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20-30

20화 가지 않은 길(2)

헌터 마켓 인근에는 사설 스파링 센터가 많이 있다.

막 구매한 무장, 혹은 스킬의 위력을 확인하고 싶은 헌터들을 노린 것.

유진도 비슷한 목적으로 인근 스파링 센터를 들렀다.

"받아."

흑암의 반지에서 꺼낸 파프너에게 [베드리안 식 기본 창법] 책자를 던져주었다.

[주인이 익힐 것 아닌가?]

"너도 창법의 요체는 알아야 지도해줄 수 있을 거잖아."

[거참. 즉석에서 창법을 분석해서 알려달라니. 나를 과대평가하는군.]

글쎄다.

유진은 전생의 파프너가 얼마나 뛰어난 오성을 지녔는지를 잘 알고 있다.

'스켈레톤 나이트와 동화되면서 검을 다뤘는데도 대성했지.'

초월의 경지라고 불리는 9성.

파프너는 생전에 다루지 않은 검을 사용했는데도 9번째 성위에 도달했던 실력자였다.

아라한 길드의 함정에 빠져서 허무하게 죽지만 않았어도 진즉에 헌터 가문 하나가 나왔을 거라니까.

'파프너의 재능은 믿을 만해.'

적어도.

무투계하고는 1그램도 인연이 없는 유진보다는 훨씬 뛰어난 스승이 될 것이다.

[살다 살다 이런 부탁을 받을 줄이야.]

"넌 이미 죽어 있다."

[관용적인 표현도 모르냐?]

투덜거리면서 [베르디안 기본 창법]을 정독하는 파프너.

헌터가 아니기에, 내용물을 읽는다고 해서 곧바로 스킬이 생성되지는 않는다.

스킬 북을 열었을 때 조건만 충족되면 바로 습득하는 건 헌터에게만 허락된 특권.

반대로.

스킬 북의 요체를 깨달으면 각성 시스템의 보조 없이도 기예를 펼칠 수 있기도 하다.

'아라한 같은 대형 길드가 인기 있는 이유지.'

박성욱이 펼친 [카이락 창법]도 스킬 북으로 습득한 게 아닌, 아라한 길드 소속 전문 교관한테 배운 것이다.

스킬 북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라는 것.

깨달음과 반복적인 훈련으로 스킬을 창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연금술 스킬이나 강령술 수준이 낮아도 술식을 새기면 발동 자체는 가능하듯.'

파프너가 창법 스킬 북을 살피면서 낑낑대는 동안.

유진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스파링에서 입은 부상을 복구해야지.'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유진은 접경지역에서 비축해둔 오크의 생명력을 뽑아내서 파프너에게 불어넣었다.

푹 파인 근육과 살이 재생되고, 비늘이 돋아나면서 막 붙은 살갗을 가린다.

트롤과도 같은 회복력.

'언데드도 회복시키는 신성 주문이라.'

회복 대상이 반드시 인접해야 하는 제약이 있지만.

언데드를 전투 도중 즉석에서 복원할 수 있다는 장점은 꽤 크다.

좀비 같은 하급 언데드야 소모품처럼 굴릴 수 있어도.

파프너처럼 공들여서 만든 언데드가 전투 중에 손상되면 당장 전력이 깎여나가는 걸 피할 수 없다.

수리에는 많은 자원과 촉매, 그리고 집중력이 필요한데.

파손된 언데드를 복구하려고 하면 적이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할 리는 없지 않은가?

'네크로맨서에게 유용한 신성 주문.'

죽음을 거스르는 개념을 숭배하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신성 주문들은 하나 같이 언데드와 합이 잘 맞았다.

파프너의 몸에 새겨진 상흔을 모두 치유할 때 즈음.

[흐음. 대강은 알겠다.]

"거 봐. 하면 금방 되잖아?"

[어디까지나 이론만 습득했을 뿐이다. 창법에 익숙해지려면 몸으로 깨우치는 수밖에.]

유진과 파프너는 연습용 창을 쥔 채, 서로를 마주했다.

[먼저 스킬을 익히어라.]

"사양하지 않고."

[베르디안 식 기초 창법 스킬 북을 사용합니다.]

[스킬의 요체가 머릿속에 새겨집니다.]

푸스스스-.

가루가 된 책.

스킬 북에 기록되어 있는 창법의 기본 자세가 하나둘 떠오른다.

'총 6식이군. 듣던 대로다.'

제1식 – 보통 찌르기

제2식 – 빠르게 찌르기

제3식 – 회전 막기

제4식 – 창대 치기

제5식 – 돌진하기

제6식 – 전력 찌르기

여섯 중 셋이 찌르기요.

나머지 식도 개념만 놓고 보면 단순하게 느껴졌다.

[단순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어. 맞아. 호신용으로 익히기 좋네."

[창법을 수박 겉핥는 식으로 배우면 그런 말이 나올 거다.]

"우리 하수인께서는 벌써부터 기본 창법 안에 숨겨진 심득이라도 깨달은 건가?"

[설마. 그런 재주는 없어.]

파프너는 창을 들어 올리더니 날 끝을 유진에게 겨누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몸의 대화를 나누면서 알아봐야지.]

예?

뭐라고요?

대답할 새도 없이, 파프너의 손에 들린 연습용 창이 번쩍- 하고는 유진의 복부로 파고들었다.

*

뭉툭하게 만든 창끝이 시시각각 가까워진다.

당황한 건 잠시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투를 벌여온 유진은 손에 쥔 창을 의지대로 움직였다.

'나름 힘 조절은 했다, 그거지?'

유진과 파프너의 스펙 차이는 압도적.

작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면 창이 날아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미 맞았을 것이다.

유진이 반응할 정도의 속도라면.

'쳐낼 수도 있을 터.'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3식]

[회전 막기를 사용합니다.]

스킬 북으로 주입받은 지식을 바탕 삼아 창대를 빙글빙글 돌렸다.

회전을 거듭할수록 부우웅- 위협적인 소리가 흘러나오고.

파프너가 내지른 창이 회전 중인 유진의 창대에 걸렸다.

좋아.

더 힘을 주어 파프너의 공격을 걷어내려는 순간.

"으윽."

팔목에 가해진 충격에 흘러나온 신음.

힘이 쭉 빠지면서 양손으로 쥐고 있던 창대가 팽그르르- 요란하게 돌면서 허공으로 튕겨나가고.

퍼어어억!

뭉툭한 날이 가슴팍에 직격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쓰러지는 것을 면했지만, 헛구역질까지는 막지 못했다.

"우욱."

[생각보다 얼간이구나. 우리 주인은.]

작게 중얼거리는 파프너.

유진은 숨을 돌린 후, 방금 전 상황을 물었다.

"분명 쳐냈는데. 어떻게 된 거지?"

[힘을 분산시키는데 내지르는 공격을 걷어낼 수 있을 리 없잖아.]

"네 근력이 나보다 강해서 그런 건 아니고?"

[후후. 알고 있지 않느냐. 주인의 수준에 맞춰서 찔렀다는 것을.]

쳇.

안 넘어가는군.

[다시.]

유진이 튕겨나간 연습용 창을 쥐는 순간.

파프너는 기다렸다는 듯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같은 부위를 노리는 창끝.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것쯤이야, 유진에게는 익숙했다.

'이번에는 그냥 당하지 않아.'

팔뚝에 힘을 주니 한껏 부풀어 오른 근육.

고블린과 오크, 그리고 프로그맨의 생기를 육체에 축적시키면서 올라간 힘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

[4식]

[창대 치기를 사용합니다.]

따아아악!

손맛이 있다.

파프너의 찌르기를 놓치지 않고 시야에 담아두고.

그에 맞춰 창대를 길게 휘두르니 몸에 닿기 전에 쳐낼 수 있었다.

'더 나아가면 찌를 수 있....'

앞으로 발을 내딛느라, 유진의 시야가 어두워지고.

퍼억!

어?

'나는 왜 바닥에 누워 있는가.'

파프너에게 일격을 먹여주려고 했는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홱 바뀌어버렸다.

한 발 늦게.

파프너의 손에 들린 창이 등을 가격, 그 충격에 고꾸라졌다는 것을 인식했다.

"창이 튕겨나는 반동을 이용해서 뒤를 노렸나."

[정답이다.]

"내 힘을 역이용할 줄이야."

[창대를 회전시키지 않고 내 공격이 닿기 전에 쳐낸 것까진 좋았다.]

파프너는 시범을 보이듯 창을 가볍게 내질렀다.

유진의 코앞에 아른거리는 날.

[느꼈어?]

"쳐내는 위치를 잘 가늠해야 한다는 건가?"

[제법 감이 좋단 말이지. 몇 번 말하지 않아도 금방 이해하고.]

히죽거리며 웃는 파프너.

유진은 부득부득 이를 갈면서 창대를 다시 들었다.

[다시.]

아.

이거... X된 것 같은데.

식은땀이 유진의 등허리를 축축하게 적셨다.

"물러달라고 해도 안 되지?"

말과 다르게 창대를 으스러져라 세게 쥐는 유진.

파프너는 심유한 안광으로 그 모습을 담아두었다.

*

창법 수련을 시작하고 1시간이 지났다.

"허억, 헉."

용광로처럼 달궈진 폐부에서 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온다.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방울.

유진이 흘린 땀이 스파링 필드 곳곳에 흩뿌려져 있고.

창을 쥔 손은 파르르 떨렸다.

파프너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한계에 달한 육신.

〔꼴 좋구나. 계약자.〕

'닥치세요. 무능 성좌님.'

그냥 얻어맞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수없는 찌르기를 보았고.

그에 대응해서 창을 움직였다.

번번이 실패해서 파프너의 창에 역공을 당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는구나.]

"알려달라고 한 건 나니까."

유진은 분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파프너가 속도와 힘을 모두 맞춰 주었지만, 제대로 공방을 주고받기는커녕 수도 없이 넘어지거나 뭉툭한 날에 찔렸다.

헌터의 특권인 스킬 북을 사용해서 창법의 기초를 익힌 유진.

반면에 파프너는 스킬 북에 적혀진 내용을 읽었는데도, 창법 이해도가 훨씬 높았다.

'스킬 보정은 내가 받았을 건데. 공격 한번을 제대로 못했네.'

연습용 창에 얼마나 두들겨 맞은 건지.

몸 여기저기가 쑤시는 게, 치유를 하지 않으면 내일 못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창법의 요체를 조금은 이해했나?]

"요체 같은 소리. 그냥 덜 맞으려고 움직인 게 전부야."

[후후후. 본래 싸움의 본질이란, 덜 맞고 더 때리려는 것이다.]

파프너는 창대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창법은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다는 건?"

[언뜻 단순해 보이는 기예가 모두 기본에 충실했다는 말이다.]

더 빠르게 찌르고.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게 파프너가 말하는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다.

파프너가 보기에,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은 어지간한 무투계 헌터들의 기예보다 싸움의 본질에 충실했다.

'아. 그런 거였나.'

유진은 지난 1시간 동안 몸부림 쳤던 모습을 하나씩 곱씹어보았다.

창이라는 무기가 지닌 성질.

힘이 집중되는 곳이 날끝이라는 점을 활용, 일점으로 힘을 집중하거나.

기다란 봉대를 응용해서 넓게 공격하기도 한다.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은 동작이 단순하지만, 창의 장점을 살리는 방법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괜히 창귀 제임스의 주력 기술이 아니었나.'

유진의 진짜 노림수는 [베르디안 식 기본 창법]을 마스터해야만 습득 가능한 창법.

[베르디안 식 파괴 창법]을 익히는 것이다.

교두보 개념으로 익히기 시작한 거지만, 파프너의 말을 들어보니 기본 창법만 해도 준수한 창법이었다.

[공통 계열 스킬 북을 찾다가 이런 보물을 발견하다니. 주인은 운도 좋아.]

"두들겨 맞은 것도 그 운에 포함되는 거라면."

[안타깝게도 말로 설명하는 데는 재주가 없어서 말이야.]

"정말 안타깝군."

유진은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만약.

파프너한테 두들겨 맞은 게 효과가 없으면 모르겠지만.

찌르기를 튕겨내려고 발버둥을 쳤고.

1시간 동안 발악한 경험 덕에 창법의 요체를 빠르게 이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프너의 교육 방식은 유진에게 제법 잘 맞았다.

[몸 쓰는 재주도 괜찮은걸? 이 정도면 무투계 헌터로 나섰어도 대성했을 거다.]

"보육원에서 지낼 땐 나름대로 자주 싸웠어. 이쯤이야."

[주인을 가르치는 데 의욕이 샘솟는군.]

"합법적으로 팰 수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부정하진 않으마.]

저 빌어먹을 놈.

하수인이면 하수인답게, 주인에 대한 존경을 표해야지.

유진은 속으로 투덜대면서 링에 드러누웠다.

[그만 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이 고생을 해놓고?"

[주인에게는 나처럼 뛰어난 하수인이 있잖아.]

제 얼굴에 금칠하기는.

유진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힘 없이 대꾸했다.

"금방 관둘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다."

가보지 않은 길.

신관으로 전직한 거야, [흑암의 반지]를 믿었기에 벌일 수 있는 도박이었다.

무투계 스킬을 익히는 건 회귀 전에 세우지 않았던 계획.

그렇지만.

'쓸 수 있는 건 모조리 쓰기로 마음먹었어.'

사용 대상이 자기 자신의 육체일지라도.

유진은 쓸 만한 도구를 놓칠 생각이 1그램도 없다.

신관으로서의 능력은 영혼의 격과 위업을 쌓아가다 보면 자동으로 오를 것이고.

연금술과 네크로맨시야 전생의 경험을 살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무투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경험이 더 필요하다.'

라이프 드레인의 효과로 강건해지는 육체.

그냥 썩히기는 아깝잖아.

땀방울 좀 흘려서 강해지는 수단을 하나 더 확보한다면.

이것보다 더한 이득은 어디 있겠는가?

[포기할 마음은 없나 보군.]

"떠보기라도 한 거냐?"

[고객님의 단순 변심은 이쪽도 곤란하지 않겠나.]

유진은 파프너를 보면서 피식, 짧게 웃었다.

21화 남의 기연은 먼저 채가야 제 맛(1)

샤워장에서 가볍게 씻고 나오니 어느새 해가 떨어졌다.

미리 나온 강민호는 스파링 센터에서 막 나온 유진에게 다가오다가.

"형님. 얼굴이 왜...?"

여기저기에 멍이 져 있고, 팅팅 부은 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부풀어 오른 볼.

있는 힘껏 웃음을 참는 걸 보고 있자니, 유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큽, 알겠습니다."

"배고프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제가 사겠습니다."

일행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주문을 마친 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유진은 본론을 꺼냈다.

"최근 헌터 계 이슈 좀 알고 있나?"

"대부분은 찌라시지만요. 성민이가 헌터넷에 푹 빠져 있어서 주워듣는 건 있습니다."

헌터넷이라.

헌터 인증을 해야 가입이 되는 전용 사이트였지.

'들어가도 그렇게 특별한 건 없지만.'

제법 까다로운 인증과정을 거치고 들어가도,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와 차별화되는 점은 거의 없다.

헌터넷에서 돌 만한 정보는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리니까.

'정보망을 구축해야겠어.'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획득한 뒤로는 과거에 벌어진 일들을 나름대로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기연.

내 편으로 회유할 사람들.

그리고.

죽일 놈들의 명단까지.

'굵직한 건수 위주로 기억해뒀지만, 놓친 부분도 있을 거다.'

정보망을 구축하려는 이유다.

여러 정보를 접하다 보면 침전된 기억이 자극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밑져야 본전.

이왕 강민호를 불러냈겠다, 유진은 헌터넷에서 나온다는 찌라시를 물어보았다.

-강릉의 괴사.

-땅끝 마을에 나타난 게이트.

-헌터 연쇄 살인.

헌터넷에서 나도는 이슈들을 쭉 들어봤지만, 건질 건 많지 않았다.

아쉬움에 쩝, 입맛을 다실 때.

"그러고 보니 김제에 열려서 장기간 유지된 게이트 있지 않습니까?"

"뭔데."

"아... 그 잊힌 신전 말입니다. 형님."

잠깐만.

잊힌 신전이라고?

호선을 그리는 입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전생에 벌어진 일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잊힌 신전이 아직 공략이 안 됐단 말이지.'

큭.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웃음.

〔또 그놈의 기연인 게냐?〕

'우리 성좌님께서는 내가 날로 먹는 게 마음에 안 드나봐.'

〔영웅이란 무릇 시련 끝에 단련되는 법. 계약자가 걷는 길은 너무나도 쉽도다.〕

'고생은 이미 회귀 전에 엄청나게 해봤거든?'

크로노스를 향해 투덜거리는 동안 대화의 흐름이 끊어졌다.

"형님?"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그것보다 잊힌 신전에 대해 듣고 싶다."

"지평선 길드에서 1년 가까이 공략이 안 돼서 조만간 브레이크가 일어날 것 같다고 합니다."

"유동 타입인가 보네."

[고대의 정원] 같은 고정 타입은 주기적으로 몬스터들만 줄여주면 게이트 브레이크가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 유동 타입은 몬스터를 사냥해도 마력 밀집도가 조금씩 올라가기에.

오랫동안 공략을 못하면 언젠가는 게이트의 마력이 100%에 도달,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예. 밀집도가 위험단계에 돌입했다고 하더라고요."

"그쪽 길드도 체면 좀 구겼겠어."

"안 그래도 지평선에서 해당 게이트의 통제를 풀고 일반 헌터들의 참여를 받는다고 합니다."

게이트 통제.

유력 길드들은 간간이 특정 게이트 출입을 제한했다.

희귀한 몬스터.

해당 게이트 안에서만 발견되는 부산물.

그 외에도 통제를 거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가끔은 본인들도 감당이 안 되는 게이트를 통제했다가 역풍을 맞기도 한다.

"대형 길드에서는 참여한다는 이야기 없나?"

"불사조와 새벽 길드에서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은 있습니다만...."

국내 2위 불사조.

그리고 3위인 새벽 길드의 참전이라.

'둘이 나섰다면 확실해.'

유진이 회귀 전에 들었던 소문이 하나 있다.

불사조와 새벽의 신예 헌터들이 경쟁했던 장기 미공략 게이트에서 아티팩트가 발견되었다는 것.

아티팩트란 지구의 장인들이 만든 물건이 아닌 게이트 내부에서 발견된 무구들을 가리킨다.

물론.

게이트에서 나왔다고 해서 개나 소나 아티팩트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강력한 마법이나 주술, 혹은 축복이 부여된 무구.

잊힌 신전의 공략 보상인 용린갑(龍鱗鉀)도 아티팩트로 분류되는 강력한 무구다.

'전생에는 불사조 길드에서 용린갑을 손에 넣었지?'

성장 형 아티팩트.

혈액을 먹이면 강해지는 블러드 액스도 [레어] 등급이지만, 성장하는 장비이기에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용린갑의 등급은 [에픽] 급.

성장 조건을 타는 블러드 액스와 달리, 착용하기만 해도 주인과 함께 강해지는 무장이니 비교 선상에 놓기도 민망했으니.

용린갑은 회귀 전, 불사조 길드 마스터터인 김영수를 상징하는 아티팩트였다.

'이번 생에는 다를 거다.'

창법도 익혔겠다.

몸을 보호해줄 갑주까지 생기면 더할 나위 없잖아?

"팀원들한테 연락해. 내일 보자고."

"형님. 설마...."

"저번처럼 야영 준비도 해놓으라고 전해줘."

잊힌 신전 공략.

[고대의 정원]처럼 공략 포인트를 하루 안에 모두 노릴 만큼 쉬운 곳이 아니다.

"또 야영이구나."

강민호의 푸념이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

용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본 채로 서 있는 커다란 조형물.

벽골제를 상징하는 동상 사이로, 푸른 웜홀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잊힌 신전]으로 향하는 게이트다.

"히야. 게이트 공략하려고 온 헌터들이 엄청나게 많슴다."

이성민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둑 아래에 펼쳐진 벌판.

과거에는 축제 외에는 사용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지평선 길드가 통제를 포기한 후로는 수많은 헌터들이 몰려들어서 벌판 여기저기에 천막을 쳐놓았다.

"형님. 저희도 준비를 할까요?"

"게이트 안에서 숙식 해결할 거다. 밖에서 힘 뺄 필요 없어."

강민영이 자신 없는 투로 입술을 떼었다.

"챙긴 건 5일분이에요. 그걸로 괜찮을지."

"그 안에 해결해야지."

유진은 자신 있게 말했다.

[잊힌 신전]이라는 게이트를 듣는 순간, 당시 불사조 길드에서 인터뷰 했던 내용이 생각났거든.

공략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혀, 형님. 저기 보십쇼!"

"뭔데 그래?"

"불사조에서 차기 검성으로 불리는 장미선입니다!"

긴 머리를 묶어서 뒤로 넘긴 여인.

움직임에 거치적거리지 않은 경갑으로 무장했고,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를 달아놓았다.

꾹 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눈매.

은연중에 내뿜는 날 선 기세가 시끌벅적하던 공터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맞다. 쟤가 이 게이트의 비밀을 풀었지?'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장미선을 흘겨보았다.

회귀 전.

불사조 길드 마스터인 김영수를 넘어설 인재로 평가받았었으나, 게이트 공략 도중 사고에 휘말리는 바람에 꺾여버린 비운의 인물이다.

실은 그 사고가 아라한에서 경쟁자를 무너트리려는 함정이었고.

'아라한과 불사조가 길드 전쟁을 벌이는 시발점이 되었지.'

유진이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기억하는 건 불사조 길드의 용병으로 활동한 덕분이다.

'박하늘 씨 소원 성취해 준다고 말이야.'

그때만 해도 국내 1위 길드하고 전면전을 벌일 수준은 아니었거든.

이야기로만 들은 인물을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큰일인데요. 형님."

"또 뭐가? 호들갑 떨지 말고 이야기해라."

"새벽에서는 신유승이 공략에 참여하는 것 같습니다."

신유승.

훗날 [철권]이라는 이명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강자로 자리매김한 녀석이다.

장미선도 그렇고.

미래에 이름깨나 날릴 유망주들이 한 자리에 모였군.

"형님. 저희가 공략할 수 있을까요?"

"의심하지 말지어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은 신관처럼 보이네요."

"반어법이지?"

"티가 났나 봅니다."

멋쩍게 웃는 강민호.

처음에는 바짝 굳어 있더니 며칠 지났다고 제법 긴장이 풀렸다.

재능은 그렇다 쳐도, 배포나 수완도 쓸 만하단 말이야.

"저쪽 헌터들 신경 쓰지 말고 내 뒤나 잘 따라와라. 지친다고 안 봐줄 테니."

살벌한 경고와 함께 동상으로 향하는 유진.

"형님. 같이 가요!"

강민호의 새된 비명을 신호탄 삼아 뽀시래기 팀도 배낭을 메고 게이트에 속속들이 입장했다.

*

휘이이잉-!

건조한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물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갈색 땅. 잡초 몇 개가 자란 것을 빼면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땅이다.

정면에 선 큼지막한 사원.

'잊힌 신전'이라는 명칭이 잘 어울리는 커다란 구조물이다.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으니.

[또 싸움인가?]

불쑥 튀어나온 파프너가 신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건 뭡니까. 형님?"

"하수인이다."

[나름 구면인데 모르는 척하면 섭섭하지.]

강민호의 머리 위에 떠오른 의문부호.

"너도 알걸? 접경지역에서 추모했던 지박령이다."

"추모한 영혼을 언데드로 만드신 겁니까?"

"당사자의 허락 받고 한 일이야."

"제가 죽으면 부탁이니 언데드로 만들진 말아주십쇼."

"아무나 만드는 줄 아나? 넌 약해서 제작해봐야 좀비가 고작이야."

"그런 말씀 하시니 더 싫어지는걸요."

질색하는 강민호를 보며 파프너가 하핫- 크게 웃었다.

망자의 사념에 몸을 부르르 떠는 뽀시래기 팀.

"흠흠, 본격적인 공략을 시작하기 전, 간단하게 브리핑을 할게요."

헛기침과 함께 앞으로 나선 강민영이 설명을 시작했다.

[잊힌 신전]

[유형 - 유동 타입]

[출입 조건 : 1 - 2성]

[마나 밀집도 : 93%]

[게이트 면적 : 대형]

"잊힌 신전의 출입 조건은 2성까지지만, 실제 공략 난이도는 3성급이라고 해요."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신전 구조가 하루마다 바뀌는데 그때마다 환경이 제각각이래요."

구구궁-!

강민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잊힌 신전에서 기묘한 진동음이 흘러나왔다.

신전을 받치는 기둥들이 좌우로 밀리면서 발생한 굉음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바닥 일부가 꺼지거나 갑자기 솟구치는 등, 잊힌 신전 내부의 구조가 들썩거리면서 재조립된다.

[저건가 보군.]

하루마다 생기는 변화.

잊힌 신전이 1년 가까이 공략되지 못한 이유다.

24시간마다 한 번씩 신전의 구조가 바뀌면서 모조리 리셋.

신전에 존재하는 괴물들의 종류가 바뀌고, 내부 구조도 완전히 바뀐다.

"제길. 물러나라! 구조 변성에 휘말리면 살아남기 힘들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잊힌 신전에서 괴물을 사냥하거나 게이트 구조를 탐사하던 헌터들이 부랴부랴 뒤로 물러났다.

유진도 신전의 변화를 눈여겨보았다.

'내 기억대로라면....'

전생에 [잊힌 신전]을 공략했던 헌터, 장미선은 인터뷰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신전의 구조는 하루 1번 바뀝니다.

-그때 신전이 변화하는 걸 지켜보면 움직이지 않는 기둥이 있거든요.

-기둥 표면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신전의 구조가 바뀔 때마다 나오는 괴물들과 일치합니다.

-괴물들의 상징을 가지고 변형의 축을 이루는 기둥에 대면 보스 방으로 이동하더라고요.

'용케도 이게 기억나네.'

공략 방법이 꽤 복잡해서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게이트.

쉼 없이 구조가 변형되는 신전은 공포를 자아냈다.

[더 설명할 건 없나?]

"위험성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말보다 보는 게 빠르죠."

[구조가 바뀔 때 안에 있으면 뼈도 못 추리겠어.]

몇 분 후.

재구축을 마친 잊힌 신전은 방금 전까지의 소란이 거짓이라도 되는 듯, 적막함으로 물들었다.

"파프너. 선두는 맡기마."

[약한 주인을 지키는 건 하수인의 몫이니. 걱정하지 마라.]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망자에게 유효한 신성 주문을 파프너에게 사용.

전투능력을 한 단계 이상 끌어올린 후에 신전으로 진입했다.

'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해보자고.'

장미선 씨.

너무 억울해하지 맙시다.

당신은 도둑질 당하는 것도 모를 테니까.

22화 남의 기연은 먼저 채가야 제 맛(2)

"으히히힛!"

신전으로 들어서자마자 울려 퍼지는 괴성.

붉은 문신과 정수리에 붙은 두 가닥 뿔이 인상적인 반라의 거한은 살기 어린 눈으로 유진 일행을 노려보았다.

잊힌 시전의 파수꾼 중 하나인 타락한 숭배자.

[저렇게 입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나.]

"너도 안 걸친 건 마찬가지잖아."

[흠. 망자에게도 존중받아야 할 권리는 있다. 주인이여.]

시답잖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앞서 나간 파프너가 타락한 숭배자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깍지를 낀 채 힘을 겨루는 괴물들.

"형님. 타락한 숭배자는 힘이 탈 2성급입니다. 지원해야 하지 않겠습...."

우드득-!

강민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락한 숭배자의 다섯 손가락이 모두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으억?"

[하찮구나. 그 힘이라는 것.]

당황한 듯 몸을 뒤로 빼려는 숭배자.

파프너는 예상했다는 듯 당기지 않고 숭배자의 뒷걸음질에 맞춰 앞으로 힘을 주었다.

중심이 무너지면서 쓰러진 타락한 숭배자를 파운딩 자세로 올라타고는.

콰직!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자 두개골째로 박살 나 버렸다.

바닥 여기저기에 튄 피.

축 늘어진 손이 아니어도, [경험치가 올랐습니다]라는 메시지 덕에 놈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성 끄트머리의 무투계 헌터와 버금가는 무력을 지닌 괴물인데."

[후후후. 이 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파프너가 사념으로 호탕한 웃음소리를 흉내냈다.

망자의 기운이 퍼지면서 음산한 기운만 퍼져 나가는지도 모르고.

"쓸데없는 짓을 하긴."

[게이트 공략을 시작하는 훌륭한 싸움 아니었나?]

"네가 머리를 박살낸 탓에 언데드로 만들 수가 없잖아."

영력이 뭉치는 곳은 머리.

다른 부위야 어느 정도 훼손되어도 강령술의 소재로 삼을 수 있지만.

머리를 산산조각내면 쓸데가 없다.

[아.]

"무슨 아 같은 소릴 하고 있어."

[다음부터는 주의하겠다.]

으휴.

가볍게 혀를 찬 유진은 영력을 끌어올렸다.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분리되는 뼈와 살.

'뼈는 미리미리 확보해둔다.'

아머드 좀비를 만들려면 촉매가 필요하다.

잊힌 신전은 1년 동안 공략이 안 될 정도로 고난이도의 게이트.

24시간마다 변화하는 신전의 구조도 문제지만.

재구축을 마친 신전에서 무작위로 나오는 괴물들도 공략 난이도를 확 끌어올렸다.

-마법 공격에 취약하지만 물리 방어력이 높은 타락한 숭배자.

-물리공격에 약하지만 즉발 형태로 공격하며 마법 저항력이 높은 악마의 눈.

-가면을 매개체 삼아 온갖 저주와 버프 주문을 사용하는 가면수.

'변수를 차단하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답지 않게 신중하구나.〕

'난 고작 1성 나부랭이라고. 말이 좋아야 2성이지, 실제 난이도는 3성급 게이트인데 마음 놓으면 되겠나.'

살점지배로 떨쳐낸 뼈를 회수할 때 즈음.

"으히히히!"

"으힛!"

타락한 숭배자 넷이 일행을 발견하고는 새빨개진 눈으로 달려들었다.

[너무 인기가 많은 것도 고려해볼 문제구나.]

"이번에는 가세하마."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네크로맨서 전용 마법 무장.

공방에서 만든 [저주받은 이빨] 다섯 개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원념의 지팡이를 쥐면서 마력 소모를 줄이고.

집중력을 극대화해서 본 컨트롤에 실리는 힘을 극대화했다.

스파팟!

송곳처럼 뾰족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영력.

유진이 손을 휘젓자, 사선으로 발사된 저주받은 이빨이 대기를 가르면서 날아간다.

"흐힛!"

돌진속도를 늦추지 않는 타락한 숭배자들.

저주받은 이빨이 몸뚱이에 박혀 들어갔지만, 철제 갑주를 가격한 것 마냥 끄트머리만 살짝 박히는 데 그쳤다.

"아플 텐데."

저주받은 이빨 주위로 회전시킨 영력을 해방하니.

"으히힛?"

몸 안쪽으로 스며든 이질적인 기운이 타락한 숭배자의 운신에 제약을 걸었다.

생명력과 대칭되는 기운.

영력을 체내에 직접 들이붓는 것은 독을 주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정도 양이야 건강한 사람이라면 괜찮겠지.'

뼈를 조종해서 피부를 찢는 데 많은 기운이 소모되었고.

생기가 넘치는 일반적인 생물이라면, 이 정도 영력에 노출되었다고 해서 치명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끽해봐야 피로감을 느끼는 정도?

한데, 타락한 저주로 신체능력을 강화시키는 대신 속성 저항력이 마이너스인 [타락한 숭배자]한테는 이야기가 달랐다.

눈에 띄게 느려진 타락한 숭배자들.

[스파링 때 사용했던 저주인가?]

"버프였거든. 그리고 부정한 축복 걸은 거 아니야."

[어쨌든 주인의 수작으로 느려진 거잖아.]

폭풍처럼 몰아치는 주먹.

타락한 숭배자 무리가 허우적대면서 파프너의 공세를 받아내려고 했지만.

신성 주문의 효과로 파괴력이 20%나 늘어난 타격 앞에서는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크처럼 2성으로 분류되지만, 훨씬 강한 터라 뱉어내는 경험치가 훨씬 많았다.

"참. 라이프 드레인을 잊었네."

[주인의 솜씨라면 다가가는 순간 곤죽이 될 테니 제압하든, 죽인 다음 생기를 빨아먹든 해라.]

"뼈에 사무치는 충고 고맙다."

[별말씀을. 주인을 위하는 것이 내 사명이다.]

돌려서 까는 말을 유들유들하게 넘기니 더 밀어붙이지 못했다.

이거 원.

박수도 손바닥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

'회귀 전에는 늘 과묵했던 박하늘이 아주 조금 그립군.'

접근하기 어렵다고 해도 방법은 있다.

망자의 숫자를 늘린 후에 타락한 숭배자를 제압하고 느긋하게 생기를 흡수해도 될 터.

〔20레벨이 되었구나.〕

'그러게. 또 그 난리를 피워야겠네.'

[강령 학파의 지식이 사용자의 혼에 새겨집니다.]

▷다크 와이즈

분류 : 패시브

등급 : C

네크로맨서 전용 주문을 사용할 때 영력 소모가 10% 감소합니다.

▷다크 레인

분류 : 패시브

등급 : C

언데드 하수인 유지에 들어가는 정신력 및 영력 소모를 20% 줄여줍니다.

〔이번에는 주문이 아니로구나.〕

'잊힌 신전을 공략하려면 스태미나 유지가 중요해.'

지금은 한순간의 폭발력보다 장기전에 도움이 되는 지식이 필요했다.

1성 수준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초보적인 수준.

[시체 폭발] 같은 네크로맨서의 상징 격 주문은 성위를 올려야 계승이 가능하다.

"내 부름에 답하라."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아머드 좀비의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비적거리면서 일어난 타락한 숭배자.

아니.

되살아난 아머드 좀비 둘이 가래 끓는 소리를 토했다.

"형님. 오크보다 타락한 숭배자가 더 세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강민호의 말을 끊었다.

"너는 좀비가 왜 하급 언데드인 줄 아냐?"

"모르겠습니다."

"영력을 사체에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어서다."

언데드의 전투력을 좌우하는 요소는 둘.

첫째는 시체의 능력이고.

두 번째 요소는 [제작] 방법이다.

"수준이 낮은 주문으로 언데드를 제작했는데 상위 언데드가 나오면 불공평하잖아."

강한 시체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려면 마땅한 술식과 막대한 영력 등, 여러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좀비처럼 급이 낮은 언데드의 전투력은 최대치가 정해졌다는 의미.

"그럼 형님은 좀비랑 스켈레톤 말고 다른 언데드는 못 만드시는 겁니까?"

"잊어버린 것 같은데 나 아직 1성이다."

유진의 힐난에 강민호가 하하핫, 민망한 투로 웃었다.

[이 몸뚱이는 하급 언데드 따위가 아니지 않나?]

"스킬로 만든 게 아니야."

변칙적인 수단으로 얻은 드래고니안 사체.

미래의 대연금술사가 지원을 해줬고.

회귀 전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술식을 새겨놓은 데다.

스스로의 마력이 아닌, 마석 융해액으로 저주와 강화 술식을 발동했다.

마지막으로 생전에 [마투사] 고유 특성을 지닌 박하늘의 영혼이 드래고니안 사체와 동조율이 높아서 미완성된 상태로나마 움직일 수 있게 한 거지.

'이걸 다 설명해준다고 해서 알아들을까.'

네크로맨서들이 파프너를 보면 두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랄 것이다.

이적에 가까운 존재.

강령술이라는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유진이기에 만들 수 있었던 게 파프너였다.

〔괴물 같은 놈. 회귀자라지만 궤를 넘어서지 않느냐.〕

'칭찬으로 듣지.'

유진은 저주받은 뼈를 회수했다.

"속도 좀 올리자."

[후후. 피가 끓는군.]

파프너가 말라버린 피를 운운하며 다시 앞장섰다.

*

유진 일행은 사원 입구 주변을 돌았다.

대형으로 분류되는 잊힌 사원.

사원 내부는 축구장을 수십 개 연결한 것처럼 넓었고.

돌아다니는 몬스터도 그만큼 많았다.

"으히힛!"

[정말 쉬지도 않고 몰려드는구나.]

파프너에게 달라붙은 타락한 숭배자가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콰직!

비늘에 흠집이 생기고.

미처 흘려내지 못한 충격이 근육과 뼈까지 스며든다.

생물이라면 골병이 들 만한 타격.

[본래는 이런 싸움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만.]

손을 말아 쥔 파프너가 근접해 있는 타락한 숭배자의 머리를 쾅! 내리쳤다.

정수리가 푹 주저앉으면서 쓰러지는 반라의 거한.

타락한 숭배자 몇이 더 달라붙어 있어서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자세인데도.

거듭되는 전투를 벌이면서 [응징의 쐐기] 스택이 쌓인 덕에 능력치가 크게 상승했다.

[이젠 익숙해져야지.]

파프너의 전생.

박하늘처럼 싸우면 안 된다.

스파링 때 얻은 깨달음을 십분 활용해서 선봉으로 적진에 난입.

몸뚱이로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면서 타락한 숭배자를 하나하나 쓰러트렸다.

"그루아아아!"

뒤이은 아머드 좀비들의 돌진.

뼈 갑주로 전신을 감싸고 내부에 살점을 덧붙여서 근력까지 증대시킨 덕에 파프너에게 정신 팔린 타락한 숭배자 무리가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19구로 불어난 아머드 좀비.

언데드 군대의 규모가 커진 만큼, 사냥 속도도 빨라졌다.

"으으. 또 시작이야."

"정산금으로 채집 도구를 장만해서 다행임다."

뽀시래기 팀도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괴물의 심장에 자리를 잡은 마석.

숭배자의 몸뚱이는 오크보다 더 단단했으니, 힘을 그만큼 줘야 했다.

'강민호만 센스가 있는 게 아니었나.'

구구구궁-!

한창 사냥에 매진하고 있을 때.

지면이 들썩거리면서 위협적인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강민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곧 신전이 재구축될 겁니다. 나가야 합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였다.

신전 전체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움직이지 않는 기둥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 ⦿ 〕

집중해야 겨우 보일락 말락 하는 표시.

'눈 표식이라면... 재구축을 마친 후에는 그 녀석이 나오겠군.'

〔그놈?〕

'눈깔 괴물. 보면 알아.'

유진 일행은 재구축 중인 신전에서 물러났다.

얼마쯤 지났을까.

재구축을 마친 신전은 진입하는 통로부터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헌터들을 맞이했다.

"와. 괜히 미공략 게이트가 아니구나."

"오빠. 진짜 공략이 가능한 거야?"

쌍둥이 남매의 넋두리를 못 들은 척하며 곧바로 신전에 다시 진입했다.

"퀴리리릿!"

악마의 눈.

몸길이는 약 2미터. 신체 절반 이상이 눈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밧줄 굵기의 촉수 다발인 흉측한 괴물이다.

괴물이 유진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사람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동공에서 새빨간 빛이 아른거린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서 크게 뜨는 악마의 눈.

살인광선이 초음속의 속도로 날아든다.

발동 속도, 그리고 파괴력까지도 발군인 강력한 눈깔 레이저.

'네 특성이야 이미 알고 있다.'

저주받은 이빨 다섯을 교차해서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가로막았고.

간발의 차이로 발사된 살인광선이 교차해놓은 뼈에 막혀서 거무스름한 재만 남겼다.

'마력 소모가 심하군.'

신준석에게 부탁해서 저주받은 이빨에 새긴 강화 술식.

악마의 눈의 공격을 받고도 마법 무장이 원형을 유지하는 건 그 덕분이다.

다만, 강화 술식을 발동시키는 원동력은 마법 무장을 조종하는 영력이라 가성비가 안 좋아서 그렇지.

'스켈레톤 가드를 데리고 왔으면 더 좋았겠어.'

오크 족장의 사체를 매개체 삼아 나름대로 공들여서 제작한 언데드.

흑암의 반지에 담을 수 있는 시체가 한 구뿐이라, 게이트 공략에는 챙겨오지 못했다.

[시선인가. 꽤나 흉험한 공격 방식이잖아.]

"나 좀 못 보게 가려줘."

[주인은 내 등 뒤에 숨어있어.]

다시 한번 쏘아진 붉은 광선은 파프너의 비늘 일부를 녹였지만.

3미터나 되는 거구를 전투불능으로 만들기에는 파괴력이나 공격 범위 모두 부족했다.

콰직!

비정상적으로 큰 눈에 마력을 집중하는 구조라서 방어력은 있으나 마나 한 수준.

레이저를 묵묵히 받아내며 접근하니 금방 쓰러졌다.

[이 괴물은 언데드로 제작하지 않는 게냐?]

"좀비로 만들어봐야 어디에 쓰겠어."

마법 계열 언데드인 다크 후드를 제작하기에 걸맞은 시체.

강령술의 기초 주문인 [레이즈 언데드]만 쓸 수 있는 유진한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내 기억대로다.'

유진은 고꾸라진 악마의 눈을 흘겨보았다.

신전 재구축 직전에 봤던 문양.

그 표식이 잊힌 신전 공략의 비밀이었다.

'재료만 모으면 되겠군.'

회귀 전.

장미선이 밝혀낸 잊힌 신전의 공략법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웃음을 삼켰다.

23화 남의 기연은 먼저 채가야 제 맛(3)

"그르르르르르!"

하얀 가면을 쓴 괴물이 가래 끓는 소리와 흡사한 괴성을 질렀다.

가면수.

얼굴을 덮은 가면으로 온갖 저주를 다루며, 신체능력도 2성급 헌터에 버금가는 괴물이다.

질색하는 강민영.

"노출광도 싫지만, 저 가면은 불쾌해요."

타락한 숭배자

악마의 눈.

마지막으로 가면수까지.

평범한 2성급 게이트에서는 마주하기 힘든 몬스터들이다.

하얀 가면 위로 번뜩이는 사이한 빛.

선두에 있던 파프너의 비늘 위로 피어난 검붉은 반점이 곰팡이처럼 퍼져 나간다.

"그리리리."

가면 안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부패의 저주는 신관의 축복이나 성수로 해당 부위를 씻어내야 떨칠 수 있다.

"축복 좀 내려줘?"

[아니다. 마침 실험해볼 게 있는데 잘 됐어.]

파프너의 손에 밀집된 영기.

오러 발현 직전의 형태를 고정하더니 검붉은 반점을 지그시 눌렀다.

치이이익!

타는 소리와 함께 영기에 흡수된 저주의 기운.

[영기도 따지고 보면 마나의 일종이니, 더 강한 힘으로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파프너가 말한 대로다.

죽음을 거스르는 힘.

다른 말로 영기(靈氣)는 음차원의 속성을 띤 에너지 중에서도 최상위로 분류된다.

기운을 응용하면 어지간한 저주 정도는 흡수할 만큼.

'본능적으로 안 건가?'

유진도 [지식의 도서관] 덕에 알게 된 고급 정보.

그걸 오직 감으로 알아채다니.

전생에도 하수인으로 다루었던 혼백이라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엄청난 재능이다.

회귀하자마자 추모하러 가기를 잘했어.

[이 육신에 더 익숙해져야겠군.]

"지금도 충분하지 않나?"

[손 외에는 기운을 집중시키는 게 쉽지 않아. 저주가 걸렸을 때 일일이 만질 수도 없는 일이잖아.]

"적당한 상대가 있으니 한번 상대해봐. 급할 때만 개입하지."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네크로맨서와 하수인.

멀찍이 있던 가면수가 분노했다.

"그르리릿!"

또다시 파프너의 육신을 침식하는 저주.

"나도 실험 하나 해보자."

저주가 깃든 부위 위로 부정한 축복을 사용하니.

신성 주문답게 가면수의 마력을 걷어냈다.

저저적- 저적!

매개체인 하얀 가면 위로 선명한 금이 새겨졌다.

저주가 신성 주문에 노출되면서 반동이 고스란히 전해진 것.

"됐다. 그게 부서지면 곤란하거든."

저주받은 이빨 다섯 개를 동시에 사출. 가면수의 목덜미와 심장을 관통했다.

유진은 고개를 숙인 가면수의 얼굴에서 하얀 가면을 벗겨냈다.

〔그런 가면이 좋더냐? 꽤나 악취미구나.〕

'쓸 데가 있어서 그러는 거다.'

〔혹시 그 가면이 게이트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던 것은....〕

'이제는 대충 감이 오나 봐?'

가면수의 흰 가면만이 아니다.

〔 ∆ · ⦿ · ☺ 〕

신전이 재구축을 할 때마다 드러나는 문양.

각 문양은 타락한 숭배자의 뿔, 악마의 눈의 동공, 그리고 가면수의 가면을 상징한다.

'다음에 나오는 괴물만 알려주는 게 아니다.'

각 문양에 해당되는 징표.

앞에 언급한 세 가지를 충분히 모으면 잊힌 신전 지하, 그러니까 게이트의 핵이 위치한 곳으로 넘어갈 수 있다.

'49개씩 필요하다고 했지. 온전한 형태로.'

하얀 가면은 저주를 사용하거나 방금 전처럼 반발하면 내구도가 빠르게 떨어지고.

악마의 눈도 사냥하면서 원형을 보존하기가 어렵다.

그뿐이랴.

축구장 수십 개를 합친 사이즈의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축이 되는 기둥을 48개나 찾아야 한다.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이구나.〕

'이러니까 1년 가까이 공략이 안 된 거지.'

장미선은 이 조건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몰라.

"형님. 불사조 길드가 근처에서 사냥하고 있습니다."

강민호가 가리키는 방향.

신전 기둥 몇 개를 사이에 두고 불새 마크를 단 무리가 합을 맞춰 가면수를 사냥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번쩍이는 칼날.

차기 검성으로 불리는 여인, 장미선이 휘두른 칼은 가면수를 두 동강으로 잘라버렸다.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베인 단면 사이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신다.

〔저주를 베다니. 의념을 검에 실을 줄 아는 건가?〕

'오러 같은 건 아니야.'

쥐고 있는 아이템인 [바람검]의 옵션이겠지.

타이밍에 맞춰 '베기'만 하면 유 · 무형을 가리지 않고 잘라내는 무기다.

'결을 정확하게 베어내지 못하면 역으로 당하지만.'

아라한의 함정에 빠져서 죽지만 않았어도 검성을 뛰어넘었을 거라는 인재.

괜히 그 말이 나온 게 아닌 모양이다.

'장미선이 잊힌 신전 공략의 원조이기도 하잖아.'

방심해서는 안 되겠군.

"사냥 속도를 조금 더 올린다."

[경쟁인가? 오래간만에 마음이 불타오르는구나.]

호승심을 불태우는 파프너.

반면 뒤에 있던 뽀시래기 팀원들의 얼굴은 새까매졌다.

유진이 제발(?) 저려 하며 의욕을 불태울 때.

조금 거리를 둔 채 사냥하는 장미선도 그를 흘겨보았다.

"신경이 쓰이십니까?"

"저 팀. 사냥속도가 범상치 않네요. 언데드를 소환수로 부리는 것도 신기하고."

"미선 헌터만큼은 못할 겁니다. 너무 의식하지는 마시죠."

불사조에서 같은 팀으로 꾸려진 헌터가 대수롭지 않게 뒷말을 붙였다.

"재능 있는 헌터면 대형 길드에서 스카우트하지 않았겠습니까?"

불사조 헌터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장미선은 대꾸하지 않고 가면수를 사냥하는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통 사람이 아니야.'

날카롭게 벼려진 본능이 경고음을 울렸다.

먼 거리에 있는데도 장미선의 감각을 자극하는 위험한 존재.

왠지.

이 자리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게이트에서도 마주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잊힌 신전 공략을 개시하고 6일이 지났다.

"접경지역보다 더한 것 같은데요?"

"괴물이 끊임없이 나옴다."

뽀시래기 팀은 언데드 하수인들이 쓰러트린 몬스터한테 다가가서 능숙하게 마석을 채집했다.

"접경지역이라고 해봐야 오크밖에 못 본 놈들이."

허-.

유진은 기가 차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 녀석들.

기연이 숨겨진 게이트를 빼면 접경지역에서 주로 사냥할 건데,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군.

한 번 접경지역의 매운 맛을 보여주든 해야지.

[흐하핫! 덤벼라. 이 미물들아!]

파프너는 과감하게 타락한 숭배자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갈수록 대담해진단 말이야.

드래고니안 사체를 기반 삼아 만든 육체.

스파링 때 얻은 깨달음을 소화한답시고 막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겠다고 저러는 것이다.

〔계약자와는 달리 참으로 용맹하구나. 영웅의 기질이 있도다.〕

'염병. 치유는 내가 하거든?'

아주 중간이 없어요.

라이프 포스 베슬로 혼백과 용족의 정수를 따로 빼지 않아서 치명상을 입으면 곤란하단 말이다.

"가서 도와라."

아머드 좀비 무리를 추가로 투입해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몬스터의 숫자가 줄어들면 아머드 좀비나 파프너를 시켜서 붙들어놓고 생명력을 갈취했으며.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27입니다.]

경험치도 어마어마하게 획득했다.

'이런 걸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고 하지?'

큭큭.

유진의 뺨 한쪽이 씰룩거렸다.

〔품위 있게 웃으라고 말했거늘.〕

'거, 남이 웃는 것까지 참견하진 마시죠.'

〔모름지기 짐이 택한 성자라면 품위가 있어야 하느니라.〕

예.

무능한 성좌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사냥 후에는 몰래 징표가 새겨진 기둥에 몬스터들의 신체 일부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우우웅!

문양에 아른거리는 푸른빛.

'이제 48개째.'

경쟁자도 있는 마당이라 속도를 올렸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징표가 새겨진 기둥을 찾는 것도 일이고.

막상 기둥을 활성화하려고 하니 징표 손상도가 높아서 반응을 안 하기도 했다.

'눈깔에 실핏줄 몇 개 터졌다고 반응 안 하기야?'

저주받은 이빨까지 동원해서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였지만 기둥 활성화에 실패하기도 했다.

시간을 꽤 들였지만, 어쨌든 준비도 마쳤겠다.

"너희는 마석이랑 팔고 와라."

"형님께서는요?"

"레벨도 올려야 하니 사냥이나 하고 있어야지."

"알겠습니다."

부산물 처분이라는 핑계로 뽀시래기 팀을 게이트 밖으로 내보낸 후, 신전 중심부로 향했다.

얼마 정도 걸었을까.

발바닥과 맞닿은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긴 쉬지도 않고 변화하는구나. 얼른 밖으로 나가자.]

"이번에는 안 나가."

[다진 고기가 되는 게 꿈이었나?]

"나름대로 게이트를 공략하며 봐둔 게 있거든."

파프너는 유진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호오. 잊힌 신전의 비밀을 찾아냈단 말이냐.]

"확인하려면 목숨을 걸어야지."

유진은 〔 ∆ · ⦿ · ☺ 〕라는 문양을 알려주었다.

"신전 중앙에 이 모양이 새겨진 기둥을 찾아야 한다."

[좀비에게는 지성이 없으니 발품을 팔 수 있는 건 주인과 나, 둘 뿐이네.]

"발에 땀 나게 뛰어라."

유진은 기억을 되짚으며 근처에 있는 기둥으로 뛰었다.

쾅! 쾅쾅!

갑자기 벽면이 툭 튀어나오거나 지면이 꺼지는 등, 재구축을 시작한 신전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주저앉은 바닥을 피하지 못하고 빨려 들어간 아머드 좀비.

[아머드 좀비가 파괴되었습니다.]

뼈도 못 추리겠군.

재구축 중인 신전에서 몇 분을 뛰었을까.

[주인. 이쪽이다.]

신전의 축을 떠받치는 49번째 기둥을 발견하고는 미리 챙겨둔 징표를 내밀었다.

파지지지직!

스파크와 함께 기둥으로 스며드는 뿔과 눈, 그리고 가면.

마지막 기둥을 활성화시키자 끊임없이 요동치던 신전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휴. 뒈지는 줄 알았네."

구구궁-!

활성화된 기둥 바로 앞 바닥이 푹 꺼지면서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나왔다.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잊힌 신전의 지하로 향했다.

*

저벅- 저벅-.

유진의 발소리가 지하 통로의 적막감을 날려버린다.

[장기 미공략 게이트의 비밀을 알아낸 것 치고는 꽤 담담하네?]

"게이트를 완전히 공략한 건 아니잖아."

[하긴. 보스 몬스터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으니.]

파프너가 낮게 중얼거렸다.

'실은 뭐가 나올지 알고 있지만 말이야.'

장미선의 인터뷰를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만약 유진의 능력으로 공략이 어렵다고 판단했으면 팀원을 더 구해야 했으니까.

'보상을 나눠 먹을 필요는 없지.'

얼마 정도를 걸었을까.

20미터 크기의 철문이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가 보스 존인가 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잊힌 신전' 게이트를 유지하는 핵이 있는 곳.

[가면마수 데스 가디우스]

이 세상의 글자가 아닌, 마계어가 철문 위에 새겨져 있다.

유진이 철문에 오른손을 대는 순간.

끼익- 통짜 쇠로 된 문이 묵직한 소음을 토해내며 양쪽으로 밀려났다.

"이리 오너라."

젖혀진 문 틈 사이로.

"그루으아아아아!!"

잊힌 신전의 핵을 지키는 수호자.

가면마수가 노호성을 지르며 침입자를 반겼다.

가면마수 데스 가디우스는 잊힌 신전에 출몰하는 괴물 셋을 합친 것 같은 괴물이다.

신장은 약 5미터.

몸통 위에 붙은 머리 셋에는 하얀 가면이 씌워져 있는데, 머리 하나는 악마의 눈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외눈이 박혀 있다.

〔참으로 품위 없게 생긴 괴물이로다.〕

목 아래로는 머리카락처럼 달라붙은 수십의 촉수 다발이.

그리고 타락한 숭배자를 연상시키는 탄력 있는 근육이 흉측하게 꿈틀거렸다.

"짖지 마라. 시끄러우니까."

유진이 태연한 투로 중얼거리자 외눈의 가면에서 사이한 빛이 감돌았다.

콰콰콰콰!

통나무 굵기의 보라색 광선이 지면을 그시면서 유진이 선 방향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악마의 눈이 펼친 살인광선보다 훨씬 강력한 안광.

[내 허락 없이는 주인을 건들 수 없다.]

우우웅-!

파프너가 뻗은 주먹 위로 시커먼 기류가 솟구치더니 살인광선을 막아냈다.

영력에 의념을 담아내어 유형화한 암흑 투기.

첫 공격이 막혔지만, 가면마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행동에 나섰다.

하얀 가면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사용하는 순간, 회피할 틈도 주지 않고 대상에게 적용되는 즉발형 저주.

-크오오오오!

-키이이잇!

잊힌 신전에서 쓰러트린 괴물들이 환상으로 나타나서 유진의 눈을 현혹했다.

가면마수의 저주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몬스터 특유의 살기와 존재감을 구현했기에, 허상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너. 먹이. 내가 먹는다."

가면마수는 눈꼬리를 살짝 올렸다.

승리를 확신하는 조소.

"야. 웃냐?"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저저적-!

가면마수의 가면 위로 새겨진 작은 금. 유진에게 건 저주가 깨어진 반동으로 매개체가 훼손되었다.

24화 남의 기연은 먼저 채가야 제 맛(4)

축복으로 부정한 기운을 튕겨내자, 그 충격으로 금이 새겨진 가면.

가면마수의 초점이 흔들리면서 보랏빛 광채가 잠깐 끊겼다.

"파프너. 정면으로 달려들어라."

[괜찮겠나? 가면마수가 주인을 노릴 수도 있다.]

"이 녀석들이 있잖아."

뼈 갑주로 강화한 아머드 좀비라면 파멸의 광채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재구축 중인 신전에 휘말려서 7구가 파괴된 상황.

'버티기만 하면 소모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다.'

가면마수에게 최대한 가까이 배치해둔 후, 놈의 움직임에 맞추는 게 최선!

[주인. 허무하게 죽지 마라.]

"가면마수의 저주는 내가 막아줄 테니. 넌 공격에 집중해라."

[후후후. 맡기겠다.]

"으으. 작은 먹이. 귀찮게 한다."

가면마수의 눈자위가 다시 한번 자색으로 물들고.

콰콰콰콰!

보랏빛 광채가 다시 한번 파프너를 삼킬 듯이 폭발적인 기세로 짓쳐든다.

[암흑 투기]

파프너의 두 다리를 휘감은 시커먼 기류가 응축되었다가 지면으로 방출.

암흑 투기가 만들어낸 커다란 바람이 유진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속도로 일직선으로 돌진하며 가면마수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큰 먹이. 안 놓친다."

악마의 눈을 닮은 커다란 동공이 한 발 늦게 파프너를 쫓는다.

하나, 생각만큼 광선이 휘어지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방출되는 마력.

마력광선이 대상에게 닿기까지야 순식간이지만.

그 경로를 수정하려면 눈에 집중시킨 마력을 모두 움직여야 한다.

자연히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고.

[여기까지 내다본 것이구나.]

유진의 지시대로 돌진한 파프너가 감탄사와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파프너의 의념을 실어낸 암흑 투기.

강철보다도 질긴 피부가 찢겨나가고 수백 겹이 꼬아진 근섬유가 파괴되었다.

쿵- 중심을 잃고 양손을 허우적거리는 가면마수.

살인광선을 거둔 직후.

놈의 눈동자가 파프너를 바라보았다.

[엑토플라즈마]

[오염된 피부]

음차원의 마나가 파프너의 혼백에 독을 풀어놓고.

드래고니안의 피부 위로 푸른 기포가 보글보글 솟구친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갖가지 저주가 파프너를 침식하려는 순간.

미리 성력을 끌어올린 유진이 신성 주문을 전개했다.

성력과 저주는 상극관계.

마력 양은 가면마수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부정한 축복]은 망자인 파프너에게 더 효율적이었다.

저주가 영역을 넓히기도 전에 스며드는 신성 주문.

다시 한번 주문이 취소당한 반발력으로 마수의 얼굴을 뒤덮은 가면 일부가 저적-! 부서졌다.

[내 주인다운 솜씨다.]

[케넥 전투술]

[7장]

[10발 난타]

스파링 때 펼친 체술.

꽉 말아 쥔 파프너의 양손이 번갈아가며 가면마수의 허벅지를 연타했다.

강철검도 뚫지 못할 만큼 단단한 피부가 찢겨지고.

터진 근육에서 핏방울이 비산했으며.

마침내 나무 밑동 굵기의 다리뼈가 우직, 선명한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툭 튀어나온 뼈.

사람이었으면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했을 만한 상처지만.

가면마수는 통증을 분노로 치환했다.

"아프다! 너. 죽인다!

신전을 받치는 기둥만큼이나 두꺼운 팔이 뒤로 젖혀졌다가 앞으로 튀어 나온다.

[어딜 노리는지 훤히 보이는데. 맞아줄 리가 있겠나?]

파프너의 능력치는 탈 3성급.

부정의 축복으로 모든 스탯이 20% 상승했고.

이미 사냥을 하던 중이었으니 응징의 쐐기도 최대치까지 스택이 쌓였다.

가면마수가 2성급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치고는 비이상적으로 강력한 편이지만.

정면으로 맞서면 파프너도 밀리지 않았다.

[뭐, 눈에 보이는 것을 일부러 피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허공을 가르는 가면마수의 주먹.

막 가격한 부위에서 기포가 솟구치고, 매캐한 냄새와 함께 찢겨진 근육이 다시 붙기 시작한다.

[재생력은 트롤과 버금가는군.]

"대상의 생명력을 깎아서 부상을 되돌리는 혼돈의 광란이다."

생명력을 대폭 소모하는 주문이라서 노화 같은 부작용을 겪기 쉽다.

가면마수의 피부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긴 것이 증거.

"뭐든 공짜는 없는 법이지."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저주받은 이빨이 막 붙고 있는 상처를 파고들어서 크게 헤집어놓는다.

철퍽!

날선 끄트머리에 걸린 살점 일부가 바닥에 떨어지고.

"작은 먹이. 죽인다!!"

가면마수는 하얀 가면에 축적시킨 저주의 힘을 일시에 방출했다.

[저주 술식]

[암흑의 파동]

저주를 사용할 때마다 누적되는 힘.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진 않지만, 유 · 무형의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밀어내는 기이한 파장이다.

[크읏. 버틸 수가 없다.]

암흑의 파동에 저항하려던 파프너가 수십 미터 뒤로 밀려났고.

가면마수는 유진을 노려보더니 눈가에 마력을 집중했다.

저주를 파훼하고.

원거리에서 상처까지 헤집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막아라."

"그아아아."

아머드 좀비가 가면마수와 유진 사이를 가로막았고.

한 발 늦게 쏘아진 광선이 뼈 갑주를 태웠다.

충돌지점에서 솟아나는 매캐한 연기.

[본 아머를 사용합니다.]

유진은 깎여나가는 뼈를 영기로 강화했다.

살인광선에 담긴 에너지를 흘려내지 못해 몸뚱이로 고스란히 받아낸 아머드 좀비.

"그어어...."

본 아머로 강화했음에도.

4초 정도를 버티고는 까맣게 타서 지면에 고꾸라졌다.

[날 두고 한눈파는 건가?]

충격파에 밀려났던 파프너가 금세 다가와서는 가면마수의 옆구리에 기다란 상흔을 만들었고.

"큰 먹이. 방해하지 마라!!"

가면마수가 분노 섞인 비명을 토해냈다.

*

가면마수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공격은 파프너에게 맡기고.

놈의 저주를 해주하거나 마법 무장으로 견제, 혹은 아머드 좀비로 방어에 힘썼지만.

콰콰콰콰!

"그어...."

아머드 좀비가 반 넘게 타버렸다.

'남은 하수인들을 전면으로 보내면 승기를 금방 잡겠지만.'

유진은 신중하게 전투를 이어갔다.

가면마수의 무서운 점은 근거리와 원거리 양쪽 모두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

'마법 무장을 방어에 동원하는 건 임시방편이야.'

악마의 눈의 공격이야 막을 만했다.

가면마수는 마력 양이 남다른 만큼, 살인광선의 출력도 훨씬 셌다.

저주받은 이빨을 만드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데.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무장을 잃을 순 없으니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작은 먹이. 큰 먹이. 둘 다 싫다."

가면마수의 몰골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피부의 주름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상처 일부는 재생되지 않아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놈의 몸뚱이에 새겨진 가장 큰 흔적은 파프너가 처음으로 만든 골절상.

상처야 모두 나았지만, 부러진 뼈는 재생하지 않기에 걸을 때마다 절뚝거렸다.

[이래서는 끝이 없겠어.]

"파프너. 힘은 얼마나 남았나?"

[암흑 투기를 한두 번 전개할 수 있을 정도.]

"그러면 슬슬 끝내자."

충분하다.

놈의 숨통을 끊어놓기에는.

"파고들면 빈틈은 알아서 만들어주마."

[지시에 따르지.]

가면마수와 다시금 간격을 좁히는 파프너.

놈이 발악하듯 팔을 휘두르는 순간.

[응징의 쐐기를 해방합니다.]

거듭되는 전투로 쌓아놨던 충격 스택을 일시에 방출.

멀쩡한 가면마수의 다리를 가격해서 몸 전체를 크게 흔들었다.

무게중심을 잃으면서도 주먹에 실린 힘을 끝까지 빼지 않는 가면마수.

그 행동에서 집념이 느껴지지만.

[싸움은 마음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다.]

가면마수의 움직임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본 파프너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등 위로 스쳐 지나가는 주먹.

풍압이 일 만큼의 힘이 실렸지만 파프너에게 닿지는 않았다.

[강한 공격도 맞지 않으면 소용없지.]

반 정도 넘어지면서까지 팔을 휘둘렀던 가면마수.

놈의 상체가 파프너에게 노출되었다.

[케넥 전투술]

[5장]

[일점집중]

몸뚱이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영기를를 뺀 모든 기운을 집중.

암흑 투기로 구현해서 훤히 드러난 가면마수의 상체를 있는 힘껏 올려쳤다.

드드득-!

갈비뼈가 부러지고, 더 안으로 파고든 충격이 심장에 이르렀다.

"컥."

한 줄기 비명을 내지르며 고꾸라진 가면마수.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29입니다.]

"와우."

가면마수가 쓰러지자마자 레벨이 2나 올랐다.

못해도 하루 이틀은 고생해야 올릴 수 있는 경험치 양.

탈 2성급의 보스 몬스터라서 그런가.

생각보다 많이 오른 경험치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애피타이저치고는 마음에 드네."

[본 메뉴는 무엇이냐?]

"놈의 등 뒤에 있는 제단. 거기에 뭐가 있을 것 같아서."

유진은 전생에 들은 정보를 태연하게 말했다.

지하 공동의 안쪽.

신전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제단에는 은빛을 내포한 갑주가 놓여 있었다.

[호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방어구로구나.]

"그러게 말이야."

제단 위로 올라간 유진은 갑주를 천천히 살펴봤다.

'그때 본 거랑은 조금 다른 형상이군.'

불사조 길드장이 착용했던 아티팩트.

용신갑의 외형은 전신을 가리는 풀 플레이트 메일이었고 찬란한 금빛을 내포한 형태였다.

반면 제단 위에 있는 갑주는 몸통을 방어하는 흉갑.

사이즈도 훨씬 작아서 유진에게 맞을지 걱정해야 할 정도다.

'과연, 아티팩트는 달라도 달라.'

유진은 기억과 다른 용린갑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다.

형태 변환은 유명한 아티팩트나 장인의 무구에도 종종 붙어 있는 옵션이다.

[용린갑]

등급 : 초월

분류 : 갑옷

제한 : 없음

내구도 : 5,000/5,000

용의 뼈로 만든 강력한 방어구다. 사용자의 마력에 동조, 의지대로 형태를 바꿀 수 있다.

*형태에 따라 장비의 옵션 변형.

*성장하는 아티팩트.

*자가 복구 가능. 완전히 파괴되지 않으면 내구도가 자연적으로 회복된다.

역시나.

생김새가 다를 뿐.

유진이 기억하는 그 아티팩트가 맞다.

'형태 변환 옵션이라. 사용할 방법이 넘쳐나겠어.'

용린갑에 손을 댄 순간.

찌릿-! 유진의 마력이 접촉면을 타고 갑주로 흘러들어갔다.

'이 녀석 봐라.'

유진은 마력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서서히 검은 색으로 물드는 갑주.

"네가 취해야 할 건 마력만이 아니다."

[백야를 사용합니다.]

[마력 → 성력]

사용자에게 동기화하는 과정.

여기에 성력까지 들이부으면 용린갑이 어떻게 반응할까.

통짜 쇠로 만든 것 같은 용린갑의 표면에서 하얀 물결무늬가 나타났다.

갑주가 완전한 어둠에 젖어들었을 때.

촤라라락!

수십 갈래로 펼쳐지면서 사슬 형태로 변이한 용린갑이 유진의 몸통을 휘감았다.

언뜻 보기에는 그를 적대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유진은 갑주 안에 스며든 마력과 성력이 제어를 벗어나지 않음을 인지하곤 변화를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철컥! 철컥!

용린갑은 비늘 같은 물결무늬가 새겨진 상의가 되었다.

"이거 봐라. 생각 이상으로 물건이잖아?"

함박웃음을 짓는 유진.

그는 용린갑의 기능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사용자의 의지에 맞춰 변화하고 주인의 마나에 감응해서 출력까지 올려주는 증폭기.

평상복 형태를 띤 것은 용린갑에 마력을 불어넣기 직전, 유진의 복장이 평상복이라서 그런 것이다.

[타격 방어 Lv 12]

[마법 저항 Lv 7]

[민첩 + 10%]

옷차림에 걸맞은 빈약한 방어력.

대신 몸놀림에서 추가 보정을 받는다.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면.'

차르르릉!

사슬이 부딪치면서 나는 금속음이 울려 퍼지고.

평상복처럼 가벼웠던 용린갑이 눈을 뺀 모든 노출부위를 감춘 중갑으로 변했다.

[타격 방어 Lv 12 → 47]

[마법 저항 Lv 7 → 35]

[민첩 + 10% → -5%]

'불사조 길드장이 취했던 형태가 이거랑 비슷했지.'

옵션을 확인해보니 방어력이 확 늘어났지만, 민첩에서 페널티가 붙었다.

〔범상치는 않다고 생각했다만. 변형 옵션이라.〕

'활용 가치가 무궁무진하지.'

〔초월 등급치고는 방어력이 낮아 보이는 게 흠이다만.〕

"성장하는 아티팩트니까."

지금은 풀 플레이트로 변형시켜도 레어 등급 방어구에 불과한 수준이지만.

사용자의 강함에 비례해서 아티팩트도 같이 강해지니,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호오. 주인에게는 더더욱 유용하겠어.]

"나한테?"

[창법 말이다. 익숙하지 않으니 실전 땐 가만히 두었는데, 뛰어난 방어구를 얻었으니 제대로 굴릴 수 있지 않겠냐.]

웃으면서 끔찍한 말을 하는 재주가 있군.

그래도.

"실전만큼 좋은 경험이 없지."

유진은 파프너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파지지직!

제단 위에 생성된 푸른 균열.

게이트의 핵을 담당하는 보스 몬스터가 소멸하면서 출구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돌아가자.]

"보스 몬스터의 사체는 챙겨야지."

가면마수를 암야의 반지에 쑤셔 넣는 순간.

탱-.

녀석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가면과 책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25화 보상은 언제나 달콤하다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시커먼 가면.

가면마수의 안면을 덮었던 저주의 매개체다.

그리고 스킬북까지.

놈의 육신이 너무 큰 데다 용린갑에 신경을 쓰다 보니 사후 확인을 소홀하게 했군.

'스킬 북은 그렇다 쳐도. 가면도 쓸데가 있겠군.'

네크로맨서도 저주하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저주]라는 테마를 공유하는 흑마법사와는 스킬 발동 매커니즘이 다르지만.

혼백을 조종하려면 저주에 능통해야 했다.

그가 전생에 개발했던 혼백 합체 술식도 저주의 응용방식 중 하나.

'액막이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유진이 흑색 가면에 손을 뻗는 순간.

[그림자 가면]

등급 : 유니크

분류 : 투구

제한 : 없음

내구도 : 215/444

여러 저주를 새긴 가면이다. 마력을 불어넣으면 100미터 안에 있는 대상에게 저주를 사용할 수 있다.

저주의 반동이 오면 가면의 내구력을 소모함으로써 사용자를 보호한다.

*저장된 저주 - 5/5

-엑토플라즈마

-오염된 피부

-암흑 시야

-혼돈의 광란

-암흑의 파동

아이템 정보가 눈앞에 나타났다.

"가면이 아이템이라고?"

[뭘 그렇게 놀라.]

"잠깐."

유진은 [그림자 가면] 정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성능이 미쳤는데?'

단순히 액막이용 가면이라고 여겼는데, 가면에 불어넣은 저주를 발동시키는 독특한 효과가 있었다.

그 말인즉슨.

유진의 머릿속에 있는 저주 술식을 새기면 가면을 매개로 발동이 가능하다는 것!

'2성에 올랐을 때 바로 저주 분야 쪽 지식을 계승할 필요가 없다.'

흑암의 반지에서 새로운 분야의 지식을 획득하려면 성위가 올라가야 한다.

회귀 전에 절대자의 경지로 불리는 9성에 도달한 몸.

깨달음이야 충분하지만.

문제는 레벨이다.

'보통 한계 레벨에 도달해도 깨달음 때문에 발목이 잡히지만....'

유진은 반대다.

깨달음보다 레벨이 문제인 상황.

'그림자 가면을 매개로 하면 저주 쪽은 바로 열지 않아도 돼.'

연금술이나 골렘 제작 등, 지식의 도서관에서 습득할 분야가 한둘이 아니다.

가면에 새길 수 있는 개수가 최대 다섯이지만, 이미 각인이 된 걸 없애도 되니 급박한 전투 상황만 빼면 의미가 크지 않은 제약이다.

스윽-.

유진은 [그림자 가면]을 천천히 얼굴에 갖다 대었다.

가면마수의 안면에 맞는 크기다 보니 흡사 방패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으나.

유진과 가까워지니 얼굴을 딱 덮을 정도로 작아졌다.

얼굴 팩을 붙일 때와 비슷한 이질감이 드는 건 잠시뿐. 가면이 안면에 달라붙었는데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피눈물을 흘리는 가면을 취하다니. 꽤 고약한 심미안이야.]

"성능 때문에 쓰는 거지."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라. 거울은 안 봤지만 호감 가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사냥의 전율]

등급 : 레어

분류 : 스킬북

제한 : [암흑] 특성이나 [주술] 특성 보유.

내구도 : 10/10

저주의 대상을 사냥감으로 지정. 최대 10킬로미터까지 추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추적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상의 저항력 및 방어력을 떨어트립니다. 지속시간이 지나면 저주의 효력도 사라집니다.

호오.

꽤 괜찮은 스킬북이 나왔다.

추적에 특화된 주술인데 매커니즘은 저주와 비슷해서 암흑마법에 특화된 마법계도 익힐 수 있다.

암흑 쪽에 특화된 헌터가 적어서 문제일 뿐.

'안 팔리면 내가 익혀도 되겠어.'

유진은 스킬 북도 꼭 챙겨놓았다.

"이제 가자."

게이트에서 얻을 건 모조리 뽑아냈겠다.

유진은 발에 힘을 실어서 푸른 웜홀 너머로 나아갔다.

*

벽골제로 돌아온 유진.

게이트 주위는 장이 열린 시장바닥 마냥 시끌벅적했다.

"잊힌 신전이 공략됐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나라고 알겠냐. 갑자기 보스 몬스터가 공략됐다는데."

"불사조에서 한 건가?"

"그쪽 분위기가 조용한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만."

"아니면 새벽일지도."

전조 하나 없이 갑작스럽게 공략 된 잊힌 신전.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던 헌터들은 곧 폐쇄된다는 알람을 듣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서 대기 중인 이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

여러 추측이 오갔지만 누가 게이트를 공략했는가 알 방법은 마땅찮았다.

[섭섭한 걸. 주인이 공략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다니.]

"광고라도 해주게?"

[내 주인이라면 유명세 정도는 떨쳐야 하지 않겠어?]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될 거다."

유진은 너스레를 떨었다.

힘을 숨길 생각은 아니지만, 대놓고 자랑하고 다닐 필요는 없다.

타인의 이목이 끌리면 이득도 상당하지만 귀찮음 또한 비례해서 늘어나거든.

[근데 눈에 띄기 싫다면 가면부터 벗지 그러냐?]

"아. 착용감이 없어서 잊어버렸네."

그림자 가면을 떼어서 가방에 넣어두었다.

용린갑은 평상복 형태로 몸에 걸쳐놓으니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형님!"

멀리서 뛰어오는 뽀시래기 팀.

강민호가 다급한 표정을 짓더니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잊힌 신전이 공략됐답니다!"

"나도 아니까 좀 진정해라."

"아. 형님께서도 게이트 안에 계셨었죠. 도대체 누가 게이트의 비밀을 풀고 보스 몬스터까지 사냥했을까요?"

"내가 했다."

"그러시군요. 역시 형님이십...?"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강민호.

뽀시래기 팀원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다.

"진짜 대단하심다!"

"시끄럽기는. 고함 지를 건 없잖아."

"아니. 그래도 이런 대형 사건을 들었는데 어떻게 조용히 할 수 있습니까?"

흥분한 뽀시래기 팀을 가볍게 말리던 중 분배 문제가 떠올랐다.

'용린갑을 팔 순 없으니 적당히 사례금을 줘야겠네.'

계약은 언제나 공평해야 한다.

아티팩트의 값을 모두 치를 생각이야 없지만, 빈손으로 돌려보냈다간 상호 간의 신뢰가 옅어지는 법.

"보스 레이드 때 얻은 것도 정산에 추가해야겠군."

"아닙니다. 저흰 한 게 없는데요. 그거 나눠먹으면 양심에 털 난 거죠."

보스 몬스터한테서 뭘 얻었는지도 묻지 않는 강민호.

"두 번은 안 권한다?"

"똑같이 물어보셔도 답은 같습니다."

유진은 피식 웃고는 벽골제를 등졌다.

한편.

게이트를 조사하던 불사조와 새벽 길드원들은 갑작스러운 공략 메시지를 보고 회담을 가졌다.

"잊힌 신전. 당신들이 공략했어?"

무복을 입은 사내.

새벽 길드의 유망주인 신유승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도 알고 싶네요. 누가 공략했는지."

긴 머리카락의 여인.

불사조의 차기 검성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국내 2위와 3위 길드에서 공들여 키운 신예가 부딪친 상황.

수많은 언론.

투자자들.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잊힌 신전] 게이트 공략을 성공하는 길드가 어디일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신유승은 미심쩍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신이 아니야?"

"불사조에서 공략에 성공했으면 곧바로 성명을 발표했겠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있어야지."

"반대로 물어보죠. 새벽에서 공략을 끝내고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닌가요?"

신유승의 입안에서 까득-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이 달아오르려고 하니까 게이트 공략이 끝나버렸다는 게 말이 돼?"

장미선은 맞은편의 사내가 분개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았다.

'거짓은 아닌 모양이네요.'

잊힌 신전은 대형 길드인 지평선이 1년 가까이 매달렸는데도 공략하지 못한 곳.

장미선을 포함한 불사조의 유망주 팀도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두 길드의 정예 인원 외에는 신전 내부를 탐색하는 행위조차 목숨을 걸었어야 했으니.

불사조나 새벽이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혹시...?'

불현듯, 한 인물의 실루엣이 장미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언데드를 소환수로 부리는 사내. 유진이 게이트의 비밀을 풀고 보스 몬스터까지 사냥한 건 아닐까.

'그럴 리가.'

장미선은 고개를 돌리며 막 떠오른 상념을 털어냈다.

이번 공략에 많은 것을 투자한 불사조 길드.

1군에만 붙는 게이트 분석 팀이 합류했고, 공략에 참여한 헌터들에게도 길드 소유 장비들을 대여했다.

말이 좋아서 2성급 팀이지.

실 전력은 3성 끄트머리에 달한 프로 헌터 팀과 비교해도 한 수 위라고 자부했다.

맞은편에 있는 새벽 길드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니면 대체....'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두 길드.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에 찾아온 침묵이 두 길드의 헌터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

파주로 돌아온 유진 일행.

"형님. 공방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한 것 같습니다."

강인호가 말하기 무섭게, 1주일은 안 감은 것 같은 부스스한 머리의 사내가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겁니까!!"

핏발이 선 눈으로 달려온 신준석은 비명인지 괴성인지 구분 가지 않는 소리를 토해냈다.

"아라한에서 찾아왔나?"

"댁 짓이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홍보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기에 내가 판촉 좀 했지."

신준석은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얼마나 귀찮았는지 아십니까? 며칠 간 하루도 쉬지 않고 포션 좀 팔아달라고 성화를 하던지...."

그 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한시도 쉬지 않고 불평을 토해내는 연금술사.

유진은 심드렁하게 그 불만을 일축했다.

"도움 됐어. 안 됐어?"

"아. 도움이야 됐지만요. 그래도!"

"결과가 중요한 거지. 조금 귀찮아도 일처리는 빨리 됐잖아."

"으그그그."

신준석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이만 갈아댔다.

"그래서 진행사항은?"

"중급 포션 특허는 신청이 끝났고 조만간 양산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참. 주문하신 물건이 어제 막 도착했습니다."

다크니스 오브.

흑마법 계열 장비로 마력을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오브는 희소성이 있어서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신경 써줘서 고맙다."

"흑마법사가 비인기 직업이라 다행이죠."

신준석이 낮게 조소했다.

암흑 속성과 디버프에 특화된 마법계 세분화 직업인 흑마법사.

파괴력은 순수 마법계 헌터보다 모자라고.

디버프 쪽도 신관 직업군과 겹치다 보니 인기가 많지 않다.

신준석한테서 받은 다크니스 오브를 파프너의 가슴팍에 갖다 대니.

[또 무슨 파렴치한 짓을 하려는 거야?]

파프너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을 잘도 하는군."

유진은 투덜대면서 마력을 흑암의 반지에 불어넣었다.

스스스슷!

반지를 매개 삼아 치환된 영력이 파프너와 다크니스 오브를 연결한다.

영혼 동조.

리치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그릇]과 몸뚱이를 잇는 것이다.

만약 동조가 잘 안 되면 육체가 파괴되었을 때, 혼백이 그릇으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으으으. 느낌이 이상한 걸.]

"저항하지 마라."

희끄무레한 기운이 드래고니안 사체에서 흘러나왔다.

박하늘의 혼백과 하나 된 용족의 정수.

'이걸 다크니스 오브에 유도한다.'

드래고니안 사체와 검은 구슬을 오가는 혼백.

몇 번 교차한 후에는 다크니스 오브를 파프너의 가슴팍에서 떼었다.

[엘드리치 드래곤의 완성도가 조금 올라갔습니다.]

[불완전한 영생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리치와 동일한 스킬.

이제 몸뚱이가 부서져도 라이프 포스 베슬만 무사하면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불완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나?]

"라이프 포스 베슬이 부서지면 죽거든."

휘익!

유진이 다크니스 오브를 허공으로 던지자 파프너가 화들짝 놀라면서 도약하고는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이스 캐치."

[뭘 하는 거야!]

"경고를 잘 들었나 하는 거지."

다크니스 오브.

아니, 이젠 파프너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조만간 아공간 주머니라도 하나 마련하든 해야지.

파프너의 생명과 직결된 만큼 안전하게 보관해야 한다.

"아. 너희도 일 하나만 하자."

쿠웅-!

흑암의 반지에 보관했던 가면마수의 사체가 공방 앞마당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마석을 캐면 됩니까?"

"가능하면 원형은 보존하면서."

"이 시체도 언데드로 만드실 건가 보군요."

척하면 척이다.

뽀시래기 팀이 작업을 하는 동안, 유진은 가면마수의 팔뚝에 손을 얹고는 영력을 흘려보냈다.

떡 벌어진 골격.

오우거만큼이나 단단한 뼈.

강력한 언데드로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재료다.

[가면마수는 무슨 언데드로 만들 생각인가?]

"언데드보다는 골렘을 제작하려고."

[시체를 기반으로 한 골렘도 있다니. 참 세상 오래 살 일이야.]

"넌 죽었잖아."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가면마수의 사체를 골렘으로 만들려는 이유나 말해줘.]

"내 실력이 모자라니까."

변칙으로 언데드를 만드는 것도 한계는 있다.

아머드 좀비나 공 / 방어에 특화된 스켈레톤을 넘어선 언데드를 제작하긴 어려운 상황.

'파프너야 드래고니안 사체 덕에 성위를 넘어선 성과를 낼 수 있었지.'

가면마수 사체의 특징을 극대화하려면 자이언트 좀비나 스켈레톤 킹 정도는 만들어야 하는데.

상급 언데드 제작은 최소 4성은 되어야 시도할 수 있다.

'골렘은 다르다.'

2성이 되면 골렘 관련 지식을 계승.

가면마수의 사체를 기반 삼아 골렘을 제작하면 된다.

[저 시체만 가지고 골렘을 만들 수 있나?]

"연금술사와 재료가 필요해."

훌륭한 연금술 노예야 바로 옆에 있고.

골렘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는 돈으로 구하면 된다.

"동업자 양반. 아라크네의 실과 마력 기관도 구해줄 수 있나?"

"당장 구하는 건 무리입니다. 아라크네의 실은 접경지역 너머에서 공급되고, 마력 기관은 기업들이 눈에 불을 켜고 구하는 중이니까요."

"그라운드 제로는 어때?"

파주에 있는 무법지대.

돈만 쥐여 주면 어떤 것이든 다 구해준다는 땅이다.

"어... 거길 가시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요."

신준석은 질린 듯이 혀를 내둘렀다.

26화 그라운드 제로(1)

그라운드 제로.

대격변 이전에는 파주 아울렛이라는 지명으로 불렸으나, 수차례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 이후에는 무법천지가 된 지역이다.

[여긴 복구가 전혀 되지 않았구나.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라운드 제로가 반가운 건가?"

[설마. 그런 악취미는 없다.]

파프너가 쓰게 웃었다.

반쯤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느껴지는 강렬한 눈빛.

그라운드 제로에서 얕보였다간 주머니 털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데 여긴 왜 온 건가?]

"볼 사람이 있다."

[합법적인 쪽은 아닌 것 같다만.]

"그런 부분까지도 계약에 걸린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난 그렇게까지 착한 위인은 아니야.]

"은하수 펍의 마담을 보러 간다."

그림자 가면을 쓴 유진은 콘크리트 폐허 속으로 발을 성큼 내디뎠다.

마담 오현정.

전생에도 꽤 교류를 많이 했던 인물이다.

본업은 칵테일 바 운영이라고는 하나 브로커나 정보상, 그 외에도 여러 분야에 발을 뻗은 암흑가의 문어발.

현 시점에서는 어디까지 사업을 확장했을지 모르지만, 유진에게 필요한 일은 하고 있을 것이다.

'정보. 그리고 암시장으로 들어가는 티켓.'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경계의 눈빛.

[내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구나.]

"됐어. 먼저 자극하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어."

시비가 붙으면 모를까.

누가 이빨을 드러내기 전에는 굳이 힘자랑 할 필요가 없다.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주먹자랑 하지 마라.

이런 격언도 있으니 말이야.

마침내.

[은하수]라는 글자를 싸구려 네온사인 간판으로 달아둔 매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주인. 여기가 맞는 건가?]

"어. 일단은."

[꽤나 취향이 독특하구나. 빈티지한 술집을 좋아할 줄이야.]

폭발에 의해 뜯겨나간 문.

언뜻 보이는 건물 내부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빈티지가 아니라 빈티 아니냐?"

[동감이다.]

파프너는 곧바로 유진의 말을 긍정했다.

멀쩡한 집기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술집.

단순히 물건만 파손되었으면 모를까.

깔끔하게 반으로 쪼개진 탁자는 거미 표식을 단 불량배가 흘린 피에 젖어서 붉게 물들었다.

〔크하핫. 곤란하게 되었구나.〕

'웃으면서 그런 말 해도 설득력 없거든?'

〔늘 잘 풀리기만 하면 보는 입장에서는 재미가 없도다.〕

'무능 성좌의 취향에 맞춰줄 생각은 없다.'

유진과 파프너는 펍 내부를 살펴보았다.

[전투가 벌어졌군. 오래 되진 않은 것 같다.]

"이 녀석한테 물어보지."

바닥에 쓰러진 불량배에게 다가간 유진.

"이봐."

"끅, 끄윽."

"주인장은 어디에 있나?"

"ㅁ, 마담은 이미 내 동료가 잡았을 거다. 쿨럭."

"친구야. 방금 물은 건 그게 아니었잖아."

"미친 놈. 난 너 같은 친구 둔 적 없...."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지."

[오염된 피부를 사용합니다.]

가면마수가 사용했던 저주.

흑마법사 전용 스킬이지만 그림자 가면에 각인되어 있어서 마력만 불어넣으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치익-.

"끄아아악!!"

"어때. 나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입술을 씰룩이는 파프너.

[친해지는 방법이 꽤 독특하네.]

"내가 좀 사교적이라."

마력을 추가로 불어넣자 영역을 넓히는 저주.

팔 일부가 썩어버리니 불량배가 끄아악! 이라는 비명을 질렀다.

"말할게. 하면 되잖아!"

"좋아. 친구. 은하수의 마담을 습격한 시간을 알 수 있을?"

"30분 전이야. 멀리 도망 못 쳤을 거야."

"어디로 도망 간지는 모르고?"

"붉은 거미의 동료들이 잡으려고 쫓아갔어. 난 여기에 있어서 몰라."

유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붉은 거미와 마찰이 있었다는 게 이맘때쯤이었나.'

전생에서는 달 그림자라고 불렸던 여인.

마담 오현정은 그라운드 제로를 양분하는 커다란 조직을 이끌었다.

그녀가 [은하수 펍]의 규모를 어떻게 키웠는지는 일일이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사건이 계기였다고 들었다.

붉은 거미와의 전쟁.

'흠. 이때가 그쯤일 줄은 생각도 못했네.'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20분이면 흔적을 찾기 어려울 거다.]

"괜찮아. 방법이 다 있어."

"흥. 마담이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모른다. 알아도 안 알려줄 거다!"

불량배가 목소리를 높였다.

"걱정 마라. 물어보는 건 네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니."

유진이 손을 올리자, 파프너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가 하강했다.

한 차례 충격음이 터지고.

"끄륵."

정수리를 맞은 불량배가 기절했다.

"그 놈. 죽지는 않았지?"

[악인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이지는 않아.]

파프너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보다 마담이라는 자를 어떻게 찾을 셈인가?]

"물어볼 자가 있다고 말했잖아."

[이 펍에는 방금 전에 기절시킨 녀석 말고는 아무도 없다만.]

"사람이라고는 안 했어."

유진은 그림자 가면을 벗은 후, 마력으로 저주 술식 하나를 지워버렸다.

[혼돈의 광란 저주가 사라졌습니다.]

[그림자 가면에 저장된 저주 - 4/5]

재생능력을 극대화하는 대신 사용자의 수명을 깎는 저주.

언데드한테는 재생능력이 의미가 없고.

자기 자신에게 사용했다가는 금방 늙어버릴 것이다.

'우선순위로 뺄 저주였지.'

스스스슷!

영력을 손가락에 집중. 느린 동작으로 그림자 가면에 저주 술식을 새겼다.

[그림자 가면에 소울 체이스 저주가 등록됩니다.]

소울 체이스

분류 : 저주

등급 : C

사물에 깃든 혼백의 흔적을 찾습니다. 머문 시간이 지날수록 대상의 기운이 옅어집니다.

"필요한 저주를 일일이 새기려니 귀찮네."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그림자 가면을 다시 썼다.

마담 오현정의 안방이나 마찬가지인 펍.

혼백의 기를 찾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소울 체이스를 사용합니다.]

적외선 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것마냥 이질적인 색이 망막에 아른거린다.

"가자."

[내 주인은 신기한 재주를 많이 지녔단 말이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린 파프너가 유진의 뒤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섰다.

*

그라운드 제로의 골목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다.

불법 개축에 확장, 새로운 이주민을 받아들이면서 끊임없이 몸집을 불린 슬럼가.

거주민들조차 익숙하지 않은 곳에 발을 디디면 방향 잡기도 힘든 곳이다.

"헉, 허억."

이정표 하나 없는 좁은 길을 거침없이 달리는 한 여인.

목덜미에 닿을락 말락 하는 단발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위아래로 흔들린다.

"잡아!"

"놓치면 안 돼!"

추격자들의 숨소리가 귓불을 스치는 것 같은 느낌.

심장이 터질 것처럼 거세게 뛰어도, 여인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붉은 거미가 왜 나를 노리는 거야?'

오현정.

표면적으로는 [은하수]라는 펍을 운영하는 사장이지만.

실제론 온갖 뒷거래를 중개해주는 브로커다.

그라운드 제로에 투신한 지 10년. 그 동안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장사 규모를 키웠지만, 붉은 거미처럼 커다란 조직과 척을 질 일은 벌이지 않았다.

'영문은 몰라도 잡히면 그냥 끝나지 않을 거야.'

까득-.

오현정은 이를 갈았다.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다.

'여기서 끝낼 순....'

삐이이익!

어둠을 찢어발기는 호각 소리.

붉은 거미를 수놓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골목 양쪽을 막아섰다.

"허 참. 고작 한 명 때문에 이렇게나 고생할 줄이야."

팔뚝에 난 기다란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는 두 눈을 부라리면서 오현정을 향해 걸어왔다.

팅-.

소매에서 튀어 나온 비수가 오현정의 손에 들렸다.

검붉은 색으로 점철된 날.

오현정을 쫓던 붉은 거미 조직원들을 해치우는 과정에서 묻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쉽게는 안 가."

"킥. 이미 마나도 다 떨어진 주제에 허세 부리기는."

"허세인지 아닌지는 네 몸뚱이로 직접 확인해보시던가."

비수를 역수로 든 오현정.

붉은 거미 패거리는 그녀를 포위한 채,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하필이면 진영 아저씨가 자리를 비웠을 때...!'

독기 가득한 표정으로 두려움을 감추었지만, 비수 끝이 떨리는 것까지는 어찌 하지 못했다.

체력과 마나 모두 바닥났고.

팔, 다리, 복부 등 여기저기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이 피를 꾸역꾸역 내보내고 있다.

앞뒤로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악명이 자자한 붉은 거미가 마수를 드리우니.

'지금이 밤이었으면.'

해가 중천일 때는 비활성화 되는 오현정의 고유 특성.

자력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때.

"아저씨들. 뭔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몰려든 거야?"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침묵으로 젖어든 골목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붉은 거미 패거리와 오현정의 눈동자가 분위기를 깬 이방인, 유진에게로 일제히 향했다.

〔저 여인을 찾아온 것이었구나.〕

'그래. 조금만 늦었어도 낭패를 봤을 것 같군.'

거미 문신을 새긴 남자는 뜻밖의 불청객을 보고 흉흉한 미소를 지었다.

"외지인은 당장 꺼져라. 뒈지기 싫으면."

"친절하기도 해라. 경고도 해주고."

"이 새끼. 감히 붉은 거미를 농락하다니."

진심으로 한 말인데.

유진은 난감한 듯 어깨를 살짝 올렸다.

[흠. 대화로 해결할 상황은 아닌 것 같구나.]

뒤이어 골목으로 진입한 파프너.

"그 소환수 하나 믿고 나대는 거라면 후회할 거다."

"파프너야. 그렇다는데?"

[후회는 내 주인이 아니라 너희들이 하겠지.]

타핫-!

파프너는 떠들고 있던 붉은 거미 패거리의 앞에 뛰어들었다.

붉은 거미 패거리 중 하나가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으나, 파프너가 훨씬 빨랐다.

명치에 꽂힌 주먹.

"끄억!"

붉은 거미 패거리의 선두에 있던 녀석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휘둥그레진 사내의 눈.

비로소 파프너가 일반적인 소환수가 아니란 것을 알아채고는 목청을 크게 높였다.

"죽여!"

쇠파이프나 단검.

그 외에도 소지하기 편한 흉기들을 쥔 이들이 뒤집어진 눈으로 달려들었다.

"숨은 붙여놔야 한다."

[날 무슨 쾌락살인마로 아나. 그런 취미 없어.]

그라운드 제로가 행정력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라지만, 사람을 수십이나 죽이면 조용히 넘어갈 수 없다.

반면 붉은 거미는 사람 하나쯤 묻어버리는 건 자신 있다는 듯, 절제되지 않은 살기를 내뿜으면서 자신 있게 달려들었다.

이러니 멀쩡하게 영업 중인 펍을 습격했겠지.

"컥!"

"끄아악!"

붉은 거미 패거리가 하나둘 나가떨어진다.

조직원 상당수는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비각성자.

날붙이나 둔기를 휘두른들, 강화 회로를 새긴 용인족의 몸뚱이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간간이 불량배 사이에 껴서 파프너를 노리는 '헌터'도 있었지만.

[암흑 투기]

영력으로 비늘을 강화해서 버텨냈다.

[왜. 더 찔러보지?]

"이익!"

새빨개진 얼굴로 안간힘을 쓰는 헌터.

암흑 투기로 감싼 비늘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고.

[시시하군.]

퍼억! 일격에 근육이 뭉개지고 뼈가 부러지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빠르게 무력화되는 붉은 거미 패거리.

"뭔 놈인지는 몰라도 불타 죽어버려라!"

화르르륵!

팔뚝에 긴 흉터를 새긴 남자가 모았던 양손을 펼치는 순간.

손바닥에서 화염줄기가 솟구치면서 좁은 골목을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부하들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은 공격.

"아. 그런 거였나."

유진은 넘실대는 화염을 보면서 짧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달 그림자라고 불릴 인물.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오현정은 얼굴에 큼지막한 화상을 입었다.

아무래도.

미래의 달 그림자에게 낙인을 찍은 원흉은 붉은 거미 출신 헌터인 모양이다.

"위험해요!"

한 발 늦은 오현정의 경고가 유진의 귀를 스쳐 지나간다.

[주인. 영력 좀 쓰겠다.]

파프너의 전신을 감싼 흑색 기류.

암흑 투기를 최대로 끌어올린 형태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비틀거린 유진이 이를 갈았다.

"미리 경고를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영혼으로 이어진 결속의 끈.

유진이 마력 패스를 크게 제어하지 않은 탓에 파프너가 일부를 끌어와서 암흑 투기로 발현한 것이다.

골목길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은 암흑 투기 앞에서 금세 사그라졌고.

"내 불꽃을 어떻게... 무슨 수로!"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 붉은 거미는, 컥!"

[말이 많다.]

파프너의 주먹이 놈의 안면을 강타하면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한 쪽은 끝났고."

유진은 골목 반대편에 있는 붉은 거미 패거리를 바라봤다.

"제, 제길. 마담이라도 납치해!"

"그건 곤란합니다. 젊은이."

등 뒤에서 튀어 나온 목소리. [은하수]의 바텐더, 정진영은 손날로 툭- 하고는 붉은 거미 소속 사내를 제압했다.

"아저씨!"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하.

유진은 비로소 그녀가 어떻게 위기를 헤쳐 나왔는지 이해했다.

제 딴에는 마력을 감추었지만.

노인의 등 뒤로 아른거리는 강렬한 영혼의 힘까진 숨기지 못했다.

'6성인가.'

7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 합류했다면 붉은 거미 패거리 수십이야 큰 위험이 되지 않았으리라.

전생에는 시간을 못 맞춘 탓에 오현정의 얼굴에 화상이 생긴 모양이군.

'이젠 없는 일이지.'

유진의 개입으로 달라진 역사. 적어도 그녀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을 상처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정적으로 물든 골목.

"아가씨. 이 분들은 누구십니까?"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나쁜 의도로 온 것 같진 않네요."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정리한 마담.

"덕분에 위기를 넘겼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술 한 잔 먹으려고 왔다가 바텐더랑 사장님이 안 보여서 따라온 것뿐이야."

능청 떠는 유진을 찬찬히 살펴보는 마담. 호기심과 경계하는 마음이 섞인 오묘한 눈빛이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유진.

노인과 마담, 둘 다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니.

"가만히 있어"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널브러진 붉은 거미 조직원의 생명력을 빼앗아서 마담에게 불어넣었다.

빠르게 아무는 상처.

"아. 신관이었나요?"

"비슷해."

1분도 되지 않아서 모든 상처가 나았다.

일반적인 하급 치유 주문으로는 1시간을 붙들고 있어도 안 됐을 건데.

성자 전용 스킬이라 그런지 효과 하나는 어마어마했다.

〔크하하핫! 역시 짐이 하사한 주문이도다.〕

거 조용히 좀 하쇼.

분위기를 몰라.

"여기는 통성명하기에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호홋, 그러네요. 장소를 옮길까요?"

"진득하게 이야기를 할 장소면 더 좋겠어."

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27화 그라운드 제로(2)

엉망진창이 된 펍.

마담은 카운터에 흩어진 파편을 치운 후 태연하게 앉았다.

"메뉴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우유."

"네?"

"취하긴 그렇잖아. 볼 일도 있고."

"그라운드 제로에서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노인은 우유를 잔에 따랐다.

아.

보디가드 겸 바텐더였구나.

6성 절정으로 짐작되는 헌터라.

펍의 바텐더치고는 너무 고 스펙이다.

'전생에는 못 봤는데.'

나름 은하수 펍에서 손꼽히는 단골이었던 유진이다.

바텐더 노인의 기억이 없다는 건.

'그 전에 죽었다는 말.'

붉은 거미가 습격을 했던 일도 그렇고.

마담의 신변과 관련해서 어떤 사건에 휘말렸다는 것쯤은 쉽게 예상이 되었다.

유진은 라운지 위에 놓인 우유에 손을 뻗었다.

"맛있네요."

"깔루아처럼 우유가 들어가는 칵테일도 있으니까요. 늘 신선한 걸 쓰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어수선한 분위기가 아니라면 한 잔 먹어보고 싶네요."

푸근하게 웃는 바텐더.

마담은 커피를 든 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 난장판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다니. 역시 미래의 달 그림자답군.

유진은 그녀의 담대함에 감탄했다.

"그럼 저를 찾아오신 진짜 목적을 들어볼까요?"

"지하 경매장 티켓을 얻고 싶다."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건 알고 계실 것 같네요."

호로록-.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마담.

"...라고 말씀드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제 목숨 값에 비해서는 별것 아니네요."

은하수 펍 마담의 명함.

검은 색 종이에 금박으로 이름을 새겨서 고급스러운 느낌을 한껏 냈다.

"명함이라면."

"제 보증 같은 거랍니다."

"지하 경매장 티켓보다 더 값진 거 아닌가?"

"호호. 붉은 거미의 세력권 말고는 어느 곳을 가든 당신을 터치하지 않을 거예요."

은하수 펍 마당의 보증.

그라운드 제로 내부에 한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신분 보장 방법이 없으리라.

"목숨 값이라고 쳐도 너무 후한데."

"통용되는 건 한 번이니, 필요한 데서 제 이름을 쓰세요."

유진은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근데 경매장에서는 뭘 찾으려고 하시죠?"

"마력기관."

"기관의 종류는 상관없나요?"

"어. 골렘의 핵이든 리빙 아머 코어든, 출력이 3성만 넘으면 괜찮아."

태블릿을 천천히 훑어보는 마담.

"지하 경매장에 가도 재미는 보기 힘들 거예요."

"그쪽 매물도 확인할 수 있나보군."

"서비스랍니다. 본래 외부인에게 매물 리스트를 말씀드릴 수 없거든요."

지하 경매장은 암상이 관리하는 걸로 아는데, 용케도 그 리스트를 확보했군.

흠.

티켓을 허무하게 쓰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마력기관이 나오면 귀띔해줄 수 있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매물을 알려드리는 건 서비스였답니다."

두 번은 안 해준다는 말.

전국에서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물건들은 모두 그라운드 제로로 모이는데도, 마력기관을 구할 수 없었다.

흠-.

'직접 구해야 하나?'

신준석을 독촉한다고 해도 원하는 출력이 나오는 마력기관을 제작하긴 쉽지 않다.

자본과 시간.

금전적인 문제야 어떻게든 해결 한다 쳐도, 마력기관을 하나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마력기관을 루팅할 만한 게이트를 찾아보든 해야겠어.'

은하수 펍의 마담한테 인상적인 첫 인상을 준 걸로 만족해야겠다.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리고는 일어나려고 할 때.

"의뢰 받을 생각 없나요?"

마담이 한 마디를 내뱉고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

은하수 펍.

언뜻 보면 평범한 술집 같지만, 실제 업무는 의뢰를 중개하는 해결사 사무소다.

'평범한 흥신소하곤 다르지.'

그라운드 제로 너머 국내 전역의 의뢰를 수집하고.

마담의 까다로운 안목으로 뽑은 해결사들이 의뢰를 해결한다.

천정부지의 가격.

그럼에도, 지갑이 두툼한 고객들이 은하수 펍을 찾아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 무법지대에서 암상, 붉은 거미와 함께 3대 단체로 인정받은 이유.

'처음 계획은 의뢰의 대가로 지하 경매장 티켓을 얻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유진.

그녀가 역제안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자신의 명함을 주고.

한 번 본 게 전부인 사람한테 의뢰까지 부탁한다는 것.

전생의 기억과 비교해보면 파격적인 대우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는 거군.'

픽.

유진은 가볍게 조소했다.

"날 떠보는 거. 감당할 수 있겠어?"

"제가 원래 타인을 쉽게 못 믿는 성격이라서 말이죠. 또, 당신에게 손해는 아닌 제안이잖아요."

"뭐, 좋아. 의뢰 내용부터 들어보자고."

*의뢰인 : 오현정

*의뢰 종류 : 게이트 공략

*난이도 : C

*보수 : MIS - 4 마력기관

*세부 사항

공략 목표 - 개미굴

유동 형 게이트.

게이트 등급 - 1 ~ 3성

규모 - 중형

*특이사항 - 붉은 거미가 혈석 공급원으로 관리 중.

허.

유진은 황당한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붉은 거미한테 보복하는 의뢰를 나한테 한다고?"

"맞아요. 당신만큼 적임자가 없으니까요."

"그라운드 제로를 3등분하는 세력과 척을 지라는 말을 잘도 하는군."

"걱정 마세요. 붉은 거미가 손을 쓰는 일은 없을 거랍니다."

마담은 자신 있게 답했다.

붉은 거미의 영역은 그라운드 제로에 한정되었으니.

음지에서 벗어나는 순간 햇볕에 노출된 그림자마냥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렇다 한들 마냥 무시했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야.'

유진은 팔짱을 꼈다.

"방금 전에 불에 구워질 뻔했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신뢰가 가진 않는데?"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되죠."

"안에 있는 붉은 거미 패거리를 모두 죽이란 말을 쉽게도 하는군."

사실은 의뢰를 제안 받을 때부터 짐작했던 내용이다.

마담의 입가를 물들이는 싸늘한 미소.

"죽은 자는 말할 수 없으니까요."

그 말이 꼭 옳지는 않다.

유진은 망자와 소통할 수 있으며.

그 혼백의 의지를 무시하고 원하는 정보를 토하게 하거나 지배하는 것도 가능하다.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쓴웃음과 함께 상념을 뱃속으로 삼켰다.

"게이트 폐쇄는 제 이름으로 하는 조건이면 되겠지요?"

유진은 납득한 듯 끄덕이곤 뒤를 흘겼다.

"어찌 생각하나. 파프너?"

[계약에 위배하는지를 묻는 건가.]

"붉은 거미가 글러먹은 놈들인 건 맞지만 죽이는 건 다르잖아."

마담을 구하는 과정에서 중상자가 속출했지만, 결국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격전 도중에도 파프너가 손속에 자비를 두었기 때문.

[주인이여.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콰직!

파프너가 발에 힘을 주니 바닥 일부가 주저앉았다.

아까 습격 때 충격이 누적되어 있었는지, 힘을 살짝 준 것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주인의 손을 잡는 순간부터, 법도에서 어긋난 것을 자각했다. 이제 와서 뭘 물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꼭 악마라도 되는 것 같잖냐."

[난 주인의 검이다. 언제부터 무기가 의지를 가지고 벨지 말지 물어봤나.]

검이라.

판단하는 것을 내려놓고 유진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또한, 저들은 단죄를 받아야 할 악인들이잖아.]

"판단을 맡긴다고 해놓곤 악인 타령하긴."

유진은 황당한 투로 중얼거렸다.

"호호. 의견 조율은 끝난 것 같은데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해도 되나요?"

"MIS - 4 마력기관. 잊지 말라고."

"걱정 마세요. 미국에서 초도 생산된 마력기관을 확보해뒀거든요."

Myth Industry Series - 4.

마도공학 방면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기업. 미쓰 사에서 만든 4번째 마력 엔진 시리즈라는 의미다.

'최대 출력은 5성급. 마력 과부하 문제가 있어서 얼마 후에 가치가 폭락하는 물건이었지?'

미쓰 인더스트리는 4번째 시리즈의 처참한 실패를 디딤돌 삼아 개량 버전을 내놓는데, 그게 대박을 낸다.

전생에서도 세계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MIS - 5가 대중적으로 사용되었으니 말이야.

'나는 그 구조를 대충 알고 있지.'

MIS - 4의 과부하의 원인과 해결 방법까지.

그렇다고 미쓰 인더스트리에 자문해줄 생각은 없다.

낙향한 천재 연금술사와 미국의 대기업.

스케일이 너무 차이가 나잖아?

동업자 양반이야 조율이 가능하기에 목줄을 채워놓고 부릴 수 있다.

현 시점에서도 전 세계 국력 1위인 나라에서 힘깨나 쓴다는 대기업을 상대로 거래를 시도했다가는 일방적으로 이용당할 게 분명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은 독이야.'

일단 MIS - 4를 손에 넣는 것에 집중하자.

생각을 정리한 유진이 입술을 떼었다.

"마력기관에 아라크네의 실 10kg도 더해서."

"그 정도는 서비스로 해드리죠."

"좋아. 하지."

"참. 아까 보여주신 무력을 보면 3성의 끄트머리이신 것 같은데 혹시 벽을 넘으셨나요?"

3성까지만 입장 가능한 게이트.

유진의 경지가 그 이상이면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1성인데."

"호호. 이제는 의뢰인 대 해결사로 보는 건데 장난은 그만 두세요."

"진짜다."

마담은 두 눈을 끔뻑이더니.

"예???"

머리 위에 의문부호를 다섯이나 띄우면서 화들짝 놀랐다.

*

콘크리트 무덤에 드리우는 땅거미.

세상 곳곳을 밝혀주던 해가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멀지 않은 야산.

유진 일행은 수풀 사이에 몸을 감춘 채, 은은하게 빛나는 게이트를 바라봤다.

"저긴가 보군."

푸른 웜홀 주위를 크게 두른 철조망.

어깨나 볼, 혹은 손등에 거미 문신을 새긴 자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모두 헌터네. 실력은 형편없지만."

유진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수십이나 되는 이들을 한 번에 제압하는 건 어렵다.

하나라도 살려두었다가 그라운드 제로에 있는 붉은 거미 본대와 연락이 닿으면 공략이고 뭐고 없는 일이 될 터.

"걱정 마세요."

비수를 땅에 꽂는 마담.

웅-!

짧은 떨림과 함께 비수에서 푸른 아우라가 퍼져 나오기 시작한다.

[달의 주술]

[호접지몽(胡蝶之夢)]

마법이나 신성 주문과는 궤를 달리하는 능력.

특수 직업군으로 분류된 주술의 힘이다.

'마담한테 달 그림자라는 호칭이 붙은 이유지.'

달의 주술.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마담 오현정의 주술은 밤이 되었을 때만 전개가 가능하다.

조건을 타는 만큼 주술의 위력만 놓고 보면 성위를 초월하는 수준.

푸른 기류는 금세 게이트 주변을 모두 휘감았다.

[모든 통신 및 이동 관련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성좌의 능력도 아닌 것이 섭리에 간섭한다라.〕

크로노스는 흥미를 드러냈다.

"마법 기반 스킬이야 막을 수 있지만, 전파는 아니지 않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바텐더.

마담이 주술을 사용하는 동안, 기다란 봉을 설치했다.

"전파 교란 장비군."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고객님."

"뭐, 조금."

게이트가 습격 받았다는 사실을 외부로 알릴 방법은 모조리 막아버렸다.

"의뢰는 게이트 공략이니 길은 열어드릴게요."

"아니. 한 놈이라도 놓치면 곤란하니 힘을 합친다."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응징의 쐐기를 사용합니다.]

미리 준비한 신성 주문을 파프너에게 걸어주었다.

[나에게 맡겨두어라.]

우측으로 뛰쳐나가는 파프너.

"흠. 이쪽도 가만히 구경만 하면 체면이 서지 않겠군요."

바텐더의 양손에는 어느새 길이가 다른 쌍검이 쥐어져 있었다.

곁에 있는 유진조차 검을 쥐는 순간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빠른 속도.

파프너가 달려간 방향과 대칭이 되는 쪽으로 이동한 바텐더가 붉은 거미 무리에게 쇄도했다.

"괴, 괴물이다!"

"이쪽은 은하수의 바텐더가 나타났다고."

게이트를 지키던 붉은 거미 패거리가 혼란에 빠졌다.

입구를 지키는 인원은 전원이 1성급.

그라운드 제로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붉은 거미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이미는 자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다음 생에는 악한 짓에 발을 담그지 마라.]

퍼어엉!

흡사 수류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일순간 힘을 응축해서 붉은 거미 소속 헌터의 몸뚱이에 때려 박으니.

피륙으로 된 육신이 막대한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늙은이를 두고 한 눈 팔면 곤란합니다."

서걱!

바텐더는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붉은 거미 패거리를 썰어 넘겼다.

"어서 본부에 연락해!"

"전파장애입니다."

"마도구도 작동하지 않아요!"

"도대체 어찌 해야...."

붉은 거미라는 이름값만 믿던 헌터들은 별다른 저항조차 못하고 순식간에 전멸.

게이트를 지키는 인원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무운을 빌어요."

유진은 자신 있게 게이트 너머로 발을 디뎠다.

28화 새빨간 위장(1)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진한 어둠.

[주인.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유진은 칠흑으로 잠긴 토굴에서도 당황한 기색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아른거리는 희끄무레한 기운.

영력을 망막에 코팅하듯 살짝 둘러서 어둠을 내다보았다.

투쾅!

흑암의 반지에서 튀어나온 스켈레톤.

오크 족장 사체로 만든 방어 특화 언데드의 첫 실전 무대다.

"밥값은 해야지."

"그겔겔겔."

스켈레톤 가드가 턱뼈를 들썩이면서 화답했다.

[선봉은 내가 맡을게.]

"잘 부탁하지. 대전사 님."

쿵- 쿵-.

토굴을 크게 울리는 파프너의 발소리.

진동음에 자극 받은 괴물이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레드 슬라임]

새빨간 점액질로 된 몸뚱이.

무언가를 삼키고 녹인다는 식욕 외에 아무것도 없는 몬스터, 슬라임이 바닥을 미끄러지며 천천히 다가왔다.

[처음 보는 색상이야.]

"강철도 녹여버리는 놈이다."

위험 등급은 3성.

마나를 싣지 않은 물리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고.

강화 회로를 새기지 않은 갑주 따위는 닿기만 해도 몇 초 안에 녹아버린다.

[그럼 적을 두고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해?]

"약점이 하나 더 있긴 한데."

검지를 쭉 뻗어서 레드 슬라임의 몸뚱이를 가리키는 유진.

탁구공보다 조금 큰 구체가 새빨간 액체 한가운데에 파묻혀 있다.

"놈이 사냥하려고 할 때 점액질을 모두 펼치거든."

[그 순간에 핵을 파괴하란 말이군.]

"레드 슬라임이 약점을 노출하는 시간은 0.1초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파프너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레드 슬라임에게 다가갔다.

츠라라랏-.

반구 형태로 뭉쳐 있던 레드 슬라임이 펼쳐진 보자기처럼 늘어나는 순간.

[하아압!]

쭉 편 손이 새빨간 점액질 속으로 파고들고.

퍼엉-!

무거운 돌을 호수에 빠트린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레드 슬라임의 몸뚱이가 터져 나갔다.

사방으로 튄 붉은 액체.

토굴 일부가 녹아내리면서 치익, 매캐한 연기가 솟아오른다.

"그 타이밍을 칼 같이 잡네."

[말했잖아. 어렵지 않을 거라고.]

이죽거리던 파프너의 안광이 순간 어지럽게 흔들렸다.

[슬라임은 시체가 없잖아.]

"그렇지?"

[이래서는 주인의 강령술도 무용지물이겠어.]

"슬라임 사체 가지고는 무리야."

시체 공급이 문제였으면 게이트 진입 전에 죽인 놈들을 망자로 일으켰겠지.

[그러면 왜 빈손으로 진입한 거야?]

"필요 없으니까."

-좀비

-역병 좀비

-스켈레톤

-아머드 좀비

유진이 사전준비 없이 제작 가능한 언데드 리스트다.

스켈레톤?

레드 슬라임한테 다이빙하면 몇 초도 안 돼서 녹아버릴 거고.

좀비는 한 10초 정도 버티겠군.

본 아머로 강화한 아머드 좀비라면 30초 정도?

유진은 킬킬거리면서 그림자 가면을 벗었다.

[암흑 시야 저주가 사라졌습니다.]

[그림자 가면에 저장된 저주 - 4/5]

이미 각인된 저주를 지우고.

손끝에 집중시킨 희끄무레한 기운으로 다른 저주를 새겼다.

[그림자 가면에 다크 콜링 저주가 등록됩니다.]

[내구도가 19 소모됩니다.]

다크 콜링

분류 : 저주

등급 : D

영혼을 굴복시키고 죽음의 힘으로 물들입니다. 다크 콜링에 종속된 혼백은 망령이 됩니다.

"이리로 오라."

힘 있는 목소리로 외치니 슬라임의 혼백이 유진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반투명한 영체를 잠식하는 희끄무레한 기운.

영력에 물들면서 점점 시커멓게 변해간다.

[망령을 제작했습니다.]

-키히히힛!

음산한 기운으로 가득한 웃음소리.

다크 콜링에 붙들린 슬라임의 혼백은 망령이 되었다.

[한데 이 망령이라는 건 어디에 쓰려고?]

"디버프랑 지속 피해."

수맥 흐르는 곳에서 자면 가위에 눌리거나 어깨가 결리지 않던가.

망령도 비슷하다.

생물에게 깃들어서 음기를 주입.

몸을 굳게 하거나 감각 교란, 혹은 물리력으로 피해를 입힌다.

[잡령치고는 꽤나 다재다능하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볼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좀 더 안쪽으로 나아가니, 이번에는 레드 슬라임 세 마리가 불쑥 나타났다.

-키히히히!

지시도 안 했는데 불쑥 치고 나가는 망령이 붉은 점액질에 스며들었다.

[망령이 레드 슬라임에게 깃듭니다.]

[근력, 민첩이 2% 감소합니다.]

[탈진 Lv 1이 부여됩니다.]

파프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딴 게... 디버프?]

"다재다능보다는 다재무능이지."

[영력이 아깝다.]

"한 가지 장점은 디버프가 중첩된다는 거다."

유진이 사역 가능한 언데드는 20마리.

그 숫자를 망령으로 채우면 의외로 쓸 만하단 말이야.

"망령 수가 늘어날 때까진 수고 좀 해줘."

펑! 퍼엉!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하나씩 터져 나가는 레드 슬라임.

"이리로 오라."

레드 슬라임의 영혼은 하나둘 유진의 힘에 굴종해서 망령으로 변했다.

[근력, 민첩이 15% 감소합니다.]

[탈진 Lv 8이 부여됩니다.]

[혼란 Lv 9가 부여됩니다.]

[이제야 조금은 쓸 만해졌군.]

파프너는 적을 앞에 두고도 갈피를 못 잡는 레드 슬라임을 쉽게 사냥했다.

*

유진 일행은 거침없이 토굴 안쪽으로 나아갔다.

하나뿐인 길.

게이트 공략을 마치려면 선행한 붉은 거미 패거리를 돌파해서 가야 한다.

[게이트만 공략하고 빠지긴 어렵겠어.]

"뭐, 예상했잖아."

2시간 정도 나아가자, 형광등과 비슷한 색을 띤 빛이 반대쪽에서 아른거렸다.

마법으로 생성한 빛이다.

[꺾인 통로라. 조금 곤란한 걸.]

난감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파프너.

빛의 발원지는 ㄱ자로 꺾여 있는 토굴 안쪽이다.

혈석을 채굴 중인 붉은 거미 패거리의 규모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상황.

여태 상황을 관망하던 크로노스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핫! 계약자도 여기까지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회귀했다고 해서 모든 걸 알진 못해.'

유진은 빛이 아른거리는 곳으로 망령 다섯을 보냈다.

희끄무레한 영체 무리가 코너를 꺾는 순간.

주황색 빛이 한순간 일렁였고.

콰앙-! 요란한 폭음이 토굴 일대를 마구 흔들었다.

[망령 4기가 파괴되었습니다.]

코너에 진입하고 3초가 되었을 때 동시다발적으로 소멸한 혼백들.

한 기가 살아남았지만 다시 한번 주황빛이 번지고는 다른 망령과 같은 꼴이 되었다.

'거리는 약 100미터. 마법 계 헌터는 넷이군.'

폭발 화력으로 보건대 3성의 끝자락.

탈 3성급 언데드인 파프너라고 해도, 정면으로 세 번 이상 맞는 건 위험하다.

붉은 거미 패거리의 탱커 라인이 단단할 경우에는 붙기도 전에 당할 수도 있다는 뜻.

이러면 새로운 변수를 만들 방법을 추가해야겠군.

마침 레드 슬라임들을 도륙하면서 30레벨에 도달했겠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지식을 끄집어 낼 시간이다.

[강령 분야의 지식이 사용자의 혼에 새겨집니다.]

[본 스피어 주문이 추가됩니다.]

본 스피어

분류 : 마법

등급 : D

영력을 뼈에 휘감아서 일직선으로 투척합니다.

"끙."

유진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괜찮은가?]

"더럽게 아픈 거 빼곤."

후욱, 유진은 긴 심호흡과 함께 통증을 몰아냈다.

본 스피어와 망령 무리.

그리고 파프너까지.

붉은 거미 패거리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한 전력이다.

머릿속으로 전투를 그려본 유진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

새빨간 위장의 안쪽.

보스 룸 앞에 진을 친 붉은 거미 패거리는 전투 준비를 마쳤다.

"어떤 새끼가 쳐들어 온 거야?"

조승철.

혈석 채굴 담당을 맡은 헌터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붉은 거미가 혈석 채집에 투입한 인원은 10명.

전원이 일반적인 헌터의 발전 한계점으로 불리는 3성이었고.

그 자신은 강력한 고유 능력과 마력 제어 능력을 인정받아 붉은 거미에서 많은 투자를 받았다.

아이템들의 시너지 효과를 더하면 한시적으로 4성급 마법계 헌터와 엇비슷한 화력을 낼 수도 있고.

"통신 걸어봐."

"응답이 없습니다."

이변이 발생한 한 시간 전.

정기적으로 오가는 통신이 두절되었다.

'붉은 거미의 영역에 머리를 들이댄 겁 없는 새끼 때문에 뭔 고생이야?'

혈석은 마나를 증폭시키는 강력한 촉매.

최근 전직 루트가 밝혀진 연금술사 덕에 혈석의 가치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100그램당 약 1,200만 원.

[새빨간 위장]에 굴러다니는 붉은 돌덩이는 황금보다도 가치가 더 높았다.

부수입도 짭짤하게 챙기던 중, 변수가 생겼으니 조승철의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든 튀어나오면 다 조져 버려."

조승철이 맹수처럼 으르렁대자 붉은 거미 소속 헌터들의 기합도 바짝 들어갔다.

그 순간.

뼈로 된 방패를 든 스켈레톤이 붉은 거미 패거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겔겔겔!"

스켈레톤 가드의 뒤에 아른거리는 희끄무레한 영체.

망령 여럿이 넓게 퍼지면서 시야를 어지럽힌다.

"스켈레톤?"

"망령도 그렇고. 웬 언데드가 튀어 나오냐."

마법 계 헌터들은 당황하지 않고 마력을 재배열했다.

토굴에서 뭐가 튀어 나오든.

붉은 거미 패거리를 제외하면 모두 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

[플레임 비트]

[파이어 볼 x 2]

[레드 바인드]

조각조각 나눠진 화염 다발이 망령들의 접근을 막았고.

새빨간 불줄기가 스켈레톤 가드의 발목을 휘감았으며.

정면에서는 축구공 크기로 응축시킨 화염 덩어리가 쇄도했다.

"피할 곳은 없다. 뼈다귀 새끼야!"

조승철이 크게 외쳤다.

[철벽]

[공격 흡수]

쿵-!

있는 힘껏 방패를 지면에 꽂은 스켈레톤이 방어 스킬들을 활성화했다.

초록색 빛이 화염 마법들의 궤도를 틀어내고.

뼈 방패와 정면으로 충돌하더니 커다란 폭발과 함께 열풍이 통로를 한껏 달궜다.

"그, 그겔."

좁은 통로에서 마법 세례를 받아낸 스켈레톤 가드.

커다란 방패가 절반 이상 녹아내리고.

폭발 에너지 일부를 몸뚱이로 받아냈는지 턱 뼈가 어긋났지만, 그래도 소멸하지 않고 공격을 받아냈다.

[잘했다. 뼈만 남은 전사야.]

스켈레톤 가드를 뛰어넘으면서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실루엣.

파프너는 크게 도약한 직후, 땅을 박차면서 붉은 거미 패거리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썩은 내 풍기는 언데드 주제에!"

조승철의 눈가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방패를 든 스켈레톤은 미끼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퀵 리로드]

마력을 두 배 소모하는 대신, 마법 전개 후 딜레이를 줄여주고 재배열 속도를 상승시키는 고유 특성.

다른 마법계 헌터들이 방출 후 자신의 마력을 수습하고 있을 때.

"이거나 먹고 뒈져버려라!"

1초 만에 두 번째 화염구를 던지는 게 가능했다.

이글거리는 화염구.

각종 아이템의 보조 덕에 준 4성에 달하는 위력이 담겨 있다.

[새빨간 위장]처럼 비좁은 공간.

벽을 넘어서 오러를 다룰 줄 아는 4성급 헌터라도, 폭발 에너지가 새어나갈 곳이 없는 공간에서는 큰 화상을 입을 것이다.

"이러니까 망령이 죽는 데 시간차가 얼마 나지 않았지."

토굴 반대편에서 흘러나온 사람의 목소리.

뼈 방패 뒤에 숨어있던 유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희끄무레한 기운을 휘감은 무언가가 통로 반대편에서 날아들더니 화염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본 컨트롤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

조승철이 재배열한 마력을 방출하는 순간에 맞춰 쏘아 보냈음에도, 더 빠른 속도로 날아들어서 요격한 것이다.

콰아앙-!

목표 지점보다 이른 곳에서 터진 화염구.

파괴력에 집중된 화염 마법답게 폭발 에너지를 사방으로 발산하며 파프너까지 삼키려고 했으나.

쇄애애액!

유진은 본 스피어에 실어놓은 영력을 회전시켜서 폭발 에너지를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파이어 볼의 폭발 에너지를 완벽하게 밀어냈다고?!"

경악하는 조승철.

만약 유진이 1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그 대가로 [저주받은 이빨] 하나가 부서졌지만, 가장 중요한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

[훌륭하군. 주인.]

사후경직으로 굳었어야 할 파프너의 뺨이 씰룩였다.

유진을 닮은 한 줄기 조소.

붉은 거미 패거리의 눈가에 불똥이 아른거렸다.

"우리가 허수아비로 보이냐?"

"죽여!"

탱커를 포함한 무투계 헌터 다섯이 무기를 쥔 채 파프너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든 장비를 레어 등급으로 갖춘 붉은 거미 패거리.

새빨간 위장을 지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이다.

최대 3성까지만 출입할 수 있는 게이트.

어지간한 헌터라면 방어망을 뚫고 마법 계 헌터에 도달하기는커녕, 무투계 헌터들의 칼에 썰리고 말 것이다.

[암흑 투기]

[케넥 전투술 7장]

[10발 난타]

우우웅!

고출력 바이크의 배기음처럼 웅혼하게 울리는 파프너의 영력.

기운에 의념을 부여해서 유형화시키는 경지. 오러의 다른 형태를 두른 주먹이 무투계 헌터들에게 쏟아졌다.

펑! 퍼퍼펑!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는 주먹 위에 덮인 암흑 투기가 헌터들의 무기를 꺾어내고, 강철로 만든 갑주를 우그러트린다.

"오러다!"

"4, 4성이라고?"

"데스 나이트도 아니면서 무슨 오러야!"

순식간에 둘이 나가떨어지고.

남은 무투계 헌터 셋이 간격을 둔 채 파프너를 견제했다.

"뭐가 잘 안 되니?"

유진의 이죽거리는 목소리.

붉은 거미 패거리의 뇌리에 '무언가 잘못됐다.'라는 생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29화 새빨간 위장(2)

"빌어먹을 자식이!"

욕지거리와 함께 분노를 토해내는 조승철.

거친 말과 달리, 그는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진 일행의 전력을 분석했다.

주먹에 암흑 투기를 두른 파프너의 신위.

뼈를 조종해서 전력으로 쏘아낸 파이어 볼을 상쇄시킨 유진의 마법 실력.

교전을 벌이자마자 무투계 헌터 둘이 당했고.

마법계 헌터들은 마력을 재배열하느라 다음 공격을 펼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보아하니 소환 쪽 특성을 가진 모양인데.'

언데드 소환수를 다루는 헌터가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승철은 가능성을 닫지 않았다.

지금껏 밝혀진 헌터의 고유 특성만 수십만 개에 달하는데 개중 언데드를 조종하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이 상황을 엎으려면 놈을 쓰러트려야 해.'

빠르게 견적을 내리고는 곧바로 입술을 떼었다.

"민우는 저 언데드를 붙들고 나머지는 저 새끼 조져."

큰 방패를 든 헌터가 짓쳐들더니.

[인핸스드 그립]

방패 면을 수직으로 세워서 파프너의 팔뚝에 바짝 붙였다.

점성을 띤 초록색 마력에 옭아매이자, 파프너가 팔을 휘둘렀지만 딱 붙은 방패도 이리저리 휘청거리면서 운신을 방해했다.

[그 용기가 가상하나, 이 정도 마크는 얼마든지...]

[퀵 리로드]

[레드 바인드]

다시 한번 고유 특성을 발동한 조승철.

불줄기로 이루어진 밧줄이 튀어 나와서 파프너를 붙들었다.

[...떼어내지 못하는군.]

파프너의 음성에 섞인 낭패감.

탱커 하나가 붙드는 동안 나머지 무투계 헌터들은 유진을 향해 달렸다.

'괜찮은 판단이군.'

〔크핫, 계약자의 대전사가 고전하는 듯하다만.〕

유진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무투계 헌터들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쉽게 가면 좋았을 텐데.

책임자로 보이는 헌터, 조승철의 판단력이 예상보다 날카로웠다.

'뭐, 그 정도는 예상했어.'

[부정한 축복을 사용합니다.]

백야 특성으로 영력과 성력을 빠르게 교체.

자신에게 버프를 건 직후, 곧바로 성력을 영력으로 바꾸었다.

유진은 등 뒤에 숨겨두었던 나머지 망령들을 날려 보냈다.

-키히히힛!

지면을 박차며 달려들던 무투계 헌터들에게 스며든 희끄무레한 안개.

순식간에 중첩된 디버프에 두 헌터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유진의 허리춤에서 튀어 나와 허공으로 솟구친 검은 뼛조각.

[저주받은 이빨]에 영력을 거듭 회전시키면서 관통력을 극대화시킨다.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허공을 가르면서 쏘아진 뼈가 공중에 한 가닥의 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뼈의 끝이 노리는 대상은 검과 방패를 든 헌터.

왼손에 낀 방패를 비스듬히 세우면서 저주받은 이빨을 받아치려 했다.

본 스피어를 빗겨내려는 시도.

"으으, 읏?"

카가가각!

방패에 닿자마자 영력이 거듭 회전하면서 밀려나지 않고 헌터를 공격 궤도로 휘말리게 했다.

흘리기를 시도했다가 오히려 본 스피어를 정면으로 쳐낸 사내.

강화 회로가 새겨진 철 방패가 우그러지고.

큰 충격을 몸뚱이로 고스란히 받으면서 뒤로 수 미터나 밀려났다.

방패가 관통되지는 않았지만, 온몸이 저릿저릿한지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버린 헌터.

"죽어. 이 개자식아!"

옆에서 달려들던 헌터가 지근거리까지 거리를 좁힌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하위 마법인 본 컨트롤처럼 동시에 여럿을 전개하는 건 1성 수준으론 불가능.

일반인의 한계를 뛰어넘은 헌터에게 있어, 100미터라는 거리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좁힐 수 있는 수준이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먼저 쏘아 보낸 저주받은 이빨을 제외한 나머지 3개가 튀어 올랐다.

파파팟!

사선으로 내리꽂는 마법 무장.

"그 공격은 한 번에 하나밖에 못 하는 모양인가?"

무투계 헌터의 팔이 크게 움직이고.

티티팅!

무게감이 느껴지는 철퇴의 궤적에 휘말린 저주받은 이빨들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쯧."

유진은 혀를 차면서 스켈레톤 가드를 앞세웠다.

뼈 방패가 절반이나 녹아버렸고 몸 여기저기에 금이 가 있지만, 아직 소멸하지는 않았다.

무투계 헌터의 눈빛이 싸늘하게 물들었다.

"죽다가 만 놈이. 꺼져라."

[강타]

위에서 아래로 정직하게 휘어지는 철퇴.

[철벽]으로 자세를 고정한 스켈레톤이 절반가량 남은 방패를 들어서 막아냈지만.

콰직-! 선명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전신이 폭삭 주저앉았다.

[스켈레톤 가드가 파괴되었습니다.]

귓가에 아른거리는 시스템 메시지를 무시하고 곧바로 영력을 끌어 올렸다.

다시 한번 본 컨트롤을 사용.

이번에는 저주받은 이빨들 대신 막 산산조각 난 방어형 스켈레톤의 몸뚱이를 움직였다.

〔계약자. 이건 진짜 위험한 거 아닌가?〕

'파프너가 마법계 헌터들을 쓸어버릴 때까지 버텨야 한다.'

무투계 헌터가 철퇴를 거두고 재차 공격으로 이어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놈이 스켈레톤을 부숴준 덕에 유진이 준비한 '안배'를 펼치기도 쉬워졌다.

차라라락!

부서진 뼈 일부가 얽히면서 길게 늘어난다.

3미터가 조금 안 되는 봉.

유진은 본 컨트롤을 사용해서 막 제조한 막대기를 손으로 가져왔다.

"마법계 주제에 근접전 흉내라도 내냐?"

지면을 박차면서 도약하는 무투계 헌터.

그래.

정답이다.

유진은 파프너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몸에 익힌 대로 무투계 헌터의 움직임을 두 눈에 담았다.

[베르디안 식 기초 창법]

[제4식 – 창대 치기를 사용합니다.]

뼈 창이 허공에 커다란 궤적을 그리고.

태애애앵!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무투계 헌터는 철퇴를 휘두를 때만 해도 유진의 머리통을 박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조승철이 전개한 파이어 볼을 상쇄시킬 정도의 마법사가 봉을 들어봤자!'

아이템 보조 덕에 준 4성의 마법 실력을 보유한 조승철.

그의 주력 마법인 파이어 볼은 토굴처럼 좁은 공간에서 최대의 위력을 자랑한다.

'허세로 시간을 벌려는 수작 따위 알아봤다.'

눈에 훤히 보이는 유진의 반격을 무시하고 철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던 찰나.

태애애앵!

강한 반탄력이 팔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윽."

짧은 신음을 흘리면서 한 걸음 뒤로 빠지는 무투계 헌터.

베르디안 기본 창법의 묘리를 실은 창대가 팔을 후려치니, 힘이 쭉 빠졌다.

철퇴를 놓치지 않은 게 다행인 상황.

"제길."

"왜. 뭐가 잘 안 되니?"

유진은 다시 한번 본 컨트롤을 전개, 방금 전에 튕겨낸 저주받은 이빨들을 조종해서 무투계 헌터를 노렸다.

"X랄하지 마!"

목에 핏대를 세운 헌터가 저주받은 이빨을 무시하고는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푹! 푸욱!

갑주의 빈틈을 노린 저주받은 이빨들이 살갗을 찢어발기면서 몸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으나.

일체 반격을 포기하고 유진에게 쇄도하는 것을 막진 못했다.

[강타]

스켈레톤 가드를 일격으로 부숴버린 공격.

파프너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기초를 닦은 베르디아 창법이 있지만, 3성급 무투계 헌터의 전력을 받아내기는 모자랐다.

"괜찮아. 그것도 예상했거든."

차르르릉-!

[용린갑의 형태를 변형합니다.]

셔츠의 모습을 취하던 용린갑이 유진의 생각에 반응했다.

0.1초 만에 전신을 감싼 하얀 갑주.

풀 플레이트로 변한 용린갑을 착용한 유진이 다시 한번 4식을 펼쳤다.

우지끈-.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부러진 뼈 창대.

급조한 데다 무투계 헌터의 전력을 받아내기에는 힘도 모자랐다.

철퇴가 뼈 창을 부러트리고는 유진의 몸뚱이를 정면으로 가격.

"커흑!"

묵직한 충격에 버티지 못하고 한 줄기 비명과 함께 수 미터 뒤로 튕겨 나갔다.

그렇지만.

"윽."

유진에게 통렬한 일격을 먹인 무투계 헌터도 주저앉았다.

중첩된 망령의 저주에 저주받은 이빨들이 급소 여기저기에 파고들었다.

실패해버린 도박.

모든 판돈을 걸었던 만큼, 그 대가도 혹독했다.

"컥, 시부럴 거. 창 배우길 잘했네."

마른기침을 내뱉으면서도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유진.

주 전력인 파프너를 전위로 앞세우면서 이 정도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으랴.

붉은 거미 패거리가 던진 비장의 수는 파훼되었고.

파프너의 발을 붙들 귀중한 전력을 허무하게 소모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암흑 투기]

영력으로 구현한 오러가 팔을 속박한 불줄기를 가차 없이 찢어발겼고.

"끄륵, 끅."

어그로 고정 스킬로 파프너를 묶어두었던 무투계 헌터도 금세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제길. 망령 따위가 재배열을 방해하다니."

유진이 처음에 내보낸 망령들은 정신을 가다듬던 마법계 헌터들의 집중력을 흩트려놓았고.

파프너를 요격할 마법을 준비하는 것도 한발 늦어졌다.

"프, 플레임...."

[기다리다가 하품 나겠어.]

콰직!

일격에 한 명씩.

파프너가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마법계 헌터의 목숨이 하나씩 사그라졌다.

"내가 이름도 없는 놈 따위에게...!"

[새빨간 위장]의 채굴 담당인 조승철은 억울했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쓰러졌다.

*

적막해진 토굴.

후욱- 훅.

유진이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만이 침묵으로 가라앉은 전장을 일깨웠다.

[주인. 괜찮은가?]

"뒈지는 줄 알았어."

가슴팍에 새겨진 움푹한 자국.

전생 때 용린갑을 다루었던 헌터, 김영수가 입었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했지만 당시의 방어력까진 흉내 낼 수 없었다.

명색이 에픽 등급 아티팩트지만 성장형이라서 진가를 발휘하려면 멀었다.

현재 수준으로는 레어 등급 방어구의 효율을 겨우 내는 정도.

방어력을 극대화한 모습으로 변형시켰는데도 가슴팍이 푹 파인 거 봐라.

[쿡.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모르느냐?]

"아픈 건 아픈 거야."

비축해둔 생명력으로 충격을 완화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되었든 승리했구나.]

"그러게."

[1성의 헌터가 홀로 3성 끝자락에 달한 이들을 쓰러트렸다, 누가 들으면 질 나쁜 농담으로 치부할 거다.]

"다 훌륭한 하수인 덕분이지."

유진은 뺨을 일그러트리며 가볍게 웃었다.

망령 태반이 소멸.

스켈레톤 가드도 파괴되었고.

레어 등급 마법 무장도 하나가 완파되었다.

"쓸 수 있는 패는 다 썼어. 이게 최선의 결과야."

[만약 내가 쓰러지면 어찌 하려고 했느냐?]

"튀었을 거다."

[의리 하나는 대단한 주인이구나.]

"넌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으니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잖아."

난 목숨이 하나라고.

유진은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붉은 거미 패거리의 사체들을 훑어보았다.

"그래.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네."

[조승철 말인가?]

"응. 꽤 대단한 녀석이었을 걸."

[확신 없는 투로 말해봐야 설득력이 없다.]

피 묻은 다리. 붉은 거미의 간부 중 하나인 조승철의 이명이다.

아니지.

현생에서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과거형이 되었구나.

'7성의 실력자였던가.'

〔나름 가락이 있던 자였군. 조금 더 분발했으면 계약자의 목숨이 위험했을 거다.〕

'꼭 그러길 바라는 것 같다?'

〔크하핫. 아슬아슬한 승리는 보는 맛이 있지 않느냐.〕

그라운드 제로에서 붉은 거미가 정리될 때 끝까지 발악했던 헌터.

마담의 일거리를 하나 줄여주었군.

"이리로 오라."

거울 사냥꾼에 비해 급이 떨어지지만, 조승철 정도면 쓸 만한 하수인이다.

'리치 같은 상급 언데드는 무리여도 영혼을 동조시키면 괜찮은 언데드를 만들 수 있을 거다.'

조승철의 혼백에 저주의 낙인을 찍어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의 사체도 챙기는 걸 잊지 말아야지.

암야의 반지로 주검을 수거한 후, 멀쩡한 아이템들도 골라냈다.

[주인이여. 이 시대에는 레어 아이템이 흔한 건가?]

"그거 농담이지?"

유진이 곧바로 되물었다.

비인기 아이템인 [원념의 지팡이]도 추정가가 수백만 원이다.

여기 있는 걸 다 수거하면 못해도 수억은 될 건데, 뭐가 어쩌고 저째!?

"헛소리 말고 장비나 챙겨."

파프너를 채근해서 붉은 거미 패거리가 걸치고 있던 아이템들을 모조리 수거했다.

[주인. 이 아이템은 어떤가?]

"뭔 무투계 장비를 추천해. 그냥 챙기기만 해."

마법계 아이템도 대부분 화염 마법을 증폭시키는 옵션에 치중되어 있어서 쓸모가 없었다.

아.

개중 두 개는 바로 쓸 수 있겠네.

[지혜의 귀걸이 x 2]

등급 : 레어[R]

분류 : 귀걸이

제한 : 없음

내구도 : 37/50

사용자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귀걸이다.

*마력 + 8

*마력 소모량 2% 감소.

간단한 설명과 옵션.

동일 등급인 원념의 지팡이보다 증가 폭이 낮지만, 원래 액세서리는 주력 무기보다 효율이 떨어진다.

착용에 제한도 따로 없고 증폭 옵션도 깔끔하니, 범용성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은색 링을 양쪽 귀에 갖다 대었다.

"좀 어울리냐?"

[주인의 심미안을 이제야 알겠다.]

"그건 무슨 의미인데."

[다음부터 코디는 내게 맡겨라. 감각이 틀려먹었구나.]

이 자식이.

돌려 까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야.

전생의 과묵했던 박하늘 씨가 조금 그리워졌다.

30화 네크로폴리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