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을무반의 수업이 중지되고 모든 무생들에게 대연무장으로 모이라는 소집령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지?"
"글쎄. 혹시 불시 평가가 아닐까?"
"또? 어제 종합 평가가 있었는데?"
무생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수군거리며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미리 도착한 이들은 여덟 명의 교두들에 의해 열을 지어 늘어서 있었고, 모두가 모였을 때 용봉관주 등여평과 정무칠성의 한 사람인 무풍개 양소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양소방이다."
"와아아아!"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
무생들 중에는 이름만 들어 보았을 뿐 양소방을 처음 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정파 무림에서 가장 강한 일곱 명의 무인 중 하나이자 가장 신출귀몰한 그의 모습에 함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내가 온 이유를 대충 짐작하리라 믿는다."
꿀꺽.
무생들이 침을 삼키며 결의에 찬 눈으로 양소방을 바라보았다.
양소방이 고개를 끄덕이자 총 교두 백천성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순서대로 지명된 교두들 앞에 서도록. 화산의 현선!"
"예!"
현선이 처음으로 호명되었다.
그리고 일 조를 맡은 천검(天劍) 여옥상 교두에게 배정되었다.
"다음은 무산파의 귀칠!"
차례로 호명된 무생들이 다시금 열을 짓기 시작했다.
팔십 명의 무생들의 절반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할 무렵.
"무당의 청상!"
"예!"
"칠 조."
청상의 조가 정해졌다.
쾌검술로 이름이 높은 소요검객 담평익 교두의 조원이었다.
제갈산산은 오 조에 배정이 되었고 아직 청우의 이름은 나오지 않은 참이었다.
"석문장 단우진!"
"예!"
"팔 조. 이상 끝!"
백천성은 그를 마지막으로 무생들의 이름이 적힌 서류철을 덮고 등여평의 뒤로 물러났다.
"어? 저, 저기 전 안 부르셨는데요?"
마지막까지 이름이 불리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은 청우의 모습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무생들 중 일부는 킥킥거리며 웃었고, 교두들은 눈을 찌푸렸다.
"저 아이는 분명?"
안면이 있었던 양소방이 묻자 등여평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약간의 문제가 저 아이입니다."
"응? 뭐가 말인가?"
"무공의 재능은 을무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데... 나머지에서 죄다 낙방하는 바람에."
"흠."
양소방이 청우를 바라보았다.
분명 진무를 따라다니던 무당의 이대제자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자신이 어떻게든 엮어 보려던 진무가 정무맹주 철지량과 비무를 마친 다음 곧바로 표주를 떠났다 들었다.
'고얀 놈. 나랑 할 때는 제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더니.'
진무를 떠올린 양소방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머지가 다 무슨 소용인가? 일단 시험 대상에 포함하게. 이번 시험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걸세."
"흠, 알겠습니다. 하면."
등여평이 잠시 고심하다 백천성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 백천성이 청우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다가 외쳤다.
"무당의 청우!"
"예!"
"칠 조. 이상 끝!"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청우가 뒤뚱거리며 뛰어가 칠 조의 맨 뒷자리에 섰다. 제 딴에는 후다닥이었겠지만.
그리고.
"지금부터 을무반 시험을 시작한다. 각 조는 교두들과 함께 중원을 여덟 곳으로 나누어 이동하며 시험을 치른다! 출발 시간은 내일 묘시(卯時) 초! 이번 시험을 통해 각 조별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이들이 갑무반에 선발될 것이니! 모두 최선을 다하라!"
"예!"
등여평의 말에 무생들의 대답이 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또한, 그들은 시험과 더불어 '궁'이라는 자들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결연한 표정이 참으로 듬직하구만그래."
떠날 준비를 위해 흩어지는 무생들을 보며 양소방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잠시 머무르며 쉬시지요."
"그럴 수야 있겠는가?"
"예?"
"저 아이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네. 나도 살펴봐야지."
"하면 바로 떠나실 겁니까?"
"그럴 생각일세. 혹 지나는 길에 고약한 놈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예?"
"그런 게 있네."
의아한 등여평의 표정에 양소방이 싱긋이 웃었다.
그는 떠나는 길에 진무도 한번 찾아볼 생각이었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뭔 상관이겠는가? 그저 총타에 일러 찾아보라 하면 될 일이었다.
'요놈, 요 고얀 놈. 얼굴이나 보고 떠날 것이지.'
* * *
"야!"
"왜요?"
진무의 고함에 사악한 기세를 풍기며 육중한 체구의 덩어리(?)들을 조져 놓고 있던 백표가 고개를 돌렸다.
"너 속으로 내 욕했지?"
"제가요?"
"뭐 고얀 놈 이딴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절대로 아닙니다."
백표가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하지 마! 이 새끼가 고기 좀 맛나게 썬다고 오냐 오냐 했더니."
빡!
진무가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백표의 대갈통을 후려쳤다.
"아니라니까 왜 때리십니까, 은공!"
반항을 해? 이 새끼가 미쳤나?
진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백표를 쳐다보았다.
지난 한 달간의 여정.
동정호를 떠난 진무와 백표는 수로에 이어 마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광서성의 동북단 관문인 흥안(興安). 백가장이 있다는 계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오는 길에 세 곳의 산채를 털었고 두 곳 마을에서 시비를 걸어 온 흑사방 지부를 박살 내 놓았다.
그 때문에 둘에 대한 이름이 중원의 서남부 사파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서남쌍괴(西南雙怪).
별 거지 같은 명호였다.
딱히 밝히고 다닌 적은 없지만 무당의 제자에게 기이할 괴(怪) 자를 붙이다니. 그리고 쌍괴라니?
당연히 천신과 그의 수하. 혹은 정의의 사도와 떨거지 정도가 되어야지.
어디 묶을 게 없어서 이런 사악한 놈과 쌍으로 묶는단 말인가?
격 떨어지게시리.
어쨌든 선하디선한 사파의 무인(?)들을 공격하는 질 나쁜 놈들이라는 소문이 난 뒤로는 습격이 잦아졌다. 지금 백표의 발아래 쓰러진 덩어리들도 사파의 습격자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백표는 당연히 채기법으로 기운을 모았고 이제는 제법 건장해진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퀭했던 눈동자가 부리부리해지고 근육까지 썩 알차게 생기니 이제야 좀 무인다운 외양으로 보인다.
거기에 내력이 더해진 난파풍도는 공기 가르는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예리해졌다.
문제는 몸과 함께 성격도 변했다는 것이다.
정신이 돌아온 직후에는 좀 벽창호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문 정파의 자식처럼 예의를 지켜 대하더니 채기법으로 기운이 쌓여 갈수록 눈빛은 물론 성격마저 사악해진다.
"이게? 눈 안 깔아?"
"...."
"잘하면 칼질이라도 하겠다?"
"칼질이라니요! 은공께 그딴 마음 품어 본 적 없습니다!"
"그런 놈 눈빛이 그래?"
살기를 띠며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진무를 바라보던 백표가 기세에 눌려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대체 뭐 이딴 부작용이 있단 말인가?
지나치게 도전적이다.
꼬박꼬박 은공이라고 부르며 말은 참 잘 듣는데 저놈의 눈빛이 문제인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혼잣말처럼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귀에 정확하게 꽂혔다.
"이 새끼가?"
진무가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부라리자 입을 꽉 다문 백표가 신경질적으로 돌부리를 걷어찼다.
"진짜 확.... 어휴, 말을 말자."
괜스레 자신의 말투를 나무랐던 진허와 진궁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열 받았을 만했다.
아니, 하지만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외적으로 보이는 것만 약관이었지 실상 팔십이 넘은 진무였다. 그런 자신에게 저따위 싸가지 없는 말투라니.
고기 잡는 솜씨가 좋아서 데리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씻겨져 내려간다.
그래. 백가장까지만이다.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면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벌써 생각이 몇 번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뱉은 말은 무조건 지켜 왔던 진무는 이제 성격을 바꾸어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까지 하는 참이었다.
하지만 팔십 년이나 이어 온 그 강박에 가까운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야! 쫑알대지 말고 빨리 정리해."
"예, 잘 알겠습니다! 은공!"
이 새끼 봐라, 들으란 듯이 목소리를 높여?
정말 진심을 담아서 곡소리 나도록 패 봐?
"자기는 꼼짝도 안 하면서. 맨날 이래라저래라...."
또 구시렁거린다.
씨발, 그냥 죽여 버릴까?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낸 진무는 속으로 연신 무량수불을 외워 댔다.
딱히 도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나 마음을 다스리는 데 이만한 게 또 없었다.
"화병 나겠네. 화병."
진무가 도호를 외며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백표는 쓰러진 덩어리들에게서 채기를 시작했다.
"으으으...."
기 빨린 놈들의 신음이 이어지고.
"자요."
"...."
백표가 놈들의 품에서 전낭을 수거해 진무에게 내밀었다.
이럴 땐 참 마음에 든다. 몇 번 보여 주었더니 곧잘 따라 하지 않는가? 이런 건 이제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잘 물어 왔다.
"제법 묵직하네."
전낭 다섯 개의 무게가 느껴지자 조금 전까지 언짢았던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자, 그럼 돈도 생겼고, 가서 고기나 좀 먹을까?"
"그러시죠, 은공."
순식간에 표정이 바뀐 백표가 환하게 웃는다.
희노애락의 부작용은 아직 유효한 모양이었다.
"자, 그럼 오늘은 늑대 새끼를 먹을까? 저번에 맛이 좋던데."
"...."
순간 진무의 뒤를 따르던 백표가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뭐?"
"설마? 지금 또 포 떠 달란 말입니까?"
"왜? 무슨 문제 있어?"
당연하지.
돈도 생겼고 고기도 먹어야 한다면 당연히 돈을 쓴다고 생각하는 쪽이 정상 아니던가.
"아니, 봐 봐요. 저기, 저기, 저기."
백표가 짜증이 잔뜩 서린 표정으로 불이 켜진 몇 곳을 가리켰다.
"널린 게 주루요, 객점입니다."
"그래서 뭐?"
"뭐라니요? 돈이 생겼으니 주루나 객점에서 산해진미를 처먹어야겠다, 뭐 이딴 건설적인 생각은 안 합니까?"
"흐음."
잠시 고민하던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주루와 객점을 잊다니."
그 말에 백표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못 볼 수도 있어. 아무리 은인 같은 고수라도 다른 데 신경이 팔려 있다 보면 못 보고 지나가는 것도 있겠지.
"자."
"...."
짤랑.
진무가 백표의 손에 전낭에서 꺼낸 동전 몇 개를 떨어뜨렸다.
"가서 술 사 와. 젤 맛난 걸로. 오늘은 특별히 너도 한 병 사 줄게."
"...."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밝게 웃는 진무의 표정에 백표의 얼굴이 와장창 일그러진다.
"서둘러 가자. 배도 고프고 밤이 되면 한층 사나워지는 게 늑대란 놈이거든."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왜 하필이면 이딴 놈을 은인으로 만났단 말인가?
대부분 나쁜 놈들에게서 빼앗은 것이기는 하지만 돈이 생기면 쓸 줄을 알아야지.
모은다.
한 푼도 안 쓰고 모은다.
동림전장 지부를 찾아가서 차곡차곡.
저축성 하나는 열 받을 정도로 뛰어난 은공이었다.
"이런 씨...."
"어, 계속해 봐. 더 하면 팰지도 몰라."
싱긋이 웃는 위협에 백표가 뒷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몸을 돌려 주루로 갔다. 술을 사기 위해서.
그리고 그날 밤 흥안의 인근 산 깊은 곳에서는 울분에 휩싸인 불청객을 만난 늑대들이 팔자에 없는 횡액을 당하고 말았다.
"와! 진짜 끝내주는구나."
익어 가는 고기를 바라보며 진무는 연신 감탄사를 뱉었고.
'망할 노무 은공 새끼! 수전노 같은 은공 새끼!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은공 새끼!'
백표는 쉴 새 없이 얇게 썬 고기를 구워야만 했다.
"너 속으로 또 내 욕했지?"
"아 진짜!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러십니까, 은공! 그냥 확 굽지 말까요!"
이 새끼 발끈하는 걸 보니 욕한 게 틀림없다.
심히 거슬렸지만, 진무는 한 번쯤 용서를 해 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채기법으로 내공이 늘어난 덕분에 난파풍도의 경지가 한층 심오해졌고, 고기가 상상 이상으로 맛있어졌기 때문이다.
"더 구워. 술 남았다."
"...."
투덜거리기는 해도 열심히 고기를 썰고 굽는 백표를 보며 진무는 명진이 참 편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패천주일 때는 손 하나 까딱해 본 적이 없었구나.
'백가장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서도 데리고 다닐까? 저 새끼 말투만 어떻게 고치면 딱 좋은데.'
그놈의 고기 앞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진무가 백표를 데리고 백가장으로 향하는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맛있게 익어 가는 고기와 향기로운 술과 함께.
91화
중원 최남단에 위치한 광서성.
중심에서 멀어져 있으나 꽤 이권이 많은 곳이었다.
북으로 가는 경로가 아미, 청성, 당가가 자리한 사천으로 인해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거래는 안전한 사천으로 가지만 대부분의 밀거래는 광서성의 경로로 이루어진다.
주요 사업이 밀거래다 보니 광서성에는 사파의 세력들이 즐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관부의 통제도 심하지 않으니 사업을 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하지만 광서성에서는 성도보다 더 유명한 곳이 북쪽 도시 계림이었다. 계수나무가 거대한 군락지를 이루어 펼쳐진 그곳은 모든 상인과 여행자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명소였다.
오가는 이들이 많다 보니 객점과 주루가 발달한 것은 물론이고 표국에 전장, 상단의 지점들이 즐비하다.
앞서 말했듯이 관의 통제가 적으니 사파가 득세를 한다.
도시 외곽은 밤만 되면 밀거래품이 오가는 암시장과 도박장, 홍등가가 불야성을 이루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에는 반드시 가시가 있는 법.
바로 계림의 유일한 정파인 백가장이었다.
그들은 사파의 세력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가시로서 누대를 이어 왔다.
초대 장주였던 백혁산의 유지에 따라 사방 백 리 안에 굶는 이가 없도록 은덕을 베푸니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 *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이! 감히!"
백가장의 대전각이 시끄럽다.
탁자의 중앙에 앉은 장로들의 목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려 퍼진다.
대전각의 중앙.
서신을 들고 있는 여인은 화를 애써 참아 내는 것처럼 손을 떨어 대고 있었다.
"장주! 이것은 본가를 업신여기는 처사가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감히 이따위 서신을 보내다니요! 당장 놈들의 목을 잘라야 합니다!"
장로들이 당장이라도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 들듯이 고성을 질렀다.
하지만 여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의 이름은 백여린. 당금 백가장의 주인이며, 여인이지만 광서성에서 풍령도(風鈴刀)라는 명호를 가진 이름 높은 무인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한 장의 서신.
붉은 비단으로 감싸고 청실과 홍실로 중앙을 봉한 그것은 혼첩이었고, 백가장의 세력권을 호시탐탐 노려 온 패력당주 노영찬이 보내온 것이다.
"모두 조용히 하라!"
대장로 사마소의 굵직한 목소리에 좌중이 진정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채 참아 내지 못한 분기로 인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백여린이 가까스로 가라앉힌 목소리로 사마소에게 물었다.
"도발이겠지요."
"도발이라니요! 이는 무시입니다. 대장로님, 당장에 무인들을 소집해 패력당을 공격해야 합니다!"
"어허! 조용히 하라지 않는가!"
"...."
사마소가 다시 한번 나무라자 외당 장로 이임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대장로, 그대의 생각을 말해 보시오."
백여린의 말에 사마소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따위 혼첩을 보낸 놈들의 행태는 결코 좌시할 수 없으나, 그들과의 싸움에는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음."
냉정한 판단이었다.
십 년 전 혈사 이후로 백가장의 세력은 전성기의 반에도 차지 못했다.
아니, 멸문에 가깝게 파괴당한 백가장이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남은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모두가 백여린이 혼사도 포기하고 백가장을 위해 불철주야로 뛰어다녔기 때문이었다.
백가장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와중에 쉰이 넘은 패력당주가 혼첩을 보내 백여린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처도 아닌 첩이 되라고.
가주가 희롱당한 것을 참을 만한 가신들은 없었다.
당장에 싸워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니었다.
백가장.
그들은 계림의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곳이 공격받는다면 재야의 인사들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도우려 나설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사파의 세력이 훨씬 더 강함에도 그들 중 누구도 힘 빠진 백가장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영찬이 말도 안 되는 혼첩을 보내 백가장을 도발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싸움의 빌미.
누가 먼저 시작하였느냐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것은 곧 명분이 된다.
만약 백가장이 참지 못하고 나선다면 그들이 시작한 전쟁이 될 테니 주위의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뛰어난 무인들이 즐비한 백가장이었으나 세가 약하니 먼저 공격을 시작하면 분명 큰 피해를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참아야 했다.
백여린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래, 참자. 아직은 때가 아니다.
좀 더 힘을 기른 후에 싸워도 늦지 않다. 이미 지난 십 년간 숱한 모멸감을 견뎌 오지 않았던가.
"노영찬에게 전갈을 보내세요."
"장주!"
"싸움은 없습니다."
"...."
"만나자 하세요."
힘 빠진 목소리에 장로들이 더 이상 반문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백여린임을 알기에.
* * *
"오! 경치 좋은데?"
진무가 길가의 가로수를 보며 감탄했다.
곳곳이 계수나무였다.
중앙 관도뿐 아니라 길목마다 계수나무 꽃이 활짝 피어 절경을 이룬다.
계림의 중심으로 들어서기 전에 자리 잡은 영천현(靈川懸).
길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밭에서 열심히 땅을 일구는 촌로의 모습과 길 좌우로 나지막하게 솟구친 봉우리들이 줄은 이은 모습은 가히 인세의 도원이라 할 만했다.
"계림은 작은 도시가 아닙니다. 모두 열네 개의 현이 포함된 거대한 주부지요."
백표가 지난날을 회상하듯이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의 정취를 느끼고 있는 그 기분은 이해하지만.
진무도 안다.
방금은 그저 감탄사였다.
아주 오래전에 무림을 유랑할 때 몇 번이나 왔는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백표와 함께 도착하니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음, 하지만 과거와 같지는 않군요."
진무가 회상하는 사이 백표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과거의 백가장은 계림의 모든 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열네 곳의 현 모두가 백가장의 세력권에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오래전의 평화로웠던 계림에는.
와장창!
"이런 시팔! 오늘까지 준비하라고 했지!"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상인에게 보호비를 내라며 괴롭히는 무뢰배도 없었고.
"오냐! 오늘 잘 걸렸다!"
"어? 해 보자고? 좋아, 칼 뽑아 이 새끼야!"
서로를 노려보며 칼을 뽑아 들고 으르렁거리는 사파 무인들도 없었다.
스르릉.
어째 잘 참는다 했다.
"어이, 정지. 적당히 해라. 돌아오자마자 피부터 볼 생각이냐?"
"...."
진무의 말에 백표가 한숨을 내쉬며 칼을 집어넣었다.
성격하고는.
아니 무뢰배가 상인들 괴롭히고 술 처먹다가 끼리끼리 싸우는 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필요하면 그들이 알아서 관에 신고를 해야지. 지가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나서길 왜 나서?
하여간 정파라는 이름만 달고 있으면 모두가 이런 식이다.
무림인은 무림인이. 범법자는 관에서. 이런 기본적인 사회 규율도 모른단 말인가?
어쨌든 이 망할 놈의 성격을 봤을 때 역시 얼른 떼 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서둘러 백가장에 보내 놓고 양의심공이나 찾으러 가야겠다.
"야, 가자. 얼른 집에 가야지. 동생 보고 싶다며?"
"동생을 보고 싶다는 말은 한 적이...."
"부끄러워하기는. 서둘러."
진무가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자 백표가 사람들을 괴롭히고 거리의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사파 무인들을 몇 번이나 돌아보다 그 뒤를 따랐다.
영천의 경치를 감상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빠져나온 진무는 한 시진도 되지 않아 계림의 중심에 도착했다.
백가장이 있는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계수나무 숲 쪽이었다.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다.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 하는 것인데 막상 헤어지려니 좀 섭섭하다.
그래도 함께해 온 정이 있으니 밥이라도 한 끼 먹고 보낼 생각에 싫다는 백표를 억지로 끌고 객점을 찾았다.
그래,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름난 요리를....
"자리가 없습니다. 손님."
"응?"
"예약이 꽉 차서."
막 객점의 주렴을 걷어 내는데, 점소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거리며 막았다.
진무가 의아하게 안을 바라보았다. 자리 많은데?
아, 손님은 있구나.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어서 그런 거구나.
슬쩍 점소이 너머의 상황을 보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살기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으니까.
객점의 일 층에는 칼 찬 놈들이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고 두 패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다. 딱 봐도 사파와 정파.
둘이 만나면? 일단 째려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태초부터 정해진 사실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광경이 아니던가?
그리고 다행스럽게 사파 쪽이 좀 더 우세하다.
'듬직한 녀석들.'
몸은 정파이되 마음만은 아직 사파가 아니던가? 대충 복장을 보니 예전에 본 적도 있는 놈들 같은데. 패... 뭐시기라 했던가?
"어?"
순간 백표의 눈이 찡그려진다.
"왜?"
"...."
진무가 물었지만, 백표의 시선은 정파의 무인들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뭐? 왜?"
"...."
이 새끼가 갈수록 싸가지가 없어진다. 은인께서 물어보면 공손하게 대답할 생각을 해야지.
하지만 한 번만 더 참아 주자. 어차피 헤어질 마당에.
"야, 가자. 자리가 없다니 딴 데 가서 먹지 뭐. 식당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만큼은 괜한 시비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진무가 몸을 돌리는데.
"어? 야!"
백표가 점소이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저게 진짜."
말 한번 거지 같이 안 듣는다.
* * *
계림 중심지에서 제법 유명한 객점, 소담(笑談).
그곳의 객점주는 운이 좋으면서도 더러운 하루를 맞이했다.
손님이 많아도 너무 많다.
미리 예약을 했던 손님들이 일 층과 이 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계림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패력당과 백가장.
하물며 각 세력의 무인들이 아니라 주인들이 직접 찾아오는 바람에 객점 주인은 좌불안석이었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듯한 분위기.
아니 왜! 이놈의 자식들은 어째서 만나는 무대가 객점 아니면 주루란 말인가?
길거리도 있고, 들판도 있고, 하다못해 제 놈들 집도 있는데! 써먹을 장소가 그렇게도 없냐?
그리고 하필이면 어째서 많고 많은 객점 중에 소담이란 말인가?
객점주는 중원의 모든 주루와 객점을 대표해 울분을 쏟아 내고 있었지만, 힘이 없는 게 곧 죄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객점주는 이 층에서 시중을 들며 혹시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까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패력당주님의 말씀은 고마우나 본 장주가 모자라 정중히 사양하는 바요."
백여린의 거절에 노영찬이 음흉하게 웃는다.
"모자라다니요. 무공이면 무공, 미색이면 미색. 어디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분이 아직 혼자시니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요."
"높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다시 한번 거절을 해 보지만, 노영찬은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허허, 걱정이랄 게 뭐 있겠소? 자고로 운우지정(雲雨之情)이니, 음양합일(陰陽合一)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소? 서른이 넘도록 그 즐거움을 모르시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 게지요."
"...."
노골적인 희롱의 언사에 백여린의 고운 아미가 분노로 움츠러들었고 장로들이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 싸늘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호오? 말이나 나누자더니 칼을 뽑으시려고?"
노영찬은 마치 그런 분위기를 즐기듯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오해하셨군요. 이만한 일로 칼부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오히려 백여린이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들어 장로들을 진정시켰다.
"우리 백가장은 괜한 오해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혼첩은 감사하나 거절임을 아실 터이니 그만 물러가 주시지요."
"위명 쟁쟁하신 풍령도 장주께서 개새끼처럼 꼬리를 마시니 어쩔 수 없지. 혼첩은 한번 생각해 보시구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소?"
끝까지 뱀처럼 음흉한 눈으로 백여린의 몸을 훑은 노영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이만 가리다. 좋은 만남이었소. 자주 이런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군. 주루도 좋고, 침소도 좋고."
"...."
노영찬은 끊임없이 백여린을 도발했다.
여인으로서 느끼는 수치심을 감안하면 당장 싸움이 일어나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아, 차라리 지금 침소로 가는 것은 어떻소? 혼례가 뭐 대수겠소? 오가다 만나서도 인연을 맺는 게 이 무림인데."
조금 더 노골적인 도발. 하지만 백여린은 주먹을 움켜쥐었을 뿐 참고 또 참으며 억지스럽게 미소를 유지했다.
놈은 일부러 자신이 칼을 뽑게끔 만들려 유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 내야 한다.
수치는 참으면 된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어렵게 지켜 온 백가장이 다시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가자니까? 내가 잘해 준다니까?"
뻐억!
노영찬이 백여린을 향해 음흉한 눈빛으로 다가서는데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타격음.
콰직! 퍼억!
소란스러움이 객점을 가득 채운다.
설마 아래층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인가? 그토록 주의를 주었건만.
미간에 골이 깊게 파인 백여린이 벌떡 일어나자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이 층에 있던 패력당과 백가장의 무인들이 일거에 칼을 뽑아 들었다.
"니들은 뭐냐?"
그 순간 낮게 깔려 나오는 스산한 살기와 함께 이 층으로 올라서는 무인.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건 또 뭐야?"
노영찬이 그의 손에 잡힌 패력당의 무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오, 오라...버니?"
92화
올라온 인물을 유심히 바라보던 백여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분명 저 얼굴은 십 년 전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백표였다.
어째서 지금? 네가 왜 여기서 나타나?
"뭐? 오라비?"
하지만 그녀의 말은 지금의 상황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아! 이거 봐라? 아주 뒤로 호박씨를 제대로 까셨구만?"
마치 잘 걸렸다는 듯이 웃으며 노영찬이 기세를 피워 올렸다.
실수다. 자신도 모르게 뱉은 말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 버린 것이다.
망할, 그토록 참아 냈거늘.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어째서 지금 오라비가 나타난단 말인가? 그동안 연락 한 통조차 없었으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버텨 온 십 년인데.
"크크, 아주 좋아. 니들이 먼저 걸어 온 전쟁이야."
노영찬은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아챘다.
"얘들아!"
그의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곧 전쟁이 시작될 터였다. 백여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얘들 같은 소리 하네."
"...?"
끼이익, 끼이익.
짓밟힌 나무 계단의 비명과 함께 등장한 나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백표가 걸었던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오는 새파랗게 젊은 무인.
그리고 그 아래 모조리 쓰러진 패력당의 무인들.
어?
순간 노영찬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잊어버렸다.
그것은 백여린을 비롯한 백가장의 수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이 상황은 뭘까?
따악!
"이 자식이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고 지랄이야!"
이 층 끝에 오른 진무가 살기를 피워 내던 백표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쳤다.
"왜 때리십니까!"
"몰라서 물어? 기껏 밥이나 한 끼 사 주려고 했더니 난데없이 싸우기는 왜 싸워!"
"됐고, 비켜 주십시오. 은공!"
"이게 계속 봐줬더니 뒈질라고? 확!"
진무가 눈을 부라리며 손을 들어 올리자 백표가 움찔거리며 목을 움츠렸다. 여전히 스산한 살기를 뿌리면서.
그들은 마치 지금의 상황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라, 이것 봐라. 익숙한 느낌의 인간들이 많네."
백표의 앞으로 나선 진무가 패력당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제야 백표가 제멋대로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 생각났다. 계림의 패력당.
더욱이 그 반대편에 있는 여인이 백표를 보고 오라비라 했으니 당연히 백가장이겠지.
근데.
"니들 싸우냐?"
"...."
진무의 말에 모두가 당황을 넘어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진무야 과거 속의 기억이 떠올라 팔십 노인으로서 말했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그저 새파랗게 어린 놈의 반말지거리였다.
"이런 어린놈의 새끼가!"
반응은 곧바로 터져 나온다.
십 년 만에 나타난 백표를 애 다루듯이 하는 진무였으니 백가장은 아직 정확히 상황판단을 하지 못했다. 시작은 당연히 패력당이다.
노영찬의 뒤에 있던 무인이 곧바로 주먹을 뻗어 왔다.
하지만.
탁.
가볍게 손목을 꼬아 잡은 진무가 슬쩍 비틀자.
휘릭. 쿵!
힘조차 쓰지 못하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 바닥에 처박혔다.
"거, 새끼 성급하기는."
"...!"
가볍고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지켜보는 이들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패력당의 무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방금 진무를 공격한 자는 패력당의 외순찰을 맡은 서열 오 위의 고수 고학성이었다. 그런 그를 손목을 비튼 것만으로 쓰러뜨린 것이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좋거든? 그러니까 그냥 가라. 좋은 기회잖냐?"
진무가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이 새끼...."
쩍!
훌륭한 사파인답게 적의 강함에 굴하지 않고 말을 내뱉었던 패력당의 내당주 문추는 대가리가 뒤로 젖혀졌다.
아무도 그의 머리에 손이 닿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파리 쫓듯 손만 슬쩍 휘둘렀을 뿐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고 옛 성현께서 말씀하셨지. 자, 누구 또 지껄일 사람?"
진무는 여전히 웃는다.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박히듯 든 생각은 하나였다.
고수. 그것도 자신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고수였다.
그것은 백가장으로서는 축복이었고 패력당에게는 저주였다.
'이런 개 같은....'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것도 모자라 고기한테 살점을 뜯어 먹히게 생긴 노영찬이 얼굴을 굳혔다.
"귀하는 누구요?"
역시 사파인들은 태세 전환도 빠르다. 실로 흐뭇하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무림은 힘센 놈이 법이고 정의다. 사파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방금의 그 존댓말이 너의 생명을 구했느니라. 최소한 너의 모가지는 따지 않으마.
"나? 혁... 그냥 손님이야."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함에 하마터면 혁련무강이라고 말할 뻔한 진무가 싱글거리며 둘러대었다.
손님?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는 것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백가장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지는 모르나 이것은 세력 간의 다툼입니다. 백가장 쪽에서 먼저 시작한."
당연히 알지. 왜 모를까?
정사불양립(正邪不兩立)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한자리에 모이면 반드시 싸우는 게 정파와 사파였다.
그리고 노영찬이 말한 의미.
세력 다툼이며 백가장에서 먼저 시작했으니 관계없는 놈은 꺼지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그러나 진무가 어디 그딴 걸 신경이나 썼던가.
"그래서?"
"...뭐요?"
"그래서 뭐? 싸우려고?"
"...."
"상관은 없는데. 내가 지금 니들 봐주려고 한 거거든? 근데 끝까지 해보자고 하면 마다할 이유는 없지. 귀찮긴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전부 다 모가지를 따 주는 것도 나쁘지 않고."
잔인한 말을 웃으면서 잘도 내뱉는다.
하지만 사실이다.
백표는 녹록한 실력이 아니다. 채기법으로 그 손속에 잔인함마저 머금게 되었으니 싸우면 패력당은 지금의 숫자로는 온전히 살아 나가기 힘들 터였다. 물론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진무의 책임이 컸지만 뭐 어떤가.
그리고 일 층의 무인들을 진무가 모조리 때려 눕혀 놓았으니 수적으로도 백가장이 훨씬 우세해져 버렸다.
그러게 막지 말라니까.
진무가 하나도 남김없이 쓰러져 있는 일 층의 무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뭣 때문에 싸우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살려는 줘야지. 어른 알아보고 존댓말도 하는 착한 사파 놈들인데.
"한번 해볼래?"
"...!"
여전히 웃는 진무였지만 노영찬을 비롯해서 패력당의 무인들은 사방을 짓눌러 오는 압력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진무가 뻗어 내는 기운. 거악과도 같은 압박감이 객점을 통째로 짓누르고 있었다.
'새,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노영찬은 수장의 자존심으로 자신이 가진 기운을 모조리 끌어 올려 버텼으나, 발이 마룻바닥을 부수며 파고들고 있었다.
진무는 그사이 기세를 미묘하게 바꾸어 패력당의 무인 하나하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노영찬부터 시작해서 그 옆에, 그 뒤에... 응?
어느 순간 진무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어쭈, 흘려?'
희한한 놈이 하나 걸려들었다.
아무리 모든 기운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제 놈들 수장조차 버티지 못하고 이를 악무는 판에 진무의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요 자식 봐라?'
진무가 기특한 마음이 들어 조금 시험해 볼까 하는데.
"무, 물러나겠습니다."
이러다 무릎을 꿇게 생긴 노영찬이 다급하게 대답해 왔다.
화악!
그러자 진무의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고, 압박당하던 패력당의 무인들이 가쁜 숨을 토해 내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괜히 고집부리다 뒈지면 너만 손해지."
진무가 빙긋이 웃으며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근데 너 이름이 뭐냐?"
"허억, 허억... 저는 패력당의 노...."
"너 말고."
"예?"
진무가 짜증을 내며 손가락을 들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노영찬의 뒤편에 서 있는 무인이었다.
"아, 이분.... 아니 이자는 본방의...."
노영찬이 퍼뜩 말을 바꾼다. 이분?
"너한테 안 물었어."
"...."
노영찬의 얼굴이 수치심에 와락 일그러졌다. 백가장의 무인들이 보고 있는 자리가 아니던가?
하지만 자존심보다는 사는 게 먼저였다. 자신들 전체를 짓누를 정도의 기세를 뿌리는 고수라면 싸우는 즉시 무조건 세상과 하직이다.
"너 이름이 뭐냐니까?"
이어진 진무의 물음에 지명당한 무인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목인겸입니다."
"목인겸?"
들은 적이 없는 자다.
그리고 노영찬은 그를 짧게나마 '이분'이라 칭했다.
제 놈이 당주면서.
그렇다는 것은 그만한 신분을 가졌다는 뜻이다. 사파에서 한 방파를 이끄는 놈이 자신보다 강한 수하를 둔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사패천? 그럴 리가.
검강지경의 고수가 뿜어낸 기세를 흘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의 핵심 고수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누굴까?
진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목인겸이라는 자를 바라보는데.
"대인께서 허락하신다면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노영찬이 고개를 숙이며 청해 왔다.
진무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인겸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저런 젊은 고수가 사파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굳이 간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었다. 진무를 공격한 것도 아니고, 사파의 씨를 말릴 생각도 아닌데 뭐 하러 그들을 죄다 죽인단 말인가.
"어, 그래. 가라."
"감사합니다. 대인!"
싸가지 없는 백표 놈과 달리 인사성도 밝다.
그래. 열심히 해라, 이 녀석들. 사파의 미래가 밝구나.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가는 노용찬을 향해 진무는 속으로 응원까지 해 가며 기분 좋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백여린과 백가장의 장로들이 급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대협!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
뭐 딱히 도와줄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닌데.
그나저나 동생이라는 것이 십 년 만에 만난 제 오라비는 본 척도 안 하고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하다니. 가족이란 게 원수를 져도 알은체는 하는 법인데.
하여간 정파라는 것들은....
진무는 백표가 참 안됐다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제 이걸로 끝이다. 자신이 마음먹은 일을 드디어 완수해 냈다.
동생과 가신들이 있으니 집에 데려다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장하다, 진무!
그가 썰어 주는 고기 맛이 그립긴 하겠지만 이제야 귀찮고 싸가지까지 없는 놈을 떼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밥값도 굳었다. 집에 가서 먹겠지.
"자, 그럼 다들 수고하라고."
"...예?"
진무의 급작스러운 인사에 모두가 당황한 듯 고개를 쳐든다.
"뭐? 할 말 있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우셔서. 이럴 것이 아니라 본방으로 가셔서."
"응? 뭐 하러?"
"예?"
진무의 반응에 백여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난 그냥 집 나온 놈 집에 데려다주러 온 거야. 길까지 돌아가면서."
"...."
그제야 백여린이 자신의 오라비를 쳐다보았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갑자기 집을 나가 자신을 십 년 동안 고생하게 만들었던 말 새끼가 암말도 아니고 전투 병력을 데려왔다. 그것도 패력당의 수뇌들을 혼자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고수를.
백여린은 절대로 그를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의 도움으로 넘어갔지만 패력당을 비롯한 수많은 사파의 무리들이 백가장을 노리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도움을 받고 또 청하는 것이 염치없긴 했으나 물러간 패력당이 가만있을 리 없었고, 백가장이 살자면 지금 눈앞에 있는 고수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만약 그와 연을 맺는다면 그동안의 울분을 떨치고 다시금 백가장이 계림의 패자가 될 기회일지도 몰랐다.
필요하면 자신의 미색...을 동원해 보기에는 너무 어리다. 아무튼 그래도 어떻게든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은공!"
"...."
또 은공이냐? 이젠 좀 귀찮다, 그 말.
진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백여린을 바라보는데.
"감히 은공께 부탁드립니다. 백가장을 도와주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어, 필요 없어."
너무도 단호한 거절에 뒤를 이어 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잡아야만 하는데.
"은공."
그 사이를 백표가 끼어들었다.
"가시죠. 밥 먹게."
"...."
"고기, 맛나게 구워 드리겠습니다."
"...."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백표가 차가운 살기를 흘리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건 좀... 땡긴다.
그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일단 먹고 출발해도, 뭐.
"어디로? 니네 집?"
"예."
"그래."
고민하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무의 모습에 백여린은 물론 장로들마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무엇들 하시오? 서둘러 안내하시오!"
"예? 아예."
퍼뜩 정신을 차린 외당 장로 이임생이 안내하듯 앞서 걸었다.
백여린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기? 뭔 고기? 뭘 맛나게 굽는다는 거지?
"장주님."
"...예?"
"가시죠."
"...예."
"허 참, 대공자께서 저런 분을 데리고 오시다니."
대장로 사마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고 백여린은 가면서도 고기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했다.
93화
'이게 지금 뭐 하는!'
백가장으로 돌아온 백여린은 기분이 무척이나 언짢았다.
귀한 손님을 위해 잘 꾸며진 후원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진무가 한 상 가득 차린 저녁을 거절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귀한 손님이 된 진무를 접대하기 위해 장주인 자신은 물론 장로들까지 모여 있는 자리였다.
슈슛! 스스슷!
백표가 펼친 검술을 모두가 쳐다보고 있었다.
백가장의 직계에게 전해지는 난파풍도가 엄청난 수준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공기조차 소리 없이 가르는 그 모습은 그가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다.
진무를 대접하기 위해 백표가 잡아 온 노루 한 마리.
난파풍도를 고작 노루를 해체해 먹기 좋게 포를 뜨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치욕스러운....'
아무리 가문에 은혜를 베푼 이를 대접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수치스러운 행동이었다. 명망 높은 가문의 무인이 도축장 소백정도 아니고 가문의 비전 도법을 고작.
그리고 백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저 사악한 기운은 또 뭐란 말인가? 바람처럼 청량해야 할 백가장의 운기법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아니었다.
마치, 마치... 사파인들에게서나 보는 기운.
백여린은 솟구치는 화를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비가 간악한 사패천의 천우명에게도 굴하지 않고 지켜 낸 의기가 가득한 백가장이었다. 자신이 사파의 수많은 억압과 공격에서도 버티며 지켜 온 백가장이었다.
난파풍도는 그 백가장의 의기를 대표하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고기나 써는 데 사용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서, 땀까지 흘리며.
치이익.
이번엔 굽지 않는가?
먹기 좋게 구워 진무의 앞에 공손하게 놓는다.
"드시죠."
"어."
진무가 고기를 입에 넣고 히죽 웃자 백표가 사이한 눈빛으로 만족스럽게 따라 웃는다.
더구나.
"너도 먹어라."
"...."
백여린의 앞에 놓인 접시.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고기.
백여린은 쌍심지를 세워 백표를 노려보았다.
고작 이 꼴을 보이려 돌아온 것이냐? 자신에게 백가장이라는 거대한 짐을 떠넘기고 사라졌다가, 고작 이 꼴을 보이려고?
와장창!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 말종 같으니라고!"
진무를 꾀어 자신들을 도와 달라 해 보려던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백여린은 접시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백표를 향해 솟구치는 화를 토해 내었다.
"...."
백표는 우두커니 서서 땅바닥에 떨어진 고기와 깨어진 접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주웠다.
그 모습에 백여린의 분노가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치워! 누가 그따위 걸 먹는다고!"
결국,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후원을 떠나 버렸다.
그 모습을 진무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저래? 맛있기만 한데."
진무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둘의 사이였다.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행동을...."
"...?"
뭐를? 고기 구워 먹는 걸?
"가문의 자존심과도 같은 난파풍도를 고작 고기 써는 일에 사용한 것을."
"아, 난 또 뭐라고."
진무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정파라는 것들의 자존심이란.
그게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어차피 무공이라는 게 싸우기 위함도 있었지만,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쯧, 그 때문에 고기가 훨씬 더 맛있는 것은 모르고."
필요한 데 사용하면 그만이다.
진무의 말에 백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변해야 하죠. 굳건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전통을 지킬 수 있으나 재건하는 이들은 변해야 합니다. 때론 고기도 썰어야 하고 생선의 배도 따야 합니다. 필요하면 뭐든 해야 하는 건데 동생은 아직 그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웬일로 백표가 제 모습을 찾아 맞는 말을 한다.
재건하는 자는 변해야 한다. 그의 말에 깊은 고뇌가 느껴지는 것은 물론 변화에 대한 갈망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 과정이 모두에게 지탄 받을 것을 알기에 처연함마저 담겨 있었다.
"한잔할래?"
진무가 웃으며 백표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가는 걸음은 급하지 않다.
잠시 오랜 친구처럼 웃으며 한잔 건네는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 * *
"저, 어찌할까요?"
패력당의 수뇌들이 모인 자리.
노영찬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목인겸이라는 자였다.
갑자기 찾아온 자. 그 이름 또한 가명임을 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이 무림에 본명을 쓰며 돌아다니는 이가 몇이나 된다고.
그는 백가장과의 싸움이 시작되면 패력당을 돕겠다 했다.
이미 그의 무위는 확인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는 강했다. 다섯 명의 수하와 찾아왔지만 홀로 패력당의 수뇌를 모조리 꿇려 버렸다.
그는 단 한 가지만 원했다.
한 자루의 검.
백가장은 도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검이라니?
의아했으나 그들이 도와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검 따위 그가 갖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 길로 노영찬은 혼첩을 보내 백가장을 도발했다. 저들이 먼저 공격해 올 수 있도록. 그래야만 자신들에게 명분이 생긴다. 이참에 전쟁을 통해 백가장이라는 이름을 아예 지워 버릴 참이었다.
그런데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자신들이 어찌해 보지 못할 정도로 강한 약관의 고수였다.
어쩌면 목인겸이라는 사내도 자신할 수 없었는지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끓어오른 탐욕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눈을 감기만 해도 미색이 출중한 백가장주가 떠오른다.
'달덩이처럼 풍만한 그 엉덩....'
갑자기 흐르는 침을 닦아 낸 노영찬은... 하여간에 백가장이 가진 막대한 이권(?)에 대한 생각을 하니 조바심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고수는 손님이라고 하지 않던가? 곧 떠날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기다려야 하는가?
"백가장을 공격한다."
"...예?"
고민하고 있던 노영찬은 목인겸의 말이 뱉어지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오늘 밤 안으로 백가장을 계림에서 지운다."
"하지만 명분이 없습니다."
"명분? 그건 그대가 생각해야지."
노영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파와 사파는 다르다.
무인의 수로 따지면 패력당이 백가장보다 훨씬 더 앞선다. 하지만 백가장의 세력권에 있는 소규모 방파들이 열 개도 넘는다. 그들을 모두 합하면 패력당의 전력이 밀리게 된다.
소규모 방파들은 모두 열두 개 현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파와 달리 명분에 움직인다. 그것이 그들의 협력 관계를 끈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백가장이 먼저 공격해 오도록 도발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백가장을 치고 이권을 나눈다. 알짜배기만 차지한 뒤 나머지를 나누어 주고 그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면 된다.
문제는 그들이 연합하기 전에 백가장의 본진을 무너뜨려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백가장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면 아무리 정파라고 해도 뭉치기가 쉽지 않다. 그때부터는 명분보다 실리다.
명분을 제공하던 쪽이 사라진 바에야 돈 준다는 놈을 싫다고 할 놈은 없었다. 백가장이 무너지면 그들은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모든 협상은 백가장이 완전히 무너지고 난 다음의 일이다.
저들이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원군이 오기 전에 무너뜨리자면 하룻밤 안에 끝내야 한다.
패력당만으로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또한.
"낮의 그 고수는 어찌합니까? 그가 백가장을 돕게 되면...."
승산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 하룻밤을 훨씬 넘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가 맡도록 하지."
"...."
엄청나게 강하던데.
나이는 어리지만 적어도 의기 이상은 되는 듯했다. 재수 없으면 그보다 더 강한.
하지만 노영찬의 의심스러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인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이외에도 지원군이 대기 중이다. 공격을 시작하는 즉시 백가장을 칠 수 있게."
"...!"
지원군?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런 게 있으면 왜 미리 말해 주지 않고?
목인겸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문득 의심이 생긴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패력당을 돕는 것인가? 그 검이라는 게 그리도 가치 있는 물건이었나?
하지만 이어지는 목인겸의 말에 의심마저 지워 버렸다.
"그대가 오늘 밤 안에 백가장주를 안을 수 있게 해 주지."
툭.
때로 탐욕이 이성을 지배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불나방은 죽을 줄 알면서도 불을 향해 뛰어드는 법이다.
백가장주를 안는다.
곧 백가장을 얻게 된다.
그 막대한 이권을 오늘 밤 안에 얻는 것이다.
노영찬은 단숨에 일어나 수뇌들을 향해 고함치듯 명령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외당주는 지금 즉시 무인들을 끌어모으라!"
"예. 당주님!"
"놈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알고 외부에 도움을 청해 인원을 모으기 전에 친다!"
"알겠습니다."
애초에 싸울 계획이었다.
뜬금없는 고수의 등장에 잠시 머뭇거렸을 뿐이다. 더군다나 그 고수는 저자가 맡는다고 하지 않은가.
패력당에 무인이 모이는 동안 주변에 도움을 요청한다 해도 저들의 대응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지원군까지 있다 했으니 시간은 충분할 터였다.
'흐흐흐, 오늘 밤이 지나면 백가장의 막대한 이권과 그년을...품을 수 있겠구나.'
노영찬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명이 떨어진 순간 계림에 퍼져 있는 패력당의 무인들에게 소집령이 내려졌다.
"그럼 본진이 준비될 때까지 쉬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적어도 한 시진은 걸릴 겝니다. 푹 쉬고 계십시오!"
탐욕에 찬 노영찬의 달뜬 목소리를 뒤로한 목인겸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거처로 돌아온 목인겸은 곧바로 야행복을 갖춰 입었다.
노영찬에게 말했던 것처럼 휴식이나 취하고 있을 생각이 아니었다.
지원군은 그저 패력당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거짓말일 뿐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무혈(無穴)."
뒤로 돌아선 그의 앞에는 똑같은 복장을 한 다섯 명의 무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대랑께 약속드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더 이상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다. 처음 계획한 대로 패력당이 백가장을 공격하는 틈을 노린다."
대답은 없다. 아니,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명령에 충실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명을 받고 계림으로 온 그들은 백가장을 유심히 살폈다.
백가장주 백여린.
그들이 노리고 있는 물건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백가장 안에서만 보냈다.
그렇다고 백가장에 숨어들어 그녀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범은 범이다. 발톱이 빠져도 이빨은 날카로웠고 마지막 순간에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자신들만으로는 백가장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패력당을 이용한 것이다.
백가장과 패력당. 계림을 놓고 싸우는 그들이었기에 이용하기가 너무도 쉬웠다. 약간의 탐욕만 충동질하면 충분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목표만을 취한다. 명심해라."
목인겸의 말에 복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어두워지기 시작한 밤.
땅거미에 숨은 여섯 명의 복면인들이 패력당을 빠져나갔다.
94화
타닥, 타닥.
진무와 백표가 여유롭게 앉아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시간. 깊어 가는 밤에 취해 가던 그때, 백가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갑작스러운 비에 빨래 걷는 아낙처럼 부산스럽게 움직였고 이곳저곳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백표가 바삐 지나가는 후원의 무인을 불러 세우자 짜증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패력당으로 사파의 무인들이 대거 모이고 있다는 전갈이오."
가문으로 돌아온 장자에 대한 말치고는 무척이나 거슬리는 어투였으나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의 백가장에서 그를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뭐라고? 어째서?"
"어째서라니? 당연하지 않소. 그 망할 놈들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말이오!"
"...!"
이해가 안 되었다.
낮에 진무의 무위를 보았음에도 공격을 감행할 생각이란 말인가?
"이런! 장주는 어디에 있나?"
"지금 장로님들과 긴급회의를 시작하셨소. 바쁘니 그만 놓으시오."
"망할."
백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에 진무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굳이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자신의 앞길을 막을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으나 지금의 백가장의 세력은 너무 약했다.
그에 반해 패력당의 세는 강하다. 낮에 객점에서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꼭 수가 많은 것이 승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일 층에 있던 패력당의 무인이 배는 더 많았다.
그리고 고수의 질에서도 차이가 났다.
그리고.
'그 목인겸이라는 놈.'
진무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패력당과 백가장의 수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기운을 버텨 낸 놈이었다.
'한데 생각해 보니 조금 익숙했단 말이야.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하지만 무림에서 활동한 것이 이 년이 되지 못하는 진무가 만난 사람들이라고 해 봐야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익숙할까?
얼굴이 아니라 그... 느낌? 그런 무공?
그 순간 진무가 일그러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 새끼들!"
무월루의 노인네. 그리고 형주 인근에서 어린 소녀를 노렸던 놈들.
그놈들이다.
"아, 젠장! 왜 몰랐지?"
진무가 갑자기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자 백표가 슬쩍 쳐다본다.
뭘 잘못 처먹었나? 지금 백가장이 공격받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오냐?
백표가 언짢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쳐다보는데 진무가 자신의 검을 챙기기 시작했다.
"은공? 어딜 가시려고?"
이런 중요한 때에!
"패력당."
"...예에?"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싶다. 갑자기 패력당은 왜 간단 말인가?
아니 잠깐, 설마 자신들을 돕기 위해서?
맞다. 분명 그럴 것이다. 객점에서도 백가장을 도와주지 않았던가.
지금의 백가장이 저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의 세력권에 있는 군소 방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패력당으로 간다는 것은 저들의 공격을 늦추려는 생각이 분명하다. 백가장에게 시간이라도 벌어다 줄 셈인 것이다.
아, 은공....
갑자기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지금 즉시 무인들을 준비하겠습니다."
"...."
결연한 표정으로 투기를 피워 올리는 백표의 모습에 진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왜? 혼자 갈 건데."
"예?"
혼자?
진무가 강하다는 것은 안다. 그는 검강의 고수였고, 능히 일문을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을 지닌 자였다.
하지만 패력당이 전쟁을 시작한 이상 저쪽에 분명 수많은 고수가 포진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진무가 백가장을 돕기 위해 간다면 절대로 홀로 보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무인들을 편성해서....
"간다."
"아, 아니, 무인들을...."
백표가 말을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산보라도 가듯이 손을 흔든 진무는 이미 몸을 날리고 없었다.
"이, 이런...."
미친 은공이?
다급해진 백표는 지나가던 무인을 서둘러 불러 세웠다.
"은공께서 패력당으로 가셨다. 내가 뒤따를 테니 적의 습격에 대비해 본진의 경계를 튼튼히 하라고 전해!"
무인대를 편성할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만이라도 진무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제 할 말만 마치고 몸을 날리는 백표의 말을 곱씹던 무인은 눈을 끔벅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둘이? 그 험한 델? 뒈지려구?
* * *
"뭣이?"
후원 무인이 전한 말에 장로들과 대책을 논의하던 백여린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패력당으로 갔다. 그것도 둘이서.
'망할, 나이가 어려서 아직 사리 판단이 안 되는가.'
어찌 이리도 멍청하단 말인가?
오라비가 데려온 손님은 분명히 고수였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과신한다고 해도 적의 본진을 둘이서만 쳐들어가다니.
자신이 무슨 절대를 걷는 검강지경의 고수라도 된다 여기는 걸까?
자만이며 오만이다. 쓸 만하다 싶었더니 고작 혈기만 믿고 날뛰는 애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오라비까지 함께라니.
멍청한 것들이 쌍으로 생각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장주님, 어찌할까요? 은인께서 본진의 경계를 강화하라고 했다 하니."
"멍청한 소리!"
외당 장로의 말에 백여린이 날카롭게 질책했다.
적의 의도를 파악하고 적절한 대처를 생각해도 모자랄 촉박한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마저 오라비와 손님으로 인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머뭇거릴 틈이 없어졌으니 당장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십 년 만에 돌아온 혈육이 아닌가? 아무리 쓰레기 짓을 한다고 해도 적진에서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지금 즉시 무인대를 편성합니다. 각 장로는 스물씩을 데리고 패력당을 다섯 방향으로 산개하여 공격합니다. 중심은 제가 맡습니다. 대장로께서는 본진을 경계해 주십시오."
"예! 장주님!"
장로들이 재빨리 대답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장주님."
뒤따라 일어나려던 백여린을 사마소가 불러 세웠다.
"패력당은 제가 다녀오리다."
"예?"
"어찌 일문의 주인이 함부로 움직일 수 있단 말입니까? 주인이라면 마땅히 본진을 지켜야 합니다."
"대장로."
"잊으셨습니까? 십 년 전의 한을?"
"...."
"전대 장주께서도 제일 앞자리에 나섰지요. 제가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다시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
대장로 사마소. 그는 십 년 전 백가장 혈사 때 장로들 중 막내인 자였고, 장로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였다.
그는 지금도 그때 자신이 다른 이들과 함께 죽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장주님."
사마소의 부름에 백여린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공자를 너무 미워하지 마시오. 그 역시 간악한 천우명으로 인해 그리된 것뿐이니."
"...."
잘 안다.
돌아온 그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다고는 해도, 십 년 전까지의 백표는 누구보다 듬직한 백가장의 후계자였으며 자신에게는 둘도 없는 오라비였다.
그렇기에 지난 십 년간 찾고 또 찾았지 않은가?
그가 돌아와 백가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꿋꿋이 버텨 온 것이다.
"그럼 다녀오겠소이다."
사마소가 백여린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전각을 빠져나갔다.
탁.
전각의 문이 닫히고 안에 홀로 남은 백여린이 주먹으로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빌어먹을...."
* * *
계림 외곽, 백가장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성곽.
"저기가 패력당입니다."
백표가 담벼락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을 날카롭게 경계하며 소곤거렸다.
안다. 모를 리가 없다.
주위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작은 성곽. 딱 봐도 미적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파의 건물이다.
"놈들의 움직임이 많습니다. 일단 경계가 소홀한 곳을 찾아...."
이봐, 은공.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미 걸어가고 있다. 뒷짐까지 지고, 너무도 여유롭게.
그 모습이 하도 당당해서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백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런 미친놈이?
시간 벌기 하러 온 것이 아니었어?
그럼 당연히 기습을 해서 적의 시선을 끌고 도망치다 싸우기를 반복해야지, 뭐 저리 당당하게 정문으로 간단 말인가?
설마 정면 돌파해서 싸울 생각인가? 패력당에 몇 명이 있을 줄 알고?
전쟁을 시작했으니 분명 가능한 만큼 끌어모아 놓았을 텐데. 우리는 꼴랑 둘이서 왔는데.
그 와중에.
"뭐 해? 같이 갈 거면 빨리 와."
해맑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정문 위사들이 전부 보고 있었다.
저 미친 은공 새끼 같으니.
백표는 속으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이게 무슨 미친 짓입니까?"
백표가 가까이 다가와 들리지도 않을 모깃소리로 소곤거렸다.
"미친 짓? 이게?"
"그럼 이게 정상입니까? 적진에 버젓이?"
"적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예?"
진무의 반응에 백표가 의아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진무는 그대로 정문 위사들에게 다가갔다.
"야."
"...!"
"문 좀 열어. 노영찬이 좀 보러 왔다."
"...?"
정문 위사 부웅탁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웬 뜬금없이 신박한 놈이란 말인가?
패력당은 계림 최대의 사파 세력이다. 그들은 전쟁을 막 시작한 참이었고, 기세는 흉흉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런 와중에 새파랗게 어린 놈이 찾아와서 패력당주인 노영찬의 이름을 친구인 양 부르며 웃는다.
"이런 미친 새...."
쩍! 부웅! 털썩!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에 맞은 부웅탁이 그 이름에 걸맞게 허공을 날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물론 마지막 소리는 탁이 아닌 털썩이었지만.
"뭐, 뭐냐? 웬 놈이냐!"
순식간에 외부에 나와 경계를 서고 있던 무인들이 하나둘씩 진무와 백표에게 다가왔다.
스릉!
상황이 심각해지자 백표가 자신의 투박한 칼을 꺼내 들고 진무의 등 뒤를 지켰다.
"뭘 칼까지 꺼내고 그래?"
"...."
지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는.
"야, 문 열라고. 가서 노영찬이한테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하라니까?"
"이런 개...."
쩌억!
두 번째.
진무가 파리 쫓듯 손을 휘두르자 욕설을 뱉으려 했던 무인이 고개가 뒤로 꺾인 채 넘어갔다.
"거, 새끼들. 꼭 말로 하면 안 듣지."
차자자장!
두 명이 힘도 못 쓰고 쓰러지자 패력당의 무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아, 좋게 말로 해결하려고 했더니."
진무가 짐짓 한숨을 내쉬는 동안 백표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노려보았다.
주위에 칼을 들고 위협하는 패력당의 무인들.
하지만 진무는 관대함을 보여 주기로 했다. 변방 말석이기는 해도 사패천에 이름을 올린 패거리가 아닌가.
"지금부터 딱 셋 센다. 하나."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정말 어이없는 상황이다.
찾아와서 문 열라고 하면 막 아무에게나 문을 열고 웃으면서 '어서 오세요.' 할 사파가 어디 있단 말인가? 더구나 자신들을 먼저 공격한 상대에게?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리는 없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노무 새끼가!"
슈가가각!
둘러싼 무인 중 하나가 거도를 힘차게 뿌려 내었다.
까강!
하지만 진무보다 백표가 빨랐다.
스스슷!
두 뼘이 채 안 되는 요리용 칼이 거도를 튕겨 냄과 동시에 진무의 앞을 막아서며 공기를 잘라 내었다.
"끄으윽...."
목의 앞부분이 잘려 덜렁이는 무인이 피를 뿜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야! 죽이지 말라고. 싸우러 온 거 아니니까. 둘!"
진무가 백표의 잔인한 손속을 나무라며 숫자 세기를 이어 갔다.
"죽여!"
누군가의 외침이 신호가 되는 순간 사방에서 검격이 날아들었다.
'제길,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이래선 습격하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백표가 칼의 손잡이를 힘껏 그러쥐며 기운을 모조리 뽑아 올렸다.
채기법에 의해 모인 기운. 진무가 가르친 기초공에 의해 연단되어 그의 단전을 채운 그것이 사지백해를 흐르자 눈동자가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하압!"
기합성과 함께 휘둘러진 칼이 수백의 잔영을 만들어 내며 뿌려졌다.
바람마저 갈라 놓는다는 백가장의 비전도법, 난파풍도가 온전한 모습으로 펼쳐졌다.
잔인한 혈광을 머금은 눈빛과 함께.
까가강! 스스슷! 푸학!
어지럽게 휘저어진 검이 핏빛 기운을 머금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붉은 선혈이 뿌려졌다.
"셋!"
진무가 얼굴을 찡그리며 일 보를 내디딘다.
셋을 세겠다는 말은 지켰다.
이제부턴 전부 니들 책임이다.
95화
한 발을 내디딘 채로 비스듬하게 자세를 취한 진무.
우우우웅!
허리에 당겨 붙인 주먹에 시퍼런 선기가 선명하게 어린다.
꾸우....
내디딘 발에 힘이 실리고 지면을 파고들자 진무가 호흡을 멈추며 빠르게 일권을 뻗어 내었다.
칠성권, 창룡출해(蒼龍出海).
청우가 익히고 있는 무당 칠성권의 가장 마지막 초식이었다.
하지만 검강지경의 진무에 의해 펼쳐진 그것은 신공절학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닷속 깊은 곳에 웅크려 몸을 숨겼던 용이 승천하듯 주먹이 뻗어져 나가고.
휘리리리!
내질러진 순간 비튼 주먹을 타고 뻗어 나간 푸른 기운이 승천하는 용이 몸을 뒤틀어 오르는 모양으로 회전을 만들어 낸다.
쩌어엉! 콰아아앙!
나선처럼 비틀린 기운이 정문과 함께 성벽을 때리며 폭발했고, 사방에서 달려들던 패력당의 무인들은 폭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안으로 튕겨졌다.
휘우우우.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가 사방을 가득하게 채웠다가 가라앉았다.
"...!"
백표는 칼을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싸우던 패력당의 무인들이 일체의 공격을 멈추고 입을 벌린 채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 이게 대체."
방금까지 있던 정문은 흔적도 없었고, 오 장여의 성벽이 통째로 무너져 있었다. 아니, 터져 버렸다고 해야 할까?
또한, 진무의 전방이 휑하다.
그의 앞을 공격해 오던 무인 수십이 부서진 성벽과 함께 안으로 튕겨 들어가 모조리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탁, 탁.
"...."
딱히 먼지가 묻은 것도 아닌 손을 털어 낸 진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거봐. 열라고 했을 때 열었으면 좋았지."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는 놈들이 있다.
진무는 뒷짐을 지고 유유히 안으로 걸어갔다.
"...."
백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 가볍고 거친 성격에 익숙해져서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검강지경에 오른 절대의 무인이라는 사실을.
"야, 안 오고 뭐 해?"
"...예? 예!"
백표가 서둘러 진무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성벽 안을 채운 무수히 많은 패력당의 무인들을 향해, 보무도 당당하게.
성문이 터졌으니 그 굉음을 패력당의 수뇌들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일부는 그 현장을 직접 보았고 일부는 전각 안에서 부랴부랴 무기를 챙겨 뛰쳐나왔다.
"다, 당신은!"
노영찬이 진무를 먼저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 노영찬."
"...."
반갑게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모습에 노영찬이 눈을 끔벅거리다가 옆에 있는 백표를 발견했다.
분명 백가장주의 오라비라고 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노영찬이 서둘러 박살 난 성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없다.
아무도 없다.
설마? 둘이서 공격을 해 왔다고?
노영찬의 두 눈이 찡그려졌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오?"
"아, 누굴 좀 찾으러 왔는데. 자네를 불러 달라니까 대뜸 칼질부터 해서 말이야. 성벽 부순 건 자네가 이해하게."
"...."
이런 미친!
하마터면 욕이 나갈 뻔했다.
그가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탄기를 극한까지 깨달은 자신이 꼼짝도 못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낮과는 다르다. 그들이 찾아온 곳은 십수 명을 대동한 객점이 아닌 패력당의 본진이었다.
패력당이 어디 동네 무뢰배 집단도 아니고, 엄연히 광서성의 일맥을 차지하는 사패천 소속의 문파였다.
그들의 예하에 몸담은 현기급의 무인들만 해도 십수 명이요. 그 이하 수하들의 수가 오백에 달한다.
고작 둘이 찾아와서 행패를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싸우러 온 거 아니야."
이게 지금 싸우러 오지 않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깽판이냐?
"목인겸. 그 새끼 어디 있냐?"
"...."
노영찬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 남의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 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대인, 대인 해 가면서 대접해 줬더니! 이런 미친 새끼가!"
노영찬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노성을 질렀다.
"뭣들 하고 있어! 죽여!"
촤자자작!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패력당의 무인들이 저마다 흉흉한 살기를 품고 진무와 백표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영찬은 순찰 장로를 불렀다.
"가서 목인겸을 불러와라. 그들이 상대하겠다고 자신했으니."
"알겠습니다."
순찰당주가 뛰어가고 노영찬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백여 명이 넘는 패력당의 무인들이 칼을 곧추세운 채 진무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음, 이럼 곤란한데."
"...."
진무의 말에 백표가 홱 고개를 돌렸다.
뭐가 곤란한데? 이럴 줄 몰랐어?
하긴, 아무리 강기의 무인이라도 상황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것은 좀 심하긴 했다.
그러게 습격을 했어야지, 습격을.
그런데.
후아악!
진무의 몸에서 시퍼런 선기가 전신을 감싸며 피어올라 불길처럼 넘실거린다.
"목인겸이만 데려오라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주 곤란해져."
해맑기만 했던 진무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잔인하게 변했다.
싸늘한 눈빛과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빛나는 차가운 송곳니가 소름이 절로 돋아 오르게 할 정도로 섬뜩했다.
꾸우욱.
그가 발을 가볍게 내딛자 움푹 팬 지면이 힘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분명 이런 상황이 있었다.
단강구의 공사척 패거리를 찾아갔을 때와 비슷했다.
물론 패력당은 하찮은 무뢰배 집단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 방파였다. 인원수부터 소속된 무인들의 질까지 천양지차다.
하지만 그때의 진무와 지금의 진무는 다르다.
그때는 그저 탄기에 이르러 있었고, 지금은 그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 검강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패력당? 수백 무인?
패력당은커녕 그 할애비가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진무였다.
검강지경의 무인을 괜히 절대의 경지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일인 문파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강했다.
물론 이곳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만.
"죽어!"
가장 먼저 칼을 휘둘러 온 텁석부리 수염의 장한.
그래. 재수 없게도 니가 시작이구나, 불쌍한 놈.
진무가 손을 마주 뻗자 칼이 허망하게 튕겨 나가고 장한의 모가지가 손아귀에 잡혔다.
"내가, 지금, 조금! 화가 나."
나지막하게 뱉어진 진무의 목소리.
쿠아아앙!
모가지를 잡은 채 그대로 땅바닥에 찍어 버린 힘에 그 주위가 폭격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
놀람? 경악? 그딴 걸로 표현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딱 한 걸음 걸었고, 딱 한 번 움직였다. 그것으로 모든 게 멈췄다.
패력당의 무인들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칼을 들었던 그 동작으로 그대로 정지했다.
흩어지는 기운이 세찬 바람을 만들어 먼지를 날리고 놀라운 광경을 드러낸다.
대가리부터 몸의 반이 땅속에 처박힌 채 두 다리만 빠져나와 있는 텁석부리 수염의 사내.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반구형으로 패어 들어간 오 장여의 대지.
"퉤."
진무가 입 안으로 들어온 먼지를 뱉어 내며 패어 든 대지에서 걸어 나왔다.
역시 강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적어도 법보다 힘이 가까운 이 무림에서 그만한 것은 없다.
손으로 먼지를 털어 가며 걷는 가벼운 걸음이었지만, 누가 경박하다 하겠는가?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방을 짓누르는 압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
스윽.
백표가 검을 내렸다.
이건 뭐 자신이 도울 게 없었다.
이미 적은 전의를 상실해 버린 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영찬!"
"...!"
진무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부르자 노영찬이 식겁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주, 죽여. 죽여라!"
진무가 보여 준 한 수에 넋이 나가 버린 노영찬은 공포심에 아무 소리나 막 질렀다.
그 새끼 참, 이미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 터인데 뭘 그렇게 뼛속까지 호전적이야?
그런데 이 멍청한 놈들이 똥오줌 못 가리고 또 그 명령을 듣는다. 사파치고는 충성스러운 놈들이다. 사지를 벌벌 떨며 주저앉아도 모자랄 판에.
"휴, 그래. 충성스러운 거 좋지. 하지만 사파인이 그래서 되겠냐? 가능성이 없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검광을 번뜩이며 주위로 검진을 형성해 다가오는 패력당 주력 무인들의 모습에 진무가 걸음을 멈췄다.
스르릉.
진무가 자신을 둘러싼 검진을 향해 검을 뽑았다.
시퍼렇게 솟구치는 검강이 그 자태를 드러냄과 동시에 살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사이 노영찬의 곁으로 순찰 장로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다, 당주님!"
"...?"
"없습니다. 없어요!"
뭐가 없단 말인가?
"목인겸, 그놈과 그 수하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
너무 놀라운 소식을 들으면 약간 정신이 멍해진다.
그리고 이내 충격이 심장을 조여 온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잠시 쉬고 있겠다고, 자신들이 상대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도, 도망갔...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망할!
조금만 더 빨리 와서 말해 주지.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건만, 놈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취를 감춰 버린단 말인가.
노영찬이 허망한 표정을 짓는 순간.
콰아앙!
사방을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검광이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다.
시퍼런 불길이 모든 곳을 집어삼키고, 검진이 터져 나갔다.
파훼한 것이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짓밟아 으깨 버린 것이다.
눈 몇 번 감았다 뜨고 나자 수십 명이나 되던 패력당의 주력 무인들이 모조리 땅바닥에 피를 토하며 널브러져 있었다. 현기급의 무인들이 태반이었는데, 죄다 사지 육신이 분리되어 죽은 것이다.
고작 한 방에.
그리고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진무.
핏물 가득한 대지에 서서 악귀처럼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칼에 유형화되어 맺힌 시퍼런 기운.
"가, 가, 가, 강...."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습.
응, 그래. 맞아. 이게 바로 강기란다.
진무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가 어지간하면 사파는 안 죽여. 근데 칼 들고 죽자고 덤비는 놈까지는 용서할 생각은 없거든."
목을 따 주겠다는 말을 참 웃으면서 잘도 한다.
그러고는 또 한 걸음씩 다가왔다.
제 명줄을 취하러 오는 사신처럼.
꿀꺽.
노영찬은 패력당의 최고 고수였으나 도무지 저 괴물을 상대할 자신은 들지 않았다. 수하들 앞이고 나발이고 뒈지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건 잘못되었다. 잘못 건드려도 아주 단단히 잘못 건드렸다.
망할 자식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것이 실수였다. 하필이면 패력당에 저런 만년교룡 같은 전설의 괴수가 찾아올 게 무어란 말인가?
"야."
"...."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진무가 전각 아래 단 위에 서 있던 노영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려와. 목 아파."
이런 난장판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한마디.
팟! 파팍!
노영찬은 섬전처럼 뛰어내려 진무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살면서 그리 빨리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탄기의 극한?
그의 무공은 진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요, 보름달 앞에 놓인 반딧불처럼 미미한 수준이었다.
"...."
진무가 자신의 발아래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노영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야,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닌데. 니가 예의 바르기도 했고, 근래 선도비기를 익히다 보니 성격이 좀 유해졌거든?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더 묻는다."
"말씀하십시오, 대인!"
"목인겸이란 새끼 지금 어디 있냐?"
96화
왜 하필 도망친 놈을 찾는단 말인가?
"그, 그게."
"그냥 뒈질래?"
사람 목숨 가지고 차분하게도 말한다.
"도, 도망간 것 같습니다."
도망? 그럴 놈들이 아닌데?
진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노영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진무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들자 노영찬이 사색이 되어서 소리쳤다.
"저,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억울하기 짝이 없다. 개수작이라니, 지금 겁에 질려서 오줌이라도 쌀 판인데 뭐 하러 자신이 도망간 놈을 비호한단 말인가?
"저희는 정말 그 개자식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대인."
"지랄하네. 관계도 없는 새끼랑 함께 있었다고? 용서할 마음 자꾸 사라지게 왜 이러지?"
진무의 눈빛에 머금어진 살기가 짙어질수록 노영찬은 울고 싶어졌다.
그게 사실인데 눈앞의 괴물이 믿어 주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차피 그따위 놈들과 지킬 의리 따위도 없다. 노영찬은 벌벌 떨며 자신이 아는 바를 최대한 소상하게 설명했다.
목인겸이 자신들을 찾아온 순간부터 그가 했던 제안, 그리고 그들에 대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끄집어냈다.
"검이라고?"
"예. 검만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
잠시 생각하던 진무가 백표를 슬쩍 쳐다봤다.
"백표."
"예, 은공."
"니네 집에 검 있어?"
"검이라면...."
백표가 골똘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백가장은 오랫동안 도문이었다.
"잘 생각해 봐. 목인겸이라는 새끼, 아무래도 내가 아는 놈들 패거리 같거든. 그런 놈들이 도망친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놈들이 뭔가를 노린다면 이유가 있는 물건일 거야."
칼을 쓰는 문파에 누군가 노릴 만한 검 따위가... 어? 설마?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비슷한 게 있다. 백가장의 주인에게 대를 이어 전해지는, 자신이 떠나며 백여린에게 넘겨준 물건.
그리고.
"설마? 그들이 본가로 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백표의 눈이 부릅떠졌다.
"추측인데 아마 거의 확실할걸?"
"이런!"
백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노영찬의 말을 함께 들은 뒤였다.
목인겸이라는 자는 홀로 패력당의 수뇌들을 무릎 꿇릴 정도로 뛰어난 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패력당으로 오기 전 진무는 본가의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불안했다.
"젠장!"
백표가 진무의 허락도 듣지 않고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가문이 걱정되었을 것이고, 동생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쯧, 성격하고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백표의 뒷모습에 진무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노영찬."
"예! 대인!"
"니들 그놈들과 관계없는 거 확실하지?"
"예!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좋아. 병력들 전부 해산시켜."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명색이 사패천 소속이라는 새끼들이 남에게 휘둘려서 전쟁 일으킨 걸 생각하면 죄다 대가리를 깨 버리고 싶으니까."
차분하고 위협적인 말에 노영찬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놈도 여기서 움직이지 마, 내가 부를 때까지. 알겠어?"
"예!"
"좋아."
진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력당과 백가장.
누가 계림의 주인이 되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뭐, 패력당이 주인이 된다면 더욱 좋기야 하겠지만.
목인겸이라는 놈이 뭘 노리고 있는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무월루의 노인과 목인겸의 관계성이었다.
"이번엔 꼭 잡아서 물어본다."
살기 어린 눈을 빛내는 진무의 모습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 * *
"크윽!"
백여린이 진한 신음과 함께 밀려났다.
그녀는 자신의 도를 사선으로 움켜쥐며 습격해 온 인물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백가장의 무인들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난 다음 찾아왔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백여린이 복면인들의 수장과 싸우는 사이 그의 뒤를 따른 다섯 명의 무인들은 백가장의 무인들을 막고 있었다.
깡! 까강!
"크악!"
사방에서 피가 튀어 오르고 비명이 들려왔다.
비록 다섯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검에 수십이나 되는 백가장의 무인들이 도륙당하다시피 목숨을 잃고 있었다.
일그러진 백여린의 시선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복면인들의 수장에게 향했다.
이미 수십 초를 겨루었음에도 자신과 달리 호흡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패력당이 보낸 암살자인 것이냐?"
"...."
백여린의 물음에 복면인이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무혈을 내놓아라. 하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
무혈? 그게 뭐지?
의아함을 머금은 백여린을 향해 복면인이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의 시선이 복면인의 손가락을 따라 자신의 목덜미를 향했다.
짤랑.
옷 밖으로 삐져나온 작은 소검(小劍).
대대로 백가장의 주인에게 전해지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은장도와도 같은 그것은 그저 백가장의 가주임을 증명하는 징표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힘주어 당겨도 검집에서 빠지지도 않는 장식용 물건에 불과했다.
한데 어째서 습격자들이 그것을 노리는가?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위급한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찾아왔다.
백가장에 남은 무인은 오십.
고작 여섯이라는 수로 그 많은 무인들을 압도할 만큼 뛰어난 자들이라 해도, 밤이슬을 맞으며 찾아온 습격자 따위에게는 백가장의 그 무엇도 내어 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오랫동안 물러섬 없이 계림의 패자로 존재해 온 백가장의 자존심이었고, 당대의 주인인 백여린의 역할이었다.
짜르르르.
백여린이 기운을 끌어 올리자 그녀의 도에 기가 피어오르고 칼날의 중심에 달린 둥근 고리들이 바람에 스친 풍경처럼 부딪히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
"백가장에서는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
"...."
넘실거리는 도기를 뿜으며 매섭게 노려보는 백여린을 복면인이 지그시 응시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소검, 무혈. 그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패력당을 빠져나온 그들은 백가장 인근에서 전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일문의 수장을 노렸다가는 일의 성패를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패력당을 빠져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낮의 고수.
잠시 뒤에는 백가장의 무인들이 줄을 지어 달렸다. 그들이 가는 방향은 패력당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기습을 할 모양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그 일행에 백여린이 빠져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일이 너무도 쉽게 풀리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하듯 담을 넘었고, 모습을 드러낸 백여린을 공격했다.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달려들었지만, 복면인의 수하들이라면 충분했다.
지금 그의 역할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목표물을 확보하는 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반드시 가져가야 할 물건이니 목을 베어서라도 챙겨 갈 수밖에."
"...!"
복면인의 모습이 갑자기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좌측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백여린은 다급하게 머리 위로 팔을 둥글게 돌렸다.
따다다당!
칼끝에 이어진 도기가 나선처럼 그녀를 감싸고 쇳소리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도기의 틈새로 날카로운 검극이 심장을 찔러 왔다.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허리를 꺾었지만, 검격이 옷을 찢어 내고 살갗을 베었다.
"큭!"
백여린은 짧은 신음과 함께 뒷발로 몸을 세우며 재빨리 도를 횡으로 그었다.
깡!
검을 튕겨 낸 그녀가 복면인을 찾으며 재차 도격을 뿌리려는 순간.
"컥!"
옆구리에 진한 통증이 찾아왔다.
복면인의 주먹.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멈칫한 순간 다섯 개의 검격이 그녀의 몸을 토막 내려는 듯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백여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어 고통을 참으며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짜라라라!
도에 달린 고리들이 미친 듯이 부딪히고 공기가 빠르게 잘려 나갔다.
땅! 따다다당!
위로 휘저은 도기와 복면인의 검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
막았다 싶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가슴 아래에 박혀 든 일장.
푸학!
백여린이 피를 뿜으며 뒤로 밀려 나갔다.
"크으...."
칼을 지면에 박아 겨우 몸을 세운 백여린.
일장을 맞아 고운 입술이 피로 물들었고, 찢어진 옷 틈새로 가슴께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여인으로서는 더없이 수치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백여린은 굳이 앞섶을 가리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검극을 지면으로 늘어뜨리고 선 복면인.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
강하다.
이제 막 탄기의 경지에 오른 그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가히 신묘막측하다.
검과 손을 쓰는 연결점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또한, 어디서 날아오는지 예측이 안 될 정도로 간결하고 빨랐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백여린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히고 들끓는 내기를 다스리며 말을 걸었다.
최선을 다해야 했다. 여인으로서 수치스러운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배제할 정도로 전력을 쏟아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을 끌어 볼 참인가?"
복면인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느껴졌다.
"쓸모없는 짓!"
파앙!
복면인은 곧바로 바닥을 밟으며 백여린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손이 힘껏 당겨지고 수평으로 세워진 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망할!'
백여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늦었다.
복부를 맞은 충격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 피하기에는 너무 빠른 검격이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적의 검이 그녀를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 다가오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잡은 도를 빠르게 당겨 올렸지만, 그 속도가 검보다 느림을 모를 리 없었다.
"여린!"
"...!"
그 순간 담벽을 넘어온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공기를 꿰뚫으며 날아왔다.
쐐애액!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깨닫기도 전에 손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무지막지하게 눌렀다.
까아아앙!
뒤이어 터진 쇳소리와 비스듬하게 횡격을 그리는 복면인의 검.
탁!
허공의 무언가가 잡히고.
스스스슷!
무언가는 공기를 싸늘하게 갈라놓았다.
"...?"
어지러운 백색 선들이 전방을 가득하게 채우자 복면인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백여린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등 하나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손님과 함께 패력당으로 갔다던 백표였다.
언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백여린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백표가 자신의 윗옷을 벗어 돌아보지 않고 건네었다.
"밤바람이 차다. 입거라."
"...."
백여린은 말없이 그의 손에 들린 옷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그의 상체.
굴강하지는 않아도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가득한 몸이다.
그리고 그 몸에는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수많은 상흔이 흉측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베이고 뚫린 자국들이 세어 보지 않아도 기십을 넘는 것 같았다.
짐승의 고기나 썰고 술이나 퍼먹으면서 살아온 이의 몸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
그것은 마치 수라의 전장을 지나온 전사의 모습 같았고, 지난 십 년 세월이 그에게 남긴 흔적 같았다.
그래서 저토록 사악하고 살기 어린 기운을 뿜어내는 것인가?
"입어라. 과한 놈이라 여유가 많지 않구나."
툭.
백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백여린에게 자신의 옷을 던지고 복면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97화
백표는 담벼락을 넘는 순간 칼을 던져 복면인의 검을 쳐 냈다.
그럼에도 검격이 힘을 잃지 않기에 머리를 눌러 조금이나마 비틀어진 검의 궤적에서 백여린을 구했다.
동시에 튕겨진 칼을 잡아 난파풍도의 초식을 마구잡이로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복면인은 여유롭게 물러나며 도격을 모조리 피해 버렸다.
보통 놈이 아니다. 분명 자신보다 훨씬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났다. 자신의 동생을 노린 습격자에게 차가운 분노가 끓어 올랐다.
"일이 조금 더 어렵게 되었군. 하지만 결과는 같다."
방해꾼이 끼어들었음에도 복면인은 당황스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목소리로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백표를 향해 뛰어든다.
동시에 백표가 앞으로 나서며 그를 맞이했다. 튕겨진 칼에 혹여 백여린이 상처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깡! 까강!
두 사람의 검과 칼이 한 호흡에 수십 차례를 부딪치며 불꽃을 만들어 내었다.
복면인의 검은 빠르고 간결했으며, 백표의 칼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대기를 가른다.
고수와 고수의 대결.
수십 초의 공방이 오고 감에도 부딪혀 터져 나오는 쇳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휘황찬란한 검기의 향연 같은 것은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서로를 잘 알아 온 것인 양 이어지는 둘의 싸움.
복면인의 검에 어린 검기가 백표를 향해 휘둘러졌지만, 백표는 지독히도 빠르고 변화막측한 칼로서 모조리 잘라 내고 있었다. 분명 실력은 복면인이 위인데 밀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
상처를 입으면서도 복면인의 허점을 파고드는 모습에 백여린은 잠시 잊었던 가르침을 깨닫는다.
오래전 듬직했던 오라비는 가문의 도법을 가르치며 말했다.
'기(氣)에 집중하는 순간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형(形)에 치우치는 순간 변화는 무뎌지는 법이다.'
백표가 뿌리는 도법.
남들처럼 강맹한 내력으로 펼치는 도법이 아니라 오직 예리함과 빠름으로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칼의 향연.
품은 기세가 어쩐지 사파의 무인처럼 사이하긴 했으나 분명 백가장이 이어 온 난파풍도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 꼴로 돌아와서는....'
백여린이 믿음직스러운 제 오라비가 건넨 옷을 걸쳐 여미며 일어났다.
"큭!"
그런데 팽팽하게 이어지던 싸움에서 물러난 백표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오라버니!"
물러난 백표의 어깨에 벌어진 틈이 보일 정도로 큰 상처가 생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칼.
고기를 베어 내었던 투박한 칼.
그것으로도 능히 복면인을 상대했으나 끝내는 모자랐음이다. 상대적으로 짧은 칼이 그에게 허점을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백여린은 자신의 곁에 떨어진 도를 주워들었다.
무엇보다 얇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예기를 머금은 그것은 지난 십 년간 풍령도라는 명호와 함께해 온 애도, 풍참(風斬).
그것은 목에 걸린 소검처럼 허울 좋은 징표 따위가 아닌, 진정한 계림 백가장 주인의 신물이었다.
"오라버니!"
이전의 부름은 안타까움이었으나 다음의 부름은 결연한 의지가 담겨 외쳐졌다.
동시에 그녀가 백표를 향해 자신의 도를 던졌다.
탁.
백표는 날아온 도를 받아 들고 백여린을 힐끗 쳐다봤다.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이다.
그리고 백여린이 던진 도에 담긴 의미. 그것은 백가장이었다.
가문의 주인이 가진 무기는 그 자체로도 가문을 대표한다. 백표는 잠시 고민했다. 오랜 세월 집을 떠나 방랑했던 그다. 자신이 이것을 잡아도 되는 것인가?
그때.
[받지 그래? 기껏 동생이 마음을 내어 준 듯한데.]
백표의 귓가에 진무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고리는 떼 버려. 아마 니가 사용하는 도법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
진무의 목소리를 백표는 망설임 없이 믿었다.
툭.
오랫동안 들고 다니던 요리용 칼이 바닥에 떨어져 꽂혔다.
까드드득!
그는 망설임 없이 풍참의 중심에 달린 고리를 부숴 버렸다.
"칼 따위가 달라졌다고 무슨 차이가 있지?"
잠시 지켜보고 있던 복면인이 싸늘한 표정으로 백표를 비웃었다.
"글쎄. 그래도 은공께서 허투루 말씀하실 리는 없겠지."
"뭐?"
백표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도를 좌우로 크게 휘둘렀다.
휘링, 휘리링.
고리가 떨어져 나간 도의 구멍을 타고 흐른 바람이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마치 바람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좋군. 지금이라면."
휘리리리.
백표의 움직임을 따라 바람 소리가 백가장을 가득 채워 울리자 때아닌 폭풍이 불어온 것처럼 모든 것이 바람에 집어 삼켜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스스스슷.
그리고 날카로운 예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 복면인을 공격했다.
"...!"
달라졌다.
고작 칼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조금 전까지 그저 빠르고 변화가 많은 도법에 불과하던 백표의 도가 세상을 갈가리 찢어 놓기 시작했다.
기운이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도가 품은 기운은 이전과 동일했다.
뭐가 변한 거지?
파핫!
처음으로 복면인의 옷자락에 생채기가 생겼다. 분명 피했음에도. 그리고 공수가 오고 갈수록 그의 몸에 상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소리?'
복면인의 눈이 찡그려졌다.
필시 그것이다.
고리를 걷어 내고 드러난 도의 바람구멍이 만들어 낸 소리가 고막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오감 중 세 가지 감각은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시각, 청각, 촉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피부로 느낀다.
그것을 얼마나 잘 단련하는가에 따라 가진 내공보다, 익힌 무공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표의 도가 그중 하나인 청각을 둔화시켰다. 당연히 대응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기를 움직여 소리를 막을 수도 없었다. 방해받는 것과 들리지 않음은 똑같은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따위 꼼수로 나와 동등해지리라 생각하는가! 멍청한 무림인들 같으니!"
우우웅!
복면인의 몸에서 이끌려 나온 막대한 기운.
꾸우우웅!
거칠게 찍은 진각이 대지를 뒤흔들며 백표가 만들어 낸 소리의 폭풍을 창졸간에 집어삼켰다.
슈우욱!
그 틈을 비집고 나온 검극이 백표를 향해 다가섰다.
깡! 까가강!
바람의 흐름을 타고 펼쳐지던 백표의 도에 머뭇거림이 생겼다.
빠르다. 검의 시작점이 모호하다.
펼쳐지는 순간 변화를 만들고, 변화가 바람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깡!
기운을 머금은 검이 백표의 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본 실력을 모조리 꺼내 놓은 복면인에 의해 잠시 승기를 잡았다 싶었던 백표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푸학!
백표의 몸에서 피가 뿜어진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더 빠르게, 더 날카롭게 도를 휘둘렀다. 몸이 피로 물들고 상처가 생기면서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놈이!'
수십 차례의 검격을 뻗어 큰 상처를 입혔음에도 무너지지 않는 백표의 모습에 복면인의 마음에 조바심이 생겼다.
서둘러 끝내고 물러나야 할 싸움이었다. 온전히 백가장과 패력당의 싸움으로 종결되어야 할 싸움이었다.
무엇보다 흔적이 남기 전에 소검 무혈을 확보하고 떠나야 했다. 애초에 일대일의 결투를 위해 찾아온 걸음이 아니니 방법을 바꿀 수밖에.
백표의 뒤로 물러선 여인. 상처를 입었고 제 도마저 오라비에게 주었으니 그의 수하들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만하리라.
"무혈을 먼저 확보한...?"
백가장의 무인들을 상대하던 수하들을 향해 외치던 복면인이 불현듯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백표로 인해 소리가 감추어졌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에 땅바닥에 쓰러진 수하들의 모습이 들어오고, 뒤이어 주위를 둘러싼 백가장의 무인들이 보였다.
"왜? 계속해. 재미있는데. 난 지켜보기만 할 거야. 막 여럿이서 공격하고 이럴 정도로 약하지 않거든, 쟤도, 나도."
"...."
팔짱을 끼고 수하의 등에 앉아 웃고 있는 약관의 무인. 진무.
"어, 언제?"
"언제는. 아까 니가 백표랑 싸울 때부터지."
"...."
진무가 히죽 웃자 복면인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지난 낮의 고수.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을 막고 있는 자 역시 진무와 함께 백가장을 빠져나갔던 자였다.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멍청했다.
분명 패력당을 상대하기 위해서 가지 않았던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설마 패력당이 벌써 무너졌단 말인가?
낭패였다.
눈앞에 있는 백표와 백여린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무는 무리였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 그리고 수하들이 모두 쓰러진 지금 방패막이가 되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길, 되레 내가 포위된 것인가?'
복면인의 눈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무 방심한 것이다.
칼날 위를 걷듯이 주의를 기울여 행해야만 할 임무였는데 생각지 못한 방해꾼으로 인해 실패했다.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도주, 혹은 자결.
복면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눈앞에 있는 자는 고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할 때를 위해 독특한 훈련을 받아 왔다. 이미 중원의 고수들을 상대해 본 이들이 입증한 방법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어리지 않은가? 아무리 강해도 경험의 부족은 매우 큰 단점으로 작용하기 마련이었다.
복면인은 상대를 바꾸었다.
백표와 백여린이 아닌 진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그를 쓰러뜨리고, 임무를 완수한다.
패력당이 무너졌다면 백가장의 무인들이 돌아올 것이다. 시간을 더 끌다가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질 수 있었다.
"어쭈? 나랑 해 보게?"
검극이 자신을 향해 돌려지자 진무가 비웃음을 머금고 일어났다.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난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아."
이죽거리며 손가락을 꺾자 우드득 소리가 소름 끼치게 퍼지며 싸움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복면인이 끌어 올리는 기운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게 전력이라면.
"백표를 상대하는 게 편했을 텐데."
진무가 손을 풀고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복면인의 검이 빠르게 휘어져 들어왔다.
변화를 무시한 간결한 찌르기. 백표를 상대할 때보다 훨씬 빠르고 예리했다.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할 준비 동작 없이 펼쳐지는 검술.
이걸로 확실해졌다. 놈은 한패다.
그리고.
우우웅!
주먹을 힘껏 움켜쥔 진무는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콰아앙!
검극과 주먹이 부딪히고, 강렬한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크윽!"
진무의 경험 부족에 일말의 가능성을 걸었던 복면인이 신음을 흘리며 밀려나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놈이 어떻게!"
이놈이나 저놈이나 한결같은 반응이다.
제 놈들과 똑같은 방법을 쓰자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벌써 세 번째다. 이 새끼야!"
호종보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진무가 악귀 같은 얼굴로 복면인의 전면으로 파고들었다.
"치잇!"
복면인이 재빨리 뻗은 검을 비틀어 변화를 만들었지만.
"늦어!"
땅!
진무의 손등이 검을 쳐 냈고, 반대편 손이 복면인의 가슴팍에 대어졌다.
퍼엉!
강렬한 기파가 터져 나가고 복면인의 몸이 쭉 밀려 나가는 순간 진무의 신형이 유령처럼 뒤따른다.
"겨우 이걸로?"
쩍!
시작된 타격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온다.
"너 때문에 왔다 갔다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리 멀지 않은 길이었다. 패력당에서 백가장까지는 고작해야 삼십 리(12km)밖에 되지 않았다.
백표의 경공으로도 일각도 안 걸린다. 하물며 진무의 걸음이라면 고생이라 할 것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핑계다.
줘 패기 위한.
"아직 멀었다, 이 새끼야!"
퍽! 퍼퍼퍽!
손과 발이 사정없이 쏟아지고, 복면인은 제대로 된 공격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복날 개처럼 얻어맞고 있었다.
98화
복면인의 무공의 핵심은 한 박자 빠름이었다.
상대의 공격 이전에 시작되어, 흐름을 끊음으로써 격차를 줄인다.
내공이 완전히 발현되기 전에 적의 공격이 위력을 발하면 원래 가진 힘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준비 동작을 생략한 무공, 무촌경의 무서운 점이었다. 형주 인근 강가에서 등여평이 그들을 단숨에 제압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하지만 동일한 방법이라면 더 강한 내기를 가진 이가 이기고, 초식의 응용력이 뛰어난 자가 이긴다.
복면인은 고작해야 탄기의 무인. 팔십 년간 전장을 떠돌며 살아온 진무의 경험과 무지막지한 내력을 결코 이길 수 없다.
"크으으."
곤죽이 되도록 맞고 밀려난 복면인이 비틀거렸다.
"거 새끼, 맷집은 더럽게 좋네."
그럴 리가?
진무는 딱 그 정도로 때렸다. 애초에 죽일 생각이었으면 골백번도 더 죽었으리라.
"자, 이제 끝낼까?"
백표는 그 광경을 당연하게 바라보다가도 새삼 놀라움을 느꼈고, 백여린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들은 그렇게 어려운 상대였는데, 마치 애 다루듯이 하지 않는가?
"이럴 리가 없다!"
복면인이 이를 악물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진무를 향해 검을 찔렀다. 손쉽게 검극을 피한 진무가 복면인의 팔 아래를 찍어 버렸다.
콰직!
"크윽!"
팔뼈가 꺾인 게 아니라 역으로 부러졌다.
부러진 것도 모자라 덜렁거렸다.
물러난 복면인이 고통스럽게 눈을 찡그리고 진무를 노려보았다.
"크으... 네놈이 어떻게 무촌경을 아는 거지? 어떻게 이렇게 능숙하게 펼칠 수 있는 거냐!"
"고마운 노괴한테 배웠다."
"노괴? 설마 대랑께서?"
대랑?
호오? 아직 심문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잘도 알려 주네?
"아니지. 대랑께서 무촌경을 중원에 전할 리는 없다."
"그건 니 생각이지."
"...."
진무의 빈정거림에 복면인의 눈동자가 세찬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떨린다.
이길 수 없는 상대. 일말의 가능성조차 짓밟아 버린 상대.
그의 말처럼 대랑이 무공을 전수할 리는 없었다. 누구보다 중원 무림인을 싫어하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명확하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도주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복면인은 쓰러진 수하들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 그들의 입을 통해 얻을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그들이 몸담은 단체와 연결점이 될 수 있는 자신이 포로가 된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혹여 잡힐 상황을 대비해 고문에 버티는 훈련을 받아 왔으나 사람의 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복면인은 검을 성한 팔에 거꾸로 옮겨 잡았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사람을 죽여 입을 막는다. 비밀을 지키는 데 그만큼 안전한 방법은 없었다. 복면인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한데 검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검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당기고 엎어지면 끝날 일인데.
"야!"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어느새 다가와 맨손으로 그의 검 끝을 우그러뜨리고 있는 사내.
"이런 독한 새끼. 살인멸구도 아니고 자진멸구(自盡滅口)냐?"
"...!"
언제 움직였단 말인가?
죽음을 결심하고 칼을 뒤집어 잡은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너 아가리에도 뭐 하나 물고 있지? 뒈질라고."
꽈악.
진무가 다른 한 손으로 복면인의 턱을 움켜잡았다.
뚜둑.
악관절을 누른 힘에 턱뼈가 덜렁거리며 빠져 버렸다.
칼은 이미 막혔고, 이빨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단약을 물지도, 혀를 깨물어 자진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진무의 잔인한 얼굴이 비춰진다.
"일단 한숨 자라."
뻐어억!
진무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 충격이 뒤로 퍼져 등뼈가 아스러질 듯했고, 토악질이 올라올 정도로 진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잔인한 새끼.
점혈이라는 간단한 방법도 있는데....
털썩.
복면인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진무가 복면을 벗기고 그의 입 안을 살폈다.
작은 실. 그리고 그 끝에 묶인 손톱만 한 독 주머니.
"무슨 독사 새끼냐? 독 주머니가 입 안에 있게?"
진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독 주머니를 바닥에 던졌다.
치이익.
터져 버린 독에 흙이 꺼멓게 물들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리자 진무가 눈을 찡그렸다.
흙을 태울 정도라면 퍼지는 순간 입 안은 물론 식도를 타고 흘러 몸 안의 장기마저 녹여 버렸을 것이 틀림없다.
칼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병신, 무서웠던 모양이네. 독약부터 물었으면 못 막았을 텐데."
진무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어이, 백표."
"...예! 은공!"
"일단 이놈 깨서도 딴짓 못 하게 묶어 놓고 다른 놈들도 살펴봐."
조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싸움을 이어 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여유로운 목소리.
진무의 개입으로 인해 싸움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하지만 절대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구파나 오대세가처럼 중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거파도 아니고, 고작해야 광서성 계림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백가장과 패력당이다. 진무가 마음먹으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모조리 도륙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싸움이 치열하고 허무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백가장이 지켜졌고 동생이 무사했다.
패력당?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진무에 의해 전의를 상실해 버렸을 테니까.
복면인들이 무슨 음모를 꾸민 것인지는 모르지만 백가장과 패력당 간의 전쟁 자체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이, 거기 성질 더러운 아가씨. 괜찮아?"
"예? 예...."
성질 더러운이라는 말이 상당히 거슬렸지만, 이 마당에 누가 그를 탓한단 말인가?
"아, 그리고 이 새끼들 뭘 노렸던 것 같던데. 혹시 그게 뭔지 알아?"
진무의 말에 백가장의 무인들에게 지시를 내려 복면인들을 묶고 깨어나지 못하게 수혈을 짚었던 백표가 백여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백가장이 가지고 있는 검. 누군가 노릴 만한 것이라곤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것입니다."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백여린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진무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던 소검.
"무혈이라 부르더군요."
"무혈?"
진무가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가 없다?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 봐도 들어 본 적 없는 물건이다.
하긴 중원이 얼마나 드넓은가? 알려진 자들보다 은거해서 살아가는 기인들이 더 많은 것이 무림이었다.
산천에 깔린 영약을 다 알 수도 없고,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기보 또한 넘쳐 난다.
하여간에 온갖 전설이 난무하는 무림인데 듣는다고 바로 아는 게 더 이상하지.
"뭐, 유래나 이런 게 있는 물건이야?"
"글쎄요. 저희도 그에 대해 들은 바가 없기에 그저 대대로 장주에게 전해져 오는 징표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
어, 그래. 참 잘났다.
명색이 대대로 전해졌으면 가문의 신물이나 징표일 텐데 유래도 몰라? 알아볼 생각은 안 해 봤어? 비밀 같은 게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여기."
백여린이 내민 소검을 손에 쥔 진무가 힘을 주어 당겨 보았다.
"빠지지 않습니다. 기를 주입해 보기도 했고 문양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기관 전문가를 불러 확인시키기도 했구요."
뭐, 노력은 해 봤다는 거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진무가 소검을 다시 찬찬히 살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뽑을 수 없는 검.
그래서 무혈인가? 뺐을 때 생기는 구멍이 없어서?
"이런 걸 왜 노리지?"
진무가 눈을 찌푸리며 소검, 무혈을 지그시 응시했다.
젠장, 눈만 아프다. 머리만 복잡하고.
"망할. 더럽게 복잡한 새끼들이네."
진무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이거 혹시 내가 보관해도 돼?"
"...예?"
그의 말에 백여린이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진무를 쳐다봤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문을 구한 은인의 부탁이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소검은 그저 징표에 불과한 것.
하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것을....
"필요하시면 은공께서 보관해 주십시오."
대답은 백표가 대신했다.
"오라버니?"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거라."
"...."
"백가장의 장주를 대표하는 건 어떤 물건이 아니다. 살아가고 지켜 내는 이들이 대표하는 것이지."
"...."
백표의 말에 백여린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됐네."
진무가 히죽 웃었다.
* * *
뜻하지 않은 일로 백가장에 머물게 된 진무는 탁자에 턱을 괴고 소검을 바라보았다.
백가장에 남겨진 기록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목인겸이 깨어났다는 소식도 듣긴 했지만 아직 심문을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잘 훈련된 놈들이 고문을 한다고 쉽게 입을 열 리는 없기 때문이다.
뭔가 알아내야만 한다. 놈들을 당황에 빠트릴 뭔가를 알아야 비벼 볼 여지라도 생기는 것이다.
치이익.
그사이 돌판 위에서 구워진 고기를 들고 온 백표가 진무의 앞에 내려놓았다.
지난밤의 상처로 인해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진무를 위해 고기를 굽고 있었다.
아프면 마땅히 쉬어야 했지만 지가 좋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었다.
"드시죠."
"어? 아. 그래."
진무가 젓가락을 가져가는 사이 백표는 한쪽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는 백여린에게도 내밀었다.
"너도 먹어라."
"예."
백표의 권유에 백여린이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
그러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표와 고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때?"
"맛있...네요."
"그래."
그녀의 대답에 백표가 환하게 웃었다.
맛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의 맛이다.
십 년.
도대체 오라비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숙수?
그럴 리가. 지난밤 보여 준 그의 무공은 하루 이틀 수련한 모습이 아니었다. 필경 어딘가에서 죽을 둥 살 둥 무공을 익히다 온 것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함께 온 고수와는 어떤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백가장의 사람들이 은공이라 부르기 전부터 오라비는 그 고수를 그리 부르고 있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더욱이 그의 행동과 말투. 거칠고 싸가지 없다.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정파보다는 사파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백여린은 문득 진무라는 고수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오라버니."
"응?"
"은공께서는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으신지?"
백여린이 조심스럽게 백표에게 속삭였다.
"모른다. 이름도 내력도."
"...예?"
"몰라. 그저 나를 구해 주셨고, 지금은 가문을 구해 주신 분이다."
"...."
"어떤 내력을 가지셨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겐 그저 은공이다.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베푸신."
"...."
얼굴이 살짝 굳은 채 입을 다문 백여린을 백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은공께서 옳지 못한 길을 걸은 것은 보지 못했다."
"아."
백여린이 작은 목소리로 탄성을 질렀다.
"여린, 너는 가문의 주인이다."
"아닙니다. 이제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셨으니...."
그것은 백여린의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변해 버린 오라비의 모습이 치가 떨리게 싫었으나 그는 여전히 가문을 생각하고 아끼는 백가장의 사람이었다.
하물며 복면인과의 싸움에서 보았던 백표의 난파풍도는 가문의 누구보다 뛰어났다. 당연히 가문을 물려받아야 했다.
"여린, 나는 백가장이 제자리를 잡고 다시금 계림의 패자가 되면 먼 길을 떠날 생각이다."
"그게 무슨?"
"그리해야 한다. 나는 사파의 내공을 익혔다. 백가장의 주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백가장의 주인은 십 년 동안 너였고, 앞으로도 너여야 한다."
"...."
"하지만 명심하거라. 가문의 주인이 명심해야 할 것은 바로 보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겉이 검다 해서 속까지 검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파인이라 해서 편견을 가질 필요도 없다. 때로는 그들이 정파인들보다 옳을 수도 있다."
백표의 말에 진무가 잠시 소검에서 시선을 떼었다.
뭔 개소린지는 모르지만 싸가지 없이 굴 줄만 알았던 놈이 갑자기 말하는 게 청산유수다.
제 동생 앞이라서 그런가?
"사람들은 모두가 겉모습에 쉽사리 오해를 하곤 한다. 은공께선 사파의 인물이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진실을 보아라. 우리 가문을 구해 주시는 것에 있어 조금이라도 잘못된 점이 있었더냐? 그 사악한 패력당의 무인들과 상대함에도 그들이 먼저 공격하기 전에는 절대로 검을 뽑지 않으셨다. 단지 겉으로 행동하시는 것이 그러할 뿐...."
"나 무당인데?"
"정파의... 예?"
진무의 나른한 말에 백표와 백여린이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턱을 괸 진무가 고기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 오물거리면서 말했다.
99화
"아, 내가 말 안 했냐?"
"...."
"나 무당 제자야. 일대제자 진무."
아.... 그러셨구나.
백표와 백여린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근데 왜 고기를 처먹지? 술은? 말투는? 싸가지는?
백가장으로 오기 전에는 사파인들을 족치고 나서 돈도 털었다.
그런데 어디를 어떻게 봐야 무당의 도산데?
"음, 니들이 의아한 건 알겠는데 왜 언짢은 눈빛이냐? 눈깔을 확 파 줄까?"
"아, 그게 아니라."
"말이 되지 않는...."
백표와 백여린이 동시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웃기고 있다. 지는 얼마 전까지 사람 죽이는 살수였으면서.
"뭐가 말이 안 돼? 겉모습 어쩌고 하더니."
진무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그건 그렇고 도통 모르겠네. 결국은 심문을 해 보는 수밖에 없나?"
진무가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백표."
"...예?"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이던 백표가 고개를 올려 진무를 쳐다보았다.
"가자."
"...어딜요?"
"고문해야지."
"...."
"이 새끼들 무릎뼈를 으스러뜨리고 눈깔을 뽑아서라도 자백을 받아야겠다."
"...."
"혹시 잘 아는 고문 기술자 없냐? 그 뭐라더라, 진실을 실토하게 하는 약물이라던가? 뒈진다고 위협하면 뭔가 말하려나?"
앞서 걸으며 중얼거리는 진무의 모습에 백표와 백여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똑같았다.
무당의 제자라고? 정파라고? 니가? 어디가? 어떤 부분에서?
* * *
백가장의 뇌옥.
한동안 비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섯 사람이 각기 나뉘어 갇혀 있었다. 패력당과의 싸움에서 백가장을 습격해 온 복면인들이었다.
철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뇌옥 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참 완벽하게도 묶어 뒀네."
진무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지를 벽에 달린 사슬로 묶고 혹시나 자결을 하지 않을까 입마개도 채웠다.
거기다 점혈까지 해 두었으니 죽으려고 노력을 해도 절대로 죽을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진무는 다른 이들을 지나쳐 자신을 목인겸이라고 밝힌 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진무를 알아보고 노려보는 눈빛.
"호오, 눈으로 욕하는 새끼는 처음이네."
그렇게 느껴졌다. 속으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는 듯한 눈빛.
보는 순간부터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사슬이 벽에 부딪히며 철그렁대는 소리가 뇌옥 안을 가득히 울린다.
끼이익.
문을 열고 가까이 다가간 진무는 잠시 고민을 했다.
심문을 하자면 입마개를 벗겨야 하는데 혹시 혀를 깨물고 자진하면 어찌하나? 스스로 죽고자 한 놈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턱뼈를 뽑아 놓으면 말을 못 할 것이고.
이빨을 죄다 뽑을까?
그건 너무 잔인했다. 명색이 무당의 도산데.
지켜보는 눈도 있으니 그 방법은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흐흠."
진무가 목인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그렇지!"
혀를 깨물지만 않으면 된다. 말할 정도만 되면 된다.
진무는 목인겸의 가까이로 다가가 턱 언저리를 슬쩍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닿은 것은 혈 자리가 아니었다.
얼굴의 수많은 근육 중 하나인 저작근(咀嚼筋). 턱을 당겨 이와 이를 맞닿게 하는 근육만 약화시켜 씹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전부도 필요 없다. 몇 개만 끊어 버리면 된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진무의 눈빛이 사악하게 변했다.
툭, 투툭!
손가락이 양쪽 턱 언저리를 가볍게 때리자 목인겸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떠졌다.
"크어어어...."
외상은 없으나 진무의 손가락에 근육이 생으로 끊어지는 고통을 받게 된 목인겸은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백표와 백여린은 혹 그가 어떤 혈도를 누른 건가 의아해했다.
"자, 대충 준비는 된 것 같네."
진무는 히죽 웃으며 목인겸의 입마개를 벗겨 냈다.
"이, 이노오음, 자라리 주겨라(이놈, 차라리 죽여라)!"
"어? 젠장, 근육을 너무 많이 끊어 버렸나?"
진무가 얼굴을 찌푸렸다.
뭐라고 하고는 있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지금부터 물을 테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해."
"다처라(닥쳐라)!"
"...."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괴성을 질러 대는 목인겸을 진무가 지그시 바라보다가, 중지를 꺾어 그의 이마를 튕겼다.
따악!
"크아아악!"
목인겸의 머리가 뒤편 벽을 처박고 튕겨 나왔다.
"죽을라고."
진무가 짧게 짜증을 냈다.
뼈와 살이 뒤틀리고 근육이 끊어진다는 분근착골(分筋錯骨)과 같은 방법도 있었지만, 진무는 즉각적인 고통을 주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식으로 제대로 한 방 맞으면 뇌가 흔들리고 짜릿한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더욱이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더없이 선한 고문법이 아닌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크으으."
"니들 어디 소속이야?"
"...."
따악!
"대랑이라는 노인네 어디 있어?"
따악!
"뭐 하는 새끼들이야?"
따악!
진무의 중지가 신명 나게 튕겨지고, 그때마다 목인겸의 머리는 벽을 처박고 튕겨져 나왔다.
"오라버니?"
"응?"
"혹시 저거 딱밤인가요?"
"...아무래도."
신종 고문술이다.
튕기는 방법이 탄지공을 날리는 모습과 비슷했지만, 딱밤이었다.
사지를 묶어 놓고 딱밤을 때린다. 여기까지는 좀 살벌하긴 했지만 장난같이 보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때리는 사람이 강기의 고수라는 사실이다.
손가락 하나로 금강석을 후벼 팔 정도로 강력한 무공을 가진 사람의 딱밤은... 보기만 해도 소름 끼쳤다.
"진짜 무당의 제자일까요?"
"...글쎄."
"...."
딱! 따닥! 딱!
백표와 백여린이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소곤거리는 사이 진무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튕겨지고, 목인겸은 사지가 묶인 채로 이마에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 * *
놈이 아는 게 별로 없었거나 고문이 부족했는지 알아낸 게 별로 없었다.
소검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저 대랑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하부 조직에 불과했고, 그들이 받은 명령은 '무혈'을 확보하는 것뿐이었다.
단지, 정신을 잃기 전에 '청성'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청성?
그들이 어째서 청성을 언급하지?
청성과 소검 무혈.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다음 목적지가 청성이니 가 보면 뭔가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 없이 맞은 딱밤에 혼절해 버린 목인겸에게서는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몇 차례 깨워도 보았으나 '청성.' '무혈.'만 되풀이했다.
처소로 돌아온 진무는 한숨을 내쉬며.
"작은 조직은 아니란 말이지? 대단하네. 탄기급의 무인을 하부 조직으로 거느릴 정도라니."
그들과 같은 자들이 몇이나 되냐는 말에 목인겸은 '많다.'라고만 대답했다. 정확한 수는 알지 못했다. 저작근을 잘라 버려서 말한다 해도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결국, 전문가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네."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무풍개 양소방.
그가 대랑이라는 자와 관련된 세력을 뒤쫓고 있다고 했으니 뭔가 알 터였다.
하지만 굳이 양소방을 만날 필요는 없다. 괜히 귀찮기만 하지.
"백표."
"예! 은공!"
진무가 부르자 백표가 화들짝 놀란 모습으로 대답했다.
이 새끼는 왜 갑자기 이렇게 정자세일까? 예전의 싸가지 없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언가에 겁을 집어먹은 눈빛이었고, 그 시선은 진무의 손을 향해 있었다.
"혹시 인근에 개방도들이 있을까?"
"예. 아마도."
"좋아. 불러와."
"알겠습니다. 한데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패력당에서 손님이 와 있습니다."
"손님?"
"예. 노영찬이 만나 뵙고 싶다며 직접 찾아왔습니다."
"흐흠."
잠시 고민을 하던 진무가 가볍게 말했다.
"좋아. 불러와. 백가장주도 함께."
"예!"
어차피 손댄 이상 자신이 해결해 줄 생각이었다. 그냥 놔두면 분명히 또 패권 어쩌고 싸움질을 할지도 몰랐다.
그동안 채기법으로 내공을 다진 백표의 실력을 봤을 때, 어디서 고수라도 초빙하지 않는 이상 둘 모두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사이좋게 지내면 될 걸 왜 싸우고 지랄들인지. 쯧쯧."
진무가 혀를 차며 목인겸과 그의 조직들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에 백표가 패력당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데리고 왔다.
노영찬을 비롯해 패력당의 수뇌부와 백가장의 장로들이 모조리 몰려와 후원이 가득 찰 정도였다.
백가장에서 준비한 의자에 양측이 서로를 마주 보며 나누어 앉았고, 그 중심에 진무와 백여린, 노영찬이 있었다.
"밥 먹었어?"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인."
"괜찮긴. 손님이 왔으면 뭐라도 먹을 걸 내와야지."
진무가 백표를 힐끗 쳐다보았다.
"구워."
"예!"
진무의 말에 벌떡 일어나 고기를 자르는 모습에 백가장의 장로들이 얼굴을 찌푸렸으나 그 누구도 입을 떼지는 않았다.
치이익.
잘려진 고기가 익어 가는 사이 진무가 노영찬을 바라보았다.
"계속할 거야?"
"...예?"
"백가장과 싸우는 거 말이야."
"...그게."
"그만해라."
"...."
이번에는 패력당의 수뇌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동네 애들 싸움 말리는 것도 아니고 그만하라니.
그저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싸움의 결과에 계림의 수많은 이권이 달려 있었다.
"그래. 쉽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 백가장도 그렇고, 패력당도 그렇고. 근데 그 때문에 다들 못 먹고 사는 건 아니잖아?"
"그건...."
노영찬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 기분 나빠?"
"그게 아니라."
"기분 나쁘면 지금이라도 칼을 들어. 무림인이 뭐 별게 있겠어?"
"...."
"말이 없으면 그만두는 것으로 알지. 그럼 이제 백가장도 어느 정도 양보를 하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계림의 이권.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잖아. 대충 적당한 선에서 양보해. 저들도 얻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안 됩니다!"
진무의 말에 백여린이 발끈하며 말했다.
"안 돼?"
"예. 저들에게 영역을 내어 주면 계림의 민초들이 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어떤 고통?"
"저들은 필시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려 돈을 뜯어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백여린이 노영찬을 노려보는 모습을 진무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니들은?"
"...예?"
"저들은 돈을 뜯고, 그럼 니들이 뜯어 가는 것은 뭐지?"
"...."
"백가장도 돈 받잖아. 객점, 주루, 상단. 다들 백가장에 잘 부탁한다며 돈을 주잖아."
"그것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그저 백가장을 후원하는 마음에."
"개소리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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