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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30-40

30화

어둠이 짙게 깔린 단강구 수고, 갈대밭.

덜그럭, 덜그럭.

어른의 키만큼이나 크게 자란 갈대를 은밀히 헤치며 짐을 가득하게 실은 몇 대의 수레가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이냐?"

"예."

검은 야행복을 갖추어 입고 조심스럽게 단강구의 물길을 바라보고 있는 금적산이 수하를 향해 물었다.

"구매자들은?"

"거래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습니다."

금적산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적막하다.

그믐이라 달도 뜨지 않아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금적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약 밀거래.

이 한 번의 거래를 위해 금적산은 청양상단의 전부를 쏟아부었다. 일반적으로 살 수 있는 돈보다 네 배나 되는 돈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거래가 끝나면 일확천금이 부럽지 않을 엄청난 수익을 얻게 된다.

이미 단강구의 중심 관도 내에 있는 점포들을 봐 둔 터였다. 자금만 확보하면 모조리 매입할 생각이었다.

'이번 거래만 끝나면 밀거래는 끝이다. 겉으로 상단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상단이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 불법적으로 상단을 운영할 수는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금적산은 자신이 수레에 가득히 담아 온 짐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짐 속에 감추어진 화약.

그것만 해도 적지 않았다.

긁어모은다면 적어도 반 수레는 족히 될 만한 양이다.

준비하는 데만도 석 달이 걸렸다.

'도대체 정체가 뭐길래 이만한 양을 구매하려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구매자는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하긴, 서로 모르는 것이 속 편하다. 어차피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 하고 빠질 생각이었다.

"상단주님."

금적산이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수하 중 하나가 손으로 강가를 가리켰다.

불빛.

강에서 홰를 든 인영이 원을 그려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배?'

생각지 못했던 방향이었다.

구매자는 거래 물목, 시간과 장소만 알려 왔을 뿐, 나머지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밝히지 않았다. 금적산도 달리 묻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육로가 아니라 수로인가?

밀거래에 있어 수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관의 순시선도 문제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장강의 수적이었다.

단강구는 호북, 하남, 하북, 산서로 이어져 있었기에 인근 수채만 해도 세 곳을 넘는다.

절대로 그들의 눈을 피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또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배는 한 척이 아니었다.

어둠에 숨어들기 위해 검은 옻칠을 한 배가 다섯 척.

배마다 서너 명 이상의 사람이 타고 있었고, 모두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 물건을 건네주고 돈만 받으면 된다.'

금적산은 수레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은밀하게 신호를 보냈다.

"주위를 경계해라. 만약 놈들이 딴마음을 품는다면 바로 공격을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상단주님."

금적산은 일부러 상단의 호위 중 무공이 뛰어난 자들만 선별해서 데려왔다.

말을 모는 마부와 짐꾼까지 전부 비수를 숨기고 있는 무인으로 구성했다.

밀거래는 위험하다.

정상적인 거래가 아니니 변을 당해도 관에 고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지켜야 했다.

금적산의 명령으로 호위 무인과 짐꾼, 마부가 미리 계획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수레를 중심으로 형성한 원방진(圓防陣).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해 중심을 지키는 효과적인 진형이었다.

준비가 끝나는 것을 확인한 금적산이 옆에 있는 무인에게 말했다.

"기선, 접선 신호를 보내라."

"예."

짧은 대답과 함께 홰에 불을 붙인 기선이 똑같이 원을 그려 강 위의 구매자에게 신호를 보냈다.

강 위에 멈춰 있던 배가 청양상단을 향해 다가왔다.

그그극.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강변에 도착한 배에서 복면인 다섯이 뛰어내렸다.

"물건은?"

짧고 간결한 물음.

밀거래를 하는 사이에 굳이 통성명이나 인사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준비되었소."

금적산이 고갯짓으로 수레를 가리켰다.

복면인의 확인 작업이 끝나고,

"돈은?"

금적산의 물음에 뒤에 있던 복면인 둘이 궤짝을 들고 와 내려놓았다.

턱.

묵직한 소리와 함께 궤짝이 열리자 누런 금덩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금 열 관.

홰를 비추자 어둠을 쫓을 만큼의 누런 빛이 반사되었다.

"기선."

"예. 상단주님."

대답과 함께 기선과 호위 무인 둘이 복면인들로부터 궤짝을 건네받았다.

"한데 배를 통해 어찌 물건을 옮길 생각이오? 관은 둘째 치고 장강 수적들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텐데?"

"...."

금적산의 물음에 복면인의 눈동자가 매섭게 변했다.

"아, 미안하오. 괜한 걸 물은 모양이오."

금적산이 금세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수레 주위에 원방진을 이룬 무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원방진이 진형을 흩트리며 천천히 물러나자 복면인들이 배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배에 남아 있던 이들이 모두 내려 수레를 향해 다가왔다.

모두 열다섯.

거래는 끝났다.

이제는 그들이 떠날 때까지 경계만 늦추지 않으면 될....

"거기까지."

갈대숲 한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직이던 이들의 행동이 멈췄다.

차앙!

동시에 수레로 다가왔던 복면인들이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는 검을 뽑았다.

"누구냐!"

금적산의 미간이 일그러지고 상단의 무인들도 즉시 무기를 뽑아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사박, 사박, 사박.

갈대를 헤치며 세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너는!"

홰를 비춰 나타난 인물의 얼굴을 본 금적산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잘 있었어? 뒈지라고 밀어 넣고 나서 살림살이 좀 나아졌냐?"

"...."

진무.

그가 나타났다. 청우와 공사척과 함께.

"놀라는 꼬락서니 하고는."

팔짱을 끼고 이죽거리는 진무의 모습에 복면인들이 매서운 기세를 뿌리며 금적산을 노려보았다.

"제길...."

진작 죽었어야 할 놈이 어째서 여기 나타난 것이지?

더군다나 그 옆에 공사척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진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자신이 진무를 알아보았으니 복면인들은 자신과 진무 일행이 한패라고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복면인들 무리여도 돈은 물론 물건까지 챙기려 한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그들의 검 끝의 일부가 자신들을 향해 있었다.

딱히 신용을 지켜야 할 사이는 아니지만 복면인들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복면인 열다섯.

청양상단 스물.

무당의 일대제자, 단강구에서 제법 알아주는 고수 공사척이라고 해도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살인멸구(殺人滅口)할 수 있었다.

"병신 같은 놈. 그냥 못 본 척했으면 좋았을 텐데."

금적산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죽여!"

그의 명령과 동시에 상단 무인들이 곧바로 진무를 향해 칼을 뻗어 왔다.

"당연히 그렇게 나와 줘야지. 내가 지금 시간이 별로 없거든."

진무의 입술이 벌어지고 새하얀 송곳니가 사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공사척!"

"예!"

진무의 외침과 동시에 공사척이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튀어 나갔다.

까가강!

박도로 호위 무인들의 검격을 튕겨 낸 공사척은 도기를 뿜어 채찍처럼 휘둘렀다.

하지만 상단의 호위 무인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죽임을 당한 자는 없었다.

순식간에 열다섯이나 되는 상단 호위 무사들이 공사척을 향해 반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척을 괜히 먼저 내보낸 것이 아니다.

"얘들아! 쳐라!"

공사척의 외침에 사방에서 무뢰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

순식간에 난전이 시작되었다.

"뭐, 뭣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금적산이 뒷걸음질 쳤다.

쯧쯧, 내가 그럼 혼자 왔겠냐?

가뜩이나 내상에 광혈참혼기공까지 사용해서 몸도 안 좋은데?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이 새끼들아.

진무가 금적산을 비웃었다.

깡! 까강!

적을 상대하는 동안 공사척의 몸에 상처가 늘어 가고 있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뒈지면 그것도 제 팔자지.

하지만 조금은 도와줄 생각에 공사척 주위로 달려든 적들을 향해 선심 쓰듯 지풍을 날렸다.

퓨퓻!

"컥!"

진무의 도움으로 한 놈씩 공사척의 박도에 목숨을 잃기 시작했다.

"대혀, 가사하니다(대협, 감사합니다)!"

진무로 인해 여유가 생긴 공사척이 발음도 되지 않는 입으로 감격에 겨워 외쳤다.

말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죽여라, 이 멍청아.

진무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공사척이 마음껏 몸빵하는 사이 진무는 아름다운 자태로 놓여 있는 궤짝을 향해 다가갔다.

"이, 이런... 공사척 이놈이 미쳤나."

싸움이 지속될수록 공사척의 박도에 상단 호위 무인들의 수가 자꾸만 줄어 가자 금적산은 당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모두 죽어 버리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고 만다.

진무가 살아 나간다면 무당과의 연이 끊어지는 것은 물론 청양상단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이놈들아! 싸워라! 죽여! 죽이란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는 금적산이 복면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와달라고.

함께 저들을 죽이자고.

그런데 그들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소곤거리는가 싶더니,

'이, 이놈들이?'

진무와 공사척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고 황금이 담긴 궤짝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내 거다. 이제 이 돈은 내 거란 말이다. 니들은 화약이나 가지고 꺼지란 말이다.

금적산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복면인들이 검을 세워 위협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인이지 무인이 아니었다.

'이런 젠장....'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진무가 복면인들의 앞을 막아섰다.

"얻다 손을 대!"

취리릿!

선명하게 뿜어지는 푸른 검기.

따다당!

서슬 퍼런 기세에 복면인들이 검기를 막아 내며 뒤로 물러났다.

설마? 나를 구하려고?

순간 금적산은 진무가 자신을 구해 주려는 것인가 하는 착각을 했다.

퍼억!

"커억!"

진무의 발에 차인 금적산이 땅바닥을 나뒹굴고,

"내 거야. 이 새끼들아. 이것 때문에 좆 빠지게 튀어 왔구만!"

그는 황금이 든 궤짝을 지켰다.

시퍼런 검기를 줄기줄기 뽑아내며,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듯한 눈빛을 하고.

그렇다.

관군을 동원해 함께 오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많은 화약 따위, 가져도 쓸 데가 없다.

진무가 원하는 것은 금적산의 모가지와 덤으로 화약을 구매할 때 사용한 대금.

"니들은 관심 없으니까 그만 꺼져. 싹 뒈지고 싶지 않으면."

"...."

목숨을 걸고서라도 궤짝을 지키려는 진무의 의지(?)에 복면인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데,

피융!

갈대밭 외곽에서 불화살이 솟구쳤다.

"모두 추포하라!"

벌써?

젠장, 청상 녀석. 쓸데없이 빨라서는!

관군의 등장에 궤짝을 되찾아 가려던 복면인들이 당황해하더니 서둘러 자신들의 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급하기는 진무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청우야!"

"예. 사숙!"

"들어!"

"...예?"

이 새끼야, 제발 눈치 좀.

"궤짝!"

"아, 예."

청우가 금이 열 관이나 담긴 궤짝을 손쉽게 들어 올렸다.

"튀어!"

"...."

"빨리!"

눈을 부릅뜬 진무의 외침에 청우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망쳤다.

"휴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무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우리끼리 진득하게 대화 좀 해 볼까?"

"...."

진무의 스산한 목소리에 금적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31화

빠악!

주먹이 휘둘러지자 비대한 금적산의 몸이 허공을 날아올랐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크어어. 그, 그만."

땅바닥에 처박혔던 금적산이 손을 뻗어 다가오는 진무를 제지하려 했다.

퍼억!

하지만 곧바로 발길질이 살집이 가득한 복부를 파고든다.

"커억!"

콱! 콰콱! 콱!

이어지는 것은 사정없는 짓밟음.

요 새끼! 요 돼지 같은 새끼! 감히 날 사지로 몰아넣은 새끼! 밀수꾼 새끼!

"꾸에엑!"

금적산의 비명이 갈대밭을 가득 채웠지만, 진무의 구타는 멈추지 않았다.

딱히 무슨 절세의 무공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짓밟는다.

그저 때리고 찬다.

하지만 무공이라고는 고작 삼류들이나 하는 손, 발짓밖에 익혀 보지 못한 금적산으로서는 고스란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진무의 구타는 매우 집요하고 고통을 주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분명히 전신을 가리지 않고 패는 것 같은데, 맞고 보면 아까 그 자리다. 맞은 곳의 고통이 가시기 무섭게 같은 자리를 패고, 또 패고, 팰 만큼 팼다 싶으면 그제야 옮겨 패고....

"크허허허. 제발, 제발 살려 주시오. 제발."

눈물이며 콧물로 온통 범벅이 된 금적산이 진무의 바짓단을 부여잡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꽈악.

진무는 그가 잡은 바짓단을 내려다보았다.

"놔."

"살려... 주세요."

그리고 천천히 쪼그려 앉아 바짓단을 꼬옥 잡은 금적산의 손가락을 쥐었다.

"누가 죽인대?"

우드득.

"아악!"

손가락이 꺾이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접혔다.

콰직!

그리곤 주먹으로 손뼈를 으깨 버렸다.

"끄어어!"

부러진 손가락의 아픔보다 더욱 심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아팠다.

몸서리치도록 아픈데, 딱 그만큼이었다.

극심한 고통이라면 혼절이라도 할 것인데 진무는 딱 정신을 잃지 않을 정도의 고통만 주었다.

"저, 그, 그만 말려야."

보다 못한 관군의 수장이 청상에게 소곤거렸다.

누가? 누굴? 왜?

청상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옥에 가고 싶으면 혼자 갈 일이지, 어째서 자신을 끌어들인단 말인가?

진무의 눈동자.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무서웠다.

진무와 함께하는 동안 저런 눈빛은 처음 보았다.

분명 말렸다가는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청우가 보이지 않았음에도 묻지 못했다.

"무량수불."

청상은 관인을 애써 외면하며 도호를 외웠다.

"후우, 후우...."

얼마나 지났을까?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금적산을 두들겨 패던 진무가 손을 털며 일어났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금적산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땅바닥에 패대기쳐지고 행인들의 발에 수도 없이 짓밟힌 개구리 같은 모습이었다.

누군가 '사실은 사람일세.'라고 하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 만큼 처참했다.

진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청상이 급히 말했다.

"사, 사숙! 수고하셨습니다."

뭘? 사람 팬 걸?

그냥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살기로 가득한 진무의 눈빛에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옆에 있던 관인의 수장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청상과 마찬가지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진무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양상단의 호위 무인들은 백여 명이나 되는 관군에 의해 무기를 빼앗긴 채 모두 제압되어 있었다.

진무 일행을 도왔던 무뢰배들 또한 같은 모습이었다.

관군이 나타나는 순간 공사척이 박도를 버리고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혀(대협)!"

공사척은 잡혀서 발음 새는 소리를 내면서도 표정이 밝았다.

무당의 도사를 도와 화약 밀수꾼을 소탕했다.

투항해서 무공이 제압당하고 손목에 추(杻: 나무로 된 수갑)가 채워졌으나 세상에는 정상 참작이라는 것이 있다.

진무가 변호를 해 주면 필시 방면될 것이라 생각했다.

희망 가득한 공사척의 눈빛에 진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관군의 수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얼마요?"

"예?"

진무의 소곤거림에 무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사척. 현상금."

"아, 은 백 냥입니다."

백 냥, 백 냥이란다.

사파의 무인들은 정파의 무인들과는 달리 관무불침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었다.

녹림은 산적이고, 장강은 수적이며, 흑사방은 각종 불법의 온상이었다.

공사척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단강구의 뒷골목을 주름잡아 온 무뢰배의 두목으로 상인들의 고혈을 빨고 사람들을 수도 없이 괴롭혔다.

즉, 그들은 민생을 어지럽힌다.

다만 섣불리 잡아들이려 했다가는 도리어 관인들이 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들이 뿌려 놓은 뇌물이 워낙 막대했기에 잡을 수 있는 경우에도 모르는 척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어쩌다 잡히기라도 하면 예외 없이 감옥행이었다.

실적을 쉽게 올릴 수 있는 일인데 관군이 놓아줄 리 없었다.

외통수에 걸린 이상 뇌물을 쓴다고 해도 어림없었다.

물론 진무로서는 같은 사파의 쓸 만한 무인을 관군에게 넘긴다는 사실이 껄끄러울 수도 있었으나,

애초에 감히 자신의 목숨을 노린 놈 아닌가. 굳이 선처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데려가쇼. 나머지까지 엮어서."

"알겠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사척파를 일망타진하고 국가적으로 금하고 있는 화약 밀거래까지 잡았습니다. 지현대인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관군의 수장의 말에 공사척이 진무를 바라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자, 자까마 대혀(잠깐만 대협)?"

분명 목숨을 노린 건 불문에 부친다고?

물론 그랬다.

그래도 어쩌랴.

진무는 굳이 약속 따위에 구애받지 않을 만큼 비열했다.

은이 백 냥인데... 그것도 부수입으로.

"끌고 가라."

관군의 수장의 말에 공사척이 눈이 동그래져서 진무를 쳐다보았다.

"대혀(대협)!"

그리고,

관군의 수장이 진무에게 현상금을 내어 주겠다는 확인증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공사척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야이! 비열한 개쉐끼야!"

공사척은 이때만큼은 무척이나 정확한 발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흠, 재갈을 물리는 게 좋겠소. 빠져나가려고 무슨 말을 꾸며 댈지 모르는 놈이니."

"아, 그럴까요?"

진무의 의견에 관군의 수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역시 바라던 바였다.

공사척이 뿌린 뇌물이 대단하여 입을 연다면 관인들도 곤경에 처할 테니까.

누이랑 매부가 나란히 좋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관인은 즉시 공사척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 뒤를 따라 관군들이 피떡이 되어 사람 형체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금적산과 무뢰배, 상단의 호위 무인들까지 포승줄로 묶어서 압송했다.

마음 같아서는 공사척이고 금적산이고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명망 높은 무당의 도사가 아니던가?

사건은 끝났다.

배를 타고 도망친 복면인들은 관군의 순시선이 뒤쫓고 있으니 굳이 진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범죄자는 관군이 잡고,

나쁜 놈은 나쁜 놈이 잡았으니,

진무는 돈만 챙기면 된다.

궤짝은 청우가 들고 날랐고, 현상금도 받았으니 이제 충분....

"저어."

"...예?"

갑자기 진무가 부르자 관군의 수장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 밀거래 포상금 같은 건?"

"...."

"...없습니까?"

초롱초롱한 눈망울.

안 주면 무척이나 실망할 것 같은 진무의 표정에 관군의 수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 후에 현청으로 와 주십시오. 제가 지현대인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동안 의심하고 있던 금적산을 잡았으니 청양상단의 재산이 몰수당할 겁니다. 막대한 재물일 테니 포상금 정도야."

뭐?

청양상단이 몰수를 당한다고?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청양상단을 습격했을 때 좀 빼돌리는 건데....

아쉽다.

원래 돈에 대한 욕심이란 게 황금으로 산을 쌓아 두고도 땅에 떨어진 철전이 탐나는 법이 아니던가.

하지만,

진무는 무당의 도사였다.

더 이상의 속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럼 막대한! 포상금을 기다리겠습니다."

"아, 아. 예."

특정 단어에 힘을 주는 진무의 모습에 관군의 수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꼭이오!"

진무는 죄인들을 이끌고 돌아가는 관군의 수장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청상아."

"예, 사숙."

"청우 찾자."

"...."

"멀리 못 갔을 거야."

청상은 그저 두 눈만 끔벅거렸다.

그러고 보니 청우는 어디 간 거지?

* * *

탕, 탕!

"누구요!"

동림전장의 단강지부장 황전은 아침부터 문을 두들겨 대는 소리에 짜증스럽게 잠에서 깨었다.

탕탕탕!

하지만 찾아온 이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문만 두들겨 대었다.

"그만 두들기시오! 거, 부서지겠소!"

잠에서 막 깬 터라 신경질이 가득 묻은 황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에 붙은 외창으로 빼꼼히 밖을 살폈다.

도사, 그것도 셋.

희한하다.

원래 도사들은 딱히 전장과 거래할 일이 없었다.

돈에 초연한 이들이니.

그런데 앞섶에 태극 문양이 선명한 것을 보면 분명히 도사, 그것도 무당의 도사들이 분명한데,

'아침부터 빈털터리 도사들이 재수 없게시리....'

더욱 짜증이 났다.

자고로 첫 손님이 중요한 법인데 하필이면 도사란 말인가?

더욱이 저 꾀죄죄한 옷차림 하며.

쫓아내야 했다.

저것들을 받았다가는 오던 재신도 돌아갈 것만 같았다.

"문 열 시간이 멀었소. 볼일이 있으면 오후에나 오시오."

"...."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인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전은 눈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쾅! 쾅쾅!

"...."

더욱 세게 두들기기 시작한다.

이 도사들이 진짜!

정말로 문을 부술 듯한 기세였다.

황전은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결국 몸을 돌렸다.

"이보쇼! 문 열 시간이."

슬쩍 빗장을 푸는 순간,

도사들이 황전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진무 일행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예치금 백 냥 이상의 귀한 손님들을 상담하기 위해서 마련된 호피 의자에 앉는다.

그 가죽이 얼마짜린 줄 알고!

옷에 묻은 지푸라기는 물론 흙조차 떨지 않고!

"이보시오!"

황전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하려는데,

"여기 용정차 한, 아니 세 잔!"

차 마시는 다루(茶樓)도 아닌데 다짜고짜 차 심부름을 시킨다.

황전의 나이 올해 쉰을 넘었다.

어린 도사 놈들이 뭐 이렇게 싸가지가 없지?

하지만 손님 접대에 오랫동안 단련되어 온 황전은 가까스로 화를 삭이며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이보시오. 도사님들,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비 무인을...."

황전이 여차하면 강제로 쫓아낼 생각으로 말하려는데 진무가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청우!"

"예, 사숙!"

"올려."

텅!

들고 온 궤짝이 탁자 위에 올려졌다.

"열어!"

덜컥!

궤짝의 뚜껑이 열리고,

"...."

황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렇다.

복되고 찬란한 황금빛 물결이 온 방 안을 채운다.

꿀꺽.

절로 침이 목울대를 넘어갔다.

'재, 재신이다. 재신이야!'

황전은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전장의 벽면에 설치된 손잡이를 잡고 미친 듯이 당겨 대었다.

짜라라라라!

분명 종소리라 함은 '짤랑'일 텐데.

얼마나 열심히 당긴 것인지 소리가 끝을 맺지 못했고,

어느새 일어난 전장의 직원들이 진무 일행이 앉은 탁자로 차와 음식을 날라 왔다.

"이놈들이! 감히 재신님께 이따위 차를 가져와? 서둘러 서호용정(西湖龍井)으로 바꿔 오지 못해!"

"이놈들! 다과가 이게 뭐냐! 최고급이다! 최고급으로 가져와!"

"네 이년! 어서 귀인분들의 어깨를 주무르거라! 얼굴에 저리 피곤이 묻어나시거늘!"

황전은 일인 삼 역을 하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경건한 모습으로 진무 일행이 앉은 탁자로 다가왔다.

털썩.

쉰이 넘은 나이였지만 그는 여전히 일선에서 뛰고 있는 전장의 지부장이었다.

나이?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전장에서는 돈이 곧 어른이고 신분인 법이다.

더욱이 무당이 아닌가.

이보다 확실한 신분도 없었다.

또 좀 불확실하면 어떤가? 진무 일행이 들고 온 궤짝의 누렁이라면 무려 일 년 치 거래금에 달했다.

"귀인!"

황전이 무릎을 꿇고 진무를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동림전장, 단강지부장 황전이 인사 올립니다."

동림전장 단강지부는 개점 이래 처음으로 이른 새벽 영업을 시작했고, 진무는 동림전장 단강지부에 처음 구좌를 텄다.

청상과 청우에게도 한 구좌씩.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입을 막기 위해....

32화

"크, 큰일 났습니다!"

우가장의 대사부 조방이 정문을 밀치고 뛰어들자 여유롭게 차를 마시던 우문흠이 눈살을 찌푸렸다.

"웬 소란인...."

"지금 현청에 난리가 났습니다."

"...?"

"공사척 패거리와 청양상단이 모조리 현청에 압송되었습니다."

우문흠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차근차근 설명해 보게!"

"관군이 청양상단과 사척파의 본거지를 지키고 있어서 정확한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난밤에 밀거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미, 밀거래?"

"예."

골이 아파 오는지 우문흠이 이마를 짚었다.

청양상단이 밀거래에 손을 대고 있음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필이면 지금이란 말인가?

가만, 그런데.

"공사척 패거리까지 잡혔다고?"

"예. 듣기로 일망타진되었다고 합니다."

"그게 뭔...."

"밀거래 현장에서 함께 잡혔다고 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나 청양상단과 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무슨 뜬금없는 개소리란 말인가?

진무 일행을 뒤쫓고 있어야 할 공사척이 어찌 청양상단의 밀거래에 끼어들었단 말인가?

더구나 진무 일행을 죽이기 위해 함정을 판 것이 이틀 전 밤이었다.

밤, 낮과 다시 밤을 지났다.

고작 만 하루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조방 역시 자세히는 모르는 눈치였다.

'이런 젠장. 놈들이 입을 다문다면 모르겠으나 우리가 의뢰한 내용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더럭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진무 일행이 도망쳐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무당에 알리고, 무당에서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하기라도 한다면?

무당에서 자신들이 청부의 뒷배라는 것을 알면 우가장은 물론 진혜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다.

사형제의 목숨을 노리는 것.

중원의 모든 문파가 가장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일이었다.

파문을 당하는 것은 물론 사지근맥이 잘려 폐인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진혜는 우가장의 역사를 이끌어 갈 꿈과 희망이었다.

우가장이 무당에 추궁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이, 일단 증거를, 어떻게든 증거를 인멸해야 한다. 그리고 진혜는 몰랐던 것으로 해야 해. 우리가 몰래 일을 꾸민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문흠의 눈에 시퍼런 불길이 치솟았다.

'금적산, 공사척. 서둘러 그 두 놈을 죽여야 한다. 그놈들의 입만 막으면 되는 일이야.'

결심을 굳힌 우문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히 지현대인을 만나야겠다. 자네는 이 길로 진혜에게 연락을 보내고, 무당의 동태를 살피게. 또한 청양상단과 공사척과 관련된 모든 증거를 소각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조방에게 명령을 내린 우문흠은 서둘러 채비를 갖추고 무인 다섯을 대동해 현청으로 달려갔다.

* * *

쩔거럭.

묵직한 전낭의 느낌에 진무는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조사를 해 보니 수배 중인 놈들이 꽤 있더군요. 이팔룡이도 있고."

"이십 냥!"

"예?"

"흠흠, 아닙니다."

이팔룡이 끼어 있었다니. 현상금 이십 냥이 추가되었다.

"어쨌든 다 해서 모두 이백 냥이 조금 못 되지만 제가 도장의 노고에 조금 더 넣었습니다."

판관 오맹달의 말에 진무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관인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구나.

"하면 밀거래 포상금은...."

"아, 그건 큰 공을 세우신 지현대인께서 도장을 직접 만나 뵙고 드린다고."

"그렇습니까."

"예. 지금 기다리고 계실 겝니다. 함께 가시죠."

"예."

이미 포목점에 들러 번쩍번쩍한 새 도포로 갈아입은 참이었다.

포목점 주인의 배려로 발에 꼭 맞는 새 신까지 신으니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 발걸음이 가볍다.

막 그들이 현청의 본관으로 갈 때쯤, 우문흠과 우가장의 무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우가장주님 아니십니까?"

우가장주?

오 판관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 진무의 눈에 매서운 빛이 스쳤다 사라졌다.

"아, 오 판...관."

고개를 돌렸던 우문흠이 진무 일행을 보고 순간적으로 표정이 경직되었다.

무당의 복장을 한 세 명의 도사.

지금 단강구에 있는 도사들이 진무 일행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놈들이 어찌 현청에?'

처음은 놀람이고, 뒤이은 것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모른 척 오 판관에게 물었다.

"이분들께서는?"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소문이요?"

"예. 지난밤에 밀거래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청양상단의 꼬리를 잡은 게지요. 그런데 이 미친놈들이 글쎄 화약까지 거래했지 뭡니까. 어쨌든 무당의 도장들 덕에 일망타진했고, 지금 정 판관이 관군을 이끌고 구매하려던 놈들을 쫓고 있는 중입니다."

진무 일행이 밀거래 현장을 덮쳤다고? 그들이 어찌 알고?

설마 금적산, 그 멍청한 놈이 밀거래를 하는 사실을 이 어린놈들에게 들켰단 말인가?

"그리고, 밀거래뿐 아니라 공사척 패거리까지 일망타진할 수 있게 되었지 뭡니까. 지역 상인들의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놈들이 나쁜 짓을 좀 많이 했습니까? 다들 무당의 이름을 칭송하느라 바쁘더군요. 어찌 되었든, 이참에 그놈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비리 관료들까지 쳐 낼 수 있게 되어 지현대인께서 크게 기뻐하고 계십니다."

쉬지 않고 나불거리는 오 판관의 모습에 우문흠은 눈가가 찡그려지려는 것을 애써 참아 내며 미소를 머금었다.

"대, 대단합니다. 관에서 수년째 하지 못한 일을... 역시 무당의 도장입니다."

우문흠은 겉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진무 일행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들이 배후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사척과 금적산은 어디까지 말했을까?

"예. 대단하지요. 저도 놀랐습니다. 근래에 무당파가 대외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말이지요."

그사이 진무도 우문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가장, 안 그래도 반드시 한번 만날 생각이었다.

공사척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청부한 곳. 그곳의 주인이라는 놈. 이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하지만 들어 본 적도, 본 적도 없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자신과 무슨 원한이 있어서 자신들을 죽이려 청부를 했을까?

"아, 그러고 보니 아드님이 무당의 제자라 하지 않았습니까?"

오 판관의 말에 진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들이 무당에 있다고?

"그, 그렇습니다."

표정을 감추고 있던 우문흠이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도명이 뭐랬지요?"

우문흠은 눈치 없는 오 판관으로 인해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아 참! 내 정신 좀 보게. 지현대인께서는 어디 계시오? 내 급히 만나야 할 일이 있는데."

우문흠이 다급히 화두를 돌렸지만,

"아! 진혜! 진혜 도장이라고 했지요?"

"...."

"진자 배의 항렬이니 진무 도장의 사형이겠군요."

우문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고, 진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진혜.

그렇군.

진무는 머리가 확 하고 맑아지는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정말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일이었다.

대제자를 꿈꾸는 진혜.

애초에 청양상단과 진혜의 결탁을 알고 있었던 그였다.

그의 가문인 우가장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다면 응당 진혜를 먼저 떠올렸어야 했다.

'이 새끼가 대제자가 되려고 사형제를 죽이려고 해? 제 집안까지 동원해서?'

이런 비열한 새끼들.

하마터면 진짜로 죽을 뻔했지 않은가?

확 이 자리에서 그냥.

하지만 가만.

죽이는 건 너무나 쉽다.

죽이고 나면 크게 쓸모가 없지 않은가?

이미 약점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이런 비열한 놈들은 자고로 옆에 두고 쓰는 게 좋다.

제 뒤가 구린 놈들은 이용 가치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을 잘 듣는 편이다.

더구나 무당의 일대제자 중 한 명이 아닌가? 어쩌면 진무가 대제자가 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크크크, 이 새끼들. 너희의 비열함을 제대로 이용해 주지.'

진무는 어떻게 하면 그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또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진무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우문흠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진혜 사형의 아버님인 줄 몰랐습니다. 무당의 진무가 인사를 여쭙니다."

"아, 그... 허허, 이리 만나게 되어 반갑네. 우가장을 맡고 있는 우문흠일세."

설마 모르는 것일까?

우문흠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인 것 같았는데 이리도 순박하게 웃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함께 가시지요. 이번 일로 포상금을 주신다 하여 지현대인을 뵈러 가는 길입니다."

"아, 그, 그러세."

진무가 앞자리를 청하자 우문흠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오 판관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그 뒤로 진무의 음흉한 표정은 보지 못한 채.

'젠장, 하필이면....'

진무의 속을 알지 못한 우문흠은 답답하기만 했다.

지현을 만나는 동안에도 이미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두둑하게 포상금까지 챙기며 지현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우문흠은 웃기만 할 뿐, 자신이 할 말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공사척과 금적산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우가장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는가였다.

그리고 만약 참형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은밀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참, 공사척 그놈이 우가장에서 진무 도장을 죽이라 청부를 받았다고 하던데."

"예에?"

지현의 말에 순간 우문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불었다고? 전부? 다?

한발 늦었다.

우문흠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도 들었습니다만 아마 거짓말일 겁니다. 우가장은 동문 사형의 가문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갑자기 진무가 우문흠의 편을 들어 주었다.

"하긴, 진무 도장께 이용당했다고도 하더군요. 금적산이 도장께서 자신의 돈을 가로챘다나 뭐라나."

"그럴 리가요. 도사가 무슨 돈이 필요하다구요. 저로 인해 잡혔으니 나쁜 놈들이 어떻게든 복수를 해 보려 발악하는 것이지요."

진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쯧쯧, 하긴. 그도 그럴 겝니다. 무당의 도사들이 청렴한 것이야 세인들이 다 아는 사실이거늘. 허헛."

지현의 말에 진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고, 시선이 마주친 우문흠이 어색하게 웃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보다, 이번 일로 지주(知州)대인께서 무당에 큰 감사를 표하셨습니다. 국법으로 엄히 금하고 있는 화약 밀거래인지라."

지주는 지현의 상위 관직이었다.

"별말씀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어떠십니까? 지주대인께서도 뵙고 싶어 하시니 현청에 잠시 기거를 하시는 것이."

지현의 말에 진무가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민생 안정에 도움을 드린 것뿐인데 관에 폐를 끼칠 수야 없지요. 때마침 동문 사형의 아버님을 뵈었으니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잠시 기거하다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 우가장에요?"

"예."

진무와 지현이 동시에 우문흠을 바라보았다.

"어, 허허. 저희야 다, 당연히."

수락할 수밖에.

망할....

우문흠으로서는 욕설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미 공사척이 진무에게 모든 것을 분 뒤였다.

그럼에도 '거짓말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향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음흉스럽게 웃는 진무였다.

'이, 이놈. 무슨 생각인 게냐?'

33화

현청에서 돌아온 우문흠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좀처럼 불안감을 떨치지 못해 다섯 살 때 이후로 처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금적산과 공사척을 죽여 입을 막는 것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그 입 싼 놈들이 모든 것을 불어 버린 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그들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청양상단이 하필 화약을 거래하는 바람에 현청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관심을 가진 사건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죽는다면 끝까지 사건을 파헤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놈의 표정.'

우문흠은 진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대놓고 자신을 향해 음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뭔가 노림수가 있음이 분명했다.

'제길...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아들의 경쟁자를 처리하려다가 약점만 제대로 잡힌 꼴이 되고 말았으니,

우문흠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장주님."

"뭐냐!"

밖에서 들려온 시비의 목소리에 우문흠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는데, 허락도 받지 않고 방문이 열렸다.

"접니다."

"...!"

진무.

그가 찾아왔다.

우문흠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진무가 의자에 앉아 청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주위를 좀 물려 주시겠습니까?"

"...."

"어서요."

생글거리며 웃는 진무를 노려보던 우문흠이 밖을 향해 외쳤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장주님."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허락이 있을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

"예."

명령을 내린 우문흠은 진무를 노려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우문흠이었다.

원래 구린 놈일수록 더 조급한 법이니까.

"어허허허. 바로 올 줄은 몰랐는데."

우문흠은 일단 표정을 감추고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지켜보려 했다.

그런데,

"처웃고 지랄이야."

"...."

"썩을. 서로 알 만한 사이에 같잖은 연기 그만하지?"

대뜸 반말이다.

진무가 나른한 표정으로 우문흠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아는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네놈.... 무슨 생각이냐?"

"꼭 뭘 해야 하나?"

"뭐, 뭣이?"

"이봐. 우 장주. 아니 우문흠."

이젠 대놓고 이름을 불러 댄다.

"어린놈이 감히!"

"하, 지금 이 마당에 나이나 따질 정신이 있나 보지?"

"뭐...."

"잘 들어. 너는 지금 아들놈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무당의 일대제자 하나와 이대제자 둘을 죽이려고 했어."

"다, 닥쳐라. 이놈. 그건 분명 네 입으로...."

"닥쳐야 할 건 너지."

"뭣이?"

"내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고 생각하나?"

"...."

"고작 놈들의 몇 마디 말 때문에?"

우문흠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공사척에게 장부가 있더군."

"자, 장부!?"

우문흠이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거, 거짓말! 거짓말 마라."

당연하지. 물론 거짓말이다.

장부?

그따위 게 있을 리가 있나.

우가장이 진혜의 가문이라는 사실도 현청에서야 알았다.

하지만 절대로 티를 내서는 안 될 일.

모든 위협은 상대가 믿게끔 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법이었다.

"거짓말 같나?"

진무가 짐짓 비웃음을 머금으며 우문흠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제법 효과가 괜찮았다.

"...뭘 원하는 것이냐."

"무당의 대제자 자리."

"그, 그건."

그저 경쟁자라고만 생각했으나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고민할 여지가 있나 보지? 만약 내가 장부를 관과 무당에 보이고, 나와 사질들의 살인 청부의 뒷배에 우가장이 있다고 고하면 어찌 될까? 물론 진혜도 이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이야."

진무의 말에 우문흠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협박이다.

그것도 자신의 우려를 명확하게 관통한.

빌어먹을, 어린놈이 자신들의 약점을 틀어쥐고.

당장이라도 쳐 죽이고 싶었으나 그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진무가 우가장에 머물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죽는다면 책임은 모두 우가장에 돌아오게 된다. 그렇다고 놈의 뜻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장부가 밝혀지면....

진퇴양난, 사면초가였다.

"어때? 결정을 내렸나?"

"어떤 도움을 원하는 것이냐?"

"진혜의 전폭적인 지지."

우문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들을 대제자로 만들어 보려던 우가장의 계획이 영영 물 건너가는 순간이었다.

"도움의 여하에 따라 진혜에게 무당 장문인의 자리를 약속하지."

"자, 장문인이라고?"

우문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된다.

장문인의 자리를 진혜에게 준다면 뭐 하러 자신이 대제자가 되려 한단 말인가?

하지만 진무의 표정에는 어떠한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대제자 자리에 오르려는 자가 무당 장문인의 자리를 내어 주겠다고?"

"무당 장문인 따위."

"...."

"나는 대제자만 되면 된다. 그 이상은 필요 없어."

우문흠은 도무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무당 장문인?

그까짓 귀찮은 자리를 뭐 하러 맡는단 말인가?

진무가 원하는 건 오직 양의심공이다.

또한, 그를 발판으로 무당을 넘어 정무맹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무당 장문인의 자리는 그저 통과점이자 귀찮은 직책일 뿐이었다.

차라리 아주 뒤가 구리고 비열한 진혜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훨씬 낫다.

진무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우문흠은 한참 만에 입을 떼었다.

"네놈을 어찌 믿지?"

"어떻게 믿냐고?"

진무가 우문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이봐 우문흠. 그따위 건 선택 사항에 없어. 내가 지금 말하는 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야. 만약 거부한다면 여기서 우가장을 모조리 박살 내 버릴 생각이거든."

"뭐, 뭐라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일대제자라고는 하나 약관도 안 된 나이가 아닌가?

이미 현기의 중반에 오른 자신이었고, 우가장은 수많은 무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무얼 믿고 이리도 오만하단 말인가?

"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런 기회를 주는 건 딱히 우가장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야. 그저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지."

"어린놈이 기껏 조그마한 실력이 있다고...."

순간 우문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싸늘해지는 진무의 표정과 함께 방 안을 가득 짓누르는 기세.

'우웁! 이, 이런.'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짙은 살기와 함께 숨이 막혀올 정도의 위압감이 진무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공사척이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고 청양상단을 습격한 것 같나?"

"...."

우문흠은 진무의 기운에 짓눌려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에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았다.

서, 설마 두려움을 느끼는 것인가?

이 어린 도사에게?

"공사척은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죽이지 못한 거야."

"그, 그럴 리가...."

"하긴,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지."

진무가 더욱 싸늘해진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파삭.

"...!"

그저 일어나기만 했음에도 유형화된 살기가 사방을 헤집기 시작했다.

급기야.

퍼억!

우문흠과 진무의 사이에 놓여 있던 탁자가 강한 압력에 짓눌리며 반으로 갈라져 가라앉았다.

"으으으...."

우문흠은 온몸의 내기를 끌어 올렸음에도 진무가 뿜어내는 압력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반면 진무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서, 설마 탄기? 아니, 그 이상의 경지란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진무의 나이가 너무나 어렸기 때문이다.

턱.

진무의 손이 우문흠의 어깨에 가볍게 얹혔다.

투두둑!

순간 어깨를 짓누르는 가공할 힘에 앉아 있던 의자가 부서짐과 동시에, 우문흠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끄으...."

억눌린 신음을 토해 내는 우문흠을 향해 진무의 얼굴이 다가왔다.

'허억!'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사람을 죽여 본 자들만이 가지는 그런 눈빛.

그것도 한둘이 아닌, 수라의 전쟁터를 지나온 그런 공포스러우리만치 무심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귓가에 다가온 진무가 차갑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혜의 도움.... 기대하지."

"...."

그와 동시에 손이 떨어지고, 방 안을 가득 채웠던 기세가 자취를 감췄다.

"그럼."

진무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그의 거처를 나갔다.

하지만,

진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이 거칠어지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손끝이 잘게 떨렸고 후들거리는 다리에는 힘이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

무당의 일대제자 진무.

그는 도사가 아니었고, 자신의 상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마치 자신을 죽이러 온 사신 같았고, 아가리를 크게 벌린 범 같았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고였던 침이 목이 아플 만큼 크게 목울대를 넘어갔다.

"장주님!"

진무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다는 시비의 보고에 조방이 급히 뛰어들었다.

방 안 곳곳에 새겨져 있는 흔적.

반으로 쪼개진 책상.

부서진 의자와 함께 주저앉아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문흠.

"장주님!"

조방의 두 번째 부름에서야 정신을 차린 우문흠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 지필묵을... 진혜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예?"

조방은 돌아가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이튿날, 진무는 우가장을 떠나 무당으로 돌아왔다.

내려갔던 길에는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으나, 돌아오는 길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침에 출발한 걸음이 저녁나절이 되어 무당에 도착했다.

그가 온다는 소식에 진허가 미리 나와 자소궁의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무 사제!"

"어?"

반갑게 맞이하는 진허의 모습에 진무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이놈, 사형이 인사를 하는데 '어?'가 뭐냐."

진허가 짓궂게 진무의 어깨를 감싸 쥐며 머리를 헝클었다.

한 번 더 줘 패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는 진무를 진허가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고생했다."

"...."

"녀석, 네가 무당의 의기를 제대로 세웠구나."

도무지 뭔 말인지.

그리고 이제 좀 떨어져라, 새끼야. 가슴에 푹신함도 없는 자식이 징그럽게.

진무의 바람과는 달리 진허는 한참 동안 진무를 끌어안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리곤,

"너희도 수고하였다. 녀석들, 어느새 이리도 컸구나."

진허가 청상과 청우를 푸근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 들어가자. 장문인과 장로님들, 사형들이 한참 전부터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니라."

응? 왜? 귀찮게시리....

진무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무당파의 도사가 아니던가.

진무 일행이 진허를 따라 자소궁의 대전으로 들어가자 모두가 반갑게 맞이했다.

물론 반갑지 않은 놈도 있었다.

명공의 뒤에 선 진혜가 진무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지금쯤 은밀히 제 아비의 연락이 닿았을 텐데.

역시나 굳이 우가장을 내버려 둘 필요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확 그냥 저 눈깔을!

진무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며 진혜를 노려보는데,

"진무는 엎드려 돌아왔음을 고하여라."

스승 명진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예. 스승님."

진무는 여전히 스승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망할 도동 놈의 기억. 언제쯤 없어지려나.

"무당의 일대제자 진무, 장문인과 장로님들께 인사를 여쭙니다."

진무가 청상, 청우와 함께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자 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미 단강구 지현대인께 너의 활약을 전해 들었음이다."

자식들, 소식 한번 빠르네.

"네가 아니었다면 청양상단의 본모습을 모르고 큰 우를 범할 뻔하였구나. 고생하였다."

"아닙니다. 무당의 제자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또한, 단강구의 뒷골목을 어지럽히던 무뢰배들을 모두 소탕하여 무당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니 그 또한 대단히 장한 일이니라."

명현의 말에 장로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명진이 흐뭇해하니 왠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 같았다.

말코 도사 놈들 좋아하기는.

뭐, 그래도 나쁘진 않네.

"그나저나 청양상단이 주고 간 돈을 쓸 수가 없음이니... 응당 관에 돌려주어야 함인데."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 문파의 내부 살림을 담당하고 있는 원화관주 명선이 아쉬움이 가득한 투로 말했다.

"그래도 듣자 하니... 네가 현상금을 받았다고...."

"...."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리를?

설마 감히 나한테 돈 달라는 거야?

이게 뒈질....

"허허, 걱정 마십시오. 사형. 청양상단의 일은 아쉽게 되었으나 우리 진무가 무뢰배를 잡고 문파를 위해 받아 온 현상금이 아닙니까? 진무야. 받아 온 돈을 명선 장로께 가져다드리도록 하거라."

누가! 왜! 어째서!

하지만, 사부인 명진의 말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마음과는 달리....

"예. 사부님."

절대로 원하지 않은 말이 나옴에 마음속 깊이 눈물을 흘리는 진무였다.

34화

타닥, 타닥.

청상과 청우가 외유 때 사용했던 물건을 반납하러 간 사이에,

모처럼 돌아와 충허암에서 사부의 식사를 준비하던 진무는 매운 연기가 들어갔는지 눈물을 흘렸다.

씨발, 씨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애먼 놈이 챙겨 간다더니....

다 뜯겼다.

은자 이백 냥과 포상금까지.

망할 판관 놈이 정확하게도 이야기한 탓이다.

명진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진무는 전장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 냥짜리 전표로 바꿔 온 그 돈을 통째로 명선에게 가져다 바쳐야 했다.

다행히 청우와 청상이 입을 다물어 준 덕분에 전장에 맡겨 둔 황금 열 관은 무사했다.

그래도 소중한 살점이 통으로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망할 도사 놈들. 감히 사파의 지존이었던 이 몸에게 삥을 뜯다니.

역시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하아."

진무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아궁이 속에서 번져 오는 연기에 연신 눈물을 닦아 내었다.

그러다 문득,

'그 노인네.'

무월루에서 만났던 의문의 노인이 생각났다.

정체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파나 일월마교의 인물이 아니다. 정파의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런 식이었나?"

진무가 자신의 손을 들어 묘하게 움직여 보았다.

노인이 자신을 향해 뻗어 내었던 일장.

어떠한 준비 동작도 없이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던 팔을 단숨에 뻗으며 비튼다.

휘릭! 팡!

내기가 실리지 않았음이나 대각선으로 당겨졌다 내질러지는 손의 움직임이 꽤 빨랐고,

극점에서 때려 낸 허공이 가죽 북 터지는 소리를 만들었다.

"흠, 이게 아닌데... 이거였나?"

진무는 연신 같은 듯 다른 방법으로 계속해서 허공으로 뻗었다.

휙, 휙휙휙! 팡! 파파팡!

하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진무의 미간은 점점 찌푸려졌다.

"젠장, 왜 똑같이 안 되지?"

분명히 보았다.

아직 이룩한 경지가 낮아 부딪히는 순간 내상을 입기는 했으나, 장력을 펼쳐 내던 움직임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흉내는 낼 수 있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정확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장법이었어. 기본을 깡그리 무시한.'

일반적으로 장법의 기본은 당김으로 기를 모으고 뻗음으로 폭발시키는 것이다.

물론 문파별로 변화를 주거나 비틀어 회오리를 만드는 등으로 발전을 시키기는 하지만, 기본을 깡그리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공에 다양한 변화를 주는 것이 특기인 진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노인의 장법은 그 기본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당기고 모으는 동작을 생략하고 곧바로 폭발시킨다. 짧지만 두 가지 동작이 빠져 간결하다. 그럼에도 위력이 넘쳤다.

"흐음."

한참을 손을 놀리던 진무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이거 쉽지 않네."

진무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사파의 무공으로 절대의 위치에 있었던 자신임에도 똑같이 시전해 낼 수 없자 묘한 호승심이 끓어오른다.

무당의 무학을 익힌 지 어느덧 일 년.

제법 재미를 느끼고 수련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나름의 발전은 이루었으나 탄기의 경지에서 정체되었다.

사파의 무공과 달리 정파 무공의 핵심은 '깨달음'.

정파 무인들이 사파 무인에 비해 수련 시간이 길면서도 성취 속도가 낮은 이유였다.

이른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그것 앞에 수많은 이들이 좌절을 한다.

하지만 그 벽을 넘는 순간, 착실하게 다져 온 내공이 그 깨달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순식간에 확장되어 엄청난 발전을 이룬다.

벽을 넘은 자와 넘지 못한 자.

그것이 정파 무인의 경지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그렇기에 무작정 내공을 쌓는다 해서 정비례로 성장하지 않는다.

계단식 발전을 느리게 거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했다.

정사마가 가진 무공의 종류는 수천, 수만 종에 달했으나 그 마지막은 하나로 귀결되는 법이었다.

진무는 그 마지막에 가장 근접해 있었던 이였다. 이미 기공 무학의 종점이라는 '강(罡)'의 경지를 이룩했으니까.

그러니 더 이상 깨달음의 벽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깨달았으니 발전도 없다.

그렇기에 무당의 모든 무공을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원숙하게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내공의 확장을 이룰 수가 없었다.

즉, 모을 수 없으니 깨달음을 펼쳐 낼 내공이 부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늦어!'

자신이 익히고 있는 육양신공.

이 미친 심법은 기껏 개고생을 해서 내공을 모아 놓으면 운기를 할 때마다 연단되어 선기만 남기고 불필요한 내공을 흩어 버린다.

그것도 대부분을.

내공은 갈수록 정순해지지만 쌓이는 속도가 극악할 정도로 느리다.

진무는 한 번도 수련을 게을리해 본 적이 없었다.

근래에 일이 있어 조금 나태해지기는 했으나 언제나 새벽같이 일어나 운기를 하고 점심 먹고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운기를 했다.

하루 세 번.

절대 빼먹지 않은 일상이지만,

모으고, 연단하고, 버리고....

이게 무슨 짓거리인지.

차라리 익숙한 묵룡혼원공을 익혔다면 과거의 경지까지는 아니어도 무당 장문인쯤은 뼈와 살을 발라 놓을 정도로 성장했어야 했다.

"하아."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노인을 만난 이후 진무는 더욱 강해질 필요성을 느꼈다.

오랫동안 무림을 살아오며 진무가 느낀 핵심은 '약하면 죽는다.'였다.

시비가 끊이지 않는 곳이 무림이었다.

그런 곳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면 마땅히 강해야 한다.

무공을 수련하는 목적도 거기에 있었다.

강한 것이 곧 정의(正意).

그것이 진무가 가진 무인으로서의 가치관이었다.

어차피 앞으로 대제자가 되려면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나아가 정무맹을 손에 넣자면 사패천주 혁련무강, 아니 그보다 더 강해져야 할지도 몰랐다.

뼈마디가 튼튼한 젊은 몸을 얻었으나 내공이 부족했다.

무당의 보물이라는 태청신단(太淸神丹)이라도 훔쳐 먹어야 하나?

그랬다간 좀생이 같은 도사 놈들이 당장에 때려죽인다고 길길이 날뛰겠지.

망할 놈의 도사들.

결국, 답은 양의심공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전에,

초식?

무당의 무공?

그딴 것에 대한 수련은 진무에게 전혀 필요가 없다. 이미 다 아는 걸 뭘 굳이.

'이제부턴 모든 수련 시간을 축기(蓄氣)하는 데만 때려 박는다.'

진무가 앞으로의 수련을 다짐하는데,

"진무야."

방 안에서 명진이 불렀다.

"예. 스승님!"

"식사는 멀었느냐?"

"아닙니다. 들여가겠습니다."

진무는 서둘러 식사를 준비했다.

진무 일행이 돌아온 지 열흘.

충허암의 일상이 조금 변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청우와 청상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암자가 위치한 산자락 어귀까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들의 수련을 봐주는 것은 진무가 아닌 명진이었다.

돌아온 이후 충허암 인근 암묘에서 내공 수련에만 전념하고 있는 진무를 대신해 수련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병약한 명진이었으나 봄을 지나며 날이 제법 풀리기도 했고, 육식을 시작한 이후 갈수록 기력이 좋아진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막 수련을 끝내고 돌아온 진무가 청우, 청상과 함께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데,

"사숙!"

한참 수련이 이어지는 가운데 진허가 숨이 턱까지 차오른 모습으로 충허암으로 달려왔다.

"오, 진허냐. 한데 어찌 그리 급한 게야?"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진허는 청우와 청상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서둘러 채비하셔야겠습니다."

"채비?"

"예. 장문인께서 속히 사숙과 진무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너희들도 어서 채비하거라."

장문인이?

아놔 이것들이 진짜, 다 뒈질라고.

필요하면 제 놈들이 찾아오지, 어디 귀찮게 사람을 오라 가라야?

하지만 스승도 함께 가야 한다 했고, 일단 대제자가 되려면 명현에게 잘 보여야 했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급히 찾는단 말이냐?"

"그게, 지금 본산에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

"예. 하여간 진무 이 녀석 때문에. 허참."

말은 탓하는 어조였지만, 진허는 꽤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딱히 나쁜 일은 아닌 듯했으나 영문을 모르는 명진이 진무를 보았다가 다시 물었다.

"진무가 왜?"

"일단 가 보시면 압니다. 서두르시죠."

진허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싱글거리기만 했다.

이 자식이. 스승님 말씀하시는데 싸가지 없이.

하지만 스승도 딱히 말이 없고 가끔 제 편을 들어 주는 진허였다.

아무 일도 아니기만 해 봐라.

* * *

"이 무슨?"

자소궁으로 들어서던 명진이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당황하여 눈을 끔벅거렸다.

"하하, 대단하지요?"

진허가 제 허리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젖혀 웃었다.

자소궁의 대연무장.

길게 늘어선 줄.

몇 되지도 않는 무당의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뭔 잔치라도 하는 건가?

그런데 희한하게 다들 줄을 서서 기대감이 잔뜩 어린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줄의 맨 앞에 있는 도사들이 팔을 벌리고 있었고, 처음 보는 이들이 자를 대어 품을 재고 있었다.

"이게 뭔?"

명진이 대답을 요구하는 사이에 밖에 나와 있던 장문인과 장로들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어서 오게."

장문인 명현의 얼굴이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허헛, 이 사람. 이게 다 진무 때문이 아닌가."

"예?"

명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보았지만, 진무 또한 알 길이 없었다.

"허허, 이 녀석. 모른 체할 참이냐?"

뭘 자꾸 허허거려?

그리고 뭘 모른 체한다는 거지?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장문인과 장로들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허헛, 사형께선 정말 복덩이 제자를 두신 모양입니다."

원화관주 명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

"저들은 단강구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글쎄 저들이 우리 무당 제자들에게 새 도포를 맞춰 준다지 뭡니까? 관모에 신발까지 덤으로요."

도포?

당연히 새로 맞춰야지.

안 그래도 기워 입다 못해 죄다 해져서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정도로 낡았는데.

물론 진무와 청우, 청상은 이미 비단 도포를 입었으니 상관없지만.

그런데 돈이 어디서 났지?

설마 지난번에 나한테서 뜯어 간 이백 냥으로?

이 자식들이. 돈 좀 생겼다고 이리 흥청망청이라니! 개고생해서 번 돈을 아껴 쓸 줄 모르고.

진무가 발끈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명선이 환하게 웃었다.

"글쎄 전부 무상이라 하지 않습니까."

응? 뭐?

"이게 다 무상이랍니다. 장문인께서 민폐라며 극구 사양을 하셨는데 어차피 진무가 아니었다면 무뢰배들에게 빼앗겼을 돈이라며 되레 사정을 하는 통에."

뭐, 뭐라고?

그 말을 들은 진무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공사척 그놈의 횡포가 아주 대단하였던 모양입니다."

"...."

"진무 덕에 무뢰배들이 소탕되어 더 이상 보호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며 포목점뿐 아니라 단강구 대장간에서 무당의 무기를 전량 만들어 준다고 하지 뭡니까?"

무기까지?

"허허, 지금 것들도 쓸 만한데 모처럼 병기고가 가득 차게 생겼다고 옥허궁의 명원 사형께서도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습니다."

명선의 칭찬이 계속되고 명진의 얼굴에 흐뭇함이 늘어 갈수록 진무의 얼굴빛은 점점 더 검게 변했다.

"더 놀라운 사실이 뭔 줄 아십니까?"

또 있어?

진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지난번 청양상단에서 받은 돈을 관에 반납했는데 다시 돌려주더군요. 그 와중에 무당의 재정이 어렵다는 소문을 듣고 단강구에서 상점이며 객점, 주루를 운영하는 이들이 우리 무당을 돕겠다며 모금을 해 오지 않았겠습니까."

모, 모금이라고?

얼마나?

"놀라지 마십시오."

진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귀를 쫑긋하게 세웠다.

"자그마치 오백 냥입니다."

오, 오백 냥...이라고?

"그뿐입니까? 몇몇 상단에서 다시 무당과 연을 맺었으면 한다고 연락해 왔지 뭡니까? 그 때문에 벌써 진궁이 이대제자들을 이끌고 단강구로 내려갔습니다. 하하, 이게 모두 진무 덕분입니다."

진허의 흐뭇한 웃음에 진무는 불로초로 빙의되었던 영혼이 도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로 금의환향이 아닙니까."

금의환향(錦衣還鄕).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다는 뜻이다.

물론 비단 도포를 입고 돌아오기는 했다. 새로 맞췄으니까. 청우와 청상까지.

"진무야. 정말 수고하였다. 내 기쁘기 한량없구나."

"예. 사부님."

명진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대답은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은혜를 입었으면 응당 당사자에게 갚아야지.

왜 쓸데없이 제 놈들 마음대로 무당에 바친단 말인가?

지난번 이백 냥도 뺏겼는데.

내놔라. 이놈들아! 내 돈이다!

하지만, 그사이 그를 바라보는 장문인과 장로들의 눈동자에 담긴 사랑이 더욱 커져만 감을 진무는 알지 못했다.

그저 속만 쓰릴 뿐이었다.

35화

충허암으로 돌아온 진무는 한동안 암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연일 계속하던 심법 수련도 잠시 멈춘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내 돈....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피 같은 돈이.

그래도 어찌하랴.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일어나서 수련이나 해야지.

그런데 어째 오늘따라 청우와 청상이 수련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일까?

분명 진무를 대신해서 근래 명진이 그 둘의 수련을 돕고 있었는데.

진무가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밖에서 청우와 청상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근데 사형."

"응?"

"괜찮을까요?"

"뭐가?"

"동림전장에 맡겨 둔 돈 말입니다. 사조님들께서 저리도 좋아하시는데...."

"아, 그 돈 말이냐. 하나 사숙께서 달리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다 뜻이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응?"

"사숙께서 저희에게 만들어 주신 구좌의 돈만이라도 가져다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방음이 되지 않는 암자다.

청우의 목소리가 진무의 귓가에 때려 박히듯이 파고들었다.

이놈의 자식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진무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이제 겨우 잊으려고 했는데!

벌컥!

진무는 그대로 방문을 걷어찼다.

"어, 사숙?"

청우와 청상이 일어났다.

"뭘 가져다 바친다고?"

"예?"

청우가 멍하니 되묻는데 한기를 풀풀 풀리는 진무가 표홀히 날아올랐다.

쿠악!

"꽥!"

진무의 주먹이 청우의 투실투실한 살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감히 네놈이 내 재산을 탐내! 죽어라 이놈! 이 고기나 축내는 식충이 놈!"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진무의 손과 발에 청우는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았다.

그리고 청상은 그제야 진무가 동림전장에 맡겨 둔 돈을 사문에 고하지 않은 뜻을 깨달았다.

'아, 사숙께선 속됨을 배척하려 노력하시기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시는 거야. 세속에 속함으로써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도를 깨달으려 하시는 것이로군. 과연 사문에 말했다가는 다른 이와는 다른 도의 길에 제재를 받을까 우려하시는 게지.'

청우의 비명이 커질수록 도사로서는 초연해야 할 돈에 대한 탐욕이 깊이 느껴졌다.

그의 생각과 달리 진무는 그저 독식(獨食)하려는 생각뿐이었지만 청상의 오해는 깊어졌고, 청우의 고통은 더욱 심해져 갔다.

"후아!"

청우를 한참이나 두들겨 패던 진무가 손을 멈추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래도 원체 맷집이 좋아서인지 정신을 잃지는 않은 듯했다.

"응? 일어났... 청우는 왜 그러고 있느냐?"

"사, 사조님. 으흑흑흑."

잠시 출타했다 돌아온 명진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청우가 서러운 듯이 눈물을 흘렸다.

"사숙께서 청우에게 가르침을 주는 중이셨습니다."

"가르침?"

분명 맞은 모양샌데?

청우가 우는 것이 의아했으니 청상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니 명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은 게냐?"

"예. 스승님. 걱정을 끼쳤습니다."

"아니다. 내 며칠 두문불출하는 네가 걱정되었으나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되었다. 자, 오늘은 내가 꿩을 잡아 왔으니 다 함께 먹자꾸나."

"예? 직접이요? 그런 일은 저희에게 시키시지 않고요."

자신이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아 스승이 직접 꿩 사냥을 다녀왔다 하니 괜시리 미안해진 진무가 고개를 돌렸다.

이 자식들이 감히 스승님께서 직접 사냥을 다니시게 만들다니.

"청상, 청우."

"예, 사숙."

"불 피워. 물 끓이고."

"알겠습니다."

청상이 급히 뛰어가고 청우가 훌쩍거리며 뒤따랐다.

그래도 청우를 때렸더니 속은 좀 풀렸다.

종종 울적할 때 써먹을 수 있겠다. 맷집도 좋고, 투실해서 때릴 곳도 많다.

* * *

충허암의 시간은 꽤 빠르게 지나갔다.

단강구의 사건이 있은 지도 벌써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근래 몇 개의 상단과 연을 맺은 덕분에 바빠진 터라 충허암은 언제나처럼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간간이 찾아오는 진허를 제외하고는 근래에 무당이 바빠진 터라 찾아오는 이가 없었기에 수련에만 매진할 수가 있었다.

충허암 인근 삼공암묘.

언젠가부터 진무의 심법 수련장으로 정해져 버린 그곳.

진무는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심법 수련에만 할애하고 있었다.

평평한 바닥에 좌정해 운기를 하는 진무의 몸에서 청량한 선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자,

우-웅.

한 장 깊이로 파인 바위 굴이 미세하게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됐다.'

진무는 일주천을 마치고 단전을 채운 기운을 가늠해 보았다.

제법 늘었다.

진무가 수련한 심법.

육양신공은 무당의 대표적인 절학 중의 하나였다.

태극의 음에서 양의 기운을 끌어내는 독특한 심법.

진무를 살리기 위해 장문인과 장로들이 남겨 놓았던 진기였으나 쌓이고 연단되어 탄탄하게 영글었다.

'하아, 고작해야 사십 년의 공력인가?'

연단을 통해 정순해진 공력이니 갑자의 내공을 가진 사파 무인에 비견(比肩)해도 될 정도였다.

진무는 옆에 놓여 있던 검을 뽑아 앞으로 곧게 뻗었다.

찌이잉!

단전에 갈무리되었던 기운이 부드럽게 기맥을 휘돌아 주입되자 검날이 잘게 진동했다.

진동과 더불어 푸르스름한 선기가 검에 담겼다가 실처럼 자라나 무수히 일렁거렸다.

마치 푸른 바닷속에 자리 잡아 물결에 춤추는 해초 같았다.

탄기의 다음 경지인 의기(意氣).

기운에 뜻을 담는다.

즉, 기운을 자신의 생각에 맞춰 가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무가 펼쳐 낸 것은 검사(劍絲).

그 모양이 실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의기에 오른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강기를 흉내 낼 수 있는 기술이라 하여 거짓 강기(위강: 僞罡)라 불린다.

이때부터는 검기를 마음먹은 대로 가공할 수 있게 된다.

통상 검사를 쓰자면 보통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가져야 했다.

대문파의 장로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들이나 가능한 경지였고, 현재 진무의 내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과대한 깨달음이 내력이 모자람을 채워 검사를 구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젠장, 두 달이나 꼬박 수련했는데 고작 이 정도가 한계인가?'

진무가 기운을 모조리 끌어 올려 주입하자 검사가 사방으로 늘어나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이제 뭉쳐지기만 하면.'

취리릭!

진무가 정신을 집중하자 사방으로 뻗어졌던 검사가 검에 모여들어 촘촘한 거미줄처럼 감싸기 시작했다.

무릇 검을 만들 때는 불에 녹여 불순물을 제거한 철광석을 두들기고 접고 펴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과정이 수도 없이 반복되면 불순물이 빠져 더욱 순수해지고 강도는 원래의 그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지는 법이다.

흔히 '강'이라 불리는 기예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단전에서 연단된 공력을 실처럼 쪼개 검사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합치는 과정에서 응축되면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력한 위력을 가진 강기가 된다.

고수라 칭해지는 이들이 사용하는 검기가 가공되지 않은 물이나 불이라면 절대의 이름을 가진 이들이 사용하는 검강은 얼음이자 용암이었다.

검사의 응축.

진무는 지금 그 과정을 통해 강의 경지를 이루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하학!

얽히고설켜 검에 뭉쳐지던 검사가 단번에 풀려 버렸다.

"허억, 허억."

응축되는 마지막 순간에 흩어져 버린 것이다.

호흡은 거칠어졌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젠장."

내공이 부족했다.

검사가 응축되는 과정에서 그 외부를 억눌러야 하는 힘이 부족했다.

다시 운기를 해 공력을 모으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분명 수련을 통해 한 단계 나아갔으나, 강기를 이루기에는 부족했다.

정말로 일 갑자의 내공에 이르러야 가능할 모양이다.

"망할, 이거 원 어디 가서 영약이라도 처먹어야 하나."

육양신공.

망할 도가 심법 같으니.

"후우."

진무가 수련에 매진하는 사이 동굴 밖은 어둠이 깔려 오고 있었다.

번번이 실패를 해 버린 진무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언제나 이어지는 스승과의 식사시간.

수련과 함께 절대 빼먹지 말아야 할 진무의 일상이었다.

"차압! 하압!"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충허암에 돌아오자 청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칠성권을 수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팡! 파팡!

칠성보를 밟으며 연거푸 내지른 주먹이 허공을 경쾌하게 터트리는 소리가 충허암을 울려 놓았다.

이른 봄에만 해도 주먹에 기운을 싣지 못했던 청우였다.

새싹이 완연히 자라 무성해진 여름이 된 지금, 고작 육 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인데 발경을 제법 흉내 내고 있었다.

스승인 명진의 가르침이 있었다곤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청상의 경지와 비슷하게 올라서다니.

과연 도명을 받은 제자답다.

저 돼지 녀석이 그동안 고기만 처먹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청상은?

진무가 청우를 보며 조금 놀랐던 시선을 돌렸다.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 눈을 감고 사선으로 비스듬히 검을 늘어뜨린 청상.

분위기가?

어?

진무의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거, 검기?

청상의 검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던 기운이 조금씩 그 길이가 늘어나고 있었다.

확실하다.

검기다.

비록 아직 깨달음이 모자라 충검의 경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허허, 놀랍지 않으냐? 청우도 청상도."

"...."

어느새 진무의 곁으로 다가온 명진이 흐뭇하게 웃었다.

놀랍다.

자신이 심법 수련에 매진해 있는 사이에 저만한 발전을 이룰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나 청상의 재능은 놀랍더구나. 아직 벽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한 것 같으나 검기를 흉내 내고 있음이다."

"...."

"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재능이나, 능히 우리 무당의 든든한 핵심이 될 녀석들이야."

부족해?

그럴 리가요. 스승님.

진무는 혁련무강이었을 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스승인 명진?

아니 명현조차 그가 이루었던 경지를 흉내 낼 수 없다.

진무가 최근 검사의 경지에 오른 것은 절대에 도달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고작 약관을 넘은 나이였다.

비록 명진과 진무의 가르침이 있었다고는 해도 정해진 스승도 없는데 청상은 검기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정말로 천재였나?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어떠냐? 저 아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 네가 뚫어 주지 않겠느냐?"

"...."

명진이 은근하게 말했다.

청상이 넘어야만 하는 현기의 벽은 명진이 깨우쳐 줄 수도 있었다.

이미 한번 지나온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진은 청우와 청상을 진무가 제자로 삼게 하고 싶었다.

"제가요?"

"그래. 네가 도와주거라."

명진이 온화하게 웃는다.

왜? 뭐 하러 굳이.

하지만 스승이 말했고, 진무는 이미 청상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청상."

"아, 사숙."

수련에 집중하고 있던 청상이 급히 정신을 차리고 진무에게 인사를 했다.

아, 도와주고 싶지 않다.

청상을 수련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막상 잘되는 꼴을 보니 배가 아프다.

"묶어 두려 하지 마."

"예?"

"검은 유형이되 기는 무형이다. 굳이 검에 기를 묶어 두어 제한하지 마. 검은 그저 손의 연장이고 기운을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매개체일 뿐이야."

"아!"

진무의 말에 청상이 탄성을 질렀다.

말은 쉽지.

그러나 그걸 깨닫고 행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다.

알아듣지 못하게 최대한 어렵게 말하기도 했다.

깨닫지 못했으면 좋....

"우웩!"

갑자기 청상이 검은 피를 토하며 엎어졌다.

어? 벌써? 이렇게 쉽게?

"사형!"

수련하던 청우가 놀라 뛰어가려 하자 명진이 흐뭇한 얼굴로 막았다.

"헛헛, 그대로 두거라."

"예?"

청우가 걱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청상이 그 자리에 그대로 좌정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 앞에는 청상이 토해 낸 핏물을 그대로 뒤집어쓴 진무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서 있었다.

이놈의 자식이!

새로 맞춘 비단 도포에 피를!

36화

취리릿!

가을빛을 닮은 푸른 검기가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았다.

구름을 타고 흐르듯이 유려하게 흘렀다가 천둥처럼 호쾌하게 떨어진다.

청상의 손에서 펼쳐지는 유운검법은 검기를 깨달은 이후로 훨씬 더 정교해져 있었다.

아, 망할.

그냥 가르쳐 주지 말걸.

"청상아."

"예. 사숙!"

진무의 부름에 수련을 멈춘 청상이 밝은 얼굴로 달려왔다.

진무의 가르침으로 인해 현기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대제자들은 상대도 안 되고 일대제자와 비견될 정도의 실력이었다.

만약 진무를 만나지 못했다면 절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허니 진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야 오죽할까.

"멧돼지."

"예?"

"잡아 와."

"아직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인데요?"

그렇다.

아침을 먹은 지 아직 한 시진밖에 되지 않았다.

진무는 괜한 배가 아파 심술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은 강의 경지에 아직 올라서지 못했는데 저 자식은 말 한마디에 검기의 경지에 떡하니 올라서다니.

"익히려면 오래 걸려."

"아,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청상은 군말 없이 수련을 멈추고 진무의 말에 따랐다.

"청우야, 가자."

"아니! 너 혼자."

"예?"

"혼자 가라고!"

진무가 신경질을 부렸지만.

'아, 청우에게 수련 시간을 더 주려고 하시는구나. 사숙의 저런 마음 씀씀이란. 커다란 놈을 잡아 와서 사숙의 은혜에 작게나마 보답해야겠다.'

청상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산 아래 숲으로 달려갔다.

"청우야."

"예! 사숙!"

청우는 청상 홀로 식사 거리를 준비하러 보내는 진무의 모습에 기대감을 품고 대답했다.

혹여 수련이라도 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무가 자신의 도포를 벗었다.

"깨끗이 빨아 와."

"예?"

"핏자국 하나도 남지 않게."

"...예."

청상의 각혈이 선명히 남아 있는 도포였다.

핏자국은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하필이면 사형은 사숙 방향으로 각혈을 해서는....'

청우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도포를 받아 들고 개울가로 뛰어갔다.

이러다가 점점 더 무공이 세지는 거 아냐, 설마? 내 자리를 위협하는 건 아니겠지?

자고로 대가리가 굵으면 말을 듣지 않는 법이다.

안 되겠어. 이놈의 자식들. 이제부터는 체력을 단련시켜야겠어.

진무가 이룩한 의기의 경지에 오르려면 아무리 뛰어난 청상이라 해도 두 번의 벽을 더 경험해야 했다.

성취 빠른 청상이라고 해도 진무의 경지를 따라잡기는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무는 더욱 열심히 심법 수련을 해야겠다는 다짐과 더불어 청우와 청상의 수련을 방해해야겠다 생각했다.

진무가 중얼거리며 모닥불을 만들 나무를 준비하는데 충허암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무야, 잘 지냈느냐?"

"어?"

장문인 명현과 장로들이었다.

이것들이 떼거지로 웬일이지?

"어쩐 일이세요?"

"이놈, 어쩐 일은. 아무리 근래에 바빠서 찾아오지 않았기로서니 섭섭하구나."

명현이 샐쭉하게 눈을 뜨고는 진무를 흘겨보았다.

거짓말.

안 바빠도 잘 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그 편이 나았다.

그들의 방문은 언제나 귀찮기만 했으니까.

이번엔 또 뭘 뜯어 가려고.

"명진, 안에 있는가?"

"어서 오십시오. 사형."

목소리를 들었음인지 명진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냥 들어가세."

"예?"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네."

"할 말이라 하시면?"

"진무야. 너도 들어 오너라. 함께 들어야 할 일이니."

"예."

옆으로 비켜선 명진을 지나 장문인이 방 안으로 들어가고, 진무가 뒤따랐다.

좁은 방 안에 장문인과 각 궁의 수장인 장로들, 명진과 진무까지 앉으니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아, 진짜. 쓸데없이.

그냥 밖에서 이야기하지.

"이번에 장로 회의를 통해 무너졌던 오룡궁을 재건하기로 결정하였네."

"오, 오룡궁을 말입니까?"

"그렇네."

명현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명진이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오룡궁(五龍宮).

충허암의 인근에 위치하였던 곳.

무당 팔궁 중 하나로 사패천주 혁련무강의 습격 때 불타 버린 곳이었다.

다른 팔궁이 그러하듯 오룡궁 또한 맡은 역할이 있었다.

본궁인 자소, 계율의 영은, 대외 협력의 우진, 단약을 제조하는 정동, 병장기를 취급하는 옥허, 내부 살림을 맡은 원화관.

그리고 오룡은 무당을 지키는 호법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오룡궁을 무당의 '수호자'라 불렀다.

선대였던 현오가 궁주였고, 명진은 실무자였다.

그렇기에 명진은 다른 명자 배와는 달리 정사대전에 나서지 않고 무당에 남았고.

사패천주의 앞을 막아선 명진이 자소궁을 지켜 냈던 것이다.

"오룡궁을... 오룡궁을 재건하다니. 생전에 다시는 못 보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룡궁이 무엇이기에?

진무는 명진의 눈동자에 어째서 습막이 차오르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허허, 이 사람. 그리도 좋은가?"

"좋지요. 좋고 말고요. 이제야 죽어 스승님을 뵐 면목이 생겼습니다. 진무가 있고, 청우와 청상이 있다 자랑도 하구요."

어느새 명진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가 그리 감격스러운지 알 길은 없었으나, 스승의 눈물에 진무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씨, 왜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거지?

어쨌든 스승이 저리도 기뻐하니 다행이었다.

"허나, 과거와는 좀 다를 것이네."

"예?"

"나는 오룡궁이 앞으로 남암궁의 역할을 했으면 하네."

"남암궁의 역할을요?"

"그렇네. 무당을 수호하는 것은 특정 궁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생각했네."

"음."

옳은 말이었다.

과거 오룡궁에만 맡겨 두고 모두가 싸움에 나섰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재건되는 오룡궁은 이름은 오룡궁이되 실질적으로는 남암궁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네."

명진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슬쩍 진무를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군요."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오룡궁이면 오룡궁이지 남암궁의 역할을 한다는 건 또 무슨 개소린지.

하여간 도사들의 머릿속은 쓸데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자네가 오룡궁을 맡아 주게."

"예? 하지만."

명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무당은 무가였다.

일궁의 주인은 응당 강해야 했고, 특히나 남암궁의 역할을 하는 오룡궁 주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자신이 궁주라니.

지금의 무당에 자신이 폐인이 되었음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보게, 명진."

"...."

"자네는 누구보다 강했던 무당의 제자였네. 그리고 이미 진무를 훌륭히 키워 내고 있지 않은가?"

뭐라냐? 알아서 컸거든?

"나는 잘 해내리라 믿네."

명현의 은근한 어조와 장로들의 동조하는 눈빛에 명진이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그래, 그래. 허허, 잘 결정하였네."

"장문인의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한참 전에 해야 했던 일일세."

명현이 명진의 어깨를 살포시 두들겨 주었다.

"허나 당장은 어렵다네. 근래에 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일궁을 재건할 정도는 아닐세. 그래도 명선이 최대한 아껴 준비해 보겠다 하니 수년 내로는 가능할 것이네."

"십 년인들 못 기다리겠습니까."

"헛헛, 그러니 자네도 서둘러 몸을 회복하고, 앞으로 오룡궁을 이끌어 갈 제자들을 늘려 가게나."

"예. 장문인."

명진이 결연하게 대답했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무당의 이름을 중원에 드높일 것이네. 벌써 세 곳의 상단과 연을 맺었고, 속세로 내려간 진궁이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야."

"기쁜 소식이군요."

함박웃음을 짓는 명현을 향해 명진이 마주 웃었다.

"진무야."

"예. 장문인."

"앞으로 네가 할 일이 많을 터이다."

뭔 할 일.

수련할 시간도 없는데.

그리고 뭘 시키려면 보상을 해 줘야지.

"네가 앞으로 무당을 이끌어 갈 든든한 재목임을 내 믿어 의심치 않음이야."

그러니까 뭘 주든가.

양의심공이나 뭐 그런.

마음의 소리를 꺼내지 못한 채 진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 * *

장문인과 장로들이 돌아간 이후.

명진은 점심도 거른 채 진무를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꾸에엑!

멧돼지를 잡아 온 청상도.

펄럭!

진무의 도포를 깨끗하게 빨아 널어놓은 청우도 함께였다.

명진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충허암이 위치한 봉우리의 가장 높은 오로봉이었다.

어?

이곳은?

과거에 직접 불태워 버린 곳이니 진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곳이 오룡궁이니라."

아, 그랬나?

"내 스승님이신 현오자께선 오룡궁의 궁주셨고, 나는 그 아래의 일대제자였느니라."

아... 그랬구나. 그래서....

진무는 스승이 어째서 그리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는지 이해했다.

괜히 좀 미안한데.

"그 사악한 혁련무강 때문에."

뭐, 그렇게 표현할 것까지는.

"진무야."

"예. 스승님."

"오룡궁과 남암궁에 대해 아느냐?"

진무가 알 리가 없다.

딱히 관심도 없었고.

"하긴 말해 준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 이미 네가 도동이 되기 전에 불태워진 곳이었다. 그 사악한 혁련무강에 의해서."

거참, 그만하라니까.

"오룡궁은 무당의 수호자였다. 대대로 무당을 지켜 온 호법이었지. 그리고 남암궁은...."

무당의 검과 방패.

오룡궁은 무당을 지키는 방패였고 남암궁은 검이었다.

남암궁(南岩宮).

사람들은 그곳을 무당의 '무력(武力)'이라 불렀다. 무당에서 무공이 가장 강한 무인들로 구성된 곳.

남암궁은 무당과 엮인 수많은 곳에 무인을 파견해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당에서 유일하게 '살계(殺戒)'가 허락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뭐 대놓고 죽일 수 있다니 나쁘진 않은데.

"앞으로 이곳이 재건되면 진무 너는 앞으로 오룡궁의 제자이자 무당의 검으로서 무림에 나서게 될 것이다. 너는 무당의 얼굴이자 자존심이 될 것이니라."

"예. 스승... 예?"

잠깐만, 뭐라고?

뭘 한다고?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 한다. 청상과 청우도 마찬가지니라."

"예. 사조님."

청우와 청상이 결연히 대답했지만, 진무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이봐.

그러니까 내가 왜?

수련할 시간도 부족하다니까?

하지만 스승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니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외칠 뿐이다.

하기 싫어. 하기 싫다고.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겠구나. 토목 공사도 그렇고 전각을 세우는 일만 해도 엄청난 자금이 들 터인데...."

스승의 안타까움과 아쉬운 마음이 진무의 가슴을 쥐어짜듯 눌러 왔다.

망할 금고아!

망할 도동의 기억 때문에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은 사패천의 비동을 털어서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었다.

"한데 사조님."

청상이 넌지시 물었다.

"사조님께서 궁의 주인이 되시면 사숙께서도 대제자가 될 자격이 주어지는 건가요?"

"흠, 그렇겠구나. 일궁의 실무자가 되어 공적을 쌓으면 훨씬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겠지. 하지만 대대로 남암궁의 제자가 대제자가 된 경우는 없었는데."

응? 뭐?

순간 귀가 확 열리는 것 같았다.

뒷이야기는 제쳐 두고, 대제자의 자격이라니 그건 또 뭔 소리지?

그런 게 있었냐?

"스승님, 대제자가 되는 것에 자격이 있었습니까?"

"응?"

진무의 물음에 명진이 눈을 끔벅거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 마음에 두었던 모양이구나."

"...."

"오냐. 너 정도 무재(武才)라면 그런 꿈을 꾸어도 나쁘지 않겠지. 꼭 그런 것은 아니다만 대제자가 되려면 무공만 강해서는 안 되느니라. 각궁의 실무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해 업적을 쌓아야 하고, 사문의 동배들에게 평판도 쌓아야만 한다."

"...."

"해서 장로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회의를 통해 장문인께서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지."

이런 망할!

그런 이야기는 진작에 해 줬어야지, 이 멍청한 스승아!

아니, 그리고 뭔 신경 쓸 게 그리도 많은 거냐!

당연히 강한 놈이 대제자가 되어야지!

37화

수년.

장문인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오룡궁을 재건하기 위해서 그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그런데.

주요 실무를 보는 일대제자 놈이 모두 다섯이다.

표주를 나간 놈들까지 합하면 모두 일곱이었다.

만약 오룡궁이 재건되는 수년 사이에 다른 놈이 대제자가 되면?

양의심공은?

진무를 다시 절대의 경지로 만들어 줄 묵룡혼원공은?

무당을 타락시키고 나아가 정무맹을 타락시키는 원대한 꿈은?

이런 젠장!

무공만 세면 되는 줄 알았다.

진허를 쓰러뜨렸고 진혜의 약점을 잡았으니 이제 다섯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제자가 되는 자격이 따로 존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스승과 함께 재건될 오룡궁의 터를 다녀온 뒤로 걱정이 되어서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삼공암묘에 수련을 위해 앉았지만, 도무지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안 돼.

서둘러 오룡궁이 재건되어야 해.

잘못하다가는 닭을 놓치고 지붕만 쳐다보는 꼴이 된다.

기껏 불로초로 돌아온 삶을 평생 무당의 제자로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오룡궁 재건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었다.

나무야 산에서 구한다지만 나머지 자재를 사고 인부와 목수를 고용하자면 엄청난 양의 자금이 필요했다.

"제길, 전장에 맡긴 황금을 쓰기는 아까운데...."

까드득.

생각할수록 조급해지는 마음에 진무가 제 손톱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어떻게 한다."

지금 수련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속한 시일 내에 자금을 구해 오룡궁을 재건하지 않으면.

아!

그 순간 진무의 머릿속에 한 곳이 번뜩 떠올랐다.

그래. 그놈들이 있었지!

굳이 전장에 있는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풍진강호에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생각이 미친 진무는 한껏 밝아진 얼굴로 충허암으로 달려갔다.

"스승님!"

"응?"

"제자, 단강구에 잠시 내려갔다 올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해 주십시오."

"단강구에?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명진이 피식 웃었다.

"원 녀석, 혹 술이라도 한잔 생각난 게냐?"

이미 청상과 청우에게 지난번 단강구에 갔을 때 진무가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알겠다. 딱히 허락은 필요하지 않느니라. 아직 건물은 없으나 구두상으로 오룡궁주가 되었고, 내 허락만 구하면 너는 그 실무가 되었으니 딱히 자소궁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아!"

이런 좋은 일도 있구나.

하면 앞으로는 좀 더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인가?

스승의 허락만 받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더 이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다녀오너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진무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는데.

"진무야."

"예?"

"올 때...."

명진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술 한 병...."

으이구, 타락한 도사 놈아....

"예! 맛나게 숙성된 놈으로 사 들고 오겠습니다."

그까짓 술 한 병이 무에 대수겠는가?

진무는 다시 한번 명진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딱히 준비할 것이 없었다.

그저 검 한 자루면 충분했다.

그런데.

"니들은 뭐 하냐?"

"예? 사숙께서 내려가시는 것 같아서."

청우와 청상이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지랄하고 있네. 열심히 수련이나 해. 스승님 식사 잘 챙기고."

"...예."

청우와 청상은 펼쳐질 즐거운 모험을 빼앗겨 버린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진무는 그들을 뒤로하고 날듯이 무당산을 내려갔다.

* * *

"그래. 얼마쯤 되는가?"

"한 궤짝은 족히 넘습니다."

"호오? 그래?"

"예."

조방의 말에 우문흠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척이 사라진 뒷골목.

그곳에는 그가 운영하고 있던 도박장이 있었다.

평소 공사척 패거리와 제법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우문흠은 관에 의해 밝혀지지 않은 한 곳을 은밀하게 급습했다.

이미 공사척과 함께 그 패거리가 참수를 당해 아는 자는 없었다.

우가장은 이미 단강구에서 제법 알려진 무관의 한 곳이니 직접 운영할 수는 없었지만, 도박장이 보유하고 있던 돈을 회수하는 데는 큰 문제는 없었다.

수금할 때가 아니었는지 도박장이 보유하고 있던 금액은 어마어마했다.

도박 빚에 저당 잡힌 각종 패물과 집, 땅문서는 둘째 치고, 은전만 해도 한 궤짝을 넘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구만."

"예. 덤으로 청양상단이 숨겨 두었던 비자금도 찾아냈습니다."

"청양상단이?"

"예."

"얼마나 되던가?"

"많지는 않습니다. 은으로 작은 궤짝이 하나입니다. 한데 손가락만 한 야명주가."

"야명주라고?"

"예. 몰래 숨겨 둔 모양이었습니다."

"야명주라니. 헛헛."

야명주는 황궁에서조차 쉽게 구경할 수 없는 희귀한 물건이니 그 가치가 엄청났다.

"그래, 어디에 두었나?"

"일단 장주님의 거처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집무실에?"

"예. 확인은 하셔야 할 것 같아서."

"흠. 잘했군. 아주 잘했어. 진무 그놈으로 인해 근래 속이 답답했는데 체증이 내려가는 듯해."

우문흠은 품에서 전낭을 꺼내 조방에게 던져 주었다.

"고생했네. 오늘은 이 길로 퇴청해서 수하들과 술이라도 한잔하게."

"예? 아니,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묵직한 전낭에 조방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흐흐흐, 일부를 삥땅 친 건 눈치 못 채겠지?'

조방의 생각이었고.

'설마 뒤로 챙겨 간 것은 아니겠지?'

우문흠의 생각이었다.

"자, 그럼 좋은 시간 보내게."

"예. 장주님."

조방이 나간 뒤 우문흠은 재빨리 탁자 위의 문서들을 정리하고 자신의 거처로 뛰어갔다.

혹시나 시비가 방을 치우다가 손을 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어쩌면 그의 부인이 발견하고 패물을 챙기기 전에 치워 버려야 했다.

'진무 그놈이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지?'

우문흠은 만약 자신이 대제자가 되면 진혜를 무당 장문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떠올렸다.

그놈의 실력을 봤을 때 어차피 대제자는 물 건너갔다.

어떻게 무당 장문인으로 만들어 줄지는 모르지만, 약점을 잡힌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진짜로 놈의 말대로 진혜가 무당 장문인이 된다면 문파를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할 터였다.

그때를 위해서 자금을 모아야 했는데 때마침 매우 적절하게 돈이 생긴 것이다.

'이 기회에 영약이라도 하나 구해야겠다. 진혜가 진무 그놈보다 강해져야 할 것이니.'

벌컥!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거처에 도착한 우문흠은 주위를 면밀히 살피며 문을 열었다.

"어이, 우 장주."

"...."

"오랜만이야."

순간 자신의 의자에 앉아 반갑게 손을 흔드는 놈은.

니가 왜 여기 있냐?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당황으로 굳어 버린 우문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들어와, 들어와."

제 놈이 방 주인이라도 된 양 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진무였다.

그리고.

조방이 금은보화를 담아 가져다 놓은 궤짝이 모조리 열려 있는 통에 불을 켜져 있지 않았음에도 방이 환했다.

"놀래기는. 거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 하는 거 아냐?"

"...."

"그나저나 우가장이 제법 수완이 좋은가 봐? 이게 다 얼마야?"

음흉하게 웃는 진무.

우문흠은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고 웃는 얼굴을 때려 버리고 싶었다.

실력만 된다면.

"잘됐네. 안 그래도 부탁할 게 있었는데 이 정도라면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되겠어."

"...."

"어이, 우 장주."

"...."

"이번에 우리 무당에서 오룡궁을 재건하려고 하거든?"

"...."

"당신이 좀 도와줘야겠어."

우문흠은 순간 울컥해서 고함을 내지를 뻔했다.

왜! 어째서! 뭣 때문에!

이미 거래는 끝났잖아!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후원 좀 하지?"

내려갔던 체증이 다시 올라왔다.

목 뒤가 뻣뻣해지는 게 당장이라도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어, 얼마나?"

"많이는 말고, 오룡궁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오, 오룡궁을? 저, 전액 말인가!"

한두 푼이 아니다.

평지도 아니고 산에다가 도관을 새로 만들자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럼, 전액이지. 내가 무슨 뒷골목 무뢰배도 아니고, 고작 몇 푼 뜯어 가려고 직접 찾아왔겠어?"

무뢰배보다 더한 놈! 네놈이 도사냐? 도사야?!

"그리고, 후원금은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자네 아들을 위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문흠은 신경질적으로 진무를 째려보았다.

"생각해 보라고. 무당이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오룡궁을 재건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비용을 일대제자인 진혜의 가문에서 전액 지원했다."

"...."

"그 가운데 진혜의 이름과 우가장의 이름을 음각으로 새겨 넣는 거야. 다른 곳도 아니고 주춧돌에 말이지. 내부의 기둥에 새겨도 되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쁘진 않다.

"아마 대대손손 그 이름을 보게 되지 않겠어?"

당연한 말이었다.

"그 전시 효과가 어떨 것 같은가? 진혜를 보는 사문 어른들의 눈빛을 상상해 봐. 다른 제자들은 또 어떻게 보겠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진혜의 평판이 지금보다 배는 올라갈걸?"

"으음."

틀린 말은 절대 아니었지만 말하는 대상이 대상인지라 딱히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장기적으로 봐. 이건 투자야."

진무의 감언이설에 딱딱하게 굳어졌던 우문흠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진혜가 무당 장문인이 될 거라니까?"

"그, 그게...."

솔깃해졌으나 여전히 불신이 가시지 않은 우문흠이 머릿속으로 수많은 계산을 했다.

"고민할 게 뭐 있어? 대제자는 내가 되더라도 무당 장문인은 당신 아들이 될 거야."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대제자가 아닌 제자가 장문인이 된 경우는...."

"거참, 필요하면 약조를 기록하고 수결(手決)이라도 할까?"

수결이라는 말에 우문흠이 넌지시 지필묵의 위치를 힐끗거렸다.

그런데.

"대충 알아들은 것으로 알고 그만 가 볼게."

"아, 잠시, 약조서를...."

갑자기 진무가 일어나자 우문흠이 서둘러 지필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일필휘지로 약조문을 쓰기 시작했다. 말 나온 김에 반드시 수결을 받아 두어야 했다.

은밀한 약조에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아 참!"

"...."

나가려던 진무가 우문흠이 든 지필묵을 향해 다가오지는 않고 돌연 몸을 돌려 궤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전낭을 꺼내 은전 한주먹을 퍼담았다.

"살 게 있어서."

그래, 가져가라.

대신 약조서에 반드시 수결을.

우문흠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몇 자만 더 적으면 된다. 어서 빨리 수결을 받아야 했다.

"아, 그리고."

"...."

"이거 들고 무당파를 찾아와 전달하는 과정에서 말이야. 내 이름을 슬쩍 거론해 주면 좋겠는데?"

진무는 대제자가 되기 위한 본인의 평판에 신경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 지난번 청양상단이나 공사척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진무가 도와주었다든지. 위기에 처한 우가장의 무인을 구해 주었다든지. 그럴싸한 이유 많잖아. 알지?"

"...."

진무가 말하거나 말거나 우문흠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정말로 몇 글자 안 남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자, 그럼 또 보자고."

"...."

"나중에 충허암에 한번 들러. 내 꿩탕이라도 맛나게 끓여 줄게."

"됐다!"

약조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우문흠이 고개를 들었을 때 진무는 없었고, 그가 활짝 열고 나간 문이 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수, 수결을... 망할."

우문흠은 완성된 약조서를 들고 방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38화

땅! 땅!

망치질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올수록 명진의 입가에 지어진 흐뭇한 미소가 커졌다.

공사가 시작된 지 한 달.

오룡궁이 들어설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목수들은 쉴 새 없이 망치질을 했고, 벌목꾼들이 잘라 낸 아름드리나무 기둥이 인부들에 의해 무당으로 옮겨졌다.

우가장의 후원을 무당은 한사코 거절하였으나.

이미 인부들과 목수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후원금을 전달한 우문흠이 충허암으로 몇 번이나 찾아왔으나 때마침 진무가 자리를 비웠기에 만날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때마침이다.

일부러 피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공사가 시작된 지 한 달.

"어이, 거기! 기둥을 들어!"

"거기 좀 더 조이고!"

재건 총책임을 맡은 대목수의 고함이 산정을 울리고, 조용하던 도관이 연일 작업하는 소리로 시끄러워졌으나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좋으십니까?"

진무의 물음에 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오래도록 기다려 왔음이다. 그리도 염원하였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일이었느니."

명진의 눈가에 또다시 습막이 차올랐지만, 이전과 달리 그 눈물이 진무의 가슴까지 먹먹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의 기분이 감격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진무야."

"예."

"우가장의 헌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암요. 잊지 말아야지요.

진혜를 반드시 무당 장문인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니까요?

주춧돌에 '증(贈) 우가장'이란 글귀도 넣어 주기로 했구요.

하지만 진무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스승님, 그만 내려가시지요."

"아니다. 내 어찌 이 역사적인 순간을 방 안에서 귀로 듣기만 할까? 직접 보아야 함이다. 오룡궁의 기둥이 다시 오르고 지붕이 얹히는 것을."

명진의 마음은 알 것 같았으나 괜스레 무리하다 건강이라도 악화되면 진무만 고생스러울 뿐이었다.

"스승님. 날이 아직 찹니다. 혹여 고뿔이라도 드실까 제자는 우려됩니다."

진무의 말에 명진이 아쉬운 눈빛으로 공사 현장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알았다. 가자꾸나. 청우에게 일러 인부들이 작업함에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히 챙기라 하거라. 도관에서 먹는 것과는 다르니 저들의 음식에도 각별하게 신경 쓰라 하고."

"예. 사부님. 이미 원화관에 협조를 구해 놓았습니다. 또한, 청우에게 술과 고기를 끊기지 않게 대라 하였으니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오냐. 오냐."

명진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우가장의 도움으로 공사는 진행되고 있다만 궁을 채울 제자들이 문제로구나. 이대제자들은 이미 다른 궁에 자리를 잡았음인데."

"그도 이미 실무 회의에 참석하여 각 궁에서 협조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청상이 이대제자들 중 몇몇을 선별해 오기로 하였습니다."

"오, 그랬더냐? 흠, 그래도 우리 오룡궁은 무당의 검이니 뛰어난 아이들로 선별하여야 할 터인데."

"그 또한 걱정 마십시오. 현기에 이른 청상이니 보는 눈이 있을 것입니다."

"진무야."

"예, 스승님."

"이대제자들이 기거할 장소가...."

"...."

"진무야."

"...."

"진무야."

그만, 제발 그만!

이젠 환청까지 들릴 것 같았다.

제 스승이 이렇게나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명진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진무를 찾아 이것저것 묻고 지시를 했다.

이게 누굴 종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진무야?"

"예!"

"응? 왜 그리 화가 났느냐?"

"화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난 또."

명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접혀 있는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내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필요한 무공 몇 가지를 추려 보았다. 장서각으로 가서 찾아 오너라."

"무공이요?"

진무가 명진이 건넨 종이를 펼쳤다.

"어디 보자. 양의문검(兩儀紋劍), 삼재검(三才劍), 오행검(五行劍), 칠성검(七星劍), 신문십삼...."

진무는 잘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작은 글씨로 적은 무공서 목록에 눈을 부릅뜨고 명진을 쳐다보았다.

흐뭇하게 웃고 있다.

진무는 점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 아니 잠깐만.

이보시오 스승님.

장서각을 통째로 옮길 생각이오?

"이런!"

명진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비틀거리자 진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내 생각이 짧았구나. 십단금(十段錦)을 빼먹었어!"

"...."

"그러고 보니 호조절호수(虎爪絶戶手)도...."

아, 정말 싫다.

진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둘러 거처로 돌아가 추가로 작성을 해야겠다. 필요한 검진도 몇 가지 있고. 일단 너는 다녀오거라."

명진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충허암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분명 그냥 뛰는 건데 보기엔 제운종에 버금가는 속도였다.

망할 도사 놈, 다 나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신이 난 명진의 뒷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것이 도동의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도동의 몸에 동화되어 조금씩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 이제는 구분하기가 좀 어려웠다.

"휴, 젠장. 이게 뭔 짓거리인지."

진무는 피식 웃으며 계율원의 임무와 함께 장서각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영은궁으로 향했다.

* * *

"아니! 이걸 전부?"

영은궁주 명공 장로가 왕방울만 하게 커진 눈으로 탁자에 놓인 서신과 진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예."

그래. 나만 미쳤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음, 알겠다."

응? 뭐? 알겠다고?

순간 진무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본산의 비급을 내주는 일을 어찌 이리도 쉽게 결정한단 말인가?

더구나 이렇게 많은 양을?

"밖에 진혜 있느냐?"

"예, 사부님."

명공의 부름에 진혜가 안으로 들어왔다. 진무를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무와 함께 장서각주에게 이 서신을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진혜는 명공을 향해 공손하게 대답하고 서신을 받아 들었다.

"따라오너라."

말이 좀 짧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진무는 진혜를 따라 장서각으로 향했다.

무당의 장서각은 영은궁이 있는 납촉봉(臘燭峰) 아래 절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출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영은궁에서 연결된 잔도뿐이었고 깎아지른 절벽의 중턱에 그 입구가 있어 딱히 경계가 필요하지 않은 천혜의 장소였다.

"조심하거라. 발을 헛디뎠다가는 허공답보의 경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살아남기 힘들 것이니."

진혜의 말에 진무가 피식 웃었다.

실력도 달리는 놈이 누굴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진무의 비웃음에 심기가 불편해진 진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자신의 아비로부터 서신을 전해 받았고, 진무와 우가장 간의 밀약(?) 또한 알고 있는 터였으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놈이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둘 사이에서 맺은 밀약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진무의 성취.

우문흠이 보낸 서신에는 진무의 경지가 분명 탄기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었다.

지금의 일대제자 중 탄기 이상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둘뿐이었다.

우진궁의 진궁.

그리고, 표주를 나가 있는 무당칠자의 우두머리 진명.

그들의 실력은 이미 보아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진무가 그들과 같은 경지에 있다는 사실을 진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다. 이런 놈이 어찌. 아버님이 잘못 보신 거야. 진허 사형을 이겼던 것도 순전히 운 때문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야 말이 된다.

고작해야 일 년 전까지 도동이었던 놈이었다.

아무리 장문인과 장로들의 도움이 있어 육양신공의 내공을 거저 얻다시피 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탄기에 이를 수는 없었다.

'감히 무당 장문인 자리를 운운해? 이런 천한 놈이 탄기의 벽을 넘었다고? 나도 이르지 못한 경지를? 개가 웃을 일이지.'

이미 몇 년째 탄기의 벽 앞에 가로막혀 있었던 진혜였다.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무력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이니 진무가 탄기의 경지라는 아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뭘 그리 꼬나보냐?"

"...."

"아주 눈깔로 사람 잡아먹을 새끼네."

진무의 이죽거림에 진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놈이! 감히 사형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사형? 염병하네."

"뭐라고?"

"야, 넌 널 죽이려고 했던 새끼를 사형이라고 생각하겠냐?"

"뭐, 뭣이!"

"우문흠한테 못 들었어?"

"우, 우문흠? 이놈이 감히!"

"닥치고, 들었으면 똑바로 해라. 초 치지 말고. 기껏 실력도 없는 놈 장문인 만들어 줄랬더니. 고마운 줄은 모르고."

"뭣이?"

"진정이나 하지? 거기 발 헛디디면 그냥 골로 간다며?"

"...."

진무의 이죽거림에 진혜의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이 더욱 깊어지고 쌍심지가 솟구쳤다.

"뭐? 왜? 해보려고? 아서라. 네 아비가 그리 열심히 노력 중인데 장문인 되기도 전에 죽어 버리면 되겠냐?"

"닥쳐라. 이놈!"

급기야 참지 못한 진혜의 몸에서 시퍼런 기운이 솟구쳐 나왔다.

사문의 위계를 무시하는 놈이다.

고기나 처먹고 삼류 시정잡배처럼 말하며 도사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천하디천한 놈이다.

진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진무처럼 질서를 어지럽히는 버러지 같은 놈이 앞뒤 구분 없이 나대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오냐, 이놈. 네놈은 오늘 발을 헛디딘 것이다.'

진혜는 진무를 죽일 생각이었다.

얼마 전, 아비가 진무의 수결을 받아 놓으라 신신당부하며 주고 간 약조문이 가슴에 있었으나 이제 그따위 건 필요하지 않았다.

죽어 버리면 그만 아닌가?

영은궁에서 장서각으로 가는 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

지킬 필요가 없는 곳이니 보는 눈도 없다.

누구 하나 죽어도 모를 곳이고, 목격자라고는 진혜뿐이었다.

그저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 하고 거짓으로 통곡을 하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이거 봐라? 아예 죽일 생각인데 지금? 죽이고 발이라도 헛디뎠다 하려고?"

진혜의 눈동자에서 번들거리며 피어나는 살기에 진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냐. 죽일 생각이다. 이미 한번 떨어져 본 경험이 있으니 새롭지도 않을 터. 너 같은 놈은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 것이 무당에 훨씬 좋은 일이리라."

진혜의 손에 시퍼런 선기가 맺히자 진무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맺혔던 비웃음은 어느새 스산하게 변했다.

"하, 이것 봐라. 도사라는 새끼가 비열하기가 사파 뺨치네."

진무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뜨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너,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

"선을 넘으면 우문흠과의 밀약이고 뭐고... 죽는다."

진무의 미소.

서늘하다.

아니 그저 서늘함이라고는 표현하기 모자랐다.

주변의 공기마저 차갑게 가라앉아 피부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진무의 웃음은 사신의 미소 같았고, 그의 말은 죽음에 대한 선고처럼 차가웠다.

진혜는 순간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계속할래?"

하지만 진혜가 머뭇거리는 사이 진무의 몸에서 새어 나오던 차가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꿀꺽.

자신이 있었다.

진무 따위, 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은 저절로 마른침이 울대를 움직이며 넘어갔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일순간이라곤 해도 진무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사술이다. 사술일 것이다.

사람의 눈빛과 목소리에 이리도 위축될 리는 없었다.

"놈! 감히 방문좌도의 술수를 익혔구나!"

진혜가 노성을 토하며 살기로 물든 기운을 가득 머금고 손을 뻗어 왔다.

39화

검기(劍氣).

기운을 검에 담아 사용하는 것.

하지만 꼭 검일 필요는 없었다.

기운을 도에 담으면 도기가 되고 주먹에 담으면 권기가 된다.

취릿!

진혜는 푸른 기운이 겹겹이 둘러싸인 주먹을 연거푸 뻗어 냈다.

진무는 주먹이 닿지도 않았음에도 뒷걸음질하며 물러났다.

주먹에서 연장된 권기의 간격을 피해 내고 있는 것이다.

"놈! 이런 곳에서 피할 수 있을 듯싶으냐!"

코끝을 일그러뜨린 진혜가 일 보를 길게 뻗어 거리를 좁히며 재빨리 무공을 바꾸었다.

주먹이 활짝 펼쳐지고 날카롭게 세워진 손이 사라졌다.

촤자자작!

그 빠른 움직임에 공기가 찢기는 듯한 소음이 만들어졌다.

무영신나수(無影神拿手).

무당이 자랑하는 금나수 중 하나로 그림자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가진 무공이었다.

그 속도로 인해 기운을 머금은 무영신나수가 펼쳐지면 푸른 선기가 남긴 흔적이 마치 그물처럼 보인다고 했다.

'놈!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진혜는 자신의 손을 피해 물러나는 진무의 모습을 비웃으며 손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화악!

교차된 손이 사라지고 거대한 푸른 그물이 진무를 사로잡을 듯이 덮쳐 왔다.

하지만.

상대는 진무였다.

무영신나수?

그림자가 없기는. 다 보인다. 얼마나 다 보였는지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진혜가 신이 난 듯이 열심히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되지도 않을 걸로 애쓴다, 애써. 아, 진짜 상대할 가치도 없네.'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유롭게 피하고 있는 동안 진혜는.

'놈! 어떠냐? 이것이 격의 차이니라! 제법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피하고는 있다만! 그것도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점점 더 그 생각에 변화가 오고 있었다.

한 치.

벌써 수십 차례 모든 손의 간격을 한 치 앞에서 피해 내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그 한 치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진혜의 손속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아무리 기운의 범위가 길어졌다고 해도 거리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뭐?'

"어차피 이리 소모해도 그만 저리 소모해도 그만인데 뭐 하러 잡고 있는지."

진무의 말에는 탄기로 가는 현묘한 깨우침이 담겨 있었으나 진혜에게는 그저 자신을 비웃는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닥쳐라! 네놈쯤은."

더 열이 뻗친 진혜가 사력을 다해 봤지만.

아무리 빠르고 화려해도 베지 못하면 쓸모없는 검이고, 잡지 못하면 그저 헛손질에 불과할 뿐이었다.

'젠장. 빨리 비급 받아다 놓고 내공을 모아야 하는데.'

진혜와 드잡이를 하는 시간이 아까워져 짜증이 치민 진무가 물러나던 뒷발에 힘을 주었다.

그저 멈춘 것이었으나 진혜의 눈에는 포기하는 것으로 보였다.

"놈, 잡았다!"

진혜가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진무의 맥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잡는 순간 당겨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 것.

"...!"

순간 흐릿해지는 잔상과 함께 진무의 모습이 사라지고 진혜의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피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이런!'

진혜는 재빨리 전후좌우를 살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뒤에도 없었다.

"뭐 찾냐?"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진혜가 기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머리 위의 절벽 면.

사라졌던 진무가 마치 그곳이 평지인 양 팔짱을 끼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웃었다.

"자, 이제부터 발을 헛디디게 되는 건 누굴까?"

진무의 송곳니가 당장이라도 진혜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새하얗게 빛나며 드러났다.

진혜가 다급하게 물러나려는 순간 낮은 자세로 절벽을 스치듯이 움직인 진무가 뒤편으로 이동했다.

"사, 사술!"

"병신, 제종술(提縱術)이다."

"그, 그런!"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진무의 손이 진혜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순간.

"으악!"

진혜의 발이 절벽 면의 길에서 벗어났다.

진무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뿌득, 뿌드득.

머리 가죽이 통째로 벗겨질 것 같은 고통은 그렇다 쳐도.

"머리카락이 제법 질긴 놈일세."

"...!"

뽑히거나 뜯기는 순간.

'주, 죽는다.'

식겁한 표정이 된 진혜가 양손으로 진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힘을 주어 비틀어도 보고 기운을 주입해 꺾어 보려고도 했지만 진무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머리채가 잡힌 고통보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치욕스러웠다.

더욱이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진무의 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놔라. 이놈아!"

이를 갈며 소리를 치는 진혜의 말에 진무가 어이없이 웃었다.

"놔?"

놓으면 죽을 텐데?

진혜 또한 금세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더 이상 놓으라는 말은 못 하고 열심히 버둥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진무의 손을 이용해 몸을 비틀어 튕기듯이 솟구치고 싶었으나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진무의 손에 들어간 힘이 너무 강했다.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사, 살려 다오!"

"응? 뭐라는 거야? 안 들리네."

"살려 달란 말이다!"

진혜가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발악하듯 소리쳤다.

"내가 왜?"

"뭐?"

"넌... 그냥, 발을 헛디딘 거야."

진무의 나지막한 말에 진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힘이 약해진다.

진무가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슬며시 놓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손목을 비틀며 자신이 잡은 손을 떨쳐 내려 하고 있었다.

눈을 깔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절벽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진혜가 진무처럼 절벽을 밟고 달리는 경공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떨어지면?

상상만 해도 섬뜩했다.

"뭐, 흔하잖아. 발을 헛디디는 일 따위는."

"자, 잠깐!"

"잠깐이고 나발이고, 힘 아껴 뒀다가 떨어질 때 비명이나 질러."

진무의 목소리에 동정심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당의 일대제자.

열다섯에 무당에 입문.

나름 재능을 인정받아 도명을 받고 스물다섯에 명공의 문하로 일대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이 서른.

은혜로운 스승의 가르침으로 현기를 깨달아 무당칠자 중 한 명이 된 진혜였지만.

원래 야비한 놈일수록 제 목숨 알기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법이다.

또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산중에 처박혀서 무공만 죽자 사자 익혀 온 진혜는 단 한 번도 목숨이 경각에 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죽음이란 겪어 보지 못한 미지의 공포.

그런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 인사하는 통에 오줌을 지릴 것처럼 겁에 질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뭐? 잘 안 들리는데?"

"살려 주십시오!"

어떻게 할까?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고, 살려 달라면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지금 진혜는 진무에게 언제든 날개를 뜯으며 가지고 놀다 버리는 잠자리에게 불과했다.

그리고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우가장은 이용할 만큼 이용했고, 기회를 줬음에도 자신을 죽이려고 한 놈이니 지금 죽인다 해도 그다지 아까울 것이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아닙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진혜는 산중에 메아리를 만들 정도로 열심히 외쳤고 진무는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후우, 난 정말 너무 정이 많아서 탈이라니까. 이런 건 그냥 죽어 버려야 하는데."

뿌드득!

한 움큼 잡은 풀이 뿌리째 뽑히는 소리와 함께 진혜의 몸이 확 당겨지며 던져졌다.

텅!

잔도에 처박힌 고통에 뼈마디가 온통 욱신거리고 죄 뜯긴 머리털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지만.

살았다는 안도감에 진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댔고, 떨리는 손발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옥의 문턱에 고개를 내밀었다가 돌아온 심정이었다.

"야."

"...!"

"대답 안 해?"

"네, 넵!"

진무가 눈살을 찌푸리자 진혜가 다급하게 답했다.

"마지막 기회였어."

꿀꺽.

무섭다.

자신의 앞에 다가와 쪼그려 앉은 진무가 너무도 무서웠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사제로 보이지 않았다.

천하디천한 도동 따위로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라도 자신의 목을 따 버릴 수 있는 사신처럼 보였다.

"한 번만 더 까불면 너는 물론 우가장까지 모조리 작살 내 버릴 거야.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진혜가 사색이 되어 대답했다.

"좋아. 자, 앞장서."

"옙!"

진무가 그를 앞서게 했지만, 도무지 다리가 떨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힘겹게 한 발 한 발 옮겨 걷는데.

"빨리 안 갈래? 그냥 확 밀어 버리고 갈까?"

진혜의 걸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빨라졌다.

당연했다. 그의 뒤에서는 사신이 쫓아오고 있었으니까.

* * *

진혜와 함께 긴 잔도를 지나 장서각에 도착하자 초로의 노인이 입구의 문을 열고 나왔다.

주름이 얼굴을 가득 덮은 통에 도무지 나이를 알 수가 없었다.

"운공 어르신을 뵙습니다."

"오냐, 진혜로구나. 한데 네 꼬락서니가 어찌 그러누?"

"아, 그, 그게...."

진혜가 머뭇거리자 진무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형께서 잔도에서 떨어질 뻔하신 것을 제가 구했습니다. 하필이면 잡은 곳이 머리카락이었어서."

하긴 이상할 만도 하지.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고 뜯긴 모공에서 피가 흘러 얼굴을 가득 물들이고 있었으니.

"끌끌, 잔도에서 떨어질 뻔했다?"

운공 노인이 고개를 들어 진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드는 순간 주름을 뚫고 나온 눈에서 엄청난 신광이 드러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진무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마치 안광이 자신의 몸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운공.

운자는 현 무당에서 쓰지 않는 항렬이었다.

현 무당의 항렬은 명진청의 순이었다.

'그 위로 현자, 영자, 옥... 다음이 운...자? 에이... 설마?'

말도 안 된다.

운자 배의 도인이라면 최소로 잡아도 백이십은 족히 되었을 텐데.

정말로 운자 배라면 이미 등선을 했거나, 땅속에서 백골이 진토되어 넋조차 사라져 가고 있을 터였다.

진무는 생각이 너무 멀리 가 버렸다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고놈, 웃는 것이 꼭 사파 놈같이 비열하구나."

"...."

"훔, 그나저나 네놈 몸에 쌓인 것은 분명 무당의 도력이 맞을진대 어찌... 거참 별일이로세. 내 모르는 사이에 뭔 일이라도 있었던 겐가?"

서신을 받아 든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진무의 눈동자에 짙은 이채가 어렸다.

뭐지? 이 노인네?

만난 순간 이미 내력을 발출해 노인을 살폈던 진무였다.

분명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난번 무월루에서 만난 노인네도 그렇고 이번 무당의 노인네도 그렇고....

"사형."

"예? 아니, 으응?"

"누구십니까? 저분은?"

진무가 서신을 읽고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소곤거렸다.

"아, 운공 어르신은 오랫동안 장서각을 지켜 오신 분...입니다."

"얼마나?"

"그게."

그러고 보니 진혜도 알지 못했다.

딱히 그에 대해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고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몰라?"

"예. 사부님께서도 딱히 말씀해 주지 않으셔서."

"흠, 그렇군요."

칭하는 말이 어르신인 것을 보면 무당의 도명을 받은 제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랬다면 사숙조니, 몇 대조니 하면서 불렀겠지.

그러고 보니 십수 년 전 무당을 찾아왔을 때도 저런 노인을 본 적은 없었다.

분명히 뭔가 있는 노인네임이 틀림없는데.

노인의 정체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던 진무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에이 씨! 머리만 복잡하네. 뭔 상관이야.'

평소 '생각은 먹물들이나 하는 것이지.'라는 인생관을 가진 진무였다.

그에게 고민은 쓸데없이 뇌를 혹사하는 일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눈앞에 닥치는 대로 처리한다.

그것이 그의 오랜 성격이었다.

어차피 대제자만 되면 되는 일이었다.

양의심공만 익히고 나면 딱히 무당에 남아 있을 생각도 없었다.

노인이 뭐든 간에 자신의 일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끌끌, 제법 양이 많구나. 필사(筆寫)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테니 그만 돌아가 있거라. 다 되면 연락하마."

"예, 어르신."

노인의 말에 진혜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고 진무는 연신 노인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장서각을 빠져나왔다.

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