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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 160-170

160화 마개조

"힘을 원하는가?"

[평소였으면 그렇다, 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왜지? 넌 힘을 원하잖아."

[주군의 표정을 보니 의욕이 싹 가시더군요.]

"충성스러운 부하를 치하하는 상사의 얼굴이 뭐 어째서."

[악마가 더 어울립니다. 방금 전에 꺼낸 말씀을 되짚어보길.]

"...."

송명석의 입장에서는 악마보다도 더한 존재가 유진이었다.

아라한 길드의 초신성.

장차 한국 헌터 업계를 좌우할 인재로 평가 받던 인재였다가 볼품없는 해골이 되고 말았다.

유진의 제어 능력이 원체 뛰어나서 반감조차 떠올리지 못할 뿐.

[합일] 주문으로 자의식이 또렷하게 살아 있는데 이만큼 협조적인 것도 대단했다.

〔자업자득이로구나.〕

'일장일단이 있다고 해주지 않을래?'

오리지널 주문인 [합일]은 효과가 강력한 만큼 리스크도 크다.

망자의 혼백과 육신이 같이 있으려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야겠지?

그런 상황이라면 되살리는 대상이 아군보단 적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회귀 전에 합일 주문을 전수받은 네크로맨서 중 상당수가 그랬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자의식을 살리면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늘 생각해야 한다.

송명석도 가끔 소소하게 반항하고 그러잖아?

〔그럼 포기해야겠구나.〕

'동기부여를 해주면 되지. 왜 포기해.'

〔저렇게나 완강해서야.〕

'성좌 나리는 가만히 지켜보고나 계셔.'

협상이란 이렇게 하는 거다.

유진은 짐짓 안타까운 듯이 혀를 쯧, 찼다.

"네 뜻이 그렇다면 존중해줘야지."

[주군답지 않습니다.]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시술이야. 싫으면 어쩔 수 없지."

[....]

송명석의 안광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짙은 불신.

이 주인이 그렇게나 듣기 좋은 말을 내뱉을 리 없는데, 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파프너는 이번에 강화해서 드래곤의 힘을 얻었는데 말이야."

[예?]

"역시 내 대전사라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그, 그게 무슨.]

"조정 중이라서 못 데려온 게 아쉽네. 어쩔 수 없나.

[주구우우운!!!]

"왜?"

[힘,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봐봐.

설득까지 1분도 안 걸렸잖아.

〔어리석은지고. 간단한 도발에 홀랑 넘어가버리다니.〕

무너진 신전 터에서 지박령처럼 머무르던 어떤 낙성좌도 간단한 도발에 넘어가던데.

누가 누굴 탓하는지 모르겠군.

"좀 아플 거다."

[언데드에게 감각 같은 게 어디에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지금 할 시술은 혼백 자체에 충격이 전달된다."

[얼마나 아픕니까?]

"너 뒈지기 전에 아팠던 정도라더라."

참고로 경험담이다.

회귀 전 데이터지만 말이야.

송명석은 흠, 짧게 신음을 흘리더니.

[까짓 거, 해보겠습니다.]

"긍정적인 마인드. 아주 마음에 들어."

[속하는 뭘 하면 됩니까?]

"거기 얌전히 누워 있어라."

바닥에 드러누운 송명석의 옆에 풍정룡들에게서 얻어낸 부산물들을 배치한다.

가죽.

비늘.

그리고 뼈.

누워 있는 송명석과 최대한 비슷한 골격으로 배치한 후, [본 컨트롤]로 가다듬었다.

[연금술식 - 강화 회로를 사용합니다.]

[연금술식 - 마나 오버드라이브를 사용합니다.]

뼈와 가죽, 그리고 비늘을 회로로 연결.

영력을 흘려보내보니 꽤 매끄럽게 흘러갔다.

'내 솜씨는 역시 최고야.'

〔한데 무얼 제작하고 있는 게냐?〕

'엘드리치 드래곤 만들던 시절 기억하나.'

〔드래고니안 사체에 여러 수작을 벌이던 것 말이더냐.〕

'표현이 좀 그렇지만, 어쨌든 맞아.'

〔하면 이 하수인도?〕

'아. 그건 안 돼.'

드래고니안 사체는 용족의 격이 온전히 깃들어 있었고.

기반이 될 살점과 뼈 등, 주검의 상태도 만전에 가까워서 변칙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파프너의 혼백과 생전의 특성이 엘드리치 드래곤으로써 모자람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

〔이 하수인은 격이 모자라단 뜻이로구나.〕

'재능은 있는데, 분야가 다르다고 해야지.'

파프너가 수리와 물리에서 만점을 받았다면, 송명석은 생명 쪽에서 최대 점수를 찍은 거나 마찬가지다.

천골.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골격이란 의미의 특성이다.

천무문 문주인 창 우페이의 고유 특성이기도 하니 능력은 증명된 셈.

"송명석아. 이제부터 네 혼백을 여기로 옮길 거다."

[본래의 육신은 버리는 겁니까?]

"다는 아니야. 혼백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일부가 필요해."

[용족의 뼈로 혼백을 옮기는 시술이라니. 믿기지 않습니다.]

강령술에 대해 일자무식인 송명석도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망자에게 깃든 혼백을 분리해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 발언의 당사자가 유진만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신뢰해주니 고맙군."

[주군이 제 손으로 하수인을 파괴하지 않으리란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 그래. 어쨌든 심호흡 한번 해라."

[예?]

얼빠진 송명석의 대답을 한 귀로 흘리며 두개골을 뽑았다.

*

혼백이 머무는 부위.

두개골을 분리해서 풍정룡의 부산물 위에 올려놓았다.

[통증은 따로 없습니다. 훗. 역시 전 대단하군요.]

"아직 시작 안 했으니까 없지."

설레발 치지 마라.

[강화 회로]로 양쪽 뼈를 연결하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내 부름에 답하라."

[언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덜그럭, 덜그럭, 영력을 불어넣은 풍정룡의 부산물이 위 아래로 통통거리면서 요란하게 흔들렸다.

위에 올려놓은 송명석의 두개골도 진동 모드로 놓은 휴대전화 마냥 부르르 떨렸고.

[ㅈ, 주, 군. 이, 거 맞습, 니까?]

"걱정하지 마라. 난 최고의 네크로맨서니까."

[ㄱ, 근데, 네크, 로, 맨서, 는, 주군, 밖, 에, 없....]

"어쨌든 최고죠?"

[빌, 어, 먹, 을.]

걱정도 팔자다.

회귀 전 네크로맨서의 정점에 섰던 몸을 의심하다니.

유진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풍정룡의 부산물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반발력을 영력으로 눌렀다.

-평소와는 다르구나. 용족의 시체라 그러한가?

'아니. 애초에 강령술 대상이 아닌 걸 가지고 주문을 사용해서 그래.'

풍정룡의 온전한 사체가 아닌, 사후에 남은 부산물 일부를 퍼즐처럼 엮어놓았다.

굳이 '시체'란 표현이 아니라 부산물이란 단어를 강조한 것도 그 이유.

제대로 된 강령술 대상이 아니니 주문도 발동될 리 없지.

그래.

평범한 네크로맨서라면 말이야.

'이런 짓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반발력을 억누르며 부산물에 쑤셔 넣은 영력을 송명석의 두개골로 인도한다.

쩌엉- 텅 빈 두개골의 안구 부위에 감돌던 푸른 귀화가 한순간 폭발할 것 같은 기세로 활활 타올랐다.

[으아아!!!! $%!&@!!!]

전반부는 비명이었고.

그 뒷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욕처럼 들리는데 정확히는 모르겠군.

"나는 경고했어."

X나게 아플 거라고 했지?

인간의 정체성을 가진 송명석에게 용족의 부위를 이식했으니 곧바로 받아들이면 그게 더 이상했다.

사람으로 치면 B형인 환자한테 AB형을 수혈한 거나 마찬가지.

[그, 럼, 죽....]

"영혼이니까 괜찮아."

죽을 만큼 아프겠지만.

정말로 뒈지지는 않더라고.

아.

이미 죽은 몸이니까 뒈진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겠구나.

송명석이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신경 쓰지 않고 영력의 흐름을 제어했다.

[대상에게는 강령술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상에게는 강령술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쿵! 쿵! 쿵!

유진과 송명석에게만 들리는 소리.

두개골로 올라온 영력과 풍정룡의 부산물에 깃든 용족의 격이 송명석의 혼백을 쉼 없이 두드린다.

부딪칠 때마다 송명석의 혼백과 용족의 격이 조금씩 섞여들고.

[용아병을 제작했습니다]

[혼백과 육체의 성질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성위가 한 단계 하락합니다.]

반발하던 영력이 두개골을 통과해서 한 바퀴 순환까지 무사히 끝냈다.

바람 앞 촛불 마냥 줏대 없이 흔들리던 송명석의 안광이 번쩍! 한순간 강렬한 빛을 토해내고는 순식간에 갈무리.

곧바로 일어서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새로운 육체를 주신 은혜를 각골난망하겠습니다.]

"새 뼈에 잘 새기도록."

[힘이 넘쳐납니다. 손을 뻗으면 태산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응. 아니야. 오버하지 마."

바위 정도는 가능하겠지, 라고 중얼거린 유진은 바뀐 송명석의 스탯을 확인했다.

[용아병(송명석)]

등급 : ★★★★ -> ★★★★★★

종족 : 언데드 -> 용아병

*특성

용의 인자[A], 바람 걸음[B+] 추가.

가장 큰 변화는 성위.

두 단계나 뛰어 오르면서 스펙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송명석의 육신은 평범한 인간.

잠재력이야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죽었을 때 기준으로는 4상 무투계 헌터에 불과했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로 능력을 끌어 올려줘야 했던 비루한 몸뚱이.

이젠 풍정룡의 부산물로 구성한 새 육체를 얻음으로써 죽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내 손가락이 몇 개로 보이냐?"

[셋입니다.]

"환각 같은 후유증은 없군."

[후유증?]

"이 시술 했다가 새 육신에 적응을 못해서 미친 애들이 꽤 되거든."

[죽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 미친다고 죽진 않잖아."

참고로 이 강화 시술을 받고 제정신을 유지한 망자는 30% 정도다.

성공 수치는 말 안 해주는 게 좋겠지?

〔희박한 확률을 놓고 되도 않는 도박을 벌였구나.〕

'송명석이라면 버틸 거라고 확신했다.'

녀석의 잠재능력을 믿었으니 일을 벌였지.

아무 근거 없이 한 건 아니라고.

〔혼돈의 화신처럼 막무가내로 굴지 말아라.〕

'이왕이면 하수인을 믿었다고 해주시죠.'

유진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죽였다.

*

용아병으로 재탄생한 송명석은 날아다녔다.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하늘을 누볐다.

[바람 걸음]

윈드 골렘의 바람 제어처럼 간섭하는 능력과는 조금 달랐다.

바람을 걸어 다닌다는 특성.

공기 흐름을 느끼고 만지며 밟을 수도 있다.

[죽으십시오!]

푸아악-.

늘어난 스탯에 강풍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되니 풍정룡은 더 이상 적수가 되지 못했다.

[참으로 두렵습니다. 제 힘이지만 대단하군요.]

"내가 준 거 가지고 생색 내지 마라."

[최형태 따위는 바람을 누비기는커녕 고꾸라졌을 겁니다.]

비교할 대상이 파프너가 아니고 최형태라.

아직 파프너랑 붙어서 이길 자신은 없는 모양이다.

"풍정룡은 새끼다. 진짜 정룡은 따로 있어."

[예?]

"템피스트. 7성급 용족이다."

용의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애꾸눈에 필적하는 괴물들이 널려 있다.

여기가 괜히 마경인 줄 아니.

튜토리얼 맛보고 쉽다며 히히덕대긴.

[다른 지역은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똑같다. 새끼 정룡이 힘을 축적하면 성체로 자라나거든."

성체는 그래도 잡는 보람이 있다.

새끼 정룡처럼 몸뚱이 대부분이 증발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

회귀 전에는 성체들을 잡아서 본 드레이크 병단을 꾸리기도 했는데 말이야.

[골렘 연성을 사용합니다.]

성체가 나타나거나, 혹은 새끼 정룡의 숫자가 많으면 골렘을 불러냈다.

못 이길 것 같으면 미끼로 던져주고.

해볼 만할 때는 전력을 다해 정룡을 사냥했다.

[역천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나도 이제 근접전을 꽤 하지 않냐?"

[충언하자면 그런 말씀은 쉽게 하는 게 아닙니다. 주군의 움직임은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이 새X가."

[각자의 재능이 다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하하.]

풍정룡을 어느 정도 사냥하고는 불의 영역으로.

그 다음에는 물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나날이 아공간에 쌓이는 새끼 정룡들의 부산물과 용석.

2주라는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갔다.

161화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우적-.

건조한 육포를 조심스럽게 뜯고는 질겅질겅 씹었다.

턱을 몇 번 움직이니, 한 방울의 땀이 뺨을 타고 또르륵- 아래로 흘렀다.

"후. 더럽게 힘들군."

대지의 영역.

거센 바람도, 뜨거운 열기도, 입을 틀어막는 물도 없는 평범한 곳이다.

중력이 10배로 적용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힘을 잘못 조절하면 이가 나가버리니."

호흡이라는 자연스러운 행위조차, 이곳에서는 큰 노동이다.

턱을 위 아래로 움직이는 것조차 신중해야 한다.

아니면 힘이 너무 들어가서 상처를 입거나, 안 들어가서 헛짓거리가 되니까.

[유기체는 참 불편합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이 안 나니.]

"네가 움직일 수 있는 건 내 영력 덕이거든?"

[뭐, 이런 몸이 되면서 장점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여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냐."

[그건 좀.]

헛소리를 지껄이던 송명석이 입을 턱 다물었다.

용아병으로 몸을 갈아탄 후에 강해졌다고 기고만장해지긴.

〔그래도 저 치가 노력해준 덕에 용석을 수월하게 획득하지 않았느냐.〕

'아직 멀었어. 용아병의 능력을 100% 발휘하려면.'

〔제대로 된 용족도 아닌 것들을 엮어내어 만든 얼치기 아니더냐.〕

'시스템은 용아병이라고 인정했지. 그럼 된 거다.'

용아병의 어원은 드라코 이스메니오스의 이빨로 만들어진 인간.

즉, 언데드가 아닌 별개의 종족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용의 뼈로 만든 피조물 전체를 일컫는 용어로 변질되었지만 말이야.'

중요한 것은 시스템 상 언데드와 구분된다는 사실이다.

송명석은 용아병이란 '종'을 지녔으되, 헌터로 치면 무투계나 마법계 같은 전문 분야를 선택하지 않은 상태.

유진과 마찬가지로 제 능력과 스킬만을 이용해서 무투계 흉내를 내는 거나 마찬가지다.

〔호오. 그렇다면 왜 그 사실을 일러두지 않는 게냐?〕

'말했잖아. 아직 본인의 몸에도 적응을 못했다고.'

용아병의 무력은 최소 7성.

새끼 정룡들의 부산물을 그러모아 만들었다지만, 시스템 상으로 '용아병'이란 표기가 나온 만큼 스펙은 확실했다.

송명석이 그 힘을 온전하게 다루지 못해서 스펙 및 성위에도 제약이 붙는 것이다.

'적응을 마치면 추가 시술을 통해 데스 나이트로 만들어야지.'

용아병 베이스의 데스 나이트라.

회귀 전에도 몇 구밖에 못 만들었던 강력한 언데드다.

기대되는군.

송명석의 잠재능력을 생각하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으리라.

"크라라라!"

먼 곳에서 들리는 괴성.

송명석은 검 두 자루를 손에 쥐었다.

"후퇴 준비를 해라."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주군!]

"포효에 담긴 마력의 파장을 읽어라. 성룡급이다."

성룡의 무력은 7성.

접경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는 애꾸눈과 버금가는 전투력을 보유했다.

[빚을 갚지 못하고 물러나야 하다니.]

"저번처럼 성룡한테 달려들었다가 박살나면 복구 안 해준다."

1주 전, 용아병의 힘에 도취한 송명석이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성체한테 몇 합 버티지도 못하고 오체분시 된 이후로는 무조건 회피했다.

[모두 주군을 위함이지 않습니까.]

성체가 된 정룡은 새끼 때와 달리 사냥하면 주검이 그대로 남는다.

본 드레이크로 만들면 언데드 군대의 전력 상승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

"호승심 때문은 아니고?"

[아주 조금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튼 다 주군의 힘이 되기 위함입니다.]

"퍽이나 그러겠다."

조소를 머금은 유진이 발에 힘을 주며 성룡과 거리를 벌렸다.

일찍 적을 파악해도 도망치는 건 쉽지 않았다.

불, 물, 바람, 그리고 흙.

정룡의 네 요소와 맞물리는 지형적 특색은 헌터에게 체력과 마력 소모를 강요했다.

힘이 조금만 과하게 들어가도 공기 중의 마력 파장에 민감한 정룡에게 발각되기 일쑤였으니.

송명석을 흑암의 반지에 거둔 채, 외부로 방출되는 영력을 최소한으로 하며 거리를 벌려야 정룡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이번에는 운 좋게 넘어갔구나.〕

'실력이라고 해주지?'

〔어쨌든 칭찬하마. 골렘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바깥에서 챙겨온 마석도 얼마 안 남았어.'

새끼 정룡들이 많이 몰려들거나.

아니면 성룡과 조우했을 때 이목을 끌 목적으로 골렘을 제작, 던져주었다.

1회성이라서 아낌없이 미끼, 혹은 단시간의 전력 증강용으로 사용했는데 그마저도 슬슬 한계다.

용의 계곡에서는 일반적인 마석을 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 용석이란 물건으로 골렘을 제작하진 않는 게냐?〕

'안 될 걸.'

〔되면 된다, 아니면 아니다. 확실히 말하려무나.〕

'연구하면 될 지도 몰라. 근데 회귀 전에도 딱히 안 해본 시도라서.'

용석은 다양한 방면에 사용되는 강력한 촉매다.

1회성으로 사용하는 급조 골렘 제작용으로 써먹을 일은 없었다.

'신준석이라면 만들 수도 있겠지.'

〔그대답지 않게 모자람을 빠르게 인정하는구나.〕

'회귀 전 기준이야.'

연금술사의 정점에 도달한 대연금술사의 실력이라면.

즉석으로 연구해서 용석 베이스의 골렘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겠다.

부 전공 수준으로 필요한 부분만 연금술을 배운 유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의미.

'의미 없는 문제로 씨름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

크로노스의 사념을 밀어낸 유진은 현재까지의 수확을 총 정리했다.

-하급 용석 x 371개

-새끼 정룡의 부산물 약 500kg.

여기서 말하는 새끼 정룡이란, 4대 속성 전부를 일컬었다.

괜히 불 / 물 / 땅 / 바람의 지역을 돌아다녔겠는가.

젊었을 땐 고생을 사서 한다는 속담도 있지만, 유진은 그 이야기를 크게 신용하지 않았다.

'회귀 전 나이로 치면 젊지도 않다고.'

정룡들을 사냥해서 얻은 소득만 정리하면 이 정도요.

한 가지 수확이 더 있다.

'불사자의 관에도 충분히 정룡의 힘을 축적했군.'

사냥할 때마다 틈틈이 불사자의 관을 꺼내서 정룡이 죽는 순간에 에너지 일부를 흡수했다.

죽는 순간 시체가 자연으로 환원되는 새끼 정룡.

순수한 자연의 마력도 굳이 따지자면 피 아니겠나, 라는 생각에 혹시나 하고 불사자의 관을 사용해보았다.

'근데 되더라고.'

회귀 전에는 불사자의 관을 얻은 후에 용의 계곡을 방문할 일이 없어서 시도하지 못했다.

2회차인 현생에서는 [메멘토] 주문 덕에 피의 발렌타인을 예견.

불사조 길드가 산산조각 내기 전에 먼저 입수할 수 있었기에 시도할 수 있었던 기연이다.

최근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쿨타임이 차서 메멘토로 다시 들여다 본 덕에 기연 하나가 숨겨진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필리핀이라고 하였지? 그 나라는 언제 방문할 계획이더냐.〕

'이제 가야지. 용석이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니 최대한 여유롭게 챙겼어야 했어.'

〔그렇게나 팔자 좋은 소리만 늘어놓다 보면 기연의 원 주인이 가져가는 수가 있느니라.〕

내 참.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라고.

로마노프 가문이 통제 중인 용의 계곡에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말이야.

그래도 2주 넘게 고생한 수확은 넘칠 정도로 얻었다.

'슬슬 돌아가 볼까.'

유진은 용의 계곡을 돌아다니면서 발견한 균열들을 떠올렸다.

굳이 입장 때 이용했던 균열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어디를 통과하든, 무작위로 나가지는 건 마찬가지이니까.

*

후우우웅-.

몸이 붕 떠올랐던 느낌도 잠시, 시야가 홱 바뀌면서 눈가가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들어갔던 곳과 다른 장소.

마경의 크기가 한국의 영토 중 절반이나 되는 크기인 만큼, 입장 때 이용한 균열과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쉽게 짐작가지 않았다.

[그 지긋지긋한 곳을 이제야 벗어나는군요.]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을 거다."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둔 신호 발신기를 꾹 눌렀다.

삐- 삐- 옛날 방식의 기계음이 흘러나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푸른빛과 함께 메시지 하나가 송출되었다.

[현재 위치 - 중국 퉁장시]

[발신자와의 거리 - 112km]

[주군. 왜 저희의 위치가 중국인 겁니까?]

"퉁구스카 강은 중국하고도 맞닿아 있으니까."

침식 범위만 경기도 + 충성도 + 강원도 급인 마경이다.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러시아의 시 급 행정지역 하나를 삼켰으니.

무작위로 나온 위치가 중국일 가능성도 0이 아니었다.

'100킬로라. 이틀 정도 걸리려나.'

이 곳이 한국이었으면 고속도로에서 1시간 정도 걸렸겠지만.

침식지역에서는 아무리 짧아도 하루는 잡아야 한다.

유진은 미리 챙겨놓은 야영 장비를 꺼내서 느긋하게 세팅했다.

간혹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몬스터들도 있었지만 송명석 선에서 모두 정리가 됐다.

"내 부름에 답하라."

시체들은 모두 언데드로 되살려서 호위로 써먹었고.

아.

망자들을 부리는 감각, 2주 만에 느끼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구나.

브로커 김 씨를 기다리며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파츠츠츠츠-!!

웅혼한 마력의 울림이 먼 곳에서 솟구쳤고, 그 파장을 느끼자마자 온 몸의 솜털이 삐쭉 섰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마력의 파동.

뭐지?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잠깐만...."

유진이 말리기도 전에 송명석이 웅혼한 마력의 울림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파악되지 않은 위험으로부터 네크로맨서를 보호하고.

나아가서는 적을 파악하며 시간을 끌기 위해 필요한 행동.

평소 같았으면 유진이 먼저 명령을 내렸겠지만, 방금 전 마력의 파장이 원체 심상치가 않아서 말리려고 했었다.

〔계약자여. 심상치가 않구나.〕

'나도 알아.'

유진은 바로 [고스트 아이]를 사용.

송명석과 시야를 연결했다.

저 어마어마한 마력의 파장을 일으킨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해야, 대처 방법도 나오니까.

한데.

시야를 공유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지면이었다.

'왜 고꾸라져 있지?'

머리를 지면에 처박은 채 꿈틀거리는 송명석.

설마.

[고스트 아이]를 적용해서 시야가 공유되기까지 몇 초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시간 만에 제압된 건가?

"그대. 재미있는 술법을 사용하는군."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

[고스트 아이]를 해제한 유진의 앞에는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일그러지는 유진의 표정.

'형이 왜 여기서 나와?'

7대 명가 중 하나인 천무문의 주인, 무왕이 유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무왕 창 우페이.

마법왕 드미트리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강자이자, 천무문의 창시자다.

"아. 걱정 말게. 그대의 소환수는 무사하니."

창 우페이가 가볍게 손짓하자,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고개를 처박은 송명석이 둥실 올려졌다.

염력 같은 마법이 아니다.

순수한 '의념'과 마력을 조합.

이 세계에 간섭하는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선보인 것이다.

[....]

1합 만에 제압당한 송명석은 안광을 가라앉힌 채 창 우페이를 노려보았다.

차분하게 벼려진 살기.

평소의 송명석하고는 다른 모습이 마음에 들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상대는 무왕이다. 가만히 있어."

[무왕...?!]

의구심으로 가득한 사념.

그러게.

무왕이 어디 시골에서 풀어 키우는 개도 아니고.

만주 변두리의 이름 없는 숲에서 마주치기에는 이름값이 너무나도 높은 인물이다.

'갑자기 무왕이 나타났다, 라.'

6성 스펙의 송명석도 한 번에 제압하는 강자.

어떻게 하면 몸을 뺄 수 있을까.

가용 가능한 주문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무왕의 시선을 돌릴 방법이 하나둘 떠올랐다 사라졌다.

창 우페이의 눈가에 떠오르는 호기심.

"무왕이시여. 저 자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불가. 저 소협이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니 손대지 말게."

뒤따라온 헌터가 병장기를 꺼냈지만, 창 우페이는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당신.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닌가?"

"소협이 누구인지 알고 손을 대겠는가."

"맞는 말이군."

"하지만 이젠 알 것 같군. 한국에서 온 천유진 소협."

창 우페이의 입가 위로 묘한 미소가 드리웠다.

162화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다(1)

"소협의 명성은 익히 들었네. 만나서 반갑군."

이제 와서 통성명이라.

송명석을 의념으로 속박해놓고 태연하게 인사를 하는군.

유진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죽였다.

"천하의 무왕께서 이런 변두리에는 무슨 일로 행차하신 거지?"

"각자 사정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천 소협도 나름의 사연을 지닌 건 마찬가지로 보이는군."

"남의 귀한 소환수를 붙들어놓고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런가. 돌려주지."

무왕이 가볍게 손을 털자, 허공에 둥실 떠올랐던 송명석이 유진 쪽으로 날아왔다.

쿵,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송명석은 바닥을 차면서 일어나더니 쌍검을 다시 쥐었다.

[주군! 어서 제 뒤로 오십시오.]

"상대는 무왕인데?"

[그냥 죽어주실 겁니까! 주군의 숨이 끊어지면 저도 죽으니 따라주십시오!]

넌 이미 두 번 죽었잖아.

충성심보다는 다분히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

그 진실 된 모습에 유진이 픽, 웃었다.

"천 소협은 침착하군."

"당신이 나를 해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그리 생각하는 근거가 있나?"

"지금까지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게 가장 확실한 증거다."

무왕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천외천.

회귀 전이었으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모든 능력을 쥐어 짜내도 승률이 0이다.

〔0이라고 단언하다니. 너무 포기가 빠른 게 아닌가?〕

'상대는 9성이야. 어떻게 이겨?'

〔그대답지 않구나.〕

'승률을 말하는 거다. 도망을 전제로 하면 조금 달라.'

〔호오. 가능성은 얼마나 되느냐?〕

'0.1%.'

유일한 방법은 등 뒤에 열려 있는 균열로 들어가는 것뿐.

전력으로 뛰면 3초 안에 진입할 수 있다.

송명석과 언데드 군대, 그리고 블러드 골렘을 모두 제물로 바치면 아주 낮은 확률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천 소협은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군. 이 순간에도 퇴로를 모색하다니."

"들켰네?"

"본 문주를 앞에 두고 이런 태도는 오래간만이라. 꽤 색다른 경험이다."

"손가락 한 번 휘두르면 내 목을 자를 수 있는 양반이니 긴장 좀 한 것뿐이다."

"평범한 헌터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지."

창 우페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숨 막히는 기운.

용아병(송명석)은 언데드 소환수이니 그렇다 쳐도, 내뿜는 기운이 4성에 불과한 유진이 목을 뻣뻣하게 들고 있는 것은 창 우페이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천무문을 세우고 무수한 헌터들을 봤지만, 유진과 같은 인물은 처음 보았다.

'내 기운을 못 느끼는 게 아니다.'

창 우페이가 내뿜는 기세는 반경 1킬로미터를 뒤덮었다.

몬스터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머리를 땅에 박았고.

공기의 흐름조차 그의 지배하에 들어와 있다.

마음먹으면 손가락을 까딱일 필요도 없이 유진의 목숨을 거둘 수 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나 담대하다니.'

창 우페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소협은 다르네. 본 문주 앞에서도 심지가 꺾이지 않는군."

"마음을 꺾을 필요가 있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발버둥이라도 칠 거다."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라네. 소협처럼 말일세."

"서로가 갈 길이 바빠 보이는데. 그만 볼 일 보러 가시는 게 어때?"

무례하기까지 한 유진의 대답.

그렇지만.

창 우페이는 오- 하며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감탄사를 흘렸다.

"본 문주가 왜 이 곳을 방문한지를 알고 있었나?"

"용의 계곡이겠지. 로마노프 가문이 싫어할 만도 해. 극동 쪽 영향력을 상실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아."

"소협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건가."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누구라도 유추할 수 있을걸."

검지로 제 머리를 툭툭 건드리는 유진.

창 우페이의 옆에 선 외눈의 남자가 살기를 드러냈다.

"문주님. 저 자를 돌려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흠."

"문주님께서 직접 손을 더럽히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선에서...."

"본 문주의 의뢰는 용의 계곡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싱. 선을 넘지 마라."

싱?

유진은 한쪽 눈을 가린 사내의 정체를 깨닫곤 쯧, 하고 혀를 찼다.

"구룡방의 아홉 머리도 꽤 한가한가 봐. 뒷구멍 안내에 직접 나서고 말이야."

"...귀인을 모시는 영광을 자처했을 뿐이다."

구룡방의 아홉 머리 중 하나.

외눈의 사신, 싱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릉거렸다.

중국 암흑가 상당 부분을 장악한 거대 조직도 천무문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했다.

최고위 간부인 싱이 안내역을 맡은 것도 그 까닭.

무왕 창 우페이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어마어마한 세를 자랑하는 구룡방조차 바람 앞 촛불 신세에 불과했다.

유진의 지적에 굴욕감을 삼키던 싱이 단검을 손에 쥐었다.

"차라리 잘 됐다. 황해에서의 빚을 여기서 갚겠다."

"싱. 천 소협과 해결해야 할 은원이 있나?"

"그렇습니다. 문주님."

"이번은 본 문주의 면을 보고 물러나지 않겠는가."

뜻밖의 중재에 싱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창 우페이가 왜 끼어드는 건가!

따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입술 하나 뻥끗 할 수 없었다.

상대는 마법왕 드미트리와 어깨를 견주는 강자.

둘 사이의 은원에 왜 끼어 드냐고 물었다간 구룡방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한판 벌여도 상관없는데."

"훗. 뛰어난 인재를 허무하게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 문주의 배려임을 이해하라."

"그러다가 나중에 천무문이랑 적대관계가 되면 어떻게 하려고."

"본 문주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고도 꺾이지 않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도전을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창 우페이는 유진의 담대함을 보고 흡족했다.

초월의 영역에 한 발자국 들이민 후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아무리 마력을 갈무리해도 초월자 특유의 존재감에 굴복하는 이들뿐.

한데.

유진은 달랐다.

"빨리 성장하여라. 그래서 본 문주와 겨루어보자꾸나."

"7대 명가의 수장이나 되는 양반의 도전장은 살인예고 아닌가?"

"훗. 본 문주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는군.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인물과 만났지만, 나쁘진 않았다.

장차 로마노프 가문과 일전을 벌여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좋은 이미지를 유지해서 나쁠 건 없지.

유진은 망자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구룡방의 아홉 머리, 싱은 주머니에 넣어둔 발신 장치를 켰다.

*

삐- 삐-.

유진은 발신기를 힐끗했다.

20킬로미터까지 줄어든 거리.

브로커 김 씨도 다가오고 있다 보니 양측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주군. 숨을 좀 돌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쉴 틈이 없다."

[천무문주가 중재를 했으니 걱정할 건 없지 않습니까.]

"손을 쓰지 말라는 건 간부인 싱뿐이었다."

싱은 7성의 헌터.

창 우페이가 중재하지 않았으면 유진도 대적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그렇지만.

"다른 녀석들이 움직이는 건 별개다."

구룡방은 중국 음지 곳곳에 뿌리를 내린 거대 조직.

간부인 싱이 못 나선다고 해서 유진을 해할 방법은 차고도 넘쳤다.

"구룡방은 반드시 수작질을 부린다."

[확신하시는군요.]

"나쁜 놈들 머리 굴리는 거야 뻔하지. 자기들이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당한 거만 떠올린다."

유진은 송명석을 힐끗 바라봤다.

죽기 전의 이 녀석도 업보는 생각 안 하고 억울하다고 비명을 질렀지.

[참 후안무치한 자들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주군. 그런데 왜 저를 보시는 겁니까?]

"별 거 아니다."

누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무왕과 조우하고 나서 한나절 정도 지났을 때, 브로커 김 씨와 재회했다.

"다행입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부탁할 게 하나 있다."

"말씀하시죠."

"지도 한 장 주고. 아무르 강 상류에 가서 이걸 흘려줄 수 있겠나?"

새하얀 뼈를 받은 김 씨가 표정을 굳혔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구룡방과 사소한 다툼이 발생할 것 같아서."

"차라리 극동 공화국으로 넘어가시죠."

"그게 더 위험해. 놈들이 뻔히 예측하고 있을 거다."

만주 일대는 구룡방의 입김이 큰 지역이다.

천무문과 거리가 멀기에 정부의 영향력보다 어두움이 더 짙었다.

싱이 얼마나 많은 헌터를 동원할지는 짐작이 안 가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이거야 원. 생각도 못한 일에 휘말리셨군요."

"업보라고 생각해야지."

"천 대표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김 씨는 하얀 뼈를 품속에 집어넣은 후, 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주군. 그래도 길 안내역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 씨가 있으면 강행군을 할 수 없다. 지켜주기도 어렵고 말이야."

[지도 한 장 가지고 괜찮을지.]

"걱정하지 마라. 지도가 있으면 방향만 대충 잡아도 되니까."

유진은 씩 웃었다.

*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브로커 김 씨는 몬스터들의 영역을 최대한 피해서 안내했다.

그에 비해 유진은 지도를 보고 방향만 잡아 나아가다 보니 몬스터들과 반복적으로 충돌했다.

[리바이브를 사용합니다.]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막 쓰러진 시체를 일으켜서 적 무리 한가운데로 던지고 폭발.

쿠아아앙-! 굉음과 함께 수십이나 되는 몬스터들이 폭발에 휘말렸다.

[주군의 곁으로 보내진 않습니다.]

[텐터클 블레이드]

다섯 가닥으로 나누어진 암흑 투기가 몬스터들을 도륙했고.

그 뒤를 따르는 망자의 군대가 썩은 이를 드러냈다.

[아머드 좀비가 피해를 입혔습니다.]

[언홀리 커맨드의 효과로 피해 일부가 사용자의 영력으로 치환됩니다.]

지휘 스킬을 흉내 내어 만든 강령술.

언홀리 커멘드 범위에 들어온 언데드들이 피해를 입히면 영력이 회복되었다.

망자들의 수가 적을 땐 효과를 크게 못 봤지만.

400구에 달하는 언데드들을 부리니 회복되는 양도 상당했다.

〔너무 느긋한 것 아니더냐?〕

'싸움을 피할 수는 없어. 차라리 물량을 불리는 게 나아.'

적은 몬스터만이 아니다.

구룡방에서 나온 추격자들.

싱이 보낸 긴급 전문을 해독한 구룡방은 급한 대로 헌터들을 편성.

무왕 창 우페이를 안내했던 곳 위주로 팀들을 보내서 유진의 행적을 쫓았다.

"천유진이다!"

"놈만 죽이면 돼!"

인적이 드문 곳.

또한,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한 곳으로 이동했는데도 추격자들이 따라붙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개개인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 정도일까.

유진의 행적을 발견하고 쫓아온 이들은 막상 언데드 군대를 마주하자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중국 최대의 암흑 조직 수준. 잘 알았습니다.]

"어떤데?"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습니다.]

"이 놈들은 피라미다. 방심하지 마라."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주군.]

콰직!

그 말을 내뱉고 나서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송명석의 어깨가 박살났다.

흔치 않은 원거리 저격.

미사일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화살에 오러를 듬뿍 실어서 날린 공격에 당한 것이다.

"정말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군."

[아, 아닙니다. 주군!]

"구룡방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를 쫓을 모양인가보다."

초장거리 저격.

거기에 미사일만 한 크기의 화살의 주인은 유진도 알고 있는 녀석이다.

'꽤 귀찮게 되었네.'

침엽수가 무성하게 자리 잡은 숲.

유진은 그 너머에 있을 화살의 주인을 떠올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163화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다(2)

구룡방 아홉 머리 중 하나.

싱이 전달한 급보는 구룡방 만주 지부를 뒤흔들었다.

"사룡 님이 지부의 총력을 동원하라 하셨다."

"한국 진출에 가장 훼방이 되는 적, 블랙 컴퍼니 대표를 죽여라."

구룡방이 서해에서 유진에게 격퇴 당했단 사실은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한국은 태평양으로 향하는 입구이자, 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범죄 네트워크 형성에 꼭 필요한 요충지.

만약 유진을 죽이거나 포획하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겠지.'

'공을 인정 받아 본부 쪽 사업을 따낼지도.'

'새 구룡을 밀어내고 아홉 머리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어.'

유진이라는 보물 고블린의 출현!

구룡방 만주 지부는 생각도 못한 빅 이벤트에 들썩거렸다.

"용병, 용병을 고용해야 한다."

"녀석의 주력은 모두 한국에 있다. 이 기회를 잡아야 해."

"다른 머리한테 보고할 필요는 없다. 결과로 증명하자."

구룡방 만주 지부의 책임자는 셋.

모두 여섯 개의 별을 완성시킨 강자였고, 야심만만했다.

-내가 천유진을 잡는다.

각자의 전력을 최대로 동원했고, 모자라면 여유 자금을 털어서 용병까지 고용했다.

'이 정도로는 모자라.'

메이 샤오.

세 책임자 중 한 명이자, 원거리 공격이 특기인 여인은 언데드들이 값진 보물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용의 계곡 근처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극동 공화국 쪽이라던데."

"뭔 귀물이라도 나타났나봐."

꼬리에 꼬리를 물며 퍼져가는 소문은 점점 덩치를 불려갔고.

만주 헌터 업계 전체가 보물 고블린의 정체도 모른 채, 용의 계곡을 향했다.

초봄이었다.

*

발리스타로 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화살.

추가 공격이 있을까 [부정 충격 방패]를 전개했지만, 온 것은 화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언데드?"

"구룡방에서 현상금을 건 자가 분명해."

"어떻게 할까?"

"제압부터 하고 보자고."

보물 고블린(?)을 발견하자 눈이 벌게진 용병들.

유진은 쯧- 하고는 혀를 찼다.

"귀찮게 됐군."

[속하가 처리하겠습니다.]

"오냐. 숨은 붙여 놔라."

용아병으로 몸뚱이를 갈아탄 송명석의 신위는 6성 수준.

암흑 투기 응용력은 뒤떨어져도 어마어마한 스펙이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었다.

동 스펙의 헌터와 겨루면 한 수 뒤처지겠지만.

누굴 상대하는지도 모르고 군침을 흘리는 중인 어중이떠중이들한테는 과분했다.

[입은 남겨두었습니다.]

"친구들. 내가 궁금한 게 있어. 친절하게 답해주면 고맙겠군."

헌터들에게서 정황을 들으니 실소가 절로 나왔다.

누굴 보물 고블린 취급해?

구룡방 놈들. 아주 사람을 사냥감 취급하고 있군.

'일장일단이 있는 판단이다.'

용의 계곡과 맞닿아 있는 중국의 영역.

만주는 극동 공화국과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다.

특히 유진의 이동 루트는 모두 침식지역이라서 포위망을 넓게 구성하기가 어려웠다.

구룡방에서는 뜬소문을 퍼트려서 관계자 외 일반 용병이나 헌터들을 움직이게 만들었고, 유진의 행적을 쫓기가 훨씬 쉬워졌다.

'대신 연계는 허술해진다.'

구룡방에서 고용한 용병들이나 헌터라면 모를까.

보물 고블린을 찾아 위험에 뛰어든 자들은 구룡방과 협조할 이유가 없었다.

[주군. 어떻게 합니까?]

"숨통을 끊어라."

[존명.]

이미 숨이 껄떡거리는 놈들이다.

회복주문이나 포션이 아니면 가만 둬도 죽을 터.

차라리 언데드로 되살린 다음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봉사를 시키는 게 자비겠지?

〔그게 어디를 봐서 자비더냐.〕

귀찮아질까봐 밀입국 했는데.

엉뚱한 포인트에서 발목을 잡혀버렸군.

용의 계곡을 벗어나고 나서 무왕과 구룡방 아홉 머리 중 하나를 만날 줄 누가 알았나.

쇄애애액-!

다시 한번 허공을 격하며 날아드는 미사일, 아니 화살.

송명석이 [텐터클 블레이드]로 허용량을 초과한 암흑 투기를 전개해서 화살을 쳐냈다.

콰지직, 유니크 등급 검이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의 소리.

[백광검]으로 진로를 막아서고.

동시에 [적광검]으로 화살에 실린 오러를 깎아내서 어떻게든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받아냈습니다. 주군.]

"또 온다."

[빌어먹을!]

투쾅-!

같은 부위에 꽂히는 화살.

송명석이 급히 암흑 투기를 끌어 올렸지만 의념을 충분히 가다듬지 못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몸에 구멍 나는 건 면했네."

화살을 막아낼 힘이 충분하지 않음을 인식하자마자 텐터클 블레이드로 구현한 암흑 투기로 궤도를 살짝 틀어냈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힘을 역이용.

저항하지 않고 도리어 다리에 힘을 주어서 바닥에 고꾸라지는 대신 화살을 흘려보냈다.

쾅! 지면에 꽂힌 화살은 수 미터 크기의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속하의 암흑 투기에 힘을 소진했을 텐데도 이 정도 위력이라니.]

"정통으로 맞으면 죽겠지."

[화살에 이만한 힘을 실었으면 멀리 있지 않을 겁니다.]

"아서라. 못해도 5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을 걸."

[말도 안 됩니다. 그 정도 거리라면 화살에 담은 오러가 사라지고도 남았을 겁니다.]

원거리에 특화된 무투계 헌터는 거의 없다.

일단 원거리 공격과 궁합이 좋은 고유 특성이 잘 나오지 않기도 하고.

마법계 헌터의 주문을 대체할 정도로 뛰어나지 않아서다.

그뿐이랴.

어찌어찌 활 특화 고유 특성을 살려서 벽을 넘어서면 그 다음 문제가 들이닥친다.

[오러를 발현하려면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제 육체든 병장기든 말이지."

[화살에 오러를 담아서 발사해도 사거리가 그렇게 길지 못하다는 게 상식 아닙니까.]

"맞다. 그래서 이렇게 무식한 화살을 쏜 거다."

더 많은 오러를 쑤셔 박기 위해.

화살을 발사하는 순간부터, 불어넣은 오러가 빠르게 소모된다.

그렇다면.

화살 자체를 키워서 투입하는 오러의 양을 늘리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공성병기에 가까운 화살을 쏘아낸 녀석, 메이 샤오는 그 방법으로 저격 사거리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효과는 있잖아."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저격을 했다.

풍정룡의 시체를 조립해서 만든 용아병의 몸뚱이에 구멍을 낼 만한 위력.

스쳐도 중상이고.

정통으로 맞으면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 곁으로 가기 딱 좋겠지.

〔위험한 상황이로구나.〕

'꽤 즐거워 보이는 걸.'

〔그대가 이 시련을 무슨 수로 극복할 지 궁금한 것뿐이로다.〕

크로노스의 사념에는 감출 수 없는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네크로폴리스가 아닌 장소.

쓸 만한 하수인은 송명석과 블러드 골렘 뿐.

반면에 적은 넘쳐났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이라고 생각하겠지?'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절체절명까진 아니어도 위험한 상황인 건 여전했다.

구룡방 소속 헌터들은 물론이요.

녀석들이 고용한 용병이나 헌터들, 그리고 보물 고블린의 정체를 확인하러 달려드는 부나방 모두 적이나 마찬가지다.

'저격수까지 내 심장을 노리고 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쫓아가면 되지 않겠냐고?

발사 후 곧바로 해당 위치를 벗어나서 다른 저격 포인트로 이동했을 것이다.

이 곳은 만주. 놈들의 홈그라운드이니 저격 포인트를 예측해서 미리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무왕보단 낫지.'

모든 것을 판돈으로 올려놔도 생존할 확률이 0.1% 정도에 불과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해볼 만 했다.

"여기다!"

"천유진이다. 되도록이면 사로잡아라."

이번에는 구룡방 측 헌터들이 유진을 발견하고는 공격 마법을 사용했다.

망자 수십 마리가 폭발에 휘말려서 새까맣게 타버렸고.

무투계 헌터가 오러를 실어 휘두른 병장기가 하급 언데드들을 도륙했다.

"소모전으로 가면 유리할 줄 알았나본데."

유진은 킬킬거렸다.

숲 어딘가에 모습을 감춘 채 빈틈을 노리는 저격수.

메이 샤오는 한 가지를 착각하고 있다.

'내가 널 알고 있다는 거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을 유진은 참 좋아했다.

*

"제법이잖아."

메이 샤오는 감았던 한 쪽 눈을 뜨면서 중얼거렸다.

5킬로미터가 넘는 초장거리 사격.

보통은 알아채기도 전에 화살에 가슴팍이 뚫려서 죽었고.

알아채더라도 화살의 어마어마한 질량과 오러의 파괴력에 대응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4발 째인데도 안 되네."

음지에 헛소문을 퍼트려서 전장의 혼란을 유도했고.

부나방처럼 달려든 무관계한 헌터들이 죽어 나갈 때 화살을 쏘았다.

"샤오 님.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겠습니다."

"얼마나 가야 하지?"

"10분입니다."

"그럼 홍고에게 소식을 흘려."

"알겠습니다."

홍고는 메이 샤오와 동급의 간부.

경쟁자에게 정보를 흘리는 꼴이지만, 메이는 침착했다.

'유효타를 먹이려면 더 큰 혼란을 유도해야 해.'

첫 공격 때는 유진의 소환수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나 했지만, 금세 회복해버렸다.

언데드이니 팔이나 다리를 날리는 것으로는 모자랐다.

머리를 부수지 않는 한.

저 소환수는 끊임없이 회복해서 유진을 보호할 것이다.

'무력은 홍고와 비슷한 수준. 차라리 홍고를 끌어들여야겠어.'

홍고가 송명석을 맡아주는 동안 암살하는 게 베스트.

아니어도 빈틈을 노려서 송명석을 파괴한 후에 유진을 다시 노려도 된다.

미리 확보해둔 저격 포인트로 이동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쿠아아앙-!!

그 순간.

숲에서 울려 퍼진 커다란 굉음이 메이 샤오의 귀를 어지럽혔다.

방금 전에 유진이 서 있던 곳에서 솟아오른 매캐한 연기.

눈동자에 마력을 불어넣어서 확장한 시야로도 연기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독수리의 눈을 사용하겠습니다."

시야 방해 효과를 무시하고 먼 곳도 꿰뚫어볼 수 있는 고유 특성.

메이는 저격을 위해 [독수리의 눈]을 연마한 수하를 꼭 옆에 두고 다녔다.

"뭐가 보여?"

"언데드 군대와 그... 특별히 강력한 녀석, 그리고 흑발의 사내가 보입니다."

"뭐야. 폭발 소리가 나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오우거와 조우해서 발이 묶였군요. 시체를 폭발시켜서 피해를 입힌 모양입니다."

오우거라고?

메이의 눈매 위로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놈이 부리는 언데드라고 해봐야 대부분 하급이잖아."

"그래도 오우거한테 당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발이 묶였잖아. 그게 중요하지."

홍고까지 불러들여서 만들려고 했던 절호의 찬스.

운이 좋군, 이라고 중얼거린 메이 샤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장을 꺼냈다.

[특대(特大)형 이글 보우]

그것은 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활 길이만 4미터.

활대 아래에는 지면에 고정하는 홈이 파여져 있었다.

초장거리 저격용으로 맞춤 제작한 무기.

"연기가 사라지길 기다리는 건 너무 늦어."

"제가 메이 님의 눈이 되겠습니다."

독수리의 눈 사용자가 활대와 최대한 근접해서 [시야 공유] 스킬을 사용했다.

초점이 조금 틀어지지만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기에, 순식간에 영점을 맞춘 메이가 시위를 당겼다.

드드드드드득-.

오우거의 힘줄을 수십 번 꼬아서 만든 활줄은 6성 무투계 헌터가 전력을 다해야 겨우 당길 수 있을 정도의 탄력이었다.

시위에 통나무, 아니 전용 화살을 달은 후에 절호의 기회를 노렸다.

우웅, 푸른 기류가 화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엔트의 몸뚱이 안에 마력 전도율이 높은 철근을 박아 만들어서 쏘아낸 후에도 오러 밀집도가 뛰어난 화살.

손을 놓는 순간, 노리는 것을 찢어발길 만한 위력을 지녔다.

채애앵!

오우거를 상대로 분투하는 유진의 소환수.

메이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최대로 당긴 시위를 놓았다.

패애애애애앵, 활대에 찾아온 반동 때문에 귀가 먹먹하고 지면이 흔들린다.

허공을 격하며 새카만 연기 속으로 날아간 화살.

콰직,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오우거와 손속을 겨루고 있던 언데드의 머리가 산산조각 났다.

"해치웠나?"

164화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다(3)

저격수들은 방아쇠나 시위를 놓기 전, 손맛을 느낀다고 한다.

멀리 떨어진 목표를 맞출 수 있다는 확신.

산산조각 나버린 골통은 이번에도 그녀의 예감이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두개골이 부서지자 술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뼈들.

후두둑, 더 이상 지탱할 힘을 잃은 뼈들이 지면에 떨어지더니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성공입니다."

"다음."

"천유진은 포획합니까?"

"숨을 붙여놓으면 더 좋겠지만 위험해."

메이는 거리를 좁힐 생각이 1그램도 없었다.

용병이나 헌터들을 의도적으로 붙였고.

구룡방 소속 인원들도 전력 파악 겸 유진을 공격하게 했다.

본부에서 전해 받은 이야기에 따르면 고작해야 각성 1년 차 헌터.

뛰어나다고 한들, 얼마나 대단할까.

...그 생각은 첫 저격이 보기 좋게 실패하면서 바로 깨어졌다.

"여기서 놈을 죽인다."

파르르 떨리는 활대를 꾹 잡아 진정시키고, 다시금 시위를 당긴다.

콰직, 활대에 가해진 힘 중 극히 일부만 지지대를 타고 아래로 흘러갔음에도 지면 일부가 갈라졌다.

[독수리의 눈]으로 보조 중인 헌터가 신음을 삼켰다.

'이런 무기는 메이 님 말고는 못 다룰 거다.'

시위를 당기는 데만 6성 절정급 헌터의 근력이 필요했고.

어마어마한 장력으로 화살을 밀어내는 만큼 조준도 굉장히 까다롭다.

거기에.

초장거리 사격이다 보니 바람이나 마력의 흐름 등, 고려해야 할 요소는 얼마나 많은가.

단순히 시위를 당길 줄 안다고 해서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서 희소한 재능.

유진을 사냥한 공로라면 굴러 들어온 돌인 새 9룡, 김재우를 제치고 더 크게 날아오를 것이다.

"마무리한다. 긴장 풀지 마."

"예."

[고유 특성 - 독수리의 눈]

[스킬 - 시야 공유]

재장전을 완료한 메이는 시체 폭발이 빚어낸 연기 너머에 있는 유진을 노려보았다.

시위만 놓으면 끝.

걸려 있는 화살이 놈을 꿰뚫기까진 1.5초면 충분했다.

[오러]

[스트라토스 샷]

[초정밀 사격]

저격 관련 스킬을 동시에 적용하고.

오러를 충분히 밀어 넣어 통상의 수십 배나 되는 거대 화살이 활대를 떠나 대기를 갈랐다.

순식간에 5킬로미터라는 공간이 좁혀졌고.

쿠가각, 유진의 심장을 뚫고 지나간 화살이 지면에 기다란 상흔을 새겼다.

"해치웠...."

"아니. 블러핑이야."

메이 샤오는 까득, 이를 갈았다.

후드 안쪽에서 나부끼는 흑발.

[독수리의 눈]으로 확인했을 때만 해도 유진이라고 확신했건만.

심장이 뚫린 채 비틀거리는 놈을 다시 보니,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인물이었다.

'저건 시체다. 용병 중에 놈과 인상착의가 비슷한 놈이 있었나?'

메이는 단순히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유진의 계획대로였다.

[본 컨트롤]

[살점 지배]

매캐한 연기로 시야를 가린 후.

용병들의 시체 중 적당한 놈을 일으켜서 골격과 살점을 움직여서 자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성형했다.

먹히면 좋고, 실패해도 큰 손해가 없는 기만전술.

메이 샤오는 보기 좋게 낚여서 사전 준비 시간이 필요한 초장거리 사격을 한 발 낭비했다.

"메이 님."

"당황할 것 없다. 놈의 주력인 소환수는 이미 쓰러트렸어."

연속으로 초장거리 저격을 하느라 포인트를 바꾸지 못했지만, 시간은 여전히 자신의 편이다.

직선거리로 5킬로미터.

몬스터가 바글바글한 침식지역이니 전력으로 뛰어올 수도 없다.

주요 전력인 송명석도 머리에 구멍이 나버렸고.

유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망자들 사이에 파고들어서 시간을 버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알겠어? 놈을 빨리 찾아내면 돼."

"알겠습니다."

메이의 차분한 말에 냉정을 되찾은 부하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 후.

망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유진을 발견하고는 득의만만하게 웃었다.

"찾았습니다."

"좋아. 이쪽도 준비가 끝났다."

메이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혼란해진 전장은 자신에게 유리하리라고 여겼다.

수 킬로미터를 뛰어넘는 초장거리 저격.

천천히 몰이사냥을 하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당할 것이라.

그렇지만.

혼란한 상황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메이 샤오만이 아니었다.

'더 시간을 주면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몰라.'

여기서 사냥을 끝내야 한다.

마음 한쪽을 좀먹는 불길함을 떨쳐내며, 한껏 당긴 시위를 놓는다.

그 순간.

유진은 메이 샤오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씩 웃었다.

'웃어?'

[부정 충격 방패 x 10]

[본 월 x 10]

희끄무레한 육각형 결계가 화살의 궤도에 드리웠고.

방어에 치중한 형태로 조형된 뼈가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벽이 굳건하게 솟아올랐다.

쿠드드드득-!

원거리 공격에 대응해서는 방어력이 수배로 올라가는 [부정 충격 방패].

압도적인 질량과 속도, 그리고 오러를 담아낸 화살 앞에서는 10장을 덧대어도 순식간에 우그러졌다.

본 월도 마찬가지였다.

뼈로 세운 벽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상당히 힘을 소모했지만, 여전히 진로는 유진의 심장을 향했다.

[용린갑 - 중갑 형태]

[타격 방어 Lv 93]

[마법 저항 Lv 75]

차르륵, 유진의 전신을 감싸는 뼈 갑주.

사용자의 의지를 반영하여 형태를 변환하는 용린갑이었다.

동시에 두꺼워진 갑주 위로 [역천의 가호]를 두른 유진이 두 팔을 X자로 교차해서 가슴팍에 바짝 붙였다.

[본 아머를 사용합니다.]

[오러를 사용합니다.]

2중으로 몸을 감싸는 하얀 갑주.

미리 빼놓은 단단한 뼈로 만든 본 아머에, 오러까지 사용하면서 화살을 받아낸 유진이 마른 비명을 토했다.

"컥!"

속을 진탕시키는 어마어마한 충격.

본 아머가 종이처럼 찢겨 나가고 오러도 순식간에 증발했다.

용린갑에도 눈에 띌 만큼 커다란 균열이 새겨졌고.

화살에 실린 에너지를 모두 소화하지 못하고 수 미터 뒤로 튕겨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살았다고?!"

메이는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신관계라면서?

부정 충격 방패와 본 월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화살에 들인 힘이 상당수 깎여나갔지만.

유진의 심장을 뚫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동일 성위 무투계 헌터라도 짧은 시간에 유형화한 오러로는 그 화살을 막아내지 못했으리라.

"다음 포인트로 이동한다."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멍청한 소리. 이미 한 장소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어."

"그 소환수도 죽이지 않았습니까. 위치를 안다고 해서 놈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그 말이 옳았다.

주의해야 할 것은 6성급 무투계 헌터 수준의 언데드 소환수 뿐.

유진의 마법은 성위를 초월할 만큼 강력하지만 수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사거리가 닿지 않았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부하 헌터의 말이 옳았지만.

메이는 화살을 쏘는 순간, 유진이 지은 미소를 잊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본능적인 감대로 행동하는 게 옳았다.

"알겠습...."

[텐터클 블레이드]

[분광검 - 5식 적광검]

수 미터가량 솟구친 붉은 섬광.

텐터클 블레이드로 사거리를 대폭 증가시킨 오러가 활어처럼 팔딱거리며 시야를 공유 중인 부하의 목을 꿰뚫었다.

"끅, 끄윽."

[드디어 찾았습니다.]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송명석.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한 기세에 메이가 이를 악물었다.

"천유진.... 나를 속였구나. 천유진!"

이중 페이크.

풍정룡의 부산물을 꺼내서 급조한 스켈레톤 나이트에 걸쳐놓은 후, 송명석으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쫓게 한 것이다.

초장거리 저격은 다음 공격까지의 쿨타임이 긴 편.

유진은 그 부분을 노리고 스스로를 미끼삼아 메이의 발을 붙들었다.

[자. 이제 혼날 시간입니다.]

"죽다 만 언데드 따위가!"

단궁을 든 메이는 활시위를 빠르게 당겼다.

푸른 기류를 휘감은 화살들이 빗발치고.

송명석은 오러를 촉수처럼 휘둘러서 모조리 튕겨냈다.

"내가 장거리 저격만 잘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언데드 자식아!"

[가만히 있으면 금방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산속에서 난데없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유진은 화살 세 발이 연속으로 날아온 방향을 힐끗거렸다.

'송명석이 빈틈을 찌른 모양이군.'

[본 컨트롤]과 [살점 지배]로 만든 변수.

더미를 만들어 놓고도 사각으로 빠지지 않은 것은 메이를 최대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아얏."

신성 주문과 본 월, 본 아머에 오러, 그리고 용린갑까지.

쓸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동원했는데도 양팔이 부러져버렸다.

피를 게워낸 걸 보면 내상까지.

이 정도면 오러 블레이드에 준하는 위력이지 않나, 라고 생각하며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했다.

〔마지막은 그래도 무모하지 않았느냐.〕

'기회는 한 번뿐이다. 이런 기만전술은 두 번 못 써먹으니, 확실히 해야지.'

메이 샤오의 초장거리 저격은 위험하다.

저격을 의식하다 보면 이동 루트에도 제약이 있고.

체력 및 정신력의 소모가 너무 컸다.

조기에 녀석을 쓰러트려야 돌아가는 길이 편해지기에.

다소 무리하면서 기회를 만들었다.

〔이제는 기다리면 되겠구나.〕

'뭘 기다려? 송명석 혼자서는 무리야.'

6성 절정의 헌터.

원거리가 특기라고 해서 근거리 대응책이 없진 않을 거다.

실제로 유진이 기억하는 메이 샤오는 근접전에서도 꽤나 매서운 상대였다.

"쿠오오!"

"시끄럽게 짖지 마라."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쿠아아앙-!

리바이브로 되살린 시체 몇을 오우거에게 달라붙게 한 후 폭발.

충격이 누적되어 있던 오우거는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마력 저항이 강해도 폭심지와 거의 붙어있었던 탓에 충격을 모두 제 몸뚱이로 받아들여야 했으니.

시체만 넉넉하면 5성 몬스터 중 위험도가 높은 오우거조차, 유진의 적이 되지 못했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오우거의 생명력이 육체에 스며듭니다.]

[힘 2.3이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체력 2.5가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오우거의 생명력은 엄청났다.

상처를 치유하면서 소모한 생명력을 채우고도 남아서 스탯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시체는 망자로 되살리지 않는 게냐?〕

'대형은 네크로폴리스 안에서 제작할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대형종은 [거인의 묘소] 같은 구조물이 있어야 한다.

시체가 지닌 힘을 발휘하게 하려면 대규모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

7성을 넘어서면 네크로폴리스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대형종을 언데드로 만들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의미가 없는 가정이다.

〔어쨌든 그대의 하수인을 도우러 가야겠구나.〕

'그건 무리다. 추정 거리가 5킬로미터인데, 직선거리로 돌파하다간 몬스터나 다른 용병들에게 붙들릴 거다.'

〔언데드들을 대기시키면 되지 않느냐?〕

'무투계는 부업이거든요.'

방금 전에 쓰러트린 오우거가 이 숲에 얼마나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리바이브로 오우거를 되살릴 생각도 했지만 파기했다.

덩치가 큰 만큼 시선을 끌기도 좋아서 몬스터들에게 발목을 잡힐 것이다.

'빨리 가도 30분은 걸릴 거다.'

〔그 시간이면 이미 승부가 났을지도 모르겠구나.〕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지.'

유진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화살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통나무와 비슷한 크기라서 한 손으로 들 수가 없었으니.

〔무얼 하려는 게냐?〕

'지켜보면 알아.'

[역천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접촉면을 타고 화살에 스며드는 역천의 가호.

유진은 곧바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이런 걸 보고 로켓 배송이라고 하나?"

우우우웅-!

초장거리 저격을 막는 과정에서 흡수한 메이 샤오의 마력.

유진이 불어넣은 힘은 그 주인을 찾아 대기를 가르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갔다.

165화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다(4)

파팟!

나뭇가지를 박차며 크게 도약하는 메이.

송명석은 육중한 걸음으로 아래를 내달리며 쫓았다.

[도망은 못 칩니다.]

마인으로 변모한 마누엘을 쓰러트리고 얻은 스킬 북.

텐터클 블레이드로 암흑 투기의 사거리를 비약적으로 늘린 송명석이 분광검을 펼쳤다.

형형색색의 암흑 투기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메이를 노린다.

"도망? 누가?"

[속사]

빗발치는 화살.

한 발 한 발에 오러를 부여, 회전까지 더하면서 관통력을 상승시킨 공격에 암흑 투기가 더 나아가지 못한다.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생긴 빈틈을 노린 송명석의 한 수가 파훼되었고.

메이 샤오는 오러의 구멍 사이로 화살을 쏘았다.

[빌어먹을, 입니다.]

팅, 팅, 용아병의 몸뚱이를 뚫기에는 모자란 화살의 위력.

급하게 발사한 탓에 충분한 오러를 실어내지 못해서 비늘 안쪽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충격을 받은 송명석의 움직임도 조금 둔해졌고.

메이 샤오는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는 다시 화살 여러 개를 활시위에 걸었다.

[멀티 샷]

한꺼번에 여러 대의 화살을 날리는 기예.

위력과 명중률이 줄어드는 페널티가 붙지만, 메이는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와 오러로 단점을 상쇄했다.

막 출수한 직후에, 화살 세례를 맞고 움직임이 둔해진 상황에서는 멀티 샷을 싹 쳐낼 수 없었다.

송명석은 푸른 안광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쌍검을 비스듬히 들었다.

[쌍수호박]

[듀얼 블레이드]

[분광검 - 4초식 녹광검]

번쩍이는 검광.

이마와 목을 노리던 화살이 쌍검의 궤적에 휘말려 서걱, 반으로 잘렸다.

남은 화살 4대는 양쪽 무릎과 어깨에 푹, 박혔지만.

송명석은 대수롭지 않게 촉 윗부분을 칼날로 싹둑- 쳐냈다.

[광뇌보]

A급 이동기인 광뇌보.

잔상을 남기며 달린 송명석은 방금 전 시위를 놓은 메이 샤오의 근처에 도달했다.

[더 발악하지 말고 순순히 목을 내놓으십시오.]

"헛소리!"

부웅- 쌍검이 허공을 갈랐다.

뒷걸음질 치며 한 치 간격으로 회피한 메이 샤오.

그녀는 내심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초장거리 저격을 받아낼 만큼 맷집이 강하면서, 민첩도 나랑 큰 차이가 없다고?'

어떻게 되먹은 소환수인가.

불합리함을 느끼면서도 쉼 없이 화살을 쏘는 메이.

땅! 따다다당!

짧은 시간 무수한 공방이 오가고.

메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오러를 충분히 싣지 않으면 몸에 흠집을 내는 게 고작일 만큼 송명석이 단단하다는 것.

부상이나 체력 소모가 의미 없는 망자.

유효 타격을 입히려면 화살에 오러를 충분히 실어야 했다.

'검격은 막아낼 수 있지만, 한 수 모자라.'

메이 샤오는 초조함을 감춘 채, 마력 잔량을 확인했다.

반 이상 소모된 마력.

초장거리 저격은 마력 소모가 크다.

수 킬로미터 거리에서도 상대를 꿰뚫을 만큼 오러를 투사하려면.

그만한 마력을 불어넣어야 했다.

'남은 마력은 최대한 아끼면서 후퇴해야 해.'

송명석 역시 비슷한 생각을 품는 중이었다.

'연비가 나쁜 텐터클 블레이드를 연속으로 쓰니 버겁군요.'

오러(암흑 투기)를 수 미터로 구현하는 스킬. 분광검까지 펼치니 영력 소모가 훨씬 컸다.

유진이 곁에 있을 때는 영력을 빌려와서 충당했지만.

수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주인의 힘을 빌려올 수 없었다.

'영력 소모를 아끼면서 접근. 한 방을 먹여야 합니다.'

기습으로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이제부터는 소모전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현재 상황에서 가장 알맞은 판단을 내리는 순간.

쇄애애액-!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큼지막한 물체가 메이 샤오에게 날아들었다.

"내 화살이잖아?!"

초장거리 저격용 맞춤 화살.

전 세계를 뒤져봐도 이렇게까지 특이한 화살을 사용하는 헌터는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 할진대.

왜.

맞춤형으로 제작한 화살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일까.

'천유진!'

무슨 수로 화살을 되돌려서 자신을 노리게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송명석을 앞에 두고 나타난 새로운 변수.

메이는 이를 뿌득 갈았다.

'내가 쏜 것보다는 느려. 그래도 무시할 수 없잖아.'

초장거리 저격용 화살의 위력은 사용자인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맞으면 끝.

장비 세팅도 원거리 공격에 특화되어 있어서 방어력이 없다시피 했고.

맷집에 스탯도 거의 투자하지 않은 탓에 원본보다 힘이 떨어진 화살도 경시할 수 없다.

[스트레이프 애로우]

0.1초 만에 화살 다섯 발을 연속으로 날렸다.

따다당- 초장거리 저격용 화살의 앞부분을 비스듬한 각도로 가격.

메이 샤오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오던 화살의 진로가 살짝 틀어졌다.

'꼭 정면으로 붙을 필요는 없...?!'

방금 전 집중 사격으로 궤도를 틀었던 저격용 화살.

0.5초 만에 다시 방향을 수정해서 메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역천의 가호]로 되돌린 힘.

축적시킨 에너지가 그 진원지인 메이에게로 돌아가려 한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으아아아!!!"

분노와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상식에서 벗어난 화살의 움직임.

진로를 바꾸는 정도론 귀신 들린 것처럼 움직이는 저격용 화살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

[익스큐션 애로우]

대인용 스킬 중 제일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스킬.

초장거리 저격을 빼면 메이의 필살기라고 해도 될 만한 기예다.

오러를 수 겹으로 꼬아서 응축.

일점으로 모아서 꿰뚫어버리는 일격이 반대편에서 날아드는 저격용 화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흡사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굉음이 터져 나오고.

충돌의 여파로 발생한 강풍이 인근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부러트렸다.

"흐읍."

아슬아슬하게 충격을 상쇄시켰지만, 메이의 몰골은 썩 좋지 않았다.

배탈이 난 것처럼 부글부글 끓는 속.

급하게 오러를 끌어 올린 후유증으로 인한 마력 폭주의 전조다.

"일단 자리를 벗어나야 해."

[활쟁이. 혹시 잊어버린 건 없으십니까?]

"아, 이 자식."

푸욱!

저격용 화살이 역으로 날아온 충격이 너무 커서일까.

메이 샤오는 방금 전까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단 사실조차 잊어버렸고.

한순간 마음을 놓은 대가로 칼침을 선물 받았다.

[걱정 마십시오. 당신도 나와 비슷한 처지가 될 겁니다.]

"그, 게, 무, 슨."

[나머지는 주군에게 물어보십시오.]

메이 샤오는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

*

현장에 도착한 유진은 싸늘하게 식은 메이 샤오의 몸뚱이를 볼 수 있었다.

[별것 아닌 상대였습니다.]

"호언장담하는 것 치고는 몰골이 엉망인데?"

[영광의 상처입니다. 주군.]

"내가 화살 받아치기를 안 했으면 못 이겼겠고만."

[....]

묵직한 팩트에 입을 꾹 다문 송명석.

왜.

뭐요.

되게 억울해 보인다?

"멍때리지 말고 경계나 서라."

[존명.]

이제부터는 집중해야 한다.

전 세계를 뒤져봐도 흔하지 않은 원거리 무투계 헌터의 사체.

궁술이 특기인 몬스터들은 꽤 있어도, 놈들은 [합일]을 쓸 수 없는 반쪽짜리이니 예외다.

[다크 콜링을 사용합니다.]

육체를 떠나지 못한 채 근처를 머무르고 있던 메이 샤오의 혼백.

[그림자 가면]에서 흘러나온 영력이 그녀의 영혼에 낙인을 찍자, 끼아아악! 섬뜩한 귀곡성이 터져 나왔다.

-너! 너어어어!!!

"힘이 넘치는군. 가까이에서 보니 더 반갑네."

-끼이이익, 끼익!

"얌전히 있어라. 네게 육체를 돌려줄 테니."

피눈물을 흘리는 망령의 원한 따위는 알 바인가.

그래도 망령이 되어 유진에게 복속되었는데도 이만큼 자아를 유지하다니.

꽤 정신력이 굳건한 녀석이다.

'회귀 전에는 구룡방의 아홉 머리 중 하나에 올랐던 녀석이었지.'

-미래의 머리 둘을 수하로 거둔 셈이구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기둥 두어 개만 더 빼갈 수 있으면 더 좋겠군.

유진은 킬킬거리며 손가락을 뻗었다.

[흑암의 반지에 시체를 보관합니다.]

-당장 언데드로 되살리지 않는 게냐?

'이 시체의 잠재력을 살리려면 재료가 많이 필요해.'

당장은 메이 샤오의 능력을 100% 발휘할 만한 언데드를 제작할 수 없다.

어쭙잖은 언데드로 되살렸다가 파괴되면 그게 더 손해고.

-무사히 돌아갈 자신은 있는 게냐?

'어떻게든 되겠지.'

메이 샤오의 시신과 장비를 모두 수습하고는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커다란 장애물 하나를 치웠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다.

*

용의 계곡과 맞닿은 커다란 숲.

대격변 이전에도 주민이 거의 없었던 곳인데, 마경이 생성되면서 모두 떠난 탓에 대규모 침식지역이 되었다.

[버러지들. 죽으십시오!]

리자드맨의 목을 베어 넘긴 송명석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바닥을 적시는 녹색 피.

과장 조금 더하면 숨 쉴 때마다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언데드 군대를 가로막았다.

언데드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괴물들의 관심을 끌기도 더 쉬워졌으니.

[주군. 소수 정예를 운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서라. 그럼 이놈들은 어떻게 막게."

이따금씩 추적해오는 구룡방과 만주 쪽 헌터들도 경시할 수 없었다.

언데드 군대를 줄이면 유진을 보호할 벽도 얇아지는 셈.

정예화를 하기에는 촉매가 부족했다.

[더러운 가불기입니다.]

송명석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그 뒤를 쫓고 있던 만주 지부 간부인 홍고도 비슷한 불평을 내뱉었다.

"왜 소모전이 효과가 없는 거냐."

"몬스터나 헌터들의 시체를 되살려서 전력으로 부려먹고 있습니다."

"누가 몰라서 묻냐? 대책을 마련하란 말이야. 대책을!"

"소모전이 아니라 압도적인 화력으로 한 번에 밀어붙여야..."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한 숲.

유진은 전투 중에 언데드가 쓰러져도 즉각적으로 징발이 가능했지만.

구룡방의 추격자들은 소모되는 인원을 충당할 방법이 없었다.

"이 숲에서 총력전을 하자고?"

"죄송합니다."

"봐. 머리를 굴리니까 괜찮은 생각이 나오잖아."

"ㅇ, 예?"

"천유진은 언데드들을 부리느라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 미리 앞질러서 총력전을 하면 되겠네!"

"역시 대단하십니다."

"자. 그럼 놈이 어디로 갈지 예측해봐."

홍고의 지시에 부하가 헙, 숨을 삼켰다.

왜 그걸 자기한테 물어보는 건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부하는 인근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보던 중,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강입니다. 보스!"

"아무르 강을 타면 극동 공화국까지 바로 넘어가겠군."

"추격하기도 어려워질 겁니다."

부하의 그럴싸한 추리에 홍고가 크핫, 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 애들 모두 집합시켜라. 바로 그쪽으로 간다."

"예!"

유진의 소재를 알려준 메이 샤오가 돌연 연락이 끊긴 게 신경 쓰였지만 무시했다.

아니.

홍고는 도리어 경쟁자가 하나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기꺼웠다.

"집합해라."

"목표는 아무르 강 상류다."

"천유진이 빠져나가기 전에 강행 돌파해서 맞이할 준비를 해놓자."

구룡방 간부 중 한 명.

홍고 휘하 부하들을 모두 집결시키면 유진의 언데드 군세에도 꿀리지 않았다.

거기에 만주는 그들의 홈그라운드.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한 침식지역이라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와 영역은 있기에 정보를 활용하면 앞질러 갈 수 있었다.

"뒈지면 시체 놓고 간다. 큰 부상도 마찬가지다."

부하들을 집결시킨 홍고는 그 말을 던진 후 무리의 선두에 섰다.

그가 솔선수범하는 성격이라기보단, 그게 제일 효율적이었다.

'전력을 온존해야 천유진의 언데드 군대를 막는다.'

소모전으로 가면 이쪽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몬스터와 유진, 구룡방, 그리고 덤으로 낀 부나방 신세의 용병과 헌터들까지.

언뜻 보면 소모전이 유리했지만, 유진의 특기를 간과한 탓에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쉔 녀석은 아직 냄새를 못 맡았다. 여기서 끝을 낸다.'

홍고는 앞장서며 흥분으로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붙들었다.

길잡이를 동원해서 몬스터들과의 충돌을 최소화.

아무르 강 상류에 도달해서 미리 진을 치던 구룡방 무리는 평소와 다른 풍경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안개?"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만큼 짙은 안개가 홍구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166화 유령선단의 무서움

유진은 거지꼴이 된 채로 아무르 강 상류가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도달했다.

며칠간의 강행군.

옷은 넝마가 된 지 오래고.

검게 물든 눈 아래는 유진의 몸에 쌓인 피로가 어느 정도인지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여기서 쓰러지시면 곤란합니다. 주군.]

"부축이나 제대로 해라."

라이프 드레인으로 소모된 체력을 회복했지만, 누적된 피로는 모두 씻어내지 못했다.

구룡방의 추격은 전보다 힘이 명백히 빠졌지만.

보물 고블린을 쫓아온 부나방들이 수시로 유진을 노렸고.

무엇보다 이 근방이 모두 침식지대라서 숨 쉬듯이 전투가 벌어졌다.

4성 무투계 헌터의 스펙 덕에 반쯤 인간에서 벗어난 몸뚱이도 차곡차곡 쌓이는 피로 앞에선 무기력해졌다.

〔총 172번의 싸움을 벌였더구나.〕

'그걸 다 세어주기도 하고. 성좌 나리의 친절함에 눈물이 날 것 같네.'

〔크하하핫. 언제나 짐이 지켜보고 있음을 망각하지 말지니라.〕

침식지역을 돌파하던 중에 병력이 줄고 늘기를 반복했던 언데드 군대는 자연스럽게 정예화가 되었다.

스켈레톤 나이트와 다크 미니언, 타이런트 같은 중급 언데드들의 비율이 늘어났고.

하급 언데드들은 전투 중에 소모되어서 거의 남지 않은 것이다.

'다크 미니언을 27구나 건진 게 소득이군.'

귀하디귀한 마법계 언데드가 많이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거듭되는 난전에서도 다크 미니언이 소모되는 상황은 최대한 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신경 쓸 일이 가뜩이나 많았는데 마법계 전력을 온존하는 통에 유진의 피로도는 그야말로 최대치였다.

'한숨 자고 싶다.'

〔자업자득이지 않느냐.〕

'거 조용히 하쇼.'

지도대로라면 야산을 넘으면 바로 아무르 강 상류가 나온다.

유진은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겨우 떼었다.

〔한데 강에 무엇이 있기에 그리 확신하느냐?〕

'김 씨가 일을 제대로 해주었으면 그게 와있을 거다.'

산중턱을 넘어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

아무르 강 상류를 휘감은 진한 안개가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자연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넌 그렇게 나랑 붙어다녔으면서 아직도 감이 안 오냐."

[언제 네크로폴리스를 지으신 겁니까?]

"으휴. 말을 말자."

유령선이잖아. 유령선.

브로커 김 씨한테 준 것은 유령선을 불러내는 촉매.

물에 닿으면 유령선에만 반응하는 특수한 파장을 발산하는 물건이다.

〔어떠한 원리로 작용하는 게냐?〕

'해적 이야기 보면 병에 편지를 넣어서 바다에 흘려보내곤 한다.'

누군가의 손에 닿기를 바라며 넣어둔 쪽지.

보물이 감추어진 지도라든지.

혹은 정치적인 스캔들이라든지.

뭐, 그런 걸 써놓은 쪽지를 바다에 던지는 건 실제로도 있었다고 하니까.

유령선을 불러내는 아이템도 그런 '설화'에 기인해서 만든 것이다.

〔쫓기는 중에 용케 그런 물건을 제작하였구나.〕

'용의 계곡 들어가기 전에 만들어놨지.'

준비는 철저해야지.

아무 대책 없이 반쯤 적진인 극동 공화국에 들어온 게 아니라고.

채앵, 챙! 안개 속에서 울리는 병장기들의 충돌음.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전투가 길어지는 걸 보니, 유령선을 대기시키길 잘했군.'

〔무슨 의미더냐?〕

'유령선의 성위는 5성. 군집이라서 전투력은 위이고, 물 위에서라면 능히 6성 헌터도 감당할 수 있다.'

〔한데 승부가 금방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앞질러서 그대를 노리는 적이 있단 말이로구나.〕

'길게 설명 안 해도 잘 아네?'

〔무수한 티탄 신들을 이끌었던 몸이니라. 군사적 소양은 당연히 갖추지 않았겠느냐.〕

'예예. 대단하십니다.'

빈말을 중얼거린 유진이 손가락으로 안개를 가리켰다.

-으어어어어.

거침없이 안개 속으로 뛰어드는 망자들.

유진의 곁에 있던 송명석도 몸이 근질근질한지 칼자루를 쥐었다.

"넌 천천히 가라."

[주군. 어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든 나를 두고 가겠다고? 이러다가 눈먼 화살 맞고 죽어버리면 누구도 허무하게 가겠어."

[....]

잊지 말렴.

우리는 운명 공동체란다.

데스 나이트나 리치 같은 고위급 언데드가 되면 술자가 죽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지만.

송명석은 그만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명색이 용아병인 만큼 두 번째 벽을 넘어서는 깨달음만 있으면 스스로 상위 언데드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현시점에서는 턱도 없지.

"이 죽다 만 시체는 왜 또 나오는 거냐!"

강가 근처에서 들리는 고성.

양팔에 푸른 오러를 두른 거한이 분노와 함께 타이런트 한 구를 세게 쳤다.

힘과 방어력을 상승시킨 중급 언데드.

마찬가지로 암흑 투기를 일으켰지만 출력 차이가 극심해서 1초도 버티지 못하고 곤죽이 되어버렸다.

-너도 우리와 같이 가자.

"물귀신도 꺼져라!"

퍼엉!

산산조각 난 스켈레톤 워리어.

완전히 소멸했어야 할 언데드는 짓뭉개진 타이런트와 달리, 허공에서 뼈가 재조립되며 금세 부활했다.

유령선에 매여 있는 망자들의 특징.

혼백이 배에 묶인 채, 중심이 되는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부활해서 산 자의 발을 붙들었다.

[고스트릭 체인]

차르릉!

회색 사슬 다발이 사내의 팔과 다리를 휘감지만 발 구르기 한 번에 깨어졌다.

[유령선에 타려면 저자를 쓰러트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속하에게 맡겨주십시오.]

"됐어. 나 부축하는 게 제일 중요한 임무인 거 모르니."

송명석의 푸른 귀화가 옅어졌다.

강적을 앞에 두고 인간, 아니 언데드 목발 신세라니.

그 마음을 알 턱없는 유진은 혼백으로 이어진 유령선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1, 5, 10... 잠깐, 20척이라고?'

첫 번째 유령선을 만든 게 언제였더라.

극동 공화국에 밀입국할 때였으니 얼추 3주 정도 지났나.

단순하게 계산하면 하루에 1개씩 늘어났다는 건데.

유진은 황당한 마음에 혀를 찼다.

'이 동네 치안이 얼마나 개판인 건지 모르겠네.'

아무리 러시아 내 자치구 형태로 유지되는 동네라지만.

로마노프 가문이 직접 지배하고 있는 상트페테부르크 주변하고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상반되었다.

〔한데 숫자가 많아도 고전하고 있지 않느냐.〕

'제대로 화력을 못 내니까 그렇지.'

유능한 지휘관의 유무가 싸움의 방향을 어떻게 바꾸는지 잘 지켜보라고.

[군주의 지휘를 사용합니다.]

접경지역에서 얻은 기연.

공용 계열 스킬인 군주의 지휘로 유령선들의 능력치를 올려주고.

선두의 배는 더 위로 북상시켰다.

카드드득-.

얕은 수심을 거슬러서 억지로 올라가다 보니 유령선 바닥이 손상되었다.

'나중에 고치면 돼.'

배를 수리할 때처럼 전문적인 인원이 필요하지도 않다.

적당한 재료와 영력만 불어넣어주면 알아서 수복하니 얼마나 편해.

상류에서 줄지어 서서 온전한 화력을 내지 못했던 유령선들이 줄지어 위로 올라오고.

일부는 땅 위에 걸쳐서 지상으로 상륙시켰다.

'유령선의 묘미는 역시 약탈이지.'

상륙 후 약탈.

단지, 이번에는 그 대상이 상대의 목숨일 뿐이다.

*

구룡방 만주 지부의 간부, 홍고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개자식아. 선수를 치면 된다고?"

기가 막힌 의견을 냈던 부하는 이미 죽은 지 오래.

유진의 목적지로 추정되는 아무르 강에 도달하니, 해를 가릴 만큼 진한 안개가 드리우면서 놈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콰지직!

산산조각 난 뼈.

하급 언데드의 변종으로 보이는 언데드, 아머드 스켈레톤을 일격에 분쇄했지만 홍고의 표정은 도통 풀리지 않았다.

'소모전으로 가면 놈들의 바닥을 금방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데드를 불사자라고 칭하지만, 실제로 불사는 아니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도 고통 하나 안 느끼고.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한들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지만.

몸을 움직이는 근원인 영력이 고갈되거나, 힘이 깃든 머리를 부수면 소멸한다.

헌터업계의 상식이다.

'근데 이놈들은 왜 계속 살아나는 거냐!'

재생하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지만.

상식 밖의 사태에 대처하지 못해서 초기에 피해를 크게 입었다.

나머지 인원으로는 유진을 노리려다가 오히려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

'어쩔 수 없지. 물러난다.'

홍고의 눈가 위로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이 일대는 모두 침식지역.

중상을 입은 부하들까지 챙겨서 후퇴할 수는 없다.

'녀석들을 제물로 바쳐서....'

홍고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차릉, 귓가에 거슬리는 마찰음과 함께 본능에 울리는 경종.

몇 번이나 그의 손발을 붙들었던 빌어먹을 사슬이다.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라!"

찰나에 깃든 오러가 회색 사슬들을 으깨버린다.

오러 운용의 극한.

천골이라는 극히 희소한 재능을 지닌 송명석조차 암흑 투기를 발현하려면 약간의 딜레이가 있지만.

6성 절정에 도달한 홍고는 의지를 품는 것과 동시에 오러를 발출.

영력을 몇 겹으로 땋아서 만든 사슬을 부술 수 있었다.

'이상하군.'

팔뚝에 전해지는 반탄력이 이전보다 조금 강해졌다.

장시간의 전투로 쌓인 피로감 때문일까.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몇 번이나 사슬을 더 쳐내고 난 후에는 확신했다.

"웬 놈이 수작질이냐."

사슬의 숫자.

힘.

그리고 속도까지 빨라졌다.

힘을 온존하며 대응할 수 있었던 전과 달리, 불과 몇 분 만에 기세가 달라진 사슬들의 공격에 땀 한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 눈치 챘나?"

안개 너머에서 불쑥 들리는 음성.

제3자의 목소리에 홍고가 눈을 부릅뜨는 순간.

차르르르르릉, 등이 오싹해질 정도로 많은 울림소리가 뒤에서 들렸고.

홍고가 몸을 돌리니 수백 가닥이나 되는 사슬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몰려들었다.

"물량으로 밀어붙여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나?"

[오러]

[금륜익 - 5식]

[타이들 웨이브]

홍고의 팔뚝을 감싸고 있던 링.

여러 개의 차크람이 팔을 빠져나오더니 맹렬하게 회전했다.

평소에는 마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차크람을 감싸고 필요할 때 꺼냈지만.

지금은 차크람을 원격으로 조종하며 오러까지 최대치로 불어넣고 파괴력을 극대화시켰다.

'천유진이다. 놈이 분명해!'

갑자기 빨라지고 강해진 데다 숫자까지 늘어난 사슬.

목소리까지 들린다?

놈이 승리를 확신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 분명했다.

'사슬들을 쳐내서 빈틈을 만든 후 전력으로 달려간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가면 놈이 있을 테니!'

홍고는 비열하게 웃었다.

6성 절정이라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싸움을 치렀다.

방심이라는 마음 때문에 승패가 갈린 것도 많이 봤고.

유진의 자신만만한 태도 덕에 난국을 타개할 단 하나의 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위이이이잉-!

맹렬하게 회전하던 차크람 10개가 원을 그리며 전진.

연신 출렁대는 사슬의 파도 한가운데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날아갔다.

"방심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누가 방심했다는 거지?"

차르르릉-.

회전 중인 차크람 10개와 충돌하기 직전.

빼곡하게 겹쳐진 사슬들이 돌연 넓게 퍼진다.

홍고의 시야를 가득 메운 유령선의 사슬.

뭉쳐 있을 때보다 수십 배나 넓어진 면적에 비해 차크람의 충격 범위는 작았으니.

맹렬하게 회전한 오러의 고리가 폭발하면서 걸리는 사슬들을 파괴했지만 전체와 비교하면 극히 일부였다.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어떻게."

"알았냐고? 팔뚝에 두른 차크람이 폼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유진은 히죽 웃었다.

압도적인 화력과 비대칭적인 정보.

이 싸움.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유령선단에게 소모전을 걸려고 한 시점에서 놈들의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차르르릉!

고스트릭 체인에 포박 당한 홍고.

오러를 끌어 올려서 몇 가닥씩 끊어냈지만 어마어마한 숫자 앞에선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당신도 합류하는 겁니다.]

유진을 부축하고 있던 송명석이 칼집에서 꺼낸 검을 쥐었다.

167화 용의 인자(1)

뚝딱뚝딱-.

쿵- 쿵-.

대격변 이후 사람들이 피난 가면서 버려졌던 연평도 부두에서 소음이 흘러나왔다.

건축 현장에서 들을 법한 연장 부딪치는 소리.

자재를 쌓을 때 나는 소음 등, 인류의 문명에서 들을 수 있는 음색이다.

"오라이. 오라이."

"그건 언제 적 말입니까?"

"현장에서는 다 쓴다."

미스터 블랙은 막 멈춘 트럭을 탕탕- 두드렸다.

연평도는 전략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섬.

이곳을 장악하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해로를 장악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서해 전역을 좌우할 수 있는 요충지다.

'토대를 잘 닦아놔야 해.'

동아시아에서 손에 꼽히는 불법 상인 연합.

암상의 총수로서 서명해야 할 서류만 한가득이지만, 그는 시간을 내어 틈틈이 연평도에 와서 재개발을 진두지휘했다.

"거기! 컨테이너는 그쪽으로 옮겨놔."

"예? 여기 아닙니까."

"그러면 차가 오가는 데 방해되잖나. 처음에 각을 제대로 잡아놔야지."

"알겠습니다."

첫 작업은 수십 년 동안 방치된 건물들을 밀어내는 것.

중장비를 옮길 만한 환경은 아니라서 헌터들을 고용, 마법으로 부순 후에 무투계 헌터들이 파편을 짊어지는 식으로 항만을 깨끗하게 밀었다.

헌터의 몸값이 몸값인 만큼 중장비를 옮겨서 쓰는 것보다 더 비쌌지만, 미스터 블랙은 개의치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항만의 인프라를 완성시킨다.'

연평도 항만이 제 역할을 하는 순간부터, 이곳은 서해 무역의 중심이 되리라.

몇 년 만인가. 이렇게까지 열정으로 타올라본 적이.

미스터 블랙은 한 달 전에 극동 공화국 밀입국을 알아봐달라고 했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천 대표님. 정말이지 신기한 사람이다.'

그라운드 제로의 삼강 중 하나인 '붉은 거미'도 손을 대지 못했고.

이북 최대의 위협이라고까지 불리는 개성 인간사냥꾼들도 연평도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레리크가 그렇게까지 센 괴물은 아니지만.

상륙 포인트가 한정되어 있고,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괴물이 섬을 점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레리크들이 토해낸 불꽃은 그만큼 위협적이었으니.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졌던 이 섬을 함락시켰지.'

이러다간 정말로 한반도 이북 너머 대륙까지 향하는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겠다.

처음 거래할 때는 반쯤 허풍이라고 생각했는데.

곧 이북 너머 루트를 머리 쥐어뜯으면서 짜야 하지 않을까.

미스터 블랙의 입가가 진한 미소로 물들었다.

'일복 터지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다.'

유진과 손을 잡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블랙 컴퍼니 산하?

허울만 있지, 따로 요구하는 것도 없다.

물어다주는 일마다 대박이 터지는 복덩어리이니.

이럴 거면 진즉에 합병을 해야 했나 싶을 정도라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큭. 나도 참. 갈 데까지 갔군."

혼잣말과 함께 쓸데없이 많아진 사념을 정리하고 있을 때.

부하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사, 사장님."

"무슨 일인가?"

"해안가가 안개로 물들었습니다."

"원래 그런 곳이잖아."

"아닙니다. 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겁니다."

미확인된 적이 다가온다고?

섬을 지키는 스킬라나 중심부에 똬리를 튼 존재가 반응하지 않는데.

미스터 블랙은 뺨을 일그러트리면서 해안가로 다가갔다.

"정말이군."

"어떻게 할까요?"

"용병들을 대기시켜놔라. 혹시라도...."

"그럴 필요는 없다."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갑판 위에 선 사람의 얼굴은 미스터 블랙에게 퍽 익숙했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보다시피."

"만주 부근이 유진 님 덕분에 아주 떠들썩하던걸요."

유령선단의 주인이 된 유진은 피식 웃으며 연평도에 발을 디뎠다.

*

"음료 하나 드시죠."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아메리카노에 얼음 두 개만 띄워줘."

"그럼 전 카라멜 마키아토로."

컨테이너로 만든 가건물.

임시로 세운 카페에 들른 두 사람은 커피를 홀짝이며 상황을 교류했다.

"브로커는 안전하게 돌아갔나?"

"아. 김 씨 아저씨는 능력이 좋은 사람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행이군. 꽤나 신세를 졌어."

"아주 화려하게 일을 저지르셨더군요. 만주와 극동 공화국 일대가 들썩거리는 중입니다."

"만주는 그렇다 쳐도 극동 공화국은 왜?"

미스터 블랙은 단 음료를 어울리지 않게 마시면서 큭큭, 웃었다.

"그 동네 용병 업계는 국경선이 없습니다."

"만주 쪽이 타격을 입었으니 극동 공화국도 인건비가 비싸졌겠어."

"예. 덕분에 암상이 파고들 여지도 많아졌지요."

용병과 헌터의 몸값이 올라갔으니, 관련 장비 가격들도 차례대로 인상될 거란다.

한국이나 일본, 혹은 미국에서 생산된 양질의 무장을 팔 절호의 기회.

"더 많은 물건을 올려 보내지 못하는 게 아쉽군요."

"배가 모자라면 유령선단을 빌려주마."

"그래도 되겠습니까?"

"연평도는 파프너와 스킬라 무리만으로 충분하다."

미스터 블랙의 입가가 찢어질 것처럼 휘었다.

극동 공화국 쪽 밀수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두 가지다.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이 적다는 것.

그리고 해적이다.

"유령선단이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되겠군요."

"성당에서 파사 전용 무장과 성수를 준비해둬라. 운 나쁘면 유령선에 홀릴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챙겨둘 수 있죠."

"그나저나 한 달 만에 제법 그럴싸한 수준으로 개발을 해놓았어."

모든 인프라가 박살 난 섬.

전기를 사용하려면 소형 발전기가 필요하고.

수돗물도 없어서 지하수를 다시 끌어 올리거나 본토에서 실어 와야 한다.

"이렇게 카페까지 차려놓고 말이야."

"직원 복지는 챙겨주자는 게 신조입니다."

카페나 편의점, 그리고 술집 같은 편의시설들이 우선적으로 들어섰고.

방치되었던 항만도 어느새 정비가 끝나서 배를 대기 편해졌다.

"1달 뒤에 연평도 수복 사실을 공표할 거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협회에 수복한 땅에 대한 소유는 인정을 받았다."

"그럼 문제는 없겠군요."

"수복했다곤 해도 몬스터가 생성되는 건 여전하고 말이야."

무작위로 생성되는 몬스터를 핑계 삼아 섬을 사유화한다고 한들.

헌터협회는 크게 반발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없는 사이에 별일은 없었나?"

"사업은 다들 번창하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보고는 임 이사에게 들으시죠."

"너무 성의가 없군."

"상세한 부분은 저한테도 공유해주지 않아서 모르는 겁니다."

"어림짐작은 하지 않나?"

"그럼 두 번 이야기를 들으시게 되는 건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귀찮다는 말을 잘도 돌려서 말한다.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자, 미스터 블랙이 남은 카라멜 마키아토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2주 전에 아라한 길드가 철원 쪽으로 선발대를 보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네."

"한 명 빼고 모두 전멸했지만요."

"저런. 안타까워라. 동정해주지."

유진은 킬킬거렸다.

"소문에 의하면 애꾸눈한테 괴멸당했다고 하더군요."

"철원 쪽으로 나가놓고는 애꾸눈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고?"

"천 대표님을 견제할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용케 그 정보를 주워들었어."

"실력이 좋은 동업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라운드의 정보통, 마담.

아라한 길드에서 꽁꽁 숨기려고 했던 선발대의 루트도 파악해둔 지 오래였다.

"주가가 더 떨어졌겠어."

"반대입니다. 전보다 20% 상승했습니다."

"미친."

"아라한이 북진을 하겠다고 액션을 취했으니 호재이지요."

"주식쟁이들의 생각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발대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는데 주식이 올랐다고?

과학자 뉴턴이 주식의 광기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며 한탄했다는데, 유진도 그 발언에 동감했다.

"북진 계획이 조금 더 빨라질 수도 있겠어."

"꼭 그렇진 않습니다. 예산을 더 투자하고 있지만, 신중을 들여서 넘어갈 준비를 한다더군요."

무엇을 위한 준비인가.

애꾸눈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을 보면, 아라한 길드의 노림수야 뻔했다.

'북진은 역시 허울뿐인 이야기였군.'

네크로폴리스 토벌.

아라한 길드의 노림수가 확실해지니 생각도 맑아졌다.

"나찰 길드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습니다."

"울타리를 수리하기도 바쁠 테니까."

"아라한 쪽은 당분간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마담이나 저나 동향을 주시하고 있으니 특별한 일이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블랙 컴퍼니 임원으로서 훌륭한 마음가짐이다."

유진은 미스터 블랙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짧은 대화를 마친 후, 유진은 신전으로 향했다.

[강력한 존재감이 느껴집니다.]

"오. 뭐가 느껴지나."

[마력하고는 좀 다릅니다. 본능적인 감을 건드리는 느낌이라고 해야겠군요.]

"꽤나 모호한 말이다?"

[속하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인지라.]

용의 권속인 용아병.

[불사자의 관]을 통해 온전한 불사룡, 엘드리치 드래곤이 된 파프너의 기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긴 그림자가 땅을 물들이고.

[왔어?]

흥분한 듯한 사념과 함께 10미터 크기의 드래곤이 지면에 쿵- 착지했다.

칼자루에 손을 얹은 송명석이 푸른 안광을 불태웠다.

"그 몸에 제법 적응했나 보네?"

[나름대로. 꼬리를 활용하거나 비행은 좀 어색하지만 말이야.]

"역시 잊힌 영웅다워. 적응이 빠르잖아."

[그 낯간지러운 호칭은 이제 그만 불러줘도 되지 않을까?]

몸서리를 치는 파프너.

놀리는 것처럼 말했지만 모두 진심이다.

'드래고니안과 달리, 용의 인자를 충분히 흡수해서 변이된 육체는 인간형이 아니다.'

생전의 박하늘 씨는 순도 100% 인간이다.

팔과 다리를 쓰는 것도 당연히 사람에 맞춰져 있다.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게냐?〕

'평생 안 써본 기관이 갑자기 추가되었다고 생각해봐.'

갓 태어난 아기가 자신의 몸에 익숙해지고 의식적으로 물건을 들기까지 약 5개월이 걸린다.

쥐는 힘이야 2, 3개월이면 생기지만.

정확하게 손을 뻗어서 쥐고 든다는 행위를 하려면 몸을 쓰는 감각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비행을 할 수 있는 게 대단한 거야.'

그냥 날개와 꼬리만 달아놓은 게 아니다.

인간보다 훨씬 상위 종으로 인식되는 드래곤이란 종에 빨리 익숙해진다는 것은 파프너의 정신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다.

"참. 선물 줘야지."

갑자기 정해진 용의 계곡 행의 원인.

파프너에게 부족한 용의 정수와 인자를 채워줄 용석들을 꺼냈다.

주먹 크기의 돌을 수백 개나 쏟아내니 야트막한 언덕 크기가 되었지만, 파프너가 앞에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한데 그대의 대전사가 바뀐 육신에 적응을 마쳤다면 저 돌도 필요 없지 않느냐?〕

'파프너는 용족으로서 필요한 조건을 아직 충족하지 못했어.'

불사자의 관에 응축시킨 피가 드래고니안 사체에 깃든 용족의 기원을 이끌어냄으로써, 파프너는 의도하지 않게 온전해졌다.

중요한 포인트는 유진이 의도하지 않은 정도란 것.

'돈이 없어서 가불한 거나 마찬가지야.'

골격은 커졌지만 살과 근육이 없어서 앙상한 몸.

파프너를 보면 썩 와 닿는 비유가 아니지만, 지금의 그녀는 필수 영양분을 하나도 섭취하지 못해서 텅텅 빈 상태나 마찬가지다.

'용석으로 그 부분을 충원할 수 있을 거다.'

〔확신은 못 하는구나.〕

'나도 안 해본 짓이니까. 이건.'

유진은 볼을 긁으며 아공간 주머니에 담아둔 물건들을 모조리 탈탈 털었다.

그 순간.

아공간 주머니가 들썩거린다.

내부에 보관 중인 물건 중에서 파프너에게 반응할 만한 게 없을 텐데, 라며 중얼거리던 찰나.

불사자의 관이 손에 딱 잡혔다.

168화 용의 인자(2)

덜그럭- 덜그럭-.

"격하게 반응을 해서 일단 꺼내기는 했다만."

턱을 만지작거리는 유진.

고뇌의 주제는 아공간 주머니에 얌전히 있던 [불사자의 관]이었다.

파프너가 가까이 오자 아공간을 넘어서까지 떨림을 전달하는 흑색의 관. 이유는 짐작이 갔다.

〔정룡의 사체에서 추출한 정수가 그대의 대전사를 갈구하는 듯하구나.〕

'이건 생각 못 했는데.'

흠, 신음을 흘린 유진이 파프너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인. 문제라도 생겼어?]

"호재라고 해야 하나."

불사자의 관에 담긴 내용물을 설명하니 파프너의 푸른 안광이 크게 휘었다.

[오늘 내 생일이야? 아주 특식을 준비해줬네.]

"섣부르게 먹었다간 탈이 날 수도 있다."

이미 불사자의 관 때문에 변수가 생겨났다.

결과론적으로야 엘드리치 드래곤의 완성도를 확 끌어올렸지만.

유진이 상정한 것보다 효과가 더 좋은 탓에, 몸을 구성해야 할 용의 인자의 부재로 인해 자칫하면 육체가 붕괴할 뻔했다.

"신전이 있어서 별 탈 없었던 거지. 안 그랬으면 대책을 세워야 했다."

[잘 풀렸으니 됐잖아.]

"마법은 사소한 변수 하나로 결과가 달라진다. 마음을 놓을 순 없어."

[주인답지 않은 발언인걸.]

"나답지 않다고?"

[그렇잖아. 온갖 도박에 판돈을 싹 거는 사람이랑 안 어울려.]

유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구나.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그의 행보는 늘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도박의 연속이었다.

'회귀라는 특전은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무의식적으로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시간을 되돌리는 성유물.

여러 성좌와 관련된 신화 및 전설, 그리고 성유물에 대해 연구했지만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만큼이나 이질적인 능력은 없었다.

'내 부모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물건을 남겨주고 떠난 걸까.'

회귀 전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회귀'의 덕을 볼 때마다 드문드문 생각났다.

당장은 아니지만 한번 조사해봐야겠어.

"...어쨌든 느낌이 영 안 와."

[고민하는 건 나중에 해. 못 먹어도 고라고 하잖아.]

"도박 이야기도 그렇고. 예시가 좀 그렇다."

[난 느낌이 좋아서.]

"일단 용석부터 먹고 생각해보자."

츄라이 해봐, 츄라이.

파프너는 손을 뻗어 수북하게 쌓인 용석을 입으로 덥석덥석 넣었다.

[엘드리치 드래곤(파프너)이 용의 인자를 축적했습니다.]

[붕괴 속도가 느려집니다.]

[엘드리치 드래곤....]

좋아.

여기까지는 생각했던 대로다.

불사자의 관이 이끌어낸 드래고니안 사체의 가능성.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드래곤'의 형상에 필요한 인자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파프너의 기운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잊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제 공이 컸습니다.]

[아이고. 신세 많이 졌습니다. 예예.]

[후일 이자까지 톡톡 쳐서 받아낼 테니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송명석은 가슴을 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으휴.

저놈의 승부욕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 나오는군.

아그작-.

산더미처럼 쌓아둔 용석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음미하듯 안광을 꺼트린 파프너.

흐음, 숨을 쉴 리 없는데도 사념으로 숨소리 비슷한 것을 흉내 냈다.

[틀어져 있던 미세한 감각이 이제야 좀 맞아 떨어지네.]

"벌써 몸 상태를 점검한 건가?"

[눈 감았다가 뜰 시간이면 충분하지.]

"어때."

[다 좋은데 말이야. 좀 아쉽네. 식후땡으로 커피를 안 한 느낌.]

파프너의 시선이 불사자의 관으로 향했다.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모습.

허 참.

유진은 뒤통수를 벅벅 긁더니 탄식하듯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라."

[그래야 내 주인이지.]

이 순간에는 파프너의 감을 믿어 볼까.

불사자의 관에 담아둔 용족의 정수를 연구해보고 싶었는데.

생각도 못한 식으로 정수를 소모하게 되었다.

〔괜찮겠느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파프너의 감은 좋기도 하고.'

〔감이 좋은 작은 인간이 함정을 알아채지 못하다니. 어불성설이도다.〕

'알면서도 당할 때가 있는 법이야.'

아라한 길드의 2인자인 백성현은 파프너의 생전, 그러니까 박하늘 씨가 민간인들을 등지고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1차 몬스터 웨이브 때 남하하는 대규모의 괴물들을 교묘하게 유도.

박하늘이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본인이 살려고 하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거야.'

미처 피난하지 못한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잊힌 영웅.

저 감은 믿을 만했다.

결심을 내린 유진은 불사자의 관을 슬쩍 가리켰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믿고 있었다고.]

손톱으로 관 뚜껑을 조심스럽게 밀어난 파프너.

오색 빛깔을 내뿜는 구체가 관 한가운데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저렇게 생겼군, 이라고 중얼거린 유진은 손을 들어서 파프너를 제지했다.

"표본만 챙겨두자."

회귀 전, 후를 통틀어서 처음 보는 형태의 에너지.

신준석에게 분석을 맡겨봐야지.

당장은 어느 분야에서 쓸 수 있을지 감이 안 오지만, 미래의 대연금술사라면 명쾌한 답을 내려줄 것이다.

비어 있는 병 하나를 주워서 구체에 슬쩍 갖다대니 빛 일부가 안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먹어도 돼?]

"오냐."

[잘 먹겠습니다.]

파프너는 빛나는 구체를 꿀꺽- 삼켰다.

*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강렬한 기운.

거세게 타오르는 불구덩이처럼 뜨겁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얼음을 꿀꺽 삼킨 듯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와. 겁내 아프네.'

파프너는 입을 꾹 다물어서 한숨을 삼켰다.

입을 벌렸다가는 방금 전에 삼킨 용족의 정수가 새어나올지도 몰랐기에.

고통에 벌어지려는 주둥이를 붙들었다.

'이건 평범한 통증이 아니야. 혼백으로 전해지는 충격이다.'

송명석이 용아병으로 몸뚱이를 옮길 때 극통을 느꼈듯.

파프너 역시 비슷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드래고니안 사체에 빙의했지만 그녀의 본질은 아직 인간이었으니.

순수한 용의 정수가 스며드니 혼백의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아. 그래. 나한테 모자랐던 게 이거야.'

파프너는 4대 새끼 정룡의 정수가 농축된 구체를 천천히 음미했다.

고통 좀 받아서 어쨌다고?

잠깐만 참으면 된다.

이 순간, 파프너는 굳이 '인간'이나 '생전'의 자신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면 어떻고. 망자면 어떻고. 드래곤이면 어때.'

날개나 꼬리에 익숙해지는 정도로는 진정한 의미의 '엘드리치 드래곤'이 될 수 없다.

4대 정룡에게서 뽑아낸 정수가 반발하는 것을 느낀 후에 얻은 깨달음이다.

자신은 자신일 뿐.

반발하는 용의 정수를 드래곤 하트에 욱여넣고.

멈춘 심장을 영력으로 뛰게 하면서 전신으로 순환시킨다.

쾅! 쾅! 쾅!

파프너의 내부에서 연신 폭발이 일어났다.

용석을 먹고 축적한 용의 인자가 4대 정룡의 정수에 반응.

레리크들의 피와 살, 그리고 뼈로 만든 엘드리치 드래곤의 육신을 진정한 용족에 걸맞은 형태로 재구성시켰다.

[주인. 내 라이프 포스 베슬을 줘라.]

"엥?"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급히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은 구슬을 꺼냈다.

용의 정수를 응축시켜서 만든 라이프 포스 베슬.

리치와 마찬가지로 구슬만 깨어지지 않으면 몸뚱이가 파괴되어도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게 해주는 비술이다.

파프너는 그 생명줄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불완전함을 버리고 온전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둘을 합치자.'

유진처럼 무수한 경험과 데이터, 그리고 계산에 의해 도춯한 결론이 아니다.

마음이 향하는 대로.

드래고니안 사체를 기반 삼아 만들어진 불완전한 육체를 채워나갔다.

여기서 파프너도, 유진도 생각하지 못한 또 하나의 요소가 변화하는 엘드리치 드래곤의 몸에 깃들기 시작하는데.

우우웅-!

지금까지 파프너의 몸이 붕괴되는 것을 막아주던 신전에서 대량의 성력을 분출.

하늘 위로 솟구친 회색 기둥이 그녀의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그게겔.

-그겔.

성력을 지닌 언데드.

디파일러들도 파프너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했으니.

망자의 육신에 성력과 용족의 정수가 뒤섞였고.

살아있는 마력 노심이자, 어떤 기계보다도 뛰어난 힘을 지닌 드래곤 하트가 융합되는 힘을 다시 전신으로 내보내며 변화를 가속시켰다.

"이건 대체."

〔짐도 이 현상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바가 없구나.〕

"성좌 나리. 구경만 하지 말고 힘 좀 보태봐."

〔그리하마.〕

휘오오오-!

소용돌이치는 힘의 폭풍 속에서.

파프너는 하나의 알을 깨고 여태까지 없던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기 시작했다.

[종의 한계를 넘어 새 가능성을 엽니다.]

*

용.

신화시대와 필멸자들의 전설에서 대적자로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며.

동시에 강대한 힘을 지니고 필멸의 굴레를 벗어난 초월종이다.

여러 성단이 전쟁 대신 대타협을 이루고 '만신전'을 건설했을 때, 각 세계에 흩어져 있던 용들도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것이 용 군단이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구나.』

황금을 녹여서 발라놓은 것 같은 비늘.

용 군단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골드 드래곤의 수장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의 눈동자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안식처를 향했지만.

바라보는 것은 벽 너머에 위치한 만신전에 얽힌 수많은 차원의 흐름이었다.

『새로운 용 군단의 가능성이라.』

용 군단은 만신전에 좌(座)를 두진 않았다.

신들의 대적자로서 위명이 자자한 용들이 별에 제 이름까지 새기면?

여러 성단과 전면전을 벌일지도 모르는 중대사였기에, 용 군단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대신 협력하는 입장으로 용 군단을 대여해주면서 만신전의 힘을 빌려서 여러 차원에 개입하는 중이었다.

『만신전에 여태 없던 새로운 개념이 탄생했다고 하였는데, 이번 일과 관계가 있는 듯하구나.』

용 군단에서 가장 지혜로운 종족.

골드 드래곤의 수장은 만신전에 얽힌 차원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만으로 앞뒤 상황을 빠르게 유추했다.

새로운 개념, 그리고 용족.

이 사태는 용 군단에게 있어서 이득일까, 아니면 손해일까.

『이리로 오라.』

골드 드래곤 수장의 사념이 퍼져 나간 지 얼마쯤 지났을까.

반대편에서 금색을 띤 용 하나가 그의 앞으로 날아왔다.

『깨어나셨습니까. 군단장이시여.』

『클클클. 호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빨리도 오는구나.』

『다른 용도 아니고 군단장님이시니. 바삐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드는구나. 요즘 것들하고는 다르게 성실해.』

요즘 것들은 말이지, 어? 마법에 대한 열의도 없고 어쩌고....

부름에 이끌려서 온 용족은 골드 드래곤 수장의 장광설에 하품을 삼켰다.

용족 불러놓고 라떼 시절 이야기라니.

상대가 일족의 수장만 아니었으면 들이박았을지도 몰랐다.

젊은 용족에 대한 못마땅함을 토로하는 데만 며칠 정도가 흘렀고.

『그래, 그래. 잠시 다른 이야기를 했구나.』

못마땅한 것을 어느 정도 털어낸 골드 드래곤 수장이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구라는 차원을 아는가?』

『예. 최근에 만신전과 연결된 차원입니다.』

『군단은 어느 정도나 개입할 수 있나.』

『침식 단계가 높지 않아 간접적으로만 개입할 수 있습니다.』

『아쉽지만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구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지?』

골드 드래곤 수장은 만신전에 얽혀 있는 흐름 한 가닥을 뽑아냈다.

[새 가능성을 엽니다.]라는 메시지.

『용족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낸 아이를 찾아내어라.』

169화 믿음이 가는 동료들

[파프너의 종족이 언데드 → 사룡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엘드리치 드래곤으로서의 기질을 상실합니다.]

[특성 – 불완전한 영생이 삭제됩니다.]

[특성 – 진룡이 추가됩니다.]

언데드로 시작하였으되, 이제는 망자가 아닌 존재.

종족 표기가 사룡으로 변경되면서 언데드 특유의 성질이 몇 개 삭제되었다.

변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0미터 크기의 몸이 1/2 정도로 축소되었고.

빛을 잃었던 비늘이 윤기를 되찾고 심연 같은 흑빛을 품었다.

유진은 곧바로 파프너의 스탯을 확인했다.

"덩치가 줄어들었어도 능력치는 그대로군."

[음. 밀도를 높였다고 해야겠지?]

"재구성인가."

[몸을 키우면 스펙도 그에 비례해서 늘어날 거야.]

"조건은?"

[이전과 같아. 마석을 먹어야 하지.]

"한결같아서 좋네."

[대신 효율이 3배는 될 거야. 소화력도 전보다 빨라졌고.]

성장속도가 3배라.

엄청난 특혜군.

파프너의 고유 특성인 [마투사]는 마력(영력) 스탯이 늘어나면 무작위로 다른 스탯도 늘어난다.

스탯이 2배로 복사가 되는데, 효율이 3배로 늘어나면 그 효과도 극대화되겠지.

〔불완전한 영생으로 인해 거둘 수 있는 이점을 고려하면 조금 아쉽구나.〕

크로노스의 말은 옳았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는 한, 계속해서 되살릴 수 있는 [불완전한 영생] 특성.

애꾸눈과 조우했을 때도 파프너를 남긴 것도 그 덕분이다.

최중요 전력을 위험한 곳에서 마구 굴릴 수 있다는 건 굉장히 큰 전략적인 이점이거든.

'얻은 게 하나가 아니니 괜찮아.'

〔한 가지가 아니다?〕

'진룡 특성.'

[고유 특성 - 진룡]

속성 지배력이 300% 증가하고 마법 사용 시 마력 소모 및 재배열 속도가 70% 감소합니다.

진룡은 드래고니안 같은 용인이나 바실리스크처럼 아룡에게 없는 특성이다.

말 그대로 진정한 용에게만 부여되는 능력.

속성 지배력은 브레스처럼 고유 속성을 활용한 공격의 파괴력과 전개 속도 등에 추가 보정을 붙여주고.

마법 사용 시 소모 및 재배열 속도 감소는 말해봐야 입이 아픈 능력이다.

'마법의 종주. 드래곤다운 고유 특성이지.'

〔한데 그대의 대전사는 마법을 거의 안 다루지 않느냐.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만.〕

'속성 지배력은 폼이 아니야.'

예시로 브레스를 들었지만.

고유 속성을 발출하는 능력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오러나 오러 블레이드.

발현하는 마력의 성질에 따라 성광기 / 오러 / 암흑 투기 / 마투기 등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진룡 특성이 있으면 암흑 투기의 위력도 증가한다.'

〔대단한 것은 사실이나, 그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마법도 다루어야 할 것이니라.〕

'스킬 북이라도 구매해봐야지.'

안 그래도 파프너에게 줄 흑마법 스킬 북들을 구하려던 차였다.

진룡 특성까지 생겼으니 빨리 구해야겠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사룡이라는 종족은 처음 봐서."

[헤헤. 주인이 당황하는 건 흔치 않은데 말이야.]

"나도 사람이다."

[그러면 좀 더 놀라게 해줄까.]

파프너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영력을 끌어 올렸다.

빠르게 재배열되는 영력.

그 속도만큼은 4성인 유진을 월등하게 초월했으니.

'갑자기 웬 마법이야?'

습득한 주문이라고는 [다크 미사일] 말고 없는 녀석이.

그나마도 실전에선 위력도 약하고 재배열 과정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폴리모프]

파프너의 전신을 물들이는 하얀 섬광.

5미터 크기의 형상이 빠르게 축소되더니 인간의 실루엣으로 변했다.

허리까지 닿는 흑발과 햇볕 한 번 닿지 않은 것 같은 하얀 피부.

마담에 비견되는 외모의 여인은 파충류를 닮은 마름모꼴 눈동자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어때?"

"박하늘 씨?"

"그 이름은 버렸잖아. 파프너라고 불러줘."

"생전의 모습인가."

"응. 눈 빼고는 기억대로 된 것 같아. 어때?"

"일단 옷부터 입어라."

"...어??"

파프너는 잠깐 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으아아아!! 라는 비명을 지르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

"형. 대체 어디를 다녀온 거야?"

"너는 왜 가자미눈으로 보냐."

"그 옆에 계신 분에 대해서 우리한테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팔짱을 낀 채, 날카로운 눈으로 파프너를 노려보는 강민영.

옆에 선 두 사람은 정면에서 보지 못하고 힐끗거렸다

"나 몰라?"

"당신 같은 사람이랑 구면이면 바로 알아봤죠."

"대련도 많이 했잖아."

"그런 기억 없어요."

파프너는 느긋하게 강민영의 앞에 서더니 손을 뒤로 젖혔다.

잠깐.

그 자세.

설마 한 대 패려는 건 아니겠지?

화아아악!

꽉 말아 쥔 주먹에서 느껴지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살기.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압박감이다.

강민영은 몇 번이고 했던 대련 때의 습관대로 입술을 질끈 깨물으며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파프너. 갑자기 왜 살기를.... 응?"

"봐. 알잖아."

"진짜? 당신이 파프너라고요?"

"속고만 살았나."

"혀, 형님. 그러니까, 누님?"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극존칭 쓰고 그래."

"도무지 믿기지가 않슴다."

이성민이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강민호 역시 부끄러워하는 건 마찬가지였고.

으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녀석들 같으니.

블랙 컴퍼니 간부라는 놈들이 말이야. 담대함이 없어요.

"동업자 양반은 그래도 믿음직스럽네."

"ㄴ, 네?"

아니구나.

선 채로 기절한 거였군.

유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파프너의 파격적인(?) 변신에 얼어버린 블랙 컴퍼니 간부진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됐고. 사업 보고나 좀 들읍시다."

"준비해두었습니다."

임재백은 빙그레 웃으면서 준비해둔 PPT 화면을 켰다.

수직 상승하는 그래프.

뽀시래기 용병단과 연금술 공방, 그리고 붉은 거미한테서 가져온 사업체들까지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공방이야 그렇다 쳐도. 용병단은 좀 의외네."

"저희 능력이 아닙니다. 김 고문의 협조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겁니다."

"겸손하게 말할 필요 없어. 네 수완과 능력 덕분에 성장한 거다."

목줄을 걸어놨어도 미친개는 미친개다.

김미정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어떻게든 맞춰 주면서 부려먹는 것도 재주지.

"용병단장의 제일 중요한 덕목은 사람을 쓰는 안목이다. 김미정을 잘 써먹은 것도 네 능력이야."

"감사합니다. 형님."

이건 진심이다.

강민호의 잠재능력이야 '거울 사냥꾼'을 떠올리면 확실했지만, 사람을 다루는 분야는 미지수였다.

회귀 전에 용병으로 활동했던 것을 떠올려서 용병단을 맡겼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해주고 있다.

"포션 공장은 얼마나 지어졌나?"

"벚꽃이 지기 전에는 완성될 것 같습니다. 설비까지 들어가면 초여름에 포션 생산도 가능합니다."

"빠르네."

"건축 속도를 올리려고 헌터들을 고용했으니까요."

연금술 공방은 정식으로 도제를 모집했다고 한다.

시범적으로 구인 공고를 10명만 냈는데 수백 명이 몰려왔다나.

"우리나라에 연금술사가 그렇게 많았나?"

"미국과 일본에서도 왔습니다. 괜찮은 친구들이 있어서 좀 뽑았죠."

"언어 문제는... 하긴, 상관없겠어."

대기업에서 일했던 양반답게 4개 국어를 쓸 수 있다고 했지.

영어, 일본어, 그리고 중국어까지.

"와. 연금술사님. 머리 엄청 좋네요?"

"흐후훗. 흐훗."

"그러니까 포션도 막 그렇게 개발하시지. 형이 섭외한 분답네."

신준석의 어깨가 승천할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

참 파악하기가 편한 사람이야.

"임 이사. 그라운드 제로 쪽은 왜 이렇게 수입이 좋아진 거지?"

"나찰 길드가 타격을 입은 뒤로 검은돈이 그라운드 제로 쪽으로 많이 흘러들어왔습니다."

"잡음이 많이 있었겠어."

"대표님께서 제공해주신 언데드 덕분에 문제가 커지기 전에 해결 가능했습니다."

그라운드 제로에 배치한 중급 언데드.

스펙만 높지, 전투 센스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4성 수준의 병사를 양산하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어깨에 힘깨나 주고 다닌다는 녀석들도 중급 언데드 앞에서는 겸손함을 배워갔다나.

"아라한 길드 때문에 동요하는 사람은 없나?"

"형님. 용병들은 크게 신경 안 쓰는 분위기입니다."

"접경지역에서 사고가 났는데 의외네."

"몸값 더 비싸게 받을 수 있겠다고 좋아하더군요."

"부나방들도 아니고. 참."

"형. 용병들은 부나방 맞아. 민 씨 아저씨 보면 알잖아."

"민 씨?"

"검은 늑대 팀. 형한테 덤볐다가 이제는 우리 용병단 들어온 아저씨."

강민영의 시니컬한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용병은 원래 그랬지.

동요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걸로 된 거다.

"좋아. 다들 이대로만 합시다."

유진은 짝짝- 박수를 쳤다.

*

그라운드 제로가 내려다보이는 건물 최상층.

유진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광을 눈에 담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게냐?〕

'내가 자리를 비워도 잘 돌아가잖아. 얼마나 좋아.'

자신만만하게 블랙 컴퍼니를 출범했지만, 불안 요소는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

유진의 이름값에 기대어 몸집을 마구 불린 사업체.

바람 한 번 세게 불면 우수수 무너져버릴 만큼 허약한 구조였다.

그렇지만.

이젠 믿고 맡겨도 될 만큼 노예, 아니 동료들이 성장해서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투자한 보람이 있어.'

미래에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을 미리미리 섭외.

컴퍼니의 요직에 배치해두니 알아서 잘 굴러가는 수준에 이르렀다.

'또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이럼 마음이 편해지지.'

〔메멘토로 확인한 것을 취할 셈이로구나.〕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노스의 회중시계]가 보여준 비전.

필리핀에 나타난 기연을 찾아가려면 2주 정도 자리를 더 비워야 한다.

아라한 길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상황 봐서 포기할 생각도 했는데, 컴퍼니 간부들을 보니 믿고 맡겨도 되겠다.

똑똑-.

"마담이 대표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아. 그쪽도 할 이야기가 많지. 바로 가지."

너무 감상에 빠져 있었군.

임재백의 노크에 생각을 끊고는 블랙 컴퍼니 사옥 밖으로 나섰다.

"은하수 펍으로 모시겠습니다. 대표님."

"됐어. 바쁜 양반 부려먹을 생각 없으니까 일 봐."

"그래도...."

"임 이사도 오늘은 쉬어. 눈이 퀭하네."

4성 무투계 헌터도 피로감을 느낄 만큼 많은 일.

공격적으로 사업 규모를 확장하다 보니 결재거리도 넘쳐났다.

임재백이 유진의 빈자리를 채워주지 않았으면 사업 한두 개 정도는 시원하게 말아먹었으리라.

〔그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도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만?〕

'이래서 눈치 빠른 성좌 나리는 좋아할 수가 없어요.'

은하수 펍으로 가려는 찰나.

불쑥 튀어나온 거지꼴의 사내가 유진의 앞을 막아섰다.

"미스터 천! 당신, 미스터 천이 맞습니까?!"

웬 영어를 쓰지?

아니.

그것보다 목소리가 익숙한데.

등 뒤에 따라오던 임재백이 검을 뽑아들고는 불청객을 가로막았다.

"이 작자가! 아직도 얼쩡대고 있었나!"

"누군데?"

"대표님과 구면이라고 주장하면서 꼭 뵙고 싶다고 하는 걸인입니다. 벌써 1주일째 이 근처를 맴돌았습니다."

누구지?

옷가지로 상대의 됨됨이를 파악하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지만.

갑자기 앞에 튀어나온 사내는 그런 편견이 생길 만큼 몰골이 썩 좋지 않았다.

"미스터 천. 지하 투기장. 기억 안 나십니까?"

잠깐만.

투기장이라고?

익숙한 목소리에 투기장이라는 장소.

"스네이크 아이?"

"Yes. 접니다. 미스터 천."

회귀 전에 유진의 뒤통수를 친 용병이었고.

두 번째 삶에서는 지하 투기장에서 돈을 벌어주었던 인물.

스네이크 아이가 낡아빠진 거죽 안쪽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170화 스네이크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