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성자의 축복(2)
두 번째 목내이병 치료.
성위가 올라가면서 축적해놓은 생기의 양도 늘어났다.
그 덕분에 치료도 수월하게 진행....
"되지만은 않네."
욱.
포션을 너무 퍼먹어서 헛구역질이 나왔다.
목내이병 치료에 들어가는 생명력은 어마어마했다.
회귀 전에 전용 치료기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그 과정을 오롯이 신성 주문으로 커버하려고 하니, 탈이 날 수밖에.
'이러다가 포션 중독증에 걸리겠어.'
〔포션 중독?〕
'단기간에 많이 먹으면 회복에도 저항성이 생긴다고.'
신성 주문이야 많이 사용해도 후유증이 없지만.
포션의 치유 매커니즘은 약재라서 먹다 보면 면역이 생긴다.
어지간히 먹지 않는 이상에야 문제가 안 되지만.
최근 네크로폴리스를 확장한다고 무리한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었다.
'생명력을 확보할 다른 방법을 찾아보든 해야겠어.'
모자란 영력을 충당해야 할 상황이 앞으로 벌어지지 않을까.
아니.
성위에서 벗어난 힘을 다루다 보면, 결국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영력 스탯을 늘리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이지만.
레벨을 올리든, 라이프 드레인으로 스탯을 흡수하든 간에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빨리 4성이 돼서 인형설삼을 먹어야겠어.'
만성적인 영력 부족을 해결하려면 영약이 최고지.
유진은 혀를 찬 후, 치료하는 과정에서 힘이 바짝 들어갔던 어깨를 가볍게 풀어주었다.
"끝났습니까?"
"예. 환자가 괜찮은지, 직접 확인해보시죠."
"아, 아아."
신음을 내뱉으며 방으로 들어온 의뢰인.
유진 일행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진성현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성자님."
"별 말씀을요. 공짜로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뼈가 있는 유진의 말에 진성현은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그 부분은 저 친구도 숙지하고 있을 겁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을 테니까요."
"일찍 말해주었으면 세령이를 부탁드릴 때 같이 의뢰를 했을 텐데. 괜히 번거롭게 해드렸군요."
"병세가 있는지 모르셨나봅니다?"
"국내 1위 제약회사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며 자구책을 마련하다가 실패한 모양입니다."
대한 제약회사 대표의 안사람이 목내이병으로 고통 받는 중이다?
알려지면 회사 주식이 휘청거릴 만 한 이슈다.
"세령이 이야기를 우연히 흘리지 않았다면... 저도 몰랐을 겁니다."
"대한 제약회사 대표님이 좋은 인연을 둔 덕을 보시네요."
"허허허.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은근슬쩍 마담을 짚고 넘어가는 진성현.
흠.
마담은 진성현 회장과 적당히 선을 긋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당사자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둘의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시죠.'
유진은 끼고 싶지 않았다.
마담하곤 어디까지나 파트너 관계. 사적인 감정이 들어갈 사이가 아니다.
사적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꺼내면 본인부터 싫어할 걸.
〔정말로 그리 생각하느냐?〕
'회귀 전에도 철저하게 업무적인 사이였다.'
〔크하하핫. 짐이 보기에는 마냥 공적인 이야기만 나누는 것 같지 않구나.〕
'헛소리 마쇼. 성좌 나으리.'
마담이 사근사근한 건 본심을 감추려는 페르소나.
즉, 가면이다.
유진은 그 가면에 비치는 모습에 빠져서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다가 파멸한 이들을 꽤 보았다.
'가만있으면 절반은 가는데 그걸 못하네.'
〔흐으음. 이상하구나.〕
마침 환자와 해후를 마치고 나온 의뢰인.
끝까지 납득 못하는 크로노스의 사념을 밀어낸 후, 가볍게 목례했다.
"성자님. 남편은 이제 괜찮은 거죠?"
"예. 치료는 완전히 됐습니다."
진세령 때와 마찬가지로 주의사항을 이야기해주니, 중년의 여인은 눈에 맺힌 습기를 닦아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마침 드릴 제안이 하나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시죠."
곧바로 본론을 꺼내는 유진.
옆에 있던 진성현이 허흠- 크게 헛기침을 했다.
"젊은 친구라서 겉치레를 안 좋아하니. 정 회장이 이해해주길 바라네."
"은인을 앞에 두고 체면 챙길 생각은 없어. 걱정하지 마."
대한 제약회사를 국내 1위로 만든 굴지의 기업가.
정순임은 무뚝뚝한 평소의 모습 대신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
대한 제약회사의 대표.
정순임의 경지는 6성이다.
성천 기업 진성현과 달리, 두 번째 큰 벽을 넘진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얕볼 사람은 아니야.'
대한 제약회사를 국내 1위로 우뚝 서게 한 주역.
약 5년 전쯤에 나타난 [연금술사] 직업군도 아니면서, 성능이 뛰어난 의약품들을 여럿 개발한 인물이다.
'환약을 유통하려면 대한 제약회사를 끼는 게 낫다.'
성천 기업의 주력도 연금술이지만, 약을 전문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연금술 카테고리 안에는 몇 가지 분야가 있고.
대한 제약회사는 약재 관련된 쪽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인 것.
"동업자 양반. 다리 좀 그만 떨어."
"아니. 그 전설의 파란 물, 아니. 바쿠스를 만든 분 아닙니까."
속칭 '파란 물약'으로 불리는 회복제.
바쿠스는 헌터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사랑(?)받는 음료다.
복용 시 피로가 회복되는 효과가 있고.
중독성이나 부작용도 없어서 대한 제약회사의 주력 상품으로 명성이 높았다.
"한때 엄청 먹었죠."
"지금은 끊은 것처럼 말하지 마라."
"티 납니까?"
"중급 포션 만들 때 갖다 놓고 물처럼 마시더만."
큭, 짧은 신음을 토하는 신준석.
정순임 회장은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성자님과 일행 분. 제안하실 게 있다고 했죠?"
"이 환약, 그러니까 성자의 축복의 유통을 맡기고 싶습니다."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정순임.
그녀 역시 진성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대단하군요! 이렇게 획기적인 약이라니!"
"이 친구가 능력이 좀 돼서요."
"근데 성자의 축복이라는 이름, 다음 시리즈도 염두에 둔 건가요?"
"흠.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굳이 부정하지 않는 유진.
옆 좌석에 앉은 신준석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웬 시리즈 제품이요? 전 그런 이야기 못 들었습니다.
-메인으로 삼을 브랜드 이름은 필요했잖아.
성자의 00, 이런 식으로 앞에 성자를 두는 식으로 브랜드를 만드는 건 어떨까.
정순임의 이야기에 즉흥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
생각할수록 괜찮은걸?
물론.
브랜드를 구축하려면 해당 이름을 건 상품이 꾸준히 나와 줘야 한다.
'아이디어야 넘치지.'
회귀 전, 신준석과 동업하는 과정에서 주워들은 레시피가 여럿 있고.
흑암의 반지에 깃든 지식도 많았다.
소생 포션.
강체환.
매서커 포션 등.
성자 시리즈로 탈바꿈시킬 상품이 얼마나 많은데?
"동업자 양반.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
"...?"
"그냥. 그렇다고."
유진은 신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고생 좀 합시다.
나 혼자 득 보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잖아?
〔참으로 불쌍한 자로고.〕
크로노스는 혀를 찼다.
그 뒤로 이어진 유통 관련 협상.
정순임 회장은 블랙 컴퍼니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었다.
"생산량이 얼마 안 되니 프리미엄으로 판매하는 게 좋겠네요."
"프리미엄이라면?"
"저희 회사의 후원을 받는 상위 헌터들 위주로 공급, 서서히 소문을 낼 겁니다."
정순임은 성자의 축복을 소수에게만 제공, 입소문을 내는 식으로 판매 전략을 제안했다.
[성자의 축복]의 하루 생산량은 많이 쳐줘도 10알.
정규 브랜드로 만들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양산형 중급 포션처럼 생산 라인을 구축하기에는 제조법이 복잡했으니.
'사업 쪽은 확실히 안목이 다르군.'
한 수 배웠다.
브랜드 창출과 유통 라인을 뚫는 것만 생각했건만.
[성자의 축복] 공급과 약의 효과 등, 모든 요소를 고려한 조언이라.
'나중에는 전문 경영인도 한 명 섭외하든 해야겠어.'
이번 생은 회귀 전과 다르다.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으니.
첫 끗발이 개 끗발로 끝나지 않으려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소중한 가르침을 싼 값에 얻었어.
"좋습니다."
"그럼 남편을 치료해주신 보답을 드려야겠군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
반면에 신준석은 부담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프리미엄 라인으로 유통을 뚫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그건 저희한테도 득이 되는 제안이라서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그렇지. 신 연금술사, 두 사안은 따로 다루는 게 맞소."
중간에서 의뢰를 이어준 진성현도 말을 보탰다.
암, 암. 그렇고말고.
성자의 축복 같은 환약을 정기적으로 공급받는 게 얼마나 큰 기회인데?
대한 제약회사에게도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줄 계약이다.
그러니까.
보상도 따로 받아야지.
"인형설삼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군요. 아마... 한 달 정도."
"괜찮습니다."
급할 건 없었다.
인형설삼 복용 조건인 4성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으니.
'접경지역으로 돌아가면 몬스터 사냥에 매진해야겠어.'
파프너의 성위가 5성에 올랐고.
[천골] 특성을 지닌 천재, 송명석도 망자 군대에 합류했다.
접경지역 안쪽에서도 사냥이 가능한 전력.
4성?
금방 도달해주마.
유진은 혀로 입술을 쓱 핥았다.
*
동해 어딘가에 솟아오른 작은 섬.
침식현상의 여파로 나타난 육지에 방문자가 들이닥친 건 며칠 만이었다.
"아주 엉망이야."
붉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인이 혀를 찼다.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 갑옷.
걸음을 뗄 떼마다 허리춤에 달아놓은 50센티미터 길이의 단검 몇 자루가 좌우로 흔들거린다.
"죄송합니다. 누님. 이런 곳까지 발걸음을 하게 하다니."
"양심은 있나 봐?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짜악- 펑!
부풀어 올랐던 풍선껌이 터지자, 수습하러 나온 갈매기파 조직원들은 깜짝 놀라 여인의 눈치를 살폈다.
나찰 길드 사외이사 겸 행동대장, 김미정.
용병업계에서 악명이 자자한 인물로 특유의 자유분방함 때문에 의뢰도 가려 받는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염병. 빚만 아니면 짠내 나는 무인도 따위 안 오는 건데."
안내역을 맡은 헌터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잔혹한 손속은 부산 쪽 암흑가에서 모르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힘센 이끼는?"
"그대로입니다. 누님."
"잘 됐네. 안 그래도 윗선에서 공급이 끊기면 안 된다고 지랄을 했거든."
"노역자가 없는데요."
"등신아. 너희는 손이 없니. 발이 없니?"
김미정의 눈매가 보름달처럼 휘었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동공.
허리춤으로 간 오른손은 금방이라도 단검을 뽑을 것처럼 꿈틀거렸다.
"야. 뭐하냐! 빨리 잠수복 입어라!"
새하얗게 질린 갈매기파 보스는 정리 중인 부하들을 닦달했다.
"너. 재미없어."
김미정은 시시하다는 듯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시선을 옮겼다.
해안가 여기저기에 남은 전투의 흔적.
"탐색 셔틀. 흔적 찾아봐."
"싸움이 벌어지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나올지 말지는...."
"안 나오면 셔틀씨 목숨도 없는 거지."
나찰 길드 소속 헌터는 비명을 삼킨 후, 마력을 재배열했다.
[메모리 오브 랜드]
직역하면 땅의 기억.
해당 지역에 머무는 정령을 불러내어 과거에 벌어진 일을 확인하는 마법이다.
유진의 신성 주문인 [메멘토]와 흡사해 보이지만.
[메멘토]는 사용 대상이 땅에 국한되지 않으며. 기억도 소거되지 않지만 넓은 범위를 살펴보지 못해서 장 · 단점이 있다.
"뭐가 보여?"
"시간이 오래 지나서 실루엣만 보입니다."
"난 네 목숨 줄이 보여."
"...배에서 내린 사람이 오른손을 뻗었고, 쌍검을 든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아. 그래. 내가 원하는 답이야."
히죽거리는 김미정.
그녀의 눈동자가 전투의 흔적을 빠르게 쫓았다.
"쌍검 든 놈이 오러를 사용해서 갈매기파 녀석을 베었어. 근데 흔적이 툭 튀어나왔단 말이지?"
"그, 그렇습니까."
마법계 헌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땅의 기억을 읽는 마법보다 더 자세하게 상황을 파악한 여인.
지면에 새겨진 흔적을 대충 보고 이만큼이나 추리하다니. 실력 하나는 진짜였다.
'근데 왜 날 불러온 거야!'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라서 항의도 못하고.
마법계 헌터는 울고 싶었다.
"이야. 네 덕에 하나는 알고 간다."
"무엇입니까?"
"쌍검을 든 녀석. 소환수야."
땅의 기억을 재생하는 마법.
그리고 전투의 상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추론했을 때 나오는 답은 간단했다.
"검 두 자루를 다루는 소환수. 금방 찾겠는데?"
나찰 길드는 이번 사태를 덮어두고 넘어갈 수 없었다.
손 놓고 있으면 부산의 암흑가 통제에도 지장이 갈 만한 사항.
길드의 영역을 함부로 건들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확실히 보여줘야 했다.
"안 그래도 본부에서 한 놈 더 조지라고 성화니까 빨리 처리해야겠어."
나찰의 배후에 있는 길드.
아라한에서는 김미정에게 헌터 한 명을 조사하고, 기회가 되면 제거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최근 이중 게이트를 공략한 주역.
유진이었다.
김미정은 아라한 길드의 지령 속 인물이 무인도에 침입한 사람과 동일한 것을 모른 채, 히히덕거렸다.
91화 시계야. 이게 무슨 기연이니
유진은 [성자의 축복] 유통 권한을 넘기는 김에 양산형 중급 포션 판매도 맡겼다.
-계약기간은 3년. 상호동의하에 갱신 가능.
-갑(신준석)은 을(대한 제약)에 성자의 눈물(구 양산형 중급 포션) 유통 권한을 위임.
-을은 성자의 눈물 마진의 10%를 획득.
"안정적인 물량 확보. 가능하시겠나요?"
"시간과 예산을 조금 더 주신다면...."
"대금 선지급 개념으로 장비를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신준석의 눈길이 옆으로 슬슬 향했다.
"왜 내 눈치를 보냐?"
"투자 받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상황이 달라졌잖아."
예전에는 투자자에게 휘둘릴 수 있어서 자금이 유입되는 것을 경계했다.
경력 하나 없는 연금술사.
포션의 효력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눈탱이를 맞을 수도 있고.
사업 전체가 휘둘릴 가능성도 높았다.
"천유진의 파트너. 그 정도면 이름값은 충분하지 않겠나."
아라한 길드의 신예와 공동 공략.
이중 게이트 공략 신화의 주역.
각성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지만, 유진은 굵직한 사건들을 연달아 터트리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누구한테 먹힐 걱정은 덜 해도 된다는 것.
"동업자 양반 능력이 출중한 것도 입증됐잖아. 안 그래?"
성자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두 작품.
성자의 축복과 눈물(포션)을 단독으로 개발한 천재가 신준석이다.
대한 제약회사와 사이가 틀어진다면.
'러브콜이 쏟아지겠지.'
몸집도 적당히 키웠겠다, 투자 좀 받는다고 누군가한테 휘둘릴 걱정은 없다.
판을 쥐고 흔들 정도는 아니어도.
게임에 참가할 만한 판돈은 쥔 셈이다.
"받겠습니다."
대한 제약회사는 대량 배합에 필요한 기계와 조작 및 단순 노동을 해줄 사람 10명을 파견했다.
이 정도 말했으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크로노스는 흠- 짧게 신음을 흘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너무 안이한 것 아니더냐? 회사에서 인원을 파견하면 포션 제작 공정정도는 금세 파악할 터.〕
"대략적인 건 알아채겠지?
〔그 사실을 인지하였음에도 그리 하였느냐? 통재로다.〕
"연금술이라는 분야를 너무 얕보지 마."
기온이 1도만 차이가 나도.
배합 비율이 1%가 모자라거나 더해도.
촉매를 넣는 타이밍이 1초만 빨라도.
완성품과는 동떨어진 결과물이 나오는 게 연금술이다.
생산공정의 대략을 알아?
알면 어쩔 건데.
"중요한 건 그 미세한 차이다. 배합 비율이나 온도 맞춰본다고 따라해 봐야 한세월일 거다."
북극곰이 좋아하는 시커먼 탄산음료의 레시피가 왜 수십 년 후에도 비밀로 남아있겠나?
눈대중으로 대충 보고 훔쳐갈 수 있는 거였으면 누구나 포션 장사하게.
운이 좋아서 베끼는 데 성공했다 치자.
성자의 눈물은 이미 특허 등록까지 마친 상황.
'고소 걸기 딱 좋네.'
유진은 킬킬거렸다.
〔계약자여. 음흉하기 그지없구나.〕
'대책은 마련하고 일을 저지른다는 걸 설명해준 것뿐이다.'
크로노스는 말문이 막힌 채, 잠시 사념을 끊었다가 이내 반색하며 외쳤다.
〔드디어 그때가 도래하였구나.〕
'무슨 말이야. 갑자기.'
〔짐이 그대에게 하사한 능력을 다시 활용할 날을 말하는 것이니라.〕
진동음을 내는 회중시계.
아.
그러고 보니 [메멘토]를 사용한 게 벌써 1달 전인가.
'저번에는 공허의 파편을 얻었지.'
서해 5도 중 하나.
연평도에 숨겨진 기연을 알려준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회귀 전의 시간선의 기록을 불러들여서 동 시기에 발견된 기연과 연관된 정보를 보여준다.
유진의 기억에 없는 것까지도.
〔크하하핫. 어서 사용해보아라.〕
'좋아. 이번에는 무슨 기연을 알려줄지 보자고.'
[메멘토를 사용합니다.]
[대상 -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째깍째깍-.
멈춰 있던 분침과 초침이 돌아가고.
유진의 머리 위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
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선박.
1천 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 가능한 대형 크루즈가 항구로 다가온다.
육지와 가까워지는데도 줄어들지 않는 속도.
콰앙-!
정박 중인 선박들을 짓뭉개면서 나아간 크루즈가 항구에 올라탔다.
예고되지 않은 사고에 속출하는 민간인 피해.
'...뭐야?'
저기요.
회중시계야.
이게 무슨 기연이니?
참극이야 익숙했지만, 기연을 보여주라고 했더니 사고 장면이 왜 나와.
'영문을 모르겠네.'
뺨 한쪽을 일그러트린 유진이 회중시계의 기억을 마저 살펴보았다.
느닷없이 항구로 밀고 들어온 크루즈로 인해 혼란에 빠진 상황.
재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키흐흐. 신선한 먹이가 아주 많다.
-모두 제물로 바치자.
붉은 피부.
그리고 이마에 붙어 있는 두 갈래의 뿔.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이종족, 악마들이 크루즈 갑판 위로 나타났다.
'악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시감.
유진이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메멘토] 속 환상의 악마들이 곧장 도시로 향했다.
예기치 않은 재난을 마주한 헌터들이 산발적으로 저항했지만.
흑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악마와 성위를 뛰어넘는 신체능력을 지닌 암흑계의 마수들을 당하진 못했다.
〔인외마경이로구나.〕
'그러게.'
괴물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뿔 달린 악마한테 붙들린 채, 제물로 바쳐진 시민들.
도시 전역이 붉게 물들을 때 즈음.
크루즈에서 사이한 빛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2028/2/14일]
[속초의 기억을 읽었습니다.]
메멘토로 읽어낸 회귀 전의 사건.
유진은 잠깐 동안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졌다.
〔계약자여. 오해하지 말거라.〕
'뭘 오해해?'
〔이건 짐의 의도하는 바가 아니니라. 분명 회귀 전 시간선에서 읽어내는 기억은 재난이 아니라 기연과 관련된....〕
'따지고 보면 기연이기는 해. 내 생각이 맞는다면.'
떠올랐다.
2월 14일이라는 날짜에 장소까지 보니 확실해졌다.
피의 발렌타인.
그 빌어먹을 재난이 일어나기까지, 고작 2달밖에 안 남았구나.
〔피의 발렌타인?〕
'발렌타인데이 때 일어난 재난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어.'
속초 전역이 초토화된 전대미문의 사태.
이북에서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 이후 대한민국의 도시 하나가 초토화된 건 피의 발렌타인 사건이 최초였다.
〔철의 무덤인가 하는 게이트도 있지 않았느냐.〕
'그거야 인명피해는 별로 없었어.'
철을 흡수해서 강해지는 보스 몬스터 때문에 자산피해가 컸던 것이지.
시민들은 대부분 피난을 마친 덕에 인명 피해가 거의 없었다.
피의 발렌타인 사태는 다르다.
관광객.
시민.
그 외에도 무수한 인원들이 모두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자세하게 이야기 해보아라. 궁금하구나.〕
'뭐, 쓸데없이 복잡한 일이야.'
유진은 성난 기세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메멘토]로 봤다시피, 재난의 시발점은 속초 - 삿포로를 오가는 크루즈다.
'정확히 말하면 배를 점거한 사교도들이지.'
만신전이 세계 각지에 나타난 후.
어느 누구도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그 대척점에 선 악신들도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악신 성좌를 모시는 자들. 일명 사탄교가 미국 쪽에서 대두되기 시작한다.'
〔참으로 고약한 작명 센스로구나.〕
'뭐, 그쪽은 대격변 이전에도 악마 추종자들이 있었다니까.'
바벨탑의 72 악신 성좌.
그 중 수좌에 군림하는 존재, 사탄의 이름을 붙인 악마 추종자들은 전 세계에 뿌리를 내렸다.
'놈들 중 일부는 크루즈를 강탈. 손님들을 제물로 바칠 계획을 세웠다.'
악신 성좌들은 제물을 바치는 만큼 대상에게 힘을 부여한다.
항해를 시작하면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크루즈.
악신에게 제물로 바칠 인간들도 넘쳐나니.
머리를 엄청 잘 쓴 거지.
역겹게도 말이야.
〔동감이도다. 그릇된 방법으로 쌓은 결과는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이니.〕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크로노스.
그릇된 방법이라.
마치 신왕의 위(位)를 지키기 위해 자식들마저 삼켜버린 과거의 자신을 회상하듯.
그 사념에는 지우지 못한 미련과 아쉬움, 그리고 분노가 배어있었다.
'의식이 성공했으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몰라.'
〔그건 무슨 말이더냐?〕
'제물이 모자랐거든. 그래서 폭주한 거다.'
의식 규모에 비해 모자랐던 탑승객들.
흑마력을 받아들이던 악마 추종자는 이성을 잃은 채, 더 많은 제물을 찾아서 크루즈를 움직였다.
[망가진 크로노스의 회중시계]가 읽은 미래는 그 뒤에 벌어진 참극.
〔한데, 왜 시계가 그 재난을 기연이라고 알려주었을꼬.〕
'아마도... 메멘토가 그 기억을 읽어낸 건 악마 추종자의 소지품 때문일 거다.'
〔대체 그 물건이 무엇이더냐?〕
'불사자의 관.'
진혈.
뱀파이어 일족 중, 고귀한 혈족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관이다.
악마 추종자는 그 아티팩트를 활용해서 악신 성좌에게 제물을 바쳤다.
〔피 빠는 모기들의 관이 왜 기연인 게냐?〕
'나한테는 쓸 데가 많아.'
회귀 전에는 불사조 길드에서 악마 추종자들을 토벌.
악신의 힘을 빌려오는 매개체인 [불사자의 관]은 신성 주문으로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만약 불사자의 관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두고두고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다.
'잘못 먹으면 배가 터져서 뒈질 수도 있는 건수라서 그렇지.'
〔흐으음. 연평도 때보다 위험하단 말이로구나.〕
'악마 추종자의 성위가 7성이었을 걸.'
〔그대가 두려워하는 애꾸눈과 동일한 경지란 말이더냐?〕
'안 무서워하거든요.'
7성.
무투계는 오러를 넘어선 힘, 오러 블레이드를 구현할 수 있고.
마법계 헌터도 섭리를 비트는 힘을 얻게 된다.
신관 쪽은 모시는 성단에 따라 '이적'을 하사받기까지 하니.
〔그대답지 않구나.〕
'뭐가?'
〔미래에 토벌되는 것이 확정된 작은 인간들. 거기에, 불사조 길드라고 하면 그대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지 않느냐.〕
'길드장에게 부탁해서 관이라도 빼달라는 거냐.'
〔짐은 그런 비겁한 방법을 싫어하나, 그대라면 거리낌 없이 그 수단을 택하리라 여겼다.〕
'시민들은 어쩌고.'
유진은 혀를 찼다.
딱히 정의감이 넘치는 성격은 아니다.
네크로맨서로 정점에 오르기까지 무수한 피를 흘렸고.
그중에는 무고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제 와서 사람들의 목숨이 귀하다고 지껄일 생각 따윈 없다.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잖아.'
불사자의 관이라는 기연을 손에 넣고.
속초 시민들의 목숨도 겸사겸사 구하고 싶다.
양자택일을 해야 하면 모를까.
지금은 둘 다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크하하핫! 훌륭하구나. 영웅의 기개를 보는 듯하도다.〕
'빌어먹을 영웅찬가.'
〔한 가지만 더 묻자꾸나. 차라리 크루즈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막는 게 낫지 않느냐?〕
'놈들은 의식을 벌이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한다. 내가 배에 타면 의식을 취소할지도 몰라.'
그런 일로 미래가 바뀌는 건 사양이다.
유진이 개입해서 2월 14일에 준비했던 의식이 취소된다?
악마 추종자들은 다른 날짜를 골라서 다시금 의식을 시행, 악신 성좌의 힘을 내려 받을 것이다.
'크루즈가 막 항구에 도착했을 때 막는다.'
쳇.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악마들의 경지는 최소 4성.
현재 일행 중 4성급 몬스터를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건 합일 및 시술을 마친 언데드들뿐이다.
뽀시래기 팀이나 임재백의 수준으로는 안 돼.
'일행의 전력도 강화시키고. 언데드도 더 만들어야 한다.'
〔7성이라는 악마 추종자는 어찌 하려고 하느냐?〕
'놈이 7성에 도달한 건 제물을 바쳐서야. 막 상륙했을 땐 6성쯤 될 거다.'
[메멘토]로 본 환상의 마지막 부분.
핏빛 광채가 크루즈에서 솟구쳐서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던가.
제물을 충족시켜서 벽을 뛰어넘는 현상.
악마 추종자들은 핏빛 광채가 솟구치는 것을 보고 '승천 의식'이라고 불렀다.
〔계약자에게도 나름대로 승산이 있겠구나.〕
'6성도 버겁긴 해.'
크루즈에 열린 게이트.
평범한 게이트가 아닌, 암흑계와 현세의 벽을 뚫는 균열이다.
승천 의식의 여파로 나타난 현상.
암흑계의 마수나 악마들은 그 통로를 넘어서 속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 하나 유리한 게 없네.'
〔그렇게 말은 해도 포기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2달 남았잖아. 지금부터 대비해야지.'
까드득-.
불사자의 관이라는 기연을 손에 넣고.
덤으로 '피의 발렌타인'으로 불릴 재난도 막아주마.
유진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92화 우리 형 미국 갔어(1)
유진과 신준석이 대한 제약에서 지원 받은 장비 및 인력 배치를 놓고 씨름할 때.
정순임도 [성자 시리즈] 판촉을 위해 발품을 팔았다.
대한 제약의 '바쿠스'는 나름대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닌 피로회복제.
오스트리아의 블루 불이나 미국의 몬스터 파워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탁월한 효능 덕에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알음알음 팔리고 있었다.
-선물은 잘 갔나요?
정순임은 화상통화 너머의 존재에게 나긋한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목덜미에 닿을락 말락 하는 짧은 흑발에 청색 눈동자와 이마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인상적인 여인.
캘리포니아에 근거지를 둔 길드, [리틀 엔젤스]의 부 길드 마스터 앨리스 킴은 특급 배송으로 날아온 환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체어맨 정. 특급으로 보내주신 물건, 잘 받았어요."
-다행이네요.
"무슨 약이기에 급히 보내주신 건지?"
-복용해보면 알 겁니다.
은은한 미소를 띠우는 정순임.
화면 너머로 마주한 여인은 그 모습에 의아한 듯 갸우뚱하고는 환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성자의 축복을 복용했습니다.]
[마력 재배열 속도가 20% 상승합니다.]
[이동하면서 마력을 재배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재배열 속도가 50% 감소합니다.]
"Wow."
앨리스 킴은 바쿠스 미국 유통을 주도했던 사업가이기도 했다.
VIP 위주로 진행하는 [성자의 눈물] 프로모션 때 우선적으로 약을 배송한 이유이기도 했다.
'복용하기만 해도 마법 발현 속도가 20% 감소하고 무빙 캐스트까지?'
탐이 난다.
전 세계에서 헌터 보조 의약품으로 가장 발달한 나라. 미국에서도 이렇게까지 파격적인 효과를 지닌 약은 개발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체어맨 정. 미국 진출할 생각 없어요? 내가 다리 놔드릴게."
-마음만 받을게요.
"이 정도 성능의 보조 의약품을 개발할 실력이면 미국에서도 히트할 거라니까."
-성자의 축복은 유통만 맡고 있어요.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서 말이죠.
앨리스 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누가 이런 약을?"
-거 참. 말씀드리면 안 되는 부분인데.
화면 너머로 비치는 정순임 회장이 난감한 듯, 그러면서도 한쪽 입술을 씰룩거렸다.
-연금술사와 성자. 두 사람이 공동제작 했다더군요.
"...성자요?"
-어머. 실례. 방금 전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환약에 [성자의 축복]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건 그 이유 때문이구나.
앨리스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체어맨 정. 방금 전 이야기.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
-...그렇게 천 대표를 소개하게 되었어요.
정순임의 이야기를 들은 유진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앨리스 킴이라.
〔계약자. 짚이는 게 있느냐?〕
'아니. 전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 한번 시원찮구나.〕
'회귀했다고 다 아는 게 아니라니까.'
앨리스 킴이나 리틀 엔젤스?
미안하지만 다 초면이거든요.
한국도 아니고 태평양 너머에서 골목대장(?) 하는 길드 이름이나 관계자를 어떻게 다 알겠어.
크로노스에게 타박한 후,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약효는 어떻답니까?"
-훌륭하다고 감탄했습니다. 생산량만 받쳐줬으면 미국 쪽 판로도 확보하는 건데, 안타깝더라고요.
"그거 참 다행이군요."
-참. 앨리스 킴이 성자님을 초청하고 싶다더군요.
그거 참 잘 됐어.
비자에 잉크도 안 말랐는데, 또 쓸 일이 생기다니 말이야.
-경비는 대한 제약에서 부담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일행이 넷 더 있는데 괜찮습니까?"
-그 정도쯤은 괜찮습니다.
"자세한 일정 잡히면 말씀해주십쇼."
-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유진이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크로노스가 의문을 드러냈다.
〔하면 왜 하나가 아니고 넷인 게냐?〕
'성자라고 했잖아. 약 관련한 이야기로 보자는 거였으면 연금술사를 불렀을 거다.'
정순임 회장은 유진의 성위까지도 은근슬쩍 흘렸을 터.
관할지역 내 게이트 중에 실력이 뛰어난 '신관'이 필요했으니 초청장을 보낸 것이리라.
〔갈! 방금 전 이야기대로라면 홀로 가야 하지 않느냐.〕
'미국에서 얻어야 할 게 하나 있어.'
단독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기연.
안 그래도 미국과 남아공 중에서 한 나라를 들를 생각이었는데 잘 됐다.
캘리포니아에서 나름대로 먹어주는 길드의 초청이라면.
향후 일정을 짤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유진은 접경지역에서 사냥 중인 뽀시래기 팀을 불렀다.
"해외여행은 관심 없나?"
"형님. 갑자기 여행 이야기를 하셔도 게이트 공략하러 가자는 말씀으로밖에 안 들리는걸요."
자식.
예리하군.
유진은 진실 일부를 감춘 채, 말을 가다듬었다.
"이번에 미국의 리틀 엔젤스라는 길드에서 초청을 받았다."
"형. 리틀 엔젤스면 거기잖아! 거기!"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듣냐."
"배우 겸 가수로 유명했던 연예인. 아만다가 길드 마스터로 있는 곳!"
"...?"
저기요.
그게 누군데요.
유진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다섯 개 떠오르자, 강민영이 답답한 듯 외쳤다.
"진짜 몰라요? 뮤지컬 영화 너 참 불쌍하다의 주연!"
"정말임까. 선배?!"
"아. 그러네."
뽀시래기 팀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유일하게 분위기를 타지 못한 유진 혼자 두 눈을 껌뻑이고는.
"...그게 중요한 거냐."
"물론이죠. 형. 세상에나, 전 꼭 갈래요!"
"리틀 엔젤스의 초대를 받은 건 나뿐인데."
"방금 해외여행 가자고 말했잖아!"
"말했잖아, 는 반말이고."
"요."
"너희는 동행. 그쪽 길드 의뢰 해결하는 동안 관광이나 즐겨라."
유진의 파격적인 선언에 뽀시래기 팀원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웬 휴가야?"
"형님이 그래도 우리를 챙겨주시나 보다."
"캘리포니아 맛집은 저한테 맡겨주지 말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일행을 휘감았다.
〔참으로 고약하구나. 거짓된 희망으로 수하들을 기만하다니.〕
'왜. 쉬는 시간 주는 건 사실이잖아.'
착한 유진이는 거짓말 같은 거 몰라요.
리틀 엔젤스에서 '3성'인 '성자'를 찾는 이유는 뻔했다.
게이트 공략.
단기간에 끝날지, 아니면 장기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그 동안에는 일행에게 쉬는 시간을 줄 생각이다.
'휴가라도 줘야 원망을 안 듣지.'
〔얼마나 호되게 부려먹을 계획인 게냐?〕
'나도 몰라.'
유진은 히죽 웃었다.
정말이다.
미국의 모 게이트에 숨겨져 있는 기연에 대해서는 소문만 들었거든.
난이도가 어마어마하다는 거랑 보상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유진도 직접 마주해봐야 안다.
〔가련한지고.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저리 해맑게 웃고 있다니.〕
크로노스는 나지막이 뽀시래기 팀을 동정했다.
*
로스앤젤레스.
미국 서부 최대 규모의 도시이자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
전 세계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를 비롯하여 대중문화의 중심지다.
"우와. 내가 살다 살다 해외여행을 오다니!"
"전 이 날을 평생 기억할검다!"
강민영과 이성민이 호들갑을 떨었다.
대격변 이후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해외여행 비용.
세계 각지를 좀먹은 침식지대 때문에 비행 및 항해 코스도 전보다 복잡해졌다.
크로노스를 성좌로 삼기 위해 크레타 섬에 갔을 때도 순수하게 비행기 값으로만 1천만 원 가까이 사용했듯.
한번 외국을 다녀오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
'여행에 들어가는 경비는 모두 대한 제약에서 지원해준다고 했으니 신날 만하겠어.'
많이 웃어둬라.
이 때가 그리운 순간이 반드시 올 테니까.
크흐흐.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막은 채, 유진은 뽀시래기 킴을 흘겨보았다.
"미스터 천?"
강렬한 마력 파장을 휘감은 단발머리 여인이 직선거리로 다가온다.
황색 피부와 검은 머리, 그리고 푸른 눈동자라.
통성명을 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히 짐작이 갔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킴 부 길드장님."
"별 말씀을. 좋은 약도 선물 받았겠다, 전도유망한 성자님을 직접 보고 싶어서요."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강민영이 멍한 표정으로 유진과 앨리스 킴을 번갈아봤다.
"형. 그 영어 뭐야, 요."
"국제시대에서 영어는 기본이지."
"와. 배신당한 기분이야."
인생 2회차에게 영어 따위는 껌이란다.
"앨리스라고 불러요. 성으로 부르면 너무 딱딱하잖아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일행분들은?"
"LA 관광하러 왔습니다. 자유여행 한다고 하니 숙박할 곳만 알려주시죠."
앨리스 킴이 손을 까딱이자, 뒤에서 대기 중인 비서가 호텔 키를 일행에게 전달했다.
"우, 우와! 여기 5성 호텔인데?!!!"
"형님. 이건 너무 과분한 대접인 것 같습니다."
"내 일행이면 당연한 거다."
"형님....!"
들떠 있는 두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강민호야. 너까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니.
"임 이사. 애들 뒤치다꺼리 좀 부탁하지."
"선은 지키게 하겠습니다."
뽀시래기 녀석들 보모 해달라고 부른 건 아닌데.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미안하지만 일 보고 오는 동안 고생 좀 해줘.
일행이 신난 기색으로 공항에서 벗어나는 것을 확인한 후, 본격적으로 비즈니스 이야기가 오갔다.
"성자라고 하셨죠?"
"네. 어느 성좌를 모시는지는 알려드릴 수 없지만요."
"성자의 축복. 그 환약의 효능만 봐도 미스터 천의 실력은 검증된 거나 마찬가지죠."
환약 만들 때 제 성력 같은 걸 섞은 게 아닙니다만.
유진은 그 착각을 굳이 바로잡아주진 않았다.
"제 성위가 3성인 건 알고 계시지요?"
"알다마다요. 저희 길드에서 수소문 중인 게 3성의 신관이니까요."
"그렇다면 역시...."
"미스터 천이 짐작한 대로 게이트 공략 의뢰입니다."
[망령의 단말마]
[유형 - 고정 타입]
[출입 조건 : 3성]
[게이트 면적 : 중]
[출입 제한 : 10명]
[마나 밀집도 : 84%]
"리틀 엔젤스에도 인재가 있을 건데요?"
"그건 맞아요. 길드장님부터가 성녀 후보로 뽑히는 강력한 신관이니까요."
"왜 길드 사람이 아니라 저를 기용하려는 건지."
"게이트 공략에는 더 강한 신관 전력이 필요하거든요."
망령의 단말마.
언데드와 유령 계열 몬스터가 바글바글할 것 같은 이름이지 않은가.
리틀 엔젤스에서는 관할지역 안에 생긴 게이트를 공략하려고 신예 헌터들을 투입했지만.
쉼 없이 쏟아지는 언데드의 물결 앞에서 패퇴했다.
"그러니까 성자인 제 힘이 필요하다?"
"미스터 천. 한국에서는 이미 유명인사더군요."
앨리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중 게이트 공략.
기기묘묘하면서도 효과가 대단한 신성 주문들.
[성기사] 클래스도 아닌, 순수 신관 직업인데도 동일 성위 무투계에 밀리지 않는 무력까지 지녔으니.
3성 신관 중에서 유진만큼 뛰어난 사람을 찾는 건 미국 전역을 뒤져봐도 어려웠다.
앨리스 킴이 내린 판단이었다.
"듣자 하니 모시는 성좌에게 강력한 소환수도 하사받았다고."
파프너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파프너는 세력을 확장 중인 네크로폴리스 방비의 총책임자로 남겨두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전도유망한 쌍검잡이 하나를 챙겨왔지.
"꽤 많이 조사하셨네요."
"체어맨 정이 비밀로 해달라는 걸.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정순임이 은근슬쩍 정보를 흘렸던 때와 마찬가지로.
앨리스 킴 역시 가볍게 발뺌했다.
그 사실을 짐작한 유진도 더 추궁하진 않았다.
"조건을 듣고 싶습니다."
"길드에서 보관 중인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 중 하나. 원하시는 걸로 드리겠습니다."
"후한 조건이네요."
"리틀 엔젤스의 위신이 걸린 문제니까요."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지면 인류의 영역이 줄어든다.
현 시점에서는 대지와 융합한 게이트 핵을 추출할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기에.
나날이 올라가는 마나 밀집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봐요."
"게이트 공략 과정에서 지휘권을 위임받고 싶습니다."
"그 친구들이 납득할지 모르겠네요."
"설득은 제가 하죠."
의아함으로 물든 앨리스 킴의 눈동자.
"좋아요. 그런 조건이라면야."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망설이지 않고 오른손을 내미는 앨리스 킴.
쿨 거래는 언제나 환영이지.
유진은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93화 우리 형 미국 갔어(2)
LA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 정도 가면 애너하임이 나온다.
디즈니랜드로 유명한 도시.
[망령의 단말마]가 나타난 곳은 애너하임 북부였다.
"공격대가 이미 파견되어 있군요."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진 못해도 주기적으로 괴물을 소탕해줘야죠."
앨리스 킴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헌터들의 주 수입원은 게이트에서 사냥한 몬스터들의 부산물.
대표적으로 마석이 있다.
근데 언데드 몬스터들은 시체에 마석이 스며들면서 탄생하기에 잡아봐야 빈털터리.
시체에서 쓸 만한 부산물을 찾으려고 해도 삭아버린 뼈나 가죽뿐이니.
마나 밀집도가 더 오르지 않게끔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도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었다.
"부 길드 마스터님."
"공격대는?"
"이제 막 복귀했습니다."
"Great. 안 그래도 소개해줄 사람이 있는데 잘됐네."
"금방 집결시키겠습니다."
점액질이나 먼지가 묻은 장비 그대로 앨리스 킴 앞에 모인 헌터들.
눈가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모두 수고가 많아."
"아닙니다. 부 길드 마스터님."
"내가 여러분들을 도와줄 인원을 하나 섭외했거든?"
앨리스 킴이 유진을 가리켰다.
"코리아에서 온 미스터 천. 클래스는 신관이야."
"성자입니다."
앨리스 킴이 말하는 사이에 유진이 능청스럽게 끼어들었다.
성자.
영어로는 세인트.
길지 않은 단어이지만, 이들에게는 그 영단어에 담긴 무게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앨리스 킴도 놀란 듯이 유진을 흘겨보았다.
'슬슬 밝혀도 되겠지.'
유진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다.
클래스가 성자임을 감춰온 것은 이름값에 휘둘리지 않을까 염려했을 뿐.
이젠 나름대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고.
[성자] 시리즈까지 판매할 예정이니, 직업을 밝히기에는 적절한 시점이다.
"부 길드 마스터님. 외부인이 게이트 공략에 참여하는 겁니까?"
"너희가 못해서 구해온 거잖아."
"...."
[망령의 단말마] 게이트 공략 담당인 제이크가 분한 기색을 삼켰다.
뭐,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리틀 엔젤스는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나름 손에 꼽히는 길드.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당연했다.
"거기 코쟁이. 못 미더우면 테스트 한번 해보든지."
"테스트라고?"
"한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거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뭔 소리인지 알아듣게 말해라."
"직접 보는 게 100번 듣는 것보다 낫다. 그런 거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연금술식 - 강화 회로를 사용합니다.]
길게 늘어난 뼈.
마력을 뼈 안쪽에 빼곡하게 새겨 넣어서 내구력을 강화했다.
흠.
이왕 창법도 익혔겠다.
뼈 대신 제대로 된 무기를 장만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강화 회로와 본 컨트롤로 뼈를 업그레이드해도 매직 아이템 수준밖에 안 되니까.
"덤벼. 상대해주마."
유진은 갑주를 입은 무투계 헌터, 제이크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
게이트 앞을 빙 두른 인원.
리틀 엔젤스에서 나온 사람들은 앨리스 킴의 눈치를 살폈다.
'이러다가 사고 나는 거 아니야?'
'부 길드 마스터가 섭외한 헌터잖아.'
'신관이 왜 지팡이를 들고 무투계한테 붙어보자고 하는 건지 원.'
'구경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길드 관계자들이 눈치를 살피는 것과 달리, 앨리스 킴은 팔짱을 낀 채,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지휘권을 달라는 맹랑한 말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감당할 자신이 있으니 나선 거겠지.'
리틀 엔젤스의 위신은 신예 몇 명 깨진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
앨리스 킴은 도리어 신입 헌터들의 기강을 잡을 기회로 삼을 생각을 했다.
'실력 한번 보여줘. 미스터 천.'
게이트 공격대 팀장인 제이크는 그녀의 침묵을 다르게 해석했다.
'외부인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기강 잡으라는 지시군.'
성자고 뭐고.
팀플레이에서 호흡이 맞지 않으면 더 위험했다.
앨리스 킴의 방조는 자신의 리더십을 테스트할 겸, 게이트 공략 성공을 위한 침묵이리라.
"미스터...?"
"천유진. 성은 천이다."
"아. 미스터 천. 난 힘조절 같은 거 모릅니다."
"그래. 전력으로 덤벼라. 나중에 힘을 조절했네, 어쩌네 하지 말고."
뿌득-.
제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쭈.
이러다 한 대 치겠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거인의 힘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크흐흐흐.
힘이 넘치는군.
유진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자, 제임스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그 알량한 버프의 효과를 믿는 거라면...."
"입만 나불댈 거면 먼저 가지."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5식 - 돌진하기를 사용합니다]
창 끝에 전신의 힘을 실어서 돌진.
유진의 망막 너머로 당혹감에 젖은 제임스의 표정이 비쳐졌다.
'F, FXXX!"
빠르다.
같은 성위의 무투계 헌터조차 내기 힘든 쾌속의 찌르기.
눈동자로 유진의 공격을 쫓았을 때는 이미 창날이 지척까지 도달했다.
쩌엉-!
귓가에 아른거리는 뭉툭한 타격음.
의식적으로 막아낸 게 아니다.
무수한 훈련, 그리고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벼려진 제임스의 본능이 왼팔을 움직였으니.
팔에 달아놓은 방패가 유진의 창을 겨우 막아냈지만.
제임스의 수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2식 - 빠르게 찌르기를 사용합니다.]
'비, 빌어먹을.'
공격을 막아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창에 실린 힘을 흘려내기는커녕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낸 팃에 호흡과 자세가 무너졌고.
뒤이어 쏟아지는 날카로운 찌르기에 반격할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팀장. 제대로 하십쇼."
"상대가 무투계 아니라고 너무 쉬엄쉬엄 하는 거 아닙니까?"
제임스의 속도 모르고 야유를 보내는 팀원들.
욕이 목구멍 근처에 아른거렸지만 내뱉을 수는 없었다.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유진은 창을 휘두르면서도 입을 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삼중 버프로 강화된 육신.
[거인의 힘] 때문에 창을 내지를 때마다 체력이 두 배로 소모되었지만, 라이프 드레인으로 착실하게 올려놓아서 버틸 만했다.
'파프너한테 처맞던 거 생각하면 애교야.'
제임스의 아이템 셋은 검과 방패를 든 전형적인 밸런스 타입이다.
공방 밸런스가 좋다는 건 뭐야.
반대로 말하면 특출 나는 포인트가 없다는 거지.
한 번 적의 페이스에 휘말리면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실드 월]
방패를 물들이는 강렬한 푸른빛.
창을 잡고 있던 손목이 시큰거리고, 강한 반발력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공격 템포를 늦췄다.
몰아치는 유진의 공세를 겨우 받아내며 준비한 스킬.
"이대로 질 것 같으냐!"
제임스는 새빨개진 얼굴로 흡사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볼링 배시]
충격을 연속으로 일으키는 타격기.
검에 실린 마력이 유진한테 몰아치려는 순간.
우윳빛 성력으로 이루어진 방벽이 창대 위에 덧씌워지면서 제임스의 검격을 받아냈다.
쩌적-.
일격에 부서지는 신성 결계.
제임스는 웃지 못했다.
검을 쥔 손을 타고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반탄력.
연이어 충격을 전달해야 할 [볼링 배시]의 물리력이 사용자에게로 되돌아온 것이다.
[부정 충격 방패를 사용합니다.]
근접공격을 막아내면 피해 일부를 적에게 되돌려주는 신성 주문.
유진은 충돌 직전에 맞춰 성력을 전개했고.
검에 축적된 볼링 배시의 연타 피해가 고스란히 제임스를 덮쳤다.
비명조차 못 지르고 자신의 힘에 버티는 제임스.
휘익-.
창날이 목을 겨누는 순간에도 두 눈을 부릅 뜬 채 충격을 해소할 뿐.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짝짝!
"엑설런트. 훌륭했어요. 미스터 천."
"아직 몸이 덜 풀렸는데. 아쉽게 됐네요."
앨리스 킴의 칭찬에도 유진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제임스가 더 버텨줘야 실력 차이를 확실하게 인지시킬 수 있었는데.
너무 쉽게 이겨버리니 운이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야매로 오러를 사용할까도 했는데 헛된 고민이었잖아.'
-작은 인간을 상대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였구나.
'허 참. 장미선급은 되어야지.'
캘리포니아에서 잘 나가는 길드라면서요.
수질 관리 좀 하셔야겠어.
보아하니 앨리스 킴 말고는 대련의 흐름을 읽어낸 헌터도 없는 것 같고 말이야.
"부 길드 마스터. 방금 전 결과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술수를 쓴 게 분명합니다."
거 봐.
이해를 못하면 꼭 저렇게 나선다니까.
사술 타령이라도 안 해서 다행인가.
앨리스 킴은 항의하는 팀원들에게 어떤 식으로 페널티를 줘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소환수까지 꺼내는 조건으로 9대1은 어떻습니까?"
"음. 정말이지. 파격적이군요."
"팀원들을 납득시키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군요."
유진의 뼈 있는 말에 앨리스 킴이 속으로 혀를 찼다.
햇병아리들이 자존심을 내세운 탓에 의뢰 비용이 늘어난 것을 직감한 것이다.
"좋아요. 그럼 둘로 늘리죠."
"후회 안 하실 겁니다."
능글맞게 웃는 유진.
혹시.
처음부터 길드 신입들이 반발할 것을 생각해서 여기까지 판을 짠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앨리스 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야. 일할 시간이다."
흑암의 반지에서 튀어 나온 스켈레톤 나이트.
송명석이 뿜어내는 흉흉한 살의를 마주하자, 리틀 엔젤스 신입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주군. 모두 죽이면 됩니까?]
"대련이거든. 살수 펼치면 너도 죽는다."
[시시해서 죽고 싶군요.]
"능력치 제한은 안 걸 테니 마음껏 날뛰어봐라."
[정말입니까?]
"내가 거짓말 하는 거 봤냐."
[속하가 보기에는 거짓을 별빛처럼 뿌리시는 것 같습니다만.]
"닥쳐."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 은 말이지.
사실의 일부만 말한 경우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잖아.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유진과 송명석.
그들은 리틀 엔젤스 신입들 따윈 이미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우리 X 된 건가?'
'God Damm! 이게 뭐냐고!'
단순히 숫자로만 보면 9대 2.
질 수 없는 싸움이지만 너무나도 태연한 유진의 모습에 등골이 오싹했다.
심리전부터 지고 들어가는 싸움.
리틀 엔젤스 신입들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춘 채 대련을 둔비했다.
무투 2, 마법 3, 신관 4.
언데드가 주력인 게이트를 공략하느라 신관 계에 치중된 인원 배치.
유진의 소환수가 스켈레톤 나이트인 만큼, 신관들이 많으니 유리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
대련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Let's Rock!"
앨리스 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리틀 엔젤스 신입들은 그 판단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광뇌보]
제임스와 또 다른 무투계 헌터를 가볍게 따돌린 송명석이 팀 한가운데로 파고들었고.
역날로 쥔 쌍검을 휘두르자 마법계 헌터 둘이 무력화되었다.
[홀드 퍼슨]
[홀리 라이트]
[디바인 실드]
....
한 발 늦게 펼쳐진 신성 주문이 쇄도했다.
스켈레톤 나이트의 전신을 감싼 성력의 파도.
"해치웠나?"
"타격은 받았을 거다."
"놈의 발이 묶였을 때를 놓치지 말..."
스스스슷-!
흑색 기류가 백색 광휘를 시커멓게 물들이고는 이내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다.
갑주에서 솟구치는 암흑 투기.
[이야. 생각보다 재미있군요. 시시하다는 말은 취소입니다.]
망자는 신성 주문에 약하다.
이 대전제에서 송명석도 자유롭진 못했다.
[그 덕에 암흑 투기를 갑주에 투영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천골.
하늘이 내려준 체질답게 암흑 투기 응용능력도 남달랐다.
막 떠오른 영감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현하는 천재성.
파프너를 보는 것 같네.
"오, 오러라니."
"반칙이잖아. 이건 불공평해."
[당신 목을 노리는 적에게도 똑같이 말해보시죠.]
벽을 넘어선 송명석.
상대가 9명이라고 해도,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다.
"다들 납득했나?"
유진의 대답에 굴욕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리틀 엔젤스 공격대.
그 모습을 본 앨리스 킴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적당히 기를 눌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유진의 무력 때문에 신입들이 예상보다 큰 좌절을 맛보았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 마음을 아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건지.
천연덕스러운 말과 함께 공격대가 푸른 균열 안으로 들어갔고.
리틀 엔젤스가 1달 동안 골머리를 앓았던 애물단지 게이트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자취를 감추었다.
94화 고대의 시험장Ⅱ(1)
게이트 공략 보상은 별것 없었다.
C급 마석.
[망령의 단말마]의 핵과 동기화된 보스 몬스터는 유령 계열이라서 시체도 건질 게 없었다.
'오우거를 사냥하면 최소 C급이 나오는데 말이야.'
〔크하핫. 그대답지 않구나. 수지타산에 안 맞는 일이라니.〕
'진짜 보상은 따로 있잖아. 그걸로 만족해야지.'
앨리스 킴은 게이트 폐쇄 소식에 앓던 이가 빠진 표정을 지었다.
"Perfect. 완벽하군요. 미스터 천."
"제가 좀 대단해서 말이죠."
"동양인은 겸손이 미덕 아니던가요?"
홀로 공략 가능한 게이트를 9명이나 데리고 가줬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겸손한 것 아닌가?
회귀하고 나서 팔자에도 없는 겸손을 떨었는데 못 알아봐주는군.
리틀 엔젤스 공격대는 게이트에 들어간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들에게 일을 시킬 필요가 없었다.
[시시하군요. 고작 이따위 언데드에게 고전하다니.]
쌍검을 쥔 스켈레톤 나이트는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언데드들을 썰어버렸고.
헌터들의 신경을 자극했던 악령들은 [부정 충격 방패]를 넘지 못했다.
앨리스 킴도 공격대의 차후 보고서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은 이미 알고 있는 상황.
'연금술에도 조예가 있으면서 전투 감각까지 뛰어나다니.'
가공도 안 한 원석이 이렇게나 빛을 발하다니.
보석으로 치면 다이아몬드.
그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다고 알려진 핑크 다이아몬드 수준의 재능이 아닐까.
'우리 길드로 끌어들일 순 없겠지.'
주 활동무대가 태평양 반대쪽이니 포섭은 불가능했다.
앨리스 킴은 아쉬움에 쩝- 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배고프세요?"
"숙녀한테 실례되는 말이네요."
"갑자기 입맛 다시길래."
"흠, 어쨌든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길드 창고를 개방해드리죠."
"유니크급 두 개 맞습니까?"
"맞아요."
리틀 엔젤스의 아이템 창고는 학교 강당을 연상시킬 만큼 컸다.
"원하는 걸로 가져가시죠."
도, 검, 창 같은 근접 병기부터.
지팡이나 보주처럼 마법계 헌터의 장비는 물론이요.
반지, 혹은 목걸이처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보조 무장까지.
캘리포니아 주에서 잘 나간다는 게 헛소문은 아닌지 창고에 쟁여둔 아이템들의 종류와 수준 모두 준수했다.
〔무엇을 챙기려느냐?〕
'우선 창 한 자루 구하려고.'
나열되어 있는 창들을 한 번씩 들어서 휘두르거나 찔러보고.
아이템 설명도 빼지 않고 정독했다.
"이 녀석으로 하겠습니다."
[유니콘 뿔 창]
등급 : 유니크
분류 : 창
제한 : 창법 스킬 숙련도 75% 이상.
내구도 : 1,000/1,000
전설의 동물 유니콘의 뿔을 날 삼고 천년목의 가지에 동일한 홈을 파서 만든 창입니다.
마력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보유했으며 찌르기를 하면 창의 위력이 증대됩니다.
*마력 증폭 Lv67
*찌르기 Lv71
"그 무기보단 옆에 있는 저주받은 흑기사의 창이 낫지 않나요?"
"괜찮은 물건이죠. 휘두르거나 내지를 때마다 저주를 유발하긴 해도."
"미스터 천처럼 성력을 다루는 헌터는 저주를 받지 않으니까요. 딱 맞을 텐데."
"친절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한테는 이 녀석이 더 잘 맞을 것 같군요."
저주받은 흑기사의 창.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던 무기다.
피격 대상에게 저주를 불어넣을 뿐더러, 창의 예리함과 파괴력도 유니콘의 뿔 창보다 한 수 위.
영력과도 궁합이 잘 맞아서 암흑 투기 발현 시 위력 증폭 옵션까지.
〔하면 왜 그 창을 고르지 않았느냐?〕
'유니콘 뿔 창에는 숨겨진 옵션이 하나 있거든.
마력 증폭 옵션은 창날 역할을 하는 유니콘의 뿔에 파여 있는 나선 형태의 홈에서 기인한 것이다.
베르디안 식 기본창법을 극한까지 익혔을 때.
숨겨진 비의 [데스 스파이럴]을 습득할 수 있는데 그 요체가 마력 회전이란 거지.
〔미래를 위한 투자란 말이로구나.〕
"뭐, 그렇지."
〔한데 너무 빠르지 않느냐? 데스 스파이럴은 창귀란 자의 비기. 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닐 터.〕
크로노스의 지적은 타당했다.
데스 스파이럴을 습득하려면 베르디안 식 기본창법의 숙련도를 최대로 올려야 했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저주받은 흑기사의 창을 다루려면 암흑 관련 특성이 있어야 해.'
한 마디로 조건 미달이다.
유니콘 뿔 창은 그나마 '종류 불문'하고 창법의 숙련도만 올리면 되지만.
다른 창들은 무투계 관련 스킬이나 특성, 아니면 성위를 따지니 사용 제한을 충족시키기가 어려웠다.
'암흑 관련 특성이야 마음만 먹으면 흑암의 반지로 꼼수를 부리면 대체할 수 있어.'
그래도 말이야.
번거롭게 그 녀석을 쓸 바에는 미래를 준비할 겸.
페널티 없이 다룰 수 있는 유니콘 뿔 창이 훨씬 나은 선택지다.
〔하나가 남았구나.〕
'이미 뭘 고를지 결정했다.'
[페이디피데스의 목걸이]
등급 : 유니크
분류 : 목걸이
내구도 : 150/150
마라톤 전쟁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뛰었던 전령, 페이디피네스를 기리는 목걸이입니다.
지구력을 더해주며 사용자의 체력을 보충해주는 축복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체력 + 50
*지구력 Lv35
*[마라톤의 정신] 스킬 내장
[마라톤의 정신]
소진된 체력과 정신력을 최대 수치로 회복시켜줍니다.
부상이나 저주로 인해 소모된 부분까지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소모된 체력을 곧바로 최대치까지 회복시켜주는 버프.
꽤 좋아 보이지만, 허점이 있다.
부상에 의한 체력소모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아이템의 등급이 유니크로 책정된 이유다.
'나한텐 좀 다르지.'
생기 / 마력 / 체력 등을 마음대로 치환할 수 있는 스킬.
라이프 드레인이 유진에겐 있다.
〔짐이 그 주문을 부여했을 때만 해도 이런 식의 활용법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상상력이 빈곤하네.'
[마라톤의 정신]은 유진에게 있어 최고의 회복 스킬인 셈.
아.
참으려고 해도 웃음이 나오네.
유진이 킬킬거리자, 앨리스 킴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
다음 날.
유진은 호텔 라운지에서 뽀시래기 팀을 마주쳤다.
"다들 신수가 훤하네?"
"와. 형. 베벌리힐즈라고 들어봤어요? 엄청 눈호강 하고 왔어."
"그놈의 아이 쇼핑이 뭔지."
"저는 빼고 가주시지 말임다. 사지도 않으면서 뭘 그리 봄까."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강민영.
다른 일행은 피곤함이 섞인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베벌리힐즈는 미국 유명 배우나 부자들이 사는 곳. 그러니까 서울로 치면 청담동 같은 지역이다.
돈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명품 매장이나 백화점들도 다수 자리를 잡았으니.
강민영이 일행을 이끌고 베벌리힐즈에서 아이쇼핑을 실컷 한 모양이다.
"왜. 그래도 매끼 잘 먹고 다녔잖아."
"그거야 제가 알아본 거 아님까."
"까다롭게 구네. 임 이사 아저씨는 괜찮았죠?"
"저야 뭐."
글쎄.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베벌리힐즈만 간 거냐?"
"헐리우드도 구경하고 왔죠. 설마 명품 구경만 했겠어요."
"제대로 돌려면 하루 가지곤 모자라니까."
"왠지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빠르게 보고 왔어요."
강민영은 신난 기색으로 말했다.
오.
감이 좋군.
유진은 무의식 중에 진실을 유추해버린 강민영의 날카로운(?) 감에 탄성이 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다들 도박 좋아하나?"
그러면 떡밥을 던져볼까.
"...!"
"라스베이거스...?!"
"진짜임까?"
화들짝 놀라는 일행.
유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피로감으로 물들었던 일행(강민영을 뺀)의 안면에서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도박 하면 카지노, 카지노 하면 라스베이거스!
캘리포니아 바로 옆에 있기도 하니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들 아침 든든히 먹어둬라."
"알겠습니다. 형님."
조식을 챙겨먹은 후 곧바로 체크 아웃.
리틀 엔젤스에서 제공한 차량을 타고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여기서 레버 하나만 잘 당겨도 인생 역전이잖아."
"그런 마음으로 갔다가 집문서까지 날리면 어떻게 하려고."
"오빠는 라스베이거스 가면서도 잔소리야?"
"너무 몰입하지 말란 거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는 미래의 거울사냥꾼.
"군대에서 벼려진 백전연마의 포커 실력. 확실하게 보여드리겠슴다."
이성민은 살짝 흥분한 듯 기대 섞인 눈빛으로 라스베이거스 시내를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냐.
라스베이거스에 간다곤 했지.
카지노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말이야.
"형. 근데 왜 시가지에서 멀어져요?"
"목적지는 라스베이거스 남쪽에 있는 게이트다."
순간 차 내부의 온도가 5도 정도 떨어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게에에에이트??"
"허허허허. 저희 라스베이거스 와서 게이트 들어감까?"
"어쩐지. 형님이 놀러가자고 하셨을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강민영은 눈에서 불길을 내뿜으며 금방이라도 유진의 머리카락을 뽑아버릴 기세였고.
이성민 역시 실성한 듯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고.
강민호도 쓴웃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다. 나중에 고맙다고 할걸.'
〔한데 이번 외국행은 무엇을 노리고 온 게냐?〕
'아. 설명을 안 해줬구나. 혹시 고대의 정원 기억하나.'
〔시험에서 적을 쓰러트리고 대전사의 육신을 구했던 곳 말이로구나.〕
'이번 게이트는 그 연장선이다.'
고대의 시험장.
전 세계의 고정형 게이트 중 일부에 숨겨진 시련의 장.
라스베이거스 인근에 생성된 게이트, [영광의 전장]에는 만신전에서 준비한 [고대의 시험장Ⅱ]가 숨겨져 있다.
〔그렇게나 중요한 곳이라면 다른 길드에서 그대를 통과시켜주지 않을 것 같다만.〕
'현 시간대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
〔그대만이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이란 말이로구나.〕
'새삼스럽기는.'
이러는 거 하루 이틀 보셨수?
아예 작정하고 미래 지식 활용하랍시고 자기 성유물까지 고쳐 준 양반이 모르는 척하네.
라스베이거스 외각의 게이트 앞에 멈춰 선 차량.
[영광의 전장]
[유형 - 고정 타입]
[출입 조건 : 3성]
[게이트 면적 : 중]
[마나 밀집도 : 61%]
"다들 준비해라."
"와. 진짜 게이트네. 하, 하핫."
무장을 갖춘 일행의 등을 떠밀면서 게이트에 입장했다.
강한 빛과 함께 확 바뀌는 풍경.
근 현대의 구조물처럼 보이는 도시가 눈앞에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는 강민호.
"게이트 이름이 전장이라고 해서 탁 트인 벌판인 줄 알았습니다."
"시가지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하더라."
게이트의 '설정'은 종종 다른 차원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삼기도 한다.
이 도시를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는 뜻.
게이트 학자들은 구조물의 양식이나 기록 등을 연구해서 다른 차원의 역사를 추정하기도 했다.
〔저번처럼 심장을 뽑아야 하는 게냐?〕
'아니. 이 게이트에 숨겨진 조건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주위를 둘러본 유진은 전장이 된 시가지를 태연하게 거닐었다.
"형님. 제가 앞서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한 몸 건사할 정도는 된다."
아무렴.
리틀 엔젤스의 신입인가 하는 친구들도 가볍게 꺾었는걸.
골목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으로 가볍게 제압했다.
얼마 정도를 돌아다녔을까.
"저 탑. 시가지에서 제일 높아 보이지?"
"그렇게 보이네요."
"시야 확보도 할 겸 올라가 보자."
거침없이 올라가는 유진.
일행은 서로를 돌아보곤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뒤를 따랐다.
'형님도 참. 갑자기 게이트 공략이라니.'
'아. 형. 너무하잖아.'
'그런데 처음 온 거 치고는 너무 과감하지 않슴까.'
'천 대표님 나름의 계획이 있어 보이는군.'
각자 생각을 마음 속에 품은 채 탑 위로 올라온 일행.
유진의 말대로 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는지, 꽤 넓어 보이는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영광의 전장에 숨겨진 비밀을 풀었습니다.]
[고대의 시험장Ⅱ로 이동합니다.]
"혀, 형님???"
강민호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새하얀 섬광이 탑 정상에 내리꽂혔고.
탑 옥상에서는 더 이상 유진 일행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95화 고대의 시험장Ⅱ(2)
[자격을 확인합니다.]
[시험장에 들어온 인원은 모두 고대의 시험장Ⅰ을 통과했습니다.]
[다음 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형님. 고대의 시험장이면 그, 명동의 게이트에 숨겨져 있던 거 아닙니까?"
"어. 맞아."
"시험이 이어질 줄은."
"그러니까 앞에 1이라는 숫자가 붙은 거지."
유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만신전의 성좌들이 뛰어난 헌터를 골라낼 요량으로 숨겨둔 시험.
통과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난이도가 높지만, 보상이 원체 파격적이다 보니 대형 길드들이 출입을 통제할 만큼 인기가 높다.
[고대의 시험장Ⅰ]의 소재지가 밝혀진 프랑스의 게이트도 소수의 인원들만 이용할 수 있게 제약을 걸어놨으니.
"의뢰 보상으로 들으셨나 보군요."
강민호는 정보의 출처를 멋대로 추론한 후, 납득했다.
미래의 지식보다는 그게 더 설득력 있겠지?
유진은 침묵함으로써 강민호의 의견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형. 이래서 어디 가는지 말 안 해준 거야, 요?"
"고대의 시험장 출입 조건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너희도 입단속 해둬."
"알겠슴다!"
[영광의 전장]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에 도달하는 것.
프로그맨의 심장을 모은 후, 고블린 주술사의 피를 묻혀서 정해진 위치에 놓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조건이다.
그럼에도.
이 게이트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또다른 출입제한 때문이었다.
"여기는 고대의 시험장을 통과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거든."
"혹시 여행 가자고 한 게 이거 때문은 아니죠. 형?"
"동생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럼 게이트의 비밀을 출발 전부터 알고 계셨단 거잖아."
음.
쓸데없이 예리하긴.
유진은 민감한 화제에 더 불을 붙이는 대신, 앞을 바라봤다.
"긴장해라.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으니."
철컥- 철컥-.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
쭉 뻗은 통로가 크게 들썩이더니 여기저기가 갈라지면서 인간 크기의 석상들을 토해냈다.
[전사의 석상]
"그, 저. 형."
"석상은 언데드로 못 일으킨다."
"제가 뭐 물어볼지 어떻게 알았어요?"
"뻔하잖아."
통로를 가득 메운 전사의 석상.
얼핏 봐도 수백 기는 되어 보인다.
눈동자를 조각해놓은 부위에서 솟구치는 붉은 안광.
오싹한 느낌에 강민영이 자신의 팔뚝을 무의식적으로 쓸어내렸다.
[고대의 시험장Ⅱ에 입장한 것을 환영합니다.]
[이 시험은 최대 5인이 치를 수 있습니다.]
[통로의 끝까지 도달하십시오.]
[도전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뒤에 있는 문을 여십시오.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이면 물러날 수 있다."
"형님. 진심도 아닌 말씀 해봐야 설득력 없습니다."
"티 났냐?"
"그럴 거면 처음부터 저희를 데려오지도 않으셨을 거잖아요."
정답이다.
유진은 히죽 웃었다.
"형 오더 따를게."
"주문서는 그리스랑 디그, 그리고 아이스 필드 챙겨왔슴다."
장비 점검 및 싸울 준비를 하는 뽀시래기 팀.
유진도 성력을 전개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거인의 힘을 사용합니다.]
뽀시래기 팀에게는 [부정한 축복]을 제외한 버프를 걸어주었고.
흑암의 반지에서 불러낸 송명석한테는 거인의 힘을 뺀 나머지 신성 주문을 사용했다.
[연금술식]
[골렘 연성을 사용합니다.]
촉매에 압축해놓은 붉은 괴수. 블러드 골렘까지 소환했으니.
적을 맞이할 준비는 끝났다.
"강민영과 이성민이 후위. 나머지는 전위를 맡는다."
"형은요?"
"양쪽 다."
축구로 치자면 미드필더 포지션.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와 야매로 사용할 수 있는 오러면 어지간한 3성 무투계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고.
마법 무장 [저주받은 이빨]로 중거리 견제도 가능했으며.
치유와 결계까지 능수능란하게 사용 가능한 인재가 바로 자신이다.
이야.
지닌 능력이 많은 것도 피곤한 일이야.
"맞는 말이지만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형님한테 실례 저지르지 마라."
"그런데 선배 말, 좀 공감되지 않슴까."
이 놈들.
사람 구실은 할 수 있게 만들어줬더니 못하는 말이 없어요.
〔짐이 보기에도 그렇구나.〕
'필멸자들 다툼에 성좌는 끼지 마시지?'
〔교만은 누구나 경계해야 하는 것. 그대도 잊지 말아라.〕
'난 담백하게 사실만 말하는 거다.'
〔아까 겸손 타령했던 작은 인간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빌어먹을.
그 말을 이렇게 돌려주네.
유진은 쳇,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침입자. 발견.」
「목표. 저지한다.」
행동을 개시하는 석상들.
저주받은 이빨 하나가 영력을 휘감은 채로 쏘아졌다.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콰직-.
[전사의 석상]의 머리에 푹 박힌 저주받은 이빨.
붉은 안광이 사그라지나 했더니, 놈은 마법 무장이 박힌 채로 달려들었다.
"왜 머리를 노렸는데도 안 죽는 겁니까?"
"생명체가 아니잖아."
영력을 흑마력으로 치환, 시커먼 창을 구현하고는 머리에 뼈로 만든 송곳을 달아둔 석상의 가슴팍을 향해 던졌다.
쿵- 연이은 타격에 힘이 다한 석상이 고꾸라지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다.
"형. 그거 핵을 맞춘 거야?"
"석상은 골렘처럼 핵이 없다. 대신... 몸을 구성하는 마력이 떨어지면 저렇게 돼."
"그러니까 충격을 줘서 마력을 소모시키면 됨까?"
"이해가 빨라서 좋군."
게임으로 치면 HP가 있는 셈.
일정 이상 충격을 누적시키면 석상의 힘이 다해 쓰러진다.
"화력을 얼마나 투사할 수 있냐, 그게 관건이군요."
강민호는 [고대의 시험장Ⅱ]의 핵심을 빠르게 짚어냈다.
"맞아. 지속력도 고려해야지."
"형님의 지휘만 믿겠습니다."
"오냐."
1성 때부터 기저귀 갈아주며 키워준 보람이 있단 말이야.
유진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석상들을 직시하며 하나씩 지시를 내렸다.
*
네바다주에 위치한 게이트, 영광의 전장.
그 안에 감추어진 시험장에 올빼미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채앵! 챙!
금속끼리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마찰음이 통로에 울리고.
땀과 가루, 그리고 핏방울이 튀는 격렬한 전장 한가운데에서 그 누구도 올빼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전장을 굽어봅니다.〕
'고대의 시험장Ⅱ'에 방문한 것은 유진 일행만이 아니다.
프랑스에도 '고대의 시험장Ⅰ'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게이트가 있듯.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 위치한 [아르마투스 콜로세움]에서도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고대의 시험장Ⅱ'에 입장이 가능했다.
그러니.
라스베이거스의 게이트를 통해 시험을 치르는 유진 일행이 특별한 것은 아니라는 뜻.
'이 아이들. 제법이잖아.'
아테나.
올림포스 성단에서 지혜를 관장하는 성좌는 유진 일행을 관찰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블러드 골렘 3보 전진. 나머지 전위는 2보 후퇴."
[존명.]
"이성민은 그리스와 아이스 필드 전개. 직후 파이어 볼트 준비."
"넵!"
"강민영. 5초 후에 4시 방향으로 일제사격. 정확하게 맞추려고 할 필요 없다."
"알겠어요. 형!"
긴 통로를 가득 채운 [전사의 석상].
유진 일행은 끊임없이 몰려오는 석상 군대를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 아이의 지휘 덕분이야.'
아테나가 공식적으로 관장하는 영역은 지혜이지만, 전쟁과 전법에도 뛰어났다.
같은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인 아레스가 '전쟁'을 관장하기에 그 능력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렇기에.
유진의 지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눈에 전장의 흐름을 읽어내고 적절한 판단을 내린다.'
시대를 풍미한 명장에게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노련함.
고작 20대에 불과한 유진한테서 백전노장 같은 여유가 느껴지는 건 기묘했지만, 그 부분 말고는 흠잡을 데가 아무 데도 없었다.
'팀워크도 훌륭해.'
유진의 지시를 받는 뽀시래기 팀원들도 대단했다.
마치 한 몸인 것마냥 유진의 지시를 받자마자 의도에 부합하는 행동을 취했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빨랐으면.
혹은 유진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면.
순식간에 진열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연속된다면, 더 이상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지.'
아군의 기량과 적의 수준을 완벽하게 계산한 지휘능력.
또한.
유진을 100% 신뢰하고 지시에 따르는 뽀시래기 팀원들의 움직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었다.
'3성치고 뛰어난 이들이야 많이 보았지만, 이런 조합은 처음이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당장이라도 필멸자들을 후원해주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네 명 모두 탐이 나는 인재지만.
그중에서 제일 욕심이 나는 것은 유진이었다.
아테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신력을 추가로 불어넣어서 유진을 자세히 관찰했다.
'뭐야. 이 불쾌한 기운, 순리를 벗어난 힘을 다루잖아.'
쯧-.
혀를 찬 아테나는 곧바로 유진에 대한 마음을 거두었다.
영력을 기반으로 한 능력, 강령술을 익힌 존재는 후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만신전에 이름을 올린 성좌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암묵적인 규칙.
'근데 성력도 느껴지잖아. 이 아이.'
아테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순리를 벗어난 힘, 그러니까 네크로맨서인데 신관을 겸하고 있다?
불가능했다.
마법계 헌터가 신관을 겸하는 일이 드물게 있긴 해도.
네크로맨서를 신도로 받아주는 성좌는 만신전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바벨탑 쪽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아테나는 더 이상 유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못 먹을 감에 욕심을 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방패를 능숙하게 다루는 헌터, 강민호를 후원하는 편이 나았다.
'이 아이에게는 내 가호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려줄 재능이 있다.'
아이기스.
수호의 개념을 부여하는 아테나의 가호다.
[이동요새] 특성을 보유한 강민호가 '아이기스'를 부여받게 되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시험을 지켜보고 있는 성좌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서둘러야겠어.'
아테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후, 유진 일행이 [고대의 시험장Ⅱ]를 통과하기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
[고대의 시험장Ⅱ을 통과했습니다.]
통로 끝에 도달한 일행.
몇 시간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몰려드는 석상들을 부수며 나아갔다.
"헤엑, 헥."
"진짜로 뒈지는 줄 알았슴다."
"혀, 형. 이런 여행은 두 번 하고 싶지 않아요."
녹초가 된 뽀시래기 팀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신성 주문으로 최대한 보조했음에도.
일행의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달했을 만큼 격렬한 싸움이었다.
「전투능력 63% 저하.」
[방심한 것뿐입니다. 주군. 다음에는 이렇게 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가장 선두를 맡았던 블러드 골렘은 피를 과도하게 소모한 탓에 덩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송명석은 아예 하반신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다섯 명을 권장할 만했네.'
아슬아슬했다.
블러드 골렘과 송명석까지 있었는데도, 생각 이상으로 전력소모가 컸다.
〔어떻게든 시험을 통과하기는 하였구나.〕
'만족스러우셨나 봐.'
〔크하핫. 짐의 감정을 읽었느냐?〕
'또 그놈의 영웅 어쩌고 하면서 팝콘 잡수셨겠지.'
크로노스를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지는 안 봐도 VOD였다.
[용맹의 문장이 새겨집니다.]
◎용맹의 문장
분류 : 문장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의 상태와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하게 해줍니다.
*근력, 체력, 마력 10% 증가.
*정신간섭 저항력 30% 증가.
인내에 이어 두 번째로 획득한 문장의 이름은 '용맹.'
무려 스탯 셋을 조건 없이 10% 늘려주고.
저항력을 올리기가 까다로운 정신 관련 부분도 대폭 상승시켜주었다.
'나한텐 크게 필요 없는 옵션이지만 말이야.'
유진은 쓴웃음을 삼켰다.
고유 특성 [클리어 마인드]는 모든 정신간섭을 배제하는 능력.
스탯이 늘어나는 걸로 만족해야했다.
[위계를 몇 단계나 뛰어넘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의 설화에 한 자락이 추가됩니다.]
[당신이 섬기는 위대한 존재의 격이 상승합니다.]
〔크하하핫! 훌륭하구나. 아주 잘해주었다!〕
호탕한 웃음과 함께 크로노스가 만족감을 드러냈다.
여기까진 계산대로군.
"저, 형님."
"성좌들이 후원하겠다고 메시지라도 보내냐."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후원할 만한 헌터를 찾으려고 만든 게 고대의 시험장이다."
"아하. 그렇다면 형님도 성좌님들의 메시지를 엄청 받으시겠군요."
"난 이미 배후성이 있잖아."
강민호야.
성자 타이틀 달고 있는 사람한테 감히 후원하려는 성좌가 있겠니.
'네크로맨서'를 겸하는 직업이라서 성좌들이 관심조차 가지지도 않겠지만 말이야.
유진의 목적은 처음부터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크로노스의 격을 상승시키는 데 있었다.
"너희 둘도 마찬가지냐?"
"맞아요. 형."
"제가 성좌님들한테 이렇게나 사랑을 받을 줄은 몰랐슴다!"
유진은 뽀시래기 팀원들에게 후원 메시지를 보내는 성좌들의 신명을 모두 들었다.
"둘은 후원 받지 마라."
"왜임까?"
"너희 능력이랑 잘 맞는 성좌가 없어."
무수한 헌터들이 목표로 하는 배후성 계약.
욕심 날 법도 했지만, 두 사람은 유진의 조언에 곧바로 마음을 내려놓았다.
"형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알았어요."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 말임다?"
유진은 빙그레 웃은 후, 강민호를 바라보았다.
"형님. 그럼 전...."
"미네르바의 올빼미랑 계약해."
"실례지만 그 성좌님의 진명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테나."
회귀 전에도 강민호의 배후성이 되어준 성좌.
검증된 조합인 데다, 아테나는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인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성좌다.
생각보다 미끼를 빨리 물어주니 고마울 지경이군.
"아, 아, 아테나라고요?!!!!"
한발 늦게 현실을 인식한 강민호가 화들짝 놀라며 경악 섞인 비명을 질렀다.
96화 추적자(1)
유진 일행이 미국에서 관광(?)을 즐기고 있을 때.
백성현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를 차분하게 읽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저희도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교차검증을 마쳤는데도 모두 사실이란 말입니까?"
"예. 부사장님."
백성현은 새로 장만한 의자에 손을 올린 채, 팔걸이를 두드렸다.
툭- 툭-.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소리.
보고서를 올린 비서가 긴장한 표정으로 백성현의 안색을 살폈다.
얼마쯤 지났을까.
길게 한숨을 내뱉은 백성현이 보고서를 흘겨보았다.
천유진 조사 보고서
◎나이 - 24
◎각성 일자 - 3개월 전
◎고유 특성 - 미확인
◎첫 목격 장소 - 고대의 정원
◎능력 계통 - 신관계, 마법계 하이브리드 직업군으로 추정 중.
◇근거
① 잊힌 신전과 고대의 정원에서 천유진이 언데드를 다루었다는 목격자의 발언.
② 송명석을 포함, 이중 게이트 공략에 투입된 길드원들의 시신에서 이질적인 마력의 흔적이 발견됨.
③....
◎각성 후 행적
시간 순으로 나열이 아닌, 확인된 부분 위주로 기재하였음.
-그라운드 제로에서 붉은 거미를 몰아내고 사업체들을 차지한 것을 확인.
-성천 그룹, 대한 제약과 모종의 관계 유지.
-동업자인 신준석과 협업해서 양산형 중급 포션 상용화 및 새 의약품 프로모션 진행 중.
-의약품 종류 및 효과는 추가 확인이 필요함
-불사조 길드의 장미선(차기 검성)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것으로 보임.
-한국 암흑가 및 의뢰 업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은하수 펍과 가까운 사이.
◎위험도
-각성 기간을 고려하면 현재 성위는 3성으로 추정됨.
-성좌에게 하사 받은 소환수는 5성 절정의 전투력을 지닌 것으로 확인.
-뽀시래기 팀원들의 위계도 3성. 천유진과 비교하면 위험도가 턱없이 낮음.
-다른 언데드 소환수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함.
-블랙허브 농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 중임. 관련 정보는 추가 조사 중.
....
(중략)
"각성 3개월 된 헌터가 붉은 거미의 전력을 반이나 깎아먹었다, 라."
그라운드 제로의 삼강 중 하나.
붉은 거미는 이북 지역 쪽 밀수 루트와 블랙허브 공급, 그리고 여러 사업체들을 쥐고 있는 조직이었다.
암중에서 나찰 길드를 키워낸 백성현.
모를 수 없는 이름이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이 사실이 왜 알려지지 않은 겁니까?"
"은하수 펍에서 정보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허. 귀찮은 짓을 벌였군요."
국내 1위 길드인 아라한조차, 마담이 수작을 부린 탓에 유진에 관한 정보를 제때 취득하지 못했다.
유진이 붉은 거미의 전력 중 반을 날렸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대구 이중 게이트 사태를 일으켰을 때 함정을 더욱 철저하게 팠을 것이다.
"접경지역 관련 자료가 모자라군요."
"확인 중입니다. 조금만 더 시간과 예산을 주신다면...."
"변명은 죄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붉은 거미와의 싸움에서 천유진이 무슨 수를 썼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각성 3개월 차 헌터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조직.
유진이 숨겨놓은 패를 확인해야, 아라한 길드도 다음 행동에 나설 수 있다.
'다음이란 없습니다.'
살기로 물드는 백성현의 눈동자.
아라한에서 물심양면으로 투자했던 인재, 송명석이 허무하게 죽었고.
가문 설립을 위해 비밀리에 로마노프 가문과 접촉했던 것도 흐지부지됐다.
그뿐이랴.
이중 게이트 사태나 공동 공략 등, 유진과 엮이기만 하면 아라한의 명예가 땅으로 처박히기 일쑤였으니.
'박하늘, 그자가 생각나는군요.'
부르르-.
새로 장만한 의자의 팔걸이가 초당 수십 번씩 흔들렸다.
비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또 부서지는 건 아니겠지?'
엔트의 나뭇가지에 강화 회로를 5중첩으로 새겨서 만든 백성현 전용 의자.
그럼에도.
7성 헌터가 작정하고 힘을 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날 게 분명했으니.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가, 비서는 목덜미가 뻐근함을 느꼈다.
"접경지역은 언제쯤 조사가 끝날 것 같습니까?"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저녁까지 마무리하세요."
"알겠습니다."
덜컥-.
커다란 방에 홀로 남은 백성현은 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에 들린 휴대전화.
저장하지 않은 번호를 능숙하게 누르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요, 브로.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경박한 목소리.
백성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힘센 이끼 공급 문제는 해결됐습니까?"
-아. 그게 말이지. 일해 줄 친구들을 이제야 구한 거 있지.
"일처리가 너무 느리군요."
-누가 헛짓거리 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재발 방지 대책도 세워야 했어. 부사장님이 이해 좀 해주시죠.
아라한에서 비밀리에 설립한 단체.
나찰 길드의 총 책임자 박진수는 진지함이 1그램도 느껴지지 않는 음색으로 대꾸했다.
"습격자의 정체는 알아냈습니까?"
-마법계. 쌍검을 다루는 소환수를 부린다는 것 정도. 경주에서 행적이 끊겨서 찾는 중이야.
"누구에게 추적을 맡겼습니까."
-김미정. 이번 사건에 꽤나 흥미를 느꼈나봐.
백성현은 아, 하고는 짧게 탄식했다.
나찰 길드 서열 3위이자 행동대장을 도맡은 여인.
6성의 실력자이며 전투 센스와 추적 능력도 뛰어나지만.
본인이 흥미를 느끼는 부분만 적극적으로 나서는 탓에 다루기가 까다로웠다.
"곤란하군요. 맡길 일이 하나 생겼는데."
-브로, 우리도 좀 봐주라. 사업체 운영하기도 벅찬데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나찰의 영역을 경기도 쪽으로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그라운드 제로는 어쩌고. 거미 새끼를 상대로 원정을 뛰는 건 무리야.
"몰랐습니까? 최근 붉은 거미가 밀려났습니다."
백성현은 유진을 뒷조사하면서 알게 된 경기도 인근 암흑가의 정황을 짧게 이야기했다.
-3성 따위가 거미의 영역을 먹어?
"경기도에 지부를 낼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만."
-아. 근데 말했잖아요. 우리도 힘센 이끼 공급 문제라든지 해서 사람 빼기가 좀 어려워.
"김미정 행동대장이라도 보내주시죠."
박진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쉼 없이 두드렸다.
파주에 위치한 그라운드 제로.
이북 쪽 루트와 서해 인근의 밀무역을 꽉 쥐고 있는 곳.
나찰이 그라운드 제로에 깃발을 꽂을 수만 있으면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 친구랑 4성 헌터 30, 그리고 3성 헌터 70. 부산 쪽 사업 관리하려면 더 못 빼.
"준비에 얼마나 걸립니까?"
-2주일만 기다려줘. 부사장님.
"1주일 드리겠습니다."
-염병. 빡빡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욕지거리를 마지막으로 끊어진 전화.
백성현은 고개를 위로 젖힌 채, 사무실 천장을 빤히 바라봤다.
'이제 나찰 길드에게 맡기면 되겠군요.'
더 이상 변수는 없다.
나찰 길드장 박진수는 가벼운 말투와 달리, 일처리를 할 때 빈틈이 없기로 유명했다.
유진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각성 1년 차에 불과한 헌터.
무슨 술수를 부려서 붉은 거미의 전력을 깎아냈는지는 모르지만, 나찰 길드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마담이 천유진에게 이야기를 전달했겠지요.'
유진과 밀접한 관계로 보이는 은하수 펍.
국내 1위 길드인 아라한이라고 해도 그녀의 정보망을 완전히 피해가기는 어려웠다.
그렇기에.
백성현은 정보의 공백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나찰 길드가 아라한의 산하에 있다는 것은 마스터와 박진수 빼곤 아무도 모릅니다.'
밀월 관계인 나찰 길드를 동원하면?
아라한만 경계하던 유진은 뒤통수를 세게 맞고 당황하겠지.
나찰의 습격을 당하기 직전에나 싸워야 할 적이 누군지 알 것이다.
'천유진도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그쯤 될 테니. 시기도 딱 맞는군요.'
생각을 정리한 백성현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수십 년 전.
아라한 길드의 앞길을 막아섰던 박하늘이 허무하게 죽고 나서 기록까지 말살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유진도 그 날개를 제대로 펴기 전에 꺾일 것이라.
*
-아라한이 천 대표님 뒤를 캐고 있어요.
[고대의 시험장Ⅱ]를 통과하고 현실로 복귀한 후.
휴대전화를 켜자마자 날아온 메시지다.
뚜- 뚜-.
-해외여행 중에 불쾌한 소식을 전해드리게 됐네요.
"여행은 무슨. 게이트 들어갔다가 막 나왔다."
-호호. 바쁘시네요.
"아라한 길드에서 어디까지 조사했나?"
-그라운드 제로의 새로운 삼강이 천 대표님인 것까지는 확인한 것 같아요.
흠.
그럼 사실상 이쪽의 패는 대부분 확인했단 말이군.
"특별한 움직임은 없나?"
-제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봤는데, 뒷조사 말고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답니다.
"놓칠 가능성도 있잖아."
-호호호. 농담이죠?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
유진은 더 묻는 대신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나찰 길드를 조사해봐."
-부산 일대 암흑가를 쥐고 있는 곳이잖아요.
"아라한에서 키운 위성 길드다. 조사를 마쳤으면 그쪽을 움직일 거야."
곧바로 돌아오지 않는 대답.
잠시 후.
-천 대표님.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몰랐나? 나찰 길드장 박진수가 아라한 길드장의 배 다른 동생이다."
-으음. 잠깐만요.
마담의 음색이 가볍게 떨린다.
크흐흐흐.
당연히 혼란하겠지.
나찰 길드의 배후에 아라한이 있다는 것과, 두 길드장이 이복 형제라는 건 최소 10년 후에나 밝혀지는 비밀이거든.
아무 생각 없이 걷던 중에 "절름발이가 범인!"이라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겠지.
'미래가 바뀌어간다 한들, 이런 식의 인과는 바뀔 리 없다.'
회귀라는 특전.
써먹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우려먹을 거다.
-정보 출처는 안 알려주실 거죠?
"당연하지."
-그럼 신뢰하기가 어려운걸요.
"신뢰하라는 말이 아니다. 나찰 길드를 조사해달란 거지."
-알겠어요. 다만, 나찰 길드 쪽 정보는 값이 조금 비싸답니다.
"대가는 후불로 달아두마."
통화를 종료하고는 하늘 위를 올려다 보았다.
〔괜찮겠느냐?〕
'뭐가.'
〔그대가 없는 틈을 타서 무뢰배들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을까 우려가 되는구나.〕
'나찰 길드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거다.'
공교롭게도.
유진은 최근에 나찰 길드 휘하의 조직 하나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힘센 이끼 공급처를 박살 낸 사건.
바다에 들어가서 이끼를 채집할 노동자도 다시 구해야 하고.
무인도를 지킬 선박도 추가로 개조해야 하며, 관리 인원까지 뽑아야 한다.
〔그렇다 한들, 너무 여유를 부리는 건 지양해야 하지 않겠느냐.〕
'볼 일은 다 봤으니 돌아가야지.'
대륙 너머에 숨겨진 기연은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굵직굵직한 사건 정도는 알아도.
자잘한 기연을 일일이 기억하려면 절대기억 능력이라도 있어야 할 걸.
뽀시래기 팀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니, 세 사람은 하늘이 무너진 것마냥 좌절했다.
"해외여행이라면서요!!!"
"이건 좀 너무하지 말임다."
두 사람은 대놓고 바닥에 드러누웠고.
강민호도 입을 떼지 않았을 뿐, 표정에 담긴 감정은 대동소이했다.
〔크하핫. 걸작이로다. 참으로 악독한 고용주로구나.〕
'아까 급하게 돌아가자고 한 성좌님은 어디로 갔대?'
〔차라리 작은 인간들에게도 사연을 말해주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녀석들을 이번 일에 참여시킬지 아직 결정 안 했어.'
세 사람의 전투능력은 준 4성급.
오러나 다중 연산을 사용하지 못할 뿐, 타고난 재능에 유진의 채찍질 덕에 급격하게 강해졌다.
[이동요새]나 [동화]&[염력], 그리고 [공간]은 전투에서 변수를 창출하기 용이한 능력이기도 했으니.
뽀시래기 팀이 함께하면 나찰 길드를 상대하기가 한결 편해질 것이다.
〔믿음을 가지어라. 그대가 벼려낸 작은 인간들이니.〕
'조금 더 고민해봐야지.'
결정을 미룬 유진은 남은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루 놀고 가자는 건 너무한 것 같군."
꿀꺽-.
뽀시래기 팀의 눈동자가 유진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용돈 줄 테니 카지노 맛이나 봐라."
"형! 진짜 최고야! 사랑해!"
"우오오오!!!"
"형님.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용기의 문장]을 얻은 순간보다 더 기뻐했다.
으휴.
이 철없는 것들.
뽀시래기 팀의 성화에 못 이겨 라스베이거스로 향한 유진 일행.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유진은 카지노 지하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97화 추적자(2)
씬 시티(Sin City).
라스베이거스의 별칭이다.
온갖 쾌락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 죄악의 도시라는 이름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저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반적인 카지노는 헌터를 받아주지 않는다."
무투계 헌터는 민첩 스탯 덕에 평범한 사람을 뛰어넘는 반응속도와 동체시력을 지녔다.
4성, 그러니까 벽을 한번 넘은 헌터만 해도 굴러가는 주사위의 숫자를 대충 봐도 읽어낼 수 있고.
마법계는 은밀하게 준비한 마법으로 결과값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헌터 전용 카지노가 따로 있어."
"힝. 평범한 카지노에서 놀아보고 싶었는데."
"헌터에 맞춰서 종목 일부를 바꾼 거지. 분위기는 큰 차이가 없다."
"그걸 다 어떻게 아심까?"
"주워들은 거다."
사실은 회귀 전에 다 해봐서 아는 거지만 말이야.
헌터 전용 카지노에 도착한 일행.
유진은 미리 환전해놓은 달러를 세 사람에게 쥐여 주었다.
"다 털리면 끝이다."
"혀어어엉. 나도 돈 좀 챙겨왔는데요."
"그거까지만 써. 카드로 돈 뽑으면 쫓아내버린다."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강민영의 눈빛.
가만 두면 카지노의 지박령이 될 인상이로다.
유진이 눈에 쌍심지를 켜자, 더 달라붙지 못하고 깨갱 하며 물러났다.
"형님은 어디 가십니까?"
"지하. 투기장 구경하러 간다."
카지노에서 돈을 딸 확률은 높지 않다.
이왕 왔으니 재미로 레버를 당겨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질 확률이 100%인 게임을 하는 취미는 없어.'
이왕 카지노에 왔으니, 조금이라도 따고 가야 하지 않겠어?
헌터 전용 카지노 아래로 내려가면 화려하게 꾸며진 지상과 180도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퍼억-!
퍽!
"한 번만 더 쳐!"
"피해! 피하라고! 등신아!"
"아이고. 저걸 그냥 맞아 주냐!"
퍼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헌터.
새우처럼 허리를 웅크린 것이, 몸통에 박힌 주먹이 꽤나 아픈 모양이다.
반면 주먹을 꽂아 넣은 상대는 체력이 남은 건지 쌩쌩했고.
"1, 2, 3.... 9, 10!"
땡- 땡-.
"블랙 재규어 다운. 타이거마스크의 승리!"
"Bull Shit!"
"역배 달달하고요."
"아 왜! 고양이 새X야! 한 방에 쓰러지냐? 이 악물고 일어나야지!"
링 위의 혈전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다.
승자에게는 환호가 쏟아지고.
패자는 원망과 저주, 그리고 야유가 빗발친다.
원초적인 감정이 꿈틀대는 공간.
헌터들이 주먹을 맞대는 승부의 세계, 지하 투기장이다.
〔참으로 저열하구나.〕
'재미있지 않아? 사람의 밑바닥을 볼 수 있잖아.'
〔짐이 보고자 하는 모습은 작은 인간이 시련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라.〕
'편식하지 마쇼. 성좌님.'
보고 싶은 것만 눈에 담고,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집으면 되겠나.
때로는 먹기 싫은 피망도 입에 털어 넣어야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라고.
'누구한테 걸어볼까.'
그가 자신 있게 투기장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투기장에서 이름을 떨친 이들.
그러니까.
회귀 전의 미래에서 오랫동안 활약했던 헌터들의 이름 정도는 대충 기억하고 있어서다.
'타이거마스크는 지금도 현역이었군.'
방금 전, 묵직한 보디 블로우로 승리를 따낸 헌터.
호랑이 가면을 쓴 사내, '타이거마스크'는 유진이 회귀하기 직전까지 투기장에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조금 더 빨리 내려왔으면 배팅했을 텐데.
아쉽군.
〔한데 이상하구나. 헌터들은 제각각 능력치가 다르지 않느냐.〕
'그래서 투기장이 있는 거다.'
헌터 카지노와 지하 투기장은 연평도에 마련한 신전처럼 특정 성좌의 힘이 깃든 성역이다.
바람의 전령이라는 성좌명을 지닌 존재.
올림포스 성단에서 나그네와 도둑, 그리고 전령의 신으로 불리는 자.
헤르메스를 배후성으로 둔 헌터가 운영하는 도박장이다.
'여기선 능력으로 사기를 칠 수 없거든.'
도박 관련 행위에 참여할 때에는 스킬 사용 불가.
링 위에 오르는 선수들은 헤르메스에게 '정당하게 승부할 것'을 맹세해야 했다.
맹세와 함께 페널티가 적용되어서 능력치가 하락.
서로 비슷한 체급이 되기에, 타고난 전투 센스와 경험으로 승부가 갈린다.
〔모름지기 성좌라면 고귀한 일에 보증을 서야 하거늘.〕
'헤르메스는 원래 고귀함하고 거리가 멀거든?'
〔제우스의 아이라더니. 경박한 건 제 아비를 꼭 닮았구나.〕
'그 제우스를 낳으신 게 누구더라.'
크로노스의 입을 막아버리고는 느긋하게 선수 리스트와 대진표를 훑어보았다.
'아는 이름이 생각보다 없네?.'
타이거마스크처럼 눈에 익은 선수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이한 생각이었나 보다.
대기 중인 투기장 선수들의 이름 중 낯이 익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줄이야.
〔크하하핫. 회귀자의 자랑인 미래의 지식은 어디 간 게냐.〕
'시끄러. 나라고 해서 다 기억하는 건 아니라고.'
이러면 정말로 배당률이나 이전 경기들의 기록만 보고 찍어 봐야 하나.
턱을 만지면서 고민하던 중.
유진의 눈동자가 어느 한 곳에서 5초 이상 머물렀다.
'스네이크 아이?'
〔기억에 남는 선수더냐.〕
'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평소의 그대답지 않게 모호한 발언이로구나.〕
'투기장에서 본 이름이 아니라서.'
스네이크 아이.
추적의 달인이자, 타고난 사냥꾼.
각성자를 일컫는 대명사인 '헌터'의 원 뜻이 사냥꾼이지만.
스네이크 아이만큼 사냥꾼이라는 명칭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호오. 꽤나 높은 평가이지 않느냐. 어찌하여 그런 평가를 주는 게냐?〕
'다양한 무기를 사용해서 근거리부터 원거리까지 모두 대응 가능하고 추적술까지 능해서 그래.'
근데 말이지.
스네이크 아이가 투기장 선수로 뛰었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다.
본인이 맞는 건가.
혹은 우연의 일치인 건지.
당장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그 작은 인간에게 찾아가서 "자네가 미래에 위명을 떨칠 사냥꾼이오?"라고 물어보기라도 할 셈인 게냐.〕
'유머감각 좀 더 길러야겠어.'
〔하면 무슨 수로 작은 인간이 맞는지 확인하려느냐?〕
'딱 보면 알아.'
선수 대기실로 향하는 유진.
철창으로 분리된 공간 사이로 링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선수들이 보인다.
빠르게 선수들을 훑던 중.
〔설마 저자가 스네이크 아이인 게냐?〕
크로노스가 한 사내를 보고 황당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응.
맞아.
딱 보면 알아볼 수 있다고 했지?
유진의 뺨이 씰룩거렸다.
*
뱀처럼 쭉 찢어진 눈동자.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40대 남자가 벤치에 앉은 채로 심호흡하고 있었다.
유진은 스네이크 아이의 전적을 확인했다.
'승률이 많이 낮네?'
투기장에서는 재미를 많이 못 봤구나.
이러니 회귀 전의 세상에서는 투기장 선수 활동 이력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
"스네이크 아이."
유진의 부름에 호흡을 가다듬던 사내의 눈동자 위로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허.
'스네이크 아이'라는 호칭이 붙은 결정적인 이유.
저 눈빛을 보니 유진도 순간 놀라서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당신도 나 때문에 돈을 날렸소? 아니면 날릴 예정인 거요."
"한몫 든든하게 챙길 예정인 사람이지."
"눈은 장식인가 보군."
"한 마디만 조언해도 될까?"
"승부조작 같은 거 청탁해도 소용없어. 우린 계약을 맺었으니 매 경기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야.
스네이크 아이가 패배감에 절어 있다니.
회귀 전의 사내에게는 볼 수 없는 희귀한 모습이라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말이지.
할 말은 해줘야 돈을 벌지 않겠나.
"무기를 여러 개 써봐."
"뭐?"
"소드 브레이커 두 자루에 브로드 소드, 그리고 단창 정도면 좋겠네."
소드 브레이커는 날 뒤를 톱니처럼 만든 단검이고.
브로드 소드는 도신 길이가 1미터 정도 되는 장점이며.
마지막에 언급한 무기, 단창은 총 길이가 2.5미터 정도 되는 병기다.
어느 것 하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는 무기.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헛소리를 할 거면 꺼지시오."
"믿는 건 자유지만 손해 볼 것도 없잖아. 고민해 봐."
유진은 능글맞은 미소를 남긴 채, 배팅 장소로 돌아갔다.
-빅 베어 대 스네이크 아이! 약삭빠른 뱀이 곰을 이길 수 있을까요?
장내 스피커에서 울리는 사회자의 격앙된 목소리.
'스네이크 아이'라는 선수 명으로 투기장에 등록된 헌터, 테렌스 D. 스미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기 중인 선수들을 지나 무기 진열대에 선 사내.
'빅 베어. 투기장의 스타 중 한 명. 묵직한 철퇴를 능숙하게 다루는 선수다.'
사내는 평소처럼 브로드 소드 한 자루를 쥐었다.
이길 확률은 높지 않다.
그렇지만.
포기할 순 없다.
지하 투기장의 선수들이 돈을 버는 수단은 간단했다.
링 위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
상대가 투기장의 스타 중 한 명인만큼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는 게 가능하다면...?'
그 순간.
사내, 테렌스 D. 스미스는 무의식적으로 웨폰 브레이커에 손을 뻗었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유진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도는 걸까.
병마로 고생하는 딸을 위해서라도.
'난 승리해야 한다.
테렌스는 입술을 질근 깨문 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하며 웨폰 브레이커 두 자루를 허리에 달아놓고 등 뒤에 단창을 고정시켰다.
잠시 후.
투기장의 강자 중 한 명인 빅 베어는 스네이크 아이의 변칙적인 공격에 무릎을 꿇었다.
*
○스네이크 아이
배당 - 5.1배
배당금 - 4,970,000$
당장 융통할 수 있는 건 100만 달러.
환전하면 10억 좀 넘는 돈을 스네이크 아이에게 올인 했고.
'뭐? 돈이 복사가 된다고?'
유진은 말 그대로 대박을 냈다.
40억.
막 과거로 돌아온 직후에는 2천만 원 가지고 벌벌 떨었는데.
3개월 만에 조언 한 마디와 용기(?) 하나로 돈을 40억씩 복사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쯧, 물욕은 작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원흉이거늘.〕
'그러면 신전도 쭉 검소하게 두든지.'
〔허흠. 짐을 숭배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구나.〕
말 바꾸는 거 보소.
〔한데 붉은 거미의 사업체를 손에 넣어서 다달이 금전이 들어오는 거 아니더냐?〕
'블랙허브 농장을 빼고도 20억은 꽂히지.'
〔짐은 40억이라는 금액이 그리 커 보이지 않게 느껴지는구나.〕
'돈 한 푼 안 벌어본 성좌님이 뭘 알겠어.'
돈은 많을수록 좋다.
이 사실은 유진이 죽기 직전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여유 자금 확인 좀 해보고 시체들 매입해야지.'
쓸 만한 몬스터 시체를 일일이 구하러 다니는 건 효율이 나쁘다.
회귀하고 난 직후에야, 지갑이 얇은 탓에 발품을 팔아야 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네크로폴리스를 확장하고 지키려면 강력한 언데드도 여럿 필요하고.
암상에 의뢰를 해놓았으니 곧 소득이 있을 거다.
〔한 가지 묻자꾸나.〕
'무기를 여럿 챙긴 걸로 이긴 게 맞냐고?'
〔그렇도다. 짐이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더구나.〕
'스네이크 아이의 고유 특성을 봐야 해.'
[무기의 달인]
스네이크 아이의 고유 특성으로 어떤 무기를 사용하든지 효율을 끌어올리는 능력이다.
'본인은 그걸 숙련도 상승 속도로만 해석했다던가.'
각성 전에 취미로 검도를 배워서 주력 무기도 장검으로 결정.
한 무기만 주구장창 휘둘렀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찮게 병장기를 여럿 사용할 기회가 생겼고.
스네이크 아이는 고유 특성의 진정한 활용방법을 깨달았다.
〔꽤나 자세히 알고 있구나.〕
'스네이크 아이를 고용한 적이 있어서.'
대격변 이후 인외마경으로 변한 중앙 아프리카.
수십 년 전에는 콩고라고 불렸던 나라에 자리를 잡은 괴물, 드레이크를 사냥한 적이 있다.
추적과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스네이크 아이는 최고의 용병이었지.
'슬슬 돌아가자.'
〔한 번으로 만족하는 게냐?〕
'거하게 벌고 나서 멈추는 것도 용기야.'
배당금도 수령했겠다.
익숙한 이름도 더 없으니 슬슬 돌아가야겠다.
몸을 돌이켜 카지노로 올라가려고 할 때.
"저기요."
"스네이크 아이?"
"당신 말 들어서 이겼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눈매가 무서운 사내.
스네이크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유진을 찾았다.
"빚진 거 없으니 가봐. 나도 당신 덕에 지갑 두툼하게 돈 벌었다."
"초면에 실례지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스네이크 아이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저를 훈련시켜 주십시오!"
"...예?"
너무 놀라서 존대가 튀어나왔네.
유진은 황당한 눈빛으로 고개 숙인 스네이크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98화 손님맞이(1)
〔크하하핫! 인재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구나.〕
'생각 좀 하게 조용히 해봐.'
강민호, 민영 남매하고는 상황이 좀 달랐다.
두 사람이야 풋내기일 때 우연히 만나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전에 섭외한 거고.
그마저도 유진의 동료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었다.
'이 양반은 아니란 말이야.'
거울 사냥꾼은 맡은 계약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용병.
회귀 전 행적으로 볼 때, 인연을 쌓으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이다.
스네이크 아이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글쎄다.
'저 양반. 내가 죽였어.'
〔거울 사냥꾼처럼 그대를 죽이란 의뢰를 받은 게냐?〕
'드레이크를 사냥한 직후에 날 노렸거든.'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 한다.
그 행위의 범위에는 의뢰인을 배신하는 것도 포함된다.
본인이야, 드레이크를 죽인 시점에서 의뢰가 끝난 것이니 배심은 아니라고 했지만.
시부레.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유진은 노란 머리 짐승(?)을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거절하지."
"초면에 이러는 게 실례인 건 압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싫어. 난 돈 번 걸로 만족해."
"전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당신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알 바인가."
스네이크 아이의 능력 활용 방법을 알려준 건 여흥이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투기장.
돈 복사 이벤트(?)가 흔한 것도 아니니 미래의 지식을 활용해서 녀석에게 기회를 줄 겸, 돈도 번 것이다.
그렇지만.
회귀 전에 뒤통수를 때린 녀석을 거둘 만큼 유진도 신경이 굵진 않았다.
"그런데 왜 돈이 필요하지?"
"제 딸이 많이 아픕니다."
흠-.
딸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
스네이크 아이가 원체 개인사를 잘 감춘 채 업보를 쌓았어야지.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 정보.
잘하면 이용해먹을 수 있을지도?
"내 명함이다."
"미스터 천, 코리아?"
"성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당신 딸. 치료할 생각이 있으면 한국으로 와라."
유진은 명함을 쥔 채, 멍한 표정을 짓는 스네이크 아이를 뒤로하고 투기장을 벗어났다.
〔그대답지 않은 자비로구나.〕
'웬 자비?'
〔회귀 전의 악연이라도 그 사연을 듣고 품어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딸내미를 한국에 데려오면 훌륭한 인질이 되잖아.'
순순히 치료해줄 거였으면 당장 얼굴 보러 가자고 했겠지.
왜 한국으로 오라고 명함을 줬겠어?
〔그런 흉흉한 의도를 심중에 둔 것이더냐!〕
'애초에 치료가 될지도 몰라.'
미래 지식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스네이크 아이가 미래에도 돈에 집착한 것을 보면 치료 자체는 불가능해도 숨을 붙일 순 있다는 건데.
또 모르지.
성좌님의 능력과 신준석이 지는 연금술 재능, 그리고 유진의 지식을 더하면 해결 방법이 나올지도.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건 없어.'
스네이크 아이가 노란 머리 짐승이긴 해도, 능력은 진짜다.
유진도 배신할 가능성을 고려한 채로 드레이크 사냥을 위해 규용했을 정도.
그런 녀석의 약점을 쥐고 부려먹는다면?
'달달하다. 달달해.'
40억보다도 더 큰 걸 얻은 셈이다.
〔그대는 피도 눈물도 없구나!〕
'소각용 쓰레기를 재활용하겠단 거다. 얼마나 마음씨가 좋아.'
〔말세로다. 말세야.〕
크로노스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
"이게 무슨 해외여행이야."
"속았지 말임다."
"그래도 문장을 얻었잖아. 형님 덕분이다."
강민호야.
편 들어주는 건 고마운데 너도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뚝뚝 느껴지거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앨리스 킴은 유진 일행을 배웅했다.
"미스터 천. 아메리카 대륙에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사양하지 않죠."
리틀 엔젤스.
미국이 오죽 넓은가? 캘리포니아에서 힘깨나 쓰는 길드라지만, 유진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쓸 만한 패를 거절할 이유는 없지.'
미국 쪽은 무연고지인 상황.
이후에 나타날 기연들을 손에 넣을 때 도와줄 협력원이 생긴 것만 해도 큰 수확이다.
한국으로 귀환하자마자 마담과 통화했다.
-저하고 이렇게 자주 연락하는 남자는 유진 님뿐인 거 아시죠?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은데."
-딱딱하시긴.
"누구보다 공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한테 그런 말 들으니 좀 그런걸?"
수화기 너머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
-나찰 길드는 최근 관리 중인 영역의 헌터들을 조금씩 빼고 있어요.
"어디를 노리는지는 뻔하군."
-대 몬스터용 병기와 보급품도 사들이던걸요. 전쟁이라도 일으킬 분위기라서 부산 암흑가의 분위기도 엉망이에요.
"기간도 짧았는데 꽤 상세하게 파악했어."
-제가 누군가요? 은하수 펍의 마담이랍니다.
능력이 출중한 거야 잘 알지.
회귀 전에도 마담의 정보력 덕에 이득을 꽤 보았다.
개성에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한 터라 그라운드 제로의 조직들과 엮이는 건 필연이었으니.
'전생보다는 더 친해졌지만 말이야.'
틀어진 시간선에 묻혀버린 기억을 잠시 상기하곤, 다시 입술을 떼었다.
"나찰 길드가 준비를 마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5일 정도 걸리겠네요.
"꽤 빠른데."
-나찰 길드 영역 내에서 움직임이 심상치 않답니다.
"알아봐줘서 고마워."
-별 말씀을요. 거스름돈은 다음에 드릴게요.
아라한 길드에서 위성 단체 겸 더러운 일을 맡기려고 나찰 길드를 설립했다는 정보.
나찰 길드 조사를 부탁한 것으로는 정보의 값어치를 모두 채울 수 없다는 말이다.
"말 안 했으면 잊어버렸을 건데."
-퍽이나 그러시겠어요.
짧게 웃으면서 대화를 종료하는 마담.
5일이라.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긴 꽤 빠듯한 시간이군.
〔그대의 수하들도 참전시키려느냐?〕
'이젠 결정을 해야겠지.'
일행을 흘겨보니 강민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형님. 지시를 내려주십쇼."
"웬 지시야?"
"저희한테 하실 말씀 있지 않으십니까."
"관심법이라도 익혔냐."
"표정 보면 그래도 대충은 압니다."
어쭈.
이제는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거냐.
강민호의 대답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작은 행동이나 표정 변화만으로 생각을 읽어내는 부하라.
1회차 때는 정신금제로 복종시킨 언데드 말고는 신뢰할 녀석이 없었는데.
회귀하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든든함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유진은 마담에게 들은 상황을 짧게 요약해서 뽀시래기 팀에게 일러주었다.
"무, 무슨 범죄와의 전쟁. 그런 검까?"
전쟁이라.
어감 좋네.
"참여하지 않아도 뭐라고 안 한다. 누군가를 죽일 각오가 없으면 빠지는 게 나아."
"형.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요."
"섭섭하다고?"
"우리가 형한테 붙어서 꿀만 빨고 뒤로 빠지는 거잖아요."
강민영은 평소의 가벼운 목소리 대신 가라앉은 음색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 그런 어쭙잖은 책임감으로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거다."
"솔직히 고민 많이 했지만 이런 일이 생기면 빠지지 않기로 다짐했어요."
"두 사람도 민영이와 같은 의견인가?"
"그렇습니다. 형님."
"무섭지만 함께 하고 싶슴다."
흠.
유진이 짧게 신음을 흘리니 크로노스가 보챘다.
〔저 작은 인간들이 각오를 다졌으니, 그대도 응당 답해야 하지 않겠느냐.〕
'변수가 많은 전투야. 솔직한 마음으로는 내보내고 싶지 않아.'
〔계약자의 수하들은 젖을 먹는 아이가 아니니라.〕
'맞는 말이긴 한데.'
〔그대를 신뢰하며 믿고 따르는 이들의 마음을 무시하면 되겠느냐.〕
무심결에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예리한 부분을 날카롭게 찌르는 크로노스의 충고.
'성좌님. 조언 고맙다.'
짧게 뇌까리고는 뽀시래기 팀원들과 일일이 눈빛을 마주했다.
"내 지시를 착실히 따라야 한다."
"알겠어요. 형."
"무작정 돌격하라는 것만 아니면 따르겠슴다."
"형님.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오냐.
너희가 동의했으니, 이제부터는 토 나올 정도로 굴려주마.
*
나찰 길드와의 전쟁은 거미 사냥하곤 조금 상황이 달랐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적들.'
거미 사냥 땐 정보의 불균형을 최대로 활용했다.
블랙허브 농장 주위를 일부러 배회했고.
개성 인간사냥꾼 흉내를 내서 붉은 거미의 병력들을 꾀어냈다.
상대의 움직임을 강제할 수 있으니.
미리 시체를 묻어둬서 함정을 파기도 쉬웠지.
〔이번에도 그대가 수성 측인 건 마찬가지이지 않느냐.〕
'조금 달라.'
아라한 길드는 유진의 행적을 모조리 조사했다.
지금쯤이면 언데드를 다룬다는 것 정도는 녀석들도 파악했을 터.
거미 사냥 때 재미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폭발의 매개체인 시체를 적이 의식하지 못해서였다.
'나찰이 공세에 나서면 시체가 전장에 있는지도 꼼꼼하게 살펴볼 거다.'
〔그럼 정면으로 겨루는 수밖에 없겠구나.〕
세력을 확장하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일.
인간사냥꾼을 의식해서 미리 대형 언데드들을 제작해서 다행이다.
곧바로 접경지역으로 넘어간 일행.
첫 번째 검은 방첨탑을 건설한 곳으로 이동했다.
[주인. 선물은 없나?]
"선물은 없고 좋은 소식은 있다."
파프너에게도 상황을 일러주자 푸른 귀화를 양쪽으로 흩뿌렸다.
[뭐가 좋은 소식이야?]
"아라한의 졸개들을 네 손으로 족칠 수 있잖아."
[오. 그러네.]
납득 한번 빠르군.
파프너는 그 말에 의욕적이 되어서 휘파람까지 불었다.
죽은 몸뚱이로 바람을 불다니.
도대체 영력을 어느 정도까지 세밀하게 운용할 수 있으면 그런 묘기를 부리는 거니.
"브루탈은 얼마나 만들었나?"
[이제 5구를 제작했다.]
"생각보다 많네."
[근데 문제가 좀 있어.]
"성능이 제대로 안 나오나 보군."
내 그럴 줄 알았다.
조승철의 강령술 숙련도는 대형 언데드를 만들 만큼 높지 않다.
핵심 요소는 [거인의 묘]가 모두 처리한다지만, 결국 구조물을 움직이는 건 조종 중인 네크로맨서거든.
숙련도가 모자라니 브루탈의 완성도도 떨어질 수밖에.
[어떻게 알았나?]
"그 정도는 감안하고 맡긴 거다."
완성도가 높지 않은 브루탈들을 모이게 했다.
팔 길이가 제각각이거나.
마력 회로 일부가 잘못 새겨져서 스펙이 떨어진 녀석도 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한번 실수는 괜찮다. 다음에도 같은 일을 벌이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닌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떻게 해결하는지 잘 봐둬라."
[공허의 파편]을 박은 지팡이 끝에 모이는 영력.
유진은 희끄무레한 기운을 능숙하게 다루어서 밸런스가 무너진 브루탈들을 빠르게 손봤다.
비틀어진 팔 위치가 들어맞고.
마력 회로 일부가 고쳐지면서 바깥으로 의미 없이 새어나가던 영력이 브루탈의 전신을 순환했다.
[주인님은 역시 대단하십니다!]
"당연한 소리 하지 말고."
브루탈들을 고친 건 시작에 불과했다.
유진은 각 방첨탑에 배치해놓은 언데드의 숫자를 파악했다.
-스켈레톤 워리어(3성) : 75구.
-아머드 스켈레톤(2성) : 193구.
-스켈레톤 메이지(2성) : 20구.
현재 네크로폴리스의 주력은 아머드 스켈레톤들.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안 되겠다. 싹 물갈이해야지."
[아머드 스켈레톤 대신 스켈레톤 워리어로?]
"그래야지."
스켈레톤 워리어를 만들려면 생전에 3성인 몬스터의 시체가 필요했다.
네크로폴리스의 전력을 올리려면 그만큼 발품을 파는 수밖에.
그뿐이랴.
[본 월을 사용합니다.]
안개로 뒤덮인 곳을 돌아다니며 뼈로 된 장벽을 세웠다.
수시로 몬스터들이 생성되는 접경지역.
본 월의 촉매로 삼을 뼈가 여기저기에 많아서 전선 구축이 한결 쉬웠다.
〔방어선이 너무 긴 것 같구나.〕
'모두 지킬 생각은 안 해.'
영역 곳곳에 본 월을 세우는 용도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나찰 길드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고.
또한 적의 동선을 유진의 의도대로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병력을 배치하든 말든, 유리한 곳에서 요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기니까.'
검은 방첨탑의 안개로 제한되는 시야.
본 월이 앞을 막고 있으면 나찰 길드의 헌터들도 쉽게 진격하진 못하리라.
〔준비는 이제 되었느냐?〕
'설마.'
손님을 맞이하려면 정성을 다해 준비해야지.
해야 할 일은 넘쳤다.
유진은 [페이디피데스의 목걸이]의 체력 회복 주문을 사용하면서 피로를 해결했다.
99화 손님맞이(2)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연금술식 - 강화 회로를 사용합니다.]
[본 아머를 사용합니다.]
뼈를 적당한 만큼 깎아내고.
내부에 강화 회로를 새긴 후에.
강령술로 스켈레톤 워리어의 갑주에 새로운 뼈를 결합한다.
그극- 그그극-.
뼈가 갈려 나가는 소음이 귓가를 어지럽히지만.
뒤이어 들리는 시스템의 반응에 입가가 씰룩거렸다.
[스켈레톤 워리어의 신체구조가 개선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2.7% 상승합니다.]
[방어 Lv20이 추가됩니다.]
"다음."
-그게겔.
막 개조를 끝낸 스켈레톤 워리어가 옆으로 빠지고.
줄지어 선 망자가 앞으로 나왔다.
"넌 몸뚱이보다 치열을 봐주고 싶은데, 됐다. 소개팅 나갈 것도 아니고."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
스켈레톤 워리어의 구조를 파악하기까지 평균 3초.
뼈를 알맞게 다듬는데 평균 10초.
그리고 [본 아머]로 구조를 변형, 강화하기까지는 약 10초.
'총 23초라. 실력이 예전 같지 않네.'
회귀 전이었으면 직접 손을 댈 것도 없이 쓱 보기만 해도 됐을 일.
가내수공업(?)으로 23초라. 참 굴욕적이군.
〔흠. 그냥 뼈를 깎아서 바꿔 끼면 되는 것 아니더냐?〕
'우리 성좌님은 언데드 강화가 얼마나 섬세한 작업인지 모르시는구먼.'
구조의 이해.
마력 간섭.
뼈 세공.
마지막으로 구조물 융합까지.
어느 과정이든 하나만 실수해도 언데드의 스펙이 오르기는커녕 크게 꺾인다.
오차가 크면 아예 박살나기까지 한다고.
〔짐이 보기에는 아무 뼈나 막 뽑는 것 같다만.〕
'영력의 중심부가 되는 부위를 섬세하게 건드리는 일이거든요.
〔한데 공들이는 것보단 아쉬운 성과로구나.〕
크로노스는 흠, 짧게 신음하더니 재차 사념을 보냈다.
〔합일시킨 망자들이나 아머드 시리즈처럼 개조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고. 재료도 필요해.'
스켈레톤 워리어를 보다 상위 언데드로 개조하려면 연금술로 연단한 [망집이 깃든 쇳덩어리]가 필요하다.
파주 공방에서 [성자의 눈물] 양산 체계를 준비 중인 신준석을 불러올 순 없고.
합일은 망자의 몸뚱이와 싱크로가 잘 되는 혼백을 찾아야 한다.
〔갓 쓰러트린 괴물들의 혼백을 몸에 불어넣으면 되지 않겠느냐.〕
'몬스터는 반쪽짜리 존재인 거 알잖아.'
게이트 핵이 지맥이나 대기의 마력을 흡수해서 빚어내는 존재.
육신이야 흙과 공기 같은 요소들을 주물러서 만들 수 있지만, 온전한 혼백을 만들진 못한다.
게이트에서 출몰하는 몬스터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까닭.
[새빨간 위장] 공략 때처럼 괴물의 혼백이라도 적절하게 굴릴 수 있지만.
몬스터의 영혼으로는 합일체를 만들 수 없다.
〔그건 좀 아쉽구나.〕
'애꾸눈 같은 변종은 몰라도 평범한 몬스터론 안 돼.'
스켈레톤 워리어 200구.
리터너 250구.
도합 450이나 되는 언데드를 제작하고 일일이 만지면서 강화하니 한나절이나 지나갔다.
영력이 떨어져서 숨만 붙여놓은 몬스터의 생기를 흡수하기도 했고.
집중력도 회귀 전만큼 나오지 않아서 숨을 돌리기도 했다.
"아오. 더럽게 힘드네."
〔강화한 3성 언데드가 450구. 그대의 대전사까지 있으니 준비는 충분하지 않느냐?〕
'전에 한번 말했잖아. 언데드는 동일 성위보다 전투력을 낮게 잡는다.'
처음에 제작할 때 1차로 강화해서 스펙을 뻥튀기시키고.
두 번째 개조로 능력치를 올리면 3성 몬스터를 상회하는 힘을 얻게 되지만.
같은 성위의 헌터에 비해서는 한 수 모자란다.
'스펙에서 우위여도 장비 빨은 못 이겨.'
갖가지 수단으로 언데드를 강화해도.
여러 아이템을 착용하고, 또 소모품을 지닌 헌터에 비해선 조금 모자란다.
1대1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여지가 있겠지만, 대규모 전투에서는 그 차이가 더욱 크게 벌어졌다.
'조합도 단순하잖아.'
네크로폴리스의 주력은 백병전이 특기인 스켈레톤 워리어와 리터너.
리터너는 기동력까지 느리니, 수적 우위를 살리기가 어렵다.
한 손이 열 손을 막기 어렵다곤 해도.
결국 포위를 해야 수적 우세를 100% 살릴 수 있거든.
'원거리 지원 병력도 수준이 모자란다.'
스켈레톤 메이지는 2성.
강화를 해도 3성에 미치지 못하고, 보유 마력도 많지 않아서 소모전으로 가면 불리해진다.
물량으로 밀어붙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마법 적성이 있는 시체가 있어야 스켈레톤 메이지를 제작 가능해서 규모를 불리기도 난감하단 말이지.
〔엄살이 너무 심하구나.〕
'티 났어?'
〔지금보다 훨씬 불리한 때에도 승리를 계산하지 않았느냐. 이미 대책을 마련했을 터.〕
'원거리 화력은 망자들 외에도 대처할 방법이 있다.'
새로 제작한 언데드들을 모두 개조한 후.
유진은 강령술 연구소로 향했다.
"연구 진척 상황은?"
[첫 연구 과제는 모두 끝냈습니다.]
[강령술 연구소에서 '방어 구조물 Lv1' 연구를 완료했습니다.]
[해당 영지 및 링크되어 있는 검은 방첨탑에서 '망자의 골탑'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좋아. 농땡이 안 부리고 잘 했군."
[두 번째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현재 연구 중인 항목은 '언데드 강화 Lv1'입니다.]
[완료 예정시간 - 71:53:47]
"그렇게만 해."
[맡겨주십시오.]
5성의 마법사.
다크 미니언이라는 언데드 종의 한계로 생전의 힘을 모두 발휘하진 못해도.
합일을 이룬 덕에 본연의 능력을 상당수 발휘할 수 있어서 강령술 연구소 1단계의 연구 과제쯤은 쉽게 소화했다.
'좋아. 이러면 다음 준비로 넘어가자.'
〔다음이라면?〕
'원거리 요격 수단 마련해야지.'
수성전이라는 이점.
최대한 살려봐야 하지 않겠어?
*
유진은 검은 방첨탑에 손을 얹고 영지 정보를 확인했다.
[영지 규모 - 2]
[강령술 증폭 범위 - 3km]
[사역 가능 언데드 개체 수 - 451/500]
[영력 농도 – 3]
[구조물]
-검은 방첨탑(Link - 5)
-불경스러운 묘지(1)
-죽음의 전당(1)
-강령술 연구소(1)
-거인의 묘소(1)
확연하게 달라진 영지 창.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강령술 증폭 범위가 3배로 늘어난 것이다.
강령술 증폭 범위 = 안개.
'언데드는 강화되고, 산 자들에게는 시야 페널티를 강요한다.'
나찰 길드에서 아무 대책 없이 접경지역으로 넘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라한에서 뒷조사를 마쳤다면.
네크로폴리스에 감도는 불길한 안개도 파악했을 터.
그럼에도.
상대방에게 불리함을 강요하는 건 무조건 이득이다.
'아직은 모자라.'
거미 사냥 때처럼 미리 땅에 묻어놓은 시체를 사용할 수 있으면 모를까.
정면으로 부딪치기에는 전력이 부족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네크로맨서의 영지'에서 싸운다는 의미를 살릴 시간이다.
[망자의 골탑]
죽은 자의 뼈를 탄환 삼아 범위 내에 들어온 적을 공격하는 구조물입니다.
▷건설 조건
-방어 구조물 Lv1 연구
-뼈 1,000kg.
-영력이 축적된 흙 300kg.
〔그 하수인으로 하여금 연구를 진행한 건 모두 이 때문이었구나.〕
'조건은 이미 충족시켰다.'
파프너는 3성 몬스터의 사체를 구해온답시고 네크로폴리스 인근을 샅샅이 뒤졌다.
그 과정에서 몬스터들과 조우하는 것은 필연.
몬스터들이 "예. 지나가십쇼." 하고 비켜줄 리는 없으니.
그 덕에 시체들이 더 쌓였다.
[살점지배]로 주검의 뼈와 살을 분리하는 게 번거로울 뿐.
"망자의 골탑을 건설한다."
굳은 의지를 담아 외치자, 검은 방첨탑의 표면에서 으스스한 빛이 흘러나왔다.
[지목한 구조물의 배치 장소를 정해주십시오.]
검은 방첨탑이 빚어낸 안개.
즉, 강령술 증폭 범위가 유진의 시야에 3D 홀로그램처럼 펼쳐진다.
'골탑의 최대 사거리는 약 300미터.'
일반적인 투사 형태의 마법은 100미터 이상 나아가면 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반면 망자의 골탑은 이론상 사거리가 꽤 넓은 편.
〔꽤 쓸 만하지 않느냐.〕
'이론이라고 했잖아. 실제로는 고려해야 할 게 많아.'
접경지역은 크고 작은 산지와 언덕, 그리고 수풀로 이루어졌다.
탁 트인 곳이 아니면 골탑의 장점을 살리기 어렵다는 거다.
'그래서 미리 골탑의 부지를 봐두었지.'
〔뼈로 된 벽을 영지 곳곳에 설치해둔 것은 이를 위한 포석이었구나.〕
'정답이다.'
이제는 말 안 해도 척척 알아채네.
미리 골라놓은 지형을 선택하자, 불경스러운 묘지에 쌓아둔 뼈들이 땅으로 스며들었다.
[망자의 골탑 건설을 시작합니다.]
[건설 시간 - 48:00:00]
이틀.
현대의 건축 기술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속도다.
'골탑 셋을 더 건설한다.'
파프너가 쌓아 놓은 사체의 뼈를 대부분 소진.
영역 안에 망자의 골탑을 추가로 건설하니, 대기 시간이 확 늘어났다.
〔그 작은 인간이 예측한 시간 내에는 완성되기 어렵겠구나.〕
'손을 놓고 구경만 하면 그러겠지.'
네크로폴리스 수비에 필수인 방어 구조물.
사거리.
전투 지속력.
그리고 내구력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랄 것이 없다.
지금까지는 네크로폴리스를 지킬 일이 없다 보니 방어 구조물 건축을 후순위로 미루어두었지만.
파주 인근을 거점 삼아 세력 확장에 나서기로 했으니, 본격적으로 투자해야지.
[구조물 생성에 개입합니다.]
[건축 속도가 127% 상승합니다.]
방어 구조물은 죽음의 전당이나 검은 방첨탑처럼 네크로맨서의 재량만으로 건설 효율을 확 올릴 수 없다.
영력을 추가로 불어넣거나.
혹은 구축 과정에 들어가는 술식 계산을 돕는 정도.
"너희도 와서 일해라."
강령술을 익힌 파프너와 조승철도 검은 방첨탑으로 불려왔다.
[건축 속도가 21% 상승합니다.]
[건축 속도가 45% 상승합니다.]
두 언데드를 합쳐도 유진 한 명보다 못한 능률.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디냐.
'나찰 길드에서 쓸 만한 마법계 시체들을 많이 구할 수 있으면 좋겠군.'
전생에는 마법계 언데드들을 여럿 만들어서 네크로폴리스 운영에 참여시켰다.
이번 생에는 더 빠르게 힘을 쌓는 중이니.
과거에 만들었던 체계를 더 빠르게 구축할 수 있겠지?
*
철컹- 철컹-.
화물 운반용 열차가 크게 휘청거린다.
대(對)헌터 병기가 빈 공간에 차곡차곡 쌓이고.
무장을 갖춘 헌터들도 느릿한 걸음으로 열차에 들어갔다.
"아. 씨. 무슨 화물칸에 타."
"길드장 명령이다."
"그 놈의 보안인가. 진짜 귀찮네."
나찰 길드에서 수배한 열차는 본래 바다 너머에서 온 화물들을 내륙으로 나르는 용도이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의 이목을 속이고 병기와 헌터들을 파주까지 보낼 최적의 수단이다.
"재미있는 일 좀 하나 했더니. 사람 힘 빠지게 말이야."
휘릭-.
나찰 길드 행동대장.
6성의 절정에 도달한 헌터, 김미정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요, 브로. 이번 한 번만 참아주라."
"나는 여자거든? 브로라고 하지 마. 길드장."
"그렇게 말하면 상처 받아."
"염병. 내가 알 바야?"
나찰 길드의 마스터.
박진수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이번 일. 분명 재미있을 거야."
"...진짜?"
"천유진이라는 녀석. 꽤 대단하더라고."
아라한 길드에서 철저하게 조사한 유진의 행적.
박진수가 요약해서 이야기해주자, 김미정의 눈가에 흥미가 감돌기 시작했다.
"정말 3성 맞아?"
"처음으로 게이트에 진입한 시기를 고려하면 그럴걸."
"키히. 녀석도 소환수를 다룬다고 했지."
"천유진의 소환수는 쌍검이 아니라 박투 전문이라고 했다."
"그건 좀 아쉽네."
김미정은 힘센 이끼 공급처에서 벌어진 일에 미련을 놓지 못했다.
만약.
유진의 소환수가 박투 대신 쌍검을 다루었다면.
공교롭게도 무인도에서 벌어진 사태와 그의 행적을 연관 지을 수 있게 된다.
'몇 가지 근거를 생략해야 하지만 말이야.'
김미정은 순전히 자신의 감만으로 진실에 접근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쨌든 다녀와. 아라한에서 골치 아파 하는 일이니 재미있을 거다."
박진수는 '재미'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하면서 강조했다.
나찰 길드 3인자이지만.
실질적인 전투력은 박진수 다음으로 꼽히는 헌터.
오직 본인의 흥미 위주로 움직이기에, 중역을 맡기지 못하는 게 유일한 단점인 게 눈앞의 여인이다.
"킷. 다녀올게."
김미정은 히죽거리면서 화물칸에 탑승했다.
100화 전면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