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 45-50

45화. 서민 샘플

"반지를 모조리 몰수해 버릴까 생각 중입니다."

공왕령의 아침은 루리의 푸념으로 시작되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면서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페르다로선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렇군."

그래서 페르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페르다님께서 불러들인 작업장들이 제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 성에서 피 한 방울 떨어트리지 말라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모르겠군."

"그래 좀 흘릴 수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놈들 자기들이 흘린 거 전혀 안 치우고 갑니다."

"그런가?"

"용이 무서운 줄 알면 그래도 버릇을 좀 고칠 거 같은데, 어떻습니까?"

"네 뜻대로 하거라."

쫑알거리던 루리의 입이 멈췄다.

슬쩍 올려다본 그녀는 페르다를 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페르다 님이 제일 나쁩니다."

"그런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대충 대답하시는군요."

"그렇군."

"때를 한 번 밀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까?"

쪼잔하게.

들리지 않게 아주 작게 말했지만, 페르다는 들었다.

그날의 원한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복수도 했겠다, 이번에는 정성껏 대답해 주기로 했다.

"마력석 정제는 원래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연구라는 게 금방 되는 게 아니지 않던가?"

"페르다 님은 그렇게 빠르게 3서클에 달성했으면서 그런 걸 이해할 수 있습니까?"

"범인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연습을 했지."

예전의 페르다였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의 페르다를 알고 있는 지금의 페르다가 급속도로 서클을 뚫어 내면서 느꼈던 것을 떠올리면 평범한 자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러시군요."

이번엔 루리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니 조금만 그 처벌도 조금은 미뤄 두도록 해라, 조만간 좋은 소식을 전하면 그때—."

-으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페르다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미치광이의 웃음소리가 발드로바 성을 울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으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성공했어! 이 빌어먹을 마력석 굽기 더 이상 안 해도 돼! 으하하하!!"

그 미치광이는 버넬 마르퀴스였다.

떡진 머리에 반쯤 벗어 버린 가운.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페르다와 루리의 눈이 고정되어 있었다.

페르다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성과가 나온 모양이군."

마침내 버넬을 들인 이유를 증명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 * *

미치광이가 되어서 뛰어다니던 버넬은 그 이후로 잠만 잤다.

그는 마력석 정제 연구에 자는 시간을 줄여 가면서 수명을 깎는 노동을 했다.

페르다의 앞에 설 때는 정갈한 모습으로 왔다.

"그게 오늘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됐더라고요. 하하하!"

"이제 설명 좀 해 주겠나?"

"아, 옙! 물론이죠. 그러니깐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면...."

버넬이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려 1시간을 걸쳐서 연구 내용들을 주절주절 설명했고, 빼곡히 채운 칠판에 마침표를 찍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셨죠?"

그 설명을 전부 들은 페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했나?"

"저, 저는 물론 다 했습니다. 어느 정도 정리도 한 상태이고, 최대한 쉽게 풀어 드리려고 해서 이렇게 얘기를 해 드린 건데...."

"흠."

페르다는 생각했다.

'내가 그다지 머리는 좋지 않은 모양이군.'

대마법사의 자리까지 오른 것은 순전히 노력발이었구나 하고.

버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30분쯤에서는 웬 우주가 보인다 싶더니, 정신을 살짝 놓아 버렸다가, 마침표를 찍으며 돌아왔다.

페르다는 슬쩍 보조하는 연구원들을 보았다.

그들의 눈은 똘망똘망했다.

연구자로서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그런 눈이다.

'아무도 이해 못 한 모양이군.'

스테판 파스칼이 나름대로 똑똑한 놈들이라 해서 보낸 애들이다.

그가 탁월한 상인이라면, 기술을 얻기 위해 최고 중에서 최고로 뽑아 보냈으리라.

'기술 유출 문제는 그래도 당장엔 없겠군.'

페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어찌 됐든 그가 이해하고 보여 줄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뭔지 보여 주게."

"옙!"

그가 수많은 마법 장치 중에서 하나를 가져왔다.

그것은 마력 고정기라 부르는 물건이었다.

마력을 부여하면 5위계의 고정 마법과 함께 공중에 일정 영역의 마력을 고정한다.

"여기에 마물의 사체를 집어넣고, 약간의 전기 마법으로 자극을 하면...."

죽어 있는 사체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결이 부드럽지 않으며 쓸 수 없는 정크 마나가 오염물처럼 뿜어져 허공에 떠다녔다.

"그리고 이걸 일정 온도에 가열한 다음, 압축시키고 이렇게 식히게 되면...!"

불로 지지고 압축하고 식히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나자, 결정체가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나타났다.

그것은 푸른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돌이 생성되었다.

"이게 바로 마력석입니다!"

야심 찬 목소리와 함께 결과물을 꺼내는 버넬.

마력을 머금은 수정석처럼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경이로운 순간이지만, 페르다에겐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탁하군.'

페르다는 미래에서 이미 본 물건.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빛깔이 옅으며, 조금은 조잡한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혹시나 해서 버넬에게 물어보았다.

"효율은 어느 정도지?"

"어... 그게...."

알 수 없는 지식은 술술 내뱉던 버넬이 거기서 턱하고 막혔다.

"버넬 마르퀴스."

"예, 예!"

"네게 묻지 않았나? 효율이 얼마나 나오는가 물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

버넬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힘겹게 대답했다.

"마력석 7개분의 마력을 소모하면 1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효율은 그렇다면 14.2%라고 봐야겠군."

"반올림하면 14.3%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또...."

뭐가 더 남은 모양이다.

그 남은 것도 좋지 않은 건지 우물쭈물했다.

"마력석 자체의 용량에 끌어올리면서 새어 나가지는 마나가 있어서... 그 절반은 더 떨어진다고 봐야 합니다...."

14개 마력석을 써야지 본래 한 개의 효율을 낸다는 셈이다.

"대충 7%라는 셈이군."

"첫째짜리까지 하면 7.1%로... 헙, 죄송합니다."

버넬이 눈치가 없게 지적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 망했구나.

내 연구는 이걸로 끝인가 보다.

차라리 마법사를 고용하고 말지, 7.1%의 효율을 내는 물건을 어디다 써먹겠는가?

속으로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죽음의 5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마력석을 내려다보면서 한참을 입 다물던 페르다가 입을 열었다.

"효율 말인데."

"예."

"더 끌어올릴 수 있나?"

"예...?"

"효율을 더 끌어올릴 수 있냐고 물었다."

버넬 마르퀴스를 들일 때부터 생각했다.

이놈이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실패하는 것으로 놓을 생각은 없었다.

버넬이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가능합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래."

페르다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계속 연구하도록 하게."

버넬은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게 끝인가 싶었을 때, 그가 말을 덧붙였다.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할 사람들을 모아 오도록 하지. 그때까지 연구 내용과 시현을 한 번 더 정리하도록. 알겠나?"

"네, 넵!"

페르다는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조차 확신이 없는 이 연구를 믿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불안감에 떠는 버넬과 다르게 페르다의 생각은 달랐다.

'잘만 써먹었지.'

페르다는 알고 있다.

마도공학은 어떻게든 발전한다.

그리고 그 발전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버넬이 발표하던 당시만 해도 비웃음이 돌았다.

그런 걸 누가 쓰냐, 왜 쓰냐, 품위가 떨어진다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훗날 어떻게 되던가?

'마법사들이 마도공학을 더 쓴다.'

그들이 연산하여 쓰는 마법진과는 차원이 다른 편리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법이 가지고 있는 신비함을 독점하는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날을 알고 있는 페르다에겐 버넬을 믿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 * *

열흘의 시간이 흐르고 귀빈이 찾아왔다.

노영주, 콘실러스 백작과 파스칼 무역회사의 점장, 스테판 파스칼이었다.

버넬은 그들의 앞에서 페르다에게 했던 것처럼 시현하고 부연 설명을 했다.

열흘을 정리할 시간을 주니 처음 페르다에게 설명했던 것보다는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난해한 내용들이었다.

"호오, 그렇군."

"그렇군요.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페르다는 그들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들에게 물었다.

"정말로 이해했는가? 나도 이해를 못 했으니 솔직하게 말하게."

그제야 둘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목소리에 영혼이 없다 싶었는데 맞았다.

"허허, 죄송합니다. 맞장구를 쳐 주는 것이 버릇이 된 지라서. 이 늙은이가 그쪽에서는 문외한입니다."

"저도 모르고 있어 보이는 건 좀 민망해할 것 같아서...."

역시 둘 다 아는 척이나 해 보던 것이었다.

나름대로 더 정리해서 쉽게 요약했다고 생각한 버넬만 난감했다.

"그래도 제가 아는 내용으로 종합해 보면 효율이 높지 않다라는 게 결론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맞는가?"

"그렇습니다."

"흐음, 참으로 애매한 물건이로군."

콘실러스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고, 버넬은 식은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콘실러스의 부정적인 면에 스테판이 긍정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주려 애를 썼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당장은 좋다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마나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것에서는 좋은 물건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건 제가 설명을 해 드린 부분인데... 마법사에게 마나를 공급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은 아닙니다. 포션이나 엘릭서처럼 회복이나 충전은 못 하는 물건이죠."

"아, 그러면 좀 애매하군요.... 성공은 해도 그만큼 효율이 안 나온다면...."

실드로 치려던 스테판도 한발 물러섰다.

두 명이 전부 부정적인 대답에 가까운 답을 내놓은 상태.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스테판이었다.

그건 페르다도 예상하는 일이었다.

"당장 효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게. 어차피 그건 후에 우리 수석 기술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

페르다는 이미 예상한 바였다.

공개해 봐야 부정적인 소리를 듣는 시점에서 이 둘에게 보여 준 것은 다른 것을 위해서였다.

"이 물건을 통해서 어떤 것을 먼저 만드느냐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이야기하시고 싶으십니까?"

페르다는 버넬이 만들어 낸 마력석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말 그대로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대신해 주는 획기적인 물건의 동력원이라네. 마법사가 필요했던 일, 그리고 마법사가 하기엔 생각보다 하찮은 일들에 대해서 떠올려 보도록 보게."

필요한 것은 아이디어였다.

콘실러스 백작과 스테판은 각 분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다.

페르다의 말에 콘실러스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물건을 통해서 마법사를 흉내를 낼 수 있다면.... 전방에 부족했던 보병들도 마법사로 채울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는 백작가에서 자란 뼛속까지 군인인 노인이다.

그러니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극동부의 위협에서부터 대체할 수 있는 요소였다.

"가능하지. 무기로 가공한다면,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일이 아니다."

언젠가 그렇게 불리게 될 이름을 그들에게 말했다.

"마도공학 보병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야."

"호오.... 마도공학 보병이라."

콘실러스 백작의 눈에 빛이 나는 듯했다.

마법사는 거의 모든 상황 속에서 효율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그중에서 특히 마물 대응에는 가장 큰 효율을 보인다.

극동부는 몬스터보다 마물이 더 많은 땅이었다.

누구보다 절실한 구역이다.

그러나 무릇 최전방이 그러하듯이 마법사에게는 유배지와 다름없다.

그나마 실력이 있으며 의욕이 있었던 마법사가 테살로스 월처였다.

"좋군요. 마법사의 공백을 메운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보입니다. 효율만 해결된다면, 무기로 먼저 가공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콘실러스 백작이 의욕을 보였다.

보병들의 희생을 지켜볼 수 없는 노영주답게 그편으로 얼른 추진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때 스테판이 반박했다.

"콘실러스 백작님의 의견도 맞습니다. 보병이 자유롭게 마법사로 전환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수송에서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스테판은 이 사업에 투자할 때 이미 걸어 놓은 것이 있었다.

"수송 말인가?"

"예. 전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제나 보급입니다. 화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당장 보급이 문제가 된다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도 맞다네. 하지만 극동부에는 이미 많은 마물이 죽어 가고 있어. 그 마물들을 여기서 제작하는 데 집중하면, 그 어려운 문제는 나중으로 미뤄도 될 걸세."

콘실러스 백작과 스테판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서로가 바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역시 둘에게 물어보길 잘했군.'

이렇게 공방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그 둘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문제점이 무엇인지 보인다.

스테판은 당장 운송에서 느꼈던 비용들을 줄이고 싶었으며, 콘실러스는 극동부 영지 병사들의 생존율을 높이고 싶어 했다.

서로가 물러서지 않는 것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저희 둘로선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으니, 이런 점에선 공왕의 섭정님께서 결정하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예. 저도 마침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화살이 페르다에게 떨어졌다.

"내 생각엔 모든 개발의 책임자인 수석 연구자에게 돌리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예?"

그리고 페르다는 그 화살을 버넬 쪽으로 냅다 던져 버렸다.

"저요?"

버넬이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멀뚱멀뚱거렸다.

하지만 페르다의 말대로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고, 버넬은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 그러니깐 전...."

버넬은 평화주의자다.

무기를 만드는 것보다 당장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한 사내였다.

버넬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냈다.

"저, 저는 역시 무기를 먼저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렇지요?"

"물론 무기의 중요성도 있습니다만, 좀 더 생각해 보시죠. 마물 물량 공급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저입니다."

승자는 허허 웃었고, 패자는 2차 설득을 시도했다.

"그게 처음에는 저도 다른 쪽으로 개발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콘실러스 백작님이 다스리시는 영지를 보고 나니 좀 달랐습니다."

그가 콘실러스 백작령에 들렀을 때는 마나 과부하로 인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그는 백작령의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이 가족을 잃는 고통과 슬픔을 보았다.

"우선은 무기를 만들어서 저희 터전을 망치려 드는 마물들을 먼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끄응.... 알겠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신다면야...."

스테판은 결국에 물러섰다.

우선순위가 밀리긴 했지만, 어찌 됐든 스테판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있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은 무기 개발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물들의 특징에 관해서도 연구하고 있었으니, 좋은 소식을 안겨 드릴 수 있을 겁니다."

"허허, 고생해 주게. 자네의 연구가 우리 극동부의 빛이 될 테니 말이야."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는 듯한 분위기.

"그래, 그 무기에 대해서 말인데...."

페르다는 잘됐다는 듯이 운을 뗐다.

"혹시 그 무기도 자네가 설명한 것만큼 어려울 예정인가?"

"예? 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거 잘됐군."

페르다는 이미 알고 있다.

버넬 마르퀴스.

그가 만들어 낸 첫 번째 발명품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그는 복잡한 것을 구현하여 기적을 만들어 내지만, 간소함의 중요성을 모른다.

"마침 자네에게 참 좋은 표본이 있지."

"어... 표본 말입니까?"

"그래, 표본. 들어오게!"

페르다의 외침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사내가 들어온다.

그들은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갑옷을 입고 있는 그는 제식을 구사하고 있었다.

왼발이 움직이면 왼손도 함께 들리고, 오른발이 움직이면 오른발이 들린다.

그 어색한 제식을 제식이라고 보이며 당당히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버넬은 그를 보자마자 싸늘함을 느꼈다.

"피치 힐의 말콤! 부름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 잘 왔네. 자네가 할 일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가슴에 손을 얹은 그는 열정이 넘치는 어린 소년 같았다.

별로 보기 좋진 않았다.

"2 곱하기 2가 뭔가?"

"쉽습니다! 4입니다."

"맞아. 그러면 7 곱하기 6이 뭔가?"

이번에도 쉽다는 듯이 대답했다.

"13입니다!"

"잘했네."

"하하, 과찬이십니다!"

말콤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주위의 사람들은 싸늘함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을 주워 왔지, 라는 얼굴.

페르다는 버넬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가 이해하고 사용할 만큼 간단하게 만들게."

"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믿네."

"...예?"

버넬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46화. 헛된 희망

공허에 빠진 얼굴을 한 버넬을 뒤로한 채, 페르다는 콘실러스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공의회에 대해서 말인데...."

대화 주제는 모든 고위 귀족들이 참석하는 대공의회였다.

"그 건에 대해서 참여해 줬으면 좋겠다는 대답을 들었다네."

"아아, 잘된 일입니다. 드디어 극동부를 대표할 만한 목소리가 나오게 될 줄이야...."

콘실러스의 자글자글한 눈가에서 눈물이 똑하고 흘렀다.

"죄송합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눈물이 많아지는군요."

"신경 쓰지 않는다네. 공작급만이 참석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 정보에 대해서 알고 있나?"

"빠삭하게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질문에 최대한 대답해 드릴 수 있도록 머리를 굴려 보지요."

"그곳에서 내 지위가 어느 정도 될 것 같은가?"

콘실러스가 그 물음에 숨을 흘리며 말을 골랐다.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이 틀림없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좋지는 않을 겁니다. 섭정님은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초보에 나이가 어립니다. 게다가 공동 자치가 아닌 대리의 신분이지요. 그걸 해석해 드리자면...."

콘실러스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거만한 사람을 연기하며 대답했다.

"장난감 칼을 만져야 할 풋내기에게 시험 삼아 진검을 쥐여 줬다... 같은 느낌이겠군요."

"자네도 그렇게 보고 있나?"

페르다가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콘실러스는 허허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미숙한 점이 있으나, 공왕령의 발전을 위해 제게 조언을 요하는 것을 보면, 진심 어린 발전을 기원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아무튼, 블랑카로스의 중립 구역인 화이트 하우스에는 시종을 포함하여 5명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쓸데없이 많은 사람들을 대동하는 것을 금하고 있지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만큼 꼴사나운 게 없긴 하지. 대부분 귀족들은 그 인원들을 다 채워서 가는가?"

"그렇습니다. 시종은 시종답게, 자제는 자제답게 차려서 자신들을 과시하지요. 섭정님께서 원하신다면, 제 기사들을 호위로 붙여서 최대한 화려하게 입회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네."

귀족의 얼굴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가식적인 웃음과 치장을 승부 보고 싶진 않았다.

"데려가실 분들이 있으시면 상관없습니다만, 저희 애들 한 명만이라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공왕의 얼굴을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페르다는 미간을 구겼다.

속내를 숨기고 슬쩍 꽂아 달라는 귀족들의 화법은 신물이 났다.

"빙빙 돌려서 얘기하는 건 싫어한다네. 그대가 나를 신뢰하고, 내가 그대를 신뢰한다면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해 주게. 뭐가 목적인가? 자네를 데려가 달라는 말인가?"

"이 늙은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대공의회에 얼굴을 비치겠습니까? 크흠...."

페르다는 직구를 던졌고, 콘실러스가 부끄럽다는 듯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아르웬이라는 기사, 아시지요?"

"그대의 기사 말이군."

곰 마물을 잡으러 갈 때를 첫 만남으로 제국까지 호위해 주기도 하며 많이 마주쳤던 기사였다.

"그 아이가 대공의회의 모습을 지켜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일개 기사에게 경험을 주겠다?"

"일개 기사이긴 하나, 충직하고, 기사도 정신도 훌륭합니다. 평생을 극동부에 봉사만 한 탓인지 견문이 좁아 아쉬운 아이입니다. 제대로 된 것들을 본 적이 없지요. 대공의회에서 넓은 세계를 보여 주면 자극이 될 것 같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콘실러스 백작의 요구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례적인 요청이었다.

일개 기사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대공의회에 데려간다라....

어쩌면 피붙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아르웬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지?"

"허허, 물론 생면부지입니다. 언젠가 전장에서 보았던, 그리고 제 기억에는 잊혀졌지만, 아이에겐 잊혀지지 않은 그런 관계일 뿐입니다."

콘실러스 백작에겐 가족이 없다.

정확하게는 모두가 죽었다.

아내가 죽고, 그 아들마저 죽자 그는 재혼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극동부로 스스로 발을 들였다.

자식 하나 없는 콘실러스에게 아르웬이라는 존재는 아들과도 같을 것이다.

"알겠네. 아르웬을 데려가도록 하지."

"이 늙은이의 쓸데없는 아집에 어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밖에 궁금하신 건 없으십니까?"

"대공의회에 의제를 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의제라.... 물론 동등한 권한이 있으니, 그 누구도 반발하진 않을 겁니다만...."

페르다의 위치가 어디쯤인가 물었을 때보다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걸 넘어서 역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군을 만들기보다 적을 만들 확률이 더 높지요."

"상관없네."

페르다는 아예 작정한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만, 그 의제가 무엇인지 소인이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거기서 발드로바를 악룡으로 칭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물을걸세."

"발드로바...."

콘실러스가 반사적으로 자신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대는 악룡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입니다.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코 근본은 소문만큼이나 사악하지 않으신 분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악룡으로 지정된 이유는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지 못하기 때문일세. 그렇지 않나?"

"알려진 바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끓어오르는 본성을 억누를 수 있으면 어떻겠나?"

"혈기를 억누를 수 있고, 인간을 해칠 의도가 없다면 그런 악룡이라는 누명은 쉽게 벗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크게 기대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발드로바의 편을 드는 자들이 대공의회에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바꾸면 되는 일이지. 물론 내 설명에 납득하고도 끝까지 우기기만 하겠다면...."

페르다의 눈에 살의가 담겼다.

"그에 당연히 상응하는 대답이나 대가를 내놓아야겠지만."

콘실러스의 목젖이 크게 꿀렁였다.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숨 막히는 감각.

테살로스 월처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죽였던 그 눈이다.

"회담장은 블랑카로스의 구역입니다. 부디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가 없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말게. 바보는 아니니까."

페르다는 턱을 짚었다.

앞으로 한 달인가.

대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은 공작 이상의 귀족들과 왕.

'그리고 드래곤 스폰.'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절대자의 대변자들.

인간의 사회이자, 동시에 용의 사회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 두 개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페르다가 어깨가 무겁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그것이 페르다가 이곳에 존재하는 의의였으니.

* * *

페르다는 동행할 사람들을 결정했다.

가장 먼저 콘실러스 백작이 요청했던 대로 기사 아르웬.

얼굴마담 시키는 데 탁월한 제드 스왈로우.

'나까지 해서 3명이면 될 것 같은데.'

3명을 더 데려가는 것이 대공의회에 참여하는 귀족들에게 맞지만, 페르다는 굳이 숫자를 채우려 들진 않았다.

다른 영주들을 대동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았고, 그들도 감히 요청하진 않았다.

그렇게 세 명이서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예기치 않은 인물이 페르다에게 오며 요청했다.

"대공의회에 저도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리였다.

페르다는 그녀에게 말했다.

"거기엔 가도 맛있는 게 없을 거다."

"제가 무슨 돼지인 줄 아십니까?"

"개돼—."

"이상한 소리 하시면 다시 한번 더 때를 밀어 버리겠습니다."

페르다는 입을 다물었다.

한다면 하는 여자였다.

"적어도 페르다님의 품위에 지장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네가 거기에 가 봐야 좋을 건 없을 거다. 거기에는 실버윈드가 정기적으로 참여한다고 하더군."

실버 드래곤, 실버윈드.

루리는 발드로바의 스폰이 아닌 실버윈드의 피를 이어받은 실버 드래곤이다.

실버 드래곤 스폰들은 발드로바를 증오하고 있다.

그녀가 실버윈드를 죽였으니까.

그 섭정도 탐탁지 않을 것인데, 실버 드래곤 스폰인 루리는 어떻겠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루리의 존재는 배신자나 다름없다.

좋은 소리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자리에 그녀가 끼일 이유가 없었다.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는 페르다의 생각과 다르게 반응했다.

"그렇기에 가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페르다는 한층 더 진지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가는 것이 명확하게 말해라. 내게 숨길 생각하지 말고."

페르다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그냥 정보 교류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루리가 무언가를 입안에서 웅얼이고는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실버윈드와 너무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주인님께 앙심을 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아볼 필요도 없는 일이지 않더냐?"

루리는 드래곤 스폰이다.

그것도 실버 드래곤의 스폰.

그 말은 즉, 누구보다 실버 드래곤들의 사고방식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발드로바에게 호의는 품지 않을 거다."

"오랜 세월이 흐른 일인 만큼 그 증오도 가라앉았을지 모릅니다."

"드래곤이 앙심을 품으면 멈추지 않는다. 그건 너도 알지 않더냐?"

드래곤은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설령 그 앙심을 품은 당사자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 대를 이어서 그 복수의 대상이 된다.

실버윈드는 결코 발드로바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루리 정도로 실력이 있는 드래곤 스폰이라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이야기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페르다는 루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만약'이라는 이름을 가진 희망을 걸고 싶은 것이었다.

"안 된다."

페르다의 눈은 차갑게 선을 그었다.

그렇기에 안 된다.

그 희망은 가망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셋이서 갈 것이니, 너는 얌전히 이곳을 지키도록 해라."

루리의 몸이 크게 동요했다.

애써 무표정함으로 감추려는 속마음.

그러나 진한 원망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루리는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 * *

페르다는 이따금 연공법을 다시 시도했다.

집중 상태로 들어가 각성까지는 완벽했다.

하지만, 그것을 받쳐 주는 레드 서클의 회전이 없다.

'뭐가 부족한 걸까?'

복수심이 부족하다면, 복수심을 채우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페르다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질투했으며, 그들의 지위와 힘에 맞서 싸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어떻게 해서 채우는 거지?

매년 매달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오직 그녀만을 바라봐야 충족되는 것일까?

'충족이라....'

우스운 말이다.

욕심은 갈증이 아니다.

갈증이 사라지면 그보다 더욱 큰 갈증만이 자리를 잡을 뿐.

그 갈증을 채우고 채우고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인가 이성은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

페르다는 복수를 위한 복수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감정은 온전히 페르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감정을 조급하게 해결하려고 할수록 잘못된 길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눈을 감고 조용히 자신의 심상 세계로 들어가 보았다.

그녀의 얼굴.

딱 한 번 마주했던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 가장 큰마음이었다.

하지만 발드로바는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대인 기피증이니까.

그렇기에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이건 언젠가 스스로를 잡아먹어 버릴 것이다.

"...역시 명상하는 건 내 체질이 아니야."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채우는 것이 익숙한 남자였다.

앉아서 망상을 채우는 것보다 산책으로 다른 잡념을 채워 버리는 게 낫다.

그렇게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는 달이 서쪽으로 기울어 있는 늦은 밤이었다.

고요한 복도를 채우고 있는 것은 푸른 달빛.

페르다는 창가에 서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었다.

"안나 로스노바."

마치 숨처럼 흘러나오는 이름.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 이름이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언제나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페르다는 어렸을 시절에 밤이 싫었다.

어두운 그늘 속에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괴물이 자신을 덮치는 상상을 했었다.

물론 지금도 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페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위험에 처할 때는 언제나 밤이었으니까.

그렇게 싫은 밤인데도, 달을 올려다보는 것은 그에게 얼마 없는 위안을 안겨 주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그것이 희미한 어머니의 미소를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먹혀 버리는 그 순간까지,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위안을 찾았었다.

'어머니....'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던 아름다운 어머니.

페르다는 그 생각으로 채워 갔다.

조금은 집착에서 멀어져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어머니의 존재로 채웠다.

그때였다.

긴 복도를 타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잘그락잘그락.

다른 성이었다면, 순찰을 돌아다니는 경비병이나 기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드로바 성을 순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루리뿐이었다.

그리고 루리는 갑옷 대신 메이드복을 입었다.

'그렇다는 건....'

페르다는 자신의 생각을 의심했다.

지금 이런 타이밍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그러나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와 드러나는 실루엣은 페르다를 확신케 했다.

어둠 속에서 나온 것은 드래곤 용기병의 갑옷.

그것을 입고 이 성에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명뿐.

나의 약혼자.

발드로바.

그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47화. 용안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용기병 갑옷.

2m 크기에 상대를 위압하도록 만들어 놓은 위협적인 장식들.

그러나 그녀의 맨 모습보다 더 많이 본 그 갑옷은 페르다에겐 발드로바의 일부로 느껴졌고, 그녀의 일부로서 사랑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런 모습의 발드로바라도 갑작스레 마주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으나, 생각보다 현실은 달랐다.

반가운 마음보다 얼떨떨한 마음이 더 컸다.

욕망에 미쳐 버려서 벌써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페르다의 앞에 섰다.

"...."

"...."

서로를 응시한 채로 침묵만이 흘렀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흐르다 못내 말문을 뗀 것은 발드로바였다.

"그러니깐 그게, 음, 그러니까...."

모래사장 속에서 진주를 고르듯이 힘겹게 말을 꺼내었다.

"산책을 좀... 하고 싶어서... 나왔어요."

"그렇습니까?"

"네, 그렇고 말고요!"

페르다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다에게는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발드로바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곱게 모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절그럭절그럭.

건틀릿의 강철이 맞물리면서 소음을 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

갑자기 마주친 페르다 때문에 불편한 걸까?

그러다가 못내 다시 입을 열었다.

"사,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에요!"

"예?"

"페르다 씨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서 나온 거예요!"

"그렇...습니까?"

"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에 담아 둔 죄악 하나를 고해한 것만 같았다.

페르다는 신경 쓰지 않았다.

페르다가 복도에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

그게 중요할 뿐이다.

그 말은 곧, 페르다를 만나고 싶기에 이곳으로 왔다는 것.

'나를 만나고 싶다.'

의식하고 나니 괜스레 떨린다.

양치는 하고 왔던가?

옷에서 냄새는 나지 않던가?

밀실에서 촛불 하나에 기대어 연기가 배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우려도 잠시였다.

페르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발드로바 공왕님을 뵙습니다."

"아, 네, 어서 오세요, 그... 페르다.... 페르다...."

이름을 부르면서 끝을 흐렸다.

말 맺음을 잊지 못하는 그 흐린 말은 투구에 내장된 음성 변조관 때문인지 구슬픈 울음소리처럼 울렸다.

"섭정이라는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 그래, 그거! 섭정!"

손뼉을 짝 치며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페르다 섭정. 그 호칭을 꼭 써 보고 싶었어요. 왕의 약혼자를 그렇게 칭하잖아요?"

"사실은 그건... 아니, 예, 그렇습니다."

정정하려던 것을 멈췄다.

차마 저 반짝이는 순수함이 이쁘다고 계속 손을 대면 때를 타게 된다.

"그럼 이제 저도 섭정이라 부르면 되나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적인 장소에서만 쓰이는 용어이니,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페르다라고 불러 주십시오."

"아, 그렇게 하겠다, 페르다...씨."

페르다, 페르다....

투구 안쪽에서 몇 번이고 되뇌며 연습하는 발드로바.

귓속에 속삭이는 것만 같아 괜스레 귀가 간지러웠다.

"다시 한번 페르다 씨를 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이해합니다."

페르다는 조용히 공감했다.

그녀 또한 마음이 컸던 모양일까?

"저... 이렇게 온 건 루리 때문에 왔어요."

그런 건 아니었다.

"루리 말입니까?"

발드로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리가 최근에 많이 힘들어하는 듯해서요."

페르다는 루리의 참가 요청을 거절했던 것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은 화가 나 있었다.

"제가 감정이라는 걸 잘 헤아린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아이가 슬퍼하는 얼굴은 잘 알고 있어요. 그 아이는... 틀림없이 지금 슬퍼하고 있어요."

그녀의 투구가 페르다의 얼굴을 향했다.

"혹시 그 아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안다면... 페르다 씨가 알지 않을까 싶어서...."

페르다의 입술은 달싹이기만 했다.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아는데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이 진실을 말해서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진 않을까?

허나 끝내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

"그 변화는 아마 제 탓일 겁니다."

"페르다 씨의 탓이요?"

"루리가 대공의회에 참석하려고 제게 요청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요인은 그것뿐입니다."

"그 아이가 왜 그곳으로 가는... 건가요?"

"말하길 실버윈드 측과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발드로바의 몸이 움찔거렸다.

허나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화 정도라면... 데려가도 되는 것 아닌가요?"

"헛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헛된 희망?"

"그 시종이 하려는 행동은 피딱지를 긁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물지도 않은 부분은 긁다 보면 다시 살점이 떨어지고 상처가 벌어지죠. 딱 그런 일입니다."

"아아, 그건... 많이 아프죠."

"예, 많이 아픕니다."

발드로바가 공감하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팔뚝을 손으로 감쌌다.

"하지만 그 헛된 희망이... 헛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않나요?"

자신없는 물음표로 말을 맺는 발드로바.

"실버윈드는 여전히 앙심을 품은 상태입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루리에겐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이야기하면 잘 풀릴 거라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그 아이가 돌아갈 곳은 생길 테니까요."

"돌아간다니요?"

페르다의 물음에 아차 싶은지 비장하게 말을 꺼내었다.

"아아, 페르다 씨는 모르겠네요. 그 아이는 제 스폰이 아니라 실버 드래곤의 스폰이에요."

"아...."

"제게 충직한 아이였으니,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할 수 있죠."

"예...."

애초에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페르다가 놀란 것은 그저 돌아간다는 말 때문이었다.

"드래곤 스폰들은 피로 이어진 가족들이에요. 루리에게 가족은 실버윈드의 스폰들이죠."

"루리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가족만큼 소중한 것은 없지 않나요?"

소중한 가족.

페르다에겐 너무 동떨어진 주제였다.

그는 가족에게 괴롭힘을 받았고, 끝내 버림받았다.

페르다의 복수심의 근원은 가족이라는 존재였고, 끝내 자신에게 했던 모든 것들을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모든 감정이 해후된 지금은 신경 따위는 쓰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리는?

루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페르다는 모른다.

루리는 발드로바를 아낀다.

그러나 실버윈드와 이어진 핏줄에 비하면 보잘것없을 수도 있다.

이 기회에 그녀는 발드로바와의 연을 끊어 내려는 수일 수도 있다.

미래의 페르다가 발드로바의 심장을 뜯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루리가 그걸 바랄지도 모르지만...."

페르다는 발드로바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그러길 바라십니까?"

바로 대답하는 대신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난간에 얹은 손은 작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아이를 이곳에 묶어 둔 건 저예요. 돌아갈 길이 있다면... 그 아이를 놓아줘야만 하겠죠."

"...."

"그리고...."

발드로바는 페르다를 내려다보았다.

"제겐 이제 어엿한 약혼자가 있지 않나요?"

페르다는 형용할 수 없는 갑갑함이 가슴을 감쌌다.

결론이 난 문제에 다시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루리를 정말로 대공의회에 데려가도 되는 것일까?

끝내 페르다는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루리를 데려가실 건가요?"

"예.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모습으로 고개를 까닥인다.

주제 하나가 끝이 나니 다시 무거운 침묵이 엉덩이를 깔고 자리 잡으려 들었다.

"대공의회...."

발드로바가 그 엉덩이를 조심스럽게 걷어찼다.

"매번 열린다는 말만 들었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어요."

"궁금하십니까?"

"무척이나 궁금해요.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모든 종족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곳이잖아요? 그런 곳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죠!"

발드로바의 투구가 휙 돌아가 페르다를 보며 물었다.

"혹시 페르다 씨가 돌아온다면, 그곳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요?"

비록 투구에 가려졌으나, 그녀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빛의 아래에 결집하여 어둠을 물리치는 용사의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추운 겨울 속 쌓여 있는 깨끗한 눈밭처럼.

눈이 부신 순수함이었다.

"이야기는 듣기 좋지만은 않을 겁니다."

"어, 어째서요?"

당혹감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

페르다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침묵하거나 변명을 둘러대기엔 이미 늦었다.

그러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형편 좋은 이야기는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 잇속을 챙기는 게 바쁠 뿐이죠."

"그런 건가요?"

"예. 그러니 너무 큰 기대를 하진 말아 주십시오."

어렵게 말을 맺었다.

발드로바는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충격에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있을까,

아니면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짓고 있을까?

"페르다 씨는...."

돌아오는 대답은 습기 없이 평온한 여인의 목소리.

"고드윈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일어섰을 때, 어땠는지 알고 있나요?"

알 리가 없다.

15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니 페르다의 할아버지도 겪지 못했던 시대니까.

"고드윈이 세상을 혼돈에 빠트렸을 때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저희들이었어요."

"용들 말입니까?"

발드로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다에겐 별로 감흥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만약 에스콜레이아의 학자가 이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학계가 뒤집혔으리라.

발드로바도 아차 싶었는지 자신의 입을 가렸다.

괜스레 주변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귓속말했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전부 비밀이에요?"

"무덤까지 끌고 가겠습니다."

"아무튼... 그 시대에는 혼돈과 타협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대책이라고 답을 내놓았어요. 장생족인 드워프나 엘프들도 모두 그 타협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기도 하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 타협이 이루어졌다면, 마가 극동부에 내몰린 채로 오수를 내뱉어 대는 땅이 될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오직 한 종족만이 그러지 않았어요."

이 부분은 페르다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가장 먼저 인간들이 일어선 거죠."

양손을 곱게 포개어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들이 타협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검이 마를 용서하지 않았기에 대륙에는 아직 희망이 있음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이 대륙은 다시 평화가 찾아왔어요."

그날의 추억에 젖은 발드로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페르다는 가슴으로 이해했다.

존경이다.

드래곤과 인간.

장생종과 단명종.

불멸자와 필멸자.

인간이 드래곤을 존경하고 경외할지는 몰라도, 드래곤이 인간을 존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허나, 발드로바는 달랐다.

"비록 지금은 탐욕에 눈이 젖어 있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마를 위해 싸울 거예요. 그러니...."

발드로바의 머리가 페르다를 살며시 내려보았다.

달빛 아래에 놓인 붉은 갑옷은 실로 고결하게 빛났다.

"저는 그들을 사랑할 거예요."

그때였다.

머릿속에 일어나는 화학적인 반응은 페르다를 미지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용의 머리를 본따 만들어 낸 투구,

그 속에 숨어 있는 가녀린 여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희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페르다는 바보같이 탄성을 내질렀다.

하늘을 높이 날다가 내리꽂히는 듯하다.

한없는 하늘에서 추락한 나머지 떨어진 충격은 헤아릴 수 없다.

"페르다 씨?"

"...."

"괜찮으신가요? 말이 없으세요...?"

발드로바가 쩔쩔 매면서 페르다의 안색을 살폈다.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페르다가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네??"

"그 용안을 한 번만 제게 더 보여 주실 수 있으십니까?"

"요, 용안? 어, 제 얼굴을 말하는...??"

"예. 당신의 얼굴입니다."

페르다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발드로바의 투구로 향했다.

발드로바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투구를 사수했다.

"아, 안 돼요! 저, 어, 얼굴은 아직 보여 줄 수 없어요!"

"부탁드립니다. 부디 그 용안을 한 번만 더 제게...."

"그, 그러니깐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다가오지 마세요!"

한 발짝 다가가면, 한 발짝 물러난다.

그렇게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추격전의 연쇄를 끊은 것은 발드로바였다.

"죄송해요오오!!"

발드로바의 사과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그녀가 서 있던 곳에 남은 온기.

그 온기에 취해 열병에 걸린 얼굴을 한 페르다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곳에 멍하니 시선을 던졌다.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왔다.

페르다의 열을 식히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는 다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

그러나 달아오른 가슴 속에는 어머니의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처음과 다르게 걱정할 건 없었다.

페르다의 가슴 속에 깃든 감정은 붉게 회전하고 있었다.

48화. 그림자의 형태

페르다는 다시 어두컴컴한 방 속으로 돌아갔다.

수면을 취하는 대신 연공법을 속행하기 위해서였다.

마나 연공법인 쉐이프 오브 쉐도우.

여느 마법사들이 서열로 세운다면, '상'에 위치할 만큼 난이도가 있는 연공법이다.

그러나 페르다는 이미 그보다 더 어렵고 고난한 길도 걸어왔던 남자였다.

그런 것 정도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는 듯이 해낼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은 오직 서클의 움직임뿐.

그리고 마침내 그 서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억지로 짜내는 방법은 페르다도 알고 있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 당장 5서클까지도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감정에 잡아먹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페르다는 이 감정을 경계하며 해답을 찾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낼 수 있었다.

페르다는 눈을 감았다.

마나의 흐름을 퍼트려 전신에 집중한다.

그리고 천천히 기울여 모든 것을 엎어 버렸다.

페르다의 심상이 전부 바닥에 눌어붙는다.

그의 정신은 그림자의 세계에 투영되었다.

숨에 살랑살랑 움직이는 촛불 속 아른거리는 그림자.

그 그림자가 스스로 움직이더니, 스멀스멀 페르다의 몸으로 말려 올라왔다.

말려 올라온 그림자는 페르다의 단전 속, 붉은색 원과 마주했다.

'발드로바.'

페르다의 머리가 멋대로 발드로바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미치광이 화가가 살고 있었다.

캔버스에 똑같은 모습을 반복해서 그리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부수는 것마저 반복한다.

수천 장을 그리고, 수천 장을 부쉈다.

충족되지 않는 마음은 단순한 갈증이 아니었다.

'3서클에 도달했을 때 알아내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발드로바의 폭주를 막아 내면서 사라져 버렸던 의문.

그러나 페르다는 끝내 알아내었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발드로바의 모습에는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있었음을.

그 빈자리에는 두 음절의 글자가 있었다.

'내일.'

그 순간, 마음속의 미치광이 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노에 사로잡혔을 때와 다르게 열성이 깃들었다.

이번에는 좀 더 넓은 캔버스로 발드로바의 모습을 거침없이 그려 갔다.

'그녀의 내일.'

단순한 그녀의 내일이 아닌.

'내가... 있는 내일.'

아직 채워지지 않은 곳에 자신을 채워 넣었다.

그 그림은 한 문장으로 만들어졌다.

'그녀와 내일을 함께하고 싶다.'

문장이 완성되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얄팍한 상상으로 만들어지던 그림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르다는 이걸 알고 있었다.

'동심.'

아주 먼 옛날, 몸이 약한 소년이 꾸었던 꿈.

두루뭉술하게 그렸던 반려의 모습은 붉은 머리에 네 개의 뿔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으로 덮어 씌워졌다.

그것은 꿈이었으며, 동시에 황홀경.

황홀함은 감정의 절정.

움직인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마음은 서클을 격동시켰다.

그대로 두면 페르다는 망가지게 될 운명이다.

그러니 페르다는 집중했다.

둘이 함께하는 미래는 몽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만 하기에.

페르다는 집중했던 영의 형태감을 서클에 가져갔다.

그 순간, 수십 다발의 손이 격류 하는 마나들을 끌어모아 형태를 빚기 시작했다.

'쉽다.'

단순히 한 손으로 퍼 올리며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1, 2서클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을 때가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너무 쉬워.'

전방위로 포위하여 누르고 있으니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회전은 회전대로 움직이며, 형태는 형태대로 빚어진다.

그렇게 새로운 껍질의 형태로 덧씌워졌다.

페르다는 그렇게 4서클에 도달한 것이다.

페르다는 눈을 떴다.

그림자가 꾸물거리며 움직이더니 이윽고 손의 형태로 변했다.

그것은 3위계 마법인 쉐도우 핸드.

아니, 그 쉐도우 핸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마법으로 만들어 낸 인공물 따위가 아니었다.

페르다의 몸의 안쪽에 숨겨 놓았던 또 다른 몸 부위.

페르다는 그것에 곧바로 적응했다.

'그림자가 나이며.'

손이 분화되어 또 다른 손이 만들어진다.

그 손들든 또 다른 손으로.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분화한다.

좁은 방 안에는 검은 손들로 가득 채워졌다.

'내가 곧 그림자다.'

촛불은 짙은 어둠을 견디지 못해 픽 꺼졌다.

* * *

길드.

길드는 길드원들의 신분을 증명하고 혜택을 주는 집단이다.

대신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묻고, 규칙으로 통제하며, 이익을 위해서는 단합을 요구하기도 한다.

조합을 통해서 그들의 이권을 지켜 가는 것이 바로 본질이었다.

하지만 세르데스 인류 마법학회는 그런 길드와 본질이 달랐다.

증명보다는 감시.

혜택보다는 통제.

그것이 세르데스 대륙에서 마법사들이 살아가는 세계였다.

그 창립자는 에르데스 로톤.

용마전쟁에서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결집된 12인 원정대의 전쟁 영웅이며, 인류 마법학회를 창립자이다.

무려 1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살아있으며 현역이다.

인류 최강의 마법사 타이틀을 현세대까지 내려놓지 못한 마법사.

지성의 집합체.

살아 있는 증인.

무시할 수 없는 연륜을 지녔으나, 그녀는 한창때의 여자들보다 젊었다.

"공무를 하셔야 합니다."

"싫어!!"

젊다 못해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

"일하기 싫단 말이야! 날 내버려 둬!"

"공무가 며칠째 밀렸습니다. 이것 보세요. 쌓여서 학회장님 얼굴이 안 보입니다요!"

"네 얼굴 보기 싫어서 올린 거야. 블루가 대신해."

"제가 어떻게 대신합니까? 그리고 제 이름은 루입니다."

"좀 밀린다고 안 죽어. 그리 꼬우면 내 얼굴 보고 말하라 그래."

"그치만 문을 열어 주지 않잖습니까?"

"결투 신청하면 내가 잘 열어 주잖아?"

"세상 어떤 미친놈이 학회장님이랑 싸우겠습니까?"

그녀는 용마전쟁의 전쟁 영웅이자, 인류 최강의 마법사다.

서클의 격차가 있으면 승률이 한없이 낮은 바닥에서 이론적으로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깐 그게 문제인 거야. 말로만 사활을 걸었다고 그러지, '뒤져 볼래?' 하고 물어보면 '살고 싶습니다!' 하고 호다닥 도망치잖아 응? 근성이 없어, 근성이."

"목숨을 건 사람을 불구로 만드셨잖습니까?"

"살다 보면 힘 조절 좀 실패했지. 당사자와 원만한 합의를 거쳤잖아?"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넘겨 버렸다.

비서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숨과 넘겨받은 문서를 주는 것밖에 없었다.

"이번 대공의회 참석자 명단이에요. 확인해 주세요."

안 하셔도 상관없고.

그렇게 입안에 중얼거리는 루.

에르데스의 손가락이 한 번 까닥이자, 그 명단이 그녀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아는 늙은이들이 많네. 그 나이를 처먹었으면, 이제 아들내미한테 물려주기나 할 거지, 언제까지 해 먹으시려고."

"그러게 말입니다."

비서의 눈이 에르데스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눈깔 뽑아 버리기 전에 거둬라. 그러지 않으면, 응?"

재빠르게 훑던 에르데스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내가 잘못 봤나 싶어서."

몇 번이고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그런데 잘못 본 게 아니었네. 블루, 너 이 새끼 일 처리 똑바로 안 해?"

"예?"

갑작스러운 폭언에 당황했다.

그녀가 명단 중 적혀 있는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있는 이 남자의 성이 발드로바라고 적혀 있잖아?"

"아, 그거 실제로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의 이름이 맞습니다. 제가 잘못 기재한 게 아니고, 주최 측 실수도 아니란 뜻이죠."

"구라 아니라고 맹세해?"

"예. 기록도 있습니다?"

에르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민망함을 떨쳐 내었다.

"그 무시무시한 드래곤이 별일이네. 그러면 발드로바의 스폰이야?"

"어... 그거 모르셨습니까?"

에르데스가 빙긋 웃었다.

그런데 얼굴은 싸늘한 그늘이 졌다.

"내가 모르는 게 뭔데? 세상 물정 모르는 빡통 아가씨라는 사실? 아니면 오늘 네 모가지가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

"헉, 그게 아니라 결코 학회장님을 비하하려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며, 이것은 순수하게...."

"본론."

"그러니까 이번에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의 약혼자입니다."

"약혼자?"

철없는 에르데스지만, 발드로바의 약혼자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찐?"

"예?"

"찐이냐고."

"어, 예. 찐입니다."

"신기하네. 사형받겠다고 가는 놈은 없는데... 페르다, 이 인간 기록 좀 줘 봐."

"아, 잠시만요!"

비서가 양손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며 주문을 외웠다.

"서치, 페르다 발드로바."

그 순간, 집무실 바깥에서 종이 다발이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비서의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주문을 마친 비서가 그 종이를 에르데스에게 건네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그녀의 눈이 건네받은 문서를 빠르게 훑었다.

"어디 보자, 로스노바 가문 삼남에... 흠...."

에르데스의 눈빛이 사뭇 차분해졌다.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녀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블루."

"예."

"대공의회가 언제 열리지?"

루가 눈을 크게 떴다.

"5일 뒤에 열립니다만, 설마 가실 생각입니까?"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나 해 댈 거 같아서 그만두려 했는데,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에르데스의 입술이 페르다의 초상화를 지그시 응시했다.

"게다가 이 멍청하게 잘생긴 얼굴 정도는 볼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참석하신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늦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라도 얼른 마차 준비를...."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에르데스의 손가락이 허공을 향해 빙글 돌린다.

그러자 허공에 그녀가 그린 궤적과 비슷한 원형의 포탈이 생겨났다.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뭣 하러 그런 귀찮은 짓거리를 해?"

5위계의 텔레포트 도어.

어려운 마법을 그녀는 영창도, 마법진도 없이 간단하게 구현하였다.

마법사라면 평생 보기 힘든 경이로운 순간이리라.

그러나 루에게는 경이보다는 불안감이 더욱 컸다.

"그러니깐 루. 나 공무하러 갔다 올게."

"예?"

"나 없는 동안 잘 지키고 있으라고. 고양이들 먹이 주는 것도 잊지 말고!"

"아니, 학회장님. 잠시만요!"

"나 간다~!"

학회장이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며 텔레포트 도어 속으로 몸을 던졌다.

"포탈 타실 거면, 밀린 공무는 하고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아아악!!"

루가 내지르는 비명이 무색하게 포탈은 닫혔다.

* * *

대공의회 10일 전,

페르다는 대륙 중부로 가기 위해 채비를 마쳤다.

대륙 중부에 있는 블랑카로스의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 지금부터 출발해야만 했다.

'관례라는 건 쓸데가 없군.'

지위가 높을수록 많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

그중에는 시간도 있으며, 여유를 가지는 것은 귀족의 덕목이다.

미래를 경험했던 페르다로선 우스운 일이었다.

마력 자동차가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런 여유로운 문화는 사라졌으니까.

오히려 귀족들이 더욱 빠르게 이동할 수단을 바라게 되었다.

"섭정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루리가 아닌 제드였다.

그는 발드로바 성의 일원으로서 붉은 정복을 입고 있었다.

발드로바 공왕령의 가신들은 그렇게 입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콘실러스 백작님께서 보내신 아르웬 경과 휘하 병사들이 막 도착했습니다."

"그렇군."

"저희도 마차 준비는 마쳤고, 이제 몸만 오르시면... 응?"

제드가 의아하다는 듯이 페르다의 몸을 쓰윽 훑었다.

"문제 있나?"

"문제까진 아니고 그걸 입고 가시나 해서...."

페르다의 옷은 수수하기 짝이 없었다.

귀족들은 어떻게든 자신이 빛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보석으로 실을 뽑아 빛이 나는 것은 기본.

그중에서 가장 만만한 금색 실은 반드시 들어간다.

왕궁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페르다는 금실에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게다가 광택도 적당히 풀 먹인 수준뿐.

여타 다른 귀족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수수하다.

"황금색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

"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반응하는 제드.

그의 옷을 스윽 훑어보고는 나름대로 평가했다.

"그게 없으니 저랑 비슷해 보일 텐데요."

"잘됐군. 멋도 모르는 암살자가 나를 노릴 확률이 줄어드니."

"대역치고는 너무 잘생겨서 절 노릴 것 같진 않습니다만."

제드가 나르시시즘이 한껏 들어간 미소를 지었다.

페르다는 그런 모습에 개의치 않고, 탁자 위에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받아라."

물건을 받기엔 거리가 있어서 제드가 발을 떼려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스슥—.

페르다의 손에서 그림자가 뻗어 나오더니 그 물건을 잡고 자신에게 건너오고 있었다.

그림자 손에 적잖게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이게 뭡니까?"

"약속한 물건이다."

약속한 물건이라는 말에 제드는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발드로바의 부군이자, 대리인, 섭정인 페르다 발드로바가 위대한 12용이자, 힘과 불의 지배자이신 발드로바의 대리로서 제드 스왈로우를 왕의 검이자, 백성들의 방패이며...."

혀가 꼬일 법한 내용을 전부 다 읽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었다.

"기사 서임장?"

제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고개를 들었다.

"...이거 진짭니까?"

"그럼 가짜겠나? 애초에 그걸 약속하고 들어온 것이지 않나?"

"아니, 상류계에 몸을 들이게 힘써 주겠다고는 했지만, 바로 기사로 서임해 줄 줄은 몰랐는데요?"

기사가 되는 것은 귀족의 발판이 되는 단계이다.

그렇기에 대대로 내려온 기사 집안이 아니거나, 눈에 띄는 무훈을 쌓지 않으면 되는 게 불가능하다.

"지금 이렇게 받아도 되는 겁니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네 능력은 제국 창고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제드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런 건 원래 성대한 연회가 기본이지 않습니까?"

"...."

"여자들도 부르고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하는 그런 중요한 부분을 생략한다는 게 좀...."

페르다는 잔을 까닥거리는 시늉을 하는 제드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도로 뺏어 버릴까.

"네 임무에만 집중해라, 제드 '경'."

"씁. 알겠습니다, 섭정님."

내 파티....

그렇게 꿍얼거리면서 그는 자리를 떴다.

"나도 빨리 준비해야겠군."

본래라면 루리의 시중을 받아야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스슥—.

페르다의 소맷자락과 가슴에서 검은 안개 따위가 뻗어 나왔다.

그 안개는 여덟 가닥의 손으로 빚어져 페르다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단추를 여미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면서 완벽에 가까운 모양새를 만들어 낸다.

'역시 4성쯤은 올라야 할 만하군.'

지금은 미숙한 상태이기에 이런 간단한 시중에 써먹지만, 이 손들은 페르다의 팔이다.

익숙해진다면 마법진을 구사할 수 있고,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다.

재능은 아직 페르다에게 남아 있었으니, 남은 것은 연습과 경험뿐.

"가 볼까?"

페르다의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타고 흘러갔다.

홀로 내성 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그 아래에 많은 병사가 집결해 있었다.

"예를 갖추어라!"

아르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무릎을 꿇었다.

단 한 동작이었을 뿐인데도, 얼마나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졌는지 알 수 있었다.

"아르웬 울프하트, 휘하 30인 부대, 호위 작전 수행을 명받았습니다!"

"명받았습니다!"

기사들의 외침 소리.

페르다는 그들 한 명씩 스윽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해 주게."

"예! 각자 위치로!"

아르웬은 말 위에 올라타고 병사들은 호위를 위한 방진을 펼쳤다.

아르웬의 옆에는 제드가 함께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기사가 된 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여자깨나 울렸다는 제비답게 모양새가 잡혀 있었다.

페르다는 마차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붉은색의 마차와 메이드 루리.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문을 잡고 있었다.

"오르시지요."

"그래."

페르다가 성을 나서 마차에 올라타려던 그 순간이었다.

페르다는 시선을 느끼고 슬쩍 고개를 돌려 성을 올려다보았다.

내성에서 성문을 내려다볼 수 있는 발코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무엇을 기대한 것인가?

"페르다님?"

"간다."

페르다가 자리에 올랐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일의 긴 여정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49화. 화이트 하우스

세르데스 중부

고르게 지어진 평야 한가운데에는 성 한 채가 우뚝 서 있었다.

논밭의 터로는 딱일 정도로 기름지고 트인 땅이었지만, 있는 것은 잔디뿐인 푸른 초원.

주변에는 사람이나 생물이 사는 흔적 따위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녹빛 바다 위에 얹어진 섬처럼 보였다.

그곳이 바로 블랑카로스의 영역이자, 모든 대륙의 사건들을 다루는 대공의회장.

통칭 화이트 하우스.

페르다는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 앞인가?'

페르다는 성문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성문은 이미 열려 있다.

보통 사람들의 육안으로는 그게 끝이었지만, 페르다처럼 마력에 익숙한 자들은 볼 수 있었다.

성문 앞에는 반투명한 하얀 장막이 원형 돔 형태로 결계처럼 쳐져 있었다.

질서와 영역.

그 두 개를 만족한다면, 블랑카로스의 영역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거스를 순 없다.

설령 신조차도 말이다.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성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청년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블랑카로스 님은 규칙과 질서를 지키는 자들에겐 관대하신 분입니다."

페르다는 사내의 용모를 훑었다.

새하얀 복색에 새하얀 피부.

창백한 모습이 뱀파이어를 연상케 한다.

만약 한 쌍의 뿔과 눈이 없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 사내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블랑카로스의 손, 페르다 님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예상대로 블랑카로스의 스폰이었다.

블랑카로스의 스폰은 총 세 명으로 각각 손, 입, 그리고 눈이 있다.

각 부위가 이름인 만큼 그 부위에 특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

그들은 여타 다른 드래곤 스폰답지 않게 친절하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블랑카로스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알겠다."

페르다는 그 영역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작은 입자 따위가 페르다의 피부 사이를 파고드는 감각을 느꼈다.

곧 페르다는 단전 속에 깃든 서클의 움직임에 이상을 느꼈다.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다만 이물질에 걸린 듯이 턱턱 걸리는 게 아닌 마치 페르다의 의지로 힘을 빼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참으로 놀랍군.'

절대적인 영역.

그 절대적인 것은 자신마저도 적용되기 때문에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며 견고했다.

그러나 그 억누름은 완전히 무력화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것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해칠 수 있다면 해쳐 보도록 해라.'

하지만 블랑카로스의 법봉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변명의 여지를 한 줌조차 쥐지 못한 채로.

그것을 강조하려는 셈이었다.

'쉐도우 핸드 정도는 움직이겠군.'

마법진을 만들기 위한 집중 또한 간섭되지만, 만들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이런 상황을 위해서 익힌 것이 바로 쉐이프 오브 쉐도우였으니까.

페르다는 슬쩍 뒤를 보았다.

자신을 따라오던 제드나 아르웬도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영역에 발을 들인 기분은 어떤가?"

"썩 좋지는 않네요. 무력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눈도 좀 뻑뻑하고요."

"저도 그렇습니다. 조금 힘이 빠지는 기분입니다. 오러를 쓰지 못하는 것 같은데...."

기사는 오러를 쓰지 못하고, 제드는 적안족들만이 지닌 특유의 능력이 방해받고 있었다.

"루리, 너는?"

"이상 없습니다."

"그런가?"

대화는 담백하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 둘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라면 충분히 이상하다고 느낄 만했다.

아르웬이 슬쩍 제드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저기 스폰 아가씨랑 섭정님이랑 무슨 일 있었습니까?"

"몰라, 나 저기에는 신경 안 쓰기로 했어."

용 싸움에 인간 등 터지는 법.

이미 한 번 느껴 본 제드는 몸서리를 쳤다.

"회담 개최까지는 5시간이 남았습니다.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연회장으로 가시겠습니까?"

"차이가 뭐지?"

"휴식인가, 친목 교류인가입니다. 지금 연회장에는 많은 분들이 모여 계십니다."

"당연히 연회장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드가 유독 눈을 반짝였다.

페르다가 그를 한심하다는 눈을 하자, 제드가 서둘러 변명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상대를 미리 알아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보셨습니까?"

"넌 그렇지 않으니까."

제드는 어이없다는 듯이 쏘아보았지만, 감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연회장으로 안내해 주게."

"알겠습니다."

블랑카로스의 손이 안내를 시작하였고, 페르다는 그 뒤를 따라가기 전 제드의 어깨를 토닥였다.

"연회 충분히 즐기도록 하게."

"예?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걷다가 제드는 그 말이 마음속에서 걸려 왔다.

생각하고 생각해 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맞을 수도 있다.

페르다라면 그렇게 할지 모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드가 슬쩍 페르다에게 물었다.

"설마 이 연회로 서임식 연회 땡 치려는 생각은 아니시죠?"

"...."

"아니...시죠?"

페르다는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 * *

화이트 하우스 연회장.

회담까지 5시간밖에 남지 않은 만큼. 그곳에는 이미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한 사람에게 허용된 동행인이 제한되지 않았더라면 연회장은 이미 미어터져 버렸을 것이다.

새하얀 대문이 스르르 열리며, 안에서 품었던 웃음과 음악이 흘러나왔다.

"호오."

처음으로 발을 들인 대공의회.

그 모습은 감상적이지 않은 페르다조차 감탄사를 내뱉게끔 했다.

제국의 건물도 화려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결국 인간이 지어낸 것.

드래곤의 건물은 인간이 지어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 안에는 이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단순히 인간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엘프의 대족장, 드워프, 노움처럼 인간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종족들까지도 참석했다.

"오오...."

참지 못하고 감탄사를 터트린 것은 아르웬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제드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파티는 처음 오나 봐, 기사 양반?"

"아니, 백작님 따라 공무로 이런저런 파티는 많이 가 봤다."

"그럼 시골 촌놈 같은 얼굴 하지 말라고. 다 티 나니까."

"아, 그, 그러지...."

제드의 경고에 아르웬은 순순히 인정하며 시선을 정면에만 던졌다.

어색한 건 사라지지 않았다.

'콘실러스의 말이 맞았군.'

그는 경험이 필요한 인간이었다.

시골 촌놈인 아르웬과 다르게 제드나 루리는 그 분위기 속에 휩쓸리지 않았다.

제드는 이런 사교계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

루리는 애초에 마이페이스.

그리고 페르다가 이 화려함 아래에서 느끼는 감정은,

'독사의 소굴로 들어온 기분이군.'

불쾌감이었다.

지방 영주들과의 기 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부터가 마치 싸움처럼 느껴진다.

호의적인 눈동자는 약점을 포착하기 위해 끊임없이 훑고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것까지 전부 페르다를 품평하는 듯했다.

'그러니 고위 귀족이며, 한 나라의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겠지.'

그들에겐 힘이 있다.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는 힘.

오르고 싶은 자리에 올라가는 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릴 수 있는 힘.

그런 이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실로 간단한 질문이었다.

페르다는 오히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보란 듯이 걸어갈 뿐이다.

페르다는 그들 하나씩 눈을 마주치며, 흐름을 읽었다.

모두가 어울리는 사교계라고 해도 결국엔 제 파벌들끼리 뭉치기 마련.

페르다는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만약에 뭉치게 된다면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누군가가 페르다의 눈에 밟혔다.

"허허, 왔는가! 발드로바 섭정!"

뭉쳐 있는 인간 무리 중에서 독보적으로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사내와 여인들.

마치 그 중심에 있다는 듯이 둘러싸인 채로 페르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 사내의 어깨에는 아르켄 제국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알렉산더 아르켄.'

아르켄 제국의 1황자였다.

* * *

무능한 황제, 고드프리 아르켄.

그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아둥바둥했던 1황자, 알렉산더 아르켄과 2황자, 우레아스 아르켄.

제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역사의 현장이라 그들은 자칭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고드프리는 건재하고, 두 아들은 비웃음을 받았다.

'무능한 황제조차 끌어내리지 못한 무능한 두 아들.'

이미지에서부터 고드프리가 선녀였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으니 황제의 자리를 더욱 굳건하게만 만들어 준 셈.

제국의 멸망을 바라는 페르다로선 그 두 놈은 쓸모없는 것들일 뿐이다.

"정식으로 인사하지, 알렉산더 아르켄일세."

장남 알렉산더 아르켄.

30대의 중년으로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은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 입고 있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제1황자님을 뵙습니다."

"일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해 주지 못해 미안하네. 그날은 공무 때문에 눈 뜰 새도 없이 바빴거든."

개코나.

페르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여인이 거들었다.

"하하! 황자 앞엔 1억 신민이 있는데, 몸이 두 개도 모자라지 않겠어!?"

금색으로 빛나는 황제와 다르게 그녀의 빛은 푸른색 복장이었다.

앳되어 보이는 외견에 호탕한 웃음이 실로 건방지다 싶지만, 알렉산더도 그녀를 감히 어떻게 하진 못했다.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그녀의 나이는 세 자리가 넘었으니까.

"이 미남은 누구야? 내게 소개시켜 주지 않겠어, 황자?"

"아아, 그렇지! 이거 실례했습니다! 인사드리도록 하게! 세르데스 인류 마법학회 학회장이신 에르데스 로톤 님일세."

에르데스 로톤.

로톤.

한때는 가장 위대한 연금술사 가문이자, 최악의 사기꾼 집안.

그 집안에서 마지막 핏줄이 바로 에르데스였다.

그녀에겐 영지도, 작위도 없다.

가지고 있는 것은 7서클뿐.

그 이름 아래에 인간 사회의 마법사들은 전부 그녀의 손 아래에 관리되며 통제된다.

아니,

통제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페르다 발드로바입니다. 위대한 대마법사를 뵈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하하! 공왕 폐하의 용안을 한번 뵙고 싶었는데, 그 약혼자를 먼저 보게 됐네."

"이 자리에 참석하시는 건 힘들다 들었습니다."

"물론 알고 있어. 이곳은 불멸자가 아닌 필멸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이니까."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즐겁다기보다는 반사적으로 짓는 미소에 가까웠다.

그녀의 눈이 지그시 페르다를 응시했다.

"발드로바 섭정, 아니 페르다 섭정이라고 부르도록 할게. 아무래도 발드로바라는 이름 자체를 언급하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래도 되지?"

"그러도록 하십시오."

"몇 살이야?"

"18세입니다."

"마법사 집안?"

"아닙니다. 로스노바라는 기사의 삼남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이 달덩이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흠, 놀라운 일이네! 기사들도 마나 연공을 한다고는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곁가지였던 것으로 아는데. 네 몸에서는 마법사의 것이 느껴진단 말이야?"

"마법사로서 연마를 했습니다."

"오오, 그래? 어린 나이에 커다란 성취를 이뤘구나?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쉴 새 없이 혀가 움직였다.

"황자에게 들었어. 이번에 제국에서 쥐새끼를 잡는데 큰 공을 이뤘다지?"

"쥐새끼 말입니까?"

"흑마법사 말이야."

기억났다.

지하 수로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상은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걸림돌이 되어 버릴 것이 뻔해서 빼 버렸던 것이지만.

페르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큰 그림을 위해 작게나마 보탰을 뿐입니다."

"너무 좋아하지 말아. 네 업적이 거기서 끝이 아니잖아? 테살로스 월처 건도 해냈던데?"

이번에는 약혼식 이전에 모든 영주들을 모았을 때 있었던 일.

죽일 의도가 없었지만, 죽여야 했던 남자.

"그 빌어먹을 자식이 흑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다지?"

"그렇습니다."

"인상적이었어. 기록으로 봤을 때는 그저 그런 재능이 없는 마법사였는데, 분노에 사로잡혀서 레드 서클로 변이가 되었다고 하더라. 그 이후로는 성취가 있었나 봐."

에르데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흑마법에 빠졌으니 말이야."

손에 들린 잔 속의 와인이 작게 소용돌이쳤다.

"그거 알아? 나는 흑마도들을 엄청 싫어한다?"

그녀가 흑마법사를 혐오한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흑마법을 익힌 자에겐 무관용이 원칙.

자격 박탈에 서클을 부숴 평생 마법사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얼마나 싫은가 하면 같은 방에서 공기라도 맡으면 내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을 정도야."

"그렇습니까?"

"재능이 없는 것들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얻은 걸 노력이라 포장해 버리더라? 끝내 개만도 못한 꼭두각시가 되어서 구승을 떠도는 망령보다 못한 것이 된다는 것도 모른 채로 말이야."

가늘게 뜬 그녀의 눈동자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너는 어때, 페르다 공? 흑마법을 익히는 자들을 어떻게 생각해, 응?"

눈동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선명한 혐오감.

흑마법사들에게 향하는 그 눈이다.

"특히 마물들을 이용하여 사령술을 부리는 것을 누군가가 계승해서 진행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 혐오가 페르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페르다가 레드 서클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도.

흑마법을 익혔다는 것도.

그러니 페르다를 지금 이렇게 혐오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류 최강의 마법사인 만큼 그녀의 혐오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네가 그것까지 알고 있을까?'

네 그 혐오가 스스로 목을 졸라 버렸다는 것을.

증오로 판 무덤 속에 스스로 떨어졌음을.

그리고 너를 그곳에 떨어트린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는 것을.

50화. 대공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