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네크로폴리스(1)
보스 룸으로 진입하는 문.
그 앞에는 붉은 빛을 내뿜는 광석이 벽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이게 그 혈석이라는 것이더냐?〕
'응. 꽤 비싸지.'
수박씨 만 한 것부터 손톱 크기까지.
게이트의 마력을 빨아들여서 몸집을 불린 혈석이 시선을 끌었다.
'이러니 붉은 거미가 손에 꽉 쥐고 놓지를 않지.'
벽에서 금세 시선을 떼는 유진.
〔욕심나지 않느냐?〕
'꼬리가 길어지면 들키는 법이다.'
〔현명하구나. 작은 인간들은 과한 욕망으로 일을 그르치는 일이 많건만.〕
유진은 픽, 짧게 웃었다.
'먹어서 탈이 날지 안 날지 구분하는 정도야.'
금광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게이트.
붉은 거미에서 준비한 수단은 이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진법으로 통신을 차단해도.
이변을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겠지.
'그 전에 게이트를 공략하고 빠져나가야 한다.'
유진은 토굴 끄트머리에 달려 있는 철문에 손을 얹었다.
기기기긱-!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밀리는 문.
[거대 레드 슬라임]
새빨간 위장의 보스 몬스터는 몸뚱이에 핵이 3개나 있는 대형 슬라임이었다.
"뀨잉!"
이상한 비명을 지르면서 폭발하는 보스 몬스터.
명색이 보스 몬스터지만 파프너를 상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파프너는 산 자처럼 콧김을 내뱉었다.
[킁, 시시하네.]
"붉은 거미도 공략을 못한 게 아니잖아."
혈석을 채굴하려고 일부러 방치해둔 보스 몬스터.
탈 3성의 힘을 지닌 파프너가 남은 영기를 쥐어짜내며 맹공을 퍼붓자 얼마 버티지 못했다.
터져 나간 슬라임의 동체에서 떨어진 작은 구슬과 스킬 북.
[슬라임 코어]
등급 : 레어
분류 : 잡화
내구도 : 37/50
거대 슬라임의 핵입니다. 마력을 집약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에너지 볼트]
등급 : 레어
분류 : 스킬북
제한 : 마법계 직업군, 3성, 화염 속성 마법 1개 숙련도 80% 이상, 바람 속성 마법 1개 숙련도 70% 이상
내구도 : 10/10
에너지를 응축시켜서 화살 형태로 발사합니다.
〔얄궂구나. 슬라임 코어도 골렘의 핵으로 사용할 수 있을 터.〕
'골렘 구동용 핵으로 삼기는 출력이 떨어져.'
포지션 안 겹치니까 걱정하지 마라.
마침 슬라임 코어를 활용할 만한 시체도 얻었으니 말이야.
에너지 볼트 스킬 북도 의외의 성과다.
마법 스킬북은 귀하거든.
팔아버리던지, 아니면 뽀시래기 팀의 이성민에게 줘도 되겠다.
공략을 마치고 나왔을 땐 여전히 밝은 달빛이 유진을 반겨주었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내가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으니 의뢰를 넣었겠죠."
천하의 은하수 펍 사장이 꽤 후하게 평가를 해주시는구먼.
"붉은 거미는?"
"통신이 차단된 걸 알아챘어요. 곧 움직일 거랍니다."
[그럼 여유 부릴 때가 아니지 않아?]
"빠져나갈 구멍은 이미 만들어두었을 사람이다."
태연한 유진의 대답.
"놀리는 맛도 없는 사람."
작게 투덜거린 오현정이 앞장섰다.
*
펍으로 돌아온 유진 일행.
오현정은 펍 창고에서 경차 크기의 기계를 꺼내왔다.
MIS – 4
미쓰 사에서 만든 차세대 마도공학 엔진.
"정품인지 확인해보시겠어요?"
"이런 데서 장난을 치진 않았겠지."
"뭐어- 제대로 기능하는지는 보여드릴게요."
발전기와 연결.
작동 버튼을 누르니 쿵쿵쿵쿵! 멈춰 있던 강철의 심장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엔진에서 퍼져 나오는 마력의 파장.
"쓸 만한 출력이군."
"나중에 하자가 있어도 책임은 질 수 없답니다."
"너무 불친절한 거 아닌가?"
"시제품이잖아요.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감안해야죠."
오.
단순히 감이 좋은 건가. 아니면 알고 있는 건가.
MIS - 4는 태생부터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반쪽짜리 엔진.
아무 조치 없이 골렘의 핵으로 썼다간 얼마 안 돼서 고장 날 거다.
'발 뺄 공간은 만들어놓는군.'
나중에 엔진 결함 문제로 생색 좀 내려고 했더니. 약점 하나 잡기 힘들구먼.
"물건 하자 생겨도 안 따질 테니 서비스 조금 더 써줘."
"배달인가요?"
"어. 챙겨가기는 좀 크잖아."
신준석의 공방 주소를 불러주니 마담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가까운 데에 계시네요?"
"접경지역에서 주로 활동할 예정이라."
"다음에 못 뵐 수도 있겠네요."
"아주 뒈지라고 고사를 지내시지 그래?"
짧게 투덜거린 유진은 뒤에 서 있는 파프너를 힐끗했다.
후두둑-.
"이게 뭔가요?"
"붉은 거미 놈들의 아이템."
"은하수 펍은 의뢰 알선 전문이랍니다?"
"내가 풀면 습격자가 누군지 나팔 부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애프터 서비스 정도는 해줘야지.
오현정의 티 하나 없는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약조한 게 있으니 지켜야죠. 다만 수수료는 받아야겠어요."
"10%."
"장물은 최소 40%부터 시작하는 거 아시죠?"
"에이. 붉은 거미한테 내 신변을 감춰주는 게 의뢰 조건 중 하나였는걸."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는 유진.
오현정으로서는 타인의 페이스에 끌려 다닌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좋아요."
"계좌도 적어둘게."
펜을 잡는 유진의 능글능글한 미소가 얄밉게 느껴졌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일정을 끝낸 후.
신준석의 공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가장 큰 문제는 파프너.
암야의 반지에 보관 가능한 사체는 1구뿐이라, 파프너를 수납했다간 조승철의 시체를 포기해야 한다.
'그건 좀 아깝지.'
퀵 리로드는 마법 계 헌터의 고유 특성 중에서도 중상위급.
언데드로 만들면 꽤 쓸 만하단 말이야.
위계를 끌어 올리고 여러 촉매까지 사용하면 두고두고 부려먹을 정도의 하수인을 만들 수 있다.
[저 엔진을 배달하는 김에 사체도 같이 나르지 그래?]
"우리나라 치안이 그 정도로 만만하진 않아."
시체 하나 실어놓았다가 경찰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파프너를 트럭에 실어놓고 접경지 근처까지 직행.
"이런 일은 언제든 불러주시죠."
수당을 두둑하게 받은 트럭 기사의 입가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동업자님. 용케 무사히 돌아오셨네요."
"왜. 가서 팔 한 짝이라도 떼고 오기를 바랐나 봐?"
"다른 곳도 아니고 그라운드 제로잖아요. 유령이라고 해도 믿을걸요."
"아. 마침 소개해 줄 유령이 하나 있는데."
-키히힛!
망령으로 거둔 조승철이 귀곡성과 함께 튀어 나왔다.
"아오, 씨!!"
"크크큭. 뭘 그렇게 놀라나."
"그럼 안 놀라게 생겼습니까? 망령이 튀어 나왔는데!"
유진의 뺨 한쪽이 일그러졌다.
걸작이네.
이거 완전 걸작이야.
미래의 대연금술사도 귀신은 무섭다는 건가.
"포션 인준 및 대량생산에 관해...."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잠을 한숨도 못 잤거든."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습격을 당한 오현정의 행방을 찾는답시고 발에 땀 나도록 뛰었고.
3성급 난이도의 게이트를 홀로 공략하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붉은 거미 헌터들과 싸웠으니.
[피곤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이제야 좀 사람 같네.]
"내가 언데드라도 되는 줄 알았나?"
[언데드까진 아니어도 그 친적쯤은 되는 줄 알았다.]
숨만 잘 쉬는구먼.
멀쩡한 사람을 송장 취급하다니, 너무하네.
"동업자님. 이쪽에서 쉬시죠."
공방에 딸린 휴게소로 안내 받은 유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후.
유진은 시간을 되돌린 후,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
수마의 늪에 가라앉은 의식.
빛 한 줄기가 정수리에 꽂히면서 유진의 정신을 일깨운다.
'눈을 감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어?"
벌어진 입가 사이로 황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감기 전에 봤던 하얀 천장 대신.
암전된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커다란 거인이 유진의 눈을 가득 채웠다.
〔왔느냐. 계약자여.〕
'크로노스?'
〔맞도다. 짐의 옛 육신이지.〕
'남의 꿈에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나오면 곤란해.'
사생활 보장은 해줘야지.
짧게 투덜거리는 유진을 향해 크로노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성좌로써의 격이 올라감으로써 후원하는 필멸자에게 채널을 열 수 있습니다.〕
〔채널에 접속한 대상을 성좌의 전당으로 인도합니다.〕
〔성좌 '역천의 거인'의 전당에 접속했습니다.〕
만신전에서 보았던 풍경과 흡사한 공간.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땐 무수한 성좌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유진의 '별'이, 홀로 서서 고고하게 광채를 흩뿌린다는 점이다.
'성좌의 후원을 받은 자들이 말한 게, 이런 거였구나.'
배후성을 둔 헌터들은 무의식 상태일 때 종종 성좌의 전당으로 혼백이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성좌와 더 가까워짐으로써 얻는 기연.
전당으로 불려간 헌터는 종종 더 강력한 축복을 받곤 한단다.
아무 수확이 없어도 강력한 영적 존재를 배알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그런데 넌 아무것도 안 주냐?'
〔짐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도 하는 말이 고작 그거더냐.〕
'티탄이니까 덩치는 당연히 크겠지.'
〔그대에게 가호를 내려주기에는 짐이 성좌로써 쌓아올린 역사가 모자라다.〕
염병할.
게임에서 업적 퀘스트도 뭐 하라고는 알려주거든?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라.'
〔짐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시스템이라는 것의 도움을 받는 게 훨씬 낫겠구나.〕
따악-!
크로노스가 손가락을 퉁겼다.
[현재 성좌 역천의 거인에게는 성유물이 없습니다.]
[성유물은 해당 성좌의 존재력을 고정시키는 물건이자, 신도에게는 신앙의 표식입니다.]
[해당 성좌의 기원에 알맞은 성유물을 구하십시오.]
[성좌를 모시는 신전이 없습니다. 적당한 터를 찾아 신전을 건설하십시오.]
[그 외에도 사용자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업적을 세우면 격을 빠르게 올릴 수 있습니다.]
성유물을 구하는 것.
신전 건축.
그리고 새 언데드 제작.
'세 번째는 내 경지가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채워진다.'
문제는 성유물과 신전이군.
'당장 만들긴 어렵겠어.'
유진은 성유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성좌로써의 업을 상승시킬 방법은 하나 더 있으니 말이다.
'혹시 신성 주문을 더 얻을 순 없나?'
〔말했잖나. 이전에 부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리한 것이니라.〕
칼 같기는.
응징의 쐐기와 부정한 축복, 둘 다 성능이 원체 뛰어나다 보니 욕심이 났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지만 금세 상념을 끊어냈다.
볼 일은 다 봤다.
성좌의 전당과 연결을 끊고자 마음먹으니, 유진의 머리 위로 내리쬐던 별빛이 점점 옅어졌다.
*
흐아암-.
기지개를 편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굳었던 몸이 조금씩 풀린다.
[꽤 피곤했나 봐.]
"내가 잠에 든 지 얼마나 지났나?"
[한나절이다.]
"생각보다 오래 잤네."
침대를 박차면서 일어난 유진은 뽀시래기 팀원들의 숙소로 향했다.
막 식사를 마친 강민호가 고개를 숙였다.
"형님. 이제 깨셨습니까?"
"다른 애들은."
"양치하고 있으니 곧 올 겁니다."
"잘 됐네. 마침 너희랑 할 말이 있었거든."
유진은 숙소에 깔아놓은 간이 매트릭스에 걸터앉았다.
잠시 후 방에 모인 뽀시래기 팀.
'오빠. 뭔 분위기야?'
'저 형님은 왜 저렇게 분위기 잡고 계심까.'
'나도 몰라. 갑자기 오셨다고.'
뽀시래기 팀이 불안한 기색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있을 때.
유진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너희 셋은 헌터를 하는 이유가 뭐냐?"
"돈 많이 벌고 싶어서죠."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솔직한 말.
강민호의 대답에 유진이 히죽 웃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속물적인 거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대의니 영웅이 되고 싶다는 헛소리를 할 줄 알았지."
"에이. 그랬으면 형님 따라다니겠습니까."
강민호는 질문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한 가지 제안을 하마."
유진이 검지를 펴자 뽀시래기 팀원들의 시선
이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향했다.
"내 부하가 되어라. 정식으로."
"이미 형님의 부하로 일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이야 가계약이지. 그리고 내 성취가 올라가면 따라오지도 못할 거 아니겠냐."
뽀시래기 팀원들은 모두 1성.
마음만 먹으면 보름 안에 그들의 경지를 넘어설 수 있다.
"정식이란 게 그런 의미군요."
"내 뒤를 쫓아올 정도는 되어야지."
최소한 짐은 되지 않아야 유진의 곁에서 일할 수 있다는 뜻.
즉.
강해져야 한다.
"형님을 따라가면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아마 죽도록 힘들 거다. 매일이 후회스럽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겠지."
"그렇게까지 하면 뒤처질 만큼은 아니란 말이군요."
빙그레 웃는 유진.
그 미소에 담긴 무언의 긍정을 이해한 강민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형님의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너희들도?"
유진과 눈을 마주친 뽀시래기 팀원들도 한 박자 늦게 외쳤다.
"ㅇ, 예!"
"죽지만 않을 정도로 굴려주십쇼!"
반쯤 겁에 질렸으면서도,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미래의 랭커 둘이 부하로 써먹어달라고 하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 녀석은 뭐하는 녀석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럼 짐 싸라. 이제부터 고생길 시작이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며칠 전에 갔던 곳."
"접경지역... 이군요."
"이번엔 좀 오래 머무를 거니까 예비식량도 많이 챙겨둬라."
최소 접경지역에서 1달 정도는 지낼 예정이다.
네크로폴리스.
강령술의 핵심이 되는 유진만의 '영지'를 만들기 위해서.
너희도 따라오면 분명히 강해질 수 있을걸.
죽을 만큼 힘들겠지만 말이야.
31화 네크로폴리스(2)
다시 접경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킬 일이 있다.
"구울의 뼈 1kg랑 열사의 모래 50kg, 힘센 이끼 14kg. 그리고 B급 마나 스톤 하나 구해줘."
"포션 공장 만든다고 여윳돈이 하나도 없습니다만."
"이번에는 선금 줄 테니 눈에 힘 좀 풀고."
붉은 거미 패거리의 장비를 처분한 금액이 들어와서 넉넉해진 통장.
몇 억이나 되는 금액이 터치 몇 번 만에 사라졌다.
"확인해봐."
"이만 한 돈을 대체 어디서 난 겁니까?"
"괜찮은 의뢰를 받았거든."
"설마."
자금의 출처를 짐작한 신준석이 입을 크게 벌리든 말든, 유진은 손을 휘휘 저으며 다음에 나올 말을 봉쇄했다.
"돈은 깨끗하니까 걱정 마라."
은하수 펍의 마담이 꽂아준 돈에 문제가 있을 리 없지.
신준석은 한숨을 푹 쉬곤 다시 입을 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구울의 뼈는 둘째 치고 열사의 모래나 힘센 이끼 같은 건 어디에 쓰려는 겁니까?"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제 손 빌릴 거잖아요. 마음의 준비는 해야겠습니다."
예리하네.
쳇, 짧게 혀를 찬 유진이 입술을 떼었다.
"골렘."
"소환수가 아니라 마력원만 있으면 상시 유지되는 골렘 말이죠?"
"그럼 소환수 밥으로 그걸 주문할까."
연금술사 직업군이 세상에 나타난 건 불과 1년 전.
마력 회로 각인 같은 분야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고 있지만, 골렘 쪽은 이제야 시제품이 하나둘씩 나오는 중이다.
"오, 오오오! 고, 고고고고...."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흥분하지 마라."
"골렘 연구는 대기업들도 기초 수준의 시제품을 내세우는 게 고작인걸요!"
확 돌아버린 신준석의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빛.
잊고 있었네.
신준석이 독학만으로 연금술 분야 정점에 올랐던 광인이라는 것을.
저 어수룩한 얼굴 뒤로는 찬란한 재능에 뒤처지지 않는 광기가 숨겨져 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훌륭한 표본이지.
"아. 하나만 더 부탁하자."
"말씀하시죠."
"리버스 마나 플로우는 익혔나?"
"꽤 난이도가 있는 주문이군요. 근데 제가 누굽니까!"
안 그래도 높았던 신준석의 코가 더 올라갔다.
으으.
손가락으로 눌러주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군.
"그거 양피지에 새겨줘."
"맨입으로요?"
"싫으면 말던가."
"그 정도는 서비스로 해드리죠."
[마법 스크롤 - 리버스 마나 플로우]
마력 흐름을 역으로 뒤집는 연금술 주문.
준비는 충분하군.
"이제 접경지역으로 가시는 겁니까?"
"무사히 돌아오기나 기도해라."
"동업자님이 섬기는 분께 기도하면 되는 겁니까?"
〔크하핫. 이 작은 인간은 뭘 좀 아는구나!〕
아서라.
그 성좌는 무능해서 네가 기도한다고 해서 들어줄 만한 힘이 없어요.
"농담이야."
"전 진심인데요. 오늘부터 작정기도 할 겁니다."
신준석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광망에 유진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
구구구궁-! 육중한 소리를 내며 젖혀진 철문.
유진 일행은 문 사이를 지나 두 번째로 접경지역에 들어섰다.
"내 발로 두 번이나 여길 올 줄은."
강민호가 작게 투덜거렸지만, 눈에 아른거리는 묘한 기대감에 독백의 의미가 조금 퇴색되었다.
-강하게 만들어주마.
어젯밤, 유진이 한 말이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져서인지.
게이트보다 한층 더 위험한 곳을 들어왔는데도 왠지 모르게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혼잣말을 들은 유진이 두 눈을 부라렸다.
"불만이면 돌아가든가."
"아이고. 제 주둥이가 마음대로 나불거린 겁니다. 형님!"
촐싹거리면서 손바닥으로 입을 치는 강인호.
그 모습을 한심한 듯 바라보던 파프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인. 이번 접경지역행의 목표는 무엇인가?]
"네크로폴리스를 만들 거다."
[네크로... 무엇?]
"죽은 자들의 도시. 강령술의 진원지가 되는 영지."
마법사나 연금술사에게 공방이 있다면.
네크로맨서는 고유 영지를 선포함으로써 강령술의 효율을 극대화시킨다.
회귀 전에는 전 세계 각지에 강령술 증폭 매개를 설치해둬서 전력을 최대로 끌어올렸지.
'더 많은 언데드를 제작하고 사역하려면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해야 한다.'
접경지역은 네크로맨서의 영지로 최적의 장소다.
게이트와 일체화된 곳은 마력 분포도가 일반적인 땅보다 훨씬 높다.
몬스터들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데다.
헌터에게 사냥 당하거나 자기들끼리 영역 싸움을 벌이는 탓에 죽음의 향기가 충만한 곳이다.
〔전투가 많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방어가 까다롭지 않겠느냐?〕
'맞아.'
턱을 만지작거리는 유진.
접경지역은 게이트처럼 출몰하는 몬스터의 등급이 정해져 있지 않다.
몬스터들끼리 암묵적인 영역이 그어져 있다지만, 그게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실제로 파주 인근에서 악명이 자자한 '애꾸눈'은 주기적으로 산자락을 넘나들면서 눈에 들어오는 몬스터나 헌터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닌다.
〔괴물이 강해봐야, 결국은 이성 없는 존재이거늘.〕
'7성 짜리 변종 오우거 맛 좀 볼래?'
애꾸눈은 트윈헤드 오우거도 아닌 주제에 마법까지 능통한 변종이다.
만약 애꾸눈 같은 괴물과 네크로폴리스에 들이닥치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파프너가 전력을 끌어 올려도 5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는 땅.
뽀시래기 팀원들이 유진을 따르기로 한 건 정말이지, 엄청난 결심이었다.
'너희도 쓸 만하게 키워주마.'
파프너라는 훌륭한 교관이 있으니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쌍둥이 남매야 이미 자질이 증명되었으니.
이성민은 잘 모르겠지만, 제 풀에 나가떨어지지만 않으면 실력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네크로폴리스를 세울 만한 부지를 찾아볼 거다."
[배산임수라도 찾아야겠네.]
"혹시 풍수지리에 관심이 있었냐?"
유진은 황당한 투로 대꾸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주워들은 것뿐이야.]
"배산임수는 아니지만 비슷해. 우린 수기가 흐르는 곳을 찾을 거다."
물이 흐르는 땅은 귀기가 강하다.
수기가 강한 곳에서는 유령을 보거나 가위가 눌리잖아.
"연금술의 4대 속성 이론 중 물이 관장하는 영역이 혼백이기도 하거든."
동, 서양을 막론하고 영혼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게 물. 그러니까 수기(水氣)다.
[그럼 젓가락이라도 챙겨올 걸 그랬어.]
"다우징 로드겠지."
[흠. 명칭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내면서 그렇게 말한들 1그램도 설득력이 없다.
유진은 짧게 웃은 후에 영력을 끌어 올렸다.
스스스슷-!
망막 위에 아른거리는 희끄무레한 기운.
[그러고 보니 주인. 영력을 눈에 부여한 건가?]
"별것 아닌 잔재주다."
[잔재주라고? 겸손이 도가 지나치네!]
파프너가 화들짝 놀라하면서 유진을 추궁하듯 외쳤다.
"갑자기 왜 이렇게 흥분해."
[기에 의념을 불어넣어서 유형화하는 건 오러 발현의 첫 단계다.]
유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영력 응용의 한 갈래야. 오러랑 비빌 정도는 아니라고."
[주인은 방금 그 행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 것 같네.]
낮게 뇌까리는 파프너가 못마땅한 듯 푸른 귀화를 흩뿌렸다.
"집중해야 하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유진은 다시 한번 영력 응용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시신경과 영력을 잇는 일.
현재의 경지에서는 감히 엿보는 것조차 버거운 '영안'을 편법으로 펼치는 것이다.
영력 전개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시력이 영구적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보인다.'
땅 아래로 지나가는 수기.
접경지역에서 죽어간 혼백들이 그 흐름을 타고 낮은 지대로 움직인다.
수기가 흐르는 길.
곧 영맥(靈脈)이다.
1분 정도 집중하니 뻑뻑해진 눈가.
영력을 거두자 눈가에 후추를 뿌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괜찮아? 두 눈이 충혈되었어.]
"살 만은 해."
영맥의 흐름을 찾으려면 다우징 로드 같은 전용 장비가 필요하다.
그, 세간에 돌아다니는 작대기 말고 회로를 새긴 진품 말이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야지.'
라이프 드레인으로 충혈된 눈의 통증을 가라앉히고는 수기가 흐르는 방향을 가리켰다.
[후후. 전위는 내게 맡겨라.]
앞장서는 파프너.
"형님. 뒤는 저희가...."
"아. 경계 정도는 얘 시켜도 돼."
-끼히히힛!
유진의 몸뚱이에 숨어 있던 조승철의 망령이 억눌렀던 한을 터트리며 날아다녔다.
"허, 허허."
"나중에 훔쳐보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뽀시래기 팀원들은 황당해하면서도 유진의 뒤를 따랐다.
-키히힛! 키힛!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살기를 드러내는 망령. 허공에서 크게 원을 그리면서 빙글빙글 돈다.
[적이다.]
수풀이 흔들리고, 머지않아서 괴물의 외관이 망막으로 확인 가능할 만큼 가까워졌다.
"리자드맨입니다. 형님. 오크보단 힘이 약하지만 민첩하고..."
[약해빠진 도마뱀이잖아.]
쿵- 쿵-.
파프너는 강인호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지면에 커다란 족적을 새기면서 빠르게 뛰쳐나갔다.
"기름을 비늘에 머금어서 타격 공격에 저항력을 가졌다고요!"
콰직!
강인호의 비명과 겹쳐진 육중한 타격음. 파프너의 주먹이 꽂힌 리자드맨의 가슴팍이 안쪽으로 푹 들어갔다.
으깨진 뼈와 근육 사이로 흘러나오는 푸른 피.
[뭐라고 했나?]
"그, 저기. 타격이 잘 안 먹힌다고."
[다음에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힘이 모자라지 않았는지 고민해봐.]
쾅! 콰쾅!
압도적인 폭력이 리자드맨 무리를 휩쓸어버렸다.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레이즈 언데드를 사용합니다.]
살과 뼈를 분리한 사체는 아머드 좀비의 재료로 사용.
중갑으로 무장한 좀비 셋이 추가되었다.
"파프너. 난 영맥의 흐름을 쫓아야 하니 싸움은 모두 너한테 맡기마."
[맡겨둬라.]
상반신이 개를 닮은 인간형 몬스터인 놀.
여러 도구를 요령 있게 다루는 코볼트.
그 외에도 몬스터 박물관에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괴물들이 불쑥불쑥 나왔다.
"저번하곤 다르네요."
혀를 내두른 이성민이 막 쓰러진 코볼트의 심장에서 마석을 캐냈다.
"괴물들 영역을 가로지르니까."
박하늘 씨의 혼백이 머무르던 곳은 오크의 영역이니 인근을 돌아다녀 봐야 오크 말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금은 영맥을 쫓으며 괴물들의 영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상황.
"그럼 위험한 거 아닙니까?"
"돌아가면 한도 끝도 없다. 이렇게 뚫고 가는 게 나아."
접경지역 초입이라 망정이지.
더 깊숙이 들어가면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괴물들이 도사리는 곳이다.
일행의 수준이면 파주의 네임드 몬스터인 애꾸눈이 나설 것도 없이 오우거 선에서 정리될걸.
-그워어억.
아머드 좀비도 순조롭게 늘어나면서 사역 최대치인 18 + 2(파프너와 망령 1마리)구를 도로 채웠다.
쯧, 하고 혀를 차는 크로노스.
〔매번 언데드를 제작하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로구나.〕
"네크로맨서의 애환이지."
전력이 불어난 만큼 이동속도도 더 빨라졌다.
"쿠륵, 숨은 걸 어떻게 안 거냐!"
-키히히힛!
매복 중인 괴물이 있어도 산 자의 기척에 예민한 망령을 사역한 덕에 간파했다.
큰 어려움 없이 영맥을 쫓던 유진.
"여기가 적당하겠어."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지면 아래로 흐르는 영맥의 흐름이 꽤 강력하고.
인근에서 제일 높은 부지라서 네크로폴리스로 삼기 알맞은 지형이다.
[괜찮겠어? 꽤 돌출되어 있어서 눈에 띈다만.]
"위험은 감수해야지."
[봐라. 기존 주민들은 새 이웃을 반가워하지 않잖아.]
날카로운 손톱이 가리키는 방향.
근처에 있는 몬스터들이 언덕 위에 선 유진 일행을 향해 다가온다.
어림잡아도 백 단위는 되어 보이는 숫자.
침을 꿀꺽- 삼킨 강민호가 무기를 쥐려고 할 때.
"너희는 야영준비하고 있어라."
"적의 숫자가 엄청납니다. 저희도 가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시체가 필요했는데 잘 됐지."
유진은 [본 컨트롤]로 마법 무장 넷을 허공에 띄웠다.
네크로맨서의 주특기가 뭔지 알아?
소모전이다.
'얼마가 됐든 이기는 건 나다.'
쇄애애액-!
구울의 뼈로 만든 저주받은 무장이 허공을 가르며 적에게 쏘아졌다.
32화 네크로폴리스(3)
언덕 주위에 널린 몬스터들의 사체.
겁 없이 달려든 놈들은 모두 눈가가 뒤집힌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35입니다.]
이 속도면 1주 안에 위계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접경지역에 머무르다 보니 경험치가 오르는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속도 좀 올리자."
"헉, 허억. 거의 다 끝나갑니다. 형님."
뽀시래기 팀이 쓰러진 괴물들의 사체에서 마석을 캐내면.
"좋아. 거기다가 놔라."
-그워어억.
아머드 좀비가 마석 채집을 끝낸 사체를 언덕 중심부로 옮겼다.
몬스터들의 주검에서 흘러나온 피가 언덕을 축축하게 적신다.
〔새 언데드를 만들려는 건 아닌 것 같구나. 네크로폴리스와 관련된 일인가?〕
'그래. 이제부터 검은 방첨탑을 만들 거다.'
〔방첨탑은 엔네아드 일족의 수장. 라를 숭배하는 구조물이지 않느냐.〕
유진은 오-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맞아. 원래는 태양신 라를 위시한 엔네아드 신족의 상징이지.'
저물어가는 해를 가리킨 유진.
태양은 넘실거리는 생기를 지녔으며, 또한 섭리를 뜻하기도 한다.
'검은 방첨탑으로 그 개념을 엎을 거다.'
자연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중, 영적 능력과 깊은 관련을 가진 수기를 반전시켜서 외부로 송출.
안개처럼 퍼트려서 태양을 가리고 수기에 얽혀 있는 영기를 증폭시킨다.
〔순리를 비트는 행위라. 역시 네크로맨서답구나.〕
'칭찬으로 들으마.'
유진은 크로노스의 비꼼을 가볍게 넘겼다.
〔한데 이토록 충만한 태양의 기운을 반전시키는 건 쉬워 보이지 않는다만?〕
'가만히 보고 있어봐.'
100번 듣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게 낫지.
유진은 더 설명하기를 멈추고 영기를 천천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본래 경지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영역.
그렇지만.
시스템 보조로 얻은 능력이 아닌, [지식의 도서관]을 통해 강령술의 요체를 머릿속에 새기고 깨달음을 얻어 진정한 '힘'으로 체화한 유진에겐 가능했다.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먼저 뼈와 살을 분리.
새하얀 뼈들을 본 컨트롤로 움직였다.
'구조물의 틀을 갖춘다.'
둥실 떠오른 크고 작은 뼈들이 턱- 턱- 정해진 도면대로 엮이기 시작한다.
언덕의 꼭짓점.
가장 높은 곳이자, 중심이기도 한 위치에 5미터가량 되는 뼈 탑이 세워졌다.
'뼈대는 갖추었고.'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분리했던 몬스터들의 살점이 꾸물꾸물 기어와서는 탑의 내부를 채운다.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강민영이 욱, 하고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지만 용케 참아냈다.
아무렴.
그와 함께 다니다 보면 훨씬 더 끔찍한 몰골도 여럿 볼 텐데, 벌써부터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흠."
입에서 새어 나온 한 줄기 신음.
한계까지 마력을 쥐어짜낸 탓인지 몸의 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주인.]
파프너가 유진의 뒤로 가선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주었다.
"좀만 붙들어줘."
[백야를 사용합니다.]
[마력 → 성력으로 치환됩니다.]
부족한 마력은 생기를 몸에 불어넣어서 소모한 기운을 회복시켰다.
"형님. 저희가 도울 건 없습니까?"
"바닥에 토하지나 마."
"...."
어느 정도 성력이 회복되면 곧바로 백야를 전개해서 마력으로 치환.
살점들을 다시 움직였다.
꾸득- 꾸드득-.
피륙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뼈탑을 꽉 채운 살점들.
"휴."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검은 방첨탑의 형을 잡는 데만 몇 번이나 탈진할 뻔했는지 모르겠군.
못해도 3성은 되어야 시도할 엄두를 낼 수 있는 영지 건설.
미래 지식과 경험이 있다지만, 위계를 둘이나 넘어서야 해볼 만한 작업을 벌였으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큰 변화는 없는 것 같구나.〕
'형태를 갖춘 것에 불과해. 진짜 작업은 시작도 안 했어.'
피와 으깨진 살점이 뒤섞여서 번들거리는 구조물에 오른손을 얹었다.
끈적거리는 촉감에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
'외형보단 내실이 중요한 법이니까.'
유진은 찝찝한 감촉을 무시하곤, 검은 방첨탑에 감각을 동조화시켰다.
꾸물거리는 살점 덩어리들.
접촉면을 타고 흘러간 유진의 영력이 검은 방첨탑에 스며들면서 증폭되었다.
[이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파프너가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출 정도로 흉맹한 영기의 파장.
'잘 만들어졌군.'
유진은 녹슬지 않은 실력에 만족스러워하며 웃었다.
검은 방첨탑의 역할 중 하나인 '영력 증폭'은 성공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확인.
'여기서 멈출 순 없지.'
네크로폴리스.
강령술사의 영지로 기능하려면 영맥에서 퍼 올린 수기와 영적 에너지가 근방을 자욱하게 물들여야 한다.
유진은 동조하면서 증폭된 영기를 지면 아래로 거침없이 퍼부었다.
땅 아래로 스며든 영기는 방첨탑과 지하를 잇는 작은 통로를 뚫으면서, 거의 동시에 마력 회로를 새겨냈다.
[마력 회로 - 리버스 마나 플로우]
유진의 제어 능력과 이해력, 그리고 마력 회로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을 보유했기에 선보일 수 있는 신기.
만약 신준석 같은 연금술사가 이 자리에 있었고, 지면 아래에서 행해지는 실시간 마력 회로 각인을 두 눈으로 봤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영맥까지 직선 통로를 뚫는 순간.
'바로 입질이 오네.'
유진의 영기에 반응해서 맥동하는 수기.
물의 흐름에 섞여 있는 강렬한 영적 에너지가 미끼를 덥썩 문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면서 위로 솟구쳤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검은 방첨탑으로 증폭된 힘을 최대치로 발현.
지면으로 솟구치려는 영기를 막아내곤 영맥에도 회로를 새겼다.
[오행진(五行陣) - 수기천충(水氣天充)]
본디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할 수류의 흐름에 간섭하는 진법.
유진은 지면을 흐르는 수기의 힘을 역이용해서 영력과 함께 위로 역류하게끔 진법으로 유도했다.
'뭐, 어디까지나 야매지만.'
진법의 기본은 음양오행의 순리.
물의 흐름을 억지로 비트는 건 제대로 된 진법사라면 하지 않을 일이다.
네크로맨시를 진일보시키기 위해 여러 지식에 손을 댄 유진이라서 벌일 수 있는 파격적인 수법이다.
지잉-!
통로를 만들면서 새긴 마력 회로가 영기의 유출을 막으면서 손실 없이 검은 방첨탑까지 인도했고.
"작동해라."
유진이 검은 방첨탑의 기능을 모두 활성화시키자, 탑 끄트머리에서 희끄무레한 기류가 피어올랐다.
[검은 방첨탑을 완성했습니다.]
[위계를 몇 단계나 뛰어넘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역천의 거인의 신화에 한 자락이 추가됩니다.]
[구조물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성능이 50% 증가합니다.]
아무렴.
내가 누군데?
시스템에서도 경악을 금치 못한 일을 해낸 유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렇게나 충만한 죽음의 힘이라니. 내 능력이 증대되고 있다.]
[검은 방첨탑 안에서는 생물체의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집니다.]
[언데드의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근데 파프너야. 왜 옆으로 서 있냐."
[옆이라니. 주인이 삐딱하게 보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말해?]
무슨 말이야. 그게.
유진은 그제야 목덜미가 젖혀졌음을 깨달았다.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몸뚱이.
극한까지 집중력을 끌어올린 후유증이 뒤늦게 육신에 엄습해왔다.
"잠깐. 이거 잘못된 것 같...."
흐려지는 의식.
아.
시바.
마력을 억지로 회복시키면서 술식을 응용했으니 탈이 오는 것도 당연한 일.
순간적으로 회귀 전의 육체에 맞춰 컨디션을 감안했었다.
'아. X 됐네.'
마력이 폭주하는 극단적인 사태야 발생하지 않았지만, 머리를 쪼갤 것 같은 통증이 정수리에 푹 박혔다.
[주인! 주....]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 파프너의 사념이 천둥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
낯선 천장, 아니 천막이다.
〔크하하핫. 참으로 걸작이로구나. 감당 못할 힘을 다루다가 기절하다니.〕
'머리 울리니까 그만 떠들어라.'
〔그와는 별개로 그대의 수완은 인정해야겠구나. 질서를 비틀다니.〕
유진이 벌인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크로노스는 잘 알았다.
최소한의 힘으로 자연의 섭리를 비틀어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고작 1성 헌터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
〔정말이지. 성좌의 가호 없이 9성에 도달했다는 게 허풍이 아닌 모양이다.〕
크로노스는 몇 번이고 감탄사를 삼켰다.
유진은 캠프에서 나와서 몸을 가볍게 풀었다.
"형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좀 무리한 것뿐이다."
"안색이 새파라신데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설득력이 없다고요."
강민호의 염려 섞인 말에 유진이 대충 손을 휘휘 저었다.
"저, 그런데 형님."
"궁금한 거 있으면 빨리 물어봐라."
"이 안개는 계속 있는 겁니까?"
언덕 주위를 덮은 희끄무레한 기류.
방첨탑에서 흘러나오는 안개 때문에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었다.
"왜. 불편하냐."
"하핫,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네크로맨서의 영지라는 건 이렇게 생겨먹은 거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을 차단.
음기 증폭과 강령술의 효율도 올리고, 생물체의 시야를 극단적으로 제한함으로써 방어에도 용이하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까지 불편하면 안 되겠지."
유진은 마법 무장으로 강민호의 손끝을 가볍게 찔렀다.
"아얏."
"따끔한 거 가지고 오버하긴."
몽글몽글 솟아난 피에 영기를 불어넣자, 안개에 스며들었다.
[검은 방첨탑에 해당 생물체의 정보를 기입합니다.]
나머지 일행의 혈액도 검은 방첨탑에 기록.
"와. 이제 잘 보임다."
"무슨 마술을 쓴 건지. 통 모르겠네."
"난 형님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거다."
뽀시래기 팀원들은 흥분해서 떠들었다.
[과연. 시야를 제한하는 것은 오직 생물체만이란 거지?]
"죽음의 영지니까."
검은 방첨탑으로 돌아온 유진은 다시 한번 정신을 연결했다.
[영지 규모 - 1]
[강령술 증폭 범위 - 1km]
[수용 가능 언데드 개체 수 - 0/100]
[영력 농도 – 3]
[구조물 - 검은 방첨탑]
'뭐, 예상대로인가.'
영맥의 굵기, 다른 말로는 영력의 출력에 따라 공기 중의 농도도 달라진다.
최대 수치는 5.
그 만한 영력이 흘러나오려면 대규모 전쟁이 일어난 곳이어야 한다.
'이만하면 딱 좋아.'
영력이 너무 세면 제어하려다가 오히려 끌려 다닐 수도 있거든.
하루도 안 돼서 찾은 입지인 걸 감안하면 훌륭한 조건이다.
[아머드 좀비 18기의 제어를 검은 방첨탑으로 옮깁니다]
[수용 가능 언데드 – 18/100]
언데드 제어 권한을 탑으로 이전했어도, 여전히 좀비들은 유진의 지시를 따랐다.
검은 방첨탑의 소유자는 유진.
또 다른 네크로맨서의 영역에서 좀비들의 소유권을 이전하면 모를까.
'방첨탑을 거점 삼아 언데드 군대를 늘린다.'
지상의 마력을 빨아들여 끊임없이 괴물들이 튀어 나오는 마경.
검은 방첨탑의 수용 최대치인 100구를 채우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주인의 영지인 거네.]
"영지는 무슨. 제대로 기능하려면 검은 방첨탑만으론 부족해."
불경스러운 묘지.
강령술 연구소.
암흑 기원실 등.
제대로 된 네크로폴리스로 자리를 잡으려면 해야 할 일이 한가득이다.
"너도 바빠질 거다."
[후후후. 난 괜찮으니 얼마든지 부려먹어라.]
"말 나온 김에 부탁 하나 하자."
유진은 강민호를 가리켰다.
"얘 좀 훈련시켜줘."
[주인을 굴, 아니지. 훈련시킨 것처럼 말이더냐?]
"더 굴려도 되고."
"저어,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인지."
"강해지는 데 왕도가 어디 있냐. 훈련이랑 실전이 최고다."
무신의 눈 특성으로 습관과 행동, 그리고 스킬의 허점을 금세 파악할 수 있는 최고의 교관이 있다.
괴물들이 바글거리는 접경지역!
훈련과 실전이라는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형님. 그럼 저희는 가봐도 되겠슴까."
"오빠 파이팅!"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두 사람.
"어딜 도망가. 너희는 나한테 배울 거다."
유진은 히죽 웃었다.
걱정 마라.
살려는 드릴게.
33화 훈련
[강민호라고 했던가.]
"예. 저, 그 어떻게 불러야할지...."
[파프너라고 해라. 이상한 호칭 붙이지 말고.]
"알겠습니다."
[넌 고유 특성이 뭐지?]
강민호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우우웅-!
방패 위를 은은하게 감싸는 푸른빛.
[마력으로 방패를 강화하는 능력이군.]
"적을 붙들어야 하는데 튕겨내서 아군 전열을 흩트린다고 하더군요."
쓴웃음을 짓는 강민호.
◎특성
이동요새(Movable Fortress)[고유]
방패에 마력을 불어넣어서 방어력 및 충격량을 증가시킵니다. 근력 스탯의 영향을 받습니다.
[멍청한 작자들이네.]
"네?"
[앞으로 잘 쓰지도 못하는 칼은 들지 말고 방패만 들어라.]
파프너는 단호하게 말했다.
〔크하핫. 걸작이로구나. 칼을 버리고 방패만 들라니. 완전히 달팽이 아니더냐.〕
'그게 정답이다.'
〔뭣이라? 공격을 포기한 겁쟁이 같은 게 답이라니.〕
'강민호의 주 무기는 방패였거든.'
[무신의 눈].
한 번 보기만 해도 무예의 특징과 강, 약점까지 파악하는 어마어마한 특성.
무작위로 받는 고유 특성이 아니다.
파프너, 그러니까 전생의 박하늘 씨는 어마어마한 재능과 안목으로 [무신의 눈]을 자력으로 습득했다.
아라한 길드의 수작에 휘말려서 죽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에서 헌터 명가가 나왔을 걸.
물론.
"방패만 들고 어떻게 적을 쓰러트립니까?"
당사자가 그 이야기를 단번에 수용하긴 어려웠다.
[그 방패 줘봐.]
강민호가 사용하던 방패를 든 파프너는 몇 번 팔을 움직이더니.
[내가 하는 걸 집중해서 잘 봐라.]
방패를 감싸는 시커먼 기류.
암흑 투기를 일으킨 파프너가 느릿한 동작으로 나무에 방패를 대는 순간.
퍼어엉-!
공기를 꽉 채워 넣은 풍선이 터지는 소리와 흡사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후한 음색과 함께 나무가 산산조각 났다.
[어때. 참 쉽지?]
"뭘 하신 겁니까?"
[네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
파프너는 방패를 가리켰다.
[마력 방출 능력의 핵심은 방어가 아니다. 뭐, 정확히는 공방일체라고 말하는 게 좋겠지.]
"공방일체라니.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요는 간단해. 힘을 주는 타이밍에 맞춰 방패를 마력으로 강화해봐라.]
휘익-!
파프너가 던진 방패를 받아든 강민호의 눈빛이 의구심으로 물들었다.
갈등 섞인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까짓거 한번 해보죠."
오른팔에 방패를 견착. 가까이에 있는 나무 앞에 섰다.
'허튼짓을 시키시는 건 아닐 거다.'
강민호는 방금 전에 파프너가 보여준 무위를 100% 신용하지 않았다.
저 흉악한 언데드와 자신은 스펙부터 월등하게 차이가 났다.
같은 원리의 스킬을 사용하더라도 동일한 파괴력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럼에도.
-강해지게 해주마.
유진이 헛된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
강민호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집중하자.'
파프너가 알려준 요령대로 왼팔에 힘을 주는 것과 동시에 마력으로 방패를 감싸고는, 그대로 나무를 향해 휘둘렀다.
철제 방패와 나무가 부딪치는 순간 팔을 밀어내는 엄청난 반발력.
"흡."
순간 비명이 튀어 나왔지만 꾹 참으면서 힘을 풀지 않았다.
한 줄기 광채와 함께 발생한 폭발.
나무는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고, 충격을 일으킨 강민호도 그 반발력에 몇 미터 뒤로 튕겨 나갔다.
[부여한 마력이 과했어.]
날아가는 강민호를 받아낸 파프너.
상황을 지켜보던 뽀시래기 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오, 오빠. 진짜 오빠가 한 거야?"
"선배. 방금 그건 뭠까!"
"...진짜 되네."
두 사람의 말에 대꾸하지는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강민호.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산산조각 난 나무와 방패를 연신 번갈아보았다.
〔한데 그대의 하수인도 따라할 수 있는 거라면 구태여 특성이 없어도 되지 않느냐?〕
'뭘 모르네. 역시 무능 성좌님다워.'
〔빨리 설명하라. 계약자여.〕
'파프너가 보여준 건 어디까지나 흉내. 그것도 4성은 되어야 가능한 신위야.'
마력에 의념을 부여해서 유형화하는 것.
오러 발산의 첫 단계이자 벽을 깬 자만 선보일 수 있는 기예다.
'방패에 한해서라지만 격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지.'
〔결국 4성에 도달하면 의미가 없지 않느냐?〕
'그랬으면 내가 전생에 쌍둥이랑 붙었을 때 고전했겠나.'
방패 강화 특성.
강민호가 방패를 매개 삼아 오러를 활성화시키면 그 위력마저 상승한다는 뜻이다.
또한, 숙련도가 모자라서 그렇지. 방금 전 강민호가 힘을 주는 순간과 마력 발산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췄으면 파프너보다 더 강한 위력을 냈을 것이다.
[그러면 숙달될 때까지 반복한다.]
"예?"
[적이 네가 집중할 때까지 기다려줄 것 같나?]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겠... 죠."
[알고 있으면 두 눈 깜빡이지만 말고 움직여라!]
파프너의 호령에 놀란 강민호가 허겁지겁 방패를 들었다.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군.
"그러면 우리도 시작해볼까."
"혹시 지금이라도 무르는 건 안 되겠죠?"
하얗게 질린 강민영의 말에 유진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걱정하지 마라.
너도 떡잎이 푸르니까 조금만 구르면 감을 잡을 거야.
전생에는 '거울 사냥꾼'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성민이야 확신할 수 없지만.
'나가떨어지지만 않으면 중간은 가겠지.'
쓸 만은 할 만큼 만들어주마.
*
두 사람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유진을 마주했다.
"먼저 네 특성부터 말해봐라."
"네, 넵!"
흡사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 강민영.
◎특성
동조[고유]
지정한 사물, 혹은 미리 허가를 받은 파티원과 동조합니다.
-그다지 쓸모는 없어 보이는 고유 특성이로구나.
'이동요새랑 마찬가지야. 제대로 쓰는 방법만 알면 강력하지.'
동조는 헌터들 사이에서 꽤 흔한 고유 특성이다.
일반적인 사용법은 주 무기에 동조해서 마력을 추가 부여, 위력을 늘리는 정도.
'동조의 진정한 활용방법을 알아낸 게 강민영이다.'
정확히는 미래의 거울 사냥꾼이지.
유진은 거울 사냥꾼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때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먼저 이걸 익혀라."
"헐. 스킬북이잖아요."
"공용 계열 스킬인 염력이다. 나중에 다 받아낼 거니까 고마워하라고."
"쳇. 좋다 말았네."
긴장한 게 언제냐는 듯 입술을 내민 강민영이 스킬북을 펼쳤다.
파스스스-.
스킬북에 담긴 진수를 받아들이자 가루가 된 책자.
두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뜬 강민영이 손을 까딱이니, 땅바닥에 있는 돌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와. 이거 가성비 너무 안 좋네요."
"공용계열에 얼마나 많은 걸 바라는 거냐?"
"그래도 형이 준 스킬북이니까 특별할 줄 알았죠."
얘는 왜 자신을 보고 형, 형 거리는 건지.
호칭에서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지금 쓰고 있는 석궁에 동조를 걸고 염력으로 움직여봐라."
"알겠어요."
[동조]
[염력]
동조를 마친 석궁을 정신력으로 들어 올리는 강민영.
"어? 왜 이렇게 쉽게 되지?"
"동조한 무장은 네 정신과 파장이 동화되어 있어서 염력으로 훨씬 움직이기가 쉬워진다."
유진은 약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선 나무를 가리켰다.
"석궁으로 나무를 맞춰봐라."
"...저. 그러니까 염력으로 석궁을 원격조종하란 말이죠?"
"잘 알아들었군."
"직접 들고 쏴도 어려운 거리를요?"
"할 수 있을 거다.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하면 돼."
큰 생각 없이 유진의 말대로 석궁 조종에 집중하는 강민영.
어느 순간, 마치 석궁이 자신의 몸처럼 느껴지더니 시야가 확 트였다.
'될 것 같아.'
[동조]와 [염력]의 시너지가 만든 효과.
방아쇠를 당기자 한껏 당겨진 시위가 놓이고, 그 반발력으로 화살이 공기를 가로지르며 힘차게 날아갔다.
쿵!
나무를 정확하게 꿰뚫은 화살.
화살촉에 담긴 힘이 원체 셌는지 박히는 데 그치지 않고 관통해서 나무 뒤로 날아가 버렸다.
"미, 미친거 아님까!"
지켜보던 이성민이 환호를 터트렸다.
숨을 고르는 강민영.
마력소모가 크진 않았지만 [동조]와 [염력]을 동시에 펼치느라 한계까지 집중력을 짜낸 여파였다.
한참 뒤에 결과물을 확인한 민영은 꺅, 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봐. 된다고 했잖아."
"저기요. 형. 맞춘 건 그렇다 치고 석궁의 위력은 왜 저렇게 세진 거예요?"
"네 마력이 화살에 실렸으니까."
"염력으로 들었잖아요. 직접 사용한 게 아닌데 어째서...."
무투계 헌터 중 원거리 사용자는 많지 않다.
총 같은 현대 병기가 몬스터에게 왜 통하지 않는가?
마력이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강민영처럼 원거리에 적합한 특성을 익히지 않는 이상에야, 활 같은 무기를 쓸 이유는 없지.'
석궁에 동조를 걸음으로써 발사 시 마력을 담아낸다.
여태까지 그녀의 특성을 활용한 방식이다.
〔그럼 무슨 원리로 석궁의 힘이 강화된 것이더냐?〕
'염력에 소모된 마력까지 위력을 강화시키거든.'
고유 특성 [동조]의 비밀을 알아낸 건 강민영이 최초였다.
염력과 동조의 시너지 효과가 밝혀진 후에는 스킬북의 가격이 몇 배로 올랐으니까.
'그 능력을 최대로 활용한 건 강민영뿐이었지.'
거울 사냥꾼의 악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천부적인 강민영의 마력 컨트롤 능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
회귀 전, 전성기에는 수십 개의 무장에 동조를 걸고, 염력으로 일일이 조종해서 상대를 압박했다.
그러니까 염력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거지.
〔용케 거기까지 알고 있구나.〕
'그 압박당한 사람이 나라서 말이야.'
데스 나이트 같은 상위 언데드들도 무수한 화살 앞에서는 맥을 못 추렸다.
오러가 깃든 화살이 비처럼 쏘아지는 걸 상상해봐라.
'흐흐. 이런 게 바로 당첨 확률 100%짜리 복권이라는 거다.'
유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조금 더 [염력]과 [동조]의 연계에 익숙해지면 관련된 특성도 얻을 수 있을 걸.
"보유 마력이 떨어질 때까지 연습해."
"더 안 봐주세요?"
"일행이 하나 더 있잖냐."
유진의 손끝이 어설프게 서 있는 이성민을 향했다.
전생에서는 못 본 거울 사냥꾼의 파트너.
별 유명세를 떨치지 못했으니, 능력도 대단하지는 않겠지.
많은 기대를 품지 않은 채로 입술을 떼었다.
"넌 특기가 뭐냐."
"그게, 좀 말씀드리기 민망함다."
"야. 이동요새나 동조도 그렇게 잘난 특성 아니거든?"
강민영의 지적에 움츠러든 이성민.
잠시 후 어렵게 입술을 떼면서 자신의 특성을 설명했다.
◎특성
공간[고유]
사용자만 다룰 수 있는 공간을 생성합니다. 공간 면적은 마력 스탯에 따라 달라집니다.
"공간이라고?"
"넵. 이런 식으로 만들 수 있슴다."
이성민이 박수를 짝- 하고 치자 시커먼 공간이 허공에 나타났다.
"공간 생성이라고 해서 좋아했는데 보관 용량이 별것 없슴다."
"얼마나 저장 가능한가?"
"제 마력 수치로는 1kg가 조금 넘슴다."
이성민은 부끄러운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크하핫. 짐꾼으로 알맞은 재능이로구나!〕
'아니. 꼭 그렇진 않아. 몇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강력한 특성이거든.'
로마노프 가문의 2인자.
소피아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는 이성민과 마찬가지로 [공간] 특성의 보유자였다.
〔로마노프라고 하면 그 7대 명가인가 하는 곳이렷다?〕
'맞다. 내 적이지.'
〔참으로 운이 좋구나. 우연히 거둔 부하에게 뛰어난 능력이 있다니.〕
'못마땅한 티 내면서 그런 말 하지 마시죠?'
근데 [공간] 능력의 힘을 발휘하려면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어마어마한 돈.
'소피아는 온갖 성유물과 마법을 저장했다가 사출했다.'
역사와 격을 지닌 성유물은 쏘아보내기만 해도 전술병기 급 위력을 낸다.
사출했던 아티팩트는 고유 특성으로 회수.
다시 발사하기만 해도 어지간한 헌터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아공간의 저장 용량을 늘리려고 영약도 엄청나게 퍼먹었다지.'
즉.
재벌에게나 어울리는 능력인 셈.
〔크하핫! 연이은 행운인 줄 알았는데 돈 먹는 하마로구나!〕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
소피아처럼 키워줄 순 없다.
로마노프 가문은 현 시대에도 7대 명가로 영향력이 막강한 세력.
유진 개인의 수완으로는 명가의 자본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면 빛 좋은 개살구로구나.〕
'왜. 무능 성좌님이 말한 대로 하면 쓸모가 있잖아.'
〔짐은 농담이었다만.〕
'난 진담인데.'
그냥 부려먹겠다는 건 아니다.
마법계 헌터로서 성장할 방법과 아공간 제어 요령은 알려줘야지.
네크로맨서도 마법계의 하위 직업군.
이미 강령 분야에서 정점에 도달했던 만큼 코찔찔이 마법계 헌터 하나 교육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마력 재배열부터 좀 볼까."
두 사람이야 능력 활용 방법을 알려주고 반복학습 시키면 그만인데.
너는 고생 좀 해야 할 거다.
유진의 입가가 차가운 미소로 물들었다.
34화 성위를 높이다.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하고 2주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접경지역에 나타난 죽음의 영지.
불청객을 이웃으로 두게 된 몬스터들은 거침없이 안개 속으로 들어와서 격렬한 환영인사를 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49입니다.]
폭발적으로 올라간 레벨.
몬스터가 넘치는 접경지역답게, 경험치 획득량이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강령 분야 주문 하나도 더 습득했고.
▷점액화
분류 : 마법
등급 : C
살점에 영력을 불어넣어서 끈적끈적한 물질로 변화합니다.
살점지배와 연계를 전제로 한 마법.
실전 활용도는 높지 않다.
〔계약자여. 드디어 정신을 놓은 모양이로구나.〕
'왜?'
〔필요도 없는 주문을 왜 습득하느냐?〕
'다음 주문을 습득하기 위한 선행 주문이라서 그렇지.'
흑암의 반지에서 지식을 계승하는 건 일종의 스킬트리다.
강령 분야의 지식이라고 해도, 특정 조건 없이 곧바로 습득 가능한 주문이 있는가 하면 몇몇 주문을 숙달해야만 비로소 전승이 되는 마법도 있다.
'성위를 올리기만 하면 그 마법을 익힐 수 있다.'
네크로맨서의 꽃이라고 불리는 공격 마법.
그것만 습득하면 몬스터 사냥 속도도 월등히 빨라질 것이다.
〔한데 주문 습득을 더 할 수 있으면서 왜 여유를 두는 게냐?〕
'당장은 익힐 만한 주문이 없거든.'
크흐흐흐.
유진은 시원하게 웃었다.
[웃을 시간 있으면 지시나 내려라.]
"주인한테 말본새 좀 보소."
[안개 너머에서 몰려드는 괴물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질책하는 파프너의 시선이 네크로폴리스로 침입 중인 괴물들을 향했다.
"몬스터 연합군도 아니고 뭔 종족이 셋이나 섞여 있대."
[이런 게 미움 받을 용기 아니겠어?]
"미움을 사려고 용기까지 내고 싶진 않은걸."
[하긴. 주인은 알아서 미움 사는 편이지.]
거 말씀이 심하시네.
유진은 다시 한번 과묵했던 박하늘 씨가 그리웠다.
"늘 하던 대로 선두는 맡기마."
유진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파프너의 신형이 멀어지더니 돌진 중인 괴물들 앞에 도달했다.
[후후후. 다 죽어버리렴!]
[케넥 전투술]
[7장]
[10발 난타]
탈 3성급 무력의 소유자.
파프너는 자욱한 안개를 장막 삼아 괴물들 상대로 멈추지 않고 일격이탈을 했다.
지치지 않는 언데드의 특성과 안개를 꿰뚫는 귀안.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몬스터들이지만, 주도권을 빼앗긴 채 일방적으로 사냥 당했다.
"쿠후훅. 쿠훅!"
파프너의 무력이 4성에 준하긴 해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순 없는 법.
일부 몬스터들은 안개를 무시하고 본능적으로 달려들었다.
2성으로 분류되는 철갑멧돼지였다.
"준비됐나?"
"예. 형님."
[이동요새]
[강격]
콰앙-!
무작정 앞으로 달려오던 철갑멧돼지가 꽥, 소리를 내며 반대로 튕겨났다.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마력과 힘을 충돌.
1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파괴력으로 철갑멧돼지의 머리를 으깨버린 것이다.
막 방패를 휘두른 강민호가 멈춘 때를 놓치지 않고 급회전하면서 날 선 이빨을 겨누는 철갑멧돼지.
[동조]
[염력]
[약점 노리기]
푹! 철갑멧돼지의 정수리 위로 쏘아진 화살이 무방비하게 노출된 거죽을 일격에 꿰뚫었다.
지면에서 10미터 위로 띄운 석궁.
석궁을 안개에 가려놓은 채로 괴물들의 약점을 노렸다.
"화력 모자란다."
"파이어 애로우!"
이성민의 마법 시전 속도도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전직 9성 네크로맨서가 전담으로 과외를 해주니 실력도 일취월장.
유진의 격려(?)와 노력 덕에 빠르게 질주 중인 철갑멧돼지를 정확하게 맞췄다.
"뀌익!"
쇠처럼 단단한 가죽이 그을린 게 전부였지만.
거울 사냥꾼으로 명성을 날리게 될 두 사람에 비해서는 평범한 헌터에 불과한 탓에 성위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죄송함다. 위력이 모자랐슴다."
"아냐. 잘했어."
고속이동 중인 철갑멧돼지를 맞춘 것만 해도 큰 성과다.
유진이 고개를 까딱이니 허리춤에 달려 있던 저주받은 이빨 하나가 솟구쳤다.
[본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파이어 애로우가 지지고 간 곳을 파고드는 마법 무장.
"뀌이이잇!"
철갑멧돼지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이물질이 파고드는 것을 막았지만 이미 약해진 부위라서 금세 찢어졌다.
"형님. 철갑멧돼지들이 저를 무시하고 곧장 달려듭니다."
강민호의 말에 유진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겔, 그게겔."
"그게겔. 주인님의 명이다."
시커먼 갑주로 무장을 갖춘 스켈레톤.
[본 아머]와 [본 컨트롤]을 응용하여 제작한 아머드 스켈레톤이 남은 철갑멧돼지들의 진격을 막아냈다.
[아머드 스켈레톤]
종족 : 언데드
등급 : ★★
◎능력치
근력 : 101(+43) / 민첩 : 114(+45) / 체력 : 100(+31) / 맷집 : 83(+56) / 마력 : 40(+24)
◎특성
▷불사의 존재[C+] / 절상 내성[C+]
◎스킬
▷하급 무기술[D] / 비열한 습격[D] / 강격[D]
좀비보다 민첩하지만 근력과 맷집은 아래다.
'어쩔 수 없지. 영력 전달 매개체를 뼈로 하면 살점보다 효율이 떨어지니.'
아머드 스켈레톤은 강화 방법이 좀비와 다르다.
뼈로 짜낸 갑주 사이로 마력회로를 대체하는 작은 뼈들을 연결한다.
제작 난이도는 아머드 좀비보다 몇 배나 위.
유진도 현재의 실력으로는 한 구를 만들 때마다 5분 이상 집중해야 했다.
〔효율은 떨어지면서 귀찮기까지 한 일을 잘도 하는구나.〕
'스켈레톤은 유지력이 좋다.'
염을 한 시체도 부패를 완전히 막을 순 없다.
아머드 좀비는 살점을 뼈와 밀착시켜서 회로를 강화시켜서 더욱 부패에 취약하다.
반면 마력회로를 뼈로 강화한 아머드 스켈레톤은 지속력에서 훨씬 위.
네크로폴리스까지 선언한 마당이니 오랫동안 부려먹을 수 있는 하수인이 필요했다.
[이쪽에서 막는다고 막았는데도 꽤 샜네.]
안개를 자유롭게 누비며 몬스터들을 처리한 파프너가 뒤를 덮쳤다.
순식간에 정리된 괴물 무리.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은 50입니다.]
[한계를 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갑니다.]
별안간 충만한 힘이 차오르면서 온몸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힘.
한계 레벨에 도달함으로써 다음 성위로 가는 자격을 획득, 그 너머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든 능력치에 +20% 보정을 받습니다.]
[경험치 요구량이 4배로 늘어납니다.]
1로 돌아간 레벨.
여태까지 투자한 스탯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손해는 아니다.
도리어 모든 능력치에 20% 추가 보너스가 붙었으니 훨씬 더 이득이지.
추가 보너스는 성위가 올라갈수록 더 많이 늘어난다.
'이래서 성위 차이가 절대적이라는 거다.'
〔크하하핫! 계약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난 예외로 둬야지.'
2성 수준의 하수인들이 100기 이상.
준 4성급 괴물인 파프너.
네크로맨서 전용 장비로 만든 마법 무장까지 있다.
'평범한 헌터는 이런 거 꿈도 못 꿔.'
〔계약자의 머릿속에는 겸손함이라는 단어가 없느냐?〕
'사실을 말한 건데요.'
〔허어. 저 오만함에 걸맞은 실력을 지녔다는 게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구나.〕
거 적당히 투덜댑시다. 무능 성좌 씨.
유진은 흑암의 반지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지식의 도서관을 사용합니다.]
[선대 죽음의 주인들이 남겨놓은 지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암흑 / 저주 / 연금술 /······ 그 외 분야 중 하나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선택지가 꽤 많구나. 뭘 선택할 셈이더냐?〕
'회귀 전에는 저주 분야를 골랐다.'
저주는 네크로맨서의 부전공 같은 분야다.
각종 디버프와 혼령을 비틀어서 지배하는 술법.
유진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언데드 강화 술식인 [합일]도 강령과 저주 양쪽의 지식을 모두 필요로 한다.
〔하면 고민할 필요가 없겠구나.〕
'이번에는 달라.'
툭- 툭-.
안면을 덮고 있는 시커먼 가면.
가면마수한테서 얻은 저주의 매개인 [그림자 가면]이 있다.
최대 5개의 저주가 새겨진 아이템.
필요한 술식은 그때마다 회로를 조작해서 추가할 수 있으니, 우선순위에서 미뤄도 된다.
〔그렇다면?〕
'연금술 분야를 계승하겠다.'
[연금술 분야의 지식이 사용자의 혼에 새겨집니다.]
[영혼의 격이 낮습니다. 주문 일부가 전승됩니다.]
'당장 필요한 건....'
한 번에 전승 가능한 주문 개수는 둘.
유진은 미리 생각해둔 연금술 마법을 떠올렸다.
골렘 연성
분류 : 연금술
등급 : B
골렘을 제작합니다. 해당 골렘의 성질은 매개체나 마력 핵 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강화 회로
분류 : 연금술
등급 : D
마력회로를 강화시키는 술식입니다.
〔왜 전처럼 울부짖지 않느냐?〕
'나도 이제 2성이야. 전처럼 아프진 않다고.'
〔아깝구나. 그대가 발버둥 치는 모습은 꽤 유쾌했다만.〕
'닥쳐. 무능 성좌.'
유진은 투덜대면서 머릿속에 들어온 지식을 갈무리했다.
*
검은 방첨탑.
네크로폴리스의 중심에 위치한 구조물은 영역 안에서 스러져간 괴물들의 혼백을 빨아들였다.
핏줄처럼 꿈틀대는 시커먼 마력 회로.
많은 영혼을 흡수한 덕에 한층 더 강해진 영력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이 기세면 조만간 영지 규모가 2로 올라가겠군.'
유진은 네크로폴리스 정보를 확인했다.
[영지 규모 - 1]
[강령술 증폭 범위 - 1km]
[수용 가능 언데드 개체 수 - 100/100]
[영력 농도 – 3]
[구조물 - 검은 방첨탑, 불경스러운 묘지]
[불경스러운 묘지]
▷등급 - 1
▷면적 - 소
▷내구도 - 500/500
안치한 시체의 부패가 진행되는 것을 막아주며 영력을 자동적으로 불어넣습니다. 오래 숙성할수록 언데드 제작에 알맞은 시체가 됩니다.
▷보관 중인 시체 10/10
언덕 아래에 세워진 검은 묘소.
첫 입주자는 붉은 거미의 유망주였던 조승철의 시체였다.
〔지극정성이구나. 그 치 말이다.〕
'2성이 되었으니 조만간 놈도 언데드로 만들어야지.'
스켈레톤 메이지나 다크 후드 같은 마법 유형 언데드는 2성이 되어야 제작할 수 있다.
〔엘드리치 드래곤 같은 고위급 언데드는 잘도 만들어놓고 약한 척하는구나.〕
'그건 변칙이잖아. 제대로 된 강령술이 아니다.'
연금술과 강령 분야, 그리고 저주.
쓸 수 있는 수단을 모조리 동원하고 미래의 대연금술사인 신준석의 조력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
용족의 힘을 오롯이 지닌 드래고니안 사체도 한몫했고.
그럼에도.
아직 미완성 상태지.
〔그 치도 꽤 쓸 만한 재능을 지녔다고 하지 않았더냐?〕
'죽을 때를 기준으로는 3성이지.'
유진이라고 해도 사체가 지닌 미래의 가능성을 끌어와서 언데드를 제작할 순 없다.
회귀 전의 파프너.
그러니까 박하늘 씨처럼 업그레이드를 하는 거면 모를까.
"파프너야. 잠시 파주에 다녀올게."
[뭐야. 주인. 여기서 집이라도 보라는 말 같은데.]
"감 좋네. 네크로폴리스 좀 지키고 있어."
[후후후. 맡겨 두어라.]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파프너를 힐끗거리는 강민호.
"형님. 저희도 남아서 여길 지키면 됩니까?"
"너희들 레벨이 어떻게 되냐."
"48입니다."
"47이요."
"45임다."
뽀시래기 팀도 레벨을 가파른 속도로 올렸다.
휘하 언데드의 경험치까지 헌납받는 유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느렸지만, 흔한 1성 헌터들보단 성장세가 매우 빨랐다.
"잘 됐군. 너희도 잠시 다녀오자."
"네크로폴리스를 통으로 비우는 건데 괜찮습니까?"
"못 지킬 거 같으면 포기해야지."
파프너는 라이프 포스 베슬만 있으면 몸뚱이가 소멸해도 되살릴 수 있다.
접경지역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유진 일행이 다녀오는 동안 네크로폴리스가 함락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너희는 죽어도 언데드로 안 살려준다."
"보통 그런 건 고인 능욕이라고 하는 겁니다. 형님."
어쭈.
농담 정도는 이제 걸어볼 만하다 그거지?
"정말로 죽을 때가 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
"왠지 형님께서 직접 죽여주신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킬킬거렸다.
35화 골렘 연성(1)
접경지역 관문 앞에 선 유진 일행.
"흐엑. 헥."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서, 선배. 팔 안 떨어졌슴까?"
초주검이 된 뽀시래기 팀원들이 퀭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 뒤에 선 유진은 투덜거리면서도 신성 주문으로 소진된 일행의 체력을 회복시켜주었다.
"엄살 심하네. 다들 팔 다리 멀쩡하면 된 거잖아."
"파프너 님 없으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강민호가 힘없이 팔을 흔들었다.
움푹 찌그러져서 원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방패.
수리보다는 용광로에 녹이고 새로 만드는 것이 나아 보이는 모습이다.
강민영도 목소리를 쥐어짰다.
"형. 쟤네들이라도 도와줬으면 더 나았을걸요?"
유진의 뒤에 도열한 아머드 스켈레톤 무리.
절반가량이 어깨에 커다란 포대를 몇 개씩 메고 있다.
네크로폴리스에 몰려온 괴물들한테서 나온 마석과 부산물들.
2주 동안 쉼 없이 쓰러트린 만큼 부산물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돈을 버리고 올 수는 없잖냐."
"그거야 그렇슴다."
"야! 거기서 동의하면 어떻게 해!"
하수인 중 절반은 부산물과 마석을 관리하느라 대기.
남은 아머드 스켈레톤 10구와 뽀시래기 팀, 그리고 유진이 길을 뚫어야 했다.
'위기는 없었지만, 조금 피곤하군.'
접경지역인 만큼 조금만 이동해도 괴물들과 조우했다.
연속되는 싸움.
라이프 드레인이 체력도 회복시켜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전투를 마치고 쉬기를 반복하느라 며칠 더 걸렸을 것이다.
〔크하하핫. 참으로 보기가 좋도다.〕
'남 고생하는 게 그렇게 마음에 드냐?'
〔말하지 않았느냐. 영웅 서사란 본래 고난과 역경이 있어야 하는 법. 그대는 너무 쉽게 가느니라.〕
싫은데요.
기껏 회귀까지 했는데 날로 먹어야지. 굳이 돌아가거나 고생을 자처할 필요는 없잖아.
이제는 꿀 좀 빨고 삽시다.
"통과하십시오."
관문의 병사는 아머드 스켈레톤 무리를 보고 살짝 놀랄 뿐, 제지하지는 않았다.
곧장 신준석의 공방까지 직행.
"동업자님.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이젠 스켈레톤들을 보고 호들갑도 떨지 않는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참 빠르게 익숙해지네.
〔뻔뻔하기는. 짐이 보기에는 적응이 아니라 포기한 것 같다만.〕
'어허. 동업자끼리 무슨 포기야.'
크로노스의 태클을 무시하고 휴대전화를 집었다.
-마담입니다.
"나다."
-어머나. 혹시 그쪽은 저승이 아니라 이승인가요?
"장난치고는 좀 시시하군."
-당신이 접경지역으로 넘어갔다고 들어서요. 용케 살아오셨네요.
"국경 너머도 나름 살 만하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접경지역과 마주하고 있는 건 그라운드 제로도 마찬가지다.
구 아울렛을 포함하여 상당한 면적의 무법지대를 정부에서 가만 두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
무법자들은 세금을 내는 대신 접경지역의 괴물들을 막아주는 것이다.
'암묵적인 합의라고 해야 하나.'
유진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마담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막 돌아오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이시죠?
"부탁할 게 있어서."
화상통화로 변경.
공방 앞에 수북이 쌓인 부산물과 마석을 보여주었다.
-고객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서비스 차원에서 해줄 수 있잖아."
-부산물을 취급하는 건 은하수 펍의 업무가 아니랍니다.
"그래서 안 해줄 거야?"
잠시간의 침묵.
-사람을 보낼게요.
"한 가지 더 부탁하지."
-들어보고 결정하죠.
"이 부산물들을 처리해서 나온 값으로 마력 상승 영약을 구해줘."
-종류나 속성은 불문인가요?
"어."
-알겠어요. 그럼 적당한 영약을 구해볼게요.
뚝-.
매정하구먼. 업무 이야기 끝났다고 바로 끊어버리다니.
〔짐이 보기에는 그대가 심해 보인다만.〕
'성좌가 인간 마음을 어떻게 이해한다고 그리 말하나?'
〔이건 필멸자와 불멸자 이전의 문제이지 않느냐. 그대의 뻔뻔함 때문인 것을.〕
권력을 지키려고 아드님도 잡아먹은 성좌님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은걸.
유진은 킁- 콧김을 불며 크로노스의 지적을 무시했다.
*
부산물 처리는 마담에게 맡겨 두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았다.
"저희가 돕지 않아도 됩니까?"
"어. 됐으니까 너희 셋은 명동으로 가라."
"명동은 갑자기 왜······."
"처음 만났던 게이트. 고대의 정원에는 숨겨진 요소가 있다."
유진은 [고대의 시험장Ⅰ] 출입 조건을 설명했다.
〔계약자여. 이야기가 다르지 않느냐.〕
'뭐가 달라?'
〔언제는 그 기연을 독점하겠다고 킬킬대놓곤, 왜 알려주는 게냐.〕
'그땐 남이 될지도 몰랐지만 이 정도로 함께 행동했으면 신뢰해도 되잖아.'
미래의 거울 사냥꾼.
강씨 남매는 회귀 전의 행동으로 보건대, 믿을 만했다.
팀원으로 같이 활동하는 이성민이야 100% 신뢰하기에는 모자라지만.
녀석의 고유 특성도 쓸 만하니 키워볼 셈이다.
〔혹, 그 작은 인간이 배반한다면 어찌 하려고 그러느냐?〕
'이미 단 맛을 봤는데 그럴 것 같나.'
무려 전직 9성의 마법 직강이다.
전 세계 어디를 뒤져봐도 들을 수 없는 귀한 강의!
〔크하핫. 그 작은 인간은 계약자가 9번째 성위에 도달했다는 걸 모르지 않느냐.〕
'들을 귀가 있으면 내 설명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거다.'
마력을 재배열하는 과정.
방출 요령.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고유 특성을 살릴 방법까진 알려주지 않았지만 충분할 거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동아줄이 황금으로 된 건지 썩은 건지 정도는 알아볼 터.
설명을 마친 유진은 뽀시래기 팀원들을 훑어보았다.
"질문?"
"시련의 대상이 드래고니안이란 말씀이죠."
"2성으로 능력치 제한을 받지만 강적인 건 변함없지."
"그걸 1대1로 상대해야 한다는 거군요."
"시련에서 패배해도 죽진 않아."
목숨을 걸 필요는 없으니 다행이지.
실패하면 죽을 만큼 아프기야 하겠지만.
"보름달 떴을 때만 입장 가능하니 게이트 들어가서 미리미리 봐둬라."
한 가지 다행인 건 [고대의 시험장] 출입 제한이 1명일 뿐, 하루에 최대 10명까지 시련을 치를 수 있다.
재료를 모두 챙겨놓으면 셋 다 같은 날에 고대의 시험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나중에 봐요. 형."
"꼭 시련을 통과하고 오겠슴다!"
뽀시래기 팀은 비장한 표정으로 인사하고는 서울로 떠났다.
"이야. 저 친구들 떠나니까 조용해졌네요."
"동업자 양반은 북적거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뭐, 가끔은 허전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유진은 픽 웃고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신준석이 여태 참아왔다는 듯, 빠르게 입을 열었다.
"중급 포션 양산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양산과정에서 문제는 없나?"
"가끔 배합 기계가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사소하죠."
"아라한에서 투자 제의 같은 건 없고?"
"공장 장비나 생산 과정에도 관여하고 싶다고 하는데 개소리죠. 첫 생산 분량만 넘겨주는 걸로 하고 투자 받았습니다."
현명하군.
아라한 길드의 제안을 통으로 받았다간 나중에 공장 전체가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대기업에서 한 번 데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부분은 확실하네.
〔거기까지 내다봤으면 처음 이야기할 때 조언이라도 해주지 그러느냐?〕
'말을 해주는 거랑 직접 데여보는 건 달라.'
신준석은 동료보다 협력자에 가깝다.
회귀 전에도 연금술사로서 명성을 떨치며 수많은 도제들을 두었던 인물.
유진의 지시에 일일이 따를 게 아닌, 스스로 판단하는 입장이다.
'내가 코치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자립심이라도 길러줄 셈인가? 참으로 재미있구나.〕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모르겠군요.
크로노스의 묘한 말을 흘려 넘기고는 다시 신준석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말한 건 다 구해졌나?"
"예. 아라크네의 실과 마력 엔진 빼고는 다 구하기 쉬운 거라서요."
"그러면 작업을 바로 시작해도 되겠어."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준석의 콧구멍이 두 배로 확대되었다.
"드, 드디어!!!"
"네가 해줄 일이 아주 많다."
"물론이죠. 어떤 것이 되었든 말씀만 하십시오!"
2성이 되면서 연금술 분야의 지식을 얻었다곤 해도 극히 일부다.
엘드리치 드래곤 때도 그랬듯, 신준석의 보조가 없으면 골렘 연성은 시도조차 불가능하다.
〔골렘 연성 주문을 전승받았으니 작은 인간의 협조 없이도 된 거 아니더냐?〕
'골렘은 그냥 마법 쓰면 딱 하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골렘은 연금술의 모든 기술을 총망라한 피조물이다.
마력회로를 일일이 새기는 것은 기본이요. 연성과 약초 배합, 그리고 마나 포밍 등 온갖 요소가 들어간다.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도 연금술사의 솜씨에 따라 결과도 크게 달라진다.
'기대되는군. 미래의 대연금술사와 만드는 골렘이라.'
두 사람은 공방 인근의 공터로 넘어갔다.
널찍한 땅에 방치되어 있는 가면마수의 사체.
방부 처리를 했지만 파리가 꼬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기에, 일부가 썩어 있었다.
"으으으. 죄송합니다. 나름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2주 지난 거치곤 훌륭하지."
유진은 가면마수의 사체에 손을 얹었다.
스스스슷-!
접촉면을 통해 스며든 희끄무레한 기운이 군데군데 썩어있는 가면마수의 전신을 순환하고.
썩은 부위가 뽑혀나가고 시체에 자리 잡았던 벌레들도 몰아냈다.
〔그러면 엘드리치 드래곤 때와 같지 않느냐?〕
'좀 달라. 언데드를 만드는 게 아니잖아.'
드래고니안 사체에 마력 회로를 각인하던 때하곤 다르다.
망자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복원시키고는 영력 운용을 멈추었다.
"재료를 가져와라."
"예."
신준석은 미리 주문한 연금술 재료들을 공터로 옮겼다.
"실린더와 마녀의 솥도 세팅해놓는 게 좋을 거다. 동선을 줄이려면."
"알겠습니다."
연금술 세팅을 마치는 동안, 유진은 재료의 질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역시 신준석이야. 괜찮은 물건들을 챙겨놨다.'
촉매의 상태도 연금술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
신준석은 재료 엄선부터 관리까지 철저하게 해서 모든 요소를 최상의 상태로 맞추어놓았다.
"동업자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왜 골렘의 매개체가 시체인지 궁금한 거지?"
"독심술이라도 쓰십니까?"
"아니. 이쯤 되면 그 질문을 할 것 같아서 말한 거다."
골렘은 연금술로 창조한 인공생명체.
처음 빚어내는 '매개'에 따라서 몸뚱이를 구성하는 성질도 달라진다.
바위로 만들면 록 골렘.
쇠를 사용하면 아이언 골렘.
마도공학의 결집체인 기간트 골렘 등.
골렘은 한 객체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렇게나 커다란 시체면 언데드를 만드는 게 더 이득인데 왜 골렘을 만들까. 그렇게 생각했지?"
"부끄럽지만 맞습니다. 동업자님의 생각은 알 수 없더군요."
"뭐, 반쯤은 맞아. 내가 만들 건 언데드와 골렘 양쪽에 걸쳐 있는 녀석이거든."
네크로맨서에게 전해지는 비전 골렘.
유진이 만들 녀석이다.
"블러드 골렘."
"······피 말입니까?"
"그래. 내가 만들 골렘은 피를 자신의 육체로 삼는 녀석이다."
피는 생명의 통화.
죽음을 거스르는 직업인 네크로맨서, 혹은 생명 자체를 희롱하는 뱀파이어들이 하는 말이다.
"생명의 정수인 피 그 자체를 몸뚱이로 삼는 골렘.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지 않나?"
〔크하하핫. 어떤 정신 나간 작은 인간이 그런 모습을 기대하겠느냐.〕
아닐걸.
피 자체를 매개체로 삼는 골렘.
일반적인 골렘의 매커니즘과 반대되는 물건이다.
가만 있지 않고 흘러내리려고 하는 액체에 마력 회로를 새긴다?
연금술사라면 참을 수 없을거다.
"엄청 기대됩니다!!!!"
회중시계가 크게 떨렸다.
말을 내뱉자마자 정면으로 부정당했으니 마음 꽤나 상했겠군.
'무능 성좌께서는 가만히 구경이나 하고 있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손을 쓱쓱 비빈 유진이 속으로 웃음을 삼킨 후, 회귀 전에 쌓아올린 지식을 떠올리며 다음 작업을 지시했다.
36화 골렘 연성(2)
푸욱-!
[샤프니스] 마법으로 강화된 메스를 든 신준석이 가면마수의 사체를 거침없이 갈랐다.
죽은 지 오래돼서 피가 나오기는커녕 미동도 없는 몸뚱이.
F급 마석을 갈아서 만든 푸른 가루를 막 갈라낸 틈 사이로 뿌리고는.
[마력 회로 각인]
굳어버린 근육과 뼈에 회로를 새겼다.
"아라크네의 실로 회로를 각인하니 효율이 12% 상승하는군요."
"대신 내구도가 37% 떨어지지."
"그러면 마력 회로가 오래 못 버티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골렘이라면 그렇지만, 내가 만들 건 괜찮다."
한 번 '기억'만 시키면 마력 회로까지도 자동으로 회복시키는 골렘.
블러드 골렘이 가진 장점이다.
"10센티미터 위까지만 회로를 이어줘. 더 길게 뻗으면 마력 쇼트가 날 거다."
"알겠습니다."
마력 회로 각인은 골렘 연성의 기초다. 건축으로 치면 터다지기 같은 거지.
시간과 노동력이 많이 들지만 그만큼 중요하다.
〔마치 그대가 직접 마력 회로를 각인이라도 하듯 말하는구나.〕
'난 하고 싶어도 스킬이 없어.'
〔스킬이 있으면 할 생각이 정말로 있느냐?〕
'그런 상황이 되면 고민해 볼게.'
아무렴.
마력 회로 각인은 좋게 말하면 기초공사요, 나쁘게 말하면 순도 100% 노가다다.
단순노동인데, 그마저도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어휴.
보고 있기만 해도 눈이 빠질 것 같네.
유진도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블루 슬라임의 점액과 쌍두혈사의 독액. 그리고 늑대 거북이의 껍질.'
시커먼 액체에 푸른 점액질을 밀어넣자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큰 기포가 퐁- 퐁- 터지더니 작은 기포가 연이어 하나둘 떠오르고.
"지금이다."
철에 버금가는 경도를 띤 늑대 거북이 껍질을 독액에 넣으니 원래의 딱딱함을 잃고 흐물흐물해졌다.
유진은 철로 된 막대기로 녹는 중인 껍질과 독액을 휘적거리면서 한데 섞었다.
[혈독(血毒)][변화(變化)][경화(硬化)]
철 막대기로 가볍게 저을 땐 부드럽게 움직이지만, 힘을 세게 쥐니 딱딱해졌다.
좋아.
여기까지는 성공적이군.
이 정도쯤은 연금술 직업군 보정을 받지 않아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 어렵진 않아 보이는구나. 이 정도면 작은 인간들을 시켜도 되었을 것을.〕
'뽀시래기 애들은 못 해.'
〔정해진 순서대로 넣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
'연금술의 핵심은 타이밍과 비율. 그냥 본다고 하면 누구나 대연금술사가 되겠지.'
촉매를 가열하는 온도.
여러 촉매를 조합시킬 때 순서와 타이밍.
자그마한 차이가 큰 결과로 이어지는 게 연금술이라는 분야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무식하단 소리 들어.'
〔무엄하도다! 감히 짐에게 무슨 말버릇인가!〕
'무능 성좌님. 어디 가서 나 같은 뛰어난 사람한테 가호 줬다고 이야기나 하지 마시죠.'
독액을 모두 섞은 후에도 유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액화 효능을 지닌 르아임의 나뭇가지를 우려낸 후, 솥에 2차로 끓인다.
[액화(液化)][유지(維持)][탄성(彈性)]
'준비는 얼추 끝났고.'
마침 신준석도 가면마수의 몸뚱이에 마력 회로를 전부 새겼다.
"눈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애썼다. 오차 하나 없이 마력 회로를 새긴 솜씨, 대단하군."
신준석은 예예, 하고 대충 대꾸하곤 유진이 준비한 골렘 재료들을 관찰했다.
"특별한 촉매 없이 조합만으로 서로의 성질을 끌어올리다니. 이런 배합비가 있을 줄이야."
"그거 비율은 알려줄 테니 나중에 보고. 지금은 이게 먼저다."
"참. 근데 동업자님.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골렘 제작 과정은 크게 셋이다."
인식.
결합.
구동.
"첫 번째는 골렘의 마력 엔진이 신체를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럼 마력 회로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해가 빠르군.
한 마디를 했는데 벌써부터 앞서나갔다.
정답에 가깝지만,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평범한 골렘이라면 말이야."
가면마수의 사체는 완성될 블러드 골렘의 '틀'을 고정하는 역할이다.
피를 육신으로 삼는 골렘.
성질만 놓고 보면 자연의 일부를 매개체로 불러내는 소환수나 정령에 가까웠다.
따악-!
"이쪽으로 가져와라."
아머드 스켈레톤 둘이 커다란 엔진을 들고 천천히 공터로 들어왔다.
MIS - 4. 마담의 의뢰를 수행하고 받은 마력 엔진이다.
[살점지배를 사용합니다.]
[본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우지지직-!
가면마수의 심장 쪽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는 마력 엔진을 놓았다.
"마지막 조정만 부탁하지."
"예."
신준석이 마력 회로를 엔진에 이어 붙이자, 유진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강화 회로 각인을 사용합니다.]
파지지직!
골렘 연성과 함께 선택한 전승 스킬.
일반적인 마력 회로로는 마력 엔진의 출력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럼 엔진을 가동시켜볼까."
쿵- 쿵- 쿵- 쿵-!
육중한 소리를 토해내며 박동하기 시작하는 골렘의 심장.
MIS - 4는 작동과 동시에 생성한 마력을 곧장 강화한 마력 회로로 보냈다.
아라크네의 실로 각인한 회로에 스며든 독액과 용액이 엔진의 마력과 조우하는 순간.
화르르륵!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그 자리에서 타버렸다.
〔크하하핫! 보기 좋게 실패했구나.〕
'실패?'
〔보아라. 골렘의 혈관이나 마찬가지인 마력 회로가 타고 있지 않느냐.〕
'내가 볼 땐 아닌데.'
검붉은 불꽃 사이로 지나가는 푸른 마력.
아라크네의 실이 녹아내리면서 가면마수 사체에 더욱 깊이 회로가 새겨지고.
미리 적셔둔 배합물들도 엔진의 마력과 자연스럽게 융화되었다.
"첫 번째 과정을 통과했군요."
"다음은 훨씬 쉬울 거다."
유진은 뻐근해진 목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풀어주었다.
*
3일이 지났다.
두 사람은 최소한으로 쉬면서 골렘 연성에 매달렸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군."
"정말이지. 연금술의 새로운 지평을 봤습니다."
"내 방식은 사파다. 정통적인 방식하고는 결이 완전히 달라."
흑암의 반지에 기록된 연금술 지식은 평범하지 않다.
네크로맨시 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향.
기초 지식이야 비슷하지만, 심화 과정으로 들어가면 연금술의 개념을 비튼 요소가 많이 함유되었다.
"골렘도 마찬가지다. 넌 제대로 된 걸 만들어라."
"많이 배웠으니 된 거 아닙니까?"
피로로 찌든 눈 사이로 기이한 광망이 일렁인다.
유진의 보조를 하는 와중에도 무언가 영감이 떠올랐는지 히죽거리며 웃지 않았던가.
실시간으로 유진의 지식을 체화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소름이 돋았다.
'이러니 대연금술사가 됐지.'
골렘 제작에서 체득한 지식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 모르겠군.
"마지막 과정만 남았군요."
"그래. 이제 구동만 하면 돼."
유진은 MIS - 4의 상태를 점검했다.
현 시대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결함.
엔진을 구동시킬 때 마력이 과하게 흘러서 '통합 제어장치'가 망가지는 현상이 찾아오지 않게끔 출력에 제한을 걸었다.
'좋아. 엔진에 문제는 없으니 시작해보자.'
[골렘 연성을 사용합니다.]
MIS - 4를 툭 건드리자, 엔진에서 나온 푸른 마력이 가면마수 사체 구석구석을 순환했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엔진을 작동시켰을 때와 동일한 현상.
"이젠 조금 다를 거다."
쿵- 쿵- 쿵-!
마력 엔진의 출력이 급격하게 올라가더니 가면마수 시체가 크게 들썩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체를 쥐어짜기라도 하듯, 팔과 다리가 비틀리더니 꽈배기처럼 마구 회전했다.
미리 세팅한 촉매, 힘센 이끼가 마력 전도율을 높이면서 발생한 일.
"도, 동업자님? 잘 된 거 맞습니까?"
"응. 문제없다."
"가만히 두면 엔진 출력을 못 버티고 부서질 것 같은데요?"
"내가 만든 골렘 이름을 잘 떠올려봐라."
블러드 골렘.
가면마수의 시체는 골렘의 형태를 고정하는 '틀'이지, 본체가 아니다.
비틀린 팔과 다리가 1/5 이하로 작아졌을 때.
미리 준비해놓은 마지막 재료인 몬스터의 피를 쪼그라든 육체에 뿌렸다.
"피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군요!"
"골렘이 저 피를 육체 구성의 매개체로 인식한 거다."
액체이되 단단함을 겸비했으며.
중력의 영향을 받아 흘러내려야 할 피는 유진이 불어넣은 촉매 덕에 팔과 다리의 형태를 유지했다.
'이 타이밍에 열사의 모래를 뿌리면....'
부글거리며 끓는 피 위에 뿌려지는 노란 모래.
모래는 괴물들의 피를 인간과 흡사한 모습으로 고착화 시켰고.
고정되어버린 틀 위로 새빨간 액체를 계속 부으니 약 3미터 크기의 거한으로 재탄생했다.
[블러드 골렘이 제작되었습니다.]
네크로맨시와 연금술의 합작.
오직 네크로맨서만 부릴 수 있는 골렘이 탄생했다.
*
신준석은 완성된 블러드 골렘 주위를 갸웃거렸다.
"만져 봐도 됩니까?"
"독 올라도 괜찮다면야."
"히익!"
"참고로 쌍두혈사의 독이라서 10분 안에 치료 안 하면 손은 못 쓸 거다."
유진은 시니컬하게 대꾸하며 블러드 골렘의 상태를 확인했다.
[블러드 골렘]
종족 : 골렘
등급 : ★★★
◎능력치
근력 : 230 / 민첩 : 180 / 체력 : 200 / 맷집 : 200 / 마력 : 150
◎특성
▷인조병기[B] / 혈류 변환[B] / 혈류성장[B] / 혈독[B]
◎스킬
▷거대화[B] / 맹렬한 돌진[C] / 볼링 배쉬[C] / 블러드 웨폰[C]
◎특이사항
피를 흡수할수록 체구가 커집니다. 육체를 구성하는 피의 질에 따라 전투력이 결정됩니다.
〔참으로 가관이로구나. 3일 동안 고생한 것치곤 스펙이 아쉽지 않느냐.〕
'특이사항 좀 보시죠. 무능 성좌님.'
〔피 좀 좋은 거 먹인다고 해서 얼마나 강해질 수 있단 건가.〕
'6성까지는 올라갈 거다.'
골렘의 전투능력은 육체를 어떤 물질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특히 블러드 골렘은 흡수한 피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큰 편.
'지금이야 1성 몬스터들의 피를 되는 대로 사왔지만, 전투를 벌이다 보면 더 커질 거다.'
〔골렘이 엘드리치 드래곤처럼 성장이라도 한다는 게냐?〕
'성장 같은 건 아니고. 엔진 출력이 허용하는 만큼은 강해질 수 있거든.'
MIS - 4의 출력이면 최대 6성.
이 마력 엔진으로는 미스릴 같은 레어메탈을 사용해도 5성이 한계인데, 블러드 골렘은 그 이상도 바라볼 수 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말이야.'
1성이나 2성 몬스터들의 피로는 턱도 없다.
블러드 골렘이 7성 수준의 전투력을 보유하려면 동급 몬스터의 피를 어마어마하게 구해야 했다.
'몬스터의 피는 수요도 없으니 구하기도 어렵고.'
〔그래도 피를 구하면 계약자의 전력도 크게 보강되지 않겠느냐.〕
'아니. 그러면 블러드 골렘이 내 말을 안 탈 걸.'
무엇이든 과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고 하지 않는가.
쟤, 나름대로 자아도 있어.
"블러드 골렘. 깨었으면 대답해라."
「예. 마스터.」
쇠를 긁는 듯한 거북한 음색.
크로노스는 블러드 골렘의 대답에 경악하며 시계를 마구 흔들었다.
〔고철 심장을 가진 핏덩어리한테 자아라니!〕
'컴퓨터 인공지능 수준이다. 기초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정도야.'
〔연금술이라는 분야에 대해 작은 인간들의 재주라고 생각한 것이 부끄러워지는구나.〕
오만하기로 정평이 난 티탄의 수장은 자신의 과오를 쉽게 인정했다.
그만큼 유진과 신준석이 빚어낸 골렘을 보고 놀랐다는 방증.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건 필멸자에게 허락된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크로노스의 반응이 생각보다 뜨겁네.'
유진은 평소처럼 놀리기보다 크로노스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동업자님. 바로 접경지역에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 뽀시래기 팀 기다려야지."
"그러면 여기 계시는 동안 골렘 연구 좀 하겠습니다."
크로노스와의 대화에 집중하는 동안, 신준석은 방독면과 장갑까지 챙겨왔다.
"적당히 해라. 제독 장비도 완벽하지는 않으니까."
"무리하게는 안 할 겁니다."
"거울 좀 봐라. 내가 믿게 생겼나."
두 눈 벌게져서 말하는데 퍽이나 신용이 가겠다.
왠지 신준석에게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여기서 볼 일은 끝난 게로구나.〕
'일단은 그렇지?'
〔그럼 만신전으로 가자꾸나.〕
'만신전이라면....'
〔짐이 그대의 정성과 노고를 갸륵하게 여겨 새로운 힘을 부여하고자 하니 거부하지 말라.〕
크하하하핫-!
저거 보소.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 걸 어떻게 참았는지 몰라.
유진은 피식 웃었다.
37화 나는 성자다(1)
만신전에 도착한 유진은 팔짱을 낀 채 크로노스의 별을 관찰했다.
전보다 미묘하게 강해진 별빛.
'내 업적으로 격을 올리는 성좌라.'
썩어도 준치라고.
크로노스가 단순히 가호만 주는 게 아닌, 자신을 성자로 임명함으로써 실리를 취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더 강한 가호.
그리고 신성 주문을 얻으면 유진에게는 이득이고.
크로노스도 제대로 된 성좌로서 복귀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득인 셈이다.
'이번에는 무슨 신성 주문을 받으려나.'
[신성 주문 - 거인의 힘이 추가됩니다.]
◎스킬
▷거인의 힘
분류 : 신성 주문
생명력을 소모하여 완력을 크게 증가시켜주고 육신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크하하하핫! 어떠느냐. 짐이 부여한 새로운 능력이!〕
'시답잖은 주문이군.'
〔뭣이?!〕
불 같이 화를 내는 크로노스.
유진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뒷말을 이었다.
'거인의 힘이라니. 신성 주문 이름부터 너무 노골적이잖아.'
잊지 말자.
크로노스가 언데드 쪽 성질의 주관자가 되었다고 해도 본질은 티탄이다.
거인의 대명사 급 단어로 자리매김한 단어.
'나한테 도움 될 만한 스킬을 만들어야지. 누가 자기만족하래?'
〔무엄하도다. 짐을 상징할 만한 신성 주문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무능 성좌가. 쓸모없는 걸 만들다니.'
유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크로노스가 옛 영광을 모두 저버렸다 한들, 본질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신대(神代)의 거인.
우라노스의 양물을 잘라내어 왕위를 빼앗은 찬탈자이자, 티탄의 시대를 연 위대한 거신이다.
'거인의 힘도 그래서 튀어나온 거겠지.'
크로노스의 존재력과 '죽음을 거스르는' 영역을 섞어서 만든 신성 주문.
거인과 불사의 영역을 겹쳤으니.
버프 개념 주문인데도 대상의 생명력을 깎는 기묘한 스킬이 탄생했다.
'아스가르드 성단의 버서크도 비슷하긴 하다만.'
생명력을 깎지만 활력을 올려준다, 라.
완전 도핑 아닌가?
크로노스는 유진의 격한 반응에 기세가 팍 꺾였다.
〔지, 짐이 선사한 주문이 그렇게나 엉망진창이란 말인가.〕
'생명력 소모가 전제잖아. 파프너 같은 애들한테는 걸어줄 수도 없어.'
언데드한테 생기 같은 게 어디 있나?
죽은 자들의 기운인 영력으로 일으킨 망자들인데.
완력을 얼마나 늘려줄지는 모르겠지만, 언데드가 주력인 유진한테는 쓸모가 많지 않았다.
흐음.
턱을 만지작거리던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쓸 만할지도.'
〔감히 짐에게 싸구려 동정을 던지는 게냐?〕
'라이프 드레인으로 페널티 상쇄가 가능할 거다.'
생명력을 강탈하거나 불어넣는 신성 주문.
먼저 라이프 드레인으로 생기를 보충해준 후에 거인의 힘을 연달아 사용하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좀 귀찮지만 말이야.'
유진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버프 하나 걸어주려면 치유 주문이 선행되어야 한다니.
사용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아니지. 굳이 대상을 언데드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나.'
크로노스의 대리인.
[백야의 성자]가 되면서 직업군도 신관으로 변했다.
네크로맨서가 아니라 신관으로 활동할 일이 생기면 유용할지도 모르겠군.
부정한 축복은 음차원의 마나, 그러니까 영력을 기반 삼는 거라 헌터에게 쓰면 디버프로 작용하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이더냐?〕
'응. 쓸모없다는 말은 취소할게.'
〔크하하하핫!!! 역시 짐의 안목이 옳지 않더냐.〕
예예. 그러시겠죠.
거인의 힘이라. 유진은 좁아졌던 시야를 반성했다.
'신관으로 얻은 능력도 활용해야지.'
이번 생은 전보다 선택지가 훨씬 늘어났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강화한 신체능력 덕에 창법도 배우고.
신성 주문까지 쓸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인식의 폭을 넓혀야겠어.'
수중의 패는 많을수록 좋다.
로마노프 가문.
전 세계의 흐름을 좌우하는 7대 명가 중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막강한 세력과 겨루려면 쓸 수 있는 건 모두 동원해야 한다.
부웅-!
'왜 신호를 보내는 거냐?'
〔짐이 아니니라.〕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했더니, 회중시계가 아니라 휴대전화가 보내는 신호였다.
발신자는 마담.
괜찮은 영약을 벌써 구하기라도 한 건가.
'역시 능력 하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신준석과 마찬가지로 유능한 파트너.
음지와 양지를 통틀어서 정보에 능한 인물은 많지 않다.
"벌써 구한 건가."
-호호호. 다짜고짜 본론으로 넘어가는 건가요?
"그럼 안부인사라도 할까."
-사양하겠어요. 당신이 인사치레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썩 유쾌하지가 않네요.
내가 뭘 어쨌다고.
유진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마담이 본론을 꺼냈다.
-마침 괜찮은 의뢰가 들어왔답니다. 보상은 인형설삼이고요.
사람을 닮은 산삼.
자연지기 중 냉기만을 축적하여 음차원의 힘과 궁합이 맞는 고등급 영약이다.
"인형설삼이 보상이면 보통 의뢰가 아니겠는데."
-맞아요. 성천 기업 회장이 의뢰주랍니다.
성천 기업.
대기업은 아니지만, 중견에 속하는 회사로 마석 응용 및 화학 쪽에서 큰 입지를 지녔다.
'국내에서는 연금술 장비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지.'
그만한 회사에서 제시한 의뢰라.
"의뢰 내용이나 들어보지."
-회장님의 막내 따님이 목내이병에 걸렸더라고요.
목내이병.
정식 명칭은 '근육수축경화증세'으로 중국에서 처음 발견된 병이다.
병에 걸리면 온 몸의 수분이 쭉쭉 빠져나가고 근육은 말라 비틀어져서 미라처럼 바싹 마르게 된다.
포션이나 신성 주문도 증세를 완화시키는 게 고작.
병에 걸리는 원인도, 치유 방법도 알지 못해서 신의 저주라고까지 불린다.
"그걸 낫게 해주면 되는 건가."
-호호호. 가능하시겠어요?
"시도해봐서 손해 볼 건 없잖아. 그럼 해봐야지."
-당신이 치유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알선한 의뢰인데 긍정적으로 말해줘서 다행이네요.
은하수 펍 습격 때 마담을 치유해준 일.
그걸 기억해서 영약 의뢰까지 연결해주다니, 작은 부분도 놓치지를 않는군.
마담에게서 의뢰 일정을 받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계약자여. 방법은 있느냐?〕
'방법을 몰랐으면 의뢰를 받지도 않았지.'
목내이병의 발병 원인은 수년 뒤에 밝혀진다.
일반인이 고밀도의 마나를 접하면 근육에 이상이 발생.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육체가 공기 중의 마나에 자극을 받아 수분을 토해내는 것이다.
〔공기 중에 있는 마나가 원인이라.〕
'대격변 이후에 생긴 병이거든.'
〔그리 자신만만한 것을 보면 해결방법도 알고 있다는 말이로구나.〕
'미래에는 전용 치료 캡슐을 만들었어.'
인위적으로 마나 진공 상태를 만들고 특정 영약을 농축한 액기스를 전신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가격은 비쌌지만 확실하게 치유가 가능했다.
〔현 시대에는 캡슐이 없지 않느냐?〕
'어떻게든 흉내 내야지.'
인형설삼.
마침 파프너의 경지를 올릴 생각이었는데 잘 됐어.
드래고니안 사체의 마력 총량을 올리려면 음기를 품은 영약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유진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
수원 인근에 위치한 전원주택.
"이쪽으로 오시죠."
경비의 안내에 따라 정원을 가로질러 응접실까지 왔다.
옆에 선 신준석은 불안한 기색으로 주위를 관찰하는 중이었고.
중개역인 마담은 흥미롭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겁먹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예예."
"이것도 인연인데, 명함이라도 주고받을까요?"
마담은 오른손을 내밀어서 신준석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끌었다.
"아...."
쩍 벌어진 신준석의 입.
보기 드문 미인이 친절하게 말해주며 눈웃음을 치고 있으니 그대로 넋이 나가버렸다.
중견기업 회장 본다고 하니까 긴장할 땐 언제고.
'으휴. 못난 녀석.'
유진은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저, 저, 저. 유진 님하고는 무슨 사이인지."
"사업 파트너랍니다. 신준석 연금술사 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제 이야기를요?"
"호호. 국내 포션 개발 1인자에 연금술 재능도 아주 뛰어나다고 하시던걸요."
"하, 하하하하. 과장이 있지만 맞습니다!"
아이고.
홍조까지 띄운 게 아주 볼 만하군.
가만있으면 중급 포션 레시피까지 술술 불어버릴 것 같은 기세다.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유진을 향해 마담이 한쪽 눈을 찡끗 감았다가 떴다.
"의뢰만 던져주고 안 올 줄 알았다."
"그건 성천 그룹 회장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두 분은 제가 보증해드리는 거랍니다."
"연이라도 있나 봐?"
"조금, 은요."
성천 기업이 동네 슈퍼마켓도 아니고. 딸의 치료를 위해서라지만 어중이떠중이를 주택에 들일 리가 없지.
아라한 길드에서 유진을 주목하고 있지만, 몇 주 전 길드 내에서 벌였던 대련은 외부에 비밀로 부쳤으니 예외다.
'마담이 성천 기업과 연이 있었다는 건 몰랐군.'
〔회귀자인 그대도 모르는 게 있느냐?〕
'회귀가 만능은 아니야. 나라고 해서 모든 걸 꿰뚫고 있진 않다고.'
거울 사냥꾼에게 동료가 있었다던가 말이지.
생각해보면 마담 오현정의 과거는 지독하리만큼 알려지지 않았었다.
바텐더로 있는 노인도 그렇고.
6성의 실력자가 펍에서 칵테일을 제조한다?
그라운드 제로를 삼분한다는 붉은 거미의 수장도 현재 6성이다.
'신준석을 조사한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중견 기업 회장의 막내딸을 치료하는 일이다.
마담이 과거의 인연까지 밝히면서 의뢰를 책임진다고 했으니, 뒷조사는 모르는 척 넘어가야겠군.
응접실에 제공된 차를 홀짝이고 있을 때.
덜컥-!
양쪽으로 젖혀진 문 사이로 정장을 입은 중년 사내가 들어섰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사내.
손에는 오망성을 새긴 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데, 강한 마력 파장이 흘러나왔다.
중년 사내가 응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깨를 누르는 중압감.
'7성 마법사는 역시 다르군.'
성천 기업 회장으로 역임 중인 진성현은 국내에서 얼마 없는 7성의 마법계 헌터이기도 했다.
유진은 신준석의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힉."
소리를 크게 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해줘야겠다.
"회장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7성 마법사의 기파를 흘려보낸 마담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천유진입니다."
"시, 신준석입니다."
두 사람을 본 체 만 체한 중년 사내는 이내 마담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래간만이구나."
"네. 회장님도 강녕하셨지요?"
"예전처럼 아저씨라고 불러도 된단다."
"사적인 담소는 천천히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참. 내 정신 좀 봐라."
사내는 흠- 짧게 헛기침을 했다.
"진성현이라고 하오."
"저희를 만나주신 건 의뢰를 맡기겠단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당신들이 알지 모르겠지만, 치료를 목적으로 나한테 접근한 사람들이 꽤 많소."
진성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최근에서야 병명이 붙여질 만큼 알려지지 않은 병.
성천 기업과의 연.
아니면 보상 자체를 노리고 몰려든 사람들만 해도 트럭 하나를 채울 정도였다.
"다들 입만 살아있었지."
진성현이 내뿜는 기파가 한층 진해졌다.
수년 뒤에나 알려진 목내이병의 치료 방법.
마음에 품은 희망이 몇 번이나 무너진 사람의 모습이다.
"난 딸이 더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소."
"치료를 성공시키면 그렇게 될 겁니다."
"자신만만하군. 내가 당신을 믿고 치료를 진행시켜도 되겠습니까?"
"대안이 없다면 믿으셔야죠."
협박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요. 아저씨.
마담의 보증이 있다고 해도 명성 하나 없는 두 사람을 치료 목적으로 불러들였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
치료를 못 하면 해코지라도 할 기세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유진은 목내이병의 치료 방법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유진의 태도를 본 진성현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
"...잘 부탁합니다."
강경한 모습을 꺾더니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환자에게 안내해주시죠."
"절 따라오십시오."
유진 일행은 진성현의 뒤를 따라 전원주택 안쪽으로 들어갔다.
38화 나는 성자다(2)
"동업자님. 속은 괜찮습니까?"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
"간이 너무 부어서 배를 터트리지 않을까 걱정돼서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신준석.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갈 때 숨도 제대로 못 쉬었는지 얼굴이 새파래져 있었다.
"회장은 실망할까 두려워서 역정을 내는 거다."
"그렇겠죠. 치료에 모두 실패했으니."
"난 치료를 해낼 자신이 있는데 무서워 할 이유가 없잖아."
태평한 유진의 모습에 신준석이 혀를 내둘렀다.
"저도 회장님이 진노하는 모습은 거의 못 봤는데. 그걸 버티시네요."
"뭐, 7성 마법사의 위압감은 대단하네."
2성의 영력으로는 몸을 숙이지 않은 것이 고작이었다.
쩝.
회귀 전에는 7성 따위,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는데 말이야.
〔크하하핫! 짐에게도 고개를 뻣뻣이 들었는데 고작 작은 인간 따위한테 숙이면 안 되느니라.〕
'그렇게 말하니 한 번 정도는 숙여주고 싶은걸.'
〔쯧, 명색이 짐의 대리인이라는 자의 말버릇 하고는.〕
무능 성좌님은 닥치고 계십쇼.
"환자는 여기에 있소."
진성현은 고풍스러운 장식으로 꾸며진 문 앞에 섰다.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달칵-.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진한 마력.
[리커버리]
[마나 레스트]
[대미지 리콜]
"마법진은 회장님께서 직접 설치하셨군요."
"맞소. 딸아이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기 위함이었지."
"죄송하지만 이 마법진들은 모두 거둬주십시오."
"왜 그런 지시를?"
"단기적으로 보면 따님의 상태가 호전되어 보여도, 오래 가면 목내이병을 더 진행시킬 뿐입니다."
목내이병의 정식 명칭.
근육수축경화증세는 마력이 근육을 자극시켜서 수축시키는 질병이다.
마력으로 생기를 채워주고 몸의 부담까지 줄여주면 단기간에는 효과가 있어 보이겠지.
'회장의 성취가 높은 게 오히려 독이 되었군.'
진성현은 마담과 유진을 힐끗 보더니 떨떠름한 기색으로 방에 설치한 마법진들을 모두 해제했다.
"이분이군요."
바짝 마른 채 숨을 헐떡이는 여인.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눈망울에는 힘겨움과 절망이 아른거렸다.
"아, 아빠."
"세령아. 힘들게 말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렴."
"이, 분, 들은."
"너를 치료해주실 분들이란다. 현정이가 직접 보증한 사람들이야."
마담의 본명이 나오자, 여인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어, 언."
"가만히 있어. 곧 괜찮아질 거야."
예상했지만 두 사람은 역시 구면이었다.
성천 기업 회장도 아는 사이이니 이상할 건 없었다.
'단순히 의뢰 보상만 가지고 나를 부른 건 아니었겠어.'
마담한테 뜯어낼 게 하나 더 늘었군.
"참. 생각해보니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군."
"말씀하시죠."
"치료사님. 헌터인 건 알겠는데 직업군이 뭔지 알 수 있습니까?"
진성현은 유진을 마법계, 혹은 신관 클래스라고 짐작했다.
병을 치료하러 왔는데 무투계이진 않을 테니까.
"성자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직업을 말한 유진.
순간 방 안에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마냥 적막감으로 물들었다.
"성자라니!"
"도, 동업자님. 성자였습니까?!"
진성현과 신준석은 비명을 지를 것처럼 말했고.
마담도 입을 벌리진 않았지만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느 성단, 아니지. 성좌의 대리인이십니까?"
"별빛도 약한 성좌라서 모를 겁니다."
〔뭣이! 그대는 짐을 변방 잡귀 취급하는 게냐!〕
크로노스의 항의는 무시했다.
맞잖아. 변방 잡귀.
'이젠 무능 성좌보다 변방 잡귀라고 불러줘야겠네.'
크로노스가 들으면 대경을 칠 생각을 한 유진이 뒤이어 말했다.
"제가 모시는 성좌께 맹세코 세령 양을 치료해드리죠."
"잘 부탁드립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한 기색을 떨쳐내지 못했던 진성현은 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이러면 진즉에 성자란 것을 밝히지. 왜 물어보기를 기다렸느냐?〕
'내 입으로 성자라고 하면 무게감이 퍽이나 있겠다.'
성자를 직업으로 가진 헌터는 극소수다.
단순하게 가호를 내리는 걸 넘어서 대리인으로 선정하는 일.
해당 성좌의 업과 존재력도 어마어마하게 소모하기 때문에 성자를 두지 않은 성좌도 많았다.
"그럼 시작할까. 동업자 양반."
"알겠습니다."
신준석은 C급 마석 네 개를 방의 꼭짓점 위치에 놓았다.
[마력 회로 각인]
[마력 순환]
[마력 초순환]
[연금술식 - 마나 서킷]
각 마석 사이를 연결하는 마력 회로를 새긴 후에 연금술식을 발동한다.
대기 중에 분포된 마력을 한데 모으는 술식.
본래는 연금술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지만.
이번만큼은 목적이 달랐다.
"동업자님. 바깥으로 내보내면 되죠?"
"어. 문 쪽으로 설치해."
마지막으로 방 입구에 마석 하나를 더 놓은 신준석이 회로를 추가로 새기고는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 유도]
솨아아아-!
방문턱에 걸쳐놓은 마석에서 푸른 입자가 마구 솟구친다.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한 고농도의 마력이라니."
"회장님이 새긴 마법진이 그만큼 엄청난 마력을 모아놨다는 거죠."
"근데 왜 방에서 마력을 방출하는 게요?"
"마력이 아예 없는 진공 상태로 만들 겁니다."
회귀 전에는 캡슐에 넣어놓기만 해도 진공 상태가 유지되었지만.
치료기계가 개발되지 않았으니 연금술로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훌륭한 동업자가 있어서 시도할 수 있는 거지.
유진 혼자였으면 목내이병을 치료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10분이 지나자 빛을 잃는 마석.
"교체 한번 하겠습니다."
"3번까지는 해야겠어. 마력 농도가 생각보다 안 떨어지네."
방에 쳐놓은 마법진의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마법진은 해체했어도, 발동의 근간인 마력이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졸지에 치료를 훼방한 진성현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되었군. 좀 더 고생해줘."
"알겠습니다. 동업자님."
마력 진공 상태.
건조한 곳에 들어온 것처럼 피부의 솜털이 올올이 선다.
이런 곳에서 오래 있으면 헌터의 체내에 깃든 마력이 대기 중으로 유출될 것이다.
[백야를 사용합니다.]
[영력 → 성력]
자.
이제 네크로맨서 말고 성자로 일할 시간이다.
손끝에 모인 성력이 크게 일렁였다.
*
목내이병 치료의 첫 단계는 신준석의 협조로 통과되었다.
'이제 부족한 생기를 채워줘야 한다.'
마력이 한 톨도 없는 상태에서 특수한 영약을 전신 모공에 넣으면 끝.
회귀자인 유진도 목내이병 치료약을 만드는 방법을 머릿속에 저장하지는 않았다.
〔하면 무슨 수로 치료할 셈이더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야지.'
유진은 진세령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거인의 힘을 사용합니다.]
[주문 대상의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근력이 40% 상승합니다.]
40% 증가라. 꽤 준수한 수치잖아.
처음 사용하는 이유가 목내이병 치료라는 게 아이러니지만.
질병을 치유하는 건 신관이 해야 할 일이니.
'참 적응이 안 되네.'
유진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진세령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안 그래도 바닥 직전인 생명력이 고갈됨과 동시에 완력이 강해졌으니,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듯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성자님. 이게 무슨 일이오?!"
"조금 기다리십쇼."
다 설명하려면 길뿐더러, 생명력을 떨어트리는 신성 주문을 썼다고 하면 멱살 잡혔을걸.
성자라고 밝히길 잘했어.
아니었으면 회장의 눈이 돌아가서 무슨 짓을 벌였을지 모른다.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단전에 축적한 생기를 진세령의 몸에 전달.
고갈되어가던 생기가 채워지자 들썩거리던 여인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로구나.〕
'이렇게 자극을 줘야 굳었던 몸이 활성화 될 거다.'
치료받는 본인은 죽을 맛이겠지만 살고 싶으면 참아야지.
유진은 두 주문을 번갈아가면서 사용했다.
'모아놓은 생명력이 다 떨어졌네.'
〔그럼 계약자의 생기라도 줘야겠구나.〕
뽕-!
신준석이 만든 중급 포션을 입에 물고는 꿀꺽꿀꺽- 내용물을 목으로 넘겼다.
〔거기까지도 이미 계산을 했더냐?〕
'물론.'
포션으로 생기와 체력이 회복되는 족족 전달.
여인의 몸에 생기가 차오르면 거인의 힘을 써서 활력을 채워주는 동시에 소진시켰다.
땡그랑-.
빈 포션 병이 하나둘 바닥에 나뒹굴고.
단기간에 많은 생기를 짠 후유증으로 유진의 눈이 퀭해졌지만.
멈추지 않고 포션을 계속 목으로 넘겼다.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아, 아아아아."
진세령은 마른 비명 대신 탄성을 내질렀다.
'이때다.'
마지막으로 [거인의 힘]을 사용.
손을 떼고는 진세령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관찰했다.
자극받은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고.
여태 들이부은 생기가 펌프질하듯 스며들면서 굳은 부분을 모두 풀어냈다.
"회장님. 리커버리를 써주시겠습니까?"
"아, 알겠네."
자연의 마나로 체력을 회복시키는 마법.
마법진으로 상시 발동했을 때도 차도가 없었던 진세령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얼굴에 감도는 활기.
창백했던 볼 위에 불그스름한 혈기가 돌고.
마른 입술이 립밤을 바른 것마냥 촉촉하게 변했다.
"아, 아빠."
"세령아!"
딸을 부둥켜안는 진성현.
유진은 느리게 뒷걸음질해서 밖으로 나왔다.
"동업자님. 저도 나가야 합니까?"
"부녀 해후의 순간을 방해할 거면 쭉 있던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잖아요."
신준석이 부랴부랴 나오고, 유진은 곧바로 문을 닫았다.
*
응접실로 돌아온 유진 일행.
"어으, 피곤하다."
눈 아래에 기다란 음영이 드리운 유진.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오른팔을 주물럭거렸다.
'내 생명력을 타인에게 넘긴 건 처음이다.'
라이프 드레인은 치유 목적보다 능력치를 상승시킬 용도로 훨씬 많이 사용했다.
괴물한테서 빼앗은 생기가 늘 단전에 충만했건만.
목내이병을 치료하느라 모은 생기가 거덜 났으니, 자신의 생명력으로 대체해야 했다.
'가능은 하군.'
생명력을 능력치로 치환하는 거나 치유 효과 자체는 뛰어나지만 말이야.
참 괴이한 신성 주문이다.
저벅- 저벅-.
힘 있는 발걸음 소리가 응접실 쪽으로 향한다.
진성현은 눈이 붉어진 채로 문을 젖히고는 유진의 반대편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따님이 잘 버텨낸 거죠. 기력이 많이 쇠했을 테니 보양식으로 잘 먹이십쇼."
"성자님께서 안 계셨으면 세령이는...."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시는 진성현.
"의뢰를 수행한 것뿐입니다."
"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집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아이가 잘못됐으면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을 겁니다."
진성현은 유진에게 존대를 했다.
딸의 생명의 은인.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마음에 더 큰 파장이 일어났다.
'이런 건 익숙하지가 않네.'
유진은 볼을 긁었다.
"보상. 곧바로 수령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진성현은 시커먼 가죽 케이스로 된 가방을 내밀었다.
[인형설삼]
등급 : 유니크
분류 : 영약
제한 : 4성 이상
내구도 : 10/10
사람의 모습을 한 설삼입니다. 극한의 음기를 담고 있어서 관련된 마나 심법이나 속성을 다루는 자가 복용하면 엄청난 마력 및 신체능력 강화가 가능합니다.
은은하게 서리가 끼어 있는 산삼.
"진짜군요."
"딸의 목숨을 걸고 협잡을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진성현은 가방을 닫고는 유진에게 손잡이 방향을 돌려서 주었다.
"한 가지 제안 드릴 것이 있습니다."
"목내이병 치료 방법 말입니까?"
"예."
"국내에 환자가 좀 있는 걸로 아는데. 제가 일일이 찾아가기는 어려워서요."
빈말이 아니다.
신준석을 대동해야 마나 진공 상태 유지가 가능했고.
연거푸 포션을 들이마셔야 목내이병이 치유될 때까지 버틸 수 있다.
인형설삼 같은 고등급 영약이 흔한 것도 아니고.
'치료를 조건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럼 네크로폴리스를 너무 오래 비우게 된다.
신준석의 연구에도 차질이 생길 터.
더 시간을 투자하면 주객전도가 될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더 권유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군요."
"대신 성천에서 치료 장비를 만드시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목내이병은 일종의 마나 중독증입니다. 생기를 과하게 불어넣어서 강제로 자극시키는 원리죠."
신준석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왜 그런 비밀을 술술 이야기해주냐는 눈빛.
"성자님. 만약 치료 장비 개발 및 상용화를 마치면 로열티로 10%를 드리겠습니다."
로열티 10%.
생산 단가부터 유통까지 생각하면 치료 장비 판매액에서 순수입 중 상당수를 유진에게 주게 된다.
"회사 입장에서는 꽤 출혈이 클 텐데요?"
"전 은인께 그 정도도 못해드릴 만큼 배포가 작지 않습니다."
크흐흐흐.
인형설삼도 좋지만 중견 기업 회장과 연을 만들다니.
뜻밖의 행운에 유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39화 전력 강화(1)
"부산물 처리. 정기적으로 도와드릴게요."
전원주택에서 나오자마자 마담이 툭, 말을 던졌다.
"아는 동생 살려줬는데 그게 끝이야?"
"정당한 의뢰의 대가는 회장님이 치르셨잖아요."
"야박하네."
유진은 크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동업자 양반도 수고했어."
"헷. 덕분에 신기한 경험 했습니다."
"영감이 막 샘솟나?"
"골렘 연성 때 깨달음도 아직 정리를 못했는데 큰일이군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신준석은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적었다.
'뭐라고 쓴 거야?'
이 양반 보소. 지독하게 악필이군.
자체적으로 암호문을 만드는 기묘한 재주에 혀를 내둘렀다.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보니 골렘 연성 때 발생했던 마력 파장과 강화 회로의 반응 관계 등 온갖 데이터를 공식으로 만들어놓았다.
'지금은 마력 방출식을 적고 있군.'
나중에는 숨 쉰 걸로도 영감을 얻었다고 할 기세구먼.
천재란 족속들은 다 이런 거겠지.
〔작은 인간 주제에 9번째 성위를 달성한 그대도 천재의 범주로 포함되지 않느냐?〕
'어. 나도 좀 잘났지.'
〔쯔쯧. 언제쯤이면 겸손함을 배울는지.〕
크로노스의 타박을 한 쪽 귀로 흘리고는 시트에 머리를 눕혔다.
잠시 쉬었다고 해서 피로가 확 가실 리 없잖아.
"도착할 때까지 건들지 마."
그 말을 남기고는 두 눈꺼풀을 닫았다.
*
[KM은행 - 1,437,580,110]
14억.
부산물과 마석을 처분한 금액이다.
회귀 전에는 10억 단위로 벌기까지 수년이나 걸렸는데.
참, 감개가 무량했다.
"다른 영약도 구해볼까요?"
"인형설삼으로 충분해."
음기는 망자와 궁합이 잘 맞는다.
파프너가 섭취하면 영약의 힘을 온전히 소화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터.
당장 쓸데가 없는 영약을 구하기보단 투자해야지.
"동업자 양반. 받아."
"일, 십, 백, 천, 만... 이게 다 얼마입니까!"
"앞으로 더 벌어다 줄 테니 자금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해봐라."
"감사합니다. 충성!"
신준석은 유진의 구둣발을 핥을 기세로 헉헉거렸다.
우리의 스펙터클했던 첫 만남은 머릿속에서 이미 지워버린 듯한 태도.
"연금술사님."
"네!"
"저도 투자를 할 수 있을까요?"
"안 돼. 누굴 넘보려고 해."
유진은 마담의 투자 제안을 곧바로 거절했다.
"호호, 저는 당신에게 말씀드린 게 아닌걸요. 대답은 신 연금술사님께 듣겠어요."
"난 동업자거든?"
마담.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았군.
투자를 유치하는 건 좋지만, 파이가 커졌을 때 나눠 먹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속에 구렁이 몇 마리를 키우는 마담하고 엮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고려해보겠습니다!"
"아."
유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파주 공방으로 돌아오니 뽀시래기 팀이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다녀오셨습니까."
"고대의 시험장은 모두 통과했나?"
"예!"
호오.
유진의 눈가에서 의외라는 빛이 스쳐지나갔다.
"세 사람 모두 용케 버텼군."
"형님이 알려주신 대로 했을 뿐임다!"
이성민의 대답에 유진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이야 통과할 줄 알았지만 얘까지 드래고니안한테서 버틸 줄이야.'
강민호와 강민영은 고유 특성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동일한 성위에서는 이미 성좌의 가호를 받는 헌터를 빼면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
이성민은 그 정돈 아니란 말이지?
"넌 어떻게 통과했나?"
"형님이 알려주신 대로 공간 능력을 활용했슴다."
"공간?"
"방패를 최대한 넣었슴다."
이성민의 앞에 생긴 균열.
고유 특성 [공간]으로 만든 아공간 안쪽에서 회색을 띤 물건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래고니안의 공격이 닿기 직전에 공간을열었군?"
"옙! 맞슴다!"
유진한테 마력 응용을 배우면서 아공간 저장 용량도 수배로 늘어났다.
50kg.
이성민은 시험 내용을 듣고 매직 등급 방패를 허용 가능한 만큼 사서 아공간에 보관했다.
'거기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이 녀석.
제법이잖아?
거울 사냥꾼 남매와 함께 키우는 맛이 있겠어.
신준석은 대기 중인 뽀시래기 팀과 유진을 번갈아보더니.
"접경지역으로 다시 가십니까?"
"어."
"그럼...."
"블러드 골렘도 챙겨가야지."
"안 돼!!!!"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비명을 지른 신준석은 좌절한 듯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저씨. 괜찮아요?"
강민영이 안쓰러운 듯 바라봤지만 유진은 손을 휘휘 저었다.
"엄살 부리는 거다."
"내 연구! 새로운 영감이 팍팍 떠오르고 있는데에에!!!"
"소화할 거 많다며. 그거 먼저 해라."
중급 포션 양산 공장.
골렘을 연성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연금술.
분석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할 땐 언제고.
칭얼거리는 신준석을 둔 채. 일행은 다시 접경지역으로 들어갔다.
[한계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며칠 동안 강행군 끝에, 뽀시래기 팀 전원이 2성까지 오른 건 부차적인 수확이었다.
*
[너무 늦었다!]
네크로폴리스에 도달하자마자 떨어진 불호령.
파프너의 텅 빈 동공에 자리 잡은 푸른 불꽃이 거세게 흔들렸다.
"늦긴 뭘 늦어?"
[이렇게나 오래 걸린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며칠 안에 온다는 약속도 안 했지."
[참으로 무정한 주인이다. 괴물이 가득한 무법천지의 땅에 날 홀로 버려두다니!]
전생 6성의 실력자가 그렇게 말해도 설득력이 없잖아.
유진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자. 받아라."
[선물로 풀어질 마음이 아니다.]
"인형설삼인데?"
갑자기 뚝- 멈춘 파프너의 몸뚱이.
마치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일렁거리던 푸른 불꽃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 인형설사아아암?!!!]
"너하고 궁합이 잘 맞을 거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구한 건가. 주인!]
"누구 좀 치료해주고."
[믿기지가 않는군. 주인이 신관 노릇을 했다는 것이.]
변방 잡귀랑 똑같은 반응이네.
"안 먹고 싶으면 말아라."
유진은 파프너를 약올릴 겸, 느린 속도로 가방을 뒤로 뺐다.
근데 웬일인가.
충분히 반응할 정도의 속도였는데 파프너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영약 안 필요해?"
[흠. 그게 말이다. 주인. 실은 영약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파프너의 사념.
유진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주인 일행이 떠난 뒤에도 네크로폴리스를 노린 괴물들이 꽤 있었다.]
"그랬겠지. 여긴 접경지역이니."
[한데 말이다. 실수로 몬스터의 마석을 입에 댔거든.]
파프너의 사념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실수 맞냐?"
[솔직히 말하마. 왠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맛있는 냄새가 나더군.]
"마석에서 냄새가 났다, 라."
[그래서 먹었다. 입에 넣는 순간 녹아버리더니 뱃속으로 들어가더구나.]
마석을 섭취하는 언데드라고?
네크로맨서의 정점에 도달했던 유진도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거기서 끝은 아닐 거잖아."
[마력 총량이 늘었다.]
유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렇게나 쉬운 방법일 줄이야.'
엘드리치 드래곤.
드래고니안의 사체를 발판 삼아 만든 성장형 언데드.
변칙과 꼼수로 만들어서 불완전하다는 명칭이 붙었었고, 유진도 전생에는 만들지 못한 언데드라서 정보가 모자랐다.
'여러 전투를 경험해도 한계를 넘지 못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하게 접근했어야 했나.
유진은 머리를 쓸어 넘기곤 킬킬거리며 웃었다.
마력 부족.
텅 빈 드래곤하트를 채우는 게 성장의 조건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럼 인형설삼도 큰 도움이 되겠네."
[지금은 마석만으로 충분하다.]
"왜?"
[현 수준으로는 영약에 담긴 마력을 전부 거두지 못할 것 같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뭐, 당장 섭취하지 않는 건 아쉽지만 성천 기업과 연을 만든 걸로 만족해야겠지.
"어쨌든 답을 찾아서 다행이네."
[괜찮겠나?]
"뭐가."
[내가 마석을 먹으면 주인의 수입이 줄어들잖아.]
아.
파프너가 왜 마석 이야기를 빙빙 돌리나 했더니 진짜 이유가 따로 있었군.
"돈은 결국 수단이야."
[수단?]
"더 강해지기 위한 길 중 하나지."
돈으로 시간을 산다고 하잖아?
돈이 많으면 원하는 것을 빠르게 취할 수 있다.
그래도 정말 필요한 건 돈만 가지고는 얻을 수 없거든.
"내 빛나는 미래를 위해서는 상대해야 할 적이 아주 많아."
국내만 해도 아라한 길드가 있고.
회귀 전 유진의 숙적이었던 로마노프 가문도 있다.
방조한 7대 명가 전체도 암묵적인 적.
"마석 좀 팔아서 얼마나 번다고. 네가 강해지는 게 훨씬 중요하다."
[주, 주인!]
감격한 파프너가 유진에게 달려왔다.
[이해해줘서 고맙다! 주인!]
"야, 야! 그렇게 힘을 주면 내 장기가 으스러진다고!"
[맹세하마. 백골이 진토 될 때까지 주인을 위해 싸우겠노라고!]
"커흑."
한 줄기 비명과 함께 고개를 떨군 유진.
그제야 파프너는 과하게 힘을 줬다는 걸 깨달았다.
슬쩍 힘을 풀자 유진은 크게 심호흡하면서 머릿속에 산소를 공급했다.
'와. 세상에 두 번 죽을 뻔했네.'
〔크하하핫! 아주 걸작이구나. 제 하수인한테 짓눌려서 죽을 뻔하다니!〕
한껏 웃는 크로노스.
이번에는 유진도 반격할 말을 찾지 못했다.
"참. 조승철은 잘 있나?"
[시끄러운 망령 말이군. 저쪽에 있다.]
파프너는 방첨탑 끝을 가리켰다.
뾰족한 탑 주위를 쉴 새 없이 도는 희끄무레한 영혼.
망령 신세가 된 조승철이다.
"이리로 와라."
-키히히힛!
유진의 곁으로 날아온 망령.
〔한데 그 잡귀는 왜 두고 있는 게냐?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다만.〕
'오. 나도 큰 도움 안 되는 잡귀 하나 알고 있는데.'
〔짐을 능멸하려는 게냐!〕
'성좌님이라고 안 했는데?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나 봐.'
침묵하는 크로노스.
아까 폭소했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충분했다.
망령을 데리고 불경스러운 묘지로 이동. 아머드 스켈레톤을 시켜서 조승철의 사체를 땅 위로 꺼냈다.
'2성이 되었으니 새 주문을 익혀야지.'
연금술 분야하고는 별개로, 이미 전승 중인 분야의 지식도 추가로 머릿속에 새길 수 있다.
레이즈 데드.
분류 : 마법
등급 : D
영혼이 떠난 시체를 마법 유형 언데드로 제작합니다.
제작한 언데드의 질은 베이스가 된 사체의 능력과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결정됩니다.
레이즈 언데드에서 글자 하나를 뺀 주문.
글자 하나 차이라고 보기에는 결과물이 꽤 다르다.
[살점지배]로 망자의 살을 모두 발라낸 후, 영력을 손에 집중시켰다.
"내 부름에 답하라."
힘 있게 외치며 손에 응축된 영력을 해방.
뼈만 남은 조승철의 사체에 불어넣으니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났다.
[레이즈 데드를 사용합니다.]
[스켈레톤 메이지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10% 상승합니다.]
"역시 묻어놓은 효과가 있어."
불경스러운 묘지.
이 땅에 묻은 시체에 영력을 불어넣어 언데드로 되살리기 적합한 형태로 만드는 구조물이다.
묘지를 짓자마자 처음으로 묻은 게 조승철.
그 덕분인지, 회귀하고 100%를 넘지 못했던 강화도가 10% 더 올라갔다.
"강화해도 2성 수준이지만."
아머드 시리즈보다 월등히 떨어지는 스펙.
마법 공격에 특화되어 있긴 해도 같은 2성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호들갑을 떤 것 치고는 시시한 결과물이로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더 보여줄 게 남아있단 말인가.〕
'그렇고말고.'
〔자신만만하구나. 그렇다면 짐을 실망시키지 말거라.〕
유진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망령을 낚아챘다.
-키히히힛?
"얌전히 있어라."
손에 두른 영력으로 조승철의 망령을 압박.
벗어나지 못하게 눌러놓고는 스켈레톤 메이지의 머리에 쑤셔 넣었다.
'둘의 싱크로를 맞추는 거다.'
이 몸뚱이의 원 주인은 망령이 된 조승철이다.
하급 언데드에게는 영혼이 없지만.
그 혼백을 강제로 붙들어서 동조시키면 어떻게 될까?
흑암의 반지에도 기록되지 않은 지식.
'난 그걸 합일이라고 명명했다.'
유진의 영력이 조승철의 혼백과 망자의 파장을 고정.
희끄무레한 기류가 두개골 속으로 스며들더니.
[망자의 육신과 혼백이 일체화되었습니다.]
[새 주문 - '합일'이 추가되었습니다.]
[스켈레톤 메이지(조승철)이 제작되었습니다.]
-그겔!! 혼돈, 파괴, 망ㄱ...!!
텅 빈 동공에서 새파란 불꽃이 거세게 일렁였다.
40화 전력 강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