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역시 경험이 부족하군.'
방가후는 단번에 유운검이 가진 단점을 파악해 내었다.
검을 쥔 손, 하단의 방어.
잘 감추고 있었지만 가끔씩 흐름이 끊어지고 있었다.
방가후는 그것을 그저 초식 운용이 미숙한 이대제자 청상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아깝게 되었군. 이대제자치고는 제법 대단한 실력이었는데.'
약점을 잡았다 생각한 방가후의 앞발이 단번에 내뻗어져 청상의 우측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한껏 뒤로 당겼던 주먹을 빠르게 뻗었다.
후웅!
"...!"
그 순간 적중되어야 할 주먹이 허공을 갈랐고, 방가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허리를 빼 주먹을 피하며 검이 반대편 손에 잡히자마자 곧게 뻗었다.
"이런!"
고스란히 전면을 노출해 버린 방가후가 당혹성을 뱉어 내었다.
청상이 노린 것은 방가후의 목.
천돌혈.
"큭!"
검집의 끝이 깊숙이 틀어박히는 순간 숨이 턱 막힌 방가후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고의로 허점을 노출한 청상의 전략이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검격.
잘한다!
조질 때는 확실히 조져 놔야지!
새끼, 가르친 보람이 있구만.
진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빠악!
첫 번째 검격이 방가후의 옆구리를 깊숙이 파고들며 난타가 시작되었다.
이 맛이지. 줘 패기 시작하는데 초식은 무슨.
빡! 빠바박!
방가후는 정신없이 청상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기 시작했고, 지켜보는 제갈근의 눈에 노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저런 멍청한!'
시험해 보라 보냈더니 신나게 처맞고 있었다.
"가후! 어린애를 상대로 부끄럽지도 않은가!"
딱 봐도 동년배인데 어른스러운 척은 더럽게 한다.
제갈근의 외침이 객점을 날카롭게 울렸다.
그 순간 얻어맞고 있던 방가후의 몸에서 예리함을 가득 머금은 기류가 회오리처럼 쏟아져 나왔다.
쩌엉!
"크으윽!"
신나게 검을 휘둘러 패던 청상이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검집은 튕겨져 나가 검신이 드러났고 검병을 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그의 앞에는 방가후가 흉신악살처럼 변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뽑혀 나온 검에 시퍼런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검날을 감싸다 못해 그 끝을 넘어 뱀의 혀처럼 넘실거리는 검기(劍氣).
일류라 평가받는 이들의 전유물인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다 이긴 판을.
멍청하게도 손속에 사정을 둔 게 틀림없었다.
승기를 잡는 순간 팔이나 다리 하나 정도는 아주 작살을 내 버렸어야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청상을 돕기 위해 일어나려던 진무는 피식 웃고 말았다.
물러난 청상의 검.
우우웅.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검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기가 채워지며 발생하는 공명 현상.
그리고 검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충검.
청상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층의 제갈근의 놀라는 눈동자가 제법 볼만했다.
'어디, 좀 더 지켜볼까?'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던 진무가 다시 자리에 앉자 청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사, 사숙. 검긴데요?"
"그래서?"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가만히 청우를 바라보던 진무가 한숨을 쉬었다.
따악!
"아얏!"
"돕긴 뭘 도와!"
"질 것 같아서...."
져? 확 그냥! 승부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 같으니.
이런 놈이 어떻게 청상을 이겼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런 게 내 제자를 하겠다고 따라다니다니.
어쨌든 진무는 청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호오? 충검? 고작 약관에 이른 것 같은데 제법이군. 허나."
방가후 역시 청상이 만들어 낸 충검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막 기를 주입한 충검과 검기의 경지는 천지 차이였다.
기의 응집도가 다르니 위력이 달랐고.
무엇보다 거리.
한 개인이 가지는 공격 거리인 간격(間隔)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다.
"거기까지다!"
취릿!
백색의 검신이 가볍게 휘저어지자 검기가 쭉 하고 늘어나며 채찍처럼 크게 휘었다.
쫘악!
예상치 못한 궤적에 청상이 다급히 피했지만 새로 입은 도포의 끝자락이 무참히 잘려 나갔다.
땅! 까강!
검기와 충검이 부딪혀 귀를 찢어 대는 소음을 만들었다.
청상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공격은커녕 접근조차 하지 못했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기를 겨우 막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어떻게든 방가후의 틈을 잡아내기 위해 열심히 거리를 좁히려 하고 있었다.
기특하다.
무인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하지만 계속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검기가 나온 이상 죽지는 않겠지만 잘못하면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청상이 패배한다면 위에서 쳐다보고 있는 저 재수 없는 제갈근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제자는 아니지만... 나중에 수련 좀 시켜야겠구만. 이거 같이 다니기 쪽팔려서, 원.'
진무가 일어났다.
그리고 막 수세에 몰려 물러나기 시작한 청상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따아앙!
어느새 뽑혀진 검이 방가후의 검기를 튕겨 내었다.
지이잉.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검신이 잘게 떨렸다.
탁.
손잡이를 잡아 뒷짐께로 검을 돌린 진무가 턱을 슬쩍 치켜들고 가늘게 뜬 눈으로 방가후를 깔아 보았다.
"이놈! 감히 승부에 끼어들 참이냐!"
"승부? 옘병하고 있네."
"뭐?"
"칼 꺼냈지? 이쯤 되면 그저 실력 확인이 아니라 막가자는 이야기잖아. 어디 하나 부러져도 되고, 실수로 뒈져도 할 말 없고."
"이, 이놈이."
"자, 난 시비를 걸었고, 넌 받았고."
"...."
"이해되지? 자, 그럼 대충 니가 대단하다는 건 알았으니까 이 차전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 착한 내 새끼 괴롭히지 말고."
진무가 새하얗게 빛나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이, 이놈이...."
"사숙!"
진무에 의해 가로막힌 청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방가후는 물론, 제갈근과 제갈세가 학사들의 눈동자에 놀람이 어렸다.
사숙.
분명 사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진자 배.
'사숙이라고? 저렇게 어린 자가?'
특히 제갈근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진자 배, 무당의 일대제자.
무당 장로들에게 직접 사사하고 있는 무인들.
나이는 대부분 서른 중반, 무당의 실질적 주력이라 불리는 무인이었다.
"뭐야? 설마 나를 이런 꼬맹이들이랑 같이 놓고 생각한 건 아니지?"
"...."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사숙,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청상이 발끈하며 외쳤다.
"청상아."
"...예."
"아주 잘했어."
진무가 초승달처럼 휜 눈으로 청상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제부턴 저런 새끼를 어떻게 조지는지 알려 줄게. 잘 보고 배워."
"아!"
청상의 눈이 반짝거렸다.
진무의 무공.
진허와의 비무에 대해 청우에게 들은 적만 있지, 본 적은 없었다.
팔룡파 식구라는 이들과 십언이흉과 싸울 때 보여 준 것은 딱히 무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냥 팼다.
그런데 사숙이 직접 무공을 보여 준다니,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이, 콧수염. 뭐 해? 니네 주인 기다린다."
"...방가후다."
"그거나 그거나. 꼬맹이 뒤치다꺼리나 하고 다니는 병신 새끼 주제에."
"어린 도사가 말이 심하군."
진무의 말에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져 버린 방가후의 몸에서 스산한 살기가 넘실거리며 피어올랐다.
"그렇지. 그렇게 나오셔야지. 그래야 줘 패는 맛이 있지."
진무의 눈동자가 사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가후!"
순간 제갈근이 당황하며 외쳤지만 방가후는 제어되지 않았다.
좋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당의 일대제자.
살기를 품은 이상 비무가 아니라 생사를 건 싸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문파 간의 마찰로 이어진다.
아무리 세가 약해진 무당이라 해도 정파의 종맥이었다.
그리고 일대제자라면....
"젠장!"
방가후를 말려야 한다 생각한 제갈근이 급히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진무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그리고 살기를 머금은 방가후의 검이 묘한 움직임을 만들어 내었다.
본가가 아닌 분가에게 허락된 소천성검(小天星劍).
청상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좌우의 방위를 번갈아 밟으며 휘저어진 검에 이어진 한 줄기 검기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하지만 진무는 피할 생각조차 없는 듯이 걸음을 내디뎠다.
"사숙!"
검기를 코앞에 둔 절체절명의 순간 청우와 청상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스륵.
순간 진무의 검이 묘한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절묘하게 검기의 방향을 비틀었다.
"아!"
진무의 검신에 보일 듯 말 듯 어려 있는 푸르스름한 기운.
충검이다.
진무는 검기를 사용하지 않고 청상처럼 충검으로 방가후의 검기를 흘려 버렸다.
부딪치거나 막지 않고.
마치 사부가 제자에게 충검의 사용법을 알려 주듯이.
크크, 무조건 세다고 좋은 게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한 거란다, 이 무식한 놈아.
콰콰쾅!
방가후가 연속적으로 검기를 뽑아내며 공격을 했지만, 진무의 몸에 닿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검면을 타고 흘러 멀쩡한 객점 바닥만 부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방가후가 뿜어내는 살기가 진해지고 검격은 훨씬 더 촘촘해졌다.
그리고.
세 발자국의 거리.
짧게 휘어진 검신이 방가후의 검격 사이를 파고들며 사라졌다.
짜아악!
첫 번째 걸음.
옆으로 세워진 검면이 방가후의 왼쪽 볼에 작렬했다.
고개가 꺾여 한쪽으로 치우쳐 버린 방가후.
"크으...."
빠각!
두 번째 걸음.
바닥으로 눕혀진 검면이 훤하게 드러난 방가후의 쇄골 뼈를 바스러뜨리고.
"끄억!"
빠박!
세 번째 걸음.
방가후의 뒤를 점한 진무의 발이 그의 무릎 뒤를 강하게 때렸다.
쿠웅!
방가후의 무릎이 거세게 바닥을 찧었다.
그리고.
턱.
검을 던져 버린 진무의 손이 방가후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끄으...."
무릎이 꿇린 채 머리가 뒤로 꺾인 방가후는 진무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딱 여기. 앞으로는 이렇게 우러러보도록 해. 알겠지?"
사악하게 피어오르는 미소와 함께 높이 들렸던 주먹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퍼억! 퍽! 퍽! 퍽!
둔탁한 소음이 객점을 가득 채우고 튀어 오른 피가 바닥을 적셨다.
잔인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에 그 누구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방가후는 진무에게 머리가 잡힌 채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린 듯 몸만 잘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만!"
보다 못한 제갈근이 그를 말리기 위해 끼어들었다.
쉬익!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과 함께 뻗어진 손이 진무의 손목으로 날아왔다.
그가 사용한 것은 제갈세가의 금나수법인 응혈신조(凝血神爪)였다.
손목을 잡아 비틀어 꺾은 다음 밀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
잡았다 생각했던 진무의 손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고, 어느새 방가후의 머리를 잡아끌고 피한 진무가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방가후가 당했고, 수하들이 보고 있었다.
가문이 자랑하는 금나수를 사용했음에도 행동을 멈추게 하기는커녕 손목조차 잡을 수 없자 제갈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세인들은 제갈세가라고 하면 기관진식과 남다른 지혜를 가진 학사의 가문이라 평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이었다.
제갈세가도 엄연히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무가였고, 그중에서도 거대 세가에 속했다.
단지 무(武)보다 문(文)이 더 뛰어난 것이지 결코 무공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은 호북 최고의 가문이었다.
쪽팔림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제갈근이 급기야 소천성신공으로 내공을 끌어 올리며 움직임에 속도를 더했다.
취리릿!
손가락 끝에 옅은 기운이 피어오르며, 응혈신조의 속도가 두 배 이상 빨라지고 노리는 곳도 다양하게 변했다.
다른 이도 아닌 제갈분가의 직계가 최선을 다해 펼치는 무공이었다.
그쯤 되니 진무도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손목도 아니고 어른 멱살을 잡으려고 해?
응수해 주지.
21화
방가후를 놓아 버린 진무가 손을 어지럽게 휘젓자 호쾌함이 가득한 선기가 뿜어져 나왔다.
무당의 태청산수(太淸散手).
파팍! 파팍!
빠르게 교차하는 손놀림에 두 사람의 소맷자락이 엉켜들며 공기 터지는 소리를 만들었다.
제갈근은 잡아채려 하고 진무는 흩어 놓는다.
'이, 이놈이!'
제갈근은 자신이 가진 내공의 전부를 끌어 올렸음에도 진무의 손목을 잡아채지 못했다.
더욱이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과는 달리 진무의 표정은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하압!"
급기야 더 참지 못한 제갈근이 응혈신조를 거두고 일장을 뻗어 내었다.
쿠르릉!
강맹한 기운을 머금어 담은 기운이 우레성을 내며 쏘아졌다.
"흥!"
그리고 비웃음을 머금은 진무의 일장이 똑같이 뻗어졌다.
쩌어엉!
맞부딪친 손바닥에서 일어난 소음이 객점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타다다닥!
그리고.
반탄력을 이기지 못한 제갈근이 뒤로 넘어가는 몸을 바로잡기 위해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다섯 걸음.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제갈근이 서둘러 고개를 쳐들었다.
"...!"
원래의 자리에서 한 치의 거리도 움직이지 않은 진무.
그리고 여전히 입가에 맺힌 비웃음.
약간의 차이 정도가 아니었다.
호북성에 퍼져 있는 제갈분가의 후계를 모두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자신이 밀린 정도가 아니라 처참하게 패했다.
"제법이네. 피 한 사발 정도는 쏟을 정도로 힘을 줬는데."
"...."
진무의 이죽거림에 제갈근이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진짜 눈깔들을 죄다 뽑아 버려야 되나.
고수에게 한 수 배웠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해야지.
근래에 눈 제대로 뜰 줄 모르는 놈이 왜 이리도 많은지.
진무가 눈썹을 역팔자로 만들고 입술을 있는 대로 비틀며 위협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공자님."
그의 호위들이 부축하려 하자 제갈근이 매섭게 뿌리치고 진무를 노려보았다.
"너, 이름이... 뭐냐?"
"응?"
"네놈의 이름. 일대라면 진자 배를 쓸 터."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하여간 정파 놈들은 가정 교육부터가 틀려먹었다. 어른 앞에서는 제 이름부터 밝혀야지.
마음 같아서는 모가지를 뽑아 들고 제갈가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지금이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살기를 품은 호위 정도야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제갈가 자손의 명줄에 문제가 생기면 제갈세가가 직접 나선다.
그리되면 그저 작은 소란으로 끝날 것이 무당과 제갈의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명분이 무당에 있다.
저들은 다수이고 무당은 고작 셋.
진무가 스스로 시비라 했으나 누가 보아도 제갈세가가 먼저 건 시비였다.
그들은 고기와 술을 먹은 죄뿐.
그걸 알기에 제갈근도 살수를 펼치지 않은 것이다.
하여간 정파 녀석들. 재는 것 많아서 좋겠어.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싸가지하고는.
어째 내뱉는 족족 반말인지.
뭐, 그리 궁금하다면 알려 주지. 귓구멍 파고 새겨들어라.
앞으로 정무맹의 정점에 설 이 몸의 이름을.
"진무."
"진...무...."
제갈근이 곱씹듯이 되뇌며 일어났다.
"...또 보게 될 게다."
"지랄하네. 내가 너 같은 싸가지를 왜 또 보냐?"
피식 웃는 진무를 매섭게 노려본 제갈근이 턱 언저리에 근육이 잡히도록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이. 이 콧수염 안 데려가냐?"
"...."
진무가 가리킨 것은 피떡이 되어 쓰러진 방가후였다.
"패배한 놈은... 쓸모없다."
햐, 막연히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는데 아주 구체적으로 쌍놈 새끼였구만.
아주 나보다 더하네, 더해.
지도 진 건 마찬가지면서.
그리고 막 객점을 나가려는 제갈근을 진무가 다시 불렀다.
"야!"
"뭐지?"
"뭐긴. 눈 없냐? 주변 좀 봐라."
"...."
객점 안은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방가후가 뿌린 검기로 인해 탁자들은 모조리 부서졌고 바닥이며 벽이 성한 곳이 없었다.
"대제갈세가의 자제분께서 힘없는 민가에 피해를 입히고 그냥 가시면 되겠냐? 주인이 관에다 고발을 할지도 모르고 말이야."
"...."
제갈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관에 고발?
해 봐야 그 누구도 단강에서 제갈가에 책임을 묻진 못한다.
하지만.
진무와 더 이상 드잡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네놈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객점에 대한 피해는 제갈가에서 직접 보상할 테니."
다시 걸음을 내디디려는데 진무가 또다시 불렀다.
"뭐 그건 그렇고."
"...."
"얌전히 밥 먹다 니들하고 시비 붙은 우리는 생각 안 하냐? 고깃값, 술값, 그리고 친히 싸워 주신 수고료 정돈 괜찮잖아? 돈도 많을 텐데."
이 자식이....
누가 봐도 약 올리는 것이 분명했다.
툭.
제갈근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하고 품에서 묵직한 전낭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어이구. 묵직하네, 묵직해."
진무는 도사라고 하기엔 너무도 속된 모습으로 재빨리 전낭을 챙겨 열었다.
"뭐야, 죄다 은둥이네. 누렁이는 없냐?"
"...이!"
화가 더없이 치밀었지만 제갈근은 차마 움켜쥔 주먹을 뻗지 못했다.
"돌아간다!"
제갈근은 찬바람이 풀풀 날릴 듯한 표정으로 학사들과 함께 객점을 빠져나갔다.
"거, 새끼 성질하고는."
어쨌든 공돈이 생겼다. 흐흐흐.
"사숙! 대단하십니다!"
덤으로 청상과 청우의 충성도까지 소폭 상승한다.
"청우야."
진무가 청우를 불렀다.
"예. 사숙!"
"저 아저씨 주워서 의원에 데려다줘라."
아직은 살생을 함부로 하지 않는 도사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진무였다.
제갈근은 성난 걸음으로 객점에서 한참을 떨어지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비틀.
그를 호위하던 학사들이 부축할 틈도 없이 무릎을 꿇은 제갈근.
"이, 이공자님!"
"우웩!"
제갈근이 검붉은 울혈을 토해 내었다.
내상.
진무와 장력을 부딪치는 순간 내상을 입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나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자 앞에서 피까지 토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스윽.
제갈근은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객점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길평!"
"예. 이공자."
호위 무사 추길평이 곧바로 대답했다.
"은밀하게 꼬리를 붙여라."
"...."
"저 정도나 되는 놈들이 무당산을 내려왔다면 필시 목적이 있을 터다."
"예!"
"어디에서 묵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샅샅이 확인해 보고하라."
"알겠습니다."
추길평이 공손하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그저 늑대 새끼인줄 알았던 놈이 제대로 범 새끼였다.
그것도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단강구.
과거 그곳의 이권은 무당과 제갈세가에서 양분하고 있었다.
아니, 무당이 좀 더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익을 추구하는 세가와 달리 도문이었던 무당에 큰돈은 필요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돈을 아낄 수 있었던 상단들이 그곳에 줄을 대고 있었다.
하지만 십여 년 전 사패천에 의해 참변이 일어나고 난 뒤 세가 약해진 무당이었다.
제갈분가는 그 틈을 노려 단강구에 있는 대부분의 상권을 집어삼켰다.
그간 무당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두가 단강 제갈분가에서 그리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뒷골목의 일부 이권을 사파와 끈이 닿은 무뢰배 집단이 차지하고는 있었으나.
만약 무당이 다시 움직이고 상권이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제갈분가가 받는 타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 틀림없었다.
'무당... 이제 와서 단강구에 파란을 일으키고자 함이더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제갈근은 다시 한번 입의 핏물을 닦아 내었다.
"순찰은 끝이다. 분가로 돌아가야겠다."
"예! 이공자."
* * *
다음 날 아침.
진무 일행은 방천을 떠나 청양상단이 있는 단강구 도심으로 향했다.
모처럼 보는 도사들의 등장 탓인지 관도를 거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더욱 끌어 대는 것은.
"우와!"
갓 상경한 촌놈처럼 입을 떡 벌리고 두리번대는 청우.
두 벌밖에 없는 도포를 모조리 피로 물들인 청상과 진무.
물론 진무의 도포에 물든 피는 방가후의 것이었지만.
하아, 일단 옷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다.
진무는 사람들에게 물어 포목점 거리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팔룡이 포목 거리에서 보호비를 받는다고 했는데.
잘됐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이팔룡이 잡고 현상금도 챙기고.
품속에 있는 은 스무 냥을 더해 제갈근에게 수고료(?)로 받은 전낭의 묵직함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이거 전장에 거래라도 한 구좌 터야 하나. 앞으로 돈을 많이 벌 텐데 말이지.
문득 진무의 시선이 청우에게 닿았다. 그러고 보니 청상은 둘째 치고 청우의 옷도 많이 낡았다.
불쌍한 녀석들. 문파를 잘못 만나서 어찌 저리도 가난한 신세들인지.
근래에 충성도가 많이 오른 듯한 눈빛이었으니 상을 주어 충성도의 극점을 찍어야겠다.
"얘들아."
"예, 사숙."
"내 너희에게 새 도포를 사 줄 것이다! 가즈아!"
"우오오오!"
도사고 나발이고, 역시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놈은 없다.
* * *
포목점 중 제법 쓸 만해 보이는 곳에 도착한 진무는 주인을 불렀다.
"이보시오! 주인장!"
"아이구, 어서 오십...쇼."
손님 들어오는 소리에 포목점 주인, 왕척이 반색하며 뛰어나오다가 얼굴을 구긴다.
더욱이 청우와 청상이 벽면에 걸어 둔 비단을 손으로 만지며 꿈꾸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아, 거기 만지지 말고! 때 타요! 때 타! 쯧, 하필이면 돈도 없는 도사 놈들이."
뒷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려도 다 들린다, 이 양반아.
이럴 땐 역시.
쩔거럭.
"...!"
역시 장사치들의 눈치란.
소리만 듣고도 귀인이 강림했음을 깨달은 왕척이 당장이라도 간 쓸개를 두 손 모아 바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아이구, 도사님! 이 누추한 곳에 왕림을 해 주시다니 삼생의 영광입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흐음, 혹 도포를 지을 비단이 있소?"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저희 포목점으로 말씀드리자면 이곳 단강구에서 제일가는 비단만을 취급하며 중원 곳곳에 주문을 받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호오, 그렇소?"
"암요, 암요."
"그럼, 내 믿고 맡기리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도사 나리!"
왕척은 양손을 모아 비비적대며 최대한 공손하게 웃었다.
"그럼 이쪽 분의 옷을...."
왕척이 찢어진 옷을 입은 청상을 바라보자 청우가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어허!"
"예?"
갑작스러운 호통에 의아해진 왕척의 눈앞에 진무가 손가락 세 개를 펴 힘차게 내밀었다.
"셋, 모두!"
"어헉!"
"두 벌씩!"
"허어억! 귀이이인!"
진무의 말에 왕척은 물론, 청상과 청우마저 당장에 절이라도 올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질 땐 제대로 조지고, 쏠 때는 확실히 쏜다!
무릇 윗자리에 앉은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자세였다.
돈이 곧 권력이고, 돈이 곧 충성을 끌어올리는 법이다.
"박촌 거지 노인이 오늘 서쪽에서 귀인이 올 것이라 하더니 그 말이 맞았구만. 허헛."
왕척이 감격해 중얼거리며 다음에 거지 노인이 오면 반드시 푸짐하게 음식을 내어 주리라 다짐했다.
"참, 혹시 이팔룡이라는 자를 아시오?"
"팔룡파의 그 이팔룡이요?"
청우와 청상의 옷 품을 재던 왕척이 순간 굳은 표정으로 멈칫했다.
"그놈이 하도 나쁜 짓을 하고 있다길래. 내 얼굴이나 볼까 하고."
"아!"
그러곤.
"그 개놈 자식을 찾는 분이 많군요."
"응?"
"어제는 우가장의 무사님들이 찾던데... 하긴 다양하게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놈이니."
"우가장?"
"예. 그런데 어디에 숨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답니다. 우가장 무사들이 어제저녁부터 포목 거리를 몇 번이나 들락거렸습죠."
"흐음."
진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팔룡에게는 물어볼 것도 있었거니와.
'이 새끼들이 내가 찍은 먹잇감에 손을 대려고 해? 내 귀한 스무 냥짜리를?'
진무는 우가장이라는 곳보다 반드시 먼저 이팔룡을 잡아야겠다 다짐했다.
"다 되었습니다. 옷을 다 지으면 어디로 보내 드리면 될까요?"
"청양상단이라고 아시오?"
"암요. 알다 뿐입니까? 그곳이랑 거래도 하는데요."
"흠, 잘 됐구만. 그럼 그리로 보내 주시오."
"알겠습니다. 완성되는 대로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그때 봅시다."
"예, 귀인! 살펴 가시고 하시는 일 족족 잘되시길 빌며, 이팔룡 그놈도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하하핫!"
진무는 덕분에 새 옷을 얻게 되어 충성 어린 눈빛을 빛내는 청우, 청상과 함께 청양상단으로 향했다.
22화
"무당이라고?"
"예."
"흠."
한 사람이 쓰기에는 과도하게 큰 집무실.
서류 더미를 쌓아 놓고 있던 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고한 학사의 차림에 고집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인상을 가진 이는 단강 제갈분가를 이끌고 있는 제갈무린이었다.
이른 아침 막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시찰을 나갔던 둘째 아들 제갈근이 면담을 청해 왔다.
그런데.
"무당의 일대제자인 진무라는 자가 이대제자 두 명과 함께 방천현에 나타났습니다."
"진무?"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일대제자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무당이라는 이름이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산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던 이들이 갑자기 어찌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어떤 인물이더냐?"
"무척이나 특이한 인물이었으나, 적어도 범 새끼는 되는 듯하였습니다."
"확인해 보았다는 이야기로구나?"
"...."
제갈근은 아비에게 차마 자신이 패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방가후를 보내 시험해 보았으나...."
제갈근이 뒷말을 흐렸으나 범 새끼라 했으니 졌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쯧쯧, 직접 나서지 않고.... 무당의 일대제자에게 창피를 당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의 뒤를 밟아 보았습니다."
제갈근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뒤를 밟아 보았다?"
"예. 아버님께서 신경 쓰실 듯하여."
"흐음. 그건 잘한 일이로구나."
방가후가 패배했다는 말에 언짢아졌음일까. 제갈무린의 눈동자에 탐탁지 않음이 느껴졌다.
"그래. 그들이 어디로 향하더냐?"
"지금 청양상단에 들었습니다."
"청양?"
익숙하지 않은 이름인지 제갈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강구에 있는 상단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제갈무린이었으나 청양상단의 이름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청양, 청양이라. 설마 외하구에 있는 그 청양상단을 말함이냐?"
"예. 아마도 무당과 연을 맺은 듯합니다. 한데 어찌?"
되묻는 연유를 알지 못한 제갈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갈무린은 되레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 하하하, 이거 참 놀랄 일이구나. 무당이 궁핍하게 살더니 제대로 미쳐 가는 게로구나. 청양상단과 연을 맺어?"
청양상단은 제갈가와 손잡지 않은 곳이라 제갈근은 잘 알지 못했다.
"청양상단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
"죄송합니다. 소자가 부족하여 미처 그것까지는."
"내 기억이 맞다면, 번듯이 상단 행세는 한다만 실상은 밀수나 하는 쓰레기들이지."
"예? 설마 무당이 밀수에 손을 댄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아마도 모르고 그랬겠지. 속세를 떠나 있던 도사 놈들이 어찌 그 사실을 알겠느냐."
"한데 어찌 무당이 그런 자들과...."
"그건 모르겠다만 무당과 청양상단이 연을 맺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닌가. 크하핫!"
제갈무린이 고개가 젖혀지도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청양상단을 찾은 도사가 좀 이상하기는 했습니다."
"이상하다?"
"예. 육식에 음주까지 하더군요. 돈도 좀 밝히는 것 같고."
"뭐라? 일대제자가 말이냐?"
"예."
"이런, 이런. 무당이 절로 망해 갈 모양이다. 내심 그들이 다시 활동을 재개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거늘."
제갈무린은 앓던 이가 저절로 빠진 듯이 기뻐했다.
"한데 신경 쓰이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방천현에서 우가장의 조방을 보았습니다."
"조방?"
"예. 우가장의 무사부입니다. 당시에는 생각지 못하였으나 그가 무당의 도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호오? 우가장이 무당을?"
제갈무린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가장의 아들이 무당에 있다 하지 않았더냐?"
"예. 진혜라고 합니다."
"그래, 진혜. 그리고 청양상단에 온 도사는 진무라 했지?"
"예."
"흐음, 진혜와 우가장, 청양상단이라."
제갈무린은 가늘어진 눈을 하고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렇군. 과연 그래. 크하하핫!"
한참을 생각하던 제갈무린이 다시금 파안대소를 했다.
"어찌?"
"소 피나 빨아야 할 쇠파리 따위가 아예 소를 잡아먹으려고 하는구나."
쇠파리는 소나 양, 말과 같은 숙주의 등에 붙어 피를 빨아 기생하는 곤충이었다.
하지만 어찌?
제갈근은 아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만 갸웃거렸다.
"잘되었다. 뒤가 구린 것들이 뭉쳤으니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겠어. 흠, 어떻게 한다? 멍청한 놈이 무당의 주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가늘게 뜬 제갈무린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설마 그들이 무당을 집어삼킨단 말입니까?"
"집어삼켜? 당치도 않는 소리. 제 아가리나 찢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제갈무린이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어찌 되었든 좋은 기회다. 적어도 망해 가는 무당의 이름에 제대로 똥칠을 해 줄 수도 있겠어. 다시는 이 단강구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말이야."
"예?"
"근아."
"예."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그 무당 도사 놈들이 하는 일을 소상하게 알아보거라."
"혹, 그들이 청양상단과 함께 불법적인 일에 관여하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함입니까?"
제갈근의 추측에 제갈무린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되면 훨씬 더 좋을 테지. 어쨌든 내 너에게 청화대(靑花隊)의 무인 스물을 내어 주마."
"처, 청화대를요?"
제갈근이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청화대는 가주 직속으로 편성된 무인대 중 하나로 단강 제갈분가의 주 전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한 번도 후계들에게 청화대를 내어 준 적이 없었다.
그만큼 기대를 건다는 뜻.
"오냐. 무당의 도사들을 주시하거라. 운이 좋아서 그들이 눈먼 칼을 맞고 죽어도 좋고, 혹여 무당의 도사들이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면 네가 직접 잡아 오너라."
"알겠습니다."
제갈근이 힘차게 대답했다.
제갈분가의 소가주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제갈무린의 성격상 적자 승계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더 세가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가?
그것이 소가주를 선택하는 조건이었다.
제갈무린이 저리 기뻐하고 있으니 눈에 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청화대다.
한차례 싸워 본 진무라는 도사의 무공은 자신보다 훨씬 더 강했다.
감히 그 수위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
다시 싸운다 해도 이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청화대의 무인 스물이라면? 무당의 장로급조차 쉽게 승부를 자신하지 못할 전력이었다.
'놈, 원한을 톡톡히 갚아 주겠다.'
제갈근은 다시금 힘차게 대답했다.
"반드시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오냐. 너를 믿겠다."
제갈무린이 일어나 제갈근의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했다.
* * *
"진무 도장 계십니까?"
진무 일행은 청양상단에 도착한 이후 작은 전각 하나를 통째로 배정받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말이 작은 전각이지 후원에 정자까지 있어 셋이 쓰기에는 무척이나 큰 곳이었다.
저녁이 가까워 오는 시간, 일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던 금적산이 총관과 함께 후원으로 찾아왔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청우와 청상의 대련을 보며 수련을 도와주고 있던 진무가 반갑게 일어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인."
의외로 진무는 공손했다.
"허허, 내 무당을 찾았을 때 도장께 큰 관심이 있었는데,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어찌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금적산이 과할 정도로 예를 갖추며 웃었다.
"그런데 옷차림이...."
"아, 오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저런, 어떤 쳐 죽일 놈들이 무당의 도인분들에게!"
금적산이 눈을 부릅뜨며 당장이라도 찾아내겠다는 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끝난 일인 것을요."
"이거 안 되겠습니다. 제가 호위라도 붙여 드려야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하핫, 대인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라니요. 이제 무당과 저희는 이제 한 식구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수십 년을 알아 온 이들에게 짓는 듯한 웃음이었으나 진무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과도한 친절.
이유 없는 친절의 이면에는 항상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그리고 진무는 이미 금적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하하, 상단주님께서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안 그래도 장문인께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 도우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무가 순수하게 말을 받으며 웃었다.
"아 그래요? 이런 감사할 데가... 허나 저희 같은 작은 상단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저와 함께 단강구 구경이라도 나가시지요. 저녁 식사도 할 겸."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저나 사질들이나 속세는 처음인지라."
진무가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하며 뒷머리를 긁자 금적산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해합니다. 아, 그리고 계시는 동안 혹여 단강구에서 돈 쓸 일이 생기면 청양상단의 이름으로 사용하십시오."
"엇, 정말입니까?"
"암요. 한 식구나 다름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금적산이 넉넉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는 그의 말이 너무도 반가웠다.
금적산의 시커먼 꿍꿍이속을 모르지 않았기에 어떻게 뽑아 먹을까를 고민하고 있던 진무였다.
대놓고 돈을 대 주겠다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상단에 대한 파악만 끝나면 닥치는 대로 빨아먹어 망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이다. 비열함으로 따지면 중원 대표급을 자부하는 진무였다.
"저어, 하면 혹시 포목점에...."
"아! 옷을 주문하셨습니까?"
금적산이 세 사람의 허름하고 찢어지고 피까지 묻은 옷을 다시 한번 힐끗거렸다.
"예. 천가 포목이라는 곳에."
"그곳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총관에게 일러 값을 치르라 하지요."
"감사합니다. 대인!"
"하핫, 수행에 매진하시는 도사님들께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부담스러워 말고 말씀만 하십시오."
"부끄럽습니다."
진무가 얼굴을 붉히곤 뒷머리를 긁적이며 음흉하게 웃었다.
"허허,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속히 환복을 하고 오겠습니다."
"예."
진무 일행의 숙소를 나온 금적산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싸늘했다.
"총관!"
"예, 단주님."
금적산의 부름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총관 이치성이 대답했다.
"지금 즉시 우가장에 연락을 보내라. 무당의 도사들이 도착했다고."
"알겠습니다."
이치성은 두말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가장과 금적산의 밀약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가장은 무당의 일대제자 진혜의 본가였다. 청양상단이 무당과 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우가장과 진혜가 힘을 써 준 덕분이었다.
무당에서 제자들을 청양상단으로 보내겠다는 소식이 왔을 때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혜가 아닌 진무.
당연히 진혜가 올 것이라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금적산은 무당을 찾아갔을 때 보았던 진무를 기억하고 있었다.
진혜의 사부인 명공에게마저 인정을 받고 있는 무당의 제자.
어쩌면 그가 대제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곧바로 우가장에서 연락이 왔다. 우가장은 손님으로 오는 도사들을 노리고 있었다.
청상이라는 제자의 옷차림을 보았을 때 벌써 우가장으로 인해 한차례 습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걸림돌이라고 생각을 했겠지.'
딱히 상관은 없었다.
진혜를 도와 대제자로 만들고 장문인에 오르게 한 뒤 무당의 이름을 이용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 오히려 진무보다는 진혜가 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은밀한 밀약을 나누는 것은 깨끗한 놈보다는 뒤가 구린 놈이 훨씬 더 나을 테니까.
"저, 그런데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무당의 제자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상단에 피해가."
"총관."
"예."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자신들은 관계없다.
진무 일행의 문제는 우가장에 맡겨 두면 될 일이었다.
자신들은 그저 한발 빠져 있으면 될 일이고 모든 책임은 우가장이 진다.
이로써 그들의 약점 하나를 더 잡게 되었으니 나쁠 것이 없었다.
그보다 급한 것은.
"총관."
"예."
"그 화약 밀수 건은 어찌 되고 있나?"
"아, 안 그래도 오 일 뒤 거래하기로 했습니다."
"오 일? 준비할 시간은 넉넉하겠군. 관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조심들 하고."
"예.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23화
진무가 청양상단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
우가장주 우문흠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조방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청양상단에서 연락이 왔는가?"
"예."
"준비는?"
"저녁에 금적산이 단강구 야시장을 구경시켜 준다며 데리고 나온다 하였습니다."
"그때 습격을 한다?"
"예. 금적산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틈을 타 습격할 생각입니다."
"음."
조방의 계획에 우문흠이 잠시 고민을 했다.
야시장이라면 보는 눈이 많다.
소란이 일어나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칫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될 일인데?"
"해서 강변의 무월루에 자리를 마련하라 하였고, 입이 무거운 낭인들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무월루(無月樓).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주루였다. 일을 벌이기에 꽤 적격인 곳이었다.
"무월루라. 좋군. 낭인은 어떤 자들인가? 듣자 하니 십언이흉도 당했다 하던데?"
"걱정 마십시오. 이번에는 제법 이름난 이들로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이번에는 공사척이 직접 나선다 하였습니다."
"공사척이?"
"예. 이팔룡은 그의 사촌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팔룡을 찾는다는 소문에 직접 연락을 해 왔습니다."
"쯧, 또 얼마나 요구하려고."
"어쩌겠습니까? 대공자께서 무당을 손에 넣는 일입니다."
"음."
우문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낭인들이 실패하면 그들이 직접 나설 것입니다."
공사척은 단강구 일대에서 꽤나 알아주는 무뢰배 집단인 사척파의 두목이었다.
뒷골목 무뢰배임에도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현기(顯氣)의 고수로, 우문흠 자신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실력이었다.
또한 이팔룡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하를 거느리고 있었고, 사파의 거대 문파인 흑사방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쨌든 공사척이라면 충분하겠군."
"암요. 일대제자라 해도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입니다. 이번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렇군. 좋아."
우문흠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의 일대제자, 진무.
그는 반드시 죽여야 했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만 했다.
우문흠은 자신들의 미래를 걸고 있었다.
무당의 제자를 죽인다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잘못하면 다른 일대제자는 물론 장로들까지 검을 뽑아 들고 나타날 수 있는 일이었다.
사건의 연관성이 밝혀지면 공사척 패거리는 물론 우가장까지 모조리 털려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험 부담이 큰 만큼 이득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너져 가는 무당이었다.
폐인이 되어 허름한 암자에서 세월을 보내는 명진 도장.
진무는 그의 도동이었던 자였고, 화적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천애 고아였다.
더욱이 근래 무당 십계를 어기며 분란을 자초하고 있다고 한다.
그저 무공이 조금 뛰어난 일대제자는 무당의 수치에 불과할 것이다.
죽어도 슬퍼할 사람조차 없는.
'그래. 긴장할 필요 없다. 그의 죽음에 우가장은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이다.'
우문흠은 진무가 죽는 즉시 공사척 패거리를 쓸어 버릴 생각이었다.
죽은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면 된다.
그저 사파의 떨거지가 겁 없이 무당의 제자를 죽인 것으로 결론 나리라.
그들은 무당 제자의 복수를 한 우방이 될 것이고, 진혜는 점점 더 승승장구하여 무당의 꼭대기에 오를 것이다.
"반드시 성공한다. 우가장의 미래를 걸고!"
우문흠은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밤이 된 단강구.
중원의 이름 높은 강어귀가 그러하듯 단강구 강변은 밤이 깊어 갈수록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낮 동안 닫혔던 문이 열리고, 집집마다 홍등이 내걸리면 입은 듯 만 듯한 나의(羅衣)의 여인들이 지나가는 행인을 유혹한다.
"상공, 아잉, 잘해 줄게요."
속이 훤히 비치는 나의에 속살을 드러낸 홍등가의 기녀들이 화장기 짙은 얼굴로 섬섬옥수를 감아 왔다.
"허억!"
"어흠!"
진무와는 달리 금적산의 뒤를 따라 홍등가를 지나는 청우와 청상이 시뻘게진 눈을 어디로 둘지 몰라 했다.
아무리 도포를 차려입은 도사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이대제자, 아직 여인의 분 냄새를 견딜 만큼 수양이 깊지 않았다.
한창 피가 끓는 나이가 아니던가.
"어머, 도사네?"
"도사는 처음인데?"
기녀들이 금적산을 따라 홍등가로 들어온 진무 일행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어린 도사니임~!"
살포시 다가와 팔짱을 끼고 가슴을 비벼 오는 여인에 청우가 콧구멍을 벌렁이며 세찬 숨을 쏟아 내었다.
"이, 이거 놓으시오. 왜, 왜 이러시오."
"어머, 팔뚝 포동포동한 것 좀 봐. 이리 와, 응? 누나가 잘해 줄게."
팔을 빼려 할수록 기녀는 청우를 뱀처럼 휘감아 당겼다.
"아, 아니."
이것 봐라.
청우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무는 보았다. 난감하다는 듯 거부하는 한편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작은 눈을 슬슬 음흉하게 빛내기 시작하는 청우를.
이 새끼, 즐기고 있구만.
진무가 가늘게 뜬 눈으로 청우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사, 사숙, 그게 아니라."
아니긴, 이 새끼야. 네 완력을 내가 모르냐?
"진무 도장께서는 수양이 무척이나 깊으신 모양입니다."
청우나 청상과는 달리 당황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진무의 얼굴에 금적산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산중의 도인이 여인의 분 냄새를 쫓아서야 되겠습니까?"
언뜻 선기마저 느껴지는 진무의 모습에 청우와 마찬가지로 달려드는 여인들을 떼어 놓던 청상의 눈동자에 존경심이 어렸다.
'사숙께선 정녕 대단하시구나. 말투와 행동은 거침이 없으신데 이런 상황에서는 또 저리 초연하시다니. 역시 저분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것은 잘한 것이다.'
청상의 생각과는 달리 진무는 그저 익숙할 따름이었다.
사파의 지존으로 경국지색이라 해도 좋을 미녀들 틈에서 살아온 그에게 이 정도의 분 냄새가 뭐 그리 대수일까?
한때는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살았던 그였고.
대낮에 버젓이 나체로 돌아다니는 사패천 예하 환희궁의 여걸들과도 시간을 보냈던 진무였다.
"청상아."
"예, 사숙."
"팔 빼라."
"...."
청상 역시 청우와 다르지 않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에 찢어질 듯이 솟구친 입꼬리.
이 새끼도... 즐기고 있네.
"...예에."
청상이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기녀들을 천천히(?) 떼어 놓았다.
"청우야! 이 녀석, 도사가 어찌!"
그 와중에 청우에게 핀잔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니가 더해, 이 자식아.
"하핫, 이런, 이런. 길을 잘못 잡은 모양입니다. 저희에게는 하도 익숙한 지름길이라."
금적산이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럴 리가.
일부러 홍등가를 관통하는 길을 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금적산의 좌우를 따르는 호위들만 해도 다섯이었다.
만약 정말로 배려할 생각이었다면 길은 둘째 치고 기녀들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막게 했을 것이다.
혼을 빼놓으려는 게지.
그리고 혹여 약점이라도 하나 잡으면 다루기 편할 테니까.
진무 일행은 금적산을 따라 홍등가의 중심을 지나 강과 맞닿아 있는 한적한 주루에 도착했다.
무월, 달이 없는 곳.
좋은 데도 많은데 어째서?
의심이라는 것은 한번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법이다.
비록 티는 내지 않았으나 진무는 금적산의 손가락을 움직이는 작은 행동조차도 놓치지 않았다.
"단강구에 도장들께서 드실 만한 곡주를 취급하는 곳이 이곳뿐인지라 먼 길을 모셨습니다."
그래, 그래. 왜 아니겠냐.
뭔가를 꾸민다고 해도 너무 눈에 보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사들이 먹을 만한 곡주야 더 말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고.
일단 주루의 위치부터가 그 이름처럼 안에서 누가 하나 죽어도 모를 만큼 외진 곳인 것이다.
수작질의 수준에도 엄연히 고저가 존재하는 법이거늘.
만약 금적산이 무언가를 꾸몄다면 누구나 눈치를 챌 만큼 저급하고 싼 티가 물씬 나는 장소였다.
물론 청상과 청우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상단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자, 들어가시지요."
주루 입구의 주렴을 걷어 내자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고, 나이가 들어 귀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늙은 주인이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청양상단에서 왔네. 내 미리 별실을 예약해 두었네만."
"아, 상단주님이십니까?"
귀를 기울인 노인의 물음에 금적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노인이 허리를 굽히며 방향을 안내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면 좋지 않을 듯하여...."
금적산이 웃으며 자신의 행동을 쓸데없을 만큼 일일이 설명했다.
주루 안에는 파리가 날아다닐 만큼 한산했다. 딱히 사람들 눈에 띌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방 안으로 안내한다는 것은 은밀히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거나.
뭔가를 꾸미는 것이 확실하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상단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진무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하고 금적산을 따라 별실이 있다는 주루의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에는 손님을 안내하기 위한 왜소한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뫼시겠습니다."
공손히 인사하는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는 진무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어쭈? 이것 봐라?'
배꼽 언저리에 공손히 모인 사내의 손. 주루에서 손님 시중이나 들 만한 손이 아니다.
긴 소매로 감추고 있었지만 언뜻 드러난 손마디 관절의 돌출된 부분에 자리 잡은 선명한 굳은살.
싸움 좀 해 본 놈이라 이건데.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직 무얼 꾸미는지 모르니 굳이 의심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진무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열린 문을 통해 별실로 들어섰다.
"우와!"
청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목소리를 냈다.
별실 안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한 술상이 미리 차려져 있었다.
술을 따르기 위한 기녀가 넷.
그리고 흥취를 돋울 목적으로 부른 피리와 비파를 든 악공이 둘.
진무 일행이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은은하게 연주를 시작한다.
"자, 앉으시지요."
"예."
상석에 금적산이 앉고 그 주위로 진무와 청상, 청우가 각기 자리를 잡고 앉자 기녀들이 다가와 술잔을 채웠다.
'아, 정말 수준 못 맞춰 주겠네.'
안 보고 싶어도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방금 기녀가 따른 두 종류의 술.
금적산의 잔에 채워진 술과 진무 일행의 잔에 채워진 술의 빛깔이 미묘하게 다르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막 식사가 시작되려는 순간, 청양상단의 총관 이치성이 어딜 봐도 기다렸다는 듯이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참, 시기적절하다.
예상했던 순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금적산의 의도 또한 얼추 확실해져 가고 있었다.
"상주님."
"어허, 이 총관. 손님을 모신 자리에 어찌 호들갑인가?"
"죄송합니다. 급한 일인지라."
"이 사람, 뭐가 그리."
"지현(知縣) 대인께서 단주님을 찾으신다 합니다."
"뭐라? 지현 대인이?"
지현은 단강구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관리의 직함이었다.
"예. 지난번에 관에 납품한 물목에 무슨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뭐라? 이런!"
금적산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진무를 바라보았다.
"이거 죄송해서...."
"괜찮습니다. 급한 일이신 것 같은데."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금방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럼."
금적산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보니 급히 주루를 빠져나간 것 같았다.
대충 노림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극단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손님을 두고 자리를 빠져나간 금적산.
비워지다시피 한 외곽의 객점.
그 안에 자신들을 맞이하던 싸움 좀 하는 사내.
이야.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24화
대충 장단이나 맞춰 주고 돈만 빼먹어서 망하게 하려 했더니?
진무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날카롭게 방 안을 살폈다.
정방형의 공간.
밖으로 나가는 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잔에는 무언가를 탄 듯한 술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슬쩍 만져 본 기녀의 다리는 과할 정도로 탄탄하다.
그리고 문제의 악공 둘.
비파의 현을 튕기는 손가락.
손의 안쪽에 박힌 굳은살의 모양으로 봤을 때 꽤나 오랫동안 현을 다루어 온 악공이거나 암기에 능숙한 자였고.
피리를 잡은 사내의 손끝에는 옅은 멍 자국이 보인다.
피리의 구멍을 막느라 생긴 것일 수도 있겠으나 대개는 싸구려 독을 취급하는 자들에게 주로 생기는 흔적이다.
진무의 추측이 맞다면 금적산은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설마 진혜가 대제자가 되는 데 자신이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건가?
그럼 진혜가 뒤에서 사주한 건가?
"도사님, 한잔 쭉 드세요."
진무가 생각에 빠진 사이 옆에 앉은 기녀가 콧소리를 내며 젓가락으로 먹음직한 안주를 집어 들었다.
"재미있네, 아주."
"예?"
"뭐 어찌 됐건 금적산을 잡아서 족쳐 보면 되겠지."
"...."
기녀를 보는 진무의 입술이 벌어져 새하얀 송곳니가 빛을 내며 드러났다.
"무당의 도사에게 술을 마시라고? 생각 없으니 너나 먹어라."
"예? 소녀가 어찌...."
기녀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테지. 아암, 그래야지.
진무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먹어 봐."
낮고 스산하게 깔리는 진무의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낀 청상의 표정이 굳었다.
눈치 빠른 녀석 하나.
"와!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입 안에 고기를 가득 처물고 감탄이나 내뱉는 눈치 없는 돼지 한 마리.
그리고.
"처먹어 보라니까? 네년 아가리에 직접 처넣어 줄까? 술에 뭔 짓을 해 놓았는지 확인도 할 겸?"
진무의 말에 사색이 되어 가는 기녀와 매섭게 눈빛이 변하는 악공들.
"청상!"
파악!
뻗어진 청상의 손을 피해 그 옆에 앉았던 기녀가 재빨리 물러나며 벽을 타고 도망쳤고.
퍼억!
"크윽!"
옆에 앉은 기녀에게 얼굴을 맞고 뒤로 벌렁 자빠진 청우.
완전 짐 덩어리가 따로 없다.
진무는 도망치려는 기녀를 잡아챘다.
비파를 들고 있던 악공이 어느새 품에서 꺼낸 대침을 열 손가락 가득 끼워 들고 있었다.
"죽어라!"
슈슉!
허공으로 뿌려지는 비침.
동시에 진무는 손에 잡은 기녀를 던졌고, 청상은 넘어진 청우의 옷깃을 쥔 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퍼퍼퍽!
"케엑!"
허공에서 방패막이가 되어 버린 기녀는 온몸에 비침이 박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 이런 잔인한 놈!"
설마하니 도사가 여인을 방패로 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인지 비파의 악공이 눈을 부릅떴다.
"잔인 같은 소리 하네. 죽이려고 한 주제에."
진무가 그를 비웃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남은 것은 악공 둘, 기녀 셋.
그리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놈 하나.
"쯧쯧, 그나저나 준비한 게 겨우 이거냐?"
"...."
몸에 비침이 박혀 고슴도치처럼 변해 버린 기녀를 밟고 선 진무의 말에 피리를 들고 있던 악공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변했다.
"네놈, 어찌 알았느냐?"
"어찌 알기는. 하도 어설퍼서 하나하나 읊어 주기도 귀찮아."
"...."
"보아하니 금적산이 우리를 이쪽으로 유인해 죽이려 한 것 같은데. 암습치고는 너무 허술한 거 아니냐, 니들?"
"네놈...."
"하나만 묻자. 혹시 이팔룡이라는 놈도 금적산이 사주한 거냐?"
"우리는 고객의 정보를 팔지 않는다."
"고객? 까고 있네. 다 들켜서 암습도 실패한 주제에."
진무의 이죽거림에 피리를 든 악공은 눈을 매섭게 빛내며 품에서 약병을 꺼냈고.
비파의 악공은 다시금 비침을 잡았다.
"니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진무가 상 위에 서서 악공들을 깔아 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그거 쓰면... 죽는다."
"흥! 네놈이나 죽거라!"
약병이 뿌려지고 비침이 악공의 손을 떠나려는 순간.
콰득! 퍼억!
단 일 보에 거리를 좁혀 버린 진무의 발이 비파를 들었던 악공의 복부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손은 약병을 든 악공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여간에, 하지 말라면 꼭 하더라."
우두둑!
"끄악!"
손목이 꺾어져 버린 악공이 신음을 내지르는 순간 진무가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죽는다고 했지?"
"...!"
약병을 진무의 손에 빼앗겼다.
그리고.
뻐억!
진무가 그의 입 안에 약병을 집어넣고 주먹으로 후려쳤다.
"크아악!"
입 안에서 약병이 깨어지고 독이 목으로 넘어가 버린 악공은 제 목을 잡고 고통스럽게 주저앉았다. 진무로 인해 독을 통째로 마셔 버린 꼴이었다.
"이, 이런 악독한 놈!"
중독되어 시커멓게 변해 죽어 가는 동료의 모습에 비파의 악공과 기녀들이 독기를 잔뜩 머금은 눈으로 진무를 공격했다.
"감히!"
물러나 있던 청상의 검이 빠르게 뽑혀 나왔고.
무당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채로 휘둘러졌다.
유운검법.
부드러운 변화와 더불어 활(活)의 묘리를 품고 있었던 그것은 청상의 손에서 간결하고 단호하게 변해 펼쳐졌다.
진무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계도에 대해 깨달은 청상의 손에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아악!"
횡으로 그어짐에 기녀의 목 하나와 핏물이 솟구치고.
사선으로 당겨짐에 비침을 든 악공의 몸이 대각선으로 잘렸다.
그리고 이어진 검격이 다른 기녀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
쩌어엉!
문밖에서 소란을 듣고 뛰어든 왜소한 사내의 주먹이 검면을 때렸다.
청상을 물러나게 하고 방 안의 상황을 파악한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저런, 조금만 빨리 들어왔으면 하나 정도는 더 살렸을 텐데."
무척이나 안타까운 어조로 내뱉는 진무의 말에 사내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네놈들...."
왜소하기만 했던 사내의 몸에서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매서운 살기가 뿜어져 근처의 벽과 바닥에 상처를 만들었다.
"호오? 제법인데."
"감히...."
분노를 참지 못한 그가 주먹을 움켜쥐어 들자 목숨이 구해진 기녀 둘이 돕기 위해 나란히 옆으로 섰다.
"근데 말이야. 이미 독인지 약인지 탄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부터 암습은 실패한 거 아냐?"
"닥쳐라! 네놈들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기녀들이 쌍심지를 돋우며 소리를 질렀다.
"흐음."
진무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소한 사내의 실력은 제법 강해 보였지만, 자신과 비교하면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만약 술을 마신 후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멀쩡한 지금의 진무에게는 어림없는 실력이었다.
즉, 직접 싸우기에는 매우 격이 떨어진다.
"청우야."
"예?"
진무의 부름에 청우가 급히 대답했다.
"맨손이라네."
"...."
"싸워."
"제, 제가요?"
이런 믿음이 부족한 녀석.
"응, 니가 이겨."
니가 이겨, 이겨, 이겨....
주문 같은 진무의 속삭임이 청우의 귓가에 맴돌고 순식간에 전투 의지를 고양시켰다.
청우가 잔뜩 기세가 오른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청상. 저기 기녀 둘을 맡아."
"예, 사숙!"
진무가 슬쩍 발을 물리자 왜소한 사내가 천둥 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몸을 날려 왔다.
후웅!
강맹한 기운을 머금은 주먹이 허공에서 비틀리며 강렬한 바람을 만들어 대며 진무를 덮쳤다.
"하압!"
물러나는 진무의 몸을 피하기 위해 벽을 밟고 도약한 청우의 두툼한 주먹이 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쩡!
두 개의 주먹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청자 배의 막내 청우.
비록 고기에 환장하고 눈치도 없는 데다 멍청하기까지 하지만.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칠성권은 오랫동안 대를 이어 전수되어 온 무당 권공 중 하나.
또한 진무에 의해 투로와 보법이 청우의 체형에 맞게 변해 그 예리함과 파괴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어 있었다.
쩡! 쩌정! 쩡!
역시 자신감만 있으면 어디 가서도 밀리지 않는 청우의 권격이었다.
왜소한 사내 또한 청우의 권격을 모조리 때려 내며 방어할 정도로 뛰어난 권사였다.
'크윽!'
하지만 부딪힐 때마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한결같이 주먹을 단련해 왔지만, 살이 도톰하게 오른 청우의 푹신한 주먹에는 내기가 잔뜩 둘러져 있었다.
물론 외공과 내공에 우열을 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청우는 무당의 이대제자였고, 사내는 뒷골목 무뢰배였다.
애초에 상대가 될 리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청우의 주먹은 빨랐다. 뚱뚱한 체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젠장, 이 정도로 밀릴 줄이야.'
사내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청우에 대한 공략법을 생각하는데.
"아악!"
옆에서 기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련아!"
사내의 눈에 비친 화련이라는 기녀의 가슴에는 청상의 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끄르륵...."
화련에 이어 나머지 하나의 기녀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뻐억!
한눈을 판 사이에 측면으로 파고든 청우의 주먹이 왜소한 사내의 옆구리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끄으윽!"
숨이 막혀 오는 느낌과 함께 몸이 허공에 붕 떴고.
쩡!
거칠게 내려 밟는 진각과 함께 청우의 일권이 곧게 뻗어졌다.
칠성권의 창룡출두(蒼龍出頭).
비록 그 경지가 낮아 발경을 뿜어내지는 못했으나 왜소한 사내를 별실의 벽과 함께 튕겨 내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우웩!"
가슴팍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문밖으로 튕겨진 왜소한 사내가 검은 핏물을 왈칵 토해 내었다.
저벅, 저벅.
청우가 마무리를 하기 위함인 듯 부서진 문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청우!"
섬뜩함을 느낀 진무의 외침에 걸음을 멈췄고.
슈아악!
날카로운 예기가 아슬아슬하게 청우의 발끝으로 지나갔다.
파가각!
발의 한 치 앞.
마룻바닥이 거칠게 파헤쳐졌다.
그리고.
"홀홀, 이런 아까울 데가 있나. 그것을 알아채다니."
복도의 끝에서 들려오는 이빨 빠진 노인의 웃음소리.
자칫 한 치만 더 나아갔어도 검기에 청우의 뚱뚱한 몸이 반토막이 날 뻔했다.
처음 주루에 들어왔을 때 일행을 맞이했던 노인이었다.
그저 변두리에서 주루나 운영하는 별 볼 일 없는 노인인 줄 알았는데.
"청우, 물러서라."
문밖으로 나오며 청우의 앞을 가로막고 노인을 바라보는 진무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사숙, 제가 맡겠습니다."
청상이 나서려는 것을 진무가 고개를 저으며 막았다.
'누구지?'
강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다.
고작 단강구의 약소 상단주인 금적산의 청부를 받을 만큼 수준 낮은 인물이 아니었다.
청우를 노린 기운.
적어도 자신의 기운을 쏘아 내는 탄기(彈氣)가 가능한 수준의 고수였다.
무릇 검기를 쓰는 이의 경지는 셋으로 나누어진다.
처음이 현기(顯氣), 특정 매개체를 이용해 기운을 외부로 드러내는 경지다.
대부분의 검기를 사용하는 고수들이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을 깬 자들이 도달하는 탄기의 경지. 드러낸 기운을 마음먹은 곳으로 쏘아 낼 수 있는 수준으로, 지금의 진무가 이룩한 경지였다.
현기의 고수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 숙련도와 응용력이 더해지면 두 배 이상은 족히 차이 나리라.
탄기에 도달한 자들은 대부분이 대문파의 장로급이거나 그 바로 아래의 지위를 가진다.
그만큼 뛰어난 고수라는 뜻이다.
이전의 진무는 훨씬 높은 경지에 도달했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아직 의기(意氣)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거 눈치도 못 챘네. 대단해."
이죽거림은 여전했으나 진무는 조금도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아니, 풀 수가 없었다.
노인은 그저 뒷짐을 지고 있을 뿐인데 피부가 따끔거려 올 정도로 강렬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라면 필시 의기 이상을 깨우친 자가 분명했다.
재수 없을 경우 '강'의 경지를 깨우쳤을지도.
25화
그런데 누굴까?
저만한 고수라면 모를 리가 없는데.
일월마교, 사패천, 정무맹.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름난 고수 중에서 노인 같은 자는 없었다.
"제법이구나, 아이야. 아마도 네 또래에서는 중원 최고가 아닐까 싶구나. 무당에 너만 한 제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노인이 이가 없어 움푹 패인 볼을 움직이며 웃었다.
"늙어서 귀가 처막혔나 보지."
"홀홀, 고놈 참. 입심 한번 대단하구나."
"닥치고. 한패냐?"
"한패? 흠, 글쎄다. 지금은 이 아이들을 이용하고 있으니 한패라고 해도 될 듯하다만."
젠장! 금적산 이 개새끼. 돈을 얼마나 쓴 거야?
하필이면 이 정도의 고수라니.
그 정도 실력이면 어디 처박혀서 몸 편하게 장로 놀음이나 할 것이지 어디서 청부질이야, 청부질이. 다 늙은 합죽이 노인네 주제에.
짜증이 확 치밀었다.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의 실력으로는 꼼수를 부린다 해도 필패(必敗)였다.
청상, 청우와 함께 합공을 한다 해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노인네가 있는 줄 알았다면 절대로 여유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 정도 되는 자가 고작 나를 죽이는 청부를 받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응? 한패라 했지 청부를 받았다 한 적은 없다만."
"뭐?"
이놈의 노인네가 지금 누굴 놀리나?
진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노인이 무언가를 느낀 듯이.
"홀홀, 사이한 기운을 가진 놈들에 제갈가의 놈들까지? 이런, 이런. 무당의 어린 도사가 뭔 죄를 지었길래 벌써부터 이리 노리는 놈들이 많누?"
"뭐라고?"
사악한 놈? 제갈세가?
이 노인네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어찌 되었든 나는 저놈만 필요하다. 어떠냐? 무당의 아이야."
"...."
노인은 청우의 손에 쓰러져 기절해 버린 왜소한 사내를 가리켰다.
"반드시 살려 데려가야 하니 방해하지 않는다면 나도 너희를 못 본 걸로 해 주마."
"못 본 걸로 해 준다고?"
진무가 되물었지만 노인은 합죽이처럼 볼을 움푹 집어넣은 채 웃기만 했다.
하지만 다행이다.
눈앞의 무시무시한 노인과 굳이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 아닌가.
"좋아."
손해가 분명한 장사에 투자를 하는 미친 상인은 없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놈을 내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런 사소한(?) 고집으로 목숨을 내어놓는 우를 범하느니 그냥 고개 한 번 숙이고 무릎 한 번 꿇는 것이 낫다.
적어도 진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되었구나. 홀홀."
노인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다가왔고, 진무는 조심스럽게 비켜났다.
쓰러져 있는 사내의 맥을 짚어 본 노인은 마치 마른 솜을 들듯 어깨에 들쳐 메었다.
그러곤.
천천히 진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순간적으로 노인의 눈동자에 스치는 섬뜩함.
이런 X 같은 노인네가!
파앙!
미처 방비할 새도 없이 노인의 손이 빠르게 뻗어져 나왔고.
"피해!"
진무가 재빨리 외침과 동시에 뒤로 물러나 어지럽게 손을 휘저었다.
휘리리링!
단숨에 차고 오른 내공이 바람을 일으키며 손바닥으로 뿜어져 나왔다.
파아악!
부딪힘과 동시에 진무의 일장이 노인의 장력을 비틀어 버렸다.
콰아앙!
길게 이어진 복도의 벽이 거센 폭발음과 함께 부서져 내렸다.
"호오?"
노인의 눈동자에 묘한 표정이 어렸다.
장력이 부딪히는 순간 진무의 적절한 대처가 꽤나 놀라웠다.
노인이 거래를 제안한 것은 자신의 어깨에 둘러멘 왜소한 사내, 고월을 반드시 살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목적을 이룬 즉시 진무를 죽이기 위해 장력을 뿜어낸 것이다.
그런데 부딪히는 순간.
"무당의 회풍장(廻風掌)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회풍장은 그 기세가 회오리치는 바람처럼 뿜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진무는 장력의 힘이 아닌, 그 여파로 일어난 바람을 이용했다.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달은 진무는 회풍장에서 일어난 바람을 응축시켜 공기의 층을 만든 뒤 노인이 뿜어낸 장력을 빗겨 흘렸다.
말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로 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무공에 대한 이해가 극에 달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시도한다 해도 시기를 맞추기 힘든 방법이었다.
엄청난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허, 어린것의 초식 운용이 수십 년을 산 노괴보다 뛰어나구나."
노인이 진무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단 말인가?
"당신 뭐야?"
진무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노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글쎄. 죽어야 할 놈에게 가르쳐 줄 이름은 아니니라."
노인의 표정이 음산하게 변했다.
그 순간 싸늘한 살기가 매서운 바람처럼 휙 하고 몰아쳐 왔다.
진무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검을 뽑아 좌우로 휘둘렀다.
땅! 까강!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휘둘러진 검에서 강한 마찰음이 일었다.
"호오? 그것도 느꼈느냐? 이거 점점,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확신이 들게 하는구나."
"...."
청상과 청우를 노렸다.
무형의 경기.
노인은 기운의 모습을 자신의 마음대로 감출 수 있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손에서 피어오르는 선명한 핏빛 기운.
씨발.
언제나 불안감은 현실이 된다.
노인의 경지는 의기 정도가 아니라 '강'의 경지였다.
[청상! 청우! 도망쳐! 무조건! 명령이다!]
"...!"
진무는 외침과 동시에 노인을 향해 뛰어들었다.
"사, 사숙!"
청상의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상대는 강기의 고수.
노인이 제 실력을 보이는 순간 모조리 죽는다.
고작 탄기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 진무의 경지로는 절대로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경고를 했으니 도망치는 것은 청상과 청우의 몫이었다.
진무는 아주 작은 시간만 벌어 줄 생각이었다.
둘의 보호자로서.
취리릭!
벽면을 밟고 노인을 향해 쇄도한 진무의 검이 화려한 변화를 만들자 주루의 내부가 수많은 검기로 채워졌다.
진무가 좋아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검은 언제나 실전적이어야 했다.
불필요한 움직임에 들어가는 힘을 생략하고 오로지 적을 상하게 할 수 있는 힘에 집중한다.
짧고 간결하게.
하지만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진무의 목적은 시간 벌기.
최대한 많은 허초와 변초를 사용해 화려함을 만들고 그것으로 시선을 빼앗아 시간을 번다.
그리고 그가 현혹되는 틈을 타 은밀한 공격을 준비한다.
'제발 먹혀라!'
사방을 가득 채우며 펼쳐진 검기가 한 점에 몰렸다.
"흥!"
막 검기가 노인의 전신을 난자할 듯 쏟아지는 순간.
쿵!
가볍게 밟은 일 보.
휘릭!
그리고 작은 원을 그리는 손짓.
무릇 절대의 경지에 도달한 자들에게 검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검은 그저 손의 연장.
강기는 어디로든 뿜어낼 수 있었다.
노인의 손가락이 펼쳐지자 핏빛 강기가 거미줄처럼 그의 전방으로 펼쳐졌다.
까아아앙!
진무가 뿜어낸 푸른 검기가 아스라지고.
찌잉!
곧게 뻗어진 검극이 허공에 멈춰 매미 날개처럼 떨려 댔다.
막힌 것이다.
검기로 시선을 뺏고 그 중심을 향해 찔러 넣은 검이 노인의 손바닥에 닿지도 못한 채.
"놈, 제법 머리를 썼...."
모든 공격을 무로 돌려 버린 노인이 진무의 표정에 의아해했다.
진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웃음이다.
어째서?
하지만 그의 의아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섬뜩함이 느껴졌다.
노인은 재빨리 고개를 세차게 꺾었다.
핏!
"...!"
한 줄기 실낱같은 기운이 그의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주룩.
피가 흘러나왔다.
"이, 이놈이...."
흘러내리는 핏물과 함께 쓰라림이 느껴지자 노인의 얼굴이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로 검붉게 물들었다.
화려한 변화에 감춘 비수가 변화의 중심을 노린 검격 하나인 줄 알았더니.
그것마저 세 번째 공격을 감추기 위한 허초였다.
진무는 검격을 뻗기 전 느릿하게 실낱같은 기운을 날렸다.
시간 차를 둔 공격.
팡!
어느새 뒤로 물러난 진무가 노인을 향해 이죽거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머리 좀 써 봤다. 망할 노인네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너무 아쉬웠다.
만약 고개를 꺾지 않았다면 눈알 정도는 꿰뚫어 버렸을 텐데.
"네놈...."
가늘어진 노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노인에게 있어 진무는 개미에 지나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로 짓눌러 터트릴 정도로 하찮은 벌레.
하지만 가끔 개중에 용맹한 녀석이 제 분수도 모르고 사람의 피부를 무는 경우가 있었다.
노인은 지금 그런 꼴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독 기운을 잔뜩 머금은 개미, 진무에게.
그리고 진무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그의 곁에 있었던 청상과 청우라는 놈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린놈이 감히 나를 상대로."
"지랄하네. 감히는 무슨. 누군지도 밝히지 않은 주제에."
진무는 검을 사선으로 비틀어 들며 노인에게 대꾸했다.
무공으로 따지면 하수였지만 절대로 말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하나 이겨야 했기에.
하지만 속이 타들어 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싸늘하게 깔려 사방을 짓누르기 시작하는 노인의 기운. 그 엄청난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젠장, 괜히 건드렸다.
그냥 벌도 아니고 말벌집을 건드린 것이다.
"오냐! 네놈이 명줄을 재촉하는구나!"
팍!
미세한 소음.
어?
찰나의 순간에 공간을 뛰어넘어 버린 것처럼 노인의 손이 진무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 이건 또 뭐야?!'
장력이다.
당겨서 모으고 밀어야 하는 준비 동작 자체가 없는 일장.
내뻗어진 손에서 곧바로 느껴지는 막대한 기운에 진무가 다급하게 바닥을 찼다.
하지만 물러나는 속도보다 터지는 장력의 속도가 더 빨랐다.
'제기랄!'
진무는 재빨리 발을 차올려 노인의 손목을 노리며 양팔을 교차했다.
쩌어엉!
엄청난 충격과 함께 진무의 몸이 건물 벽을 뚫고 튕겨 나갔다.
"...."
하지만 노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비틀었다.
그 짧은 순간에.
노인의 장력이 교차한 팔의 중심을 때리는 순간 진무가 몸을 팽이처럼 비틀어 충격을 흘렸다.
아직 어리다.
그러나 그 나이와 무공의 경지를 보았을 때, 지닌 잠재력이 상상도 못 할 지경이었다.
더욱이 무공을 운용하는 것이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노인은 부서진 건물 벽을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확실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밖으로 몸을 내밀지 못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기감에 느껴지는 것만도 수십 명 이상.
그의 실력이라면 당장에라도 그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임무는 고월을 데려가는 것이었다.
또한 함부로 몸을 드러낼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떨어지는 진무를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쐐애액!
강맹한 지풍이 진무를 향해 날아갔다.
따아아앙!
노인의 미간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망할 애송이가 그 와중에도 허공에서 몸을 틀어 검으로 막아 내었다.
막은 충격에 땅바닥에 처박혔고, 피까지 토했으나 죽지는 않았다.
무려 두 번.
그만한 실력이 되지 못함이 확실한데 장력에 이어 지풍까지 막아 내다니.
"실로 굉장한 놈이로다. 안타깝구나. 직접 죽여야 후환이 없겠으나 거지 놈에게 흔적을 남길 수도 있는 일이니."
싸늘하게 웃은 노인이 발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기운을 뿜으며 바닥을 힘껏 찍어 밟았다.
콰아아앙!
26화
'젠장!'
격중당하는 순간 몸을 비틀어 충격을 줄였음에도 장력에 당한 고통이 상당했다.
팔뼈가 아스라지는 것만 같았다.
쐐애액!
그런데 뒤를 이어 대기를 꿰뚫는 엄청난 파공음.
망할. 이렇게 집요할 줄이야.
진무는 비룡번신(飛龍飜身)의 수법으로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뒤쪽을 향해 검을 횡으로 그었다.
따아아앙!
강렬한 충격과 함께 검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진무는 떨어지는 속도를 더해 땅바닥에 처박혔다.
퍼억! 데구르르.
"쿨럭, 우웩!"
혹시나 공격이 더 있을지 몰라 바닥을 굴러 피한 진무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한 사발에 가까운 검은 피를 토해 내었다.
"크으...."
두 손을 땅에 짚고 있음에도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듯 어지러웠다.
빌어먹을 노인네.
당장이라도 돌아가 노인의 면상 가득 잡힌 주름을 모조리 펴 버리고 싶었지만.
'젠장, 고작 장력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지. 하지만 다시 만나면... 반드시!'
진무가 이를 박박 갈며 다짐을 하는데, 다행히 상처 없이 도망쳤던 청상과 청우가 급히 다가왔다.
"사숙! 괜찮으십니까?"
"크으... 괜찮으니까 튀어. 그 노인네 또 무슨 짓을...."
진무가 둘을 채근하는 순간.
우지끈! 콰드득! 콰쾅!
주루가 통째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
노인은?
콰드드드.
거센 먼지와 함께 건물 전체가 폭삭 내려앉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먼지 자욱한 건물의 잔해를 살폈지만,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깔려 죽...었을 리가 없지. 그 괴물 같은 노인네가.
분명 도망쳤을 것이다.
건물을 무너뜨린 것도 노인이 한 짓이 틀림없을 터였다.
근데 왜 사라졌지?
부딪쳐 본 노인의 힘이라면 곧장 나와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을 정도였는데.
"휴우...."
어쨌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진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거지 같은 노인네.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서둘러 피해서 몸부터 회복한 다음에.
"금적산. 이 개자식이 감히 나를 죽이려고."
모든 습격의 원흉은 금적산이었다.
하는 짓이 귀엽고 어설퍼서 지켜봤다가 골로 갈 뻔했다.
"청우, 청상!"
진무가 자신의 옆에 있는 둘에게 부축을 부탁하려고 부르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주먹을 움켜쥐고 자세를 잡는 청우, 검을 꺼내 주위를 노려보고 있는 청상.
어째...서?
"하! 이것들 보게. 살아 있잖아?"
멀리서 들려오는 걸쭉한 목소리와 함께 흐릿해졌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무인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장비 수염을 하고 팔짱을 낀 거한.
뭐야, 이건 또?
"멍청한 단강칠괴(丹江七怪) 녀석들. 고작 무당의 어린 도사 셋을 못 잡다니. 보아하니 모두 당해서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었나?"
거한이 건물의 잔해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넌 또 누구냐고!
"여하튼 다행이군. 팔룡이가 실패해서 청부금을 돌려줘야 하나 했는데. 이걸로 우가장에 추가금을 좀 더 뜯어도 되겠어."
그런 중요한 정보를 막 늘어놔도 되는 거냐?
어쨌든 팔룡이는 익숙한데, 우가장? 거긴 또 어디냐?
혼잣말을 너무도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거한의 모습에 진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염병, 돌겠네.
산 넘어 산이라더니. 하필이면 몸 상태가 이런데 수십 명이나 되다니.
금적산 이 개잡놈의 자식. 살아 나가기만 하면 아주 찢어 죽일 테다.
하지만 복수는 복수고 일단은,
"네놈은 뭐냐?"
진무가 천천히 일어나 거한을 향해 물었다.
"뭐? 네놈? 이런 싸가지 없는 도사 새끼를 봤나.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 어른한테."
"닥치고. 내가 지금 기분이 몹시 엿 같거든? 그니까 너 누구냐고, 미친 놈아."
"허!"
도사인 진무의 걸쭉한 욕설에 거한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살면서 도사에게, 그것도 약관도 안 된 도사에게 욕을 들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도사 놈이 실성을 했나? 이 단강에서 나 공사척에게 그따위 욕을 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공사척?
다행히 들어 본 적은 없는 놈이다. 그런데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은 아니었다.
적어도 현기 이상.
그 정도라면 웬만한 가문의 잘나가는 후기지수요. 대문파의 일대제자 중에서도 수위에 들어가는 수준이다.
단강구에 뭔 꿀이라도 발라 놓은 건가, 무뢰배 두목 따위가 뭐 이리 강해?
원래의 몸 상태라면 뼈와 살을 친절하게 발라 버릴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위험했다.
하지만 자고로 승부라는 건 실력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지.
일단은 허세.
"야!"
"야아?"
"공사척이고 공사판이고 관심 없으니까 꺼져라. 그럼 봐줄게. 좋은 기회잖냐? 안 그래?"
진무의 말에 거한, 공사척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허 참, 거 웃긴 도사 새낄세. 너 내 이름 모르냐?"
"내가 염병, 너 같은 떨거지 놈 이름을 알겠냐?"
당연히 모르지.
아무리 상대가 현기급의 고수라 해도, 그리고 사패천의 주인이었던 진무라고 해도 전국구도 아닌 지역구 뒷골목 무뢰배 두목 따위를 알 리가 있나.
그래도 신중해야 했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공사척을 이기지 못한다.
단 한 번의 기회.
최대한 놈을 도발해 틈을 만들어야 했다.
"야, 나 공사척이야. 공사척."
"하아, 힘 빠지네, 진짜. 야, 됐다. 그냥 덤벼. 내상 좀 입었기로서니 너 따위 뒷골목 불량배한테 질까?"
"뭐? 하하핫! 이런 정신머리 없는 새끼를 봤나."
공사척이 팔짱을 풀고 수하들을 돌아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 순간의 틈을 진무는 놓치지 않았다.
파학!
언제 움직인 것인지 진무가 빠르게 거리를 좁혀 와 공사척의 목 어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허헉!"
기습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공사척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검극이 공사척의 목덜미 앞으로 지나가면서 가벼운 자상을 만들고 피를 튀어 올렸다.
아, 짧았다.
목을 따 버렸어야 했는데.
놈을 죽이는 데 실패했으니 이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천금 같은 기회를 놓쳐 버린 진무는 공사척을 노려보며 아쉬운 듯이 호흡을 골랐다.
평소라면 죽이고도 남았다.
하지만 지금의 몸 상태로는 그것이 한계였다.
단 한 번의 움직임이었는데도 핏물이 올라올 것처럼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갑자기 기습을 해? 뭐 이런 황당한 도사 새끼가 있어?"
공사척이 제 목을 잡고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구기며 박도(朴刀)를 뽑았다.
그리곤, 눈을 치켜뜨며 곧장 진무를 향해 쏘아지듯 달려들었다.
깡! 까강!
박도와 검이 부딪치며 허공에 불꽃을 그려 내었다.
'크윽. 젠장, 뭔 놈의 힘이!'
예상했던 대로 공사척의 무공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몰아쳐 오는 그 힘이 엄청났다.
박도는 그 무게와 크기 때문에 양손으로 드는 경우가 많아 쌍수대(雙手帶)라 불린다.
그럼에도 공사척은 그걸 마치 부지깽이처럼 한 손으로 들고 휘둘렀다.
더욱이 그 속도란.
망할, 몸 상태만 멀쩡했어도....
비록 내공의 차이를 초식의 활용도로 메꾸고 있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부딪힐 때마다 목구멍으로 핏물이 솟구치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따당!
후려쳐진 박도에 쭉 하고 밀려 버린 진무가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진무의 뇌가 미친 듯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힘이 없을 때 가장 중요한 건 잔대가리를 얼마나 굴리냐였다.
하지만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무의 눈에 서서히 초조함이 어리기 시작할 때.
아!
그 순간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잠깐, 사악한 놈들이라 했던 건 공사척 패거리가 맞는 것 같은데.
제갈세가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 정도 능력을 가진 노인이 허언할 리 없었고, 할 이유도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죽이지 않고 물러난 것도 제갈세가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면 어디냐?
분명 어딘가에서 보고 있다는 뜻인데.
진무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찾아야만 했다.
아무리 중원의 무가가 이해관계에 치중된 곳이라 해도 뒷골목 무뢰배들과 손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놈, 실력은 제법이다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갑자기 공사척의 박도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리더니 반 장에 가까운 길이로 늘어났다.
도기(刀氣).
놈이 도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상 시간은 더욱 촉박해졌다.
젠장, 미리 청상에게 검기를 사용하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둘걸.
후회막급한 일이었지만, 그런 걸 따지고 있을 틈도 없었다.
공사척이 다가오는 사이 진무는 계속해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제갈세가의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 시선이 어느 한 곳을 스치는 순간, 진무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무당의 어린 도사 놈. 네놈들을 죽이고...."
땅!
순간 진무가 공사척의 박도를 흘리지 않고 때려 내며 뒤로 물러났다.
"후우, 놀고 있네, 병신."
"...."
위기에 몰리더니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방금까지 긴장감에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 있던 진무가 갑자기 너무도 여유로워졌다.
아예 검까지 집어넣는 모습.
"어이, 공사척이."
"어이 공사척이? 이 자식이 죽을...."
"닥쳐, 머저리 새끼야."
진무의 달라진 반응에 공사척이 점점 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이 진짜 실성을 했나?"
누가 봐도 그랬다.
그런데 진무가 히죽 웃었다.
허세가 실패했으니 남은 것은 주변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적이든 아군이든 닥치는 대로 이용하는 것뿐.
"안 느껴지냐? 아가리 여물고 주변 좀 봐."
"뭐?"
진무의 말에 공사척이 눈을 찡그리며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어?"
공사척의 눈에 보인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청삼을 입은 학사들이었다.
'뭐야? 제갈근? 그리고 저 모습은 청화...대? 이런 빌어먹을, 청화대가 여긴 웬일이야?'
공사척의 눈동자에 당황이 스치는 것을 진무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 이해했냐?"
"...."
"등신.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곳에 있을 만큼 멍청해 보였냐?"
진무의 말에 공사척의 얼굴이 와장창 일그러졌다.
단강구 최강의 세력이라고 불리는 제갈세가였다.
그들은 정무맹의 한 축이었다.
비록 근래 들어 쇠락해졌다고 하지만 무당 역시 정무맹 소속이었다.
아무리 호북성의 이권과 패권을 놓고 다툰다 해도 같은 정무맹 소속인 제갈세가가 무당파의 도사들이 사파에 당하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공사척은 그렇게 생각했다.
'젠장. 놈이 제갈세가에 도움을 요청했을 줄이야.'
시기적절하게 함께하고 있는 제갈세가의 모습에 공사척은 자연스럽게 오해를 했고,
잔머리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진무가 멀리 청화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하마터면 정말로 죽을 뻔했잖아. 아, 내상만 아니었어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제갈근을 향해 친근하게 외치는 진무로 인해 공사척은 더욱 갈등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딱 봐도 진무와 제갈가가 친해 보인다.
강행해야 하는가?
눈앞에 있는 것은 단강 제갈분가에서 최강으로 꼽히는 청화대의 무인들이었다.
숫자는 끌고 온 수하들과 엇비슷하지만,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제갈세가의 청화대라면 대부분이 충검의 경지를 넘었을 것이고, 일부는 현기 초입에 이른 실력이다.
공사척 하나만으로는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무당의 제자를 노렸다.
그것만으로도 무당에 평생 쫓겨 다닐 일이었다.
'망할, 어찌해야 하지?'
공사척이 고민하는 사이 진무가 음흉하게 웃으며 청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눈치 없는 청우에게 말해 봐야 긁어 부스럼일 뿐이었다.
[청상.]
[예, 사숙.]
[튀자.]
[예? 안 싸우고요?]
[싸우긴 뭘 싸워.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은 놈인데.]
제갈세가는 돕지 않을 것이다.
진무는 일전에 방천에서 만난 제갈세가의 인물들을 떠올렸다.
진무는 그들에게 굴욕감을 주었다. 꽁한 성격의 먹물들이 잊을 리가 없었다.
정황상 아마도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돕고자 했다면 공사척이 나타나는 순간 끼어들었겠지.
하지만 싸워 주진 않아도 도망치는 데 충분히 이용할 수는 있었다.
감시해 준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자 그럼, 뒤를 부탁할게."
진무는 물러났고, 공사척은 이를 갈며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27화
무월루 인근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보던 제갈근의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진무 일행이 청양상단주 금적산과 주루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저건 또 뭐야?"
뜬금없이 공사척이 나타났다.
공사척은 제갈세가에도 제법 알려진 고수였다.
뒷골목 무뢰배이기는 했어도 현기에 이르러 도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수였고, 흑사방과도 연이 닿아 있었다.
단강구 제갈분가에서도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나서서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사소한 일로 빚어질 수 있는 흑사방과의 마찰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진무 일행이 금적산과 불법적인 일을 자행한다면 그 앞을 막는 자가 누구일지라도 나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금적산이 진무 일행을 죽이려 한다? 왜?'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아비인 제갈무린이 중얼거렸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무당의 일대제자 진혜.
그리고 그의 가문 우가장.
우가장은 진혜를 대제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진무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사형제끼리 살인 청부라? 무당의 꼬라지가 아주 잘 돌아가는군.'
제갈근이 한껏 비웃던 그때,
갑자기 진무가 튕겨 나와 피를 토하더니, 건물이 통째로 무너졌다.
그리곤 공사척과 싸우는가 싶더니 갑자기 자신들을 향해 외치는 게 아닌가.
"왜 이렇게 늦었어? 하마터면 정말로 죽을 뻔했잖아. 아, 내상만 아니었어도."
뭐?
제갈근은 진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진무 일행이 물러났고, 공사척은 매서운 기세를 뿌리며 노려보기만 했다.
"자 그럼, 뒤를 부탁할게."
"...."
충분히 물러나 제갈근을 스쳐 지나며, 진무가 매우 친근하게 눈을 찡긋거렸다.
'이, 이놈이 설마?'
이용당했다. 자신들이 있음을 깨닫고, 도망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공사척을 자신에게 떠넘긴 채.
이런 개자식이!
"이공자. 어찌할까요?"
"...."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는 제갈근에게 청화대 무인이 물었다.
"망할."
그 사이 무월루에서 도망친 진무 일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헉, 헉.... 젠장, 진짜 엿 될 뻔했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바닥의 바닥까지 긁어서 짜낸 공력으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 와중에 어지럽기까지.
하지만 일단은 달려야만 했다.
"사숙, 한데 어째서 도심으로 오십니까? 차라리 인적이 드문 산으로."
청상의 물음에 진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멍청하긴.
등하불명(燈下不明)이랬다. 자고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놈들은 그들이 적의 소굴과 같은 단강구의 도심 안으로 도망쳤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무당으로 가는 길목이나 뒤지고 있겠지.
급한 대로 도심에 위치한 객점에 방을 구한 진무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공사척, 금적산. 이 개새끼들. 그리고 우가장?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후레자식들이 감히 내 목숨을 노려?"
어떻게 살아난 목숨인데.
우가장은 모르겠고,
직접적으로 자신을 위험에 빠트린 금적산이나 공격해 온 공사척은 절대 가만둘 수가 없었다.
"청우! 청상!"
"예, 사숙."
"요상단 가지고 있지?"
"예."
"전부 다 꺼내!"
"...."
요상단은 내상을 다스리는 환약의 일종이었다.
진무는 청상과 청우가 품에서 꺼낸 요상단 열 알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사, 사숙. 그걸 전부 다?"
청상이 당황스러워했지만, 열 알이고 백 알이고 상관없다.
최대한 빨리 회복을 해서 공사척을 친다.
잠? 휴식? 지금 그딴 거 하게 생겼어?
지금쯤이면 제갈세가가 물러나고 공사척이 자신들을 찾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진무는 사파 무인들의 생리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을 추격하는 것은 딱 하루.
그 안에 찾지 못하면 분명 도망칠 것이다.
범을 잡을 때는 반드시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상처 입은 짐승만큼 무서운 것이 없고, 더욱이 진무의 뒤에는 무당이라는 어미까지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루는 내상을 회복하기에는 무척이나 촉박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진무는 오랜 기억을 뒤져 한 가지 방법을 끄집어내었다.
광혈참혼기공(狂血斬魂炁功).
일시적으로 몸 안의 내기를 폭발시켜 사용하는 혈도술 중 하나였다.
본래 가진 내공을 사용하는 방법이니 정공이니 사공이니는 상관없다.
기혈을 폭주시키고 혼을 잘라 낸다고 할 만큼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런 만큼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지만 지금은,
"이 새끼들. 목 깨끗이 닦고 기다려라, 살아서는 세상 구경 못 하게 해 줄 테니."
분노가 더 컸다.
이미 삼킨 요상단 열 알이 엄청난 열기를 뿜으며 단전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 * *
"이런 멍청한!"
퍼억!
던져진 벼루가 제갈근의 머리에 맞고 산산이 부서졌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러나왔지만 제갈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라? 그놈들을 도와줘? 같이 죽여 버려도 모자랄 판에?"
밤이 깊은 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제갈무린의 노성이 제갈세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청화대의 무인 스물을 이끌고 진무 일행을 감시하던 제갈근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진무의 도주를 도와주고 말았다.
공사척과의 무의미한 대치는 한 식경 넘게 이어졌고, 서로가 경계하며 물러나고 난 뒤에는 진무 일행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망할 놈이....'
제갈근은 제갈무린의 불호령을 들으며 턱이 부서져라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버님,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놈들을 찾겠습니다."
"찾아? 무얼?"
"놈들을 찾아서 공사척이 죽일 수 있도록...."
순간 제갈무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자 제갈근은 자신이 단단히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을 보았나.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게냐! 뭐? 공사척이 죽일 수 있게? 네놈이 지금 고작 뒷골목 무뢰배를 도와서 무당의 제자를 죽이겠다는 말을 할 참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소자의 말은."
"닥쳐라!"
"...."
제갈근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버렸다.
급한 마음에 실언을 해 버리고 말았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구나."
"아버님, 그게 아니라."
"닥치라 했다."
"...."
"밖에 모 대주 있는가!"
제갈무린의 부름에 가주실 밖에서 기다리던 청화대주 모익상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놈을 당장 거처로 데려가라."
"아버님...."
"듣기 싫다. 명이 있을 때까지 거처에서 근신하라! 한 발짝이라도 나섰다가는 다리를 부러뜨려 놓을 것이다!"
정말로 잔인한 아비였다.
무당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청화대의 무인까지 내어 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더니, 실수하는 순간 단칼에 내쳐 버린다.
하지만 제갈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히 말을 보탰다가는 아비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썩 꺼지거라!"
서슬 퍼런 축객령에 제갈근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가주전을 빠져나왔다.
'진무, 망할 무당파 도사 놈. 모든 게 네놈 때문이다.'
두 번.
한번은 굴욕을 당했고, 또 한 번은 이용당했다.
그로 인해 기껏 얻은 아비의 신임마저 잃어버렸다.
"꼴을 보니 또 아버님께 혼이 난 모양이지?"
모익상과 함께 가주전을 빠져나온 제갈근을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
비꼼이 담긴 목소리의 주인.
제갈근의 배다른 형이자 단강 제갈분가의 대공자 제갈각.
"형님을 뵙습니다."
"치워라. 마음에도 없는 인사."
"...."
제갈각의 반응에 고개를 숙인 제갈근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쯧쯧, 멍청한 자식. 소 뒷발에 쥐를 잡는가 싶더니. 하긴 천한 놈이 그 쉬운 감시조차 제대로 해낼 리가 없지."
폭언에 가까운 제갈각의 말에 제갈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익숙했다.
늘 그래 왔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세가를 떠나 도문에 귀의하는 것이 어떠냐? 무당의 제자를 살려 줬으니 기꺼이 받아 줄 터인데."
"...."
"멍청한 놈."
제갈각이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제갈근을 일별하고 집무실 쪽으로 다가갔다.
"아버님, 각입니다."
"들어오너라."
제갈각이 집무실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제갈근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뿌드득!
"두고 봐라. 내가 어찌 소가주가 되는지. 네놈이 언제까지 그 잘난 대가리를 빳빳이 들 수 있을지."
불이 이글거릴 정도로 집무실을 매섭게 노려보던 제갈근은 거처로 돌아갔다.
* * *
단강구 야시장이 위치한 외곽 골목에는 제법 규모 있는 장원 하나가 위치해 있었다.
무법의 세계 속에 살며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사척파의 본거지였다.
그들이 수많은 범법 행위를 자행하면서도 숨지 않는 것에는 무수한 뇌물과 흑사방이라는 거대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각.
화롯불이 켜진 거대한 장원에는 다수의 인원이 빠져나갔음에도 평소보다 많은 인원으로 채워져 있었다.
뒷골목 부랑아, 배수, 도둑까지.
공사척은 단강구에서 자신의 힘이 미치는 모든 이들을 동원했다.
무공을 가지든 가지지 않든 상관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무 일행의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백여 명에 가까운 숫자가 동원되었고, 혹여 그들과의 싸움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공사척은 자신의 수하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을 추격에 참여시켰다.
진무라는 무인이 제법 실력이 있어 보였으나 내상을 입은 채이니 그들만으로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연락이 없단 말이냐!"
"예. 아직 찾지 못한 듯합니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 같으니!"
공사척이 홧김에 옆에 있던 화로를 걷어차 버렸다.
한아름은 될 듯한 청동화로가 거세게 쓰러져 바닥에 불을 쏟아 내었다.
제갈세가의 청화대가 물러간 이후 공사척은 자신이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장 수하들을 무당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보냈다.
밤? 그딴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도주해 무당으로 가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었다.
무당 제자의 목숨을 노렸다.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무당의 도사들이 떼거리로 나타날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동문의 죽음에 엄청나게 집요함을 보이는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설사 당장은 도망친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쫓겨 다닐 게 뻔한 일이었다.
한 가닥 연을 맺고 있는 흑사방이 그의 뒷배이기는 했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분명 그들은 무당과 분쟁을 만드느니 그 끈을 잘라 버리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무조건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찾아서 죽여야만 했다.
공사척은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곽기!"
"예. 두목."
"지금 즉시 우가장을 찾아가라. 무당의 제자들이 도주했음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라."
"우가장에서 도와줄까요?"
"흥, 우리가 다치면 놈들도 무사할 리 없다. 반드시 도와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추격하는 인원은 많을수록 좋다.
더욱이 우가장의 무인들이라면 제법 실력이 있는 자들이다.
자신의 수하들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되리라.
"서둘러라."
공사척의 명령에 곽기가 다급히 뛰어나갔다.
그 순간,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음.
장원의 정문이 통째로 터져 나가고 공사척의 명령을 받고 나갔던 곽기가 피떡이 된 얼굴로 튕겨 날아왔다.
"뭐, 뭐냐?"
"무슨 일이냐?"
별안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모두가 어벙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이야, 버젓이 장원까지 있으니 찾기도 쉽고 좋네."
빈정대는 말과 함께 자욱한 먼지를 뚫고 세 명의 사내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진무, 그리고 청상과 청우였다.
28화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가장 가까운 놈이 진무를 향해 주먹을 날려 왔다.
"청우!"
뻑!
명령과 함께 움직인 청우의 짧고 간결한 움직임에 상대가 코피를 쏟으며 튕겨 나갔다.
"와아아!"
처맞는 걸 제대로 못 봤나?
다섯이나 되는 놈들이 한꺼번에 진무를 공격했다.
주먹과 발을 섞어서.
하지만,
청상과 청우가 마치 쌍둥이처럼 그 앞을 막아섰다.
쩍, 퍽! 짝! 빠박!
청상과 청우가 나머지를 처리하는 동안 진무는 곧장 한 인물을 향해 다가갔다.
딴 건 뵈지도 않는다.
진무의 눈에는 오로지 공사척 하나만 보였다.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가는 진무의 모습에 사척파의 인물들이 저마다 손에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청상과 청우의 무위를 본 터라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고 포위만 유지한 채 물러나며 길을 열어 주었다.
"이놈!"
개중에 용기가 있었던 놈이 진무를 향해 칼을 뻗어 왔다.
허접쓰레기 따위가 어딜.
횡으로 휘둘러진 비수를 피해 허리를 살짝 젖힌 진무의 손이 쑥 하고 뻗어졌다.
"컥!"
모가지를 잡힌 무뢰배는 숨이 막혀 버둥거렸다.
"뭐야? 이것들은?"
때아닌 소란에 딴생각을 하고 있던 공사척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뭐냐고?"
진무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뚜둑!
소름 끼치는 소리와 버둥거리던 사내가 힘없이 목을 옆으로 꺾었다.
털썩.
비명 한번 제대로 못 지르고 절명한 사내를 던져 버린 진무가 검을 늘어뜨린 채 공사척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놈?"
당황스럽겠지.
이해가 안 가겠지.
냅다 도망가서 무당에 일러바쳐야 할 놈이 버젓이 쳐들어왔으니 놀랄 수밖에.
공사척은 황당해하던 표정을 지우고 진무를 향해 싸늘하게 웃었다.
"크크크.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도망친 줄 알았던 놈이 제 발로 찾아와 주다니 말이야."
"병신이 쪼개기는. 고마운지 안 고마운지는 조금 지나 보면 알게 될 거다."
어금니를 갈아 대며 욕설을 내뱉는 진무의 모습에 공사척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죽여!"
공사척의 외침과 함께 포위하고 있던 무뢰배들 수십이 한 번에 무구를 휘둘러 왔다.
죽여?
그래. 죽여 주지!
날카로운 무기의 예기가 날아드는 가운데,
진무는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단전을 완전히 개방했다.
내상?
완전히 치료하지는 못했다.
요상단으로 치료해 회복한 힘은 고작 오 할.
하지만 광혈참혼기공을 사용한 뒤라 그 힘은 평소의 배 이상 증폭되어 있었다.
증폭된 육양신공의 내공이 사지백해로 퍼져 나가고, 양팔을 흘러 검에 쏟아져 들어갔다.
우우웅!
일시적으로 담기는 거대한 기운에 검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광혈참혼기공의 효력은 딱 한 시진.
그리고 찾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 반 시진.
시간은 충분하다.
"청상, 청우! 물러나!"
진무가 손아귀를 비틀며 힘을 주자 검에 깃든 선기가 핏빛으로 물들며 뻗어 나왔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검술이 있지."
무당검공,
구혼탈백(勾魂奪魄).
영혼까지 싹 털어 주마!
쑤우웅! 파사삭!
진무의 손에 들린 검에서 핏빛 검기가 일 장을 넘어갈 정도로 솟구쳤다.
그리고,
자세를 낮춘 진무가 선풍각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힘껏 끌어당겼다.
후우웅!
튀어 오른 흙더미와 함께 늘어난 검기가 거대한 원을 그렸다.
스거걱!
검기가 만들어 낸 동심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초식?
그런 건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다. 검기가 가진 힘과 거리상의 이점이 모조리 발휘된 단 일 초의 검격.
취리릿! 탁!
두 번의 회전을 그리고 멈춘 검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검기는 사라지고 푸르스름한 기운만 남아 있었다.
촤아악!
진무가 검을 털어 내자 혈조(血漕)에 맺혀 있던 핏물이 바닥에 흉측하게 떨어졌다.
검기가 스치고 지나가며 멈춰 섰던 이들의 몸에 한 줄기 실선이 그어졌다.
후둑, 후두둑.
진무를 공격했던 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깨끗이 양분되어 쓰러졌다.
사방에 피가 뿜어져 바닥을 적시고 잘린 팔과 다리, 분리된 상반신과 하반신이 정원 안을 장식했다.
"끄아악!"
"으어억!"
상처 입은 자들의 비명 소리.
그리고 그 중심에 진무가 넘실거리는 살기와 닮은 핏빛 선기를 뿜으며 고고하게 서 있었다.
마치 지옥의 한가운데서 악마를 모조리 도륙한 선인처럼 잔혹한 미소를 머금고 공사척을 바라보고 있었다.
"...!"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공사척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진무를 공격했던 수하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사척파 내에서 무공이 뛰어난 이들은 진무 일행을 잡기 위해 떠난 뒤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단 일격에 수십이나 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이놈이....'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고작해야 자신보다 초식 운용이 조금 뛰어나다 생각했다.
그런데 진무의 검에서 뻗어 나온 검기는 뭐란 말인가?
더욱이 그 길이가 일 장이나 되었다.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아니,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고수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분명 내상을 입었다고 했었다.
제갈세가의 인물들에게 그리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넘실거리는 검기를 보았을 때,
이미 힘의 대부분을 회복한 상태.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냄새만 맡아 봐도 알 수 있었다.
공사척은 사파인이다.
그것도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어 온 무뢰배 중의 무뢰배였다.
전형적으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능성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도주한다.
수하들 따위야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일단은 물러나 우가장과 힘을 합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공사척은 곧바로 도주를 감행했다.
하지만 지면에 발을 대는 순간 엄청난 기세를 품은 기운이 파공성을 만들며 날아왔다.
쓔아아앙!
"어헉!"
노리는 것은 공사척의 명치, 단중혈.
기겁한 공사척이 재빨리 박도를 들어 쳐 냈다.
따아앙!
거친 쇳소리와 함께 부딪힌 충격을 이기지 못한 공사척이 마룻바닥 끝과 맞닿은 벽에 처박혔다.
"크윽!"
엄청난 힘이었다.
급하게 둘렀다고는 하나 기운을 주입한 박도에 동전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야, 누가 토끼게 둔대?"
검을 어깨에 걸치고 다가오는 진무의 모습.
소름이 끼치도록 잔인한 미소.
공사척은 등줄기에 지하수처럼 솟구친 식은땀이 콸콸 흐르고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타, 탄기라고?'
진무와 공사척의 거리는 오 장여.
설마하니 검기가 그 정도나 늘어날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검기를 날렸다는 뜻.
'우가장주 이 개새끼. 나한테 탄기의 고수를 죽이라고 청부했던 거야?'
옆에 있으면 대가리를 깨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맞닥트린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어찌할까?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었다.
탄기의 고수를 어찌 자신이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날고 기는 재주가 없는 이상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하지만 가까워지기만 하면....'
공사척은 자신의 품속에 지닌 암기, 천왕침(天王針)을 슬쩍 만져 보았다.
먼 거리가 아닌 가까운 거리에서라면? 충분히 승산은 있다.
일단 놈의 주의를 끌어 안심시키고 천왕침을 쏜 다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면.
기가 막힌 계획이었다.
급해지니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자신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결정을 내린 공사척이 박도를 던지고 곧바로 마룻바닥에 절을 하듯 엎드렸다.
"아이구, 대협!"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 미천한 놈이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살려만 주십시오!"
도인, 무당파의 도사.
선기를 수련하는 도사들은 대체로 너그럽다.
악인을 수양으로, 설득으로 계도할 수 있다고 믿는 정신 나간 자들이었다.
직전에 수하들을 죽인 한 수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들은 죄를 뉘우치는 행동 따윈 보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사죄하면?
공사척은 고개를 처박고 엎드려 손바닥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빌고 또 빌었다.
자존심 같은 것은 개에게 줘 버린 지 오래다.
비굴함? 그게 다 뭐란 말인가.
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저벅, 저벅.
진무의 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머지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리고, 엎드린 시선에 마루 위로 올라오는 진무의 발끝이 보였다.
지금이다!
공사척은 곧바로 품속에서 천왕침을 꺼내 심지를 당겼다.
"캇캇캇! 죽어라!"
퓨하학!
원통 안에 화약을 넣고 그 위에 비침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심지가 당겨지면 수백 개의 잔침들이 한 번에 쏘아져 나간다.
단거리에서 그만한 위력을 가진 암기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그런데,
없다.
눈앞에서 천왕침을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져야 할 진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날아간 천왕침이 힘을 잃고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니가 그럼 그렇지."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목소리.
"...."
공사척은 멍한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좆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진무였다.
전생에서는 사패천주로 전국구 악명을 날렸던 그가 공사척의 꼼수 따위에 당할 리가 없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
착한 사람은 불알친구가 사기를 쳐도 불쌍하게 보이면 용서의 감정을 품는 법이고,
비열한 새끼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도 비열하다.
진무의 손이 공사척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대, 대협! 이, 이건 온전히...."
마지막 희망을 품고 사색이 되어 비는 공사척을 향해 진무가 환히 웃었다.
"이 꽉 물어."
"...."
빠악!
공사척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들어 올린 채로 진무의 주먹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뻐억! 뻑! 뻑뻑뻑뻑!
"솰려... 주새요."
잠시 손을 멈춘 사이 이빨이 몽땅 나가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버린 공사척이 새는 발음으로 애원했다.
"살려 줘? 아직 멀었어, 이 잣나무 잣 같은 새끼야."
쩍, 뻑, 빠바바박!
경쾌한 박자를 가진 구타 소리는 진무의 호흡이 거칠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공사척은 얼마 가지 않아 혼절해 버렸고, 그 뒤로도 진무는 축 늘어진 공사척을 한참 두들겨 팼다.
마룻바닥이 그의 피로 흥건해질 때까지.
* * *
"청우야."
"예, 사숙!"
"물 뿌려."
"예, 사숙."
촤아악!
"안 일어나는데요?"
"그래? 그럼 혈도라도 눌러 봐."
"예, 사숙."
장원 내부의 풍경은 진무 혼자서 만들어 낸 일이었다.
한 편의 지옥도와 함께 원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도 못 할 만큼 박살이 나 버린 공사척의 모습.
청상과 청우는 절대로 사숙에게 반하거나 말대꾸를 하거나 신경을 거슬러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진무가 시킨 대로 청우가 공사척의 혈도 몇 군데를 누르자 반응이 왔다.
"으음, 으으음."
깨어난 공사척은 부어올라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진무를 발견했다.
"히에에!"
"시끄러."
"...."
"지금부터 몇 가지만 물을게."
"우에(네)."
"그냥 고개만 끄덕여. 알아듣기 힘드니까."
끄덕끄덕.
딱히 얼굴 이외에는 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이미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진 진무에게 겁을 있는 대로 집어먹은 공사척은 도망칠 생각 따위는 품지 못했다.
"청부인이 금적산이냐?"
도리도리.
"그럼 우가장이야?"
끄덕끄덕.
공사척은 의리 따위는 없는 아주 졸렬한 놈이었다.
제가 살기 위해서 없는 죄도 만들어 뒤집어씌울 놈이지, 죄 있는 놈을 비호할 만한 놈이 아니었다.
"우가장이란 말이지. 좋아."
진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우가장.
나름 단강구에 번듯하게 자리 잡은 무관이었다.
그곳에 있는 무인들은 뒷골목 무뢰배와는 다를 것이 틀림없었다.
진무가 아무리 탄기의 고수라고는 해도 셋으로는 조금 힘들 수도 있었고,
일시적으로 증폭시킨 내공일 뿐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들만으로 우가장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일단은 상대적으로 약한 청양상단부터 조진다.
하지만 광혈참혼기공의 효과가 그 정도로 오래 지속될 리 없었다.
청상과 청우가 있다고 하지만 상단의 무인들의 수도 제법 될 터였다.
그렇다면?
진무가 공사척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29화
"와아! 죽여라!"
"부숴 버려!"
습격.
그들은 모두가 잠든 한밤중을 틈타 공격을 해 왔다.
그것도 정문을 부수고, 달려드는 호위 무인들을 모조리 때려눕히며,
그런데?
'어째서 사척파가?'
청양상단의 총관 이치성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전날 진무를 죽이러 갔던 놈들이다.
제갈세가의 방해로 놓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밤새 수하들을 풀어 진무 일행의 행적을 좇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공사척과 함께 그들이 서 있단 말인가?
진무, 청상, 청우.
눈을 아무리 비벼 보아도 그들이 확실했다.
어째서 공사척은 저리도 굽신거리며 앞잡이 행세를 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고, 사척파의 무뢰배들은 뭐가 저리도 열심이란 말인가?
상단 호위와 싸우며 팔다리가 부러지고 칼날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다.
"청양상단의 악도들을 처단해라!"
미친 건가?
"무당파의 의기를 보여 주자!"
미쳤네.
뒷골목 무뢰배인 놈들이 무당의 제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한다.
"막아! 막으란 말이다!"
이치성이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치며 몸을 천천히 뒤로 뺐다.
연유야 어찌 되었건 지금의 상단 호위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상단 총관인 그라 해도 공사척의 무위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 왔다.
그의 수하들은 몰라도 그는 강하다.
적어도 단강구 상단에 있는 호위 무인들 중 어느 누구도 상대가 되지 못할 만큼.
이치성은 모두가 싸우는 틈을 타서 몰래 도망칠 생각이었다.
서둘러 지금의 상황을 금적산에게 알려야만 했다.
공사척의 배신을 알리고 금적산으로 하여금 우가장을 움직이게 해야만 했다.
켕기는 것이 있으니 우가장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우가장주인 우문흠이 직접 움직일....
퍼억!
막 자리를 피하던 이치성의 눈에 큼지막한 발 하나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크엑!"
수없이 쓰러진 사내들.
길게 늘어선 줄.
하나같이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부어 무릎을 꿇고 있었고 사척파의 무뢰배들이 그들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치욕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청양상단의 총관 이치성.
"크흐흑."
참담한 마음에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공사척 이 치사한 새끼.
아무리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사파라고는 해도 무당파에 붙어먹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하필이면 금적산과 상단의 주력 무인들이 밀수 건으로 모조리 빠져나간 다음에 그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네놈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청부를 받고 죽이러 간 놈이 도리어 앞잡이가 돼?"
이치성이 공사척을 향해 호통을 치며 노려보았다.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무릎이 꿇려 있음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어이, 거기 총관. 눈 깔아."
"...."
진무의 말에 이치성이 발끈하며 눈을 치켜떴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도사다.
아무리 힘이 좀 있다기로서니 어른한테 싸가지 없이.
하지만 진무보다 공사척이 먼저 움직여 이치성의 복부를 마구잡이로 걷어차 버렸다.
"이언 쐉노므애끼! 어디 대혀께 누까리르(이런 쌍놈의 새끼! 어디 대협께 눈까리를!)"
공사척이 멱살을 잡고 눈을 부라렸지만, 이빨이 빠져 우물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치성은 곧바로 눈을 깔았다.
매가 사람을 만든다.
그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불문율이었다.
그 아픔에 뼛속까지 시릴 정도라면 더더욱 효과적이었고.
공사척은 제 놈이 살기 위해 더욱 악랄하게 상단 무사들과 이치성을 두들겨 패며 진무에게 충성을 보였다.
전날 새벽, 진무는 공사척에게 한 가지 제안과 함께 무당 제자를 노린 것을 불문에 부치겠다고 했다.
한 가지만 도와주면.
정파와 사파는 상극이었다.
특히나 그 상대가 도가의 맥을 이은 무당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불문에 부치겠다니.
자신의 목숨을 노린 상대의 죄를 묻지 않겠다니.
이렇게도 자비로울 수가.
더는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다.
혹시나 무당과 척을 지고 평생을 도망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진무가 수십의 수하를 죽인 것도, 자신을 개 패듯이 팬 것도, 이빨이 몽땅 빠져서 발음이 새는 것도 모조리 기억에서 날아갔다.
연이 닿은 흑사방의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 현기의 경지를 얻은 공사척이었다.
그 때문에 무뢰배치고는 실력이 좋았다.
하지만 그럴듯한 약소 문파를 만들어도 충분한 실력으로 단강구 무뢰배들의 두목이 되었다.
더 좋은 자리도 있었겠지만, 그는 본래 소인배였고, 그래서 용 꼬리보다 뱀 대가리를 택한 것이다.
거대 문파에서 무인대 중 하나로 사느니 단강구 무뢰배의 두목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게 훨씬 좋았다.
제갈세가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뒷세계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무가 이번 일을 용서해 준다면 그 생활을 계속해서 영위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사력을 다해 청양상단을 조졌다.
조금이라도 진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금적산 어디 있냐?"
공사척을 물린 진무가 이치성을 향해 물었다.
"그, 그게."
"대답 안 할 거야?"
진무의 채근에 이치성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의 대답이 늦어지자 옆에 있던 충성스러운(?) 공사척이 구멍 난 박도를 들고 이치성의 목 어림을 위협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공사척이 잡혔으니 이미 우가장이 연관되어 있음은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과정에 청양상단이 끼어 있음도 알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모조리 털려 나간다.
스윽.
목에 대어진 서늘한 검날이 그의 피부를 짓눌렀다.
"흡!"
지금 남을 생각해 의리를 지킬 처지가 아니었다.
일단 살고 봐야지.
"상단주께서는 거래를...."
"거래? 거짓말하지 마! 무슨 상단 거래가 오밤중에 이루어진다고!"
이치성의 대답에 청상이 버럭 화를 내었다.
"그게, 밀거래...."
"이놈이 그래도?"
잠깐만, 청상아.
진무가 이치성을 향해 화를 내며 다가서는 청상을 붙잡았다.
무당파에서 이미 그들의 대화를 들었기에 청양상단이 밀거래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진무였다.
밀거래는 불법적이고 은밀하다.
주로 관에서 금지하고 있는 품목을 거래하는 경우가 많고, 과도한 세액이 매겨진 품목이 대부분이며, 결정적으로 고가의 품목들이다.
잘만하면 팔자를 고칠 수도 있었다.
'호오? 밀거래가 있었어? 어쩐지 어제 본 것보다 호위 무인 수가 턱없이 적다고 했더니.'
진무가 턱 언저리를 쓸었다.
밀거래. 위험이 따르는 만큼 정상적인 거래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거래 중이라면?
흐흐, 복수를 하러 왔더니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이거 잘하면 도랑 치고 가재 잡겠다.
그래, 이건 복수다.
그저 복수하는 과정에서 몸을 움직인 데 대한 수고료를 조금 받아 가는 것뿐이다.
어차피 청양상단을 자금을 뽑아 먹으려 했던 진무가 아니었던가.
'잘하면 전장에 몇 구좌 더 개설해야겠는데?'
순식간에 거래 현장을 급습해 모든 것을 빼앗아 챙길 계획을 세운 진무가 청상을 진정시키고 이치성을 향해 은근히 물었다.
음흉한 미소는 덤이다.
"근데 왜 아랫것들 안 시키고 금적산이 직접 갔지?"
"그게."
이치성이 말하기를 주저하자 공사척의 박도가 그의 목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화, 화약입니다. 이번에 거래하는 물목이...."
"뭐?"
이런 미친놈들이?
고작 소금이나 도자기, 용정차 같은 품목인 줄 알았는데.
화약이라는 말에 진무가 벌떡 일어났고 옆에 있던 청상은 물론 청우마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화약을 거래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춘절이나 중양절, 혹은 잔치 때 불꽃놀이를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화약은 대포의 장약이다.
즉, 전쟁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물건이었다.
소량이라고 해도 관에 신고하지 않고는 절대로 거래해서는 안 된다.
관무불침(官武不侵).
지금의 시대를 이룩한 태조가 건국 당시 무림의 도움을 받았기에 칙령을 내렸고, 후대에 전해져 그대로 전통이 되었다.
하지만 관무불침이라 해도 그 전통이 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림인들이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민가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역모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절대로 군부에서 통제하는 화약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정사마의 어느 세력도 함부로 화약을 탐내지 않는다.
그것이 무림 내에서의 암묵적인 규약이고, 매우 모자란 청우마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재수 없으면 백만 어림군에 의해 무림 자체가 쓸려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지역의 중소 상단이 화약을 거래한다고?
'허, 금적산이 이 새끼. 아주 상또라이였구만?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하긴 그러니 상단 주제에 무당의 제자를 암살하는 계획에 동참했겠지.
진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청상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어, 사숙. 화약이라면 관에 연락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음."
진무는 잠시 고민을 했다.
복수와 더불어 덤으로 밀수품과 돈까지 챙겨 보려는 생각이었는데... 젠장, 하필이면 화약이라니.
이건 덩치가 커도 너무 크다.
아깝긴 해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도사 신분이 아니던가?
괜히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걸어서 좋을 게 없다.
"어이, 총관. 거래 장소가 어디야?"
"그... 북쪽 수고(水庫: 저수지)의 갈대밭입니다."
"갈대밭이라."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약이라면, 일단 관을 부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청상, 이 길로 곧장 단강구 현청으로 가라. 무당의 제자임을 밝히고 화약 밀거래에 대해 알려라."
이런 일에는 눈치 빠른 청상이 청우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예! 한데 사숙께선?"
"나? 지금부터 조지러 가야지."
"혼자 말입니까? 차라리 관과 함께 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다.
반드시 관보다 먼저 가야 한다.
화약은 챙기지 못할지라도 수고비만큼은 무조건 챙겨야 했다.
"청상아."
"예, 사숙!"
"시간이 없다. 만약 놈들이 먼저 거래를 끝내면 밀거래의 꼬리를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
"허니 먼저 가서 놈들을 붙잡고 있겠다. 그리고 내 걱정은 말아라. 든든한 지원군이 있질 않느냐."
진무가 자신을 향해 어떻게든 눈에 들어 보려 헤실거리는 공사척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청상아."
"예?"
"네 사숙을 믿어라."
"알겠습니다. 하면 몸조심하십시오. 서둘러 관군과 함께 가겠습니다."
"오냐. 거기서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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