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ASOCIACIONCHAMAN / Chapter 8 - 70-80

Chapter 8 - 70-80

70화

후우웅!

뽑아 올렸다.

마치 거목을 뿌리째 뽑아 올리듯이 끌어당긴 진무의 힘을 따라 검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파가가각!

검에서 이어진 푸른 강기가 채찍처럼 휘어져 수직의 반월을 만들고.

쿠아아아!

세상을 갈라놓듯이 쏘아져 나갔다.

서걱!

강기가 복면인을 관통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물살을 거칠게 헤쳐 가르며 날아간 강기가 절벽을 때리며 거센 폭음을 토했다.

쿠르릉! 쩌저저적!

지축이 뒤흔들리고 절벽의 중앙이 갈라졌다.

무너지지는 않았으나 마치 거인이 도끼로 힘껏 내리친 것처럼 커다란 자국이 만들어졌다.

"구혼탈백검(勾魂奪魄劍) 월망혼(月亡魂)."

진무가 가장 좋아하는 무당의 검공이었다.

일단 이름부터가 너무나도 진무의 취향이었다. 혼백을 아주 그냥 털어 버린다지 않는가.

동귀어진을 펼쳤던 복면인은 진무를 향해 날아오던 그대로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바닥에 피와 내장이 쏟아지고 절단된 뼈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쳇, 그 노인네에 대해 물었어야 했는데. 뭐 상관없지. 나중에 천천히 찾아서 죽이면 되니까."

진무가 처참하게 죽은 복면인의 시신에서 고개를 돌리는데.

털썩.

털썩.

복면인의 수하들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과 싸우고 있던 등여평 등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가장 먼저 차분히 상황을 파악한 것은 제갈선이었다.

독한 놈, 아니 독한 년이다.

육신이 짓눌리고 갈라져 터진 시신을 보면 토악질을 할 만도 한데 매우 차분한 표정으로 다가가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지(理智)가 제압당했습니다. 이들 모두."

"뭣이?"

제갈선의 말에 등여평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으나 저들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말을 한 것은...."

제갈선이 진무에게 죽은 복면인의 수장을 힐끗 바라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진무가 만들어 놓은 광경은 너무 잔혹했다.

"저자뿐, 나머지는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율평, 일단은 이들을 점혈하고 모두 포박하게."

"예. 대공자!"

"사령들은 지금 즉시 절벽으로 올라가 다른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아라."

제갈선의 말에 율평을 도와 청우와 청상이 쓰러져 있는 복면인들을 제압해 마차에 준비된 포승줄로 결박했고, 사령들은 절벽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참으로 희한한 자들이군."

"예. 이런 자들이 있다는 말은 저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제갈선이 팔짱을 낀 채 손등으로 턱을 괴고 고심하다 청우와 함께 있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

저들이 쫓고 있었으니 무언가 아는 것이 있을 게 분명했다.

"얘야. 혹시...."

하지만 제갈선은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아, 으, 아으, 으."

"음."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

경련처럼 몸을 떨고 있다.

단단히 겁에 질려 있는 것이다.

눈동자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고 간신히 내뱉는 목소리로 추측하건대.

'실어증? 너무 과한 충격을 받은 게로군.'

소녀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

다그친 것은 아니었으나 제갈선은 겁에 질려 있음이 분명한 아이에게 너무 갑작스럽게 묻지 않았나 하며 자책했다.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꼬옥.

무릎을 꿇고 소녀와 눈을 마주친 제갈선은 포근하게 웃으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서로의 고개를 엇갈려 맞대며 등을 어르듯 도닥였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으어... 아...."

몇 번이나 참았을 숨이 끝내 토해졌을 때 소녀의 눈에 습막이 차올라 볼을 타고 흘렀다.

"흐읍... 으앙!"

터져 나오는 울음.

제갈선은 더욱 따스하게 소녀를 안았다.

소녀는 하염없이 울었고 제갈선은 소녀의 얼굴을 당겨 가슴에 파묻게 하고 말없이 등만 다독였다.

"흠, 흠."

아이의 울음이 너무도 서럽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등여평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진무를 향해 다가갔다.

"제갈가의 소저는 심성도 고운 듯하구먼. 저리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니."

뭐, 그런 것 같기는 했다.

차분하고 결단력 있는 성격인 줄로만 알았더니 제법 사람의 아픔을 보듬을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구만. 강의 경지를 넘어 탄강, 아니 반월강기라니."

"...."

진무가 만들어 낸 거대한 흔적. 절벽을 쪼개 놓은 반월형 강기.

등여평은 그것만으로도 진무의 무위가 입신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한 녀석이었다.

무당지검, 진무.

새롭게 등장한 무림의 강자.

"허, 참."

등여평은 문득 눈앞의 약관의 청년이 앞으로 만들어 갈 역사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길을 어쩌면 자신이 함께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과 흥분이 생겼다.

"험험, 그나저나 자네 손속이 매섭군. 사람을 이리 토막 내 놓은 것은 처음 보네."

반으로 갈라져 버린 복면인들의 수장.

처참했다.

"백로께서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진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이미 그의 말투와 성격에 익숙해진 백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참, 이들에 대해서 아는 듯하던데?"

등여평이 궁금증을 드러내자 진무가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

"무풍개께서 아는 눈치였소."

"무풍개? 아! 그러고 보니 자네가 소방 형님과 인연이 있었다 했지?"

형님?

백로와 무풍개가 서로 친분이 있었나?

어쩐지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은 게 비슷하다고 생각했더니.

"뭐, 조금."

"흠, 하면 단순한 인신매매범은 아니란 말이군. 저 아이의 신변에 흉사를 일으킨 자들을 소방 형님이 쫓고 있다면, 이는 관에 넘길 것이 아니라 필시 맹에 고해야 할 일일세."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다? 죽은 자들은 그렇다 치고 생포한 자들이 십수 명인데 줄줄이 꿰고 다닐 수는 없으니."

등여평이 고심으로 미간을 찌푸리는데 소녀를 어느 정도 달랜 제갈선이 다가왔다.

이미 돌아온 사령들에게서 절벽 위에서 더 이상의 적이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뒤였다.

"이미 의창에서도 열흘 거리입니다. 저희가 맹으로 데려가자면 꽤 먼 거리이니 인근 문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인근 문파라. 하지만 이곳에 적당한 곳이 있겠는가?"

"개방의 도움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개방?"

"예. 지금 상황으로는 저희 쪽에서 흔적을 쫓아 흉사가 일어난 곳을 찾기에는 무리입니다. 추적술에 능한 개방이 적격이지요."

"그렇군. 하면 속히 개방으로 가야겠구만."

"음, 이 정도의 인원이라면 인근에서 제일 큰 형주(荊州)의 개방 분타에 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 현장을 조사하자면 꽤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고수들의 도움도 필요하구요. 분타에서도 그 정도 인원을 움직이려면 총타의 승인이 필수일 터인데."

제갈선이 고심을 하다 진무를 힐끗 쳐다보았다.

"뭐? 왜?"

"아니 무풍개 어른과 연이 있다고 하니 혹시나 개방과도 연을 맺지 않으셨을까 해서 물어보았소."

이게 어딜 사람을 부려 먹으려고?

"그딴 거 없어."

진무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데.

"저 사형, 혹 전에 무풍개 어른께서 사숙께 주신 징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청우가 조심스럽게 소곤거렸고 청상이 재빨리 진무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진무는 제갈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목소리가 작았으니 못 들었겠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징표라니요?"

제갈선이 의아한 눈빛으로 청우를 바라본다. 젠장, 귀도 밝지.

"그게 실은."

잠깐 청우 너 이 자식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진무가 막기도 전에 청우가 제 머리를 긁으며 입을 뗐다.

"사형, 말 좀 해 주세요. 전에 사숙의 명령으로 그 녹슨 동전을 씻어 오셨잖아요."

"처, 청우야, 그건."

청상이 난처해진 눈빛으로 청우와 진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녹슨... 설마! 협전을 받으신 겁니까!"

제갈선의 외침에 등여평의 눈이 왕방울처럼 휘둥그레졌다.

잘도 알아 처먹는다.

이 여자 도대체 모르는 게 뭘까?

얼마나 똑똑한 거지?

"허! 자네 정말 협전을 받은 겐가? 이런, 내 소방 형님과 그리 친하게 지냈음에도 받지 못한 물건인데."

망할, 모두가 답을 찾았다는 듯 밝은 얼굴로 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진무와 청상뿐이었다.

어쨌든 협전이라면 개방 분타쯤은 불러들이고도 남겠지. 하지만 진무는 절대로 협전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개방의 협전이라니. 더욱이 무풍개 어르신께서 직접 징표로 주셨다니."

제갈선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하하핫! 암요! 사숙께서는 저희 무당의 자랑이십니다. 무당의 검이 아닙니까!"

"처, 청우야."

눈에 띄게 붉으락푸르락해진 진무의 얼굴에 청상이 사색이 되어 말려 보지만.

"그 대단하신 무풍개 어르신께서 연을 맺어 달라 사정까지 하며 주셨다니까요? 하하핫!"

사숙을 향한 칭찬에 한껏 자랑스러워진 청우가 눈치 없이 가슴을 부풀리고 있었다.

하아, 이런 망할 놈이.

다시는 청우에게 비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겠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제갈선이 의사를 물어 왔다.

"허헛, 이 사람. 당연한 것을 뭘 묻고 있는가?"

당연하다니! 이 노인네야!

어찌 남의 것을 쓰려고 들면서 그렇게 당당한 표정을 하는 게야!

하지만 진무에게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명색이 무당지검이라는 감투까지 썼는데. 보는 눈이 한둘도 아니고.

무당의 체면이라는 게 있지.

"이, 이게... 도움이... 되겠어?"

진무는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이 품에서 작은 동전 하나를 꺼냈다.

어색하게. 최대한 느린 손놀림으로.

안 될 리가 없지만 안 된다고 했으면 좋겠다.

"오오! 정말로 개방의 협전이라니!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군요. 다행입니다."

양손으로 협전을 받아 든 제갈선이 감탄하고.

"협전이라면 총타의 승인 없이도 형주분타 전체가 옮겨 올 걸세. 암!"

등여평이 확신한다.

"역시!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등여평과 제갈선의 놀란 얼굴에 청우가 뿌듯해했다.

저게 진짜, 지 것도 아니면서.

휴, 청우야. 이 우직하지만 모자란 놈아.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올바른 일이다만... 너는 아무래도 오늘 생명이 위태로울 것 같구나.

그리고 너는 오룡궁에서도 반드시 퇴출시킬 것이다.

이 민폐 덩어리 돼지 녀석아.

71화

들개 떼처럼 몰려온 개방도들이 절벽 밑의 강가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도착과 동시에 일사불란하게 시신을 수습하고 포로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끈 형주 개방 분타주 옥동개(玉童丐)가 오결의 개방도답게 제갈선과 등여평을 단번에 알아보고 다가왔다.

"형주분타주 옥동개가 백로 어른과 제갈가의 대공자를 뵙습니다. 혹 본방의 어르신께 협전을 받은 분이?"

옥동개는 당연히 백로가 아닐까 생각하며 물었다.

그들이 형주분타에 들고 온 협전은 무풍개 양소방의 것이 확실했다.

양소방의 행적은 개방도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할 정도로 신묘했고, 아직 양소방이 협전을 누군가에게 전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기에 의아할 따름이었다.

"내가 아닐세."

"예?"

"저기."

등여평이 미소 띤 얼굴로 청상과 청우를 개 잡듯이(?) 수련시키고 있는 진무를 가리켰다.

"저분은?"

"무당지검이라네."

"헛! 무당지검!"

소문으로 들은 바는 있었다.

현 호북성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정보 중의 하나였다.

무당지검의 칭호를 받은 약관의 무인.

몇 가지 사건들은 있었으나 그 외에는 산문에 틀어박혀 행적이 불분명했기에 그에 대한 정보는 최고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개방도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사이 옥동개는 서둘러 진무를 향해 다가갔다.

"개방의 옥동개가 협전의 주인인 무당지검 진무 도장을 뵙습니다."

"...."

감격해 마지않는 표정.

이름 그대로 옥동자처럼 작은데 신기하리만큼 못생긴 얼굴이었다.

도대체 왜 이름에 옥동이 들어가지?

"여기 협전입니다."

옥동개가 양손에 협전을 받쳐 공손히 내밀자 진무가 매우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받아 챙겼다.

영영 안 돌아오는 줄 알았다.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협전의 주인께서 그 이름에 걸맞게 사용해 주시니 이 모두가 무림의 홍복입니다."

옥동개는 궁금했다.

무풍개로부터 협전을 받은 인물.

이는 곧 그 대단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더욱이 무당지검이니 연을 맺어 두면 더없이 좋으리라.

그렇기에 최대한의 친근함을 보였으나 진무는 귀찮기만 한 표정이었다.

"얼마나 더 쓸 수 있소?"

"예?"

"이거."

"아! 협전은 본방의 신물 중 하나입니다. 아시다시피...."

"얼마나 더 쓸 수 있는지만 말하시오."

"그, 무풍개 어른의 권한상 두... 번...."

"크윽!"

갑자기 진무가 제 심장을 부여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오. 신경 쓰지 마시오."

두 번이란다.

그 귀중한 기회 중 한 번을....

"청우! 누가 쉬랬어! 뛰어!"

매섭게 고개를 돌린 진무가 잠시나마 물결에 둥실둥실 몸을 맡기고 쉬던 청우를 향해 소리를 뻑 지르자 물속에 있던 청우가 재빨리 튀어 올라 절벽에 매달렸다.

망할 놈이.

두 번밖에 쓸 수 없는 이 귀한 협전을 쓸데없는 일로 한 번이나 써 버렸다.

용서치 않으리라.

진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청우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저, 진무 도장?"

"뭐요!"

"예?"

"볼일이 남았소?"

"아니, 그게 아니라. 대화를 좀."

"됐소! 나눌 이야기 없소!"

"...."

"청우! 똑바로 안 해?"

진무가 다짜고짜 강물을 밟고 달리며 막 절벽에서 미끄러진 청우의 뒷덜미를 잡고 절벽에 패대기치듯 던졌다.

"빨리 안 기어 올라가?"

"...."

진무의 행동에 당황한 옥동개가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제갈선이 웃으며 다가왔다.

"좀 특이하지요?"

"예?"

"진무 도장의 성격 말입니다."

"뭐, 예."

"그래도 대단한 무인입니다. 저희도 이번에 저분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제갈선이 자신을 무난하게 지키고 적의 수장까지 처리한 진무를 떠올렸다.

"맞네. 성격이 좀... 거칠기는 하지만 무당지검의 칭호가 잘 어울리는 사내라네."

등여평이 옆에 다가와 거들었다.

"그, 그런가요?"

그러기에는 동문의 제자를 너무.

"수련법이 특이하더군요."

제갈선이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대단한 수련법인 듯합니다. 벌써 청상 도장의 무위가 현기에 이르렀다 하니."

"헛! 현기란 말입니까? 청자 배라면 이대제자인데?"

옥동개의 놀람에 제갈선이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대단하지요?"

"대단하지?"

"...."

진무를 바라보는 이 둘의 눈빛은 또 뭐란 말인가?

무한한 신뢰가 담긴 흠모의 눈빛?

아니, 그러기에는 좀... 싸가지가 없어 보였는데.

"어쨌든 진무 도장의 말씀으로는 습격한 자들이 무풍개 어른이 뒤쫓는 자들과 관계가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예? 어르신이 뒤쫓는?"

옥동개는 진무에게 향해 있던 의아한 시선을 지우고 표정을 굳혔다.

무풍개가 누군가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바가 없었다.

즉, 비사 중의 비사란 뜻이다. 절대로 발설되어서는 안 되는.

"하면 두 분께선."

"비밀로 하겠습니다."

"아? 예."

눈치 빠른 제갈선이 싱긋 웃었다.

"일단 무풍개 어른께서 쫓고 계시는 일이니 본가에도 고하지 않겠습니다."

"마찬가질세."

제갈선과 등여평의 말에 옥동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아이. 습격자들에 의해 가족이 몰살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달리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실어증에 걸려 있습니다. 심신 상태도 불안정하고요."

"그래 보이는군요. 무리하게 조사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뒷일은 개방에서 수습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예."

옥동개가 제갈선과 등여평에게 인사를 나누고 조사를 위해 물러났다.

그사이 율평과 사령은 출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근데, 오늘은 좀 더... 뭐랄까?"

"빡세구만."

* * *

정무맹이 위치한 무한.

용봉회로 인해 각지의 내로라하는 무인들이 몰려든 탓에 인산인해가 따로 없었다.

아직 용봉회가 시작되려면 닷새라는 시간이 남았기에 정무맹의 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자들은 객점을 구하지 못해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헛간을 빌려서라도 자리를 잡았고, 그마저도 구하지 못한 이들은 무한 외곽에서 야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용봉회에 몰려든 이들은 각 지역을 대표하는 가문의 차남이나 차녀, 혹은 이대제자였다.

약소 방파에서는 장자를 보낸 경우도 있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온 정파의 후기지수들은 반드시 시험에 통과해야만 했다.

정무맹주 철지량이 직접 개최하는 용봉회.

그 시험만 통과하면 새로 마련된 용봉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무림의 명숙들에게 직접 무공을 사사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그중 한 사람은 무림맹주 철지량의 제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얼마 전 은밀하게 퍼진 소문에 의하면 학관주로 거론된 이가 백로 등여평과 용무 여월협이었다.

철지량의 제자가 못 되어도 백로와 용무의 제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입관식에는 정무칠성의 일부도 모습을 보인다고 하니 이보다 대단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용봉관의 입관.

그것은 꿈이요, 보장된 출셋길이었기에 당금 정무맹 예하 모든 문파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내가 왜!"

무한의 입구로 들어서는 진무의 고함이 짜증스럽게 울려 퍼졌다.

"어차피 객점을 못 구합니다."

"구해!"

"허헛, 진무 도장. 지금 무한에 몰린 후기지수만 수천입니다. 그들을 호위하는 각 가문의 사람들까지 합하면 추산이 안 되지요."

"...."

"객점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진무의 옆을 나란히 달리는 제갈선이 무척이나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이놈들만 내려놓고 갈 거니까."

"하핫. 그러지 마시고."

"됐다니까!"

"아니 용봉회가 개최되려면 아직 닷새나 남았는데 도대체 어디에 거처를 삼겠다고 이 고집을 부리시는 거요?"

"...."

"설마. 체면 떨어지게 무당의 제자들이 야숙을 할 셈은 아니겠지요?"

진무의 짜증에도 제갈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쯤 되면 화를 낼 만도 한데 차분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언뜻 보면 진무 혼자서 화를 내며 투덜거리는 모양새였다.

"그러니 잘 부탁한다잖아. 제갈세가에서 이 두 녀석을 맡아 주겠다며?"

"물론입니다."

"그럼 됐네."

"제 말을 잘못 이해하셨군요. 진무 도장과 함께입니다."

"이게 진짜?"

눈앞의 남장 여인.

말싸움으로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살살 구슬려서 상대가 은연중에 비밀을 토해 내게 만든다.

요망한 여우가 사내로 변신한 것이 틀림없었다.

"진무 도장, 그러지 말고 마음 돌리시지요. 서로 다 좋지 않습니까?"

"안 좋아."

말해 봐야 계속 말리기만 할 것 같았던 진무가 고개를 돌리는데.

"하하, 이 사람아. 나도 함께라지 않는가?"

등여평이 환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닥쳐! 너랑 있는 것도 비슷하게 싫어!

이제 겨우 무당에서 빠져나왔다.

그 숨 막히던 스승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무림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뭐 하러 다시 정파 놈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머문단 말인가?

더욱이 무당의 도사니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다.

어떻게 봐도 진무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닷새씩이나 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망할 것들이 진짜 싫다는데 왜들 이렇게 귀찮게 구는지.

"어? 다 왔네요."

"뭐?"

제갈선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홱 돌렸다.

거대한 정문에 '제갈세가 무한지부'라고 쓰인 현판이 보였다.

어, 언제?

"자, 들어가시지요."

"들어가세. 이리 올 것을 그리 고집을 부리고. 사람 참."

"...."

등여평과 제갈선은 참 죽이 잘 맞았다.

어째 자꾸 말을 건다 했더니 사이좋게 말로 현혹하며 자신을 제갈분가 앞에 끌어다 놓은 것이다.

젠장, 이것들이.

인상을 팍 구긴 진무가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사숙?"

청우가 너무나도 지친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 자식.

마음 같아서는 객점은커녕 야숙을 시켜도 모자랄 놈의 자식.

청우 때문에 협전을 쓸 수 있는 두 번의 기회 중 하나가 날아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사숙, 객점을 알아볼까요?"

청상이 늘 그랬듯이 진무에게 묻는다. 그 역시 지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진무가 가자 하면 따라나설 게 틀림없다.

진무의 마음이 불현듯 약해졌다.

우직하고 충성스럽지만 가끔씩 사고를 치는 청우.

화적이라면 치를 떨지만 말 잘 듣고 눈치 빠른 청상.

그들은 누가 뭐래도 진무의 충직한 수하 일 호와 이 호가 아니던가?

그래, 이 정도로 용서해 주자.

뭐, 제갈세가에서 지내면 돈도 아끼고, 손님이니 술과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공짜로.

어차피 스승인 명진이 정무맹주를 반드시 만나고 용봉회가 개최된 뒤에 표주를 떠나라 했으니 못해도 닷새 동안은 꼼짝없이 무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휴, 됐다, 됐어. 들어가자. 손님으로 청해졌으니 차라리 가서 푹 쉬자."

진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나는 제갈선이라 하네. 안에 기별을 넣어 주겠는가?"

"제갈? 앗!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제갈선을 알아본 정문 위사가 급히 인사를 하고 안으로 달려갔다.

72화

"하하하! 어서 오게, 대공자."

"오랜만입니다. 분가주님."

제갈선이 환하게 웃으며 공손히 인사하는 사내.

마흔쯤 되었을까?

사내는 다름 아닌 무한 제갈분가주 제갈충언이었다.

네 곳의 분가 중 가장 어린 나이에 분가주에 오른 그였으나 그 누구도 그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무한분가는 오랫동안 본가의 대장로를 배출해 온 곳이었고, 정무맹이 위치한 무한을 대대로 지켜 왔을 만큼 정쟁(政爭)에 능한 가문이었다.

수많은 문파의 수뇌들과 머리싸움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곳을 맡았다는 것은 그 능력이 뛰어남을 입증함이었고, 더불어 본가 대가주의 신임이 지대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산산은 미리 도착해 쉬고 있네. 피곤한지 불러도 나오질 않더군."

"뭐 하러요. 늘 보는 사이인데요."

"그래, 육로로 오시기 불편하지는 않으셨는가?"

"예. 그저 달리기만 하였기에."

제갈선은 형주 인근에서 받은 습격에 대해서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개방에게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대공자님, 오랜만입니다."

마중을 나온 이는 제갈충언뿐만이 아니었다.

미리 도착한 분가의 자제들이 제갈충언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앞다투어 제갈선에게 아는 체를 해 왔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서로 간의 인사가 오고 가는 중에 제갈충언이 멀찍이 물러나 기다리고 있던 제갈선의 일행 중 한 사람에게 시선을 두었다.

"이보게. 대공자."

"예?"

"혹, 저분이?"

"아!"

제갈충언의 가리킴에 제갈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제가 함께 오신 귀한 손님들을 소개해 드리지 않았군요."

제갈선이 제갈충언을 안내해 등여평을 향해 다가갔다.

"무림의 소졸(小卒) 제갈충언이 백로 대협을 뵙습니다."

"허허, 등여평일세. 소졸이라니 너무 과한 겸양이 아닌가? 내 일찍이 무한에 군자검(君子劍)이 있다는 위명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거늘."

"어디 백로 대협에 비하겠습니까? 이리 제갈분가를 찾아 주심에 본가의 가주님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둘의 인사에 진무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랄들을 한다.

정파인들은 인사 하나에도 미사여구가 많고 거추장스럽다.

진무는 빨리 인사를 끝내고 거처를 배정받아 우글거리는 정파 놈들에게서 벗어나 쉬고 싶었다.

쉬기로 한 이상 몸에 달라붙은 먼지를 씻어 낸 뒤의 한잔 술 생각이 간절했다.

"이번에 용봉관주로 내정되셨다지요?"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저런,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군요. 지금 무한에는 백로께서 용봉관주가 되신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뭐라?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는 그저 용봉회에 관심이 생겨 구경차 온 걸음이거늘."

등여평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면 대군사와 맹주님을 만나 뵈셔야 하겠군요."

"흠, 그래야겠구먼."

제갈충언의 말에 등여평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흑의 무복을 입은 진무 일행을 바라보았다.

둘은 지친 표정이 역력했고 하나는 귀찮음이 덕지덕지 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당의 도사분들입니다."

"아, 그러한가?"

제갈충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오가다 만났겠지,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인사를 끝내고 백로와 차라도 한잔할 생각에 제갈충언이 몸을 돌리는데.

"어!"

심드렁하기만 했던 진무가 제갈분가의 자제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야, 오랜만이네. 너도 용봉회에 참가하나 보지?"

진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뒤를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어? 너, 이 새끼?"

단강구 제갈분가의 이공자 제갈근.

분가의 자제들 틈에 끼어 있었던 그가 갑작스러운 진무의 지목에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제갈선 일행에 무당의 도사인 그들이 끼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포가 아닌 흑의 무복이라 그저 호위라고 생각했었거늘.

'젠장, 실수했군.'

그의 감탄사 자체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이었으나 시선이 너무 집중되어 있었다.

무한분가주. 그리고 본가의 대공자. 거기에 무림의 명숙인 백로 등여평까지 있었다.

언행에 주의를 기울였어야 마땅한 자리였다.

제갈근이 실언을 했다며 사과하고 넘어가려 고개를 숙이는데.

"제갈근, 지금 뭐라 했는가?"

"예?"

"지금 뭐라 했느냐 물었다."

제갈선의 싸늘한 표정. 평소와 다른 하대.

더욱이 목소리에 노기까지 느껴지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갑작스레 폭우를 쏟아 내는 여름철 날씨처럼 급변해 버린 제갈선의 모습.

어이, 너 갑자기 왜 그래?

진무마저도 제갈선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다.

좀 전까지 알던 제갈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어른에게 '새끼.'라고 한 건 잘못이지만 그 정도야 또래 남자들끼리 으레 할 수 있는 말인데.

"아니, 그게."

제갈선의 표정에 제갈근이 어색하게 웃는데.

"단강구 분가에선 예를 가르치지 않는가?"

온화하기만 했던 제갈선의 날 선 목소리에 순식간에 주위의 분위기가 동토의 그것처럼 얼어붙었다.

과하다.

분가와 본가의 자제들이 가지는 격차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본가의 대공자는 곧 다음 대 제갈의 주인이었다.

원칙대로 하자면 분가의 가주들조차 머리를 조아려야만 할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한참이나 어린 제갈선이었다.

그저 말 한마디 실수한 것뿐인데 어째서 이리 화를 낸단 말인가?

나이로 따지면 무려 열 살이나 많은 제갈근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모를 줄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기분이 더럭 언짢아진 제갈근이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대공자, 말씀이 너무 심하시오. 그저 잠시 실언을 한 것뿐인데."

"닥치거라!"

"...."

"말과 행동은 마땅히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할 터."

제갈선의 날 선 목소리에 제갈근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런데 실언? 실언이라는 말로 그따위 언사가 용서될 것 같으냐! 나도 아는 이분의 신분을 단강구 분가에 속한 네놈이 모른단 말이냐?!"

듣고 있던 제갈충언이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무당 도사의 신분이 무엇이길래?

물론 대공자와 함께 왔으니 손님일 것이다. 예를 갖추어야 함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지금 제갈선이 내보이는 노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제갈선은 진중한 성격이었고, 심계 또한 누구보다 깊었다.

그럼에도 제갈근에게 저리 화를 내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의 이름이 진무일세."

제갈충언의 곁으로 백로가 다가와 슬쩍 소곤거렸다.

"진무라면? 혹?"

"당대의 무당지검이라네."

"예?!"

제갈충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무당지검이라니?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면 제갈선이 육로를 선택한 것은 백로 때문만은 아니었단 말인가?

무당지검.

그 칭호가 가진 의미.

비단 무공적인 부분만이 아니었다. 그 이름 하나로 무당을 대표하는 신분인 것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은 관계없었다. 일파의 장문인에 버금가는 신분.

서로가 전쟁 중인 상황이 아닌 자리에서 만난다면 제갈의 대가주라 할지라도 마땅히 예를 갖춰 대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를 손님으로 불러 놓고 분가의 자제가 이 새끼 저 새끼 운운한 것이다. 예와 법을 중시하는 제갈로서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사실이었다.

또한, 전 무림이 무당과 제갈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같은 정파임에도 호북을 놓고 경쟁하는 두 문파. 더욱이 얼마 전 단강분가의 일로 제갈은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방금 제갈근의 언행은 이 자리에서라면 그저 실언으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일지 몰라도, 외부에 알려진다면 또다시 제갈세가의 치부가 되기 충분한 일이었다.

자신들에게 망신을 준 무당지검을 손님으로 초대해 놓고 무시한 졸렬한 가문이 되는 것이다.

제갈충언은 제갈선이 갑자기 화를 낸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것은 무마였다.

그가 화를 냄으로써 실수를 인정했으니, 모든 것은 진무에게 실언을 한 제갈근의 한 명의 잘못으로 국한되는 것이다.

물론 제갈근이나 다른 분가의 자제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쯧쯧, 멍청한 것들. 어찌 이리도 아둔한가?'

제갈충언은 자신이 나설 때를 알았다.

지금의 상황을 모두에게 알려 주어야 했고, 무엇보다 질책을 받고 있는 답답한 자리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는 없었다. 풀어 주어야만 했다.

"이놈, 제갈근!"

"...?"

"어서 사죄드리지 못할까!"

"예?"

"감히 무당지검에게 그따위 언행이라니! 지금 네놈의 실언으로 오랫동안 제갈이 이어 온 이름이 더럽혀졌음을 모른단 말이냐!"

"...."

진무가 아니라 무당지검이었다. 제갈충언의 호통에 분가의 자제들이 진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갈세가의 인물들은 그제야 제갈선이 화를 낸 이유를 눈치챘다.

제갈충언의 한마디로 인해 방금까지 제갈선의 행동이 과하다 여기는 듯하던 이들의 눈빛이 제갈근에 대한 질책으로 바뀌었다.

"이런, 이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무한분가의 가주 제갈충언이 이놈을 대신하여 무당지검께 용서를 구합니다."

"아, 뭐.... 예."

제갈충언의 사과에 진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제갈충언이 제갈근을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제길.'

제갈근은 결국 내키지 않음에도 진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강구 제갈분가의 차남 근이 무당지검께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

진무가 눈앞의 상황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그저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갈선의 노성, 제갈충언과 백로 사이에서 오간 말들과 뒤이은 제갈충언과 제갈근의 사과.

대충 느끼기에 뭔가 복잡한 것들이 마구 얽히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가문의 체면이라든지 문파 간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라든지.

여하간에 뭔가 둘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것 같은 느낌인데.

그래서 뭐?

뭔가 숨겨져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진무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그러니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진무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숙어진 정수리 하나.

제갈근의 대가리.

그게 중요했다.

'요 새끼. 큭큭, 꼬라지 좋은데?'

진무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그저 닷새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차에 놀 거리가 생긴 것뿐이다.

"이거 미안하오. 예서 보아 반가운 마음에 괜히 알은체를 하여 곤란하게 했습니다."

진무가 웬일로 예를 다해 마주 사과를 한다 싶어 고개를 들려던 제갈근의 귓가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그래, 그래. 앞으론 그렇게 고개 숙이고, 눈도 깔고.]

진무의 전음이었다.

'이런 쌍놈의 새끼가....'

도로 고개를 푹 숙인 제갈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해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큰일도 아니었소."

진무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하면 저는 동생과 함께 정무맹에 들를 일이 있으니 먼저 쉬고 계십시오."

"그러시지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예."

제갈선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도 함께 가세. 아무래도 나 역시 맹주님과 대군사를 만나 보아야 할 듯하니."

등여평이 함께하겠다는 말에 진무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 그럼 먼저 쉬고 있겠습니다."

진무는 진심을 담아 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잘 생각했다.

어서 가라. 웬만하면 다시 오지 말고. 귀찮다.

73화

진무 일행의 숙소로 배정된 곳은 무한분가 가장 안쪽의 전각이었다.

진무가 조용한 곳을 원했기에 그리 정해졌다.

조금이라도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곳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보게, 제갈근."

"...예."

"예는 무슨. 처음 본 사이도 아니고 그냥 전처럼 말 놓지."

"...."

제갈근은 진무의 웃는 얼굴을 짓이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망할 자식이.'

시비를 붙여 준다 했더니 편한 사람이 좋다면서 자신을 지목하는 바람에 제갈충언이 실수를 만회할 겸 냅다 붙였다. 잘 모시라 신신당부까지 하면서.

"...괜찮습니다. 제가 어찌 무당지검께 말을 놓겠습니까. 이게 편합니다."

"아 그래? 이거 참 나이도 비슷한데...."

비슷 좋아하네.

제갈근의 나이 스물여덟이다. 진무보다 여덟 살이나 많다.

저놈이 분명 일부러 반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망할 도사 놈이.'

제갈근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삼켰다.

"음, 그럼 나 혼자 말을 놓는 것으로 하지. 괜찮겠지?"

"...그러...시지요."

"어째 이를 꽉 다문 소리구먼?"

"...그럴... 리가요."

"뭐, 아니면 되었네."

진무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무당이 자네 가문과 참 인연이 많아. 안 그런가?"

이놈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고 보니 자네 말이 맞았구만. 나중에 꼭 다시 보자 했었지 않은가?"

"...."

"그 콧수염 친구는 잘 있나? 우리 청상이를 시험하겠다 시비를 걸었더랬지. 아, 그러고 보니 이제는 버려졌으려나?"

뿌득, 뿌드득.

제갈근은 소리가 나지 않게 열심히 이를 갈았다.

"그러고 보니 아쉽겠어? 말로야 아니라고 하지만 일해상단을 어찌해 보려 이성상단을 움직였는데 말이야."

"그런 일 없소."

"이 사람, 다 지난 일이네.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니야."

"...."

"감시를 붙이지 않나, 암천대를 보내 나를 죽이려 하지를 않나."

"그런 일 없다 하지 않습니까."

제갈근이 최대한 웃는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허, 모두가 아는 사실을."

"진무 도장... 그런 일 없다고...."

"어허, 왜 이러나. 그날 그 대결 이후로 자네 아버님이 다 인정한 사실이 아니었나?"

"...."

제갈근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진무를 노려보았다.

"걱정 말게. 그런 일로 이제 와서 자네를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네. 나는 뒤끝 없는 사람이거든. 아주 깨끗하지. 청정수 같은 사람이니 걱정 말게. 하핫."

"...."

"무림에서 그만한 일이 어디 특별하겠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무슨 말은. 그저 지난 과거를 잊고 이제부터라도 잘 지내 보자 하는 것이지."

"...."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그럴싸하게 건네는 진무의 말에 제갈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성격이었나?

시비 대신 자신을 청하였을 때만 해도 분명 자존심을 상하게 하려 한다 생각했다. 각오도 단단히 하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 저 깔끔한 표정은 다 뭐란 말인가? 생각했던 것과는 영 다르지 않은가?

자신이 오해한 것일까?

하긴, 무당의 도사들은 그랬다. 한없이 너그럽고 포용력이 넘친다.

일해상단의 일만 해도 그렇다.

모든 것은 제갈분가의 음모였다.

당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무당은 어떠한 피해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단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진궁은 일해상단의 일이 있은 이후 제갈무린을 찾아와 잘 부탁한다면서 인사를 하고 갔고, 오늘 무한분가를 찾아온 진무는 심지어 반갑게 먼저 인사를 해 오기까지 했다. 화를 낸 것은 제갈충언과 제갈선이었다.

사죄하던 자신에게 날린 전음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과거의 악연을 생각하면 그 정도 반응은 문제랄 것도 없었다.

"어떤가? 술이라도 한잔하며 우리의 악연 같지 않은 악연을 풀어 보는 것이?"

"아..."

진무를 오해했다.

그런 것이다.

그를 잘 알지 못하고 자신이 속 좁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환하게 웃는 진무의 얼굴을 보며 완전히 마음이 풀어진 제갈근이 피식 웃었다.

"좋소. 그럽시다. 진무 도장께서도 술과 고기를 즐기신다고 알고 있으니 내 이름난 주루를 예약하리다."

"응? 그건 무슨 소리야?"

"...예?"

"도사가 사람들 다 보는 주루에서 술을 마실 수야 있나."

분명 전에 방천현에서 아주 그냥 막 미친 듯이 먹는 걸 봤는데.

사람들 눈 같은 건 한 톨도 의식하지 않고.

"그냥 여기서 구워 먹도록 하세. 술도 사 오고."

하긴, 방천현과는 다르다.

아무래도 정무맹이 있는 곳이 아니던가. 분명 신경 쓰이는 정도가 다를 것이다.

"그, 그러시지요."

제갈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면 시비에게 고기와 술을 가져오라 하겠소."

"왜?"

"예?"

"시비는 불편하다니까."

"...."

순간 제갈근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에 눈치 빠른 청상이 다가왔다.

"사숙, 불을 피울까요?"

"응? 니가 왜?"

"예?"

"여긴 제갈세가야. 안 그런가, 제갈근?"

진무가 웃으며 쳐다보자 제갈근이 멍청하게 진무를 마주 쳐다보았다.

"술 한잔하자니까? 고기도 굽고, 술도 마시고?"

"그래서 시비를...."

"불편하다니까."

그제야 진무의 말뜻을 대강 이해한 제갈근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직접?"

끄덕끄덕.

"아!"

그리고 이어진 진무의 간결한 고갯짓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부려 먹겠다는 뜻이다.

"자, 자, 무엇 하는가? 불도 피우고, 고기도 가져와 굽고."

이, 이 자식이.

제갈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오해는 무슨! 이런 망할 놈의 도사 자식!

"왜? 싫어? 과거의 악연을 풀어 보자는데?"

"...."

"무한분가주에게 직접 찾아가야 하나?"

제갈근이 진무를 매섭게 노려보다 거칠게 몸을 돌렸다.

"아, 배가 고프니 빨리 좀 부탁하세."

"...."

"아, 그리고 술은 금로주가 입에 맞던데. 그걸로 부탁하네."

성난 걸음으로 정원을 빠져나가는 제갈근의 등 뒤로 진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핫, 이렇게 서로 간의 오해를 풀게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진무의 웃음에 제갈근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스스로의 관대함에 취해 연신 흡족하게 웃었다.

이 얼마나 너그러운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으로 배를 짼다든지 팔다리를 으깨 놓는다든지 하는 뒤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작은 봉사만 요구했을 뿐이다.

* * *

치이익.

폭풍 같은 시간이 끝났다.

어찌나 잘 처먹는지 쉬지도 않고 석쇠에 고기를 구워야 했다.

질기다느니, 육즙이 없다느니.

중간중간 비워진 술병을 얼마나 바꿔 왔는지 기억도 안 났다.

독째로 가져다 놓겠다니까 그러면 주향이 날아가서 술맛이 없어진다느니.

호랑말코 같은 도사 놈.

하도 쉴 틈 없이 뛰어다녀서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고기를 들이붓듯 처넣고 있는 저 돼지 같은 놈의 아가리라도 찢어 놓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제갈충언이 어쩌고 제갈선이 어쩌고를 들먹였다.

꺼억.

얼마나 처먹었는지도 모를 만큼 처먹고 나서야 배를 만족스럽게 두들기는 돼지 같은 놈. 이름이 청우랬던가?

"이거 참, 이리도 열성적으로 구워 주시니 미안해서 어쩝니까."

살집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휘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죄송합니다. 사숙께서 절대 나서지 말라고 하셔서."

그러면 어떻게 좀 티 안 나게 돕기라도 하든가.

그냥 처먹기만 했다.

구운 고기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빨리.

"청우야. 어찌 성의를 무시하는 게냐? 이게 다 제갈근 저 양반이 우리와 악연을 풀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인데."

진무가 되레 청우를 나무랐다.

"그런가요?"

"암. 그나저나 배부르게 먹은 게냐?"

"조금 모자라긴 한데...."

"저런."

청우가 제 배를 슬슬 어루만지고, 진무가 그를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자 제갈근이 콧김을 뿜어대며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제 놈 혼자 처먹은 게 십 인분도 넘는데.

"하긴 나도 술이 좀 모자라긴 하다만."

이미 굴러다니는 술병이 다섯이다.

"사숙, 밤이 늦었습니다."

보다 못한 청상이 어색하게 웃으며 진무를 말렸다.

그나마 착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쯧쯧, 아직 자정도 안 되었거늘!"

진무가 핀잔을 주며 혀를 찼다.

평소의 청상은 너무 물렀다. 수적 놈들 상대할 때처럼 좀 더 잔혹해지면 좋을 텐데.

이런 성격으로 어찌 용봉회에서 그 많은 무림의 자제들과 경쟁하겠다고.

하지만 이제 갓 하루가 지났을 뿐이고, 제갈분가에 기거할 날은 아직 나흘이나 더 남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이쯤 먹고 그만 쉬도록 하자."

진무의 말에 제갈근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가 보게. 내 덕분에 모처럼 즐거웠네."

오늘은?

"아, 내일 아침에는 해장국 좀 부탁하세."

"...."

"술 마신 다음에는 해장을 꼭 해야 해서 말이야. 내 분가주를 뵈면 자네 덕에 잘 보내고 있다고 꼭 전함세."

"...예, 감사합니다."

제갈근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자, 그럼 우리도 이만 쉴까?"

"예, 사숙."

진무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가는 뒷모습에 제갈근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일어났다.

"아!"

진무가 가다 말고 뭔가 생각난 듯이 그 자리에 멈춰 제갈근을 돌아본다.

"거, 치우고 가게. 도와주고 싶은데 자네가 다 해 주겠다 했으니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말이야."

해 주겠다는 말은 한 적도 없는데.

"자, 그럼 내일 보세. 청상, 청우. 들어가자, 어서."

"...예, 사숙."

진무가 피곤한 듯이 크게 하품을 하며 채근하자 청상과 청우가 진무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

고기를 굽고 난 숯.

어지럽게 널린 술병들.

"이런 개...."

제갈근은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 두고 보자. 내 반드시 검성의 제자가 되어."

그리곤 흉신악살과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며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랬다. 진무는 뒤끝이라고는 모르는 대무당파의 너그러운 도사였다.

* * *

밤늦은 시간.

진무는 과하게 먹은 금로주로 인해 아랫배가 빵빵해져 옴을 느끼고 일어났다.

드르렁, 푸우.

야트막한 야산처럼 볼록하게 솟구쳤다가 내려가는 뱃살.

많이 고단했던 것인지 이리저리 뒤척이며 열심히 코를 고는 청우와 반듯하게 누워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청상.

자는 것마저 각자 성격들이 드러나는 모습에 진무가 피식 웃었다.

'다음부턴 같이 자지 말아야지.'

어차피 앞으로 나흘만 더 지나면 한동안 볼 일도 없었다.

진무는 시끄럽게 방 안을 울리는 청우의 코골이를 피해 소피를 보러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거처로 배정받은 전각.

무당지검이라는 칭호 때문인지 아니면 제갈선의 입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셋이 지내기에는 무척이나 넓은 곳이었다.

방이 네 개나 되는 전각 앞으로 꾸며진 뜰에는 작은 정자가 운치 있게 자리 잡고 있었고, 때마침 물골을 내어 만든 큼지막한 연못도 있었다.

쪼르르르.

시원하게(?) 볼일을 마친 진무는 잠에서 깬 김에 후원을 거닐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가 떠올랐다.

사패천, 팔십 년의 세월, 충직했던 천우명, 비고에 쌓아 두었던 수많은 금은보화....

혁련무강으로서 살아온 긴 세월.

후회하지 않았다.

누릴 것을 다 누려 보았으니까.

그래도 양의심공을 익히고 나면 반드시 찾으러 가야지.

정무맹 하나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정무맹이든 사패천이든 주인은 그대로 두고 자신은 그 위에 군림만 할 생각이었다.

필요하면 마교까지라도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황제까지...는 반란이니 나중에 생각하고.

어쨌든 모두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던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생각에 빠져 한참을 걷던 진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어?

어디지, 여긴?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들이 배정받은 전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너무 많이 걸은 모양이었다.

"이런 멍청한. 누가 목숨을 노렸으면 꼼짝없이 뒈질 뻔했네."

진무가 어이없이 웃으며 몸을 돌리는데.

"진무 도장?"

"...?"

누구?

처음 보는 여인이 진무를 향해 인사를 건네 왔다.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뭐가 이리 예뻐?

74화

마치 달덩이가 지상에 떨어진 것 같았다.

빛이 난다. 빛이.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사패천에 두고 온 애첩 화양이? 비교가 안 된다. 보름달 옆의 반딧불 정도나 되려나.

연지를 바르지 않았음에도 입술은 앵두보다 붉었고 분칠을 하지 않았음에도 얼굴에서 희게 빛이 나는 듯했다.

한 발자국씩 내딛는 걸음은 황성의 교태전을 채운 여인들처럼 기품이 넘쳐흘렀다.

"하하, 아직 깨어 계셨습니까?"

"...?"

뭐지? 이 목소리?

이게 뭔 불협화음이란 말인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이리 걸걸할 리가.

설마 누군가의 육합전성(六合傳聲)?

진무가 매서운 표정으로 고개를 휙휙 돌리는데.

"뭘 찾는 겁니까?"

"...."

분명 그녀의 입에서 난 소리였다. 입 모양과 목소리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진무 도장?"

재차 사내의 목소리를 걸걸하게 내며 생긋이 웃는다.

그 엄청난 부조화에도 미소 하나만큼은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눈깔이 낯이 익다.

사슴처럼 동그랗게 뜨고 사람을 홀리는 요망한....

"제갈...선?"

"네?"

"...뭐?"

고운 입술을 모아 대답하며 살풋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진무가 눈을 끔벅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분명 제갈선을 불렀는데 어째서 니가 대답하냐?

설마?

남장 아래 감추었던 모습이?

"...."

그 놀란 모습이 하도 엉거주춤했는지 여인이 오던 걸음을 멈추고 눈을 찌푸렸다.

"남장에 어울리는 소리만 내다 보니 원래의 목소리가 습관이 안 되어서...."

"...."

이게 말이.

"큼큼, 이제 좀 괜찮은가요?"

말이 되냐!

진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헛기침 몇 번에 목소리가 외모만큼이나 아름답게 변하는데.

옥구슬? 청아함? 그런 걸로는 표현이 안 된다.

이건 뭐 신이 좋다는 걸 모조리 때려 박아 놓은 것도 아니고.

정말 말도 안 된다.

사람일 리가 없었다. 저 외모에, 저 목소리가 어떻게 사람이란 말인가?

놀람을 넘어선 경악이었다. 진무는 자기도 모르게 제갈선이 다가오는 만큼 물러났다.

"...."

진무가 자꾸만 멀어지자 제갈선이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쳇, 굳이 그런 표정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도사들이 금욕적이라지만 그리 싫은 표정을 지으실 줄 알았으면 그냥 남장을 할 걸 그랬네요."

볼을 부풀리며 삐죽거리는 모습까지... 예쁘다.

나이 먹고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제갈...서언이 맞는 거냐? 아니 맞는 거요?"

그녀에게 반말을 한다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졌다.

"서언은 아니고, 이제부터는 산산입니다."

"어? 뭐?"

"제 이름요. 제갈산산입니다."

"제갈...산산?"

"예."

아, 그렇구나.

진무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갈선은 정무맹에 갔다가 제갈세가로 바로 돌아간 겁니다. 다들 그리 알고 있으니 모른 척해 주십시오."

진무는 또다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싫은 표정도 좀 지워 주시죠."

어떤 표정? 내가? 지금?

아니, 나 지금 놀란 표정이라니까?

니 외모와 목소리에 놀라 자빠진 표정이라고.

"예, 예.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을 테니 그만 물러나시고요."

물러나는 게 아니라, 혹시나 때라도 묻을까 봐....

"방금 정무맹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백로 대협께서는 용봉관주의 문제로 좀 더 머무신다 하여."

"아."

그딴 노인네 오든가 말든가.

"그리고 지난번 습격에 대해 확인을 해 보았습니다."

제갈선, 아니 제갈산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극비라며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더군요. 더욱이 그 소녀에 관해서는...."

제갈산산이 뭐라고 열심히 설명을 한다.

귀에 들리지 않는다.

주책맞게도 진무의 눈에는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빨갛고, 예쁘고....

"...내일 함께 가시겠습니까?"

"어, 뭐?"

"내일요."

"아, 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대군사님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내일 맹주님을 만나 뵈러 가겠다고."

"그러지... 응? 뭐?"

"예?"

멍하니 있다가 얼결에 대답해 버렸다.

그런데 대군사? 맹주?

이 요망한... 예쁜 여우한테 홀려서 내용을 하나도 못 들었다.

뭐라고 한 거지?

그런데 제갈산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아, 젠장.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호랑이에게 물려 갔을 때는 잘만 차렸던 정신이 망할 여우에게는 안 되는 것인가?

* * *

"...."

결국 거부하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청삼의 사내.

귀티가 좔좔 흐르는 얼굴에 학익선을 들고 웃는 모습, 흐트러짐 없이 양쪽으로 나누어진 단정한 수염은 누가 봐도 천생 학사의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옆에 다소곳하게 앉은 제갈산산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무 도장... 커허험! 아, 죄송합니다. 이 목소리가 습관이 안 되어서."

"...."

"이분은 정무맹의 대군사십니다."

정말이지 적응 안 된다.

금방 옥구슬 목소리로 바뀌긴 했으나 저 얼굴에 저 걸걸한 목소리라니.

하여간 제갈산산의 소개에 학익선을 든 청삼 학사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정무맹 대군사 제갈협진이오. 근자에 위명이 쟁쟁한 무당지검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안다. 그것도 아주 잘 안다.

이 망할 학사 놈의 간계에 속아 패한 전투가 몇 번인지, 사패천이 입은 손해가 얼마였는지 추산도 안 된다.

무공이라면 정무칠성 앞에도 꿀리지 않는 그였으나 지략에서만큼은 정무맹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도 패할 때마다 제갈협진이라는 야비한 군사 놈을 가진 정무맹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빤히 바라보는 진무를 향해 제갈협진이 의아하게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무당의 진무입니다."

진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자 제갈협진이 빙긋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맹주께서 맞이하셔야 마땅할 것이나 선약이 있으셔서. 잠시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아니 뭐 딱히 보고 싶지는."

본능적으로 속마음을 말해 버렸다.

"...예?"

"아, 아닙니다."

진무가 어색하게 웃자 제갈협진과 제갈산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빨리 가고 싶다.

팔십 년 세월이 허망하다. 고작 여인의 미색에 취해서 적진의 중심부...는 이제 아니지만 정무맹주실까지 내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그보다 어떻습니까? 정무맹은?"

"...음, 크네요."

"예?"

"...."

멀뚱히 진무를 응시하던 제갈협진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역시 무당의 도사다우시군요. 우문에 현답이라 해야 하나요? 제가 괜한 질문을 한 모양입니다."

"...."

제갈협진의 시원한 웃음에 되레 진무가 머쓱해져 버렸다.

우문에 현답은 무슨.

큰 걸 크다고 했는데 왜 웃지?

제갈협진이 물은 것은 정무맹의 분위기가 어떠한가였고, 진무의 대답은 본 그대로였다.

전각도 많고 높고 정갈하다. 사패천의 본성보다도 훨씬 큰 규모였다. 짓는 데 돈이 꽤 많이 들었을 것 같다.

"맞습니다. 크지요. 과하게 큽니다."

"...."

"하나 화이부실(華而不實)이지요. 크기만 할 뿐 실속이 없으니."

제갈협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꽃은 화려하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말이었다.

"엄살이 심하시네요."

진무는 그 말에 고소를 머금었다.

당대의 정무맹은 누대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하다. 그것이 속세의 평이었다.

그리고 진무 또한 직접 경험해 본 적도 있었다.

정무맹주 검성 철지량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무공도 무공이거니와 세력을 활용할 줄 아는 진정한 지도자였다.

저 잘난 맛에 뭉쳐지지 않아서 유명무실하기만 했던 구파와 오대세가는 물론, 그 이하 중소 방파까지 규합했다.

또한 최단기간에 맹의 예하로 여섯 개의 무력 단체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가 맹주가 되고 십 년, 정무맹은 단숨에 일월마교와 사패천을 밀어내고 중원을 삼분하는 거대 세력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철지량 개인의 능력은 아니었다. 그 휘하에 제갈협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무맹이 속 빈 강정이라는 것은 그저 욕심 많은 그의 엄살일 뿐이었다.

"하핫, 그렇습니까? 하지만 도처에 사악한 무리들이 득세함에도 그들을 모두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음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제갈협진의 말에 진무가 피식 웃고 말았다.

도처에 득세한 사악한 무리.

당연히 사패천과 일월마교를 이름이었다.

그리고 바른길이라 함은 그들을 밀어내고 중원의 패권을 잡겠다는 뜻.

역시 정파 놈들은 말발 하나는 끝내준다.

아주 입에 기름을 바른 듯이 저런 오글거리는 말이 잘도 튀어나온다.

"왜 웃으십니까?"

"그냥요. 그럴싸한 말로 포장은 되었는데 제법 야심만만하다 싶어서요."

"...."

순간 제갈협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속뜻을 알아들었단 말인가?

좀 전까지만 해도 멍한 표정을 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도사였는데.

힐끗 보니 제갈산산은 이미 예상한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문만 무성했던 그에 대해서는 지난밤 제갈산산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누구도 몰랐던 제갈산산의 남장을 단번에 눈치채었다 했다.

더욱이 그들이 이동하며 만난 자들은 양소방이 뒤쫓고 있는 '궁'의 무인들이 확실했다.

제갈산산의 말에 따르면 그의 무위는 확실히 '강'의 경지였다.

그것도 단순히 묶어 두는 게 아니라 쏘아 내는 경지이니 이미 검환(劍丸)이 아닌가.

결국 그의 실력에 대한 가설은 두 가지였다.

원래부터 그는 강의 경지였다.

하지만 약관에 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은 고금사 어디를 뒤져 보아도 없었다.

그 정도 경지였다면 양소방이 알아보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더군다나 알아본 바로는 그는 일 년, 혹은 그 이전까지 무공조차 알지 못하는 도동이었다고 했다.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단강구에서 양소방을 만난 이후 성장했다는 뜻이 된다.

검사에서 검강으로.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불과 한 달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건 검에 대한 깨달음이 중원의 그 누구보다 빠르고 깊다는 검성 철지량이라도 불가능한 성취였다.

'이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직접 대하고 나니 진무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깊어졌다.

"왜 그리 보십니까?"

"아, 아니오. 내 진무 도장을 잘못 본 듯하여."

잘못 보기는. 오늘 처음 봤다.

"하핫, 어쨌든 대단하시오. 그 나이에 강의 경지라니."

"뭐...."

제갈협진의 말에 진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실력을 감추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긴, 제 자랑은 안 하고 시키지도 않은 사숙 자랑하기 좋아하는 놈들도 있는 판에.

"한데 어찌 저를 부르신 겁니까? 아직 용봉회가 개최되려면 나흘이나 남았는데요."

그저 의문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제갈협진의 눈빛이 또 한 번 변했다.

그걸 놓칠 진무가 아니었다.

애써 표정은 감추고 있는 것 같았지만 미세한 동공의 움직임과 작은 떨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죠. 쓸데없이 말장난하지 마시고."

"아, 그."

물론 뜻이 있으니 불렀겠지.

하지만 제갈협진은 자연스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이질적인 진무의 말투.

도사라는 고정 관념 때문이기도 했지만 너무도 직설적이다.

변초 없이 핵심을 그대로 찌르고 들어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전형적인 도사와는 지나치게 판이하다.

"핫핫핫! 이거 대군사가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구만그래."

열린 문과 함께 들어오는 두 명의 인물.

제갈협진과 제갈산산이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고, 진무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망할.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75화

"군사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시게."

"허헛. 저놈이 저렇다니까요."

등여평이 중년인의 말을 받아 웃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진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나 대답했다.

등여평과 함께 들어온 인상이 강해 보이는 노인.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피부는 오히려 중년인의 그것처럼 보였다.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일어나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정무맹주 검성 철지량.

어찌 잊겠는가? 자신의 숙적 중 하나였는데.

더욱이 과거에 보았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었다.

무겁다.

그저 방 안에 들어오기만 했는데 공기가 무거워졌다.

진한 압박감에 숨이 막혀 올 정도였다.

그것은 격차였다.

과거와 달리 지금 눈앞에 있는 철지량은 진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무인이기 때문이었다.

'젠장, 아직 멀었군. 저 자식을 따라가려면.'

진무가 놀라고 있는 사이 철지량 또한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일부러 기세를 흘렸다.

그런데 저 모습은 뭐란 말인가?

처음에는 당황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허, 이거 들은 것보다 훨씬 이상이구만 그래.'

진무는 자신을 보았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분명 첫 만남이었다. 아무리 무당지검이라는 칭호를 받은 도사라고 해도 그 반응은 너무나 예상외였다.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들 중 그런 자가 있던가?

대부분 황송한 표정으로 일어나 삼생의 영광이네 뭐네 하면서 한껏 격앙된 목소리를 내뱉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마치 오랜 대적을 보는 것 같은 저 도발적인 눈빛은 뭐란 말인가?

약관에 강의 경지에 오른 무당의 도사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습니까? 제 말이 맞지요?"

둘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기류를 느끼고 있던 등여평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려. 과연 용봉관주의 말대로입니다. 이거 참,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에요."

아주 죽이 잘 맞는다.

그리고 용봉관주?

등여평이 결국 수락을 한 모양이었다.

금시초문이라더니 지가 언제부터 용봉관주였다고 철지량 옆에 딱 붙어서는.

둘의 대화에 진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하핫! 이런이런. 이리되면 우리가 서신을 괜히 보낸 셈이 되었나?"

"...."

서신?

그러고 보니 무당 장문인 명현도 서신을 주고 선택을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거 원. 이보게 대군사. 이거 우리가 큰 실수를 한 모양일세."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

둘이 아주 주거니 받거니 잘도 웃는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는 진무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 앉으시게."

철지량이 앉으며 자리를 권하자 진무를 누르던 기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쳇, 시험을 해 보았다는 말이지.'

자신이 숨이 막힐 정도였다.

등여평은 둘째 치고, 미리 언질을 준 게 아니고서야 제갈협진은 물론 제갈산산이 무표정하게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앉으라니까."

재차 권하는 손짓에 진무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딱히 그와 동석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맹주에게 인사를 전하고 표주를 떠나라는 스승과 장문인의 명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굳이 나흘을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인사만 끝나면 곧바로 떠날 수 있었다.

"내 직접 서신으로 자네를 보고자 청한 이유를 아시는가?"

"...."

딱히 이유를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런데 청해?

"처음에는 비흔이 천거하여 자네를 가르쳐 볼까 생각했네."

철지량은 제갈협진처럼 둘러 오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밝혔다.

그런데 비흔? 진무가 의아한 표정을 하자 제갈협진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무풍개 어르신을 맹 내에서 칭하는 직명입니다."

"아."

그냥 무풍개라고 하지. 쓸데없이 명호를 여러 개 만들어서 사람 헷갈리게.

아니, 그런데 누굴 가르친다고?

그제야 진무는 장문인이 내민 선택지 중 하나가 저들이 먼저 청한 것임을 깨달았다.

아, 잠깐. 이 새끼들이!

만약 그들이 청하지 않았다면?

진무에게는 대제자와 무당지검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가정이 아니라 분명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굳이 자신이 운공의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도문을 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더욱이 남아 있는지의 여부도 불확실한 양의심공의 후반부였다.

만약 그들이 장문인에게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반쪽짜리건 뭐건 양의심공을 벌써 익히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무는 빽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쨌든 자네의 실력을 보니 가르침을 받기는 실격일세."

누가 가르침 따위를!

할 생각도 없고 필요도 없었다.

"당연한 말입니다. 무당지검이 아닙니까? 더구나 저 아이는 벌써 저와 동수를 이룰 정도입니다."

"그렇구려. 흠, 이거 용봉관주이신 등 대협과 동수라면 무관에 입관을 시킬 수도 없고. 어디 좋은 자리가 없으려나?"

철지량이 진무를 힐끗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혹, 용봉관의 무사부는 어떨까요? 나이는 어리지만 저 아이의 신분이나 무공에 대한 깨달음을 보면 충분할 것 같지 않습니까?"

"충분이요? 차고도 남지요."

이것들이?

등여평은 제갈산산과 함께 정무맹에 들른 이후 계속 머물렀다. 분명 둘 사이에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 갔을 테고 말하는 걸 봐서는 지금의 저 대사도 미리 맞춘 게 분명했다.

"이보게, 대군사.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지당하십니다. 근래에 내리신 결정 중에 단연 최고입니다."

"허허, 자네 생각도 그러한가?"

"암요."

"저도 찬성입니다."

제갈산산까지 걸걸한 목소리로 동조를 하고 나섰다.

하지만.

"싫습니다."

"어?"

"뭐?"

"응?"

"예?"

진무의 단호한 거절에 각양각색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마치 거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이.

벙찐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보던 등여평이 설득하듯이 입을 떼었다.

"아, 아니 이보게, 진무 도장. 용봉관의 무사부 자릴세. 자네가 속세에 무관심하여 잘 모르는 모양인데, 거론되는 사람만 해도...."

"싫다니까요."

진무로서는 당연하다.

맹주 자리를 준다 해도 거절할 판이었다.

"...."

정말이지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용봉관의 무사부 자리? 당연히 지들 아랫자리다.

더욱이 그냥 자리만 맡겨 둘 리 없었다. 엄청나게 부려 먹을 것이 틀림없었다.

진무가 뭐가 아쉬워서 중원 각지에서 모인 코흘리개나 가르치고 있단 말인가?

겨우 표주를 핑계로 무당을 떠나왔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꿈, 양의심공을 하루빨리 찾아내는 것도 시급한데 이것들이 어디서 엮어 매려고.

"저는 그저 장문인께서 인사만 드리라 하여 찾아온 것뿐입니다."

진무는 '인사'라는 단어를 한껏 강조했다.

철지량은 그런 진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민되겠지. 고민될 수밖에 없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강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 가지는 이름값은 어마어마하다.

등여평이 다시 한번 설득한다.

"이보게 진무 도장. 잘 생각하게. 보통 기회가 아닐세. 무당지검이 용봉관의 무사부가 된다면 무당의 위신도 한껏 세워질...."

"인사만! 드리고! 갈! 겁니다."

진무는 곧바로 말을 끊음으로써 철벽 방어를 쳤다.

절대로 싫었다.

"진무 도장,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

초롱초롱한 사슴 눈망울로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 요망한 제갈산산의 말에는 조금 휘둘릴 뻔도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정은 동일합니다. 인사만입니다."

"...."

"음."

모두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하하, 그런가? 인사로구만. 인사야."

진무의 의도와 달리 철지량이 시원스럽게 웃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인사만 받도록 하겠네."

"...예?"

철벽 방어가 너무 쉽게 해결되자 되레 진무가 어안이 벙벙했다.

"자네 무림인들 간의 인사가 무엇인지는 알지?"

"...."

무림인들 간의 인사?

그게... 뭐였지?

처음 듣는다.

혹시나 싶어 슬쩍 쳐다본 제갈협진이나 제갈산산도 모르는 눈치다.

"자, 나가세. 인사를 받으러."

"예?"

"허, 이 사람. 뭘 모른 척하고 그러시는가?"

모른 척이 아니라 모른다니까.

"허헛, 이거 참, 검을 꺼내 든 것이 얼마 만인지."

철지량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일어나 벽면에 걸린 자신의 검을 잡았다.

응? 그런 뜻이었어?

"하핫! 그렇지요. 무인 간의 인사. 받으셔야지요."

제갈협진이 거들고 나선다.

누가 봐도 어거지로 때려 맞춘 게 분명하다.

"하긴 그렇구만. 무인 간의 인사인 게지. 다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말이야."

"맞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정무맹에는 의룡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목숨만 붙어 있으면 살려 내신다는. 무당과 연락을 주고받자면 한 한 달 요양할 정도로 다치면 딱 좋겠네요."

등여평과 제갈협진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아니 진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저희들끼리 요양 시기까지 정해 놓는 상황에 진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인사...하신다면서요?"

제갈산산이 걸걸한 사내 목소리로 방긋이 웃는다.

"...."

잊고 있었다. 이것들이 죄다 한패라는 것을.

인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가 그 검은 속내를 모를 줄 알고?

어떻게든 힘으로 눌러서 다치게 하고 무당을 압박해, 어떻게든 진무를 용봉관에 눌러앉게 할 참인 것이다.

"...."

진무가 그들을 보며 한숨을 짓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철지량. 몇 번이나 부딪쳐 보았던 그의 검공이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다. 과거의 철지량, 그리고 지금의 철지량.

그리고 자신의 무위는 어느 위치에 와 있는가?

어차피 언젠가는 만나야 할 상대였다. 정파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반드시 꺾어야만 하는 상대였다.

'좋아. 해 주지, 인사.'

진무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 * *

정무맹주의 집무실이 있는 대전각 아래.

'크기도 하다. 이건 뭐 죄다 크구만.'

그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집무실 한쪽 벽면의 통로를 따라 지하로 한참을 내려왔다.

그 비싸다는 야명주를 통으로 때려 박아 밝힌 복도.

'저게 다 얼마야?'

마음 같아서는 몰래 하나를 파내 가고 싶을 정도였다.

휘황찬란한 야명주의 복도를 지나자 거대한 철문이 나왔고, 그 안에는 장방형(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동이 있었다.

"내 개인 수련장이라네."

철지량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진무는 속으로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무림에 알려진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소탈한 정무맹주.

권력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수하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참, 개소리도 여러 가지다. 도대체 누구의 기준으로 말하는 소탈함이란 말인가?

진무는 사패천주였을 때도 이런 개인 연무장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줄줄이 박힌 야명주도 야명주지만 이건 뭐 한 백 명쯤 들어가도 모자라지 않을 정방형 개인 연무장.

더욱이 그 높이가....

지하에 어떻게 이런 걸 뚫었을까?

과하다. 과하기 짝이 없다.

그냥 들판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아까운 돈을 써 가며 이런 공간을 만들었단 말인가?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었다.

"맹주님은 너무 소탈하십니다. 연무장 바닥을 이런 잡석으로 까시다니요."

"어허, 이 사람. 맹의 재정도 생각해야지."

제갈협진이 안타까워하자 그걸 맞장구친다.

금강석을 깔아도 진각 몇 번 밟고 칼질 몇 번 하면 다 박살 난다.

"그렇군요. 놓여진 무기들도 고작 백련정강이라니, 정말이지 맹주님의 검소함에 제가 다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허헛, 제갈가에서 너무 과용하는 게야."

제갈산산이 걸걸한 목소리로 감탄하자 그걸 또 웃으며 받는다.

백련정강? 자고로 수련을 할 때 목검이나 목봉을 써야지 뭔 놈의 백련정강? 그게 돈이 얼만데!

이런 미친 것들이 있나.

가질 것 다 가지고 태어난 가문의 족속들은 이래서 문제다.

니들이야 당연하겠지.

아주 당연하겠지.

니들이 녹슨 철검 들고 무림에 나서는 사파의 낭인들을 알아?

날 때부터 보검을 처들고 다니니 알 수가 있나.

진무의 몸으로 들어가고 나서조차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넝마를 기워 만든 도포를 입고 다녔다.

풍족하게 먹을 게 없어서 벽곡단을 하루 세끼 챙겨 먹으면서 오늘도 일용할 양식이 생겼음을 감사하는 무당파의 도사들도 있는데.

이것들은 저런 낭비를 하면서도 검소하다고 하고 있다니.

"자, 그럼 시작할까?"

철지량이 자신의 검을 들고 연무장의 중심에 서자 제갈협진과 제갈산산이 진무의 곁에서 멀찍이 물러났다.

꾸욱.

진무는 기다릴 것 없이 검을 뽑았다.

쑤욱!

그리고 곧바로 검에 기운을 집어넣자.

"허어! 검강?"

철지량을 비롯해 모두가 놀란다.

"이 사람, 한두 수 나누며 서로 간의 실력을 봐야지, 처음부터 끝을 볼 참인가?"

"...."

철지량이 너털웃음을 터트렸지만 그딴 거 없다.

양손 가득 잡은 검에 사파의 처절함과 가난한 무당의 울분을 담아.

낭비벽이 심한 네놈들을 내 친히 단죄하리라!

파앙!

진무가 곧장 진각을 내리밟으며 철지량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76화

쩡!

쩌정!

거대한 공동이 강렬한 진동과 함께 울음을 토했다.

검광이 사위를 가득 채워 밝히고 부딪힌 기의 조각들이 늦봄 바람 맞은 꽃잎처럼 뿌려졌다.

"허!"

둘의 비무를 지켜보던 등여평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상대가 안 된다.

격차가 너무 크다.

같은 검강이라고는 하나 그 순도부터가 달랐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파가가각!

채찍처럼 휘어진 검강이 지면을 스치듯이 달려가는 진무의 뒤를 쫓아 바닥을 파내며 고랑을 만들었다.

취릭, 콱!

철지량의 전면으로 다가서는 순간 깊게 박힌 검에 힘이 실리고 검날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땅!

용수철처럼 튕겨진 검과 함께 진무의 몸이 사선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송곳처럼 곧게 펴져 찔러지는 발.

철지량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진무의 인사.

느긋하게 받아 볼 생각이었다.

무당의 일대제자.

그는 무당의 앞날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파의 앞길을 열어 갈 든든한 후기지수가 아니던가?

철지량이 검을 뽑아 든 것에는 진무의 실력을 확인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으나,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무인을 적당히 눌러 줄 생각도 있었다.

너무 빠른 것은 좋지 않다.

빠른 것은 때로 독이 되기도 한다. 튼튼히 쌓지 않은 기초가 혹여 벽을 만나 무너질까를 우려한 것이다.

때로는 천천히 느긋하게 가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진무가 검강을 뽑아 올려 공격해 올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여유롭게 차근히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덤으로 약간의 부상을 입혀 의실 신세를 지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분명 실력의 격차는 확연했다.

그러나 자신의 검술이 가진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들며 그 격차를 현저하게 줄여 버린다.

마치 그의 검술인 벽사검법(僻邪劍法)을 오래전부터 연구해 온 것처럼.

'이런 망할.'

벽사검법의 유성비타(流星飛墮).

수십 개로 나누어진 검강이 유성처럼 날아가 떨어지는 적의 움직임을 가두는 초식이었다.

초식의 특성상 모르면 아차 하는 순간 꼼짝없이 당하기 쉽고, 설령 안다 해도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 초식을 펼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검성 철지량이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의 검강이 각개로 흐르듯이 움직이는데 어찌 피한단 말인가?

그리고 피한다고 해도 곧바로 이어지는 야화소천(野火燒天).

유성비타에 의해 떨어진 검강이 들불처럼 솟구쳐 올라 하늘을 뒤덮는다.

일월마교의 대장로였던 마군(魔君) 괴월의 오른팔을 날려 버린 초식이었다.

그가 무림을 주유하는 동안 그 연계기에서 벗어난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사패천주 혁련무강.

싸울 때마다 강해지던 그 괴물 같은 놈만이 유일했다.

물론 혁련무강 같은 경우야 그 무위가 엄청났기 때문에 야화소천 자체를 짓눌러 버렸지만.

그런데 또 한 명.

아무리 가진 내력의 오 할만 사용했다고 하지만 진무가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물론 방법은 달랐다.

물 찬 제비처럼 요리조리 바닥을 스쳐 유성 같은 검강을 피하고 야화소천이 시작되기도 전에 철지량을 공격해 흐름을 끊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니 초식의 흐름이 아주 잠시 멈칫했을 뿐이다.

그러나 진무는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송곳처럼 발을 찔러 왔다. 그리고 그를 피하는 순간 팽이처럼 회전하며 검격을 휘둘러 온다.

수십여 개의 검격이 그의 전신을 할퀴듯이 날아들었다. 바로 옆에서 날아온 것이기에 피할 수도 없었다.

"합!"

기합성과 함께 당겨진 검에 막대한 기운이 어렸다.

따아앙!

거친 공명음과 함께 쳐 내진 검.

진무는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훌쩍 물리며 철지량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는다.

검을 늘어뜨린 철지량이 멈춰 서서 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철지량의 말에 잠시 휴식을 취할 틈이 생긴 진무가 가슴이 부풀어 오르도록 들이마셨던 숨을 토했다.

"벽사검법을 알고 있었던가?"

당연히 알지.

하지만 누가 봐도 안다고 하면 안 되는 상황이다. 산중에 틀어박혀 있었던 진무가 그걸 안다는 게 더 이상했으니까.

"그럴 리가요."

"한데 어찌 피해 낸 것도 모자라 초식의 흐름을 끊었단 말인가? 간격을 잡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삐끗하는 순간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인데?"

"그러게요.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냈네요."

진무가 스스로도 놀란 표정을 한껏 지어 주었다.

어렵긴. 철지량에 대한 분석은 이미 오래전에 끝냈다.

하오문에 은위단까지 총동원해서 그의 검술뿐 아니라 성격이며 집안 사정까지 빠삭하게 뒷조사를 했었다.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검성 철지량. 산동성에서 내로라하는 검가(劍家) 벽사문 출생.

올해 일흔 살.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었고, 처 하나, 첩 하나, 그리고 슬하에 아들 둘, 딸 셋. 많이도 낳았다.

철지량을 제외한 그의 가족들은 산동성 벽사문에 있었다. 그들의 가문이 권력을 남용할 것을 우려한 그가 정무맹에 발을 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첩을 하나 더 들였거나, 자식을 더 봤거나, 아무튼 바뀌지 않았다면 진무의 기억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진무가 그에 대해 연구했다고 해도 만약 생사투였다면 지금의 경지로는 철지량의 일 초식조차 막지 못할 것을 안다.

고수의 대결에서는 상대의 검공을 안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초식이 순서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며, 그마저도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구잡이로 초식을 잘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련은 아까의 기세에 이은 두 번째 시험임을 알고 있었다.

철지량은 절대로 살수를 펼치지 않는다. 또한, 절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왜냐? 정파니까.

그리고 스스로가 가진 초식을 하나씩 아주 친절하게 선보여 줄 것이 틀림없었다. 파훼식만 알고 있다면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었다.

또한, 진무는 철지량을 알지만 철지량은 진무를 알지 못한다. 이건 이것대로 짜릿한 일이다. 당황해하는 철지량의 표정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흐흐흐, 백날 고민해 봐라. 이 새끼야.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혁련무강임은 모를 것이다.'

벽사검법? 철지량?

그게 뭐?

벽사검법은 무겁고 가볍다. 그러니 무거움은 흘리고 가벼움은 무겁게 짓눌러 막으면 된다.

진무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면서 연무장 구석에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등여평은 턱이 빠질 지경이었고 제갈협진은 눈이 튀어나올 듯하다.

제갈산산은... 동그란 사슴 같은 눈망울....

빌어먹을. 어쨌든 아주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큭큭, 이거 이름값 좀 오르겠네. 다들 잘 봐라. 내가 바로 앞으로 정사무림 전체에 군림할 진무니라!'

진무는 천천히 검을 사선으로 비껴 쥐었다.

"인사는 잘 받으셨나요?"

"...."

철지량이 진무를 응시하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핫! 이런, 내 참으로 자네를 잘못 보았으이. 이거 비밀 대련이 아니었으면 큰 창피를 당했겠어."

뭐? 비밀 대련? 그럼 소문은? 내 이름값은?

이런 얍삽한 놈을 보았나!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대련이라고 해도 검성이자 정무맹주 체면에 질 수야 없지."

어? 뭐?

철지량이 갑자기 싱긋이 웃는다.

왜 쪼개지? 진무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둥실.

그의 손에 잡혔던 검이 갑자기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 저건?

"내 자네를 무시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주겠네."

아, 이러면 곤란한데?

진무의 눈이 점점 커지고, 눈동자에 떠오른 경악의 감정이 점점 더 짙어진다.

휘리리리.

철지량의 기운이 갑자기 급속도로 팽창하고, 흐름 없던 대기가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쑤욱!

떠오른 검을 대신해 철지량의 손에서 푸른 검강이 솟구쳐 검처럼 자리 잡았다.

"내가 깨달은 검공의 마지막 단계일세.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이라고 들어 봤는지 모르겠구먼. 손에 잡힌 것은 기검술이라고 한다네. 허허."

"...."

철지량이 온화하게 웃는다.

어이, 잠깐만 이 사람아!

지금 웃음이 나오냐?

그런 건 원래 악당을 죽이기 위해 영웅이 대서사시의 마지막에서 쓰는 최후의 절초 같은 걸로 등장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리디어린 약관의 도사를 상대로 일흔 살이나 처먹은 노괴가 이기어검술을 펼쳐?

"허헛, 놀랐나 보구먼. 걱정 말게. 자네의 성취를 보니 서른도 되기 전에 나만큼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미리 경험해 본다 생각하게."

미친, 지금 그걸 배려라고....

그냥 지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 이 속 좁은 새끼야.

하여간에 엿 됐다.

망할 노괴가 아주 날을 잡은 모양이었다.

이러다간 정말로 정무맹 의실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몰랐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받아 보게! 하하하!"

슈아아앙!

잘도 처웃으며 저런 무공을.

진무는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생동감 넘치게 허공을 가르는 검격에 기겁하며 내달렸다.

깡! 까강!

쉴 틈이 없었다.

오롯이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검격이 쉬지도 않고 진무를 몰아쳤다.

진무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자신이 아는 무당의 모든 검공을 쏟아붓는 내내, 망할 철지량은 멀리 편하게 서서 손가락이나 까딱거릴 뿐이었다.

진무는 내심 이를 갈았다. 바로 이것이 이기어검술의 무서운 점이었다.

첫 번째는 의외성.

허공을 자유롭게 떠다니기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른다.

두 번째는 움직임에 제약이 없다.

모든 검공이 시전자의 상상 그대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상상하는 게 하필이면 검성 철지량이다.

진짜 씨발....

"하하핫! 이것도 받아 보게!"

하지 마.

"오호! 대단하군! 정말로 대단해! 으하하핫!"

하지 마! 이 개새끼야!

울고 싶은 진무와는 반대로 철지량은 신이 잔뜩 나 있었다.

전력은 아니지만 이기어검술을 펼치고 있음에도 진무가 버텨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당의 모든 검공에 신법, 장법, 권법, 각법 등을 총망라해서 뒤섞고 엮어서 마치 새로운 무공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대단하네!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구만!"

파앙!

움직였다.

지금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는 게 고작인데 철지량이 순도 십 할에 달하는 시퍼런 기검을 손에 쥐고 진무를 향해 뛰어들었다.

아, X 됐다.

땅!

수십 초의 검격을 막아 내었으나 그것이 한계였다.

목 뒤를 노려 오는 검격을 쳐 내는 순간 비틀린 진무의 복부에 묵직한 일격이 틀어박혔다.

"끅!"

하마터면 토사물이 올라올 뻔했다. 그 한 방의 권격에 중심이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냥 당할 줄 알고!

입을 꽉 다물고 고통을 참아 낸 진무가 악착같은 집요함으로 비틀렸던 상체를 되돌리며 팔꿈치를 휘두르는 순간.

쩍!

뒤이은 철지량의 수도(手刀)가 진무의 목 뒤를 내리쳤다.

망할. 아직은 무리인가.

진무는 끊어지는 의식 너머로 철지량을 향해 자신이 아는 모든 욕설을 퍼부었다.

"...."

맥없이 허물어지는 진무의 모습을 보던 철지량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에 펼쳐진 일격에 섬뜩함을 느꼈다.

그의 단중혈의 한 치 앞에서 멈췄던 진무의 팔꿈치 끝자락.

준비 동작이 없는 일장.

양소방이 말했던 그들의 무공.

수도로 그의 공격을 끊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

'허, 그 상황에서?'

살을 내어 주는 대신 뼈를 친다.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수법이다.

상처를 입으면서 적의 명줄을 노리는 방법은 말로는 쉬워도 막상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자신의 주먹을 그대로 얻어맞고서라니.

무공이 아니다. 본능적인 한 수였을 것이다.

'마치 야수처럼.'

진무는 무당의 도사가 아니라 마치 산정을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짐승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허! 고작 약관에 불과한 녀석이.'

철지량이 자신의 발아래 쓰러진 진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허. 이거 말년에 노력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다니. 십 년, 아니 오 년 안에 무당의 이름이 전 중원을 울릴지도 모르겠어. 이 녀석으로 인해서 말이지....'

철지량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지어졌다.

"맹주님."

등여평과 제갈협진, 제갈산산이 서둘러 다가왔다.

"대군사."

"예. 맹주님."

"진무 도장을 잡을 순 없을 것 같네."

"예?"

철지량의 말에 제갈협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맹주님!"

생각했던 것보다 진무의 무위는 훨씬 더 뛰어났다.

앞으로 그들이 나아가야 할 목표에 반드시 필요한 무인이었다. 용봉관이 아니더라도 차후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궁'이라는 자들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군사. 야수는 우리에 가두어서는 안 되는 법이라네."

철지량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었다.

"이 녀석은 그런 녀석 같구먼."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제갈협진은 물론 등여평조차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를 맹에 둔다면 훨씬 더 이득이."

"그렇겠지. 일월마교나 사패천과의 싸움. 그리고 '궁'이라는 자들에 대비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 하나, 굳이 가둘 필요는 없다네. 어차피 그는 무당지검이 아닌가? 그냥 뛰어놀게 두세나."

"...."

철지량은 제갈협진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제갈산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산산."

"예. 맹주님."

제갈산산이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한분가로 데려가 쉬게 하게. 그리고 깨어나거든 내가 진무 도장의 인사를 아주 잘 받았다고 전해 주게나. 하하핫!"

77화

제갈세가 무한분가.

"...그리 전하라 하셨어요."

"...."

진무가 깨어났을 때, 제갈산산이 전해 주었다.

인사 잘 받았다. 철지량의 말이었다.

"그리곤 후에 다시 보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싸우면 가진 바 전력을 처음부터 다해 주겠다고."

다소곳이 앉은 제갈산산의 말에 진무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사이.

"정말로 사숙께서 검성 어른과 비무를 하셨단 말입니까?"

청상이 제갈산산을 향해 물었다.

"예. 그것도 호각지세(互角之勢)였어요."

"호, 호각!"

청상은 물론 청우까지도 작은 눈이 찢어지게 부릅떴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숙! 검성과 호각이라니요!"

청상이 주먹을 움켜쥐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 눈빛에 더해진 존경심에 진무가 피식 웃고 말았다.

호각지세? 그리 보였나?

말도 안 된다.

졌다. 그것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검성에게 처참하게 진 것이다.

진무의 첫 패배였다. 아니, 무월각의 노인네와 양소방이 있으니 세 번째인가?

아니다.

진무가 자신의 모든 전력을 사용한 것은 철지량뿐이었다.

사실 그에게 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월마교, 사패천, 정무맹. 중원의 삼 대 세력을 통틀어 검에 있어서는 최고수인 그였다. 지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건만, 진무는 그 사실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길. 아직 멀었네.'

철지량의 이기어검.

그 너머에 심검(心劍)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으나 아직 누구도 이르지 못했기에 다들 이기어검을 검공의 실질적인 마지막 단계라 불렀다.

혁련무강이었던 때에도 이루어 보지 못했던 경지였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있으나 무조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검강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은 원래 익숙한 것에 더욱 뛰어난 능력을 보이기 마련이다.

혁련무강은 권장으로 절대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다. 철지량과 한창 싸웠을 때도 권장을 사용했고, 그것으로 이겼다.

그렇기에 그는 검으로 철지량을 이길 수는 없었다.

무당 무공의 종류는 너무도 다양했다. 검공 이외에도 수백 종의 무학이 장서각 안에 잠자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검공이 가장 강하다. 그렇기에 중원 검공 중 화산과 더불어 무당을 최고로 꼽았다.

문제는 진무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진무의 몸으로 철지량을 쓰러뜨릴 날이 온다면 그것은 검공이 아니라 권장에 의한 것이리라.

'양의심공의 후반부를 얻어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긴 셈이군. 철지량, 다음에 볼 때는 반드시 이겨 준다.'

진무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청상, 청우."

"예! 사숙!"

가슴이 벅차오른 둘이 진무를 향해 힘차게 대답했다.

아,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숙인가? 평생을 따라가리라!

"나는 지금 당장 표주를 떠날 생각이다."

"예! ...예?!"

청상과 청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뭐가 이리도 갑작스럽단 말인가?

떠날 것은 알고 있었으나 아직 용봉회 개최가 사흘이나 남아 있었다.

"사숙! 아직 몸을 좀 더 추스르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기를 섭취해 피로도 좀 푸시고."

하아, 청우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다만.

"시끄럽고. 니들이나 걱정해라."

"...."

진무는 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표주를 나온 목적은 무당에서의 탈출이었다. 어쩌면 이제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무는 그동안 자신을 따라온 그들에게 작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은 없지만 그들에게는 왠지 그냥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하 일 호와 이 호가 아니던가.

"청상, 너는 검공에 있어서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진무의 칭찬에 청상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검기를 수련해 기운의 범위가 계속 늘어난다고 해도 거리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

"기운은 어차피 이리 소모해도 그만 저리 소모해도 그만이니 잡아 두려 하지 말아라. 어차피 기운이나 검이나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구에 불과함이다. 던진다 해도 검이고 기운이다. 중요한 것은 형(形)과 힘을 유지할 만큼의 응축임을 명심해라."

진무의 말에 청상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벽에 막혔을 때 잊지 않고 되뇌면 깨달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

청상이 감탄사를 뱉었고 눈치 빠른 제갈산산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르침?

별안간? 뜬금없이?

그리고 그 가르침은 그럴듯한 글귀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고민하게 만드는 종류가 아니었다.

쉽고 간결하다.

아직 그 정도의 경지가 되지 않았기에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감사합니다. 사숙! 이 은혜를...."

청상이 감격함에 절을 올리려 하자 진무가 손을 들며 고개를 저었다.

"안 하던 짓 하지 마. 남사스럽게시리."

"...."

"처음에 말했듯 나는 너희의 스승이 아니고 너희는 나의 제자가 아니야."

진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청상의 마음은 벅차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제갈산산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승 관계가 아니었단 말인가?

진무가 어리다곤 해도 일대였다. 더욱이 무당지검이다. 제자를 들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신분이다.

한데 사승 관계가 아님에도 가르침이 어떠한 구애도 없이 대화하듯 자유로웠다.

아무리 동문의 무인이라 해도 그러한 경우는 없다.

제갈세가에서는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일이었다.

본가의 가주인 제갈웅현조차도 자신에게 그리 편하게 가르침을 내려 주지 않았다.

무인의 깨달음이란 그런 것이다.

오랜 고통과 인내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얻는 것이기에 타인에게 쉬이 전수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자라 할지라도 그에 맞는 준비가 되지 않는 한 전하지 않는다.

더욱이 외인(外人)이 있는 자리라면 절대로 하지 않는다.

감추고 또 감추는 것이 그러한 가르침이다.

'대단하구나. 저것이 천년 무당의 분위기인가? 아니면 그저 진무 도장의 성격인가?'

제갈산산 역시 현기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다.

진무의 말은 자신에게도 엄청난 도움이었다.

기연이고 은혜나 다름없었다.

제갈산산이 감탄을 하든 말든 진무가 청상에게서 고개를 돌려 청우를 바라보았다.

"청우, 너는... 음."

진무가 잠시 말을 멈추자 청우가 칭찬을 기대하는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음. 너는...."

"...."

"아! 우직하다."

"...예?"

뭔가 좀 더 칭찬을 기대했던 청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칭찬을 하려고 해도 딱히.

"그래. 넌 우직해. 그러니 남들이 뭐라 하건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너는 다른 것과는 맞지 않다. 곁눈질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분명 권공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다."

"예! 사숙!"

자신을 가장 잘 따랐던 천우명이 생각났기에 그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해 주었다.

그 역시 우직했기에 한 방향으로 올곧게 나아갔고 결국은 사패천 최강의 무력 단체였던 철검단의 수장이 되었다.

진무의 말이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청우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래, 열심히 수련해라."

"알겠습니다."

"청상."

"예, 사숙."

"청우 잘 보살피고."

"...."

나지막한 진무의 말이 이별 인사처럼 들렸기 때문일까? 시무룩해진 청상의 눈에 옅은 습막이 차올랐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 자신들과 다르기에 막을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

청상은 천천히 일어나 절을 올렸고, 청우도 그를 따라 했다.

이때만큼은 진무도 막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조금 기분이 좋았다.

"사숙, 다시 뵈올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하지만 그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이런 진심이 담긴 인사를 받아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일까?

진무는 왠지 코끝이 시큰해지는 기분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랄한다. 내가 죽냐?"

"예?"

"걱정 마라. 이놈들아. 그리고 알지? 다시 봤을 때 마음에 차지 않으면 둘다 뒈진다. 이번엔 진짜로 모가지를 따 버릴 거야."

매섭게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는 모습에 청상도, 청우도, 심지어 제갈산산까지 피식 웃고 말았다.

"읏챠! 그럼 가 볼까?"

"예? 벌써 가십니까?"

"그럼! 당연하지."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준비는 옘병. 검 하나만 있으면 되지."

그리고 전장에 맡겨 둔 돈이 잔뜩인데 뭐가 걱정이란 말이냐.

진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청상과 청우도 따라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됐어. 뭘 따라 나오려고 그래?"

"아니 그게."

"내 말 못 들었어?"

"예?"

"성에 차지 않으면 진짜로 모가지를 딸 거라니까?"

"...."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진무는 웃으며 말했지만 청상과 청우에게는 왠지 진심처럼 들렸다.

진무라면 왠지.

"나가."

"...예."

아쉬운 듯 어물쩡거리는 둘을 향해 진무가 사악한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시간이 많은가 보네."

"...."

"그럼 좀 더 수련을 시켜 주고 갈까?"

"...아, 아닙니다. 사숙!"

손가락을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낸 진무가 눈을 부라리자 청상과 청우가 기겁한 표정으로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산산이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젠장,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웃는 모습은 하여간에 제일 예쁜 요물이었다.

"뭐? 왜?"

"그냥,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아서."

"뭐?"

"그냥 그렇게 느꼈습니다. 사질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시는 것이 낯간지러워서 일부러 내보내신 건 아닐까 하는."

"...."

눈치 빠르기는.

제 마음을 들켜 버린 진무가 입맛을 다셨다.

청상과 청우. 명진과는 또 다른 인연이었다.

사파인으로 살며 인연이라는 것을 맺어 본 것은 천우명이 유일했다.

그 외에는 언제나 혹시나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목숨을 노리지는 않을까를 걱정한 의심의 대상이었으니까.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청...."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다.

무서운 년.

갑자기 치고 들어오다니. 그것도 저런 미소와 목소리로.

빨리 떼 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알려 줘야 하지?"

"예?"

"굳이 알 필요 없잖아."

"뭐, 그렇네요. 어쨌든 진무 도장의 말씀이 제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갈산산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흥, 멍청한 두 녀석을 잘 봐 달라는 뜻이라 생각해라."

진무가 피식 웃으며 벽 한편에 세워 둔 검을 끌러 허리 뒤춤에 매었다.

"가십니까?"

"그래."

"부디 영웅으로 가시는 걸음이 언제나 옳은 방향을 향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영웅 같은 소리 하네."

제갈산산의 말에 진무가 피식 웃었다.

영웅? 그딴 거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간다면 차라리 악당의 길을 갈 것이다. 그편이 훨씬 더 성격에 맞으니까.

사패천주 혁련무강.

그는 드디어 무당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중원으로 가는 원대한 일 보를 내디뎠다.

78화

삼 층으로 지어진 거대한 전각에 내리쬔 해가 만든 짙은 그늘이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그 그늘의 끝.

담벽 근처에 담녹색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정성스럽게 땅을 고르고 있었다.

벽을 따라 둘을 이은 두 줄기의 고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고랑마다 각종 채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런, 이런."

노인은 그중 하나가 힘을 잃고 시들시들한 모습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뿌리가 약한 녀석이었는지 물기를 빨아들이지 못해 볕에 말라 버렸다.

"옆의 놈들이 남의 것까지 죄다 빨아 먹었나 보구나."

노인이 시들한 녀석 옆에 왕성하게 잎을 피운 채소들을 째려보았다.

고작 채소인데 그 눈빛에 진한 살기마저 서린 듯했다.

"아이구, 대인. 또 이러고 계십니까요?"

지나다 노인의 모습을 본 아낙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아, 치삼 애미 왔는가?"

노인이 얼굴에 주름이 지도록 밝게 웃자 아낙이 한숨을 쉰다.

"대관절 '아'가 뭡니까요. 어서 일어나세요. 누가 보면 어쩌시려구요."

"허헛, 이 사람아. 누가 나보고 뭐라 한다고."

"뭐라 합니다. 대인 보곤 아무도 말을 안 하지만 저희 아랫것들에게 손가락질한단 말입니다."

"엥? 어떤 놈이 말인가!"

노인이 짐짓 화를 내듯 매섭게 주위를 노려보았지만 아낙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다요. 전부 다요."

"이 사람, 흰소리 말게. 내 집에서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노인이 장난스럽게 웃자 아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인은 과거 대학사를 지낸 인물이다.

정쟁에 밀려 초야에 묻혔으나 그 선정이 하늘에 닿아 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자였다.

성주가 그의 이름을 흠모해 직접 찾아와 가르침 받기를 청해도, 성도를 쥐락펴락하는 무가에서 만나 보길 청해도 초야에 묻힌 야인이라며 거절할 만큼 그 위세가 높았다.

하지만 그 성정이 소탈한 것은 물론 인정이 많은지라 자신이 가진 드넓은 대지를 소작농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기근이며 홍수 때마다 구휼미를 풀었기에 상관평의 집 인근 삼백 리에 굶는 자가 없다 했다.

그러면서도 삼백 리 밖의 흉작을 걱정하니 그에 대한 존경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저 보게. 불쌍치 아니한가?"

"뭐가요?"

노인을 억지로 끌고 대청에 앉아 과일을 깎고 있던 아낙이 의아하게 물었다.

"저 중간에 있는 놈 말일세."

"...."

"옆에 있는 망할 놈들이 물기를 죄다 뺏어 갔어. 나누어 먹으면 좋으련만 욕심도 많지."

하여간 인정도 많다.

이제는 한낱 채소에게까지 안타까움을 드러낸단 말인가?

"아휴, 대인 어른. 세상이 다 그런 것을요. 잘난 놈이 있으면 못난 놈도 있고, 힘센 놈이 약한 놈 것을 뺏어 먹는 것이 세상 아닙니까?"

"엥? 이 사람 어딜 가서 몇 자 배운 모양일세?"

노인이 짐짓 놀라는 표정을 하자 아낙이 으쓱하며 웃는다.

"서당 개 노릇이 삼 년이 넘었는데요."

"응? 하핫. 제법일세. 제법이야. 이거 무지렁이 아낙이라 무시할 게 아니야. 말에 제법 현기가 있어."

"과찬이네요."

노인의 말이 농임을 아는 아낙이 피식 웃었다.

"참 안타까운 세상이 아닌가? 다들 저리 시든 놈을 솎아 내지만 실상은 저리 뺏어 먹는 놈을 솎아야 하는 것이지."

"그랬다간 다 굶어 죽겠죠."

"그런가?"

"암요. 시든 놈은 어차피 죽을 놈인데 그놈 살리자고 실하고 좋은 놈을 솎아 버리면 뭘 먹는답니까?"

"그렇구만. 자네 말이 정답일세. 하지만 말이야. 저 옆의 놈을 솎아 사람들에게 나누면 다들 배부르고, 시든 놈도 살아날 수 있지 않겠는가?"

노인의 말에 아낙이 그도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대인."

"응?"

"채소 걱정만 하지 말고 제 걱정도 좀 하시면 어떨까요?"

"뭐가?"

그의 물음에 아낙이 물끄러미 담녹색 비단옷을 바라본다.

"...."

흙이 묻어 지저분하다.

빨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눈앞에 있는 치삼 어미의 몫이 분명하다.

"정말 하루에도 몇 벌씩 빨아야 한다구요. 차라리 옷을 더 사시든가 하시지, 몇 벌이나 된다고."

"음, 아... 미안하네."

"그리고 제발 좀 체통을 지키세요. 마님 돌아가신 후로는 잔소리를 하실 분이 없으니 원."

"허허."

"허허가 아니구요! 대관절 이 위세 높은 전각에 밭이 웬 말입니까! 그리고 저런 일은 아범에게 맡기세요."

"아니, 소일거리를...."

"어르신!"

"...."

빽하고 소리를 지르는 치삼 어미의 표정에 노인이 입을 다물었다.

꼭 잔소리 듣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기에 지나며 그 광경을 보는 사람마다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근방에서 가장 위세 높은 사람이지만 허드렛일을 하는 아낙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그였다.

"자, 이제 들어가서 옷 벗어 주세요."

"아니, 아직 입을 만...."

"어서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눈을 찌푸리는 통에 노인은 '허참.'을 연발하며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치삼 어미가 돌아가고 난 것을 확인한 그는 몰래 텃밭으로 다시 나왔다.

그리곤 시든 채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삼궁주님.]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분명 그곳에는 노인뿐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목소리는 선명하게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귀신이라며 놀랄 법도 하건만, 노인의 표정은 너무나 담담했다.

[형주의 일이 실패했습니다.]

"...!"

그 말에 노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팬다.

"꼬리를 밟혔더냐?"

[아닙니다. 우청이 죽었으니 꼬리는 밟히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노인이 무언가를 고민했다.

"아이는?"

[정무맹에서 조사 중입니다.]

"양소방이냐?"

[아닙니다.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허공 중의 목소리에 송구함이 느껴져 왔다.

"죄송할 필요 없다. 실수도 할 수 있는 게지. 다른 아이로 대체하면 될 일이다."

[하면 정무맹에 있는 아이는 어찌할까요?]

"...."

노인의 걸음이 채소께로 다가갔다.

"죽여야지."

허공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주저되느냐?"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다. 불쌍하다 해도 반드시 흘려야 하는 피가 있는 법."

[알겠습니다.]

둘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양의를 찾는 일은 어찌 되어 가느냐?"

[여전히 행적이 묘연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알고 있습니다. 일단 무혈(無穴)의 행방을 찾았다고 하니 그것만 확보되면 청성의 비밀은 풀릴 것입니다.]

"무혈은 누가 가지러 갔더냐?"

[적해가 가지러 갔습니다. 확보되는 즉시 청성에 잠입해 있는 귀영(鬼影)에게 전달하라 전했습니다.]

"알겠다. 하면 대랑에게 지원하라 해야겠구나."

[예? 대랑께요?]

"음."

[혹, 대랑의 휘하에 있는 청랑대도 움직인 것입니까?]

노인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삼궁주님. 허나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대규모의 인원이 움직이면 당가가 눈치챌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과 마찰이라도 생긴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물건이다. 혹여 당가와 청성을 피로 씻는 한이 있어도."

[삼궁주님.]

"그만 돌아가 보거라."

[...예.]

허공의 목소리는 대답을 끝으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노인의 시선은 물끄러미 채소를 바라보았다.

"머지않았다. 새로운 세상이. 그때가 되면."

뿌드득!

시든 놈 옆의 채소 두 개가 뿌리째 뽑혔다.

먹기에도 충분할 만큼 체구가 불어난 녀석이라 숙수에게 가져다주라 할 만도 한데 노인은 고민 없이 발로 짓밟았다.

"이놈이든 저놈이든 그저 세상에 백해무익한 놈들에 불과하다."

짓밟힌 채소가 그의 발에 으깨져 흙투성이로 변했다.

"세상의 고름 같은 놈들. 기다려라. 세상의 환부와 같은 네놈들을 모조리 도려내 줄 터이니."

초야에 묻힌 이후에도 그 인덕으로 칭송받는 대학자.

짓밟아 으깬 그의 두 눈에 어울리지 않는 핏빛 살기가 가득했다.

* * *

콰아아아.

거대한 물줄기가 시원스럽게도 흐른다.

예로부터 통천하(通天下)라 불리운 강.

청해성에서 발원해 구만 육천 리를 지나 여덟 성을 아울러 굽이치는 거대한 물길은 강소성 끝자락에서 대해로 빠져나간다.

그 사이사이 갈래가 각지와 연결되어 흐르니 가히 천하로 통한다는 말이 적절했다.

그곳은 중원의 역사와 더불어 흘러 왔고, 만들어질 미래와 함께 흘러가는 장강(長江)이었다.

정무맹이 무한에 위치한 이유도 이 장강의 흐름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로를 타고 중원의 각지로 물자와 사람을 나를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곳이라 할 만했다.

무한에서 배를 띄워 장강에 오르면 청해까지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이 있다.

중원의 중심 호남성 끝자락의 거대한 호수.

바로 동정호(洞庭湖)가 그것이다.

장강이 천하제일의 대천이라면 동정호는 천하제일의 호수였다.

그곳은 중원의 중심을 관통한 기다란 줄기에 달려 진한 단내를 풍기는 과실수처럼 지나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시사철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중원의 모든 상단과 표국이 거쳐 가는 강호의 중심.

호수의 연안을 따라 즐비한 객점과 주루가 수백에 달해 그것만으로도 일성이라 불릴 만했고, 휘황찬란한 불빛이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불야성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곳에는 주인이 없었다.

그것은 암묵적인 약속과 같았다.

정사의 무림 모두가 욕심내고 있으나 누구도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막대한 이권이 몰려 있는 그곳은 오랫동안 강호인들이 탐욕스럽게 욕심을 내어 온 각축장이나 다름없었다.

강호의 은자들이 가장 많이 기거하고 수많은 정사의 문파들이 자신의 분파를 자리 잡게 한 곳.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가 일어났지만 그곳을 차지하려는 대규모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곳은 무법의 대지이자 가장 치안이 강한 법치(法治)의 대지였다.

동정호 외곽 우시장 뒷골목.

소와 돼지를 비롯한 가축이 거래되는 곳이기에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도려내는 도축장이 가득했다.

툭! 처억! 탕탕! 사각, 사각.

커다란 도마 위를 누비며 고기를 써는 두툼한 칼.

직사각 반듯한 칼질에 큼지막한 소 갈빗대가 잘리고 순식간에 뼈와 살이 분리되어 서로 다른 광주리에 나누어 담겼다.

"이야!"

능숙한 손놀림에 고기를 받으러 온 더벅머리 소년, 우칠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칼을 잡은 손은 쉬지 않았다.

"정말 동정호 근방 소백정 중에는 형님이 최고라니까요?"

"...."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몸을 하고 소 한 마리를 그리도 쉽게 발골(發骨)해 내시는지."

우칠은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사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발골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짜 맞춘 듯이 덥수룩한 수염에 여인의 허벅지만 한 팔 근육을 가지고 있다.

그 덩치도 웬만한 사람 둘은 될 정도로 크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 백표.

애처롭다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표현을 하자면 말랐다.

그것도 뼈만 앙상해서 그 커다란 칼을 들게 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였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초점 없는 눈동자로 걷는 모습을 보면 누가 툭 건들자마자 뼈가 와그르 쏟아질 듯하다.

더욱이 퀭한 눈동자에 숨은 또 왜 그리 가쁘게 쉬는지.

몇 걸음 걷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발골은 기가 막히게 잘한다.

그저 들고 있을 때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다가 발골이 시작되면 마치 칼춤 추는 무희(舞姬)처럼 변한다.

수천 마리의 소를 해체하고도 그 칼이 여전히 날카로움을 유지했다는 전설적인 소백정 포정(庖丁)이 환생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무후입무간(以無厚入無間).

즉, 두께 없는 얇은 칼로 소의 골절 사이 틈새를 헤집고 다닌다.

백표의 칼질은 딱 그 모양새였다. 소뼈에 그 흔한 칼집 하나 내지 않고 발골을 끝냈다.

탁!

"다 됐다."

"와! 진짜 빠르네요."

우칠의 감탄에 칼을 놓은 백표는 힘겹게 주저앉아 갸르륵 소리가 나도록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79화

발골을 끝내고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은 모습이 마치 모든 것을 하얗게 불사른 듯한 모습이었다.

꿀꺽, 꿀꺽.

그리고 항상 그의 일터에 놓여 있는 싸구려 백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술은 왜 그리 좋아하는지. 우칠은 그가 취하지 않은 날을 본 것을 손에 꼽을 정도였다.

"형님, 그렇게 마시다간 죽어요."

"...."

"밥도 잘 안 드시면서 술은 뭐 하러 그렇게 먹는담?"

우칠의 걱정스러운 말에 백표가 슬쩍 고개를 든다.

"헉! 으이구, 그 눈빛 좀."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백표의 눈빛은 너무 무서웠다. 마치 죽음이 그의 곁에 서려 있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사이할 정도로.

그렇기에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두고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부를 정도였다.

"으휴, 진짜. 차라리 안주라도 좀 먹어요."

"귀 울린다. 그만 꺼져."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말투.

세상 누구라도 정이 가지 않을 성격에 무서운 분위기까지.

"쳇, 좀 좋게 말하면 덧나나? 그러니 친구가 없는 거잖아요."

"...."

"이러니 그 실력을 갖추고도 이런 변두리 푸줏간에서 일하지. 좀 사근사근하면 안 돼요?"

고기 담긴 광주리를 챙기는 우칠의 말에 백표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가."

"쳇! 가요, 가."

백표의 말에 우칠이 얼굴을 찡그리며 품에서 전낭 하나를 탁자에 던졌다.

"내일 또 올게요."

"...."

"어이구.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백표는 우칠이 가든 말든 인사도 하지 않았다.

우칠이 광주리를 들고 사라지는 뒷모습에 백표는 멍하니 앉아 술병만 연신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백표의 일상은 언제나 똑같았다.

일어나 반 시진(1시간) 가까이를 걸어 출근을 한다.

집이 먼 것은 아니다. 남들은 일각(15분)이면 충분할 거리였으나 몇 걸음에 한 번씩 쉬는 백표의 걸음이라 그랬다.

그리곤 그의 업무가 시작된다. 작업량은 우칠이 일하는 여와루(女媧樓)에서 필요한 만큼이 전부였다.

어차피 그 이상은 무리였다.

뛰어난 발골 실력을 가졌으나 백표를 아는 이들은 다른 일을 맡기지 않았다.

더 많은 일을 했다가는 송장을 쳐야 할지도 모르니까.

최고의 칼 솜씨를 가졌으나 심각하다 못해 걱정될 정도로 체력이 모자란 발골사.

그게 백표였다.

"하아... 하아...."

술병을 놓은 백표는 퇴근을 위해 겨우 일어나서 우칠이 놓고 간 전낭을 집어 들었다.

"...."

움켜쥔 손안에 느껴지는 동전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

백표는 또 힘겹게 전낭을 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담긴 구겨진 쪽지를 들었다.

네 번이나 접어 놓은 종이를 펼친 그의 눈동자에 차가운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발골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짐승이 아닌 사람을 죽여 본 이들이 가진 반들거리는 그것.

"...."

쪽지의 내용을 모두 읽고 난 뒤 백표는 무심한 표정과 멍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곤 퇴근을 시작했다.

힘겹게....

백표의 집은 우시장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며 돼지, 개, 닭을 비롯해서 각종 가축들을 모아 놓은 곳이라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산다고 해도 판자를 짓고 살아가는 빈민들뿐이었다.

가축들의 분뇨와 사체들이 풍기는 악취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었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를 내었지만, 백표는 아랑곳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곤 이내 불이 꺼진다.

사람이 없는 곳.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

백표는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 죽은 듯이.

그런데 잠시 후.

잠에 든 줄 알았던 백표가 자신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딱 봐도 헐렁해 보이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희한한 것은 들어갈 때 열었던 문이 분명한데 녹슨 경첩의 갈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백표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우시장의 뒷골목.

수없이 많은 쇠창살 우리가 빼곡하게 자리를 잡아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 좁다란 골목에 도착한 백표.

음머, 음머어.

깨어져 버린 고요에 잠에서 깬 짐승들이 미친 듯이 울어 대기 시작했다.

저벅. 스윽. 저벅. 스윽.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 지면을 끌 듯이 걷는 발소리의 스산함에 순식간에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어째서인지 발길 닿은 철창 안의 가축들이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말아 넣고 겁에 질린 듯 대가리를 처박았다.

몇몇 놈은 부들거리며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턱.

그중 한 곳에 닿은 백표의 걸음.

흑우였다.

소 중 덩치가 가장 크다는 녀석이었다.

음무우.

백표와 눈이 마주친 흑우가 눈깔을 동그랗게 뜨고 겁에 질린 듯이 물러나자 묶은 고삐가 팽팽히 당겨진다.

"크크크."

그 모습에 백표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스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백표의 손이 천천히 철창 안으로 뻗어졌다.

콱.

흑우는 그의 손이 목덜미를 움켜쥐었음에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뿌득, 뿌드득.

기괴한 소리.

흑우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뿌드득.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툭.

떼어진 백표의 손.

철창 안의 흑우는 마치 들판에 버려져 말라 버린 것처럼 가죽만 남아 있었다.

백표를 바라보던 눈동자 또한 생기를 잃은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후우."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표였다.

커졌다.

헐렁했던 옷이 꽉 낄 정도로.

"큭, 이만하면 되었나? 사람이 더 좋은데. 뭐, 흔적이 남으면 안 되니까."

숨쉬기조차 불편해 보였던 그의 목소리에 힘이 넘쳐 흘렀다.

그리고.

파앙!

딱 맞는 옷을 입은 백표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가축우리가 가득한 그곳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 * *

서걱!

"큭!"

황의 장포의 중년 사내가 피가 터져 나오는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깔끔했다.

묶지 않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살수는 별안간 나타났다.

술에 취한 채 인적이 드문 골목에 접어들었고, 부랑자인 줄로만 알았던 사내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그의 송곳니가 하얗게 빛나는 순간 짧게 그어진 투박한 느낌의 네모반듯한 칼.

그게 사내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털썩.

쓰러지는 눈동자에 그를 호위하던 무인 다섯도 똑같이 쓰러진 모습이 비춰졌다.

"죽었니?"

매우 짧고 간결한 한마디.

감정 한 올 묻어나지 않는 그의 목소리.

백표였다. 이전의 마른 몸이 아닌 건장하리만치 단단해 보이는 육체를 가진.

"흠, 또 확인을 못 했네. 청사관 판관 이덕삼?"

황의 장포의 사내, 아니 시체 옆에 쪼그려 앉아 뱉은 질문이었으나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맞겠지, 뭐. 아니면 내일 또 죽이면 되고."

백표는 싱긋이 웃으며 일어났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골목 어귀를 향했다.

겁에 질려 주저앉은 여인 하나.

살해의 현장을 목격당하고 말았지만, 백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되레 웃으며 물었다.

"봤니?"

"으으으."

"봤구나?"

두려움의 표정이 역력한 여인이 눈을 부릅뜨고 도망치려는 듯이 버둥거렸다.

하지만 후들거리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저런, 너도 죽어야겠다."

"...!"

여인은 엷게 벌어지는 백표의 입가에 맺힌 웃음에 사력을 다해 일어났다.

그 순간.

파학!

여인의 목덜미에 얇은 혈선 하나가 그어졌다.

"미안, 목격자를 남기면 안 되거든."

백표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유유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털썩.

여인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 * *

"오랜만이군."

막 배편을 이용해 동정호에 도착한 진무는 나루에 내려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강 위에 뜬 수많은 향락선과 시인 묵객을 실은 관광선.

대낮부터 취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취객과 나룻가 인근에서 고기를 파는 상인, 흥정을 하는 사람들.

강가를 따라 빼곡하게 채워진 수많은 주루.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참 많이도 싸웠는데."

동정호에는 추억이 많았다.

이권을 위해 일어난 수많은 싸움의 중심에 그가 있었고, 매일을 칼부림으로 살았다.

"쯧, 진즉에 차지했어야 하는데."

진무가 혀를 찼다.

중원의 모든 강에서 제왕이라고 했던 수채 놈들에게 맡겨 둔 것이 실수였다. 직접 나섰어야 했는데.

장강 수로의 핵심이 바로 이 동정호였다.

모든 상단의 배가 그곳에 모인다. 장강 수로를 지나는 이들은 무조건 그곳을 지나다녀야만 했다.

그걸 차지하면?

모르긴 몰라도 몇 개의 성에서 뽑아 먹을 이득은 될 터였다.

"뭐, 이젠 상관없지. 나중에 어차피 중원 전역이 다 내 것이 될 텐데. 하하핫!"

진무는 호탕하게 웃으며 나루를 빠져나왔다.

무한을 출발한 진무의 목표는 중원의 오대도문이었다.

다른 곳은 필요하지 않았다.

중원 여행은 이미 팔십 년 동안 수도 없이 해 봤다. 딱히 신기할 것도 없었다.

양의심공 후반부를 찾아내기도 부족한 시간에 뭐 하러 그딴 걸 한단 말인가?

중원 오대도문.

무당, 화산, 곤륜, 청성, 공동.

다섯 곳이다.

물론 과거에는 한 곳이 더 있었다고 들었다.

중원 도문의 시초였다는 전진. 지금은 망해서 없다.

어쨌든 진무는 그 다섯 곳을 찾아가기 위해 무한에서 배를 탔다.

그 시작은 사천의 청성이었다.

청성을 시작으로 청해의 곤륜, 감숙의 공동과 섬서의 화산까지 원을 그리며 최단 거리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일단 돈 좀 찾고."

진무는 일단 동림전장 동정호지부에 들를 생각이었다.

무당스럽지 않은 검도 하나 구해야 하고, 옷도 하나 사야 했다. 도포가 아닌 흑의 무복을 입고 나선 걸음인데 영 기분이 칙칙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황삼이었다.

그래, 황삼을 입자. 그나마 제일 무난한 색상이 아니던가?

막 전장을 향해 가던 진무의 앞에 한 떼의 사람들이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 뭐야? 왜 길을 처막고 있어? 이쪽이 지름길인데."

얼굴이 찡그려졌다.

이 지름길을 이용하지 않으면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관인들이 창날을 세운 채 오가는 이들을 막고 있었고, 행인들이 몇 겹이나 둘러싸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괜히 이쪽을 택했나?"

진무의 기억에 이쪽 방향에서 그나마 빠른 길로 돌아가자면?

"그쪽은 냄새가 심한데."

피혁을 사고파는 시장통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괜한 시비는 사양하고 싶었던 진무가 행인들을 피해 길을 옮기는데 사람들의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또 죽었다며?"

"그래. 같은 놈이라지 뭔가?"

"거, 그놈 대단하네. 장 판관이면 관에서도 알아주는 고수 아냐? 더욱이 같이 죽은 게 그의 수하들이라며?"

"맞어. 무림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그...."

"히야, 그 살수 놈 정말 간도 크지. 근데 누가 청부했을까?"

"어디 한두 놈이겠어? 장 판관 저 새끼 잘 죽었다고 생각하는 놈이 못해도 백은 넘을 게야."

"하긴, 못된 짓을 좀 많이 했나 그래."

"근데 여자도 하나 죽었다던데?"

"여자?"

"음."

"목격자네. 목격자야."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살수 놈이구만."

갖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모두가 각자의 결론을 만들어 내며 너도나도 속삭여 대었다.

'살수? 뭐, 동정호니까.'

진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주인이 없는 곳. 늘상 다툼이 많은 곳. 원한을 진 놈들이라고 어디 한둘이겠어?

더구나 통제되지 않는 무림인들이 잔뜩이다.

관? 절대로 통제할 수 없다.

객점과 주루가 수백 곳에, 도박장까지 합하면 추산이 안 된다. 검은돈이 넘쳐 난다는 뜻이다.

관인들이라고 별수 없다. 아니, 쥐꼬리만 한 녹봉을 받는 놈들이니 훨씬 더 타락하기 쉽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을 테니 살수와 같은 청부업자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으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진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곳을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진무가 지나가고 싶지 않았던 우시장 어귀에 들어섰다. 한참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악취가 코를 찔렀지만, 사람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잘만 북적거렸다.

'저놈들은 다들 어떻게 참는 거지?'

진무는 고개를 저으며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 방향을 잡았다.

그곳에서도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이런 씨발! 또 이 모양이야."

"왜 그래?"

상인들이다. 하나는 화가 잔뜩 나 있었고 하나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니 뭔 구미호가 사는 것도 아니고. 이거 봐, 또 이 꼴이라니까?"

상인이 짜증스럽게 말라비틀어지다시피 한 흑우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리던 진무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어?

"어제까지 말짱했다니까? 근데 밤새 이리되었어."

"허,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만."

상인이 신경질적으로 흑우의 사체를 발로 찼다.

그런데 그 옆으로 진무가 다가와 앉아 소의 사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요?"

잔뜩 열 받아 있던 터라 진무를 향해 내뱉는 말이 곱지 않았다.

뒤적뒤적.

진무는 상인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체를 이리저리 살폈다.

"아니 뭐냐니... 컥!"

상인이 눈을 부라리는 순간 진무가 벌떡 일어나 그의 울대를 잡아채었다.

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