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 65-70

65화. 소금과 모래

쿵!

아벨의 몸 안에서 폭발하는 소리가 깊게 울린다.

동시에 아벨의 몸이 축 늘어졌다.

고통에 신음하던 것도, 떨림도 전부 사라졌다.

"아...."

루리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꿈이라고.

사실 자신은 침대에 있고, 악마가 몰래 자신의 침소에 들어와 보여 주는 악몽이라고.

그런데 깨지가 않았다.

깨려고 집중하면 할수록 차가운 현실은 가까워진다.

"아아...."

루리는 비틀걸음을 지으며 아벨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고꾸라진 그의 몸뚱이를 뒤집었다.

동공에는 초점이 없다.

맥박은 사라졌다.

체온은 싸늘해진다.

치유술을 써 보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심장이 부서졌으니까.

심장이 부서지면 그 어떤 드래곤 스폰도 살 수 없다.

페르다 또한 이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페르다는 그에게 생의 여지를 남길 생각이 없었다.

눈보라 치는 차갑고 어두운 장소에서 벌어진 이 참상의 감각이 뇌리에 쑤셔 박혔다.

실버 드래곤의 스폰이 죽었다.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이 오늘 죽었다.

그 또 다른 자식이 보았던 것이 그녀에게도 보인다.

그리고 그 남자는 바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지금...."

막힌 목구멍을 억지로 비집고 튀어나오는 목소리.

"페르다 님이... 무슨 짓을 하신지 아십니까?"

"안다."

페르다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살인이지."

북부의 공기만큼이나 차가웠다.

"그냥 살인이 아닙니다... 페르다 님."

루리의 손이 떨렸다.

"실버윈드의 자식이 죽었습니다. 그분의 피를 이어받은 자를 죽였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알고 있다."

"아뇨. 당신은 모릅니다."

루리가 고개를 들었다.

페르다를 향해 걸어왔다.

"드래곤의 피를 이은 자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복수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다."

"당신이 죽을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다."

"당신이 알고 있다면!!"

루리가 페르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런 선택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녀가 쌓아 온 모든 것이.

"당신의 그 행동 때문에!"

페르다의 행동으로 인해.

"발드로바 님을 위해 지켰던 평화가 깨졌습니다!"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당신이... 당신 때문에...."

루리가 고개를 떨구었다.

멱살을 움켜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두 다리는 후들거리며 겨우 몸을 지탱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수습할 수는 있을까?

이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벌어질 일들을 가늠해 보려 하지만 할 수가 없다.

이건 그녀의 밖을 벗어난 일이었다.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아, 하아...."

긴장감이 목을 조였다.

색색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노래져 간다.

"당신 때문...입니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원망.

"발드로바 님은... 당신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마음에도 없었던 독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신이...! 당신이 그분의 생에 들어오려 해서...!"

그러나 페르다는 꿈쩍하지 않았다.

페르다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가여운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루리."

"그 입으로 제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그 입으로...!"

"루리."

차가운 목소리가 혼란스러운 그녀를 움켜잡았다.

"나를 봐라."

루리가 고개를 들었다.

갈 곳을 잃은 은색 눈동자가 페르다를 올려다보았다.

"아벨은 죽어야만 한다. 이 선택지는 불가피했다."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선택을 했습니다."

"네 스스로를 포기하는 그 선택지는 가장 최악이었다."

"제가 있든 말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당신에겐 발드로바 님만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평화를 지키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애초에 평화라는 건 없었다."

"있었습니다! 그곳에 선명하게! 제가 만들어 놓은 평화가 있었습니다!"

루리가 쏘아붙인다.

어쩌면 틀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그녀의 가슴에 부풀어올랐지만, 그녀는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했던 모든 걸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루리."

페르다가 묻는다.

"내가 네가 만든 평화를 깬 것이냐?"

"예."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약혼자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냐?"

"예."

그것 또한 사실.

"그렇다면 내가 틀린 것이냐?"

"...."

루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대답을 주저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분명 그는 아벨을 죽였다.

그로 인해 평화가 깨졌다.

발드로바가 위험하다.

그래서 그게 틀린 건가?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당신이... 틀렸습니다."

그녀에겐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다시 한번 더 생떼를 부렸다.

"그런가."

페르다는 그녀의 손을 떼어 내었다.

그의 손짓에 루리의 손이 딸려 간다.

루리의 두 눈이 커졌다.

옷깃보다 좀 더 위로 움직이더니, 그의 목을 감싸게끔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거라."

루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진심...입니까?"

"그게 네게 부탁했던 일이었다."

루리는 기억 저편에 놓아두었던 것을 떠올렸다.

페르다가 인재들을 모두 뽑았을 무렵,

그가 마지막으로 적었던 것은 자신의 이름.

그리고 이렇게 부탁했다.

"약혼자를 위험에 빠트리고, 그릇된 행동을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죽여 달라고."

루리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세상에 죽고 싶어 하는 생물은 없다.

인간은 물론, 드래곤 스폰도.

심지어 드래곤까지도.

"내가 죽는다면 네가 지킨 그 평화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페르다는 달랐다.

그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다.

아벨을 죽일 때부터 지금까지.

깃든 결의는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루리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질문을 뱉었다.

"페르다님은... 그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 겁니까?"

"후회하지 않는다."

페르다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행동을 하기도 전에 생각했고, 행동을 하면서도 생각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었다.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다.

"시간을 천 번 되돌린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구할 것이다."

"어째섭니까?"

동공이 흔들리는 자신과 다르게 그는 또렷하게 빛났다.

그것은 루리에게 없는 빛이었다.

"이것이 내 약혼자, 발드로바를 위한 것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으니까."

그 빛이 루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분에겐 내가 아니라 네가 더 필요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루리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대체... 어째섭니까?"

페르다의 목을 잡던 손이 풀려 몸을 타고 내려갔다.

"어째서... 내가 더 오래 살았는데... 발드로바 님을 더 오래 모셨는데...."

목소리에는 수분을 머금었다.

"왜 인간인 당신이...."

루리는 인간이 싫었다.

인간의 욕심은 언제나 발드로바를 아프게 만들기만 했다.

페르다는 그런 인간들과는 달랐다.

그런데.

그 어떤 인간들보다 페르다가 미웠다.

어째서일까?

그는 발드로바를 위하는데.

실제로 위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가 죽도록 미워진다.

"왜, 나는... 당신처럼...."

루리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싫은 남자의 몸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우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그보다 더 싫었다.

"끄흑, 흐윽...."

루리는 울음소리를 필사적으로 삼키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그의 옷에 얼굴을 파묻어 억지로 소리를 죽였다.

루리는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희미한 냄새를 맡았다.

오래전, 대화재로 전소되었던 마을.

그 속에 홀로 살아남은 소녀를 거두어 주었던 남자.

그 남자의 냄새가 났다.

페르다는 루리와 함께 콘실러스 백작의 성으로 돌아왔다.

"고맙다."

"...."

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울고 난 이후로부터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거라."

긍정도 부정도 없다.

대신 손이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안감이 손을 타고 스며들었다.

"루리."

"...."

"전쟁이 일어날까 봐 두려운 거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뜻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맞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

"너는 약혼자의 곁으로 돌아가거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서 다과회를 준비하거라."

"...."

"네 주인을 위해 그래 줄 수 있겠느냐?"

그제야 루리가 옷깃을 놓아 주었다.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는 쌩 날아가 버렸다.

페르다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발코니 문을 열었다.

성안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저 악마 년을 얼른 죽여!"

"그냥 죽이지 말고 성스러운 빛으로 태워 죽여야 합니다!"

뿔이 잔뜩 난 기사들.

"흐아아앙!! 죽기 싫어어어!!"

성이 떠나가라 우는 분홍 머리 악마.

"아니, 좀 진정하고 내 얘기를 들어 봐요!"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재하려고 진땀 빼는 제드.

"제드 경 비키시오!"

"저 악마 년에게 홀리기라도 한 거요!?"

"이 망할 낙하산 기사 자식이! 당장 그년 이리 보내지 못해!?"

"아니, 이 사람들이 못 하는 말이 없네! 내가 이년을 감싸는 게 아니고, 나도 명령을 받았다니까!?"

"흐아아아, 기사니이임! 살려 주세요오!"

"아니, 이 미친년아! 내 다리 붙잡지 말고 떨어져! 어우씨 진짜, 그 양반 때문에 무슨 이 개고생을!!"

일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이 일을 받아들이는 건 실수였다.

제드는 그렇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얼른 죽여 버려!"

"흐아아아앙!!"

"대체 무슨 일인가?"

"이 개만도 못한 악마 년이 섭정님이 타고 올 게이트를 가로채서 이 사달을... 응?"

"서, 섭정님?"

화제의 중심에 있는 그 섭정이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네. 갈비뼈랑 손가락이 나가긴 했지만, 별 이상은 없군."

"저 악마가 말하길, 섭정님께서 들여보냈다고 거짓말을 하던데...."

"우아아앙!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거짓말 아니네. 내가 들여보낸 게 맞아. 그러니깐 살기를 거두고 돌아가도록 하게."

"아, 예. 그렇다 하시면...."

"보세요! 맞잖아요! 왜 날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는데! 진짜 악마생 서러워서 진짜 우브븝!"

"아까부터 진짜 시끄럽네, 진짜!"

불난 집에 기름을 냅다 끼얹으려는 페넬로페.

제드는 그 입을 거적때기로 봉해 버렸다.

"갑작스러운 작전에 모두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나는 괜찮으니, 가서 쉬도록 하게나."

그렇게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페르다는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두 명.

진땀 빼고 있는 제드.

그리고 눈물 콧물 질질 흘리는 페넬로페.

"자네 둘은 따로 할 일이 있어."

* * *

콘실러스 백작 성의 이른 새벽.

검은 하늘은 슬슬 색을 찾기 시작했다.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의 황혼이었다.

페르다는 잠들지 않고 기다렸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손가락이 꺾였었던 그였다.

치유 마법을 써서 몸을 복구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어느 때보다 더 피로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졸음을 참고 기다렸다.

잠시 후, 페르다는 주변에서 침입하는 기운을 느꼈다.

"우리 달링, 돌아왔구나?"

대악마, 시트리가 어둠 속에서 기어 왔다.

"일이 꼬인 것 같아서 참 걱정이었는데, 어찌저찌 됐나 봐?"

"...."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안 그래?"

"그래, 네 잘못은 아니지."

페르다는 등받이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런데 무사히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 것 같군."

"그럴 리가. 비즈니스를 죽은 사람이랑은 할 수 없잖아? 누구보다 당신의 생환을 기다렸다구?"

요염한 미소를 짓는 시트리.

하지만 몇 시간 전에 보았던 그녀의 표정과 사뭇 달랐다.

조급함이다.

"네 개는 죽었다, 시트리."

"내 개? 누구 말이야?"

"시치미 떼지 마라. 아벨 실버윈드가 네 개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다."

"어머, 진짜 너무한다. 달링을 싫어하는 사람이면 죄다 악마들의 편, 이런 거야? 나 그런 편견 싫어하는데...."

능청스레 잡아뗀다.

그녀의 눈이 그믐달처럼 휘었다.

"설령 그 아벨이 내 개라고 해도 그 증거는 없잖아?"

시트리가 진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증거는 없다.

악마와 거래를 했다면, 인장이나 혹은 마력 흔적이 새겨지기 마련.

아벨에겐 그런 게 없었다.

"증거도 없이 생악마를 잡아떼면,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그토록 부인하면, 그것들이 나를 증인으로 세우려고 할 거야. 그러면 나는 부정할 거고."

"그럼 내가 곤란해지겠군."

"멋대로 침입해서 살인까지 저지른 페르다 섭정이 모든 게 악마 탓이라고 돌리면서 책임을 회피한다... 라는 그림이 나오겠지. 그리고...."

시트리가 슬금슬금 기어 왔다.

"달링이 살려고 발버둥 치는 꼴로만 보이게 될 거야. 설령 그렇게 안 보이더라도 인간들이 달링을 가만히 둘 리가 없을 테지."

페르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정작 악마와 손을 잡았던 건 달링이잖아?"

시트리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영토에 몰래 들어가기 위해서 악마의 마법을 빌렸고, 악마를 구출해 냈어."

시트리는 이미 그 증거를 확보해 놓았을 것이다.

벤딩 브리지를 제공해 주겠다는 그 시점에서 덫을 몇 중으로 치며 페르다가 걸릴 수밖에 없도록 해 놓았다.

"가엾고 귀여운 우리 섭정님."

시트리가 페르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상하지 않아? 악마와 거래를 하지 말라는 말이 왜 세월을 거듭해도 바뀌지 않을까? 매번 그렇게 강조를 해도 똑같은 실수를 하거든."

"...."

"달링이 이미 내 벤딩 브리지를 쓴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만약에 내가 아니라 다른 아이에게 더 빨리 부탁했더라면, 이런 일을 없었지 않았을까?"

페르다의 모든 결정이 실수였음을 조롱한다.

흐름이 기운다.

악마는 언제나 그 틈을 노린다.

시트리가 제안하려 입을 열었다.

"만약이라...."

페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이라는 말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는 자들의 도피지."

페르다는 고개를 들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만약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

시트리의 것이라 여겼던 분위기가 단박에 바뀌었다.

시트리는 그 눈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다.

상황 파악도 못 하는 멍청이인가 싶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건 틀림없이 결단력으로 빚어진 확신이었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거야? 아니면 발드로바와 파혼이라도 할 셈? 어느 쪽이든 당신에게 좋을 건 없을 텐데?"

"전쟁도 파혼도 없을 거다."

페르다는 여유롭게 말했다.

"아벨은 악마 추종자였고, 협력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들었어?"

시트리는 어이가 없었다.

"말했잖아? 증거가 없다고. 증거가 없는데 달링을 어떻게 믿어? 게네가 바보야?"

이 판은 시트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서 많은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역공을 먹여 버릴 준비를 마쳤다.

페르다도 바보는 아니었다.

악마의 거래에서 오는 후폭풍을 막기 위해 페르다도 만반의 준비를 마쳤었다.

"그래, 증거는 없지."

그러나 아벨을 죽이면서 그 패들은 전부 손에서 벗어났다.

시트리의 카드에 대항할 카드는 없다.

"그러니."

대신 그가 쥔 것은,

"이제부터 네가 만들 것이다."

악마를 묶어 버릴 개목줄이었다.

66화. 개목줄

"달링."

시트리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돌았어?"

그녀의 입에선 가식적으로 흘리던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돈 것처럼 보이나?"

"혹시 북부 잠깐 갔다 와서 폐부에 바보 바이러스를 박고 온 거야? 아니면 내가 달링이라고 불러 대서 진짜 반했다고 착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그런 착각을 하는 인간들은 많았다.

하지만 페르다는 그럴 부류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트리는 이토록 당황케 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난 네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내게 치명이란 수식어에 어울리는 건 매력밖에 없는데?"

비밀은 클수록 티를 내지 않는 법이다.

나라가 위중할수록, 혹은 윗선이 위협받는 사안일수록, 철저하게 다룬다.

그건 악마도 마찬가지였다.

비밀의 법칙은 악마도 피할 수는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더군."

지금으로부터 먼 훗날의 이야기.

페르다는 마법 연구를 위해 갖가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지옥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지옥의 일곱 대악마들이 위협받았던 순간들을 회고한 기록.

그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와 약점들을 기록해 놓은 총집편.

악마들은 그것을 데비로미콘이라고 불렀다.

위중한 사안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인간도 열람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똑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는 굳은 의지이며, 동시에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함정이었다.

악마의 약점을 잡겠노라 데비로미콘을 들여다본 자들은, 언제나 역으로 당했다.

언제나 자기는 다르다고 오만하게 굴면서 나오는 결과였다.

그러나 페르다는 정말로 달랐다.

페르다가 그 악마사를 읽은 것은 무려 15년이 지난 이후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 읊는 것은 그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

"평소처럼 난잡하게 놀고 있던 대악마 시트리가 낳은 수많은 자식들 중 하나에게 라이프 베슬을 도난당했다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일까?"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모르는 이야기인가?"

"당연하지. 달링이 하는 게 뭔 개소리인지 감이 안 잡히는걸?"

"그런가?"

유혹하는 악마답게 탈이 좋았다.

페르다는 느긋하게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 가면이 깨지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러면 페넬로페를 마법학회 쪽으로 가져가면 되겠군."

"마법학회...?"

"그 녀석들의 악마 혐오는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테지? 거기다가 갖다 바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단순히 악마가 아니라 대악마 시트리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악마라고 한다면 말이야?"

페르다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러면 페넬로페의 몸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겠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엔 진실에 도달하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그만."

시트리가 페르다의 말을 끊었다.

분위기가 돌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페르다를 유혹하는 비단실 같은 느낌이 이제는 차가운 가시처럼 변했다.

"누구야?"

시트리의 가면이 깨졌다.

"어떤 개자식이 그런 비밀을 네게 갖다 바쳤어?"

시트리의 시선이 따갑다.

페르다의 속을 들여다보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우리 딸은 아닌 거 같고. 그 멍청한 애가 그걸 말하거나 힌트를 줬다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을 테니까."

"내가 스스로 알았을 가능성은?"

"너를 우습게 보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과대평가도 하지 않아. 대공작들도 아직 모르는 이야기를 어떻게 일개 인간 따위가 먼저 안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이젠 달링이라 부르지도 않는군. 조급한가?"

"응, 조급해지네. 얼른 대답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신세를 면하고 싶지 않으면."

기다란 손톱으로 위협하는 시트리.

"협박하지 마라. 네놈도 똥파리 신세가 되고 싶으냐?"

지옥의 악마들에게는 룰이 있고, 대악마의 지위로 갈수록 엄격해진다.

오르는 것은 어렵지만, 몰락은 한순간이다.

"내가 못 할 거 같아?"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이 페르다의 살갗을 꾹 눌렀다.

"넌 우리 거래 조건을 위배했어. 페넬로페를 넘겨 달랬더니 그걸로 나를 엿 먹이려 하고 있잖아?"

페르다가 대답했다.

"넌 페넬로페를 구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난 구출했지."

"아니, 난 분명 내게 보내 달라고 했어. 이건 계약 위반이야, 섭정."

페르다는 코웃음을 쳤다.

"너 또한 위배하지 않았나?"

"뭐?"

"넌 '우리' 모두를 무사히 보낸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했지. 이 점에선 어떻게 할 거지?"

"당연히 페넬로페를 죽였어야지. 지옥으로 역소환하면 끝나는 일이었어."

"내가 그걸 몰랐던 거라면, 어떻게 할 건가? 넌 구출을 조건으로 걸었다. 그리고 난 안전하게 구출해 냈지. 오히려 위배되는 건 너다."

"말장난할 셈이야?"

"너희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지 않나?"

악마들의 말장난.

그 말장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혹당하고 죽었던가?

"그렇게 거슬린다면...."

페르다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대었다.

"재판해 보도록 하지."

계약 문제가 일어나면 악마 재판소에서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시트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판에 회부시킬 것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저놈의 입에서 라이프 베슬이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면.

그녀의 치부가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것이니까.

시트리는 입을 다물었다.

외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이다.

"네가 말했지. 마족도 목줄만 잘 채운다면, 훌륭한 개가 된다고."

페르다는 슬며시 조소했다.

"악마도 훌륭한 개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후후...."

시트리는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훗! 하하하하!!"

시트리가 폭소를 터트렸다.

실성이라도 해 버린 것인가?

"그거 알아, 오빠?"

"...오빠?"

"오빠, 지금 엄청 섹시한 거 말이야."

거짓된 유혹과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좋아, 해 줄게. 아벨 실버윈드와 거래했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것 말고 다른 건 없어?"

그녀가 기다란 혀로 자신의 입술을 적신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오빠라면 뭐든지 해 줄게."

싸늘해졌을 때보다 더욱 섬뜩한 느낌이었다.

"떨어져라."

"후후, 까칠하게 굴긴. 튕기는 것도 어쩜 이리 매력적일까?"

시트리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슨 질문?"

"오빠한테 정보를 말해 준 밀고자."

누가 말해 주고 자시고.

이건 먼 미래에서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당연히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답했다.

"바르바토스."

지옥의 7악마 중 하나인 바르바토스.

그림자와 모략의 악마이며, 페르다와 가장 접점이 있을 법한 악마.

"바르바토스... 희한한 일이네. 그 이름이 나올 줄이야."

시트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언가 답을 찾은 사람 같진 않았다.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같은 반응.

"그럼 다음에 또 봐, 잘생긴 오빠. 그때까지 개목줄 잘 간수하고 있도록 해."

쪽.

손키스와 함께 그녀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졌다.

여명이 찾아왔다.

* * *

"크으윽...."

다크 엘프.

긴급 탈출 마법을 썼던 만큼 그녀의 몸만 이곳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젠장할...."

간신히 피신할 곳을 찾았지만, 한기는 피할 수가 없었다.

몸의 내성이 높은 엘프라 할지라도 눈으로 덮인 고산 지대에서 버티는 건 쉽지 않았다.

동굴 바깥에서 스며들어 오는 차가운 바람은 다크 엘프의 의식을 끈을 건드렸다.

그러던 중,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누구냐?!"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손에 쥔 돌멩이뿐.

그만큼 독기 있는 얼굴로 침입자를 위협했다.

동굴 밖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동굴을 반쯤 가리는 덩치였다.

다크 엘프의 눈에는 똑똑하게 보였다.

그것은 붉은 눈과 뾰족한 이빨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린네 연구소장."

"...."

그 사내는 린네의 몸을 슥 훑어보며 말했다.

"소란이 있다는 정보는 받았는데, 보아하니 전부 사실인 모양이군."

"마족 새끼들도 음흉하기 짝이 없군. 네놈도 엘프의 몸 한번 보겠다고 줄을 선 놈이냐?"

"쓸데없는 소리."

"쓸데없는 소리라는 걸 알면 옷이나 내놔. 이대로 가면 얼어 뒤질 거 같으니까."

마족 사내는 손을 내밀었다.

크고 울긋불긋 솟아난 근육이 위협적이었다.

"일지와 샘플이 먼저다."

"지금 이 꼴을 보고도 그걸 찾고 싶나? 당연히 내 손을 벗어났다."

"그럼 그건 그놈들 손에 있다는 말이로군."

"그래, 실패했다."

"실패한 자의 말로는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나?"

린네는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실패했으니 즉결 처형이라도 할 셈인가?"

"연구소장에서 죄수로 호송될 거다. 그리고 재판을 받겠지."

"그놈의 재판 얼마든지 해 보라그래! 모든 연구는 내 머릿속에 있다. 그 샘플을 다시 만드는 것도, 어떻게 하면 진적이 이어 갈지도 알고 있는 건 나뿐이지."

"우리들 중에서는 사령술을 다루는 놈도 있다. 머리에 든 것을 꺼내는 건 일도 아니야."

"그 머저리들? 하! 그 음침한 헛똑똑이들이 내 머리에 장난을 쳐서 얼마나 완벽한 걸 만들 수 있을까? 어린애 장난감만 몇 개 만들다가 후회하는 꼴이 훤히 보이는데?!"

사내는 그저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억지로 입을 놀렸다.

죽을 것 같은 한기에 억지로 입을 열어 말을 토해 냈다.

"너흰 내 동족들이 죽어 가는 와중에 나만 살려 줬어. 그날 너희들이 이렇게 말했지? 그중에서 쓸모가 있던 건 나뿐이었다고. 가장 유능한 놈을 여기서 처형할 것인가?"

"...."

"그러니 그 망할 옷이나 당장 내놓으라고."

사내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옷을 던져 주었다.

린네는 코트를 둘렀다.

안은 온기 마법으로 따뜻했다.

"네 눈을 그렇게 만든 건 페르다 발드로바인가?"

린네는 이를 꽉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꼬맹이에게 당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보통 인간보다 뛰어나다고는 들었었다. 지금 원탁에서도 놈의 이름이 오를 정도지."

"보통 인간보다 뛰어나다라는 말로 해선 안 돼. 그 말조차도 그를 과소평가하게 할 정도다."

"그럼 네가 평가하면 어떤가?"

린네가 코트를 단단하게 안았다.

"고금을 통틀어서 그런 놈은 전래 불명이었다."

"겁먹었군."

"객관적으로 말할 뿐이야. 놈이 내 허를 찌를 때 느낌이 왔어."

라이트닝 볼트가 눈을 꿰뚫은 이후,

그녀의 시야 속에 들어왔던 페르다의 모습을 떠올렸다.

보였던 것은 회색 머리의 젊은 남자.

의중을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

그 푸른 눈동자 속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놈은 자기보다 강한 마법사와 몇 번이고 싸워 본 미친놈이야."

부족한 힘을 기교로 채우고,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상대를 압도하는 거물 사냥꾼들의 눈.

그 눈에서 린네는 패배를 직감했다.

그렇기에 싸움을 포기하고 긴급 탈출 스크롤을 사용해 빠져나온 것이다.

사내는 슬쩍 바깥을 보았다.

눈발이 거세게 퍼붓던 날씨가 어느새인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린네의 발걸음은 주저했다.

"내 징계는... 피할 수 없나?"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나?"

사내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 미친놈이라는 평가가 의회에서 먹혀들기만을 바라야 할 거다."

마족이란 족속들은 전부 이러했다.

감정이 없고, 죄책감도 없다.

그러니 오직 계산에만 의존하여 그녀의 목숨을 저울질할 것이다.

'할 수 있는 건 내가 얼마나 유능한가를 보이는 것뿐.'

린네는 코트를 잡고 끌어안았다.

'난... 살아남을 거야.'

생존.

그것은 고드윈의 피에 손을 댔을 때부터 다짐했던 약속이었다.

* * *

평화로운 세르데스 대륙의 중동부.

로스노바 영지 또한 평화롭게 굴러가고 있었다.

가주인 에렘발트는 늙었기에 은퇴했지만, 그 두 아들이 집안을 이어 가면서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그런 집에 난데없이 폭격이 떨어졌다.

실제로 대포나 투석기가 날아왔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차라리 그게 나을 지경인 상황이었다.

"안녕, 가주.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겠지?"

에렘발트 앞에 있는 것은 소녀.

앳된 목소리로 건방지게 묻고 있었다.

평소라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이 얻다 대고 반말이냐고 호통부터 쳤을 에렘발트였으나,

"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렘발트는 그녀에게 감히 그러지 못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소녀는 자신의 나이도 거뜬하게 넘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마법사의 귀감, 에르데스 님이시지 않습니까?"

"어머, 귀감이라니. 그런 사탕발림은 안 해도 돼. 너희들한테는 미소녀 망나니로 통하는 거 알고 있거든."

반응하기 참으로 난감했다.

망나니는 맞지만, 미소녀는 아니었으니까.

"이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에렘발트는 그녀의 목적이 궁금했다.

에르데스는 폭풍 같은 존재이다.

난데없이 나타나 모든 것을 난장판으로 뒤집어 놓고 가 버린다.

경우에 따라선 사라질 수도 있다.

에렘발트도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뭐 다른 건 아니야. 이쪽을 쑥대밭으로 만들거나 그럴 의도는 없으니깐 안심하고."

"예, 예. 당연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지요."

"근데 경우에 따라선 그럴 거야."

에렘발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대로 된 또라이에게 걸렸구나.

에르데스가 손가락을 휘적이자, 그녀의 품속에서 지도 한 장이 탁자 위에 펼쳐졌다.

"이게 뭐인 거 같아?"

"지도... 아닙니까?"

"그래 마력 용지에 새겨 놓은 지도지. 우리 마탑에 있는 사람들은 이 지도를 이용해서 마력 흐름을 관찰해."

간단한 설명과 함께 그녀가 작은 지팡이로 한 군데를 짚었다.

"여기가 어디인 거 같아?"

"표기된 걸로는... 콘실러스 백작의 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맞아. 그리고 여기 표시된 곳은?"

"음... 북부...의 어느 야산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그게... 실버윈드의 영역입니다."

"맞아! 다행이네. 우리 블루 군처럼 아둔했으면 좀 화났을 텐데."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지팡이를 거두었다.

"내가 그 두 군데를 지목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예? 어, 그러니깐 그게...."

에렘발트는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저 미묘한 미소.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 아둔한 머리로는 이해를...."

"뭐, 괜찮아. 마법사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 그리고 블루 군이랑 다르게 자기가 멍청하다는 것도 알고 있잖아?"

에렘발트는 조금 전까지 사신이 자신의 등 뒤에서 머무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말과 행동, 선택지가 어긋날 때마다 에렘발트는 죽을 것이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서 벤딩 브리지 마법이 일어났어. 지옥과 경유되는 벤딩 브리지 말이야."

흑마법 때문이었다.

그녀의 흑마법 혐오는 저명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나는 콘실러스 백작이 썼다고 생각이 안 들거든."

"그, 그렇다면?"

"머리를 좀 더 굴려 봐. 콘실러스 백작이 아니라면, 누구겠어? 그의 친척이나 자식들? 아니면... 그보다 높은 사람?"

"그보다 높은 사람...."

그러자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이 망나니 마법사가 왜 기사 가문인 자신을 찾아왔는지.

"페르다...."

자신이 내버린 삼남.

그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발드로바 섭정이 지금 악마와 접촉한 흔적이 있어."

에르데스 로톤.

그녀의 흑마법 혐오는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다.

흑마법과 접촉된 자는 최소 멸문.

그것은 로스노바 가의 소멸을 의미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에렘발트가 무릎을 꿇었다.

용맹한 가문의 문장이 찌그러졌다.

"맹세코 저는 그 녀석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 녀석이 이곳을 나갈 때부터 여태까지 남남이었습니다! 연락조차 안 했습니다!"

필사적으로 손을 비비며 목숨을 구걸한다.

에르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아. 너 같은 기사 나부랭이가 관여되지 않았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투.

그러나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분노에는 자비가 없다.

이 사실만으로도 로스노바 가문을 멸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깐 말해 보라고."

그녀가 원하는 소원은 하나.

그 하나가 너무나도 컸다.

"그 페르다라는 놈에 대해서 말이야."

67화. 두 번째 다과회

페르다는 발드로바 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았다.

무려 한 달을 비웠기에 무슨 일이 있던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버넬의 연구실.

알아듣기 힘든 버넬의 이론도 점점 알아듣기 쉬울 정도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15명의 조수가 그를 거들면서 이루어 낸 성과였다.

'아직 큰 산은 멀었지만.'

그에게 가장 큰 과제는 역시 말콤이었다.

"말콤 씨, 이거 오른쪽 투입구에 좀 넣어 주시겠어요?"

"오른쪽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아니, 오른쪽! 밥 먹는 손! 아니, 거기 말고! 아악!"

천재들과 경쟁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말콤은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조금만 어려운 말을 했다 하면, 바로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지 않나,

동서남북은 물론 좌우조차도 헷갈리는 사상 최고의 똥멍청이.

천재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걸 바보가 이해하게 만들어야 한다니.

버넬은 머리카락을 너무 쥐어뜯은 탓에 풍성했던 머리도 두피가 보일 지경이었다.

정작 그 원인인 말콤은 산책 나온 개처럼 해맑기만 하다.

'마도공학은 결국 마법사가 아닌 인간들이 쓰기 위한 물건들이다.'

말콤 정도 되는 인간이 응용하진 못하더라도 용도를 파악하고 조작할 수 있다면, 보통 사람들도 쓸 수 있게 된다.

그것이 페르다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였다.

'아무튼 여기는 순조로운 듯하고.'

골머리를 싸는 모습을 보며 지나치던 중, 페르다는 복도 한구석에서 시끄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흐야아아앙!?"

호들갑 떠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악마 페넬로페였다.

"뭐예요, 이 마녀는?!! 왜 드래곤의 성에 마녀가 버젓하게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녀가 지칭하는 마녀는 틀림없이 에키드나.

"후후후후후, 악마가 돌아다니는데 마녀라고 못할까요오오?"

둘이 왜 엮여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저기, 에키드나 양?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보실래요?"

제드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확실했다.

페넬로페는 제드의 다리에 매달렸고, 제드는 쩔쩔매고 있었고, 에키드나는 제드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에키드나의 눈은 풀려 있었다.

"아아, 제드 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드 님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요. 그냥 저는 계약 분리술을 하려고 그러는 것일 뿐이니까."

"계약 분리술?"

"네, 제드 님이 표식을 새겨 둔 곳을 절단해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저주를 피하는 방법이에요. 그러면 제드 님은 예전처럼 아주 깔끔해진 몸이 될 거예요."

"...그거 내 팔을 절단한단 소리 아니에요?"

"그리고 매일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야 하죠. 하지만 그 고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드가 어처구니없는 나머지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너 돌았니?"

"괜찮아요! 팔 하나만 있어도 전 제드 님을 쭈욱 사랑할 거니까!"

"난 내 팔을 사랑하거든?!"

"극복해 내죠! 우리들의 사랑으로!"

여기도 여기 나름대로 개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야기만 들어도 그 원인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페넬로페와 맺은 맹약 때문이로군.'

구출한 그날, 페르다는 페넬로페와 제드에게 계약을 하게끔 만들었다.

페넬로페의 몸이 지옥에 돌아가지 않고, 동시에 그녀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시트리의 라이프베슬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게끔 입막음 장치도 단단하게 해놓았다.

개목줄이 차인 입장이지만, 페넬로페 입장에선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방방곡곡 도망자 신세로 지내는 것보단 안전한 용의 둥지 속에 숨을 수 있지 않던가?

'제드에게도... 좋은 건가?'

여자면 일단 반사적으로 들이대는 놈이다.

페넬로페도 일단 여자였으니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페르다는 제드에게 페넬로페의 용도를 정확하게 설명하진 않았다.

단지 시트리가 엄청나게 아끼는 딸이라고만 알고 있어도 충분했었다.

제드가 악마와 마녀 그 사이에 끼어있던 중. 페르다가 눈이 마주쳤다.

제드가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살려 주세요.

모름지기 남자는 등으로 말하는 법.

페르다는 남자답게 등을 돌렸다.

네 알아서 해라.

'아무튼, 문제없이 굴러가는 중이다.'

그가 성을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저질렀는지, 모르는 채 흘러가고 있었다.

"페르다 님."

메이드복을 입은 자그마한 소녀, 루리도 평소처럼 다가왔다.

"준비했습니다."

"알겠다."

페르다는 괜스레 넥타이를 고쳤다.

그의 옷에서 검은 손들이 뻗어 옷을 다시 한번 더 고치기 시작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악마와 거래하는 위험을 감수했다.

루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녀를 위협하던 것을 죽였다.

국가 존속에 위태로운 상황 두 가지가 그에게 닥쳤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을 합쳐도 지금 이 순간만큼 긴장되는 일은 없었다.

마치 어린 시절, 오줌 쌌던 이불을 장롱 속에 감추는 듯했다.

당장엔 몰라도 언젠가는 알게 되는 그런 비밀을 숨기는 것처럼.

그런 불안감도 오락실 문이 열리며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활짝 열려 있는 발코니와 다과 테이블.

그리고 이질적인 용기병 갑옷.

'오늘도인가.'

이미 두 번이나 봤으니,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만히 앉은 채로 이곳을 보고 있었다.

발드로바의 용안을 따서 만든 투구는 대면하고 있는 이를 위압한다.

'왜 가만히 보고 계시지?'

페르다는 일단 걸어서 앞으로 갔다.

저 투구 너머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멋대로 상상해 보았다.

최악의 상상에 도달하기 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코오...."

자고 있던 것이었다.

발드로바의 머리가 앞으로 기울었다.

바닥에 콕 처박을 듯이 기울다가 다시 머리가 원위치로 돌아갔다.

"음냐... 음... 음?"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발드로바의 투구가 들리며 페르다를 향했다.

"음... 페르다 씨...?"

아련하게 울리는 목소리.

페르다를 빤히 응시하다가.

"헛!? 페르다 씨!?"

그녀가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나 페르다를 반겼다.

"오, 오, 오셨네요!?"

"예. 발드로바 공왕님을 뵙습니다."

"어, 어서 오세요. 페르다 씨. 저는 그게...."

적당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 발드로바.

페르다가 거들어 주었다.

"생각하실 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깊게 상념에도 빠지시고."

"네? 아, 그게 사실은 졸았던 건데...."

"보통 왕이 졸고 있다가 깰 때는 그런 말을 해 드리는 게 예의입니다."

"아, 그, 그렇군요. 맞아요. 새, 생각하고 있었어요. 네!"

좋은 명분을 찾아 기분이 좋은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 서투른 여인이었다.

"페르다 씨는 괜찮으신가요?"

"예."

"마차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었어요. 그래서 콘실러스 백작님의 영지에 들으셨다고...."

페르다는 슬쩍 루리를 보았다.

병풍처럼 서 있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니 페르다도 긍정했다.

"예, 그렇습니다."

"다치거나 하진 않았나요?"

"크게 문제 되진 않았습니다. 경정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다행이네요. 조금 걱정했었어요."

그녀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 반응이 비밀이 필요한 이유가 되었다.

"대공의회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했었나요?"

페르다는 대공의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단순한 영토 분쟁 이야기.

"그렇군요. 세르데스 대륙에서... 물론 전쟁이 간간이 일어난다고는 들었어요."

엘프와 드워프 간의 영토 분쟁.

"그분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나요? 옛날에도 그러셨던 것 같았는데...."

대부분 그런 이야기였다.

갈등과 분노.

웃음을 꽃피울 만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발드로바는 깊게 경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섭다.

그녀의 순진무구함에 말려서 실수를 해 버리는 건 아닐까 봐.

그 순수한 눈밭 속에 진흙발을 들이미는 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동부 정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동부 정벌이요?"

"저희 국경지에 있는 마의 땅을 정복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

마의 땅.

그 말을 들으니 맞장구쳐 주던 발드로바도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괜스레 자신의 팔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발코니 너머로 향했다.

색이 가장 풍만하게 변화가 이루어지는 초가을의 모습.

그리고 일반적인 세르데스 대륙인들이 보는 풍경이었다.

"지금 마의 땅이라 불리는 그곳도."

아련한 추억에 젖은 목소리.

"한때는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지닐 때가 있었어요."

그 목소리에는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은 검게 물들어 버린 곳이지만, 다시 저렇게 예쁜 색을 되찾을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그 말로 간단하게 끝낼 수 있었지만, 페르다는 그럴 수 없었다.

"쉽진 않을 겁니다."

페르다는 확신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보았던 그 풍경을 되찾기 위해서 뭐든지 할 겁니다."

대신 그의 의지를 드러내었다.

"그런가요?"

발드로바 또한 그 말에 와닿은 듯 반색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돕도록 할게요."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약혼자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제가 놀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전하께서 손을 내밀어 주신다면, 네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속내를 깊게 읽을 필요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순수함이리라.

"그... 다른 이야기는 없으신가요?"

"다른 건 없습니다."

"아, 네...."

자신감이 없는 말투로 흐리는 발드로바.

뭘까?

무슨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페르다는 식어 가는 홍차를 입에 가져갔다.

"그게, 루리가 얘기하길...."

"예."

"올리비아라는 여성과 손도 잡으셨다고."

"푸흡."

사레가 들리고 홍차를 장대하게 뿜어냈다.

홍차를 뿜어 버린 페르다보다 발드로바가 당황했다.

"페르다 씨? 괜찮으신가요?!"

"예,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고...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페르다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눈을 돌렸다.

병풍처럼 서 있는 루리와 눈이 마주쳤다.

결국 이야기까지 한 거냐?

그 물음이 담긴 눈으로 노려보자, 루리는 눈을 돌렸다.

원망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순식간에 머리가 아파졌다.

뭐라고 해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년이 먼저 잡았다고?

손을 잡긴 했지만, 그렇게 큰 의미는 없었다고?

수십 가지의 변명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페르다는 곧바로 지워 버렸다.

"죄송합니다. 전하를 앞에 두고 외간 여자와 손을 잡다니...."

"네, 배신이라뇨? 저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페르다 씨도 남자고...그분도 엄청 예쁘다고 들었고, 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해하는 듯이 중얼거리지만, 꼼지락거리는 손가락과 숙인 고개는 그렇지 않았다.

페르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짓눌려 갔다.

"그래서 말인데요...."

조심스럽게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

"혹시...."

그녀가 페르다에게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혹시 제 손도... 잡고 싶으신가...요?"

페르다의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예?"

그가 멍청하게 묻고 말았다.

"전하의... 손 말입니까?"

"네. 저번에도 한 번 잡아 본 적이 있고... 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아직 얼굴은 무리지만.

그렇게 입안에서 얼버무린 채로 답변을 기다렸다.

"어, 어떠세요?"

그런 가벼운 마음과 다르게 페르다는 어느 때보다 신중을 기울였다.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

그걸 멋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다.

애써 떨림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침을 삼켜 목청을 풀었다.

"잡고... 싶습니다."

"알겠어요. 잠시."

그녀가 건틀릿을 벗었다.

커다란 건틀릿과 다르게 작고 가녀린 손이 페르다에게 보였다.

힘의 위상이라 느낄 수 없는 연약한 팔이다.

그 주먹을 수줍게 말아 쥐니, 그마저도 더 작아졌다.

"여, 여기 있어요!"

손바닥을 보이며 내밀었다.

페르다는 그것을 넋 잃은 듯이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과 손바닥에 그어진 손금까지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페르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에 손을—.

"히끅!?"

발드로바의 손이 휙 하고 튕겨져 나갔다.

부드럽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그게... 그게 말이죠오.... 히, 힘 조절을 잘 못할 것 같아서... 조금만 마음의 준비를...."

말꼬리가 늘어지고, 투구 속에서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마음이 바뀌었다는 말을 할 줄 알고 내심 가슴이 철렁였다.

짝짝이 양손을 가슴에 얹은 채로 숨을 골랐다.

긴장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니, 페르다가 그녀에게 제안했다.

"힘 조절이 어려우시다니 제가 위에서 포개면 어떻습니까?"

"헛! 그런 방법이 있겠네요! 그렇게... 하는 걸로."

발드로바가 손등 쪽으로 테이블에 슬쩍 올렸다.

페르다는 다시 한번 더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우지직—.

그 순간,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테이블이 금이 가 있었다.

'이게 화강석으로 만든 테이블이라 했던가?'

하늘에서 메테오가 떨어져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고강도를 자랑하는 재료.

그걸로 테이블을 만들었다면 대륙에서 가장 단단한 테이블인 셈.

'어지간해서 금도 안 간다고 하던데 역시....'

괜히 힘의 위상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페르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득, 자신이 했던 행동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녀와 첫 만남.

발드로바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는 충동감에 했었던 짓.

'그때는 틀림없이 손깍지까지 꼈던 것 같은데.'

페르다는 자신의 오른손이 아작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런 섬뜩함을 느끼면서도 페르다는 발드로바의 손을 놓지 못하였다.

작고 보드랍다.

따뜻한 체온과 선명하게 느껴지는 맥박.

평생 놓고 싶지 않은 작은 일부.

놓아야 한다면 적어도 후회 없이 느끼고 싶다.

'손이 좀 으스러져도 괜찮을지도.'

확 저질러 버릴까 생각하지만, 페르다의 이성이 그 생각을 잠재웠다.

"요즘도 그 혈기 때문에 고생하시고 있습니까?"

발드로바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오.... 괜찮아요."

"발드로바 님께서는 어제 사냥을 하시지 못했습니다."

"루, 루리?"

당황하는 발드로바.

불쑥 나타난 사람처럼 정보를 툭 던지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입니까?"

"그게... 네.... 그래도 별일 없을 거예요. 어제 안 나왔다고, 오늘 마물들이 안 올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온다는 보장도 없지요."

"네, 그렇...죠."

"사냥을 못 하신다면, 자해를 하실 거고."

"...."

발드로바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녀로선 난감할 뿐이었다.

그러나 대화는 크게 필요 없었다.

"아...."

발드로바는 손등에서 무언가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건 잘 알고 있는 감각.

일전에 혈기를 잠재웠던 그것이었다.

"페르다 씨...."

"괜찮습니다."

발드로바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몸에 들어오자, 심장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느껴 봤는데도, 감탄이 나오려 했다.

날뛰어야지만 해소되는 그 감각이 이토록 차분하게 사그라들다니.

"저, 페르다 씨...."

"예."

"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네."

페르다는 마나 주입을 그만두었다.

정적이 돌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적.

그러나 그 정적을 감히 깨트리려 들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설 것만 같았기에.

용기 내어 이어진 이 손이 멀어질 것만 같았기에.

조금만 더.

이 불편한 정적을 즐겼다.

68화. 변화

서쪽에 기운 해가 석양을 그리고 있을 무렵,

루리는 정령을 부리며 다과회 뒷정리를 시작했다.

물의 정령들이 식기를 닦고, 바람의 정령이 말린다.

페르다와 발드로바가 손대지 않은 디저트는 루리의 입에 쏙쏙 들어갔다.

완벽한 역할 분배였다.

페르다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빼면.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했느냐?"

페르다가 물었다.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루리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바람둥이."

페르다가 인상을 구겼다.

"그건 바람이 아니다."

"저는 보이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 망할 계집이랑 손잡았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초를 치려고 했던 거냐?"

"초를 치다니,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그건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제가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손을 잡은 일이 있기라도 하겠습니까?"

"손 말이냐?"

"네, 손 말입니다. 주인님의 손을 만끽하던 그 손. 그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또 무슨....

이라고 생각하기엔 오늘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면 그렇지 않았다.

페르다는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다과회에 임했었다.

오늘 발드로바의 손을 잡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올리비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손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사냥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오늘 밤 괴로워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루리가 오해를 살 만한 말을 했기 때문.

"그게 전부 네 계산이란 말이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콧방귀 뀌는 루리.

"주인님은 욕심이 있으신 분입니다. 조금만 자극해도 발을 내디디는 분이시죠. 그 계집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주인님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주 잠깐 동안 잊고 있었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이 성을 관리했고, 발드로바를 지켜보았다.

그러니 누구보다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페르다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까지 해 준 적이 있었던가?

루리가 메이드로서 몇 번이고 도움을 주려고 한 적은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발드로바를 위해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개입해서 도와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루리가 물었다.

"그냥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는군."

"어떻게 달라 보인다는 겁니까?"

"잘 모르겠군. 이걸 귀엽다고 해야 하나?"

멈칫.

"귀엽...?"

"정의하면 귀여운 개돼지쯤 되겠군."

"...."

루리의 표정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페르다는 이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그 혐오감.

아니, 그때보다 더욱 컸다.

"쓸데없는 소리 하시려거든 얼른 나가십시오. 청소에 방해됩니다."

"그러지."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괜히 불똥 튀고 싶진 않았으니 페르다도 얼른 자리를 뜨려 했다.

"페르다 님."

루리가 불렀다.

석양이 비스듬히 흘러 들어오는 가운데 등지고 있는 그 자리에 루리가 보였다.

똑 부러진 메이드가 아닌 아이인 루리였다.

"걱정하지 마라."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페르다가 선수 쳤다.

루리도 말하지 않았다.

단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 * *

발드로바의 레어.

두꺼운 철문을 제외하면 내부가 아주 커다란 동굴 날것 그 자체인 장소.

그곳에 붉은 드래곤 머리를 한 용기병이 안으로 들어왔다.

불과 힘의 위상, 발드로바였다.

그녀는 막 다과회를 마치고 돌아온 길이었다.

발드로바는 동굴 한가운데에 서서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제야 겨우 혼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녀는 가슴에 박혀 있는 보석을 눌렀다.

스르르륵—.

그러자 용기병 갑옷의 내부가 드러나며 안에 있던 내용물을 뱉어 내었다.

그 안에 있던 것은 신장 160cm의 여인이었다.

"후아아아...."

발드로바는 마치 지독한 전장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그녀에겐 전장이 차라리 쉬웠을 것이다.

6시간 동안 연달아 오는 마물들을 토벌했을 때도 이만큼 힘들진 않았었다.

고작 해 봐야 2시간 정도.

자리에 앉아서 페르다와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순간이 발드로바에겐 버거웠다.

이렇게 커다란 갑옷을 입었는데도.

발드로바는 갑옷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못 벗었어...."

그 갑옷은 브론즈 드래곤이 폴리모프하는 발드로바를 위해서 만들어 준 물건이었다.

무서운 레드 드래곤답게 커다랗고, 위압적이며, 위협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 의도는 어디까지나 드래곤이자 지배자로서 위엄을 보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의도와 반대로 도피처였다.

마치 달팽이의 껍데기처럼.

"아저씨가 보면 뭐라고 하겠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슬쩍 옆에 놓인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두 쌍의 뿔과 황금색 캐츠아이, 그리고 루비로 실을 뽑아 만든 듯한 찰랑거리는 적발.

발드로바는 이 모습을 보여 준 사람은 몇 없었다.

루리와 드래곤들이 그녀의 얼굴을 기억할 뿐.

그렇기에 그녀의 폴리모프 폼에서의 평가는 적었다.

루리는 외적인 강함을 부드러움으로 감추는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라 말했다.

다른 드래곤은 '순둥이'라고 간단하게 말했다.

그리고 인간인 페르다는....

"후으읏...."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때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면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 간다.

몸이 붕 떠오르고, 백 개의 손이 몸을 간질이는 듯하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는 그 상황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듣고 싶어...."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다.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싶다.

갑옷이 아니라 본연 자신의 모습을 보여서 그 말을 듣고 싶었다.

그렇기에 갑옷을 입어도 그 안에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둘렀다.

페르다는 알고 있을까.

그가 보고 있는 갑옷 속에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그러나 차마 보여 줄 용기가 없어 매번 갑옷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그런 주제에...."

부끄러움에 젖은 목소리.

다과회 전 루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올리비아 아르켄과 손을 잡고, 화이트 하우스를 구경했습니다.

발드로바는 이해했다.

페르다 정도 되는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와 손 정도는 잡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래.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그렇겠냐고...."

질투했다.

당연히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약혼자가 다른 여자랑 손을 잡다니.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함께해야 할 사람이 다른 여자와 손을 잡다니.

질투함과 동시에 발드로바는 그런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매번 도망친 건 나인 주제에...."

페르다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을 보일 용기가 없어서 숨은 건 발드로바였다.

그런 주제에 질투나 해 버리다니.

"바보."

자책.

"바보 멍청이."

그럼에도 끝에 짓는 것은 미소.

"그래도... 마지막엔 잘했어."

설마 자신의 입에서 손을 잡자는 말이 나올 줄이야.

충동적이었지만, 그 충동이 없었으면 감히 꺼내지도 못했을 말이었다.

"...."

발드로바는 멍하니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페르다가 잡아 준 그 손.

그 손에는 아직도 페르다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따뜻했지...."

발드로바는 선명하게 느꼈다.

그가 얼마나 따뜻한 심장을 지닌 사람인지.

얼마나 남을 위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러니 이 성도 시끌벅적해지고 있어.'

그가 이 성에 들어온 1년.

성 위는 시끌벅적해지고 있고, 영지의 발전 소식도 들려오고 있었다.

발드로바가 하지 않았던, 그리고 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는 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느끼는 것은 동경.

'그러니 나도 바뀌어야 해.'

그리고 자극.

발드로바는 그래야만 한다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그것이 약혼자로서 와 주었던 페르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일 테니까.

"졸려...."

눈꺼풀이 무겁고 몸이 나른해진다.

혈기가 도는 날에는 한숨도 자지 못하던 그녀였는데 지금 눈을 붙이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드래곤으로 돌아가서 자야겠지만, 발드로바는 감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남기고 간 이 온기를, 이 자취를, 조금만 더 소중하게 느끼고 싶다.

발드로바는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옆으로 누워 똬리를 트듯이 몸을 웅크리며 오른손의 온기를 꼬옥 안았다.

그녀는 내일을 생각했다.

그녀의 내일은 언제나 고통의 연속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그 생각이 들면 얼른 도피하고 싶어 잠자리에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 내일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무엇을 하면,

어떻게 하면,

페르다 씨가 좋아할까?

결론이 나지 않는 무한한 선을 그리며 그녀는 잠에 들었다.

* * *

세르데스 대륙 중부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륙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며, 마탑이었다.

블루 드래곤, 이오르가가 지은 마탑으로 모든 블루 드래곤 스폰들이 그 마탑 안에서 전반적인 생활을 한다.

그 건물의 이름은 푸른 눈이었다.

눈은 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

푸른 눈은 이름대로 하늘 아래에서 모든 것을 살펴보기 위해 만들어진 감시망이었다.

마탑의 위치에 따라 서열을 나눈다.

맨 꼭대기 층은 드래곤인 이오르가의 보금자리.

그 바로 아래층은 드래곤 스폰의 대표인 에리카 이오르가의 자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슬슬 인간들이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푸른 눈의 감시 마법에 대한 허술함이 지적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느 때보다 늙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원로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안건과 문서를 해결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계산해서 얻을 수 있는 추정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정확한 데이터는 없었는지 현재로서 30%가 줄어들었다고 추정하는 것 같습니다."

30%.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수치였다.

"이대로 가다간 이오르가 님의 부재를 눈치챌 듯합니다만...."

청룡 이오르가.

마법의 위상이자, 절대자에 버금가는 마력의 소유자이며, 실제로 마탑의 마력에서 5할을 담당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오르가도 고드윈의 어둠에 침식당하는 중이었다.

단순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 생활을 하는 것조차도 리스크가 너무나도 컸다.

그렇기에 이오르가는 스스로 몸을 결정화하는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늙은 장로 마법사들이 말을 흐리며 에리카의 대답을 기다렸다.

블루 드래곤 스폰의 수장인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침착했다.

서류를 검토하던 에리카가 마지막 장까지 내려다보고는 책상 위에 던졌다.

"아직은 정상 범위 내입니다."

그 말에 깜짝 놀라는 원로들.

"30%가 어떻게 정상 범위 내입니까?"

"실제로 우리 마탑의 마력 손실은 50%로 절반입니다."

푸른 눈의 감시망에 넣을 마력은 한참 부족하다.

예전 같은 넓이로 퍼트리자니 깊이가 없고, 깊이에 집중하자니 범위가 좁아진다.

"인간들이 30%라고 추정하는 건 20%만큼 대체재가 효과를 보고 있다는 뜻이죠."

그렇기에 기존 방식을 버리고 융통성이 있는 방향으로 대체재를 찾고 있었다.

우발 지역에 감시망을 집중하고, 감시망에서 벗어난 지역들은 모험가 길드와 연계해 인력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좀 더 분석하고 대체재를 찾아야 합니다."

"언제까지고 모험가들을 써서 할 수는 없습니다. 근원을 치유하지 않으면, 모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그 근원을 치유하려고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에리카의 눈이 날카롭게 그 원로를 노려보았다.

"당장 대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저는 입을 다물겠습니다. 한 번 제시해보세요."

"그건... 아닙니다만."

원로는 깨갱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에리카는 코로 한숨을 내쉬고는 나긋하게 그들을 달래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불안한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현재 우리 마탑, 푸른 눈은 전래 불명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입니다. 대륙을 굽어살피는 눈이라는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력을 전부 써도 모자랄 판이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이오르가 님의 치유제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스스로 상태가 나빠진 것을 직감하고 동면에 들어가신 만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실제로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마나도, 시간도, 인력도.

"그러나 그만큼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야만 합니다. 확신이 없으면, 이 공든 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겁니다."

푸른 눈은 마법을 지배하며 감시한다.

마법에 있어선 그들이 꽉 쥐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줘야 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수장님을 믿는 수밖에 없겠지요."

회의를 하던 원로들은 그렇게 물러났다.

그렇게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나가고 문이 닫히자,

"후우우우우!!"

강철 같은 리더의 얼굴을 하던 에리카가 압력솥 김을 빼듯이 한숨을 토했다.

"씨발...."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육두문자.

왕관에는 무게가 있는 법이라 했다.

에리카가 쓰고 있는 이 왕관은 언젠가 그녀의 목을 부러트릴 것만 같았다.

'그냥 죄다 쓸어버릴 수도 없고.'

다른 종족들을 깔보는 것이 성격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드래곤 스폰들이다.

다른 드래곤 스폰들이었다면, 인간 주제에 말대꾸하냐며 당장 위협하거나 폭력을 행사했겠지만, 이오르가의 자손들은 감히 그럴 수 없었다.

마법은 이성적인 자들을 위한 도구이다.

역정을 내는 건 비이성적이며, 마법이 위태롭다는 신호나 다름없다.

그들이 지닌 최고의 무기는 의연함.

평소와 다를 바 없으며, 무슨 일이 닥쳐도 이겨 낼 자신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니 수장인 에리카는 말 못 할 속병만 늘어갔다.

"후우...."

에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폭발해 버릴 것 같아 가볍게 풍경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식히려 했다.

초가을의 풍부한 색감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달라지는 풍경이지만, 그녀의 생각은 언제나 비슷했다.

북쪽의 커다란 산

'머리에 얼음덩어리만 찬 바보들이 사는 곳.'

서쪽 들판

'가식에 꽉 찬 종교쟁이들의 터.'

남쪽의 사막

'자기파괴를 일삼는 극단주의자들의 놀이터.'

동쪽의 검은 대지.

'...페르다 발드로바.'

아니,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본래라면 '천천히 썩어 가는 탐욕자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공의회에 다녀온 이후로 인간의 이름으로 덧씌워졌다.

-최후에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고드윈으로 인해 만들어진 비밀의 최후.

"최후라...."

그녀는 몇 번이고 최후를 되짚어 보았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낙관적인 미래나 비관적인 미래나

어느 것도 수용할 수가 없었다.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예측은 할 수 있을지라도 완전히 들여다보는 짓은 불가능한 일이다.

"건방진 놈...."

이오르가의 자손들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현재를 살아간다.

에리카 이오르가도 마찬가지였다.

비관하지 않고, 낙관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오르가가 추구하는 이성이다.

그런데.

페르다에 대해서 떠올리면 그 말이 자꾸 귀에서 맴돌았다.

모기처럼 앵앵거리는 듯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어쩔 건데?

어쩔 거냐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후우...."

에리카는 한계에 달함을 직감하고 손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에서 작은 물방울이 응집했다.

그 물방울은 장막 형태로 퍼져 순식간에 그녀의 주위를 완전히 덮었다.

"후우."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그래서 뭐?!"

고함을 질렀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바닥을 퍽퍽 찍으며, 손을 휙휙 휘둘렀다.

"기껏 그 발의를 뭉그러뜨려서 그 망할 얼음 바보들 막아 줬더니, 혼자 꼴값을 떠는 넌 뭐가 잘났는데엑!! 인간 주제에! 인간 주제에!! 지가 뭐가 잘났다고오오!"

진정할 수 없으면 발산한다.

"아 몰라! 때려치울래! 안 해! 내가 왜 이거 해야 해!? 해서 뭐 하는데! 죄다 나만 가지고 모라 그러고!! 지들도 못하는 주제에!"

몇 분을 꽥꽥 소리를 지르며, 속에 있던 것을 해우시켰다.

똑똑—.

"저기, 에리카 님?"

비서가 그녀를 찾아와 문을 열었다.

발작하듯이 소리치던 에리카가 급하게 움직였다.

물의 장막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수장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왜 그러시죠?"

비서는 에리카가 히스테리 부리며 뒹굴었던 여자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보고를 시작했다.

"말씀하신 로스노바 가문의 조사 기록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만, 시간이 되십니까?"

타이밍이 예술적이다.

에리카는 괜히 제 발이 저렸다.

"말씀하세요."

"일단 로스노바 가문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었습니다. 제국의 기사 가문 중 하나이고, 인간에 가까운 업적을 세우고,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그런 흔한 가문이죠."

"페르다 섭정의 집안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적어도 로스노바 가문은 그렇습니다."

다음 장을 넘겼다.

"문제는 페르다 섭정의 친모가 되는 분, 안나 로스노바입니다."

"그분은 왜죠?"

"친모에 대한 정보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단 하나도 없다니요? 평범한 평민이나 그런 사람이라는 뜻인가요?"

"아뇨. 그런 범주가 아닙니다. 좀 더 깊게 조사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마치...."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잠깐 주저하는 여인.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유령을 쫓는 기분이랄까요?"

"유령?"

조사관이 한다는 말 중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

그러나 에리카는 그 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오르가의 자식들이고, 에리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이 말을 꺼냈다는 것은 아주 깊게 파고들었음에도 먼지 한 톨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에리카는 중얼거렸다.

"달걀이 있는 이유는 닭이 있기 때문이지요."

결과가 있는 것은 원인이 있기 때문.

아들이 있는 것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

그들이 신인 드래곤조차도 창조주가 존재한다.

페르다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알려고 정보를 캐는데 돌아오는 것은 미지의 질문이라니.

'도대체 그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이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계단에서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성을 중시하는 이오르가와 맞지 않게 겁에 질린 사내가 올라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왜 그렇게 호들갑입니까?"

"그, 그게! 이, 이걸!"

그가 건넨 것은 마력으로 염사한 그림.

설원에서 드래곤 스폰 몇 명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실버 드래곤 스폰이... 죽었나요?"

"예."

그것만으로도 중대한 사항이었다.

모든 드래곤 스폰들은 피를 나눈 자들의 죽음을 기억한다.

유대가 가장 강하기로 소문난 실버윈드는 원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이것만 가져왔다면, 어디서 피바람 불겠거니 했을 일.

그 다급함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다음 장에는...!!"

하늘 위에 날아가고 있는 실버윈드 패거리.

그 가운데에는 커다란 날개를 지닌 드래곤 스폰도 보였다.

"얼음 바보 대장이 직접...?"

고즈 실버윈드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보통 사안이 아니다.

단순히 개인이 끝장나는 것이 아닌 그자가 지닌 모든 것을 부수려는 의도이다.

왜지?

왜 그가 직접 움직이는 것일까?

에리카는 생각했다.

곧바로 떠오르는 인물 하나.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그놈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실버윈드와 관계가 어떤지 뻔히 아는데,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러나 확신해야 하기에 그녀는 어렵게 질문했다.

"누가 실버윈드의 자손에게 손을 댔습니까?"

그가 대답했고, 그녀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입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69화. 도화선

페르다는 마족 연구 시설에서 가져온 가방을 확인했다.

들어 있는 것은 연구 일지와 앰플 몇 개.

제드에게 건네줬던 그 상태였다.

'일 처리 하나는 확실히 하는군.'

제드 스왈로우를 영입한 것이 제대로 된 한 수였다고 스스로 감탄했다.

페르다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쥐여 줄 상여금.

'그리고 에밀리아의 행방.'

그가 불만을 내뱉기 전에 어떻게든 해 줘야만 한다.

그것이 잡아 둘 수 없는 괴도를 잡아 둘 수 있는 조건.

그가 불만을 드러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만 할 텐데.

'일단 생각만 해 두도록 하고....'

페르다는 가방을 들고 서재로 가져갔다.

그곳에는 언제나 한 소녀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리."

모리가 고개를 돌리며 올려다보았다.

머리에 풍성하게 컬을 넣은 그녀는 오늘도 귀공녀가 따로 없었다.

"이걸 좀 해독해 줄 수 있겠나?"

페르다는 모리에게 일지를 건네주었다.

린네의 일지는 암호로 만들어졌다.

모리의 만상서고 능력을 활용하면, 암호의 내용을 쉽게 해독할 수 있었다.

-해독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불가 선언.

"불가능하다는 건?"

-제가 해석할 수 있는 단서가 없는 문자입니다.

만성서고에 단서가 없는 문자.

그렇다는 말은 하나다.

"구전 문자라는 의미로군."

기록이 아닌 입으로만 전해지며, 그 뜻도 전부 개인마다 다 다르게 설정된 문자.

그 문자를 지닌 종족은 딱 하나였다.

'하이엘프.'

세계수의 심부까지 들어갈 수 있는 귀족 중에 귀족인 종족들.

개개인마다 독자적인 언어를 구축하고 있고, 본인 이외에는 해석할 수 없는 극악의 난이도를 지니었다.

린네 연구소장이 하이엘프였다면 가능하다.

'그 다크 엘프가 원래는 하이엘프였다 그 말이지?'

특이한 일이었다.

오직 세계수를 위해서만 생각하며,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하이엘프가 고드윈에게 충성하고 타락하다니.

마치 목 없는 닭이 산보하는 꼴이오, 뭍에서 나온 메기가 숨 쉬는 꼴이다.

"그럼 하이엘프들에 대한 기록이 있나?"

-관찰 기록이 몇 건 존재합니다.

"문자와 연관된 건?"

-없습니다.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웠다.

"어떻게 해석해 볼 순 없겠나?"

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삐그덕삐그덕.

몸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꺾인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취소하마."

푸슈우우

김이 빠진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문자를 알고 싶어도, 굳이 모리를 망가트려서까진 할 생각이 없었다.

모리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어깨로 떨군 채로 페르다를 올려다보았다.

"일에 있어서 할 만한가?"

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과 공왕령 내에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현재 크게 문제 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문제가 존재합니다.

"어떤 거냐?"

-첫 번째로는 헬루스 포비다스입니다.

척결단을 이용해서 코를 꿰어 냈던 남자.

페르다에게 충성을 맹세한 대가로 모리의 지혜를 빌려줬기에 그는 현자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자가 왜?"

-헬루스 포비다스는 비효율적인 질문이 많습니다. 가끔씩은 앞뒤가 맞지 않으며, 공상적인 이야기로 서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대화는 언제나 지치게 만든다.

방금 전, 모리가 억지로 해독하려고 머리를 쥐어 짜낼 때를 떠올리면, 헬루스가 얼마나 비효율적인 짓거리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에 지장이 간다는 이야기로군. 그리고?"

-발드로바 님의 권한을 탈취 시도 암시를 8번이나 보였습니다.

비효율적인 질문보다 놀랍지 않은 이야기였다.

모리가 페르다에게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기에 그를 이용하기로 한 거니까.

"앞으로 질문을 5개로 제한시키도록 하지. 그리고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네가 선판단되면 대답을 거부해도 된다. 그렇게 하면 효율을 좀 더 끌어올릴 수 있겠나?"

-효율이 올라갈 것으로 전망됩니다만, 한 가지 요소가 더 남았습니다.

"뭐냐?"

-에키드나 필리아즈입니다.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모리에게 몇 번이고 눈이 뒤집힌 꼴을 봤었는데.

"에키드나의 행위가 문제 된다면 조금 제한할 수 있겠지만,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에키드나 필리아즈가 끼친 영향은 헬루스 포비다스의 3배입니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호칭으로 자신을 불러 달라고 요구합니다.

"어떤 호칭이냐?"

-언니라는 호칭에서 엄마, 어머니, 어마마마까지 관계에 적합하지 않은 칭호입니다.

페르다가 보기에는 쉬운 요구였다.

"그 요구를 들어주면 되지 않느냐?"

-그 요구를 받아들이면, 이어서 역할극을 요구합니다. 역할극 요구를 받아들이면, 그에 심취하여 진짜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망상장애가 깊어집니다.

그래서 3배나 힘들다는 것이다.

'마녀니까.'

모리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페르다는 고민했다.

모리를 돌보게 시킬 만한 건 에키드나뿐이었고, 무엇보다 제드의 일 때문에 최근에는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당분간은 받아 주도록 해라. 그 마녀도 우리에겐 필요하니까. 그것 말고 네 효율을 이끌어 내는 방법은 없겠나?"

모리는 생각했다.

가볍게 펜으로 종이를 톡톡 치다가 짧게 대답했다.

-칭찬해 주십시오.

"뭐?"

-제가 해냈을 때는 칭찬을 해 주십시오. 업무 난이도에 따라 상응하는 칭찬이 필요합니다.

정말 예상하지 못한 요구였다.

만상서고를 머리에 지닌 노예 현자의 펜에서 칭찬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그런 게 필요한 일이냐?"

-칭찬은 업무 효율을 높여 주며, 스트레스 감소에 탁월하다는 논문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습니다.

"그거야 인간들이지 않나?"

-검투사의 도시, 콜로세니아에서 칭찬받은 검투사들의 승률은 20%가 더 높습니다.

"네게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광산 도시, 오필레스에서 칭찬을 들은 광부들이 성과가 12%가 더 높다고 발표되었습니다.

페르다의 말은 전면 부정하듯이 팩트를 줄줄이 내밀었다.

특이한 일이다.

모리는 자아가 없는 노예 현자다.

감정도 느끼지 않는 궁극의 이성체인데, 왜 그런 게 필요한 것일까?

페르다는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벌이는 것보다 세 음절을 말하는 게 낫다.

"고맙다."

이거면 됐겠지.

그러자 모리의 펜대가 글자를 휘갈겼다.

-연구에 따르면, 성인 남성이 아동을 칭찬할 때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 들었습니다.

귀찮아 죽겠군.

그러다 페르다는 그녀의 말대로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매끄러운 감촉이 닿았다.

"고맙다."

무심하게 던지는 칭찬.

그러나 페르다를 올려다보던 묘한 빛이 났다.

고개를 못 가누던 모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됐나?"

대답을 들은 모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된 거 맞나 모르겠군.

페르다는 일지를 접어 두고, 상자를 꺼내었다.

'여기서 약을 꺼냈다.'

상자에는 11개의 앰플이 들어 있었다.

도플러 시약 3개와 각 나이트급 마족들의 명칭과 (시제)라는 단어가 붙은 8개의 앰플이 들어 있다.

전부 검은색에 점성을 지닌 액체라는 공통점이 있어 라벨이 없었으면 구분할 수 없었으리라.

'바운서약까지 합치면 12개겠군.'

페르다는 바운서로 변해 버린 놈을 떠올렸다.

바운서는 지능이 떨어지는 대신 힘이 강한 스타일.

지능도 확실히 떨어졌고, 힘은 확실히 더 강해졌다.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그놈보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들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약이 시제품이기 때문이다.

완성품에서는 부작용은 완화하고 힘은 증대시킬 것이다.

'그 여자는 틀림없이 살아 돌아갔을 것이다.'

린네 연구소장이 뭔가를 하기 전에 페르다 쪽에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페르다에게는 샘플이 있고, 린네 연구소장에게는 지식이 있다.

스타트 라인은 좋지만, 최후에는 누가 이길지 아무도 모른다.

'이 물질의 연구는 누구한테 시키지?'

난관은 거기서부터였다.

페르다는 인재들을 떠올려보았다.

버넬?

똑똑하긴 하지만 그것도 마도공학 전문이다.

그는 거기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에키드나?

룬에 정평하지, 이런 물질에 손을 대게 만들고 싶진 않다.

버나드 총장?

그 인간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아직은 믿을 수 없다.

'그럼 내가 해야 하나?'

페르다도 여러 연구를 해 본 경험이 있었다.

강해지기 위한 마나 연공법 수련과 형태에 한해서지만, 집념은 충분히 있었다.

그 집념을 연구에 쓴다면, 괜찮지 않을까?

페르다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땡! 땡! 땡!

성내에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경종 소리가 울렸다.

희한한 일이었다.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 본진에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울린다니.

잠시 후,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루리였다.

그녀는 다급함이 묻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페르다 님."

"무슨 일이냐?"

"오고 있습니다."

루리가 다시 말했다.

"실버윈드의 자손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올 것이 왔나.

페르다는 발코니로 향했다.

하늘에 보이는 점들.

곧 페르다의 시력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명확한 특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것은 압도적으로 큰 크기의 날개.

"저건 수장이겠군."

"예. 고즈 님입니다."

대장이 직접 왔다는 것은 중대한 사항이라는 의미.

뭐든 간에 태세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다.

"어떻게 합니까?"

루리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평소에는 잘 숨기고 다녔던 루리인데, 이 순간에는 초조함이 잘 느껴졌다.

"일단 기다리지."

"적이 오고 있는데 말입니까?"

"적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거다."

페르다는 가까이 향하고 있는 점들을 응시했다.

무심코 쥔 주먹에는 땀이 흠뻑 젖어 있었다.

'시트리.'

그 개 같은 악마 년이 자신의 뒤통수를 친 걸까?

아주 교묘하게 정보를 왜곡하여 페르다의 잘못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하지만 속단하지 않았다.

악마도 제 목숨이 중요한 줄은 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악마들이 간을 배 밖으로 나온 놈처럼 굴어서 그렇지, 인간들보다 더욱 겁이 많은 게 악마다.

잠시 후, 페르다가 내린 판단의 결과가 나왔다.

실버윈드의 자손들이 전부 외문 앞에 내려와 정렬했다.

"희소식이로군."

"외문 앞에 있는 게 희소식입니까?"

"싸우러 왔으면 발코니로 돌진했을 거고, 시비 걸러 왔으면 내성문 앞으로 왔겠지."

페르다는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다 고즈와 눈이 마주쳤다.

묘한 시선 교환이 오갔다.

"루리,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응?"

고개를 돌리던 페르다의 말이 끊어졌다.

루리는 실버윈드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순히 내려다보고 있다면, 페르다도 그렇게 반응할 이유는 없었다.

"루리?"

"부르셨습니까?"

"왜 내 옷을 붙들고 있는 거냐?"

"그게 무슨—."

루리의 말이 끊겼다.

페르다의 말대로 그의 옷을 잡고 있었다.

스스로도 놀란 얼굴.

손을 휙 거두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이 얼버무렸다.

"...먼지가 묻었습니다."

"그런가?"

페르다의 옷에 먼지가 묻었을 리는 없었다.

하물며 먼지가 묻었다고 해서 직접 떼 줄 리도 없었다.

"저는 손님 맞이할 준비를 하러 가겠습니다."

루리는 그렇게 물러났다.

페르다도 실버윈드를 맞이하기 위해 내려갔다.

* * *

경보가 울렸다.

성내에 있는 비전투 인력들은 방에 들어가서 숨었고, 전투 인원은 배치되었다.

그리고 발드로바 성에서 전투 인원은 딱 두 명이 있었다.

제드와 말콤.

그들은 기사라는 신분을 지녔기에 외성문 앞에서 배치되었다.

'씨발, 대체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제드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눈으로 다시 한번 더 훑어보았다.

그들은 교과서에 나올 법한 실버 드래곤의 스폰들이었다.

은발에 은색의 눈동자.

험상궂은 얼굴과 날카롭게 솟은 뿔.

갑옷을 입었는데, 그들의 몸에 나 있는 근육들이 뚫고 나올 기세였다.

그 하나와 마주해도 긴장할 텐데, 그것도 떼거리로 몰려들었다.

드래곤의 두려움을 억제하는 반지도 수의 압박감이나, 그들의 험상궂은 인상은 감히 이겨 낼 수 없었다.

'특히 저놈.'

병사들을 뒤에 세우고 앞에 서 있는 저 남자.

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딱 봐도 대장이다.

저 남자가 이 긴장감의 8할을 차지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흉악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네 주인은...."

그가 입을 열었다.

"언제 나타나지?"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수천 명의 서리 거인을 쓸어버리며 얻어낸 혼 같은 싸늘한 죽음.

중저음에 압도될 뻔했으나, 애써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금방 내려오신다 하였으니 오실 겁니다."

"조금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

그 증오심이 자신들을 향하지 않는다는 걸 앎에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곤란한 것은 제드에게 또 다른 변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끄흡, 끄흐흡!"

꼴에 기사랍시고, 옆에 선 말콤이 훌쩍이고 있었다.

"전능한 빛의 신 알테님, 살려 주세요."

우는 것도 모자라서 신에게 빌고 앉았다.

제드는 그에게 머리를 살짝 기울여 말했다.

"너 그냥 가라."

"끄흡, 저는 이 공왕령의 기사로서, 발을 뗄 수는...."

"아니, 방해되니깐 가라고. 나 혼자서도 되니까."

제드의 제안에도 말콤은 떠나지 않았다.

그놈의 기사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후들거리는 다리도 억지로 꼿꼿하게 펴면서 버티고 앉았다.

'어우씨 내 인생.'

좀 조용해진다 싶으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뭔가가 나온다.

기사고 뭐고 다 때려쳐 버릴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들의 등 뒤에서 구원의 발소리를 들었다.

"기다리게 했군."

페르다가 왔다.

제드와 말콤 사이에 나와 고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놈은 손님을 기다리게 만드나?"

그가 던진 핀잔.

"보통 손님이라는 것은 오기 전에 편지라는 것을 보내지. 그렇지 않은 걸 불청객이라 한다."

팽팽한 신경전.

끝인 줄만 알았던 말콤과 제드는 지금이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점에선 인정하지. 사전에 공지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선 사과하겠다."

쉽게 수긍했다.

페르다는 생각했다.

이럴 놈이 아닐 텐데.

"하지만 내가 사과하는 만큼 네놈도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역시나다.

물러서는 이유라 한다면, 세 발 더 내디디기 위해서이다.

"페르다 섭정, 네놈이 악마의 마법을 빌려 아벨 실버윈드를 살해하고 증거를 은폐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이 자리에 왔다."

의혹이 제기되었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시트리?'

동물적인 반사가 그 이름을 재차 부르짖는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역시 시트리였다.

곱게 일 처리를 해 주지 않는 것은 악마의 특징이다.

어떤 엿을 먹이려는 속셈인가 페르다는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트리는 페르다를 엿 먹일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금방 나왔다.

"안녕, 페르다 섭정?"

보기만 해도 땀내 올라오는 남자들 사이에서 발랄한 목소리.

챙이 넓은 마법사의 모자를 쓴 작은 여인이 모습.

세르데스 인류 마법학회의 배지가 고깔에 크게 박혀 있었다.

저런 모자를 쓸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다.

세르데스 인류 마법학회장, 에르데스 로톤

"우리 구면이지?"

이 판을 만든 건 저년의 작품이다.

70화. 증오와 집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