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70-80

70화 새로운 무대

덜그럭거리면서 조금씩 떠오르던 뼈가 후두둑, 바닥에 도로 쏟아졌다.

스킬 구현은 성공했지만, 이해도가 모자라서 생긴 현상.

[위대하신 주인님. 부디 제게 다시 한번 가르침을!]

조승철이 턱뼈를 요란하게 달싹였다.

"응. 아니야."

[주인님!!!]

"다음 기회에. 지금은 시간이 없다."

파프너에게 알려준 김에 조승철한테도 [레이즈 언데드]를 전수했지만, 글쎄... 파프너가 나은 것 같다.

녀석도 전생에 7성까지 도달했던 자질의 헌터.

마력 이해도나 운용감각은 괜찮은데, 막상 파프너 옆에 두니 빛이 바래는 느낌이다.

[보아라. 어리석은 뼈다귀야.]

[이 몸은 위대하신 주인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이다! 모욕하지 마라.]

조승철이 레이즈 언데드를 붙들고 고전하는 동안, 파프너의 [스킬]에는 레이즈 언데드가 정식으로 추가되었다.

영력 운용 매커니즘.

그리고 시체를 일으킬 때 핵심 포인트를 모두 이해했다는 것.

'태생 마법사보다도 이해력이 더 좋을 줄이야.'

유진은 회귀 전에도 여러 네크로맨서와 언데드 마법사에게 강령술을 전수해주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뒤.

미국 콜로라도 주에 열린 [망자의 통곡]이라는 게이트가 공략된 후부터 네크로맨서도 전직할 수 있게 되었고.

개성에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한 후에는 네크로맨서 여럿이 그에게 가르침을 구해서였다.

'조승철만 해도 상위 1%급인데 이 녀석은 대체....'

그래.

조승철이 모자란 게 아니라 파프너가 너무나도 뛰어난 것이다.

"나 없는 동안 연습 더 해라."

[숙련도를 30까지는 쌓아보겠다.]

"의욕적이라서 마음에 드네."

유진에 버금가는 네크로맨시 재능.

드래고니안 육체와 흑마법까지 더하면 얼마나 강해질 것인가.

그 시너지를 짐작하려니 입술이 씰룩거렸다.

*

유진은 파프너를 연평도에 둔 채,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배 몰던 선장이 더 수고했지. 별거 없었다."

"연평도를 본격적으로 공략하는 건 언제부터로 생각하십니까?"

미스터 블랙의 질문에 유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략?"

"이번은 선발대 개념으로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필요한 걸 말씀하시면 암상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인간사냥꾼들이 먼저 연평도를 차지하면 파주 인근 해역 밀무역도 큰 피해를 입는다.

사람을 가축으로 생각하는 놈들.

그라운드 제로로 배가 들어오려면 연평도 인근 해역을 지나가야 하는데, 인간사냥꾼과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가만 두었으면 암상이 손해 좀 봤겠어.'

메멘토가 보여준 환상에서는 인간사냥꾼들이 섬을 점거했었다.

회귀 전의 역사와 달라져버린 흐름.

이 경우에는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틀어버린 셈이군.

그라운드 제로의 암상도 제법 쓸 만한 호ㄱ... 아니 사업 파트너라서.

"C급 마석 50개만 준비해 줘."

"준비하겠습니다."

개당 1억 정도 하니 총 50억 정도를 불렀는데도 흔쾌히 수락했다.

미스터 블랙, 아니 암상이라는 조직에서 연평도 공략의 중요성을 얼마나 크게 매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언제까지 줄 수 있지?"

"섬 공략 재정비를 하시려면 3일은 걸리시죠? 그 안에 마련해놓겠습니다."

"천천히 해도 된다."

"인간사냥꾼들이 나서기 전에 먼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략은 이미 끝났으니까."

미스터 블랙은 잠깐 동안 멍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예?"

"레리크 싹 정리하고 인간사냥꾼도 못 오게 조치했다."

"아. 그러니까 말이죠. 어떻게 그걸...?"

"사업 비밀.'

유진은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했다.

"연평도 인근 해역은 마음대로 써도 된다. 근처를 돌아다니는 해적까진 못 막아준다만."

태연하게 말을 잇는 유진의 태도에 미스터 블랙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참 종잡을 수가 없는 분입니다."

"C급 마석. 잊지 말고."

"지원해드린다고 했으니 당연히 드려야죠. 근데 연평도 항구 쪽은 암상에서 써도 되겠습니까?"

"당장은 안 된다. 나중에 대여해주든 하지."

섬에 구축한 네크로폴리스는 영지로써 제대로 된 기능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손님맞이 할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상황.

명색이 네크로맨서의 영지인데, 민낯을 드러낼 순 없잖아.

"그럼 나중에 부탁드리겠습니다."

"때 되면 알려주마."

네크로폴리스 정식 개장하면 자리 하나쯤 내줄게.

임대료는 넉넉하게 챙겨두는 게 좋을 거다.

미스터 블랙한테 결과를 알려줄 겸, 마석도 선물(?)받고는 은하수 펍으로 넘어갔다.

"뽀시래기 애들 어디 갔나?"

"유진 님이 볼 일 보러 가신 후에 얼마 안 돼서 접경지역으로 떠났답니다."

"좀 쉬어두라고 했더니."

저번에도 2주 간 휴가 보내주니 게이트 공략이나 하고 오고.

이 녀석들.

다음에는 휴가를 압수해야 하나.

"호호호. 아직 그 친구들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봐요."

"무슨 의미지?"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두려움에 떨겠죠. 저도 그랬고요."

"그래서 마음을 다스릴 시간을 준 거잖아."

"사람마다 그 방법은 다른 법이랍니다. 쉬면서 마음에 담아두었다간 오히려 곪아버릴 수도 있고요."

마담의 지적에 유진은 곧바로 수긍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잊고 싶은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하지."

"뽀시래기 팀도 마찬가지일 거랍니다. 오히려 펍의 싸움을 보고 자극을 받은 것 같던걸요."

"자극?"

"유진 님에게 폐가 안 되어야겠다. 뭐 그런 각오 있잖아요."

흠.

뽀시래기 팀 녀석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직접 들어나 봐야겠군.

어차피 접경지역에서 볼 일도 있으니, 겸사겸사 넘어가야지.

"3대 길드 사이에 특별한 일은 없나?"

"그쪽에도 관심이 있으신가 보네요."

"조금은."

"최근 대구에서 이중 게이트가 생성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왔어요."

"두 게이트가 겹쳐진 현상?"

"알고 계시네요. 입장 가능 헌터는 2-3성이지만, 실제 난이도는 그보다 훨씬 높겠죠."

흠.

이중 게이트라?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고민했지만, 수십 년 전 일이라서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메멘토를 시계에 사용해버려서 도움은 안 되겠어.'

신성 주문 자체는 대기시간이 없지만, 한 사물에 1달마다 1번씩 사용 가능한 게 문제였다.

[크로노스의 망가진 회중시계]로 연평도에 숨겨진 기연을 들여다보았으니.

이중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혹은 어떤 보상이 숨겨져 있는지는 직접 확인해야 한다.

'메멘토에도 이런 맹점이 있었군.'

크게 아쉽진 않았다.

덕분에 공허의 파편을 획득했잖아.

어지간한 보상 가지고는 연평도에서 발견한 촉매와 비비지도 못할 것이다.

"아라한 길드에서 이중 게이트 공략에 나서기로 했나?"

"반만 정답이랍니다."

"이중구조이니 새벽이나 불사조, 둘 중 하나랑 공동으로 진입하나 보군."

"재미없어. 그 몇 마디로 어떻게 유추한 거예요?"

"네가 정보는 다 줬잖아."

"힌트를 드리긴 했어도, 바로 맞추실 줄은 몰랐네요."

이중 게이트, 그리고 두 길드의 연합 공략.

정수리가 간질간질하다.

분명히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인데.

"아!"

"왜 그러시나요?"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유진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보는 마담을 외면한 채, 방금 떠오른 생각을 되새겼다.

'장미선이 사망한 곳.'

차기 검성으로 불리며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잊힌 신전]을 공략한 불사조의 유망주.

아라한은 불사조 길드가 국내 1위로 치고 올라올 것을 경계해서 함정을 팠고, 결국 장미선을 해치웠다.

'이중 게이트를 듣자마자 기시감이 들더니.'

허 참.

쓴웃음이 입가를 물들였다.

그녀가 음모에 걸려서 사망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라한이 파놓은 '함정'이 뭔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진 않았다.

대충이라도 알면 경고라도 해줄 텐데.

〔계약자여. 어찌할 게냐?〕

'아라한 길드에게 한 방 먹일 겸, 불사조에 은혜를 입힐 기회잖아.'

〔이번 사태에 개입하면 인과가 더 크게 비틀릴 것이다.〕

'그렇겠지.'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나비 효과든 인과가 틀어지든, 그런 걸 걱정할 거였으면 회귀할 시도도 안 했다.'

미래는 어느 방향으로든 달라진다.

아니.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만들 것이다.

비틀려버린 인과가 어떤 식으로 후폭풍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고?

'오히려 바라는 바다.'

미래가 달라질수록, 유진이 알고 있던 정보와 기연도 무용지물이 될 터.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출 순 없다.

〔크하하하핫. 아주 훌륭하도다.〕

'웬일로 칭찬을 하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두려움 한 점 없이 나아가는 마음. 그야말로 영웅의 표본이지 않느냐!〕

'그놈의 영웅찬가.'

피식 웃은 후에 전화기를 들었다.

연락처를 받아놓은 걸 이렇게 쓰게 되네.

뚜- 뚜- 뚜-.

-어? 유진 님!

"목소리를 들으니 잘 지내나 보네."

-잘 지내긴요! 공략 준비한다고 아주 그냥....

"이중 게이트?"

-헤헤헤. 유진 님도 알아주니 영광이네요. 사부님한테 배운 게 엄청 도움됐어요.

"사부?"

-파프너 사부님이요.

언제 사제관계까지 맞은 거냐. 너희.

"불사조에는 사람 없어?"

-어휴. 사부만큼 제 부족한 부분을 족집게처럼 콕 집어준 분이 없는걸요.

"길드장이 들으면 섭섭할 소리를 막 하네."

-사부님한테 배우는 거. 길드장님께 다 허락 맡아서 괜찮아요.

불사조 길드 마스터 김영수.

국내 3대 길드 중 하나를 일구어낸 만큼 실력이 나쁘진 않았지.

성품도 괜찮았고.

-혹시 보상 때문에 전화하셨어요?

"비슷해. 꼭 금전적인 걸로 받을 필요는 없잖아."

-그야 그렇죠. 해드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뭐든 도울게요.

"이번 공략. 우리 팀을 끼워줄 수 있나?"

잘 생각해라. 장미선.

네가 살아남을 길은 지금 내민 손을 잡는 것뿐이다.

변수가 없으면 게이트에서 반드시 죽을 테니.

〔손해를 감수하다니. 그대답지 않은 판단이로구나.〕

'쟤가 죽으면 심장석이고 뭐고 어떻게 받냐?'

〔그대의 특기인 강령술로 되살려서 청구하든지 하려무나.〕

'성좌 나으리. 농담이 많이 늘으셨습니다.'

유진도 그녀가 어느 게이트에서 숨을 거뒀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중 게이트와 아라한이라는 단어를 못 들었으면 아예 생각도 안 났을걸.

-별거 아니네. 그렇게 해요.

긴장한 게 우스울 만큼 장미선이 흔쾌히 대답했다.

"너무 쉽게 승낙하는 거 아니냐."

-이번에 게이트 공략 팀 꾸리는 건 저한테 일임했거든요. 마스터가.

"그럼 날짜랑 장소 알려줘."

-참. 대련 보상은 다른 걸로 말해줘요. 이건 너무 가벼우니까요.

뚝-.

얘. 대체 뭐야.

불사조 길드를 돕고 아라한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생긴 건 좋지만, 얼떨떨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

이중 게이트 공략은 5일 뒤.

불사조 길드와 짧게 면담도 가져야 하니, 4일 전까지는 그쪽에 합류해야 한다.

'쉴 틈이 없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접경지역으로 향했다.

붉은 거미가 이용했던 샛길을 타고 북쪽으로 이동.

"케케케켁. 인간!"

[버릇없는 것. 위대하신 주인님을 대신해서 내가 교육을 해주겠다.]

콰아앙-!

조승철은 최대 화력으로 몬스터들을 뼛조각까지 태워버렸다.

"이 자식아. 뼈 정도는 남겨야 언데드로 만들지."

[죄송합니다. 괴물의 언동을 바로잡아주겠다는 일념 하에 그만!]

"으휴. 적당히 하자. 적당히."

[명심하겠습니다. 위대하신 주인님!!]

싸울 때마다 마력을 아주 바닥에 뿌리고 다니네.

조승철도 시간 되면 파프너에게 훈련을 맡기든지 해야겠다.

다크 미니언이 되면서 자아가 또렷해진 건 좋은데, 왠지 모르게 나사가 많이 빠졌단 말이야.

"내 부름에 답하라."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아머드 좀비를 제작합니다.]

이 근방의 괴물들은 끽해야 1성에서 2성.

리터너, 스켈레톤 워리어 같은 언데드를 만들기에는 생전의 능력이 모자랐다.

'뭐, 아머드 좀비로도 충분하니 괜찮아.'

블랙허브 농장으로 가는 길은 붉은 거미가 주기적으로 몬스터들을 청소해놓은 덕에 비교적 안전했다.

유진도 거미 사냥 준비 과정에서 시체를 확보하기 위해 몬스터들을 사냥했고.

그 덕에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얼마를 걸었을까.

스으으으-.

음산한 안개.

검은 방첨탑이 빚어내는 연기가 두 눈에 들어왔다.

"아? 형!! 우리 여기 있어요!!"

귓가를 파고드는 낭랑한 음색.

안개 사이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온 곳을 바라보니, 휴식 중이던 세 사람이 보였다.

"생각보다 얼굴색이 괜찮네?"

정해진 미래가 아닌, 새로운 무대로 향할 제안을 품은 채.

유진은 뽀시래기 팀과 재회했다.

71화 함정인 줄 알면, 더 이상 함정이 아니다(1)

"혀, 형님."

"우선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

뽀시래기 팀을 보려고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유진의 신체능력이 동일 성위 무투계 헌터와 맞먹는다지만, 힘을 쓰면 그만큼 칼로리도 소모되니.

꼬르르륵-.

마침 이성민의 배에서 큰 소리가 나왔다.

"하, 하핫. 죄송함다."

"너희도 배고프잖아. 잘 됐네."

칼과 방패, 그리고 갑주에 튀어 있는 피.

얼굴도 꼬질꼬질한 거 봐라.

그라운드 제로에서 유진과 헤어진 후, 며칠 동안 안개를 들락거리면서 괴물들을 사냥한 뽀시래기 팀.

유진은 딱하듯이 본 후, 아공간 주머니에 쟁여둔 물품들을 꺼내 간단한 요리를 했다.

"탕수육이 엄청 바삭합니다."

"전분 농도랑 기름 온도가 핵심이다."

"형. 소스도 기가 막히게 맛있어."

"그건 시판이고."

"...."

밀가루나 전분 같은 식재료는 넣었을 때 그대로인 상황.

네크로폴리스의 안개가 있다지만, 몬스터가 재생성되는 땅에서 요리 해먹을 정신은 없었겠지.

후식으로 인스턴트 커피까지 한잔 마시니, 다들 흐뭇하게 웃었다.

"형님 덕에 호강했습니다."

"언제나 충성 충성."

"선배. 그건 제 할 말임다."

몬스터들의 땅에서 좀처럼 누릴 수 없는 호사.

역시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게 최고지.

뽀시래기 팀의 얼굴이 편안해진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생각 정리를 꽤 요란하게들 하네."

유진의 말에 행복감으로 젖어들었던 일행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라 하는 거 아니다. 기특해서 그렇지."

"형님의 파트너, 블랙 컴퍼니에서 일하려면 지금으로는 부족하다 싶었습니다."

강민호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됐어. 너희보고 살인을 하라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피를 손에 묻히는 상황이 반드시 오겠지.

그렇다 한들, 먼저부터 짐을 어깨에 지고 갈 필요는 없다.

"너희들의 각오와 행동만으로도 충분해."

"형...!"

"형님!"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세 사람의 눈빛.

으으.

좀 부담스럽군.

"낯간지러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무게 잡고 말하니까 닭살이 돋네."

커흠-.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유진은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일 하나 해야 하니 짐들 싸라."

"무슨 일입니까?"

"불사조랑 아라한이 게이트 공동 공략을 한다."

멍한 표정을 짓는 일행.

강민호가 아- 하고는 입술을 열었다.

"불사조 쪽에 끼는 겁니까?"

"정답이다."

"형. 그럼 우리 아라한이랑 완전히 척 지는 거 아니에요?"

"이미 대립관계라고 봐야지."

아라한은 국내 1위라는 타이틀에 광기가 느껴질 만큼 집착했다.

박하늘 씨를 접경지역에서 묻어버린 것도.

회귀 전, 장미선을 함정에 빠트린 것도.

아라한 길드가 1위를 빼앗길 만한 변수를 모두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대표고 부사장이고 아주 음흉한 놈들이니까.'

특히 조심해야 건 부사장인 백성현.

박하늘 씨를 함정에 빠트렸던 것도 그 녀석이다.

아라한이 꾸민 음모 중에서 부사장이 관여하지 않은 걸 찾기가 힘들 정도.

"척진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까짓거 해보죠. 뭐."

정리를 마친 뽀시래기 팀과 이동.

불경스러운 묘지에 숙성시킨 붉은 거미 간부 최형태의 시신을 꺼내 리터너로 제작했다.

'여기 있군.'

방첨탑 주위를 돌고 있는 망령 중에서 최형태를 잡아낸 후, 곧바로 망자의 육신에 합일시켰다.

"저, 언데드에 혼백을 불어넣으면 얼마나 강해집니까?"

"하급이나 중급은 싱크만 맞아도 생전 실력은 낼 수 있다."

"헐. 언데드는 동일 성위여도 헌터나 몬스터보다 전투력이 약간 모자란 게 상식 아닙니까."

강민호의 말대로다.

순리를 벗어난 망자가 생전의 자신만큼의 힘을 내는 건 어불성설.

리치, 데스 나이트 같은 상급 언데드들이나 생전보다 강한 힘을 다루지.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하급 언데드들은 전투력이 모체보다 상당히 떨어졌다.

"내가 수고로운 짓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대단합니다. 형님."

유진은 망자를 제작할 때 영력으로 시체의 힘을 증폭, 2배의 힘을 낼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망자라서 능력치가 떨어지는 페널티를 개조로 상쇄하고 장점만 남은 불사의 군대!

"너희 셋이 달려들어도 얘 하나 못 꺾을걸."

리터너로 되살아난 최형태.

제작 보정과 합일의 여파로 갓 드래고니안 사체에 깃들었던 파프너에 준하는 스탯을 지녔다.

준 4성급.

암흑 투기는 못 다루지만, 3성 헌터 셋을 동시에 상대해도 버틸 수 있는 스펙이었다.

"와. 걸어 다니는 시체보다 못하다는 건 좀."

강민영이 투쟁심을 불태우자 리터너(최형태)도 그 기세에 반응해서 살기를 내뿜었다.

"윽. 미안. 잘못했어."

셋이 덤벼도 안 된다던 유진의 말도 들었겠다, 최형태가 썩다 만 턱을 들썩이자 바로 꼬리를 말았다.

'쩝. 시술까지 하면 딱 좋은데.'

중급 언데드로 개조하려면 아머드 시리즈처럼 단순히 뼈나 살점만 가지곤 안 된다.

레버넌트야 하위 용족이란 시체의 특수성 덕에 제작이 가능한 거고.

얼마 전에 승급시킨 조승철처럼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 같은 특수 촉매가 있어야 시술이 가능했다.

'다음엔 신준석보고 출장 좀 와달라고 해야겠어.'

이승연도 스켈레톤 메이지로 제작.

합일 과정까지 마친 후 두 언데드에게 지시했다.

"너희는 여기서 네크로폴리스를 지켜라."

-며, 명을, 받듭니다.

네크로맨서를 적으로 돌린 자들의 비참한 말로.

끔찍하게 죽은 뒤에도 노예로 부려지는 것이 두 사람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다.

'애꾸눈 녀석만 안 오면 수비는 될 터.'

파프너야 소멸해도 라이프 포스 베슬 덕에 되살릴 수 있지만, 저 둘은 한 번 파괴되면 끝이다.

뼛조각이라도 회수하면 복원이 가능하겠지만.

애꾸눈이 들이닥치면 무리겠지만.

'그렇다 한들, 이젠 네크로폴리스를 포기할 수 없다.'

블랙허브 농장을 몬스터들에게서 지키려면 네크로폴리스의 방위 능력이 필수.

두 언데드의 손실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은 감수해야 한다.

세력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리스크를 짊어지는 수밖에.

〔크하핫. 미래를 아는 계약자조차 괴물의 변죽에는 답이 없나 보구나.〕

통쾌한 크로노스의 웃음소리가 공연히 유진의 뇌리에 맴돌았다.

*

접경지역에서 볼 일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뽀시래기 팀은 며칠 동안 사냥해서 얻은 부산물과 마정석을 용산 헌터마켓에서 싹 정리했고.

유진도 언데드 시술에 들어가는 촉매를 몇 개 매입했다.

"쓸 만한 게 없어."

"국내에서는 헌터마켓만 한 곳이 없는걸요."

미래가 기준점인 유진의 눈에는 모두 성에 차지 않았다.

소소하게 정비를 마친 후.

일행은 불사조 길드 본사로 넘어갔다.

"뽀시래기 팀 맞으시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시커먼 정장 차림의 남녀가 본사 건물에 들어온 일행을 맞이했다.

"뽀시래기?"

"그 송명석을 뭉개버린 팀이잖아."

"아라한의 초신성을?!"

"헌터 업계가 안 그래도 저 팀 때문에 난리였다고."

"특히 신관 계 헌터의 소환수가 어마어마하게 강하다던데."

지나가던 불사조 길드 소속 헌터들의 시선이 일행에게 집중되었다.

놀라움.

질시.

부러움.

긍정과 부정이 섞인 감정들의 탁류가 일행을 집어삼킬 듯이 넘실거린다.

〔작은 인간들은 참으로 감정이 풍부하구나.〕

'익숙하다. 저 눈빛들은.'

유진은 태연한 모습으로 선 채, 오연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자, 못 본 척 시선을 피하는 헌터들.

정점을 향해 가다 보면 저런 눈빛쯤이야 숨 쉬듯이 마주하게 된다.

〔담대한 마음가짐이구나. 이런 부분은 그래도 영웅의 모습을 지녀서 다행이도다.〕

영웅 같지 않으면 어쩌실 건데요.

한 마디 쏘아주려다가 참았다.

〔계약자가 거둔 작은 인간들도 담대한 건 마찬가지로구나.〕

'음. 저건 담대한 게 아니라 신경 쓸 틈도 없는 거다.'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사조 길드에서 마중을 받을 줄 몰랐습니다."

"와! 대박이야!"

"저는 오늘을 못 잊을 검다!"

갓 상경한 시골 쥐가 서울 구경하듯.

뽀시래기 팀원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길드 시설들을 쳐다보기 바빴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하아-.

폐부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티 안 나게 내뱉었다.

길드 중역 회의실로 안내 받은 일행.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저흰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문 앞에서 대기하는 안내역.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허락받은 사람뿐이다.

망설임 없이 문을 밀며 들어가자, 회의실에 앉아 있던 낯익은 여인이 팔을 크게 흔들었다.

"여기예요!"

불사조 길드의 미래.

차기 검성.

그 외에도 몇 가지 수식어를 보유한 헌터, 장미선이 환한 얼굴로 일행을 맞이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뽀시래기 팀.

반면 유진은 뚱한 얼굴로 맞은 편 좌석에 앉았다.

"꽤 화려하게 반겨주더군."

"길드장님 뜻이에요. 네 사람을 불사조로 모셔오고 싶으시다나."

"이번 공략. 길드장이 참여하는 조건으로 터무니없는 걸 말하진 않겠지?"

"에헤이. 그럼 처음부터 부탁 안 받았죠."

장미선은 손사래를 쳤다.

"근데 사부님은 안 왔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저한테 그만한 깨달음을 주신 건 파프너 사부 뿐인걸요."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사조 길드 교관들이 들으면 섭섭해 하겠는걸."

"어쩌겠어요. 사부 같은 일타강사는 우리 길드에 없잖아."

"국내 2위라는 자부심이 울겠네."

"헹. 아닌 건 아니라고 인정하는 게 더 멋진 거예요."

불사조 길드장 김영수가 늦게 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아무리 호인이라곤 해도, 면전에서 저런 말을 들으면 가만히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걘 당분간 바빠서 못 온다."

"유진 님. 그럼 게이트 공략은요?"

"뽀시래기 팀이랑 너. 이렇게 다섯이서 해야지."

파프너가 유진의 최대 전력인 건 사실이다.

각종 버프와 용린갑까지 착용하면 5성의 극에 버금가고.

[무신의 눈]과 [마투사]라는 사기적인 특성과 더불어, 파프너 본연의 실력까지 더하면 6성에 준하는 전투력을 보유했다.

'파프너를 빼고도 공략 정도는 할 만하지.'

준 5성급 마법계 언데드인 조승철.

나사가 좀 빠졌어도 등급을 넘어선 위력을 지닌 신성 주문.

마지막으로 네크로맨서의 주력인 강령술까지.

전력은 넘쳐났다.

"이번 게이트 공략. 혹시 불사조에서 제안한 건가?"

"반대랍니다. 아라한에서 꺼냈어요."

"넌 송명석한테 졌잖아."

"모르셨구나? 3일 전에 기회가 돼서 재대결했는데 이겼거든요."

짜잔- 하고는 오른손으로 V자를 그린 장미선.

'그래서 이중 게이트가 나타난 거였나.'

〔마치 아라한이 변수를 만든 것처럼 들리는구나.〕

'어. 정확히는 로마노프 가문의 수작질이라고 해야겠지?'

마법왕 드미트리.

의지만으로 세계의 규칙과 섭리, 근간마저 비트는 절대자.

배후성인 오딘은 드미트리에게 수많은 지식과 비술을 전수해주었다.

'인위적으로 게이트 둘을 합치는 방법도 그 중 하나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아라한 길드는 현 시간대에서도 로마노프 가문과 손을 잡았다는 것.

'본래 역사대로라면, 장미선이 송명석을 제친 건 꽤나 뒤에 벌어진 일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장미선이 이중 게이트에서 사망한 '역사'가 존재했다.

시기가 다름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변수를 누군가가 통제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겠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끼이익-.

열린 문 사이로 신장이 170 조금 안 되어 보이는 다부진 체구의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뽀시래기 팀."

"부, 불사조 길드장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이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였다.

반면에 유진은 고개를 적당히 숙인 게 전부.

"너무 격식 차리지 않아도 돼요. 미선이 친구면 내 조카뻘이지."

"친구... 요?"

"왜 그래. 우리 대련하면서 친구하기로 했잖아."

강민호의 떨떠름한 표정에 장미선이 요란하게 떠들면서 뒷말을 틀어막았다.

아.

우리, 친구 사이라고 소개해서 공략에 참여하는 건가?

'...김영수. 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용케 받아주었군.'

회귀 전에도 아라한 길드를 무너트릴 때 힘을 합친 터라, 김영수가 괜찮은 사람인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장미선이 친구라고 우기면서 게이트 공략 팀원으로 넣은 걸 용케 받아줬네.

'아무 계산 없이 그러진 않았겠지만.'

뽀시래기 팀이 송명석을 꺾었다는 소식은 이미 헌터 업계 여기저기에 퍼졌다.

일행을 공략에 합류시킨 건 나름대로의 보험일 것이다.

"하하하! 미선이를 잘 도와주게. 내일 공략, 이기는 것보다 무사히 나오는 게 더 중요하니 너무 무리하진 말고!"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성량.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바보일지도.

유진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72화 함정인 줄 알면, 더 이상 함정이 아니다(2)

공략 당일.

불사조 길드에서는 일행 앞으로 밴을 보냈다.

"어서 타요."

차 문을 열어주는 장미선.

뽀시래기 팀원들은 설렌 모습으로 하나씩 밴에 탑승했다.

"밴은 연예인만 타는 거 아님까?"

"여기 좀 봐봐. 오빠. 칵테일도 준비되어 있어!"

"큰일 두고 술 먹으면 안 된다."

유진은 하아- 짧게 한숨을 쉬고는 중얼거렸다.

"그거 무알콜이다."

"형님은 모르시는 게 없군요."

"방금 전 상황은 차라리 모르고 싶었다."

다음에는 불사조 길드에 적당히 챙겨달라고 말해야겠다.

부끄러움은 항상 자신의 몫이어야 하는가.

앞에 탄 장미선이 쿡, 하고 웃었다.

"게이트 정보는 아예 없나?"

"선행 팀이 대략적인 정보를 수집해왔어요."

장미선은 미리 준비한 브리핑 정보를 빠르게 공유했다.

대구 - 굶주린 굴&옛 저택

[유형 : 고정 타입]

[출입 조건 : 2 - 3성]

[게이트 면적 : 소]

[출입 제한 : 10명]

"출몰하는 괴물은 늑대인간과 흡혈귀래요."

"앙숙인 놈들이 잘도 붙어먹었군."

"게이트의 핵은 둘. 진입하면 길이 양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각 통로 끝에 있다고 하네요."

"다른 특이점은 없나?"

"변종이 많다, 그리고 보스 몬스터를 동시에 공략해야 한다 정도."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 사실을 파악했다는 건, 선행 팀이 보스 공략에 성공했나 봐?"

"아라한에서 힘에 부친다고 우리를 부른 거니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장미선은 유진의 지적을 가볍게 넘겼다.

과연.

이렇게 판을 짜놨단 말이지?

'로마노프 가문을 배제하면 함정인지도 몰랐겠어.'

-이중 게이트.

-타이밍에 맞춰 보스 둘 사냥.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공략 팀도 전력을 분산시켜야 했다.

진입 가능 인원이 고작해야 10명뿐이니.

아라한의 정예 헌터만으로는 역부족이라며 불사조 길드에 협조를 구할 명분까지 완벽했다.

"늑대인간과 흡혈귀. 모두 강력한 종족 아닙니까?"

"제대로 된 놈들은 뱀파이어랑 라이칸스로프로 불린다. 그건 하위종이야."

"웩. 사대주의도 아니고 한글 이름이면 약하고 영어면 세다니."

혀를 내두르는 강민영.

꼬부랑거리는 글자를 선호한 게이트를 탓하든지 해라.

"뭐, 정보는 충분하니 우리 힘내보게요! 파이팅!!"

장미선의 선창에 뽀시래기 팀도 파이팅- 이라며 뒤따라 외쳤다.

어느새 대구시 중심부인 명덕역 근처까지 온 밴.

"목적지가 근처입니다. 준비해주세요."

역 근처에 고등학교나 입시학원이 많아서 유동인구가 제법 되는 지역이지만.

변종인 이중 게이트가 생성된 탓에 한산했다.

"차량이 하나도 없군요."

"아. 그건 시의 협조 하에 도로를 통제했대요."

텅 빈 도로에는 치료진과 무장 점검 팀 등, 게이트 공략을 위해 파견된 인원이 바글바글했다.

"하하. 또 뵙는군요."

"그러게. 아라한의 초신성 씨."

"송명석입니다."

"당연히 이름이야 알지."

조롱 가득한 말투에 송명석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킬킬거리면서 넘긴 유진.

"못 보던 사이에 신수가 많이 어두워졌어?"

"덕분에 말이죠."

"차기 검성 씨한테도 한 수 제대로 배웠다던데."

"...."

입을 꾹 다문 송명석.

착 가라앉은 눈동자 위로 음침한 빛이 넘실거린다.

이제는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는군.

"그 소환수는 없습니까?"

"파프너는 일이 있어서 못 부른다."

"안타깝군요. 공동 공략 때는 힘이 되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두 번 아쉬우면 살인이라도 나겠어.

이제 와서는 불사조 길드의 체면 때문에 공략을 무를 수도 없으니 속마음을 감출 생각도 안 했다.

"걔 없어도 게이트 폐쇄 정도는 일도 아니지."

"하하하.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니 아주 믿음이 갑니다."

"너도 분발해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유진은 몸을 홱 돌렸다.

송명석의 시선은 훤히 드러난 그의 등에 꽂혀서 한동안 떠날 줄을 몰랐다.

"아라한 길드, 진입 준비 끝났습니다."

푸른 균열 앞에 도열한 아라한 길드 공략팀.

유진하고는 모두 구면이었다.

"그쪽은 다들 2성 아니었나?"

"모두 3성으로 올라갔습니다. 폐가 되진 않을 테니 걱정 마시길."

송명석은 유진 일행을 빤히 바라봤다.

"잘 됐네. 나도 3성이야."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만에...?"

기선제압 멘트치고는 너무 싸구려 아니냐.

유진이 콧방귀를 뀌자, 생각도 못한 리액션이 쏟아졌다.

"벌써 3성에 도달하셨습니까?"

"형. 우리도 피똥 싸면서 노력했는데 그 속도는 못 따라잡겠다."

"이건 아니지 말임다. 우리를 놓고 혼자 가시다니."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은 뭐니.

세 사람이 원망 섞인 눈으로 유진의 등을 쳐다봤다.

"하, 하하. 다행이군요."

"초신성 씨. 나도 3성이니까 폐는 안 될 거예요."

장미선도 거들으니 송명석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함정인 줄 알면서 그렇게까지 도발할 필요가 있느냐?〕

'그러니까 더 긁는 거다.'

〔호오. 계약자의 의도가 궁금하구나. 짐에게 그 생각을 고하여라.〕

'녀석이 감정적으로 나오면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겠지.'

〔크하하핫. 그대는 저 작은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구나.〕

어.

그렇게까지 싹 계산한 건 아닌데요.

대놓고 성질을 긁으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 건 성격이랑 안 맞아서.

"아라한에서 먼저 진입하겠습니다."

저벅- 저벅-.

송명석을 필두로 아라한 공격대 다섯이 푸른 웜홀로 들어가고.

"우리도 가죠.'

장미선이 경쾌하게 말하며 앞장 섰다.

뒤를 따르는 유진 일행.

두 길드의 공격대가 이중 게이트 안으로 모두 진입하는 순간.

파지지지지직-!!!

게이트에서 튀어 나온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면서 아스팔트 도로와 건물 등을 파손했다.

"피, 피해!"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야!?"

뇌전을 휘감은 게이트의 색이 피를 끼얹은 것 마냥 적색으로 물들어간다.

붉은 게이트.

폐쇄형을 의미하는 색이다.

"두, 두 번째 변이...."

불사조 길드 관계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힘 빠진 음색.

이중 게이트에 이어 발생해서는 안 될 변이가 연속으로 발생했다.

두 길드 공략대가 현실로 돌아오는 방법은 하나 뿐.

게이트 핵을 동시에 파괴해서 공략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길드장님께 연락해! 어서!"

부산해진 두 길드 관계자들.

하지만.

다급함으로 물든 불사조 길드원들과 달리, 아라한 길드 소속 인원 중 상당수는 당황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게이트를 흘겨보았다.

*

거대한 토굴.

바닥부터 천장까지 높이가 약 50미터.

폭은 100미터가 넘어 보였다.

"굴보다는 지하 던전 느낌이네."

유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느긋하게 감상평을 말했다.

"브리핑과 달라요. 길은 하나에...."

"토굴 안에 저택이 있잖아.

"그러게요. 아라한 공격대는 또 어디로 사라진 건지."

걱정이 섞인 음색으로 대꾸한 장미선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저 진입한 아라한 공격대를 찾느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눈동자.

"힘 빼지 마. 못 찾을 거다."

"이상하잖아요. 게이트가 변형되었고 아라한 공격대는 사라져버렸는데."

"그게 의도한 거라면 전혀 이상할 것도 없지."

태연한 유진의 말에 뽀시래기 팀이 헉- 크게 비명을 질렀다.

"혀, 형. 우리 설마 함정에 걸린 거야... 요?"

"반말이든 존대든 하나만 해라."

"아니, 아니. 형은 왜 그렇게 침착한 거야."

"형님이 옳다. 당황한다고 해서 풀릴 일이었으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어."

강민호가 당황하는 쌍둥이 동생을 진정시켰다.

이미 함정이란 것을 알았다고 하기에는 근거가 없으니, 적당한 핑계를 댔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송명석의 태도가 이상했거든."

"초신성 님, 아니 그 새X가요?"

강민영아.

너 걔한테 싸인까지 받았잖아.

함정을 친 용의자가 되자마자 팬심이고 뭐고 곧바로 날려버리다니.

"유진 님. 그건 좀 비약 아닐까요? 근거가 없어요."

"장미선 씨. 이중 게이트가 또 변이를 일으키고 폐쇄형으로 변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봐?"

"많진 않죠. 그래도 심증만으로는 좀."

"내 말을 믿으란 건 아니다. 그래도 방심하다가 뒤통수 맞는 것보다는 나아."

장미선이 그 말을 바로 믿을 거라곤 생각 안 했다.

아라한 길드, 특히 송명석을 보고 마음만 놓지 않으면 된다.

미리 약을 쳐놔야 충격을 받아도 덜 아프지.

'총도 살살 쏘면 덜 아프다고 했어.'

〔마력을 싣지 못하는 원시적인 무기 말이더냐?〕

'그게 얼마나 과학적인 무기인데 원시라는 단어를 붙이냐.'

크로노스에게 타박하고 있을 때 음산한 붉은 안개가 저택을 감쌌다.

새빨간 연기를 가르면서 뛰쳐나오는 괴물들.

"크르르르. 컹!"

"신선한 피를 내놓아라."

네 발을 앞뒤로 움직이며 빠르게 거리를 좁힌 늑대인간.

창백한 안색의 사내, 흡혈귀들은 5미터 정도 떠오른 채로 일행을 노렸다.

"저희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거 맞죠?"

"아마도."

"음. 지휘는 유진 님이 해주세요."

"괜찮겠나?"

"사부의 주인이잖아요. 그리고 뽀시래기 팀이 4명이니 그게 맞겠죠."

"좋아. 반드시 살아서 나가게 해주마."

괴물들의 숫자는 40마리.

어럽쇼.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오기보단 간을 좀 보시겠다?

'블러드 골렘과 조승철은 이따 꺼내야겠어.'

[철의 무덤] 공략 때 아라한 공격대 앞에서 블러드 골렘을 선보였지만.

유진은 전력을 노출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레리크들의 피를 흡수하면서 한층 더 강해졌으니.

노골적인 탐색전에 이쪽 패를 모조리 공개할 필요는 없잖아.

"일단 버프부터 걸자고."

[뇌기를 품은 떡갈나무 스태프]를 높이 들고는 백야로 스탯을 전환.

연속으로 신성 주문을 전개했다.

[거인의 힘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3성 맞아요? 무슨 주문 영창 속도가 이렇게 빨라."

"게이트에 문제없이 입장한 거 보면 모르냐."

유진은 가볍게 핀잔했다.

탐색전이라.

오히려 좋아.

장미선과 호흡을 맞춰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 아니 대련은 지겹도록 했지만 같은 팀으로 싸우는 건 다르거든.

놈들이 총력으로 나섰으면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

"장미선과 강민호를 전위, 남은 두 사람은 후위로 명칭을 통일한다."

"넵!"

"전위는 10보 전진. 후위는 뱀파이어 견제. 다가오지 못하게만 해도 돼."

앞으로 나서는 두 사람.

강민영은 [동조]와 [염력]으로 석궁 3개를 들어 올렸고.

이성민도 마력을 재배열했다.

"컹! 컹!"

"강민호는 5보 전진 후 이동요새를 사용해라. 1초 후에 장미선은 혜성질주로 난입."

초 단위로 내려진 명령.

강민호는 시키는 대로 걸어간 후, 방패에 마력을 집중했다.

[가속]

[야생의 질주]

정면으로 달려들던 늑대인간들의 속도가 2배 이상 가속.

눈 깜짝할 사이에 강민호의 앞에 짓쳐들었다.

[이동요새]

[강격]

마력과 힘의 방출 시점을 완벽하게 일치시킨 공격.

넓은 방패에서 솟구친 푸른 섬광이 늑대인간들을 뒤덮고.

"깨개갱!"

선두에서 달려든 늑대인간 여섯 마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큰 피해는 아니었다.

동일한 성위의 적이었으면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부러트릴 만큼의 충격이었지만.

늑대인간들은 3성.

강민호보다 성위가 한 단계 높았다.

[유성검]

[혜성질주]

번쩍-.

돌풍을 휘감은 칼이 허공에 기다란 궤적을 남기고.

충격파에 맞고 쓰러진 늑대인간들의 목덜미에 붉은 선이 그어지더니.

푸아아악-!

머리가 분리되면서 피분수를 뿜어냈다.

"크르릉! 컹!"

뒤따라오던 늑대인간들도 가속.

막 검을 휘둘러서 무방비해진 장미선을 향해 날선 이를 드러낼 때.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아가리를 쫙 벌린 늑대인간의 앞을 회색 방벽이 가로막고.

미처 이빨을 거둘 틈도 없이 콰지직- 결계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쩌어엉-!

근접 충격을 일부 되돌려주는 효과.

늑대인간들은 골이 흔들리는 충격에 뒷걸음질 쳤다.

"인간. 제법이다."

"그 피는 무슨 맛일까?"

후위의 견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던 흡혈귀들이 본격적으로 나섰다.

점점 빨라지는 비행속도.

늑대인간들에게 발이 묶인 전위는 흡혈귀들을 막을 수 없었다.

"이성민은 방패 전개. 강민영, 동조와 염력 사용."

"예, 예!"

[공간 - 방출]

텅, 텅, 텅.

은으로 코팅한 방패 여럿이 바닥에 떨어지고.

강민영은 막 꺼낸 방패들을 염력으로 조종해서 덧대었다.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저주받은 이빨을 휘감은 영력.

공허의 파편 덕분에 강화된 마법의 창이 흡혈귀 하나를 꿰뚫었다.

"컥, 커억!"

"왜 그러지? 비틀거리고 있지 않나."

뱀파이어도 마찬가지로 3성의 몬스터.

유진은 평범한 마법 / 신관계 헌터보다 마력(성력) 수치가 훨씬 높다.

그뿐이랴.

[뇌기를 품은 떡갈나무 스태프]로 강화되기까지 한 마법.

[저주받은 이빨]이라는 우수한 매개체까지 사용했으니, 이름 없는 뱀파이어쯤은 일격에 격살할 수 있었다.

"카악! 죽여!"

"네놈의 피를 모두 빨아주마!"

성난 뱀파이어들을 맞이한 건 [동조]와 [염력]으로 조종하는 방패.

유진은 타이밍을 맞춰 [부정 충격 방패]까지 전개했다.

펑- 퍼퍼펑-.

탱커가 들고 있는 것도 아닌, 고작 염력으로 지탱한 방패에 튕겨난 뱀파이어들.

쇄액-!

저주받은 이빨들이 놈들의 숨통을 하나씩 끊었고.

늑대인간들도 전위에 선 두 사람의 활약과 유진의 오더, 그리고 적재적소에 펼쳐진 신성 주문에 말려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사람. 지휘를 왜 이렇게 잘 하는 거야?!'

장미선은 속으로 경악했다.

73화 함정인 줄 알면, 더 이상 함정이 아니다(3)

첫 전투는 압승으로 끝났다.

일행 중 누구도 부상 하나 입지 않고 몬스터 40마리를 도륙.

유진과 장미선을 제외하면 성위가 낮음에도, 각자의 특기를 살려서 전투 내내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늑대인간이 힘은 좋네요."

"내 공격은 잘 먹히지도 않는다고."

"선배는 은화살이라도 쓰니 괜찮지 말입니다. 전 아님다."

방금 전 싸움을 복기하는 세 사람.

장미선은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유진을 바라봤다.

"방금 전에 내렸던 오더. 뭐예요?"

"뭐기는. 효율적으로 싸우는 법을 지시한 것뿐이다."

"유진 님의 지휘능력은 유망주 수준이 아니라 불사조 1군 선배들보다도 뛰어났다고요."

"비교할 만한 감은 있네."

네크로맨서에게 중요한 덕목이야, 추려보면 몇 가지 있겠지만.

유진은 전장을 보는 '눈'을 첫 번째로 꼽았다.

생전보다 모자라는 언데드들의 판단력.

[합일]로 강화한 망자들이나 상급 언데드면 모를까.

하급이나 중급은 지휘를 놓치면 엉뚱한 행동을 저지르기 일쑤다.

'고작 다섯 명을 지휘하는 건 일도 아니거든.'

회귀 전에는 부관 하나 없이 만 단위의 군대를 홀로 지휘하기도 했다.

뽀시래기 팀은 각자의 특성을 진즉에 파악했고.

파주 공방에서 두들겨 맞은 덕에 장미선의 특기와 스킬 셋도 대충 파악했다.

'3성으로 올라간 만큼의 스탯을 계산하면 대충 끝나지.'

이중 게이트?

로마노프 가문의 도움을 받아서 만든 함정?

아라한 공격대?

'돌파하기에는 충분한 전력.'

견적을 모두 뽑아낸 유진의 입가 위로 미소가 번졌다.

"어때. 믿을 수 있겠나?"

"믿었으니까 처음부터 지휘를 맡겼죠. 이젠 확신이 생겼고요."

"시간 끌 거 없이 바로 가자고."

"저, 형님. 시체들은 그냥 두고 가시는 겁니까?"

"수중의 패는 바로 까는 게 아니다."

아라한 공격대는 유진의 진정한 특기를 알지 못했다.

세 게이트를 공략할 때, 파프너 선에서 대부분 정리되었기 때문.

이유를 모르는 장미선만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

고풍스러운 저택.

송명석은 3층 건물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참 고생들 하는군요."

전투를 마친 유진 일행이 망막에 비친다.

핏빛 안개가 시야를 차단하지만, 송명석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른손에 들려 있는 나선 형태의 붉은 크리스탈.

보스 몬스터와 동화되었을 게이트 핵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늑대인간 40, 흡혈귀 30마리를 더 보내세요."

"Yes. My Lord."

"크르르르."

평범한 늑대인간보다 머리 하나 높이만큼 더 큰 괴물.

옆에 선 뾰족한 이빨의 사내가 송명석의 명령에 수긍했다.

이중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

[미친 늑대인간]과 [굶주린 흡혈귀]다.

"부사장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이런 것까지 준비하고."

두 게이트의 핵을 엮어서 만든 제어장치.

보스 몬스터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게이트의 구조를 바꾸는 등, 여러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

송명석은 이중 게이트에 진입하자마자 구조를 직렬로 변경.

양 갈래로 나뉘어 있던 몬스터들을 집결시키고 유진 일행을 맞이했다.

"팀장님.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요?"

"그럼 저들을 놔주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되묻는 송명석의 차가운 말투에 질문을 꺼낸 팀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쉴 새 없이 붉은 크리스탈을 만지작거리는 오른손.

대답을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입을 뻥긋거릴 뿐,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침묵의 서약을 했습니다."

게이트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바깥에 떠들지 않을 것.

마법 명가로 불리는 로마노프 가문의 마법사의 입회하에 진행한 계약이다.

게이트를 임의로 조정하는 능력.

세간에 퍼지면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킬 게 분명했고.

또한, 이 안에서 벌어질 '사고'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저분들은 서약을 맺지 않았군요."

"맞습니다."

"비밀이 외부로 나가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중 게이트 자체가 함정이란 이야기는 쏙 빼버린 송명석.

그럼에도.

팀원은 그 부분을 지적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 송명석 팀장님. 근데 몬스터를 나눠서 보낼 필요가 있을지."

"사냥은 급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이트 입구 뒤로는 공간이 없다.

몬스터들을 지배함으로써 얻은 수적 우위도 한 면이 막힌 상태에서는 재미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때 본 골렘을 정면에 세워놓으면 꽤나 귀찮아지겠죠."

송명석은 분노에 눈이 흐려지지 않았다.

그의 열등감을 부추긴 두 사람을 매장시키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몬스터들을 나눠서 보내는 것도 이유가 있는 법.

"변이된 게이트를 조사하려면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럼 체력을 소모시켜서······."

"지금이라도 이해하니 다행이군요.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으니."

게이트는 일정 주기마다 몬스터를 재생성한다.

순차 투입해서 몬스터를 소모해도 얼마 안 돼서 후속 병력이 채워진다는 사실.

반면에 유진 일행의 전력은 한정되어 있다.

"거듭해서 전투를 벌이다 보면 체력과 마력이 깎일 겁니다."

"저들이 기진맥진할 때 공격하면 되겠군요."

송명석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선행한 공략 팀의 정보가 무용지물이 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공략의 정석대로 움직일 게 분명했다.

저택을 핏빛 안개로 감싼 것도 유진 일행의 과감한 행동을 봉쇄하는 역할.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무턱대고 나서진 못할 겁니다."

송명석의 눈가 위로 번들거리는 살기.

아라한 공격대원들은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불똥이 튀었다간 유진 일행처럼 개 먹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좀먹었다.

'장미선, 그리고 천유진. 당신들은 특히 고통스럽게 죽여 드리겠습니다.'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길을 망가트린 두 사람.

꽈악-.

붉은 크리스탈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제6식]

[전력 찌르기를 사용합니다.]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의 빛살.

크게 벌어진 늑대인간의 입속으로 들어간 뼈창은 연한 피부를 찢고 뇌까지 헤집어 놓았다.

"끅, 끄르륵."

머리를 관통당한 늑대인간이 몇 번 꿈틀거리고는 축 늘어졌다.

"자식. 더럽게 무겁네."

뼈창을 회수한 유진이 입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한 손이 열 손을 못 막듯.

둘뿐인 전위로는 득달같이 몰려오는 늑대인간들을 모두 마크할 수 없었다.

그때 나선 게 유진.

[본 월을 사용합니다.]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알음알음 챙겨둔 촉매로 늑대인간들의 진로를 막고.

뼈 벽을 돌파한 놈들은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으로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올린 능력치는 무투계 헌터와 버금갔고.

생물에게 디버프로 작용하는 [부정한 축복]도 자신한테는 해가 되지 않으니, 3중 버프로 떡칠했으니.

여러 마리가 몰려들지 않는 한 위험할 일은 없었다.

"유진 님. 대체 클래스가 뭐예요?"

"신관인 거 알면서 왜 묻냐."

"무슨 신관이 뼈를 다루고 창도 잘 쓰고, 지휘까지 잘해."

장미선이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형님. 벌써 7번째군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겠다는 거다."

유진은 태연하게 대꾸하곤 늑대인간과 흡혈귀의 시체에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했다.

숨이 끊어진 적한테는 생기 갈취 효율이 떨어지지만.

5번이나 이어진 습격 덕분에 시체가 넘쳐났고, 생명력을 충분히 빨아들였다.

[해당 종족의 생명력으로는 더 이상 능력치를 올릴 수 없습니다.]

[획득한 스탯]

[힘 : 25.5]

[민첩 : 16.6]

[체력 : 22.3]

[맷집 : 27.9]

[영력 : 42.1]

총합 134.4.

3성이 되면서 레벨 업 보너스가 20으로 늘었으니, 생기 흡수만으로 6레벨을 올린 것과 동일한 능력치를 획득했다.

'강한 몬스터일수록 주는 능력치도 늘어난다.'

헌터들이 영약에 환장하는 것도 레벨 업 외의 방법으로 스탯을 늘릴 수 있어서다.

라이프 드레인은 영약 없이도 능력치를 계속 끌어올리는 게 가능한 스킬이니.

다시 생각해봐도 파격적인 신성 주문이란 말이야.

스탯을 모두 올린 후에도, 빨아들인 생기는 유용하게 쓰였다.

"휴. 덕분에 힘이 나네요."

강민호가 편해진 안색으로 말했다.

라이프 드레인은 축적한 생기를 체력 / 회복 / 마력 등 어떤 쪽으로도 치환이 가능한 신성 주문.

전투 직후의 피로감도 시체에서 빨아들인 생기로 날려주었다.

"정신적인 피로감은 해줄 수 없어. 컨디션 관리 잘해라."

"옙."

유진은 일행의 체력과 정신력 관리도 철저하게 했다.

소모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 유지.

작은 실수 하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게 전장이다.

언데드들은 집중력이 흐트러질 일이 없으니 신경을 안 써도 되지만, 인간은 꾸준히 신경 써야 한다.

'공략을 마칠 때까진 충분하겠어.'

게이트의 규모는 소.

내부에 배치된 몬스터 숫자에도 한계가 있다.

게이트에서 다시 빚어낸다지만, 한 번에 몇백 마리씩 재생성되는 것도 아니었고.

'놈들도 전력에 한계는 있다.'

몬스터들의 숫자가 일정 이하로 떨어지면 전면전에 나설 수밖에 없으리라.

유진은 그때를 기다리며 차근차근 몬스터들을 쓰러트렸다.

"지칠 만도 한데. 왜 이렇게 멀쩡해 보이지?"

"천유진. 신관이 맞긴 한 건가. 창 다루는 솜씨가 무투계급이잖아."

"남은 팀원들은 어쩌고? 그 파프너인가 하는 소환수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저번 공략 때보다 훨씬 잘 싸우네."

"팀장님. 이제 남은 몬스터는 100마리 정도입니다."

송명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진 일행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몬스터들을 투입했지만.

전투를 거듭할수록 서로의 팀워크가 좋아지는 것만 느껴질 뿐.

거듭되는 싸움에도 지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팀원의 질문이 귀에 들어오자, 송명석은 충동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고픈 욕구.

송명석은 까득- 이를 갈면서 화를 가라앉혔다.

"어찌 되었든 체력이나 마력을 꽤 소모했을 겁니다. 정면으로 나서죠."

"저택을 끼고 수성하는 편이 어떨지요."

"아라한의 이름을 달고 겁쟁이처럼 숨어있자는 겁니까?"

날선 목소리에 팀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몬스터들을 축차 투입한 건 본인이면서 왜 나한테 지랄이야!'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하는 것도 아니고.

억울한 마음에 한 마디를 내뱉으려는 순간.

칼자루 위에 올려놓은 손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준비하세요."

한기가 서린 지시에 마지못해 무장을 점검하는 아라한 공격대.

팀원들이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송명석은 못 본 척하며 붉은 크리스탈을 만지작거렸다.

"남은 몬스터들을 집결시켜라."

흡혈귀 51마리.

늑대인간 53마리.

보스 몬스터 둘.

그리고 아라한 공격대 5인.

잔여 병력을 모조리 끌어 모은 송명석은 자신 있게 나섰다.

끼이이익-!

굳게 닫혀있던 저택의 문이 열리고.

시야를 현혹시키던 핏빛 안개가 흩어졌다.

활짝 열린 문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괴물 집단.

장미선은 몬스터들 사이에 섞여 있는 아라한 공격대를 보더니 짧게 탄식했다.

"아까 하신 말씀. 안 믿고 싶었는데 정말이었네요."

"가능성의 문제다."

송명석이 두 사람의 대화를 주워듣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짐작하고 있었습니까?"

"아라한이 배후라는 것쯤은. 방법이야 모르지."

"감이 좋군요. 천유진 헌터."

"파프너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 거. 너무 티가 많이 났잖아."

크흐흐.

유진은 비릿한 웃음을 드리웠다.

거 참,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어도 말이지. 수상한 냄새를 대놓고 풍기는데 어떻게 그러겠냐.

"알았으면 그때라도 빠지시지. 제 발로 함정에 들어오다니. 어리석군요."

"함정인 줄 알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작 다섯 명으로 몬스터 100마리와 보스 둘, 그리고 우리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압도적인 숫자 차이.

순차적으로 몬스터를 투입해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전력 차는 명백해보였다.

"······라고 생각하겠지."

유진은 킬킬거리곤 [뇌전을 품은 떡갈나무 지팡이]를 높이 추켜세웠다.

스스스슷-!

공허의 파편에 응집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영기.

"내 부름에 답하라."

회색 광석에서 솟구친 음침한 빛이 전장을 휩쓸고.

-그어어어억!

폐부에 남은 공기를 쥐어 짜낸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신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74화 함정인 줄 알면, 더 이상 함정이 아니다(4)

[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리터너 87구를 제작했습니다.]

[레이즈 데드를 사용합니다.]

[스켈레톤 메이지 72구를 제작했습니다.]

[완성도가 높습니다. 능력치가 53% 상승합니다.]

큭-.

과도한 영력 소모에 초점이 마구 흔들린다.

지팡이에 몸을 기대지 않으면 설 수조차 없을 정도.

'남은 영력이 5%도 안 되나.'

미리 계산한 소모 값에서 큰 차이가 나진 않는군.

곧바로 [백야]를 사용.

축적해둔 생명력으로 바닥 직전인 성력(영력)을 채우고는 재차 백야로 스탯을 전환했다.

-그겔겔.

-그오오오오!!!

늑대인간들의 시체는 리터너로.

마법 능력을 지닌 흡혈귀들은 스켈레톤 메이지로 되살아났다.

"어, 언데드라고?!!"

"팀장님. 적의 숫자가 100기를 넘어섰습니다."

아라한 공격대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네크로맨서는 현 시대 기준으로 전직 루트가 알려지지 않은 직업군.

그라운드 제로에서 언데드를 부린 적은 있지만 마담이 소문을 통제한 덕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불사조와 아라한 길드에서도 파프너를 소환수라고 생각했으니.

'아직 안 끝났다. 자식들아.'

[골렘 연성 – 서먼 블러드 골렘을 사용합니다.]

[죽은 자의 관에 보관한 시체를 꺼냅니다.]

피를 육체 삼는 5미터의 거인.

그리고 시커먼 영력을 로브처럼 두른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하신 주인님께 영광을!]

「명령 대기 중.」

장미선은 블러드 골렘과 조승철을 보더니 흠- 하곤 신음을 흘렸다.

'이 사람은 도대체 몇 가지 능력을 가진 거야?'

피를 매개 삼아 만든 골렘이라니.

MIS – 4 엔진이 뿜어내는 강렬한 마력 파장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조승철도 마찬가지.

영력을 실체화시켜서 만든 로브를 보고 있자니, 불길한 마음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꽉 쥐었다.

"팀장님. 포위되었습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빌어먹을. 나한테 묻지만 말고 생각이란 걸 하란 말입니다. 개자식들아!"

한껏 일그러진 송명석의 표정.

늘 예의 바르고 친절한 모습이 아닌, 가면 아래에 숨겨온 본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미안해. 형. 싸인 받은 거 나가는 대로 버릴게."

"재수 없으니까 불태워라."

"알았어요."

까득-.

송명석은 다시 한번 이를 갈면서 앞으로 나섰다.

"다 이겼다고 생각합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공대는 집어치우지."

"나 같은 사람이 너 따위랑 말을 섞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십시오."

"이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야겠네."

스르릉-.

칼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시퍼런 빛을 흩뿌렸다.

"당신만큼은 제 손으로 반드시 죽여 드리겠습니다."

"이중 게이트를 만들 때부터 그 생각 해놓고는 굳이 입 아프게 떠드네."

유진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주둥이로 싸우지 말고 덤벼. 아라한의 초신성 씨."

"크아아아아!!!"

눈을 부릅뜬 송명석이 군집에서 이탈, 정면으로 달려들자 아라한 공격대도 부랴부랴 뒤를 따랐다.

무너져가는 대열.

"아라한은 맡겨두마. 조금만 버티면 금방 합류하지."

"초신성 씨는 제가 맡을게요."

"남은 녀석들은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겠습니다."

비장한 표정을 짓는 뽀시래기 팀.

걱정 마라.

사생결단도 아니고, 발을 잡는 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하수인들아. 내 적을 짓밟아버려라."

-그어억.

-겔겔. 죽어라.

유진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괴물들을 향해 달려가는 언데드 군대.

"컹! 컹!"

"먹을 게 없는 놈들. 더러우니 꺼져라."

늑대인간과 흡혈귀들이 맞서면서 본격적인 전투의 막이 올랐다.

*

-그으으으으.

늑대인간의 시체로 만든 리터너가 생전의 동족을 물어뜯는다.

허공에 튀는 핏방울.

리터너에게 물린 괴물도 손 놓고 당하지는 않았다.

서걱-!

벼려낸 도검만큼이나 날카로운 손톱으로 망자의 몸뚱이를 난도질했고.

언데드와 몬스터는 서로를 붙든 채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모든 힘을 쥐어짜냈다.

[다크 미사일]

[포이즌 애로우]

....

스켈레톤 메이지들은 원거리 포격으로 몬스터 군집을 견제.

막 공중으로 떠오른 흡혈귀들은 자신들의 피를 뽑아서 방어벽을 펼쳤다.

"키하핫. 잔재주로는 나를 못 죽인다."

흡혈귀 하나가 재빠르게 이동.

쏟아지는 투사체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진형 후위에 있는 스켈레톤 메이지들을 노렸다.

[파이어볼]

콰아아아앙-!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음.

거미 사냥 때 획득했던 지팡이, GB(그레이베이스) - R5 타입에서 솟구친 불덩어리가 흡혈귀를 일격에 소멸시켰다.

[위대하신 주인의 명이다. 너희는 벗어날 수 없다.]

조승철은 턱뼈를 들썩거렸다.

4성의 극에 도달한 헌터와 비등한 마력 스탯.

[마력 순환] 특성과 준수한 아이템 성능이 더해지면서 흡혈귀 따위는 한 방에 소멸시킬 만한 위력이 나왔다.

콰직- 쿵!

두 무리가 본격적으로 충돌.

서로 얽히면서 피아 구분이 어려운 난전으로 이어졌다.

꾸드드득-.

리터너의 목을 물고는, 그대로 머리까지 뽑아버리는 늑대인간.

숫자는 언데드가 더 많았지만, 각 개체의 기량은 몬스터 측이 더 높았다.

'일일이 시체의 강화 수치를 높이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언데드들의 완성도가 평소보다 떨어지는 이유.

그렇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았다.

"내 부름에 답하라."

리터너들의 억척스러운 손길에 목이 꺾인 늑대인간.

마법 공격을 연달아 맞고 쓰러진 흡혈귀.

그리고.

송명석이 일행의 힘을 뺄 요량으로 나눠 투입했던 몬스터들의 시체까지.

망자로 되살릴 매개체는 사방에 널렸다.

'네크로맨서와 소모전을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마.'

이중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너희. 못 지나간다.」

준 4성급의 괴물들이 협공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블러드 골렘.

레리크의 피를 흡수함으로써 4성의 극, 아니 준 5성 수준으로 강화되었다.

"Wryyyyy!!!"

"크허헝!"

두 보스 몬스터들을 지휘해야 할 송명석은 분노에 눈이 멀어 적진으로 돌입해버렸으니.

블러드 골렘에게 발이 묶인 채, 힘겨운 전투를 이어갔다.

'몬스터들은 이쯤이면 됐고.'

유진의 시선이 가까운 곳으로 움직였다.

채앵! 챙!

허공에서 격돌하는 세 자루의 검.

차기 검성과 아라한의 초신성으로 명성을 떨친 두 사람이 격돌했고.

그보다 이름값은 떨어질지라도, 국내 1위 길드의 유망주로 불리는 이들과 대등하게 싸우는 뽀시래기 팀이 그의 망막에 비쳤다.

*

"비키십시오. 뒈지기 싫으면!"

"안 비켜도 죽잖아. 그러면 당신 말을 들을 필요가 없네."

"다시 말하겠습니다. 편안하게 죽고 싶으면...."

"아, 진짜. 유진 님 말대로 주둥이로만 싸울 거야?"

후우우웅-!

휘몰아치는 돌풍.

장미선은 바람검의 능력으로 공기의 흐름에 간섭, 송명석을 향해 쏘아 보냈다.

바람 가닥마다 실린 마력.

오러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맨몸으로 받아낼 수준은 아니었다.

쌍검으로 돌풍을 베어낸 송명석이 으르렁거렸다.

"개 같은 것! 왜 내 앞을 막고 지랄입니까!"

"너 말이야.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장미선이 기가 찬 듯 뾰족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유성검을 펼쳤다.

"나 죽일 생각으로 이런 짓까지 해놓고. 뭐가 억울해?"

"당신이나 저들 같은 범재들이 천재의 마음을 무슨 수로 이해하겠습니까."

"헛소리 천재라면 이해해줄게."

두 천재가 조금의 양보도 없이 백중세의 공방을 주고받을 때.

뽀시래기 팀은 지닌 역량을 모조리 쥐어짜내 아라한 공격대를 붙들었다.

퍼어엉-!

[이동요새]와 [강격]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발생한 충격파.

아라한 공격대 4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전열을 흩트릴 정도의 충격은 되었다.

"우릴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쾌진격]

사용자의 육체를 화살처럼 쏘아 보내는 강력한 돌진기.

그 반동으로 충격 일부가 몸에 누적되지만 탱킹 스킬 무효화에 속도도 빨라서 유용한 스킬이다.

잔상과 함께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무투계 헌터가 강민호를 지나쳐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너희 모두 죽ㅇ...."

[공간 – 방출]

[마법 스크롤 : 디그]

유진에게 배운 아공간 특성의 또 다른 활용법이 펼쳐졌다.

발동 직전 상태의 마법 스크롤을 아공간에 담아두고는 필요할 때 방출.

재배열 과정을 마친 스크롤이 즉시 발동되었다.

마법사용 전조도 없이 푹 꺼진 땅.

쾌진격으로 파고든 헌터가 발을 헛디디면서 5미터 아래로 고꾸라졌다.

[동조]

[염력]

공중에 떠오른 석궁 셋의 방아쇠가 동시에 당겨지고.

수직으로 내리꽂은 화살들이 갑주의 이음새 사이에 파고들었다.

한 발은 몸부림치는 헌터의 갑주에 막혀서 튕겨났지만.

푹-.

남은 두 발은 아킬레스건과 겨드랑이에 꽂혔다.

비명과 함께 주저앉은 무투계 헌터.

성위 격차에 따른 스탯 보정으로 치명상을 면했지만 아킬레스건에 상처를 입어 구멍 위로 도약할 힘을 잃어버렸다.

"성인 씨!"

"개자식들. 비겁한 짓을!"

분노로 몸을 잘게 떠는 아라한 공격대.

강민영이 풋, 하고는 비웃었다.

"3성이나 되는 분들이 2성 따위한테 달려드는 건 정당한가 봐?"

"선배. 저런 사람들이 꼭 내로남불 엄청나지 말임다."

"어쩌겠어. 실력이 부족하면 말이라도 잘해야지."

어느새 싸움 가운데 말하는 게 유진을 닮아가고 있는 뽀시래기 팀.

송명석만큼은 아니어도 길드에서 미래를 이끌 유망주라고 불리며 여러 지원까지 받았던 이들이다.

"진짜 죽일 거다!"

"너희들 용서 안 해!"

아라한 공격대는 훈련받은 포지션 대신 격정에 몸을 맡긴 채, 무작정 달려들었다.

태앵! 탱!

세 사람은 유진과 파프너에게 배운 대로 스킬을 펼쳤다.

한 명이라도 실수하면 끝.

아라한 공격대가 냉정함을 잃었다지만, 여전히 스펙은 훨씬 앞섰다.

'마력 방출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춰야 한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끝이다.'

'다각도에서 견제해야 오빠가 충격파를 펼칠 틈이 생겨.'

'급하면 바로 스크롤을 꺼내야 함다.'

접경지역에서 보낸 며칠.

파주 공방에서 파프너에게 덤볐던 일.

그리고 이중 게이트 진입 후 유진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순간까지.

지금까지 쌓은 경험들이 뽀시래기 팀의 잠재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고.

각자 지닌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실수 한 번 없이 완벽하게 대응.

아라한 공격대의 발을 묶었다.

"씨, 어째서 2성 헌터들 따위한테!"

"방어 주문이 늦잖아. 이런 상황에서 무슨 수로 마법을 준비하라고!"

"너희가 제대로 견제를 못하니 이 모양이지."

반면 싸움이 길어지면서 팀워크가 꼬여만 가는 아라한 공격대.

마음이 급해지니 이젠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그 순간.

"잘 버텨줬다."

저주받은 이빨로 꿰뚫어놓은 시체 몇 구가 아라한 공격대 사이에 떨어졌고.

[시체 폭발을 사용합니다.]

쿠아아아앙-!!

영력을 한계치까지 담아낸 뼈와 핏방울, 그리고 살점이 아라한 공격대 셋을 휩쓸었다.

비명조차 낼 틈도 없었다.

미리 전개했던 방어 주문은 종이처럼 찢겨나가고.

아라한 길드가 지급한 레어 등급 아이템들도 폭발에는 무용지물이었으니.

"형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와. 진짜 힘들었어."

"스크롤도 바닥나서 더 버티기 어려웠슴다."

긴장이 풀린 세 사람은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성위 하나의 간극을 넘어선 싸움.

4대3으로 인원수까지 모자랐음에도, 뽀시래기 팀은 제 역할 이상을 해냈다.

"빌어먹을!!"

송명석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확 기울어버린 전세.

그가 장미선에게 붙들려 있는 동안 몬스터들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들었고.

아라한 공격대도 방금 전 폭발에 휩쓸려서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내가 죽는다고?'

인정할 수 없다.

고작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쓰러지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것 같은가!

송명석은 쌍검을 X자로 휘두르면서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매서운 기세에 장미선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때.

"하, 하하하. 간단하네. 게이트 공략을 해버리면 되는 거잖아!"

주머니에서 꺼낸 붉은 크리스탈을 쥐고는 크게 웃었다.

보스 몬스터들에게서 추출해낸 게이트 핵.

오른손에 힘을 주기만 하면.

이중 게이트를 유지하는 힘이 사라지면서 출구가 나타나리라.

'살 수 있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기회는 오리라.

송명석은 그렇게 되뇌며 힘을 주려 했다.

[엑토플라즈마를 사용합니다.]

[영적 기운이 대상의 감각을 교란합니다.]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속이 울렁거리고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한 발 늦게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을 깨달은 송명석이 갑주의 옵션을 발동.

몸에 깃든 저주를 완전히 소멸시켰지만.

서거걱-!

장미선은 유진이 만들어준 한순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짓쳐든 후, 유성검으로 송명석의 오른팔을 베었다.

"어?"

송명석은 바닥에 떨어진 오른팔을 멍하니 바라봤다.

잘린 팔에서 느껴지는 격통.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게이트의 핵.

어느 것 하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하하- 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살아서 다신 보지 말자."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멍하니 서 있는 송명석의 목덜미에 박힌 저주받은 이빨.

아라한의 초신성은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75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1)

대구에 나타난 변종 게이트.

극히 드물게 비슷한 좌표에 생성된 두 균열이 하나로 합쳐진 현상.

일명 이중 게이트가 공략되었다는 소식은 매스컴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충격! 아라한의 초신성이 저물다]

[공략을 성공시킨 주력, 뽀시래기 팀은 누구?]

[차기 검성, 자신은 무능했다고 고백.]

[공략의 주역인 천유진은 누구?]

······.

"초신성이면 그, 누구더라. 송명석 아니야?"

"헐. 나 그 헌터 화보집도 샀는데."

"중국의 무왕하고 똑같은 고유 특성을 타고 났다 했잖아."

"우리나라에서도 가문 하나 나오는 거 아니냐고 말 많았었는데."

"호들갑으로 끝났네. 크."

아라한 공격대의 전멸 소식은 헌터 업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무왕 창 우페이에 이어 두 번째로 천골 특성을 보유한 헌터의 사망.

헌터의 수준 = 국력으로 여겨지는 시대에서는 뼈아픈 소식이었다.

"근데 뽀시래기? 이 팀은 뭐하는 애들이람."

"아라한 길드가 직접 의뢰해서 게이트를 공동으로 폐쇄한 적도 있고."

"차기 검성이 자기보다 강하다고 인정했대."

"장미선? 송명석이랑 최근에 대결했다가 이긴 헌터잖아."

"대박. 왜 이런 헌터들이 여태 안 알려졌대?"

이중 게이트 공략에서 벌어진 참극은 또 다른 소식에 금방 묻히고 말았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뽀시래기 팀.

길드 소속도 아니요.

큰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헌터들이 불쑥 나온 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런 헌터들이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요새 좀 괜찮은 신인 나왔다 하면 대형 길드에서 낚아채잖아."

"불사조에서 섭외하는 거 아닌가?"

"아니지. 송명석도 죽었겠다, 아라한에서 돈을 풀지도 몰라."

"그 초신성 몸값이 500억이지 않았나."

"초신성도 죽은 게이트를 공략했으니 그 이상?!"

"미쳤네."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계기로 존재감을 드러낸 신인 헌터 팀.

공략에 참여하지 않았던 3강, 새벽 길드부터 뽀시래기 팀과 접선을 시도한다는 찌라시가 퍼졌고.

이외에도 국내에서 인지도 높은 대형 길드 여럿이 대형 신인을 섭외하려고 자금 확보에 열을 올렸다.

"다른 헌터는 몰라도 천유진, 이자만큼은 반드시 미르로 데려와야 한다."

"송명석을 꺾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아라한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섭외해야 해."

"천유진 헌터를 포섭하기만 해도 몇 년 뒤에는 우리 길드가 3강을 노려볼 만하지 않겠어?"

대형 길드들은 아라한과 뽀시래기 팀의 협업에 숨겨진 진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게이트 공략 중에 벌어진 일이야, 당시에 입장했던 헌터들 말고는 알 수 없지만.

부산물들을 처리하는 과정은 어느 정도 노출되기 마련.

이중 게이트 사건은 대형 길드 관계자들의 짐작을 확신으로 만들어주었다.

"뽀시래기 팀 소재 파악부터 해."

"친인척이나 지인들도!"

"무조건 다른 길드보다 먼저 접선해야 한다!"

헌터 업계에 풀린 대형 매물.

뽀시래기 팀의 활약상에 국내 언론 및 대형 길드들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

"······이렇게 공략을 마쳤습니다."

장미선은 이중 게이트 공략 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했다.

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신음을 흘린 김영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으, 뜨거워라."

"마스터의 원소 저항력이 얼마인데. 그걸로 엄살을 피우세요?"

"커피 본연의 맛을 느끼려면 억눌러야지."

헛소리를 내뱉으면서 태연하게 커피를 음미한 후.

김영수는 다시 입술을 떼었다.

"두 갈래 길이었던 게이트 구조가 변했다고 했지?"

"사전조사하고는 다르더라고요."

"먼저 진입했던 아라한 공격대가 기습당했고. 후발대가 자리 잡을 때까지 분전하다가 사망했다, 라."

그 과정에서 아라한 공격대 전원이 사망.

특히 송명석은 늑대인간들의 손톱에 찢겨서 시체도 건지지 못했다는 것이 장미선의 보고였다.

나머지 시체들, 그리고 송명석의 장비만 겨우 수습해서 아라한 길드에 인계.

"덕분에 공식적으로는, 아라한에 빚을 지운 셈이 되었지."

"공식적이요?"

"비공식적인 건 좀 다르잖아."

김영수는 입가에 드리웠던 미소를 지운 후, 진중한 음색으로 말했다.

"대외용으로 내보낼 이야기는 거기까지만 하자."

"티 났어요?"

"너는 거짓말할 때 꼭 왼쪽 눈을 깜빡이더라."

"아하하. 신경 좀 써야겠네."

장미선이 너털웃음을 짓자, 김영수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라한 길드 소속 헌터들이 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후발대를 지켜주었다?

굳이 장미선의 습관을 지적하지 않아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중 게이트, 그 자체가 함정이었어요."

장미선은 공략 때 벌어진 진상을 하나도 빼지 않고 이야기했다.

게이트 구조의 변형.

몬스터들을 지배하에 둔 아라한 길드가 일행을 공격한 것.

그리고.

유진의 활약상까지.

"처음 했던 게이트 공략 보고는 그 친구의 활약상을 덮어주려고 둘러댄 거니?"

"으음. 천유진 님 아니었으면 거기서 죽었을 거니까요."

대외적으로 알려진 유진의 포지션은 신관.

성천 기업 막내딸을 치유한 이야기는 대형 길드들 사이에 비밀도 아니었다.

유진의 소환수인 파프너의 활약상도 알음알음 소문이 났고.

장미선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무턱대고 파주 공방에 찾아가지 않았던가?

"완전히 잘못된 정보였군."

김영수는 입을 다문 채, 신음을 삼켰다.

시체를 부리는 신관?

정말 신관이 맞기는 한 건가.

오히려 게이트 내에서 발굴되는 문헌에 언급된 마법계 직업, '네크로맨서'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미선아. 네 말이 맞는다면 헌터 업계는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다."

"무슨 착각이요?"

"아라한은 2달 전부터 그 자를 조사하던 중이더구나."

대구의 이중 게이트가 아라한의 함정이었다면.

불사조에서 유진 일행을 포섭했을 때, 이미 조사한 내용에 근거해서 전력을 보강했을 것이다.

"유진 님의 능력을 모두 파악했으면 그에 맞춰 준비했겠네요?"

"그랬겠지."

"와. 대박. 아라한을 작정하고 속이다니."

대외활동 때 네크로맨서 능력을 철저하게 감춘 유진.

회귀 직후에나 [고대의 정원]과 [잊힌 신전]을 공략할 때 언데드들을 대놓고 부렸지.

그 뒤로는 사람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접경지대나 그라운드 제로에서 본 실력을 발휘했다.

앞서 벌어진 일들을 김영수가 알진 못했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파악했다.

"천유진 헌터는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꿀꺽-.

장미선은 침을 꼴깍 삼켰다.

"무서운 사람이네요."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말이다."

"이번 사건으로 아라한 길드랑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을 건데. 제가 한번 섭외해볼까요?"

"그 자는 어떤 길드에서도 품을 수 없는 그릇이다. 건들지 않는 게 나아."

"와아- 소문으로만 들었던 길드장님의 감 맞죠?"

"도대체 어떤 소문이 난 건지."

짧게 투덜거린 김영수.

하지만.

마냥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사조의 감.

헌터업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다.

불사조가 국내 3대 길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김영수의 안목 덕분.

유능한 헌터를 섭외하고.

그 사람에게 알맞은 지원과 훈련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아라한이나 새벽 길드에 비해 길드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인재를 알아보는 '감' 덕분에 실질적인 무력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별명도 있던데. 그걸로 불러드릴까요?"

"그러다가 혼난다."

"췌."

입술을 내민 장미선.

김영수는 조카뻘 되는 길드의 유망주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

"미선아. 부탁 하나만 하자."

"우선 들어보고 할지 말지 결정할게요."

"틈틈이 천유진 헌터하고 교류할 수 있겠니?"

"길드 섭외는 어려울 거라고 하셨잖아요."

"불사조로 데려오라는 게 아니다. 친해지란 거지."

장미선의 머리 위에 떠오른 의문부호.

"그거나 이 말이나. 같은 의미 아니에요?"

"내 품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서, 꼭 적이 되리란 법은 없단다."

장미선과 송명석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재능을 지닌 헌터.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힘을 숨기는 지혜와 때가 되었을 때 힘을 드러내는 과감함까지 지녔다.

아군으로 삼을 수 없어도.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파트너로 삼으면 되지 않겠는가.

"음. 아무리 그래도 불사조 길드장님이랑 유진 님을 동등한 선에 놓기는 좀······."

"가능성을 보고 미리 투자하는 거란다."

호재가 100% 확정된 기업이 있으면?

모든 재산을 털어서라도 주식을 구매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이 딱 저점이다."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우호적인 관계로 남는 것이 최선이다.

김영수는 새 유망주의 등장에 왠지 모를 설렘을 느끼며 빙그레 웃었다.

*

공략을 마친 후, 유진 일행은 파주 공방으로 돌아왔다.

"동업자님! 여긴 연금술 공방입니다. 사랑방이 아니라고요!"

"명색이 블랙 컴퍼니 이사님이잖아.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자고."

"아, 아오. 그 말은 당신이 할 게 아니죠!"

신준석은 잔뜩 화난 얼굴로 바깥을 가리켰다.

울타리 너머로 바글거리는 사람들.

중급 포션 투자 건보다 2배, 아니 3배가 넘는 인파가 공방 앞을 빼곡하게 채웠다.

"뽀시래기 팀 계시죠?"

"천유진 헌터님!!! 이번 게이트 공략에서 큰 활약을 하셨죠!"

"YNN에서 나왔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미르 길ㄷ······."

"한국대 40학번 강민호! 나 38학번 선배 김······."

전통시장도 여기보단 덜 시끄럽겠군.

유진은 킬킬거렸다.

"사람 사는 냄새도 나고 좋잖아."

"두 번 좋으면 살인나겠네요. 저 말리지 마십쇼."

"오냐. 절대로 안 말리마."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유진의 말솜씨에 신준석이 코를 벌름거리며 씩씩거렸다.

뒤에 있는 강민호가 눈치를 슬슬 보더니.

"형님. 저희가 여기 있으면 연금술사님께 민폐가 아닐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그럼 네크로폴리스나 그라운드 제로로 갈까?"

라는 유진의 말에 곧바로 대답을 못했다.

망설임으로 흔들리는 눈동자.

그래도 용기 내어 입을 떼려고 할 때.

"악-."

"형. 우리도 여기가 좋아."

강민영이 쌍둥이 오빠를 꼬집으며 헛소리를 원천봉쇄했다.

"참. 동업자 양반."

"왜요. 사람 냄새 나는 거 좋아하는 분."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 저번에 끓였던 비율 기억나지?"

"제가 누굽니까. 당연하죠."

"10kg만 세팅해줘. 쓸 데가 있어서."

"맨입으로?"

이 양반이 못 보던 사이에 혀가 짧아졌네.

마침 새로운 연금술을 전수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됐다.

"블러드 골렘 연구는 성과가 있나?"

"대략적인 매커니즘은 이해했습니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말씀은······?"

"이번 일이 끝나면 골렘 연성 스킬을 전수해주마."

신준석의 얼굴에 감돌았던 짜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턱에 수염 난 아저씨가 저러니 좀······.

"조금만 기다리십쇼. 제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신준석은 날아다닐 것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공방에 들어갔다.

'이쪽도 작업을 시작해볼까.'

〔호오. 드디어 그 작은 인간을 되살리려 하느냐?〕

'어. 다른 사람 눈에 들어오면 곤란하니까 파주 공방만 한 데가 없지.'

유진은 주위를 살펴보고는 흑암의 반지에 보관해둔 시체를 꺼냈다.

몬스터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진 것으로 알려진 송명석의 최후.

실제로는 목에 뚫린 커다란 구멍 말고는 눈에 띠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8성의 자질을 보유한 시체. 이걸 어떻게 참냐?'

〔안타깝구나. 짐은 그에게서 영웅의 자질을 보았다고 생각했건만.〕

'사람 보는 눈 좀 키우셔야겠어.'

크흐흐흐.

유진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먼저 살점지배로 주검의 근육과 살, 그리고 가죽까지 모두 걷어내곤.

[데드 라이즈를 사용합니다.]

[스켈레톤 워리어를 재작했습니다.]

뼈만 남은 시체에 영력을 부여해서 스켈레톤 워리어로 되살린 후, 게이트에서 망령으로 복속시킨 놈의 혼백을 불어넣었다.

찌릿-!

망자와 생전의 영혼이 일체화되는 과정에서 강한 저항이 발생, 유진의 힘을 밀어낸다.

붉은 거미 간부들을 상대로 [합일]시키는 것보다 몇 배나 심한 반발력.

송명석의 혼백이 앞서 되살린 두 사람보다 훨씬 강력한 파장을 지닌 탓이었다.

'네놈이 버텨봤자.'

[다크 콜링]으로 제작한 망령은 유진에게 종속되어 있다.

영력 일부를 빼서 송명석의 혼백을 쥐어짜내자.

-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오고.

합일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항력도 눈에 띄게 옅어졌다.

[스켈레톤 워리어와 혼백이 일체화되었습니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본인의 이름(송명석)을 자각합니다.]

-그겔?

송명석의 육체로 제작한 스켈레톤 워리어.

신체능력은 네크로폴리스에서 제작한 최형태보다 조금 떨어졌다.

〔일전에 되살린 작은 인간보다 나약하다니. 그대도 실수라는 것을 하는구나.〕

'난 그런 거 안 해.'

사망 당시를 기준으로 5성인 최형태.

당연히 현재 스펙만 보면 송명석이 뒤떨어질 수밖에.

하급 언데드라서 그렇지, 중급 언데드로 만들었으면 최형태가 더 강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미래의 가능성을 이 몸뚱이에 새기는 거다.'

[천골(天骨)]

스켈레톤 워리어에게는 존재할 수 없는, 협회 기준 최상위 고유 특성이 송명석에게 있었다.

합일이 아니었으면 저 능력도 사라졌겠지.

"준비 끝났습니다!"

타이밍을 딱 맞춰 온 신준석.

그 덕에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작업을 이어갈 수 있겠다.

'네가 자랑스럽게 여긴 재능. 헛되이 날아가지 않게 해주마.'

유진은 탐욕스러운 눈으로 뼈만 남은 송명석의 신체를 훑어보았다.

76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2)

"이번에도 뼈를 갈아 끼우는 겁니까?"

"그 시술도 하고. 다른 곳에도 쓸 데가 있다."

시술 첫 단계는 조승철을 다크 미니언으로 개조하는 과정과 동일했다.

뼈 몇 개를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로 교체.

신준석은 철 위에 마력 회로를 새기던 중에 음- 하고는 신음을 흘렸다.

"이 방향이 맞습니까? 저번이랑 다른걸요."

"기억하고 있네."

"동업자님이 시키는 건 이상하게 다 기억나더군요."

"이러다가 내 노하우도 싹 가져가겠어."

"그래도 됩니까?"

신준석의 농담에 킬킬거린 유진이 재차 입술을 떼었다.

"영력의 흐름을 바깥과 동조시킬 거다."

"바깥이라면...? 아!"

이해가 빨라서 좋군.

한 가지를 알려주면 열을 깨닫는 총명함.

배우고자 하는 열정까지 넘쳐나니, 가르칠 맛이 나는 연금술 노ㅇ... 아니. 파트너다.

"바깥?"

"공기라도 붙드는 거 아니겠슴까."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움직이는 뽀시래기 팀.

지켜보면 알게 될 거다.

마력 집속 회로를 모두 새긴 후, 이번에는 헌터마켓에서 구매한 싸구려 철검 두 자루와 갑주 하나를 내려놓았다.

"복제할 수 있겠나."

"그 정도쯤이야."

[연금술식]

[분석]

유진도 습득한 연금술의 기본 스킬.

철검 두 자루, 그리고 갑주의 형태와 구조를 마력으로 파악한 후.

[연금술식]

[금속 제어 – 형태 변환]

신준석은 흐물흐물해진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에 마력을 부여.

뇌리에 새긴 무기와 방어구의 구조를 본떠 동일한 구조로 형태를 짰다.

금속에 간섭해서 사용자의 의념대로 주물럭거리는 술식.

난이도가 높지만 한 치의 오차 없이 철검과 갑주 복제를 마쳤다.

"색다른 경험이군요. 물건을 복제한다니."

"훌륭하군. 첫 시도가 맞나 의심될 정도의 완성도다."

유진은 복제한 철검을 쥐어보더니 아낌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뭐? 아이템이 복사가 된다고?"

"저도 연금술사 할 걸 이랬지 말임다."

강민영과 이성민이 부러운 듯 중얼거리자, 신준석이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근데 이 병기들. 실전성은 없는 거 알죠?"

마력으로 구조를 이해, 그대로 복제한다고 해도 제 성능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우선 재료부터 달랐고.

담금질이나 주조처럼 철을 제련하는 과정도 생략되었으며.

헌터용 무기라면 필수인 마력 회로 매설 같은 작업도 되어 있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휘둘렀다간 바로 동강 날겁니다."

"무엇이든 쉬운 건 없네요."

"오빠. 그런 생각 안 한 것처럼 말한다?"

"흠. 의미를 모르겠네."

"선배. 치사하게 혼자만 빠지는 건 아니지 말입니다."

강민호를 같은 수준으로 옭아매는 두 사람.

유진은 피식 웃은 후, 신준석이 복제한 철검과 갑주를 송명석에게 착용시켰다.

[연금술식]

[강화 회로를 사용합니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로 만든 갑주와 철검, 그리고 갈아끼운 뼈를 잇는 회로.

깅화 회로를 새기고는 바로 영력을 불어넣었다.

스스슷-!

노도와 같은 기세로 마력 집속진을 꼭짓점 삼아 송명석의 뼈 여기저기로 순환하는 영력.

조승철을 다크 미니언으로 승급시킨 때와 마찬가지 반응이다.

'여기서 끝나면 안 되지.'

불어넣은 영력의 방향을 위로 살짝 틀었다.

어깨와 맞닿은 갑주로 이어진 강화 회로가 영력을 자연스럽게 인도.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로 제작한 갑주를 타고 순환하고는 반대쪽 어깨를 타서 다시 뼈 속으로 넘어갔다.

손에 쥔 쌍검도 마찬가지.

영력은 '철검'과 '갑주'도 송명석의 신체 부위로 인식했다.

〔굳이 저 무장들을 사용하지 않고 복제한 까닭이 여기에 있구나.〕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로 무장시켜줄 게 아니면 이게 최선이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는 언데드와 궁합이 좋다.

시술 포인트는 송명석의 혼백이 [금속 변환]으로 빚어낸 쇳조각, 아니 무장을 자신의 육신이라고 인식하는 것.

그 과정만 통과하면....

철컥- 철컥-.

어깨뼈 위에 얹어놓고, 강화 회로로 연결시켜놓은 갑주가 송명석의 체구에 맞춰 변형되었고.

손에 쥐고 있던 칼, 정확히는 칼 모양을 딴 쇳조각 일부가 스며들면서 기사의 건틀릿처럼 변했다.

화르르륵-!

동공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글거리는 푸른 귀화.

[스켈레톤 워리어(송명석)가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스켈레톤 나이트로 승급합니다.]

하급 언데드를 넘어서 '자아'를 가진 중급 언데드로 승급했다는 증거다.

"날 알아보겠나?"

[천유진.]

"그래. 반갑다. 아라한의 초신성 씨."

[예. 주군.]

한 템포 느린 반응.

조승철과 다르게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언데드로 되살린 터라 유진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어. 괜찮아. 학습할 시간은 많으니까."

생전의 원한을 가지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영혼으로 이어진 끈.

놈의 의지와 분노가 얼마나 강하더라도.

9번째 성위를 완성시킨 유진보다 굳건한 정신력을 지니지는 못했으니.

[크아아악!]

숨이 붙어있는 인간처럼 생생한 비명을 지르는 스켈레톤 나이트(송명석).

유진은 뼈다귀를 건들지 않고, 직접 연결된 영혼의 끈을 자극했다.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흐읏, 흐으읏.]

걱정 마.

네 자아를 날려버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다.

8성의 재능을 보유한 인재에게서 자유의사를 빼앗으면 어떻게 되겠어?

그저 그런 스켈레톤 나이트 A로 남는 거지.

"대신에 서열정리는 확실하게 하자."

유진의 한쪽 입술만 씰룩이면서 흉흉한 미소를 자아냈다.

*

[충성을 맹세합니다.]

혼을 울리는 사념.

사소한 의견 대립이 있었지만, 송명석은 금세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칼날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드는 자세.

기사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충성의 서약이다.

품위가 느껴지는 모습.

"오냐. 잘 받았다."

반면에 서약을 받는 당사자는 경박한 투로 대꾸했다.

〔계약자여. 나중에 다른 마음을 품으면 어찌 하려고 그러느냐?〕

'저 맹세는 영혼에 새겨지는 거다. 이미 굴종해버린 이상, 마음을 바꾸긴 쉽지 않다.'

유진의 언데드 장악력은 절대적이다.

그가 정신을 잃거나 제어 능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송명석은 방금 내뱉은 맹세를 어기지 못했다.

[스켈레톤 나이트(송명석)]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651 / 민첩 : 560(-100) / 체력 : 473(+200) / 맷집 : 444(+250) / 영력 : 375(+100)

◎특성

▷천골[고유] / 쌍수호박[A] / 경계를 넘은 자[B] / 불사의 존재[C+] / 불사의 지휘관[C+] / 무기의 달인[C+]

◎스킬

▷광뇌보[A] / 분광검[A] / 듀얼 블레이드[B] / 암흑 투기[B]

휘황찬란한 특성과 스킬들.

천골은 워낙 유명하니 넘어간다 쳐도, A급 특성인 쌍수호박도 지니고 있을 줄은 생각 못했다.

〔쌍수호박?〕

'양손이 서로 치고받는다는 특성. 오른손과 왼손으로 각각 다른 기예를 펼칠 수 있다.'

쌍수호박에 무기의 달인까지 있으니 쌍검을 주특기로 고를 만했다.

익힌 스킬들도 하나 같이 어마어마했다.

분광검과 광뇌보는 회귀 전에도 송명석의 성명절기로 악명을 떨쳤었다.

자력으로 얻었을 리는 없으니 아라한의 투자라고 봐야겠지.

'숙련도가 낮은 건 두 스킬의 진가가 오러 운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겠지.'

듀얼 블레이드도 굉장히 강력한 스킬들이다.

참.

휘황찬란한 등급을 보니 뽀시래기 팀과 비교되네.

'우리 애들은 기껏해야 D나 E급 스킬로 연명하는데.'

그렇게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했던 유망주가 덜컥 숨져버렸다.

스킬 세팅을 보면 아라한에서 송명석의 죽음을 얼마나 안타까워 할지 짐작도 안 가는군.

〔계약자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겠구나.〕

'자업자득이다.'

유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회귀 전보다 아라한과 충돌하는 시기가 훨씬 빨라졌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미래의 구룡방 간부를 제거했고.

그 시체는 되살려서 충실한 부하로 삼았다.

착실하게 시술을 하다 보면 회귀 전의 파프너, 그러니까 박하늘 씨처럼 둠 나이트를 넘어 헬 나이트가 될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자질!

'하여간 아낌없이 주는 친구들이야.'

받은 것도 많겠다.

이 은혜는 두고두고 기억해서 편안하게 죽여주는 걸로 보답해야겠다.

부우웅- 부우우웅-.

[발신자 – 성천 기업 회장]

진성현 회장.

1달 전쯤인가, 목내이병으로 고생하는 딸을 구해달란 의뢰를 했던 기업가다.

치료 후에는 아라한 길드에서 유진을 주시하고 있단 정보도 알려주는 등 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꾸준히 내비치기도 했다.

"천유진입니다."

-아, 성자님! 먼저 이중 게이트 공략을 축하드립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멀쩡합니다. 걱정해주시니 감사하군요."

-허허. 직접 뵙고 무용담이라도 듣고 싶은 마음이지만... 급히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아라한 길드와 관련됐나 봅니다."

-벌써 짐작하고 계시는군요. 성자님의 팀원들 친인척에게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쯧.

단조로운 녀석을. 패턴이 변하질 않아요.

회귀 전에도 지겹게 경험했던 아라한 길드의 접근법이다.

당사자가 길드 가입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 주변인들에게 자본을 뿌려서 흔드는 것.

섭외할 헌터를 테이블 앞으로는 끄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놈들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알려주십쇼."

-다음이라면.

"나찰 길드가 움직일 때요."

-거기까지도 알고 계셨습니까?

"잡지식이 꽤 많거든요."

나찰 길드.

길드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한국에서 악명이 높은 범죄집단이다.

부산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며 돈이 되는 건 종류를 가리지 않는 흉악한 집단.

'실은 아라한 부사장이 키워낸 조직이다.'

현 시대에는 아라한과 나찰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진성현 회장도 마담을 통해서 겨우 확인한 극비정보.

-하긴. 그 아이가 성자님을 고평가하고 있으니, 당연히 아셨겠군요.

유진은 임 회장의 오해를 굳이 바로잡진 않았다.

정보 출처가 미래의 자신이라고 설명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때가 되면 알려주십쇼."

-성자님을 도울 수 있으니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뚝-.

〔저 작은 인간들의 가족들이 해를 입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

'당장은 큰 일 없을 거다.'

나찰 길드가 움직이지 않으면 됐다.

아라한에게 매수 당한 친인척들 때문에 마음고생 좀 하겠지만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니까.

'조만간 그쪽도 한번 들를 생각이었는데 잘 됐어.'

현생에서도 아라한 길드하고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전력 차가 명백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체급 차이가 나는데 정면으로 싸워줄 필요는 없다.

'차근차근 갉아먹어주마.'

미래의 지식과 힘.

누구한테 두들겨 맞는지도 모르고 힘이 쭉 빠질 거다.

유진은 킬킬거렸다.

*

와장장창-!

방 한가운데에서 불어닥친 마력의 회오리가 유리창을 산산조각 냈다.

유형화된 마력에 깃든 어마어마한 살기.

푸른 기류의 폭풍에 걸리면 의자고 책상이고 할 것 없이 찢겨나갔다.

크가각-.

[아라한 길드 부사장 - 백성현]이라는 명패마저 수십 갈래로 쪼개졌을 때.

마력 폭풍을 일으킨 사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천유진. 그 자가 모든 것을 망쳤다.'

로마노프 가문의 힘을 빌어서 만든 이중 게이트.

변수는 없었다.

장미선이 최근 대련에서 송명석을 앞질렀다지만, 둘의 기량은 종이 한 장 차이.

이중 게이트의 몬스터들까지 합세하면 승부는 뻔했다.

'길드에서 송명석에게 투자한 것이 얼마였거늘.'

A급 스킬 분광검과 광뇌보.

송명석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투자해놓은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공식 보고?

백성현은 잘 꾸며놓은 헛소리를 한 마디도 믿지 않았다.

'웃기는 소리. 송명석이 언제부터 정의로운 인물이었다고?'

송명석의 이미지는 본인이 꾸미기도 했지만, 길드 차원에서 메이킹했다.

늘 웃고 있는 눈동자 안에 야망이 꿈틀거리는 것쯤.

백성현은 진즉에 눈치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주변인들을 건드려보고, 안 되면 다음 수단을 써야한다.'

천유진은 송명석조차 뛰어넘는 슈퍼 루키다.

무왕의 자질을 타고 난 녀석도 압도한 유망주가 성장한다면?

차후 아라한 길드의 행보에 크나큰 위협이 될 것이다.

똑똑똑-.

"부사장님. 로마노프 가문에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문을 연 비서가 헙- 탄식을 내뱉으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방 안의 집기 중 멀쩡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

의자며 책상, 화분, PC 할 것 없이 모조리 푸른 기류에 휩쓸려서 쪼개져 있었다.

노란 머리카락에 푸른 눈.

그리고 하얀 피부에 새긴 까마귀 문신이 인상적인 중년 사내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많이 흥분하셨나 봅니다."

"수양이 부족하군요. 못 볼 꼴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감정을 분출하는 것도 더 높은 성위를 추구하는 과정 아니겠습니까?"

로마노프 가문의 방문자.

아라한 길드의 요청으로 대구에 이중 게이트를 만든 장본인이 손가락을 퉁겼다.

[윈드 커튼]

바람의 막으로 투사체를 막는 3성 마법.

그 마법을 영창이나 마력 재배열 과정 없이 손가락 한번 퉁기는 것으로 펼쳤다.

백성현은 방을 감싼 바람 막을 보고 흠- 신음을 삼켰다.

'단순한 무영창이 아니군.'

바람 막의 구조에 간섭, 방을 감싸는 형태로 전개해서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마법왕 드미트리의 가문은 역시 다른 건가.

끝을 모르는 저력에 소름이 끼쳤다.

"대화가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중 게이트에서 열쇠를 회수하지 못한 겁니까?"

"불사조에서 파괴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로마노프 가문의 방문자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중 게이트의 핵을 추출한 붉은 크리스탈.

그 물건은 가문에서도 귀하게 여기기에, 반드시 회수했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시는 겁니까?"

"예. 가주님께 이번 일을 보고드려야 하니까요."

백성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은밀히 로마노프 가문과 선을 대고 있던 아라한 길드.

붉은 크리스탈 파손 건은 이후 로마노프 가문과 교류를 할 때 두고두고 길드의 위신을 깎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다음에 뵐 때까지 강녕하시길."

몸을 홱 돌리고 나가는 로마노프 가문의 방문자.

그럼에도.

백성현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이미 파괴된 붉은 크리스탈의 대체제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천유진...!!'

결국.

백성현은 이번 사태의 원흉을 다시 읊조리며 분을 삭였다.

77화 성유물

"하압!"

방패를 어깨에 견착한 후, 온몸의 힘을 싣는 강민호.

푸른 섬광과 함께 발생한 충격파가 송명석의 전신을 압박한다.

[느립니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로 만든 검.

칼 모양만 잡아놓은 수준일진대, 그의 손에 들린 후로는 장인의 손을 거친 명검처럼 서늘한 예기가 감돌았다.

[분광검(分光劍)]

[5초식 – 적광검(赤光劍)]

암흑 투기를 실어내지 않았음에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예기.

스켈레톤 나이트로 되살아난 송명석은 충격파의 중심을 베어내면서 힘을 양쪽으로 분단.

그 사이로 발생한 틈을 놓치지 않고 전진했다.

"누가 가만히 둔대!"

정수리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는 화살.

[동조]와 [염력]으로 공중에 띄운 석궁들의 시위가 일제히 당겨졌고.

통상적으로는 노릴 수 없는 각도로 발사돼서 송명석의 움직임을 제한하려 했다.

[이래서 범재들이란. 하찮은 공격으로 어쩌겠다는 겁니까?]

채챙!

일격으로 화살 셋을 모조리 쳐낸 송명석이 귀찮은 투로 말했다.

풋, 하고는 짧게 웃은 강민영.

"하찮은 거 신경 써줘서 고마워."

[공간 – 해방]

[블레이즈 x 3]

푸른 귀화가 화살의 궤적을 쫓는 순간.

지근거리에 생성된 아공간에서 화염 줄기가 연속으로 솟구쳤다.

"이거나 먹어라!"

2성급 화염마법.

이성민은 헌터마켓에서 새로 구매한 마법을 아공간에 미리 저장, 송명석이 빈틈을 드러내는 순간 방출했다.

방출 위치를 지정하려고 가까이 접근하는 위험까지 무릅쓴 공격.

[그러니까 말했잖습니까. 범재들의 생각이야 뻔합니다.]

[쌍수호박]

[분광검 – 4초식 녹광검]

[듀얼 블레이드]

빛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왼손.

시선을 아래로 돌릴 것도 없이, 옆구리로 쇄도하는 불꽃을 잘랐다.

칼에 암흑 투기를 실어내지 않았음에도.

검격에 담긴 묘리와 힘, 그리고 불꽃의 흐름을 읽어내어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마법을 베어낸 것이다.

파팟-!

지면을 박찬 송명석이 거리를 좁히자, 강민호도 방패를 다시 한번 추켜세우며 어깨에 바짝 붙이려고 했다.

송명석의 푸른 귀화에 아른거리는 조롱기.

[느리군요.]

강민호가 힘을 싣기 직전에 파고든 칼날.

큰 저항 없이 방패를 아래로 젖히고는 더 힘을 주어 목덜미 앞까지 검을 밀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너희들의 수준. 잘 알았습니다.]

"...."

[시시해서 죽고 싶어지는군요.]

유진에게 굴복했음에도, 송명석의 오만한 성정은 바뀌지 않았다.

도리어 망자로 되살아나면서 지금껏 써온 가면을 벗어버리고 본성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근데 말이야.

시시해서 죽고 싶다는 말, 파프너가 먼저 쓰지 않았니?

"너 힘 몇 %나 썼냐."

[40%입니다. 주군이시여.]

"지랄. 40%를 안 썼겠지."

[그, 그걸 어떻게!]

"아주 내 눈이 옹이구멍으로 보이나 봐."

유진의 투덜거림에 푸른 귀화가 바람에 나부끼듯 좌우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군!]

"방금 그 말. 내가 믿어도 되는 거 맞냐?"

[속하가 잠시 착오를 일으켰습니다. 60%의 능력을 사용했습니다.]

"4성이나 되는 놈이. 2성 셋 상대하면서 힘을 절반 이상이나 써놓고 잘난 척하면 되겠나."

[....]

"다음 대련 땐 30%만 써라."

[그러다간 속하가 패배의 쓴 잔을 마실지도!]

"아. 싫으면 조교 당하든가."

엄지와 중지를 마주한 자세, 핑거 스냅을 하려고 손가락에 힘을 줄 때.

[속하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사념을 퍼트리며 한쪽 무릎을 지면에 대었다.

스켈레톤 나이트 특유의 복종 자세.

"그런데 넌 말투가 왜 그러냐?"

[어린 시절에 무협 드라마를 좋아한 영향인 듯합니다.]

"무의식의 발로인가."

생전에는 존댓말을 그렇게 잘 쓰고 다니더만, 이렇게까지 사후의 모습과 간극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게 진정한 송명석의 모습이... 라기에는 중2병 기질이 있어 보이는데.

'능력만 좋으면 됐지.'

유진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흠.

아니. 조금은 부끄러울지도.

"30% 잘 유지해라. 아까처럼 30%만 안 썼다 하면 가만 안 둘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송명석과 뽀시래기 팀이 겨루고 있을 때.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에 잡히는 작은 수정.

나선으로 꼬여 있는 붉은 크리스탈을 쥐고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건 이중 게이트의 핵 아니더냐?〕

'정확히는 추출한 게이트 핵을 담아둔 촉매다.'

〔파괴한 줄 알았건만, 용케 그걸 온전히 둔 상태로 게이트를 벗어났구나.〕

'이 아까운 걸 부술 순 없지.'

〔그러고 보니 수정에서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만.〕

'신력으로 빚어낸 거니까.'

유진의 태연한 대꾸에 크로노스가 화들짝 놀랐다.

〔방금 신력이라고 하였느냐?〕

'어. 룬 문자로 신력을 붙들어서 만든 거다.'

처음으로 마법이라는 개념을 창시한 성좌.

붉은 크리스탈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딘의 룬(Rune) 문자가 보인다.

게이트의 핵을 탈취하고 몬스터들조차 부리는 능력.

마법보다는 이적에 가까운 힘이다.

'로마노프 가문에서는 이걸 쐐기돌이라고 불렀지.'

〔쐐기돌?〕

'게이트의 근간을 뽑아낸다, 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들었다.'

〔핵을 추출하여 게이트 제어 권한을 손에 넣는 기능을 지녔으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구나.〕

'뭐, 이름의 유래는 알바가 아니지만.'

미간을 찌푸리는 유진.

로마노프 가문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면 무엇을 고민하는 게냐?〕

'쐐기돌을 어디에 쓰면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따로 계획이 없다면 짐에게 내주는 것은 어떻겠느냐.〕

'어디에 쓰게?'

〔짐의 거처도 지었으니, 이제는 상징만 만들면 되느니라.〕

성좌의 상징.

곧 성유물 제작을 언급하는 크로노스.

유진이 두 눈을 껌뻑였다.

'성좌님하고는 계통이 다르잖아.'

〔크하하핫. 짐을 누구로 보는 게냐. 다 계획이 있도다.〕

본인이 이렇게까지 자신 있다는데 나름대로 근거가 있겠지.

떨떠름한 기색을 버리지 못한 유진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뭘 하면 되나?'

〔보자꾸나. 짐이 주관하는 영역을 고려하면 뼈를 주재료로 삼으면 좋을 터인데.〕

'이건 어때.'

회귀하고 나서 처음으로 얻은 레어 아이템.

원념의 지팡이를 꺼내드니 크로노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제법 괜찮은 뼈다귀로구나. 특히 지팡이에 깃든 사념이 강한 것이 마음에 들도다.〕

쐐기돌과 원념의 지팡이에 스며드는 기운.

드미트리의 전신을 둘렀던 〔아우라〕와 흡사한 파장이다.

'다음 순서는 뭐지?'

〔신명(神名)에 어울리는 형태를 떠올려보려무나.〕

'역천의 거인과 맞는 이미지라.'

잠깐.

명색이 성유물을 만드신다던 분이 생김새 하나 고민 안 했어?

'성좌님 취향에 맞아야지. 내가 고민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크하하핫. 짐은 떠오르는 것이 없더구나.〕

'자랑스럽게 말하지 말고. 당신도 같이 고민해.'

〔밥상을 차려주었으면 떠먹는 건 계약자의 몫이니라.〕

'그건 책임 전가잖아!'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후, 크로노스가 내준 과제를 생각해 보았다.

타이밍이 생뚱맞을 뿐.

성유물 제작 자체는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신전 건축과 성유물 제작. 두 가지를 완수하면 크로노스가 온전한 성좌로 자리 잡는다고 했지.'

그렇게 되면 성좌의 가호를 내려주는 것도 조만간일 터.

회귀 전부터 소망했던 힘.

로마노프 가문을 비롯한 7대 명가에게 닿을 만한 이빨이자, 유진이 채우지 못했었던 마지막 조각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성유물 자체의 성능도 무시 못 할 테고.'

크로노스의 회중시계처럼 이적을 일으키는 수준은 기대도 안 한다.

성유물이 지닌 강함은 성좌의 위업과 관련되어 있으니.

등급 분류표로는 [유일]보다 더 높게 치지만, 모든 성유물이 초월이나 유일 등급 아티팩트만큼 강력하진 않다.

이번에 크로노스의 성유물을 제작해도 마찬가지겠지.

'자. 문제는 성유물의 형태인데.'

본론으로 돌아오자.

역천의 거인을 상징하는 표식.

그와 동시에 유진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실용적인 아티팩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만한 게....

〔명심하여라. 짐의 성질과 주관하는 영역을 모두 만족하는 상징이어야 할지니.〕

'대충 해. 언제까지 이런 걸로 고민하고 있어?'

〔계약자.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성좌님은 보조나 해줘. 시간 끌 생각 없으니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아이디어.

오른손에는 쐐기돌을.

왼손에 [원념의 지팡이]를 들었다.

너무나도 과감한 유진의 행동에 기겁한 크로노스가 제지하려고 할 때.

유진은 한 발 빠르게 성유물의 형태를 떠올리며 두 물체를 세게 부딪쳤다.

*

쐐기돌과 부딪친 원념의 지팡이.

큰 충격음이 터져 나와야 할 상황이지만, 출렁이는 감촉과 함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저항감 없이 뼈 지팡이에 스며든 붉은 크리스탈.

[사용자가 떠올린 형태로 물질을 변화시킵니다.]

원념의 지팡이 끝에 달려 있던 해골이 흐물흐물해지더니 쭉 늘어났다.

길게 뻗은 뼈는 이내 곡선으로 휘어지면서 날을 세웠고.

해골이 있던 위치에는 쐐기석이 자리를 잡았다.

[역천의 거인이 쐐기돌에 간섭합니다.]

[쐐기돌에 깃든 신력은 거인의 혈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역천의 거인도 신력에 간섭 가능합니다.]

'아. 오딘도 거인의 후손이었지?'

태고의 거인 이미르의 후손이면서도 선대 거인들을 몰살시키고 아스가르드를 창설한 성좌.

그 피에 흐르는 거인의 개념을 이용한 건가.

크로노스는 오늘날 '거인'의 대명사가 된 티탄의 왕.

마법 소양은 오딘보다 뒤떨어져도, 거인이라는 기원만 놓고 보면 그를 앞섰다.

'쐐기돌을 보고 자신만만할 만했네.

〔크하하하핫. 짐의 위대함을 이제야 체감... 아니지, 그래서 대체 무얼 만든 게냐?〕

'죽음 하면 역시 낫이잖아.'

서양에서 흔히 떠올리는 사신의 이미지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검은 로브와 해골.

그리고 낫.

'밀이나 보리를 거두는 도구. 그렇기에 사람의 목숨도 수확해간다는 의미다.'

크로노스가 관장하는 영역은 죽음을 거스르는 것.

순리를 역행하나, 동시에 죽어가는 이들이 품는 '살고 싶다.'는 염원과 한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후대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거스르면서도, 동시에 죽음과 떼놓을 수 없는 표리일체라고 봐야겠지.

'내가 9번째 성위를 완성하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네크로맨서들은 죽음을 거스르는 힘을 만든 것이 아니다.

이미 세상에 존재했던 영혼의 힘, 영력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제창한 것뿐.

〔그러니 죽음 하면 떠오르는 상징을 짐의 성유물로 삼겠다?〕

'어때. 그럴싸하지 않나.'

〔크하하하핫! 훌륭하도다. 과연 짐의 계약자다운 통찰력을 지녔구나!!〕

박장대소하는 크로노스.

유진이 내놓은 해답이 마음에 드는 듯, 한참 동안을 웃었다.

〔한데 그거 아느냐?〕

'주제는 던져줘야 알든 말든 하지.'

〔본래 짐의 성유물은 하나가 더 있느니라.〕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낫. 스퀴테.

크로노스는 그 낫으로 무수한 목숨들을 거두었으며, 한편으로는 필멸자들의 수확을 돕기도 했다.

〔스퀴테에 비할 바는 아니나, 짐의 기원과도 알맞으니 참으러 훌륭하지 않느냐.〕

'만족하셨으면 다행이지.'

단순히 사신의 낫을 생각한 건데.

이런 걸 보고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지.

'잘 만들어졌는지 성능이나 보자고.'

유진은 뼈 낫을 손에 쥔 후, 능력치를 확인했다.

[사신의 낫 – ■■■]

등급 : 성유물

분류 : 무기

내구도 : 444/444

성좌 역천의 거인의 성유물입니다.

타 성좌의 신력을 기반 삼아 만들었으며, 쌓은 위업이나 설화가 없어서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진정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때 성유물의 힘도 완전해집니다.

*언데드 지휘 능력 + 30%. 이 효과는 성유물을 소유하기만 해도 적용됩니다.

*지휘 중인 언데드의 능력 + 20%. 이 효과는 성유물을 소유하기만 해도 적용됩니다.

*〔역천의 거인〕이 하사한 신성 주문 사용 시 효과 및 지속시간이 20% 증가합니다.

"미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극찬.

성유물을 직접 쥐고 사용하지 않아도 적용되는 상시 버프라고?!

공허의 파편을 꽂아 넣은 지팡이보다 스펙이 떨어진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유물이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면 얼마나 좋아지려나?'

이건 뭐, 짐작도 안 가는군.

크흐흐흐.

유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

78화 부산으로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틀을 갖춘 성유물.

역시 아라한 길드야.

베풂에 있어서는 하나도 아끼지 않고 다 퍼준단 말이지?

'이 사장님. 장사 이렇게 하면 남는 게 있나 모르겠네.'

꺼억.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계약자여. 차후 계획은 무엇이더냐?〕

'당장은 가로챌 기연도 없고. 그라운드 제로에서 세력을 갈무리할 생각이었다만....'

〔생각이었다만?〕

'전력이 보강됐으니 행동 반경을 넓혀도 되지 않을까.'

원 계획은 잠시 숨고르기를 할 생각이었다.

단기간에 너무 많이 영역을 넓힌 상황.

그 때문에 파프너를 수비에 돌리는 등, 전력 감소로 더 과감하게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그라운드 제로와 접경지역, 그리고 연평도까지.'

붉은 거미의 사업체 중 일부만 먹으려고 했던 계획은 군소 규모 조직들의 난동으로 실패.

암상과 마담의 조력을 받아 거미의 영역 대부분을 먹었다.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게 접경지역이지만 개성 쪽 외에도 존재하는 구)북한군 잔재를 막아낼 완충지대로 삼아야 하니 유지할 생각이다.

애꾸눈 같은 변수가 생기면 미련 없이 포기해야겠지만 말이야.

'현 시점에서 제일 중요한 곳은 연평도다.'

경기도 연안의 흐름을 좌우하는 요충지.

회귀 전의 역사대로라면 머지않은 시기에 인간사냥꾼들이 바다를 건너는 데 성공, 연평도를 손에 넣지 않았던가.

유진이 개입함으로써 섬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놈들이 그 정도 변수로 욕심을 놓을 리 없다.

'파프너를 빼면 연평도 방어가 성립이 안 돼.'

지리적 이점 말고도 연평도를 지켜야 할 이유는 많다.

크로노스를 모시는 신전이 있고.

수시로 출몰하는 레리크 덕에 하위 용족의 비늘이나 힘줄 같은 희귀 부산물을 주기적으로 수급하는 공급처다.

전력 소모를 감수하면서까지 파프너를 연평도에 배치한 이유.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람?'

이중 게이트 공략에서 얻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성유물로 언데드 군대의 질과 규모가 모두 올라갔고.

[내가 한낱 범재들에게 밀릴 리...!]

말하는 건 못 미덥지만, 송명석이라는 강력한 전력 하나가 추가되었다.

용린갑을 착용한 파프너보단 2수 아래.

착용 안 했으면 1수 아래쯤 되려나.

버프를 모두 적용시키면 5성 초입의 무력을 지녔으니, 어지간한 상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조승철이라는 뼈다귀도 동일한 4성 아니더냐?〕

'고유 특성이랑 스킬셋이 다르잖아.'

조승철은 4성의 스탯을 보유했지만, 그 능력치를 살릴 주문이 모자랐다.

최대 화력은 3성 주문인 파이어볼.

4성 주문을 습득해야 성위에 걸맞은 화력을 낼 수 있다.

'무투계는 스킬을 익힐 때 성위 제약을 덜 타거든.'

생전에 3성이었던 송명석도 A급 스킬인 분광검을 익혀두지 않았던가.

마력 운용 능력과 신체능력도 모자라고, 숙련도도 떨어져서 실전에 활용하진 못해도 말이야.

분광검와 마법의 성위를 비교하면 최소 6성 정도 쳐줘야 했다.

〔제 위력을 내려면 다양한 주문을 습득시켜야겠구나.〕

'중요한 건 돈이지.'

4성 마법 스킬북은 최소 단위가 10억이다.

벽을 넘어선 헌터의 숫자가 많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비싸냐고?

수요보다 공급이 적은 탓.

'무투계 헌터는 고등급 스킬이 없어도 마력을 불어넣어서 충당이 가능하거든.'

반면 마법계의 특전은 [다중 연산].

둘 이상의 주문을 동시에 전개할 수 있으면 변수 창출에 유리하지만.

무투계처럼 벽을 넘어선 것만으로 극적인 화력 증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저 뼈다귀가 합류함으로써 대전사의 공백이 메워졌단 의미로구나.〕

'맞아. 그러니까 지금은 일을 하나쯤 더 진행시켜도 돼.'

〔선점해야 할 기연이라도 떠오른 게냐?〕

'기연은 아니고 사람 하나 구해주러 갈 거다.'

〔크하하핫. 어울리지 않는구나. 계약자가 누군가를 구해준다니.〕

이보세요.

무덤 앞에 서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장미선을 살려준 게 누구인데?

유진이 만나려는 사람도 비슷한 처지였다.

〔호오. 본래의 흐름대로 놔두면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운명이란 말이로구나.〕

'그 녀석의 별명을 들으면 감이 올 거다.'

〔별명?〕

'처형인.'

차기 검성이나 아라한의 초신성 같은 칭호하고는 180도 차이가 있는 호칭.

유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마담. 사람 하나만 찾아줄 수 있나?"

*

의뢰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남는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감이 좀 오나?"

"알 듯 말 듯한데 조금만 더 해보겠습니다."

싸구려 마력 엔진을 두고 씨름 중인 신준석.

[골렘 연성] 스킬 전수를 위해 공수해온 물건이다.

블러드 골렘을 좀 뜯어봤다고 해서 곧바로 습득할 수 있었으면 전 세계의 석학들이 골렘 제작하겠다고 식은땀 흘릴 리가 없겠지.

산준석이 불세출의 천재요.

연금술 스킬을 전수해줄 유진도 곁에 있지만, 골렘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해야 [골렘 연성] 습득이 가능했다.

'며칠 더 고생해야 할 거ㄷ....'

번쩍!

싸구려 마력 엔진에서 솟구친 환한 빛.

미리 세팅해둔 바위가 들썩이면서 마력 엔진을 감싸고는 팔과 다리가 붙는다.

인간처럼 2족 보행하는 바위 인형.

머리 부위의 바위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왔다.

「명, 령을.」

"서, 성공했습니다!!!"

아. 씁.

저기요.

이건 좀 아니잖아요. 선생님.

'흑암의 반지로 전승받은 나도 제대로 구동하는 골렘을 만들기까지 10일이나 걸렸다고!'

파프너도 그렇고, 천재란 족속들은 하나 같이 재수가 없냐.

괜히 심술이 나서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동업자의 성장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가끔은 상식 안에서 행동했으면 좋겠다.

〔그대를 보는 이들도 같은 마음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느냐?〕

'난 회귀자잖아. 치트키도 썼으니까 당연하지.'

〔크하하핫. 작은 인간의 몸으로 9번째 성위에 도달한 자가 겸손한 척하긴. 평소대로 하여라.〕

'아오. 남이 피똥 싸면서 노력한 결과물을 쉽게 말하지 마.'

크로노스를 향해 쏘아붙였지만, 유진도 네크로맨시에서 대적할 상대를 찾지 못할 만큼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흑암의 반지로 선대 네크로맨서들의 지식까지 손에 넣었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격.

7대 명가의 가주들을 빼면, 유진만이 초월의 경지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부우웅-.

진동음을 내는 휴대전화.

"전화 받았습니다."

-찾았어요. 임재백이라는 분.

"빠르군. 이름과 대략적인 연령대만 말해줬는데."

-호호. 말씀해주신 이름이 흔하지 않아서요. 금방 특정했답니다.

*임재백

*나이 : 35세

*직업 : 헌터(노역 중)

*거주 지역 : 부산

*가족 : 부 / 모 / 제

....

상세하게 기록된 인물 정보.

주민등록번호는 기본이요. 보유 자산이나 최근 행적 등, 온갖 정보가 나열되어 있다.

천천히 내려가는 유진의 눈동자.

어느 한 구절에서 멈추더니, 망막 위로 이채를 띄웠다.

"부산에서 노역 중이라고?"

-네. 갈매기 파라고 대한해협 쪽 밀수를 주력으로 삼는 조직이요.

"약점이라도 잡혔나보군."

-동생의 빚 때문이라네요. 자세한 사정은 파악하지 못했어요.

이 자가 확실하군.

동생 때문에 불법적인 일을 했다고 들었으니.

문제점이 하나 있다면 현재 소재지가 유진의 근거지에서 멀다는 것이다.

"채무자 한 명 갈매기 파로 넘겨줄 수 있겠어?"

-그런 알바라면 차라리 미스터 블랙한테 알선을 받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눈치 하나는 빠르군.

유진이 혀를 차는 소리에 마담은 호호, 하고는 짧게 웃었다.

-자리 하나 만들어드릴게요. 하루만 주세요.

"고맙다."

-별 말씀을. 정 노인이 다음에는 우유 말고 칵테일을 대접해드리겠다니, 한번 들르세요.

마담은 가볍게 유진을 떠본 후, 더 물어보는 대신 의뢰를 수락했다.

일처리가 깔끔해서 좋아.

'며칠은 걸리겠어.'

채무자로 위장해서 갈매기 파로 넘어가는 데 하루.

상황 파악 및 임재백의 행동반경을 파악하려면 이틀에서 삼 일은 걸릴 터.

최소한으로 계산해도 4일 이상 걸리는 일정이다.

유진은 훈련 중인 뽀시래기 팀원들과 신준석을 불러 모아 1주 정도 자리를 비울 거라고 말했다.

"저희 팀은 접경지역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괜찮겠나?"

"안개 끼고 사냥하면 꽤 안전하더라고요. 급하면 언데드 쪽으로 유인해도 되고."

강민호가 허허로이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녀석들.

고대의 정원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좀비의 외형에 굳어버렸으면서.

불과 3개월도 안 됐는데 언데드를 방패막이 삼는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고 있다.

'정신력이 강한 건지. 아니면 무뎌진 건지.'

회귀 전, 거울 사냥꾼의 쟁쟁한 위명을 생각하면 전자일 터.

유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너도 같이 가."

"동업자님. 어딜 말입니까?"

"방금 들어놓고 왜 모른 척하냐."

"연구원이 그렇게나 위험한 곳을 왜 갑니까!"

"레벨 올리기에는 몬스터 사냥이 딱 좋다."

대장장이나 연금술사 같은 직업군은 연구나 제작 성과에 따라 경험치가 오른다.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아도 성위가 오르는 이유.

대신 전투 관련 스킬을 익히기가 까다롭고, 설령 배워도 제 위력이 안 나는 게 문제지.

"젊어서는 고생을 사서도 한대잖냐."

"고생을 사서 하는 건 제 취향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보다 어리면서 그런 말 하지 마시죠."

"흠. 골렘 연성 테스트를 해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쉽군. 너희끼리만 가라."

관심 없다는 투로 말을 끝낸 유진.

마지막에 던진 한 마디가 신준석의 귀를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골렘이 있었죠."

"아냐. 못 들은 걸로 해라. 실전만큼 좋은 교보재가 없긴 해도, 당신 능력이면 골렘 성능 개선도 충분히 할 걸."

"접경지역.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왜 그래?"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

옆에 선 뽀시래기 팀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 아저씨도 참 불쌍하다."

강민영의 넋두리가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

끼룩- 끼룩-.

갈매기 울음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코를 간질이는 짠 냄새.

안대를 껴서 보이는 게 없지만, 현 위치가 바다 인근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나와."

툭-.

억센 손길이 오른팔을 휘감는다.

팔뚝에 전해지는 힘으로 보아하니, 2성 무투계 헌터 수준.

저항하려고 하면 버틸 수 있지만, 유진은 굳이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펄럭-.

눈가를 가리던 천이 홱 벗겨지고.

푸른 바다와 하늘을 누비는 갈매기, 마지막으로 멀리서 다가오는 통통배가 시야에 들어왔다.

'일처리가 너무 확실해도 문제인 건가.'

마담은 약속대로 하루 만에 유진을 채무자로 꾸며놓았다.

행방불명된 사람의 신분증을 도용.

얼굴 사진은 물론이요. 그 외에도 걸림이 될 만한 부분을 모조리 유진에게 맞춰버렸다.

'그 뒤에 갈매기 파로 넘겨버렸지.'

채무자를 파는 건 암상의 도움을 받았단다.

미스터 블랙에게 말했더니, 유진을 돕는 일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나서겠다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나.

왠지 녀석이 기쁨을 느낀 포인트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크하하핫! 쓰디쓴 고배를 마신 기분이 어떤가?〕

'염병. 회귀 전에도 이런 경험은 안 했다고.'

말이 좋아야 노역이지.

이 정도면 현대에 부활한 노예제도다.

부산에 내려오는 내내 안대로 시야를 가려놓질 않나.

수상쩍은 물건은 없는지, 속옷까지 모두 조사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귀속 상태인 흑암의 반지를 빼가지 못했다는 점?

'손가락을 안 자른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하나.'

유진은 한숨을 꾹 참았다.

번거롭기는 해도 갈매기파 안으로 파고들기 가장 쉬운 방법이다.

노역에 동원되는 채무자들은 다섯 명.

저 통통배를 타면 미래의 '처형인'이 노역 중인 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

〔괜찮겠느냐?〕

'여기까지 참고 왔는데.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그게 아니라 처형인이라는 작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니라.〕

'임재백 씨는 왜?'

〔그렇게나 흉흉한 이름으로 불렸으면 은혜를 입힌다 한들, 그대의 뜻대로 부릴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구나.〕

'호칭의 유래를 알면 생각이 바뀔걸.'

유진은 회귀 전에 들었던 사연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79화 처형인 임재백(1)

임재백이 처형인으로 불린 사연.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악인의 목을 효수해서 붙은 호칭이다.'

〔정의감이 넘치는 성격인 것이더냐?〕

'아니. 복수심 때문에.'

흔하디흔한 이야기다.

사기 당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 노역을 자처했던 형.

몇 년을 고생했지만 돌려받은 건 싸늘하게 식어버린 주검이었고.

'치밀하게 준비해서 동생의 복수를 해냈다고 들었다.'

〔오랜 기간 착취를 당했는데도 용케 앙갚음에 성공하였구나.〕

'재능과 끈기가 있었어.'

노역 중에도 끊임없이 복수의 칼날을 벼려온 임재백.

동생의 죽음을 확인한 후, 보다 확실한 복수를 위해 몇 년을 더 기다리고는 해당 조직의 단원들을 모두 죽였다.

그 후로도 임재백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분노의 화염은 꺼질 줄을 몰랐다.

'원한을 풀 수단으로 범죄자들만 찾아서 죽인 거지.'

〔죄인들을 향한 원망과 고뇌를 해소할 방법 치곤 과하나, 이 또한 훌륭한 영웅이로구나.〕

'난 슬슬 그 영웅이라는 것의 기준이 헷갈려온다.'

쯔쯧.

고매하신 성좌님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나.

유진은 혀를 찼다.

"살 만한가 봐. 채무자님. 혀로 재간 부릴 여유도 있고."

으스대는 민머리 사내.

차에서 유진의 팔을 억세게 잡아당겼던 갈매기파 조직원이다.

응. 네 얼굴은 특별히 기억해주마.

통통통-.

어선 특유의 엔진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작은 배.

해안가에 정박한 배에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의 사내가 나왔다.

"어디 봅시다. 한놈, 두식이, 석삼이, 너구리, 오징어. 다 왔네요?"

"사람을 보내준 게 언제인데 또 다섯을 구해 달래!"

"아유. 지원이형. 우리 사정도 좀 봐주세요."

"씹. 그냥 빚쟁이 새끼들도 아니고 무투계를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냐?"

"그만큼 떼 주잖아. 참아주쇼."

"이번 놈들은 최대한 숨 붙여 놔라. 당분간은 몸 사려야 하니까."

채무자들은 들을 수 없는 거리에서 귓속말을 나눈 두 사람.

정장을 입은 사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곤 채무자들에게 다가갔다.

"새 희망을 찾아오신 분들. 환영합니다."

"희망? 빚 못 갚았다고 납치하다시피 끌고 와놓곤 뭔 개소리야!"

채무자 하나가 목청을 높이자 사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쪽 선생님. 아직 제가 말하는 중이잖아요?"

빠악-!

홱 돌아간 채무자의 얼굴.

2성 무투계 헌터가 공격하는 순간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사내의 주먹을 맞고 고꾸라졌다.

터진 입술과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모래를 붉게 적셨고.

"그러니까 닥치고 들어. 빚쟁이 놈들한테는 말할 권리도 없습니다."

정장 사내의 목소리가 얼어붙은 분위기를 한층 더 차갑게 만들었다.

"이 개자식이!"

"덤빌 겁니까? 차라리 잘 됐군요. 다 죽여 버리면 되니."

"헌터협회가 안 무섭냐?"

헌터 관련 범죄는 죄질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특수범죄로 취급했다.

일반인을 상회하는 능력.

그리고 스킬.

무투계가 2성만 되어도 평범한 사람을 손쉽게 죽일 수 있고.

마법 쪽은 마력 파장 외엔 흔적도 남지 않아 사고로 위장하기가 훨씬 편했다.

"등신들아 잘 들으세요. 여기가 어딘지 알고 높으신 분들이 찾아오겠어요."

"그, 그래도 마력 파장이 나는 걸!"

"어차피 밑바닥인 분들이잖아요. 거기 하나 죽어도 세상은 모른다니까. 하나 정도는 죽여서 확인시켜 드려 줘?"

정장 사내가 경박하게 웃자, 유진을 뺀 4명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채무자 한 명을 쓰러트릴 때 선보인 신위.

넷이 달려들어도 이기기는커녕 개죽음 당할 것이 분명했다.

'저 속도면 4성은 되겠어. 그것도 벽에 부딪친 지 오래 된 것 같군.'

〔벽을 한 단계 넘어섰구나.〕

'오러를 펼칠 줄도 알 걸. 갈매기파인가 하는 놈들 사이에서 꽤 높은 직급일 거다.'

붉은 거미처럼 5성 간부가 넷이나 되는 조직은 많지 않다.

4성이면 어느 단체에서든 중견으로 취급받는 강자.

유진은 느긋하게 정장 사내의 말투와 행동을 관찰했다.

'적절한 무력시위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군.'

〔두려움을 활용하는 솜씨가 일품이구나. 계약자와 판박이로다.〕

'질 떨어지는 놈이랑 나를 비교하면 섭섭하지.'

〔크하하핫. 뭐 그렇다 치자꾸나.〕

네 사람과 달리 표정에 변화가 없는 유진.

정장 사내는 그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 가까이 와서 어깨를 두드렸다.

"선생님. 마음에 들어요. 이왕 밑바닥까지 왔으면 성실하게 갚아서 나가면 되잖아. 안 그래요?"

"밑바닥이라."

"어디 보자. 이름이... 박기태 씨군요. 아이고! 10억을 당기셨어?"

박기태는 마담이 위장용으로 준 사내의 이름이다.

실제로 빌리지 않은 금액을 들으니 감흥도 크게 없군.

정장 사내는 유진이 굳어버린 것으로 착각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서 3년만 구르면 되겠네. 걱정 마요. 딱 그 기간만 열심히 일하면 싹 해결되니까."

"월급 3천만 원이라. 후하게 쳐주네."

"그렇죠? 말이 통하는 채무자님을 만나니 내가 기분이 다 좋아."

정장 사내는 박수를 짝짝- 쳤다.

채무자들의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모이는 걸 확인하고는.

"이야. 기분이다. 박기태 씨는 내가 1년 감해줄게."

큰 인심 썼다는 투로 외쳤다.

정장 사내의 폭탄발언에 두 눈이 돌아가 버린 채무자들.

주먹을 맞고 고꾸라진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나, 나도 깎아줘!"

"치사하게 저 인간만 해주는 법이 어디 있어?"

"아. 적극적인 모습, 아주 좋군요. 그럼 모두 노역 기간을 1/3만큼 줄여드리겠습니다."

환호하는 채무자들.

유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킬킬거렸다.

'크로노스. 저 인간이 왜 인심 쓰듯 노역 기간을 줄여주는지 알아?'

〔보기와 다르게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것 같다만.〕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단 의미다.'

1/3이고, 1년이고 줄여주면 뭐하겠는가.

노역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소용없는 일.

뻔질나게 생긴 녀석이 호기롭게 기간을 단축시켜주는 건 채무자들이 그 기간 안에 반드시 죽을 거란 확신을 가져서다.

두 사람이 멀찍이서 나눈 이야기를 듣지 않았음에도.

유진은 정황과 몇 마디 대화만으로 현장에 가지도 않았는데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

'밀매 쪽은 아니고. 게이트인가?'

아는 건 임재백이 수년 동안 노역생활에 시달린 것뿐.

정확하게 어느 조직에서, 무슨 일에 동원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더 기억을 되짚어보아라.〕

'소용없어. 나랑 접점이 별로 없는 양반이라서.'

〔불확정 요소가 굉장히 많은데 괜찮겠느냐?〕

'임재백 씨가 이맘때쯤이면 2성이었을 거다. 근데 살아남았으면 나도 가능하겠지.'

전승 가능한 스킬은 3개.

새 분야도 일부러 선택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변수 창출이 가능한 패를 쥐고 있으니.

'정 안 되면 나 혼자라도 살아서 돌아갈 거다.'

〔그대는 짐의 유일한 신자다. 허무하게 죽으면 곤란하니 늘 조심하여라.〕

'영웅 타령이나 하지 마세요. 그럼.'

〔커흐흠. 본디 성좌들은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법이니라.〕

크로노스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는 통통배에 탑승했다.

*

통통통통-.

바다를 가르고 동쪽으로 전진하는 어선.

얼마 정도를 나아갔을까.

소금기가 감도는 공기에 섞여든 이질적인 냄새.

"웩. 뭔 냄새야?"

"썩은 내 같은데."

"폐기물이라도 치워야 하는 건가?"

채무자들은 투덜거리더니 각자의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갑판 밖을 힐끗거리는 유진.

푸르렀던 바다 아래에 시커먼 무언가가 해류에 휩쓸려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고.

잠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힘센 이끼 채집을 시키고 있었나.'

〔저 해초 말이더냐?〕

'맞아. 우리 성좌님 눈치가 많이 늘었네.'

〔크하하핫. 짐은 계약자를 늘 굽어보는 중이니라.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도다.〕

힘센 이끼는 수중 타입 게이트에서만 종종 나오는 해초다.

블러드 골렘 제작에 필요한 재료이기도 해서 유진한테는 낯설지 않았다.

'동해에 이런 침식지대가 있는 줄은 몰랐군.'

갈매기파의 주 수입원이 밀수라고 하더니.

동쪽으로 주구장창 이동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곤 생각했다.

"어떻습니까? 채무자님들의 새 직장이."

작은 어선이 멈춘 것은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이었다.

엉성하게 만들어진 임시 건물.

숙소 대신 배치한 녹슨 컨테이너들이 을씨년스러움을 더했다.

"동해에 왜 섬이 있지? 울릉도나 독도는 아닌 것 같다만."

"침식 활동과 함께 떠오른 곳입니다. 작긴 해도 숙식 정도는 해결이 가능하죠."

게이트의 침식으로 변이를 일으킨 지형.

작은 섬이 떠오르고.

바다에는 연금술이나 가죽 장비 제작에 필요한 힘센 이끼가 자라나고 있다.

붉은 거미의 주 수입원 중 하나였던 [새빨간 위장]만큼은 못해도, 갈매기파를 먹여 살리기에는 충분했다.

"저 시체는 뭐지?"

"별거 아닙니다. 침식지대다 보니 몬스터가 가끔 나오거든요."

글쎄다.

별거 아니라고 둘러대기에는 해안가에서 썩어가는 괴물의 숫자도 상당하고 덩치가 너무 큰걸.

유진의 눈동자가 뼈를 드러낸 괴물 물고기의 사체에서 떠날 줄 몰랐다.

'4성 몬스터인 제노사이드 새먼이다.'

〔호오. 저 생선을 감당할 수 있는 건 말을 번지르르하게 내뱉었던 작은 인간뿐이겠구나.〕

'바다에선 힘들 걸.'

〔같은 성위인데도 말이더냐?〕

헌터가 인간을 넘어선 힘을 얻었어도, 생물의 근간이 바뀌지는 않았다.

바꿔 말하면 해양에서는 제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의미.

'대지에 발 붙이고 사는 물고기랑 사람이 같으면 안 되지.'

정장을 입은 사내는 채무자들을 한 컨테이너로 안내했다.

뎅- 뎅-.

종소리가 울리고 바다에서 힘센 이끼를 채집하던 이들이 하나둘 섬으로 돌아왔다.

마석을 달아놓은 잠수복.

힘센 이끼가 내뿜는 독을 막아주고 바다에서의 활동을 보조해주는 아이템이다.

"사랑스러운 채무자 여러분들. 새 동료가 왔습니다."

"또 지원인가?"

"그렇습니다. 이제 할당량을 채울 수 있겠군요."

"피라미들 붙여주면서 생색 내지 말고 안전 보장이나 해줘."

"임 소장님. 신경 써주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섭섭하잖아요."

퍼어엉-!

정장 사내가 주먹을 내지르면서 발생한 파공음.

임 소장이라고 불린 남자의 코앞에서 멈추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죽일 테면 죽이든가."

"하. 그건 좀 곤란하죠. 임 소장님 덕에 채무자님들의 근무 시간과 업무 효율이 올라갔으니까요."

"시부레. 제노사이드 새먼 때문에 다 뒤져나가게 생겼고만!"

"그러니까 신입들을 잘 부탁드린다는 겁니다."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임 소장.

정장 사내는 그 분노를 태연하게 넘기면서 유진을 포함한 채무자들에게 손짓했다.

"임 소장님이 채무자님들에게 노동의 값어치를 알려줄 겁니다."

"소장이라면 당신처럼 갈매기파에 발을 담그고 있나?"

"캇,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임 소장님은 채무자님들처럼 빚을 좀 졌답니다."

꿈틀거리는 임 소장의 미간.

훤히 드러난 팔뚝 위로 힘줄이 도드라지게 튀어 나왔다.

유진은 천천히 사내에게 다가가고는.

"임재백 님 맞습니까?"

작게 중얼거리자, 임 소장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대답은 들은 거나 마찬가지.

그럼.

악취로 가득한 곳에서 더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군.

정장 사내는 유진의 발언에 흠짓- 놀라더니 살기를 피워 올리며 다가왔다.

"박기태 씨. 임 소장님하고 무슨 관계...."

채앵-!

금속끼리 부딪칠 때 발생하는 날카로운 음색.

불쑥 튀어나온 스켈레톤 나이트가 휘두른 칼날이 정장 사내에게 쇄도했고.

갑작스러운 일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양팔을 X자로 교차하면서 검격의 충격을 최소한으로 줄였....

[암흑 투기]

[분광검]

[5초식 - 적광검]

새빨간 빛을 흩뿌리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쌍검.

본래 검은색이었을 암흑 투기가 검법의 영향을 받아 붉은색으로 방출되었고.

콰아앙-!

검에 실린 막대한 힘을 미처 해소하지 못한 정장 사내가 수십 미터 뒤로 처박혔다.

파르르 떨리는 임 소장의 눈동자.

그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힘을 주어 말했다.

"당신은 누굽니까?"

"천유진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반갑수다. 미래의 처형인 씨.

할 말은 많지만, 이번 생에서는 초면이니 통성명부터 하자고.

유진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80화 처형인 임재백(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