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대주!"
"조장님!"
허벅지를 잡고 쓰러지는 둘의 모습에 참새 떼처럼 흩어지던 녀석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젠장!"
그러곤 곧바로 수장들을 잡기 위해 다가가는 진무를 향해 검을 뻗어 왔다.
무척이나 충성스러운 녀석들이었다.
상대를 잘못 파악했을 뿐.
퍼억!
일 보를 내디디며 허리를 숙여 횡으로 그은 검격을 피하고 복면인의 복부 깊숙이 주먹을 박아 넣는다.
"커억!"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숙어진 얼굴을 향해 진무의 무릎이 솟구친다.
콰직!
이어 교차해 날아오는 두 개의 검격.
빠바박!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피해 내고 연이어 양발이 그들의 턱을 부쉈다.
뻑! 퍼억! 콰직!
그들은 스무 명에 달했지만, 진무와 실력의 격차가 너무 컸다. 검을 놓고 나오긴 했지만 상관없다. 주먹과 발에 가득히 머금어진 선기면 충분했다.
자비는 없다.
주먹은 뼈를 부수고 발은 짓밟아 으스러뜨린다.
콰앙!
뒷머리를 잡은 채 담벽 위로 세차게 찍어 내렸다.
무너진 담에 깔려 정신을 잃은 복면인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우드득.
"끄악!"
손에 잡힌 팔을 여러 각도로 꺾어 몸 기(己)자를 만들자 경쾌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또다시 사정없이 이어지는 구타.
정신을 잃어도 멈추지 않는다.
"으으으."
그쯤 되니 복면인들이 진무를 공격하지 못하고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열 명 이상이나 남았지만, 숫자로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모양이었다.
격이 다른 강함을 가진 무인.
그리고.
"이게 무슨 일이냐!"
아직 해가 뜨려면 먼 시간이었지만, 이런 소란에 멍청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정도로 무당의 제자들은 약하지 않았다.
특히나 탄기의 경지에 다다른 진궁이 아닌가?
남들보다 몇 배는 잠귀가 밝다.
더구나 상단의 경계를 위해 번을 서고 있던 호위 무인들도 졸다가 깬 모양인지 타종을 때려 대었다.
무당의 제자들을 필두로 상단의 호위무사들까지 쏟아져 나와 복면인들을 포위했다.
누가 봐도 진무가 스물 가까운 괴한들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모양새.
"이놈들, 무기를 버리지 못할까!"
진궁이 눈에서 불길을 토하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자식, 또 이런다. 싸움은 진무가 했는데 마치 제가 다 했다는 양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어지간히 주워 먹길 좋아하는 얄미운 놈이었다. 잠이나 처자고 있었으면서.
하지만 진궁의 외침은 효과가 컸다.
포위된 복면인들이 즉시 무기를 버리며 투항했다.
"제자들은 이들을 제압해 안으로 옮겨라!"
"예, 사숙!"
제압은 무슨, 멀쩡한 놈이 몇이나 된다고.
하지만 이미 이대제자들이 복면인들을 데리고 장원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괜찮으냐?"
"뭐."
"들어가자."
웬일이지?
이 꼬장꼬장한 놈이 나한테 괜찮냐고 묻다니.
걱정? 그럴 리가....
그리고 그런 말을 해도 좀 포근한 표정으로 해야지.
진궁을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가자 다리가 부러진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무릎이 꿇려져 있었다.
"벗겨라!"
진궁의 명에 이대제자들이 각기 자신의 앞에 앉은 이들의 복면을 벗겼다. 이미 잡혀 있는 터라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그대는?"
진궁이 그들 중 하나의 얼굴을 알고 있는지 놀란 표정을 했다.
아니, 놀람보다는 의아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진무의 지풍에 허벅지가 꿰뚫린 자였다.
"개방이 어째서?"
개방?
개방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진무는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양소방, 이 노인네가 진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개방의 오결제자인 철골개께서 어찌 진무와 싸우고 있단 말이오? 그것도 복면까지 쓰시고."
진궁의 말에 철골개가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양소방이 시켰겠지, 뒷조사 좀 하라고.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저들이 개방이라면 나머지 한 패거리는 누구란 말인가?
대답은 진궁이 해 주었다.
"아니! 당신은 여위강?"
여위강?
그건 또 누구지?
"허, 점점. 아니 제갈분가의 무인인 당신은 또 어쩐 일이란 말이오?"
진궁의 추궁에 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개방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갈분가에서 복면을 쓰고 일해상단을 찾아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 대답도 진궁이 해 주었다.
"허! 제갈각입니까? 아니면 제갈무린 가주께서 직접 시키신 일입니까?"
"가, 가주님께선... 모르십니다."
진궁의 추상같은 호통에 여위강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이번 일해상단의 일로 꼴이 부끄럽게 되었기로서니, 그대를 시켜 진무를 노리다니요!"
"그, 그건."
"닥치시오!"
"...."
진궁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자 여위강이 찔끔하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감히 수치도 모르고 본문의 제자를 노리다니! 내 이번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소이다. 당장 본산에 알려 제갈분가와 개방의 잘못에 대해 따지겠소!"
"지, 진궁 도장."
"진궁 도장."
철골개와 여위강이 당황스러워하며 진궁을 바라보았다.
"변명은 꿈도 꾸지 마시오! 감히 진무를, 우리 무당의 검을 노리다니!"
"예? 무, 무당의 검이요?"
"...."
진궁의 말에 둘의 눈에 불신이 잔뜩 어렸다. 검? 무당의 주먹이 아니고...?
"청강!"
"예. 사숙!"
"무당의 팔궁인 우진궁 실무자로서 명한다. 지금 즉시 본산에 전서구를 띄워라!"
"예."
"지금 이 사실을 장로님들과 장문인께 알리고, 조속히 우진궁주이신 명충 장로님을 청한다 하여라!"
"예, 사숙!"
손바닥으로 막았을 것을 넉가래(눈삽)로도 못 막게 생겼다. 진궁의 명령에 여위강과 철골개는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애원했다.
"도, 도장. 그렇게까지 하실...."
"닥치라 했소! 그대들은 본산의 제자를 노렸소. 그 의미를 모른단 말이오? 지금부터 그대들의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겠소. 모든 사건의 정황은 명충 장로님께서 판단하실 게요."
"...."
무당의 제자를 노린 것에 대한 의미.
간혹 산문을 떠난 제자가 횡액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만약 개인적인 실수나 전투에 나선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음모나 습격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리고 무당은 이를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 무당의 산하의 모든 제자에게 비상 소집령이 떨어지고 문파의 이름을 건 대규모 보복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무당의 분노였다.
"이들을 가두고 철저하게 감시하라!"
"예, 사숙!"
진궁은 이대제자들에게 끌려가며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여위강과 철골개에게서 싸늘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진무."
"예?"
"새벽잠을 설쳤을 테니 가서 쉬도록 하여라."
"아, 예."
진무를 향한 진궁의 목소리는 여전히 근엄했지만, 그 안에 따스함이 가득했다.
...어째 사건이 좀 커진 것 같긴 한데. 뭐, 그러거나 말거나.
* * *
일해상단에서 일어난 소란은 순식간에 단강구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소식을 들은 제갈세가와 개방에서 찾아왔지만, 아직 무당에서 사건을 확인할 장로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짜악!
"이런 멍청한 놈!"
"...."
제갈무린의 분노에 뺨을 얻어맞은 제갈각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감히 허락도 없이 암천대를 움직여?"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
뻐억!
내질러진 발에 제갈각이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게 지금 죄송하다 해서 될 문제란 말이냐!"
"죄송합니다."
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은 제갈각은 그 말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확인만 하고자 했다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멍청한 놈! 꼴도 보기 싫다! 썩 꺼지거라!"
"...."
축객령이 떨어졌으나 제갈각은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후, 형님. 어찌 일을 이리 만드셨소.'
지켜보는 제갈근은 속으로 고소하게 웃었다.
이로써 그는 대공자의 자리에서 밀려날 것이고, 다시 한번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망할!"
제갈무린은 치미는 분노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일해상단의 일로 본가에서 자중하라는 서신이 도착하였는데 하필이면.
"여위강 이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단 말인가!"
제갈각도 제갈각이지만 암천대주가 그리 행동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제갈무린의 분노는 점점 커져만 갔다.
"청화대주!"
"예."
"지금 즉시 무인들을 소집해서 일해상단의 장원을 포위하라!"
"포위입니까?"
"그래! 포위다."
"알겠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청화대주 모익상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금세 깨달았다.
가주는 이른바 무력시위를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시작은 애들 싸움이었으나 이제는 어른 싸움일 수밖에 없다. 무당의 제자를 노렸다는 사실이 들통난 시점에서 이 일이 문파 간의 싸움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근래 단강구의 이권으로 작은 마찰이 있었으니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사람을 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제부터는 무당과 제갈 간의 자존심 대결로 치달을 것이 틀림없었다.
무림 문파 간의 기 싸움.
유혈 사태로까지는 번지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제갈의 힘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기 싸움에서 밀리는 순간 단강구의 모든 여론이 승자에게 손을 내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무당과 제갈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되면 정무맹에서 절대로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중재에 나서는 순간 제갈세가는 무당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서 일을 마무리 짓게 될 것이다.
제갈세가는 산중에 틀어박혀 도나 닦는 무당보다 이해관계에 밝으며 계략을 꾸미는 일에 훨씬 능숙했으니까.
'무당,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싸움이었다.'
충분히 우위를 점하고 들어갈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제갈무린은 언뜻 스치는 불안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앉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자식."
* * *
"사숙! 사숙!"
청강이 급히 안으로 뛰어들자 상단주 강유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진궁과 진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냐."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뭐?"
청강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진궁은 굳은 표정으로, 진무는 짜증이 잔뜩 서린 표정으로 뒤따랐다.
진무는 지금의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잡혀 온 자들의 주리를 틀어서 입을 열게 하고 싶었으나, 진궁이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입 열게 하는 데는 고문이 최고다. 일단 입만 열고 나면 이놈들의 멱살을 잡고 제갈세가를 찾아가 정문을 부수고 따지면 될 일을, 뭐 하러 명충 장로까지 오라 가라 한단 말인가?
이놈의 정파는 역시나 일 처리가 글러 먹었다.
그놈의 절차, 절차.
하지만 착하게 '네' 하면서 따라 줄 진무가 아니었다.
가장 처음에 잡혀 온 놈. 그놈을 몰래 청상에게 맡겨 놓았다.
그때 봐서는 양소방의 수하도, 그렇다고 어설픈 사파인도 아니었다.
아직 정체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보면 지금의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제갈세가 놈일지도 모르고. 좌우지간 뒤를 캐 보면 필경 도움 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정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묘한 위압감이 가득히 느껴졌다.
백을 헤아릴 정도로 많은 무인들이 흉흉한 기세를 품고 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제갈?"
진궁이 눈을 씰룩거리는데.
"청운검룡이 아니시오."
"...."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모익상.'
진궁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51화
청화대주 모익상.
그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진궁과도 승부를 점칠 수 없을 만큼 강한, 단강구 제갈분가의 최고수 중의 한 명.
그가 어째서 이 많은 무인들을 이끌고 나타났단 말인가?
더욱이 그들의 모습은 마치 일해상단을 포위하고 있는 형세였다.
누가 봐도 그 의도가 명확하다.
무력시위.
숫자를 동원한 압박.
"하, 이것들 봐라?"
진무가 눈을 세모로 뜨고 나서자 모익상이 힐끗 쳐다보며 싱글거렸다.
"흠, 이분께선?"
"본파의 일대제자 진무요."
진궁의 대답에 모익상이 환하게 웃었다.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번 공사척 일당을 몰아내고, 연을 맺은 청양상단의 뒤통수를 쳐서 밀수로 엮으셨다지요? 근래에는 하찮은 수적 패거리 하나도 토벌하셨고요. 참 대단하십니다."
"...."
뭐? 뒤통수?
하찮은 수적 토벌?
이런 어린놈의 실눈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진궁만 없었다면 실실 쪼개고 있는 아가리와 함께 얇게 휘어진 눈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진무가 주먹을 움켜쥐고 나서려 하자 진궁의 그의 손을 잡았다.
"놔요."
짜증이 묻어나는 외침에 진궁이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거라."
기다려?
상대가 대놓고 도발을 해 온 마당에 또 절차 타령이나 하자고?
뭐, 그래. 절차 좋지.
살아온 세월이 모익상이나 진궁의 두 배가 넘는 진무가 그 중요성을 모를까?
하지만, 사패천주였던 시절에도 자신을 향해 도발해 온 놈을 봐준 적이 없었다.
절차고 나발이고, 힘도 없는 것들이 숫자만 믿고 와서 자신을 압박하려 하다니. 당장에라도 모익상이라는 녀석의 모가지를 뽑아서 제갈세가로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청화대주. 그런데 지금 이 행동은 어떤 뜻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매섭게 노려보는 진무와는 달리 진궁은 너무도 차분하게 물었다.
"어떤 뜻이냐니요?"
"제 눈에는 지금 귀가에서 우리 무당을 상대로 무력시위라도 하려는 생각으로 보입니다만."
"무력시위라니,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섭섭하다?"
"우리는 그저 본가의 무인들이 혹여 과한 고초를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온 것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진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혹시 또 모르지 않소. 포로를 넘겨주지 않고 문을 닫아걸었으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무당에서 무슨 짓을 할지."
"감히 우리 무당을 어찌 보고 그따위 말을. 습격은 제갈가에서 먼저 해 오지 않았소."
"이보시오. 청운검룡."
"...."
"사건의 정황은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아오."
이 새끼가 진짜.
진무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꼭지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진무의 몸에서 확 피어오른 투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검을 잡으며 진한 기세를 뿜었다.
일촉즉발의 상태.
일단 모익상이라는 놈의 입을 찢어 놓고 시작해 볼까?
그런데.
"진무야."
"뭐요?"
"이 일은 사형을 믿고 맡기거라."
"...."
웬일로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럽고 진중하게 말해 온다.
"너는 무당의 검으로서의 충분히 역할을 다했다. 하나 지금은 문파와 문파 간의 문제가 되었으니 우진궁의 실무자인 나에게 맡기거라. 네 사형이 그리 미덥지 않은 사람은 아니니."
"...."
진궁의 은근한 어조에 진무가 모익상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기운을 풀고 물러났다.
마음에 영 안 들었지만, 진궁이 그렇게까지 나왔는데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너, 실눈 새끼. 두고 보자.
진무 역시 알고 있다. 상대가 교묘한 말로 마치 자신들이 포로들을 은폐하여 무언가를 꾸미는 것처럼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제갈세가 소속 아니랄까 봐 무인이라는 새끼가 독사 같은 혓바닥으로 협잡질이나 하다니.
하지만 대놓고 칼부림부터 시작하는 사파와는 달리 정파는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누가 먼저 칼을 뽑았느냐?
그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검을 뽑아서는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칼을 뽑는 순간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싸움이 되니까.
설사 무당에 잘못이 없다고 해도 상대에게 유리한 고지를 내어 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되면 정말로 자신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모양새가 되기 십상이었다.
"진무 도장께선 어려서 그런지 참으로 성격이 불같으시오."
"...."
모익상이 진무의 화를 돋워 보려는 듯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진궁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이상, 싸늘해진 진무의 마음에는 더 이상 불이 붙지 않았다.
"맞아. 도사치고는 불같은 성격이지. 그래도 난 누구처럼 혼자 오면 혹시나 처맞을까 봐 겁먹어서 애새끼들 줄줄이 달고 다니지는 않아."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상대가 도발한 만큼은 돌려줘야 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모익상의 눈이 매서워지고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뭐, 이 작아서 눈깔도 잘 안 보이는 새끼야.
"청화대주."
"뭐요?"
진궁의 부름에 답하는 모익상은 얼굴만큼이나 말투가 매서워져 있었다.
"나는 무당의 제자요. 없는 사실은 만들지 않소."
"물론 이름 높은 청운검룡께서 없는 사실을 만들진 않으시겠지."
"...."
"하지만 가문의 무인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우리 세가의 입장도 이해해 주기 바라오."
진궁은 능글맞게 웃는 모익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진궁.
무당의 대외 협력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궁의 실무자인 진궁이었다.
비록 제갈과는 달리 협잡하지 않고 오롯이 정도(正導)를 지키며 일을 처리해 왔으나, 대화를 유리하게 만드는 방법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침착해야 한다.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상황은 아직 자신들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
"옳은 말이오. 아직 사건 정황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지."
"...."
"한데 말이오. 귀공과 제갈분가의 가주께선 아직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뭐요?"
"일해상단에 잡혀 있는 자들이 제갈세가뿐이라 생각하시오?"
진궁의 한마디에 모익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지금 이곳에는 단강구 개방지부의 오결제자인 철골개도 함께 있소."
"철골? 개, 개방이라고?"
모익상이 굳었던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철골개는 개방 단강지부를 대표하는 고수였다.
분타주 바로 아래의 지위. 그런데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모익상의 반응을 보며 진궁의 옆에 있던 진무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진궁, 제법이다.
고리타분한 도사 놈인 줄 알았더니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안다.
굳이 윽박지르고 위협하는 것 없이, 차분히 사실을 조목조목 짚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대화에서 승기를 잡아 오지 않았는가.
흠, 괜히 우진궁의 실무자는 아닌 모양이네.
진무는 시시각각으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모익상을 보며 고소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이 진궁은 한번 문 상대의 목덜미를 쉽게 놓아 주지 않았다.
"여위강은 이미 실토를 했고, 그 사실을 무당만 들은 것이 아니라 철골개도 함께 들었소."
물론 그런 적 없다.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는 사실.
그렇다고 딱히 진궁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실토를 했다고 했지, 무엇을 실토했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그저 제갈세가라는 사실만 인정했을 뿐이다.
'이, 이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튀어나오자 모익상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디 무력시위를 할 테면 해 보시오. 그러고 보니 이참에 지난번 이성상단이 수로 이용권을 어찌 빼앗아 갔는지도 한번 따져 봐야겠군."
결정타다.
지금 상황에서는 잘못을 한 쪽이 도리어 힘으로 상대를 위협한 꼴이 되었으니 명분마저 잃었다.
"나는 무당의 제자로서 제갈세가가 핍박을 가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똑똑히 밝히겠소."
모익상의 표정이 재미있다.
웃고 있던 실눈이 커졌지만, 눈동자의 상하가 잘려 보이니 더욱 이상하게 생겨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그럼 후에 봅시다."
진궁이 싸늘하게 먼저 몸을 돌리고, 진무는 모익상에게 비웃음을 날리며 그 뒤를 따랐다.
쾅!
일해상단의 문이 세차게 닫히고.
"거, 사형. 좀 합디다."
진무의 말에 진궁이 빙긋이 웃으며 큼지막한 손으로 진무의 머리를 쓸었다.
"녀석, 그만 들어가거라."
"...."
이놈 자식이 칭찬 좀 해 줬더니 어디 어른 머리를.
그래도 뭐,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 * *
무력시위가 시작된 지 이틀이 지났다.
일해상단의 문이 활짝 열리고 각 파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전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우진궁주 명충이 중심을 잡자 무당의 제자들은 도인으로서의 면모를 여과 없이 뿜어내었고, 가주를 위시한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날 선 기세를 뿜어내었다.
단지 단강구 개방지파의 분타주 용선개만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좌불안석이었다.
"자, 그럼 어디 말씀들을 해 보시지요?"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져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와중에 명충이 무릎을 꿇고 앉은 철골개와 여위강을 보며 말했다.
"왜들 말씀이 없으십니까? 분타주께서 먼저 말씀해 보시지요."
"저, 그건...."
용선개는 차마 그들이 일해상단을 감시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
"개방에서 우리 진무를 노렸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복면을 쓰고 공격을 하신 겁니까?"
"...."
용선개는 또다시 한숨만 내쉬었다.
그로서는 차마 행적이 은밀해야 하는 양소방의 명령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거참, 하면 제갈분가주께선 어떠시오? 어찌 암천대가 진무를 노렸습니까?"
"노린 적 없소. 오히려 귀파의 제자들이 우리 제자들을 핍박한 것이오."
"핍박이요?"
"그렇소."
용선개와는 달리 제갈무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뭐가 저리도 당당하단 말인가?
뒤에 있던 진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제갈무린을 바라보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되레 피해자인 척을 해?
"제갈분가주."
명충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제갈무린을 노려보았지만.
"왜요? 내 말이 틀렸소?"
"뭐요?"
"그럼 어디 한번 물어보지요."
"...."
제갈무린이 고개를 돌려 여위강을 바라보았다.
"너희가 일해상단의 담을 넘었더냐?"
"아닙니다. 가주."
"넘지 않았다?"
"예."
그렇겠지. 넘기도 전에 개방의 무인들과 싸우고 있었으니.
"그럼 너희가 먼저 진무 도장을 공격했느냐?"
"아닙니다."
"하면 누구와 싸웠느냐?"
"개방입니다. 그 사실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너희의 싸움에 진무 도장이 끼어들었단 말이냐?"
"...예. 뭐."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이렷다?"
"예."
여위강의 말이 끝나자 제갈무린이 이번엔 철골개를 바라보았다.
"철골개는 어떠시오? 위강의 말에 거짓이 있소?"
"그건... 없습니다."
철골개의 대답에 제갈무린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보시오. 우리 세가의 무인들은 그저 단강구를 순찰하던 중에 일해상단 주위에 숨어 있는 개방을 발견했고, 그들을 의심스럽게 여겨 싸운 것뿐이오. 그런 세가의 무인들을 공격했으니 잘못은 오히려 진무 도장에게 있소."
"거참 재미있는 말이구려. 한밤중에 복면을 쓰고 순찰을 했다? 그것도 우리 무당이 기거하는 일해상단 근처를?"
"그렇소. 단강구는 우리 제갈의 영역이니 순찰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대놓고 단강구가 자신들의 영역임을 피력한다. 더욱이.
"그리고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나는 이 자리에 사과를 하러 온 것이 아니오."
"뭐라?"
"순찰 중인 본가의 무인들을 공격한 진무 도장에게 사과를 받으러 온 것이오."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52화
"허허, 제갈분가주께서는 우리 무당을 너무 우습게 보시는 모양입니다."
제갈무린과 명충이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대화의 승기를 잡기 위해 팽팽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누가 봐도 여위강이 노린 것은 일해상단이다. 그럼에도 몇 마디의 말로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언급하는 바에 거짓은 없었으니까.
역시나 제갈무린이었다.
어설프게 흉내나 내는 모익상과 달리 지금 앉은 이들 중 누구보다 심계가 깊은 자였다.
이미 다양한 예행연습을 끝냈을 터였고, 화려한 말발로 상대를 무력화시킬 준비까지 마쳤을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오자마자 곧바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 분위기를 제갈 쪽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는 여위강에게 진술을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이 유리하게 사실에 근거한 진술을 만들고, 여위강에게는 대답만 하도록 만들었다. 여위강에게 다시 묻는다 해도 앵무새처럼 제갈무린의 말을 반복하리라.
이미 철골개의 확인까지 거쳤으니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셈이다. 그리고 기세를 살려 모든 잘못을 진무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칼날 없는 전쟁터에서 제갈무린은 최고수였다. 그 어떤 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하고 비열한 자.
그런 자에게 정석적인 대화법으로 맞서는 우진궁주 명충이나 진궁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갈분가주. 이렇게 나오시다니 본 도장은 심히 기분이 좋지 않구려. 그대들은 복면을 쓰고 무당의 제자를 암습하려 했소."
"그런 적 없다 말씀드렸소만."
딱 잡아떼며, 제갈무린은 여유롭게 자신 앞에 놓인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허, 본파는 지금 지난번 이성상단을 움직여 수로 이용권을 빼앗고 일해상단의 상행을 방해했다는 사실조차 묵인하며 양보를 보였거늘."
대화의 승기를 빼앗겼음을 느낀 명충이 다른 사건을 통해 공격을 하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제갈무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린 것처럼.
딱.
입으로 가져가려던 찻잔을 내려놓자 짧은 마찰음이 생겨났다.
노린 것이다.
그 한 동작으로 좌중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기세를 잡는다.
"우진궁주."
"...."
"말을 가려 하시오."
"뭐라?"
"내 그런 소문을 듣기는 하였으나, 전부 사실무근이오."
"사실무근이다?"
"그렇소. 우리 제갈분가를 음해하는 자들이 소문을 퍼트린 것이라 이미 확인을 마쳤소."
"...."
"이성상단의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소."
"뭐요?"
"필요하면 당장 이성상단에 확인을 해 보아도 좋소."
이미 이성상단에 손을 써 두었다는 것이다. 확인한다 해도 딱히 얻을 것이 없으리라.
이후로도 명충은 상대에게 '뭐라?', '뭐요?'라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무린의 세 치 혀에 의해.
졌다. 처절하게 진 것이다.
무당은 순찰 중인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공격한 것도 모자라 헛소문으로 음해한 파렴치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혀는 때때로 칼보다 날카롭다.
우진궁은 뛰어난 대외 협상 능력을 가졌다. 진무도 진궁에게 살짝 놀랐을 정도니까.
하지만 수가 모자라거나 정상적인 놈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비열함으로 무장한 놈들에게 그따위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협잡에는 협잡으로 응해야 하는 법인데.
진무는 몇 번이나 주먹을 움켜쥐었다. 복잡한 정파 놈들이다. 그냥 싹 줘 패고 의사를 관철시키면 될 것을. 지금 이 자리가 사패천이었다면 주저 없이 그랬을 것이다.
모익상, 제갈무린.
사패천이었다면 아마 지금쯤 피떡이 되어 있겠지. 하지만 영 나설 방법이 없었다.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사숙.]
귓가에 들려온 전음.
청상이다.
전음을 듣는 순간 진무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맨 처음 잡은 놈에게서 무엇인가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제갈세가임을 확인했습니다. 자신을 암천대 소속의 주학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역시.
청상에게 맡겨 두길 잘했다.
아주 시기적절하다.
진무가 하는 말에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보이는 녀석이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팔다리 하나씩은 자르지 않았을까.
어쨌든 돌파할 방법이 생겼다.
저 잘난 세 치 혀를 잘라 버릴 만한 방법이.
"장로님."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진무가 앞으로 나서자 진궁이 그의 손을 잡았다. 높으신 분들이 말씀 중이니 나설 자리가 아니란 뜻이겠지.
하지만 나설 때가 되었다. 패배한 무당의 도사들을 구원하기 위해.
여기서 지면 끝이니까.
업적도, 평판도.
"오룡궁의 제자 진무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진무가 아랑곳하지 않고 나서자 잠시 생각하던 명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는 천천히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나는 무당의 도사다.
예와 도를 아는 정파의 제자다.
사패천주 혁련무강이 아니다.
공손하고, 절도 있게, 예의를 다해서.
제갈무린이 좀 열 받게 해도 절대 주먹은 쓰지 말자. 욕도 하지 말고.
"제갈분가주께서는 무당을 감시하지 않았다는 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습니까?"
당돌한 일대제자의 말에 제갈무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니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네."
"그렇군요."
진무가 사악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명충을 바라보았다.
"장로님, 실은 제가 일전에 출타 중 습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습격이라고?"
제갈무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침을 진무가 놓치지 않았다.
"예. 습격입니다."
잠시 말을 끊는다.
궁금하겠지. 어떤 말이 나올까 생각지도 못하고 있겠지.
"계속 말해 보거라."
"잠시 강변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 거닐던 중에 저를 은밀히 따르는 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취객으로, 또는 행인으로. 변장에 무척이나 능한 자였습니다."
"허!"
명충의 감탄사와 동시에 제갈무린의 눈동자에 변화가 생겼다.
정말로 변장술만큼은 뛰어났다. 사패천에서도 그만한 놈을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런 능력을 가진 부하라면 제갈무린이 모를 리가 없겠지.
"그는 저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진무의 말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고, 어느새 진궁은 그의 손을 놓고 있었다.
"확인해 본 결과 그의 이름은 주학이라더군요."
"...!"
무릎을 꿇고 있던 여위강이 고개를 쳐들었다.
'제길. 잊고 있었다.'
상황이 묘하여 미리 제갈무린에게 언질을 주지 못한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진무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제갈분가의 암천대 소속이라고 했습니다."
"닥치시게!"
불시의 공격.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제갈무린의 평정심이 깨어졌다.
주학에 대한 내용은 보고받지 못한 일이었다. 제갈각은 그저 암천대주와 십 호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주학이라니?
하지만 상대의 틈을 잡은 진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상처가 생겼을 때는 놓치지 않고 소금을 뿌려야 더욱 쓰라린 법이다.
"그는 제게 살수를 펼쳐 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치명상을 입은 제갈무린의 볼이 씰룩거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무당의 일대제자 진무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느냐?"
"예.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냐?"
명충이 기대감을 품은 눈으로 진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무의 시선은 개방의 단강구 분타주 용선개를 향했다. 제갈무린이 개방을 이용했던 것처럼 똑같이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분타주께선 알고 계시지요?"
모두의 시선이 진무를 따라 용선개에게 집중되자 그의 얼굴이 더 이상 힘들 정도로 찡그려졌다.
"용선개."
명충이 엄한 목소리로 추궁하듯이 물었다.
"아는 사실이 있소?"
"그게...."
용선개는 한숨만 내쉬었다.
알고도 말할 수 없으니 답답했고,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은 그의 입만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그가 사건의 열쇠가 되어 버렸다. 제갈이든 무당이든 그의 한마디에 입장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말해! 양소방이 내 뒷조사시켰다고! 양소방이 주학이라는 놈과 싸우는 걸 다 봤다고! 왜 입을 가지고 말을 못 해!
진무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다그쳤다.
그리고.
"명충은 개방의 제자를 너무 핍박하지 말게."
어디선가 마치 거짓말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돌아갔다.
어?
저 노인네가 왜?
넌 안 불렀어! 용선개만으로 충분해. 가! 가, 인마!
그를 알아본 진무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열려진 일해상단의 정문.
허리가 구부정한 죽립인이 외곽을 포위한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뚫고 천천히 다가왔다.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그가 어떻게 언제 자신들을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의아함을 드러낼 때쯤 죽립이 벗겨졌다.
"무, 무풍!"
"양소방!"
그의 얼굴을 알아본 이들은 모두가 눈을 찢어질 정도로 부릅뜨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금 정무맹에서 절대라 불리우는 자들 중 하나이자 가장 신비한 행적을 가진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일제히 머리를 처박고 엎드렸고, 명충과 제갈무린이 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무풍개 어른을 뵙습니다."
그 이름 한마디가 주는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특히나 제갈무린의 눈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왜? 어째서 무풍개가 나타나는 것인가?
"허헛, 개방의 제자들은 그만 일어나라. 나로 인해 고초가 많았으이."
"아닙니다. 저희가 실수를 하여 비흔께서 내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만하게. 내가 다 낯이 부끄럽군."
어느새 다가온 양소방이 용선개를 일으키고 고개를 돌렸다.
명충과 제갈무린은 여전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무풍개 양소방이 가지는 이름값과 정무맹에서 차지하는 위치였다.
"그대들도 그만하고 앉으시게."
"예. 어르신!"
하지만 명충과 제갈무린은 고개만 들었을 뿐, 차마 앉지 못했다.
용선개가 급히 의자를 내주어 양소방이 앉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명충, 무린. 오랜만일세."
"예. 어르신. 근 이 년 만에 뵙습니다."
명충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녀석은 지난밤과 딴판이구나."
양소방이 진무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죄송합니다. 고명(高名)하신 분을 몰라뵙고 예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예는 무슨. 그럴 리가 있나.
지금 자리에선 어쩔 수 없으니까 예의를 차리는 거지.
하지만 그 모습에 양소방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 성격을 보면 알았어도 딱히 변할 게 없지 싶다만."
이 거지새끼가.
하여간 더럽게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어쨌든 개방으로 하여금 저 아이를 감시하게 한 것은 나의 지시가 맞네."
"아, 그러셨습니까. 제가 미처 알지 못하여."
명충은 그에 대해 한마디도 따질 수 없었다.
천하의 양소방이 한다는데 어찌 무당의 일개 장로 따위가 감 놔라 배 놔라 한단 말인가? 진무를 반병신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잘하셨습니다.' 할 일이었다.
"이 아이가 습격을 받고 있더군. 뭐, 습격을 한 건지 받은 것인지는 좀 애매하지만 말일세."
필요한 말만 해라. 이 노인네야.
진무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노인네가 괜히 다른 말을 해서는 곤란했다.
"그때 제가 습격당한 것을 무풍개 어르신께서 모두 보았습니다."
진무의 말에 무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공인이다.
그 무엇보다 정확하고, 누구도 반문할 수 없는.
"보았지. 내가 이 아이를 감시하게 한 것은 다른 이유기는 하지만 말이야. 어쨌든 그에 관해 개방이 산 오해는 풀렸으면 좋겠구만."
"당연합니다."
명충의 대답에 진무는 조금 심기가 불편해졌다.
내가 안 풀었는데 네가 왜 대답을 하고 난리냐?
하지만 이걸로 끝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양소방이 인정해 버렸으니 제갈무린은 외통수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오면서 개방의 아이들에게 듣자 하니 제갈분가와 무당 간에 작은 마찰이 있었다 들었네."
"예."
"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제갈분가에서 무당에 실수를 한 게 맞는 듯한데. 어떤가, 내 얼굴을 봐서 이제 그만 물러나 주지 않겠는가?"
양소방이 은근하게 제갈무린을 압박하자 그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53화
"어르신."
한참이나 고심하던 제갈무린이 천천히 입을 뗐다.
"말하게."
"주학이 진무 도장을 노린 것은 저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습니다. 허나 무당은 이를 두고 제갈세가를 음해하였음은 물론, 없던 잘못까지 뒤집어씌웠습니다."
"음...."
양소방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으나 제갈무린은 물러날 수 없었다.
이미 청화대 전체를 동원해 일해상단을 압박한 지 이틀.
단강구의 모두가 둘의 마찰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난다면?
기 싸움에서 지게 된다.
승리는 못 할지라도 무승부는 이루어야만 했다.
"어찌한다?"
양소방이 고민을 하자 진무가 슬며시 앞으로 나섰다.
"어르신."
"응?"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어차피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네가 있는 듯하니."
양소방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무가 고개를 숙인 채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양소방이 나타난 건 의외였으나 쓸모가 있으면 최대한 이용해 준다. 진무가 고개를 들고 당당한 표정으로 양소방부터 시작해 좌중의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 했습니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오랫동안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무림을 유지시켜 온 불변의 진리.
묻고 답함은 쓸데가 없다.
무인은 주먹으로 말하고 칼로써 뜻을 세운다.
진무는 절묘한 순간에 사태를 해결할 절묘한 방안을 꺼내 들었다.
제갈분가도 무당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서로가 물러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서로에게 내세워진 명분은 더 이상 대화로 해결될 수가 없었다. 두 곳 모두 정파의 거두이니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팽팽하게 당겨진 매듭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절단이다. 그것은 최후의 방법이자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진무의 말에 양소방이 가만히 진무를 바라보았다.
그가 찾아온 것은 비단 개방 때문이 아니었다.
개방에서 조사한 진무에 대한 내용.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근래 단강구에서 보인 진무의 행적은 누구보다 정의감 넘치는 도사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 과정 안에 자신이 쫓고 있는 자들과의 연관성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얼마 전 단강구에 있었던 화약 밀거래.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의 흔적이 남은 무너진 무월루. 그 모든 곳에 진무의 행적이 남아 있다.
또한 얼마 전에 겪은 진무의 무공.
그들의 것과 동일했다.
그리고.
'이놈 봐라? 무공뿐 아니라 제법 영악하기까지 하구나.'
자신의 방문을 당황스러워한 표정이 역력했는데, 이제는 이용하려는 수작까지 보인다.
심계까지 제법 출중하다.
'오냐, 일단은 이용당해 주마. 네 녀석에게는 물어볼 것이 많을 듯하니.'
양소방이 피식 웃으며 진무가 깔아 놓은 판에 발을 들이밀었다.
"네 말인즉, 자존심을 걸고 승부를 보잔 말이더냐?"
"예. 서로 간에 대표자를 내세워 승부를 보고, 지는 쪽이 깨끗이 물러나는 것으로 하시지요."
대표자.
양소방은 진무가 스스로 나서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뜻 보이는 그의 성격상 확신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을 게 분명했다.
또한 간밤에 보였던 그의 무위라면?
'제갈세가가 꽤 낭패를 보겠어. 하나 모든 것은 제갈세가가 초래한 일. 내가 관여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양소방은 정무맹을 대표하는 무인이었다.
무당과 제갈의 싸움.
어느 누구의 편을 들어서도 안 되었다.
그저 중재만 가능할 뿐이었다.
"의뭉스러운 놈. 좋다. 자네들의 뜻은 어떠한가?"
양소방의 말에 명충은 잠시 고민했고, 제갈무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무당이니 명충이 나설 리는 없었다.
필시 일대제자. 이변이 없는 한 진궁이 될 것이고, 진무가 나선다면 더욱 좋다.
"어르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제갈무린의 대답에 양소방이 명충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
자파의 진무가 제안했으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러자니 상대가 내밀 패가 너무 뻔해 보였다.
"이보게. 명충."
"아, 죄송합니다. 저 역시... 어르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명충과 제갈무린이 동의하자 양소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단 살수는 안 된다. 무당과 제갈에서는 각 파를 대표할 무인을 천거하라."
양소방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명충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진무가 나섰다.
"제가 사건의 중심이니 무당에서는 제가 나서겠습니다."
"진무야!"
생각했던 대로 명충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당연히 진궁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
"사부님."
"...."
"괜찮습니다."
이미 한번 처맞아 본 경험이 있는 진궁이 자신 있게 막아 준다.
그리고.
제갈무린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격이 있으니 본인이 나서지는 않겠지. 다만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최고수로 정할 것이다.
"청화대주!"
그의 말에 명충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진무는 씨익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다.
안 그래도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모익상, 피똥을 싸게 해 주마. 기저귀는 덤이다.
진무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으나 명충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청화대주 모익상.
비록 분가의 무인이지만 호북성 전체에 그 이름이 알려진 무인.
그의 이름이 단강구 너머 중원에 알려진 것이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일개 분가 소속 무인대의 수장에 불과한 그는 녹림을 토벌하며 그 이름을 드러내었고, 그 과정에서 검기를 쏘아 당시 녹림 산채의 수장이던 용패력의 목을 자름으로써 탄기의 고수임을 입증했다.
그로 인해 수차례 본가의 부름을 받았으나 단강구 분가에 남아 충성을 지킨 그 절개를 모두가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분가주인 제갈무린에 비교해도 모자람 없는 실력의 무인. 진궁보다 훨씬 더 전에 탄기에 이른 고수.
무당의 장로 중 몇몇과 비견해도 모자람이 없을 그의 무위를 알기에 명충의 구겨진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저 녀석이 어쩌자고."
모두가 물러나며 마련된 중앙의 공간으로 나서는 진무를 보며 명충이 중얼거렸다.
"사부님."
"...."
"걱정 마십시오. 진무는 강합니다."
진궁의 말에 명충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모익상의 무위에 대해서는 진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이리 자신만만하단 말인가?
"저 아이는 오룡궁의 실무제자이자 무당의 검입니다."
확신에 찬 표정은 또 뭐란 말인가?
"다만 생각하신 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요."
"뭐?"
미소까지 머금는 진궁의 얼굴에 이제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무당의 검'이라는 칭호까지 앞세우는 말에 당황스러움이 궁금증으로 변했다.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단 말인가?
명충은 한 줄기 희망을 품으며 진무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핫, 이거 진무 도장께서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나이처럼 주제 모르고 혈기 방장하군요."
"...."
주제를 모르고 혈기 방장(血氣方壯)하다. 어린놈이 분수도 모르고 날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비웃음을 머금은 모익상의 표정은 대충 저런 뜻이리라.
"자, 그럼 어찌한다? 분가의 명예가 걸렸으니 어린 도사님을 봐드릴 수도 없고."
모익상이 주절거리는 사이 진무가 자신의 검을 꺼냈다.
그리고.
철거렁.
검을 뽑아 바닥에 던진 진무가 검집을 쥐었다.
"더럽게 말 많네."
"...?"
"나불거리는 입만큼이나 실력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짝다리를 짚고 검집을 어깨에 걸친 도발적인 모습.
진무의 걸걸한 말에 앞에 선 모익상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이들이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공손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제가 생각하신 것과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고."
진궁이 명충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소곤거리는 사이 영 도사답지 않은 진무의 말이 이어졌다.
"맨손으로 할 거야? 봐주면 나야 고맙고."
"하! 이거 참."
어느새 눈동자가 드러날 정도로 매섭게 눈을 뜬 모익상의 손에 목검이 잡혀 있었다.
"무당에서 선배 무인에 대한 예의는 가르치지 않은 모양입니다?"
"선배? 예의? 그딴 건 필요한 사람에게나 지키는 거지!"
파학!
말이 끝남과 무섭게 진무의 발이 흙더미를 파헤쳤다. 목검이라 해도 이미 상대는 검을 뽑았다. 굳이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헙!"
일 보.
떨어짐과 무섭게 진무의 사악한 얼굴이 다가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빠른 움직임에 모익상이 서둘러 목검을 가슴까지 당겼다가 곧게 펼쳤다.
쑤웅!
급한 움직임이었으나 맹렬한 기세가 뻗어져 대기에 회오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방향을 꺾은 진무가 낮은 자세로 모익상의 옆구리를 향해 검집을 휘둘렀다.
땅!
뻗었다 당겨 세운 목검과 검집이 맞부딪쳐 쇳소리를 만들고.
타다닥.
힘에 밀려 버린 모익상이 게걸음을 치며 물러났다.
파학!
봐줄 생각도 멈출 생각도 없던 진무는 곧바로 지면을 강하게 밟으며 신형을 직각으로 꺾고 검집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촤촤촤!
'큭!'
비틀어 내지른 검집 끝이 묘하게 흔들리자 수십 개의 잔영이 생겨나 공기를 헤집는다.
딱, 따다다닥!
방어하기도 급급했다.
모익상은 자신이 가진 바 검공을 펼칠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밀리기만 했다.
그리고.
검집이 그의 목검에 닿는 순간.
취릿!
짧게 비틀리며 만들어 낸 회전이 목검을 튕겨 내고 가슴을 열었다.
'이, 이런!'
곧게 찔러 들어오는 검집에 명치를 고스란히 내주게 생긴 모익상이 기운을 끌어 올려 주먹에 담았다.
투웅!
후려친 주먹이 검집의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휘릭!
달려온 그대로 비틀어진 몸과 함께 곧장 뻗어 나오는 발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모익상이 그대로 옆으로 몸을 굴렸다.
파아앙!
발바닥이 허공을 때려 터트려 버린 공기가 진한 울림을 만들어 내었다.
정적.
검집을 어깨에 걸치고 선 진무가 히죽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 좀 놀랐나? 내가 좀 너어무 혈기 방장하지?"
"...."
흙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엎드려 고개를 든 모익상. 주먹을 불끈 쥐며 희열에 찬 표정의 진궁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는 양소방.
그리고.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모익상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치스럽게 바닥을 뒹굴었다.
고작 약관의 도사에 의해.
으드득!
이를 갈아 댄 모익상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수치스러웠다. 아무리 기운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지만 깨달음의 정도가 다르고 초식 운용에서 월등하게 뛰어나야 할 그가 방어만 하다 볼썽사납게 뒹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깔아 보며 비웃는 진무의 얼굴.
'이 자식! 죽여 버리겠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모익상이 엎드린 채로 양손으로 땅을 파헤치듯 잡아당기며 뒷발을 힘차게 밀었다.
파학!
비스듬히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는 그의 신형이 진무를 향해 섬전처럼 쇄도했다.
네발?
이제 보니 네놈은 개로구나.
하면 복날 맞은 개처럼 패 주마.
진무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사악해졌다.
54화
쫘자작!
거칠게 횡으로 휘둘러진 목검에 진무의 허리가 뒤로 꺾이며 발이 솟구친다.
쩡!
팔꿈치로 비껴 막은 모익상은 그대로 검격을 떨어뜨렸다.
슈가각!
수직으로 떨어지는 검격이 진무의 몸을 쪼개 버릴 듯한 기세로 날아오는 순간, 진무가 몸을 뒤로 제치며 땅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뒹굴었다.
'나려타곤?'
모익상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과 똑같이 놈도 바닥을 뒹굴게 만들었다.
그런데.
뻑!
'크윽!'
등 어림에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
뒹구는 것과 동시에 팔 힘으로 몸을 세워 비튼 진무의 발이 그의 등짝을 때렸다.
그리곤 튕기듯이 몸을 세우는 진무의 모습.
충격에 두어 걸음 밀린 모익상이 급히 멈춤과 동시에 몸을 돌리며 목검을 뒤로 휘둘렀다.
후웅!
"...!"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그러나 걸리는 게 없다.
바로 이어서 공격해 올 줄 알았던 진무가 훌쩍 물러나 또다시 검집을 어깨에 걸치고 자신을 비웃었다.
'이 어린놈의 자식이.'
모익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인으로서 응당 수치스러워해야 할 나려타곤을 또 다른 공격법으로 만들며 자신의 약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아, 설마 그냥 땅바닥이나 구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빙글거리는 진무의 모습에 살심이 끓어올랐다.
개쪽도 이런 개쪽이 없었다.
서 있어야 할 것은 자신이었다. 가르침을 내려야 할 것도 자신이었고, 그를 비웃어야 할 것도 자신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본격적으로 해 보지 그래?"
"놈. 감히...."
"감히, 이 자식, 두고 보자. 니들은 어째 맨날 반응이 뻔하냐? 하여간 실력도 없는 것들이 자존심만 세서는."
진무가 코웃음을 치며 화를 돋우자 모익상의 눈이 점점 더 매서워졌다.
그리고 툭!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모익상의 목검에서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며 피어올랐다.
파가각.
기운을 이겨 내지 못한 목검이 부서지고 있었다.
"저!"
검기.
그것도 살의를 잔뜩 머금은 기의 결정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명충이 다급한 표정을 지었고, 양소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 살수는 금한다 하였거늘!"
양소방이 무서운 기세를 품고 일어나자 제갈무린의 미간이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하지만.
"큭큭, 그래. 그쯤은 되어야 피똥을 싸도 아무 말 못 하지!"
사악한 느낌을 주는 중얼거림.
누가 움직이기도 전에 진무의 몸이 모익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취리릿!
푸른 빛이 선명한 검기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모든 것을 잘라 내는 순도 높은 검기는 피해야 함이 마땅했다. 검날이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강한 힘을 머금었기에 금강석조차 두부처럼 잘라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뛰어들었다.
"진무야!"
명충이 다급히 외치며 뛰어들려는데 진궁이 그의 소매를 붙잡는다.
그 이전에 모익상을 제지하기 위해 몸을 날렸던 양소방이 놀란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서걱!
소름 끼치도록 음산한 소리. 예상도 못 했던 불협화음이다.
'자, 잘려?'
양소방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지의 차이였다.
탄기의 고수가 뿜은 검기를 탄기의 고수가 자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허공을 푸른 빛으로 물들이며 휘어진 모익상의 검기가 잘렸다.
그리고 도마뱀의 꼬리처럼 다시 자라나야 할 검기가.
스걱, 스걱.
마구잡이로 잘려 줄어들고 있었다.
진무의 손에 들린 검집이 휘저어질 때마다 조각나는 검기가 근원을 떠난 불꽃처럼 잘려 허공에 아스라진다.
'허! 설마 저 녀석의 경지를 잘못 보았단 말인가?'
양소방은 너무 놀란 나머지 진무를 바라보며 눈만 끔벅거렸다.
모익상의 경지는 탄기의 경지가 확실하다.
그렇다면 진무가.
'의, 의기의 경지라고?'
기함을 토할 일이다.
약관에 의기의 경지를 깨우친 무당의 도사.
비단 무당뿐 아니라 전 무림을 뒤져 봐도, 지나온 모든 역사를 한 줄 한 줄 정독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와중에.
"이 개자식!"
모익상이 벌게진 눈으로 하지 말아야 할 살수를 꺼내 들었다.
우웅!
가공할 기운이 끌어 올려지는 순간 힘을 이기지 못한 목검이 형체를 잃고 터져 나간다.
그와 동시에.
촤라라락!
수십여 개의 기운으로 나누어진 검기가 부서진 목검 조각에 담겨 사방으로 쏘아졌다.
탄기. 자신의 기운을 담아 쏘아 내는 경지.
문제는 그 방향이 부채꼴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는 기세가 아직 경험이 일천한 무당의 이대제자들과 제갈분가의 무인들을 덮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양소방은 다급해졌다.
거리가 너무 멀다. 자신의 위치는 모익상의 뒤편, 진무를 마주보는 위치.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그 범위가 너무 커서 모든 곳을 막기가 불가능했다.
몇몇은 죽을지도 모른...?
그 순간 무당의 이대제자들의 앞을 뛰어드는 두 개의 그림자.
청상, 그리고 청우.
청상의 검에 머금어진 희미한 푸른 선기가 구름 노닐듯 아름답고 유유자적하게 휘둘러지고, 청우의 칠성권이 강맹하게 내질러진다.
까가가가강!
'쳐 냈어?'
하지만 넋 나간 채 구경하며 기다릴 틈이 없었다. 한쪽은 막혔으니 남은 한쪽은 제갈분가 무인들이 있는 곳.
파아앙!
모든 기운을 끌어 올려 용천혈에 때려 박은 양소방의 신형이 단번에 오 장여의 공간을 뛰어넘었다. 기합성이 장내를 울리기도 전에 그의 모습이 제갈세가 무인들의 앞을 막아섰고.
"하압!"
가슴께로 모였던 그의 양손이 수백 개의 잔영을 만들어 내었다.
파파파파팡!
정무맹의 절대자 중 한 명인 양소방의 쌍장은 단 하나의 조각도 놓치지 않고 제갈세가의 인물들을 보호했고.
"우웩!"
무당의 제자들을 막아섰던 청상과 청우가 거친 기침과 함께 울혈을 토해 내고 무릎을 꿇었다. 모익상의 기운을 가까스로 쳐 낼 수는 있었으나 완전히 견딜 수는 없어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럼 진무는?
양소방이 모익상의 기운이 집중되었던 진무를 향해 재빨리 고개를 꺾었....
'허!'
놀람의 연속일 뿐이다.
검집을 곧게 뻗은 진무. 그리고 검집에 어린 싯푸른 선기.
마치 비단을 올올이 풀어낸 듯이 사방을 잠식한 검기가 모익상의 기운을 모조리 흩어 버리고 사방으로 뿜어진 채 하늘거린다.
"거, 검사라니...."
과한 놀람에 바람 빠진 공처럼 힘없이 중얼거리는 양소방.
의기의 경지다.
의심이 아닌 확신. 강의 바로 밑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검사이니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멀리서 바라보던 제갈무린의 허망한 얼굴, 명충의 아연한 표정, 진궁의 희열.
모습을 드러낸 약관의 무당 신진고수는 모두의 얼굴에 서로 다른 경악과 더불어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어린놈의 도사 새끼!"
정작 당사자인 모익상은 분노와 살심에 눈이 멀어 진무의 경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목검과 함께 터트려 버린 검기에 이어 푸른 기운이 선명하게 머금어진 모익상의 손가락이 날카롭게 세워져 진무를 공격했다.
꽁지에 불이 붙은 개는 제 앞의 천 길 낭떠러지를 보지 못한다.
진무의 손이 휘둘러진 모익상의 손을 깍지 끼듯이 잡았다.
우득!
"끄아악!"
움켜쥔 힘에 있는 대로 꺾인 손에서 찾아든 고통.
"자, 끝내야지?"
진무의 입가에 지어진 싸늘한 미소.
역시 제 주제를 모르고 버릇없이 나대는 놈을 훈계하는 데는 주먹질이 최고다.
뻐억!
짧고 간결하게 뻗어진 주먹에 모익상의 얼굴이 뒤로 튕겨 젖혀지는가 싶더니.
뻑, 뻑뻑뻑!
손이 잡혀 있었던 탓에 그의 얼굴은 마치 고무줄에 묶인 공처럼 되돌아왔고, 그때마다 진무의 주먹이 연거푸 뻗어졌다.
"...."
손을 잡은 채 끌고 가며 때리는 모양새. 진무의 손은 모익상을 절대 놓아 주지 않았다. 밀리듯 물러나는 모익상을 따라 걸으면서, 주먹을 쉬지 않고 내지른 것이다.
콰직, 콰지직.
얼굴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수놓는 핏물.
그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입만 벌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털썩.
진무의 주먹이 멈추자 모익상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바닥으로 처박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손은 진무에게 잡혀 있었다.
"싱겁네."
무덤덤하게 내뱉어진 진무의 목소리가 바늘 소리도 들려올 정도로 사위에 내려앉았던 정적을 깨뜨려 놓았다.
"생각하신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명충을 향해 진궁이 벅찬 얼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궁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진무의 경지.
탄기 정도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은 틀렸다.
검사.
애초에 자신은 진무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일전에는 그래도 사형이라고 봐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궁은 그러한 마음보다는 벅찬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희열을 넘어 심장은 물론 온몸의 맥들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진무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질투가 아니라 그가 무당의 제자라는 사실이, 스스로 '무당의 검'임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 기쁘고 기뻤다.
더욱이 청상과 청우.
비록 내상을 입었으나 탄기에 오른 무인의 기운을 막아 내고 동문의 제자들을 지켰다.
스스로 위험에 뛰어든 것이다.
근래 이보다 무당의 이름을 드높인 경우가 또 어디 있었단 말인가?
툭.
진무가 손을 놓자 모익상이 바닥에 널브러지듯 쓰러진다.
그리곤 천천히 모익상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온 진무가 양소방을 지나 제갈무린이 있는 곳까지 천천히 다가왔다.
"결과를 인정하시겠습니까?"
모익상을 내려놓은 진무는 싸움에 나섰을 때와는 달리 너무도 공손한 모습으로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여 왔다.
그 모습에 제갈무린은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협잡에 능한 그였으나 모두의 앞에서 약속한 바를 물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정무맹 소속 제갈세가의 한 축인 단강구 제갈분가의 주인이었다.
모익상의 패배.
살수를 펼쳐 진무를 노린 것도 모자라 제갈세가의 무인들, 그리고 무당의 이대제자들까지 죽일 뻔했다.
졌다.
모익상이 아닌 제갈분가가 무당에 패배했다. 그것도 처참하게.
"제갈분가는...."
제갈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틀거렸다.
"...귀 파가 주장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오."
제갈무린의 승복.
"와아아아!"
무당제자들과 일해상단의 사람들은 함성을 질렀고, 제갈무린과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힘없이 어깨를 떨군 채 물러갔다.
"사부님."
진궁의 말에 아직 충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명충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뭣들 하는 게냐! 청상과 청우를 서둘러 방 안으로 옮기고 의원을 불러라!"
"예! 사조님!"
명충의 명령에 이대제자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그사이.
"진무야!"
진궁이 함지박처럼 입을 벌리고 기뻐하며 진무에게 다가왔다.
설마?
와락!
역시.
진궁이 거칠게 끌어안자 진무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이놈들은 왜 다 이리 끌어안는 것을 좋아하는지. 도사들이 여색을 금하는 게 다 남색이라서인 거 아냐?
그래도 모두가 골목 전투에서 이긴 아이들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뿌듯했다.
그리고.
"네 녀석."
양소방이 진무를 향해 다가왔다.
아 참, 이 거지새끼가 있었지.
"무풍개 어르신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양소방이 다가오자 진무가 진궁을 떼어 내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도움? 흥, 장기짝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고?"
양소방이 코웃음을 치자 진무가 미간을 티 나지 않게 찌푸렸다.
이 노인네가 왜 시비야?
"어쨌든 따라오너라."
양소방이 뒷짐을 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진무와 진궁, 명충이 그 뒤를 따랐다.
55화
"네놈의 무공. 어디서 배운 것이냐?"
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 다 있단 말인가? 무당의 제자가 무공을 무당에서 배우지 어디서 배워?
과거라면 양소방의 머리끄댕이부터 잡고 시작했겠지만.
"어떤 무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은 무당의 제자인 진무는 공손하게 되물었다.
"네놈이 더 잘 알텐데?"
"무슨 말씀이신지?"
진무가 영문 모를 표정을 했다.
사실이 그랬다. 양소방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무는 무당의 제자가 된 이후로 사파의 무공을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익히려면 당장에라도 사파의 무공을 극성까지 익힐 수 있었으나 몸 안에 자리 잡은 육양신공으로 인해 익혀도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무릇 내공을 기반으로 한 무공은 다른 내공을 익혀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즉, 지금의 진무로서는 육양신공, 즉 선기를 기초로 한 무공만 사용할 수가 있었다.
"놈, 네놈이 쓴 무공은 필시 그들의 무공이다."
그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진무뿐 아니라 명충과 진궁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쯧!"
짜증스럽게 혀를 찬 양소방이 가볍게 손을 떨쳤다.
팡!
곧게 뻗은 일장이 허공을 때리며 강렬한 파열음을 만들었다.
"어?"
그 모습에 진무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양소방을 쳐다보았다.
"그 무공을 어떻게?"
진무가 알은체를 하자 양소방이 매섭게 고함을 질렀다.
"역시, 네놈! 그들과 연이 닿았더냐!"
"...."
하지만 진무는 여전히 양소방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가 화를 내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다만 양소방이 어떻게 무월루에서 만난 노인의 무공을 아는지가 궁금했다.
양소방이 펼쳐 낸 일장.
완벽하다. 무월루에서 만난 노인이 펼쳐 낸 일장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자신이 수도 없이 시도했지만 똑같이 따라 할 수 없는.
"말해라! 네놈이 어찌 그 무공을 아는지!"
양소방이 왜 화를 내는지는 몰랐지만.
"실은...."
진무가 이전에 단강구에 내려왔을 때 무월루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따라 한 거라고?"
"예."
"...."
그럴 리가?
양소방은 진무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진무의 말은 거짓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묻고 있는 것은 '무촌경(無寸勁)'이라는 것이다.
통칭 '그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사용하는 그것은 중원의 무학과는 궤를 달리했다.
양소방 자신도 그것을 흉내 내는 데 꼬박 삼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물론 밥만 먹고 그것만 수련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 한 번 보고 따라 할 만큼 간단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네놈이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양소방이 노려보았지만 진무의 눈빛에는 한 점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기에.
"좋다! 네놈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내 직접 확인하겠다."
양소봉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일더니 그의 손이 빠르게 진무를 향해 뻗어졌다.
명충과 진궁이 반응조차 하지 못할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
촤라락!
곧장 심장을 노리고 날아든 일장에 진무가 미간을 깊이 찡그리며 태청산수로 막으려는데.
'이건!'
눈앞에서 사라진 손바닥이 갑자기 가슴팍 한 치를 두고 나타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마치 순간적으로 허공을 뛰어넘은 것 같았을 정도로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손이 물러나는 진무의 속도를 끈질기게 따라잡고 있었다.
'망할 거지새끼가!'
양소방이 펼친 것은 개방의 은밀한 비공인 쇄심파(碎心把).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과거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쇄심파는 심장을 부수는 살인 기예로, 형체 없는 물과 같았다. 정해진 형태가 없는 일격의 초식. 강한 힘으로 짓누를수록 더욱 집요해지는 일장.
지금의 진무로서는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적어도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사실 정도일까.
즉, 일종의 시험.
전력이 아니니 충분히 막을 가능성이 있었다.
재빨리 태청산수를 거둬들인 진무는 양손으로 공을 잡듯 쇄심파의 기운을 감싸 쥐었다.
'적어도 쪽팔리게 으드득 소린 듣지 말아야지!'
감싼다, 둥글린다.
비틀고, 뿌리친다.
무당 태극권형의 핵심이자 기본인 비틀기(纏絲勁: 전사경)이다.
힘을 빼 쇄심파의 흐름에 기운과 움직임을 동화시키고 그 회전이 한계에 달해 멈칫하는 순간.
진무가 있는 힘껏 역(逆)으로 비튼다.
순행에 역이 걸렸으니 흩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말이 쉽지.
한순간이라도 어긋나면 질러진 일장에 가슴뼈가 작살 난다.
취리릿! 파아앙!
진무의 손을 따라 쇄심파에 실린 기운이 역으로 회전하며 흩어졌다. 하지만 그 손바닥은 막아 내지 못했다.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뻐걱!
"컥!"
손바닥에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진무의 신형이 튕겨 나가며 구석에 처박혔다.
"어르신!"
명충과 진궁이 급히 양소방의 앞을 가로막았다.
"...!"
하지만 양소방은 되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놓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딱 쓰러질 정도의 충격을 받게끔 힘을 주었고, 반드시 그리되었어야만 했다.
원래는 개방 무공 중 가장 은밀하게 전해지는 쇄심파를 보여 주고 흉내 낼 수 있겠느냐 물으려 했었다.
본 적이 없으리라.
진무는 물론 명충조차도 본 적 없을 것이다.
제대로 보여 준 자들은 이미 다 죽었으니까.
그렇기에 만약 자신이 보여 준 쇄심파를 흉내 낼 수 있다면 믿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맞아야 할 쇄심파를 막아 낸 것도 모자라 그 안에 실린 기운을 아예 흩어 버렸다.
"크윽,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거지새끼가! 죽일 생각이냐!
하지만 속마음과 달리 째려보는 게 다였다.
"...."
그 말에도 양소방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의 쇄심파가 흩어진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네놈, 어떻게?"
"아무리 무림의 어른이라 해도 다짜고짜 때리시다니. 너무하시네요."
"아, 아니 그건."
"뒷골목 무뢰배도 아니고, 내 참!"
진무가 짜증스럽게 가슴을 털고 일어났다.
충격이라곤 조금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놀람을 넘어 황당할 정도였지만, 목적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확인해야 했다.
"따, 따라 해 볼 수 있겠느냐?"
"뭘요?"
"방금 내가 펼친 무공."
양소방의 말에 진무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어째서 이 같은 짓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거지새끼가 하여간 의심은 많아서. 사람이 말을 하면 믿을 것이지, 굳이 이런 방법까지 동원해?
진무는 슬슬 기분이 언짢아졌다.
"어르신.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다짜고짜 진무를 공격하시더니, 이번엔 따라 해 보라니요?"
명충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며 얼굴을 굳혔다.
진궁 또한 마찬가지의 표정이었다.
진무의 뛰어남이야 인정하지만, 어찌 사람이 한 번 본 무공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진무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면 무당의 빛이 될 인재를 잃을 뻔했다.
모익상을 이긴 후,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진무는 무당의 미래를 짊어질 유능한 인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죠?"
진무의 물음에 양소방이 당황을 감추고 대답했다.
"네 말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못 하면요?"
"정무맹의 옥사에 갇혀 고문을 받겠지."
이런 잔악무도한 새끼들. 대놓고 고문하겠다는 말을 잘도 한다.
잠시 고민하던 진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쇄심파?
까짓거, 누가 못 할 줄 알고?
이렇게 된 이상.
"좋습니다. 까짓거."
"뭐?"
"응?"
뭐가 좋다고?
진무의 반응에 양소방을 말리려던 명충과 진궁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진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단 말이죠?"
"그래."
"예. 그렇단 말이죠?"
거지새끼....
진무는 이미 쇄심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미 과거에 몇 번이나 보았고, 그에 대한 파훼법도 수차례 고민했다.
진무에게 있어서 쇄심파는 무월루에서 만난 노인의 '무촌경'이라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물론 진무를 무당의 어린 도사로만 생각하는 양소방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휙, 휙휙.
가볍게 손을 움직여 보는 진무의 모습을 주시하던 양소방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어?'
순간순간 손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흐름은.
'쇄심파를? 어, 어떻게? 정말로 한 번 보고 따라....'
양소방이 당황하는 순간 진무가 사악하게 웃으며 걸음을 내딛는다.
"자, 그럼 해 볼까요."
"아, 아니, 자, 잠깐...."
파앙!
이미 확인은 끝났다. 방금 전 진무가 손을 움직인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진무는 한 번 본 무공을 따라 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이미 진무의 몸이 명충과 진궁의 사이를 지나 바닥을 낮게 쓸 듯이 쏘아져 왔다.
"이, 이런!"
놀란 얼굴로 서 있던 양소방의 심장을 향해 진무의 일장이 솟구치듯 뻗어 온다.
'헛!'
쇄심파다.
따라 한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쇄심파였다. 그것도 엄청난 내기가 실린.
쿵!
양소방은 재빨리 바닥을 힘껏 밟으며 물러났다.
휙!
그 순간 쇄심파를 담은 진무의 손바닥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
심장이 아니라 옆구리?
따라 한 것도 모자라 응용까지 한다고?
양소방은 급히 몸을 틀며 일장을 받아쳤다.
휙!
"...!"
헛손질.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사라진 진무의 손바닥이 양소방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왔다.
생각지도 못한 의외성에 양소방이 급히 고개를 뒤로 꺾었다.
치이익!
스치고 지나가는 손바닥에 볼이 찢어질 듯이 당겨졌다.
쓰라린 아픔을 느껴 본 것이 언제였던가?
뻑!
동시에 본능적으로 후려친 주먹이 진무의 어깻죽지를 때렸다.
'망할!'
양소방은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에 진심을 담고 말았다.
비록 전력은 아닐지라도.
텅! 우당탕탕!
진무의 신형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진무야!"
명충이 급히 뛰어가 쓰러진 진무를 부축했다.
"우웩!"
진무가 엎드린 채 울혈을 토했다.
"어르신!"
진궁이 예의를 잊고 양소방을 다그치듯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하지만 양소방은 곤혹스럽기만 한 마음에 진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분명 어깨를 맞았는데?
내가중수(內家重手)의 묘리가 담긴 것도 아닌데 울혈을? 내상을 입었다고?
"우웩!"
마치 보란 듯이 다시 피를 토하는 진무.
양소방의 얼굴은 점점 더 곤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이젠 어딜 맞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실수였다.
크나큰 실수였다.
정무맹을 대표하는 양소방이다. 가장 배분이 높은 어른 중 한 사람인 그가 한참이나 어린 무당의 도사를 시험하다 때린 것도 모자라, 내상을 입히고 만 것이다.
"미,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궁색하게 변명하려던 양소방이 말을 멈췄다.
잠깐, 설마?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몸이 반응했다고? 자신이? 저 어린 도사에게?
양소방의 얼굴에 어렸던 곤혹스러움이 놀람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우, 후우... 어르신, 이제 증명이 되었습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는 진무의 물음에 양소방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네."
"그럼 되었군요.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저의 대한 의심이 사라지셨다니."
"아, 그게...."
되레 담담하고 예의 바른 진무의 모습에 양소방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휘둘린다. 칠십 년 이상을 살아온 그가 약관의 도사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저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내상이 너무... 쿨럭, 심하군요."
"...."
어쩌면 본능적으로 후려치는 사이에 자신의 기운이 흘러 들어간 모양인지도.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는 진무로 인해 양소방은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피로 물든 턱 어림과 도포의 앞섶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리고 그사이.
진궁에게 부축되어 밖으로 나가는 진무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흐, 거지새끼. 니가 날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지.'
이제 막 검사를 이룩한 진무가 실력으로 양소방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실력이 안 되면?
당연히 치사하게 놀아야지.
뭐 하러 당당하게 정면 돌파를 한단 말인가?
양소방의 일격.
전력을 다한 게 아니다.
양소방에게 있어서 진무는 그저 시험 대상일 뿐이고, 어리디어린 도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맞았다.
울혈?
그까짓 거짓 울혈이야 얼마든지 토해 낼 수 있었다.
이걸로 의심을 걷어 내고 양소방에게 빚까지 지웠다.
빚이나 원한은 바로 갚는 진무였으나 이번만큼은.
'천천히 느긋하게 받아 주마.'
정무맹의 큰 어른 중 하나인 양소방이다. 앞으로 쓸모가 많을 것이다.
천천히 이용해 준다.
제대로 뽕 뽑을 때까지.
진무는 아주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든든한 조력자, 아니 한 마리 거지 노예가 생겼다.
56화
진무의 부상으로 인해 무당산으로 돌아가려던 명충은 진무가 회복할 때까지 일해상단에 기거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진무는 무당의 검임과 동시에 지켜야 할 희망이 되었다.
이대제자들은 그가 완쾌될 때까지 거처를 지키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방을 감시했다.
"졸지도, 눈을 떼지도 말아라! 비열한 제갈세가에서 또 어떤 암수를 쓸지 모른다!"
청상이 이대제자들을 지휘했다.
물론 그리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미 이대제자들은 진무의 모습을 눈으로 보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진무는 무당의 누구보다 존경스러운 도사였다.
"사형."
"응?"
청우가 무언가 가득히 얹혀 보자기가 씌워진 소반을 들고 다가왔다.
"이게?"
"사숙께서 즐기시는...."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술과 고기였다.
"통과!"
청상이 마치 수문장이라도 된 것처럼 소리치자 문 앞을 지키던 이대제자 둘이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문을 열었다.
청우가 당당히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반쯤 세운 몸을 침상에 기댄 진무와 걱정스러운 표정의 진궁, 대화를 나누는 명충과 양소방이 있었다.
"무당의 이대제자 청우가 보양식을 가져왔습니다."
"음. 이리 가져오라."
명충의 말에 청우가 뻣뻣하고도 당당한 걸음으로 소반을 가져갔고 진궁이 탁자를 끌어당겼다.
탁.
소반이 놓이고 보자기가 걷혔다.
"으잉?"
드러난 물건에 양소방이 놀란 표정으로 명충을 바라보았다.
"어허헛...."
딴청을 피우는 명충.
"...."
진궁의 부축을 받고 힘겹게 다가와 술과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진무.
"아, 아니, 네 녀석...?"
무당은 육식과 음주를 금하지 않았나?
양소방이 의아하다 못해 황망한 표정을 짓자.
"진무는... 합니다. 장문인께서 육식의 금기를 해하라 명하셔서."
"아."
양소방이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무당 장로가... 한다는데야.
아니,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와구와구, 쩝쩝, 꿀꺽.
부상당한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호쾌하게 먹어 치우는 진무.
어른한테 먹어 보란 소리라도 좀 하지 않고....
어째 뭔가 속은 건 아닐까 생각하는 양소방이었다.
"그보다, 안 가십니까?"
진무가 입 안에 고기를 가득 문 채로 물었다.
"어? 아, 가야지. 그 전에 무당에 좀 들러야 할 것 같아서."
무당에 들른다고?
진무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하지만 양소방의 말에 명충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르신께서 방문하신다면 본산의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한데 무슨 용무라도 있으신 겝니까?"
"용무라."
양소방이 슬쩍 진무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날 보는 거지?
진무는 왠지 그 눈빛에 불안감을 느꼈다.
빚을 받기는 해야겠지만 양소방과 엮이는 것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허헛, 별다른 용무가 있겠는가? 단강구의 일도 끝났으니 맹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처럼 무당에 들러 볼까 싶은 거지."
"아, 그러시군요. 속히 본산에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장문인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하핫. 그래, 그래."
양소방과 명충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이 거지 놈이 무슨 속셈이지?'
양소방을 향하는 진무의 눈초리에는 끝까지 의심이 담겨 있었다.
* * *
무당.
언제나 정돈된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던 그곳이 들썩이고 있었다.
하산했던 명충이 진무를 데리고 해검지를 지났다는 소식에 일대와 이대제자 모두가 담벼락에 참새 떼처럼 바짝 붙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
"진무 사숙입니다!"
함께 오는 장로 명충은 보이지도 않는 듯 모두가 진무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도사답지 않게 대충 묶은 머리카락.
있으니 들어 준다는 느낌으로 어깨에 걸친 태극검.
정돈되지 않은 걸음걸이.
누가 봐도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무당 제자들의 마음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다.
멋있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위엄 있고 당당하다.
더욱이 진무의 뒤에는 이번 일에 진무와 함께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이대제자 청상과 청우가 따르고 있었다.
청상은 여전히 칼날 같은 기도에 흐트러짐 없는 모습.
청우는... 여전히 돼지같이 피둥피둥한 모습.
그렇지만 멋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매불망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진허가 한걸음에 뛰어갔고, 진소를 비롯해 진혜 등의 일대제자가 그 뒤를 이었다.
"사숙!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바로 진무에게 다가간 진허가 십 년 전 헤어진 정인이라도 되는 양 진무를 끌어안는다.
이 자식들 정말 남색일지도....
진무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안겨 든 진허를 밀어 내는데 명충의 호통이 떨어졌다.
"이 녀석들! 어찌 일대들이 이리도 체통 없이 행동하느냐!"
"죄송합니다. 진무가 하도 기특하여."
욕을 먹어도 좋은지 다들 헤실거린다. 똥을 생으로 씹은 듯한 표정의 진혜만 빼고.
"어허! 이 녀석이 그래도! 무림의 큰 어른은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예?"
그제야 진허가 일행을 살피다가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허리 구부정한 노인을 발견했다.
누구?
일대의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분은!"
명충이 소개하려는 것을 노인이 웃으며 막는다. 그러더니 죽립을 벗고.
"양소방일세."
"아, 그러시군요. 무당의 일대제자 진허가... 예?"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고개를 갸웃하는 진허.
"에엑? 양소... 무풍개!"
진허가 너무 놀란 나머지 삿대질을 하며 한 걸음 물러나자 명충이 호되게 질책을 내렸다.
"이놈! 경박스럽게! 예를 갖추지 못할까!"
"허허, 되었네, 되었어."
양소방이 웃자 진허를 비롯한 일대제자들이 급히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무당의 제자들이 무풍개 양소방 어르신을 뵙습니다."
"그래, 그래. 만나 반갑네."
사숙의 한마디에 금세 정돈된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일대와 이대의 모습에서 진한 정기가 느껴지자 양소방은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비록 세가 약해졌으나 무당은 여전했다. 그들은 여전히 강인하고 정갈했으며 기품이 넘쳤다.
과거 사패천이 암계를 써서 무당산을 불태울 때 돕지 못했던 자신을 가만히 탓해 보는 양소방이었다.
"오르시지요."
"예."
일대제자들을 못마땅하게 째려본 명충이 비켜나 길을 안내하자 양소방이 앞서 걸었다.
"사숙."
"응? 왜 그러느냐?"
진무가 말을 걸자 명충이 다른 이들을 볼 때와는 확연하게 바뀐 표정을 지었다.
"충허암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응? 장문인께 인사도 드리지 않고 말이냐?"
"예. 아직 부상이...쿨럭, 쿨럭."
진무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까지 굉장히 괜찮아 보였는데.
하지만 그 효과는 충분했다.
"아, 이런. 내 생각이 짧았구나."
무려 양소방과 겨룬 진무였다. 내상이 나았다 해도 그 충격이 쉬이 가실 리 없었다.
아픈 몸에 너무 무리를 시킨 게 아닌가 걱정된 명충이 서둘러 허락했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알겠다. 내 장문인께는 알아서 말씀드리도록 하마. 어서 가 쉬거라."
명충의 말에 진무가 인사를 하고 청상과 청우의 부축을 받아 물러났다.
"저런, 저런. 좀 더 쉬었다 올라올 것을."
명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진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양소방의 얼굴에도 덩달아 미안한 기색이 어렸다.
"저, 사숙."
"응?"
진허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제자들도 충허암에 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근래에 이만한 일을 한 무당의 도인이 있었던가?
듣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도사라 해도 혈기 들끓는 젊은 나이다. 영웅담을 듣고 싶은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명충이 흐뭇하게 웃었다.
"오후 수련은 끝냈느냐?"
"...."
"각 궁의 정리는?"
"종례 회의는 안 하느냐?"
"저녁 식사 준비는?"
온화한 표정의 명충이 질문을 할 때마다 일대제자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툭툭 얹히는 것 같았다.
"대답이 됐느냐?"
"예."
시무룩한 표정은 일대뿐 아니라 이대에게도 이어졌다.
"썩 돌아가지 못할까!"
명충의 호통.
장로가 되어서 제자들의 나태함을 살피는 일을 한시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무당의 희망이며 빛은 진무뿐이다, 이놈들아.
아, 능력 있는 놈만 인정받는 더러운 세상이여.
터벅거리며 돌아가는 제자들을 바라본 명충이 다시금 양소방에게 길을 안내했다.
"가시지요."
"그러세."
변하지 않는 건 어디든 있는 모양이라 생각한 양소방이 가볍게 발을 옮겼다.
* * *
무당파 자소궁 대전.
평소 같은 시간이라면 하루를 마감하는 짧은 장로 회의가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자소궁은 비워진 채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두고 마주 앉은 명현과 양소방.
명현이 양소방을 응시했다.
한창 진무의 공을 치하하며 떠들썩해야 마땅했으나 양소방이 장문인과의 독대를 요청해 왔다.
양소방이 정무맹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조직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각 파의 장문인들과 정무맹의 수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의 말은 농이라도 함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었기에 명현은 양소방의 요청에 자소궁의 모든 인원을 물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명현의 물음에 양소방이 잠시 뜸을 들인다.
"나는 지금 '궁(宮)'이라는 곳을 쫓고 있소."
조금은 답답하게 시작한 양소방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
천궁이나 마궁도 아니고 그저 '궁'. 이 무림에 그러한 단체가 있었던가?
"아마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오. 우리도 정확한 이름은 알지 못하니."
"아."
"오 년째 뒤쫓고 있으나 아직 그들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낸 게 없어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수가 없구려."
명현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양소방은 현 정무맹에서 은신, 추적, 경공에 있어 따를 자가 없다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오 년을 뒤쫓았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들을 뒤쫓는 과정에서 단강구에 이르게 되었소."
"그렇군요. 허면 어째서 맹주님께서는 이 일을 수면 위로 드러내어 공론화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확실치 않기 때문이오."
"확실치 않다?"
"그렇소. 아직은 그들의 정확한 이름도 알지 못할 뿐더러, 그들의 목적 또한 모호하오."
"모호하다 함은?"
"정사마(正邪魔)의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이오."
정사마에 속하지 않는다.
그 말은 반대로 어느 세력에도 속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이미 몇 차례 그들과 마주쳤으나 그들의 이름도, 목적도, 정체도 밝혀내지 못했지."
명현의 얼굴에 더 큰 놀람이 어렸다.
마주쳤으나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양소방이 그들을 잡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
"강하더군."
"...."
"더욱이 전혀 새로운 무공이었다오. 오랫동안 정형화되어 온 이 중원 무학의 틀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그런?"
"해서 우리는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소. 그들의 움직임에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음."
명현이 짙은 신음을 흘린다.
지금의 무림은 삼파전.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무맹과 달리 일월마교와 사패천의 목적은 명확하다.
긴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중원 무림의 정벌.
이런 와중에 새로운 세력이 끼어들어 힘을 싣게 된다면 균형이 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균형의 깨어짐은 곧 환란(患亂)으로 이어진다.
양소방의 말에 의하면 이미 일월마교에서도 그들을 은밀히 뒤쫓고 있다고 했다.
"맹주께선 혹시나 그들로 인해 지금의 평화가 깨어질 것을 우려하고 계시오."
"...."
"해서 조만간 용봉회를 개최할 참이오."
"혹시 그들이 적일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입니까?"
"맞소. 후기지수들을 기르기 위함이오. 이미 대군사께서 용봉회를 통해 선발된 인원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두와 무공들을 선별하고 있는 중이오. 아마 이에 대한 내용이 정무맹 산하 무림 문파에 전달될 것이오."
"그렇군요. 한데 무당에 이리 직접 걸음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용봉회에 대한 내용을 알려 주기 위함은 아닌 듯한데."
명현의 말에 양소방이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57화
"아, 말이 조금 엇나갔구려. 어쨌든 내 궁을 뒤쫓다가 그 아이를 만나게 되었소."
"진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명현의 물음에 양소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가 왜?"
"단강구에서 그들의 흔적을 발견했지. 화약 밀거래와 주루의 붕괴."
주루의 붕괴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화약 밀거래라면 알고 있었다.
진무가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 이룬 첫 업적이었다.
"진무가 해결한 그 사건은 궁의 행사와 연관성이 있다 추측하고 있었소. 그리고 어쩌다 보니 진무를 의심했소."
"예?"
"아, 의심은 이미 해결되었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무가 제갈세가와의 분쟁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것도 보았지."
양소방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또한 보았소."
"무엇을요?"
"진무의 천재성, 그리고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지혜. 능히 무림의 영웅이 될 자질을 갖춘 아이요."
"아!"
명현 자신도 놀라고 있는 부분이었다.
"내 그 아이를 잠시나마 의심하여 빚을 지었으니. 어떻소? 빚을 갚을 겸, 그 아이에게 길을 열어 줄까 하는데."
"길이요?"
"맹주님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천거를 해 볼 요량이오."
양소방은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지만 명현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무맹주.
검성(劍聖) 철지량.
그가 중원 무림의 최강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검(劍)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그의 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진무가 의기의 경지에 이르러 검사를 구현해 냈음을 들은 뒤였다.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천재.
무당의 역사 가운데 누구도 그 나이에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그런 진무가 만약 검성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절로 침이 넘어갈 만큼 긴장되었다.
하지만.
"음...."
명현이 미간을 찌푸리자 양소방이 온화하게 웃었다.
"무얼 고민하시오? 더없이 좋은 기회 아니오. 만약 그 아이가 맹주님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면 무당은 무림 최고수를 배출해 낼지도 모르지 않소?"
양소방의 말이 그의 마음을 충동질했다.
또 하지만.
"어르신."
"...."
"무당은 오랜 전통과 규율로써 제자를 바른길로 인도할 뿐, 나아갈 길을 결정해 주지 않습니다."
"아! 음...."
명현의 말에 양소방이 짧은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인도는 하지만 결정을 하지 않는다.
선택지인 것이다.
만약 당대 맹주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가 아무도 이룩하지 못한 경지에 이를 것이고, 무당의 이름을 전 중원에 드높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당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제자를 이용하지 않는다.
오롯이 진무의 결정에 맡겨야 할 일인 것이다.
"하지만 본인 의사를 물어보긴 하겠습니다."
"음. 좋소."
양소방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아니 벌써 가십니까?"
"허허, 방랑하길 좋아하는 늙은이가 엉덩이가 무거워 어디에 쓰겠소? 내 온 김에 운공 어른이나 만나 뵙고 바로 내려갈 참이오."
"아, 운공 어르신께서도 반가워하시겠군요."
"하핫, 반갑긴. 참 오래도 살지, 그 노인네. 무공도 잃은 양반이 동굴에서 혼자 몰래 뭘 자시는지. 혹, 장서각 동굴에 만년석균(萬年石菌)이라도 키우시는 게요?"
양소방이 고개를 두어 번 내저으며 웃음기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진무라는 녀석도 그렇고, 그 청상이라는 녀석도 그렇고. 이거 참. 무당의 미래가 밝소, 밝아."
양소방의 말에 명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모두가 무당에 대한 칭찬이 아닌가?
더욱이 장서각을 지키는 운공과 양소방의 오랜 인연을 명현 또한 잘 알고 있음이었다.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그리고, 궁에 대한 것은 따로 문파에는 알리지 말아 주시오. 확실하지 않은 사실이 퍼지게 되면 괜한 혼란이 생길 수 있으니."
"예. 어르신."
명현과 양소방은 근래의 무림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며 천천히 영은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청상아."
"예, 사숙."
"팔 들어."
"예."
"청우야."
"예... 사수욱."
"자세 더 낮춰."
"예에...."
대충 기대앉은 진무의 말에 청상과 청우가 비 오듯이 땀을 흘린다.
단강구에서 돌아온 날 저녁.
청상과 청우는 진무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었다.
수련시켜 주마.
처음이었다. 진무가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켜 주겠다고 한 것은.
수련은 그들이 잠에서 깨자마자 시작되었다.
너무도 기쁜 마음에 들뜬 청상과 청우에게 내려진 첫 번째 명령은 마보였다.
모든 무공의 기본. 자고로 튼튼한 하체에서 강한 힘이 나오는 법.
기초가... 탄탄해야... 그런데 이건 너무 힘들다.
팔과 다리에 큼지막한 돌덩이를 각기 매달고 마보를 취한다.
그게 끝이다.
물론 내공은 사용할 수 없었다.
한 시진째.
팔, 다리, 허리 할 것 없이 모조리 끊어지는 것 같았다.
"사, 사숙. 이게 정말 도움이...? 허리가 부러질 것... 같습니다."
청우가 우는소리를 하자 진무가 실망스럽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우야, 청우야. 이 사숙도 다 거쳐 온 길이란다."
언제?
본 적이 없는데?
물론 진무가 그런 걸 거쳤을 리는 없다. 그저 둘에게 꼭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에 시킨 것뿐.
진무의 기준에서 청상과 청우는 약하디약하다.
위기의 순간이 오면 자신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할 녀석들이 되레 짐 덩어리밖에 되지 않는다.
본인이 느끼지 못하는 이상 도움을 줘도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그 와중에 더 강해지려면?
초식의 정교함은 경험이 쌓여야 하고 내공의 발전은 까마득히 멀었다.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자면 우선 육체를 단련시키는 수밖에.
그리고 육체의 힘을 기르는 데 원초적인 방법보다 좋은 것은 없다.
'녀석들, 내 장담하건대 지금의 고통이 나중에 니들의 목숨을 살려 줄 게다, 암!'
청상과 청우를 바라보던 진무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고통스러워하건 말건.
그나저나.
'아, 어디 업적 쌓을 만한 일 또 없나? 사건이라도 하나 터져 주면 좋을 텐데.'
진무는 이번 일로 제법 재미를 느꼈다.
오룡궁의 실무자이자 무당의 '검'임을 내세운 것이 제법 효과가 있었다. 일, 이대제자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역시 감투가 제일이다.
대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평판과 업적이 대폭 상승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거지새끼에게 빚까지 지워 놓았으니 장차 단단히 쓸모가....
어?
진무의 생각에 발맞추듯 충허암으로 다가오는 양소방.
무슨 호랑이도 아니고 거지새끼 주제에 생각만 해도 나타나는 거지?
'저 양반은 볼일 끝났으면 갈 것이지 뭐 하러 와?'
평소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진무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보게, 진무 도장."
쪼개기는, 뭐 반가운 얼굴이라고.
"허헛, 내려가기 전에 잠시 볼일이 생각났지 뭔가?"
"볼일이요?"
"그래."
히죽 웃으며 가까이 다가와 앉는 양소방을 향해 진무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호오?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인가?"
"예, 뭐...."
제자는 아니지만.
"이건 우리 어렸을 때나 했던 방법인데. 요즘은 잘 안 하지 않나? 허리에 무리도 많이 가고."
뭔 참견인지.
"거 요즘은 쇠로 만든 팔찌를 쓰는 것 같던데."
"가난해서요."
"하긴."
진무의 말에 양소방이 금세 수긍했다.
"도사나 거지나 가난한 건 매한가지지."
어딜 감히.
무욕(無慾)한 거랑 빌어먹는 게 어떻게 같단 말인가?
그리고 개방이 가난하다고?
한 해에 그들이 벌어들이는 정보료만 수만 냥에 달한다.
무림, 상계, 관부에 이르기까지 팔아먹지 않는 곳이 없었다.
더욱이 몰래몰래 사파와 마교에 팔아먹는 정보까지 계산하면 추산조차 되지 않음을 안다.
진무도 오래전 개방에 정보를 의뢰한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돈독 오지게 오른 거지새끼들이 뭐? 가난해?'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나저나 볼일이라는 게 무엇인지요?"
딱히 반가운 얼굴도 아니고, 아직 빚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빨리 가기나 했으면.
"아, 내 정신 좀 보게."
진무의 말에 양소방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는 자신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구만."
"...."
바지춤 속으로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다가 사타구니 쪽에서 꺼낸 녹슨 철전 하나.
으 씨발, 더러운 거지새끼 같으니.
절대로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협전(俠錢)일세."
뭐라고? 협전?
순간 진무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방의 협전.
팔결 이상인 방주와 원로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개방의 징표였다.
협전을 소지한 자는 협의(俠義)에 위배되지 않는 한 개방의 모든 지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그렇기에 칠결의 후개나 육결의 장로들조차 소지하지 못한다.
"자네와 연을 이어 가고 싶은 내 마음일세."
"...."
탐난다.
천금으로도 얻기 힘들다는 개방의 협전.
"자, 받게."
탐은 나지만.
"받으라니까."
"...."
진짜, 사타구니만 아니었어도.
"어허 이 사람 괜찮네. 자네에게 이 정도는 줄 수 있는 사람이라네."
그렇겠지. 다른 이도 아니고 개방주보다 배분이 높은 양소방인데.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더럽잖아!
양소방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기분 탓인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땐.
"청상!"
진퇴양난에 빠진 진무가 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청상을 불렀다.
"예?"
"어르신께서 내린 귀한 물건이다. 공손히 받거라."
"...예."
어디서 꺼낸 건지 알 길 없는 청상이 서둘러 돌덩이를 풀어내고 다가와 양손으로 협전을 받아 들었다.
"어르신의 은혜 감사드립니다. 이 귀한 것을 어찌 감히 제 손으로 받겠습니까."
"...."
청상에게 협전을 건넨 양소방이 진무를 바라보았다.
물건은 타인이 받고 자신은 절을 올린다.
과례(過禮)였다.
이런 식의 예를 차리는 것은 무척이나 오래된 예법이었다.
자신의 건넨 성의를 대함에 있어 진무가 더없이 공손한 방법을 사용했다 생각한 양소방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배려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 사람. 우리 시대의 예를 알다니. 헛헛헛! 내 자네를 제대로 보았음이야."
양소방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너무 탐나는 인재다. 무당이 거부한다고 해도 정무맹으로 끌어들이고 싶을 만큼 탐이 난다.
한시바삐 맹으로 돌아가 맹주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내 자네에게 주고 싶은 물건을 전했으니 이만 가 봄세. 후에 속세에 내려오거든 술이나 한잔 나누세."
"예. 어르신!"
진무가 다시금 절을 올리자 충허암을 떠나는 양소방의 걸음에 신이 났다.
"하핫, 하하핫!"
아예 개방의 최상급 절예인 만리추풍(萬里追風)까지 사용해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
멀리 그의 웃음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진무가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갔냐?"
"예, 가셨습니다."
"휴우."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쉰다.
"사숙, 이건?"
"씻어 와."
"예?"
"최대한 박박, 깨끗하게, 냄새 하나 없이."
"이걸요?"
"응."
청상의 물음에 진무가 밝게 답했다.
약간 떨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협전을 씻으러 가는 청상의 뒷모습을 보며 진무가 환하게 웃었다.
'개방의 협전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귀보를 얻었다.
하지만 아직 빚은 받지 않았다.
양소방은 분명 연을 맺기 위한 자신의 마음이라고 했지 빚을 갚는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58화
양소방이 떠난 이후 무당산에서 보내는 진무의 일상은 한결같았다.
청상과 청우를 수련시키고 심법을 수련해 내공을 쌓는다.
오룡궁의 재건과 관련해서는 명진이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고, 원화관에서 직접 관리도 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막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을까?
진무가 새로운 업적을 쌓을 일이 없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즈음.
"사숙!"
"응? 너는 영은궁의 청진이 아니냐?"
"예, 사숙."
일전에 진혜에게 알아듣게(?) 몸소 체험을 시켜 주었으니 계율 문제로 자신이 찾을 리는 없는데.
"어쩐 일이냐?"
"장문인께서 속히 자소궁으로 드시라 하셨습니다."
"장문인께서?"
"예. 무당 전체에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지금 장로님들 이하 각 궁의 실무 제자들도 모두 모여 있습니다."
청진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래 들어 찾은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예. 자세히는 알지 못하고 이대제자들까지 자소궁 연무장에 모두 모이라 하신 것을 보면 무척이나 중한 일인 듯했습니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진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설마? 업적을 쌓을 임무?
그것도 무당의 제자 전부를 모으라 할 정도라면 더없이 큰?
생각보다 기회가 일찍 찾아왔다.
절로 흐뭇해진 진무가 비지땀을 흘리며 마보를 수련하던 청상과 청우를 불렀다.
"얘들아! 가자!"
업적이니라.
* * *
날 듯이 자소궁으로 달려온 진무는 무언가 평소와 분위기가 다름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오와 열을 맞춰 정자세로 연무장에 대기하고 있는 이대제자들.
엄숙하다.
근래에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뭐지?'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소궁의 긴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끼이익!
진무가 다가서자 이대제자들이 공손하게 인사하고 문을 열었다.
원시천존의 목상 앞으로 놓인 단에 장문인 명현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고, 좌우로 늘어선 기둥 앞으로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뭐가 이리 진지해?'
어째 옷차림마저 다르다.
일상적으로 입는 도포가 아니었다.
대전 안에 모인 이들 모두가 제(祭)를 올릴 때 입는 예복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평소와 너무 분위기가 다르자 왠지 불안해진다.
예복을 입고 왔어야 했나? 청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일대제자 진무는 가까이 오라."
부드러우면서도 엄숙한 명현의 목소리가 대전을 가득히 울린다.
"...예."
입구에 멍하니 서 있던 진무가 그 중심을 걸어 다가갔다.
'스승님?'
이제는 오룡궁주로서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진.
그의 얼굴이 너무도 흐뭇해 보였다.
가까이 가 보거라. 어서.
마치 진무의 걸음을 재촉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무는 게 앉거라."
뭐지? 임무치고는 너무 거창한데?
설마 전쟁이라도 난 건가?
진무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명현이 가리킨 위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힐끗거리며 눈치를 살폈으나 장문인 명현뿐 아니라 장로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의아하기만 한 가운데 명현이 손짓하자 진소, 진허가 각기 다른 물건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다가왔다.
명공의 뒤에 선 진혜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지다시피 하고 있으니 필시 진무에겐 좋은 일일 텐데.
"...."
진무는 자신 앞에 놓인 두 개의 물건을 응시했다.
진소가 놓은 것은 붉은 서찰, 진허가 놓은 것은 작은 옥갑과 곱게 개어진 백색 도포였다.
진무가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건들과 명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무는 듣거라."
"예."
"이는 장로들이 지난 한 달간 회의를 거듭하고, 일대제자들의 의사를 물어 결정한 사안이다."
뭔데 회의까지 할 정도로 거창하지?
"앞에 놓인 것은 네게 전할 두 가지 길이니라."
"...."
"서찰은 내가 쓴 것이다."
아니 근래 아무리 입지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이 양반이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네.
우리가 연인 사이도 아니고 부끄럽게 뭔 서찰씩이나 쓴단 말인가?
"그 서찰의 행선지는 정무맹이다."
정무맹?
갈수록 의아해졌다.
"수신인은 정무맹주이신 검성 철지량 대협이며, 무풍개 어르신의 추천으로 네가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내용이다."
아, 그렇군요.
정말 놀랄 만큼 대단한 일이네요.
검성 철지량.
검에 대한 깨달음만큼은 진무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후기지수에게는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장로들의 뿌듯한 표정과 일대제자들의 부러운 시선만 봐도 그러했지만... 진무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검성?
실력은 비슷하지만 이겨 본 경험도 있는 자다.
뭐 하러 붙어서 이겼던 인간의 가르침을 받는단 말인가?
"그 옆에 놓인 백색 도포는 오직 한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바로 무당지검으로 인정받은 이에게 내려지는 백룡의(白龍衣)니라."
아, 그러시군요.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딱히 마음에 들진 않는다.
백룡의.
역시나 뭐 하러 이 위험한 강호에서 제 신분을 만천하에 노출하는 저따위 옷을 입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눈에 확 띄는 백색으로.
역시나 심드렁하다.
그런데.
"또한, 무당지검으로서 인정된 이에게는 그에 걸맞은 귀보가 내려진다."
귀보?
"바로 옥갑의 태청신단(太淸神丹)이니라."
"태, 태청!"
너무도 놀란 나머지 진무가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때부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동그래진 눈, 떡 벌어진 입.
태! 청! 신! 단!
오직 그 네 글자만 귓가에 맴돈다.
근래에 이만큼 놀라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적어도 살면서 이런 충격적인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일전에 양소방이 주고 간 더러운(?) 개방의 협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당의 신물이 눈앞에 있다.
무당의 전설적인 신물.
무가지보(無價之寶)라 불리는 수많은 물건 중 소림 대환단과 더불어 최상위권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는 도가 연단술의 정수.
영초? 영물의 내단? 그게 뭐?
내가 신단이다!
라고 할 만한 그런 물건이 눈앞에 있었다.
꿀꺽.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헤아릴 길 없는 탐욕이 눈동자에 여실히 드러났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근데 이런 걸 일대제자에게 막 줘도 되는 건가?
이런 인심 후한 도사 놈 같으니.
준다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설마 줬다가 뺏는 건 아니겠지?
진무는 도포 자락에 가려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올라갈 수 있다.
저 태청신단을 오롯이 흡수하기만 한다면 단번에 '강'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천우명 이 새끼, 고맙다.
불로초 이 기특한 녀석, 감사한다.
저승차사, 오해해서 미안하다.
진무의 몸에 빙의시켜 준 걸 욕했던 것은 성급했다.
"물론 둘 중 어느 것을 택하여도 상관없다. 또한, 두 개의 길을 마다하고 너만의 길을 간다 해도 탓하지 않는다."
검성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길과 무당지검으로서의 길.
비교가 되겠냐?
태청신단이 눈앞에 있는데.
무림에 회자되는 태청신단의 영기가 사실이라면 검성의 제자 따위는 개를 줘 버려도 좋았다.
태청신단의 영기를 흡수해 '강'의 경지에 이르고 양의심공을 익힌 뒤, 묵룡혼원공을 극성까지 익힌다면.
정사마를 통틀어 최강의 무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덥석.
진무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옥갑과 백룡의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당당하게 외쳤다.
"제자, 진무! 무당의 검으로서 오롯이 나아가겠습니다!"
진무의 선택에 명현의 얼굴이 밝아진다.
덩달아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의 얼굴 또한 환하게 밝아졌다.
둘 모두를 선택한다 해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았을 일이다.
결정은 진무의 몫이었으니까.
다만, 모두가 가슴 한구석에 그가 검성의 그늘이 아닌 오롯이 무당의 제자로서 그 이름을 무림에 당당히 내걸기를 바라고 있었다.
"고맙다."
명현의 말.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태청신단은 내 거!'
진무는 옥갑을 가슴에 힘껏 품었다. 아무도 뺏어 갈 수 없게.
* * *
치솟았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저런 축하의 말들과 장로들이 돌아가며 의식 비슷한 것을 치르는 동안 외운 주문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자신이 충허암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진무는 곧장 자신의 심법 수련장이 되어 버린 삼공암묘로 들어갔다.
어둡게 가라앉은 공동(空洞)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
진무는 앞에 놓인 옥갑을 희열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옥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떨린다.
사내로서 첫 경험을 했을 때도, 처음 살인을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새색시 고름 풀듯 조심스럽게 내민 손이 옥갑을 잡았다.
반항하지 않았다.
기특한 녀석.
차가운 느낌이 손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온통 저릿하게 만들었다.
딸깍.
맑고 청아한 소리.
적어도 진무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과하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심혈을 기울여 연 뚜껑 안쪽에서 영롱한 빛을 품은 신단이 비단 강보에 싸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인의 나신보다 뽀얗고,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둥근 저 자태란.
더욱이 암묘를 가득 채운 그 향기는 또 어떠한가?
마치 꽃들이 만개한 천상의 화원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이건 뭐지?"
한참이나 그 향기를 음미하는 중에 단약 옆에 놓인 종잇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쪽지.
그 안에는 태청신단을 흡수할 때의 주의 사항과 운공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아, 치밀도 하여라.
무당파의 도사들이 이리도 친절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명필(名筆)이다.
이를 쓴 도사는 필시 당대의 어느 학사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아니, 더 뛰어날 게 틀림없다.
외워야지.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으나 이렇게까지 베푸는 마당에 사람이 예의라는 게 있지.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한 가닥의 영기도 놓칠 수 없다.
진무는 머리에 글자가 각인된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주의 사항을 외고 또 외웠다.
그리고, 꿀꺽.
단약이 혀에 닿는다. 녹는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고체인가, 액체인가?
달콤하게 녹아내린 단약이 순식간에 목구멍을 넘어갔다.
신기하기도 하여라.
어찌 이리도 신묘막측(神妙莫測)하단 말인가? 순식간에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이 뜨끈한 영기는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우웅!
진무는 누군가 남긴 그 주의 사항에 따라 운공을 시작했다.
'일찍이 태극이 있으니....'
* * *
삼공암묘 인근.
진무가 안으로 들어간 뒤, 명진과 더불어 청상과 청우가 그 앞을 긴장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마치 해산을 앞둔 산모에게서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는 아비처럼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허참."
명진도 태청신단을 취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선대 무당의 검이었던 사숙 현공에게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전부였다.
일각이 여삼추라. 조마조마하게 서성이던 셋의 걸음에 점차 속도가 붙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진한 향기가 가득히 느껴지더니 암묘가 우웅 하며 거친 울음을 토해 내었다.
그리고 세상을 온통 짓누르는 기운이 느껴졌다.
감히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기운.
마치 태풍처럼 휩쓸었던 기운이 사라지고 난 뒤, 고요가 찾아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적막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잘하고 있겠지?"
"그, 그렇겠죠?"
명진의 걱정스러운 혼잣말에 청상과 청우가 혼잣말로 대답했다.
그들의 시선은 암묘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못했다.
59화
다음 날.
명진과 청우, 청상은 암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아직인가?"
진무가 태청신단을 취하기 위해 폐관에 들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명현이 찾아왔지만 명진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걱정 말게. 별일이야 있겠는가?"
"그렇기야 하겠지만."
명진은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진무는 그 어떤 누구보다 소중했다.
폐인이 된 이후로 정성을 다해 자신을 보살핀 진무였다.
절벽에 떨어졌던 이후로 뭔가 성격이 조금 변한 것 같기는 했지만, 자신에게만큼은 한결같았다.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라 주었다.
태청신단을 흡수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일이나 혹여 뭔가, 아주 사소한 무언가라도 잘못되면 어찌할까 걱정이 가득했다.
"원래 이리 오래 걸리는 겁니까?"
"글쎄. 나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네. 돌아가신 현공 사숙께서 태청신단을 취하셨을 때는 우리가 너무 어렸지 않은가."
"그렇지요."
"기다려 보세."
"예."
명현이 돌아간 뒤로도 장로들 둘인가 셋이 암묘를 찾았고, 그 이후로는 일대제자들이 줄을 이었다.
마치 영겁처럼 느리게 흐른 시간이 어느덧 사흘이 되었고, 이제 명진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슬쩍 들여다봐야 하나?
무릇 영험한 물건인데 부정이라도 타면 어찌하나?
머릿속을 채운 두 가지 고민이 그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흘째.
쩡!
거친 소음이 암묘를 가득히 채워 울리고.
"어?"
진무가 너무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밖으로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명진과 청상, 청우를 바라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뭐 하세요?"
"아!"
십 년은 족히 늙어 버린 듯한 명진의 눈에 진한 습기가 차오른다.
"진무야!"
명진이 진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늙으나 젊으나 참 안는 걸 좋아하는 족속이었다.
"스승님?"
"됐다, 됐어. 허헛! 된 것이야."
무슨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뭘 이리도 기뻐한단 말인가?
와중에 정작 있어야 할 물음은 없었다.
무당의 신물을 취했으니 응당 '어떠하냐?'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느냐?' '보여 다오.' 같은 반응을 보이며 궁금해해야 하는데.
명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환하게 웃으며 진무를 힘껏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저 아무 일도 없이 밖으로 나와 준 것이 그리도 고마운 것일까?
이해할 순 없었지만 싫지 않았다.
"어? 사숙, 몸이 조금 커지신 것 같은데요?"
"그래?"
"예. 피부도 훨씬 좋아지신 거 같고. 뭔가 탄탄해진 것 같습니다."
"흐음."
옆으로 다가와 손으로 머리끝을 가늠해 보는 청상과 청우가 신기해하며 웃었다.
"그만하고 가자. 나흘이나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플까."
"예. 사조님."
명진의 말에 청상과 청우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다.
아니, 배가 고픈 것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청상은 급히 자소궁에 들러 이 사실을 장문인께 고하고 청우는 암자로 올라가 불을 피우거라."
"예, 사조님."
청상이 뛰어가는 모습에 진무가 명진을 향해 말했다.
"그럼 제가 얼른 가서 멧돼지라도...."
"어허! 영단을 취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예?"
"자고로 아이를 낳은 산모도 이레는 쉬어야 한다 하였다. 어찌 영단을 흡수하고 바로 무리를 한단 말이냐?"
애 낳는 게 더 어려울 텐데?
그리고 해산한 산모가 이레만 쉬어서는 턱도 없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을 쉬고 일 년을 족히 조심해야 한다 하였다.
"몸이 커진 것을 보면 필경 골격이 자라거나 했을 것이 틀림없다. 어찌 몸이 정상이겠느냐?"
명진이 자신의 장삼을 벗어 진무에게 걸쳐 주며 다그쳤다.
"앞으로 달포는 족히 쉬며 흡수한 영기를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찬 바람도 쐬지 말고, 무거운 것을 들어서도 안 된다."
"사부님?"
"어허! 이 스승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게냐?"
그러니까, 몸은 무척 좋아졌는데요?
"자, 서두르거라. 뼈에 찬 바람 들라. 어서 올라가 방에 들어가거라."
아니, 일단 애를 낳은 게 아니라니까요? 거참.
진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오늘은 직접 실한 놈으로 잡아 오마. 너는 그저 먹기만 하여라. 이 스승은 그것이 더 뿌듯하다."
"...예."
뭐라 말을 더 하려 해 보았으나 명진의 표정이 너무 단호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조금 과하다는 것이 문제기는 했지만.
'뭐, 나쁘지 않네.'
진무는 산짐승을 잡으러 휘적휘적 걸어가는 명진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많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명진은 더 이상 폐인이 아니다. 내력이 담겨 있지는 않았으나 그의 발걸음에 제운종의 묘리가 느껴졌다.
낫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무인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명진이 잡아 온 고기가 청우의 손에서 먹음직스럽게 구워졌다.
역시 자주 먹어선지 솜씨가 나날이 발전하는 것이 느껴진다.
숙수로 뛰어도 충분하겠다.
찌이익!
청우가 먹기 좋게 익은 다리 두 개를 뜯어 명진과 진무에게 내밀었다.
"허허, 향이 좋구나. 먹자."
"예. 스승님."
진무가 막 고기를 베어 무는데.
"허헛, 난 또 네가 대제자가 되려 하는 줄 알았지 뭐냐?"
"에?"
명진의 말에 진무가 입으로 가져가던 고기를 멈추고 명진을 멀뚱히 바라봤다.
"저어, 스승님?"
"응? 왜 그러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뭐가?"
"대제자."
"응?"
명진이 진무를 지그시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몰랐느냐?"
"예? 뭘요?"
"무당지검의 칭호를 받은 제자는 대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
"몰랐던 모양이구나. 허허, 뭐 아무려면 어떠냐? 자, 먹자."
명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진무는 이미 석상처럼 굳어 버린 뒤였다.
왜!
왜 그걸 이제 말해!
선택할 때 말했어야지! 길이 세 개라고, 아주 정확하게 말했어야지!
벌써 태청신단도 다 까먹었는데!
여기 배 속에, 세맥에! 막! 어? 호랑이 기운이 막 솟아나고 있다고, 지금!
내 양의심공은? 정사마 최강자가 되는 원대한 꿈은?
개방 협전에 태청신단에... 어쩐지 억세게 운이 좋다고 했더니.
씨발, 씨발....
* * *
진무가 태청신단을 무사히 흡수하고 나왔다는 소식에 장문인, 장로, 일대제자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명진은 방 안으로 찬 바람이라도 들까 봐 고리눈을 뜨고 그들의 출입을 감시했다.
"그런데 어째서 저리 멍해 보이지?"
"그러게 말일세. 현공 사숙께 들었던 바대로라면 막 눈에 총기가 넘치고 신광이 뿜어진다 했는데."
진무를 만나고 나온 장로들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거 흡수가 잘 안 된 거 아니야?"
"그런가?"
"그래, 사흘씩이나 걸린 것도 그렇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에 명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만약 그들의 말처럼 영기가 제대로 흡수되지 않았다면 상처를 가장 크게 받는 것은 진무 본인일 터였다.
'안 되겠어. 이러다가 진무가 더욱 피곤해지겠군.'
제자의 휴식을 위해 구경꾼들을 쫓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모두 이만 돌아가시오. 영단을 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오."
명진이 떠밀듯이 사람들을 몰아냈다.
시끌시끌했던 충허암이 비로소 한산해졌을 때.
"휴우."
명진이 긴 한숨을 내쉬며 진무가 몸을 반쯤 기대고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사조님."
"응?"
"괜찮을까요?"
"음. 방문을 닫아 주거라. 찬 바람 들라."
"예."
실의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진무의 모습을 보며 충허암의 사람들은 또다시 한숨만 내쉬었다.
"하아...."
하늘을 한 번 보고 땅을 향해 한숨짓는다.
"하아."
청상과 청우가 부러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도.
최고의 솜씨를 발휘해 고기를 굽고 산 아래로 내려가 몰래 사 온 술을 보여 줘도.
진무는 세상 다 잃은 듯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태청신단을 취한 이후로 늘 같은 모습이었다.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듯한 표정에 명진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무의 모습에 충허암의 분위기가 마치 명진이 침상에 누워 멍하니 세월을 보내던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미래도 꿈도 없던 그 시절로.
명진은 결심했다.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것이 스승의 도리이리라.
"진무야."
"...예."
명진의 부름에 진무가 힘없이 대답했다.
"너무 앞서가려 하는 것 아니더냐?"
"...?"
"이미 충분하니라."
명진은 자신의 제자를 향해 진심으로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네가 이룩해 낸 경지가 놀라운 것이 아니더냐?"
"예?"
"약관에 의기에 이른 것만도 고금 무림사에 없던 일이다."
뭐라는 건지.
"태청신단의 영기를 얼마만큼이나 흡수했는지 이 스승은 알지 못하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시련의 연속인 게지."
"...."
"하늘은 이겨 낼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하지 않느냐?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다. 당장이야 깨달음이 없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이나 잘 이겨 내리라 믿는다."
"...."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너는 이미 네 할 만큼 준비를 끝냈으니 필시 하늘이 뜻을 내려 줄 게야."
이 도사 놈은 도대체 무슨 말을 이리도 길게 하고 있는 것일까?
진무가 명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녀석."
명진이 제 스스로 뿌듯해하며 웃었다.
그리 생각한 것이다.
의기에 오른 진무. 어쩌면 태청신단을 흡수하자마자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너무도 빠르게 발전해 왔으니 조급해할 만도 했다. 더욱이 '무당지검'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니 그 조바심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의기의 다음 경지인 '강'의 단계.
그것이 보통 일이던가?
지금의 무당에서 누구도 이르지 못한 단계였다.
올라서는 순간 '절대'의 이름으로 추앙받는 지고지순한 경지가 아니던가?
진무의 나이로 봤을 때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다.
"진무야. 강의 경지라는 것은 말이다. 스스로의 깨우침만으로는 힘든 것이다. 천운이 닿아야만 하는 것이야."
"...."
"당금의 정무맹에도 강의 경지를 이룬 이들이 열을 넘지 못한다. 일전에 찾아오신 양소방 어르신도 환갑이 넘어서야 겨우 강의 경지에 오르셨다지 않느냐? 그러니 조바심은...."
충고라는 것이 으레 그렇다.
같은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마치 자신의 생각을 주입해 설득이라도 할 것처럼 반복한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의 충고는 대개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뭐 명진이야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말이겠지만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해 죽을 것 같은 진무는 명진이 주절거리는 것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쑤욱!
순간 진무의 손에서 시퍼런 기운이 솟구친다.
"이런 거요?"
"그래. 그런... 응?"
기운을 목도한 명진은 말을 잃었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억, 아, 하는 소리만 내었다.
수련을 하고 있던 청상과 청우는 아예 턱이 빠질 지경으로 입을 벌렸다.
"아님 이런 거요?"
휙!
진무가 손을 휘젓자 솟구친 기운이 구슬처럼 뭉쳐졌다가 던져진다.
콰아앙!
충허암 인근에 있던 바위가 산산이 폭발했다.
"...!"
명진과 청우, 청상의 눈에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가, 가, 가...."
"예, 강기네요."
진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태청신단의 영기. 진무는 정말 한 방울도 놓치지 않았다.
그 결과 단전이 재구성되고 단번에 반 갑자의 내공을 얻었다.
비록 전설적인 경지라는 탈태환골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강기에 도달하기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내공이 부족했을 뿐 이미 '강'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넘치도록 많았던 진무였다.
태청신단의 영기를 모조리 흡수한 진무에게 강기 따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젠 강기를 뭉쳐 포탄처럼 던져 내는 '강환(罡丸)'까지 가능했다.
"너, 너...."
"하아, 이만 쉴게요. 피곤하네요."
진무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충허암의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그저 '가, 가, 강....'만 합창처럼 연발했다.
도대체 왜!
이미 강의 경지에 올랐으면서 어째서 세상 다 잃은 표정이냐!
이 축복받은 놈아!
멱살이라도 잡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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