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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무당기협

1화

올해 나이 팔십 세.

참 철없이 겁 없이 오래도 살았다.

원래 소년은 나이는 먹어도 철들지 않는 법!

전에는 불로장생을 꿈꾸며 몸에 좋다는 것은 모조리 처먹으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도가 놈들은 등선을 해서 신선이 되기도 한다는데 나에게 그런 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십오 년 전인가?

나를 간악하다 욕하던 무당의 말코 도사 놈들이 있었다.

내가 왜?

인신매매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강도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쁜 짓 하는 놈을 구해 준 적도 당연히 없다.

도둑질한 놈, 산적 놈, 수적 놈.

안 잡히면 몰라도 제가 멍청해서 잡힌 머저리를 구할 리가 없잖은가? 파옥(破獄)? 언어도단이다.

그런데.

그들의 사파의 수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싸잡아 욕을 했다.

참을 수 없어서 화 좀 냈더니 정사대전이니 뭐니 하며 전쟁이 일어났다.

거창한 이름에 걸맞게 대규모 접전이 일어났으나 정작 나는 그곳에 없었다.

왜? 애초에 목표는 무당이었으니까.

다른 놈들이 싸우건 말건 무당으로 갔고, 세 개 궁을 불태우고 장문인과 장로들의 모가지를 모조리 뽑아 버렸다.

기껏 선심 써서 욕한 놈만 내놓으라 했는데 검부터 들이밀기에 그랬다.

그랬더니 비열하다, 간악하다, 치졸하다며 또 욕을 했다. 웃긴 놈들 아닌가?

어쨌거나 휴전은 했지만, 그로 인해 천년 도가의 성지였던 무당은 세(勢)가 약해져 구파의 말석까지 밀려났다고 했다.

뭐 나완 상관없는 일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 하지 않던가.

물론 원래 성향도 도사 놈들과는 맞지 않는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말을 내뱉는 위선적인 족속들....

상종은커녕 생각만 해도 두드러기가 돋아 오르는 것 같다.

후우, 어쨌든 시간이 갈수록 말짱해지는 정신 덕에 지나간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게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건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일생을 함께해 온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제자 녀석, 장로들... 나와 함께 지금의 사패천(邪覇天)을 이룬 믿음직한 녀석들.

그런데 천우명이 안 보인다.

좀 많이 모자라기는 해도 가장 충성스러운 녀석.

그러고 보니 나를 위해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겠다고 떠나서 아직 안 돌아온 건가?

있지도 않은 걸....

그냥 돌아오지.

그 녀석의 성격상 지금쯤 어느 산자락을 뒤지며 잡초나 캐고 있을 게 뻔하다. 약초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죽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가면 좋을 텐데.

여하튼 자꾸만 숨이 가빠지는 것이 이제 귀천(歸天)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당시에 나와 함께 시작한 놈 중에 나만큼 잘된 놈은 없었다.

일월마교, 정무맹과 함께 당금 무림을 삼분한 사패천의 주인.

사패천주 혁련무강.

그게 나의 이름이었다.

잘난 놈 배신하고, 못난 놈 짓밟고, 도와준 놈 등에 칼 꽂고....

배신과 배반을 일삼으며 승승장구를 거듭한 끝에 사파의 지존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비열하다 손가락질했지만, 우매한 것들이 뭘 알겠는가. 그 덕에 나는 치열한 세상 풍파를 이겨 내고 근 사십 년간 왕으로서 사파에 군림할 수 있었다.

원하는 여인은 언제든 안을 수 있었고, 비고에는 금은보화가 넘쳐 났다.

엔간한 문파 하나쯤은 손짓 하나로 날려 버릴 수 있는 최강의 권력자가 이 몸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어찌 사람이 되어서 하늘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갈 때 되면 가야지.

이젠 크게 미련도... 사실 좀 아쉽기는 하다.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비고에 쌓아 둔 돈이라도 몽땅 써 버리는 건데.

감히 내 몸에 칼침을 놓은 정파의 몇 놈은 손봐 주고 갔어야 했는데.

새로 들인 첩실 화양(華陽)이와의 뜨거운 밤도 아직인데!

하아....

한숨이 가쁜 숨으로 변해 입 밖으로 새는 것이 느껴진다.

믿음직한 수하들이 나를 향해 슬픈 얼굴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의 충성스러운....

"씨발, 왜 안 죽는 거지?"

충성....

"몸에 좋다는 걸 있는 대로 처먹어서 명줄이 잘 끊어지지도 않는 모양이군."

"개새끼. 지독한 새끼."

이 새끼들이?

"저 정신 연령 낮은 사악한 놈 때문에 죽도록 구른 걸 생각하면 눈물이."

욕설도 모자라 이제라도 뒈져서 다행이라며 눈물까지 질질 짜는 놈도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해 보겠습니다."

올해 예순을 바라보는 유일한 제자 놈이다.

저걸 제자라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해 주면서 키웠다니.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정말 소천주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암요."

"그래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는 그 멍청한 천우명 단주가 혹시라도 불로초를 진짜로 구해 올까 봐 매일 정화수까지 놓고 빌었다니까요?"

"그러니까요. 세상에 저런 패악 무도한 놈이 늙지도 않고 더 사는 꼴을 봐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어휴."

딴에는 소곤거리는 모양이지만 다 들린다.

"이제 우리끼리 잘해 봅시다."

모두가 제자 놈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분위기다.

차라리 빨리 뒈지라고 목을 조르지 그러냐!

나를 욕하고 손가락질하던 놈들의 기분이 이런 거였나. 이 비열하고 간악한 놈들.

뭐, 처음부터 이런 놈들이기는 했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고....

저 멀리 검은 옷을 입은 놈이 환영처럼 일렁거린다.

나를 마중 나온 저승차사가 틀림없다. 분가루라도 칠한 것인지 안색이 무척 창백한 놈이다.

하아, 그래. 가자.

더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현실의 사물들이 흐릿해지고, 저승차사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혁련무강....

중저음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첫 번째 부름.

그 부름이 세 번째가 되면 이승과의 연이 완전히 끊어진다 했던가?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없다. 더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눈이나 감....

"주~ 구~ 운!"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미염공(美髥公)처럼 멋들어진 수염을 휘날리며 침소 안으로 뛰어드는 반가운 인영.

철검단주 천우명.

불로초를 구하러 간 주제에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돌아온 것까지도 녀석답다.

그래,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나에 대한 충성심이 그나마 존재라도 했던 녀석의 얼굴은 보고 가게 되어서....

"불로초입니다! 제가 드디어 불로초를 구해 왔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주군!"

그의 한마디에 모인 이들의 얼굴이 와장창 일그러졌다.

잠깐만... 뭐?

이 판국에 그게 뭔 개소리야!

불로초라고? 그딴 게 진짜 있는 거였어? 뭐야, 나 사는 거냐?

갑자기 생의 의지가 마구 솟구친다!

"어서요, 어서 드십시오!"

천우명이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흙도 채 떨어지지 않은 약초를 마구잡이로 입에 쑤셔 넣는다.

그래! 잘한다!

어서 서둘러라, 이 무식한 놈아... 씨발, 그래도 흙은 좀 털고.

"주군, 어째서 씹질 않으십니까! 씹으십시오. 씹으셔야 합니다!"

혁련무강....

이런 미친, 누가 저 저승에서 온 새끼 입부터 좀 막아 줘!

하지만 목소리는커녕 몸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에잇!"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지르며 천우명이 내 입에 강제로 처넣었던 불로초를 다시 꺼내 움켜쥐었다.

자, 잠깐 너 설마....

우려는 언제나 현실로 돌아온다.

꾸우욱.

짜냐?

씻지도 않은 손으로?

"제가 먹여 드리겠습니다, 주군!"

"빌어먹을! 막아! 천 단주를 막아라! 어서!"

제자들과 장로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천우명을 잡아당겼다.

야 이 새끼들아! 놔둬! 놔두란 말이야! 내가 좀 더 사는 게 그렇게도 꼬우냐!

혁련....

이 난장판을 비웃는 것처럼 세 번째 부름이 시작되었다.

아, 잠깐만!

나 아직 덜 먹었어! 덜 먹었다고!

무....

씨발,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사력을 다해 입에 힘을 모았다.

다행히 아직 혀는 움직인다.

자존심도 잊고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끌어 올려 최선을 다해 천우명의 손을 빨았다.

꿀꺽.

미친 듯이 핥아 대는 혀 놀림에 엉망진창으로 으깨진 불로초가 목 어림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저승차사가 내 이름 세 번을 완전히 부르기까지는 고작 한 글자가 남았을 뿐이다. 육신과 연결된 영혼의 고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끊어지려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 젠장, 저 도움 안 되는 새끼. 조금만 더 빨리 오지. 살 수 있었는데. 불로장생, 그 어려운 걸 내가 해낼 수 있었는데.

강....

이제 완전히 끝이다. 돌이킬 수 없다.

내 돈... 내 화양이... 내 뜨거운 밤....

그런데.

불로초의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악착같이 짜낸 의지와 불로초의 약효가 뒤섞여 끊어지려는 영혼의 끈에 꾸역꾸역 달라붙었다.

세 번을 불렀음에도 끈이 잘리지 않자 저승차사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표정만 변했는가? 아예 강제로 뜯어내려는 것처럼 이미 육체에서 반쯤 빠져나와 있는 나의 혼을 움켜쥐고 힘껏 끌어당겼다.

야, 아! 머리카락! 악! 아파, 아프다고, 이 새끼야!

툭!

놓쳤다.

머리카락이 왕창 빠진 것인지 머리 가죽이 지랄 맞게 아파 왔지만.

흐흐흐, 결국 놓쳤다.

저승차사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는 나를 바라보았다.

살았다. 내가 이겼다.

불로초라는 게 진짜였나 보다.

천우명, 이 기특한 새끼....

네가 나를 살리는구나.

살아나면 크게 한턱 쏴야겠다.

그런데 저승에서 온 놈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참을 날 노려보던 녀석이 다가와 내 몸에 손을 얹고 주문 같은 것을 외웠다. 분명 어떻게든 내 혼을 빼 가려는 생각이겠지.

후후, 백날 노력해 봐라 이 새끼야! 불로초다! 불로초!

진시황도 못 처먹고 죽은 걸 내가 처먹었다고!

나는 저승차사에게 주먹 쥔 오른손의 손목을 잡아 다소곳이 내밀어 주었다.

한데 이 새끼가 의미심장하게 쪼갠다.

하아? 쪼개?

병신 새끼,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이럴 때 답은 하나다.

버틴다.

후후, 인내심 하면 무림에 나만 한 인간이 없다.

놈이 꺼질 때까지 눈 딱 감고!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사패천주 혁련무강이다!

2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젠가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려 왔다.

세월의 흐름이 잔뜩 스며 있는 늙은이'들'의 목소리.

이상했다.

저승차사는 간 것 같은데....

힘겹게 눈을 뜨자 한눈에도 짜증 나는 느낌을 주는 옷차림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오! 깨어나는가 봅니다."

"...."

끔벅, 끔벅.

흐릿해진 시야가 선명하게 밝아졌을 때.

"정신이 좀 드느냐?"

선명한 태극 무늬.

어디서 많이 본 문양이었다.

저런 후져 빠진 문양이 새겨진 관을 쓰는 것은... 그래, 무당....

뭐, 무당?!

"허허, 천운이 닿은 게야!"

"천존께서 보우하심입니다."

다 늙은 도사 놈들이 입 냄새를 펄펄 풍기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분명히 저승차사 놈의 술수를 피해 잠시 버틴 것뿐인데... 설마?

이놈이 내가 불로초를 먹어 끌고 가지 못하니 강제로 등선을 시켜 버린 것인가?

...개소리지. 그럴 리가 없지. 그런데.... 어찌 된 것이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아니, 그것보다 지독하게 아프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지고 근육이 모조리 끊어진 것처럼 아팠다.

"괜찮다. 무리하지 말거라."

이 양반아, 지금 무리가 아니라.

"쯧쯧, 어찌 이리 기특할꼬. 제 스승을 위해 약초를 구하다 절벽에서 떨어지다니...."

갑자기? 언제? 누가 누굴?

주위를 둘러싼 도사들이 저마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낯선 기억들이 머릿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

비루하기 짝이 없던 삶 속에서 만난 온화한 성품의 도사.

포근... 아니, 그딴 걸 느낄 때가 아니잖아!

그리고 망할 사패천주(?)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고 폐공(廢功: 무공이 폐해짐)까지 당해 버린 도사.

소년의 나이는 열일곱.

도사를 살리기 위해 무당산 험지를 헤매며 약초를 구하다가.

아, 아니 잠깐만. 그래서 대체 이 기억이 다 뭔데?

크윽!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파 왔다. 막대한 양의 기억들이 강제로 쑤셔 박듯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자 늙은 도사들이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쌌다.

"기맥이 불안정합니다."

맥문을 짚은 한 도사의 다급한 음성을 또 다른 도사가 받았다.

"자, 모두 서두르세!"

미리 의논한 것이라도 있는지 늙은 도사들이 각기 다른 혈도에 손을 올렸다.

지금, 뭐 하는....

순간 오색영롱한 선기(仙氣)가 도사들의 몸에서 일어나 방 안을 휘돌다 도사들의 손을 따라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우우웅!

강렬한 기운이 전신의 혈도를 두들기고 기경팔맥을 아울렀다.

으으으.

청량감을 머금은 선기가 고통스럽게 몸을 헤집는다.

미친놈들아, 뭐 하는 짓이냐!

사패천주 혁련무강의 몸에 선기를 주입하다니!

죽일 셈이구나!

네놈들이 저승차사 놈의 사주를 받고 날 죽일 셈이야!

고통은 무려 두 시진을 넘게 계속되었고, 방 안의 선기가 옅어지다 이윽고 완전히 사그라들었을 때.

한판 고문(?)을 마친 도사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됐습니다. 됐어요!"

"다행이네. 이만하면 혈맥들은 온전히 자리를 찾았으니 뼈마디만 붙으면 될 것이네."

더 늙은 도사의 말에 덜 늙은 도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전에도 육양신공(六陽神功)의 선기가 안전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단전에 뭐? 육양이 어째?

"감사합니다."

"장문인과 사형제들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은혜? 감사를 드려? 이런 악독한 도사 놈들 같으니! 네놈들의 그 망할 선기에 고통받은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 것이냐!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반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무량수불, 어찌 자네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아이의 생명을 외면하겠는가? 모두가 인연(因緣)인 게야."

장문인이라 불린 늙은 도사, 명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한데 장문인. 이 아이의 몸에 본문의 비기인 육양신공의 힘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참에 명진의 제자로 삼음이 어떠하신지요?"

"명진의?"

"예. 진즉에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일이 아닙니까."

"흐음. 그렇기는 하네만, 전례에 없던 일이 아닌가? 명진의 제자라면 이대가 아니라 일대인데...."

"이 또한 저 아이의 복이고 무당과의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비록 폐공되었다 하나 명진도 마땅히 후사를 길러야 하고요."

한참을 고민하던 명현이 명진을 돌아보았다.

"자네의 뜻은 어떠한가?"

"한참 전부터 생각하였으나 제 몸이 이러해 말씀을 드리지 못했던 일입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가르쳐 보겠습니다."

"음...."

명현이 명진과 다른 장로들을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파격적이기는 하나 모두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 아이가 명진의 제자가 됨을 허락하네."

"높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장문인."

명진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명현을 향해 절을 올렸다.

"허허, 그래. 생각해 둔 도명은 있는가?"

명현의 말에 명진이 잠시 고심하다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일대는 진자 배이니 무(武)로 하겠습니다."

"진무라. 좋은 이름일세."

명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장로들이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진무(眞武).

참 도가적으로 상스러운 이름 아닌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도대체 왜 도가 놈들은 쓸데없는 항렬을 만들고 비슷한 돌림자를 가져다 쓰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이 쓸모없고 개성도 없는 새끼들.

"자, 그럼 다 같이 모여 '진무'의 쾌유를 위해...."

명현의 말에 도사들이 강강수월래라도 하듯이 서로의 손을 잡고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 새끼들이 또 뭔 짓을 하려고?

몸 안에 자리 잡은 선기로 인해 기진맥진한 혁련무강, 아니 진무의 흐릿한 눈동자에 강렬한 불안감이 어렸다.

"구축병마(驅逐病魔),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급급여율령."

끄아아! 그만! 그만! 이놈들아! 도사님들! 제발!

"조일강복(早日康復),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명현의 선창을 따라 명진과 장로들이 근엄하고 엄숙하게 법주를 외기 시작했다.

구축병마, 몸에 스민 잡귀와 마귀를 몰아내고.

조일강복, 다친 몸이 빠르게 회복되기를 기원....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이 새끼들아!

사람이 다쳤으면 응당 침을 꽂고 부목을 대어 고쳐야지. 주문이라니, 날 대체 어디까지 잡을 셈이냐!

입 밖에 내어 외치지 못하는 공허한 발악과 함께 진무는 눈을 까뒤집으며 혼절해 버렸다.

* * *

"...."

한 달.

눈에 띄게 수척해진 진무가 퀭한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천하에 다시없을 비열함과 사악함으로 중원을 휩쓸던 사패천주 혁련무강.

일월마교의 교주, 정무맹의 맹주와 함께 천하를 삼분하여 다스리던 무림의 절대자.

는 개뿔이....

다 망해 가는 무당의 일대제자 진무가 되어 버렸다.

망할 놈의 저승차사 놈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눈을 감았다 뜨니 난데없이 무당의 죽어 가던 도동(道童)의 몸에 빙의되었고, 그 기억까지 온전히 머릿속에 담아 버렸다.

노력? 해 봤다.

아는 방법을 총동원해 보았다.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자랑하던 묵룡혼원공(墨龍混元功)을 익혀 이 무간지옥 같은 도량에서 벗어나려 병상에 누운 한 달간 무던히도 노력을 했다.

그런데.

'망할 놈의 육양신공....'

단전에 강제로 자리 잡은 이놈의 선기가 공력이 모이는 족족 흩어 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단전을 비우고 다시 채우고 싶었지만, 지금의 공력으로는 씨알도 안 먹히는 일이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는가?

도대체 어찌해야 이 거지 같은 곳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진무야."

"예! 스승님!"

무조건적인 반사 작용.

의사도 묻지 않고 스승이 된 명진의 부름에 본능적으로 공손하게 대답해 버린다.

망할, 이 쓰잘머리 없는 도동 놈의 기억.

마치 손오공에게 씌워진 금고아처럼 머릿속에 자리 잡은 기억이 행동을 멋대로 휘두른다.

그의 스승인 명진(明眞).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

해검지를 뒤집어 놓고 팔궁 중 셋을 불태우며 무당을 쓸어 버리던 그때.

진무, 아니 혁련무강의 앞을 막아서서 끝까지 대항하며 자소궁을 지키던 도사 놈.

당시 일대제자였던 명진의 기개가 기특해서 목숨은 취하지 않았던 것이 크나큰 실수였다.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아예 무당산에서 도관이라는 도관은 전부 파내 버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점심을 먹자꾸나."

"예. 속히 준비하겠습니다. 스승님."

젠장, 마음과는 다르게 또 공손하게 대답해 버린다. 얼굴 가득 미소까지 머금고.

진무의 몸에 빙의된 당금 무림의 절대자 중 한 명이었던 사패천주 혁련무강은.

탁탁탁.

채소를 썰고.

슥슥.

능숙하게 우려낸 국물을 맛보며.

"캬, 좋다."

최선을 다해 스승의 점심상을 준비했다.

이런 씨발....

차라리 도망이라도 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 도망친 적도 있었다. 병상에서 일어난 뒤로 여러 번.

그런데 이 망할 기억 새끼가.

무당산을 벗어나기도 전에 돌아오게 만들지 않는가! 도무지 병석의 스승이 걱정되어 버리고 떠날 수가 없어서!

부인하고 싶은데, 그냥 죽여 버리고 싶은데....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다.

스승만 보면 포근하고 혼자 두기 걱정스럽고 삼시 세끼 밥을 꼭 챙겨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이 절로 우러난다.

"오오, 국물 맛이 좋구나!"

"감사합니다. 스승님."

환장하겠네.

스승이 흐뭇해하자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져 저녁에 무얼 해 드릴까를 고민하는 흐름까지, 아주 가지가지로 염병 아닌가 말이다.

망할 저승차사 새끼.

하필이면... 무당이란 말이냐.

그것도 불필요한 측은지심으로 똘똘 뭉친 도동 놈의 몸에.

"진무야."

"예. 스승님."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진무와 명진이 마주 앉았다.

"너의 몸이 회복된 지도 꽤 지났으니 오늘부터는 내 너에게 무공을 가르치려 한다."

진무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무공을? 무당의? 이 자식이 기어이 미친 게 아닌가? 어디 되지도 않는 게 당금 무림의 절대자 중 한 명에게 도가 따위의 무공을 배우라고?

나는 사파의 지존 혁련무강이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예. 스승님."

껍데기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스승의 은혜에 깊은 감사의 절을 올렸다.

"허헛, 녀석. 허나 몸이 이러해 구전(口傳)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으니 안타깝구나."

명진의 얼굴에 아쉬움이 어리자 마음이 슬퍼지고 먹먹해진다.

작작 해라, 마음아. 제발.

"괜찮습니다. 스승님."

진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자, 그럼 오늘부터 네 단전에 깃든 육양신공에 대해서 전수를 해 주도록 하마."

고작 육양신공 따위를?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저절로 귀가 열려 스승이 읊어 주는 구결이 때려 박히듯이 들려왔다.

"무당의 진결은 태극(太極)에서 시작한다. 태극은 음양(陰陽)이며 그중 육양은 음에서 기인해 극양의 기운을 이끌어 내는...."

"...."

망할, 듣기만 해도 장문인과 장로들이 진무를 살리기 위해 심어 놓은 단전의 기운이 혈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익히고 싶지 않은데, 육양신공 따위....

하지만 의사와는 달리 망할 기억이 본능을 지배해 명진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무당의 팔궁과 가장 멀리 떨어진 오로봉(五老峰) 기슭에 자리한 충허암.

때때로 식료품을 가져다주는 싸가지 없는 이대제자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

반쯤 강제적으로 지옥 같은(?) 도가 무공 수련이 시작되었고, 진무의 내공은 날이 갈수록 쌓여 가고 있었다.

3화

수련을 시작한 지 석 달.

"허어! 벌써 충검의 경지란 말이냐!"

슬쩍 검에 기운을 흘려 넣었더니 명진의 얼굴에 경악에 가까운 놀람이 떠오른다.

"희한하구나. 수년을 수련해도 충검을 깨닫기는 쉽지 않은 것인데... 고작 석 달 만에...."

그것도 구전으로 무공을 익히면서, 라는 말을 생략했겠지.

"몸 안에 주입된 육양신공의 선기 때문인가? 아니면 네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 아니 백을 깨닫는 천고의 기재...일 리는 없는데."

명진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해가 될 리가 있나.

이래 봬도 몸뚱이는 진무지만 그 속에 든 것은 무림의 절대자 중 한 명이었던 사패천주다. 애초에 깨달음의 깊이가 다르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무당의 무공이라는 것이 익혀 보니... 꽤나 재미지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는 내공에, 깊어지는 초식의 이해도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급진적이고 위험천만한 사파의 무공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안정적이었다.

인정한다. 괜히 명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쳇, 이런 쓸 만한 무공에 예의니 형식이니, 대가리에 똥만 찬 도사 놈들 같으니.'

불로초로 인해 새로운 몸을 얻은 이후 시간은 계속 흘렀고, 무당의 일대제자 진무는 점점 더 성장하고 있었다.

"차압!"

검극에서 뻗어 나간 서늘한 예기가 눈앞의 공간을 헤집는다.

뒤로 한 발을 물리며 세로로 그어 낸 검이 다섯으로 나뉘어 허공을 발기발기 찢어 놓았다.

취리릭!

솟구쳐 오른 검기가 한 장으로 늘어나 아름드리나무의 표면에 거친 상처를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발현된 기운은 여느 무당의 제자와는 완연히 달랐다.

육양신공의 기운이 양의 기운이기는 하되 유려한 선기를 머금어야 함인데 검에서 뻗어 나온 것은 호쾌할 정도로 강맹했다.

"후우, 후우...."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진무의 아침 수련.

낭인으로 뒹굴며 처음 무공을 익히던 그때가 생각나 좀처럼 시간이 흐른 것을 느낄 수가 없다 보니 어느새 검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경지가 되었다.

'쯧,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시간 참 빠르다.

수련에 매진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다.

진무가 언짢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무당의 무공.

좋다.

허례허식만 제외하면 그가 이전에 익혀 온 어떤 무공보다 뛰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내공이었다.

이미 한번 가 보았던 길이요, 익히고 있는 무공의 핵심까지 꿰뚫고 있으나 내공은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수련 일 년 만에 능숙하게 검기를 발현할 정도이니 무당의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기함을 토할 일이었으나, 진무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젠장, 다 좋은데 뭐 이딴 게 다 있는지....'

더없이 느려 터졌다.

마음 같아서는 익숙한 사파의 무공으로 단숨에 몇 단계를 뛰어넘고 싶지만 내력이 충돌하는 탓에 그도 어려웠다.

진무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가득한 땀을 닦아 내었다.

어쨌든 소기의 성취는 이루었다.

아직 제대로 부딪쳐 보지는 못했으나 이쯤이면 무당의 일대제자 정도는 대강 찜 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절대의 경지에 들기 전에는 익히고 있는 내공 심법을 무(無)로 되돌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대제자가 되면....'

지난 일 년 동안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주워듣게 된 풍월이 있었다.

무당.

과거 구파의 수좌로 있으며 정무맹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문파였다.

하지만 십오 년 전 혁련무강의 습격으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당대 장문인과 장로들이던 무당의 현자 배가 모조리 죽었고, 일대제자들 태반이 죽었다.

그 뒤를 이어받은 게 사패천의 계략에 의해 하산했던 나머지 일대제자, 지금의 명자 배였다.

장문인 명현과 현 오궁일관(五宮一館)의 주인이 된 장로들이 그들이었고.

그리고 진무의 스승이던 명진은 당시 무당의 실질적인 주력이던 일대제자들이 빠져나간 틈을 타 습격한 혁련무강의 은덕(?)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어쨌든 그 일로 무당은 급격하게 쇠퇴의 길을 걸었고 지금에 와서는 직계만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그동안 줄을 대 오던 상가와 속가제자들의 발길도 뜸해져 재정 상태가 악화되었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청자 배의 싸가지 없는 제자 놈이 가져오는 식료품의 질이 자꾸만 떨어져 가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직 장문인의 적전인 대제자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일대제자들의 성취가 그만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장문인의 뒤를 잇는 대제자가 되면 무당의 비전(祕傳)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전 중.

'양의심공(兩儀心功).'

진무가 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식료품을 가지고 오는 놈에게 흘려들은 이야기라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놈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 * *

보름 전.

"대단하네요. 누가 보면 대제자라도 되려는 줄 알겠습니다."

"...?"

"하긴 대제자가 되기만 하면야 장문인께 직접 수련을 받는다고 하니."

누가 약해 빠진 무당 장문인 따위에게 수련을 받고 싶어 한다고.

"하긴 다음 대 장문인의 내정자니 당연한 말이지요. 그러니 사숙들께서도 다들 대제자가 되려 하시는 거고."

평소라면 식료품만 던져 놓고 가던 놈이 말이 많은 걸 보니 아무래도 심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무는 대제자가 되고 싶은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뭐 하러 차기 장문인이 되기 위해 일대제자 놈들과 경쟁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아, 나도 되고 싶다. 그리만 되면 무당의 최상승 절예인 태극혜검이나 전설의 양의심공 같은 것들을 전수받게 될 텐데...."

그 순간 진무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뭐라 했느냐!"

"예?"

"양의심공이라고?"

"...예."

진무의 반응에 이대제자가 화들짝 놀라며 눈치를 살폈다.

맙소사, 양의심공이라니?

두 가지 무공을 한 몸에 담아 익힐 수 있는 무당의 비전 중의 비전 아닌가.

진무, 아니 혁련무강이 태어나기도 전에 실전되었다고 들었다.

이후 무당에서 양의심공을 익힌 고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사실은 남아 있고, 그것을 진무가 익힌다면?

분명 선기와의 충돌 없이 묵룡혼원공을 익힐 수 있으리라.

"확실한 거냐? 대제자가 되면! 양의심공을 전수받을 수 있다는 게?"

"...예.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내용을 진무만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좀 알아볼 것을.

그 와중에 당황했던 이대제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궁의 제자도 아니고 충허암의 제자인 진무 사숙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몰라도 불가능할 겁니다."

"뭐?"

"일대제자들 전부가 대제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는데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멍청한 새끼.

사람 볼 줄 모르는 새끼.

경쟁자? 그게 뭐?

길이 보였으니 달리기만 하면 된다.

자고로 무인이란 센 놈이 최고다. 일대제자 놈들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리고 대제자가 되는 것은 이 몸이라, 이거다.

그때가 되면.

'흐흐흐, 이 지긋지긋한 도량과도 안녕이다!'

* * *

진무는 보름 전의 일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대제자가 되어 양의심공을 얻는다 해도 무당을 떠날 수가 없는 이유.

바로 스승인 명진의 존재.

아닌 말로 폐공 이후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진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놈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살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그만큼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걱정에 지금도 발길이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무당의 신물이라는 태청단(太淸丹)이라도 훔쳐 먹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서서히 해결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해결책은 다름 아닌 영양 보충.

얼마 전부터 국물이 아니라 직접 고기를 먹이고 있다.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하더니 울며불며 경극 배우 뺨치는 연기를 선보인 진무의 간곡한 부탁에 끝내 입에 대기 시작했고, 보란 듯이 조금씩 기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간악한 도사 놈들.

아무리 문파에서 금하고 있다고 해도 환자에게 풀때기나 처먹이다니.

역시 기력 회복에는 고기만 한 게 없는 것을.

그 덕분에 근래에는 아주 버리고 도망갈 정도는 아니지만, 한동안 자리를 비워도 될 정도로 걱정이 줄었다.

물론 자신의 계획에 관해서는 아직 스승에게 말하지 않았다.

스승이 이것저것 묻는다면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껍데기로는 도무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어쨌든 명진의 회복이 끝나고, 대제자가 되어 양의심공만 익히면! 흐흐흐.

진무가 모처럼 기분 좋은 생각에 빠져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저기...."

"어헉! 씨발 깜짝이야!"

너무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는 칼로 찌를 뻔했다.

무당파 안이라고 너무 마음 놓은 것이 실수였다.

그런데 못 보던 놈이다.

팔이 사람 허벅지만 하고 배가 나오다 못해 살이 옷 밖으로 삐져나온... 거의 돼지?

"헤헤, 진무 사숙이시죠?"

제가 진무는 맞습니다만 귀돈(貴豚)께선 누구신지?

"원화관에서 나온 이대제자 청우(淸羽)입니다."

청돈이 아니고? 도대체가 어딜 봐서 깃털(羽)이냐?

"식자재를 가져왔는데요."

"식자재?"

원래 오던 싸가지 없는 놈이 아니라 웬 돼지 같은 놈이 왔다.

"놓고 가거라."

"예."

청돈, 아니 청우가 빵빵한 볼살로 인해 거의 보이지도 않는 눈을 초승달처럼 휘어 웃으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뭐, 이대제자 따위 바뀌거나 말거나.

무엇보다 아직 식사를 준비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무는 잡념을 지우고 계속해서 수련에 매진했다.

그런데.

일 초식에.

"와!"

이 초식에.

"우와!"

"...."

정신 사나워 죽겠네.

이 돼지가 볼일 다 봤으면 갈 일이지 왜 안 가고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앉았어? 힘 빠지게.

"안 가냐?"

"아, 예. 죄송합니다. 제가 사숙께 방해가 되었네요. 그럼."

날이 선 진무의 말에도 청우는 붙임성 좋게 웃으며 충허암에서 멀어졌다.

뒤뚱거리며 달리는 모습이.

'거 잘 구르네.'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정도로 뚱뚱한 녀석이었다.

분명 수련을 게을리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풀때기와 벽곡단만 처먹고 저렇게 살이 찔 리가 없었다.

뭐, 무당 놈들과 친해질 생각도 없는데... 굳이 저놈 살찐 것을 걱정해 줄 필요까지야 있겠느냐마는.

진무는 계속해서 수련에 매진했다.

다음 날.

"...."

수련을 하러 나왔는데 웬 익숙한 돼지 새끼 하나가 어제까지는 자신의 영역이었던 게 분명한 검 자국 가득 남은 아름드리나무를 향해 손발을 놀리고 있었다.

"아! 사숙!"

확실히 어제 본 그 돼지가 맞다.

"너 뭐냐?"

"청웁니다!"

돼지가 눈치까지 없는 건가?

"그러니까 네가 왜 여기서 수련을 하고 있냐고. 원화관 제자면 원화관에서 수련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헤헤, 오늘은 수련이 없어서요."

아니, 지금 그걸 묻는 게... 하아.

"사숙, 수련하시게요?"

"...."

"하세요. 저는 그럼 저쪽에서. 헤헤."

실없는 놈. 뭐가 좋다고 쪼개는 건지.

여하튼 진무의 수련이 시작되고 검극이 뻗어 나갈 때마다.

"와! 이야! 호오?"

"...."

빌어먹을, 집중이 안 된다.

도대체 이 새끼는 뭘까?

"야!"

"예. 사숙!"

"안 가냐?"

"보고 있으면 안 될까요?"

"안 돼!"

"수련도 없는데요?"

그러니까, 이 돼지 자식아.

그 빡빡한 수련 일정에 쉬는 날이면 동배들과 어울려 노는 게 정상 아닌가?

"원화관에서 안 찾냐?"

"예."

"놀 사람 없어?"

"뭐, 다들 바쁜가 봐요."

"...."

아, 설마 이 새끼.

"야. 혹시 애들이 너만 가까이 오면 다른 데로 가고 그러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막 같이 대련도 안 해 주고?"

"맞아요. 제가 동배들 중에 실력이 제일 모자라서 그런가 봐요."

"식자재 가져다주는 거... 원래 오던 놈이 너한테 미안하다면서 바꾸자고 하디?"

"예. 요새 좀 바빠졌다고."

"그럼 막 네가 실수하면 비웃기도 하고 그래?"

"제가 남들에게 웃음을 좀 주는 편인가 봐요."

진무의 물음에 청우가 해맑게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돌림이네, 따돌림이야.

뭐, 본인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휴, 어쨌든 가라. 바빠."

"그렇군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오지 마. 딴 놈 오라 그래. 내가 직접 가서 받아 와도 되고."

"네, 헤헤."

청우가 해맑게 웃으며 또다시 굴러서 사라졌다.

4화

"야!"

이 자식이 또 왔다.

"오늘은 검진 수련이라 제가 할 일이 없거든요."

수련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할 일이지 왜 자꾸 충허암으로 와서 방해질이란 말인가?

사람이 그만큼 싫은 티를 냈으면 눈치를 채야 정상이 아닌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한 녀석의 얼굴이 겹쳐진다.

모자라지만 충성스러운 녀석.

처맞고도 헤헤 웃기만 하던 녀석.

'천우명....'

사패천에서 유일하게 그리운 녀석이었다.

청우는 왠지 그 녀석과 닮았다.

눈치 없이 해맑은 거나.

따돌림당하는 거나.

모자라기 짝이 없는 것이.

"하아...."

진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숙, 저 방해되지 않게 이쪽에서 수련하고 있으면 안 될까요? 가 봐야 할 일도 없는데...."

"그래. 그래라...."

괜히 천우명이 생각나기도 했고, 방해만 되지 않으면 상관이 없었던 진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청우가 해맑게 웃었다.

그리곤 곧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핫! 타압! 이얍!"

갖은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움직인다.

명진에게 구전으로 듣고 이미 익혀 본 지 오래인 칠성권(七星拳)이었다.

슬쩍 호기심이 생긴 진무가 수련에 집중하는 청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제법 수련을 많이 한 것인지 기본기 자체는 탄탄했다.

'게으른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법이네. 그런데....'

기본 투로에는 익숙해져 있으나 본인 체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청우는 뚱뚱하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움직임이 무겁고 둔하다.

즉, 상대에게 자신의 노림수를 훤히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누가 가르친 건지 멍청하기 짝이 없군. 팔이 짧으면 원래의 보법보다 발을 더 밀어 넣어야지.'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으나 보고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야!"

"예?"

진무의 부름에 청우가 작은 눈을 끔벅이며 돌아보았다.

"주먹에 왜 그리 변화가 많아?"

"예?"

어리둥절한 표정.

"넌 굵어. 뚱뚱해. 싸릿대로 변화를 주면 상대를 현혹시킬 수 있지만 아름드리나무로 같은 변화를 줘 봐야 티도 안 난단 말이야."

"...."

눈만 멀뚱거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하아, 미치겠네. 와도 이딴 돼지 새끼가 와서는."

진무가 한숨을 내쉬며 청우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뭐라도 가르쳐 주고 빨리 쫓아 버릴 생각이었다.

"해 봐."

"예?"

"다시 펼쳐 보라고, 칠성권."

"아! 감사합니다!"

청우가 갑자기 신이 난 듯이 칠성권을 펼치기 시작했다.

딱!

"아얏!"

통통한 주먹 끝에서 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진무의 검집이 그의 팔꿈치를 때렸다.

"이 자식아. 쓸데없는 변화에 치중하지 말고 목표만 노려. 짧고 간결하게 주먹을 뻗으란 말이야."

"예? 예."

딱, 딱!

진무는 칠성권의 보법을 똑같이 밟으며 검집을 움직여 때리면서 청우의 권격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발 더 밀어 넣고! 변화 주지 말고! 어허!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여기선 차라리 낭심을 노려! 눈 찌르고!"

"아얏! 사, 사숙. 하지만 그건 너무 비겁한데요?"

"닥쳐! 싸움에 비겁한 게 어디 있어! 뒈지면 끝이야! 다시!"

딱! 따닥! 딱!

청우의 칠성권이 한 스무 번쯤 반복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쓸데없는 동작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두 번만 해 보면 알 것인데.... 정말이지 멍청한 놈이었다.

"거기까지!"

"헥, 헥... 감사합니다, 사숙!"

온몸이 시퍼런 멍투성이로 변한 청우가 땀을 줄줄 흘리며 인사하고 주저앉았다.

그래도 멈추라고 할 때까지 움직인 것을 보면 제법 끈기는 있는 놈 같았다.

"야."

"예?"

"내일부턴 오지 마."

"...네."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알 바인가. 이놈은 대제자가 되는 길에 방해만 될 뿐이다.

"절대로 오지 마. 알겠지?"

"...예."

"오면 죽일 거야."

"...."

진무가 살기를 가득 머금고 눈을 부라리자 청우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딱히 표시는 나지 않았지만.

"그,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사숙."

"어, 그래. 절대로 오면 안 돼!"

진무는 여전히 굴러가듯 달리는 청우를 향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제발, 제발 안 와야 할 텐데....

"진무야."

어느새 암자의 문을 열어 두고 나와 있던 명진이 흐뭇한 표정으로 진무를 불렀다.

"아, 스승님. 죄송합니다. 식사가 늦었네요."

젠장, 이 짓도 한 일 년쯤 되니 존대하는 것도, 식사를 차리는 것도 익숙해져 버렸다.

망할 놈의 기억 때문인가?

그래서 자꾸만 진짜 제자인 양 행동하게 된다.

"식사야 좀 늦어도 괜찮다. 그나저나 못 보던 아이구나."

"예. 좀 멍청하고 모자라네요."

"헛헛, 그래. 허나 네가 잘 이끌어 주었구나. 마땅히 그리해야지, 암."

명진은 뭐가 그리 좋은지 흐뭇한 표정이었다.

"서둘러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오냐."

* * *

다음 날 아침.

기력이 제법 좋아진 명진이 운동 삼아 산보를 나간 뒤 수련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진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충허암과 이어진 길을 바라보았다.

안 온다.

늘 오던 놈이 늘 오던 시간에 오지 않았다.

"휴우, 다행이다. 이제 마음 놓고 수련을 할 수 있겠어."

가슴을 쓸어내리며 검을 뽑으려는데.

"이놈!"

"...."

날카로운 노성이 충허암 앞뜰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새파랗게 겁에 질린 뚱뚱보 청우 녀석과 시퍼렇게 젊은 서른 중반의 도사.

기억을 더듬어 보니.

'원화관의 일대제자 진허.'

진무보다 한참 위의 사형이자 무당칠자(武當七者)의 하나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도인이었다.

"아, 사형."

"아? 사혀엉?"

진무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진허가 눈꼬리를 묘하게 꼬았다.

한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것이 어째 화가 잔뜩 나 있는 표정이다.

"어쩐 일이...시죠?"

명진은 그렇다 치고 어린 도사 놈에게까지 존대를 할 수는 없었던 진무가 뒷말을 흐렸다.

"네 녀석 짓이더냐?"

"무슨 말씀...이신지?"

진무는 담담한데 진허 홀로 화를 내는 모양새였다.

"청우에게 이따위 것을 가르친 게 네놈이냔 말이다."

하아, 어려도 한참은 어린 놈이 얻다 대고 이놈 저놈인지.

하긴, 지금은 팔십 넘은 혁련무강이 아니라 무당의 일대제자 중 가장 막내인 진혜와도 열 살이 차이가 나는 진무였다.

그럴 수도 있지.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청우의 칠성권!"

"아!"

조금 손봐 주긴 했다.

그렇긴 한데.

"이노옴! 감히 신성한 도량에서 이따위 비겁한 초식을 가르치다니!"

침까지 튀겨 가며 손가락질을 해 대는 진허의 모습을 진무가 지그시 바라보았다.

듣다 보니 조금 짜증이 난다.

"왜요? 졌소?"

"왜요? 졌소? 이놈의 자식이 말 꼬락서니 하고!"

"...."

"네놈이 청우에게 방문좌도(傍門左道)의 비겁한 술수를 가르쳐 대련 중에 다른 아이가 부상을 입었다."

"흠, 이겼구만."

"이겨? 이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하마터면 대를 잇지 못하는 몸이 될 뻔했단 말이다!"

숨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 대는 모습에 진무가 피식 웃으며 청우를 기특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도사가 대(代)는 무슨."

"뭐야? 이놈이 감히!"

"거, 밤새 화통을 삶아 드셨나. 귀 따가워 죽겠네."

"뭐, 뭐라고?"

진허가 황망한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제의 말투가 이상했다.

진허는 도동일 때의 진무를 알고 있었다. 사숙인 명진을 끔찍이 모시던 순박한 아이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도 변했단 말인가?

더욱이 자세는 저게 무엇인가? 짝다리도 모자라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귀까지 후비는 모습이라니.

"너?"

시정잡배 뺨을 후려치는 진무의 모습에 진허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보오, 사형."

"이, 이보오?"

갈수록 가관이었다.

"불알 안 터졌으면 됐지 그게 뭐라고. 어쨌든 이겼으니 된 거 아니요."

"부, 불알... 닥쳐라. 이놈! 도문의 제자가 어찌 그따위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거참 시끄럽네. 불알을 불알이라고 하지 뭐라고 한담?"

진무의 말에 진허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쓸데없는 소리나 할 거면 그만 가쇼."

"뭐, 뭐라? 이놈이 진정...."

"거 씨발, 아침부터 왜 이놈 저놈 지랄이야? 짜증 나게. 친하지도 않구만."

"허!"

다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진무의 혼잣말에 진허의 낯빛이 푸르다 못해 허옇게 질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 네놈의 말투와 홀로 수련해서 삐뚤어진 게 분명한 그 성격. 내 사문의 사형으로서 반드시 예를 가르쳐야겠다!"

진허가 서슬 퍼런 기세를 줄기줄기 흘리며 검집째로 뽑아 들자 진무의 눈이 신경질적으로 찡그려졌다.

"가르쳐?"

"오냐. 이놈! 내가 계율을 가르치는 영은궁의 제자는 아니지만, 사형으로서 반드시 네놈을 계도하리라!"

"계도는 염병."

진무가 음흉한 눈빛으로 천천히 진허를 바라보았다.

아직 무당의 다른 누군가와 손속을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대충 일대제자보다 뛰어나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지면 어쩔 거요?"

"져? 진다고?"

진허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뱉었다.

진무는 아직 어렸다.

애초에 몸져누운 명진자의 도동(道童)이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수뇌들에 의해 몸 안에 육양신공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내공이 쌓여 있다고는 하지만 그저 명진에게 구전으로 무공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 진무가 무당칠자의 일인인 자신을 이겨 보겠다 하지 않는가?

그리고 저 자신감은 또 뭐란 말인가?

"이놈이 홀로 수련을 하더니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나서거라! 내 네놈의 그 기고만장함을 꺾어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겠다."

"후회하실 텐데...."

탁!

진무가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뽑아내고 검집을 손에 쥐었다.

생각보다 기회가 일찍 찾아왔다.

대제자로 가는 길.

일대제자 진허는 말하자면 경쟁자인 셈이다.

그를 쓰러뜨리고 이름을 알리면 대제자가 되는 데 한발 다가서는 셈이 아닌가?

안 그래도 어떻게 좀 엮어 볼까 했는데 직접 와서 시비까지 걸어 주니 이 얼마나 하늘이 내린 기회인가?

진무는 천천히 검극을 지면으로 향하게 했다.

"오쇼."

"...."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오쇼라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껄렁한 말투인가?

더구나 응당 기수식을 취해야 함이 마땅한데 저건 또 무슨 자세란 말인가?

이래서야 도무지 어떤 검술인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이 오만방자한 녀석이!"

"거참 입으로 싸우나... 해 지겠네. 해 지겠어."

"...."

"뭐, 안 오면 내가!"

팍!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자세였다.

그런데 발을 떼는 순간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고, 바닥을 향했던 검격이 하단에서 번개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헛!"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에 진허가 기함을 토했다.

유려한 변화가 아닌 곧장 뻗어 오는 직선의 움직임이 다른 무당의 검공보다 더없이 빠르게 느껴졌다.

'시, 신문혈!'

하지만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검극이 노리는 방향은 신문혈이다.

이는 필시 무당의 검공인 신문십삼검(神門十三劍).

허리를 꺾은 진허의 검이 맞추어 비튼 손끝에서 유려하게 휘어졌다.

'오냐, 똑같은 검공으로 상대해 주마!'

진허는 그리 생각했다.

같은 검공에도 격차가 있음을 알려 주면 저 방자하기 짝이 없는 놈도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도의 목적이니 사제를 상하게 할 수는 없다. 검면으로 손목을 때려....

"허헉!"

순간 감싸 안았다고 생각했던 진무의 검이 커다란 낙차를 만들며 수직으로 떨어졌다.

'나, 낭심!'

진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순간적으로 생겨난 변초에 자신의 소중한 부위가 통째로 날아갈 판이었다.

재차 검을 비틀어 튕겨 내려는 순간, 진무의 검격이 흐름을 거스르듯이 솟구쳤다.

"헙!"

이번엔 눈.

'이놈의 자식이! 설마 일부러?'

진무의 검극이 진허의 낭심과 눈, 겨드랑이와 같은 곳을 번갈아 가며 노려 왔다.

변칙적인 공격에 번번이 공격의 맥이 끊어진 진허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변칙적이고 비열하긴 했으나 분명 신문십삼검이었다.

열셋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공은 손목의 신문혈(神門穴)을 노려 무기를 빼앗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상대의 목숨을 빼앗지 않기 위한 무당의 정신이 가득 녹아든 군자의 검공.

그러할진대 어째서 검극이 사파 나부랭이들의 그것처럼 눈과 낭심을 골라 노려 댄단 말인가?

그저 초식의 방향을 좀 바꾸었을 뿐인데 신문십삼검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간악하기 짝이 없는 사파의 무공으로 변해 버린다.

"이노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진허의 검이 지지 않고 화려한 초식을 만들어 내려는 순간.

5화

따아악!

"...."

진허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비어 버린 손.

바닥에 떨어진 검.

아릿한 충격이 전해지는 신문혈.

'허! 이런 일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람과 당혹스러움에 순간 움직임마저 멎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비록 낭심과 눈, 겨드랑이와 같은 치졸한 곳을 노렸다고는 하지만, 검로(劍路)에 변화를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진무가 해냈다.

일대제자가 된 지 고작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진무가.

진허는 고지식해도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허! 내가 지다니.'

승부는 끝났다.

비록 순수한 초식의 겨룸이었으나 진 것은 진 것이다.

진허는 진무에게 진 것을 쪽팔려 하기보다는 사제의 성장에 감탄하고 있었다.

못 본 새 당시 일대제자 중 가장 뛰어나다 알려졌던 도사 명진의 뒤를 이어 가고 있지 않은가.

대견하고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진무...."

벅차오르는 희열에 칭찬의 말을 건네려는 순간, 단단하게 움켜쥔 주먹과 사악한 진무의 표정이 날아들었다.

분명히 승부는 끝났는...데.

'승부도 안 났는데. 이 새끼가 뭐 하는 짓이지?'

진허의 승부는 끝이었으나 진무의 승부는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였다.

쩌억!

둔탁한 충격이 진허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신음을 낼 겨를도 없었다.

쩍! 쩍! 쩍!

연거푸 짓쳐들어오는 주먹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무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하는 사제의 성장(?)에 진허는 끝내 정신을 놓아 버렸다.

'허, 조옿타! 역시 손맛은 도사지. 바로 이 맛이야! 이 짜릿함!'

모처럼 만에 느낀 희열에 그동안 명진에게 억압(?)받아 온 진무는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했고.

곤죽이 되어 땅바닥에 처박히는 진허를 지켜보는 청우는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하지만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경악이 아니라 존경심이었다.

진자 배의 막내.

충허암에만 있었던 탓에 문파에 알려지지 않았던 진무가 무당칠자 중 하나인 진허를 때려눕혔다.

그것도 아주 무자비하게.

"야, 뭐 하냐?"

"예?"

진무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던 청우를 불렀다.

"정동궁 의실로 옮겨."

정동궁(淨東宮)은 무당 팔궁 중 하나로, 약당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예? 예!"

청우가 급히 정신을 잃은 진허를 들쳐 업고 달렸다.

진무는 멀어지는 청우와 진허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진허를 이겼다.

정동궁 의실로 옮겼으니 당연히 소문이 날 테고, 청우의 입을 탄다면 거기에 살까지 넉넉히 붙을 것이다.

대제자가 되기 위한 경쟁.

드디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아무리 도가라고 해도 무림 문파였다.

무림에 딴 게 있을 리가 있나.

강하면 장땡이다.

이대로 무당칠자를 모조리 꺾어 일대제자 중에서 가장 강해진다면?

'흐흐흐, 양의심공! 반드시 익혀 주겠다.'

진무의 꿈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 * *

"그 진무가 진허를 이겼단 말인가?"

원화관을 맡고 있는 장로 명선(明善)의 말에 장문인 명현(明賢)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허!"

좌중의 장로들 사이에서 놀람이 터져 나오고, 웅성거림이 빠르게 퍼졌다.

진허가 누구던가?

비록 막내라고는 하나 일대제자들로 구성된 무당칠자(武當七者)의 한 사람이었다.

"그게 말이...."

"그렇지요? 저도 그런 줄 알고 진허를 불러 물어보려 했지요."

"...."

"그런데 올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아침께의 소란이라 아직 내용을 상세하게 듣지 못했던 명현과 장로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아주 곤죽이 되었습니다."

"...."

"너무 심하게 맞아서."

"맞아? 진허가? 진무에게?"

"예. 반나절이 지나도록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진무를 불러 혼을 내야 마땅함인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

명현은 혹시나 명선이 아침에 뭘 잘못 처먹고 자신에게 농을 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진무가 일대제자가 되어 명진에게 가르침을 받은 게 고작해야 일 년일세."

"그게 저도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진허를 업고 온 청자 배의 아이에게 물어보니 진무가 사용한 것이 신문십삼검이었답니다."

"신문십삼검?"

"예."

"허! 갈수록."

도무지 말이 안 된다.

신문십삼검은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한 것이지 강한 상대와 전력으로 싸우기 위한 검공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한 가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이상해? 뭐가?"

"검공을 변형시켰다는군요."

"변형했다? 신문십삼공을?"

"예."

"어찌?"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하도 어이가 없어서."

명현이 말문이 막혀 명선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짭니다."

"...."

너무나도 진정성으로 충만한 명선의 표정에 조금 당황스러워진 명현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흠, 흠. 명진이 가르친 건가?"

"그럴 수 있겠군요."

"하긴, 그때 이후로 명진이 무당의 검공에 불만이 많았지 않습니까?"

"맞아요. 허울을 버리고 실리를 취해야 한다고요."

명현의 물음에 장로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도 그리 생각했는데... 진무가 칠성권도 변형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응? 칠성권을?"

"예. 진무가요. 그것도 본인이 가진 체형에 맞춰서."

"하핫, 농담도...."

"그렇지요?"

명선의 표정에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이 뱉은 말이지만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공을 변형시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자소궁 대전에 모여 있는 장로들이라면 초식을 시기적절하게 쪼개고 붙이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대제자들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런 경지는 무공에 대한 핵심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헛헛, 청자 배 아이의 배움이 적어 과장을 했던 모양일세."

"그렇겠죠? 하지만 진허의 상태가 하도...."

명선의 말투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하긴 자신도 영 믿을 수가 없기는 했다.

그러나.

"어쨌든 진허가 진무에게 진 것은 사실입니다. 곤죽이 된 것도 사실이구요."

"거참...."

사제가 사형을 이겼다면 그 성취를 칭찬해야 마땅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형제를 상하게 했다면 응당 벌을 주거나 훈계를 내려야 하는 바.

문제는 피의자가 진무였고, 피해자가 진허라는 사실이다.

누가 봐도 반대여야 할 일인데....

"일단 진허가 깨어나지 않고 있다 하니 진무의 입장도 들어 봐야겠지."

"옳은 말입니다. 서둘러 진무를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명선의 말에 명현이 잠시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음, 아닐세. 근자에 청양상단과의 일로 바빠 명진을 찾지 못했지. 이참에 내일 일찍 사제를 보러 가야겠네."

"그게 낫겠군요. 명진이 진무에게 어떤 가르침을 내렸는지도 궁금하고요."

"옳네. 그럼 내일 아침에 다들 가 보도록 하세."

"예."

* * *

진허와 매우 작은(?) 다툼이 있었던 다음 날.

또 왔다. 망할 돼지 같은 청우가.

여느 날과는 달리 이대제자들이 조식 전 운기 수련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임에도 찾아왔다.

아침을 먹기도 전에, 짐까지 잔뜩 싸 들고.

"휴, 넌 대체 왜 또 왔냐?"

진무가 한숨을 내쉬며 묻자 청우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오늘부터 원화관에서 충허암으로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사숙."

"뭐? 왜? 누가? 어째서?"

이런 쓸모없는 걸!

"진허 사숙께서 진무 사숙님께 앞으로 많이 배우라고."

"...."

이런 미친놈이! 이런 짐 덩어리를 던지다니. 덜 맞은 건가? 내 당장 찾아가서 이놈을!

진무가 주먹을 움켜쥐며 부르르 떠는 사이에 명진이 문을 열고 말했다.

"진무야."

"예. 스승님."

"내가 허락하였다."

"아, 그러셨... 예?"

진무가 수긍하듯 대답하려다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명진이 환하게... 아니, 뭘 처웃고 있어.

"지난밤에 진허가 찾아와 부탁하길래 내가 그리하라 하였다."

진허, 이 자식이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에 순진한 스승을 꼬드겼구나.

"앞으로 네가 많이 가르치거라."

"예... 에?"

공손하게 대답하던 진무가 더욱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부님, 제자는 아직 제자를 들일 실력이나 준비도 되지 않았습니다."

진무가 항변하듯 말했다.

"녀석, 누가 제자를 들이라더냐? 단지 내 진허에게 사정 이야기는 들었다. 너의 재능을 의심하였거늘. 벌써 진허를 이길 정도로 성장하였더냐? 허허, 실로 하늘이 내린 무재로구나. 무당의 홍복이다."

명진이 아는 것을 보니 소문이 나긴 한 모양이었다.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아, 그게...."

"되었다. 되었어. 과정 또한 들었음이다. 만류귀종이라 하였다. 비록 정도를 벗어났다 하여도 이 스승은 제자의 성취가 기쁘기만 하구나."

"...."

대꾸할 말을 잃은 진무에게서 시선을 거둔 명진이 청우를 바라보았다.

"청우야."

"예. 사조님."

"앞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오냐. 헛헛."

이것들이 왜 갑자기 짝짜꿍이야! 뭘 열심히 해! 그리고 누가 대답하래!

진무가 차마 스승은 째려보지 못하고 청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청우는 그저 그것이 자신의 다짐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한 눈빛이라 여기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하게 먹었다.

그리고.

"진무야."

"...예."

"밥 먹자. 허기가 지는구나."

이런 식충이 스승 같으니!

하지만 이번에도 본능적으로 공손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아, 망할 놈의 기억.

젠장, 될 대로 되라지.

명진이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진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사숙. 사조님의 조반은 어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앞으론 제가 하겠습니다."

"...."

진무는 청우를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투실투실한 얼굴에 휘어진 실눈과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간 웃음. 해맑긴 참 해맑다.

"야."

"예, 사숙!"

진무가 최대한 얼굴을 위협적으로 찡그리며 청우의 두툼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스승님의 명으로 너를 받아들이기는 하겠는데."

"예!"

"첫째, 난 네 스승이 아니다."

"...."

"둘째, 앞으로 뭐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

"대답 안 해?"

"...예."

"마지막 셋째, 앞으로 수련하는데 지난번처럼 우와! 이야! 호오! 이딴 감탄사 뱉지 마라."

"...."

"이 세 가지만 지키면 돼.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알겠지? 그리고 방금 내가 했던 말 어길 때마다 죽일... 수는 없고, 뒈질 정도로 맞는다고 생각해라."

"...아, 알겠습니다."

청우가 살짝 기죽은 듯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좋아. 그럼 이제 다녀와."

"어딜?"

"닭 잡으러."

"예? 닭을? 설마 드시려는 건 아니죠? 육식은 선기를 수련하는데 방해된다 하여 본문에서 금하고."

뻐억!

곧장 내질러진 주먹이 투실하게 오른 청우의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꺼억!"

비계가 단단히 보호하고 있었지만 엄청난 고통에 청우의 눈이 살집을 뚫고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분명히 말했다. 뒈질 정도로 맞는다고."

청우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이니까 이 정도로만 하지. 이제 갔다 와."

청우가 알아들은 표정을 하자 진무가 만족스럽게 그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저...어. 그런데. 사숙."

"뭐!"

"닭을 어디서 잡아 와야...?"

"...."

진무는 대답 대신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히익! 갑니다, 가요! 쏜살같이 다녀오겠습니다!"

청우가 무당의 독문경공인 제운종(梯雲縱)을 펼쳐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닭을 잡으러 간 사이 진무는 솥에 물을 담고 불을 지폈다.

그러고 보니 청우가 있으면 이것저것 심부름을 보낼 녀석이 있어서 편하기는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안 와? 스승님 배고프실 텐데.'

6화

벌써 중천을 향해 달려가는 해를 보며 진무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사숙! 사숙!"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청우가 뒤뚱거리며 달려왔다.

"닭은?"

"여기요!"

진무의 물음에 청우가 자랑스럽게 손에 든 것을 쑥 하고 내밀었다.

꼬꼬댁!

청우의 손안에서 날갯죽지를 잡힌 닭 두 마리가 뒤엉킨 채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아주 잘했다."

"헤헤."

청우가 해맑게 웃었다.

딱 써먹기 좋게 순진무구한 녀석 같으니.

"그럼 죽여."

"옙!"

불쌍한 닭 두 마리가 두툼한 청우의 손에서 생을 마감했다.

"피 뽑고."

주륵.

"넣어."

솥뚜껑을 연 청우가 곧바로 펄펄 끓는 물에 닭을 던져 넣었다.

"털 뽑고."

"예!"

말만 하면 된다.

이런 듬직한 놈을 여태 귀찮게만 여겼다니.

거기다 어제 아침 진허를 패는 것을 본 다음부터는 충성도까지 소폭 상승한 것 같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패는 건데 그랬나.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끓일까?"

"예!"

닭이 끓는 동안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청우가 진무에게 물었다.

"저, 근데 사숙."

"응?"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뭐가?"

"어제요. 저 진짜 놀랐어요. 진허 사숙의 무공은 사숙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데, 그분을 그렇게."

"대단하지? 존경스럽지?"

끄덕끄덕.

청우가 선망 가득한 시선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우야."

"예. 사숙."

"물 넘친다."

"옙!"

흐흐흐. 기특하다, 기특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라.

진무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자 청우는 정말로 보이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운 그 눈을 또 활짝 휘며 기뻐했다.

보다 보니 그새 좀 귀여운 것도 같고.

전에 느꼈듯이 청우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었다.

천우명.

심각하게 눈치 없고 모자라긴 해도 충성심만큼은 최고였던 녀석. 지금 와서 유일하게 보지 못함이 그리운 녀석.

청우는 그 녀석의 어린 시절을 닮았다.

하다못해... 너무 착해서 동배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까지.

오냐, 이왕 이렇게 된 것 앞으로 너를 부하 일 호로 삼아 주마!

"근데 괜찮을까요?"

"뭐가?"

"닭이요."

청우의 말에 진무가 허연 김을 내뿜으며 맛난 냄새가 폴폴 올라오는 솥을 힐끗 쳐다보았다.

"육식은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혹시라도 걸리면."

"청우야."

"예."

"나 믿지?"

"옙!"

"그럼 이제 꺼내 와."

"...."

"뭘 그렇게 봐? 다 익었어."

"아!"

돌 터지는 소리 내기는.

솥뚜껑을 열자 먹음직스럽게 익은 닭이 윤기 나는 자태를 드러내었다.

"먹을래?"

진무의 말에 청우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울대가 움직일 만큼 침을 삼킨다.

무당십계(武當十誡).

무당의 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였다.

그중 육식(肉食)은 선기를 쌓기 위해 무공이 일정 경지에 오를 때까지는 무조건 금해야 하는 것이었다.

무당 내공 연단법으로 선기가 어느 정도 영글기 전에 육식을 하게 되면 선기는 쌓이지 않고 내공만 늘어나게 된다.

그렇기에 무당에서는 제자의 육식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여러 가지 곡물과 약초를 배합해 만든 벽곡단뿐이었다.

쯧쯧, 한참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못된 도사 놈들 같으니.

"괜찮아. 나도 가끔 먹는다. 스승님도 드신 지 오래되었고."

"...."

청우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침 넘기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진무는 청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고 커다란 그릇에 닭 한 마리를 가득 담아 명진이 누워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스승님."

문을 열고 들어선 진무의 손에 닭이 담긴 그릇이 들려 있자 명진이 흐뭇한 표정으로 상 앞에 앉았다.

그가 육식을 시작한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고기 맛을 알아, 이제는 어느 고기가 맛있더라며 품평까지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닭이로구나. 허허, 이 귀한 것을."

"많이 드시고 더욱 왕성하게 기력을 회복하셔야지요."

"헛헛, 오냐, 오냐. 안 그래도 내 너의 말을 듣고 육식을 한 뒤로는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는구나. 두 달 전부터는 산보도 다니질 않느냐."

"예. 다행입니다."

그리하셔야 제가 걱정을 덜고 이 지긋지긋한 무당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지요.

닭 다리를 뜯어 가는 스승의 모습에 진무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옛다. 너도 먹거라."

"아닙니다. 밖에 한 마리 더 있습니다. 청우와 전 그것을 먹겠습니다."

"어허, 한창 클 나이에 한 마리를 둘이 나눈단 말이냐? 쯧쯧, 아예 세 마리를 잡아 오지 않고."

"...."

이런 타락한 도사 놈을 보았나.

고기 맛을 보더니 아주 점점 더 노골적으로 타락하고 있었다.

"하면 나가 보겠습니다. 스승님. 식사를 마치시면 말씀하십시오. 내어 가겠습니다."

"오냐."

흐뭇해하며 닭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스승을 뒤로하고 진무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

처먹지 않겠다고 빼던 청우의 앞에 조금 전까지 토실토실하게 오른 살에 윤기가 가득했던 닭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듯 깨끗이 발라진 뼈만이.

이런 나눠 먹는 즐거움도 모르는 돼지 새끼를 봤나!

그 순간.

"이노옴! 당장 뱉지 못할까!"

불호령과 함께 나타난 것은 명현자와 장로들이었다.

저것들이 웬일이지?

닭 다리뼈에 남은 육수까지 쪽쪽 빨아 먹고 있던 청우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이놈이 감히! 본산 안에서 계율을 어겨?"

불같이 화를 낸 것은 무당의 계율을 담당하는 영은궁(迎恩宮)의 장로 명공이었다.

서슬 퍼런 그의 기세에 청우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떨었다.

그리고 장문인 명현이 방 안에 앉아 막 닭을 먹기 시작한 명진을 바라보았다.

"자, 자네가 어찌...."

"...."

명진의 입가에 노골적으로 묻은 기름기에 명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진무의 공손한 인사에도 명현의 시선은 명진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이게 지금 무슨...."

명진은 갑자기 닥친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고, 명현은 너무나 화가 난 탓인지 수염을 부들거리며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엿 됐다.

하필이면 다른 놈도 아니고 장문인이라니.

대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식으로 찍히게 되면 곤란하다. 만일 이런 일로 오점이 생겨서 대제자가 되지 못하면 어쩐단 말인가?

진무는 일단 냅다 엎드려 빌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

엎드려 죄를 청하는 진무의 말에 명현의 시선이 비로소 명진에게서 떨어졌다.

"스승님의 기력이 너무도 쇠하시어."

"닥쳐라. 이놈!"

불같이 노성을 지른 것은 명현이 아니라 계율을 담당하는 영은궁의 명공이었다.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은 갸륵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문의 계율을 어겨? 네놈이 정녕 제정신이란 말이냐!"

"...."

계율 좋아하네.

스승을 최선을 다해 봉양하는 중인데 고작 닭고기 좀 먹었기로서니, 쯧쯧.

마음 같아서는 확 그냥.

'아직은 때가 아니지.'

썩어도 준치다.

변칙이나 초식 운용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은 이제 막 삼십 줄을 넘은 일대제자들까지였다.

무당의 장로라는 자들의 실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힘이 모자랐다.

'참자, 양의심공(兩儀心功)을 얻을 때까지. 그것만 익히면... 꼭 저 새끼 대가리부터 깨 버려야지.'

바닥에 납죽 엎드린 그대로, 진무는 이를 북북 갈며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자네가 말해 보게. 무당의 가장 어른인 자네가...."

"...."

"명지-인!"

명현의 노성에 명진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형."

"...."

"그것이 그리도 큰 죄입니까?"

"...!"

강하게 이글거리는 눈빛.

그의 형형한 눈빛은 간신히 자리보전이나 하던 뒷방 노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진무는 그만 일어나거라."

"...."

"어서!"

단호한 명진의 말에 진무가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떳떳하게 고개를 들어라. 네가 무슨 죄를 지어 고개를 숙인단 말이냐. 거기 청우도 그만 일어나거라."

명진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무거운 힘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로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된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사형, 명공, 명선."

명진은 명현과 자신의 사형제들을 하나씩 불렀다.

"내 모습이 어찌 보이십니까?"

"...."

"내가 사패천주 그 사악한 놈에게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십니까? 힘이 없어 죽어 가는 사형제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또 얼마나 참담했는지 아느냔 말입니다."

저기, 사악한은 좀 빼고... 어쨌든 진무는 스승을 응원했다.

역시 고기를 먹여 놓은 보람이 있다. 제 놈도 먹었으니 당연히 편을 들 수밖에 없으리라.

자, 어서 설득해! 설득해서 나의 죄를 사하여라!

"우리가 왜 무너진 것 같습니까? 힘이 없어서? 아니요. 이따위 허울뿐인 계율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진."

"끝까지 들으십시오."

명진의 음성은 당당했고 한편으로 무거웠으며, 엄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그 허울뿐인 계율을 죽도록 지켜서 얻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명현과 장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가 허울 좋은 정도(正道)의 도리를 지키는 동안 어찌 되었습니까?"

"...."

"무너졌지요. 참담하게 패배했습니다. 사패천주 혁련무강이 돌아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무맹은 휴전을 했습니다. 그 후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다못해 복수라도 했습니까?"

옳은 말이었다.

정무맹은 그때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다.

당시의 무림은 삼파전.

정사대전이 더 지속되기라도 하면 호시탐탐 중원으로 세력을 뻗으려는 일월마교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우려한 정무맹은 무당의 참담한 현실을 외면하고 휴전을 택했다.

그 후 어느 누구도 무당을 돕지 않았다.

무당은 잊혀진 채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림이다.

힘이 있을 때는 누구나 도우려 하지만 힘이 없어지면 철저히 외면받는.

정의며 협(俠)이라 포장한다 해도 그것이 냉혹한 현실이었다.

도가의 종맥이던 전진도, 그 외 다른 수많은 문파들도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변하지 않는 이상 지금 이 순간에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무당이 온전히 무림에 남을 것 같습니까? 무당의 역사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 누가 장담을 합니까?"

"...."

"그래요. 진무가 처음 고기를 먹으라 줄 때는 나도 놀랐습니다. 한데 저 아이가 그럽디다. 그거라도 먹고 기력을 차리라고. 제가 죽으면 자신은 어찌 사느냐고."

"...."

명진의 말에 명현이 고개 숙인 진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서 먹었습니다. 먹었더니 힘이 났지요. 요새는 충허암 근처로 산보도 다니고 있습니다."

"...."

놀라운 말이었다.

십 년을 자리에 누워 있다시피 한 명진이었다.

그런 그가 산보를 다닐 정도로 회복되었단 말인가?

"그래요. 십계를 어겼지요. 한데 어기니 훨씬 더 나아집디다.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힐책에 가까운 명진의 말에 명현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사형은 모르십니까? 우리가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이 계율을 지키는 동안 중원 무학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선기를 쌓기 위해서는 육식을 지양해야 하나 육신의 힘을 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함을 어찌 모르십니까? 우리가 제재만 하는 사이에 무당 전체의 힘이 약해지고 있음을 어찌 모르시냔 말입니다."

명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지켜 온 십계가 그리 중요합니까? 무당이 망하고 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요?"

"...."

"재물을 탐하지 않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작금의 무당을 살렸습니까? 아니요. 재물을 멀리했기에 이리 궁핍합니다. 제자들에게 새 도복 하나 내어 주지 못하지 않습니까?"

"...."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요. 그리도 인명을 아껴 어찌 되었습니까? 예. 사패천에 이 꼴이 되었습니다."

몇 가지 말이 반복되기는 했으되, 이후로도 명진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7화

무당이 여지껏 고수해 온 전통인 십계를 정면에서 비판하였으나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막을 수가 없었다.

"사형, 버릴 것은 버리고 변할 것은 변해야 합니다."

통렬한 명진의 말이 끝나고, 명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장고(長考) 끝에 그가 나지막이 입을 뗐다.

"명진."

"예."

"하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있네."

"...."

"살아남기 위해 옳지 않게 변한다면 어찌 그것이 정도라 말하겠는가?"

"옳지 않게 변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고 있네. 허나 그 결과는 또 어찌 장담하는가?"

"장담이 아니라...."

"그만!"

명현이 일갈을 내질러 더 이상의 항변을 막았다.

둘의 대화는 나란히 달리는 평행선과 같았다.

서로가 주장하는 바가 다르니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무당의 십계.

오랜 전통.

절대 쉽게 바뀔 수 없는 일이었다.

십계야말로 무당이 지키고 계승해 온 역사요, 정체성이었다.

명진의 말에 틀림은 없었으나, 명현 또한 당대의 장문인으로서 당연히 무당의 전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물론 명진이라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고 자신이 과했음도 알고 있었다.

장로들이 보고 있었고 진무와 청우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장문인에게 그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나, 그동안 쌓여 있던 불만이 터져 예의를 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장문인.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맞습니다. 명진 사형의 건강이 회복되는 효험을 보았다 해도 규율은 지켜져야만 합니다. 십계를 어긴 명진 사형을 비롯해 진무와 청우를 처벌해야 마땅합니다."

명선과 명공이 부추기듯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명현은 명진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문인!"

"자네들도 그만하게."

명현이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잘라 내고 명진을 바라보았다.

명진.

무당은 그에게 많은 빚을 졌다.

사패천의 공격에서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고 자소궁을 지킨 위대한 도인이 바로 그였다.

비록 무공은 잃었으나 그의 숭고한 정신은 모든 무당도들의 귀감이었다.

그가 말하는 변화.

명현 역시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장문인이 된 이후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기 때문이었다.

정도(正道)를 지키며 사도(邪道)를 막는다. 올바름으로 간악함을 계도(啓導)한다.

그것이 오랫동안 지켜 온 무당의 전통이자 정의였고, 십계는 그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가?

옳다 믿고 행하였으나 그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고 산문에 가득했던 이들 모두가 떠나갔다.

어찌해야 다시 과거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명진의 일침을 듣고, 그가 육식으로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모습까지 보고 나니 심경이 더욱 복잡해졌다.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게. 이 일은 내 알아서 처결토록 할 터이니."

"장문인!"

명공이 재차 불렀지만 명현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알겠습니다. 허면 일단 돌아가겠습니다."

명공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찾아온 걸음은 진무의 성장에 대한 즐거움과 흥분이었으나, 그것으로 계율을 어긴 죄가 용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장문인이 직접 처결하겠다고 명을 내린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일.

명진이 기거하는 암자의 문이 닫히고 명공과 명선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간 뒤.

"저, 사숙... 이제 어떻게 하죠?"

걱정이 가득한 청우의 물음에 진무가 눈을 찡그렸다.

아니 근데 이게 그리 중요한 문제인가?

그냥 고기를 먹은 것뿐이다.

뭔 계율이 어떻고 변화가 어떻고... 하여간 사소하기 짝이 없는 문제에 목숨을 거는 도사 놈들 같으니.

어쨌거나 불안하다.

진무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스승의 항변이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묘하게 흘러 버렸다.

'젠장, 둘이 뭔 이야기를 하는 거지?'

대제자의 꿈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무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귀를 기울였다.

* * *

다음 날.

무당파의 장로들이 모두 모인 자소궁.

"진무는 앞으로 나서거라!"

문파의 계율을 담당하는 장로 명공의 외침에 아침부터 불려 온 진무가 장문인의 앞으로 나서 무릎을 꿇었다.

명현이 진무를 차분히 바라보았고 장로들이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어떤 처결이 내려질지 모두가 궁금한 표정이었다.

"진무, 너의 죄는 세 가지니라."

뭐? 세 가지?

고기 먹은 죄만 묻는 것이 아니었나?

진무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명현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첫째, 스승을 위함이라 하나 본문의 십계 중 하나를 어겼다. 둘째, 사문의 허락도 얻지 않고 선대의 검공을 함부로 변형하여 후대에게 가르쳤다. 셋째, 사형제 간의 비무에서 중한 상처를 입혔다. 인정하느냐?"

"예?"

첫째는 그렇다 치고, 둘째와 셋째는 왜?

지난밤.

명현은 명진에게 몇 가지를 묻고 몇 가지를 답했다.

대부분 어찌 수련을 시켰느냐?

근자에 건강은 어떠하냐 등과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언급하는 세 가지 죄목에 대해서 어찌하겠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기에 진무는 불안하기만 했다.

"다시 묻는다 인정하겠느냐?"

망할, 이런 엄숙한 분위기에서 못 한다고 배 째라 할 수도 없고.

"...예."

진무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좋다. 본 장문인은 이상의 세 가지 죄를 물어 직권으로 처결을 내리겠다. 진무는 앞으로 한 달간 해검지(解劍池)의 마목(馬木)을 보수하라."

"...."

순간 진무뿐 아니라 장로들의 얼굴에도 놀람이 어렸다.

"장문인!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명공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섰다.

처분이 가벼워도 너무 가볍지 않은가.

마목 보수.

어디를 어떻게 봐도 단순 구실에 불과할 뿐이었다. 자중하라는 의미였다.

응당 징벌동에 가두어야 마땅한 죄였다. 그렇기에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명현이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막았다.

"장문인으로서의 직권이라 하였다."

"하지만...."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라."

"...."

명현의 말에 명공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물러났다.

"또한, 향후 한시적으로 육식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겠다."

"장문인!"

"아니 됩니다!"

사방에서 우려의 외침이 일어났다.

처결이 가벼운 것도 모자라 십계 중 하나인 육식을 해(解)한다니?

한시적이라 하였으나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문인, 오랜 전통입니다. 어찌 그리 쉽게...."

"그만!"

명현이 일갈이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려 웅성대는 좌중의 목소리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진무는 그만 나가 보라."

"...예."

대전 안은 무거운 분위기가 가득했으나 이번 일로 대제자가 되지 못할까 걱정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 진무의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진무가 나간 뒤 명공이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장문인! 십계 중 하나인 육식을 해하시다니 말도 안 됩니다."

"맞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명공의 뒤를 이어 장로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자신의 의견을 토해 내었다.

"장로들은 들으시게."

"...."

명현의 음성이 대전의 웅성거림을 짓누르고 내뱉어졌다.

"이번 일에 반대와 우려가 클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하였네. 하나 이번만큼은 내 결정을 따라 주게."

낮은 음성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모두를 감싸 안는 듯한 포근한 힘이 있었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린 명공을 대신해 정동궁주 명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문인. 명이 내려졌으니 장로들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찌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고기를 먹고 기력을 회복했다는 명진 때문입니까?"

"들은 모양이군."

"예. 산보를 다닐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었다지요?"

"그래."

"하긴 육식을 하였으니...."

명화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무당의 의원으로서 오랫동안 그의 몸을 돌봐 온 명화였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록 무공을 되찾을 순 없어도 기력 회복에 있어 장기적으로 육식이 필요함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십계를 정면으로 어겨야 했기에 차마 권하지 못했다.

전통에 묶여 알고도 행하지 못했으니 사제인 명진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제가 했어야 할 일을 진무가 하였군요. 실은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없거늘, 계율에 묶여 행하지 못한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옳네.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하지만 육식의 금기를 해한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닐세."

"예?"

"진무의 이야기를 들었겠지?"

"예. 신문십삼검을 변형해 진허를 이겼다지요?"

"그래. 한데 명진에게 물어보니 그가 가르친 것이 아니라더군."

"예?"

"그는 그저 무학의 요결을 구전으로 사사했다 했네."

"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그저 구전으로 익힌 심법과 무공이 가진 약점을 꿰뚫고 변화까지 주었단 말입니까?"

"그러게나 말일세."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로들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사실이라면 하늘이 내린 무재로군요. 고작 일 년 만에 저만한 재능을 보이다니."

"옳네. 모두가 알다시피 진무는 오직 충허암에만 기거하며 정해진 수련과 관계없이 스스로 참오하고 배우며 익혔네."

명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우리가 오랫동안 지켜 온 틀 안에 제자들을 가두어 자율성을 저해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생각 말일세. 그로 인해 재능 있는 아이들이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자조 섞인 명현의 음성이 대전에 퍼질 때마다 장로들의 가슴이 무겁게 짓눌렸다.

"명진이 그러더군. 무당은 변해야 한다고."

"...."

"나는 한번 변해 볼 참일세. 그것이 옳은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는 없겠지. 그렇기에 한 번에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십계의 하나를 해한 것이네. 그것은 비단 육식에 대한 해함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나의 의지임을 모두가 이해해 주기 바라네."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에 담긴 명현의 진심에 장로들의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명공."

"예. 장문인."

"계율을 맡은 자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이번 일을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겠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네."

명현의 부드러운 음성에 명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하겠습니까? 이 모두가 장문인의 뜻인 것을요."

"고맙네."

약간은 투덜거림이 남은 기색이었으나, 그래도 마음이 많이 풀어진 듯한 명공의 모습에 명현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당.

다른 문파와는 달리 무당에는 문 내 파벌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곧 문파 내의 결속이 다른 어떤 곳보다 돈독함을 뜻했다.

도를 추구하는 문파로서의 특징이기도 했으나 사패천의 공격 이후 그 결속력이 더욱 단단해진 이유도 있었다.

진무의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난 뒤, 모두가 흐뭇해진 분위기 속에 우진궁주 명충이 화제를 돌렸다.

"참, 장문인. 곧 청양상단에서 오기로 하였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던지 명현이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연락이 왔는가?"

"예. 보름 뒤에 찾아오겠다 하였습니다."

"흠. 잘되었군."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알다시피 이번 교류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네."

당연하다.

상계마저 등을 돌린 시점이었다.

이미 무당산 인근의 이권이 모조리 제갈세가로 넘어간 뒤였기에 무당의 재정은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대외 활동을 아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무당 전체는커녕 일궁조차 먹고살기가 빠듯했다.

지금 청양상단과 연을 맺는 것은 어려운 무당의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곧 오기로 하였다니 각 궁에서는 그들을 대접함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장로들은 공손한 대답과 함께 대전에서 물러났다.

8화

무당산을 오르다 보면 그 산어귀에 작은 연못과 누각이 있었다.

해검지(解劍池)와 해검각(解劍閣).

도가의 상징이 무당의 원시천존을 모신 자소궁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도관이라면.

해검지와 해검각은 위세를 떨치던 무당의 자존심과도 같은 곳이었다.

과거 무당을 찾은 그 어떤 이도 말을 타고 병장기를 소지한 채 그곳을 넘을 수가 없었다.

이는 구파의 종맥(宗脈)이었던 무당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사숙. 무얼 그리 멍하니 보십니까?"

함께 벌을 받게 된 청우가 추억에 잠겨 있는 진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알 리가 없지.

진무가 바라보는 곳.

그곳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누각은커녕 그저 연못 하나 덩그러니 남은 황량한 공터였다.

지키는 무인도 없고.

말을 매어 두던 수십여 개의 마목(馬木)도 보이지 않았다.

'에휴, 그때는 좀 볼만했는데. 꼬라지가.'

진무가, 아니 혁련무강이 그리 만들었다.

과거 그가 찾아왔을 때 검진을 이루어 길을 막아섰던 명자 배의 무인들.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목을 모조리 뽑아 버리고 수하들에게 명해 해검각을 통째로 부숴 버린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래도 핏기는 좀 가셨네.'

그 당시 무당의 피로 물들어 온통 붉게 변했던 해검지의 색이 옅어지기는 했다.

진무가 과거의 추억(?)에 잠겨 있다가 문득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쳐다보는 청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진무의 시선이 청우의 뒤쪽 숲과 산을 오르는 계단을 살폈다.

"혼자야?"

"아, 예!"

아니, 지금 그런 명랑한 대답이나 듣자는 게 아니고.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조회에 참석했었다.

아침마다 열리는 조회, 다시 말해 오궁과 일관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일대제자들이 참석해 하루 일과를 논의하는 그 자리에 참석했을 때만 해도 인원을 보내 주겠다는 말을 분명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단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놈밖에 안 왔지?

진허가 부상당한 이후로 청우를 포함한 원화관 소속 청자 배의 제자들이 다른 궁에서 수련을 받게 되었다.

조회에서 통보한 바대로라면 그들이라도 왔어야 했다.

뭐지? 대체 왜... 오호라!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이 손뼉을 쳤다.

돌아가는 꼴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애초에 진무는 일대제자들과 교류가 적었다. 스승의 몸을 살피느라 충허암에서 두문불출하다시피 했으니 그럴 수밖에.

또한, 진무는 연고 없는 도동 출신인 데 비해 진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대제자는 나름 명가의 후손이었다.

즉, 출신이 다른 도동 주제에 자신들과 같은 위치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검공을 변화시켜 원화관의 진허를 때려눕혔다. 하찮은 놈이 자신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 것도 모자라 문파의 존장과 수뇌들 앞에서 스스로를 당당히 증명한 꼴 아닌가.

하물며 그 십계를 어겼다.

그럼에도 징벌동이 아닌 해검지 마목 보수를 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어딜 봐도 용서나 다름없는 처벌은 물론, 금하고 있던 육식까지 한시적으로 허용되었다.

즉.

"아놔, 이런 개새끼들이?"

"예?"

생각에 잠겨 있던 진무가 갑자기 상스러운 욕설을 뱉자 청우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엿 함 먹어 보라 이거지?"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질투. 그것이 결론이다.

원래 굴러온 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혹시나 박혀 있는 누군가가 뽑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굴러온 게 금강석, 아니 야명주라면 더더욱.

"쯧쯧, 이러니 망해 가지. 계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병신들. 계율만 지킨다고 되나? 아랫것들 단속이 안 되는데...."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도사 놈들 겉과 속이 다른 게 어디 가겠느냐마는.

사제가 좀 잘났다고 음흉하고 비열하게 따돌림이나 시키다니....

사파보다 더 사파 같은 노무 새끼들.

"그나저나 요 새끼들을 어떻게 한다? 어린놈들이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진무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진허를 두들겨 패 놓은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야 사람들의 놀람을 얻어 낼 수 있겠지만 너무 잦으면 눈 밖에 나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확 그냥...."

일단은 참아야 했다.

딱 대제자가 되기 직전까지만.

"오냐, 두고 보자. 이 잡놈의 새끼들이 감히 나한테 비열함으로 시비를 건다 이거지? 크크크."

사이한 기운이 떠오른 눈동자를 번들거리는 진무의 모습에 청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숙, 저...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청우야."

"예?"

"가서 산돼지나 잡아먹자."

"...예?"

청우가 깜짝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육식의 금기가 해제되었다고 해도 충허암에서 닭 다리뼈를 핥다가 장문인과 장로들에게 들킨 일이 바로 얼마 전이다 보니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모양이었다.

"왜?"

"해검지 보수는 어찌하고...."

"나 믿지?"

"...예."

"가즈아."

어차피 해검지 보수는 그저 구실에 불과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준 것은 자중하라는 의미가 강했으니 대충 말목이나 박아 놓으면 될 일이었다.

* * *

해검지를 보수하는 일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은 전날보다 늦게 내려온 청우의 뒤에 한 명이 딸려 있었다.

"응?"

청우와는 달리 꽤 잘생긴 데다가 훤칠한 체구를 가진.

매우 모자라고 우직한 청우와는 절대로! 친하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었다.

"넌 뭐냐?"

"청상 사형입니다."

진무의 물음에 청우가 대신 대답했다.

그래, 청상. 청자 배.

근데 사숙을 보고도 인사를 안 하네. 요런 싸가지 없는....

"청상 사형이 이것저것 물어보시는데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제가 데려왔습니다."

"뭘 물어봐?"

"그러니까, 근래에 사숙에게 배운 것들이요. 몸으로는 되는데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어서...."

청우가 해맑게 웃으며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대었다.

그래, 그랬겠지.

그게 말로 설명이 되겠냐?

특히나 네 녀석이라면....

"청상 사형께서는 이미 유운검법을 오 성까지 익히셨다니까요?"

호오?

유운검(流雲劍)이라면 제법 상승 검공에 속하는 무공이었다.

청자 배가 오 성이라면 가진 재질이 보통이 아닌 것이다.

물론 진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고 보름달 앞의 반딧불 정도였지만.

"대단하죠? 물론 사숙께서 보시기에는 별거 아니지만, 동배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납니다."

청우가 마치 제 자랑인 것처럼 침까지 튀겨 대며 청상을 치켜세웠고, 청상은 조금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제 놈이 잘난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근데 이상하게 매일 허드렛일만 하신다니까요."

흐음.

"사숙들께서 잘 안 가르쳐 주세요.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청상 사형의 출신이...."

"청우!"

청상이 짐짓 화를 내듯이 나무라자 청우가 입을 다물었다.

딱 봐도 알 것 같았다.

출신에 대한 이야기에 발끈한다는 것은 본인이 비천하다는 뜻이다.

타고난 재능은 있되, 끈이 없으니 잘난 가문 출신의 도사 놈들에게 질투를 받고 있겠지.

망해 가는 문파의 놈들이 따지는 건 진짜 더럽게 많다.

어쨌든 이놈도 결국...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고.

'귀찮은 게 또 하나 늘었군.'

하여간에 모자란 녀석.

하필이면 데려와도 이딴 놈을.

한숨을 내쉬던 진무의 머릿속에 갑자기 기똥찬 생각이 스쳤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이거 뭔가 재미있을지도 모르잖아?'

십계 중 하나인 육식의 금기가 해제되었다.

즉, 콧대 높은 무당이 지켜 온 전통이 근간부터 변화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다 만약 기어이 십계 전체가 무너진다면?

타락.

그래, 타락이다.

즉, 좀 더 세속적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만 힘을 보탠다면?

흐흐흐,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지금에야 육식 하나지만 그 뒤로는 뭐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술이든, 여자든.

점잔만 빼며 뒤로 호박씨를 까던 도사 놈들이 대놓고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하는 세상.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불로초를 먹고 진무가 된 이후 대제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양의심공을 익혀 원래의 무공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다음은?

아직 정해 놓은 것이 없었다.

불로초를 먹었으니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래, 대제자가 되어 양의심공을 익힌다.

그리고 그럴듯한 놈을 장문인으로 앉혀 놓은 뒤에! 무당을 타락시키고! 나아가 정파 전체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흐흐, 으흐흐흐.'

진무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비약의 나래가 펄럭였다.

무당이 곧 사파가 될 것이며 정무맹이 곧 사패천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비열함과 간악함으로 가득 채우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 계획이었다.

청우, 이 기특한 녀석.

귀찮은 쓰레기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숙의 즐거움을 위해 몸소 새끼를 쳐 온 것이로구나!

진무는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원대한 계획을 위해!

청상 너를 부하 이 호로 삼아 주마!

청우와 함께 타락의 씨앗으로 자라날 기회를 주지!

"청우!"

"예! 사숙! 하면 일단 토끼라도 한 마리 잡아 올까요?"

아, 이 멍청한 놈을 어찌해야 할고.

꼬시는 데도 순서가 있어야지.

대놓고 십계를 어기는 모습부터 보여 주면 어쩌자는 건지.

"토끼라니, 청우야. 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 해검지를 보수해야지."

"...."

청우가 말똥말똥 뜬 눈을 끔벅거렸다.

"저기, 돌 치워."

진무의 손가락질에 청우의 고개가 슬쩍 움직였다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 저걸요?"

진무는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사숙. 저건 좀 무리가 아닐지.... 그리고 돌이 아니라 바위인데요."

"돼."

"그게...."

"청우야."

"예?"

"나 믿지?"

"...예."

그래, 새끼야. 꼬시려면 뭔가 보여 줘야지.

그것도 상상 그 이상을 보여 줘야 효과가 있지.

청우가 마지못해 해검지에 박혀 있는 돌, 아니 바위 곁으로 다가갔다.

높이 네 자 여섯 치(138cm), 폭 두 자(60cm).

그냥 한 아홉 살 먹은 애만 하다.

무게는... 들어 보면 알겠지. 허리가 빠지는가 안 빠지는가.

"잡어."

"아무리 생각해도...."

울상을 지으면서도 청우는 시키는 대로 양팔을 넓게 펼쳐 바위를 감싸 안았다.

"끄으응!"

얼마나 힘을 주는지 이마에 지렁이처럼 굵은 힘줄이 마구 솟구치고, 도포 자락 밖으로 보이는 팔뚝에 근육이 잔뜩 맺혔다.

진무는 힐끗 청상을 살폈다.

비웃듯이 피식거리고 있었다. 괜히 따라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다.

아마도 무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겠지.

타고난 신력이 있거나 지닌 내공이 적어도 반 갑자 이상은 족히 되어야만 가능할 크기였으니까.

하지만.

턱.

진무는 용을 써 대는 청우의 무릎 뒤를 슬쩍 눌렀다.

"어?"

청우의 자세가 낮아지고.

손으로 명문을 슬쩍 밀어 주자 허리가 펴져 곧게 섰다.

툭.

양발 끝이 안쪽으로 모이게 만들고, 무릎을 바위에 밀착하게 했다.

"끄으응!"

청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

청상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오른다. 부릅떠진 눈이 끔벅거렸다.

크크크. 모든 일에는 요령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지.

"끄아아압!"

투둑, 투두둑.

청우의 기합성과 함께 애만 한 바위가 슬슬 밑동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웅!

바위가 해검지 밖으로 빠져나와 바닥에 거칠게 떨어졌다.

9화

"헛!"

비록 완전히 들어 올리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청상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고 있었고 직접 해낸 청우는 환희에 찬 표정이었다.

그저 자세만 바꾸어 주는 정도로 생각했겠지.

청우의 명문에 손을 대었을 때, 진무가 슬며시 자신의 내공을 전해 준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손은 눈보다 빠르다고.

"사숙!"

딱!

"아얏!"

"돌 하나 움직여 놓고 좋아하기는. 제대로 들지도 못했잖아."

"...."

약간의 허세.

청상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우야."

"예!"

"이제 잡아 와라."

"뭘요?"

누가 저 새끼 눈치 좀 어떻게 못 하나.

"...토끼."

"아! 예!"

청우가 초급 수준의 제운종을 시전해 숲속으로 뛰어들고 난 다음, 진무는 대충 흙을 밀어 바위를 빼낸 곳을 메꿨다.

청상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미 놀라움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이다. 몸이 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먼저 말을 걸면 지는 것이다. 그걸 아는지 청상도 쉽게 말을 걸어 오지 않았다.

흐흐, 어린놈의 도사 새끼. 내가 네놈 머리 꼭대기에 있다, 이놈아.

진무는 여유롭게 나무를 모으고 모닥불을 만들었다.

타닥, 타닥.

불이 탈 때쯤 청우가 토끼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그리고.

능숙하게 나무에 걸어 불 위로 올렸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의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코끝을 자극했다.

"사숙, 다 익은 것 같은데...."

네가 더 몸이 달아 있으면 어떡하냐, 청우야.

진무는 침까지 질질 흘리는 청우를 무시하고 청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휙.

진무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으나 목울대로 침 넘어가는 모습이 선명한 게, 내심 귀엽기까지 했다.

좋아, 반쯤 넘어왔다.

"먹을래?"

"아니요! 제자가 되어 어찌 선대께서 정한 십계를 어긴단 말입니까!"

짜식. 청우와는 달리 제법 대가 있다. 육식을 해도 된다고 발표까지 난 마당에 저리 거절을 하다니.

"그래? 흠, 희한하군. 육식을 하고 나면 청우처럼 훨씬 힘이 좋아질 것인데...."

"...."

살짝 놀라는 표정.

흐흐흐, 그래, 차근차근 넘어와라. 나의 타락 수하 이 호야.

청상은 토끼가 뼈만 남길 때까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자, 그럼 수련을 시작해 볼까?"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청우가 토끼 잔해와 모닥불을 치우고 난 뒤.

"어이, 거기 청상. 그냥 서 있으면 심심할 텐데, 어디 청우랑 대련이라도 해 볼 테냐?"

"예에?"

청상의 얼굴이 굳어지고, 청우의 눈은 동그래졌다.

"말도 안 됩니다. 청상 사형은 저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합니다. 이미 유운검을...."

"유운검?"

청상을 향해 피식 웃어 주고 쐐기를 박아 넣는다.

"청우야. 네가 이겨."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에 청상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 진무를 노려보았다.

청우가 자신을 이길 것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무당의 도명(道名).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흔히들 무당의 제자를 구분하는 일대(一代), 이대(二代), 삼대(三代)와 같은 세대 구분.

같은 시기에 도적에 이름을 올리더라도 도명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구분은 명확했다.

도명을 받았다는 것은 직계를 뜻한다. 즉, 무당의 상승 무공을 익힐 자격을 받은 자다.

과거 무당이 성세를 이룰 때도 도명을 받은 제자는 수뇌에서부터 삼대를 아울러 수백을 넘지 못했다.

하물며 몰락해 가는 지금은 고작 백 명이 채 되지 못했다.

도명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질과 실력을 무당이 인정하고 있음을 뜻했다.

물론 청우 역시 도명을 받은,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청(淸)'자 배 항렬의 제자였다.

하지만.

'청자 배에서도 최하위. 이제 막 무형지기(無形之氣)를 발현하는 청우가 이미 충검(充劍)을 넘은 나를 이긴다고?'

충검이란 검에 기를 담는 것을 말한다.

일대제자들의 눈에는 그리 대단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충검에 이른 무인은 이대제자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인정을 넘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일진대, 저 확신에 찬 진무의 표정은 뭐란 말인가?

비록 진허를 이겼다고 하지만 직접 본 것은 청우뿐이었다.

즉, 진무의 실력은 무당의 고수 중 아무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다.

'명진 사조의 도동이었던 자.'

하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무당의 검공을 변형시킬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다 했다.

십계를 어겼음에도 고작 해검지 마목 보수라는 징계 같지도 않은 징계를 받았다.

존장과 장로들의 인정을 받은 자. 그리고 눈앞에서 고작 자세만 바꿔 준 것으로 청우가 저 바위를....

청상의 시선이 진무가 타고 앉은 바위에 닿았다.

"어때? 해볼 거야?"

"...."

청상은 가늘어진 눈으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거, 새끼. 얼굴 뚫리겠네. 왜? 쫄리냐? 질까 봐?"

자신보다 한 살이 어린 사숙.

도문에 몸담았다는 자의 말투가 시정잡배와 다름없다.

"제가 그리 우스워 보입니까?"

"어."

단호하다.

그 단호함에 저도 모르게 어금니가 절로 갈리고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청우는...."

"칠성권(七星拳)을 익혔지."

적수공권(赤手空拳)이라는 말이다. 청우는 아직 검공을 모른다. 아니 배우지 못했다.

"잘 아시는군요."

"그럼. 누구보다 잘난 내가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한데도 저와 대련을 시키겠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유운검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근데?"

"...."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다.

무엇을 익히고 있는가는 일대제자들은 몰라도 입문 단계의 이대제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아직은 자신이 익힌 무공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즉, 어떻게 해도 청우와 자신의 대결은 검과 권의 대결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너 설마? 무기 하나 쥐었다고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

"유운검법 오 성? 풉!"

누가 봐도 비웃음 가득한 표정.

"청우가 이긴다니까."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진무의 말에, 청상이 한기를 풀풀 날리며 매섭게 째려보았다.

청우는 계속 좌불안석인 표정이었다.

"내 검에는 눈이 없소."

내? 없소? 이 새끼가 속 좀 긁었다고 말 자꾸 짧아지는 것 봐라.

"허세는.... 누가 들으면 무당 최강의 고수인 줄 알겠다."

"...."

"할 거야?"

"좋소!"

청상이 콧김을 뿜어 대며 근처에서 쓸 만한 나뭇가지를 구해 들었다.

"어? 너 뭐 하냐?"

"왜! 뭐 문제 있소?"

진무가 당연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청상의 허리를 가리켰다.

진검.

"하, 사형제와의 싸움에 진검을 쓰라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

"됐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사형제 간에 진검을 쓰는 것은 십계로 엄격히 금하고 있음이오."

"또 십계냐? 쯧, 후회할 텐데...."

"시끄럽소!"

하나하나 발끈하는 모습이 역시 꽤 귀엽다.

"뭐, 좋아.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흥!"

청상의 모습에 빙긋이 웃은 진무가 청우를 불렀다.

"청우야."

"예?"

진무는 청우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요렇게 해서... 이렇게. 그다음엔 요렇게...."

"...!"

듣고 있던 청우가 얇은 눈을 깜박거렸다.

"지, 진짜요?"

청우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진무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게 가능한...."

"이 자식이 자꾸. 야, 너 진짜 나 못 믿어?"

"믿습...."

"그럼 해."

"...예."

청우가 어깨가 축 늘어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청우야."

"예?"

"가르쳐 준 대로 안 하면 뒈진다."

진무는 친절하게 움켜쥔 주먹을 청우의 눈앞에 대고 살살 흔들자 청우의 표정이 핼쑥해진다.

이미 맞아 본 경험이 있으니.

"그리고 지면 앞으로 고기는 없을 줄 알아."

"예...? 헉, 옙!"

'고기.'라는 말에 청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역시 인간에게는 동기 부여가 필요한 법이지, 암.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진무가 흐뭇하게 웃으며 팔짱을 끼는 동안 청우가 자세를 낮추고 두 주먹을 앞으로 뻗은 기수식을 취했다.

청상이 보기에는 그저 그런 초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있었던 진무의 귓속말. 무슨 말을 해 준 것일까?

칠성권(七星拳)을 익히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인 투로나 공격의 방향은 청자 배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칠성권의 핵심은 발경(發勁).

대성하면 발경만으로 집채만 한 바위도 부술 수 있다.

'하나 대련이다. 청우의 초식 운용은 아직 모자람이 많다. 하물며 청우에게 발경은 무리!'

청상은 비웃음을 가득히 머금고 검을 가볍게 돌려 기수식을 취했다.

괜히 왔다.

뭔가 혹시 얻을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올라가자.

그 전에 이 물정 모르는 어린 사숙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청우와 청상이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끌어 올리는데.

"야, 니들 뭐 하냐? 안 하냐?"

"...."

턱을 괴고 앉은 진무의 말에 청우의 신형이 북두보(北斗步)를 밟았다.

쿵!

거칠게 지면을 밟은 청우가 단숨에 전진해 왔다.

'허!'

생각보다 움직임이 빠르고 좋았다.

도저히 청자 배의 최하위 실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간결한 움직임이었다.

근래 진무에게 배우고 있다더니 꽤나 효과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북두의 움직임에 따라 전진해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

'지금! 맥을 끊는다.'

청상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구름이 흘러가듯 부드럽게 휘었다.

산중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슬쩍 물러났다 뻗어진 나뭇가지가 청우의 몸을 감싸....

사라졌다.

분명 문곡의 자리에서 공격이 시작되어야 했다.

그랬어야 하는데.

뒹굴.

"...!"

굴렀다.

앞구르기를 하듯이 굴러 검격을 피한 청우가 청상의 측면에서 솟구쳐 올랐다.

'나, 나려타곤?'

구르기에 이어 펼쳐진 칠성권의 기본 권각, 승룡퇴(乘龍退).

퍽!

다급히 펼쳐 낸 검을 물리며 솟구친 발을 막아 낸 팔꿈치가 시큰거렸다.

그리고 또 구른다.

청상이 다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이미 옆으로 구른 청우가 몸을 솟구치며 연환 타격을 펼쳤다.

퍽, 퍽, 퍽!

강렬한 주먹이 연신 그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온다.

노리는 곳은 검을 든 손 쪽.

교묘하다.

아무래도 검을 들고 있으니 방어가 자유롭지 못했다.

다섯 번의 공격 중에 두 번이 옆구리에 적중되었다.

생각보다 청우의 공격이 날카롭고 빨랐다.

'크윽...!'

강하진 않았지만,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는 되었다.

무인, 아니 명문의 제자가 되어 나려타곤을 펼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고.

더욱이 검을 쥔 손의 측면을 집요하게 노려 오자 공격은커녕 방어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청상이 당황하고 있는 동안 청우도 사력을 다해 열심히 구르고 있었다.

진무가 속삭인 것은 유운검의 공략법.

청우야. 굴러.

무조건 검을 쥔 손의 측면으로.

뜬금없이 구르라니?

그런데 먹힌다!

그 대단해 보이던 청상이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공격을 위해 솟구치는 청우를 막아 낸 청상의 동작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탓에 부드러워야 할 유운검에 과도한 힘이 실렸다.

바로 진무가 말한 순간이었다.

쿵!

청상의 좌측을 잡은 청우의 오른발이 지면을 눌러 밟고 상체가 비스듬하게 선다.

어깨와 등.

철산고(鉄山靠)였다.

쩌어엉!

청상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크게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 겨우 중심을 잡았다.

"...."

마지막 순간 가까스로 허리를 비틀며 청우의 목덜미를 찌른 나뭇가지는 손잡이만 남기고 박살이 났다.

졌다. 진 것이다.

연속해서 구르는 동작으로 유운검법의 공격이 무력화되었다.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은 청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져, 졌...."

따악!

"아극!"

청우가 두 손으로 제 이마를 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멍청한 자식!"

진무가 청우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