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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40-50

40화

장서각을 다녀온 뒤로도 충허암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청상과 청우는 수련에 박차를 가했고 진무는 언제나처럼 삼공암묘에서 '강(罡)'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물론 달라진 것도 있긴 했다.

일대제자들의 실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매일 아침 진무가 자소궁 외전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 * *

'하아, 뭐 하러 이딴 영양가도 없는 회의를 하는 건지.'

실무 회의에 참석한 진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제도 없고, 핵심도 없고.

그저 할 일의 나열일 뿐이다.

이번 달 식단?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회의 석상 안건으로 올라온단 말인가?

어차피 풀뿌리 조금과 벽곡단이 전부인데.

그리고 궁금하면 직접 와서 보고 가면 되지.

오룡궁이 얼마나 재건되었는지를 왜 묻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쓸모없는 탁상공론.

이러니 정파 놈들이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스승의 명만 아니었어도 이따위 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진궁 사형께서 연락을 보내셨네."

진소가 전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진궁이 산에서 내려간 뒤로 나머지 제자 중 가장 선임 제자인 진소가 실무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다.

"진궁 사형께서요?"

"그래. 단강구의 상단 간에 수로 이용권을 두고 마찰이 생긴 모양이야."

"저런."

진허가 미간을 찌푸렸다.

수로 이용권이라면 상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안 중 하나였다.

무려 네 곳의 물길이 모여 각지로 뻗어 나가는 단강구 수로.

그곳에는 상선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관의 순시선이 움직이는 시간대가 그것이었다.

그 외의 시간대가 되면 수로 곳곳에서 수적이 출몰하니 상행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배가 그 시간대에만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인지라 매년 순서를 정하고 그 값을 매긴다.

수로 이용권으로 문제가 생겼다면 상단 간의 분쟁으로 발전할 여지가 다분한 사항이었다.

"해서 진궁 사형이 장문인께 제자들의 파견을 요청하셨네."

"예? 진궁 사형께서 데려가신 이대제자들이 여덟이나 되지 않습니까?"

"허허, 여덟이나가 아니라 여덟뿐일세."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진무가 단강구의 무뢰배들을 소탕한 이후 무당과 다시 연을 맺은 상단이 모두 세 곳이었다.

진궁은 각 상단에 이대제자 두 명을 두고, 나머지 둘과 함께 세 곳을 번갈아 살피는 중이었다.

"상단이 셋 아닌가. 한곳에 이대제자 둘밖에 되지 않는다네."

"음, 그리 생각하니 수가 부족하군요."

"그래. 진궁 사형께서 힘에 부칠 만한 일이지."

"그런데 상단의 호위만으로는 부족합니까? 통상 그런 경우에는 상단 간의 협의로 해결하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었다.

상단 간의 마찰에 무림의 문파가 끼어드는 일은 흔치 않았다.

본산의 무인들이 나서는 경우는 수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겼거나 사람이 죽었을 경우뿐이었다.

"그래. 맞네. 의외의 요청이기는 하지. 한데 그들만으로는 협의가 되지 않는 모양이야."

"협의가 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와 연을 맺은 일해상단과 마찰이 벌어진 곳이 이성상단이라네. 어째서인지 계속 협의를 거부하고 있다 하더군."

진허의 찌푸려진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이성상단.

과거 무당과도 연이 있던 곳으로, 단강구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상단이었다.

그들의 규모라면 약소 상단 중 하나인 일해상단과 마찰이 일어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째서 그들이."

진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무당의 도사인 그들은 상계의 속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진소가 진혜를 돌아보며 짜증을 내었다.

"너는 어찌 근래 아무 말이 없는 게냐?"

"예?"

묵묵히 듣기만 하던 진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멀찍이 앉아 있는 진무를 힐끗거렸다.

"아무래도 단강구의 사정은 네가 제일 밝지 않느냐? 의견을 말해 보아라."

진소의 말에 진혜가 진무의 눈치를 살피다,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슬며시 입을 뗐다.

"그, 이성상단이라면 절대로 협의를 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협의를 해 주지 않는다고?"

"예."

"어찌 그러하냐?"

진혜의 대답에 실무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성상단의 뒤에는 제갈분가가 있습니다."

"제갈분가?"

"예. 그리고 제갈분가는 오랫동안 무당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 왔지요."

진무가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귀찮은 듯이 입을 다물고 있자 진혜가 안도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호북성의 패권입니다. 지난 십 년 계속해서 노력해 왔고요."

"흐흠."

"한데 지난번 사제...의 일로 약소 상단이라고는 해도 세 곳이나 무당과 연을 맺었습니다."

진혜가 진무를 거론하며 다시 한번 눈치를 살폈다.

"계속해 보게."

"...예. 어쨌든 그로 인해 제갈분가에서는 단강구의 상계가 분위기에 휩쓸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인가?"

"굳이가 아니라 '충분히'입니다."

"...."

"제갈분가에서는 상단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우리 무당과는 달리 막대한 후원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대 상단과는 달리 약소 상단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그런 와중에 무당이 다시 상단과 연을 맺고 활동을 재개한다니 반갑지 않겠습니까?"

"하면, 제갈분가가 뒤에서 이성상단을 조종해서 일해상단에 피해를 입히려 한단 말인가?"

"피해요? 분명 망하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에게 보여 주려는 겁니다. 제갈세가에 등을 돌린 상단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으음."

모두가 얼굴을 구겼고 진무가 의외라는 듯이 진혜를 바라보았다.

제법이다.

그저 쭉정이 놈인 줄 알았더니 그럴싸하게 세를 분석하고 읽을 줄 아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이지 않길 잘했다.

좀 더 써먹을 가치가 있는 놈이다.

진무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사패천주로 있던 당시에도 그는 이해관계에 그리 밝지 못했다.

계략을 꾸밀 정도로 똑똑하지도 못했다.

그가 가진 것은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꾸미는 건 먹물 좀 먹었다는 군사나 수하들이 할 일이었다.

'헛! 저놈이 왜 또 나를 보는 거지?'

그 사이 진혜는 진무와 눈이 마주치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혹시 뭔가 실수했나?'

진혜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머리를 보호했다.

혹시나 진무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아닌가 싶어 등줄기로 식은땀이 솟구쳐 흘렀다.

"진혜."

"예?"

"무슨 생각을 하길래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겐가?"

"...죄송합니다."

"말 끊지 말고 계속해 보게."

"그...."

이미 진무의 눈치를 살피며 잔뜩 쫄아 버린 진혜는 말문이 막혔다. 일전에 각인된 공포가 그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사형."

"예? 아, 아니 응?"

"계속해 보시죠."

진무의 말에 진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저, 어디까지 말했죠?"

"허, 이 사람 이상하구만. 어디 몸이 안 좋은 겐가? 식은땀을 다 흘리고."

진소가 일어나자 진혜가 다급하게 그를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망할 진무가 계속해 보라 했으니 말을 멈추었다가는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저들이 일해상단을 망하게 하려는 것 같다, 까지 말했네."

진허의 말에 진혜가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번 일은 상단 간의 문제가 아닌 제갈분가와 무당의 힘 싸움이 될 것입니다."

"음."

진혜의 말에 진소를 비롯한 실무자들이 진한 침음을 흘렸다.

"그렇군. 하면 대책은?"

"표면적으로는 상단 간의 문제이니 제갈세가와 직접적으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하면?"

"일해상단이 수적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상행을 강행하는 수밖에 없지요."

"강행한다?"

"예.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성상단의 방해로 상행을 취소하면 일해상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계에서 무당의 입지는 다시 좁아지겠지요. 하지만 반대라면."

"수적을 물리치고 상단을 보호했으니 상계에서 무당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우호적으로 변하겠군."

"맞습니다."

진무는 진혜가 더욱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비열한 놈이지만 한편으로 끌어들이기에는 충분한 자질을 갖춘 놈이다.

뒤에서 자신의 등을 노릴 수도 있겠지만, 그따위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위험이야 언제나 목전에 놓인 곳이 무림 아니던가?

사패천주일 때도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놈은 천우명뿐이었다.

적재적소에 놓고 쓰기만 하면 되는 일이고, 필요 없을 때는 솥에 넣고 끓여 버리면 된다.

"자네 말이 맞다면 실무자 회의에서 결정할 사안은 아닌 게로군."

진소가 굳은 얼굴로 말했지만, 진혜는 고개를 저었다.

"장문인과 장로님들께서도 아셔야 할 사안이지만, 결코 그분들이 나서서는 안 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저 단강구의 약소 상단입니다. 장로님들이 나선다면 수적들로부터 지킬 수는 있을 것이나, 무당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고작 수적이 무서워 무림의 명숙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무당의 힘이 없다고 말이지요."

"아! 음."

정파의 무인들은 명예를 중시한다.

"힘들더라도 반드시 일대제자급에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최소의 인원으로요."

진혜의 말에 신음은 더욱 깊어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마땅히 산문을 나간 진궁이 나서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대외 협력을 위해 나간 걸음이기에 그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일이다.

연을 맺은 곳이 일해상단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결국, 누군가 내려가야 한단 말이군. 꽤 위험한 일이고 말이야."

"예."

"음, 누굴 보내야만 한단 말인가?"

모두가 고심하고 있던 그때, 진허가 진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는다.

'어? 저 자식이 왜 날 보지?'

진무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설마?

"사형! 뭘 고민하십니까?"

"응?"

진허의 밝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진무를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망할, 불안은 왜 항상 현실이 되는 거지?

"진무를?"

"예. 고민할 거리도 못 됩니다. 이미 오룡궁이 재건되는 중입니다. 그러니 응당 무당의 검이 될 오룡궁의 실무자 진무에게 맡겨야지요."

저게 미쳤나?

그런데 잠시 고민하고 있던 진혜가 음흉하게 웃으며 동조를 하고 나섰다.

"옳은 말입니다. 응당 오룡궁이 나서야지요. 사제는 진허 사형을 이겼을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분히 잘 해낼 것입니다."

이 자식은 또 왜?

진무가 눈을 부라리자 진혜가 식겁하는 표정으로 회피했다.

잘되었다. 잘하면 저 악귀 같은 놈이 수적들과 싸우다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진혜는 그리 생각했다.

자신을 째려보는 진무의 눈빛이 공포스러웠으나 잠시만 참으면 되는 일이다.

무조건 강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 자네가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모처럼 옳은 말을 했네."

진허는 어째서 진혜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잘되었다 생각했다.

진허는 진무가 대제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번 일은 꽤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다른 일대제자에 비해 진무는 입지가 낮았다.

지난 일로 제법 이름값이 생기기는 했으나, 아직은 부족했다.

그러나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분명 대제자로 한 걸음 훌쩍 다가설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새끼들이 쌍으로 미쳤나? 가려면 제 놈들이나 가지 어디서 나를!'

진무가 있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빛으로 위협했지만, 진혜는 시선을 피했고, 진허는 바보스럽게 웃기만 했다.

"알겠네. 그럼 그리 정하는 걸로 하고, 나는 이 사실을 속히 장문인과 장로님들께 고하도록 하지."

진소는 진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 진무가 이리 장성하여 주니 이 사형은 기쁘기 한량없구나."

너 좋으라고 큰 거 아니거든?

"진무는 그리 알고 준비하고, 각 궁의 실무자들은 진무와 함께 갈 실력 있는 이대제자들을 선별하도록 하라."

야! 잠깐만 인마!

내 의견도 들어 봐야 할 것 아니야!

41화

"...."

결국, 내려와 버렸다.

스승이 장하다며 부둥켜안고 잘 다녀오라 격려해 주지만 않았다면.

망할 도동의 기억이 자신의 정신을 지금까지 지배하지 않았다면.

실무 회의의 임시 결정권자인 진소를 두들겨 패서라도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는 진무의 모습에 청상이 다가왔다.

"사숙, 무슨 고민이라도... 허업!"

넌지시 물었다가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진무의 눈빛에 청상은 헛바람을 삼키며 물러났다.

고민?

그래, 고민이지.

진무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행렬을 바라보았다.

청상, 청우.

그리고 각 궁에서 선별해 보낸 이대제자 일, 이, 삼, 사, 오.

모두 다섯.

나름 각 궁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이대제자들이다.

하지만 청우와 비교해도 지극히 모자란 그저 그런 녀석들.

그들이 누군진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진무의 눈에는 그들 모두 그저 세상 구경을 한다는 생각으로 부푼 새끼 오리들이고, 그 앞을 이끄는 자신은 어미 오리가 된 기분이었다.

망할, 어째서 이런 짐 덩어리들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두고 보자 진허, 진혜. 쓸모 있게 써먹어 주겠다는 생각은 취소다. 돌아가면 반드시 모가지를 따 버리겠다.'

모두 그 두 놈 때문이었다.

진무 홀로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하며 걱정하시는 스승을 그 두 놈이 설득해서 명령을 내리게 만들었다.

장문인과 장로들을 설득하던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열성적이던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격려하며 자신을 떠나보내던 진허.

그리고 특히 진혜 놈.

그놈이 무당의 자존심 운운하며 반드시 최소 인원으로 가서 해결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등 뒤에서 칼을 꽂을 줄은 알았으나 이런 식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혼자 가라고?

가서 수적들에게서 상단을 보호하라고?

이런 어린 오리 새끼 같은 이대제자들이랑?

그냥 가서 죽으란 이야기다.

먹물들이 자주 써먹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따위를 해 볼 속셈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제 놈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수적들의 힘을 빌어 자신을 죽여 보려는 것이리라.

그 둘을 생각하자 진무는 눈에서 불길이 토해지는 것만 같았다.

"죽인다. 죽여 버릴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진무의 모습에 걱정스럽게 다가왔던 청상이 사색이 되어 물러났다.

"처, 청우야."

"예?"

"지금 사숙께서 심기가 몹시 불편하신 모양이다. 지금 걸리면 알지? 아이들 단속을 잘 시켜라."

"헛! 아, 알겠습니다."

이미 몇 번 맞아 본 청우는 제법 눈치가 생겼다.

대개 이런 경우 진무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맞는다.

그 고통은 맞아 본 사람만 안다.

특히나 고통이 뼈까지 절절히 사무쳐 있는 청우는 더욱 잘 안다.

이미 숱하게 경험한 청우와 청상은 나머지 다섯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필히 경고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당을 내려온 진무 일행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마치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럽게 일해상단으로 향했다.

이미 무당산에서 그들이 온다는 연락이 전해진 것인지 상단의 총관이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일해상단의 총관 곡우량입니다."

"진무요."

총관이라는 자는 둥근 얼굴에 성격 좋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지금 진무는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뭐 하나 걸리기만 하면 아작을 내 버리고 싶었다.

이런 날은 청우를 때리며 기분을 푸는 게 제일인데.

저 돼지 녀석이 근래 눈치가 빨라졌는지 아까부터 아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진무의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곡우량은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살갑게 짐까지 건네받으며 진무 일행을 안내했다.

"가시지요. 상단주님과 진궁 도장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럽시다. 까짓것."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해결한다.

수적이고 제갈분가고 걸리는 족족 작살 내 놓고 무당산으로 돌아가서.

'진허, 진혜. 이 새끼들.'

진무는 두 눈으로 여전히 시퍼런 불길을 토하며 이를 갈았다.

* * *

"혼자란 말이냐?"

"예."

진무의 대답에 진궁의 미간이 찡그려졌고 일해상단주 강유가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근데 뭐, 이 새끼들아.

"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오. 무당에서 이리도 무관심하시다니. 내 무당을 믿고 또 믿었거늘...."

실망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들은 진궁이 강유를 향해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짜증이 잔뜩 오른 눈으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어찌 혼자란 말이냐! 내 분명 이번 일이 중요하다 전서에 써넣었거늘!"

내가 결정했냐?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구만,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찌 이리 지랄들인지.

마음 같아서는 확 그냥 노려보는 진궁의 눈깔을 파 버리고 싶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시 전서구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인원을 좀 더 충원할 수 있도록."

진궁이 달래자 강유는 더욱 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장, 지금 충원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일 출발한다고 해도 고작 이틀입니다. 수로를 이용해 부지런히 달려가도 물목이 도착하기도 빠듯한 시간이란 말입니다. 언제 무당에 전서를 보내고, 언제 또 무인들이 당도한단 말입니까?"

"그, 그것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진궁은 점점 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이보시오. 도장. 내 근래 진무 도장의 이름이 높은 것은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수적을 만날 것이 뻔한 일인데 어찌 고작 일대제자의 막내를.... 더욱이 이성상단 뒤에 제갈분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도 없소. 무인들을 모집한다고 해도 누가 지원을 하겠소! 이 마당에 말이오!"

말이 길다.

강유가 맘속에 있는 말을 쉬지 않고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은근히 진무를 높여 주면서도 까는 것이 분명했다.

"진무 하나로 안심이 되지 않으신다면 제가 이대제자들을 모두 다른 상단으로 보내고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궁의 흘겨보는 저 눈빛.

그리고.

뭐? 안심이 안 돼?

이것들이 사람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를 하고 있었다.

고작 진궁 따위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사실에 진무는 심히 기분이 나빠졌다.

안 그래도 기분이 더러웠던 차에 아주 기름을 부어 대는 꼴이었다.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른 진무가 진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혼자 가죠."

"...."

진무의 단호한 말에 진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눈에 쌍심지를 돋아 올렸다.

"지금 뭐라 했느냐?"

"혼자, 제가, 이대제자 일곱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또박또박 다시 말하는 진무의 모습에 진궁의 눈가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이놈이? 지금 말이면 단 줄 아느냐!"

"일정에 변동은 없습니다. 상단은 내일 출발할 것이고 호위는 예정대로 제가 합니다."

쾅!

"닥쳐라, 이놈!"

더 참지 못한 진궁이 탁자를 치고 일어나 부리부리한 눈으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이런 얼빠진 놈 같으니! 네놈은 지금 이 사안이 얼마나 큰지 모른단 말이냐! 상단도 상단이지만 이번 일이 실패하면 무당에 미칠...!"

진궁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말을 이어 가다 강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뒷말을 삼켰다.

"분명히 말했습니다. 혼자 갑니다. 이번 호위의 책임자는 접니다. 오룡궁의 실무자인 제가 무당의 '검'으로서 받은 임무입니다. 사형의 간섭으로 문제가 생긴다면 차후 사문에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이, 이놈이!"

진궁이 좀처럼 화가 진정되지 않는지 볼을 푸들거리며 몸을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확 두들겨 패고 싶었으나 외부인이 있는 자리였다.

사형제 간에 말싸움하는 것을 보인 것부터가 이미 실수였다.

주먹다짐까지 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진무가 스스로 무당의 '검'임을 언급했다.

어찌 이다지도 철이 없단 말인가?

제 자존심에 무심코 내뱉은 말이리라. 하지만 그 말은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진궁에게는 그러했다.

무당의 '검'.

그것은 무림 문파의 한 곳으로서 가지는 무당의 자긍심이었다.

무당이 사패천에 습격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로 인해 무당이 아무런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말했다.

무당의 검은 이제 부러졌다고.

그런데.

진무가, 일대제자의 막내가 지금 그 자긍심을 꺼내 들며 공언한 것이다.

실로 대견하다 해야 할 일이었으나 진궁은 오히려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놈이 천년 도량을 지켜 온 모든 무당 도인의 이름을 등에 업은 무게를 모르고 호기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한낱 도동에서 벗어난 지 고작 이 년이 채 못 된 놈이 감히 무당의 자긍심을 더럽히려 하고 있었다.

"상단주님,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소?"

"아, 그... 알겠소."

답답하기만 했던 강유가 뭐라 대꾸하려 했지만 진궁의 몸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압력에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강유가 몇 번이고 쳐다보며 물러났지만 분노한 진궁의 시선은 진무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강유와 상단의 인물들이 모두 나간 뒤.

"네놈."

진궁이 진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

"뭘 말이오?"

"네놈이 한 말의 의미는 실로 무겁다. 네놈, 아니 명진 사숙조차 함부로 책임질 수 없는 말이다."

진궁은 자긍심에 대한 말을 한 것이었으나 진무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 와중에 더욱 기분이 나쁜 것은 자신의 스승인 명진을 거론했다는 사실이었다.

"네놈이 자신했으니 나는 아무것도 돕지 않겠다."

"바라던 바요."

"그래, 좋다. 하나 모든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할 것이다."

"당연한 말."

"네놈은 무당의 검임을 자처했다. 그것은 무당의 자긍심이자 지켜야 할 마땅한 본질이다. 그럼에도 실패하면 네놈과 명진 사숙의 목숨, 그리고 재건되는 오룡궁마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규율이다."

뭐?

규율? 고작 그따위 것 때문에 감히 스승의 목숨을 운운해?

"좋소."

"...."

"만약 내가 이번 일을 문제없이 마무리하고 나면 사형께선 어찌하시겠소?"

"뭐라?"

진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막내 사제의 당돌함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이번 일해상단의 일은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했다.

실패하면 무당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할 것이고 상계는 또다시 무당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협박에 진무는 차라리 도와달라 간청을 했어야 했다.

그럴 용의는 충분히 있었다.

어차피 진무 혼자서는 어려운 임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함께 간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자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단강구의 수적(水賊)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도적이 아니었다.

일전에 진무가 소탕한 단강구의 무뢰배나 청양상단 같은 밀수 패거리와는 급이 달랐다.

그들은 저 간악한 사패천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모두가 고된 수련과 생사의 역경을 거쳐 온 무인들이고, 집단전에 능한 자들이다.

또한, 일신의 무공과 관계없이 물에서는 최강을 자랑할 만큼 뛰어난 수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들을 강호 경험조차 일천한 애송이가 홀로 막겠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자신이 임무를 잘 수행하고 나면 어찌하겠느냐 묻기까지 한다.

"너...."

"무릎 정도는 꿇을 수 있겠지?"

진궁이 분노로 말을 이어 가지 못하는 순간 진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나를 무시한 것에 대해서 머리를 처박고, 내 스승님의 목숨을 운운한 것에 대한 사죄."

"가, 감히."

주체할 수가 없다.

무당의 명운이 걸린 일이 어찌 일개 도사의 목숨이나 자존심과 비교될 수 있단 말인가?

"이노옴!"

결국 진궁의 분노가 터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뻗어 낸 손을 따라 거친 장력이 뿜어졌고 그 방향은 진무를 향해 있었다.

42화

철썩!

짐을 잔뜩 실은 배가 강물을 가르며 단강구를 떠났다.

순풍이다.

바람을 한껏 받은 돛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자 배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흐흐흐."

뱃머리에 앉은 진무는 무당산을 내려올 때와 달리 무척이나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사숙."

"오, 청상이냐."

"여기."

이빨이 몇 개인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는 진무를 향해 청상이 공손하게 술병을 내밀었다.

퐁!

마개를 열자 향긋한 향이 퍼지고.

꿀꺽.

입에 머금자 알싸함이 감돌았다.

"캬아! 술맛 좋다!"

진무는 도포 자락으로 입가를 닦아 내며 웃었다.

"너도 마실래?"

"아, 아닙니다. 사숙. 저는 괜찮습니다."

청상이 부동자세를 취하며 거절했다.

뱃전을 가득 채운 일해상단의 사람들은 그런 진무를 벌레 보듯이 했지만.

청상을 비롯한 무당의 이대제자들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가서 쉬어라. 수적이 나타나려면 단강구 수고(水庫)를 한참이나 벗어나야 할 테니."

"옙!"

목소리는 온화하고 사질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애틋함마저 묻어나는 진무였으나.

청상은 전보다 훨씬 공손했다.

"날씨 좋고! 바람도 선선하고, 핫핫! 순행이구나, 순행이야!"

진무는 지금 시조라도 한 수 멋들어지게 읊으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청상은.

'설마하니 그 진궁 사숙을....'

존경심을 넘어 경외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청상, 그리고 청우와 나머지 이대제자들은 전날 분명히 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 속에서 악마처럼 웃고 있는 진무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했다.

'잘해야 해. 눈 밖에 나면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 * *

전날, 일해상단.

진궁의 일장이 진무를 향해 쾌속하게 뻗어져 나갔다.

그 엄청난 기세에 휘말린 대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비틀렸다.

진궁.

그를 수식하는 말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탄기를 깨달은 일대제자'였다.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은 무당뿐 아니라 중원 무림 전체에 퍼져 유명 인사가 되었고.

진명과 함께 무당을 이끌어 갈 후기지수라 칭해졌다.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고 있는 진명과는 달리.

고지식하지만 올곧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도사였던 그를 누구나 다음 대의 장문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대제자들이 가장 존경하며 닮고 싶어 하는 그였다.

그런 그의 일장이 진무를 노린 것이다.

그런데.

"쯧, 사형제 중 연장자라는 자가 제 분조차 이기지 못하는 꼴이라니."

뭐가 저리 여유롭단 말인가?

공간을 넘어 펼쳐진 진궁의 일장은 무당을 대표하는 장법인 면장(綿掌)이었다.

유연하고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움을 간직한 장법은 무당 무공의 정수를 담았다 알려져 있었다.

한번 펼쳐지면 서른여섯 번의 변화를 일으키며 적을 쇄도한다.

시작은 가벼우나 갈수록 그 위력이 더해져 종래에는 태산마저 무너뜨릴 기세를 품는 내가중수법의 총아였다.

쿠콰콰콰!

진무는 면장의 위세가 그의 면전으로 치고 들어올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 사숙!"

위급한 상황에 청상이 다급하게 외치는데, 그 순간 진무의 양손이 커다란 원을 그렸다.

"태, 태청산수?"

면장에 대응한 방법이 다른 것도 아닌 태청산수임에 지켜보던 이대제자들이 놀람을 토해 내었다.

태청산수라니?

설마 면장을 흩어 버릴 생각이란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

흩어졌다.

분명 연이어 폭발해야 할 면장의 흐름이 끊어진 것도 모자라, 사방을 압박하고 있던 막대한 양의 선기가 진무의 손에서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진무가 진궁의 간격 안으로 쑥 하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꼬리에 불이 붙어 날뛰는 멧돼지 같으니."

비웃음과 함께 곧바로 이어진 손아귀가 진궁의 목을 잡아 갔다.

일직선으로 뻗어지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짧고 간결하다.

하지만.

일대제자 중 최고라 칭해지던 진궁의 실력 또한 녹록하지 않았다.

허리를 뒤로 접는 동작과 함께 앞발이 솟구쳐 올라 다가온 진무의 턱을 노렸다.

빠각!

강렬한 타격음이 들려왔을 때 모두가 진무의 패배를 직감했다.

"제법인데?"

하지만 들려오는 진무의 목소리.

진궁의 발이 솟구친 순간, 진무는 팔꿈치로 그의 발끝을 찍어 내고 물러나 혀로 입술을 쓸고 있었다.

"크윽."

되레 충격을 받은 것은 진무가 아닌 진궁이었다.

사람의 뼈 중 가장 강한 곳 중 하나가 팔꿈치였다.

그리고 그곳에 부딪힌 발끝.

아무리 단련한다 해도 발가락이 팔꿈치를 이길 수는 없었다.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 정도로 진한 고통에 끊어졌던 진궁의 이성이 돌아왔다.

"네 녀석?"

거리를 벌리고 진무를 바라보는 진궁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좀전의 공격으로 거리를 벌린 진무는 승기를 잡았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무로서는 굳이 여기서 진궁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가장 강한 자가 대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평판 좋은 자가 대제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였다.

진허는 오해가 있었고, 진혜는 자신의 목숨을 노렸으니 당연히 가르침이 필요했다.

하지만 진궁과는 싸워도 얻을 것이 없었다.

귀찮기도 하고.

하지만 진궁은 달랐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진무.

치기에 날뛴다고 생각했던 가장 어린 사제가 이 정도의 무위를 가졌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자신의 면장을 흩어 버린 태청산수만으로도 기함을 토할 지경인데 방금의 능수능란한 대처는 실로 놀라웠다.

언제 이 정도로 성장했단 말인가?

탄기의 경지에 이른 자신의 면장을 쉬이 막을 정도라면?

설마 스스로 무당의 검임을 자처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란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진궁 역시 무당의 제자다.

비록 변화를 꿈꾸는 진허와는 달리 무당의 전통과 규율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생각했으나.

누구보다 무당을 아끼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제자가 되려 했던 것이다.

쇠퇴해 가는 무당이 과거의 영광을 찾음과 동시에 올곧게 나아가기 위해, 더 강한 무당을 만들기 위해.

"이봐, 진궁 사형. 그만하지."

"...."

그런데 사형에게 '이봐'라니?

진무의 말투는 고지식한 진궁의 성격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드시 사형제 간의 예의를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에 호기심이 일었다.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사제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진허에게 듣기로는 변칙에 능하다 하지 않았던가?

궁금해졌다.

무당의 일인으로서 가진 분노는 진무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다시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으로 변했다.

"그만? 흥!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안 그러냐?"

"...."

진궁이 약간 신이 난 듯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잡자 진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거 봐라?'

냉정해졌다.

진궁은 탄기의 경지를 이룩한 경험 많은 무인이었다.

진허나 진혜와는 달랐다.

근래 발전을 이룬 덕분에 의기의 경지까지 오른 진무였으나 목숨을 빼앗는 생사투(生死鬪)가 아니라 제압해야 하는 싸움이다.

사형제 간의 대련에서 상대를 해할 정도의 기운을 사용하는 것은 무당이 금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결국, 최소의 기운을 이용한 초식 싸움이다.

면장을 날렸을 때 박살을 내 놓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제길, 그나저나 이거 뭐야? 그저 고리타분한 도사 놈인 줄 알았더니.'

불같이 일장을 날려 올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냉정해지고 난 다음 진궁의 몸에 갈무리된 선기가 너무도 침착하다.

또한, 진궁의 눈빛.

싸움을 즐기는 자의 그것이었다.

대부분 그런 자들은 경험이 많다. 또한, 경험으로써 발전하는 족속이 대부분이었다.

'쳇, 머리 아파. 내가 언제부터 앞뒤 생각하고 행동했다고.... 결국 밟아 줄 수밖에 없다 이거지?'

진궁과 마주 선 진무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세를 취했다.

처음이었다.

진무의 몸이 된 이후 처음으로 기수식을 취한 것이다.

"좋구나! 탄탄하다. 기본공인 칠성권(七星拳)의 자세가 그리도 완벽할 수 있다니!"

진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청우가 익히고 있는 무당의 기본 권공인 칠성권이었으나 진무가 취한 그것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허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자세였다.

"언제까지 감탄만 하고 자빠져 있을 거야? 할 거면 빨리해."

"하하! 내 너무도 놀라 너를 기다리게 하였구나."

진궁이 주먹을 움켜쥐고 진무의 반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취한 무극현공권(無極玄功拳)의 자세에 진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검 들지? 그 편이 조금이라도 유리할 텐데?"

"녀석. 좋은 자신감이다. 하나 적수공권인 사형제에게 검을 쓰는 것은 규율로 금하는 일. 그리고 이 사형의 주먹이 그리 녹록지는 않을 것이다."

멍청한 놈. 또 규율 타령이냐?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지. 그리 고지식해서야.

하지만 진궁이 자세를 취하자 몸에서 뻗어 나는 기세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꾸밈없이 정직하다.

무릇 기운은 가진 사람의 성격을 대변하는 법이었다.

진궁의 기운은 올곧다.

이리저리 간을 보지 않고 정면에서 곧장 뻗어져 진무의 전신을 압박하려 했다.

'이 자식은... 진짜 도사, 아니 무인이로군.'

진무는 진궁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스승이었던 명진.

자소궁을 등지고 혁련무강의 앞을 막아섰던 그의 잔상이 겹쳐졌다.

아무리 도를 수련한다 하여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본시 악하여 유혹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명진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는 구걸하지 않았고, 목숨을 내걸고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기에 기특했다.

그렇기에 자소궁을 무너뜨릴 수 있었음에도 혁련무강은 명진을 살려 주고 물러났었다.

진궁은 그런 명진을 닮아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의 길을 향해 흐트러지지 않고 나아가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다.

이 무림에 몇 되지 않는.

하지만.

봐줄 수는 없다.

그냥 조금, 아주 조금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찌이-익.

발끝이 밀리며, 둘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뻗어진 둘의 손등이 닿는 순간 둘의 눈동자에서 신광(神光)이 쏟아졌다.

파파팍!

지켜보는 이대제자들은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근래 현기를 깨달은 청상만이 어렴풋이 그들의 움직임이 남긴 잔상을 뒤쫓고 있었다.

"허!"

청상의 놀람에 이대제자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둘의 대결보다 청상에게 듣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청상은 그저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호? 제법인데?'

놀라기는 직접 진궁을 상대하고 있는 진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궁은 초식의 이해도와 깊이에서 진무를 따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변칙적인 공격을 해도 수없이 공격을 허용하면서도 자신이 아는 바를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또한, 지극히 자연스럽다.

공격의 흐름이 끊임없이 연결되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게 꼭 좋은 건 아니지.'

진궁의 움직임에 감탄하던 진무가 갑자기 멈췄다.

'엇!'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던 공수에 순간적으로 엇박이 끼어들자 진궁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의 멈춤이 공격의 맥을 끊고 있었다.

'이, 이런!'

뻗은 주먹과 발의 끝자락에서 생겨난 찰나의 멈춤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공격의 흐름이 흐트러졌다.

"크크크. 박자 뺏기다, 이 자식아."

순간적으로 놓쳐 버린 진무의 신형이 유령처럼 휘어져 진궁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

놀람과 함께 진궁의 늑골 아래에 닿은 진무의 손.

뻐걱!

숨이 멎는다.

딱 그만큼의 발경.

뻗어 낸 기운의 충격으로 몸이 떠오르고, 진무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빡! 빠바바바박!

무차별적으로 날아오는 주먹과 발이 진궁의 전신을 두들겼다.

"끄아아악!"

* * *

"으음...."

억눌린 신음.

"사숙!"

함께 산에서 내려왔던 우진궁의 이대제자 청강이 급히 진궁의 고개를 받쳐 안았다.

"물입니다. 드십시오."

"으음."

청강의 도움으로 겨우 몸을 일으킨 진궁이 힘겹게 물을 삼켰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신을 차린 진궁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무는?"

"출발하였습니다."

"허, 내가 하루를 누웠더냐?"

"예."

"거참."

진궁은 진무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해 하루 동안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찰지게 팬 것인지 온몸이 욱신거려 왔다.

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에 빙긋이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그 녀석이 정말로 홀로 해낼지도 모르겠구나."

"...."

청강은 그토록 처맞은 진궁의 미소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형에게 말버릇이... 음, 그것만은 잔소리를 해서라도 고쳐야 함이야."

43화

나루를 떠난 배는 얼마 가지 않아 단강구의 수고를 벗어나 북쪽 수로로 방향을 잡았다.

일해상단이 향하는 곳은 하남성(河南城) 정주.

그들이 배에 잔뜩 실은 물목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했으나, 대부분이 미곡(米穀: 쌀)이었다. 정주 인근의 곡물 수확량이 적어 기근이 들었다는 말을 들은 일해상단이 천금을 털어 미곡을 매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각지에서 미곡을 운반하고 있으니 시일에 맞추지 못하면 순식간에 가격이 떨어져 헐값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 * *

"가즈아!"

뱃머리에서 들려오는 호기로운 외침 소리.

진무다.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장군처럼 뱃머리에 당당히 서 있었다.

좋다.

나쁘지 않은 자세다.

그런데.

"내 격식 있는 도인이라 믿었거늘."

상단주 강유가 화가 나는 것은 진궁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같이 가 주겠다던 그의 모습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단강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 악명 높은 천수채.

특히나 채주 두낙통은 제갈세가에서도 몇 번이나 토벌에 실패한 적이 있는 수적 두목이었다.

관에서 내건 현상금만도 무려 오백 냥.

그런데 그런 사파의 고수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판에 경험도 일천한 데다 새파랗게 어린 일대제자 하나라니.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격군들은 노를 저어라! 바람처럼 달려라! 내가 해신이다! 으하핫!"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잔뜩 격양되어 외치는 진무의 모습에 힘이 쭉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노는 개뿔, 돛배다.

더구나 군선도 아니고 상선에 노 젓는 격군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상행이 장난도 아니고, 어린애들 소꿉놀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강유로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물이라도 치고 통곡할 일이었다.

무당과 연을 맺음과 동시에 문제가 터졌다.

분명 무당에 붙은 자신들을 고깝게 여긴 제갈분가에서 이성상단을 움직인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관리를 통해 어렵게 구한 수로 이용권이었다.

관의 순시선을 따라 안전하게 이동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이성상단이 강짜를 부린 통에 시일은 지체되었고 수로 이용권에 관한 문제임에도 관에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필시 이성상단에서 뇌물을 먹인 것이 틀림없었다.

'망할. 나의 실수다, 나의 실수야.'

뱃머리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강유의 입에서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뱃머리에서 이대제자들을 통솔하고 있는 진무의 모습은 흡사.

'골목대장.'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청상아."

"예. 사숙."

진무가 뱃머리에 누운 채로 부르자 청상이 급히 달려가 공손하게 답했다.

"어디쯤이냐?"

"서협(西峽) 초입입니다."

"서협이라."

단강구의 수고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곧.

'흐흐흐. 이제 곧 수적 놈들의 영업이 시작된다.'

단강구를 주름잡는 수적의 이름은 흘러가듯 들어 알고 있었다.

배 위의 선원들이 수군대는 말에도 그들의 이름이 수차례 거론된 바 있었다.

천수채(天水寨).

일명 하늘의 물.

굳이 뜻을 알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지극히 단순한 이름임에도 얼마나 운치 있고 뛰어난 작명인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그리운 사파의 이름이다. 수채 두목이 두낙통이라는데 그딴 건 알 리가 없고.

어쨌든 하늘의 물길을 노니는 우수한 사파의 정예들이지만, 지금은 그냥 적이다.

과거의 인연?

의리?

굳이 지킬 필요가 있나.

지금 그는 사패천의 주인이 아닌 진무다.

비열한 사파의 공격에 맞서 무당의 이름을 만방에 떨칠 일대제자.

덤으로 진궁은 자신과 스승에게 무릎을 꿇고 빌게 될 것이며.

'흐흐, 단강구 뒷골목의 무뢰배가 아니라 사파에 당당히 이름 석 자 올린 놈을 잡아 족치면.'

대제자 경합에 필요한 업적!

문파 내의 인지도는 소폭, 아니 대폭 상승할 것이 분명하다.

어서 오너라.

사파의 잡졸들이여.

나의 업적과 평판을 위해 맛있게 먹어 주겠다.

"크하하핫!"

진무가 허리에 팔을 대고 고개를 젖히며 광소를 터트렸다.

"사형."

진무의 모습에 청우가 낮은 목소리로 청상에게 소곤거렸다.

"응?"

"사숙께서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글쎄? 원체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니."

"아무리 그래도 다들 이리도 걱정하고 있는데 저런 모습은 좀."

청우가 주위의 눈치를 보자 청상이 빙긋이 웃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청우, 사숙께서 어디 보통 분이더냐? 분명 뭔가 생각이 있으실 게다."

"예."

진무와 달리 청상과 청우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듣기로 사파의 수적들의 악랄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라 했다.

더군다나 명호까지 버젓이 존재하는 요절도(腰絶刀) 두낙통.

마주친 상대의 허리를 끊어 버리기에 그리 불린다고 들었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름이던가?

하지만.

꾸욱.

청상은 검의 손잡이를 힘 있게 움켜쥐었다.

'사숙의 도움으로 깨달은 경지.'

첫 전투이고, 첫 실전이자, 처음으로 검기를 사용해 보는 것이었다.

또한.

'수적과 화적. 백해무익한 쓰레기들.'

청상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어린 시절 화적에게 가족을 잃었다.

그 원한이 사무치고 사무쳐 얼마나 가슴이 아렸던가?

무당의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무공을 익혀 온 이유.

이것은 복수다.

비명횡사한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구천에 떠돌지 않도록.

검기는 그들을 위한 춤사위며, 적들의 비명은 그들을 위로하는 장송곡이 될 것이다.

청상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살기를 무럭무럭 피워 올리는 사이.

일해상단의 배가 절벽을 만나 휘어지는 강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던 진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청상을 불렀다.

"청상!"

"예! 사숙!"

깜짝이야.

청상의 우렁찬 대답에 진무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이 왜 이렇게 살기등등하지?

진무가 바라보는 청상의 모습.

눈이 살짝 돌아갔다.

흰자위가 네 곳에 보이는 것을 사백안(四白眼)이라 하던가?

사백안은 살인자의 눈이라던데.

하여간 당장이라도 뭔가를 잡아 죽일 듯한 살기로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족이.

근데 왜 수적한테 화풀이하려는 거지? 뺨은 화적한테 맞고 말이야.

뭐, 상관은 없다.

열심히 싸워 주겠다는데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주위를 경계해라!"

"예? 적입니까?"

"아니, 적들이 나타나기 딱 좋은 지형 같아서."

"알겠습니다!"

더 이상의 반문은 없다.

청상은 언제나 그랬든 진무의 말이라면 전적으로 신뢰했다.

특히나 근래 현기를 깨닫게 해 준 이후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서 거의 맹신에 가까운 충성도를 보였다.

진무는 이내 청상에게서 관심을 끊고 시선을 다시금 절벽으로 돌렸다.

본격적으로 서협이 시작되는 곳.

딱 봐도 저기다.

절벽으로 나아갈 길이 가려졌으니 배를 숨기기에 적당한 위치였다.

원래 수적패라는 녀석들의 등장은 으레 그렇다. 무료한 일상에 깜짝 놀랄 상황을 선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양.

그리곤 외치겠지.

"멈추어라!"

역시.

배가 강줄기를 따라 휘어 절벽의 반대편으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듣는 걸걸한 사파인의 목소리에 진무는 흐뭇함을 금치 못했다.

왔구나, 업적들이여.

"감히 나 천수채주 두낙통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을 지날 생각을 하다니."

장비 수염에 상체를 거의 드러내다시피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상단의 사람들이 몸서리치듯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두, 두낙통."

특히나 강유의 표정은 절망에 가까웠다.

두낙통이 직접 오지 않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아아, 그 아래에 있는 수적들이라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을 것인데.

모습을 드러낸 천수채의 배는 모두 셋으로, 본선이 중앙을 막고 좌우로 소선이 이쪽에서 선회를 할 수 없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더욱이 본선을 제외하더라도 양쪽의 소선에 저마다 무구를 든 자들이 언뜻 봐도 십수 명은 넘어 보였다.

파각!

양측 소선에서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걸쇠를 던져 걸었다.

끼이익.

좌우의 수적들이 힘주어 당기자 소선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져 왔다.

그 와중에 뱃머리에 선 진무는 여전히 골목대장 같은 모습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고, 그 아래 이대제자들은 잔뜩 긴장하여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출발할 때의 신난 모습은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역시 무당 따위는 믿을 수 없다. 상단은 강유 자신이 지킬 수밖에 없었다.

강유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준비한 작은 함을 꺼냈다.

오가는 길목을 지키는 수적과 화적들에게는 관례가 있었다.

일명 통행세.

말만 잘하면 어느 정도의 돈을 상납하고 수로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강구 일해상단의 강유가 강상의 영웅을 뵙소이다."

"...."

"상행이 급하여 부득불 허락받지 못하고 배를 움직였소."

강유가 앞으로 나서며 함을 열어 내밀자 두낙통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핫핫. 관례를 아는 상인이로군. 일단 배를 멈추고 기다리게. 내 건너가서...."

두낙통이 햇빛을 받아 멀리서도 번쩍이는 은자를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친다.

그 순간.

"관례는 무슨. 지랄 염병을 하네."

"...!"

갑자기 터져 나온 격조 높은(?) 비아냥.

"...."

순식간에 주위에 정적이 흐르고.

상단의 사람들은 기겁한 표정으로 진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수적들은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여 귀를 후비고 있었다.

"지, 진무 도장?"

강유는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두낙통을 노려보는 진무를 바라보았다.

이런 미친 도사 새끼가!

이런 위험한 순간에 대놓고 도발을 하다니.

"자, 잠깐만요. 진무 도장."

다급하게 소매를 잡는 강유의 손길을 뿌리친 진무가 턱을 높이 들며 두낙통을 깔아 보았다.

통행세나 내고 지나가자고?

지나갈 수야 있겠지.

그럼 수적을 처단하는 업적은? 평판은?

절대로 그럴 순 없지.

무조건 싸우고 때려잡아야 했다.

"야! 업적!"

"...야?"

업적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두낙통은 진무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무당 '검'의 이름으로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크, 달빛 아래에서 외쳤다면 거의 시조(時調) 수준이었을 텐데.

나름 멋있었다고 생각한 진무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만족스러워하는 사이.

'아, 미친. 망했다.'

강유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쟤 뭐래냐?"

두낙통은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인가 봅니다."

"그러게요. 통행세고 나발이고 그냥 죄다 허리를 잘라 버리시죠."

수적들이 비웃음을 터트리며 무기를 움켜쥐는 사이.

"청상 좌측, 청우는 우측. 전면은 내가 맡는다!"

진무의 외침과 동시에 청상과 청우가 고민도 없이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져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좌우에서 소선이 이미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음을 확인한 진무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떠오른다.

"모조리 조져!"

팡!

청상과 청우가 좌우로 다가서는 소선을 향해 뛰었다.

뒤이어 이대제자 일이삼사오가 반으로 나누어져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난입을 막기에는 소선의 위치가 너무 가까웠다.

"뭐 저런?"

두낙통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그것도 도사가.

이런 개 같은 경우는 수적 인생 삼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겨우 도사 몇 놈으로 십수 명이나 되는 수적들을 공격... 어?

"하압!"

더구나 좌측을 공격한 청상의 무위가 핏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정직함이나 화려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실전적인 검술.

"크악!"

"으악! 내 팔!"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터져 나오는 수하들의 비명에 두낙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 손속이 도사답지 않게 저리도 잔인하단 말인가?

"크하학! 죽어라, 사악한 수적 놈들아!"

더욱이 피를 보며 좋다고 날뛰는 저 모습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수적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수하들의 팔다리를 잘라 내는 모습이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런 망할 도사 놈이!"

좌측의 수적들이 상선에 올라타기도 전에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사파고 누가 정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콰아앙!

청상을 보며 이를 갈아 대는 사이에 일어난 거센 충격음에 두낙통의 고개가 이번엔 우측으로 홱 돌아갔다.

보기에도 숨이 막힐 듯이 뚱뚱한 체구를 가진 도사.

"하압!"

거칠게 뻗어진 주먹과 발이 수적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한다.

아니 팬다.

마치 어떤 한(恨)을 풀어내듯이 무자비하게.

"이런 개자식들이!"

당장이라도 달려가 요절을 내고 싶었으나 본선과의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뭣들 하느냐! 노를 저어라! 서둘러 본선을 놈들의 배에...."

두낙통이 답답한 마음에 수하들에게 소리를 지르는데.

펄럭!

뱃머리에서 깃발처럼 휘날리는 도포 자락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어, 어떻게?'

44화

무당의 검이 어쩌고 하던 도사가 분명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분명 상선과 본선의 거리는 거의 오 장여나 떨어져 있었는데?

한 번에 뛰어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설마? 수상비(水上飛)?

그럴 리가. 전설적인 경공의 하나로 불리는 수상비를 약관의 애송이 도사가 펼쳐 낼 리는 없었다.

탄기의 경지에 이른 두낙통조차 그 정도 거리는 쉽지 않았다.

스르릉.

두낙통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동안 진무는 가로로 든 검을 천천히 뽑았다.

두낙통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검날을 보며.

"이런 개 후레자식이!"

뭐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도사 놈이 싸가지 없이 자신의 본선에 올라탔다. 허락도 없이.

두낙통은 분기탱천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죽여!"

그의 외침과 함께 수적들이 저마다 무기를 빼 들고 뱃머리를 향해 뛰었다.

선상을 가득 채우고 빼곡하게 달려오는 수적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무의 시선이 두낙통을 향했다.

좌우의 소선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현기의 청상이나 칠성권의 청우나 그리 얄팍한 실력이 아니니 수적들을 상대로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남은 건 진무가 맡은 본선.

'굳이 모두와 싸울 필요는 없지.'

두목인 두낙통만 잡으면 될 일이었다.

싸움은 그걸로 끝이다.

"하압!"

기합과 함께 높이 솟구친 발.

진무의 입가에 지어지는 싸늘한 미소.

그리고.

쿠웅.

세차게 찍어 내린 천 근의 짓누름에 거친 진동음과 함께, 수적들의 본선이 깊이 짓눌린다.

앞이 눌리자 지렛대처럼 선미가 바닥을 드러내며 솟구쳤다.

"으헉!"

평행을 이루던 배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리자 진무를 향해 다가서던 수적들이 기겁하며 중심을 잡으려 애를 썼다.

그리고 발이 떨어지는 순간 제자리를 찾아 가며 배가 세차게 흔들렸고 수적들이 균형을 잃는다.

파앙!

진무는 그 힘을 이용해 솟구쳐 올랐다.

"두낙-토옹!"

거대한 외침과 함께 해를 가리며 떨어져 내리는 진무가 두낙통을 일검에 쪼개 버릴 듯이 수직으로 그었다.

까아앙!

하지만 천수채에 두낙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러나는 두낙통의 앞으로 거대한 월도가 횡으로 휘둘러지자 쇳소리가 선상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월도를 휘돌리며 진무의 앞을 가로막은 자는 청우에 버금갈 정도로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살 대신 근육이라는 것?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본선에 올라탄 것도 모자라 채주님을 노려?"

"...."

월도를 든 사내의 뒤로 나타난 것은 모두 넷.

모두가 구릿빛 피부에 알찬 근육을 가지고 흉흉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진무는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딱히 긴장하거나 경계심을 머금은 표정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짜증?

"니들은 또 뭐냐?"

"흥, 들어 보았겠지. 우리 천수채의 정예 천수오걸이다."

못 들어 봤다.

하물며 너무도 성의 없는 명호 아닌가.

천수채의 천수오걸이라니.

딱 봐도 힘이 절로 빠지는 것이 피라미가 확실하다.

"멍청한 놈, 가까운 좌우 소선을 먼저 공격한 시도는 좋았으나 네놈은 너무나 무모했다."

하지만 두낙통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천수오걸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표정이었다.

"놈,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보았구나. 좌선과 우선에는...."

"끄아악!"

두낙통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좌측 소선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당연히 청상의 비명이 아니었다.

"오, 오극상?"

부릅뜬 두낙통의 눈에 보인 것은 양팔이 잘려 피를 흘리는 수적과 도포를 피로 적신 살기 어린 청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청상의 손에 들린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

"거, 검기라고?"

두낙통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희미하긴 했으나 분명 검기가 확실했다. 고작 약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좌측은 끝난 모양이네."

진무가 검을 어깨에 걸치고 비웃었다.

"자, 그럼 우측은 어떨까?"

"...!"

마치 친절하게 안내하듯 말하는 진무를 따라 두낙통과 천수오걸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빠박! 빡!

처맞고 있다.

우측 소선의 우두머리 백탄이 도포 아래 비대한 살을 출렁거리며 마구잡이로 휘둘러 대는 주먹에 몸을 맡긴 채 진한 타격음을 흘리고 있었다.

"대충 우측도 끝날 것 같고."

"...."

저렇게 쉽게?

그들은 수많은 전투를 치러 오며 생사의 경계를 넘어온 천수채의 정예였다.

그런데.

"자, 그럼 남은 건 본선 하나로군. 사숙이 되어 사질들에게 뒤처지면 체면이 안 서겠지?"

진무의 몸에서 푸른 선기가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사질이라고?"

좌측의 놈이 검기를 뽑아낼 정도라면 일대제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약관의 무당 장로.

말도 안 된다.

무슨 전설의 반로환동의 경지도 아니고.

"젠장!"

저 어린놈이 장로일 리가 없다.

'사질' 어쩌고 한 것은 필시 자신이 '사제'라고 하는 것을 잘못 들은 것이다.

아랫것보다 강하다고 해 봐야 겨우 희미한 검기나 뽑아내겠지.

뭐, 좀 더 강하다고 해도 상관없고.

놈은 혼자였다.

어찌 넘어온 것인지 보지는 못했지만, 아직 거리가 멀어 지원군은 올 수 없다.

즉, 서둘러 놈을 죽이고 공격해 일해상단의 배를 수장해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뭣들 하는 게냐! 놈을 죽여라!"

두낙통의 외침에 천수오걸이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넓게 펼쳐 섰다.

"누가? 니들이? 나를?"

두낙통의 외침에 진무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쑤우욱! 파가각!

진무의 손에 잡힌 검에서 푸른 선기가 솟구쳐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을 파고들었다.

"...?"

역시나 검기다.

더욱이 자신에 버금갈 정도로 시푸른, 고농도의 검기였다.

'이런 씨발. 다 망해 가는 무당에 영약 잔치라도 벌어졌나, 애새끼들이 뭐 이리 강해?'

두낙통은 물론 천수오걸의 눈까지 왕방울만 해졌다.

검기가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새파랗게 어린 도사들이 저리도 쉽게 사용한단 말인가?

"시장통 당과보다 못한 새끼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도발이 꽤 신선하다.

사람을 달고 맛나는 당과에 비유하다니. 무공도 무공이지만 말 좀 하는 도사 놈이었다.

하지만 그따위 것에 감탄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파앙!

단 한 순간.

진무가 일 보를 내디뎌 밟고 쏘아지는 순간.

빠각!

천수오걸의 수장 이치룡의 얼굴에 진무의 무릎이 깊숙이 틀어박혔다.

"이노옴!"

생각지도 못한 선수에 천수오걸들이 동시에 무기를 휘둘렀다.

놀라긴 했어도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슈아악!

네 개의 무기가 한곳으로 집중된 순간 진무의 몸이 잔상이 되어 흩어지고.

뻐어억!

"크아악!"

천수오걸의 셋째 두견이 몸을 옆으로 꺾으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옆구리에 깊숙하게 박혀 있는 진무의 주먹.

그리고 그 주먹은 곧장 반대편 옆구리와 얼굴을 때렸다.

텁!

뒤로 넘어가는 두견의 멱살을 잡아챈 진무는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퍽퍽퍽!

진무가 이치룡을 쓰러뜨리고 두견을 두들겨 팬 것은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식간에 피떡이 된 두견이 진무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더욱이 그만하면 되었을 법도 한데 진무의 주먹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놈! 멈추지 못할까!"

형제같이 지내 온 아우의 처참한 모습에 둘째 왕적의 철편이 휘둘러지는 순간, 진무가 두견의 멱살을 잡고 던져 버렸다.

자, 놨다.

"어헉! 이, 이런 간악한 놈!"

잘못하면 두견을 때리게 생긴 왕적이 급히 철편을 멈춘다.

"놓으래서 놓았더니 욕질은!"

콱!

틈을 놓치지 않은 진무의 발끝이 왕적의 명치를 찔렀다.

"큭!"

콰앙!

그리고 진무의 머리가 곧장 왕적의 코뼈를 들이박았다.

"꾸엑!"

뒤이어 뛰어든 넷째 한두광의 공격이 이어지기도 전에.

"늦었다. 이 멍청한 놈아!"

콰득!

올려 찬 발에 맞은 한두광의 턱뼈가 으스러졌다.

우드득!

진무는 뒤로 쓰러진 왕적의 다리를 밟아 뼈를 부수며.

빠바바박!

허공에 떠 버린 한두광의 몸을 검집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이 망할 도사 놈이!"

검기는 쓰지도 않았다.

그저 주먹질, 발길질만으로 천수채의 정예 천수오걸을 걸레처럼 짓이겨 놓은 것이다.

그것도 고작 다섯 걸음 만에.

두낙통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렸다.

"이 개새끼! 아주 죽여 달라고 염불을 외는구나!"

피떡이 되어 진무의 발아래 쓰러진 천수오걸의 모습에 두낙통이 거칠게 기운을 일으키자.

쑤우욱!

박도에서 푸른 기운이 쑥 하고 뻗어 나왔다.

진작에 그랬어야지.

근데 이걸 어쩌냐?

이미 늦었다.

애초에 합공을 했어야지.

수하들을 미끼로 삼고, 급습을 하거나 독을 풀고, 암기를 던지고, 화살이라도 쏘았어야지.

정파도 아닌데 뭐 하러 체면을 차린단 말인가?

수적이란 놈들이 정정당당해서 어디에 쓴다고.

그럴 거면 어디 가서 작은 무관이나 열고 아이들이나 가르쳐야지.

어려운 사람들이나 돕고, 봉사 활동이나 하러 다녀야지.

비열하고 간악한 사파로서 자긍심도 없는 업적 나부랭이 새끼.

"죽어라, 이놈!"

쿠르릉!

두낙통이 다가서는 진무를 향해 박도를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자 도기가 용음(龍音)을 토해 내며 늘어났다.

순간.

진무가 도기를 향해 뛰어들었다.

"잡았...."

가가각!

꿰뚫릴 것으로 생각했던 진무가 검집을 들어 도기를 비껴 내고, 그의 신형이 쭉 늘어났다.

"헙!"

단 일 보의 움직임만으로 파고든 진무의 신형에 두낙통이 재빨리 박도를 끌어당겼다.

쏘아졌던 도기가 진무의 등을 향해 채찍처럼 휘어져 달려들었다.

'놈. 죽어라!'

진무의 움직임을 보았을 때 노리는 것은 늑골 아래.

두낙통은 자신의 옆구리를 내어 주는 대신 진무의 몸을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뻗어진 진무의 손바닥.

"허업!"

기겁한 두낙통이 재빨리 기운을 모아 맞받아쳤다.

쩌어엉!

가볍게 시작된 장력이 연거푸 이어지며 폭풍을 몰고 왔다.

무당의 면장이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준비 동작 자체가 사라져 버린.

퍼어엉!

"크으윽!"

두낙통은 서른여섯 번째 변화를 끝으로 깊은 신음과 함께 뒤로 밀려 나갔다.

"우웩!"

밀려남과 동시에 뱉어진 검붉은 핏물.

두낙통의 모습에 천수채 본선을 채운 수적들 사이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오직 진무만이 그 중심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이름 모를 노인을 흉내 낸 완벽하지 않은 장법.

무당 면장에 대입한 그것은.

"쓸 만하네."

진무가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진무가 진득한 선기를 피워 올리며 두낙통을 향해 걸어갔다.

"이 개자식!"

두낙통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부하들이 죄다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원래 수적이라는 것이 그렇다.

쪽수는 많아도 고수는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수적이 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는 대부분 고수가 자신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 줄 때였다.

천수채 최정예 고수인 천수오걸이 개처럼 두들겨 맞고 자신마저 피를 토했으니 전의를 상실할 만도 했다.

결국.

"이런 개 쌍놈 새끼. 오냐! 끝까지 가 보자!"

천수채주 두낙통이 자신의 모든 기운을 끌어 올려 박도에 담았다.

차라랑!

세찬 기운에 칼끝에 매달린 고리가 부딪히며 잘게 떨리는 순간.

가가가각!

두낙통이 칼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달렸다.

"하압!"

바닥을 파헤치며 온 칼이 직각으로 솟구쳐 올랐다.

섬전 같은 그 빠름과.

후웅!

거센 풍압이 진무의 전면을 쓸어 갔다.

'십(十)자 도기.'

두낙통을 잡으려 했던 많은 고수가 그 노림수에 당해 허리가 잘렸다.

해서 사람들은 두낙통을 '요절도(腰折刀)'라고 불렀다.

허리를 쪼개는 도.

거대한 아가리로 시선을 끌고, 감추어둔 발톱으로 상대를 절단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십자 도격.

사파의 고수 두낙통이 가장 신뢰하는 장기였다.

수직으로 솟구치는 첫 번째 도격에 진무가 옆으로 비켜났다.

지금이다.

"크크크! 놈! 걸렸구나!"

첫 번째 도격을 피해 내는 순간 진무의 방향을 잡은 두낙통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허리춤에서 만도를 잡아당겼다.

끝이다. 이걸로 놈의 허리는....

쩌어엉!

하지만 만도가 다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막혔다.

"...!"

발.

옆으로 피함과 동시에 달려 거리를 좁힌 진무의 발이 만도를 뽑던 두낙통의 손을 힘껏 밟고 있었다.

"얍삽한 새끼. 이걸로 끝이다."

"...!"

진무의 손이 두낙통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검이 내던져지고, 진무의 주먹이 신들린 듯이 쏟아졌다.

빠바바바박!

단강구의 위대한 수적, 두낙통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서협에 울려 퍼졌다.

45화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까?"

"예. 도장."

나루에 선 진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일해상단의 총관 곡우량이 힘없이 대답했다.

미곡 운반을 위해 떠난 배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단강구를 떠난 지 벌써 삼 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계획대로라면 정주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미 몇 차례 정주에 전서구를 띄웠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런...."

진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진무에게 맞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속히 후발대로 출발했어야만 했다.

걱정되었으나 한 줄기 희망을 걸고 믿은 것이 실수였다.

만약 진무가 이대제자 일곱만으로 수적들의 위협을 뚫고 상행을 이루어 낸다면 무당의 이름을 높이는 데 그만큼 좋은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타오른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것이라 생각했다.

단강구 상계뿐 아니라 무림 전체에 무당이 건재함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리라 여겼다.

"아...."

하지만 너무 시간이 흘러 버렸다.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면 필경 수적들의 습격에 당한 것이리라.

최악의 경우 더 이상 진무의 모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진궁은 답답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내가 멍청하였다. 멍청하였어. 도사 된 자가 이익에 눈이 멀어 전도유망한 사제를 사지로 몰아넣은 꼴이로다. 이제 스승님과 장문인을 어찌 뵌단 말이냐.'

"사숙!"

청강이 급히 진궁을 부축했다.

"괜찮다."

진궁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으나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청강.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구나. 본산에 전서구를 띄워라. 서둘러 구출대를 꾸려야겠다."

"알겠습니다."

청강이 굳은 얼굴로 전서구를 보내기 위해 뛰어가는데 나루를 향해 한 떼의 인물들이 들어섰다.

"아니, 이게 누구요?"

그의 목소리에 진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청삼을 걸친 학사 차림의 사내.

'제갈각.'

그는 다름 아닌 단강 제갈분가의 대공자였다.

"내 청운검룡께서 산문을 내려오셨다는 말씀은 들었으나 공사가 다망하여 인사가 늦었소이다."

청운검룡(靑雲劍龍)은 푸른 검기가 마치 구름을 닮았다 하여 무림에 알려진 진궁의 명호였다.

"그나저나 상황을 보아하니 일해상단의 배가 아직 안 돌아온 모양입니다."

"...."

진궁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저런, 정말이었구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겠소."

제갈각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던 상인을 바라보았다.

"듣자 하니 수로 이용권을 놓고 분쟁이 있었다 하던데?"

"아, 예."

제갈각의 말을 비대한 체구를 가진 중년인이 받았다.

이성상단의 외총관 두억기였다.

"거, 조금만 양보를 해 주지 그러셨소."

"죄송합니다. 저희도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하도 급하여 부탁해 사들인 것이 일해상단의 이용권인지 몰랐습니다. 설마하니 그들이 위험을 안고 상행에 나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여."

뒷머리를 긁적이며 송구한 표정을 짓는 두억기의 모습에 진궁은 끓어오르는 화를 인내했다.

급해?

거짓말이다.

일해상단의 배가 떠나고 매일을 나루에 나와 있었다. 이성상단의 배는 단 한 척도 나루를 떠난 적이 없었다.

"천수채주인 두낙통이 제법 악랄한 자라 들었는데."

"허리를 잘라 버리기로 유명해서 요절도라 불립니다."

"저런, 어쩌자고 순시선이 도는 시간이 아닌 때에 배를 출발시켰단 말이오. 쯧쯧."

혀를 차며 말하는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라곤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되레 고소하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속을 긁기 위해 온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무당에게 대놓고 쪽을 주기 위해 온 것이다.

'수치라고는 모르는 것들.'

진궁은 매서운 눈빛으로 제갈각을 쏘아보았다.

몰랐다고?

그럴 리가 없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일해상단은 진즉에 관으로부터 수로 이용권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뜻이었다.

비록 법적인 문제가 없었다고는 해도 그것을 방해한 것이 이성상단이고, 그 뒤에 제갈분가의 입김이 있었음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단강구 상단들조차 그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무당과 연을 맺은 나머지 두 곳도 자신들이 일해상단처럼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궁은 예와 도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고지식한 도사였다.

상대의 잘못은 매우 확실한 정황이었으나 실질적인 증거는 아니었다.

"귀공의 걱정에 감사드릴 뿐이오."

진궁은 근엄한 표정으로 제갈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라니요. 모두가 정무맹에 속한 한 식구 아니오. 필요하면 우리가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 뭐든 말만 하시오. 내 같은 정파의 일원으로 어찌 돕지 않겠소."

진궁의 인사에 제갈각이 화답을 해 왔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맺힌 것은 명백한 조소였다.

'이런 망할 자식이.'

속으로 욕설이 나왔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무당이 호위해서 출행한 상단이 수적의 습격을 받았다.

이를 제갈분가에서 해결을 해 주겠다 손을 내민다면?

안 봐도 훤한 노릇이다. 망할 놈들이 대놓고 무당의 이름에 똥칠을 할 생각인 것이다.

"다시 한번 귀공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드리오. 하나 무당에게 아직 그 정도의 힘은 있으니 마음만 받도록 하겠소."

안 그래도 진무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았던 진궁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언제든 말하시오. 우리 제갈분가가 자랑하는 무인들이 상시로 대기 중이니."

제갈각이 다시 한번 비웃음을 머금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제갈각의 비웃음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진무야. 부디 살아 있기만 해 다오.'

진궁의 마음속에는 사제와 이대제자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아련하게 멀리 강을 바라보는데.

"총관님! 진궁 도장!"

누군가 나루로 급히 뛰어왔다.

일해상단의 인물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나 좋지 않은 소식이라면 어쩐단 말인가?

만약 상선이 침몰하고 모두가 죽었다는 소식이라면.

진궁은 굳은 얼굴로 남자가 곡우량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진궁 도장!"

곡우량이 환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도착했습니다."

"예?"

"상선이 무사히 정주에 도착하였습니다."

"...."

그의 말에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무슨."

"보십시오. 정주에서 온 전서입니다."

곡우량의 말에 진궁이 전해 받은 전서를 급히 펼쳤다.

"아!"

진궁의 표정이 밝아지자 막 의기양양하게 떠나려 했던 제갈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됐군요. 됐어요."

곡우량이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지만, 진궁은 애써 표정을 감추고 무뚝뚝한 척을 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달랐다.

살았다. 산 것이다.

진무와 무당의 제자들은 무사히 상선을 호위해 정주까지 간 것이다.

가득 졸이고 있던 가슴이 펴지자 내내 막혀 있던 숨이 한 번에 쉬어졌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

"천수채를 토벌했다고 합니다."

곡우량의 말에 진궁이 아닌 제갈각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너무도 놀랐기 때문인지 대놓고 반말을 하고 말았다.

"...예. 전해 온 서신에 따르면 천수채주 두낙통을 비롯해 천수오걸과 수적 서른을 생포했다고 합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에 제갈각은 참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반대로 진궁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얼마나 걱정했던가?

처음에는 혹여 상행을 완수하지 못하여 일해상단이 피해를 입고, 단강구 상계에서 무당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칠까 걱정되었다.

그 후에는 돌아오지 않는 제자들이 살아 있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상행을 문제없이 호위한 것뿐 아니라 수채를 토벌해 승전보까지 울리다니.

'진무야. 너 이 녀석.'

기특한 마음이 절로 든다.

고작해야 약관을 넘은 녀석이 어찌 이리 무당의 이름을 드높인단 말인가?

무당의 '검'임을 자처한 것을 그저 치기로만 여겼거늘, 진정으로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다니.

'허허, 이 녀석, 이제 말투만 고치면 되겠구나.'

진궁이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곡우량의 말이 이어졌다.

"허허, 상단주님의 전언에 따르면 수채를 토벌해 막대한 재화를 취득한 것은 물론, 정주 관아에서 현상금까지 두둑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갈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자, 진궁이 싸늘한 눈으로 물었다.

"제갈분가의 대공자께서는 어째 표정이 좋지 않소이다?"

"...."

"우리 무당파의 '자랑스러운 진무'가 천수채를 토벌한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지요?"

진궁의 말에 제갈각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사과했다.

"아니, 그, 그게...."

"뭐, 됐소. 딱히 따지려 한 것은 아니니."

"...."

"진무 사제가 아직 어려서 호기가 넘친다오. 수적들을 보고는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모양이오. 혹여 다른 상단도 피해를 볼까 봐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고작 이대제자 일곱으로 수채를 토벌하다니. 쯧쯧, 도사라는 녀석이 어찌 이리도 무모한가."

짐짓 화를 내는 듯했으나 말이 긴 것을 보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니, 기분이 좋은 게 틀림없었다.

진궁의 눈동자와 얼굴에 자부심이 쏟아져 나올 듯했으니까.

"그리고 이 녀석들. 별 무리 없이 잘 해낼 줄은 알았으나 이리도 연락을 늦게 하다니. 내 돌아오면 아주 혼쭐을 내야겠구먼!"

진궁의 말에 곡우량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방금까지 오만 걱정에 제 사제에게 사죄까지 하고 있던 사람이.

하지만 제갈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진궁은 내심 통쾌함을 느꼈다. 있는 대로 구겨진 제갈각의 그 얼굴이 어찌나 고소한지 십 년 묵은 체증이 단번에 내려가는 것 같았다.

물론 무당파 도사의 체면이 있기에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듣자 하니 제갈세가에서 그 천수채라는 곳을 몇 번이나 토벌하려 했다가 실패했다 들었소. 저런, 미리 말했으면 우리가 좀 도와줬을 터인데."

담담하지만 은근히 약 올리는 듯한 어조에 제갈각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나저나 제갈세가에서는 단강구 상계의 어려움을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우리 막내 사제도 해내는 일을 못 할 정도로 약한 무인들을 수채 토벌에 보낸 것을 보면?"

"...."

진궁의 말에 제갈각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입장이 뒤바뀌었다.

망할 도사 놈이 자신과 제갈분가 전체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근엄하고 차분하게.

"본인은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 보아야겠소. 그럼 이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진궁은 한바탕 크게 웃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속이 다 시원한 게 한 며칠 과식을 해도 될 것 같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모습에 제갈각이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일해상단을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꾸민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이성상단으로 하여금 일부러 수로 이용권을 빼앗게 하고, 단강구의 상단에 은밀하게 명해 일해상단이 매집한 미곡을 아무도 되사지 못하게 만들었다.

몇 번을 고민했고,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일해상단은 결국 막대한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상행을 나가야 하는 외통수에 걸린 것이다. 순시선 없이 나갔다가는 수적에게 당하게 될 것이 자명함에도.

더욱이 그들이 마주칠 천수채의 우두머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두낙통.

제갈세가는 이미 그의 무위를 알고 있었다.

단강구 상단을 장악했던 제갈세가와 이미 여러 차례 마찰을 빚어 왔고, 그의 손에 허리가 잘려 죽은 제갈세가의 무인이 수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당에서 장로급 무인을 호위로 보내거나 청운검룡 진궁이 직접 나선다면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도 없다.

제갈각은 무당이 절대로 장로급의 무인을 호위로 보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수적 따위를 두려워해 무당의 장로가 움직인다면 상행은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당은 무림 전체에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그 사실을 아는 무당은 예상대로 진무라는 일대제자와 이대제자 일곱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무림에 그 명성이 자자한 진궁이 호위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던가?

그런데 상행을 성공한 것도 모자라 천수채를 토벌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일성."

"예. 대공자."

"서둘러 정주에 서신을 띄워 확인을 해라. 정말로 두낙통이 맞는지.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소상하게 알아 와라."

"알겠습니다."

일성이 달려가는 모습에 제갈각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무."

그 이름을 곱씹던 제갈각이 무서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공사척을 잡아들이고, 청양상단의 밀거래를 박살 낸 것이 요행은 아니었단 말이지."

46화

단강제갈분가 대공자의 거처.

소청전.

와장창!

거처로 돌아온 제갈각은 방 안의 집기를 모조리 부숴 버렸다.

도무지 화가 풀리지 않았다.

이번 일의 실패로 인해 도리어 무당의 입지만 높여 준 꼴이 되었다.

그 때문에 가주인 제갈무린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들었고 동생인 제갈근마저.

"왜요? 잘나신 형님께서 뭐가 잘 안된 모양입니다."

라며 흘러가듯 비웃었다.

특히나.

"진궁, 그 개자식."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약 올리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진궁과 제갈각은 또래였으나 이름값이 달랐다.

진궁은 탄기를 깨달은 무당의 기재로서 중원 무림에 이름을 날렸으나, 지재(知材)로 이름 높은 제갈세가의 제갈각은 그다지 돋보이지 못했다.

그들이 사는 곳은 무림.

무공이 강한 진궁이 더 인정받는 것이 당연했다.

"망할! 하필이면 놈에게 그런 꼴을 보이다니."

제갈각이 한참이나 소란을 피우고 앉았을 때.

"대공자, 일성입니다."

"들어오라!"

정주로 사실을 확인하라 보낸 일성이 돌아와 자신이 조사한 바를 상세하게 보고했다.

"정말이었다고?"

"예. 강유의 말이 맞았습니다. 수적들의 공격을 막고 난 뒤, 천수채를 찾아가 잔당을 토벌했다고 합니다."

천수채의 토벌.

정주 관아에서 그 사실을 인정했다.

오랫동안 제갈분가에서 하지 못한 일을 일개 상단이, 무당의 코흘리개 꼬마가 해낸 것이다.

'젠장, 문제는 소문이군.'

세상 그 무엇보다 빠른 말.

이미 천수채 토벌에 관한 이야기가 단강구 상계에 퍼져 안줏거리가 되고 있었다.

제갈분가가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과 함께.

물론, 자신의 아비인 제갈무린이 알았으니 그리되게 둘 리는 없었다.

제갈분가의 치부와도 같은 일이니 가진 힘을 모두 써서 소문을 막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깐일 뿐이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들의 입과 입을 통해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한데 두낙통이 이상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말?"

"예. 진무라는 자가 탄기의 고수일지도 모른다고."

"탄기? 하!"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두낙통을 잡았다고 하지만 약관의 도사였다.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사파의 수적 놈이 개소리를 지껄인 것에 불과하다.

원래 사파라는 족속들이 제 실력을 부풀리기 좋아하지 않던가.

"자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겠지?"

"...."

"말해 봐. 네 생각을 듣고 싶다."

제갈각의 말에 일성이 잠시 고민하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수적들은 그가 스스로 무당의 검이라 했다더군요."

"무당의 검?"

"예. 지금은 비록 잊혀 가고 있으나 무당의 검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지 않습니까?"

무당의 검.

그것이 가진 의미.

그것은 무당의 대제자나 장문인이 가지는 의미와는 달랐다.

무당에서 가장 강한 이들에게 내려지는 상징적인 칭호였다.

대대로 '무당의 검'이라 불린 자들은 그 무공이 입신(入神)에 이르러 중원 무림을 울려 왔다.

"미쳤군. 치기를 넘어 미쳤어. 고작 약관에 이른 놈이 무당의 검이라고?"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일성은 웃지 않았다. 본인의 성격이기도 했으나 정말로 그리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확인이 필요하단 말이냐?"

"나쁠 것은 없을 듯합니다."

"흐음."

제갈각이 제 턱을 쓸며 일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성, 동획.

평범한 무인이 아니었다.

제갈각의 먼 친척이기도 한 그를 옆에 둔 이유는 그저 남들보다 뛰어난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세(勢)를 볼 줄 아는 눈.

훈련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드물게 나타나는 사람의 본성이자 감각이었다.

그의 말과 진심 어린 표정에 제갈각은 진무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진무.'

어찌 보면 모든 것이 그놈 때문이었다.

그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자신의 완벽했던 계획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만약 그가 정말로 탄기를 깨달았다면?

탄기에 이른 약관의 무인.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 상징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단번에 중원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호북의 주인 자리를 놓고 제갈세가와 오랫동안 수면 아래에서 다퉈 온 무당이 아니던가?

될성부른 싹은 진작에 밟아 놓는 것이 좋다.

후에 막강한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좋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 판단이 그렇다면 두들겨 봐야지. 돌다리인지 나무다리인지."

제갈각이 묘한 표정을 짓자 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성."

"예. 대공자."

"암천대주를 만나야겠다."

"예?"

제갈각의 말에 무덤덤하기만 했던 일성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확인이 필요함을 말했을 뿐인데 암천대(暗天隊)라니.

"너무 과하십니다."

암천대는 청화대와 더불어 가주의 직속 무인대였고, 그림자이자 은밀한 살수였다.

아무리 다음 대의 가주로 거론되는 제갈각이 그들과 교류를 하고는 있으나.

'암천대를 움직이면 가주께서 아시게 될 터인데.'

일성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제갈각이 피식 웃었다.

"만사 불여튼튼이다. 네 말대로 그놈이 무당의 검이라면 조금도 과하지 않다."

일성은 제갈각의 말에 비웃음이 서려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또한, 아버님께서 아신다 해도 상관없다. 만약 탄기의 경지라면 미리 확인해야 함이 마땅하다."

"알겠습니다. 암천대주를 부르겠습니다."

* * *

다음 날 밤, 일해상단.

정주로 떠났던 상선이 돌아왔다.

무사히 상행을 마친 것도 모자라 수적까지 토벌했으니 일해상단은 잔칫집 같은 분위기였다.

정원에 수 개의 화로가 밝혀지고, 고생한 이들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 자식이 코빼기도 안 비춰?'

연회에 참석한 진무가 상단주 강유와 함께 따로 앉아 있는 진궁을 째려보았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일해상단은 물론 인접 상단까지 나루에 나와 그들의 승전을 축하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진궁은 나오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였다.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로 한 주제에 진무 일행이 일해상단에 도착하고 나서야.

"애썼다."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그것도 근엄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주위에 사람들만 없었다면 당장에 대가리를 후려쳤을 것이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재주는 진무가 부렸는데 어째서 진궁이 상단주와 동석해서 감사를 받는단 말인가?

망할 도사 놈.

설마 업적까지 챙겨 가는 건 아니겠지?

진무가 진궁을 째려보고 있는 동안 청상과 청우는 남아 있었던 청강을 비롯한 이대제자들에게 영웅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진짜 대단했다니까? 와, 정말 그 다섯 명을 쓰러뜨리는데 숨이 막히는 줄 알았어."

"다섯을 말입니까?"

"그래."

청상의 말에 상황을 보지 못한 이대제자들이 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그러곤, 팍! 파팍! 이렇게 막!"

"이야!"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막 속이 다 통쾌하더라니까? 그 사악한 수채의 잔당들까지 토벌하시다니. 사숙께선 정말 우리 무당의 표본과도 같은 분이셔."

청상이 말을 쉬지 않는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좀 더 진중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뭐 그 덕에 이대제자들이 진무를 바라보는 눈빛에 존경이 잔뜩 어려 있었다.

좋아, 잘한다. 더 해라, 청상아!

그들과 함께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진무가 흐뭇해하며 진궁을 쳐다봤다.

자꾸 힐끗거리는 것이 자신이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못마땅해하는 것이 틀림없다.

술도 맘 편히 못 먹게 하다니. 속 좁은 놈 같으니.

진무는 남은 것을 빨리 먹고 주루나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진무의 생각과는 달리.

'기특한 녀석.'

진궁은 상단주와 함께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온 신경은 진무에게 향해 있었다.

단지 체면 때문에 모른 척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속마음 같아서는 진무을 와락 끌어안고 잘했다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사히 상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그저 어깨를 두들기며 애썼다는 한마디만 하고 말았다.

섭섭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진궁은 사형으로서의 위엄을 지켜야만 했다.

너도나도 잘했다고 칭찬해 준다면 사람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다 여겼다.

그리고 사형은 사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길을 잡아 주는 사람이었다.

진궁은 그저 진무를 연신 힐끗거리며 흐뭇한 표정으로 치하를 대신했다.

'하긴 진무의 무위라면.'

자신을 이겼을 때.

진무가 탄기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추측했던 것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예의가 좀 없으면 어떠하단 말인가? 그저 성격이 거침없기 때문일 것이다.

고기? 술?

십계를 어긴 일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눈감아 줄 수도 있었다.

어차피 육식에 대한 금기는 한시적으로 해한다는 장문인의 발표가 있었지 않은가?

단지.

꿀꺽, 꿀꺽.

좀...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지.

술병째로 벌컥이며 마시는 모습에 자꾸 시선이 갔지만 진궁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휴,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꼭 고쳐 주어야겠다.'

약관에 탄기에 이르렀다면 그 발전 속도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쩌면 머지않아 의기의 경지에 오르고, 절대라 불리는 '강'까지 재현해 낼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사형께서도 금세 탄기에 오르는 것 아닙니까?"

응? 뭐?

갑작스러운 청우의 말에 진궁이 멀뚱거리는 표정으로 청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이, 말도 안 돼.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현기에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이것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진궁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지 말고 저도 좀 가르쳐 주세요. 요즘 자꾸만 벽이 느껴진다니까요?"

"에이, 네가? 거짓말."

"정말이에요."

"아서라. 내가 보기엔 넌 아직 멀었어. 아마 말해 줘도 모를걸?"

청상의 말에 청강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진짜 현기에 오른 거야?"

"예. 얼마 전에요."

청우가 마치 제 일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거짓말."

"어? 정말인데?"

"...."

"사형, 한번 보여 주세요."

"아, 됐어. 부끄럽게시리."

청상이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싫지는 않았던지,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일어나 자신의 검을 뽑아 바닥으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합!"

스르륵.

비록 '쑥'은 아니지만 청상이 기운을 주입하자 검 끝에서 푸른 선기가 희미하게 한 자 가까운 길이까지 늘어났다.

"와!"

이대제자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고, 진궁은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진짜 검기라고?

'맙소사. 도대체 명진 사숙께서 어떤 방법을 쓰셨길래.'

듣기로 전대의 일대제자 중 최고수였다 하는 명진이었다.

명현과 함께 장문인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는.

그런데.

"진무 사숙께서 깨달음을 주셨어."

지, 진무라고?

명진 사숙이 아니라?

청상의 말에 진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딱 한 마디 하시는데 그 순간에 느껴지는 희열이.... 와, 진짜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니까요."

"...."

딱 한 마디.

그게 말로 되는 거였나?

말한다고 막 알아듣고 깨닫는 그런 거였다고?

진궁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쳐다보는데.

"어?"

진무가 보이지 않았다.

47화

단강구 외곽.

시끄러운 분위기와 진궁의 눈치(?)에 마시던 술을 빠르게 비워 낸 진무는 홀로 빠져나와 강변을 걷고 있었다.

걷다 보니 경치가 익숙하다.

일전에 왔었던 무월루 인근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달랐다.

강물에 비친 달은 파랑에 일렁이고, 바람이 도포 자락을 치고 지나간다.

손에 든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니 알싸함이 감돌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망할 진궁 놈. 거 술 좀 먹는다고 그렇게 눈치를 주나?"

진무가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경치는 좋구만."

얼굴에 닿는 강바람의 시원함에 취기가 날아가고, 머리가 맑아진 진무는 지나간 시간을 되새겼다.

"무당의 제자라."

사패천주 혁련무강.

죽음의 순간 천우명이 건넨 불로초의 영기로 인해 살아남았고, 뜬금없이 무당에서 깨어났다.

그 연유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저승사자 놈이 무언가 술수를 부린 것임에는 틀림없다.

"뭐, 이제는 상관없지."

원래부터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진무였다.

마음에 안 들면 때리고.

가지고 싶으면 빼앗고.

도전해 오는 놈이 있으면 짓밟는다.

그게 그의 성격이었다.

물론 지금은 힘이 부족했다.

생각 없이 나댔다가는 무당파에서 당장에 축출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힘을 얻을 때까지는 참아야만 했다.

"일단 대제자부터 되어야 하는데."

무당의 대제자.

이게 아주 거지 같다.

사파는 힘센 놈이 대장이다.

그런데 이놈의 문파는 뭐 그리 따지는 게 많은지.

무공만 강하면 되지.

업적에, 평판에, 제자도 키워야 하고, 하여간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귀찮은 놈들 같으니.

"뭐, 차근차근 하나씩. 당장 죽을 것도 아니고. 이제 스물인데."

피식 웃은 진무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일단 대제자가 된다.

양의심공을 얻으면 곧바로 묵룡혼원공을 익혀 과거의 모든 힘을 되찾....

"잠깐, 생각해 보면 굳이 정파 하나만 손에 넣을 필요는 없잖아?"

진무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 정파는 물론 사패천도 손에 넣으면 되지. 그럼 다 쓰지도 못한 비고의 돈이며 화양이와 보내지 못했던 뜨거운 밤도 다시!"

왜 이 생각을 못 했단 말인가?

어차피 힘센 놈이 제일인 사파가 아니던가.

하, 이런. 내 스스로 한계를 정한 꼴이었다니.

정파는 정파대로 손에 쥐고, 사파는 사파대로 손에 넣는다.

고금에 그만한 업적을 세운 이가 있던가?

없다.

만약 이룬다면 진무가 최초이리라.

속담에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보면 모두 놓친다는 말이 있다.

다 멍청한 소리다. 그건 평범한 놈이 능력이 안 되니까 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진무가 누구던가?

절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되살아난 능력자가 아니던가.

"그래! 그럼 되지. 둘 다 손에 넣는 거야!"

점점 더 확장되어 가는 야망에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리자 지나가는 행인들이 힐끗거렸다.

"미친 도산가?"

누군가의 소곤거림이 귓가를 스치지만, 딱 한 번만 용서해 주자.

정사를 통일할 미래의 중원 무림의 군주가 될 도사의 모습이다.

나중에는 돈 내고도 못 볼 얼굴이니 그 두 눈동자에 새겨 두거라. 이 우매한 놈들아.

"크하하핫!"

진무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앙천광소(仰天狂笑)를 터트렸다.

사람들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귓가에 원을 그리든 말든.

"자, 그럼 기분 좋게 술이나 한잔 찐하게 걸쳐 볼까!"

하지만 그 전에.

웃음을 뚝 그친 진무가 자신을 쳐다보는 행인들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혹시나 미친 게 묻을까 싶어 사람들이 좌우로 확 갈라졌다.

진무의 걸음이 향한 곳.

자신을 구경하던 행인들의 뒤편 담벼락에 거적을 깔고 구걸을 하고 있는 걸인.

"이봐."

"예?"

진무가 말을 걸자 걸인이 깜짝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걸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나 알아?"

"도사님을...요?"

"그래."

"아니요. 처음 뵙습니다만."

"그래. 근데 왜 따라다녀?"

"...."

짧은 적막의 순간, 걸인의 눈에 싸늘한 빛이 흘렀다가 사라졌다.

"헤헤, 도사님.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게."

"...."

어느새 진무가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근데 희한하지? 아까 전엔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있어. 그것도 마치 한참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

진무의 말투가 점점 더 싸늘해졌다.

그와 함께 옅은 기세가 뿜어 나오기 시작하자 걸인은 점점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너 누구냐?"

진무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떠오르고.

"말해 봐. 아니면 말하게 해 줄까?"

스스스.

진무의 주먹에 푸른 선기가 어리고 싸늘한 기세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뭐, 뭔 일이래?"

"좀 전에 미친 듯이 웃던 무당 도사 아냐?"

"걸인한테 왜 저러지?"

걸음을 멈춘 행인들이 그에게 시선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도사님,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십니까요?"

걸인이 절을 올리듯이 엎드렸으나.

'제길.'

고개를 숙인 걸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러는지는 니가 더 잘 알 거 아냐."

"...."

진무의 주먹에 어린 기운이 점점 더 진한 청색으로 변했다.

걸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쉽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기세를 감추고 자신을 뒤따른 자.

의기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만큼 뛰어난 변장술을 가진 자.

이미 한번 당한 적이 있었다.

자꾸만 되새기게 되는 무월루에서 만난 노인.

무당 밖으로 나올 때면 항상 주변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진무였다.

무월루의 사건 이후로 그 살핌은 강박에 가깝게 강해졌다.

걸인, 아니 걸인으로 변장한 자는 일해상단을 떠난 그 순간부터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물론 처음엔 몰랐다.

그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강변에서부터였다.

때로는 행인, 때로는 취객이었고, 이번엔 걸인이었다.

모습은 달랐다.

의심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인물들이 같은 기세를 품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인이라면 몰라도 일반인임에야.

그렇기에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 느낌이 확실해질 때까지.

"어째서 나를 따라다니는 거지?"

"아이고...."

"연기 그만해. 모가지를 꺾어 버리기 전에."

"...."

진무의 몸에서 차디찬 살기가 뿜어지자 걸인이 말을 멈추고.

"눈썰미가 좋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눈 아래가 복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제법이네. 얼굴 가죽을 여러 장 달고 다니나 보지?"

"...."

장난스러운 이죽거림이었으나 걸인, 아니 복면인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주위를 가득 채운 기운.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쳐진 것만 같았다.

진무는 이미 걸인에게 다가서는 순간 기의 그물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말을 거는 순간 도망쳤을 것이다.

'생각보다 치밀한 성격이군. 도망치지 못하게 수를 쓰고 물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위치가 좋지 않았다.

좌우로는 보이지 않는 섬뜩한 기의 칼날이 촘촘하게 뻗어 있었고, 뒤로는 벽을 등지고 있다.

도망치려면 위쪽뿐이었으나 이미 예상 안의 도주로일 것이다.

눈앞의 상대는 도사였으되, 느껴지는 살기는 섬뜩했다.

그는 묻고 있었으나 굳이 대답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고, 움직이는 순간 당할 것 같았다.

"역시, 탄기의 고수였군."

"...."

복면인의 말에 진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신의 경지를 완벽히 알아채지는 못했으나.

저 말투.

마치 자신이 탄기의 경지에 이른 것을 확인하려 했던 것 같지 않은가?

이런 경우, 감시자는 대개 하수인에 불과하다.

즉, 뒤에 누군가 더 있다는 이야기인데.

"하, 이거 봐라. 말하지 않으면 그냥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꽤 흥미를 돋우네."

"잘됐군. 혹시나 묻지 않고 죽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점점? 그래서? 꼬라지를 보니 도망이라도 쳐 보려고?"

"글쎄. 그대의 기운을 봐서는 쉽지 않을 듯하군."

"좋아. 알면 불어 봐. 어째서 나를 감시한 것이지?"

"이거 참, 진퇴양난이군."

지지 않고 대꾸했지만 복면인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제갈분가 암천대 소속의 무인이었다. 은밀한 임무의 특성상 변장과 은신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일보십변(一步十變)이라 불리는 자신의 변장술은 암천대 중 최고였다.

그가 받은 임무는 확인.

진무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데 그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챌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분명 변장은 완벽했건만, 어디서부터 실수한 것일까?

"야, 왜 말이 없냐?"

진무의 말에 복면인은 들키지 않게 손에 기운을 모았다.

도주해야 했다.

한순간의 틈만 만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일행들은 진무의 뒤쪽에 있었기에 적합하지 않다.

시선을 끌기에 적당한.

'저기군.'

복면인의 시선에 한 여인이 잡혔다.

일단 여인을 공격해 시선을 끌고 그 틈에 도망친다.

죽여서는 안 된다. 그저 상처만 입히면 충분했다.

"야! 왜 말이 없냐고!"

진무가 소리를 지르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복면인의 손이 빠르게 품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파핫!

날카로운 비침이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진무는 도사다.

민간인이 피해를 입는 것을 절대로 외면하지... 못할?

"너 뭐 하냐?"

"...."

진무의 시선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악!"

비침을 팔에 맞은 여인의 비명이 터져 나왔음에도 그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여인이 위험해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분명 도사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애민정신(愛民情神)인데.

"뭐야? 난 또, 날 노리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뭐? 어째서?

그는 진무를 알지 못했다.

"이리 와. 웬만하면 죽여 버릴랬는데, 좀 물어봐야겠다."

'뭐 이딴 도사가.'

"뭐, 물어도 말 안 할 것 같으니까 차분히 맞고 시작해 볼까?"

"...!"

푸른 선기가 맺힌 주먹이 짧은 준비 동작도 없이 복면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어헉!'

콰아앙!

급격하게 고개를 꺾은 복면인의 뒤로 담벼락이 커다란 구멍을 만들며 터져 나갔다.

맞았다면 분명 머리가 저 담벼락 꼴이 났을 터.

맞고 시작하자더니 그냥 죽일 셈인가?

소름이 등줄기를 차고 올랐다.

"어쭈? 피해?"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진무의 성질을 더욱 돋운 모양이었다.

푸른 기운이 서린 주먹이 수십여 개의 잔영을 만들며 쏟아졌다.

'젠장!'

쾅! 콰쾅!

사방이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진무의 주먹이 스칠 때마다 건물이며 담벼락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암천대의 무인.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공보다도 경공이었다.

한때는 경공만 죽어라고 수련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너무나 고마워서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무지막지한 도사 놈의 공격을 한 번도 피해 내지 못했을 테니까.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복면인은 사력을 다해 피했고, 아슬아슬하게 놓치는 진무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압!"

쾅!

* * *

"이게 무슨 소린가?"

소란이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고개를 돌렸다.

"확인해 볼까요?"

"흠."

죽립을 쓴 사내들 중 하나가 대답하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꽤 떨어진 곳임에도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네들은 계속해서 조사를 진행하게.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네."

"예. 비흔(秘痕) 어른!"

"일위."

"예."

"가 보세."

노인과 처음 대답을 했던 죽립인들이 소란이 들려오는 곳으로 서둘러 몸을 날렸다.

그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불야성을 이룬 주루 거리이기도 했고.

쾅! 콰쾅!

"요 새끼! 이것도 한번 피해 봐라! 어쭈! 그럼 이건 어떠냐!"

태극 문양의 도포를 입은 도사가 무지막지하게 거리를 때려 부수고 있었다.

"무당?"

48화

비흔은 멀리서 구경 중인 행인들의 틈에 숨어서 진무와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의아했다.

무슨 일이길래 무당의 제자로 보이는 아이가 저런 무지막지한 무공을 선보이고 있는 것인가?

더욱이 단강구 외곽 일대를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설마하니 행세를 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태극 문양의 도복에 무공을 봐선 무당의 제자가 분명한데.... 어째서 민가에 피해를 주는 것일까요?"

"그, 그러게 말일세."

"말릴까요?"

"응? 아, 아닐세.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피해가 갈수록 심해져 가자 수하인 일위가 나서려 했다.

하지만 비흔은 고개를 저어 그를 만류했다.

지켜보니 무당 도사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었다.

언뜻 봐서는 그저 주먹질과 발길질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무공의 초식을 모조리 자르고 쪼개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견 난잡해 보였으나 진무의 움직임에는 무당의 현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또한, 지극히 실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허, 저리 잘라 쓰고 있음에도 어찌 저리 자연스러운가?'

뿐만이 아니다.

진무의 공격을 피하고 있는 복면인이 보이는 움직임 또한 감탄을 자아낼 만했다. 필경 경공과 보법을 극한까지 수련한 자. 하지만.

'저 녀석, 당장에 제압할 수 있음에도.'

안 하고 있다.

복면인은 자신이 피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건 오산이다.

저 도사는 지금 복면인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런 상황이라면 무지막지한 주먹질에 복면인의 뇌리에는 조금씩 공포가 심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 등줄기가 흠뻑 젖었으리라.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는 생각으로.

'허허, 거참, 재미있는 녀석이로고.'

비흔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리타분한 무당의 도사 중에 저런 발칙한 녀석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거늘.

참으로 흥미가 돋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크핫핫핫! 이것도 피해 봐라!"

진무는 광기로 가득 찬 웃음을 흘리며 복면인을 향해 쇄도했다.

그런데.

도망치기 급급하던 복면인의 기세가 일순간 변했다.

어떻게 해도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은 그의 움직임에서 세찬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목적이 바뀐 것이다.

도주에서 살해로.

복면인이 몸을 돌리는 순간 날카롭게 세워진 손날이 살기를 머금고 진무의 낭심을 향해 파고들었다.

비열한 수.

순간적인 대처였으나 너무도 절묘했다.

"저!"

지켜보던 비흔이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토해 내었다.

위험하다.

놀라울 정도로 갑작스러웠기에 피한다 해도 큰 부상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콰득!

진무가 사악하게 웃었고, 복면인의 얼굴에는 고통스러움이 가득했다.

"끄악!"

진무의 손가락이 복면인의 손등을 그대로 꿰뚫고 들어가 있었다.

더욱이 깍지를 끼듯 움켜쥐고 있다.

복면인은 분명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리고 이어진 진무의 동작.

복면인의 손을 잡아당기며 그대로 뻗어지는 일장.

"저건!"

진무가 무사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던 비흔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엇을 쓰려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히 있어야만 하는 준비 동작이 존재하지 않았다.

"놈!"

비흔이 곧바로 몸을 날려 진무와 복면인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취리릭!

짧고 간결한 움직임을 가진 금나수가 진무의 손목을 향해 뻗어졌다.

'이건 또 뭐야?'

진무는 갑자기 나타난 죽립인의 공격에 급히 허리를 꺾었다.

하지만 날아온 손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직각으로 꺾어졌다.

'고수?'

그것도 엄청난 실력을 가진 고수였다.

곧게 세워진 손가락이 당장에 진무의 가슴을 뚫을 듯하자.

팍!

가볍게 지면을 찬 진무의 몸이 허리를 눕힌 채로 얼음 바닥에 선 것처럼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감탄이 절로 나올법한 움직임이었으나 손아귀는 끈질기고 집요했다.

취리릿!

휘어진 손이 쭉 늘어나 진무를 향해 뻗어 왔다.

'뭐야, 이거? 익숙한데. 설마?'

진무는 자신을 잡으려는 손의 움직임이 너무나 익숙한 탓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상대를 확인할 틈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손아귀에 잡힐 듯했기 때문에.

'젠장, 이렇게 되면.'

진무는 일부러 적에게 손목을 내주었다.

그러자 물고기가 미끼를 물 듯이 곧바로 노려 왔다.

갈고리처럼 세워진 손가락. 마치 뼈가 없는 듯이 휘어지는 움직임.

'제령신수(制靈神手)? 망할! 역시 그놈이군.'

진무는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손목이 잡혔다.

하지만.

투룩, 퉁!

'뭐? 이, 이런 일이?'

그런데 잡았다 싶은 순간 진무가 교묘하게 손목을 비틀어 튕겨 내고 훌쩍 물러났다.

"허!"

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자신의 손아귀에 잡혔던 것을 놓쳐 본 적이 얼마 만이란 말인가?

더욱이 진무는 복면인까지 잡고 있지 않던가?

실로 놀라웠다.

"...!"

그 순간 진무 역시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의 놀람과는 다른 종류였다.

죽립인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진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망할, 이 무슨 뜬금없는 전개지? 저 거지새끼가 갑자기 왜 나타나는 거야?'

더욱이 저 흉흉한 기세는 또 뭐란 말인가?

나타난 죽립인.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구부정한 허리, 거지새끼들 특유의 냄새.

그리고 유령 같은 움직임의 금나수를 사용하는 놈은 딱 하나다.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무풍개(無風丐) 양소방.

자신이 그러했듯 정무맹에도 '절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들이 있었다.

현 정무맹주인 철지량을 비롯해 정무칠성(正武七聖)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이 양소방이었다.

무풍개라는 명호는 움직임에 바람조차 일지 않을 만큼 은밀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정무칠성 중에서도 진무가 가장 싫어했던 이름 중 하나였다.

그가 하는 일은 주로.

'추잡하게 남의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는 새끼.'

진무가 생각하는 무풍개 양소방은 그런 인물이었다.

저놈으로 인해 사패천의 비밀이 몇 번이나 털려 나가는 바람에 얼마나 고초를 겪었던가.

몇 번이고 놈을 잡고자 했으나 항상 실패하고 말았다.

'무공도 보잘것없는 새끼가.'

차라리 맞붙어 싸우면 다리를 부러뜨려 버렸을 텐데, 항상 도망치는 통에 이빨만 갈아 대었다.

어찌나 빠른지.

'제길. 변장술이 제법이다 싶었더니만. 이 복면 새끼, 양소방의 수하였나?'

양소방의 등장으로 인해 복면인을 괴롭히며 즐거워졌던 기분이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진무가 양소방에게 시선을 돌린 사이 복면인이 그 틈을 타 도망치려 하자.

"이 망할 새끼가."

진무는 잡고 있던 복면인의 손을 보란 듯이 꺾어 버렸다.

뿌드득!

"끄아악!"

복면인이 비명을 지르자 양소방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러워!"

빠각!

짜증이 난 진무가 그대로 복면인의 얼굴을 찍어 버렸다.

단번에 축 늘어진 복면인을 던져 버린 진무의 모습에 양소방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자신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지 않은가?

"네놈."

"뭐냐?"

뭐냐?

죽립에 가려져 진무는 보지 못했으나 양소방의 눈에는 황당함이 어렸다.

무슨 도사의 말투가 어찌 저리 시건방지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보아하니 무당의 도사가 분명한데 네놈이 어찌 그 무공을 알고 있는 것이냐?"

"무공?"

뭔 말이지?

복면인을 때려눕힌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걸 보면 한패는 아닌 게 분명한데.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진무는 양소방과 대화 자체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원래라면 무당의 제자인 그가 이름 높은 양소방에게 예의를 다하며 인사를 해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얼굴은 죽립으로 가리고 있었고, 아직 자신에게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그러니 존대를 할 필요도 없다. 얼굴을 가렸는데 양소방인지 노인인지 알 게 뭐냐. 모른 체하면 된다. 굳이 아는 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군."

진무는 서둘러 그와 헤어지고 싶은 생각에 바닥에 널브러진 복면인의 멱살을 잡아 들고 몸을 돌렸다.

"멈춰라!"

그런데 그의 앞을 또 다른 죽립인이 막아섰다.

양소방을 비흔이라 부르며 따르는 수하 일위였다.

죽립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칼까지 꺼내 든 것이, 어떻게든 막겠다는 심산이다.

"거참, 더럽게 귀찮게 하네."

진무의 중얼거림에 양소방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라?"

"한패냐?"

"...."

"아니면 꺼져."

"뭣이?"

"한패면 덤비고 아니면 꺼지라고."

"...."

갈수록 태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가 시건방진 것도 모자라 직설적이다.

더욱이 진무가 만들어 놓은 소란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지켜보는 눈이 늘어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자신들의 임무는 은밀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정체를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정체를 드러내는 한이 있어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막 그가 기운을 끌어 올려 진무를 공격하려는 순간.

[비흔, 찾았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급박한 전음.

조사를 맡긴 수하가 분명했다.

찾았다.

그 말이 주는 의미를 알기에 양소방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놈을 제압해야....

[지금 이위 이하 모두가 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뒤이은 전음이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제길.'

비흔은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진무를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진무를 제압해 다른 곳으로 몸을 옮기고 싶었지만, 무공이 만만치 않다.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필시 단번에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무에 대한 것은 의심이지만 자신의 수하들이 찾아낸 것은 필시 확신일 터. 아쉽지만 지금은 물러날 수밖에.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내가 왜 알려 줘야 하지?"

"...."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면서.

"네놈,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양소방은 진무를 째려보며 훌쩍 몸을 날렸다.

단 일 보를 걸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진무의 앞을 가로막았던 일위 또한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어? 뭐야?"

"허억!"

구경꾼들은 자신들이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하고 눈을 비볐다.

하지만.

진무의 시선은 어느새 한참이나 멀어진 양소방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제길."

양소방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명령이 내려지면 망할 거지새끼들이 자신의 뒷조사를 시작할 것이 틀림없다. 아니, 이미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양소방 이 거지새끼와 엮이다니. 이거 꽤 귀찮게 됐네."

진무는 복면인을 둘러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소란의 현장에서 조금 벗어난 곳.

"일위."

"예."

"그리고 지금 즉시 개방 단강지부에 놈에 대한 정보를 최우선적으로 조사하라 하고 꼬리를 붙이라 전하게. 놈의 실력은 최소 탄기 이상. 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이어야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주위 경물들이 세차게 지나갈 정도로 빠르게 달리는 양소방은 진무를 떠올리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놈, 네놈에 대해 알아야겠다. 어찌 그들의 무공을 사용하는지도.'

진무의 예상대로 본격적인 사생활 침해가 시작되었다.

49화

"뭣이?"

암천대주 여위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학이 일해상단으로 끌려갔습니다."

뿌드득.

수하의 말에 여위강이 이빨을 거칠게 갈았다.

대공자 제갈각의 부탁은 무당 일대제자 진무의 실력을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탄기의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은신과 변장이 가장 뛰어난 수하인 일보십변 주학을 보냈다.

그런데 감시 중에 들킨 것도 모자라 잡혀 갔다고 한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병신 같은 놈. 제갈분가의 최정예라는 놈이 고작 일대제자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하고 임무에 실패해?"

속이 끓다 못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어찌할까요?"

"...."

수하의 말에 여위강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일해상단은 무당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대공자의 부탁인지라 가주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진행한 일이었다.

"지금 일해상단에 머무는 무당의 제자가 누구인가?"

"진무를 제외하고 청운검룡 진궁 이하 이대제자 아홉입니다."

"음."

만만하지 않은 전력이었다.

이대제자들이야 몇이라도 상관없었으나, 진궁의 존재는 무척이나 성가셨다.

'망할.'

여위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안 그래도 천수패 토벌과 관련해 제갈분가가 뒤에서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단강구에 퍼진 참이었다.

제갈무린은 본가의 호된 질책을 받았고, 외당의 사람들이 불철주야로 뛰어다니며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막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제갈분가의 암천대가 수적 토벌의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진무를 은밀하게 감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불호령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무당에서 이를 문제 삼게 되면 단강 제갈분가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이로 인해 본가의 장로직에 거론되고 있는 분가주 제갈무린의 앞길이 막힌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제갈각은 물론 자신의 모가지까지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주학이 제갈세가 소속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반드시 구해야만 했다.

또한 그는 현기 초입의 무인. 그런 주학을 잡아갔다면 어중간한 무인으로는 턱도 없을 터였다.

"암천십호를 불러라. 내가 직접 움직여야겠다."

"예? 가주님의 승인도 없이 말입니까?"

"멍청한 놈. 이 마당에 승인을 받잔 말이냐?"

"하지만...."

"시끄럽다. 오늘 밤 자정을 기해 곧장 일해상단에 잠입한다."

"예. 대주님."

수하는 못내 꺼림칙했으나 명령이 내려졌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책임은 본인이 질 테니까.

* * *

달이 구름에 가린 밤.

단강구 도심에 자리 잡은 일해상단의 장원이 깊은 잠에 빠져든 사이.

'대주! 이상한 놈들이 접근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철골개는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

방금까지 일해상단을 향해 은밀하게 다가오던 자들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뛰어난 자들이다. 기척을 감추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자들이었다.

'설마 일해상단을 감시하는 자들이 우리 말고 또 있나? 아니면 적?'

일해상단의 담벼락에 은신하고 있는 자들.

그들은 단강구 개방 분타의 감시조였다.

중원 거지들의 우상인 무풍개 양소방의 명령으로 분타주는 곧장 개방의 거지들에게 비상 동원령을 내렸다.

거의 백여 명에 가까운 거지들이 '진무'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하는 사이, 철골개와 감시조는 일해상단 외곽에 배치되었다.

진무의 무위가 뛰어남을 고려해 오결인 자신은 물론 분타 내에서도 선별된 자들만 끌고 온 참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진무는 곧바로 잠을 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인물들로 인해 철골개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뭐 하는 놈들이지? 감시하라는 명령 외에는 듣지 못했는데.'

야행복을 입고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으니 정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자신들이 그들을 발견하는 순간 그들 역시 자신들을 발견할 것 같았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직 저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일단 상대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검은 야행복을 입고 일해상단으로 접근하던 인물들.

그들은 다름 아닌 여위강을 비롯해 암천대에서 가장 뛰어난 열 명의 고수였다.

그중 현기에 오른 자만 셋.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모두가 잠에 빠져 있을 테니 신속히 담을 넘어 주학을 구해 빠져나온다. 때마침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져 있으니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지!'

담을 넘으려던 여위강은 섬뜩한 느낌에 재빨리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의 신호에 암천십호라 불리는 무인들이 순식간에 어둠에 몸을 숨겼다.

'이, 이게 뭐지?'

그의 기척에 걸린 미세한 느낌.

동류의 냄새다.

은신자.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일해상단의 담벼락 곳곳에서 느껴져 왔다.

고수다.

그것도 자신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고수들이 분명했다. 여위강조차도 그들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열 명 이상?'

설마 함정에 걸린 것인가?

무당의 도사들이 자신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무당의 도사들이 은신을 할 리는 없는데.

갑작스러운 긴장감에 여위강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하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급한 것은 자신들이었다. 주학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해 구해야 했기에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망할. 어쩔 수 없지.'

여위강은 곧바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신속히 처리한다.'

퓨슛!

짙은 어둠 속,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은 빛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땅!

쇳소리가 거칠게 울렸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살수나 은신자들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그 어떤 특징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야행복을 입고 얼굴까지 복면으로 가렸으니 신분을 알 수 없고, 무기나 무공마저도 전혀 다른 것을 사용하기 마련이었다.

즉,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복면을 벗겨 신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큭!"

암기에 맞은 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 위로 수 개의 칼이 날아갔다.

따다당!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나 칼날을 쳐 냈다.

야행복과 야행복의 싸움.

누가 누구 편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그저 자신들만 은밀한 표식을 통해 알 뿐이었다.

싸움이 고조되자 그들은 더 이상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서로의 실력이 비등했기에 그들은 은신보다는 서로의 무공에 더욱 집중했다.

하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행인이다! 기척을 숨겨라!'

멀리 일해상단의 담벼락에 취객 하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자 양측이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모습을 숨겼다.

이내 언제 싸움이 있었냐는 듯이 적막감이 흘렀다.

"우웩!"

취객은 골목 한곳에 멈춰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 취한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파파팍!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된 것처럼, 잠시 숨을 고른 은신자들은 또다시 전투를 이어 갔다.

난전에 난전이 거듭되었다.

피가 튀고, 야행복이 갈가리 찢어져 나갔다.

검술에 경공술, 은신술까지 너무도 비등했기에 그들의 싸움은 새벽이 가까워 올 때까지 팽팽하게 이어졌다.

* * *

챙, 채챙!

"...."

자고 싶다.

챙, 채챙.

아직 더 자고 싶은데 미세하게 들려오는 쇳소리가 진무의 신경을 거슬러 왔다. 고요함에 물든 시간이라 더욱 잘 들렸다.

애써 귀를 막아도 보았지만.

땅, 챙! 채챙!

한번 들려온 소리는 점차 크게 고막을 울렸다.

"이런 쌍!"

결국 진무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벗어 두었던 도포를 걸쳤다.

"어떤 새끼가 이 시간부터 검술 수련을 하고 지랄이야!"

안 그래도 지난밤에 양소방 그 거지새끼를 만나 잠을 설친 진무였다.

씨발, 니들은 오늘 뒈졌다.

진무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기 위해 방문을 열고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러곤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방향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래, 아주 우는 사람 뺨을 때리는구나. 어떤 새낀지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데 정원도 아니고, 마당도 아니고....

담벼락?

진무는 의아한 표정으로 쇳소리가 울려 퍼지는 담벼락 위로 몸을 휙 날렸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복면을 쓴 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상당히 지쳐 보였고, 입은 상처도 많아 보였으나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얘들은?

황당하기만 한 광경에 진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압!"

"차앗!"

잠시 휴식이 끝났는지 또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그런데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솜씨의 검술. 형(形)과 변(變)을 제외한 실전적인 검이었다. 그런 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초식을 쪼갤 줄 알아야 한다. 엄청난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고수들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몇몇은 선명한 검기를 뿌리고 있는 것이, 현기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거의 근접했을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실력이 너무나 비등하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뭘까? 어디서 이런 자들이 떼거지로 나타났단 말인가? 그리고 왜 남의 집 앞, 아니 옆에서 싸우고 지랄들일까?

그런데 구경을 하다 보니 제법 재미가 있었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강 건너 불구경과 남 싸움 구경이라지 않는가. 잠을 깨웠다는 이유로 손봐 주려던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는데 복면인 중 하나가 지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하고 놀랐다.

"지, 진무?"

그의 말에 갑자기 싸움이 멈췄다.

"응? 니들 날 알아?"

눈빛을 보아하니 두 패거리 다 진무를 아는 눈치였다.

나 그렇게 유명 인사였나?

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업적이나 평판이 올라갔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자신을 알아본 자들이 복면을 쓰고 있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었다.

일해상단의 근처에서, 자신을 알고, 복면을 썼으며, 칼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니들 뭐 하는 새끼들이냐?"

진무의 몸에서 스산함을 머금은 푸른 선기가 피어나고,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생겨났다.

"...."

"...."

진무의 질문에 대치하고 있던 둘이 서로를 쳐다보며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제길! 후퇴한다!"

둘이 동시에 같은 소리를 외치고, 그들의 수하가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흠, 이런 걸 어부지리(漁父之利)라고 해야 하나?

진무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그들은 긴 싸움으로 지쳐 있었다. 또한 싸움을 지켜보며 실력 파악도 대충 끝난 상태.

진무의 손가락이 엄지에 의해 굽혀졌다가 푸른 선기를 머금고 튕겨졌다.

퓻! 퓨퓻!

탄기, 검기와 동일한 기운을 쏘아 내는 경지.

의기, 기운에 뜻을 품었으니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휘어지게 할 수 있는 경지.

지금 진무의 경지가 그렇다.

두 줄기의 강맹한 푸른 선기가 복면인들 중 딱 둘을 향해 날아갔다.

기운을 감지한 듯이 검을 들어 쳐 내려 했으나, 휘어진 기운이 그들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큭!"

"으윽!"

굳이 모두 잡을 필요는 없다. 이미 저들끼리 싸우다 힘이 빠진 놈들 아닌가.

진무는 두 패거리 중에서 가장 센 두 놈만 잡기로 했다.

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