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야."
"켁, 케켁!"
상인이 숨도 못 쉬고 허공에 매달려 버둥거렸다.
그리고 진무의 번들거리는 눈동자.
"이거 뭐냐?"
"케에... 눼?"
목이 잡힌 상인은 대답을 하기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털썩.
상인을 땅바닥에 던진 진무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뭐냐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겁을 집어먹었다.
아니,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허리춤에 맨 검과 그의 눈빛, 단숨에 사람을 들어 올리는 악력.
무림인이다.
그들은 무법자였고 힘을 가진 자였다.
또한, 눈빛에 머금어진 기세는 아무리 완력이 세다 해도 일반인들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거 누가 이랬냐고?"
"그, 그건... 저도 잘...."
상인이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몰라?"
"...예.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한 놈이었는데, 아침에 왔더니."
"...."
진무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흑우를 사체로 만든 것의 정체.
'채기법(採氣法).'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 무공이었다.
타인의 기운을 빼앗아 자신의 내공으로 만들어 내는 무공.
그러한 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교에 이어진 흡성마공이었고, 그 외에도 채음보양술, 양기보충술 등의 아류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무림에서 손꼽히는 금단의 마공이었다. 익히는 순간 무림 공적이 되어 전 무림의 추격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그렇기에 마교도들밖에 익히지 않는다.
하지만 흑우의 사체에 남은 것은 그런 아류들과는 달랐다.
좀 더 근원적인 무공, 다시 말해 기본공인 채기법의 원형.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그것은 진무, 아니 혁련무강의 독문무공인 묵룡혼원공의 기초이기도 했다.
'어떤 놈이... 감히.'
진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가 알기로 채기법을 아는 자가 당금 무림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의 마지막 전수자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잘못 쓰면 마인으로 지탄받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그것으로 기초를 닦아 사패천주가 되었고, 중원 무림에서 절대의 이름으로 군림했었다.
하지만 채기법을 익히는 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절대로 흡정 대상을 죽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부의 유지이자 금기였고, 또한 채기법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대상을 채기법으로 죽음에 몰아넣는 순간 사기(死氣)가 체내에 쌓이게 되고, 중첩될수록 심각한 부작용이 찾아오게 된다.
이른바 갈증과 소멸.
사기, 즉 죽음의 기운이 일정 이상 쌓이게 되면 마성에 빠지게 된다. 채기법이 야기하는 살인에 대한 충동을 억누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맨정신으로는 절대로 버틸 수가 없다. 술이든 약이든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셔야만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육체는 계속해서 피폐해져 가고, 종래에는 목내이처럼 말라비틀어져 모든 것이 소멸된다. 강제로 얻은 내공이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소의 사체.
죽였다.
채기법으로 죽였으니 놈도 부작용을 앓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필시.
'살수겠지. 드러내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직업 중에 그만한 것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도 지독한 주정뱅이.'
진무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나만 묻자."
"예?"
"몇 번이냐?"
"...뭐가요?"
"짐승 새끼들이 이런 상태가 된 것이."
"에... 한 열 번쯤?"
"얼마에 한 번씩?"
"그건 대중없습니다요."
"...."
진무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상인은 호위를 고용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그 많은 우리를 모두 지키자면 몇 명이 될지도 몰랐고, 그 돈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인의 사정이었다.
진무에게 중요한 것은 반복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채기법을 아는 놈이 근처에 있다는 뜻.
그리고 그놈은 분명 자신, 혹은 자신의 스승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놈은 금기를 어겼다.
'그렇단 말이지.'
진무의 눈동자에 싸늘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툭!
우칠이 전낭을 놓고 갔다.
백표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살행이 있은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
백표에게 전해지는 청부는 잦지 않았다.
대상은 언제나 뛰어난 무인.
뭐 상관없다.
그는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살인(殺人) 그 자체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순간의 짜릿함. 그것이 좋았다.
피 냄새는 언제나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크크크."
백표는 또다시 피 맛을 보게 된다는 생각에 묘하게 웃으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날 밤.
백표는 살행에 나가기 위해 우시장 우리를 찾아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걸음이었다.
한 번의 살행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기를 뽑아내기 위함이다.
많아서는 안 된다. 사건이 될 수 있으니까.
사건이 되어 이목이 집중되면 동정호를 떠나야만 했다.
자신을 쫓고 있는 자들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벅, 스윽. 저벅. 스윽.
짐승들은 고요 속에 울음을 멈췄고, 백표는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갔다.
뿌드득.
기를 빨아낼 때 가축들의 뼈마디가 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흥미로웠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똑같은 하루였다.
그런데.
"야!"
"...?"
누군가 그를 불렀다.
의아하다. 이 시간에 이곳에 사람이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백표의 시선이 향한 곳에 검은 무복을 입고 팔짱을 낀 사내가 보였다.
"응? 누구?"
"...."
"흠, 봤구나."
두 마리째의 짐승에게서 기운을 뽑아내 헐렁한 옷이 꽉 맞게 된 백표가 싱긋이 웃었다.
"그럼 죽어야지."
웃음이 사라지는 순간 백표의 발이 가볍게 뻗어졌다.
파앙!
그리고 깔끔하게 그어지는 일격.
땅!
"...!"
백표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겨났다.
달라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일상이.
그리고 백표의 칼을 쳐 낸 흑의 무복의 사내, 진무가 싸늘하게 말했다.
"너 뭐냐?"
"...."
목을 베고 지나갔어야 했다.
늘 그랬듯이.
찌-잉.
손에 쥐어진 네모반듯한 요리용 칼.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백표는 칼에서 거둔 시선을 곧바로 쳐들며 진무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허리 뒤쪽에 매어진 검은 뽑히지도 않았고, 팔짱은 풀리지도 않았다.
어떻게 막았지?
진무를 노려보던 백표가 고개를 저었다.
'우연이겠지.'
백표는 떨림이 멈춘 직사각의 도를 손안에서 회전시켜 움켜쥐었다.
그리고 매섭게 진무를 노려보았다.
두 번의 우연은 없다.
지금까지 그런 놈은 없었다.
즉, 놈은... 죽는다.
파학!
이전보다 거칠게 밟아진 걸음에 보다 강한 힘이 실렸다.
흙이 파헤쳐졌다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백표의 신형이 지면을 스치며 달렸다.
촤촤촤촤!
차가운 공기가 그 속도를 이기지 못해 백표의 얼굴에 부딪히고, 머리칼은 뒤로 쭉 뻗은 것처럼 일자로 섰다.
취릭! 따앙!
자신의 도가 튕겨지는 순간 백표는 정확하게 보았다.
검이 아니다.
파리 쫓듯이 휘두른 손. 마치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표정.
그런데 이 살기는 뭐란 말인가?
진무의 몸에 둘러진 거대한 기운이 전신을 바늘처럼 찔러 왔다.
죽음? 더 들어가면 죽는다.
백표는 곧바로 방향을 꺾으며 진무를 비껴 스치며 훌쩍 물러났다.
"너... 뭐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크게 뜨여졌던 눈을 깜빡이며 경계하듯이 칼을 역수로 움켜쥔 모습을 진무가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야. 넌 뭐냐? 어떻게 채기법을 알고 있지?"
"채기...법?"
살기로 물든 백표의 눈동자에 한 줄기 의아함이 스친다.
채기법이 뭔지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눈앞의 사내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스윽.
백표의 기세가 날카롭게 피어오른다.
눈앞의 상대. 살법(殺法)으로 상대할 만한 자가 아니다.
살수들의 방법은 정면 대결에 좋지 못하다. 상대의 허점을 노려 단숨에 목숨을 끊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에 단순하고 빠를 뿐이다.
"큭큭큭, 너 제법 재미있다."
"...."
백표가 싸늘한 표정으로 혀로 입술을 쓸었다.
"자, 이제 죽여 줄게."
"...."
자세를 취하는 백표를 진무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모자란 새끼.
그의 칼이 예리하다는 것은 알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의 격돌에서 알았어야 했다. 그는 지금 진무의 실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상대의 실력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
채기법을 남용한 부작용이다. 사기가 머리까지 치고 올라가 미친 것이다.
그는 서서히 마인이 되어 가고 있다.
점차 살육에 미쳐 사리 분간을 못 하게 될 것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종래에는 마도의 무인들이 그렇듯 사람의 기운을 빨아먹게 될지도 몰랐다.
자신이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파앙!
백표가 지면을 밟고 진무를 향해 몸을 날려 왔다.
슥! 스스스슥!
"크핫핫! 죽어라! 죽어!"
광기에 휩싸인 눈동자로 미친 듯이 도를 휘둘러 대는 백표의 모습에 진무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피하기만 했다.
백표의 도가 가진 공간 안에서 최소의 움직임만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었다.
칼날에 스민 예기가 그의 옷자락을 베어 내고 있었지만 진무는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오히려 발을 내디뎌 더욱 몸을 밀착했다.
바로 보기 위함이었다.
백표의 도법은 무척이나 뛰어나다. 길이로 따지면 단도보다 조금 긴 정도였다. 그것을 손안에서 이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내공을 제외하고 쓰임 하나만 따지면 청상보다 훨씬 윗줄에 있었다.
노리는 곳 하나하나가 일격에 상대의 목숨을 끊을 정도로 뛰어난 살초였다.
'핏줄을 노리는 건가?'
백표의 칼이 노리는 곳.
칼날의 스침이 공기를 가르고, 한발 물리며 허리를 젖힌 진무의 가슴께로 칼날이 지나간다.
뛰어나다.
그의 칼은 둔탁한 모양을 했을지언정 그 어느 것보다 예리하다.
스스스슷.
더구나 공기의 결을 타고 있다. 그렇기에 빠르고, 공수 전환이 자유로웠다.
분명 엄청난 수련을 쌓아 온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익혔다 해도 칼이 흐름을 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칼의 움직임만으로 보면 살수로 쓰이기에는 너무 아까울 지경이었다.
진무는 고민했다.
어찌할까? 죽여야 하는가?
하지만 놈이 어째서 채기법을 알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렇기에 공격을 하지 않았다.
만약 죽일 생각이었다면 시작과 동시에 끝났을 싸움이었다.
"크하하하!"
초식이 이어질수록 백표의 광기가 더욱 짙어졌다.
위험하다.
앞으로 최소 열 번. 그가 채기법을 사용해 계속해서 사기를 모은다면 그 안에 그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미칠 것이다.
사람이 아닌 살육에 미친 짐승이 된다.
취리릭!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 때문이었을까? 진무의 움직임에 머뭇거림이 생겼고, 백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을 그었다.
따아앙!
"...!"
분명 정확히 그었다.
그런데 거친 쇳소리와 함께 칼이 멈췄다.
그리고 칼날이 진무의 오른손에 잡혀 있었다.
"제길, 호기심이 이겼다."
"...?"
백표의 눈동자에 피식 웃는 진무의 미소가 그려졌다.
쨍!
그리고 도가 부서졌다. 진무의 손아귀에 어린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너, 일단은 살려 주마. 어떤 놈인지 확실하게 파악될 때까지."
"...!"
진무의 미소가 짙어지는 순간.
뻐억!
진무의 왼손이 백표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꺽...!"
튀어나올 듯 커진 눈.
백표는 단 한 방의 주먹에 새우처럼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 칼을 부숴 버린 오른 주먹이 횡으로 휘어지며 비틀려 날아왔다.
복부를 맞은 충격이 너무도 컸음인지 백표는 눈으로 보면서도 그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콰직!
주먹이 턱을 강타했다.
고개가 꺾이듯이 옆으로 돌아가 버린 백표의 정신이 남아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털썩.
백표는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진무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동정호에 조금 더 머물러야 될지도 모르겠군."
81화
동림전장 동정호지부 인근 객점.
"으으...."
백표는 복부와 얼굴께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
끔벅이는 눈동자에 비치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졌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꽤 넓은 천장.
그리고 자신의 옆에 의자를 놓고 앉은 황의 장삼을 입은 사내. 진무였다.
"네놈!"
백표는 진무를 발견함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주먹을 뻗었다.
"뭐 하냐?"
"...."
진무가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느리다.
최선을 다해 뻗고는 있지만 더없이 느린 것도 모자라 파리 한 마리 잡을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구나 가냘프다.
여인의 손목보다도 가늘어 뼈가 앙상한 백표의 손.
탁!
진무는 귀찮은 표정으로 쳐 내 버렸다.
"크엑!"
가볍게 쳤는데?
부주의했다. 고작 손을 쳐 냈을 뿐인데 백표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침상에서 떨어져 굴렀다.
"...."
종이 인형이냐?
그냥 '탁' 친 건데... 다음부터는 좀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야, 일어나."
한숨 섞인 진무의 말에 백표가 힘겹게 일어났다.
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진무는 지난밤 동안 백표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에게서 빨아들인 생기는 고작 두 시진을 넘지 못했다.
무슨 시체가 말라 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건장한 백표의 체구가 물먹은 솜이 말라 가듯이 변했다. 팔다리는 너무도 얇게 변해 버렸고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퀭해졌다.
채기법의 부작용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으으으... 네놈... 죽여 버리겠다."
"...."
진무가 침상을 잡고 힘겹게 일어서는 백표를 보며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깨진 것인지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고 진무의 손에 맞은 팔은 부러진 듯이 덜렁거렸다.
어, 어이. 이봐.
그게 팔이 부러지고 머리에 피까지 흘릴 정도의 충격이었냐?
일단 정신을 좀 차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턱!
진무는 백표의 이마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
"네놈 뭐 하는...!"
쩌엉!
순간적으로 백표의 머리가 멍해졌다.
무당의 선기.
도문의 기운이기에 그 청량함이 사기(邪氣)와 마기(魔氣)를 쫓아내는 힘이 있었다.
"으으...."
골이 흔들렸다가 돌아온 뒤 백표의 눈동자에서 살기와 광기가 옅어졌다. 잠시 동안은 원래의 성격을 되찾을 것이었다.
"여, 여긴?"
정신을 차린 백표가 의아한 듯이 주위를 둘러본다.
하긴 마기에 빠져 있는 동안의 기억이 온전할 리는 없었다.
"이봐, 하나만 묻자."
"...."
진무의 말에 백표는 여전히 머리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짜증이 치민 진무는 좀 패고 시작할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정신도 아닌 놈을 패 봐야 그다지 얻을 것도 없다.
이런 놈은 때리기보다는 잘 구슬려야만 했다.
"당신은 누구요?"
"나? 그건 알 것 없고 채기법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부터 말해 봐."
"채기...법?"
자신이 익히고 있는 무공의 명칭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 채기법. 니가 익히고 있는 남의 기운을 빨아내는 그 무공."
"...?!"
백표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동자에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 어찌 그걸?"
"좀 더 신뢰감을 더해 줄까?"
"...."
"니 몸의 변화. 소의 생기를 빨아먹고 변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시진. 그다음에는 엄청난 고통이 찾아오겠지. 우린 그걸 산공(散功)이라 부른다. 술이 없이는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지금 너의 몸 상태로 봤을 때는 술을 마셔도 고통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진무의 말에 백표의 눈동자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밤새 살수 일을 하다 돌아와 아침이 되면 고통이 엄청나지? 한순간에 산공 현상을 겪게 되면 나타나는 공허감 때문이야. 그러다가 좀 지나면 몸에 힘은 없어도 괜찮아지고."
"...?"
"원래 몸은 이렇지 않았겠지? 채기법으로 생기를 흡수했을 때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거고."
진무는 마치 점쟁이처럼 자신에 대한 것들을 맞춰 내고 있었다.
오방색 옷을 입고 얼굴에 화장을 했다면 박수무당이라 해도 믿었을 터였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말랐겠지. 그리고 그때부턴 분명 갈증이 생겼을 거야."
말을 들을수록 백표의 눈가가 심하게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그거 부작용이야. 몸 안에 죽은 기가 쌓여서 생기는."
"그걸 어떻게...?"
여전히 경계심 어린 표정이었으나 백표의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
"어때? 묻는 말에 대답만 잘 해 주면 내가 부작용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좀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치료한다고?
백표의 동공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미 백방을 수소문해 치료법을 알아보았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그런데 눈앞에서 웃고 있는 자가 누구길래?
말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모자라 치료까지 해 줄 수 있다 한단 말인가?
"당신이 누구기에?"
"질문은 내가. 대답은 니가. 이해됐어?"
진무가 싱긋이 웃었다.
"당신을 어떻게 믿소?"
"안 믿어도 좋아. 지금 여기서 너를 죽여도 나는 상관없거든. 애초에 그러려고 했었고."
"...."
한참을 머뭇거리던 백표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백표. 광서성 계림 백가장의 소장주.
백가장(白家莊)은 광서성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정파의 일원이라 한다.
사파의 세력권인 곳에서도 수 대를 버텨 온 곳이었다.
특히나 가문의 도법인 '난파풍도(亂破風刀)'는 바람을 자른다는 이름처럼 그 예리함이 뛰어나 중원 도법 중에서도 수위에 들어가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십 년 전 백가장에 혈사가 일어났다.
"사패천의 천우명이 찾아왔었다고?"
"그렇소. 그게 왜?"
"아, 아니야. 계속해 봐."
진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천우명이 어째서 그곳을 찾아갔을까?
십 년 전이면 천우명이 불로초를 찾아다니던 시기였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다며 본가가 오랫동안 지켜 온 성심곡(聖心谷)으로 들어가길 원했소. 그곳은...."
성심곡.
백가장이 지키는 계수나무 숲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계곡.
예로부터 그곳에 기화요초가 만발한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싶어 찾아간 걸음이리라.
천우명 이 새끼 진짜 사방팔방 뒤지고 다녔구나.
대충 이해된다.
정파의 일원인 백가장이라면 자신들이 대대로 지켜 온 성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겠지.
그리고 천우명과 철검단의 실력이라면?
"아버님께서는 그놈에게 맞아 죽었소. 어머님은 한을 품은 채 목을 매어 자결을 하셨고."
역시.
천우명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목표를 정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저질렀을 테니까.
"아, 그, 그랬냐?"
"...예?"
"아냐, 계속해."
진무의 반응에 백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가 놈 때문이오."
그, 그렇지.
"천우명 그놈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아!"
기억이 났다.
채기법을 익힌 게 자신 말고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천우명에게 채기법을 전수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망할 놈, 절대로 타인에게 전하지 말라고 했더니.
"천우명 이런 멍청한 놈이!"
"...예?"
"아, 아니야."
"...예. 어쨌든 놈이 고통스럽게 죽으라며 강제로 심은 무공으로 나는 살욕을 주체하지 못했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소.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백표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회한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퀭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랬을 것이다. 그간 강제적으로 찾아온 갈증과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했다.
"참으려 노력을 했었소. 하지만 자꾸만 살욕이 강해져서...."
그랬겠지.
그의 축 처진 어깨를 보니 왠지 미안하다.
천우명, 그 멍청한 녀석이 채기법을 제대로 전수했을 리가 없었다.
제 놈도 머리로 외우지 못해 처맞으면서 배우지 않았던가.
분명 구결과 주의 사항은 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사기가 쌓여야 생기는 살욕이 시작부터 생겼겠지.
아, 멍청한 놈.
잘 모르면 가르치지나 말든가. 뭐하러 남의 가정을 박살 내고 강제로 무공까지 심었단 말인가?
더욱이 그냥 죽이지 뭐 하러 고통까지 줘 가면서?
하지만 생각해 보면 모든 사건의 원인 제공은 불로초일지도 모른다.
천우명의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불로초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자신이 진무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인가? 막 전생의 인연이 이어지는?
아니, 그런데 그래서 뭐?
자신이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어찌 된 게 자꾸 죄의식이 든다. 몰랐다면 무시했을 일이나, 알고 나니 더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젠장, 선공을 익히면 성격도 바뀌게 되는 건가? 근래에는 자꾸 감정에 치우치게 된다.
진무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왜 안 죽었냐?"
"왜? 글쎄. 이 망할 무공을 익혔음에도 죽기는 싫었던 모양이외다."
백표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냥 무심코 물어본 말이었다. 울리려고 한 말은 결코 아니었는데 백표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선기에 정신을 차려서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던 기억들의 조각이 과거사를 이야기하면서 머릿속에 순서대로 맞춰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고 있겠지.
마성에 빠져 자신이 죽였던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기억이 나는 것이겠지.
"아, 내가 살수가 되다니. 살고자, 살욕을 채우고자.... 내 선대를 어찌 뵌단 말인가."
"어이, 이봐. 그렇다고 울 것까지야."
"미안하오."
눈물을 닦아 낸 백표가 진무의 앞에 자세를 바로 하며 꿇어앉았다.
"귀하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정신을 차리게 해 주어 감사드리오."
"...."
"차라리 잘되었소. 자, 이만 거두어 주시오. 내 죄업을."
진무는 목을 길게 뺀 백표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망할. 어찌해야 할까?
진무는 잠시 고심했다.
살수가 되어 관계없는 사람들을 죽였으나 그 원인은 천우명에게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일부 원인이 있지 않는가?
그래. 도와주자. 채기법이 그리 나쁜 무공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건 몰라도 기초를 쌓기에는 더없이 좋은 무공이었다.
그리고 우연으로 전해졌으나 따지고 보면 같은 무공을 익힌 동문이 아니던가.
진무가 한숨을 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취리릭!
진무의 검이 빠르게 휘저어졌다.
핏! 피피핏!
열두 곳에 달하는 혈도에 새겨진 자상에서 솟구친 핏물이 바닥을 적신다.
"...!"
그런데 백표는 멀쩡했다.
당황한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묻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을 죽이지 않느냐고. 그리고 칼집 낸 열두 곳의 혈도는 무엇이냐고.
"말했지. 부작용, 없애 줄 수 있다고."
"...아!"
"방금 너의 혈도는 사기가 뭉치는 곳이다. 그리고."
진무는 검을 집어넣고 백표에게 다가갔다.
툭.
그의 머리, 백회혈에 올려진 손.
"지금부터 몸 안에 있는 사기를 몰아내겠다. 운기해라."
"...!"
놀람의 연속이었다.
백표는 진무가 자신을 죽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살리는 것도 모자라 정말로 부작용을 없애 준단 말인가?
감탄하는 순간 백회를 통해 엄청난 양의 내력이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연이은 감탄.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이끄는 대로 운공이나 해라. 잘못하면 진짜로 죽는다."
"...예!"
백표는 꿇은 자세를 풀고 좌정했다.
82화
"은공!"
열두 번의 운기가 끝났을 때 백표는 진무를 향해 엎드렸다.
정신이 맑아졌고, 몸은 더없이 가뿐했다.
술에 의지해야만 견딜 수 있었던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
"이 은혜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안 갚아도 된다. 은혜 갚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천우명 때문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부작용을 없애 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백표는 감격한 표정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거, 울지 말라니까."
"예."
진무의 말에 거짓말처럼 눈물을 멈춘 백표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치료한다고 했는데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 남은 모양이다.
희(喜)와 애(哀)가 제멋대로였다.
"이봐. 그런데 다 고쳐진 건 아냐."
"...예?"
"방금 내 힘으로 운기를 도와주기는 했다만 채기법을 익힌 사람은 다른 내공술을 익힐 수 없다."
양의심공이라면 모를까.
"아... 예? 그럼?"
"채기법밖에 못 한다고."
"...."
멍하니 바라보던 백표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천우명 개자식! 나한테 그따위 무공을!"
"...."
"죽여 버리겠다!"
터져 나오는 백표의 분노에 진무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실망하지 말고 잘 들어. 채기법이 꼭 나쁜 건 아니야. 생기를 흡수하긴 하지만 적절하게 사용하면 매우 유용하다고."
"...?"
"아주 조금씩만 흡수하는 거야. 즉, 죽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럼 사기가 스미지 않으니까 부작용도 없을 것이다."
"아!"
감탄만 몇 번이나 하는 건지.
"이른바 박리다매(薄利多賣)군요!"
백표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희와 애뿐 아니라 노(怒)와 락(樂)의 감정도 제멋대로인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인격이 여럿으로 갈렸거나 아예 미친? 뭐 언젠간 해결되겠지.
그리고 박리다매라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적진성산(積塵成山), 티끌 모아 태산에 가깝다.
뭐, 여하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은공께서는 어찌 그리 상세하게 아십니까?"
백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그런 건 묻지 말고.
진무가 머쓱하게 웃는데.
"어쨌든 감사합니다. 대협.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이거 정말 대가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 질문을 해 놓고 금세 잊어 먹고, 또 울고.
이쯤 되니 지겹다. 그냥 그때 다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험험, 그래, 이제부터 뭐 할 거야?"
백표가 잠시 고민하더니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은공께서 저를 용서하시고 은혜까지 베푸셨다고는 하나 저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죽으려고?"
"예. 하지만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계림으로?"
"예."
"가서 어쩌려고?"
"동생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백가장을 일으켜 세우도록 도와야지요.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제게 죽은 이들에게 모든 죄업을 밝히고 자진할 생각입니다."
"자진한다고?"
진무가 백표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예. 함부로 살생을 했으니...."
무림인을 죽인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 든 이상 죽음을 각오한 인생이니까.
하지만 일반인을 죽인 죄는 진무도 그다지 반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죄가 천우명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불로초 때문이기도 했고.
진무가 몹쓸(?) 죄책감에 화제를 돌렸다.
"흠. 그런데 자네 살수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청부를 받는 쪽에 소속이 되어 있을 텐데?"
"예."
"그들이 놔줄까?"
"놔 달라 해야지요."
놔주겠냐? 아니 뭔 살수로 살아 놓고 살수들의 생리를 이렇게 몰라?
살수 집단의 특성상 치부가 드러나면 떼 몰살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해서 몰래 도망친다 해도 추격당할 것이고, 아무리 입을 다문다고 약조해도 살아서는 절대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안 놔줄 텐데?"
"그래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이상 더는 살업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죽더라도."
백표가 굳건하게 다짐을 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은공의 은혜는 평생 가슴에 담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이름도 모르면서 보답을 해?
이런 미친놈.
백표가 힘겹게 진무를 향해 절을 올렸다.
절하는 데 뭐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그리고는.
저벅, 스윽. 저벅, 스윽.
달팽이냐...?
방문까지 반 장이 조금 넘는 거리다. 한 발 떼고 스윽, 한 발 떼고 스윽. 거기다가 덜덜 떨기까지.
너무 애처롭다. 걷는 모양만 봐도 가슴이 아프다.
저 상태로 살수 집단에 찾아갔다가는 분명히 죽는다.
힘도 하나 없이 살수직을 그만두겠다고 해 봐야 동정표도 못 얻는다.
물론 채기법으로 내력을 채우고 찾아가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기운만 좀 채우면 탄기급 무인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도법은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분명 일대다의 싸움이 될 것이다.
하아, 진무가 한숨을 내쉰다.
자신을 제약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진짜, 망할 놈의 선기.
서둘러 양의심공을 익히고 묵룡혼원공을 익혀야지.
이러다간 정체성에 혼란이 생길 것 같다. 자꾸만 착해지려 한다.
일단은.
"도와...주지."
"예?"
"살수질 그만둘 수 있게."
"아...."
울지 마!
* * *
동정호 외곽지 부랑촌.
도박 빚에 인생을 망친 사람들과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죄인들이 숨어든 곳.
그곳은 주인 없는 동정호에서도 가장 위험한 우범 지대였다. 관병은 물론 이름난 무인들조차 함부로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무법 자체가 체계로 자리 잡은 곳이었기에 은밀한 자들이 몸을 숨기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랑촌의 분위기는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고 해가 드는 곳마저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이 밝은 부랑촌.
밤늦도록 술에 찌들었던 취객을 위해 항상 일찍부터 문을 연 국수 가게로 흑의에 죽립을 쓴 거한이 찾아왔다.
도심의 관도에서라면 의심받을 만한 복장이었으나 부랑촌에서는 너무도 익숙한 복장이었다.
그곳에 있는 대부분이 자신의 신분을 들키려 하지 않았기에 그랬다.
"주인장. 여기 국수 한 그릇."
거한은 미리 자리를 잡은 허름한 복장의 노인과 등을 맞대고 앉아 주문했다.
국수가 말아지는 동안 흑립 거한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백표에게서 소식이 없습니다."
그 말에 젓가락질하던 노인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노인의 이름은 범용. 길거리에서 구걸이나 할 법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동정호에서 제법 알려진 살수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실패한 것인가?"
"모르겠습니다. 청부 대상은 살아 있고 백표는 거처에서 사라진 뒤 푸줏간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흐흠."
범용 노인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의외였다.
범용 노인이 이끄는 삼살당(三殺堂)은 동정호의 밤거리에서 제법 은밀하게 이름이 알려진 살수 집단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죽립의 거한 일살, 초립. 침묵의 살인자라 불리는 이살, 현묵. 그리고 삼살 백표.
삼살당이 보유한 특급 살수.
그들은 단 한 번도 살행에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백표는 뛰어난 살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자였다.
평소에는 비리비리한 모습으로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특유의 섬뜩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도무지 무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살수였다.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죽여야 할 대상을 죽이고 돈만 벌면 되는 일이었다.
백표, 그는 몇 번 되지 않는 살행으로 단번에 특급 살수의 실력을 보여 준 자였다.
살해한 이들의 몸에 남은 너무나 깔끔한 흔적. 그가 평소 발골하는 소백정으로서 그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그 실력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은신술이나 경공이 뛰어나지 않으면서도 지금까지 그를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평소에는 걷는 것조차 힘든 자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살행마다 무조건 성공시키니 살수계에서도 꽤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어찌 된 게지?'
젓가락을 놀리는 범용 노인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와루의 우칠에 의해 전달되는 그들의 은밀한 명령서. 명령서가 도착하면 어김없이 청부 대상은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가 삼살당에 몸담은 이후 마치 하나의 일상과도 같이 반복된 일이었다.
그런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청부 대상은 버젓이 살아서 걸어 다니고, 그는 거처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변화는 좋지 않았다.
무언가 불안했다.
"초립, 이살에게 전해라."
"...."
"백표의 뒤를 쫓는다."
"예. 살주."
흑립 거한, 초립이 짧게 대답하는 사이 국수가 말아져 나왔다.
둘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고, 어느샌가 식사를 마친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에 뒷짐을 지고 제 갈 길로 사라졌다.
* * *
"은공? 이곳에서 기다린단 말씀입니까?"
백표는 진무의 이름을 듣지 못했기에 그저 '은공'이라고만 불렀다.
"그래."
단답형의 대답.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투였다.
백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작용에 대한 치료를 끝낸 진무는 그를 데리고 곧장 동정호의 한적한 거리로 이동했다. 푸줏간에도 가지 않았고, 백표가 살던 거처로도 가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푸줏간 인근 길거리였다.
아침부터 그들이 한 행동은 그저 앉아 있다가, 사람 많은 곳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뿐이었다. 행인들이 많았기에 그를 아는 이들이 있다면 금세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만약 삼살당이 그를 뒤쫓는다면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째서?
"궁금해?"
"예?"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지? 그리고 어째서 사람들 눈에 일부러 띄게 행동하는지."
"...예."
"멍청하긴. 너 삼살당인지 뭔지 하는 곳의 소속이라고 했지?"
"예."
"위치 알아?"
"대충 부랑촌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는 소리잖아."
"...예. 저는 언제나 청부 쪽지와 청부금만 받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가서는 안 되지."
"...?"
백표는 궁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봐. 넌 청부받은 살행을 하지 않았어."
"그런데요?"
"원래 끝났어야 할 일인데 우리가 하루를 더 기다렸으니까 그쪽에서는 의아해하며 널 찾고 있을 거야."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사패천의 유명한 살수 집단인 살막(殺幕)을 수하로 부렸던 진무였다.
살수들의 생리라면 빠삭했다.
은밀한 놈들일수록 의심이 많다. 하물며 사람 목숨을 제 업으로 삼는 놈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 와중에 정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놈의 근거지로 찾아갈 순 없지."
"그런가요?"
"...."
도대체 왜 이런 걸 설명까지 해야 하지?
하지만 그 또한 부작용 때문이라 생각한 진무는 애써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놈들의 규모, 위치조차 알지 못하고 갔다가는 되레 피해를 보기 십상이다. 뭐하러 당당하게 찾아가서 위험을 자초해?"
백표는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나 묵묵히 듣기만 했다.
"모든 싸움의 기본은 자신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우리는 놈들을 모르니 우리가 유리한 곳으로 끌어들여야지. 이는 병법의 기본이기도 하다."
"...그렇군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있지만 전혀 모르는 듯한 백표의 표정을 보며 진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광기와 마기가 옅어져 원래의 성격으로 돌아오긴 했어도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뇌에 가해진 손상 또한 워낙 심해 완전히 회복되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었다. 감정조차 들쭉날쭉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적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자고? 하물며 지금 백표의 몸 상태로?
미친 소리다. 자신은 몰라도 살수들의 공격에서 백표를 지킬 수가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니, 그러게 채기법으로 내공을 좀 빨고 오자니까.
이유 없이 생기를 흡수할 수 없다며 그리 고집을 부리다니. 제 놈이 언제부터 정파였다고.
내기를 채흡하지 못한 백표는 서 있는 모습조차 비실거리는 게 당장 쓰러질 듯한 모양새였다.
"됐다. 됐어."
진무는 이미 준비를 끝냈다.
백표를 사람이 많은 길거리로 끌고 나와 행적을 일부러 노출했다.
해가 서산을 넘어갔고 밤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어둠이 찾아왔으니 그림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백표가 몸담은 삼살당. 그들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자, 갈까?"
"예?"
해가 서산을 넘어가며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진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이 오신 것 같아서 말이지."
진무가 히죽 웃었지만, 백표는 여전히 의아한 모양새였다.
83화
하긴 지금으로서는 느낄 수가 없겠지. 저런 상태라면 내공은커녕 무인이 가진 예민한 감각조차 둔해졌을 테니까.
진무가 걸음을 떼자 백표가 그 뒤를 힘겹게 따랐다.
한 발 한 발 바닥을 끌면서 걷는 그는 너무 느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진무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행인들의 발길이 드문 으슥한 골목이었다.
진무는 일부러 높다란 담벼락에 가려 달빛조차 들지 않는 곳을 골랐다.
"여긴?"
"여기?"
진무가 피식 웃고는 어둠에 그늘이 더해진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이지."
발을 뗌과 동시에 별안간 진무의 신형이 쭉 늘어났다.
그리곤 어둠을 향해 손을 뻗어 넣었다.
그런데.
취릿!
그늘 속에서 한줄기 섬광이 쏟아져 나왔다.
"어딜!"
땅!
쇳소리가 났으나 진무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섬광을 지워 버린 태청산수가 곧바로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켁!"
억눌린 신음과 함께 진무의 손에 모가지를 잡힌 흑의인이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그리고.
콰드득!
"끅!"
무릎뼈를 짓밟아 으깨 버렸음에도 흑의인은 짧은 신음 이외에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되레 뼈가 으스러진 소리가 더욱 컸다.
"참는 거 보게. 꽤 아팠을 텐데?"
진무가 사악하게 웃는데.
퓻!
다리가 으스러졌음에도 흑의인이 입을 오므려 무언가를 쏘아 내었다.
팅!
그쯤은 예상하고 있다, 이놈아.
시도는 좋았으나 그저 휘젓듯 손을 떨친 것만으로 비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진무는 곧장 흑의인의 턱을 움켜쥐었다.
뿌드득!
턱뼈가 으스러졌다. 혹시나 자결을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진무는 그에 그치지 않고 그의 양팔을 잡아 역으로 꺾어 버렸다.
"끄으...."
이번에는 좀 더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완전한 제압.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진무의 시선은 자신이 쓰러뜨린 흑의인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전각의 지붕 위에 머물렀다.
또 다른 흑의인.
골목을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그가 진무를 응시하다 사라졌다.
'새끼.'
진무는 피식 웃었다.
그 사이 백표가 팔다리가 모두 부서져 땅바닥에서 버둥거리는 흑의인을 향해 다가갔다.
"이자는?"
"삼살당 소속이겠지. 집 나간 개를 찾으러 온."
"아."
백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삼살당에 대해 아는 것은 전무했다. 기억이 온전치도 않아서도 있었으나 살욕에만 취해 있었기에 딱히 관심도 없었다. 중요한 건 죽일 사람을 정해 주는 청부뿐이었다.
그가 삼살당에서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살주와 가끔씩 찾아오는 커다란 덩치의 죽립인, 일살 초립.
그 둘뿐이었다.
흑의인을 바라보던 백표가 진무를 향해 물었다.
"하면 이제 이자를 심문해 삼살당에 대해 알아내실 겁니까?"
"뭐? 왜?"
"예?"
그럴 생각은 없었다.
살수란 게 원래 이런저런 내용을 발설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굳이 고문 등으로 힘을 빼지 않아도 어차피 알아서 다시 찾아올 놈들이다.
좀 전에 지켜보던 놈도 있었으니 분명 밤새 계속해서 찾아와 귀찮게 할 게 틀림없었다.
진무가 원한 것은 전투 불능.
죽이기는 좀 그렇고 찾아오는 족족 하나씩 박살 내서 놈들의 전력을 줄여 놓을 생각이었다.
놈들이 화가 나서 미쳐 버릴 때까지.
그다음에는 그저 자신이 유리한 장소에서 그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이, 백표."
"예?"
"지금부터 꽤 바빠질 것 같거든? 자네의 도움이 좀 필요해."
"...?"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 몸으론 힘들겠지?"
"...."
옳은 말이다. 지금의 몸으로는 살수의 공격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살수야. 나쁜 놈들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죄책감도 가질 필요 없어."
백표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진무가 히죽 웃었다.
"빨어."
"...예?"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돼야지."
"아!"
그제야 의미를 이해했다.
채기법. 상대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무공.
진무의 말에 따르면 백표는 이제 그것밖에 사용할 수가 없다.
그는 이제 남은 인생 여름철 극성맞은 모기처럼 남의 생기를 빨아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눈앞에 있는 것은 살수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백표가 굳은 얼굴로 흑의인에게로 다가갔다. 결심이 선 것이다.
"대신 조금만 빨아. 죽이지 않을 정도로만."
"...예."
백표는 비실거리는 몸으로 다가가 흑의인의 손목을 잡았다.
맥이 뛰는 자리.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곳.
쫘아악!
"끄으으으!"
흑의인의 왕방울만 하게 커진 눈에 경악이 어리고 백표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좀 사악한데?
* * *
우두둑!
"크으윽!"
뼈마디가 뒤틀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흑의인.
이걸로 여섯. 백표가 생기를 흡수한 삼살당 살수의 숫자였다.
처음에는 두 놈이 곧장 공격을 해 오더니 다음에는 네 놈이 찾아왔다.
물론 그들의 은신을 눈치채지 못할 진무가 아니었다. 나타난 자들은 어김없이 진무에게 팔다리가 부러졌고 백표의 먹잇감이 되었다.
채기를 한 덕분인지 백표의 움직임이 꽤 빨라졌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채기법으로 받아들인 내공은 체내에 쌓이지 않는다. 두 시진이 지나면 흩어지고 만다.
'흠.'
진무는 막 채기를 끝내고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백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하나. 내일이면 분명 내공이 사라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텐데.
"이봐. 백표."
"예! 은공!"
힘이 생기니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또한 눈빛에는 사이함이 배어 나왔다.
"채기법으로 얻은 내공을 단전에 가두는 방법이 있어."
"예?"
묵룡혼원공.
진무는 그것의 기초를 전할 생각이었다.
물론 기초다.
채기법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단 그 하나로는 흡수한 모든 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 흡수한 기운을 연단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이는 정파의 심법으로 내공을 연단하는 과정과 비슷했다.
채기를 통해 얻은 힘에서 순수한 기운만 흡수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리고 연단을 한다고 해도 계속해서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채기법으로 빼앗고 연단을 통해 쌓은 내공은 일정 단계가 지나면 더 이상 늘지 않는다. 최대한으로 쌓아도 탄기?
절대의 경지로 가기 위해서는 그다음 단계가 필요했다. 깨달음이 아닌 다른 방법이기에 기본공을 안다 해도 전수되지 않으면 절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진무만이 알고 있었다. 진무가 알려 주지 않으면 절대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진무는 도움을 주기로 결정한 이상 확실하게 도와줄 생각이었다. 남이 싼 똥이기는 하지만 기왕 치우기로 한 거 흔적이 남아서야 되겠는가. 치우고 물청소까지 깔끔하게 해 줘야지.
그래. 어차피 자진할 놈, 잠시 즐기다 가게 해 주자.
"하지만 은공께선 분명 부작용이 있다고."
"그건 불완전한 방법일 때 그렇지."
"...."
채기법은 생기를 빼앗되 대상을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여 사기를 배제하고, 빼앗은 기운을 정제하기만 하면 일정 경지까지 가장 빠르게 오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 수련법에 맞는 체질이 있었기에 아무에게나 전하지 않았다.
남의 기운을 뽑아 사용하는 것이 어디 몸에 좋겠는가?
천우명에게 채기법을 가르친 것은 체질이 그에 적합했기 때문이었고, 백표가 강제로 익히고도 죽지 않은 것은 운이 억세게 좋은 경우였다.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채기법을 사용했다. 즉, 그 또한 익히기에 알맞은 체질이란 뜻.
"잘 들어. 채기법으로 흡수한 기운을 단전에 쌓는 방법이니까."
"...!"
진무의 말에 백표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혼원(混元)은 모든 기운의 원형이자 근원. 모든 것이 정제되기 전의 어둠. 처음이 곧 끝이고 끝 또한 처음이며, 둘이 아닌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니 어지러움 속에 질서가 만들어지고 이는 곧 혼원공이라...."
진무의 말은 기다림 없이 이어졌다.
백표는 서둘러 좌정을 하고 그의 이끌림에 따라 운공을 시작했다.
"단전에서 시작한 기운이 회음(會陰)을 지나 독맥(督脈)과 임맥(任脈)을 흐르고 다시 단전으로 돌아오나 멈추지 아니하며 그 기운의 순수함이 남을 때까지...."
구결의 주해(註解)였다.
혹여 백표가 알아듣지 못할 것을 우려해 진무는 구결을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했다.
그래도 천우명보다는 훨씬 더 잘 알아먹어서 가르치기가 쉽다.
그의 설명은 반복되었고 백표는 점점 더 운기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주해를 읊조리던 진무는 백표가 구결에 익숙해진 듯이 보이자 말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팔자에 없는 호법을 서게 생겼군. 어디 객점이라도 잡고 가르쳐 줄 걸 그랬나?"
피식 웃은 진무는 기운을 퍼트려 주위를 면밀하게 살폈다.
혹시나 찾아올지도 모를 적에 대비해서.
* * *
"모두 죽었다고?"
"죽은 것은 아닙니다만 모두가 팔다리뼈가 부서져서 전투 불능이 되었습니다."
"...."
"백표와 함께 있는 자의 무공이 가벼이 생각할 수준이 아닙니다."
거한 초립의 말에 삼살당의 주인 범용의 얼굴에 주름이 더해졌다.
불안감의 정체.
이살 현묵으로 하여금 백표를 찾게 했다. 그런데 마치 보란 듯이 길거리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살이 그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하급 살수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죽이지도 않고, 싸울 수 없을 정도로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살의 말에 따르면 그가 자신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뭐라고?"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지켜보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고."
"이런...."
범용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 무슨 뜬금없는 일이란 말인가? 설마 누군가 삼살당을 노리고 일부러 이 같은 짓을 벌였단 말인가?
"누구인가? 그는? 백표와는 어떤 관계인가?"
"아쉽게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뭣이?"
"처음 보는 자인데 십 장(30m) 이내로 접근을 불허하였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모조리 그의 손에 당했다고 합니다. 희한하게도 당한 자들은 팔다리가 부러진 것은 물론,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무력한 표정이라고 하더군요."
"음."
기감이 십 장이나 되는 무인.
살수는 무인이되 무인이 아니다. 오직 죽이기 위해 훈련된 자들이다. 그렇기에 정면 승부보다는 암습을 하는 것에 익숙하다.
암습을 하기 위해서는 청부 대상이 자주 가는 장소, 만나는 사람, 행동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을 조사한다.
죽일 때도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 적을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끌어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결행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모습과 기운을 감추는 은신 능력이 절대로 필요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은 삼살당의 특급 살수 셋뿐이었다.
그 와중에 살수들의 은신을 귀신같이 파악하는 능력을 갖춘 것도 모자라, 그 너머의 이살까지 목격했다면 보통 껄끄러운 상대가 아님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어째서 그런 자가 백표의 옆에 있는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결론은 하나다.
"백표를... 버린다."
"...!"
초립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친다.
"알겠습니다."
"단 초립, 너는 나서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라. 이살에게 맡겨."
"현묵에게만입니까?"
"그래. 청부금은 금 한 냥이다."
"알겠습니다."
적은 돈이 아니다. 돈으로 목숨값을 매길 수야 있겠느냐마는 금 한 냥은 최상위 청부에 들어가는 금액이었다.
삼살 백표. 삼살당에 들어온 지 고작 다섯 해가 조금 넘었다.
그럼에도 특급 살수로 인정받아 삼살당을 대표할 정도로 뛰어난 고수 중의 고수였다.
그를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없었고, 청부금이 내려졌으니 초립을 제외한 삼살당의 살수 전부가 움직일 것이다.
그는... 절대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초립이 고개를 숙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범용은 청부를 내렸음에도 자꾸만 커져 가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쌓인 경험이 그에게 자꾸 경고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84화
새벽이 가까워지고 조금씩 밝아지는 시간.
스스슷!
핏빛 도신이 차가운 공기를 베어 내자 핏물이 튀어 올랐다.
상처를 입은 흑의인은 베어진 어깨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조금 전 고개를 뒤로 꺾지 않았다면 필시 목이 잘렸을 것이다.
"죽이지 말라니까."
"...."
흑의인 하나의 손목을 부러뜨려 잡고 바닥에 처박아 버린 진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크크크, 죄송합니다."
백표가 도신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대답했지만.
그게 죄송한 표정이냐? 눈깔이 아주 사악함으로 떡칠이 되어서는.
더구나 즐기고 있네?
죄송하다면서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걸 보면 즐기는 게 분명하다.
광기나 마기는 분명히 아닌데 피를 보자 주체를 못 하고 있다.
채기법의 부작용에 대해서 스승에게 듣기는 했으나 경험해 본 적은 없었다.
'빌어먹을. 도와주지 말까 그냥?'
진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무의 도움으로 기본공의 수련이 한 시진을 넘었을 때 살수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백표에게 위험하니 수련을 멈추라고 했지 싸우라고 한 적은 없었다. 채기법의 연단술을 배우기는 했으나 아직 제대로 된 내공이 아니었고, 제대로 정제하지 않으면 흩어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은공께만 위험한 상황을 맡기고 편히 쉴 수 없다며 나선 걸음이었다.
그런데 어째 지가 더 즐기는 듯한 분위기다.
'어쨌든... 놈들의 움직임이 바뀌었어.'
연이어 공격해 오던 비수를 피한 진무는 살수들의 움직임이 변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전까지는 그저 감시였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살수를 펼쳐 왔다. 조직적으로. 백표를 버리기로 한 것이다.
살수들이 동료를 버린다는 것은 말살(抹殺)을 뜻한다. 즉, 백표는 물론 자신까지 죽이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비슷비슷한 놈들이 전부다.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이겠지, 뒤에 숨어서.'
진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필시 이런 쭉정이들만 보냈을 리 없었다. 놈들 중에 이름난 놈이 있을 것이다. 제법 뛰어난 놈인지 기감에 걸리지 않았다.
'그럼 어디 틈을 좀 줘 볼까?'
진무는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살수의 옆구리를 때려 갈비뼈를 부숴 놓고 훌쩍 뒤로 물러났다.
턱.
담벼락을 등진 자리. 그늘이 져서 몸을 숨기기에 좋고 벽 뒤에서 검을 찌를 수도 있는 위치였다.
상대에게 틈을 주고 공격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기감을 싸늘하게 거슬러 오는 느낌이 잡혔다.
'왔구나!'
진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기운이 담벼락 뒤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점차 그 느낌이 증폭되어 극에 달하는 순간.
꾸웅!
양팔을 들어 올렸던 진무가 팔꿈치에 막대한 기운을 담아 세차게 담벼락 쪽으로 당겨 찍었다.
콰아아앙!
"케엑!"
"커억!"
"끅!"
폭격을 맞은 듯이 터져 나간 벽과 함께 동시에 터져 나온 세 개의 비명.
진무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퓻!
측면에서 날아오는 섬뜩한 살기.
'어?'
날카롭게 쏘아진 비수가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한 놈이 더 있었나? 자신의 기감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진무는 곧바로 고개를 꺾으며 몸을 틀었다. 비틀림을 이용해 차올린 발이 채찍처럼 뿌려졌다.
쩌어엉!
둔탁한 타격음.
"하! 이것 봐라?"
진무의 눈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조금 전 자신을 공격했던 흑의인.
송곳처럼 생긴 뾰족한 비수를 역으로 잡고 있다. 충격이 있던 것인지 눈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분명히 막았다.
비록 본신의 모든 실력을 꺼내 보이지 않았지만, 그 각도에서 공격을 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도 그는 발을 막고 재차 공격해 올 듯이 송곳을 꼬나 쥐고 선명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이 공격하는 순간까지 느끼지 못했다.
"너 이름이 뭐냐?"
"...."
침묵.
그래, 뭐. 말하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좋아. 너는 특별히 최선을 다해 주마."
진무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어린다. 그의 검이 뽑히고, 푸른 섬광이 피어올랐다.
"...!"
이살 현묵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검강이라니? 당대의 무림에서 절대를 걷는 이들이나 가능한 경지가 아닌가?
무언가 잘못되었다.
살수들은 검기에 자신의 의지를 담아 사용하는 의기의 무인조차도 노리지 않는다. 기감이 미치는 모든 영역을 감시할 수 있는 그들을 암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검강의 무인이라니. 살수계의 지존이라 불리는 살막주조차도 거절할 수준이었다.
진무가 검강을 꺼내 드는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현묵은 물론 백표와 싸우고 있던 삼살당의 살수들은 뒷걸음질마저 치고 있었다.
죽는다. 그가 마음먹는 순간 검강이 그들의 전신을 난자할 것이 틀림없었다.
"뭐 해? 안 싸울 거야?"
진무가 장난스럽게 다가왔고, 현묵은 당황한 눈빛으로 뒷걸음질 쳤다.
"괜찮아. 잡아먹진 않아."
"...."
현묵은 친절한 표정으로 웃는 진무의 면전에 욕이라도 한바탕하고 싶었다.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삼살당은 애초에 한 문파의 제자들로 구성된 살막 같은 집단과는 달랐다. 서로의 이득을 위해 합류한 자들, 즉,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진 살수 집단이었다.
살주, 범용 노인은 뛰어난 살수이기는 했으나 이제는 자신들에게 일감을 주고 수수료를 떼 가는 거간꾼에 더 가까웠다.
백표를 죽여야 함은 청부금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 이전에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비밀 때문이었다.
그가 드러나는 순간 삼살당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이 죽여 온 수많은 이들에게 복수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살수들의 또 다른 운명이다.
칼날 이전에 비밀 유지를 경계로 생과 사를 오가는 자들.
그들에게는 살막처럼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 줄 든든한 뒷배가 없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
진무가 검강을 꺼낸 순간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표에게 내려진 청부금은 금 한 냥이었으나 자신의 목숨값에 비하면 푼돈이다. 죽으면 끝이니까.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있을까? 암습을 해도 불가능한 상대를 정면으로 마주했는데.
결국 모종의 결심을 한 현묵은 살기를 지우고 송곳을 반대편 손에 옮겨 잡았다.
서걱. 툭.
"...."
현묵은 제 오른팔을 자르며 무릎을 꿇었다.
팔이 잘린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흩뿌려짐과 동시에 진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눈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귀하에게 사죄로 드리는 예물이오."
"...."
흐르는 피를 지혈하지 않은 현묵의 담담한 말에 진무가 눈을 찡그렸다.
검을 쥐어야 할 오른팔을 잘랐다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 큰 의미였다.
익숙한 팔이 잘리면 다른 팔로 검을 쓰기가 힘들다. 좌수검(左手劍)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외팔이는 중심을 잡기 힘들기에 새롭게 무공을 익히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그는 그런 소중한 자신의 팔을 내주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리고 습격해 온 살수 중 가장 강한 현묵이 꼬리를 말았으니 나머지야 오죽할까.
"쯧, 이러면 싱거운데."
진무가 입맛을 다시며 기운을 흩어 버리고 검을 집어넣었다.
어차피 그들을 모조리 죽이려던 건 아니었다. 이번 일의 목적은 백표가 살수 집단을 떠날 수 있게 돕는 것이었으니까.
딱히 정파의 인물들처럼 살수들을 증오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무림에는 무림의 법이 있고,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다.
그들이 살수로 먹고살든 똥지게를 지고 살든 자신의 목숨만 노리지 않으면 관계없다.
거기다 짖지도 못하고 꼬리를 말아 버린 개를 두들겨 패 봐야 딱히 재미도 없었다.
"귀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오."
현묵은 그제야 어깨를 지혈했다.
쓸 만한 놈이다.
제 실력 모르고 날뛰는 불나방 같은 놈들이 사방 천지인데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야."
"...?"
진무가 간단한 점혈로 피를 멈추게 한 현묵을 불렀다.
"니네 살주 어디 있냐?"
"그건...."
현묵이 주저하는 표정을 했다.
패배는 했다지만 살수들에게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고, 그것을 어기면 다시는 발을 들일 수 없거니와 목숨까지 내걸어야 했다.
겨우 목숨을 구한 현묵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됐다. 니들에게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겠지."
"...귀하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현묵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넌? 이렇게 되면 후환이 있지 않겠나?"
"나는 청부에 실패한 살수일 뿐이오."
"흠."
그것 역시 그들의 생리였다.
그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저 실력이 모자라 청부에 실패했을 뿐이다.
살막이었다면 징계를 받았겠지만, 낭인이나 다름없는 그들에게는 그저 일신의 경력에 흠집 하나 생기는 것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제 목숨을 구한 흠집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손해도 아니었다.
"한 가지만 더. 삼살당이라는 곳에서 너의 위치는?"
진무의 물음에 현묵이 잠시 고민했다.
"...더 뛰어난 자는 한 명뿐이오."
현묵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암습을 가한 살수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놓아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죽이지 않고 생포했다면 인두로 살을 지지고 집게로 손톱과 발톱을 뽑아 가며 실토할 때까지 고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대가 이토록 큰 양보를 해 주었으니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좋아. 돌아가."
"감사드리오."
살수치곤 참 예의 바른 놈이다.
현묵과 살수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모습을 감추자, 백표가 다가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묻는다.
"크크크, 은공, 죽일까요?"
방금 돌아가라고 했거든?
"사악한 살수 놈들입니다. 제가 모조리 죽이겠습니다. 이참에 삼살당을 찾아가서 모조리 쓸어 버리시죠?"
"...."
미친 새끼야, 너도 살수였거든?
진무가 살기로 번들거리는 백표의 눈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좀 괜찮아졌다 싶었는데 또 이 모양이다. 광기도 마기도 아니지만 지독스럽게 사악한 눈빛.
피 냄새만 맡고 나면 아주 정신을 못 차린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은공이랍시고 진무 말은 잘 듣는다는 정도.
"그냥 놔둬."
"알겠습니다. 크크크."
크크크... 는 염병.
업보로다, 업보야.
진무가 어울리지 않게 속으로 무량수불을 외웠다. 어째 백표와 있으니 자신이 정파라도 된 것 같았다.
어차피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해가 밝고 낮이 되면 더 이상의 습격은 무모하다. 습격해 올 수는 있겠지만 밤새 상대한 살수는 모두 스물.
거대한 살수 문파가 아니고서야 태반의 전력일 것이다.
더욱이 조금 전 그는 자신보다 뛰어난 살수는 하나뿐이라고 했다. 즉.
"습격은 끝난 셈... 아!"
진무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이마를 쳤다.
"왜 그러십니까? 은공?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죽일까요?"
"...."
진무가 잔뜩 희망찬 살기로 눈을 빛내며 물어 오는 백표를 바라보았다.
이 잔인한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말리지 않으면 당장 살수들을 쫓아가 뼈와 살을 분리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어쨌든 실수다. 몇 놈 잡아서 기운을 빼먹게 해야 했는데.
기초공을 중간에 멈춰 버려서 분명 바람 빠진 공인 양 변할 텐데.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85화
"야! 하라니까?"
"안 됩니다."
쓸데없이 고집이었다.
"왜!"
"은공의 말씀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악한 무공을 익혔으되 마음만은 여전히 정파의 도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 죄도 없는 이들의 기운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채기를 한다고 사람이 죽는 게 아니야. 얼마나 빨렸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회복이 된다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은공."
"이...!"
고집불통에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 같으니!
도와주기로 마음먹지 않았으면 당장에 저놈의 아가리부터 찢어 버렸을 텐데.
아니 분명 지난밤에는 살육에 미친 짐승 놈 같은 눈빛이더니, 막상 기운이 다하자 세상에 이런 정파 놈이 없고 지랄이다.
진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 지나고 휴식을 취한 백표는 원래의 비실비실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기초공을 배워 조금의 내력을 쌓았으나 말라붙은 땅에 빗방울 조금 떨어졌다고 전부 해갈되진 않는 법.
그는 여전히 비실비실하고, 끝도 없이 애처로웠다.
젓가락 하나 들어 올리면서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도대체 그런 몸으로 발골은 어떻게 한 거냐?"
"이것과 그것은 다릅니다. 은공."
다르겠냐?
"본가의 도는 결을 타는 것이라 한 줌의 숨으로도 수십 번의 검격을 펼칠 수 있습니다."
백표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자랑을 했다.
그래. 잘났다....
이 자식도 빨리 떼 버려야 되겠다.
하지만 이제껏 마음먹은 것을 포기해 본 적은 없었다. 도와주기로 했으니 끝까지 돕는다.
그리고 약간 더 신경 써서 백가장까지만 데려다주자.
양의심공을 얻기 위해 청성으로 가는 길이기는 하지만 뭐 백 년이나 숨겨져 있던 게 갑자기 사라질 리도 없고.
약간 돌아갈 뿐이다.
그 후에 자진을 하건, 칼 맞아 죽건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을 셈이었다.
'젠장, 장사까지만 배로 이동하고 마차를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망할 놈 때문에 아까운 생돈이 날아가게 생겼어.'
진무가 속으로 천우명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짤랑.
진무가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객점의 주렴이 달그락거리며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립을 쓴 거한과 노인.
평소 주변을 감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진무가 힐끗 쳐다보았다.
'제법 단련이 잘된 놈들이네. 단단해. 특히 저 노인네, 기운을 감추는 게 아주 제법이군.'
하지만 그들을 보는 순간 백표의 눈이 부릅떠졌다. 심지어 힘도 없으면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한다.
"어? 왜?"
"살주...?"
백표의 말에 진무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백표가 살주라고 불렀다면 그는 분명 삼살당의 주인일 것이다. 그리고 거한은 죽립을 썼으니 가끔씩 보았다는 살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그들이 찾아왔다는 것은?
진무는 빠르게 객점 안을 재차 훑으며 기감을 퍼트렸다. 나름 기세를 감추고 있었지만 진무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 이것들 봐라?'
백표와 실랑이한다고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이곳저곳에서 손님들이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이 모양이었다.
점소이, 뒤편에서 밥 처먹는 노인네, 이 층의 남녀 등등, 하여간에 죄다 살수로 채워진 객점 내부.
참 각양각색으로 숨었다. 무슨 숨은 살수 찾기도 아니고. 들키지나 말든가.
이 정도면 동정호에서 활동하는 이름난 살수를 모조리 동원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의 목표는 진무와 백표일 터였다.
'허, 미친놈들이네. 백주에 버젓이 찾아와? 살수라는 새끼들이?'
진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노인과 죽립 거한이 다가왔다.
"앉아도 되겠소?"
진무가 어리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법 예의를 차린다. 싸움이 아닌 협상을 원한다는 뜻이리라.
필시 백표를 내놓으라 하겠지.
참 간도 크다.
진무의 경지는 지난밤에 팔 하나를 놓고 간 놈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이만한 살수들을 불러 객점을 채웠다는 것은 협상이 되지 않는다면 죽이겠다는 뜻임이 틀림없었다.
미친 새끼들. 지들이 뭐라고 검강의 고수를 노린단 말인가? 제대로 만나 본 적도 없을 거면서?
검강의 고수는 정사 전 무림을 뒤져도 스물을 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홀로 거대 문파 하나에 해당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살막 같은 거대 집단도 아니고, 양패구상을 결심하고 움직이는데 동정호에서 살수질을 하는 놈들이 떼로 검강의 고수를 노려? 이미 어디에 어떤 놈이 살수인지 죄다 알겠는데?
생각할수록 기가 찼다. 노리려면 시간이나 주지 말았어야 했다. 기감을 퍼트릴 시간, 위치를 파악할 시간.
"알고 찾아와 놓고 뭘 묻고 그래? 앉아."
"고맙소."
노인이 자리에 앉고, 흑립의 거한은 그 옆으로 호위하듯이 섰다.
"삼살당주 범용이오."
"그런데?"
"...."
진무의 반응에 범용 노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약관에 강의 경지에 오른 눈앞의 고수.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수십 명의 살수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진무의 예상처럼 협상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 죽일 생각이었다.
"귀하께서 우리의 과오를 용서했다 들었소."
"지랄하네. 수틀리면 다 죽일 수도 있어. 그냥 어제는 기분상 자비 좀 베푼 거지."
빈정거리며 말했지만, 범용 노인은 표정 하나 구기지 않았다.
준비한 것이 있으니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삼살당은 귀하와 은원을 맺기를 원치 않소."
"누구 마음대로? 공격은 니들이 먼저 시작했는데?"
코웃음을 치자 죽립 거한이 싸늘한 눈초리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이게 제 놈 주제도 모르고.
"하하, 이것 봐라? 해보자는 거야?"
"...!"
진무의 눈빛이 변했다.
그 순간.
쿠구구구.
엄청난 기의 압력이 죽립 거한을 짓눌렀다.
"크으."
거악이 짓누르는 듯한 충격에 죽립 거한이 자신의 모든 내공을 끌어 올렸음에도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혈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여길 일이었다. 하지만 범용 노인은 그 살인적인 압기(壓氣)의 여파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협상 실패. 범용은 곧바로 공격 신호를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손 올리면 니들 여기서 싸그리 다 뒈지는 거야."
살기등등한 눈빛과 함께 퍼져 나간 기운이 객점을 가득 채웠다.
"크으윽."
"으으윽!"
이곳저곳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초립뿐 아니라 자신이 준비했던 살수들이 한 놈도 빠짐없이 진무가 퍼트린 기운에 제압되었다.
그리고 엄청난 기운을 끌어 올렸음에도 진무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 이런.'
이제까지 무표정하기만 했던 범용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미친 새끼. 내가 지금 장난하는 줄 알아?"
"...."
"그렇게 우스워 보이나? 어떤 놈부터 황천길 보내 줄까? 백표 얘 뒤쪽에 있는 놈? 아니면 저쪽 옆에 있는 년?"
진무가 하나씩 짚어 낼 때마다 사색이 되었던 범용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 갔다.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 대협, 무례를 용서하시오."
범용이 급히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용서? 그래, 어제 그놈은 오른팔을 내놓던데, 니들은 뭘 줄 거지?"
진무의 살인적인 눈빛에 범용은 마른침을 삼켰다.
애초에 그를 노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검강의 고수를 만나 보지 못했던 무지가 동정호 살수들의 씨를 말릴지도 모를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범용은 재빨리 자신의 품에서 묵직함이 느껴지는 전낭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이것은 그저 제 서, 성의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이 길로 살수업을 접겠습니다. 용서를...."
"...."
진무가 힐끗 전낭을 쳐다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묵직한 게 내심 기분이 좋다. 생각지도 않은 공돈이 생겼지 않은가?
살수질이야 뭐 계속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었다. 백표만 건드리지 않으면.
안 그래도 백표 때문에 마차를 구해야 했는데... 어? 잠깐.
범용, 죽립 거한. 그리고 객점 안의 수많은 살수들.
전부 나쁜 놈들이었다.
그것도 아주아주 나아쁜 놈들.
범용이 내민 전낭을 서둘러 챙기고 백표를 힐끗 쳐다본 진무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씻은 듯 사라지는 압박감.
곳곳에서 막혔던 숨이 터져 나온 뒤, 진무의 나긋한 말이 이어졌다.
"좋아. 두 가지 요구 조건만 들어주면 서로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범용은 속으로 안도했다.
목숨은 건졌다.
"예? 그게 무엇인지?"
"하나는 더 이상 백표에 대해 신경 쓰지 말 것."
이 마당에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또 하나는 아주 사소한 거야. 사소한 거. 그냥 모기한테 물려서 피 좀 빨렸다고 생각하면 돼."
"...?"
* * *
진무가 동정호를 지나던 그때, 용봉회의 개최로 전 무림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정무맹 예하 모든 문파의 시선은 무한에 집중되어 있었다.
용봉회에 참가한 자들은 대부분 각 문파의 이대제자거나 차남이었기에 그 나이가 적게는 십 대 후반에서 많아도 서른을 넘지 않았다.
즉, 차세대 후기지수들이라는 뜻이다. 이미 두각을 드러내며 알려진 자들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자들.
용봉회에 자신들의 제자와 자식들을 참가시킨 이들은 각종 정보 조직을 동원해 참가자들의 신상 정보를 모으고 서열을 매기기 시작했다.
용봉회의 목적 자체가 용봉관에 입관할 무생들을 단계별로 선발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그 지위 고하와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참가한 무인들의 급수는 소정의 시험을 통해 갑을병정(甲乙丙丁)의 네 단계로 나누어졌고, 이는 곧 용봉관에서의 수련 연차가 된다.
기초 단계인 정무반(丁武班), 연마 단계의 병무반(丙武班), 심화 단계의 을무반(乙武班).
그리고, 최상위이자 용봉관의 핵심이라 불리는 갑무반(甲武班).
다른 곳과는 달리 갑무반에 선발되는 무인은 오직 여덟.
그렇기에 다른 이들과 완전히 대접이 달랐다. 수련 방식은 물론 기본 대우부터가 달랐고, 무엇보다 그들을 수련시키는 교관들의 이름이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갑무반의 무인 중 일부는 용봉관주 등여평에게 직접 무공을 사사할 수 있었으며, 그중 가장 뛰어난 자는 검성 철지량의 가르침까지 주어질 예정이었다.
어디까지나 소문이었지만 정무칠성이 직접 무공을 사사한다는 말도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갑무반에 선발된다는 것만으로도 해당 문파에게 삼생의 영예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때문에 나름 이름 좀 있다는 자들 모두가 갑무반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치열하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 * *
"저쪽은 화산의 현선입니다. 이대제자임에도 벌써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익혔습니다."
제갈산산의 말에 청상이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은 해남의 이백의라는 자인데 해남일검류(海南一劍流)를 익힌 쾌검수입니다."
"그렇군요."
"구파는 이미 저 둘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려 파벌이 형성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
"그리고 저쪽 창천의(蒼天衣)를 입은 자가 남궁창위입니다. 그 옆이 황보웅이구요. 오대세가는 저 둘을 중심으로 또 다른 파벌이 생길 겁니다."
용봉회가 시작된 지 이틀 차.
참가한 무인들의 등급을 정하는 시험이 시작되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제갈산산은 연무장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그들의 신상과 성격, 무공 내력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한둘이 아니었다.
이름 있는 문파에서는 최소 다섯에서 열 명에 달하는 인원을 용봉회에 참석시켰기에 그들의 신상을 모두 꿰듯이 안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단하십니다. 그 많은 것을 어찌 그리 다 아십니까?"
"하하, 제갈가는 학사의 가문입니다. 이 정도는 조사를 해 둬야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무공의 격차를 줄일 수 있죠."
"와, 정말 대단하네요. 제갈소저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로 저들이 그리 대단하다니. 사숙께서 항상 저희들에게 모자란다 타박하신 데는 이유가 있었군요."
청우가 제갈산산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한다.
하지만.
'격차라....'
청상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제갈산산의 말은 겸양에 불과했다. 그녀의 무공은 자신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
세속에 관심이 없다 해도 현기의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가장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이 여인이구나.'
제갈산산의 눈빛에 어린 자부심. 스스로 강하다 생각하는 자들만이 가지는 눈빛이었다.
"청우야."
"예, 사형!"
"사숙께선 표주를 떠나셨다."
"압니다."
"지금의 정무맹에 무당의 이름을 대표하는 것은 너와 나 둘뿐이다."
"...."
"무당은 물론 사숙과 오룡궁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거라."
"예!"
청우의 대답에 제갈산산이 묘한 눈빛으로 청상을 바라보았다.
'또 한 명의 천재라는 것인가? 흠, 당대 무당에 복이 많구나.'
제갈산산이 바라보는 청상은 그랬다.
흔들림이 없는 자. 차분하고 냉정한 자.
진무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괴물에 의해 그 빛이 가려져 있었을 뿐.
그의 무위에 대해서는 이미 겪어 알고 있었다.
자신과 용봉관주 등여평만이 알고 있는 청상과 청우의 수준.
그들은 이미 나름 유명세를 타는 이들과도 엄청난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청상은 약관에 현기를 깨달은 천재 중의 천재였다.
분명 금번 용봉회에서 일대 파란을 일으킬 것이 틀림없었다.
86화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제갈산산의 설명을 듣고 있던 청상과 청우를 향해 긴 창을 비껴 든 사내가 다가왔다.
"제갈가의 영애가 아니시오?"
"아, 악 공자."
"소저께서 참가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이거 제갈 형님께선 벌써 세가로 돌아가신 모양입니다."
"예."
제갈산산에게 인사를 해 오는 사내.
산동 악가의 셋째 악평.
제갈선으로 살아오는 동안 몇 번 정도 본 적이 있는 인물이다.
"이거 섭섭합니다. 이번엔 제갈 형님과 술 한잔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들어는 보았으되 신경 쓸 정도로 강한 무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쭉정이.
제갈선일 때도 안면 정도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마치 대단한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악평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제갈산산의 옆에 있는 청상과 청우를 바라보았다.
"이분들은?"
무당의 도포를 입고 있으니 모를 리 없음에도 묻는다.
"무당의 청상 도장과 그 사제이신 청우 도장입니다."
제갈산산의 소개에 청상과 청우가 공손하게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아, 무당의 제자...."
악평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제갈산산을 바라보았다.
"한데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그것도 망도추행에 있는 도문의 제자들과요."
"...."
비웃음이 섞여 있는 악평의 말에 제갈산산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망도추행(亡道追行).
망해 가는 길을 쫓는 걸음.
작금의 무당을 우화할 때 쓰는 말이었다.
망해 가는 도란 도가의 조종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전진파를 일컬음이고, 그 뒤를 쫓는다 함은 소림과 더불어 태산북두로 군림했던 무당의 쇠퇴를 비웃음이다.
"악 공자, 말씀이 심하시군요."
"하핫, 틀린 말도 아닌데 뭘 그리 과민 반응이오?"
다분히 의도적이다. 대놓고 무당의 제자들에게 쪽을 주려는 것이다.
수치라고는 모르는 것들.
하지만 다행히 청상과 청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어쨌든 저쪽으로 가시지요. 제갈 소저를 보기 위해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
제갈산산이 악평이 가리키는 방향을 슬쩍 쳐다보았다.
남궁창위를 중심으로 한 파벌의 오대세가 무인들.
제갈산산은 악평이 찾아온 이유를 금세 이해했다.
그들이 자신을 알 리 없었다.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그녀에 대해 무림에 알려진 내용은 제갈선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것뿐이었다.
분명 소문과 옷차림으로 판단했을 것이고, 목적은 그녀를 자신들의 파벌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파벌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악평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탕하지는 않았으나 음흉하다. 보기 좋은 꽃이니 옆에 두면 자신들이 돋보일 것이라 생각하는 멍청이들의 눈빛이다.
"글쎄요. 저는 지금의 자리가 편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 이거 참. 기회를 주었음에도 거절하시다니."
기회?
제갈산산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렀다.
무엇이 기회인가? 고작 자신들의 파벌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 그들의 옆에 꽃처럼 서 있을 기회?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 자가 아닌가?
지금에 이르러 갑자기 만들어진 용봉관의 목적.
무언가에 대비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하면 응당 서로 뭉치고 발전하도록 노력을 해야 하거늘, 기다렸다는 듯 파벌이나 만들고 있다니.
제갈산산이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려는데, 또 한 사람이 다가왔다.
"허, 눈치 없는 조합이군."
"...."
제갈산산은 물론 악평과 청상, 청우의 고개도 돌아갔다.
어깨에 커다란 참마도를 걸친 무인.
구파에는 들지 못하나 그 규모가 구파에 필적한다는 형산파(衡山派)의 이대제자 상원영.
"정무맹이 한 그늘이라 하나 어찌 무당이 사사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무가의 자제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지?"
"무슨 뜻이죠?"
"쇠퇴하여 그 힘이 본파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니. 무당도 다되었구만, 쯧쯧."
상원영이 참마도를 앞으로 세워 땅에 꽂고 커다란 근육을 움직이며 말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제갈산산의 눈에 상원영은 그저 멍청한 근육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한 무당이 형산의 이름에 미치지 못한다고?
어이가 없다.
형산이 무당을 밀어내고 구파의 한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대제자까지 이리도 노골적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이, 말조심하지. 사사로운 이해를 추구하다니? 잘못하면 내 창이 그대의 입을 다물게 할지도 몰라."
악평이 비릿하게 웃으며 비껴 든 창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하, 악평? 미친 건가?"
"뭐?"
"네놈의 얄팍한 창술로 나의 참마도를 어찌해 보겠다고? 이 자리가 용봉회가 아니었다면 좋았겠군."
"오호? 그래? 그럼 나가서 한판 겨뤄 볼까?"
사내들의 쓸데없는 힘 싸움. 더욱이 있어 보이게 말하고는 있지만, 고작 위의 지시를 받고 파벌에 끌어들일 무인이나 탐색하는 놈들이다.
호랑이 등에 타면 제 놈들이 호랑인 줄 안다더니 딱 그 꼴이다. 파벌에서 말석이나 차지할 만한 실력들 주제에.
제갈산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서려는데 청상이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청상 도장?"
그녀의 의아함에 청상이 미소로 화답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예?"
"세인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뿐인 것을요. 저희는 그저 무당의 제자로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담담하다.
분위기를 보면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표정에 한 줌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
왠지 쭉정이나 다름없는 자들에게 휩쓸려 화를 내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자신이 용봉회에 참가한 이유를 되새겼다.
운명을 바꾸고 싶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후계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녀는, 여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사내의 아내로 살고 싶지 않았다.
가문의 위세나 여인으로서의 한계 따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무인으로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함이었다.
고작 파벌의 힘에 기대어 살아가는 상원영이나 악평과 드잡이를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두 분은 참으로 수양이 깊으시군요. 제가 너무 과민했나 봅니다."
"뭘요. 저도 사숙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을요."
청상의 미소에 제갈산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멀리서 무당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우. 우리가 시험을 치를 차례인 모양이다. 속히 가 보자."
"예. 사형!"
"사숙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
청상의 말에 청우가 다시 한번 힘주어 다짐하고 시험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모두가 관심 밖에 두었던 무당의 이대제자들이 용봉회에 참가한 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 * *
콰앙!
"...!"
제일 관의 시험감독을 맡은 정무반 교두 남로환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기, 합격인가요?"
실눈을 휘어 웃는 뚱뚱한 무당의 도사, 청우.
"하, 합격. 다음 시험으로... 이동하게."
"아, 감사합니다."
남로환에게 합격지를 받고 신이 나서 청상을 향해 흔드는 청우의 모습.
다음 차례인 청상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녀석, 어찌 이리 경박스러우냐. 그리고 그리 터트려 놓으면 다음 사람은 어떻게 해."
"아, 뚫는 거 아니었나요? 내공을 사용해 있는 힘껏 때리라고 해서."
"남들은 하지 못해서 안 한다더냐? 그냥 손자국만 내면 통과라 하지 않더냐."
"...아, 헤헤. 사형께서 최선을 다하라 하셔서, 저도 모르게."
"쯧, 사숙께서 보시면 내력 조절조차 제대로 못 했다고 화를 내시겠구나."
청상의 말에 청우가 머쓱하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남로환은 물론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참가자들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용봉회의 세 단계 시험.
그 처음이 참가한 이들이 모두 거쳐야 하는 정무반의 시험이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한 치 두께의 철판. 그곳에 손자국을 남김으로 내력의 깊이를 측정하려는 것이다.
겨우 한 치였음에도 이미 무수히 많은 이들이 그 깊이가 옅어 떨어졌고, 아예 손자국을 만들지 못한 자들 또한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청우는 그것을 발경으로 아예 뚫어 버렸다.
최선을 다해서.
엄청나게 뚱뚱한 줄로만 알았던 무당의 제자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당당히 시험에 통과한 것이다.
"무당의 청상입니다."
"어? 아, 그래. 시, 시작하게."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기다리는 이들이 많아 빠르게 진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국의 깊이가 얼마나 되어야 합니까?"
"바, 반 치 이상만 되면 된다네."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청상이 천천히 걸어가서 철판에 손을 대었다.
"아, 아니 이보게. 때려야...."
남로환은 다음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지켜보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곳에서 시험을 치르는 이들마저 자신의 행동을 멈추고 청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꾸우우.
청상의 손이 여래의 그것처럼 철판을 눌렀다. 때린 것이 아니라 민 것이다.
선명한 손자국이 철판 뒤쪽에 볼록하게 그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충분합니까?"
"...토, 통과."
"감사합니다."
청상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역시 사형은 못 따라가겠네요."
청우의 천진난만한 감탄에 청상이 빙긋이 웃었다.
무척이나 쉽게 이루어 냈으나 청우가 뚫은 것보다 더욱 어려운 방법이었다.
때리는 것은 힘을 순간의 극점에서 그 효과가 극대화됨을 노리는 것이다.
반면에 누르는 것은 때리는 것보다 힘의 집중도가 적다. 그 중심이 손바닥 전체에 분산되기 때문에 그러했다.
하지만 청상은 눌러서 자신의 손자국을 남겼다. 그것도 한 치 이상의 깊이로.
"두 분 도우님께 부끄러운 실력을 보였습니다."
시험을 마친 청상이 제갈산산의 옆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악평과 상원영은 너무도 놀라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고 제갈산산은 그 모습에 고소한 듯이 웃었다.
"두 분께선 잠시 기다리세요. 제 차례가 끝나면 다음 시험으로 함께 이동하시죠."
"예."
제갈산산의 말에 청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런 녀석들이 이대라고? 그 무당의?'
상원영과 악평은 여전히 놀란 눈빛으로 청상과 청우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들뿐 아니라 모두가 그리 보고 있었다.
망도추행의 무당.
이제는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시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수히 많은 파벌이 생기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무당을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구파의 두 파벌의 핵심인 화산의 현선, 해남의 이백의, 오대세가 파벌의 핵심인 남궁창위와 황보웅.
그들은 무당 제자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담아야 했다. 파벌에 포함시킬 무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경쟁자로서.
그리고.
철판과의 거리를 재었던 제갈산산의 손이 가슴께로 당겨졌다가 가볍게 뻗어지며 철판에 닿는다.
쩌어엉!
움푹 패어 든 고운 손이 청상의 손자국 옆에 또 다른 흔적을 만들어 내었다.
엇비슷한 깊이.
"하, 합격!"
남로환의 외침과 함께 합격지를 받아 든 제갈산산이 청상에게 다가와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아쉽네요. 청상 도장만큼의 깊이도 안 되고 청우 도장처럼 뚫지도 못하고."
"그럴 리가요. 소저의 내력 조절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청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 그럼 가실까요?"
제갈산산이 마주 웃으며 악평과 상원영을 째려보았다.
"비켜 줄래요?"
"...아, 예."
갑무반에 포함될지도 모를 실력을 가진 제갈산산이 악평과 상원영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나저나 진무 도장께서 두 분의 모습을 보셨다면 좋아하셨겠네요."
제갈산산의 말에 청상이 고개를 저었다.
"보셨다면 한바탕 불호령을 내리셨을 겁니다."
"예?"
"사숙께서 보시기엔 언제나 모자라니까요."
"...하긴."
듣고 보니 그렇다.
검성과 등여평 앞에서도 거침없는 진무의 말투와 성격이라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갈산산이 생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숙께선 어디로 가셨을까요? 고기나 굶지는 않으실는지."
"어디인들 그분이라면 잘 드시고 지내실 거다. 그리고 분명 또 어려운 이들을 돕고 계시지 않겠느냐?"
"흠, 하긴."
청우가 볼을 부풀리며 걱정스럽게 말하자 청상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87화
사이한 빛으로 물든 눈깔이 매섭게 빛났다.
스스슷.
빠르다.
지독한 쾌도라고 표현함이 마땅하다.
또한, 도의 움직임에 처음과 끝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흐름이 자연스러웠다.
짧게 파고든 검이 순식간에 가죽과 근육 사이를 가른다.
"...아!"
지켜보던 진무는 절로 감탄사를 뱉으며 손뼉을 쳤다.
볼수록 대단한 도법이었다.
촤촤촤촤!
마치 옷이 벗겨지듯이 가죽이 분리되고 부위별로 살이 잘려 나간다.
얇게 썰린 고깃점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진무 앞에 내밀어졌다.
"와!"
눈앞에 놓인 선홍빛의 자태에 진무가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쯔압. 쯔압.
어?
이, 이게 정말?
진무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이것이 진정 늘 청상과 청우를 데리고 구워 먹었던 멧돼지 고기란 말인가?
핏기를 머금었으되 잘린 방향마다 결이 살아 있으니 그 풍미가 어떠한 음식보다 뛰어났다.
"대단해!"
진무는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탄성을 질렀다.
머릿속에서 펑 하고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크크크."
사이한 웃음소리.
진무의 칭찬에 잔인한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웃으며 칼날에 묻은 피를 혀를 핥아 내리는 백표.
채기법으로 멧돼지의 기운을 빨아먹고 난 뒤 그 육신을 썰어 낸 그는 흔하디흔한 고깃점을 천하일미로 바꾸어 놓았다.
굽지도 않고.
이게 정녕 육회의 맛인가?
사악한 표정으로 자신이 고기를 대접하겠다던 그를 의심했던 것이 내심 미안했다.
이놈은 진짜다.
도법이 가히 천하제일이었다. 분명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뛰어날 것이다.
그는 정말이지... 천하제일의 발골사.
진무는 감동한 표정으로 양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크크크."
사악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가 영 거슬리게 귓가에 맴도는 것만 빼면.
평소에는 명문 정파 어쩌고 하면서 점잔을 빼는 놈이 채기법만 하고 나면 사악한 성격으로 변한다.
무턱대고 칼을 드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뭐 어떠랴?
맛있는데.
이런 식이라면 멧돼지 한 마리를 혼자 먹어도 될 것 같다. 역시 이놈을 데려다주기로 결정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어떻습니까? 은공."
어떻긴. 눈물 안 흘렀냐? 감동받아서 울 지경이다.
"크크크, 본가의 난파풍도의 장점입니다. 결을 따라 흐르니 적들은 목숨을 잃고 나서야 칼에 맞은 것을 알게 되지요."
굳이 그렇게 싸늘한 살기를 풍기며 자랑할 것은 아니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 주자.
"크크크, 그럼 다음은."
백표가 고기 한 점을 미리 달구어 놓은 돌 위에 올렸다.
치이익!
순식간에 겉면이 익어 가고 고소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아!"
저 끓어오르는 육즙. 먹고 싶다.
막 진무가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가져가는데.
"하, 이게 뭐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텁텁한 목소리.
"어디서 고기 굽는 냄새가 맛있게 퍼진다 했더니, 이 자식들 감히 우리 앞마당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짐승 가죽을 기워 대충 옷처럼 걸친 다섯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흔히 사람들이 녹림이라 부르는 자들.
참 시기적절하다. 이 망할 놈의 중원은 어째서 산자락마다 산적 떼가 출몰을 한단 말인가.
"두령님. 고깃값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암, 이 산에 사는 건 죄다 우리 것이니 받아야지."
지랄도 풍년이다.
하지만 그딴 놈들 신경 쓸 게 뭐란 말인가?
눈앞에서 고기가 익어 가고 있는데.
그리고.
"어이, 거기 술이냐?"
진무가 산적 중 하나의 손에 들린 도자기 병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
너무도 당당한 말투에 산적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역시 바늘에는 실! 고기에는 술이다!
진무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불쌍한 민초의 돈이나 뜯어먹는.
"산적이지?"
"...."
"나쁜 놈들이네."
뜬금없이?
"백표."
"예. 은공!"
진무가 부르기도 전에 백표는 사악한 눈빛에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방금까지 고기를 저미던 칼을 움켜잡았다.
"빨어."
파앙!
허락과 동시에 그가 핏빛 야수처럼 산적들을 덮쳐 갔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놈.
말리지 않으면 포를 뜨고 뼈와 살을 분리할 것이 틀림없다.
"죽이진 말고...."
산적을 걱정하는 듯 말하면서도 진무는 고기에서 눈조차 떼지 않았다.
"녀석들에게도 나중에 먹여 주면 좋으련만. 혹시 이 사숙을 걱정하는 것은 아닌지."
진무가 이제 막 용봉회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사질들을 떠올렸다.
청상아, 청우야, 걱정 말거라.
이 사숙은 고기 끝내주게 잘 먹고, 나쁜 산적들을 혼내 주면서 즐겁게 가고 있으니.
진무에겐 맛난 고기.
백표에겐 잘 차려진 생기.
그리고 산적들에게는 억세게 재수 없는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취리릭! 땅!
날카롭게 뻗어진 검이 목표의 반격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탈락!"
시험관의 매서운 일갈에 응시생의 표정이 애처롭게 변하고 어깨가 축 늘어진다.
용봉회의 이 차 시험이 시작되었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무반의 시험이었기에 이틀이라는 시간이 쉴 새 없이 지나갔고, 미리 통과한 이들은 긴 휴식을 끝내고 병무반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쯧쯧, 초식의 활용도가 어찌 이 모양인가? 이거 원 수준 떨어져서는."
병무반 총 교두 한태석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정무반의 시험은 총 세 가지였다. 내력, 기초 진법, 기본 학식.
말 그대로 기초만 되는 이들을 뽑는 것이다. 그럼에도 반절이 떨어져 나갔다.
일단 어중이떠중이는 걸러진 셈이었다.
그리고 이어 두 번째, 병무반에 뽑힐 자들부터는 본격적인 무공 실력에 대해 평가가 이루어졌다.
각자가 익힌 무공 초식을 얼마나 능숙하게 활용하느냐.
그런데.
"쯧쯧, 아주 형편없구만!"
한태석은 짜증이 났다.
이런 식으면 죄다 정무반으로 돌려보내야 할 판이었다.
"저기, 총교두님."
"뭐야?"
"이게 좀."
병무반 교두 중 하나인 장팔상이 응시생들이 작성한 신상 정보 하나를 슬쩍 들이밀었다.
"뭔데 그래?"
"무당의 제자입니다."
"무당? 근데?"
"이게 성적이...."
장팔상의 말에 한태석이 빼앗듯이 신상 정보를 받아들었다.
무당파 이대제자 청우.
기초 진법, 낙방.
기본 학식, 낙방.
"뭐야 이거? 이런 멍청한 새끼가 병무반에 어떻게 올라왔어? 무슨 무당 장문인 제자야? 든든한 집안 출생이라도 돼?"
어이가 없었다.
세 가지 시험 중 두 가지를 낙방했는데 병무반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다니.
"남 교두가 무조건 응시하게 해 달라고 하도 부탁을 해서 일단 보결로 응시하게는 했는데."
"남로환이?"
"예. 다른 건 몰라도 내력이 수준급이랍니다."
"수준급?"
"예. 정무반 시험에서 철판을 아예 뚫어 버렸다는데요?"
"...."
장팔상의 말에 한태석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흠. 좋아. 데려와 봐."
"예!"
한태석의 말에 장필상이 즉시 대답하고 뛰어갔다.
잠시 후 그가 데려온 세 명의 무인.
힘이 잔뜩 빠져 울상을 짓고 있는 뚱뚱한 청우의 뒤를 따라 청상과 제갈산산이 함께였다.
"힘내요. 그래도 보결이 어디예요."
제갈산산은 청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했고.
"쯧, 어찌 이리도 멍청하단 말이냐! 어찌 이리도 공부를 게을리했어. 낙방이라니, 사숙의 이름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청상은 싸늘한 표정으로 나무라고 있었다.
"야, 왜 셋이냐?"
한태석이 짜증스럽게 장팔상을 쳐다보았다.
"그게, 청우는 특별 시험 격이고 나머지 둘은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잘됐네. 셋 다 내가 시험하지."
"총교두께서요?"
"그래. 다들 바쁘니까."
"알겠습니다. 하면 순번을 조정해 놓겠습니다."
장팔상이 물러가고 한태석이 청우를 불렀다.
"네가 보결, 청우냐?"
"예. 무당의 이대제자 청우입니다."
힘이 쭈욱 빠진 목소리.
청우는 보결이라는 말에 더욱 울상이 되었고, 제갈산산은 다시 위로를 건넸으며, 청상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뭐, 자신감 잃은 아이를 위로하는 엄마와 못마땅해하는 아빠의 느낌이랄까?
무당 제자와 제갈세가의 딸. 참으로 특이한 조합이었다.
호북을 두고 무당과 제갈이 이어 온 경쟁 관계는 무림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거늘, 어찌 저리 친근해 보인단 말인가?
그런데 어째 주변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병무반의 시험을 치르러 온 이들이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 시험을 치르지 않은 이들은 물론, 한창 시험 중인 이들까지 집중하지 못하고 그들을 힐끗거리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긴, 철판을 뚫었다고 했으니. 뭐 확인해 보면 되겠지.'
한태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청우."
"...예. 사형."
"언제까지 죽을상을 할 것이냐? 사숙의 가르침을 허사로 만들 셈이냐? 다시 뵈올 때 부끄러워서 얼굴이나 들겠느냐?"
"...."
"위축되지 말고 가진 바 최선을 다하라."
청상의 질타 어린 응원에 청우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한태석의 앞으로 나섰다.
청상의 말이 맞다.
지금 떨어져서는 진무를 볼 낯이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사숙의 성격이라면 분명 죽도록 맞을 것이 틀림없었다.
청우가 자세를 취하자 한태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뚱거리며 나서는 움직임이 흡사 공 구르는 듯하다. 무공을 익혔는지도 의심이 갈 만큼 둔한 모습. 하지만 시험은 치러야 하니.
"남로환 교두의 부탁으로 특별히 치러지는 시험이다. 본래의 요건을 충족하지 않았으니만큼 허투루 치를 수는 없는 일. 해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내 직접 확인할 것이니 준비하라."
"예!"
청우가 실눈을 살짝 치켜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험은 간단하다. 나의 허리에 묶인 붉은 끈을 빼앗으면 된다. 자신 있는 무공을 택하라."
"무당의 칠성권입니다."
"칠성...권."
"가장 자신 있는 무공입니다. 저는 이것만 배웠고 이것만 익혀 왔습니다."
그 말에 한태석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너무 유명한 무공이다.
동네 무관 꼬마에게 무엇을 배우냐 물으면 삼재검과 육합권을 한다는 것처럼 칠성권은 무당 권법의 기초였다.
상승 무공이 아니라 칠성권만 배우고 익혔다 하니... 알 만하다. 이런 자를 내공 좀 강하다고 특별 시험까지 보게 하다니.
약간이나마 기대했던 한태석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것은 잠시나마 집중해서 보고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실망스러웠다. 분명 어디서 영약 비스무리한 쪼가리 하나 먹고 내력이나 급하게 키워서 왔겠지.
이런 준비되지 않은 이대제자를 보내올 정도니 무당이 망하고 있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해 보게."
"예!"
한태석은 오른손을 뒤로 돌렸다. 실력의 격차가 있으니 한 손만 사용할 생각이었다.
병무반의 시험에서는 내력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순수하게 무공을 얼마나 열심히 익혔는가, 초식을 얼마나 참오하여 연마하였는가를 확인한다.
아무리 강한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초식을 제대로 응용하지 못하면 한태석의 허리춤에 있는 붉은 끈을 빼앗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후우."
청우가 가볍게 숨을 고르며 첫 초식의 자세를 잡았다.
그러곤.
파앙!
"...!"
뒷발이 지면을 강하게 밀어 내는 순간 공기가 터져 나가고, 청우의 몸이 순식간에 한태석을 향해 쇄도했다.
'어헛! 뭐가 이리도 빠른!'
88화
놀랐다.
거대한 것이 갑자기 확 하고 커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태석은 병무반의 총 교두에 어울릴 정도로 뛰어난 탄기급의 무인이었다.
당금 무림의 사천현무도(四川玄武刀)라고 하면 누구나 알 정도로 명성 높은 도객이었으나, 권법 역시 일절이었다.
조금 놀랐을 뿐 그 대응은 능수능란했다.
들이받을 듯 다가오는 청우의 속도만큼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허리로 당겼던 손을 빠르게 솟구쳐 뻗었다.
노린 곳은 청우의 오른쪽 겨드랑이. 그런데 교차했던 투실한 청우의 팔이 빠르게 양쪽으로 펼쳐진다.
빠각!
한태석의 손을 쳐 내 버린 청우가 곧장 머리를 들이밀었다.
칠성권, 개산벽(蓋山璧)의 변형이다.
어깨 등으로 펼쳐야 할 초식을 머리로 펼쳐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쩌어엉!
격렬한 소리가 말해 주는 충격의 정도. 내기를 싣지 않았음에도 그 소리가 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크윽!'
한태석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위급의 순간 손으로 청우의 머리를 짚으며 두 발을 뒤로 뻗었음에도 몸이 한 자 이상이나 밀려 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의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생긴 한태석이 청우의 머리를 힘으로 짓누르며 물러나려는데.
"...!"
눌리는 느낌이 없다.
그의 손에 막혔던 청우의 머리가 아래로 푹 하고 꺼져 버렸다. 그리고는 위아래 자세를 바꾸어 물구나무서듯이 발을 차 올렸다.
승룡퇴(乘龍退)였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 한태석의 허리가 뒤로 휙 젖혀졌다.
그리고 솟구친 힘을 이용해 곧장 뛰어오르며 날아오는 청우의 양손.
'이런! 허리를!'
한태석은 재빨리 허리를 비틀었다.
붉은 끈을 빼앗기는 순간 시험은 끝난다. 쉽게 빼앗겨 주지 않을 셈이었다.
그런데.
터엉!
허리를 노릴 줄 알았던 쌍장이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욱신거리는 충격. 허리를 뒤로 젖힌 탓에 중심이 흐트러져 버렸다.
'끈을 노리지 않아?'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청우는 끈이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팽이처럼 몸을 돌리며 발을 차 들어오고, 그의 전신 요혈을 집요하게 노려 왔다. 뚱뚱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날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뭐가 이리 빨라!'
움직임이 간결하고 직선적이다.
시선을 흩트리는 변화는 애초에 배제되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한발 앞서 다가와 공격을 뻗어 왔다.
'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청우의 몸이 펼치는 것은 흔하디흔한 칠성권이 아니었다. 주먹과 발놀림이 자신의 체형에 딱 맞추어 발전한 그만의 무공이었다.
더욱이 나려타곤마저 서슴지 않는다. 필요하면 무조건 구르고, 구른 뒤에는 어김없이 빠른 공격이 날아온다.
청우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끈을 뺏는 게 아니라 마치 이기려는 것처럼.
파팡! 팡!
공수가 오고 갈 때마다 지켜보는 이들의 감탄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시험을 치르던 교두들이며 응시생들도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둘의 싸움에 집중했다.
'놈, 이겨 보려는 셈이란 말이냐? 무당의 이대제자가 나를?'
한태석은 결국 청우를 인정했다.
사용하는 무공은 무당의 칠성권이 분명한데 활용도에서 그 차이가 극명하다. 변칙적이고 단순하며 무엇보다 효과적이다.
하지만.
'흥, 자격이 없는 놈은 절대로 병무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한태석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끈을 포기하기로 했다. 상대가 승리를 바라고 있으니 그에 맞춰 짓눌러 버릴 생각이었다.
끈이라는 제약 요소가 사라지자 한태석이 한 팔만 사용함에도 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어 놓았다.
퉁!
주먹이 청우의 뱃살을 파고들고.
떵!
발이 그의 전신을 두들기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괜찮을까요?"
지켜보던 제갈산산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청상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저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겁니다."
"예?"
"그보다 저 녀석, 제법 머리를 쓰고 있군요."
"...."
제갈산산은 확신을 가진 청상의 표정에 의아함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저 정도 타격쯤이야.'
청우는 괜찮다.
진무에게 맞은 것으로 따지면 청상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청우였다.
톡 치는 것으로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무의 주먹, 그걸 버텨 온 게 청우다.
머리는 조금 모자라지만 몸으로 체득한 청우의 실력은 아직 다 발휘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청우가 비틀거리며 허점을 만들어 낸다.
'녀석, 노림수가 그것이더냐?'
모두가 충격이 쌓여서 그런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청상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끝이로구나!"
틈을 잡아낸 한태석의 주먹이 이전보다 조금 큰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져 왔다.
그 순간 청우의 몸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태석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흥!"
한태석은 그런 움직임을 예견했다는 듯이 강하게 바닥을 밟으며 일권을 뻗었다.
빠악!
청우의 턱 언저리에 때려 박히는 주먹.
끝났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주먹에 맞아 얼굴이 꺾인 청우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비틀었다.
맞는 순간 같은 궤적으로 고개를 비틀며 충격을 줄이고, 허물어지듯 한태석의 측면으로 쓰러졌다.
우당탕.
거칠게 바닥을 구르는 청우.
그리고 그의 손에는 붉은 끈이 움켜쥐어져 있었다.
"...."
한태석은 주먹을 뻗은 자세 그대로 멍하니 청우를 바라보았다.
"저... 합격인가요?"
"...."
애초에 노린 것이 승리가 아니라 끈이었단 말인가? 자신을 그리 믿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두들겨 대었던 것인가?
더구나 저 얼굴은 뭐란 말인가? 그리 맞고도 충격 하나 없는 듯한 표정으로 웃지 않는가?
한태석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깨끗이 당해 버린 것이다.
"수고했네. 합격일세."
청우의 시험이 끝나고 잠시간의 휴식이 생겼다.
그리고 다음에 바로 이어진 청상의 시험은 지켜보던 이들에게 경악이라는 표정을 만들어 놓았다.
검 대 도.
무당 이대제자와 사천현무도 한태석의 대결.
"...."
한태석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바닥을 굴렀던 청우와는 달리 목검을 등 뒤로 잡고 꼿꼿하게 선 청상.
그의 목검에 잘려 바닥에 떨어진 붉은 끈 조각.
"흠, 총교두께서 너무 봐주셨구만."
"그러게 말일세. 실력을 보고자 하셨다가 당해 버리셨어."
지켜보던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태석은 방심 같은 멍청한 짓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뛰어난 실력인가를 시험해 볼 생각도 없었다.
이걸 어찌 믿어야 하는가?
아무리 한 손만 사용하며 대련했다고 하지만 단 십 초식으로 끝났다.
청상이 사용한 유운검법.
빠르게 뻗어 온다 싶은 순간 사라졌고, 사라졌던 검격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들었다.
청우의 공격처럼 변칙적이지도 않았다. 지극히 실전적이고 딱 필요한 만큼의 움직임.
당한 것이 아니라 진 것이다.
청우에게는 생각지 못한 심계에 졌고 청상에게는 실력으로 졌다.
내공을 활용하였다면 자신의 승리가 당연한 일이었겠으나 초식 운용에서만큼은 진 것이다.
사천 전역에 이름을 알린 탄기의 무인이 고작 약관밖에 되지 않은 무당의 이대제자에게.
"합격입니까?"
청상이 너무도 공손하게 물어 왔다.
"하, 합격일세."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웃는 모습에 한태석은 자신도 모르게 마주 인사하고 말았다.
* * *
"허, 대단하군요. 저 사천현무도가 단 십 초 만에 지다니."
"흐흠."
병무반의 시험이 치러지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전각.
연무장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용봉관주의 집무실에 세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무당이 오랫동안 활동이 뜸하더니. 이런 인재들을 키우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뛰어난 인재들 틈에서도 무당의 제자들은 단연 발군이군요."
"이 사람. 괜히 천년 무당인가? 다들 쇠퇴했다고 하나 무당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지."
대군사 제갈협진이 혀를 내두르고 등여평이 고개를 끄덕인다.
"확인해 보니 진무 도장을 비롯해 저 아이들 모두가 무당 오룡궁의 제자라고 하더군요."
"오룡궁? 그 무당의 수호자라 불리는 곳 말인가?"
"예. 과거에는 그러했으나 지금은 무당의 검이었던 남암궁의 역할까지 병행한다고 합니다."
"그랬구만, 그랬어. 하긴 진무가 무당지검의 칭호를 받았으니."
"더욱이 오룡궁주가 그 명진 도장이라 합니다."
"뭣이? 명진? 그럼 그가 진무의 스승이란 말인가?"
제갈협진의 말에 등여평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그랬구만. 그 일 이후로 폐인이 되었다더니 제자들을 저리도 잘 키워 놓았어. 아니 그렇습니까, 맹주."
등여평의 물음에 함께 있던 철지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의 명진.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한창때의 그는 장래가 기대되는 무당의 제자였다.
지금은 폐인이 되어 인구에 회자조차 되지 않았으나 그 당시에 함께 활약했던 이들은 모두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대단했던 악귀 사패천주 혁련무강도 그의 의기와 용기를 인정해 발걸음을 돌렸다는 일화는 전설과도 같았다.
비록 오래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거 저들을 보니 무당이 다시 태산북두의 이름을 되찾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여평이 마치 제 일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맹주님, 어떠십니까? 무당의 발전에 한 발 담가 보시는 것이."
"한 발?"
"예."
"흐흠."
등여평의 말에 철지량이 전각 아래로 보이는 무당의 제자 청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뛰어난 검수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눈에는 보인다.
약관밖에 되지 않는 무당의 도사는 사천현무도로 이름 높은 한태석의 깨달음에 뒤지지 않는다.
검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안다. 또한, 검술이 가진 허점을 스스로 참오하고 발전시켰다.
청상이 익히고 있는 무당의 유운검법.
철지량이 그 검술의 허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뛰어난 검술이기는 하지만 하단에 대한 방어가 취약하다는 것. 그렇기에 무당의 제자들은 유운검에 다른 무공을 섞어 보완했다. 각법이나 보법 등으로.
그러나 청상은 오직 유운검법만으로 그 허점을 덮어 버렸다. 변화로 인한 허점을 없애기 위해 검법 자체를 간결하게 변화시켜 놓았다.
기초는 무당의 유운검이되, 전혀 다른 모양의 검술이 되어 버렸다.
등여평의 말대로 실로 탐나는 인재가 아닌가.
가르쳐 볼 여지가 충분한 검수였다.
'흐흠, 제자라....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어디까지 발전할지.'
철지량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사이 등여평이 제갈협진에게 물었다.
"그보다 을무반 시험 준비는 어찌 진행되어 가고 있는가?"
"비흔께서 돌아오시면 곧바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흐음, 그럼 이제부터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을무반 아이들을 평가해야 하나?"
"예. 시험 전까지는 그럴 생각입니다."
"허허, 아무리 생각해도 절묘한 시험 방법이야. 조를 짜서 시험을 보게 하다니. 응시생들은 알고 있나?"
"아직 공지하지 않았습니다."
"실력들이 천차만별일 테니 조를 편성하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리겠어."
"예. 관주님께서 할 일이 많으시겠지요."
"그렇군."
"예."
"아쉽군. 실력으로 보면 무당의 제자들과 산산이 다른 조에 편성될 수밖에 없겠어."
"그렇겠지요. 원체 발군인 아이들이니."
등여평의 말에 제갈협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시험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철지량이 조용히 입을 연다.
"이보게. 대군사."
"예. 맹주님."
"지금 조 편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자네 가문의 여식을 걱정해야 할 듯싶네."
"예?"
제갈협진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철지량이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한태석이 제법 화가 많이 난 모양일세."
"...?"
"그리고 그 다음 응시생이 자네 가문의 여식이고 말이야."
"...!"
89화
병무반의 시험이 끝났다.
교두들의 긴 회의 끝에 청우는 겨우 을무반 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생겼고.
열 받은 한태석이 사정 봐주지 않고 자신의 전력을 다한 덕분에 제갈산산은 머리가 산발이 되는 고생을 하고서야 겨우 붉은 끈을 차지했다.
멀쩡하게 통과한 것은 청상뿐이었다.
물론 그 세 사람으로 인해 병무반 시험의 강도가 높아진 탓에 합격자가 서른도 채 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애초 계획보다 너무 적은 수였기에 재시험이 치러지는 등 우여곡절이 일어났다.
병무반의 시험을 통과한 후 휴식할 시간이 생긴 그들은 정무맹 내에 자리 잡은 객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와작, 까득.
"...."
제갈산산이 멍하니 청우를 바라보았다.
정말 잘 먹는다. 도대체 저 많은 게 어떻게 다 뱃속으로 들어가는지.
"볼 때마다 대단하시네요."
제갈산산의 감탄에 청상이 멋쩍게 웃었다.
"그나저나 이제 을무반의 시험이군요."
"예. 다른 시험과는 달리 합격자가 딱 여덟으로 정해져 있으니 경쟁이 치열할 듯합니다."
"어떤 시험인지 아십니까?"
"아니요. 아직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지가 되지 않아서."
"흐흠."
정보력이 뛰어난 제갈산산이었으나 을무반 시험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 가지 알려진 것은 이번 시험의 총감독이 무풍개 양소방 대협이라는 것입니다."
"예? 양 대협께서요?"
"그러고 보니 두 분께선 이미 인연이 있다 하셨지요?"
"아, 그건 아닙니다. 양 대협과 연을 맺은 것은 사숙이신지라."
"그렇군요. 어쨌든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정무칠성의 한 분이신 양 대협이 직접 주관하시는 시험이라니."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곧바로 수업이 시작된다죠?"
"예."
"수업이라. 하면 수업 중에 시험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겠군요?"
"예. 저도 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면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듯합니다. 그것이 을무반 시험에 큰 영향을 미칠 듯하구요."
제갈산산의 말에 고기를 먹느라 정신이 없던 청우 대신 청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무반의 시험을 통과한 것은 모두 팔십 명이었다. 이제 을무반으로서 인정을 받은 합격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양소방을 기다리며 학관에 배정받은 숙소에 자신의 짐을 풀었다.
시험 일정이 정확하게 발표되지 않았으나 제갈산산의 말처럼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청우와 달리 청상은 반드시 갑무반에 들고 싶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숙.
아직 그의 옆에 서기에는 실력이 너무 모자랐다.
무당을 떠나올 때 누구도 자신들에게 반드시 무엇을 하라고 목표를 정해 주지 않았다.
그저 잘 다녀오라. 몸 건강하게 잘 지내다 오라 그리만 말했다.
누구도 그들에게 무당의 이름을 드높이고 오라든지와 같은 부담스러운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상은 자신들이 무당의 얼굴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정무맹에 무당의 이름을 걸고 있는 것은 청상과 청우뿐이었다.
그들이 무당을 대표한다. 용봉관에서 그들이 이루는 성과는 곧 무당의 이름을 높이는 길임이 틀림없었다.
'사숙께선 이미 정무칠성에 다가가고 계신다.'
양소방과의 인연, 그리고 검성 철지량과 호각지세를 이룬 비무.
그 두 가지만으로도 엄청난 위명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무당지검으로서 명성마저 그들과 비슷한데 무공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려 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들이 나아가야 할 때였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무당의 제자이자 오룡궁을 대표하는 무인으로서, 사숙이자 무당의 검인 진무의 사질로서 부끄럽지 않게.
무당의 이름을 드높여야 했다.
청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청우야."
"...예?"
청상의 부름에 볼이 빵빵하도록 고기를 문 청우가 고개를 들었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순박하고, 우직하지만 조금 모자란 자신의 사제.
"내일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당의 도인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
"우리 둘 모두 반드시 갑무반에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덟 명만 뽑는다는데 저까지요? 사형이나 제갈 소저는 몰라도 저는... 자신이.... 그냥 을무반에 있는 게."
청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청상의 표정이 너무 단호했다.
"음, 그 말을 사숙께서 들으시면 가만두지 않으실지도 몰라."
"...예?"
"지는 거 싫어하시는 거 알지?"
"...."
"아마 뒈지게 맞을걸?"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청상의 말에 청우가 손에 들었던 고기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마 맞을 거야. 분명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청상의 모습에 청우가 눈동자가 보이도록 크게 뜬 눈을 쉴 새 없이 끔벅거렸다.
"그, 그럴까요?"
"확신해."
"...."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분명 진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청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퍽! 퍽! 쩍! 쾅!
환청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진무에게 맞았던 그 지옥 같은 경험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그려졌다.
그리고 청상의 얼굴에서 사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진무의 얼굴이 겹쳐진다.
꿀꺽.
분명 환상이고 환청인데 침이 절로 넘어가고 맞았던 곳이 쑤셔 오기 시작했다.
"잘하자."
"...예, 예!"
* * *
시간은 때로 빠르게 흐르기도 한다. 용봉관 무생들의 시간이 그러했다.
시험 결과에 따라 정무반, 병무반, 을무반으로 나누어진 무인들은 미리 배정된 교두들에게 수업을 받으며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받아야 할 수업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무학에 대한 기초 지식부터 수많은 문파의 진법, 야생에서 생존하는 방법까지 가리지 않고 엄청난 양의 지식을 습득하게 했다.
그리고 매 수업마다 그날 수업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고, 열흘에 한 번씩 종합적인 평가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빡빡한 일정이 끝나면 개인의 자유 시간이 철저히 보장되었다. 그것은 교두들뿐 아니라 무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청우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입관 시험이 끝난 지 스무 날이 지난 어느 날.
"자, 이건 외우세요."
"...."
을무반 무생의 신분임을 알려 주는 봉황(鳳凰)이 수놓아진 수련복을 입은 제갈산산이 책을 펴 놓고 청우를 다그쳤다.
"이것도 외워야 합니까?"
"...."
이것도라니? 겨우 이것만이다.
"당연합니다. 지금 몇 번째 낙방인지 아시죠?"
제갈산산의 아미가 살짝 찡그려지자 청우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교두님 말씀 못 들었어요? 한 번 더 낙방하면 병무반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구요."
"...."
제갈산산은 그 때문에 자신의 시간까지 쪼개 보충수업을 해 주고 있었다.
열흘에 한 번, 을무반 무생으로 치른 두 번의 종합 시험.
청우는 무공이 뛰어났다. 을무반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기초 지식 부분에서는 팔십 명 중 최악.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다. 반드시 함양해야 할 기본적인 수준이었다.
사실 무인에게 요구되는 지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과거를 볼 학사도 아니고 뭐 하러 수준 높은 공부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진법이라든지 기관에 대한 지식 같은 것은 무조건 외우고 익혀야만 했다.
그것도 그리 어려운 수준이 아니었다. 제갈세가로 따지면 다섯 살 꼬맹이들도 익히는 매우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청우는 어렵게 합격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대놓고 낙방이었다.
빵점, 백지, 낙서. 도대체 어떻게 무공을 익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자, 다시 설명할게요. 육합(六合)은 천지(天地)와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방향을 가리키는 말로 음양가(陰陽家)는...."
제갈산산의 설명이 이어지고, 청우는 점점 몽롱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변한다.
"집중해요! 집중!"
제갈산산의 뾰족한 고함에 청우가 번쩍 정신을 차린다.
"자, 외워 봐요."
"에, 육합은 천지와 동서남북이고... 동서남북이고... 동서남북이고...."
앵무새도 아니고 같은 말만 반복한다.
풀어서 설명해서 그렇지 기껏해야 오십 자도 안 된다. 도대체 이 간단한 걸 왜 못 외우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던 제갈산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우가 보이는 무공에 대한 발전은 실로 엄청났다. 무공 수업 시간에는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였고, 그 습득력에는 무생들뿐 아니라 교두들까지 놀랄 정도였다.
몸을 쓰는 수업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머리를 쓰는 수업에는....
"하아."
청상의 간곡한 부탁이 아니었다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 하나 만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찌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잊어 먹는단 말인가? 뭐 이런 똥멍청이가 다 있단 말인가?
육합권은 할 줄 알면서 육합에 대해서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냐?
정말이지 신기할 정도였다. 사형제가 어찌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듬직하기가 도사의 표본과도 같은 청상에 비하면 이건 뭐.
제갈산산의 잦은 한숨에 청우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는데.
"분명 죽을 거야. 사숙한테...."
"...."
"확실해. 죽을 게 틀림없어."
그의 등 뒤로 청상이 힘 빠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유령처럼 지나간다.
청우의 등줄기가 써늘해졌다.
진무만 생각하면 강제적으로 열의가 생긴다.
"저어, 제갈 소저?"
"뭐요?"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
제갈산산이 청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아, 좋아요. 제발 집중해서 잘 들어요. 이해하지 말고 그냥 외우라고요. 알겠죠?"
"...예."
"육합은...."
제갈산산의 말이 이어지고 청우가 한 자, 한 자 필기를 해 가며 열심히 되뇌었다.
집중력이 하락할 때마다는 청상이 그의 뒤를 유령처럼 지나간다.
"죽을 거야. 분명히...."
"...."
* * *
용봉관은 기존의 목표대로 후기지수들을 가르치는 무관이자 학관으로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교육이 시작되고 정확히 스무닷새가 지났을 때.
"하핫, 어서 오십시오."
용봉관주 등여평과 제갈협진, 그리고 각 반의 총 교두들이 모여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이거 신수가 아주 훤해졌구만?"
"그렇습니까?"
손님의 말에 등여평이 활짝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래, 제법 자리를 잡았다고?"
"예. 벌써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고생이 많았군."
"모두가 교두들의 공입니다. 정말이지 이들의 열의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입니다."
등여평은 모든 공을 교두들에게 돌려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자, 그럼 이제 을무반의 시험을 시작할 때인가?"
"예.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무풍개 양소방이었다.
"준비는?"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벌써 여러 가지 평가를 통해 을무반의 무생들을 여덟 개 조로 나누었습니다."
"고생했군. 쉽지 않았을 터인데."
"대군사가 계획을 잘 세운 덕이지요."
등여평의 말에 양소방이 제갈협진을 쳐다보자 그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아이들을 보낼 곳을 정하셨습니까?"
"그 때문에 늦었지."
양소방이 함께 온 수하에게 지도를 받아 탁자 위에 펼쳤다.
"확인할 곳은 총 여덟 곳이네."
"음, 이곳이 '궁'이라는 자들과 연관이 있다는 곳인가요?"
"그렇다네."
"위험할 수도 있겠군요."
제갈협진으로부터 '궁'에 대해서 들은 뒤였던 등여평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해서 각 조별로 을무반의 교두 한 명과 비선대(秘線隊)의 정예 무인 둘씩 딸려 보낼 참이네. 어차피 무생들의 평가도 해야 하니까."
을무반의 여덟 교두는 모두가 의기급에 이른 명망 높은 무인이었으며, 비선대는 양소방이 이끄는 정무맹의 숨겨진 정보 조직이었다.
사패천과 일월마교를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니 결코 모자라지 않는 실력이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하겠군요."
"그래. 모두 여덟 개 조로 나누어진 무생들은 각자에게 내려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지도력, 융통성, 상황 대처 능력. 그리고 발전 가능성까지 다각도로 평가받게 될 것이네."
"허면 각 조에서 가장 우수한 인원을 뽑아 갑무반으로 편성하는 것입니까?"
"옳네. 이 용봉관이 만들어진 목적이 바로 그것에 있으니까."
양소방의 말에 등여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무맹 산하 여섯 개의 무력 단체가 있었으나 구파, 오대세가, 각지의 중소 방파의 입김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즉, 정무맹주가 오롯이 장악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다. 특히나 그 대주를 맡은 자들이 정무맹의 장로들이기에 더 그랬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힘이 집중되지 않았고 사패천과 일월마교와의 분쟁에서도 많은 패배가 있어 왔다.
용봉관을 만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곳은 겉으로 보이기에는 각 문파에서 발전 가능성이 있는 무인을 모아 수련시키는 학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
첫째는 중원 무림을 삼분하는 사패천과 일월마교, 그리고 의문의 세력인 '궁'이라는 자들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용봉관을 대표할 여덟 명의 무인을 갑무반으로 선발해 정무맹의 핵심 전력으로 키워 내는 것.
갑무반 여덟 무인은 유사시에 용봉관의 무인들을 이끌 대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림에 아무 세력도 갖지 않은 등여평을 관주로 앉힌 것이다.
이는 등여평에게도 설명한 내용이었고, 교두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정무맹주 직속으로 만들어, 오직 정무맹주에 의해 통제되는 막강한 전력으로 기능하게 하는 것.
그를 위해서 용봉관에 입관한 이들을 각 파의 이대제자, 장남에게 가려져 후계에서 멀어진 가문의 차남, 그리고 구대문파 및 오대세가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한 중소 방파의 자제들을 선발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갈협진의 계획에서 시작되었고 정파를 아끼는 철지량과 양소방, 그리고 총 교두가 된 네 명의 무인 간의 토의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번 시험으로 용봉관의 체계가 완성되는 것은 물론 '궁'이라는 자들에 대한 조사가 좀 더 진척될 수 있겠군요."
"우리가 기대한 바네."
양소방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결의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럼 시험 일자는 언제로 잡을까요?"
"언제? 이 사람. 뜻을 품었으면 바로 시작해야지. 지금 당장 을무반의 무생들을 대연무장에 모아 주게."
"지금요?"
"암. 꾸물거릴 것이 뭐란 말인가?"
마음에 품은 뜻을 행함에 있어 머뭇거림이 없었다. 양소방다웠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등여평이 피식 웃으며 을무반의 총 교두 만화검(萬花劍) 백천성을 바라보았다.
"시작하세."
"예. 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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