 어디 있냐고?

-으우우우.

비틀거리면서 날아드는 레서 데몬.

이제는 영력으로 두 번째 삶을 부여받은 망자가 되어 제 주인에게로 달려들었다.

"시체 폭발."

쿠아아아앙-!

지옥 화염의 장막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독 분야와 연계해서 훨씬 강력해진 시체 폭발은 마누엘도 경시할 수 없을 만한 파괴력을 지녔다.

거기에, 마누엘이 상대해야 할 적은 유진만이 아니었다.

[흠.]

묵묵히 나아가는 죽음 용기병.

마인 한 명이 호위로 붙었지만, 악신의 가호 덕분에 막 6성에 도달한 정도로는 준 7성급 강자인 죽음 용기병과 정면 승부하기가 어려웠다.

"으아아아!!"

마누엘의 입에서 울분 섞인 고함이 튀어나왔다.

유진에게서 느껴지는 마력 파장은 고작해야 4성 수준인데.

왜.

벨리알의 가호를 받아들여서 단번에 성위를 두 단계나 건너뛴 자신이 이렇게까지 고전해야 하는가!

'강력한 주문을 더 빨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막대한 흑마력을 마음껏 방출하고 싶다.

저 벌레 같은 언데드들.

그리고 유진을 짓뭉개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

실제로 1분 정도만 자유의 몸이 되면 해안가에 바글바글한 언데드들을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크아아앗."

지근거리에서 발생한 폭발.

마누엘은 재배열 중인 흑마력을 미완성 상태로 방출해서 충격을 상쇄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상황.

악신 성좌가 부여해준 가호로 인해 흑마력이야 넘쳐났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막대한 힘을 제대로 발휘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뭐가 잘 안 되나?"

유진은 타이런트 수십 구를 죽음 용기병의 양 옆으로 우회시켰다.

정면으로는 준 7성급 언데드인 죽음 용기병.

느리게 걸어오지만, 착실하게 양쪽을 압박하는 타이런트들까지.

마누엘의 곁에 있는 마인이 양손에 응축시킨 마투기를 최대치로 발현해서 폭발을 일으켰지만.

타이런트들도 암흑 투기를 일으켜서 저항했다.

[단기간에 많은 영력을 소모했습니다.]

[집중력이 감소합니다.]

제길.

오래간만에 찾아온 페널티군.

[고대의 정원] 공략 때 이후로 처음 겪는 페널티이니 얼마 만인지도 가물가물했다.

〔막상 기간을 살펴보면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았느니라.〕

'자잘한 건 넘어가자고.'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암흑 투기를 최대로 전개했고.

타이런트들도 일부가 힘을 끌어 올렸다.

언데드 하수인들이 소모하는 영력 일부는 유진이 감당해야 했으니.

중급 언데드를 유지하는 기본값도 어마어마한데, 출력까지 올리니 현기증이 핑 돌았다.

"민정아."

"예예. 한 마리 배달 갑니다!"

철푸덕, 석궁 네 발에 날개를 꿰뚫린 레서 데몬이 유진 앞에 떨어졌다.

떨어지는 각도를 절묘하게 조절한 결과물.

추락한 레서 데몬은 양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유진을 노렸지만.

"가만히 있어라. 생명력 셔틀."

장미선의 날카로운 검격과 비교하면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손쉽게 거리를 좁히고는 오른손으로 레서 데몬의 안면을 꽉 쥐었다.

[고유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영력 → 성력으로 치환됩니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끄, 끄륵."

"금방 끝난다. 입 열고 있으면 혀 깨물으니까 가만히 있어."

친절하게 속삭이며 레서 데몬의 생명력을 강탈.

빨아들이는 족족 성력(영력)으로 치환했다.

그 순간.

마인들과 손속을 섞고 있던 중급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겔, 겔.

-으오오오.

하급 언데드를 사역할 땐 벌어지지 않았던 현상.

유지에 소모되는 영력 양도 어마어마한데다, 반 이상이 암흑 투기를 전개하는 중이었다.

중급 언데드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던 유진이 [백야]로 능력치를 치환하는 순간.

동력원이 되는 영력이 사라지면서 전투력도 급감한 것이다.

"이 놈들. 갑자기 느려졌다."

"작전인가?"

"알바인가. 일단 쓰러트려야지."

콰드득, 몇 초 동안 둔해진 언데드 군단 일부가 흑마력에 쓸려 나갔다.

음.

[백야]로 스탯을 치환하는 순간에 빈틈이 생길 건 예상 못했군.

[고유 특성 - 백야를 사용합니다.]

[성력 → 영력으로 치환합니다.]

〔중급 언데드를 다루었다고 하여 이런 변수가 생기진 않았거늘!〕

'이렇게까지 많은 놈들을 부리진 않았잖아.'

한 순간의 변수로 무너진 전장의 균형.

높은 성위끼리 전투가 벌어지면 찰나의 순간으로 인해 승패가 갈리곤 한다.

유진이 고유 특성으로 능력치를 치환한 건 무려 수 초.

마인들은 중급 언데드들이 굼뜨게 움직이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손실은 1/5 정도인가.'

뼈 아픈 피해를 입었지만 괜찮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진이 대동한 중급 언데드들은 모두 근접 계열이라서 전투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숫자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슨, 총원 중 1/5를 잃어도 당장 전투력 손실이 피부에 와닿진 않는다는 것.

〔한데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언데드는 왜 동원하지 않은 게냐?〕

'만들기도 어렵고 잃으면 아깝기도 하고.'

스켈레톤 메이지?

마력 저항력이 높은 악마종한테는 큰 도움이 못 된다.

이번에 대량으로 제작한 다크 미니언 수준이라면 견제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이득에 비해 위험도가 너무 높다.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이야.'

스켈레톤 나이트나 타이런트는 암흑 투기로 모자란 스펙을 벌충할 수 있다.

보다 상위 개념인 [오러 블레이드]가 아닌 이상.

출력으로 찍어 누르더라도 쉽게 떨쳐내지는 못한다.

'이제부터는 전투 중에 소모되는 영력을 회복할 수단도 추가로 마련해야겠어.'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두 번째에도 같은 우행을 저지르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다.

실책 한 번으로 전황이 기울 뻔했지만, 파프너와 송명석이 나서서 중급 언데드들이 굳으면서 생긴 틈을 메웠다.

[주군! 속하의 활약상을 두 눈에 똑똑히 새기십시오!]

음.

그래.

마투기를 다 해소하지 못하고 튕겨난 몰골은 뇌리에 잘 기억해두고 있으마.

한 번 위기가 있었지만 그 뒤로 전장이 주도권은 유진에게 다시 한번 기운 후로 움직이질 않았다.

〔허 참. 기대치에 못 미치는 적들이로구나.〕

'이왕이면 준비가 철저하다고 해줄래?'

〔그대의 준비가 과하였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니라.〕

'만약 이렇게까지 준비를 안 했으면 놈들이 안하무인으로 날뛰었을 거다.'

즉석에서 가호를 받아 만들어진 6성 헌터.

아이가 제 몸 크기의 칼을 위태롭게 흔드는 것과 비슷했다.

망자들과의 싸움에서 조금씩 힘에 익숙해지고 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제물 수급을 막고 힘에 익숙해질 시간을 안 줬지.'

[메멘토]로 엿본 기록을 바탕으로 병력 구성과 배치를 완료했다.

2중, 3중으로 대책을 마련해서 악신 성좌의 힘에 취한 마인들이 날뛰지 못할 환경을 조성했으니.

사탄교 신자들의 전투력은 원 시간대에 벌어진 '피의 발렌타인' 때보다 훨씬 뒤쳐졌다.

〔더 변수가 없으면 그대의 승리가 확실시 되는구나.〕

'플래그 세우지 마.'

이러다가 "해치웠나?"라고 하겠어.

크로노스의 감상은 반대편에 선 마누엘 역시 느끼고 있었다.

"이, 이대로는 안 된다."

[불사자의 관]을 지키고 있는 마인까지 전투에 합류시켰지만, 언데드 군대를 밀어내진 못했다.

도리어 총동원령을 듣고 모여든 헌터들이 속속들이 전장에 합류.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마인들을 견제하는데 참여해서 운신의 폭이 갈수록 좁아졌다.

밀물이 들어오는데 해안가에 그대로 서 있는 느낌.

바닷물이 천천히 차오르면서 몸을 적시는데 갯벌에 발목이 잡힌 것 마냥 벗어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마누엘은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최후의 수단만큼은 쓰는 일이 없기를 바랐건만.

골수까지 파고든 악신 성좌의 기운에 반쯤 날아갔던 이성이 되돌아올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의식을 중단하고 도망을 가?'

그렇지만 후퇴도 쉽지 않았다.

도주 수단은 크루즈뿐인데, 항해 요령이 없는 사탄교 신자들이 배를 몰아봐야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유진이 그들을 순순히 놔줄 리도 없었다.

'남은 수단은 하나뿐!'

푸아악-!

길쭉하게 자란 손톱으로 제 손바닥을 긋는 마누엘.

옆에 있던 마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누엘 사제. 지금 뭘 하는?"

"위대하신 분이여. 그대에게 제물을 더 바치오니, 합당한 가호를 내려주소서."

"제물이 어디에 있다ㄱ...?!"

무의식적으로 대꾸하던 마인은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오른팔.

마누엘처럼 자해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읍, 으읍!"

"피는 영혼의 화폐일지니. 너희의 혼백은 내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불사자의 관]으로 치른 의식.

그 주최자가 마누엘인만큼, 힘의 주도권도 그에게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수하들에게도 모종의 대법을 새겨놓았고.

마음만 먹으면 사탄교 신자들의 목숨을 싸그리 거두워서 자신의 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촤아아아악!!!

유진 일행과 손속을 겨루던 마인들이 순식간에 핏물로 화하더니 마누엘에게로 쏟아졌다.

전신으로 흡수되는 피와 흑마력, 그리고 힘.

[첫 번째 사자가 더 큰 가호를 내려줍니다.]

[한계를 넘어선 첫 번째 사자의 가호가 당신의 신체를 개변합니다.]

[마인 -> 악마]

꾸드득, 꾸득. 육체가 재구성되면서 신장이 2.5미터까지 자라났다.

이마 위에는 두 가닥의 뿔이 솟아났고.

피부가 붉게 물들었으며 동공이 파충류처럼 길게 찢어졌다.

악마.

레서 데몬 따위가 아닌, 진정한 악마로 재탄생한 것이다.

[당신의 혼백이 쌓아올린 격과 이야기가 모자랍니다.]

[흑마력이 뇌리에 파고듭니다.]

[이성을....]

마누엘은 그 뒤에 이어지는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

이미 반쯤 마비되었던 이성.

제물을 바쳐서 강제로 성위를 끌어올렸는데, 그 이상으로 힘을 추구하자 육체는 그 형태에 맞춰 변화했지만 혼백이 적응하지 못했다.

도망?

『이 힘이 있는데 왜!』

강제로 벽을 넘어버린 마누엘은 더 이상 인간도, 마인도, 온전한 악마도 아니게 되었다.

오직 파괴만을 추구하는 마리의 마수.

본능에 뇌리가 잠식된 마누엘은 핏발 선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네놈 때문에 내가 이런 곤욕을!!!』

파츠츠츠!!

마인들의 힘을 모조리 거두면서 무투계 능력 계통까지 손에 넣은 마누엘이 흑마력을 손가락에 응집시켰다.

오러 블레이드.

7성이라는 벽을 넘은 이에게만 허락된 찬란한 빛이요. 파괴의 정수가 발현되었다.

"어. 그건 좀."

『죽어라!!!』

손가락을 떠난 구체 형태의 오러 블레이드가 허공을 격하며 유진에게 쇄도했다.

141화 피의 발렌타인(5)

오러 블레이드.

미력에 의념을 부여해서 유형화하는 단계, [오러]를 넘어 구체적인 상(狀)을 구축한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칼날이나 철퇴.

혹은 주먹 등.

사용자의 의지와 무장에 따라 구축하는 형태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한 가지가 있다.

-의지를 관철하는 힘.

신체에 깃든 마력을 힘의 근원으로 삼는 무투계.

오러 블레이드란, 육신이란 소우주의 규칙을 외부에 방출해서 규칙과 섭리를 꺾고 일그러트리는 '권능'이나 '가호'와 흡사한 능력이다.

그 의지를 관철하는 방식이 오직 파괴뿐이기에 뭇 별들에 이름을 새긴 성좌들의 가호에 비하면 신비가 떨어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반쪽짜리 이적임에도 가호와 비견될 만큼 위대한 힘이 [오러 블레이드]였다.

"위험해!'

새된 비명이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헌터협회 속초 지부 책임자인 공서진은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을 뼈저리게 알았다.

최전선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만큼 직접 오러 블레이드를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저 오러 블레이드는 진짜야!'

마누엘이 날린 검붉은 구체를 정면으로 맞으면 반드시 죽는다.

말 그대로 필살의 일격.

공서진의 경고음에 뽀시래기 팀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군!]

챙강-!

암흑 투기를 두른 쌍검이 부러지고.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끼워서 강화한 몸뚱이도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는 종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슴팍이 반쯤 날아간 채 고꾸라진 송명석.

힘겹게 머리를 위로 들더니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빌어먹을! 주군이 쓰러지면 저도 소멸한단 말입니다!]

으음.

네 충심(?)이야 갸륵하다만 말이지.

유진은 두 손을 놓은 채 오러 블레이드를 빤히 바라봤다.

십수 미터 정도 나아간 검붉은 에너지탄.

송명석의 암흑 투기를 짓뭉개고도 기세가 거의 줄지 않았던 오러 블레이드가 갑자기 연해지더니 픽, 허공에서 사라졌다.

[어?]

"편법으로 경지를 올린 녀석이 무슨 수로 오러 블레이드를 수십 미터까지 날리겠냐."

협회 요원도 그렇고.

왜 이렇게 호들갑인지를 모르겠군.

오러 블레이드는 사용자의 의념을 기반 삼아 펼치는 국지적 규모의 이적이다.

제물이라는 편법으로 7성에 도달한 녀석이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해봐야 얼마나 익숙하게 다루겠어?

"오러도 아니고 오러 블레이드를 수십 미터 거리까지 날리는 건 7성 절정의 실력자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 속하가 한 일은....]

"응. 헛짓거리. 덕분에 소일거리만 늘었어."

[크흐흐흑.]

야.

우냐, 울어?

송명석에게는 헛짓이라고 말했어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언데드들은 반항하지 못한다.

[합일]로 자의식이 되살아난 언데드도 마찬가지. 그저 판단을 할 뿐, 유진이 강제성을 띤 명령을 내리면 반드시 수행한다.

'방금 전에는 몸을 던지라고 안 했는데도 자발적으로 나섰지.'

송명석이 충심만으로 저랬을 린 없다.

제 입으로 말했듯, 유진이 허무하게 죽으면 그도 소멸해야 하는 운명이니 강맹한 기세로 쏘아진 오러 블레이드를 온몸으로 막아냈겠지.

중요한 것은 방금 전 행위가 100% 본인의 의사였다는 것이다.

〔이 작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행동한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더냐?〕

'높은 경지로 나아가려면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거든.'

뭐,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지금은 눈앞의 과제를 치워버리는 데 집중하자고.

송명석의 돌발행동으로 아군의 전력이 뭉텅 깎였지만, 유진은 크게 난감해하지 않았다.

"파프너. 뒤로 물러나라."

[전선 유지가 안 될 건데?]

"눈 봐. 이미 맛이 가버렸다. 이제는 차륜전으로 가자."

[알겠다.]

『크아아아아!!!』

고농도로 응축된 흑마력이 땅을 휩쓸 때마다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파도가 출렁이고 지면이 흔들려서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전장 테두리에서 대기 중인 헌터들도 중심을 잡기 어려울 만큼의 충격.

쿠구구궁-.

항만 근처의 건물 몇 개가 거듭되는 충격파에 못 이기고 주저앉았다.

마누엘이 발산한 힘의 잔향만 해도 이 정도일진대.

[스켈레톤 나이트가 파괴되었습니다.]

[타이런트가 파괴되었습니다.]

[듀라한이....]

직접 그 흑마력을 받아내는 중급 언데드들은 훨씬 더 상황이 안 좋았다.

마누엘은 오러 블레이드의 사거리가 길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 후, 방출하는 대신 쭉 늘려서 채찍처럼 사용했다.

머리를 굴려서 내놓은 지혜가 아니다.

본능적인 움직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중급 언데드들을 파괴하는 건 성공했지만.

대가는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칵, 카아악!?』

연신 흑마력으로 일으킨 오러 블레이드를 흩뿌리던 마누엘이 가래 뱉는 소리와 흡사한 비명을 토해냈다.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남이 할 대사를 왜 가로채고 그래."

[주인은 그 말을 할 때 얼마나 얄미운지 모르는 것 같아서. 대신 해본 거다.]

"너는 진짜...."

[그런데 저 반푼이 악마는 갑자기 왜 사레가 들렸어?]

"계약 매개체를 빼돌렸거든."

죽음 용기병이 들고 있는 검은 색 관.

의식의 매개체인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 [불사자의 관]이다.

놈이 넘치는 흑마력에 취해서 이성을 놓자, 슬쩍 챙겨오라고 지시해놓았지.

[가호는 이미 받았잖아. 매개체가 사라져도 의미가 없지 않아?]

"평범한 상황이라면 그랬을 거다."

마누엘은 동료들까지 제물로 바쳐서 무리하게 힘을 키웠다.

[불사자의 관]이 없었으면 감당 못 할 힘에 취해서 오러 블레이드를 흩뿌리지도 못하고 이성 없는 마수 수준으로 전락했으리라.

"매개체가 없어진지도 모르고 힘을 더 뿌려댔으니."

[놈이 보유한 흑마력은 여전히 막대한 걸.]

"더 이상 오러 블레이드는 쓸 수 없을 거다."

[마법은?]

"이런 상태에서 흑마력을 재배열할 수 있을 만한 정신력을 가졌으면...."

저 꼴이 나지는 않았겠지?

팔짱을 낀 유진의 혹평.

마누엘은 기침을 몇 번 내뱉더니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감히, 내 앞에서 건방을 떠는 거냐!』

"정신이 이제 좀 들어?"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힘을 과하게 썼다고 이성이 조금 돌아오다니.

참 비루한 녀석이군.

"네가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아나봐."

『이 몸은 첫 번째 대리자의 가호를 받아 필멸자의 굴레를 벗어났다.』

"싸구려 뿔 두 개 달아놓고 굴레 타령하긴."

『크아아앗!!』

수 갈래로 나누어진 오러가 마누엘을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정도를 마구 난도질했다.

뇌리까지 스며든 흑마력.

[불사자의 관]이 사라진 충격으로 이성이 돌아온 것 같지만, 이미 흑마력이 뇌를 침범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거다.

[도발하는 건 좋지만 이래선 끝이 안 날 거다.]

"다 계획이 있어."

미리 준비해둔 언데드들이 1/10도 남지 않았을 때.

흑마력을 마구 흩뿌리던 마누엘은 컥, 마른기침과 함께 주저앉았다.

"악신 성좌의 가호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제물을 바치는 대로 힘을 부여해준다?

그렇게나 쉽게 강해질 수 있으면 바벨탑의 문턱이 닳도록 많은 헌터들이 찾아갔겠지.

강대한 마력과 힘에 어울리는 격을 갖추지 못하면 어떻게 되냐고?

놈을 봐라.

흑마력을 온전히 제어하지 못해서 역류하고 있잖아.

일명 마력 폭주 현상에 빠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반쪽짜리 악마 신세가 되는 거지.

"파프너야. 이제 끝을 내자."

[주인의 뜻대로.]

파프너는 양팔을 뒤로 크게 젖혔다.

[케넥 전투술]

[10장 - 구결집합권]

아홉 가지 성질을 모조리 쑤셔 넣어 극한까지 파괴력을 끌어 올린 비장의 수.

광증에 사로잡혀 흑마력을 마구 흩뿌린 마누엘은 더 이상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킬 수 없었다.

역류하는 흑마력을 겨우 붙들어서 정면으로 방출, 구결집합권에 맞섰으나.

『끄, 끄으.』

마누엘의 양팔이 반대로 꺾였다.

제대로 된 의념조차 불어넣지 않고 방출한 흑마력.

온갖 묘리를 욱여넣어서 일점에 폭발시키는 구결집합권 앞에선 몇 초도 못 버티고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깍지를 낀 파프너의 양손이 가슴을 강타.

콰직- 갈비뼈가 일격에 부러지고 안쪽에 자리 잡은 심장까지 충격으로 터져버렸다.

『아, 아직이다. 난 아직!!』

끈질기군.

심장이 박살났는데도 흑마력을 응용, 파프너의 주먹을 밀어내며 파편들을 그러모았다.

놈이 심장을 재생시키고 도망가면 그건 좀 곤란하겠군.

죽음 용기병의 돌진은 위력적이지만, 자칫하면 파프너가 휘말릴 수도 있다.

거기에 놈의 재생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서 더 빠른 조치가 필요했다.

'이걸 실전에서 써보는 건 처음이던가.'

유진은 지팡이 끝을 마누엘에게 겨누었다.

후.

짧게 심호흡을 내뱉은 후.

[기적을 사용합니다.]

〔역천의 거인〕을 섬기는 신관에게 허락된 기적을 펼쳤다.

마누엘의 이마를 관통하는 한 줄기의 빛.

『ㄷ, 더 많은 힘을! 커컥!!』

심장에 이어 뇌가 파괴된 마누엘은 더 버티지 못했다.

한 줄기 비명과 함께 고꾸라진 악마.

"희망'호 승객들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복수할 힘을 원했던 마인은 허무하게 숨을 거두었다.

*

마누엘이 쓰러졌지만 사태는 완전히 종료되지 않았다.

크루즈 선 위에 생성된 균열.

최초 신고처럼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가 벌어진 건 아니었지만.

균열에서 주기적으로 튀어나오는 레서 데몬 무리를 처리하느라 상황 해제를 선포할 수 없었다.

"저, 천유진 대표님."

"그쪽이지? 협회 요원 총괄."

"속초 지부에서 일하는 공서진 과장입니다."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이면서 명함을 내미는 여인.

물끄러미 그녀의 손을 바라보던 유진은

군말 없이 명함을 받은 유진은 곧바로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허위신고로 벌금 내야 하나?"

"아. 그렇네요. 엄밀히 따지면 게이트 브레이크는 아니니까요."

"미리 납부할 테니 20% 공제해줘."

"속초를 구한 영웅에게 벌금 딱지 끊을 생각은 없습니다."

공서진은 흠흠, 하고 짧게 헛기침을 했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아니면 어떤가.

만약 유진이 적절하게 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공서진이 불길함을 느끼고 긴급상황 선포 및 요원들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저 선박이 항구 위로 올라타는 것을 막지 못했다면.

어느 것 하나라도 삐끗했을 경우, 속초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이건 천운이야.'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가 아니었으면 찾아오지 않았을 행운.

공서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푹 숙였다.

"천유진 대표님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유진은 손톱으로 볼을 살짝 긁었다.

"한 가지 고견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균열은 저 배에 새긴 의식 마법의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없어지지 않을 거다."

"그걸 어떻게?!"

"내 능력이 뛰어나서."

공서진은 웃을 기운도 나지 않았다.

사태가 벌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늘 위에 뚫린 균열을 해결할 방법까지 간파한 건지.

실은 [메멘토]로 '희망'호에서 벌어진 참극을 보았기에 해답을 바로 내놓을 수 있었지만, 공서진이 알 리 없었다.

"의식의 중추인 아티팩트는 미리 회수했네. 마법진만 훼손시키면 없어질 거다."

"감사합니다."

공서진은 요원 일부를 데리고 땅에 반쯤 걸쳐 있는 크루즈 선에 올라탔다.

자.

그러면 보상을 확인해볼 시간인가.

[불사자의 관]

등급 : 유니크

분류 : 잡화

제한 : 진조

내구도 : 300/300

뱀파이어 중 최초의 혈족인 진조가 머무는 관입니다.

유진은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이대로 서 있으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고장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뭘 그리 호들갑 떠는 게냐?〕

'성좌 나으리. 뭘 몰라서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불사자의 관이라고!'

불사자의 관이 있으면 직접 흡혈귀를 만들어서 사역할 수도 있고.

사탄교 신자들처럼 의식에 활용할 수도 있다.

그뿐이랴.

불사자의 관을 '피'를 매개로 하는 술법이나 언데드 제작, 혹은 연금술에 응용하면 효율이 몇 배로 올라간다.

네크로맨서에게는 초월 등급 아티팩트인 [용린갑]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물건!

'마침 쓸 데도 있잖아.'

이마와 심장이 부서진 채 널브러진 악마.

한때 '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체를 본 유진이 혀를 날름거렸다.

142화 뒷정리

"웁, 우욱."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그 악귀 놈들!"

"사람들이 왜 다 말라서 죽어있는 건지."

"온통 피밖에 없습니다."

크루즈에 진입한 협회 요원들은 한 폭의 지옥도를 보고 압도당했다.

피라는 붉은 염료로 도배가 된 내부.

모든 생명력과 피를 갈취당한 사람들은 미라처럼 바짝 마른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1팀은 유해를 수습해. 2팀은 날 따라와."

피가 향하는 방향으로 바쁘게 움직인 공서진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갑판 위에 새겨진 마법진을 발견했다.

매개체인 [불사자의 관]이 사라졌음에도.

이미 제물을 받아들인 마법진은 여전히 작동하며 바벨탑과 현세의 경계를 허무는 중이었다.

"천유진 대표 말이 맞았네. 이것부터 지운다."

"막 손을 대면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겁먹지 마. 이미 매개체는 제거했다고 하니까 별문제 없어."

공서진은 피로 그려진 마법진 일부를 병장기로 긁어냈다.

일부가 훼손된 마법진.

치직, 붉은 스파크가 튀더니 하늘 위로 솟구치고는 공중에 생긴 균열 속으로 들어갔다.

"균열이 좁혀집니다!"

"정말이지. 그 사람 말대로 다 풀렸네."

갑판에 주저앉은 공서진.

이진원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선배. 왜 그러고 계세요?"

"다리에 힘 풀렸다."

"전혀 힘 안 들어 보이시던데요."

"야. 헌터들 통솔하랴, 요원들한테 지시하랴. 거기에 이런 지옥도까지 봤는데 힘 좀 풀릴 수 있지."

산전수전 다 겪은 헌터에게도 고역인 일정.

유진이 사탄교 신자들을 붙들어 놓아서 덜 부각되었을 뿐, 레서 데몬들을 막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여간 대단한 사람들이야."

"그 천 대표 말입니까."

"뽀시래기 팀이라고 했지? 그 사람들도 포함이야."

"하긴. 세 사람이 없었으면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을지도 모르죠."

"석궁이 하늘을 날아다니질 않나. 사전 준비 없이 마법을 쓰고, 성좌의 가호를 받은 헌터까지. 대단해."

공서진은 순도 100%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벽을 넘지 못한 세 사람.

무수한 경험 덕에 뽀시래기 팀의 경지가 3성이라는 것쯤은 금세 알아챘다.

그렇지만 셋의 활약상은 4성의 벽을 넘어선 이들에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원된 헌터들과 요원들보다도 훨씬 많은 일을 해냈으니.

"괜히 불타오르는 걸."

"또 현장으로 전출 신청하시게요?"

"나보다 한참 뒤에 각성한 후배님들도 저러잖아. 가만있을 순 없지."

무수한 도전 끝에 마음이 꺾이고 현실에 안주하길 선택했건만.

유진 일행의 활약은 그녀에게 다시 한번 일어날 힘을 주었다.

*

회귀 전보다 피해 규모가 대폭 축소된 '피의 발렌타인' 사태.

그래도 처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1차 피해로 전원 사망한 크루즈 '희망'호 승객들이 있고.

균열에서 튀어나온 레서 데몬들로 인한 건물 파손.

전투 도중에 부서진 항만 시설 등.

속초에 발생한 피해를 확인하는 것만 하루가 넘게 걸렸고.

피난했던 시민 및 관광객들이 머무를 장소 확보와 복구 대책 같은 일들이 산적했다.

"우린 이렇게 한가해도 돼요?"

"봉사에 지원해도 수강 점수 같은 건 안 나와."

"형. 대학교도 안 다녀봤으면서 그런 건 어떻게 알아요?"

"주워들은 거지."

"꼭 점수 때문은 아니고요."

"대민지원은 우리보다 저쪽이 더 잘할 거다."

유진은 초토화 된 항만 여기저기서 힘을 쓰는 헌터들을 흘겨보았다.

불사조와 새벽.

옛 통일전망대에서 일정을 소화하던 두 길드는 긴급 소집을 확인하자마자 훈련을 중단하고는 속초로 넘어왔다.

회귀 전과 달리, 속초 근처에서 모의전을 치르던 터라 빠르게 개입할 수 있었다.

'이 또한 회귀하면서 생긴 변화겠지.'

〔한데 저들은 아무것도 거든 것이 없지 않느냐.〕

'전투만큼이나 사후 처리도 중요한 거야.'

오러 전개가 가능한 헌터는 중장비만큼의 힘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다.

국내에서 입지가 가장 센 헌터 길드 둘이라면 사태의 뒤처리를 맡기기에 충분하고도 남지.

암, 그렇고말고.

재해 복구 작업에 한 손 거들던 장미선은 휴식 중인 유진 일행에게 와선 조잘거렸다.

"소개하려고 한 집이 문을 닫아버렸네요."

"이 시국에 장사를 하면 그것대로 대단한 일이다."

"사부한테도 맛보게 해주고 싶었는데."

"이야. 장미선 씨 엄청 악취미네. 언데드한테 음식 맛을 보게 해준다고 하고."

"맛 보게 해줄 방법 있다고 들었거든요! 나 쓰레기로 만들지 마요."

쓰읍.

안 넘어가네.

"현장에 일찍 왔다?"

"일찍이라곤 해도 유진 님이 다 끝내놓은 거 정리나 하는 상황인걸요."

"한 판 붙기를 바랐나보군."

"아니요. 다행이란 의미인걸요?"

만약 유진이 이 자리에 없었으면 속초에 더 큰 피해가 오지 않았냐는 의미.

올곧은 심성의 소유자인 장미선은 안도감을 감추지 않았다.

"휴대전화 안 봤으면 긴급 상황이 발생한지도 몰랐을 거예요."

"모의전 때 쉬고 있었나?"

"내 참. 언제는 쉬라면서요."

"그랬지. 정말로 쉴 줄은 몰랐지만."

혹시 해서 들어놓은 보험이 잘 작동했군.

이왕이면 불사조나 새벽 길드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선에서 해결되길 바랐지만, 유진의 계획되로 풀리지 않을 때 플랜 B가 필요했다.

'긴급 상황이 발동되면 휴대전화를 봐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두 길드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탄교 신자들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장미선은 그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흥. 밥은 나중에 사드릴게요."

"기대하지."

"보상은 언제 받으러 오실 거예요?"

"창고에서 아이템 하나 골라가라고 했던 거 맞던가."

"음. 그렇죠."

"속초가 어느 정도 수습되면 찾아간다고 길드장한테 전해줘."

"알았어요."

재난 현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건져낸 레서 데몬들의 시체는 모두 유진이 챙겨갔다.

〔용케도 멀쩡한 시체들이 남아 있구나.〕

'다 터트리진 않았으니까.'

간간히 생명력 셔틀용이나 날아다니는 폭탄으로 써먹었지만 모두 시체 폭발의 매개체로 사용하진 않았다.

본격적으로 사탄교 신자들과 전투에 돌입한 후로는 전장을 살피느라 레서 데몬들이 새는 것을 모두 막을 수도 없었고.

레서 데몬들이 항만을 벗어나기 전에 모조리 격추당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에서 얻은 소득을 정리해보자꾸나.〕

'정산 시간인가.'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가장 큰 소득은 앞에서도 언급한 [불사자의 관].

언데드 강화에 필요한 아티팩트이며, 진조를 사역할 가능성까지 열렸다.

〔아무 생물이나 흡혈귀로 만들 수 있는 게냐?〕

'불사자의 관과 혈액 파장이 맞는 사람만 가능해.'

〔무조건적이지는 않나 보구나.〕

'뭐, 흡혈귀를 사역하는 건 어디까지나 옵션이니까.'

〔아쉽도다. 고생한 보람이 크지 않으니.〕

뭘 모르네.

피를 숙성시키는 용도로만 써도 제 값은 한다.

[불경스러운 묘지]에 시체를 묻어둬서 숙성시키는 것하곤 차원이 다르다.

'두 번째 성과는 악마종의 시체들이군.'

〔필멸의 굴레를 벗어난 악마라. 그대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수확일 터.〕

'아이러니하게도 몸뚱이의 주인은 힘을 감당하지 못해서 혼백이 영락해버렸지만 말이야.'

〔하나 틀을 벗어난 육체는 진실되느니라.〕

악마종으로 거듭난 마누엘의 육신.

7성급 헌터나 몬스터의 시체만 해도 상급 언데드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다.

근데 어마어마한 마력을 내포한 악마종의 시체라면?

사람들만 없으면 공중제비를 하고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성과다.

'멀쩡한 레서 데몬의 시체도 50구 넘게 구했다.'

〔그 치들도 망자로 되살릴 것이더냐?〕

'고민 중이야.'

레서 데몬의 시체는 언데드 강화에 사용하거나 특수한 망자를 만들 때 재료로 쓸 수 있다.

마력에 민감하기 때문에 연금술 촉매로도 유용하고.

악마종의 피는 시약 등 여러 분야에 쓰인다.

미래의 대연금술사가 이 사실을 알면 눈이 뒤집어지겠군.

'협회 담당이 호의적이라 다행이야.'

쓰러진 레서 데몬들의 시체는 그의 소유물이 아니다.

협회 요원들과 긴급 동원된 헌터들에게 시체의 권한이 있었으니.

공서진이 중간에서 의견 조율을 해주지 않았으면 레서 데몬 시체들을 쉽게 얻지 못했으리라.

〔본디 영웅이란 본능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사는 법.〕

'왜 조용하나 했다. 그 놈의 영웅 타령.'

〔이미 훌륭하게 영웅의 길을 걷고 있지 않더냐. 이만 그대의 운명을 받아들이어라.〕

'난 그런 낯간지러운 건 못 해.'

네크로맨서가 영웅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유진은 피식 웃어 넘겼다.

〔쓸 만한 물건은 건지지 못한 게냐?〕

'개털이야.'

〔참으로 빈궁한 자들이로고.〕

'그래도 한 가지 남긴 건 있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책.

마누엘을 쓰러트린 직후, 시체를 수습할 때 획득한 스킬 북이다.

[텐티클 블레이드]

등급 : 유니크

분류 : 스킬북

제한 : [오러]와 [암흑] 특성 소유자

내구도 : 10/10

오러나 오러 블레이드에 사용자의 사념을 불어넣어 촉수처검 퍼트립니다. 여러 가닥으로 펼친 공격에 검법 스킬의 묘리를 더할 수 있습니다.

촉수검이라.

반푼이 악마가 펼친 기예가 스킬 북으로 나왔다.

시스템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종이 된 마누엘을 괴물 취급한 것이다.

〔검법이라. 어찌 하겠느냐. 그대에게는 쓸모가 없겠구나.〕

'그... 어째 기뻐하는 것 같다?'

〔짐이 어이하여 그러겠느냐. 뜻하지 않은 행운이 그대를 따라주지 않은 것에 통탄함을 금치 못하겠거늘.〕

웃지나 마쇼.

하나 뿐인 신도가 고생 중인데 옆에서 웃고 있으면 되나.

그리고 말이야.

마냥 낭패를 본 것도 아니다.

스킬과 궁합이 잘 맞는 하수인에게 줘서 익히게 하면 그만이니.

"송명석아. 정신은 차렸냐?"

[부르셨습니까. 주군.]

"머리만 남아놓고 진지한 투로 말해봐야 웃기잖아."

[....]

"몸을 고치는 대로 이 스킬북 익혀라."

[스킬북이라 하심은?]

"저 사탄교 신자가 마지막에 발악하면서 사용한 기술. 네가 쓰면 딱 맞겠어."

머리만 남은 송명석의 푸른 안광이 크게 번쩍였다.

[주, 주군! 충심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오냐. 그 뼈가 닳아서 흙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해라."

[보십시오. 파프너. 결국 주군께서 인정하신 하수인은 저입니다!]

[와. 축하해. 대박. 정말 존경스러운 걸?]

[하하하! 제 능력을 알아봐주시다니.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음.

뭐, 그래. 됐다.

너만 행복했으면 됐지.

[주인. 언제까지 쟤 머리만 덜렁거리게 둘 거야?]

"네크로폴리스로 돌아가서 수리해야지."

송명석의 혼백과 싱크가 맞는 뼈를 구해야 하고.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도 끼워줘야 한다.

부러트린 칼은 또 어디에 맡겨서 수리해야 할지.

하여간 일거리를 잔뜩 안겨주었군.

괜히 얄미운 마음에 놈의 머리통을 가볍게 쳤다.

[으아아악!]

"고통도 못 느끼면서 엄살피우지 마."

[진동 같은 건 알 수 있습니다. 주군!]

"그러면 잘 됐네. 나를 고생시킨 대가라고 생각해라."

이 녀석 머리통으로 축구라도 할까.

송명석의 두개골을 쓰다듬으며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형님.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 아라한 길드에서 성명문을 냈다고 합니다."

성명문?

회귀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보면 알겠지'

태연하게 TV 앞으로 간 유진.

LED 패널에 비친 사내, 백성현은 마침 성명문 주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라한 길드에서는 오랫동안 준비한 프로젝트인 한반도 회복 작전을 시행하고자 합니다.

엥?

뭐라굽쇼?

143화 아라한의 북진

찰칵! 찰칵!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린다.

백성현은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도 눈살 한번 구기지 않았다.

"고려일보 주민성입니다. 이북 정벌 계획은 장기적입니까, 아니면 단기적입니까?"

"이북 정벌 계획이라. 어감이 좋군요. 그 단어를 프로젝트 명칭으로 정식 채택해야겠습니다."

기자들은 백성현의 말 하나하나를 곧바로 옮겨적었다.

이 순간에도 빠르게 나가는 속보.

질문을 던진 기자가 답변을 촉구하니 백성현이 재차 입술을 떼었다.

"장기적입니다. 1차 목표는 개성 탈환입니다."

"경제일보 박한성입니다. 몬스터 재생성 문제 대책은 마련된 겁니까?"

"우선 개성을 탈환한 후 개성과 파주를 잇는 도로를 주기적으로 소탕하며 보급선을 마련할 겁니다."

아라한 길드의 대책은 간단했다.

개성처럼 침식을 피해간 땅을 거점으로 삼고 각 지점을 잇는 루트 위주로 몬스터를 소탕한다.

또한 각 거점을 이어주는 구간 사이사이에 헌터들을 배치.

보급의 안정성까지 확보한다는 계획.

"침식 현상의 근본적인 해결법을 찾지 못하는 이상에는 현 방안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만만치 않은 금액과 인원이 들어갈 것 같습니다."

"해내야죠. 언제까지 대한민국이 섬처럼 대륙과 분리된 채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백성현은 정론을 들먹였다.

6.25 이후 섬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된 대한민국.

대륙과 이어지는 길을 다시 내는 건 오랜 숙원이었다.

"연맹뉴스 김철민입니다. 아라한 길드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만, 왜 지금입니까?"

기자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조금 멀게 보면 블랙 컴퍼니에서 개성을 탈환하겠단 선언과 겹치고.

가까이는 이틀 전에 벌어진 '피의 발렌타인' 사태를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의도였다.

"그 대답은 제가 드릴 수 없겠군요."

"혹시 블랙 컴퍼니를 의식하신 것은...."

"아라한 길드의 대표로 계신 이신우 길드장님께서 답해주실 겁니다."

기자의 말을 끊은 백성현은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신우 길드장?"

"길드 운영에서 손을 떼지 않았었나?"

"8성의 벽을 깨기 위해 수련 중이라고 들었어."

웅성웅성-.

절묘한 타이밍에 말을 끊고 내려간 백성현.

기자들은 두 눈을 굴리며 그의 말에 담긴 뜻을 해석하려 노력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저벅, 저벅, 묵직한 구두 굽 소리가 울리면서 수군거리는 음색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느릿한 걸음으로 단상에 오르는 한 사내.

꿀꺽, 마지막으로 질문을 꺼낸 기자의 목젖이 크게 요동쳤다.

"아까 질문한 기자?"

"여, 연맹 뉴스의 김철민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더군요. 블랙 컴퍼니라고."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질문을 꺼낸 기자가 숨을 헙, 크게 삼켰다.

국내에서 제일 강한 헌터.

한 번 눈이 돌아가면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광전사]가 불쾌감을 드러내자 회견장 기온이 5도는 떨어진 것 같았다.

'이신우는 눈 뒤집어지면 다 엎어버리잖아.'

'저번에 기자 한 명이 인터뷰를 하다가 건방지다고 멱살 잡혔지.

콧대 높은 기자들도 이신우를 눈앞에 두니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눈치를 살폈다.

이신우는 기자들의 분위기를 물끄러미 살피곤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난 얼마 전까지 수련에 매진했습니다."

"8성의 벽을 넘으려고 하셨다,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최근 한 가지 일을 계기로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거든요. 이번 북진은 깨달음을 보다 확실하게 체화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8성의 벽을 넘으신 겁니까?"

"비슷합니다."

아리송한 대답에 기자들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8번째 성위를 달성한 건가?

당장이라도 속보를 내고 싶지만 확실하지 않은 이신우의 반응에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확실하게 말해두죠."

음색에 깃든 웅혼한 마력이 장내를 무겁게 짓눌렀다.

등이 축축해지고 고개를 숙이고 싶어지는 어마어마한 위압감!

혼백조차 쥐어짜는 듯한 압박감에 기자들은 핼쑥해진 얼굴로 눈을 깔았다.

"아라한 길드의 북진으로 대한민국의 역사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겁니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이신우는 단상을 내려왔다.

평소였으면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목소리를 높였을 기자들이지만 몇 분 동안 입 하나 뻥끗하지 못했다.

*

틱-.

꺼진 LED 화면에는 유진이 턱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비쳐졌다.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나오는 자세.

옆에 선 강민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이거 완전 큰일 난 거 아닙니까?"

"나찰이 습격했던 때보단 낫잖아."

"으음. 그래도 말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신우 길드장님이 공식석상에서 저리 말씀하시니 좀 찝찝하네요."

"명분도 가져올 겸 블랙 컴퍼니도 견제하겠다. 너무 훤히 드러나는 노림수잖아."

찝찝할 것도 많네.

다른 수 안 쓰고 정면으로 승부하겠다는 말.

유진이 2년 안에 개성을 탈환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대비를 이루는 훌륭한 선전포고다.

〔하면 무엇을 그리 신경 쓰고 있는 게냐?〕

'이신우가 8성에 근접했다는 이야기.'

〔그대에게서 화제를 옮기기 위하여 거짓을 발표하였을 수도 있지 않느냐.〕

'음.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

〔그리 판단하는 근거를 풀어보지 않겠느냐.〕

'버서커라는 단어가 오딘의 추종자들한테서 파생된 말이야.'

베르세르크.

노르드어로 곰 가죽을 뒤집어 쓴 전사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다.

현대 영단어인 버서커의 어원이기도 하고.

〔오딘은 룬 마법의 창시자이지 않느냐. 한데 광전사를 후원하다니.〕

'베르세르크는 오딘을 숭배했던 전사 집단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

피와 폭력만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투쟁을 벌이는 성향이야말로 이신우와 흡사했다.

오딘의 후원을 얻은 것도 '광전사'라는 공통점 덕분일 터.

로마노프 가문과 다리를 놓을 수 있었던 것도 배후성인 오딘의 중재 덕이었다.

'평소의 아신우라면 분노조절장애가 터지고도 남았을 거다.'

〔분노조절장애?〕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버럭 화낼 사람이야.'

근데 지금은 분노조절잘해네?

이신우의 성급함은 고유 특성에 기인하고 있어서 화를 억누른다고 해서 참을 수 없다.

저렇게 차분한 걸 보면 8성으로 가는 실마리를 잡았단 건 과장이 아닐 터.

〔피의 발렌타인 사태 때 악마를 사냥하지 않았느냐.〕

'그랬지.'

〔어찌 되었든 7성에 도달한 악마를 쓰러트렸으니 이젠 그대가 지닌 힘으로 극복이 가능할지도.〕

'반푼이 악마랑 준 8성 헌터를 비벼서 쓰겠나.'

크로노스는 호오,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웬일로 겸손을 떠느냐.〕

'난 원래 객관적이거든? 그리고 문제는 따로 있어.'

이신우가 분노조절잘해가 된 것을 보면 8성에 근접했단 의미.

회귀 전보다 5년이나 빨라졌다.

〔이 또한 시간 축을 비틂으로써 발생한 이변인가.〕

'나는 이신우랑 엮인 적이 없거든요?'

〔그대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하여 비틀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니라.〕

아라한과 나찰의 밀월 관계 폭로.

공을 들인 로마노프 가문과의 거래가 위태로워지기까지.

이신우는 지난 몇 개월간 유진이 저지른 일들을 듣고 한계까지 분노했다.

머리 뚜껑이 열리는 듯한 경험.

그 순간.

분노에 반응하는 힘의 근원인 혈기가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이미 비틀어진 시간 축은 그대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엇나가는 중이다.〕

'그거야 알고 있어.'

〔당장은 비틀림의 원인을 떠올리려 노력하기보다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현명하겠구나.〕

흠, 유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번만큼은 성좌 나으리 말이 옳아.'

〔전제가 묘하구나. 이번만이라니.〕

거, 성좌씩이나 되는 양반이.

자잘한 건 넘어가자고.

"형. 진짜 괜찮아?"

"오히려 좋아."

아라한 길드가 진심으로 북진을 추진할지는 미지수다.

회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거든.

유진이 접경지역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발생한 변곡점인 셈이다.

아라한에서 무슨 식으로 나올지 딱딱 예측은 되지 않지만 어느 쪽으로든 유리하게 활용할 자신이 있다.

"정말 이북 정벌 계획을 성실하게 수행하겠다면 인간사냥꾼이든 애꾸눈이든, 한 쪽을 맡기면 된다."

"그러면 블랙 컴퍼니의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블랙 컴퍼니는 애초에 그럴 정도의 가치도 없어. 내 이름값으로 올려놓은 허위 매물 같은 거니까."

작전 주나 코인 같은 상황이지.

얼굴마담 하나 세워서 사람들의 지지와 투자를 끌어내고 잠적하기 좋은 사업체.

유진이 그럴 생각은 없지만 세간에선 블랙 컴퍼니에 대해 기대감 반, 우려 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만약 투자 유치를 벌였으면 그것대로 재미가 있었을 거야.

"엇?! 정말 그런 거였슴까?!"

"헛소리 말고. 내가 먹고 튈 사람으로 보이냐."

"휴. 그런 줄 알았지 말임다."

이성민아.

사람을 조금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넌.

"푹 쉬기는 틀렸네."

강민호의 혼잣말이 공허하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

"괜찮으십니까. 마스터?"

"걱정 마라. 이젠 광대놀음을 벌여도 이성이 나가지 않는군."

백성현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핏줄.

무표정한 얼굴 안쪽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활화산 같은 분노가 잠재되어 있다.

'마스터께서는 경지가 오를수록 화를 주체하지 못하게 됐다.'

이신우가 세간에서 말하는 분노조절장애 급까지 화를 못 참게 된 것은 6성에 도달했을 때부터였다.

당시 국내 헌터 업계에서는 이신우보다 먼저 여섯 번째 별을 손에 넣은 사람이 있었으니.

지금은 '파프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망자, 박하늘이었다.

'마스터께서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성취를 보인 자를 용납하지 못했다.'

1차 몬스터 웨이브에서 박하늘을 함정에 빠트려서 죽이고.

갖가지 로비를 동원해서 그녀의 이름과 활동내역 등 기록들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오직.

마스터인 이신우를 위해서.

그 이후로도 광증이 심해지는 길드 마스터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업무를 총괄했다.

'이나마도 감사하다.'

폐관수련 직전과 비교하면 훨씬 호전된 이신우의 상태.

분노로 인해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지만.

이전이었으면 무례한 질문을 꺼낸 기자의 멱살을 곧바로 잡았을 것이다.

"훌륭하십니다."

"블랙 컴퍼니를 견제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이로써 천유진을 조명 중이던 여론도 집중도가 분산되겠지."

"마스터께서 그렇게 염두에 두실 건...."

"성현아. 방심하지 마라."

이신우는 주먹을 몇 번이고 쥐었다가 폈다.

분노를 조절하는 그의 루틴이었다.

"이미 천유진 때문에 입은 피해가 어마어마하다."

"그렇습니다. 마스터."

"불사조나 새벽을 의식할 게 아니다. 천유진이야말로 우리의 꿈을 이루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너무 과대해석이 아닐지."

"그렇게 생각했다가 입은 피해가 얼마지?"

백성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적하려는 게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과대평가를 하시는 건 아닌지."

"피의 발렌타인을 조사하러 보낸 팀의 보고에 따르면 악마의 무력이 7성 수준이라고 하더군."

"일시적으로 벽을 넘은 것에 불과합니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줄 아는 것 빼곤 준 7성이라고 봐야 합니다."

"각성 1년 차 헌터가 준 7성을 이겼다."

제 말을 곧바로 돌려받은 백성현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해라. 난 쉬러 가야겠다."

억눌렀던 광증이 다시금 올라오자, 이신우는 손을 휘휘 저으며 방을 나섰다.

자리를 떠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는 백성현의 눈동자 위로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144화 자진입대를 환영한다

양산형 중급 포션 [성자의 눈물] 출시와 블랙 컴퍼니의 발호.

아라한과 나찰의 밀월 관계.

피의 발렌타인 사태.

그리고 아라한 길드의 북진 선언까지.

최근 2달은 연이은 사건의 연속으로 시끌벅적했다.

"당신도 꽤 바뻐 보이더군."

"어머. 바쁜 줄 알면서 찾아온 건가요? 무례하시네요."

마담이 입을 가리며 호호, 웃자 맞은 편에 앉은 사내가 묵묵부답 술을 단숨에 마셨다.

꿀꺽, 꿀꺽, 도수가 60도나 되는 위스키가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간다.

40대 중반의 사내.

미스터 블랙은 뱃속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기운에 트림을 꺽, 하고 내뱉었다.

"취하고 싶어서 온 건가요?"

"아니. 맨정신으로는 이야기 못 할 것 같아서."

빌어먹게도 제정신이지만, 이라고 중얼거린 미스터 블랙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마담. 천 대표랑 친하지?"

"공적으로는요."

"꽤나 가까워 보이더만. 천 대표도 사내라면 호감 정도는 품고 있지 않아?"

"천 대표님은 이성에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혀, 탄식을 내뱉은 미스터 블랙.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는 걸까.

유진이 고자인 건 아닐까, 란 실없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굉장히 실례되는 생각 했죠?"

"난 심각해."

"방금 전은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답니다."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마. 은하수 펍은 블랙 컴퍼니에 선을 댔나?"

빙그레 웃기만 하는 마담.

제길, 이라는 욕지거리를 내뱉은 미스터 블랙이 자리를 박찼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원칙을 잊어버렸나?"

"전 아직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당신의 협력이 없었다면 천 대표가 이렇게나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겠나!"

"맹세하죠. 천 대표님은 누구의 조력도 받지 않고 자신만의 능력으로 오롯이 사업 규모를 키우고 있답니다."

마담의 단언에도 굳은 표정이 풀어지는 일은 없었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거미 사냥부터 나찰 집단군 격퇴에 블랙 컴퍼니 창설.

속초에서 벌어진 '피의 발렌타인' 사태에 이르기까지.

각성 1년차 헌터가 벌인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한 가지 더 알려드릴까요?"

"말해봐라."

"제가 천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땐 1성이었답니다."

새빨간 위장.

붉은 거미의 핵심 돈줄이었던 [혈석]을 채굴하는 게이트.

선제공격을 당한 마담은 거미 측에서 일부러 공략을 하지 않은 [새빨간 위장]을 폐쇄해달라고 의뢰했었다.

"새빨간 위장이 최대 3성까지 들어갈 수 있는 건 알고 있죠?"

"음. 그랬지. 거미에서 키우고 있던 마법계, 조승철 때문에 난공불락이라고 불렸으니."

"거길 없앤 게 천 대표예요."

미스터 블랙의 뇌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뽑아냈다.

당시 혈석 채굴에 동원되었다가 도망친 광부들이 내뱉은 말.

새빨간 위장 공략 날짜.

그 외에도 온갖 데이터를 조합해서 마담의 말이 진실인지를 가늠해보았다.

"제길. 이게 말이 되나."

"천 대표가 각성한 지 불과 반년밖에 안 됐잖아요."

"당신이 말한 시간대에 1성이었으면 거미 사냥에 나섰을 때는 잘 쳐줘도 2성쯤 됐겠네."

"저도 그렇게 예측하고 있답니다."

미스터 블랙은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소파에 도로 털썩 앉았다.

"한 잔 더 줘."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 보여도 되나요?'

"맨정신으로는 안 믿기니까 이러는 거다."

거미 사냥 때 접경지역에서 스러져간 이들이 누구던가.

그라운드 제로 삼강 중 하나였던 붉은 거미의 주력 일부!

전원이 최소 3성 헌터였고.

간부급인 최형태와 이승연은 5성 절정의 실력자였다.

'당시의 천 대표가 2성이었다고?'

왜 의식하지 않았을까.

유진이 헌터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았으니, 역으로 계산하면 추론이 가능했다.

실제로도 마담의 이야기에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들겨보니 금세 답이 나오지 않았던가.

미스터 블랙이 유진의 선취를 늦게 파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작 2성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

유진이라는 존재가 얄팍한 상식에 의존해서 파악이 가능한 상대가 아니란 것을.

"빌어먹을.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멍청하게 굴었던 건 나였나."

아니.

단순히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판단을 그르친 게 아니다.

모든 정보를 취합했을 때 드러나는 진실.

그 조각들이 모이지 못하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큰 그림을 흐려놓았다.

미스터 블랙이 마담을 노려보자 어머, 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들켰네요?"

"장난을 과하게 쳤어. 마담."

"의뢰인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랍니다."

"설마."

"천 대표님은 여기까지도 미리 내다보신 모양이에요."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다.

"오덕구 씨. 궁금증은 다 해소되셨나요?"

"그래. 내가 천 대표한테 잘 놀아났다는 건 확실하게 깨달았다."

마담이 본명을 부르며 슬슬 긁었는데도 반응이 없다.

자존심을 세울 여유조차 없었으니.

'몇 개월 만에 판을 이만큼이나 꾸렸다.'

그라운드 제로가 오랜 시간 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 힘의 균형은 미스터 블랙이 모르는 사이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향후 2, 3년이면 확실하게 무게추가 블랙 컴퍼니에게로 기울 터.

마담 역시 블랙 컴퍼니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나 역시 선택해야겠군."

"그래야겠죠."

"네가 천 대표한테 약속받은 건 뭐지?"

"호호호. 맨입으로요?"

"빌어먹을. 값은 나중에라도 지불하겠다."

"가치가 꽤 나가는 정보랍니다."

"달의 서를 구해다주마."

마담은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흐응. 설마 했는데 미스터 블랙이 가지고 있었군요."

"이렇게 쓸 줄은 몰랐지만."

흔치 않은 고유 특성인 주술계.

마담은 밤에만 펼칠 수 있는 '딜의 주술'에 특화되어 있는 헌터였다.

그 힘을 일깨우려면 특수한 아이템이 필요했는데.

미스터 블랙이 언급한 [달의 서]도 그 중 하나였다.

"값은 충분하네요."

"당신한테는 남는 장사겠지. 그러니 어서 말해라."

"천 대표에게 요구받은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무슨 의미지?"

"은하수 펍은 블랙 컴퍼니의 산하 조직으로 활동한다. 블랙 컴퍼니 본사는 은하수 펍의 운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을 믿으라고?"

미스터 블랙이 도중에 말을 끊었지만, 언짢은 기색 없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인걸요. 정당한 거래를 했는데 가짜 정보를 주겠어요?"

"그럼 수입 배분은?"

"당장은 없답니다."

"말이 좋아야 산하 조직이지. 그냥 연대잖아!"

"천 대표는 블랙 컴퍼니의 규모를 키우는 부분에만 관심을 두더군요."

붉은 거미의 이권을 장악할 때도 묘하게 욕심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유진의 태도.

미스터 블랙은 신음을 삼켰다.

"천 대표와 약속을 잡아줘."

"결심하셨나요?"

"이야기는 해봐야지."

블랙 컴퍼니.

실체는 거의 없으면서도 체급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키워가는 단체를 떠올리며, 미스터 블랙은 한숨을 삼켰다.

*

유진은 '피의 발렌타인'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것을 확인하고는 그라운드 제로로 향했다.

[메멘토]로 본 사태를 막으려고 네크로폴리스에서 두문불출했다.

블랙 컴퍼니의 운영 전반을 임재백에게 맡겨둔 상황.

자잘한 일은 임재백의 자율에 맡겨두었지만 굵직한 부분은 유진이 결재해야 했다.

"나를 보자고? 미스터 블랙이?"

-정확하게는 절 포함해서 3자대면이죠.

"블랙 컴퍼니 합류 여부를 고민하고 있나 보군."

-천 대표님의 노림수가 제대로 먹혔네요.

"노림수는 무슨."

-호호, 이렇게 될 줄 아셨잖아요.

글쎄.

100% 확신한 것은 아니다.

미스터 블랙은 원체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라서.

마담처럼 아군으로 회유할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돌아가는 길이었다. 2시간 정도 걸릴 거다."

-복귀하시자마자 회담을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굳이 숨 돌릴 필요는 없지."

-은하수 펍으로 오시면 된답니다.

통화를 끊은 후, 좌석에 머리를 기대었다.

-계약자여. 진실로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였느냐?

'마담도 그러더니. 나라고 모든 판을 짜놓고 행동하는 건 아니야.'

-하면 그 작은 인간이 어인 일로 그대를 보려 할꼬.

나라고 알겠습니까.

턱을 만지작거리는 유진.

전생의 기억 속 미스터 블랙은 매우 강인한 인물이었다.

그라운드 제로를 중심 거점 삼아 동아시아 – 동남아시아 음지의 시장을 거머쥔 대상.

중국의 흑상도 미스터 블랙의 수완에는 한 수 접어줘야 했다.

'내가 힘을 보태준 덕이지만.'

-외력에 굴하지 않을 작은 인간이란 뜻이로구나.

'맞아.'

아이러니하군.

마담도 블랙 컴퍼니에 포섭하기보단, 상부상조하는 조력자 포지션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근데 강민호의 말에 솔깃해서 제 발로 들어왔지.

미스터 블랙이 생각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나비 효과 타령은 하지도 마.'

-크으읏. 감히 짐의 발언을 가로채려드느냐!

'할 말이야 뻔하잖아.'

당장은 고민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다.

직접 미스터 블랙을 만나봐야 답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은하수 펍으로 직행한 유진은 두꺼운 쇠문 너머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을 만났다.

"우와. 가문의 영광이네. 마담은 그렇다 쳐도 암상의 주인이 나를 기다려주고."

"만남을 청한 것은 저이니 당연히 기다려야죠."

"못 보던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누구 덕분에 마음고생을 조금 했습니다. 그래도 금방 살이 붙겠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나 보네."

"그렇기를 바랄 뿐입니다."

현 상황에 대해 돌려서 이야기하는 미스터 블랙.

문제가 잘 풀리려면 네가 답을 잘 해야겠지.

유진이 맞은 편에 앉자마자 미스터 블랙이 입술을 떼었다.

"블랙 컴퍼니의 지분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비매품인데?"

"값은 확실히 치르겠습니다. 그리고 암상도 블랙 컴퍼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 어떻습니까."

"암상이 블랙 컴퍼니의 산하로 들어온다고 이해해도 되나."

"산하, 라기보다는 파트너 같은 겁니다. 은하수 펍처럼 말이지요."

은하수 펍과 같은 조건을 암시하는 말.

그와 동시에 '산하'라는 표현을 회피하며 은근슬쩍 위치를 조정하려고 했다.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생각이다. 한 가지만 빼고."

"블랙 컴퍼니의 품 안으로 들어오란 말씀이군요."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간판을 바꿀 필요도 없고. 당장은 블랙 컴퍼니 산하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데도 왜 블랙 컴퍼니의 산하로 거두려고 하는 건가?"

미스터 블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미래에서 왔고 당신들의 수완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고 있으니까, 지만 곧이곧대로 말해줄 순 없다.

"미스터 블랙의 수완을 믿거든."

"네?"

"지금이야 암상이 한국을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미래에는 동아시아 음지 쪽 상권을 꽉 쥘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회귀 전에는 실제로도 그렇게 했으니까.

유진은 미래에서 본 것을 읊은 것에 불과했지만, 미스터 블랙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각성 1년차에 7성 악마를 쓰러트린 인물이 자신을 인정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군요."

"그건 심부전증이라고 한답니다."

"말씀하신 조건에서 변동이 없다면 암상도 블랙 컴퍼니 휘하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미스터 블랙.

이 순간에도 나름대로 음지 쪽 시장을 잡고 있는 거물이자, 미래에 더 큰 입지를 지니게 될 인물이 먼저 손을 건넸다.

지분까지 사겠다면서 말이야.

〔마담이란 작은 인간에게는 그냥 주지 않았더냐?〕

'내가 판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이래서 정보는 힘이라고 하지.

속인 사람은 없고 속는 사람만 있는 기묘한 상황에 입술이 씰룩거렸다.

145화 바쁜 벌꿀은 쉴 틈이 없다

암상과 은하수 펍을 거두었다고 해서 당장 큰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천 대표님. 그럼 전 하던 대로 하겠습니다."

"암상이 블랙 컴퍼니에 합류하는 부분도 나중에 밝혀."

"과연.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처럼 비쳐지게 하란 말씀이군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여전히 저 힘의 균형에 대해서는 기묘할 정도로 집착하는군.

굳이 오해를 수정해주진 않았지만, 그럴 만한 이유를 하나 더 붙여주었다.

"블랙 컴퍼니는 너무 음지에 치우쳐져 있어."

"일리가 있군요. 그라운드 제로에 본사를 둔 것만 해도 그렇게 보일 만합니다."

"접경지역에 영역을 펴고 있으니 유야무야 넘길 수 있다지만. 음지 쪽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되는 건 피해야지."

"이왕 한 배를 탔으니 여쭤보겠습니다. 천 대표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블랙 컴퍼니의 궁극적인 목표?

음.

로마노프 가문에 맞설 힘을 키운다, 고 말하면 방금 전 거래를 무르겠지.

그럼.

목표로 가는 '과정' 중 일부만 내비치자.

"동아시아 제일이나 두 번째 정도."

"...!"

"약소하지?"

"허언증이라도 있으신 건지."

"왜. 미스터 블랙이랑 마담이 도와주면 불가능한 목표도 아니잖아."

유진은 태연하게 말했다.

한 점 의심을 찾아볼 수 없는 음색.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느꼈다.

'나를 안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까지 신뢰해주는 건가?'

'천 대표의 신뢰에 보답하려면 노력해야겠네요.'

미래를 보고 온 유진이야, 은하수 펍과 암상이 동아시아의 음지 사업에서 패권을 쥐게 될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두 사람은 의심 한 가닥 없는 발언에 힘을 얻었다.

"미스터 블랙. 한 가지만 부탁하지."

"예."

"시체들 알아보는 거. 돈 좀 더 써줘."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습니까?"

"한 배 탄 거 아니야? 1시간도 안 돼서 흥정하려고 하냐."

"당장은 관계없는 척해 달라고 하신 게 천 대표님이었습니다."

"너무 벗겨먹진 마."

"쿠쿠쿡. 물건값은 정가로 쳐드리겠습니다."

호오.

정가라니. 꽤 많이 깎아주는군.

음지 쪽 매물은 상당수가 장물이다.

살 때는 비싸고 팔 땐 후려치기 당하는 게 일상인 곳.

미스터 블랙이 말한 '정가'란, 음지 프리미엄을 빼고 제 값만 주면 구해주겠단 의미였다.

"좋아. 그럼 명단은 정리하는 대로 보내마."

"알겠습니다."

"저번에 주문한 시체들은 언제쯤 도착하나?"

"남중국해 쪽 해류가 심상치 않아서 일정에 지장이 생겼습니다. 1주만 더 기다려주십쇼."

미스터 블랙이 언급한 '해류'란, 침식현상이 일어난 바다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부산 – 경주 인근 바닷가에 생성된 무인도 같은 장소는 한둘이 아니었다.

제노사이드 새먼은 양반이라고 할 정도의 괴물들이 심해를 누비고 있으니.

해양 몬스터들은 헌터들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난적이다.

"적재하기 전에 부패 방지용으로 나름 조치를 취하긴 했습니다만."

"썩으면 썩은 대로 써먹어야지."

부패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면 스켈레톤 계 언데드로 되살리면 된다.

살점이나 혈액도 다 쓸모가 있지만.

해양 몬스터들이 준동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변수니까.

"여력이 생기면 황해 일대는 정리해주마."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간사냥꾼도 견제할 겸, 블랙 네트워크도 신경 쓰이니까 가만히 손 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블랙 네트워크.

구륭방이 만들고자 하는 동아시아 – 동남아시아 일대의 대규모 음지 연결망이다.

붉은 거미의 보스인 김재우가 구룡방에 합류하기도 했고.

연평도 일대 해양을 장악했으니 놈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스킬라만으로는 모자라겠어.'

인간사냥꾼들은 테이머 계열 직업군에 치우쳐져 있어서 해전에 극도로 취약했다.

하지만.

구룡방은 차원이 다른 적이다.

마도공학으로 강화한 선박.

강력한 마법계 헌터들도 여럿이니 스킬라들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웠다.

〔하면 왜 그 작은 인간들이 강경하게 나오지 않는 게냐?〕

'피해가 아예 0은 아니니까. 조만간 회유할 생각으로 날 찾아오지 않을까.'

붉은 거미하고도 접촉했던 놈들이다.

유진이 그 포지션을 그대로 계승했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접촉하려고 하리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시죠."

"오. 적극적인걸."

"힘의 균형도 무너진 마당에 굳이 견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미스터 블랙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

과거 붉은 거미의 본거지였던 호텔.

이제는 블랙 컴퍼니 본사 건물이 되어 새 단장을 마쳤다.

그라운드 제로 삼강의 이면 합의를 마친 후 본사에 가자마자 임재백이 거의 절하는 기세로 맞이했다.

"대표님이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어, 어. 그래."

"직접 서명해주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어서 가시죠."

"컴퍼니의 전권은 임 이사한테 넘겨줬을 텐데?"

"제가 모르는 분야까지 체크할 순 없지 않습니까. 일을 많이 벌려놓은 대표님의 수완을 탓하십쇼."

등 떠밀려서 간 옛 호텔 라운지.

니콜라이를 맞이할 때 사용하기도 했던 최상층에 가자마자, 수북하게 쌓인 A4용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대표님의 재가가 필요한 서류입니다."

"너무 고전적이잖아."

"전 아날로그 파라서요. 직접 프린트한 용지가 좋습니다."

대표 취향 좀 고려해줄래?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탁자 앞에 앉았다.

"내가 확인해야 할 사항은 뭐가 있지?"

"크게는 셋이군요. 먼저 이것부터 보시죠."

임재백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목내이병 치료 기계 로열티 및 제품 명칭에 대한 제안]

아.

목내이병이면 성천 그룹이군.

〔그 작은 인간의 딸을 치료했던 사건 말이로구나.〕

'생각보다 양산 체계를 빨리 갖췄네.'

〔그대의 노예인 신준석이란 작은 인간도 포션을 양산하지 않았느냐.〕

'노예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그 양반은 천재다.

소스만 조금 던져주면 알아서 척척 만들 재능을 가졌다고.

'뭐, 방법이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치료법 자체는 쉬웠으니 금방 만들었겠군.'

성천 그룹에서는 목내이병 치료 기계를 '성자 시리즈'에 포함해주길 바랐다.

최근에 발매한 [성자의 눈물]도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만큼 판매 증진 효과가 기대된다나.

안 그래도 성자 시리즈를 어떻게 늘릴까 고민 중이었는데 잘 됐어.

'그럼 이름만 정하면 되겠는걸.'

〔성자의 휴식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휴식이랑 1그램도 관련이 없는 옵션인뎁쇼.'

〔치료 기기를 사용하려면 누워 있어야 하니 그럴듯하다고 본다만.〕

오.

설득력이... 있어!

크로노스의 말에 납득한 유진은 목내이병 치료 기기에 붙일 이름을 쓰고 서명까지 마쳤다.

"다음은 성자의 눈물과 축복의 생산량에 대한 문의인데."

"신 연금술사님은 제 관할이 아니니까요."

"축복은 어렵고. 눈물은 투자를 더 해야겠어."

"대한제약에서 유통하는 족족 모조리 매진이라고 하더군요."

"싼 가격에 효과는 좋으니 그럴 수밖에."

헌터는 대격변 이후 각광받는 직업군이다.

게이트라는 미지의 위험을 억제 가능한 수단.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까지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위험도 수반한다.

"성자의 눈물은 여벌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중급 포션이 없던 것도 아니잖아."

"가격도 비싼 데다 매물도 많지 않은 편이었죠."

회귀 전에도 다르진 않았다.

신준석이 양산형 중급 포션을 개발하기 전까진 게이트 내에서 발견되거나 트롤의 피를 정제해서 만드는 게 전부.

돈도 돈이지만.

매물이 흔하지 않아서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대한제약의 지원까지 받았는데 생산량이 따라가질 못하다니."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중이더군요."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대표님은 금전욕이 커보이지 않으시던데요. 의외의 말씀이군요."

"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강령술이나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를 일일이 발품 팔아서 구하려면 한도 끝도 없거든.

돈이 있으면 그 시간을 대폭 줄이는 게 가능하다.

"그러니까 수단인 셈이군요. 알겠습니다."

"싱겁긴."

그 외에도 유진의 재가가 필요한 업무는 산더미처럼 많았다.

임재백에게 설명을 듣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거나 방침을 정해주는 등.

대충 넘겨서는 안 될 일들이 가득했다.

〔흐으음. 그대답지 않구나.〕

'왜. 뭐요.'

〔책상물림처럼 어울리지 않은 행위를 몇 시간이나 반복하고 있을 줄은.〕

'해야 할 땐 하거든?'

미스터 블랙이 물어본 질문.

블랙 컴퍼니를 세운 궁극적인 이유는 결국 '로마노프' 가문에게 대적할 힘을 얻기 위함이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쓸 수 있는 건 모조리 써먹어야지.

지금이야 의도하지 않았지만 작전주처럼 소문만 크게 부풀렸을 뿐 실제론 거죽만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블랙 컴퍼니의 내실을 키워가려면 귀찮은 일도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도 유능한 사람을 구해놔서 번거로운 일이 줄어들었어.'

임재백도 그렇고.

동생인 임재영도 일처리를 꽤 꼼꼼하게 해주었다.

붉은 거미의 영역을 접수하는데 한 손 거든 미스터 블랙도 칭찬할 정도의 수완가라지.

서류더미를 모두 처리한 후, 유진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입술을 떼었다.

"임 이사. 블랙 컴퍼니의 한달 수입은 얼마나 돼?"

"그라운드 제로에서 20억. 신 연금술사 측에서 로열티로 72억입니다."

"히야. 100억이 좀 안 되는군."

"다만 뽀시래기 용병단은 현재 수입보단 지출이 큰 상황이라 5억 정도 적자가 발생 중입니다."

"당장에 융통할 수 있는 금전은 얼마나 되나?"

"200억 정도입니다."

회귀 직후에는 해외여행 갈 돈이 없어서 영혼까지 끌어 올렸는데.

격세지감에 코끝이 찡했다.

유진은 내친 김에 잔고를 확인했다.

아라한과의 공동 공략이나 불사조와의 협업, 그 외에도 돈 들어올 곳이 많다 보니 계좌에 돈이 어마어마하게 쌓였다.

"개인 돈까지 합치면 500억 정도인가."

"대표님. 어디에 따로 투자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신 연금술사한테 300억만 넣어."

"성자의 눈물 생산라인을 확보하는 데 사용하겠습니다."

"100억은 미스터 블랙한테 주고. 몬스터나 헌터의 시체를 좀 구할 거다."

"남은 금액은 예비용이군요."

"사업에는 늘 변수가 있기 마련이니까."

"적금 들 생각은 없으십니까?"

"만기까지 언제 기다려."

여유 자본 배분도 끝났겠다.

임재백이 담당 중인 그라운드 제로 내 사업들도 점검했다.

"문제는 없나?"

"작은 트러블이 있긴 해도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입니다."

"하기야 그라운드 제로니까."

"암상 쪽에서 일을 도와주는 편이지만, 무력이 필요한 쪽은 곤란해 하더군요."

"용병들을 고용하지?"

"네. 금액은 암상에서 부담해주고 있는 지라, 슬슬 인원 감축을 고려하는 모양입니다."

"하라고 해."

용병보다 더 쓸 만하 부하들이 있잖아.

보수도 받지 않고.

밥도 필요 없으며 잠도 자지 않는 완벽한 일꾼이.

유진의 뉘앙스에 임재백이 눈을 부릅떴다.

"언데드를 배치할 계획이시군요."

"그래. 언제까지 사업장에 남들 쓸 수는 없잖아."

"식대에 고용비 등을 아낄 수 있으니 좋겠습니다만. 제어가 가능할지."

"송명석을 붙여주마. 녀석이라면 중급 언데드도 잘 부릴 수 있다."

중급 언데드 대부분은 피의 발렌타인 때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라운드 제로 담당으로 배치할 송명석도 지금은 몸통이 없는 상황.

사업 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만들려면 결국 네크로폴리스로 넘어가야겠군.

그 순간.

〔그대여. 짐에게 시간을 할애해주지 않겠느냐?〕

크로노스의 사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146화 역천의 가호(1)

'내 시간은 왜?'

〔짐의 신전으로 가야 할 일이 생겼노라.〕

'알았어. 급한 일은 대충 처리한 것 같으니까.'

〔어인 일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성좌 나으리가 가자는데. 당연히 이유가 있겠지.'

여지껏 크로노스가 무언가를 요구한 것은 많지 않았다.

신전이나 성유물처럼 자신이 성좌로서 존재하기 위한 필수 요소들을 갈구했을 뿐.

유진이 강해질수록, 〔역천의 거인〕의 설화와 영성도 쌓여가니 특별히 바랄 것도 없었다.

'궁금하긴 하군.'

〔크하핫.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일러주진 않을 것이야.〕

'그러든지 말든지.'

배를 수배하는 건 저번과 마찬가지로 미스터 블랙에게 맡겼다.

"아. 조만간 연평도에서 자리 펼 생각 해."

"드디어 열어주시는 겁니까?"

"한 배를 탔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경기도 일대 해안가의 흐름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요충지.

연평도에 거점을 설치하면 암상의 영향력도 눈에 띄게 증가하리라.

'방어용 구조물도 지어놔야겠네.'

〔대형 몬스터의 뼈가 많이 필요하겠구나.〕

차량에서 대기 중인 파프너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았어. 주인.]

[주군. 제 몸뚱이는 언제 복구시켜주실 겁니까?]

"네 뼈 맡겨놨냐."

[이런 몸뚱이로는 주군의 명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좀 있어봐."

파프너에게 맡겨두었으니 연평도 쪽 네크로폴리스 단계를 올릴 준비는 끝난 셈이고.

미스터 블랙이 수배해준 쾌속선에 올라탔다.

"또 뵙는군요."

"신수가 훤하네. 선장님."

"껄껄. 천 대표님이라고 하셨던가. 덕분에 훤한 겁니다."

유진이 연평도를 장악한 이후로는 서해를 돌아다닐 때 눈치 볼 일이 거의 없어졌단다.

조금 멀리 나가면 중국에서 온 어선이나 구룡방 쪽 배와 마주치기 때문에 적당히 몸을 사리는 중이지만.

"어쨌든 붉은 거미든 인간사냥꾼이든 대표님이 치워주신 거 아닙니까?"

"인간사냥꾼은 개성에서 아직 못 몰아냈다만."

"곧 해주신다고 했으니 믿어야죠. 껄껄."

속 편한 양반이구먼.

부두에 다가가니 언데드와 레리크들이 드잡이를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현 시대에는 인근의 지맥과 융합한 게이트 핵을 분리할 방법이 마땅찮다 보니, 끊임없이 생성되는 괴물과 맞서 싸워야 했다.

'연평도는 핵을 추출할 수 있게 돼도 그대로 둘 생각이지만.'

〔호오. 침식을 거둬낼 방도가 생기는 모양이구나.〕

'지맥과 융합한 핵을 분리하는 방법이 나오긴 해. 신준석 씨가 개발했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과거가 아니라 미래형으로 말해야하나?

'생각보다 자주 오게 됐네.'

〔그 신성을 지닌 언데드를 개발한답시고 오래 머무르지 않았느냐.〕

'성과는 있었잖아.'

성력을 지닌 언데드, 디파일러.

역대 흑암의 반지 주인들조차 해내지 못한 위업을 연평도에서 해냈지.

[백야의 성자]란 이중 직업군이라서 가능했던 일.

크로노스에게 그거 하나는 감사해야겠어.

〔자. 어서 짐의 거처로 가자꾸나.〕

'여유 좀 즐깁시다. 좀.'

〔그대와 제일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구나. 농담이 꽤 늘었어.〕

왜.

뭐요.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

농담 취급해버리네.

대격변 이후로 버려져서 움푹 파이거나 깨진 도로를 따라 천천히 신전으로 향했다.

자욱하게 낀 안개가 생물들의 시야를 차단했지만 유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영력을 끌어올려서 빚어낸 희끄무레한 기류.

네크로폴리스의 주인인 유진에겐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

〔짐은 반년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그대를 지켜보았도다.〕

'새삼스럽기는.'

〔필멸자들은 시간을 금처럼 사용한다고 하였지만 그댄 특히 더 그리하였지.〕

'맞서야 할 적이 그만큼 강대하니까.'

〔그렇기에 짐도 고뇌하였느라.〕

'어떤 주제로?'

〔짐의 유일한 신도이자 대리인인 그대에게 어떤 계통의 힘을 주어야 도움이 될 것인가.〕

그 말인즉슨.

성좌가 내려주는 이적, '가호'를 말하는 것이었다.

'자, 자자자자잠깐만.'

〔당황하였느냐?〕

'아니. 안 그러게 생겼어? 내가 가호를 받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잖아.'

〔알다마다. 그러니 짐이 고심한 것 아니겠느냐.〕

꿀꺽-.

목울대가 크게 요동친다.

성좌의 가호.

회귀 전, 그 힘이 없어서 곤욕을 치렀던 때가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성좌나 그에 준하는 이들에게 허락된 저 너머의 힘.

신력이 아니면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아우라]를 전신에 휘감았던 드미트리가 떠올랐다.

'대등하게 싸우려면 이쪽도 성좌의 가호가 필요해.'

격의 차이.

언데드를 끊임없이 제작하고 강화한다 한들, 결정적인 차이 때문에 드미트리를 넘을 수 없었다.

회귀하자마자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들고 그리스까지 날아간 이유이기도 했다.

〔계약자에게 힘이 되어야 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부여해주면 도움이 될 만한 범용성까지. 챙길 것이 많더구나.〕

'성좌 나으리가 내린 결론은?'

〔크하하핫. 그건 신전에서 확인해보아라.〕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야?

그러다 시답잖은 능력을 부여하면 다시는 겸상 안 할 줄 아쇼.

*

-으어어.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던 디파일러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역천의 거인〕의 신도이지만, 그 전에 유진의 피조물인 탓에 우선순위가 주인이었다.

〔짐의 신도여. 어이하여 대리인을 경배하느냐!〕

'실세가 누군지 알아보는 거지.'

〔고얀 것!〕

왜 좀비한테 경쟁심을 품고 그러세요.

신전에 발을 딛자 몸이 이완되었다.

공간 전체를 충만하게 휘감은 크로노스의 기운.

노천탕에서 목욕을 즐기고 막 나왔을 때와 흡사한 나른함이 전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역천의 거인의 힘이 피로를 감소시켜줍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증가합니다.]

피로 감소와 소소한 능력치 증가.

신전을 증축하면 효과도 더 커지겠지.

접경지역 쪽에도 신전을 건설할 만한 곳이 있으려나.

〔신전을 더 지을 셈이더냐?〕

'우리 성좌 나으리도 제대로 된 성좌로 자리를 잡으려면 신관을 추가 모집해야지.'

연평도는 크로노스의 신자들을 늘릴 만한 장소가 안 된다.

바다를 넘어 와야 하니 접근성도 떨어지고.

만신전에 이름을 올렸지만 제대로 된 성좌가 된 것도 아니라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신도 모집이 안 된다.

포교를 하려면 막 각성한 헌터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장소여야지.

〔짐을 향한 마음이 갸륵하구나.〕

'연평도의 성당 같은 조건을 충족시킨 부지가 더 있을진 모르겠다만.'

한국 쪽은 무리다.

절이나 교회, 성당 같은 곳을 무단으로 점거했다간 신성 영역을 침범했다고 성단끼리의 분쟁으로 번질 것이다.

연평도의 성당처럼 필멸자들의 염원이 담겼으면서, 동시에 버려진 곳이라면 모를까.

'옛 북한 쪽이면 괜찮은 땅이 있을지도.'

인간사냥꾼을 밀어버릴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제대로 된 신도를 구할 방법은 조만간 생길 거다.'

〔흐음. 짐도 효용성이 있는 신성 주문들을 더 빚어내야겠구나.〕

크로노스는 작게 주억거렸다.

하긴.

너프된 [라이프 드레인]은 치유 효과가 뛰어나긴 해도 사용 제한이 있어서 일반적인 치료 주문의 하위호환이고.

[부정한 축복]도 생명체에게는 디버프 효과를 제공해서 오히려 마이너스다.

[부정 충격 방패]나 [응징의 쐐기]는 뛰어난 신성 주문이지만.

그 정도로는 메리트가 적단 말이지.

'언데드 소환수를 다루는 주문은 어때?'

〔참고하도록 하마.〕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유진은 손을 쓱쓱 비볐다.

회귀 전 · 후를 통틀어서 제일 간절하게 원했던 능력!

마법왕 드리트리에게 맞서 싸우려면 마력을 넘어선 힘, 신력을 다뤄내야 한다.

'언데드 관련 능력이면 곤란한데.'

〔단언컨대 그대가 난감할 일은 없을 것이다.〕

호오.

이거 참 기대되는구먼.

우우웅-!

크로노스의 유일한 대행자요, 신자이기도 한 유진의 몸에서 희끄무레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 곳은 역천의 거인을 모시는 신전.

반쪽짜리 성좌인 크로노스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성좌의 '상'을 또렷하게 빚어낼 수 있었다.

몸에서 피어오른 안개는 이윽고 한 점으로 모이더니 사람과 흡사한 형태가 되었다.

[역천의 거인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야. 신수 한번 훤하네."

평소에 텔레파시를 보내던 것과 달리 성좌의 존재감을 두른 크로노스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흩뿌렸다.

크로노스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이더니.

[역천의 거인은 당신에게 예를 갖추길 바랍니다.]

이거 참.

성좌 대접이라도 해달라는 건지.

가호만 주면 양쪽 무릎이 닳도록 꿇어줄 수도 있다.

피식 웃은 유진은 한쪽 무릎을 가볍게 꿇었다.

[역천의 거인이 만족합니다.]

[역천의 거인은 당신에게 가호를 부여합니다.]

[역천의 가호 – Lv 1이 추가됩니다.]

[역천의 가호]

등급 : 1

순리를 거스르는 성좌의 가호입니다. 어떤 에너지든 가리지 않고 흡수하여 짜여 있는 배열에 간섭, 어떤 에너지든지 사용자의 의지대로 재구성시킵니다.

힘을 재구성한다고?

유진의 눈가 위로 놀라움의 감정이 번져 나갔다.

*

신전의 힘을 빌어서 사람의 형상을 취했던 크로노스.

유진에게 가호를 내려주자 축적된 기운이 모두 소진되어서 자동으로 돌아왔다.

〔크하하하핫! 어서 감상을 말해보아라.〕

'대단한데.'

〔고작 그 한 마디가 끝인 게냐!〕

'설명이 너무 대단해서. 확 감이 오지를 않네.'

〔향후 그대가 맞서야 할 대적. 마법왕의 특기는 무엇이더냐?〕

'마법왕이니까 마법이겠지.'

〔짐은 그 대적을 상대할 열쇠를 쥐여주고 싶었노라.〕

세계의 근간인 '마력'을 비틀어서 이상현상을 빚어내는 기예, 마법.

크로노스가 부여한 [역천의 가호]는 마법과 완전히 상극이었다.

'이 능력이라면 아우라도 돌파가 가능하다.'

힘을 재구성하는 능력.

배후성의 가호를 최대까지 부여받아 반신의 경지에 이른 존재만이 다룰 수 있는 방어벽, [아우라]조차도 간섭할 수 있을 것이다.

가호는 성좌의 능력.

[아우라]와 동일한 격을 지녔으니.

크로노스가 부여한 가호만 있으면 전처럼 일방적으로 맞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마법왕의 능력에 대해 완벽한 카운터.'

〔크핫! 짐이 하사한 가호가 마음에 드느냐?〕

'일단은.'

〔아까부터 미적지근한 반응이로구나. 분명 그대에게 필요한 힘일 터인데.〕

'성좌의 가호도 만능은 아니니까.'

가호는 일반적인 헌터의 스킬이나 특성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렇다고 해서 가호의 효능이 모든 섭리나 이치를 무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진은 회귀 전에도 배후성을 둔 헌터들을 셀 수도 없이 쓰러트린 경험이 있었으니.

'작동 방식은 머리에 새겨졌으니 됐고. 발동 범위나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크로노스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유진의 전투 스타일.

회귀 전에 벌어진 사건 등.

무수한 정보들을 꼼꼼하게 살핀 후, 〔역천〕이라는 성좌명에 걸맞은 능력을 엄선하여 구현해냈다.

한데 넙죽 절하지는 못할망정 간을 보고 있어?

〔나불거릴 시간에 테스트라도 해보아라.〕

'그럴 생각이었다.'

역천의 가호.

모든 힘을 반전시킨다는 어마어마한 설명.

실전에서 제대로 활용하려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성좌 나으리께서 얼마나 대단한 걸 주셨는지 한번 보자고.'

147화 역천의 가호(2)

가호를 테스트할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카락!"

"실험에 협조해줘서 고맙군."

막 재생된 레리크의 눈동자가 수축과 이완을 몇 번 반복하더니 유진을 인식.

괴성과 함께 목울대를 꿀꺽였다.

뱃속에서 끓어오른 화염이 목을 타고 올라왔고.

곧이어 이글거리는 화염이 솟구쳤다.

후.

떨리는구먼.

"역천의 가호."

손바닥을 감싸는 희끄무레한 기류.

언뜻 보면 주문 전개 직전의 영력이나 성력과 흡사하지만.

가호를 발현한 유진은 손에 깃든 힘의 진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힘이다. 그토록 원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것!'

주륵, 눈에서 땀이 났다.

아.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원하던 능력이던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잠시 잊고 시시각각 날아드는 화염에 집중했다.

'감상에 젖는 건 나중에도 충분해.'

모든 에너지의 방향을 일그러트리는 가호.

어떻게 작동하는지.

능력 범위는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불꽃이 손에 깃든 [역천의 가호]와 충돌하는 순간.

유진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아, 씨. 뜨거!"

레리크가 내뱉은 화염의 온도.

촉감.

냄새.

기타 등등.

오감이 느껴지면서 피부가 익어버리는 것까지 실시간으로 감상했다.

'힘을 되돌린다며! 흡수한다며!'

〔충격을 막아준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지 않았느냐?〕

'이 변방 잡귀가!!!'

〔어허! 그 호칭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조한 게 엊그제거늘!〕

이용 약관을 확인하란 보험사 설명도 아니고.

흡수 = 피해 없음이지.

상식도 없단 말인가!

원치 않게 몸이 익어가는 고통을 실시간으로 감상한 유진이 분노를 터트렸다.

〔역천의 가호는 공격을 척척 반사시켜주는 편리한 능력이 아니니라.〕

'그럼 뭔데?'

〔순리를 거스르는 개념을 이해해보려무나.〕

배후성 계약을 자신한테만 할 생각인가.

일반적인 '가호'는 부여받자마자 사용할 수 있게끔 가공이 되어 있다.

강민호처럼 연습이 필요한 능력이야, 심화 과정이니까 그런 거고.

보통은 최형태의 배후성이었던 비다르처럼 사용 방법이 직관적이란 말이지.

〔짐의 조언이 필요하느냐?〕

은근한 크로노스의 말이 귓가를 어지럽힌다.

아까 그 말 했다고 삐지긴.

됐수다.

"불을 하나 더 뱉어봐라."

"카라락!"

거무죽죽하게 타버린 손을 흔들거리며 히죽거리자, 레리크가 이상하다는 듯 보더니 앞으로 내달렸다.

"응. 그건 아니야."

둘 사이를 가로막는 본 월.

촉매인 뼈가 널려 있어서 방벽을 세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레리크는 몇 번이고 유진에게 다가가려다가 실패하자, 다시 한번 배를 부풀렸다.

"카락"

"잘 좀 맞춰 봐라. 가만히 있는 것도 못 맞추네."

레리크의 불꽃은 명중률이 높지 않았다.

첫 공격은 운이 좋았을 뿐.

하품을 내뱉을 때 즈음 두 번째 화염이 유진의 머리를 향해 정면으로 쏘아졌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두 팔을 쫙 벌리고는 가슴팍을 내민 유진.

그대로 지면을 박차며 화염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몸을 내던졌다.

피구 선수가 공을 받아내듯.

화염을 꼭 끌어안으니 어마어마한 격통에 눈이 번쩍 떠졌다.

'시X. 겁내 아파.'

늘어난 맷집 스탯과 저항력으로도 고통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노릇노릇한 냄새가 코를 어지럽히고.

화끈한 격통에 정신을 놓을 것 같지만, 유진은 그 감각을 잊지 않았다.

'방금 전에 흡수한 에너지가 남아있다.'

레리크의 불꽃을 가호로 흡수한 것은 두 번.

축적된 에너지를 정면으로 방출하려고 마음 먹자마자 화염 덩어리가 쏘아졌다.

〔호오. 벌써 감을 잡은 게냐?〕

'빌어먹을 정도로 효과적인 가호네.'

짜증 섞인 대꾸를 내뱉으며 마법 무장으로 [데스 스피어]를 사용.

레리크를 쓰러트린 후 욕지거리와 함께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했다.

빠르게 아무는 상처.

후, 고통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역천의 가호]를 사용했던 순간을 복기했다.

'되돌리려면 일단 흡수를 해야 하는군.'

〔그러하다.〕

'어떤 힘이든 거둔 후에 성분을 이해하고 재구축한다, 라.'

한 가지 문제는 반드시 '흡수'라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지?

이건 뭐 병X도 아니고.

낙담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몸뚱이로 받아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더 실험해보면 감이 올지도.'

일반적인 성좌들의 가호하고는 명백하게 이질적인 발동 원리.

제대로 다룰 수 있으면 어마어마한 힘이 되리라.

유진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

치이익, 몸뚱이를 불태우던 불꽃이 희끄무레한 기운에 흡수된다.

격통으로 더욱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이 막 거둔 레리크의 화염을 분석.

마력 구조와 속성 같은 정보가 뇌리에 전달되었다.

'조잡하군.'

역천의 가호로 흡수한 불의 기운을 재배열.

[지식의 도서관]에서 받아들인 지식을 응용해서 창의 형태로 구현했다.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는 법."

희끄무레한 기류에서 튀어 나온 화염 창이 레리크의 이마에 꽂혔다.

단순히 창이라는 형태만 부여한 게 아니다.

[관통]과 [회전]의 개념으로 레리크의 화염을 강화.

놈이 쏘아 보낸 불꽃보다 족히 6배는 강한 구조로 바꾼 것이다.

"칵."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레리크가 고꾸라졌다.

화염 저항력을 타고나면 뭐해.

관통력에 회전까지 더한 화염이 머리를 꿰뚫었으니 뇌가 익어버렸을 거다.

"끙. 아주 꼴이 엉망이야."

넝마가 된 옷.

파프너에게 용린갑을 넘겨준 뒤로 제대로 된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다.

입고 다니던 옷은 평범한 재질.

그러다 보니 [역천의 가호]를 테스트하던 중에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더럽게 힘드네."

유진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등을 타고 올라오는 시원한 감각.

하루를 꼬박 [역천의 가호]에 투자해서 얻은 소득이 뇌리를 가득 메웠다.

'제대로 써먹으려면 접근전이 강제되는군.'

[역천의 가호]의 발현 범위는 육체와 몸에 걸치고 있는 무장까지.

무기, 혹은 갑주처럼 육체 일부와 닿은 장비도 '몸'으로 친다는 것을 확인했다.

옷가지가 넝마가 된 것도 그 이유.

'역천의 가호는 단순히 힘을 반사시키는 게 아니야.'

먼저 상대의 힘을 가호로 흡수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거둬낸 에너지를 이해.

이해한 힘의 파장을 재구축해서 발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중간 과정은 생략해도 돼.'

흡수 – 이해 – 재구축 – 발현

총 네 가지 과정에서 [이해]와 [재구축]은 굳이 거치지 않고 발현으로 가도 된다.

거둬들인 에너지가 '오러' 같은 성질이라면 더더욱.

의념이 깃든 힘은 이해하는 것도, 유진의 의지대로 재구축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처음 예상대로 오러보단 마법 카운터에 특화되어 있다.'

사소한(?) 문제가 한 가지 있다면 육체로 받아내야 한다는 점.

방어구를 매개 삼아서 충격을 대신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파프너한테서 용린갑을 다시 회수해야 하나.

'문제는 이걸 제대로 활용하려면 접근전이 강제 되다는 거고.'

스펙은 [라이프 드레인]으로 꾸준히 쌓아왔으니 괜찮다.

동일 성위 무투계 헌터보다 조금 앞선 능력치.

문제는 그 스펙을 제대로 활용할 만한 스킬이 모자란다는 거지.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은 E급 스킬. 더 높은 묘리가 담긴 기술 앞에서는 힘을 내기 어렵다.'

이거 참.

계륵이군. 계륵이야.

역천의 가호는 성능만 놓고 보면 가호들 중 최상위에 들 만큼 대단했다.

그 능력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전제조건이 많이 걸려서 문제지.

특히 유진하고는 궁합이 썩 좋은 편아 아니었다.

'왜 이따위 능력을 만든 거야?'

〔크하하핫. 짐이 본래 어떤 신이었는지 잊었느냐.〕

'티탄 신왕이었지.'

〔그러하다. 짐은 늘 전장에서 최전선에 서서 적들이 수급을 추수하였느니라.〕

크로노스는 농경과 시간을 주관했던 성좌.

유진이 그 개념을 뒤집어 '죽음'을 거스르는 성질을 부여했다곤 하나, 본질을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다.

배후성으로서 후원 중인 필멸자에게 내려주는 가호도 마찬가지.

〔가호의 능력을 극대화하려면 필연적으로 근접전을 이행하여야 한다는 의미니라.〕

지랄났군.

흠.

능력이 강한 만큼, 나름대로 페널티가 꽤 크게 붙었다.

〔무투계 헌터에게는 그리 큰 제약도 아니지 않느냐?〕

'일반적인 무투계 헌터가 퍽이나 마법의 구조를 분석할 수 있겠다.'

오러는 구조가 단순하다.

사용자의 의념을 얼마나 강하게 부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보다 상위 개념인 오러 블레이드라면 모를까.

흡수와 이해, 그리고 재구성을 했을 때 효과가 극대화되는 분야는 마법이지.

근데 마법계의 카운터 격 가호인데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튜닝을 너무 해서 출력이 저하되는 꼴이라고 해야 하나.'

〔계약자여. 옵션은 많을수록 좋지 않느냐.〕

'튜닝의 끝은 순정이거든요?'

가호 본연의 성능은 신왕급 성좌와 비견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능력을 100%로 발휘하는데 조건이 어마어마하게 붙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

'뭐, 그래도 대충은 적응했네.'

[흡수]의 개념은 피부에 닿은 갑주에도 적용된다.

굳이 용린갑이 아니어도 방어구를 아공간에 넣어두고 소모품처럼 사용하면 충격을 완화할 수 있고.

레리크의 화염에 새로운 개념을 부여했듯, 흡수한 에너지를 가공해서 되돌려줄 수도 있다.

〔그대는 무투계의 싸움법도 단련하고 있지 않느냐?〕

'쓸 만한 옵션인 거지. 주력은 아니잖아.'

투덜거렸지만 납득이 가는 페널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역천의 가호]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추가 장비 및 스킬을 확보해야겠다.

〔한 가지 조언을 해줘야겠구나.〕

'말해보십쇼.'

〔짐을 상징하는 성유물은 회중시계가 아니란 것을 잊지 말아라.〕

대낫 스퀴테.

농사에서 결실을 의미하는 수확의 도구이자, 동시에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의 성유물이다.

'낫질이라도 하라고?'

〔호오. 통찰력이 제법이로구나.〕

'창이라면 몰라도 낫질은 안 돼. 관련 스킬도 없단 말이야.'

〔오러를 응용해보아라. 그럼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

'그냥 오러만 불어넣으면 당연히 파괴력에서 밀리지.'

〔무엇을 걱정하느뇨. 짐의 가호가 있거늘.〕

'야잇!'

햄스터 쳇바퀴 돌리는 것도 아니고.

낫 관련 스킬이 없다 → 오러로 극복해라 → 기교가 모자라다 → 가호를 응용하면 되지 않냐 → 그러니까 낫 관련 스킬이 없는데 접근전을 어떻게....

라는 무의미한 다툼을 5분 간 벌였다.

[주인. 못 보던 사이에 거지꼴이 됐네?]

"벌써 왔냐. 뼈는 어떻게 하고."

[조승철이 잘 모아놨더라고. 그래서 발품 많이 안 팔고 바로 왔어.]

시키지도 않은 짓을 잘도 했군.

붉은 거미 간부인 이승연은 향상심이 크지 않지만.

조승철은 자아를 부여해준 순간부터 유진에게 충성심을 드러내며 상승 욕구를 감추지 않았다.

회귀 전 7성에 올랐던 실력자이기도 하니.

재료만 갖춰지면 리치로 만들어서 두고두고 부려먹어야겠다.

[근데 무슨 난리를 쳐놨어?]

"아. 그게 말이지."

유진은 크로노스가 부여한 가호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와. 대박. 완전히 사기 능력인데?]

〔보아라. 그대의 대전사도 가치를 바로 알아보지 않느냐!〕

쟤한테는 안 들리거든요.

유진은 쳇, 하고 혀를 찼다.

[근데 낫이라. 낫 관련 무투계 스킬은 없어.]

"내 상식으로도 그렇다."

[아까운 걸. 낫을 활용하면 더 효과가 좋을지도 모르는데.]

파프너는 잠시 고민하더니 아- 하고 손뼉을 마주쳤다.

[주인. 하나 만들어줄게.]

"음?"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에서 동작 좀 추가하면 되잖아.]

저기요.

무투계 스킬이 뚝딱, 하면 만들어지는 줄 아세요?

파프너의 재능이 세계구급이긴 해도, 스킬을 창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해봐."

유진은 팔짱을 낀 채로 대꾸했다.

148화 되는데요

[주인.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의 숙련도 얼마나 올렸어?]

"100."

[열심히 했네.]

"누가 개처럼 굴려서 말이지."

[그 사람한테 상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은 아니다."

원망 섞인 눈빛에도 파프너는 킁, 코를 푸는 사념을 흘리며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았다.

죽어있는 몸뚱이니 눈썹을 움직인다는 게 맞는 표현인진 모르겠지만.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특별한 제약 없이 익힐 수 있는 스킬치곤 꽤 구성이 알차.]

"그런가?"

[무슨 기준으로 이 창법을 고른지는 모르겠지만 잘했어.]

파프너의 칭찬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 창법을 고른 이유, 라.

향후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게 될 인물. 영국의 창귀 제임스 로스차일드의 성명절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이 필요했다.

디딤돌 개념으로 익힌 거라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 못하지.

[낫 대용으로 쓸 만한 게 있나.]

"이거는 어때."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허리춤에 매달아둔 성유물, [죽음의 낫]의 봉대를 쭉 늘렸다.

전체가 뼈로 되어 있어서 길이 조절이야 강령술로 얼마든지 가능했다.

대신 내구도가 떨어지겠지.

실전용도 아니니 큰 상관은 없을 터.

[무기로서는 밸런스가 엉망이지만 어쩔 수 없지.]

"주는 대로 하지?"

[흠. 시간 좀 줘봐. 무게에 적응 좀 하게.]

부웅- 붕-.

쭉 늘어난 낫을 몇 번 휘두르거나 뻗어본 파프너가 비로소 만족스러운 듯 뺨을 일그러트렸다.

[좋아. 이제 손에 익네.]

"빠르군."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천유진의 대전사."

[후후. 그 이름값을 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시범이나 보여줘 봐."

[말 안 해도 그럴 참이야.]

파프너는 길게 변한 낫을 휘둘렀다.

허공에 궤적을 그리는 낫.

유진의 망막 위로 시퍼런 날이 번쩍였고.

후웅, 대기를 헤집은 낫이 일으킨 강풍이 한 발 늦게 머리카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어때?]

"어떻고 자시고. 한 번 본다고 어떻게 아냐."

[느낌이 팍 와야지.]

내 참.

파프너가 낫질 하는 걸 한 번 보고 느낌이 오면 네크로맨서가 아니라 무투계를 했지.

유진이 미간을 찌푸릴 때.

〔훌륭하도다!〕

요란한 사념이 머리를 강타했다.

'아오. 조용히 좀 말해!'

〔그대여. 믿기지 않는구나. 방금 전 대전사가 보여준 솜씨는 그야말로 짐의 마음을 뛰게 하였느니라.〕

통역이라도 해줄 테니 둘이서 대화 나누시죠?

유진의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 개수가 늘어나니, 파프너가 호탕하게 웃었다.

[후후. 성좌님께서 칭찬해준 거냐?]

"어럽쇼. 그건 어떻게 알았냐."

[주인이 섬기는 존재와 직접 소통한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았다.]

흠.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이란.

못마땅한 기색을 살짝 비춘 유진과 달리, 크로노스는 파프너의 솜씨에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다.

〔그대여. 저 낫을 기억하여라. 만일 대전사의 일격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짐의 가호를 더욱 능숙하게 다루어낼 수 있을지니!〕

'성좌 나으리.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지?'

〔일러두지 않았더냐. 짐의 상징은 수확의 낫. 가호를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그러하니라.〕

강민호가 [이동요새]란 고유 특성에 아테나의 가호를 융합해서 더 큰 힘을 끌어내듯.

크로노스의 가호도 알맞은 무기를 사용하면 효율이 좋단 의미다.

방금 전 파프너가 선보인 낫질은 [역천의 가호]와도 궁합이 잘 맞았다나.

'하란다고 정말 하나.'

〔뭘 그리 투정부리느냐?〕

'본인이 익힌 스킬도 아니잖아. 내가 창 휘두르는 것을 몇 번 보고 개량을 한다니.'

정말이지.

천재는 천재인가 보다.

크로노스가 감탄할 정도라니.

[자. 내가 해본 대로 낫을 휘둘러봐라.]

"...방금 한 번 보여줘놓고는 따라해보라고?"

[둔하네. 주인, 오러는 다룰 줄 알면서 감각이 못 따라가는구나.]

"거 둔해서 미안하게 됐수다."

[천천히 보여줄게. 두 눈 뜨고 잘 봐.]

파프너는 전보다 몇 배 느린 속도로 낫을 휘둘렀다.

기술 일부를 즉석에서 뜯어고쳤는데도 금세 능숙해졌는지 시연 속도 조절까지 하는 섬세함.

유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제 확실하게 이해했어."

[모르잖아.]

"티가 났냐."

[얼굴에 써 있다.]

몇 번 봐서 이해하면 네크로맨서 안 한다니까?

아오.

유진이 이를 부득부득 갈자, 파프너가 이해 안 간다는 듯이 주억거렸다.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은 금방 익히더니. 이상하네.]

"그건 스킬 북을 사용했잖아."

[안 되면 될 때까지 해야지. 어쩔 수 없네.]

"시간이 없어."

무투계든 마법계든, 시스템이 정해놓은 한계를 벗어나려면 강렬한 영감이 필요하다.

파프너를 비롯하여 본연의 성위를 뛰어넘은 언데드를 제작할 수 있었던 건 회귀 전에 이룩한 깨달음 덕분.

시간을 되돌림으로써 당시에 얻은 것을 모조리 잃었지만.

깨달음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네가 보여준 신위는 깨달음의 영역이야. 동작만 따라한다고 해서 될 게 아니라고."

[흠. 주인. 몸을 움직이는 데는 영 소질이 없어.]

소질의 기준점이 굉장히 높은 기분이다?

쩝, 하고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유진의 눈가가 순간 파르르 떨렸다.

"파프너야. 개쩌는 생각이 떠올랐다."

[음? 뭔데.]

"아까 그거. 다시 한번 해봐."

유진은 오른팔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야?]

"낫으로 내 팔을 잘라. 암흑 투기도 실어서."

[못 보던 사이에 그런 쪽 취향이 생긴 건가. 그래도 좀 꺼림칙한데.]

"그런 거 아니거든!"

취향이라니.

실례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지 마라.

"내가 새로 얻은 가호의 능력을 써먹어보려는 거다."

[시키니까 하긴 하는데. 후회하지 마.]

불신감을 고스란히 드러낸 파프너가 낫을 위로 추켜세웠다.

[역천의 가호 Lv1을 사용합니다.]

오른판을 뒤덮는 희끄무레한 기류.

가호가 탈 없이 발동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파프너에게 신호를 보냈고.

[에라. 모르겠다.]

서걱!

레리크의 불꽃을 받아냈을 때보다 몇 배나 되는 격통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괜찮아.

버텨냈어.

[눈물 난다.]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히 있어."

지혈할 시간도 없다.

방금 전.

파프너가 휘두른 성유물이 팔뚝을 베는 순간.

[역천의 가호]로 그 힘을 흡수했다.

'흡수. 그리고 이해.'

신경계를 타고 올라온 격통이 뇌리를 흔들지만 무시한다.

흡수한 에너지는 두 가지.

낫에 실린 힘.

그리고 암흑 투기.

두 에너지의 궤적과 운용 방법을 [역천의 가호]로 '이해'한다.

마법이 아닌 무투계의 영역.

이해력이 모자라지만 억지로 쑤셔넣고, 몸에 체화했다.

'재구성은 생략. 곧바로 마지막 과정이다.'

유진은 한쪽만 남은 팔을 뻗었다.

곧장 성유물을 건네주는 파프너. 길게 늘어난 봉을 잡고는 두 다리를 살짝 벌렸다.

[그 자세....]

신음하듯 흐려지는 파프너의 사념.

유진은 [역천의 가호]로 욱여넣은 정보와 축적한 에너지를 그대로 방출했다.

후우우웅-!

낫이 궤적을 그리자, 베어진 공기가 좌우로 밀려나면서 강풍을 일으켰다.

파프너가 낫을 휘둘렀을 때와 같은 현상.

"ㅂ, 봐. 되잖아."

유진이 비틀린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흡수 - 이해 순으로 이어지는 [역천의 가호].

무식한 방법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을 이해하는 데 멈추지 않고 동작을 재해석했습니다.]

[당신의 업적이 만신전에 등록됩니다.]

[겸(鎌)법이 무투계 스킬의 하위 분류로 새롭게 추가됩니다.]

[새로 창시한 스킬 이름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어?

어어어어????

유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

[후후후. 새로운 무투계 스킬 창조라니! 난 정말 대단해!]

"음. 등록은 내가 하는 거다."

[주인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거잖아.]

"숟가락을 올리는 과정도 쉽진 않거든?"

허전한 오른쪽 어깨를 과장되게 움직이니 파프너가 슬쩍 시선을 옮겼다.

[그, 그건 주인이 둔해서 그런 거고.]

못돼 처먹은 놈.

아니지.

파프너의 전생인 박하늘 씨는 여자니까, 으음. 더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잘려나간 팔을 잘 댄 후에 치유 주문을 사용하니 간지러운 느낌이 들면서 금세 붙어버렸다.

흉터 하나 남지 않은 상처.

파프너가 원체 깔끔하게 잘라내기도 했고.

라이프 드레인의 치유 효과가 대단한 덕도 봤다.

"동작 하나 더 개조해야지?"

[아. 그래. 3번이 남았지.]

창대를 길게 휘둘러서 견제하는 4번 식.

반면 3식인 회전 막기는 본래 방어용 기술이지만, 파프너는 다르게 활용했다.

[대낫을 끝에 달아놓고 빙글빙글 돌리면 얼마나 위협적이겠어?]

후우우웅-.

머리카락이 날 끝에 걸려서 썩둑, 잘려나가니 유진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식을 손보는 건 알겠지만 깜박이 정도는 켜고 들어와야지.

이 정도면 암살 시도 아닌가?

"어쨌든 알겠다."

[또 같은 방식인가?]

"깔끔하게 잘라주라. 이왕이면 안 아프게."

[노력은 하지.]

서걱!

두 번이나 피를 본 덕에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일부를 개수할 수 있었다.

이어붙인 손을 쥐었다가 폈다 하기를 반복하는 유진.

'가호라.'

돌고 돌아 회귀 후 중대한 목표였던 가호를 획득했다.

발동조건이 까다롭지만 제대로 다룰 줄만 알면 드미트리에게도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만한 비장의 패.

어깨 아래가 가끔 욱신거리는 것 빼곤 모두 마음에 들었다.

'몸으로 받아낸 것을 분석 및 습득할 수 있다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스킬도 익힐 수 있을까?'

만약.

시스템이 정해놓은 한계를 마음대로 뛰어넘을 수 있으면?

공중제비를 돌고 싶은 마음이군.

섬에서 나가면 한번 실험해봐야겠다.

〔허흐흐흠.〕

'왜. 할 말 있으면 해.'

〔계약자여. 새로 창시한 겸법의 이름을 아직 정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만.〕

'아. 그렇지.'

〔따로 염두에 둔 것이 있느냐?〕

'대충은. 베르디안 식 개량 창법이나 겸법으로 하지 뭐.'

겸법이라곤 해도, 근본적으로는 창법의 연장선이다.

찌르기와 베기가 혼용된 기예.

할버드 같은 장비를 사용해야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있으리라.

〔갈!!!〕

'아잇, 깜짝이야.'

〔계약자여. 어찌 그리 몰개성한 이름을 붙일 수 있느냐!〕

'뭘 그렇게 흥분하세요.'

〔두 귀를 씻고 짐의 고견을 듣거라!〕

크로노스는 흠흠- 헛기침을 내뱉은 후 사념을 전달했다.

〔스퀴테.〕

'그건 성좌 나으리의 성유물이잖아.'

〔못돼먹은 아들이 부러트리고는 녹여버렸으니, 그 이름을 기념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무 거창한걸.'

〔이 세상에 짐의 흔적이 다시 새겨진 뜻 깊은 기예이니라. 그 정도는 괜찮지 않겠느냐?〕

본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라고 중얼거리며 개량한 스킬의 이름을 [스퀴테]로 정했다.

그나저나.

낫이 [역천의 가호]와 궁합이 맞는다면 성유물인 [죽음의 낫]도 손을 봐야겠는걸.

'지금은 버프 전용에 가까운 상징물이나 마찬가지니.'

성유물을 손볼 만한 실력자라.

이 시간대에 있으려나.

회귀 전 기억이라도 되짚어봐야겠다.

[주인. 뼈는 어디에 놓을까?]

"아. 신전 앞으로 옮겨다줘."

연평도를 해안 거점으로 활용하려면 네크로폴리스 랭크가 올라가야 한다.

방어 시설을 건설하려면 영지 규모가 2는 되어야 하니.

'영맥의 힘이 모자라지만 극복할 방법은 있다.'

주기적으로 생성되는 레리크들.

땅과 융합한 게이트 핵이 빚어내는 족족 언데드 방어군에게 사냥 당했다.

유진이 없을 때야 섬 여기저기에 버려졌지만.

그가 온 직후, 부패가 덜 된 시체들은 모조리 검은 방첨탑으로 모아놓았다.

'천 단위인가. 이 정도면 충분해.'

검은 방첨탑에 손을 얹어서 동기화를 한다.

영맥을 타고 흐르는 영력.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힘으로 시체들을 잠식, 분해했다.

변칙으로 늘어난 검은 방첨탑의 출력.

'죽음의 전당을 건설한다.'

모아놓은 재료로 죽음의 전당을 건설.

조건이 충적되었으니 강령술 연구소까지 추가로 지은 후에 [방어 구조물 Lv 1] 연구까지 진행했다.

[망자의 골탑 x 20을 건설합니다.]

상륙 가능한 지점을 중심으로 방어 구조물을 건설.

혹시 모를 인간사냥꾼이나 구룡방의 침입 대책까지 마련해놓았다.

'지영만 씨. 내가 서비스 크게 해줬다.'

몇몇 이들만 알고 있는 미스터 블랙의 본명을 중얼거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꿈에 그리던 가호도 얻었겠다.

이제는 다음 스텝을 준비할 시간이다.

149화 앞마당 멀티(1)

연평도를 떠나기 전.

[불사자의 관]을 신전 앞에 배치해두고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레리크의 피와 마석을 여기에 넣어라."

검은 방첨탑에 예속시킨 언데드들은 모두 하급이다.

이 정도면 명령 범위 안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오는 수준.

파프너를 배치하기에는 아깝지.

〔힘들여 얻은 관을 저리 방치해두어도 되느냐?〕

'다 쓸 데가 있어.'

파주로 돌아온 뒤에는 한동안 숨 쉴 시간도 모자라다고 느껴질 만큼 바빴다.

본격적으로 시동한 블랙 컴퍼니.

여러 사업에 발을 걸치고 있는 만큼,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동업자님. 새 상품이 필요합니다!"

"나 본다고 떡이 나오냐."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합니까? 일 벌려놓은 건 동업자님이면서!"

신준석이 우는 소리를 하니, 느낌이 참 묘했다.

회귀 전에는 누구한테 의지하는 모습을 한 번도 비치지 않았거든.

〔그대가 이 작은 인간을 나약하게 바꾼 것이니라.〕

'칭찬 감사합니다.'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든 것도 문제가 있군.

어쩌겠어.

신준석의 뛰어난 실력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연구 방향만 틔워주면 되는 법.

당장은 새 아이디어가 필요하니 하나만 던져줘야겠다.

"힘이나 민첩을 늘려주는 도핑 포션 하나 만들자."

"도핑이요? 그건 부작용이 있지 않습니까."

"줄여줘야지."

"어떻게요?"

"그건 동업자가 해결할 문제고."

"이이이이!!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제 해결에 필요한 소스 하나는 줘야지.

유진은 접경지역에서 챙겨온 시커먼 덩어리를 내밀었다.

"뭡니까?"

"똥."

"아잇. 싯팔.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정확히는 가시멧돼지의 똥이다."

가시멧돼지는 돌진 순간에 힘을 증가시켜서 순간적으로 가속한다.

섭취한 약초의 성분을 몸에 저장.

원하는 타이밍에 방출해서 근력을 증가시키는 것.

"정말입니까?"

"스킬 같은 게 아니야. 놈들은 약 성분을 몸에 쌓아둘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약초의 부작용도 담아두는 꼴인데."

"뭔가 방법이 있겠지. 그 해결법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라고 짐작하는 거다."

"동업자님 말이니 속는 셈치고 믿어봅니다."

걱정하지 마라.

도핑 포션의 부작용을 없앤 결정적인 재료가 그 똥이니까.

가시멧돼지는 네크로폴리스 근처에서 가장 흔히 만날 수 있는 괴물이다.

똥은 얼마든지 공급해줄 수 있다고.

"공장 좀 늘리자."

"대한제약에서 투자받은 건 모두 썼습니다."

"200억 줄게."

"동업자님!!! 사랑합니다!!!!"

어우.

징그럽다. 거리 좀 두자.

아저씨한테 포옹 받고 좋아하는 취향 따윈 없단 말이다.

"골렘은?"

"스킬 숙련도는 72입니다."

이 미친 인간.

숙련도는 단순히 자주 사용한다고 해서 늘어나는 게 아니다.

스킬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유진이 [지식의 도서관]에서 스킬을 계승하는 족족 숙련도가 100인 것도 이해와 깨달음이 동반되어서다.

"바쁜 와중에 잘도 골렘을 연구했어."

"취미죠. 취미."

"골렘을 파는 건 어때?"

신준석의 턱이 아래로 쭉 내려갔다.

놀라긴.

회귀 전에 당신이 했던 사업이야. 너무 놀라지 마.

"마석으로 에너지만 간간이 채워주면 무급으로 굴릴 수 았잖아."

"경비로 좋겠군요."

"게이트 공략에 활용해도 되고."

"아! 정말 엄청난 아이디어입니다!!!"

"투자 유치도 좀 받아봐."

"상용화하려면 못해도 몇 년은 걸릴 텐데요?"

"에이. 뭐 투자 리스크는 본인들이 감내하겠지."

골렘을 소환수로 부리는 이들은 몇 있지만.

상시 유지 가능한 제작물로써의 골렘은 아직 시장에 풀리지 않았다.

언론에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헌터 업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만한 소재.

"마담한테 부탁해. 여론은 잘 만들어줄 거다."

"알겠습니다."

"도핑 포션도 좋은 소식 들려달라고."

"이름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흠. 성자 시리즈 4번째 작품의 이름은... 활력이라고 하지."

"좋습니다. 그대로 진행하죠."

유진은 공방을 힐끗거렸다.

"일손 모자라지 않아?"

"모자랍니다. 손이 열 개쯤 되면 좋겠네요."

"도제를 받아라."

"영업 비밀을 공유하란 말입니까?"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니 신준석의 표정은 오물을 본 것 마냥 일그러졌다.

"싫습니다."

"도제가 배신이라도 할까 두렵나?"

"예. 제가 결과물을 도둑질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중요한 부분은 쏙 빼고 전수해주면 된다. 이미 대한제약 협력 직원들한테 하듯이."

"거긴 계약직 아닙니까. 도제는 다르죠."

신준석은 회귀 전에도 도제를 늦게 들였다.

전 직장에서 배신을 당한 경험도 있고.

그가 명성을 떨친 후에 몰려온 이들 중에서도 비법만 훔쳐가려는 파렴치한 작자가 태반이었다.

'후자는 아직 경험 못 해봤겠지만.'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유진은 태연하게 입술을 떼었다.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아니.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말이죠. 그래도...."

"우리는 사업을 더 키워나갈 거다. 홀로 작업해선 한계가 명확해."

"끙."

"모든 걸 공유하려고 하지 마. 재능의 유무, 신뢰가 가능한지 등 모든 것을 고려해서 등급별로 나누면 되는 거다."

굳게 닫힌 입술.

한 마디 가지고 생각이 바로 달라지면 그게 이상한 거다.

유진은 가볍게 웃으며 신준석의 어깨를 두들겼다.

"뭐, 당장 하라는 건 아니다. 생각은 해보란 거지."

"고려해보죠."

*

골렘 연성과 성자 시리즈의 다음 상품 연구.

신준석에게 틈틈이 영감을 주면서도, 뽀시래기 용병단 운영에도 관여했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염병! 주둥이 나불대지만 말고 직접 하든지!"

"뽀시래기 용병단 고문님께서 하는 일을 내가 대신 해줄 순 없지."

"손가락 빨고 있을 거면 닥치고 있으라고!"

"아. 그건 좀."

팔자에도 없는 용병단 고문을 맡은 김미정이 새빨개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용병단의 주 업무는 중개.

마담과 업종이 겹치는 것처럼 보여도 미묘하게 다르다.

-괴물 사냥.

-사람 추적.

-아이템 찾기.

-분쟁지역 참전.

민간군사업체와 헌터가 결합된 업종.

일반적인 헌터의 돈벌이는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내부에서 자라나는 부산물을 습득하는 것이다.

반면에 용병은 헌터로서 지닌 '힘' 자체를 돈벌이 요소로 활용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그러니까 베트남 쪽으로 외주 좀 보내자고!!"

"아직 국내에서도 뿌리를 못 내렸는데 무슨 외국을 보고 있어."

"한국은 대격변 이후에도 몇 없는 안정된 사회를 유지 중인 나라잖아. 용병한테 무슨 일거리가 있다고!!"

야심차게 출범한 뽀시래기 용병단.

유진의 이름값까지 끌어다 써서 공격적으로 인원을 늘렸지만.

창단 1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규모에 비해 자잘한 의뢰만 수행하는 중이다.

"월급은 꼬박꼬박 주고 있잖아."

"아오! 용병단에 입회만 해도 돈을 주니까 애새끼들이 의뢰는 수행 안 하고 자기들이 할 일만 하지!"

"1년 만이다. 몸집을 불리려면 역시 돈을 푸는 게 제일이니까."

"야. 내가 어? 남의 돈 나가는 거 아까워한 게 이번이 처음이거든?"

미친개 김미정.

그녀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높이고 싶진 않았다.

전 직장(?)인 나찰 길드에서도 서열 3위라고 대접을 해줬지만 흥미 있는 일만 나섰다.

길드장에게 신세를 진 것만 아니었으면 그마저도 걷어찼을 성격.

유진한테 발이 잡힌 상황에서도 그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뭘, 사소한 것에 일일이 신경 쓰지 마."

"이렇게까지 개판을 치면 어떻게 손 놓고 있냐고!!!"

"책임감이 강한 성격은 아니잖아."

"염병할. 흥미가 생겼는데 어떻게 떠나겠어."

김미정은 한 가지에 꽂히면 흥미가 사라질 때까지 관심을 끊지 못한다.

타고난 성향.

하필, 지금은 뽀시래기 팀과 유진에게 꽂혀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귀찮음을 감수하고 용병단 고문이 되면서까지 옆에서 지켜보려니까, 일을 이렇게까지 개판 친다고?

하는 수 없이 나서서 용병단 내 업무 정리를 힘닿는 데까지 도왔다.

"이거야 원. 신세를 졌습니다. 고문."

"너도 사람 좋게 웃지 마! 목을 뽑아버리고 싶네, 진짜."

"하하하. 한 번만 봐주세요."

강민호가 사람 좋게 웃으니 김미정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그래.

미친개는 이런 사람이다.

〔알고 그런 게냐?〕

'대충은. 회귀 전에도 유명한 성격이었거든.'

일을 못하는 게 아니다.

안 하는 거지.

'못'과 '안'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유진은 모르지만, 김미정의 유능함은 동해에 생성된 무인도 사건 때도 빛을 발할 뻔했었다.

정보 하나 없는 상황에서 유진의 특성을 어느 정도 추론했으니.

그래도 너무 방치했다간 화가 나서 떠날지도 모르지.

셀프 기아스 스크롤로 맹약을 했지만, 충성 맹세 같은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일거리 하나 물어왔다."

"재미없으면 안 해."

"들어보고 결정해. 참고로 의뢰인은 나다."

"자기 회사에 의뢰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용병단이잖아. 돈을 줘야 일하지."

접경지역 탐사 의뢰.

더 자세히 말하자면 네크로폴리스 너머 몬스터들의 분포 및 영역을 분석해야 한다.

"시시해."

"애꾸눈을 사냥하기 전에 사전 작업인데. 시시하다면 어쩔 수 없지."

"진심이야?"

"어. 저번에 그 놈한테 진 빚이 있거든. 갚아줄 거다."

애꾸눈.

7성의 극에 도달한 변종 오우거.

오러 블레이드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줄 알며, 신체능력까지 뛰어난 괴물 중의 괴물이다.

놈의 악명은 한국 출신 헌터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좋아. 할게."

"사람들은 적당히 꾸려줘. 인명 피해 생기는 건 싫으니까."

김미정한테 파주 너머의 몬스터 분포 및 지형을 파악하게 한 후.

유진은 뽀시래기 팀을 굴리며 용병단 체계를 더욱 탄탄하게 잡았다.

"형님. 드디어 오러를 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너라면 금방 해낼 줄 알았다."

강민호가 먼저 오러 사용법을 깨우쳤고.

공간 능력을 쉼 없이 탐구하던 이성민도 금세 벽을 넘어섰다.

"하면 되지 말임다!"

음.

이건 좀 예상 밖이군.

강민영이 더 빨리 깨달음을 얻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회귀 전 거울 사냥꾼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두 사람이니, 자질만큼은 확실했다.

이성민이 강민영을 앞지를 줄은 몰랐다.

"우씨. 좀만 기다려!"

유일하게 벽을 넘지 못하고 정체구간에 들어선 강민영이 분한 듯이 외쳤다.

걱정은 들지 않았다.

조바심에 벽을 넘는 데 시간이 더 걸릴지는 몰라도.

회귀 전의 강민영을 생각하면 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용병단의 체계를 잡는 중에 마담에게 의뢰를 맡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견갑 제작 쪽 장인을 찾아달라고요?"

"응. 뼈를 잘 다루는 사람이면 더 좋고."

"금속을 아예 배제하면 추천할 사람이 많진 않겠지만, 알겠어요."

크로노스의 조언대로라면 [역천의 가호]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죽음의 낫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길이를 늘인 것은 임시방편일 뿐.

실전에서 활용하기에는 내구도가 모자랐다.

가호로 힘을 받아들였다간 몇 합 주고받았을 때 뎅강 부러져버릴걸.

'당장 생각나는 장인이 없으니. 마담의 도움을 받아야지.'

그 동안 암상에 의뢰했던 대형 몬스터나 헌터의 시체들도 무사히 도착.

살점이 대부분 부패한 탓에 건질 만한 부위가 줄어들었다.

"죄송합니다.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염두에 둬서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만."

"아쉽지만 뼈라도 구한 게 어디야."

미노타우루스.

사이클롭스.

그 외에도 어렵게 구한 강력한 대형종들의 시체를 불경스러운 묘지에 묻어두었다.

조만간 쓸 일이 생길 테니.

영력으로 숙성시킬 겸, 더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연평도에서 돌아오고 2달 정도가 지났을 때.

"어때. 만족해?"

꾀죄죄한 몰골을 띤 김미정이 접경지역 너머의 환경을 추가한 지도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네크로맨시로 레벨업하는 성자님

150화 앞마당 멀티(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