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앞마당 멀티(2)
구깃구깃한 종이.
김미정을 포함한 용병 여럿이 목숨을 걸고 획득한 정보다.
〔목숨을 걸고, 라. 꽤나 거창한 표현이로구나.〕
'그만큼의 돈을 걸고 부려먹었으니까.'
〔하면 어찌할 셈이더냐?〕
'예전과는 다르게 행동해야지.'
회귀 전에는 개성 인근만 네크로폴리스로 포함시켰을 뿐.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몬스터의 시체야 접경지역에서 쉼 없이 재생성되는 놈들을 죽이거나 암상을 통해 구매하면 됐고.
검은 방참텁이 뿜어내는 안개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져서 한반도 이북을 되찾으려던 정부와 마찰이 벌어지기도 해서였다.
'정부의 눈치? 개나 주라지.'
현 시대의 흐름을 좌우하는 것은 헌터의 힘이다.
대격변 이후 수 갈래로 쪼개졌던 러시아와 중국이 어떻게 과거의 세를 되찾았던가?
로마노프와 천무문.
두 헌터 명가의 힘 덕분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본격적으로 네크로폴리스를 확장함으로써 로마노프 가문에 대응할 힘을 키운다.
이번 세력 확장은 첫 번째 스텝을 밟는다고 봐야겠지.
"염병할. 그 주둥이는 언제까지 닥치고 있을 거냐."
"아. 생각할 게 있어서."
"생가아아악? 남은 몬스터 똥 냄새 맡아가면서 구르고 왔더니."
"어쨌든 잘했다. 보수는 후하게 주지."
"보수 말고. 언제 싸울 거야?"
"계획을 짜야지. 네가 가져온 정보를 바탕으로."
유진은 파주 북쪽의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진 종이를 툭, 툭 건드렸다.
개성 인간사냥꾼과 애꾸눈.
네크로폴리스의 확장을 억제하는 강력한 요소다.
당장에 제치지 못한다고 해서 손가락만 빨 수는 없는 법.
"그 외눈박이 놈을 드디어 사냥하는 거냐!"
"무슨 말이야. 피해가야지."
애꾸눈 사냥?
그런 거 무리야.
마법과 오러 블레이드를 모두 전개하는 대형종을 무슨 수로 해치워.
김미정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럼 놈의 활동영역을 파악하라는 게!"
"빙 둘러서 세력을 넓힐 거니까."
"염병!"
"너무 화내지는 마. 놈을 사냥할 기회는 곧 온다."
그리고 말이야.
네가 만족할 만한 상대는 또 있다고.
유진이 지도 모퉁이를 툭툭 건드리자, 김미정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다.
"인간사냥꾼?"
"그래. 6성급이 다섯이나 있다지."
휘유, 김미정은 휘파람을 불었다.
"진짜야?"
"한 놈은 확실해. 연평도에서 손속을 겨뤄본 적이 있다."
"몬스터를 부리는 놈들이잖아. 재미 없을 것 같은데?"
"내가 겨뤄본 놈은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더군. 증폭한 마법으로도 피 한 방울 내는 게 고작이었다."
당시에는 성위가 한참 모자랐지만, 이라는 뒷사정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내쫓는 게 고작이었다는 추가 설명을 붙이자, 김미정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이름은?"
"주영민. 자칭 제5 혁명군 3군단장이라고 하더군."
"놈은 내 먹이로 줘."
"이번에는 못 볼지도 모른다."
"네 말대로 인간사냥꾼의 영역을 건든다면 조만간 보겠지."
김미정은 실실거리며 웃었다.
*
블랙 컴퍼니의 북진 소식은 대한제약과 성천 그룹과 연이 닿은 기자들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정말로 아라한과 붙는 건가?"
"설마. 그 이신우가 활동을 재개했잖아."
"으음. 그래도 이건 맞불을 놓겠다는 의미잖아."
"천유진. 보통내기가 아닌 모양이야."
일반인들은 블랙 컴퍼니와 아라한의 대결 구도를 쉴 새 없이 언급하며 흥미를 드러냈고.
"한강 온도가 얼마나 된다고 했지?"
"왜! 왜냐고! 아라한 주식은 분명 상한가를 쳐야 하는데!"
"빌어먹을 블랙 컴퍼니!"
"거긴 왜 상장을 안 하냐!"
아라한 길드의 북진 소식에 주식을 구매했던 사람들은 비명을 토했다.
블랙 컴퍼니의 신속한 행동은 아리한의 행보에 어깃장을 놓았으니.
아라한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는 만큼 주식도 연일 하한가를 칠 수밖에.
큰 손들이야 일희일비하지 않고 단기간의 손해를 무릅쓰길 선택했지만.
개미들은 피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형님. 너무 일이 커지는 거 아닙니까?"
"왜. 뭐가."
"실제로는 그렇게 큰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들은 모르지."
접경지역은 위험천만한 땅.
몬스터가 끊임없이 재생하고, 일부 지역은 게이트 핵의 영향으로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리기까지 한 인외마경이다.
애꾸눈 같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철조망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무시무시한 곳이니.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너도 그랬잖아."
"언제적 말씀을. 이젠 적응했죠."
"헌터들도 접경지역 들락거리길 꺼려해. 그러니 우리가 무슨 일을 벌이든, 그 실상을 파악하긴 어렵다는 거다."
"사기를 쳐도 모른다는 말이군요."
"조금 과대 과장을 하는 것뿐이야. 감자칩도 질소를 넣어두잖아."
"우리는 그걸 질소칩이라고 부르기로 사회적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어쭈.
강민호야. 좀 컸다?
유진이 지그시 노려봤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눈을 부릅 떴다.
피식-.
"좀 컸네."
"형님의 곁에 설 수 있게 노력한다고 말씀드렸으니까요."
"용병들은?"
"검은 늑대 팀을 포함해서 15명이 참여한답니다."
"많이도 참여하네. 목숨도 안 아까운가."
"형님을 믿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도 있고."
김미정이 단검을 빙그르르 돌렸다.
이번 북진의 목표는 단순하면서도 어렵다.
-애꾸눈의 성질을 건들지 않는 선에서 네크로폴리스를 확장한다.
-인간사냥꾼과의 충돌은 최소한으로 한다.
"형. 이게 가능한 거야?"
"용병단 고문께서 물어온 정보대로라면 될 거다."
유진은 개성 옆 산자락을 가리켰다.
옛 북한 명칭으로는 장풍군이란, 대격변 이후로는 전역이 게이트에 침식당해서 생존자가 한 명도 없는 죽음의 땅으로 전락한 곳이다.
"여기는 화산지대라고 했지?"
"화산까진 아니야. 그냥 산이 불탄다고 해야겠네."
김미정은 슬쩍 그을린 머리카락을 빙빙 꼬았다.
화염 저항 아이템은 성천 그룹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공짜로 안 주셔도 되는데요?"
-허허. 무료는 아닙니다. 저희 회사 마크를 크게 박은 제품이라서 말이죠.
성천 그룹 진회장은 화염 저항 옵션이 붙은 코트를 제공했다.
걸치기만 해도 대기의 화기를 억눌러주고.
호흡기관이 상하지 않게 보호해주는 데다 움직임에 방해되지도 않는단다.
총 20벌.
개당 5억이라고 하니 100억 정도인가.
"기자라도 대동해야겠군요."
-흠흠. 안 그래도 헌터 출신 기자를 섭외해두었습니다.
"모델 홍보는 알아서 잘 하실 테니. 후속 기사도 잘 부탁드립니다."
-맡겨주시죠.
성천 그룹의 깔끔한 솜씨 덕에 일이 줄어들었다.
아라한 길드 같았으면 서울에서 요란하게 출정식을 벌이면서 이목을 끌었겠지만.
그라운드 제로와 접경지역에 본거지를 둔 블랙 컴퍼니로썬 헌터 출신 기자를 섭외하는 정도가 최선이다.
"명색이 접경지역 토벌인데 이렇게까지 간소해도 될지 모르겠슴다."
이성민의 투덜거림에 강민영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자신 없어?"
"선배는 벽부터 넘고 그러지 말임다."
"이 자식이!"
함께 하는 용병들이 으르렁대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중 제일 황당한 기색을 드러내는 건 5성 헌터이자 나찰 집단군 습격 때 후퇴했던 민상진이었다.
"저런 친구들한테 패배했다니. 어디에 말할 수도 없고."
"어디에 놔도 부끄러운 간부들이야. 오빠."
검은 늑대 팀은 한숨을 내뱉었다.
*
파주와 개성, 그리고 장풍군이 맞닿아 있는 이름 모를 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열기가 공기를 덥혀서 주위의 풍광을 일그러트린다.
"이야. 성천 그룹. 좋은 걸 개발했어."
"뽀시래기 용병단 고문 님. 좀 더 몸을 움직여봐라."
"나보고 모델 노릇을 하란 거야?"
"받았으면 그만한 값어치는 해야지."
"염병할."
김미정은 유진의 요구에 표정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성천 그룹 마크가 잘 보이는 각도를 취했다.
헌터 출신 기자가 촬영하는 동안 산자락을 흘겨보았다.
'정말로 불타는군.'
〔계약자여. 회귀 전에는 이 땅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땐 열기가 사라졌거든.'
게이트 핵을 추출해서 제거하는 방법이 개발되기도 했고.
재생성되는 화염 속성 몬스터들을 사냥하다 보니 열기가 발생할 계기가 없어졌다.
〔그대도 모르는 곳이렷다?〕
'어.'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쉽게 가는 꼴을 못 봐요. 하여간.'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 정도의 열기라면 지하를 흐르는 영맥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검은 방첨탑을 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첫 단추를 꿰는 것부터 엉망이로구나.〕
'좋아하지 말라고.'
김미정한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리 대책을 준비해두었다.
될지 안 될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2팀은 예정대로 갑죠."
"인간사냥꾼이 움직이면 신호탄을 쏘고 후퇴해라."
"개죽음은 사양이니 강조 안 해도 그럴 거유."
민상진을 포함한 뽀시래기 용병단원 대부분은 산자락 아래로 내려갔다.
용병 무리를 힐끗거린 유진의 시선이 왼쪽으로 옮겨갔다.
불타는 산에서 서쪽 방향.
인간사냥꾼들의 본거지인 개성이 있는 쪽이다.
'시야가 안 좋군. 보이지 않아.'
쯧, 하고 혀를 차는 유진.
이번 작전의 핵심 포인트는 두 가지.
불타는 산을 토벌해서 네크로폴리스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
또한, 인간사냥꾼들의 행동을 견제하는 것이다.
'날씨가 좋으면 놈들의 움직임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운에게서 버림받았다고 계획을 미룰 순 없다.
"고문 님."
"염병할. 조롱하려고 그러는 거지?"
"설마 그러겠어."
김미정은 샐쭉한 눈으로 흘겨본 후 불타는 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공기를 달구는 열기가 몸을 침범하려 했지만.
성천 그룹에서 제공한 코트 덕에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타지 않는 자."
"너도 우리와 같이 타라."
숯처럼 검게 그을린 덩어리들이 가볍게 진동하더니 투투툭,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신장은 약 3미터.
화염으로 벼려진 단단한 갑피 곳곳에 균열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뜨거운 불꽃이 새어나왔다.
화염인.
4성으로 분류되는 몬스터들이 김미정을 노렸다.
"헹. 이렇게나 굼뜨면 이 누님을 만질 수나 있겠어?"
잔상을 남기며 화염인 무리 사이를 자유롭게 누비는 김미정.
화염인의 불꽃은 뜨겁지만, 직접 닿지 않으면 코트의 효과 덕에 어느 정도 방어가 됐다.
서걱-.
한 발 늦게 폭발하는 오러.
칼날의 궤적에 심어놓은 마력이 동시에 터지면서 화염인들의 목덜미를 날려버렸다.
"그 유명한 도적의 일곱 가지 도구인가."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 좀이 쑤시네.]
"적당히 놀고 와."
파프너도 장작 패기에 동참.
화염인들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였다.
〔다른 하수인들은 동원하지 않는 게냐?〕
'언데드는 불에 약해. 상식이다.'
〔그대의 대전사는 멀쩡하게 움직이지 않느냐.〕
'암흑 투기로 몸을 보호하고 있잖아.'
나머지 언데드들을 왜 산자락 아래에 머무르게 하겠어?
네크로폴리스 방어 전담으로 놓고 온 송명석을 뺀 정예 병력은 모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
불꽃은 상성에 안 좋기 때문이지.
화염인들의 시체가 쌓이자, 유진은 양손을 비비며 앞으로 나섰다.
"작업 시작하니까 건들지 마."
화염으로 뒤덮인 산에 네크로폴리스를 만들려면.
이쪽도 변칙을 쓰는 수밖에.
눈을 감고 영력을 끌어올리는 순간.
퍼어엉-!
붉은 섬광과 함께 커다란 소리가 산자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네크로맨시로 레벨업하는 성자님
151화 앞마당 멀티(3)
인간사냥꾼.
제5 혁명군이라고 자칭하지만, 사람을 몬스터들의 먹이로 던져주는 인간 백정들이다.
총원은 고작 수십 명.
적은 숫자로 개성 인근을 장악할 수 있었던 건 인간사냥꾼 전원이 [테이머]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못 보던 애미나이가 왔구먼 기래?"
[테이머].
몬스터를 길들이고 수하로 부릴 수 있는 하이브리드 형 직업.
인간사냥꾼은 테이밍한 몬스터들을 개성 인근에 배치하고 눈과 귀로 사용했다.
블랙 컴퍼니의 북진도 그들의 시야를 벗어나진 못했으니.
3군단장 주영민은 심령으로 연결된 몬스터의 눈을 통해 불청객이 들락거린 것을 확인했다.
"어디 가십네까?"
"마실이라우."
부하들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리며 움직이는 주영민.
비쩍 마른 여인이 그의 앞에 서더니 어깨를 가볍게 붙들었다.
"침입자네?"
"누님은 가만 있으라. 내 먹이다."
"고조 아새끼래 무리하지 말라. 니만 재미 보다 다 주기뿌지 않았나."
"디냔 이야기 왜 하나!"
"경망하게 행동 말라우."
제2 군단장이자 배다른 남매인 주영숙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녀는 동생과 달리 스탯을 마력에 집중 투자한 타입.
마력 스탯을 극단적으로 올려서 테이밍 범위를 어마어마하게 늘려놓았다.
혼백으로 이어진 끈을 자극.
개성 인근에서 대기 중인 괴물 군대를 움직였다.
-오크 부족장 5.
*휘하 전사 872.
-홉 고블린 7
*휘하 고블린 5천.
-코볼트 족장 6
*휘하 코볼트 보병 2천.
8천에 가까운 몬스터들의 군세.
모두 테이밍한 것이 아니다.
집단을 통솔하는 수뇌부만 골라내어 부하로 만든 것.
이 경우에는 오크 / 고블린 / 코볼트의 진로가 겹치면 충돌할 가능성이 크기에 동선을 잘 짜야 했다.
"동무는 큰 그림을 못 본다."
"누님이나 많이 보라우."
자칭 제5 혁명군에서 가장 전략적인 시야를 보유한 인물.
깡마른 여인, 주영숙은 몬스터들의 진격 루트가 겹치지 않게 대규모 군세를 움직이며 침입자들이 있는 쪽으로 유도했다.
"기리니끼 고조 애미나이들 지치면 마무리하라."
"누님만 믿겄디요."
기껏해야 1성과 2성급 몬스터들.
테이밍 해놓은 보스급 괴물들도 잘 쳐줘봐야 3성급이다.
겁 없이 개성 인근까지 온 것을 보면 실력에 자신이 있는 헌터들이라고 쉽게 예측이 가능했다.
'압도적인 숫자를 두고 애미나이들이 뭘 할 수 닜간?'
인간의 체력과 마력은 무한하지 않다.
주영숙은 헌터와 싸울 때마다 그 부분을 집요하게 노렸다.
신묘한 용병술까지 발휘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침식된 땅에서 무한하게 샘솟는 몬스터들을 길들이고.
적의 체력이 떨어질 때까지 쏟아 붓는 것뿐.
몬스터들끼리 상잔하지 않을 만큼 동선만 짜주면 된다.
[사육사의 눈]
길들인 몬스터와 시야를 공유하는 스킬.
10킬로미터 너머에 떨어져 있는 오크 부족장의 눈으로 침입자들을 관찰했다.
'고조 애미나이들이 잘 싸우는지 확인해보겄...?'
주영숙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오크 부족장의 시야에 비친 전장.
그 모습은.
더 이상 전투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
"시킨 대로 했수다."
"잘했다."
민상진을 포함한 용병들은 미련 없이 후퇴했다.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 대군.
대부분이 3성 이하지만, 2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맞서 싸웠다가는 뼈도 추리기 어려웠다.
"무리한 일 안 시켜서 다행이지."
"시켰으면 퍽이나 했겠어."
"바로 도망쳤을 거유."
"용병은 의뢰를 목숨처럼 여겨야지."
"보다시피 성실한 편은 못 돼서. 용병의 본분을 다했으면 좀비가 되지 않았겠어유?"
정론이군.
유진은 가볍게 투덜대며 앞으로 나섰다.
"너흰 장작을 더 모아라."
"혼자서 할 거유?"
"그게 나아."
작업 좀 시작하려니까 훼방을 놓고 말이야.
씰룩이는 입가에 강민영이 히익, 하고 새된 비명을 내뱉었다.
"형. 꽤 화가 났네."
"내가 뭘."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웃음을 지으면 늘 사고가 난단 말이야."
"아름다운 미소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다."
"저 모르는 사이에 미의 관점이 바뀌었슴까?"
오른손에 힘을 슬쩍 주니 이성민이 고개를 홱 돌렸다.
"너희도 화염인 사냥에 가세해라."
"형님. 아무리 그래도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걱정하지 마."
유진은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산자락 아래로 내려갔다.
귀에 아른거리는 얇은 숨소리.
고블린들이다.
'빠르게도 왔군.'
〔그 인간사냥꾼이란 자들의 소행이겠구나.〕
'운이 좋아.'
천 단위의 몬스터.
그것도 조무래기들을 먼저 보낸 걸로 볼 때 2군단장 주영숙의 솜씨가 분명했다.
잡병들로 체력을 소모시키는 건 그 녀석의 주특기거든.
〔바다에서 마주친 작은 인간을 또 마주했으면 좋았으려니와.〕
'쉽게 가는 꼴을 보면 배가 아프기라도 하십니까?'
〔그대에게는 시련이 필요하니라.〕
유진은 못 들은 척하며 마법 무장들을 [본 컨트롤]로 움직였다.
흠.
그러고 보니 구울의 뼈로 만든 기초 수준의 마법 무장들을 지금도 쓰고 있었구나.
네크로맨서 전용 무장은 게이트에서 발견되는 시기가 아닌 만큼, 직접 제작하는 것 말곤 획득할 방법이 없었다.
'성유물을 개조할 때에 새 무장도 만들어야겠어.'
[다중 영창]
[본 스피어 x 4]
네 방향으로 쏘아진 마법 무장들이 고블린의 목덜미와 심장을 관통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반격조차 못하고 쓰러졌지만, 남은 고블린들은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고 나아간다.
〔본디 겁이 많은 족속들일 터인데. 과거에도 그러지 않았더냐.〕
'홉 고블린이 지휘를 하면 달라.'
특수한 음파로 고블린 다수에게 명령을 내리는 보스 몬스터.
홉 고블린은 지휘 능력에 더해 3성 수준의 전투력까지 보유한 탓에 위험도가 높은 몬스터다.
'지금은 내 먹잇감이죠.'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흩날리는 살점과 피.
독 주문으로 개량하면서 폭발 범위 및 위력이 증대된 폭발 주문이 산자락을 뒤흔든다.
순식간에 100마리 가까운 고블린들이 쓰러졌지만.
여전히 두려운 기색 없이 달려들었다.
"좋아. 그래야 흥이 나지."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아머드 좀비 37구를 제작합니다.]
죽은 고블린들의 뼈와 살이 분리되고.
덧대어지며 재조립되는 과정까지 소요된 시간은 불과 2초 남짓.
이번 원정에 참여한 조승철이 뼈를 딱딱거렸다.
[대단하십니다. 주인님. 그게겔.]
"입에 발린 칭찬은 관둬라."
[그게겔. 제가 방금 전처럼 언데드를 일으키려면 1분은 필요했을 겁니다.]
"1분이 아니라 2분을 줘도 못했겠지."
[그겔.]
영력으로 골격 및 살점을 분석.
적절한 형태로 가공 및 재구성을 싸움 도중에 한다?
실력 있는 네크로맨서도 무리였다.
'나 아니면 말이야.'
〔언젠가 그 교만함으로 인하여 사달이 날 것이니라.〕
'회귀 전을 기준 삼아도 많지 않거든. 그만한 실력자는 말이야.'
〔계약자는 인내와 겸손함을 배워야 할지니.〕
겸손함에서 180도 정도는 떨어져 보이는 양반이 그런 소리를 해봐야 설득력이 있나.
쯧, 유진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쿠르륵. 앞으로 가라."
"쿠륵, 우리. 싸우려고 모인 거 아니냐."
"쿠르륵. 더 큰 싸움. 기다린다."
오크들의 거친 숨소리가 측면에서 아른거린다.
빨리도 도착했군.
〔가만있으면 양면전선이 되겠구나. 괜찮겠느냐?〕
'말했잖아. 나 혼자 충분하다고.'
〔호오. 오기를 부리는 건지, 자신 있는 건지는 지켜보면 알겠구나.〕
'양면전선은 무슨.'
유진은 픽, 짧게 코웃음 쳤다.
파훼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제2 군단장 주영숙은 괴물들을 모두 테이밍한 것이 아니다.
오크 무리를 고블린이 있는 방향으로 유도하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울걸.
주영숙의 성격상 전장에 직접 왔을 리는 없고.
세세한 병력 운용은 불가능할 거다.
〔나름대로 근거는 있는 판단이로구나.〕
'아. 그렇게 하진 않을 거다.'
그럼 재미가 없잖아.
유진은 지면을 박차며 오크 군대가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성유물, [죽음의 낫]이 튀어 나오더니 손에 착 잡히고.
[본 컨트롤]로 길이까지 늘어나면서 대낫으로 변했다.
"쿠륵! 적!"
"응. 말 안 해줘도 알아."
[스퀴테]
[4식 - 수확을 사용합니다.]
허공을 부유하는 오크의 머리.
낫에 오러를 실어낼 필요도 없었다.
4성급 무투계 헌터와 맞먹는 신체능력이면 숨 한번 들이키며 힘을 짜내면 오크를 일격에 베는 것쯤 쉬운 일이었다.
길게 늘어난 낫을 빙그르르 돌리며 분리된 머리를 오크 군대 한가운데로 던져놓고.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그대로 터트렸다.
"쿠에엑!"
"쿠엑!"
오크 몇 마리가 각혈하며 쓰러졌다.
폭발의 촉매로 사용한 오크의 머리가 크지 않다 보니, 위력 및 범위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리바이브를 사용합니다.]
생전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게 되살아난 망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크들은 리바이브 특유의 성질 때문에 동족이 아닌, 언데드란 사실을 늦게 인식했고.
쿠아아아앙-!
연이은 폭발이 지축을 크게 뒤흔들었다.
"쿠륵! 시체를 조심해라!"
"쿠르륵. 몸으로 덮어서라도 폭발을 막아라."
"쿠륵, 각 부족은 산개한다."
연쇄 폭발로 쓰러트린 오크는 100마리 정도.
대처가 빠르군.
원격 조종인데도 이만큼이라.
하여간,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나 보다.
〔영력소모가 빠르구나.〕
'개량한 시체 폭발이나 리바이브, 두 주문 다 소모량이 만만찮으니까.'
〔한데 괜찮겠느냐? 저 되다 만 피조물들은 아직 많으니라.〕
뭘, 이 정도 가지고.
유진은 살기 어린 오크의 돌진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대낫을 장난스럽게 휘둘렀다.
[역천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서걱-!
가벼운 동작과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힘에 오크가 두 동강 났다.
놈의 공격을 흡수하는 게 아니냐고?
천만에.
'에너지 그 자체를 흡수한다.'
블랙 컴퍼니 운영에 시달리면서도 틈틈이 가호에 대해 연구한 결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해석이 가능한 '에너지'의 범위는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사실.
역천의 가호는 에너지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흡수해서 축적할 수 있다.
'질량이나 생명력 같은 개념도 말이야.'
F = ma
힘은 질량 x 속도.
생명력은 에너지의 일종.
모든 요소를 흡수하고 분석할 수 있다면 에너지 치환도 자유자재로 가능하다는 의미다.
'흡수한 에너지를 분석. 재구성한다.'
발현까지 할 필요는 없다.
재구성하는 것은 유진의 근간인 영력.
역천의 가호로 시체 폭발(改)과 리바이브로 소모한 힘을 충당했다.
〔짐이 하사한 가호를 이런 식으로 응용할 줄이야.〕
'나니까 가능한 거다.'
〔숙지하고 있느니라. 성력과 마력을 모두 다룰 줄 아는 그대만이 보일 수 있는 기예겠지.〕
설명은 복잡하지만, 요는 근접 피해를 주거나 받았을 때 영력 회복이 가능하다는 거다.
반쯤 근접전이 강요되지만 소모한 힘을 회복할 수단이 [라이프 드레인] 말고 하나 더 생겼다는 건 엄청난 장점.
[백야] 특성으로 성력 / 영력을 바꿨을 때 중급 언데드들이 굼떠지는 것을 생각하면 일장일단이 있다.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근접전을 벌이면서 소모되는 영력을 충원.
그 와중에 시체들을 망자로 일으켜서 오크들의 발목을 잡았다.
유진은 멀찍이 서 있는 오크 부족장을 바라보았다.
"왜. 뭐가 잘 안 돼?"
오크 부족장과 시야를 공유 중인 여인, 주영숙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간나새끼가!!!!"
읽혔다.
이 공격의 의도.
몬스터들을 사역하는 방식.
약점까지.
10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있는데도.
상대는 주영숙의 속내를 들여다보듯이 모조리 파악했다.
"딘뎡하라우. 누님."
"딘뎡? 디금 마음 가라앉히게 생겼나!"
"왜 그러슈. 딘뎡하고 말하라."
"저기 간나새끼가 내를 농락했다!"
솔직히 두려웠다.
6성 절정의 실력자인 자신이 부린 수작을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읽어냈다.
그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화를 버럭 냈으나, 손이 떨리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주영숙은 마음을 잠식 중인 시커먼 감정을 떨쳐내려고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냄새 풀풀 나는 망자 따위에게!!!"
"망자?"
주영민은 배다른 누이의 외침에 잠시 아- 하더니 킬킬거리며 웃었다.
연평도 해전 때 마주했던 정체불명의 헌터.
그 놈이다.
누이를 곤란에 빠트린 자가 유진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내래 당장 가겠수."
"딘뎡하라우."
"내래 말리지 마라우."
"듈 니상의 군단장은 대장동무 허락이 닜어야 갈 수 닜는거 닞어버렸간?"
인간사냥꾼에는 5명의 간부진이 있다.
하나하나가 전술병기 급 전투력을 보유하였기에, 그들의 대장은 군단장이 사적인 목적으로 한 번에 여럿 움직이는 것을 금지했다.
답답한 듯 주영민은 배다른 남매를 노려보고는.
"내래 니번만 참겄수."
분노를 가라앉히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주영숙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간나새끼는 뉘험하다우.'
대외적인 명분으로 동생을 막아섰지만,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계를 알 수 없는 유진의 저력.
지배 중인 오크 부족장이 품은 두려움이 그녀에게 필터 없이 전달되었다.
만약에 두 군단장이 나섰는데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하면?
'간나새끼가 더 강해질 게 분명하다우.'
시체를 다루는 네크로맨서.
그 자가 더 강해진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불타는 산?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놈이 더 깊이 들어오는 순간, 인간사냥꾼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으리라.
152화 알박기
"괴물이군."
민상진은 입 밖으로 나오려던 신음을 아래로 삼켰다.
대부분 1성에서 2성 아니냐고?
그 수가 천 단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압도적인 숫자로 짓눌리기만 해도 어지간한 헌터는 짜부되어 뼈도 못 찾을 거였고.
거리를 벌리며 유격전으로 가자니 영역 확장이란 목적에서 멀어진다.
정면에서 겨루다가 몬스터들에게 깔리든.
뒤로 물러나든.
무엇을 고르더라도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패배다.
"헹. 보는 눈은 있네?"
"소환수를 수백이나 다룰 줄 아는 거야, 이미 당해봐서 알잖수. 그걸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지."
"맞아. 염병할 놈. 못 보던 사이에 더 강해졌어."
김미정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제작한 언데드가 주력이면서 제 발로 최전선에 뛰어든다?
몸놀림을 보아하건대 동일 성위의 무투계 헌터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늘 상식을 깨는구먼. 우리 고용주님은."
"그래서 재미있잖아."
유진의 솜씨는 잘 포장해도 뛰어나다곤 할 수 없었다.
신체능력이 높으면 무얼 하겠는가.
낫을 휘두르는 자세는 어색하고.
뛰어난 스펙의 효율을 끌어올려줄 스킬은 많지 않아서 어린아이가 진검을 들고 휘두르는 것 마냥 불안해보였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오싹하지 않아?"
"그렇수다. 도저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드는군."
뼈 갑주를 쉴 새 없이 재생성하고.
낫으로 괴물들의 머리를 수확.
[역천의 가호]로는 에너지를 흡수하며 소모되는 영력을 끊임없이 충당했다.
수천이나 되는 적을 삼면으로 붙들어놓으면서 본인 또한 최전선에 섰고, 그 와중에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니.
잘 싸우는 것은 둘째 문제요.
유진의 정신력이 얼마나 굳건한 지 엿보이는 부분이다.
"뭐해. 다들 구경났어?"
"언제는 구경만 하라며. 좀이 쑤셔서 죽는 줄 알았다고."
"화염인들은 더 모아놨나."
"근처에 있는 건 다."
김미정은 수북하게 쌓여 있는 화염인들을 가리켰다.
전보다 배 가까이 늘어난 숯덩어리.
손을 쓱쓱 비빈 유진은 화염인 시체 더미 앞에 서고는 영력을 끌어 올렸다.
-이들도 망자로 되살릴 것이더냐?
'화염인은 생물이 아니야.'
나무 정령 드라이어드의 흔적이라고 해야겠지.
정령은 자연을 구성하는 일부이지, 숨을 쉬는 생물이 아니다.
그러니까 언데드 제작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
[흑암의 반지를 사용합니다.]
[영력 → 마력]
[골렘 연성을 사용합니다.]
연성할 재료는 불.
땔감으로 삼을 화염인의 몸뚱이가 수북이 쌓였으니 촉매는 넘치고도 남았다.
'임시로 만드는 녀석이니 핵은 마석으로 충당이 된다.'
화염인의 마석 여러 개를 직렬로 연결.
마력 방출 양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화염인의 숯더미들을 회로로 잇는다.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자연 요소, 불.
그렇지만.
화염인들을 쓰러트리면서 얻은 숯들을 회로로 연결, 발산하는 방향을 고정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틀을 고정할 수 있게 된다.
"일어나라."
구우웅-.
집 크기만큼 쌓인 숯이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솟구치더니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취한다.
[화염 골렘을 제작했습니다.]
[순수한 원소의 힘을 지녔습니다. 지닌 힘에 비해 내구성이 모자랍니다.]
[핵이 불안정합니다. 골렘의 핵을 교체하거나 보강하지 않으면 출력이 떨어집니다.]
"미친. 내가 뭘 본 거지?"
"골렘이다."
"누가 몰라서 물어봐?! 골렘을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신준석과 내가 있으니 아무도란 말은 빼야겠네."
김미정의 입이 쩍 벌어진 채 도무지 올라오지 않았다.
옆에 있던 뽀시래기 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랑 같이 있으면서 상식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저 형이 하루 이틀 그랬나."
얘들아.
칭찬... 맞지?
〔진즉에 만들었으면 일을 덜었겠구나.〕
'얘는 전투용으로 만든 게 아닌데?'
직렬로 이어놓은 마석들이 인근의 불꽃과 열기를 끌어들인다.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 골렘.
유지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지만, 소모되는 마력에 비례해서 몸뚱이가 갈수록 커졌다.
"조금 선선해진 것 같은데요."
"형. 그 골렘이 불을 흡수하고 있는 거야?"
"맞다. 열기를 한쪽으로 집약시키면 억눌린 영맥의 흐름도 되살아나지."
정공법은 아니다.
신준석 같은 연금술사가 있었으면 마력 유도진을.
마담처럼 주술에 능한 헌터는 불의 흐름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겠지.
세련된 방법은 아니지만 효과적이니 됐잖아?
화염 골렘이 열을 흡수하는 동안 눈동자에 영력을 집중, 포인트를 집어냈다.
[검은 방첨탑을 건설했습니다.]
구조물 제작에 필요한 살점과 뼈, 그리고 피는 넘쳐났다.
인심 후한 어느 헌터 덕분에 말이야.
[인근에 설치된 방첨탑과 네트워크를 구축합니다.]
[네트워크 수 - 6]
[언데드 유지에 소모되는 영력이 10% 감소합니다.]
링크한 검은 방첨탑의 개수를 늘린 게 얼마만이던가.
검은 방첨탑 네트워크는 링크한 숫자가 늘어날수록 버프 효과도 증대된다.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링크한 구조물 중 하나라도 부서지면 전체가 먹통이 되는 리스크도 생긴다.
〔이 땅은 언제든 포기할 생각으로 확장한 게 아니더냐?〕
'그럴 거면 애초에 건들지도 않았어.'
말했잖아.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울 거라니까?
애꾸눈 - 인간사냥꾼 - 네크로폴리스가 교차하는 땅이자, 쉴 새 없이 솟구치는 열기와 불꽃 때문에 건들지 않는 땅.
이 산자락에 깃발을 꽂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만간 알게 될 거다.
*
[검은 방첨탑을 건설했습니다.]
[인근에 설치된 방첨탑과 네트워크를 구축합니다.]
[네트워크 수 - 10]
이걸로 10개째.
개성 인근으로는 더 접근하지 않고 동쪽으로 우회.
연천과 철원 인근까지 네크로폴리스를 넓혔다.
회귀 전이었으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공격적인 세력 확장.
〔야심만만하구나.〕
'실속은 하나도 없어.'
접경지역은 대규모 침식지대이다보니 몬스터가 끊임없이 재생성된다.
검은 방첨탑을 무방비하게 노출시켰다간 금방 파괴될 터.
한 가지 보험은 영력을 섞어서 만들어낸 안개가 재생성 된 몬스터의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단체행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두고 검은 방첨탑만 극단적으로 늘려 놨다.'
4드론이라고 들어는 보셨으려나.
검은 방첨탑의 링크 숫자를 두 배로 늘린 덕에 버프 효과도 눈에 띄게 상승했다.
[영지에 등록된 네크로맨서들의 영력 소모가 50% 감소합니다.]
[사역 가능한 숫자가 100% 증가합니다.]
[언데드의 능력치가 100% 증가합니다.]
안개 속에서는 종류를 불문하고 스탯이 2배로 뻥튀기되고.
네크로폴리스에 종속시키거나 술자가 직접 부리는 언데드들의 유지력 및 강령술에 들어간 영력 소모가 절반으로 깎이며.
하수인의 물량까지 2배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야. 달달하다.'
개성 공략 때 핵심이 될 지역도 쉽게 확보했겠다.
네크로폴리스의 버프 효과를 낀 파프너가 버티고 있으니 쉽게 공략할 순 없을 거다.
만약 파프너를 쓰러트리고 검은 방첨탑까지 부수더라도.
그 과정에서 피해가 강요될 것이고.
파프너야 생명력을 불어넣어서 되살리면 그만이니 손해는 없다.
〔링크한 검은 방첨탑이 파괴되면 다른 영역도 위험하지 않느냐?〕
'버프가 없다고 아예 못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
목 좋은 곳에 알박기도 해놨겠다.
철원 인근을 마지막으로 인간사냥꾼과 아라한 길드의 움직임을 모두 견제할 수 있는 위치는 모두 확보했다.
부자가 된 기분인 걸.
"애꾸눈은?"
"나중에. 당장 싸우면 모두 손잡고 저승 탐방하기 딱 좋은 수준이라."
"염병! 재미있는 거 구경시켜준다며!"
"인간사냥꾼 봤잖아."
"냄새 조금 맡은 게 전부거든?"
"그러면 몬스터 수천을 네가 상대했어야지."
"아. 그건 좀."
김미정은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자신 없다기보다는 단순 노동에 힘까지 빠지면서 재미도 없는 일을 맡긴 싫다며 소소하게 자존심을 세웠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이 내딛은 작은 걸음이지만, 한국에는 큰 도약이다.
-망자들을 수하로 다루는 기묘한 신관.
-신관? 아니면 무투계? 천유진의 수상한 비밀.
....
성천 그룹에서 붙여준 헌터 출신 기자는 세력 확장 과정 중에 촬영한 것들을 최대한 과장해서 보도했다.
알박기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아서 비 내리듯 기사가 쏟아졌고.
블랙 컴퍼니와 협력 관계인 성천 그룹과 대한제약 주식이 급등했다.
"역시 투자는 부동산이지."
아무렴.
땅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잖아.
접경지역 너머를 개발할 때 전진기지가 되어줄 노른자 땅을 선점해두니 든든해졌다.
물론.
과도하게 알박기를 해놓은 후유증도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 대표님. 큰일입니다."
"지영... 아니, 미스터 블랙. 당신답지 않군."
"구룡방이 연평도에 상륙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그런 건 빨리 말해야지!"
네크로폴리스 확장을 마치고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오자마자 다른 사건이 터졌다.
구룡방.
중국 암흑가를 좌우하는 거대 조직이 연평도를 무단으로 점거하려 한 것이다.
해안가에 배치한 [망자의 골탑]과 스칼라 무리가 구룡방 깃발을 단 배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았지만.
놈들은 방어 마법으로 선체를 보호하며 몇 번이고 상륙을 시도했단다.
"쾌속선은?"
"준비했습니다.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좋아. 뽀시래기 팀도 같이 간다."
강민영과 이성민의 능력은 해양 전투에 탁월했다.
무투계 헌터는 선상에서 전투를 벌일 때나 능력 발휘가 가능하고.
마법계도 물이 가득한 환경에선 제대로 화력을 낼 수 있는 속성이 한정되어 있다.
염동력으로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강민영.
이성민도 마법 스크롤과 간이형 포탑으로 여러 속성을 다룰 수 있다.
"저, 스크롤 돈은 형님이 내주시는 검까?"
"그래. 알았다."
"전력으로 모시겠슴다!"
최근 스크롤 값으로 마음고생이 심하던 이성민은 화색이 되었다.
[디그]나 [윈드] 같은 1성 마법이야 스크롤 값이 100만 원 선이지만, [파이어볼]만 해도 한 장에 1,000만 원이 넘는다.
[공간] 능력은 자체적인 전투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이성민이 화력을 끌어올리려면 말 그대로 돈지랄이 필요했다.
'소피아도 본연의 능력이 모자라는 것을 돈지랄로 해결했었으니 말이야.'
유진이 알려준 [공간] 특성의 활용법은 매우 효과적이지만.
가성비가 너무 안 좋았다.
"블랙 컴퍼니다!"
"접경지역에 가 있다고 들었는데?"
"놈이 오면 물러나라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한 번 싸워봐야지!"
통통배에 타 있는 구룡방 헌터들이 원거리 포격을 개시했다.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마탄들을 관찰했다.
〔저 작은 인간들은 그대를 아는 모양이로구나.〕
'김재우가 구룡방에 의탁했다고 했지.'
잊고 있던 정보가 불현 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라운드 제로의 삼강 중 하나.
붉은 거미의 보스인 김재우는 접경지역에서 조직원 상당수를 잃자 마담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회귀 전의 역사에는 벌어지지 않은 일.
자신이 개입해서 바뀐 미래이리라.
'뭐, 그 정도 변수 쯤이야.'
[부정 충격 방패 x 10을 사용합니다.]
원거리 투사체 공격을 받으면 내구력이 몇 배로 오르는 방어 주문.
마법하고는 달리 재배열 과정도 필요 없기에, 의념만으로 여러 장을 덧대어 쾌속선을 보호했다.
"누굴 노리는 거야!"
허공으로 떠오른 석궁 여럿이 통통배 위에 선 마법계 헌터들을 집요하게 노렸고.
미리 뜯어놓은 스크롤로 방출한 마법들은 선체를 뒤흔들었다.
쿵- 쿵- 구룡방 소속 헌터들이 충격에 비틀거리다가 하나둘 바다에 떨어졌고.
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킬라들은 포악한 입을 벌려서 찢어발겼다.
"후퇴! 후퇴다!"
전투 개시 30분 만에 선체를 돌리는 구룡방 헌터들.
유진은 손을 들어 추격을 금지했다.
"형! 여기서 끝을 낼 수 있어!"
"살려서 보내는 게 낫다."
구룡방의 저력은 어마어마하다.
드넓은 중국의 암흑가 중 제일가는 세력.
저 통통배에 탄 놈들을 전멸시켜도 구룡방이 받은 피해는 미미했다.
"차라리 경고하는 게 나아."
이번 전투로 확실히 알았으리라.
연평도가 누구의 소유인지 말이야.
그나저나.
놈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기도 하고, 알박기를 무리하게 해서 그런지 커버해야 할 영역이 넓어졌군.
'하수인을 더 강화해야겠어'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153화 뼈를 깎는 네크로맨서
용 9마리가 모인 곳.
구룡방(九龍幇)은 늘 지도자 격인 아홉의 머리를 뽑는다.
최근에 아홉 머리 중 하나가 된 헌터, 김재우는 느린 동작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놈에게 모두 당했단 말이오?"
"절반 정도는 돌아왔지. 놈이 보내주지 않았으면 모두 물고기 밥이 되었겠지만."
김재우를 찾아온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홉 머리 중 하나. 왕 류메이.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과 앳되어 보이는 미인이 교성을 냈지만 김재우의 표정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뭐요?"
"자기야가 흥미로워 할 것 같아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김재우의 쇄골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뇌쇄적인 모습이지만 김재우는 더욱 안색을 굳혔다.
'빌어먹을 것.'
같은 아홉 머리이긴 해도 왕 류메이와 그의 영향력은 천지차이였다.
애초에 타향 사람인 김재우가 실적과 무력을 인정받은 것도 눈앞의 여인이 힘을 써준 덕분이다.
대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왕 류메이의 애인이 되었다.
단순히 욕망을 토해내고 받는 관계가 아닌, 그녀가 필요한 일을 대신 해주는 하인과 비슷한 처지.
김재우가 운 좋게 깨달음을 얻어 7성이 된 탓에 개처럼 구를 일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왕 류메이의 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자기야.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그건 구룡방 전체의 의견이오?"
"대충은. 자기야의 무력이 출중해서 아홉 머리 중 하나가 되었지만, 실적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있거든."
구룡방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의 음지를 한데 묶는 대형 프로젝트.
블랙 네트워크가 성공하려면 한국의 어둠을 장악해야 한다.
"자기야도 알겠지만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한국만큼 안정된 나라가 없잖아?"
"난 이미 세력을 모두 잃었소."
"에이. 아홉 머리 중 유일한 현지인이 약한 소리 하면 쓰나."
"빌어먹을."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말고. 이번 일에 머리 넷이 지원해주기로 했어."
넷이면 김재우를 빼고 정확하게 반절이다.
이번 건을 잘 해결하면 그를 진정한 아홉 머리 중 하나로 인정하겠다는 의미.
판이 이렇게까지 깔렸으면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축하해. 이번 기회에 원수를 갚겠네?"
"무슨 말이오?"
"내 부하들을 수장시킨 녀석. 자기야를 쫓아낸 녀석이잖아."
김재우의 뺨이 일그러졌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쫓겨난 후, 의식적으로 한국의 정황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처음엔 만리타향에서 자리를 잡느라 복수 같은 걸 곱씹을 여유도 없었고.
이어지는 구룡방의 미션을 수행하던 중 운 좋게 깨달음을 얻어 아홉 머리 중 하나가 된 후로는 굳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붉은 거미가 그라운드 제로의 삼강 중 하나였다지만.
구룡방의 아홉 머리보다는 한 수 떨어졌으니.
'이제 와서 복수라고?'
솔직히 X나게 싫다.
전화위복이라고.
더 큰 부와 권력을 얻었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꼭 해야만 하는 건가?"
"자기야가 거절하면 꽤 슬프겠지."
"제길."
김재우의 욕지거리에도 왕 류메이는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홉 머리 중 하나라곤 해도 기반이 너무 약했다.
7성에 오른 덕에 무력이야 충분했지만, 타향 사람이란 딱지 때문에 현재의 자리를 유지하려면 그녀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제 와서 구룡방을 떠나는 것도 어려웠다.
조직에 한번 발을 담근 이가 나가겠다는데 퍽이나 보내주겠다.
'다른 선택지가 없나.'
엿 같군.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 유진을 떠올리니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좋은 표정이야."
"얼마나 지원해줄 수 있소?"
"해볼 마음이 들었나보네."
"안 하면 가만 안 둘 거잖아."
"맞아. 자기야는 말을 여러 번 안 해도 돼서 좋다니까."
"당장은 아니다. 준비는 해야하니."
"지원 쪽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천천히 해도 돼."
왕 류메이가 서늘하게 웃었다.
*
"붉은 거미 보스가 새 아홉 머리 중 하나가 되다니."
마담한테 들은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거미 사냥 때 전면전을 회피하고 중국으로 도망친 김재우가 음지의 거물이 되어 다시 나타날 줄이야.
회귀 전에는 유진과 마담의 연합에 맞서 정면으로 나섰다가 죽었던 만큼, 더욱 놀랐다.
"어머나. 천 대표님이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네요."
"나도 사람이거든."
놀라움의 포인트는 다르지만, 굳이 짚어주진 않았다.
나비 효과 타령 중인 크로노스의 사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는 송명석이 차지해야 할 자리였다.'
역사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는 건가.
회귀 전에는 이방인이 구룡방의 아홉 머리 중 하나가 된 게 송명석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몇 년 후에나.
한데, 김재우가 아홉 머리가 되었다니.
유진이 회귀함으로써 비틀어진 시간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레일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크하하핫. 이제 어찌 하려느냐.〕
'저번에도 말했지?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 안 담그냐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미 회귀 전과 달라져가는 미래의 흐름에 대항할 힘이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구룡방이 한국에 진출할 지도 모른다고 했지?"
"물류의 움직임으로 볼 때 확률은 90% 정도예요."
"꽤 높네."
"태평양으로 넘어가려면 한국을 반드시 경유해야 하니까요."
구룡방의 목표인 범 아시아 범죄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면 반드시 한국 쪽 음지의 협조가 필요했다.
붉은 거미와 접촉하여 한국에 스며들려고 했지만.
유진의 개입으로 노림수가 분쇄되었다.
"현지인도 있겠다, 직접 오겠단 거군."
"아마 그렇겠죠."
"재밌게 됐네."
북쪽으로는 인간사냥꾼.
아래는 아라한 길드에서 은근슬쩍 압박을 했고.
바다 너머에선 유진과 마담에 의해 쫓겨났던 김재우가 더 큰 세력을 입고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다.
"감시는 맡기마."
"천 대표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별 거 있나. 늘 하던 거 해야지."
뼈를 깎는 노인, 아니 네크로맨서 신세지.
*
당장 부족한 걸 말해보라고 하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모자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제일 급한 건 강자의 부재다.
〔누가 들으면 욕지거리라도 내뱉을 발언이로구나.〕
'애꾸눈 하나 어떻게 못해서 빌빌대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그 생각이야말로 오만함이니라.〕
티탄 신족의 왕께서 그렇게 말해봐야 설득력이 있겠냐고.
어쨌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두 번째 벽으로 칭해지는 7성 이상의 실력자에 대응할 수단이 없단 것이다.
피의 발렌타인 때 7성 마인을 쓰러트렸지만.
놈은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올곧게 심상을 쌓아서 정공법으로 벽을 넘은 진짜 7성과 비교하면 한 수 모자랐다.
'강자의 싸움에서는 그 한 수가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드니.'
그러니까.
네크로폴리스에도 강자가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쓸 줄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나.'
불경스러운 묘지에 묻어놓은 대형 몬스터들의 사체.
바다를 넘어 오는 동안 부패가 상당 부분 진행되어 남아있는 살점이 거의 없었다.
골격으로 삼을 뼈가 남아있는 게 어디인가.
뼈를 모두 챙기고는 파프너도 최전선에서 불러들였다.
[괜찮겠어? 인간사냥꾼들이 틈만 나면 힐끗댄다고.]
"죽음 용기병이면 버틸 순 있을 거다."
[맡겨주십시오. 주인님.]
무뚝뚝한 투로 답하는 최형태.
순수 스펙만 놓고 보면 파프너보다 훨씬 강한 녀석이다.
링크해서 강력해진 방첨탑의 버프를 끼면 인간사냥꾼의 견제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지.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으면 도망쳐라."
[예.]
정신력이 강한 녀석이 아니라서 전략적인 판단력이 떨어지는게 흠이군.
기본 방침은 내렸으니 방어도 적당히 하겠지.
무력만 놓고 보면 파프너보다 위인데도 썩 믿음이 가지가 않았다.
[주군. 차라리 제게 맡겨주십시오!]
"넌 검법 수련이나 해."
[크으읏!]
송명석은 몸뚱이를 수복한 후로 텐티클 블레이드 숙달에 여념이 없었다.
7성 마인이 다루었던 강력한 오러 운용 수단.
마력 소모가 어마어마하지만 그만큼 화력과 유틸성이 뛰어났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곳이다. 널 잃긴 아까워."
[하하하! 보십시오. 도마뱀 녀석. 주군께서는 나를 더 아끼고 계십니다.]
괜한 말을 했군.
네크로폴리스에서 챙겨온 뼈와 파프너를 대동하고는 연평도로 넘어갔다.
[최근에 접전이 있었다지?]
"구룡방이 이 섬을 탐내더라."
[최전선만큼이나 중요한 곳인 것은 알겠다. 그래도 당장 신경을 써야 하는 건 인간사냥꾼 쪽이 아니던가?]
"아. 너한테 수비를 맡기려고 부른 게 아니야."
유진은 신전 앞에 놓인 투박한 관을 가리켰다.
피의 발렌타인 사태를 초래했던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
[불사자의 관]은 붉은 기류에 휘감겨서 요사스러운 빛을 토해냈다.
[이 냄새는 뭐지? 마음이 설레는 걸.]
"냄새라고 느껴지나."
[그래. 죽은 몸뚱이라서 냄새를 맡을 리 없는데도 혈향이 선명하게 느껴져.]
"잘 됐군. 예상한대로 잘 풀린 모양이다."
레리크의 피를 불사자의 관에 모을 것.
3달 전, 검은 방첨탑에 귀속시킨 언데드들에게 내린 지시다.
"이 관은 피에 깃든 근원을 증대시켜준다."
[레리크는 하급 용족. 그 피를 모아서 강화한 거야?]
"강화라기보단 열화된 피의 진짜 힘을 일깨운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파프너의 귀화가 거세게 타올랐다.
당장이라도 관을 열고 그 안에 모인 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
불완전한 형태로 만들어진 엘드리치 드래곤.
드래고니안 사체는 본능적으로 완성되기를 갈망했고, 그 육신에 깃듦으로써 인간을 벗어난 파프너의 혼백도 그 본능에 이끌렸다.
그럼에도.
유진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초인적인 인내로 본능을 억눌렀다.
"잘했어. 그냥 마셔서는 효과가 덜할 거다."
[난 뭘 하면 되지?]
"앞에 누워 있어라."
불사자의 관에 들어가면 효과가 극대화되겠지만.
이번에 할 시술은 스케일이 크면서 섬세함까지 요구하다보니 관 안에 넣고 할 수가 없다.
자칫하면 불사자의 관에 깃든 진조의 개념이 시술을 훼방할 수도 있으니.
변수는 최대한 줄여야지.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미노타우루스의 다리 뼈를 들어서 파프너의 허벅지 엎에 대었다.
사각, 사각, 빙글빙글 돌아가며 조금씩 깎이는 하얀 기둥.
체고만 6미터가 넘는 괴물의 정강이뼈는 신전 기둥보다도 굵었으니 그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네 몸뚱이를 키울 거다."
드래고니안 사체에 깃든 용족의 격.
불사자의 관으로 레리크의 피에 깃든 기원을 일깨우고.
대형 몬스터들의 뼈로 골격을 확장해서 불완전한 엘드리치 드래곤의 완성도를 상승시킨다.
〔계약자.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되느냐?〕
'나도 몰라.'
파프너라는 존재 자체가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본래 엘드리치 드래곤은 리치처럼 스스로 생명력을 봉인해서 언데드가 되는 비술이다.
죽어버린 몸뚱이에 다른 혼백을 넣어서 리치를 만든다고 생각해봐라.
당연히 상식 밖의 일이고, 성공 확률 자체도 낮다.
드래고니안이라는 이질적인 사체를 베이스 삼았으니 더 말이 안 되겠지?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게 바로 나다.'
〔만신전의 시스템마저 인정한 위업이었지. 짐도 기억하노라.〕
'확률을 따지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지 이제 이해가 가시나?'
〔자신만만하구나. 짐도 관망하겠도다.〕
대형 몬스터들의 뼈들을 다듬어내고 누워 있는 파프너의 몸에 딱 붙여놓았다.
[뼈들을 내 몸에 붙이기라도 하게?]
"그럴 리가. 이제 시술해야지."
[시술이라는 게 설마...]
"몸에서 힘 빼는 게 좋을 거다."
후각이나 미각은 없어도, 몸에 전달되는 충격을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는 파프너다.
신경을 끄지 않으면 죽을 만큼은 아니어도 꽤 아플 걸?
[자, 잠깐. 그러니까 뼈를 내 몸에 밀어넣겠단 거잖아.]
"맞아. 시작한다."
뿌드득-.
154화 용오름
평범한 언데드는 몸 일부가 부서져도 금방 복원이 가능하다.
다른 시체의 뼈나 살점을 덧대어 손상된 부위를 대체하고 영력으로 엮어내면 끝.
인간은 수혈만 해도 혈액형이 맞지 않으면 거부반응이 일어나지만.
죽은 시체한테 거부 반응 따위가 일어날 리 없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녀석이라면 말이야.'
합일.
유진이 만든 강령술 주문은 언데드를 평범하지 않게 만든다.
본래였으면 산 자의 사념만으로 움직여야 할 망자에게 혼백을 뒤집어씌워 자의식을 깨우는 것.
생전의 기억과 망자와의 합도 잘 맞아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투 중에 잃어버린 부위를 수복할 때 손이 많이 가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그 쌍검쟁이를 되살리는 데 오래 걸린 이유로구나.〕
'쌍검쟁이란 못된 말은 어디서 배웠대.'
〔그대의 수하들이 내뱉은 단어이니라. 꽤 유쾌하지 않더냐.〕
'좀 더 유쾌했다간 성좌 실격이다.'
성좌는 모름지기 품위가 있어야지.
유진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파프너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해.'
정석적인 방법으로 만든 언데드가 아니다.
드래고니안 사체에 타인의 혼백을 불어넣었고.
저주 술식과 연금술로 강령술의 등급을 억지로 상승시켰다.
마지막으로 용족의 격을 억지로 쥐어짜내어 라이프 포스 베슬에 깃들게 하기까지.
갖가지 변주로 만들었으니 시술 과정도 평범하지가 않다.
[으게게게겍!!]
"환자분 숨 쉬세요."
[예고는 하고 넣든지 하라고!]
"감각 꺼두라고 했잖아."
[1초 전에 말했거든? 몸에서 힘을 빼는 것도 말한다고 척척 되겠냐고!]
될 줄 알았다.
미안하군, 이라며 짧게 뇌까리며 시술을 이어갔다.
"음. 길이가 1.3센티 기네."
넣었던 뼈를 슬쩍 빼서 다시 가공하거나 위치를 조금씩 틀자, 파프너의 귀화가 거세게 타올랐다.
[내 몸 가지고 뭐하는 짓이야!]
"개복하는 게 확실한데 네 몸이 워낙 단단해서 마음대로 안 된단 말이야."
뼈의 크기와 굵기 등을 세밀하게 조정한 후.
파프너의 기존 육체, 그러니까 드래고니안 사체와 링크가 잘 된다 싶으면 반쯤 새겨놓은 마력 회로를 완성시킨다.
연장된 육체.
뼈를 갈아 끼우니 본래의 육체보다 길어져서 특 튀어 나왔다.
치킨을 먹다가 일부만 발라놓은 것 같군.
"감각 좀 다시 켜봐."
[스위치 온 오프 하듯 말하지 마.]
파프너는 투덜거리면서도 연장된 뼈에 영력을 불어넣어 육체와 동화했다.
들썩, 들썩, 몸뚱이에 이어 붙여서 훤히 드러난 뼈가 살짝 움직였다.
-음. 꽤 불편한데.
"구체적으로 말해봐. 어디가 불편한지."
-골반에서 바로 아래쪽 오른다리에서 영력 흐름이 나빠.
"대퇴골이군."
툭툭, 손가락으로 해당 부위를 두드렸다.
영력의 순환 효율이 떨어지는 부위를 바로 체크.
즉석에서 바로 수정했다.
[오. 좀 낫네.]
"다른 부위는 문제가 없나."
[싹 말해야 해?]
"그래야 조율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지."
[67군데.]
"...."
괜히 물어봤군.
완전히 동화되어 한 몸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단순히 감각을 동조하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뼈를 깎고 조정한 것까지 포함하면 반나절 가까이 들었다.
[끝났어?]
"이제 시작이지."
[답답해지려고 하는걸.]
"숨 좀 참고 있어. 10시간이면 될 거다."
[살아있는 사람은 10분만 참아도 죽을 텐데.]
"그래서 하는 말이야."
관 뚜껑에 힘을 슬며시 주자 구구궁- 육중한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났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향.
뚜껑을 닫고 있을 때도 은은하게 피 냄새가 났는데, 관을 여니 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냄새가 났다.
"부어라."
-으어어억.
리터너 몇이 불사자의 관을 힘 주어 밀었다.
파프너가 누워 있는 곳으로 쏟아진 핏물.
바닥에 스며들어야 할 붉은 액체였지만, 중력을 거스르고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호오. 이건 무슨 조화더냐?〕
'불사자의 관으로 복원한 용족의 격이 파프너에게 반응하는 거다.'
쪼르륵, 못해도 100리터가 넘어가는 피가 연장된 뼈 주위로 순환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혈관이라도 있는 것 마냥 둥실 떠다니며 전신을 움직이는 레리크들의 피.
해부도를 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주인. 가만히 있어도 돼?]
"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마."
[간지러워서. 좀 긁고 싶은데 참아야겠네.]
언데드가 간지러움을 느낀다?
레리크들의 혈액이 파프너의 몸뚱이와 잘 결합하고 있다는 징조다.
피가 적어서 걱정했는데 최소 조건은 충족시킨 모양이군.
"심장에서 영력을 뽑아내라. 저 혈류를 네게 당겨."
[알았어.]
스스스슷-!
파프너가 유형화시킨 영력이 순환 중인 혈류 한 가닥을 낚아채어 심장으로 움직였다.
이미 죽어버린 심장이니 영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움직일 일은 없다.
그렇지만.
"때로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부여된다."
용의 심장은 불사자의 관으로 끌어 올린 용족의 격을 받아들여 한 꺼풀 벗고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드래고니안은 용족이며, 진정한 용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용인.
그 사체도 용족의 힘을 품고 있지만 진정한 용족에 비해서는 격이 모자랐다.
불사자의 관으로 끌어 올린 용족의 격은 부족한 것을 채워주었다.
"레리크들의 살점을 올려놓아라."
-으억.
레리크 사체는 넘치고도 남았다.
녀석들의 피를 갈취한 후 비어버린 몸뚱이는 신전 근처에 널브러졌으니.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썩지 않고 온전한 시체 위주로 발라내어 파프너의 뼈 위에 덕지덕지 올려놓으니 순환 중이던 혈류가 살점을 끌어당겼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완성도가 상승합니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살점이 꾸물거리면서 뼈 옆에 달라붙었다.
차오르는 공백.
간혹 혈류가 뒤집히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새면 다시 잡아주는 등, 세세하게 조율했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즈음.
뼈에 덕지덕지 붙던 살점이 더 움직이지 않았고.
불사자의 관에 담아두었던 피도 완전히 바닥나버렸다.
[끝난 건가?]
"마지막으로 조정 한 번 더 할게. 영력을 전신에 순환시켜 봐."
[알았다.]
파프너는 드래곤 하트를 인위적으로 뛰게 만들었다.
용의 심장은 피를 내보내는 것 말고도 마력을 축적하며 생산하는 영구기관.
심장이 뛰면서 영력을 펌프질했고.
새로 공급받은 피가 영력과 섞여서 전신을 순환했다.
[잠깐만. 이건 좀 다른데?]
유진의 지시대로 영력만 움직이려고 했는데 피가 같이 돌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파프너가 의도한 것도 아닐뿐더러, 순환하는 혈류를 멈출 수 없었다.
사람이야, 자기 피의 흐름을 마음대로 멈출 수 있겠냐마는.
자신은 숨이 끊어진 망자인데다 이 몸뚱이는 드래고니안의 사체다.
'잘못해서 손상이라도 입으면 주인에게 민폐다.'
걱정으로 흔들리는 푸른 귀화.
유진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잘 됐네. 거기까진 예상대로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조금만 더 해봐. 그럼 반응이 올 거다."
투툭- 투투툭-.
파프너의 육신 곳곳에서 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육이 파열하는 건지.
혹은 트롤처럼 재생하면서 나는 건지 모를 기묘한 음색이었다.
[어, 어어어!]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파프너.
뼈만 연결했을 때하곤 다르게 힘이 부쩍 붙은 몸놀림이다.
동시에 영력이 급속도로 상승.
파프너를 중심으로 희끄무레한 기류가 공격적인 기세로 흘러나오더니 이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콰아아아아-.
마구 회전하던 영력이 맹렬한 기세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고.
일순간 하얀 기둥이 수십 미터까지 솟아올랐다.
용오름이었다.
*
머리카락이 마구 나부낀다.
오러나 마법 같은 현상으로 인한 바람이 아니다.
순수하디 순수한 힘의 발현.
한 순간 유진조차 압도당할 정도의 영력이 공중으로 솟구치며 공기가 밀려났고.
여파로 발생한 돌풍이 옷가지를 마구 흔들었다.
〔계약자여. 이건 대체?!〕
'나도 몰라.'
정말이다.
[메멘토]로 불사자의 관을 엿보았을 때부터 생각한 개조 방식이지만.
이만한 박력을 내뿜을 줄은 생각하지 않았다.
두두두두둑-.
10미터까지 뻥튀기시킨 파프너의 육체가 재구성된다.
아까 들렸던 기묘한 소리는 온전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하기 위한 사전 작업.
등 뒤에서 피막으로 뒤덮인 날개가 솟아나고.
허벅지는 더욱 두꺼워졌으며, 빛을 잃고 칙칙해진 비늘 위로 광택이 번들거렸다.
"이래서야 원."
진짜로 드래곤 같잖아, 라고 뒷말을 삼켰다.
[엘드리치 드래곤이 완성되었습니다.]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언데드를 창조했습니다.]
[역천의 거인의 설화에 한 자락이 추가되었습니다.]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이 확고해집니다.]
[만신전의 성좌들이 당신의 업적에 경악합니다.]
[용 군단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아스가르드 성단의 성좌 27명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올림포스....]
대단한 업적인 거 알겠으니까 그만 좀 떠들어대라.
과장되게 손을 휘휘 흔드는 유진의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주인?]
"몸은 좀 어때."
[어. 그게 말이야. 좀 안 좋아.]
"그럴 리가."
시스템도 인정했다고.
파프너에게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기운은 시술이 성공적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었다.
[그게 말이지. 안정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파프너는 잠시 단어를 고르더니, 돌연 꼬리를 위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쿠아앙! 땅에 기다란 고랑이 새겨지고 충격의 여파로 나무들이 뽑혀 나갔다.
"힘자랑은 나중에 해도 되지 않겠어?"
[자랑하려는 게 아니야. 난 가볍게 두드릴 생각이었다고.]
"그 안정이라는 게...."
[맞아. 힘 조절이 안 돼.]
파프너는 오른발을 떼었다.
쿠웅! 과하게 들어간 힘 때문에 몸 전체가 휘청거렸다.
"어, 조심. 너한테 깔려서 죽으면 유령이 되어서도 부끄러울 것 같다."
[깔려 죽기 싫으면 알아서 처신 잘 하라고.]
진심인 것 같군.
유진은 볼을 가볍게 긁었다.
[엘드리치 드래곤(파프너)]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힘 : 5,583(-3,000)
민첩 : 4,145(-3,000)
체력 : 5,287(-3,000)
맷집 : 5,493(-3,000)
영력 : 8,011(-3,000)
◎특성
▷마투사[고유] / 무신의 눈[S] / 용의 혈통[A+] / 불사의 존재[A] / 미숙한 초월자[A-]
◎스킬
▷브레스[A+] / 케넥 전투술[A] / 오러 블레이드[A-] / 다크 미사일[C]
*강제로 올라간 격과 혼백의 불일치로 인해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대형종의 스탯 가중치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용족으로서 몸을 구성하기 위한 격이 모자랍니다. 힘 조절이 어렵습니다.
*모자란 격을 채우지 않으면 몸이 붕괴됩니다.
어마어마한 스펙.
동시에 페널티도 우수수 추가되었다.
'강제로 7성을 돌파한 탓에 오러 블레이드도 사용이 가능해졌군.'
송명석과 마찬가지 상황.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순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도리어 제 몸을 해치겠지.
[으아아. 살려줘요.]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라.
불사자의 관으로 복원한 용족의 기원이 너무 효과가 좋았나?
유진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버려서 페널티가 덕지덕지 붙었다.
〔한데 이상하구나. 몸이 붕괴한다고 하였거늘,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성좌 나리의 힘 덕분이다.'
불사자의 관을 안치해둔 곳은 신전 앞.
크로노스는 유진의 도움으로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을 주관하게 되었다.
신전에서 흘러나오는 성력은 파프너의 육체가 붕괴되는 것을 막아주고 안정도를 올려주었다.
'신전을 떠나면 몇 시간 못 버틸 거라는 게 사소한 문제군.'
파프너가 새로운 육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고.
용족의 격이 담긴 시체도 구해야 한다.
당분간은 연평도의 터줏대감이 되어줘야겠네.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등대지기라고 생각해. 구룡방 놈들도 기웃거리니까 잘 됐네."
[소일거리로 강령술이나 익혀야겠네.]
파프너는 태평하게 웃었다.
155화 마경으로
연평도를 떠나기 전.
크로노스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짐이 그대의 대전사를 후원해도 되겠느냐?〕
'두 번째를 후원할 여력이 있어?'
〔본래는 안 되겠으나, 대전사는 예외니라.〕
변칙으로 탄생한 엘드리치 드래곤의 존재는 죽음을 거스르는 역천의 개념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왜 파프너만 특별 취급 해준대?'
〔용족이지 않느냐.〕
용, 혹은 드래곤은 여러 신화에서 대적자나 상서로운 존재로 얼굴을 비추었다.
태양신 라를 대적하는 사악한 뱀 아포피스.
필멸자들에게 불을 내려준 테오토카 성단의 용신 케찰코아틀.
천군(天君) 성단의 시초로 추앙받는 여와의 대적인 응룡(應龍) 등.
현 시대에 이르러서는 용 군단이라는 테두리 안에 묶였지만, 본래는 여러 신화에서 존재감을 남긴 강력한 생물이다.
'영성 소모가 상당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용족을 짐의 권속으로 거둔 업적만으로 충분히 상쇄가 가능하니라.〕
드래곤은 여러 신화에서 신들의 대적자로 자주 등장하지만.
의외로 반골 기질이 다분한 용을 다스려서 신화의 한 자락에 새긴 성좌도 꽤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전설적인 존재, 응룡도 신화가 저물어가던 시절에는 황제 헌원에게 부림을 받았단 이야기가 있으니.
용을 다스리는 건 성좌의 영성을 대폭 늘릴 수 있는 일화였다.
[주인이 모시는 성좌님이 나를 후원해주겠다고?]
"영광으로 알라는데."
[생전에 많이 받아봐서. 딱히 영광까지야.]
지금이야 기록말살 형을 당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생전의 박하늘 씨는 나름대로 유명인사였다.
특히 만신전에선 그녀의 찬란한 재능과 성취를 눈여겨본 성좌들이 여럿 있었으니.
크로노스는 커흠, 크흠, 하면서 불편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래도 주인 얼굴 봐서 받아들여야겠네.]
파프너는 안광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윙크를 저런 식으로 하네.
[바뀐 몸에는 최대한 빨리 적응할게.]
"아니야. 천천히 해도 돼."
[섬 지킴이로 썩고 있기에는 내가 아깝지 않아?]
"그것도 맞는데. 몸이 붕괴하는 건 적응하곤 별개의 문제니까."
파프너는 [불사자의 관]으로 일깨운 용족의 기원으로 강제 성장한 상태.
사람으로 치면 칼슘처럼 꼭 필요한 요소가 모자란 상태다.
뼈에 구멍이 숭숭 났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시술이 잘 돼서 문제라니."
강령술 실력이 너무 뛰어난 것도 탈이다.
레리크들의 피에서 용족의 기원을 추출, 완성도를 높이는 정도가 계획이었지.
짜잔- 용족으로서의 격이 모자라니 육체가 붕괴되어버린답니다, 까지는 생각 못했다고.
"어쨌든 섬 잘 지키고 있어. 조만간 손님들이 올 거다."
[좋아.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고 집 보고 있으마.]
"꼬리를 말면 침입자를 보내준다는 거 아니냐?"
[주인 하는 거 봐서.]
파프너에게 의도치 않은 서해 방어를 일임하고는 불사자의 관을 챙겨서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왔다.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당분간 구룡방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천 대표님만 믿겠습니다."
"궁금하지 않아?"
"대표님께서 빈틈없게 어련히 잘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깊은 신뢰를 드러내면서도 유진에게 작은 빚을 얹어둔다.
절묘한 미스터 블랙의 화법에 쯧, 가볍게 혀를 찼다.
"참. 하나 부탁할 게 있다."
"말씀하시죠."
"마경에 들어가려고 한다."
7대 마경.
대격변 이후 UN에서 민간인 출입을 금지시킨 위험지역이다.
"밀입국 루트를 알아봐야겠군요."
"다른 방법은 없나?"
"아시겠지만 각국에서는 UN의 선언에 기초해서 마경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침식 현상은 게이트 핵이 땅 아래에 흐르는 지맥과 융합하면서 주변 일대를 게이트의 풍경과 흡사하게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반면 7대 마경은 조금 다르다.
침식을 마친 지역을 시공 결계로 감싸서 별개 공간으로 분리, 외부 세계와 격리되었다.
현실에 걸쳐 있으면서도 게이트처럼 출입구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출입도 까다로운 편이었으니.
"단순히 출입하기만 어려우면 마경이라고 안 불렀겠죠."
"꽤 험난하다지."
"일반인은 들어가면 1분 안에 죽을 정도의 환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남극에 생성된 마경은 평균 온도가 영하 100도.
아무 대책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간 폐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고.
지중해 불카노 섬에 나타난 마경은 달구어진 공기에 노출되기만 해도 닭이 익어버릴 정도의 열기를 자랑한다.
"UN에서 괜히 출입을 금지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돈이 꽤 듭니다만."
"후려치려고 밑밥 엄청 까네."
"그만큼 제 노고를 알아달란 말씀입니다."
생색내긴.
유진은 뺨을 일그러트렸다.
"근데 갑자기 웬 마경입니까?"
"용족의 시체가 좀 필요하거든."
"그런 문제는 저한테 부탁하셔도 됩니다."
"시간이 걸리잖아. 이쪽도 좀 급해서 말이야."
엘드리치 드래곤의 완성도가 너무 높아져서 생긴 불상사.
모처럼 하수인을 강력하게 업그레이드했는데 한 장소에서 머무르게 해야한다고?
이걸 어떻게 참나.
한시라도 빨리 용족의 격과 인자를 채워줘서 파프너를 최전선에서 굴려야지.
발품을 팔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일.
"그럼 용의 계곡 밀입국 루트를 알아보겠습니다."
"설명을 길게 안 해도 돼서 좋아."
"별말씀을."
유진의 극찬에 미스터 블랙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블랙 컴퍼니의 주인으로서 보인 뛰어난 수완.
마법명가 로마노프에서 관심을 드러낼 만큼 재능도 대단했고.
피의 발렌타인 사태 해결의 주역으로 명성까지 얻고 있는 인물이 자신을 인정해주니 무의식적으로 웃어버렸다.
"징그럽게 왜 웃냐."
못 볼 걸 봤다는 듯, 유진은 미간을 찡그렸다.
*
용의 계곡.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퉁구스카 강 유역에 나타난 7대 마경 중 하나다.
"천 대표님. 로마노프 가문이랑 연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쪽 루트는 안 쓸 거다."
"음. 그럼 2주 정도만 시간을 주십쇼."
"생각보다 더 걸리네?"
"최근에 로마노프 가문과 천무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말입니다."
두 명가의 충돌이라.
회귀 전의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봤지만 로마노프와 천무문이 충돌한 적은 없었다.
〔그대의 회귀가 불러온 나비 효과일 수도 있지 않느냐.〕
'말이 되는 소리를. 천무문이랑 엮일 일이 없거든?'
〔구룡방조차 아홉 머리 중 한 명이 바뀌었거늘. 너무 낙관하지는 말아라.〕
크로노스의 경고는 상큼하게 무시했다.
나비 효과인가 생각해봐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천무문은 구룡방의 영향을 받을 정도로 작은 조직이 아니다.
아니.
도리어 구룡방이 음지 쪽 영향력을 인정받기 위해 먼저 고개를 숙이는 입장이지.
그렇다는 건....
"두 명가와 관련된 테마주가 있나?"
"예에. 지금은 꽤 가격이 떨어져 있습니다."
"주머니에 여유 있으면 관련 주식 최대한 사놓는 게 좋을 거다."
"두 명가가 전면전을 벌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절대로."
미스터 블랙은 난감한 듯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유가 뭐냐고?
'로마노프 가문의 목표는 유럽에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대격변 이후에 부활한 러시아 제국의 후예.
로마노프 가문은 늘 유럽 진출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천무문?
중국의 패권을 쥐는 것으로 만족하는 가문을 먼저 자극할 필요가 있겠는가.
두 명가는 비밀리에 불가침조약을 맺고 필요에 따라 갈등을 빚는 척 액션만 취했다.
〔호오. 용케도 기억해냈구나.〕
'로마노프 가문이 어떻게 천무문을 지나 한국까지 왔겠어?'
마법명가가 총력으로 한반도를 공격하는 상황.
천무문이 묵인하지 않았으면 마법왕 드미트리가 직접 나서진 못했으리라.
"시체 매입용으로 맡겨둔 돈 얼마나 남았나?"
"일단은 50억 정도 썼습니다."
"150억인가. 그거 전부 로마노프와 천무문 관련 주식에 묻어줘."
"진심이군요."
"나는 늘 진심인데?"
미스터 블랙은 "퍽이나 그러시겠습니다."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은 자산은 그쪽으로 투자해줘."
"리스크가 큽니다."
"감수해야지. 원래 투자라는 게 그렇잖아?"
두 명가가 충돌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리스크는 무슨.
사기만 하면 반드시 당첨되는 복권 같은 건데.
이걸 어떻게 참아.
"2주라고 했지?"
"예."
"너무 길지 않고 적당하네."
알박기를 무리하게 해놓은 탓에 후유증이 도처에 나오는 중이다.
연평도 일대는 파프너에게 맡겨놨으니 남은 지역 방어를 충분히 굳혀놔야지.
"조승철아. 이리로 와라."
[그겔. 주인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손 좀 보려고."
오른손을 가볍게 휘저으니 조승철의 몸뚱이가 산산조각 나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분리된 턱뼈가 위 아래로 움직였지만 마주칠 머리뼈가 없다 보니 특유의 딱딱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구 흔들리는 푸른 귀화.
꽤 당황한 모양이다.
"안 잡아먹어. 걱정하지 마라."
4성도 됐겠다.
중급 강령술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재료만 충분했으면 리치로 개조했을 거다.
마법계 헌터나 몬스터가 자신의 생명력을 봉인하고 껍데기만 남은 육체를 망자로 바꾸는 비술.
조승철은 뼈만 남은 지 오래 됐으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리치가 될 수 없다.
변칙을 사용해야 하는데 재료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당장은 시술이 불가능하단 말이야.
"리치가 아니어도 네크로폴리스 운영을 맡길 순 있다."
조승철의 두개골을 [죽음의 전당]으로 가지고 가서 비어 있는 자리에 올려놓았다.
[연금술식 - 강화 회로를 사용합니다.]
머리만 남은 조승철의 마력 회로가 죽음의 전당과 이어진다.
[주인, 님. 이건 대체.]
"링크로 연결된 네크로폴리스 전역은 이제 네 제어 아래에 들어왔다."
[그, 렇습니다. 쏟아지는 데이터, 가 너무 많, 습니다.]
"걱정 마라. 네 자질이면 극복이 가능할 테니."
회귀 전 7성에 도달했던 실력자.
조승철의 재능 정도면 네크로폴리스 전역에서 보내는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영지 운영을 맡기겠다."
[명, 을 받듭, 니다.]
"언데드 강화 연구와 망자를 생산하는데 집중해."
[대형, 언데드, 도 말입니, 까?]
"브루탈은 커버 가능한 만큼 만들고."
[변수, 가, 발생, 하면 어떻게 합니까.]
애꾸눈이나 개성 인간사냥꾼의 침략처럼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기본 방침을 수행하는 데만 해도 벅차 보이는 조승철에게 추가 지시를 내릴 순 없다.
"그런고로 내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하다."
"형님. 그렇게나 막중한 임무를 제게 맡기시면...."
"거창한 일을 맡기는 거 아니다. 인간사냥꾼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하면 얘한테 말해줘."
[그겔. 맡겨, 주십시오. 주인님. 딱딱.]
턱뼈를 원래 위치로 붙여놓은 조승철이 거세게 충돌음을 냈다.
"형. 우리도 따라가면 안 돼?"
"안 돼."
"짐은 안 될 자신 있어!"
"내가 마음 편하게 자리를 비울 수 있는 게 누구 덕인데."
말에 담긴 신뢰감에 강민영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진짜아? 우리가 그렇게 든든한 거야?"
"안 그랬으면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마경을 가진 않았을 거다."
"형!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네네. 그러시겠죠."
"충성임다!"
감격한 뽀시래기 팀의 반응에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미스터 블랙을 찾아갔다.
"준비는 다 하셨습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두었지."
"절 따라오시죠."
"안내역으로 몸값 비싼 양반을 부려먹네."
"손님이 천 대표님이니 격을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스터 블랙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156화 네 이름은 이제부터 유령선이여(1)
지리상으로는 반도에 속한 한국.
그렇지만.
6.25 이후 대륙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막혔고, 대격변이란 초유의 사태까지 겹치면서 섬이나 마찬가지인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밀입국 루트는 바다 쪽이 많습니다."
이북 쪽은 천 대표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요, 라고 뒷말을 붙인 미스터 블랙이 속초 인근에 정박한 어선을 가리켰다.
"또 통통배인가."
"연평도 다녀오실 땐 늘 쾌속선을 제공해드리지 않았습니까?"
"빚을 져서 팔려나갈 때 탔던 게 통통배거든."
"아. 그 박기태 씨 말이군요."
미스터 블랙은 이를 드러내며 음흉하게 웃었다.
노역 중인 임재백을 찾으려고 신세를 진 적이 있었지.
팔자에도 없는 빚쟁이 신세가 되어 정강이도 까이고 말이야.
"블라디보스토크까지만 고생 좀 하시죠."
"그 뒤에는?"
"고려인 사업가 신분을 하나 마련해두었습니다."
"역시 빈틈이 없네."
암상에서 사용하는 위장 신분.
여권을 확인해보니 유진의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이 증명사진은 어디서 났대."
"천 대표님도 꽤 귀여운 시절이 있으셨군요. 이렇게 봐야 제 나이처럼 보입니다."
보육원에서 나오기 전에 찍은 증명사진.
꾀죄죄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불과 5년도 안 된 사진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지.
회귀라는 이적이 없었으면 지금도 별반 차이가 없었으려나.
"정기적으로 3일에 한 번 연락드리겠습니다."
"내가 연락을 안 받으면?"
"3번이 넘어가면 그땐 사람을 동원해서라도 찾아야죠."
"꽤나 적극적이군."
"한 배를 탔으니 열심히 노를 젓는 겁니다."
"마경에 들어가면 연락할 방법 없으니까 감안해."
"미리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통통배라.
남해를 빙 둘러서 갔을 때가 생각나는구먼.
〔크하하핫. 아주 걸작이었지. 그대가 속을 게워내는 모습은 도무지 잊히지가 않는구나.〕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였도다. 무엇보다 그대의 행보를 모두 바라본 짐의 기억을 부정하려는 게냐.〕
빌어먹을.
발뺌도 못하겠네.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통통배에 탑승.
오징어를 잡으러 떠나는 선박들 무리에 섞여서 북쪽으로 향했다.
대격변 이후 북한이 무너지면서 동해 인근의 어업 활동도 꽤 편리해졌다고 한다.
〔그 밀수란 것은 비밀리에 진행되는 게 아니더냐?〕
'사전적인 의미로는 그렇지.'
〔한데 이렇게 당당하게 무리를 이탈하여 간다니.〕
'본인들이 자신 있어 하잖아.'
유진은 최대한 통통배의 진동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며 답했다.
대격변이 발생하면서 생긴 공권력의 공백.
헌터의 수준이 국가의 무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면서 정부의 영향력도 덩달아 축소되었다.
뒤집어서 말하면 바람 새는 구멍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거고.
퉁퉁....
"죄송합니다. 고객님. 빨리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엔진을 왜 껐지?"
"그게 말입니다. 해적이 나타나서요."
해적?
유진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
대격변 이후, 국가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사설 무장단체가 많이 늘어났다.
그 중에는 바다에서 약탈을 주로 삼는 직종.
해적도 포함되었다.
"저기 깃발 보이시죠?"
선원이 건네준 망원경으로 보니 배 위에 펄럭이는 해골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나 해적이요." 라고 말하는 듯 한 몰개성한 표식.
유진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많이 겪는 일인가?"
"이쪽 일 하다보면 흔하죠. 러시아 갱단입니다."
"잡히면 뼈도 못추리겠어."
"지금이야 도망칠 수 있으니까요. 고객님이 허락하신다면."
역시 경함자는 달랐다.
밀수의 프로다운 판단력. 몇 번이나 해적들을 따돌린 경험이 있는 모양이다.
"지금 돌아가면 바로 출항할 수 있나?"
"안 됩니다. 해류도 안 좋고, 러시아 해적 놈들이 뜨면 며칠은 안 들어가거든요."
"그럼 좀 곤란한데. 돌아갈 것 없이 정면 돌파하지."
"그럼 배를 가까이 대겠습니다."
미스터 블랙에게 언질을 받아둔 선장은 당황한 기색 없이 잠잠해진 통통배의 엔진을 다시 예열시켰다.
통, 통, 통, 물살을 해치며 해적선들을 향해 나아가는 배.
유진은 [그림자 가면]을 꺼낸 후, 손 끝에 영력을 집중했다.
*
대격변 이후, 러시아는 한 정부라는 테두리 안에서 여러 자치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주된 원인은 너무나도 드넓은 영토.
러시아의 자랑이기도 했던 광활한 세력궈는 대격변 이후 독으로 작용했다.
"시베리아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날 거라고?"
"포기해. 거긴 사람도 없는 곳이잖아."
보호해야 할 땅은 너무나도 많았고.
그에 비해 헌터는 모자랐다.
러시아 영토 중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시베리아에서 인간의 생활권이 얼마나 되겠는가.
7대 명가 중 하나인 로마노프 가문에서 러시아 정부의 권리를 존중해주곤 있지만, 그것과 게이트 폐쇄하고는 별개였다.
"줄 건 줘."
"중앙정부 말만 듣고 있다간 그냥 죽겠다."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은 러시아 정부에 반기를 들지 않았을 뿐.
대격변 이후에는 독립된 세력을 구축, 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사실상 연방제 국가가 되어버렸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설립된 극동 공화국도 새롭게 구축된 지방정부 중 하나.
그렇지만 로마노프 가문이 자리를 잡은 상트페테부르크와 거리가 먼 만큼 러시아 연방 공화국 중에서 가장 체제가 불안정한 세력이었다.
"밀수선 맞지?"
"잡았는데 냄새나는 오징어만 있어봐라."
"그럼 싹 물고기밥으로 던져주는 거지."
"밀수품을 순순히 주면?"
"그래도 물고기밥으로 던져줄 거다."
극동 공화국은 세력을 유지하기도 벅찬 상황.
해적이나 마적이 들끓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붉은 형제단]도 그 중 하나였다.
"어떻게 할까. 대장."
"물건 상하면 안 되니까 원거리 공격은 하지 마라."
안대로 한 쪽 눈을 가린 사내, 붉은 형제단 대장은 혀를 날름거렸다.
통통배와 해적선의 거리가 50미터 정도로 좁혀지자, 푸른 밧줄 다발이 날아들어서 배를 붙들었다.
[홀드 퍼슨]
마력으로 지정한 대상을 붙들어놓는 마법.
강력한 구속 효과가 있지만 그 대신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도 움직일 수 없다.
연신 출렁대는 바다 위인데도 뿌리를 내린 것 마냥 고정된 통통배.
해적선이 더 가까이 접근해서 상륙하려고 할 때.
[알아서 다가와주니 고마운 일입니다.]
솜털이 삐죽 서는 음산한 사념이 해적들의 귓가에 아른거리고.
통통배에서 불쑥 튀어오른 검은 인영이 해적선 갑판에 올라탔다.
복원을 마친 송명석은 푸른 귀화를 좌우로 흩뿌렸다.
"어, 언데드다!"
[시끄럽군요. 조용히 있어주지 않겠습니까?]
빛살처럼 내지른 검 끝이 해적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미처 반응할 시간도 없이 목이 꿰뚫린 해적은 불신에 젖은 눈빚을 남긴 채 갑판에 고꾸라졌다.
"젝스가 당했어?"
"4성 헌터를 오러도 안 쓰고 제압하다니."
"보통내기가 아니다. 협공해!"
해적들은 당황하지 않고 병장기를 쥐었다.
동료애?
나눠 먹을 입이 하나 줄어서 더 즐거우면 즐거웠지, 방금 전까지 잡담을 나누던 이가 죽는다고 해서 과몰입하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마음에 드는군. 타락한 혼백은 좋은 소재가 되니까."
한 발 늦게 갑판에 올라탄 유진이 뺨을 일그러트리며 조소를 날렸다.
"넌 누구냐."
"장래 너희들의 고용주가 될 사람."
"이렇게 깽판을 쳐놓고 우리를 고용하겠다?"
"맞다."
"푸흡. 재미있잖아. 동양인. 얼마나 생각하고 왔나."
붉은 형제단 대장은 호쾌하게 대꾸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들겼다.
언데드를 부리는 미지의 인물.
젝스를 일격에 제압한 소환수에, 본인도 무력에 자신이 있어 보인다.
'제안을 들어보고 여기서 죽이든, 놈의 주머니를 털어먹자.'
둘 중 어느 쪽이든 손해는 아니리라.
그렇게 판단하고 있을 때, 유진의 조소가 한층 짙어졌다.
"무급. 고용 기간은 두 번 죽을 때까지."
"농담할 여유가 있나?"
"난 진심인데."
붉은 형제단 대장의 이마 위로 내천(천) 자가 떠올랐다.
"이 새끼가. 장난치면 그 주둥이를 찢어주마."
"진심으로 말하는데 믿어주지 않으니. 참 각박한 세상이야."
"죽여!"
해적들이 살기와 함께 요호홋- 이라는 기합을 토해내며 달려들었다.
왜 진실을 마주해도 곧바로 믿지 않고 제 몸으로 시험해보려고 하는 걸까.
짧게 탄식한 유진이 손가락을 따악- 퉁겼다.
[텐티클 블레이드]
[분광검 – 적광검 X 5]
칼집에서 뽑혀나온 검이 스산한 빛을 흩뿌렸다.
발검과 함께 솟구친 붉은 기류.
칼날 위를 휘감은 암흑 투기가 다섯 갈래로 퍼져 나가더니 반경 10미터 안에 들어온 해적들을 도륙했다.
[주군의 힘을 좀 쓰겠습니다.]
스켈레톤 나이트로는 감당할 수 없는 [텐티클 블레이드]의 영력 소모량.
암흑 투기와 분광검을 섞어서 단기간에 출력을 끌어올린 대가다.
흠- 순간 짧은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올 정도.
유진은 심호흡과 함께 [백야] 특성으로 스탯을 치환, 라이프 드레인으로 소모한 영력(성력)을 회복했다.
'대단하긴 해.'
파프너의 천재성에 뒤처지지 않는 눈부신 재능.
오러 사용이 전제인 [텐티클 블레이드]를 벌써 이만큼이나 능숙하게 다룬 것이다.
몸뚱이를 복원하는 데 시간이 걸린 걸 감안하면, 수련 기간은 썩 길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이 개자식이이!!"
빗발치는 암흑 투기를 뚫고 정면으로 쇄도한 붉은 형제단 대장.
상처 투성이지만 급소만 가린 채 돌진해서인지 몸을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너만 죽이면!"
"썩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상대가 나만 아니라면 말이야, 라고 중얼거린 유진.
붉은 형제단 대장은 갑자기 시선이 홱 돌아가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뭐, 지.
입을 뻐끔거리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한 발 늦게.
유진의 손에 쥐어진 기다란 낫에 핏방울이 맺힌 것을 보고 목이 잘린 것을 이해했다.
'오, 오러라고.'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라는 생각과 함께 붉은 형제단 대장의 생각이 끊겼다.
*
통통배보다 몇 배는 큰 선박을 제압하기까지는 10분 가량 정도가 걸렸다.
전세가 기울자 해적들 중 일부가 무기를 내려놓기도 했다.
"사, 살려주십쇼."
"아까 저희를 고용하신다고 했죠!"
"응. 맞아."
서걱-.
갑판을 구르는 해적의 머리.
또 하나의 목숨을 수확한 낫에서 핏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거짓말!"
"우릴 농락하다니!"
"고용의 방법이 다른 것뿐이다."
아무렴.
거짓말은 안 한다니까.
마지막 해적의 목을 베어낸 송명석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해적선을 제압했습니다.]
"오냐. 수고했다."
[이번 행보에서 저를 선택하신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판단이십니다.]
"그놈의 혀에 기름칠만 하지 말고 성과로 답해라."
[존명.]
가볍게 타박했지만 송명석의 푸른 안광이 주눅들진 않았다.
이번 전투에서 꽤 만족한 모양이다.
조만간 저 기를 눌러줘야지.
〔계약자여. 시체 폭발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진즉에 승부를 낼 수 있었을 터인데 왜 힘을 아낀 것이더냐?〕
'배가 가라앉았겠지.'
〔해적의 배를 그대가 염려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지켜보면 알아.'
이 녀석들.
못된 짓을 한두 번 한 게 아닌 모양이다.
해적선에 깃든 어마어마한 원한.
죽어간 이들이 남긴 한(恨)이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진다.
네크로맨서로서 이런 환경을 어떻게 눈 감고 지나가겠어?
유진은 [불사자의 관]을 갑판에 배치했다.
꾸물거리면서 흑색 관을 향해 몰려드는 해적들의 피.
'이쯤이면 됐나.'
얼굴을 감싼 피눈물을 쏟고 있는 가면.
[그림자 가면]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오면서 막 새긴 저주가 발현되었다.
[가이스트 빌라를 사용합니다.]
157화 네 이름은 이제부터 유령선이여(2)
저적, 저저적.
깨어진 가면 일부가 수직 낙하하더니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다.
새 저주를 각인하는 과정에서 소모된 내구력.
강력한 저주를 사용한 반동까지 겹쳐지면서 내구력 감소에 이어 영구적인 손실을 입었다.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가면처럼 바뀌었네.'
입에서 턱을 감싸는 부분만 깨지니 오히려 멋있어 보이잖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니 크로노스가 혀를 찼다.
〔무엇이 그리 기쁘더냐. 아티팩트 관리도 제대로 못 해놓곤.〕
'이미 깨진 거 어쩌겠어? 본드로 붙일 수도 없거든.'
액막이는 본래 소모품이다.
그림자 가면이 지금까지 큰 손실 없이 버텨준 게 용한 거지.
'꽤 수준 높은 저주를 사용했어. 아예 박살이 나지 않은 게 어디야.'
〔하면 묻자꾸나. 액막이의 손상을 감수하고 펼친 주문은 무엇이더냐?〕
'유령의 집이라고 하면 감이 오려나.'
놀이공원에서 커플들의 단골 코스로 명성(?)이 자자한 기구 말고.
유진이 말하는 건 진짜 유령의 집, 그러니까 심령 스팟이다.
'장시간에 걸쳐서 원한이 스며든 구조물은 혼백을 묶어두는 힘이 있다.'
원한 자체는 산 자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한다.
혼령도 마찬가지.
죽은 자의 혼백을 더럽혀서 망령으로 만든다 한들, 소소한 저주를 토해내는 정도가 고작이다.
'가이스트 빌라는 일졍 공간에 깃든 원한을 혼령에게 주입해서 힘을 발휘하게끔 만든다.'
짙은 원한.
그리고 망령.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저주가 [가이스트 빌라]다.
사용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효과도 대단하고.
휘오오오-!
스산한 바람이 해적선을 중심으로 휘몰아친다.
-너, 너가 그랬어.
-원통하다.
-죽어! 죽어! 죽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한이 저주의 영향으로 힘을 얻는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메아리.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통통배 선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죽음의 메아리로구나. 하나, 저주의 효력이 다하면 모두 사그라질 운명이지.〕
'그럼 쓰나. 죽어간 이들의 한을 풀어줘야지.'
[불사자의 관]으로 속박한 해적들의 사체와 혼백.
피는 생명의 통화요, 영혼을 붙들어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매개체다.
그림자 가면으로 사용한 저주는 해적선에 깃들은 한을 증폭시켜 해적들을 옭아맸다.
-사, 살려줘! 다시는 안 그럴게!!
-끄아아아!!!
해적들은 죽은 후에도 자유를 얻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감옥, [가이스트 빌라]에 붙들린 채로 해적선에 남은 한을 받아내며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글쎄.
벌써부터 괴로워하면 곤란할 걸.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테니까.
"내 부름에 답하라."
[언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듀라한 5구를 제작합니다.]
[좀비 프리즈너 37구를 제작합니다.]
[레이즈 데드를 사용합니다.]
[스켈레톤 메이지 10구를 제작합니다.]
목이 잘린 시체들은 중급 언데드인 듀라한으로 되살아났고.
수준이 떨어지는 놈들은 좀비로 일으켰다.
물론.
이름 뒤에 수식어가 붙는 만큼 평범한 좀비는 아니었다.
'가이스트 빌라에 속박되어 무슨 수를 써도 되살아나는 진정한 불사자.'
프리즈너를 직역하면 죄수.
해적선에 깃든 원한은 해적들의 사후마저 종속시켰다.
몸을 토막 내거나 머리를 베어내도.
불 마법으로 전신을 태워도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난다.
"말했지? 고용 방법이 다르다고."
걱정 마라.
더 이상 배가 고프진 않을 테니.
황금을 쥐어줘도 쓸 일이 없으니 돈도 필요가 없다.
무급으로 일 해줘야겠어.
평생 동안.
그 몸뚱이가 바스러져서 가루가 될 때까지.
전직 해적선이자, 이제는 유령선이 되어버린 선박에서 안개가 흘러나온다.
검은 방첨탑과 같은 성질.
망자들에게는 힘을 부여하며 산 자들의 시야를 훼방했다.
[그억, 억. 주인, 님.]
"네가 이 해적들을 이끌었나?"
[그렇습, 니다.]
듀라한으로 되살아난 붉은 형제단 대장이 머리통을 옆구리에 낀 채로 답했다.
송명석의 푸른 안광이 아래쪽을 향하더니.
[머리를 조아리다니. 주군에 대한 예를 잘 아는군요.]
라며 잘난 듯이 지껄였다.
넌 신입한테까지 경쟁심을 느끼면 어떻게 하니.
〔한데 이 자들을 일일이 망자로 되살릴 거라면 저주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느냐?〕
'이 놈들은 모두 유령선에 속박되었다. 여럿이되 하나인거나 마찬가지야.'
설명보다는 보여주는 게 빠르겠군.
[유령선]
종족 : 유령
등급 : ★★★★★
◎능력치
힘 : 0
민첩 : 0
체력 : 0
맷집 : 5,000
영력 : 5,000
◎특성
▷군체 의식[B+] / 불사의 존재[B] / 영체[B] / 영적 재생[B] / 저주 전염[B]
◎스킬
▷소울 프리즌[B] / 원한의 낙인[B] / 고스트릭 체인[B]
가이스트 빌라는 인위적으로 심령 스팟을 만드는 저주.
스탯을 확인하려고 하면 듀라한이고 좀비 프리즈너고 할 것 없이 [유령선]으로 표기가 떴다.
"선장. 말 하나만 묻지."
"ㅇ, 예!"
"동해에 해적선이 많이 돌아다니나?"
"러, 러시아 쪽은 그렇습니다."
"안 잡아먹으니까 떨지 마라. 당신들 배에는 한이 별로 없어."
아예 없다고는 안 했다.
밀수를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길 테니까.
어찌어찌 조건이 맞는다고 쳐도 암상 소속 배를 유령선으로 만들 순 없잖아.
"하,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선장.
다음부터는 착하게 까진 아니어도 원한 살 일을 피해가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
통통배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에 정박했다.
"господин 천. 러시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그 호칭은 떼지. 기분 나쁜 녀석이 떠올라서 말이야."
니콜라이 드미트리. 그 빌어먹을 작자의 면상을 연상시키는 단어.
암상 측 안내인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흰 이 근방을 순회하면서 해적들을 잡아먹어라."
-으어어억.
하나로 엮인 해적들의 영혼이 괴이한 신음을 뱉으면서 바다로 나아갔다.
〔저리 보내도 되겠느냐?〕
'운만 따라주면 유령선단을 꾸릴 수도 있으니까.'
〔유령선단?〕
'해적들은 떼를 몰려다니길 좋아하지. 유령선도 마찬가지다.'
전설 속에 나오는 유령선은 대부분 전직 해적선이다.
피, 그리고 죽음.
한이 쌓이기에 적합한 환경이라서 그렇다.
해적선이 무리를 이루어 배를 약탈하듯 유령선도 본능적으로 세력을 불리고 싶어 한다.
'내가 더 손 쓸 필요도 없이 저주를 옮겨서 유령선을 늘릴 거다.'
〔계약자여. 만일 유령선이 침몰하면 어찌 하려고 하느냐.〕
'어쩌긴. 손해 보고 마는 거지.'
〔호오. 그대가 손해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니 침으로 기묘하구나.〕
'투자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막상 투자라고 해도 그림자 가면의 내구력이 영구적으로 소모된 게 전부다.
유령선이 침몰해도 피부에 와 닿을 만한 손해는 아니었다.
통통배 선장은 찜찜하다는 눈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유령선을 흘겨보았다.
"저렇게 보내도 되는 건지."
"걱정 마라. 너희는 쌓인 한이 별로 없다고 했잖아."
"참 안심이 되는 말입니다. 허허."
1그램도 안심이 되지 않는 표정으로 말하는 선장.
유진은 볼을 살짝 긁었다.
"당신들은 이대로 돌아가나?"
"이왕 왔으니 물건 좀 사고팔고 해야죠."
"아. 밀수선이었지."
"급하게 일정을 잡아서 거래할 게 많진 않습니다만. 괴물 부산물 쪽을 돌아봐야죠."
한국은 구 DMZ, 현재는 접경지대로 부르는 곳을 빼곤 대규모 침식지역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반면 극동 공화국은 크기에 비해 인구가 턱없이 모자랐으니.
대격변 때 영토 상당부분을 내주고 도시나 마을 위주로 지킨 탓에 주요 길목과 요충지 빼고는 몬스터들이 자주 나왔다.
"메이거스랑 성천 그룹 물건들을 좀 챙겨왔는데 잘 팔릴 진 모르겠군요."
"마도공학 쪽은 영 발달이 안 된 모양이군."
"본토랑 멀지 않습니까. 덕분에 우리만 노났죠."
헌터들의 실력이 뛰어나서 부산물도 많이 나오고요, 라며 밀수꾼은 뒷말을 붙였다.
"용의 계곡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빠르면 2주입니다. 도로 사정이 나빠지면 좀 더 걸리겠죠."
"몬스터 때문인가?"
"예."
"걱정 마라. 거치적거리는 놈들은 모두 치워주마."
몬스터요?
이제는 제 밥이죠.
*
유진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서 용의 계곡으로 향할 때.
망망대해로 나온 유령선은 하릴없이 바다를 맴돌았다.
-으어어. 동료. 늘린다.
-나만 고통 받을 순 없다.
-억울해. 억울해.
가이스트 빌라에 묶여서 유령선을 떠나지 못하게 된 해적들의 영혼.
포도 주스를 원액과 물로 분리할 수 없듯.
저주로 오염되어버린 채 뒤섞여버린 혼백들은 더 이상 순수한 형태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들에게 남은 사념은 한 가지 뿐.
동료를 늘려 한 명이라도 더 고통의 굴레에 떨어트리는 것이다.
[흐어어어.]
여럿이 합쳐서 군체 의식을 이루었지만 중심축이 되는 혼백이 있었다.
붉은 형제단을 이끌었던 사내.
이제는 제 이름마저 잃어버린 채 유령선의 선장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동료. 있을 곳.]
전직 해적은 생전의 기억을 되짚으며 다른 해적단이 있을 만한 곳을 뒤졌다.
동해와 오호츠크 해 근방을 돌아다닌 지 1주일 째 되는 날.
수평선에 걸려 있는 배와 조우하는 순간, 유령선에 매인 혼백들이 쾌재를 내질렀다.
-찾았다.
-신선한 피.
-너도 우리와 함께하자.
스아아아-!
일직선으로 퍼져 나가는 안개. 누가 봐도 상식에서 벗어난 기류를 감지한 해적선이 사이렌을 울렸다.
애앵- 애앵-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놀란 해적들이 무장을 갖추고는 갑판 위로 올라왔다.
"뭐야?"
"저 안개. 인위적인 거다."
"어떤 새끼가 우리 영역을 넘봐?"
산전수전 다 겪어본 해적들은 시야를 가리는 안개 속에서도 두려운 기색 없이 병장기를 쥐었다.
갑판 위에서 싸우는 건 이골이 났다.
휘청거리는 갑판에서 중심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가?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길 줄 알아야 한다.
극동 공화국이 해적을 퇴치하지 못하는 것도 숙련도 차이가 크기 때문.
마법으로 시야를 가린다 한들, 결국 선택지는 배 위에 올라타서 근접전을 벌이는 것이다.
"선상 싸움은 질 수가 없다."
"다 죽여도 되지?"
"노예로 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손이나 발만 잘라 놔라."
안개를 뚫고 나온 배의 앞부분이 해적선의 옆구리를 쿵- 하고 들이박았다.
해적들은 충격에 선체가 흔들려도 당황하지 않고 접촉면으로 돌진.
곧장 상대 측 배를 점거하려고 근접전을 시도했다.
[환영, 한다.]
"언데드?"
"듀라한이 왜 배에서 나와!"
서걱-!
암흑 투기를 휘감은 도끼가 상륙을 시도한 해적들을 도륙했다.
화려한 빛을 보고 날아들다가 불타버리는 하루살이처럼.
아무 경계 없이 넘어온 해적들이 쓰러져간다.
"어, 언데드다!"
"모두 대비해! 성수를 뿌려!"
한 발 늦게 넘어온 해적들이 경고를 외쳤지만.
그들의 음성은 희끄무레한 안개에 삼켜져서 동료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으어어.
"좀비라고?!"
"후진해. 거리를 두고 포격한다."
"먼저 넘어간 녀석들은 어떻게 하고?"
"저 좀비들 봐. 이미 다 뒤졌을 건데 뭘 챙겨!"
배에 남은 해적들은 동료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간격을 벌리려 했다.
[고스트릭 체인]
차르릉-!
유령선에서 솟구친 회색 사슬들이 해적선을 붙들었다.
좀비 프리즈너들은 사슬을 붙들고는 배가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당겼고.
듀라한을 비롯한 언데드들이 반대로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적선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너도, 이제, 유령선이다.]
머리통을 옆구리에 낀 듀라한의 사념이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158화 용의 계곡(1)
유령선이 해적들을 잡아먹으며 선단을 꾸려가고 있을 때.
극동 공화국에 들어온 유진도 2주 동안의 여정 끝에 목적지를 눈앞에 두었다.
일그러진 풍경.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균열이다.
"언제 봐도 장관이군요."
"김 씨는 용의 계곡에 자주 오나 봐?"
"하는 일이 그거 아닙니까."
민간인 출입이 제한된 금역.
용의 계곡은 극동 공화국 대신 로마노프 가문에서 직접 관리를 하고 있다.
"위험하다고 들어가지 말라니. 헛소리죠."
"용석은 비싸니까."
"맞습니다. 그러니 저희 같은 브로커가 먹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고려인 출신 브로커 김 씨가 입매를 비틀었다.
UN에서는 왜 7대 마경 출입을 제한하는가?
표면적인 이유는 너무나도 위험해서라지만, 이면적인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용석.
용족 계열 몬스터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부산물.
바실리스크나 레리크 같은 아종이 아닌, 진정한 용족으로 분류되는 괴물한테서 얻을 수 있다.
"최소 5성은 되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지만. 출입 자체를 막는 건 심하지 않습니까."
김 씨의 눈동자 위에 스쳐 지나가는 경멸감.
로마노프 가문은 극동 공화국의 치안 유지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본가와 멀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인원만을 파견한 채, 생색만 잔뜩 내고 항만의 지분을 뜯어갔다.
용의 계곡을 통제하는 것도 그렇고.
가문의 이득 말곤 관심이 없는 작자들이었다.
"죄송합니다. 말이 좀 과했군요."
"근데 밀입국이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기껏 준비해 놓은 여권을 쓸 일이 없네."
"한국이랑 같이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극동 공화국은 정부의 영향력이 썩 강하지 않으니까요."
대격변 이후 상당수 영토를 잃고 행정력도 최소한으로 유지 중인 자치 정부다.
자국 내 도시를 오갈 때에도 용병이나 헌터를 고용해야 하는 상황.
밀입국자를 잡아낼 인력이 있으면 몬스터 사냥에 투입했겠지.
[주군. 모두 정리했습니다.]
송명석이 칼날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내며 보고했다.
그 뒤를 따르는 100여 구의 언데드 군대.
바닥에는 몬스터들의 사체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2주 동안 벌인 전투만 수십 번. 사람들이 오가는 국도를 이용했는데도 이 모양이다.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정말 대단하시군요. 천 대표님. 덕분에 경비와 시간이 엄청 줄었습니다."
김 씨가 말했던 2주는 몬스터와 최소한으로 접촉했을 때를 가정하는 것이었다.
한데, 이번 마경 행에는 기묘할 정도로 몬스터들의 습격이 많았고.
유진의 활약상이 없었으면 한 달이 걸렸을지도 모를 만큼 힘겨운 여정이었다.
"운이 좋군."
"그러게 말입니다. 허헛."
글쎄.
운이 좋다는 건 다른 의미로 말한 건데.
유진은 브로커 김 씨의 오해를 구태여 잡아주지 않았다.
"마석은 모두 캤나?"
[예. 주군. D급 이상만 선정해서 모두 트럭에 옮겨놓았습니다.]
"잘했다."
"그럼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만큼 가까워진 마경.
부릉, 부릉, 김 씨는 오른발로 브레이크를 지그시 누르며 트럭 엔진을 재시동했다.
*
7대 마경은 매우 넓다.
마경 중 가장 면적이 좁다고 알려진 마경, [인페르날]조차 불카노 섬 전역을 시공 결계로 감싸서 제 영역으로 삼아버렸으니.
용의 계곡은 훨씬 크다.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강원도를 합친 면적이 통으로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다.
"그래서 샛길도 많습니다."
"샛길이라고 하면 불규칙적으로 열리는 게이트 출입구였지?"
"예. 마경은 출입구도 하나가 아니니까요."
[용의 계곡]
[유형 - 마경]
[출입 조건 : 없음]
[게이트 면적 : 초대형]
고정으로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 외에도 균열이 여기저기서 생성된다.
김 씨 같은 마경 출입 브로커가 알선하는 출입구이기도 했다.
좌표가 고정된 통행로는 로마노프 가문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으니.
로마노프 가문의 눈을 피할 방법은 불규칙적으로 생성되는 무작위 균열을 이용해야 한다.
"왜 무작위 균열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무작위로 생기니까 그런 것 아니겠나."
"반만 맞추셨습니다. 무작위 균열에 들어가면 어디로 떨어질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동 지점이 랜덤이다?"
"예. 운이 없으면 용의 계곡 심처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같은 균열에 들어가도 도착지점이 다르단다.
팀 구성이 의미가 없으니.
그야말로 목숨을 건 밀수다.
"심처로 넘어갈 확률은 1%도 안 된다고 하지만 조심하십쇼 "
"그 통계는 어디서 낸 거야?"
"로마노프 가문입니다. 그 정보 알아내려고 관계자한테 돈 좀 먹였죠."
"참 위안이 되는 말이네."
용의 계곡에 언데드 군대를 대동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숫자를 불려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할 걸 그랬다.
"나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들어가셨을 때 보이는 균열 위치를 확실히 기억해두십시오."
"그때도 무작위인가."
"예. 운이 없으면 반대쪽에서 나오기도 하더군요."
"기도메타네."
유진은 짧게 투덜거렸다.
〔마치 처음 방문하는 것 마냥 일일이 물어보는구나.〕
'진짜로 처음이니까.'
〔회귀 전에도 경험해본 적이 없단 말이더냐?〕
'왜 같은 대답을 두 번 하게 해.'
마경을 들락거린 경험이야 여럿 있다.
더 강한 언데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반이 되는 시체가 필요했다.
7대 마경처럼 강력한 몬스터가 출몰하는 곳은 많지 않거든.
용의 계곡도 본 드래곤 제작에 필요한 용석을 모으려고 몇 번씩 들락거렸다.
〔출입은 로마노프 가문이 관리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때는 천무문이랑 공동으로 맡았으니까.'
네크로맨시에 적대감을 드러내던 로마노프 가문과 달리. 천무문은 합의점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었지만, 용족의 부산물이나 용석의 가치를 생각하면 참을 만했다.
"참. 나오면 어떻게 당신을 찾지?"
"발신기입니다.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두셨다가 나오면 켜주십쇼."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군."
"받은 만큼 일한다는 것이 제 모토입니다."
김 씨는 웃음기를 싹 지우곤 유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운을 빕니다."
"곧 봅시다. 얼마나 걸릴 진 모르겠지만."
트럭에 쌓아놓은 마석들을 모조리 챙기고는 균열에 몸을 밀어 넣었다.
*
휘오오오오!!!
균열 너머로 진입하자마자 눈을 뜨기조차 어려울 만큼 거센 바람이 유진을 환영해주었다.
매서운 공기의 흐름이 피부를 쉴 새 없이 강타했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발을 잡아당기듯, 아래로 수직 낙하했다.
〔바닥이 없구나.〕
'그러게.'
〔그리 평온하게 이야기해도 되겠느냐?〕
스카이다이빙 즐기듯 양팔과 다리를 곧게 펴고 바람과 마주하니 크로노스가 길게 타박했다.
아니.
뭐, 좀 즐길 수도 있지.
〔이 기세로 낙하하면 금방 지상과 격렬하게 키스하겠구나.〕
'그러겠지. 뼈나 추리면 다행이겠어.'
〔참으로 느긋한지고.〕
'말했잖아. 용의 계곡은 몇 번 와봤다고.'
비공식 루트를 이용해본 게 처음인 거지.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 수직 낙하하는 경험은 이미 꽤 해봤다.
이 곳은 바람의 정룡이 머무는 지역.
거센 바람으로 휘감긴 곳으로 발 디딜 만한 땅이 거의 없다.
〔비행은 가능하느냐?〕
'미리 준비를 했으면 모르겠지만, 당장 쓸 수 있는 주문으로는 불가능해.'
정석적인 마법계 4성 헌터라면 [플라이]나 [레비테이션] 같은 주문으로 낙하를 저지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추락만 막을 뿐 거센 바람 속에서 중심을 잡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성좌 나리. 아직도 나를 모르겠어?'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토록 평온하다는 것은 대책도 마련했다는 의미더냐.〕
'그래.'
스카이다이빙 자격증은 없어도 바람을 탄 경험이 많아서 낙하 중에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유진의 시야를 통해 마경을 관찰하던 크로노스가 아- 하는 감탄사를 내질렀다.
〔부유 중인 바위가 있구나!〕
'여기는 바람이 원체 세서 땅도 날아다니거든.'
허공에 고정시킨 것 마냥 둥둥 떠 있는 바위를 향해 대각선으로 낙하했다.
충돌 직전.
유진은 공중제비를 돌며 아래를 향하던 머리를 위로 추켜세웠고.
[오러를 사용합니다.]
두 다리를 오러로 강화하고는 파프너에게서 찾아온 [용린갑]까지 각반 형태로 바꾸어서 충격에 대비했다.
콰앙- 착지하는 순간 발을 타고 올라오는 짜릿한 감각에 제길!, 이라는 욕지거리가 나왔지만.
어쨌든 무사히 착지했다.
〔놀랍구나. 발 디딜 틈도 없는 게이트라니.〕
'용의 계곡 전부가 이렇지는 않아.'
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강원도를 합친 면적의 대규모 균열.
용의 계곡은 크게 네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불 / 물 / 바람 / 대지
〔자연의 4원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양새로구나.〕
'뭐, 비슷하지. 용들도 그러거든.'
마침 손님이 왔네.
유진이 길게 늘인 낫으로 바람 사이를 가리켰다.
"크라라라라!"
밝은 청록색 비늘로 전신을 뒤덮은 용.
몸길이는 5미터 정도였고 비늘 주위를 휘감은 돌풍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인근의 바람에도 영향을 끼쳤다.
바람 사이로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
살기 어린 눈빛은 유진을 시선만으로 난도질할 것 같은 기세였다.
"운이 좋군. 풍정룡 윈드를 만나다니."
"크라라?"
"너를 얕보는 게 맞다. 그래서 어쩔 건데?"
"크라라라!"
풍정룡이 두 눈을 부라리며 직선 코스로 돌진했다.
거세게 불던 공기의 흐름이 청록색 몸체에 휘감기면서 귀를 먹먹하게 하던 바람소리가 일순간 사라졌다.
일점으로 집중된 힘이 노리는 것은 유진이 서 있는 땅.
기교 하나 없는 단순한 돌진인데도, 5성 화염 마법인 익스플로전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녔다.
[흑암의 반지에 보관된 사체를 방출합니다.]
[주군. 저 괴물은 뭡니까!]
"사냥감."
[일찍 불러주시지 그랬습니까. 이렇게나 가까이 왔으면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파프너였으면 그런 말 하기 전에 이미 반격 준비를 했을걸?"
[빌어먹을, 입니다.]
[텐티클 블레이드]
[분광검 4식 - 녹광검 X 5]
일점으로 집중된 초록색 빛이 응축된 바람의 흐름을 파훼했다.
0.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풍정룡의 바람을 읽어내고.
암흑 투기로 빈틈을 찌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봐. 하면 되잖아."
[주군.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아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골렘 연성을 사용합니다.]
유진과 풍정룡 사이에 나타난 5미터 크기의 거한.
피를 매개로 제작한 피조물, 블러드 골렘이 [혈류 변환]으로 손을 길게 늘어뜨렸다.
돌진하던 풍정룡은 졸지에 골렘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었다.
암흑 투기로 바람을 무효화하고.
감소된 풍정룡의 돌진은 블러드 골렘으로 받아낼 수 있었다.
서걱-.
새빨간 광채가 블러드 골렘에게 붙들린 풍정룡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주군! 속하가 용을 사냥했습니다!]
"이놈은 새끼 정룡이다. 5성급 잡고 그렇게 흥이 나면 어떻게 해?"
[예에? 고작 5성이 이만큼이나 강하단 말입니까!]
버프 싹 빼면 4성 수준밖에 안 되면서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니니.
유진은 핀잔을 주려다가 말았다.
그래.
자존심은 지켜줘야지.
앞으로 싸울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그대가 언급한 정룡이란 무엇이더냐?〕
'정령 같은 용이라고 해야 하나.'
턱을 만지작거린 유진은 회귀 전 지식을 이야기했다.
진정한 용족.
그러니까 드래곤은 정해진 속성을 극한까지 육신에 축적한다.
마법에도 능한 데다 주관하는 속성에 한해선 가히 무적이라고까지 불린 강력한 존재!
'정룡은 반대야.'
정령 같은 용이라고 해야 하나.
드래곤이 성장하면서 자연의 힘을 쌓는 것과 달리.
정룡은 해당 속성을 담기 위해 육체를 키운다.
결과적으로는 비슷하지만 과정이 반대라고 해야겠지.
〔기이하구나.〕
'용 군단에서는 정룡을 찾아볼 수 없기도 하고.'
용의 계곡에 서식하는 정룡.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것 같지만, 관심 있게 조사한 건 아니라서 내막까진 모른다.
[주, 주군? 한가하게 턱을 만지실 때가 아닙니다.]
"다른 생각 하다가 분위기를 못 읽었네."
유진을 향해 몰려드는 풍정룡.
방금 전에 쓰러트린 놈과 동일하게 생긴 용이 5마리로 늘어났다.
아무래도.
X 된 것 같은데?
159화 용의 계곡(2)
[빌어먹으으을!!!!]
[분광검]
[1식 - 청광검(靑光劍)]
허공에 맺힌 푸른 잔광이 거세게 몰아친 바람을 밀어낸다.
춤을 추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두 자루의 칼.
송명석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쉴 새 없이 암흑 투기를 일으키며 풍정룡 무리의 공세를 받아쳤다.
"힘내라. 힘내라. 내 하수인."
[주군. 그 입, 조금만 다물어주실 수 있습니까?]
"응원이라도 해야지. 시체도 없는 네크로맨서가 뭘 할 수 있겠어?"
[방금 전에 사냥한 놈 시체도 있지 않습니까!]
"정룡은 시체가 안 남는다."
풍정룡이었던 것, 의 시체가 바람에 섞여서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건 비늘과 거죽, 그리고 뼈 조금.
명색이 용족의 부산물이니 값어치가 높지만, 당장 전투에 활용할 정도는 아니다.
언데드 군대를 끌고 오고 싶었던 이유였는데 말이지.
하긴.
바람의 영역이라면 대부분 자유 낙하해서 뒈졌을 테니 의미도 없겠군.
〔이래서야 정령이나 다를 바 없구나.〕
'뭐, 비슷하지.'
크로노스의 말대로다.
목숨이 끊어지면 시체가 자연에 환원되고.
용의 정수가 가득한 곳에서는 자연적으로 탄생한다.
네크로맨서가 활동하기에는 최악의 필드.
"송명석아. 얼마나 버틸 수 있겠니."
[5분도 못 버팁니다!]
"3분은 된다는 거네."
[주군. 그 3분이면 역전의 수단을 마련하실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렇다면 속하가 벌어다드리겠습니다.]
호오.
웬일로 믿음직스러운 말을 하는군.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석들을 꺼냈다.
"블러드 골렘아. 너도 수고 좀 해라."
「명령. 받듭니다.」
[혈류 변환]
방패처럼 굳건한 형태 및 구조로 양팔을 바꾼 블러드 골렘이 유진을 보호했다.
좋아.
그러면 작업을 시작해볼까.
〔시체도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네크로맨시는 쓸모가 없다고 했잖아. 그럼 다른 방식으로 해야지.'
강령술이 안 된다고?
[지식의 도서관]에는 강령술 말고도 여러 주문이 있다.
마석들을 쭉 나열한 후에 마력 회로로 연결한다.
불타는 산 때와 동일한 배열.
〔골렘이로구나.〕
'정답.'
용의 계곡에서는 강령술이 무력화된다는 것쯤, 회귀 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마경에 오기 전.
집요하게 마석을 채집한 것도 이 때를 대비해서였다.
'여긴 4대 속성력이 강해. 암흑 마법은 제 위력을 낼 수 없다.'
독 마법도 마찬가지.
암흑과 독은 효과가 반감되는 데다, 정룡들은 마력 저항력이 매우 높아서 마법으로는 제대로 된 피해를 주기 어려웠다.
[그림자 가면]에 새긴 저주도 마찬가지.
쓸 수 있는 수단 중에서 효과가 없거나 미미한 것들을 모두 배제하면?
연금술이 남는다.
〔신성 주문은 통용될지도 모르지 않느냐.〕
'아. 그건 실험 안 해봤네.'
날카로운 지적인걸.
회귀 전과는 달리, 지금은 신관도 겸하고 있으니.
연구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공격 주문이 없는 게 흠이지만.'
〔어허. 짐이 하사한 이적이 있거늘. 어이하여 그러느냐.〕
'예, 예. 한 번 쓰면 마력과 체력을 모두 탕진하는 필살기 말이죠.'
풍정룡 다섯을 이적 한 방으로 격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1그램도 들지 않는걸.
[지식의 도서관을 사용합니다.]
전승 가능한 슬롯은 다섯.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 필요한 주문은....
[연금술식 - 리버스 마나 플로우 주문을 전승합니다.]
[연금술식 - 오버드라이브 주문을 전승합니다.]
[연금술식 - 가이디드 마나 주문을 전승합니다.]
〔그대여. 어이하여 전승 주문을 연금술로만 한정지은 게냐?〕
'말했잖아. 다른 분야는 안 먹힌다니까.'
〔한데 연금술은 공격하곤 거리가 먼 분야가 아니더냐.〕
'무엇이든 쓰기 나름이지.'
같은 칼 한 자루로 요리를 만들기도 하고.
몬스터의 수급을 벨 수도 있다.
도구는 결국 도구란 말이지. 스킬도 마찬가지다.
[연금술식 - 리버스 마나 플로우를 사용합니다.]
우선 바람의 흐름을 풍정룡에게서 빼앗아볼까.
바람도 결국은 마력의 갈래.
마력 운용을 반전하는 연금술식이 발동되자, 직렬로 이어놓은 마석들을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과거에 검은 방첨탑을 세울 때 사용한 주문이로구나.〕
'그땐 동업자 양반의 도움을 받았었지.'
휘몰아치는 바람 일부를 빼앗았지만 풍정룡들의 기세를 꺾긴 역부족이다.
바람의 도움 없이도 순수 스펙만 해도 오우거보다 높은 괴물.
신성 주문을 걸어줬다지만, 송명석이 5대1로 시간을 버는 행위 자체가 기적이었다.
[연금술식 - 가이디드 마나를 사용합니다.]
[연금술식 - 마나 오버드라이브를 사용합니다.]
거대한 흐름을 역류시켜서 마석과 연결시키고.
가이디드 마나로 물질이 아닌 마력 그 자체에 길을 새긴다.
마지막으로는 인위적으로 마력 과부하를 일으키는 [오버드라이브]까지.
'효율은 92% 정도 되려나. 급조한 것치곤 괜찮군.'
〔골렘 연성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이는 것 같구나. 전에는 이토록 번거로운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을 터인데.〕
'타버린 화염인들의 몸뚱이가 있었잖아. 지금이랑 같나.'
휘몰아치는 바람.
마력이 들끓는 장소지만, 공기 자체를 매개체로 삼을 순 없다.
연금술식으로 진한 마력을 함유한 바람을 붙들어놓고 직렬로 붙인 마석 쪽으로 유도.
종래에는 인위적으로 모아놓은 바람의 마력을 폭주시켰다.
'이 타이밍을 기다렸다.'
[골렘 연성을 사용합니다.]
극한까지 압축된 바람을 육체 삼아 가동을 시작한 골렘.
[윈드 골렘]
종족 : 마법 생물
등급 : ★★★★★
◎능력치
근력 : 1,300 / 민첩 : 1,500 / 체력 : 700 / 맷집 : 1,200 / 마력 : 1,000
◎특성
▷인조병기[B] / 물리면역[B] / 정령체[B] / 비행체[B] / 바람 제어[B]
◎스킬
▷거대화[B] / 소닉 붐[B] / 타이푼[B]
블러드 골렘과 비슷한 덩치가 지면을 박차고 일어나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주인. 명령을.」
"저놈들을 없애라."
「명. 받듭니다.」
후- 유진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연금술은 강령술처럼 척척 안 되는군.
회귀 전 경험을 최대한 살려도 작업 종료까지 3분이나 걸렸다.
[주구우우운!]
"친구 보내줬잖아. 이제 할 만할 거다."
3분을 버틴 보람이 있잖아.
안 그래?
*
바람을 육체 삼아 만든 골렘, 일명 [윈드 골렘]이 전장에 합류하고.
수비용으로 돌려둔 블러드 골렘까지 투입하니 풍정룡 다섯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바람. 빼앗는다.」
[오버드라이브]
[바람 제어]
허용된 양 이상으로 마력을 과부하.
풍정룡이 두르고 있던 바람까지 강탈해서 전투력을 빼앗았다.
바람 제어 능력은 골렘이 한 수 위였으니.
[특성 - 바람 제어]
[바람 마법 - 타이푼]
쾅! 쾅!
공중을 누비던 풍정룡들이 골렘의 팔에서 발생한 회오리에 휘말려서 지면으로 추락했다.
[너는 제 몫입니다.]
송명석은 텐티클 블레이드로 암흑 투기를 단번에 역량 이상으로 방출했다.
바람을 두르고도 막아내지 못한 검.
무방비하게 약점을 노출시킨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다.
"크락...."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29입니다.]
오.
좋군.
전승 슬롯을 3개나 써버려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금방 2개를 채울 수 있겠다.
마지막 풍정룡의 심장에 칼을 쑤셔 넣은 송명석이 가슴을 탕- 탕- 두드렸다.
[보십시오. 주군. 제 힘을!]
"파프너였으면 진즉에 끝냈을 건데."
[크, 크으으읏!!!]
"그래도 잘했다. 공중전 대책도 없으면서 용케 풍정룡을 사냥했어."
송명석의 안광이 거세게 타올랐다.
드디어.
저 인간 같지도 않은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전율이 샘솟았다.
살점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었으면 파르르 떨렸을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굴욕과 핍박의 나날을 딛고 이겨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강해지다 보면.
대전사인 파프너도 뛰어넘어서 저 콧대 높은 주인조차 자신을 믿고 의지하리라.
'곧 찾아올 겁니다. 그날이!'
유진은 그 모습을 힐끗 본 후, 실소를 삼켰다.
연평도에서 드러누운 파프너를 한 번이라도 봤으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으리라.
뭐, 어쩌겠어.
좌절감은 사내를 키우는 양분인걸.
'어디 한번 힘내봐라.'
송명석이 강해져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휘유- 유진은 휘파람을 불었다.
[근데 이런 골렘을 만들 수 있으면 진즉에 하시지 그랬습니까.]
"1회성이다."
[시간만 충분했으면 모조리 도륙했겠지만, 주군을 지키면서 싸우니 힘들었습니다.]
송명석은 다시 한번 가슴팍을 두드리며 허세를 부렸다.
피식, 짧게 웃은 유진이 골렘을 가리켰다.
"2억. 윈드 골렘 한 기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이다."
[예?]
"지속시간도 짧다. 1시간 후에는 마석에 담긴 마력을 모두 소진해서 없어질 거다."
시급 2억.
불타는 산에서 만들었던 화염 골렘보다 연비가 훨씬 안 좋다.
주 원인은 화염인들의 잔해처럼 땔감으로 삼을 촉매가 없다는 것.
마력으로 바람의 흐름을 붙들어 육체처럼 만들었다.
"연비가 안 좋을 수밖에 없지."
[강령술을 못 쓰는 상황을 대비해놓다니. 역시 주군입니다.]
"내가 좀 대단하지."
[이렇게나 치밀하고 간교하니 생전의 제가 당해내지 못한 것도 당연합니다.]
미간을 찌푸리는 유진.
이 정도면 먹이는 게 아닌가?
[저 골렘. 가성비가 아주 나쁘군요.]
"가성비도 그렇고. 용의 계곡은 마석이 안 나오니 아껴서 써야지."
마석도 무한하지는 않다.
2주 동안 D급 이상 마석을 최대한 긁어모았지만 여유롭다고 보기 어려운 양.
도무지 감당이 안 될 때만 골렘을 연성해야 한다.
[역시 주군의 손발이 되어줄 만한 하수인은 저밖에 없습니다.]
"윈드 골렘이 아니었으면 허우적대다가 당했을 거면서."
[크, 크흠.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는 겁니까?]
유진은 바람 사이에 떠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흔들리는 송명석의 안광.
몇 번이고 안광을 좌우로 흔들더니, 못 믿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설마 바위 사이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말씀은 아닌지.]
"이해가 빠르군."
[주군, 농담이 심하십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빌어먹을, 입니다.]
"왜. 쫄?"
[저는 그렇게 나약한 언데드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거면 팔과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게 제어하든 해야지.
설득력이 하나도 없잖니.
"윈드 골렘. 우리를 태워라."
「명. 받듭니다.」
유진과 송명석을 어깨에 얹은 골렘은 그대로 지면을 박차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또 다른 전력인 블러드 골렘은 압축해서 아공간에 보관하니 들고 다닐 걱정은 없었다.
쿵- 쿵-.
애당초 비행 타입으로 만든 게 아니기에, 윈드 골렘의 활강시간은 길지 않았다.
길게 도약해서 하늘을 날다가 적당한 바위에 착지.
다시 한번 도약하는 식으로 이동했다.
[주군. 여기에 온 목적을 다시 한번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용석이랑 용의 부산물이 첫 번째다."
[두 번째도 있습니까?]
"그래. 두 번째 목적은 이따 알려주마."
이동하면서 풍정룡을 몇 마리 더 사냥하니 윈드 골렘의 몸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형태가 없는 바람을 붙들어놓으니 마석의 에너지 소모량도 높았다.
아쉽지만 이 녀석은 그만 놓아줘야겠어.
〔전력이 모자라구나.〕
'풍정룡을 열심히 사냥한 건 그것 때문이다.'
아공간에 쟁여놓은 가죽과 비늘, 그리고 뼈를 꺼냈다.
사냥한 숫자에 비해 많지 않은 양.
당장 쓸 정도는 되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골렘만이 아니야.'
크흐흐흐.
낮은 웃음소리가 입가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160화 마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