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 75-80

75화. 으리

"...으리."

"...."

"...으리!"

"...."

"나으리!"

"어, 응?"

스테판은 화들짝 놀랐다.

그의 시중이 고개를 돌리며 스테판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마차 타시고 종일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요?"

"아, 괜찮아."

괜찮고말고.

스테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허먼 파스칼의 집에 나와서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가 언제부터 움직였지?"

"30분 전입니다요."

"30분...."

그 30분간의 기억은 물론, 식사가 끝났다는 기억도 없었다.

스테판의 머릿속은 뿌연 안개에 둘러싸인 듯만 했다.

그리고 그 뿌연 안개가 걷히기 무섭게 다시 그를 잠식하려 들었다.

그 안개는 허먼 파스칼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가 대놓고 간섭을 시도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허먼 파스칼이라면,

대상인이자, 존경받는 상인인 그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라는 뜻.

실제로 누구 한 명 동부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던가?

스테판은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한다고 풀리는 문제는 아니었다.

"마차는 어디로 가고 있지?"

"어디로 가긴 집이지 않겠습니까요?"

"아, 그래. 그렇겠지...."

너무 당연한 질문을 했다.

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일까?

스테판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집으로 가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목적지는 명확했다.

"말 상태는 어떤가?"

"괜찮습니다요."

"그러면 돌아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

"어디로 말입니까?"

"발드로바 성으로."

"며칠 걸릴 텐데, 준비도 안 하고 말입니까? 옷도 준비하고 서신도 보내고 해야 할 텐데요? 그냥 돌아가시죠?"

"잔말 말고 가."

넋이 나간 모습을 보고는 차마 무어라 할 수 없어 마부에게 노선을 변경했다.

스테판의 머리에는 다시 뿌연 안개가 찼다.

스테판은 일단 그 안개 속을 걸어갔다.

'극동부.'

극동부는 어떤 존재인가?

개척되지 않은 불모지에 골드러시를 꿈꾸는 것들이 간간이 있었지만, 매번 좌절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기라는 것은 불멸자들도 어찌하지 못하는 재앙인데, 인간이 어떻게 극복을 하겠는가?

화로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그런 뻔한 결과인데, 나는 무엇을 믿고 이러는 걸까?

'마력석 때문인가?'

스테판은 그 마력석에 꽂혀서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아버지인 허먼은 그렇지 않았다.

틸다도, 머칫도 그 물건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만약 냄새를 맡았다면 어떻게든 방해하거나 가져오려고 안달을 했겠지.

스테판은 질문했다.

'그렇다면 내가 틀린 걸까?'

자신을 믿고 싶지만,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그렇다.

나라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믿음을 지닌 채로 자만하다 쓰러진다.

아버지, 허먼 파스칼은 언제나 그 상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두 눈으로 확인케 했다.

부를 거머쥔 상인으로서, 아버지로서 스테판에게 조언한 것이다.

내가 자만하고 있는 건가?

콩깍지가 씌어서 그가 구원자처럼 보일 뿐이던가?

그도 그저 그런 사기꾼인 것이 아닐까?

'나'를 믿고 자만하다가 죽은 것들과 똑같이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다.

내 인생을 그에게 바칠 만큼 나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인가?

두렵다.

통행세 때문에 제국 밖을 나서지 못하고 안 속에서 서서히 죽을까 봐 두렵다.

그 두려움을 잊게 해줄 만한 것이 필요하다.

술? 여자?

아니면....

"으리!"

"으헉! 깜짝이야! 뭐?! 왜!? 뭐!?"

"도착했습니다, 나으리! 이제 정신 좀 차리십시오!"

"뭐? 발드로바 성에 도착해? 고작 몇 분 만에?"

"무슨 소립니까? 나흘 걸렸습니다요."

무려 나흘 동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제대로 씻지 못해 냄새가 풍겼고, 최고급 튜닉도 체액에 누런 자국이 묻어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왔지?

질문이 이상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답을 찾으려고 여기에 오지 않았나?

스테판은 내성 안을 걸어 페르다를 찾았다.

그는 수석 연구자인 버넬과 함께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막 마친 참인 듯했다.

"무슨 일인가?"

페르다가 물었다.

"저, 그게...."

여기에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

스테판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말은 오직 하나였다.

'여기서 발 빼겠습니다.'

나를 믿지 못하고, 거지꼴이 되는 것은 두려우니 여기서 손절매해 버리겠다.

그 말을 하려고 했지만, 페르다가 선수 쳤다.

"마침 좋은 소식이 하나 있군. 에스콜레이아 총장이 버넬에게 큰 제안을 했다네."

그 말에 목구멍에서는 다른 말이 올라왔다.

"어, 어떤 제안 말입니까?"

"2주 뒤, 할림에서 열릴 전시회에서 메인을 제안했다더군."

스테판은 머리를 쾅 하고 내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안개가 걷히고 한 줄기의 빛이 쏟아졌다.

"축하드립니다! 에스콜레이아 전시회 메인이면 엄청난 거지 않나요?! 제가 알기론 그랬는데?"

"예. 모든 학자에게 영광인 그 자리 맞습니다."

그 까다로운 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받았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상인들 사이에서도 주목할 만하고, 십중팔구는 돈이 되는 것들이다.

"이거, 그냥 넘길 수가 없겠는데요? 오늘은 먹고 마시면서 축하를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하,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제가 사비를 들여서라도 한번 크게 연회를 열어 드리겠습니다. 하하!!"

스테판이 크게 웃었다.

평소 그답지 않게 과장된 몸짓이었으나, 너무 기쁜 소식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스테판."

"예?'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나?"

페르다의 물음에 스테판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그거... 그냥 잘해 보자고 말씀을 드리러 왔죠! 하하!"

스테판의 머릿속을 뒤덮은 안개는 더 이상 없었다.

나를 믿자.

설령 거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후회 없이 나아가는 거다.

* * *

일주일 후, 이오르가와 발드로바가 공식적으로 동맹을 선포했다.

세르데스 대륙은 한바탕 뒤집혔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수호룡과 악룡이다.

대공의회라는 접점을 통해서 의견 교환이 몇 번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갈등은 언제나 해소하지 않은 채로 마무리된다.

그런 악룡과 수호룡의 동맹이라니.

이오르가 측에서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커졌다.

그녀의 입장은 이러했다.

-비록 제2의 피해를 일으킨 발드로바지만, 그 섭정이 과거를 청산하고, 마의 땅을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줌으로써 그의 뜻을 지지하며, 동참하기로 하였다.

표면상으로는 가장 좋아 보이는 구실이었다.

그녀의 지지는 패기 있는 어린 섭정의 선언에 힘을 실어 넣어 주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벌은 실패할 것이라는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푸른 눈에서 지지했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실패한 정화 작업에서 한낱 인간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소?

고드윈이 죽은 이래로 그 마의 땅에 접근한 사람은 없었으며, 접근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적잖게 페르다의 뜻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극동부의 정벌이 가능한 것 아니겠소?

-역사에만 있었던 아름다웠던 극동부의 땅을 탈환하는 것은 아주 큰 일이 될 테지.

어찌됐든 바람은 불기 시작했다.

외로이 표류하는 돛단배에는 어느 쪽이든 순풍이었다.

* * *

할림.

도박과 유흥의 도시로 꼽는 자리이며, 제드를 영입하기 위해서 한 번 들렀던 장소였다.

전시회를 위해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루리가 동행하지 않는다는 것.

페르다의 주변에는 이미 충분하게 사람이 있는 데다가 내성에 또 다른 드래곤 스폰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루리는 아직까지도 이사벨라가 사보타주를 위해 왔다는 작은 믿음이 있었다.

견제해도 나쁠 건 없었기에 루리를 내버려두었다.

루리는 배웅하는 길에 짧게 한마디만 했다.

"도박하지 마십시오."

"재정 부족이지 않던가? 돈을 끌어내는 데, 제격—."

"하.지.마.십.시.오."

은색의 두 눈이 살의 가득하게 노려보았다.

매직 블라스트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반발감이 들었다.

그대로 전재산을 꼬라박아 버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목숨이 두 개가 아니니 어쩔 수 없이 그 한마디를 가슴에 새기고 할림으로 향했다.

스테판은 메인에 발표할 때 필요한 소품 따위를 준비하겠다고 일찍이 돌아가 할림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버넬은 마차 안에서 발표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었으며, 한 치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다른 곳에 마음 쓰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 이외의 동행으로는 기사인 제드와 말콤.

"흐아아아, 저 정말로 괜찮은 거죠? 괜찮은 거 맞죠?"

그리고 페넬로페까지.

그녀는 초원에 선 머맷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할림 입구에 도착하여 내려 입국 절차를 밟으려 할 찰나,

할림을 보호하는 마법진에 한 발짝만 남긴 상황이었다.

"괜찮으니깐 이 팔 놔, 이년아."

제드는 달라붙은 페넬로페의 머리를 밀어내면서 억지로 떼어 냈다.

그녀는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징징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저 지옥에 있을 때 들었어요! 할림에서는 악마들이 출입 못 한다고요!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면 몸이 녹는다고 말이에요! 실제로 제 이부 오빠가 그렇게 죽었다고 하거든요?"

"아니, 괜찮은 거 맞다니까? 그거 그냥 너 겁주려고 한 개구라니깐 나 믿고 들어와 보라고."

"괜찮은 거 맞죠? 죽는 거 아니죠?"

제드는 더 이상 문답이 하기 싫어져 입을 다물었다.

대신 팔을 단단하게 잡은 페넬로페를 역으로 움켜잡아 그대로 끌고 갔다.

페넬로페는 물가에 끌려가는 고양이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으아아! 뭐 해요!? 아니, 나 죽기 싫어! 죽기 싫은데에에, 으아 속이 뒤집힌...어라? 아무 일도 없잖아?"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는 페넬로페.

울고불고 짜던 얼굴은 어디 가고 시시하다는 듯이 자리에 벌떡 섰다.

"인간의 마방진이라는 거 별거 없군."

"...."

제드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를 포함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을 데려오는 건 그랬나?'

페넬로페는 시트리의 라이프 베슬을 지니고 있다.

혹시나를 대비해서 일단 눈이 띄는 곳에 함께 두려 이번에 동행시켰다.

게다가 아직 페넬로페에 관한 신뢰가 없는 상태였기도 했다.

악마를 동행하기에 주변에 시끄러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그것은 우기였다.

그녀가 시트리의 라이프 베슬을 머금으면서 특별한 이능이 생겼는데, 어지간한 악마 감지 마법으로는 그녀를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녀를 인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리고 시끄러운 건 본인이었고.'

경박하고 시끄러울 것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너무 예상을 빗나갔다.

그녀는 폭풍 같은 존재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사건이 일어나는 그런 류.

시트리는 어떻게 저런 애한테 라이프베슬을 빼앗긴 것일까?

'그래도 뭔가가 있을 거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페르다는 간과하지 않으려 페넬로페에게 물었다.

"네 능력에 대해서 말해 봐라. 시트리의 자손이니 환술계를 다루나?"

"네, 가볍게 환술이랑 속임수를 위한 그런 마법들 몇 개 정도요."

"아케인 트릭스터로군."

"오, 이름이 멋진데요? 맞아요. 그런 거죠."

득의양양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니, 제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케인 트릭스터는 무슨. 트러블 메이커지."

"뭐라구요!?"

연분홍색 눈동자가 제드를 쏘아보았다.

제드도 지지 않고 그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밀었다.

"틀린 말 했냐? 너랑 있으면 하루도 조용하지가 않는데??"

"그건 제 잘못이 아니죠! 누가 그런 마녀한테 눈에 띄라고 그랬어요? 이 여자 저 여자 다 주워먹고 다니니깐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어서 했겠냐? 나도 건드리면 안 되는 건 잘 알거든!?"

왁왁 거리는 둘의 모습.

페르다는 그런 모습을 뒤로하고 페넬로페와 제드가 지닌 능력을 생각해 보았다.

아케인 트릭스터, 페넬로페와 대도, 제드.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로 잘 맞을 듯하겠군."

"예?"

제드가 어이없다는 듯이 페르다를 보았다.

"죄송하지만, 이런 빡통 울보랑 엮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자네가 좋아하는 여자지 않나?"

"무슨 아무거나 주워 먹고 다니는 애처럼 말씀하시는데, 존재 자체가 사고나 일으키는 트러블이랑 다니는 건 사양이에요."

"저도 이런 포악한 남자랑 엮이기 싫거든요? 전 여자가 좋아요. 여자 중에서도 미인만! 미인 정기나 주체 없이 빨아먹고 싶어요!"

"어제도 내 정기 빨아먹은 주제에 뭐라는 거야?"

"나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에요, 밥! 현계에 유지할 정도로만 아주 소식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인간처럼 있을 수 있는 것도 있고!"

시끄러워 죽겠군.

페르다는 자신이 했던 말을 철회하기로 했다.

"원한다면 새로운 파트너를 찾게 해 주지."

"엣?"

"예?"

방금 전만 해도 서로 잡아먹듯 굴던 놈들이 그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왜 이래?

"크흠, 그, 일단은 현행 유지하고 싶은데요."

"왜?"

"미녀를 꼬시는 데 이만큼 말발 좋고, 훤칠한 미남은 또 구하기 어려워서...."

페넬로페는 그렇다 치기로 했고, 제드는 무슨 이유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얘는 정기 빨아먹고 제가 꼬신 여자애 기억 지워 준다고 해서...."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둘 다 똑같은 연놈들이었군.'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

방생 금지.

* * *

에스콜레이아의 전시회는 할림의 카지노를 하나 통째로 대관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흥의 도시에서도 손에 꼽는 크기의 카지노였으며, 많은 귀족과 상인, 그리고 학자들을 수용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페르다가 도착했을 때는 전시회 1일 차, 오프닝 준비를 막 끝내야 할 무렵이었다.

"오오, 섭정님! 무탈하게 오셨습니까?"

주변을 서성이던 스테판이 페르다에게 걸어와 깍듯하게 인사했다.

"무탈했군. 자네는?"

"저도 뭐 괜찮았습니다. 전시회 부스도 계획대로 만들었죠. 한번 구경하시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왔으니 봐야지 않겠나?"

스테판이 페르다를 안내하여 움직였다.

페르다는 전시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대강 살펴보았다.

학자들은 자신의 물건을 부스 형태로 전시회에 배치하고, 상인들과 귀족들이 그곳을 지나가면서 하나씩 볼 수 있게끔 해 놓았다.

그리고 전시회에 참여한 학자들은 저마다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연구자에게 부족한 것은 항상 돈이다.

이 전시회는 그들의 연구 생활을 이어 갈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돈을 채워 주는 건 이 전시회를 구경할 상인과 귀족들이었다.

운이 좋다면, 페르다 또한 그들의 후원자가 될 수 있었다.

페르다는 입구에서부터 학자들의 물건을 대강 살펴보았다.

'별로 끌리는 건 없군.'

눈에 보이는 건 이론만으로 존재하거나 상품성이 떨어지는 물건들뿐.

그러니 이런 외곽지에 동떨어진 느낌이겠지.

그러나 전시회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부스가 점점 커지고, 물품 또한 화려해져 간다.

개중에는 미래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물건도 있었다.

버넬의 부스는 중심에 있었다.

파스칼 상회의 힘을 빌려 만든 버넬의 부스는 다른 기업의 후원을 받는 대형 부스들처럼 화려했다.

"어떻습니까?"

"잘 만들었군."

"그렇죠? 저희 장식 전문가들을 데려와서 만든 것들입니다, 하하."

눈에 띄는 만큼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부스는 준비되었지만, 전시할 물건은 아직 없었다.

그것은 페르다 쪽에서 가져오기로 했기에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희가 준비해야 할 마력석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건 버넬이 가지고 있는 모양이로군. 버넬은 어디로 갔나?"

"숙소 쪽으로 먼저 간 것 같은데요."

"말도 없이?"

며칠 꼬박 제대로 잠도 못 잤으니 메인 무대 전에 잠이라도 자려는 것일까?

그의 곁에 있었으니, 버넬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페르다는 알고 있었다.

"제가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지."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싶어 페르다는 직접 움직이려 했다.

스테판의 만류에도 꿋꿋하게 발길을 옮기며 숙소로 걸어갔다.

숙소에 뻗어 있었을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버넬을 발견한 곳은 숙소로 향하는 통로 쪽이었다

그곳에는 이 전시회의 주최자인 버나드 총장도 있었다.

그 둘이서 무언가 이야기를 한창 나누고 있었고, 페르다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버넬 마르퀴스."

버나드 총장이 버넬을 보면서 말했다.

"자네에게 실망을 금치 못하겠군."

76화. 돈이 될지

할림에 도착한 버넬은 정리한 문서를 들고 복도에 서성였다.

그곳은 숙소로 향하는 길.

그는 자신의 방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으며, 길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길에서 방황하듯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넬 군."

묵직한 목소리.

그리고 수풀 사이로 나 있는 반짝이는 머리.

한때는 태양광 마법사라는 이명을 지닐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줬던 머리이다.

한때의 추억에 미소가 지어질 법도 했으나, 버넬은 그러지 못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총장님, 아카데미 이후로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제게 메인 자리를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호의에 감사드리며—."

"그건 뭔가?"

버넬의 말을 끊고 그의 손에 들린 문서를 보았다.

"이건 이번 설명회에 발표할 내용입니다. 제 나름대로 열심히 다듬었는데, 그래도 쉽지가 않아서 총장님께 한번 검토를 받아 보고 싶습니다."

"내게 말인가?"

"예."

"...이리 줘 보게."

버나드 총장이 발표문을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진지한 눈빛에 버넬은 입이 바싹 말랐다

그는 끝내 웃었다.

그 웃음은 희소식인가?

"같잖군."

아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버넬 마르퀴스 군, 자네에게 실망을 금치 못하겠어."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버넬은 정중함을 유지하며 묻는다.

"효율이 고작 12%밖에 나오지 않아서 어떻게 할 셈인가?"

"효율은 점차 늘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걸 발표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비웃음이나 당하란 말인가? 그나마 자네를 믿어 줬던 발드로바 섭정의 얼굴에 먹칠하겠다고?"

버넬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기존에 있는 것을 응용한 것도 아닌 새로운 창조였다.

12%만 해도 놀라운 성과였다.

버나드 총장은 이어 말했다.

"그래서 네가 알아낸 공식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더냐? 지금 이건 내가 봐도 중구난방이군. 자네는 공식을 얻기만 했지, 효율을 개선하는 속도는 너무 느려. 내가 이걸 이해하고 있다면 너보다 훨씬 빠르게 효율을 끌어올렸을 거야. 왜 그런 자신감이 있는지 아나?"

"...."

"버넬, 네 시야가 너무 좁기 때문이다.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걸 보질 않아. 그 1%에 집중하고 있으니 10%를 올릴 방법을 모르는 거야."

버나드는 버넬의 발표문을 그의 가슴팍에 밀어 버리며 말했다.

"실망이야, 아주 실망스러워. 허황한 꿈을 꿀 때가 차라리 나았군. 지금의 자네는 '엉망진창' 그 자체이니."

버나드는 그를 등진 채 걸어갔다.

버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 * *

페르다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버나드가 버넬을 모욕하고 좌절을 안겨 주고 자리를 떠날 때까지.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버나드 총장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나?'

버나드는 버넬을 위해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도 메인 자리를 내줬다는 건 학자들에게 큰 의미라 했다.

페르다는 이것이 호의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버나드는 버넬을 인정하지 않는 치졸한 놈이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만큼 떨어질 때 아픈 법이다.

그렇다는 건 버나드를 버넬을 죽이려는 작정인가?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만 하지?

"오오, 섭정님! 여기서 마주치시는군요."

반가운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깨어났다.

몰래 지켜볼 때만 해도 삼류 악당의 얼굴을 하던 그 남자가 지금은 예의 바르고 사람 좋은 인상을 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스테판 파스칼이라는 상인이 제게 와서 메인 행사에 어떤 식으로 할 건지—."

"그가 정말로 우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페르다가 말을 자르고 묻자, 버나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

페르다는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의도치 않게 나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페르다의 물음에 버나드는 그제야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거 참... 보여 드리기 힘든 모습을 보였군요."

그래, 보기 힘든 얼굴이긴 하지.

인간의 이중성이라는 것이 들키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려 주려 했다.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버넬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페르다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버넬 마르퀴스는 저희 원로 학자들이 기대했던 영재였습니다. 아카데미 시절에서도 수석을 자리를 꿰차고, 총명한 머리 때문에 세기를 뒤엎어 버릴 아이라고 입을 모았었죠."

그런 칭송과 다르게 엔딩이 좋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버나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가 콘퍼런스에 발표할 내용을 가져온 순간, 모두가 당황했습니다. 그곳에는 터무니없는 내용들로 가득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만류하고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발을 돌리려 했지만, 듣지도 않았죠. 그런 이들이 열에 아홉은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이상에 사로잡혀 미치광이가 됩니다."

"하지만 미치광이가 아니었죠."

"예. 해냈지요."

"그런데도 저를 설득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만약 이상만 좇고 있는 것이었다면, 페르다도 이해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냉소적인 태도로 버넬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넬은 해냈다.

몇 년을 더 기다려야 나오는 성과가 불과 몇 달 만에 나왔고, 효율도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가 옳았다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지식의 총재가 하는 일이란 말입니까?"

"버넬 같은 사람들에겐 그래야만 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

"저희가 부정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을 제시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저 같은 범인의 한계에 머물게 해선 안 됩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 연구하는 게 아닌, 자신이 믿는 것을 따라가야 하지요."

페르다는 그 말을 이해했다.

버나드는 천재이다.

그러나 버넬은 천재 중에서도 천재였다.

그러니 버나드의 잣대는 버넬에게 범인의 잣대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었다.

"버넬은 어떻게든 저를 엿 먹이려고 실력으로 증명할 겁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성공했다면, 이제 더 발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게 한 방 먹일 준비를 하겠지요."

이것은 버넬을 위한 채찍질.

그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호승심을 끌어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다가 그릇된 길로 가면 어찌할 겁니까?"

마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페르다는 그 말을 삼켰다.

"버넬은 비겁한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정면 승부를 고집하죠. 그도 절대적인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학자일 테니."

버나드는 꾸벅 인사를 건네었다.

"그래도 만약 잘못된 길로 간다고 생각이 드신다면, 사실은 제가 면전에서는 인정도 못 하는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옹졸한 인간이라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이만 준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버나드는 그대로 페르다를 지나쳤고, 페르다도 그를 보내 주었다.

그를 쥐잡듯이 패든, 나무라든 얻는 게 뭐가 있겠는가?

'궁금하기도 하다.'

동시에 버나드가 파악한 버넬이라는 인간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인정받지 못했단 사실에 좌절할 것인가, 아니면 버나드의 말대로 새로이 거듭날 것인가.

페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버넬의 방을 찾아가 보았다.

그 충격이 가시지도 않았는지 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버넬은 숙소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어깨가 들썩이고, 숨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 씨이발... 그 효율... 내가 끌어내 보면 되잖아?"

눈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그의 손과 머리는 멈추지 않았다.

버나드가 지적했던 부분들을 모두 수정하는 중이다.

"현실적? 그래, 내가 다음 달 안에는 20%까지 끌어올리고 만다. 두고 봐. 날 비웃었던 놈들 전부... 전부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 테니까. 젠장...."

그의 언행에서 선명히 느껴지는 복수심.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복수는 그런 것이다.

피로를 잊게 해 주며,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는 집중력을 준다.

'나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버나드의 예상대로 옳은 길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 * *

"거기 있는 거 그냥 떼 버려. 나타낼 때랑 비교하니깐 별로네. 그 물건 살살 다뤄!"

스테판은 인테리어 도면을 보면서 인부들을 지휘했다.

"사장님, 물건 가져왔습니다. 어디에 전시하면 될까요?"

"잘했어. 그거 저기 벽면에 걸어 놔! 걸쇠 있지?"

"예."

"걸쇠 단단한가 한 번만 더 확인해. 중요한 물건이야! 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물건이라고 있는 건 샘플로 챙겨 온 마력석과 그를 활용한 무기.

혹시나 해서 미래 계획 도안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비전을 제시했다.

기다란 파이프를 메인으로, 복잡한 전선과 유리병을 주렁주렁 달아 놓은 그 물건을 '마도공학 라이플'이라고 불렀다.

'저게 무기라고?'

연구자들의 말로는 성능이 좋은 물건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시현을 본 적이 없었다.

저게 과연 작동은 할까?

"어머, 오라버니? 여기서 뵙네요."

스테판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꽂힌다.

예상외의 인물...이라고 하기엔 예견되었던 일이다.

모든 상인이 참여하는 전시회인 만큼 파스칼 가문이 오지 않을 리가 없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틸다의 존재는 스테판에게 늘 의외의 존재만큼이나 난감했다.

스테판은 그녀가 껄끄러웠다.

"혼자 왔어?"

"아뇨. 당연히 약혼자랑 같이 왔죠. 저기 있죠, 앙리?"

한 남자가 해맑게 웃으면서 이곳으로 걸어왔다.

남자는 30대 중반의 뚱뚱한 중년.

앙리 단돌로였다.

제국에서 가장 큰 상회 중 하나인 단돌로의 후계자이다.

"틸다, 내 사랑. 말하던 칵테일 가져왔어."

뚱뚱한 30대의 사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잔을 건네었다.

상대적으로 아담하고 늘씬한 검은 머리의 미인이 그 잔을 빤히 쳐다보았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눈망울을 촉촉하게 적셨다.

"이건 체리 봄이잖아요?"

"어, 응?"

"난 블루 사파이어가 마시고 싶었는데...."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눈을 깜빡이는 틸다.

그 모습을 본 앙리 단돌로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안해. 새로 가져올게!"

"고마워요. 역시 당신밖에 없어."

"처남! 인사는 나중에 합시다!"

"어, 예. 그러죠...."

틸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좋다고 다시 칵테일을 가지러 갔다.

스테판은 그 모습을 보면서 인상을 구겼다.

"하인들은 왜 놔두고, 네 약혼자를 부려 먹고 있냐?"

"왜겠어요? 꼴도 보기 싫으니깐 그렇지."

틸다는 비릿하게 웃었다.

남들 앞에서는 가식을 떨어 대는 그녀인데, 스테판에게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네 그 추악한 속내는 잘 알고 있나?"

"그럴 리가요. 제 속옷도 못 벗긴 남자가 그런 통찰력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 나눈 대화를 알려 주면 참 좋아하겠어."

"그럴 깡이 있으시면 해 보시던가."

이런 식이다.

남자의 머리 위에 있다는 듯이 굴면서 모두를 조종하려 든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함정을 파 버려 숙청하거나 깊은 상처를 남겨버린다.

처음에는 귀여운 수준으로 그쳤지만, 머리가 굵어짐에 따라 점점 용의주도해져 갔다.

스테판은 그런 틸다가 무서웠다.

저 미소 짓는 얼굴 속의 괴물을 봤는데도 그게 어떤 괴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게 오라버니가 지원하는 극동부 쪽의 물건인가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마도공학 라이플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귀엽네요. 저런 물건을 가져오시다니."

흐음.

숨을 흘리면서 유심히 보는 척하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제가 보기엔 예술품에 가까워 보이는데."

써먹을 수는 있냐는 물음.

"당연히 써먹을 수 있지."

"어떻게 작동하나요?"

"그거, 그러니깐 여기를 이렇게 당기고 여차여차하면... 알아서 작동해."

말이 점점 흐려질수록 틸다의 미소도 진하게 번졌다.

"한 번도 보지 못하신 거네요."

"...."

"뭐 전시회니까요. 완성 못 한 물건도 그냥 걸어 놓으면 아무도 모르죠. 아니지."

그녀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검지로 턱을 짚었다.

"생각해 보니 설명회도 하지 않나요?"

다 알고 있다는 눈빛.

마력석에 대한 정보도 아는데, 메인에 오를 설명회도 있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한 번도 작동해 보지 못한 물건을 왜 가져왔어요? 중간에 터져 버리고 그러면 망신만 당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겠지."

"전시용으로는 딱이긴 한데, 흐음... 이게 돈이 될지는 의문이네요? 아버님 말씀대로 동부는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

그녀의 입술에는 그믐달 같은 미소가 걸렸다.

저 표정.

저 표정이 파스칼가에 있었을 때, 자신을 몇 번이고 찍어 눌렀던 얼굴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동생아."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스테판은 평소와 다르게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네가 남자 가랑이나 잡고 있을 때, 나는 내 후원자의 어깨를 잡고 있으니까."

꽤 저급한 말이 섞인 도발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아주 좋았다.

틸다가 표독스레 노려보았다.

스테판 주제에 내 말에 토를 달아? 하는 듯한 얼굴과 부들부들 떨리는 손.

기가 꺾였을 스테판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든든한 곳에 후원하고 있는 후원자다.

'아씨, 그래도 무섭긴 하네.'

유년기 시절 물불 안 가리고 손찌검해 댔던 그 모습을 떠올리니,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비켜 주겠나?"

그녀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험악하게 일그러지던 얼굴이 싸악 펴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훤칠한 키에 회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을 가미한 정복을 입은 남자.

나이가 어리지만, 나이에 맞지 않은 아우라를 풍긴다.

'이 사람이 페르다 발드로바.'

테살로스 월처를 죽이고 얻은 냉혹한 살인마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차가운 표정에 복잡해 보이는 얼굴.

틸다의 관심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발드로바 섭정님. 저는 틸다 파스칼이라 하옵—."

"누군지 관심이 없으니 자리를 비켜라."

"예, 예?"

틸다의 인사를 끊어 버렸다.

무례한 언행이 거슬리기 짝이 없었지만, 틸다는 속으로조차도 화를 내지 못하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푸른 눈동자는 혈관을 얼려 버릴 만큼 시리고 차가웠다.

"말귀 못 알아먹는군. 내 앞에서 꺼지라 했다."

77화. 수면 저항 대회

틸다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하던 인사도 멈추고 옆으로 물러났다.

그 이후로 페르다는 틸다에게 눈길을 한 번도 주지 않았다.

모욕적인 상황에 틸다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틸다의 모습을 본 스테판이 페르다에게 물었다.

"혹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무슨 이야기 말인가?"

"전시품이 돈이 될까면서 조롱했었는데...."

"그랬나?"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표정.

페르다는 스테판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적대적이셨습니까?"

스테판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런 속물적인 이야기를 엿들은 것도 아니면 틸다를 초면에 적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닮은 미인이었으니까.

"나도 처음에는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었네. 그런데 보니깐 좀 달라지더군."

"뭐가 말입니까?"

"기분 나쁘더군. 그 눈이."

"눈 말입니까? 그 눈이 왜...."

"자네의 여동생은 누구든지 일단 쥐고 깔고 앉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부류지 않나?"

스테판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딱 그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페르다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증오했다.

그 증오를 위해서는 인간 유형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몇 개의 특징은 페르다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틸다 파스칼은 페르다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였다.

능력도 없으면서 분수에 맞지 않은 탐욕을 가진 놈들.

인간을 장난감처럼 자기 손바닥에 굴리려 하는 놈들.

틸다의 본성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사실에 감탄하면서 스테판은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한창 전시회 준비로 바쁜 와중이었으니 잡담할 여유가 없었다.

"마르퀴스 씨는 만나셨습니까?"

"그래."

"마력석은 혹시 어디에 두셨는지...?"

"내일 전시할 수 없겠나? 오늘은 바쁜 듯해서 건드리고 싶지 않군."

"뭐, 알겠습니다. 그럼 메인은 사실 숨기고 있다는 전략 쪽으로 잡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죠."

마력석이라도 전시해야 이목을 이끌 것 같은데.

그렇게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스테판.

하지만 전시회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곁가지에 불과하고, 메인 설명회가 중점이니까.

그 설명회에서 말할 것은 마력석.

그리고 저기 걸려 있는 마도공학 라이플.

페르다와 스테판은 마도공학 라이플을 올려다보았다.

"섭정님, 혹시 저거 시현하는 거 보셨습니까?"

"비슷한 걸 보긴 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는 그런데 저렇게 생기지 않았었다."

마력탄을 발사하는 라이플은 더욱 크고 복잡한 무언가였다.

뭔가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저 물건이 간소화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난잡했었다.

"자네 눈에는 어떤 것 같나?"

"제 눈에 말입니까?"

"자네나 다른 상인이나."

"그러니깐 음...."

스테판은 머리를 긁적였다.

틸다는 저 물건을 보면서 돈이 될까 라는 말을 했었다.

실제로도 다른 상인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스테판도 그렇고.

자신이 후원하는 곳에서 나쁜 말을 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외관만 좀 더 깔끔해지면 그래도 평가가 다시 오르지 않겠습니까?"

"구리다는 말이군."

"예."

"하긴 그렇겠지."

페르다가 보기에도 그랬다.

지금의 물건을 보면 돌아가는 기계 장치라기보단 예술 작품에 가까우니.

페르다에겐 지금 이 마도공학 라이플이 가장 중요한 때였다.

"이 물건으로 북부와 남부 상인들을 끌어모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북부는 최대한 제가 힘을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테판은 남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맏형인 머칫이 버티고 있는 지금으로선 장담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니 첫술에 너무 배부를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그렇게 생각했으나,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터져 버렸다.

* * *

평생 책만 잡고 살아온 학자들은 지성인.

우물 안의 개구리라면서 조롱해 오지만, 그런 지성인들이 필요한 순간은 반드시 온다.

특히 정보 쪽을 다루고 있는 집단이라면, 정보를 거르고 처리하는 과정이 더더욱 중요한 법.

블랙 반다나는 그런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블랙 반다나.

흑색 두건을 상징으로 하고 있는 그들은 세르데스 대륙 전역에 퍼져 정보를 수집하며 파는 비밀 조직.

그들이 다루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에스콜레이아의 지성인들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블랙 반다나의 일원인 가넷이 이곳으로 왔다.

"흐음."

그녀는 남부의 흔한 귀부인 중 하나인 것처럼 장식을 달고, 천 면적이 좁은 옷차림을 했다.

애쉬그레이색 머리와 대비되는 까무잡잡한 피부.

극남부의 사막민 행세를 하기에는 딱 좋은 인종과 외형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가 문제였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가씨?"

육감적인 옷차림에 날파리처럼 몰려드는 남자들.

"엉?"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아가씨의 에스코트를, 쿨럭...!"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아연실색을 하며 물러선다.

"이, 이거 실례했습니다.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엉?"

가넷은 한쪽 눈썹을 치켜든 채로 그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사내는 호다닥 도망쳤다.

저 남자가 왜 자신의 옆으로 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북부민의 복장을 하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아이참. 두목. 좀 웃어 봐요. 누구 죽이러 왔어요? 우리가 살수 집단이야?"

친근하게 구는 이 남자.

이 남자도 블랙 반다나의 일원으로 할림에서 정보 처리원을 찾기 위해 왔다.

그 말은 곧 일하러 왔다는 것.

가넷은 그의 얼굴과 손에 들린 잔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너 일하는 중에 술 처먹고 있는 거니?"

"잠복근무할 때는 필수죠. 협박이 아니라 설득하려면 긴장을 풀어야 하는데, 북부의 전사들에게 술은 필수라고요?"

"비리비리한 놈 구슬리는데 그 잔보단 칼이 더 어울릴 텐데? 그 뺀질이 자식처럼 자료 다 챙겨서 뒷돈 챙겨 먹는 놈 또 뽑으려고?"

"아, 그때는 나도 정신이 없었다니까요. 제가 직접 처리도 했잖아요?"

"술 처먹으니 그렇지. 한 잔만 더 마셔 봐라. 목구멍에 손 집어넣어서 위장을 쏙 뽑아서 그대로 다 쥐어짜 버릴 거니까."

가넷은 살벌하게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그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아이참, 무섭게 또 그러시네. 웃어요! 여자는 웃을 때가 제일 예쁜 법이야. 누구 죽이려는 얼굴이 아니라."

"입 다물고 일이나 해. 내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러나 북부남은 낄낄 웃으면서 잔을 들어 보이고는 다시 사라졌다.

가넷은 한숨을 내쉬고는 쥘 부채로 입을 가렸다.

'이래서 귀부인 콘셉트는 싫다고 했건만.'

부티 나는 옷을 소화할 정도로 미인이긴 하였으나, 그것뿐.

그녀의 일생은 꽃밭보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장이 더 가까운 폭력적인 세계에서 살아왔다.

눈빛은 사납고, 행동거지 또한 남자스러움이 묻어 나올 수밖에 없다.

거추장스럽고 움직일 때마다 살이 들어나고 짤랑이는 옷은 다신 입고 싶지 않았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그녀는 이 할림에 왔다.

그 이유는 한 인물 때문이었다.

가넷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움직이기로 했다.

곧 있으면 설명회가 시작된다.

설명회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진행되었다.

소리가 울리는 구조에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니 제격이었다.

가넷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자리를 찾는 척, 그녀의 시선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저기로군.'

오케스트라 좌석으로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

앞줄 2개가 통째로 비워진 채로 자신의 측근들로 둘러싸 완전 경호 상태였다.

가넷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페르다 발드로바.'

첫 조사는 헬루스 포비다스가 시발점이었다.

그 사내의 어린 소녀가 납치되었다는 말에 고용되었으며, 그녀를 찾으면서 페르다 발드로바를 알게 되었다.

'갈수록 신기했지.'

발드로바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보고도 충분히 임팩트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파기 시작하면서 흥미는 박차를 가했다.

극동부의 정보는 일주일 단위로 갱신되었고, 갱신이 될 때마다 놀라운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할림에 참석했다.'

가넷은 그 인물을 직접 보고 싶었고, 마침내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회색 머리에 훤칠한 키.

슬림한 정복에 가려졌지만, 그의 몸은 단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외견상으로는 큰 특징이 없지만,'

아우라가 다르다.

소파 의자에 앉아서 뒤통수와 목덜미만 보이는 게 고작인데, 50대 중년만이 낼 수 있는 기품이 느껴졌다.

혈기에 얽매이지 않는 여유로움과 침착함.

과연 사모하고 있는 여자들이 꽤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에스콜레이아 총장이 이번 메인 설명회에서 자리를 내줬다지?'

전시회, 그중에서 메인 설명회는 몇 년을 걸치고 빡센 심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총장조차도 그 메인 설명회에 오르려고 다른 학자들과 경쟁하였다.

그걸 단독으로 통과시켰다는 것은 자신의 자리를 걸 정도로 확신한다는 뜻.

'최근 이상하게 발언권도 세졌고, 역시 페르다 섭정과 커넥션이 있던 모양이군.'

집중적으로 파 볼 만한 가치가 있겠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메모장을 꺼내어 슥슥 써 내려갔다.

대륙 최대 정보통인 만큼 그녀도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죄송합니다, 부인?"

"엉?"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직원이 헛숨을 삼켰다.

"헛! 호, 혹시 제가 심기를 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정작 가넷은 생각에 빠져 있었을 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빴더라도 그 직원의 태도 때문이었으리라.

"아니, 괜찮아. 혹시 내 자리가 어딘지 알려 줄 수 있겠어?"

"예!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가넷에게 배정된 좌석은 오페라 하우스의 박스석 중 하나였다.

정중앙인 데다가 시선 안에는 페르다도 잡혔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다.

'기다려 봐야겠군.'

페르다 섭정의 안목은 과연 어떨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해 볼 순간이었으니까.

* * *

한편, 페르다는 많은 귀족의 입맞춤을 받고 있었다.

비싼 맨 앞자리를 통째로 빌렸기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야 하지만, 굳이 그 앞을 지나가 페르다에게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극동부의 수호자 배필을 뵙습니다. 저는 옥석상회의 주인으로...."

"극동부의 위대한 섭정님을 뵙습니다! 저로 말씀을 드리자면, 현재 용병 활동을 하고 있는...."

단순히 학자만이 아니라 기사, 귀족, 그리고 상인들까지 자신의 이름을 찔러 넣으며 눈에 띄려 애를 썼다.

지위와 금전을 두루두루 갖춘 몇 안 되는 귀인에게 눈에 띄는 방법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보통 귀족들은 이런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길을 아예 통제한다.

한두 명이야 어찌 웃으면서 넘기면 되지만, 수십이 아예 줄을 서고 있으면 귀찮아지기 마련.

그런데도 페르다는 그들이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혹시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놀라우리라 만치 페르다에게 알려지지 않은 쭉정이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간 낭비를 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설명회가 시작하기 전까진 할 게 없으니까.

'그나저나 사람이 많군.'

먼저 온 스테판이 말했길, 오프닝 설명회에는 이 오페라 하우스에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말과 다르게 오늘은 사람들로 꽉 찼다. 티켓 자리 가지고 주먹 다툼이 일어날 정도였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유망하며, 혁신적인 내용들을 간추려서 발표하는 자리였으니, 귀족들이나 상인들이나 전부 신경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설명회에서 가장 큰 경쟁자는 상인이나 귀족이 아닌 발표하는 학자들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학자인...."

-드르르렁!

-쿠우우우!

설명 단계는 물론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가떨어지는 귀족과 상인들.

귀빈석에 앉아 있는 페르다도 그 수면의 유혹에 저항하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이건 설명회가 아니라 수면 마법 저항 콘테스트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말콤."

"넵!"

다들 지쳐 떨어지는 와중에 말똥말똥한 말콤.

아무것도 모르니 이해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 졸 필요도 없었다.

"버넬의 차례가 언제쯤이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음.... 버나드 웨인의 마물 출현 예측 장비 설명회 그다음입니다!"

"그렇군. 잘 들리니깐 목소리 좀 낮추게. 발표자가 이곳을 보고 있지 않나?"

"예? 엇!!"

일생을 바쳐 온 업적을 소개하는 자리인 만큼 민감했다.

말콤도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반쯤 졸면서 발표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무렵, 페르다의 정신을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가 선보일 물건은 입니다."

에스콜레이아 총장의 목소리.

그의 차례가 온 것이다.

페르다와 비슷한 생각이 있었는지 졸고 있던 사람들의 눈도 다시 빛이 났다.

"우선 간단하게, 이 예측 장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자면, 마물 출현 시에는 그 주위의 공기에서 이질적인 마나가 순간적으로 검출됩니다. 그 마나의 패턴을 파악해서 알고리즘을 짰으며, 그 수식을 통해서 룬을 확보하였으며...."

하지만 그 빛마저 다시 잃게 만들고 곯아떨어지게 할 만큼 압도적으로 지루한 설명을 이어 갔다.

'버넬이 나올 때쯤이면 8할이 졸겠군.'

그를 후원하는 페르다도 차마 그의 설명을 빙자한 수면 마법은 버틸 자신이 없었다.

미안하다, 버넬.

아니, 사실 미안하진 않았다.

아니꼬우면 네가 잘해야지.

"하하, 많이들 지루하시지요? 죄송합니다. 이런 자리에 오르는 건 적도 많지 않으니. 가볍게 시현을 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총장이라고 감이 있어 시현으로 넘어갔다.

그가 가져온 장비는 금속 기둥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 예측 장비는 매직 워커는 물론 마나 워커들까지도 다룰 수 있도록 작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마나를 주입하고 수식을 활성화하면...."

우우웅—.

"이렇게 장비가 작동하죠. 하하, 이제 좀 설명이 쉽고 재밌을 겁니다. 자, 여기 보시면 이 화면이 있지요? 이 화면은 간단하게 지도만 읽을 줄 알아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마물이 등장하면, 뚜—. 뚜— 거리면서 특유 소리가 나는데...."

뚜— 뚜—.

"어? 아, 네 이렇게 말이죠. 그렇다고 마물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잠시 시동을 걸 때의 특유 문제가 있습니다."

뚜— 뚜—.

"어라? 잠시만요. 분명 설계도대로 해서 테스트까지 마친 물건인데 이게 왜...?"

뚜—. 뚜—.

"어어라?"

버나드가 당황하면서 장치를 만져 보았다.

어디에 결함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열심히 두들겼다.

페르다는 직감했다.

그건 오작동이 아니다.

"모두 준비해라."

"예?"

"놈들이 올 거다."

화면에 표시된 중앙 지점이 점멸하더니, 설명회장을 밝히던 촛불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머, 뭐야?"

"지진인가?"

심각한 사태인 것을 인지 못 하는 사람들.

그들 중에서도 전투 경험이 있는 자들은 곧바로 무기에 손을 뻗었다.

마물 출현 예측 장비 주변의 공간에 균열이 일어났다.

어지러운 색들이 펼쳐진 균열 속에서 무언가가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것은 늑대의 머리.

아니 늑대의 머리를 한 마물이다.

크허어엉!!!

마물의 포효성이 울린다.

"꺄아아악!"

"으아아악!!"

찢어지는 비명과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터져 나온다.

갑작스러운 마물의 등장에 설명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세를 몰아 균열 속으로 빠져나오는 늑대 마물.

그때였다.

"라이트닝 스피어."

페르다가 말 맺음과 동시에 균열에서 튀어나온 마물을 향해 영창한 마법이 날아갔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샹들리에의 불빛을 집어삼키는 섬광 한 줄기가 늑대의 머리를 꿰뚫었다.

피슝!

늑대 마물의 뇌에서 심장까지 일직선으로 꿰뚫었다.

입에서 녹색 피를 쏟아내는 것이 틀림없이 즉사였다.

페르다는 그 녀석을 보며 생각했다.

일단 한 놈.

78화. 늑대 마물

페르다의 일격에 늑대 마물이 시체가 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물이 한 방에...."

마물이 마법사들에게 효과가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그 효과를 본 사람은 드물다.

마물을 한 방에 처리하는 일은 마법사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페르다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뭘 꾸물거리고 있나?"

"예?"

"균열은 아직 열려있다."

그의 말대로였다.

늑대 마물이 죽었는데도 균열은 닫히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 안에 마물들이 남아 있다는 뜻.

"검을 뽑을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전투를 준비해라! 시민들을 지켜!"

"증원을 요청해라! 경비대 불러!"

"경비대 말고 마법사를 불러! 마법을 때려 박을 수 있는 마법사를 호출하라고!"

중구난방 여기저기서 소리를 치고 있지만, 그 나름대로 명령 체계가 되었으니 페르다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경계선에서 축 늘어진 시체가 움찔거린다.

"우, 움직였어!"

"아직 안 죽었나?"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저 늑대 마물은 죽었다.

하지만 저렇게 움직인다는 것은 또 다른 놈이 나올 준비를 한다는 것.

페르다는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한다.

곧,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공간 너머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똑같은 늑대 마물이다.

튀어나오려고 했으나 페르다가 한 수 더 빨랐다.

"라이트닝 스피어."

페르다는 균열에서 튀어나온 마물을 향해 영창한 마법을 던졌다.

전격의 창이 나오고 있던 늑대 마물에게 적중했다.

-크륵!

4위계 마법 중 하나인 라이트닝 스피어.

우수한 관통력을 지니어 급소를 노릴 수만 있다면 치명적인 대미지를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급소를 제대로 노리지 못한다면, 놈을 죽이지 못한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놈처럼 말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군.'

나오려던 놈이 당황해서 다시 뒤로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균열 틈에서 대가리를 들이미는 다른 늑대 마물들의 머리가 보였다.

숫자가 적어도 넷 이상이다.

패닉에 빠진 덕분에 일시적으로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사이에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준비 태세를 갖췄다.

기사들은 검을 뽑고, 몇 없는 마법사들은 마법 영창을 준비했다.

마물에 대처하는 것은 마법사가 효과적이다.

그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마물을 상대해 본 마법사가 얼마나 있겠는가?

서클이 오를수록 마법보다 정치에 가까워지는 것이 마법사들의 사회다.

이 전력으로는 승산이 없다.

"저희는 어쩝니까, 대피합니까?"

제드가 물었다.

할림의 일이었으니, 굳이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아니, 우리도 참전한다."

이곳에 쓸 만한 마법사는 페르다, 자신뿐.

그러나 목숨을 걸 필요도 없으며, 승률 또한 높다.

'이 일에서 도망치는 것보다 싸우는 게 이득이다.'

판단을 마친 페르다는 필요한 것을 탐색했다.

'내게 필요한 건 마나.'

페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부족한 마나를 채워 줄 마나통들.

그러니깐 밑거름이 되어 줄 마법사들이다.

그 계획을 위해 이름 하나를 불렀다.

"말콤!"

"예, 섭정님!"

말콤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대답과 다르게 그의 몸짓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을 내게 모두 데려와라. 마나샷을 생성할 수 있는 정도라도 상관없으니 일단 모두 모아 와."

"마, 만약 하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그럼 납치라도 해서 끌고 와라."

"예, 옙! 명을 받들겠습니다!"

말콤은 허우적거리면서 달려갔다.

"저도 데리러 가도 됩니까? 설득 하나는 자신 있는데."

제드가 슬쩍 물었다.

"자넨 기사로서 일해야지."

"젠장."

제드가 탄식을 내뱉으면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크르릉!

그사이 늑대의 패닉이 멈췄다.

늑대가 몸을 비집고 밖으로 튀어나오고, 대기하고 있던 늑대들도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안에 있던 늑대 마물들이 전부 쏟아져 나왔는지 균열은 다시 봉합되었다.

'숫자는 총 7마리인가?'

일반 기사들에게도 한 마리가 버거운 마당에 7마리가 건물 안에 침입했다.

'내가 맡을 수 있는 건 두 마리 정도. 나머지 다섯 마리와 대치한다고 하면....'

페르다는 재빠르게 전력을 확인하고 대칭해 보았다.

'무리다.'

놈들은 일방적인 사냥을 할 것이고, 그 사냥이 전멸을 이끌 것이다.

이미 쓰러진 도미노처럼 멈추지 않는다.

"제드 경."

"예."

"좀 나서 줘야겠군. 두 마리 정도 어떻게 시간을 끌어 줄 수 있겠나?"

"두 마리나 말입니까?"

제드는 숨을 꿀꺽 삼켰다.

생긴 게 늑대같이 생겼으나,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은 주둥이와 발톱만 있는 게 아니다.

뾰족뾰족 돋아난 꼬리 촉수가 위협적으로 둥둥 떠 있었다.

저런 걸 2마리나 시간을 끌라고?

"할 수 있겠나?"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제드가 대답했다.

"보수금이 좀 셀 겁니다."

"내가 언제 돈 떼먹은 적이 있던가?"

"없죠. 그럼...!"

제드가 단검을 고쳐 잡고 어디론가 움직였다.

그는 페넬로페에게 다가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였다.

"우에에엥! 죽기 싫어어어!"

"야, 페페! 정신 차려 임마!"

찰싹!

"우갹!"

"질질 짜지만 말고 너 일 좀 해라. 너도 마법 쓰잖아!"

"머, 뭐 해야 하는데요? 내가 저런 거랑 어떻게 싸워요?!"

"싸울 필요는 없고, 좀 도와라. 어떻게든 내 몸을 가볍게 만들어 봐,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쓰읍, 잠시만요. 헤이스트으!"

페넬로페의 마법이 제드의 몸을 덮어씌웠다.

제드는 한층 더 빨라지는 것을 느끼고 몸을 풀었다.

"그래, 이 느낌이지."

제드는 씨익 웃으며 마물 늑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산책 좀 하고 옵니다."

제드가 그렇게 두 마리의 시선을 끌기 위해 움직였다.

이걸로 페르다가 둘을 맡고 나머지는 셋을 맡는다.

페르다는 고개를 돌려 검을 뽑은 이들 중에서 가장 노련해 보이는 남자를 골랐다.

"거기 자네!"

"예!"

"기합이 좋군. 우리가 넷을 상대해 볼 테니 주변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든 셋을 상대해 보도록 하게. 할 수 있겠나?"

"어, 어떻게 말입니까?"

"최대한 수비적으로 움직이도록 지시해 보게. 방진을 형성해."

말은 그리했으나, 수비든 공격이든 상관없었다.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페르다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그게 끝이었다.

"섭정니이이임!"

명령을 받았던 말콤이 급하게 달려왔다.

왜 돌아왔냐는 말을 하려다가 그가 들고 온 것에 말문이 막혔다.

그의 양어깨에는 로브 차림의 남성 둘이 있었다.

"여기, 마법사입니다!"

"정말 납치를 해 왔군."

"제가 설득은 자신이 없어서...!"

페르다는 숨을 헐떡이는 말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똑똑하군."

"예? 저 똑똑합니까?"

"자기 자신을 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계속 그렇게만 해 주게."

"알겠습니다!"

말콤은 신선한 마나통을 납치하러 움직였다.

영문도 모른 채로 잡혀 온 사내들은 얼어붙어 있었다.

잘 도망치고 있는데, 갑자기 전장 한복판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페르다는 그들이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자네, 마나 봄을 구사할 줄 아는가?"

"예? 아, 예...."

"그럼 마나봄을 준비하게. 내가 지시하면 내 쪽으로 던지게. 자네는?"

"저, 저는 아직...."

"그럼 마나샷을 준비해. 준비하고 지시하면 내게 던지게. 그 정도는 쉽지?"

"옙!"

"그리고 저 납치범이 마법사를 또 데려오면 그렇게들 지시하도록. 두 번 설명하기 싫으니까.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급박한 상황인 만큼 그걸 전부 알아들었을 리는 없다.

페르다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전투를 준비했다.

'흑마법은 최대한 자중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흑마법은 치명적인 오명을 안겨준다.

에르데스가 이미 흑마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대중들이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최대한 피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쓸 수도 없지.'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고 조용하게 사용한다.

그렇기에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을 익힌 것이었다.

페르다의 발치 아래, 그림자의 형상이 움직였다.

은밀하게 늑대의 발치 아래에 닿았다.

페르다는 주문을 영창했다.

"바인드."

페르다의 그림자 속에서 숨겨둔 손이 뻗어 나온다.

-크르릉!?

늑대의 발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 중 4위계에 해당되는 속박 마법.

본래 이름은 쉐도우 바인드였지만, 페르다는 쉐도우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았다.

애초에 영창도 필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며, 겉보기에도 바인드와 유사한 효과를 지니었다.

끈끈한 접착제 늪에 빠진 것처럼 발을 떼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빠르게 한 놈부터.'

머릿속에 담아 둔 마법진을 재빠르게 수중에 그리며 마법을 영창한다.

"라이트닝 스피어."

전격의 창이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심장을 맞히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파지직!

전격의 창이 빠르게 날아가 가죽을 뚫고 들어간다.

심장이 있던 자리는 곤죽이 된 녹색 피만 뿜어내었고, 늑대는 힘없이 쓰러졌다.

"세상에, 저걸 한 방에...."

다시금 터지는 감탄사.

-크르릉!

구속당한 다른 놈이 동족의 죽음을 느끼고 이빨을 꺼내었다.

놈이 격하게 움직이며 저항하다가, 순간 늘어난 틈을 이용해 주둥이로 검은 형체를 물었다.

"윽."

페르다의 입에서 고통성이 흘렀다.

늑대가 묾과 동시에 페르다는 오른쪽 새끼손가락 부근에서 끊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림자는 페르다의 신체 일부로 여기고 사용된다.

그렇기에 그림자가 끊어질 때 살갗도 끊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그것이 조건.'

조심하지 않으면 고통에 사로잡히고 환상통에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페르다는 능숙하게 정신을 끊으면서 그 환상통에서 벗어났다.

그림자와 정신을 끊음과 동시에 위력이 약화되었다.

늑대 마물이 풀려난다.

"섭정님! 마나 봄을 어디다가...!"

타이밍이 괜찮군.

"내 쪽으로 던져라!"

마법사가 커다란 푸른 구체를 페르다에게 던졌다.

페르다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페르다의 등에서 검은 손가락의 일부가 나타나 그 마나 봄에 마나의 끈을 분사하여 낚아채었다.

남들이 보았을 때는 마치 그 구체가 페르다의 반경에 들어서는 순간 자연스럽게 그의 손아귀로 들어서는 듯 보였다.

"헉!"

"매직 인터셉트...!"

능숙한 마법사들이 부리는 어려운 기교에 눈을 의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페르다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의 정신은 온전하게 타깃을 향해 쏟아부었다.

마나 샷과 마나 봄을 늑대의 안면에 던졌다.

퍼퍼펑—!

100%의 적중률.

마력의 폭발이 늑대의 안면을 강타했다.

정크 마나들을 뿜으며 살아가는 역리의 존재들이 순리와 맞닥뜨리는 순간, 재생이 더뎌진다.

그리고 재생력이 완전히 멈추는 순간, 늑대 마물은 한여름의 개처럼 비틀거렸다.

"라이트닝 스피어."

그렇게 페르다는 앞에 맞닥뜨린 두 마물 늑대를 처리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전황을 살핀다.

'기사와 병사 쪽.'

기사와 병사들이 버티고 있는 쪽은 버거워 보였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반면 제드는 상처 하나 없이 두 늑대 마물의 주의를 돌리고 있었다.

두 늑대 마물의 공격은 말 그대로 온몸을 던지듯이 넓은 반경을 유린하는 중이었다.

제드는 놀랍게도 마물들의 공격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여서 전부 피하고 있었다.

'제드 쪽을 도와야 한다.'

여유로워 보여도 가장 급한 건 그였다.

"제드!"

"뭡니까!?"

제드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내 그림자가 있는 쪽으로 놈들을 유인해라."

"알겠습니다!"

공중제비를 도는 제드의 눈이 재빠르게 페르다의 그림자 위치를 확인한다.

그러고는 아크로바틱한 몸놀림으로 움직여 페르다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컹! 컹!

약이 바짝 오른 늑대 마물 두 마리가 제드를 향해 달려온다.

그것들이 페르다의 그림자를 넘어가려는 그 순간, 손이 솟아나 그 늑대들의 발목을 잡았다.

-끄깽!?

갑작스러운 장애물에 걸린 늑대 마물의 몸이 구른다.

"바인드."

페르다는 준비해 놓은 쉐도우 바인드로 두 마리를 한 번 더 속박했다.

"던져라!"

지시에 맞춰서 보급된 마법사들이 만들어 놓은 마나봄을 하나씩 페르다에게 던졌다.

섭정을 공격하는 꼴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그러나 페르다는 그것들을 능숙하게 마나의 실에 휘감아 자신의 마법으로 만들었다.

퍼퍼펑!

마물 두 마리의 몸 내부에 마나가 스며들었다.

의도대로 두 마리 모두 비틀거렸다.

'내 마나량이... 애매하군.'

레드 서클이 팽팽하게 돌고 있지 않으니, 추가적인 수급이 어려웠다.

'남은 마나는 라이트닝 스피어 3번 정도인가?'

두 놈에게 때려 박으면 나머지를 처리할 때의 마나가 애매해진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섭정님!"

제드가 페르다를 불렀다.

그의 눈빛에 전의가 깃들어 있었다.

페르다는 그 눈을 보며 생각했다.

'쓸모가 없군.'

정신론으로 무장한 기사들에겐 어쩔지 몰라도 페르다에겐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나 단검은 싸늘한 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러였다.

'그건 쓸모가 있지.'

의도를 파악한 페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 1.5초의 짧은 의견 교환으로 서로의 목표물을 지정했다.

"라이트닝 스피어"

페르다의 섬광 화살이 한 마리의 미간을 꿰뚫어 심장까지 터트린다.

"지옥에 가서 실컷 산책해라, 이것아!"

제드의 단검이 마물의 뱃가죽을 뚫는다.

억센 가죽이 마치 젤리처럼 푹 들어가더니 단검은 그대로 갈비뼈 안쪽을 파고들었다.

투둑—!

두껍고 딱딱한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맥없이 늘어지는 늑대 사체.

제드가 끌고 다닌 두 마리마저도 그렇게 죽었다.

남은 것은 이제 3마리.

그 3마리의 주의를 이끄는 것은 오합지졸의 군대들.

"악! 저놈이 날 쏘았어!"

"물러서지 마! 진형을 유지해라!"

그러나 통솔자의 카리스마가 그들의 발을 묶어 준 덕분에 늑대 마물 3마리도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저 군대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페르다는 그 틈을 노린다.

페르다는 마법사들 쪽에 외쳤다.

"마나봄!"

말콤이 공급한 마법사는 총 10명.

생성된 구체는 총 12개로 페르다를 향해 일제히 날아왔다.

페르다의 그림자 손가락들이 그 구체들을 빠짐없이 낚아채어 페르다의 것으로 만들었다. 늑대 마물의 틈을 노렸다.

퍼퍼펑-!

몸통에 박히는 마나들.

외피를 뚫고 몸속으로 들어갈 만큼 농도가 높았다.

직격당한 늑대 마물은 비실거렸고, 호전적으로 움직였던 늑대 마물 두 마리도 유의미한 대미지를 입고 물러났다.

"지금이다 때려눕혀!"

"우와아아앗!"

함성과 함께 비실거리는 놈에게 검을 꽂아 넣으며 반격을 가했다.

늑대 마물도 저항하지만, 다 죽어가는 노인네와 다를 바가 없이 맥없는 휘두름만 이어졌다.

-컹컹!

두 늑대가 페르다에게 시선을 두었다.

야생의 감이 이 인간 무리에서 핵심이 누구인지 파악한 것이다.

그들의 눈이 단단히 뒤집혔고, 페르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이 섭정님을 향한다! 섭정님을 보호해라!"

제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병사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할 리가 없었다.

'두 마리.'

페르다는 제드처럼 화려하게 피할 수 있는 몸 재주가 없다.

페르다는 살기를 느끼기 이전부터 마법을 준비했다.

"라이트닝 스피어."

전격의 창이 한 녀석의 몸통을 관통했다.

심장이 꿰뚫리지 않았으나,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남은 하나는 겁도 없이 페르다를 향해 달려왔다.

"섭정님!"

제드가 페르다의 앞에 가로막아 그를 보호하려 했다.

"크헉!"

민첩함에선 늑대 마물을 이겼겠지만, 정면 승부에서의 그는 무른 흙에 박힌 허수아비처럼 무너진다.

페르다는 제드가 만들어 준 틈을 이용해 라이트닝 볼트라도 꽂아 넣으려 마법진을 펼쳤다.

"라이트닝-."

전부 외지도 못한다.

늑대 마물이 페르다의 양어깨를 짓누르며 그대로 올라탄 것이다.

-크헝!!

놈이 아가리를 벌렸다.

늑대처럼 생겼으나, 입속은 늑대의 것이 아니다.

한층 더 날카로운 이빨과 수십 가닥으로 갈린 혀 촉수.

날카로운 이빨이 페르다의 목을 파고든다.

죽음을 직감한다.

파앙-!

천지를 울리는 파공음.

동시에 빠르고 작은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늑대 마물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목덜미를 반쯤 파고들었던 이빨은 더 이상 힘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구사일생한 페르다는 마물이 왜 죽었는지 살폈다.

'작고 빠르며, 강력한 마법....'

기시감이 느껴진다.

페르다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 누구인지 살폈다.

그것이 날아온 방향은 무대 쪽.

그 무대에 선 것은 다름 아닌 버넬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의 손에는 무언가를 들려져 있었다.

버나드 총장 다음에 소개될 예정이었던 마도공학 라이플이었다.

그가 들고 있던 긴 파이프는 새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79화. 짧고 강렬한

사건 발생 5분 전,

무대 뒤의 버넬.

"후우, 후우...."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와서 이런 무대를 가져 본 적이 얼마나 있던가?

그리고 이런 기대를 해 본 적은 있던가?

'해 본 적은 있지.'

하지만 진정으로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예상하였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버넬은 없었다.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사채업자에게 장기까지 털릴 뻔했던 것이 그의 일생.

페르다가 끼어들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상상하진 못했다.

버넬은 슬쩍 커튼을 들치고 바깥을 보았다.

넓은 오페라 극장 좌석들이 보인다.

설레는 가슴.

그러나 그보다 더욱 큰 것은 압박감과 공포.

-버넬 군, 자네는 그게 실현이 가능하리라 믿는가?

버나드 총장의 말이 귓속에서 맴돌면서 그 감정이 더욱 커졌다.

그것은 에스콜레이아의 아카데미 생도였을 당시, 아카데믹 콘퍼런스에서 질문 타임을 가졌을 때였다.

-그런 허황한 이상 따위는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네. 하지만 자네가 그런 것에 사로잡히면 어쩌자는 건가?

-기존에 있는 법칙들을 전부 깨 버릴 수 있다고 믿지 말게. 자네는 똑똑해도 그런 천재는 될 수 없으니까.

버나드는 버넬의 의지를 꺾으려 들었다.

그러나 버넬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인간이 껄끄러워졌다.

특히 이런 메인 무대에 오르는 것은 더더욱.

또 비웃진 않을까?

쓸데없는 지적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진 않을까?

나를 믿어 줬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게 아닐까?

그러한 질문들이 손이 되어 버넬의 목을 졸랐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자신을 믿어 준 섭정, 페르다를 위해서.

자신의 성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욕한 버나드를 엿 먹이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것을 바쳐 왔던 자신을 위해서.

"후우우!!! 이놈의 약차는 왜 이렇게 효과가 없어...?"

긴장에 풀린다는 약차를 몇 잔이나 마셨음에도 머릿속의 잡념은 떨어지지 않았다.

양손을 꼭 모은 채로 기도했다.

예기치 않게 파투가 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꺄아아악!

마치 자신의 자그마한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듯이 비명이 터졌다.

갑작스레 터진 비명에 버넬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뭐야? 무슨 일이 터진 거야?"

무대를 진행하던 스태프들이 일제히 도망가기 시작했다.

버넬은 따라 도망치는 대신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허억...!"

균열이 열렸다.

할림, 그것도 오페라 하우스 안에서 마물이 쏟아지는 균열이 말이다.

'저게 가능한가?'

도시 안에서 마물이 등장하는 게이트가 있다지만, 그 건수는 희박하게만 존재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고, 마물 출현 예측 장비를 소개하고 있을 때, 나타나다니.

시기가 너무 공교롭다.

'도망쳐야 하나?'

버넬이 발을 뒤로 돌리려던 순간, 그의 발목이 붙잡혔다.

그의 시야에 페르다가 보였다.

페르다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냉철한 눈으로 균열에 대응하고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페르다는 귀족의 의무를 다하는 모습이었다.

버넬은 저 눈에 고무되었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해.'

그때처럼 목숨을 거는 짓은 못 하더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이 준비해 놓은 마도공학 라이플이었다.

버넬은 라이플을 들어 작동시켰다.

마력 양을 조절하고, 충분히 예열하고, 조정간을 맞추고, 표시되는 조정치에 맞춰서 위력 조절을 하고....

'뭐가 이렇게 많아?'

무려 20개가 넘는 조작 과정이 필요했다.

원래는 조작 과정이 100개가 넘었다.

말콤이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버넬이 계속해서 간소화하면서 줄인 결과였다.

'그래도 너무 많아.'

버넬은 발표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쓸 만하지 않을까?

이 정도는 사람들이 조작하고 쓸 수 있잖아?

'아니었어.'

말콤이 쓸 정도로 간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언제든지 쓸 수 있어야 하는 정도다.

이렇게 복잡해서는 이렇게 급박한 순간에서 쓸 수 없다.

버티는 순간에도 희생이 따라온다.

'젠장.'

멍청한 놈.

총장 말대로 난 멍청한 놈이다.

필요한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1%를 올리는 데만 매달린 결과가 이런 것이다.

그런 후회를 내뱉으면서도 버넬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마침내 장전을 마치고 노리쇠를 잡아당겼다.

우우웅—!

물체 가속 마법진이 작동하면서 파이프 안쪽에서 진동했다.

버넬은 그 라이플을 들고 무대 위를 올랐다.

상황은 어느새 막바지로 접어든 상태.

두 마리만 남은 늑대 마물이 페르다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엄청 빨라!'

버넬의 기회는 단 한 번뿐.

그 한 번으로 놈에게 유효타를 먹여야만 한다.

그러나 라이플을 들고 있기도 빡센데, 그 움직임을 좇아 쏠 자신이 없었다.

파지직!

페르다의 손에서 뻗어 가는 한 줄기의 번개.

한 마리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한 마리는 그렇지 않았다.

제드를 제치고 페르다를 그대로 덮쳐든다.

그리고 그대로 목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안 돼!'

버넬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트리거를 잡아당긴다.

마력식이 발현하면서 유리관에서 마나 구체 하나가 빚어졌다.

그 구체는 기다란 파이프 안쪽으로 흘러들어가더니 섬광이 되어 뻗어갔다.

파앙!

페르다를 노리던 마물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것이 정확하게 심장에 꽂혔다.

순수한 마력탄이 꽂히면서 늑대 마물은 깨갱대며 바둥거리더니 그대로 꼿꼿하게 굳었다.

한 방.

단 한 방에 마물이 나가떨어졌다.

라이플을 쏜 버넬 본인도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위력을 평소보다 강하게 설정해 놓긴 했지만, 설마 한 방에 쓰러질 줄은 몰랐다.

고작해야 시간 버는 정도라고 생각했건만.

하지만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상관없었다.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마지막 마물의 죽음.

그 모든 것이 모두의 이목을 버넬로 끌었다

바보처럼 입을 쩍 벌린 채로 자신을 보고 있다.

"뭐야 저건?"

"저기서 마법이 튀어나온 거 같은데?"

"그럼 지팡이야? 마법을 쓴 건가?"

"지팡이가 저렇게 생겼을 리는 없잖아?"

버넬이 들고 있는 물건에 대해서만 추측하고 있었다.

애초에 설명회에서도 마력석이 주된 목적이었고, 마도공학 라이플은 단순히 응용된 물건으로만 소개될 예정이었다.

"어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버넬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압박감을 느꼈고, 그는 입을 열었다.

"이게 제가 이번에 가져온 물건, 마도공학 라이플입니...다?"

그게 끝이었다.

그 이상은 말문이 나오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충분했다.

그 소개만으로도 모두의 머릿속에 때려 박을 정도로 강렬했으니까.

* * *

설명회장이 난리가 난 한편, 그곳을 멀찍하게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상황은 종료되었고, 뒷수습 중인 모습이 눈에 비쳤다.

"늑대 마물 7마리."

한 사내가 팔짱을 끼면서 중얼거렸다.

"저 늑대형 마물 7마리로 몇 명 정도 죽을 거라 예상했지?"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대꾸했다.

"적어도 300명은 죽었어야지. 에스콜레이아 총장을 포함해서 말이야."

"그런데 사망자가 단 하나도 없군. 버나드도 죽지 않았고."

"계획한 놈은 책임을 면치 못하겠군."

단순히 예상을 빗나갔다, 혹은 상회했다는 수준으로 그치기 어려운 실패였다.

"실패 원인이 무엇인 거 같나?"

"대답이 필요한가?"

"똑같은 생각을 하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다."

패배의 원인은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역시 그놈인가?"

둘은 같은 생각을 했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최근까지도 그 이름이 계속해서 마족들 사이에 오르고 있었다.

그가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악마들의 힘을 빌려서 연구 시설도 습격했다고 하던데. 저놈을 간과해서 이 모양인가?"

"간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대평가에 가까운 수준이었지."

그 과대평가는 린네 연구소장의 증언이었다.

마족들은 린네의 증언이 패배를 변명할 때 써먹는 레퍼토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과대평가마저 웃돌고 있는 수준이로군."

페르다는 상상 이상이었다.

"전투에 써먹지도 못하는 1, 2서클들을 가지고 마물을 무력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

"전력을 파악하고 분배하는 것도 완벽했다. 조금 무리를 했지만, 그것도 고려해서 넣은 듯하고."

"냉철한 놈이야, 어떻게 된 것인지 이런 전투에는 능숙한 것처럼 보여."

"고작 18살짜리인데,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전장에 나갔던 것이 아닐까?"

"저 몸을 봐. 근육도 없는 저 야윈 몸으로 뭘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렇지 않으면... 선천적인 건가?"

"선천적인 센스라기엔 즉흥적인 느낌이 없다. 수준이 달라."

페르다를 향한 추측은 많지만, 해답은 내놓을 수 없는 오리무중 상태.

"얽힌 요인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무슨 말이지?"

"시야를 넓혀 보자는 말이야. 다른 것들에 요인들을 더 찾아보지."

그가 갈색 머리의 남자를 턱짓했다.

"저 제드라는 놈도 뭔가 이상하거든. 몸에 헤이스트가 걸렸다고 저렇게 움직일 수 있나?"

"인간들이라면 보통은 못 하지. 저렇게까지 움직인다면, 그 속도로 살아왔던 사람이어야만 했을 거다."

"제비 짓이나 하고 다니는 것이 기사라 해서 이상하다고 했는데 채택된 이유가 있었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저 말콤이라는 작자는...."

"그냥 바보지. 상황이 끝난 지금도 열심히 마법사들을 납치해오고 있지 않나?"

"...그렇군."

그사이에 다른 사내는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위험 등급을 바꿔야 하겠군. 적어도 알베르도 등급으로 말이야."

"페르다 발드로바를 말인가? 섣부른 판단 같군. 아직은 상정 내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저놈이다."

그가 턱짓하여 가리키는 건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푸른 머리의 사내였다.

그 남자는 예술품에 가까운 물건으로 늑대 마물을 한 방에 죽인 남자.

버넬 마르퀴스였다.

"저놈의 영향력은 틀림없이 페르다 발드로바 이상이 될 것이다."

* * *

늑대 마물 7마리가 죽으면서 설명회장의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부상자가 다수 있지만, 사망자 하나 없이 전투가 끝났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보통 마물 한 마리가 나타나도 3명이 죽는 것은 기본이고, 숫자가 늘어나면 사망자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일곱 마리가 난입했음에도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할림의 지원 병력이 등장하기 전에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단순히 멋지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경이로운 상황을 이끌어 간 사람은 페르다였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섭정이시여."

"섭정님의 눈부신 고결함에 진심으로 탄복하며, 숭배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함께 싸웠던 자들은 물론 도망쳤던 자들도 다시 돌아오면서 페르다에게 아부를 떨어 댔다.

최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웠던 페르다의 행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칭송은 페르다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 못지않게 인상을 남긴 자가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버넬 마르퀴스라는 자더군. 이번에 설명회에 참여한 사람이라던데."

바로 버넬이었다.

그는 마물의 침공에서 마지막에 등장하여 대미를 장식했기에, 자연스럽게 입에 올랐다.

"아아, 기억나는군. 버나드 총장이 단독으로 밀어붙일 정도로 대단한 것인 듯하던데?"

"그게 저 물건인가 봐?"

"그건 아닌 거 같소. 마력석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름이 안 맞는데? 마력석이면 돌이어야 하지 않소?"

"그럼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마도공학의 개념이 없었으니 그 물건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개념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마도공학은 마물을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

그건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버넬은 자신을 향한 눈빛이 달라진 것을 느끼고 페르다에게 슬쩍 다가갔다.

"저 섭정님... 말씀드릴 게 하나 있는데...."

"말해라."

"제가 마물을 죽이긴 했는데... 이게 원래 죽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페르다는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깐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 라이플 시현 당시 체크했을 때에 측정된 힘이랑, 이 늑대 마물의 근육 밀도와 탄 궤적 등을 고려했을 때는 심장에 결코 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죽이려고 쏜 게 아니었다?"

"시간을 벌 수 있을 정도로만 생각했죠. 그래서 마물이 죽은 걸 대충 확인했는데 말입니다...."

"그래."

"제가 쏜 장소 있지 않습니까? 그곳의 근육이 살짝 벌어졌었는데, 그게 정확하게 근육이랑 사이의 공간을 지나서, 힘의 소실이 거의 없는 상태로 심장까지 도달했고 그곳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죠."

버넬의 설명을 들은 페르다가 요약해 보았다.

"그러니깐 자네는 모든 것이 우연이 겹치면서 일어난 것이란 소리군?"

"예, 그렇죠."

페르다는 버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굳이 그걸 알린다고 우리에게 득이 될 게 있나?"

"어... 없죠?"

"그럼 초 치지 말고 즐기게."

페르다는 버넬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지나갔다.

페르다가 지나가기 무섭게 많은 학자와 상인들이 버넬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예를 차리고 있었다.

버넬은 그들을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썩 나쁘진 않았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자신이 만든 물건으로 생긴 기회였었으니 말이다.

그러는 와중에 페넬로페는 제드를 붙잡으며 방방 뛰고 있었다.

"제제, 제제! 저기 봐, 저기! 저 암컷들의 눈빛을 보라고!"

"...."

"세상에. 벌써 배가 불러오는 거 같아. 나, 나 울어도 되는 거야?"

"...시끄러워, 임마."

호들갑 떠는 페넬로페의 머리를 밀었다.

제드는 무언가 걸리는 얼굴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무언가 복잡해 보이는 얼굴, 페넬로페는 그런 제드의 뒤를 어린애처럼 쫓아갔다.

"뭔데? 복잡한 남자라는 콘셉트야?! 그런 것도 나쁘지는 않지! 너무 콘셉트 과하지 않게 잡으라고! 오늘 포식할 거니까!!"

모두가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는 한편, 유독 말콤만은 그러지 못했다.

"당신 미쳤어!? 나를 전장 한가운데에다가 던져!?"

"죄송합니다! 저 마녀일 줄 알고...!"

"이 미친놈이 뭐가 어째!? 내가 마녀처럼 보여 엉?!"

"엇,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 진짜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던 거라서."

상황 종료되고 5분이나 지나서도 열심히 마법사를 납치해 오던 말콤은 귀부인이 내뿜는 불벼락을 맞고 있었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귀부인 하나를 마녀로 오인해서 납치해 오는 바람에 침 세례를 받으면서 모욕을 듣고 있었다.

1분 만에 그의 부모와 고간이 사라졌고, 그 이외에도 무언가가 잔뜩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보다 못한 페르다가 직접 나서서 귀부인 앞에 나섰다.

사태는 10초 만에 진정되었다.

말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섭정님. 제가 실수를 해 버려서."

"아니, 고개를 들어라. 네가 죄를 지었나?"

"마법사만 데려오라고 하셨는데, 귀부인을 데려와서 곤란하게...."

"그 정도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넌 할 일을 다 했다. 공왕령의 기사로서 내 명에 따라 수행했고, 넌 훌륭한 일을 했다."

페르다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말콤이 만약 마법사를 데려오지 않고 설득하려 했었다면 어땠겠는가?

그 누구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이 도사리는 거길 미쳤다고 가서 나서겠는가?

직접 납치해 오지 않았더라면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이번 작전은 말콤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기 때문에 수월하게 풀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크윽!!"

말콤은 서러움에 눈물을 머금었다.

그렇게 일단락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페르다에게 다가왔다.

그가 밟은 자리에는 그 누구도 서있지 않은 게 고위급 인물이 확실했다.

"위대한 불의 힘, 발드로바의 배필을 뵙습니다. 이 쾌락의 땅, 할림의 영주 아흐마드라 합니다."

할림의 영주였다.

페르다가 그 인사에 대꾸하기도 전에 아흐마드가 무릎을 꿇었다.

"할림을 대표하여 이 사태를 진정시켜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두가 아흐메드의 행동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할림의 영주가 무릎을 꿇다니...."

"제국 황제가 와도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던 남자가...."

왕 앞에서도 함부로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남부 영주들의 특성.

아흐마드가 남들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페르다의 평가를 더욱 높였다.

나쁘지 않은 성과다.

"귀족으로서 의무를 했을 뿐입니다."

"누가 남의 땅에 벌어진 일을 목숨을 걸어가면서 수습하겠습니까? 이럴 것이 아니라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이야기를 좀 더 나누시지요."

페르다는 그제야 자신의 목이 뚫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혈은 된 상태지만, 고통에 욱신거렸다.

'틀림없이 흉지겠군.'

발드로바와 나눌 대화 주제가 필요하지만, 이런 흉터로 대화를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말끔하게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흉터 하나 남기지 않도록 최고를 불러오겠습니다."

페르다는 아흐마드와 함께 영주 성으로 향했다.

80화. 물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