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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10화

왜? 어째서?

"등이랬지!"

"죄송합니다. 사숙."

"등을 잡을 때까지 미친 듯이 구르랬잖아!"

"...네."

"아오, 이 자식이 다 잡은 기회를.... 더럽게 굼떠 가지고는."

"죄송해요."

누가 봐도 청상이 졌다.

그런데 진무는 오히려 청우를 잡고 있었다.

어째서?

"마지막에 너무 조급하게 공격하는 바람에 맞았잖아. 진검이었으면 넌 죽었어."

아!

청상은 그제야 진무가 청우를 나무라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의 손에 들린 게 진검이었다면? 그의 말대로 청우는 죽었을 것이다. 목덜미에 검이 꽂혀서.

"넌, 이틀 동안 고기 구경도 못 할 줄 알아!"

"예? 아무리 그래도 청상 사형을 상대로 선전을...."

청우가 울상을 지었다.

"닥쳐! 너 때문에 다 잡은 고기를 놓쳤잖아!"

응? 다 잡은 고기?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청상은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청우에게 졌다.

그간의 자존심이 모조리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이, 너."

"예?"

갑작스러운 부름에 청상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사과하지. 청우가 졌다. 이길 줄 알았는데...."

이겼으면 분명 한 놈 더 꾀어서 타락시킬 수 있었는데.

"아니, 그건 제가...."

어느새 말투마저 공손해지고 있었지만, 진무는 더 듣지도 않고 청우의 귀를 잡아당긴 채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뒈진다고."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사수욱...."

청상은 우두커니 서서 숲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기인이다. 자신보다 어린 사숙은....

* * *

거 참 이상하다.

왜 오지?

진무는 해검지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꿍! 쾅! 콩!

말뚝을 박아 넣는 소리.

해검지 보수를 시작한 지 보름째.

처음에만 해도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청상이 바로 다음 날 청우와 함께 내려왔다.

흠, 분명 녀석이 이겼기에 얻을 것이 없을 텐데.

그리고 다음 날, 그리고 또 다음 날. 청상은 계속해서 찾아왔다.

뭘까?

더구나....

"사숙, 마목 열 개 다 박았습니다."

공손해지기까지.

이런 새끼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근래에 무당의 음식이 상한 건 아닐까? 아무래도 뭘 잘못 처먹고....

가까이 다가와서 은밀하게 속삭이기도 한다.

"고기를 준비할까요?"

"...."

"들어 보니 꿩고기가 그리 맛나답니다."

징그럽게 눈까지 찡긋거리고... 뭐, 좋은 현상이기는 한데.

진무가 뚱한 표정으로 청상을 쳐다보았다. 이런 자발적인 변화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타락하는 것은 좋은데 기쁘질 않다.

"그, 그래...."

"알겠습니다. 사숙. 금방 잡아 오겠습니다."

청상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제들을 향해 다가갔다.

"청우야."

"예. 사형."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더니 요 며칠 새 꽤 친해진 모습이다.

"사숙께서 번거롭지 않으시도록 불을 피워 두거라. 내 서둘러 꿩을 잡아 오마."

"예. 다녀오십시오. 사형."

다시 한번 진무를 향해 고개를 숙인 청상이 재빨리 숲으로 뛰어들었다.

"젠장, 이거 뭐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흠... 음... 하아...."

진무가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리자 불을 피우던 청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숙,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별건 아니고.... 흠...."

진무가 청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그게... 흠...."

아무리 봐도 멍청하다.

무공을 익히는 속도도 늦고, 눈치도 없고.

이 녀석 때문에 청상이 오는 건 절대로 아닌 것 같은데.

"사숙. 고민이 있으시면 말씀을 해 주세요."

청우가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살집 속으로 눈을 감추었다.

그래,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잠시 뒤, 청상이 양손 가득 꿩을 잡아 왔다.

한 손에 두 마리씩.

도합 네 마리나 되었다.

"사냥술이 모자라 이것밖에 잡지 못했습니다, 사숙. 이놈들이 어찌나 날렵한지."

손에 든 꿩을 내밀며 히죽히죽 웃는 청상의 손과 얼굴에는 영광스러운(?) 상처가 가득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지 모른다고 했던가. 고기 맛을 몇 번 보더니 아예 꿩 씨를 말릴 셈인가 보다.

진무가 되레 당황해 입을 떡하니 벌리는데 청우가 신이 난 듯이 꿩을 나뭇가지에 꿰어 불 위에 올렸다.

"아, 아니 털은 좀 뽑고...."

이 무식한 놈아!

말릴 새도 없이 꿩이 활활 타오르는 불 속으로 사라졌다.

고기 맛을 보면 뭘 하나. 처먹을 줄을 모르는데.

노릇하게 구워져야 할 꿩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아까운 꿩고기 맛을 다 버려 놓았다. 자고로 고기는 바싹 익은 껍데기가 제맛인데.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죄 타 버린 꿩을 한 마리씩 들고 청우와 청상이 진무를 쳐다보았다.

먼저 먹으라는 말이다.

굽는 법은 몰라도 예의는 바르다.

'하아....'

진무가 한숨을 내쉬며 그나마 타지 않은 속살을 발라 먼저 한입 베어 물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아귀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니들 굶었냐?

"마, 맛있다!"

그거 탄 거야.

"이런 맛이라니!"

탄 거라니까?

그을음으로 떡칠이 된 얼굴을 해서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청상과 청우.

고기를 먹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먹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사숙 덕분에 이런 맛을 다 보고, 정말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고기를 먹고부터는 힘이 더 나는 것 같습니다. 수련할 때도 전보다 덜 지치는 것 같고요."

뭐지? 이런 아부성 발언?

물론 금방 배가 꺼지는 채식 위주의 식단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

며칠 고기 먹었다고 갑자기 그리 변할 리는 없었다. 필시 심리적인 효과가 분명하다.

"청우의 체력이 좋아진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듯합니다. 저걸 들다니."

청상의 말에 청우가 우쭐거리며 어깨를 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한숨만 나왔다. 씨발, 이놈의 꿩고기 진짜 더럽게 맛없네.

얼굴과 손이 시커메지고 기름기에 입술이 번들거리는 두 놈의 모습에 식욕까지 감퇴하는 느낌이었다.

"저, 사숙."

맛없는 꿩고기를 맛있게 먹고 흔적까지 알아서 싹 치워 버린 뒤 청상이 은근한 어조로 불렀다.

"뭐?"

"저, 지난번에 그 유운검의 단점 말입니다."

"...."

"그게 생각보다 고치기가 쉽지 않던데...."

이거였군.

이 새끼가 꿋꿋이 오는 이유가.

어쩐지 계속 아부를 해 대더라니.

진무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하긴 멍청하고 해맑기만 한 청우가 새끼는 쳤으되 키울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절대로 보상이 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씩, 하나씩 배가 고플 때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던져 줘야 하는 것이다.

"아, 고기를 많이 먹었나? 입이 텁텁한 게 물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사숙, 물 떠 올까요?"

멍청한 청우가 또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끼어든다 싶을 때, 이미 청상은 저만치 달리고 있었다.

부하 이 호는 다행히 눈치는 좀 있는 편이었다.

* * *

"뭣이? 또? 계율을 어겼다고!"

명공의 고함에 정동궁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예. 제가 지켜본 결과, 해검지 마목을 보수하기는커녕 아주 대놓고 고기 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진혜의 말에 명공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육식을 하고 있더냐?"

"예, 사부님."

이미 한시적으로 해지된 금기였다.

명공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건 말건 진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명진 사숙을 생각하는 마음에 장로님들께서 인정을 베푸신 것을 압니다. 하지만 감사하기는커녕 다시 잘못을 범하고 있으니 반드시 일벌백계하여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무, 물론 그렇긴 한데."

장문인이 원한 것은 무당의 변화였다.

이미 장로 회의를 통해 십계 중 나머지 부분도 수정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당의 변화를 위해 조금씩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진혜의 마음이야 알지만, 한시적으로 해지된 금기를 어겼다는 것으로 책임을 물을 순 없었다.

물론 이미 발표를 했음에도 나머지 제자들은 여전히 금기를 지키고 있었다.

"근래에는 청상까지 그놈에게 휩쓸려 개인 수련 시간만 되면 해검지로 가고 있습니다."

"청상까지?"

"예. 청우에게 진 뒤로는...."

"응? 누가 누구한테 져?"

명공이 눈을 크게 떴다.

"청상이 청우에게요."

"...."

과거라면 몰라도 이대제자가 몇 되지도 않는다.

더욱이 무당의 계율을 담당하는 영은궁의 궁주였다. 지금의 무당 제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청상이라면 이대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아이가 아니냐?"

"예. 그러니 큰일이지요. 전도유망한 녀석이 진무 녀석의 꼬임에 넘어갔습니다. 제자는 혹여 이러한 분위기가 다른 제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처벌을...."

진혜가 진무의 잘못을 재차 거론했지만, 명공의 귀에는 한 가지밖에 들리지 않았다.

"허, 도명을 받은 청자 배 중에 가장 모자라는 녀석이 청상을 이겼다고?"

"예!"

"어, 어찌 이겼더냐?"

명공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묻자 진혜가 물 만난 고기처럼 고해 바쳤다.

"그도 문제입니다. 아예 대놓고 나려타곤을 쓰며 청상이 검을 쥔 손의 측면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뭣이! 나, 나려타곤을?"

"예! 정말 부끄러움도 모르는 건지. 나려타곤이라니요. 반드시 처벌해야 합니다."

명공은 놀라움에 한동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려타곤은 당나귀가 바닥을 구르는 것과 같아 모든 정파인이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유운검의 단점.

하단이 취약하고 검을 쥔 손 쪽의 공수 전환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기에 유운검을 익힌 이들은 다른 무공으로 그 단점을 보완한다.

물론 일대제자들은 그러한 단점을 알 리가 없다.

그들은 유운검에서 불편함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다른 무공을 익혀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진무가 어찌 알았을까?

무공에 대한 깊은 고뇌와 통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익히기 이전에 파훼하기 위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단하구나. 누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 아이가 스스로 무당을 변화시키고 있음인가?'

들을수록 놀라운 기행이었다.

명진의 제자.

이미 도동으로 지내며 스승을 모셔 온 그 착한 됨됨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거늘, 발전의 속도가 실로 경이롭지 않은가.

"그놈 참...."

명공이 제 턱수염을 쓸며 입맛을 다셨다.

"당장 진무를 계율원으로 부를까요?"

"흠...."

'그놈 참'과 '흠'이 좋은 뜻을 품고 있었으나 진혜는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사부님?"

"...."

자꾸만 처벌을 입에 담는 진혜의 말에 난감하기 짝이 없던 명공이 다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아!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러고 보니 오늘 청양상단이 온다 하지 않았더냐?"

"아, 예. 조금 있다가 제가 해검지로 나가 볼 참입니다."

"오냐, 그래. 장문인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니 대접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보다 진무의 처벌에 대해서는...."

"...거 참, 흠."

"사부님?"

"허허, 참."

명공은 진혜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천천히 일어나 '허 참.'을 연신 내뱉으며 영은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11화

해검지를 보수하는 작업은 차근차근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 달에 걸쳐 마목 수십여 개를 박는 작업이니 그다지 급할 것도 없었다.

늘 그랬듯이 진무는 놀고, 청우와 청상은 열심히 박고, 한 두어 개쯤 박고 나면 청상이 사냥을 나가고, 청우가 불을 피운다.

그리고는 툭툭 내뱉는 듯한 진무의 가르침에 따라 둘의 수련이 이어졌다.

"쩝쩝, 근데 오늘 손님이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점심으로 토끼를 구워 먹고 있던 청우가 흘러가듯이 말했다.

"맞아. 으적으적, 명충 사조께서 몇 번이나 찾아가 읍소를 하셨다고 했었지."

"꽤나 중요한 손님인가 봐요. 아침부터 다들 청소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그래. 청양상단인가? 뭐 그런 이름이라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분명히 점심 때쯤 진혜 사숙께서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직접 여기로 내려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청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 언덕 아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청상의 얼굴에 짙은 긴장감이 떠올랐다.

"청우야!"

"...."

"치워!"

파팍! 파바박!

순식간에 꿩의 잔해가 치워지고, 타다 남은 나무들이 땅속으로 파묻혔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척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해검지 앞으로 나섰다.

"야, 니들...."

진무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이미 그들은 세속을 등지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무당파의 자랑스러운 청자 배 이대제자로서 고고한 표정으로 해검지를 향해 다가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청양상단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예."

청상의 기품 있는 인사에 염소수염에 야비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사내가 헙!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무당의 이대제자 청상입니다."

"아, 아... 예."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모습에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아침에 진혜 사숙께 오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한데 무당에 무슨 우환이라도...?"

"예?"

사내의 물음에 청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산문 쪽에서 일대제자 진혜가 십수 명의 이대제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상단주님."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던 진혜가 청상과 청우 등을 보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이놈들이...."

염소수염의 상단주 때문인지 차마 화는 내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홱 하니 진무를 째려보았다.

야리기는. 확 눈깔을 뽑아 버릴라.

나무에 기댄 진무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파락호 같은 놈. 또 고기를 처먹어? 내 청양상단과의 일만 끝나면 일대제자들의 뜻을 모아 반드시 장문인께 주청을 드리고 말겠다.'

속으로 이를 득득 갈던 진혜가 표정을 고치고 청양상단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올라가시지요.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예?"

"어째 이대제자분들의 얼굴이?"

"아, 아닙니다. 아마도 해검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아아...."

얼핏 수긍하는 것 같으면서도 염소수염의 사내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이미 진혜의 대답을 들은 다음이라 더 묻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은 짐을 받아 들거라."

"예, 사숙!"

진혜의 외침에 청자 배의 무인들이 상단의 사람들이 메고 있던 짐을 받아 어깨에 메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하하, 상단주님. 우리가 남입니까? 산길이 험하니 사양치 마시지요."

"허헛,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암요. 암요. 자, 가십시다."

진혜가 산문 쪽으로 길을 비켜나자 상단주가 기분 좋은 듯 자신의 수염을 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네놈들은... 나중에 두고 보자."

청양상단주가 앞서자 진혜는 청상 등을 보며 눈을 있는 힘껏 부라리고 급히 따라 올라갔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청상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휴우, 진혜 사숙께 토끼 잡아먹은 것을 들키는 줄 알았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서둘러 치웠으니 망정이지."

사실 들켜도 상관은 없을 일이다.

"그런데 어째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던데요?"

가기 전에 자신들을 쏘아보던 진혜의 모습에 청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아...."

그들을 지켜보던 진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음, 왜 그러실까요?"

청우가 시커먼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봐도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은데.

"분명히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는데...."

청상의 기름 범벅인 입술.

예의가 문제가 아니지 않니?

하아, 적어도 청상은 제법 똑똑할 줄 알았는데....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정말이지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놈들이다. 하필이면 부하로 삼은 일 호, 이 호가 이런 놈들이라니.

그나저나.

"청우야."

"예, 사숙."

"쟤들 누구냐?"

"아, 모르셨습니까?"

모르니 묻지 이 자식아.

"청양상단입니다."

"청양상단?"

"예, 단강구 어디에 있는 상단이라던데요?"

"흠."

단강구 청양상단.

진무는 자신이 아는 수많은 상단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지만,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산중에서 무식하게 도(道)나 닦는 정파와는 달리 상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패천이었다.

평소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깰 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는 중원에서 활동하는 이름 있는 상단, 표국, 해운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생인가?"

하긴 죽은 지가 벌써 일 년이다.

되살아난 다음에도 꼬박 무당산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어? 아닌데요?"

"응?"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단강구에서 삼대째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삼대?"

삼대(三代)라면 최소 육십 년은 넘는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쩌리다.

별 볼 일 없는 상단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상단의 주인이 무당의 일대제자인 진혜에게 저런 대접을 받는다고?

산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분명한 상하 관계가 존재했다.

상단주는 객(客)임에도 앞서 걷는 것에 그다지 거리낌이 없고, 뒤따르는 진혜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모습.

'아무리 망했다고 해도 명가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이름도 없는 상단 나부랭이에게 저자세를 보여? 이거 봐라?'

진무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무당에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팔궁 중 셋이 불태워지고 수뇌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음에도 자신을 향해 굽히지 않고 원독을 머금고 자신을 노려보던 '명진'과 제자들의 눈빛을.

비록 자신이 싫어하는 도문이었으나 무당은 그 정도로 꿋꿋한 곳이었다.

분명 뭔가 있다.

특히나 상단주의 얼굴에서는 본능적으로 비열함을 느꼈다.

무당과 같은 명문에 절대로 이득이 될 만한 놈이 아니었다.

"얘들아."

진무의 부름에 청자 배의 제자들이 시선을 모았다.

"올라가자."

"예? 아직 작업이...."

"됐으니까 그딴 건 대충 정리해."

"...."

"그리고, 니들...."

제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다 진무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얼굴 씻고 와."

"...."

"주둥이 기름도 좀 닦고."

* * *

무당파 본궁인 자소궁의 내전에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청양상단의 금적산이 무당 장문인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명현이 내어 주는 자리에 금적산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앉았다.

자소궁 대전에 모인 이들.

중앙에 나란히 자리를 놓은 장문인 명현자와 금적산.

그 옆으로 영은궁주 명공을 필두로 팔궁의 주인인 장로들이 앉고, 그 뒤로 일대제자들이 서 있었다.

반대편에는 상단에서 온 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가져오너라."

금적산의 말에 매서운 호목(虎目)에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궤짝 하나를 들고 왔다.

"초청해 주신 마음에 보답하고자 약소하게 선물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명현이 눈앞에 열린 궤짝에 가지런하게 담긴 은원보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리도 많은...."

오랫동안 도를 닦아 온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금적산은 놓치지 않았다.

"많다니요. 그저 무당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헛헛, 그리 생각해 주시다니 다행입니다."

명현이 만족스럽게 웃자 장로들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으나 근래 무당의 사정을 듣고 몇 가지 준비를 더 해 보았습니다."

금적산의 눈빛에 또 다른 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짐을 풀자 제법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검들과 숫돌 등 무인들에게 필요한 물목들이 가득히 쏟아져 나왔다.

"허!"

장로들이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특히나 무당의 살림을 맡은 원화관주 명선으로서는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간 제자들에게 얼마나 미안했던가?

아껴 쓰라고 얼마나 다그쳐야 했던가?

지난 십여 년 동안 이어진 재정 악화로 인해 제자들의 무복 하나 마음대로 지어 입히지 못했던 것이 언제나 못이 되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상단주. 이렇게나 신경을 써 주시니 제가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별말씀을요. 되레 저희 같은 상단과 연을 맺어 주신 무당에 제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 모두가 진혜 도장과의 인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금적산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눈빛으로 진혜를 바라보았다.

일대제자 진혜.

단강구에서 제법 이름난 가문의 아들로, 명공의 제자였다.

올해 서른이라는 나이로 무당칠자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그는 장래가 기대되는 무당의 검수였다.

"허허, 우리 진혜가 큰일을 하였군요. 덕에 무당이 한시름 놓겠습니다그려."

"옳은 말씀입니다. 진혜 도장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언감생심 정도 무림에서 이름 높으신 분들을 이리 가까이서 뵐 수나 있었겠습니까? 모두가 진혜 도장 덕분입니다."

추켜세우는 금적산의 말에 명공의 뒤에 서서 대기하던 진혜가 공손하게 말했다.

"상단주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장문인과 장로님들 앞에서 얼굴이 부끄럽습니다."

"저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금적산이 미안해하자 명현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아니요. 실수라니요, 허허. 진혜는 과히 겸양치 말거라. 이리 좋은 인연을 맺게 한 너의 공을 모두가 높이 사고 있음이다. 안 그런가? 사제."

명현의 말에 명공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장문인 말씀이 옳습니다. 진혜는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이니 괘념치 말거라."

"예."

명공의 말에 진혜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상단주, 내 응당 대접을 해야 하겠으나 도문에 흥취를 돋울 것이 마땅히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오."

"아닙니다. 딱히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으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저 돌아가는 길에 도관에 들러 가족들의 구축병마(驅逐病魔)나 빌게 해 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구축병마라 함은 병과 마를 쫓는 것을 말했다.

한창 성세를 구가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기는 해도 찾아오는 이들마다 어떻게든 무당의 힘에 기대려 하건만 어찌 저리 소박하단 말인가?

그의 마음 씀씀이에 명현과 장로들은 더욱 흐뭇한 마음이 들어 너도나도 청양상단과 연을 맺게 한 진혜를 칭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면 바쁘실 터인데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허허, 산중의 도인이 바쁠 것이 무에 있겠소."

"마음은 감사합니다. 실은 제가 속인(俗人)이다 보니 도관의 분위기가 영 적응이 되지 않아서."

"허허, 돌려서 말씀하신 것을 내가 우둔하여 몰랐구려."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다시금 깊이 반성했다.

청양상단주 금적산.

무당의 재정 문제로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여 온 명현에게 진혜가 조심스럽게 소개한 사람이었다.

세가 예만 못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음에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어떠했던가.

염소수염에 비열해 보이는 눈빛.

속세에 밝지 못해 그에 대한 소문을 자세히 듣지 못했으나 외양만으로는 그다지 연을 맺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나 대화를 하고 만나 보니 그 됨됨이가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허헛, 도를 허투루 닦았음이야. 어찌 외관만 보고 사람의 진면목은 들여다보지 못했단 말인가.'

마음이 그러했기 때문일까?

처음 가졌던 마음과는 달리 금적산의 모습조차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금 단주. 아무리 불편하다 해도 내 그냥은 보내 드리기 안타깝소. 하니 무당의 도관과 아이들이 수련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가시오."

"그리 말씀하시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고맙소이다."

"하면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금적산이 공손하게 예를 다하고 상단의 사람들과 함께 자소궁을 빠져나갔다.

12화

"장문 사형, 실로 잘된 일이 아닙니까? 이제야 숨을 좀 돌리겠습니다."

금적산이 깔아 놓은 은원보와 병장기들을 살펴본 명선이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암, 잘된 일이고말고. 이제야 우리 무당이 다시 일어설 때가 된 모양일세."

"모두가 장문인께서 주야로 고생하신 덕분입니다."

"아닐세. 모두가 본문을 생각한 진혜 때문이지. 아주 큰일을 하였어."

명현이 거듭 칭찬을 아끼지 않자 장로들이 진혜를 든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혜야."

"예, 장문인."

"오래 계시지는 않을 듯하나 대함에 예를 다해야 한다. 네가 직접 상단주를 안내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명현의 말에 진혜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장문인, 아무리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청양상단 또한 상단이 아닙니까?"

"음?"

"무가와 상단이 연을 맺으면 응당 이쪽에서도 도울 일이 있을 겁니다."

명공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이 무가와 연을 맺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보호.

상단을 운영하다 보면 갖은 위험에 맞닥뜨리게 된다.

녹림이나 수적을 만나기도 하고 다른 상단과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상단은 이를 위해 호위 무인을 채용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해서 마음이라 표하며 '사례비'를 내고 무력을 지원받는다.

그렇기에 누가 더 강력한 세력과 연을 맺는가 하는 문제는 상단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과거 무당이 성세를 구가할 때만 해도 중원의 이름 있는 상단들이 줄을 섰고, 그를 차마 내칠 수 없어 마지못해 도와준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당의 영향력은 인근의 단강구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당이 쇠퇴하는 사이 제갈세가가 영역을 넓혀 이권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탓에 누구도 무당과 연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저들에게 무당의 힘이 여전함을 슬쩍 내보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보인다고?"

"예. 상인들이 수준 높은 무예를 본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청자 배 아이들의 수련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일상적인 수련이라 말하고 조금만 신경을 쓰면...."

"흐흠,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명선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진혜가 안내하는 동안 따로 준비하라 이를까요?"

명선은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무당의 살림을 맡고 있었기에 청양상단과 맺어지려는 연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명선 장로님, 장문인."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장로들이 있는 자리였기에 일대제자가 나서서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으나 청양상단을 소개한 공을 높이 사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혹,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제가 영은궁의 제자들에게 미리 준비를 시켜 둔 것이 있습니다."

"오!"

모두가 진혜의 준비성에 감탄했다.

"그래. 무엇을 준비했느냐?"

"한 달 전부터 사부님의 도움을 받아 구궁검진(九宮劍陳)을 수련시키고 있습니다."

"구궁검진을?"

장로들이 진혜의 사부인 명공을 바라보았다.

명공 역시 이미 알고 있었기에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무당이 자랑하는 구궁검진이었고 명공과 진혜가 직접 수련을 시켰다면 힘을 보여 주기 부끄럽지 않을 터였다.

"허허, 네가 정말이지 큰일을 하고 있었구나. 잘하였다."

명현이 진혜를 다시 한번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오냐, 그럼 서둘러 나가 보거라. 손님들 기다리겠구나."

"예."

진혜가 공손히 답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하하, 이거 참. 명공이 제자를 잘 키운 모양입니다."

"암요. 저리 속이 깊을 줄이야."

"근래에 들리는 것이 어찌 다 좋은 소식입니다. 장문 사형."

장로들이 너도나도 진혜를 칭찬하고 나섰다.

"그러게나 말일세. 진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렇고 진혜도 그렇고. 이제야 우리 무당에 볕이 들 모양이네."

"암요. 암요. 모처럼 깊이 잠을 청하시겠습니다."

그동안 명현의 고충을 모르지 않은 장로들이 저마다 위로를 하고 나섰다.

"하면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명공이 일어나자 명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상주님. 너무 과한 것이 아닙니까?"

먼저 자소궁 밖으로 나와 한쪽 구석에서 기다리던 청양상단의 총관 이치성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역시 제 주인을 닮아 세모꼴에 비열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뭐가 말이냐?"

"다른 물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은원보가 한 궤짝입니다. 그 정도라면 차라리 제갈세가와 연을 맺는 것이...."

무당이 망해 가는 지금 호북성의 최대 세력은 융중산(隆中山)의 제갈세가였다.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예?"

"이놈아. 내가 그리 생각이 없어 보이더냐?"

금적산이 야비한 표정으로 수염을 쓸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은원보 한 궤짝. 큰돈이기는 하지. 허나 제갈에 그 돈을 바쳐서 얻는 게 있겠느냐?"

"...."

"다른 곳도 아니고 세속에 누구보다 밝은 제갈이다. 그 안의 학사 놈 중에 우리에 대해 아는 놈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야...."

학문뿐 아니라 상리에도 밝은 가문이니 필시 그러할 터였다.

"제 놈들 체면에 밀수로 돈을 번다는 사실도 알고 연을 맺으려 하겠느냐?"

"...."

"은원보를 바치면 받기는 하겠지만 그 뒤는? 모른 체할 게 틀림없다. 헛돈만 날리게 되는 게지."

"그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당은 힘이 없는데...."

"없지. 아니, 계속 없어야지. 그래야 다른 날파리들이 꼬이지 않을 게 아니냐."

금적산의 눈빛이 점점 더 야비하게 변했다.

"무당이 망해 간다곤 해도 세간의 생각은 다르다. 무당이 중원의 종맥이자 세상 어느 곳보다 떳떳한 도문이라는 것은 동네 세 살 꼬마도 아는 사실이란 말이다."

"그렇지요."

"우리가 그런 곳과 연을 맺었다 소문을 내어 보아라. 또한, 힘도 없는 무당에게 선뜻 발전 자금을 내주었다는 소문이 돌아 보아라."

"아!"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에 대한 중원의 평판이 달라질 게다. 당장은 손해라 해도 차차 나아질 게야. 안 그래도 근래에 관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데 떡하니 현장에 명망 높은 무당 도사라도 도와주러 오면."

"그렇군요. 관에서 보는 시각이 달라지겠군요."

이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봉문 이후로 약화되었다고 해도 천년을 이어 온 무당의 이름이다. 관의 무인들이 사용하는 무공 중에도 거슬러 오르면 무당의 것이 수십은 될 터였다.

충분히 힘을 발휘하고도 남는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무당뿐이었다.

"그래. 큰돈이지. 하지만 그로 인해 도사 놈들도 돈맛을 알아 갈 게다. 더없이 궁핍하니 맛을 보고 나면 빠져나가지도 못할 것이고. 지금이야 제 놈들이 대가리를 뻣뻣하게 들겠지만, 나중에는 사정하며 매달리게 될 게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이치성은 금적산의 교활함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

"대단? 흐흐, 고작 그뿐이라 생각하느냐?"

"예?"

"내 이미 진혜 도장과 약조한 것이 있느니라."

"약조라 하시면?"

"무당에는 아직 대제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아!"

대제자.

다음 대의 장문인이 될 사람이었다. 만약 그 대제자가 진혜가 된다면?

"그놈은 제 놈 욕심에 대제자가 되어 우리를 이용한다 생각하겠지만, 나중에 우리에게 휘둘리다 보면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과연! 상단주님의 혜안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이치성의 놀람에 금적산이 비열한 눈빛으로 자신의 수염을 쓸었다.

진혜로 인해 무당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은 금적산에게 천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흐흐흐, 도사 놈들. 필요한 만큼 뽑아 먹어 주마."

금적산이 음흉한 미소를 짓는 사이 진혜가 상청궁을 빠져나왔다.

"상단주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허허, 아닙니다. 모처럼 청량한 도문의 분위기에 가슴까지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금적산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진혜를 대했다.

"자, 그럼 가실까요?"

"예."

* * *

진혜와 금적산이 사라진 뒤.

담벼락 뒤에 팔짱을 끼고 있던 진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청우와 청상을 충허암으로 돌려보내고 자소궁으로 향하던 걸음이었다.

때마침 금적산과 이치성이 멀리서 대화를 나누고 있기에 어떤 놈들인가 알고 싶어 기척을 지우고 접근했다.

그런데.

염소수염 새끼.

어쩐지 비열해 보이더라니.

물론 칭찬을 해 주고 싶을 만큼 기특한 생각이었다.

이른바 뒷돈, 혹은 뇌물.

언젠가 무당을 타락시키기 위해 반드시 모두에게 권장해야만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염소 대가리 같이 생긴 놈이 감히 내가 찜한 영역에 대놓고 오줌을 갈기려 들어?'

무당의 타락 계획은 오롯이 자신에 의해 진행되어야 했다.

그것이 진무의 즐거움이었고 다시 사는 목표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놈이 끼어들어서 안 도와줘도 될 일을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진혜를 대제자로 만들겠다고?'

진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대제자는 자신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양의심공(兩儀心功)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야만 내력의 상충 없이 몰래 자신의 묵룡혼원공을 익혀 과거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힘을 얻고 난 뒤 정무맹 전체를 손에 넣으려는 원대한 계획의 발판인 무당을 접수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 잡것들이 내 계획을 방해한다 이거지?"

진무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풀었다.

나의 계획을 위해 네놈들의 음모를 반드시 박살 내 주마.

그리고 특히 진혜.

'이 새끼, 감히 나와 경쟁을 하려고 들어? 어디 두고 보자.'

진무는 천천히 그들을 뒤따라 영은궁으로 향했다.

일단은 정보가 필요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자신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이제 적을 알아야 했다.

* * *

무당 팔궁.

무당의 근간을 이루는 곳이었다.

자소궁을 포함해 정동(淨東), 영은(迎恩), 우진(遇眞), 옥허(玉虛), 남암(南岩), 오룡(五龍), 태화(太和)라 불리는 여덟 궁은 거대한 산 능선을 따라 용의 형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록 현재에는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못해 오궁과 일관만이 남아 있었다.

명자 배로 구성된 여섯 명의 장로들은 각각 오궁과 일관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그중 영은궁은 제자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을 맡고 있는 곳이었다.

계율을 담당하는 만큼 그곳에 소속된 도사들은 걸출한 재능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주인인 명공 역시도 명자 배에서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실로 기세가 대단합니다."

금적산이 수련 중인 이대제자들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날 선 기세가 피부를 쩌릿하게 울려 왔다.

비록 이대제자로 구성된 무인들이었으나 그의 상단에 소속된 어떤 무인들보다 뛰어나 보였다.

특히나 단체로 검을 뻗었다가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는 검초는 군무처럼 아름다웠다.

"이대제자라 들었는데 놀람을 금할 수가 없군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진혜와 금적산이 수련을 지켜보는 가운데 영은궁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사부...님?"

영은궁의 주인인 명공의 모습에 진혜가 급히 뛰어가다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은 왜?'

명공의 뒤를 따르는 것은 다름 아닌 진무였다.

13화

"그래, 시연은 잘하고 있느냐?"

"예, 사부님."

진혜가 진무를 힐끗거리며 대답했다.

"아, 오다 만났다. 진무가 영은궁 제자들의 시범을 보고 싶다 하더구나?"

"아, 예...."

무척 달갑지 않았으나 사부가 함께 있으니 내색은 할 수 없었다.

"사형, 오랜만에 뵙습니다. 근래 해검지를 보수하느라 시간이 모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어. 그래."

진혜가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았다.

'뭐 보수 때문에 바빠? 이 자식이 어디서 거짓말을.'

진혜는 그간 몰래몰래 해검지에서 진무와 청자 배의 무인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보름이 넘었는데 보수라고는 마목을 몇 개 박아 놓은 것이 고작이고 연일 산짐승들이나 잡아 처먹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진무, 근자에...."

진혜가 명공이 들으라고 그의 과오를 슬쩍 꺼내려는데.

"이분이 무당에 도움을 주신 그분이군요?"

어느새 진무는 진혜를 지나쳐서 금적산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진혜 사형의 사제인 진무입니다."

"예? 아! 금적산입니다. 낮에 해검지에 계시던 분이군요. 나이도 어려 보이시는데 일대제자라니 대단하십니다."

"하핫, 눈썰미가 엄청나십니다. 제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아까는 감히 인사도 드리지 못했는데."

"...예."

낯을 가린다고 하기에는 너무 넉살이 좋아 보였다.

"제가 미리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청자 배 아이들에게 말해 두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실례를 범할 뻔하였습니다."

"예? 무슨?"

"검이요."

진무가 밝게 웃는 얼굴로 금적산의 허리춤에 매어진 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이, 이건...."

딱 봐도 장식용이었다.

하지만 진무의 싱글거리는 얼굴에 금적산은 뒷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해검지가 가지는 의미는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탓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해검지에서 검을 풀지 않음을 제지하지 않았을 만큼 상단주님을 귀빈으로 대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금적산이 사과를 하자 명공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진무를 말렸다.

"어허, 진무야. 그만하거라. 상단주께서 난감해하시지 않느냐?"

하지만 명공은 한편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해검지.

무당의 자존심과 같은 곳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누구도 그에 관해 말하는 자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재물에 눈이 멀어 당당히 허리에 검을 차고 자소궁에 들었던 것에 대해 누구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역시 장문인께서 바로 보고 계신 것인가? 비록 육식의 금기를 어기고는 있으나 그간 누구도 말하지 않은 무당의 자존심을 이 아이가 거론하는구나.'

진무가 그 사실을 서로 언짢지 않은 범위에서 일깨워 주고 있으니 내심 기분이 좋아진 명공이었다.

"참, 제자가 듣기로 오늘 구궁검진을 시연한다 들었습니다."

"오냐."

"혹, 제가 참관을 해도 되겠습니까?"

"응? 네가 말이냐?"

"예. 무당의 대검진인 구궁이 펼쳐지는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진무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자 명공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근래 진무의 재능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커진 시점이었다.

또한 얼마 전 청우가 청상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명공의 기대와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오냐, 알았다. 그리하거라."

"감사합니다. 사숙!"

진무가 뛸 듯이 기뻐하며 눈을 빛내자 명공은 더욱 흐뭇해졌다.

"진혜야. 시작하거라."

"예, 사부님."

진혜가 명공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진무가 끼어든다.

"사형, 기대가 큽니다."

"오, 오냐."

진혜는 내심 이를 갈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분위기가 자신에게 쏠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저 망할 놈이....'

갑자기 끼어든 놈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앞마당과 같은 영은궁에서.

나이도 어린 사제 놈이 마치 객이라도 된 것처럼 단에 올라 스승인 명공과 금적산의 옆에 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도 꼴 보기가 싫었다.

"구궁검진을 펼쳐라!"

하지만 일단은 시연이 먼저였다.

스승이 지켜보고 있으니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진혜가 우렁찬 외침과 함께 대열에 끼어들자 이제제자들이 일제히 진을 형성했다.

"개진(開陣)!"

진이 열리고 스무 명의 제자들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제각기 다른 방위를 점하며 검진을 펼쳤다.

모두 각각의 검로에 따라 검을 펼치자 흩어졌던 검격이 일순 하나로 모였다.

"재미있는 진이네요."

진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진을 응시하자 명공이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볼만하냐?"

"예. 하지만 집중이 조금 아쉽군요."

"아쉽다?"

"예."

"어찌 그렇게 느꼈느냐?"

"글쎄요. 검진에 대해서는 아직 배운 바가 없어 잘 모르겠으나 흩어진 검이 다시 모일 때 적을 단숨에 압박해야 하는데 묘하게 어그러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

금적산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명공의 두 눈은 경악으로 크게 뜨여져 있었다.

"계, 계속해 보라."

"음, 너무 치중하는 느낌이 듭니다. 저라면 좌변(左邊)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도망치겠어요. 차라리 저쪽의 검을 느리게 해 적을 유인하고 그 안에 날카로움을 더해 적을... 복잡하네요. 역시 좀 더 공부해 봐야 알겠습니다."

"...!"

검진의 부족한 점을 날카롭게 짚어 내는 진무의 모습에 명공은 눈만 끔벅거렸다.

구궁검진을 해석한 진무의 말은 팔문(八門)을 섞은 '구궁팔괘진'의 묘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 정녕 검진을 처음 보았단 말이냐?"

"예?"

진무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검진의 검(劍)자도 모르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괜한 말을...."

놀라기는.

허접하기 짝이 없는 구궁진법을 펼쳐 놓고는....

속마음은 영 달랐으나 진무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그를 바라보는 명공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럴 수가. 그저 보는 것만으로 깨우친단 말인가? 진의 파훼법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보완점까지 생각한단 말인가?'

재능이 출중하다는 것은 누차 들어 왔으나 직접 대해 보니 그 놀람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저,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보기에는 그저 대단할 뿐인데...."

대화에서 멀어졌던 금적산이 슬쩍 끼어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이거 손님을 모셔 놓고 제가 큰 결례를 범했군요."

"아닙니다. 그저 두 분의 대화에 호기심이 생긴 덕분에...."

금적산의 말에 명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무를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이 아이는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 재능이 뛰어나 본문에서 기대가 아주 크지요. 장문인께서도 눈여겨보시는 인재입니다."

외인에게 검진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이유도 없고, 어차피 상인에게 말해봐야 알지도 못할 일이었다.

명공은 복잡한 설명으로 금적산을 혼란스럽게 하는 대신에 진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금적산으로서는 묘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무당 장문인이 눈여겨봐? 이거 대제자가 될 놈은 따로 있었던 거 아냐?'

자신이 투자하려는 대상은 진혜였다.

무당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그의 탐욕을 충동질해, 나중에 그가 장문인에 오르면 통째로 빨아먹을 계획이었다.

그 와중에 뜬금없이 새로운 놈이 나타났으니.

'진무라....'

금적산의 눈동자에 어리숙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진무의 모습이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진무는 금적산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흐흐, 이 새끼야. 네놈들이 머리를 굴려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다. 자, 안면은 텄고 어느 정도 호감도 준 것 같으니 다음은 어떻게 접근하느냐인데....'

진무는 본심을 감추고 계속 어리숙한 연기를 하며 검진을 참관했다.

그 사이 아무것도 모르는 진혜는 명공과 금적산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검진을 지휘하고 있었다.

* * *

"흠...."

스승의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진무의 얼굴에 고민이 가득했다.

"하아, 어쩐다."

진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청양상단의 인물들이 돌아간 다음 날, 진무는 그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은위(隱僞)단주 명세찬에게, '야, 청양상단 좀 털어 봐.'라고 하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금적산이 입고 있는 속옷 재질까지 알아 올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무당산에 갇혀 지내는 일개 도사일 뿐이다. 도무지 청양상단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지금 아는 것이라고는.

금적산이 무당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는 것과 청양상단이 몰래 '밀수'라는 기특한 상행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진혜가 대제자가 되고 청양상단의 금적산에게 뒷돈을 받아 가며 타락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것에 침 바르게 둘 순 없지. 싸그리 털어 버려야 하는데....'

물론 그러자면 청양상단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제대로 알자면 그들에게 접근을 해야 했지만, 지금의 진무는 무당산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명분이 필요했다.

"하아...."

문득 돌아보니 한쪽에서 고기를 구워 처먹고 있는 청우가 보였다.

이젠 아주 대놓고 처먹는다.

뜨거웠는지 고기를 후후 불어 대다 시선을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다.

저 쓸모없는 식충이 자식.

고민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식 같으니.

"청우야."

"예! 사숙."

"그만 처먹고 스승님 상 차려."

"넵!"

쓸데없이 해맑지나 말든가.

그래도 시킨 일은 곧잘 하는 우직한 녀석이었다. 볼 때마다 천우명이 생각나 미워할 수가 없었다.

청우가 푸짐하게 고기를 올린 밥상을 들고 들어가자 명진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식사는 다 했느냐?"

"저희는...."

"아니요!"

청우가 밥상 위 가득한 고기에 침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새끼가 방금 처먹어 놓고.

"그럼 모처럼 같이 먹자꾸나."

"예!"

참 언제 봐도 한결같은 녀석이다.

하는 수 없이 명진과 진무, 청우는 함께 모여 육향 가득한 저녁 식사를 했다.

그사이에도 진무는 머릿속으로 청양상단에 접근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진무야."

"...."

"진무야?"

"예? 아, 뭐라고 하셨나요?"

"흠."

명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게냐?"

"아, 아닙니다. 그다지...."

생각이 너무 깊었던 탓일까. 진무가 제 실수를 깨닫고 희미하게 웃는데 청우가 끼어들었다.

"청양상단이 왔다 가고부터는 계속 저러시는데요."

"청양상단?"

"예. 이틀 전에 찾아온 상단입니다. 원화관에서 듣기로는 무당에 꽤 많은 후원금을 주어서 명선 사조님께서 엄청 좋아하셨다고 하던데요."

청우가 입 안에 고기를 가득 물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청양상단이라. 허, 하긴 세상 구경할 때도 되었지.'

명진은 그제서야 빙긋이 웃었다.

이미 약관에 오른 진무였다.

속세에서 온 이들을 보았으니 호기심이 일 만한 나이가 아니던가?

비록 봉문을 했다지만 자신의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면 벌써 한참 전에 제 사형들처럼 산 밖으로 나가 보았을 나이였다.

'녀석, 하긴 내 수발을 드느라 수년 동안 산중에 갇혀 있다시피 하였으니....'

명진의 아련한 눈빛이 닿았으나 진무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상을 내가는 진무를 향해 명진이 물었다.

"내일이 며칠이더냐?"

"초나흘입니다."

"초나흘이라.... 알겠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오냐."

명진은 흐뭇해진 표정으로 진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이 새낀 밥 잘 처먹고 왜 쪼개고 지랄이야?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진무는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14화

다음 날.

"진무야."

"...어?"

스승이 웬일이지?

평소라면 아침 식사 때나 되어야 말을 꺼내던 명진이 입지 않고 걸어 두었던 도포를 말끔히 차려입고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자소궁으로 가야겠다."

"...."

순간 진무는 명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새벽녘이라 바람이 차다.

기껏 살려 둔 놈이 괜히 찬바람이라도 들어서 다시 아프면 자신만 고생이었다.

"바람이 이렇게 찬데요?"

"든든히 입었으니 괜찮다. 가자."

이 자식이 뭔 좋은 일이라도 있나? 왜 자꾸 실실 웃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보는 눈이 많음을 잊지 않았던 진무는 성의껏 명진을 부축해 자소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매월 초닷새.

무당파에서는 장문인의 주관하에 정기적으로 장로 회의가 열렸다.

다가올 한 달 동안 시행되어야 할 행사들과 안팎의 살림살이를 논의하고 제자들의 수련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해서 장로들뿐만 아니라 각 궁의 업무를 담당하는 일대제자들까지 모두가 참석하는 자리였다.

사부인 명진은 맡은 궁이 없기도 했고 근래까지 암자에서 두문불출했었기에 그동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그 때문에 장로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진무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어? 사숙!"

부상을 털고 일어난 진허가 자소궁으로 가다가 명진을 보고 반갑게 다가와 인사했다.

"오, 진허더냐. 오랜만이구나."

"예.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괜찮다. 그래 근자에 진전은 좀 있더냐?"

"진전이요?"

진허가 명진을 부축하고 있는 진무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사숙님의 제자 덕에 근래 크게 개안을 했지 뭡니까?"

"아, 들었다. 진무가 좀 과했다지?"

"과하긴요? 덕분에 아주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제가 사제 하나는 잘 두었지요. 아니 그러냐?"

진허가 진무의 옆구리를 툭 하고 쳤다.

이 새끼는 죽도록 처맞아 놓고 뭐가 좋다고 웃는 건지....

진허의 반응에 진무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 들어가자꾸나."

"예. 함께 모시겠습니다."

"오냐, 오냐."

진무와 진허의 부축을 받으며 자소궁의 계단을 오르는 명진의 모습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왔다.

하나같이 지극히 공손한 자세와 존경심 가득한 눈빛.

'뭐야? 이 반응? 그냥 뒷방 노인네 아니었어?'

그간 진무가 생각해 온 명진은 그저 병치레 중의 쓸모없는 도사 나부랭이였다.

하지만 무당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명진.

그는 지금의 무당에서 가장 존경받는 도사 중 한 명이었다.

무공을 잃기 전까지는 명현과 함께 다음 대의 무당 장문인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촉망받는 인재였고.

사패천주에게 마지막까지 대항하여 싸우고 제자들을 보호했던 그는 무당의 항거 정신이자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장문인과 장로들이 힘을 모아 절벽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매던 진무를 살렸던 것도 그가 명진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도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무에겐 과거에는 그저 싸가지 없이 자신에게 덤볐던 주제넘은 도사였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더 쓸모없는 애물단지에 불과했지만.

"아니! 자네가 어쩐 일인가?"

누군가 알렸음인지 장문인과 장로들이 반가운 기색으로 뛰어나왔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사형제였다.

명자 배의 모두가 죽고 남은 것은 지금의 장문인과 장로. 그리고 진무의 스승 명진뿐이었다.

"허허, 언제까지 충허암에만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래도 몸 생각을 해야지."

"괜찮습니다. 장문인."

"장문인은! 사형이라 부르게, 이 사람아."

명현이 진허를 물리고 직접 부축하였다.

"진허야. 가서 사숙을 위해 화로를 들이라 하거라."

"예, 장문인."

혹여 몸이 성치 않은 사제가 추위를 느낄까 싶어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명현이었다.

"그나저나 이리 멀리까지 움직여도 되는가?"

"괜찮습니다. 근래 요 제자 놈 덕에 거동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기력을 찾았습니다."

"그래?"

명현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무당이 금하고 있던 육식.

그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역시 육식의 금기를 해한 것은 잘한 결정이야.'

명현은 고집스레 지켜 온 계율로 인해 사제의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했던 것을 다시 한번 후회하게 되었다.

더불어 명진이 바깥으로 거동할 수 있게 되기까지 애썼을 진무가 더욱 기특했다.

"춥네. 어서 들어가세."

명진이 장문인의 근처에 자리를 잡자 장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 주제는 당연 청양상단이 주고 간 은원보에 관한 것이었다.

한동안 재정 상태가 바닥을 보여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과한 돈이 생기자 각 궁마다 원하는 것이 많아 회의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정하기로 하지."

두 시진에 가깝게 진행된 회의가 절충안을 찾아 마무리되는 시점에 명현이 슬쩍 명진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병약해진 사제에게 장시간의 회의가 힘들지나 않았을지 걱정이었다.

"장문인."

"응? 뭔가? 할 말이 있는 겐가?"

"예. 청양상단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오! 어서 해 보게."

회의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명진이 말을 꺼내자 장문인과 장로들이 모두 귀를 기울여 집중했다.

"청양상단과 연을 맺은 것은 좋은 일이나 우려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려라.... 어찌 그러한가?"

"진혜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의도와 출처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돈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료됩니다."

그 말에 명공의 뒤에 있던 진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흐흠."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던 것인 터라 장문인과 장로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군."

"제 생각에는 그들 곁에 제자들을 보내 놓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만."

어? 설마?

순간 회의가 지루하기만 했던 진무의 눈이 번뜩였다.

"제자들을?"

"예. 그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조심스레 살펴보는 게지요."

명진이 계율을 담당하는 명공을 바라보았다.

"흐음. 명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연을 맺은 상단에는 일대제자들을 식객으로 보냈던 전례가 있으니...."

"그렇기야 하지. 헌데 제자들을 보내 어찌하잔 말인가? 자칫하면 그들이 감시를 받는다 언짢아할 수도 있는 일일세."

명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명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상단에 호위를 둔다고 하나 무당의 제자들에 비해 못할 것은 자명할 일. 그저 잠시 식객 생활을 하겠다 하면 오히려 좋아할 듯합니다."

"식객이라...."

명현이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은데 다들 어떠한가?"

"옳은 말입니다. 일전에 본 그의 성격상 도움이 필요해도 따로 청하지는 않을 듯했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장로들이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고 명진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진무는 그제야 아침부터 장로 회의에 참석한 명진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하! 이것 봐라?

청우 그 모자란 자식만 도움이 되는 줄 알았더니. 명진까지? 이거 목숨 줄 연장시켜 놓은 보람이 있잖아?

"모두가 동의하는 듯하니 그리하세. 허면 누가 좋겠는가? 장로들은 과하고, 청자 배는 아직 모자라니 일대제자들 중에서 하나를 보내야 할 터인데."

명현의 말에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누구를 보낼까 의논하듯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던 진혜가 제 스승인 명공에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명진이 선수를 쳤다.

"무얼 고민하십니까? 진무가 있는데요."

"진무를?"

좌중의 시선이 진무에게 집중되자 진혜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야. 우리 스승님께서 구구절절 맞는 말씀 하시는데 꼬나보길 어딜 꼬나봐? 기사멸조로 확 눈깔을 파 버릴까.

진무는 진혜를 똑바로 쳐다보며 몰래 비웃어 주었다.

'저놈의 새끼가....'

얄밉기 짝이 없는 진무의 표정에 진혜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자신이 오랫동안 공들여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 오는 진무가 눈엣가시 같았다.

"명진 사숙의 말이 지당하십니다. 다른 일대제자들은 각 궁에서 맡은 일들이 많아 바쁠 터입니다. 진무를 보내시지요."

진허가 명진의 말에 힘을 보탠다.

이 자식, 너 좋은 녀석이구나?

그런 줄 알았으면 그때 좀 살살 팰 건데....

한참을 고민했던 문제가 갑자기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흠, 저도 동의합니다. 진무라면 청양상단주와 안면도 있고 제법 관심 있어 하는 눈치였으니."

제 사부인 명공마저 동조를 하자 진혜의 얼굴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다.

"청양상단주와 안면이 있어?"

"예. 그에 관한 말씀은 따로 올리겠습니다. 장문인."

명공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진무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뜻을 모았으니 고생스럽더라도 진무는 충허암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예."

진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 키운 도사 한 놈 열 사파 부럽지 않다더니... 흐흐흐, 이게 웬 횡재냐.

* * *

"사형! 이대로 두고 보실 참입니까?"

진혜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히 채웠다.

"으음."

진혜의 눈초리를 받은 진궁이 얼굴을 찌푸렸다.

진궁은 무당칠자의 둘째이자 무당의 외부 활동을 담당하는 우진궁(遇眞宮)의 책임자였다.

외부로 나가 있는 진명을 제외하고 현 무당파 제자 중 가장 연장 제자였다.

장로 회의가 끝나고 실무 회의격으로 열린 일대제자들의 회의 석상에서 진혜는 진무의 문제를 거론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계율을 어겨 징계를 받고 있는 녀석입니다. 그런 녀석에게 외유라니요."

진혜의 말에 진궁 이하 일대제자들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도 틀리지는 않네만, 이미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 아닌가?"

덩치가 무척이나 큰 정동궁(淨東宮)의 진소의 말에 진혜가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형. 장로 회의가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틀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허! 진혜는 말을 삼가라."

대놓고 장로들을 불신하는 말에 진궁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르십니까? 녀석은 제자들을 꾀어 육식을 하고 있습니다."

"...."

"응당 더한 죄를 물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장로 회의에...."

"답답한 소리 마십시오. 진소 사형."

"아니 이 사람."

"도동이었던 놈입니다. 화전민의 자식이었던 천한 놈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지금 장문인과 장로님들이 명진 사숙의 이름에 가려 그놈을 인정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대로 놈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

"음...."

"설마 닭 쫓던 개 꼴이 되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동배의 제자를 함부로 폄하하는 말이었으나 틀리지는 않았다.

진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각궁의 일대제자들은 선별된 인원이었다.

나름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나 풍운의 뜻을 품고 무당의 도명을 받았고 다음 대를 책임질 대제자가 되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무가 세 개의 죄를 짓고 해검지를 보수하는 일을 맡았을 때.

따로 무인을 배정하지 않기로 한 것은 진허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동의한 일이었다.

"저는 장로님들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당의 오랜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는 놈에게...."

진혜가 피를 토하며 말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너는 정말 쓸데없는 일에 열을 올리는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원화관의 진허였다.

15화

"진허 사형?"

"무엇이 전통이냐?"

"...."

진허의 물음에 진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변변치 못한 사제에게 얻어맞아 며칠 동안 정동궁, 의실(醫室) 신세를 진 사형이다.

응당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사람이 변절해 진무의 편을 들고 있었다.

"전통만 지키면 뭐가 나아진다더냐? 좋은 것을 찾아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쯧쯧."

혀를 차며 비웃는 모습에 진혜의 양쪽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세워졌다.

"명진 사숙을 보지 못했어? 고기를 드시고 나서 거동까지 하시는 모습?"

"말을 삼가십시오. 계율을 어긴 것을 두둔할 참입니까?"

"계율? 허, 과연 영은궁을 맡은 실무 제자답구나. 그런데 그건 이미 해지된 금기 아니더냐?"

"그, 그건!"

"아까 보니 명공 사숙께서도 진무를 보내자는 의견에 찬성하시던데?"

"...."

"진혜야."

진허가 진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엔 너는 그저 배가 아픈 것 같구나."

"뭐요?"

"하긴 청양상단과 연을 맺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니 당연한 일이지."

"이, 이... 감히...."

"하지만 속내가 너무 빤히 보이는구나. 어찌 도사가 그리도 계산적이란 말이냐?"

"말을 삼가십시오."

"삼가라? 글쎄. 네가 누구보다 세속에 밝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허나 그것이 옳은 방법으로 사용되지는 않는 것 같구나."

"...."

"진궁 사형께선 너를 어찌 보실 것 같으냐?"

"뭐, 뭐라구요?"

갑자기 거론된 진궁의 이름에 진혜가 흠칫하며 눈치를 살폈다.

"외부의 상단이나 세력과 조율을 하는 것은 응당 우진궁의 일이다. 응당 진궁 사형께 논의하고 명충 사숙께서 보고를 올리도록 해야 했던 일 아니더냐?"

"...."

"한데 직접 장문인을 만나 아뢴 것은 무엇 때문이냐? 더욱이 청양상단주에게 도관을 안내했다지?"

"그, 그건 장문인께서...."

"진혜야, 적당히 좀 하거라. 적당히. 대외 활동만으로 대제자가 될 것 같으냐? 각 궁을 얼마나 잘 이끌었는지, 그리고 제자들의 지지를 얼마나 받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

진혜가 진궁을 슬쩍 바라보았다.

미간에 내 천(川)자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대제자는 무당의 얼굴이다. 네 이득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무당을 이용하는 자리가 아니란 말이다."

"사형! 말씀이 과하십니다!"

진허의 말에 진혜가 살기 어린 눈을 부릅뜨고 기세를 뿜어내었다.

쾅!

"그만들 하지 못해!"

결국 보다 못한 진궁이 매서운 눈으로 진혜와 진허를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더라도 실무 회의의 수장은 진궁이었다.

"쯧, 각 궁을 이끄는 중책을 맡은 이들이 어찌 이리 난잡한가!"

"...."

"진혜도 진허도 서로에게 언사가 과했음을 사과하고, 더 이상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일에 왈가왈부하지 말라."

진궁이 못을 박듯 말하자 진혜와 진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 기존에 결정된 대로 외유를 나가는 진무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다. 비록 장로들께서 결정을 하셨으나 십계를 어기고 징계 중인 녀석이다. 해검지 마목 보수 때와 마찬가지로 청자 배의 제자들이 휩쓸리지 않도록 각 궁에서는 통제를 단단히 하라."

"예."

"사형. 하지만!"

진허가 반대하려 하자 진소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통제를 단단히 하되, 자발적으로 나서는 녀석들은 제재하지 않는다."

진궁이 서슬 퍼런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가 버렸다.

"사, 사형!"

그 뒤를 진혜가 급히 뒤따랐다.

"휴우...."

모두가 나간 뒤 진소가 사람 좋은 표정을 하고 진허를 나무랐다.

"이 사람아. 대충 좀 하게. 진혜가 청양상단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몰라서 그러는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쯧쯧, 사람하고는. 그 불같은 성격 좀 고치랬더니. 진혜가 제 가문을 거론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몰라서 그래?"

"진혜가 잘못한 겁니다. 장로님들께서도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죄를."

"...."

진허가 투덜거리자 진소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리 예쁜가?"

"예?"

"진무 말일세. 아주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구먼."

"아, 하핫! 예, 맞습니다. 아주 예뻐 죽겠습니다."

"허참,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궁금하구만그래."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아십니까? 무공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니까요?"

"남달라?"

"예. 생각해 보십시오. 검공을 변형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참오하고 또 참오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입니다."

"흐음, 신문십삼검을 말하는 게군."

"예! 그뿐인 줄 아십니까? 원화관에 소속된 청우라는 녀석이 있습니다."

"아, 들었네. 청상을 이겼다지?"

"이겼다 뿐입니까? 근래 무공에 대한 발전이 놀라울 지경입니다. 진무의 가르침 때문에요. 하하하!"

진허가 큰 소리로 웃자 진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참, 여인네도 아닌데 그토록 자네의 마음을 훔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가끔 자네를 팰 걸 그랬네."

"예? 사형도 참, 하하!"

"어쨌든 청상이도 요즘 충허암으로 달려가 올 생각을 하지 않더군."

"하긴 청상이도 마음고생이 심했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사형 잘못입니다."

"음. 하지만 마음에 한을 씻어 내지 못한 아이를 생명을 다루는 정동궁의 제자로 들일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뭐, 그 덕에 전도유망한 녀석이 진무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겠네요."

"흠... 글쎄. 그러하면 더욱 좋겠으나...."

"사형께선 어찌 보십니까?"

"무얼 말인가?"

"대제자요."

"자네 설마 진무 그 아이를 염두에 두는 건가?"

"예. 그리될 겁니다."

"언제는 자네가 될 거라 그리 장담하더니...."

"그땐 쓸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지요."

"허, 말본새하고는. 진혜를 제외하면 자네 위로 죄다 사형들이거늘."

"에이, 그래도 사형께선 제 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 다른 이는 몰라도 진궁 사형과 진혜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을 터인데?"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지 않습니까."

잘난 놈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었다.

"허헛. 어디 한번 두고 보세나."

진소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실무 회의가 열리는 동안 진무는 사부인 명진을 부축해 저녁이 다 되어서야 충허암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나서 주니 기특해 죽을 것만 같았다.

"어찌 그리 보느냐?"

그 말에 '예뻐서요.'라고 답할 뻔했다. 진무가 피식 웃자 명진이 온화하게 웃었다.

"나갈 생각을 하니 좋은 게로구나?"

"뭐, 그저 스승님께서 걱정될 뿐입니다."

"녀석...."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으나 명진은 진무가 자신을 챙기려는 마음이라 여기고 기특해했다.

"내 걱정일랑 말고 잘 놀다 오너라."

"놀아요?"

"암, 도사는 놀지 말란 법이 있더냐?"

"음, 아마 내려가면 고기를 먹을지도 모르고...."

"지금도 먹지 않느냐."

"어쩌면 술도...."

"허허, 녀석. 그 또한 어떠하랴? 술이라면 나도 소싯적 표주를 나갔을 때 먹어 보았느니."

"기녀...."

"...."

"하룻밤...."

"지, 진무야."

"농입니다. 농."

"녀석, 싱겁기는."

눈을 찡긋거리는 진무의 모습에 명진이 헛웃음을 흘렸지만, 마음 한구석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왠지 제자 녀석이라면 진짜로 그럴지도....

"사숙! 사숙!"

방 안으로 명진을 부축해 모시는데 청우와 청상이 한 짐을 꾸려서 달려왔다.

"응? 어쩐 일이냐? 그 짐은 또 뭐고?"

"외유 가신다면서요?"

"청양상단으로 가신다 들었습니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청우와 청상의 말에 진무가 눈을 끔벅거렸다.

"근데?"

"함께 가겠습니다."

"저도...."

"왜?"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자가 스승을 보필해야지요!"

"제자? 누가?"

청우의 말에 진무가 코웃음을 쳤다.

"에? 제자... 아니었나요?"

"지랄하네. 누가 너처럼...."

멍청한 놈을 제자로 들인단 말이냐? 누구 좋으라고?

차마 끝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 명화 사숙조와 진소 사숙께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응?"

청상은 사형 진소가 주무를 맡고 있는 정동궁의 제자였다.

그런데 허락을 했다고?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진허 사숙께서 잘 다녀오라면서 용돈도 주셨는걸요?"

자소궁에서 본 진허의 반응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분명 멍청한 청우를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젠장, 됐어! 내가 왜 니들을 데려가냐? 쓸모도 없는데."

"아니, 사숙. 그러지 마시고요."

청우가 금세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이 매달렸다.

"싫어! 내일 아침에 찾아오는 놈 중에 제대로 된 놈들 골라서 갈 거야."

"사수-욱!"

청우가 주저앉아 비통하게 소리를 질렀다.

* * *

멀리 충허암이 보이는 자리.

진혜가 매서운 눈으로 진무와 청우, 청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이 감히... 몇 년 동안 기울인 우리 가문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려고 해?'

진혜의 눈동자는 살기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진혜의 본명은 우철환이었다.

단강구 우가장.

지금은 제법 무관으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곳이었으나 몇 대 전만 해도 단강구 뒷골목에서 알아주던 불량배 집단이었다.

그의 조부인 우주명의 노력으로 번듯한 무관이 되었으나 각종 더러운 일의 뒤를 봐주던 가문이라는 꼬리표는 여전했다.

그 꼬리표를 떼 가문의 숙원을 풀기 위해 우주명은 진혜를 무당의 제자로 들여보냈다.

벌써 이십 년도 전의 일이었다.

아마 무당에 어려움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진혜가 특출난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면 턱도 없었을 일이었다.

진혜는 밤낮으로 노력했고, 일부러 계율을 담당하는 명공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끝내 무당칠자가 되었을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꼬리표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대제자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무당의 장문인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지금의 무당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재정이었다.

세를 불리고 제자들을 먹여 살릴 돈이 없어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진혜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문의 도움으로 청양상단과 연을 맺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진저리 나는 꼬리를 떼기 위한 노력의 결실을 보려 하는데 웬 망할 놈이 끼어들어서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었다.

"천한 놈의 자식. 오냐, 네놈이 몸 성히 돌아올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외유에서는 제법 험한 일도 많이 당하는 법이니까."

푸드득.

진혜의 손을 떠난 전서구가 밤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다.

무당의 일대제자 진혜.

그는 지금 무당 십계 중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되는, 동문 살해를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길을 향해.

16화

외유가 결정된 이후.

장문인 및 장로들의 명으로 진무는 청우와 청상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냥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부인 명진에게 인사를 하고 각 궁에 들러 사숙과 사형들에게 알려야 했다.

원화관에 들르자 낡았지만 깨끗하게 잘 빨린(?) 도포와 관모를 새롭게 지급해 주었다.

새것도 아니고 새것처럼 고친 헌 옷을 주면서 생색은 더럽게 낸다.

그래도 원화관에서 명진의 식사를 챙겨 주기로 하여 사부에 대한 걱정은 덜었다.

"하하, 사제가 벌써 이리 장성해 첫 외유를 나가니 내 기쁘기 한량없다!"

진허가 다가와 어깨를 두들기다 말고 몰래 품속으로 전낭 하나를 찔러주었다.

"슬쩍 빼돌린 게다. 사질들과 맛난 것 사 먹거라. 아끼지 말고."

"예."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은 고맙게 받았다. 원래 공짜라는 것은 다 좋은 거니까.

진무는 담담한 표정으로 전낭을 열었다.

"아, 아니, 이 녀석 참. 몰래 열어 보지 않고."

"...."

철전 열 개.

설마? 겨우? 고작?

야, 아끼지 말라며?

진무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진허가 크게 웃었다.

"이런, 너무 많아서 놀란 모양이구나. 괜찮다. 너를 위해 사형이 이 정도도 못 줄까."

많아? 너무 적어서 보는 건데?

아... 말을 말자, 말을.

찢어지게 가난한 도사 놈 같으니라고.

어쨌든 원화관을 나온 진무가 다음으로 들른 곳은 영은궁이었다.

"...안 되고, ...주의하고, ...절대 해서는 안 되느니라. 알겠느냐?"

"...."

자신을 앞에 두고 반 시진에 달하는 시간 동안 했던 말 또 하고, 다시 하고, 아주 밑도 끝도 없이 반복하는 일장 연설의 지루함에 혼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무서운 명공.

다 똑같은 말을 다르게 반복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뭔, 하지 말라는 게 그리도 많은지.

대답은 '예.'하고 공손하게 했으나 절대로 그래 줄 생각은 없었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

그리고.

저 새낀 왜 계속 째려봐?

멀리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진혜의 모습에 진무가 오만상을 구기며 쏘아보았다.

이런 쌍놈의 새끼가. 눈 안 깔어? 확.

예전 같았으면 일단 쥐어 패고 볼 일이었으나 지금은 도사였고, 또한 사형이었으니 참아 줄 수밖에 없었다.

요 새끼 하나만 걸려라, 아주.

잠시만 참으면 이 지긋지긋한 도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진무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잘 다녀오너라."

"예. 사숙."

진무는 역시나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영은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우진궁에서 외부 세력과 조율하고 확인해야 할 수많은 사항....

옥허궁(玉虛宮)에서 태극 문양이 선명한 검을 새로이 지급받고.

정동궁에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일에 대비해 속명단, 금창약, 붕대... 등등까지 받아 들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자소궁에 들렀다.

장문인에게 외유를 나섬을 고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각 궁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산 능선을 따라 수십 리에 걸쳐 띄엄띄엄인데 뭔 절차가 이리도 많은지.

외유고 뭐고 나가기도 전에 지칠 것만 같았다.

절차를 간소화해야지. 망할 놈들 같으니. 이제는 말하기 입 아프지만 역시 망해 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허허, 짐이 제법 되는구나."

"...."

명현의 말에 진무가 각 궁을 돌며 받아 온 짐들을 바라보았다.

아주 한 짐이다.

놓고 가면 안 되나.

"첫 외유니 이것저것 빼먹지 말고 챙겨서 가거라. 물가를 조심하고, 으슥한 곳에 가지 말고...."

아! 제발 그만! 그만!

무슨 다섯 살 먹은 꼬마냐!

내내 무당산에 처박혀 있던 니들 누구보다 이 몸의 세상 경험이 많다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 청우와 청상이 함께 간다고?"

뒤에 엎드려 있는 청우와 청상을 향해 흐뭇한 표정으로 묻는 명현의 말에 진무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잘되었구나. 똘똘한 아이들이니 도움이 될 것이다."

"...."

"자, 그럼 이만 가 보거라. 해야 할 일이 막중함을 잊지 말고. 무당의 이름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예. 장문인."

끝났다. 드디어!

몰아치는 해방감에 서둘러 짐을 챙기고 나가려는데, 명현이 재차 진무를 불러세웠다.

"진무야."

아, 또 왜!!

"연락은 하루에 한 번씩 꼭 하거라."

질린다....

"예. 장문인."

빌어먹을 도문.

정말이지 무서운 놈들이다.

그저 산문을 나가기 위한 절차를 수행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들 수가 있다니....

자소궁을 나온 진무는 진허와 진소의 배웅, 진혜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며 드디어 무당산을 내려갔다.

해검지를 지나 무당의 영역을 벗어나자 비로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도문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진무를 감싸고 돌았다.

'흐흐흐, 얼마 만에 보는 세상이냐!'

진무는 메고 있던 짐보따리를 내팽개치고, 양팔을 벌린 채 눈을 감고 상쾌하기 그지없는 세상의 공기를 만끽했다.

"후읍! 아 좋다."

진무뿐 아니라 청우는 물론, 항상 무표정하기만 하던 청상의 얼굴에도 흥분의 기색이 가득했다.

자, 그럼 가 볼까?

"청우야."

"예! 사숙."

"들어."

"...."

"내 짐."

"...예."

청우가 등에 멨던 제 짐을 앞으로 메고 바닥에 팽개쳐진 진무의 짐을 등에 메었다.

"청상아."

"...."

"검 들어야지?"

"검은 본인이 휴대해야 합니다. 자고로 무인에게 생명과도 같은...."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놈.

"다시 올라갈래?"

청상이 빛보다 빠르게 진무의 검을 등 어림에 메었다.

"자, 가자!"

단강구의 청양상단.

진무와 청우, 청상의 첫 외유가 활기차게 시작되었다.

* * *

무당산 초입에서 청양상단까지는 고작 백 리를 조금 넘는 길이라고 했다.

말을 타고 달리면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

그런데 시작부터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어이, 거기."

"...."

"도사 놈들, 가진 거 다 내놔 봐."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진부한 대사를 내뱉으며 십여 명의 장한들이 진무 일행을 막아섰다.

진무는 잠시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눈만 끔벅거렸다.

익숙하다 못해 식상하기까지 한 대사는 차치하고서라도, 이곳은 무당산이다.

근래 세상이 바뀌어 미친것들이 넘쳐 난다지만, 무당파 앞마당에서 도사에게 돈을 뜯으려 들다니.

간뎅이가 부은 거냐?

"그대들은 누구요? 무당의 도포를 모르지 않을진대, 감히 무당산에서 우리의 앞을 막다니."

진무가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해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청상이 매서운 눈빛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우리의 앞? 놀고 있네."

"...."

"좋게 말할 때 그 등에 진 거 다 꺼내 놔. 그럴 리야 없겠지만 꼬불쳐 놓은 돈 같은 것도 있으면 같이 좀 내놔 보고."

어째서 이런 놈들이 무당산 인근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행인의 돈이나 뺏는 뒷골목의 잡스러운 놈들이다.

"휴, 청상아."

"예. 사숙!"

"정리하고 가자. 해 지기 전에 도착해야지."

"알겠습니다."

청상이 듬직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제가 도울까요?"

청우가 나서려 했지만, 진무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삼류 잡배야. 넌 그냥 짐이나 들고 있어."

"...눼."

청우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물러나는 사이 청상과 잡졸들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다쳐? 지랄하고 있네. 알아서 짐과 돈을 내놓고 꺼졌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맨 앞에 있던 얍실하게 생긴 사내가 품에서 단도를 역으로 뽑아 들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던지 십수 명의 장한들이 마찬가지로 야비한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꺼내 부채꼴 모양으로 청상을 에워쌌다.

그래. 그래야지.

지금까지는 너무도 익숙한 진행이었다.

어느 동네를 가도 있는 불량배들의 행동은 마치 한 명의 사부에게 전수받은 것처럼 똑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쯧! 감히 무당산에서 이런 무도한 짓이라니!"

"흥! 망해 가는 문파 따위! 신경이나 쓸까 보냐!"

파바박!

선두의 사내가 빠르게 달려 거리를 좁히며 청상을 향해 뛰어들었다.

역으로 들린 단도가 청상의 얼굴을 향해 횡으로 그어졌다.

쉬익.

허리를 살짝 젖히며 한 발자국 물러난 청상의 얼굴 앞으로 단도의 예리함이 스쳤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리며 이어진 뒷발이 곧게 뻗어 왔다.

단도에 이은 각법이 매우 깔끔했지만 딱히 놀랄 것 없는 불량배의 솜씨였다.

청상은 발을 떼지도 않고 상체를 젖힌 그대로 비스듬히 꺾어 검집의 끝을 찔렀다.

툭!

검집이 사내의 무릎 뒤 위중혈(委中穴)을 살짝 누르자.

"아악!"

사내가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허물어졌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잡배다.

저런 것들이 뭘 믿고 무당파 도사의 앞을 막아섰지?

진무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놈! 뭣들 하느냐! 놈을 공격해라!"

한 놈이 쓰러지자 녀석들이 떼거지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역시나 익숙한 진행이었다.

대부분 저런 경우 잠시 후, 검조차 빼지 않은 청상에 의해 모두 쓰러져 살려 달라, 잘못했다 빌 것이다.

청자 배, 무당의 이대제자.

무당파 안에서야 가장 막내 항렬이었으나, 이미 십 년 가까이 고된 수련을 이어 온 무인이다.

그 정도만 되어도 작은 현에 자리 잡은 무관의 사부 정도는 찜 쪄 먹는다.

청자 배에서 가장 모자란 실력을 가진 청우만 해도 무형지기를 뿜어내는 실력이다.

하물며 청상은 어떠한가?

검에 기운을 담는 충검(充劍).

검기의 바로 아랫단계를 이룬 무인이었다.

더욱이 얼마 전 청우에게 당한 뒤로 진무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받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전보다 검공이 가진 초식의 이해도가 높아져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애초에 동네 삼류 불량배 열 명에게 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쩍! 뻑! 짝!

보란 듯이 뒤엉킨 난전에 검집으로 육신을 후려치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순식간에 혈도를 얻어맞은 둘은 이미 땅바닥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진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상과 싸우고 있는 습격자들을 면밀하게 살폈다.

'호오, 요놈들 봐라?'

둘.

습격해 온 놈들 중에 움직임이 좋은 녀석들이 숨어 있었다.

칼을 쓰는 것이 무척이나 익숙하다. 제법 경험이 많은 놈들이었다.

그저 동네 불량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하지만 합공을 한다 해도 청상의 실력이 조금 앞선다.

쯧쯧, 니들은 안 된다니까....

한숨이....

"크윽!"

그 순간 들려오는 이질적인 신음.

어? 청상이다.

청상이 어깨 아래쪽에 상처를 입고 두어 걸음이나 물러났다.

"사형!"

청우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서려 하는 것을 진무가 잡았다.

분명 실력이 위인데도 눈먼 칼에 맞았다.

문제는 경험의 부족.

산에 처박혀서 무공만 죽도록 익혀 온 청상이었다.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정한 합을 정해 놓고 싸우는 것과 현실적인 싸움은 다르다.

그들의 싸움에는 일정한 투로나 형식이 없다.

난잡한 공격에 자신들의 실력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청상이 그들의 허접스러운 공격에 익숙해져 실수를 범할 때까지.

이른바 무림 초출들이 흔히들 겪는 실수였다.

어떤 변수도 발생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실력 차가 나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고수도 삼류 무사의 비수에 당할 수 있는 게 이 바닥이다.

실력은 있되 부족한 경험이 독이 되는 것이다.

쯧쯧....

17화

'이런 젠장!'

청상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을 둘러싼 자들.

분명 하수다.

실력 차가 분명했다.

그런데 어깨에 상처가 생긴 이후로 자꾸만 상처가 늘어 갔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이런 싸움은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그들의 공격에는 투로도 초식도 없었다.

대신에 악착스러움이 있었다.

하수의 검인데도 가슴이 시릴 정도로 서늘한 살기가 스며 있다.

캉! 카캉!

더욱이 공격이 더욱 난잡해지고 집요해져서 막는 것이 어려웠다.

핏!

"큭!"

무릎 아래가 예리하게 베어져 나가는 느낌에 청상의 몸이 비틀거렸고, 날카로운 단도가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피하기에는....

텁!

"쯧, 좀 더 경험을 쌓게 두려 했더니."

"사, 사숙...."

단도는 청상의 목에 닿지 못하고 어느새 가로막은 진무의 손에 잡혀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진무의 모습에 공격했던 사내가 단도를 빼내려 용을 써 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병신 새끼, 실패했으면 바로 놨어야지."

쩡!

비웃음과 함께 진무가 손을 움켜쥐자 단도가 작은 파열음을 내며 부서졌다.

그리고.

퍼억!

곧게 뻗은 발이 사내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커억!"

사내의 몸이 새우처럼 꺾이고.

퍽!

진무의 주먹이 그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털썩!

거센 충격에 사내가 땅바닥에 처박혀 정신을 잃었다.

"자, 한 놈은 잡았고."

진무의 싸늘한 시선이 습격자 중 하나를 향했다. 황의를 입은 고리눈의 사내.

'어떻게?'

일행인 척 숨어 있었던 것인데 어찌 알았을까?

그의 눈에 떠오른 당혹스러움을 진무는 놓치지 않았다.

"넌 뭐냐? 딱 봐도 칼 쓰는 게 경험 많은 낭인인데."

"...."

황의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하찮기는 해도 이런 놈들과 어울릴 정도로 수준이 낮아 보이지는 않고."

"...."

"어떤 놈한테 청부라도 받은 모양이지?"

"무, 무슨 소리를...."

"어, 그래. 뭐 물어본다고 바로 친절하게 대답할 거라는 기대는 안 했다. 역시 대화가 좀 필요하겠지?"

"...."

"청우야!"

"예!"

청우가 힘차게 대답했다.

"...."

으이구, 이럴 땐 좀 알아서 움직여 주면 좀 좋아.

"정리 좀 해라."

"뭘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만약 이놈들이 제법 실력 있는 놈들 같았으면 벌써 다 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놈 빼고 다 패라고. 쫌!"

진무가 황의인을 가리키며 눈을 부라리자 그제야 청우가 짐을 벗어 던짐과 동시에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제길!"

동시에 황의인이 도망치려 몸을 날렸다.

상대에게 들킨 이상 흔적을 지우고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

황의인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눈앞에 나타난 한 뼘 조금 넘는 크기의 발.

뻐어억!

황의인은 서너 걸음도 달아나지 못한 채 얼굴을 얻어맞고 뒷걸음질 쳤다.

턱!

멱살을 잡아 오는 손.

"도망치게 놔둔대?"

사악한 미소와 함께 휘둘러져 오는 두툼한 주먹.

퍼억!

황의인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코뼈를 박살 내며 틀어박힌 주먹에 황의인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뻐억! 뻑! 빠박!

그 사이에도 청우는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딱! 쾅! 퍼벅!

"...."

계속....

"청상아."

"예. 사숙."

"...해 지겠다."

파팍!

역시 눈치는 청상이 훨씬 빠르다. 청상이 끼어들자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어버린 둘을 제외하고 습격자들 태반이 진무의 앞에 일렬로 무릎이 꿇려졌다.

"자, 이제 대화를 좀 해 볼까?"

진무의 미소에도 습격자들은 여전히 대가리를 꼿꼿하게 들고 있었다.

청상과 청우가 자신들보다 훨씬 고수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놓고 반항을 하지는 않았으나.

"니들, 혹시 우리가 도사라서 막, 말로만 대충 물어보고, 어? 막, 좀만 입 다물고 버티면 적당히 훈계질 좀 하다 관아에 넘길 거고, 응?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

그들의 생각은 적어도 그러했다.

원래 도사라는 족속들이 그렇지 않은가. 잔인하지가 못했다.

끽해야 몇 대만 참으면....

"그렇지, 맞아. 아마 뒤에 있는 애들이라면 그럴 거야. 아니, 저 순진해 빠진 놈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근데."

진무가 한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가 부드럽게 팔을 잡았다.

친절히 웃으면서....

우두둑!

"끄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내의 모습에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역으로 꺾인 팔.

피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뼈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사, 사숙!"

청상과 청우마저 그 잔인한 모습에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괴성을 질러 대는 사내의 발을 움켜쥐고 무릎을 밟았다.

"귀찮게 말이야."

어디까지나 미소를 잃지 않고....

우두둑!

"끄아아아악!"

마찬가지로 역으로 꺾인 다리.

결국, 사내는 격통을 이기지 못해 눈을 허옇게 뒤집고 혼절해 버렸다.

"사, 사숙!"

청우는 얼어붙은 채 눈만 끔벅거렸고 청상은 놀라서 짐에서 응급처치에 필요한 것들을 마구잡이로 꺼냈다.

"굳이 내가 열 명이 넘는 니들을 관에 넘길 필요 있을까? 니들 실력이면 딱히 현상금이 걸려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생기는 것도 없는데."

진무는 새하얀 이빨이 보일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익숙하잖아. 이런 거. 칼 밥 먹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다치기도 하고, 이런저런 곳에서 비명횡사하는 일도 종종, 왕왕, 비일비재하지. 안 그래?"

진무가 그 옆에 앉아 있는 이를 향해 최대한 상냥하게 웃어 주었다.

"...!"

오히려 그것이 훨씬 더 잔인해 보였다.

잔뜩 돋은 소름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있는 대로 쪼그라든 심장은 원래의 모습이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뭐 이런 도사 놈이 있단 말인가?

"이, 이런 잔인한!"

"뭐? 잔인? 웃기는 놈이네. 먼저 죽이려 한 주제에...."

진무가 싱글거리며 그의 뒷머리를 틀어쥐고 힘껏 움켜쥔 주먹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자, 잠깐...."

"어, 어. 움직이지 마. 목 부러져."

퍽! 퍽퍽퍽!

경쾌하다.

고르고 일정했다.

코뼈가 부서지고 피가 튄다.

그 사이로 진무의 미소와 함께 날카로운 송곳니가 시리도록 빛났다.

온통 터져 나온 핏물이 입을 가득 채워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정신을 잃고 진무의 손에서 놓여난 그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함몰되어 있었다.

"아, 새로 받은 도복인데...."

피가 튀었네.

처음으로 진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미친놈이다.

미친 도사 놈이다.

사람 둘을 순식간에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고 웃다가 제 옷에 피가 튄 것에 얼굴을 찌푸리다니.

"마, 말하겠습니다."

"...."

다음이 자신의 차례가 될 것을 직감한 세 번째 사내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목이 터져라 외쳤다.

"뭘?"

"예?"

"딱히 듣고 싶지 않은데?"

"...."

하늘이 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뭐가 됐든 말해야 했다.

저 또라이 새끼 손에 걸리면 병신이 되거나 죽는다.

분명 자신이 아는 내용 중에 저놈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고, 나머지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너도나도 마치 방언이 터진 것처럼 머릿속에 있는 모든 기억을 토하듯이 외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게.

"그만!"

"...."

"시끄러워서 알아들을 수가 없네."

진무가 눈살을 찌푸리자 모두가 미리 짠 것처럼 입을 닫았다.

"너!"

"예! 팔룡파 소속! 마흔두 살 곽청길!"

"말해 봐."

"예! 팔룡파는 단강구 뒷골목에 있는 불량 조직으로, 서남쪽 포목 거리에서 보호비를 받고 있습니다. 두목은 이팔룡!"

말인즉슨.

이놈들은 단강구 뒷골목에서 방귀깨나 뀌는 녀석들인데, 상인들을 위협해서 보호비 명목으로 갈취를 일삼던 와중에 두목이 오늘따라 무당산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이 어린 도사 세 놈을 잡아 오라고 했단다.

이 정도 실력을 가진 도사라고는 듣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했다.

자신들은 그저 애새끼 셋만 잡아 오면 된다고 쉽게만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진무에게 처맞고 뻗은 둘의 이름은 십언이흉(十堰二凶).

단강구 뒷골목에서는 제법 알려진 고수였기에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즉, 진무 일행이 그곳을 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딱히 도사 셋을 잡아갈 이유가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당파의 도사였다.

아무리 세가 약해졌어도 무당파다. 그들이 건드리기에는 먹이가 너무 크다.

잘못하다가는 입이 찢어지는 건 물론 사돈에 팔촌까지 털려 나갈 수 있는 일이었다.

웬만한 사파의 주력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물었다는 것은 일단 앞뒤 구분이 없을 정도로 간이 크다는 뜻이고.

그 간을 빼놓을 정도로 청부 금액이 크단 말이겠지.

"좋아. 괜찮군. 넌 저쪽에 가서 찌그러져 있어."

"감사합니다! 대협! 아니 도인, 도사님!"

곽청길은 당장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절을 올리며 잽싸게 물러났다.

그리고 진무의 시선이 닿자 네 번째 사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입을 열었다.

"팔룡파 서른두 살! 왕덕삼! 삼남 이녀 중 둘째! 홍등가 앵앵이의 기둥서방입니다!"

"...."

어떻게든 살아 보려 곽청길보다 많은 내용을 쏟아 내었다.

범굴에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곽청길, 이 개새끼.

좀 나눠 먹지. 팔룡파에 대해서 전부 말하는 바람에... 그래도 뭐라도 말하자.

왕덕삼은 굳이 안 해도 될 자신의 삶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예? 아, 아닙니다. 아직 할 말이 많습니다. 제발...."

왕덕삼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통사정을 했다.

"닥치고. 지금부턴 묻는 말에 대답해."

"예!"

"어떤 놈이 청부한 거야?"

"예? 그, 그건...."

"몰라?"

"...."

왕덕삼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도 사색이 되었다.

모른다는 이야기다.

"몰라?"

"살려 주십시오. 정말 모릅니다. 진짭니다. 제발요."

"흠...."

진무는 잠시 고민하다가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지만 하나같이 쓸데없는 대답일 뿐 정작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팔룡파 두목이라는 이팔룡을 직접 찾아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저 새끼들 유명하냐?"

진무가 십언이흉을 가리켰다.

"예! 단강구 뒷골목에서는 손에 꼽습니다. 듣기로는 섬서에서 제법 이름난 무인을 죽이고 단강구에 숨어 산다고 했습니다."

"얼마짜리지?"

"예?"

"걸린 현상금 정돈 있을 거 아냐?"

"은 열 냥쯤 될 겁니다."

"...."

제길... 어쩐지.

단강이흉도 아니고 촌구석인 십언이흉이니.

그래도 두 놈 합해서 은 스무 냥이다. 진허가 쓰라고 준 용돈보다 훨씬 많다.

일단 챙기고.

"니들은 뭐 가진 거 없냐?"

"...."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팔룡파 식구들은 속옷에 감춰 두었던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서 진무에게 바쳤다.

"사, 사숙."

그걸 보고 있던 청상과 청우는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한 것도 모자라 불량배들에게서 돈을 뜯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도사가 해서는 안 될 짓이었지만 이미 진무가 흐뭇하게 받아 챙기고 있었다.

"좋아. 그럼 가 봐."

"예?"

"꺼지라고. 대신 이팔룡이한테는 말하지 말고. 만약에 내가 찾아갔을 때 이팔룡이 못 찾으면 니들은 전부...."

진무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모두의 시선이 따라갔다.

팔다리가 역으로 꺾였으나 청상이 겨우 응급 처치를 해서 사람 꼴로 돌려놓은 사내.

얼굴이 함몰되었으나 청상이 필사적으로 응급 처치를 해서 숨은 붙여 놓은 또 한 명의 사내.

꿀꺽.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앞으론 절대로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 길로 바로 도망쳐서 다른 곳에 가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쳤다.

"응? 아, 그럴 필요 없어. 계속 그냥 뒷골목에서 살아. 보호비도 받고, 남들 괴롭히고."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제 이름! 아니 아비의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이런 쌍! 그냥 나쁜 짓 하면서 살라니까!"

"...!"

진무가 눈을 부라리자 모두가 딸꾹질을 하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쯧, 가 봐. 저기 다친 놈들 데리고."

"예? 예!"

진무의 허락에 눈치를 살피던 사내들이 잽싸게 부상자들을 들쳐 메고 자신이 달릴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도망쳤다.

아마 그들은 더 이상 단강구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자, 그럼 가 볼까?"

"...."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갔건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진무의 모습에 청우와 청상은 도무지 적응하지 못했다.

"야, 뭘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어?"

"예?"

"업어."

"...."

십언이흉이라는 자들.

청상과 청우는 그들을 한 명씩 나누어 업었다.

물론 청우가 두 개의 짐을 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짐에 사람까지 업은 모습이 고되어 보이기는 했으나... 멍청하긴 해도 힘이 좋으니까 상관없었다.

18화

진무 일행이 단강구 초입의 작은 현, 방천 관아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짐은 둘째 치고 사람을 하나씩 업고 있으니 아무리 무인이라 해도 일반인들이 내는 속도보다 조금 빠른 정도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쉬어 가자고도 해 봤으나....

"이게 다 수련의 일환이라 생각해!"

라고 일축하는 진무의 모습에 청상과 청우는 더욱 열의를 다해 걸었다.

"잠시 쉬고 있어."

십언이흉을 인계한 진무가 관인과 함께 현청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 청상과 청우.

"사형...."

한참을 숨 돌리던 청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청상을 불렀다.

"사숙의 행동이 옳은 것일까요?"

"...."

"십언이흉은 두고서라도 두 명이나 그리 잔인하게...."

"청우야."

"예."

"나는 되레 사숙의 모습에서 감탄했다."

"예? 그게 무슨?"

"아까 본 이들. 누구에게나 지탄을 받는 뒷골목의 무뢰배들이었다."

"...."

"그들이 다시 나쁜 짓을 할 것 같더냐?"

청상의 물음에 청우가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도망칠 때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두려움, 공포.

그들의 눈동자는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아예 단강구의 반대편으로 도망간 걸 보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화적에게 가족을 모두 잃었다."

청상이 문득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청우도 들은 적이 있었다.

청상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 마을 사람들과 내 가족을 죽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참히 학살했지."

어린 나이였다.

화적에게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던 것을 정동궁주 명화가 거두었다.

"당시 명화 사숙조는 화적을 토벌해 관에 넘기셨다."

"...."

"그 후로 어찌 된 줄 아느냐?"

"...."

"그들이 뇌물을 써서 관을 나왔다더구나. 그리고 버젓이 다시 화적질을 한다고 들었다."

"사형...."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검을 익혔다."

청우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진소 사숙과 명화 사숙조는 나의 마음을 다스리라고만 하셨다. 한데 진무 사숙은 어떠하더냐?"

"...."

"나는 그저 그분께서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기에 옆에 붙어서 배우면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젠가 그 화적 놈들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을 때까지."

청상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헌데, 나는 오늘 진정한 계도(啓導)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

청상의 말을 들으며 청우는 낮의 일을 떠올렸다.

청상의 말을 듣고 보니 진무의 행동이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계도.

타인을 깨우쳐 이끎을 뜻한다.

진무는 그들을 계도한 것이다.

목숨을 노린 그들을 단죄하고 되레 '죄를 지으라고' 압박하며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필시 '죄를 지으면 내가 반드시 찾아가 단죄하리라.'라는 뜻을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하려 했던 것이 틀림없다.

비록 선의 뜻을 가진 무당의 계도와는 달랐으나, 훨씬 더 효과적으로 갱생의 길을 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스스로 지옥을 걸으며 세상에 광명을 가져다주는 사람.

청상의 눈에 비친 진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 사숙께선 너무나 높으신 뜻을 품으셨군요."

청우가 그제야 감탄하듯 말했다.

"잔인했지만 즉각적이고 확실한 힘으로 그들을 갱생시키신 것이다. 십언이흉 같은 악독한 자들을 어찌 살려 두신 건지는 모를 일이나 그 또한 깊은 뜻이 있을 터."

청상의 눈동자가 불타오르듯이 이글거렸다.

"나는 오늘, 앞으로 사숙을 따라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반드시 제자가 되어야겠다. 스스로 지옥을 걸어 악인을 계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받들어...."

"아!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오해다.

청상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렸다.

그러나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진무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청상은 멋대로 열의에 타올랐고, 청우는 멋대로 감동했다.

* * *

"한 냥 더 쓰시죠."

"허, 도사님께서 돈독이 오르셨나. 정해진 게 열 냥이라니까요."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는 진무로 인해 관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밖에 못 보셨소? 애들이 다쳤어! 막, 여기 칼도 맞고, 옷도 다 잘라져서...."

"거참. 하나는 맞는데, 하나는 얼굴이 뭉개져서 확실치도 않고...."

"어허, 무당의 도사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이오?"

"아, 그게 아니라."

"힘들게 잡았다니까요."

"허 정말... 알았소, 알았소. 일단 이건 좀 놓고...."

"아! 하핫. 나도 모르게 그만."

웃으며 물러나는 진무의 모습에 관인이 벗겨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린 바지춤을 올려 매고 비뚤어진 관모를 바로 했다.

"여기 있소."

관인이 한숨을 푹푹 쉬며 은전 하나를 더 꺼내자 진무가 재빠르게 채어 전낭에 넣었다.

"허헛, 복 받으실 게요."

"거참, 희한한 도사구만. 내 관인 생활 십수 년에 그대 같은 사람은 처음 보오."

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진무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돌아서려다.

"아! 참."

"예?"

"혹시 말이오. 이팔룡이라고 아시오?"

"이팔룡? 그 팔룡파의?"

"그렇소."

"알다 뿐인가! 그놈 자식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 다녀서...."

"얼마요?"

"...?"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나?

관인이 멀뚱히 진무를 쳐다보았다.

"그 이팔룡 현상금이 있을 거 아니오."

"아, 이십 냥이오."

"이십!"

진무가 생기 어린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냈다.

분명 비열하고 악독한 놈임에 틀림없었다.

필시 그러하리라.

그리고 무척이나 기특하지만.

'일단은 내 배부터 불러야지. 미안하다, 팔룡아.'

진무는 마음속으로 한 번 본 적도 없는 이팔룡에게 사과했다.

"설마? 그놈을 잡아 주실 생각이오?"

"봐서."

"아서시오. 우리도 몇 번 잡으려 했으나 원체 무공이 뛰어난 놈이기도 하고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숨어 다니는 통에."

무공이 뛰어나?

말도 안 된다.

지금의 단강구가 제갈세가의 영역임을 모르는 자는 없다.

사패천이 싸우자고 들지 않는 이상 제갈세가가 버티는 단강구에서 세력을 넓힐 리 없다.

즉, 아무리 강하다고 해 봐야 이십 냥짜리 뒷골목 불량배일 뿐이다.

그리고, 그깟 놈들 숨어 있는 장소야 뻔하지.

도박장, 야시장, 홍등가.

쭉 훑다 보면 안 잡힐 수가 없다.

서둘러 보고 싶다. 물어봐야 할 것도 있고, 겸사겸사 부수입도 좀 챙기고.

진무가 음흉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저런, 저런... 저러다 칼 맞지, 쯧쯧. 무당파가 현상금 사냥이라. 그러고 보니 근래에 단강구에서 도사들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관인이 진무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참, 어쨌든 도사치고는 별스럽구만그래."

* * *

의아하게 바라보는 관인을 뒤로하고 전낭 두둑이 현상금을 챙긴 진무가 밖으로 나오자 청상과 청우가 날 듯이 달려왔다.

"사숙!"

"어?"

이 자식들 눈빛이 왜 이래?

그 사이에 뭔 일이라도 있었나?

"존경합니다. 사숙!"

"...."

청우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청상의 표정도 청우와 다르지 않았다.

이것들이 정신이 좀 이상해졌나?

하긴 좀 고생하긴 했지.

진무는 짐이며 사람을 업고 두 시진은 족히 걸어온 둘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필시 힘들고 지치고 배고파서 헛소리를 하는 중이리라.

뭐 고생한 것도 있고, 밤도 늦었으니 청양상단으로 가기 전에 배나 채울까?

"자, 가자."

"예? 또 어딜?"

"밥. 저녁 먹어야지."

"아!"

"오늘은 특별히! 외유를 나온 첫날이니 제대로 요리된 고기를 먹게 해 주마!"

"오오! 고기!"

청우가 순식간에 환장하는 표정이 되어 눈을 빛냈다.

이 고기에 미친 도사 놈.

"가즈아!"

"우오오!"

청우는 기괴한 함성을 지르며 냉큼 진무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에 청상이 피식 웃었다.

청우도 청우지만 진무는 참, 기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얼마 안 가 도착한 곳은 방천현 중심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한 객점이었다.

해월각(海月閣).

마을 밖에 위치하고 있는 허름한 객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객점을 지어 놓고는 '바다에 뜬 달'이라니. 희망 사항인가?

마을 중앙에 위치한 객점을 마다하고 진무가 그곳을 선택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방천현에서 청양상단이 있다는 단강구 중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밤이 늦어 쉬어 갈 생각을 하던 중 때마침 해월각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맛은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고기 무제한!'

먹고 지칠 때까지 고기를 준단다.

싸고! 많고! 맛은....

아무려면 어떤가.

산돼지를 불에 구워 줘도 맛있다고 처먹는 놈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야숙을 할 때나 먹는 음식을 그리 귀하고 맛있게 먹는 놈들이었다.

그저 요리 구색만 갖춰도 천하일미(天下一味)라 할 것이 분명했다.

"여기!"

진무 일행이 객점 안으로 들어가 점원을 불렀다.

"어서 오십시오!"

모처럼의 도사다 보니 객점 안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동안 단강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무당파의 도인들이었다.

속세와 연을 끊고 산중에 올라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도사는 언제 보아도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하나 횡액이라도 당한 것인지 한 사람은 옷이 갈가리 찢어지고 몸의 곳곳에 피딱지가 가득했다.

허, 저 도사들이 대체 무슨 일을 당하였길래....

"여기가 고기를 무제한으로 준다는 곳이 맞나?"

응? 고기?

고기라는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의아하게 변했다.

"맞기는 한데 무당의 도사분들께서 어찌?"

"그렇군."

점원의 되물음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청우의 입가에는 침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안 그런 척하고 있으나 청상도 마찬가지로 기대감에 잔뜩 부푼 눈빛이었다.

내 오늘 니들에게 '맛'을 알려 주리라.

"고기! 푸짐하게! 쉬지 말고!"

"예?... 아, 예."

진무의 말에 점원이 눈을 끔벅이다가 마지못해 뛰어갔다.

그리고.

저런 호랑말코 같은 도사 놈들!

어린 도사 놈들이 고기나 처먹다니!

금욕 따위는 개나 줘 버리는 도사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눈을 찡그리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진무가 누구던가?

"여기! 술도 한 병!"

사람들의 시선 따위 생각해 본 적 없다.

음식이 나오고 청우가 한 젓가락 떠서 조심스럽게 맛을 보았다.

"오오오!"

생전 겪어 보지 못한 맛에 황홀한 감탄사를 터트린 청우가 마구잡이로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청상도 지지 않으려 애썼고 진무는 그들을 기특하게 바라보며 술잔을 채웠다.

자식들, 아주 향신료 맛에 뻑 가는구나.

"흑흑, 사숙. 이게 정녕 고기란 말입니까?"

"맛있네요. 맛있어요."

청우와 청상의 반응에 진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많이 먹거라, 내 새끼들.

무제한이니라!

"쯧쯧, 무당이 망해 간다더니."

저런 소리 따윈 신경도 쓰지 말고.

"어린 도사 놈들이 저따위니 볼 장 다 봤구만그래."

"아무리 그래도 무당인데.... 저놈들 혹시 사칭 아닐까?"

"에이 퉤! 모처럼 먹어 볼까 했더니 입맛만 버렸구만! 가세!"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처먹거라!

사람들이 진무 일행을 보며 욕설을 내뱉는 사이에 그들을 은밀히 주시하는 눈동자가 있었다.

"대사부님, 저놈들이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놈들 아닙니까?"

"음. 팔룡파가 실패한 모양이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 본 걸음이거늘. 쯧쯧."

뱁새의 눈을 가진 사내가 혀를 차며 일어나자 그 일행이 그의 뒤를 따라 객점을 빠져나갔다.

"추상."

"예."

"이팔룡을 찾아 어찌 된 일인지 자세히 알아보라. 나는 지금 즉시 장주님께 돌아가겠다."

"알겠습니다."

19화

고기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해월각의 이 층.

시끄러운 일 층과는 달리 무척이나 한산한 분위기였다.

손님이라고는 커다란 탁자를 차지하고 있는 한 무리의 학사들뿐.

하지만 탁자에 앉아 있는 것은 이제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앳된 학사 하나였고 나머지는 그저 뒤에 시립한 채였다.

희한한 것은 차림은 학사인데 모두가 등 어림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백색 검을 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융중산(隆中産) 어귀에 터를 잡고 호북성 북부의 이권을 차지하고 있는 제갈세가의 인물들이었다.

"방금 나간 자들. 익숙하군."

청삼에 검은 사방관(四方冠: 사각 학사모)을 쓴 학사가 안줏거리에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며 묻자.

"우가장의 조방입니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 학사가 즉각적으로 답하며 의향을 되물었다.

"어찌 방천에 온 것인지 확인해 볼까요?"

"아니, 됐어. 우가장 따위야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

사방관의 학사가 고개를 젓자 중년 학사가 공손히 물러났다.

희한하게도 눈으로 보이는 나이의 고하가 극명한데 되레 많은 쪽이 지극히 공손했다.

나이? 실력?

그따위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넘을 수 없는 신분의 차이.

젊은 학사는 제갈세가의 다섯 분가(分家) 중 하나인 단강구 제갈분가의 자손 중 한 명이었고, 중년인은 그의 호위였기 때문이다.

당대의 제갈세가는 융중산 본가(本家)를 중심으로 단강구, 양양, 의창, 무한까지 호북 다섯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저 분가 중 하나라 하면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수십 대를 이어 온 제갈세가였다.

융중의 본가는 말할 것도 없고 단강의 제갈만 해도 역사가 백 년은 족히 되었다.

직계와 방계를 포함해 제갈씨를 가진 자만 해도 백을 넘고 소속된 무인과 학사, 식객, 일꾼을 합하면 천을 헤아릴 정도였으니.

단강구 자체가 제갈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젊은 학사의 이름은 제갈근.

당대 제갈세가 단강분가주의 차남이었다.

직계 혈족인 그가 단강구에서 가지는 위세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그가 방천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른바 세력권을 시찰하는 임무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진무 일행을 보게 된 것이다.

"무당의 도사는 오랜만이지 않은가?"

제갈근이 아래층을 힐끗 쳐다보며 관심을 보였다.

"예. 그때의 참사 이후 구파의 중심에서 밀려나 두문불출했으니까요."

콧수염을 가진 호위, 방가후가 다시금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무당이 육식을 했었나?"

"...."

"더욱이 음주라?"

제갈근의 말에 방가후가 술을 마시는 진무와 벌써 십 인분째 처먹으며 객점주의 인상을 온통 구겨 놓고 있는 청우, 청상을 비웃었다.

"망조(亡兆)가 들어 버린 문파가 아닙니까. 나이로 봐서는 이대인 청자 배인데. 제자들이 저 모양이면 윗대는 보지 않아도 뻔하지요."

"윗대라...."

제갈근이 잠시 그 윗대를 떠올렸다.

진자 배와 명자 배.

그들 중 중원 무림에 이름을 떨쳤던 이들이 많았다.

한때 호북성을 두고 경쟁했던 무당의 고수들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듣고 외웠으니 제갈근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이 변해 간다고?

그래서 힘이 없다고?

천년의 세월을 견뎌 온 무당이다. 변한다고 해서 그 힘과 전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세가 줄었을 뿐이다.

그런 그들이 객점에서 버젓이 육식과 음주를 즐기는 모습이 무슨 문제가 될까?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그저 세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 생긴 비틀림일 뿐이다.

혼(魂)은 변하지 않는다.

제갈근은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무당이 단강구에 모습을 드러냈다라.'

진무 일행을 응시하던 제갈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산중에 처박혀 있다고 해도 무당은 여전히 범이었다.

그중에서도 굶주린 범.

그런 범이 굴 밖을 나오는 이유는 단 하나, 먹이를 구할 목적인 것이다.

"가후."

"예. 도련님."

"저들이 범인지 개인지 알아야겠다."

"예?"

제갈근의 말에 방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의미를 깨달았다. 사소한 시비로 상대의 능력을 파악해 보라는 뜻.

"직접 갈까요?"

"이대라면 최고로 잡아도 충검, 이류의 경지는 될 터. 현기(顯氣)의 경지에 오른 자네의 실력이면 다치지 않게 시험해 볼 수 있겠지."

나지막한 제갈근의 목소리에 방가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층을 내려갔다.

시험이니 과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사달이 커질 수 있으니 방가후 정도는 되어야 저들에게 적당한 수치를 주며 제압할 것이라 생각했다.

제갈근은 술을 마시는 척하며 층 아래 진무 일행을 응시했다.

"허허, 이런 곳에 무당의 도사들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

갑자기 다가온 방가후의 말에 양손으로 고기를 집어 먹던 청우와 청상이 손을 멈췄다.

"저는 단강구 제갈분가의 방가후라 합니다."

"근데?"

청상과 청우가 기름 범벅이 된 입술로 영문을 몰라 하는 사이 진무가 말을 받았다.

방가후는 내심 당황했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다.

근데... 라니?

이런 경우 통상 '저는 무당의 누구누구입니다.' 라는 식의 답이 돌아오는 게 회화의 기본이 아니던가?

"그래서 어쩌라고?"

"...."

당황하는 바람에 방가후가 말을 찾지 못하고 있자 진무가 짜증스럽다는 듯 잔을 탁 내려놓았다.

"식사 중이니까 볼일 없으면 꺼져."

꺼, 꺼져?

갈수록 황당하다.

도사의 언변이 어찌 닳고 닳은 시정잡배 뺨치는 수준이란 말인가?

말투와 표정만으로는 사파의 무인이 도포와 도관을 갈취해 입었다 해도 믿을 듯했다.

"꺼지라니까?"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진무의 직설적인 화법에 당황했던 방가후였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고 미소를 지었다.

"사, 사해가 동도라지 않소. 내 평소 무당을 존경해 온 마음에 술이라도 한 잔...."

그 말에 진무가 위층을 힐끗거리며 피식 웃었다.

"염병 한번 오지게 떨고 앉았네. 도사한테 술을 사겠다고?"

"...."

"딱 봐도 뭔 지랄인지 뻔하구만. 애쓴다, 니들."

"뭐, 뭐요?"

진무의 대찬 비웃음에 방가후가 속내를 들킨 아가씨마냥 눈을 찡그리고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진무는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뿐이지 주변을 살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사파의 무인으로 살아온 그다.

사파의 지존인 사패천주가 되어서도 수십 번 이상은 목숨이 노려졌던 그다.

생사의 경계 속에 놓이지 않았던 것은 무당에서 지낸 일 년이 고작이었다.

무당산에서야 신경 쓸 일이 도무지 없었지만, 밖으로 나왔을 때는 달랐다.

이미 한번 습격을 받은 뒤였다.

진무는 객점에 들어왔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주변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욕하던 손님들.

은밀한 눈빛을 보내고 나간 뱁새눈의 일행들.

그리고 이 층에서 자신들을 힐끗거리는 자들.

그중 가장 많이 신경을 거스른 것은 이 층의 인물들이었다.

진무 일행이 도포로써 무당의 제자임을 밝히듯이 그들의 옷차림이 당연히 제갈세가임을 말하고 있었다.

호북을 놓고 무당과 경쟁했던 제갈세가. 그리고 그중 하나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술을 사겠다는 웃기지도 않는 이유를 대면서.

"거 웃긴 새끼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처내려올 일이지, 어디 쫄따구를 보내?"

"쪼, 쫄따구?"

방가후가 어이없어하는데 진무가 아예 제갈근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두 다리를 벌리고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 상체를 숙인 것이 영락없는 뒷골목 불한당이었다.

"이, 이보시오. 말이...."

"아, 됐고. 다시 말하지만 꺼져. 뭔가 해 보고 싶으면 하고."

상황이 묘하게 흐르자 청우가 눈치를 살폈고 청상이 매서운 표정으로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자가 감히...."

"뭐? 제갈가에 시비를 거냐고?"

"...."

"니가 말하려는 걸 대신해 준 거지만 딱히 감사할 필요는 없어."

"...."

"청상아."

"예."

"이분께서 니들 실력이 궁금하시단다."

청상은 이미 일어난 채였다.

빡대가리에 가까운 청우와는 달리 눈치가 꽤 빠른 녀석이었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아까처럼 병신 짓 하면 뒈진다."

"걱정 마십시오."

청상이 결연한 눈빛으로 나서자 방가후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이 층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놈, 선수를 빼앗겼군.'

제갈근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육식에 음주를 하는 것도 모자라 삼류 잡배 같은 말투라니.

특이한 도사였다.

자신이 아는 무당파의 어떤 제자들과도 달랐다.

제갈근이 진무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말하는 것만 봐서는 늑대 새끼는 될 모양이군. 실력은 어떨지.'

하지만 오히려 잘되었다.

굳이 돌려 행동하지 않아도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고 알아서 행동해 주니 실력을 확인하기가 더 쉬워졌다.

제갈근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가후가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당의 도사치곤 입이 걸군. 이렇게 된 이상 실력이 그 입만큼 되길 빌지."

방가후가 주먹을 쥐며 슬쩍 물러나자 진무가 피식 웃었다.

바로 태세 전환하는 꼴하고는.

"어이. 뭐 하는 거야?"

"...?"

"우리 청상인 검만 써."

이미 청상은 검집째로 뽑아 손에 쥐고 있었다.

방가후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진짜 뭐 이딴 놈들이 다 있단 말인가?

방가후는 다시 한번 제갈근을 쳐다보았고, 제갈근은 재미있다는 듯 웃기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가후는 검을 뽑지 않았다.

분명히 청상이라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상대는 무당의 이대제자에 불과했다.

제갈근의 호위이기는 하지만 방가후는 단강 제갈분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였다.

자존심 상하게 고작 이대를 상대로 검을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수공권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쯧, 후회할 텐데...."

진무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청우가 아닌 청상이다.

그는 이대제자 중 가장 월등한 실력을 가진 한 명이었다.

아직 충검의 경지이지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다. 천재는 원래 자극만 주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청우와의 대결 이후 그는 부지런히 유운검법이 가진 단점을 해소하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취도 이룬 참이었다.

서서히 정형화된 초식의 틀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더욱이 낮에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으니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상대를 정확히 분석하고 허점을 찾아내서 집요하게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진무가 그렇게 가르쳤고, 경험도 해 보았으니.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방가후가 청상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청상을 얕보고 있으니 제 실력을 모두 보일 리 없다. 그 자만은 틈을 부를 것이고, 그를 놓치지 않는다면.

'청상이 이긴다.'

진무가 음흉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뻗었다.

"청상! 가라!"

파학!

외침과 동시에 청상이 앞발을 내디뎌 거리를 좁혔고 검을 곧게 뻗어 방가후의 명치를 노렸다.

변(變)을 고려하지 않으니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빠르다.

구름 흐르듯이 움직인다는 유운검의 변형.

청상의 손에서 펼쳐진 검은 유운검의 검로를 따르고 있었으나 구름이 아니라 그 속을 빠르게 노니는 번개처럼 변해 있었다.

"헛!"

예상치 못한 빠르기에 방가후가 재빨리 몸을 틀었다.

청상의 검이 그를 놓치지 않고 좌변으로 여유롭게 흘러 두 줄기로 뻗어 나갔다.

동시에 노려진 목과 허리.

방가후는 헛바람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강호에서 칼 밥 좀 먹어 본 노련한 고수였다.

금세 침착함을 되찾고 손등을 휘둘러 청상의 검극을 때렸다.

땅!

거친 쇳소리와 함께 물러났던 방가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방어를 위해 휘둘러지는 검격의 궤적을 피하며 청상을 몰아붙였다.

언뜻 수세에 몰리는 듯했으나 청상의 얼굴은 평온했다.

보고 있다.

청상은 방가후의 주먹과 발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며 그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일단은 발의 움직임.

어느 발에서 어느 주먹이 뻗어 오고 어느 각도로 움직이는지 놓치지 않고 보며 기억했다.

간간이 몸을 스치고 가는 주먹과 발이 아릿함을 남겼지만 비껴 맞았으니 큰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실력에 있어서는 청상이 약하다. 이미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호오?'

청상과 방가후의 대결을 바라보던 진무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어쭈? 제법 얍삽해졌는데?'

검을 쥔 손의 움직임.

청상은 이미 고쳐 놓았던 유운검의 단점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