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괴물
윌리엄은 다소 무리하더라도 최대한 사기를 증진하려 했다.
그것이 먹혔는지 방진은 유지되었고, 창대는 더욱 굳게 마물의 몸을 노리고 있었다.
-치안대장 상황은 어떻습니까?
들려오는 전음.
윌리엄은 소리쳤다.
"마물 셋과 조우 중! 치안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파악했습니다. 그곳으로 이오르가의 자손 두 명이 향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시길.
잠시 후, 날개를 펼친 무언가가 하늘에서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우아한 몸짓으로 내려와 마물과 대적했다.
"더러운 마물 놈들. 네 주인은 이미 저승길로 올랐는데, 네놈들은 쓸데없이 명줄이 길구나."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라."
이오르가의 자손들이 적대감을 표출하며 수통 마개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던 투명한 물이 손가락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더니 마치 열 갈래로 찢어진 채찍이 되었다.
휘익!
채찍을 휘두르자, 찢어진 열 갈래가 흩어져 목표물을 향해 뻗어 갔다.
그들은 자신의 수족이 된 것처럼 정확하게 마물의 신체들을 잡는다.
순식간에 세 마리의 마물이 제압되었다.
"치안대장, 마무리를."
"예!"
붉은 검기를 두른 기사의 검이 묶인 마물의 급소를 하나씩 노렸다.
"으아아! 죽어라!"
창병들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용기백배하여 움직였다.
예로부터 다구리에 장사 없다고 했다.
꼼짝없이 제압된 마물은 창세례에도 뚫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윌리엄이 2마리를 보내고, 창병들이 1마리의 숨통을 끊었다.
고전했던 상황이 고작 몇 분 전인데, 이토록 쉽게 제압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 감사합니다. 마법사님들."
"...."
이오르가의 자손들은 윌리엄을 슥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일이 끝났다는 듯 어디론가 다시 날아갔다.
자존심 높은 드래곤 스폰들은 지위가 낮은 인간들과 함부로 교류하지 않는다.
'내가 그들에겐 교류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로구나.'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앙심을 품지 않고 금방 수긍했다.
'내가 좀 더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었더라면, 쉽게 해결했을 문제일 수도 있었어.'
자신의 처지에 수긍하며, 그에 안주하지 않고 발판으로 삼는다.
치안대장, 윌리엄은 속으로 생각했다.
'좀 더 강해지자.'
레드 드래곤의 통치 아래에 있는 마을, 그에 걸맞은 힘을 지니기로 마음먹었다.
* * *
"발드로바 공왕령의 기사 지금 출동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북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마리의 말이 발드로바 성에서 내려왔다.
아니, 그중 한 마리는 말이 아닌 당나귀.
그 당나귀에 올라탄 남자는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제드 경! 저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어, 어떻게 할까요?!"
그 말에 대답한 이는 뒤에 얹은 페넬로페였다.
"어쩌긴. 가서 팝콘이나 뜯어라."
"그, 그래야 합니까?"
"당연하지. 팝콘은 내 몫까지 만들어 놓, 우갹!"
"어휴, 넌 아가리만 벌리면 한숨만 나오는 소리를 처하고 있어."
"켁켁! 항복, 항복!"
제드는 페넬로페의 목을 조였고, 페넬로페는 그의 단단한 팔뚝을 쳤다.
"도움이 되고 싶으면 몸받이라도 해! 늑대 마족들이 나오면 시선이라도 끌어 봐!"
"예, 옙!"
"난 저쪽으로 간다! 넌 이쪽 길이 나 있는 곳으로 쭉 움직여!"
"알겠습니다!"
당나귀를 탄 말콤과 헤어지는 순간, 페넬로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몸받이 하라고? 너무 매정한 거 아냐?"
"안 되면 도망이라도 치겠지."
"그럴 지능이 없어 보이던 사람인데."
"너보다는 똑똑할 거다, 인마."
"뭐야? 이게 진짜!"
페넬로페가 뒤에서 머리를 잡아 뜯으려 하던 순간, 그들의 시야에 커다란 물체가 잡혔다.
늑대 마물이었다.
티격태격하던 것도 접어 두고 목표에 집중한다.
"적 발견. 그때랑 비슷한 거네."
"그래."
"사이즈랑 형태도 다 비슷하잖아. 그때 겨우 피할 수 있었는데, 지금 괜찮겠어?"
"괜찮고말고."
제드는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 고통을 감내하지 않았던가?
"복수할 수 있는 순간은 얼마나 짜릿한데."
이제는 수확해야 한다.
제드가 허리에 꽂아 놓은 소검을 뽑아 들었다.
소검에는 푸른 검기가 솟아오른다.
눈을 가린 말이 용감하게 달려가다가 멈춰 섰다.
제드는 그 반동으로 말의 몸에서 튕겨 올랐다.
"페페! 지금!"
"헤이스트!"
분홍 머리 악마가 날아오른 제드를 향해 가속 주문을 걸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손발이 맞는 두 사람의 연계.
한층 더 날렵한 몸놀림으로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크릉!?
늑대 마물이 당황했다.
늑대 마물은 그 움직임을 좇으려 하지만, 붙어있는 뱀 머리들은 그 잔상만을 따라 움직이는 게 고작.
단순히 도망치던 때와는 달랐다.
소검에 머금은 푸른 검기가 잔상을 따라 긴 궤적을 그린다.
슈슈슉—!
늑대 마물의 몸에 궤적이 닿고, 관통한다.
뱀 머리를 모두 자르고 힘줄을 끊으며 무력화했다.
무력화된 마물이 재생에 힘을 쓸 때가 그가 노리던 가장 큰 틈.
제드는 소검을 가슴안으로 찔러 넣었다.
페르다를 지킬 때와는 다르게 아주 손쉽게 끝이 났다.
"와 쩔어!"
페넬로페가 경박하게 펄쩍 뛰었다.
"제제! 너 거기서 뭐 하고 온 거야?"
"놀았겠냐, 이년아."
"좀 섹시해 보이는데? 이렇게 관능적인 남자는 네가 처음인걸?"
"하하, 떨어져라, 어딜 정기 빨아먹으려고 개수작을."
"그러지 말고, 일주일 동안 여자도 없었는데...!"
주린 배를 어루만지며 요염한 눈빛을 보내는 페넬로페.
말이 요염이지 제드에게는 불쾌감과 구타를 유발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이사벨라의 전음이 들려왔다.
-제드 경.
"말씀하십시오."
-말콤 경이 마물 몰이 중입니다. 그곳에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제드가 즉각 대답했다.
"위치가 어디입니까?"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골목길 쪽을 보시길.
어느 골목인지 찾을 필요도 없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이곳으로 가까워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당나귀의 얼굴.
그리고 비명 같지 않은 비명을 내지르는 말콤이었다.
"으하아악! 으학! 나 죽는다아아!"
히히이잉!
눈물 콧물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말콤과 당나귀.
곧 늑대 마물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제드는 충격에 빠졌다.
'저놈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딱히 뛰어난 신체 능력도, 무술도 없는 사내가 고작 당나귀 한 마리와 함께 꽁지 빠지게 도망치고 있었다.
당나귀를 타고 있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 당나귀도 딱히 이렇다 할 특징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속도는 물론 민첩성까지 늑대 마물이 상회한다.
모든 상황으로 볼 때 늑대 마물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았다.
그런데도 늑대 마물들이 말콤을 잡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는 늑대 마물 두 마리가 그 둘을 공격하려고 움직일 때마다 손발이 맞지 않아 엉켰다.
둔한 놈들이 걸린 것인지, 억세게 운이 좋은 것인지.
뭐든 간에 지금은 늑대 마물을 죽이는 게 우선이다.
"어이, 당나귀 아저씨! 여기로 와!"
"으학! 으학! 으하아악!"
대답하는 대신 비명만 대차게 지르는 놈.
저 쓸모없는 것.
제드가 그 움직임에 자신이 맞춰야 하나 하던 그때였다.
당나귀가 제드의 말을 알아들은 듯 몸을 틀어 그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약이 단단히 오른 늑대 마물은 어떻게든 그 두 놈을 잡기 위해 또 달려온다.
어찌 됐든 의도대로 되고 있다.
당나귀가 제드를 지나친다.
제드는 속으로 카운트다운 했다.
3, 2, 1.
0과 함께 보이는 늑대 마물의 몸뚱이.
제드는 가속한 몸을 날려 눈이 뒤집힌 놈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깨갱!
늑대 마물 하나가 죽고, 다른 하나는 당나귀나 쫓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움직인다.
하지만 혼자 남은 늑대는 제드에게 밥이나 다름없었다.
역수로 쥔 소검이 남은 놈의 심장까지 모두 취했다.
두 마리는 어쩌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던 제드로선 이 성과가 믿기지 않았다.
'훌륭한 미끼가 따로 없네.'
페르다가 그를 달고 다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싶었다.
어찌 됐든 제드는 전우애라도 다지려 말콤을 칭찬했다.
"이야, 미끼로는 진짜 손색이 없었네, 아저씨 수고했—."
"으켁! 으헥! 나 죽는다. 나 죽어...."
"...."
훌륭한 미끼가 된 말콤의 혼이 돌아오기까지는 3시간이 더 걸렸다.
* * *
마물이 습격하기 전, 발드로바는 지시받았던 골목에 섰다.
'마물이 들어온다.'
그 되뇌는 문장에 그녀의 오감이 반응했다.
도면화 하여 모든 방향에 있는 일들이 그녀의 눈에 생생하게 보이며, 들렸다.
범위는 이 마을을 너머 저 숲 너머까지....
그녀의 감각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발드로바는 그 감각을 죽였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이 골목으로 오는 늑대 마물을 죽이는 일이다.
그것만 하면 된다.
다른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잠시 후, 그 적의 기척이 그녀를 눈 뜨게 했다.
-크르르
늑대 마물이 입을 벌리며 으르렁거린다.
보이는 것은 짐승의 누런색이 아닌 초록색 어금니.
-컹!
발드로바를 향해 달려들었다.
포탄 하나가 날아오는 듯 위협적인 돌격.
인간이라면 겁을 먹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발드로바에게는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발드로바는 그보다 빠르고 강한 힘으로 마물의 주둥이를 움켜잡아 들어 올린다.
저항하지 못하고 딸려 오는 늑대 마물의 몸에 그녀는 왼손을 찔러 넣었다.
푸욱!
마물의 가죽을 물에 젖은 종이처럼 뚫고, 그 안에 있는 심장을 뽑아 터트려 버렸다.
콰직!
그 모든 과정까지 걸린 시간은 0.1초.
누구보다 마물을 많이 죽였던 발드로바였기에 단순 공정처럼 쉽고 빠르게 끝냈다.
-끄륵....
깨갱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즉사한 늑대 마물.
발드로바는 그것의 죽음을 확인하고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이 그 마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발드로바는 그 마물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아니, 둘 수가 없었다.
'보면 안 돼.'
그곳에 시선을 두자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발드로바는 이 감정을 알고 있었다.
증오였다.
그녀는 마물과 마주하면 선명한 증오를 느꼈고, 그 증오를 활력으로 삼아 불태웠다.
그렇게 마의 땅을 벗어나 진군하려는 많은 마물을 죽였다.
하지만 이번에 느낀 감정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그 익숙한 감정에서 느껴진 것과 조금은 다르다.
두려움이었다.
'어째서일까....'
해답은 간단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용으로서 대륙을 지키려고 했다면, 지금은 한 명의 기사로서 마을을 지켜야 한다.
용이었을 때의 그녀는 마의 땅으로 날아가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 불태웠다.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뒤에 있었으며,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깊은 분노를 표출하며 날뛰어도 그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
다친다면 자기 몸뿐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지켜야 할 것들은 한가운데에 있었다.
'내가 날뛰게 된다면....'
모두가 다친다.
헤스티아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감정이 두려웠다.
'진정하자.'
그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오감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마물의 피 냄새와 울려 퍼지는 괴성은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끝내, 흉악한 슬픔의 파도가 그녀의 마음을 뒤집어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남아 있는 것은 꺼지지 않는 불.
그것은 마족을 향한 깊은 분노.
그 불꽃이, 분노가 아물지 않은 상처를 다시금 건드렸다.
상처의 고통은 그녀의 기억을 자극한다.
'그것들이 다시 앗아 가려고 해....'
그녀가 일궈 놓은 것들을.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조리 앗아 가고 유린하려는 고드윈의 악의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기에.
그 의지를 강제로 되새기게 만든다.
"우읏...."
불이 지펴졌다.
멈출 수 없는 그녀의 분노는 충동으로 이어지려 했다.
'돌아가야 해.'
이 마을을 빨리 벗어나 다시 내 레어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서 조금만 날뛰면 해결될 일이다.
그녀는 기도했다.
그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기를.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꺄아아악!"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두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소녀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조금 더 큰 소녀.
발드로바는 그 둘을 잘 알고 있었다.
3실링을 주고 구출해 줬던 아이들이었다.
그들을 한입에 삼키려 드는 흉악한 마물의 형체가 보였다.
'안 돼.'
그것은 저항하지 못하는 두 소녀를 잔혹하게 유린하기 위해 아가리를 벌렸다.
저 아가리가 닫히는 순간, 둘은 형체와 목숨을 잃을 것이다.
'안 돼!'
그 순간, 발드로바의 귀에서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꽂혔다.
-보십시오, 발드로바.
그것은 고드윈의 목소리였다.
용마전쟁이 터지기 전, 그가 자신을 보면서 했던 말이었다.
-이것이 당신이 지키고 싶어 하던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그 순간, 발드로바의 머릿속에 있던 망설임이 사라졌다.
몸이 반사적으로 오른발을 굽히며 왼발을 뒤로 뻗으며 자세를 취했다.
투웅!
그녀는 발꿈치 뒤편에 커다란 충격파를 남기며 인간 포탄이 되어 날아갔다.
발드로바의 주먹이 그 주둥이를 향해 힘껏 뻗었다.
콰직!
늑대의 주둥이가 돌아가다 못해 그대로 찢겨 벽에 날아간다.
몸뚱어리는 기울어진 배럴 통처럼 데굴데굴 굴러 대로까지 튕겨 나갔다.
-크럭... 크러어억...!
정신을 못 차리고 폐에 쌓인 핏물을 뱉어 내는 늑대 마물.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호전성은 발드로바를 향해 달려든다.
-크르르르 컹!
주둥이가 날아갔으나, 발성에는 지장이 없다.
애초에 늑대도 아니었으며, 모습을 모방한 무언가일 뿐이다.
늑대를 모방하는 더럽고 조잡한 조합물일 뿐이다.
'해치지 마.'
발드로바 내면의 분노가 타오른다.
그러는 와중에 강철보다 단단한 이빨이 발드로바의 견갑을 물어뜯는다.
하지만 그녀의 갑옷은 강철보다 몇 배는 더욱 단단한 희귀 광물.
대장장이의 신이나 다름없는 브론즈 드래곤의 걸작품.
의미 없는 공격에 수를 쓴 늑대는 역으로 잡힌다.
추한 몰골의 그것을 바닥에 처박았다.
'건드리지 마.'
발드로바의 주먹이 늑대의 살갗을 파고들어 뼈를 부러트린다.
콰드득!
-깨깽!
늑대 마물이 뒤늦게 깨닫는다.
이놈에게는 달려들 것이 아니라 도망쳐야 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몸뚱이를 파고든 발드로바의 손은 그것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없어져야 할 건 너야.'
그녀는 힘의 위상이었으며, 그 위상이 새빨간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발드로바는 움켜잡은 것을 그대로 뽑아 버렸다.
살갗 아래에 숨어 있던 척추, 그리고 갈비뼈가 그로테스크한 소리를 내며 뽑혔다.
안에 있던 내장마저 뒤흔들리면서 내부는 완전히 곤죽이 되어 버렸다.
'아직.'
마물은 쉽게 죽지 않는다. 발드로바는 그대로 손을 뻗어 심장을 움켜잡아 터트린다.
마물들의 생명의 근원이 분쇄되고, 늑대의 형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물의 완전한 죽음.
'아직이야.'
그녀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남아 있는 그 형체마저 그녀는 증오스러웠다.
그 시체는 여전히 그녀를 비웃고 조롱하고 있었다.
발드로바가 주먹을 말아 쥐며 그 얼굴을 향했다.
'이 대륙에서.'
그녀의 주먹이 바닥과 함께 내리찍었다.
'영원히 사라지란 말이야!'
쿠웅!
커다란 울림.
동시에 녹색 피가 투구 안쪽에 튀어 피부에 닿았다.
그제야 그녀가 자신이 이성을 잃었음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아."
입에서 나오는 것은 거친 숨.
눈에 보이는 광경은 보라색과 녹색으로 얼룩진 바닥.
그것보다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덧칠된 양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크레이터처럼 푹 꺼진 바닥 아래에 있는 발드로바.
모두가 밖으로 나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골목길로 돌린다.
그곳에는 소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여전히 마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해치려는 마물은 이미 죽었는데도 말이다.
'아아....'
그녀는 알고 있다.
그 두려움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괴물은 나라는 것을 말이다.
101화. 난가
쿠웅!
헤스티아 마을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상황은 종료되었다.
남아 있는 마물을 제거하려 모였던 이들은 발드로바를 둘러싼 형태가 되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우읍...."
비위가 약한 이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그 형태를 알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광전사.'
분노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부수는 이들.
그 분노는 제어할 수 없어, 침착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가 없다면, 크기가 작은 오우거로 취급받을 뿐이다.
주민들은 어째서 터무니없는 괴력을 구사하는 그녀가 여기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짐작 또한 확실치 않지만, 공포는 금세 전염되었다.
모두가 발드로바를 두려워했다.
발드로바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더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뿐.
모두가 서로를 흘겨보면서 망설였다.
일격에 땅이 푹 꺼져 버린 그 안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기사님?"
치안대장의 견장을 차고 있던 남자.
누구보다 용감하게 마물의 앞에서 대적하던 사내가 다가가 물었다.
발드로바는 대답하지 못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도와드립니까?"
윌리엄이 손을 내밀어 보지만, 발드로바는 그 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죽어 버린 것처럼 있었다.
그녀의 정신을 깨운 것은 한 명의 목소리.
"윌리엄 경."
페르다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페르다를 올려다보았다.
"예, 섭정님."
"방금 전에 엄청난 폭음이 들렸더군. 이곳이 진원지인 듯한데...."
페르다가 자신을 본다.
그 싸늘한 눈동자.
다정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너는...."
페르다가 말을 잇지 못한다.
그 이유를 발드로바는 알고 있다.
'나는....'
괴물이니까.
페르다가 발드로바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표정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인다.
시야를 가리니 발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온 페르다가 입을 열었다.
"성으로 와라. 네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늘 자신을 향했던 다정함은 없었다.
* * *
이 공간도 몇 번이나 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주인으로서 둘러보았다면, 지금은 손님으로서 왔으니 말이다.
웃기는 이야기였다.
성의 주인이 손님으로 오는 상황이라니.
페르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는 직접 응접실의 차를 준비하여 따랐다.
"본래 여종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만, 지금 바깥 상황을 정리하느라 바빠서 내가 하게 되는군. 맛이 없어도 이해해 주게."
"...."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게. 모든 기사는 들어와서 씻어야 한다고 규칙을 정해 놔서 시간만 잡아먹었을 테니."
페르다는 찻잔을 발드로바에게 향했다.
맛이 없든 말든 상관없었다.
'페르다 씨가 타 준 차....'
그것 하나만으로도 너무나도 각별해 보였다.
마시고 싶다.
그러나 투구를 벗으면 얼굴이 보일 것이다.
페르다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태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해야 할 것이고, 복잡해질 것이다.
그는 환멸을 느낄 것이다.
그녀는 그런 비극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있자.'
발드로바는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페르다가 다른 대화를 시작했다.
"침묵의 맹세를 했다고 하더군."
끄덕끄덕.
"좋은 핑계긴 하지. 침묵의 맹세를 했다고 하면,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되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야. 그렇지 않나?"
페르다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를 꿰뚫는 듯했다.
"우매한 대중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기사 집안에서 자란 사람일세. 침묵의 맹세는 보통 성기사들만이 하는 일이지. 그리고 누군가를 믿는다면, 몸에서 드러났을 거다."
"...."
"하지만, 자네는 그 누구도 모시지 않았어. 가진 것은 기사들을 상회하는 힘과 싸움 실력뿐이지. 그렇다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
그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뻔한 이야기지. 네가 과거에서 벗어나려 정체를 감췄다는 것일 테니까."
발드로바가 주먹을 쥐었다.
비록 페르다가 헛발 짚은 게 있어도 본질은 맞았다.
발드로바는 자기 자신을 싫어했다.
많은 이들을 죽음에 몰고 갔던 마족들보다 누군가를 떨게 만들어야 하는 그녀 자신이 더 싫었다.
"말해 보게."
페르다가 찻잔을 들며 물었다.
"그 분노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죽인 적이 있나?"
끄덕.
"그래서 도망쳐서 이곳으로 온 건가?"
끄덕.
"그렇군."
잠깐의 고요함.
무언가를 생각하던 페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자네는 그날을 후회하고 있나?"
후회.
어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몇십 년 동안 비탄에 빠져 스스로를 혐오했으며, 악몽에 시달렸다.
신의 자비와 구원을 바라지만,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멈춰 서서 스스로를 혐오했다.
용마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떠올리면 언제나 이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죽였던 그 사람들이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천하를 적으로 돌린 악룡이 되어도 상관없노라고.
발드로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담담한 긍정문이 폭풍 전의 고요함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욕이 날아올 것 같았다.
너 같은 괴물은 이 도시에 필요 없다고.
당장 꺼지라고 말이다.
"자네는."
그러나 폭풍은 없었다.
"이 마을이 좋나?"
너무나도 쉬운 물음이었다.
발드로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을을 지키고 싶은 의향 또한 있는가?"
끄덕끄덕.
"그렇다면... 내가 제안할 기사 작위 또한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가?"
끄—.
발드로바는 고개를 들었다.
'기사라면....'
백성들을 보호하고 왕을 수호하는 직위.
시골 소년들이 꿈꾸는 것은 나이트 로망이다.
발드로바 또한 '수호'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만큼 그 직위에 관심이 있었다.
'그치만, 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괴물로 보았다.
그 소녀들도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악룡, 아니 악인이다.
그런 사람은 기사가 되어선 안 된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끄덕.
"하찮은 생각을 하는군."
거침없는 독설.
여린 발드로바는 상처받았다.
"헤스티아 마을에서 모험가들이 얼마나 참여했는지 아나?"
도리도리.
"23팀이 들어왔지. 숫자로 하면 73명일세. 그들 하나가 무력이자, 지혜인 자들이지."
"...."
"그런데 방어전을 펼칠 때 참여한 것은 고작 4팀일세. 무슨 의미인지 아나? 19팀은 사람이 죽든, 마을이 부서지든 알 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페르다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러나 자네는 그러지 않았지. 그 머저리들과 한패가 되어 숨을 수도 있었지만, 자네는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어."
"...."
"그건 과거의 일보다 눈앞에 있는 이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발드로바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졌다.
한없이 차가운 괴물을 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건 처음부터 발드로바의 착각이었다.
비록 다정하진 않으나 그 눈 속에는 존중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이곳을 지켜 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네 과거는 내게 의미가 없다."
너는 잘못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 나가면 된다.
'뭘까....'
이상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런 대화는 페르다의 마나를 건네받을 때, 몇 번이고 해 봤었다.
그때의 페르다는 언제나 다정했다.
'그런데 편하지는 않았어.'
페르다는 자신을 다룰 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화초인 것처럼 굴었다.
그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은 그녀의 피부만을 닿다가 지나갈 뿐.
발드로바는 그 말을 믿지 못하였고, 그렇기에 그 위안 또한 휘발하는 감정에 그쳤다.
'그때와 달라.'
다정하지 않은 말투와 눈빛.
모든 것이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
'처음 만나는 듯한 기분.'
만지는 데 주저하지 않고, 그 내면에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그 모든 것이 페르다의 또 다른 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욱 깊은 이것은 틀림없이 연모라는 감정이다.
"내가 이해심이 깊은 것 같나?"
그의 물음에 발드로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네. 이렇게 이해심이 많은 척을 하는 것도 이미 한 번 보았던 사람과 닮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지."
그게 대체 누구일까?
그녀가 속으로 궁금해할 때, 그가 말했다.
"그분은 참으로 아름다운 분일세."
아름답다.
그 말을 하는 페르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발드로바는 가슴 안쪽이 답답해졌다.
'페르다 씨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 미소를 지은 적이 없다는데....'
루리가 그렇게 말했다.
다정한 것도 발드로바이기에, 미소를 짓는 것도 발드로바이기에 그런 것이라고.
대체 그 사람이 누구길래,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얼굴도 고작 한 번 보았지만, 그것도 제대로 보았다 할 수도 없군."
'얼굴을 한 번만 봤으면서도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을까?'
"게다가 처음으로 보았던 얼굴은 눈물로 있었으니 말이야."
'우는 모습이 그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인가....'
"매번 그분의 얼굴을 보고 싶지만,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더군."
'나쁜 놈이구나. 얼굴 한번 보여 주지도 않고....'
"그래도 그분이 이 성 아래에서 근심 없이 쉬고 계신다 생각하니 그것만으로 위안을 삼고 있지."
'이 성 아래에....'
잠깐만.
그 사람....
'난가?'
뒤늦게서야 깨닫는 발드로바.
그가 말했던 것들을 되짚어 보니 자신과 처했던 상황이 똑같지 않던가.
'아....'
발드로바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각하기 시작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여길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레어로 돌아가 평소처럼 한바탕 바닥을 뒹굴면서 콧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혼신을 다해 이 떨림을 가라앉히고 남인 척 연기했다.
'이젠 정말로 들켜선 안 된다.'
페르다를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잡설이 길었군. 그러니 기사 작위를 받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겠나?"
페르다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발드로바도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기사가 된다면... 페르다 씨를 지키는... 사람이 되는 걸까?'
발드로바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용이었다면, 발드로바였다면, 감히 들을 수 없었던 말을 이렇게 듣고만 있으니 설렘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을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것은,
'페르다 씨를 지켜 주고 싶어.'
그보다 더더욱 큰 것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더 듣고 싶어!'
면전에 대고 물어볼 용기가 없던 여자와, 면전에 대고 말하지 못하는 남자.
그런 관계에서 속마음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더없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그 이유가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발드로바가 그에 대한 대답을 주려던 찰나.
"페르다 님."
루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을 상황은 어떤가?"
"수습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쁜 소식은 없던가?"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사망자는 미미한 수준이고, 중상자가 속출하긴 했지만, 응급 처치를 빨리 마쳐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행이로군."
"시중을 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능숙하고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잡아 차를 대접했다.
루리의 시선이 슬쩍 갑옷을 보았다.
"음?"
인간에게는 무심한 그녀가 어째서인지 그 갑옷을 가만히 향하고 있었다.
루리는 갑옷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깨달을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가물가물하다는 듯한 얼굴.
잠시 후,
"...허?"
루리의 표정이 급격하게 썩어 들어갔다.
발드로바는 그 표정을 알고 있다.
'눈치챘어!'
갑옷 안쪽에서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어 간다.
루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지그시 바라보았고, 침묵의 맹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페르다는 루리의 행동이 이상하게만 느낄 뿐이었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을에 남겨진 오물이 잠깐 생각나는 바람에."
루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중을 마치고 페르다의 뒤로 갔다.
"그럼 계속 이야기를—."
"죄송하오나."
루리가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기가 진행 중인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네가 그걸 묻는 건 처음이군."
그녀는 늘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병풍처럼 서 있으며, 절대로 참견하지 않았다.
"꽤나 중요한 이야기 같았기에 말입니다. 저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페르다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기사로서 내게 맹세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기사... 맹세...?"
어처구니없다는 얼굴.
"그래서 받아들였습니까?"
"대답을 들으려던 참이었다."
"호오...."
루리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기사를 스윽 보았다.
"그렇습니까?"
발드로바는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정체를 까발리려는 속셈인 걸까?
마음속으로 크게 부정하며 그녀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었다.
제발 모르는 척해 줘!
루리도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잔혹하게 대응했다.
"페르다님. 이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것 말인가?"
"지위가 높은 기사가 평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페르다는 대답했다.
"평민에게 충성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신념에 충성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 신념에 따라 백성들을 보호하겠다고 한다면, 평민들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일이지. 그것은 고결한 일이다."
페르다는 그렇기에 윌리엄을 치안대장으로 삼은 것이었다.
마을의 규모가 더 커진다면, 그를 기사로 임명할 생각까지 마쳤다.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 조금 다르게 말씀을 드려 보죠. 가령...."
그녀가 말을 고르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발드로바 님이 페르다 님에게 충성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페르다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네가 제정신이냐는 듯이 루리를 쏘아보았다.
"어불성설이군.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지. 충성을 맹세하는 건 내 쪽이고, 신임을 주셔야 하는데, 내게 충성한다는 그런 말은 능멸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더냐?"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알고 있었다면, 함부로 그런 말을 하지 말거라. 예시로라도 참을 수가 없구나."
"죄송합니다. 그저 궁금했기에 물었을 뿐입니다."
루리는 팔짱을 끼면서 발드로바를 노려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 알겠느냐는 표정.
"그래서 자네의 대답은 어떻게 하겠나?"
페르다가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102화. 정좌
갑옷 기사와 대화를 마친 후, 에리카가 페르다를 찾아왔다.
이목구비는 그에게 익숙했지만, 결정적인 요소들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뿔도 꼬리도 날개도 없는 완전히 인간을 흉내 낸 상태.
명목상으로도 플래티넘급 모험가, '에리'의 방문이었다.
"몸은 괜찮아지셨는지요?"
"예. 발작도 줄어들었고, 가벼운 마력 정도는 구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돌아왔습니다."
인간으로 치면 3년은 마나 연공만 해서 복구해야 할 정도인데, 고작 3시간 만에 회복했다.
평생 마법을 연구하는 드래곤들답게 깊은 내상조차도 경상처럼 빠른 치유력을 보였다.
"모험가들이 이번 사건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에리카가 먼저 불편한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예. 그렇더군요."
"그 거지 같은 것들은 명단을 추려서 지금 자격 박탈을 진행 중이니 걱정하지 마시길."
격식적인 어조 속에 저렴한 욕이 섞였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리고 걱정할 게 뭐 있나?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으면, 배신감이랄 것도 없었다.
선점하려고 욕심내는 것들은 다 그 모양이니까.
'그래도 모험가들을 수용하려고 만드는 마을인데, 꼬이는 건 벌레들뿐이니.'
이래서는 만들어도 의미가 없지 않던가?
자격을 박탈하는 건 박탈하는 것이고, 대책은 대책대로 필요했다.
"대책 부분에서는 저희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섭정님께선 이름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제 이름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푸른 눈 탑주에 발드로바의 부군까지 합세하면 최소한 지금 협회장 목을 치는 건 가능하죠."
용 두 마리의 입김을 어떻게 한낱 인간이 피하겠는가.
인맥을 동원해도 해결되지 않을 중대한 문제였다.
"뭐 이런 일에 대해서는 험한 말만 나올 테니 더 이상 언급하지 말도록 하죠. 지금 직면해야 할 것은 따로 있으니까요."
에리카가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곡마 말이군요."
"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당연히 죽은 줄만 알았던 그놈입니다."
곡마.
고드윈의 일곱 흉성으로도 불리우며, 마왕이 공인한 일곱 심복이자, 대륙에서 가장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재앙 같은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중 가장 저평가된 흉성은 역시 곡마였다.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막 각성한 용사의 식칼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바라볼 자료들이 부족했다.
그 죽음은 인간을 향한 경각심을 일깨우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영웅의 탄생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그런 곡마가 이토록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여섯 흉성들과 비교해도 강합니까?"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지금 느낀 바로는...."
마왕과도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을 굳이 하진 않았다.
에리카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판단이 자신이 패배했다는 두려움과 수치심에서 나온 변명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페르다 또한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던 곡마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전체적으로 로브로 가려진 몸.
그 안에는 자신과 비슷하게 여리여리한 몸과 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하얀 손.'
페르다가 아는 마족은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다.
"노블레스급들은 하얗습니까?"
"아뇨. 마왕조차도 피부가 검었고, 다른 심복들도 마찬가지예요."
"곡마는 그렇지 않더군요."
"예. 그렇죠. 그게 저도 궁금했던 참이었어요."
페르다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은 에리카도 마찬가지였다.
로브 바깥으로 내민 손가락의 색깔은 틀림없이 하얀색이었다.
"어쩌면 그게 그토록 강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고드윈이 남긴 힘을 이용해, 변형과 변질을 거듭하여 자신의 힘을 극대화했다고 한다면...."
"가능성이 있겠군요."
진실은 알 수 없지만, 페르다는 어느 정도 그 말에 동의했다.
린네라는 다크 엘프 또한 일순간에 나이트급 마족을 만드는 약을 만들고 있지 않던가?
그들은 과거를 학습하고, 미래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기회가 있다면, 서슴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에게 다음이라는 말을 남기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런 놈들이 헤스티아 마을을 건드린 이유를 모르겠네요. 눈에 성가시기 때문에 끝장내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고...."
곡마가 마을로 보낸 늑대 마물 숫자는 15마리.
그러나 그가 도주를 위해 쏟아 내었던 마물의 숫자는 무려 4배였다.
처음부터 그 숫자를 마을로 쏟아 냈으면, 최소 수십이 죽고, 수백이 다쳤을 일이었다.
어중간한 그것은 떠보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떠보기였을까?
확실한 파괴만 원하는 마족이 떠보기를 했다는 게 그들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일단 벽을 먼저 세우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에리카가 그렇게 제안했다.
"마족이 또 올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놈들의 수법에서 더 올 리는 없겠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니까요."
"일리 있는 말씀이군요."
지금은 지도자가 아닌 대중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어찌 됐든 사건이 터졌고, 사상자도 생겨났다.
도로에 놓여 있는 저 시체가 자신일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불안이라는 씨앗이 심겼다.
이 도시에 있으면 언젠가 저런 운명이 될 것이다.
이 겨울이 지나기 전에,
어쩌면 내일,
아니, 오늘 밤이 될 수도 있다.
보여 주기 식으로라도 그들을 보호하고 있음을 알리는 편이 좋았다.
'인력은 늘 부족하다더니....'
벽을 짓게 되면 도시 계획에 투입될 인력도 줄어드는 법.
인프라가 구축되는 추세도 자연스럽게 위축될 것이다.
도시 계획을 진행 중인 이사벨라에겐 골치 아픈 변수다.
"도시 문제는 그렇게 하고, 제가 가져온 물건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에리카는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그것은 주황색 빛깔의 보석을 머금은 애뮬릿이었다.
"항마 부적입니다."
동맹을 맺기 전, 그녀가 말했던 개념의 물건.
아직 연구 단계라 들었던 페르다에겐 빠르다고 느꼈다.
"실제 마의 땅에서 얼마나 마기를 막을지는 테스트해 봐야 하지만, 예측한다면 침투하는 마기의 95%는 차폐할 수 있죠."
"5%는 들어온다는 말이군요."
"그 5%도 마의 땅 안쪽을 기준으로 한다면 놀라운 성과죠. 본래 인간이라면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을 조금 발을 들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위험을 안는다면 사흘. 안전한 범위는 하루 정도일 거예요."
하루라.
"마기에 노출되어 해독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푸른 눈의 학자들은 보름 정도 휴식을 권장하죠."
"하루 일하고 15일은 쉬어야 한다는 거군요."
"네, 너무 길죠."
모험이라는 것이 본래 준비하는 기간이 더 긴 일이긴 하지만, 보름은 너무 길다.
미진입 지역을 탐사하는 것인 만큼 성과 내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생각이 많아지는 게 흠이다.
'모험에서 깊은 생각은 독이다.'
위험을 안아야 할 때는 생각이 많아지면 안 된다.
생각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겁을 먹고, 겁은 우울로 이어진다.
우울함은 모험의 생을 끊는 극독이다.
"모험가라는 직업이 효율로 보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그걸 고려하고도 좋진 않죠. 일주일 정도 줄일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일주일이라...."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페르다는 곧 그만두었다.
어차피 이건 페르다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버넬에게 일러두도록 하겠습니다."
"그 천재 학자 말인가요? 최근에 할림에서도 공을 세웠던?"
에키라가 기대감에 찬 얼굴로 물었다.
그녀가 인간의 이름을 듣고 그토록 기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사람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해결할지는 모르겠지만, 에리카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페르다 섭정의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의 수완은 또래 인간은 물론 그녀가 겪었던 인간 전체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다 외려 자신의 얄팍함이 보일까 봐 두렵기도 하다.
에리카는 이해할 수 없는 페르다만의 지혜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그에게도 마땅히 방책이랄 게 없었다.
페르다는 이렇게 생각했다.
'버넬이라면 어떻게든 하겠지.'
마도공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도 모르는 페르다.
실제로 그 밑에서 일하는 조수들도 이해하는 내용이 손에 꼽는데, 페르다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러니 실제로 해낼지도 미지수라는 것이 머릿속 답이었다.
그래도 버넬이라면, 마도공학의 천재이니 무언가 해답을 주겠지.
그런 막연함에 갈려 나가는 것은 버넬뿐이었다.
* * *
모든 업무가 끝이 난 늦은 밤,
루리는 발드로바의 레어로 내려갔다.
평소와 같이 정세 얘기를 하기 위해 간추린 내용을 들고 있었다.
다만, 표정은 평소 같지가 않았다.
지하감옥 속에 갇힌 죄수를 마주하러 가는 듯한 얼굴이다.
"주인님, 루리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옆에 난 작은 문을 통해 발드로바의 레어로 들어갔다.
"주인님, 오늘 말씀드릴 것은—."
루리의 말이 턱 하고 끊겼다.
커다란 드래곤의 레어에는 평소처럼 붉은 비늘을 두른 위대한 위상이 없었다.
대신 작은 여인이 갑옷을 벗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왜 정좌를 하시고 계십니까?"
그녀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
발드로바는 쩔쩔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리가 화낼 테니까...?"
"화 안 났습니다."
"정말?"
"조금... 실망했을 뿐이지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는 발드로바.
그 말이 화내는 것보다 더 아프게 들려왔다.
"근데, 루리야...."
"예."
"어떻게 알았어?"
"...발드로바 님의 품행을 봐서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품행 때문에 갑옷 기능이 떠올랐고요."
"그렇게 티 났어?"
"그렇지마는 또 않은 거 같더군요. 페르다 님은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렇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발드로바.
그 모습을 보고는 루리의 표정이 약간 사나워졌다.
"안심하긴 이르십니다."
루리는 무언가를 꺼내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재앙의 소문이 열렸다.
"기록을 찾아보니 갑옷 기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시는군요."
"으, 응...."
"벌써 몇 달 동안 이곳에서 일하셨고요."
"그렇지...."
발드로바의 어깨가 무겁게 내리앉아갔다.
"침묵의 맹세. 참으로 기발하십니다. 만약 말을 하셨다면, 페르다 님도 금방 알아차렸을 테니 말입니다."
"그건 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됐어...."
"그렇겠지요. 발드로바 님이 그리 치밀하게 하실 리는 없으니."
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하시는 일은 인간으로서 유희입니까?"
"유희 같은 게 아니야. 이, 인간들을 돕는 거지."
"...."
그래.
이건 유희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드래곤의 유희라는 것은 대부분 평범한 인간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할 때를 일컫는다.
위대한 업적, 혹은 악명을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지면서 훗날 드래곤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 하는데,
어떤 드래곤이 인간으로 위장하여 공사장에서 짐 나르는 인부 일이나 하겠는가?
그건 위대한 업적도 한낱 유희도 아닌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었다.
루리는 드래곤의 여종으로서 그 일이 탐탁지 않았다.
발드로바가 자신의 힘을, 명성을 좀 더 소중하게 대하길 바랐다.
"그래도 말이야...."
그러나 그런 마음도 모른 채로 발드로바가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열심히 일해서 돈 이만큼 모았다?"
자랑스럽게 그녀가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그곳에는 동화와 은화가 섞여 있었다.
루리는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충 창고의 물건을 발로 차서 끌어와도 이것보단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고작 푼돈에 보람을 느끼는 저 모습이 탐탁지 않았다.
이건 화를 내야 한다.
"좋습니까?"
"응. 좋아."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내가 뭔가 부수지 않고, 만들 수 있구나 싶어서."
"...."
그 말을 듣자, 놀랍도록 분노가 가라앉았다.
루리는 알고 있다.
저렇게 순수하게 웃으면서 슬쩍 던지는 자기혐오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것을.
오직 루리만이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았기에, 그녀를 질책할 수 있는 것이며 동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뻐하는 것도 잠시였다.
발드로바의 머리가 바닥으로 기울었다.
"그치만... 역시 또 부숴 버리고 말았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는 걸까?"
발드로바는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헤실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발드로바 님은 힘의 위상, 그보다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발드로바는 머리를 살짝 그녀에게 기대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무서워했어. 내가 또 부숴 버려서...."
"경황이 없었을 뿐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우매합니다. 당장 닥친 일을 두려워해도 다시 되새기면 금방 주인님의 업을 깨닫고 찬송할 것입니다."
발드로바가 고개를 들어 루리를 보았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촉촉하다.
"그럴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 갑옷을 입으시고 말입니다."
루리의 말에 발드로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그 일 계속해도 되는 거야?"
"하셔도 됩니다."
"루리가 싫어하는데도?"
"주인님의 뜻을 어찌 한낱 종 따위가 어떻게 막겠습니까?"
이런 상황까지 왔는데,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하찮은 유희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고, 상처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녀가 어찌 바보 같은 짓이라 매도하며, 그만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설령 드래곤의 위엄으로서 어긋난다 할지라도, 그녀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인내할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말이지...."
발드로바는 들뜬 얼굴로 그녀에게 한 가지 더 부탁했다.
"나 페르다 씨의 기사가 되는 것도 하면 안 될까?"
인내의 한계를 벌써 느끼고 말았다.
"...그건 왜 하고 싶으십니까?"
"그야... 페르다 씨를 자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이며 말했다.
"자주 만나시지 않습니까?"
"무, 물론 자주 만나는데... 만나긴 하는데...."
발드로바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평소랑은 다른 모습이 조금... 멋있어서."
"...멋?"
"페르다 씨가 항상 자상하게 대해 줘서, 항상 그 사람이 자상한 사람이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런데...?"
"조금 차갑게 대하는 그 모습이 남남이 된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발드로바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얼굴은 암컷이나 다름없다.
"뭔가 설레었달까?"
"...."
그러자 차분해졌던 루리의 마음속에 순식간에 불로 지펴졌다.
그녀의 눈에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주인님."
"응?"
"정좌하십시오."
"으, 응?? 왜?"
"설교에 들어가겠습니다."
재앙의 소문이 본격적으로 열렸고, 발드로바의 안색은 창백하게 물들어 갔다.
괴로운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지만, 그 눈물 또한 새로운 설교 거리로 이어졌다.
* * *
발드로바는 루리의 말대로 다시 헤스티아 마을을 찾아갔다.
똑같은 모양의 갑옷과 행세.
숨기지 않은 갑옷 기사 그대로였다.
'나를 보고 있어.'
그들의 시야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괴물이 왔어.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 또....
-꺄아아악!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환청이 진득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역시 그냥 돌아갈까?'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던 두 다리가 연약한 마음에 흔들린다.
"기사님."
안개가 개고 현실로 돌아왔다.
어린 소녀가 당돌하게 다가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소녀는 질 나쁜 모험가들에게 잡혔던 작은 아이.
마물의 아가리에 잡아먹힐 뻔했던 그 아이.
그리고
나를 괴물로 보았던 아이.
"구...."
소녀가 힘겹게 입을 열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꽃이었다.
숲에 가면 발에 차이는 그런 흔하디흔한 들꽃.
그러나 발드로바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듯이 그 꽃을 쥐었다.
소녀가 짓는 젖니 빠진 미소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103화. 재목
아무것도 없는 설산 한가운데,
추위에 강한 생물들도 우중충한 날씨에 겨울나기를 위해 잠들어 있어 고요했다.
그런 공간 속에서 세로로 크게 균열이 벌어졌다.
뭍으로 새어 나온 기름처럼 어지러운 색의 균열은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을 뱉어 내었다.
그 안에 있던 것은 검은 덩치 사내와 회색 로브를 입은 사내.
페르다가 곡마라 간파했던 그 남자였다.
그들은 설산 앞으로 도착했다.
"굳이 이쪽으로 와야 했나?"
"없지."
"그런데?"
"마땅히 생각나는 장소가 없더군."
"흠."
덩치는 설산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린네라는 다크 엘프가 연구소장으로 활동했던 장소.
그러나 그것도 과거형에 불과했다.
"린네는 어떻게 하기로 했지?"
"연구는 속행하기로 했다."
"관대한 처사로군."
그러자 덩치가 코웃음을 쳤다.
"관대할 리가 있나? 완성되고 나면 죽일 거다. 애초에 그것 이외에는 가치가 없는 여자였으니."
"개를 삶는 건가? 것도 뒤탈은 없겠군."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자신을 향한 살기를 느낀 곡마.
그는 손을 들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무언가가 그의 손에 막혔다.
쿠웅!
덩치의 주먹이 그의 손에 닿았다.
힘의 차이에 한참 밀리긴 했으나, 두 다리로 견뎌 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네가 하는 짓을 했을 뿐이다."
"내가 뭘 했단 말이냐?"
"대화를 피하고 있으니, 나도 대화를 포기했다. 말이 더 필요한가?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겠군."
"속일 생각하지 마라. 굳이 그 다크 엘프 계집 이야기를 꺼낸 건 대화를 피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내가 피했다는 대화가 무엇이냐? 너는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
"페르다 발드로바."
덩치는 화가 난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 남자를 왜 죽이지 않았지?"
"...."
"봐라. 대답을 못 하지 않나?"
곡마의 침묵에 덩치가 이죽였다.
"네놈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꼴사납게 용사에게 찔려 죽은 주제에 몰래 생을 연명하다가 모습을 드러낸 꼴을 말이야."
"...."
"넌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다. 추하게 살아서 이렇게 돌아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죽는 게 좋다면...."
곡마는 감정이 담긴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너도 함께 아버지를 따라가지 왜 살아 있나?"
"네놈 때문이지 않더냐?"
"그건 핑계에 불과하지. 내가 널 살려 냈을 때, 내 명확한 목적을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넌 그걸 받아들였지. 지금 와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네가 금세 변심하는 인간과 다를 게 무엇이냐?"
덩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폭력으로 이어지는 대신 맞대었던 주먹을 거두었다.
곡마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페르다를 죽이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역시 인간이란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모르겠더군."
곡마가 과거 그 말을 꺼내게 했던 이는 딱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먼 과거를 떠올렸다.
곡마는 인간들의 약함을 하찮게 보았다.
그들이 믿어 왔던 것들을 무너트리고 부수며, 그들의 나약함을 조롱했었다.
그렇기에 죽는 순간까지도 몰랐었다.
그 나약한 인간 무리들 중에서 감히 자신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자가 나올 거란 것을.
그리고 그 남자가 끝내 마왕마저 없애 버릴 줄은.
고드윈의 뜻을 거세해 버린 반역의 씨앗.
'용사.'
곡마는 자신의 가슴을 매만졌다.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은 모든 신과 용의 가호가 깃든 성검이 아닌 조잡한 식칼.
비록 지금은 부활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로 경각심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온전히 기쁨으로 빚어진 감정이었다.
그 불완전한 죽음으로 인해 뜻은 이어지고 있으며, 이토록 강해질 수 있었기에.
틀림없이 아버지 또한 허무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리라.
곡마가 평가를 두 번씩이나 번복하게 만든 것은 용사가 유일무이한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절대라는 단어가 없다.
'페르다 발드로바.'
용사에게 느꼈던 그 의외라는 감정을 그 사내에게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 방향성은 다르나 결은 비슷한 감각.
곡마는 그것도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음?"
덩치가 눈밭 한 곳에 시선을 던지며 소리를 내었다.
"왜 그러지?"
"...누군가가 있다."
보이는 것은 눈으로 완전히 덮인 눈밭.
아니. 덩치가 시선을 던지는 곳으로 곡마도 눈을 돌리니 유독 튀어나온 무언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투구 같은 형체를 하고 있었다.
투박한 형태로 볼 때, 어딘가에 놓인 석상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그 석상에 쌓인 눈이 흔들렸다.
그것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돌산 하나를 인간의 몸으로 표현한 것처럼 거칠고 투박한 갑옷이었다.
그 갑옷을 보자, 어째서 눈이 몸을 덮을 동안 가만히 있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알베르도, 당신이로군요."
그의 이명만큼이나 우직한 모습.
가히 걸어 다니는 요새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자태였다.
"당신을 이렇게 마주한 게 우연일 리는 없을 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말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내려놓았던 몽둥이와 방패를 들었다.
길이만 2m가 넘는 그 무거운 몽둥이와 비슷한 크기의 방패.
온몸에 두른 갑옷 또한 투박하고 거칠다.
몸에 두른 것만 보면, 둔해 보이고 실제로 그 움직임도 둔한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마족들 사이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이다.
쌓은 악명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특히 덩치가 그 모습을 보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이 개 같은 새끼...!"
덩치가 잘 만났다는 듯 이성을 잃고 알베르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늘이야말로 죽여 주마!"
그의 주먹이 갑옷을 깨부술 기세로 힘껏 뻗는다.
알베르도 또한 그 박자에 맞춰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격돌하려던 그때였다.
곡마는 허공에 손가락을 그었다.
덩치와 알베르도, 그 사이에 공간이 열리며, 덩치를 집어삼켰다.
알베르도는 허공을 가르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쿠웅!
바닥이 크게 울리며, 눈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다시 바닥에 내리 앉았다.
알베르도는 곡마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이해하십시오. 당신에게 사지가 분질러진 것이 분해서 저러는 것이니 말입니다."
"...."
"게다가 당신이 원하는 건 저 잔챙이 같은 놈들이 아니라 저이지 않습니까?"
언뜻 듣기에는 자아도취에 빠진 듯하지만, 그 말은 진실이었다.
알베르도는 곡마만을 바라보며 달려왔고, 그렇기에 이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만두십시오. 저를 추적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알베르도."
"...."
"당신은 마력도 없고, 무엇도 없는 그저 인간에 불과하죠. 내가 손가락을 한 번 그어 이 공간에서 빠져나간다면, 당신은 다시 뚜벅거리며 대륙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 불합리함 속에서도 당신은 고독하게 저를 찾는군요."
"...."
알베르도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곡마는 그렇게 말했으나, 알베르도를 비웃지 않았다.
그의 둔함에 썰려 간 마족과 마물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으며, 붕괴된 거주지만 해도 두 자리가 넘는다.
그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이 그는 묵묵히 마족만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기에 그 남자는 걸어 다니는 요새, 알베르도라고 불리우는 것이었다.
"마족을 죽을 만큼 싫어하시니, 당신에게만 말씀을 드리죠. 제가 오늘 무엇을 보고 왔는지 아십니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페르다의 얼굴이었다.
"마왕의 재목입니다."
"...."
"잠재력이 뛰어난 인간이었습니다. 지금은 마의 땅을 정복하려는 괘씸한 마음을 지녔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지요."
곡마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상실의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허무."
곡마는 다시 한번 더 공간을 찢었다.
"그리고 허무에는 언제나 분노가 자리를 잡으니."
그렇게 곡마는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알베르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우중충한 날씨.
곧 눈보라가 칠 예정이다.
강풍이 불며 눈이 다시 쌓이겠지만, 그의 발걸음을 막진 못할 것이다.
마물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그 발걸음은 정처 없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여느 때와 다르게 발걸음이 또렷하게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 * *
갑작스러운 마물의 등장.
패닉으로 이어질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아침은 평온했다.
비록 누군가가 죽었으며 심각하게 다친 사람들도 있었으나, 비탄에 빠지는 길로 이어지진 않았다.
치안대장 윌리엄을 향한 신임과 드래곤 스폰들의 지원이 최악의 사태를 모면했음에 안도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핸슨이 바로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골드러시의 꿈을 가장 먼저 꾸면서 이곳으로 왔던 핸슨은 이 평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난리를 쳐야 될 텐데.'
무릇 계층의 이동은 혼란에서 나오는 법.
핸슨은 그 계층에 대한 집착이 남들보다 강했다.
그는 목공으로 제국에서는 이류에 그치는 건축가였다.
그런 그가 제국에 머물렀다면, 소장 자리는 상상으로 그쳤을 것이다.
그는 이미 능력 이상의 직위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좀 더 높은 자리로 가고 싶다.'
귀족의 자리.
아니 귀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여기 있는 서민들이 고개를 조아리는 자리를 말이다.
'나 같은 놈들에게는 안 되는 일이었지.'
원래는 서민들이 꾸는 한낱 백일몽에 그치는 일이다.
입담꾼들이 괜히 거지들이 기연을 얻어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되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듯 그런 판타지는 모두 가슴 속에 있다.
핸슨은 그 망상이 특히 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엄청난 기연이 있지 않던가?
'갑옷 기사.'
모든 것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자체를 다루기도 쉬우며, 능력도 출중하니 매번 핸슨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던가?
그렇게 반장 나부랭이였던 자신을 소장 자리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핸슨은 초기의 그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저 사람은 조만간 기사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아부도 떨고, 대신 목소리가 되어서 그를 대변해 주는 등, 챙길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챙겨 주었다.
길어야 1달 안에 기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갑옷 기사는 기사가 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공사판에 머무르고 있었다.
'갑옷 기사님이 기사가 되어야 나도 권력이 생기는데....'
소장을 넘어서 현장 관리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부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갑옷 기사가 좀 더 높은 곳으로 가야만 한다.
'성으로 불려 갔을 때, 옳다구나 싶었더니....'
제 복을 발로 차 버리는 놈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겉으로는 괜찮다고 말을 해도 뒤에선 쓰라린 속을 달래려 술이나 홀짝이는 신세였다.
어쩌겠는가?
자기 분수에 맞게 사는 수밖에 없지.
"분위기가 참으로 흉흉하구만!"
그 말을 넌지시 던진 이는 한 여인이었다.
아직 혼기를 잡기엔 이른 정도의 나이.
얼굴에서 나오는 건방진 모양새는 숫처녀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그런 건방진 처녀가 있을 리 없다.
이 여자는 초출 나온 마법사임이 틀림없었다.
'엮이면 피곤할 거 같은데....'
핸슨은 그 말을 못 들은 듯이 외면했다.
그러자 여인은 좀 더 노골적으로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흠흠, 늑대 마물이 들이닥쳤다는 말을 들었소만."
"...그런데?"
"그런데는 반말이고. 내가 제때 오지 못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들었소."
"4명밖에 안 죽었수다."
"자넨 사상자가 뭔지 아나? 사망한 사람이 아니라 다친 사람도 포함일세."
"그렇다 해도 이 정도만 해도 선방했던 거였수. 모험가 나리들이 더 끼였다면, 그런 사망자도 없었을 테지."
"결국에는 이런 사태에 대응하지 못하는 무능한 위의 잘못이라는 것 아니겠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핸슨이 눈살을 찌푸리며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여인은 당돌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게. 이 도시에서 자네가 온 이유가 무엇이겠나? 돈을 벌려고 왔지?"
"그렇소만...."
"분명 자네들을 꼬셨던 고용주들도 이렇게 말했겠지. 마의 땅이랑 가깝긴 한데, 그래서 오히려 안전하다는, 그런 식으로 말이야."
사실이긴 했다.
그 말을 믿진 않았지만, 전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말.
여기에 온 이들은 어차피 일자리가 없어서 온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습격을 당했어. 사람이 죽었지. 그런데도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그래서 뭐 어쩌란 거요, 아가씨?"
"하하! 그러니깐 내가 방법을 제시하는 것 아니겠나?"
이제야 말이 통할 것 같다는 듯이 옆에 다가왔다.
꽃향기가 진하게 풍겨 왔다.
"그래서 자네가 소장인가?"
"그렇소이만."
"밑에 있는 인부만 몇인가?"
"대충 50명 정도 됩니다만...."
"다른 소장까지 꼬시면 100명은 되겠군."
"그렇소."
"생각해 보게 이 도시에 인구는 이제 600명 가까이 되지. 자네들만 해도 100명이지 않은가? 무려 1/6이란 숫자일세."
"그렇...소?"
"이런 마을에서 자네들이 훅 빠지게 되면 얼마나 손실이 일어날지 아는가?"
"...."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당장에 우리들이 있어서 이 공사판이 굴러가지 않던가?
하루하루 노동이 이어져야 하는 곳에서 멈추게 된다면, 큰 타격이 올 것이다.
"자네들은 대체할 수 없는 귀중한 인력이지. 그런 인력들을 이렇게 굴리고 있다는 사실은 분노해야 마땅하지 않겠나?"
"흐음...."
"자네들에게는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지위를 누릴 권한이 있다네. 돈으로만 살 수 없는 것이 인명이라는 걸 그 애송이 섭정이 똑똑히 깨달아야 한단 말이야."
핸슨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금 물욕이 한창 끓어오르고 있을 때 들은 말이다.
그것은 악마의 속삭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무슨 수로 제가 그런 걸 합니까?"
그러자 여인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다 방법이 있지. 내가 도와주도록 하겠네."
* * *
갑작스러운 마물의 출현에도 마을은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사상자는 30명으로 군인 5명과 민간인 15명, 그리고 합류했던 모험가 10명이었으며, 그중 4명이 죽었는데 전부 민간인이었다.
그렇기에 헤스티아 마을의 아침은 평소와 같을 수는 없었다.
이사벨라는 이렇게 말했다.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104화. 파업
파업.
페르다에겐 참으로 생소한 개념이었다.
"파업?"
"말 그대로 나 일 안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돈을 주는데 왜 일을 안 하나?"
"자신의 권리를 찾겠다느니 그런 목적으로 일을 그만두는 것이죠."
"인질극이로군."
페르다는 신박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인질로 삼는 수단을 쓰다니.
목이 떨어지는 것도 자신인데,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제국에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없던 것 같은데."
"수요의 차이지요. 제국에서는 그런 소리를 했다 하면, 바로 대체해버리면 그만이니."
제국 수도에만 몇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 하나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바꾸는 것이 그곳의 일상.
새삼 얼마나 눈이 어두운지 느껴진다.
'용의 권력보다 황제의 권력이 더 강하다니.'
뭔가 말이 되지 않는 소리 같아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멀리 있는 보검보다는 가까이 있는 식칼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어찌 됐든, 페르다는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그녀에게 물었다.
"그 건방진 주동자가 누구지?"
"핸슨이라는 제국 출신의 목공입니다. 현재 제국에서 온 인부들의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죠."
"죽여도 지장 없겠나?"
그의 해결법은 간단했다.
대가리를 쳐 냄으로써 딴맘을 못 품게 하는 것.
그것이 페르다가 생각하는 최선이었다.
이사벨라는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실력은 시원찮긴 하지만, 함부로 죽이면 문제가 될 겁니다."
"어째선가?"
"나름 인물 간의 커넥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이미지가 악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이미 나쁜 상태에서 나빠져 봐야 얼마나 더 나빠지겠나?"
페르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돌연 깨닫고 그에게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페르다 님 지금 평판이 어떠신지 모르시는 겁니까?"
"그래."
눈을 깜빡이는 이사벨라.
인지시킬 필요가 있겠다 생각하여 이사벨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난민들을 수용하고,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이런 겨울에 난민을 받아 주는 것만큼이나 구원자는 없지요. 게다가 일자리 또한 보장해 주고 있으니, 안정적인 수입을 통해 의식주도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게다가 외세에 못 이겨 쫓겨난 자들인 만큼, 그 위협을 막아 주겠노라는 포부를 보였으니, 그 점에 감화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 음?"
페르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나?"
"제가 지어낸 말이었으니,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왜 그런 짓을 했지?"
"레드 드래곤의 악명 때문에 그에 대비되는 선한 명성이 필요했습니다."
"실제로는 안 그런데?"
"세간에는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사벨라의 요지는 페르다가 발드로바의 악명에 대응할 수 있어야만 안심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내쫓을 생각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자기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도망친 것들을 받았는데, 돌려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여튼, 그녀가 하는 말이 뭔지는 알 수 있었다.
"요는 내가 마을에서는 평판이 좋다는 말이로군."
"누군가는 성인군자의 환생이 틀림없다고 떠들어 대실 정도지요."
기묘한 일이었다.
페르다는 성인도 아니며, 군자도 아니었다.
오로지 발드로바 하나를 위해 달려가고 있으며, 그를 위해선 어떤 일도 서슴지 않을 뿐이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더니.
딱 이런 일이 아닐까?
페르다는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목을 치는 게 안 된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이 안 된다고 하니 다른 방안을 모색해 보려 했다.
"비단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사벨라가 그럴 시간도 주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또 어떤 일이 있나?"
"자잘한 것까지 합치면 아주 많습니다만, 대표적으로는 벽 건축가 간의 의견 충돌이 거세게 진행 중이라던가."
종이 한 장을 앞으로 내밀고,
"모험가들이 구역별로 보호비를 받아 내려고 해서 점주들과 마찰을 빚는다던가."
다시 한 장.
"그리고 기도하는 도중에 웬 분홍 머리가 이상한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는 바람에 전원이 박장대소하여 엄숙함을 못 유지해서 잡아서 족쳐야 한다며, 청하는 중입니다."
"분홍 머리라...."
그 분홍 머리는 누군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이런 불만과 혼란이 있는 가운데에 의도적으로 섭정님의 명성을 좀먹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선동가가 있습니다."
선동가야 어딜 가든지 있다.
부유한 집안, 혹은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자라나, 지식과 말재간을 바탕으로 서민들을 끌어들이는 놈들.
역사가 짧고, 체계가 덜 잡힌 이런 도시에서는 서민들이 선동가들의 먹잇감이 되기 충분했다.
"그놈은 족쳐도 되나?"
"저 또한 족치려 하고 있습니다만, 실마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건 좀 놀라운 이야기인데.
"자네가 추적을 못 한다고?"
"그렇습니다. 제가 말하기에 부끄럽습니다만, 신출귀몰이 따로 없습니다."
"흠...."
그녀는 마법의 위상인 이오르가의 자손이다.
그런 그녀가 추적하지 못한다는 건 상대도 만만치 않은 것들이라는 것.
'단순한 선동가는 아니겠군.'
권력보다는 혼란을 더 좋아하는 순수한 악마 같은 놈일 것이다.
"아무튼, 이번에 쌓인 일들은 한 가지 형태로 끝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사벨라가 서류를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협의회를 여는 겁니다."
"서민들과 마주하고 이야기해 보라는 거군."
"일을 가장 부드럽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이지요."
부드럽게 끝낸다라.
페르다는 그 '부드럽게'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수를 거느리는 사람이 굳이 유해질 필요가 있겠는가?
오히려 독하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는 이사벨라가 더 뛰어나다.'
웃대가리를 쳐서 정상화하겠다는 생각은 이사벨라도 했으리라.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러 오지도 않았겠지.
협의회를 고려해 볼 만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쁘지도 않겠군....'
죽여서 얻는 것보다 살려 둬서 얻는 이득이 많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게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지 않을까?
"알겠다. 협의회를 진행하도록 하지."
"예. 그러면 일정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이사벨라는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페르다는 곧바로 전음용 수정구를 꺼내어 어디론가 연결했다.
-파스칼 상회의 연락관, 리제가 섭정님을 뵙습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일세. 본부장 지금 있나?"
-본부장님은 지금 계십니다. 연결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부탁하지."
잠시 후, 스테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섭정님을 뵙습니다. 혹시 파업 사건으로 연락하신 겁니까?
소식통이 빠르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버릴 줄이야.
"그렇다네."
-안 그래도 그것에 관련해서 조치를 취해 드려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주저하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가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네. 협의회를 열 건데, 어떻게 이어질 것 같은가?"
-협의회라면... 저 또한 많이 해 보았지요. 이렇게 영주와 대적하는 유형은 대부분 권력과 직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권력이라...."
권력이 있으면, 돈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법이다.
얕보이는 듯한 느낌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 권력을 주면 되는 일이란 말이로군."
-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권력을 보존하는 방법도 있지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스테판이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만 믿으십시오. 그것들을 두고두고 괴롭힐 수 있는 인형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 *
헤스티아 마을, 공사 현장.
헤스티아 상회가 입주 예정되었던 곳은 현재 극동부 노동조합(임시)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여 점거된 상태였다.
그곳의 대장은 다름 아닌 소장, 핸슨.
그가 다른 소장과 반장들을 꼬드겨 임시 조합을 창설하는 데 성공했다.
"거, 우리 말을 들을까요...?"
자리에 깔고 앉은 반장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높으신 분들이 이런 짓을 허락해 줄 거 같지가 않은데...."
"거, 김빠지는 소리 하지 마쇼."
"돈 좀 더 받고 싶다면서 올 때는 언제고, 그런 말을 하나! 지금이라도 빠지게, 그럼!"
"아니, 나는 그냥 불안해서 그렇지...."
거친 반장들의 반발에 꼬리를 마는 수밖에 없었다.
핸슨은 무뚝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불안해 죽겠다.'
저지르기 전까지는 꿈에 부풀어 올랐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호랑이 등에 업힌 그에겐 선택권이라는 게 없었다.
'그래도 함부로 어떻게 하진 못하겠지....'
핸슨이 그렇게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도, 든든한 동료가 있기 때문이었다.
'갑옷 기사.'
통나무 11개를 맨손으로 들 수 있는 괴력!
홀몸으로 마물 두 마리를 죽일 만큼 뛰어난 무력!
비록 두려움을 자극하나 이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핸슨이 이토록 무모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갑옷 기사 또한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소장과 반장 또한 그 갑옷 기사를 믿었다.
사실상, 그들이 맺은 결속의 구심점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구심점은 핸슨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래, 갑옷 기사님이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
침묵의 맹세로 단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으나, 위급한 상황에서는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날렵한 안경과 지적인 눈매.
발드로바 문양이 새겨진 붉은 정복을 입은 모습이 전문적이며 고압적인 인상이었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그들은 모두 '삶이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문구를 적은 머리띠를 매고 있었다.
"섭정님과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이사벨라가 말했다.
"요구사항을 준비해 놓으십시오. 일주일 뒤 협의회를 열 것입니다."
"협의회라면, 섭정님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고충을 들어 주실 테니, 그사이에 준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반신반의했다.
제국이었다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끝났을 것이고, 다른 마을이었다면, 치안대의 급습에 강제 해산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무력 대신 이야기를 들어 준다니.
"그리고 협의하겠다고 들어준 만큼, 진행하는 파업은 중단하시고 생업에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에 반장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장, 핸슨이었다.
핸슨이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직 우리한테 내놓은 조건도 없는데 일을 하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난감한 얼굴로 핸슨의 얼굴과 이사벨라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사람들.
이사벨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장 후임자도 없는 상황에서 공사 현장을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봉급은 현행에서 150%로 인상하여 지급할 것이며—."
"봉급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은 판국에 이번과 똑같은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보게...."
반장들이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갈 곳을 잃은 손은 우뚝 멈췄다.
핸슨은 일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젊은 마법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러했다.
-자네들에게 생업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할 테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절대 받아들여선 안 돼. 생업에 돌아가면, 자네들 또한 얕보이게 될 걸세. 아, 미개한 우민들이 저렇게 나와도 돈만 준다고 하면 다시 위험을 감수한다고 말이야.
-음....
-무엇보다 자네가 얻을 권력이 약해질 걸세.
그 말에 꽂혀 버린 핸슨은 마법사의 말대로 대응한 것이다.
물론 될 대로 되라는 현재 심정이 크게 한몫했다.
간이 배 밖으로 이미 튀어나왔는데, 쓸개 정도야 더 튀어나올 수 있지 않는가.
이사벨라는 그렇게 주장하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가움을 대표하는 이오르가의 자식들.
그러나 이 차가움은 결이 달랐다.
심장에 파고들며, 모든 것을 멈추게 만든다.
이오르가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하려던 순간, 핸슨은 어깨에 콕 하고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자, 그곳에는 갑옷 기사가 있었다.
핸슨은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물었다.
"후우, 후우.... 왜 그러십니까, 기사님?"
갑옷 기사는 침묵의 맹세를 했다.
그러니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젓기만 했다.
핸슨은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다.
"일하러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끄덕끄덕.
원하는 것은 얻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더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구심점이 될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기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알겠습니다. 당장 일에는 돌아가도록 하지요. 만약 또 마족들이 나타나서 위험해진다면...."
"저는 저로서 책임을 지겠지요."
이사벨라의 눈에 한기가 서렸다.
"그쪽은 무슨 책임을 지겠습니까?"
"저는...."
핸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띠에 적힌 '삶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어떤 것도 확언하지 못했다.
이사벨라는 김빠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됐습니다. 실랑이는 이쯤에서 끝내고 돌아가도록 하죠."
이사벨라는 짧고 명료하게 말하고 사라졌다.
숨을 죽이고 있던 반장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진짜 간이 떨리는군."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틀어졌으면 다신 여기서 일을 못 하겠구만...."
"자자, 우리도 일하러 갑시다. 어우! 샌님처럼 앉았더니, 온몸이 뻐근하네, 그려!"
반장들이 하나둘씩 문밖을 벗어났다.
그때, 맨 끝에 서 있던 중년 하나가 눈치를 보더니 핸슨에게 슬쩍 다가왔다.
그는 난민으로 이곳으로 와 성실하게 일하여 반장 자리에 오른 남자였다.
"핸슨 소장, 다음부턴 그러지 마시오."
그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105화. 살미 아니면 쥬금을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괜히 공포 조성할 거 같아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야기 안 하겠다만, 그쪽이 한 행동이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거 아시오?"
핸슨은 그 말에 허세를 부렸다.
"위험할 게 뭐가 있나? 어차피 그쪽 관리가 내게 손대면, 그쪽만 손해일 텐데...."
"무슨 소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네가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이사벨라 행정관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무슨 목숨을 잃는단 말인가?"
"자네 같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한때 용병이었소. 세르데스 대륙을 누비면서 돈이 될 만한 일이란 일은 다 해 봤지. 그러다가 한번 드래곤 스폰들을 만난 적이 있었어."
평소였다면, 흔히 떠드는 허풍이라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그 중년은 허풍쟁이들은 할 수 없는 살기등등한 눈빛이었다.
"그날은 우리가 오우거를 잡던 날이었어. 표적이 표적인 만큼 많은 용병을 이끌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로 갔지. 꽤 치열한 전투였어. 놈의 재생력과 우리의 준비가 비등비등한 수준이었지. 그때, 후객이 나타났지. 드래곤 스폰이었다네."
중년 반장이 침을 크게 삼켰다.
"그 오우거가 드래곤 스폰의 표적이었는지, 어쩌다 보니 합공하는 형태로 잡게 되었지. 아니, 합공이라는 말도 무색해. 놈이 오자마자 바로 목을 잘라 냈고, 우리는 그 시체에 흠집을 내는 거였으니까."
"그게 지금과 무슨 상관입니까?"
"끝까지 들어 보게.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오우거가 죽고 나서 그가 귀를 잘라서 우리 용병대장에게 던져 주었다네."
"토벌 증거품 말입니까?"
"그렇지. 드래곤 스폰이 공로를 가로챈 만큼, 나름대로 호의를 베풀어 준 거였지."
"원만하게 해결된 문제처럼 들리는데,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겁니까?"
"우리도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아니었다네. 우리 용병대장은 기사 출신이었어. 게다가 철도 없었지. 그 드래곤 스폰에게 배짱을 부렸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아나?"
그가 굳어 버린 표정으로 목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대로 목을 쳤어."
"...."
"그놈만 죽은 줄 아나? 아니야. 그 목을 포함해서 10명을 더 치고 나서야 무자비한 살육을 그만두었지."
"왜 그런 짓을...."
"간단하네. 말대꾸를 했기 때문이야. 철없이 어리고 약한 것이 자존심 부리는 건 그들에게 허락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야.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는 좀 실감하는가?"
반장이 어디론가 턱짓했다.
갑옷 기사가 앉았던 자리였다.
"귀인께서 자네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물론 여기서 몇 명은 더 죽어야 끝났을 걸세."
중년 반장이 그렇게 말하고 연장을 어깨에 걸치며 밖으로 나갔다.
핸슨은 그의 뒤를 따라 나가지 못했다.
그 중년이 한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말이다.
'그래도 내 생각이 맞았잖아.'
갑옷 기사가 있기 때문에 죽음은 모면하지 않았던가?
어찌 됐든, 그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 * *
한편, 이사벨라도 기묘한 감각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순간 본능이 압도했다.'
드래곤 스폰의 본능은 명예 하나로 귀결된다.
하늘 아래에 가장 존귀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이며,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는 본보기로 삼아 일벌백계하고,
그분의 자식을 죽이는 자를 지옥 끝까지 쫓아가 고통스럽게 죽이라.
그러한 본성이 순간적으로 그녀를 압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드래곤 스폰이 같은 인간을 보더라도 급이 나뉜다.
존중받아 마땅한 자들이라면 마땅히 존중하지만, 그 이외에는 개나 가축 수준이다.
그들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말이 조금 통하는 수준이라는 것.
이오르가의 자식인 이사벨라도 마찬가지였다.
페르다는 발드로바의 약혼자이며, 동시에 유능한 섭정이기에 존중한다.
윌리엄은 뛰어난 무예와 그를 웃도는 정신력을 지니어 존중한다.
하지만 핸슨은?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게 없다.
즉, 말할 줄 아는 개와 동급인 수준이었다.
특별히 간식도 가져왔더니, 꼬리 흔들지는 못할망정, 제 주인의 손을 무는 건방진 개.
기껏 원만하게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고 승인받아서 왔는데, 하는 말이 더 내놓으라니.
사람을 무는 개는 죽어야 한다.
딱 그 생각에 사로잡혔었고, 핸슨을 죽이려 했다.
본보기는 그면 충분했다.
'그 남자가 막아서기 전까지는.'
갑옷 기사.
높은 장신에 듬직한 체형.
투시 마법으로는 뚫을 수 없는 갑옷.
외형은 마을 대장장이들 수준에서 만들어지는 수준이었지만, 최고급 소재를 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남자가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이사벨라는 본능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핸슨의 목이 바닥에 구르거나, 운이 좋다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터.
결코, 좋은 꼴은 보지 못했으리라.
'우둔하고 어리숙한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날카로운 감이 있어.'
이사벨라 또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를 단순한 인부로 놔두기엔 아까웠다.
* * *
갑옷 기사, 발드로바는 생각했다.
'왜 다들 여기에 앉아 있지?'
때는 이사벨라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반장급 인물들.
좁은 사무실 안에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채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소장님이 뭐라고 하긴 했는데....'
핸슨은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무어라 말을 했었다.
다만,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확실하게 알아들은 것은 하나.
-기사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도움이 절실하단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와주기로 했다.
'이 마을을 위해서니까!'
틀림없이 무슨 힘을 써야 하는 일이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하는 일은 고작 핸슨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
아무리 봐도 도움이 필요한 것 같지 않은 일이었다.
'심심하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근육이 굳어 버리는 기분이다.
엉덩이를 떼고 싶어도 이 분위기가 그녀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그렇게 생각해서 몇 시간이나 앉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오르가의 아이구나.'
동시에 떠오른 루리의 당부.
-주인님이 여기서 부역자 행세했다는 사실은 절대로 들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그 망할 물도마뱀들 무리들이 알아차려선 안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나운 표정을 했기에 감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괜스레 긴장되었다.
들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와중에 무슨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사벨라의 말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녀는 말을 건져 낼 수 있었다.
-진행하는 파업은 중단하시고, 생업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생업.
그 말은 즉 일하러 가라는 소리.
발드로바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 거였구나!'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는 저 이오르가의 자손이 하지 말라고 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기다렸던 것이었고.
'일을 못 하게 막고 있었으니 이토록 화가 난 거구나.'
발드로바라도 화가 났을 일이었다.
인부들과 맞는 부분이 있구나 하며 혼자서 기뻐했다.
'이제 일하러 가야지.'
하지만 그때였다.
"안 됩니다."
핸슨이 그것을 거부한 것이었다.
'왜??'
분명 일하지 말라고 한 사람은 이오르가의 자식인 거 같은데, 왜 하라니까 이제 거부하는 거지?
발드로바는 핸슨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하면 돈이 생기는데 왜 일을 안 하려고 하지?'
일하면 돈이 생긴다.
돈이 생기면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
심지어 돈도 더 준다고 하고 있는데 이걸 걷어차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하고 싶어.'
빨리 건물 하나가 더 올라가는 걸 보고 싶은 발드로바.
어쩔 수 없이 발드로바가 움직여 그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다행히 의사 전달이 되었는지, 핸슨도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고, 반장들은 다시 작업하러 밖으로 나섰다.
발드로바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서쪽으로 훅 기울어 있는 해가 보인다.
'얼른 오늘 할당량을 마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무언가에 쫓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일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남들 쉬는 일요일보다 월요일을 더 좋아했다.
'일하러 가야지.'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
오늘도 즐겁게 공사장으로 출근.
* * *
협의회 당일.
파스칼 상회 헤스티아 지부로 삼을 건물을 오늘의 회의실로 삼았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건방진 놈들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들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루리 또한 그 뜻에 동조했고, 이사벨라도 그제야 물러섰다.
물론 이사벨라는 그 이유를 다르게 설명했다.
헤스티아 마을 실정을 살피고, 마을의 건축물을 신뢰하기에 그런 것이라 포장해 버린 것이었다.
평판이 원래부터 좋았던 사람이니, 서민들을 살핀다고 받아들이기도 어렵진 않았다.
좋은 평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아침 준비를 마친 페르다는 협의장으로 움직였다.
페르다가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페르다에게 예를 표했다.
"협의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페르다가 착석함과 동시에 이사벨라가 진행자가 되어 개회했다.
페르다는 허례허식에 따르며 문구를 읊는 동시에 온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반대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 머리에는 '삶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투쟁 문구가 적혀 있었다.
'모조리 죽여 버릴까?'
아주 죽여 달라고 말하는데 죽여 줘야 하는 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던가.
그 둘 중 하나도 못 하고 말로만 씨불여야 한다는 사실이 페르다에게는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페르다는 예상외의 인물도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
아니, 익숙한 얼굴이 아니라 투구였다.
'갑옷 기사.'
그를 향한 감정이 조금 더 복잡했다.
기사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말을 거절하고 돌아선 놈.
괘씸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기껏 이야기를 그렇게 했는데, 자신의 호의를 걷어차다니.
'아니, 걷어찬 것 정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이런 곳에 참여해서 물을 흐리는 것이라니.
'설마....'
페르다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저놈이 이 사태의 실질적인 주동자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단순히 기사를 넘어서 영토를 받은 귀족 자리를 노린다면?
제국에서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은 수두룩하다.
저놈이 재기를 위해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게다가 실패 리스크도 없다.'
핸슨이라는 바지사장을 내세워서 불리한 자리에는 내빼면 그만이다.
'같잖군.'
배신감에 따르는 모멸감이 차오른다.
조금은 고결하다 생각했는데, 이토록 속물일 줄이야.
'언젠간 네놈의 아가리를 찢어버려 주지.'
페르다는 증오가 섞인 눈으로 갑옷 기사를 쳐다보았다.
갑옷 안에 있는 발드로바가 그 눈을 보았다.
'페르다 씨가 노려보고 있어....'
친절함 하나 느껴지지 않는 눈빛.
그런데 그 눈이 마냥 싫지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눌렀다.
개회를 알리며,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노동자 임원 대표인 핸슨이었다.
"민초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섭정님과 행정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핸슨이 써 놓은 것들을 보며 말했다.
"저희는 지난가을, 이곳으로 와서 헤스티아 마을의 건설을 돕는 인부로서 이 땅을 처음으로 밟았습니다."
시작은 그럭저럭 포부가 있는 스토리였다.
"그러나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30명의 사상자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마을에는 큰 혼란이 빠졌습니다."
혼란도 있긴 하지만,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라 했었다.
핸슨은 그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아도 모르는 척할 수 있는 뻔뻔함을 지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현명한 왕이며, 지도자라 한다면 민초의 간청을 들어주십사, 조심스레 소를 올립니다.
첫 번째로는 건설업 종사자들의 임금을 올려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두 번째로는 건설 조합을 만들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두 개처럼 보이지만, 총 세 개였다.
돈과 보금자리
'그리고 권력.'
무릇 사람이 뭉치는 곳에는 권력이 생기는 법.
조합, 혹은 길드라고 부르는 곳은 서민들이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만드는 권력 기관이다.
'확실한 건 누가 써 줬다는 것이겠군.'
어휘나 읽는 방식을 보면 그가 스스로 썼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저놈이 대신 쓴 건가?'
저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다면, 페르다가 생각하는 흑막 이론에는 힘을 얻게 된다.
'어찌 됐든, 모든 게 예상대로다.'
정확히는 스테판의 예상이었다.
아버지의 밑에서 대형 회사를 거느렸던 만큼 이런 일에서도 빠삭하여 금방 눈치를 챘다.
"만약."
페르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 요청을 묵살해 버린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핸슨은 그 말을 듣고 긴장했다.
나이가 어리지만, 그에 걸맞지 않은 눈빛에 압도되었다.
그렇기에 핸슨은 발드로바에게 슬쩍 신호를 주었다.
'내가 움직일 차례.'
그러자 그녀가 스윽 움직여 펜과 종이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적을 것은 그들의 이마에 적혀 있는 문구.
'삶이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쓰라 했지?'
발드로바는 긴장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당장에 글씨만 써도 되는 것이니 상관없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쓰는 거였지?'
글자를 쓰는 법을 까먹었다.
아니, 모른다에 가까웠다.
읽는 것이야 익숙해져서 글자를 보면 읽을 수 있는데,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즉, 입력은 되는데 출력이 안 되는 상태.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살면서 글자를 써 본 것이 손에 꼽았다.
당연히 연습도 하지 않았고, 스펠링이 어떻게 되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삶이 아니면 죽음을, 삶이 아니면 죽음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중얼거리면서 글자로 모방해 보았다.
그렇게 해서 쓴 글을 이러했다.
-살미 아니면 쥬금을.
"...?"
"...?"
싼티 나는 글씨체에 맞춤법까지 맞지 않은 문자.
페르다는 물론 대표인 핸슨마저 놀라 식은땀을 흘렸다.
페르다는 그 문자를 보며 한 가지 확신했다.
'흑막 같은 건 아니었군.'
경멸감이 한심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106화. 권력의 맛이란
그들의 의견을 들었으니, 이번에는 페르다가 말할 차례였다.
"그대들의 뜻을 잘 알았다. 공왕령 아래에 새로운 마을을 짓기 위해 불철주야해 주는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지."
감사하다는 말과 다르게 눈빛은 분자 단위로 쪼갤 기세였다.
페르다도 의식하고는 심호흡 한 번으로 감정을 추슬렀다.
"최근에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30명의 사상자가 생겼지. 그중 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들은 전부 민간인이었지. 그들의 죽음이 그대들은 물론, 나에게도 가볍지만은 않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현재는 건물에 집중했던 인력을 돌려서 벽을 세우는 데 집중할 생각이다. 대략 천 명의 시민들이 원활한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최대 3천 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면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핸슨이 인부라고 하지만 나름대로 건축 업계에 발을 담근 사람이었다.
그 면적이 어느 정도인지 대강 가늠할 수 있었다.
"그 벽을 세우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을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시작하겠군요."
"물론이다."
"그렇다면 그 인부들의 안전에 대한 보장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안에 대한 방안.
참으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미 있지 않던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을 한가운데에 설치해 놓은 경종. 그게 뭐라 생각하나? 그건 학자들의 도시인, 에스콜레이아의 총장이 만들어 낸 물건이다."
그러자 뭐 좀 들었다 하는 반장이 호들갑을 떨었다.
"에스콜레이아의 총장이라고 하면, 그 샌님들의 영주인 셈이지 않나?"
"영주면, 제일 똑똑하겠네그래."
에스콜레이아의 총장이라고 하니 믿음이 간다.
실제로는 상위권에서 애매한 위치에 선 학자지만,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페르다는 말을 이어 갔다.
"마물 출현 예측 장비의 경보 기능을 강화하여 위험을 알리는 경종 형태로 바꾸었다. 그걸로 마물의 접근을 감지했고, 신속하게 대피가 이루어졌지. 그래서 사상자가 그만큼 적기도 했다."
페르다는 올려놓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그러나 사망자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최소한의 피해지.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페르다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물 침략 사례가 궁금하다면, 얼마든지 알려 주겠다. 최근에는 30건이 넘는 습격 사례가 있었는데, 그곳과 대조하면 우리가 얼마나 완벽하게 막아 냈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설명을 원하는가?"
그의 말은 차갑고 단단한 것이 강철과도 같았다.
물렁물렁한 주먹으로 쳐 봐야 제 손만 부러질 게 분명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런 자리는 내 지식을 뽐내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기 경보보단 역시 마물을 죽일 힘이겠지."
페르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를 결심한 듯 그들에게 말했다.
"조만간 버넬 마르퀴스가 만들어 낼 마도공학 라이플을 그대들에게 지급하도록 하겠다. 어떤가?"
반장 대부분이 깜짝 놀랐다.
마도공학 라이플의 명성은 이미 일반 서민들에게도 닿았다.
"그 늑대 마물을 한 방에 죽였다는 그 물건 말입니까?"
"그래."
그 말을 들은 스테판이 깜짝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섭정님, 그 부분은 일단 저와 상의를 하고 나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야 그 프로토타입을 공급해야 할 곳은 다른 곳이 먼저이고 어필을 해야 하는지라...."
페르다는 스테판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이 극동부의 안전을 위해서 만든 물건이다. 극동부에 종사하는 이들이 먼저지, 멀리 있는 것들은 내 알 바가 아니지 않더냐?"
"물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만...."
"'다만'이라는 건 없다. 그 이상 발언하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 스테판 파스칼."
"죄, 죄송합니다."
스테판이 그렇게 깨갱거리며 물러섰다.
페르다는 다시 반장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어떤가, 임시 조합장?"
핸슨은 반장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당장 받으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대로 받아서 끝낼 수는 없었던, 핸슨은 조심스럽게 트집을 잡았다.
"물론 그렇게 해 주신다면, 섭정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겠습니다만, 저희가 학식이 짧은지라 그런 물건을 잘 다룰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부분은 섭외한 천재들이 알아서 하고 있으니."
정확히는 바보가 알아서 해 주는 거지만.
천재들을 오늘도 바보 때문에 머리를 뜯고 있을 것이다.
"그 물건에 쓰는 탄환 하나로 늑대 마물 하나를 잡을 수 있으니, 못해도 마물 하나를 다섯 명이서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호오...."
"다섯이서 하나를... 엄청난 물건인데...."
사람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반할 것만 같은 표정을 했다.
그들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 제국으로 상경한 시골민들이었다.
마족들이 만들어 낸 마물과는 접촉이 없었을지 몰라도 고블린 같은 몬스터들의 습격은 다반사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비군도 아닌 제 몸을 지킬 힘.
혹은 그에 상응하는 수단이다.
페르다는 몬스터를 죽일 힘을 죽일 수 있다.
그것도 돈 받고 일하는 용병들도 꺼리는 마물을 죽일 수단을 말이다.
그것은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깊은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선뜻 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제국의 대부호와 관계가 틀어질 각오를 하고 말이다.
'진정 동부를 생각하시는 분이로다.'
페르다는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거의 다 넘어온 것이 훤히 보였다.
'스테판의 예측대로군.'
마도공학 라이플을 지급한다고 던진 작전은 사실 스테판이 꾸민 작전이었다.
사흘 전, 도착한 스테판과 상의하면서 몇 가지 시나리오를 그렸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선심 쓰는 척하기였다.
애초에 마도공학 라이플의 존재 의의가 민간인들을 위한 것.
그리고 당장 극동부민들을 대상으로 먼저 상용화하려 했다.
인부들은 좀 더 빠르게 가지게 되는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여차하면 예비군으로도 만들 수 있고.'
그들에게는 마물을 죽일 힘이 생기고,
페르다에게는 유사시 동원할 병력이 생긴 셈.
서로 윈윈으로 보이는 전략이었다.
물론 총대를 멘 놈, 핸슨은 그걸로 끝내기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요구와는 별개에 가까운 내용이니까.
"위대한 불의 배필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만, 저희의 요구에도 생각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네. 이건 그대들의 요구와는 별개의 것이니. 그 부분은 내가 잘 모르고 있으니, 바톤을 넘기도록 하지."
그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스테판 파스칼이었다.
그가 넉살 좋은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스테판이라고 합니다. 파스칼 상회의 본부장을 맡고 있으며, 후에 상회 전체의 회장이 될 예정이며, 현재는 전 단돌로 상회의 대리 경영자로도 있습니다."
제국 최고의 상회 회장이자, 이인자 그룹마저 경영하고 있는 남자.
비록 귀족은 아닐지라도 어지간한 귀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닌 서민이었다.
그런 주저리를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들을 기죽이기 위함이었다.
"확인해 본 바 여러분들의 고용은 현재 헤스티아 마을의 행정관에게서 외주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이렇게 많은 인부가 있는데, 조합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저 또한 큰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찌 됐든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는 스테판.
"조합의 필요성은 극동부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저 또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발드로바 공왕령의 노동조합, 그러니 극동부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지지합니다."
스테판은 그렇게 종이를 넘기며, 또 다른 요구 사항에 답변했다.
"또한, 현재 인부들과 반장의 봉급은 50% 인상된 그대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각 반장은 관리 감독하는 인부들의 숫자에 따라 차등한 보상을 지급, 실적 성과에 따라서 상여금을 수여하며, 연차에 따라서 극동부 거주지에 입주 지원도 할 예정입니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여태까지 왜 이런 불만을 안 말하고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조합장은 여러분들이 합의했던 내용이 있던 것 같은데, '핸슨' 씨를 추천하기로 결정하셨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핸슨 씨를 극동부 노동조합의 조합장으로 임명하는 거로 알겠습니다."
슥슥 이름을 적고는 스테판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부탁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조합장과 할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이상 내용은 소장 이상만 참여시킬 예정인데 괜찮으시겠나요?"
그러자 반장 하나가 인상을 구기며 따졌다.
"무슨 작당을 할지 알고 그럽니까?"
"그냥 지금 얘기하십쇼."
"원래는 조합장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말씀하신 게 우려되어서 소장급들까지 참관을 허용하는 겁니다."
핸슨을 포함해서 소장급은 총 3명이었다.
영 찜찜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웠다.
반장급들이 자리를 비우고, 소장들만이 남은 자리 속, 스테판이 사뭇 다른 분위기로 말을 시작했다.
"그럼. 간부들이 하는 진짜 이야기를 제대로 해 볼까요?"
"무슨 짓을 하든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거요."
"흔들릴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요. 제가 반장급을 끼우지 않은 건, 귀족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귀족적인 내용?"
핸슨은 적극적으로 받아쳤다.
"공왕령 법도상 현재 시민들에게는 참정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합장이 되어 봐야 사실상 마을 이장보다 못한 직위일 뿐이죠."
"그렇습니다."
"이 건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섭정님께서 노동조합장을 시민 대표라는 형태로 만들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민 대표 말입니까?"
"예. 서부 일부 공화국에서는 이런 형태로 참정권이 주어집니다. 제국의 법도에서 익숙한 쪽으로 말하면... 준남작이라 보시면 될 겁니다."
준남작!
엄밀히 말하자면, 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귀족의 특권을 지닐 수 있는 자리였다.
핸슨이 그토록 원하던 귀족의 자리이지 않은가?
"따라서 시민 대표가 될 경우, 참정권을 보장하며, 세금 감면과 상업 활동 또한 연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기별로 품위유지비까지 지급드릴 예정이고요."
읊는 한 줄 한 줄이 귀에 쏙쏙 박혀 들어왔다.
해가 저물고 받는 일당도 이만한 쾌감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핸슨은 표정 관리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 마법사의 말대로잖아?'
불평은 사람을 귀찮게 만들고, 그 귀찮음은 보상으로 이어진다.
핸슨은 좀 더 빠르게 이런 발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물론 이건 조합장이라는 직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조합장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시민 대표의 자격은 사라집니다. 이해하셨습니까?"
"그렇다는 말은 제가 조합장에서 내려온다면, 일반 시민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까?"
"후임자에게 넘어가니, 후임자가 시민 대표의 권한을 얻게 될 테죠."
"알겠습니다."
"다른 두 분은 이견이 있으십니까?"
소장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견 없수다."
"그대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조합장님은 여기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스테판이 계약서를 내밀었고, 핸슨은 계약서의 내용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서명했다.
그렇게 하여 협의회는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 * *
그날 밤, 핸슨은 기분 좋게 술을 퍼마셨다.
내일부터는 소장이 아닌 극동부 노동조합장으로서 출근한다.
'멋들어진 명패랑 의자도 배치하고... 앞으로 살 집도 봐 놔야겠어.'
앞날이 그야말로 꽃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고, 친지와 가족들에게 연락을 돌릴 생각으로 굴뚝같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건방진 어린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핸슨은 그 목소리를 격하게 반겼다.
"어이구! 어서 오십시오, 마법사님!"
"하하, 일어나지 마. 내 손 잡으려고 할 생각도 하지 말고. 그래서 어떻게 됐나?"
"마법사님 덕분에 조합장으로 올랐지요."
"축하하군. 그러니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 보게."
얼큰하게 취하여 여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무용담을 읊는 것과 다르게 마법사의 얼굴은 점점 굳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였나?"
"당연하지요. 저희들의 요구를 다 받아줬는데 어찌—."
"이 병신 머저리 같은 자식!"
다짜고짜 폭언을 쏟는 여인.
핸슨은 그 말에 술이 깨고 말았다.
"왜, 왜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내 말 못 들었냐,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아니 네놈은 땅바닥에 기는 두더지만도 못하겠지. 걔넨 눈치라도 있으니 기어오르지 않으니까! 지금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어?"
"...?"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자 여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노동자로 변장을 해서 끼어드는 건데, 그놈이 눈치를 채든 말든 말이야.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을 그대로 보낸 내 잘못이지!"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그러십니까?'
"뭐긴, 네놈이 스스로 사형대에 올라서 매듭까지 짜고 목에 걸친 게 아니겠느냐?!"
* * *
"용사극?"
페르다가 의문을 표했다. 그것은 그가 말한 작전의 핵심을 담은 단어였다.
"마왕이 죽고 용사의 승리로 끝나지 않습니까?"
"그렇지.
"마왕이 죽는 건 알지만, 실제로 그 마왕을 연기한 배우는 죽이지 않죠. 그것과 비슷합니다."
"시늉만 한다는 말이로군."
스테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사건이 터지면, 조합장이 용사를 자칭하며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나쁜 악당인, 섭정님을 무찌르고 보상을 취하는 것이죠. 그렇게 시민 대표가 반대 세력에도 지지를 얻습니다."
스테판이 씨익 웃었다.
"실제로는 한통속이라는 걸 모르는 채로 말입니다."
"그런데 핸슨은 지금 내 편이 아니지 않던가?"
스테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섭정님의 손아귀에서 고개를 조아리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설명해 보게."
스테판은 검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첫 번째로는 저희들이 벽을 만들기 위해서 일부 인력이 빠지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원활한 도시 계획을 위해서는 추가 인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100명을 더 투입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노동조합에는 100명의 추가 인력이 생겨납니다."
"끌어들일 수 있겠나?"
"지금 지급하는 일급이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임페리얼 드림도 잠깐 내려놓을 수 있는 돈입니다."
현재 노동자의 숫자는 253명.
하지만 그중 98명은 할림에서 온 노동자였으며, 그들은 극동부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155명이 있다는 뜻.
거기서 100명의 추가 노동자가 생겨난다.
무려 2/5가 파릇파릇한 신입이다.
"파벌이 생기겠군."
"파벌은 지금도 생겨나는 중일 겁니다."
"어째선가?"
"이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시민 대표라는 직위에 한해서 귀족과 비슷한 혜택을 얻습니다."
"그렇지."
"여기서 조합장 선거제까지 투입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해했다.
"그래서 소장들을 증인으로 내세운 척 이야기했던 것이로군."
"예. 당장 눈앞에 있는 권력에 눈이 흐려진 핸슨과 다르게 둘은 완전히 이해한 모양이더군요."
권력욕이라는 게 비단 핸슨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핸슨이 됐는데 내가 안 될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겠지.
"그 선거에 파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월급만으로 사람들을 회유할 힘이 있겠습니까?"
"없겠지."
"그리고 평생 기술만 만지던 사람들이 경영에 대해서 뭘 알겠습니까? 법률은? 인사나 재정 관리는?"
스테판이 목수업을 할 수 없듯, 핸슨이 경영업을 할 수 없듯, 저마다 못 하는 게 있다.
"결국 그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게 필요합니다."
스테판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다.
돈.
권력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
"그 돈을 대 줄 사람을 찾게 되겠죠."
당장 눈앞에 많은 돈을 지닌 사람이 누구겠는가?
재정 흐름과 법률, 인사 관리에 조언을 해 줄 사람은?
"지성인이 없는 판은 언제나 큰 흐름에 휘둘리기 마련입니다."
스테판이 바로 흐름 그 자체였다.
내심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몇 개월 내로 노동조합이 내 것이 되겠나?"
스테판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늦어도 2개월 안에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107화. 양육권 소동
"훌륭하군. 잘해 줬네."
마을의 노동자들이 모여 만들어 낸 노동조합도 결국에는 페르다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꼭두각시 신세가 되는 것.
그것이 페르다가 바라는 상황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참, 제국에서 단돌로 상회의 상호명 변경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부터는 단돌로 상회가 아닌 헤스티아 상회로 공식적으로 운영된다.
천막에 박힌 가문의 문양도 이제는 발드로바의 문양이 찍힐 예정이다.
"잘하고 있군. 계속 부탁하도록 하지."
"맡겨만 주십시오."
임시 노동조합과의 협의회는 이렇게 끝이 났다.
"원만하게 해결되었으니, 이제 다른 업무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그녀가 쌓아 놓았던 문서로 눈길을 옮겼다.
"분쟁 건이 몇 개 더 있는 걸로 아는데."
"그렇습니다만, 행정관의 권한으로 대리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아니, 내친김에 해결해 보도록 하지. 이렇게 내려왔으니, 빨리 해결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리고...."
"그리고?"
"이렇게 대화로 해결해 보니 감회가 새롭군."
"음, 알겠습니다."
이걸 대화라고 취급할 수 있는 건가?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이사벨라는 군소리하지 않았다.
이사벨라가 움직였고, 잠시 후 두 명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접때 말씀드렸던 중재가 필요한 석공들입니다."
페르다는 그들을 대강 흘겨보았다.
까무잡잡한 남자와 상대적으로 흰 남자가 나란히 앉았다.
한눈에 봐도 남부와 중부 출신으로 갈린 외모다.
페르다는 까무잡잡한 쪽에 먼저 질문했다.
"할림에서 왔나?"
"예. 할림에서 성벽 공사만 외길 20년을—."
"그쪽은 제국이고?"
"그렇습니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요컨대, 두 개의 공법이 달라서 그걸 조율하고 있는 중이라지?"
하얀 석공이 말했다.
"예. 지형과 특성을 고려해서 벽을 어떻게 지을지 말하고 있는데, 이 남부 놈이 도통 알아먹질 못하니...."
혀를 차는 제국 석공.
그러자 할림 석공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형과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벽은 결국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저희 할림에서 시공하는 벽은 어떤 상황이 와도 부서지지 않는 벽을 자랑합니다."
"더운 지방에서 와서 겨울바람이 뇌까지 들었나 봅니다. 침략 한번 당하지 않은 것들이 모래로 벽을 쌓다 보니 내공이라는 게 있겠습니까?"
"빈 구멍에 돌멩이 쑤셔 박는 게 공사라고 하면, 우리 세 살배기 아들도 장인이겠군."
"이 자식이—!"
"그만."
벽 두드리라고 만든 망치를 서로의 머리로 향하기 전에 막았다.
페르다는 어찌 된 일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두 장인의 자존심 때문에 생긴 일이다.
"둘의 의견은 잘 알겠다. 그러니 명확하게 대답해 줄 수 있군."
"어떤 것으로 시공할지 아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페르다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평생 벽만 만지고 살았던 사람들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페르다는 검지를 치켜세웠다.
"1개월."
"...예?"
"그 안에 길이, 높이 4M짜리 벽을 만들도록 한다."
둘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누구의 것으로 할지 저희가 알아서 정하라는 말씀이신지?"
"그래. 그건 너희가 해야 할 일이니까."
중재받으러 왔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판결.
페르다는 그에 그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너희들은 1개월 이내로 내 공성 마법에 충분히 견디는 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
두 장인은 당황한 눈초리로 페르다를 보았다.
이게 무슨 농담인가 싶었지만, 페르다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공법이 어떻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알아듣질 못할 것이니, 내가 내 나름대로 해결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페르다는 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대들은 튼튼한 벽을 만들 줄 알지."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을.
"그리고 나는 벽을 부술 줄 안다."
그 튼튼함을 자랑하는 제국의 벽 또한 그의 손에 무너져 내렸었다.
"그러니 1개월 안에 가장 단단한 벽을 만들어라. 그 벽의 정중앙을 내가 매직 블라스트로 때려 박겠다. 이해했나?"
"그 벽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됩니까?"
"간단하다."
엄지로 목을 그었다.
두 석공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1, 1개월 만에 지은 벽이 무너졌다고 저희 목을 치실 겁니까?"
"허술한 벽을 만들었으니 죄목은 전문가 사칭 및 사기 혐의가 적용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국가 안보 위협까지 갈 것이다."
"그건 너무 비약적입니다."
"비약인가, 행정관?"
이사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경계에 실패한 자들에게는 사형을 구형하는 것도 싸게 치이는 일이죠."
"그렇다는군."
기술자들은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서로가 적이라 생각했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진짜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나타난 것이다.
식은땀을 삐질 흘리고 있자 페르다가 물었다.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나?"
"쿨럭!"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정확하게 꿰뚫어 본 페르다.
"도망쳐도 된다. 할 수 있다면 해 보아라. 하지만 너희들을 추격해서 다시 잡아 올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벽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지겠지."
페르다는 '흠....' 하고 숨을 흘리다가 그들에게 태연스레 물었다.
"혹시 살려 달라 해야 할지 죽여 달라 해야 할지 헷갈릴 만큼 고통스러워 본 적이 있나?"
"...."
"과정이 궁금하다면, 얼마든지 알려 주겠네."
"아, 아닙니다!"
"소인들이 도망치지도 않을 건데, 그런 걸 알아서 뭐 하겠습니까, 허허...!"
기합이 바짝 들어간 두 사람.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말을 모두 이해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물론이지요! 당연히 이해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 가도록 하게. 자네들에게 이제 29일 23시간 55분의 시간이 남았으니. 하루라도 빠르게 벽을 지어야 할 거야."
"예, 옙!!"
페르다의 명이 떨어지자 그들은 도망치듯이 자리에서 벗어났다.
살벌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페르다가 중얼거렸다.
"대화라는 건 생각보다 좋은 수단이로군."
"그걸 대화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사벨라는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적어도 이젠 생산성 없이 싸우진 않겠군요."
"이랬는데도 싸운다면, 그것대로 인정해 줘야 하는 일이겠지. 다음 분쟁 건은?"
"이번 분쟁은...."
페르다는 이어서 분쟁들을 해결해 갔다.
두 석공처럼 자존심이 강한 이들은 없었기에 위협 없이 손쉽게 해결해 낼 수 있었다.
"일은 이걸로 끝인 것 같군."
어느새 이사벨라가 두었던 서류들이 전부 사라졌으니, 마무리를 하려 했다.
그때였다.
"아직 한 건이 남아 있습니다."
"한 건?"
이사벨라는 서류첩 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었다.
"오늘 해결하시는 일을 보니, 이 일을 판단하시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적은 소장입니다."
페르다는 그녀가 적은 소장의 피고발인을 보았다.
보자마자 한순간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벌써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이 사람을 고발하겠다?"
"그렇습니다."
푸른색의 눈동자는 세상 진지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여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에키드나 필리아즈의 태업을 고발합니다."
* * *
"이 X발 년이."
대면하기 무섭게 욕부터 박은 이는 에키드나였다.
그녀에게 전보가 날아가기 무섭게 이곳에 날아와 건넨 첫마디였다.
'이건 좀 새롭군.'
매번 그녀의 음침하고 헤실거리는 얼굴만 봤던 페르다였기에 이토록 불같이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제야 좀 마녀 같은 느낌이다.
만나자마자 쌍욕을 들은 이사벨라는 요지부동이었다.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석 연구원. 사람이나 짐승이나 만나면 인사를 할 텐데, 그 두 개 중 하나에도 해당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이사벨라도 만만치 않았다.
에키드나의 눈알이 빠질 기세였다.
"시비는 당신이 먼저 걸었거든요오?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어서 아주 사는 게 지겨워지시는가 봐요오???"
"제가 무슨 시비를 걸었다고 그러시는 건지요? 순수하게 사실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내가 내 일을 안 했다고요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죠오??"
자존심 강한 두 여인의 기 싸움은 흡사 두 드래곤의 격돌과도 같았다.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만 등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저, 섭정님...."
등 터지는 중인 스테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나?"
"저, 마녀는... 누굽니까?"
"우리 성에 고용한 마녀라네."
"왜 여태까지 비밀로 하고 계셨습니까? 마녀가 산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는데...."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지."
그렇긴 했다.
스테판은 가슴을 추스르며, 등이 터지지 않게 둘의 눈치를 보았다.
이사벨라가 헛기침하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페르다에게 말했다.
"말씀드렸듯이 에키드나 필리아즈 수석 연구원을 태업으로 고발하는 바입니다. 연구 진척이 후에 영입된 버넬 마르퀴스보다 없으며, 진척 사항을 단 한 번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기록하는 것은 연구자로서 의무.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태업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사벨라의 말에는 조리가 있었다.
에키드나의 평소 성격이었다면, 죄송하다고 하면서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정할 수 없는 궁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것은...."
페르다는 이걸 읽어도 되나 싶듯 침을 삼키다가 말했다.
"...모리의 양육권이로군."
양육권이라니.
참으로 하찮은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양육권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 지경이 난 것이기도 했다.
이사벨라가 에키드나를 고발한 이유이며,
에키드나의 눈깔이 뒤집힌 이유다.
"이성적으로 보십시오. 이렇게 흉포한 마녀가 섬세한 아이를 관리한단 말입니까?"
"당신이 오기 전부터 모리 쨩은 제 손에서 잘 길러졌거든요오?? 섭정님, 설마 저런 말에 제게서 빼앗을 것은 아니시죠오?"
에키드나가 눈을 부라렸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렇다고 하면 날 죽일 건가?"
"네? 아뇨! 아무리 그래도 섭정님을 제가 어떻게 건드리나요...."
아차 싶어서 표정을 풀어 버리는 에키드나.
그래도 눈이 완전히 뒤집힌 건 아닌 모양이다.
그들이 흥분한 만큼 골치가 아픈 건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다....'
쉽게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애초에 그 골렘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그녀가 룬 메이커라는 것에서도 지금 충분히 그녀의 가치를 느끼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의 말도 일리가 있다.'
골렘 만들기에 진전은 없는데, 모리의 옷은 날이 갈수록 다채로워지는 묘한 상황.
태업으로 보여도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골렘의 가치가 기대되는 상태다.'
동부 정벌이라는 이름을 내세웠기에 그 골렘에 대한 우선도도 높아진 상황이었다.
그녀의 연구에 채찍질할 필요가 있었다.
'그걸 건드리는 방법은 양육권.'
아슬아슬한 줄타기나 다름없는 소재였다.
그러나 마녀는 레드 서클의 소유자다.
필리아즈인 만큼 집착이 무서운 것들이다.
감정으로 회로를 굴리는 종속들인 만큼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한참을 둘이서 으르렁거리다가 에키드나가 제안했다.
"제 양육권을 뺏어 갈 거라면, 일단은 모리 쨩의 의견부터 먼저 들어 보도록 해요!"
그 말에 페르다는 이사벨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습니다."
이사벨라는 그곳에 놀라우리라 만큼 관심을 보인다.
태업 따윈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어찌 됐든, 결판을 내려 페르다는 모리를 소환했다.
정갈한 옷차림의 영애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어뜨케... 너무 귀여워...."
"크흡...."
에키드나는 호들갑을 떨면서 좋아했고, 이사벨라가 그 얼굴을 보더니 감정에 벅찬 소리를 내었다.
"마녀나 드래곤 스폰들은 전부 이렇습니까?"
"난들 어떻게 알겠나?"
관심도 없다.
그러든 말든 페르다는 자신의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질문은 내가 하도록 하겠다. 모리, 이 문제에서 답을 어떻게 해결하는 편이 좋겠나?"
모리는 에키드나와 이사벨라를 번갈아 보더니 평소처럼 글을 적었다.
유려한 글씨로 이렇게 대답했다.
-몸을 반으로 가르는 것이 명쾌한 해답이라 생각합니다.
"...?"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시적인 은유법인가 싶어서였다.
"둘 중 어느 사람이 너를 아끼는지 보란 뜻인가?"
-갈등의 근원을 없애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죽여 달라는 게 맞았다.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모리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잔뜩 끼어 있었다.
"...판결하지."
페르다가 입을 열었다.
"모리는 요 일주일 동안 내 아래에서 관리하도록 하겠다."
"네엣???"
"예!?"
깜짝 놀라는 이사벨라와 에키드나.
당연하다는 듯이 반발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법이 어, 어디 있나요오? 제게 위임해 주셨잖아요."
"그건 대책이 생길 때까지 임시에 불과했다. 모리는 공왕령의 재산이니, 그 관리 또한 내가 선택할 수 있고, 따라서 내가 관리하는 것도 가능하지."
이사벨라가 당혹감을 감추려 애꿎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무엇보다 모리 양은 아담한 소녀입니다. 그런 소녀가 남자의 손을 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사각사각사각!
"본인의 생각은 다른 듯하군."
모리는 열심히 펜으로 X표를 쳤다.
그 판결이 그녀에게 있어선 해답이라 여기던 모양이었다.
"요 일주일은 루리와 내가 모리를 관리하도록 하지. 어차피 말도 없으니 옆에서 작업해도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이고."
"그 일주일 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피고발인의 성과에 따라서 하도록 하겠다."
페르다의 푸른 눈동자가 굴러 에키드나를 향했다.
"에키드나."
내리깐 목소리는 에키드나의 몸을 찌릿하고 떨게 했다.
"네, 넷!"
"네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네 골렘을 연구하기 위함이다. 맞지?"
"네, 그, 그렇죠오오...."
"버넬은 성과를 보였지만, 너는 여태까지 말이 없었지. 네가 인형 놀이를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적어도 네 일은 해야만 한다."
"우우...."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에키드나.
"그러니 6개월의 유예를 주도록 하겠다. 그때까지는 관리 체제를 일주일 단위로 바꾸는 식으로 한다."
"그 말씀은 제가 일주일을 보내고 난다면, 이 마녀에게 일주일을 넘겨줘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둘로선 만족스럽지 못했다.
차지해도 모자란 판에 일주일마다 당번하듯이 바꾸라니.
"그리고."
페르다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모리는 능률 현황에 대해서 내게 보고하도록 해라. 능률이 현저히 저하될 때는, 경고 없이 남은 기간을 교대자가 대체한다. 그리고 교대자 능률 하락을 보인다면, 한 달을 내 수하에 놓도록 하겠다."
장난감 때문에 싸운다면 장난감을 빼앗는 것이 당연지사.
그 판결이 내려지기 무섭게, 모리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가 메모지에 적어 놓은 문자는 이러했다.
-성군이나 다름없는 판단이라 사료됩니다.
"좋군. 이렇게 종결짓도록 하지."
에키드나는 이사벨라를 노려보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라는 듯한 원망이 섞인 눈동자.
하지만 특이하게도 회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회로 형성에 기여하는 감정이 그런 분노와 원망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었다.
이사벨라도 지지 않는다는 듯이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기가 센 것으로는, 마탑의 수석 비서였던 그녀도 만만치 않은 것.
둘 사이의 골이 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과 별개로 모리는 한층 편안해진 얼굴을 했다.
108화. 업보
파업은 끝이 났고, 분쟁도 해결했다.
헤스티아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일단락 수습된 셈이었다.
물론 헤스티아 마을 사람들에겐 해결되었겠지만, 페르다에겐 더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마족의 재림.'
결국 에스콜레이아의 총장, 버나드 웨인의 예측이 맞았다.
한때는 일곱 흉성이라 불리던 자들 중 하나인 곡마가 살아 있음이 확인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강하다.'
눈에 보이는 마력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깊이가 남달랐다.
손가락 하나를 그어서 아공간을 만들어 버리는 능력.
손가락 튕김 한 번으로 지정된 장소를 왜곡시켜 파괴하는 힘.
그 모든 것이 페르다의 능력을 웃돈다.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그 녀석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페르다가 가지고 있는 수.
그리고 곡마를 관찰하면서 얻었던 데이터.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수백 번 반복하며 싸워 보았다.
'승률은 소수점인가.'
그 승리 예측 또한 예상치 못한 기적이 찾아왔다는 가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가상으로 설정한 곡마는 현재 파악한 수준의 힘만으로 쟀다.
본격적으로 붙고, 놈이 숨겨 둔 카드를 꺼낸다면, 페르다가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어떻게 하든 페르다가 승리할 확률은 0%에 수렴한다는 뜻이었다.
'강해져야만 한다.'
더욱 높은 경지에 올라서 그를 찍어 누를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그게 가능한가?'
영지가 생겨났고, 공왕령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을 조율해야만 한다.
일이 바빠진다면, 더욱 바빠질 것이고, 그럴수록 마법사로서의 수련과 업무에는 소홀해질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럴 때야말로 더욱 수련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그게 마음처럼 된다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레드 서클은 기본적으로 감정의 격동을 따라 움직인다.
애정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 하였다.
괜히 애증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마음에 빠진다면 그것은 페르다가 아는 증오의 길로 빠질 것이며, 오직 경계와 관철을 통해서만 바른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내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겠는가?'
등불이 있다고 하지만, 안개를 모두 밝히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페르다가 걷는 길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차라리 그 힘을... 다시 쓸 수 있다면?'
분노로 돌아가는 레드 서클.
그 길은 페르다가 알고 있는 길이었고, 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곡마 정도면 페르다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능성이 있어.
그러다가 잠에서 깬 듯이 생각을 떨쳐 냈다.
'...엄청나게 몰려 있군.'
설마 이런 멍청한 생각까지 고심하고 있을 줄이야.
그 힘은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종국에는 발드로바를 죽였던 감정이지 않던가?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페르다는 그렇게 10년 동안 착각에 사로잡혀 왔었다.
페르다는 도망치듯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수단인가....'
마력을 머금은 스태프나 마법진을 써 내린 스크롤.
혹은 마도공학을 통해서 만들어진 부산물 또한 그의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옛날에 썼던 건....'
'여섯 번째 원소'라 불리는 스태프였다.
불사왕의 무덤에서 일주일에 걸친 싸움 끝에 얻어 내었던 궁극의 무장.
'그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용마전쟁 이전 시대에 대륙의 공적이었던 불사왕의 유물이다.
그때의 페르다는 어차피 혼자였고, 흉악한 범죄자나 마찬가지였으니 쓰든 말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입지만 떨어지면 상관이 없는데, 발드로바가 위험해지는 짓이었다.
'그래도 그에 필적하는 물건은 있다.'
역천의 번개를 맞은 나뭇가지.
할림에서 일어난 마물 사태에 공을 세우면서 줬던 물건.
딱히 누군가에게 보여 주지 않았고, 잠깐 놔둔 물건이었다.
이걸로 지팡이를 만든다면, 강력한 순수의 힘, 역천의 번개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만들기도 쉽지가 않다.'
고위력 고효율의 마법일수록 난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100년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페르다가 사는 세대에 역천의 번개를 버틸 만큼 뛰어난 부여 마법사와 대장장이가 없었다.
서남의 드워프 마을 마을에서도 마녀의 물건은 취급해 주지 않을 것이며, 엘프에게 부탁한다면 자기를 놀리냐는 듯이 적대감을 보일 것이다.
'드워프들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겠군.'
설득하다 보면 어떻게든 만들어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있을 때, 손님이 찾아왔다.
똑.
똑.
텀이 긴 노크 소리.
듣기만 해도 자신감 없어 보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페르다 씨? 바쁘신가요?"
무시무시한 드래곤의 대가리가 보였다.
발드로바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마나가 필요하십니까?"
"네, 오늘도 좀...."
"알겠습니다."
익숙해진 만큼 깊은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녀는 2M를 훌쩍 넘는 용기병 갑옷을 입었다.
살을 노출하는 곳은 오직 오른손뿐.
페르다는 그 손에 대고 자신의 마나를 주입했다.
'역시 따뜻해.'
가슴에 스며드는 마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몇 번이고 느껴 봤지만, 몇 번이고 더 느껴 보고 싶을 정도로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여기에 온 이유마저 순간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잖아!'
굳이 이곳으로 와서 페르다의 시간을 뺏은 이유는 발드로바가 큰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화 주제는 내가 정해 보고 싶어.'
그걸 위해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지 않던가?
마침 딱 궁금한 것도 있었다.
'페르다 씨는 갑옷 기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뭔가 두근거린다.
생각해 보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어보자.'
발드로바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페, 페르다 씨!"
"예."
"그... 최근에 루리가 말하던데요옷...."
발음이 픽픽하고 새어 나간다.
음성변조관 때문에 페르다에게는 구슬픈 메아리처럼 울렸다.
페르다는 침착하게 받아쳤다.
"어떤 것 말씀이신지요?"
"그러니까... 가, 갑옷 기사라는 사람이 엄청! 화, 활약했다고옷...!"
급기야 혀까지 깨물어 버려서 텐션이 확 죽어 버렸다.
"드, 들어서요...."
"아, 그 사람 말이군요."
페르다는 놀란 눈치였다.
갑자기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 이유를 모르니 말이다.
발드로바는 애써 입 밖으로 나오려는 진실을 억눌렀다.
"마을을 엄청... 아끼는 사람이라고 루리에게 드, 들었어요."
"그렇긴 합니다."
그렇긴 하다.
그 말을 들으니 불안했던 마음이 놀랍도록 들떴다.
"정말인가요?"
"초기에 할림의 지원을 받지 않았을 때는 그의 힘이 큰 역할을 했었죠. 덕분에 더욱 빠르게 많은 건물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그런가요?"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는구나.
괜스레 뿌듯한 감정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반골 기질이 있는 역모 분자인가 싶어 불안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요?"
"제 착각이더군요."
한 줌의 희망을 얻은 목소리.
"좋은 사람이라는 뜻인가요?"
"좋은 사람인 건 맞습니다."
발드로바는 당장이라도 날개를 펼쳐서 파닥파닥 날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여러모로 문제가 많더군요."
"...넷?"
그런 마음도 잠시였다.
높이 올라온 만큼 떨어질 차례였다.
"사람이 많이 어리석은 것 같더군요."
"어, 어리석어요?"
"이번 협의회에 참여했을 때도 사람들한테 휘둘리는 게 티가 나는 것이 머리가 좋은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런...."
"세상에 기사 갑옷을 입고, 침묵의 맹세를 지키면 글의 도움이 누구보다 중요할 텐데, 글씨도 엉망이고, 맞춤법도 하나 못 지키고...."
"...."
"그런 놈은 필히 사람을 잘못 만나면, 인생이 꼬이기 마련인데. 조금 걱정이 되긴 하더군요."
"...."
페르다는 그녀의 손을 슬쩍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손이 새빨갛습니다."
백옥같았던 손이 어느새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발드로바도 그걸 확인하고 황급히 손을 뺐다.
"벼, 별일 아니에요...."
"거부 반응이나 그런 것 같은데, 좀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
"저, 정말로! 별거 아니니깐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발드로바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르다는 그녀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 오늘은 일찍 가볼게요."
"충분하십니까? 평소보다 덜 드린 것 같습니다만."
"네, 아무래도 힘이 조금... 필요하기도 해서요."
그렇게 말하며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본 페르다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역시 남의 험담을 하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인가.'
나름대로 순화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던 모양이었다.
기껏 대화 주제를 꺼내서 이야기해 주었는데, 불편하게 만들어 버릴 줄이야.
'다음번에는 줄이도록 해야겠군.'
페르다는 그렇게 다짐하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 * *
발드로바는 곧바로 레어로 돌아왔다.
그녀는 갑옷에서 나와 그대로 자리에 누워 버렸다.
평소와 다르게 다리를 끌어안았다.
"우우...."
작게 신음 흘리는 발드로바.
몸이 살짝 떨렸다.
"주인님, 루리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루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인간 고치가 되어 버린 발드로바가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고 있으십니까?'"
"루리이...."
발드로바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머리 빛깔만큼이나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루리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미 들었으니까.
눈물을 글썽이며, 작은 시종의 가슴에 파묻히는 발드로바.
"말씀하십시오."
"페르다 씨가... 페르다 씨가 나보고 바보래...."
"...."
"너라도 부정해 주면 안 돼?"
울먹이는 눈동자로 올려보지만, 루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깐 평소에 공부를 좀 하시라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하긴 했지만... 하긴 했지마안...."
"게다가 많이 듣는 소리였는데, 그렇게 반응할 만한 일입니까?"
"물론 이오르가도 그랬고, 다른 분들도 그랬지만...."
발드로바가 다리를 꼬옥 안으며 서글픈 목소리로 찡얼거렸다.
"페르다 씨가 그러니깐 더 슬퍼져."
"주인님께 직접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서럽단 말이야! 평소에 자상하게 말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내가 엄청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 아니야?"
"...."
"부정 좀 해 줘. 나 정말 울어 버려."
루리의 반응에 더욱더 서러워지는 발드로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노력하신다면, 그런 면도 틀림없이 알아줄 겁니다."
"그럴까?"
"그러니...."
루리는 책 두 권을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어린아이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맞춤법 공부
-아이들을 위한 우아한 영애가 되는 과정: 예쁜 글을 써 보자!
"하셔야겠죠?"
발드로바는 루리와 책 두 권을 번갈아 보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응."
배움에는 나이가 없는 법.
* * *
그날 밤, 페르다는 꿈을 꾸었다.
발드로바가 있었다.
그곳은 성이 아니었다.
작은 집.
페르다가 성에서 쫓겨나 돈을 모두 잃고 묵었던 그런 서민스러운 집이었다.
'꿈이로군.'
딱히 해로운 꿈도 아니었기에 그냥 앉아만 있다가 깨어나자고 생각했다.
"일어나셨어요?"
고운 음색이 귓가를 간질였다.
페르다는 이 목소리를 딱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붉은 장발 머리에 금색 눈동자.
두 쌍의 뿔과 길게 째진 동공이 없고, 수수한 옷차림이었으나 페르다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틀림없어.'
발드로바였다.
"왜 그러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그녀의 손이 페르다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집에 온 듯한 포근함이 온몸을 감쌌다.
한결 편안해진 페르다의 얼굴을 보더니, 발드로바가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손을 잡아서인지 그 손의 촉감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이대로 꿈에 갇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거 할까요?"
"그거... 말입니까?"
페르다가 모르겠다는 듯이 반응하자, 발드로바가 귀엽다는 듯이 눈웃음쳤다.
발드로바는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
"당신이 잘하는 거예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페르다의 손을 맞잡았다.
페르다의 손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그녀가 이끈 장소는 목이었다.
페르다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자, 죽이세요."
페르다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의 손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단단하게 조였다.
황금색의 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발드로바의 형체가 녹아 일그러진다.
-왜?
입에서는 절규가 뿜어져 나왔다.
-왜 나를 죽였어요?
수없이 많은 목소리가 페르다의 머릿속에서 헤엄친다.
그것은 업보.
그것은 그가 저질렀던 일들에 대한 업보들.
그 업보는 과거로 돌아왔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것.
그 업보는 돌아와 자신의 목을 조른다고들 한다.
하지만 페르다의 업보는 역으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의 목을.
업보는 그게 페르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 왜? 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 아버지를 돌려 내!
어수선한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가느다란 목에는 힘이 들어간다.
혼돈의 종국에는,
지독한 적막이 찾아왔다.
꿈에서 깬 것인가?
아니다.
아직 자신의 손에는 가느다란 촉감이 생생하다.
페르다.
그 속에 들려오는 것은 목소리.
자, 다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달콤하였다.
당신이 누구인지 떠올려요.
아아.
나는....
뿌득—.
* * *
꺾이고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 온몸이 불쾌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불쾌한 것은,
'회로가....'
레드 서클이 격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또.
발드로바를 향한 마음이 아닌데도, 가슴 속에 있는 회로가 격하게 돌고 있었다.
페르다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을 비운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텅 비어 버리게끔,
곧 페르다의 서클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우려했던 것보다 더욱 간단했다.
하지만, 그 간단함조차도 페르다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어째서....'
그것은 기시감이라는 이름으로 향했다.
그 기시감은 페르다에게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왜 내게 증오가 남아 있는가?'
페르다를 9서클의 재앙으로 만들었던 그것이었으니까.
* * *
페르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나 운명론이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실제로 느끼고, 실제로 돌고 있는 것이었다.
페르다도 어렴풋이 있을 것이라 느꼈었다.
'역시... 그때의 그건 내 착각이 아니었나?'
아벨 실버윈드.
루리를 겁박하던, 이름을 기억할 가치가 없는 삼류 악당.
페르다는 그때, 어둠에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아벨의 몸속까지 들어가 그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건 4서클이 해낼 수 없는 일이었으며, 설령 페르다라도 불가능했다.
페르다는 그때의 감각을 되새겨 보았다.
마치 시간을 천천히 되돌리듯이 그 죽음 이전까지 돌아가 본다.
-보고만 있을 거야?
'목소리.'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것이 몸속에 있는 것을 휘저었고, 힘을 끌어내었다.
분노로 사로잡혔던 자신의 그 힘을.
'시간을 되돌렸는데도, 그게 아직도 남아 있단 말인가?'
가족을 죽였던,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던,
그리고 지금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마저 죽였던,
그 힘이 페르다 속에 있다.
혼란스러웠다.
단순히 마나 운명론에 얽매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막연한 불안이었다면, 이번에는 근거가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똑똑똑.
침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
루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페르다 님."
"왜 왔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서 짜증이 섞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손님은 맞이할 생각이 없다. 돌려보내거라."
"페르다 님께서 아시는 분이라 여쭤보러 온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이 자리에 직접 만나러 올 사람이 누가 있던가?
수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치고 있는 가운데, 루리의 입 밖으로 나온 이름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페르다 님의 부친이신, 에렘발트 로스노바입니다."
그가 지닌 증오의 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