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하아아아."
진무가 방바닥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대제자가 될 수 없다니. 양의심공이 물 건너갈 줄이야. 망할 장문 도사 놈 같으니."
원망스럽다.
미리 말해 줬으면 절대로 태청신단에 현혹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공 따위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모으면 그만이다.
강의 경지?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어차피 묵룡혼원공만 얻으면 강기 따위는 금방인데.
"하아."
한숨이 그야말로 쉴 새 없이 나왔다.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강제로 뺏을까?"
어차피 이제 무당 최고수다.
장문인 모가지에 칼을 들이밀고 '내놔, 양의심공.'이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지만 필시 자신의 본능을 지배하고 있는 망할 스승이 방해하겠지.
만약 스승이 '멈춰!' 하면 멈출 수밖에 없다. 망할 도동 놈의 기억은 아직 유효하니까.
"젠장, 뭐 어쩌라는 거야!"
저승차사 빌어먹을 놈. 하필이면 무당에 보내 가지고.
태청신단을 얻었을 때 감사했던 마음은 싹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하아."
이걸로 몇 번째 한숨인지. 폐 다 쪼그라들겠네, 아주.
진무가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앉아 있는데.
"사숙! 사숙!"
청상이 문을 벌컥 열었다.
"사조님께서 장서각에 다녀오시랍니다."
"...."
이 새낀 뭐가 좋다고 처웃고 있는 건지.
거기다가 저 존경심을 잔뜩 담은 눈빛이라니... 아, 파내 버릴까?
하지만 스승의 명이라니.
"장서각은 왜?"
"일전에 사조님께서 부탁하신 무공 비급의 필사가 끝났다고 연락이 와서요.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망할 스승. 제자의 마음도 몰라주고 심부름이나 시키다니.
아, 원망스러워라.
"알았다. 가자."
진무가 의욕 없는 모습으로 일어났다.
충허암에서 장서각으로 가는 길은 산길이다. 절벽에 붙은 잔도까지 있으니 수레는 부적합했다. 터벅거리며 걷는 진무의 뒤를 청상과 청우가 등에 지게를 지고 따랐다.
오든가 말든가.
아, 가기 싫다.
느린 걸음 때문인지 장서각이 위치한 영은궁까지 가는 시간은 평소의 배나 걸렸다.
"오! 진무가 아니냐!"
낮 시간이라 궁에 있던 영은궁주 명공이 진무를 알아보고 반가운 척을 했다.
이것들이 왜 죄다 내 얼굴만 보면 쪼개는지 모르겠다.
"예."
진무가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하는데 멀리 진혜가 보인다.
원망, 질투, 부러움.... 눈깔 하나에 참 다양하게도 감정이 묻어난다.
눈깔 파낼 놈이 자꾸만 늘어 가네.
진무가 째려보자 진혜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 장서각으로 간다고?"
"예."
"어서 가 보거라. 허허."
명공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멀어지는 진무의 등을 바라보았다.
'진무가 강기, 아니 강환을 깨달았다.'
명진의 그 한마디는 순식간에 무당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이던가?
무당에 강의 경지를 깨달았던 도인이 마지막으로 존재했던 때가 언제였던가?
만약 자신들이 그때 죽어 가던 도동을 살리지 않았다면? 그를 일대제자로 들이지 않았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무당을 찾아온 축복이자 선대의 보살핌이었다.
정무칠성이라 불리는 절대자들과 이름을 나란히 놓으며 앞으로 중원 무림에 무당의 이름을 드높일 보물이었다.
그에게 태청신단을 주었을 때, 강의 경지를 기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이루어 내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을.
"허허, 어찌 이리도 장한 모습이란 말이냐."
장서각이 있는 절벽의 잔도로 모습을 감추는 진무의 모습에 명공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진혜는.
'아, 아랫배가 끊어질 것 같구나.'
인상을 찌푸리고 뒷간으로 향했다.
장서각에 도착한 청우와 청상은 신기한 듯이 안을 두리번거렸다.
무당에 십 년을 넘게 살았지만 이대제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장소이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들어가!"
진무의 짜증스러운 한마디와 함께 장서각의 문이 열렸다.
"왔느냐?"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장서각을 지키는 운공.
나이도 배분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노인네였지만, 지금의 진무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어휴, 많기도 많다. 쓸모없는 무공들 같으니."
높다랗게 쌓아 수십 권씩 새끼줄에 묶인 비급을 보며 진무가 푸념처럼 중얼거리자 운공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젠장, 양의심공도 없는데 이 많은 비급이 다 무슨 소용이야."
"응?"
낮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운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왜요?"
운공의 관심에 진무가 짜증스럽게 인상을 썼다.
"아니다. 이제는 아무도 익히지 않는 양의심공 따위에 관심을 두는 것이 신기하여 물어보았다."
"쯧, 무당의 대제자만 익힐 수 있는 고매한 무공을 두고 따위라니."
"허허, 고매한 무공이라?"
운공이 진무의 말을 곱씹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매하긴 하지. 허나 양의심공은 독(毒)이기도 하다."
"...."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이내 진무가 관심을 끊어 버리려는 순간.
"오랫동안 무당의 전설이었던 양의심공을 다시 찾는다면 좋기는 하겠구나. 처음의 모습 그대로...."
운공의 말에 진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요?"
처음의 그 모습은 무엇이며, 다시 찾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무슨 말은. 그저 노인네의 넋두리지. 비급이나 가지고 돌아가거라."
운공이 귀찮은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진무의 호기심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양의심공에 대한 말이 아닌가.
이 노인네, 분명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청상, 청우."
"예, 사숙."
"먼저 돌아가거라."
"예?"
"사부님께는 내가 장서각에 좀 더 머물다 간다 말씀드리고."
"...예."
청상과 청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서각을 빠져나가자마자 진무가 노인의 곁에 앉았다.
"어르신."
"...?"
"양의심공에 대해 아십니까?"
어느새 말투마저 공손해져 있었다.
"양의심공?"
운공은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이었다.
"무당에 양의심공에 대해서 모르는 이도 있다더냐?"
그건 그렇지.
무공을 대표하는 무공 중의 하나니까.
"한데 독이라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양의심공을 처음 그 모습대로 다시 찾는다는 것은 또 무슨 말씀이구요?"
"...."
두 가지 물음에 운공이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거참 근래 보기 드문 놈일세. 내 몇 대의 제자들을 지나왔으나 아무도 양의심공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거늘."
"예? 그게 무슨?"
"무슨이고 나발이고, 어찌하여 양의심공에 대해 관심을 보이느냐?"
운공의 눈동자에 묘한 신광이 어렸다.
"아, 그게...."
"혹, 익혀 보려고?"
눈을 샐쭉하게 뜨는 운공 노인의 말에 진무가 잠시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진무는 운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처음 노인을 만났을 때 느꼈던 기이한 느낌.
그리고 지금의 느낌.
노인은 양의심공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배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노인.
무당의 누구보다 오래 살았을 노인이 어쩌면 한 줄기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히고 싶습니다."
"익혀?"
"예. 뜻하는 바가 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양의심공뿐입니다."
"...."
운공노인이 진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뜻하는 바가 있다라... 흠."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동자.
그의 눈빛을 마주한 진무는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상을 살며 봐 왔던 어떤 눈과도 달랐다.
세월이 쌓여 누런빛이 도는 그것은 단순한 탁수(濁水)인가 싶다가도,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느껴졌다.
"허헛, 네놈 이름이 진무겠지?"
"어찌 아십니까?"
"멍청한 놈. 무당이 다 아는 사실을 어찌 나만 모르겠느냐? 아침에도 명공이 찾아와 네놈 자랑을 한 바가지나 하고 갔는데."
그뿐 아니라 얼마 전에 양소방도 찾아와 대화 내내 진무의 이름을 수도 없이 거론해서 아직까지 귀에 딱지가 앉은 기분이었다.
들은 것만으로 따지면 무당의 역사 이래 무재가 가장 뛰어난 제자가 아닌가.
"약관에 '강'에 이르다니 네놈도 참 대단하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허허, 운이라. 천명(天命)은 쉬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라."
운공의 미소에 진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마치 불가에서 말하는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보였다.
웃음 속에 모든 것을 깨달아 아는 듯한.
'도대체 이 노인의 정체가 뭐길래.'
볼수록 신기한 노인이었다. 진무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냐?"
운공은 마치 진무의 마음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이 물었다.
"예. 운자 배시라면 필경 본문의 최고 어른이실 텐데."
"뭐라? 하하핫! 내가 말이냐?"
"...?"
갑자기 노인이 웃기 시작했다.
"너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묻지도 않았고, 가르쳐 준 사람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운자 배는 맞다만, 죄를 지어 잊힌 파문 제자이니 문도의 예를 차릴 필요 없다. 마땅히 사지근맥이 잘리고 파문이 되었어야 마땅함이나 선대의 은혜를 입어 내공만 폐하여졌느니. 지금은 그저 한 줌 내공도 없이 장서각을 지키는 이름뿐인 노인네니라."
파문 제자. 선대의 은혜.
진무는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노인이 누구건 간에 핵심은 양의심공이었으니까.
"듣자 하니 네가 무당지검의 칭호를 받았다 하더구나."
"예."
"하면 양의심공을 익힐 수 없다는 사실도 들었겠구나."
"예."
"한데 어찌 관심을 두느냐? 이미 선택을 하였음인데?"
운공의 말에 진무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양의심공을 전수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당지검의 칭호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태청신단을 받았지 않느냐?"
"태청신단요? 쳇, 양의심공에 비하면 그냥 내공 덩어리 환약일 뿐이잖아요."
진무의 투덜거림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운공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핫! 태청신단을 그리 표현하다니 실로 미친놈이로다."
"제겐 그렇습니다."
"쯧쯧, 과욕이다. 포기하거라. 무릇 하나를 익혀 대성하기도 힘든 것이 무공이다. 더 욕심내어서는 어중간할 수밖에 없는 게야. 너는 이미 그 나이에 과분할 정도로 이루었으니 천명을 받은 것과 같다. 허니 그 길만을 갈고 닦아도 무림사에 누구보다 이름을 알릴 것이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양의심공에 비하겠습니까?"
"쯧쯧."
진무의 말에 운공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과욕은 좋지 않다.
특히나 이미 빛을 발하고 있는 제자가 아니던가? 더 많은 욕심을 부리는 것은 가야 할 길을 늦출 뿐이었다.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제자가 양의에 매몰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운공은 진무를 말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놈아. 양의(兩意)의 뜻을 모르더냐?"
"예?"
"정상적인 무당의 도사가 그것을 익히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보느냐?"
"...?"
"무릇 태극은 음양이다. 음양은 밝음과 어둠이요, 이는 곧 선과 악이니라. 그 둘을 한 몸에 담는 것이 양의이나 나누어진 것은 다시 뭉치려 들기 마련. 종래에는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선악이 충돌하게 된다. 이를 끝내 융합하면 모르되, 실패하는 순간 심마(心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라."
"...."
"도문의 제자가 마음속의 악함을 이기지 못해 심마에 빠지면 어찌 되는 줄 아느냐?"
"...."
"마귀가 된다. 마선(魔仙)이 되어 세상에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익혀야지.
운공의 말이 맞다. 도인은 사공을 익힐 수 없고 악인은 선공을 익힐 수 없다.
선공을 익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마음마저 정결히 변하는 법이니 사공을 익혀도 내공이 늘지 않는다.
진무의 몸에 쌓인 육양신공의 기운이 묵룡혼원공의 사기를 흩어 놓는 것만 보아도 아는 일이다.
또한, 삿된 마음을 품은 자는 절대로 무당의 무공을 대성할 수 없었다.
무당의 내공이 그러하다. 인내함으로써,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닦으면서 깨달음을 얻는 무공이다. 그렇기에 도가의 내공을 도력(道力)이라 하지 않던가?
하지만 진무는 다른 누구와도 달랐다.
진무는 정상적인 도사가 아니었으니까.
61화
선도의 무공을 익혔다.
마음이 악함에도 강제로 육양신공을 얻었으니, 위화감 없이 무당의 무공을 익혔다.
깨달음의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다 깨달았으니까.
그러니 그 마음 또한 전혀 선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악하고, 여전히 비열하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도포 입은 사파인이었다. 그것도 극악할 정도로 탐욕스러운 사파인. 양의심공을 익힌다 해도 무슨 심마에 빠진단 말인가? 근본이 악한데.
"저는 괜찮습니다."
"뭐?"
"저는 절대로 심마에 빠지지 않습니다."
진무가 자신 있게 말했다.
"허!"
이게 무슨 개소린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 주었건만 '응 나는 괜찮아.'하며 처웃고 있다니.
진무가 도무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운공의 미간이 깊이 일그러졌다.
선도비기를 익혀 앞으로 나아가는 자로서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두면 그 수양이 얕아지기 마련이었다.
해서 운공은 앞으로 무당의 이름을 드높일 진무를 설득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했던 아픈 기억 하나를 꺼내기로 했다.
"백 년 전이다."
백 년 전?
진무, 아니 혁련무강이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였다.
노인의 나이가 많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아니, 근데 뭘 이렇게 오래 살았어? 무당산 정기 혼자 다 빨아 처먹었나?
"하여간 오래전 그때, 마지막으로 양의심공을 익혔던 분이 계셨다."
마치 할아버지가 머리맡에서 으레 해 주는 옛날이야기처럼, 나지막이 읊조리는 운공의 말이 시작되었다.
양의심공.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진무는 할아버지 무릎에 누운 손주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경청했다.
"당시의 장문인이셨던 청무(靑武)께서도 너처럼 당신은 괜찮을 것이라며 양의심공을 수련하기 위해 폐관에 드셨다."
청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양의란 원래 하나의 태극이었다. 하나를 둘로 나눈 셈이지. 그 덕에 한 사람의 몸에 음양의 무공을 익힐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나누어져 있다고 해도 원래 하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조화인 게지. 한데 그것이 쉬운 일이겠느냐?"
그건 아까도 했던 이야기였다.
늙으면 같은 말을 반복한다더니.
하지만 진무는 운공의 말이 끝날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그분은 양의심공에서 말하는 음의 무공을 채우려 사파의 심공을 따로 익히셨다. 하지만 태극으로 합일하는 과정에서 균형을 맞추지 못하여 심마에 빠지셨고, 끝내 마인이 되어 본문에 화(禍)를 남겼다."
음양의 무공이라 했으니 당연히 도가의 심공 외에 사파의 무공이나 마공을 익혔을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화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은 전혀 들어 보지 못했는데?
"생소한 이야기겠지. 청무, 그분에 대해 남은 기록은 무림에서 활동하신 십 년이 전부니까. 그 외에는 모두가 무당 내부의 일이었고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무당에서 막았다. 어쨌든 이제야 다 잊었으나 당시의 무당으로서는 더없는 치욕이었다. 한 줄이라도 역사에 남길 수 없었지. 어쨌든 무당은 십 년간의 기록을 제외하고 양의심공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지우고 마인이 된 그분의 무공을 폐했다."
장문인이 마인이 되었으니 치욕스러울 만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양의심공을 익혔음에도 이런 허접한 무당 도사들에게 막혔단 말인가?
사패천주였던 자신조차도 막지 못했던 무당에게.
뭐, 별로 상관은 없다. 진무가 양의심공을 익히려는 것은 묵룡혼원공을 익히기 위함이니까.
태극 따위를 이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다지 강하진 않으셨나 보네요."
"뭐라? 말도 안 되는 소리!"
진무의 중얼거림에 운공이 갑자기 화를 내듯 소리치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진무를 쏘아보았다.
"강하지 않아? 그분께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마기를 억누르고 동문의 목숨을 앗은 것에 대한 속죄를 위해 제자의 손에 목을 내놓지 않았다면 무당은 물론 온 세상이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아씨, 깜짝이야.
아니면 아닌 거지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런데 온 세상이 피로 물들어?
이 노인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설마 천하제일 고수, 뭐 이딴 걸 말하는 건가? 무당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창때 활동하신 십 년의 시간만으로도 무림사에 더없는 전설을 만들어 내신 분이다. 내 그분의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든 인물은 맹세코 보질 못했느니. 만약 태극을 이루셨다면 황제조차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뭐? 에이, 뻥을 쳐도....
황제가 고개를 조아린다고?
손짓 한 번에 백만 대군을 움직이는 게 황제인데.
이 양반 이거, 과하게 오래 살아서 혹시 노망이라도 난 건?
그런데 이글거리는 운공의 눈동자에 거짓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못했다더라.'가 아닌 '못했다.'였다.
"근데 그걸 어찌 직접 본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그건...."
부리부리한 눈으로 화를 내던 운공이 문득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분의 목을 자른 그 제자였으니까."
"...."
아, 그러시군요.
막 천하제일인이고 모두가 머리를 조아릴 정도의 대단한 사람인데 말이죠.
그 대단한 사람이 정신을 차렸는데 스스로 목을 내놓았다고?
괜히 들었다.
이 노인네, 노망난 게 확실하다.
그리 오래 살면서도 장서각에 처박혀 비급이나 필사하는 이유가 있었다.
차라리 자신이 청무라고 했으면 조금이라도 믿었겠다.
그럼 엎드려 절했겠지. 제발 양의심공을 가르쳐 달라고.
진무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려는데 운공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어쨌든 그때 이후 양의심공의 제이 권이자 후반부인 태극본이 넷으로 나누어졌다."
응? 잠깐만, 두 권이라고?
한 권이 더 있는 거냐?
"두 권이란 말입니까?"
"그래, 원래 두 권이었다. 하지만 그분의 유지에 따라 앞으로 무당의 그 누구도 태극을 이루다 마기에 빠지지 못하도록 태극본을 무당을 제외한 네 곳의 도문에 나누어 봉하게 하셨지."
이 노인네가 진짜.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럼 없다는 거잖아!
듣다 보니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럼 장문인에게 대제자가 전수 받는 양의심공은 뭡니까?"
"전반부다."
"...."
"하지만 태극을 이루는 후반부가 사라졌으니 진정한 양의심공이라 할 순 없다."
말인즉슨 전반부인 일 권이 양의심공이고, 후반부인 이 권이 태극을 이루는 요결이란 말이다.
중요도는 비슷하다고 해도 진무가 필요한 건 전반부였다.
후반부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깟 태극 따위....
결국 진무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말이다.
"그럼 찢어졌다는 태극본은 전반부가 없으면 쓸모가 없겠네요. 양의심공을 익힐 수 없으니 두 가지 내공을 다시 합할 수도 없을 텐데."
"아닐 것이다. 청무께서 주해본과 태극요결을 각기 둘로 나누어 네 곳에 봉인하라 하셨다 하니 후반부에는 전반부의 주해가 담겨 있을 것이다."
뭐? 그럼 후반부가 더 대단하단 소리를 하는 건가? 후반부만 얻어도 양의심공을 익힐 수 있다고?
이 노인네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럼 그 사실을 다른 도문에서도 아는 건가요?"
"글쎄. 그들이 비밀을 지켰다면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겠지."
"...."
진무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운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그사이에 누가 찾았다는 소문도 없구요?"
"글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만."
"혹시 이 이야기를 무당에 또 아는 사람이 있나요?"
"말했지 않느냐? 양의심공에 관련한 내용은 치욕스러운 역사였기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그다음 대 장문인이었던 운정이 후대에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예에."
돌고 돌아 원점.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 이야기는 운공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미친 노인네의 상상 속에서 존재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이야기에 미래를 걸고 싶진 않았다.
더 들을 가치도 없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젠 청무라는 자가 실존했다는 이야기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만한 인물이면 응당 전 무림에 소문이 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리고 아무리 마인이 된 사람이라고 하나 이미 스스로 정신을 차린 인물이다.
조상을 제 몸같이 대하는 도사가 다른 이도 아니고 또한 자칭 중원 최고수로 불린 장문인의 목을 자르고 살아남았단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정도로 대단한 무인이라면 사고를 좀 쳤다고 해도 면벽이네 뭐네 하며 나이 들어 죽어야지.
목을 잘라?
그랬다가는 분명 고리타분한 도사 놈들이 기사멸조를 들먹이며 사지근맥을 자르고 뼛가루를 빻아 뿌려 버렸을 일이다.
노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길래 뭔가 있는 줄 알고 기대했더니만.
신광인 줄 알았더니 그저 미친 노인네라 다른 사람들과 눈빛이 달랐나 보다.
심연인 줄 알았던 것은 그저 멍한 것이라 그리 보였나 보다.
"어쨌든 세월이 이리도 흘렀으니 태극본이 남겨져 있을지도 알 수 없구나. 자파의 것도 아니고 찢겨져 불완전한 것을 과연 보존하고 있을까?"
운공이 아련한 눈빛으로 중얼거리지만 이젠 관심도 없다.
청무? 황제가 머리를 조아려? 하여간 도사 놈들이 뻥은....
"예. 그렇겠네요."
망할 노인네, 혹시나 살아온 세월이 있어 구결이라도 알면 뒷구멍으로 좀 얻어 볼까 했더니.
사실 관계조차 명확하지 않은 역사만 늘어놓았다.
존재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후반부 따위....
흥미가 완전히 떨어져 버린 진무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운공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다만, 어쨌든 다시 말하면 양의심공 같은 헛된 욕심을 버리고...."
* * *
운공과의 대화 이후 충허암으로 돌아온 진무는 스승의 명령에 의해 장서각에서 받아온 책을 종류별로 분류했다.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운 좋게 태청신단을 얻어 강의 경지를 이루긴 했으나 애초의 목표인 양의심공은 완벽하게 날아가 버린 셈이다.
"망할. 괜히 무당지검을 선택한 건가?"
이 무당의 검이란 칭호가 아주 더럽기 짝이 없다.
일단 움직임에 명분이 있어야 한다. 하물며 그의 행동이 곧 무당의 행동과 다름없으니 매사에 조심스럽기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태청신단은 소화되다 못해 뒷간에 버려진 지 오래였다.
당초의 계획은 양의심공을 익힌 뒤에 스승의 허락을 받고 무당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의심공이 날아가 버린 마당에 지긋지긋한 무당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젠 자신을 제약하는 스승의 허락을 받고 떠날 시기가 된 것이다.
한시적으로 떠나는 외유가 아닌, 오랫동안 무당에서 떠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떠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진무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옆에서 함께 비급을 분류하던 청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숙? 표주(漂周)라도 떠나시게요?"
"응? 뭐?"
"아니 무당을 나가신다고 하길래. 표주라도 나가실 생각인가 하고."
"뭐?"
"모르셨어요?"
알긴 안다.
표주(漂周).
그에 대해서 진무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두루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는 말이었다.
무인은 무공만 강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강호를 알아야만 했다.
무공을 익히고 강호를 돌며 경험을 쌓음으로써 진정한 무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표주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 인맥을 키운다.
그것이 표주의 목적이었다.
"표주는 대제자에게 주어지는 기회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그렇죠. 근데 사숙께선 무당지검이시잖아요."
"...응?"
"무당지검은 무당의 대표자이자 외적인 일에 나서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대제자보다 더욱 표주를 나가 경험을 쌓는 것이 마땅할 겁니다."
"아!"
그래, 네 말이 맞다.
왜 그 생각을 못 했단 말이냐.
무당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자신을 제약하고 있는 '스승의 허락'을 받기에도 충분한 명분이었다.
무당지검이니 당연히 표주를 나가서 세상 경험을 쌓아야지.
이미 넘치도록 쌓은 경험이 머릿속에 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 어디서 칼이 날아올지 모르는 무림에서 경험을 쌓아 더욱 뛰어난 무인으로 거듭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기특한 청상 놈.
이런 귀한 정보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다니.
"으하하! 청상아, 청상아. 이런 예쁜 녀석 같으니."
"예?"
"그런 게 있다."
진무가 갑자기 칭찬하자 청상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승님은 어디 계시냐?"
"오룡궁 재건 현장에."
"오냐! 알겠다. 넌 그만 쉬어라. 개인 수련을 해도 좋고."
"예? 아, 알겠습니다."
청상에게 내려진 휴식에 청우가 기대감이 잔뜩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사숙, 저는요?"
"아직 분류되지 않은 비급이 많이 남았는데?"
"...."
"꾀부리지 말고 계속해. 오늘 밤에 확인할 거야."
"...예."
실망한 청우를 뒤로하고 진무는 힘차게 오룡궁 재건 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평판, 업적 같은 건 필요 없다. 대제자? 양의심공도 날아간 판에 엿이나 먹으라지.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남은 건 한 가지뿐이다.
스승의 허락.
그래야 어떠한 제약도 없이 중원을 활보할 수 있었다.
스승도 이제 많이 좋아졌다. 혼자 사냥도 잘하고, 조금씩 무공도 되찾아 가는 모양새였다.
그래, 진무 성격에 이 정도면 충분히 오래 있었다. 이대로 곧장 허락을 받고! 무당을 떠난다!
쇠뿔은 원래 단김에 빼야 하는 법이니까!
62화
진무는 곧바로 오룡궁 건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오로봉으로 올라갔다.
자금이 지원되고 무당에서도 단단히 신경을 쓰고 있기에 기초 공사가 꽤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스승님."
"오, 진무냐?"
공사 현장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명진은 진무의 방문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기특한 제자인가.
그가 단기간에 세운 업적으로 무당의 이름을 다시 만방에 떨치고 있으니 바라만 보아도 뿌듯했다.
"바람이 찹니다."
거기다 스승의 몸 걱정까지.
"걱정 말아라.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알기는.
이러다가 몸져누우면 진무만 개고생이다. 덤으로 떠나려는 계획이 훨씬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원화관의 제자도 있는데 어찌 매일 나와 계십니까?"
"허허, 궁주가 되어서 어찌 그냥 앉아만 있겠느냐?"
책임감 넘치는 꼴이 더 불안하다.
왜 이리 열성적이란 말인가? 자신이 직접 삽 들고 공사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참, 장서각의 책은 다 분류했느냐?"
"...예, 뭐."
"그래 앞으로 우리 오룡궁의 제자들을 교육시킬 비급이니 세세히 잘 분류하거라."
"예."
명진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앞으로는 운공 어른께 가끔 인사라도 가거라. 대화도 좀 나누고."
"왜요?"
내가 뭐 하러 노망난 노인네의 말동무를 해 준단 말입니까?
"응?"
"아, 아닙니다."
"원, 녀석. 실없기는. 어쨌든 자주 찾아뵙거라. 비록 기사멸조의 죄를 범하시어 무공이 폐하여졌으나 이 무림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분이니 대화를 나누어 보면 도움이 될 게다."
어? 뭐? 기사멸조?
순간 진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청무라는 자의 목을 벤 것이 자신이라 하지 않았던가?
뻥이 아니었나?
그럼 설마?
"스승님, 혹시...."
"응?"
"혹시 선대 중에 청무라는 분이 있었습니까?"
정말 혹시나 해서였다.
"청무?"
명진은 의아했다.
이제껏 무당의 역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진무였기 때문이었다.
"있었다. 청무께선 무당의 최전성기를 이끄셨던 분이지."
어? 진짜 있었어?
노망난 노인네의 미친 소리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아니었다고?
"예? 정말이란 말입니까? 무당에 그런 분이 있었다는 소문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그야 당연하지. 기록된 것이라고는 그분이 활동했던 십 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 십 년도 관의 부탁에 의해 잠시 나선 것이라 기록이 몇 줄밖에 되지 않느니라. 도동으로 시간을 더 오래 보내어 무당의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너라면 놓칠 만하지."
말도 안 된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어째서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예? 미친 노... 아니 운공 어른의 말씀으로는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지셨다고."
"흠, 좀 과장되었다 생각은 되지만 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무당의 역사 중 가장 강성했던 시기라 들었다. 지금의 무림에 관무불침의 원칙을 세우신 것도 그분이라는 속설이 있었느니."
그러고 보니 진무도 얼추 들은 기억이 있었다.
관무불침이라는 것이 원래 지금의 나라를 건국한 태조가 무림인의 도움을 받고 내린 칙령이라 하지 않았던가?
얼추 시기는 비슷하다.
그런데 그 무림인이 무당파의 장문인이었던 청무였다고?
"속설이요?"
"그래. 그분에 대해 남은 몇 줄의 기록조차 너무 허황되거든. 한데 네가 어찌 그분을 아느냐?"
"장서각에 들렀다가 운공 어른께 들었습니다."
"운공 어른이? 별일이구나. 그분이 청무 조사님을 입에 담으시다니. 하긴, 청무 그분께서 장문인이실 때 운공 어른이 일대제자였을 터이니."
뭐? 진짜였어?
"허면 청무, 그분에 대한 말이 거짓이 아니란 말입니까?"
"거짓? 허허, 과장이 심하기는 하지만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지.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어떤?"
"일검에 산봉우리를 베셨다든지 강을 갈랐다든지 하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어이없다고 생각했던지 명진이 피식 웃었다.
"네가 들어도 희한하지? 무슨 전설 속 일위도강도 아니고. 허헛."
일위도강(一葦渡江).
소림의 조종인 달마가 한 줄기 갈잎을 타고 장강을 건넜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였다.
근래야 개나 소나 등평도수니 허공답보니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게 짧은 거리면 몰라도 장강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넓은 장강을 수상비로? 가다가 내력이 달려서 물에 빠져 수영으로 나왔겠지.
소림의 땡중들도 참, 달마를 너무 우상화했다.
하지만 허황되다라는 말을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진무의 존재 자체가 허황되지 않은가?
"하면 스승님. 청무 그분의 끝은 어떠하셨습니까? 혹시 마인이 되어 문파의 제자에게 죽었다든지."
"떽! 이놈."
"...."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그것 하나로 내공이 폐해지고 사지근맥이 잘릴 중죄이거늘."
"아, 예...."
"그분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기록이 남지 않았다만 분명 등선을 하신 게 분명하니라. 제자에게 목숨을 잃었다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 놈들 선대라고 포장하기는.
어쨌든 이렇게 되면 운공의 말에 신빙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산봉우리를 베고 강을 가른다.
허황되기 짝이 없긴 하지만 한 가지가 걸린다.
오대도문에 나누어졌다는 양의심공의 제이 권이자 후반부인 태극본의 존재.
다시 희망이 샘솟기 시작한다.
노망난 늙은이의 미친 소리인 줄 알았던 것들이 죄다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샘솟는다.
아니면 또 어떠하랴?
어차피 무당에 남아 있는 양의심공 전반부는 얻을 수가 없다.
대제자만 익힐 수 있다는 망할 규율이 그렇다는데야 어쩔 수 없다. 강제로 뺏고 싶어도 명진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이미 떠날 생각을 굳힌 뒤였다.
그리고 그냥 만약이다.
청무, 무당이 배출했던 무림 최강의 고수.
운공의 말대로 정말로 만약 그가 양의심공을 넘어 태극을 이루다가 심마에 빠졌고.
그로 인해 양의심공 후반부인 태극본이 무당을 제외한 네 곳 도문에 나누어 봉해졌다면?
운공은 분명히 그 네 곳에 나누어진 태극본에 양의심공의 주해는 물론 태극을 이루는 구결까지 있다고 했다.
사라졌던 목표가 다시 세워진다.
"사부님!"
"응?"
"제자 표주를 나가고 싶습니다."
"뭣이? 표주를?"
"예."
진무의 갑작스러운 말에 명진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렇게 다짜고짜?"
"허락해 주십시오. 이미 진정한 무당의 검이 되기로 한 이상, 이제 강호에 나가 경험을 쌓고 좀 더 실력을 키우고자 함입니다."
"허, 녀석 참."
말 그대로 다짜고짜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청무에 대해 묻더니만, 표주를 나가겠다며 허락을 구하다니.
'흠, 녀석. 설마 강호에 나가 보고 싶은 겐가? 하긴, 그럴 때도 되었지.'
명진이 진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일을 수도 없이 눈에 보여 준 자신의 제자.
청무도 허황되지만, 진무도 허황되다.
직접 보지 않고, 겪지 않았다면 약관의 무인이 '강'을 이룩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진무라면 기록에 남은 청무 조사의 그 허황된 소문을 실제로 재현해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주, 무인에게 있어서 무공만큼이나 경험은 중요하다.
이미 무당 최고수라 불러도 좋은 진무의 실력에 경험까지 쌓인다면 호랑이 등에 날개까지 단 격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무당의 상황도 많이 좋아졌다.
제갈세가와의 분쟁 이후로 호북성 각지에서 무당과 연을 맺으려는 상단이 줄을 이었고, 도처에서 제자들이 몰려들고 있었기에 무당의 각궁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참이었다.
또한, 오룡궁 재건은 이제 막 기초 공사가 끝난 시점이었다. 마무리까지 앞으로 일 년은 족히 걸릴 게 분명했다.
진무가 표주를 나간다고 해도 딱히 무리가 될 상황은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나가야 하기도 했고.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진심이더냐?"
"예!"
"음."
명진은 자신의 제자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생각했다.
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있는 대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강기를 선보이지를 않나.
이제는 표주를 보내 달라 한다.
"오냐. 네 뜻이 그러하다면 내 장문인께 청을 넣어 보마."
"예? 스승님의 허락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지난번엔 분명."
"이 녀석. 꽤나 몸이 단 모양이구나."
"그게...."
"하나, 그것과 그것은 다른 문제이니라. 잠시간의 출타야 상관없으나 표주는 길게는 몇 년이나 걸리는 유랑이 아니더냐."
"그렇군요."
"그래. 하니 기다리거라. 내 내일 아침에 장문인을 찾아뵙고."
"지금 해 주십시오."
"응?"
당차게 말하는 진무의 모습에 명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예."
"당장?"
"예."
"허!"
정말로 황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뜻을 먼저 살피고 행동하는 진무가 이 정도로 강하게 자신에게 부탁한 적이 없었다.
스승을 대하는 예의에 다소 어긋나기는 했으나, 명진에게 진무는 아낌의 대상이자 든든한 자랑거리였다.
"허허, 오냐. 알겠다, 이 녀석. 내 서둘러 다녀오마."
"감사합니다."
등이 떠밀려 자소궁으로 가는 명진의 모습에 진무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허락은 떨어졌다.
더 이상 자신의 발목을 잡을 요소는 없다.
설사 장문인이 반대한다 해도 무조건 강행할 생각이었다.
일단 스승이 장문인의 허락을 받아 오는 동안 장서각을 들러야 했다.
운공 노인의 미친 소리, 아니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을 경청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 * *
자소궁의 대전.
한 장의 전서구를 받은 명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전서의 발신지는 정무맹. 그것도 정무맹주 철지량이 직접 작성해 보낸 것이었다.
"허, 무풍개 어르신께서 이리도 무모하시다니. 이거 참."
전서구의 내용은 다름 아닌 용봉회의 개최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 그 주된 내용은 진무를 보고 싶으니 정무맹으로 보내라는 것이다.
분명 진무의 뜻에 맡기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음에도 서신까지 보내 부른다는 것은 무풍개의 입김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맹주께서 직접 보내신 서신이니 아니 보낼 수도 없고."
인사차 보내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문제는 진무가 무당지검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즉, 무당을 대표한다.
더 이상 후기지수와 동급으로 놓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당연히 용봉회에는 참석할 수 없다.
장문인과 장로, 무당 전체가 인정하는 고수를 그들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무당의 격에 맞지 않았다.
또한, 무당의 검으로서 무당을 지켜야 함이 마땅한 자가 정무맹의 어느 단체에 소속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인사만 나누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테고, 필시 진무를 회유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제자로든, 소속 무인이로든.
하지만 거절을 해야 하는데 마땅한 명목이 없다.
"허 참, 어찌한다?"
명현이 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장문인, 오룡궁주 명진 들었습니다."
진무의 표주를 허락받기 위해.
63화
"오, 어서 들어오게."
명현이 명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이 사람, 정식 회의도 아닌데 뭐하러 그리 격식을 차리는가. 이리 와 앉게."
"예."
명현은 자리를 내주고 직접 차를 따라 명진에게 내밀었다.
명진은 그사이에 명현의 얼굴에 어린 수심을 읽어 내고 물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근심?"
"예. 그리 보이는군요."
"그랬는가?"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맹주가 보낸 서신을 슬며시 내밀었다.
"이건?"
"맹주님께서 직접 보낸 서신일세."
"음."
명진이 서신을 읽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얼 고민하십니까?"
"뻔히 보이는 수가 아닌가? 진무를 회유해 볼 속셈인 것일세."
"그러네요."
"그리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닐세."
"보내면 될 일입니다."
"뭐?"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이참에 청우와 청상도 용봉회에 보내시지요."
안 그래도 고민인데 명진이 한술을 더 뜨자 명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장문인."
"...."
"오늘 진무가 제게 와서 표주를 떠나겠다며 허락을 구했습니다."
"표주라고?"
"예."
"아니 그 아이가 어째 표주를 나간단 말인가? 이미 그 아이의 무공이."
"하나 경험은 일천하지요."
"음."
"조금 이르기는 하나 어차피 무당지검의 칭호를 받았으니 오대도문의 인장을 받아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참에 강호 경험도 할 겸 표주를 보내 주시지요."
"응?"
"무당지검은 중원 오대도문의 인장을 받아 오는 것이 전통이지 않습니까."
"아!"
명진의 말에 명현이 제 무릎을 쳤다. 어찌 이 생각을 못 했단 말인가?
무당지검이 몇 대에 걸쳐 끊어졌었기에 그 생각을 깜빡 잊고 있었다.
"용봉회의 목적은 각 파의 이대제자들 사이에서 옥석을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이미 청상과 청우의 무공이 나이답지 않게 강맹하니 단연 발군의 실력을 보일 것입니다."
"옳네. 무당의 이름을 세울 뿐 아니라 체면도 차릴 수 있지. 저들의 요구를 거절한 건 아니니까 말일세."
"예. 오대도문의 인장도 받을 겸 진무를 인솔자로 두시고 인사를 전하게 하시지요."
"옳거니. 찾아오라 했으니 찾아가 인사를 하고, 표주 중이니 회유는 정중히 거절하고."
"예. 무당지검이 된 제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전통이니 맹주께서도, 무풍개 어른께서도 과한 요구를 하며 잡지는 않으실 겝니다."
"허허, 자네의 혜안(慧眼)에 탄복할 따름일세."
"혜안이라니요. 저도 진무가 표주를 보내 달라 하지 않았다면 생각해 내지 못했을 일입니다."
"알겠네. 하면 서둘러 채비를 하라 이르게."
"예, 장문인."
막상 진무의 표주에 대해 어찌 말할까 고민했던 명진도, 정무맹의 청을 어찌 거절할까 고심했던 명현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물론 가장 득을 본 것은 진무였다.
* * *
정무맹주 집무실.
호피로 감싸인 의자에 느긋하게 앉은 중년의 사내.
고집이 묻어나는 얼굴에 용목(龍目)을 박아 넣은 듯이 부리부리한 눈.
의자 뒤 벽에 걸린 백색의 검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는 당금 정무맹을 이끄는 검성 철지량이었다.
위압감이 절로 느껴지는 외모만큼이나 그의 업적은 대단했다.
정사마를 통틀어 검으로 최고의 위치에 오른 무인.
맹주에 오른 지 십 년. 그는 다양한 노력을 통해 정무맹을 변화시켰다.
지부를 신설해 지역 무림계를 통제하고 우수한 재원을 끌어들여 맹 예하 여섯 개의 무력 단체를 만들었다.
그들을 통해 정무맹 산하의 각종 분쟁을 해결하는 한편, 각 파의 명망 있는 고수들을 포섭해 맹에 상주시킴으로써 중앙 집권적 체계를 형성했다.
그로 인해 정무맹은 흩어지지 않고 뭉칠 수 있었고 일월마교, 사패천과 더불어 중원의 삼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누구나 인정하는 위업. 그럼에도 지도자로서, 권력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소탈함으로 중원 정파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거인.
칠십에 이른 나이에도 모두가 연임을 의심치 않을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그에게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조차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의 옆에서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이가 있었다.
철지량이 무력이라면 그는 그 무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지혜.
바로 지금 그의 앞에 학익선(鶴翼扇)을 들고 앉은 고고한 자태의 학사이자 정무맹 대군사 제갈협진이었다.
"맹주님, 각 파에 용봉회에 관련된 서신을 모두 전달하였습니다."
"그러한가?"
제갈협진의 보고에 철지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어찌 되어 가는가?"
"예. 이번에 신설되는 용봉관은 무관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입니다."
"교두들은 모두 선발하였는가?"
"예. 정무맹 예하 이름 높은 재야 고수들을 모두 초빙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응?"
"용봉관주를 누구로 앉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흠."
철지량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새롭게 신설되는 용봉관.
이는 정무맹의 두 기둥인 제갈협진과 양소방의 의견을 모아 진행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의문의 세력인 '궁'에 대비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중원을 삼분하는 일월마교와 사패천보다 훨씬 강한 무력을 지니기 위함도 있었다.
가려지지 않은 옥석들을 선발해 정무맹 예하에 강력한 무인 단체를 장기적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구파일방, 칠대세가는 물론 정무맹에 소속된 중소 방파를 비롯해 상계의 무인들에게까지 소식을 전했고.
방을 붙여 재야의 재능 있는 낭인들까지 참가할 수 있게 했다.
계획대로 용봉관이 지어지고 제대로 운영만 된다면 장차 정무맹 최대의 무관이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 된다.
그렇기에 용봉관주를 누구로 앉히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오직 맹주의 명에 충성해야 했고, 흔들림 없이 곧은 마음을 가져야 했다.
"정무칠성 중에서 고르시면 안 됩니다."
"음."
자칫 맹주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력에 소속되지 않은 자여야 하고요."
자파의 이득을 우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땅한 자가 있는가?"
"백로(白鷺)는 어떠십니까?"
"백로를?"
"예."
"음."
분명 그의 이름을 꺼내기 위해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백로(白鷺) 등여평.
올해 나이 예순둘.
호남성(湖南城) 석문의 등가장이라는 작은 무가 태생이었으나 이미 그의 무위가 정무칠성에 버금간다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권력욕이 없고 세력 다툼에도 뜻이 없는지라 가문의 주인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은거한 자였다.
"백로라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인사이긴 하지."
"그렇습니다. 그분의 신상에 어떤 오점도 없을 뿐더러 맹주님과 작은 연조차 없으니 더욱 합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의 고고함에 대해서는 철지량도 잘 알고 있었다.
정파 내의 세력 다툼에서 벗어난 중도파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오죽하면 '백로'라 불리겠는가?
"하지만 그는 은거한 뒤로 신분을 감춘 채 강호 유람을 다닌다 하지 않았나?"
"예."
답하는 제갈협진의 얼굴이 자신에 차 있자 철지량이 피식 웃었다.
"위치를 찾은 모양이군."
"비흔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의창에 있다는군요."
"의창? 근처에 있었구만."
"어찌할까요?"
"음. 그를 용봉관주로 앉힐 수만 있다면야 더없이 좋은 일이네만."
그의 성정을 잘 아는 철지량은 반신반의한 표정을 했다.
"그런데 그가 승낙을 할까? 예전에도 맹의 장로직을 권했다가 거절당했지 않은가?"
"그랬었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음, 좋네. 일단은 그를 초빙해 보게. 허나 다른 인물들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게야."
"예. 이미 차선책으로 용무 여월협 대협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흠, 용무는 좀 그렇지 않겠나?"
제갈협진이 거론한 인물에 철지량이 껄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용무(龍武) 여월협.
등여평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일파의 장문인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었다.
또한, 곧은 성정만을 따진다면 등여평에 못지않기에 이견이 없을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철지량과의 인연이었다.
너무 깊다.
어렸을 때부터 형 동생 하며 자란 막역한 사이니만큼 그가 막강한 힘을 가진 용봉관주가 된다면 주위의 시선이 곱지 못할 것이었다.
필경 인맥에 의한 인사니 하며 호사가들의 입을 오르내릴 것이 자명했다.
"일단은 차선책일 뿐입니다. 만약 백로께서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강행해야 하지만 승낙하신다면 그분께 부관주의 직위를 청해 볼까 합니다."
"알겠네. 두 사람 모두 모자람 없는 인물이니 잘 판단해서 처리하리라 믿네."
"예."
"어쨌든 이번 용봉회에 참석하는 이들 중 이름이 제법 알려진 녀석들이 많은 모양이더군."
"예. 특히나 비흔 어른께서 천거하신 무당의 제자는 단연 발군인 듯합니다."
"흐음."
철지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이라 불리는 이들을 은밀하게 쫓던 중에 만난 무당의 제자.
제갈분가와의 마찰에서 모익상을 꺾었다.
그것도 그냥이 아니라 개 패듯이 해 두어 다시 재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검사를 사용하고, 양소봉의 쇄심파를 똑같이 흉내 내었다고 들었다.
궁금증이 일어 알아보니 사패천 수적의 하나인 천수채까지 토벌했다지 않는가?
개방에서 은밀하게 전해 온 소식이라 아직 무림에 그의 이름이 자세하게 소문이 나지는 않았으나 실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내 무당 장문인께 직접 서신까지 보냈다네."
"예. 들었습니다."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자네 가문에서도 천재라고 소문난 제갈선의 쌍둥이 동생이 참석한다지?"
"예."
"흠, 아깝구만. 그 제갈선이라는 아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가문의 대공자니 어쩔 수 없지."
철지량이 그 이름을 거론하자 제갈협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실은 그 아이가....'
제갈협진은 무언가 말을 감추는 듯했다.
"허허, 다행일세. 재능 있는 젊은 무인을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함이야. 그들이 장차 우리 정무맹을 이끌 핵심이 될 테니 말일세."
"옳은 말씀입니다."
"어쨌든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게.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정무맹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네."
"예. 맹주님."
제갈협진이 공손하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간 뒤 철지량이 창가로 다가갔다.
멀리 완공되어 가고 있는 용봉관의 공사 현장이 보였다.
"흐음, 백로라."
좋은 일이었다.
그가 관주직을 허락한다면 용봉관의 위상은 한층 높아질 것이 틀림없었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니 어쩌면 수락할지도."
64화
의창(宜昌) 나루 인근.
의창은 호북성 중앙, 강줄기에 위치한 거대한 도시였다. 거대한 수로(水路)가 지나는 곳이라 원래 사람이 많기도 하였으나 특히나 이번 용봉회의 개최로 인해 중원 각지에서 몰려든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바로 수로 때문이었다. 정무맹이 위치한 무한으로 편안하게 가자면 반드시 의창에서 배를 타야만 했다.
무당을 떠난 진무는 표주와 더불어 청상과 청우를 무한의 정무맹까지 데려다주라는 명을 받았다.
그게 무슨 대수일까? 꿈을 이루게 생겼는데.
한껏 신바람이 난 진무는 사질들을 데리고 무당산을 떠난 뒤, 곧장 육로를 타고 남쪽으로 열흘 가까이를 내려오다 의창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하도 사람이 많아 배를 구하지 못해 주루에 들른 참이었다.
그것도 세 곳을 돌아 겨우 구한 자리였다.
청우가 좋아하는 고기를 잔뜩 시키고 술까지 시켜 두었는데 뜬금없이 노인 하나가 다가와 합석을 요구했다.
진무가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고 있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합석을 하자구요?"
"그렇네."
"왜요?"
"응?"
당연히 승낙해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까?
심드렁한 대답에 노인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야 하냐구요?"
"...."
진무의 물음에 노인은 더욱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복장을 봐선 무당의 제자가 확실하다.
또한, 나이가 어린 것을 보니 용봉회에 참석하고자 하는 이대제자임이 분명한데.
이런 경우.
'합석을 부탁합니다.'라고 하면 '예.'라고 대답하는 게 도사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품성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요라니?
잠시간 멍하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던 노인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지금 주루에 자리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자네들 자리는 사 인석이고 한 자리가 비니."
궁색한 표정으로 변명을 하는데 진무가 손가락을 들어 주루의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저기."
"...."
"사 인석에 둘이 앉은 곳도 있고 셋이 앉은 곳도 있고, 심지어 혼자 앉은 곳도 있는데 왜 하필 이 자리인 겁니까?"
"응? 아, 그건."
순간 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진무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대로 합석을 할 수 있는 자리는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진무 일행에게 합석을 청한 이유는... 신기해서였다.
도포를 걸친 도사가 고기와 술을 시킨 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기세를 보면 보통 녀석들이 아니었다.
그냥 앉아만 있는데도 온몸에서 선기를 풀풀 날리는 것이 나 도사입네 외치고 있을 정도였다.
하도 의아해서 어떤 놈들인지 보려고 온 걸음인데 이리도 박대를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딴 데 가시죠."
짧게 말하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너무도 매몰차다.
"아니, 이보게. 자네들은 무당의 도사가 아닌가?"
"근데요?"
"아니,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밥을 사 달라는 것도 아닌데 어찌 무당의 도사들이 합석을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하등 쓸데없는 편견이군요."
"뭐?"
"무당의 도사라고 꼭 합석을 승낙할 이유도 없거니와 노인장께서 돈 내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
"내 돈 내고 내가 합석을 안 하겠다는데, 그게 도사인 것과 무슨 상관이냐구요?"
"아, 그, 그렇지."
"그렇죠? 그러니까 딴 데 가서 알아보세요."
"...."
노인은 살아오면서 이런 식의 반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저, 사숙."
"왜?"
"합석해도 저희는 괜찮은데."
"시끄러. 내가 안 괜찮아."
청상이 말을 꺼냈다가 핀잔만 들었다.
그리고 진무가 계속 거부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노인의 정체 때문이었다.
'백로 등여평.'
어찌 모를까.
중원 무림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사패천주였던 진무가 반대 세력의 쟁쟁한 무인의 얼굴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이름은 물론 성격까지 모조리 꿰고 있었다.
사실 합석을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호기심 많은 성격에 분명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틀림없다.
또한, 그의 출신은 석문 등가장이라는 약소한 가문.
재물 보기를 돌같이 하는 검소함을 가진 것도 모자라 피곤하기 짝이 없는 대쪽 같은 성품까지.
즉, 양소방과 달리... 가난하고도 가난하여 얻을 게 없는 귀찮은 노인네일 뿐이다.
"이보게. 그러지 말고 좀."
"거참, 귀가 어두우신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진무가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사숙?"
"야, 사숙이고 나발이고 빨리 일어나."
"예? 하지만 고기가."
"귀찮은 노인 때문에 입맛이 떨어졌어. 딴 데로 가자."
"...."
진무의 행동에 노인, 아니 등여평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 입맛이 떨어져? 귀찮아?
이런 싸가지 없는 도사 놈이.
등여평이 눈을 찌푸리며 화를 내려는데.
"이보오! 주인장."
"예?"
"이 노인 때문에 귀찮아서 나가야겠소. 그러니 음식과 술은 취소해 주시오."
"아, 아니, 도사님. 이미 요리를 하고 있는데."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뭣하면 이 노인께 돈을 받던가."
진무가 휘적휘적 나가 버리자 청상과 청우가 눈치를 보며 그 뒤를 따라갔다.
"허, 뭐 저런 놈이?"
등여평이 당장에 버릇을 고쳐 주려는데 주루의 주인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은자 네 냥입니다."
"...."
"네 냥요."
등여평은 문밖으로 사라지는 진무 일행과 주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 냥!"
뭘 네 냥씩이나. 것도 은으로....
소라도 잡아 달라고 한 게냐?
부리부리한 눈으로 쏘아보았지만 물러섬 없는 주인의 눈빛에 등여평이 눈물을 머금고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등여평을 놓고 주루를 나온 진무는 짜증스럽게 관도를 걸었다.
"이상한 어르신이네요. 싫다는데도 굳이 합석을 하자고 하셔서는."
고기를 잔뜩 먹을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덩달아 기분이 상한 청우가 볼을 잔뜩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청우야. 실례니라. 어찌 어른께 그 같은 말을 한단 말이냐?"
"왜요? 사숙께서도 하시는데."
"어허, 사숙께서 너와 같으냐?"
"치."
청상이 나무라자 청우가 진무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하지만 딱히 청우를 나무랄 일도 아니었다.
청상은 몰라도 진무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 어른이고 말고를 떠나서 싫다는데 엉겨 붙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흠. 복장을 좀 바꿔야겠군. 성격대로 행동했다가는 스승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겠어.'
자신이 어찌 비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남들 눈 따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무당이 욕먹는 것까지도 전혀 상관없었지만, 스승이 욕먹는 것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분명 마음의 짐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청상, 청우."
"예?"
"포목점으로 간다."
"포목점이요?"
"그래. 편한 옷으로 한 벌 사야겠다."
"예."
청상은 여전히 진무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
가, 하면 가고 와, 하면 올 만큼 충성스럽다.
"배고픈데...."
청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따른다.
저건 진짜 식충이도 아니고.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입맛을 버린 것은 자신 혼자였다.
무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인솔자요, 보호자 신분이니 배불리 먹여 줄 수밖에.
* * *
다음 날.
허름한 객잔에서 겨우 방을 구해 잠을 청했던 진무와 청우는 지난 밤 포목점에서 산 검은 무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사숙."
아침 일찍 배편을 확인하러 갔던 청상이 돌아왔다.
"배편이 없답니다. 그나마 있는 자리도 예약이 되어 있어서."
"쳇."
용봉회가 뭐가 그리 대수라고 배편이 없단 말인가?
청상과 청우를 서둘러 정무맹에 떨궈 놓고 오대도문을 찾아 떠나려던 여정에 차질이 생기자 짜증이 났다.
하루빨리 있을지 모를 양의심공 태극본을 구해 정사마를 발아래 꿇리고 덤으로 황제까지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이런 큰 행사가 열리면 돈을 들여서라도 배편을 추가로 마련해야지. 하여간 정파를 대표한다는 놈들이 일 처리하는 꼬라지하고는....
"하루에 운항하는 배편이 두 척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척은 제갈세가에 전세를 내었고 또 한 척은 경유선(經由船)이라 들르는 곳이 많구요."
진무는 청상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제갈세가에서 전세 낸 배야 그렇다고 해도.
"청상아, 청상아."
"예?"
"혹시 웃돈을 얹어 줄 생각은 해 봤니?"
"정해진 뱃삯이 있는데 웃돈을 줘야 합니까?"
그래, 그렇겠지.
"혹시 상선 같은 걸 알아보거나 하진 않았겠지?"
"상선이요? 상선을 왜?"
역시 그렇겠지.
그러니 무당의 제자겠지.
하아, 이것들은 역시 사회성이 부족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편법을 동원해야 할 때가 있거늘, 어찌 이리도 융통성이 없단 말인가?
이 우매한 중생들을 위해서 직접 시범을 보여 주는 수밖에.
"에휴, 앓느니 죽지. 가자, 가."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나자 청상과 청우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뒤따랐다.
막 그들이 여곽을 벗어나는데.
"이보게!"
"...."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진무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등여평.
거참, 대체 저놈은 엉겨 붙기를 왜 이리도 좋아한단 말인가?
"어제는 도포더니 오늘은 흔하디흔한 무복이구만? 혹시 도사 사칭, 뭐 그런 거였나? 그러기에는 가진 재주가 무당임이 확실한데."
등여평이 턱을 쓸며 진무 일행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진무가 무시하면서 가려는데.
"거기 서라니까."
등여평이 다짜고짜 손을 뻗어 왔다.
단순히 뻗은 것뿐이지만 고수의 손길에는 현기가 스미기 마련. 그의 손길에는 금나수의 묘리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었다.
그런데.
"...."
가볍게 일보를 물리는 것만으로 피해 버린 진무의 모습에 등여평이 허공을 움켜쥐고는 눈을 끔벅거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휙, 휙.
마치 휘젓듯이 내질러지는 손이었지만 진무는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허! 이것 봐라?'
처음에는 그저 그의 걸음을 멈추기 위함이었으나 자꾸만 헛손질이 계속되자 괜한 오기가 생겼다.
'어디....'
등여평이 손가락을 묘하게 구부리려는 찰나.
"정말! 도대체 왜 그럽니까?"
"...."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멈춘 진무의 눈빛에 등여평이 엉거주춤하게 멈춰 버렸다.
"아, 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고심하던 등여평이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외쳤다.
"왜라니, 당장 내놓게!"
"뭘요!"
"은자 네 냥!"
"...."
"자네 때문에 내 얼마나 고초를 겪은 줄 아는가? 도대체 뭘 시켰길래 음식값이 네 냥이나 된단 말인가?"
"...."
"어서 내놓게."
대놓고 강짜를 부린다.
백로.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바름을 몸소 실천해 온 정파의 큰 어른인 그를 부르는 이름.
근데 뭐가 이리 쪼잔하단 말인가? 고작 은자 네 냥 가지고.
"더럽게 쪼잔하시기는."
"뭣이? 이놈이 은자 네 냥이 얼마나 큰 돈인지 모른단 말이냐!"
알지.
모를 리가 있나.
"은 한 냥이면 쌀이 두 섬이다. 네 냥이면 쌀이 여덟 석이야. 이는 다시 말해 네 식구 가정이 넉 달은 족히 살 만한 양이거늘 뭐? 쪼잔해? 도대체 뭘 처먹으려 들었기에 주루에서 은자 네 냥씩이나 되는 요리를 주문한단 말이냐? 너에게는 도사로서의 양심도 없단 말이냐? 저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들이 불쌍하지도 않단 말이냐? 그 돈으로 고기 요리를 먹기 전에 그들을 도와줄 생각 따위는 없었단 말이냐?"
"...."
그래, 안다.
하지만 말이 길다.
남이 얼마를 주고 뭘 먹든 뭔 상관인지 모르겠다. 더욱이 불쌍한 사람을 돕네 마네.
그 고기 옆에 있는 청우가 다 먹는다고 말할까도 싶었지만 별로 상대하고 싶지가 않았다.
노인네들은 왜 다들 이리도 잔소리가 많은지.
65화
짤랑.
"자요."
등여평과 길게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던 진무가 피 같은 은자 네 냥을 꺼내 내밀었다.
"응?"
"여기 네 냥 있으니까 가져가시라구요."
"어, 그래."
잘도 받아 챙긴다.
백로? 개뿔이.
"그럼 됐죠? 이제 보지 맙시다."
"...."
"청상, 청우. 가자."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는데.
저벅, 저벅.
등여평이 계속 따라오는 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아, 왜 따라와요?"
"응? 따라가다니? 난 그냥 내 갈 길 가는 중일세."
"...."
"가게, 어서."
"먼저 가세요."
"쉬는 중일세."
이 노인네가 진짜 미쳤나?
무당 도사 신분에 사람들 몰래 어디 뒷산에 파묻어 버릴 수도 없고.
진무는 서둘러 그를 떼어 버릴 생각에 걷는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등여평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똑같이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닌가.
팡!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진무가 제운종을 펼쳐 담벼락을 밟고 솟구쳤고.
등여평이 마치 추격이라도 하듯이 경공을 펼쳐 뒤따랐다.
'아, 정말 미치겠네. 청상과 청우 때문에 속도를 더 낼 수도 없고.'
뭐 이런 끈질긴 놈이 다 있단 말인가?
나루로 향한 걸음을 최대한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녔지만 등여평이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도 마치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등여평은 그렇게까지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진무 일행이 객점을 나서는 것도 우연히 본 것이었다.
어제 주루에서의 상황도 있고, 갑자기 흔하디흔한 무복으로 갈아입었길래 궁금해서 말을 건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손아귀를 피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신기해서였다.
무당에 이런 거친 성격의 도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싸가지는 둘째 치고 술에 고기까지 대놓고 먹으려 할 줄은 몰랐으니까.
두 번째는 호기심이었다.
어떻게 피했을까? 많아야 약관임이 분명한데.
그는 딱히 무림의 세력 다툼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었다.
자신의 손길을 피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약관의 나이, 청렴과는 거리가 먼 풍족한 도사.
'거, 신기한 놈이로다.'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는 놈이었다.
그가 의창에 머문 지 한 달, 또 다른 곳으로 떠나려 했던 차에 참으로 재미있는 놈을 만났다.
'이거 재미있네. 이런 놈들이 모이는 용봉회라면 구경할 만할지도 모르겠어. 이참에 무한으로 가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뒤쫓는 사이 진무는 그를 떼어 낼 생각을 포기한 것인지 나루에서 멈췄다.
등여평도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진무는 나루에 정박한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박한 배는 모두 넷.
청상이 말한 경유선은 이미 사람들을 채우고 떠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제갈세가의 옷차림을 한 무인들이 가득했고, 나머지는 물건을 잔뜩 싣고 떠나는 상선과 관선이었다.
"제갈세가의 배로 갈 모양이지?"
그리 생각을 했는데.
"혹 자리 있소?"
상선으로 다가간 진무가 갑자기 선주(船主: 배 주인)와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응?'
갈수록 희한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속도가 생명인 상선이 가장 빠르기는 하겠지만, 불편하다.
저런 경우 백이면 백 제갈세가의 배를 타거나 관선에 타야 정상이었다.
자신이 아는 제갈세가라면 분명 배를 통째로 전세를 냈을 것이다. 그들은 돈이 많으니까.
물론 전세를 냈다고는 해도 무당 도사 셋 정도는 충분히 태울 수 있을 만큼 자리가 많을 것이다.
만약 그도 안 된다면 관선에 타야 한다.
아무리 관무불침이라고 하나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이니 무당의 이름을 듣고 태워 주지 않을 배가 없었다.
더군다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니 가난한 도사에게는 오히려 적격이라고 할 만했다.
등여평 자신도 몇 번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하핫! 고맙소! 내 안전은 책임지리다!"
"...."
진무가 오랜 친구인 양 선주와 어깨동무를 하며 웃는다.
고작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무당의 도사가 저렇게 친화력이 좋았나?
점점 더 호기심이 넘치게 만드는 놈이었다.
등여평이 피식 웃으며 자신도 한 자리 끼어 볼까 싶은 마음에 상선을 향해 다가갔다.
왠지 무당의 도사들과 시간을 보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게."
"예?"
"혹 자리가 있으면 좀 얻어 탈 수 있겠는가?"
등여평의 말에 선주가 딱 잘라 거부했다.
"없습니다."
응? 뭐?
그럼 쟤들은 뭐야?
등여평이 슬쩍 고개를 돌려 진무를 바라봤다.
그리고 보았다. 진무의 입가에 지어진 음흉한 미소를.
'저놈이 설마?'
농간을 부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끓어오른 호기심에 절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아니, 어찌 없단 말인가? 딱 봐도 자리가 남는데?"
"아, 그 자리를 전부 저분이 사셨습니다."
"응?"
"죄다요."
"...."
"웃돈까지 주시면서요."
선주가 손에 든 전낭을 보여 주며 환하게 웃었다.
말로 흥정한 게 아니라?
돈으로 샀어?
자리를?
진무가 등여평을 바라보며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배에 올랐다.
'허, 뭐 저런 놈이.'
오기가 생긴다.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니었지만, 무조건 진무와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등여평은 이제 대놓고 생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저놈이 한 자리에 얼마를 주기로 했는지 모르지만! 은 한 냥을 내겠네!"
등여평이 품에서 은 한 냥을 꺼내 내밀었음에도 선주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뭐?"
이것들이 진짜. 무한까지 가는 최고급 객선(客船)의 가격도 반 냥이 안 되거늘!
"그럼 두 냥?"
"글쎄, 안 된다니까요."
"뭐? 아니 저놈이 도대체 얼마를 냈기에!"
"그게 아니라. 저 공자께서 호위뿐 아니라 화물 선적도 돕겠다고."
"뭐?"
"안 그래도 상단 호위들이 근래 많이 지쳐 있었는데 잘되었지 뭡니까."
"...."
환하게 웃는 선주의 뒤로 청상과 청우가 네 사람은 족히 들어야 할 물건을 보란 듯이 한 손으로 들고 척척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진무가 등여평을 보며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저, 저놈 자식이!'
어딜 봐도 약을 올리는 모양새.
"흥! 그럼 나도 호위를 해 주지! 저런 어린놈들보다야."
등여평이 욱하는 마음에 소리치자 선주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누구...신데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음."
가슴을 펴고 당당히 제 이름을 말하려던 등여평이 문득 입을 닫고 말았다.
딱히 비밀을 유지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말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무림에 나름 잘 알려진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무당의 도사들이 분명 예를 갖추며 사죄를 해 올 게 분명했다.
그에게 그 정도 이름값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리되면 무당 도사들과 보내려던 재미있는 시간(?)은 꿈도 못 꾸게 될 것이다.
"노인장께서 누구시기에 호위를 해 주신다고?"
선주가 눈치도 없이 자꾸 물어 왔다.
"아, 그게."
그렇다고 안 탈 수도 없고.
* * *
"무슨 소란인가?"
막 가문 호위들의 안내를 받아 배에 오르려던 왜소한 체격의 청삼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상선으로 보이는데 웬 노인이 생짜를 부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생짜를 부려?"
"예. 알아볼까요?"
"되었다. 작은 소란일 텐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는가?"
청삼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상선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려던 고개가 문득 뻣뻣하게 멈추고 말았다.
"어? 저분은?"
청삼 사내의 고개가 다시 홱 돌아갔다.
그의 시선은 상선의 선주와 옥신각신하는 노인에게 향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는 분이라도?"
"아니, 저분의 얼굴이 어째 낯이 익은데... 아!"
잠시 고민하던 청삼 사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수하의 질문에 답도 하지 않은 채 오르던 뱃전을 밟고 훌쩍 몸을 날렸다.
어찌 그런지 영문을 몰랐지만, 그의 수하들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아! 그러지 말고 사정 좀 봐주라니까!"
"안 된다니까요!"
"거참, 한 자리 얻어 타자는데 뭘 그리 박한가."
"이미 값을 치러 받았다 하지 않습니까."
"내겠다지 않는가! 덤으로 호위까지 하겠다는데!"
"거참, 다 늙은 분이 무슨 호위를 하신다고."
막아서는 선주와 필사적으로 배를 타려는 노인.
그리고.
"무림 말학, 선(宣)이 백로 등여평 어른을 뵙습니다."
청삼 사내, 제갈선이 노인의 뒤로 다가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말에 제갈선을 따라온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어?"
자신을 알아본 제갈선으로 인해 선주와 옥신각신하던 등여평이 당황한 표정으로 배 위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진무 일행은 아직 듣지 못한 눈치였다.
[예를 거두거라.]
[....]
다급하게 날아온 전음에 제갈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제갈세가의 촉망받는 인재답게 매우 눈치가 빨랐다.
전음과 표정만으로 등여평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 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수하들에게 예를 거두게 한 제갈선은 등여평의 신분을 입에 담지 않고 그저 '어르신'이라 칭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르신. 혹 배편이 필요하십니까?"
"응? 아, 아닐세. 신경 쓰지 말게."
"...."
등여평의 떨떠름한 표정이 이상했다.
선주와 나눈 이야기를 들어 보건대 필시 배를 타려는 것이 분명하거늘.
그의 신분이라면 아무리 제갈세가에서 전세를 내었다 해도 객실 한 칸 내어 주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것만도 영광이 아니던가?
그런데 한눈에 보기에도 불편하고, 선주가 완강하게 거절하는 상선을 굳이 타려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제갈선의 시선이 상선을 향했다.
'저들 때문이군.'
그리고 선원들과는 이질적인 모습을 가진 이들을 발견했다.
특징 없는 흑의 무복의 사내 셋.
둘은 선원들과 함께 짐을 나르고 있었고, 나른해 보이는 표정의 사내는 선두에 느긋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저들이 누구길래?'
제갈선의 시선이 그들 중 짐을 나르고 있는 한 명의 사내에게 고정되었다.
날카로운 기도를 가진 사내는 뭇 여성들의 방심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등에는 한 자루 검을 메고 있었다.
손잡이 끝에 태극 문양을 새긴.
'무당?'
그리고 그들이 탄 배에 오르려고 하는 등여평.
'어찌 무당의 제자들에게 관심을?'
묘한 호기심이 동했다.
특히나 호북성을 두고 오랜 세월 자웅을 겨루어 온 무당임을 알고 나자 궁금증이 더했다.
'백로께서 관심을 가질 만한 무당의 도사라.'
골똘히 생각하던 제갈선이 미소를 지으며 등여평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응?"
"저희 배에 타시지요."
"괜찮네. 굳이 신경 쓰지 말게."
등여평이 거듭 거절하자 제갈선의 얼굴에 더욱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면 저기 무당의 제자들과 함께라면 어떠하십니까?"
"뭐?"
제갈선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자 등여평이 조금 놀란 눈으로 제갈선을 바라보았다.
제법 눈썰미가 좋지 않은가?
도포를 벗고 신분을 감추었음에도 무당의 도사임을 알아차리다니.
더욱이 자신이 상선에 오르려는 목적마저 순간적으로 간파했다.
'호오? 거참, 제갈세가의 선이라는 아이가 천재라 불린다더니.'
등여평은 제갈선을 보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더욱이 표정만으로 허락을 득하였음을 직감한 제갈선은 행동마저 빨랐다.
진무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쓸데없이.
66화
"이보시오. 선주."
"예?"
"본인은 제갈세가의 제갈선이라 하오."
"아!"
선주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이미 그들의 복장을 보아 제갈세가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창 제갈분가에서 용봉회를 위해 출발하는 인물이겠거니 했는데, 분가가 아닌 융중 본가의 제갈선이라니.
호북성에서 상단을 운영하는 이들 중에 그의 지체 높은 얼굴은 보지 못했어도 이름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청원상단의 선주 노곡입니다."
"과례는 삼가시오. 딱히 폐를 끼치려 신분을 밝힌 것은 아니니."
고개를 숙이는 선주 노곡을 향해 웃는 그 모습이 지극히 예의 발랐다.
과연 중원 오대세가의 하나인 제갈의 자제라 할 만했다.
"내 이분과 친분이 있어 그러하니 어떻소? 내 저분들과 함께 제갈의 배에 모시고자 함인데?"
"예?"
"혹, 호위가 필요하다면 함께 온 의창분가의 무인들을 무상으로 돕게 하리다."
"아, 그것이."
"그것으로도 모자란다면 일간에 융중의 본가로 찾아오시오. 내 미리 연통을 보낼 터이니."
"...!"
제갈선의 말에 노곡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 무슨 길 가다 금덩이를 발견하는 상황이란 말인가?
분가도 아니고 융중의 본가라니. 더욱이 그냥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초대라면?
살면서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는 순간은 다시 없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것이 다른 이도 아닌 제갈선이었다.
이건 무조건이다.
그리고 그의 말에 담긴 모든 선결 조건은 절대로 세 명의 무인들을 상선에 태우지 말아야 함을 깔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리게 해야지.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쫓아내야 할 일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노곡이 급히 상선에 올랐다.
"무사분들."
"...."
"내려 주십시오."
선주가 받은 전낭을 내밀자 진무의 눈동자에 짜증이 어렸다.
아래에서 제갈선과 나누는 이야기를 못 들을 만큼 무공이 낮지 않았다.
저게?
진무가 제갈선을 째려보았다.
"싫소."
진무가 딱 잘라 거절하자 선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왜요?"
"이미 거래가 끝났지 않소?"
"아니 계약서도 없는 구두 거래가 무슨 소용입니까? 지금 상단의 미래가 달려 있는데요."
이런 망할 놈이!
상인이 되어서 신용이 어찌 이따위란 말인가. 아무리 제 이득을 위해서라지만 이리도 안면 몰수를 할 줄이야.
"정히 그러시면 원래 주신 금액에 웃돈까지 드리리다. 제발 부탁드리오."
선주가 원래 진무의 것에 더해 자신의 전낭까지 꺼내 애원했다.
졸지에 돈이 새끼까지 쳐 온 상황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 웬만하면 우리 배에 올라 편하게 가지 그러시오."
제갈선이 웃으며 말을 보태 권하자 진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왜?"
진무의 말에 제갈가의 무인들이 언짢은 표정을 짓자 제갈선이 그들을 손으로 막았다.
"하하, 거, 꽤 까칠한 성격이신 모양입니다. 아마 이분을 이리 박대한 것을 알면 귀하의 어르신들께서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실 터인데요?"
"놀고 있네. 내가 왜 그딴 걸 신경 쓴다고 생각하지?"
"뭐요?"
"우리한테는 신경 끄고 거기 귀찮은 노인네나 태워 가."
진무의 말에 제갈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도사다.
표정을 봐서는 자신들이 무당 도사라는 사실을 들켰음을 아는 눈치가 분명한데.
등여평의 신분까지 슬쩍 들먹이며 사문을 거론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말투였다.
하지만.
"하하, 그러고 싶은데 어르신께서 꼭 그대들과 함께 가고 싶은 모양이외다."
제갈선의 미소에 진무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나 원, 별 오지랖 넓은 년을 다 봤네."
"...!"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혼잣말이었으나 제갈선은 그의 입 모양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어, 어찌 알았지?'
제갈선은 진무를 놀란 눈길로 쳐다보았다.
제갈선.
아니, 제갈산산.
그는 융중산 제갈세가의 무남독녀였다.
원래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오빠가 죽은 이후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하게 되었다.
제갈세가의 상황 때문이었다.
본가의 후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양자를 들여야 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나 그것은 융중산 제갈본가에 있어서는 치명타나 다름없었다.
본가의 직계가 아닌 양자가 후계가 되면 현 가주의 죽음 이후로 세력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통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원래의 이름 산산을 버리고 선이라는 이름을 택했으며, 사내처럼 입고 사내처럼 살게 되었다.
그것은 제갈본가의 가주와 가모, 그리고 일부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그에 관련된 내용은 가주의 명에 의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되었기에 본가의 핵심 인물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행히 가진 바 재능이 뭇 사내 열을 뛰어넘었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을 품은 자들은 많았으나 그때마다 가주가 막았고, 쌍둥이였던지라 조금 왜소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사내라 여겨졌다.
그리고 얼마 전, 본가에 경사가 생겼다.
동생이 태어났다.
사내아이가.
다행인 일이었으나 다시 여인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그의 앞을 기다리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정략결혼.
제갈산산은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 갇혀 살기에는 그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용봉회가 개최되었다.
가문에 속하지 않고 여류 무인으로 이름을 날릴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가주를 설득했고, 결국 허락을 받았다.
진정 여인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번 무한행이 제갈선으로서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딱히 더 미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십 년간 지속해 온 남장이라 편하기도 했고, 어쩌면 애증의 산물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시비에게 면사를 씌워 제갈산산으로 분장시켰고 자신은 제갈선의 모습으로 무한까지의 호위를 자청했다.
무한에 도착해 정무맹의 대군사 제갈협진만 만나고 나면 제갈선은 병을 얻어 은거하는 것으로 사라질 것이고 동생이 소가주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오랫동안 자신의 곁을 지킨 율평과 사령뿐이었다.
한데 처음 보는 진무가 어찌 알고 자신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한단 말인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아름다운 외모를 완벽히 숨기긴 힘들었으나 같은 나이대의 여인처럼 분이나 사향(麝香)조차 쓰지 않았고,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굴을 변장하고 말투까지 완벽한 사내로 행동해 왔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백로 어른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은데.'
제갈선은 진무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으나 스스로의 속내를 감출 줄 아는 자였다.
놀라긴 했으나 얼굴에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뭐, 상황을 보니 이놈의 상선이 우릴 태우기는 물 건너간 모양이군."
훌쩍 배에서 뛰어내리는 진무의 모습에 제갈선은 더욱 사내처럼 말했다.
진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함께 가시겠소?"
"내가? 니들이랑? 미쳤군."
"...."
코웃음을 친 진무가 청상을 불렀다.
"야, 가서 말이나 구해 와."
"예, 사숙."
진무가 선주에게 돌려받은 두 개의 전낭을 청상에게 내밀었다.
사숙이라고?
그 말에 제갈선과 등여평은 또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슷한 또래이기에 그저 사형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제길, 좀 편하게 배편을 이용해 유유자적하게 가려고 했더니 별 시답잖은 것들이 끼어들어서는. 결국 육로로 가게 생겼네. 귀찮게시리."
짜증을 한 아름 쏟아붓고 그들을 지나쳐 가는 진무의 모습에 제갈선과 등여평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둘은 이미 그들이 무당의 도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땅히 인격자여야 할 무당의 도사.
그리고, 동배의 제자들에게 사숙이라 불리는 무당의 도사.
장로일 리는 없고 필시 일대제자... 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고작 약관의 어린 도사는 지극히 말투가 거칠고 싸가지까지 없었다.
인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흠, 이거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구만."
"아닙니다. 어르신."
등여평의 사과에 제갈선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차가 좋겠습니까? 아니면 말이 좋으시겠습니까?"
"응?"
"쫓아갈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허허, 이 사람. 역시 제갈이 자랑할 만하이."
"저희가 함께 모시겠습니다."
"자네도 말인가? 이미 배를 전세 낸 게 아닌가?"
"하하, 배는 배대로 가면 될 일입니다. 서둘러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허헛, 그리하세."
자신의 마음을 쏙쏙 알아채 주는 제갈선의 모습에 등여평이 흐뭇하게 웃었다.
"율평."
"예. 대공자."
"반은 청운상단을 돕고 반은 산산을 호위해 배편으로 이동하게. 나는 어르신과 함께 육로로 가겠네."
"예? 수행 무인도 없이 말입니까?"
"수행 무인? 눈앞의 어른이 누군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제갈선이 고개를 내젓자 율평이 등여평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사령(四靈)들만이라도 따르게 해 주십시오. 마차를 구하면 마부도 있어야 하고 육로라면 가끔 야숙도 해야 할 것이니."
"흠. 그러지."
제갈선은 율평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비밀을 아는 자들이니 불편함은 없으리라.
* * *
"...."
진무가 잔뜩 찡그린 미간으로 옆을 째려보았다.
청상이 구해 온 말을 타고 육로를 따라 달린 길.
일부러 마을을 지나 산기슭에서 야숙을 택했다.
그런데 저 거머리 같은 것들이 버젓이 따라와서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같이 들겠소?"
"...."
자신들과는 달리 함께 온 사내들이 숙영지를 만들고 마차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꺼내 놓는다.
배편으로 간다던 놈들이 육포며 국물을 낼 건어물은 물론이고 야숙에 필요한 두툼한 털 담요까지 가지고 있었다.
"원래 우리가 준비성이 좋소."
제갈선이 생각을 읽고 있는지 밝게 웃는 모습에 진무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먹을거리를 구하러 간 청상 놈이 오늘따라 늦다.
청우가 매운 연기를 참으며 모닥불을 피워 올린 지가 언젠데.
"거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뜨끈한 국물이라도 드시오."
"그래. 사해(四海)가 동도(同徒)라지 않더냐? 이리 오너라."
제갈선에 더해 등여평까지 권하자 모닥불을 피우던 청우가 코를 벌름거리며 눈치를 봤다.
"청우야."
"예! 사숙."
"요 며칠 수련을 안 했지?"
"...."
"수련하고 싶냐? 돌을 한 서너 개쯤 더 달까?"
"아, 아닙니다!"
진무가 눈을 부라리자 청우가 사색이 되어서 모닥불 아래를 불어 대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빠져 가지고. 정신상태가 영 글러 먹었다.
진무가 수련의 강도를 더욱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거, 그러지 말고."
등여평이 한 손에는 술병을, 한 손에는 불에 구운 육포를 들고 다가왔다.
"거 보니 술도 곧잘 하는 것 같은데 어떤가? 한잔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이런저런?
귀찮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나 하겠지. 내가 당신을 모르냐?
한참을 달려온 터라 주향이 제법 군침 돌게 코를 찔러 왔지만, 저들과는 전혀 술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본인은 제갈선이오. 그쪽은 무당의 도사분인 듯한데."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재차 꺼내며 제갈선이 다가오자 진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꺼지라고 했어."
"거참 빡빡하시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웃기고 있네. 나보고 남장을 하고 본모습을 감춘 음흉한 계집 따위를 믿으라고?"
67화
진무의 싸늘한 말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제갈세가의 사령들이 눈을 매섭게 뜨고 노려보았다.
"이것들 봐라? 싫다는 사람한테 죽자고 엉겨 붙는 주제에 째려봐? 단체로 눈깔을 파내야 하나."
진무가 스산한 웃음과 함께 혀로 입술을 쓸며 일어나려는데.
"계, 계집, 아니 여인이라구요?"
청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갈선을 바라보았다.
등여평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 왜소한 체격에 예쁘장한 얼굴이기는 했으나 변장을 하고 있는 터라 그들의 눈에는 사내로만 보였던지 청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이런. 너무 그러지 마시오. 다 이유가 있어 남장을 한 것이니. 율평, 사령. 자네들도 그만하게. 어르신 앞에서 이 무슨 무례인가?"
제갈선이 청우의 뜨악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중재를 했다.
"자네, 여인...이었던가?"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그리되었습니다. 고의로 속이려 한 것은 아니니 이해해 주십시오."
"음, 아닐세. 모두에게는 사정이 있는 것이지."
등여평이 제갈선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눈치채지 못했다.
걸걸한 말투와 행동을 봐서는 당연히 사내였다.
아무리 진무에게 신경이 쏠려 있어 자세히 보지 않았다 해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변장과 언변이라니.
'쳇!'
살짝 성질을 건드려 등여평과 제갈선을 떼 내려 했던 진무는 예상과 전혀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힘이 빠졌다.
제갈선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제법 단단하다. 이런 자는 위험하다.
무릇 소리장도(笑裏藏刀)라는 말이 있다. 웃음 뒤에 비수를 감추고 확실한 기회를 노린다는 뜻.
진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특히나 여인이 아니던가?
그럼 더더욱 위험하다.
사내라는 것은 여인에게 현혹되기 쉽다. 괜히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사내는 세상을 지배하지만 그 사내를 지배하는 것은 여인이라 했다. 이 풍진강호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살수나 강한 적이 아니라 웃음 속에 비수를 감춘 여인이었다.
더욱이 감추고 있는 비밀을 까발려 버렸음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감정 조절에 능하고 심계마저 깊다는 증거.
또한, 제갈선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
제법 잘 갈무리하고 있지만 이미 기감을 펼친 진무에게는 여실히 느껴졌다.
자신에 비하면 발톱 아래 때만도 못한 실력이지만 청우는 능히 찜 쪄 먹을 테고, 청상에 비견될 정도였다.
반드시 떼 내야 한다. 등여평은 물론이고 제갈선까지.
비열한 것들은 옆에 두어도 상관없으나 위험한 것들은 애초에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 좋은 법이니까.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니 불편하다면 여장을 해도 상관은 없소만."
제갈선의 미소에 진무가 피식 웃었다.
여장?
딱히 예쁠 것 같지도 않았고 애초에 말투부터가 영락없는 사내라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어째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지? 목표는 백로... 이 노인이 아니었나?"
진무의 말에 눈을 굴리며 둘을 지켜보던 청우가 놀란 표정으로 일어났다.
"배, 백로... 대협?"
청우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등여평은 더욱 놀란 얼굴을 했다.
"헛! 자네? 나를 알고 있었던 게로군!"
"흥!"
진무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왜요? 이제 와서 인사라도 드릴까요?"
"뭐? 크하하하! 이런 망할 놈을 보았나!"
망할 놈?
이런 어린놈의 새끼가?
아무리 내가 약관의 진무라고 해도 그 속에는 너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어른이 있거늘.
진무의 속사정을 모른 등여평은 황당함에 숲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었다.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같은 언행을 보였단 말인가?
그사이 제갈선의 눈에는 재차 호기심이 떠올랐다.
백로 등여평의 이름값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다.
성격이라고? 그럴 리가.
아무리 성격이라고 해도 무당의 도사였고 산중에서 도(道)만 닦고 있다 해도 무인이다.
등여평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무당의 장문인이라도 고개를 숙일 판에 아무리 강심장을 가졌다 해도 고작 일제제자가 이런 허세를 보일 수가 있을 리 없다.
또한, 그의 표정은 허세가 아닌 진심이 아닌가?
이미 그의 실력을 알아보고자 기감을 풀어 보았으나 자신의 경지로는 예측조차 힘들었다.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었고, 그렇다면 생각나는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그렇군. 그대의 이름이 진무로군."
"...."
제갈선이 빙긋 웃자 진무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눈치 빠른 년.
평범한 검은 옷을 입었음에도 무당의 도사임을 알아챘고, 그저 몇 마디 말과 표정만으로 이름까지 유추했다.
진무로서는 놀라운 일이었으나 제갈선으로서는 딱히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그가 중원의 모든 일을 알 수는 없었으나 가문의 세력권인 분가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 하나를 놓칠 리 없었다.
그것이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 제갈 본가의 장남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치밀함이다.
얼마 전, 단강구에서 일어난 분가와 무당의 마찰.
이미 분가주 제갈무린이 본가의 질책을 받은 바 있었고, 그 와중에 듣게 된 이름이었다.
무당의 검, 진무.
정무칠성 중 한 사람인 양소방이 그 자리에 있어 그의 경지가 검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이런, 그 위명이 쟁쟁한 당대의 '무당지검'을 몰라보았다니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소. 어쩐지 언사에 거침이 없으시다 했더니."
"무당지검이라고?"
진무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고, 등여평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물론 그 놀람은 진무를 노려보던 율평과 사령들에게까지 전해져 있었다.
"허, 무당지검이라니? 내 아무리 강호 돌아가는 소식에 어두웠다고 하지만 당대의 장로도 아닌 일대제자에게서 무당지검의 칭호가 났음을 몰랐다니."
그로서는 정녕 놀라웠다.
아니, 무당지검의 등장은 마땅히 그러할 만한 일이었다.
정도 무림의 역사 아래 무당지검의 칭호를 받은 이들이 어떤 활약을 해 왔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 이거 되레 내가 인사를 드려야 했던 만남이었구먼그래."
등여평이 얼굴에 화색을 띠고 진무를 향해 술병을 내밀었다.
하지만 진무의 시선은 등여평이 아닌 제갈선에게 향해 있었다.
무공이 문제가 아니다. 머리 회전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망할, 뜬금없이 위험한 년에게 걸렸군.'
진무가 눈을 떼지 않고 있음에도 제갈선은 예의 웃음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치 자신을 대신해서 설명하듯이.
"당시 분가의 청화대주를 쓰러뜨린 실력으로 봤을 때는 이미 검사의 경지였다던데? 대단하오. 그 나이에 검사라니, 정말 무림사에 없었던 일 아니오."
"뭣이! 검사라고?"
이것들이 무슨 소리꾼과 고수(鼓手)도 아니고.
제갈선이 진무를 낱낱이 파헤치고 등여평이 때마다 추임새를 넣는다.
빌어먹을. 실수다.
다 보여 주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무인으로 살아감에 있어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본 실력을 감추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어긴 것이다.
앞으론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다짐하는데.
"검사가 아니라 강(罡)...."
듣고 있던 청우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보태려 했다가 진무의 살기 어린 눈빛에 헙 하며 입을 닫았다.
"어? 뭐요?"
말끄트머리조차 놓치지 않는 집요함으로 청우의 말을 듣는 데 성공한 제갈선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설마? 강기를 말하는?"
"허! 정말인가?"
아, 청우 이 멍청한 자식 때문에 다 조졌다.
"헛소리요. 제 실력이 안 되어서 그리 보이는 게지."
애써 수습해 보려 했으나 제갈선의 눈에 한번 떠오른 의심은 지워지지 않았다.
'맙소사!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약관의 도사가 강기라니?'
너무도 놀랐는지 제갈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을 진무가 빤히 바라보았다.
멍청하게 저런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지고 남장을 하다니. 속눈썹을 죄다 잘라 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겠네.
애써 사내같이 변장했으나 놀람이 가득한 그 미려한 눈동자만큼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망할, 또 실수다.
진무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예쁘다.'라는 생각을 해 버렸다.
딱 봐도 사내 모습에, 목소리까지 걸걸한 남장 여인의 눈깔만 보고 예쁘다고 느끼다니. 그것도 팔십이 넘은 나이에.
그사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제갈선이 이내 놀란 표정을 지우고 예의 속내 모를 얼굴로 돌아왔다.
"하하! 정말이지 일대의 사건이군. 강기라니!"
"그러게나 말일세. 내 당장에 손속을 나누어 보고 싶구먼!"
진무가 딱 잘라 아니라 했음에도 제갈선과 등여평은 이미 저들끼리 기정사실화해서 북도 치고 장구도 쳤다.
하아, 청우야.
너를 진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복장이 사정없이 터지는 기분에 진무가 등여평의 손에서 술병을 뺏어 들었다.
벌컥, 벌컥.
목구멍이 열리기라도 했는지 술이 잘도 넘어갔다.
와중에 술맛은 또 끝내준다.
그리고.
"사숙!"
청상이 어깨에 큼지막한 노루 한 마리를 둘러메고 왔다.
"하핫! 이놈이 어찌나 빠른지. 토끼도 있었지만, 이놈을 꼭 잡아서 사숙께 맛을 보여 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좀 늦었습니다."
이리저리 긁힌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하는 청상의 모습에 진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은 때를 잘 맞춰야지, 청상아.
평소라면 잘했다 칭찬해 줄 일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노루 잡겠다고 늦게 온 청상이 너무도 미웠다. 그냥 토끼를 잡아 오지 그랬냐, 이 새끼야.
"아이구, 이런 큰 녀석이라니. 장정 열은 너끈히 먹겠구나!"
등여평이 털썩하고 땅바닥에 떨어지는 노루를 보며 감탄했다.
그놈 참 크기도 하다.
노루치곤 영물이라 오래도 살았는지 셋이 먹기에는 너무도 커 그 자리의 모두가 나누어 먹어도 될 판이다.
"노인장께서 드시라고 가져온 게 아닙니다."
청상이 나름 기특한 말을 했으나.
"사형. 백로, 백로."
"어?"
청우가 청상의 옆구리를 찌르며 소곤거렸다.
"제갈선. 여자, 여자."
"...."
진무가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은 무척이나 길 모양이었다.
눈치 없는 청우와 쓸데없이 모두가 나누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노루를 사냥해 온 청상에게는....
* * *
무한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의창에서 무한까지는 호북을 횡으로 나누어 그 끄트머리에 있으니 말을 타고 족히 스무 날 이상을 달려야 했다.
이제 의창을 떠난 지 열흘.
형주 인근이다. 아직 반밖에 오지 못했다.
마차를 타고 달리는 제갈가의 인물들과 등여평은 편안하기만 했으나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극한의 수련으로 지친 청우와 청상에게는 지옥 길이 따로 없었다.
"저기서 쉰다. 수련도 할 겸."
휴식이라는 말에 청상과 청우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다시 나락으로 처박힌다.
진무가 가리킨 곳은 절벽과 맞닿은 강가였다.
"왜 싫어?"
"아, 아닙니다, 사숙."
진무의 말에 청상과 청우가 동시에 대답했다.
절벽.
깎아지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감탄을 자아내게 할 만했으나 청상과 청우에게는.
'하아, 또 기어올라야 한단 말인가?'
절망일 뿐이었다.
지난 열흘간 두 번의 절벽이 있었다.
그때마다 진무는 무당의 지법(指法)을 단련시킨다는 명목 아래 수련을 시켰다.
손가락 힘만으로 절벽을 오른다.
양 발목에 머리통만 한 돌덩이 두 개를 각기 달고 내공을 쓰지 않은 채로.
물론, 어디까지나 수련이다.
두 사질들이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힘조차 없애기 위함이 아닌.
"거 대단한 수련일세. 힘은 들겠지만, 효과가 탁월하겠어."
눈치도 없이 나서는 등여평이 몹시 거슬렸지만 감히 무당의 이대제자가 무림 명숙인 백로를 상대로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그런 건 진무나 가능한 일이었다.
휴식지가 만들어지는 사이 진무와 등여평, 제갈선이 강을 마주하고 앉고, 청상과 청우는 눈물을 삼키며 절벽을 기어올랐다.
"거참, 잘도 오르는구먼."
등여평이 감탄하고.
"잘 올라야지. 떨어지면 뒈질 테니까."
대수롭지 않은 진무의 말에.
"대단하오. 하면 저런 수련으로 청상 도장을 현기의 경지에 올라서게 하신 게요? 청우 도장도 곧 현기의 경지에 오를 듯하던데?"
제갈선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자신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담겨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의 예측으로는 자신과 비슷한 실력을 가진 것은 청상이었다.
그리고 지난 열흘간 얼마 되지 않는 대화 속에서 파악한 바로는 청상을 수련시킨 것은 진무였다.
수많은 스승과의 토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진무로 인해 현기의 경지를 깨달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은근한 승부욕까지 생긴 참이었다.
"흥, 여인 따위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진무의 핀잔에도 제갈선은 호기로운 미소를 지었다.
'쳇.'
또 실패다.
망할 년. 어떻게든 기분을 망쳐서 빨리 떼어 버려야 하는데, 아무리 험한 말로 찔러도 도통 화를 내지 않는다.
'젠장, 뭐지? 이 여잔 도대체 뭐지?'
진무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구겼고, 제갈선이 그 모습에 호방하게 웃었다.
"어휴."
진무가 짜증을 떨쳐 버리려 세수라도 할까 하고 강물을 향해 다가가는데.
'응?'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그의 고개가 절벽 위쪽으로 급히 쳐들렸다.
"이건?"
68화
제갈선은 몰라도 등여평은 들은 모양이었다.
촤촤촤촤.
미약하지만 분명 숲을 헤치며 달리는 발소리.
거칠다.
무인임은 확실한데, 매우 불규칙했다.
"청상! 청우!"
"...?"
진무의 외침에 절벽을 헥헥거리며 오르던 청상과 청우가 고개를 돌렸다.
"위! 떨어진다!"
진무의 말에 둘은 급히 고개를 쳐들었고.
파학!
백의를 입은 지친 표정의 사내가 달리던 걸음 그대로 절벽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진무 일행을 발견하고 품에 안았던 무언가를 던졌다.
"아악!"
뾰족하게 터져 나오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
사내가 던진 것은 여덟에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소녀였다.
"청우! 받쳐!"
발목에 달린 돌을 떼 버린 청상의 외침에 청우가 급히 공력을 운용해 절벽에 발을 쑤셔 박으며 손을 내밀었다.
파앙!
청우의 손을 밟고 허공을 날아오른 청상이 소녀를 향해 날아갔다.
받았다.
무당의 제운종.
허공을 구름인 듯 가볍게 밟은 청상의 신형이 떨어지는 소녀를 안고 재빨리 회전했다.
그리고.
피잉!
어디선가 날아온 수십 개의 암기가 소녀를 던진 백의 사내의 등을 꿰뚫는다.
"크윽!"
암기를 다발로 맞은 백의인이 그대로 추락해 물속으로 떨어졌다.
풍덩!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파파파팍!
소녀가 떨어진 절벽 위쪽에서 복면을 쓴 수십 명의 인물이 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흠, 대낮에 복면?
진무 일행이 절벽 인근에서 쉬고 있는데 나타난 것이 매우 공교로웠으나 무림에서는 자주, 종종, 왕왕 있어 온 일들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 복면인들은 인신매매범이거나 어떤 가문을 박살 낸 흉적이었다.
일이 벌어진 와중에 백의 사내가 어린 소녀를 안고 도망치고, 흉적들이 그 뒤를 쫓아온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그래도 애를 괴롭히다니 무인으로서 자존심도 없는 놈들.
진무는 비열한 사파인으로 살면서도 단 한 가지만큼은 지켜 왔다.
무림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절대로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
특히, 힘없는 민가의 여자와 애를 건드린 수하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신매매가 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통제했던 것이다.
지금 청상이 안고 있는 소녀 또한 채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였다.
나쁜 놈의 새끼들. 분란이 있으면 어른들만 죽이면 되지 애를 괴롭혀?
사패천도 하지 않는 짓을.
'쯧!'
하지만 관계없는 일이다.
딱히 소녀와 아는 사이도 아니고 도와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진무와 달리 제갈선과 등여평은 달랐다.
물론 소녀를 안고 강물에서 빠져나오는 청상과 절벽에서 튀어나온 청우의 생각도 달랐다.
마치 죽은 백의 사내가 원래 알던 사람인 양, 혹은 소녀와 친인척이라도 되는 것처럼 흉흉한 눈빛으로 복면인들을 경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는 그저 남의 일에 불과했지만 이쪽에는 정무맹 최고수중 하나로 불리는 등여평이 있으니.
"웬 놈들이냐!"
진무의 생각대로 정의감 넘치는 등여평이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도망친 것은 어린 소녀요, 쫓은 자는 대낮에 복면이다.
당연히 그놈들을 나쁜 놈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복장을 보니 제갈세가인가?"
말을 건네 온 자.
그를 축으로 절벽을 내려온 복면인들이 좌우에 위치한 걸 보면 필시 그들의 수장일 것이다.
등여평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한 듯했으나 제갈선 등의 복장을 알아보았다.
하긴, 등여평이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고 해도 무림을 살아가는 자가 몇 명인데 딱 보고 알아본단 말인가?
더욱이 은거한 뒤로 유랑 중이라 행색이 민가의 촌로나 다름없다.
알아보는 것은 저 눈치 빠른 제갈선이나 몇 번이나 얼굴을 맞대 본 진무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왕년의 사패천주 혁련무강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봤겠지만.
역시 자신과 등여평은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질적으로.
"네놈들은 누구냐?"
등여평의 물음에 사내가 차갑게 대답했다.
"제갈세가에서 끼어들 일이 아니다."
"닥쳐라! 백주(白晝)에 힘없는 어린 소녀를 추격한 놈들이."
"흠, 제갈세가의 어른쯤 되는 모양이지? 허나 다시 말하지만, 그대들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들은 등여평을 그저 제갈세가의 노고수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큰코다칠 텐데.
"아이를 놓고 물러나라.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닥치지 못할까!"
등여평이 매서운 기세를 뿜어내자 복면인들이 은근히 진무 등을 포위하듯 감싸기 시작했다.
"쯧, 아직은 딱히 중원 무림과 척을 질 때가 아니거늘. 허나 그 아이는 반드시 필요하니 안타깝게 되었군."
"뭐라?"
등여평이 한쪽 눈을 찡그리는데.
"어르신, 아이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 듯합니다. 또한, 저들의 기세 또한 간악한 사파의 인신매매범과는 다르니 일단은 지켜야겠습니다."
어이, 간악한 사파라니?
사패천 예하에 인신매매를 금하게 한 게 언젠데!
재들은 그냥 조무래기야.
사파도 뭐도 아니라고!
진무가 흘겨보았으나 제갈선의 판단이 내려지자.
차아앙!
율평과 사령이라는 자들이 검을 뽑아 들고 청상의 주위를 둘러쌌다. 등여평 역시 마찬가지였고, 청우 역시 주먹을 움켜쥐고 빈자리를 채웠다. 지키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진무뿐이었다.
그저 팔짱을 끼고 지켜본다.
등여평이면 충분하다. 굳이 자신까지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그 사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던 복면인들이 진형을 갖춤과 동시에.
"죽여라!"
수장의 외침과 함께 복면인들이 일제히 검을 날려 왔다.
깡! 까강!
순식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복면인들의 검격이 매섭고 날카롭게 번득였으나 율평과 사령들의 실력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하긴 제갈본가에서 후계자를 호위하는 무인을 허접한 놈으로 붙일 리는 없었다.
또한 아이를 제갈선에게 맡긴 청상이야 당연했고, 청우의 권격에서 발출되는 발경 또한 대단했다.
펑! 퍼펑!
"크악!"
그 와중에 등여평의 무위는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두 명의 복면인들을 제압하는 모습.
'쯧, 봐주는군. 적이라 판단하는 순간 대가리를 쪼개 버렸어야지.'
전투를 지켜보던 진무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정파인들.
뛰어난 무위를 가지고 있으나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의로워야 한다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은 늘 원래의 실력을 모두 끌어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눈앞에 적을 맞이했음에도 살수를 펼치지 않고 제압하려 드는 지금처럼.
멍청한 것들, 꼭 위기에 처해야 제 실력을 보이지.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은 자신의 가르침에 초반부터 살수를 펼치는 청상과 청우뿐이었다.
"크윽!"
하지만 역시 쪽수에 장사 없다.
사령 중 하나가 가슴께에 칼을 맞고 물러나자 팽팽하던 진형이 깨져 버렸다.
"이령!"
제갈선의 외침.
이름하고는... 좀 잘 지어 주지 않고. 사령 중 두 번째라니.
어쨌든 진형이 깨어지는 순간 칼끝이 그 중심의 제갈선을 향해 파고든다.
까라랑!
어느새 제갈선의 손에 들린 검이 허공을 수놓아 날아오는 공격을 쳐 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누군가를 지키며 싸운다는 것은 대개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그가 공격을 받자 자리를 지켜야 할 율평과 사령들의 맡은 자리가 더욱 빠르게 무너졌다.
그 틈을 노린 복면인들의 검이 제갈선을 위협했다.
"쯧!"
땅! 따다다당!
단 한 번의 손길이 펼쳐지자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다.
진무의 손에서 펼쳐진 태청산수가 사방을 휘저으며 제갈선을 감쌌고, 그녀는 순식간에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뿐이다. 진무의 움직임은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고맙소."
위기를 넘긴 제갈선이 감사의 눈빛으로 진무를 쳐다보았지만.
"흥!"
누가 너 같은 걸 도운 줄 알아?
진무가 보호한 것은 제갈선이 아니라 어린 소녀였다.
무공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혹여 다칠까 봐서 움직인 것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제갈선은 덤일 뿐이었다.
땅! 따다다당!
수십 개의 잔영을 만들어 낸 진무의 손이 제갈선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아!"
진무의 활약으로 더 이상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어진 제갈선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개입만으로도 율평과 사령, 청우와 청상이 제힘을 발휘했고, 진형이 제자리를 잡아 갔다.
"대단하시오. 진무 도장."
걸걸한 목소리의 감탄.
여러 가지로 성가시게 하네. 칭찬할 시간에 검이나 더 열심히 휘두를 것이지.
진무가 짜증스럽게 살짝 내려다보니.
어? 언제 이렇게 가까이....
제갈선이 위험을 피해 진무의 가슴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로서는 좀 더 안전한 위치를 점한 것일 터다.
하지만.
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로 인해 내려 볼 수밖에 없었고, 시야에 진무를 올려 보느라 치켜뜬 제갈선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크윽! 또! 이런 요망한 년!'
또 예의 그 사슴 같은 눈망울에 어린 감탄이 진무의 시선을 관통했다.
'예쁘... 이, 이런! 내가 또 무슨 생각을!'
육십 년 차이다.
다 늙어서 이 무슨 주책이란 말이냐.
더구나 아직 본 얼굴도 못 봤다.
눈빛을 제외한 외양은 영락없는 사내의 모습인데.
머리로는 다 알지만, 이 몹쓸 젊은 몸뚱이가 도무지 말을 안 듣는다. 심장이 통제를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나대지 마라. 이 미친 심장아. 나는 여자를 좋아한단 말이다! 이런 목소리 걸걸한 남장여자 말고!
진무는 마구잡이로 치미는 짜증을 떨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휘오오오!
그 때문인지 진무의 태청산수에 의해 주변에 회오리바람마저 일어날 정도였다.
그리고 제갈선은 그런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율평! 좌변, 하위!"
진무로 인해 여유가 생긴 제갈선이 주변을 냉철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복면인들이 만들어 낸 진형.
그는 빠르게 공격 방향을 찾아내었고,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깡!
진형에 작은 균열이 만들어지고.
피윳!
순식간에 복면인 하나가 상처를 입었다.
"일령! 중심, 상로!"
"삼령! 후위, 중위변!"
진무가 공격을 막아 주는 사이에 제갈선의 명령이 연이어 내려진다.
제법이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단번에 적의 진형을 파악하고 시기적절한 결정을 내리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데 제갈선은 그 모두를 해내고 있었다.
단번에 적의 진형을 꿰뚫고 균열을 만들었다.
수적으로 열세임이 분명한데 그의 판단이 순식간에 그 간극을 메운다.
"흥! 제법 뛰어난 책사 놈이 있었군! 중심을 집중적으로 공격해라!"
적의 수장도 제법 보는 눈이 있었다. 흘러가는 상황을 재빨리 판단하고 곧바로 진형을 변화시켰다.
"이런!"
공격이 갑자기 후방으로 집중되자 등여평이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다섯이나 되는 복면인이 짜임새 있는 연계기를 펼치며 그를 막아서자 쉽지 않은 듯 몇 걸음 떼지 못했다.
"이놈의 자식들이!"
우웅!
제 의사대로 되지 않은 등여평이 갑자기 기운을 폭발시켰다.
단전에서 솟구친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 나오며 그의 주먹에 푸른 강기가 어렸다.
쿠아앙!
휘두른 주먹에 복면인 하나가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제길, 강기의 고수였나?"
적의 수장이 등여평의 무위를 확인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놈은 내가 맡겠다! 나머지는 아이를 확보하는 데 집중하라!"
파앙!
그의 명령에 복면인들이 곧장 몸을 빼 제갈선을 향해 날아갔다.
69화
율평과 사령, 청우와 청상이 사력을 다하고 진무가 그 중심에 버티고 있으니 복면인들은 좀처럼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약 스무 명.
날파리 떼였다.
귀찮기는 하지만 아이를 안고 있는 제갈선만큼은 무조건 보호한다.
진무의 태청산수가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았고.
"청상 도장 좌변, 청우 도장 횡격세, 율평...."
너무도 안전하게 보호받는 제갈선은 전방위를 살피며 명령을 내렸다.
적의 공격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진무가 물 샐 틈조차 없이 막아 주고 있으니까.
퍼엉! 콰쾅!
진무 등이 복면인의 공격에 갇혀(?) 있는 사이 등여평과 적 수장의 싸움이 점차 치열해지고 있었다.
권강이 사방으로 난무하고 복면인이 그 틈새를 유령처럼 피해 다녔다.
'어찌 이런 무공이?'
내보이는 실력으로만 봤을 때는 등여평의 무공이 월등히 앞선다.
그런데 적의 무공이 심상치 않았다.
강한 것은 아니지만 한 박자 빠른 공격.
강기를 가득 머금은 권격을 피하는 순간 어느새 접근해 허를 찔러 온다.
쩡!
자신이 방비하기도 전에 찔러 오는 일장. 더구나 마땅히 있어야 할 준비 동작이 없다. 하여 어느 곳에서 공격이 시작될 것인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변화 없이 간결하고, 허초가 모두 실초와 같은 움직임.
물론 그렇다고 해도 등여평이 수세에 몰린 것은 아니다. 느껴지는 상대의 경지는 대충 의기. 등여평과는 천양지차였다.
하지만 좀처럼 무력화시킬 수가 없었다.
강한 힘을 뿜어내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도망쳤다가 재빨리 파고들어 준비 동작 없는 공격을 해 오니 좀처럼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사이.
제갈선의 뛰어난 판단으로 여유가 생긴 그들의 일행이 복면인들을 압도하며 밀어 내고 있었다.
진무가 허공을 채웠던 태청산수의 잔영도 점차 그 수가 줄어들었다.
여유가 생긴 진무가 여전히 싸우고 있는 등여평 쪽을 바라보았다.
'쯧, 정무칠성에 버금간다더니 거짓말이군. 고작 저런 놈한테 휘둘... 어?'
진무가 등여평을 향해 비소(誹笑)를 머금었다가 살짝 눈을 찡그렸다.
등여평과 싸우고 있는 적 수장의 무공.
무위의 격차를 메울 정도로 뛰어난 한 박자 빠른 움직임.
'무촌경?'
양소방이 말했던 '그들'의 무공이었다.
순간 무월루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노인이 떠올랐다.
"하, 그 새끼와 한패라 이거지?"
진무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청상! 청우!"
"예! 사숙!"
복면인들을 몰아붙이던 청상과 청우가 재빨리 몸을 물리며 대답했다.
"중심을 지켜라!"
"...!"
파앙!
언제나 그렇듯 진무는 생각이 든 순간 움직인다.
청상과 청우가 따라 주든 말든 돌아보지 않는다.
진무가 빠져나가자 제갈선의 통제에 급격한 제동이 걸렸다.
비어 버린 방어막 안으로 복면인들의 검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제길!"
이미 몇 번 경험이 있었던 청상이 눈치 빠르게 몸을 날려 제갈선의 옆으로 다가와 검격을 쳐 냈다.
"청우! 아이를 지켜!"
"예, 사형!"
"제갈 소저, 좌측을 부탁합니다."
"예!"
청상은 제갈선의 무공이 청우보다 한참 윗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청우를 중심에 넣고 제갈선과 그 주변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지킨다는 건 그냥 싸울 때보다 두 배 이상은 힘든 일이니까.
땅! 따당!
진무가 빠져나가자 제갈선과 청상이 시퍼런 검기를 뽑아 휘두르고 있음에도 순식간에 진형이 흐트러졌다.
진무라는 거대한 전력이 사라진 것뿐 아니라 진형을 통제하고 있는 제갈선의 명령까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촤락! 퍼퍼펑!
중심을 벗어난 진무는 복면인들이 앞을 가로막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독수리의 발톱처럼 구부린 손가락이 좌우로 휘저어져 복면인들의 의복을 찢고 뼈마디를 비틀며 살점을 뜯어 버렸다.
사방에 피가 튀고 육편이 흩날렸다.
그럼에도 그는 등여평과 싸우고 있는 적의 수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몸을 날리며 전장을 관통했다.
그리고.
쿵!
강가의 모래를 사방으로 비산시킨 일보가 깊은 족적을 만들고.
진무의 신형이 등여평에게서 버들가지처럼 휘어져 복면인의 수장을 덮쳐 갔다.
"요 새끼!"
"...!"
등여평과의 싸움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적 수장이 질겁을 하며 손을 뻗었다.
역시나 준비 동작을 생략한 무촌경.
곧바로 기운이 뿜어졌으니 달려온 걸음으로는 막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진무의 뻗어져 있던 손바닥이 복면인의 그것과 맞닿았다.
"...!"
그 순간 거칠게 압도해 오는 강대한 힘.
쩌어엉!
둔탁한 충격.
기혈을 온통 뒤집어 놓는 반탄력과 함께 복면인의 수장이 튕기듯이 밀려나 모래 바닥에 처박혔다.
"우웩!"
길게 밀려난 흔적을 남기며 엎드린 복면인이 울혈을 토했다.
복면이 입을 가리고 있어 바닥으로 쏟아지지는 않았으나 흘러내린 피가 그의 앞섶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자네?"
갑자기 끼어든 진무를 등여평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분명 복면인과 같은 무공이었다.
어떻게?
"처음부터 살수를 쓰셨어야지. 제압하려 하니 휘둘리실 수밖에. 어쨌든 뒤나 도우시죠. 쪽수도 딸리는데."
"...."
진무의 시선은 복면인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 알겠네."
궁금증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으나 일단은 그들을 제압하고 볼 일이었다.
진무의 말에 등여평이 제갈선 등을 돕기 위해 급히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야, 엄살 그만 피우고 일어나."
"...."
"내가 너한테 궁금한 게 많거든."
"네놈이 어찌 무촌경을?"
"무촌경이고 나발이고, 무월루의 그 노인 누구야?"
"무월?"
눈을 찡그린 복면인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딱 봐도 너보다 고수였어. 말해. 그럼 덜 팬다."
"...."
진무가 주먹 아래 손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위협하며 복면인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네놈, 우리를 아는군?"
"내가? 몰라."
"뭐?"
"하지만 지금부터 좀 알아볼까 하고."
"...."
"내가 그 노인네한테 신세를 진 게 있어서 말이야. 꼭 한번 봐야 하거든."
진무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복면인의 눈빛은 점점 더 매서워졌다.
이미 조금 전 싸우던 노인과 거의 동급의 힘을 가졌다는 사실은 깨닫고도 남았다.
문제는 그가 무촌경을 안다는 사실이었다.
'무촌경을 어찌 알지? 설마 대랑(大狼)께서? 아니다. 본궁의 주축 중 한 분께서 이것을 전수했을 리가 없다.'
그는 무월루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자신처럼 반드시 확보해야 할 사람이 있었고, 그 임무를 맡은 것이 진무가 노인이라 부르는 대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제길, 제갈세가에 이 같은 자가 있을 줄이야? 어쩐지 수하들이 목표를 확보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 생각했더니.'
그로서도 등여평과 같은 강기의 고수를 만난 것은 꽤 의외였다.
하지만 자신이 있었다.
한 박자 빠른 움직임의 무공.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그는 등여평이 몸을 빼지 못할 정도로만 잡고 수하들이 목표를 확보하면 곧장 도망칠 계획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품에 감춘 독과 암기라면 도주로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도망가야 하나?
수하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진무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였다.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당장은 몸을 뺄 수 있을지 몰라도 좀 전의 한 방으로 입은 내상으로 인해 얼마 가지 못해 잡힐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놈, 아무리 안다 해도 쉽진 않을 것이다."
스르릉.
복면인이 허리춤에서 휘어진 단도를 뽑아 양손에 각기 나누어 쥐었다.
"어쭈? 무기가 있었네?"
희한하게 생긴 무기다.
이제 와 그런 것을 꺼냈다는 것은.
"이 새끼 사람 보는 눈은 있네. 하긴, 등여평보다 내가 좀 윗줄이긴 하지. 아주 다리가 덜덜 후달릴 거야. 안 그래?"
뭐지? 저 만족해하는 표정은?
복면인의 수장은 도무지 눈앞의 사내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저리 여유롭다니.
더욱이 정파인답지 않은 저 야비한 눈빛과 표정, 심지어 어딜 봐도 사파인 같은 말투는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무촌경을 안다고 해도 자신들처럼 모든 무공에 대입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익혀 온 무공이었다. 응용력의 차이가 확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진무는 장차 그들의 세력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설사 자신이 죽더라도 놈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무공이 안 된다면 독이며 암기로 놈을 공격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검을 뽑았는데 그냥 둘 수는 없지."
스르릉.
진무의 손에 백색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친히 상대해 주마."
파앙!
일 보.
성난 호랑이를 쫓을 정도로 급변한다는 무당 호종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헛!"
복면인은 지면을 낮게 쓸며 자신의 다리를 노려 오는 검격에 몸을 띄운 채 단도를 교차했다.
까앙!
불꽃이 튐과 동시에 튕겨지지 않고 곧장 솟구치는 검극이 허공에 뜬 복면인을 노렸다.
'이, 이런!'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촌경이다.
진무의 검에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기수식이 없었다. 정해진 검로도 없었고 변화도 없었다.
그저 무자비한 휘두름이요, 시기적절하게 허점을 노리는 실전검이었다.
'맙소사! 어떻게 이럴 수가!'
한 가닥 자신에 차 있던 복면인은 진무의 검격에 충격을 받아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깡! 까가가강!
사력을 다해 막고 있었지만, 검격이 그의 몸을 스칠 때마다 쓰라린 상처가 생겨났다.
응당 있어야 할 초식의 강맹함이 아니라 딱 필요한 만큼의 기운을 머금은 검격이었다.
그리고 폭풍처럼 몰아친다.
예측할 수 없는 검격의 움직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그가 움직이는 모든 방향을 차단하고 있었다.
"왜? 놀랐어? 이게 쓰임새가 제법 다양하더라고. 덕분에 연습 좀 했어."
"...."
그게 연습으로 될 일이냐!
복면인은 그 하나를 위해 십수 년을 수련해 왔다.
뼈를 깎는 수련을 거듭하고서야 간신히 어느 정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약관에 이른 저 애송이는 그 무촌경을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펼치고 있었다.
"자, 그럼 대충 눈 호강은 시켜 줬으니까. 죽지 않을 정도로!"
마치 자신을 가지고 놀듯 검을 휘두르는 진무의 입가에는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파앙!
움직임이 달라졌다.
찰나의 순간 진무의 움직임을 놓쳤고.
푸욱!
"크윽!"
가슴께를 향했던 검격이 교묘하게 심장 아래를 관통하더니, 번개같이 뽑혔다.
그런데.
"흡!"
복면인이 급히 손으로 코를 막으며 훌쩍 물러났다.
"어쭈, 이 새끼 보게."
"...."
그가 물러나기 전의 자리에 피와 함께 뿜어져 나온 녹빛 가루.
"독도 쓰냐?"
하필이면 진무의 검격이 그의 품속에 있었던 독주머니를 관통했다.
그 바람에 터져 버린 독분이 꿰뚫린 그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제법 비열한 수법도 있다 이거지?"
적이 독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진무는 더욱 거침없이 사악해졌다.
독분 가진 놈이 암기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파핫!
지면을 차고 독분이 스며 나온 곳을 우회하며 다가온 진무의 검이 이전과 달리 화려한 변화를 만들었다.
촤자자작!
복면인이 황급히 막았지만, 검이 노리는 것은 그의 몸이 아니었다.
진무의 공격에 그가 입고 있던 의복이 갈가리 찢겼다.
후두둑.
완전히 드러난 상체. 그리고 조각난 의복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암기 다발.
복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후의 수단마저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상처 안으로 파고든 독분에 중독까지 되고 말았다. 그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자신에게는 더 이상 어떤 가망도 없었다.
결국.
"하압!"
복면인의 눈동자에 핏발이 돋아 오르고, 무지막지한 핏빛 기운이 솟구쳤다.
파아앙!
허공이 터져 나가며 일직선으로 쏘아진 복면인의 신형이 진무를 향해 달려들었다.
곧게 펴진 팔을 따라 뻗어진 단도.
그리고 그 안에 응축된 막대한 양의 기운.
"...."
진무의 눈이 가늘게 뜨이고,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방어를 무시한 공격.
단 일초.
동귀어진(同歸於盡).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필사(必死)의 공격법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진무였다.
"내가!"
복면인이 동귀어진의 수법을 쓴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진무가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 늘어뜨렸다.
우우웅!
지면을 향한 검날이 거칠게 떨리며 시퍼런 선기가 올올이 뭉쳐 하나의 기운으로 뻗어 나갔다.
"같이 죽어 줄 것 같냐!"
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