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SANTOSUBEDENIVELCONNIGROMANCIA / Chapter 14 - 130-140

Chapter 14 - 130-140

130화 속초로 가는 길

산자락을 타고 길게 늘어져 있는 철조망.

대격변 이전에는 북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사용되었고.

이젠 몬스터들이 들락거리지 못하도록 경계 및 마법적인 조치를 더한 경계선이다.

철조망 한가운데에는 접경지역 출입을 통제하는 관문이 나온다.

"여기로 오는 것도 오래간만이네."

[매번 불법 루트를 이용하잖아. 주인.]

"네크로폴리스를 오가는데 일일이 출입증 끊기도 귀찮다고."

[훌륭한 범죄자의 마인드야. 역시 그라운드 제로 삼강 중 하나를 맡을 만해.]

"예. 공범의 자백 잘 들었습니다."

유진은 파프더와 시시덕대며 접경지역 관문으로 다가갔다.

"저, 정지! 누구냐!!!"

"천유진. 뽀시래기 팀원 겸 블랙 컴퍼니 대표입니다."

철컥- 철컥-.

관문에서 경계를 서던 초병들이 화들짝 놀라 총구를 겨누었고.

군 복무 중인 헌터나 요원들도 긴장 섞인 표정으로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사람을 보자마자 이렇게까지 경계하면 상처받는다고.

[퍽이나 그러시겠어.]

"왜. 나름 호감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주인 뒤에 따라오는 언데드들을 보면 누구라도 겁먹을 거다.]

흉흉하게 빛나는 푸른 안광.

중급 언데드 수백 구가 살기등등한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바지가 지릴 만한 상황.

"과대광고가 심하시네."

[들어갈 수 있겠어?]

"뽀시래기 애들한테 미리 이야기해두라 했어. 문제는 없을 거다."

[없던 문제도 생길 분위기던데.]

어쩌다 보니 무력시위 하는 꼴이 됐지만 느긋하게 기다렸다.

몇 분 정도 지났을까.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양쪽으로 밀려났다.

"드, 들어오십쇼."

"고생들 하쇼."

앞서서 걷는 유진.

중급 언데드 수백 구가 침묵한 채로 뒤를 따랐다.

꿀꺽, 총을 든 병사 한 명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힘 빼. 혹시라도 격발할라."

"이상윤 병장님. 그래도 됨까? 혹시라도 덤비면."

마석을 함유한 총탄.

접경지역에 배치된 군인에게 지급되는 무장이다.

과거 휴전선이었던 영역 전부가 고스란히 몬스터의 영역으로 변했고.

정부기관 소속 요원들이나 접경지역을 들락거리는 헌터들만 가지고는 모두 대처할 수 없었다.

"총으로 대응 가능한 건 이론상 3성까지다. 안 먹힐 텐데 겨눠서 뭐하냐."

낙담하는 투로 중얼거린 선임 병사가 긴장을 풀려고 휘파람을 불었다.

전역 1주일 남기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이라니.

낙엽이 떨어지는 것도 조심해야 할 시기라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았나.

'2년 근무하면서 제일 쫄깃하네.'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이라서 파장이나 기백 같은 건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유진의 뒤를 따르는 언데드 군대가 지금껏 본 몬스터 무리나 헌터들보다 훨씬 위험하단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 언데드?"

"천유진이 언데드를 부린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저런 신성 주문이 있다고?!"

"모르지. 어쨌든 신관계 헌터인 건 확실하다던데."

"스켈레톤 나이트에 듀라한, 저건 또 뭐야."

"모두 중급 언데드다. 시비 걸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어."

접경지역을 들락거리는 헌터들도 기겁한 건 마찬가지.

나름 산전수전 겪어본 이들조차 귀기를 흩뿌리는 언데드 군대 앞에선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형! 여기야!"

"일찍 와 있었군."

대형 트레일러 조수석에 탄 강민영이 손을 흔들었다.

줄지어 서 있는 차량들.

뽀시래기 팀에게 접경지역 출입 등록을 시킬 때 같이 부탁해놓은 언데드 군대 운송수단이다.

〔매번 이러는 것도 번거롭겠구나.〕

'성위를 더 올리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지.'

[암흑의 문]이나 [불사 공간] 같은 주문은 7성 이상이 되어야 익힐 수 있다.

그전까지는 정예 언데드만 흑암의 반지나 아공간 주머니에 보관해서 다니든지.

아니면 차량 여러 대를 빌려가지고 싣는 수밖에 없다.

"그, 몬스터를 싣는 거요?"

"저기요. 계약할 때 다 명시했거든요."

"으음.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영 꺼림칙해서."

"싫으면 위약금 물고 돌아가세요."

강민영의 확고한 대답에 언데드를 보고 진땀 흘리던 운전수들이 마지못해 짐칸을 열었다.

신음 하나 내지 않고 짐칸으로 들어가는 언데드들.

유진은 짧게 오-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법인데."

"이럴 거 같아서 오빠 말고 내가 왔어요."

"하기야. 그 녀석은 아쉬운 소리 잘 못하지."

"쓴 소리는 내 담당이잖아요."

"둘은 어디로?"

"용병단 잔업 마무리하면 속초로 넘어온대요."

처음 집합 이후, 용병들은 강민호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민상진이라고 했던가?

나찰 집단군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녀석이 판을 깔아준 덕에 강민호의 입지가 탄탄해졌다.

"재영이도 일을 잘 해줘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누구시더라?"

"와. 너무하네. 임 이사님 동생이요."

근황 공유 겸 잡담을 나누고 있다 보니 금세 언데드 군대 수납이 끝났다.

유진은 가장 앞에 선 차량에 탑승했다.

"형. 나도 같이 타요."

"트럭이잖아. 비좁은 곳에 왜 낑겨 타려고 해."

"에이. 오래간만인데 밀어내면 그렇다."

"...알았다."

부릉, 선두 차량이 출발하자 언데드들을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파주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

넓게 펼쳐진 공터.

북서쪽에는 쭉 늘어진 산자락이 보이고.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한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눈을 시리게 한다.

몬스터 웨이브 때 파괴된 옛 통일전망대.

이후 불사조 길드는 정부와 협상해서 부서진 터를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그러니까 우린 어웨이란 말이잖아요."

신유승.

[잊힌 신전]에서 차기 검성 장미선과 대립각을 세웠던 유망주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주먹을 쾅, 맞부딪쳤다.

"훈련장 정보는 모두 공유를 받았다. 홈이 아니라고 불리하진 않아."

"그렇다고 해도 말이죠. 일정 당겨달라는 건 불사조 길드의 요구인데. 고성까지 올 필요가 있었어요, 아버지?"

"지금은 공적 관계다. 길드의 유망주 씨."

"보는 사람 한 명 없는데 너무 딱딱하게 그러신다."

새벽 길드의 마스터.

그리고 신유승의 아버지이기도 한 사내, 신형식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드님. 그런 데서 마음을 허물다 보면 한도 끝도 없는 법이다."

"넵. 길드장님. 그 말씀 뼈에 새기겠습니다."

"출발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번 훈련은 새벽 길드에게 큰 이득이 될 거다."

"아라한을 흔들 시간에 길드 내실을 키워야지."

"국내 1위를 흔들어야 내실을 다질 기회도 생기는 법이다."

신형식은 하나뿐인 아들을 한심하단 투로 바라봤다.

이번 합동훈련의 중요성은 출발 전에도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새벽 길드 최강자인 자신을 뛰어넘는 재능의 소유자께선 저렇게 속 편한 소리를 내뱉고 있으니.

"누구를 닮아서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된 건가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수?"

"내 머리를 반만 닮았어도."

"그랬으면 머리가 뒤로 후퇴하겠지."

"이마가 앞으로 전진하는 거라고 했잖아!"

빠직.

갈수록 넓어지는 이마를 힐끗거린 신형식이 끓어오른 분노를 가라앉힌 후, 재차 입을 떼었다.

"솔직히 물어보마. 합동훈련이 마음에 안 드는 거니. 아니면 천유진 때문이니."

"난 아부지 말 믿고 개처럼 굴렀는데 엉뚱한 놈이 주목받잖아요. 기분이 좋겠수?"

"장미선도 있다."

"걔랑은 조만간 결판을 낼 생각이었고."

"이번 기회에 내면 되겠네."

"그 벼락출세한 놈이랑 싸우는 게 자존심 상한다니까요."

불과 3개월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로 주목받았던 신유승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송명석, 그리고 차기 검성 장미선.

두 사람 말고는 자신에게 대적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 꼴이 뭔가?

"박살내버릴 거요. 그 천유진이라는 녀석."

"순번을 헷갈리지 마라. 최우선적으로 꺾어야 할 건 불사조다."

아라한이 타격을 받아 국내 1위에서 추락하면?

두 길드의 공조도 끝이다.

합동훈련은 아라한 길드를 견제함과 동시에 서로의 기량을 테스트하는 무대.

영원히 국내 1위를 수성할 것 같았던 아라한이 흔들리는 시점에서 진행되는 훈련이라서 더더욱 의미가 깊었다.

"불사조는 소수 정예. 반면 우리 길드는 숫자가 많은 대신 팀워크의 정교함이 떨어진다."

새벽 길드의 방향성은 아라한과 흡사한 기업 운영식이다.

총 전력은 불사조보다 새벽이 근소하게 앞서지만, 개개인의 역량과 팀워크를 놓고 보면 불사조가 앞섰다.

"그 차이 때문에 지금까진 훈련에서 근소한 차이로 밀렸지. 이번에는 달라야 하지 않겠어?"

"아부지 입장에선 그렇죠."

"그 천유진이란 녀석하고도 승부를 내지 말란 게 아니다. 순서를 헷갈리지 말란 거다."

블랙 컴퍼니를 초대함으로써 평소보다 더 큰 주목을 받은 합동훈련.

신형식은 자식 놈이 감정에 휘둘려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크게 걱정했다.

'진짜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 했건만.'

새벽 길드는 합동훈련 시작 전부터 꽤 많은 이득을 거두었다.

훈련일정을 당기는 것은 그도 환영하는 바였으나, 어쨌든 불사조 길드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식으로 일처리가 되었다.

무릇 주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불사조 길드한테 달아둔 빚은 새벽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되리라.

'송명석 사후 유망주들의 서열을 정리할 기회이기도 하다.'

아라한의 초신성, 송명석.

차기 검성으로 불리는 장미선도, 뛰어난 오성을 타고난 자신의 아들도 그에게는 한 수 뒤처진다는 평을 들었다.

송명석이 죽기 전에 장미선과의 대련에서 패배하긴 했어도.

그 빛이 바래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중 게이트에서 허무하게 죽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천유진이 뛰어난 인재라 한들, 변변한 배경도 없는 헌터다.'

블랙 컴퍼니?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회사를 설립한다고 해서 국내 3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아라한 길드를 뒤흔들 합동훈련의 구색 맞추기.

신형식은 유진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지만 대단하니까.'

혹독한 수련.

최소한의 휴식만 치르면서 게이트를 공략하기까지.

그가 생각해도 심하다고 여길 만큼 극한의 환경에서 신유승을 단련시켰다.

4성의 벽에 부딪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러를 일깨운 것이 증거.

'문제는 최근에 송명석한테도 이긴 적 있는 장미선이다.'

합동훈련 직전.

장미선 역시 벽을 넘어서 4성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유진 같은 근본도 없는 헌터보다는 장미선처럼 기초부터 착착 밟으며 올라온 자가 무서운 법.

신형석이 전진(?) 중인 이마를 쓸어 넘기고 있을 때, 남쪽에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아부지."

"그래. 블랙 컴퍼니가 온 모양이구나."

불사조 길드는 홈 팀답게 먼저 도착해서 합동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도 보이는 흙먼지.

훈련장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세 번째 세력, 블랙 컴퍼니였다.

"이상하구나."

"뭐가요?"

"블랙 컴퍼니는 구성인원이 많지 않다고 들었다. 휘하 용병단이 있긴 해도...."

신형식은 용병단을 합동훈련에 동원하지는 않겠지, 라는 뒷말을 내뱉었다.

끼익-.

합동훈련장 앞에서 줄지어 멈춘 대형 트레일러.

문을 열자 신형식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부지. 저건...."

"중급 언데드들이구나."

척- 척-.

차량에서 내려온 언데드들은 사람을 보고도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줄지어 도열했다.

허, 신형식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언데드를 다룬다는 게 정말이었나?"

"중급 언데드면 오러를 다룰 수 있지 않나요."

"암흑 투기. 발현 원리는 오러랑 같긴 하다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신형식은 하차 중인 언데드 군대를 물끄러미 보며 말을 이었다.

"아드님."

"네."

"이번에는 아드님 의견이 맞는 것 같아."

"그 말은?"

"천유진부터 제쳐라."

중급 언데드 수백 구를 사역하는 헌터.

상대가 1년차 헌터라는 사실 같은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새벽 길드의 위명을 널리 떨치기 위해선.

불사조가 아니라 저 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아부지. 맡겨주십쇼."

신유승이 호승심을 불태웠다.

131화 뒷걸음질쳐서 기연 잡기

"형님. 여깁니다!"

"웬 천막을 그렇게 쳐놨어?"

"수송한 언데드들 이슬 맞게 두긴 그렇잖아요."

강민호 녀석, 센스가 늘었어.

중급 언데드들은 숙소 뒤에 설치해놓은 천막들 안으로 넣어두었다.

"민호야. 불사조 길드에서 전해달란 말 있었냐?"

"훈련 일정은 내일부터라고 합니다. 오늘은 편안하게 쉬라고 하시더군요."

"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간단하게 몸을 풀려고 합니다."

긴장한 기색이 드러나는 강민호의 얼굴.

국내 2, 3위 길드의 합동훈련에 끼었으니 쫄릴 만도 했다.

"무리하지는 마라. 훈련하다 몸 축나면 내일 본전도 못 찾는다."

"예. 형님."

"형도 같이 해야지, 요?"

"난 쉴 건데. 접경지역에서 몇 주를 뒹굴었다."

"에이. 우리도 물티슈로 피부 닦고 그렇게 살았, 아야!"

"형님. 푹 쉬십쇼."

뽀시래기 팀에게 손을 휘휘 저어준 후, 숙박시설이 구비된 천막으로 들어왔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헌터 길드들은 장기간 외부에 머무를 것에 대비해서 캠핑 시설들을 준비해둔다.

인적이 드문 곳에 생성된 게이트 공략이 늦어지면 출, 퇴근을 하기도 곤란하기 때문.

짧으면 하루에서 1주 사이.

길면 1달 이상인 게이트 공략이다 보니 야전시설은 필수였다.

-그대는 하루 안에 끝내지 않았느냐?

'잊힌 신전 땐 1주 걸렸잖아.'

-하기야. 그런 일이 있었지. 짐이 간과했도다.

땀과 먼지에 절어 있는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벗어둔 후, 천막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곧바로 씻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아도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일 일정을 소화하려면 미뤄둘 시간이 없어.'

-무얼 이야기하는 게냐?

'인형설삼 흡수.'

-호오. 그때 의뢰에서 받았던 보상 말이로구나. 하도 언급이 없어서 잊어버린 줄 알았건만.

'4성이 되어야 흡수 가능한 영약이었으니까.'

인형설삼.

성천 그룹 진성현 회장한테 받은 영약이다.

현 시대에는 개발되지 않은 치유법을 이용해서 딸내미의 [목내이병]을 치료해주었지.

신준석의 도움이 없었으면 유진도 100% 성공을 자신할 수 없었을 거다.

-공치사만 하지 말고 실질적인 보상을 주어라.

'성좌 나으리가 도와준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따져요.'

-그 작은 인간이 착취당하는 몰골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으니 하는 발언이니라.

'신준석 씨는 행복할 거야.'

연금술 노ㅇ······. 아니, 미래의 대연금술사께서는 오직 연금술의 성취 말고는 관심이 없다고.

그러니까 회귀 전에도 솔로로 평생을 살았지.

아니.

으으음.

그건 관심사 문제가 아닌가?

'뭐, 됐어. 본인만 행복하면 된 거잖아.'

-어이하여 타인의 행복을 그대가 재단하는 게냐?

유진은 크로노스의 사념에 대꾸하는 대신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인형설삼 이야기 한번 꺼냈다가 아주 날을 새겠어.

[인형설삼]

등급 : 유니크[U]

분류 : 영약

제한 : 없음

내구도 : 10/10

사람의 모습을 한 설삼이다. 극한의 음기를 담고 있어서 음차원의 마력을 다루는 이들에게 강력한 힘을 선사한다.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삼.

음차원의 마력을 축적한 영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시퍼런 냉기가 피부에 스며든다.

'딱히 가공은 필요 없겠군.'

망설이지 않고 손에 쥔 인형설삼을 입에 털어 넣었다.

윗니와 아래가 맞물리면서 영약을 짓이기고.

쓴 향을 동반한 액체가 입 안을 휘감더니 민트 사탕을 먹은 것 마냥 시원해졌다.

'인형설삼의 기운이 새어나가지 않게 막는다.'

영력으로 입 전체를 감싸서 힘 손실을 막고는 그대로 목구멍에 밀어넣었다.

꿀꺽, 인형설삼을 씹으면서 나온 액체가 목 아래로 내려가니 순간적으로 몸이 파르르 떨렸다.

어마어마한 냉기.

극한의 음기를 담고 있는 영약이다 보니 사지가 덜덜거렸다.

-괜찮은게냐?

'내가 회귀 전에도 영약을 얼마나 먹어봤는데.'

마법계고 무투계고 할 것 없이, 영약은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서로 궁합이 잘 맞는 영약이 다르며.

흡수한 영약의 마력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차이가 있지만 말이야.

'인형설삼은 나하고도 궁합이 잘 맞아.'

파프너 강화용으로 얻었던 영약을 3개월 만에 취하게 되는군.

[인형설삼을 흡수했습니다.]

[영력 스탯이 200 상승합니다.]

[영력 총량이 42.7% 상승합니다.]

스탯과 총량 상승.

능력치가 늘어나면 제어력이나 세세한 컨트롤에 더 유리해지고.

총량은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제어 능력은 둘째 쳐도 총량 증가는 언제나 환영이지.'

네크로맨서들은 영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

언데드 소환수가 제작 및 유지 가성비가 뛰어난 편이지만, 그래도 소모값을 무시하진 못한다.

[언홀리 커맨드] 같은 주문도 소모되는 영력을 보충하기 위함이니.

'난 라이프 드레인 덕에 영력 관리하기 꽤 편한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많아서 나쁠 건 없지.'

-크하하핫. 모두 짐의 공이란 말이렷다.

'모두는 아니죠. 성좌 나으리.'

영약에 기운을 외부에 흘리지 않고 모두 흡수했다.

중급 언데드들을 부리면서 영력 소모가 급격하게 올라간 마당이니.

인형설삼을 섭취함으로써 전투 지속력이 꽤 늘어났다.

딱 예상했던 만큼의 성과에 만족하며 입술을 씰룩이고 있을 때.

찌릿-.

모두 흡수했다고 생각했던 인형설삼의 기운이 쥐꼬리만큼 남은 채 아래로 내려갔다.

생소한 감각에 몸을 다시 한번 떨 무렵.

단전까지 스며든 실날 같은 기운이 유진의 감각을 자극했다.

'어, 어어어???'

차가운 고드름으로 복부를 찔리면 이런 느낌일까.

이질적인 느낌에 입이 벌어졌지만 비명을 토해내지는 않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본능적인 위기감에 목구멍에 아른거리는 비명을 삼켰다.

[특성 - 미숙한 경계자가 인형설삼의 영향으로 온전해집니다.]

[미숙한 경계자 → 암흑 투기로 변합니다.]

[암흑 투기를 페널티 없이 펼칠 수 있습니다.]

어????

잠깐.

뭐라굽쇼?

*

[미숙한 경계자]는 4성에 오르면서 획득한 특성이다.

레버넌트나 변칙으로 경지를 뛰어넘었지만 깨달음이 모자란 경우에 생성된다.

유진은 무투계가 아닌데도 4성의 벽을 넘는 순간 저 특성이 추가되었다.

'근데 왜 암흑 투기로 변환이 되냐고.'

회귀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기현상.

상담할 인물을 주변에서 찾아봐야 얼마 없었고.

〔모두 짐을 숭배한 덕 아니겠느냐! 크하하핫!〕

한 명, 아니 성좌 나으리는 헛소리만 내뱉어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진은 곧바로 파프너를 호출했다.

[흠. 어려운 문제도 아닌데?]

"감이 오냐."

[주인은 오러를 깨달았다. 그래서 쓸 수 있다.]

저기요.

너무 많은 게 생략된 설명처럼 들리지 않으세요?

유진의 의구심 가득한 눈빛에 파프너가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기억나나? 주인이 영력으로 눈을 강화했을 때 내가 놀랐던 거.]

"영맥을 찾으려고 했던 적 말이구나."

[응. 원래 마력에 의념을 부여하는 건 무투계나 할 수 있거든.]

"마법은 체내의 마력을 넓게 퍼트려서 세계에 간섭하니까. 운영 매커니즘이 완전히 다르지."

[무투계라는 직업군이 중요한 게 아니야. 주인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어.]

부웅-! 붕!

파프너가 가볍게 손을 뻗었다.

손등에 아른거리는 시커먼 기류. 암흑 투기다.

[내가 되살아났을 때 몇 성이었지?]

"3성."

[그래도 오러, 아니. 암흑 투기를 사용할 수 있었잖아.]

"넌 이미 생전에 6성에 도달했잖아."

[드래고니안 사체는 그러지 않았지. 스탯은 2성이었으니까.]

아.

그렇구나.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다.

무투계가 아닌데도 [미숙한 경계자] 특성이 추가되질 않았나.

영약을 먹었다고 온전한 암흑 투기를 전개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놀랐나보다.

'시스템이라고 절대적인 건 아닌데. 잊고 있었어.'

시스템이 규정해놓은 틀이 아니더라도.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면 스킬이나 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특히 '깨달음'과 관련된 부분이라면 말이야.

"그런데 왜 영약일까."

[직접 오러를 사용해봐. 그럼 감이 올 걸.]

"해법이 너무 단순한 거 아니냐?"

[후후. 주인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서 문제야.]

전직 무투계 권위자(?)가 저렇게 말하니 은근히 신용이 간단 말이지.

유진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아공간에서 창을 꺼냈다.

영약 하나 먹었다가 이게 뭔 일인지.

후-.

심호흡을 크게 내뱉은 후, 잡념을 모조리 지웠다.

오러.

회귀 전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무투계의 힘.

파프너의 조언 덕에 발현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그 힘을 이끌어내려면 고도의 집중이 필요했다.

'내 의념을 영력에 부여해서······!'

우우웅-!

창을 물들이는 희끄무레한 기류.

그 순간.

인형설삼의 기운이 스며들었던 단전이 영력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어?'

단전에 모아놓은 제3의 에너지.

[라이프 드레인]으로 축적한 생명력 일부가 혈도를 타고 창대까지 올라오더니 발현 직전인 암흑 투기와 섞였다.

[암흑 투기를 사용합니다.]

희끄무레한 기류와 녹색 기운이 나선으로 휘감긴 형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어본 유진조차 본 적 없는 오러의 색이다.

[대박.]

"뭐가 느껴져?"

[반발하지 않고 공존하는 기운. 창을 주력으로 사용해서 가능한 건가. 음, 음. 그런 거였어.]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줘."

인형설삼은 본래 무투계 헌터와 궁합이 잘 맞는 영약.

진한 음기를 품고 있다 보니 유진도 무리 없이 소화했지만.

본질이 무투계 쪽이어서 단전의 기운을 자극함으로써, 마법계&신관계인 유진에게 모자란 부분을 생명력으로 충당하게 만든 것이다.

[내 추측은 이래. 비약이 좀 들어갔지만 말이야.]

"아니. 일리가 있어."

마검사나 성기사 같은 직업 보정 없이 순수한 마법계, 혹은 신관계 헌터가 오러를 사용한 적이 있던가.

이미 전례가 없는 일을 해냈다.

인형설삼이 모자란 부분을 채워줘도 이상하지 않단 말이지.

"무엇보다 네 감은 믿을 수 있다."

[으, 응?]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

[신뢰해주는 건 고마운데. 비약이 심한 이론을 너무 쉽게 믿어줘서 그렇지.]

"네 의견 말고 설명할 방법도 없어."

완전해진 오러.

[미숙한 경계자] 페널티가 없어짐으로써, 오러를 발출하는 게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연을 얻었네.'

파프너가 지도해준 덕에 오러를 발현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많은 영약 중에 네크로맨서와도 궁합이 맞는 [인형설삼]을 얻지 않았더라면.

둘 중 하나만 어긋났어도 무투계의 진정한 힘이라고 불리는 오러를 손에 넣지 못했으리라.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그 영웅찬가랑은 관련 없는 이야기······ 맞지?'

〔크하하핫. 본래 영웅이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마주치기 마련이니라. 겹쳐진 우연 속에서 그대의 영웅적인 힘이 각성한 것이니라.〕

으휴.

그러면 그렇지.

크로노스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밀어내며 이번 기연 덕에 얻은 소득을 차분하게 정리했다.

'첫 번째로는 근접전 기량이 크게 향상된 건가.'

실전에서 오러를 펼치려면 극한까지 집중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장미선한테 개처럼 맞은 탓에 이나마 쓸 수 있는 거지.

이제는 굳게 마음을 먹으면 오러가 자유자재로 발출되었다.

'두 번째는 무투계 스킬 중 일부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

[라이프 드레인]으로 강해진 신체능력을 활용할 방법으로 베르디안 식 창법을 선택한 이유.

상위 창법인 '데스 스파이럴'을 익히는 핵심 스킬이며 습득 조건이 없어서였다.

일반적인 무투계 스킬은 해당 직업군이거나 관련 스킬의 숙련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야 배울 수 있다.

'오러 사용이 전제인 스킬들을 익히면 근접전 능력도 더욱 향상시킬 수 있다.'

거 참.

어마어마한 기연을 얻었군.

마법계 헌터가 근접전도 잘한다고?

회귀 전과 비교하면 어디까지 강해질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갔다.

"어렵네. 어려워."

[오러 방출하는 요령이라면 알려줄게.]

"합동훈련 때 지는 게 어렵다고. 내 능력이 너무 출중하잖아."

[······.]

132화 합동훈련(1)

합동훈련 첫날은 훈련 일정 브리핑을 진행했다.

"내일은 전장 탐사 및 자율시간, 모레는 4성 이하 헌터들끼리 모의훈련을 진행합니다."

"총력전은 언제입니까?"

"6일 뒤입니다. 총력전은 불사조와 새벽 길드만 치릅니다."

모의전에서 훼손된 지형을 가다듬을 겸, 소진된 체력도 회복해야 해서 이틀을 쉰다 한다.

김영수의 설명에 유진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총력전 때도 붙어보고 싶었다.

'곧 피의 발렌타인이 벌어질 거다. 전력 소모는 피하는 게 좋겠어.'

합동훈련이니 서로를 죽이는 건 금지되어 있다.

그 원칙이 소환수에게는 통용되지 않아서 문제인거지.

중급 언데드들은 오러 전개가 가능한 4성급 헌터와 동등한 전력.

깊숙히 파고들면 공격 패턴이 단순하다든지, 전략적 사고가 불가능한 것 등 실제 4성급 헌터보다 한 수 모자랐다.

그렇다고 해도.

'오러를 발출하는 소환수를 차근차근 무력화시킬 만한 친절함을 발휘할진 모르겠군.'

〔손속에 자비를 두어야 하는 건 그대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끙.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훈련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가 날 것을 방지하려고 전용 아이템이 지급된다.

치명상을 입으면 지정된 공간으로 전송시키는 이동 마법 목걸이.

그래도 손쓸 새 없이 죽여버리면 곤란하단 말이야.

"유진 님. 너무 긴장하지 마요. 합동훈련 하면 크고 작은 사고는 늘 있거든요."

"앞뒤가 다른 말을 잘도 내뱉는군."

"저만 해도 신유승한테 어깨가 날아갔었어요. 치유하느라 고생 좀 했죠."

머리카락 한두 가닥 뽑힌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지 마.

걱정 포인트가 다르지만, 장미선의 이야기에 부담이 한결 줄어들었다.

"천유진 대표님. 제안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불사조 길드장님."

"데려오신 소환수들이 많더군요. 아주."

"뭐, 고작 350구밖에 안 됩니다."

"4성 이하 모의전 참여 인원이 총 150명입니다."

두 길드를 합친 것보다 배나 많은 숫자.

김영수는 흠, 짧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모의전 때 참여할 언데드 숫자를 제한해달란 말씀입니까?"

"예. 350구가 모두 훈련에 참여하면 모의전을 하는 의미가 없어 보이군요."

새벽 길드는 김영수의 발언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암묵적인 동의.

두 길드는 대형 트레일러 여러 대에 실려온 언데드 군대를 경계했다.

"제가 오해를 했군요."

"오해라니?"

"총력전에도 낄 줄 알고 저 친구들을 데려온 건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4성 이하 모의전에서는 소환수를 포함해서 일곱만 참여할 겁니다."

찬물을 끼얹은 것 마냥 조용해진 장내.

근육질의 거한이 벌떡 일어나서는 성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누군가 했더니 신유승이었잖아.'

아라한이 몰락한 후, 새벽 길드를 한국 최고의 길드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장본인.

지금은 유망주 소리를 듣고 있지만 말이다.

옆에 앉은 사내, 새벽 길드 마스터 신형식이 손을 들어서 그를 제지했다.

'왜 저렇게 화가 난 거람.'

〔그대가 저 가련한 작은 인간을 자극하지 않았느냐.〕

'언데드를 다수 동원하면 살기 제어가 힘들다고. 나름대로 핑곗거리 찾은 건데.'

〔그대의 발언에서 도발의 의도가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느냐?〕

'아. 그건 아니지.'

이런.

들켰네.

눈치 빠른 성좌 나으리는 이래서 좋아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점점 분위기도 잘 읽고, 사람 심리도 금방 파악한단 말이야.

〔다른 작은 인간들은 몰라도 그대에 관해서는 대충 알 것 같도다.〕

'빌어먹게 고맙네요.'

〔단 하나뿐인 짐의 신도이니. 유의 깊게 살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예예.

감사해서 눈물이 날 것 같네요.

브리핑 뒤에는 주최 측인 불사조 길드에서 마련한 연회가 이어졌다.

"나는 됐으니 너희끼리 즐기고 와라."

"형. 그래도 돼?"

"최근에 얻은 깨달음을 완전히 소화하고 싶어서."

"더 강해지시는 검까? 이러다가는 못 따라갈 것 같지 말임다."

"나를 이겨먹으려면 10년은 노력해라."

"10년으로 되면 해보지 말임다."

"됐고. 지금은 파티나 즐겨. 이것도 사업의 일환이다."

뽀시래기 용병단의 간부이기도 한 셋.

유진을 대신해서 블랙 컴퍼니를 대변할 자격은 충분했다.

[좀 쉬어두는 게 어때?]

"하루면 충분하지."

[나야 언데드니까 괜찮지만 주인은 인간이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충당하면 돼."

휘릭-.

한 바퀴 창대를 돌리고는 파프너 쪽으로 겨누었다.

밤은 길었고.

훈련할 시간은 차고도 넘쳤다.

*

다음 날 일정은 모의전이 벌어질 전장을 살펴보는 것.

홈그라운드인 불사조 길드는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합을 맞추러 갔고.

이미 같은 장소에서 몇 번이나 치고받은 경험이 있는 새벽 길드 헌터들도 2년 동안 변한 것이 있는지를 체크하곤 장소를 떠났다.

"산자락과 바다가 양쪽에 있고, 중앙은 평지군요."

"어떻게 싸워야 할 것 같냐?"

"정면에서 힘겨루기를 하거나 산자락을 타서 기습. 혹은 은밀 기동이 가능한 헌터를 돌려서 베이스캠프를 노리겠습니다."

"맞아. 정론이다."

모의전에서 승리하려면 각 진영의 베이스캠프를 함락시켜야 한다.

합동훈련 참가 단체가 셋으로 늘어나면서 구도도 복잡해졌지만? 기본적인 규칙은 동일했다.

"저흰 산자락 쪽 베이스캠프를 배정받았죠."

"소수라고 나름 배려해주는 거지."

"음. 베이스캠프 위치가 기회인지 위기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2강 1약.

일반적으로는 1약을 먼저 치워버리고 2강이 승부를 내려 할 것이다.

변수는 험준한 산자락이라는 위치.

두 길드가 단시간에 전력을 투사하기에는 지형이 좋지 않았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견제하거나. 아니면 회유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게 정론이지."

유진은 기특하단 투로 말했다.

전장 특징만 보고 거기까지 유추하다니.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용병단 책임자로 강민호를 선택한 건 역시 옳았다.

"형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눈치 좋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모르면 이상하죠."

"불사조랑 새벽. 모두 산자락으로 와서 우리를 제치려고 할 거다."

기껏 데려온 중급 언데드들을 하나도 쓰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두 길드의 입장에서는 믿는 구석이 있다고 판단하겠지.

1강 2약.

불사조와 새벽 길드는 바뀌어버린 셈법에 맞춰 다시금 주판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그, 그렇군요."

"너희는 괜찮냐?"

"형님 지시만 따르면 어떻게든 버티지 않을까요."

"크흐흐. 이럴 땐 원망 좀 해도 돼."

"형님 말씀이면 팥으로 메주를 쒀도 믿을 겁니다."

무조건적인 신뢰.

강민호는 유진이 회귀 후 보여준 행보를 가장 가까이에서 봤다.

조금 뒤에서 지형을 관찰 중인 두 사람도 마찬가지.

은은한 미소가 유진의 입가에 드리웠다.

'처음 이 녀석들을 거둘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마음을 줄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쓸 만한 부하라고만 여기지 않았더냐.〕

'회귀 전에도 이렇게까지 등을 맡길 만한 사람은 별로 없었어.'

네크로맨서의 이명은 1인 군단.

유진은 그 정점에 섰던 인물이자, 선구자였다.

게이트에 들어갈 땐 늘 혼자였고.

[합일]을 개발하기 전에는 헌터 활동 중에 대화조차 나눌 이가 없었다.

'자발적인 아싸란 거지.'

〔그대여. 진실로 자발적이라고 여기느냐?〕

'아. 좀. 감동 좀 깨지 마.'

〔짐은 그저 사실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뿐이니라.〕

퍽이나 그러시겠어.

크로노스의 사념을 밀어내고는 뽀시래기 팀을 흘겨보았다.

회귀 전의 시간선에서 용병업계에서 위명을 떨친 팀, '거울 사냥꾼.'

우연히 마주친 후에 쓸 만한 부하로 삼으려고 거두었지만.

몇 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굳건한 신뢰가 유진과 뽀시래기 팀 사이에 생겼다.

"좋아. 이 지형이면 할 만하겠어."

"명령을 내려주십쇼. 형님."

"이번 모의전. 너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두둑, 목을 좌우로 돌리며 한 번 풀어준 유진이 작전 내용을 설명했다.

*

4성 이하 헌터들이 겨루는 모의전 날이 되었다.

"갈 길이 머니 일찍 가지."

"모두 건투를 빕니다."

유진과 강민호를 필두로 한 블랙 컴퍼니 팀이 산자락으로 향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만큼 순서에서도 배려해준 것.

블랙 컴퍼니 소속 팀원들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신유승은 조용히 불사조 길드 쪽으로 다가갔다.

"장미선 헌터. 이야기 좀 하지?"

"벌써 힘 빼려고요? 싫은데."

"그러지 말고. 너희한테도 손해 볼 것 없을 거다."

"설마. 3강의 위신도 내팽개치고 힘을 합쳐 천유진 씨를 배제하자는 이야긴 아니죠?"

붉어지는 신유승의 이마.

그 모습에 장미선이 풋, 짧게 웃고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연이네요. 나도 같은 생각이거든요."

"날 얼마나 욕보이려는 거지?"

"어머나. 진담인데. 너무하시네."

이글거리는 눈이 장미선의 얼굴을 조목조목 살핀다.

잠시 후.

"...진짜냐?"

"난 천유진 씨랑 손속을 겨뤄봤어요. 그 양반이 얼마나 무서운지 당신보다 더 잘 알걸요."

"송명석도 꺾었잖아. 너."

"내가 천유진 씨 소환수님을 사부로 모시는 건 몰라요?"

"천유진과 친분을 쌓으려고 그러는 줄."

"와. 사람 너무 쉽게 보시네."

가라앉은 장미선의 눈.

입에는 웃음기가 감돌았지만.

눈동자에 맺힌 차가운 빛은 신유승을 몇 번이고 도륙할 것 같은 기세였다.

무심코 뒷걸음질 치려다가 다리에 힘을 준 신유승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누구를 사부로 모시진 않아요."

"...실언했다."

"아무튼 그 제안. 받아들일게요."

협상 목표는 달성했다.

그럼에도.

신유승은 마음에 남은 찝찝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공격 타이밍은 언제로?"

"우리가 베이스캠프에서 준비를 마치려면 10분은 걸릴 거예요."

"그럼 15분 뒤에 출발하지."

"새벽은 헌터를 얼마나 동원할 건가요?"

"60명."

"불사조도 60명 맞춰 가죠."

둘 다 배신은 염려하지 않았다.

신유승과 장미선.

두 사람은 프라이드가 강하다는 닮은 점이 있었다.

전면에서 둘이 닮았다고 하면 싫어하겠지만.

등에 칼을 꽂는 취향은 없다는 것.

'송명석이면 모를까. 신유승 씨는 무식해서 믿을 만 해.'

'장미선. 일단 블랙 컴퍼니를 치워버린 다음 1대1로 승부를 내자.'

블랙 컴퍼니가 훈련장으로 들어간 지 5분 후, 불사조 길드도 멀찍이 있는 베이스캠프를 향해 움직였다.

약속한 시간이 되기만 기다린 신유승.

"팀장님."

"가자."

새벽 길드는 베이스캠프에 최소한의 방어 인원만 배치한 후, 곧바로 산자락을 향해 진격했다.

저벅- 저벅-.

추격에 능한 헌터들과 신유승이 무리의 선두를 맡아 빠르게 능선을 탔다.

빼곡하게 자라난 수풀.

시야가 한정되지만, 신유승을 포함한 선발대 헌터들은 눈에 마력을 불어넣거나 고유 특성으로 적이 숨어있는지를 읽어냈다.

"매복은 따로 없군요."

"방심하지 마. 놈은 보통이 아니다."

평소와 달리 신중한 태도를 고수하는 신유승.

동행 중인 헌터들이 놀란 기색을 띠었다.

'그 안하무인인 사람 맞아?'

'길드장님한테 경고라도 들었나봐.'

'어쨌든 우리야 편하고 좋지.'

각자의 생각을 품은 채 산자락을 얼마나 올라갔을까.

선두 그룹의 헌터가 손을 들었다.

"천유진입니다."

"숫자는?"

"둘입니다. 천유진, 그리고 쌍검을 든 언데드."

운이 좋군, 신유승은 작게 중얼거렸다.

장미선이 경계 중인 '사부'란 작자는 불사조 길드를 견제하러 간 모양.

쌍검을 든 언데드에 대한 정보가 없지만 상관없다.

'그 사부란 언데드가 오기 전에 끝낸다.'

[질풍보]

거센 바람을 일으키는 이동기.

무복을 입은 사내의 형상이 수풀을 빠르게 헤치면서 공중에 하얀 선을 그렸다.

'신관계라면 기습을 알아채는 게 느리겠지.'

쌍검 든 스켈레톤이 달려들 경우에는 [충권]으로 밀쳐낸다.

피해를 입히는 것보다 마력을 인위적으로 넓게 퍼트려서 상대의 자세를 무너트리는 데 치우친 기예.

잠깐 동안 만들어낸 빈틈으로 소환 주체인 유진을 먼저 쓰러트리면 된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그 순간.

신유승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빛살 같은 속도로 달려드는 자신을 확실하게 포착한 눈동자.

유진이 씩 웃으면서 손가락을 내밀었고.

[흑암의 반지에 보관된 사체를 방출합니다.]

기다란 그림자가 짓쳐들던 신유승의 전신을 덮었다.

133화 합동훈련(2)

같은 시각.

반대편에서 산자락을 타고 올라오던 장미선은 손을 칼자루 위에 얹었다.

"사부. 여기서 보네요?"

[주인의 예측이 맞았구나.]

"와. 새벽이랑 우리가 손잡을 걸 맞췄다고요?"

[보다시피. 새벽 쪽은 주인이 직접 손봐주러 갔다.]

파프너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

그리고 블러드 골렘까지.

휴, 뽀시래기 팀을 본 장미선이 한숨을 내뱉었다.

"유진 님한테 얕보였네요."

"형님은 우리를 믿는 것뿐입니다. 차기 검성."

"민호 씨. 소문은 들었어요. 용병단을 차렸다면서요?"

"제 능력은 아니죠. 형님이 도와주셨을 뿐."

"축하해요. 화환도 못 보내드렸네."

"그럼 축하 대신 물러나주실 수 있습니까?"

장미선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칼자루 위에 얹은 손이 꿈틀거리고.

스읍- 언제라도 발검을 할 수 있게끔 전신의 근육을 움직인다.

"곤란한 부탁이네요. 모의전이라고 해도 나름대로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그럴 줄 알았습니다."

[물러난다고 하면 실망했을지도 몰라.]

"사부. 좀 봐주면서 해요."

[주인이 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라.]

투콱-!

3미터 크기의 용족 거한이 지면을 박차며 크게 도약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니, 155mm 견인곡사포에서 포탄을 쏜 것 마냥 맹렬한 기세가 실렸다.

[살려는 드릴게.]

도약하면서 양손을 뒤로 동시에 젖히는 파프너.

쇄애애액- 매서운 기세로 솟구치는 오러에 장미선의 본능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포메이션 D!"

낭랑한 목소리가 산자락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뒤따라오던 불사조 길드원들이 미리 합을 맞춘 대로 스킬을 사용했다.

[세인트 월]

[신성 저항 방패]

[홀리 가드]

각 성단에서 전수받을 수 있는 방어 주문들이 장미선의 눈앞에 펼쳐지고.

마법계 헌터들도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마력을 재배열했다.

사용자의 '의지'와 '성력'만 있으면 곧바로 발동되는 신성 주문.

포메이션 D는 발동 속도가 빠른 신성 주문으로 첫 방어를 전개하고, 마법계 헌터들이 보조하는 진형이다.

[좋은 판단이다.]

[케넥 전투술]

[10장 - 구결집합권]

다른 성질을 지닌 아홉 전투술의 묘리를 일점으로 집중시킨 권격.

애꾸눈을 상대할 땐 오른손으로 펼쳤지만.

이번 공격은 양손을 모두 사용했다.

[그래도 막을 수 있을까?]

파프너는 수련 끝에 구결집합권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자세를 찾아냈다.

몸을 축 삼아 오러를 회전시켜서 양손으로 집중.

깍지를 껴서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묘리들을 일거에 터트린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오러가 반발하려는 순간, 깍지를 껴서 쾅- 하고는 신성 주문과 충돌시켰다.

섬광이 눈을 현혹시키고.

"아?"

몇 겹을 덧댄 방어 주문들이 일격에 부서졌다.

장미선의 시야를 가득 메운 암흑 투기.

한 순간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 만한 기백에 육신이 멋대로 반응하려고 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어 본능적으로 칼을 뽑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윈드 붐]

[아이스 월]

[라이트닝 웹]

신관계 헌터들의 주문들이 벌어준 시간.

미리 합을 맞춘 대로 완성된 마법이 쇄도하면서 암흑 투기를 밀어낸다.

맹렬하게 회전하던 파프너의 오러가 빗발치는 마법에 깎여나가서 조금씩 줄어들었다.

[제법이잖아.]

그래도 모자라다.

파프너의 주먹에 실린 힘을 막아내려면.

새파란 안광이 장미선에게 해답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4성 이하 맞아?"

"천유진의 소환수. 강하다곤 익히 들었다만."

"미선 팀장. 원래 저렇게나 셌어?!"

장미선의 뒤를 바짝 따라온 탱커들이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포메이션 D는 최소 2성은 강한 적의 공격을 막아낼 것을 전제로 한 방어 기술.

방금 전 파프너의 일격은 그 출력조차 넘어섰다.

[아이언 윌]

[철갑신(鐵甲身)]

[혼신의 방어]

오러를 두른 방패가 서로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은 채, 파프너의 공격을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콰득, 콰드득, 마력 회로를 새긴 방패가 우그러지고 푸른 기류가 소멸했지만.

파프너가 전개한 혼신의 일격이 결국 멈춰 섰다.

'사부. 이런 기술은 안 썼잖아요?'

60명 중 45명.

저 공격을 상쇄시키는 과정에서 투입된 인원이다.

모두 오러나 다중 연산, 혹은 기적 스킬을 보유한 이들일진대.

파프너는 한 번의 공격으로 불사조 길드 유망주들의 힘을 잔뜩 빼놓았다.

[유성검(遊星劍)]

[혜성 질주]

파프너를 향해 쇄도하는 하얀 섬광.

벽을 넘어섬으로써 유성검도 진정한 위력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장미선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두근,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오러의 운용 방식을 바꾸었다.

마력의 방향을 성급하게 바꾼 탓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유성검]

[별빛 장막]

오러로 만든 장막이 드리운 직후.

[이동요새]

[강격]

[아테네의 가호 - 아이기스 Lv1]

힘의 폭풍이 장미선을 비롯하여 파프너의 공격을 막아낸 탱커진에게 휘몰아쳤다.

"와. 그건 뭐래요?"

"형님이 주신 아이디어 덕에 만든 기술입니다."

파프너가 돌진할 때 같이 움직여서 연속 공격을 펼친다.

개전 초기에 미리 합을 맞춘 대로 강민호가 완벽한 타이밍에 힘을 터트렸다.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친 석궁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아직 멀었슴다!"

아공간에 저장해놓은 마법들도 일제히 해방.

성위는 높지 않지만, 파프너와 강민호의 연속 공격에 대열이 무너진 불사조 길드원한테는 까다로운 공격이 쏟아졌다.

'전열을 다듬어야... 쳇.'

규격 외인 파프너의 무력과 뽀시래기 팀의 신묘한 기예가 어우러진다.

60대 5.

압도적인 수적 차이인데도, 첫 교전에서 주도권이 블랙 컴퍼니 측에게 넘어간 것이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이겨.'

장미선은 빠르게 전황을 읽어냈다.

대련 때보다 훨씬 까다로운 뽀시래기 팀과 파프너의 조합.

그럼에도.

불사조 길드 60명을 일거에 제압할 결정적인 한방이 모자랐다.

'무리하게 돌파하려다가 손해를 보는 것보단 차분하게 가자.'

소모전으로 가면 마력 소모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양면 전선을 펼치는 블랙 컴퍼니 입장에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일 터.

"포메이션 G로 갑니다."

"오케이. 팀장."

정면에서 힘을 겨루기보다 차륜전으로 상대의 체력을 빼는 전략.

이상한 건 파프너와 뽀시래기 팀도 급하게 돌파하거나 전장을 이탈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인 것 마냥.

'뭐지? 설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불길한 감각에 뭐라 입술을 떼려는 순간.

콰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불사조 길드원들이 온 방향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

[크라라라라!!!!]

심령을 뒤흔드는 웅혼한 사념.

그 소리에 놀랄 틈도 없이, 신유승은 머리 위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자마자 오른손을 뒤로 젖혔다.

[폭호진권]

[4장 - 폭권]

어흐으응! 주먹에서 호랑이 울음과 비슷한 소리가 터져 나오고, 하얀 오러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미지의 습격자를 가격했다.

3층 건물도 일격에 부숴 버리는 주먹의 위력.

'통했다.'

손등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타격감. 부지불식간에 펼친 기예였지만 근육의 움직임부터 타이밍, 그리고 오러 운용까지 완벽했다.

눈을 들어 습격자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순간.

[고작 이 정도인가.]

통나무보다 두꺼운 앞발이 신유승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섬뜩한 기분에 양팔을 X자료 교차.

두 팔에 오러를 최대치로 펼치며 반격하려는 순간.

"컭!"

폐부가 짓눌리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 나오더니.

목에 걸어둔 [긴급 이동] 마법이 발동되면서 신유승의 전신이 빛에 휘감겼다.

'마, 말도 안....'

이건 무효야.

아이템이 발동되는 것을 막고 싶다.

고작 한 방 맞은 건데 모의전에서 탈락한다고?

신유승은 너무 분한 나머지 양팔이 부러져서 반대로 꺾인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파팟- 전장에서 이탈한 새벽 길드의 희망.

"티, 팀장?"

"신유승 팀장을 한 방에 보냈다고?!"

"저런 언데드. 들어본 적도 없어."

"반인반마...? 아니야."

"하체는 용족 같다."

죽음 용기병.

바실리스크 시체와 타이런트(최형태)를 엮어내어 빚어낸 가공할 만한 언데드의 등장에 불사조 길드원들이 경악했다.

신유승의 경지는 4성.

오러 습득 시기는 최근이지만, 숙련도 및 파괴력은 5성 헌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찬란한 재능과 고유 특성, 그리고 뼈를 깎는 노력까지.

그런 인물을 공격 한 번으로 리타이어 시킨 것이다.

"몸은 어때?"

[이질감이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명령을 수행하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모든 스탯이 17% 감소합니다.

확연하게 줄어든 페널티.

흑암의 반지에서 안정을 취하며 틈틈이 조정해놓은 덕이다.

"죽음의 돌진과 신속을 동시에 사용하진 마라."

[돌진 시 파괴력이 많이 감소될 겁니다.]

"그랬다간 쟤들 진짜 죽어."

[명을 받듭니다.]

꾸드득, 병장기를 쥔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갔다.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새벽 길드원들.

신유승이 일격조차 버티지 못한 건 놀라웠지만, 그뿐이다.

"우릴 얕보는 거냐!"

"저 소환수는 무시하고 천유진을 끝낸다."

"그러면 우리의 승리다!"

이쪽에서는 나름 배려해준 건데.

진심은 통한다던데 새벽 길드 녀석들은 도량이 작은 모양이다.

〔도량 문제가 아닌 것 같다만?〕

크로노스의 사념을 무시하며 송명석과 죽음 용기병(최형태)에게 버프를 사용했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군주의 위엄을 사용합니다.]

[언홀리 커맨드를 사용합니다.]

순차적으로 적용되는 버프에 두 언데드의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승.

죽음 용기병은 버프를 모두 부여받자마자 지면을 쾅, 박차고 새벽 길드원들의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죽음의 돌진]

바실리스크 머리 쪽에서 소용돌이치는 암흑 투기.

기병 계 스킬인 죽음의 돌진을 발동하자, 막대한 영력이 죽음 용기병을 감쌌다.

파프너가 전력을 다했을 때만큼이나 어마어마한 박력.

새벽 길드원들도 비슷한 판단을 내렸다.

"방어 대형!"

[크리스탈 월]

[어스 앳지]

[거스트 윈드]

[홀리 배리어]

....

신성 주문과 방어 마법들이 진로를 가로막고.

탱커들도 저마다 스킬과 오러를 병행해서 사용, 방어력을 극대화했다.

"오러 블레이드도 이 방어벽은 뚫을 수 없...?"

쿵! 쿵! 쿵! 쿵!

강철보다 단단한 얼음벽도.

뿌리를 깊게 내린 거목마저 뽑아버리는 바람도.

그 무엇조차 죽음 용기병의 전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상성에서 앞선 신성 주문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막아! 밀리지 마!"

"탱커들이 붙드는 동안 2파를 준비해!"

무투계 헌터들이 죽음 용기병을 붙들어놓으려고 오러를 방출했다.

빗발치는 오러가 검은 기류를 뚫어내고.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았던 죽음 용기병의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신속]

이어지는 2차 가속.

쾅, 육중한 소리와 함께 볼링장 핀이 튕겨나듯 탱커 라인을 담당한 헌터들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일부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탓에 이동 마법이 작동하기까지.

새벽 길드가 자랑하는 4성 이하 유망주들 중 상당수가 돌진 한 번에 큰 피해를 입었다.

[돌진에 신속을 더했으면 모두 쓸어버렸을 겁니다.]

"모의전에서 줄초상 치를 일 있니."

더 강해진 최형태의 자의식.

바실리스크의 시체와 융합하면서 혼백도 성장한 것이다.

"돌진 직후에 놈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붙잡아! 여기서 발을 묶는다!"

죽음 용기병은 [데스 카발리에]와 약점을 공유한다.

돌진이 끝난 직후에 취약해지는 것.

바실리스크의 사체를 기반 삼아 만든 덕에 완전히 무력화 되진 않지만, 경이로운 돌파력을 연속으로 보여줄 순 없다.

[흑암의 반지에 시체를 보관합니다.]

새벽 길드원들이 재정비하는 동안 조용히 거리를 좁히곤, 반지에 회수해서 뒤로 물러났다.

추격해온 헌터들은 송명석이 막아주었고.

[흑암의 반지에 보관된 사체를 방출합니다.]

바로 죽음 용기병을 전장에 등장시켰다.

새하얗게 물든 새벽 길드원들의 얼굴.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얼마나 지났을까.

새벽 길드 본대 전멸에 이어 베이스캠프가 함락되었다.

134화 관점의 전환

"으, 으으으."

땅바닥에 주저앉은 새벽 길드원이 맥 빠진 신음을 흘렸다.

사내의 앞에서 돌진을 멈춘 죽음 용기병.

둘 사이의 거리는 불과 30센티미터에 불과했으니, 한 걸음만 더 떼었으면 통나무보다 두꺼운 발에 짓눌렸으리라.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 공간 이동 마법이 작동하게끔 되어있지만.

바실리스크를 닮은 언데드 괴물에게 뭉개졌으면 아이템이 발동하기도 전에 곤죽이 됐을 것이다.

"최형태야.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 정도는 조절할 수 있습니다.]

자의식이 강해진 부작용이 좀 있군.

모의전 후에 오붓한 재교육 시간을 가져야겠다.

산자락을 타고 올라온 새벽 길드원들을 무력화시킨 후, 곧바로 베이스캠프로 내려갔다.

60명으로도 어찌하지 못한 강력한 괴물.

고작 15명으로는 준 7성급 강자인 죽음 용기병을 붙드는 것조차 못했으니.

뚝-.

"아이 손목 비트는 것만큼이나 쉽네."

[주군. 비인도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걸 보면 역시 인성이....]

"비유법도 모르냐. 초등학교부터 다녀라."

[소, 속하는 전교 1등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베이스캠프에 있는 새벽 길드의 깃발을 부러러트린 후, 곧바로 기수를 돌렸다.

〔하수인을 구원하러 가지 않는 게냐?〕

'불사조 길드 베이스캠프만 함락시키면 된다.'

산을 타는 것보다는 탁 트인 평야를 달려가는 게 낫지.

파프너와 뽀시래기 팀이 작정하고 시간을 끌면 제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팀을 믿는 거다.'

〔신뢰라. 그대답지 않은 발언이로구나.〕

'왜. 뭐요.'

이번 생에는 팔자에도 없는 신관 노릇도 하는 마당인 걸.

믿음과 신뢰.

신관이라면 마음속에 늘 품어야 할 단어다.

〔우웩. 그러지 말거라. 계약자하고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구나.〕

크로노스의 푸념을 뒤로하며 불사조 길드 베이스캠프 근처까지 왔을 때.

일단의 무리가 유진을 막아섰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어쩐지 느낌이 안 좋더라니."

"파프너가 보내주던가?"

"사부가 끈덕지게 붙들고 늘어져서 일행을 반으로 나누었죠."

장미선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용린갑]까지 착용한 파프너는 6성 초입의 무력을 지녔고.

순수한 파괴력은 떨어지지만, 변수를 창출하는데 뛰어난 특성을 지닌 뽀시래기 팀도 끈덕지게 불사조 길드를 붙들어놓았다.

새벽 길드 베이스캠프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자마자 인원을 분리하지 않았으면.

"유진 님을 막지도 못하고 끝났겠죠."

"막는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까?"

"손 놓고 당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보는 게 낫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쉽게 당해주진 않을 거예요."

5분 후.

장미선을 포함한 불사조 길드원 대부분이 무력화되거나 치명상을 입고 전장에서 이탈.

불사조 길드의 깃발도 뚝, 부러져서 땅에 떨어졌다.

*

"신관 하나만 더 붙어줘!"

"엉망진창이군."

"공간 이동 마법이 0.5초라도 늦게 발동했으면 죽었겠어."

"심한데."

"4성 이하 모의전에서 이만큼 피해를 크게 보다니."

신관계 헌터들은 진땀을 흘리며 모의전 중에 나온 부상자들을 치유했다.

[공간 이동] 마법으로 전송된 이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트럭에 치인 것 마냥 어마어마한 힘에 전신이 눌린 형태라는 점.

"끄응."

온몸이 시퍼렇게 물든 신유승이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죽음 용기병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낸 대가로 양팔이 부러졌고.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서 근육이 모두 찢겨졌다.

"제길!!!"

한 방에 당했다고?

새벽 길드의 유망주인 자신이?!

너무나도 현실감이 없는 결과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깼어, 요?"

"너도 당했냐."

"당신보다는 덜 아프게 당했죠."

장미선은 멀쩡한 팔 하나를 휘휘 흔들었다.

한껏 일그러진 신유승의 얼굴.

까드득, 어찌나 분한지 온몸이 짓이겨진 상황에서도 이가 갈렸다.

"인정 못 해. 난 안 졌다."

"덜 아픈 걸로 승부하자고 안 했거든요?"

"씨, 씨. 누가 봐도 그런 말투였잖아."

"나중에 따로 승부 봐요."

"너, 알고 있었지."

"대충은요. 그렇지만 저런 괴물은 처음 봤어요."

천막 위를 올려본 장미선이 킥, 하고는 짧게 웃었다.

"뭐가 웃기지?"

"아라한의 초신성이네, 차기 검성이네 했는데 꼴이 우습잖아요."

"빌, 어먹을."

"내가 왜 접경지역 들락거린 줄 알겠죠?"

"저 괴물을 공략하려고 한 건가."

"무슨 소리예요. 한 수 배우려고 간 거지."

"...진심이었나."

파프너를 사부로 모신다던 장미선의 이야기.

유진과 다리를 놓으려고 만든 핑계라고만 여겼다.

그렇지만.

오늘 직접 겨뤄보고 깨달았다.

장미선의 말에는 1그램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나도 배워보고 싶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각성 1년차 헌터한테 우리 둘이 발렸잖아. 이유가 있겠지."

"어머나. 발렸다는 표현은 좀 거북하네요. 난 당신보다 오래 버텼는걸요."

"씨, 한 판 하자고."

"나중에 몸 좀 추스르면 하자니까요. 난 한숨 자요."

장미선은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은 후, 약기운에 몸을 맡겼다.

새근거리는 숨소리.

"...진짜로 자냐."

신유승은 황당한 눈빛으로 옆을 흘겨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으으, 목을 조금 움직이는데도 죽을 것처럼 아프다.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꾹 참았다.

'지금은 자존심이 중요한 게 아니야.'

송명석이 장미선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100% 믿지 않았다.

국내 3강의 미래라고 불리는 세 유망주.

서로의 기량은 직접 겨뤄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송명석의 컨디션이 나쁘다고만 여겼다.'

아니었다.

사부란 작자에게 훈련을 받은 덕에 장미선의 기량이 대폭 올랐고.

아라한의 초신성을 박살낼 수 있었던 거다.

'자존심 따윈 얼마든지 굽히겠어.'

차기 검성, 장미선이 특별 훈련을 받고 강해지는데 자신도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상대가 1년차 헌터인 건 중요하지 않았다.

'모의전이 끝나면....'

신유승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낮은 음색이 귓가에 들어왔다.

"아드님. 숨은 좀 쉴 만한가?"

"쿨럭, 쿨럭. 유리가루를 흡입한 것 같아요. 죽겠어."

"살 만한가 보네."

"아, 아부지. 공적인 자리 아니에요?"

"하나뿐인 아들이 다진 고기가 돼서 왔는데도 원칙 이야기할 만큼 꽉 막히진 않았다."

담담한 표정 아래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고 있는 신형식.

이 자리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새벽 길드원들만 있어도 표정관리에 힘써야 할 상황.

불사조 길드 헌터들도 한 공간에 머무르고 있어서 더욱 감정을 가라앉혔다.

"미안해요. 아부지. 훈련 값을 못했네."

"충분히 잘했다. 상대가 나빴던 것뿐이야."

"그, 그래도."

"푹 쉬어라. 아드님."

부드러운 신형식의 목소리에 안심한 듯,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있던 신유승이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팍.

하나 뿐인 자식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신형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시오?"

"그렇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미안하군요. 이번 합동훈련 때 블랙 컴퍼니를 끌어들이자고 한 부분은 사과드립니다."

"됐습니다. 무슨 의도인지 알고 받아들였으니 그에 대해서는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되오."

신형식은 옆에 선 불사조 길드장, 김영수의 말에 가라앉은 투로 대꾸했다.

그는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공적 업무를 그르칠 인물이 아니었다.

"천유진. 괴물이더군."

"나도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싸우는 건 처음 봅니다."

"장미선 헌터한테 전달받은 건 없었소?"

"뭐, 그 아이 성격 아시잖소. 받은 게 있으니 물어봐도 이야기 못한다나."

허허허, 김영수가 너털웃음을 뱉었다.

신형식은 그를 힐끗거리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음. 설령 미리 안다고 해도 대처할 방법이 없었겠소."

"수준이 이만큼이나 차이 날 줄 알았으면 4성 이하 모의전 이야기도 안 했을 거요."

충격적인 모의전 결과.

유진의 대전사이자 성좌가 하사한 소환수(로 알려진) 파프너야, 이미 그 무위가 상당하다는 것을 모두 파악했지만.

죽음 용기병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언데드의 출현은 모니터링 중인 두 길드 간부진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바실리스크였지요?"

"그럴 거요."

"협회의 데이터에도 없는 망자를 부리다니."

"돌진력만큼은 7성에 비견되는 것 같더구려."

국내 3대 길드에 속한 재능 있는 헌터들을 볼링 핀 마냥 치고 누빈 대형종.

피해를 더 크게 본 새벽 길드장의 뇌리에는 죽음 용기병의 활약상이 더욱 강렬하게 새겨졌다.

"그 커다란 언데드를 회수하고는 물러나서 재돌입시킨 것도 참 기발하더이다."

"전략적인 안목도 그렇지만, 저 몸놀림은 4성 무투계 헌터와 맞먹더군요."

"신관이라고 들었는데 어찌 그런 신체능력을...."

팔방미인?

그 단어는 헌터 업계에서 칭찬이 아니다.

한정되어 있는 보너스 스탯.

성위가 올라갈수록 주어지는 능력치가 늘어나지만.

어찌 되었든 한계레벨에 도달하면 획득 양에서 페널티가 붙기 때문에 무한하지가 않다.

유진과 같은 몸놀림을 흉내 내려면 4성 무투계 헌터는 되어야 했다.

'그냥 신체능력만 좋은 게 아니다. 스탯에 휘둘리지 않고 제 몸을 다루었다.'

움직임만 보면 경험 많은 무투계 헌터라고 해도 믿었으리라.

모의전 때 유진이 보여준 찰나의 움직임.

국내 3강 중 한 길드를 이끌고 있는 신형식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김영수는 지그시 그 모습을 관찰했다.

'오러를 발출한단 사실은 아직 못 알아챈 모양이구먼.'

장미선이 말해준 정보.

처음 들었을 땐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세 번이나 되물었다.

신관계가 언데드를 다루는 것도 모자라, 오러까지 구현할 수 있다고?

신관 - 무투계 하이브리드 직업군인 [성기사]나 [몽크]면 모를까.

'이렇게나 강력한 소환수를 다루는 헌터가 성기사일 리 없다.'

이번 모의전을 지켜보면서 더욱 확신이 들었다.

값비싼 영약을 먹었거나.

능력치를 증대시키는 모종의 스킬, 혹은 [마투사] 같은 고유 특성을 지녔거나.

어느 쪽이든.

신체능력이 높다 하더라도, 유진의 주력은 언데드를 사역하는 것이라고.

"나찰 길드를 홀로 무찔렀다는 건 과장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렇겠죠."

"불과 1년차 헌터가 이만한 능력이라."

신형식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들이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한 것?

모의전에서 유진이 보여준 힘을 생각하면 지는 게 당연했다.

"천유진의 성장세가 꺾이지 않으면 국내 1위는 우리 둘이 겨룰 문제가 아닌 것 같소."

"그러게 말입니다."

"이미 짐작을 하셨나보오?"

"생각이야 했지만 그 괴물들은... 예상 외였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유진의 능력.

신형식은 마음속으로 블랙 컴퍼니의 가치를 크게 상향조정했다.

"이미 마음을 굳히셨나봅니다."

"전 아라한 길드만 아니면 누가 1위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블랙 컴퍼니의 상승세에 탑승하겠단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허허로이 웃는 김영수.

대답은 충분했다.

"나는 고민이 더 필요하겠군요."

"시간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새벽 길드장님."

"무슨 의미인지?"

"로마노프 가문이 물밑에서 아라한 길드와 접선하고 있었다, 고 하더군요."

눈을 부릅뜬 신형식.

김영수가 아끼던 '패'였던 만큼, 그 정보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생각 정리 좀 하고 오시죠."

떠나가는 김영수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형식이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텅 비어 있는 주머니.

금연을 한 지 5년이나 되었지만, 오늘따라 담배가 떠올랐다.

135화 짧은 휴식

"총력전은 안 보고 가요?"

"직접 뛸 것도 아니잖나. 구경은 취미도 아니고."

"으으으. 이번에야말로 멋진 모습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 몸으로?"

"후유증은 없거든요!"

장미선이 과장된 자세로 팔을 번쩍 들었다가 아야- 하고 비명을 토해냈다.

신관계 헌터들이 매달려서 신성 주문을 퍼부은 탓에 멀쩡한 것처럼 보이지만.

몸 내부는 대미지가 축적되어 있어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짜릿한 통증이 그녀의 신경계를 자극했다.

[무리하지 마. 지금은 충분히 쉬어둬야 근육이 붙어.]

"그렇게 말할 거면 좀 보내주지 그랬어요. 사부."

[승부는 냉정한 법.]

"흥. 누가 뭐래요. 어쨌든 좀 보고 가지 그래요."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총력전을 느긋하게 구경할 시간은 없다.

피의 발렌타인이 벌어지는 것은 앞으로 3일 후.

두 길드의 총력전이 시작되는 날이다.

'마음 같아서는 불사조와 새벽의 힘도 동원하고 싶군.'

[메멘토]가 보여준 환상.

일행의 전력으로는 피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긴 불가능했다.

최소 천 단위의 악마.

개중에는 비행종까지 있어서 해안가를 봉쇄해도 전투지역이 넓어지는 상황이 필연적이었다.

'놈들이 제물이라도 마련했다간, 성위가 올라가니 더욱 불리해진다.'

속초시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을 일망타진해야 한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피의 발렌타인'은 예측 불가능한 천재지변에 가까운 일이라 설명할 핑곗거리도 마땅치 않다.

'가능성 정도는 남겨두는 게 좋겠지.'

옛 통일전망대에서 속초까지는 차량으로 1시간 정도.

속초에서 벌어진 괴사를 들은 불사조와 새벽 길드가 전장에 합류한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파프너야. 얘 얼마나 정양해야겠냐?"

[총력전 때는 쉬어두는 걸 추천한다. 휴식도 강해지는 방법 중 하나니까.]

"그렇다는군."

"으. 나 쉬게 하려고 입이라도 맞췄어요?"

글쎄다.

딱히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다만.

파프너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자신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마스터한테 인사나 하고 가요."

"날 뭘로 보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날 줄 알았나?"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

거 참.

우리 사이에 신뢰가 그만큼밖에 쌓이지 않았다니.

정확한(?) 판단에 유진이 혀를 찼다.

'불사조야 그렇다 쳐도 새벽 길드는 조금 껄끄러운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느냐?〕

'그쪽 길드장은 야심이 많은 양반이라서. 모의전 보고 좋은 마음은 안 들었을 거다.'

실제로 회귀 전에는 아라한 길드가 몰락한 후, 새벽이 국내 1위 길드로 자리매김했다.

김영수가 8번째 성위를 달성하지 못했기도 했고.

소수 정예를 지향하는 불사조와 달리, 새벽 길드는 아라한의 빈자리를 먹어치우며 몸집을 어마어마하게 불려서다.

〔그대를 견제할지도 모른단 말이로구나.〕

'신형식의 아들을 떡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고.'

〔아들?〕

'신유승이 그 마스터 아들이야.'

〔과연. 계약자에게도 한 줄기의 양심은 살아있단 발언이구나.〕

'누구를 인성 파탄자로 보네?'

장미선도 그렇고.

우리 성좌 나으리까지 인성 문제를 지적하니 배알이 꼴렸다.

켕기는 부분이 있지만 한 성좌와 필멸자의 지적까지 받은 마당에 맨입으로 씻을 수도 없겠어.

"내가 연락할 수도 있어. 폰 잘 봐라."

"흠. 5점 드릴게요."

"갑자기 왜 점수채점을 하냐?"

"작업 멘트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10점 만점에서 절반이나 하면 꽤 높은 거잖아."

"100점 만점인데요."

"...."

몇 번이나 말문이 막히는 건 오래간만이다.

유진은 총력전을 준비 중인 두 길드장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조금 더 있다 가시지."

"최근에 무리를 해서요. 휴가 좀 내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근시일 내에 또 뵈었으면 좋겠군요."

김영수는 군말 없이 유진을 보내주었다.

음.

그러게요.

가까운 시일(피의 발렌타인 날)에 얼굴을 보면 참 좋겠습니다, 그려.

"천 대표. 이번 모의전, 잘 봤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장미선 헌터가 신세를 지고 있다던데."

"뭐, 그렇죠?"

"우리 아드님도 한번 천 대표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구려."

음?

신형식 길드장이 원래 이런 캐릭터였던가.

처참하기까지 한 모의전 결과에 분을 삭힐 줄 알았건만.

담담한 투로 신유승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안 될 건 없죠."

"허허. 그럼 부탁하겠소."

분노를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 듯, 신형식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려왔다.

그럼에도.

유진이 생각했던 반응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형님. 기껏 데리고 온 언데드들은 결국 써먹지도 못했군요."

"다 쓸 데가 있겠지."

"바로 돌아갑니까?"

"강원도 하면 뭐야. 관광이잖아."

"형. 그거 혹시... 쉬러 가자는 말이야?"

강민영이 발을 동동 굴렀다.

최근 좀 바쁘긴 했지.

관광이라는 단어만으로 저렇게까지 흥분할 줄이야.

왠지 마음이 쿡쿡 쑤셨지만, 유진은 태연하게 준비한 멘트를 이어갔다.

"장미선이 아바이순대 사준다고 했거든."

"오. 오오오오!!!"

"근데 훈련 일정이 남았다잖냐. 우리끼리 쉬면서 기다리자고."

"순대애애!!!!!! 휴식!!!!!"

"이거 진짜임까!!!!"

강민영과 이성민이 괴성을 질러댔고.

옆에 선 강민호가 그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내심 입가가 씰룩거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참으로 가련한지고. 이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저리 기뻐하는구나.〕

혀를 차는 크로노스.

유진도 이번만큼은 뻔뻔하게 대꾸하지 못했다.

*

속초.

동쪽으로는 아름다운 해안가를 끼고 있으며, 도심 옆으로는 한국의 절경 중 하나인 '설악산'이 우뚝 서있다.

무수한 관광객들이 오가는 관광도시.

뽀시래기 팀은 설렌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수학여행 땐 제대로 구경도 못했는데. 형은 처음이야?"

"오냐."

수학여행이라.

천애고아인 유진에겐 사치스러운 이야기다.

괜히 입맛이 쓰군.

강민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음. 미안해요."

"됐어. 신경 안 쓰니까."

유진은 그 말을 내뱉으며 주미니에 넣어둔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의 유일한 흔적.

'내 부모는 누구이기에, 성유물을 놓고 간 걸까.'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언뜻 보면 평범한 시계처럼 생겼다.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 아이템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헌터에게 부여된 '시스템'으로도 진정한 힘을 엿볼 수 없는 회중시계의 비밀.

특정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성유물의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부모님의 유일한 흔적이 아니었다면 나도 진즉에 팔아버렸겠지.'

회귀 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오랜 세월 동안 품속에 두고 다닌 덕에 운 좋게 성유물이란 것을 파악했다.

아니.

정말로 '운이 좋다.'라고만 여겨야 하는 건가.

'...궁금하긴 하군.'

회귀 전에도.

시간을 되돌린 후에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두고 간 부모가 궁금한 적은 없었다.

근데 왜 불현 듯이 생각나는 걸까.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상념도 같이 털어냈다.

"형님. 생각하신 일정이라도 있으신지."

"나랑 같이 다니면 피곤하기밖에 더하겠냐. 오늘은 알아서 놀아."

"그러면 서운하지 말임다."

웃음이나 참고 말해라. 이성민아.

그렇게 속이 투명하게 보이면 어떻게 하니.

"설악산이라도 가게?"

"등산은 접경지역에서 많이 해서요. 바다 구경하러 갈 겁니다."

음.

해맑게 말하는 강민호를 보니 양심이 1그램 정도 찔리는군.

뽀시래기 팀을 보낸 후, 언데드들을 실어둔 차량들을 대동한 채 해안가의 창고로 향했다.

삐- 삐-.

"오라이, 오라이."

"좀 더 와."

대형 트레일러들이 후진해서 창고에 줄지어 들어왔다.

잠가놓은 문을 열자, 중급 언데드 특유의 한기가 퍼지면서 창고를 으스스하게 물들였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구먼."

운전수 한 명이 팔뚝에 돋은 소름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중형 언데드 수백 구를 싹 내려놓은 후, 차량 운전자들은 뒤도 안 보고 창고에서 벗어났다.

멀어지는 엔진 소리.

적막감으로 물든 창고에서 돌연 부우웅- 휴대전화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잘 도착하셨어요?

"마담이 신경 써준 덕분에 잘 왔지. 원하는 조건에 딱 맞은 창고다."

-호호. 조건 맞는 창고를 알아내느라 고생 좀 했네요.

"빚이라고 쳐줘."

-제가 천 대표님께 진 빚만 얼마인데요. 이 정도는 서비스라고 생각해주세요.

서비스라.

마담과 제일 어울리지도 않는 단어를 쉽게 꺼내는군.

-그나저나 의외인걸요?

"뭐가."

-천 대표님이 휴가라니.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공교롭게도 마담 역시 유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향성이 다르지만.

유진은 헛, 하고는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나도 사람이다. 쉬고 싶을 때도 있어."

-그거 아세요? 천 대표는 찔리는 상황에서 탄성을 내뱉는 거.

"...내가 그랬다고?"

-호호호. 넘겨짚어본 건데 사실이었네요. 좋은 걸 알았어요.

흠.

방심했군.

상대가 상대인지라 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신경 썼어야 했는데, 너무 마음을 놓았나보다.

"끊는다."

-참. 다음에도 휴가 계획 있으세요?

"모르지. 아직은 생각 없어."

-계획 잡히면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왜?"

-뽀시래기 팀만 같이 가면 섭섭하잖아요.

"진짜 끊는다."

뚝,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는 활짝 열려 있는 창고 문을 바라봤다.

마담. 무슨 흉계를 품고 있는지 짐작이 안 가는군.

〔흉계가 아니라 그대에게 호감이 있는 것이니라!〕

'아. 헛소리 마시라고요. 성좌 나으리.'

혈관에서 피 대신 얼음이 둥둥 떠다닌다는 사람이다.

당연히 비즈니스 문제겠지.

호감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흐으음. 기이하구나. 짐이 느끼기엔 분명 그러할진대.〕

'그 똥촉은 넣어두시죠.'

〔어찌 되었든 운명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마쳤구나.〕

'다 끝난 건 아니야.'

모의전을 핑계 삼아 데려온 중급 언데드는 350구.

아직 100구 정도는 더 사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릴 만한 하수인을 만들어야 할 터인데. 이 근방에서 합당한 괴물이 있느냐?〕

'조금 내려가야지. 그래서 뽀시래기 팀도 떼어둔 거다.'

〔휴가란 핑계는 이를 위함이로구나.〕

'네크로폴리스면 모를까.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거미 사냥과 나찰 길드의 습격 때하고는 상황이 달랐다.

네크로폴리스의 이점도 없고.

확 트인 시야에, 적은 기동력에서도 우위였다.

습격 날짜와 시간만 알 뿐.

언데드를 미리 꺼놓을 수도 없으니, 습격을 당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대응에 나서야 한다.

'너무 불리한걸.'

〔그리 발언하는 것치고는 표정이 꽤 볼만하구나.〕

'유리한 입장에서 싸운 적이 언제는 있었나.'

〔그러하나 늘 승리하는 것은 그대였느니라.〕

'남들한테는 없는 장점이 하나 있잖아.'

미래의 정보.

회귀라는 이적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정보력에서 앞설 수 있었다.

나비효과로 생긴 변수까지는 예측하지 못하지만.

인과를 곰곰이 되짚어보면 변곡점을 짚어내는 것도 문제가 안 된다.

'이번 사태는 회귀하고 관련 없이 발생할 일이니 더더욱.'

[메멘토]로 당시의 상황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불리할 게 없지.

정말 대응을 못 할 것 같았으면 발을 빼든 다른 핑계를 만들어서 외부세력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하여간 철두철미하구나.〕

크로노스는 자신만만한 유진의 태도에 감탄을 삼켰다.

136화 전조

2월 14일.

솔로와 커플의 희비가 교차하는 날이 찾아왔다.

유명 관광지인 속초는 특히 짝을 지어 온 관광객들이 많아서 더욱 발렌타인데이라는 느낌이 물씬 났다.

"우걱, 우걱. 커플 엄청 많네요."

강민호는 게걸스럽게 순대국을 흡입하며 중얼거렸다.

분명 맛깔나게 먹는 모습인데.

오늘따라 서글픔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입에 넣은 건 먹고 말해라."

"모의전에 휴가만 생각했지. 발렌타인은 생각도 못했지 않았습니까."

"생각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나?"

무심한 유진의 말에 강민호의 눈망울에 습기가 차올랐다.

풉, 옆에서 새어나온 웃음소리에 쌍둥이 오빠의 눈가 위로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유진이 옆에 있어서인지 바로 화를 내지는 못했다.

"근데 형님은 연애 경험 있으심까?"

"...."

후르르릅-.

국이 참 맛있군.

유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뽀시래기 팀 전원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테이블에서 난 소리는 젓가락과 숟가락이 부딪치면서 발생한 달그락거리는 음색뿐.

〔그대는 영웅이 되긴 틀렸구나.〕

'뜬금없이 영웅 타령이야?'

〔무릇 영웅이란 호색함이 기본일진대, 그대는... 아니니라.〕

아잇, 이 변방 잡, 후.

그 명칭으로는 안 부르기로 했으니 참는다.

'바빠서 그랬다.'

〔회귀 전까지 치면 인생을 꽤 오래 살았을진대,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느냐?〕

'필멸자가 9성에 도달하려면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

〔마법왕이란 작은 인간은 가문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거 적당히 하고 넘어갑시다.

번듯한 가문 출신인 드미트리랑 천애고아를 같은 선상에 두면 되겠나!

"형. 이거 받아요."

"티슈는 왜 주냐."

"눈물, 아니. 땀 닦으시라고."

빌어먹게 고맙구나.

뜨끈한 국밥을 뱃속에 밀어 넣은 후, 급히 일어났다.

"형. 땀 닦으러 어디까지 가려고."

"연락할 곳이 있어서 그래."

미심쩍은 강민영의 시선을 뒤로하고 잠시 밖을 다녀왔다.

'슬슬 때가 되었나.'

밖으로 나서자 탁 트인 해안가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투명하게 비치는 맑은 바닷물.

평소였으면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풍경이지만,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형님. 근데 순대는 왜 안 드시는 겁니까?"

"장미선이 사준대잖냐. 그때의 즐거움으로 두는 거지."

"두 번 얻어먹으면 되잖아. 형."

"기대감이 사라져."

실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가는 바다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해안가를 거닌 지 얼마나 지났을까.

"먹구름이 끼네요. 오늘 비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오빠. 기상청 말을 또 믿어?"

"그래도 마도구를 기상 측정에 활용해서 맞추는 확률이 올라갔어."

"중계해주는 것도 예상이면 예상이게."

거울 사냥꾼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무언가가 날개를 퍼덕이며 먹구름에서 튀어 나와 육지로 향했다.

"전투를 준비해라."

"예?"

"악마들이다."

후, 드디어 시작이군.

유진은 먹구름 아래에 떠 있는 크루즈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2시간 전.

삿포로와 속초를 오가는 크루즈, '희망' 호에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만신전과 대비를 이루는 거대한 구조물, 바벨탑.

바벨탑 소속 악신 성좌와 힘을 숭배하는 이들인 '사탄교'가 비극을 일으킨 주체였다.

"경비대는 제압했습니까?"

"예."

"방심하다가 멍청하게 당하지 마십쇼."

곱슬머리에 갈색 피부, 그리고 반쯤 풀린 초록색 눈동자.

피골이 상접한 것 마냥 깡마른 60대 사내가 진한 녹광을 번뜩이며 선체를 둘러보았다.

"좋아. 모두 잘 되고 있군요."

마누엘 벤자민.

사탄교의 사제는 '희망' 호에 가득한 싱싱한 제물들을 살펴보더니 광소를 터트렸다.

'내가 사탄교에 투신한 지도 어언 20년.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왔다.'

만신전의 성좌들은 필멸자의 가능성과 업적을 굽어 살피며 가호를 내려준다.

가호를 부여하는 행위는 곧 세계에 대한 간섭.

성좌 본인의 힘이 소모되기에 가능성이 있는 필멸자를 엄선한다.

그렇지만.

사탄교는 다르다.

'제물만 바치면 힘을 준다. 이 얼마나 평등합니까?'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마누엘은 무의식적으로 오른팔을 쓸어내렸다.

'사도 계급으로 올라가면 복수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필리핀 남부의 섬 민다나오.

종교 문제로 인해 시시때때로 내전이 일어나는 곳이었으며, 대격변 이후에는 반정부 단체가 섬 전역을 점거했다.

그 과정에서 오른팔을 잃었던 마누엘.

반정부 단체 소속 헌터들에게 쫓겨 궁지에 몰렸을 때, 악신 성좌 중 하나가 손을 내밀었다.

〔힘을 원하는가?〕

마누엘은 같이 도주 중이던 동향 사람들을 모조리 제물로 바치고 악신 성좌와 계약, 사탄교로 이적했다.

지금 만지작거리고 있는 팔은 666명을 바쳐서 얻은 악마의 육체.

팔뚝을 타고 흐르는 어마어마한 흑마력이 마누엘에게 힘을 주었다.

'아직 모자라.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고향을 되찾으려면.

제 손으로 죽인 고향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제물을 바쳐서 악신 성좌의 가호를 더 부여받아야 한다.

...라고 중얼거리며, 마누엘은 이 끔찍한 행위를 정당화했다.

"우리 아이 못 봤어요?!"

"시끄럽군요. 조용히 하십쇼."

촤라라락!

흑마력으로 만든 촉수가 아이를 찾는 부모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희망 호에 탑승한 관광객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오는 촉수를 보고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사, 살려줘!!!"

"돈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게! 제발!!"

크루즈를 가득 메운 절망감.

비로소 마누엘의 입가에 만족감이 드리웠다.

"더 크게 비명을 지르십시오! 너희의 두려움은 우리의 양분이 될 겁니다."

방금 전에 조용히 하라면서, 라며 사탄교 신자 한 명이 중얼거렸다.

사탄교는 악신 성좌에게 혼을 판 이들의 집단.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위로 올라갈 수 있기에, 결집력이 강하지 않았다.

마누엘을 따라 이번 의식을 준비한 이들도 콩고물을 얻어먹을 생각만 가득할 뿐.

"사제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주 좋군요."

마누엘은 크루즈 갑판 위로 올라섰다.

갑판 한가운데에 그려진 역오망성.

크루즈 경비로 고용된 헌터들의 피로 만든 피의 제단이다.

'내가 세운 계획이지만 완벽합니다.'

한 번 출항하면 바다에서 오랜 시간 머무는 크루즈.

이변이 발생해도 전파 방해와 교란 마법진을 병행하면 소식이 곧바로 전하기 어렵고.

설령 크루즈 납치 소식이 외부에 알려져도 대응책을 마련하기까지 시간이 소요된다.

헌터협회나 교황청, 혹은 바벨탑을 경계하는 가문들이 움직일 때면 상황종료.

크루즈 승객들을 모두 제물로 바친 후 유유히 떠나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벌일 좌표만 설치하면 끝."

쿵-.

흑색 관이 역오망성 중심에 배치되었다.

바벨탑의 악신 성좌와 사탄교 신자들을 연결시켜주는 좌표.

진조급 뱀파이어의 안식처인 [불사자의 관]이다.

"이건 나의 피요. 나의 살이니. 불사자의 안식처여. 피를 모을지어다."

우우우웅-!

사탄교 신자들이 희망호 곳곳에 새긴 역오망성.

마누엘은 [불사자의 관]을 매개체 삼아 각인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좌우로 요동치는 선체.

각인에서 솟구친 붉은 기류가 희망오 전체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끅, 끄으윽."

"커컥."

목을 부여잡은 채 쓰러진 사람들.

사탄교 신자들이 각인시킨 역오망성과 링크한 [불사자의 관]은 희망호에 탑승한 이들의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보니 더 섬뜩하군."

"그래도 바벨탑에 직접 가는 수고로움을 저 아티팩트 덕에 덜었잖아."

"우린 무사한 게 맞겠지?"

사탄교 신자들은 희망호 전체가 핏빛 안개에 잠식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작자들.

악신에게 혼백을 판 이들이니만큼, 선량한 피해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덜컹- 덜컹-.

희망호 승객들의 피와 생명력을 모조리 갈취한 [불사자의 관]이 요란하게 들썩거린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증표.

마누엘은 양팔을 위로 추켜세웠다.

"저 높은 하늘에 닿은 역천의 탑의 주인들이여. 내 부름에 답하소서!"

불사자의 관이 흡수한 생명력이 역오망성에 스며들고.

핏빛 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치더니 허공에서 콰직- 하고는 커다란 균열이 나타났다.

시커먼 균열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커다란 구조물.

바벨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만하는 자가 관심을 보입니다.〕

〔불화의 후작이 관심을 보입니다.〕

〔....〕

균열 너머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힘.

마누엘을 비롯한 사탄교 신자들의 눈동자가 희열에 젖어들었다.

"아, 아아아!"

"오오오!"

"날 보셨어! 날 쳐다보셨다고!"

"멍청아. 제물들을 보신 거야."

한 폭의 지옥도 아래에서 사탄교 신자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양손을 꽉 쥐는 마누엘.

그의 망막에는 균열 너머에 아른거리는 위대한 존재들이 비쳐졌다.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위대한 존재여. 이 제물들을 바치오니 제게 힘을 주소서!"

〔첫 번째 사자는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첫 번째 사자가 당신이 바친 제물을 공양받습니다.〕

〔첫 번째 사자의 가호가 임합니다.〕

지옥의 첫 번째 악마.

먼 옛적에는 위대한 뜻을 대변하던 천사이기도 했던 존재.

벨리알의 가호가 희망호에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흐, 흐흐하하하핫! 이 힘이야!"

"대단해! 엄청나다!"

밀물처럼 휘몰아치는 막대한 힘의 파장.

그토록 원하던 힘을 얻은 사탄교의 신자들은 눈이 벌게지도록 환호했다.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10분.

20분.

그리고 1시간이 지났을 때.

마누엘은 불현 듯이 샘솟는 갈증을 느꼈다.

'목이 말라.'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닷물이 역류해서 마누엘의 입으로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갈증은 심해지기만 할 뿐, 절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이, 모, 무, 슨."

점점 마비되어가는 이성.

벨리알의 가호는 평범한 헌터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강력했고.

힘이 주는 광증을 막기에는 제물이 모자랐다.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대한 욕심.

벨리알의 가호를 감당할 만한 추가 제물이 필요했다.

'제물? 어디서? 그래. 육지!'

헌터협회나 교황청의 이목을 피해 크루즈를 납치한 것 따위.

이성이 사라져버린 마누엘의 뇌리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잠시 후.

눈자위까지 붉게 물든 마누엘은 본래 계획 따윈 집어던지고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무작정 배를 몰았다.

*

시간 축을 비트는 이적. 회귀.

유진이 과거로 돌아온 지 약 4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고.

로마노프 가문이 유진에게 먼저 손을 내밀거나, 아라한 길드가 휘청거리는 등 여러 가지 변곡점이 생겼다.

'벌어질 일은 그래도 일어난다, 그건가.'

입 안에 감도는 쓰디쓴 맛.

'피의 발렌타인' 사태는 [메멘토]가 보여준 환상과 같은 시각에 벌어졌다.

이 날을 위해 충분한 전력을 끌어 모았지만.

한편으로는 미리 준비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도 고민했다.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지.'

유진도 '피의 발렌타인' 사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주모자에 대한 정보나 준비 과정 등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사전에 차단하는 것도 가능했겠지.

'불확실한 정보만 믿고 움직이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로 돌아온 유진조차 크루즈 승객들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유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

'피해를 최소화하고 불사자의 관도 획득한다.'

〔이미 각오를 다지지 않았느냐. 흔들리지 말고 그대의 길을 걷도록 하여라.〕

크로노스의 사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굴을 뒤덮은 가면을 오른손으로 천천히 쓸어 넘겼다.

그림자 가면.

[잊힌 신전]의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획득한 액막이 겸 저주를 새긴 아티팩트다.

"쿠힛! 쿠히힛!"

피막으로 뒤덮인 날개 두 장을 활짝 펼친 괴물.

하위 악마종인 레서 데몬 무리가 크루즈를 떠나 해안가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형님! 괴물입니다!"

"정확히 따지면 악마지."

스스스슷-!

[데스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흑마력과 영력, 그리고 독을 융합해서 빚어낸 주문.

유진은 세 기운을 엮어낸 마법 무장을 곧바로 쏘아내는 대신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레서 데몬을 노려보았다.

〔어이하여 관망하고 있느냐?〕

'거리가 멀어. 아무 생각 없이 투척했다간 피할 거다.'

〔손 놓고 있는 동안 피해가 벌어지면 어찌하려고.〕

'그래서 이걸 준비한 거다.'

[저주 - 원한의 추격을 사용합니다.]

망령을 하나 소모해서 지목한 상대에게 공격을 명중시키는 저주.

새 저주를 추가하느라 [그림자 가면]의 내구도가 소모되었지만 감수할 만했다.

저주의 대상이 된 레서 데몬.

쇄애애액-!

마법 무장이 직선으로 쏘아지자, 놈이 급히 선회했지만 소용없었다.

"쿠히히힛?!"

푸아악, 400미터 정도 떨어진 레서 데몬의 가슴을 관통해버린 마법 무장.

통상적인 4성 마법의 사거리를 뛰어넘은 공격이다.

"형님? 이건 대체...."

강민호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37화 피의 발렌타인(1)

레서 데몬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놈의 사망을 확인시켜주는 메시지를 듣자마자 입술을 달싹였다.

[리바이브를 사용합니다.]

대상은 막 숨이 끊어진 레서 데몬.

풀린 동공에서 푸른 귀화가 아른거리더니, 숙여진 놈의 고개가 위로 들려졌다.

-으으으우.

맥 빠진 소리를 내며 레서 데몬들을 향해 돌진하는 망자.

거리가 적당히 좁혀지자, 유진은 손가락을 퉁겼다.

"터져라."

[시체 폭발(改)을 사용합니다.]

쿠아아아앙-!

살점과 피, 그리고 뼈가 사방으로 비산했고.

독성으로 강화된 폭발 에너지가 해안가로 날아들던 레서 데몬 무리를 덮쳤다.

"키에엑!"

"킥! 키엑!"

피막이 넝마처럼 찢겨져서 바다로 추락하는 건 행복한 케이스였다.

시체 폭발의 진원지에서 멀지 않았던 놈은 곤죽이 되어서 생전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으니.

육지를 향해 날개를 퍼덕이던 괴물 수십 중 반 이상이 시체 폭발 한 번에 쓸려 나갔다.

[염력] + [특성 - 공명]

[고유 특성 – 동조]

메이거스 사에서 제작한 레어 등급 크로스보우 10정이 공중에 떠오르고.

얍! 깜찍한 음성을 신호탄 삼아 방아쇠가 당겨졌다.

투다다-!

빗발치는 화살비가 폭발에 휘말리지 않은 레서 데몬들의 날개를 노렸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날개의 피막.

레서 데몬들은 양팔을 휘저어서 화살들을 튕겨냈지만.

손바닥으로 비를 모두 막아내지 못하듯.

강민영이 쏘아올린 화살은 남은 레서 데몬들의 날개를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오. 말 안 해도 아네?"

"형이랑 따라다니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강민영의 뺨이 씰룩거렸다.

"방심하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쳇. 간만에 칭찬 좀 듣나 했더니."

"화살은 얼마나 있나?"

"음. 후배한테 물어보는 게 빠를 것 같아요."

보급 담당인 이성민이 흐, 하고 짧게 신음을 흘렸다.

"모의전 때 소모된 거 보충을 안 했슴다. 한 1천 발 정도 남았슴다."

"아슬아슬하군. 견제 위주로만 써."

"적이 그렇게 많아요?"

"악마들이 날아온 방향을 봐."

먹구름을 몰고 오는 크루즈 한 척.

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데다 속도도 줄어들지 않는다.

"어, 어어어?"

"감속하질 않는군요."

미래의 거울 사냥꾼도 이제야 크루즈 선에 벌어진 이변을 알아챈 듯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경악합니다.〕

〔미네바의 올빼미는 저 배에서 악신 성좌의 가호가 느껴진다며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형님. 성좌님께서 저 배를 휘감은 기류가 악신 성좌의 신력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인심이 후하기도 하군."

성좌의 메시지는 구체적일수록 '영성'과 '격'을 소모한다.

올림포스 성단의 12주신급이라면 부담이 될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일개 계약자 한 명에게 저만큼이나 베푸는 건 아테나의 성향이 올곧아서겠지.

〔크하하핫! 짐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느니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겠죠.'

크로노스는 성좌라곤 해도 반쪽짜리.

성유물을 매개체 삼아 유진에게 빌붙어 있는 잡귀 신세다.

새로운 성좌명을 얻으면서 만신전에 별자리를 등록해놓았지만, 영체는 자신과 함께하고 있으니.

메시지를 남발해도 격이나 영성의 하락을 걱정할 필요는 없단 뜻.

애애애애앵-!

-게이트 브레이크가 발생했습니다. 해변에 있는 시민 및 관광객은 신속하게 피난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이렌과 함께 울리는 경보.

삐, 삐, 긴급재난문자임을 알리는 휴대전화 알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대처가 엄청 빠른데요?"

"그러게 말이다."

귀를 어지럽히는 안내문자와 사이렌 소리에 유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

헌터협회 속초 지부.

북쪽으로는 험한 산세가 있으며, 동해를 끼고 있는 도시의 특성 덕에 접경지역과 마주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근무지다.

협회 요원 공서진은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흐아아아암. 발렌타인데이에 여기서 뭐하는 짓인지."

"한가한 게 싫으면 파주나 철원으로 전출 신청이나 하시죠?"

"난 느긋한 게 좋아."

3성의 벽에서 멈춰 선 지 5년이나 되었다.

현장에서 몇 년이나 뛰었는데도 깨달음의 실마리 하나 잡지 못했고.

낙담한 마음을 추스르며 고향으로 근무지를 신청. 속초에서 1년 가까이 근무했다.

부사수인 이진원은 에휴, 하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다 제가 추월합니다?"

"제발 부탁이니 추월해주라. 그럼 내가 이 차장님! 하고 이렇게 경례할게."

"으으으. 그러지 마십쇼. 선배. 부담스러워."

징그럽다는 듯 이진원이 미간을 찌푸리자, 공서진이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했다.

언제나 같은 평온한 일상.

벽을 넘기 위해 아등바등하면서 살아온 게 허무하다고 느껴졌다.

'아. 월급 루팡도 괜찮은 거 같아.'

공서진이 커피의 잔향을 즐기고 있을 때.

따르릉, 비상 연락망용 전화기가 요란하게 벨소리를 토해냈다.

"또야?"

"장난전화겠죠. 제가 받을게요."

"아냐. 됐어."

철커덕, 구형 전화기를 뽑아든 공서진은 수화기를 볼에 대었다.

"헌터협회 속초 지부 과장 공서진입니다."

-속초 해안가에서 브레이크 사태가 발생했다.

"네?"

-실제상황이다. 해안가에 악마종이 출현, 재난 사태 선포를 권한다.

"장난전화면 곤란해요. 이거 녹취되고 있거든요."

대격변 이후 수십년이 지났고.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조차 희석된 이 시대에는 장난전화를 거는 겁없는 사람도 하나둘씩 나왔다.

사안이 사안인 탓에 벌금이 꽤 센 편이지만 실제로 모두 고소하는 편도 아니기에, 은근히 장난전화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장난하는 걸로 들리나?

차분한 음성.

공서진은 구형 전화기의 선을 빙빙 꼬았다.

"신고자는 헌터이신가요?"

-천유진. 헌터협회에 조회해 보든지.

"그, 블랙 기업의?!"

-블랙 컴퍼니다.

너무하는군, 이라고 뒷말을 붙이는 사내.

공서진은 기업이나 컴퍼니나 같은 의미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바로 재난사태를 선포하고 가용인원을 모두 동원하는 게 좋을 거다.

"저기요! 게이트 브레이크가 정확히 어디서 발생했...."

뚜- 뚜-.

"끊었어."

"장난전화 가지고 너무 진지하게 대꾸해주신 거 아닙니까?"

"이 대리. 시청에 코드 레드 떴다고 전달해."

"예?"

"지금 여유 부릴 시간 없어."

"사실 확인도 안 되었는데 바로 상황 발령을 하면...."

"잔말 말고."

오랫동안 현장에서 뛴 공서진.

벽을 넘진 못했지만, 위기 상황을 여러 번 경험한 탓에 감 하나만큼은 뛰어난 그녀였다.

천유진이라는 이름값?

그것도 판단의 이유이긴 하지만, 진짜 본인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말만 듣고 움직일 순 없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공서진의 굳은 표정에 이진원도 급히 상황을 지부 전체에 전달했다.

대기 중이던 이들이 무장을 갖추고 집합.

공서진은 협회 소속 요원들을 이끌고 해안가로 향했다.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재난문자라니."

"확실하지도 않은 신고 때문에 지부를 모두 비우고 가도 되나?"

요원들이 볼멘소리를 중얼거렸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협회 소유의 대형 트레일러를 몰고 해안가로 넘어가던 중, 창문 너머로 검게 물든 하늘이 비쳐졌다.

"저, 저길 봐."

"레서 데몬?"

"진짜로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난 건가?!"

"하필 악마종이라니."

요원들은 부랴부랴 전투를 준비했다.

비행 타입 괴물, 그것도 악마종이라면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무투계 헌터들은 대부분 근접전에 특화되어 있어 날아다니는 적을 구경만 해야 했고.

마법으로 격추하자니, 악마종은 타고난 마력 저항력이 높은 탓에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빙계 마법으로 날개를 묶...?"

쿠아아아앙-!

공서진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터져 나온 폭발음에 삼켜졌다.

폭발 진원지를 쳐다본 요원들.

허공을 날아다니던 레서 데몬 중 하나가 갑자기 터져 버렸고.

그 주변에 있던 악마들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채 지상으로 추락했다.

"터져라."

쾅! 쾅! 쾅!

추락하던 레서 데몬의 시체가 연속으로 터졌고.

뼈와 피, 그리고 살점이 퍼져 나가면서 악마들을 쓸어버린다.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풍경.

공서진은 두 눈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누군지 몰라도,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를 막아내고 있어.'

레서 데몬의 경지는 3성.

악마종에 비행 타입이라, 실질적인 사냥 난이도는 준 4성급이다.

협회 요원들만으로는 피해를 최소화하기는커녕 공세를 받아내기조차 어려운 상대.

경험이 많은 공서진도 레서 데몬 수십 마리를 마주하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일단 그 헌터와 합류하는 게 우선이야.'

접경지역과 가깝지만, 험한 산세 덕에 안전을 보장받는 속초.

그 탓에 헌터 길드들이나 협회 요원들의 수준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레서 데몬이 상대라면 도시에 머무는 헌터들을 총동원해도 막기 어려울 터.

차라리 악마들을 펑펑 터트리는 헌터에게 합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선배, 아니 과장님. 저 분인 것 같은데요?"

해안가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내.

유진이 손가락을 퉁기면 어김없이 폭발이 일어났고.

도심으로 날아오던 레서 데몬 무리가 낙엽처럼 휩쓸려 나갔다.

"간이 포탑은 왜 있는 거지?"

"석궁들이 하늘을 날아다니질 않나."

유진의 퍼포먼스가 원체 압도적이라서 눈에 띄지 않을 뿐.

뽀시래기 팀도 레서 데몬들을 상대로 꽤 선전했다.

석궁 10개를 동원해서 견제 중인 강민영.

이성민은 아공간에서 간이 포탑을 꺼내서 설치, 화력을 보강했다.

"하아압!"

땅으로 추락한 레서 데몬들은 [이동요새]의 힘을 일점으로 집중시킨 공격에 몸뚱이가 으깨졌으니.

아테나의 가호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내 부름에 답하라."

[리바이브를 사용합니다.]

온전하게 남긴 시체는 유진이 망자로 되살려서 날아다니는 폭탄으로 잘 활용했다.

"과장님. 도움이 필요한 건 저 악마들 아닙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시민들 피난이나 도와."

"알겠습니다."

"너희도 모두 교통정리 좀 하고."

협회 요원들은 게이트 브레이크 같은 특수한 상황에선 경찰보다 더 높은 권한을 부여받는다.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사람을 구하는 건 요원들이 전문이었으니.

현장 지휘는 이진원에게 맡긴 후, 유진에게 다가갔다.

"어, 그, 제보자님?"

"당신인가. 전화를 받았던 협회 요원이."

"네. 맞아요."

"좋은 판단이었다. 그 덕분에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어."

밥 먹는 중에 미리 전화하기를 잘했다.

유진도 협회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였기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한 것이었다.

'긴급재난문자와 사이렌 덕에 피난이 예정보다 빨랐다.'

협회에서 대응이 늦었더라면.

미처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화력에 제한을 두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민간인 피해가 더 커졌겠지.

"제가 할 말입니다. 천유진 헌터님."

"뭔 의미지?"

"천유진 헌터님의 제보와 활약 덕에 사람들을 제때에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 제대로 된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먹구름을 휘감은 커다란 선박.

지팡이 끝으로 이번 사태의 원흉인 '희망호'를 가리키니 공서진의 입에서 하, 긴 탄식이 새어나왔다.

"배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다니. 믿기지가 않는군요."

"정말 게이트가 폭주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제와서 그게 중요하진 않지."

"헌터협회 및 동원된 헌터들에게 부탁하실 게 있습니까?"

"지금 하던 대로만 해줘."

저 녀석은 내가 막을 테니, 라며 유진은 뒷말을 붙였다.

138화 피의 발렌타인(2)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2월 14일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와중에 몇 번이고 곱씹었던 주제다.

'어쨌든 피해를 방조하는 셈이다. 2차 피해는 최소화해야 해.'

〔그리 자책할 필요가 있느냐? 그대가 나선다 한들,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질 터인데.〕

'자책이 아니야.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려는 거다.'

시체를 되살려서 종으로 부리는 직업.

네크로맨서는 인명 경시사상에 젖어들기 쉬웠다.

'숨이 붙어있는 사람보다 죽은 시체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크하하핫. 진실로 그 이유뿐인 게냐?〕

'왜. 뭐요.'

〔그대는 참으로 따뜻한 작은 인간이로고.〕

따뜻하기는 개뿔.

유진은 크로노스의 과한 평가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뿌우우우-!

고동소리와 함께 크루즈가 가속하기 시작했다.

엔진을 최대로 가동한 모양.

물보라가 거세게 일어나는 걸 보면 암흑 마법까지 동원한 것 같다.

이 상황에서 민간인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려면?

'전장을 한정지어야 한다.'

[메멘토]가 보여준 기억 덕분에 그 당시 악마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선행한 레서 데몬들이 관광객을 납치.

크루즈로 끌고 가서 악마 추종자들의 제물로 바쳐지고.

놈들은 더 큰 힘을 얻은 채로 항만에 상륙, 무수한 살인을 저지른다.

'레서 데몬들을 저지함으로써 피해를 막고 전장을 해안가로 축소할 수 있지.'

한 번 발생한 혼란은 불과 같다.

닿는 것을 불태우며 제 몸집을 불려 나가는 주홍색 불꽃처럼.

혼란이라는 것도 전염성이 있어서 더 거세게 타오르고, 확산도 빠르다.

그러니.

처음부터 민간인들이 혼란에 빠질 여지를 차단할 겸, 제물 공급도 막기로 계획했다.

〔하면 다음 방책은 무엇을 준비하였느냐?〕

'이거다.'

따악-!

손가락을 퉁기니 해안가 근처의 얕은 바다가 크게 출렁였다.

-카오오!

제노사이드 새먼을 마개조해서 제작한 해양 언데드.

스칼라 무리가 기묘한 울음을 토해내며 유진의 부름에 답했다.

"배가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라."

[메멘토]가 보여준 환상대로라면 크루즈가 감속하지 않고 할구 위로 올라탄다.

배의 속도를 줄여서 1차적으로는 직접적인 충격에 의한 피해를 감소시키는 게 스칼라들을 돌진시킨 이유다.

〔이를 위해 남부까지 다녀온 게냐?〕

'당연하지.'

뽀시래기 팀이 속초 관광을 즐기고 있을 때.

유진은 부산 인근까지 내려가서 기억을 되짚어 침식현상으로 생성된 무인도를 방문했다.

섬 주위에 바글바글한 제노사이드 새먼.

무슨 파가 다시금 힘센 이끼를 채집하고 있던데, 놈들을 모두 고깃밥... 으로 만들어주진 않고 적당히 만져주기만 했다.

"아. 또 보네."

"박기태 씨?"

"땡. 실은 천유진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무인도에 침투하기 전, 팔을 억세게 잡았던 녀석을 만나서 뜨거운 재회의 인사를 한 것은 덤이었다.

"조금만 더 힘 써봐. 그렇게 해서 힘센 이끼가 뜯기겠나."

"웁! 우웁!"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잖아."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풀어주었다.

대신 무인도에 배치된 조직원들은 그들이 했던 대로 변변한 보호 장비 없이 힘센 이끼 채집을 시켰다.

'스칼라 만드는 김에 힘센 이끼도 얻었군.'

〔그 작은 인간들을 굳이 착취할 필요가 있었느냐?〕

'스칼라를 충분히 확보하려면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겸사인 거다.'

어차피 숨 쉬는 공기도 아까운 놈들이다.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싸.

허 참.

너무 자비로워서 문제야. 문제.

〔짐이 모르는 사이에 자비란 단어의 뜻이 바뀌기라도 하였느냐?〕

'아니요. 잘 이해하신 겁니다.'

〔말세로다. 말세야.〕

'다 산 노인네처럼 중얼거리지 마.'

하루 동안 긁어모은 스칼라는 총 79구.

창고에 맡겨둔 중급 언데드들이 있어서 추가로 사역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만 해도 충분해.'

물 밖에서는 전투력이 급감하지만, 해양에선 준 5성급의 무렷을 자랑하는 괴물이다.

크루즈를 멈추는 것도 아니고 속도를 줄이는 것쯤.

[군주의 지휘를 발동합니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스칼라들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적용 범위가 좁은 [언홀리 커맨드]까진 쓸 수 없었다.

메멘토로 획득한 기연이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군.

쿵! 쿵!

스칼라들은 무리를 지어 헤엄치더니 크루즈의 선미를 들이받았다.

학교 두 개를 이어 붙은 크기의 대형 선박.

스칼라 수십 구가 연달아 충돌했어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계약자가 자신한 것치고는 효과가 크게 없구나.〕

'좀 기다려 봐.'

청어처럼 빽빽하게 붙어서 수영하는 스칼라 무리.

크루즈 선체를 들이받고는 유유히 좌측으로 틀고는 원을 그리며 다시 한번 돌진했다.

쿵! 쿵! 쿵!

연달아서 들리는 묵직한 충격음.

충돌을 거듭하니 육지를 향해 우직하게 나아가던 크루즈의 속도가 아주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이지? 티탄과 작은 인간 수준으로 체급 차이가 나건만.〕

'물고기들은 군영으로 움직일 때 더욱 강한 힘을 얻는다.'

군영(群泳).

무리지어 헤엄친다는 의미로 최소 수십에서 많게는 수천 마리가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선두가 물살을 가르면 뒤따라오는 물고기들의 부담이 줄어들고.

더 나아가서는 해류마저 지배하며, 작은 물고기들이 천적을 몰아내기까지 하는 행위.

'스칼라의 원본인 제노사이드 새먼은 포식자다. 원래는 군영으로 움직이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지.'

의지를 상실하고 유진의 종으로 되살아난 제노사이드 새먼, 아니. 스칼라가 군영으로 헤엄치면 어떨까.

그 결과물은 보는 대로였다.

〔상륙 자체를 막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구나.〕

'놈들이 손 놓고 구경만 하겠어?'

유진은 팔짱을 낀 채 서서히 느려지고 있는 크루즈를 빤히 바라봤다.

레서 데몬들의 습격은 거의 완벽하게 막아냈다.

이 순간에도 균열에서 소환된 레서 데몬들이 무리를 지어 속초로 날아들었지만.

피융!

비교적 내구도가 약한 날개를 집요하게 노리는 석궁이 놈들의 움직임을 제한했고.

콰앙-!

한 녀석이라도 쓰러지면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서 무리 대부분을 쓸어버렸다.

피에 대한 갈망으로 눈이 돌아버려서 선발대를 보냈는데.

돌아오는 녀석이 없네?

'그러면 슬슬 애가 타겠지.'

〔이번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이 직접 나설 거라고 예언하는 겐가?〕

'뭐, 예언이라기보다는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합시다.'

〔그대의 발언대로 이루어질지 지켜보자꾸나.〕

크로노스가 사념을 보내는 순간, 갑판 위에서 새카만 불꽃이 바다로 쏟아졌다.

*

촤아아아-!

파도가 크루즈 선미를 강타했다.

해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최단거리로 나아가는 배.

물살의 저항을 정면으로 받은 탓에 대형 선박인 '희망'호가 휘청거렸다.

"빌어, 먹을."

이를 부득부득 가는 마누엘.

크루즈는 흑마력과 악신의 가호로 보호받는 상황.

배가 침몰할 일은 없지만, 본인이 원치 않게 춤을 추는 신세가 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뇌리까지 올라온 흑마력은 가식적인 존댓말마저 집어치우게 만들었으니.

"제물은 왜 없냐!"

"그, 사제님. 레서 데몬들을 보내는 족족 사냥당하고 있습니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한 번 더 그딴 말을 하면 네 입도 찢어버리겠다."

"그럼 사제님 눈으로 직접 확인하십쇼."

으르렁거리는 사탄교 신자.

벨리알이 하사한 가호가 뇌리를 잠식, 감당치 못할 힘을 얻고 분노조절장애가 된 것 마냥 소리를 질렀다.

그건 마누엘도 마찬가지였다.

"시끄러!"

콰직-.

마누엘이 손을 뻗자, 초고농도로 응축된 흑마력이 솟구치면서 막 입을 열었던 사탄교 신자의 머리를 두부처럼 으깨버렸다.

주인을 잃은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역류했고.

마누엘은 혀로 핏방울을 핥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더 많은 피, 제물이 필요해."

비슷한 상황은 크루즈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감당하지 못할 힘을 부여받은 사탄교 신자들.

악신 성좌가 하사한 가호는 바친 '제물'에 비해서 너무나도 과했으니.

그 힘에 취해서 이성이 나가버린 신자들은 서로의 목숨을 취하며 정념과 힘을 흡수.

수십이나 되었던 신자들의 수는 어느새 7명으로 줄었다.

"더! 더!"

"더 많은 피!!"

그럼에도.

마누엘을 포함한 신자들의 갈급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한 발 늦게, 그들은 숭고한 의식을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방해중인 것을 깨우쳤다.

쿵!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충격에 선체가 크게 흔들린다.

배가 가라앉을 정도는 아니었다.

흑마력과 악신 성좌의 가호로 보호 받는 크루즈.

스칼라 무리의 힘은 강철조차 찢어발길 만큼 강했지만.

오러를 발현할 수는 없기에, 악신 성좌의 가호가 드리운 크루즈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누구야!"

갑판 밖으로 머리를 내민 마누엘의 녹색 눈동자 위로 막 크루즈를 들이받는 스칼라 무리가 비쳐졌다.

쿵, 다시 한번 선체를 흔드는 충격에 비틀거린 마누엘이 양손에 흑마력을 집중시켰다.

"잡스러운 언데드 주제에 감히 의식을 방해하려 드느냐!"

[게헤나의 불꽃]

흑마력으로 빚어낸 검은 화염이 장막처럼 길게 드리운다.

현세의 규칙과 섭리에서 벗어난 암흑계의 불꽃.

5성급 마법에 필적하는 위력을 지녔기에, 일반적인 흑마법사라면 재배열에 오랜 시간이 걸렸겠으나 마누엘은 달랐다.

벨리알의 가호를 부여받아 필멸자의 틀을 반쯤 벗어난 육체.

일명 '마인'이 된 터라 강력한 주문도 순식간에 완성시킬 수 있었다.

치이이이익-!

암흑계의 불꽃이 파도를 증발시킨다.

한 눈에 담기지도 않을 정도로 넓은 바다.

새카만 불길이 거세게 타올라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 앞에서는 금방이라도 꺼질 게 분명했다.

마누엘이 일으킨 게 평범한 불이었다면 말이다.

증발한 물이 금세 채워졌지만 마찬가지로 수증기가 되어버렸고.

그 아래에 머무르던 스칼라 무리에게도 옮겨 붙은 후, 물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이게 바로 악신의 힘이다. 꺼져라. 잡스러운 것들아!"

광소를 터트리던 마누엘.

이내 그의 눈가에 감돌던 녹광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옅어졌다.

암흑계의 불꽃을 현세에 강림시키는 마법.

화염 마법과 달리 폭발력은 없지만 유, 무형을 가리지 않고 태워서 대응하기가 까다로운 주문이다.

그랬을진대.

-카오오오오!

스칼라 무리는 육체에 들러붙은 불꽃을 금세 털어내곤 다시 크루즈와 부딪쳤다.

악신 성좌의 가호로 인해 큰 피해는 없었지만.

해류조차 무시하며 나아가던 크루즈의 속도가 눈에 띨 정도로 줄어들었다.

"어찌 된 거냐. 신성 주문 말고는 약점이 없는 악신의 힘이!!"

마누엘은 짐작도 못했다.

언데드에게 통용되는 신성 주문이 있다는 것을.

누적되는 피해 만큼 버프 효과가 상승하는 [응징의 쐐기]가 게헤나의 불꽃에 반응, 흑마력을 밀어내며 효과가 상승했다.

[코퀴토스의 냉기]

[푸르손의 음성]

당황한 것은 잠시뿐.

피에 대한 갈망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지옥의 냉기가 휘몰아치고 고위 악마의 음성을 따라 만든 강풍이 스칼라 무리를 타격했다.

"언데드가 길을 막는다고?"

"건방진!"

다른 사탄교 신자들도 합류해서 투마기(오러)를 발현하거나 흑마법으로 스칼라들을 도륙했다.

-카오, 카오오.

한계를 넘어선 피해에 스칼라가 하나씩 쓰러지고.

속도가 줄어들긴 했어도, 크루즈 선은 결국 항만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누엘은 비로소 만족감에 젖어든 미소를 지었다.

"제물.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해."

이성이 날아간 채로 사람들의 목숨을 갈구하는 마인.

그가 육지를 밟는 순간에 본 것은 항만에 머무르고 있던 수많은 민간인들이 아닌.

"환영인파가 좀 많지?"

유진이 창고에 보관해두었던 중급 언데드들이었다.

139화 피의 발렌타인(3)

상륙은 작전 중에서도 굉장히 난이도가 높다.

먼저 발을 디딜 만한 부지가 있어야 하고.

해안가에 접근해서 상륙을 시작할 때까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어찌어찌해서 상륙에 성공했다?

적이 가만히 손가락 빨고 구경만 하고 있을 린 없으니.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며 해당 지역을 완전히 확보해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긴. 그대도 섬을 공략할 때 제법 고생을 했었지.〕

'연평도 때 말이지?'

레리크들이 내뿜는 화염 때문에 접근하느라 고생 좀 했지.

명중률이 개판이지만 숫자로 밀어붙여서 쉴 새 없이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탄교 신자들도 마찬가지.

'저 놈들의 목적은 산 사람이다.'

악신 성좌에게 제물을 바치려면 숨이 붙어있어야 한다.

한 번 의식을 시작한 이상, 매개체인 불사자의 관을 움직일 순 없으니.

민간인이나 헌터를 납치해서 크루즈로 보내야 하는데.

레서 데몬들이 육지로 날아가는 족족 격추되는 마당이라 제물을 마련하려면 본인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형님. 저희도 합류하겠습니다."

"아니야. 너희는 레서 데몬이 새지 않게 막아라."

회귀 전 피의 발렌타인 사태와 가장 큰 차이점은 '제물 마련 유무'다.

크루즈 위에 생성된 균열은 바벨탑을 매개체 삼아 암흑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제노사이드 새먼의 고향이기도 한 악마의 땅.

공물을 많이 바치면 균열의 크기가 커져서 더 강력한 마수들이 튀어나온다.

'내가 사탄교 신자들을 붙들어놓고, 뽀시래기 팀과 협회 요원들이 레서 데몬만 견제하면 이길 수 있다.'

뽀시래기 팀은 제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 균열에서 레서 데몬이 나오기 무섭게 화살들을 사용해서 견제했다.

협회 요원들도 해안가에 전선을 구축.

다행히 협회 측 담당자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협업이 잘 되었다.

긴급 동원령 문자를 받고 나온 헌터들까지 속속들이 합류하니, 레서 데몬들이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데 저 작은 악마들은 그대의 수하들에게 특히 힘을 못 쓰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마력 저항력이 높지만 물리 쪽은 아니거든.'

무투계에서도 흔하지 않은 원거리 타입.

원거리 공격과 연계성이 좋은 고유 특성도 많지 않고.

벽을 넘으면 화살에 오러를 담아도 유효 사거리가 길지 않아서 한계가 명확했다.

사거리가 길다는 장점은 파괴력이나 대응력 모두 마법계 헌터에게 뒤처진다.

'근데 레서 데몬 같은 괴물은 예외다.'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높고 기동력이 뛰어나지만, 물리 공격에는 약하다.

비행으로 그 약점을 최대한 극복하며 거리를 두고 싸우는 게 레서 데몬의 전투 스타일.

[염력]과 [동조]로 조종하는 10대의 석궁이라면.

레서 데몬에게는 천적이나 마찬가지다.

'제물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전력도 한정될 수밖에 없지.'

'희망'호에 있는 사탄교 신자들만 죽이면 회귀 전의 비극을 막고 기연도 손에 넣을 수 있다.

뭐, 그게 쉬울 린 없겠지만.

크루즈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흑마력의 파장.

[흑암의 반지]를 매개체 삼아 암흑 분야의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유진에겐 더더욱 그 힘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네놈이구나. 위대한 의식을 방해하는 자가!"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이자 사탄교의 사제인 마누엘이 으르렁거리며 갑판 위에 나타났다.

6성의 끝자락.

준 7성이라고 해도 될 만한 어마어마한 흑마력이 놈의 육신에서 맥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지의 피와 살을 먹고 강해진 악마 추종자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6성만 다섯 명이네.]

파프너가 [무신의 눈]으로 마력 파장을 읽어낸 후, 적의 경지를 읊어주었다.

음.

과도한 친절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구먼.

[주군. 이 자리에서는 전략적인 후퇴를 진언하겠습니다.]

"왜. 자신 없나?"

[6성급, 그것도 마인을 다섯이나 상대하면서 주군을 보호할 자신이 없습니다.]

"내 몸은 알아서 건사할 테니 네 두개골이나 안 부서지게 신경 써라."

[크으읏.]

송명석아.

왜 분한 듯이 신음을 흘리니.

라이프 포스 베슬만 무사하면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는 파프너와 달리, 송명석은 머리가 부서지면 다시 만들 수도 없다.

놈의 혼백이 죽어버린 육신과 결합했으니 몸뚱이가 파괴되면 두 번 죽는 셈.

"그러니까 잘 싸워. 뒈지지나 말고."

[주군. 그 혼백의 소멸이라는 게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까?]

"잘 알아들었네."

[빌어먹을! 그런 말씀은 없지 않았습니까!]

"안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송명석의 말도 이해는 갔다.

온갖 버프와 [용린갑]까지 착용한 파프너.

그리고 죽음 용기병이 된 최형태를 제외하면 6성급 전력이 모자랐다.

〔오러 발출이 가능한 중급 언데드 수백이면 능히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

'작은 인간 100명이 모인다고 해서 티탄을 이길 수 있냐.'

〔흐으음. 불쾌한 언사로구나. 작은 인간들 따위가 1천이 모여도 위대한 종족 한 명을 당하지 못할 터인데.〕

'성위 차이가 난다는 게 똑같은 의미야.'

1천 명까진 아니겠지만 말이야.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성위 차이는 단순히 스탯 보너스나 추가 보정만 나는 게 아니다.

무투계의 경우는 오러 운용 능력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고.

마법계 역시 습득 가능한 주문이나 재배열 속도, 그리고 [다중 연산]의 활용에 이르기까지.

'성위가 한 단계 차이면 10대 1까진 할 만 할 거다.'

〔계약자는 3단계나 높은 성위의 적을 쓰러트린 적도 있지 않느냐.〕

크로노스가 최형태를 힐끗거렸다.

'그거야 조건을 갖추었고, 뛰어난 하수인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고.'

당시 유진이야 2성이었지만, 대전사인 파프너는 5성 초입의 전투력을 보유했다.

네크로폴리스에서 싸운다는 지리적인 이점도 있었고.

이번 싸움은 사탄교 신자들과 유진 양 측 모두 익숙하지 않은 전장에서 맞붙어야 한다.

그런데 말이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란 게 있는 법.'

〔애꾸눈과 마주쳤을 때처럼 말이더냐?〕

염병.

꼭 예시를 들어도 재수 옴 붙을 이야기를 하냐.

미간을 찌푸린 유진은 크루즈 갑판에 있는 사내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목 아프니까 내려오지?"

크루즈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마누엘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

"오루드. 넌 여기서 관을 지켜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마누엘의 엄포에 사탄교 신자 한 명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조직 내 위계질서는 오직 힘으로 유지된다.

평소에도 상명하복과 거리가 먼 단체였는데 악신 성좌의 가호까지 받아서 이성을 놓아버렸으니.

신선한 제물을 앞에 두고 항명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내 손에 죽든가."

"알겠다."

힘이 가장 약한 신자를 [불사자의 관] 수비로 돌린 후, 나머지 넷이 크루즈에서 내려왔다.

무릎까지 차오른 물.

육지 근처까지 다가갔지만 스칼라들의 돌진 때문에 땅 위로 올라타는 것을 끝끝내 저지당했다.

젖어드는 옷자락.

피부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빌어먹을."

마누엘은 짜증 섞인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정체불명의 언데드를 수족 삼아 위대한 의식을 훼방한 자.

풍기는 마력도 높지 않으면서, 겁도 없이 자신의 앞을 막아섰다.

"건방진 것. 영혼마저 태워주마."

"잘 됐네. 나는 네 영혼을 부려먹을 생각이었는데."

"캬아아악!"

분노로 눈이 뒤집혀진 마누엘이 흑마력을 손에 끌어 모으려고 할 때.

쿵- 쿵- 육중한 소리가 나면서 무언가가 그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뛰어들었다.

[죽음의 돌진]

[신속]

마하 1에 준하는 속도.

이동이나 돌진 계 스킬은 중복 사용 시에 효과가 반감되지만.

[신속]은 효과가 반감되지 않는 몇 안 되는 이동기였으니.

모의전 때 두 스킬을 동시에 사용하지 않은 것은 공간이동이고 뭐고, 발동하기 전에 두 길드 헌터들을 죽일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저놈들 상대로는 그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제한을 풀어주자 죽음 용기병이 더욱 신이 난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고.

마누엘은 이를 까득, 갈면서 재배열 중인 흑마력을 와해시켰다.

곧바로 찾아온 반동.

악신 성좌의 가호를 받아들이기 전이었다면 내상을 입었을 만한 충격이었지만.

지금의 마누엘에게는 손을 가볍게 털어낼 정도에 불과했다.

[포르네우스의 이빨]

흑마력으로 빚어낸 무수한 이빨이 톱날처럼 회전하며 짓쳐드는 죽음 용기병을 위 아래로 갉아먹는다.

카가가각-!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괴물의 움직임이 허공에서 가로막혔고.

죽음 용기병은 몸을 좌우로 비틀며 자신을 속박한 이빨을 밀어냈다.

'고작해야 망자 따위가 내 주문을 받아낸다고?'

평범한 암흑 마법이 아니다.

무려 바벨탑의 악신 성좌 중 하나인 '포르네우스'의 이름을 붙인 강력한 주문.

실제로 그 힘을 빌려오는 것은 아니요.

해당 악신 성좌의 성질과 흡사한 주문을 만든 후, '이름'을 붙여 강화시킨 비전 암흑 마법이다.

63빌딩도 일격에 박살낼 정도의 위력!

그 막대한 힘이 죽음 용기병을 붙들어놓는 정도에 그친 것이다.

[특성 - 다중 연산]

[코퀴토스의 냉기]

포르네우스의 이빨을 유지하는 동시에 흑마력을 재배열.

암흑계의 냉기를 구현해서 죽음 용기병의 머리 위에 쏟아 부었다.

"얼려버리면 그 잘난 돌진도 하지 못할 거다!"

"그럼 곤란하지."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부정 충격....]

쩌어어엉-!

죽음 용기병의 머리 위로 드리우던 냉기가 우윳빛 결계에 막히더니 옆으로 샜다.

딜레이 없이 연속으로 발현되는 방어 주문.

마누엘은 주문의 근원이 성력에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우쳤다.

"네 놈! 만신전의 앞잡이였나!"

"오냐. 악신의 앞잡이야."

"언데드를 사역하는 불결한 존재가 신관이라니. 믿을 수 없다."

"믿든 안 믿든 그건 댁 자유인데."

콰지지직!

흑마력으로 짜낸 괴물의 아가리가 찢어발겨지고.

죽음 용기병이 재차 돌진하자, 순식간에 마누엘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마투기]

[오버드라이브]

죽음 용기병의 돌진에 반응한 것은 마누엘만이 아니었다.

벨리알이 부여한 가호로 인해 필멸자의 한계를 벗어난 이는 모두 5명.

마누엘 수준은 아니지만, 모두 6성 수준으로 강해졌기에 무투계 능력을 각성한 마인 둘이 검붉은 오러를 크게 흩뿌렸다.

콰드드드득!

악마들이 구현하는 오러, [마투기]가 암흑 투기와 충돌한다.

돌진 중에 힘을 소모한 탓인지, 죽음 용기병의 몸뚱이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던 시커먼 기류가 점점 옅어지고.

반대로 두 마인이 펼친 마투기는 기세가 더욱 강렬해졌다.

-암흑 투기를 지면으로 방출해라.

죽음 용기병의 귀에만 들리는 텔레파시.

명령을 듣자마자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마투기를 무시한 채, 그대로 땅을 세게 굴렀다.

한 순간이지만 암흑 투기가 바닷물과 지면을 모두 들썩이게 만들었고.

마인들이 병장기에 불어넣은 마투기를 어렵사리 제어하고 있을 때, 죽음 용기병은 유유히 귀환했다.

[외도(外道)로 얻은 힘이라서 그런지 제대로 다루지 못하네.]

"금방 적응할 거다."

[그러기 전에 놈들을 끝장내라?]

"어."

6성급 마인 다섯.

한 마리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질질 끌다가 놈들이 힘에 적응할 시간만 줬을지도.

'승률을 올려주니 나야 고맙지.'

[언홀리 커맨드를 사용합니다.]

반경 100미터의 언데드들에게 버프를 부여하는 강령술.

유진은 중급 언데드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직접 전장으로 향했다.

서로 간 보는 건 여기까지 하자고.

140화 피의 발렌타인(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