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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100-110

100화 전면전(1)

"철원. 말은 들었지만 더럽게 춥다."

"빌어먹을. 안 그래도 추운데 눈까지 온다고?"

"이렇게 추운 곳을 수도로 삼으니 왕건이 반란을 일으키지."

강원도 철원까지 올라간 화물 수송 차량.

짐칸에서 내린 헌터들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 이름이 뭐지?"

"오정수입니다. 행동대장님."

"존대는 됐고. 어차피 나 말고 저 애들 인솔하려고 온 거잖아."

"그렇다면 제 지휘권을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내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알겠습니다."

"그 대신 잔소리하지 마."

오정수는 목구멍에 걸린 한숨을 삼켰다.

나찰 길드 서열 3위.

실질적인 무력은 박진수 다음으로 손꼽히는 헌터이나, 김미정이 행동대장에 머무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흥미가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는다는 것.

'내가 책임지는 게 아니라고 해도, 뒤처리는 싫단 말이야.'

오정수는 짧게 투덜거린 후, 아라한 길드에서 받은 자료를 확인했다.

접경지역.

한반도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침식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원칙적으로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원칙만으로 돌아가진 않는다.

"나찰 길드 관계자시죠?"

"오정수다."

"핫. 그렇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철원 쪽 밀수 루트로 이동한 나찰 길드원들.

개구멍 옆에는 150명 정도 되는 헌터들이 입김을 후후- 불고 있었다.

"어. 저 아저씨들 따라가면 되나?"

"접경지역 들어간다고 해서 밀렵 정도 생각했는데. 이건 전쟁이라도 벌일 기세네."

마담의 시선을 피해 은밀하게 끌어 모은 용병들.

나찰 길드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삼삼오오 떠들어댔지만 빠지는 이는 없었다.

아라한의 자본을 사용.

제 실력에 비해 몇 배나 되는 금전을 쥐여 주었으니.

'일이 끝나면 추가금 요구해야지.'

'죽기야 하겠어?'

나찰 길드에 고용된 헌터들은 사지로 향하는 것도 모른 채, 의뢰 금액을 떠올리며 히히덕거렸다.

"그러면 출발하지."

덜컹-.

널빤지를 치우자 접경지역으로 들어가는 구멍이 훤히 드러났다.

선두를 맡은 나찰 길드원이 먼저 진입하고.

용병들이 뒤이어 접경지역으로 들어갔다.

"근데 오정수야. 파주까지 가려면 너무 멀지 않아?"

"경기도 일대의 루트는 쓸 수 없습니다."

"붉은 거미는 망했다면서."

"암상에서 그 루트를 관리해주고 있다더군요."

붉은 거미는 조직원만 수백에 달하는 대규모 단체.

유진이 그 자리를 채웠다지만, 관할하는 영역을 모두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거미 사냥이 끝나자마자 암상의 지배자인 미스터 블랙을 협상 테이블에 앉혔고.

암상에서는 유진의 권한을 대행해서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다.

"보급은 어떻게 하고?"

"연천, 그리고 파주 쪽에서 아라한 길드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아라한 길드에서는 소규모 공격대들을 접경지역에 투입.

구) GOP 라인을 따라 남하하는 공격대의 보급을 챙겨주기로 했다.

"마담도 그 정도까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더군요."

"입이 몇 개인데 그걸로 되겠어?"

"길드에서 보유 중인 아공간 주머니를 모두 푼다고 합니다."

"염병. 우리가 빌려달라고 할 땐 엄청 아끼더니."

김미정이 날 선 목소리로 불평을 내뱉자, 오정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은하수 펍의 정보력은 국내에서 제일가는 수준.

마담과 유진이 최소 동업 관계로 보이는 만큼 이번 습격작전의 보안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라한 길드도 숨겨둔 패를 여럿 까야 했다.

"그럼 이동한다."

오정수의 지시에 맞춰 남하를 시작하는 대규모 인원.

비무장지대 시절 군인들이 만들어놓은 샛길을 타고 이동하다 보니, 대열의 길이가 쭉 늘어났다.

"오크가 습격했다!"

"빌어먹을. 몬스터가 계속 튀어 나와!"

"신관! 신관!"

대열이 늘어지면 몬스터들에게 노출될 가능성도 올라간다.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전투.

[독수리의 눈]

[서먼 엘리멘탈 - 실프]

....

소환수나 탐색 관련 특성을 활용해서 몬스터들의 습격에 방비했지만.

대열의 길이가 너무 길고, 몬스터들이 시시때때로 재생성되는 침식지역이라서 완벽하게 대응하는 건 불가능했다.

[질풍 걸음]

[오러]

[대참수]

단검에 맺힌 섬뜩한 기운이 트롤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푸른 궤적에 휘말린 목덜미에서 핏방울이 몽글몽글 맺히더니, 푸아악- 사방으로 붉은 액체가 튀었다.

"정신 안 차릴래?"

"가, 감사합...."

"그냥 다 뒤지게 놔둬야 하나."

김미정은 짜증 섞인 기색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철원 – 파주는 직선거리로 따져도 약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샛길로 이동하면 실 거리는 훨씬 더 멀고.

행군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평범한 사람을 벗어난 초인, 헌터라고는 해도 쉽지 않은 여정이다.

시시때때로 튀어 나오는 몬스터들까지 고려하면?

행군 난이도는 10배 이상으로 상승했다.

"동상 걸린 거 같아."

"신관은 뭐해?"

혹한의 추위도 나찰 공격대에게 악재였다.

나찰 길드에서 방한 장비를 준비했지만 행군 중이다 보니 처음 계획보다 소모되는 양이 너무 많았다.

"씨. 무슨 부귀영화 누리겠다고 이딴 의뢰를 받았나."

"파주로 내려가는 거 아니야?"

"이럴 거면 파주에서 들어가든지 하지."

용병들 사이에서 들끓는 불만.

크게 선금 땡겼을 때야 기분이 좋았지만, 1주 가까이 몬스터와 추위에 시달리니 금융치료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야. 성과급 2배로 올려준다고 해."

"행동대장님. 그래서는 아라한에서 말이 나올 겁니다."

"쟤들 중 얼마나 살아서 돌아갈 거 같아서 그래?"

오정수는 감탄이 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흥미 있는 것 말고는 관심을 안 두었을 뿐.

김미정의 통찰력은 날카로웠다.

어차피 죽을 놈들, 사기를 올리기 위해 공수표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으니.

"두 배라고?"

"어유. 불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무슨 일을 시키려고 두 배를 부르는 거야. 단순한 밀렵은 아닌 거 같은데."

소수는 두 배를 부른 저의를 의심했지만.

어찌 되었든 용병들의 불만은 한 층 꺾였다.

철원에서 시작된 행군.

1주일이 지났을 때, 나찰 길드 집단군은 희끄무레한 안개를 마주했다.

"아라한에서 말한 안개입니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네."

"그게 보이십니까?"

"눈동자를 마력으로 강화하면 돼."

6성 절정의 헌터.

마력을 손발 다루듯 자연스럽게 응용할 줄 아는 김미정은 영력으로 빚어낸 안개를 쉽게 꿰뚫어보았다.

점점 늘어나는 언데드들의 규모.

김미정은 예고도 없이 지면을 박차면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행동대장님?"

"먼저 갈게. 천천히 와."

오정수는 하-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

이 정도면 오래 참았지.

김미정의 악명을 고려하면 여태 집단군과 같이 행동한 게 기적에 가까웠다.

"모두 전투 준비하라고 해라."

오정수는 수년 동안 사용한 애병, [로드리게스의 지팡이]를 쥐었다.

*

"참 오래도 걸렸네."

유진은 스켈레톤 워리어를 강화하느라 굽혔던 허리를 펴며 중얼거렸다.

〔오래 걸렸다?〕

'놈들이 영지 안으로 들어섰다.'

〔시야 공유 마법을 사용한 기색은 없다만,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백 단위의 적이 강령술 증폭 범위 안에 들어왔다.'

검은 방첨탑의 감지 범위에 나타난 백 단위의 침입자.

이 근방의 몬스터 군락은 파프너가 주기적으로 부숴놓았다.

최근에 백이 넘는 숫자가 한 번에 영역 안에 진입한 경우는 거의 없었거든.

[고스트 아이를 사용합니다.]

영지 곳곳에 배치해둔 망령 하나와 감각을 동조하는 순간.

쇄애액-!

푸른 기운이 시야를 공유한 망령에게 쇄도했다.

순식간에 파훼된 마법.

주문 대상인 망령이 소멸하면서 찾아온 반동이 내장을 진탕시켰다.

"쿨럭."

〔왜 그리 피를 토하는 게냐!〕

'주문의 반동이다.'

[고스트 아이]의 시전을 취소했으면 이만큼 피해를 입지 않았으리라.

유진은 내상을 치유하지 않고 바로 고스트 아이를 사용했다.

〔너무 무리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침입자가 누군지 확인해야지.'

속이 꼬이면서 발생한 고통은 참아냈다.

망령을 소멸시킨 적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그 근방에 있는 망령과 시야를 공유하는 순간.

푸른 섬광이 다시 한번 날아들었다.

'반응속도 한번 엄청나군.'

곧바로 영력을 회수.

동조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자마자 [망령이 소멸했다]는 시스템의 음색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대. 괜찮으냐?〕

'뭐, 그럭저럭.'

〔침입자는 망령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구나.〕

'아. 그건 아니야.'

처음부터 망령의 존재를 인식했다면.

유진이 고스트 아이로 시야를 동조한 직후에 공격하진 않았을 것이다.

스킬 사용 때 발생하는 영력의 파장을 읽어낸 거겠지.

기감이 아주 예리한 녀석이다.

〔침입자의 정보를 파악하긴 틀렸구나.〕

'이미 확인했다.'

〔그 짧은 순간에 적을 읽어낸 게냐?〕

'아는 얼굴이더라고.'

푸른 오러가 망령을 찢어발기기 직전.

유진은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미친개 김미정.'

〔꽤 재미있는 별명이로구나.〕

싸움이라는 행위 자체를 즐기며, 목숨 건 사투를 벌일 때 히죽거리며 웃는 녀석이다.

전투광.

스릴 중독자.

김미정이 전투를 벌일 때 표정을 보면 미친개라는 표현보다 어울리는 단어를 찾기가 어려웠다.

회귀 전에는 7성 절정에 도달했던 강자.

'계획이 어그러졌군.'

유진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미친개가 나찰 길드에 발을 걸쳤던가?

회귀 전에는 듣지 못했던 정보인가. 아니면 이 또한 나비효과의 일환일까.

김미정의 어마어마한 돌파력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지 않느냐. 적이면 쓰러트리고 그대의 하수인으로 만들어버리면 될 터.〕

'그거야 그렇지.'

크로노스의 조언에 생각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미친개고 뭐고.

이미 자신한테 이빨을 드러낸 시점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잖아.

'그 이빨을 뽑아버리든, 죽이든 해야지.'

유진은 살기등등하게 웃으며 [고스트 아이]로 전황을 파악했다.

비정상적인 돌파력으로 영지 곳곳에 배치한 언데드를 부수며 돌진 중인 김미정.

나찰 길드 본대는 네크로폴리스 외곽에 배치해둔 리터너&스켈레톤 워리어를 쓰러트리고 있다.

'오히려 좋아.'

김미정이 나찰 길드 본대와 발을 맞추었다면 상대하기가 까다로웠으리라.

"파프너."

[오. 드디어 내 차례인가?]

"2시 방향으로 500미터 정도 가면 헌터 하나랑 마주칠 거다."

[그자를 쓰러트리면 되나.]

"아니. 붙들기만 해."

파프너의 무위는 6성 중급 수준.

드래고니안의 시체를 베이스로 만들었기에 스탯 보너스가 있고.

[마투사] 특성에 에픽 등급 아티팩트인 [용린갑]의 효과로 능력치 보너스를 어마어마하게 받았다.

그럼에도.

"가급적이면 정면 승부는 피하고."

[상당히 강한가 봐?]

"어."

미친개는 얕볼 만한 상대가 아니다.

저 경이로운 돌파력.

한순간이라도 방심했다간 파프너를 잃을지도 모른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으니 복구하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전력에 큰 공백이 생기니 조심해야지.

"송명석과 조승철도 붙여주마."

[주군!]

"헛소리하지 말고 파프너 말 잘 따라라."

[크흡.]

분한 기색으로 신음을 흘리는 송명석.

파프너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푸른 귀화가 곡선을 그렸다.

[가자. 졸개 1.]

[빌어먹을. 나는 졸개가 아니란 말입니다.]

[꼬우면 싸워서 이겨보던지.]

[빌어먹을, 입니다.]

송명석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파프너의 뒤를 따랐다.

"형님.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기존의 플랜대로."

"알겠습니다."

뽀시래기 팀도 전투 준비를 빠르게 마쳤다.

"형. 죽지 마요."

"너희야말로. 죽으면 스켈레톤이나 좀비로 살려주마."

"게엑. 그건 좀 싫다."

"좀비는 아니지 말임다."

미리 일러준 대로 움직이는 세 사람.

유진은 희끄무레한 기류에 삼켜지는 뽀시래기 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2주 동안 준비하느라 허리가 휘는 줄 알았다고.

부디 만족했으면 좋겠네.

유진은 손을 가볍게 비빈 후, 영력을 퍼트렸다.

101화 전면전(2)

카앙!

방패를 쥔 무투계 헌터가 수 미터 뒤로 밀려났다.

움푹 파인 철판.

내부에 새긴 강화 회로가 뭉개지면서 방패의 효능 일부가 상실되었다.

"퉷. 이 놈들. 진짜 언데드 맞아?"

튕겨난 헌터가 파르르 떨리는 오른손을 진정시키며 외쳤다.

언데드가 동일 성위의 몬스터보다 한 수 떨어지는 것은 헌터 업계에 잘 알려진 상식.

스켈레톤 워리어는 3성이니, 최소 3성 이상으로 뽑아놓은 나찰 길드 헌터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대해야 했다.

"뼈다귀 따위한테 힘 싸움에서 밀린다고?"

"조심해. 이 녀석들. 보통이 아니다."

집단군의 선두를 맡은 나찰 길드 헌터들은 상식을 벗어난 스켈레톤 워리어들의 전투력에 경악했다.

여러 아이템들을 착용한 동일 성위 헌터보다 스펙에서 앞서는 망자들.

방심했다가 대열이 한순간 무너지기까지 했으니.

"등신들아. 마음 놓지 마라! 신관들!"

[홀리 크로스]

[디바인 월]

강렬한 빛에 노출된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잠시 동안 주춤거렸고.

성력으로 빚어낸 하얀 벽이 자세가 무너진 무투계 헌터들을 보호해주었다.

"태세를 바로 잡아라."

오정수의 지시에 무투계 헌터들이 무너진 자세를 다잡고는 재차 스켈레톤 워리어들과 대치했다.

강화의 성과로 동일 성위 헌터들보다 스펙에서 앞서는 망자들이었지만.

다시 한번 충돌했을 땐 헌터들이 스켈레톤 워리어 무리를 상대로 근소하게 우위를 점했다.

"놈들이 강해봐야 뼈다귀다."

"움직임이 뻔해."

평범한 헌터가 3성에 도달하기까지는 평균 4년 정도 걸린다.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을 최소 천 단위로 사냥해야 도달할 수 있는 성위.

반면 스켈레톤 워리어들은 AI마냥 정해진 몇 가지 패턴대로 무기를 휘둘렀으니 전투 경험에서 차이가 났다.

또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스트라이킹]

[혼신의 일격]

[파워 배시]

무투계 헌터들은 다양한 스킬을 익혔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을 알았다.

"용병들도 전진. 언데드들을 쓰러트려라."

"밥값 하란 말이네."

"사냥할 게 언데드였나?"

용병들은 의아한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고용주의 명령대로 전진했다.

후위의 병력이 합류하는 타이밍에 맞춰 나찰 길드원들이 스킬을 활용, 스켈레톤 워리어들의 진형을 무너트렸고.

"죽여!"

콰지직-.

용병들은 수적 우위를 살려 언데드들을 큰 피해 없이 파괴했다.

한 풀 꺾인 스켈레톤 워리어들의 기세.

나찰 길드원들은 눈치를 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자연스럽게 선두와 후미가 교체.

용병들이 집단군 앞에 섰지만, 알아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전진."

오정수는 선두로 나온 용병들이 이상함을 알아채기 전에 다음 명령을 내렸다.

'좋아.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 말고는 사전에 이야기한대로다.

전투 중에 용병들과 나찰 길드원들의 위치를 교체.

아군의 전력은 최대한 아껴두고 용병들에게 소모를 떠넘길 구도를 만들었다.

-그겔. 도망가자.

-그게겔. 적. 강하다.

50구 정도가 쓰러지자, 남은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등을 돌리고 안개 속으로 도망쳤다.

"허. 언데드가 전략적 후퇴라고?"

오정수는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동일 성위 언데드가 오버 스펙인 것도 금시초문인데 하급 언데드가 도망치는 꼴이라니.

상식이 연달아서 무너지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아라한 길드에서 극비리에 전해준 소식.

-천유진은 언데드를 다룰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쯤 되면 확신해도 될 것 같다.

"전진. 놈에게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오버 스펙인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더 늘어나면 나찰 길드도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적이 더 전력을 늘리기 전에 몰아붙여야 했다.

희끄무레한 기류 속으로 망설임 없이 진입하는 나찰 길드 집단군.

얼마 정도를 나아갔을까.

3미터 높이의 벽이 집단군의 앞을 막아섰다.

"뼈?"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 여긴."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뼈로 된 벽 앞에 서자, 엇갈려서 세워진 뼈들이 좌우로 밀리면서 길을 만들어주었다.

추격 중인 용병들이 벽 앞에 섰을 땐 갈라졌던 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정수는 다음 지시를 내렸다.

"길을 내라."

"알겠수다."

"거기 도끼랑 철퇴 든 양반들 힘 좀 써봐."

"마법계는 놀고 있어?"

쿵! 쿵!

대격변 이전의 분단선 마냥 길게 늘어진 뼈 벽.

나찰 길드 집단군이 나아갈 수 있는 만큼만 부수면 된다.

물리공격에 대한 저항력은 높으나 마법 공격을 받으니 크게 휘청거렸고.

하얀 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10명 정도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시간을 끌어보시겠다?'

뼈로 된 벽이나 언데드 소환수들이 알짱거리는 이유야 뻔했다.

오정수는 유진에게 시간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뒤에도.

50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뼈 벽이 두 차례나 집단군의 앞을 막아섰지만.

불과 1분도 버티지 못하고 길을 내주었다.

"목표를 발견한 자에게는 의뢰비의 5배만큼을 주겠다."

"근데 목표가 누구요?"

"헌터다."

용병들은 그럼 그렇지, 라며 중얼거렸다.

몬스터 밀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괴이했던 동선.

1주 동안 고생한 이유가 '사람'이라면 보안에 집착한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거, 누군지 구경이나 하자고."

"발견만 해도 되잖아."

용병들이 세 번째 벽 일부를 무너트리고 안쪽으로 들어오는 순간.

검은 물체가 희끄무레한 안개를 가르며 선두의 용병 그룹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

콰아아앙-!

포탄이 떨어진 것 마냥 지축이 흔들리고.

한 발 늦게 들이닥친 충격음에 벽 근처의 헌터들의 귀가 이명으로 흔들렸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흙더미 사이로 흩뿌려진 붉은 액체.

포격 범위에 서 있던 헌터들의 팔과 다리도 충격에 휩싸여서 여기저기에 나뒹굴었다.

"씨, 씨X!!!!"

"신관! 신관!!!!"

"아, 아파. 아프다고!"

"뭐가 날아온 거야?!"

사망 1명.

중상 3명.

경상 7명.

집단군의 규모에 비해서는 큰 피해가 아니지만, 불의의 일격에 달아올랐던 용병들의 기세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어버렸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꺾이면 곤란해.'

고스트 아이로 전장을 살펴보던 유진이 조소했다.

암암.

준비한 게 얼마나 많은데 천천히 즐겨야지.

[망자의 골탑(4,6)의 방위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네크로폴리스에 설치한 골탑은 모두 6개.

처음 제작한 건 3개였지만, 나찰 길드 집단군이 예정보다 늦게 온 덕에 구조물을 추가로 만들 수 있었다.

〔사거리가 닿는 건 셋뿐이구나. 더 끌어들이면 화력이 극대화되지 않느냐?〕

'김미정만큼은 아니어도 돌파력이 뛰어난 헌터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망자의 골탑] 유효 사거리는 최대 500미터.

검은 방첨탑 인근에 한 개를 배치했고, 나머지 5개는 적당히 사거리가 겹치게끔 살짝 거리를 벌려서 건설했다.

나찰 길드에서 어느 방향으로 공격해올지 예측할 수 없기에 화력을 분산한 것.

〔한데 거미 사냥 땐 작은 인간들의 진로를 예측하지 않았느냐?〕

'블랙허브 농장이 있었잖아.'

그때와 한 가지 차이점이 더 있다면 시체를 경계한다는 것이다.

뭐, 다 예상대로야.

아라한 길드에서 유진의 뒷조사를 마쳤으니 능력 일부가 밝혀지는 것도 당연했다.

〔크하하핫.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한 것 치곤 담담하지 않느냐.〕

'내가? 왜.'

이만큼이나 준비해놓고 위기 타령하기는 양심이 없지 않나?

네크로맨서의 영지에서 싸운다는 의미를, 크로노스나 나찰 길드 집단군이나 아직 깨닫지 못했다.

"멍청한 놈들. 방어 마법과 스킬을 준비해라!"

오정수의 날 선 음색이 집단군 용병과 나찰 헌터들을 채찍질할 때, 파공음과 함께 시커먼 물체가 양쪽에서 날아들었다.

콰앙-! 쾅!

연달아서 발생한 충격음.

집단군 양쪽 날개에서도 피해가 속출했다.

"뼈?"

"4성 마법 수준의 위력이다."

"신관들은 결계 상시 유지해. 대비 없이 맞으면 골로 간다."

흠.

침착하군.

유진은 나찰 길드 집단군의 중앙보다 양익의 반응이 빠른 것을 보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머리 좀 썼어.'

〔왜 그리 판단하느냐?〕

'주력은 일부러 사이드로 돌려놓고 혹시 모를 함정에 용병들을 밀어 넣었다.'

첫 공격에서 사상자만 10명이 넘게 발생했는데 다음으로 활성화시킨 포대가 큰 피해를 못 입혔다.

대응 속도나 헌터들의 기량 등.

집단군 외곽에 배치된 이들은 중앙의 헌터들보다 수준이 훨씬 뛰어났다.

'시시하게 끝나진 않겠네.'

홈그라운드의 이점 덕에 허무하게 끝나진 않을까 걱정했다.

기우인 것 같아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2주 동안 한시도 못 쉬고 고생한 게 억울해질 것 같았거든.

-너희들도 가라.

유진은 혼백의 끈으로 이어진 망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막 포격이 날아온 방향에서 출몰한 언데드들.

[주인님의 적. 해치운다.]

[모두 구워줄게.]

리터너로 되살린 최형태와 다크 미니언 이승연이 [데드 라이즈]로 제작한 언데드들과 함께 집단군의 양쪽 날개를 노렸다.

투쾅! 쾅!

10초 간격으로 발사되는 검은 포탄.

뼈에 영기를 고농도로 응축시킨 후 골탑의 힘으로 쏘아 보내면 4성 마법에 준하는 위력을 지녔다.

"진형을 넓게 펼쳐. 언데드들을 밀어내고 전진한다."

"우, 우린 물러나겠습니다."

"멍청한 놈. 저 벽들을 부수는 동안 언데드들이 구경하고 있을까?"

집단군이 나아갈 정도로만 벽을 부순 게 독이 되었다.

헌터 일부를 돌려서 [망자의 골탑] 견제에 보내기도 어려웠고.

전진하자니 사방에서 언데드들이 몰려오고 있어서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신관들은 방어에 전념. 마법계는 우측 날개에 몰려온 언데드들을 쓸어버려라."

마력 안배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아껴놓은 화력을 쏟아 부어야 변수를 만들 수 있다.

오정수는 지휘 중에 어렵사리 재배열한 마력을 풀었다.

[체인 라이트닝]

쿠르르릉-!

5성의 마법사가 빚어낸 뇌전이 스켈레톤 워리어들 사이를 헤집었고.

열 구 넘는 숫자가 일격에 가루로 화했다.

"빌어먹을."

최대 출력으로 방출한 [체인 라이트닝]으로 3성 언데드를 쓸어버리지 못하다니.

자존심이 상한 오정수의 입에서 거친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어떻게 되어먹은 언데드냐!'

투콰아앙!

다시 한번 지면을 울리는 커다란 폭음.

집단군의 마법계 헌터들은 난전 비슷한 상황에 처한 탓에 제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안개 너머의 적은 말 그대로 프리딜을 넣으니.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수를 써야 했다.

"거기, 너!"

"예."

"나 좀 따라와라."

오정수는 부득부득 이를 갈며 급히 다리를 움직였다.

*

[질풍 걸음]

김미정은 본 월로 구축한 전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영지 곳곳에 배치해둔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그녀를 노리기도 했지만.

단검이 번쩍이는 순간, 두개골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뼈들이 지면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아. 개고생했는데 쉽게 끝나버리면 짜증날 것 같아."

볼멘소리를 내며 적진 깊숙이 침투했을 때.

화염구 하나가 김미정의 동선을 정확히 예측해서 날아들었다.

3성 마법, 파이어볼이다.

우우우웅-!

단검에 깃든 푸른 기류가 화염구를 베었다.

본래 무언가에 닿는 순간 곧바로 폭발을 일으키는 마법이지만.

김미정의 오러는 재배열된 마력 구조에 간섭해서 구체에 담긴 힘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키히. 이런 걸로 나를 막을 수...?"

[퀵 리로드]

[파이어볼]

1초도 안 돼서 날아드는 화염구에 단검을 재차 휘둘렀지만.

이번에는 콰아앙- 모든 힘을 상쇄시키지 못하고 화염구가 터지는 것을 허용했다.

"썅. 옷이 더러워졌잖아."

그 자리에 멈춰 선 김미정은 장비에 묻은 재를 털어냈다.

폭발 범위에 휩쓸렸지만 찰과상 하나 입지 않은 모습에 조승철이 분한 듯 턱뼈를 달싹거렸다.

[상대는 6성 절정의 헌터다. 효과가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괜히 나섰다가 뒈지지 말고 지원이나 잘 해주시죠.]

앞으로 나서는 파프너와 송명석.

김미정의 눈가가 크게 휘어지며 반월을 그렸다.

"쌍검 다루는 언데드야."

[나 말이요?]

"동해 쪽 무인도에 간 적 있지?"

[그렇습니다만.]

"키히히, 와. 진짜 대박이잖아!"

김미정은 뜻밖의 행운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그 새X 뒷꽁무니 쫓아다닌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니?"

[그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온 겁니까.]

"우연이야. 우연."

김미정은 단검을 입술 가까이에 대고는 쪽- 가볍게 접촉했다.

"킷. 너희 주인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잘 됐어."

[후후후. 질문을 하러 가려면 먼저 우리를 쓰러트려야 한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천천히 다가오는 김미정.

파프너와 송명석은 좌우로 흩어지더니 거의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102화 전면전(3)

부웅-!

매서운 파공음을 동반한 정권이 일직선으로 나아간다.

그 끝에 선 여인의 형상이 주먹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쳇.]

파프너는 혀를 차며 왼팔을 가슴팍에 대었다.

0.1초 차이로 들이닥친 푸른 궤적.

용린갑으로 전신을 감싸고 암흑 투기까지 휘감은 팔에서 쩌억,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좌우로 찢겨졌다.

"키히. 단단하잖아. 찢어버리는 재미가 있겠어."

김미정이 히히덕거릴 때, 좌측으로 다가온 송명석이 옆으로 파고들어서 칼을 뽑았다.

[분광검(分光劍)]

[5초식 – 적광검(赤光劍)]

붉게 물든 칼날이 먹이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 짐승처럼 흉포한 기세로 날아든다.

생전에 도달하지 못한 '벽'을 넘어서면서 제 위력을 내는 분광검.

[4성이라고 얕보면 곤란합니다.]

송명석은 납검한 상태로 달리는 중에 영기를 날에 불어넣음으로써 오러 발현 시간을 줄였다.

평범한 헌터라면 불완전하게 구현된 오러가 칼집을 손상시켰을 터.

천골(天骨)의 재능을 지녔던 망자이기에 가능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발현한 암흑 투기는 김미정도 얕보기 어려운 위력을 지녔다.

[고유 특성 - 도적의 7가지 도구]

[⑤. 무엇이든 휘게 하는 스프링]

얇게 구현된 오러.

송명석이 돌진하는 순간부터 끌어 올린 최대 출력의 암흑 투기에 비하면 1/5도 안 되는 힘이다.

단검을 역수로 든 김미정이 붉은 궤적과 빙 두른 오러를 충돌시키자.

팅-.

[무슨 사술을 부린 겁니까!]

적광검의 궤적이 크게 흐트러지면서 엉뚱한 곳을 가격했다.

빠르게 사그라지는 암흑 투기.

송명석이 까득- 턱뼈에 힘을 주며 다음 공격을 이어가려 하니 파프너가 어깨를 붙들었다.

"캬. 아깝네."

입맛을 다신 김미정이 단검을 다시 앞으로 들었다.

[고유 특성 - 도적의 7가지 도구]

[②. 길이를 재는 자]

송명석의 공격을 흘려내는 동시에 반대쪽 칼날에 오러를 응축.

단검의 길이가 짧다는 인식을 뒤집어서 고유 특성으로 송명석을 가격하려던 노림수가 물거품이 되었다.

짧게 손속을 교환하고는 뒤로 물러난 김미정.

아쉬움이 담긴 그녀의 시선은 파프너의 왼팔에 새겨진 자상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야. 씨. 그걸 막아?"

거친 음색에 섞인 감탄사.

[분신]과 [질풍 걸음]으로 눈을 현혹시켜 파프너의 공격이 정면으로 향하게끔 유도하고.

주먹을 뻗는 순간 심장을 노렸다.

같은 6성 헌터조차 반응하기 힘든 날카로운 공격.

[막았다고 하기에는 꼴이 영 아니잖아.]

"너 심장은 부술 생각이었어."

[언데드가 심장 없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뒈지진 않겠지. 그래도 좀 힘들지 않겠나."

파프너의 안광이 날카로워졌다.

드래고니안 사체에 기반을 두고 만든 엘드리치 드래곤.

평범한 언데드와 달리, 영력이 드래곤 하트를 중심으로 뭉쳐 있으니 심장을 꿰뚫리면 전투력도 급감한다.

한 번 본 것만으로 파프너가 힘을 운용하는 핵심을 꿰뚫어 본 것.

[그럼 더 힘 줘보지.]

"염병. 쌍검을 든 말라깽이가 가만 두지 않더라고."

[빌어먹을, 이군요.]

송명석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방금 전에 검을 휘두른 것으로 확실하게 알았다.

자신은 부나방처럼 날뛰는 여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훤히 드러난 빈틈을 쾌검으로 노렸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고.

파프너가 붙들지 않았으면 역으로 당할 뻔했다.

"캬. 재밌네. 무당이라도 돼? 감이 왜 이렇게 좋아."

히죽거리는 김미정.

[나를 능멸하는 겁니까?]

[쟤 진심이야.]

[미쳤군요.]

[그러지 마. 나도 좀 재밌어지고 있는걸.]

파프너의 입술 한쪽도 위로 올라갔다.

거울을 마주하는 것 마냥 닮은 꼴인 망자와 산 자.

[처음 계획대로 간다?]

[...어쩔 수 없군요. 당신에게 맞추겠습니다.]

[조승철. 넌 적당히 견제만 해.]

[알겠습니다.]

파프너가 메인 탱커 및 딜러.

송명석은 서브 딜러.

그리고 조승철은 지원 역할.

나찰 길드와 전면전을 벌일 때를 가정해두고 미리 정한 포지션이다.

송명석과 조승철은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김미영의 압도적인 무력을 접한지라 반문하지 않았다.

[케넥 전투술]

[1장 – 낙엽 치기]

손날을 바짝 세워서 크게 휘두르는 자세.

공격 범위가 넓은 대신 동작도 크다 보니 빈틈이 드러났다.

스텝을 밟으며 낙엽 치기를 흘려낸 김미정이 파고들려는 순간, 녹색으로 물든 검이 반겨주었다.

[분광검]

[4초식 - 녹광검]

"이거 참. 협공이라니 너무 더러운 거 아니냐? 1대1로 싸워야지."

[나라고 이러고 싶은 건 아니니 그냥 죽어주십시오.]

"헹. 싫은데?"

왼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팽그르르 돌더니 역수로 전환, 송명석의 칼날을 긁어냈다.

카가각-.

빠르게 소모되는 암흑 투기.

그에 비해 김미정의 오러는 더욱 빛이 강해진다.

오러를 빚어내는 것은 마력에 의념을 부여하고 방출하는 행위.

마력 운용능력.

그리고 의념을 불어넣는 것.

6성 절정의 헌터인 김미정은 모든 면에서 송명석을 앞섰다.

[케넥 전투술]

[4장 - 정권 찌르기]

부우웅!

김미정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간 주먹.

문제는 이 녀석이다.

'스치기만 해도 이 정도라니. 너무 재미있잖아.'

파프너.

드래고니안 사체를 베이스로 만들어서 동일 성위의 헌터보다 스펙이 뛰어났고.

[마투사] 특성으로 능력치 보정을 두 배로 받으며.

초월 등급 아티팩트인 용린갑의 효과로 모든 스탯에서 20% 증가 보정을 받았다.

경지는 5성이지만 순수 힘만큼은 김미정보다 앞섰다.

'오러 운용능력도 크게 떨어지지 않고 말이야.'

파프너의 전투 방식도 김미정과 상성이 안 좋았다.

자잘한 공격은 받아내면서 마구 파고들어 상대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인파이터.

반면 김미정의 스타일은 빠른 속도를 살려 일순간에 폭발적인 대미지를 입히거나, 혹은 천천히 갉아먹는 아웃파이팅을 선호했다.

'한 방에 못 끝낼 거면 소모전으로 가야 해.'

1대1이면 이길 수 있다.

문제는 쌍검을 든 스켈레톤 나이트, 송명석이다.

첫 공격 땐 아군의 기량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더니.

파프너와 몇 마디를 나눈 후에는 한 몸이라도 된 것 마냥 빈틈을 철저하게 보완해주었다.

'이 녀석들을 제치고 천유진을 죽일 수 있으려나?'

주륵-.

김미정의 입에서 침이 질질 샜다.

오래간만에 손속을 겨루는 맛이 있는 적을 만나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조금만 더 놀아보자고."

[먼저 쓰러지지나 말아라.]

파프너는 오러에 갈라진 용린갑을 재생시키면서 대꾸했다.

*

[고스트 아이를 해제합니다.]

'김미정은 파프너에게 맡겨두면 되겠어.'

짧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김미정의 돌파력은 방어 측인 유진이 제일 신경 써야 할 변수였다.

나찰 길드의 승리 조건은 하나.

망자들을 이끄는 주인, 유진의 목숨을 취하는 것이다.

〔그대의 하수인들을 지나쳐서 달려왔으면 곤란하였겠구나.〕

'뭐, 그렇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플랜 B도 마련해두었다.

아군의 피해가 많이 커져서 문제일 뿐.

〔망자들은 언제든지 만들 수 있지 않느냐?〕

'하급 언데드는 그렇지.'

합일과 시술로 강해진 중급 언데드들은 그렇지 않다.

네크로폴리스 확장에 필요한 수하들.

스켈레톤 워리어나 리터너 같은 하급 언데드야 전멸해도 고생 좀 하면 복구가 가능하지만.

이름을 가진 언데드들이 파괴되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그럼 이쪽에만 신경을 쓰면 되겠군.'

주 전장인 나찰 길드 집단군으로 시선을 돌렸다.

망자의 골탑 3개의 프리딜.

리터너와 스켈레톤 워리어들도 넓게 포진해서 나찰 길드 젭단군과 전투를 벌였다.

〔한데 계획대로 풀리지만은 않는 것 같구나.〕

사방에서 몰려드는 언데드 군대를 상대하면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집단군.

[스켈레톤 워리어가 파괴되었습니다.]

[리터너가 파괴되었습니다.]

[...]

[제어 숫자 – 81/208]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간 지 10분 만에 언데드가 100구 넘게 파괴되었다.

유진이 손을 써서 일일이 강화시키고.

성유물과 검은 방첨탑의 버프까지 받은 언데드들인데도 피해가 빠르게 누적되었다.

〔이 작은 인간들. 꽤나 잘 버티고 있지 않느냐.〕

'즐거우신가 봅니다?'

〔크하핫. 그대에게도 드디어 시련이라고 불릴 만한 일이 닥친 것 같도다.〕

'두고 보면 알겠지.'

유진은 검은 방첨탑에 귀속시킨 언데드들의 권한을 자신에게로 이양시켰다.

소모전으로 갈 거면 성유물 버프로 더 강해진 망자들을 보내랴 조금이라도 유리해지지 않겠는가.

〔총 병력은 얼마나 남았느냐?〕

'이제 400 좀 넘네.'

나찰의 집단군이 예상보다 늦게 와서 추가로 제작한 하급 언데드가 약 200구쯤 되었다.

〔1/4 정도의 손실이라. 그렇지만 적들은 건재하구나.〕

'구경이나 하고 있으십쇼.'

팔짱을 낀 유진은 느긋한 투로 대꾸했다.

같은 시각.

집단군의 총 지휘를 맡은 오정수는 지금까지의 흐름을 되짚으며 유진의 노림수가 뭔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난전을 유도해서 소모전으로 가겠다?'

안개에서 쉼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언데드들.

탐색 스킬인 [독수리의 눈]으로 희끄무레한 기류를 일부 들춰 보아도 망자들이 계속 시야에 잡혔다.

'아라한 길드의 정보가 없었으면 놈의 의도대로 되었을지도.'

모든 것이 예측에서 벗어났지만.

오정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라한 길드에서 확인한 유진의 최초 각성 시기는 2달 전.

접경지역에서 밤낮을 지내며 레벨 업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고 해도 올라갈 수 있는 성위에는 한계가 있다.

'놈의 힘도 무한하지는 않을 테니.'

뼈 벽으로 집단군의 움직임을 제한한 것.

시야를 훼방하는 안개.

마지막으로 원거리 포격을 전담하는 고정 포대까지.

유진의 능력에 한계가 없다면 번거로운 수단을 취할 것 없이, 정면 승부로 나섰을 것이다.

'침착하게 대열을 유지하면 이긴다.'

저 멀리 있는 구조물.

[망자의 골탑]만 해결하면 말이다.

'아군과의 거리는 약 500미터. 견제할 수단이 없군.'

집단군의 원거리 공격은 닿지 않고.

무투계 헌터들로 포대를 부수자니, 언데드 무리를 돌파해야 해서 어느 정도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이럴 때 행동대장이 있었으면.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여자다.'

자리에 없는 사람을 떠올려서 무엇 하겠나.

오정수는 분을 삭인 후 용병 팀 [검은 늑대]를 따로 불러냈다.

커다란 도끼를 어깨에 들쳐 멘 5성 헌터, 민상진.

뒤를 따르는 한 쌍의 남녀는 4성의 경지에 도달한 실력자들이다.

"뼈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가주시죠. 500미터쯤 가면 고정 포대가 있을 겁니다."

"저 언데드들을 돌파하는 건 무리 아닐지."

"길은 터드리죠."

"위험해 보이는데."

민상진의 엄살에 한숨을 쉰 오정수가 마지못해 입술을 떼었다.

"특별 수당으로 20억 드리겠습니다."

"이 아저씨. 통이 커."

"신호를 주면 가시죠."

"길은 어떻게 만들어줄 거요?"

"마법계 헌터들의 화력을 집중시킬 겁니다."

견제와 화력 지원 위주로 돌려놓은 마법계 헌터들.

오정수가 마력 소모를 아낀 것은 이 순간을 위함이었다.

"일제 발사."

[라이트닝 볼텍스]

[플레임 밤]

[윈드 블레이드]

....

재배열을 끝낸 마력이 세계의 규칙을 비틀고.

화염과 번개, 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자 집단군 왼쪽에 몰려온 언데드 수십 구가 모두 소멸했다.

"지금이다."

"특별 수당! 잊지 마쇼!"

희끄무레한 기류에 삼켜진 것처럼 빠르게 사라진 [검은 늑대] 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집단군을 괴롭히던 포탑 하나가 더 이상 뼈를 쏘지 않았다.

'좋아. 이제 수비에 집중한다.'

오정수는 집단군을 더욱 밀집시켜서 방어 대형을 더욱 견고하게 구축했다.

탱커와 근접 딜러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진.

[망자의 골탑]이 쏘아 보내는 뼈 포탄이 위협적이지만, 신관계 헌터들이 결계를 전개하면 막아낼 수 있다.

'용병들이 총알받이가 되어준 덕에 놈의 전략을 빠르게 읽어냈다.'

망자의 골탑을 모두 박살 내면 언데드 군대의 화력도 반 이하로 줄어든다.

포위망을 뚫고 적진에 파고든 무투계 헌터들.

시간은 나찰 집단군의 편이다.

'...뭐지?'

이상하다.

첫 번째 고정 포대를 부수고 5분이 지났지만 변화가 없다.

여전히 뼈 포탄이 날아들어서 집단군을 두들겼고.

안개 속으로 들어간 무투계 헌터들은 아무 소식도 없었다.

'놈. 아직도 숨겨둔 전력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선행했던 김미정은 어디로 간 것인가.

"지휘관 양반!"

"생각 중이다. 조용히 해."

"그렇게 멍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저걸 봐!"

나찰 소속 헌터의 비명에 오정수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집단군 여기저기에 드리웠고.

"X 됐네."

오정수는 그만 생각하기를 멈추고 말았다.

103화 전면전(4)

콰직!

힘껏 휘두른 도끼가 하얀 뼈를 반으로 쪼갰다.

5미터 높이의 구조물, [망자의 골탑]을 지탱하던 뼈들이 하나둘 쪼개지고.

탑의 하중을 버틸 만한 기둥이 사라지자 옆으로 기울더니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것도 마법 포탑의 일종이겠지?"

"신기하네. 오빠."

"너무 관심 가지지 마라. 우린 일만 하면 그만이다."

민상진은 도끼를 쥐었다.

도끼 몇 번 휘둘러서 20억이라니.

최근에 의뢰 수행 중 발생한 문제 때문에 쥐 죽은 듯이 살고 있었는데.

이번 의뢰 덕에 주머니 사정이 확 풀리게 생겼다.

"그 해골들한테 당하지 마라. 쪽팔리니까."

"상진이형. 나도 4성이거든? 저딴 놈한테는 안 당하지."

리터너와 스켈레톤 워리어의 스펙을 매겨보면 3.5성 수준.

단순한 움직임, 그리고 스킬까지 고려하면 실질적인 전투력은 하향조정해야겠지만.

어떤 식으로 계산하든 [검은 늑대] 팀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었다.

"남은 둘도 빨리 끝내자고."

"이 안개. 불길해."

"그래요. 오빠들. 고정 포대만 부수고 돌아가자."

출발 전.

뼈 포탄이 날아드는 방향을 관찰해서 남은 두 고정 포대의 위치도 파악해두었다.

속도를 올리는 검은 늑대 팀.

30초 정도 달리니 언덕 위에 선 두 번째 [망자의 골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포탑 앞에 있는 새빨간 괴물은 뭐지?"

"골렘. 육체 구성을 피로 한 건가."

"호락호락하진 않네."

"20억짜리 의뢰잖아. 포탑의 위력도 상당하니까 우리를 인지하기 전에 끝낸...."

태앵-!

민상진의 도끼가 허공에서 춤을 추고.

기묘한 각도에서 날아온 화살이 날에 맞아서 튕겨 나갔다.

뒤따르던 팀원들도 각자의 병기로 화살들을 어렵지 않게 쳐냈다.

"각도가 이상해."

"마력 파장이 미약하군. 헌터는 아닌데."

사각에서 날아든 화살.

각 화살에 담긴 위력은 강하지 않지만 방어구의 틈새를 정확하게 노렸다.

돌진을 멈춘 검은 늑대 팀이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일 때.

[고유 능력 - 공간]

[매직 스크롤 – 라이트닝 웹 X 3]

[매직 스크롤 – 워터 월 X 3]

민상진의 입 근육이 한순간 잘게 떨렸다.

어떤 전조도 없이 발현된 마법.

5성 절정의 실력자인 그가 재배열 때 발생하는 마력의 파장을 놓치다니?

[오러]

놀라는 것과 별개로, 무수한 실전을 겪은 육신이 본능적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도끼날을 휘감은 오러가 뇌전의 그물을 찢어 발겼고.

본래 [라이트닝 웹]의 힘을 강화할 목적으로 펼친 [워터 월]도 두 동강 냈다.

"상진이 형. 방금 그건?"

"나도 몰라."

첫 번째 구조물을 부술 땐 없었던 반격.

민상진은 부릅뜬 두 눈으로 구조물 주위를 살펴보았다.

"거기에 있었군. 쥐새끼들!"

언덕 아래를 향해 겨누어진 시퍼런 도끼날.

진득한 살기에 위장포를 감싸고 누워 있던 뽀시래기 팀이 움찔거리며 일어났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슴까. 선배. 금방 들킬 거라고."

"으그. 감이 좋은 아저씨네."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다. 괜찮아."

뽀시래기 팀이 위장을 걷어내자 블러드 골렘도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벽도 못 넘은 애송이들이잖아?"

"와. 검은 늑대도 이제 갈 데까지 갔네."

"오빠. 기분 나쁜데 죽이자."

살기등등한 모습에 강민호가 꿀꺽, 침을 삼켰다.

"스캐빈저 용병 팀, 검은 늑대. 리더가 5성의 헌터라고 들었다."

"히엑. 그거 정말임까?"

"괜찮아. 형님의 지시만 따르면 막을 수 있다."

강민호는 블러드 골렘을 흘겨보았다.

유진이 망자의 골탑 수비용으로 넘겨준 강력한 전력.

-판단력은 없으니까 명령을 잘 내려줘야 한다. 아니면 벽 정도의 역할밖에 못해.

뽀시래기 팀을 믿어준다는 증표.

세 사람은 유진의 신뢰에 반드시 결과로 답하고 싶었다.

"다들 긴장 풀고 하자."

"오빠나 잘해."

"그, 전 이런 곳에서 뒈지기 싫슴다."

"여기서 죽으면 형이 좀비로라도 살려주지 않을까?"

긴장을 푸는 뽀시래기 팀.

도끼자루를 쥔 민상진의 손에서 굵은 힘줄이 튀어 나왔다.

"애새끼들이. 죽고 싶어 환장했나!!"

땅을 박차며 짓쳐들 때.

강민호는 블러드 골렘에게 지시를 내렸다.

[혈류변환]

[블러드 웨폰 - 블레이드 모드]

허공에서 얽혀드는 골렘과 헌터.

동시에 뽀시래기 팀과 검은 늑대 양측이 모두 행동을 개시했다.

*

쿵- 쿵-.

육중한 발자국 소리가 전장 여기저기서 흘러 나오는 잡음을 모조리 삼킨다.

안개 사이에서 나타난 6미터의 거인.

숙성시킨 트롤의 뼈, 그리고 오우거의 시체를 기반 삼아 만든 대형 언데드 브루탈이 모습을 드러냈다.

-게리아악!!

날선 송곳으로 철판을 긁어내는 듯한 소름끼치는 괴성이 집단군 헌터들의 고막을 강타한다.

유진은 [백야] 특성으로 스탯을 치환.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브루탈들에게 신성 주문을 부여했다.

"가라."

버프를 받은 브루탈들이 가속하며 나찰 집단군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자 형형색색의 마탄들이 쇄도했다.

오정수의 지시를 받은 마법계 헌터들이 비축했던 마력을 일제히 재배열.

각자 충돌하지 않게 시간차를 두어 방출한 것.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허공에 나타난 육각형의 방패가 쏟아지는 마탄 세례를 받아냈다.

챙그랑- 챙그랑-.

수십이나 되는 마법계 헌터들의 압도적인 화력에 성력으로 짜낸 벽이 유리창처럼 깨져 나간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아낼 수는 없는 법.

유진은 당황한 기색 없이 재빠르게 성력을 방출하며 재차 주문을 사용했다.

'신관 직업군이 마법계보다 좋은 게 뭔지 알아?'

〔무엇이느냐.〕

'믿음 하나면 해결되거든.'

신성 주문은 마법처럼 복잡하지 않다.

마법의 원리는 세계를 구성하는 힘, 마력을 재배열해서 섭리와 규칙을 사용자의 의지대로 비트는 것이다.

반면 신성 주문을 발현하는 것은 숭배하는 성좌나 그 존재가 속해있는 성단의 가호.

'재배열 과정 없이 성력을 다루는 숙련도만 높으면 주문 전개 속도도 빨라진다.'

회귀하면서 얻은 스탯, 성력.

신관 클래스만 다룰 수 있는 힘이지만 [백야] 특성 덕에 유진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다.

영력과 맞닿으면서 대칭을 이루는 에너지.

그렇기에.

회귀 전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유진은 그 어떤 신관보다도 능숙하게 신성 주문을 펼칠 수 있었다.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부정 충격 방패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크하하핫. 그대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로구나.〕

보유 성력 중 절반을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소모했다.

수십이나 되는 헌터들의 일제 사격.

다수가 유진과 같은 성위였고.

일부 헌터의 경지는 벽을 넘어섰다고 하는 4성이었다.

보유 중인 영력을 모조리 부어 넣는다 한들, 마법계 헌터들의 사격을 막아내진 못했을 터.

'이 정도면 충분하다.'

대형 몬스터를 기반으로 만든 언데드.

브루탈의 맷집은 일반적인 망자를 상회하지만, 대책 없이 저만한 화력에 노출되는 건 위험했다.

"마탄들의 궤도가...?"

"저 결계 때문에 틀어졌다."

순차적으로 방출해서 파괴력을 극대화해야 할 마법 세례.

유진은 [부정 충격 방패]로 일부 마법을 방어하거나 날아드는 궤적을 비틀었다.

압도적인 수적 차이.

성력 절반을 쏟아 붓고도 마탄들을 직접 막아내기보다 간접적으로 간섭하는 게 전부였지만.

'전략적인 목표는 달성했다.'

유진의 개입으로 줄어든 화력으로는 브루탈의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부정....]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페이디페데스의 목걸이 - 내장 스킬 : 마라톤의 정신을 사용합니다.]

연거푸 주문을 사용한 여파로 바닥난 성력.

라이프 드레인으로 체력을 성력으로 치환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마라톤의 정신]으로 회복.

브루탈 5구는 기동에 문제가 없을 정도의 피해만을 입은 채로 집단군 근처까지 돌진했다.

-게리아아아악!!!

브루탈 5구는 밀집해 있는 헌터들에게 육탄 공세를 퍼부었다.

정수리로 쏟아지는 커다란 발.

헌터 하나가 마력으로 강화한 방패를 위로 들어 올렸다.

"이까짓 거 버티면!"

콰직-!

1초도 못 버티고 으깨져버린 헌터.

제 형태를 잃어버린 채, 갑주 사이로 흘러나온 피와 짓이겨진 살덩이가 주위를 붉게 물들인다.

다른 브루탈들도 흉성을 터트리며 밀집해 있는 헌터들을 뭉개거나 팔로 후려쳤다.

"공격을 흘려! 옆으로 흘리라고!"

"미친. 네가 한 번 해봐라. 저걸 어떻게 패링해!"

엄청난 체급 차이.

방어?

힘 차이가 원체 커서 일격도 버티지 못한다.

패링? 공격을 흘려내라고?

언데드들의 공세를 받아내려고 밀집 대형을 유지한 탓에 그마저도 뜻대로 안 됐다.

한 발자국도 물러날 수 없는데.

어떻게 무기나 방패를 사용해서 피해를 옆으로 흘리겠는가.

"씨X! 먼저 쑤셔!"

나찰 소속 헌터가 유형화된 마력을 대검에 불어 넣었다.

강철조차 종이처럼 베는 오러.

긴 리치를 십분 활용, 허리를 축 삼아 검을 크게 휘둘렀다.

브루탈의 아킬레스건을 훑고 지나간 칼날. 영력으로 강화된 거죽이 찢겨지고 사후경직된 근육이 파손되었다.

"봐. 통한..."

푸아악-.

브루탈이 오른발을 거세게 움직이자 몸통 여기저기에 붙은 돌기가 헌터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날 선 돌기를 여기저기에 붙이고 있는 브루탈에게 유효타를 먹이려면 동선도 한정되어버린다.

대검이 길어봐야 인간의 신체에 비해서일 뿐.

2층 건물 높이의 대형 몬스터한테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잘라!"

우우웅-!

푸른 기류를 머금은 병기들이 돌기를 쳐냈지만, 시간을 역행하듯 몇 초도 안 돼서 자라났다.

트롤의 뼈에 깃든 '재생' 개념을 영력과 결합.

힘만 충분하면 돌기쯤은 언제든지 재생시킬 수 있다.

-안타깝구나. 저 흉물들을 일찍 투입하였으면 피해도 줄일 수 있었을 터인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쯔쯧-.

유진이 한심한 티를 내며 혀를 차니 크로노스가 분개했다.

-작은 인간들이 볏단처럼 휩쓸리고 있지 않느냐. 한데 왜 그리 말하느뇨!

'밀집대형이니까 대응을 못하는 거다.'

-풀어서 말해 보아라.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려면 정면 싸움을 피해야 한다.'

어그로를 관리해줄 탱커.

순간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딜러.

그리고 탱킹을 도와줄 신관까지.

대형 몬스터는 경지 대비 스펙이 훨씬 높아서 포지션을 철저하게 유지해야 한다.

'밀집해 있으면 브루탈에 대응할 만한 포지션을 잡을 수 없다.'

-한데 저들이 그대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아니하였으면 피해만 더 입지 않았겠느냐.

'그랬으면 난전으로 이어졌을 거다.'

전투의 흐름이 소모전으로 간다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강화시킨 스켈레톤 워리어와 리터너의 스펙은 평균 3.5성급. 난전으로 가면 집단군에게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다.

'나찰 길드의 지휘자가 적당히 유능해서 다행이지.'

-적당히 유능하다?

'아라한에서 받은 정보대로 이번 싸움의 전략을 준비해두었어.'

시체 폭발에 대비해서 꼼꼼하게 탐색했으며.

유진이 망자들을 다룰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서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가자마자 대열을 빠르게 갖춰서 대응했다.

그 때문에 스켈레톤 워리어와 리터너 수백을 투입했음에도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브루탈에게 유린당하는 신세가 된 거다.'

차라리 난전이었으면 브루탈 5구의 돌진에 이만큼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간격을 유지해서 대응도 가능했겠지.

더 유능하거나.

혹은 의욕만 가득한 멍청이였다면.

전투의 시작부터 현 시점까지, 유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기라아알!!!!"

분노와 좌절감으로 점철된 오정수의 욕지거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봐. 이제 알아챘나 보다.'

-참으로 악랄하도다.

'내 방식이 성좌님의 취향하고는 안 맞나?'

-크하하핫. 그럴 리 있느냐. 지략도 영웅의 소양 중 하나. 저들은 결국 지혜 싸움에서 패한 것이니라.

하여간 종잡을 수 없군.

그 놈의 영웅타령은.

'싫어하지는 않으니 됐나.'

유진이 피식 웃고 있을 때.

망자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브루탈 5구가 무너트린 집단군 대열의 틈으로 스며들었다.

"야. 밀지 마!"

"버티라고!"

"꺼져! 멍하니 서 있으면 저 괴물한테 뭉개진다고!!"

나찰 길드 집단군은 붕괴했다.

망자의 골탑은 둘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뼈 포탄을 쏘고 있으며.

브루탈들은 진열을 마구 헤집었고.

분열된 헌터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언데드 군대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헌터들은 반 이상 살아있지만 더 이상 싸움을 지속할 마음도, 상황도 아니었다.

[다크 콜링을 사용합니다.]

-그대여. 잡귀들을 만든다 한들, 이 전쟁에서 사용할 곳은 없을 터인데 무얼 하는 게냐?

'합일시키려면 영혼이 필요하니까.'

마법계 헌터들의 시체를 수십이나 구할 수 있는 기회.

저 놈들을 모두 언데드로 제작하면 네크로폴리스 운영에 큰 힘이 되리라.

-오만한지고. 사후 처리까지 고려하는 게냐.

'챙길 건 챙겨야지.'

아무렴.

필요하면 불타고 있는 집에서 대들보라도 빼주겠다.

저주로 마법계 헌터들의 영혼을 붙들고 있을 때.

"천유지이이인!!!!!"

원한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싸움 중에 발생하는 소음을 뚫고 유진에게 전해졌다.

[다크 콜링]을 사용하려고 전장에 다가갔더니, 오정수가 그를 발견한 것.

산발된 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원념으로 물들었다.

"너였구나? 지휘관이."

"이 새X. 인간이 맞긴 하냐! 이렇게 간악한 짓을!"

"당한 놈이 등신인 거다."

"여기서 죽더라도 네놈만큼은 죽이겠다!!!"

5성 마법은 시전 속도와 마력 소모량 모두 부족했다.

오정수는 지팡이에 힘을 꾹 쥐며 마력을 빠르게 재배열했다.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사용한다.'

[체인 라이트닝]

지팡이 끝에 맺힌 번개가 꿈틀대더니 직선으로 날아들었다.

회피?

놈이 위치를 바꾸는 순간 뇌전의 궤도를 틀면 그만이다.

고작해야 3성.

무슨 수로 언데드를 다룬지는 몰라도, 유진의 전투력은 높지 않을 것이다.

"죽어라!!"

콰르르릉-!

새파란 뇌전이 코앞에 들이닥치는 순간.

짧게 심호흡을 뱉은 유진이 기다란 창을 뇌전 쪽으로 추켜세웠다.

유니콘 뿔 창을 감는 희끄무레한 기운.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5장 - 전력 찌르기]

스팟!

창에 맺힌 기운과 번개가 허공에서 격돌.

직선으로 뻗어 나가야 할 뇌전이 좌우로 찢어졌다.

"버, 번개를 창으로 잘랐다고?!!"

"내가 잔재주가 좀 많아서."

불완전한 암흑 투기.

파프너한테 전수 받은 반쪽짜리 기술을 펼치느라 [라이프 드레인]으로 채웠던 영력이 뚝 떨어졌다.

뇌전을 쳐내는 것도 온전하지 않았다.

체인 라이트닝의 기운 일부가 몸에 스며들면서 온몸이 저릿하고 통증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혀만큼은 기름을 칠해놓은 것 마냥 어느 때보다도 민활하게 움직였다.

"말이 돼? 이게!!"

오정수의 경지는 5성.

10년 넘는 시간 동안 무수한 괴물들을 도륙했고.

목숨을 건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벽을 두 번이나 넘어서 마침내 다섯 개의 별을 완성시켰다.

그 노력의 결정체가.

헌터가 된 지 3개월쯤 된 애송이한테 짓밟히다니.

"이건 거짓말이다. 반드시 네놈의 뒤에 배후가 있을 거다!"

부산의 암흑가를 쥐락펴락 하는 세력.

나찰 길드에서 차출한 헌터 150명과 용병 100명.

3성만 되어도 걸어 다니는 중전차 소리를 들으며 벽을 넘어서면 미사일이라고까지 하는 헌터들이 200 넘게 모였다.

그런 세력을.

1년차 헌터 혼자 감당한다?

차라리 뒷배가 있다는 가정이 합당하리라.

"응. 말이 돼."

시니컬한 대답에 오정수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나찰 집단군 본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붕괴되고 말았다.

104화 승자의 권리(1)

"튀어!"

"돈은 어쩌고?"

"여기서 살아 나가야 돈이고 뭐고 받지."

도망치는 헌터들.

패배를 직감하자 나찰 길드 헌터고 용병이고 할 것 없이 등을 돌렸다.

〔겁 많은 작은 인간들을 그대로 둘 셈인가?〕

'쫓아가기라도 할까.'

〔저 치들은 그대의 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느냐.〕

'이젠 세력을 넓히기로 결정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

그것보다도.

애초에 힘을 숨기고 다닌 적도 없다고.

회귀 후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강령술을 사용했다.

거미 사냥 땐 정보를 일부 차단했지만 그라운드 제로 안에서도 대놓고 언데드를 부렸는데 숨기긴 뭘 숨겨.

"끄르륵."

아.

마법계 헌터 하나가 더 죽었군.

[다크 콜링을 사용합니다.]

네크로폴리스 운영에 써먹을 마법계는 이야기가 다르지.

무투계 헌터들이야 얼마든지 놔줄 수 있지만.

〔신관들의 주검에는 관심이 없느냐?〕

'축복 때문에 강령술이 안 먹혀.'

신관 직업군은 숭배하는 성단에게 속해 있어서 좀비로도 되살릴 수 없다.

죽기 전에 성단을 믿는 마음을 포기시켜야 가능한데, 퍽이나 쉽겠어.

〔저 치들에게 깃든 축복을 거둬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로구나.〕

'그렇지.'

〔짐의 기운을 응용하면 가능할 것 같다만, 투자 대비 효율이 안 맞겠구나.〕

'뭐, 신관계 헌터는 신체능력도 떨어지니까.'

잠깐.

신관계 헌터의 사체로 언데드를 만든다, 라.

마침 유진의 성좌, 〔역천의 거인〕은 언데드란 개념을 주관하고 있지 않던가.

잘하면... 그게 가능할지도.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아. 아냐.'

유진은 막 떠오른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지금 당장은 눈앞의 싸움에 집중해야 할 때.

〔포위망을 돌파한 이들은 그 작은 인간들의 수준으론 벅차 보이더구나.〕

'다들 잘 하고 있다.'

〔피조물의 능력이 제법이라 한들, 결국은 단순한 명령만 수행 가능한 존재. 괜찮으냐?〕

'고스트 아이로 보고 있어. 시킨 대로 잘 하고 있군.'

〔호오?〕

파프너도, 뽀시래기 팀도.

승기를 확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적을 붙든다는 원 계획을 완벽하게 수행해주었다.

특히 강민호는 블러드 골렘에게 시기적절한 명령을 내려 도끼를 든 녀석의 발목을 착실하게 잡아놓았다.

〔그 피조물의 스펙이야 그렇다 쳐도, 역량이 미치지 못할 터인데.〕

'도구를 사용하는 건 인간이다. 누구의 손에 쥐어주느냐에 따라 결과도 다르지.'

칼과 마찬가지다.

어수룩한 자가 휘두르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달인이 쥐면 일기당천의 힘을 선사하기도 한다.

'좀 이따 도와줘도 되니. 챙길 것부터 챙기자고.'

〔그대는 참으로 태평하구나.〕

'동료들을 신뢰한다고 해주지 않을래?'

유진은 크로노스와 잡담을 나누는 와중에도 지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크 콜링을 사용하려고 가까이 접근한 상황.

집단군 헌터들 중 일부라도 혼란에서 벗어난다면?

'무방비로 노출된 나를 노리겠지.'

방금 전처럼 오정수 같은 녀석이 죽자 살자 달려들 수도 있으니 말이야.

유진은 브루탈 한 구에게 지시를 내렸다.

-게리아아악!!!

"사악한 것. 꺼져라! 저리 꺼져!"

오정수를 향해 직선으로 돌진하는 브루탈.

번개 마법이 팔과 다리에 꽂혔지만 언데드의 돌진 속도를 줄이지는 못했다.

[블링크]

순간 이동으로 위기를 벗어난 오정수가 재차 마력을 재배열하려는 순간.

"걸려들었군."

[시체 폭발을 사용합니다.]

콰아앙-!

발밑에 깔린 무투계 헌터의 시체가 폭발했다.

착용 중인 방어구가 사용자의 마력을 흡수, 간이 결계를 작동시켰지만 지근거리에서 발생한 충격을 모두 흡수하진 못했다.

"커허헉!"

온 몸에 구멍이 난 오정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중상.

"어, 어떻."

"번개 특성 헌터라면 블링크를 쓸 줄 알았거든."

블링크 사용 직후에 찾아오는 무기력감.

5성 절정 헌터라고 해도 스킬 페널티에서 자유롭진 않다.

상대의 마음을 흔들고.

브루탈을 돌진시킨 것도 오정수가 지닌 비장의 패, 블링크를 유도한 것이었다.

"왜 그러지? 비틀거리고 있지 않나."

"개자, 식."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블랙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마법 무장 '저주받은 이빨'에 부여된 영력과 흑마력이 오정수의 폐부를 꿰뚫었다.

앞으로 푹 숙여진 고개.

제 의지로 다시 들 일은 없을 것이다.

[시체 폭발을 사용합니다.]

유진은 시체 폭발을 연거푸 사용하며 적 집단에 생긴 균열을 더 크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무투계 헌터들의 시체만 골라서 터트리는 여유.

일부 시체는 [데드 라이즈]로 되살려 나찰 헌터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개자식! 고인 능욕도 작작 하라고!"

"능욕? 이건 승자의 권리다."

유진은 킬킬거렸다.

승리하면 모든 것을 가지고 패하면 잃는다.

간단한 이야기다.

패배자가 된 나찰의 헌터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물론이거니와 숨이 꺼진 몸뚱이, 그리고 혼백까지도.

"모두 내 것인데. 문제라도 있나?"

집단군에서 가장 높은 경지의 마법사, 오정수는 허무하게 숨을 거두었고.

남은 자들은 유린당하거나 희끄무레한 기류 속으로 무작정 도망쳤다.

전장에서 무사히 벗어난 이들은 극소수.

유진은 비로소 진정한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가벼운 손짓으로 마법계 헌터들의 피부와 살을 모두 발라내고.

"내 부름에 답하라."

[레이즈 데드를 사용합니다.]

[스켈레톤 메이지 42구를 제작했습니다.]

힘 있는 음성이 전장에 울려 퍼지니 뼈만 남은 시체들이 덜그럭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80% 가까이 건졌군."

훼손이 심하게 된 주검은 되살리지 못했다.

나름대로 신경을 썼지만 마법계 헌터들의 몸뚱이를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죽이기란 쉽지 않은 일.

브루탈한테 차이면 인간이었던 것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뭉개져버리니.

"최형태야. 브루탈 3기를 줄 테니 도망친 놈들을 사냥해라."

[알겠, 습니다.]

"이승연. 전장을 수습하는 걸 맡기마."

[명을 받들겠어요.]

유진에게 패배한 뒤에 언데드로 되살려진 두 사람.

지금은 그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신세가 되었다.

나찰 집단군에 속해 있던 헌터들의 운명도 둘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네크로맨서에게 대항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 땅에 발을 들이민 자들은 죽은 후에 깨닫게 될 것이다.

'뽀시래기 팀에게 합류해야겠어.'

유진은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두 번째 망자의 골탑이 서 있는 언덕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뭐야. 벌써 끝낸 거냐?"

"아. 싸움이 끝난 건 맞는데 저희 의지는 아니었어요."

"갑자기 자기들 목에 칼을 꽂았을 리는 없고. 자세히 설명 좀 해봐."

"그 친구들 도망치던데요?"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격한 반응을 터트릴 뻔했다.

"도마아앙?"

"네."

"10분 전까지만 해도 피 터지게 싸웠잖아."

"피 흘리진 않았습니다."

"말이 그렇단 거지."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자 강민영의 입가에서 풉- 실소가 흘러 나왔다.

"형. 당황했죠?"

"그런 거 아니다."

"당황했네. 했어."

"씁."

유진은 뺨을 일그러트렸다.

헌터들의 무장.

시체.

그리고 혼백까지도.

모두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네크로폴리스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더니 도망을 쳐?

〔크하하핫! 더 승자의 권리를 주장해보지 그러느냐.〕

'이래서 눈치 빠른 놈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

〔작은 인간들이란 역시 재미있도다.〕

크로노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됐다. 너희는 다친 데 없고?"

"예. 블러드 골렘 덕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 부리긴. 상대는 5성 헌터였다."

"형님도 참. 농담이 과하시네요."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

"농담이시죠?"

"가자. 아직 하나가 남았다."

무언의 긍정에 축축해지는 강민호의 등.

뽀시래기 팀이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긴장해서 제 실력도 못 냈겠지.

원래 모르는 게 약이란다.

〔아깐 수하들을 믿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뽀시래기 팀과 상대의 기량을 비교해보고 가늠한 거다.'

정말 상황이 안 좋았으면 브루탈 한 구 정도는 빼서 지원할 생각이었다.

[고스트 아이]로 지켜보니 너무 잘해줘서 맡긴 거였지.

넷이 된 유진 일행은 파프너 무리가 싸우는 곳으로 이동했다.

"힉. 다 박살났지 말입니다."

이성민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푹 파인 대지.

태풍이 휘몰아친 것 마냥 나무들이 부러지거나 통째로 뽑혔고.

큰 충격에 쪼개진 바위가 여기저기에 나뒹굴었다.

인근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은 단검을 든 여인과 파프너 무리였다.

"씨. 더럽게 재밌잖아."

홍조를 드리운 여인.

김미정의 표정만 보면 싸우는 게 아니라 데이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변태인가. 저 사람."

"당사자 앞에서 그러는 거 아니다. 민영아."

"이 상황에서 기뻐하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잖아."

"그런 말은 실례거든?"

[아직 주둥이를 나불거릴 여유가 있나봐.]

[케넥 전투술]

[4장]

[정권 찌르기]

보고도 막기 어려운 속도.

날카로운 파프너의 공격에 혀를 찬 김미정이 단검 두 자루를 역수로 들었다.

카가각-!

날선 금속음과 함께 불똥이 마구 튀었다.

신묘하게 움직이는 단검.

칼날에 실린 오러가 그 흐름에 맞춰 파프너의 주먹을 옆으로 흘리고.

그와 동시에 비늘을 긁어냈다.

"단단하네. 조금씩 갉아먹으려고 했는데 일행까지 와버렸고."

김미정이 불평할 때, 파프너의 등 뒤에서 언데드 하나가 튀어 나왔다.

[분광검]

[2장 - 백광검]

송명석이 옆으로 나오면서 휘두른 검.

예상했다는 듯 김미정이 몸을 뒤로 뺐지만.

서걱-.

앞머리가 검의 궤적에 휘말려서 살짝 잘렸다.

[가만히 있으십쇼. 제가 예쁘게 잘라드리겠습니다.]

"이왕 자를 거면 별모양으로 해줘."

[빌어먹을!]

송명석아.

뻔히 보이는 도발에 일일이 팔딱거리면 어떻게 하니.

여유롭게 말하는 것과 달리, 김미정의 몰골은 꽤 사나웠다.

팔과 다리에 남은 시커먼 그을음.

조승철의 견제가 남긴 흔적이다.

날랜 움직임에 특화된 경장갑은 상당 부분 찢어졌고.

호흡도 조금 거칠어져 있다.

'파프너와 송명석도 멀쩡하진 않다만.'

탱킹을 맡은 파프너는 뼈가 훤히 드러나 있었고.

송명석도 갑주 여기저기가 깨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겠어.

"야. 당신이 천유진이에요?"

"존대, 아니면 반말. 둘 중 하나를 해라."

"그렇게 말하니까 존대를 하고 싶어지는걸요."

"어울리지도 않는 말투는 집어치우지."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회귀 전의 인연.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어찌 하려느냐?〕

'죽여야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린 결론.

김미정은 위험하다.

마음만 먹었으면 파프너도 지나쳐서 검은 방첨탑이나 유진을 노렸을 수도 있다.

흥미 본위로 움직이는 성격 탓에 일을 그르친 거지.

'여기서 놓치면 곤란하다.'

경이로운 돌파력과 어마어마한 순간 화력.

영력을 섞어서 빚어낸 안개도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김미정을 이 자리에서 쓰러트리지 못하면 네크로폴리스에 머무는 동안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천유성 씨. 질문 하나 해도 돼?"

"말해봐라."

"나 죽일 거지?"

"당연한 이야기를."

"음. 너무 재밌는데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죽긴 싫은걸."

〔작은 인간의 도발하는 솜씨가 제법이로구나.〕

'아마도 진심일 거다.'

〔허. 짐이 느끼기에는 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혹 같다만?〕

'그렇지. 죽기 싫다면서 도망간다는 선택지도 안 고르잖아.'

파프너와 손속을 겨루면서 흥미가 생긴 건가.

뭐, 미친개다운 생각이군.

잠깐.

'이 상황.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후, 입술을 떼었다.

"너한테 선택지를 주마."

"선택?"

"이 자리에서 죽든가. 아니면 항복하든가."

"엄청 자비롭네."

강민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형이랑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를 잘도 말하네."

"다 뜻이 있으실 거다."

얘들아.

그렇게 말하면 꼭 사람 죽이는 데 도가 튼 쾌락살인마 같잖니.

〔여태까지의 행보를 보면 딱히 그릇되지도 않아 보이는구나.〕

'거 말씀이 심하시네.'

〔한데 거짓으로 투항할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느냐?〕

'말했잖아. 지켜보면 안다고.'

유진은 팔짱을 낀 채, 김미정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항복."

낙하한 단검 두 자루가 지면과 마주치면서 챙그랑, 특유의 금속음을 냈다.

105화 승자의 권리(2)

"무장은 싹 벗어줘야겠어."

"그럼 옷이 없는걸."

이성민의 얼굴이 순간 화악- 붉게 물들었다.

멀었군, 이 녀석은.

"민영아. 여분의 옷 좀 챙겨줘라."

"으. 그러다 인질극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그런다고 여기서 살아나가진 못한다는 것쯤, 본인이 제일 잘 알 거다."

유진의 눈가에 맺히는 스산한 살기.

김미정이 하핫- 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오싹해. 너무 좋아."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사람인데요."

파프너 무리를 상대하면서 근소한 차로 유리하게 싸웠던 강자.

맨손이어도.

강민영 수준의 헌터는 1초면 충분했다.

"엑. 죽으면 망령이 돼서 형 어깨에 달라붙을 거야."

"적당히 부려먹어 주마."

"으. 진짜 싫어."

순순히 협조하는 김미정.

긴 천으로 시야를 가린 후, 강민영은 차근차근 무장을 회수했다.

단검 두 자루와 보조 무장, 그리고 갑주까지.

겁에 질린 것치고는 꼼꼼하게 살펴서 모든 무장을 회수했다.

"이거 입어요."

"좀 작은데?"

"싫으면 한겨울에 벗고 계시든가."

"키히. 알았어. 그거 입을게."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크로노스가 짓궂게 웃었다.

〔훌륭한 도적질이로구나. 이 또한 승자의 권리더냐?〕

'...시체의 무장을 가져가나. 산 사람한테 뺏나. 똑같은 거 아니냐.'

〔한데 궁금하구나. 왜 이리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게냐.〕

'송명석처럼 죽여서 망자로 살리지 않느냐고?'

〔그러하다.〕

'저런 스타일은 언데드로 되살려도 강점을 살리기가 어려워.'

상대의 틈에 파고들어서 순간적인 폭딜을 욱여넣는 암살자 스타일.

공을 들여 세심하게 조정해도 미세한 감각이나 속도감을 살리긴 꽤 어렵다.

'숨 붙여서 써먹는 게 나아.'

가능하다면 말이지.

미친개라.

상황에 따라서는 후환이 남지 않게 죽일 생각도 하고 있다.

회귀 전 지식이라고 해서 완전한 것도 아니고.

설득의 '여지'가 있을 뿐.

뽀시래기 팀이나 신준석하곤 전혀 다른 케이스니까.

'그럼 정리를 하러 가볼까.'

네크로폴리스에 뿌려진 무수한 피.

수많은 헌터들이 놓고 간 아이템들.

[다크 콜링] 때문에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망령들까지.

거두어야 할 수확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거.

다 소화하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네.'

유진은 히죽 웃었다.

*

전장을 수습하는 데는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시체 운반.

아이템 분류.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건 불경스러운 묘지에 옮겨 놔라."

[알겠습, 니다.]

생전의 경지가 4성인 헌터들은 따로 묻어두었다.

다크 콜링의 주 목표는 마법계.

무투계 헌터들까진 챙기지 못해서 합일로 강화시키는 건 어려웠다.

'합일 과정을 거치지 않은 녀석들은 시술을 해봐야 크게 강해지지 못한다.'

불경스러운 묘지에 안치해 두면 시체가 부패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다가 4성에 오르면 더 수준이 높은 강령술로 되살리는 편이 낫지.

죽은 자들의 시체 중 벽을 넘은 자들을 선별한 후.

곧바로 아이템 분류에 나섰다.

"매직이랑 레어는 오른쪽에 둬라. 유니크는 손대지 말고."

"저희도 돕겠습니다."

"오냐."

시체들이 착용하고 있던 병장기와 갑주, 그리고 액세서리.

전투 중에 파손된 것도 꽤 있지만 상당수는 고치면 제 성능을 낼 수 있었다.

리터너나 스켈레톤 워리어 같은 하급 언데드는 무장 해제 같은 복잡한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니.

중급 언데드도 투항한 김민정의 감시역인 파프너 빼고는 모두 동원했다.

[빌어먹을. 귀찮군요.]

[나. 주인님의 신뢰를 얻으려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

[그건 곤란합니다. 주군의 인정을 받는 언데드는 바로 저여야 합니다.]

송명석과 조승철이 충성심(?) 경쟁을 하고 있을 때.

"저 왔습니다. 동업자님."

상황이 종료되자마자 연락을 받은 신준석이 네크로폴리스로 왔다.

"포션 공장은?"

"저 없어도 며칠은 돌아갈 만큼 안정화됐습니다."

"등신 같이 레시피 뺏기지 말고."

"이제는 그럴 일 없습니다. 회사 다닐 때 많이 뺏겨봐서요."

자랑이다.

하긴, 이 양반이 프리랜서로 나온 건 대성에서 성과를 가로채기 당해서라고 했지?

용병들의 장비는 끽해야 매직에서 레어 등급 사이.

한 자리에 모아두었다.

"그게 끽해야 라는 말로 폄하할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형님."

아연실색한 강민호의 반응에 유진이 픽- 짧게 웃었다.

"원하는 거 있으면 골라서 써라."

"정말임까?!"

"형.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거 알지?"

벽도 넘지 못한 녀석들이 5성 헌터와 4성 헌터 둘을 막아냈다.

블러드 골렘의 조력이 있었다지만.

어지간한 담력과 각오가 없었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정도는 당연한 보상이다."

"감사합니다. 형님. 앞으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선배. 너무 딱딱한 거 아님까?"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쓰레기 되는 거 같잖아."

뽀시래기 팀은 서로를 향해 투덜거리며 병장기를 고르러 갔다.

〔참으로 편협하구나.〕

'왜, 뭐가요.'

〔성능이 뛰어난 무구들은 다른 곳에 두지 않았느냐.〕

크로노스의 지적대로 유니크 급 아이템이나 아티팩트는 따로 빼두었다.

허.

이거 보소.

'내가 횡령이라도 할 줄 아나 봐?'

〔근거는 충분하다고 본다만.〕

'아이템마다 콘셉트가 있어요. 그냥 유니크면 다 똑같은 게 아니라고.'

이를테면 바닥에 있는 검 두 자루처럼 말이다.

[게레시스의 분노]

등급 : 유니크

분류 : 검

제한 : 한 검법의 숙련도 50% 이상, 4성 이상, 무투계 직업군

내구도 : 743/1,000

암흑계에 서식하는 마수 게레시스의 치아를 가공해서 만든 검입니다. 휘두를 때 암흑 속성을 부여, 참격의 위력을 증대시킵니다.

*힘 + 150

*민첩 + 130

[암흑 Lv 42]

[참격 Lv 51]

[찌르기 Lv 20]

[고드릭의 장검]

등급 : 유니크

분류 : 검

제한 : 무투계 직업군, 4성 이상

내구도 : 647/1,300

기사 고드릭이 애용한 장검입니다. 마력 감응도가 뛰어나 사용자의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힘 + 100

*마력 + 150

[마력 감응 Lv 55]

[찌르기 Lv 35]

[참격 Lv 35]

〔검 두 자루가 어떻단 말이더냐?〕

'등급만 같을 뿐. 사용 방법이 완전 다르잖아.'

고드릭의 대검은 베기와 찌르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밸런스 형 무기이고.

반면 게레시스의 분노는 휘둘렀을 때 제 위력이 발휘되는 검이다.

'하수인들이나 뽀시래기 팀에게 어울리는 무장을 골라주려고 이러는 거다.'

〔과연. 단순히 그대의 욕구만을 채우기 위함은 아니란 말이로구나.〕

'날 어떻게 보는 거냐?'

현 시대에는 네크로맨서와 관련된 장비가 거의 풀리지 않았다.

신준석의 힘을 빌려서 마법 무장인 [저주받은 이빨]을 만든 것도 그 이유.

저렴한 것도 있지만.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게 문제다.

'필요 없는 건 모두 처분하겠지만 쓸 만한 건 모두 동료들에게 나눠줄 거다.'

유니크 등급 검 두 자루는 송명석의 소유가 되었다.

[드디어 제 가치를 알아봐주신 것이군요!]

"헛소리할 거면 뺏는다."

[분골쇄신하여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자식.

아티팩트 뺏길까 봐 전전긍긍하군.

"가만 있어봐라."

송명석이 착용한 칼은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로 만들었다.

전용 회로를 새겨서 몸뚱이처럼 인식시킨 것.

스켈레톤 나이트로 강화하려면 무기를 촉매 삼아 상위 개체로서의 '틀'을 갖춰야 했다.

"동업자 양반. 이거 좀 녹여줘."

원래 사용했던 검 두 자루를 마녀의 솥에 넣어서 녹이고는 일부를 떼어냈다.

흐물흐물한 철을 얇게 편 후, [고드릭의 장검]의 손잡이를 코팅하듯 꼼꼼하게 감쌌다.

"이제 쥐어봐라."

송명석에게 검을 들려주고는 [강화 회로]를 새겼다.

[아. 따끔합니다.]

"혼백과 검이 연결되는 과정이다."

[게레시스의 분노]도 동일한 과정을 거쳐 송명석의 무기가 되었다.

소득은 그 외에도 많았다.

[로드리게스의 지팡이]

등급 : 유니크

분류 : 지팡이

제한 : 마법계 직업군, [번개] 특성 보유, 4성 이상, 번개 마법 5개 이상 숙련도 80% 이상.

내구도 : 152/400

번개 마법의 새 지평을 연 마법사, 로드리게스가 한때 애용했던 마병입니다. 뇌전의 힘이 깃들어있습니다.

*마력 + 200

*재배열 속도 20% 감소.

*번개 속성 마법의 위력 34% 증가.

[연산 Lv 26]

[전류방출 Lv 42]

[뇌격 제어 Lv 35]

오정수의 병장기인 [로드리게스의 지팡이].

전격 마법사 전용이라고 해도 될 만한 옵션이라, 당장 쓰진 못했다.

〔작은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림의 떡이란 말이로구나.〕

'이 아이템의 주인에게 들려주면 되니 상관없지.'

번개 속성은 희귀한 만큼 장점도 확실했다.

강력한 파괴력과 발출 속도.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들기 때문에 보고 반응하려고 하면 이미 늦었다.

〔그대는 오러로 번개를 자르지 않았느냐.〕

'어딜 노리는지 분명했으니까 거기에 창을 댄 것뿐이다.'

파괴력도 화염 속성 이상이다.

단점은 범위 공격이 많지 않고 제어가 까다롭다는 것.

여러 속성 중에서 가장 숙달하기 어려운 게 번개 속성이라고 하니.

오정수를 되살리면 이승연보다 쓸 만할지도 모른다.

그것 말고도 [공명석]이나 [크리에타의 카이트 실드], 그리고 [아공간 주머니] 하나를 얻었다.

"방패는 민호가 쓰고. 무한의 주머니는 내가 가져간다."

"감사함다!"

"형님. 너무 큰 걸 받은 게 아닌지."

"고마우면 더 강해져라. 그래야 내 일에 보탬이 되지."

"알겠습니다."

"저, 형. 나는요?"

강민영이 기대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보면 알겠지만 원거리 무기 중에는 유니크가 없다."

"그래도오오오. 나도 있잖아요. 형!"

으휴.

다 생각해놓은 게 있는데.

마음만 급해가지고.

"이 녀석으로 네 능력을 증폭시켜줄 아이템을 만들어주마."

"진짜요?"

"내가 언제 거짓말하디."

"사랑해요! 형!"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 및 아이템은 모두 분배를 마쳤다.

그 다음은 언데드 제작.

[다크 콜링]으로 붙들어놓은 망령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이 몸뚱이는 어떠냐?"

-키히히힛.

스켈레톤 메이지의 육신에 깃든 망령.

혼백이 스며드는 때에 발생하는 파장을 읽은 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옆에 있는 놈한테 깃들어라."

-키히힛.

크로노스가 지루한 듯이 하품을 했다.

〔언제까지 이 행위를 계속 반복하려는 게냐?〕

'끝날 때까지 해야지.'

〔번거로운 행위를 잘도 하는구나.〕

'영안을 사용하면 혼과 육체의 파장도 읽어낼 수 있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 영안이라는 기예는 이미 활용할 수 있는 것 아니더냐?〕

'야매 말고 제대로 말이야.'

영안의 힘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최소 5성은 되어야 한다.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지금은 어쩔 수 없지.

한 가지 위안은 선별 작업이 진행될수록 매칭 실패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경우의 수가 적어지니 그만큼 속도도 빨라진 것.

-그게게겔.

몇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노동을 한 끝에 스켈레톤 메이지 42구의 합일을 마쳤다.

"다음은 알지?"

"으휴.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신준석은 한탄 섞인 투로 중얼거리며 마녀의 솥을 가열했다.

보글보글-.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를 마석을 융해한 물에 넣고 정해진 시간 동안 가열.

연금술용 장갑을 끼고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네."

금속이 저항감 없이 찢어지는 모습을 신기한 듯 보는 신준석.

뭐, 언제는 유진의 행동에서 이해가 가는 게 있었나.

대단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해내는 것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이젠 큰 감흥도 오지 않았다.

"마석 좀 더 부어. 시술할 녀석들이 많다."

[여섯 개의 코어가 충분한 영력을 흡수했습니다.]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가 스켈레톤 메이지(오정수)의 뼈를 강화합니다.]

[스켈레톤 메이지(오정수)가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다크 미니언으로 승급합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다크 미니언으로 재탄생한 마법계 헌터는 모두 30구.

합일까지 치렀어도, 타고난 재능이 모자란 녀석들은 승급에 실패했다.

뭐 이 정도여도 감지덕지지.

다크 미니언들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크흐흐흐.

이 녀석들한테도 강령술을 알려주면 네크로폴리스 성장에 박차가 가해지겠지?

"나는 언제까지 묶어두고 있을 거야아아."

[...라는데. 주인.]

전장에서 얻은 수확을 정리하는 데만 하루가 넘게 걸렸다.

그동안 묶여 있던 김미정은 지루한 표정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본인의 입장을 잘 모르나 봄다."

"헤. 너 같은 녀석은 관심 없으니까 닥치고 있어."

"히이익."

6성 절정의 헌터가 내뿜는 살기에 이성민이 비명을 질렀다.

"네가 하기에 따라, 풀어줄 수도 있다."

"오. 진짜?"

"양심고백 하나만 해주면 돼."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게 이런 거 아니겠니.

유진은 싱글거렸다.

106화 아아, 이것이 바로 선전포고란 것이다(1)

"주문하신 마티니입니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작은 술잔.

은하수 펍의 대표 메뉴인 마티니다.

밀수 쪽 일에 종사 중인 두 헌터는 찰랑이는 투명한 액체를 사이에 둔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거 들었나. 나찰이 그라운드 제로를 노렸다고."

"부산이나 잘 관리할 것이지. 뭐 얻어먹으려고 기어 올라왔대?"

"붉은 거미가 없어진 틈을 노렸다더라."

"그래서 어떻게 됐대."

나찰 길드는 그라운드 제로 다음으로 한반도 음지에서 영향력이 큰 조직이다.

그라운드 제로가 암상 / 붉은 거미(유진으로 대체) / 은하수 펍이라는 삼강 구도의 합작이라면.

나찰은 일본과 미국 등 태평양 쪽 밀수 루트를 꽉 쥐고 있는 단체였다.

"어떻게 되긴. 접경지역에 갔다가 몬스터 똥이 됐다던데."

"접경지역은 또 왜 나와?"

"아무것도 모르네. 붉은 거미 제낀 녀석이 그 저주받은 땅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잖아."

"블랙 컴퍼니인가, 머시기인가 하는 조직 말인가."

블랙 컴퍼니.

홀연히 등장해서 붉은 거미의 영역을 먹어 치우고 새로운 그라운드 제로의 삼강이 된 세력.

그럼에도.

이상할 정도로 외부에 알려진 정보가 없는 조직이다.

"나찰 길드가 대충 준비한 거 아니야?"

"헌터만 150. 미친개까지 풀었다고 한다."

"그, 미친개면 설마 김미정 말하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냐."

"미친...."

동아시아에서 악명이 자자한 용병, 미친개 김미정까지 참여했다?

그 미친개가 나찰 길드에 의탁 중인 것도 놀랍지만.

나찰에서 6성 절정의 헌터까지 동원했는데 패배한 사실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붉은 거미가 만전이었어도 꽤 피해를 입을 만한 수준이잖아."

"그래서 놀라운 거지."

"블랙 컴퍼니. 대체 뭐하는 조직인 걸까."

사내는 마티니를 한달음에 들이마셨다.

입에 감도는 진한 알코올 향.

그럼에도.

방금 전에 들은 이야기의 충격이 씻겨나가질 않았다.

"괜찮겠습니까?"

술을 건네준 바텐더.

정 노인이 작게 이야기하자, 마담은 이야기 중인 사내들을 흘겨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조금 손해 봤지만 괜찮아."

"아가씨답지 않은 말씀이군요."

"내가 왜?"

"손해는 보지 않는다. 은하수 펍의 철칙 아니었습니까."

정 노인은 흘흘- 낮게 웃었다.

나찰 길드의 패배.

한반도 음지를 뒤흔들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정보다.

마담이라면 접경지역에서 도망친 용병이나 나찰 소속 헌터들을 입막음하는 것도 가능했다.

"맞아. 정보의 확산을 막고 부산 일대의 암흑가를 흔들어볼 수도 있었을 거야."

전투원 150명이 괴멸된 사태.

나찰 길드의 영향력이 크게 흔들릴 만한 사안이다.

당사자들이야 이번 사태를 최대한 알리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

이 정보가 얼마나 큰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마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혹시라도 그 청년이 마음에 드시는 건."

"치매 약이라도 받아올까?"

"사양하지요. 아직 정정합니다."

뽀득- 뽀득-.

유리잔을 닦는 소리가 바 내부에 퍼져 나간다.

"천유진, 아니. 천 대표 있잖아."

"예."

"과연 어디까지 날아갈지. 궁금하지 않아?"

처음이다.

한 사내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져본 것은.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누군가를 마음에 둘 여유 따윈 없었다.

"2달 전만 해도 새빨간 위장에 들어갔던 사람이야."

"그랬었죠."

"지금은 미친개 김미정을 꺾었잖아."

"성장세가 놀랍긴 합니다."

"천 대표는 강하기만 한 게 아니야. 수완과 안목, 그리고 결단력까지 모두 겸비했어."

소름이 돋는다.

저도 모르게 양팔을 꽉 붙드는 마담.

'이 정보. 널리 퍼트려달라고 한 이유가 있을 거다.'

마담은 확신했다.

이 정보를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손해?

유진이 그 정도도 모를까.

'무슨 일을 벌일지 너무 궁금해.'

호선을 그리는 마담의 입가.

무의식적으로 지은 미소였기에, 그녀는 웃은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정말로 반하신 거 아닙니까?"

"나 진짜 화낸다."

"흘흘.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정 노인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느긋하게 유리잔을 닦았다.

*

나찰 길드의 패전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듯.

마담이 피워낸 소문은 음지를 넘어 양지, 곧 헌터 길드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허, 참."

불사조 길드의 수장.

김영수는 몇 번이고 혀를 차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이 소문. 진짜인가?"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몇 번이나 교차 검증을 마쳤습니다만...."

"자네를 나무라는 건 아니야."

"비서실에는 추가로 조사할 것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주게."

집무실에 홀로 남은 김영수.

오른손으로 코뼈를 지그시 누르면서 피로감을 떨쳐낼 때.

터엉-!

"길드장님. 그 소문, 진짜예요?!"

"미선아. 문을 부수려면 힘을 더 주라고 했잖니."

"아. 죄송."

차기 검성으로 불리는 헌터, 장미선이 기다란 흑발을 나부끼며 급히 들어왔다.

"그 아저씨가 나찰 길드랑 한판 붙었다면서요!"

"이야기를 들었나보구나."

블랙 컴퍼니의 대표가 유진이라는 사실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라운드 제로의 삼강과 이중 게이트 사태 때 두각을 드러낸 신예가 동일인물이라고 누가 알겠는가.

불사조 길드도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사태를 접한 후, 여러 방면으로 조사한 덕에 겨우 알아낸 정보다.

"잠시 다녀오기 전에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천유진을 도우러 갈 셈이니?"

"가만 둘 순 없잖아요. 저번의 은혜도 다 못 갚았다고요."

"미선아. 진정하고 내 이야기 좀 들어봐라."

차분한 김영수의 말이 집무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목소리에 실린 웅혼한 마력.

살기를 담지 않았음에도, 심령을 옥죄는 힘이 깃들었다.

"아, 그, 네."

장미선은 할 말이 여전히 많은 듯, 입술을 계속 오물거렸지만 김영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선아. 굳이 도우러 갈 필요는 없단다."

"나찰 길드의 악명은 저도 들었어요. 아무리 천유진 씨라고 해도 정면으로는 못 이길 거라고요."

"전투원이 150명이나 당했어. 6성 헌터까지 행방불명되었으니, 나찰이라고 해도 섣부르게 나설 수 없을 거다."

"그래도...."

"또, 나도 조치를 취할 거고."

"역시 길드장님!"

장미선의 선망 어린 눈빛에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시큰거렸다.

'이 이야기는 못 말하겠군.'

쓴웃음을 삼킨 김영수의 시선이 탁자 구석으로 향했다.

막 입수한 첩보.

-아라한과 나찰의 연계 의혹.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아라한을 견제함으로써 두 가지 이득을 취할 수 있다.'

불사조 길드의 목표는 국내 1위.

심증 단계지만, 두 길드가 밀월 관계라면 이번 사태로 인해 아라한도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타이밍에 아라한 길드를 견제하면?

'심증을 확실히 굳힐 수 있겠지.'

만약 첩보가 틀렸다고 해도 상관없다.

유진과 아라한 길드는 이중 게이트 공략 이후 적대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무슨 이유로 접경지역에 세력을 구축한지 모르겠지만.

아라한이 나서지 못하게 견제해주면 이중 게이트 때의 빚을 갚는 셈이다.

'빚 청산 겸 천유진의 호감을 산다.'

계산을 마친 김영수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따릉- 따르릉-.

고전적인 벨소리가 집무실의 침묵을 깨트렸다.

"오늘은 참 바쁘네."

"늘 한량처럼 지내셨잖아요. 이런 날도 있어야죠."

"하여간 말을 못하겠어."

짧게 투덜거린 김영수가 수신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지?"

-양산형 중급 포션의 정식 판매처가 대한제약으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그건 사업부에 보고해야 할 이야기 아닌가."

-저, 문제는 천유진 헌터가 중급 포션 시연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벌떡 일어난 김영수의 턱이 아래로 쭉 내려갔다.

"마스터. 왜 그래요?"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판을 키울 줄이야."

"시연회 때 기자회견은 다들 하는 거잖아요."

"나찰 길드와 한판 벌인 후에 기자회견을 한다, 우연은 아니겠지."

유진의 수완이 보통을 넘어선 것쯤,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20대 초반이 맞는지 의문스러운 판짜기 능력.

상황을 유리한 방향으로 설계하는 감각은 노회한 경영인이나 헌터를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친구가 어디서 튀어 나왔을고."

유진이 기자회견 때 준비한 것이 무엇일까.

김영수는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에 껄껄 웃었다.

*

-말씀하신 대로 내일, 서울 D 컨벤션센터에서 시연회를 준비했어요.

"감사합니다. 대한제약 회장님."

-별 말씀을. 그이를 치료해준 값을 다 치르지도 못했는걸요.

"성자의 눈물 유통 담당과 미국에 다리를 놔주지 않으셨습니까?"

-포션 유통은 대한제약에서 부탁하고 싶은 거였죠. 아직 빚은 남아있답니다.

정순임.

대한제약 회장은 사전 조율 없이 [성자의 눈물] 시연회 일정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은인. 몸은 괜찮은가요?

"소문이 꽤 빠르네요."

-그라운드 제로의 새로운 삼강이 당신이라는 건, 아직 극비 정보지만 말이지요.

"솜털 하나 안 다쳤습니다."

-시연회는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일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될까요?

"뭐, 그렇다고 해야겠네요."

스포일러 하면 재미가 없잖아?

유진은 적당하게 대꾸했다.

"동업자님. 너무 급하게 저지르시는 거 아닌지."

"포션의 성능은 확실하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이제부터는 돈 쓸어 담아야지."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당신이 만든 포션, 회귀 전에도 인기가 어마어마했거든.

잘 안 될 리 없으니까 믿어봐.

유진은 굳어버린 신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포션]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사냥할 때 가장 많이 소비되는 아이템이다.

전투 중에 부상을 입는 건 피할 수 없는 일.

신관계 헌터는 숫자가 적으니, 포션 사용은 필수불가결이었다.

"하급 포션으로는 중상 치유가 안 돼."

"그렇다고 중급 포션을 쓰자니 병 하나당 1천이나 한다고."

"급할 때나 써야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헌터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중급 포션을 들고 다녔다.

트롤의 피나 축복 없이 중급 포션 수준의 효능을 지닌 회복제를 개발하려는 시도도 꽤 있었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낸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신준석이 나타나기 전까진.

"트롤의 피 없이 중급 포션의 효과를 재현한 약이라. 전 세계 최초잖아."

"신준석 연금술사는 대성 연구원 출신이라더군."

"천유진은 어떻고. 신성 주문으로 포션 제조에 도움을 준 건가."

"가서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들썩이는 헌터 업계.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도 [성자의 눈물] 정식 판매 소식에 관심을 드러냈고.

포션을 많이 소모하는 대형 길드들도 시연회에 참여했다.

언론들도 빅 뉴스를 놓칠 리 없었으니.

시연회 장소로 대관한 장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으. 사람 숫자 보십쇼."

"청심환 가져왔는데. 먹을래?"

"Damm it! 그거 주십쇼."

신준석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환을 집고는 입에 털어 넣었다.

"청심환이 원래 달았습니까?"

"옛 말에도 몸에 좋은 건 달다고 하잖냐."

"몸에 좋은 건 입에 쓰다고 하겠죠. 아무튼 좀 나아졌네요."

응.

동업자 양반 말이 옳아.

사실 환처럼 잘라놓은 커피 과자거든.

〔파멸의 주둥아리로다.〕

'남의 입을 마음대로 폄하하지 말아주실래요?'

〔아무리 봐도 궤휼의 역군 같거늘. 이 어찌 폄하란 말이더냐.〕

'봐봐. 안정됐잖아. 결과만 좋으면 됐지.'

청심환(?)의 효과는 대단했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 단상 앞으로 나온 신준석은 담담한 태도로 [성자의 눈물] 시연을 진행했다.

치이이익-!

"오. 상처의 회복 속도가 중급 포션과 맞먹는다!"

"92% 정도. 이 정도면 대체용품으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겠어."

기자들은 포션의 효과를 보더니 연신 키보드를 두드리기 바빴고.

길드 관계자들도 [성자의 눈물] 확보에 필요한 여유 자금을 체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골절이나 내상에도 쓸 수 있습니까?"

"예. 마시면 회복 속도가 50% 저하되지만 완전히 부서지지 않는 한 재생이 가능합니다."

신준석은 난해한 질문에도 어렵지 않게 대처했다.

[성자의 눈물] 시연식은 그야말로 대성황.

헌터 시장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을 혁신적인 아이템이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성자의 눈물이 공급만 충분하면 게이트 공략 속도도 더 빨라지겠어."

"중급 포션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매물 자체가 많이 풀리지 않았으니 말이야."

"신관들의 주문에만 회복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니."

"패러다임이 바뀌겠군."

장내에 앉은 사람들이 흥분을 조금 가라앉힐 때 즈음.

신준석은 뒤를 힐끗거렸다.

'정말로 이 소개 문구 읽어도 되는 겁니까?'

라는 눈빛을 담아 간절하게 바라보니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

에라 모르겠다.

"다음으로 성자의 눈물 제작에 힘을 보태주신 블랙 컴퍼니 대표, 천유진 님의 기자회견이 있습니다."

신준석이 유진을 소개하자, 장내는 얼음물을 끼얹은 것 마냥 조용해졌다.

107화 아아, 이것이 바로 선전포고란 것이다(2)

신준석의 소개에 맞춰 강단에 오른 유진이 장내를 훑어보았다.

방금 전까지 열기로 가득 찼던 공간이 맞는 건가 싶을 만큼 굳어버린 분위기.

기자들이든.

헌터 업계 관계자들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자신을 주목했다.

'아무렴. 그래야지.'

주목 받는 건 익숙했다.

유진이 속으로 킬킬거리고 있을 때, 기자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연맹 뉴스의 이정식입니다. 블랙 컴퍼니가 최근에 나찰 길드와 마찰을 일으킨 단체 맞습니까?"

마음에 드는 기자 양반이군.

좋아.

그렇게 질문을 던져줘야 이쪽도 말하는 맛이 있지.

단독 인터뷰 기회라도 줄까?

유진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소문은 무성한데 막상 외부에 알려진 정보가 하나도 없던데요."

"이번 기자회견이 끝나면 회사에 대해 꽤 알려지겠네요."

유진이 하핫- 가볍게 웃자 장내에 모인 이들도 따라서 웃었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시작은 임팩트 있는 게 좋겠지.'

준비해놓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한번 정리한 후,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나찰 길드와 블랙 컴퍼니의 충돌. 소문은 들으신 모양이군요."

"예. 근데 왜 접경지역인지, 그리고 나찰 길드하고는 왜 마찰이 있는 건지 모두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에 관해서는 답할 사람을 따로 섭외해놨습니다."

따아악-!

유진이 신호를 주자, 대기하고 있던 파프너와 한 여인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미친개 김미정.

이 자리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구겨진 표정으로 유진의 옆에 섰다.

"미친개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손이 묶여 있잖아."

"기자회견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잠깐. 미친개는 최근에...."

당혹감.

공포.

또는 의구심.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자, 감정의 폭풍이 장내를 휘몰아쳤다.

〔작은 인간들의 당황하는 꼴이란. 담대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구나.〕

'목에 칼 들이민 거나 마찬가지인데 평온하게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김미정은 6성 절정의 헌터.

스탯 분배가 민첩 위주이긴 해도, 근력도 모자라지 않는다.

단기간에 폭발적인 딜을 욱여넣는 전투 스타일. 제대로 피해를 입히려면 힘이 적당히 있어야 하니까.

〔이 작은 인간이 쾌락 살인마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반쯤은 정답일걸.'

이 녀석.

지금은 얌전히 있지만 피 대신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게 아닐까 의심되는 인물이라고.

흥미 돋는 주제가 생기면 제 안위조차 생각하지 않고 눈이 뒤집힌 채로 달려들 건데.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방금 전 발언은 모순이로구나.〕

'나한테는 죽기 싫다고 항복했으니까?'

〔그러하다. 더 설명해 보아라.〕

'이 녀석은 파프너, 혹은 나한테 흥미가 생긴 거다.'

괜히 항복을 권유한 게 아니다.

김미정의 성격 상 흥미를 가진 상대의 곁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하면, 항복도 서슴없이 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당장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거지.

〔회귀했다고 하여 짐작 가능한 영역이 아니로구나.〕

'통찰력인 거지.'

〔크하핫. 타인의 생각을 읽어내는 지모 또한 영웅의 풍모이니. 이번만큼은 짐이 인정해주겠노라.〕

거 참.

성좌님이 주장하는 영웅의 기준이라는 게 점점 난잡해지는 것 같은뎁쇼.

"김미정이야."

"자기소개 고맙군. 나찰 길드 소속이지?"

"그쪽 길드장한테 신세를 진 게 있어서. 3년 동안 일해주기로 했어."

"지금은 나찰 소속이라는 거잖아."

"뭐, 맞아."

"그럼 왜 나를 공격했는지 말해줄 수 있나?"

"아라한 길드에서 당신을 죽여달라고 의뢰했어. 아라한은 나찰의 후원자거든."

김미정은 집 앞 편의점에서 할인행사를 하더라, 라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폭탄을 던졌다.

장내의 사람들은 큰 생각 없이 그 말을 듣다가.

"어?"

"나찰이랑 아라한이... 뭐?!"

"트, 특종이다!"

한 발 늦게 김미정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

시연회를 하기 전.

유진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아라한 길드와 나찰의 관계를 폭로해라."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는 중요한 게 아니다. 할지 말지나 정해."

"내가 안 하겠다고 하면?"

"한 번 죽었다가 나를 섬기게 될 거다."

송명석을 가리키니, 텅 빈 동공에서 푸른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드디어 제 후임이 들어오는 겁니까!]

"반겨주는 사람도 있으니 잘 됐네."

참.

이미 죽었으니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되려나?

김미정의 입에서 하아- 기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지만 이건 좀 아닌 듯."

"그럼 어떻게 할 건가?"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게. 대신 조건이 있어."

"들어보지."

"그 사실을 불어버리면 나도 계약 파기당한단 말이야. 목숨이 위험할 거라고."

헛소리를 태연하게도 지껄이는군.

두 길드가 결탁한 사실을 증언하면 목에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리겠지.

그렇지만.

미친개 김미정이 쉽게 당할 인물은 아니다.

"말 돌리지 말고 본론이나 이야기해라."

"재미없긴."

가볍게 투덜거린 김미정은 오른손으로 유진을 가리켰다.

"당신. 나를 고용해줘."

"미친개의 목에 줄을 걸어두는 취향은 없다만."

"조건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

김미정이 나찰과 아라한 길드가 맺은 암약을 폭로하게 된 이유다.

"증거는 있습니까?"

"아라힌 길드가 접경지역의 보급을 맡아줬어. 좌표 불러줄 테니 확인해봐."

"접경지역을 어떻게 들어갑니까."

"그건 기자양반 사정이지. 내가 똥도 닦아주랴?"

신랄한 말에 질문을 던진 기자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포션 시연식에서 터진 폭탄.

타자기를 두들기면서 나오는 소음과 전화를 주고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주인. 이번 건수는 좀 과한 거 아니야?]

파프너가 유진만 들리게끔 사념의 크기를 조절했다.

-왜. 복수할 시기가 빨라지고 좋지 않냐.

[아라한 길드를 너무 자극하면 주인을 해하려고 하진 않을까 걱정돼서 그래.]

-나찰 길드의 집단군을 물리친 시점에서 더 악화될 것도 없다.

미친개의 증언.

6성 절정 헌터의 발언에는 큰 힘이 실려 있지만, 국내 1위 길드를 흔들 정도는 아니다.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럼에도.

유진이 기자회견 자리를 빌어서 아라한의 비밀을 폭로한 것은 다른 노림수 때문이었다.

-당분간은 정신없겠지.

[아라한 말이야?]

-나찰 길드도 마찬가지다.

아라한 길드와 나찰의 밀월 의혹.

김미정의 발언만으로 두 길드의 유착을 증명하긴 어려울 거다.

문제는 의혹 자체에 대해 해명하려면 시간깨나 걸릴 거라는 사실이지.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를 손대기도 어려울 거고.

[나찰 길드는 음지의 조직. 대의명분이나 세간의 눈치를 보진 않을 것 같은데?]

-이번에 박살이 났잖아. 헌터들을 또 동원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아라한의 발을 오래 묶어 두진 못할 거야. 백성현이라는 녀석, 수완은 확실하거든.]

걱정 마라.

그 녀석의 일처리 방식은 회귀 전에 질리도록 경험해 봤으니까.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시연회에 아라한 길드 관계자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 분위기가 더 화끈하게 달아올랐을 건데 말이지.

-파프너야. 내가 어떤 방식으로 네 복수를 이루어줄지 지켜봐라.

김미정의 폭탄 발언에 시끌벅적해진 장내.

유진은 낚싯대를 늘어놓은 채, 분위기가 더 끓어오를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

시장바닥처럼 혼란해진 시연회 현장.

때를 기다리던 유진이 마이크를 툭- 툭- 쳤다.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길드의 밀월 여부를 파악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단상을 바라봤다.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선 설명이 된 것 같군요."

이중 게이트 사태로 체면을 구긴 아라한 길드.

막대한 돈을 투자했던 신예, 송명석이 공략 중에 사망했다.

아라한의 초신성이라고까지 불린 인물이 허무하게 죽은 데다, 나머지 공략대원들도 하나 같이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논리에 몇 가지 비약이 있지만 납득은 가."

"송명석한테는 분광검 스킬북을 주었다고 했지?"

"그렇게 투자한 헌터들이 모두 죽어나갔는데 엉뚱한 사람이 공을 차지했으니까."

헌터 업계 쪽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연찮은 부분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나찰 길드가 유진을 공격할 이유도 마땅히 없으니, 이 자리에서 의구심을 내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시장에 파란을 일으킬 예정인 [성자의 눈물] 공동 제작자한테 미운털 박힐 일을 벌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어, 천유진 헌터님?"

"이정식 기자님. 말씀하시죠."

"핫, 하하. 기억해주시니 감사하네요. 한 가지 더 질문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좀 전에 블랙 컴퍼니라고 하셨습니다만. 어떤 회사인지 알 수 있습니까?"

아까부터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군.

"블랙 컴퍼니는 사업들의 연합체입니다."

"연합체요?"

"대기업처럼 여러 분야에 발을 걸친 단체입니다. 헌터 관련 쪽에 한정해서요."

길드, 용병업, 채광, 연금술 등.

유진을 구심점 삼아 각 분야에 무한하게 확장하는 것이 블랙 컴퍼니의 핵심이었다.

"고려일보의 주성철입니다. 각성 1년 차 헌터의 사업 구상치고는 욕심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헌터가 된 지 1년도 안 돼서 미친개를 제압한 걸로는 모자랍니까?"

"천유진 헌터의 배후에 누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정말로 좋겠네요. 아라한 길드와 척을 져줄 누군가가 있어준다면 말이죠."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신랄하게 대꾸하니 질문을 한 기자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고려일보면 아라한 길드랑 선이 닿아 있는 곳이지?

너희는 기억해두마.

"왜 몬스터들로 가득한 접경지역에 자리 잡은 겁니까?"

"그건 블랙 컴퍼니의 목표 때문입니다."

"목표요?"

"우리나라와 대륙을 다시 잇는 겁니다."

분단 이후 섬과 마찬가지가 된 한국.

대격변이라는 이상 현상이 전 세계를 강타한 후에도 달라질 건 없었다.

우후죽순 생성된 게이트들을 제때에 폐쇄하지 못해서 김씨 왕가가 무너져버렸지만.

그 뒤에도 여러 군벌의 난립과 곳곳에 산재한 침식지대 때문에 대격변 이전과 큰 차이는 없었다.

"1년 차 헌터라고 볼 수 없는 패기군요."

"제가 좀 능력이 뛰어나서."

"그렇게 자신하시는 근거가 있습니까?"

기자들은 유진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중 게이트 사태 때 아라한의 초신성조차 스러져간 곳에서 생환했고.

국내를 넘어 전 세계 헌터 업계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를 양산형 중급 포션 [성자의 눈물] 제작에도 참여했으며.

6성 절정 헌터를 사로잡기까지 했지만.

한반도 이북 개발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에는 모자랐다.

'뭐가 됐든 특종이다.'

'성자의 눈물보다 여기가 진짜였잖아.'

'블랙 컴퍼니? 무슨 짓을 벌이려고 이렇게 판을 깐 거야.'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이 순간을 위해 유진이 판을 짰음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호언장담을 한 만큼, 확실한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도.

〔계약자여. 이 작은 인간들을 만족시킬 패는 준비해두었느냐?〕

'물론.'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웬 기대야.'

〔그대가 세상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순간 아니겠느냐. 기념비적인 날이로다.〕

회귀한 지 약 3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유진의 활동 범위는 파주 인근이 대부분.

블랙 컴퍼니 창설을 알리는 순간부터, 더 이상 좁은 지역에서만 머무를 수 없게 될 것이다.

〔각오는 되었으리라 믿는다.〕

'새삼스럽게 그런 걸 왜 물어.'

유진은 싱겁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각오?

회귀를 결심한 순간부터, 이 상황이 오기를 기다렸다.

본격적으로 미래를 바꾸어가는 순간.

역사의 전환점은 오늘이 될 것이다.

컨벤션센터에 모인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본 후, 생각해둔 카드를 꺼냈다.

"2년 안에 개성 인간사냥꾼을 지워버릴 겁니다."

선전포고.

한 번 내뱉은 이상, 무를 수 없는 선언이 대중에게 쏟아졌다.

108화 바뀌어가는 미래

[성자의 눈물] 시연식.

헌터 업계의 흐름을 바꿀 획기적인 아이템의 프로모션 현장이었으나, 아라한 길드는 참여하지 않았다.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곤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화려하게 터트릴 줄은 몰랐습니다.'

백성현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상념에 빠졌다.

휴대전화는 꺼둔 지 오래였고.

사무실 전화기는 선을 빼놔버렸다.

만약.

어느 하나라도 켜두면 어렵게 만든 적막함이 그대로 깨질 게 분명했다.

'참 훌륭한 선전포고였습니다.'

당하는 입장만 아니라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비장의 수였다.

김미정을 이용.

나찰 길드와 아라한의 밀월 관계를 폭로함으로써, 당장 백성현이 쓸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막혀버렸다.

'미친개를 어떻게 구슬린 건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나찰 길드에서 계약직으로 고용한 간부.

김미정은 흥미가 가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능력이 뛰어나기에 써먹은 거지.

6성 절정의 헌터가 유진한테 포로로 잡힌 것도 믿기지 않는데.

나찰과 아라한을 적으로 돌릴 생각까지 하며 계약을 위반한 사실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리 되었는지.'

나찰 - 아라한 결탁 의혹.

기자회견 직후에 쏟아진 기사들이 붙인 이름이다.

평소 같았으면 아라한 길드의 총력을 동원해서 뭉개버렸겠지만.

[성자의 눈물] 시연식으로 언론과 헌터 업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던 터라, 쉽게 묻어버릴 수도 없었다.

미친개 김미정의 악명도 소문의 진정성을 더 올려주었고.

'증거 하나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의혹입니다만....'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산이 흔들거리지 않듯.

크고 작은 소요가 일어날 순 있어도.

아라한이라는 태산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국내 1위 헌터 길드.

그 이름값은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천유진에게 당장 빚을 갚아줄 수 없다는 게 아쉽군요.'

아라한 길드는 의혹을 벗기 위해 힘써야 하니 당분간 나설 수 없었고.

나찰 길드 역시 큰 피해를 입은 건 마찬가지였다.

미친개의 배신.

그리고 전투원 150명 중 대부분이 접경지역에서 스러져갔으니.

당분간은 부산 일대의 영역을 관리하는 것조차도 벅찰 텐데, 무슨 수로 유진을 건들겠는가.

똑똑-.

"무슨 일입니까?"

"마스터의 호출입니다."

"금방 가겠다."

백성현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말끔하게 다듬은 후, 빌딩 최상층으로 향했다.

"왔나?"

"예. 마스터."

"거기에 앉아. 이야기 좀 하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정장.

짐승을 닮은 커다란 눈동자와 턱선까지 길게 늘어진 구레나룻.

말 그대로 야수 같은 사내, 아라한의 마스터 이신우는 느긋한 투로 자리를 권유했다.

"친구. 이렇게 단 둘이 보는 건 오래간만이지?"

"그렇습니다. 마스터."

"에이. 딱딱하게 왜 그래.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하라고 했잖아."

이신우와 백성현.

두 사람은 맨손으로 국내 1위 헌터 길드라는 철옹성을 일구어낸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부사장이 길드에 끼친 피해가 엄청나게 커서?"

"예."

"솔직히 처음 보고서를 들었을 땐 수련이고 뭐고, 당장 나와서 너를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야생의 부름]

경남 남해에 생성된 6성 이상 출입 가능한 게이트.

이신우는 길드의 이름으로 해당 게이트를 독점, 일부러 공략을 미룬 채 수련장으로 활용했다.

7성 절정의 헌터가 전력을 쏟아 부으면 강을 베고 산조차도 부술 수 있으니.

게이트 안에서는 힘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몬스터들도 실전 경험에 도움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됐다. 그 덕에 벽을 넘어설 계기가 생겼으니."

"드, 드디어 깨달음의 자락을 잡으신 겁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순간 오히려 차분해지더군."

[사가(Saga)]

이신우를 대표하는 기예다.

분노를 힘의 근원으로 삼는 강력한 무술.

그 대신 사용자의 감정 조절 능력을 퇴화시키는 페널티가 있어서 싸우는 중에 이성을 놓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나는 여태까지 그 분노를 다스리려고만 했다."

"그랬었지요."

"수련 중에 보고를 받으니, 나름대로 잘 억눌러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하더군."

꾸드드득-.

근육이 맞물리면서 나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붉은 기류가 이신우의 주먹을 축 삼아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집무실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야. 분노가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에 깨달음이 왔다."

서퍼가 파도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듯.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분노에 목줄을 채우기보다 뻗어나갈 방향을 정하는 것.

분노가 뇌리를 지배하는 순간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네 덕분이다."

"마스터의 도움이 되었다면 기쁠 따름입니다."

회귀 전.

이신우는 게이트에서 폐관수련을 1년 넘게 했지만, 깨달음의 단초를 잡지 못한 채로 나왔다.

[사가]의 진정한 힘을 일깨우는 것은 이로부터 수 년 후.

회귀라는 이적이 빚어낸 나비 효과.

유진은 짐작도 못하는 곳에서 그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성현 부사장. 대책은 마련해두었나?"

"대한당에게 울릉도 일대의 바다를 정리해주기로 했습니다."

"여당 놈들. 받아 처먹은 것도 많으면서 또 뭘 달라고 아가리를 벌렸군."

"고려일보와 서우일보에도 기름칠했으니, 곧 성과가 나올 겁니다."

외부와 연락을 모두 끊기 전.

백성현은 이미 비서실에 대응 지시를 모두 내려놓았다.

[성자의 눈물] 시연식 소식을 듣자마자 방침을 모두 짜놓았기에, 백성현이 없어도 업무 지장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유진이 터트린 폭탄이 생각보다 많이 셌을 뿐.

"박00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했나?"

"아닙니다."

"모를 만하겠지. 그 녀석과 나는 이부형제이니."

이신우와 나찰 길드의 마스터 박00은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였다.

"내가 도와줄 일이 따로 있나?"

"수련에만 매진해주십시오."

"흐흣. 다음에 볼 때는 8성이 되어 있을 거다."

"전 그 동안 아라한의 길을 막는 장애물들을 치우고 있겠습니다."

이신우는 백성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참. 로마노프 가문에서는 따로 연락이 없었나?"

"죄송합니다. 쐐기돌 파손 이후로는 교류에 진척이...."

"걱정 마라. 내가 8번째 성위를 완성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이신우의 배후성은 오딘.

7대 가문 중 하나인 로마노프 가문의 수호성이자, 드미트리의 배후성이기도 했다.

마법과 지식의 신이기도 하며.

그와 동시에 '광기'를 주관하는 전사의 신, 오딘.

로마노프 가문과 연이 닿은 이면에는 배후성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길드 운영은 종전처럼 맡겨두지."

"예."

이신우는 사각 얼음을 입 안에 털어 넣고는 우득, 강하게 깨물었다.

*

기자회견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블랙 컴퍼니.

"사업 연합체?"

"천유진이라는 사람. 알고 보니 허당이네."

"개성을 무슨 수로 밀어."

"접경지역에서 계속 생성되는 괴물들은 어쩌고?"

혹자는 그의 선언을 헛소리로 취급했고.

"투자 가능한가?"

"천 대표와 미팅을 잡아보게."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가족이든 지인이든, 뭐가 있을 것 아니겠나!"

"조사해봤습니다만 고아라고...."

블랙 컴퍼니의 가능성을 알아본 자들은 눈에 불을 밝힌 채, 유진과 접촉하려고 했다.

"스승님! 오래간만!"

[오. 자세가 더 좋아졌어.]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장발의 여인.

장미선도 그 중 하나였다.

"난 바쁘다."

"아이, 참. 천유진 씨. 우리 구면인데 너무 딱딱한 거 아니에요?"

"불사조로 갈 생각 없어. 투자도 안 받아."

"섭외 아니거든요. 우리 길드장님이 동맹 맺자고 전해달래요."

동맹이라.

의외군.

블랙 컴퍼니를 산하로 두거나 금전으로 묶을 의도가 아닌,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파격적인 제안.

아라한 다음 가는 길드에서 먼저 손을 내밀 줄은 몰랐다.

〔크하하핫. 작은 인간이 보는 눈 하나는 뛰어나구나.〕

'뭐, 그 양반은 감이 좋기로 유명했어.'

불사조 길드장 김영수하고는 전생에도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다.

소수 정예인 불사조 길드가 국내 2위에 자리매김한 이유가 김영수의 감과 눈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본인은 8번째 별을 완성시키진 못해서 새벽 길드에게 추월당했지만.

감 자체는 엄청난 사람이다.

"좋아. 서류는 준비해왔나?"

"어, 저, 그게."

"준비성 하나 없군."

"아니. 그게 난 아저씨한테 전달해달라고만 들었다고요."

"나중에 길드장 한번 보러 가마."

"야호!"

"그런데 짐은 왜 싸들고 온 거지?"

"나도 따라가려고요. 길드장님 허락은 이미 맡았어요."

차기 검성, 장미선이 아군에 합류한다?

나쁘지 않군.

각 잡고 굴려서 쓸 만하게 만들어주마.

〔이 작은 인간은 뽀시래기 팀처럼 그대에게 예속되지 아니하였거늘, 그리 베풀어도 되겠느냐?〕

'불사조 길드는 나중에 블랙 컴퍼니의 협력 조직으로 거둬도 돼.'

유진은 현 국내 2위 헌터 길드를 산하에 두겠다는 포부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 동업자님. 저도 개성 인간사냥꾼들이랑 싸워야 합니까?

"팝콘이나 가져와라. 연금술사는 할 게 없다."

"진짜입니까?"

"공장 운영이랑 성자의 정신 제작이나 신경 써라."

선전포고했다고 해서 곧바로 전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

아직 전력이 모자라거든.

그래서 2년이라는 시간 제한을 걸어놨잖아.

〔미친개라는 작은 인간이 합류했는데도 말이더냐?〕

'걔 포함해도 안 돼.'

인간사냥꾼의 3대장.

모두 6성 절정의 헌터이며, 변종 몬스터들도 여럿 테이밍해두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99% 확률로 질걸.

거기에.

'억지로 목줄 쥐어놓은 녀석을 어떻게 신뢰하겠어.'

김미정이 블랙 컴퍼니에 남은 것은 반쯤은 자의가 아니었다.

나찰 – 아라한의 밀월 관계를 폭로했으니.

사태가 조금만 안정되면 두 길드 중 어느 쪽이든지 그녀의 목숨을 노릴 것이 분명했다.

'현상금을 걸든, 직접 나서든 말이야.'

〔그 이유만으로 문명과 거리를 둔단 말이더냐?〕

'나한테 흥미를 가지기도 했고.'

한 번 무언가에 꽂히면 눈이 뒤집히는 녀석.

그러니까 미친개라고 불리지.

유진도 김미정의 관심사가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포로로 잡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형님. 바로 돌아갈 준비를 할까요?"

"아. 민호야. 너희 팀은 따로 해줄 일이 있다."

"말씀하십쇼."

"서울로 가서 용병단 등록해."

용병.

몬스터 사냥이 주업인 헌터와 달리, 의뢰 수행이 주 목적인 단체다.

전문용어로는 PMC(민간군사기업)라고 하지.

대격변 이전에는 한국에 용병 단체가 거의 없었다고 하던데.

헌터들이 등장한 이후로는 용병 업계도 꽤 활성화 되었다고 한다.

"용병, 말입니까."

"너희도 블랙 컴퍼니의 한 축을 맡아줘야 하니까."

"그게 용병 쪽이군요."

"어. 내 이름 걸고 사람도 좀 모집해라."

블랙 컴퍼니가 실시간 검색어 상단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으니, 딱 좋잖아.

홍보를 따로 할 필요도 없고.

"형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 없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넌 잘할 거다."

"형. 나는 왜 말 안 해?"

"민호야. 잘 부탁한다."

"아! 형!!!"

소리 지르는 민영을 못 본 척하곤 뽀시래기 팀을 보냈다.

[주인은 이제 접경지역으로 돌아갈 거야?]

"아니. 협회 들렀다 갈 거다."

[거기서 볼 일이 또 있나.]

"네크로폴리스가 자리 잡은 땅 가지고 법적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니까."

접경지역의 옛 이름은 DMZ.

원칙대로 따지면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다.

해당 지역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인간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만일을 대비해서 정부기관인 헌터 협회와 담판 지어놓을 생각이다.

'회귀 전에는 개성공단 쪽에서 문제가 있었지.'

겁 없이 직접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시비 걸기 좋은 요소라서 미리미리 차단하면 좋잖아.

[설마. 누가 그런 걸로 따지겠어?]

파프너 씨.

회귀 전에 다 겪어본 일이니까 너무 안이한 말 하지 마세요.

유진은 기자회견 직전, 성천 그룹 진 회장을 통해 헌터 협회에 방문할 것을 이야기해놓았다.

[철두철미하군.]

"할 일 많으니까 어서 가자."

[알았다.]

유진은 파프너를 대동한 채, 헌터 협회로 향했다.

109화 뒤늦은 보상

서울 대법원과 마주하고 있는 커다란 건물.

대격변 이후 신설된 기관, '헌터 협회' 본관이다.

[세월 참 무색해. 서울 한복판에 이런 건물도 생기고 말이야.]

"누가 보면 35년 만에 서울 구경하는 줄 알겠어."

[흥. 주인도 한번 죽었다가 와봐라.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질걸.]

파프너의 언짢은 기색에 유진이 피식 웃었다.

모든 게 익숙하면서 낯선 감정.

시간을 되돌린 유진도 파프너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위이이잉-.

좌우로 밀리는 문.

망설이지 않고 들어가자, 널찍한 로비가 보인다.

[안은 넓으면서 문이 왜 이리 작은 건지.]

"네 덩치가 큰 건 생각 안 하냐."

[주인. 세심하지 않은 말은 남한테 상처를 입히는 법이다.]

"그 육체 마음에 든다고 할 땐 어쩌고."

긴장한 표정으로 유진 일행을 바라보는 경비들.

파프너가 발을 뗄 때마다 쿵- 쿵-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지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협회에 왜 언데드가?"

"아. 저 언데드! 그 사람 소환수잖아."

"천유진?"

"헐. 대박. 기자회견 기사 막 올라오고 있던데."

"그러면 기자회견 끝나자마자 협회로 바로 온 건가."

유진과 파프너를 알아본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수그러진 경비들의 모습.

이럴 때를 보면 유명해지는 게 마냥 손해도 아니라니까.

[다들 남 이야기 하는 걸 참 좋아해.]

"사람은 원래 그러잖냐."

[말할 거면 차라리 앞에서 떠들든지 해야지, 원.]

글쎄요.

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가까이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걸.

로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직원 한 명이 유진을 향해 뛰어왔다.

"천유진 헌터시죠?"

"네. 맞습니다."

"개발부 부장 양성수입니다.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짧게 악수를 나눈 후, 양성수는 두 사람(?)을 승강기로 안내했다.

"개발부는 5층입니다."

문이 열리고.

파프너가 자신 있게 승강기에 입장하는 순간 삐이-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음?]

"드래고니안 무게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타면 어떻게 하냐."

[잠깐. 나 하나도 감당을 못 하면 어떻게 해!]

"어떡하긴. 걸어서 올라와야지."

[이... %$#∂$@!!! 너무 무례하잖아!!!!]

파프너는 한참 동안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씩씩거리면서 계단으로 갔다.

쟨 왜 저런대.

"굉장히 개성적인 소환수군요."

"자율성을 많이 보장해줘서 그렇습니다."

양성수가 허헛, 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작은 소란이 지나간 후.

유진은 개발부에 찾아온 목적을 곧바로 이야기했다.

"접경지역, 나아가서는 개성의 개발 권한을 이양 받고 싶습니다."

"안 그래도 기사를 봤습니다. 포부가 크시던데요."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말한 것뿐입니다."

"절차상 문제는 없을 겁니다. 구 DMZ 쪽은 6.25 이후 꽤 시간이 지나서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보다는 몬스터가 끊임없이 나오는 침식지대를 누가 원하겠습니까, 라고 뒷말을 붙인 양성수가 껄껄 웃었다.

"개성 쪽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개성 공단은 대격변 직전까지 교류가 있었으니 문제가 될 만하군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천유진 대표님."

양성수는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두 눈에 아른거리는 감정.

의혹, 그리고 당황을 지나 무언가를 굳게 다짐한 눈빛이 유진에게로 향했다.

"주제 넘는 말이지만, 한 마디 하겠습니다."

"말씀하시죠."

"인간사냥꾼은 만만한 적이 아닙니다."

손등 가운데에 새겨진 기다란 상흔.

양성수는 말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이 상처. 1차 몬스터 웨이브 때 입은 거였습니다."

"현역이셨군요."

"지금이야 내근직입니다만. 어쨌든, 전 그때 인간사냥꾼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파르르 떨리는 손목.

양성수의 몸은 아직도 수십 년 전의 공포를 잊지 못했다.

"괴물을 다루는 괴물들. 이 표현 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군요."

인간사냥꾼들은 아무 몬스터나 테이밍하지 않았다.

홉 고블린.

오크 로드.

그리고 리자드 킹 등.

지휘관급 몬스터들을 길들임으로써 휘하 괴물들까지 수하로 부려먹었다.

"파주 일부가 초토화되었고, 이후에 슬럼화가 된 것도 인간사냥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협회 소속 헌터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원인 모를 이유로 몬스터들의 진군 속도가 늦어지지 않았더라면.

손등에 남은 흉터가 아니라, 양성수의 목숨이 날아갔으리라.

"인간사냥꾼들이 거둔 몬스터들은 게이트의 적과 다릅니다."

"전략적으로 행동하죠. 본능이 아니라."

"그걸 어떻게?"

"최근에 놈들과 싸워본 적이 있거든요."

뭐, 정확히는 회귀 전의 경험을 적당히 섞은 거지만 말이다.

연평도에서 싸울 때야 오우거와 트롤들을 무턱대고 바다에 빠트린 것만 봤다.

"정말로 인간사냥꾼을 몰아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까 말했다시피, 가능하다고 여겨서 말한 겁니다."

한 점의 망설임 없이.

유진은 대답했다.

"전 헌터 1년 차에 나찰 길드와 미친개를 잡았습니다."

"기자회견 영상으로 들었습니다."

"여기서 2년이 더해지면 인간사냥꾼이라고 못 잡을 리 없겠죠?"

양성수는 자신감 넘치는 유진의 모습에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그 말씀, 믿겠습니다."

눈가에 드리운 의혹의 안개를 거둬냈다.

"이제부터 서류 관련 문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무슨 의미죠?"

"천유진 헌터님 관련된 부분, 그러니까 이북 쪽 재개발은 모두 통과시켜드리겠습니다."

양성수는 1세대 헌터.

또한, 협회에서도 오랫동안 일을 해온 경력직이다.

조직에서 나름대로 인망이 있고.

윗줄하고도 꽤 많은 선을 둔 사람이었다.

'빛나는 재능과 꺾이지 않는 마음. 둘 다 가진 헌터를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돕고 싶다.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양성수는 마주한 사내의 진면목을 금세 알아보았다.

또한.

유진이 단언한 대로 인간사냥꾼을 몰아낼 수 있다면.

35년 전의 빚도 청산하는 셈이니 양성수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도와야 했다.

〔영웅은 타인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법. 과연 진심은 통하는 법이로구나.〕

'뭔 소리야? 저 양반 사연은 진즉에 알고 있었어.'

굳이 진 회장에게 개발부 부장인 양성수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겠는가.

이 양반이 몬스터 웨이브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개성 공단 문제로 골치깨나 썩혔다고 했잖아.'

회귀 전, 개성 일대의 지배 권한을 인정받을 때 가장 크게 도움을 준 사람이 양성수였다.

인간사냥꾼한테 맺힌 게 많았다나.

은퇴한 양반이 과거 연줄까지 싹 동원해서 유진을 도와주었으니.

'지금은 현역이니까 더 좋아.'

번거로운 과정은 모두 생략하거나 편의를 봐주겠지.

유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크. 회귀하니 참 달달하다.'

〔말세로다. 말세야!〕

크로노스의 푸념을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회귀 기능을 담아둔 성유물 만든 사람, 아니지. 성좌가 누구인데 매번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쇼. 전력으로 돕겠습니다."

"그건 인간사냥꾼 토벌 때 다시 부탁드리죠"

"천유진 헌터님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

유진은 아- 라며 짧게 탄성을 내지르더니 화제를 돌렸다.

"재개발 관련은 아니고.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ᅟᅭᆼ."

"어떤 겁니까?"

"그, 1차 몬스터 웨이브 때 희생된 헌터들 명단 말입니다. 양 부장님이 작성하셨다고."

"맞습니다. 그땐 제가 현역이어서. 아, 이건 말씀드렸던 거군요."

"혹시 누락된 사람 제보도 받아줍니까?"

스스슷-!

등 뒤에서 유진을 호위하던 파프너의 안광이 크게 일렁였다.

*

"제 능력은 망자를 되살리는 겁니다."

태연한 유진의 이야기에 꿀꺽- 양성수가 침을 삼켰다.

"천유진 헌터의 비밀을 쉽게 말씀하셔도 됩니까?"

"협회에서도 대충은 알고 있을 거잖아요."

나찰 길드가 유진에게 대패한 사실은 마담이 음지에서 손을 쓴 덕에 꽤 많이 알려졌다.

한 번 살이 붙은 소문.

눈덩이를 비탈진 곳에 굴리면 순식간에 덩치를 키우듯.

당시 전투에서 살아남은 용병과 나찰 길드 생존자들의 증언 덕에 유진의 밝혀지지 않은 능력 상당수가 알려졌다.

"본인에게 듣는 것만큼 확실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양성수도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서로 패 아낄 필요 없이 빠르게 가자고.

"제 소환수는 1차 몬스터 웨이브 때 죽은 헌터입니다."

"사람으로 보이진 않군요."

"이미 지박령이 된 혼백을 괴물의 몸뚱이에 부여했죠."

"모시는 성좌님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능력을 받으셨군요."

어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십쇼.

크로노스가 들으면 콧대 세울까 두렵거든.

"실례지만 그, 소환수 분.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박하늘이다.]

파프너는 되살아남과 함께 묻었던 옛 이름을 곱씹듯이 천천히 말했다.

음- 짧은 신음을 흘리며 고민하던 양성수가 입을 벌렸다.

"그분이셨군요."

"아는 이름입니까?"

"대격변 때 유명했던 무투계 헌터셨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셨다고 들었는데."

[보다시피 자의로 사라진 건 아니야. 타의였지.]

자조 섞인 투로 중얼거리는 파프너.

유진은 USB를 내밀었다.

"이건 지박령이 된 박하늘 씨를 찾을 수 있었던 자료입니다."

"...협회에서 해야 할 일을. 감사합니다."

"강력한 혼백을 찾기 위해 검색한 자료를 모아둔 것뿐입니다."

"잠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양성수가 USB를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

"아무 말 하지 마."

[과거의 이름을 버린 건 복수 때문이잖아. 이러면!]

"아라한과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녀석들이 네 정체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박하늘 대신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이유는 두 가지.

과거와의 단절.

그리고 복수였다.

백성현이 몬스터 웨이브 이후 기록을 대부분 지워버렸기에, 박하늘이라는 이름을 찾기 어려웠다.

유진도 회귀 전의 기억을 틈틈이 짚어보았지만, 자료를 찾기가 꽤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 진즉에 네 명예와 이름을 되찾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개성 및 접경지역 개발 이야기도 중요했지만.

파프너의 명예를 되찾는 일은 그에 못지않은 무게감을 지녔다.

'회귀 전에는 못한 일이었지.'

유진은 턱 근육에 힘을 줘서 쓴웃음이 지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붙들었다.

전생보다 10년 이상 당겨진 박하늘과의 만남.

회귀 전에는 대부분의 기억과 감정을 잊어버린 채, 죽어버린 땅에 머무르며 오직 복수심만 불태웠다.

명예를 되찾아준다고 한들.

회귀 전의 박하늘 씨는 어떤 감상도 얻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할 여유도 없었고.'

아라한을 무너트린 것은 좋았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던 로마노프 가문이 곧바로 유진을 견제했다.

7대 가문의 수좌.

마법왕 드미트리가 직접 나선 탓에 박하늘 씨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시간을 투자할 생각도 못했다.

'이젠 달라.'

회귀 전 · 후를 통틀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하수인이자 동료.

유진은 박하늘 씨, 이제는 파프너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의 명예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주인. 어째서 이렇게까지.]

"당연한 걸. 너는 내 대전사잖아."

진짜 이유를 설명해주려면 회귀 전 이야기까지 거슬러 가야 한단다.

다 말해줄 수 없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줘.

"주신 자료는 확인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교차 검증을 해보니 모두 진짜더군요."

"다행이네요. 헌터 협회에서 인정을 안 해주면 어쩌나 했거든요."

백성현, 그 녀석이 어찌나 일을 깔끔하게 해놨던지.

기록 말살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박하늘 씨에 대한 정보를 대부분 지워버렸다.

대격변 이후 국내에서 최초로 6성에 도달한 헌터를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없애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저, 박하늘 헌터님."

[파프너라고 불러라. 생전의 이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이 자리에서는 박하늘 헌터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양성수는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저희 팀이 몰살당하지 않았던 게 모두 박하늘 헌터님 덕분이었습니다."

[어, 음. 그게 무슨 말인지?]

"몬스터들의 진군을 저지한 분이 박하늘 헌터님이었군요."

1차 몬스터 웨이브 때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양성수.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몬스터들의 남하 속도가 느려졌고.

그 덕분에 태세를 재정비해서 국토를 대부분 지켜낼 수 있었다.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감사드립니다."

진심이 담긴 인사.

파프너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침묵하다, 겨우 사념을 퍼트렸다.

[...별말씀을.]

수십 년 만에 받은 보상.

파프너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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