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 90-95

90화. 악의 꽃

단돌로 가의 민며느리로 들어온 틸다는 모든 것이 불만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 저택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것도 아닌 집에서 주인 행세도 못 하는 틸다는 이 집이 짜증 나기만 했다.

"흐흥~."

그런 그녀가 오늘은 소파에 앉아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세상 즐겁다는 듯이 있는 이유는 하나.

손에 걸려 있는 반지 때문이었다.

윤기 있는 은으로 고리를 만들고 가운데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반지.

그것은 단순한 다이아몬드가 아니다.

대륙 서부의 신의 무덤, 그중에서 지옥의 경계선 아래로 들어간 광부만이 캐낼 수 있는 붉은 다이아몬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여 블러드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며, 단순히 돈만 있다고 해서는 구할 수 없는 희귀품 중에서 희귀품이었다.

틸다는 남들이 손에 넣지 못하는 희귀품이 자신의 손에 걸려 있다는 게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러나 그 기분 좋은 미소도 잠시였다.

"내 사랑, 무슨 좋은 일 있어?"

목소리를 듣자마자 틸다의 행복한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찬물을 끼얹은 것은 단돌로 저택의 소가주, 앙리 단돌로.

자신의 약혼자이자 이 반지를 선물한 장본인이었다.

틸다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연극 같은 미소가 걸려 있다.

"당신 생각했어요."

"공교롭네. 나도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앙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즐겁게 웃으며, 틸다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억지로 옆을 비집고 들어와 틸다의 옆에 앉았다.

살이 닿는 옷 너머로 닿는 것마저 짜증이 난 틸다가 슬쩍 떨어지며 물었다.

"요즘 장사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

"장사? 잘되는 중이지! 이번에 서부의 드워프들이 마법 재료에 쓰이는 희토류맥을 발견했다고 하더라고. 말 그대로 돈이 하늘에서 비 내리듯이 쏟아질 거야."

즐겁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들어 대는 앙리.

그러나 틸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한숨이었다.

웃고 있던 앙리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왜 그래? 좋은 소식이잖아?"

"좋죠. 지금 당장은 물론 좋죠. 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미래가 안 보이는 걸까요?"

"미래가 안 보여? 내가 보기엔 지금으로도 충분히 우리가 승승장구할 거란 생각밖에 없는데...."

"그건 당신이 낙관적이라서 그래요. 내가 보기엔 아니에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막막하고. 그 짐승 같은 것들이 내 것을 뺏어 먹으려고 여전히 달려들고 있잖아요?"

"처남들 말인가?"

틸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지독해요. 어릴 때 내가 그 두 남자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세요?"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틸다는 격정에 사로잡힌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 짐승 같은 것들은 제가 이 가문에 온 이유도 당신을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를 천하의 악녀로 만들어 버린 다음에 제가 어디에도 힘을 쓰지 못하는 바보로 만들려고 말이죠!"

틸다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한 방울에 앙리는 가슴이 철렁였다.

"틸다, 내 사랑. 불안해하지 마시오. 내 사랑은 오직 당신 하나만을 위해 가고 있소."

앙리가 틸다의 손을 슬쩍 잡아 들었다.

"자, 보시오. 이 다이아.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보석이지 않소?"

"...."

"이걸 당신의 손가락에 걸 때 맹세했어. 이 세상 누구보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야. 그러니 당신이 그렇게 불안해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거야."

"...정말요?"

"정말이고말고."

앙리는 다시 손등에 대고 키스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 사랑, 당신을 위해서는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주리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틸다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이 등신은 이렇게 쉽단 말이지.'

모든 남자가 여자한테 단순해진다지만, 앙리는 특히 심했다.

앙리라는 인간 자체가 그러했다.

공격적인 투자와 방식으로 확장을 이어 간 아버지와 다르게 그는 유순하며, 느긋한 방식을 추구한다.

치밀함은 없으며 즉흥적인 성향을 지닌 남자.

'하지만 그래도 능력은 있어.'

서부 지역을 개척하는 것도 그의 즉흥적인 능력 덕분에 가능했던 것.

용모가 추하고 나이도 많지만, 그 능력 하나로는 참아 줄 만한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골치 아픈 일은 다 해결해 줄 때까지 이용해 먹어야 했다.

그때, 고용인 하나가 걸어와 틸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불 놓기에 성공했습니다."

좋은 소식이었다.

"생각보다 빠르네. 알겠어."

"뭐가 빨라?"

앙리가 물었다.

"비밀이에요."

"약혼자 사이에 비밀로 해야 해?"

"비밀일 수밖에 없어요. 당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거든요."

"오, 나, 나를 위해서?"

앙리 단돌로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슬쩍 틸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 나를 위한 선물...이 뭔지 사알짝만 보여 줄 수 있을까?"

틸다도 따라 순진하게 웃었다.

"안 돼요. 그건 나중에 알려 줄 테니까, 지금은 조금 참도록 해요."

"에이, 약혼자한테 살짝 보여 주지도 못해?"

"저는 서프라이즈를 좋아한답니다. 앙리 씨가 눈치채면 제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것 같아서 슬플 것 같아요."

입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트리고 볼에 공기를 넣었다.

앙리는 그 얼굴을 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알았어. 내가 눈뜬장님처럼 봐도 모르는 척하고 있을게."

"모르는 척하는 거면 이미 안다는 거잖아요."

"이래 보여도 나 연기 잘해."

"뭐래요, 호호호!"

깔깔 웃는 틸다.

한껏 기분이 풀린 모습에 앙리는 안심한 얼굴을 했다.

"저 이만 일어나 볼게요. 시아버님, 식사하실 시간이잖아요?"

"그냥 메이드한테 맡겨도 될 일인데, 귀찮지 않아?"

"할림에서 구경한다고 소홀히 한 점도 있고, 다른 누구도 아닌 앙리 씨의 아버지잖아요?"

"허허, 이거 참. 이런 며느리를 둔 아버지나 나나 너무 과분하구만!"

앙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가 콧노래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불러 대었고, 틸다는 그 모습을 보며 호호 웃었다.

그 웃음은 정확히 문밖을 나서서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틸다의 얼굴은 싸늘하게 내리 앉았다.

그녀는 레드 카펫을 따라 걸어 가주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걷던 중, 시녀 하나가 슬쩍 그녀의 옆에 붙었다.

"상태는?"

"평소와 같습니다."

"그래? 알겠어. 준비는 제대로 됐지?"

"예."

"이리 줘."

틸다는 그 쟁반을 건네받고 방문이 열린다.

"아버님, 틸다예요.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틸다는 가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주의 방 안에는 단돌로 가문의 역사가 쓰여 있는 벽지와 뿌리 가계도가 눈에 띄었다.

200년이 넘는 세월을 걸쳐서 명맥이 유지된 만큼, 그 자부심 또한 강하다.

그 자부심을 가장 많이 표현한 인물은 앙리의 아버지인 리코 단돌로였다.

리코 단돌로는 단돌로 가문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상인이었다.

그는 공격적인 확장을 이어 가는 허먼 파스칼을 견제하기 위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실력과 함께 천운이 따라붙으면서 리코 단돌로의 사업은 점점 커졌고, 지금의 명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벌어도, 시간 앞에 자유로운 상인은 없는 법.

리코에게는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되었다.

그는 숟가락을 들 힘도 없고, 숨을 쉬는 것이 고작인, 오늘내일하는 수준의 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시아버님. 오늘 몸은 좀 어떠세요?"

틸다가 그에게 물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틸다는 혼잣말을 계속 이어 갔다.

"오늘 날씨가 화창하답니다. 바깥에 잠깐 나들이하다가 오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아요."

"...."

"물론 아버님의 상태가 이래서 어디에 앉는 것도 힘드시죠. 안타까운 일이에요."

"...."

"그래도 이 며느리가 말을 걸어 줘서 힘은 나지 않나요?"

틸다가 리코의 입안으로 죽을 밀어 넣었다.

"앙리 씨가 계약한 곳에서 이번에 희토류 맥을 발견했다고 해요. 마나 감응이 좋다고 해서 돈방석에 앉는다고 하더라고요?"

"...."

"참으로 대단하지 않나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볼품없는 쓰레기라면서 욕하고, 저런 놈이 회장이 되면 단돌로 상회가 망한다고 한탄하게 했던 그 아들이 단돌로 상회에 또 다른 부흥기를 가져오려 하고 있다니."

"...."

"당신의 그 볼품없는 아들을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

"다른 누구도 아닌 저예요. 제 공이죠."

틸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진한 미소를 띄웠다.

"전 이렇게 대단한 여자예요."

나무 스푼을 입속에 집어넣는다.

"당신이 이 상회를 무너트릴 귀신 취급할 만한 여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입속을 휘젓는다.

"모든 것이 제 것이에요. 파스칼 상회도, 단돌로 상회도, 이 저택도...."

살짝 거칠게.

나무 스푼을 입안에 밀어 넣는다.

이만큼 들어가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깊숙하게.

"그리고 식물이나 다름없는 당신의 목숨마저도 말이죠."

커억 커억—.

목이 막혀 점점 안색이 창백해지는 리코.

틸다는 즐거운 얼굴을 했다.

질식해 버리기 직전, 틸다는 스푼을 뺐다.

막혔던 숨이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사셔야죠. 지금 당장 당신이 죽는 것보다 조금은 더 사는 게 제게는 이득이라서요."

"...."

"아버님이 숨겨 두신 그 유언장을 고치려면 일단을 살아 있어야 한다더라고요. 왜 쓸데없이 비밀을 만들어서 이 고생을 시키는지."

틸다는 손가락으로 노인의 턱을 쓸었다.

지배하고 있다는 즐거움도 잠시.

틸다의 손가락이 멈췄다.

"어머?"

웃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싸해졌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할 리코 단돌로가 움직인 것이다.

그의 눈이 돌아 틸다에게 향한 것이다.

두 눈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떨리다 못해 새빨갛게 충혈되어 귀신이 될 것만 같았다.

살의.

말도 못 하는 노인네라고 느끼기 힘든 증오가 틸다를 향하고 있었다.

틸다는 그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약이 좀 부족했나...."

틸다는 품속에서 조용히 작은 약병을 꺼내어 죽 속에 한 방울을 더 흘렸다.

섞지도 않으며 그대로 퍼서 리코 단돌로의 입에 넣었다.

리코 단돌로의 눈에 다시 힘이 풀린다.

다시 그는 숨만 쉴 수 있는 유약한 노인네가 되어 버렸다.

"쉬세요, 아버님. 이제 얼마 남지도 않으셨으니까요."

틸다는 다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식물이 되어 버린 리코 단돌로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 외롭지 마시라고 아드님도 함께 보내 드릴게요."

틸다는 그렇게 비워 버린 죽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 앞에는 저택의 고용인들이 서 있었다.

"머칫 용병회사 쪽에 잘 씌워진 거 확실해?"

틸다가 죽 쟁반을 건네주며 물었다.

"예. 머칫이 늦은 밤에 스테판과 이야기를 발드로바 성으로 갔습니다만, 2시간 만에 다시 돌아갔습니다."

"늦은 밤에 돌려보냈다라... 확실히 이야기는 잘 안된 모양이네."

틸다는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하나씩 터트리면 되겠네. 하나씩, 하나씩 말이야."

"그렇습니다."

"진행하도록 해. 전부 우리 것으로 가져오자고."

"예."

고용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제 모든 게 내 손에 들어올 거야.'

머칫 파스칼과 스테판 파스칼.

혈육이긴 하나 파스칼 상회를 가지고 싶은 틸다에겐 그들은 방해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 아무것도 아니었다.

틸다는 손을 들어 불빛에 비춰 보았다.

세련되게 커팅된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아름답게 빛났다.

"약혼반지라는 것만 빼면 참 완벽할 텐데."

그런 아쉬움을 토하면서도 그녀는 즐거웠다.

약혼이라는 이름은 한순간이고,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은 영원할 테니까.

* * *

머칫은 그날 바로 돌아갔다.

늦은 밤이었으나, 묵을 장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은 문전박대와도 다름없다.

그걸로 세간에는 머칫과 스테판의 불화가 깊어졌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머칫은 이후에 분리 독립할 조짐을 보였다.

머칫은 자신이 벌였던 사업들을 용병회사로 전부 귀속시키고 분리할 준비를 했다.

대놓고 움직이게 만들려는 의도였으며, 그 의도대로 넘어왔다.

허먼 파스칼이 움직인 것이다.

힘이 나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머칫의 독립 시도를 저지하려 했고, 동시에 스테판을 내쫓기 위해서 다시 이사 재취임을 시도했다.

'스테판의 예상안이었군.'

허먼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두 형제가 싸웠고, 그로 인해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최고의 배우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난입하는 것.

허먼은 모두의 의심을 지우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아버지, 허먼 파스칼.

형, 머칫 파스칼

본인, 스테판 파스칼.

파스칼 상회의 이름 아래에서 세 남자의 삼파전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것이 틸다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섭정님."

이사벨라가 페르다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평소 같은 서류의 산이 아닌 얇은 손수건 한 장이었다.

"목수 하나가 건축 자재들을 정리하던 중에 발견했다고 합니다. 글자를 읽을 줄 모른다고 하여 제게 가지고 왔는데...."

이사벨라가 건넨 것은 곱게 접혀 있는 검은색 스카프.

그녀가 안을 펼쳐 보자, 그 안에는 섬뜩하게 붉은 피로 글을 썼다.

'아니, 피가 아니라 염료군.'

피라면 이렇게 새빨갛게 유지되진 않을 테니까.

그것이 피든 염료든 상관없다.

검은색 스카프에 붉은 염료를 사용하여 글을 쓰는 집단은 페르다가 알기로는 하나뿐이었다.

'블랙 반다나.'

세르데스 대륙 전역에 뻗어 있는 비밀 조직.

'찾을 수 없는 것은 없으며, 구할 수 없는 것도 없다'라는 도발적인 슬로건을 내세운 음지 조직이다.

그런 정보 조직답게 써진 내용 또한 도발적이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귀공.

-최근 벌어지는 파스칼 상회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귀하를 뵙도록 하겠습니다.

91화. 블랙 반다나

"짧고 강렬하군요. 겁도 없이 협박하다니."

이사벨라가 불쾌감을 표했다.

제 할 말만 딱 잘라서 하고 끝내 버리는 것도, 붉은 글씨로 쓴 행동도 그랬다.

전부 그렇게 보이기 쉬웠다.

그래서인지 페르다는 다르게 보았다.

"협박이라고 하기엔 너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나?"

몇 푼 뜯어내겠답시고 알짱거릴 작정이라면, 마지막에 있는 조만간 뵙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상대는 블랙 반다나다.

대륙 최고 규모의 비밀 정보 조직이라면, 페르다가 어떤 인물인지 대강은 파악했었을 것이다.

'그러니 궁금해지는군.'

이 조만간 뵙겠다는 말이 공왕령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말이다.

"행정관. 헤스티아에 깃대가 있나?"

"조만간 설치할 예정입니다."

"그 깃대, 오늘 세워서 이걸 중간에다가 달아 주도록 하게. 그걸로 답신이 될 테니까."

이사벨라는 페르다의 말대로 헤스티아 마을 가운데에 깃대를 설치하고, 중간 지점쯤에 스카프를 달아 놓았다.

주변에 있는 것은 외로운 산과 빽빽한 숲.

깃대의 중간에다가 달아서는 주변에 없는 인간들이 알아차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검은 로브와 흑마를 타고 있는 여섯 명의 무리가 발드로바 성으로 찾아왔다.

언뜻 보면 어느 왕국의 비밀스러운 사절처럼 보였으나,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루리는 밑으로 내려가 그들의 신원을 파악하여 보고했다.

"페르다 님, 성 아래에서 부름에 응하여 온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만."

"대표만 안으로 들이라 하거라."

비밀 조직인 만큼, 그들을 대하는 것도 신중해야 했다.

발드로바 성에 대표 자격을 갖추고 들어온 이는 늘씬한 여인이었다.

하늘색 눈동자, 애쉬 그레이색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남부 지방에서 자란 듯한 그 여인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섭정님. 소녀의 이름은 가넷 스왈로우라 합니다."

말을 하면서 살짝 벌린 입에서는 뾰족한 이빨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크 엘프?'

미모가 빼어나긴 하나, 표정이 사나워 흠칫하게 했다.

게다가 뭉툭한 귀가 그녀를 남부 지방에서 자란 미인이라고 알려 주었다.

페르다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를 협박하고 당당하게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말해 주겠나?"

가넷이 고개를 숙였다.

"협박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 같은 하수구에 사는 것들이 어떻게 공왕의 대리님을, 드래곤의 배필을 협박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서신의 내용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붉은 글씨에 자극적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조직의 고루한 관습인지라 심려를 끼쳐 드렸다면 백 번 사과해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소녀가 진정으로 협박하겠다는 의도를 품었다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가넷은 들어오면서 함께 가져온 가방을 테이블에 올렸다.

"이건 소녀가, 블랙 반다나의 대표로서 드리는 첫 번째 선물입니다."

혹여나 폭발 마법진 같은 개수작이 걸렸나 살짝 확인해 보았다.

마법으로 장난친 흔적은 없었다.

페르다는 검사를 끝내고 건네준 가방을 펼쳐 보았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서류였다.

"부디 읽어 보시지요. 틀림없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녀가 재촉하기에 페르다는 빠르게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가넷이 마음에 들 거라는 말을 한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페르다가 당장에 필요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틸다 파스칼에 대한 모든 것.'

그녀가 머칫과 스테판, 그리고 허먼을 제치고 파스칼 상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 꾸며 놓은 계획을 총망라한 문서였다.

틸다 파스칼이 심어 놓은 분탕 종자들의 조직도에서 플랜 C까지 상정해 놓은 계획도.

머칫과 스테판이 캐내려고 하는 정보 따위는 단순한 생쇼로 만들 정도로 그 내용은 상세했다.

'정확도야 후에 가서 알아봐야 할 일이지만....'

페르다는 의심하지 않았다.

최대 규모의 비밀 정보 조직인 블랙 반다나가 주는 메시지다.

거짓 정보를 줘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래도 이건 물어봐야만 했다.

"이 정보를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

제국의 영입에 몇 번이고 거절했던 블랙 반다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페르다는 그에 대한 이유가 필요했다.

가넷이 대답했다.

"단순히 제공해 드리는 게 아니라 중개에 가깝습니다."

"중개?"

"예. 틸다 파스칼은 저희가 오래전부터 노리고 있었던 타깃이었습니다. 첫 의뢰자가 무려 4년 전부터 추적과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이해가 간다.

이만한 정보가 쌓인 이유는 오래전부터 조사하고 있었으니 그런 것.

그리고 불쑥 찾아와서 선물이라고 틸다 파스칼의 정보를 내놓은 건 의뢰자의 뜻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인물입니다. 근 4년간 추적하고 붙어서 정보를 캐냈는데 그 4년 사이에 얼마나 대단한 일들을 해냈는지 아십니까?"

가넷이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저택에서 대부분을 자기 사람들로 만들고, 자기 시아버지를 중독시켜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죽이지 않고?"

"유언장을 고칠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재산을 가로채려고 술수를 쓰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양심의 자리에 욕심이 그렇게 가득 찬 여자는 처음이었습니다."

페르다에게는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페르다가 기억하는 틸다 파스칼은 단돌로 상회의 여주인이었다.

가주의 죽음 후, 빠르게 결혼식을 진행, 몇 달 후 차기 가주 또한 사망.

친인척이 없는 단돌로 상회를 계승한 건 틸다였다.

그렇게 파스칼 상회의 차기 주인으로 지목되어 머칫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자료를 읽어 보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여자가 얼마나 파스칼 상회를 갈망하는지 말이다.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이 여자가 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른다."

사실 별로 관심이 없기도 했다.

"모든 것을 짜 맞춰 본 결과, 배후에는 필리아즈가 있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럼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모든 마녀의 근원이라 불리는 필리아즈.

대부분은 원한으로 레드 서클을 강제로 뚫는데, 그것은 남자에 품은 한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틸다 파스칼은 마녀가 아니었다.

만약 마녀였다면, 자신이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정원계약을 맺은 것이로군."

정원계약.

마녀로서 각성하지 못한 여인에게, 마녀의 힘을 부릴 수 있는 계약이다.

마녀 못지않게 악의를 품은 여자가 마녀와 계약하여, 그들의 일을 대행하는 것.

하지만 그 숫자가 매우 드물고, 레드 서클이 각성한 것도 볼 수 없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계약 마법은 누구와 했는지도 파악했나?"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유력한 것은 요르 필리아즈입니다."

독과 뱀의 마녀, 요르 필리아즈.

그녀는 환술 마법에도 능하였으며, 틸다 파스칼이 보이는 카리스마와 조직 응집력을 미루어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페르다는 서류를 가방에 슬쩍 던지며 물었다.

"나는 정보를 얻었고, 의뢰인은 복수하게 되니 서로 윈윈이다 이런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정보는 어디까지나 선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거래를 성사하시겠다면, 두 가지 이점을 보시게 될 겁니다."

가넷이 검지를 펼쳤다.

"첫 번째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신속하게 일을 끝낼 수 있다는 점."

이어서 중지.

"두 번째는 이 일을 계기로 단돌로 상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페르다는 두 번째의 조건이 너무 파격적이라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단돌로 상회를 가지게 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인가?"

"우리가 아닙니다."

가넷은 정중하게 페르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님의 수중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큰 상회인 파스칼 상회.

그 두 번째로 큰 것이 바로 단돌로 상회다.

'그 두 상회가 합쳐진다면....'

제국의 절반을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제안이었다.

그만큼 크기에 믿기가 쉽지 않았다.

신뢰로 밥 먹고 사는 블랙 반다나의 말조차도 거짓이라고 느껴질 정도.

"어떻게 단돌로 상회를 가질 수 있지?"

"약속을 받지 않은 지금으로선 자세하게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틸다 파스칼과 연관돼 있습니다. 앙리 단돌로도, 리코 단돌로도 말입니다."

앙리 단돌로는 순진한 사람으로 이미 유명했다.

그 성격과 별개로 사업 수완은 뛰어나 아버지의 공격적인 확장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앙리가 기업을 안정화하게 되면....'

틸다는 숨겨 두었던 독니를 꺼내 앙리의 목을 물어 버릴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남자로군.'

그러나 동정하진 않았다.

죽었어야 할 운명에서 목숨을 부지시켜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니까.

"그녀를 몰락시킨다면 단돌로 가문 또한 신뢰를 잃게 되며, 단돌로 상회는 단돌로 가문에 지배받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의뢰자의 욕심을 너무 간과하는 것 아닌가?"

"블랙 반다나가 보증합니다. 이 조건을 행하지 않는다면, 저희가 집행자로 나설 것입니다."

블랙 반다나는 유서가 깊은 조직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신뢰를 지킨다.

상대가 지키려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뺏어서 가져오는 것이 그들의 사업.

상회를 먹을 수 있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는 페르다였다.

아주 달콤하고 커다란 떡이 굴러오는 만큼 몇 번이고 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일이 정말로 순조롭게 끝날 수 있는 문제인지 말이다.

블랙 반다나는 신뢰할 수 있으나, 그 의뢰자는 어떤 인간인지 전혀 모른다.

블랙 반다나와 거래를 끝마치면 그 의뢰자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 않던가?

그 상대를 추론하기 위해서라도 페르다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 보기로 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

"이번에도 제안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개를 참 좋아하는군."

"이야기하다 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군요."

"얘기해 보게."

"우선은 인력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인력인가?"

"요르 필리아즈와 계약의 매개체를 찾는 것입니다."

정원계약이 정식으로 이루어지려면 매개체가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매개체가 파괴하기 쉬울수록, 눈에 띌수록 힘이 강해진다는 것.

저택을 자기 사람들로 채우고, 단돌로 상회 주인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드는 독이라 한다면, 틀림없이 파괴하기 쉽고 눈에 띄는 물건이었다.

"그 여자의 매개체는 집 안에 있을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그 위치를 특정해 낼 만한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네는 그 전문가를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

가넷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드 스왈로우, 이제는 제드 경이라 불러야 할 그 남자의 힘을 빌렸으면 합니다."

이때는 직접적인 도둑질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제비로만 알고 있을 시기이다.

만약 할림에서 활약을 지켜보았다 한다면, 그의 몸놀림이 곡예사 이상이라는 정도로만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드가 도둑질에도 재능이 있다는 건 알려지지 않았을 터인데.'

과연 블랙 반다나다.

정보력 하나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방대하고 추리 또한 뛰어나다.

제국이 탐할 만한 정보 조직답다.

페르다는 생각을 마치고 그에 답을 주었다.

"빌려주겠다. 두 번째는?"

"틸다 파스칼을 백치로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백치?"

"목숨은 살려 두되, 육신이 영혼을 감금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살아도 살지 못하는 그런 상태로 만들어 버리길 원한다는 말이군."

그 의뢰인이라는 자는 틀림없이 복수를 원하는 것이다.

지독한 복수를 수천 번이나 해 본 그로서 백치로 만드는 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아주 잔혹한 짓이었다.

'그런 복수를 바라는 자가 누가 있지?'

틸다 파스칼의 악명을 따지면 누구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종합해 보았을 때, 가장 유력한 건 한 명이었다.

'리코 단돌로.'

전체적으로 보면 그가 가장 유력했다.

자신이 일궈 놓은 이 사업체를 쓰레기 같은 며느리에게 뺏기느니, 남에게 넘겨 버리겠다는 선택지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런 요구를 했다는 건....'

블랙 반다나는 페르다가 가능하다고 믿었기에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르다가 가진 무엇을 보고 가능하다고 믿는 것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내게 바라는 건가?"

그녀가 슬쩍 눈을 굴려 페르다의 대각선 옆에 선 소녀를 보았다.

"드래곤 피어입니다."

루리였다.

"평범한 드래곤 스폰들은 드래곤 피어를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드래곤에 가까워질 만큼 단련한 드래곤 스폰들은 일부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루리를 향했다.

"그리고 저기 있는 메이드가 드래곤 피어를 사용할 만큼 뛰어난 자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드래곤 피어를 원합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단돌로 상회라는 거대한 회사를 페르다에게 넘기는 데는 그만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넷은 대도의 힘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드래곤의 힘도 필요했다.

"하."

페르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던졌다.

"참으로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부탁이군."

페르다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분위기도 따라 차갑게 흘러내린다.

가넷의 목젖이 크게 울렁였다.

그녀는 지금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줄타기하는 것과 같았다.

헛디디는 순간 심연의 나락 밑으로 떨어지게 되는 만큼 신중하게 말했다.

"주제를 넘는다는 건 소녀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단돌로 상회를 넘긴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며, 이는 발드로바 공왕령에 충분히 보상이 될 만한 조건이라 생각했습니다."

"같잖군. 이 거래에서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하나?"

페르다가 차갑게 성을 내며 묻는다.

"자네는 인간의 재보로 드래곤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깟 돈으로 매수가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것인가?"

"가능합니다."

"?"

"?"

루리가 병풍처럼 서 있다가 끼어들었다.

페르다는 그녀를 슬쩍 보았다.

수 초 동안 눈을 마주치다가, 그가 가넷에게 말했다.

"가능하다는군."

"어... 정말입니까?"

"어차피 내 시종이 아닐세. 본인이 된다고 했으니 되는 것이겠지."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는지, 가넷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루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력에 감사드립니다. 위대한 발드로바의 시종께서 생떼나 다름없는 부탁을 들어주신다니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셔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불멸자들을 희롱할 만큼 저희는 오만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루리의 조력까지 확인했으니, 가넷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래에 크게 차질이 없는 듯하니 준비한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계약서를 읽어 보시고 승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서류 작업은 옆에 서 있는 이사벨라가 직접 했다.

함정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다시 페르다에게 건네주며 계약이 성립되었다.

루리의 힘이야 나중에 빌리면 되는 노릇이고,

"제드 경은 어찌하겠나?"

그건 이미 생각해 두었다는 듯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정보에 따르면 곧 도착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섭정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제드 경과는 제가 직접 이야기하겠습니다."

"잘될지 의문이로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드 경과는 이미 구면인 사이이기에."

페르다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구면이라고?"

"함께 스왈로우라는 용병단에서 일했었습니다. 3년이나 했으니 꽤 진득한 인연이지요."

"스왈로우...."

제드 스왈로우.

가넷 스왈로우.

그 두 공통점을 지금에서야 눈치챘다.

'제드에 대해서 아는 이유가 있었군.'

가까웠던 사이였기에 제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것이었다.

잠시 후, 복도에서 경박하게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알현실 앞으로 도착했다.

"섭정님, 돌아왔습니다."

훈련을 위해서 파견 갔던 제드가 호기롭게 돌아왔다.

"파견 훈련을 순조롭게 마치고, 기사도로 무장해 버린 제드 스왈로우, 당당하게 입성했습니다."

"잘 왔네."

"아 손님이 있었군요. 손님은...."

둘은 한참 동안 눈을 마주쳤다.

기사도로 당당하게 무장했다는 제드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시퍼렇게 질렸다.

"으헉! 핀드티쓰!"

귀신을 본 듯 화들짝 놀라더니 투구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가넷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제드."

"...누구세엽? 저는 제드가 아니데엽, 저는 피치 힐에서 온 말콤이라고 해엽."

"이상한 코맹맹이 소리 하지 마라. 네가 여기에 소속된 기사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니 글쎄, 아가씨. 뉘신지 모르겠다니까엽. 저는 말콤이에요. 빡통이죠. 저는 숫자도 모르고, 왼쪽 오른쪽도 몰라엽."

"하아...."

한숨을 길게 내쉬는 가넷.

그대로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속된 말로 조인트를 까 버렸다.

빠악!

알현실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큰 소리.

제드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펄쩍 뛰었다.

와중에 투구로 얼굴을 가리는 건 잊지 않았다.

"크흡! 흡! 흡! 흡!"

"이 망할 겁쟁이 자식! 따라와라! 네놈은 나한테 팔렸으니까!"

"으하아악! 그게 뭔 소리야?! 섭정님? 이게 무슨 소리예요!? 섭정님?!"

귀를 잡은 채 끌고 가는 가넷과 설명을 요구하는 제드.

그러나 제드의 눈에 비친 마지막 모습은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페르다의 모습이었다.

끝내 성문 밖을 벗어나는 것은 흑마 여섯 마리와 갈색마 한 마리.

갈색마에는 제드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뒤에 앉은 페넬로페까지.

덩달아 함께 팔려나가는 신세인 그녀도 시끄럽게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지만, 숲으로 들어가면서 멎어 들었다.

"응?"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루리가 운을 뗐다.

"왜 그러냐?"

"말은 전부 빠져나갔습니다만, 사람 하나가 부족합니다."

"제드와 페넬로페가 빠져나가지 않았더냐?"

"저도 알고 있습니다. 검은 놈 중에서 한 명이 없습니다."

루리는 이상함을 느껴 곧바로 그 한 명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수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웬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대표를 기다리고 있던 성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의 가슴에는 친절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두 번째 선물.

생일 선물 포장지를 벗기듯 흑포를 벗겨 보았다.

그러나 왜 인간이 두 번째 선물인지 알 수 있었다.

"읍! 으읍! 읍읍!"

그는 프랭크 폰테인이었다.

습격 당시에 실종된 남자.

그리고 어쩌면 이 사태에서 증언해 줄지도 모르는 남자.

입에 물린 재갈을 벗기자, 그가 이렇게 소리쳤다.

"부, 불겠습니다! 모든 걸 불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루리가 왔다.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는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바람 정령 하나를 남겨 두고, 그 정령에게 보고를 들은 것이겠지.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재빠르게 쫓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 빠른 대응이다.

그러나 최악이었다.

누구보다 든든한 원군이었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악수 그 자체다.

아벨이 루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아벨은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루리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벨은 루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똑똑하다.

'거래가 이거였나?'

페르다는 그것이 악마의 조언임을 직감했다.

'악마가 이야기했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이야기.'

그러나 동족이 이야기한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

딜레마.

발드로바와 실버윈드의 자손들 사이에서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어느 쪽도 버릴 수 없다.'

페르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루리는 무릎을 꿇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두 가지의 선택을 모두 안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

그리고

'최악의 선택.'

이제야 알겠다.

'이런 식으로 루리를 엮어 낸 것이냐?'

악마의 계략과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

그 모든 것이 평화를 지키려 했던 아이에게 마수를 뻗은 것이다.

'그래서 발드로바의 곁에 남지 않았던 것이냐?'

평화를 사랑하기에,

발드로바를 사랑하기에,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냐?

그때였다.

페르다의 몸속에 있던 마나 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발드로바를 생각하며 그녀를 애타게 찾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각이었다.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것은 페르다의 심장을 어루만지고, 단전 속 서클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무력한 루리의 얼굴에 발드로바의 얼굴이 겹친다.

그녀가 괴로워하고 있다.

그것이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보고만 있을 거야?

아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저것은 발드로바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리가 사라진다면, 발드로바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절제의 사슬이 부서진다.

레드 서클에 만들어졌던 마나들이 은밀하게 전방위로 뻗어 갔다.

어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모든 것은 페르다의 손아귀에 있었다.

동굴도.

루리로.

아벨도.

그리고 그의 내장 속마저도.

"쿨럭, 쿨헥!"

아벨이 주저앉으며 괴로워했다.

그의 입에서는 피를 쏟아 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폐가 망가졌다.

"이 개, 개자, 쿨럭!"

동귀어진이라도 하려고 움직이려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다.

짙은 어둠과 폭주하듯 움직이는 레드 서클.

드래곤 스폰을 제압하는 덴 충분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했던 아벨이었으나,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나를 죽이면...."

아벨이 피를 토하며 말했다.

"모든 실버윈드들이 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할 거다."

드래곤 스폰을 죽인 대가는 만만하지 않다.

평생을 추적당하며, 내일 아침에 깨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삶.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삶.

"상관없다."

페르다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너희 족속들이 하는 협박은 이제 신물이 나는군."

페르다는 손을 들었다.

검게 물든 그의 손바닥은 마치 무언가를 올려 둔 것만 같았다.

밑바닥이 둥글고 손바닥에 꽉 차는 물건을 쥔 것처럼.

마치 심장을 쥔 것처럼.

"너희들이 그렇게 전쟁을 바란다면, 나도 피하지 않겠다."

페르다는 주먹을 쥐었다.

페르다는 루리와 함께 콘실러스 백작의 성으로 돌아왔다.

"고맙다."

"...."

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울고 난 이후로부터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거라."

긍정도 부정도 없다.

대신 손이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안감이 손을 타고 스며들었다.

"루리."

"...."

"전쟁이 일어날까 봐 두려운 거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뜻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맞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

"너는 약혼자의 곁으로 돌아가거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서 다과회를 준비하거라."

"...."

"네 주인을 위해 그래 줄 수 있겠느냐?"

그제야 루리가 옷깃을 놓아 주었다.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는 쌩 날아가 버렸다.

페르다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발코니 문을 열었다.

성안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저 악마 년을 얼른 죽여!"

"그냥 죽이지 말고 성스러운 빛으로 태워 죽여야 합니다!"

뿔이 잔뜩 난 기사들.

"흐아아앙!! 죽기 싫어어어!!"

성이 떠나가라 우는 분홍 머리 악마.

"아니, 좀 진정하고 내 얘기를 들어 봐요!"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재하려고 진땀 빼는 제드.

"제드 경 비키시오!"

"저 악마 년에게 홀리기라도 한 거요!?"

"이 망할 낙하산 기사 자식이! 당장 그년 이리 보내지 못해!?"

"아니, 이 사람들이 못 하는 말이 없네! 내가 이년을 감싸는 게 아니고, 나도 명령을 받았다니까!?"

"흐아아아, 기사니이임! 살려 주세요오!"

"아니, 이 미친년아! 내 다리 붙잡지 말고 떨어져! 어우씨 진짜, 그 양반 때문에 무슨 이 개고생을!!"

일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이 일을 받아들이는 건 실수였다.

제드는 그렇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얼른 죽여 버려!"

"흐아아아앙!!"

"대체 무슨 일인가?"

"이 개만도 못한 악마 년이 섭정님이 타고 올 게이트를 가로채서 이 사달을... 응?"

"서, 섭정님?"

화제의 중심에 있는 그 섭정이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네. 갈비뼈랑 손가락이 나가긴 했지만, 별 이상은 없군."

"저 악마가 말하길, 섭정님께서 들여보냈다고 거짓말을 하던데...."

"우아아앙!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거짓말 아니네. 내가 들여보낸 게 맞아. 그러니깐 살기를 거두고 돌아가도록 하게."

"아, 예. 그렇다 하시면...."

"보세요! 맞잖아요! 왜 날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는데! 진짜 악마생 서러워서 진짜 우브븝!"

"아까부터 진짜 시끄럽네, 진짜!"

불난 집에 기름을 냅다 끼얹으려는 페넬로페.

제드는 그 입을 거적때기로 봉해 버렸다.

"갑작스러운 작전에 모두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나는 괜찮으니, 가서 쉬도록 하게나."

그렇게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페르다는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두 명.

진땀 빼고 있는 제드.

그리고 눈물 콧물 질질 흘리는 페넬로페.

"자네 둘은 따로 할 일이 있어."

* * *

콘실러스 백작 성의 이른 새벽.

검은 하늘은 슬슬 색을 찾기 시작했다.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의 황혼이었다.

페르다는 잠들지 않고 기다렸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손가락이 꺾였었던 그였다.

치유 마법을 써서 몸을 복구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어느 때보다 더 피로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졸음을 참고 기다렸다.

잠시 후, 페르다는 주변에서 침입하는 기운을 느꼈다.

"우리 달링, 돌아왔구나?"

대악마, 시트리가 어둠 속에서 기어 왔다.

"일이 꼬인 것 같아서 참 걱정이었는데, 어찌저찌 됐나 봐?"

"...."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안 그래?"

"그래, 네 잘못은 아니지."

페르다는 등받이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런데 무사히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 것 같군."

"그럴 리가. 비즈니스를 죽은 사람이랑은 할 수 없잖아? 누구보다 당신의 생환을 기다렸다구?"

요염한 미소를 짓는 시트리.

하지만 몇 시간 전에 보았던 그녀의 표정과 사뭇 달랐다.

조급함이다.

"네 개는 죽었다, 시트리."

"내 개? 누구 말이야?"

"시치미 떼지 마라. 아벨 실버윈드가 네 개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다."

"어머, 진짜 너무한다. 달링을 싫어하는 사람이면 죄다 악마들의 편, 이런 거야? 나 그런 편견 싫어하는데...."

능청스레 잡아뗀다.

그녀의 눈이 그믐달처럼 휘었다.

"설령 그 아벨이 내 개라고 해도 그 증거는 없잖아?"

시트리가 진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증거는 없다.

악마와 거래를 했다면, 인장이나 혹은 마력 흔적이 새겨지기 마련.

아벨에겐 그런 게 없었다.

"증거도 없이 생악마를 잡아떼면,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그토록 부인하면, 그것들이 나를 증인으로 세우려고 할 거야. 그러면 나는 부정할 거고."

"그럼 내가 곤란해지겠군."

"멋대로 침입해서 살인까지 저지른 페르다 섭정이 모든 게 악마 탓이라고 돌리면서 책임을 회피한다... 라는 그림이 나오겠지. 그리고...."

시트리가 슬금슬금 기어 왔다.

"달링이 살려고 발버둥 치는 꼴로만 보이게 될 거야. 설령 그렇게 안 보이더라도 인간들이 달링을 가만히 둘 리가 없을 테지."

페르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정작 악마와 손을 잡았던 건 달링이잖아?"

시트리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영토에 몰래 들어가기 위해서 악마의 마법을 빌렸고, 악마를 구출해 냈어."

시트리는 이미 그 증거를 확보해 놓았을 것이다.

벤딩 브리지를 제공해 주겠다는 그 시점에서 덫을 몇 중으로 치며 페르다가 걸릴 수밖에 없도록 해 놓았다.

"가엾고 귀여운 우리 섭정님."

시트리가 페르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상하지 않아? 악마와 거래를 하지 말라는 말이 왜 세월을 거듭해도 바뀌지 않을까? 매번 그렇게 강조를 해도 똑같은 실수를 하거든."

"...."

"달링이 이미 내 벤딩 브리지를 쓴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만약에 내가 아니라 다른 아이에게 더 빨리 부탁했더라면, 이런 일을 없었지 않았을까?"

페르다의 모든 결정이 실수였음을 조롱한다.

흐름이 기운다.

악마는 언제나 그 틈을 노린다.

시트리가 제안하려 입을 열었다.

"만약이라...."

페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이라는 말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는 자들의 도피지."

페르다는 고개를 들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만약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

시트리의 것이라 여겼던 분위기가 단박에 바뀌었다.

시트리는 그 눈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다.

상황 파악도 못 하는 멍청이인가 싶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건 틀림없이 결단력으로 빚어진 확신이었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거야? 아니면 발드로바와 파혼이라도 할 셈? 어느 쪽이든 당신에게 좋을 건 없을 텐데?"

"전쟁도 파혼도 없을 거다."

페르다는 여유롭게 말했다.

"아벨은 악마 추종자였고, 협력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들었어?"

시트리는 어이가 없었다.

"말했잖아? 증거가 없다고. 증거가 없는데 달링을 어떻게 믿어? 게네가 바보야?"

이 판은 시트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서 많은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역공을 먹여 버릴 준비를 마쳤다.

페르다도 바보는 아니었다.

악마의 거래에서 오는 후폭풍을 막기 위해 페르다도 만반의 준비를 마쳤었다.

"그래, 증거는 없지."

그러나 아벨을 죽이면서 그 패들은 전부 손에서 벗어났다.

시트리의 카드에 대항할 카드는 없다.

"그러니."

대신 그가 쥔 것은,

"이제부터 네가 만들 것이다."

악마를 묶어 버릴 개목줄이었다.

"이오르가 님은 정정하시지? 응? 요즘 마탑에 구설수가 많더라고?"

"걱정할 필요 없답니다. 에르데스 당신이 받은 비난에 비하면 새 발의 피, 파리 앞발에 묻은 먼지 수준에 불과하거든요.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이죠."

"어머, 그래? 그래도 반짝반짝 빛나야 하는 보석에서 잔흠이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적어도 수장이 그런 걸 용인해선 안 되지?"

"괜찮습니다. 자기가 깨진 유리인 줄도 모르고 보석이라고 주장하는 것들과는 클래스가 다르니 말이죠."

스쳐도 치명타인 상황 속에서 미소를 유지하는 두 사람.

페르다와 다르게 그들 사이에 깊은 골이 느껴졌다.

그 대화를 보고 있노라니, 모욕에 대한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마저 변호해 보자면, 페르다 님께서 구사하는 것은 그림자술입니다. 환각과 음욕을 관장하는 시트리와 결이 맞지 않는데, 악마와 거래를 했다고 하는 건 맞지 않아요."

"아몬이 마르바스의 마법서를 줄 수도 있지. 그런 게 무리는 아니거든."

아몬은 불의 악마, 마르바스는 얼음의 악마로 서로 앙숙지간이다.

"그게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고, 악마들이 그런 의미 없는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죠. 흑마법의 권위자라는 분이 그런 것도 모르시면 어떻게 합니까?"

에리카의 말대로였다.

내가 수고를 들이고 남 좋은 꼴을 보여 주는 셈이다.

악마들이 그걸 용인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에르데스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생떼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는 억지를 부리고, 억지로 흔들려고 했을 뿐.

갑작스레 나타나 훼방을 놓는 에리카가 무척이나 짜증이 났다.

"그럼 용의 부군이 될 사람이 흑마법을 쓰는 것은 괜찮다고 보는 거야? 아니면 발드로바를 지독하게 악룡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하는 개수작? 에리카 짱, 새하얀 옷이랑 다르게 속은 시꺼멓네?"

"발드로바 섭정이 흑마법을 쓴다고 해서 본성이 사악하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주장했고, 에르데스는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에리카 짱. 누누이 말했잖아? 그 망할 흑마법은 세르데스를 오염시키는 더러운 것들이야. 난 그런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어."

그것은 에리카가 가지고 있는 결벽증.

"인간들의 레드 서클은 감정에 기인하는 거라고. 그중에서 가장 쉬운 것은 부정적인 감정. 그 부정적인 감정은 어둠을 이끌어 낸다고. 흑마법을 쓰는 것들은 위협이 되는 것들이야."

"기사의 덕목 중에는 분노를 이용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룰 줄 안다면, 그것은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악마 새끼들의 마법이라고."

"악마 자체의 의도는 불순하나 악마에게 파생되었다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 아직도 그놈의 용마 전쟁에 사로잡혀 있네. 그래서? 너도 거기에 참여했고, 흑마법을 써서 전세에 보탬이 되었으니 발언권이 있다고?"

이건 또 놀라운 사실이었다.

에리카 이오르가.

다른 스폰들과 다르게 모든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엘레멘탈 마스터이며, 마이스터다.

그녀가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다.

"에리카 짱, 그건 마법이 아니야. 인간들에게 전능감을 쥐여 주고, 지닌 악한 본성을 끌어내서 자신은 물론, 타인마저 불행하게 만들어 내는 도구라고?"

"아뇨, 당신은 틀렸습니다."

에리카 또한 단호하게 주장했다.

"마법은 도구이며,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몫입니다. 지옥의 마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연구하고 발전할 가치가 있다면, 그건 써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꼬맹이가 잘 쓸 거라고 믿는 거야?"

에르데스는 페르다를 턱짓했다.

에리카도 눈을 돌려 페르다를 보았다.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 듯한 눈을 했다.

"변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해야 하는 법이죠."

에리카가 한 음절 음절 또박또박 내뱉으며 말했다.

"에리카 이오르가, 모든 블루 드래곤 스폰들의 대표로서 이 자리에서 발드로바 공왕령에 동맹을 제안합니다."

갑작스러운 동맹 선언의 충격을 이용하여 상대측을 압박했다.

"만약 실버윈드 측에서 전면전을 선언하시겠다면, 이오르가 측에서는 발드로바 공왕령을 수호하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호소력이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는 상대의 기세에 대응했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던 에르데스가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거야, 에리카 짱.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짓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당신은 너무 극단적입니다. 페르다 섭정을 이대로 둔다면,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그를 괴롭힐지 뻔히 아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 누가 나서래? 그거랑 에리카 짱이랑 무슨 상관인데?"

"100년 이후 그 누구도 꺼내지 않았던 극동부 탈환을 선언한 남자입니다. 대륙을 수호하는 입장으로서 그 발언을 했다면 지지할 수밖에 없죠."

"흐응. 그래서 저 어린 것이랑 편을 먹겠단 말이지?"

한층 더 표독스러워진 눈동자.

이야기고 뭐고 다 때려치고 지금 당장 전투를 벌이고 싶어 근질근질해 보인다.

가만히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고즈가 입을 열었다.

"에르데스."

"그래, 당신도 무슨 말 좀 해 보고 그래! 저쪽은 2명이고 우리도 2명이니까, 뭐 좀 되겠네!"

"이만 돌아가지."

"내가 저년을 맡을 테니, 뭐?"

에르데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즈를 쏘아보았다.

"뭔 소리야? 나 아직 이야기도 안 끝났는데?!"

"내가 원하던 건 전말뿐이다. 아벨, 그 버러지 새끼가 뭘 했는지만 알면 됐었다."

"말했잖아!! 그건 페르다 섭정이 파 놓을 수 있는 함정—!"

"죽기 전에 이미 거래를 했지 않나?"

"그렇긴 한데—!!"

"그럼 끝이다. 그 버러지가 거래를 했고, 섭정은 처형을 했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왜 멋대로 처형했냐고 물으면 되잖아!? 머리에 얼음만 찬 것들이 갑자기 왜 생각을 하고 그래!?"

"악마와 거래를 한 주제에 인간 하나도 못 이기는 놈은 그런 운명도 싸게 치인 거다."

고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의 눈이 슬쩍 루리를 마지막으로 담고는 복도를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에르데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페르다를 쏘아보았다.

"이야기는 끝난 것 같네. 페르다 섭정, 이대로 끝낼까?"

초당 3연발로 깜빡이는 눈썹

해명할 것이 없냐는 물음과 더 싸우자는 도발이 담겼다.

머리가 식은 페르다가 대답했다.

"배웅해 드리죠."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을지도? 나 흑마법사들이랑 옆에 있으면 죽어 버리고 싶어져서. 아니면 죽여 버리고 싶은 건가? 잘 모르겠네. 아무튼, 그렇거든?"

이젠 감출 기색도 없이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몸을 휙 돌려서는 복도를 우다다 달리며 소리쳤다.

"아씨! 같이 가! 진짜!! 숙녀를 에스코트하지 못할망정 버리고 가는 건 너네 종특이야!?"

* * *

아벨 실버윈드의 죽음.

페르다가 벌인 악마와의 거래.

그 두 개의 폭풍이 찾아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이라는 생각과 다르게 무사히 일단락되었다.

한숨을 돌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페르다는 맞은편으로 시선을 두었다.

고즈와 에르데스가 차지했던 자리는 이제 에리카가 앉아 있었다.

페르다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절 도운 겁니까?"

그 물음에 에리카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드래곤 스폰의 자존심이 가득한 목소리다.

"여기서는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나요? 당신을 도와줬는데?"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던 일이었습니다."

"에르데스의 페이스에 휘말리셨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저 여자는 속 긁는 솜씨가 아주 대단하거든요. 저야 워낙 많이 싸워 봤으니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쉽지가 않아서요."

맞는 말이었다.

페르다도 무심코 말려 버렸으니까.

"그리고 멋대로 동맹 제안을 해 버리셨던데."

"불만이었으면 물이라도 끼얹지 그랬나요? 그 머릿속에 얼음만 찬 바보들에게 도발도 해 버리시고?"

그녀의 도움을 바란 적이 없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존심만 세운 거짓말이다.

"물론 일을 원만하게 풀어 주신 점에 대해선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그 감사의 뜻 잘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맹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번 변호에서 제 진심이 닿지 않은 모양이군요."

"전 그런 건 믿지 않습니다."

"예, 알고 있어요. 당신 같은 사람들에겐 증거가 필요하겠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휙 그었다.

그 순간, 허공에서 클립보드 하나가 형상을 드러내면서 다과 테이블 앞에 놓였다.

"이게 뭡니까?"

"여기 날짜 보이시죠? 150년 전."

"예."

"첫 용마전쟁 이후, 첫 블랑카로스 님의 주도하에 대공의회가 열린 날, 그분이 본성이 사악하다는 이유로 악룡으로 지정되기 전날입니다. 바로 다음 날에 저희 이오르가 님께서 제안하신 내용이죠."

그 문서의 서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프로젝트: 헤스티아

헤스티아는 불을 지키는 여인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고대 신화의 이름이었다.

비밀 등급은 최고 레벨, 실행 등급은 최우선이라 추가로 기재되어있었다.

페르다는 그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개요는 이오르가가 발드로바의 몸에 깃든 고드윈의 광기를 제거하기 위해 연구한다는 것이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그 뒤는 대충 날짜만 훑어보고는 덮어 버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습니까?"

"단순히 이오르가 님의 의지가 발드로바 님을 방패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해석해야 합니까? 만약 그때부터 이오르가 님이 고드윈에 대한 위협을 느꼈기에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끝인데."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고 다른 것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문서를 제쳐 두고 이번에는 묵직한 물건을 꺼냈다.

수정구였다.

"이건 이 발의가 담긴 기록입니다. 이 내용에 이오르가 님이 발드로바 님을 지키려 했다는 의도가 있었음을 증명해 보이죠."

음성 기록이라면 또 다르다.

무엇보다 이 내부 자료를 바깥에 보여 줄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니 그들의 속내가 좀 더 명확할 것이었다.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었고, 수정구는 그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이오르가 님, 이 발의는 제가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까?

에리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누군가가 대꾸했다.

-맞아.

아주 짧았지만, 페르다는 이 목소리가 블루 드래곤 이오르가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단순히 기록일 뿐인데도, 얼마나 깊은 마나를 지녔는지 느낄 수 있는 울림이다.

-저는 반대합니다.

그 반대의 목소리는 다시 에리카였다.

그녀는 들리는 목소리들 중 누구보다 격렬하게 반대했다.

-우리는 그 망할 도마뱀을 도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크흠!"

에리카는 헛기침을 하며 잠시 수정구의 재생을 멈추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려 했으나,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당시에는 저희 스폰들도 많이 죽었기에 감정적이었습니다. 그 점을 참작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말하는 내용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수정구의 내용은 편집하지 않은 날것 그 자체라는 점이었다.

-아니. 우리가 도와야만 해. 그 아이는 악룡이라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 아이가 그렇게 날뛰었던 것은 고드윈의 영향 때문에 벌어진 거야.

-그럼 죽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불안정해진 것이라 한다면, 그래야만 하지 않습니까?

-죽일 수는 없어. 이미 고드윈이 죽었고, 실버윈드도 죽었어. 더 이상 희생이 있어선 안 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오르가 님. 이오르가 님은 누구보다 발드로바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원수를 돕겠다니요?

-싫어하지. 하지만 그 아이가 멍청해서 싫을 뿐이야. 본성이 악하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 아이를 죽일 수는 없어.

느껴졌다.

이오르가는 발드로바를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걱정했다.

-그러다가 제2의 고드윈이 탄생한다면 어떡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미래에 닥칠 것이라면?

-그러진 않을 거야. 그 아이는 불안정해진 자신의 모습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버틸 테니까.

순수히 이 연구가 발드로바를 돕기 위해서였음을.

-그렇게 멍청하니깐 그 정도도 할 수 있는 거고.

그러나 시작되는 악담.

-싸움만 잘하지, 아둔하고 머리도 안 좋지, 아는 게 없으니까 머릿속에는 꽃밭이나 다름없고,

"크흠!"

-그런 주제에 겁은 많고, 상처도 잘 받고, 자기주장도 제대로 못하고,

"크흐흐흠!"

-힘의 위상이라는 놈이 스폰 하나 거느리지도 않고, 지 혼자 다 짊어지겠다는 꼴이 그냥 머리를 안 써서 붉은 도마뱀 한 마리에 날개를 붙여서 허우적 날아다니는 거랑 다를 바가—.

"콜록! 콜로오옥! 콕콕!"

에리카는 사레들린 사람처럼 기침하다가 결국 레코드를 멈춰 버렸다.

"...."

에리카의 이마에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에리카는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이후로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페르다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10분 정도 넘어가도 괜찮을까요?"

92화. 칭찬

얼떨결에 받은 두 번째 선물, 프랭크 폰테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불었다.

페르다와 이사벨라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단돌로 상회를 주겠다는 건 틸다가 준비한 것들을 주겠다는 뜻이었군요."

제국 최대 규모의 상회를 인수해서 넘기겠다는 게 조금 의아했었다.

프랭크 폰테인이 증언을 쏟아내면서 그 윤곽이 드러났다.

-제가 협력하면 몇 년 후에 단돌로 상회의 본부 간부가 되기로 약속받았습니다! 대신 제가 암살자들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멍청한 짓을 했군."

상인이면 적어도 이득과 손해를 꼼꼼히 따져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득, 스테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프랭크 폰테인이 출세하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무능함은 이 반란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렇다고 해도 프랭크 폰테인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라고 무작정 믿지는 않았다.

그는 어설프게 바보였고, 어설프게 똑똑했다.

프랭크 폰테인이 주도했으나, 그 더러운 계획의 총책임자는 따로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문서가 그의 수중에 있던 것이다.

모든 자금을 대 줬다는 확인란에는 앙리 단돌로의 도장이 찍혀 있던 것.

틸다는 최악의 상황에는 단돌로 상회에 죄다 덮어씌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페르다 또한 이 문서를 쓸 수 있었다.

"블랙 반다나가 단돌로 상회를 넘길 때, 이 문서를 쓰겠다는 말이겠군요."

"충분할 거 같은가?"

"단돌로 가의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건 가능하지만, 사업체를 인계한다는 건 아직 무리입니다."

어찌됐든, 그 문서와 증언 덕분에 페르다의 일은 수월해졌다.

틸다 파스칼은 틸다 파스칼대로.

앙리 단돌로는 앙리대로 몰락하는 게 가능하다.

'정말 리코 단돌로가 의뢰자인가?'

단순히 쓰레기 며느리로부터 사업체와 아들을 지켜 낸다고 했을 때는 그가 유력했다.

하지만 이 문서를 페르다에게 줬다는 시점에서는 아들을 사업체에서 떨궈 버리겠단 것이고, 사업체를 살린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게 아버지가 할 선택인가 싶었다.

"제삼자나 다름없는 페르다 님에게 어떻게 상회를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반발이 꽤 거셀 겁니다."

"그 점에서는 걱정할 게 없다."

페르다에게는 마도공학이라는 가장 매력적인 요소가 있었다.

많은 투자자가 군침을 흘리고 있는데, 단돌로 상회에 제시한다면, 새로운 경영자를 환영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정상적으로 뺏어 오는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데 말이지요."

"행정관의 입장으로는, 지금이라도 관두는 편이 낫겠나?"

"재정에는 도움이 되는 일인데, 어찌 그만두겠습니까? 인수 관련해서 좀 더 알아보고 준비를 미리 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이사벨라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넣으며 미소를 지었다.

재정으로 앓는 소리를 자주 냈던 그녀였기에 이 제안은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었다.

모두가 즐거워야 할 상황 속에서 페르다는 슬쩍 루리를 보며 물었다.

"그것보다 너는 어떠냐?"

"뭐가 말입니까?"

루리는 늘 그렇듯이 사무적이고 무뚝뚝했다.

"인간의 계획에 협력하겠다는 것. 네가 그렇게 좋아할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정말로 괜찮으냐?"

루리가 대답했다.

"드래곤 스폰으로서 자존심이 있긴 합니다만, 바보는 아닙니다. 이런 일에 자존심을 세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가?"

"무엇보다 원망한다면, 주인님을 원망해야 할 일이지요."

루리는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다른 드래곤들과 다르게 재보는 모으시지도 않고, 한량처럼 살아가시던 분이셨으니 이런 재정을 끌어와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죠. 그러니 이 보잘것없는 시종이라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주인에게 쌓인 것이 있었구나."

"불만 있으십니까?"

"아니."

제 주인을 욕한다 해도 제 주인을 위해서 움직이는데 어찌 기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힘을 내 주어서 네게 고마울 뿐이다."

페르다는 그녀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본 루리가 흠칫 떨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섭정님."

그녀의 머리에 손이 닿기 직전,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왜 그러지?"

"지금 루리 양의 머리를 건드리려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만?"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겁니까?"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예상치 못한 감정적인 반응에 페르다는 일단 답했다.

"아이를 칭찬할 때는 이렇게 해야 효과적이라고 하더군."

"연소자를 칭찬하는 법은 맞습니다만, 그렇다면 루리 양에게는 해선 안 되는 행동이지요."

"그런가?"

"저는...."

"드래곤 스폰은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이는 페르다.

이사벨라는 이어서 주장했다.

"무엇보다 루리 양은 섭정님보다 몇 배는 넘는 연장자. 비록 어리고 지지 않는 꽃과도 같은 불멸의 순수함을 지닌 듯한 외견을 지니고 있지만, 어른임을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가?"

비록 사심이 가득한 미사여구가 잔뜩 붙었지만, 이사벨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페르다는 눈을 돌려 루리를 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다 님보다 몇백 년은 더 살아왔는데, 그런 칭찬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루리는 이치를 따져 주장하는 모습에 동조하는 듯했지만, 내심 못마땅한 감정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그것이 깎여 나간 체면으로 인한 울분이라 생각했다.

"미안하군. 내 칭찬법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니 머리를 쓰다듬는 건 하지 않도록-."

"아닙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가로채는 것은 이사벨라였다.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제가 말씀을 드렸듯이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하는 칭찬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이사벨라가 안경을 밀어 세우며 말했다.

"그렇다면 똑같은 드래곤 스폰 중 연장자가 연소자를 칭찬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

루리와 페르다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이사벨라는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 말은즉, 연장자인 제가 루리 양을 칭찬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응?"

"...하?"

페르다는 다시 물음표를 띄웠고, 루리의 얼굴은 썩어들어갔다.

이게 무슨 농담인가 싶은 두 사람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가 루리 양의 머리를 쓰다듬음으로써 칭찬을 해 드리겠단 말입니다."

이사벨라의 안경은 반짝인다.

그녀는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한 발짝 앞을 내디디는 이사벨라.

루리는 한 발짝 물러나며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연상으로서 제가."

그녀의 손가락이 꾸물거렸다.

"마구마구 칭찬해 드리도록 할 테니 말입니다."

사무업과 마법만 부린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연한 손가락 놀림.

흡사 심연 밑자락에서 기어 올라온 촉수처럼 꿈틀거렸다.

끝내 질린다는 얼굴을 하며, 루리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벗어났다.

"아."

바람처럼 사라진 자리를 허무하게 보는 이사벨라.

잠시 후, 사무적이고 딱딱하게 돌아왔다.

페르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좋은 생각은 아닌 듯하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이사벨라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 * *

블랙 반다나의 본거지.

실제로 본거지라는 것은 없었다.

은밀함을 위해서 본거지는 석 달에 한 번씩 옮기며, 이사 당일까지도 말단들은 어디로 가는지 모를 정도로 비밀리에 움직인다.

지금 그들이 본거지로 삼은 장소는 세르데스 동부에 있는 야산 안쪽이었다.

한때 마약 제조와 밀수를 일삼던 자들의 은거지로 쓰다가 소탕당하면서 블랙 반다나의 은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 비밀스러운 장소에 외부인을 들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리고 외부인을 들였음에도 살기를 받는 것 또한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드 스왈로우는 블랙 반다나의 조직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었다.

"제드 스왈로우. 매번 그림으로만 봤는데, 실물 상판대기는 처음이구만? 응?"

"하하, 요놈 피부 매끄러운 거 보게."

솥뚜껑만 한 손으로 제드의 몸을 더듬는 사내들.

제드는 온몸이 경직된 채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제 얼굴 함부로 잡지 말아 주실래요? 이래 보여도 관리 엄청나게 빡세게 했던지라...."

"그래? 그러면 엉덩이나 좀 볼까? 여기에 남색을 즐기는 놈도 있는데, 네 엉덩이를 보면—."

"그까짓 얼굴, 만진다고 닳겠습니까? 마음껏 만지십시오. 하하!"

말실수를 했구나 싶어 제드는 얼른 넘겨 버렸다.

제드는 웃으면서 자신의 삶을 한탄했다.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짓을 당해야 하냐....'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온 가넷이 미웠다.

하지만 역시 자신을 팔아넘긴 페르다가 가장 미웠다.

'그깟 돈이 대수야? 기사 작위가 대수야?'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자답했다.

'대수 맞네, 씨부럴.'

제드는 얌전히 웃는 수밖에 없었다.

"형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뭔데?"

"이놈을 왜 못 먹어서 안달들이십니까?"

"어? 너 못 들었냐?"

그러자 남자가 생긋 웃으며 제드의 정수리를 팍팍 내리쳤다.

"이놈이 우리 아가씨를 겁탈했어. 그 유명한 일화를 모른단 말이냐?"

"어? 그런 이야기 들어 본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게 이놈이었습니까?"

"그래, 이놈이야."

"오... 감히 감히 우리 아가씨를...."

그 순진했던 남자마저 혈기를 불태우려 들 때, 제드가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다.

"잠시만요! 그 겁탈이라는 게 좀 과장이 되어 있거든요?"

"어디 씨불여 봐."

"그날 저희가 거친 임무도 끝냈고, 서로 힘들었고, 위로도 해 주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녀가 한방에 있고 무드도 괜찮구나 싶어서 남자가 여기서 빼면 또 실례이지 않나 하는 마음도 있고...."

"그래서 남자답게 책임졌냐?"

"그... 제가 이런 집안의 규슈라는 걸 알기만 했다면...."

"책임졌냐고?"

"...도망쳤는데요."

"그럼 겁탈이랑 다른 게 뭐가 있냐, 이 기생 오래비야."

얼굴을 잡던 손이 거칠어졌다.

그 손들은 제드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하하, 뭐, 뭐 하십니까, 형님들?"

"형들이 많은 건 안 바란다. 얼굴에 줄 하나만 긋자. 긋고 회개하고 아가씨와 결혼해라."

"아하하! 그 검 좀 치우시죠!? 저 이런 농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너에게 농담인 것들은 우리들에게 실화란다. 얘들아, 단단히 잡아라."

"뭣들 하고 있나?"

땀 냄새가 가득한 남자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여성의 목소리.

"어, 대장 오셨네. 신고식 좀 하려던 참입니다."

"우리 일원도 아닌데 무슨 신고식을 해? 그리고 그건 단검 들고 하는 게 아닐 텐데?"

"에이 그래도 가'족'같은 분위기로 일해야 하는데 해야지 않겠습니까?"

제드가 눈으로 그녀에게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내었다.

가넷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내쫓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전부 물러나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드는 섭정님의 기사다."

"칫, 운 좋은 줄 알아라."

"네 엉덩이는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지."

가넷의 명령에 모든 이들이 물러났다.

제드는 맹수들한테 둘러싸인 가젤처럼 바들바들 떨다가 가넷을 보며 말했다.

"구해 줘서 고마워."

가넷은 그런 제드의 뺨을 후려쳤다.

짝!

"악! 왜 왜?"

"발드로바 성, 바보짓 한 대가."

"맞아도 싼 일이지 그래. 그것 빼곤 감정이 없는 거지?"

"당장은 없어. 내가 네게 앙금이 있긴 하지만, 일을 그르칠 정도로 대단한 마음은 품은 게 아니니까."

"뭐? 나를 경험하고도 그런 말을 하는 여자는 없는데...."

"...터져 볼래?"

"죄송합니다. 말씀하십시오."

수년 동안 만나지 않았던 만큼, 그 둘에게서 많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도 되지만,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넌 뻔뻔하게 스왈로우라는 이름을 달고 있구나."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핀드티쓰."

"그 별명 쓰지 마라."

"왜 옛날 생각나고 좋잖아."

"그 별명 쓰고 나한테 코 깨지지 않았던가?"

"코가 깨지고도 너한테 많이 써먹었지."

능글맞게 웃는 제드.

그 얼굴을 보자, 광견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웃지 마. 엉덩이가 가벼운 것들은 좋아할지 몰라도 난 부아가 치미니까."

"옙."

제드는 즉시 웃음을 거두었다.

가넷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냉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에는 네 도움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

"잠입해서 물건을 찾는 일이다."

제드는 능청스럽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잠입이라니.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일을 해? 못해."

"이 일은 네가 적합하다."

"무슨 근거로?"

"최근 일이나 옛날에 용병질을 했을 때나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내린 결론이다."

"용병질을 했을 때, 내가 뭘 했는데? 딱히 아무 짓도 않았을 텐데?"

제드가 끝까지 잡아떼려 하자 가넷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팔레스타인 성에서 전투 기억하나?"

"알지. 빡셌잖아."

"우리 모두가 잡혔는데, 너만 잡히지 않았었지. 모두가 도망갔다고 생각했지만, 너는 그 성으로 몰래 들어와 우리를 데리고 빠져나갔어."

"그땐, 운이 좋았어."

"그런 운이 일곱 번이나 있었지. 모두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난 알고 있어. 네가 남들 모르게 움직여서 우리를 구했다는 건 말이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데 말이지...."

실제로 제드 또한 자각이 없던 일이었다.

잠입이라기엔 동료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기에 그랬다고 느꼈을 뿐.

그렇게 대단하게 여길 일이라 생각지 않았다.

끝까지 어울리지 않으려 들자, 가넷은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기로 했다.

"네가 적안족의 마지막 후손이라는 것까지 언급하게 만들 거냐?"

제드의 얼굴이 굳었다.

"굳이 이런 걸로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나는 지금 당장-."

"그 정보."

"뭐?"

"누가 더 알고 있어?"

제드가 전과 다르게 살기등등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가넷은 그의 감정을 받아 내며 대답했다.

"나뿐이야."

"감쌀 생각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옛정이라도 이건 봐줄 수 없으니까."

가넷은 인상을 구기며 역정을 내었다.

"멍청한 놈. 누가 여태까지 네 정보를 관리했을 것 같아? 너에 관한 정보는 내가 직접 통제하고 있어."

"내 정보를?"

"넌 너 스스로 그렇게 잘 숨기고 있다고 믿고 있지? 기생오라비처럼 살면 어찌어찌 숨기고 있다 믿지? 이 바보 같은 놈. 넌, 내 도움 없었으면 지금쯤 죽었을 거야. 알아? 다 눈치까서 널 생포해서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장식해놓을 거라고!"

가넷이 씩씩거리자, 제드는 머쓱하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그래? 난 여태 네가 날 죽일 만큼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왜 너를 죽이려고 하겠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넌 나와 생사를 함께했던 전우야."

"오."

"물론 저것들은 널 죽이려고 하는 게 맞지만."

"엇...."

제드는 미소를 지었지만, 창백한 얼굴과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가넷이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데?"

"저택에 잠입해서 정원계약의 매개체를 찾아야 해."

"정원계약이라... 마녀한테 밉보이는 일은 이제 사양인데."

"어차피 네 이름은 살생부에 몇 번이고 올랐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랬다고?"

"바보인 거냐, 바보인 척 하는 거냐?"

가넷은 한심하다는 듯 보다가 다시 일 이야기로 넘어왔다.

"우리는 상대가 요르 필리아즈와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 일에는 네가 적합하다고 판단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최고의 판단이긴 해."

메이지 킬러라 불리는 적안족에게 마법을 쓰는 족속들은 쉽다.

진짜 마녀라면 골치가 아플지 모르지만, 상대는 흉내 내기에 불과한 악녀일 뿐.

"그럼 내가 잠입해야 할 장소들의 청사진이나 보여줘."

가넷은 두꺼운 서류 뭉텅이를 제드 앞에 내밀었다.

제드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청사진과 파악한 물건들의 위치.

그를 통해서 훔쳐야 할 물건이 있는 장소를 지목하며, 그에 대한 작전을 머릿속으로 굴렸다.

마침내 그 윤곽이 뚜렷해지면서 제드는 가넷을 돌아보았다.

"근데 말이야."

"뭐."

"이 일 완전히 잠입으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

"무슨 말이야?"

"조금 꼴사나운 짓을 해도 되냐는 말인데."

가넷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틸다 파스칼을 꼬시겠다고?"

"아니, 그런 수고로운 짓을 왜 하는데?"

"네가 하는 짓이 그쪽이니까."

"허허, 이거 참. 나를 안다면서도 나를 잘 모르네."

제드는 씨익 웃었다.

"이런 일은 말이야,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들어야 풀리는 일이라고."

93화. 뱀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단돌로의 저택, 가문 회의실.

그곳의 의장 자리는 가주의 것.

그 말은 즉, 리코 단돌로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틸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녀는 그곳을 이용하는 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쓰고 있었다.

"앙리는?"

"무역 건에 손봐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셔 내일까지 돌아오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건 나도 알아. 얼마나 징그럽게 굴던지. 내 말은 갑자기 들이닥칠 확률은 없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 밤은 이 저택이 내 것이라는 말이네?"

틸다는 미소를 지었다.

"머지않아 이 단돌로 저택은 틸다 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며느리가 아닌 가주로서 당당하게 이 저택 위에 서실 수 있으시지요."

이때다 싶어서 아부를 떠는 자들.

전부 한몫을 약속받은 채로 틸다에게 협력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니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어요?"

틸다는 스테판과 머칫 사이에 벌여 놓은 계략들을 하나둘씩 심화할 작업을 준비했다.

"스테판은 현재 허먼과 대치 중에 있습니다. 경영권 문제로 쫓아내려고 하지만,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머칫은요?"

"머칫은 칼을 갈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스테판과 한바탕 붙으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돈보다는 칼이 더 가까운 법인데, 머칫의 견제를 좀 더 심화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틸다는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대다가 대답했다.

"아뇨, 스테판만 몰아붙이면 돼요. 그놈을 이 판에서 아웃시켜 버리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다른 쪽은 밑 작업이 지금 탄탄하잖아요? 용병회사가 사실은 도적단이라는 그 증거들을 제국에 뿌리면 순식간에 몰락해 버릴 거예요."

"맞습니다."

"그러면 말씀대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착착 알아서 움직이는 하수인들.

틸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은 순조롭다.

소극장 무대 위에 올려진 퍼펫 인형들의 춤을 보는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손에 쥐어질 것만 같은 황홀감에 젖었다.

'슬슬 유언장만 찾으면 모든 일이 풀릴 것 같은데....'

유언장의 내용은 리코 단돌로가 죽은 이후, 앙리에게 물려준다는 것.

앙리의 자식이 19세가 넘어 앞가림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후계로 삼지 않으며, 부회장에게 모든 재산을 넘긴다고 되어 있었다.

단돌로 상회가 가지고 싶은 틸다에겐 가장 치명적인 유언이었고, 그렇기에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모든 일은 도미노처럼 진행될 것이다.

시작은 작지만, 끝에 가면 감히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파문을 불러올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그때, 저택의 사용인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틸다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아가씨,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유언장을 입수했다는 정보입니다."

"그게 정말이야?"

세상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가 있나?

틸다의 눈이 반짝였고,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유언장을 배달하는 사용인들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알았어. 가도록 하지."

금상첨화가 따로 없는 상황.

틸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인들을 대동하여 정문으로 걸어갔다.

"뭐야?"

그러나 정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정문 앞까지 걸어가 바깥을 확인해 보았으나, 마차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유언장을 배달하러 왔다면서 대체 어디에 있단 거야?'

틸다의 짜증이 확 올라오려던 그 순간,

갑자기 강렬한 돌풍이 불어와 창문을 열어젖히더니 샹들리에 위에 있던 불을 모조리 꺼 버렸다.

"어머나?"

"웬 돌풍이래?"

"뭣 하나? 마법사를 불러와! 얼른 샹들리에 다시 점등해!"

하인들이 당황하고, 집사들은 침착하게 지휘했다.

마법사들은 뒤늦게 마법으로 샹들리에 위의 초에 불을 붙이려 영창 한다.

그때였다.

어둠으로 내리 앉았던 곳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 일부만이 밝아졌다.

그것은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았다.

그 빛은 중앙 계단 위쪽을 밝혔고,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가면을 뒤집어쓴 분홍머리의 여인이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뭐야, 저 꼴사나운 복장은?"

"어머머 남사스러워라...."

그녀는 마치 할림에서나 볼 법한, 몸 윤곽이 드러난 바니걸 복장이었다.

제비 깃 같은 코트를 입어 살갗을 노출하진 않았으나, 보수적인 제국에는 몸 윤관이 드러단다는 점에서 용납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도회에 쓸 법한 하얀 가면을 쓴 채 입을 열었다.

"만인이 침묵하고!"

여인이 서커스의 쇼맨처럼 힘차게 소리쳤다.

"불의가 도래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니!"

어색함이 느껴졌으나, 목청을 높여서 애써 숨기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정의를 관철하러 이곳에 강림하노라!"

그녀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뱉었다.

"네년은 누구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침입하느냐!"

하인 하나가 묻자, 의문의 분홍머리 가면은 하하 웃으며 소리쳤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바니 스왈로우즈의 페페! 모두가 외면하는 정의를 위해, 이 저택에서 벌어지는 만행을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왔노라!"

"뭐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망언을 지껄이고 있어?!"

"어디긴 어디겠느냐? 이곳이 모든 부와 악이 모여들어 흉계가 꾸며지는 장소라는 것을 온 천하가 알고 있을진대!"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과장된 손짓을 하는 의문의 가면 여인.

사용인들이 분개하여 한마디씩 던진다.

"단돌로 어르신께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리셨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가!"

"리코 단돌로! 그 자녀들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그토록 많을 줄은 몰랐구나! 그런데 너희들은 어째서 입으로만 충성을 떠드느냐?"

"뭔 개소리야!? 우리가 어르신을 보고 충성하지도 않는 소인배로 보이나!?"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구나! 너희들은 눈뜬장님이오, 귀가 트인 농아로다! 마녀를 집안에 들여놓아 놓고 너희들은 어찌 그 마녀를 못 본 체하는 게냐?"

"마녀? 대체 누가 마녀란 말인가?"

마녀라는 단어에 모든 이들이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틸다 파스칼 또한 불안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망할 괴도가 헛발을 짚길 바랐다.

"틸다 파스칼!"

여인은 정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자 또 다른 스포트라이트가 틸다가 서 있는 자리를 비추었다.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이 더러운 마녀의 개야. 어째서 겁을 먹은 개 시늉을 하는 게냐?"

모든 시선을 받은 틸다는 당황했다.

"네 시아비를 잡아먹고, 남편마저 잡아먹고, 하다못해 혈육마저 잡아먹으려 드는 사악한 뱀아. 네 악행도 이제는 끝이니라. 네가 이 저택을 쥐고 있는 고삐가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똑똑히 보여 주겠노라!"

가면 여인이 재킷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그때였다.

그 물건을 보자 틸다의 동공이 쪼그라들었다.

"저기 있다! 침입자다!"

그때, 문 안으로 들이닥치는 수많은 병사들.

그들의 손에는 석궁이 쥐어져 있었다.

"쏴라!"

푸슝!

석궁의 화살이 벗어나 분홍머리 괴도를 향해 날아간다.

퍼퍼펑!

석궁이 그녀의 몸에 닿기 직전.

의문의 분홍머리 괴도의 몸에서 새하얀 연기가 터져 나왔다.

그 일대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꺄악!"

"콜록, 콜록!"

"침입자다! 놓쳐서는 안 된다!"

시종들은 피신하고,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러는 가운데, 틸다는 분홍머리 괴도가 서 있던 자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야.'

새하얀 연기 속에서 그 여자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어디에 있는 거야?'

그녀는 찾아야만 했다.

누구보다 먼저 그 여자를 찾아야만 했다.

"아가씨!"

그때, 누군가가 틸다의 몸을 끌었다.

"이쪽으로 대피하십시오!"

틸다가 충격에 잠시 넋이 나갔다고 생각했는지 사용인이 그녀를 이끌고 움직였다.

그녀는 당황한 사람처럼 굴며 그 손에 이끌려 움직였다.

"대피소로 지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곳으로—."

"아니!"

틸다가 그 말을 막았다.

"굳이 대피소까지 갈 필요는 없어. 내 방에서 숨을게."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사용인이 틸다를 호위하며 틸다의 방으로 안내했다.

"나오시면 안 됩니다! 부디 사태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어."

문이 닫혔다.

틸다는 초조한 얼굴을 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그 문을 검지로 톡 하고 건드렸다.

그 순간, 손가락을 중심으로 새빨간 막이 퍼지더니 문을 완전히 덮었다.

이제 이 문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뭐야, 그 미친년은?"

틸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남사스러운 복장으로 이목을 끌고, 자신의 이름을 페페라 칭했다.

"바니 스왈로우즈? 그게 뭔데? 대체 어떤 놈이 나를 엿 먹이려고 그런 짓을 한 거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조직에 괴도.

그 배후가 누구인가도 생각해 본다.

스테판? 머칫? 허먼?

아니면 오래전부터 자신이 독을 먹이기 전, 리코 단돌로가 해 놓은 개수작인가?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내가 마녀와 계약했다는 걸 알고 있지?'

정원계약은 면전에 대고 마법을 구사하지 않는 이상, 들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틸다는 언제나 신중하게 마법을 사용해 왔다.

신중에 신중을 거쳐서 이 저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알 리가 없었다.

'그걸 들켰다고 쳐도....'

한 가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었다.

어떻게 그 매개체를 눈치챌 수 있었던 거지?

페페라 소개했던 괴도가 까발리려 했던 것.

꺼내려는 순간 방해받았으나, 틸다는 그 윤곽을 슬쩍 보았다.

품에 숨길 만큼 얇고 작으면서 간편한 물건.

그리고 틸다가 설정해 놓은 매개체 또한 그러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 리가 없어.'

틸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단순히 겁박하려고 그랬다고 넘어가고 싶어도 그게 정말인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확인해 봐야만 했다.

틸다는 움직였다.

그녀가 넓은 자신의 방에서 움직인 곳은 탁상 서랍장.

자기 모습을 그린 서화가 올려져 있는 곳.

그녀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뒤집혀 있는 서화 액자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그 액자를 뒤집어 확인하려 했다.

"역시 방 안 어딘가에 있겠구나 싶었는데 거기였나?"

고요함을 꿰뚫는 목소리.

틸다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그 자리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꽁지머리를 한 갈색머리.

그 남사스러운 괴도와 비슷하게 가면을 뒤집어쓴 채로 이곳을 보고 있었다.

"너, 넌 뭐야?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인 것 같아? 그 분홍괴도가 이목을 이끌 때? 아니면 네 손목을 잡고 이끌 때부터?"

그제야 틸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쇼맨처럼 말하던 여인은 어디까지나 미끼.

진짜 목적은 자신이 그 매개체에 접근해서 확인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갈색 머리 사내가 턱짓하며 물었다.

"손에 들린 그게 진짜 정원계약의 매개체인가 봐?"

틸다는 반사적으로 액자를 자기 가슴에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죽어!!"

그 순간 마법진이 그려지며 그 안에서 뱀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하얀 비늘과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그 뱀은 문헌에 기록된 전형적인 형태였다.

"와, 진짜 요르 필리아즈와 계약한 모양이네. 역시 블랙 반다나의 정보력인가."

요르 필리아즈의 뱀.

물리는 순간 형체도 남지 않고 녹아 버릴 위험한 맹독을 지니었다.

그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틸다의 주변을 감싸며, 침입자를 위협했다.

"귀엽구만."

제드는 적안족.

적안족은 마법진의 마력을 흩트리며 무효화하는 능력을 지니었다.

그럼에도 제드는 그 눈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는 법.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튕겨지듯이 달려온다.

"죽여! 뱀들아! 얼른 저놈을 죽이라고!"

수십 마리의 뱀들이 요란하게 움직여 사내의 신형을 쫓는다.

그러나 그 신형에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 사내는 늑대 마물 두 마리의 공격도 쉽게 피해 낸 곡예사였다.

스스슥—.

얇게 베인 오러가 희끄무레한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요르의 뱀들은 오러의 선이 그일 때마다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수십 마리의 뱀이 수십 조각의 고깃덩이가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읏!!"

틸다의 얼굴이 변한다.

뱀의 얼굴을 변하여 독을 분사하려는 작정.

그러나 판단을 마쳤을 때는 이미 갈색 머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떽!"

"꺄악!"

단검 손잡이로 그녀의 손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매개체를 쥐고 있던 틸다의 손이 그대로 풀렸다.

갈색 머리는 날렵하게 그것을 낚아채어 뒤로 빠졌다.

"어디 보자. 우리 무정한 마녀 유망주께서 삼은 매개체는...."

액자를 뒤집어 본 갈색 머리가 "허."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 이건 생각지도 못했네...."

"도, 돌려줘!! 당장!"

틸다가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갈색 머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갈색 머리는 액자 속에서 서화를 꺼내 그것을 양손으로 잡았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일이라서 말이야."

찌지직—!

그 물건을 힘차게 찢었다.

시장 바닥의 싸구려 전단지처럼 쉽게 찢겨 나가는 종이.

"아...!"

그러자 두 동강 난 종이에서 새빨간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힘은 점점 강해지며 응집하다가 파공을 일으켰다.

쿠웅!

"우왓!?"

제드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멀리 있던 틸다가 짐승처럼 뛰어와 그 종잇조각을 주웠다.

"안 돼...!"

틸다가 그 종잇조각을 잡아 억지로 다시 붙이려 해 보았다.

"아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으며, 부서진 매개체는 수복할 수 없다.

그 순간, 음산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다.

"퇴장할 시간이겠구만. 그럼!"

갈색 머리는 그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 얼른 자리를 떴다.

틸다는 그만큼 놀라운 몸놀림을 구사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벌벌 떨었다.

온다.

그분이 온다.

스르르르—.

그녀의 귓가에 울린 것은 뱀의 혓바닥소리.

길고 축축한 무언가가 귓바퀴를 달콤하게 핥는다.

-우후후....

그리고 음산한 웃음소리.

그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틸다의 안색은 창백하게 번졌다.

-가엾은 틸다야. 불쌍한 틸다야. 계약이 부서졌구나.

"아, 아닙니다."

틸다는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

"제가 수습할 수 있습니다, 요르 님! 부디...!"

-아니, 넌 실패했단다. 우리 계약의 매개체는 어떤 방식으로는 지켜내라 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넌 지켜 내지 못했지.

목소리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틸다는 그런 그녀에게 재차 간청했다.

"제가 저 남자를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단다, 아가야. 분수에 맞지도 않는 욕심을 부릴 때부터 네 파멸은 이미 예견된 일이란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다란 살가죽.

이어서 들리는 건 비웃음이었다.

틸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의 충직한 개가 되겠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빌고 또 빌었다.

그에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했다.

-뱀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단다, 무능한 것아.

그 기운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변을 느꼈다.

저택을 감쌌던 무언가가 화악 하고 사라졌다.

틸다 파스칼을 이루던 주술이 풀렸다.

94화. 몰락

그녀가 이 집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근원이 사라졌다.

-뭐야?

-뭔가 이상하지 않나?

바깥에서 떠드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저택 침입자를 쫓기보다 더욱 중요한 듯이 그 일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지 느껴져.

-그러게 말일세. 뭔가 이상한 느낌이 팍 하고 들었어.

-뭐지? 우리가 뭐에 당하고 있었던 거지?

그러다가 한 명이 이렇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괴도가 틸다, 그 계집을 마녀라 부르지 않았던가?

-정말로 마녀가 무슨 술수를 쓴 것인가?

-그럴지도 몰라.

동시에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안 돼!'

틸다는 본능적으로 그 문으로 달려가 잠갔다.

찰칵찰칵!

-문 좀 열어 보십시오, 틸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말씀 좀 해보십시오!

쾅쾅!

문을 두들기지만, 틸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혼란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 괴도의 말대로 마녀였던 거야!

-그 마녀가 마법을 부린 게 틀림없다!

-문을 부숴!

그녀에게 충직했던 모든 사람이 마법이 풀린 반동으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궁지에 몰린 쥐나 마찬가지인 상태.

'도망쳐야 해.'

그러나 틸다는 이런 최악의 최악까지도 상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 준비해 놓은 로프를 창문 너머로 던져 타고 내려갔다.

어디로 도망갔는지도 모르게 밧줄을 풀어 챙기고는 저택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저택에서 들려오는 마지막 소리는 이러했다.

-가주님께서 타계하셨어!

-그 망할 마녀가 가주님마저 죽였다!

리코 단돌로의 죽음.

틸다는 영문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찌 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저택에 마법을 풀었던 마녀였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이니까.

목숨은 부지했으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목숨은 바람을 앞에 둔 촛불과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지?

생각하고 생각해 보지만, 미래는 없다.

그녀는 요르의 말대로 무능하다.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다.

능력마저 얻어 냈지만, 그녀는 지켜 내지 못했다.

'살아남을 거야.'

그럼에도 추하게 발버둥 친다.

그녀는 어두운 숲을 달리고 달렸다.

'난 살아남을 거야!'

그러나 그 생각도 머지않아 한여름의 꿈처럼 흩어진다.

"아아...."

어두운 밤 속에 숨어 있는 장막들이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이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틸다 파스칼은 저항해 보려 했지만, 끝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단돌로 저택에서 멀지 않은 도로.

그곳에는 상단으로 위장한 마차 세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 꽁지머리의 사내가 마차에 올라타면서 숨을 몰아 내쉬었다.

"후우! 생각처럼 쉽지 않네."

"그렇게까지 수고로운 짓거리를 해야 했나?"

제드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했어야만 했어. 안 그랬다면, 절대 하루 만에 안 끝났을걸?"

"꼬리가 남지 않았나?"

진심이냐는 얼굴로 묻는 가넷.

"바니 스왈로우즈?"

"재밌는 이름이지."

가넷이 사납게 노려보았으나, 제드는 미소로 응수했다.

그녀는 졌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이 쓸데없이 입담이 좋다는 건 알았지만, 그런 능력까지 있는 줄은 몰랐군."

"우리 일족의 비기야. 서커스단으로 위장하여서 등쳐 먹을 놈들을 탐색하는 건 말이야."

"보통 그런 건 단주들이 하지 않나?"

"아비가 단주면 피할 수가 없는 일이지."

"과연 그런 것이로군."

가넷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드는 바깥에서 기척을 느껴 슬쩍 밖을 보았다.

복면을 뒤집어쓴 남자들이 큰 보따리 하나를 싣고 있었다.

"그래서 저 아가씨는?"

"성으로 배송될 거야. 계약한 대로 움직여야지."

"흠, 그러면 가는 길도 같겠네. 문제는 없겠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뭔데?"

"우우웅, 제제?"

코맹맹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깨달았다.

가넷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바니걸 차림의 분홍머리 여자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마치 술에 거하게 취한 사람처럼.

"왜 그래, 페페?"

"우헤헤, 제제. 나 엄청 쩔었지? 하루 연습한 거치고 졸라 잘했지? 응? 응?"

"...?"

"이런 괴도가 세상에 어디 있어? 내가 생각해도 졸라 섹시한 듯. 이것 봐. 섹시~."

"...얘 머리 다쳤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넷.

제드가 슬쩍 그녀의 뒤통수를 확인해 보자 화살촉 하나가 푹 하고 박혀 있었다.

이래서 맛이 갔구나.

"아하하! 화살 슈슉 날아오는데, 그거 다 못 피했엉~. 아~ 누가 머리에 박힐 줄 알았냐고!"

"어어, 머리 흔들지 마."

실없이 웃으면서 제드의 팔을 붙들었다.

가넷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확인해 보니 일시적인 충격인 확률이 높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중간에 치유사와 합류할 테니, 거기서 화살촉을 빼내도록 하지."

"뭐야, 아가씨. 섹시한 주제에 똑똑한 말까지 해? 오늘 밤은 이 언니랑 불태워 볼래? 내가 잘해 줄게."

추잡한 아저씨처럼 으르렁거리는 페넬로페.

가넷은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머리를 크게 다쳐 성적 취향마저도 뒤틀려 버렸군.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겠어."

그건 원래 그랬어.

라고 차마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 * *

틸다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의 업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머칫?

스테판?

허먼?

아니면 리코??

오만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가면서 숨소리가 가팔라졌다.

어느 쪽이든 살아남기 힘들었다.

끼이익-

잠시 후, 어두운 공간 속에서 문이 열린다.

누군가가 들어온다.

또각또각

벽에 걸린 촛불 하나로 보이는 것은 깔끔한 흑색 구두.

"구면이로군. 틸다 파스칼."

젊은 청년의 목소리이나 중년의 무게를 지닌 기이한 느낌.

틸다는 이 목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치욕을 줬던 그 목소리였으니 말이다.

"페, 페르다 섭정님...?"

그는 몸을 등받이에 기대었다가 앞으로 기울인다.

회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눈에 비쳤다.

"틸다 파스칼."

재차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페르다.

"첫 대면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너는 상상 이상이로군."

그 목소리에는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없이 차가웠으며, 서늘한 칼날처럼 느껴졌다.

"감히 공왕령을 지원하는 상인을 괴롭히고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틸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모든 건 제 약혼자가...."

차악!

페르다는 문서를 집어서 바닥에 던졌다.

그 문서에 적힌 내용은 틸다 파스칼의 행적이었다.

그 정보를 제공해준 것은 블랙 반다나 측이었다.

"계속 말해 봐라."

틸다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래야만 했어요."

그녀의 입이 벌벌 떨리며 말을 쏟아 내었다.

"아버지라는 작자는 애초에 그 망할 스테판에게 물려줄 생각밖에 없었다고요."

그녀는 오랫동안 담아 놓았던 감정을 터트렸다.

"말이 안 되잖아요! 왜 제가 못 가지는데요? 저도 같은 혈육인데! 그 혈육인데...! 저도 파스칼 상회에 기여한 게 있는데, 어째서 저만...!"

그녀가 느끼고 있는 그 감정.

페르다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엿한 기사 집안의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었지만, 언제나 기준 미달이었던 소년 페르다.

가족에게서 느껴야 할 온정 따위는 없었다.

페르다는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그렇다고 한들, 네가 공왕령에 타격을 주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죄는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배상해드리겠습니다."

틸다가 의자에 묶인 채로 발버둥 치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가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간청했다.

"오늘부터 제 분수에 맞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소녀를 가엾이 여겨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틸다는 흐느끼며 울었다.

페르다는 그런 틸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더군."

페르다가 말했다.

"그 이야기에 제대로 답한다면 자네를 보내 주는 것도 고려해 보도록 하지."

"어,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뭐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제드가 이야기하더군."

"제드...?"

"네 집에 침입한 놈. 그리고 정원계약 매개체를 부숴 버린 그놈이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짧게 그 이름에 분노를 보였다.

페르다는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그가 말하더군. 네가 선택한 매개체가 가족사진이라고 말이야."

제드가 보았던 것은 모두가 그려져 있는 가족 서화.

어린 시절 모두가 웃으며 즐거워했던 사진이었다.

"왜 가족사진을 매개체로 선택했나?"

페르다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가족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여자가 어째서 가족사진을 선택했는지.

그 모순의 해답이 필요했다.

"그야...."

그러자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사랑하는 가족이니까요."

페르다는 흐르는 그 눈물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그런 거였군."

페르다가 중얼거렸다.

"대, 대답이 되었습니까? 저를 살려 주시는 건가요?"

"어차피 널 죽일 생각도 없었다. 살려는 줄 것이다."

'는'이라는 단어가 붙은 시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목숨 이외에 모든 것을 가져가겠다는 뉘앙스였다.

"답을 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페르다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대륙 서쪽, 미스트 밸리에는 플러리맨이라고 불리는 몬스터가 있지. 그게 뭔지 아나?"

모른다.

알 리가 없다.

"짐승들을 잡아먹으면서 그 최후에 내뱉는 말들을 기억한다더군. 그리고 역으로 잡아먹힐 때에는 그 짐승의 목소리를 내뱉는다 하지. 왜인 것 같나?"

페르다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면 살려 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살려 준다는 걸 아는 거지."

페르다는 가족사진을 매개체로 선택한 이유를 안다.

인정을 호소하여 최후에 최후까지 살아남아 추하게 발버둥 치기 위해서라는 것을.

"네 행동이 딱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기여했다는 말도 거짓.

몹쓸 짓을 했다는 것도 거짓.

모든 것이 제가 살아남기 위해 던지는 거짓말일 뿐.

"고맙네."

페르다는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자네 스스로 기억할 필요도 없는 쓰레기로 만들어 줘서 말이야."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빛에서 멀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끼이익-.

쿵.

문이 닫힌다.

다시 홀로 남은 공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도 잠시였다.

이 방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페르다가 들어오기 전부터 누군가가 있었다.

어둠 속에 기다리고 있어서 여태 보이지 않았을 뿐.

그것이 이곳으로 걸어와 정체를 드러냈다.

틸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의 두 눈에 보인 형체는 은색 비늘과 하늘을 찌를 듯한 한 쌍의 뿔.

그 형태만으로도 위엄이 되며, 경이가 되고, 경외로 이어지는 존재.

드래곤이었다.

'저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짜야.'

이런 좁은 공간에 이런 드래곤이 있었을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최면을 애써 걸어 보지만, 헛수고였다.

그런 이성과 논리조차 마비시키는 것이 불멸의 신비.

날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운 바람과 고막을 얕게 울리는 그르렁거림은 점점 선명해진다.

드래곤 피어.

애써 거짓이라 최면해도 미지의 근원은 진실이 된다.

그리고 그 진실은 한낱 인간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된다.

"꺄아아아악!"

긴 비명이 속절없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비명을 듣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성문 밖에서 기다리는 가넷과 검은 로브를 입은 블랙 반다나의 요원들.

일이 마무리되는 단계인 만큼 초조해졌다.

잠시 후, 성문 밖으로 나오는 사내가 보였다.

가넷은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발드로바 섭정님을 뵙습니다."

"자네의 요구대로 만들어 왔네."

곧이어 틸다 파스칼이 모습을 보였다.

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받았던 미녀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얼굴이 초췌해졌으며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멍하니 벌린 입에는 침이 흘렀다.

루리의 손길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비틀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산송장.

압도적인 공포에 정신은 힘을 잃고 육신만 남은 것이다.

가넷은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약속에 이행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직 감사하긴 이르군."

"또 무언가가 있습니까?"

"있지."

페르다는 단검을 틸다 파스칼의 목에 겨누었다.

갑작스러운 인질극에 가넷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섭정님?"

"이사벨라가 말하더군. 기업 인수라는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이야."

페르다가 말했다.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제국법과 사례들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인수가 어렵다고 하더군. 설령 블랙 반다나가 끼여도 말이지."

"저희가 거짓말을 한다는 말씀입니까?"

"나도 궁금하군. 둘 중 누군가는 내게 거짓말을 한 것 같은데,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네."

페르다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니 자네가 말해 보겠나?"

"...저는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사벨라가 거짓말을 했단 말이로군?"

가넷이 입술을 깨물다가 대답했다.

"그분 또한 거짓말을 한 건 아닙니다."

"두 번은 없다. 나를 납득시켜야 할 것이다."

"그건...."

가넷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동시에 임무를 완수해야 하기도 했다.

특히 이렇게 막판에 이르렀을 때 놓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가넷도 알고 있으며, 페르다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나 페르다는 해답이 필요했다.

의뢰자가 누구이며, 무슨 연유로 그녀를 미치게 만들려 했는지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가넷의 변명이나 해명 대신 들려온 것은 중년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이어서 말했다.

"최고 경영자가 기업 경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 자체적으로 새로운 경영자를 위임할 수 있지요. 그것이 단돌로 상회에 있는 규칙입니다."

중년의 목소리였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들 사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 사이에 있던 목소리가 걸어 나오며 두건을 벗었다.

"너는...."

그런데 정말 그 의뢰자라는 인물은 정말 예상치도 못했다.

그 사내는 다가와 페르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단돌로 가문의 소가주, 앙리 단돌로가 위대한 불의 배필을 뵙습니다."

95화. 주인과 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