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 10-20

10화 너, 내 연금술 노예가 되어라(2)

"무슨 일을 같이 하잔 거요?"

신준석은 저도 모르게 말을 높였다.

당혹감과 기대, 그리고 미심쩍음이 섞인 눈빛.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가 유진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만약 유진이 중급 힐링 포션을 만드는 걸 보여주지 않았다면 대화가 성립도 되지 않았을 터.

〔경계가 꽤 심하군. 무릇 사내라면 배포가 있어야지.〕

'저 양반이 당한 걸 생각하면 그럴 만해.'

국내 최대 규모 기업인 대성의 연구원.

신준석의 옛 직업이다.

마력 회로 개발.

포션 레시피 연구.

그는 앞에 언급한 분야 외에도 여러 가지 성과를 냈지만.

'뒤통수를 맞았지.'

신준석의 직속 상사가 교묘하게 수를 써서 모든 결과물을 빼갔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늦은 상황.

이의를 제기했지만 마땅한 증거가 없어서 묵살 당했다.

반면, 연구 결과를 가로챈 상사는 빠른 속도로 승진을 거듭했고, 임원급이 되어버렸으니.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직장 내에 아무도 없었다.

운이 좋은 걸까.

자초지종을 알고 회사에 뜻을 잃어가던 무렵, 시스템의 초대를 받아 각성자가 되었다.

-퇴사합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사직서를 제출.

고향으로 내려와서 모아놓은 돈을 전부 털고, 대출까지 껴서 공방을 만든 게 눈앞의 인물이다.

"내가 연금술 지식은 좀 있는데 장비와 스킬이 없거든."

"그러니 당신의 손발이 되어 달라?"

"맞아.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완성된 중급 포션에 손을 뻗자, 유진의 손짓에 따라 붉은 액체가 찰랑거린다.

그 움직임에 맞춰서 좌우로 움직이는 신준석의 눈동자.

'이건 못 참을걸.'

포션이 제 기능을 다하는 걸 두 눈으로 보고 말았다.

하다못해 중급 포션을 완성시킨 촉매와 비율 정도는 알고 싶을 터.

과감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효과는 확실했다.

"내가 얻는 대가는 뭡니까?"

"포션을 완성시킬 레시피. 그 외에도 여러 지식을 알려주마."

"믿을 수 없군. 아무 대가도 없이...."

"큭, 이 양반 봐. 내 지식을 날로 먹으려고 하네."

유진의 조소에 신준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언제 그냥 준다고 했나?"

"손발이 되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향후 내 조언을 받고 만든 아이템에 대한 로열티를 포함하는 거지."

유진은 다시 한번 포션을 흔들었다.

분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신준석이 중얼거렸다.

"그건 시간만 더 있으면 내가 완성시킬 수 있었을 거요."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는 유진의 태도.

신준석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고민되지?'

이미 완성된 포션을 두 눈으로 봤으니 포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신준석을 노ㅇ... 아니, 파트너로 두게 되면 금전 문제에서 여유로워질 뿐 아니라, 번거로운 연금술 작업을 모두 맡길 수 있다.

"비율은 6대 4. 내가 제작에 관여한 것만 4할이다."

"좀 많군요."

"당장 결정하라고는 안 할게."

"시간을 줘서 고맙습니다."

"대신 공방 좀 쓰게 해줘. 나도 할 일이 있거든."

"그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천천히 고민해봐. 며칠은 여기서 머무를 생각이니까."

넌 이미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

폐공장에 자리 잡은 연금술 공방.

유진은 제집에 드나드는 것 마냥 자연스럽게 누비며 재료와 도구를 하나씩 챙겼다.

"저. 혹시."

"다루는 법이나 효능은 아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값은 치르셔야죠."

"...."

〔크하하핫!〕

역시 미래의 대연금술사. 호락호락하지 않군.

"걱정하지 마라. 1달 안에 다 낼 거니."

"근데 언제까지 말씀을 편하게 하실 거요?"

"억울하면 댁도 말 놔. 그럼 공평하잖아. 초면에는 잘만 하더만."

황당하다는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신준석은 이윽고 한숨을 푹 쉬었다.

"됐습니다. 그냥 나만 존대 쓰죠."

싱겁긴.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손. 공방에 있는 재료 중에서 필요한 것을 빠른 속도로 추려냈다.

"암흑혈이랑 구울의 뼈는 없나?

"그건 흑마법 관련 촉매요. 다룰 이유가 없잖아... 요."

"편협한 사고는 연금술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아."

"아, 으으으."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한참을 끙끙거린 신준석.

좁은 시야와 편협한 사고는 연금술에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은 당신이 한 이야기야.

미래의 자신과 싸우고 있는 신준석을 보며 킥, 하고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다크니스 오브까지 해서 주문 부탁하지."

주문을 마치고는 푸른 허브와 마력초, 레드 민트를 4:2:1 비율로 넣고 능숙하게 빻았다.

순식간에 가루가 되는 약초들.

"F급 마석 5개만 융해해서 42% 비율로 만들어줘."

"날 부려먹는 겁니까?"

"싫으면 안 해도 돼."

누가 손해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라고 중얼거리자 신준석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도대체 남의 공방에 불쑥 쳐들어와서 뭐하는 짓인지."

미안하지만 당신도 고생 좀 해줘야겠어.

[융해]는 사물의 형태를 분해해서 정수만 추출하는 연금술 스킬이다.

2성에 올라가서 흑암의 반지로 연금 학파의 지식을 개방했으면 모를까. 현 시점에서는 신준석의 도움이 필수였다.

신준석은 마석 한 꾸러미를 챙겨서 욕조 앞에 섰다.

5미터 크기의 욕조.

mm 단위로 체크가 되어 있는 연금술 전용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는 마석들을 모조리 풀어 넣었다.

[융해를 사용합니다.]

딱딱했던 마석의 표면이 흐물흐물해지더니 소금이 물에 녹듯 확 풀어진다.

은은한 빛을 띠는 액체. 신준석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에 마력을 끌어 모았다.

"42% 맞습니까?"

한 번 시도한 걸로 주문한 비율을 완벽하게 맞춘 신준석.

〔소심한 품성과 다르게 실력은 대단하구나!〕

'대연금술사가 될 녀석이니까.'

〔과연. 회귀자의 특권이란 것을 또 써먹는 것인가.〕

마석 특유의 파장과 물의 양.

그리고 융해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력 손실률.

모든 것을 계산해야 하는데 말이야 쉽지.

숙련된 연금술사도 융해 비율을 맞추는 건 어려워했다.

한편.

신준석도 여러 잎사귀를 절구에 넣고 빻는 유진의 손놀림을 곁눈질했다.

'군더더기가 없는 솜씨다.'

게이트, 혹은 침식지대에서 발견되는 이세계의 식물.

빻을 때 의식하지 않고 힘을 주면 잎사귀에 담긴 진액이 대기에 노출되면서 약초의 마력도 손실된다.

기운이 사라지는 걸 막으려면 절구에 마력을 담아 일정하게 회전시켜야 하는데.

'대충 휘젓는 것 같지만 완벽해.'

신준석은 대성 그룹 연구실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수많은 마법 계 헌터들을 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미세한 오차 하나로 촉매가 상해서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성에서 날고 긴다 하는 전문가들도 유진처럼 대수롭지 않게 약초들을 다루는 마법 계 헌터가 얼마나 있을까.

'나도 스킬 보정을 받아야 비슷하겠지.'

꿀꺽-.

신준석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오. 힘드네."

유진은 가볍게 투덜거리면서 다 빻은 약초 가루들을 그대로 마석 융해액에 투하했다.

보글거리는 융해액.

약간 푸르스름했던 액체가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해방."

흑암의 반지에서 새어나온 희끄무레한 안개.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진한 회색 기류에서 드래고니안 사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히이익!"

"놀라기는. 그냥 시체야."

"그게 더 문제 아닙니까? 사람 시체를 여기에 투기하면 어떻게 해요!"

"댁 눈에는 이게 사람으로 보이나?"

신준석은 욕조에 눕힌 드래고니안 사체를 보더니 아- 하고는 넋 빠진 소리를 흘렸다.

"거참. 싱겁기는."

"언데드는 모두 이렇게 만드는 겁니까?"

"그럼 네크로맨서 못하지. 특별한 시체만 가공하는 거다."

유진은 가볍게 대꾸하곤 융해액에 손을 넣었다.

막 F급 마석을 융해한 덕에 충만하게 느껴지는 마력.

흑암의 반지로 치환시킨 죽음의 정수를 보랏빛으로 물든 액체에 천천히 풀었다.

우웅!

죽음의 정수에 반응한 마력이 서서히 얽혀든다.

"배척해야 할 성질이 어째서...."

옆에서 지켜보던 신준석이 짧게 신음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설명 못 해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해서 말이야.'

죽음의 정수는 바늘이요.

딸려오는 마력은 실이나 마찬가지.

스킬 보정 하나 없이 술식을 죽은 몸뚱이에 새기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강화 술식 - 하급 뼈 강화]

뼈 곳곳에 새겨진 술식이 발동되면서 골밀도가 상승하고.

[저주 술식 - 중급 영혼 결속]

혼백과 시체의 동조를 끌어올려서 언데드의 성능을 한층 상승시키는 주술이 뇌에 새겨진다.

그 외에도 사후경직으로 딱딱해진 근육을 유연하게 풀어주는 술식.

마력 감응도를 올려주는 마법진 등.

강령술과 연금술 모두 달인 레벨에 도달한 유진만이 가능한 마법 세공이었다.

뚝- 뚝-.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바닥을 적셨지만 멈추지 않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식하지 못할 만한 집중력.

융해액이 모두 드래고니안 사체의 몸뚱이에 스며든 뒤에야 "후-" 짧게 한숨을 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아니. 배고프고 힘들어서 눈 돌아갈 것 같아."

"마력을 엮어내는 기예. 정말이지 뭐라 표현할 말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눈 녹듯 사라진 적대감.

으르렁댈 땐 언제고, 불과 1시간도 안 돼서 유진의 기술에 매료되어서 마음의 빗장을 내렸다.

"아. 나 배고프다고."

"다음에 그 기술도 저한테도 알려주십쇼."

제 할 말만 떠드는 신준석.

그래.

이 사람은 원래 이랬지.

연금술에 미친 인간. 대성 같은 대기업에서도 연구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괴짜다.

"할 일이 많아서 배 채우면 바로 일할 거다."

"그럼 빨리 저녁을 준비하죠."

신준석은 부산을 떨며 음식을 챙겨왔다.

*

다음 날.

"주문한 재료 왔습니다."

신준석은 포장재에 담겨진 재료들을 내려놓았다.

"못해도 3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거래처가 있어서요."

이 산골짜기까지 배송을 바로 해줄 만한 인맥이라.

대기업 시절에 만들어놓은 거래처인 듯했다.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지.

"다크니스 오브는 매물이 없어서 조금 걸릴 겁니다."

"얼마나?"

"한 1주일 정도로 예상된다는군요."

"좋아. 당분간은 여기에 있을 거니 상관없겠네."

"대금은 준비해주실 수 있는 거죠?"

"걱정하지 마라."

돈 문제는 이제부터 발품을 팔아봐야지.

신준석이 중급 포션 생산 라인을 본격적으로 운용하면 모를까.

그 전에는 자금문제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 재료도 다 언데드 제작에 들어가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마법 무장을 만들 거다."

꼼꼼히 재료를 살피는 유진의 눈동자.

날 선 그의 동공 위로 만족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이 정도면 쓸 만한 무장이 나오겠어.'

만족스럽게 웃고는 검은 액체, 암흑혈을 신준석에게 내밀었다.

"뭡니까?"

"안 받고 뭐 해. 증류해야지."

"그걸 제가 왜 해야 하는가를 묻는 겁니다."

"내 손발이 되어주기로 했잖아."

"아직 결정 안 했거든요?"

"싫으면 말든지. 우리 거래도 없던 걸로 치고."

"아, 합니다. 한다고요!"

신준석은 투덜거리면서 암흑혈을 증류 장치에 쏟아 넣었다.

약초를 빻는 것 정도는 손재주로 극복이 되지만.

증류 장치는 연금술사 전용 장비라서 신준석의 도움이 필수였다.

'그러면 나머지 공정을 준비해볼까.'

[구울의 뼈]

등급 : 매직

분류 : 잡화

내구도 : 19/20

사령이 깃든 뼈다. 죽음의 기운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먼저 내구도가 멀쩡한 순대로 절반을 추려내고 나머지 뼈에는 영력을 과하게 불어넣었다.

콰드득!

한계 이상의 에너지를 부여한 구울의 뼈가 쩍- 하고 균열이 나더니 수백 조각으로 부서졌다.

유진은 조각들을 한곳에 모아서 선별해둔 구울의 뼈 위에 얹었다.

'우선은 네크로맨시 계통 술식부터.'

뼈 안쪽으로 스며든 영력을 움직여서 내부에 마력 회로를 새긴다.

드래고니안 사체를 강화하는 것과 비교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의 난이도.

사아아악!

구울은 산 자의 피와 살을 탐하는 언데드다.

뼈에 깃든 [탐식]이라는 개념.

멀쩡한 구울의 뼈가 쪼개놓은 하얀 뼛조각들을 흡수하면서 더 견고해지고 크기도 커졌다.

'형태까지도 변화시킨다.'

강화를 넘어 재구축의 영역.

뼈를 쪼갠 건 흡수 과정에 개입하여 마법 무장에 걸맞은 모습으로 바꾸기 위함이었다.

[가공된 구울의 뼈]

등급 : 매직

분류 : 잡화

내구도 : 95/100

사령이 깃든 뼈를 가공하여 마법 무장으로 가공했습니다. 죽음의 정수에 반응합니다.

뾰족해진 구울의 뼈. 말뚝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했다.

아직은 시스템 분류 상 '잡화'인 건가.

1차 작업은 끝났고.

"그쪽은 어때?"

"끝났습니다. 어둠의 정수와 암흑물질로 나뉘더군요."

"훌륭하군. 그럼 여기에 강화 마법도 새겨줘."

"그새 뼈를 가공한 겁니까?"

신준석이 눈을 반짝이면서 구울의 뼈를 훑어보았다.

"영력으로 새긴 마력 회로라. 귀하군요."

"강화 회로의 매개체는 암흑혈로 해주고. 요령은 같을 거야."

"알겠습니다."

[연금술 - 하급 투영(透映)]

[투영 술식 - 강화 회로 작성]

암흑혈로 새긴 마력 회로.

구울의 뼈가 시커멓게 물들더니, 우웅- 하고 진동음을 냈다.

강화 회로를 추가하면서 네크로맨서 전용 마법 무장이 완성된 것이다.

[저주받은 이빨]

등급 : 레어

분류 : 마법 무장

제한 : 네크로맨서

내구도 : 300/300

구울의 뼈를 암흑물질과 죽음의 정수로 가공하여 만든 마법 무장입니다. 투척과 방어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투척 Lv 23

*견고함 Lv 15

"내, 내가 레어 등급을 완성시키다니."

"레어가 대순가."

"다른 것도 아니고 대성 그룹의 정보에도 없는 네크로맨서 전용 아이템이지 않습니까!"

신준석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궁금하겠지.

중급 포션의 레시피나.

현 시점에 알려지지 않은 네크로맨서 전용 아이템 제작 방법 등.

'궁금하면 내 손을 잡아라.'

유진은 본 컨트롤로 저주받은 이빨을 조종했다.

둥실 떠오른 마법 무장.

'영력 손실은 7.2% 정도인가.'

레어 등급 무장치고는 훌륭하다.

원격으로 조종하면 그 과정에서 힘이 손실되기 마련.

고대의 정원에서 원념의 지팡이를 공격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땐 새어나가는 힘이 상당했다.

유진의 공정이 그만큼 완벽에 가까웠다는 사실.

시험 삼아 저주받은 이빨을 공방 밖에 있는 큼지막한 바위에 쏘아 보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수 갈래로 쪼개진 바위.

"뭘 한 겁니까?"

"위력 테스트. 이 정도면 1성급 게이트 공략할 때 쓸 만하겠어."

"1성이라니. 당신, 설마 1성입니까?"

"각성한 지 1주도 안 됐으니까. 성위야 금방 올라가겠지."

태연한 투로 말하는 유진.

신준석은 아연실색했다.

방금 전에 보여준 위력만 놓고 보면 1성이 아니라 2성급 헌터도 제압 가능한 수준.

대성에서 일할 때 수많은 헌터들을 만나봤고, 개중에는 랭커급 헌터도 포함되어 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 괴물이야.'

꿀꺽-.

신준석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11화 접경지역으로(1)

마법 무장을 완성시켰지만 해야 할 일은 아직 남아있다.

"융해액 비율 좀 맞춰줘."

"저 시체에 계속 붓는 겁니까?"

"하루 더 숙성시켜야 해."

"꽤 공들이시는 것 같은데 보통 녀석이 아닌 모양입니다."

"마력 융해액을 술식 발동의 원료로 쓰려면 듬뿍 머금어야 하거든."

엘드리치 드래곤 제작의 핵심은 용족의 정수를 손실 없이 담아내는 것.

놈을 쓰러트리자마자 흑암의 반지에 보관한 것도 힘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기 위함이다.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술식을 구축하는 것조차 어려워.'

본래 엘드리치 드래곤은 살아있는 드래곤이 스스로 혼백과 육체를 분리, 종족의 정수를 봉인구에 담아둔다.

유진이 시도한 방법은 용족의 정수와 몸통을 가공, 다른 영혼을 깃들게 하는 변칙적인 수법.

성공 확률이 매우 낮은데다, 인프라도 매우 열약했다.

〔계약자의 수준으로 완성할 수 있겠나?〕

'여기까지는 계산대로다.'

신준석이라는 유능한 연금술사가 도와주었기에, 드래고니안 사체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남은 건 술자인 유진의 몫.

하루를 더 숙성시킨 후, 드래고니안 사체 위에 손을 얹었다.

등 뒤에서 정신 사납게 오락가락거리는 신준석을 한 번 흘겨보고는.

"볼 거면 얌전히 봐라. 그게 더 신경 쓰인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누가 본다고 해서 닳는 것도 아니고."

"비술은 원래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법이지 않습니까."

"댁 같은 연금술사는 따라하지도 못해."

영력을 다루는 건 네크로맨서만 가능하다.

그게 아니어도.

'조만간 동업자가 될 사이에 이 정도 서비스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웃음기를 삼킨 유진은 드래고니안 사체를 관조했다.

뼈, 근육, 그리고 세포 하나하나까지.

마력 융해액이 스며들어서 마치 산 자와도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상태는 최상이고.'

스스스슷-!

흑암의 반지에서 새어나온 기운이 유진의 눈가를 물들인다.

물질 너머의 세계를 보게 해주는 눈동자.

영안(靈眼)이다.

죽음과 영혼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간섭하는 힘을 부여하는 네크로맨서의 능력.

'정식 스킬은 아니고 임시방편이지만.'

뻑뻑해진 안구.

눈이 시리고 초점도 흐려진다.

현 시점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육체에 담아두었으니.

'오래 사용하진 못해.'

눈동자가 아니어도, 쥐꼬리만 한 마력을 모두 소모해도 60초가 고작이다.

유진의 시선이 드래고니안 사체의 가슴팍을 향한다.

멈춰버린 심장.

그 안에 깃든 용족의 정수를 영안으로 제어했다.

[저주 술식 - 소울게인]

영혼의 본질을 죽은 몸뚱이에 잡아두는 술식.

본래 용도는 혼백을 특정 사물이나 장소에 깃들게 하는 저주다.

용족의 정수로 새기는 저주 술식.

'스킬이 없어도, 회로를 새기는 건 할 수 있으니까.'

네크로맨서의 정점에 올랐던 만큼 어지간한 저주 술식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

순식간에 완성된 술식.

지난 3일 동안 드래고니안 사체가 빨아들인 마력 융해액이 술식에 반응하여 동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온몸에 스며들었던 마력이 가슴팍으로 향하고.

두근- 두근-.

멈췄어야 할 심장이 다시 움직였다.

"히이익!"

새된 비명과 함께 뒷걸음치는 신준석.

"평범한 시체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원."

"심장 뛰는 소리가 나는데 왜 시체입니까?"

"좀 특수한 녀석이라서 그렇다."

약식으로 제작한 엘드리치 드래곤.

진정한 의미의 불사룡에 비해서는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재이나.

이 몸뚱이를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영혼과.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유진의 강령술이라면, 불사룡이라는 호칭에 어울릴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후, 더럽게 힘드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유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영력 고갈에 영안의 후유증까지.

혹사당한 눈가에서 핏줄이 여럿 터진 여파로 붉은 피가 아래로 흘렀다.

거참.

피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는걸.�

〔계약자. 눈은 괜찮느냐?〕

'아니. 전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살 만한가 보구나.〕

'이승인지 저승인지 구분할 정도는 돼.'

이럴 줄 알았으면 라이프 드레인으로 마력을 회복하게 미리 생명력을 흡수해놓았을 걸 그랬나.

후회는 만년지각생이라고.

한발 늦게 떠오른 아이디어에 혀를 차고 있을 때, 신준석이 수건을 내밀었다.

"닦으세요."

"남의 눈에서 피가 나오는데 아무렇지도 않나?"

"피 좀 난다고 사람 안 죽습니다. 그것보다 생각할 게 얼마나 많았는데요."

신준석은 유진의 옆에 덩달아 주저앉았다.

"첫 날에 말씀하신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

피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꽤 황당하실 거라 생각되지만 이해해주십쇼. 유진 님의 솜씨를 보고 확신한 거라서 말이죠."

그래.

연금술 말고는 관심 없는 괴짜 천재.

신준석이라면 그럴 만했다.

유진은 곧바로 비율 문제를 재차 언급했다.

"6대 4로 괜찮겠어?"

"크긴 해도 감안할 수 있는 금액입니다."

"오. 통이 큰데."

"대기업 오너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있다."

3일 전에 완성시킨 중급 포션을 쥔 신준석이 확신 어린 어투로 말을 이었다.

"당신과 함께하면 시간을 살 수 있는데 해볼 만하지 않나요?"

"그 선택. 후회하지 않을 거다."

노ㅇ... 아니지, 전속 연금술사도 생겼겠다.

힘들게 만든 엘드리치 드래곤의 축을 담당할 혼백만 찾으면 되겠군.

〔저자도 평범하지는 않구나.〕

'괴짜지만 실력은 확실해.'

〔누가 누굴 보고 괴짜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군.〕

크로노스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체 넘어간 유진.

어느 정도 몸에 힘이 들어오자, 곧바로 휴대전화를 집었다.

[뽀시래기 강민호]

뚜- 뚜-.

착신 소리가 나자마자 유진은 대뜸 입술을 떼었다.

"일 하나 더 할 생각 없나?"

*

신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친구들은 뭡니까?"

유진에 이어 파주 공방에 들이닥친 방문자들.

"내 친구들. 당분간 여기서 머무를 거야."

"헤헤. 잘 부탁드립니다."

뽀시래기 팀을 훑어보던 신준석은 이내 새빨개진 얼굴로.

"여긴 공방이지. 숙소가 아니야!!!"

목소리에 핏대가 보일 만큼 크게 소리쳤다.

거참.

젊은 사람이 흥분하기는.

"방 좀 남잖아."

"아니. 그거야 맞는 말이지만요."

"작업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다. 잠만 잘 테니."

"그럼 부, 아니지. 지인들은 파주에 왜 온 겁니까. 접경지역 관광이라도 하시게요?"

"오. 정답. 연금술사는 다들 이렇게 감이 좋은 건가."

하아- 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접경지역.

과거 한반도를 가르는 영역, DMZ를 일컫는 단어다.

"동업자님.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계십니까?"

"걱정 마. 위험한 짓은 안 할 거다."

"그 친구분들 얼굴 하얗게 질린 건 안 보이시나 봅니다."

"애들이 좀 허약해서 그래."

"비명횡사나 하지 마십쇼. 동업자님 죽으면 포션 수입은 제가 다 먹을 겁니다."

신준석은 퉁명스레 대꾸하곤 공방으로 돌아갔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양반이라니까.

"짐 풀고 바로 출발한다. 3일 정도는 머무를 예정이니."

"형님. 근데 접경지는 무슨 일로...."

"추모하러 간다."

"예?"

당황한 듯 반사적으로 물어보는 강민호.

"가 보면 알아."

유진은 깊게 설명하지 않았다.

공방에서 5킬로미터 정도 북쪽으로 향하니 도로를 통으로 막은 관문 하나가 나타났다.

양 옆으로 빼곡하게 설치된 철조망.

접경지에 가려면 도로 위에 설치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도 헌터가 많네요."

"몬스터가 있는 곳은 어디나 그렇잖나?"

"그야 맞습니다만."

"접경지도 사람 오가는 곳이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유진은 긴장한 뽀시래기 팀원들을 보며 피식 웃곤 관문으로 앞장섰다.

"헌터십니까?"

"네. 뽀시래기 팀 외에 한...."

"같은 팀이다."

유진은 재빠르게 강민호의 말을 정정했다.

경비 중인 군인은 전자기기로 뽀시래기 팀을 찾아보고는.

"확인됐습니다. 일행이 한 분이 느셨군요?"

"아. 최근에 영입한 헌터거든요."

강민호 뒤에 선 뽀시래기 팀원들이 어설프게 웃었다.

구구구구궁-!

쇠로 만들어진 문이 좌우로 밀리면서 차량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틈이 생겼다.

"행운을 빕니다."

유진은 문틈 사이로 발을 망설임 없이 내디뎠다.

몬스터의 손에 떨어진 버려진 땅.

접경지역을 향해.

*

무성하게 자란 수풀.

이계의 식물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간다.

바짝 긴장한 채 주위를 살피는 뽀시래기 팀.

"좀 큰 게이트라고 생각해라."

"그래도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요."

"저 근무했던 곳도 이런 환경이어서 더 마음이 안 놓임다."

"적당히 긴장하란 의미였지. 마음을 확 놓으라고까지는 안 했는데?"

아- 짧게 탄식하는 이성민을 보면서 낄낄대며 웃었다.

진입 구간은 군 소속 헌터들과 정부 에이전트가 주기적으로 몬스터를 소탕해서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이쯤이었지?'

기억을 되짚으며 오솔길을 걷던 유진이 돌연 길에서 벗어나 수풀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사박- 사박-.

길에서 벗어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일행 외의 발소리가 들리고.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쇄애액!

허리춤에 매여 있던 [저주받은 이빨] 하나가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풀숲을 가르며 쏘아졌다.

평범한 뼈보다 수배나 빠른 속도.

투척 증가 보너스가 붙어서 훨씬 기민했다.

"쿠륵!"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수풀 위로 모습을 드러낸 근육질의 초록 괴물.

강민영이 비명을 질렀다.

"히익. 오크가 나왔어요!"

"2성급 괴물이라니. 위험하지 말임다!"

"형님. 오크는 저희 셋이 모두 덤벼도 동수를 이룰까 하는 괴물입니다."

이 자식들.

믿음이 부족하구나.

고작 오크 따위한테 겁먹을 정도였으면 접경지역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진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저주받은 이빨을 조종했다.

"쿠륵, 쿠륵!"

부풀어 오른 오크의 팔 근육.

무투계 헌터인 강민호의 허벅지보다 굵은 팔뚝이 드득- 소리를 냈다.

일격으로 바위를 쪼갤 만한 괴력.

빠르게 날아드는 [저주받은 이빨]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손에 쥔 글레이브를 뒤로 젖혔다.

"야구라도 하려고?"

"쿠륵!"

저주받은 이빨이 날아드는 궤도를 정확하게 겨눈 글레이브.

녹슨 칼날이 검은 송곳 끝을 가격하려는 순간.

'그렇게는 안 되지.'

쇄액!

글레이브가 휘둘러지는 궤적에서 살짝 빗겨나간 마법 무장.

한 번 사출했어도 본 컨트롤의 제어를 받고 있으니 궤도 수정쯤은 어렵지 않았다.

소소한 마력 소모와 집중력이 필요할 뿐.

아슬아슬하게 전진 방향을 틀면서 오크가 대응할 시간을 빼앗았다.

푸욱!

살갗을 가르고 단단한 근육조차 찢어발긴 저주받은 이빨.

녹색 피가 바닥에 뚝뚝 흘러내린다.

"일격으로 오크에게 치명상을 입히다니!"

"대단하심다!"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심장을 노렸는데 제법이야."

충돌 직전에 극적으로 몸을 틀어낸 오크.

오크의 종족 특성인 [전투속행]이 발동하면서 고통으로 인한 경직도 무시하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쿠륵!"

전의를 불태운 오크가 힘차게 지면을 박차면서 유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형님. 제가 시간을 끌 테니 추가타 부탁드립니다."

방패를 어깨에 바짝 댄 강민호.

유진 앞에 서고는 다리에 힘을 주어서 굳건하게 버텼다.

'성취가 낮았을 때에도 대담했군.'

전생에서 본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겠지.

스스슷!

저주받은 이빨 넷이 추가로 떠오르고.

고통을 인내하며 전력으로 돌진하던 오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왜. 뭐가 잘 안 돼?"

쇄도하는 검은 송곳에 난도질당한 초록 피부의 괴물.

종족 특성도 숨이 붙어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지.

한계를 넘어선 충격에도 움직이는 건 언데드나 가능한 일이다.

그래.

죽음을 거스른 존재, 언데드라면 말이야.

"내 부름에 답하라."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몸통 여기저기에 구멍이 난 오크가 비적대면서 일어났다.

빠르게 멎어버린 피.

이미 나버린 상처는 그대로지만 전투력 손실이 크진 않았다.

[좀비의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그, 어어."

반쯤 고개를 뒤로 꺾은 오크 좀비가 비틀거리면서 다가온다.

아.

라이프 드레인으로 생기를 빼앗는 걸 잊어버렸군.

"뭐, 오크는 많으니까."

유진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니 강민호가 화들짝 놀랐다.

"형님. 추모하러 오신 거 아닌가요?"

"어. 근데 추모할 고인께서 머무는 곳이 오크 군락에 있다."

"허허허."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망연자실한 웃음소리.

유진은 강민호를 보며 씩 웃었다.

"너희도 좋아할 줄 알았다."

돈 많이 벌면 좋잖아.

그렇지?

12화 접경지역으로(2)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10입니다.]

지면에 고꾸라진 오크.

풍선처럼 한껏 부풀어 올랐던 근육이 쪼그라들었다.

'역시 오크는 생명력도 남달라.'

고블린보다 몇 배나 되는 생기의 양.

흡수한 생기는 곧바로 육체 강화에 소모했다.

몇 시간 동안 쉼 없이 사냥을 한 덕에 경험치도 많이 획득했고.

'접경지역은 게이트보다 몬스터 출몰 빈도가 높지.'

몬스터가 어떻게 출몰하는가.

수많은 가설 중에서 제일 신빙성 있는 건 마력 분포다.

"곧 저녁이니 캠프를 구축하겠습니다."

강민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팀원들과 함께 야영을 준비했다.

〔부하 하나는 잘 거뒀구나.〕

'그렇지?'

아무렴.

당첨 100% 확률의 복권이라서 미리 챙겨둔 건데.

잡무에도 능하니 더 좋았다.

"형님. 여기서 얼마나 머무를 예정인지 알 수 있습니까?"

"길지는 않을 거다. 3일 정도."

"전 오크 군락으로 바로 가실 줄 알았습니다."

"그랬다간 놈들 식삿거리 되기 좋지."

유진의 수준으로는 오크 군락과 정면승부가 불가능했다.

군락 위치는 알고 있다.

주기적으로 군락 주위를 배회하는 오크들을 사냥해서 전력을 소모시켜 놔야 정면으로 붙어볼 만하다.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긴 한데.

〔짐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게냐?〕

'보면 알아.'

유진은 뒷말을 삼켰다.

야영 준비를 마친 뽀시래기 팀은 갑자기 제비를 뽑았다.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

불쑥 다가간 유진이 물어보았다.

"너희. 뭐 하는 거냐?"

"불침번을 정하는 중임다."

무엇을 하나 했더니만.

자신 있게 외치는 이성민을 보며 쯔쯧- 유진이 혀를 찼다.

"뭘 그렇게 하나 했더니."

"제가 접경지역 인근에서 복무해서 잘 암다. 경계는 저희가 설 테니 형님은 쉬시면 됨다."

"됐다. 경계는 하수인들한테 맡기면 돼."

야영지를 감싼 좀비 20마리.

유진의 허락 없인 그 누구도 들여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강민호가 아- 하고 짧게 탄식하더니.

"저희 몫이 없네요."

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걱정 마라.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잘해주고 있어."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유진은 강민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간이의자에 걸터앉았다.

'상태창.'

마음속으로 단어를 외치는 순간.

이름 - 천유진

성별 - 남

레벨 - 10(1성)

◎스테이터스

*힘 : 7 → 37.3

*민첩 : 6 → 30.5

*체력 : 7 → 32.4

*맷집 : 5 → 25.9

*성력 : 10 → 70.2

◎특성

▷클리어 마인드(Clear Mind)

▷백야

◎스킬

▷본 컨트롤

▷레이즈 언데드

이틀 동안 몬스터를 사냥한 성과가 한 눈에 들어왔다.

허-.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스펙.

'이게 각성 이틀 차라고 하면 누구도 안 믿을 거야.'

생명력을 흡수해서 얻은 능력치가 무려 116이나 된다.

레벨 업 보너스가 45인 걸 감안하면 두 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수치.

일반적인 헌터가 능력치를 올리는 방법은 몬스터를 사냥해서 레벨을 올리는 것뿐이다.

전생의 유진조차 이런 식으로 신체능력을 강화하지는 못했으니.

흐흐.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능력치의 배분 폭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빼곤 좋네.'

대폭 상승한 육체능력.

반면에 성력(영력) 스탯은 증가 폭이 매우 적었다.

첫 사냥에서 고블린 주술사의 생명력을 갈취했을 때 빼곤 미약하게 올라가는 성력 스탯.

몬스터의 생명력에 따라 상승 포인트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신체능력도 강해진 만큼 활용방법을 찾아야겠어.'

회귀 전에 몇 가지 잡기술을 배웠지만, 주력으로 활용할 정도까진 아니다.

쓸 수 있는 건 모두 사용해봐야지.

유진은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씰룩였다.

'그나저나 밤이 되기 전에 10레벨을 겨우 달성했군.'

후-.

길게 심호흡을 한 후, 흑암의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지식의 도서관을 사용합니다.]

[선대 죽음의 주인이 남겨놓은 지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강령 분야의 지식을 열람 중입니다.]

10레벨이 됨으로써 더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각인할 수 있다.

'당장 가능한 건 강령 학파뿐이지만.'

2성으로 올라가면 다른 학파의 지식도 얻을 수 있다.

더 높은 위계에 오를수록 접근할 수 있는 분야가 늘어난다는 사실!

[강령 학파의 지식이 사용자의 혼에 새겨집니다.]

[영혼의 격이 낮습니다. 주문 일부가 전승됩니다.]

"씨ㅂ...."

내 이럴 줄 알았다.

유진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서 비명이 새어나가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과연. 반지에서 강한 힘이 느껴진 게, 이를 위함이었구나.〕

흥미로운 듯이 주억거리는 크로노스.

누군 뒈질 것처럼 아픈데.

유진은 이를 악문 채 통증을 버텼다.

[강령 학파의 지식이 일부 이전되었습니다.]

[사용자의 격이 늘어나면 나머지 지식들도 취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상기시켜주니 눈물 나게 고맙다. 이 자식아.

'나도 안다고.'

▷본 아머

분류 : 마법

등급 : C

뼈를 매개체 삼아 갑옷 형태로 조형합니다.

▷살점지배

분류 : 마법

등급 : C

망자의 사체에 붙은 살점을 의지대로 조종합니다.

지식 전이의 후유증으로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보람은 있었다.

'날이 밝는 대로 하수인들의 전력을 강화시켜야겠군.'

흐흐.

유진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

다음 날.

뽀시래기 팀은 익숙한 듯이 캠핑 도구를 정리했다.

"야영 경험이 좀 있나 봐?"

"하하핫. 전역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건 어렵지 않슴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제대로인데."

"제 취미가 캠핑임다."

궁금하지 않았던 이성민의 취미를 알게 되었다.

어쩐지.

야영 장비 세팅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라.

덕분에 편하게 쉬었군.

"오늘은 더 바쁠 테니 각오 좀 해둬라."

"알겠습니다. 형님!"

기합이 바짝 든 뽀시래기 팀원들.

오크 좀비들을 앞세운 채 접경지 인근을 돌아다녔다.

목적지인 '잊힌 영웅'의 혼이 머무는 곳.

그 위치에 자리 잡은 오크 군락의 전력을 소모시킬 겸.

새로 얻은 주문으로 하수인들을 강화하려면 쉴 틈이 없었다.

"쿠르륵?"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순찰 중이던 오크 무리와 조우.

"그어어어어."

오크 좀비들이 빛이 꺼진 동공을 기괴하게 움직이며 생전의 동족에게 달려든다.

특유의 시체 냄새를 맡고도 당황하지 않는 오크 전사들.

서거걱- 글레이브 칼날이 오크 좀비의 팔뚝이나 몸통에 박히고.

"그르르륵."

"쿠륵? 뭐냐. 이 녀석. 단단하다."

사후경직으로 굳어서 더 단단해진 근육이 글레이브를 붙든다.

일격에 베지 못하면 좀비에게 발이 묶이는 상황.

오크 몇은 힘을 더 주어서 글레이브를 회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어어. 먹는다."

너무 안쪽으로 파고든 오크들은 좀비들에게 붙들려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좀비들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첫 교전에서 좀비 특유의 굳은 몸뚱이로 오크들의 발을 묶고.

일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빙 돌아가서 오크 전사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강민호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경외심.

'형님은 전장의 흐름을 완벽하게 읽고 계신다.'

오크 좀비는 근육이 더 많아서 고블린 소재로 만든 언데드보다 느렸다.

파괴력이 더 강하지만, 무기를 다루지 못해서 생전의 오크에 비해 전투력도 떨어지는 편.

제작 효율을 끌어올려서 모자란 스펙을 채워놓았어도.

부족한 기동력을 완전히 메우진 못했다.

'교전 초기에 오크들의 발을 붙들면서 포위망까지 구축하시다니.'

전장을 완벽하게 휘어잡는 용병술.

강민호는 거듭 나오는 감탄을 속으로 삼켰다.

"쿠르...."

오크 사체에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하는 유진.

뽀시래기 팀은 생기를 빼앗은 오크 사체에서 마석을 채집했다.

물 흐르듯 진행되는 과정.

"형님. 작업은 다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바로 이동하십니까?"

"아. 할 일이 있으니 조금 쉬고들 있어."

유진은 널브러진 오크 사체를 향해 다가갔다.

사역 가능한 숫자는 20구.

언데드를 추가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각 개체의 능력을 끌어올리면 되지.'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구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오크 사체 다섯 구가 크게 들썩거린다.

뼈와 분리된 망자의 살점.

원래의 용도는 혼란한 전장에서 상대의 발을 잡는 보조 술식이지만, 유진은 조금 다르게 운용했다.

'본 아머를 사용하려면 뼈가 필요하다.'

언제 사체의 뼈와 살을 일일이 분리하고 있겠나?

[살점지배] 한 번이면 깔끔하게 발골 할 수 있는 것을.

근육과 살가죽이 모두 걷히면서 슬라임처럼 한 덩어리로 뭉치고.

오크 사체는 금세 앙상한 뼈만 남았다.

'저 살점들도 다 쓸모가 있다.'

유진이 손을 휘젓자, 검붉은 살점 덩어리 일부가 좀비한테 들러붙었다.

안 그래도 한 덩치 하던 오크의 몸뚱이가 달라붙은 살점 덕에 1.3배 정도 커졌고.

[본 아머를 사용합니다.]

하얀 뼈가 그 위에 달라붙었다.

'살점으로 뼈와 좀비의 몸뚱이를 엮어낸다.'

철컥! 철컥!

달라붙은 오크의 살점은 좀비와 뼈를 이어주는 마력 회로가 되고.

이음새 부분도 꽉 채워주면서 빈틈을 모조리 메웠다.

하얀 뼈가 동조화되면서 시커멓게 물들고.

우웅-!

본 아머에 스며든 영력이 좀비의 근원에 반응해서 연쇄작용을 일으켰으니.

"그르우아아아!!"

뼈로 된 갑주로 완전무장을 마친 좀비가 괴성을 터트렸다.

[해당 개체가 뼈 갑주와 완벽하게 융합하여 새로운 언데드, 아머드 좀비로 탄생했습니다.]

[레이즈 언데드의 하위 스킬로 아머드 좀비 제작이 추가됩니다.]

푸른 안광이 회색으로 물든 동공 위에 아른거린다.

덕지덕지 붙여놓은 살점.

본래는 [살점지배]로 풀처럼 붙여놓은 게 고작이었으나, 좀비와 공명하면서 힘을 증대시켰다.

'그래. 이래야 개조할 맛이 나지 않겠어?'

유진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아머드 좀비]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127(+50) / 민첩 : 85(-15) / 체력 : 120(+35) / 맷집 : 132(+100) / 마력 : 50(+22)

◎특성

▷불사의 존재[C+] / 용력[C+]

◎스킬

▷맹렬한 돌진[D] / 철벽[D] / 배쉬[D]

좀비의 원형인 오크보다 3배가량 높은 스펙.

살점으로 몸뚱이를 불리고.

뼈와 좀비의 마력을 공명시켜서 신체능력과 지성까지도 강화했다.

전신을 뒤덮은 뼈 갑주 때문에 시독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압도적으로 강해진 스펙이 그 흠을 완전히 가렸다.

'좀비 한 기를 업그레이드 하려면 오크 사체 세 구가 필요한가.'

살점지배로 더 커진 오크 사체를 뼈로 모두 감싸는 일이다.

갑주를 형성할 면적이 넓어지니 매개체인 뼈가 더 많이 들어가겠지?

유진이 한 번에 제어 가능한 좀비는 모두 20구.

군락 주위를 순찰하는 오크야 많으니.

목표했던 기간 내에 하수인을 전부 아머드 좀비로 개조할 수 있겠어.

"저, 형님.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뭐지?"

"혹시 좀비만 사역하시는 겁니까?"

"아. 스켈레톤 같은 건 안 만드냐는 말이군."

스켈레톤.

좀비와 함께 언데드를 대표하는 괴물이다.

"보디빌더랑 빼빼 마른 사람. 누가 더 힘이 셀까?"

"당연히 보디빌더겠죠."

"마찬가지다. 스켈레톤은 민첩하고 빠를뿐더러 화살에 저항력도 있지. 대신 약해."

질량 = 힘.

마력이라는 요소가 더해지면 셈법이 복잡해지지만, 하급 언데드한테 그 정도 계산식이 들어갈 것까지야.

장기간 사냥할 일이 아니라면 각 개체에 그만큼 공들일 필요도 없다.

"만들려고 하면 어렵진 않다만. 그럴 필요야 없지."

스켈레톤 제작은 간단하다.

방금 전처럼 살점이 모두 드러난 뼈에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하면 끝.

[레이즈 언데드] 주문은 망자의 상태를 반영해서 좀비나 스켈레톤을 제작하기에, 살점이 떨어져 나간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면 된다.

"그러면 스켈레톤을 제작해도 장점이 없어 보이는데요."

"오래 유지하려면 스켈레톤이 낫긴 해."

"왜 그렇습니까?"

"살점이 썩잖냐. 염도 제대로 안 했는데."

"아. 그렇군요."

수긍하는 강민호.

유진은 피식 웃은 후 아머드 좀비를 앞장세웠다.

13화 접경지역으로(3)

"그루아아!"

"쿠르륵!"

아머드 좀비와 정면으로 힘겨루기를 시도한 오크.

두 괴물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얽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뿌득, 오크의 손이 기괴한 각도로 틀어졌다.

핏발 선 두 눈을 부라리면서 팔을 회수하려는 오크.

아머드 좀비는 그 손을 놓아주지 않고 도리어 안쪽으로 당기면서 오크의 자세를 흩트렸다.

"쿠륵! 괴물아. 죽어라!"

등 뒤를 점한 오크가 동료를 구할 겸 손에 쥔 글레이브를 전력으로 휘둘렀고.

태애앵!

철로 벼려낸 곡도의 날이 무뎌졌지만 뼈 갑주엔 흠집 조금 난 게 전부였다.

"쓸 만하군."

태연하게 감상평을 내뱉는 유진.

후위에 있는 강민호가 아연실색했다.

"강화하신 좀비. 2성 헌터랑 싸워도 압도하겠는데요?"

"내가 고생해서 만든 놈이다. 당연히 그 정도는 되어야지."

타고난 전투 종족으로 악명이 자자한 오크 무리가 뼈 갑주를 두른 좀비 하나한테 휘둘렸다.

"쿠르르륵!"

오크 한 마리가 혼신의 힘을 담아 내려친 일격.

공교롭게도 아까 검격을 허용한 부위였고, 누적된 충격에 쩌적- 하고 뼈가 조금 갈라졌다.

"그아아아?"

대가는 비쌌다.

뼈 갑주가 깨어진 충격으로 고개를 돌린 아머드 좀비가 오른손을 뻗었고.

우악스러운 손길에 저항했지만 아머드 좀비가 힘을 주니 머리통이 순식간에 터져 버렸다.

〔품위가 없어. 꼭 제 주인을 닮았구나.〕

'성질머리 건든 놈이 잘못한 거지.'

오크 무리 대부분이 쓰러지자, 남은 한 마리가 등을 돌려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감탄하는 뽀시래기 팀원들.

"오크가 도망 안 간다고 누가 그러던데. 완전 뻥이잖아."

"하긴. 저라도 도망쳤을 검다."

"도망은 무슨. 그 자리에서 지렸을걸?"

"민영아. 말 좀 순하게 하라니까."

"왜. 내가 못할 말 했어?"

어지간한 공격에는 꿈쩍도 안 하고 잡히는 순간 팔 하나를 내줘야 하는 괴력의 소유자.

저걸 상대한다는 건 불합리함의 극치였다.

"형님. 오크를 그냥 보내주실 겁니까? 좀비의 기동력으로는 못 잡을 겁니다."

"기다려 봐."

[맹렬한 돌진]

있는 힘껏 도약한 아머드 좀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는 풋볼 선수처럼 추켜세운 어깨로 오크를 들이받았다.

"컥!"

마른 비명을 토하면서 나뒹구는 오크. 폭발적인 힘에 노출된 등이 함몰되었고, 가슴팍은 뼈가 튀어나올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그루아아!"

아머드 오크가 발을 들어서 숨통을 끊으려고 할 때.

"그만."

유진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오크의 머리 위를 막 짓누르려던 발을 거두었다.

'공격성이 증대되었군.'

본 아머와 살점지배로 개조한 아머드 좀비는 흉포함이 훨씬 강해졌다.

불어넣은 영력이 늘어나자 망자 특유의 산 자에 대한 증오심도 강해진 것이다.

〔제어하지 못하면 하수인에게 당할 수도 있겠어.〕

'내가 하수인 지배도 못해서 죽을 것 같아?'

네크로맨서 중 일부는 자신의 역량을 가늠하지 못하고 상급 언데드를 제작했다가 사망하기도 했으니.

유진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오히려 좋아.'

서슬 퍼런 아머드 좀비의 살기를 보라.

투쟁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오크도 저 흉포한 놈을 보더니 도망치지 않았던가!

〔쯔쯧. 허무하게 죽지나 말거라.〕

크로노스의 한탄을 무시하고 영력을 끌어 올렸다.

[본 아머를 사용합니다.]

손상된 아머드 좀비의 갑주도 영력을 부여하면 흠집 하나 남지 않고 복원되니.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네."

뼈 갑주가 회복되는 것을 본 강민호가 감탄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

접경지역에 들어온 지 3일째 되는 날.

"다들 각오는 되었나?"

유진의 질문에 뽀시래기 팀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 군락.

게이트로 치면 2성급에서도 끝자락에 해당하는 위험한 곳이다.

파주 북쪽이 접경지역인 것을 감안하면.

'3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셈.'

이틀 동안 군락 주변을 돌면서 오크들의 수를 줄여주었고.

[살점지배]와 [본 아머]를 응용.

지식의 도서관에 기록되지 않은 망자인 [아머드 좀비]를 제작했다.

그 과정에서 레벨을 3 더 올리는 건 덤.

아쉬운 건 오크의 생명력을 흡수해도 더 이상 능력치가 상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종에게서 흡수 가능한 생체물질을 모두 획득했습니다.]

[능력치가 더 증가하지 않습니다.]

'뭐, 한계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했지.'

유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사냥 중에 획득한 잔여 생명력은 치유용으로 보관해두었고.

혹시라도 아군이 부상을 입으면 곧바로 회복시켜줄 수 있게 말이야.

'신관 클래스는 그게 본업인데.'

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신성 주문이 추가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만신전에 가야 부여할 수 있다.〕

무능한 성좌 같으니라고.

접경지에서 볼 일만 끝나면 만신전에 들려야겠다.

"너희 몸은 알아서 지켜라."

"저희도 나름 헌터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치유 수단이 있다곤 하나, 라이프 드레인을 회복용으로 사용해보지는 않았다.

팔이나 다리가 날아가는 중상까지도 회복이 될지는 모르니까.

이런 상황에서 테스트해보고 싶진 않거든.

"전진해라."

"그아!"

아머드 좀비 20구가 앞으로 나아간다.

강가 옆에 자리 잡은 오크 군락.

은, 엄폐할 바위나 큰 나무가 없어서 아머드 좀비 무리가 접근하는 모습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쿠르륵. 적이다!"

뎅- 뎅-.

망루에서 종이 울리고.

군락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오크들이 무장을 갖춘 채 입구 근처로 모이기 시작한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허공을 가르면서 쏘아진 저주받은 이빨.

종을 울리고 있던 오크의 목덜미에 푹, 박히면서 소리가 잦아들었다.

"시끄럽게 짖지 마라."

유진이 저주받은 이빨을 회수하려는 찰나.

파파파팟!

화살 몇 발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일행 쪽으로 날아들었다.

"이 정도는 저희한테 맡겨주십시오."

[방패 보호]

[공격강제화]

[파이어 볼트]

강민호의 방패가 초록색으로 물들고.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화살들의 방향이 방패 쪽으로 틀어진다.

화살들이 뭉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발사된 화염구.

작은 폭발과 함께 화살 중 반수가 공중에서 불타 잿더미로 변했다.

티티팅!

화살 몇 개가 방패에 박혔지만.

"괜찮아. 버틸 만해."

두 다리에 힘을 꽉 준 강민호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모든 공격을 막았다.

〔쓸 만은 하구나.〕

'당첨 확률 100%짜리 복권이라니깐.'

유진은 저주받은 이빨 다섯 개를 동시에 지배했다.

뽀시래기 팀이 눈먼 화살만 막아줘도 공세에 전념할 수 있으니.

마법 무장 운용에 여분을 둘 필요가 없어졌다.

쇄애액!

저주받은 이빨이 연신 허공을 가로지르며 망루나 고지대에 서서 노출된 오크들을 쓰러트렸다.

군락의 오크들이 모두 집결하기도 전에 늘어나는 사상자.

그 숫자가 20을 넘어가니 오크들의 인내심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르륵. 그냥 돌진한다!"

"쿠륵, 침입자. 내가 죽인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입구를 거친 손짓으로 젖히면서 군락 밖으로 몰려나온 오크들.

"가라. 내 하수인들이여."

[맹렬한 돌진]

"그루으아아!!"

아머드 좀비 20구는 막 입구로 나온 오크 무리 선두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콰득!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

오크 중 일부는 돌진하는 아머드 좀비의 속도에 맞춰 칼을 휘둘렀지만.

카아앙- 도리어 뼈 갑옷에 걸린 글레이브가 반으로 부러졌다.

볼링공에 맞은 핀처럼 좌우로 날아가는 오크들.

"그아아아!!"

아머드 좀비 20구는 기세를 몰아 오크 무리를 입구까지 밀어붙였다.

"쿠륵. 밀고 나가야 한다."

"쿠, 쿠륵. 냄새나는 괴물들. 힘이 너무 세다."

"쿠르륵! 내가 틈을 만들겠다!"

오크 몇이 투쟁심을 불태우며 아머드 좀비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고.

견고한 뼈 갑주에 하나둘 상흔이 늘어난다.

힘을 과하게 주었다가 칼이 부러지기도 했지만.

오크들은 맨몸으로 아머드 좀비의 팔이나 다리에 매달려서 운신을 훼방했다.

"투쟁에 미친 괴물들이라더니. 정말이군요."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질린 듯이 중얼거리는 강민호.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아머드 좀비의 뼈 갑주에도 균열이 여럿 새겨졌다.

후위에 선 오크 족장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쿠륵! 힘내라. 전사들이여! 조금만 더 싸우면 적을...."

[본 아머를 사용합니다.]

순식간에 메워지는 뼈 갑주의 균열.

갑주 수복은 거리가 100미터 넘게 떨어져 있어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조금만 더하면 뭐. 뒤가 궁금한데."

"쿠륵, 쿠르륵!"

"왜. 뜻대로 잘 안 되나?"

"쿠르륵. 너 비겁하다.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바닥에 쓰러진 오크의 살덩어리들이 정정당당을 운운하는 놈에게 달라붙었다.

"쿠륵!"

"네크로맨서에게는 이게 정정당당한 방법이다."

철퍽! 철퍽!

아머드 좀비한테 달라붙던 오크들도 덕지덕지 붙은 살점 때문에 둔해지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오크들은 혼란에 빠졌다.

군락 입구 근처에서 유진에게 농락당한 채 고꾸라진 숫자가 반수 가까이 되었을 때.

"쿠르륵! 옆을 박살 내서 길을 낸다."

오크 족장은 군락의 울타리를 무너트리려고 했다.

"이제라도 떠올렸나?"

빙그레 웃는 유진.

그래.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대로 움직여주면 얼마나 즐거운지.'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다시 한번 저주받은 이빨이 춤을 추고.

울타리를 부수려던 오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거참. 죽여 달라고 알아서 머리를 내미네?"

"쿠르르륵!!!"

분노한 오크 족장은 충혈 된 눈으로 울타리에 달라붙어서 손에 쥔 도끼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몇 번 내려치지도 않았는데도 눈에 띄게 휘청거리는 울타리.

저주받은 이빨이 오크 족장에게 쏘아졌다.

푹! 푸푸푹!

바위처럼 단단한 피륙이 찢겨나가고.

녹색 피가 흘러내려서 바닥을 물들이지만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울타리 일부가 무너지면서 군락 입구 말고도 유진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쿠륵!"

"강 쪽으로 난 입구로 돌아오면 됐을 것을. 뭣 하러 멀쩡한 목책을 부쉈나."

이래서 오크들이란.

쯔쯧, 혀를 차는 유진의 모습이 오크 족장의 망막에 비쳤다.

"혹시나 뒤에서 동료가 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미리 정리해놨거든."

"쿠르르륵!!"

다시 한번 분노에 몸을 맡긴 오크 족장.

[버서크]

과한 혈류의 움직임으로 피부가 붉어지고.

통증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약에 취한 듯 몽롱해진다.

반면, 눈가에는 수배나 짙어진 살기가 번지면서 동공과 눈자위 할 거 없이 모두 붉어졌다.

고통과 이성이 마비된 채, 적에 대한 살의만을 품는 스킬.

"언제 쓰나 기다리고 있었다."

버서크를 사용한 직후.

오크 족장의 몸이 스킬의 효과로 경직되는 것을 기다렸다.

"양팔과 다리를 꿰어버리면 버서크 상태여도 움직이지 못하지."

한순간의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미리 대기시켜둔 저주받은 이빨 다섯 개가 오크 족장의 사지를 찔렀다.

평소보다 더 많은 영력을 부여한 덕분일까.

살과 근육을 찢고 관통한 검은 송곳들은 땅에 푹 박히면서 오크 족장의 행동을 제약했다.

"쿠르르르르르!"

"왜. 뭐가 잘 안 돼?"

저주받은 이빨에 꿰인 채 바동거리는 오크 족장.

상처가 더 벌어지고.

피가 냇가를 이룰 만큼 흘러내려도.

족장은 살기 어린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너 혼자만 죽는 것도 아니니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유진은 손에 쥐고 있던 원념의 지팡이를 [본 컨트롤]로 지배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말도 있잖아.

저주받은 이빨이 하나라도 빠지면 오크 족장이 풀려날 테니. 급한 대로 쓰는 수밖에.

'빠르게 끝낸다.'

물밀듯이 빠져나가는 마력.

본 컨트롤로 여섯이나 되는 매개체를 조종하려고 하니,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원념의 지팡이를 손에서 떼니 마력 보조 효과도 볼 수 없었고.

미리 축적해둔 생명력을 마력으로 치환하려고 해도 [백야] 특성을 한번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오크 족장을 붙드는 흐름이 끊겨버리겠지.

'노리는 건 심장. 일격에 꿰뚫는다.'

쇄액!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날아든 원념의 지팡이.

날 선 지팡이 끝이 족장의 가슴팍에 사정없이 파고들고.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19입니다.]

족장의 눈가에 맺힌 붉은 기운이 사라졌다.

"큭."

과한 마력 소모로 흔들리는 시야.

고대의 정원에 이어 두 번째로 겪는 일이지만,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백야]를 전개해서 성력으로 치환했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빼앗은 생명력으로 대상을 치유하는 이질적인 신성 주문.

생명력과 마력, 둘 다 채울 수 있기에 마력 탈진 현상이 찾아온 유진에게는 완벽한 치유 스킬이다.

"쿠륵, 족장님이 쓰러졌다."

"쿠르륵. 위험하다."

일방적인 전투에 마음이 꺾인 오크들.

개중 일부는 몸을 돌이켜 전장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어딜 도망가?"

그 전에 쓰러진 동족의 살점이 달라붙으면서 오크들의 발을 붙들었다.

순식간에 무덤이 되어버린 군락.

"쿠륵...."

최후의 오크가 쓰러지자, 뽀시래기 팀도 금세 작업에 들어갔다.

"형님. 마석은 모두 골라냈습니다."

"수고했다."

빈말이 아니다.

괴물 심장에 박힌 마석을 꺼내는 것도 상당한 노동이니까.

-블러드 액스(희귀).

-D급 마정석 1개

-E급 마정석 427개

"E급 마석이면 F급보다 3배는 비싼데."

"3일 동안 얼마를 벌어들인 건지."

뽀시래기 팀은 지친 와중에도 총 수입을 계산하며 벌어진 입을 닫지 못했다.

"진짜는 이거야."

[블러드 액스]

등급 : 희귀[R]

분류 : 도끼

제한 : 없음

내구도 : 666/666

피로 제련을 해서 완성시킨 도끼다. 주술적인 힘이 깃들어서 사용자의 힘을 대폭 증대시켜줍니다.

도끼에 피를 흡수시킬수록 위력 및 여러 가지 옵션이 추가됩니다.

*힘 + 35

*흡혈 스택 - 0

[타격 20Lv]

[광란 5Lv]

[흡혈 10Lv]

오크 족장의 무기.

조건부이긴 해도 성장 형 장비라서 평범한 레어 등급보다 가치가 훨씬 높다.

〔피 냄새가 나는 불길한 아이템이군. 참으로 격이 떨어지는구나.〕

'하여간 뭘 모르는구먼. 마켓에 팔면 비쌀 건데.'

흡혈 옵션은 피를 흡수해서 사용자의 체력과 생명력을 채워준다.

저 정도 수치면 효과가 미미하겠지.

근데 스택을 쌓으면 옵션도 강화가 되기에, 실질적으로는 준 유니크 급 아이템인 셈이다.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 수 있을 걸?

'오크 군락 하나를 공략한 보람이 있는 아이템이다.'

수확도 확인했겠다.

접경지역에 나온 본 목적을 상기하면서 눈가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영안.

물질에 국한되지 않고 영적인 파장까지 읽어내는 눈이 오크 군락을 빠르게 훑었다.

얼마 정도 눈동자를 돌렸을까.

'찾았군.'

유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14화 잊힌 영웅

저벅- 저벅-.

유진은 황량해진 오크 군락을 가로질렀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잎사귀가 몇 없는 고목 앞.

망막 위에 맺힌 푸른 귀화는 나무에 붙은 영혼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기억대로군.'

희끄무레한 안개.

그 사이에 박힌 검은 반점 두 개가 유진을 바라본다.

-마치 보이는 것처럼 바라보네.

"진짜로 보이니까 그렇지."

-뭐야?!

대답이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못한 건가.

크게 놀라며 고목 뒤로 숨는 유령.

유진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사람보고 그렇게 놀라면 상처받는다고."

"저기에 누가 있습니까. 형님?"

강민호의 질문에 태연한 손짓으로 나무를 가리켰다.

"유령."

"...예?"

"지박령이다. 그것도 꽤나 원한이 큰."

-흥. 나를 잡귀 취급하면 곤란해!

유령이 성화를 드러내니 고목에 달린 이파리가 좌우로 크게 흔들린다.

"히익!"

뒷걸음치는 강민호.

"살아있는 시체를 보고도 감응 없던 녀석이 오버하긴."

"그건 눈에 보이고 싸울 수라도 있지 않습니까. 지박령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고요."

실제로 유령 타입 괴물은 무투계 헌터의 천적이다.

병장기에 마력을 싣지 않으면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고, 정신 쪽 디버프에 특화되어 있어서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나.

'나야 뭐.'

정신 간섭 디버프에 완전면역인 유진은 태연했지만.

뽀시래기 팀은 지박령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고목에서 뒷걸음질 쳤다.

"이제야 추모를 할 분위기가 나네."

-추모라고?

"내가 오크 군락을 쓸어버린 건 당신을 보기 위해서다."

-이 땅에 매인 흔한 지박령 따위에게 관심은 무슨.

"마투사 박하늘 씨."

희끄무레한 안개 사이에 박힌 검은 점 두 개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놀람.

그리고 의문.

-어, 어떻게 내 이름을.

"말했잖아? 추모하러 왔다고."

접경지역에서 떠나지 못하는 지박령.

마투사 박하늘은 놀란 기색으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이야. 내 이름, 죽고 나서 처음으로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오크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 리 없잖아."

-그렇지. 대화를 나눈 지가 얼마인지도 기억나지 않아.

"한 35년 정도 되지 않을까?"

유령은 잠시 침묵했다가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죽은 지 그쯤 되었단 말인가.

"옛 북한 지역에서 1차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한 게 그쯤 되었으니."

-잠깐. 1차라고?!

"아. 고인께서는 모를 만도 해. 그 뒤로도 비슷한 물량이 두 번이나 더 내려왔거든."

-미친. 완전히 말세잖아. 용케도 나라가 안 망했어.

영화나 드라마의 결말을 미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런 마음일까.

연신 놀라는 박하늘을 보니 은근 재미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 덕에 안 망한 거다."

-큭큭큭. 입 발린 말인 걸 알지만 기분은 좋네.

"빈말 아니야."

유진은 사회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옛 북한 지역에서 넘어온 대량의 괴물.

박하늘처럼 사명감에 불타는 헌터들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서울까지 초토화되었을 정도였단다.

"위령비도 있어. 1차 몬스터 웨이브에서 희생된 이들 모두."

-내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유령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안도감.

그 말에 구원이라도 받은 걸까.

원한으로 세상을 떠나지 못한 지박령 주제에 선기까지 느껴졌다.

하긴.

저렇게 선한 영혼이니 생전에 목숨까지 버리면서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을 터.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건 아니지만. 당신처럼."

-...그건 무슨 말이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거든. 이 세상을 모두 뒤져봐도."

1차 몬스터 웨이브에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헌터들.

그 중, 박하늘이라는 이름은 희생자 명단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고목에 아른거리는 혼백이 크게 요동친다.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설명해.

"당신의 기록을 일부러 지워버린 사람이 있다."

잠시 뜸을 들이는 유진.

희끄무레한 기류가 대답을 촉구하듯이 크게 요동친다.

"아라한 길드의 부사장. 백성현."

휘이이이잉!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군락을 휩쓰는 돌풍.

유진의 머리카락이 강한 공기의 흐름에 닿아 마구 흔들렸다.

멀찌감치 거리를 둔 뽀시래기 팀마저 오싹함을 느낄 정도.

평범한 원혼 따위가 낼 만한 영압이 아니다.

"당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고."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지박령은 그냥 되는 게 아니야. 이 땅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거잖아."

그래.

박하늘, 당신 같이 말이야.

"거짓 정보로 헌터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다지."

대격변 초기에 손꼽히는 실력자로 명성을 떨쳤던 박하늘.

무투계와 마법, 양쪽 모두 재능이 있는 [마투사]란 고유 능력과 뛰어난 전투감각 덕에 초기 각성자들 사이에서 명성이 드높았다고 한다.

살아만 있었으면 세븐 스타에도 들어갔을지 모른다는 인물.

'1차 몬스터 웨이브 때 죽어간 망자들한테 들었다.'

그렇게나 강했던 인물이 흔한 기록 하나 남지 않고 접경지역의 이름 모를 땅에서 죽은 데에는 숨겨진 비화가 있었다.

-기록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잖아. 넌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영력이 강한 혼백을 찾다가 한 소문을 들었거든."

거짓말은 아니다.

반쯤은 말이야.

회귀 전.

네크로맨서의 능력을 증대시켜줄 강력한 영혼을 찾던 중, 오크 군락 근처에 깃든 지박령의 소문을 들었다.

거기서 만난 게 눈앞의 혼백.

'뒷사정은 이 녀석한테 따로 들은 거지만.'

아라한 길드의 배신.

박하늘을 사지로 몰아넣고 유리한 포지션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냈다.

만약.

박하늘이 이 전장에서 물러났으면 아라한도 큰 피해를 입었겠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전생에서 박하늘을 하수인으로 거둔 유진이기에.

함정을 판 백성현만큼이나 그 성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 손을 잡아라. 복수하게 해주마."

-언데드가 되라는 말인가?

"맞아."

-큭. 육체는 수십 년 전에 썩어버려서 나무의 거름이 된 지 오래다.

"당신의 혼을 담아둘 육체도 준비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나랑 계약해서 언데드가 되어 줄래?"

고민에 빠진 듯 침묵하는 박하늘.

잠시 후.

-너와 계약하면 복수를 할 수 있는 건가?

"물론이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어떻게 부리든, 그건 자유지만....

"백성현한테 복수하는 게 조건은 아닐 테고."

-죄 없는 이를 해하는 일은 거부하겠다.

유진은 피식, 웃었다.

회귀 전에도 같은 계약 조건을 내걸었었지.

박하늘의 한결같은 모습에 얼룩진 유진의 마음도 조금 밝아졌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아무렴.

죽일 악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죄 없는 사람들까지 건들 시간이 어디 있겠나.

[지박령 박하늘이 당신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영흔으로 이어진 결속.

보이지 않는 끈이 유진과 박하늘 사이를 이었다.

*

계약은 맺었지만.

진짜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흑암의 반지에 보관된 사체를 방출합니다.]

고목 앞에 쿵- 이라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드래고니안 사체가 불쑥 나타났다.

-이건 뭐야?

"박하늘 씨의 새로운 육체."

-좀비 같은 게 되는 건 줄 알았는데.

"명색이 영웅인데 대우해줘야지. 그리고 저건 오래 못 가."

뼈 갑주에 가려져서 안 보이지만.

좀비의 몸뚱이는 실시간으로 썩어가고 있다.

몸뚱이에 부여한 영력 덕에 붕괴가 늦어지고 있지만.

1주 정도 두면 몸뚱이에 들러붙은 살점 대부분이 썩어서 전투력이 급감할 것이다.

'전생에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몸뚱이에 빙의시켰지.'

혼백을 언데드에 빙의시키는 술법.

영혼 동조만 잘 되면 언데드의 전투능력을 배 이상 증가시킬 수 있다.

아머드 좀비처럼 유진이 개발한 독자적인 강령술.

박하늘은 스켈레톤 나이트에서 업을 쌓아 제 힘으로 데스 나이트가 되었고.

유진의 개조와 아이템의 보조가 더해지면서 둠 나이트로 승급.

마지막에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면서 지식의 도서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최상위 언데드, 헬 나이트가 되었다.

'만약에 박하늘에게 강한 몸뚱이를 줬으면 어땠을까?'

전생 때 종종 했던 상념.

처음에 박하늘의 혼백을 스켈레톤 나이트에 부여한 건 큰 실수였다.

한 번 동조를 마친 망자의 몸뚱이와 영혼은 다시 떼어놓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이름 없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육신으로 궁극의 경지까지 도달했던 혼백.

강인한 망자의 사체에 빙의를 시켰으면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

쉽게 짐작도 가지 않는다.

〔크하하핫. 걸작이로구나. 여기까지 내다보고 사체를 제련한 거였어.〕

맞다.

드래고니안 사체를 얻는 순간부터.

이미 몸뚱이의 주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격투와 마법, 양쪽에 재능이 있는 혼백.

엘드리치 드래곤의 축이 되어줄 최적의 영혼이지 않은가!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스스슷!

희끄무레한 기운이 오른손을 휘감는다.

빠른 속도로 드래고니안 사체 여기저기를 찌르고.

[강화 술식 - 하급 사체 강직이 활성화됩니다.]

[강화 술식 - 하급 뼈 강화가 활성화됩니다.]

[강화....]

마석을 녹여낸 융해액이 유진의 힘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비늘 곳곳에 드러나는 기묘한 문장.

신준석의 연금술 공방에서 새긴 강화 및 저주 술식이 발동한 것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구경하는 박하늘.

유진은 손을 뻗어서 안개처럼 뿌연 영체 일부를 낚아챘다.

"조금 따끔할 거다."

-아야앗!

엄살 한번 심하군.

박하늘한테서 뽑아낸 영력 일부를 드래고니안 사체에 흘려보낸다.

콧구멍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기운.

술식으로 고정시켜 놓은 용족의 정수가 박하늘의 영력에 반응하더니 동면에서 깬 곰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뭐야. 느낌이 이상해.

"저항하지 말고 내 힘을 받아들여라."

유진이 드래고니안 사체의 이마를 툭 건드리자.

[저주 술식 - 중급 영혼 결속이 활성화됩니다.]

일전에 새겨둔 저주가 융해액으로 녹여낸 마력을 기반 삼아 발동했다.

저주 대상은 박하늘의 혼백과 드래고니안 사체.

'원래는 강령술 주문을 사용해야 하지만, 내 수준으로는 가당치도 않으니까.'

강령 주문이라고 해봐야 레이즈 언데드뿐.

레이즈 언데드로는 드래고니안 사체로 좀비를 제작하는 게 고작이다.

금을 똥으로 만드는 능력도 아니고 말이야.

유진은 전생의 경험을 바탕 삼아 변칙적인 방법으로 언데드를 제작했다.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박하늘의 혼백.

스아아아!

-이... 거... 느... ㄲ… ㅣ… ㅁ....

박하늘의 사념이 한없이 느리게 들린다.

[귀속된 영혼(박하늘)이 저주 술식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해당 영혼이 저주 술식의 대상과 동조를 시작합니다.]

[영력을 부여하면 저항할 수 있습니다.]

'내가 왜?'

그러라고 판을 깔아준 건데.

쉼 없이 들썩거리는 용족의 사체.

유진의 쥐꼬리만 한 마력으로는 제작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 없다.

미리 사체에 절여놓은 마석 융해액이 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기도라도 해야 하나.'

〔짐에게 간절히 비는 건 어떤가?〕

'무능하신 성좌님은 제발 조용히 좀 해주시죠.'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격렬했던 사체의 떨림이 잦아들고.

번쩍!

감겼던 망막이 들어 올려지면서 동공에 자리 잡은 푸른 귀화가 음산한 빛을 흩뿌렸다.

[뭐야. 감각이 있잖아?]

드래고니안 사체.

아니.

이제는 박하늘과 동조화된 사체의 입에서 놀람 섞인 음색이 흘러나왔다.

정확하게는 산 자의 목소리를 흉내 낸 죽은 이의 사념이지만.

[지식의 도서관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언데드를 제작했습니다.]

[언데드 제작 - 엘드리치 드래곤(미완성)]

[사용자의 위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업적! 해당 지식이 지식의 도서관에 기록됩니다.]

위대한 업적?

'살다 살다 이런 말은 처음 들어보네.'

지식의 도서관은 수많은 네크로맨서들의 지식이 계승된 정보망이다.

에고(자아)가 있거나 한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지식의 등급을 매기는 기준이라는 게 있다.

한데, 유진이 제작한 엘드리치 드래곤을 보고 위대하다고 표현하는 걸 보면... 지식의 도서관에 기여한 네크로맨서들도 이런 개념을 떠올리지는 못했단 것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미완성이라는 건데.

'그럴 만도 하지. 완전 야매로 만들었으니.'

엘드리치 드래곤을 제대로 만들어내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

비늘 하나하나에 공정을 일일이 새기고.

값비싼 연금술 촉매와 재료들을 쏟아 부어서 사체를 강화.

가장 핵심인 용족의 정수와 혼백의 결합까지.

유진은 저주 술식을 응용해서 엘드리치 드래곤의 개념만 겨우 흉내 냈다.

[불완전하다, 라.]

"걱정 마라. 시간만 있으면 돼."

[큭. 나에게도 과제가 주어졌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이다.]

"과제?"

[내가 이 몸뚱이를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 완성된다는 의미잖아.]

쓸데없이 긍정적인 사고로군.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박하늘의 능력치를 살펴보았다.

[엘드리치 드래곤(미완성) - 박하늘]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205 / 민첩 : 143 / 체력 : 176 / 맷집 : 180 / 마력 : 221

◎특성

▷마투사[고유] /무신의 눈[S] / 불사의 존재[B] / 경계를 넘은 자[B]

◎스킬

▷케넥 전투술[A] / 암흑 투기[B] / 격투술[C] / 다크 미사일[D]

◎특이사항

이 언데드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단련될수록 사체에 깃든 힘이 더 깨어납니다.

엘드리치 드래곤으로 되살아난 박하늘의 스펙을 보는 순간.

"미친."

입이 쩍 벌어지면서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15화 새로운 언데드는 언제나 환영이야.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유진의 눈동자.

'마투사 특성이 계승될 줄이야.'

회귀 전.

박하늘을 스켈레톤 나이트에 빙의시켰을 땐 보지 못했던 특성이다.

◎고유 특성

-마투사

무투계와 마법에 적성을 모두 가졌습니다. 신체 관련 능력치가 상승하면 마력(영력)도 추가로 올라가며, 마력(영력)이 상승하면 신체능력 중 무작위로 하나가 올라갑니다.

두 스킬을 동시에 운용 및 습득에 페널티가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고유 특성.

전 세계를 뒤져봐도 이만큼 강력한 특성은 몇 없을 것이다.

'마력이 자동으로 늘어나니 스탯 분배에서 꼬일 일도 전혀 없어.'

일부 게이트에 진입하면 시스템이 제시하지 않는 특수 직업군으로 전직할 수 있다.

신준석의 [연금술사]처럼 말이야.

몇 년 전에 새로 밝혀진 무투 계열 특수 직업, 마검사도 그중 하나다.

'검술과 마법을 동시에 익힐 수 있는 포지션이었지.'

처음에는 마검사로 전직하려던 헌터들이 줄을 서서 게이트 진입 때 요금까지 받았다고 한다.

반년도 안 돼서 거품이 빠져버린 게 문제일 뿐.

-근접도, 원거리도 대응 안 되는 반푼이.

-스탯 분배에서 답이 없다.

-양다리를 벌렸다가 가랑이가 찢어지기 딱 좋은 직업.

검술과 마법.

한쪽에만 매달려도 대성하기가 어려운 기예다.

마검사의 능력을 100% 발휘하려면 신체감각과 마력 운용 양쪽에서 재능이 있어야 하고.

두 분야에 모두 통달하여도 한정된 보너스 스탯을 배분해야 하기에, 어중간해질 수밖에 없다.

'마투사 특성이 있으면 말이 달라져.'

어느 스탯을 투자하든 추가로 늘어나는 마력.

마검사의 고질적인 약점인 능력치 부족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평범한 언데드라면 큰 의미도 없을 특성이긴 해.'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강령술.

망자에게 발전 가능성 따위가 어디 있겠는가.

리치나 데스 나이트, 혹은 밴시 같은 상급 언데드라면 모를까.

모두 현재의 유진의 수준으로는 제작할 엄두도 낼 수 없는 강력한 괴물이다.

'원래는 그랬다만.'

변칙으로 만들어낸 엘드리치 드래곤에 추가된 성장 옵션.

마투사 특성이 더해지면 어마어마한 능력치 보너스가 붙을 것이다.

'성장 옵션은 내가 의도한 거지만... 마투사 특성까지 그대로 이어질 줄이야.'

박하늘과 드래고니안 사체의 동조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의미.

회귀 전, 스켈레톤 나이트에 빙의시켰을 때는 마투사 특성이 추가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케넥 전투술은 드래고니안에게서 이어받은 거군.'

A급 무투계 스킬.

본인의 기예가 아니라서 숙련도가 0이지만, 자질이 자질인 만큼 금방 익히지 않을까.

[왜 그래. 추모객 씨.]

너무 오랫동안 말도 없이 보고만 있었던 걸까.

박하늘은 상념에 빠진 유진을 채근했다.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와서."

[뭐야. 나한테 문제라도 있는 거야?]

"마투사 특성이 그 몸뚱이로 계승되었다. 생각보다 잘 맞나봐."

[그럼 좋은 거잖아!]

"어."

[아오. 난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긴장했네.]

휴-.

3미터나 되는 용족 거한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미 죽어서 오장육부도 멈췄건만, 사념으로 숨소리를 내다니.

'살아있는 느낌을 내고 싶은 건가.'

망자 중에는 생전의 모습을 흉내 내는 이들도 은근히 있다.

전생에는 못 봤던 박하늘의 면모.

하긴.

스켈레톤 나이트의 몸에 깃들었을 땐 사념을 제대로 발산하는 것조차도 어려워했다.

"몸은 어때?"

[쓸 만해. 죽기 전보단 못해도.]

박하늘이 생전에 도달했던 경지는 6성.

위계 하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1성 - 레벨 당 보너스 스탯 5개.

2성 - 레벨 당 보너스 스탯 10개.

3성 - 레벨 당 보너스 스탯 15개.

....

5의 배수로 늘어나는 추가 능력치.

스펙만 봐도 차이가 많이 나는 데다 한 가지 요소가 더 있다.

'몬스터만 사냥해서 올라갈 수 있는 건 3성까지니까.'

4성 이상은 해당 분야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무투계는 신체에 축적된 마력에 의념을 실어내서 오러를 일깨워야 하고.

마법계 헌터는 다중 연산에 성공해야 한다.

신관은?

'돈으로 해결을 봐야지.'

숭배 중인 성좌가 만족할 만한 공물을 바치면 된다.

더러운 황금만능주의.

신관 직업군이 귀족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크하하핫. 공물은 언제나 환영한다. 계약자여.〕

'나한테 붙어먹고 있는 주제에.'

〔감히 티탄 신족의 왕을 우롱하려는 게냐!〕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크로노스는 성좌로서 불완전하다.

온갖 변칙과 '영역'의 빈틈을 노려 반쪽짜리 성좌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어도.

어엿한 성좌라고 부르기에는 한참 모자라지.

벽에 부딪쳤을 때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뭐,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가 있나.'

전생과 비교하면 이미 시작점부터가 달라졌다.

회귀 같은 기연 없이도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랭커, 세븐 스타조차 꺾고 헌터의 정점에 섰던 유진이다.

깨달음이야 이미 충족되었고.

어지간한 조건쯤은 맞춰줄 자신이 있다.

"가자. 내 하수인."

[하수인이라는 말은 듣기 안 좋은 걸.]

"그러면 본명으로 불러줘?"

[이미 뼈 하나도 남지 않고 썩어버린 몸. 그때의 이름은 썩어버린 육체와 함께 묻어두고 싶다.]

"까다롭긴."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회귀 전의 박하늘은 과묵했었는데.

만남을 수년이나 앞당긴 결과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은 변화야.'

말수가 적은 것보단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하는 편이 낫다.

[흐음. 듣기만 해도 기를 죽이는 위압적인 이름이면 좋을 텐데.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잖아.]

...아니.

조금은 과묵해도 괜찮을 것 같군.

문득, 한 가지 이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파프너."

[외국 계 이름인가? 입에 착착 감기는 게 나쁘지 않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드래곤이다."

영웅 지크프리트에게 퇴치 당하는 사악한 마룡.

다행스럽게도 박하늘은 그 신화를 알지 못하는 듯, 마룡의 이름을 기꺼워했다.

[좋아. 이제부터는 나를 파프너라고 부르게. 흐흐흐!]

사념에서 느껴지는 즐거움.

참으로 유쾌한 언데드야.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아. 이것도 챙겨가야지."

유진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진 오크 족장에게 다가갔다.

[흑암의 반지에 시체를 보관합니다.]

[보관 한도 : 1/1]

드래고니안 사체를 방출하면서 생긴 여유 공간.

오크 족장의 몸뚱이는 2성 끝자락에 도달했으니, 가공을 하면 쓸 만한 언데드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석을 채집한 오크 사체도 가만 두지 않았다.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뼈와 살이 분리되면서 사체의 무게가 크게 줄어들었다.

"너희는 사체들을 챙겨라."

-그루아아.

뼈만 남은 오크 사체들을 집어 드는 아머드 좀비들.

"돌아가자."

"예. 형님."

[잠깐. 이렇게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허전하지 않나?]

파프너의 말에 유진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허전하지?"

[이 몸. 벌거벗고 있잖아. 가릴 거라도 줘.]

"...."

유진은 그 모습이 낯선 듯 잠깐 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오크가 머물던 천막을 가리켰다.

"불편하면 저거라도 두르든지."

찌이익-!

우악스러운 손길에 찢겨진 천막.

파프너는 넝마처럼 변한 천을 허리에 감았다.

'쟤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유진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접경지역 관문으로 진입한 유진 일행.

"소환수인가?"

"저런 소환수는 본 적 없는데."

"그보다 킁킁-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아?"

관문 근처에 머무는 헌터들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 중 일부는 시체 썩는 냄새에 코를 쥐어 막았고.

"이래서 좀비를 오래 못 부리는 거군요."

강민호가 코를 자극하는 시취에 미간을 찌푸린 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머드 좀비 무리 옆에 서 있다 보니 코를 막는 걸로는 부족했다.

"빨래 몇 번 해야 할 거다. 냄새 잘 안 빠져."

"차라리 클린 마법으로 세탁해야겠습니다."

"공방 인근에서 그런 서비스가 있을지 모르겠네."

[클린]은 마력으로 옷가지를 깨끗하게 해주는 공용 마법. 당연히 마법 계 헌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아. 찾아봐야죠."

"아니면 나도 서울 좀 다녀와야 하니 너희도 좀 쉬든가."

"정말입니까?"

"내가 악덕 업주도 아니고. 휴일 정도는 준다."

[그렇다면 나도....]

"하수인께서는 닥치고 계시죠."

[어허. 나에겐 파프너라는 훌륭한 이름이 있다.]

"망자가 돌아다니면 신고당할걸."

[흠. 그건 좀 곤란하겠어.]

"만약에 꼭 봐야 할 사람이라도 있으면 동행해주마."

[훗. 인사를 나눌 지인도 없을뿐더러 망자의 몸에 들러붙기로 맹세하면서 과거의 연도 같이 묻어버렸다.]

박하늘.

아니, 파프너와 유진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고아라는 것.

파프너는 대격변 때 부모를 잃었고.

유진은 이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버림받았다는 차이가 있지만.

'마음 둘 곳 없는 건 마찬가지다.'

전생에 들은 이야기.

굳이 아는 척할 필요는 없기에, 유진은 생각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유진은 아머드 좀비들을 대동한 채로 연금술 공방에 갔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투덜거리면서 나온 신준석이 아머드 좀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갑옷을 입은 좀비라니!"

[이 정도 괴물을 보고 놀라다니. 담대함이 부족한 친구로군.]

파프너의 타박에 고개를 돌린 신준석.

잠깐 동안 빤히 보더니.

"이쪽은 융해액에 담가놨던 시체 아닙니까?!"

하고 감탄 섞인 비명을 질렀다.

"어. 접경지역에서 사체에 맞는 혼백을 구했거든."

"마석 융해한다고 고생했는데. 완성된 걸 보니 신기하네요."

신준석은 눈을 반짝이며 파프너에게 다가갔다.

[이 변태는 뭐냐?]

"동업자. 불쾌해도 죽이지는 마라."

"유진 님. 한 번 만져보면 안 되겠습니까? 이건 연구할 가치가 있...."

[안 되겠다. 죽여야겠어.]

"죽는 건 그렇고. 팔 하나는 드릴 테니 연구하게 해주십쇼!"

"동업자 양반. 댁이 허무하게 가버리면 나도 손해니까, 적당히 해."

신준석은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형님. 저희는 물건을 처분할 겸 서울에 다녀오겠습니다."

"늦어도 이틀 안에는 와라."

"예."

뽀시래기 팀도 해산.

아머드 좀비 무리를 시켜서 창고 한 쪽에 오크 뼈들을 쌓아두게 한 후에 영력을 거두었다.

쿵-!

지면에 고꾸라지는 아머드 좀비 무리.

[남의 일 같지가 않구나.]

"너 같은 상위 언데드는 영력을 거둘 수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정말인가?]

"몸에 깃든 영력을 응용해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내부를 관조한 파프너가 잠시 후에 입술을 떼었다.

[진짜네.]

"심상을 구축한 상위 언데드한테는 기운을 멋대로 회수할 수 없어."

[그럼 언데드를 제어할 수 없지 않은가.]

"내 지배력을 얕보면 곤란하지."

유진은 검지를 들자.

[어?]

파프너의 다리가 위로 들렸다가 콰앙-! 지면을 세게 내리쳤다.

커다란 충격에 움푹 파인 대지.

"협박 같은 거 안 해도 부려먹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목줄만 안 걸어놨지. 노예가 따로 없군.]

투덜대는 파프너를 둔 채, 유진은 마당에 깔아놓은 오크 뼈들을 훑어보았다.

"동업자 양반."

"왜요. 연금술 발전에 도움 하나 안 주는 파트너 양반."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순순히 다가오는 신준석.

"이 뼈들 분해해줘. 그리고 푸른 허브 증류해놓은 거 500ml도."

"제가 연금술 노예나 기계도 아니고. 공방에 오자마자 갈취에 부려먹기까지 합니까?"

노예가 맞는데.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하고 신준석을 천천히 구슬렀다.

"신기한 거 보여줄게."

"보여주신다고 연구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에이. 이번 건 마음대로 해도 돼."

"...진짭니까?"

"내가 두 말 한 적 있나."

"알았습니다."

신준석은 한숨을 쉬면서도 지시한 대로 오크의 뼈들을 일일이 가루로 만들었다.

유진도 [살점지배]로 오크 족장의 뼈와 살을 발라주고는.

"파프너. 가루를 모아서 족장 시체를 마사지해줘라."

[호오. 언데드를 제작할 셈인가.]

"전력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스켈레톤 1구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영력이 뼈다귀에 부여되는 찰나의 순간.

뼈를 더 강인하게 만들면서 스켈레톤의 전투력을 100%로 끌어올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야."

푸른 허브의 성질은 마력 안정.

증류해서 짜낸 진액을 수북이 쌓인 가루에 들이붓고는.

[본 아머를 사용합니다.]

스켈레톤의 몸뚱이에 들러붙게 했다.

가루로 만든 뼈를 흡수하면서 덩치가 불어난 족장의 사체.

파프너와 비슷한 덩치까지 커진 후에야 성장을 멈췄다.

[안정된 기운이 스켈레톤의 제작 방향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켈레톤의 특성이 방어로 변환됩니다.]

기형적으로 넓어진 오크 족장의 팔.

방패를 양팔에 달아놓은 것 같은 묘한 형태다.

[스켈레톤 가드]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275 / 민첩 : 150 / 체력 : 291 / 맷집 : 332 / 마력 : 84

◎특성

▷불사의 존재[D+] / 시선 고정[E+]

◎스킬

▷공격 흡수[D+] / 철벽[D]

"당분간 신세 좀 지마."

딱딱-!

양 턱이 부딪치면서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16화 만신전으로

방어 특화로 강화한 스켈레톤.

파프너가 칼이라면 이 녀석은 방패다.

'라이프 드레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보디가드가 필요해.'

죽은 자한테는 생기를 많이 갈취하지 못한다.

오크한테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하면서 흡수 가능한 능력치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고블린 주술사 같은 보스 몬스터들은 스탯 증가치가 또 달랐단 말이지?

'보스 몬스터의 생체정보는 별개로 취급하는 걸지도.'

시험해볼 가치는 있다.

문제는 라이프 드레인의 범위가 근접이라는 것.

"나를 잘 지켜라."

-케르르륵!

스켈레톤은 턱뼈를 들썩였다.

[아머드 좀비와 비등해 보이는구나. 너무 공들인 건 아닌가?]

"전투력만 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지."

유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

"뼈라서 가볍고 염 처리를 따로 하지 않아도 썩을 일이 없어."

시한부인 좀비하고는 다르다.

영력만 간간이 불어넣어주면 쭉 부려먹을 수 있는 하수인.

뼈가 산산조각 나도 금세 복원이 가능하다.

폭발하거나 녹아내리지 않으면 꾸준히 써먹을 수 있는 하수인.

[오호라. 내 주인에게는 모두 계획이 있단 말이군.]

"주인?"

[언제까지도 호칭을 안 붙이고 부를 수도 없지 않은가.]

"네 자존심이 상할 것 같은데."

[백성현에 대한 원한을 떨쳐내지 못한 시점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세울 마음은 없어.]

시원시원한 파프너의 대답.

"동업자 양반. 이 녀석은 좀 맡겨두마."

"어디 가시게요?"

"만신전. 레벨 올랐다고 신성 주문 받으러 오라던데."

두 눈을 쉼 없이 끔뻑인 신준석.

잠시 후.

"다, 다다다, 당신. 신관 직업군이었습니까?"

"어. 나름 신실한 신도야."

나름대로 성자란다.

[역천의 거인]을 숭배하는 자는 유진 한 명뿐이니 그 어떤 신관보다도 신앙심이 깊다고 자부한다.

"갓 댐....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부정할 건 없잖아.

유진은 격렬한 반응에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파프너. 말 좀 해줘."

[오. 주여. 형제를 의심하지 말라 하신 말씀을 지키지 못함을 회개합니다.]

씨부럴.

두 사람(?)을 설득하는 건 관두고 화제를 돌렸다.

"중급 포션 특허는 등록했나?"

"아. 조만간 심사를 받을 겁니다."

"빠르군."

"시간 들여 봐야 경쟁자만 생기지 않겠습니까? 미뤄두는 건 질색이라서 말이죠."

유진은 킁, 짧게 코웃음을 쳤다.

"동업자 하나는 참 잘 뒀어."

"양산 체계로 돌리려면 배합기 구축 문제가 아직 남았지만 곧 해결될 겁니다."

"그거야 알아서 하고."

회귀 전에도 대연금술사의 사업 수완에는 관심이 없었다.

가만히 둬도 알아서 잘 할 사람이니.

'내가 관여할 건 연금술 레시피에 대한 것뿐이다.'

알아서 돈도 벌어와줘.

연금술이 필요할 땐 노동력도 제공해줘.

참으로 훌륭한 노ㅇ... 아니, 동업자를 두었다.

"다만 홍보가 문제네요. 박람회는 내년에나 있어서 소문 낼 방법이 없어서."

"뭐, 혹시 모르니 포션 좀 챙겨줘. 상황 되면 홍보 좀 할 테니."

"알겠습니다."

신준석은 큰 기대 안 한다는 기색으로 중급 포션 하나를 넘겨줬다.

"다크니스 오브는 언제쯤 오나?"

"수배 중이니 곧 됩니다. 근데 대금 정말로 주시는 건 맞는지...."

"이틀이면 되니 좀만 기다려."

휴식 겸 3일간의 수확을 정리하려고 뽀시래기 팀에게 휴가를 주었다.

수백이나 되는 D급 마석.

그리고 블러드 액스를 처분하면 못해도 수억이 나올 테니 지난 1주 동안 신준석에게 융자 받은 금액을 상회할 것이다.

"부탁입니다. 융자 받은 자본이 다 떨어져간다고요!!"

신준석은 울 것처럼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간절하게 호소했다.

*

서울로 가는 길.

며칠 만에 혼자가 된 유진은 창밖을 흘겨보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택시 안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자니.

[그리도 좋은가?]

한 줄기 사념이 유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흑암의 반지에 담아둔 파프너.

사념에는 감추지 못한 불만이 뚝뚝 묻어났다.

-좋지. 댁한테 추모하러 간다고 야영도 하고 고생했거든.

유진도 마력을 응용해서 사념으로 대꾸했다.

[흥.]

잠시간의 침묵.

얼마 정도를 조용히 보냈을까.

반지에 깃들어 있던 파프너가 다시금 사념을 보냈다.

[참으로 고약한지고. 바깥 풍경 보여 달라는 부탁 하나 안 들어주는가?]

"그 덩치로 차를 타면 민폐다."

택시만큼이나 큰 드래고니안의 몸뚱이.

천장을 뜯어서 강제로 오픈카로 만들지 않는 이상에는, 파프너가 탈 수는 없을 것이다.

[트럭 같은 걸 대여하면 되지 않느냐!]

"난 운전 못해."

[장롱이라도 괜찮다. 내가 연수를 봐주면 될 터이니.]

"돌아가신 지 35년이나 된 양반이 무슨 연수는. 도로교통법은 안 바뀐 줄 아나?"

[으그그.]

분한 듯 이를 가는 파프너.

유진은 쐐기를 박았다.

"난 면허도 없어. 그러니까 꿈 깨라."

[부탁이니 면허 정도는 따주었으면 한다. 나에게는 바뀐 세상을 지켜볼 권리가 있다.]

"맨입으로?"

[좋아. 사적 제재 한 번쯤은 눈감아주겠어.]

-죄 없는 사람을 건들면 안 된다는 맹세가 이렇게나 싸구려일 줄이야.

[....]

야.

우냐, 울어?

'큭큭큭. 너무 약 올렸나.'

회귀 전에는 이렇게까지 표현이 풍부하지 않았었는데.

지박령 생활을 더 길게 하면서 감정도 메말라버린 모양이다.

반지 안에 깃든 파프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서울로 진입했다.

*

대격변 이후 홀연히 나타난 만신전.

전 세계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 신들의 처소는 한국에만 총 6개소가 있다.

유진이 찾아간 곳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북쪽에 위치한 신전.

'참 특이하게도 생겨먹었어.'

파르테논 신전과 흡사한 기둥, 지붕에 달린 기와는 한국과 일본의 절 양식을 섞어놓은 형태다.

하늘 위로 쭉 솟아오른 기둥은 바벨탑을 연상시키고.

그 외에도 수많은 종교나 문화 양식이 뒤섞인 기이한 디자인의 구조물이다.

"싸요. 싸. 애시르 계 신성 주문의 효과를 늘려주는 성물이 단돈 500만 원입니다."

"올림포스의 군신이 좋아하는 올빼미 조각품이 75만 원!"

"성인의 사리가...."

전통시장을 방불케 하는 노점상들의 숫자.

상인들이 깔아놓은 상품들이 만신전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눈과 발을 붙든다.

뭐, 말이 좋아서 순례자이지.

실제로는 만신전의 성좌들에게 더 많은 신성 주문과 축복을 받으려는 세속적인 목적이 대부분인 자들이다.

〔참으로 세속적인 공간이로구나.〕

'세속적인 건 신도에게 노골적으로 제물을 요구하는 성좌들이지.'

〔짐은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도다.〕

'아까는 제물 바치라면서요.'

숭배하는 신들의 사회, 일명 〔성단〕에서 힘을 얻는 신관 직업군.

그래서일까.

다른 직업군과는 달리, 레벨을 올리는 것 말고도 강해지는 방법이 있다.

헌금이나 제물.

섬기는 신들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금은보화나 특정 성좌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바치는 것이다.

지나가는 중에 언급된 '성인의 사리' 같은 물건도 종교적인 의미 외에는 쓸 데가 없지만 니르바나 같은 신들의 사회에선 굉장히 값진 것으로 취급하거든.

〔한데, 신성이 느껴지는 성유물은 없구나.〕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면 길바닥에 늘어놓겠어?'

하여간 사기꾼 놈들 하고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호객 행위를 무시하고 만신전으로 직행했다.

*

108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보이는 만신전 입구.

에스컬레이터는 물론이요, 고층 빌딩이면 필수인 승강기도 찾아볼 수 없다.

〔세월이 지나도 이런 건 변하지 않는구나.〕

'위대하신 성좌를 영접하려면 겸손함을 배우라는 의미라지?'

〔성자치고는 꽤 신랄한 표현이로구나.〕

-이 정도면 지랄도 풍년이잖아.

유진은 성좌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관음 하는 게 전부인 작자들.'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불쾌감을 꾹 누른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마냥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었고, 등 뒤에 비치는 서울의 정경도 어둠으로 묻혔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신들의 처소.

돔 형태의 지붕에 양각된 수많은 별자리들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부유한 아버지가 혐오감을 드러냅니다.]

[죽음을 덮는 자가 의아해합니다.]

[아비도스의 주인이 불쾌한 눈으로 주시합니다.]

[....]

유진을 향해 쏟아지는 부정적인 파동.

네크로맨서.

죽음을 거스르는 힘을 다룬다는 이유로 성좌들이 그를 거부했다.

〔크하하핫. 걸작이구나. 걸작이야!〕

'기분 안 좋으니까 조용히 하고 계시죠. 성좌님.'

빠르게 사라지는 별들.

성좌들은 유진의 몸에 깃든 영력을 읽자마자 관심을 거두었다.

모든 빛이 사라지고 어둠으로 물든 하늘.

〔이제 짐의 차례로구나.〕

크로노스는 아무것도 없는 하늘 위에 점 하나를 찍었다.

은은한 광채를 내기 시작한 별.

〔성좌 - 역천의 거인이 만신전에 등록되었습니다.〕

'된 건가?'

〔이제 걸음마를 뗀 것에 불과하다.〕

'무능한 건 여전하단 말이군.'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계약자여.〕

[신성 주문 - 부정한 축복, 응징의 쐐기가 추가됩니다.]

◎스킬

▷부정한 축복

분류 : 신성 주문

음차원의 힘으로 능력치를 강화시킵니다. 생명의 힘이 강한 존재에게 사용하면 힘을 약화시킵니다.

◎스킬

▷응징의 쐐기

분류 : 신성 주문

지목한 대상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을 때마다 응징 스택이 쌓입니다. 재차 주문을 사용하면 누적된 피해만큼 충격을 가하거나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한 번에 여러 명을 대상으로 지정할 수 없습니다.

호오-.

무의식적으로 새어나온 감탄사.

〔어떠냐. 짐이 하사한 새로운 가호가!〕

'괜찮은데?'

부정한 축복은 언데드의 전투능력을 증대시켜주는 기상천외한 버프.

즉시 발동이 아니라 조건을 충족시키는 형태이지만, 버프와 공격 양쪽으로 운용 가능한 응징의 쐐기까지.

개성적이면서도 효과가 탁월한 스킬이다.

'실전에서는 어떠려나.'

부정한 축복은 일반적인 신관 클래스에게 주어지는 버프 형 스킬이다.

섬길 신화를 고르면 주어지는 신성 주문.

유진은 변칙적인 수단으로 섬길 존재를 골랐기에, 이제야 추가된 것뿐이다.

반면 응징의 쐐기는 양쪽 성질을 지닌 흔치 않은 스킬이니.

사용하면서 감을 잡아가는 게 최선이다.

[역천의 거인은 성좌로써의 격이 모자랍니다.]

[만신전에서 빛을 잃지 않으려면 더 많은 업적을 세우고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빛이 미약하여 다른 이들이 당신을 숭배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성좌로써의 격을 드높이십시오.]

'있는지도 모르는 성좌라서 추종자도 늘릴 수 없단 말이지?'

〔충고 참 고맙구나.〕

'성좌님. 앞으로 더 열심히 사십쇼. 그래야 무능 딱지를 떼지.'

〔이, 빌어먹을 작은 인간이!〕

길길이 날뛰는 크로노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해지는 수단은 많을수록 이득이다.

뜻밖의 횡재군.

벅찬 가슴을 진정시켰지만 연신 씰룩거리는 입술까진 막지 못했다.

*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길.

웬일인지, 크로노스는 만신전에서 나온 이후로 돌연 침묵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떠들었는데.

'뭐, 생각할 게 많겠지.'

새로운 영역을 관장하는 성좌로 만신전에 등록한 크로노스.

그 말인즉슨.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운이 좋아 제우스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신왕이 된다 한들.

[수확하는 자]가 아니라 [역천의 거인]으로 존재한다는 거지.

'그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쯤은 필요할 것이다.

조용해진 크로노스를 놔둔 채로 108계단을 모두 내려왔을 때.

[흐음. 참으로 기묘하구나.]

이번에는 파프너가 사념을 보냈다.

-뭘 보고 기묘하다고 하는 거냐?

[나중에 말해줄게.]

-하수인한테도 비밀 정도는 필요한 법이지.

유진은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파프너가 그를 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의 이해득실이 맞아서 계약까지 한 마당이니, 그 정도는 존중해줄 생각이다.

"이야. 천유진이 만신전에서 나오는 걸 보네?"

잠깐만.

옛 향수와 불쾌감이 동시에 드는 목소리가 유진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주근깨로 뒤덮인 얼굴이 퍽이나 인상적인 사내가 그를 노려보았다.

살짝 올린 입술 끝.

모멸과 악의가 느껴지는 표정이다.

"누구더라?"

"이야. 보육원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를 잊어버렸나 봐."

사내는 껄렁거리며 다가왔다.

"나야. 박성욱. 형 이름 정도는 기억해야지."

희번덕거리는 눈가에는 감출 수 없는 살의가 번들거렸다.

아.

이제야 기억나는군.

먼 과거의 기억이 유진의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17화 아라한 길드(1)

"아. 박성욱 씨."

"박성욱 씨이? 선배한테 말이 짧다."

"댁한테 욕 안 하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해라."

보육원 시절의 악연.

박성욱은 당시 보육원 원장의 눈을 피해 원생들을 착취한 쓰레기였다.

"코는 이제 좀 괜찮은가 봐?"

유진이 손을 말아 쥐자, 박성욱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놈이 보육원에서 어린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할 때.

웃음기를 드리우며 다가간 유진은 놈의 코뼈를 주먹으로 뭉개버렸다.

한 발 늦게 뒤로 물러난 걸 깨달은 박성욱은 뺨을 일그러트리더니.

"하, X발."

욕설과 함께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노를 터트렸다.

"너. 못 보던 사이에 좀 컸다?"

"키가 20센티미터는 자랐지."

"만신전 들락거리는 거 보면 너도 헌터 나부랭이인가 본데."

"어. 각성한 지 1주 됐다."

박성욱은 왼쪽 어깨를 살짝 젖히면서 가슴팍을 부자연스럽게 강조했다.

"이게 뭔지 아냐?"

"되지도 않는 춤은 클럽이나 가서 춰라."

"이 새ㄲ... 아라한 배지를 보고도 겁도 없이."

안 그래도 파프너를 수하로 거두면서 자주 언급했던 길드가 툭 튀어나왔다.

기가 막힌 우연이군.

〔이 자는 가문 출신이 아닌 게냐?〕

'우리나라에는 헌터 가문이 없어. 길드만 있지.'

헌터 가문을 정식으로 선언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1. 가문 비전의 마나 수련법

2. 가문의 수호성

3. 가주의 경지가 7성 이상

'아라한은 세 번째만 충족했을걸.'

가문 비전 마나 수련법이란, 스킬북으로 공유되는 게 아닌 헌터의 깨달음으로 빚어낸 기예를 일컫는다.

단순히 성위가 높다고 해서 뚝딱 하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거든.

거기에다.

〔수호성 계약은 헌터 한 명에게 가호를 내리는 것보다 더 많은 인과와 힘을 소모한다.〕

오죽하면 가문 창설 조건 중 제일 충족시키기 쉬운 게 7성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한반도에서 오랜 세월 동안 헌터 가문이 나오지 않은 이유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아라한 출신이었던가.

전생에서 아라한과 전쟁을 벌일 땐 못 봤었는데.

'아라한에서 활동하다 금방 죽었나 보다.'

그게 아니면 유진의 기억 속에 남지 않을 만큼 하찮은 존재였거나.

어느 쪽이든, 참 시시한 인생이다.

"신입. 그쪽은 누구시냐?"

"아. 정 팀장님. 예전에 알고 지내던 후배입니다."

팀장이라고 불린 사내는 둘 사이에 파고들더니 유진을 빠르게 훑었다.

"박성욱 팀원과 아는 사이라니. 반갑네."

자연스럽게 내미는 명함.

[아라한 5공격대 7팀장]

[정진수]

멀뚱멀뚱 보기만 할 뿐, 유진은 손을 뻗지 않았고.

"이러다 팔 떨어지겠네."

"난 줄 명함이 없어서. 받을 이유가 없는데."

유진의 대답을 들은 정진수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젊은 친구. 내 명함 챙겨두면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 도움을 구할 수도 있어."

"5공격대면 가장 질 떨어지는 곳이잖아. 당신이 날 도와줄 수 있을까?"

신입 위주로 배치하는 5공격대.

팀장급도 신입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발전 가능성에 한계를 느끼거나 부상 같은 이유로 빠진 헌터들.'

박성욱의 팀장이라고 했던가.

저 양반이 어느 쪽에 속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은 그 부분을 노골적으로 건드렸다.

박성욱을 포함한 팀원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툭 건들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

"크하하. 이 친구 패기가 좋네."

정진수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팀원들을 진정시켰다.

"아라한 신입 담당이니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다들 뛰어난 인재라서 섭외를 한 거다."

"글쎄. 박성욱처럼 인간쓰레기를 거둔 걸 보면 뛰어나다는 말에 공감이 안 가서."

"저 건방진...!"

온몸을 파르르 떠는 게 조금만 더 자극하면 달려들 것 같은 기세다.

"흠.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정진수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신입 친구도 보아하니 헌터 같은데 신입이랑 스파링을 한번 하는 거지."

"딱 봐도 무투계 같은 놈이랑 맨손으로 붙으라고?"

"크하핫. 당연히 무리겠지. 그냥 우리 신입과 구면이기도 하니 실력 한번 보여주겠단 말이었어."

"뭐, 나쁘지 않네."

한순간 대화의 흐름이 끊기고.

정진수가 의심 섞인 눈으로 되물었다.

"그 말. 진심인가?"

"하자고. 그 스파링인지 뭔지."

유진은 박성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히죽 웃었다.

*

만신전에서 도보로 3분 거리.

아라한 길드는 서울의 금싸라기 땅으로 불리는 여의도에서 건물 하나를 통으로 사들였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고층 빌딩.

정진호는 빌딩 옆에 신설된 체육관으로 안내했다.

"여기라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기량을 마음껏 겨룰 수 있지."

"그렇군."

"원한다면 길드 훈련소에 비치된 무장을 사용해도 되니, 부담 없이 둘러보게."

신관 직업군 보고 무장을 찾아보란다.

유진을 초보 헌터라고 생각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다.

"난 신관계야. 그러니, 대신할 전사를 고르겠다."

"마음대로 하게. 여긴 자네의 대전사로 나설 사람이 없어 보이지만."

"내 대전사는 이 녀석이다.

암야의 반지에서 음산한 빛이 아른거리고, 3미터에 이르는 거한이 불쑥 나타났다.

[싸움인가?]

"어. 스파링이나 좀 하려고."

파프너는 체육관 한가운데에 붙은 아라한 표식을 보더니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이야. 후배야. 꽤 좋은 고유 특성이 뽑혔나 보다?"

과장된 말투로 조롱하는 박성욱.

파프너가 소환, 혹은 정령과 관련된 고유 특성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주인. 벌써 내 복수를 행하려는 것은 아닐 테고. 왜 온 거지?]

파프너의 입장에서는 적지나 마찬가지인 곳.

그래서일까.

유진만 들리게끔 의도적으로 사념을 조절했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네 의욕도 생기지 않겠나."

[흠. 그렇다면야.]

"겸사겸사 중급 포션 성능도 홍보하고."

[주인의 본 목적은 아무래도 그쪽인 것 같군.]

유진은 대꾸하는 대신 키득거리며 웃었다.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군.

〔노림수가 또 있는 게냐?〕

'아라한 길드는 로마노프와 선을 대고 있다.'

파프너의 일이 아니더라도.

아라한 길드하고는 악연으로 엮일 수밖에 없다.

벌써 안면을 틀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오히려 좋아.

상념을 끊어내고는 훈련장 맞은편에 선 박성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키킥. 천유진, 막상 올라오니까 떨리나 봐. 얼어붙었네."

번쩍이는 갑주.

마력이 아른거리는 목걸이와.

손가락에도 능력치를 증대시켜주는 반지가 몇 개나 끼워 놓았다.

[모두 레어 등급은 되어 보인다만.]

-그러겠지.

대충 견적을 뽑아보니 걸어 다니는 스포츠카 정도 되어 보인다.

[신입한테 저만한 아이템을 보급하다니.]

-국내 1위 길드니까.

회귀 전, 아라한은 한국 최초의 헌터 가문으로 우뚝 서서 정 · 재계를 좌우하는 거대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유진과 정면으로 붙어서 멸문하지만 않았어도, 오랫동안 세를 유지했을 건데.

그러니까 헌터 가문 되겠다고 로마노프랑 손잡아서 일을 크게 키웠나.

[괜찮아? 내 복수를 해준답시고 너무 큰 적을 만든 걸 수도 있다.]

"이 정도 상대도 못 넘기면 곤란해."

진심이다.

유진이 회귀 전에 마주했던 적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7대 가문.

국내 1위 따위는 몇 년 안에 제칠 자신이 있다.

[날 위해 그렇게까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지만 넘어가자.

[스파링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두 헌터의 방어력과 생명력을 책정합니다.]

[목숨이 위험할 경우에는 방어막이 자동으로 발동됩니다.]

[3, 2, 1]

[스파링을 시작합니다.]

"천유진! 본때를 보여주마아아!!!!"

곧장 파프너를 향해 달려드는 박성욱.

[어떻게 해드릴까. 주인?]

-한 번에 끝내지 마. 포션 효과를 보여주려면 적당한 부상은 입어야 하니까.

[참으로 잔인하네. 말하는 걸 보니 지인 같던데.]

-악연이니까 손속 아끼지 말고.

[후후. 오래간만의 실전이니 몸 좀 풀어보겠다.]

파프너도 훈련장 바닥을 가볍게 차면서 정면으로 쇄도했다.

쿵- 쿵-.

발을 뗄 때마다 바닥이 울리고.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가늘게 뜬 박성욱의 눈동자가 파프너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근거리 파워 타입인 것 같은데 안 맞으면 그만이다."

[카이락 창법]

[3장]

[반사 기동]

전력으로 달려오던 박성욱의 신형이 크게 꺾인다.

미끄러지듯이 바닥을 훑으면서 파프너의 옆으로 파고들고는.

[카이락 창법]

[2장]

[일점 찌르기]

창끝에 모든 체중과 힘을 실어내면서 빠르게 내질렀다.

그 어떤 때보다도 완벽한 찌르기.

박성욱의 눈가 위로 희열의 빛이 번들거렸다.

오-.

스파링을 보던 정진호도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훈련 때보다 날카롭다.'

카이락 창법의 핵심은 짧은 순간에 폭발적인 힘을 쏟아내는 것.

아라한에서 신입 훈련을 몇 년이나 맡아온 정진호의 눈에도 창법의 묘를 살린 완벽에 가까운 일격이었다.

'승부가 너무 빨리 나도 곤란한데.'

박성욱은 최근 정진호가 공을 들여 훈련시킨 신예.

어디서 튀어나온 지 모를 후배라는 작자야, 그의 관심 밖이지만.

실전 같은 스파링에서 박성욱이 더 많은 것을 깨우치기를 기대했다.

유진처럼 근본도 없는 헌터를 훈련장까지 들인 진짜 이유.

'나름 반항은 하고 쓰러져줬으면 좋겠군.'

정진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런 느린 공격으로 나를 맞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마름모꼴 동공에 맺힌 푸른 귀화가 박성욱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따라갔다.

쇄액!

파프너의 가슴팍을 노렸을 창끝이 허공을 갈랐다.

몸을 살짝 틀면서 옆구리를 스친 날.

"어, 어?"

[참으로 가관이구나. 다음도 생각하지 않은 허술한 공격이라.]

파프너는 오른팔을 붙이면서 옆구리 쪽에 아른거리는 창대를 그대로 붙들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박성욱이 팔에 힘을 주었지만.

옆구리에 낀 창은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실전이었으면 벌써 죽은 목숨인 거다.]

파프너가 창대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기자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딸려왔다.

빈틈투성이인 박성욱.

주먹을 말아 쥐고 일격으로 끝내려던 파프너는 아차- 했다.

'어디 하나 부러트리라고 했지.'

끌어올렸던 힘을 적당하게 빼고는 팔을 가격.

우직!

갑주의 보호를 받았음에도, 파프너의 괴력에 노출된 왼팔이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

핏발 선 눈을 한 박성욱이 축 처진 왼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한테 코뼈가 부러졌을 땐 펑펑 울었잖아. 아라한 소속이 되었다고 인내심까지 생긴 거야?"

"이 개자식이!!"

곧장 유진을 노리려고 뛰는 박성욱이지만.

[넌 못 지나간다.]

3미터나 되는 엘드리치 드래곤, 파프너가 앞을 막아선다.

다시 한번 보법을 운용.

파프너를 떨쳐내고 유진에게 다가갈 길을 열려고 할 때.

쿵!

두꺼운 다리가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고.

발이 스파링 필드를 강타하면서 박성욱의 무게중심도 흐트러졌다.

"아!"

정진호의 입에서 튀어 나온 한탄.

그와 동시에, 막 지면을 훑을 것처럼 낮게 움직이던 박성욱이 스스로의 힘을 이기지 못하면서 고꾸라졌다.

[두 번이나 같은 기술을 사용하면 다 보이잖아.]

파프너는 나근나근한 어조로 박성욱의 실수를 짚어주더니.

우직!

"크아아아아아!!!"

[원래 몸에 새겨줘야 다음에는 실수를 안 하더라.]

보법을 사용했던 다리를 부러트렸다.

한쪽 팔과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이고, 뼈가 튀어나온 상황.

스파링 필드는 말 그대로 목숨에 지장이 있는 '치명상'에만 발동될 뿐.

팔, 다리가 통째로 뽑히면 모를까, 부러지는 정도로는 박성욱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그만!"

필드 위로 올라온 정진호는 거칠게 손을 흔들었고.

[스파링을 종료합니다.]

그대로 싸움이 끝나버렸다.

시시하긴.

놈이 이렇게 빨리 개입할 줄이야.

'저 녀석 인성교육은 막 시작했는데 말이지.'

유진이 쩝-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정진호가 다급한 기색으로 박성욱의 팔과 다리를 확인했다.

"크윽, 으으으으으."

"다행히 후유증은 안 남겠어."

"티, 팀장님."

"금방 신관을 불러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여기도 신관이 있는데?"

천연덕스럽게 유진이 손을 흔들자, 정진호의 얼굴에 노기가 아른거렸다.

신입의 기를 세워주려다가 된통 당해버린 상황.

한데 어쩌랴.

유진을 무대 위에 앉힌 건 정진호 자신이었다.

"...자네. 1성의 치유 주문으로는 골절을 치유하기 어려운 걸 아나?"

"그 정도는 상식이지."

"하면 어떤 수로 우리 신입을 낫게 해줄지 알고 싶군."

"나한테 중급 포션이 있어서."

게이트의 몬스터한테서 간간이 얻을 수 있는 중급 포션.

개당 천만 원을 넘기는 고가의 소모품이다.

"신입을 치료하자고 그 귀한 중급 포션을 쓰겠다고?"

"이번에 중급 포션 양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 못 들었나 봐."

중급 포션을 내민 유진.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정진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뽕-!

마개를 따고는 박성욱의 팔과 다리에 포션을 뿌렸다.

"잘 잡아둬. 아니면 엉뚱하게 붙을 거다."

길드 신입 병신 되는 꼴 보기 싫으면 집중해야지. 안 그래?

[중급 포션을 사용합니다.]

[상처가 치유됩니다.]

우득- 우드득-.

부러진 뼈가 결합되고 찢겨진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짓는 박성욱.

"신입 후배님. 그 포션, 어디서 났다고 했지?"

정진호의 눈빛에서 감출 수 없는 욕망의 빛이 꿈틀거렸다.

18화 아라한 길드(2)

중급 포션의 효과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어진 정진호.

크크크. 미끼를 물어버렸군.

아라한 같은 대형 길드에서 나서면 중급 포션의 인지도도 빠르게 올라갈 터.

[만신전에 들른 건 이 상황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나?]

-설마.

유진이 회귀자라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까진 기억하지 못한다.

'저놈이 시비를 안 걸었으면 기억도 못했을걸.'

중급 포션 홍보 방법을 몇 가지 생각해두었지만, 뜻밖의 만남 덕에 훨씬 수월하게 풀렸다.

그런데 말이야.

-파프너. 몸 덜 풀렸지?

[훗. 한 판 더 벌일 셈이라면 환영이야.]

파프너의 동의도 구했겠다.

"곧 상용화가 될 중급 포션의 출처가 궁금해?"

"하하핫. 뭐 알려주면 고맙다는 거지."

"나랑 스파링 한 판 붙으면 어딘지 말해주마."

푸들푸들 떨리는 정진호의 뺨.

막 각성한 헌터한테 싸워보자고 도발을 받았으니 자존심깨나 상했을 거다.

"승패와 관계없이 말인가?"

"아라한의 팀장님한테 한 수 배우는 거 자체가 기회지. 뭘 조건을 더 붙이겠어."

조롱기 섞인 유진의 말이 정진호를 더욱 자극했다.

"용우. 신입이 괜찮은지 챙겨라."

"팀장님. 정말 1성급 헌터랑 스파링을 하실 겁니까?"

"상용화된 중급 포션. 그 출처를 아라한에서 먼저 알면 도움이 될 거다."

말은 공익을 위해서라지만.

도발에 넘어온 정진호는 눈가에 아른거리는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네 혀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넘어오네.]

-대형 길드에 소속된 애들이 자존심만 세.

아무렴.

대놓고 성질을 건드렸는데 안 넘어와 주면 재미없잖아.

정진호는 소형 아공간 주머니에서 전용 무장을 하나하나 꺼냈다.

얇은 레이피어.

거기에, 괴물의 피부를 덧댄 경갑까지.

[속도 위주의 타입인가.]

-충격이 누적되면 위험하겠어.

[흥. 자잘한 공격쯤은 무시하고 들어가면 그만이다.]

파프너는 자신 있게 대꾸했다.

-너무 마음 놓지 마라. 상대는 3성의 끝자락에서 오래 머무른 베테랑이니까.

3성부터는 다음 단계로 진입할 때 깨달음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한계 레벨 이후로 경험치를 얻지 못하느냐, 하면 아니었으니.

50레벨 요구량과 동일한 경험치를 얻으면 해당 성위에서 획득 가능한 능력치의 1/5를 얻는다.

정진호의 경지는 3성.

한계 레벨 이후 레벨을 올리면 보너스 스탯 15 중 1/5에 해당하는 수치, 그러니까 여유 스탯이 3개 주어진다는 것.

'능력치는 파프너를 앞선다고 봐야지.'

굳이 경고하지는 않았다.

파프너는 생전의 강함에 자부심을 가졌다.

이번 기회에 25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체감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스파링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두 헌터의 방어력과 생명력을 책정합니다.]

[목숨이 위험할 경우에는 방어막이 자동으로 발동됩니다.]

[3, 2, 1]

[스파링을 시작합니다.]

"이번에도 그 소환수를 대전사로 삼을 건가?"

"신관 역할에 충실해야지."

"명심하게. 소환수는 헌터와 다르게 스파링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하니."

의도가 투명하게 보이는 말.

-들었지? 그 육체 수리는 나도 힘드니까 박살나지만 마라.

[후후. 노력해보마.]

파프너는 오른손을 앞으로 슬쩍 내밀면서 상대와의 거리감을 가늠했다.

간격을 재는 건 정진호도 마찬가지.

'아까 신입의 찌르기에 반응할 때 어느 정도의 속도였더라.'

공격에 대응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인파이터 타입.

그렇다면.

저 덩치에 어울리는 파괴력을 제대로 선보일 수 없게 속도를 끌어올리면 그만이다.

판단을 마친 정진호가 발을 떼었다.

저벅- 저벅-.

푸른 귀화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의 움직임을 쫓았고.

[오호라. 신입하고는 다르잖아.]

파프너의 사념이 유진에게 한정되지 않고, 육성처럼 넓게 퍼져 나간다.

"뭐지? 누가 에어컨이라도 틀었나?"

"그러게. 으스스한걸."

스파링을 지켜보던 팀원들은 팔을 만지작거렸다.

죽은 자의 한기.

심지가 약한 사람은 귀곡성에 가까운 파프너의 사념을 듣는 순간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정령? 아니. 무슨 소환수인지 짐작도 안 가는군."

[궁금하면 직접 알아봐야지.]

"안 그래도 그럴 참...."

[제플 검법]

[5식]

[샤프 어택]

"이다!!"

자면을 박찬 정진호가 쾌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파프너가 거의 동시에 반응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칼날을 떨쳐내려 했지만.

정진호가 내지른 칼끝이 뒤로 물러나던 파프너를 놓치지 않고 가슴팍을 긁어냈다.

카각!

불똥이 튀고.

칼에 실린 힘을 고스란히 받아낸 파프너가 기우뚱거렸다.

-힘들어 보이는데 거들어줄까?

[아직 몸도 안 풀렸으니 조금만 기다려봐라.]

자신감을 드러내는 파프너.

유진은 언제든지 싸움에 개입할 수 있게끔 성력을 끌어올린 채로 상황을 지켜봤다.

[케넥 전투술]

[7장]

[10발 난타]

파프너의 전생, 박하늘이 익힌 체술이 펼쳐졌다.

파바바박!

공기가 떨릴 만큼 엄청난 속도와 힘.

미리 새겨둔 저주로 드래고니안 사체와 일체화된 몸뚱이는 파프너의 의지대로 완벽하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막상 파프너의 동작은 뭔가 어설펐다.

[음. 이 느낌이 아닌데.]

후웅-! 훙!

주먹이 연신 허공을 가른다.

인간보다 체구가 큰 드래고니안.

그 육체에 깃든 파프너의 양팔은 쭉 뻗으면 정진호의 검격이 닿는 간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닿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

"힘이나 반응속도는 빠르지만, 몸뚱이가 느려서야."

정진호의 세검이 다시 한번 파프너의 몸뚱이를 긁어낸다.

유진이 역병 좀비로 거듭 약화시킨 후에야 균열을 만들 정도의 뛰어난 방어력.

3성 끄트머리에 도달한 헌터는 그런 수고 없이, 몇 번 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비늘을 깨부쉈다.

깨어진 부위는 극히 일부지만.

'파프너한테 유효타가 들어간다는 게 문제지.'

〔크하하핫. 이러다가 작은 인간에게 패배할지도 모르겠구나.〕

'그야 지켜보면 알 일이지.'

유진은 팔짱을 낀 채 관전했다.

챙! 채챙!

금속끼리 부딪칠 때 발생하는 날카로운 충돌음이 울리고.

강화 회로를 새긴 비늘이 하나둘 깨어지면서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일방적인 전투.

5분 동안 쉼 없이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피해를 받은 건 파프너뿐이었다.

정진호는 거리를 벌린 후, 숨을 고르며 놀라움을 삼켰다.

'1성 헌터의 소환수가 맞긴 한 건가?'

찌르기는 확실하게 들어갔다.

묵직한 손맛이 증거.

한데, 맹공을 퍼부었는데도 파프너의 움직임은 전혀 둔해지지 않았다.

팔이나 다리가 망가져도 움직이는 언데드의 특성.

그걸 알 리 없는 정진호는 파프너가 생각 이상으로 단단하다고만 여겼다.

막 각성한 헌터가 부리기에는 과분한 소환수.

그럼에도.

"몸이 튼튼하면 뭐하나.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의미가 없다."

[동감이다.]

파프너의 입술이 비틀렸다.

산 자처럼 생생한 표정.

[적응은 끝났으니, 이제 전력으로 가야겠어.]

호오, 유진은 짧게 감탄했다.

파프너의 말에 담긴 뜻.

'빨리 알아챘네.'

드래고니안의 사체는 인간보다 훨씬 크고, 강인하다.

우람한 팔뚝과 다리.

전형적인 인파이터의 체구인데.

그 몸뚱이에 깃든 영혼, '박하늘'은 원래 빠른 움직임을 선호하는 아웃파이터 성향이었다.

'데스 나이트 때도 속공을 선호했지.'

영혼 결속으로 동조를 끌어올린 것과는 별개로.

박하늘의 전투 스타일은 드래고니안의 몸뚱이와 어울리지 않았다.

'수준이 맞는 적을 만나야 금방 깨우칠 터.'

중급 포션 공급처를 빌미로 정진호를 도발한 이유다.

스파링이 끝나고 나서 감을 잡아도 빠르다고 생각했건만.

'역시 내 최고의 심복답다.'

유진은 미소와 함께 끌어 모았던 성력을 방출했다.

*

"부정한 축복."

유진의 손에서 피어난 음울한 기류가 파프너의 전신에 스며든다.

만신전에서 새로 얻은 신성 주문.

[부정한 축복이 엘드리치 드래곤에게 스며듭니다.]

[해당 개체는 음차원의 마나를 품고 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오호라.

초보 신관의 버프가 능력치를 20%나 올려준다고?

'미쳤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상승 수치.

초급 신성 주문은 증폭시켜주는 스탯이 끽해야 하나나 둘 정도다.

버프를 걸어줄 수 있는 대상이 언데드나 부정한 힘을 다루는 직업군 한정이지만.

언데드를 주력으로 삼는 유진한테는 제약도 아니다.

'그럼 이번에는....'

연달아 끌어낸 성력을 정진호에게 불어넣는다.

[부정한 축복이 인간에게 스며듭니다.]

[해당 개체는 음차원의 마나를 품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감소합니다.]

부정한 축복이 효과를 발휘하자 정진호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어떠느냐. 짐이 부여한 새로운 힘이!〕

'무능 성좌는 빠지시지. 내가 고생해서 얻은 거잖아.'

관음만 하는 주제에 생색 내지 맙시다.

"진짜 1성이 맞는 건가?"

의혹이 가득한 정진호의 눈빛을 뒤로하고, 유진은 다음 신성 주문을 발동시켰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비늘 위에 돋아나는 검은 문신.

가시나무와 흡사한 문양이 몸 곳곳에 빼곡히 새겨진다.

"네 마음대로 날뛰어봐라."

[그것참, 마음에 드는 명령이군.]

쿵! 쿵!

파프너가 다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링이 크게 출렁거린다.

수백 kg에 달하는 질량.

드래고니안 사체를 기반 삼아 만든 언데드가 푸른 귀화를 사방으로 흩뿌린다.

정진호의 머리 위로 드리운 진한 그림자.

'능력치 감소쯤.'

만년 3성에 머무르면서 수많은 게이트를 공략했다.

둔해진 감각에 적응하는 것쯤이야, 베테랑인 정진호한테는 쉬운 일이다.

[제플 검법]

[12식]

[피어싱 어택]

현란한 스텝으로 적의 공격을 흘리고.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튀어나온 세검이 비늘을 마구 할퀸다.

충격이 누적되면서 깨어진 비늘 사이로 드러난 살점이 칼의 예기에 찢겨 나가고.

'이제 곧이다.'

정진호가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그래. 이 몸의 싸움 방식은 적과 간격을 두는 게 아니다.]

파프너가 제 발로 빗발치는 검격을 향해 뛰어들었다.

살점이 뜯겨나가면서 뼈가 드러나는 중상을 입었지만, 움직임이 느려지지는 않았다.

피 하나 흐르지 않는 망자의 몸.

팔이나 다리를 베어내지 않는 한, 망자는 절대 멈추지 않으니.

치켜세운 파프너의 어깨가 막 검을 회수한 정진호의 몸통을 들이받고.

"커흑!"

마른 비명과 함께 수 미터 뒤로 튕겨나더니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 순간이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타격.

정진호는 바닥을 튕겨내듯 곧바로 일어나서 무너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적응한 모양이네.'

유진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 뒤로는 전투의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거리를 가늠하기보다, 무조건적으로 파고들어서 한 방을 먹이려는 파프너.

반면 정진호는 링 곳곳을 누비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서로에게 늘어나는 상흔.

더 과격하게 움직인 파프너는 멀쩡한 비늘을 찾기가 어려웠고.

정진호의 안면에도 시퍼런 멍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았다.

갑주에 가려서 보이진 않지만, 몸에도 충격이 누적되어서 여기저기가 멍든 상황.

콰앙-!

파프너의 기세가 바뀌고.

유진이 버프를 사용하면서 승부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내가 진다고?'

정진호의 눈가 위로 분노의 화염이 맺혔다.

만년 3성이기는 해도 국내 1위 길드에서 오랫동안 버텼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긴다.

아니. 이겨야 한다!

'승산이 없진 않아. 발은 내가 더 빠르니.'

무방비하게 노출된 유진을 제압하면 기울어가는 스파링을 다시 뒤집을 수 있다.

각오를 다지자마자 정진호가 움직이는 방향이 틀어지고.

파프너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쳐서 후방에 있는 유진을 향해 내달렸다.

[이런. 내 속도로는.]

곤란한 듯한 파프너의 사념이 울려 퍼지고.

정진호의 눈가 위로 희열의 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그럴 줄 알았지.'

[응징의 쐐기를 해방합니다.]

내가 거기까지도 예상 못 할 줄 알았나?

유진이 손가락을 퉁기자, 누적된 충격으로 불어난 성력이 거친 기세로 폭발했다.

희끄무레한 충격파가 막 파프너를 제치고 나아가던 정진호의 등을 사정없이 가격했고.

"컥!"

마른 비명과 함께 링에서 초록색 빛이 흘러나오면서 정진호의 몸을 보호했다.

[한계를 넘어선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측이 패배했습니다.]

스파링 필드를 짓누르는 무거운 침묵.

"내가 뭘 본 거야?"

한 발 늦게 터진 아라한 소속 헌터의 비명소리에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화 가지 않은 길(1)

앞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중년의 인물.

미간에 파인 기다란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 앞에는 상아로 만든 명패가 놓여있다.

[백성현 아라한 부사장]

국내 1위 길드.

아라한의 2인자이자, 국내에 몇 없는 7성급 헌터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상용화 된 중급 포션이라고요?"

"예, 예. 그렇습니다."

유진에게 불의의 공격을 얻어맞고 볼썽사납게 링을 나뒹굴었던 정진호.

스파링 종료 후, 연락처를 받자마자 윗선에 보고했고.

치유 주문으로 얼굴에 생긴 멍을 지우기도 전에 부사장실에 불려왔다.

"정 팀장이 보기에 효과는 어땠습니까?"

"부러진 뼈를 금세 아물게 할 정도이니 게이트에서 나오는 포션과 비슷합니다."

"과연. 스파링 후에 녹화된 영상과 비슷한 분석이군요."

스파링 필드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확인했음을 돌려 말하는 백성현.

정진호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저, 죄, 죄송합니다. 부길드장님."

"무엇이 말입니까?"

"아라한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책임을 달게 받겠습니다."

킥-.

백성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조소.

"정 팀장이 패한 게 어째서 아라한의 명예로 이어지는 겁니까?"

"길드 훈련소에서 근본도 없는 1성 헌터에게 패하였...."

"언제부터 아라한의 명예가 만년 3성 하나 졌다고 떨어질 만큼 얄팍했는지 모르겠군요."

냉기 섞인 백성현의 목소리가 정진호의 말을 자르고.

정진호는 벌벌 떨더니 고개를 숙이는 걸로 부족했는지 무릎까지 꿇었다.

"이제 뭘 잘못했는지 알았습니까?"

"제, 제가 감히 아라한의 명예를 함부로 입에 올렸습니다."

"다시는 입술을 가볍게 놀리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손을 휘휘 젓는 백성현.

정진호는 허리를 90도로 접은 후, 등을 보이지 않으려고 뒷걸음치며 나갔다.

삐-.

호출하자마자 부사장실로 달려온 비서.

"중급 포션 출자. 확인해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백성현은 말끝을 흐렸다.

툭- 툭-.

팔걸이를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오른손 검지.

비서는 그가 상념에 빠졌을 때 나오는 습관임을 알고 기다렸다.

'그 자. 범상치 않더군요.'

정진호를 호출하기 전.

이미 훈련장에 설치되어 있는 CCTV로 유진의 전투를 살펴봤었다.

아라한 길드의 대소사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백성현을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굳이 정진호를 호출한 건 CCTV 속 영상과 당사자의 말을 대조해보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고유 특성이라고 해도 성위를 뛰어넘는 힘을 지닐 수 있는 겁니까?'

백성현의 뇌리에는 세계 각국의 랭커가 스쳐 지나갔다.

환수 피닉스를 다루는 미국 소속 헌터 아서.

다이애나 스팅은 정령과 관련된 고유 특성을 지녔다.

그 외에도 몇몇 랭커를 떠올렸지만.

'성위를 2단계나 넘어서는 헌터는 없습니다.'

파프너의 힘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툭-.

검지가 팔걸이에 고정되었다.

'신관 클래스라고 했지. 그럼 신수를 받은 건 아닐까요?'

백성현의 입가가 씰룩였다.

오딘이 수호성으로 있는 7대 명가, 로마노프 가문은 에인헤야르를 소환수로 부리기도 했다.

만약.

유진이 신관으로서 대단한 재능을 지닌 것이라면.

'성수, 아니면 신수급의 성장 가능성이 있는 환수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럴싸한 가설에 백성현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해를 넘어서는 파프너의 전투능력.

환수, 혹은 에인헤야르 같은 신성한 존재를를 하사받았다면 상황은 모두 설명이 되었다.

"천유진. 그 자에 대해 조사하세요."

"알겠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속옷 색깔 하나까지도 놓치지 말고 알아봐요."

"예."

"그리고 정진호 팀장은 감봉 및 팀원으로 강등시킵니다."

1성 헌터한테 패배하고.

주제도 모르고 아라한의 명예까지 운운한 버러지한테는 확실하게 벌을 줘야 한다.

백성현은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

아라한 길드에서 볼일은 끝났다.

중급 포션도 홍보하고.

만신전에서 획득한 추가 신성 주문의 효력도 봤을뿐더러.

파프너의 첫 실전까지 치렀다.

'이야. 너무 남는 장사라서 미안할 정도네.'

박성욱 씨.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주인이 성심성의껏 만들어준 육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서 미안하군.]

"신경 쓰지 마. 고생 좀 하지 뭐."

엘드리치 드래곤.

리치와 마찬가지로 생명력만 충분하면 얼마나 부서지든, 원형으로 복원이 가능하다.

아직 라이프 포스 베슬을 만들지 못해서 그 재생력을 발휘할 순 없지만.

'동업자 양반한테 주문한 다크니스 오브만 오면 되는데.'

다크니스 오브가 흔한 아이템은 아니어도 '흑마법사'가 비주류 직업군이다 보니 거래 자체가 잘 안 된다.

금방 구할 수 있겠지.

"35년 만에 처음 겪는 실전은 어때?"

[인정하지. 너무 자만했고, 또 미숙했다.]

대격변 초기만 해도 6성이라는 벽을 넘은 헌터는 극소수였다.

아주 뛰어난 오성.

그리고 무수한 사선을 넘나든 헌터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경지.

파프너는 죽기 전 기준으로 수많은 헌터들 중에서 선두를 도맡았던 재능 있는 헌터였다.

괜히 세븐 스타 운운한 게 아니라니깐.

[주인. 현재 전 세계에서 제일 강한 헌터는 몇 성인가?]

"9성."

러시아의 마법왕 드미트리.

중국의 무왕 창 우페이.

현 시점에서 9번째 성위에 도달한 것은 7대 명가의 수장 중에서 둘 뿐이다.

[나무를 붙들고 곡소리나 내고 있는 동안 많이 바뀌었군. 야속하게도 말이야.]

자조 섞인 파프너의 사념.

"자신 없으면 말해. 언제든지 놓아줄 테니."

[훗. 농담 한번 재미있게 하는구나. 내가 이런 일로 움츠러들 것 같나?]

유진의 도발을 들은 파프너가 자신 있게 답했다.

"좋아. 이래야 내 하수인이지."

부우웅-!

진동음에 휴대전화를 꺼내니, 익숙한 번호로 문자가 와있었다.

[뽀시래기 강민호]

형님. 지난 번 사냥에서 나온 물건들 다 판매됐습니다.

[천유진]

수고했다. 저녁에 밥이나 먹을까?

[뽀시래기 강민호]

저야 좋습니다. 돈은 바로 보내겠습니다.

10초 만에 통장으로 이체된 금액.

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3일 만에 1억 5천이라."

[혹시 0 하나 더해서 말하는 건 아니겠지?]

"뭣하러 그래?"

[허세 부리는 거라면 이해해주겠다.]

"이 양반 보소. 35년 만에 바깥 공기 맡으니 금전감각도 없지?"

게이트에서 나오는 아이템들은 하나 같이 가격이 비쌌다.

등급이 낮은 마석도 내부에 마나를 품고 있어서 기업들이 사들이고 있으니.

향후 5년 정도는 게이트 인플레이션의 열풍이 꺼지지 않으리라.

[믿기지 않는군. 나 때만 해도 헌터라는 건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자긍심만으로 살았는데!]

"하수인아. 언제 적 이야기를 하냐?"

[세월의 무상함이여.]

"벌기 쉽지만, 그만큼 쓰는 것도 쉬운 법이다."

언데드를 강화시키려면 게이트나 접경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약초가 필요하다.

돈을 많이 벌기도 하겠지만.

강령술의 효과를 최대로 발휘하려면 그만큼 많이 써야 할 것이다.

"참. 파프너야.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명령을 내려도 될 것을. 굳이 부탁이라고 하니 불길한걸.]

"너한테는 무신의 눈이 있잖아."

[그렇지. 어떤 무예든지 핵심을 읽어낼 수 있는 특성이다.]

마투사 특성과 달리, 회귀 전에도 계승되었던 박하늘의 S급 특성이다.

시스템에서 부여한 게 아닌.

박하늘 씨가 타고난 센스라서 계승된 것.

"네 주특기가 체술인 거야 알지만 마음만 먹으면 창법도 금방 익힐 수 있지 않을까?"

[주인. 이 몸뚱이의 힘을 최대로 발휘하려면 박투가 제일 어울려. 굳이 창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 그게. 익혀서 나 좀 지도해달라고."

파프너는 멍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망자의 표정이 이토록 다채로웠던가?

그게 아니면 파프너의 사념이 굳어버린 근육을 움직일 만큼 강렬했던 것일까.

유진의 부탁을 듣자마자 수많은 언어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고.

파프너는 초인적인 인내 끝에 가장 부드러운 표현을 사념으로 내뱉었다.

[미친 소리!]

이글거리는 푸른 귀화가 유진을 노려보았다.

*

유진의 다음 행선지는 헌터 마켓.

사냥 정산금도 들어왔겠다. 여의도에서 멀지 않은 거리이기도 하니, 동선도 괜찮았다.

[진심인가 보군.]

흑암의 반지로 들어간 파프너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난 처음부터 진지했다고.

[주인이 창을 휘두를 일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뭐든 최악의 상황은 모두 대비해야 하는 법이야.

아무렴.

회귀 전에도 언데드 대군을 돌파하고 유진의 목숨을 노렸던 적이 몇이나 있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고블린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정도의 요령이 생겼겠는가?

[창법을 배운다 치면 스탯 분배 문제는 어떻게 할 거야?]

-내 육체 능력은 동 레벨 무투계 헌터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주인한테는 [마투사] 같은 고유 특성이 없잖아.]

-신성 주문 중에 라이프 드레인이라는 게 있거든.

몬스터의 생명력을 갈취, 흡수함으로써 신체능력을 증대시키는 기형적인 신성 주문.

본래 용도는 빼앗은 생기를 치유로 활용하는 것이나.

유진은 생체물질을 축적시켜서 육체를 강화한다는 부가적인 옵션을 주로 활용하는 중이다.

[신관계 스킬 중에 그런 주문이 있어?]

-이왕 능력치가 오르는데. 써먹을 방법이 있으면 좋잖아.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네.]

-창법 알려주다가 못 써먹을 정도면 말해줘. 그러면 깔끔하게 관두마.

[주인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거절할 수는 없겠군.]

파프너는 간신히 납득했다.

주인 된 입장으로 지시할 수도 있지만.

어지간해서는 파프너의 의사를 존중해줄 생각이다.

'상위 언데드부터는 영혼의 자율성에 따라 전투력도 달라지니.'

아무렴.

사람도 컨디션에 따라 능률이 다르듯, 자아가 또렷한 상위 언데드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다.

회귀 전, 유진의 주력 언데드들은 모두 자의식이 뚜렷했던 것이 증거.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성을 받아낼 것이다.'

유진이 제작한 언데드들은 기본적으로 친밀감, 혹은 복종심이 새겨진다.

조금만이라도 노력하면 금세 영혼의 결속이 강해진다는 뜻.

그게 아니어도, 사람들을 구하려고 목숨까지 내던진 잊힌 영웅의 의지를 마음대로 꺾고 싶진 않았다.

'설득도 했으니, 그 스킬 북만 찾으면 되겠어.'

스킬 북 판매 매장으로 향하는 유진.

게이트 안에서 발견된 수많은 스킬 북들이 책장에 꽂혀 있다.

구매 전에는 스킬 북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나하나 잠금장치가 걸려 있지만.

헌터라면 모두 아이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니, 스킬 북의 구성을 확인하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인. 따로 생각해둔 창법이 있어?]

-특별히 없지만, 무투계 제한이 없는 창법이어야겠지.

간혹 보조 마법이나 비주류 무술 같은 경우에는 직업군 제한이 걸리지 않는다.

효율은 떨어지지만.

제약 없이 익힐 수 있는 스킬 중에는 의외로 괜찮은 것도 있다.

'라이트나 나려타곤처럼.'

광원 마법.

그리고 회피 용도로 활용되는 체술.

특히 나려타곤은 바닥을 구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체술이지만, 급할 때 회피기로 굉장히 유용했다.

전생의 유진도 배워놓고는 위급한 상황에서 몇 번이나 사용했었고.

모양새가 떨어지는 것 빼고는 유용했다.

'이번 생에는 품위가 있으면서 강력하기까지 한 체술을 배워봐야지.'

마켓에서 판매 중인 스킬 북들을 빠르게 훑던 중.

유진의 눈동자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찾았다."

목소리에 스며든 은은한 희열.

반쯤 투명한 아이템 설명 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등급 : 일반

분류 : 스킬 북

내구도 : 1/1

이세계의 가문, 베르디안에서 내려오는 기본 창법을 기록한 책이다.

내용을 이해하기만 하면 어린아이도 배울 수 있다.

'그래. 이거야.'

잘 쳐줘도 호신술 정도로 느껴지는 아이템 설명이지만.

유진은 미소를 드러냈다.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을 완벽하게 익히면, 에픽 등급 창법인 데스 스파이럴을 배울 수 있다.

영국의 창귀,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가 한 말이다.

먼 훗날에나 밝혀질 숨겨진 요소.

'기연 잘 먹겠습니다.'

〔또 못된 버릇 나왔군.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는 건지.〕

이게 바로 회귀자의 특권이다.

20화 가지 않은 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