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load Chereads APP
Chereads App StoreGoogle Play
Chereads

CASADOCONELDRAGONROJOALQUEMATE

Kakao_Cuenta_6269
--
chs / week
--
NOT RATINGS
1.1k
Views
VIEW MORE

Chapter 1 - 1-10

1화. 약혼자를 살해하다

증오심 하나로만 대마법사가 된 유일무이한 인물이 있었다.

그 이름은 페르다 로스노바.

기사 가문인 로스노바에서 삼남으로 태어난 그는 유독 몸이 허약했다.

첩실의 자식에다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갈색 눈동자가 아닌 푸른 눈동자를 지녔기 때문에, 로스노바의 고용인들조차도 페르다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끝내 그의 아버지인 에렘발트 로스노바는 페르다가 18세가 되는 해에 그에게 한 가지 소식을 안겨 주었다.

"너와 발드로바 공왕과의 약혼이 준비되었다."

단순한 약혼식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귀족들에게 '공왕과의 약혼'이란 관용구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일종의 사형 선고였다.

이 가문에서 스스로 파면되는 것을 인정할 것인지, 죽을 것인지 선택하는 것.

"아버지의 뜻대로 나가겠습니다."

"그래."

목숨이 더 중요한 페르다는 당연히 살기를 택했고, 로스노바의 이름을 버리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어린 페르다의 마음에는 커다란 배신감이 자리 잡았다.

자신을 깔보았던 형님들이나, 고용인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역시 아버지였다.

'내가 노력하는 걸 다 알고 계셨으면서....'

이 집안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약한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매일매일 피를 토하고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연습했다.

그 모든 노력이 기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던 아버지의 시선.

그러나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그런 표정도 점차 변해 갔다.

여태 키운 것이 뻐꾸기 새끼였다는 것처럼.

급기야 집안에서 내쫓을 때는 아버지의 표정이 마치 오물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며칠이 지나도 그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용서 못 해.'

설움은 점점 분노라는 감정으로 뒤바뀌고, 복수의 불길이 되어 타올랐다.

'나를 업신여기고, 깔보는 것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페르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페르다는 자신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단전에서 마나가 하나의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있는, 일명 서클이 뚫리는 순간이었다.

페르다 로스노바가 가문에서 쫓겨나는 그날, 그는 마법사가 되었다.

* * *

마법사로 각성하는 것은 축복이다.

이 세르데스 대륙에서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르다처럼 18세에 각성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너무나도 늦었기 때문이다.

모든 마법사는 내면의 힘을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 개념을 완전히 숙달하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단련해야만 했다.

어릴 때 하지 않으면 늙어서 몇 배나 고통받으면서 그 개념을 익혀야 했다.

그랬어야 했으나 페르다에게는 늦은 각성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마나를 끌어 올리는 원동력은 바로 증오와 복수심이었다.

-저 나이를 처먹고 마법사를 하겠다고 설쳐 대다니.

-시키는 건 뭐든지 한다고 했으니, 졸업까지 쓸 만한 노예 하나 생겼다 생각하면 되지.

그 원동력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그를 무시하는 선임 마법사들, 그리고 어린 후배들이었다.

시기가 늦은 만큼 그에게 그 원동력은 주위에 널리고 널렸다.

'그렇게 백날 짖어 봐라. 너희들이 내 발가락을 구석구석 핥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강해지고 싶은 열망과 복수를 향한 집착은 꺼지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내 그는 장래가 유망한 선임 마법사들을 뛰어넘은 것은 물론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마저 가볍게 뛰어넘었다.

한동안 그의 발가락은 먼지 낄 틈도 없이 반질반질했다.

그렇게 페르다가 대륙에서 100명도 되지 않는 6서클 개방자, 통칭 아크 메이지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본격적인 복수극이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을 잔혹하게 내쳤던 로스노바 가문에 돌아와 그대로 모두를 죽였다.

자신을 모욕했던 고용인들에게 칼을 쥐여 주고 서로를 죽이게 했다.

장남과 차남은 이간질시켜 서로 증오하게 만들었고 끝내 공멸하였다.

그리고 가장 골이 깊었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게끔 했다.

자신이 쌓아 올리고, 지켜야 할 것이 비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에 에렘발트는 끝내 미쳐 버리고, 몇십 년은 더 늙은 것처럼 노쇠해졌다.

그는 이승을 떠도는 유령과도 같은 폐인이 되었다.

그렇게 로스노바 가문과 연관된 것들이 페르다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다.

'복수는....'

페르다가 그토록 갈망하던 복수가 성취되던 순간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기에 이미 그는 너무 먼 강을 건너고 말았다.

복수를 위한 힘이 필요했던 페르다는 이제 힘을 위한 복수를 찾기 시작했다.

'복수할 게 없으면 만들면 된다. 증오할 게 없으면 만들면 된다.'

그렇게 억지로 모든 것을 증오하고 복수하며 페르다는 점점 강해졌다.

뒤틀려 버린 페르다를 막기 위해 대륙 곳곳에서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시련은 언제나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으며 성장의 발판이 될 뿐이었다.

그렇게 페르다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의 나이 45세.

젊은 나이에 마나 로드라 불리는 8서클에 도달한다.

그 누구도 깔보지 못하며, 황제조차 고개를 조아려야 할 만큼 그의 힘은 막대해졌다.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었음에도 복수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페르다는 신의 영역까지 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5년을 걸쳐서 연구한 끝에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궁극의 재료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드래곤의 심장이었다.

마침 그의 증오심이 닿는 드래곤이 하나 있었다.

'발드로바 공왕.'

자신의 약혼자.

에렘발트가 페르다를 쫓아내기 위한 구실.

그 존재의 정체가 바로 레드 드래곤이었다.

* * *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은 것이로군.

그 말을 한 것은 기이하게도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드래곤이었다.

붉은 비늘에 멋들어진 뿔.

위압적인 눈동자와 세상을 뒤덮을 듯한 날개는 그것의 위상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비늘은 군데군데 벗겨졌으며, 뿔은 부러지고 꺾여 그 안에서 새빨간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라를 우습게 멸망시키는 드래곤을 이렇게 몰아넣은 것은 다름 아닌 단 한 명의 마법사였다.

-설마 짐의 약혼자가 짐을 죽이기 위해 올 줄이야.

페르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허세에 가까웠다.

드래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만큼, 그도 몸이 온전하진 않았다.

"얌전히 내 손에 죽는 편이 좋을 거다, 발드로바."

-짐은... 폭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나, 요 수십 년, 그대가 태어나기 전에도 짐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에게도 해를 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네가 그런 적의를 보이는 건지 짐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아무것도 안 했다고?"

발드로바의 담담한 말투가 속 편한 사람의 말투처럼 들렸다.

페르다는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넌 내 복수를 시작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약혼식의 희생자가 되었을 무렵부터 페르다는 모든 것이 뒤틀렸다.

페르다는 열렬하게 감정을 토해 냈다.

"네년 때문에...! 네년이 약혼자를 찾는 쓸데없는 욕심 때문에 내가 가문에서 쫓겨날 명분이 완성된 거다!"

-그것이 짐... 때문이냐?

"그래! 네년이 쓸데없는 욕심을 부렸기에! 포악한 용 주제에 인간을 반려로 들이려 한 그 욕심이 불행을 낳은 것이다, 알고 있나!?"

페르다가 거칠게 숨을 내쉬다가 비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동시에 감사하고 있다. 그 덕에 나는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가....

발드로바의 안면이 묘하게 꿈틀거린다.

화가 난 것인가?

마지막 발악을 준비할지도 모른다.

페르다는 외부에 있는 마나를 끌어모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방금 전의 증오를 표출함으로써 마나가 쌓였다.

-그래, 그런 것이로구나. 이해했도다.

발드로바의 거대한 몸이 움직였다.

발톱을 보였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기사들을 찢어 버리는 날카롭고 단단한 칼날.

페르다는 반사적으로 마법진을 준비했다.

늦긴 했지만, 이걸로 동귀어진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발톱을 들었지만, 페르다를 향하지 않았다.

발톱이 파고든 곳은 그녀 자신의 가슴이었다.

푸욱!

페르다는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자해의 의미가 뭐지?

질긴 가죽을 그대로 찢어 속에 있던 내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대의 마법에는 짐의 심장이 필요하다 했지?

뚜둑—!

혈관이 끊어지는 소리.

페르다는 이해했다.

그녀는 자기 심장을 파괴하려는 것이다.

"안 돼!"

페르다가 마법을 그녀의 안면에 난사했다.

"안 돼, 이 더러운 년아! 당장 멈추지 못해?!"

페르다는 그녀가 자기 심장을 파괴하게 둘 수 없었다.

9서클에 도달할 수 있는 단 한 번뿐인 기회다.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

머리를 지키는 비늘들이 파편이 되어 흩날린다.

그러나 발드로바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혈관과 근육을 찢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린다.

-짐의 심장이 필요하다고 하였지?

그렇게 발드로바의 발톱이 내장 속에서 뽑혔다.

그녀의 발톱을 따라 나온 것은 페르다의 머리보다 커다란 살덩어리.

"...심장?"

아주 온전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 것은 파괴가 아닌 적출.

-가져가거라.

반쯤 사라진 발드로바의 머리가 그렇게 말했다.

평소의 페르다였다면 고맙다고 주워 갔을 것이다.

그렇게 뒤틀린 페르다조차도 그녀가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그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한 거냐?"

페르다는 질문을 던졌다.

"네가 움직였다면... 나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을 텐데? 그걸 몰랐을 리가 없지 않나?"

-짐이 마지막으로 발악한다면.... 틀림없이 그대 또한 죽게 되겠지.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지 않은 이유가 뭐지?"

-그대가 짐 때문에 불행해졌기 때문이니라.

페르다는 그 순간에도 얼어붙어 있었다.

발드로바는 더 이상 목을 가눌 힘도 남지 않았다.

-짐은... 오래전부터 나 자신이 싫었다.

담담한 말투 속에서 진득한 혐오감이 묻어났다.

-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포악한 피가 너무나도 싫었다. 이유 없이 분노하며,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지닌 나 자신이 싫었다. 가장 싫은 것은 그것들이 사람들을 겁먹게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에 색채가 옅어졌다.

눈 속에서 무언가 부풀어 오르다가 그대로 볼을 타고 또르르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드래곤의 눈물은 인간과 다르다.

드래곤은 슬픔 따위로 눈물을 흘릴 만큼 감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슬픔으로 빚어진 것만 같았다.

-짐이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데, 살아서 행복을 바라다니.... 짐의 미련한 꿈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쳤구나.

"...."

-짐을 말미암아 불행해졌으니, 필멸자여, 짐의 약혼자여, 그대는 짐으로 인해 부디 행복하길 바라마. 그것이 짐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니 말이다.

마지막 숨과 함께 생명이 꺼져 간다.

대륙의 숨은 폭군, 발드로바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페르다는 조용히 눈을 감은 발드로바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분노로 마법사가 된 이래로 난생처음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어째서 이토록 찝찝한 거냐?'

페르다는 무심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수많은 시체를 넘어서 이곳으로 온 페르다였다.

자신을 훼방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였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모조리 빼앗으며 힘을 키웠다.

그는 스스로도 양심과 공감이 결여된 망가진 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죽음이 어째서인지 페르다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내린 저주처럼.

'생각하지 마라, 페르다.'

앞으로 나아가라.

쟁취하고자 했던 것을 취해라.

그녀가 꺼내 놓은 물건을 집어 들었다.

드래곤의 심장.

모든 마법사의 꿈인 9서클로 도달할 수 있는 근원.

대마법사에서 존재를 넘어선 데미갓의 반열로 들 수 있는 물건이다.

이걸 흡수한다.

그리고 모든 것에 복수한다.

이유조차 까먹어 버린 모든 것에.

페르다는 그 심장에 들어 있는 에센스를 흡수했다.

고대의 시절부터 살아온 드래곤의 에센스가 혈관을 타고 흐르자,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막대한 힘이 흘러들어 옴과 동시에 페르다는 이변을 느꼈다.

'이건....'

발드로바의 일생을 느낄 수 있는 감각.

'그녀의 감정인가?'

그 감정은 저항할 새도 없이 페르다의 일부가 되었다.

"아...."

페르다는 탄성을 내질렀다.

놀라울 만큼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힘의 원동력이었던 증오와 복수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피가 페르다의 정신을 맑게 만든 것인가?

'아니다.'

그 심장에서 느낀 감정은 부정에 가까웠다.

페르다의 증오심이나 분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연의 나락 끝에 선 듯한 감정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왔으나,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던 레드 드래곤.

주체할 수 없는 힘의 분노, 적악룡, 용 살해자....

악명을 기반으로 한 칭호들이 그녀의 이미지에 덧씌워지면서 발드로바는 완전한 폭군이 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세월을 쌓아 가며 축적한 저주들.

그러나 발드로바는 그 하찮은 것들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감추는 것을 택했다.

모두를 사랑했기에 외로움과 서러움을 꿋꿋하게 견뎠다.

그렇기에 페르다의 머리가 맑아진 것이었다.

페르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분노와 증오가 너무나도 하찮아 보였기 때문에.

"아아...."

페르다의 입술에서 작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마법사가 된 이래로 단 한 번도 제정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복수에 눈이 멀어서 끝내 그 힘에 집어삼켜져 모든 것을 파멸시켰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나?

문득 자신의 어릴 적에 꾸었던 꿈을 되뇌어 본다.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대마법사가 되는 것이었던가?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이었어.'

그런 소박함을 위해서 노력했던 자기 모습이 이제는 너무나도 거대해진 페르다의 양심을 잔혹하게 도륙한다.

"아아...."

페르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의 앞에는 서클이 그려졌다.

서클이 하나씩 완성되면서 그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1서클을 뚫었을 때는 가문에서 쫓겨났을 때의 슬픔.

2서클은 재능이 없다면서 비웃음을 들었을 때의 분노.

열등감, 원망, 질투, 배신감....

페르다의 서클들은 전부 부정된 감정으로 쌓아 올린 것들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배신도 서슴지 않았고, 강해지기 위해서 박쥐 같은 짓을 반복했다.

그렇게 페르다는 8서클의 대마법사가 되었다.

그렇게 9서클에 도달한 그가 느끼는 감정은.

'허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화가 났다.

발드로바, 그 여자가 자신이 여태까지 했던 모든 것을 실수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멍청한 백치 같은 년...."

페르다는 그녀를 원망해 보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원동력이 되는 느낌은 없었다.

스스로도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멍청한 것은 그녀를 원망했던 자신이었다.

애초에 가문에서 추방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녀는 그저 구실일 뿐이었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녀에게 화풀이한 것이었다.

발드로바는 바보 같은 궤변을 자신의 죄로 인정해 버렸다.

그리고 한 명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페르다는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페르다의 마음과 다르게 9서클의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9서클에 도달한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주문은 딱 한 가지.

'소원.'

희망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는, 만물의 섭리를 거스르는 절대의 결정체였다.

그저 말 한마디면 되는 심플한 주문이다.

그토록 원하던 것을 손에 쥐었으나 페르다는 목구멍이 꽉 막힌 듯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십 년 동안 복수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던 자신을 책망하고,

앙갚음하기 위해 모든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자신의 치졸함을 혐오하고,

그렇게 끝내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그 감정은 가슴이 이해했다.

"의미가 없군...."

마법진이 환하게 빛났다.

빛이 완전히 사그라지자, 9서클의 대마법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르다?"

"...."

"페르다."

아니, 의식이 돌아왔다.

환한 빛이 걷히고 자신의 부르는 목소리에 페르다는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피를 흘리던 드래곤이 아닌 웬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페르다? 듣고 있느냐?"

"...예?"

"예는 무슨. 이 아비가 말하고 있었는데, 여태까지 멍하니 있기만 한 거냐?"

앞에 있는 중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페르다는 이 남성이 누군지 알고 있다.

'에렘발트 로스노바.'

한때는 아버지라고 정겹게 부르던 존재.

페르다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정정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죽어 사후 세계에 온 것일까?

그런 것치고는 이 모든 것에 기시감이 들었다.

'여긴... 그런 건가?'

페르다는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생전 자신과 이야기를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던 아버지와 단둘이 있을 때.

그때는 딱 한 번뿐이었다.

"너와 발드로바 공왕의 약혼이 결정되었다. 나라에서 결정된 사항이니, 군말하지 않고 따랐으면 좋겠구나."

발드로바 공왕과의 약혼.

'나는 죽은 게 아니라 이 시절로 돌아온 건가?'

불행의 시작이라 여겼던 그 시절.

걷잡을 수 없는 복수심의 시발점이 되었던 그때로 말이다.

'어째서?'

아직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은 이미 알고 있다.

그 허무함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바랐는지 말이다.

"허."

페르다의 입에서 어색한 탄식이 튀어나왔다.

"이 자식이, 내가 말하고 있는데 한숨을 쉬고 있냐?"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아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말해 봐라."

"발드로바 공왕과 약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너도 잘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이 집에서 꺼져라.

그렇게 이해한 페르다가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너도 마음고생을 심하게... 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보는 아버지.

"바, 방금 뭐라고 그랬냐?"

페르다는 앞에 놓인 서류들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더 대답했다.

이 회귀의 의미는 내가 생전에 하지 못했던 것과 직면하는 것.

"하겠습니다, 그 약혼."

폭군 발드로바와 약혼을 맺는 것이었다.

2화. 다시 돌아온 것인가

"동생이 발드로바 공왕과 약혼을 진행한다고?"

차남, 후렌 로스노바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회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로스노바 가문에서 지력을 맡고 있으며 차기 가주가 될 사내였다.

그는 최근 제국에 볼일이 있어 그의 아버지인 에렘발트의 대리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예."

그 일을 보고했던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는데? 그 자식이 뭐 잘못 이해한 거 아냐?"

"무슨 의미이신지는 다 알고 있는 듯합니다."

"하긴 형님도 이해하는 걸 그놈이 못 이해할 리가 없고...."

후렌은 턱을 긁적였다.

자신의 머리로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거나 아니면 떠나야 하는 이 상황 속에서 왜 그놈이 죽는 걸 택한 거지?'

아버지에게 자신이 사나이라는 것을 어필하려는 수단인가?

그러나 제국에서 결정된 사항이었으니, 거부한 게 아니라 받아들인 이상 철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건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저 그냥 이 집 나갈게요.' 하면, 제국 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여 머리와 몸이 분리될 것이다.

"그래서 그놈은 지금 뭐 하는데?"

"오늘 중으로 출발할 예정이라 지금 출발 준비를 하시는 중일 겁니다.

"그래? 그러면 형제끼리 이야기할 시간은 조금 남아 있겠군."

그 말을 들은 집사는 속으로 기가 찬다는 표정을 했다.

첩실의 자식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것을 보고 제일 먼저 혐오하고 따돌렸던 건 다름 아닌 후렌이었다.

그가 형제를 운운하는 게 우스운 일이다.

후렌은 뒷짐을 지고 정원을 거닐 듯이 복도를 걸었다.

페르다의 방 앞에 도착하자, 그 문 앞에는 시중을 들어야 할 메이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왜 시중도 들지 않고 밖에 서 있는 게냐?"

메이드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여 사정을 설명했다.

"그, 그게 저희가 시중을 들어 드린다고 하였는데, 밖에 있으라 명령하셔서...."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냐?"

"예...."

"한심한 것들. 저 스스로 옷을 입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그놈도 꼴에는 귀족인데, 그걸 어떻게 한단 말이냐?"

후렌은 짜증을 부렸지만, 속으로는 옳다구나 쾌재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막상 당일이 되니깐 하기 싫다 이거지?'

후렌은 목청을 가다듬고 문을 벌컥 열었다.

"페르다! 네놈,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무슨...."

화를 내려고 했던 후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페르다의 모습은 침대에 퍼질러져서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모습.

그러나 지금 후렌이 보고 있는 것은,

'스스로 옷을 입고 있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단추를 여미고 있는 페르다의 모습이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불쑥 들어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형님?"

외려 페르다가 무례함을 지적해 버릴 수 있게 틈을 만들어 버렸다.

"네가 침대에 틀어박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제가 어찌 늑장을 부리겠습니까?"

"그럼 어째서 하인들을 밖에서 대기시키고 있느냐?"

"옷 정도는 스스로 입을 수 있으니 그런 것일 뿐입니다. 더 이상 메이드의 도움도 받지 못할 테니."

담담한 말투.

시선은 거울에 고정한 채로 자기 모습을 스스로 점검하고 있었다.

후렌은 그런 페르다를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이 자식 내가 알던 그놈이 맞나?'

페르다는 어떤 놈이던가?

비굴하게 웃으면서 살아남으려 했던 인간의 탈을 쓴 기생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는 중후한 중년과도 같이 차분하고 침착하다.

'페르다 주제에....'

난생처음 페르다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의 감정을 무마하려 후렌은 헛기침을 하고 주제를 돌렸다.

"크흠, 그래. 네가 발드라다 공왕과 약혼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들었다."

"예."

"네가 책만 읽었다면 그 약혼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을 텐데?"

"잘 알고 있습니다. 가문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꺼지라는 소리를 대신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뭔 말을 그렇게 하냐? 아무리 그래도 로스노바에서 돈 한 푼도 쥐여 주지 않고 보내겠나? 그걸로 홀로서기 정도는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페르다는 생각했다.

돈이라....

그래, 돈은 쥐여 준다.

얼마만큼?

10년 동안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문제는 이 10년이 서민들을 기준으로 10년이라는 것이다.

귀족 생활에 익숙한 페르다에게는 사흘 만에 탕진해 버릴 만큼 소액이었다.

'뭐, 그 돈도 나는 스승에게 전부 바쳤지만.'

좋아서 바친 것은 아니다.

늦깎이 제자를 받아들일 마법 스승은 돈을 밝히는 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가르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그 양반은 지금도 돈과 여색을 밝히고 있겠군.'

페르다는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픽하고 콧방귀를 꼈다.

'이 자식이 웃어?'

후렌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아니면, 그가 웃을 만큼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봐도 네가 뭘 잘못 아는 것 같구나. 왜 폭룡과 약혼한다는 게 죽는 건지 아냐?"

"왜 모릅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첫 약혼자가 찢겨 죽지 않았습니까?"

발드로바의 첫 약혼자는 제국의 3황자. 그리고 현 황제의 삼촌뻘 되는 인물이다.

머리가 비상하고 외모도 출중하였고, 인망도 좋기로 유명했다.

차기 제왕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그것을 스스로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 3황자는 3등분을 넘어서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묵사발이 나 버린 것이다.

공왕에게 간 지 하루도 되지 않아 그렇게 됐다.

그 사건을 기반으로 세간에는 이렇게 해석했다.

-발드로바의 약혼자가 되어야 할 인간은 3황자 이상의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그 이후로 발드로바가 다시 새로운 약혼자를 찾았지만, 그 누구도 지원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완벽에 가깝다는 3황자인데, 그 자리를 채워 줄 만큼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약혼자 선별은 해야 하니 매년 귀족 중 하나를 뽑았다.

문제는 전부 도망을 가 버리거나 스스로 호적을 파겠다고 선언하고 나가 버리면서 나가리가 되었고.

그게 점점 다른 의미로 변질이 되면서 귀족들이 자식을 내쫓을 때 쓰는 구실이 되고 말았다.

"그 3황자가 해내지 못한 걸 네가 할 수 있다고 믿느냐?"

할 수 있느냐고?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최연소 8서클 대마법사가 되어 능력을 입증한 페르다도 딱 잘라서 말할 만큼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그런 확신을 가지면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뭐,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후렌은 그런 페르다를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후렌은 질린다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네가 뭘 하든 상관은 없지만, 도망은 치지 마라."

"...."

"네가 도망치는 그 순간, 로스노바 가문에서 사람들을 풀어 네 목을 쳐 버릴 거다. 알아들었나?"

평소라면 저 얼굴에 겁을 잔뜩 먹었을 페르다였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다는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은 채로 후렌을 응시했다.

"형님."

후렌은 그 눈빛에 순간 압도당하고 말았다.

"뭐, 왜?"

"아랫도리나 잘 간수하십쇼. 첫째 형수님 볼 때마다 그 음흉한 시선,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후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뭣?! 너, 너, 그게 무슨...!"

"한 대 치고 싶어도 참아 주십쇼. 드래곤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 아우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페르다가 후렌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지나쳤다.

후렌은 어른스럽다 못해 여유가 느껴지는 페르다를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 * *

"도련님을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마지막 길을 반겨 주는 집사가 눈물을 지었다.

페르다는 그 눈물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대는군.'

만약 저 눈물에 의미를 부여하면 슬픔보다는 해방에 가까울 것이다.

귀족 가문에서 능력도 없고, 쓸모도 없는 도련님을 모신다는 것은 하인으로서 치욕적인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놈도 내 밥에다가 장난을 쳤던가?'

그 당시에는 몰랐었다.

바닥을 매끄럽게 만들어서 넘어지게 만든다든가, 밥을 먹다가 중간에 토하는 건 유약한 자신의 몸 때문이라 생각했었으니까.

설마 하인들이 그런 짓을 했을 것이라 상상은 했었을까?

평소라면 증오와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기에 충분할 만한 일이었다.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는 죽었다는 것을 인지도 못 하게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던가.'

그러나 지금의 페르다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타오르는 불꽃은 사라지고, 평온함만이 자리를 잡는다.

이미 한번 복수를 마쳤으니, 그곳에는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페르다는 집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그래, 수고가 많았군. 나 같은 놈을 오랫동안 보살피느라 말이야."

"...예?"

눈물을 짓는 연기를 하던 집사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내가 없는 로스노바 가문을 잘 부탁하네."

"아, 예...."

페르다는 그대로 발을 돌렸다.

죽으러 들어가는 사람답지 않게 너무 침착한 모습이었다.

페르다가 그대로 집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인사했다.

"도련님이 목적지에 가실 동안 모시게 된 마부 한스라고 합니다."

"마부?"

"예, 그렇습니다."

페르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타고 가는 건 마차인가?"

"예? 아, 그렇습니다. 마차지요. 마차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요."

"흠, 그렇군."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정겨운 느낌이구나 싶어서 말이야."

"아, 그러시군요. ...예?"

아무리 생각해도 마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푸르릉!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이군, 이건.'

페르다가 기억하는 마지막에서는 마차가 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마차라는 개념이 모호한 중산층들을 위한 물건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빈자리를 마력 자동차라는 게 자리를 잡게 되니까.'

처음에는 전통성이 사라진다는 이유로 반발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마차와는 차원이 다른 통제력과 공간의 용이함에 귀족의 물건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다가 하늘 마차라는 것도 나오게 되고, 뭐 다양하게 많아지지.'

그 모든 것은 마도 공학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진 물건들이었다.

'내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복수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페르다에겐 별 감흥이 없는 분야의 마법이었다.

'마법....'

페르다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9서클에 도달하여 소원 마법을 써 보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9서클의 대마법사가 아니었다.

'허약하고 저평가만 받던 페르다.'

당연히 지금은 마법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가 집을 나오게 되면서 마법을 각성하게 되지만, 그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분노와 복수심이었다.

지금의 페르다에겐 끓어오르는 분노와 칼날 같은 복수심이 없었다.

개화하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이젠 그러고 싶지도 않아.'

돌이켜 보면 페르다가 구사하는 마법은 마약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만, 점점 역치가 높아지면서 주체할 수가 없게 되는 그런 마약.

미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지만, 지금은 다시 경험하기 싫은 끔찍한 추억이다.

페르다는 지금의 씁쓸한 평온함이 좋았다.

'그렇다고 마법을 쓰지도 않은 채로 살고 싶지는 않고....'

마법이 없으면 역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가령 혼자서 옷을 입는다든가.

3서클에 도달하게 되면 마법을 부리는 것으로 간단한 옷을 입는 게 가능해진다.

4서클에선 복잡한 예복의 구조를 파악해서 마법이 스스로 옷을 입히게끔 지시할 수도 있다.

'혼자 사는 데 지장이 없어지려면 적어도 4서클 정도는 도달해야겠어.'

4서클을 뉘집 개처럼 읊는 모습이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리라.

하지만 당장 느껴지는 감정은 역시 막막함이다.

이미 한 번 9서클이라는 경지에 올랐으나, 페르다가 익히 알던 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분노와 복수심이 없는 페르다가 마법을 깨우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 나으리...!"

자문하기 무섭게 겁먹은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도, 도착했습니다요!"

* * *

마차가 선 곳은 숲 한가운데였고, 앞에 트인 도로 앞에는 표지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앞은 공왕의 영역이니, 이 앞의 출입을 엄금한다.

마차가 갈 수 있는 것도 여기가 끝이다.

"수고했네."

페르다는 마차에서 내렸고, 마부는 가지고 온 짐을 내리고 옆에서 기다렸다.

"이제 가 보도록 하게."

"그래도 배웅 오는 분을 기다려야...."

되지도 않는 오기를 부리는 모습.

도망치는 게 아닌지 감시도 하라고 명령받은 것이 틀림없다.

"곧 있으면 이곳에 드래곤이 올 걸세."

"드, 드래곤 말입니까?"

"아마, 드래곤 자체는 아니고 피를 이어받은 부하, 스폰일 게야. 하지만 자네 같은 사람들에겐 그냥 드래곤이나 다름없지."

마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목젖이 꿀렁거렸다.

페르다는 말 쪽을 턱짓했다.

"자네가 드래곤을 보고 견딘다 해도 저 짐승들은 못 견딜 거다. 말들이 날뛰어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면 자네만 손해 아니겠나?"

"아아...!"

"그러니 잘 들어갔다고 보고하고 돌아가도록 하게. 죽으면 말짱 도루묵 되지 않겠나?"

"아, 알겠습니다."

마부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마차 뒤에 올려놓은 커다란 가방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럼 소인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나으리!"

지키겠다고 한 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를 끌고 돌아갔다.

어찌나 빠른지 마차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페르다는 딱딱한 가방을 의자 삼아 깔고 앉으며 기다렸다.

"공왕의 영지라...."

잠시 후, 느닷없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페르다가 고개를 들어 어둑한 숲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메이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은발 머리의 어린 여급이었다.

겉모습에 속아선 안 된다.

그녀는 드래곤 스폰이다.

"페르다 로스노바 님 되십니까?"

그녀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래."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3화. 내가 원하는 것은

-제국이 정복하지 못하는 건 없다.

세르데스 대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중부.

그곳을 기점으로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아르켄 제국의 슬로건이었다.

제국 내 사람들을 심취하게 만드는 것은 아주 훌륭했지만, 외곽지의 경우엔 터무니없는 소리가 따로 없었다.

실제로 페르다가 로스노바 가에 있을 때는 그것이 부질없는 개소리임을 가장 먼저 교육받았다.

실제로 세르데스에서 정복하지 못하는 땅이 아주 수두룩했는데, 동부가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였다.

'마의 땅.'

동부는 한때 마왕의 출현으로 마가 들끓는 땅이 되었다.

끝내 저지되긴 했으나, 그 여파로 비정상적으로 식물들이 빠르게 자라며, 동물들은 몇 배나 흉포해졌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마의 땅이었다.

발드로바는 그 마의 땅, 최전선에 있는 곳에 군림하는 왕이었다.

'그래서 마룡이라고도 불리던가?'

어찌 됐든 그녀가 세간에 인식되는 이미지는 포악한 용이기 때문이었다.

마왕의 힘을 흡수하면서 힘을 키워 나가고 있다는 둥, 몰래 몬스터 군단들을 만들고 있다는 둥.

'한 것에 비해서 악명이 너무 쓸데없이 많군.'

죽일 놈이라는 듯이 음모는 많은데 단 한 번도 그녀를 질책하거나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제아무리 바보라도 드래곤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걸 아는 것이다.

부스스스—.

난 길을 따라 걷는데,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귀에 닿았다.

페르다가 슬쩍 그곳으로 의식을 향하자,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앞장서서 걷던 여급이 선수 쳤다.

"제가 옆에 있는 이상 저놈들이 함부로 덤벼들진 않을 겁니다."

역시 몬스터였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이 여자는 눈이 뒤통수에도 달려 있나?

'뭐 그 드래곤을 모시는 시종이니,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지.'

페르다는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관찰했다.

그녀의 인상은 인형과도 같았다.

몸에 딱 맞는 메이드복이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데, 여실한 성장기 소녀의 몸이었다.

사이드 업 포니테일로 묶어 올린 머리에 몽글몽글한 선이 아가씨의 이미지를 그려 내었다.

발드로바의 영지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면 아리따운 메이드 중 하나라 생각했으리라.

"자네 이름이 뭔가?"

"루리입니다."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만나서 반갑군, 루리. 얼마나 더 걸어야 하지?"

"2시간은 더 걸릴 겁니다."

"오래 걸리는군. 네가 이곳으로 오는데, 그 정도 걸린 것 같진 않은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저 혼자선 이곳까지 오는데 10초면 충분합니다."

2시간과 10초.

효율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럼 그 방법으로 레어로 가도록 하는 게 어떻겠나?"

"그러면 페르다 님을 안아야 하지 않습니까?"

"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네. 비행하는 것 정도야 견딜 수 있으니까."

"아뇨. 제가 싫을 뿐입니다만?"

"...."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리다.

보통 시녀가 메이드복을 입고 저런 말을 했으면, 당장 귀싸대기를 날리지 않았을까?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러나 페르다는 그러지 않았다.

먼 타지에 와서 자존심을 세워서 죽는 귀족이 한둘이 아니기도 하고, 결정적인 것은 그녀의 정체였다.

'드래곤 스폰.'

드래곤 스폰은 드래곤에게 간택받아 피를 부여받는 일명 '승천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 피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으로 마법을 깨우치고, 막대한 힘을 얻게 된다.

저렇게 작은 체구라 할지라도 기사 두어 명 정도는 가뿐하게 제압할 힘이 있다.

'게다가 꼬리와 뿔을 숨길 수까지 있으니....'

보통 드래곤 스폰들과는 궤가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페르다는 묵묵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체력이 저질인 페르다에게는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걷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고, 루리와의 거리도 점점 벌어졌다.

어느 정도 떨어졌을 때, 루리가 고개를 돌렸다.

"지치십니까?"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치는군. 잠깐 쉬면 안 되겠나?"

"쉴 틈이 없습니다. 얼른 움직이시죠. 주인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은발 머리에 은색 눈동자.

앳된 얼굴과 다르게 섬뜩하게 빛나는 사안이 페르다의 발길을 재촉해 댔다.

"후우, 그러지."

페르다는 최대한 숨을 골랐다.

장가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 * *

레드 드래곤의 은신처, 레어라고 부르는 곳은 제국의 최전선이라 불리는 곳에서 조금 더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제대로 개척하지 못한 우거진 숲을 거쳐 지나가면, 홀로 서 있는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중턱 쪽에는 성도 지어져 있다.

날이 맑으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성이었다.

'그게 발드로바의 레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

하지만 발드로바는 성에서 생활하지 않았다.

그 산이 통째로 그녀의 레어였다.

입구에 도달하자, 루리가 고개를 돌려 주의 사항을 대충 읊었다.

"조금 어둡습니다만, 발밑에 아무것도 없으니 쓸데없이 호들갑 떨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겠네."

"뭐, 가끔 종유석이 떨어지기도 합니다만... 뭐, 알아서 피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루리는 건성건성 설명했다.

페르다는 그 도발에 반응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루리가 다시금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곧 그들의 앞에는 커다란 철문 하나가 가로막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조각 따위는 없는 그저 두껍기만 한 철문.

마치 문 너머에 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총력을 다해 만든 봉인문처럼 느껴졌다.

루리는 그곳에 가볍게 노크했다.

"주인님. 주인님의 약혼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대신 문 너머에서 거대한 꿈틀거림이 지면을 진동시켰다.

온몸에 있는 털이 곤두섰다.

무거운 철문을 뒤로하고 있음에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뒤에는 아주 무서운 드래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퉁—.

딱딱한 무언가로 철문을 건드리는 소리.

루리는 페르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언을 받아 오겠습니다."

그렇게 루리는 커다란 철문 옆에 난 작은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고, 페르다는 인내심을 가지며 기다렸다.

3분 뒤, 루리가 밖으로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발드로바 공왕의 전언이 있겠습니다."

루리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을 시작했다.

"그대가 이곳에 온 연유가 아르켄 제국의 명에 따라 짐과 약혼하러 온 것임을 알고 있노라. 짐이 저지른 만행을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곳에 발을 디딘 것은 칭찬하겠노라."

페르다는 좋아하지 않았다.

맥락을 보건대, 저 뒤에는 틀림없이 부정적인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페르다의 예측은 적중했다.

"그러나 짐은 그대를 억지로 끌어들여서 약혼할 마음은 없다. 그러니 그대가 온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여라."

죽으리라 생각했던 놈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순간이다.

자유의 몸이라니.

어린 시절의 페르다였다면, 틀림없이 쾌재를 부르며 절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페르다는 달랐다.

"그런가? 가서 이렇게 전언하게."

루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라님이 점지어 준 것은 맞으나, 이곳에 발을 디딘 것은 순수하게 페르다 로스노바의 의지로 행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지 않고, 약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 말을 들은 루리가 빤히 페르다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차갑고 당혹스럽게 만들지만, 페르다에겐 아니었다.

"전언하지 않을 건가?"

"...알겠습니다."

루리가 다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10분 뒤, 루리가 다시 나왔을 때는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나왔다.

"전언하겠습니다. 스스로 이곳에 온 것을 높게 평가하노라. 그 의기를 높게 평가하여 짐의 재보를 주어 기반을 마련할 자금을 주도록 할 테니. 그 돈을 받고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여라."

달그락—.

그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은 금은보화였다.

추가로 종이 한 장을 던졌는데, 공왕의 증명서 같은 것이 틀림없다.

페르다의 눈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다만, 그 황금을 돌덩어리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가서 전언하게. 나는 권력에 관심이 없고, 오직 발드로바 공왕의 약혼에만 관심이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라고 말이야."

"...."

"자꾸 얼 타는군. 공왕의 시종이 굼뜬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을 텐데?"

루리는 대답도 하지 않고 철문으로 안으로 발을 들인다.

"...하아."

아니, 잠깐 발을 담그는가 싶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사무적이던 루리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증오와 복수심을 품어 왔던 페르다는 알고 있다.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혐오감이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돌아서 나가십시오."

감정이 묻어 나오는 명령.

그러나 페르다는 당황하지 않았다.

"발드로바 공왕의 전언치고는 짧군."

"아뇨. 이건 주인님의 시종인 제 의지로 하는 말입니다."

천천히 걸어 페르다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발을 디딜 때마다 모습이 변했다.

그녀의 머리에는 하늘을 찌르는 한 쌍의 뿔이 돋아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는 펑퍼짐하게 부풀어 올랐다.

감췄던 드래곤 스폰의 형상을 꺼내어 페르다를 위협했다.

'드래곤 피어인가?'

범상치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예상을 상회한다.

시종 일을 하는 드래곤 스폰이 드래곤 피어를 구사할 수 있다니.

페르다는 목구멍이 좁아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별개로 그의 정신은 평온하다.

이미 더한 것도 많이 봐 온 그에겐 재롱 잔치일 뿐이었다.

"당신 같은 것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

"하찮은 필멸자 주제에 욕심은 주체하지 못하고, 하늘을 제 손으로 주무를 수 있다고 믿는 것들."

그녀의 말에서 근거를 기반으로 한 혐오가 느껴졌다.

"주인님은 안중에도 없고 얻을 권력과 야망만 가득한 쓰레기들이죠."

페르다는 그 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불과 몇 시간 전 후렌과 대화를 나눌 때 꺼냈던 이야기에 답이 있었다.

"그래서 3황자가 죽은 것인가?"

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자는 혼약을 맺어 주인님을 시종처럼 부릴 생각이 가득하더군요. 같잖았습니다. 어떻게 그걸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더군요."

페르다는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과연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페르다는 발드로바의 심장을 먹고 그녀의 감정을 이해했다.

그래서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분수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3황자를 죽이는 폭군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3황자는 너무나도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도 더 큰 힘을 쥐어 찬탈하려고 했을 뿐이었던 것.

'결정적으로 너무 오만했다.'

"그러니 주인님께서 이렇게 돈을 챙겨 줄 때, 얼른 이곳을 떠나십시오. 원하신다면 그 몸뚱이를 잡고 제국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이유 있는 혐오.

동시에 페르다가 받을 이유가 없는 혐오였다.

그러나 페르다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런 같잖은 혐오감에 흔들리기엔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 페르다 로스노바는 이 자리에서 한 점의 거짓 없이 순수히 말하겠다."

페르다는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페르다 로스노바는 누군가의 압력으로 인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다."

발드로바의 심장을 통해서 배웠던 감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수많은 꿈을 꿨으나 그 모든 것들이 좌절되었다.

자신을 향한 음해와 눈총을 견뎌야만 했으며, 내면에서는 자신의 살의와 싸워야 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조차도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싸워 왔다.

그것은 페르다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 페르다 로스노바는 어떤 권력도, 재보도 바라지 않는다."

발드로바는 모르더라도, 페르다는 기억한다.

발드로바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가면서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기원한 것을.

이기적인 페르다에게조차 심장을 내주었던 그 기억을.

그러니, 지금의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나 페르다 로스노바는 순수히 발드로바의 약혼자가 될 몸으로서 이곳으로 왔다."

내가 기억을 하는 한,

나는 당신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장차 서로 부부가 될 사람이니, 시종의 입이 아닌 서로의 입과 귀로 대화를 나누어 오해를 풀자고 전해라."

루리의 인내심이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

"건방진 놈이 감히 주인님이 누군지 알고 망언을—!"

작고 아담한 손이 페르다의 목을 향했다.

그대로 잡히는 순간, 페르다는 목이 가을철 갈대처럼 똑 부러질 것이다.

퉁—.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

루리는 곧바로 냉정함을 되찾았다.

동시에 진동하고 있던 드래곤 피어가 사라졌다.

페르다를 죽이려 살의를 보였던 소녀는 그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가게."

페르다는 끝까지 침착할 뿐이었다.

발드로바의 뜻을 들은 루리가 다시 나왔다.

인형 같은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페르다는 좋은 소식임을 직감했다.

"그 뜻을 잘 알아들었으며, 약혼을 진행하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역시나였다.

제아무리 건방진 시종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렇군. 알겠네."

"그럼 이쪽으로...."

방금까지 나누었던 살벌한 대화는 온데간데없이 다시 사무적으로 돌아왔다.

페르다는 다시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 * *

늦은 밤, 발드로바의 성 아래.

발드로바의 시종인 루리는 다시 드래곤의 레어로 돌아왔다.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붉은 비늘을 가진 커다란 드래곤이 똬리를 틀며 우아하게 누워 있었다.

-왔느냐?

황금색 사안이 어둠을 뚫고 빛난다.

루리는 우아하면서 절도 있는 자세로 인사했다.

"위대한 열두 지배자, 그중 절대적인 힘의 위상을 이 자리에서 뵙습니다. 과연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위상다운 자태로 누워 계십니다."

-그러느냐? 그냥 누워 있는 것일 뿐이거늘.

"본래 우아함이라는 것은 흉내를 낼 때 추해 보이는 법입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만큼 몸에 밴 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아함입니다."

-그런가...?

루리는 진심이라는 듯이 눈에서 빛이 반짝거렸다.

발드로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정말 필멸자와 약혼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짐이 바라던 것이지 않더냐? 너 또한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그때는 마지못해 그렇게 말씀을 드린 것일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셔도 괜찮습니다. 번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도 제왕의 덕목인 법입니다."

끈질기게 번복을 외쳐 댔지만, 발드로바는 고개를 저었다.

-번복할 생각은 없다. 지금도 그 생각뿐이니라.

"쯧...."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혀를 차는 루리.

발드로바는 그 불손한 행동에 개의치 않고 물었다.

-말해 보거라. 짐의 반려가 될... 그 사내는 어떤 자였느냐?

루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마십시오. 약해 빠진 인간입니다."

-얼마나 약한가?

"기사 가문이라 해서 몸은 튼튼한 줄 알았지만, 오는 길도 힘들어서 죽으려 하는 허약한 몸이더군요."

-그리고?

"엄청난 추남입니다. 18살이라고 해서 믿었는데, 얼굴은 관리를 안 했는지 늙은이 같더군요."

-루리.

"죄송합니다. 꽤 곱상하게 생겼습니다. 여자깨나 울려 본 놈처럼."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지 않더냐?

발드로바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루리는 알고 있었다.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꺼낸다.

"범상치는 않습니다."

-범상치 않다?

"저는 드래곤 스폰, 용의 피를 이어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필멸자의 두려움을 건드리는 것 정도는 제게 손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루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페르다를 상기했다.

"그자는 저를 단 한 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인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느냐?

루리가 인상을 구겼다.

인간이 드래곤과 똑바로 눈을 마주칠 수 있다는 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잘됐구나.

반면, 발드로바의 얼굴에 걸린 것은 미소였다.

-짐을 평범하게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니 말이다.

"평...범 말입니까?"

-그래. 평범하게. 말이다.

루리가 알고 있는 평범과의 거리가 멀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주 보는 것은 평범하다.

그러나 인간이 드래곤과 서로 마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드래곤은 지배하고 인간은 복종해야 하는 것이 평범한 관계이다.

루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그녀가 만족한다면 그만인 법이었다.

4화. 왕의 배필이 될 자격이란

드래곤의 레어에서 나온 루리는 페르다를 한 장소로 안내했다.

그곳은 멀리서도 보이는 산 중턱에 지은 성 안쪽이었다.

레어로 향하는 동굴 쪽에 바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바로 정문 홀이 나타났다.

"깔끔하군."

페르다는 발드로바가 결혼에 있어서 누구보다 진심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면, 자신의 레어 위에 그럴싸한 성을 짓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뿐더러, 모든 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맞추지 않았을 것이다.

'3황자의 약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했지.'

3황자가 발드로바 공왕과 결혼하게 되면 그에 따르는 권력을 얻게 된다.

사실상 동부 지역의 왕이 되는 것이니, 그에 걸맞은 처소를 만든 것이리라.

그러나 자음, 모음 단위로 분해되어 버린 사건이 터져 버렸다.

사실상 그 누구도 쓰지 않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3황자가 죽은 이후로는 당연히 방치되리라 생각했는데, 묘하게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페르다가 온다고 부랴부랴 청소한 느낌이 아닌 평소에도 꾸준히 관리하는 세심한 포인트가 느껴졌다.

"이 성을 관리하는 건 누구지?"

"접니다."

"자네 말고는?"

"주인님의 시중을 드는 것은 오직 저 혼자뿐입니다."

"그럼 이 모든 것은...."

"전부 제가 관리하죠. 충분히 대답이 되었을 겁니다."

루리가 끊임없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약혼을 받아들였다는 게 어지간히도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개 같군.'

욕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개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받던 애정이 다른 곳을 향한다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으르렁거리는 개.

그렇기에 페르다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날 물지만 않으면 상관없는 일.'

집 지키는 개라면, 집만 잘 지키면 된다.

루리가 앞장서서 페르다를 안내한 곳은 아주 넓은 침실이었다.

'내가 썼던 방을 다섯 개 정도 합친 수준이로구나.'

아버지인 에렘발트는 물론, 제국 황제의 침소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이곳은 손님용 침실입니다."

"손님용이 이 정도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드래곤, 지배자께서 들이는 손님입니다."

못해도 제국의 황제와 맞먹는 것이 바로 드래곤이라는 존재들이다.

어찌 됐든 그 방으로 안내받았다는 것은 페르다의 현재 위치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 나는 딱 '손님' 정도인가?"

"예. 약혼자가 아니시니 '딱' 손님만큼이죠."

"자네는 손님에게 이렇게 적의를 보이나?"

순수하게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아뇨. 그냥 인간이 싫을 뿐입니다."

"솔직하군."

"그리고 그중에서 당신이 제일 싫을 뿐이고요."

"너무 쓸데없이 솔직해."

"숨길 이유가 없으니 말이죠."

루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들썩였다.

얄밉기 그지없는 게 자기를 때려 달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그래, 차라리 숨기지 않는 편이 나은 법이지."

실제로 페르다는 이게 낫다고 믿었다.

귀족들처럼 생글생글 웃으면서 등에 칼 꽂을 생각하는 것보다 백 배는 나았다.

페르다가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마다 루리는 역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흘겨보았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당신은 제가 무섭지도 않습니까?"

그 질문에 페르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무서워해야 하지?"

"그야 당신의 목을 부러트리려 했습니다. 만약 주인님께서 신호하지 않으셨다면, 그대로 꺾어 버렸을 겁니다."

까드드득.

루리가 가녀린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자, 살벌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죽었을 것이라....'

루리가 살의를 보인다는 건 원래도 알고 있다.

그러나 페르다는 루리의 손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약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어차피 내가 살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땐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로 주제를 바꿔 버렸다.

"쓸데없는 서열 정리는 나중에 미루도록 하지. 그래서 약혼식은 언제 하나?"

"주인님과의 약혼식은 한 달 후입니다."

"공식적으로 진행하나?"

"마음에도 없는 것들을 초대하고 난리를 치는 걸 공식적이라고 말한다면 아닙니다. 레어에서 간소하게 치를 겁니다. 셋이서요."

"셋?"

"주인님과 저, 그리고 손님."

친절하게 턱짓으로 페르다를 가리켰다.

"알겠네. 한 달 후로군."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루리가 그렇게 말했다.

"약혼식이 한 달 후에 진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한이기도 합니다."

"무슨 기한 말인가?"

"당신이 약혼자로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한입니다."

페르다는 한 번 더 생각했다.

결혼하기 겁나 빡세네.

"발드로바 공왕께서 지시하신 건가?"

"아뇨. 이건 제 의지입니다."

"독단이로군. 시종이 의지를 보여도 되는 건가?"

"필요하다면 해야만 하는 일이죠. 솔직히 말해서 저희 주인님은 명성에 비해서 너무나도 무르신 분입니다."

진짜 엄청나게 솔직하게 말하네.

"어차피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죠. 그러니 폭군, 발드로바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지도 않은 것일 테고요. 드래곤의 앞에 선 주제에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인간은 고금을 막론하고 당신뿐입니다."

"그렇군."

"애초에 인간과 약혼하겠다는 주인님이셨으니 그냥 넘어갔지만, 저는 주인님과 다르게 무르지 않습니다."

루리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이 났다.

잘 벼린 검 한 자루가 목에 닿은 듯이 싸늘하게 만드는 눈이다.

"위대한 위상의 배필인 만큼 그에 맞는 '격'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드래곤과 인간.

그것의 격차는 황제와 거지 같은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갭이 존재한다.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그래서? 한낱 인간이 내가 지금 당장 드래곤에 버금가는 힘을 얻으라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강해지라는 큰 기대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루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저 당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 주시면 됩니다."

그녀는 아담한 주먹을 쥐어 들며 말했다.

"의지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의지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허약하기 짝이 없는 당신에게도 실낱같은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한 달 내에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똑부러진 말투로 강조했다.

"그것이 발드로바의 성을 이어받을 약혼자의 첫 번째 관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두 눈과 두 귀로 담은 페르다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 약혼자는 참으로 좋은 사람을 뒀군.'

비록 입이 험하고 자신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페르다는 루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인간을 싫어하지만, 약혼자로서 필요한 것을 페르다에게 숨기지 않고 요구했다.

그 말은 즉, 발드로바에게 자신의 혐오감 이상으로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충성하고 있는데... 왜 한 번도 못 본 것일까?'

페르다가 발드로바의 레어를 습격했을 때, 루리는 없었다.

기이한 일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중요하지 않으니 뒤로 미루었다.

"알겠다. 그래서 내가 능력을 보였다 치자. 그러면 내가 어디까지 올라가면 되겠나? 제국의 황제 정도가 되어야 하나?"

루리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다른 '위상'들에게 얕보이지 않을 만큼입니다."

제국의 황제는 가뿐하게 뛰어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렇군."

"?"

페르다가 담담하게 받아치자, 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오만하게 구시는 거 아닙니까? 머리가 나쁜 겁니까? 아니면 드래곤들을 우습게 보는 겁니까? 어느 쪽이든 간에 마음에 들진 않는군요."

"둘 다 아니다."

"쉽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특히 당신같이 허약하기만 한 인간에게는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나도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는군."

"근데 왜 그런 태도입니까?"

"내 태도에 대해서 걱정하진 마라. 한 달 안에 네가 납득시킬 정도로 능력을 보여 주면 그만이지 않나?"

"...."

루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돌려받은 셈이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자신감이 넘치네.'

루리가 생각해보지만, 그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루리는 이미 아르켄 제국에서 발드로바의 약혼자가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있었다.

능력도 없는 반푼이들을 내쫓을 때 쓰는 일종의 관용구가 됐는데, 그런 놈이 위상에 버금가는 재능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페르다는 달랐다.

'충분하다.'

대륙 최연소로 8서클에 도달했으며, 9서클의 소원 주문을 사용했던 대마법사였다.

제국의 황제는 이미 자신의 발치 아래에 무릎을 꿇려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드래곤에게 꿀리지 않는 격을 갖추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가능하기만 하면 페르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페르다의 얼굴에 확신이 자리 잡았다.

"기분 나쁜 인간."

루리가 질린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 * *

발드로바의 레어 위에 지어진 성은 그녀의 이름을 따 발드로바 성이라고 불렀다.

페르다는 그 발드로바 성에서 일주일을 묵었다.

전반적인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거의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있었다.

귀족은 수발을 들어 주는 하인을 항상 대동하고 다닌다. 적어도 한 명 이상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귀족으로서 위신이 서지 않는다.

그렇기에 수행원이 없는 채로 생활하라고 하면 자신을 물로 보냐고 펄쩍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다에게 이것도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혼자 생활하는 것도 익숙해졌으니.'

외려 누군가가 옷을 입혀 주겠다고 오는 게 더 불편할 뿐이다.

홀로서기에 익숙해진 그에게 발드로바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불편함이 없었다.

'외려 저택에 있을 때보다 낫군.'

로스노바 가문에 있었을 때의 그는 언제나 좌불안석이었다.

가뜩이나 미움을 받는 와중에도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일단 그와 친하게 지낸다 싶으면, 언제나 늪에 빠트리려고 안달이 난 것들뿐이었다.

'루리인가 하는 녀석이 나를 싫어하지만, 그때 비하면 또 양반이고.'

적어도 루리는 먹는 밥에 이상한 것을 넣거나 대리석에 비누칠하는 유치한 장난은 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예쁘기 짝이 없는 똥강아지나 다름없다.

'뭐 그것도 언제까지고 될진 모르겠지만.'

루리는 페르다에게 한 가지 과제를 던졌다.

구제 불능 반푼이가 아닌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기한은 한 달.'

그 안에 보일 수 있는 게 어떤 것이 있던가?

페르다가 할 수 있는 것을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나오는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마법뿐이군.'

페르다에겐 마법의 재능이 있다.

그 재능의 편린을 루리에게 보여 주면 적게나마 인정해 줄 것이다.

'마법을 쓰려면 마나 서클을 뚫어야 한다.'

체내에 어지럽게 움직이는 마나를 하나의 원 형태로 굴려 회로로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서클이다.

문제는 그 서클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페르다는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방법은 알고 있다.'

압도할 만한 복수심과 증오를 지니면 된다.

페르다가 밟았던 길을 따라 걷는다면, 그때보다 더욱 빠르게 8서클 마법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페르다는 자신의 스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첫 단추가 제일 중요하다. 첫 서클이 레드인가, 블루인가에 따라서 마법사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되니까. 하지만 네게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겠구나.

돈밖에 모르는 뚱보에 호색한이지만, 마법 수련에 있어서 제 역할은 다한 남자였다.

레드 서클은 감정의 격동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마나 회로.

블루 서클은 침착하게 명상하는 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마나 회로.

각각 장단점이 확실하게 있다.

블루 서클은 느리게 형성되는 대신 안정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하게 정황을 살필 수 있어 80%의 마법사들이 수련을 통해서 블루 서클을 지니고 있다.

반면 레드 서클은 빠르게 형성되는 대신 불안정하다.

침착함을 강조하는 블루 서클과 다르게 감정의 격동이 주된 원동력이다.

그래서 빨리 강해질 수 있는 대신 그 감정에 잡아 먹혀 미치광이가 되기에 십상이다.

'내가 해야 할 건 블루 서클을 뚫는 것이겠지.'

똑같은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그러는 게 정답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페르다의 편이 아니었다.

'블루 서클이 형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적어도 3년이랬는데.'

남은 3주 동안 납득할 수 있는 성과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

촉박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나, 페르다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 *

"준비는 하고 있으십니까?"

늘 조용히 아침밥만 건네주던 루리가 처음으로 질문이라는 걸 했다.

페르다는 조용히 포크로 샐러드를 찍으며 대답했다.

"준비는 하고 있다."

"그런 것치고는 변화가 하나도 없군요."

"하다 보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하는 중이다."

"알겠습니다."

루리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페르다는 요 며칠 동안 메디 서클을 뚫기 위한 연구와 방법 등을 살피면서 연구해 왔다.

하지만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건 두 개의 서클은 같은 마나를 사용한다 해도 결이 다르다는 것뿐.

'약혼식에서 자격도 못 갖추게 되겠군.'

큰소리를 쳐 놓고 아무것도 못 하는 건 페르다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오늘도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려던 그때.

쿠그그긍!

천지를 울리는 격돌음과 진동이 성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근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일이지?"

루리가 대답했다.

"오늘 주인님께서 마물 토벌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마물 토벌?"

"동쪽 끝, 마의 땅에서 기어들어 오는 것들을 쓸어버리는 것이죠."

쿠그긍!

평소라면, '그런가?' 하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오늘의 페르다는 사뭇 달랐다.

'어쩌면....'

페르다는 촉이 왔다.

그가 찾는 답이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 전투, 보고 싶군."

"예?"

루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어째서냐?"

"필멸자의 정신은 연약합니다. 주인님의 전투를 보고 제정신이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페르다는 예전의 자신을 떠올려보았다.

그때의 자신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지배자라 불리는 드래곤을 몇 번이고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그를 오싹하게 했던 것은 레드 드래곤이었다.

'적의를 보이고 있었으니,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격이라는 게 존재한다.

대마법사였던 시절에서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인데, 지금의 그는 어떨까?

오줌을 지리고,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쓸데없는 호기심은 가지지 마십시오."

"아니."

페르다는 루리의 경고에 고개를 저었다.

이건 쓸데없는 호기심이 아니었다.

정답을 찾기 위한 탐구이며,

"지켜보고 싶군. 그 싸움을."

반려를 맞이할 자의 의무였다.

5화. 참으로 아름답다.

"알겠습니다."

루리는 고집 피우는 페르다를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단호하게 경고하기에 거절할 줄 알았지만, 순순히 페르다의 의견에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페르다가 식사를 마친 후, 루리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정원 공터였다.

"잠시 손을 대도록 하겠습니다."

그토록 잡기 싫어하던 루리가 페르다를 잡겠다고 했다.

"그러도록 해라."

"그럼."

루리는 페르다의 옷을 붙잡았다.

그 순간, 강렬하게 내리쬐던 태양이 사라졌다.

무언가가 페르다의 시야를 가렸다.

그것은 아주 커다란 날개였다.

루리의 등 뒤에서 한 쌍의 날개가 돋아났다.

날개가 지면을 향해 크게 날갯짓했고 그대로 날아올랐다.

투웅—!

중력이 사라지고 공기의 저항이 페르다를 괴롭혔다.

금방 먹었던 아침밥을 언제 게워 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페르다는 침을 삼키면서 기압과 풍압을 극복했다.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것도 잠시.

"도착했습니다."

루리의 말을 듣고 페르다는 눈을 떴다.

페르다의 앞에 펼쳐진 풍경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렇게 날아서 도착한 곳은 바로 산 정상이었다.

'체감 시간으로는 고작 3초. 그사이에 정상에 도착한 건가?'

텔레포트 마법도 아니고, 순수히 속도로 그 정도라면 드래곤 스폰 중에서도 가장 빨랐다.

'아니,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빠를지 모르지.'

페르다가 그 생각에 잠긴 채로 루리를 빤히 쳐다보자,

"당신이 봐야 할 건 제가 아닙니다."

"뭐?"

"밑을 보십시오."

"아, 그렇지."

페르다는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외로운 산의 정상의 동쪽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색을 잃은 평야가 펼쳐졌다.

'마의 땅.'

마왕이 죽으면서 일대가 완전히 오염되어 있는 땅.

그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물들이로군.'

마물.

마왕의 탄생과 함께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는 대륙의 침입자.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한 생물체들로 페르다가 발드로바를 죽일 때까지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것들의 목적은 150년 전의 마왕과 같다는 것.

'죽음만이 남아 있는 땅을 만드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멸하고 지배한다.

그리고 페르다가 보고 있는 것은 동부에서 올라오고 있는 마물들이었다.

'역시 동부라 마물은 엄청나게 크군.'

너무나도 거대했다.

정화하지 못하는 마의 땅에서 기어 오는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몸을 뒤집어 구르는 것만으로도 요새를 무너트릴 정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재앙급 규모였다.

칙칙한 절망의 색들 사이에서 원색에 가까운 붉은 불꽃 하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그것은 불꽃이 아니었다.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

페르다의 약혼자가 될 자가 그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발드로바는 덩치는 다른 드래곤들처럼 크다.

그러나 상대하는 마물에 비해서 절반 수준으로 작았다.

체급에서 한참 밀리지만, 발드로바는 그렇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쿠그그긍!

마물과 발드로바의 몸이 격돌했다.

체급 차가 한참 났지만,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대신 공기가 크게 울렁였다.

그 파동은 숲을 휩쓸었고, 페르다가 있는 고산까지도 뻗었다.

"으윽...."

페르다의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일반인이라면 단순히 겁을 먹어서 그렇다 하겠지만, 이것은 원인이 명확했다.

드래곤의 마나가 파동에 섞여서 피부를 뚫고 들어온 것이었다.

'드래곤 피어...겠군.'

루리가 드래곤 피어를 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격이 느껴진다.

심지어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페르다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든다.

'저것이 레드 드래곤.'

대마법사 때에는 느낄 수 없던 차원이 다른 무력감이 몸을 휩쓴다.

발드로바의 전투가 이어졌다.

콰드득! 콰득!

힘의 위상이자 불의 주인.

붉은 폭군의 싸움은 압도적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두꺼운 가죽을 벗긴다.

긴 주둥이와 이빨로 마물의 혈관과 힘줄을 끊는다.

발악하며 움직이는 마물이 우둔하게 보일 정도로 그녀는 민첩하게 움직인다.

지독하게 사각을 노려 상대에게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힘과 속도, 그리고 타고난 전투 센스.

-끼에에엑!

모든 힘줄을 끊어 낸 마물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대로 내버려두기만 해도 죽을 터.

발드로바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쩌저적—! 쩌적—!

그녀의 발톱이 마물의 배를 꿰뚫어 안을 크게 벌린다.

마물의 보라색 혈액과 녹색 내장이 멀리 있는 페르다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동시에 발드로바의 배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하얀 뱃가죽 너머에서 새빨간 빛이 강렬하게 발한다.

'파이어 브레스.'

콰아아아!

지옥의 화염보다 더욱 강력하다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가 마물의 내부를 태운다.

-키에에엑!

마물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도 얼마 가지 않아 멎었다.

마물의 몸에 뚫린 구멍이란 모든 구멍에서 발드로바의 적염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마물의 속은 고루고루 익다 못해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형체는 재와 연기가 되었고, 저주만이 내리 앉은 땅 위에는 붉은 폭군만이 서 있었다.

-크롸아아!

발드로바의 포효가 쩌렁쩌렁 울리며 모든 것을 흔들었다.

"으헉!"

페르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과연... 드래곤 로어는 이만한 힘을 가졌던가?'

대마법사 때 느낄 수 없는 드래곤에게 압도당하는 감각.

손발이 벌벌 떨리고, 이빨이 딱딱거렸다.

페르다는 말그대로 무력화되어 버렸다.

"이것이 당신의 배필이 될 자의 본 모습입니다."

루리가 따라 쪼그려 앉은 채로 페르다를 내려다보았다.

"레드 드래곤의 피에는 포악한 살의, 당신들이 말하는 악룡의 본질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건 성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본질이죠."

루리는 본질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페르다는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본질이라는 것은 바꿀 수 없다.'

악룡은 영원히 악룡.

그녀의 살의는 제거할 수 없으며, 그 살의가 페르다에게 닿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파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바로 레드 드래곤입니다. 주인님의 곁에 머무른다면, 새우등이 터질 각오를 매일 해야만 합니다."

루리의 무표정한 눈빛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얄팍한 결정을 했다는 것을 이제야 실감하겠습니까?

'확실히 그녀의 힘은 두려움을 자극한다.'

멀리서 보았음에도 그녀의 눈빛이 머릿속을 파고든 것처럼 생생하다.

그것은 피할 수 없으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페르다의 머릿속에는 그녀의 눈빛이 있지만, 동시에 발드로바의 감정도 담겨 있었다.

그녀가 보고 느꼈던 것에 대한 감정은 지금까지의 행동들을 모두 이해시키는 것을 도왔다.

'저 행동은 이 세상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의 모습을 숨기듯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마물들을 직접 사냥하는 것이다.

'그녀는 악룡이다.'

그러나 동시에 고결한 마음을 품고 있는 기사이자, 대륙의 수호룡.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고행자이다.

"참으로...."

그러니 두려움이란 감정은 경이로움으로 뒤바뀐다.

"훌륭하군."

페르다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루리는 인간이 싫었다.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면 마땅히 그러한 감정을 품어야만 했다.

그러나 자기 주인인 발드로바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것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상처를 받았다.'

3황자 시해 사건 이후로 루리가 인간에게 품은 혐오감은 다른 드래곤 스폰보다 더욱더 짙었다.

누구보다 싫어하기에 인간과 드래곤 사이의 격차를 더욱 잘 알고 있었으며,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이해했다.

그러니 평범한 인간이 레드 드래곤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다.'

페르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루리는 그를 충분히 경고했고, 말리기까지 했다.

비록 싸움이 끝나기 전에 데려가기 위해서 페르다를 잡아 들고 날기는 했지만!

충분히 말렸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리의 생각대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다는 멍하니 그곳을 보기만 했다.

격이 다른 드래곤 피어에 벌벌 떠는 모습이다.

'전형적인 상황.'

저 얼굴은 점차 두려움으로 바뀔 것이며,

곧 자신의 얄팍함에 자책하고 살려 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주인님도 알게 될 것이다.'

인간과 드래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자신의 예상대로 움직이는가 싶었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참으로... 훌륭하군."

페르다의 입에서 터무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루리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서 더욱 놀라고 말았다.

'웃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무참하게 찢기고, 불태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자신도 저렇게 하루살이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고 두려워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설마....'

그 순간, 루리의 머릿속에는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어째서 이 남자가 발드로바의 약혼자가 되고도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 상황 속에서 이렇게 웃을 수 있는지 말이다.

'그것'이라면 모든 게 말이 된다.

'이 미친 마조히스트 같으니.'

페르다를 향한 루리의 혐오가 한층 더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 * *

그날 페르다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드래곤 피어에 맞고, 로어까지 접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제정신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다.

반대로 페르다는 제정신인 만큼 몸이 망가졌다.

'정말 움직일 수가 없나?'

혹시나 해서 손을 까닥여 본다.

대신 발가락이 꿈틀거렸다.

눈을 깜빡이려 하면 엄지가 파닥이고,

입을 씰룩이면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이렇게 정신이 멀쩡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얌전하게 누워서 상념에 잠기는 것이 베스트인 상황이다.

'하루를 통째로 날리게 생겼군.'

서클을 뚫는 데 집중해도 모자란데, 이렇게 누워 있어야 한다니.

'애초에 내가 왜 그걸 보려고 했던가?'

페르다가 그것을 보고 싶었던 이유.

어쩌면 그 전투가 페르다에게 답을 주지 않을까 하던 촉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촉이 맞아떨어졌나?'

지금부터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페르다는 자신이 지켜보았던 모든 것을 다시 되뇌어 보기로 했다.

그는 산 정상에 도착했던 페르다의 때로 돌아갔다.

그가 맡았던 공기의 냄새, 피부에 닿는 온도, 발끝에 닿는 울퉁불퉁한 자갈의 감촉까지.

모든 것을 또렷하게 떠올렸다.

만들어낸 심상의 세계에서 시선을 내려 그녀와의 싸움도 떠올렸다.

그것은 악명이 자자한 악룡이 아닌,

'고결한 적기사가 행하는 고결한 전투였다.'

그녀는 곧 페르다의 배필이 될 몸이었다.

그 순간, 단전 속에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이건....'

페르다는 이 감각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로스노바 가에서 추방당했을 때 느꼈던 격동이었다.

'레드 서클이 만들어지고 있다.'

감정의 격동으로 만들어지는 레드 서클

블루 서클을 만들려 했던 페르다였기에 당연히 이것은 거부해야 했다.

'특이하다.'

그러나 페르다는 그러지 않았다.

이 레드 서클은 결이 다름을 느낀 것이다.

'이 감정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느꼈던 그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인한 격동이다.

그 감정은 분노와 복수심에 못지않은 잠재력을 지닌 것이었다.

'발드로바가 싸웠던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런 게 느껴졌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발드로바를 생각하니 그 회로는 점점 뚜렷하게 잡혀 갔다.

발드로바의 싸움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어쩌면 이게 답일지도 모른다.

페르다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발드로바에 대한 감정에 대해서 집중해 보았다.

자신이 느꼈던 경이감과 그 자태.

두루뭉술한 감정을 단어로 빚어내며 감정을 정리하고 격앙시켰다.

마나 회로가 거칠게 소용돌이친다.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회전력이 점점 강해지고.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페르다를 삼키려 들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이미 레드 서클로 대마법사에 도달했던 사내였다.

격동으로 만들어진 소용돌이를 섬세하게 제어했다.

튀려는 것을 모아들이며 압축하고 빚어낸다.

이윽고 하나의 원을 그려 낸다.

'서클.'

동시에 느껴지는 해우와 고양감의 여운을 느끼며 이 감정의 원천을 다시금 확인해 보았다.

'증오와 복수심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은 즉 똑같은 미래는 없으며, 똑같은 실수도 없다.

'됐군.'

페르다는 그 사실에 기뻐했다.

페르다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6화. 역시 죽진 않았군

"놀랄 노 자로군요."

아침을 준비하며 들어온 루리가 페르다를 보면서 뱉은 말이었다.

드래곤 스폰에 발드로바의 유일 시종답게 눈썰미가 뛰어났다.

"정말로 회로를 뚫으신 겁니까?"

하룻밤 사이에?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평범한 인간이 하루 만에 뚫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요?"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지 않겠나? 그것보다 답을 해 줬으면 좋겠군."

"무엇을 말입니까?"

"이 정도면 배필이 될 자격은 입증됐는가?"

"...."

루리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앙다문 채로 페르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잠재력의 기준치는 합격이었다.

'아니, 외려 내 예상을 웃돌고 있어.'

불과 2주 전, 페르다에게 제안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4주 차 마지막 날에 억지로 쥐어짜서 한 방울을 똑 하고 떨어트리면 기적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2주 만에 페르다는 아주 쉽게 조건을 만족했다.

'아니, 2주라고 할 수도 없다.'

그간 조짐이랄 것도 없었으니, 단 하루 만에 달성한 것이다.

'그 각성의 원인은... 역시 주인님의 싸움이겠고.'

거기서 느낄 만한 변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공포와 경외에 압도당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그의 몸이 망가져서 침대로 옮긴 것도 그녀가 했으니, 어떤 상태였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유로운 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지?"

"...됐습니다."

"뭐가?"

"기준 말입니다."

루리는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바꾸었다.

"기준은 충족했으니 약혼식까지 푹 쉬셔도 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푹 쉬는 것도 좋지만, 아직 갈 길이 멀지 않은가?"

아침 식사를 마친 페르다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연습을 할 만한 장소가 있는가?"

"뭘 연습하실 계획이신지요?"

"마법이지."

그러자 루리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마법사들을 위한 용품은 없습니다. 공수해 올 수는 있습니다만 사흘 정도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만큼 걸리진 않을 거다.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러나 페르다가 지금부터 할 훈련에는 그런 비싸고 정교한 물건 따위는 필요 없었다.

"표적 몇 개면 충분할 거다."

"표적?"

"허수아비 같은 것 몇 개만 좀 깔아 주면 된다는 말이다."

루리는 아리송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제야 1서클에 발을 들인 애송이가 허수아비로 무슨 훈련을 하겠다는 말인가?

그러나 페르다에겐 그것이 바로 최선이자, 최고의 도구였다.

그의 마법 훈련은 용품 따위로는 측정하고 교정할 수 없는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리고 그 섬세함 정도는 페르다가 이미 홀로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 * *

루리가 페르다를 안내한 곳은 산 정상으로 가기 위해 날개를 펼쳤던 공터였다.

그곳은 이제 훈련장이 되었다.

마법사가 아닌 일반 병사들을 위한 그런 장소였다.

짚단 허수아비에 거리 표시판과 장애물, 도구.

'혼자서 이 커다란 성을 관리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30분 만에 공터를 훈련장으로 바꾸는 속도.

이만한 손재주와 속도로 공간을 만들 수 있는데, 무엇을 못 하겠는가?

페르다는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루리를 보며 말했다.

"만들어 줘서 고맙군."

"구체적으로 무엇을 연습하려는 겁니까?"

"마력을 제어하는 법이다."

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제어하는 겁니까?"

"마법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지. 과하게 사용해서 마나를 허비하거나 적게 사용해서 마법이 불발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갸우뚱.

"그런 일이 있습니까?"

"드래곤은 안 그런가? 모든 드래곤들은 적게라도 마법을 쓸 수 있다 들었는데?"

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 마법을 다룰 수는 있습니다. 저희가 어떤 지배자의 피를 이어받았는가에 따라서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은 다르지만, 거의 모든 드래곤 스폰들이 가능하죠."

"그런데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예.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마치 지금 하시는 말씀은 숨이 안 쉬어질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드래곤 스폰들이 들었으면 '미개'하다는 대답을 할 겁니다."

페르다가 루리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게 미개해 보이나?"

"저 또한 드래곤 스폰이니."

미개해 보인단다.

"뭐 틀린 말은 아니로군."

안하무인이 기본적인 성격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선천적으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드래곤 스폰.

그리고 노력과 이해를 통해서 마법을 부리는 인간들.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자들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 낸 자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페르다는 고개를 돌려 허수아비 쪽을 보았다.

"훈련하시는 모습을 지켜봐도 괜찮겠습니까?"

"숨 쉬는 연습을 보는 게 재밌다면."

"그럼."

루리는 뒤에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페르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마법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고요함을 느끼며, 잔잔한 흐름에 천천히 접근하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마나를 제어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블루 서클에 한정된 제어법.'

정립되어 있는 마법의 대부분이 블루 서클을 위한 것이었다.

페르다의 서클은 레드 서클.

감정의 격동으로 이루어진 레드 서클은 블루 서클의 제어법으로는 통제가 되지 않는다.

설령 그 방법으로 통제를 한다고 해도 능력이 효과 이상으로 감퇴하여 속된 말로 '반간인'이 된다.

'통제해선 안 되는 것을 통제해야 한다.'

이치에 맞지 않은, 모순이 가득한 것이 레드 서클이다.

그 모순을 깨는 묘리만 알고 있다면, 힘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페르다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눈을 감은 채로 자기 감각을 천천히 바닥에 떨어트렸다.

호수 아래로 떨어지는 의식이 단전에 도달했다.

원형으로 팽팽하게 돌고 있는 서클이 감은 눈을 비집고 선명하게 들어온다.

페르다는 그것을 가만히 관찰했다.

빠르게 흐르는 마나는 흡사 장마철의 급류와도 같았다.

잘못 접근했다간 그곳에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페르다는 그곳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가 하려는 것은 도자기를 빚는 것과 같았다.

빠르게 회전하는 서클의 가를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형태를 유지하면서 마나를 건져 올리는 것.

'퍼 올리기.'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르는 블루 서클도 1년 이상 단련해야 하는 단계.

레드 서클은 몇 배의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과정이다.

'피가 나는 노력을 했었다.'

그 감각은 페르다에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페르다는 서클에 집중하여 그곳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급류의 마나가 손가락에 살포시 닿았고, 그 속에 있는 마나가 손가락을 새로운 물줄기로 삼아 타고 흘러나왔다.

'느껴진다.'

단전에 있던 마력이 혈관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심장에서 동맥으로.

혈맥을 길로 삼아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걸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년.'

그러나 페르다는 능숙하게 길을 찾아내었고, 마침내 오른손 검지 끝자락에 도달했다.

'1분 걸렸군.'

1년의 과정을 1분 만에 완료.

마나를 건져 올렸으니, 다음 단계인 '구체 형성'에 들어간다.

우우웅—.

손끝에 모인 마나가 체외로 발산되어 흩어진다.

푸른색의 실 가닥들이 퍼져 나가는 것을 손끝으로 느꼈다.

'응집.'

퍼지던 마나가 한마디 정도 위에 모여서 응집했다.

응집하고 응축된 마나는 진하게 빛깔을 띠었다.

마법을 깨우치지 못한 자가 선명하게 볼 정도로 응집되면 그 단계는 완성된다.

페르다의 구체는 매끈하고 단단한 완전한 구체를 만들었다.

모두 제어하지 못하고 파란 증기 형태로 발산되기 마련.

그러나 페르다의 구체에는 그런 낭비가 없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또 1년.'

도합 2년이란 시간을 거쳤던 일련의 과정들이 2분 만에 이루어졌다.

크게 기뻐하거나 하진 않았다.

루리가 말하는 것처럼 이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위다.

숨 쉬는 것을 알아냈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없듯이 페르다에겐 그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 단계.'

모든 마법사가 6년이 걸리는 작업.

그리고 재능이 뛰어났던 페르다가 3년에 걸쳐서 겨우 마스터했던 작업.

'3박자' 단계에 들어간다.

페르다는 손가락에 위에 뭉쳐진 마나 덩어리를 내려다보았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변할 수 있는 순수한 결정체.

그 결정체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바로 투척하는 '마나 샷'이다.

말 그대로 마나 덩어리를 날리는 단순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훈련은 마법사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응집력과 속도, 정확도가 전부 맞아떨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3박자다.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단계로 3서클에 도달하고도 이 단계를 넘지 못한 마법사들이 수두룩했다.

페르다도 2서클이 되어서야 겨우 이것을 가능케 했다.

마나 덩어리를 내려다보던 페르다는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50M 떨어져 있다고 표시된 간판과 허수아비가 보인다.

"흐음...."

페르다는 가늘게 눈을 뜨며 침음을 흘렸다.

"안 되겠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손가락에 다시 한번 더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위에는 구체 3개가 빚어져 떠올랐다.

페르다는 그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거지."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도 할 만 하지 않겠는가?

페르다의 손가락이 허공을 크게 긋는다.

동시에 3개의 마나 탄환이 포물선을 그리며 동시에 날아갔다.

그 지점은 정확히 허수아비의 이마 위.

퍼퍼펑-!

고밀도의 마나 탄환이 터지며 폭발했다.

허수아비의 머리는 형체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페르다는 그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죽진 않았군."

비록 1서클에 3발을 쏘는데, 보유한 마나의 절반이 날아갔지만 괜찮다.

마나는 서클이 늘어날수록 늘어나게 되어 있으니까.

페르다는 실전 테스트까지 마쳤으니, 페르다는 자신의 능력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연습은 그걸로 끝이었다.

연습 개시부터 종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 * *

그날 밤, 루리는 레어로 내려갔다.

그녀의 손에는 자신이 직접 정리한 서류를 들고 있었다.

"주간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러거라.

비록 칩거하고 있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아야만 했다.

그 역할을 유일한 시종인 루리가 진행했고, 루리는 그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발드로바는 그녀의 요약을 담담하게 들었다.

그렇게 30분에 걸친 정황 보고가 끝이 났고, 루리는 서류를 덮었다.

"이상입니다."

-그래, 고생이 많았다.

"고생이라 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무언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없다. 돌아가도 된다.

그 말을 들어왔던 루리의 귀에는 사뭇 다른 문구가 꽂혀 들었다.

-궁금한 점이라....

발드로바의 발톱이 턱을 긁적였다.

오랫동안 모셔 왔던 루리였기에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뭔가를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드디어 바깥세상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

루리의 눈이 일순간 반짝였다.

발드로바의 입이 들썩이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점이 궁금하십니까? 불초 루리, 주인님의 모든 질문에 응할 각오는 마쳤습니다."

루리의 눈이 반짝였다.

발드로바가 그것을 내려다보고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짐의 배필이... 될 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던가?

"아."

루리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은 것은 배신감.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작 궁금한 게 그딴 놈의 근황이라니.

그러나 재촉했던 만큼 대답해 주는 것이 도리였다.

"약혼자가 되실 분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뭔가 불편한 점은 없던 것 같으냐?

"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처음에는 수행원을 따로 들이지 않아서 불편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의 귀족이라는 것들과 아주 다릅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말이 끝나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루리의 입술이 들썩였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하는 듯이 속으로 고뇌하다 말했다.

"그래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종잡을 수 없다? 기대 이하라는 뜻이냐?

루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능력은 뛰어납니다. 오히려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라 그런 겁니다."

-네가 인정하는 인간이라니 특이하구나.

발드로바는 놀랐다.

그녀가 얼마나 인간을 혐오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나? 그게 불안정하기라도 하더냐?

"아닙니다. 너무 완벽했습니다."

-그건 좋은 게 아니냐?

"물론 완벽하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선 아닙니다."

루리는 페르다를 보며 관찰했던 것들을 기억했다.

특히 그녀가 이토록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이번 훈련이었다.

"인간이라는 건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족속들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죠."

그는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비단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요 며칠 동안, 그를 관찰하면서 느낀 감정이 그러했다.

인간을 싫어하던 루리조차도 페르다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대하는 자세가 틀렸다.

그렇기에 무능함에서 인정을 뛰어넘어.

"그래서 그자는 위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경외라는 감정이 루리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 것만 같기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만 같기에.

충직한 종으로서 주인의 옆에 서게 둘 수가 없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사내인 모양이구나.

"인정하기 싫지만... 예, 그렇습니다."

발드로바가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 그자가 나를 만나는 것은 순수한 목적으로 온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

"...."

-그러니 믿어 보도록 하마.

참으로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은 이토록 불안해 죽겠는데, 당사자는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내 주인님이다.'

루리는 이걸 알고 있고, 모든 일들에 계산을 넣어 두었다.

'그러니 내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한다.'

못한다면 속내라도 떠볼 수 있는 상황이 필요했다.

'역시... 그걸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루리는 아예 판을 깔아 보기로 했다.

본색을 드러내지 못하더라도 속내를 어느 정도 확인할 만한 수단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 계획을 구체화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가 했던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놀라운 이면이라...."

그 말을 곱씹던 루리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페르다의 얼굴,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감탄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길을 가다가 오물을 밟은 것만 같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 혹시 말입니다...."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7화. 나 또한 궁금하다

손님 방에 머물러 공부를 하고 있던 페르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을 하며 물었다.

"영주들을 만나라?"

"예."

그러나 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주인님께서 어째서 발드로바 '공왕'이라고 불리는지 아십니까?"

"알고 있다. 블랙 드래곤, 고드윈을 죽였고, 아르켄 제국에서 직위를 주었지."

흑룡 고드윈.

어둠의 위상이자, 모든 악한 것들의 근원.

그는 진정한 순수 악이며, 마왕의 탄생에 일조할 만큼 이 대륙의 혼돈을 바라는 생물이었다.

그 숨통을 결정적으로 끊은 자가 바로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였다.

"그렇게 해서 공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극동부 전선 쪽에서 영지를 두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보기보다 박식하시군요. 총 몇 개의 영지가 발드로바 님의 아래에 있는지 아십니까?"

"15개 아니던가? 외곽 마을까지 합치면 108개일세."

"...총인구 수는?"

"다 합쳐서 525만 6,532명이라고 했는데, 최근 출생 사망은 알 도리가 없으니 모르겠군."

그 대답까지 들은 루리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잘 아시는군요.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분이."

드래곤 피어가 살짝 묻어 있는 혐오감.

페르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배우자가 될 몸이 반려자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 그만한 수치가 어디 있겠는가?"

"말은 그럴듯하군요."

물론 루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루리의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기울뿐.

실제로 페르다도 그런 이유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심심하기 때문이지.'

서클을 뚫은 후에는 할 게 너무나도 없었다.

한창 서클을 뚫으려 아등바등했을 때는 하루를 다 써도 부족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한가롭다.

굳이 알고 있는 것들을 쓸데없이 더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발드로바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공부해 보자는 마음으로 그녀의 이야기에 손을 댔다.

"어찌 됐건 그들을 만나 뵙는 건 어떻습니까?"

"관심이 없군. 꼭 해야 할 일이 아니면 가고 싶지 않다."

"관심이 없어도 주인님과 혼인을 하시게 되면 공식적으로 부군이 되는 겁니다. 주인님께서 바깥을 담당한다면, 부군은 안을 담당해야 하죠."

"내가 안주인이 되는 것이로군."

"예."

남자가 안주인이라니.

그 말은 즉, 남자가 여자보다 더 무능하다는 뜻이 된다.

귀족 세계에서는 쪽팔린다고 할 만큼 치욕스러운 일이다.

'치욕스러워할 일은... 아니지.'

다른 누구도 아닌 폭군이라 불리는 발드로바의 배우자다.

종족 자체가 어나더 클래스인 상황에서 지금의 페르다로선 그녀와 대등히 설 힘이 없다.

그런데도 배우자가 되어서 내실을 이끌어 간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영주들을 내가 관리해야 한다라....'

페르다는 고민을 하다가 그녀의 제안에 대한 답을 했다.

"알겠다. 만나 보도록 하지."

"그럼 소집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리가 공손하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페르다는 마지막까지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었고, 루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페르다는 진즉에 그녀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역시 나를 믿지 않는 듯하군.'

견물생심.

본디 선한 사람이라 해도 눈앞에 힘이 놓여 있으면 그 힘을 쥐어 보고 싶은 법이다.

그리고 한번 권력을 잡은 자는 결코 다시 놓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나 또한 궁금하다.'

페르다는 루리를 모르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

복수심에 불타오르지 않을 때의 자신은 이럴 때 어떤 선택을 할까?

그러니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녀가 펼쳐 놓은 시험장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말이다.

"알겠다. 한번 만나 보도록 하지."

* * *

세르데스 대륙의 귀족들에 관한 농담으로는 이런 말이 있었다.

귀족들은 지방으로 갈수록 지방을 내놓게 된다.

중앙 귀족들은 대체로 살이 쪘지만, 최전방의 귀족들은 대체로 날렵함을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언제 몬스터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전투태세에 들어가야 하니 살이 찌려야 찔 수가 없다.

그러나 극동부의 영주들은 그런 농담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보쉬 경! 뱃살이 많이 늘었구려!"

"허허! 요즘 근심이 많아서 그런지 입이 자꾸 바짝 타들어 가. 그래서 매번 먹기만 하지 뭔가?"

극동부 전선 연합회장.

그곳에 15명의 영주가 한 데에 모여서 턱살을 출렁이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군데에 모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소집한 것이 무엇이오? 요 며칠 동안 잠잠해서 간섭하실 일이 없을 텐데...."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우면 쓰겠나? 최근에 공왕께서 약혼자를 들였다 하지 않았소? 그 약혼자와 대면하라고 하더군."

"약혼자?"

그 소식을 처음 들은 영주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 어떤 미친놈이 공왕과 약혼을 한단 말이오?"

"그러게 말이오. 천치가 아닌 이상 약혼이라는 의미도 그런 의미가 아닐 텐데...."

"멍청이 중에서도 상멍청이를 파면했나 보오."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인 자가 누군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상멍청이가 로스노바 가문의 삼남이라고 하더군."

"로스노바면 아르켄 제국 수호 기사의 집안이로군! 그 핏줄만 타면 모두 출중하다고 들었는데...."

"그 삼남은 그렇지 않은 것 같소. 듣기로는 다른 집안은 물론 한낱 병사들과 비교해도 약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제 아비조차 내친 모양이오."

"일반 병사보다 약하면 진짜 불량품이지 않소?"

"허! 불량품 따위를 만나려고 시간을 버려야 한다니...."

"불량품 주제에 늦기까지 하고 있으니 원...."

나이가 지긋한 영주들은 심통이 난 얼굴을 했다.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것이 거들먹거릴 생각을 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요, 다들?"

"뭘 말인가?"

"공왕의 부군이라 하면... 그래도 지위가 있을 텐데, 다들 어떻게 대응할 건지...."

그러자 가장 늙은 영주가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발드로바 공왕께 찢겨 나갈 운명이오. 우리가 뭣 하러 그자에게 고개를 숙이겠소?"

"맞소."

"뭣 하러 고개를 숙인단 말이오?"

모두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

"페르다 로스노바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을 했다.

나름 전방에서 주민들을 거느리는 영주들이다.

그러니 굴러들어 온 돌을 초장에 기를 죽여 놓을 작정이었다.

문지기의 외침과 함께 공회의실 문이 열린다.

회색 머리에 푸른색의 눈동자.

발드로바 공왕의 부군답게 금테로 발드로바의 문양을 박아 넣은 붉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들었고, 예상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예상을 벗어난 것은 역시 페르다 자체의 느낌이었다.

'불량품이라더니....'

'훤칠하고 총명하게 생긴 불량품이구만.'

몸이 허약한 것도 무인의 집안에 비교하면 그런 것이지, 걷는 모습에서 예의범절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생각하는 것은 눈빛이었다.

단순히 어린아이의 반항이 섞인 건방진 눈빛이 아니었다.

저 눈동자 안 속에는 고요한 호수가 들어 있는 듯했다.

나이에 맞지 않은 행색과 분위기에 절로 긴장했다.

페르다의 입술이 떨어졌다.

"말해 보게."

사춘기에 막 벗어난 성년의 목소리.

그러나 거친 세월을 넘어온 중년의 무게감이 있는 울림을 뱉었다.

"곧 있으면 나는 발드로바 공왕의 부군이 될 사람이네."

페르다가 뒷짐을 진다.

그의 푸른 눈이 그들 하나씩 쓱 훑어보았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다.

'어린놈이 무슨 저런 눈을....'

'대체 저놈은 뭐란 말인가!?'

흡사 한 마리의 맹수와 마주한 듯한 기분.

누구 할 것 없이 대항하지 못하고 그 눈빛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존대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대해야 하는 것인가?"

발드로바와 약혼을 진행하는 상멍청이는 불량품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 *

약 30여 분 전

극동부 전선 연합회장에 도착한 페르다.

공무상의 이유로 움직였던 만큼 페르다는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페르다는 시계를 확인했다.

"많이 늦었군."

페르다는 시간 약속에 있어서 엄격한 편이었다.

1분조차도 짜증이 나는데 10분은 대역죄나 다름없는 행동.

그러나 이 지각의 원흉인 루리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뭘 모르시는군요. 기선 제압에 있어서 10분 지각은 기본입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드래곤들의 기본 소양이며, 서열을 정리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딱히 관심이 없어도 말인가?"

"누구의 부군이 되는지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발드로바의 부군.

그렇게 말하고 나니 반사적으로 머릿속을 되뇌게 되었다.

루리는 한 걸음 뒤로 빠진 채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레드 카펫을 따라 걷던 중 페르다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발드로바 공왕의 부군이 된다면, 서열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귀족의 세계는 나름대로 복잡하다.

중앙 귀족들의 경우에는 서열은 직책에 따라간다.

그러나 외곽으로 나가면 법보다 칼이 가까운 법이라고, 오랫동안 복무해 온 자들을 대우한다.

'부군이기에 공식적으로는 왕이나 다름없지만, 그걸로는 안 될 것이고....'

지금의 페르다는 18세이다.

즉, 외관상으로는 어리고 경험이 없는 놈이다.

갑자기 나타난 약혼자가 느닷없이 왕 행세를 해 댄다면, 영주들이 반발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렇게 걷던 중, 페르다는 회의장 입구에 도착했다.

페르다는 원형으로 둘러싼 15개의 자리가 보였다.

문에서 직통으로 이어지는 자리는 비어 있었는데, 그곳은 발드로바의 자리.

즉, 페르다의 자리가 될 곳이었다.

페르다는 그곳으로 가는 대신 중앙에 선 채로 그들을 하나씩 올려다보았다.

"말해 보게. 곧 있으면 나는 발드로바 공왕의 부군이 될 사람이네."

그것은 정말로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존대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대해야 하는 것인가?"

페르다는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면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가늠해 보았다.

모든 영주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대답을 주저했다.

페르다는 머리를 긁적였다.

"음, 내 질문이 어려운 질문이었나?"

"아, 아닙니다...."

"그것이...."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서 존대해야 한다, 하대해야 한다고 대답하는 자체에서 라인이 정해진다.

약혼자로 온 꼬맹이가 설마 줄 세우기를 먼저 시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장 연로한 영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발드로바 공왕의 빛 아래에 머무는 영주들입니다. 부군이 되실 분에게 존대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요."

"그런가?"

"하지만 여기 있는 영주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부군께서도 그에 맞게 예우해 주심이 옳습니다."

대답이 되는 듯한 말이었지만, 결국 네가 하기에 따라서 달렸다고 질문을 넘겨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울베라 콘실러스입니다."

"그렇군. 콘실러스 백작인가? 그렇게 부르면 되겠나?"

"그렇습니다."

늙은 영주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서."

"예?"

"그래서 내가 존대를 해야 하는 것인가, 하대해야 하는 것인가? 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은 전혀 하지 않았군."

페르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응시했다.

늙은 영주가 난감하다는 얼굴로 다시 대답했다.

"하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군. 대답이 되었네. 콘실러스 백작. 내가 먼저 존대했다면, 그대들을 크게 불편하게 했겠군?"

"지, 지금 이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정치는 처음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떤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페르다는 영주들을 상대로 기선 제압을 해 버린 것이다.

'굴복시킬 의도는 아니었는데.'

페르다는 해명할 필요가 있다 싶어 그들에게 말했다.

"걱정들 하지 말게. 내가 공왕의 부군이 되었다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테니 말이야. 나는 그대들이 무엇을 하는지 크게 관심이 없다네. 그러니 그대들은 그대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게. 수탈하든, 자비를 베풀든 말이야."

"수탈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페르다의 말을 넘겨들을 수 없다는 듯이 일어서는 한 남자.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며 사나운 인상을 지녔다.

상대적으로 젊으며, 마법사의 인장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페르다는 생각했다.

말실수했군.

"악의는 없네.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군."

"보아하니 공왕과 약혼을 했다고 우쭐해하는 것 같은데, 예의를 갖추시는 게 좋을 거요, 젊은 약혼자! 마법사와 마법사로 섰으면 당신은 내게 엎드려 절을 했어야 하오!"

"뭣!"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늙고 살찐 영주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를 말렸다.

도화선에 앞에 놓인 촛불을 보는 것처럼 모두가 숨을 죽였다.

"흐음...."

페르다는 그 무례함에 딱히 화나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그의 말에 의문이 있을 뿐이다.

'내가 저 인간을 이길 수 있나?'

마법사로서 각성했기에 페르다는 마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테살로스라는 사내가 품은 마나의 양은 범상치 않았다.

검지로 머리를 톡톡 두들기면서 생각하던 페르다가 그에게 묻는다.

"자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월처 가문의 테살로스요!"

페르다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테살로스 월처...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었는데.

지금 당장 중요하진 않으니 일단 넘겼다.

"자네는 몇 서클에 도달했지?"

"4서클이오. 4 위계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지."

"흠, 무난하군."

"...무난?"

4서클 마법사, 테살로스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4서클만 되어도 어디서든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마법사인데.

'부군이고 나발이고 걍 죽여 버려?'

테살로스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공왕의 부군만 아니었으면 이미 쌍욕을 박아 버리고, 마법까지 날려 버렸을 것이다.

"자네에게 관심이 가는군. 그러니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나?"

"그런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도 내게 바라는 것이 있소?!"

그의 얼굴은 울긋불긋해졌고, 그 얼굴을 본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네도 좋아할 거야. 나와 겨뤄 주게."

훈련은 충분히 했으니, 실전을 치러 볼 차례였다.

8화.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마법사의 세계에서 위계질서는 서클로 결정된다.

귀족 세계에서 지위와 계급이 아닌 순수한 실력으로 상하 관계가 결정되는 몇 안 되는 직업이 마법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테살로스 월처는 오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모욕을 들었다.

-무난하군.

'뭐 무난해? 메이지가 X으로 보인다는 뜻인가?'

마법사는 서클에 따라 호칭이 정해져 있다.

1서클은 마나 워커.

2서클은 스펠 블로워.

3서클은 매직 워커.

그리고 4서클에 도달하고 나서야 겨우 '메이지'라고 부른다.

이름에서부터 진짜 마법사로 취급해 주는 단계라는 것이다.

'이제 고작 마나 워커 자식이 뭐? 무난해?'

1서클이 어떤 위치인가?

3서클에게 기는 것은 물론 2서클에게도 깍듯하게 대해야 할 피라미에 불과하다.

그런 놈이 4서클에게 무난하다는 소리를 했다.

무난하군.

무난하군무난하군무난하군무난하군.

그 말 한마디가 테살로스의 머릿속에 역린이 되었다.

그의 단전에 깃든 서클이 팽팽하게 돌았다.

언제 마법을 사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성을 잃고 그대로 공격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마침 페르다가 감사할 만한 제안을 했다.

1서클 따위가 대결마저 신청한 것이다.

테살로스는 본때를 보여 줄 작정이었다.

마법 대결을 위해서 그들은 공터로 나온 상태.

둘은 거리를 벌린 채로 서로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겠나?"

테살로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요?"

"자네는 무슨 마법을 구사하지?"

그 질문에 테살로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받아쳤다.

"마법사의 결투에서 마법을 물어보다니, 너무 무례한 것 아니오?"

"그게 무례한 행위였나? 흠, 미안하군. 이렇게 결투해 본 것도 오랜만이라서 말이지."

1서클이 내뱉을 수 없는 말에 테살로스는 어이가 없었다.

'뭐 저런 오만방자한 애새끼가 다 있어!?'

그 순간 테살로스는 다짐했다.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저놈을 죽여 버리겠노라고.

정작 페르다는 테살로스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 이제 좀 기억이 나는군.'

그의 말대로 결투라는 걸 해 본 것은 20년이 넘었다.

그 이후로 페르다에게 있는 것은 죽고 죽이는 결투뿐이었고, 그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마법사의 결투는 장막 너머로 카드 게임을 하는 것과 같지.'

어떤 카드를, 얼마나 들고 있는지 서로 가늠하지 못하고 한 장씩 꺼내 놓는 것.

이론과 실력, 그리고 지혜가 필요로 하는 게임이다.

'4서클에 도달한 마법사였으니, 최소 8개의 마법을 한 전투에서 구사할 수 있을 것이고. 4위계 마법도 쓰겠군.'

위계 마법은 특정 서클에 도달한 자들만이 쓸 수 있는 마법이다.

테살로스는 4서클의 마법사였으니, 4위계 마법까지 구사할 수 있다.

보유하고 있는 마나 또한 페르다의 몇 배는 가뿐히 넘어갈 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겠군.'

모든 것이 테살로스에게 유리한 것은 페르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난한 마법사에게 질 만큼 바보가 아니지.'

페르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핸디캡이 명확하니 한 가지 알려 주겠소."

테살로스가 비릿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보를 주겠다는데, 안 들을 이유는 없었다.

"뭔가?"

"나, 테살로스 월처는 이 자리에서 매직 블라스트를 쓸 것이오. 마법사라면 그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거라 믿소."

정작 페르다보다는 구경 나온 영주들이 더욱 놀라 수군거렸다.

"매직 블라스트라면...."

"화력에 집중한 강력한 마법이지 않소이까?"

4위계 마법에서 순수하게 파괴력을 담당하는 마법.

파괴력이 뛰어난 만큼, 같은 4서클의 마법사에게는 파훼당하기 쉬운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있는 마법사들은 아니었다.

특히 페르다처럼 1서클의 마법사에겐 가망이 없었다.

그러니 테살로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좋으니 굴복해라, 이 새끼야.

"흠, 그런가?"

페르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네. 나도 하나 알려 주도록 하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마나 샷'뿐이라네."

"마나 샷? 그딴 기초적인 걸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페르다는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아,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네. 나는 자네들과 다르게 많이 알고 있거든."

"이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테살로스를 이루던 아우라가 거칠게 요동쳤다.

"이 땅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주마!"

살의가 등등한 상황 속에서도 그것이 페르다에게는 닿지 않았다.

'이자도 레드 서클의 소유자였군.'

평정을 무너트리고 감정을 꺼내었는데도 강해졌다는 의미는 한 가지.

페르다와 결이 비슷한 마법사라는 것이다.

그도 마찬가지로 열등감을 바탕으로 마법을 수련해 온 사람이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다.'

페르다는 틀림없이 이걸 알고 있었다.

마치 병 속 깊은 곳에 들어간 젓가락처럼.

손가락 끝에 닿을 법하면서도 닿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페르다의 기억 속에서 자꾸 무언가가 간질이는 듯했다.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지금은 마법에나 집중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1서클과 4서클의 싸움이다.

페르다는 자신의 역량에 대해서 미리 가늠을 해 놓은 상태였고, 되짚어 본다.

'일반적인 1서클에서 구사할 수 있는 마나 샷의 구슬은 총 3개.'

그것도 마법에 익숙하지 않아 집중력과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총 6개.'

마나 고갈의 후유증을 느끼기 싫으면 5개가 한계.

그러니 5번의 기회가 있었다.

"흐어어업!"

거세어진 마나의 흐름이 테살로스의 손바닥에 응집한다.

응집된 마나들은 소용돌이치면서 그대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마법진의 서클.

그리고 그 내부의 상형 문자들이 테살로스가 기억해 둔 것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페르다는 자신의 뺨을 스치는 바람에 느꼈다.

살기가 그윽하다.

'출력이... 나를 아예 죽일 작정이로군.'

하지만 상관없다.

그 살의가 정작 본인에게 닿지 않는다면, 의미 또한 없는 법이지 않던가.

그가 한 방에 끝내겠다고 선언했듯, 페르다도 이 한 방에 끝을 낼 작정이었다.

페르다는 그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마력 구체를 형성시켰다.

손가락마다 하나씩, 총 다섯 개의 구체가 그의 손 위에 놓였다.

페르다의 공격이 완성된 와중에도 테살로스의 매직 블라스트는 아직 그려지는 중이었다.

"결론이 났군."

페르다가 말했다.

"내가 이겼다네."

페르다의 승리 선언과 함께 다섯 개의 구가 테살로스를 향해 날아갔다.

다섯 개의 포물선이 테살로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무슨...!"

그것을 보던 테살로스가 깜짝 놀랐고, 말을 채 잇기도 전에 페르다의 공격은 끝이 났다.

펑!

퍼퍼펑!

퍽!

테살로스의 자리에서 총 4개의 폭음과 1개의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공터의 흙이 솟구쳤고, 먼지가 자욱하게 깔렸다.

잠시 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끄윽...."

마법진을 영창 하던 테살로스가 그 자리에 앉아서 신음했다.

그가 부여잡고 있는 오른손은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부들부들 떨던 테살로스는 나지막이 페르다를 보며 말했다.

"내가 졌소...."

1서클의 건방진 애송이, 페르다가 승리했다.

* * *

테살로스는 실로 경이롭다 할 수 있는 상황을 마주했다.

그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장면들을 복기했다.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던 마나 샷.'

중지에서 발현된 그 구체가 테살로스의 눈을 향해 날아들었다.

머리가 꿰뚫리면 누구 할 것 없이 죽는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마법사를 당황하게 만들 수는 없다.

레드 서클의 마법사라 해도 집중이 깨지면 마법이 깨진다.

그러나 눈을 향해 날아드는 것은 다르다.

인간이라 하면 누구 할 것 없이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니 테살로스는 영창을 하면서 방어 마법을 펼쳤다.

그는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4서클의 마법사다.

몸통을 향해 날아들어 오리라 생각했던 세 개의 탄환도 예상대로라면 방어 마법에 막혔어야 할 터.

'노리는 것은 내 몸통이 아니라 마법진.'

그러나 마법진 앞에서 터져 형태를 유지하던 마법진을 파괴했다.

'마법진을 파괴했어....'

테살로스는 거기서 경이로움을 느꼈다.

마법진을 완벽하게 짜지 않으면 마력 맹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맹점에 정확하게 폭발이 일어나면 마법진의 효과를 감소시킬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감소하는 게 가능하지, 파괴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이다.

최소 5서클의 마법사가 되어야만 보고 할 수 있는 기술적인 영역을 저 사내가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마법진까지 파괴.

'마지막 마무리로 오른쪽 손등에 저출력의 마나 샷.'

출력을 낮춘 것은 죽일 의도가 없다는 것.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너 따위는 죽었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페르다의 완승을 의미했고, 머리에 피가 쏠린 테살로스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마법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조차도 그 결과를 명확하게 알 수 있을 정도다.

'어떻게 1서클의 마법사가 4서클을 이길 수 있는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닌가? 부군이 죽게 둘 수가 없어서....'

'그런 수작을 부릴 수 있는 건....'

혹시나 드래곤이 개입을 한 것이 아닌가 슬쩍 고개를 돌려 본다.

그 시선을 느낀 루리가 은색 사안으로 그들을 째려보았다.

"그 눈들 뽑아 버리기 전에 치워 주시겠습니까?"

"히익!"

"크, 크흠!"

대놓고 혐오감을 표출하는 루리.

페르다와 다르게 그들에게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었다.

"승복하겠나?"

"...승복하겠습니다."

테살로스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설마... 이 정도 되는 고수를 여기서 볼 줄 몰랐습니다. 정말로 세상은 넓군요."

테살로스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페르다의 실력을 인정했다.

"그대도 실력이 다른 4서클들에 비하면 출중한 편이로군. 자네 같은 전력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네."

"하하.... 저는 수도를 벗어나서 이만한 고수를 만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좌천당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군요."

그 말을 들은 페르다의 몸이 움찔거렸다.

"...좌천되었다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말인가?"

"예."

페르다의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소용돌이쳤다.

레드 서클의 마법사.

정치적 문제로 인한 좌천.

그리고 열등감.

결이 비슷한 마나.

복수심.

"자네 이름이 무엇이라 했지?"

"테살로스 월처입니다."

페르다는 그제야 이해했다.

"테살로스 월처... 그래... 드디어 기억이 나는군."

"저를 알고 있습니까?"

테살로스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다.

언제 한번 마주친 적이 있는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로스노바 가문과 자신은 접점이라 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네. 자네는 나의 은인이지."

"은인...? 우리가 언제 만났습니까?"

"과거가 아닐세. 이건 먼 미래의 이야기니까."

"먼 미래? 그게 도대체 무슨—."

파앙—!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테살로스의 머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버렸다.

그 구멍을 겨낭하는 것은 페르다의 검지.

마나 샷으로 테살로스의 이마를 꿰뚫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자네를 살려 둘 수는 없겠군."

* * *

페르다의 행적을 모두 지켜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페르다가 귀족을 죽였다.

그 누구도 귀족을 고의로 살해할 수 없으며, 그건 발드로바 공왕의 약혼자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할 수가 있는가!

규탄하고, 비난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페르다에게도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죽이려 했던 것은 테살로스도 피차일반이었으니....'

'정당...방위라 봐야 하는 것인가?'

영주들은 테살로스가 어떤 짓을 하려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4위계 마법을 펼쳐서 부군을 죽일 만큼 강한 마법을 영창했다.

결투 내가 아닌 외에서 처형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흠집이 생긴 것이었다.

평소라면 옳다구나 물어뜯을 피라냐들이었으나, 영주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의 생각은 일맥상통하였다.

우리 같은 쥐새끼들 사이에서 누가 저 고양이에게 방울을 달겠느냐?

테살로스를 죽인 페르다가 고개를 돌렸다.

페르다의 얼굴에는 이마가 꿰뚫리며 튄 피가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감정 한 줌 느낄 수 없는 얼굴과 피.

그 요소들은 모든 영주들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정작 페르다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걸 신경 쓸 정신 따위는 없는 상태였다.

'어지럽군.'

페르다의 체내에 있는 모든 마나를 남김없이 썼다.

1%를 남겨 놓는 것과 0%의 차이는 아주 심하다.

페르다는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기 위해 쏟아부었고, 그 반동으로 두통과 현기증을 느꼈다.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고, 그로 인해 표정 관리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의 얼굴은 명백히 짜증이 난 놈처럼 보였다.

"왜들 그렇게 보고 있나?"

"어어... 그, 그게...."

그들의 눈이 슬쩍 테살로스 쪽으로 떨어졌다.

페르다는 그제야 이해했다.

"아, 테살로스 때문에 그런 것인가? 괘념치 말게. 이자는 죽어야 마땅한 짓을 해 온 인물이었으니 말이야."

그는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의 얼굴 근육이 경련해 씰룩였다.

"이자가 살아있었더라면 공왕께서 슬퍼할 만한 일을 했을 걸세."

"고, 공왕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공왕은 자비로운 분일세. 인간들을 좋아하고, 그들을 위해서 싸우시는 분이지."

그때, 두통이 올라왔다.

어찌나 격한지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다고 착각해 버릴 정도로.

"나는 그분을 슬프게 만드는 사람이 싫다네."

"월처 가문의 사람이... 그,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렇게 만들 것이 틀림없어서 그랬을 뿐이라네"

대답을 들은 영주들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뭐, 뭔 개소리야, 저게?'

'그렇게 만들 것이 틀림없다고? 그럼 하지도 않았단 소리잖아.'

'공왕의 부군이 되는 자가 이런 상또라이란 말인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그의 행보에 식은땀을 흘린다.

페르다는 그들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혹여나 오해를 사는 건 아닐까, 그는 한 번 더 제 뜻을 강조했다.

"걱정하지 말게. 나는 그대들이 뭘 하는지 정말 눈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진지하게.

저 미친 고양이에게 누가 방울을 달 거냐고.

9화. 깊은 호수와도 같이

테살로스 월처가 죽고 모든 영주가 자신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연합회장에 남은 것은 루리와 페르다 둘 뿐.

"아주 훌륭하십니다."

루리는 그런 페르다를 올려다보며 작은 손으로 박수를 보냈다.

"오늘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는 확실히 보여 주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정치적 스킬이 아주 예술을 넘었습니다."

그러더니 양손의 엄지를 '척' 하고 들어 보이는, 이른바 쌍따봉을 보였다.

페르다는 마력 고갈로 인한 후유증으로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대답했다.

"의도치 않은 결과일 뿐이다."

"그 결과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이제 어쩌실 계획입니까?"

"뭘 말이냐?"

루리는 그걸 질문이냐고 하는 듯 인상을 구겼다.

"지금 당신은 귀족을 죽였습니다. 공왕의 위상을 업고 있다 하더라도 이건 명백히 논란이 될 일입니다."

"그런가?"

페르다는 자신의 주변의 모습을 떠올리고 물었다.

"그런 것치고는 조용했는데 문제가 있단 말이냐?"

"눈앞에서 칼춤 추고 있는데, 그걸 지적하는 바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흠... 그런가?"

너무 스무스하게 넘어가서 중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페르다였다.

그렇게 말하니 페르다도 슬슬 곤란함을 느껴야 한다는 걸 인지했다.

페르다의 모습을 본 루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상대는 이미 발드로바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영주 중 하나였습니다. 꽤 곤란해진다는 수준이 아닐 겁니다."

"청렴했나?"

"적당히 청렴하고, 적당히 해 처먹는 무난한 놈이었습니다. 그런 무난함이 극동부에선 최고의 충신을 의미하죠."

"최고의 충신을 내 손으로 죽였으니, 약혼에도 지장이 있겠군?"

"당연합니다."

어쩐지.

루리가 눈을 반짝이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기대와 다르게 페르다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약혼은 그대로 진행할 거다. 죽어야 할 이유는 보여 준다면 달라지지 않겠나?"

"그렇긴 합니다만.... 어찌 그리 자신합니까?"

루리가 알기로 테살로스 월처와 페르다는 오늘 처음 만났다.

그런 주제에 오래 있었던 루리나 다른 영주들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왜긴.'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지.

페르다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지금도 중죄를 저지르고 있는 중일 것이다.

"월처의 영지 쪽으로 가 보도록 하지."

"먼지라도 털겠다, 그런 말이십니까?"

"걱정하지 마라. 먼지가 한 뭉텅이 쌓여 있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야."

"뭐, 알겠습니다. 그 전에 우선...."

루리가 죽어 버린 테살로스의 사체 방향으로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실줄 같은 일그러짐이 죽은 테살로스의 목을 관통했다.

깔끔하게 목을 자른 것이다.

루리는 그 수급을 보자기에 쌌다.

"그건 왜 챙기나?"

"필요할 겁니다. 죽인 이유가 뭐가 됐든 간에 '잘못을 했기 때문에' 죽었으니까요."

페르다는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효수하고 걸어 놓을 건가? 악덕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최고의 충신이라더니?"

"이대로 약혼식이 없던 거로 만들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전 좋습니다."

페르다는 입을 다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페르다를 도와주는 루리였다.

* * *

월처의 영지.

극동부에서 가장 최전방에 있었으며, 국경의 군대와 가장 밀접한 땅이었다.

동시에 발드로바 성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바로 여기였나?"

페르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실제 테살로스 월처와 만나게 된 것은 남부 사막 땅이었다.

그 전까지는 극동부 전선에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월처의 영지에 내성 앞으로 도착하자, 집사가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월처의 영지의 집사답게 침착하게 응대했다.

"누추한 곳에 귀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주인님께서 현재 출타 중이시기에—."

"아아,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게. 그 주인은 죽었으니 말이야."

"...예?"

노집사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묻는다.

"그 주인은 죽었다고 말했네.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혹시 테살로스 월처의 연구실이 어디 있는지 아는가?"

"그, 그게... 아니 그보다 주인님을 죽였다는 건 대체 무슨...."

"됐네.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니, 숨겨 놨겠지. 직접 찾아보도록 하겠네."

일방적인 대화의 끝에 페르다는 집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뒤에 따라 들어가던 루리가 그 집사에게 보자기를 건네주며 하늘을 가리켰다.

"성문이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으십쇼."

"예? 이건 무슨...."

그렇게 루리도 집사를 지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노집사의 비명이 복도를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 * *

테살로스 월처.

마법사 가문으로 정치적인 문제로 변두로 쫓겨난 가문.

페르다에 못지않게 증오심과 열등감이 강렬한 가문이었다.

끼리끼리 놀게 된다고, 페르다는 처음으로 동료를 들였는데 그것이 바로 테살로스였다.

'테살로스 월처는 제국을 증오했다.'

그는 레드 서클의 소유자였고, 그로 인해 마법학계에서는 이단아 취급을 받으며 외곽지로 밀려나게 되었다.

테살로스는 자신을 극동부로 밀어내 버린 귀족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마법을 개발한다.

그리고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느냐?

'성공하긴 했지.'

물론 성공만 했다.

'정작 그 마법을 본 적은 없었다.'

테살로스가 그 마법을 쓰기도 전에, 아니 본격적으로 마법에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페르다의 손에 죽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그처럼 영문도 모른 채로.

'그나저나 내가 그자를 왜 죽였었지?'

그리고 페르다 또한 기억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시절의 페르다는 억지로 증오할 것이 필요했고, 그랬으니까.

누구보다 빠르게 6서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했던 그는 은인마저 죽이는 괴물이 돼야 했었다.

'뭐 상관없지.'

페르다의 마음에는 일말의 거리낌이 없었다

그건 자신이 정의이기 때문이라는 망상 따위는 아니었다.

지금의 테살로스는 틀림없이 자신의 배필을 슬퍼하게 만들 자라는 것만이 중요할 뿐.

'그나저나 틀림없이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페르다는 테살로스의 방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바쳐서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충신 행세를 하는 지금도 음흉한 마음이 숨겨져 있으리라.

그렇게 둘러보던 페르다는 마침내 무언가를 발견했다.

"여기로군."

바로 침대 밑이었다.

침대의 타일 결이 촘촘하지 않고, 그 틈 사이로 이질적인 기류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침대 밑에 비밀 장소를 만들어 놓았군."

"열 겁니까?"

"그래야지. 스위치를 찾아보겠다. 잠시...."

쾅!

페르다가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침대는 두 동강이 났고, 덮어 놓은 비밀 문도 따라 부서져 있었다.

루리는 아기자기한 주먹을 훌훌 털어 버리며 말했다.

"굳이 찾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

참으로 무식하다 할 방법이긴 하지만, 굳이 안 할 이유도 없긴 했다.

그렇게 루리와 페르다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점점 어두워지면서 비린 쇳내가 미약하게 흘러왔다.

"마물의 피 냄새군요."

"그걸 구분할 수 있나? 개코가 따로 없군."

"그런 열등한 생물로 비유하지 마십시오."

"미안하군. 하지만 그 충직함은 개 같다고 생각한다."

"...시비 거는 겁니까?"

루리가 노려보지만, 페르다는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단이 끝이 나고, 페르다와 루리는 새로운 공간에 발을 들였다.

"이건...."

반사적으로 눈살을 구긴다.

마법사의 연구실이야 늘 엉망진창이며, 알 수 없는 것을 쌓아 특이한 풍경인 건 당연하다.

때로는 핏빛 풍경을 각오하고 들어서기도 한다.

하지만 테살로스 월처의 연구실은 그것을 참작해도 도를 넘을 정도로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했다.

비위가 좋지 않으면 금세 토를 해 버렸겠지만, 루리나 페르다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냄새는 적응이 안 된 듯하지만.'

검지로 코를 가리며 후각이 적응하기까지 기다렸다.

루리는 시체 한 곳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이 이런 말이로군요."

죽은 병사의 시체와 마물 한 구가 나란히 침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들의 배는 갈라져 있었고, 보라색 내장과 붉은 내장을 실로 연결해 놓았다.

"설마 가장 충직하다 믿었던 영주가 마족 추종자라니."

마족 추종자.

150년 전, 흑룡 고드윈의 타락으로 인해 벌어진 용마대전에서 만들어진 마족들.

지금까지 그 마족들의 행적을 쫓으며, 그들의 힘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바로 마족 추종자들이다.

"생각지도 못했나?"

"마법사들이 어느 정도 음침한 건 알고 있습니다. 음침한 만큼 실력도 있는 법이니 어느 선까진 용인하고 있죠. 하지만...."

은색 눈동자에 실린 짙은 혐오감과 배신감.

"이렇게 마물과 인간의 내장을 서로 연결하는 악취미 짓을 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하지만 배신감은 믿은 만큼 당하는 법이라 했다.

"인간들이 다 그렇죠, 뭐."

드래곤 스폰인 루리는 인간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니 눈 하나 깜빡하는 걸로 지워 버릴 만큼, 깔끔하게 끝이 났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악취미를 통해서 뭘 얻으려 한 것 인가였다.

루리는 집필 공간에 널브러진 원고들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훑었고, 그 끝에 튀어나온 것은 콧방귀였다.

"진짜 사이코 새끼가 따로 없었군요."

"왜지?"

"마물들이 가지고 있는 마물 인자를 이용해서 마력 강화를 하겠다는 발상을 하고 연구를 이어 갔습니다."

"그랬나?"

"한번 보시겠습니까?"

페르다는 그녀가 보여 준 원고의 첫 장을 보았다.

개요를 쭉 읽어 내려갔다.

페르다는 그제야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마물들과 흡사한 언데드를 만들려고 했었지.'

흑마법 중에서 네크로맨서 계열은 극단적으로 나뉜다.

강력한 몬스터 하나를 만들거나, 약한 몬스터를 수 없이 깔거나.

수로 밀어붙이거나 질로 승부하는 극단적인 양상 때문에 네크로맨서들은 가장 쉽게 파훼되고 제압되는 마법사다.

'마물의 단단함과 언데드의 양을 승부를 보려고 했지.'

그게 완성되기만 한다면, 제국의 정예병을 양산할 수 있는 궁극의 마법이 된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게 아니었지만.'

페르다가 그 마법에 흥미를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그 마법을 쓰기 위해 만들어진 마나 연공법 때문이었다.

마물은 끊임없이 마나를 생산한다.

'대신 어디에 쓸 수 없는 불량한 마나지.'

압도적으로 많은 마나를 사료로 삼아 강해지는 것이 바로 마물들이었다.

'그러나 그 생산력을 재현하여 순수한 마나를 뽑아낼 수가 있다면....'

재능이 없다 하는 자들조차도 익히는 순간, 4서클, 메이지의 반열에 들 수 있을 정도.

페르다는 그 연구의 성과를 통해서 6서클은 물론 아크 메이지를 넘어서 8서클까지 도달했다.

페르다는 다시 개요가 적힌 페이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연구한다면....'

평소보다 더 빠르게 8서클에 도달할 재료를 모으는 것이 되고, 서클을 뚫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능하다.

어쩌면 몇 배는 더 빠르게 말이다.

그렇게 개요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루리 또한 페르다를 빤히 쳐다보았다.

'인간인데, 욕심이 당연히 나겠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혐오를 곱씹는 루리.

슬프게 만든다는 것도 그냥 구실일 뿐.

페르다는 테살로스를 죽이고 이 연구를 가로챌 생각을 하려 했을 뿐이었으리라.

'모든 인간은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에 사로잡혀 행복해하며, 슬퍼하는 어리석은 족속들.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배신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남자는 다른 걸까?

테살로스 때와는 다르게 가슴이 더욱 답답하다.

'이 남자를 믿어 보고 싶다고 믿는 것인가?'

루리는 자기 입술을 앙 깨물었다.

드래곤 스폰으로서 자존심이 상한 루리가 생각을 떨치려 그에게 직접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말인가?"

"그 연구. 당신이 이어 갈 수도 있습니다. 모든 마법사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아까우니까 말입니다."

아까우니깐 이어 간다.

참으로 심플하고 긴 변명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지식을 추구하는 마법사에겐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페르다의 대답은 다른 마법사들과 달랐다.

"아니."

페르다는 루리에게 그 페이지를 다시 건네주었다.

"모조리 없애 버려라."

"모조리... 말입니까?"

일순간 무표정했던 루리의 표정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이다.

적어도 그가 조금은 망설이리라 생각했지만, 페르다의 대답은 너무 칼 같았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공왕을 슬퍼하게 만드는 것을 싫어한다네."

"그렇다고 이런 마법 연구를 없애 버리는 겁니까? 세간에 말하는 대박이 날 수도 있습니다만?"

"대박 참 좋은 것이지 그래."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내 내 약혼자의 슬픔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페르다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마법사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눈.

저 푸른 눈은 깊은 호수처럼 잔잔한 무욕의 풍경이 비쳤다.

"...."

"왜 멍하니 보고 있지?"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되네."

루리의 손가락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마력을 불의 형태로 치환하면서 만들어지는 순수한 불꽃.

그걸 던지면 종이는 순식간에 타오를 것이다.

그 불꽃을 들여다보던 루리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가더니 페르다를 올려다보았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십시오?"

"괜찮네."

페르다의 바람대로 루리는 연구를 모조리 태워 버렸다.

연구실도, 연구에 쓰였던 기괴한 사체들도 모조리 푸른 불꽃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어 간다.

'잘 타는군.'

페르다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페르다라면 틀림없이 몇 달을 투자했다면, 완성했을 마법이다.

테살로스를 도와 만들기도 했었으며, 무엇보다 한 번 익혔던 마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페르다가 포기한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마법에는 성격과 감정이 묻어 나온다.'

그리고 근묵자흑이라 하여 그 성격과 감정은 점점 시전자의 본질이 되어 타락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흑마법을 배워서는 안 되며, 금지된 마법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저 마법은 분노와 증오에 기인된 것이다.'

테살로스는 제국을 증오했다.

저 마법을 익히게 되면 틀림없이 페르다는 자신의 것이 아닌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러니 버려야 한다.'

사사로운 것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

지금 현재의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

비틀린 욕구가 잿더미가 되어 무로 흩어진다.

명경지수와도 같은 마음은 페르다를 미소 짓게 했다.

"정말... 잘도 타는군."

페르다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는 루리.

루리가 하는 페르다의 평가는 이러했다.

'종잡을 수 없는 사이코.'

거기에 잊지 않고 하나를 덧붙였다.

'거기다가 마조히스트.'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조합인가 싶은 루리였다.

께름칙한 감정이 점점 깊어져 가며 그녀의 인상 또한 일그러져 갔다.

10화. 용의 브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