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증오와 집착
"와오. 발드로바 성에 한 번쯤은 들어와 보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네?"
에르데스는 호들갑을 떨면서 춤을 추듯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신 사나운 걸음걸이였으나 그 누구도 지적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분위기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대변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 섭정이 직접 안내하는 것부터 좀 수상한걸? 혹시 마음에 안 들어서 다 죽여 버린 거야? 아니면 우리 뒤통수칠 준비?"
말을 참 곱상하게도 한다.
"성안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전부 일반인입니다. 이런 걸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죠."
"아, 그런 거 같긴 해. 제비같이 생긴 놈이랑 눈물 콧물 줄줄 흘리는 놈이 기사인 마당인데 다른 놈들은 어떤 추태를 보이겠어?"
꺄르르 웃어 대는 에르데스.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지만,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이 여자는 대륙 제일의 마법사다.
손가락 하나로 멸문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고, 왕조차도 그녀의 등장에는 고개를 조아린다.
그녀는 살아 있는 재앙이오, 마법 쓰는 망나니다.
그러니 페르다는 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몰아넣었다.
성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높은 격식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압박감을 이길 능력도 없다.
"아무튼, 진짜 여기에 와 본 건 의미가 큰 것 같아. 발드로바 성이 참으로 넓네. 언제 한번 무단 침입으로도 시도를 해 봤는데, 방어막이 전혀 안 뚫리더라고."
"그걸 제가 좋아해야 합니까?"
"좋아해야지. 인류 최강의 마법사가 하는 칭찬이라고? 내가 못 뚫었으니 다른 인간들은 절대로 불가능하단 소리잖니?"
페르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한테 처참하게 깨진 주제에.
그 말에 반박한 것은 고즈였다.
"드래곤을 위해서 지은 건물이다. 인간이 혼자서는 손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같은 용이라고 감싸는 거야? 참, 용이란 것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말을 가려라, 에르데스 로톤."
"예이, 예이."
짜증 나지만 동감했다.
발드로바를 싫어하는 놈들이 변호를 한다니.
철천지원수라도 지킬 건 지킨다 이건가?
에르데스가 툴툴거리는 사이에 붉은 카펫의 끝에 왔다.
도화선의 끝자락에 선 기분이었다.
이 폭탄은 터질 것인가, 불발될 것인가.
그 마음을 안고 문을 열었다.
황금과 붉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귀빈실.
모든 것에 대비하여 응대를 마친 시종 한 명.
그녀가 폭넓은 치마를 잡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발드로바 님의 시종인 루리라고 합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다소곳하게 섰다.
그러나 그 눈은 애써 고즈와 마주치지 않으려 피하고 있었다.
정작 고즈는 루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탈취하려고 했었을 때와 다르게 미지근한 반응이 외려 수상하게 느껴진다.
와중에 에르데스는 꺄르르 웃어 대면서 멋대로 소파 위에 몸을 던졌다.
"어우, 자꾸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드네. 이래서 남자들은 안 된다니까? 고풍스러운 장소에서는, 응? 웃고 떠들어야지. 거기 메이드, 나 차 한 잔 주겠어?"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루리가 움직이려 하자, 페르다는 가볍게 손을 들며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에게 드릴 차인데, 네가 준비해야겠느냐?"
"그렇다면...."
"제가 직접 따라 드리지요."
페르다가 그렇게 나온 이유는 에르데스의 행동에 슬슬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내버려두면 마이페이스에 휘말리게 된다.
페르다는 차를 대접하려 했다.
다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발치 아래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더니 형상을 빚으며 튀어나왔다.
페르다의 쉐도우 핸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에르데스의 얼굴이 굳었다.
대놓고 나 흑마법 써요 라고 말하는 건 죽여 달라고 도발하는 것과 같았다.
페르다는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차를 한 잔 따랐다.
예법에서는 완벽했다.
"서부 지역의 고원에서 나는 최상급 차입니다. 한잔하시지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차를 앞에 뒀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페르다만 향했다.
빛을 잃은 썩은 동태 눈깔은 금세 칼을 꺼낼 듯하다.
"아쉽게도 목이 안 마르네?"
"목을 축일 게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여자라는 건 알다가도 모르겠지?"
눈웃음에서 느껴지는 살의.
그러나 페르다는 그 눈을 똑바로 직면하면서 차를 홀짝 들이켰다.
이젠 저 아가리를 좀 닥치겠지.
"이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고즈가 자리를 고쳐 앉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왜 남의 영토에 몰래 발을 들였는지 말이다."
사건의 배경부터 파악하려 든다.
페르다는 대답해 주었다.
"마족의 연구 시설이 그 근처에 하나 있었다."
"상상 속의 연구 시설?"
"최근 그 근방에서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나? 마치 뭔가가 폭발하듯이 말이야."
"...."
대답하지 않았다.
맞다는 의미다.
"놈들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장소를 내가 알아차려서 모든 걸 부수려 했었다. 그래서 빨리 움직여야 했지."
"그래서 벤딩 브리지를 이용해서 넘어와 선수를 쳤다는 의미인가?"
고즈의 입에서 벤딩 브리지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건 에르데스가 알려 준 정보이리라.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지?"
고즈가 물었다.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냐?"
"은밀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고즈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발톱을 드러낼 기세였다.
"페르다 발드로바, 네놈이 우리 영역에 멋대로 발을 들인 것도 모자라 그분의 아들을 네 손으로 죽였다. 네놈이 정녕 전쟁을 바라는 게 아니라면 똑바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오는 전쟁은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앞서 말했지만, 그 아벨 실버윈드라는 놈은 내가 죽인 게 맞다. 그리고 문제를 일으킨 것도 맞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가 바랐기에 일어난 결과는 아니었다."
페르다는 말을 덧붙였다.
"놈은 악마 추종자였다. 악마를 통해서 반역으로 권력을 꾀하려 했더군."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복잡하게 갈 필요도 없었다. 자기가 알아서 술술 불었다. 나를 다 잡은 물고기처럼 본 건지 아니면 고해성사실의 신부로 착각했는지 알 바는 아니지만, 스스로 실토했다."
고즈는 악마 추종자라는 말에서 발끈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시트리가 계약의 인장을 확실하게 찍어 주었단 의미였다.
기세가 조금 기울었다.
페르다는 조금은 쓸데없을 말을 해 보기로 했다.
"놈이 뭐라고 하던지 알던가? 고즈 실버윈드는 찬탈자에 불과한 수준이라고. 그 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군."
"실버윈드 쪽에서도 불만이 이래저래 많은 모양이야? 설마 피라미 같은 게 욕심이 생겨서 딴생각을 품는 꼴이—."
"닥쳐라."
"나 아군인 거 알지?"
아픈 상처를 긁어 대는 에르데스의 입을 막았다.
"내 힘을 의심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에 도전하는 것도 실버윈드의 자손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 하지만 악마와 계약을 해서 얻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순수한 힘.
강철과 바람의 주인이 물려준 피로 이루어 낸 힘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거랑 네가 죽인 것은 무슨 상관이지? 내게 좋은 일을 해 줬다는 의미인가?"
"그럴 리가 있겠나? 나는 전복하고 싶으면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바람이 일어난다.
대놓고 널 죽이려고 음모를 제안했다는데 열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놈이 고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놈의 전복 계획 자체에 내가 필요했기 때문이지."
바람이 멎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네놈을?"
"날 이용해서 꿰어 낸 다음, 그 힘을 흡수할 거라고 하더군."
"누굴? 발드로바를 말인가?"
"루리."
그 말을 들은 고즈의 몸이 멈칫했다.
고즈의 반응을 지켜본 에르데스가 끼어들었다.
"루리? 그게 누군데?"
"있다. 그런 애가."
고즈가 어물쩡 넘겨 버리려 했지만, 에르데스는 집요했다.
그녀가 스윽 은발 꼬마 메이드를 보고는 손뼉을 짝 쳤다.
"설마, 저 꼬마 아가씨야? 보니깐 맞는 거 같네. 체구가 작은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그게 저 꼬마 아가씨였어? 저 꼬마가 그—."
"에르데스 로톤. 네가 수다나 떠들라고 여기에 데려온 게 아니다."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험악하게 쳐다보았다.
방금 전 보다 더욱 거슬린 듯한 눈초리였다.
에르데스는 멋쩍게 미소를 짓고는 입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짜증이 난 고즈의 시선은 무심결에 루리를 쳐다보았다.
루리는 등만 보인 채로 돌아보지 못했다.
페르다는 이어 상황을 설명했다.
"루리는 나를 구하기 위해서 왔고, 그러다가 결국 아벨을 죽여야만 했다."
"흐음, 그러면 거기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우리 루리를 불러서 증언하게 해 볼까?"
멋대로 해라. 난 꿀릴 것이 없으니까.
에르데스의 물음에 페르다는 수긍하려던 찰나.
"됐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이야기가 됐으니까."
그 증언을 거부한 것은 고즈였다.
제동을 거는 고즈의 태도에 에르데스는 못마땅한 듯이 노려보다가 페르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다시 생긋 웃었다.
"그럼 두 남성분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됐으니, 내가 말할 차례겠네."
이 대화에 차례라는 것도 있었나? 네놈이 하도 난입을 해 대서 그냥 제 말만 하는 난장판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비꼬려다가 참았다.
에르데스가 크게 기지개를 피면서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뭐, 감동적인 이야기였어, 페르다 섭정. 하지만 난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겠는걸?"
예상했던 반응이다.
"놈에게 악마와 거래를 했다는 흔적이 있을 텐데?"
"그래, 발견했지. 참 오묘한 곳에 숨겨 놨더라? 발뒤꿈치라니. 하긴 거기까지 구석구석 확인하는 놈은 없으니까. 실버윈드 쪽에서도 모를 만도 하지."
간과해 버릴 수 있는 장소에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페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께름칙했다.
"그런데 나, 에르데스 로톤이야."
대륙 최고의 마법사.
마법사들의 귀감이자, 역사의 증인, 전쟁 영웅.
말이 곧 법이 되며, 국경이 없는 망나니 폭군.
동시에 흑마법에 대한 권위자.
누가 말하길 사랑과 증오는 한 장 차이라 하였다.
에르데스는 흑마법을 증오하는 만큼 흑마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거지발싸개 같은 악마 새끼의 계략은 금방 눈치챌 수 있거든. 예를 든다면, 그 인장을 찍은 시기라던가 말이야."
에르데스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거미줄에 잡힌 먹잇감을 보는 거미와도 같았다.
"아벨 실버윈드에게 새겨진 계약 인장은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더라고?"
인장을 찍은 시기를 확인한다는 건 페르다도 알지 못했다.
악마와의 계약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그 성질이나 그런 건 페르다의 관심 밖이었다.
악마들이 인간을 얽혀 내는 방법이나 그것을 피할 방법만 중요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점 두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반면 에르데스의 집착은 좀 더 광범위했다.
그녀는 흑마법에 얽힌 모든 것에 집착했다.
그것은 결벽증이다.
흑마법이라는 질병을 대륙에서 씻어 내리기 위해 온갖 집착을 다 하는 그런 부류.
그녀의 집착이 결국 페르다를 궁지에 몰아넣는 중이었다.
"내 생각을 말해 볼까?"
그녀가 자신의 추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페르다 섭정, 너는 지옥의 대악마인 시트리와 '모종의 거래'를 했어. 마족의 시설을 무너트리려고 왔다고 했지? 그게 거래일지도 모르지. 만약 며칠도 아니고 몇 시간 안에 무너져 내린다면, 어떻게 할까? 시트리에겐 아주 좋은 구실이 생기겠지. 악마와 거래를 하지 말라는 격언을 무시하고 벤딩 브리지로 조용히 타고 왔을 거야."
그녀의 말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페르다가 압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지. 타고 온 벤딩 브리지가 모종의 이유로 닫혀 버린 거야. 페르다 섭정은 홀로 덩그러니 놓인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고, 아벨이 나타났어. 그 예상치 못한 것은 시트리의 함정이었을까?"
그 질문을 던짐과 함께 에르데스가 눈웃음을 치며 페르다를 지그시 보았다.
페르다가 뒤집어쓴 가면, 그 가면 너머의 것을 확인하려고 했고, 페르다는 애써 감춘다.
"아니. 아니야. 그건 시트리의 계획이 아니었어."
표정을 읽은 것인가?
그녀가 다른 이야기로 이어 갔다.
"만약 그런 얄팍한 수법이었다면, 눈치를 챘었겠지. 페르다 섭정, 너는 바보가 아니니까. 벤딩 브리지에 함정이 없다는 것도 몇 번이고 확인했을 거야. 하지만... 그런데도 돌아가는 길의 벤딩 브리지에 몸을 집어넣지 못했어. 그렇다는 말은 그 마족의 거주지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는 말이겠지. 스스로의 목숨을 걸어서까지도 중요한 물건을 말이야."
목이 타들어 간다.
그녀가 최면을 걸 듯이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벨 실버윈드와 마주치게 했던 건 시트리, 그 창녀가 설치해 놓은 함정 중 하나일 거야. 딴생각을 먹지 못하도록 하면서 딴생각을 먹으면 처벌을 집행해 줄 사람이었겠지. 설령 죽더라도 뒤탈이 될 수 있는 그런 좋은 카드야.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 함정을 써먹지 않았어. 대신 아벨 실버윈드에게 계약의 인장을 찍음으로써 너를 도왔지."
감탄이 절로 나오려 했다.
궁지에 몰리는 중인데도 그 정도였다.
한 분야를 이토록 증오할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내다볼 수 있다는 건가?
페르다가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깊이였다.
"왜 악마가 너를 도울까? 인장을 찍지 않고 그대로 두기만 했으면, 실버윈드가 추궁하려고 너를 찾아왔고, 너는 진땀이나 빼면서 설득하려고 했을 텐데? 사실상 전쟁은 기정사실이 되었을 텐데?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왜 그녀는 스스로 포기했을까?"
입안이 바싹 말랐다.
목젖이 꿀렁거릴까 봐 의식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내가 결론에 이르는 세 개의 단서는 이래."
에르데스는 검지를 펼치며 말했다.
"첫 번째로는 네가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점."
중지.
"두 번째는 지옥의 대악마가 함정에 빠트리지 않고 너를 구해 줬다는 점."
약지.
"세 번째는 이 집에서 희미하게 악마의 냄새가 자꾸씩 난다는 것."
허를 푹 찌르고 들어온다.
뭐든 간에 에르데스가 도달해서 안 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페넬로페.'
가뜩이나 악마와 계약했느냐, 안 했느냐로 외줄타기를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악마 하나를 숨겨 두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에르데스의 적대감은 완전히 기울어 버릴 것이다.
그 적대감은 단순히 귀찮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에르데스는 제국 황제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는 제1황자가 빌붙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극동부의 발전에 분명 제동을 걸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골치 아프게 얽혀 있다.
'그것도 문제지만.'
해명하는 과정에서 대악마의 명줄을 잡을 수 있는 수단이라고 밝혀진다면, 그게 더 문제였다.
그녀는 기를 쓰고서 페넬로페에게 집착할 게 분명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성에 있는 것들은 오직 발드로바를 위해 있는 것이다.
페르다가 입을 열려던 그 순간, 에르데스가 눈웃음치며 물었다.
"너 악마의 자식이지?"
71화. 변화는 과감히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기껏 추리를 잘 늘어놓고 결론이 뜬금없었다.
악마의 자식이라니?
이 여자가 지금 농담 따 먹기를 하려고 여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그렇게 보았지만, 에르데스의 표정은 진지하다.
아니, 장난기를 머금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적어도 그 말이 농담은 아니라고 확신하는 얼굴이다.
페르다는 생각했다.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까?
펄쩍펄쩍 뛰면서 분노할 것인가, 아니면 질린다는 얼굴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까?
난처한 상황 속에서 말을 꺼낸 것은 에르데스였다.
"에렘발트 로스노바를 찾아갔어."
단순한 방문의 느낌이 아니다.
분명 한바탕 헤집어 놓았으리라.
로스노바 가문.
그녀가 엮였다는 시점에서부터 뒷조사는 당연히 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페르다의 반응에 에르데스가 눈을 깜빡였다.
"어머? 좀 반응이 의외네. 그래도 제 가족을 건드리면, 발끈하는 것들이 많던데."
"그 인간은 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로 에렘발트 로스노바는 페르다를 아들로 취급하지 않았다.
형제들과 하인들의 괴롭힘에도 묵인했으며, 오히려 권장하는 듯한 분위기로 흘렀다.
괴롭힘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던 셈이었다.
"부자지간이 참 보기가 좋네~. 그래도 네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진 않았어. 발드로바의 아래에서 잘 살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에르데스가 곧바로 다음 카드를 꺼내듯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근데 너희 어머니는 아니더라고."
어머니.
"어머? 엄마는 끔찍하게 사랑했나 보구나? 표정이 변하네?"
에르데스는 약점을 찾고는 악동처럼 히죽 웃었다.
"그년에게 홀려서 꿈같은 세월을 보내다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고 하더라?"
어린아이같이 유치한 몸짓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신기했어. 그놈이 뭐라고 한 줄 알아? 사랑하지도 않던 여인을 사랑했었다고 믿은 채로 10년이란 세월을 살아왔대. 무려 10년 동안 자신을 최면해 왔다고 하더라? 마법사의 핏줄이 제대로 타고나는 것 같아. 아니, 악마인가?"
깊게 생각하지도 알 수 있는 의도였다.
저 망할 년은 어머니를 능멸하고 있던 것이었다.
"안나 로스노바는 훌륭한 어머니였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쁜 법이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악마의 피를 벤 자식이면 더더욱 그렇겠지."
"고슴도치든 고블린이든 내 알 바가 아니다. 그 입을 계속 놀리겠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뭐?"
에르데스의 두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네 알량한 어미 사랑으로 내 추측이 바뀔 거라고 생각해?"
에르데스는 페르다의 감정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흑마법을 증오한다.
그녀는 악마를 증오한다.
그녀는 레드 서클 소유자를 증오한다.
페르다는 그 의도를 읽었다.
감정을 흔들어 폭주를 유도하려는 것이다.
보아라, 저것이 흑마법을 추종하는 것들의 민낯이노라고.
그래, 뻔한 의도다.
그런 뻔한 의도임에도 말릴 수밖에 없었다.
자비를 베풀라는 교리인 알테도 신성 영역에 발을 들인 자는 무정하게 죽였다.
어머니는 신성한 영역이다.
건드렸던 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봤다.
'에르데스 로톤.'
너는 이번 생마저도 내 손에 죽을 운명인가 보구나.
"주제를 너무 벗어났다 생각하지 않나요, 에르데스 로톤?"
귀공녀 같은 톤이 들린다.
페르다는 이 목소리를 기억했다.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을 더 잘 기억하는 페르다에겐 그녀는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에 제복을 입은 여인.
에리카 이오르가.
블루 드래곤 스폰의 수장이었다.
왜 그녀가 여기에 있는 거지?
페르다는 눈길을 돌려 루리 쪽을 슬쩍 보았다.
루리는 그 대답을 하려는지 슬쩍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일단 아군인 모양이었다.
"주제를 벗어났다니?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지금 얘기하는 주제는 틀림없이 아벨 실버윈드의 죽음에 관해서지 않나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악마라면서 감정을 흔들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요?"
"악마의 자식이니까 당연히 시트리에게 혜택을 받았겠지?"
"악마가 다른 악마를 돕진 않지요. 그리고 대악마인 시트리가 고작 같은 종족이라서 그를 돕는다는 건 말도 안 되고요."
악마들의 특징을 이용해서 페르다를 변호했다.
에르데스는 웃으면서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검지로 꼬았다.
짜증이 났다는 뜻이다.
"오랜만이야. 에리카 짱. 잘 지내고 있어?"
"네, 오랜만이네요. 에르데스 로톤."
스스럼없이 부르는 에르데스와 격식을 차리며 웃는 에리카.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고즈와 페르다 못지않은 신경전이 오갔다.
"이오르가 님은 정정하시지? 응? 요즘 마탑에 구설수가 많더라고?"
"걱정할 필요 없답니다. 에르데스 당신이 받은 비난에 비하면 새 발의 피, 파리 앞발에 묻은 먼지 수준에 불과하거든요.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이죠."
"어머, 그래? 그래도 반짝반짝 빛나야 하는 보석에서 잔흠이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적어도 수장이 그런 걸 용인해선 안 되지?"
"괜찮습니다. 자기가 깨진 유리인 줄도 모르고 보석이라고 주장하는 것들과는 클래스가 다르니 말이죠."
스쳐도 치명타인 상황 속에서 미소를 유지하는 두 사람.
페르다와 다르게 그들 사이에 깊은 골이 느껴졌다.
그 대화를 보고 있노라니, 모욕에 대한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마저 변호해 보자면, 페르다 님께서 구사하는 것은 그림자술입니다. 환각과 음욕을 관장하는 시트리와 결이 맞지 않는데, 악마와 거래를 했다고 하는 건 맞지 않아요."
"아몬이 마르바스의 마법서를 줄 수도 있지. 그런 게 무리는 아니거든."
아몬은 불의 악마, 마르바스는 얼음의 악마로 서로 앙숙지간이다.
"그게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고, 악마들이 그런 의미 없는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죠. 흑마법의 권위자라는 분이 그런 것도 모르시면 어떻게 합니까?"
에리카의 말대로였다.
내가 수고를 들이고 남 좋은 꼴을 보여 주는 셈이다.
악마들이 그걸 용인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에르데스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생떼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는 억지를 부리고, 억지로 흔들려고 했을 뿐.
갑작스레 나타나 훼방을 놓는 에리카가 무척이나 짜증이 났다.
"그럼 용의 부군이 될 사람이 흑마법을 쓰는 것은 괜찮다고 보는 거야? 아니면 발드로바를 지독하게 악룡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하는 개수작? 에리카 짱, 새하얀 옷이랑 다르게 속은 시꺼멓네?"
"발드로바 섭정이 흑마법을 쓴다고 해서 본성이 사악하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주장했고, 에르데스는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에리카 짱. 누누이 말했잖아? 그 망할 흑마법은 세르데스를 오염시키는 더러운 것들이야. 난 그런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어."
그것은 에리카가 가지고 있는 결벽증.
"인간들의 레드 서클은 감정에 기인하는 거라고. 그중에서 가장 쉬운 것은 부정적인 감정. 그 부정적인 감정은 어둠을 이끌어 낸다고. 흑마법을 쓰는 것들은 위협이 되는 것들이야."
"기사의 덕목 중에는 분노를 이용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룰 줄 안다면, 그것은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악마 새끼들의 마법이라고."
"악마 자체의 의도는 불순하나 악마에게 파생되었다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 아직도 그놈의 용마 전쟁에 사로잡혀 있네. 그래서? 너도 거기에 참여했고, 흑마법을 써서 전세에 보탬이 되었으니 발언권이 있다고?"
이건 또 놀라운 사실이었다.
에리카 이오르가.
다른 스폰들과 다르게 모든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엘레멘탈 마스터이며, 마이스터다.
그녀가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다.
"에리카 짱, 그건 마법이 아니야. 인간들에게 전능감을 쥐여 주고, 지닌 악한 본성을 끌어내서 자신은 물론, 타인마저 불행하게 만들어 내는 도구라고?"
"아뇨, 당신은 틀렸습니다."
에리카 또한 단호하게 주장했다.
"마법은 도구이며,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몫입니다. 지옥의 마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연구하고 발전할 가치가 있다면, 그건 써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꼬맹이가 잘 쓸 거라고 믿는 거야?"
에르데스는 페르다를 턱짓했다.
에리카도 눈을 돌려 페르다를 보았다.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 듯한 눈을 했다.
"변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해야 하는 법이죠."
에리카가 한 음절 음절 또박또박 내뱉으며 말했다.
"에리카 이오르가, 모든 블루 드래곤 스폰들의 대표로서 이 자리에서 발드로바 공왕령에 동맹을 제안합니다."
갑작스러운 동맹 선언의 충격을 이용하여 상대측을 압박했다.
"만약 실버윈드 측에서 전면전을 선언하시겠다면, 이오르가 측에서는 발드로바 공왕령을 수호하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호소력이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는 상대의 기세에 대응했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던 에르데스가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거야, 에리카 짱.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짓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당신은 너무 극단적입니다. 페르다 섭정을 이대로 둔다면,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그를 괴롭힐지 뻔히 아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 누가 나서래? 그거랑 에리카 짱이랑 무슨 상관인데?"
"100년 이후 그 누구도 꺼내지 않았던 극동부 탈환을 선언한 남자입니다. 대륙을 수호하는 입장으로서 그 발언을 했다면 지지할 수밖에 없죠."
"흐응. 그래서 저 어린 것이랑 편을 먹겠단 말이지?"
한층 더 표독스러워진 눈동자.
이야기고 뭐고 다 때려치고 지금 당장 전투를 벌이고 싶어 근질근질해 보인다.
가만히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고즈가 입을 열었다.
"에르데스."
"그래, 당신도 무슨 말 좀 해 보고 그래! 저쪽은 2명이고 우리도 2명이니까, 뭐 좀 되겠네!"
"이만 돌아가지."
"내가 저년을 맡을 테니, 뭐?"
에르데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즈를 쏘아보았다.
"뭔 소리야? 나 아직 이야기도 안 끝났는데?!"
"내가 원하던 건 전말뿐이다. 아벨, 그 버러지 새끼가 뭘 했는지만 알면 됐었다."
"말했잖아!! 그건 페르다 섭정이 파 놓을 수 있는 함정—!"
"죽기 전에 이미 거래를 했지 않나?"
"그렇긴 한데—!!"
"그럼 끝이다. 그 버러지가 거래를 했고, 섭정은 처형을 했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왜 멋대로 처형했냐고 물으면 되잖아!? 머리에 얼음만 찬 것들이 갑자기 왜 생각을 하고 그래!?"
"악마와 거래를 한 주제에 인간 하나도 못 이기는 놈은 그런 운명도 싸게 치인 거다."
고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의 눈이 슬쩍 루리를 마지막으로 담고는 복도를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에르데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페르다를 쏘아보았다.
"이야기는 끝난 것 같네. 페르다 섭정, 이대로 끝낼까?"
초당 3연발로 깜빡이는 눈썹
해명할 것이 없냐는 물음과 더 싸우자는 도발이 담겼다.
머리가 식은 페르다가 대답했다.
"배웅해 드리죠."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을지도? 나 흑마법사들이랑 옆에 있으면 죽어 버리고 싶어져서. 아니면 죽여 버리고 싶은 건가? 잘 모르겠네. 아무튼, 그렇거든?"
이젠 감출 기색도 없이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몸을 휙 돌려서는 복도를 우다다 달리며 소리쳤다.
"아씨! 같이 가! 진짜!! 숙녀를 에스코트하지 못할망정 버리고 가는 건 너네 종특이야!?"
* * *
아벨 실버윈드의 죽음.
페르다가 벌인 악마와의 거래.
그 두 개의 폭풍이 찾아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이라는 생각과 다르게 무사히 일단락되었다.
한숨을 돌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페르다는 맞은편으로 시선을 두었다.
고즈와 에르데스가 차지했던 자리는 이제 에리카가 앉아 있었다.
페르다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절 도운 겁니까?"
그 물음에 에리카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드래곤 스폰의 자존심이 가득한 목소리다.
"여기서는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나요? 당신을 도와줬는데?"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던 일이었습니다."
"에르데스의 페이스에 휘말리셨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저 여자는 속 긁는 솜씨가 아주 대단하거든요. 저야 워낙 많이 싸워 봤으니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쉽지가 않아서요."
맞는 말이었다.
페르다도 무심코 말려 버렸으니까.
"그리고 멋대로 동맹 제안을 해 버리셨던데."
"불만이었으면 물이라도 끼얹지 그랬나요? 그 머릿속에 얼음만 찬 바보들에게 도발도 해 버리시고?"
그녀의 도움을 바란 적이 없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존심만 세운 거짓말이다.
"물론 일을 원만하게 풀어 주신 점에 대해선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그 감사의 뜻 잘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맹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번 변호에서 제 진심이 닿지 않은 모양이군요."
"전 그런 건 믿지 않습니다."
"예, 알고 있어요. 당신 같은 사람들에겐 증거가 필요하겠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휙 그었다.
그 순간, 허공에서 클립보드 하나가 형상을 드러내면서 다과 테이블 앞에 놓였다.
"이게 뭡니까?"
"여기 날짜 보이시죠? 150년 전."
"예."
"첫 용마전쟁 이후, 첫 블랑카로스 님의 주도하에 대공의회가 열린 날, 그분이 본성이 사악하다는 이유로 악룡으로 지정되기 전날입니다. 바로 다음 날에 저희 이오르가 님께서 제안하신 내용이죠."
그 문서의 서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프로젝트: 헤스티아
헤스티아는 불을 지키는 여인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고대 신화의 이름이었다.
비밀 등급은 최고 레벨, 실행 등급은 최우선이라 추가로 기재되어있었다.
페르다는 그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개요는 이오르가가 발드로바의 몸에 깃든 고드윈의 광기를 제거하기 위해 연구한다는 것이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그 뒤는 대충 날짜만 훑어보고는 덮어 버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습니까?"
"단순히 이오르가 님의 의지가 발드로바 님을 방패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해석해야 합니까? 만약 그때부터 이오르가 님이 고드윈에 대한 위협을 느꼈기에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끝인데."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고 다른 것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문서를 제쳐 두고 이번에는 묵직한 물건을 꺼냈다.
수정구였다.
"이건 이 발의가 담긴 기록입니다. 이 내용에 이오르가 님이 발드로바 님을 지키려 했다는 의도가 있었음을 증명해 보이죠."
음성 기록이라면 또 다르다.
무엇보다 이 내부 자료를 바깥에 보여 줄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니 그들의 속내가 좀 더 명확할 것이었다.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었고, 수정구는 그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이오르가 님, 이 발의는 제가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까?
에리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누군가가 대꾸했다.
-맞아.
아주 짧았지만, 페르다는 이 목소리가 블루 드래곤 이오르가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단순히 기록일 뿐인데도, 얼마나 깊은 마나를 지녔는지 느낄 수 있는 울림이다.
-저는 반대합니다.
그 반대의 목소리는 다시 에리카였다.
그녀는 들리는 목소리들 중 누구보다 격렬하게 반대했다.
-우리는 그 망할 도마뱀을 도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크흠!"
에리카는 헛기침을 하며 잠시 수정구의 재생을 멈추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려 했으나,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당시에는 저희 스폰들도 많이 죽었기에 감정적이었습니다. 그 점을 참작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말하는 내용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수정구의 내용은 편집하지 않은 날것 그 자체라는 점이었다.
-아니. 우리가 도와야만 해. 그 아이는 악룡이라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 아이가 그렇게 날뛰었던 것은 고드윈의 영향 때문에 벌어진 거야.
-그럼 죽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불안정해진 것이라 한다면, 그래야만 하지 않습니까?
-죽일 수는 없어. 이미 고드윈이 죽었고, 실버윈드도 죽었어. 더 이상 희생이 있어선 안 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오르가 님. 이오르가 님은 누구보다 발드로바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원수를 돕겠다니요?
-싫어하지. 하지만 그 아이가 멍청해서 싫을 뿐이야. 본성이 악하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 아이를 죽일 수는 없어.
느껴졌다.
이오르가는 발드로바를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걱정했다.
-그러다가 제2의 고드윈이 탄생한다면 어떡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미래에 닥칠 것이라면?
-그러진 않을 거야. 그 아이는 불안정해진 자신의 모습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버틸 테니까.
순수히 이 연구가 발드로바를 돕기 위해서였음을.
-그렇게 멍청하니깐 그 정도도 할 수 있는 거고.
그러나 시작되는 악담.
-싸움만 잘하지, 아둔하고 머리도 안 좋지, 아는 게 없으니까 머릿속에는 꽃밭이나 다름없고,
"크흠!"
-그런 주제에 겁은 많고, 상처도 잘 받고, 자기주장도 제대로 못하고,
"크흐흐흠!"
-힘의 위상이라는 놈이 스폰 하나 거느리지도 않고, 지 혼자 다 짊어지겠다는 꼴이 그냥 머리를 안 써서 붉은 도마뱀 한 마리에 날개를 붙여서 허우적 날아다니는 거랑 다를 바가—.
"콜록! 콜로오옥! 콕콕!"
에리카는 사레들린 사람처럼 기침하다가 결국 레코드를 멈춰 버렸다.
"...."
에리카의 이마에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에리카는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이후로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페르다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10분 정도 넘어가도 괜찮을까요?"
72화. 착각이야
불편한 정적이 오갔다.
페르다는 검지로 이마를 꾹꾹 비비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악담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하나를 붙잡고 호박씨 까고 있으면, 그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할 수는 있는 거지, 들키는 건 다른 문제다.
그것도 특히 사랑하는 약혼자의 호박씨라면.
그러나 페르다는 분개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해졌다.
에르데스의 건으로 너무 열이 뻗쳤던 탓일까, 아니면 그저 과거이기에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일단 궁금한 것을 질문하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다른 드래곤들도 제 약혼자를 이렇게 생각합니까?"
"...그냥 드래곤들끼리는 그렇게 사이가 안 좋다고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니, 저는 그저 객관적인 사실이 필요할 뿐입니다. 도움을 줄 거라면 여과 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페르다는 진지하게 말했다.
에리카는 그 진지한 눈빛이 분노인지, 아니면 탐구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을 주었다.
"예. 그분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
"지금 이 순간도 그렇죠. 인간을 반려로 삼아 결혼하고 싶다니요. 농담거리도 안 될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이죠."
힘의 위상이나 힘을 쓰지 못하는 위상.
그 모순을 들어 보면 어처구니가 없긴 했다.
발드로바는 모든 것이 모순적인 존재이다.
"감정적인 이야기는 제쳐 두고."
과거에 사로잡히는 건 좋지 않았으니,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오르가와 동맹을 맺으면 이점이 뭡니까?"
"페르다 섭정이 하실 극동부 정벌에 힘을 보태 드릴 수 있어요."
"당신들과 말입니까?"
"저희들은 오래전부터 극동부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으니까요."
에리카의 말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드래곤 스폰 특유의 거만함도.
"극동부를 정벌할 수 없는 이유는 그곳에는 마기가 있기 때문이지요."
페르다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마의 땅에서 올라오는 정크 마나는 정신과 몸을 붕괴시킨다.
"극동부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모든 신의 가호와 마법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극동부에 들어가는 용사 일행은 정예 극소수만이 가능했죠. "
12명의 용사들.
각 신을 모시던 대신관들과 모든 용들이 가호의 주문을 외움으로써 그들을 보호하였다.
그 12명의 원정대 중에는 드래곤 스폰인 에리카 이오르가, 그리고 에르데스 로톤이 있었다.
"저희가 프로젝트 헤스티아를 연구해 오면서 최근에 들어서야 의미가 있는 성과가 나왔습니다."
의미 있는 성과.
그 말에 페르다는 살짝 들뜨는 것을 느꼈다.
"그게 뭡니까?"
"항마력이라는 것입니다."
항마력.
나쁘지 않은 이름이다.
페르다의 머릿속에 이 단어가 없는 걸 보면, 이건 이오르가가 숨겨 놓은 전략 병기쯤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걸로 치료할 수 있는 겁니까?"
"아뇨. 현재 마기에 침식당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풀어 줄 해결책은 아닙니다."
"치유제를 연구하면서 의미 있는 성과라 하지 않았습니까?"
"연구라는 건 그런 거죠. 의도치 않은 방향의 발견도 성과에 해당합니다."
지금 장난하나?
그런 눈초리로 쏘아보자, 에리카는 '아무튼'하고 얼버무렸다.
"저희가 발견한 것을 쉽게 얘기하면 예방과 치유의 차이 정도입니다."
예방은 닥칠 일에 대비하는 것이며, 치유는 이미 닥친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치유제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건... 여전히 진전이 없죠. 맨땅에서 시작해야 하는 연구인 만큼, 성과의 방향은 불투명합니다."
에리카가 코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니 이 대화의 요는 마의 땅에 접근할 의사가 있으시다면, 치유제가 아니라 항마제를 좀 더 연구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항마제를 연구해서 어떻게 할 겁니까? 발드로바 공왕령 측에서 위험을 감수해라?"
"아뇨. 모험가 길드를 좀 더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모험가 길드?"
"이미 모험가 길드를 끌어들인 상태이긴 합니다만, 여태 잔심부름에 그치는 수준의 의뢰들만 계속 던졌던 상황이었죠. 미봉책만 던지다가 이제야 써먹을 때가 됐네요."
모험가들은 여러 일들을 겸한다. 우편배달이나, 소소한 심부름에서 몬스터에서 지역의 수호자인 가디언즈 퇴치까지.
실력과 난이도에 따라 의뢰 비용은 차이가 크게 난다.
"그것들이 마의 땅으로 자진해서 가겠습니까?"
"이게 된다면, 못할 건 없죠."
에리카가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들여보였다.
"단순히 조사 의뢰만이 아니라 마기에 침식되기 전 동양의 신비를 가져올 수 있으면 어떨까요? 쓰레기들조차도 경매장에서 열기를 띨 겁니다."
동양에 대한 신비한 기록들은 마법사는 물론 기사들까지 매료시킬 만한 물건들이었다.
페르다조차도 그 동양의 마법을 배우면, 크게 진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이다.
'마기 때문에 안 됐지만.'
마기라는 큰 장벽을 넘을 수 없어 전설로만 치부되기도 했다.
큰돈을 만질 수 있다면, 불구덩이도 뛰어드는 것이 모험가들의 일.
실로 괜찮은 생각이었다.
마의 땅의 현 생태에 대해서는 관찰만 했지, 그 자리에 직접 발을 들인 자가 누가 있던가?
지형을 파악하고,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한다면 후에 정벌 시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의 제안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미래를 그려 갔다.
페르다에게 부족했던 것이 채워져 가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 점점 풍성해져 간다.
그러면서도 페르다는 한 가지 의심을 놓지 못했다.
'이 여자를 정말로 믿어도 되는 것인가?'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대공의회에 느꼈던 감정이 선명했다.
"저를 믿어도 되는 건가 하고 생각하시고 계시겠죠?"
"예."
"역시 직설적이시네요."
찻잔을 들어 올리며 괜스레 차를 음미하는 척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는 듯이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한 그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최후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었죠?"
그것은 페르다가 홧김에 던졌던 말이었다.
"그 최후에 대해서 어떤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듣자마자 어이가 없었다.
미래를 도피하고 싶다는 것이 수장으로서 할 소리인가?
하지만 곧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에 깃든 것은 수장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저는 지금 현재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 눈을 보니 페르다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여자라면 믿을 수 있겠다.
"좋습니다. 동맹을 맺도록 하죠."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번진다.
하지만 능숙한 수장답게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좋은 관계를 발전해 나갈 수 있으면 좋겠군요."
"동맹을 맺은 김에 이제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마무리하려던 에리카는 페르다의 요청에 살짝 당황했다.
"벌써 도움이 필요하실 줄은 몰랐네요."
"시기가 공교롭긴 합니다."
페르다는 루리에게 시켜 린네 연구소장에게 노획했던 물건을 가져와 보여 주었다.
"이게 뭐죠?"
"마족들의 연구 시설에서 가져온 물건들입니다. 연구소장의 일지와 샘플이죠."
"마족!"
에리카는 적잖게 놀랐다.
페르다는 대강 연구 시설에 있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에리카는 더욱 크게 동요했다.
"세상에... 마족이 나이트급을 순식간에 만드는 약을 만들어 냈단 말씀이신가요?"
"아직 시제품이지만, 바운서급이 저희 기사 2명과 대적했습니다."
"실력 차이라는 게 있지만, 진짜 바운서라면 그 정도로 쩔쩔맬 일은 없을 텐데. 시제품이라 약효가 덜 되거나 부작용이 있다는 말이겠고...."
에리카는 그 병 속의 액체를 들여다보았다.
마나와 마법진을 몇 중으로 띄운 눈동자는 그 성분을 분석하려 들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답답한 표정뿐이었다.
"무엇보다 이것이 그 고드윈의 힘을 모방하고 있는 무언가라는 것이군요. 세상에. 이런 물건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에리카 이 멍청한 년아. 넌 여태 뭘 하고 다닌 거야?"
동그랗게 뜬 눈과 위아래로 들썩거리는 몸.
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페르다와 눈을 마주치고 "엇!" 하고 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군요. 수장이기 전에 한 명의 연구원인지라 이런 걸 보면 너무 들떠서...."
"익숙합니다."
이미 알몸 차림으로 뛰쳐나와 소리를 지른 놈이랑 머리 냄새를 맡으면서 성분 흡수를 한다는 년이 있는데 그 정도는 애교 수준이었다.
그녀는 다음으로 일지를 살펴보았다.
일지의 문자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하이엘프들의 언어군요."
페르다와 다르게 그녀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쩌면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냥 하이엘프 문자라는 것만 알 정도예요. 세계수 수호자들의 언어라는 건 비밀을 위해서 존재하니까요."
"그럼 불가능하다는 겁니까?"
"또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제아무리 비밀이라 해도 엘프의 정신은 언제나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뿌리 내린 근원에 가까운 자들이 모든 것을 담당하죠."
그 근원의 의미는 페르다도 알 수 있었다.
"대족장이로군요."
"예, 그분이라면 해석이 가능할 거예요. 서부 깊숙한 곳에 들어가야 하긴 하는데, 크게 문제는 안 될 테고...."
돌파할 방법은 찾았지만, 생각만큼 좋지는 않았다.
하이엘프는 엘프들 중에서도 가장 고위층에 해당하며 폐쇄적인 집단.
대족장이 결코 느슨할 리가 없다.
"대족장을 설득하면 어떻게든 될 수도 있을 텐데...."
"설득할 필요 없습니다. 협박하면 되죠."
"네?"
"하이엘프가 다크엘프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만천하에 까발리겠다고 하면 버선발로 뛰쳐나올 겁니다."
"그거... 참...."
오묘한 문제였다.
좋은 아이디어라 해야 하나, 미친 소리라고 해야 하나.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이 엘프들은 지금 한창 가을제를 진행하고 있는 데다가 겨울제도 준비할 테니까요."
가을의 풍요와 겨울의 황폐를 기리는 기도를 하는데 무려 봄의 새싹이 틀 무렵까지 멈추지 않는다.
못해도 1분기는 훌쩍 넘게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이 생겼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었다.
"일지는 다시 돌려드리고, 이 샘플들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어쩌면 치유제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들뜬 얼굴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래서일까,
"한 가지 더 남았습니다."
"또 뭐가 남았나요?"
에리카가 생일 선물을 받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제 마나입니다."
"...네?"
할머니 취향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실망했다.
"마나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발드로바 님의 혈기를 제 마나로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은 한낮의 고양이처럼 쪼그라들었다.
"치유를 했다는 의미인가요?"
"아뇨. 그 상황에서 나오는 혈기를 해소할 뿐입니다."
에리카는 흥미보단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소리였으니까.
푸른 눈의 마법사들은 엘리트들이다.
그들이 전부 머리를 싸매며 연구했지만, 억제하거나 해소하는 것조차도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 한낱 인간이 그런 기묘한 마나를 지니고 있다고?
그것도 인간이 드래곤에게 영향을 미치는?
"레드 서클의 마나가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특이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고드윈의 혼돈을 억제나 해소할 수 있는 힘이라니...."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을 거듭했다.
그런데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물과 마법의 위상인 이오르가.
그 아래에서 수장을 맡고 있는 에리카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에리카는 끝내 그 자존심을 버렸다.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해 보도록 하죠."
"뭘 말입니까?"
"마나요. 그쪽의 마나가 어떤 것인지 한번 알아내 볼 필요가 있으니 직접 느껴 봐야겠죠?"
에리카는 장갑을 벗고 페르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마 별 효과는 없을 겁니다. 발드로바 님에게만 통하는 것이니까."
"확실한가요? 100%?"
발드로바에겐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실버윈드의 스폰인 루리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그러니 똑같은 스폰인 에리카에게도 효과가 없거나 미미할 것이다.
"어느 정도 확실합니다."
"'어느 정도'와 '확실'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예요. 직접 느껴 보도록 하죠. 어차피 크게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요."
그래, 마나를 건네주는 것이 뭐가 특별한 의미가 있겠는가?
페르다는 그렇게 생각하고 에리카의 손을 잡았다.
"예상컨대, 당신의 마력이 특별한 것은 아닐 거예요. 피를 타고난 주술사들처럼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썼거나 그런 형태로 흐끼야아아앙!?"
마나를 주입받기 무섭게 입에서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
치마 안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화들짝 놀라는 영애의 울부짖음이었다.
에리카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에리카가 페르다를 올려다보았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페르다도 당황해 그녀의 손을 얼른 놓아 버렸다.
차가운 리더인 에리카의 얼굴에는 수치심에 달아오른 홍조와 흔들리는 동공이 자리 잡았다.
"??"
"??"
페르다와 에리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
서로를 쳐다본다고 한들 이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은 없었다.
* * *
"바람둥이."
루리가 싸늘한 눈초리로 매도했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모든 것을 숨죽여서 지켜보았다.
페르다는 적잖게 동요했다.
"웬 바람 타령이냐?"
"그 거만한 계집애랑 바람피우지 않았습니까?"
"손만 잡았고, 수장은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이라니. 누가 들어도 교성이었습니다."
그건 페르다도 인정했다.
"마나만 흘렸을 뿐이다, 이오르가 수장이 바라던 것이었고."
"바람 피는 것들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가져오셨군요."
돌겠군.
"너도 느껴 본 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 거만한 계집애처럼 울부짖었습니까?"
"아니지."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마나였죠. 그런데 이오르가 수장에게 할 때는 뭔가가 다른 게 있다는 겁니다. 혹시...."
루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저년이 좋습니까?"
"미쳤나?"
반사적으로 정색하며 욕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냥 마나였다."
"그런데 왜 저만 괜찮은 겁니까?"
"그게 중요하냐?"
"중요합니다."
루리가 신경질적으로 장갑을 벗었다.
"해 보십시오. 저도 조금 느낌이라도 오면 그년처럼 온 힘을 다해 교성을 질러 드리겠습니다."
루리가 그렇게 나오니 진실이 어떻든 잡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페르다도 강경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왜 그렇게 과민하는 게냐?"
"말 돌리지 마십시오."
"추궁하는 것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너는 무척이나 끈질기게 구는구나."
"...약혼자를 두고 있으신 분이 그러기 때문에 이러는 것 아닙니까?"
"내가 보기엔 그 이상의 과민처럼 보인다. 내가 사랑을 속삭이기라도 했느냐, 침실로 끌어들이기라도 했느냐? 무지 속에서 나오는 새로운 반응이었을 뿐인데, 어찌 나를 오라질 놈으로 만드는 거냐?"
페르다가 침착하면서도 자신의 분노를 보였다.
그 말을 듣자 루리는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동요감을 보였다.
페르다의 말을 듣고 생각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저는 그저 발드로바 님의 시종이기에...."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웅얼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페르다는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루리는 페르다 못지않게 오늘 힘든 날을 보내었다.
전쟁에 대한 압박과 고즈 실버윈드의 눈초리.
그것들을 견뎌야만 했다.
'그래, 오늘 힘든 날이지.'
그러니 이토록 과민하고 유난 떠는 것이겠지.
그녀는 평소처럼 힘내고 있던 것이다.
질책할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해줘야 하는 일이다.
페르다는 앞에 고개를 숙인 루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고생이 많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가볍게 쓸어내렸다.
"...."
루리는 고개를 들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머리에 손을 얹은 시점에서 그대로 떡하고 굳어 버렸다.
페르다는 머리에 손을 얹고 나서 생각했다.
뭐지, 이 미친 짓은?
무심코 몸이 따르는 대로 했다만, 내가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페르다는 그 행동이 어째서 기시감이 드는지 알았다.
성인 남성이 어린아이를 칭찬할 때는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효과적이라 했던가?
그래서 모리가 자신을 칭찬할 때 그렇게 해 달라고 했었다.
그렇다.
페르다는 루리를 애 취급해 버렸다.
가뜩이나 어린아이 취급한다고 짜증을 내던 녀석이었다.
화를 낼 것이 틀림없다.
"읏...."
그렇게 생각하는데, 또 그렇지 않았다.
애 취급하지 말라, 나는 드래곤 스폰이고 당신은 인간이다.
그렇게 나올 것이란 예상과 루리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페르다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모르겠다.
짐승은 목덜미를 잡으면 안락감을 느낀다고 한다.
어미의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습관 때문이라 하던가?
아니면 분노가 압도해버린 나머지 기폭제 버튼처럼 이 손을 떼는 순간 죽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오만 생각이 머릿속에서 채울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 얼른 나가십시오. 청소해야 합니다."
"그래, 알겠다."
그제야 페르다를 손을 뗐고, 루리도 움직였다.
그녀는 곧바로 등을 휙 돌리더니,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머리카락에 가리지 않은 그녀의 피부가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루리는 생각했다.
인간은 모두 변한다.
마음은 세월의 흐름에 거스를 수 없다.
일관이라는 것이 존경받는 덕목으로 취급될 정도로 갈대 같은 물건이다.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1년도 안 돼서 저렇게 사람이 바뀌다니.
발드로바 님이 있는데, 이젠 다른 여자 손이나 잡는 바람둥이 짓이나 계속하고.
미운 짓거리만 계속하고 있었다.
'....'
아니, 루리는 알고 있었다.
저 남자는 바뀐 게 없었다.
그들의 손을 잡을 때도 별생각이 없다는 것도.
바람을 피울 생각이 없다는 것도 말이다.
그냥 괴롭힐 구실이 필요할 때 써먹던 것일 뿐.
그런데 이제는 답답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래.
바뀐 건 루리 자신이었다.
루리도 은연히 눈치채고 있었다.
불안해지면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단 페르다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고즈가 이 성에 도착했을 때는 무심코 그의 옷깃을 잡아 버리기까지 했다.
그 변화는 페르다가 아벨을 죽이고 난 이후, 그의 품에서 펑펑 울었던 그때 이후부터였다.
'실버윈드 님.'
페르다가 한때의 실버윈드처럼 느껴졌었다.
'어째서....'
그런 터무니없는 착각을 해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실버윈드와 페르다는 달랐다.
북부의 거친 사나이들과 다르게 그는 성격이 유하며 지적이었다.
규율을 중시하는 깐깐함은 거친 북부와 2인자인 고즈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혀 닮지도 않았어.'
실버윈드는 폴리모프하면 긴 수염을 지닌 중년인 반면, 페르다는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다.
닮은 게 있다면 그나마 머리카락 색인데, 그마저도 억지로 떼를 썼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루리는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냄새.'
페르다에게 기대어 울 때, 느꼈던 냄새.
페퍼민트와 캐모마일이 섞여 강렬하면서도 은은하게 퍼지는 시원한 냄새.
그리고 황폐하게 만드는 재 냄새.
왜 그 냄새를 페르다에게 느꼈던 것일까?
'착각이야.'
터무니없는 착각.
감정에 압도되어 버린 나머지 기억에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루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해야만 했다.
아버지, 실버윈드와 그를 착각한다는 건 불경이었다.
'역시 때를 박박 밀어 버려야 해.'
목욕물은 라벤더로 담아서 아주 푹 절여 버려 지워버리는 것이다.
뭐든 간에 나쁜 건 페르다다.
73화. 이사벨라
며칠 후, 이오르가 측에서 드래곤 스폰 하나가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파견으로 온 이사벨라 이오르가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발드로바 성에서 행정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오르가의 자손답게 이마에 난 한 쌍의 뿔은 둥글고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매는 날카롭고, 행동에는 절도가 있어 보기만 해도 깐깐한 사감처럼 느껴졌다.
스폰이 도착할 거란 이야기는 들었으나, 한 가지 서류상으로 틀린 부분이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다만, 오는 것은 유리아라는 이름을 지닌 스폰이라고 들었는데?"
"유리아 대신 제가 지원했습니다. 안심하시길, 에리카 수장님의 수석 비서로서 임무 수행 능력은 유리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자부합니다. 탑 내에서는 냉혹한 비서관으로 불리지요."
안경을 치켜세우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 이사벨라.
스스로 자부심이 넘치는 건 알겠지만, 진짜로 뛰어난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드래곤 스폰들의 오만함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아무튼, 알겠다."
"동맹 선포식은 아무래도 일주일 뒤에 할 예정입니다. 블랑카로스 님께서 직접 서명하신 문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세르데스 대륙 전역에 알릴 것입니다. 궁금하신 점 있습니까?"
"그 점에선 에리카 수장이 서면으로 얘기 들었으니 크게 궁금하진 않네."
"알겠습니다. 수장님께 드릴 동맹 체결 내용 확인하시고 날인해 주십시오."
중요한 문건인 만큼 페르다는 글자 하나씩 확인을 마치고 옥새를 찍었다.
끝인가 싶었지만, 또 다른 문서가 날아와 그의 앞에 섰다.
"이 문서는 행정관으로서 필요한 권한 동의서입니다. 이건 사법 권한과 징수 권한을 제게 위임한다는 위임장이며, 또한 행정 업무상 하청이 필요할 때 결정할 수 있는 권한으로...."
문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간단했다.
세금 징수나 법률 집행, 외교 같은 큰 업무에 대해서는 페르다가 직접 결재하되, 작은 업무, 사사로운 분쟁이나 세금 징수 관리원 체계 등 관련해서는 행정관인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위임 관련 문서는 전부 끝났습니다."
"끝인가?"
"이제 시작입니다. 성내의 보안 등급을 세심하게 검토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주 근무자들을 제외하고는 잡부들, 등급 외는 전부 밖으로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후 성내 행정 업무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리와 이야기를 하면서 바꾸었던 부분들이 현실적으로는 어떤지, 효율과 외관상에 대한 이유로 술술 말하면서 페르다를 설득했다.
성내 행정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가 마무리될 즘, 이사벨라는 슬쩍 창가를 내다보았다.
그 아래에 펼쳐진 것은 짐승의 소리가 없는 숲이었다.
"말은 들었습니다만, 발드로바 성에는 치하 도시가 정말로 없던 모양이군요."
"일반인들이 이곳에 살기는 버겁다고 하더군."
"모험가들을 수용할 장소는 어디로 하실 생각입니까?"
"콘실러스 백작 영지면 되지 않겠나?"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이사벨라가 차갑게 대답했다.
"국력을 형성하기 위해선 자본과 식량보다 인구가 최우선입니다. 모험가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이 주변에 도시 설계를 시작해야 합니다."
"일반인들이 이곳 근처에서 살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걸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것도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다면 그렇지요. 푸른 눈에 마법진 관리를 담당할 마법사를 파견해 달라 요청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고용의 개념이니 마법 소대를 하나 편성할 수 있도록 예산안을 준비하여 결재받도록 하겠습니다. 드래곤 피어로 인한 불안감만 해소한다면 이 도시는 수도로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수도라....
그 말을 했던 것은 올리비아 아르켄이었다.
그녀는 이곳이 제2의 수도가 되길 바랐다.
언젠가 될 예정이지만,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제국의 견제는?"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그는 소리입니다. 그들이 함부로 하진 못할 겁니다. 마의 땅에 모험가들이 집결할 것이고, 그 집결은 자연스럽게 도시를 형성하게 되는 게 이치입니다. 동쪽 정벌이라는 명목을 지녔는데, 그걸 감히 막아선다면 이오르가 측에서 반발하겠다는 의지를 보일 것입니다."
제국이 발드로바를 여태 집 지키는 개 수준으로 봤을 테지만, 이오르가는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법사 집단이다.
그들이 제대로 케어해주겠다는 말에 페르다는 만족했다.
"상단을 섭외해야 하는데, 섭정님께서는 이미 한 곳을 끌어들이셨더군요. 파스칼 무역회사, 맞습니까?"
"맞다."
"대형 상회 하나만으로는 안 됩니다. 서쪽의 상단은 아니더라도 북쪽과 남쪽에서도 교역을 활발히 해야 합니다."
"그 점에선 스테판과 이야기를 해야겠군."
"행정관인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파스칼 무역회사에도 충분히 합의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도록 하게."
그 이외에도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도로 개편과 투자금과 기부금이 어떻다느니, 도시 계획 전략이 어떻다느니.
페르다도 나름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사벨라의 앞에서는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생각을 술술 내뱉으면서 전략을 하나씩 이어 갔고, 페르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적재적소 활용했다.
'과연 수석 비서라 할 만하군.'
수사법을 이용한 말장난이 아닌 핵심만 요약하여 필요한 것만 전달한다.
중요한 문제는 단호하게, 그리고 사사로운 것은 유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꿩 대신 닭이라 생각했는데, 봉황이 내려왔군.'
확실히 믿을 만한 인재였다.
너무 믿을 만해서 역으로 두려워질 지경이다.
'왜 이런 인재가 이 성에 온 것이지?'
페르다는 그게 궁금했다.
유리아라는 스폰이 왔다면, 에리카가 시켜서 왔겠거니 했지만, 이사벨라는 자원했다.
이오르가의 자손들은 드래곤 스폰이다.
기본적으로 자신들은 다르다는 독보적인 자부심이 베이스다.
특히 이오르가가 만든 푸른 눈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하기에 마탑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한다.
발드로바 성으로 파견 온다는 것은 사실상 유배를 당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유배지에 이렇게 유능한 비서가 굳이 올 이유가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이사벨라는 늘여놓은 서류들을 정리했다.
"우선 간략한 개요는 이 정도로 하고 로드맵은 추후에 함께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업무는 이걸로 가볍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수고했군."
"질문 한 가지만 해도 되겠습니까?"
이사벨라가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섭정님께서는 혹시 술을 즐기시는지요?"
"입에 대지도 않는다."
페르다가 딱 잘라서 말하자, 이사벨라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말을 술술 내뱉던 여자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미리 짚어 봐야 했던 문제였는데, 혹시 이 성에 금주령이 선포된 상황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요?"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내가 술을 마시지 않을 뿐."
"그렇군요. 확인했습니다."
곧바로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페르다에게 거슬려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술을 즐기나?"
"조금 마시는 수준입니다. 근무 후에 마시는 술은 워낙 각별하기에."
"흠, 그렇군."
종족이 달라도 마법사는 마법사.
마법사의 친구는 술과 여자이다.
두 개를 해도 뭐라 안 하는데 하나 정도는 당연히 용인해 줄 수 있었다.
똑똑.
누군가가 노크하고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메이드복을 입은 소녀, 루리였다.
"페르다 님, 성문 앞에... 응?"
그녀가 무슨 용건으로 오다가, 이사벨라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시선이 빼앗겼다.
"그쪽이 이번에 발드로바 님을 위해 파견되신 분이군요."
루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사벨라를 향해 걸어갔다.
세 발자국 정도 남겨 놓고 거리를 두자, 그들의 키 차이는 육안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루리는 기죽지 않고 기싸움을 시전했다.
"오늘 처음 오셨으니 명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이 성에서 누구보다 많이 봉사한 것은 바로 저입니다. 제 동의 없이 물건을 빼거나 교체하시면, 마찰을 피하실 수 없을 겁니다.
분위기는 정말로 진지했다.
만약 그녀의 물건을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굳은 의지로 빚어진 것이었다.
페르다에겐 조금 다르게 보였다.
'영역 마킹하는 개 같군.'
선입견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법.
페르다는 치와와 한 마리가 왕왕 짖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그런 루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이성적인 눈이 빛나면서 입을 열었다.
"작고 아담해...."
"예?"
그녀가 중지로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방금 내뱉었던 말은 마치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차갑게 말했다.
"이곳의 관리에서 모든 업무를 루리 실버윈드 당신이 맡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루리 양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청결함에 있어선 저희 마탑의 수준보다 높은 걸로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행정 업무는 개판 오 분 전입니다. 효율과 실리에 맞지 않은 일들이 많죠."
"그런 걸 따지는 건 드래곤의 품격과 맞지 않습니다."
"따져야만 할 겁니다. 확인된 드래곤들 중에서 발드로바 님의 재산이 가장 적습니다. 본래 잡으려 했던 예산에서 좌절될 정도죠."
"그래서 불만입니까?"
"불만이라기 보다는 적절한 재테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재산이 적다는 말에 기분이 나빴지만, 차마 반박하진 못했다.
실제로 발드로바는 예전부터 진귀한 보물들에 관심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행정 개편을 위해서 성내에서 변동도 있을 겁니다만, 그 전에 루리 양을 찾아가서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업무를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페르다 섭정님."
"그러지."
구둣발 소리가 대리석을 울린다.
격식 높은 마탑, 이오르가의 수석 비서답게 우아한 걸음걸이로 물러났다.
루리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혐오감 섞인 표정을 지었다.
"저 여자, 기분 나쁩니다."
"질투하는 거냐?"
"아니, 저 물도마뱀들을 왜 질투를 왜 합니까? 그냥 기분이 나쁜 겁니다."
루리는 이사벨라가 자신을 볼 때, 묘한 감각을 느꼈다.
분명 이겼는데, 이긴 것 같지 않은 이 느낌.
저 안경 너머의 시선에서 묘한 불쾌감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물론 페르다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질투하고 있다고만 생각할 뿐.
"그래서 영역 마킹이나 하려고 왔나?"
"동네 어슬렁거리는 들개처럼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에스콜레이아 총장이 찾아왔습니다."
에스콜레이아 총장.
그의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마족 출현 예측 장비의 청사진을 받기로 했었다.
큰일이 있어서 일부러 재촉하지 않았는데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먼 길을 왔을 텐데, 우선 적당하게 대접부터 하도록 해라. 2시간 뒤에 뵙겠다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루리는 그렇게 물러났다.
잠깐 여유를 가지려는 것도 있지만, 다른 용건도 있었다.
페르다의 책상 위에 놓인 수정구.
통신 마법이 새겨진 그 수정구가 점멸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연락을 시도하고 있다는 뜻.
페르다는 수정에 손을 얹어 전음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페르다 섭정.
에리카 이오르가였다.
"예, 이오르가 수장."
-이번에는 전음을 끊지 않을 거죠?
"원하신다면 당장 끊어 드리죠."
-야박하게 그러지 말자구요. 곧 동맹이 될 사이잖아요? 동맹 체결 내용 확인했다는 서류 받았어요.
"그것 때문에 이렇게 전음을 하시는 겁니까?"
-겸사겸사죠. 유리아가 아니라 다른 아이가 갔죠?
"예. 이사벨라라고 하더군요."
-네, 맞네요. 어떠신가요? 혹시 마음에 안 들거나 하시면 원래대로 유리아를 보내 드리겠어요.
어째서 수석 비서를 되찾으려고 하는 것만 같아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똑 부러지게 하는 게 딱 필요한 인재라 생각했습니다."
-맞아요, 일 하나는 잘하죠. 뭐라 해도 제 수석 비서이니까요. 실무에 관심이 많아서 정체를 숨기고 에스콜레이아에 몰래 가서 박사 학위를 땄을 정도예요. 그런데....
길게 내쉬는 한숨.
"문제가 있습니까?"
-아뇨. 이 이야기는 하지 말죠. 천천히 아는 편이 낫겠죠. 그 아이가 나쁘거나 한 건 아니니까요.
업무에서는 완벽하니까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으니 오히려 더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도대체 그 여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저러는 것일까?
성가시지만, 일적인 문제로는 딱히 되지 않는 그런 부류임이 틀림없었다.
-말대로 선포는 일주일 뒤에 할 거예요. 그만큼 시간이 주어지니 준비를 잘하도록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의 동맹을 위해, 앞으로도 연락 자주 하겠습니다.
에리카가 빙긋 웃은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전음을 끊었다.
'선포가 일주일 뒤라....'
시작이 절반이라 하였다.
페르다는 서류의 산을 예감했다.
골치 아픈 일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 또한 발드로바를 위한 일이었으니.
페르다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지금 당장은 난해하게 나무로 뒤덮인 숲.
그곳에는 건물로 가득 채우고,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거리에는 사람과 마차가 정신없이 움직이며, 그들은 발드로바의 이름을 노래하며 그녀를 칭송할 것이다.
그러니 페르다는 이 고통을 감내할 것이다.
나의 하나뿐인 약혼자를 위해서.
74화. 원한다면
2시간 후, 페르다는 예정되어 있던 손님을 반겼다.
"에스콜레이아 총장, 버나드 웨인이 위대한 힘의 위상의 배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류의 보고 지식의 총재를 뵙습니다."
"발드로바 성에 발을 들이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에스콜레이아 총장, 버나드 웨인이 모자를 벗으며 머리를 숙였다.
수풀 두 개 사이에 놓인 살색의 고원은 여전히 반질반질하게 빛나고 있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총장. 창 너머로 보니 군대가 붙었더군."
"마법사 둘에 기사 둘, 그리고 병사 스무 명이지요. 하하! 이제야 좀 귀족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에스콜레이아 총장 덮어씌우기 작전이 실패하면서 에스콜레이아는 한바탕 뒤집혔다.
제아무리 허수아비에 모든 책임을 떠맡는 게 총장직이라고 비하하지만, 그는 결국 에스콜레이아의 얼굴이었다.
암살 기도는 에스콜레이아의 근간을 흔들 수 있었던 일이다.
그렇기에 총장은 에스콜레이아 내 의회에서 권력을 쥘 수 있었다.
"허허, 이렇게 화려한 성에서 사시니, 귀빈들이 많이 찾아오시겠군요."
"귀빈보다는 협박하러 온 무뢰배가 더 많았습니다."
"예? 그럴 리가요, 아무리 그래도 대륙을 뒤집어 놓을 힘의 위상인데...."
"저번 주만 해도 또 협박하러 왔죠."
"아... 예."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대화 주제를 바꿔버리기로 했다.
"이건 일전에 드리기로 했던 마족 출현 예측 장비의 청사진입니다."
페르다는 그가 건네준 종이를 보았다.
마력으로 형상을 유지하는 양피지에 새겨 놓았으며, 단순한 책처럼 불타거나 젖거나 풍파될 일은 없는 물건이었다.
페르다에게 건네는 건 사본인데도 그만큼 귀중한 종이를 썼다는 건 그가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이 청사진을 읽으실 수는 있으십니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페르다는 이런 설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니까.
"성에 있는 수석 연구자가 봐 줄 겁니다."
"수석 연구자라면 혹시 누구입니까?"
"버넬 마르퀴스입니다."
"버넬 마르퀴스라면... 그, 엉망진창 말입니까? 그가 여기에 있습니까?!"
버나드가 깜짝 놀라며 그의 이름을 연신 내뱉었다.
"유명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정말 유명한 모양이로군요."
"유명하지요. 에스콜레이아에서 그 녀석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만큼 기대를 받았고, 실망시켰던 사람이었으니."
그 실망한 사람은 틀림없이 버나드였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페르다에게 물었다.
"지금은 뭘 하고 있습니까? 그 말도 안 되는 것을 포기하고 이곳으로 오기라도 한 겁니까?"
"그 말도 안 되는 것은 성공했습니다."
"역시 그런... 예?"
버나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걸 성공했단 말입니까?"
페르다는 그의 경악을 예상했다.
그렇기에 그가 오기 전에 버넬이 만든 샘플 중 하나를 가져와 그에게 보여 주었다.
"마력석입니다. 마물의 사체에서 가공한 물건이죠."
"세상에... 그 녀석이 결국에는 천지를 뒤집었단 말입니까...."
학자들 사이에서 혁신적인 발견을 그렇게 말했다.
버나드의 얼굴에는 오만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경이로움과 감탄, 질투와 후회.
등을 돌렸던 사람이 결국 옳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혹시 효율은 어느 정도입니까?"
버넬이 전부 계산했을 것이란 믿음이 있는지, 계산했냐는 물음은 스킵했다.
"현재까지는 10%입니다."
"처음에는 몇 퍼센트였는지 아십니까?"
"7.1%라더군요."
"그렇군요."
그는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찝찝함을 느끼는 얼굴이다.
페르다는 학자가 아니기에 그의 머릿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제안했다.
"버넬 마르퀴스와 만나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버나드는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굳이 만나서 이야기까지 할 정도는 아니고... 그렇지."
버나드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대공의회 당시 기억하십니까? 제가 전시회에 참여해 달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할림에서 전시회를 한다고 하셨죠?"
"15일 뒤에 모든 학자들과 귀족들이 그곳으로 모일 겁니다. 사흘 정도 진행합니다. 오프닝 메인 엔딩으로 발표회도 가지지요."
그 다음으로 꺼낸 말은 그의 제안이었다.
"제가 힘을 써서 버넬을 메인 자리에 넣어 드리겠습니다. 부디 참석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버나드 총장님이... 그런 제안을 했습니까? 저보고 메인에 올려 주겠다고?"
버넬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버넬이 호들갑 떠는 모습은 몇 번 보긴 했지만, 이렇게나 놀란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손이 멈춰있었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던 모양이로군."
"에스콜레이아 전시회 사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메인 무대입니다. 이름난 학자라고 해도 그 자리를 가지는 게 하늘의 별 따기지요."
"그럼 자네에게 잘된 일이군."
"잘된... 일이죠."
말과 다르게 버넬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끝내, 펜대를 내려놓으며 테이블에 기대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페르다는 버넬이 감정에 압도된 것을 느꼈다.
"모든 학자들이 서고 싶은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칠 건가?"
"영광이고 뭐고, 버나드 총장님이 함정을 파놓은 게 뻔한데 제가 뭣하러 가겠습니까?"
"함정?"
"그분은 저를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제게 줬던 모욕을 떠올리면 그 호의는 받을 수 없습니다."
"무슨 짓을 했나?"
"제 연구 계획을 비난했습니다."
버넬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카데미 생도들이 2학년이 되면, 아카데믹 콘퍼런스라는 걸 참여합니다. 조금 허황되었다 해도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이죠. 신선한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곳인 만큼 그곳에서 비난한다는 건 의미가 너무나도 큽니다. 마치 제 바지를 내려서 모든 청중 앞에 고간을 보여 주는 거랑 같죠."
고작 그 정도로? 라는 말이 나올 수 있지만, 페르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생각해 낸 미래는 진심이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 진심이 부정당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페르다는 그가 아카데미에서 수석이었다가 꼴찌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겨우 졸업해서 마도공학 영역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버나드와 골이 이리도 깊은 줄은 전혀 몰랐다.
"네게 모욕을 줬다면, 더욱 참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페르다의 물음에 버넬이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그리됩니까?"
"자네가 틀리지 않았으니 당당해지면 되지 않나?"
"엿 먹이는 것 좋죠. 예... 하지만 그게 저를 함정에 빠트리려는 수작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영원히 피하기만 할 건가?"
페르다의 되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피하려고 하지만, 내심 이 문제를 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너는 아카데미의 생도가 아니라 내 수석 연구원이다. 만약 버나드가 네게 터무니없는 짓을 한다면,"
"...."
"자네가 아니라 나와 끝장을 봐야겠지."
그 말에 버넬이 상념에서 깨어나 페르다를 보았다.
그래,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지 않던가?
그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한번 대면해 보도록 하죠. 그 손에 들린 건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청사진 같은데...."
"버나드 총장의 자식이네."
"자식?"
"마족 출현 예측 장비의 청사진이라고 하더군. 자네가 봐 줄 수 있겠나?"
"아, 그런 거군요. 마족 출현 예측 장비라... 그것도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버넬이 청사진을 확인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스테판이었다.
마침 잘되었다 싶어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었다.
그의 낯빛은 썩 좋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안 좋은 소식을 내뱉을 것만 같았다.
"저, 그게...."
스테판이 말을 더듬었다.
* * *
며칠 전, 스테판은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는 잘 입지 않은 최상급 튜닉.
최상급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입기조차도 겁이 나는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끊이질 않았다.
"후우...."
"괜찮으십니까, 나으리? 안색이 안 좋은데, 이러다가 쓰러지시겠습니다요."
"조금 그렇긴 한데... 후우."
"매듭을 좀 풀어 드립니까?"
앞에 앉은 하인이 목카라의 끈을 풀었다.
스테판은 하인을 보며 말했다.
"좀 더 꽉 묶도록 해. 풀리지 않도록."
흐트러져서 안 된다.
차라리 매듭에 목이 졸려 죽고 말지.
그토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앞에 둔 곳은 거대한 저택 때문이었다.
파스칼 무역회사의 창시자이자, 대상인, 그리고 스테판의 아버지인 허먼 파스칼의 저택.
스테판의 고향임과 동시에 전쟁터였다.
스테판은 마차에 내려 저택 입구로 들어갔다.
"어서 오셨습니까, 스테판 도련님?"
반가운 얼굴에 스테판이 웃으면서 그와 포옹했다.
"오랜만이야, 세바스찬 할아범! 잘 지내고 있어?"
"몸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이제 은퇴를 해야 할 때가 왔지요."
"무슨 소리야. 뼈를 묻겠다 어쩌고 하더니. 몸이 부서질 때까지 일해야지 않겠어?"
너스레 떨면서 이 떨림을 감춰 보려 했었다.
집사는 그것을 눈치채고 진정할 수 있도록 어울려 주었다.
긴 복도를 타고, 고용인들과 하인을 지나쳐 화려한 문 앞에 도착했다.
"차남, 스테판 도련님 들어가십니다."
문이 열린다.
그 앞에 보이는 것은 기다란 테이블이 레드 카펫처럼 중앙에 깔려 그를 반겼고, 그 테이블의 끝자락은 왕의 자리처럼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허먼 파스칼.
파스칼 상회의 머리, 과일 장수로 시작하여 만물에 손을 뻗은 남자.
한때는 제국의 상권마저 전부 장악해 버릴 수 있었던 독재자.
그런 명성에 무색하게 연로한 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늦었구나, 동생아."
그의 오른쪽 자리에 앉은 사내가 핀잔을 주었다.
다부진 몸이 상인보다는 용병에 가까운 이 남자.
장남, 머칫 파스칼이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워낙 바쁜 시기였던지라 마무리를 한다고...."
"어쩌겠어요. 가족보다 중요한 게 회사 아닌가요? 충실한 수행원으로서 일하는 모습이 좋아요, 오라버니."
화장을 진하게 하며 빙긋 웃는 저 여자는 여동생 틸다 파스칼이었다.
언뜻 들으면 거들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웃음 짓는 건 '네까짓 게 할 수 있는 게 고작이지.'에 가까웠다.
이래서 싫다, 이 집은.
내 본가로 돌아왔는데 나는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얼른 앉아라."
스테판은 미리 착석한 조카들에게 밀려 멀찍한 자리에 앉았다.
모든 가족들이 모였다.
"자, 식사하자꾸나."
집사의 종이 울리고 메이드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대륙 최고 부호답게 모든 음식에는 구하기 힘든 향신료의 냄새들이 독하게 풍겨왔다.
평소에도 입에 대기 힘든 것을 접할 수 있는 순간이지만, 스테판은 그 음식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요즘...."
허먼이 말문을 염과 동시에 만찬 자리에 앉은 손이 멈췄다.
"어떻게들 지내고 있느냐?"
머칫과 틸다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가장 가까운 장남이 입을 열었다.
"요즘 남부 쪽에 손을 뻗고 있는 중입니다. 콜로세니아 아시죠? 최대 유흥 도시 중 하나로 화려한 검투극이 유명하지요. 그곳 검투사 양성소에서 용병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고기 장사만 할 테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곳에는 달조차도 해와 같다고 할 정도로 더운 땅이지 않습니까? 향신료들이 독이 바짝 올라서 품질이 어지간한 제국 최상품들 못지않았습니다."
"그래, 금보다 귀한 것이 그런 사치품이지."
허먼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기준을 만족한 것처럼 머칫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틸다 파스칼이 근황을 이야기했다.
"저는 우리 남편님 따라서 서부 쪽을 보는 중이에요. 신묘한 마법의 땅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지 않겠어요? 교역로를 여는 순간, 파스칼 무역회사는 폭풍이 되어 버릴 거예요."
"조금 허황된 이야기로군."
허먼이 틸다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틸다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받아쳤다.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수정석 광산 계약을 따냈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마법사들이 환장하는 물건이잖아요?"
"흠...."
허먼은 눈빛을 거두었다.
틸다 또한 능수능란한 솜씨로 계약들을 따고 있었으니, 별문제는 없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스테판."
"예, 예?"
"왜 말이 없느냐?"
"죄송합니다. 제 이야기는 별로 궁금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피하려고 했으나 피할 수 없는 자리.
그렇기에 스테판도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저는 그... 동부 쪽에 현재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동부를?"
"어머, 동부에 사업을 벌이신다고요? 제가 알기로 북부를 공략한다고 들었었는데?"
틸다가 금시초문인 마냥 굴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을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북부 쪽은 현행 유지만 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거든. 그래서 과감한 투자를 해 보려고 이번에는 동부 쪽에 벌렸어."
"으음, 오라버니. 제가 배웠기론 과감한 투자랑 돈을 땅에 버리는 거랑은 좀 다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왜 병신 짓이나 하고 다니냐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 틸다.
"내가 보기에도 좋진 않아 보이는구나, 동생아."
머칫이 그녀의 뜻에 동조했다.
"북부 것들에게 술과 훈제 고기, 가죽만 팔아도 이윤이 나오는 사업이지 않더냐? 아버지의 공식대로만 하면 적자도 피하고 좋을 텐데, 왜 굳이 그런 짓을 하고 그래?"
그야 뻔한 이야기지 않은가?
이 집구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지.
"저도 가능성을 둔 사업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가능성이라니! 지금 동부 상황을 봐라. 지금도 꾸준히 마의 땅이 침식하고 있어서 영역이 줄어들고 있지 않냐? 거기서 흙을 퍼다가 오염 병기라도 만들려고?"
"오염 병기라 좋은 아이디어네요. 분변 뿌리는 것보다 냄새는 덜하고 효과는 좋겠어요. 원한다면 제가 거기에 투자하고 싶어요, 오라버니."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머칫보다 틸다의 말이 더욱 거슬렸다.
"그만."
침묵하던 허먼이 분위기를 잠재웠다.
그가 야윈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스테판."
"예, 아버지."
"네가 바보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뭐니 해도 네가 이 중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할 만큼 머리가 좋으니."
이건 좋게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는다.
스테판은 직감했다.
"하지만 상대를 설득시킬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증거를 보여 줘야 합니다...."
"그 증거가 네 수중에 있더냐?"
"회삿돈으로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제 개인 재산을 먼저 넣었고...."
"없다는 말이로군."
"없는 게 아닙니다. 굳이 지금 알리고 싶지 않아서—."
"마력석인가 뭔가 하는 그거겠지."
"!!"
스테판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허먼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초리로 나무랐다.
"뭘 그리 놀라느냐? 이 회사는 아직 내 수중에 있다, 이 못난 것아. 네 누이나 형은 이미 눈치채고 있는 중이다."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고 한들, 언젠간 알아차릴 일이었다.
아버지인 허먼은 그렇다 쳐도, 다른 둘까지도 이미 알고 있다는 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건 스테판의 편에 선 사람 중에 내부 정보를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순조롭게 일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스테판이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들처럼.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허먼이 질문을 던졌다.
"말해 봐라. 무슨 근거로 그 일에 뛰어들었는지 말이다."
"그저 미래가 보였을 뿐입니다."
"직감이구나. 그렇다는 말은 페르다 섭정, 그자를 믿고 하는 것이렷다?"
"예."
스테판은 즉답했다.
"얼마나 확신하느냐?"
"원한다면...."
스테판의 혀가 멋대로 움직였다.
"회사를 통째로 줘 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침묵이 돌았다.
스테판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멍해져서 그만 본심을 내뱉었다.
'저질렀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러나 후회하진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홀려서 전 재산을 걸었다는 게로구나."
허먼의 말에 섞인 탄식이 스테판의 가슴을 찔렀다.
"손은 하나고 쥘 수 있는 것도 하나. 그러나 쥐어야 하는 건 두 개로군. 과욕은 화를 부르니, 선택해야만 할 때가 오지."
눈치 빠른 스테판이기에 허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극동부를 포기하고 회사를 선택할 것인가,
회사를 포기하고 극동부를 선택할 것인가.
"잘 생각해 보도록 하거라."
그것이 맨손으로 모든 것을 일궈 낸 남자, 허먼 파스칼의 최후통첩이었다.
75화. 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