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주인과 노예
틸다 파스칼은 악녀이다.
한 지붕 아래에 살았던 스테판과 머칫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부수고 보는 여자라 하였다.
그런 성격에는 언제나 원한이 따르기 마련이다.
누구보다 많은 원한을 사 온 페르다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 또한 뻔한 배후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가장 유력한 이는 독을 먹은 리코 단돌로였다.
그다음으로는 스테판이나 머칫, 혹은 그 아내.
심지어 아버지인 허먼까지 의심해 보았다.
그런 페르다가 딱 한 명만큼은 의심하지 못했다.
그게 바로 저기 있는 둔해 보이는 중년.
앙리였다.
"자네가 틸다를 조사하게 시킨 장본인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아 페르다는 직접 물어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몰락을 바라며 의뢰를 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결말마저 알고 있으면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이 또한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앙리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언뜻 보기에 너무나도 사람 좋은 미소였다.
너무 좋아서 둔하고 속을 감출 수 없는 그런 사람처럼 말이다.
"어째서인가?"
"그야 진심으로 틸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지요."
"그 뭐든지라는 게 이 꼴입니까?"
듣고 있던 루리가 끼어들어 묻는다.
그녀의 얼굴에는 혐오가 역력했다.
"물론입니다."
그녀의 반응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자, 주변의 반응또한 루리와 비슷하게 나왔다.
"비난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제 돈과 명성만 보고 사랑을 속삭이는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저만 사람의 껍데기를 보고 사랑할 수는 없겠습니까?"
"네 행동에 비난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궁금한 게 있군."
"말씀하십시오."
"이 여자가 자네의 회사를 내게 넘길 만큼 가치가 있는 건가?"
틸다가 예쁘긴 했지만, 그래도 절세미인은 아니었다.
제 영지의 모든 것을 팔고 백만 송이 장미를 바친 남자가 있는 올리비아급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는 앙리.
"회사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했지 제게 그렇게 큰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떨쳐 내고 싶었죠. 그래서 제가 사랑하는 여인을 이용했습니다."
"틸다를?"
"참으로 아름답지만, 음흉한 여자지요. 세상 그 누가 아버지에게 독을 먹이고, 제 가족들을 죽일 궁리를 하고 다니겠습니까?"
앙리는 리코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지켜보았으며, 모든 것을 통제했다.
어찌 보면 틸다를 손바닥 안에 굴리고 있던 사람은 앙리였다.
페르다는 그제야 뒤편에 미뤄 두었던 의문 하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말하길 매개체를 파괴하니 가주, 리코 단돌로가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다더군."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지요."
"그건 틸다의 짓이 아니로군."
페르다의 눈이 앙리를 꿰뚫을 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 만한 일이지요."
앙리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제가 책략가가 되길 바랐습니다. 저는 그 뜻을 받든 아들이 되었고요."
"...."
페르다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돌자, 앙리는 이 대화를 끝내려 말을 맺었다.
"약속한 대로 단돌로 상회는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인 자격을 페르다 섭정님께 드리고, 경영 대리권을 처남에게 위임하시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입니다."
"알겠네."
"제 회사는 모두 섭정님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러니 한 가지만 이 소인의 간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엇인가?"
"빼내 간 아내의 물건을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페르다의 시선이 루리를 향했다.
미묘하게 기분 나쁘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전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몰래 빼내 갔다는 소리.
페르다는 그 사람 다음 대상을 곧바로 지목할 수 있었다.
"왜 저를 봐요?"
페넬로페.
"너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낯 뜨거운 소리를 하시면 곤란한, 우갹!"
"개소리하지 말고 어디에 뒀냐?! 빨리 불어!"
"으겍! 겍! 꼬, 꼬리 쪽에! 꼬리 쪽에 걸어 놨어요!"
"악마 년 아니랄까 봐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면 오장육부가 뒤틀리기라도 하냐? 어휴!"
"흐극, 내 다이아가...!"
"뭔 네 다이아야, 미친년아."
제드가 그녀의 몸을 샅샅이 뒤지니, 그녀의 말대로 꼬리에 반지 하나가 걸려 있었다.
돈으로는 감히 구할 수 없는 블러드 다이아몬드로 만든 반지.
제드는 그 반지를 페르다에게 건네주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로군. 약혼반지인가?"
"그렇습니다. 아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이지요."
앙리는 그 반지를 받아 들자, 곧바로 틸다에게 다가갔다.
"우우...."
그녀는 이승을 떠도는 원혼처럼 구슬픈 소리를 내고 있었다.
"틸다, 내 사랑. 여기 봐. 당신이 좋아하는 다이아몬드 반지야."
침을 흘리며 혼이 빠져나가 있던 틸다의 눈동자가 반지를 향했다.
정체 없이 떠돌던 눈은 그 다이아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헤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미소에 앙리 또한 웃어 보였다.
* * *
앙리는 틸다와 함께 그대로 사라지기로 약속했다.
이런 결말을 예측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서부에 있는 집을 미리 구해 두었고, 소박하게나마 살 수 있도록 돈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가기엔 충분할 정도로만 챙기며 단돌로 저택을 떠나기로 했다.
"참으로 지독한 놈이군요."
루리가 말했다.
그녀가 꽉 말아 쥔 손은 앙리의 목을 꺾어 버릴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런 걸 그냥 보내실 겁니까?"
페르다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지켰으니, 나 또한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나?"
"저런 역겨운 것이 저희 일을 망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마녀를 놓고 꼭대기 위에 논 꼴을 보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페르다는 루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죽이고 싶은 건 네 개인적인 뜻일 뿐이지."
"역겹습니다. 가족을 죽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망가트리고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인간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루리가 그렇게 말했다.
아내를 이용해 아버지를 죽이고, 아내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가족애가 누구보다 지극한 드래곤 스폰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틸다 파스칼도 똑같은 짓을 했다.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그년은 형제를 이간질하고, 올케를 독살하려고 했으며, 장인을 식물로 만든 악녀다. 그 악녀의 말로가 저 남자에게 붙잡혀 사는 것이라면 어울리지 않더냐?"
"그리 말씀하시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만...."
분노하던 루리도 목소리가 점점 얕아졌다.
그 행동은 역겨우나, 한편으로는 응당한 벌을 받았다 생각하게 되었다.
끝내 루리는 그들에 관한 생각을 접어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이들은 이제 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었다.
페르다는 앙리가 지나간 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안타깝군.'
실로 영리한 남자였다.
페르다조차도 그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였으니, 그가 상업에 욕심을 지녔더라면 틀림없이 파스칼 상회조차 뛰어넘어 단돌로 상회의 전성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능력도 앙리에겐 필요 없는 양 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앙리의 얼굴은 천금을 포기했지만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페르다의 머릿속에 그 얼굴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그것이 찝찝함 때문인지, 아니면 부러움 때문인지.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 * *
파스칼 상회 본부.
"그렇습니까? 제 누이에 대한 일이 끝나셨군요."
몰래 일을 진행했다는 사실에 놀란 듯하였으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어찌 됐든 마음을 어지럽혔던 일이 일단락됐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알겠습니다. 형님께 말씀드리고, 아버지께도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마무리하겠습니다."
전음을 끊은 스테판이 가시지 않은 여운을 느꼈다.
페르다를 향한 경이가 있었다.
'설마 단돌로 상회를 가지게 될 줄이야.'
뜻밖의 수확이었다.
스테판은 이 일이 심화되면 최후에는 그 상회를 부술 생각을 했었다.
온전히 인수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섭정님은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던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한심한지 느껴졌다.
'이제 뒷수습을 해야겠군.'
스테판의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머칫과 작당했던 일이었으니 끝났다 하면 끝나는 일이지만, 허먼은 아니었다.
전말을 알지 못하는 허먼은 진심으로 스테판을 견제했으며, 스테판 또한 진심으로 대응했어야 했다.
"본부장님. 회장님께서...."
말미를 잇지 못하는 비서.
그만큼 허먼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법하다.
도망치고 싶다.
본능이 그렇게 소리쳤으나, 고개는 담담히 끄덕였다.
잠시 후, 문에 꽉 낄 만큼 덩치가 큰 경호원 네 명과 왜소한 노인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함께 들어온 덩치들도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에 빛나는 저 날카로운 눈이 스테판의 깊숙한 곳을 자극했다.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느냐?"
어째서 사퇴하지 않고 여기에 있냐는 물음.
"모든 게 끝났습니다."
"뭐가 끝났단 말이냐?"
스테판은 모든 것을 설명했다.
틸다가 자기 남편의 회사를 이용해 스테판과 머칫 둘을 갈라놓으려 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는 허먼까지 죽이려고 작당한 것까지.
다소 과장으로 여길 수 있겠다 싶은 내용은 일부러 축소해서 설득력에 힘을 실었다.
그런데도 그의 의중은 알 수 없었다.
깊은 산 아래의 드워프 대장간에서 재련된 검처럼 그의 표정을 깨트리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구나."
"무슨 물음을...."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지 물었다."
방금 전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 같지 않은 대화였다.
스테판은 대답했다.
"파스칼 상회의 본부장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회장이다. 네 지위를 박탈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너 스스로 물러나길 바랐건만, 너는 그러지 않는구나."
"아직도 제 판단이 실수라 주장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확신하고 있는데, 주장을 굽히는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
공왕령은 망할 것이다.
스테판은 반발심에 그에게 말했다.
"발드로바 공왕령은 번영할 겁니다."
"번영할 수 없다."
허먼은 딱 잘라서 말했다.
"그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로구나. 그래, 내 친히 대답해 주마."
허먼은 호랑이처럼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 페르다라는 작자가 흑마법을 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가 들리더구나."
"저도 귀가 있기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할림에서 많은 사람을 구했습니다."
"영웅 취급도 한순간일 뿐이지. 구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가 흑마법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약점이다. 파스칼 상회가 흑마법에 심취한 자를 돕고 있다고 하면 어쩔 셈이냐?"
"그건...."
"네가 페르다 섭정을 계속 돕다가 발을 빼려고 한다면, 이미 늦을 것이다. 수많은 상회의 식구들을 거리로 내몰 셈이냐?"
스테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도공학이란 기술에 투자하고 있을 텐데, 그 버넬이란 작자가 죽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허먼은 계속해서 몰아쳤다.
"그러면 이 투자도 물거품이 되고, 우리도 얻을 수가 없을 테지. 그리고 이 버넬이라는 남자가 딴마음을 품지 않을 가능성이 있나? 이자의 주인인 페르다는?"
"그분들이 저를 버릴 리가 없습니다."
비록 그가 처음에는 스테판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힘들 때는 물심양면 도왔었다.
그러니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허먼에게 있어선 그런 말 또한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왜 극동부에는 도시를 짓지 않는지 아느냐?"
"영토가 꾸준히 줄기 때문입니다."
"그래. 가망이 없기 때문이지. 인간의 힘으로 막지 못했으며, 불멸자의 힘으로도 막지 못했다. 그 근접한 장소에서 마기에 침식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
"그래. 낙관적으로 봐서 번영을 한다고 치자, 그 번영이 우리에게는 어떤 식으로 돌아올 것 같으냐? 돈? 명예? 인맥? 아니다. 제국이 견제하겠다고 먼지를 샅샅이 뒤지겠지. 왜겠느냐? 우리는 제국 수도의 상회다. 수도의 힘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
"그 애송이 섭정이 신임이 있고, 패기가 있다 해도 모든 정치는 늙은이들로부터 이루어진다. 늙은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느냐?"
허먼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설 힘은 없어도 제 밥그릇 쥘 힘만큼은 남기면서 오들오들 떠는 것들이다. 검소하다가 사치를 즐기긴 쉬우나, 사치를 즐기다 검소해지긴 어려운 법. 권력 또한 마찬가지지. 늙은것들이 자기 것을 챙기려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밀어 넣고 싸우게 하고 착취한다. 우리 같은 하루살이들이 그에 대항하고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스테판은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허먼의 말에는 세월을 거치며 쌓아 온 지혜가 있으며, 그 지혜는 조리가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허먼이 한 말 중에는 틀린 게 없었다.
스테판이 안아야 할 위험이 너무나도 많다.
"극동부는 포기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 회사를 포기하든가. 이게 내 뜻이다."
허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리를 뜨려던 그 순간, 스테판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또한 그런 늙은이들과 똑같습니다."
"뭐라... 하였느냐?"
허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차 물었다.
홧김에 저지른 듯한 말.
그러나 스테판의 눈에 들어간 것은 독기였다.
"아버지 또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시고, 자기 뜻만 고수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내가 옹고집을 피운다 그 말이냐?"
"예."
스테판은 짧고 명료하게 수긍했다.
허먼이 역정을 내었다.
"배은망덕한 것.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느냐?"
"저는 자격이 있습니다."
목구멍에 막혔던 혈을 뚫은 듯이 말을 쏟아 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감정과 자기주장이었다.
"아버지 회사는 3년 전부터 제가 운영하고 이끌었습니다. 그 꾸준한 성장과 안정화는 제가 일궈 낸 것입니다. 이 회사에 씨앗을 뿌린 것이 아버지라 한다면, 그걸 가꾼 것은 제가 한 것입니다. 씨앗만 뿌렸다고 농부라 할 수 없듯이, 아버지의 공이라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니 저는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습니다."
"자격이 있다? 네가 말이냐?"
"예!"
격해지는 감정에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버지가 독방의 늙은이처럼 뒷짐 지고 혀만 끌끌 차면서 저희 남매에게 칼을 쥐여 주며 구경할 동안, 저는 한눈팔지 않고 이 회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허먼은 무어라 말을 하지 않고 스테판을 올려다보았다.
스테판은 기세를 몰아 쌓여 있던 말을 더 내뱉었다.
"제가 일전에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페르다 섭정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
"그때의 그건 실수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그 남자에게 회사를 넘겨도 아버지가 일궈 놓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언가 호소를 해도 내가 보기엔 네 감정에 잡아먹혔다는 소리일 뿐이다."
"상관없습니다. 그분은 제가 힘들었을 때, 공왕령을 향한 사보타주라 명하셨고 대응했습니다. 파스칼 상회가 아니라 공왕령이라 말했습니다. 저를 공왕령의 일부로 받아 주시고,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비록 잔혹하게 한 번 내치려고 했으나, 그 잔혹한 만큼 자비로웠다.
그때 스테판은 다짐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마음을 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그러니 분명하게 말해 두겠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선택지를 던진다.
"저는 이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 회사는 제가 운영하는 것이고, 선택에는 제가 책임질 겁니다. 그러니 제 결정에 간섭하시겠다면!"
쾅!
"저와 연을 끊을 각오로 싸우셔야 할 겁니다!"
96화. 골드러시
스테판은 열변을 토하며 들이쉬지 못했던 숨을 뒤늦게 마셨다.
얼굴에는 땀이 흥건하고, 주먹을 쥔 손도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허먼이 가만히 스테판을 노려보았다.
시험에서 한 개만 틀려도 채찍질하고, 수 앞에선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며 압제자로 굴었던 허먼 파스칼.
그가 다시 입을 여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라."
"...예?"
스테판이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무장하고 싸울 준비를 마쳤는데, 상대가 항복을 선언하는 꼴이지 않던가?
"잠시만요, 아버지. 이, 이렇게 싱겁게 끝내는 겁니까?"
"싱겁게고 나발이고 내가 뭘 더 해 주길 바라느냐?"
"그렇게 끝내시니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 뒤에서 흉계를 꾸미실 생각이시라면—."
"네 말대로 뒷방의 늙은이인데, 그 늙은이가 뭘 하겠나? 네 뜻대로 하라 했다."
"그전까지는 제가 손을 떼지 않으면 잡아먹을 것처럼 구셨으면서 왜 지금은 허락하시는 겁니까?"
허먼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그때 넌 물어보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손을 떼라고 했을 뿐이다."
"지금과 다를 게 뭡니까?"
"그때의 너는 직원으로서 선택을 물어봤고, 지금은 이곳의 주인으로서 통보했지."
허먼은 몸을 돌렸다.
"주인이 싫다는데, 내가 거기서 뭘 어찌하겠느냐?"
허먼은 그 말을 하고 사라졌다.
무거웠던 공기가 다시 스테판의 폐부 속으로 깊게 찔러 들어왔다.
"허."
모든 게 허탈하게 느껴졌다.
근처에서 커다란 폭탄 하나가 떨어져 고막을 강타한 것처럼 정신이 없다.
"주인...이라."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는 스테판.
문득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것을 보았다.
책상을 내리치면서 굴러떨어진 사과 두 개.
쥐어야 할 것은 두 개.
그러나 쥘 수 있는 손은 하나.
"하하...."
불현듯 바보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꽉 잡혀 있던 스테판,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가장 현명하고 기발한 생각이었다.
스테판은 양손으로 사과 두 개를 집었다.
"내 손은... 원래 두 개잖아."
그리고 자신의 과일 트레이 위에 다시 사과를 얹었다.
그를 압박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스테판은 홀가분함에 미소를 지었다.
* * *
허먼은 본부에서 나와 자신의 마차에 올라탔다.
그 마차에는 근육질의 남자, 허먼의 몸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머칫 파스칼이었다.
허먼이 그를 보며 말했다.
"집으로 가자."
"예."
머칫이 마차에 신호를 보냈고,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허먼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
"동생 놈이랑 이야기는 잘되셨습니까?"
머칫의 물음에 허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만족스럽더구나."
"호오, 그럼 이제 스테판이가 회장이 되는 겁니까?"
"좀 더 지켜는 봐야지. 경솔하게 물려주면 풀어지기 마련이다."
"하하! 내 살다 살다 그놈이 아버지한테 인정받는 걸 보는구만."
머칫은 즐겁다는 듯이 웃어댔고, 허먼은 혀를 끌끌 찼다.
"아비한테 바락바락 대드는 꼴 보면, 뒤늦게 사춘기가 온 네놈을 보는 것 같아, 시원치 않아."
"사춘기가 아니라 원래 한 성깔 하는 겁니다. 파스칼 집안사람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는 괜찮겠느냐?"
파스칼 상회를 물려줘도 되겠냐는 물음이었다.
가업은 일반적으로 장남에게 물려주는 것이 보편적이니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머칫은 손사래를 치며 시원하게 웃었다.
"용병 회사만 해도 충분합니다. 내가 숫자를 굴릴 머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몸이고, 스테판이가 머리. 대신 굴려 줘야 내 머리가 덜 아프지 않겠소?"
"그러냐?"
"그래도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아들내미 하는 꼴을 보니, 어미를 닮아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듯하더만. 그 녀석한테 후계자 교육을 좀 시키면 결국 다시 내가 차지해 버려야지."
"그 녀석이 결혼도 못 하게 아주 훼방을 놓을 작정이냐?"
"크하하! 놓을 훼방이라도 있으면 좋겠소이다! 여자 보는 눈도 없고, 숫기도 없어서 측은할 지경이오! 오죽하면 애 엄마가 좋은 집안의 영애 규수들한테 우리 동생 좀 봐 달라고 바람 넣고 있겠소?"
동생 것을 뺏고 싶다는 것인지, 주고 싶다는 건지 알 도리가 없는 소리였다.
"그래도 그 괘씸한 것이 길을 내 줘야지 좀 살 거 같은데, 아버지가 어찌 좀 해 보시지요?"
허먼은 어깨를 으쓱였다.
"주인이랑 상의해야지. 나랑 상의해서 뭘 얻겠느냐?"
"하, 이 새끼 요새 머리 굴리는 꼴 보면 윽박지르는 거로도 안 될 텐데. 역시 아들내미가 날름 가져올 만큼 똑똑하게 만들어야겠어."
허먼은 피식 웃었다.
어찌 됐든, 파스칼 후계자 싸움은 이걸로 끝이었다.
그렇게 마차는 저택으로 다시 움직였다.
* * *
"그 소식 들었나?"
"보아하니 단돌로 상회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구려."
"그렇지. 세상 천하에 단돌로 상회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줄 누가 알았겠나?"
"리코 단돌로가 죽고, 앙리 단돌로가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으니 기이한 일이 따로 없군."
"그걸 받은 게 극동부의 페르다라는 작자 아니오? 틀림없이 어떤 술수를 부린 것이 틀림없소."
"의심이야 있지만, 앙리도 원래부터 자기 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지 않소? 아버지라는 족쇄가 깨지니 상회를 포기한 것이지."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많은 걸 포기하지 않았나? 평생 놀고먹을 돈을 왜 포기한단 말인가?"
"틀림없이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무슨 거래가 오간 것이오."
"인망도 무시는 못 합니다. 그 많은 간부가 전원 찬성을 했는데, 적당한 사람에게 넘겼다고 봐야지."
"나라도 페르다 섭정을 지지하겠소. 한창 서부 광맥과 희토류를 발견해 고공 행진 중이기도 한데, 거기다가 그 마도공학이라는 떠오르는 샛별까지 얻어 낼 수 있는데."
"그럼 단돌로 이름은 그대로 가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나? 이름을 바꾼다고 하더군. 헤스티아 상회로 말일세."
"발드로바가 아니고?"
"그 무시무시한 악룡의 이름을 계속 담으면 저주가 걸린다 믿는데, 어떻게 그 이름을 계속 쓰겠나? 자기들이 짓고 있는 마을 이름을 따서 하겠다더군."
"마을 이름이 헤스티아인가? 계집애 같은 이름이군."
"그래서 좋지 않나? 끌끌."
"그런데 공왕령에 그리 사람들이랑 돈이 모이는데, 제국은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
"극동부 정벌이라는 명목이 있지 않소? 거기서 이오르가가 지지 선언했고, 모험가들을 수용할 마을을 짓겠다 했지."
"모험가를? 그런 극동부에 무엇을 하려고?"
"보아하니. 모험가 길드 쪽에서 본격적으로 마의 땅을 탐사하려던 모양이오."
"허! 그 마의 땅에 들어가는 힘이라도 있단 말인가!?"
"보아하니 그 마기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단 모양이오."
"그렇다면, 그 동양의 신비를 캘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단 말인가!"
"약술이나 마법에서도 기이한 것이 많아 전설로만 들었던 것들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구려."
"끄으으... 안 되겠소! 이번 행상의 위치를 바꿔야겠어!"
"극동부로 갈 생각이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모이는 법이라!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소? 거기서 식량과 숫돌이나 팔아 보렵니다!"
"오오, 그러면 같이 갑시다!"
"형님, 내 자리도 하나 만들어 주구려! 따라갈려니까!"
* * *
헤스티아에 골드러시라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사람들을 이끌었으며, 침체한 겨울마저도 자리를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거리는 활발해졌다.
"자자! 오늘만 딱 30개! 30개만 판매하는 서부 지방의 명물, 넙적 메기구이! 딱 30개만 팝니다!"
"복을 가져다주는 팔찌 팝니다! 이 팔찌를 차면 무병장수! 만사형통! 그것뿐이겠는가! 딱 100일만 지나면 막대한 재물이 들어옵니다요!"
비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노점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는 일자리가 있었고, 일자리가 있으니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여드니 돈이 움직인다.
대도시에서 외면받던 노점상들이 한 명씩 자리를 깔면서 한몫씩 챙겨 가니, 너도나도 노점상을 시작한 것.
난민들은 돈을 받아도 쓸데가 잘 없었는데 노점에서 그나마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군요."
이사벨라가 그곳을 멀리 지켜보며 말했다.
단순히 문서로 확인하는 것이 아닌 육안으로 보고 판단했다.
"거리를 좀 더 확장하고 행상은 자제시키도록 하세요."
"예."
"노점 쪽에 자릿세를 제대로 받는 것은 잊지 마시고요. 고착되지 않은 지금은 쓸데없이 욕심부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옙!"
자릿세 명목으로 뒷돈을 받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냥 관리였다면, 콧방귀 뀌고 무시하겠지만 상대는 드래곤 스폰.
꼼꼼함에 있어선 혀를 내두를 수준이며, 무력 또한 뛰어나니 그 눈을 피해서 제 배를 채울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징수관들이 움직이고, 갑옷을 입은 사내가 그녀의 앞에 섰다.
하프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고, 어깨에는 치안대장이라 적힌 견장이 달려 있었다.
난민 무리를 이끌고 온 기사생도, 윌리엄이었다.
"행정관님. 치안대장 윌리엄, 순찰 보고드리겠습니다. 절도 3건을 제외하면 따로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치안대장. 사람이 몰려들어서 문제가 있을 것처럼 보이는데, 별일은 없군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제가 없도록 치안대에서 교통정리를 명령해 두었으니, 크게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겁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따로 명령할 것도 없겠군요."
윌리엄은 이사벨라의 옆에 따라 걸으며 물었다.
"저어, 이사벨라 행정관님...."
"왜 그러십니까?"
"정말로 제가 치안대장을 맡아도 되는 겁니까?"
이사벨라가 안경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물론 기사 생도보다 낮은 직급이라 불만이 많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섭정님께서 후에 기사 자리를 고려해 보시겠다 하시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만...."
윌리엄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기사 생도니, 유레이 공작 아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느니.
그런 것은 전부 내려놓은 과거 일이 되었다.
윌리엄은 난민으로서 살아갈 각오를 하고 헤스티아에 왔다.
'그런데 치안대장이라니....'
치안대장이 무엇인가?
행정관 다음으로 가장 권력이 높은 이인자나 다름없다.
치안대를 통솔하고, 필요하다면 마을 안에서 합법적으로 무력 또한 행사할 수 있다.
그 책임과 특권 때문에 어지간한 신임만으로는 꿰찰 수 없는 중책이었다.
"섭정님께서 직접 지목하셨기에 제가 당신에게 행사할 수 있는 건 해임권밖에 없습니다만, 저 또한 당신의 일솜씨가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만두시면 유레이 공작에게 그대로 송환해 버릴 것이니, 꿈에도 꾸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으헉... 그런 무정하신 말씀을...."
얼굴이 창백해지는 소리였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냉혹한 마녀 소리를 듣는 이사벨라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기도 했으니, 오히려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그럼 보고서를 작성하러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네, 수고하십시오."
치안대가 잡히면서 안정화되어 가는 마을.
그러나 그렇게 좋은 일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람 한 명이 있으면 한 개의 근심이 있고, 백 명은 백 개의 근심이 있는 법.
이사벨라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았다.
"어이, 거기 뿔쟁이 아가씨."
건방진 목소리가 그녀를 자극했다.
"마탑을 버리고 와서 한다는 게 고작 인간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나? 아니, 마탑에서 쫓겨났으니 그런 일이나 하고 있겠지?"
그녀가 이성적이긴 하지만, 드래곤 스폰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도 화내지 않는 군자는 아니었다.
"어떤 건방진 놈이 감히—!"
이사벨라가 분노를 쏟아 내려던 순간, 고개를 돌리면서 바뀌었다.
비록 뿔과 꼬리가 달리진 않았으나, 단아한 외모는 이사벨라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몇백 년 동안 그 밑에서 일해 왔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에리카 님?"
"오래간만이야, 벨라."
에리카 이오르가.
그녀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이사벨라는 그녀의 전신을 스윽 훑어보고는 물었다.
"유희를 즐기시고 계십니까?"
"유희라니. 내가 놀러 다니는 것처럼 말하네."
"어울리지 않게 인간 행세를 하고 있으니 그렇게 보입니다."
"어이가 없어서... 놀고만 다니지 않거든? 이래 보여도 플래티넘 급 모험가, 에리로서 방문한 거라고?"
자신의 모험가 패를 보이는 에리카.
모험가 길드에서 최상위 업적을 지닌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패이다.
"12인 원정대의 지혜라는 분이 인간들 사이에서 그러시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요즘 말로는 양민 학살이라 불리는 행위입니다."
"누가 보면 천하의 못돼 먹은 년인 줄 알겠어. 곤란한 일들 해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된 거라고."
의도치 않았다는 말과는 다르게 패를 쥔 손에는 자부심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에리카는 약간 민망해져셔 잡담의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늙은이들이 내뱉는 앓는 소리만 듣다가 싱싱한 것들을 듣고 있으니 말입니다."
"싱싱? 지금 발드로바의 여종을 그렇게 말하는 거니?"
"문제 있습니까?"
이사벨라의 반문에 에리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아이도 수백 년은 살았다고?"
"저보다는 어리지 않습니까?"
"서리 거인의 악몽이라는 이명도 있는데?"
"이해가 가더군요. 그 가련한 미모에 뇌살 당하기엔 충분하지요."
이사벨라는 황홀하다는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하아, 한 번만 꽉 끌어안아 보면 이 묵은 피로가 싹 가실 텐데."
에리카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한 말 중에 묘하게 걸리는 것이 있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 '것들'이라고 했잖아? 다른 사람도 있어? 그... 싱싱한 것?"
"모리라는 아이입니다. 그림 한 폭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름다운 소녀지요."
"그 소녀는 안 건드려?"
"성에 상주하는 망할 마녀가 관리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사벨라가 질투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함께 몇백 년을 지내온 에리카조차도 보기 힘든 희로애락을 한 번에 접하는 순간이었다.
"...섭정님은 그런 네 모습을 잘 알고 있니?"
"어렴풋이 아시는 것 같습니다만, 신경 안 쓰시는 듯합니다."
"그럼 됐지 뭐...."
"각설하고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지요."
이사벨라는 싱싱한 것들에서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에리카 님은 모험가로서 이곳에 방문하신 겁니까?"
"아무래도 모험가 길드 쪽을 모험가로서 확인해 봐야겠다 싶어서. 좀 어떤 것 같아? 여기로 온 모험가들은?"
"최악이 따로 없습니다."
이사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패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철이 없을 뿐이고, 정작 필요한 등급의 모험가들은 얼씬할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뒷골목 깡패질이나 하려고 온 것 같더군요."
"개고생해서 딴 등급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공을 쌓는 것은 어렵고, 죽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러니 충분히 높아지면 사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중앙 길드에 건의를 좀 해야겠네. 골드 놈들 좀 경각심을 깨워 줄 필요가 있겠어."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반발하라면 하라지, 그래. 내가 몇 번이고 목숨을 걸고 싸워서 이 대륙을 구원하는 데 이바지했는데, 목소리도 못 낼까 봐?"
에리카가 입술을 깨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개 같은 새끼들. 내가 돈 주는 건 엉덩이 쳐 깔고 앉아서 비싼 밥이나 처먹으라고 주는 게 아니라고."
"탑주님. 체통을 지키시지요."
"뭐래, 에리카가 아니라 플래티넘급 모험가, 에리라서 체통 같은 거 필요 없어. 언제 어디서든지 상스러운 말을 할 수 있지. 들어볼래? 에리의 상스러운 걸즈 토크를?"
"마탑에서 나온 제 자신이 정말로 자랑스러운 순간입니다."
에리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섭정님은 계셔?"
"아마 오늘도 집무실에 앉아 있으시겠지요. 만나시겠습니까? 전음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약속도 안 잡고 얼굴 보이긴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좋은 소식이 몇 개 있어서 괜찮겠지. 전해 줄래?"
"알겠습니다. 준비할 수 있도록 미리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전음을 준비하려 하던 그때였다.
땡땡땡!
마을 한가운데에 설치된 경종이 혼자서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에리카도 그 경종을 올려다보았다.
"저게 뭐야? 웬 경종?"
"...저건 마물 출현 예측 장비와 연결된 경종입니다. 감지되면 자동으로 울리게 되어 있죠."
"그 말은...."
"오작동이 아니면 마물이 등장했다는 말이지요."
경종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시끄럽게 울렸다.
97화. 습격
두 남자가 멀리 떨어진 채로 마을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곳이 헤스티아 마을이로군."
"그래."
"몇 개월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가?"
덩치 큰 사내가 놀라움을 표했다.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극동부.
그중에서도 경계선에 가까운 그 땅에 버젓한 마을이 세워지는 광경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땅에 새로운 마을이 뿌리내리는 건 불가능하다지 않았나?"
"불가능하지. 그만큼 극동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으니."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수완이 좋다고 할 수밖에. 파스칼 상회의 전폭적인 지원, 이오르가 측에서의 동맹 선언과 남부 할림 지역까지 합쳐지니 연금술을 부린 것이 아니겠나?"
"연금술... 하긴 돈이 모여드는 곳이니 연금술이라 해도 손색이 없군."
이런 불모지를 노다지 쌓인 곳처럼 탈바꿈시켰으니 놀라움 이상이었다.
"그것도 모든 것이 페르다 발드로바라는 이름 아래에 이루어진 것이니."
"위험한 인물이야. 이대로 세력을 불려 나가게 된다면, 계획은 문제가 되겠지."
"흠...."
사내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덩치가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모습을 드러내는 건 어떻겠나?"
"아니. 그건 우리 계획과 맞지 않아."
냉정한 판단으로 칼같이 대답했다.
"애초에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발드로바의 고립이다. 대놓고 나서서 헤스티아 마을을 부수면 어떻게 되겠나?"
"구심력을 잃지 않겠나?"
"아니, 결집하겠지. 용마전쟁 때처럼 말이야."
용마전쟁.
그 말을 들은 남자도 덩달아 흥분이 가라앉았다.
마족들에겐 그 사건만큼 치욕스러운 일은 없다.
"인간들에게 명분이라는 건 무서운 것이야. 인간들은 마의 척결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인 적이 있다. 잔당만 남은 지금도 그것도 척결하려고 하고 있는 중이야."
"그렇지."
"그러니 그들을 내버려둬야 해. 후손들이 마족에 대한 경각심을 잃도록 말이야."
사내는 마치 풍류를 읊듯이 중얼거렸다.
"칼을 녹슬게 하는 것은 평화요, 성벽을 낡게 만드는 것도 평화요, 인간을 무디게 만드는 것 또한 평화로다."
그 계획에는 덩치 또한 수긍하였다.
그러나 가슴에 내리 앉은 이 불안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만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이대로 놔두면 세력이 불어나지 않겠나?"
"물론. 그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일이지."
망가트리자니 커다란 그림이 망가지고, 이대로 숨자니 구심력에 힘을 더해 간다.
모든 것은 페르다 발드로바가 약혼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니 조금은 씨앗을 던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사내가 로브 속에 감춰진 손가락을 보였다.
그의 손가락은 아주 가늘고 희다.
그 손가락이 허공을 세로로 그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는 형형색색 일렁이는 균열이 벌어졌다.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늑대.
-크르르르....
아니, 늑대의 형상을 한 마물들이었다.
한 마리씩 천천히 균열 속으로 나오며 일렬로 섰다.
그것들은 전부 이성을 잃은 눈동자를 지녔으나, 순종적이었다.
마치 그 로브를 입은 사내를 주인으로 모시는 강아지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정중한 어투로 명령했다.
"쓸어버리십시오."
-컹! 컹!
사내의 명령을 듣기 무섭게 뛰쳐나가는 마물들.
오로지 파괴하겠다는 악의만으로 가득한 존재들이 헤스티아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 * *
"전시 상황! 모든 장병을 소집하고, 모험가들에게 알려라! 반복한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모든 공무원은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참전 가능한 병사들은 집결하라!"
유사시, 지휘관으로서 권한을 가지는 이사벨라가 소리쳤다.
"접근하는 숫자는?"
"15마리입니다."
"15마리라...."
이사벨라는 소집을 위한 전음을 하느라 바빴다.
그러는 와중에 에리카는 입을 다물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해.'
좀 더 뒤로 빠져서 이 사태를 크게 보았다.
'갑작스러운 마물 출현. 그것도 15마리씩이나 나왔어.'
최근에 있었던 사건들과 상황.
그리고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으나, 비약적인 추측까지도 서슴지 않으며 이 사태에 가장 어울리는 해답을 찾는다.
'어쩌면....'
에리카가 이사벨라를 보며 말했다.
"벨라! 나 없어도 괜찮겠지?"
"참전하지 않으실 겁니까?"
"이 마물 침입에는 주동자가 있을 거야. 그 주동자를 찾을 생각이야."
5개의 전음이 이사벨라의 귀에 끊임없이 꽂히고 있었다.
인상을 팍 구긴 채로 사납게 노려보며 대답했다.
"위대한 이오르가 님의 자식들이 뒤를 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길."
"고마워."
에리카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마법진을 펼쳤다
평범한 인간들이 하나의 마법진을 그리는 것과 다르게 다섯 개의 원이 그녀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것이 명성 높은 푸른 눈의 마탑주이자, 블루 드래곤 스폰의 수장인 에리카의 저력.
멀티 캐스팅.
한 번에 두 개의 마법을 영창 할 수 있으며, 5개의 마법을 준비할 수 있다.
에리카는 첫 번째 마법진을 발현했다.
"가거라, 내 눈이 되어다오."
마법진에 응집된 마력이 수십 마리의 푸른 참새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동작 감지 마법과 마력 감지가 걸려 있는 그것들은 거동이 수상한 자들을 추적했다.
모든 마법을 감시하는 푸른 눈이라는 이명만큼, 그 추적을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마을을 넘어 우거진 숲까지 순식간에 퍼진 참새의 눈에 무언가가 걸렸다.
"찾았다."
에리카는 곧바로 준비해 둔 마법진 하나를 바닥에 펼친다.
그것은 텔레포트 마법이었다.
순식간에 좌표를 설정하여, 감지 마법에 걸린 푸른 참새의 위로 떨어졌다.
마력의 형태로만 보였던 것이 육안에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에리카는 고민 같은 걸 하지 않았다.
마물을 풀어놓는 것들은 예외 없이 마족으로 취급하기로 했으니까.
눈에 보이는 타깃을 향해 준비해 놓은 마법진을 바로 구사했다.
"밴딩 타임."
지정한 지점의 시간을 한없이 느리게 만드는 고위 마법.
에리카 수준의 마법사라면, 아예 멈추는 것까지 가능했다.
그 마법의 영향을 받은 모든 것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남은 것은 두 개의 마법.
그 두 개의 마법진을 융화시켜 새로운 형태의 기하학이 이루었다.
기이한 그 마법은 오직 에리카만이 다룰 수 있는 것.
엘레멘탈 데몰리션.
상극의 원소 두 개의 척력을 이용하여 일대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릴 정도로 파괴적이고 야만적인 마법이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파괴적이었으나, 에리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이 한때는 대륙을 지배하려 했던 마족에게는 부족함이 없었고, 그 잔당에게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
그러나 마법을 준비하던 에리카의 육감에 날이 섰다.
드래곤 스폰의 발달한 오감.
그중 그녀의 시야 속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불가능해.'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춘 상태이다.
범위 속에 있다면, 그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을 맹신하지 않았다.
그것이 정답이었다.
밴딩 타임으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야 할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이곳을 향해 날아온 것이다.
흉악한 얼굴의 검고 커다란 물체는 솥뚜껑만한 손을 뻗었다.
에리카는 그 손을 보자마자 직감한다.
저 손에 잡히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죽을 것이다.
흉악한 손이 그녀의 다리를 잡는다.
아니, 잡는 것은 잔상이 남아 있는 자리.
그녀는 이미 텔레포트 마법으로 그 위험에서 벗어났다.
바닥으로 내려와 자세를 고치는 에리카.
마법진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조금 전의 일을 분석하는 것이 먼저였다.
'정지 마법이 무효화되었나?'
나뭇잎의 떨림도, 기어가는 벌레들도 모두 색을 잃은 채로 그곳에 멈춰 있었다.
마법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물건이 하나였다.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
그 남자만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에리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밴딩 타임을 저지하려면 저항 마법을 펼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발동하는 순간까지도 저항하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멈췄으며, 무방비한 상태다.
그렇기에 에리카는 확정타를 때려 박으려 했다.
어떻게 정지된 공간 속에서 홀로 움직일 수 있는가?
"많이 놀라신 듯합니다."
그 사내의 육성이 또렷하게 귀를 울렸다.
"위대한 이오르가의 자손이시자, 12원정대의 지혜가 마족을 처음 상대하신 것도 아닌데 말이죠."
조소하는 듯한 사내의 목소리.
에리카는 정신을 차리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게 말이네요. 제가 아직도 놀랄 것이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거 희소식이군요. 저희가 퇴보는 하지 않았다니 말입니다."
잠시 후, 하늘 위로 날아올랐던 덩치가 바닥에 착지했다.
쿠웅!
무거운 질량만큼이나 바닥의 울림은 깊었다.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로 그 사내의 뒤에 서 있었다.
사내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허를 찌르는 데 실패했나?"
"상황 판단이 생각보다 빠르더군."
"당연하지 않나? 어차피 상대는 12원정대 중 하나이자, 푸른 눈 마탑의 수장인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이상한 일이지."
로브 속에 가려진 남자의 눈동자가 슬쩍 보인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자와 붉은 눈동자.
그 속에 담긴 여유와 경멸은 에리카의 깊은 분노를 자극했다.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할 텐데....'
마음과 달리 현실은 쉽지 않다.
고위계 마법을 캐스팅하다가 실패한 대가가 너무 컸다.
그 마력 반동으로 단순히 마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에리카의 몸 안에 있는 마나까지 흩트려 버린 상태.
'어쩔 수 없어.'
인간의 마법은 잠시 접어 둔다.
에리카는 조심스럽게 손을 뒤로 뺐다.
그녀의 허리띠에 채워진 수통.
수통의 입구를 열기 위해서였다.
퐁!
그 입구가 열리기 무섭게 안에 있던 내용물이 손가락을 따라 헤엄쳤다.
가득 찬 물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는 고리가 되었다.
덩치의 한쪽 눈썹이 승천했다.
"웬 물의 고리?"
"이오르가는 마법뿐만이 아니라 물의 위상이지."
"흥, 물 따위로 뭘 할 수 있겠나?"
덩치가 비웃자, 에리카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물의 고리 중 일부가 물방울이 되어 에리카의 손 위에 떴다.
"이런 걸 할 수 있지요."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물방울은 탄환이 되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덩치가 그 물 탄환을 막으려 손을 앞으로 뻗었다.
"으읍?!"
수압탄이 깔끔하게 꿰뚫으며, 그 심장마저 파고들었다.
"크억!"
가슴을 꿰뚫고 등을 뚫더니, 뒤에 서 있는 청년마저 뚫으려 날아든다.
그러나 그의 몸에 둘러진 마력 방호만은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크으윽... 저게 뭐야? 고작 물방울 주제에...."
"말하지 않았나? 이오르가는 물과 마법의 위상이다. 하물며 그 수장이 부리는 마법인데, 네 피부를 뚫는 게 당연하지."
"그런 건 빨리 말을 해 줘야지."
"저는 직접 느끼는 편을 더 좋아하지 않던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얼굴을 하는 덩치.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태연하게 대화나 하고 있는 그 둘을 본 에리카였다.
'둘 다 죽여 버릴 작정으로 쏘았는데....'
그녀의 물방울은 치명적인 위력을 자랑한다.
심장을 관통했을 때, 회전력과 수압에 뒤틀려서 산산조각이 났어야 할 터였다.
하물며 인간보다 몇 배는 강해진 마족이라 해도 치명상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관통당한 마족은 그것을 어딘가에 찔린 듯한 경미한 부상처럼 여기고는 벌떡 일어났다.
'게다가 뒤에 있는 마족은 뚫지도 못했지.'
몸에 간단하게 두르고 있는 그 마력 방호가 그 정도의 수준이었다.
'마족의 잔당인데 이 정도의 수준이라니.'
적어도 노블레스급.
그것도 엠페러에 근접한 노블레스급이다.
밴딩 타임과 엘레멘탈 데몰리션까지 모두 실패한 지금, 더 이상 그녀에겐 수단이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약하고, 준비를 해 오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펼친다.
마법진이 발현하고 마법진이 에리카의 몸을 감싼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텔레포트 하지 않았다.
"쿨럭!"
대신 입에서 피가 뿜어지며 쏟아졌다.
영문도 모르고 각혈하며 고통에 비틀거렸다.
'내장이... 꼬인 것만 같아.'
그 부작용이 무엇인지 안다.
완벽하지 않은 텔레포트 마법을 구사하면 나오는 현상이었다.
'내가 마법진을 잘못 구현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에리카는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으며, 텔레포트 마법만 수십만 번을 썼었다.
자다가도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려 어디론가 이동해 버릴 정도로 통달한 게 에리카였다.
'그렇다는 건 저 남자가 술수를 부렸다는 뜻.'
바보같이 당하고 말았다.
에리카는 분한 표정으로 그 사내를 보았다.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마음대로 되실 줄 알았습니까?"
목소리에서 진한 미소가 느껴졌다.
분노하든, 냉담하든 뭘 해야 하지만,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신음을 내뱉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탑주님께서 열렬히 인사를 해 주시니, 저도 답을 드려야겠군요."
그가 로브 속에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은 검지 않고 새하얗다.
그 손가락이 그의 앞을 가리키며 세로로 그었다.
형형색색의 균열이 일어나며 그 속에 있던 내용물을 뱉어 내었다.
-크륵.
-크륵.
몬스터 와이번을 본뜬 마물이었다.
그것이 날갯짓을 펄럭이며 공중에 떠올랐다.
그 숫자는 적게 잡아도 스물이 넘었다.
궁지에 몰린 에리카에겐 한없이 절망적인 상황.
사내의 손가락이 에리카를 가리켰다.
"숨을 끊어주십오."
-키엣!
와이번들이 일제히 에리카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무거운 돌풍이 그들을 향해 덮쳐 왔다.
에리카의 시야를 가려 버릴 정도로 커다란 물체가 장벽이 되었다.
날아들었던 와이번 마물은 일격에 사망했다.
쿠웅!
바닥에 내리꽂힘과 동시에 솟구치는 흙먼지.
에리카는 눈을 뜨고 그 물건을 보았다.
그것은 도끼였다.
마치 거인이 쓸 것만 같이 커다란 날을 가진 전쟁 도끼.
에리카는 그 도끼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흉악한 도끼를 다루는 것과 다르게 아담한 체구.
그러나 서리 거인의 악몽이라는 이명을 지닐 만큼, 무예가 뛰어난 은발의 소녀.
"안녕하십니까, 에리카 님."
루리 실버윈드였다.
"영지에 방문하셨다는 말을 듣고 버선발로 찾아왔습니다만, 괜한 참견이었는지요?"
에리카는 검지로 입에 묻은 피를 훔쳤다.
"발드로바의 여종께 흉한 꼴을 보여 드렸군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몸가짐을 좀 더 단정하게 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루리가 하는 말에 깊은 의문을 표할 필요도 없었다.
곧 누군가가 이곳으로 걸어오는 기척을 느꼈으니까.
칠흑 같은 흑색 정장에 회색 머리와 푸른 눈.
키는 훤칠하지만, 여리여리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약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적을 향하고 있으니 천군만마의 군세를 업은 듯하였다.
페르다 발드로바.
그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에리카의 옆에 섰다.
98화. 곡마
"에리카 탑주님."
"발드로바 섭정님."
"내상이 심합니까?"
페르다는 그녀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탑주로서 체면을 지켜 주기 위함이었다.
에리카가 눈에 힘을 부릅뜨며, 자세를 고쳤다.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니랍니다."
"알겠습니다."
페르다는 짧게 수긍하며 상대의 전력을 파악했다.
날개를 퍼덕이는 와이번들 덩치 큰 사내와 상대적으로 작은 남자가 보였다.
작은 남자가 페르다를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페르다 로스노바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내의 말에 페르다는 정정했다.
"발드로바다."
"로스노바 가문에서 자랐으면서 근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겁니까? 꼴사납군요."
조소하는 사내.
그러나 페르다는 그런 도발에 휘둘릴 만큼 애송이가 아니었다.
"헤스티아 마을은 늑대 마물이 쏟아지고 여기에는 와이번 마물.... 이렇게 마물을 아무 곳에 부리는 걸 보니, 할림에서 일어난 사태의 원흉도 네놈인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감사하지요?"
"왜 네게 감사해야 하지?"
"할림에서 아주 혁혁한 공을 세워 역천의 번개를 맞은 세계수 가지까지 얻지 않으셨습니까?"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사실을 태연하게 읊어 버리는 남자.
페르다는 휘둘리지 않고 도발했다.
"패배한 개가 자위하는 소리로군."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맞긴 하군요. 당신과 주변을 너무 과소평가한 건 사실입니다. 버나드 총장만 죽일 작정으로 싸웠음에도 못 했으니 말입니다."
"그를 또 건드릴 생각인가?"
"아쉽게도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파괴하고 싶은 건 이미 당신의 손에 넘어간 듯하니.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네 말을 내가 왜 믿을 거라 생각하지?"
"왜긴요. 저는 이미 당신의 머리 위에 있으니,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가령,"
그가 마력을 머금은 손가락으로 지면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돌풍이 일어나면서 바닥에 깔린 낙엽이 휩쓸려 하늘 위로 떠올랐다.
"이런 얕은 수법조차도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한다던가."
바닥이 깨끗해지고 그 아래에 깔린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페르다의 발밑에서부터 이어진 그림자가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참으로 가소로운 재주입니다."
딱!
사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그림자 손이 있던 자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펑!
그림자 손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흩어졌다.
"윽!"
외적으로 보면 그 위력이 치명적이지 않은 듯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실제 손이었다면 마력 방호나 갑옷 따위는 종잇장처럼 찢어 버릴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호오."
사내는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은 손발처럼 다룰 수 있지만, 그 손발의 감각을 그대로 따 오기에 고통 또한 수족과 같다고 들었는데... 손이 끊어지는 고통이 아니라 마치 불에 데어 빼는 것처럼 반응하시는군요."
페르다를 분석하는 사내.
페르다는 그 말에 대꾸하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대신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페르다도 마법을 파악해 보려 했다.
'방금 부린 건 무슨 마법이지?'
페르다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손가락을 튕기면서 일어났던 폭발.
아니, 그것은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폭발 같으니 그것은 폭발이 아니다.
'그것은....'
페르다는 그 장면에 집중했다.
시간을 느리게 하여 한 장, 한 장을 뜯어 그것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폭발이 아닌 지점을 왜곡하는 마법이다.'
공간이 찰나의 순간 허공에 한 점을 중심으로 빨려들듯이 일그러지고 풀려난 것이다.
'지점을 왜곡하여 물건을 부수는 마법.'
명확하게 설명이 되자, 페르다는 그 정체도 알 수 있었다.
그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
역사의 한 줄로 사라져 버린 이름.
"네놈은 곡마로군."
곡마.
그 이름을 언급하자, 사내는 감탄했다.
"호오. 그 한 번으로 제 정체를 간파했습니까?"
놀란 것은 아군인 에리카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마족의 노블레스급 되는 인물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정체를 간파하진 못했다.
그도 당연한 것이 곡마는 존재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곡마라면 분명히 용사의 손에 가장 먼저 죽은 노블레스급일 텐데요?"
사내는 순순히 인정했다.
"맞습니다. 그때의 마족들은 인간에 대한 경각심이 없었지요. 그래서 용사에게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죠?"
"간단합니다. 그때는 당신도, 에르데스도 없는 열정만 넘치는 용사만이 있었을 때죠."
마법사들이 가진 신중함과 섬세함이 없었다는 의미.
부활의 여지가 남았다는 것.
"설마... 마족이 이렇게 훗날을 기약하고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딱히 모습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더군요."
곡마의 눈이 페르다 쪽으로 향했다.
"거슬리는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거슬린다.
그 말은 즉 기분이 나빠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곡마의 입은 외려 위로 비틀렸다.
"마족이 되면 감정도 뒤틀리나? 웃을 때를 모르는 것 같군."
"마족도 기쁨을 느낍니다. 단지 당신들처럼 하찮은 것에 목메는 그런 감정과는 다르죠."
"모든 것을 허무로 되돌리는 것이 위대한 것인가요?"
에리카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의 위대한 뜻이니, 나의 큰 기쁨이지요."
"그럼 얼른 사라져서 먼저 간 놈들과 인사나 하게."
파지직!
한 줄기의 빛이 곡마를 향해 날아간다.
그러나 그 마력 방호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페르다의 손아귀에서 나간 라이트닝 볼트였다.
"그런 걸로 저를 죽일 생각이십니까?"
"아니. 탑주의 마법이 먹히지 않는 시점에서 안 될 건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뭔가를 깨달은 에리카가 페르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지켜보고 있었나요?"
왜 얼른 와서 도와주지 않았느냐는 원망이 섞인 표정.
그러나 페르다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일대를 통째로 날려 버리려 하는데, 어찌 상황을 살펴보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긴 합니다만...."
"제정신도 아니고 공왕령의 일부를 통째로 날려 버릴 생각을 하셨습니까?"
루리가 볼멘소리를 내자, 에리카는 입을 다물었다.
중상을 입은 지금은 감정이 너무 앞서려 했다.
"전력을 파악했다고 기세등등한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미묘한 미소를 머금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군요. 이대로 서로 좋게 헤어지는 건 어떻겠습니까?"
"여긴 공왕령의 영토다. 멋대로 깽판을 쳐 놓고 도망치려 하나?"
"흐흠, 그렇다면."
그가 손가락을 허공에 휘둘렀다.
"어디 한번 막아보시지요."
또 다른 공간이 찢겨 벌어지면서 안에 있던 내용물을 토해 냈다.
페르다에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할림 때와 달랐다.
무려 5개의 균열이 곳곳에서 일어나며, 안에 있던 내용물을 토해 냈다.
그 일부는 페르다와 일행 쪽을 향했으나, 다른 일부는 헤스티아 마을로 몸을 틀었다.
동시에 곡마와 덩치는 균열 속으로 몸을 던지려 했다.
당장 발을 떼기조차 어려운 지금으로선 그 도주를 막을 방법은 없다.
아니, 루리가 나선다면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녀는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실버 드래곤의 자식이다.
그러나 루리가 나선다면 저 많은 마물은 헤스티아 마을로 향할 것이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저 마물들을 전부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페르다 님."
루리가 페르다를 올려다보았다.
가면을 어설프게 쓴 듯한 그 눈동자는 갈 곳을 잃은 얼굴이었다.
"가라. 네 주인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지켜라."
"페르다 님의 안위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으니."
비록 심한 내상을 입었지만, 에리카의 몸에 두른 물의 고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루리가 도끼를 집어 들고 날개를 펼쳤다.
투웅!
거센 돌풍이 거침없이 날아가며 헤스티아 마을로 향하는 마물들을 덮쳤다.
은빛 섬광이 숲 사이를 드나들었으며, 그 빛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무참하게 도륙된 시신만이 놓였다.
"제가 얼마나 상대하면 되겠습니까?"
"저 혼자서도 충분하답니다."
"그럼 뒤만 봐드리겠습니다."
상대는 이성을 잃고, 본능만으로 가득 찬 마물들이다.
한 방, 한 방이 위협적이지만. 그 공격은 단조롭다.
단조로울수록 간파하기 쉬운 법이었고, 에리카의 물방울 또한 쉽게 급소를 파악하고 꿰뚫는다.
'이것이 이오르가의 마법인가.'
겉은 유하기 짝이 없으나 손에서 벗어나면 어떤 금속보다 단단하고 치명적이다.
단순히 꿰뚫는 것도 아니었다.
실려 있는 회전력은 급소를 지날 때마다 몸 내부를 비틀어 터트려 버렸다.
다수를 상대하고 있음에도 조금의 낭비도 없으며, 모든 것을 일격에 해치웠다.
'이런 상대조차도 쩔쩔매게 만드는 것이 곡마인가....'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그들을 놓친 것이 아닌, 그들이 자신들을 풀어 준 것과 똑같았다.
그렇게 달려들던 마지막 한 놈까지 모두 정리를 마쳤다.
에리카는 주변 생명을 한 번 더 감지해 보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후우...."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여유로움은 없었다.
"괜찮습니까?"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며칠 동안은 집중해서 마력을 복구해야겠어요."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페르다가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에리카가 그 손을 잡았다.
마법사답지 않게 굳은살 박인 손.
에리카는 이 남자의 손을 만져 본 적이 있었다.
그때였다.
그것과 동시에 에리카의 손을 향해 무언가가 타고 흘러들어 왔다.
에리카는 그것이 뭔지 알고 있다.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그 마나였다.
"흐꺅!"
소스라치는 에리카.
페르다의 손을 놓아 버리고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일이긴! 당신이 내 손을 잡자마자 또 마나를 흘리려 했잖아! 이 색골 같으니! 내게 또 엉큼한 짓을 하려고!!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페르다는 진심으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
틀림없이 자신만 바보가 될 게 분명했다.
"크, 크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대로 마나 연공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주변을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에리카는 가부좌를 틀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몸속에 있는 회로가 돌며, 심장의 고동과 함께 마력을 쌓았다.
눈꺼풀 한 장에 남긴 어둠 속에는 불과 몇십 분 전에 일어난 자신의 싸움이 떠올랐다.
'그자가 설마 마왕의 일곱 흉성 중 하나인 곡마라니.'
일곱 흉성.
마왕인 엠페러급 바로 아래인 노블레스급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며, 군단장이 된 이들.
몇 수를 겨루고 마력을 느꼈음에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가 노블레스급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세에 몰렸으며, 온전히 전투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 정체까지 간파할 만큼 여유롭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명으로도 위안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한때 12용사의 지혜라 불리었던 마법사이다.
그녀는 이미 다른 여섯 흉성과도 싸워 봤으며, 그들을 상대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었다.
'게다가 페르다 섭정은 단 한 번 만에 알아차렸지.'
단 한 번의 공격을 받아 내면서 정체를 간파했다.
이건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사실이 아니었다.
'마력에서도 밀렸고.'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으나, 승패는 왈가왈부하기가 힘들었다.
만약 페르다와 루리가 나타나지 않고 그 남자와 대적했다면 이겼을까?
'젠장.'
속으로 그 분함을 곱씹었다.
비록 그 끝을 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으나, 에리카는 느꼈던 무력감을 간과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쪽팔려 죽겠네.'
혼자 호들갑 떨어서 소리 질렀다는 사실이 내장이 뒤틀린 아픔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팍팍 내리쳤다.
'어우, 등신아. 등신아! 걍 죽어버리지 그래!'
페르다는 그녀가 괴로움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내상이 아주 심한 모양이로군.'
잠시 후, 누군가가 이곳으로 날아왔다.
흉악한 도끼를 들고 갔던 루리가 돌아왔다.
"헤스티아 마을로 향하던 것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헤스티아 마을 쪽에서도 도움이 필요 없이 일단락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고생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마물 사체를 정리해야 합니다."
"버넬이 좋아하겠군."
숲에는 마물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녹색 피와 보라색 살점은 자연에서 이질적이고 불길한 느낌을 풍겼다.
"이 일대는 제가 정리하도록 하죠."
그 말을 꺼낸 것은 가부좌를 튼 에리카였다.
"그러실 필요는 없으십니다만."
"숫자도 많고, 꼼꼼하게 치우지 않으면 오염되는 곳이 있잖아요? 그런 건 마법의 도움이 필요하죠. 조금만 더 연공하고 나면 정리할 정도의 마나는 생길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에리카 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일이 일단락되는 듯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쿠웅—!
크게 울리는 소리.
그 진원지는 다름 아닌 헤스티아 마을에서 들려오던 소리였다.
99화. 책임
모든 것을 얼어붙일 듯한 한기가 휘몰아치는 겨울.
헤스티아 마을은 평소와도 같이 건설 작업에 열중이었다.
마을 건설 초기부터 일하던 핸슨은 반장에서 소장으로 승진했다.
그들은 반장들을 관리하는 평민 출신의 기술자들 중에서는 가장 출세한 셈이었다.
"거 고기 좀 더 주쇼! 쩨쩨하게 이렇게 먹어서 어떻게 힘을 낸다고."
"고기는 정량 배식만 합니다."
"정량은 무슨! 저기 있는 고기가 더 커 보이는구먼. 저런 거 다른 사람은 더 먹을 거 아냐? 그게 정량이야?"
"아이고, 소장 나으리가 되셨으면, 거 주변에서 햄이나 좀 사서 나눠 주고 그러십시오. 부식 배급도 아직 엉망이라 짜증이 나는데."
"그런 거 사서 먹으면 돈은 언제 모으나!? 그러지 말고 저기 있는 고기 좀 더 줘."
실랑이 끝에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받아 내었다.
핸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배식대를 나왔다.
"핸슨 소장! 여기로 오시게! 내 자리 잡아 놨어!"
모닥불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는 자리에 깔고 앉았다.
"이야. 소장도 되고도 이런 곳에서 밥을 드십니까?"
"내가 높으신 분들이랑 밥 먹을 짬이 있나? 띵까띵까 놀 동안 다른 사람들이 다 해 놓는데!"
"그 기사 나으리는 어디 가셨소?"
핸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낸들 알겠나? 갑자기 없어져도 그러려니 하고 있네. 어차피 식사도 안 하시는데, 편히 밥이나 먹읍세."
잠시 후, 반장 하나가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가왔다.
"식사 중이시오?"
"식사 중이지. 뭐 마누라한테 쫓기고 있나?"
"마누라랑 비슷하긴 하군.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 자자. 얼른 받으시오."
그가 품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었다.
햄이었다.
"오오! 웬 햄인가?"
"분명 보급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는데."
"어떻겠소? 남부 것들한테서 슬쩍 하나 가져왔지."
대놓고 절도를 자랑하는 사내.
사내들은 나무라는 대신 영웅이라 치켜세우기 바빴다.
"그러면 좀 더 큰 거 가져오지 그랬나?"
"이게 제일 큰 거요."
"요놈, 대물이네. 안 그래도 배식은 고기가 좀 부족한 것 같더만, 위장에 기름칠 좀 하겠구만. 나이프 꺼내 보게."
"내 건 더러워. 자네 것 좀 쓰게."
"내 것도 더러운 건 마찬가지야. 그러지 말고 줘 봐."
"불에 지지면 소독되고 되지 않나?"
"그럼 자네 것을 불로 지져 쓰도록 하지."
그렇게 서로 나이프를 안 쓰겠다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였다.
"아저씨들."
"그 자식 왔다! 얼른 숨겨!"
청년의 목소리에 후다닥 움직이는 사내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스튜만 푹푹 뜨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온 청년은 하프 플레이트를 입고 검 한 자루와 '치안대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
윌리엄이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고지식함이 느껴지는 그 치안대장이 물었다.
"할림에서 오신 분들이 자기들 부식이 없어졌다고 합니다만, 뭐 아시는 거 있습니까?"
"글쎄올시다. 자네는 아나?"
"나도 잘 모르겠네. 그 사막 잡신이 귀신 되어서 훔쳐 간 거 아냐?"
그 사내는 스윽 주위를 스캔해 보았다.
비상식적으로 커다란 고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바지에 있는 거 좀 꺼내 보십시오."
"어허, 이 사람이! 밥 먹는데, 가랑이를 까라 해?"
"거기 수상하니깐 그러죠. 빨리 꺼내 봐요."
"이놈이 원래 대물이야."
"...제발 서로 민망하게 그러지 맙시다."
어쩔 수 없이 바지에 숨겼던 햄을 꺼냈다.
윌리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엄연히 절도입니다. 왜들 이러십니까, 정말."
"거거, 그놈들도 그랬어! 우리 자재 몇 개 빼먹어 간 거 있는데, 우리가 안 그랬다면서 발뺌하지 않나?"
"옳소! 그쪽만 쓰고 우리는 안 될 게 뭐가 있어?"
피장파장이다 소리치며 햄 소유권을 주장하는 인부들.
그러나 치안대장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전 이 마을 치안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제발 서로 얼굴 붉힐 일 좀 하지 맙시다."
"아 글쎄, 그쪽도 그랬다니까. 이런 일로 불쌍한 우리들 가두거나 그러진 않을 거지?"
"고간에 문지른 걸 돌려주는 걸로 복수한 셈 치세요. 이러면 다음번엔 정말로 법대로 합니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구먼. 자네 가랑이 냄새는 독하니깐."
"어쭈? 일주일 동안 씻지도 않은 네놈이 더 독하지!"
치안대장은 인부들이 오십보백보 싸우는 동안 햄을 오물처럼 집고는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인부들은 한마디씩 내뱉었다.
"젠장. 저 난민 놈은 오자마자 출세했구만."
"어디서 굴러먹은 놈이랍니까?"
"몰라, 이름은 윌리엄인데, 그냥 난민 출신이더군. 난민인데 행정관이 저놈 보자마자 치안대장 하라고 하지 않던가?"
"무슨 난민한테 치안대장 같은 중책을 맡긴단 말인가?"
"어디 높으신 분 가보라도 가져와서 행정관한테 슬쩍 밀어줬나?"
"드래곤 스폰이 무슨 욕심이 있다고 그러겠나?"
"근데 하는 꼬라지 보면 어울리지 않던가? 빡빡한 게 아주 기사 나으리 납셨지."
"맞아."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동시에 그러했다.
치안대장이라는 견장이 부끄러울 짓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그러고 보면 우리 기사 나으리한테는 왜 감투 씌워 줄 생각도 안 한 말인가?"
반장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괴력을 보면, 아직도 그가 인부로 남아 있는 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난 당연히 치안대장이 갑옷 기사님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제안도 안 했다더군. 그 행정관한테 우리 기사님 감투 좀 씌워야 하지 않느냐 하니깐 고려 중이라고만 하더구만!"
"생각은 하고 있다는 거구만. 기다리면 되는 일 아니겠소?"
"생각은 무슨! 그냥 실컷 부려 먹고 내치려는 속셈 아니겠나? 욕심 그윽한 탐관오리가 따로 없소."
그 말에 간담이 싸늘해짐을 느끼는 반장들.
"그... 행정관 드래곤이지 않소?"
"드래곤이 아니라 드래곤 스폰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그게 그거지. 화나면 척추를 반으로 접어 버리는 족속들인데, 말 함부로 해도 괜찮겠나?"
"...뭐 말을 그렇다는 거지."
핸슨은 꽁지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핸슨도 자기 목숨이 아까운 줄은 알기에 대신 화를 낼 깜냥은 없었다.
평민들 사이에는 예로부터 머리에 뿔 달린 것들은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악마나 드래곤 스폰이나 드래곤이나.
전부 인간을 상회하는 능력을 지니었으니까.
"어?"
"왜?"
"저거, 우리 기사님 아니신가?"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오셨구만."
공사판에 어울리지 않는 갑옷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온다.
"기사님, 이쪽입니다!"
핸슨은 그에게 크게 손 흔들어 이목을 끌었다.
갑옷 기사는 아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달려오는 걸 보면 무슨 아녀자처럼 오는군."
"키랑 체격이 저리 큰데, 여자겠냐만은...."
기사의 알 수 없는 예법이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무엇보다 그는 맨손으로 통나무를 11그루를 집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행실이 여자 같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여성인 발드로바였으니까.
"아이고, 기사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끄덕끄덕.
"그럼, 여기서 잠깐 쉬시지요. 안 그래도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음표를 띄운다.
"이곳에서 공들을 세우신 우리 기사님께서 감투 하나 씌워 주지 않아서 참 속상하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
"그러니까 기사님께서 이 도시 건설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게 많이 서운하지 않습니까?"
핸슨이 몰아치듯이 말했다.
그러는 이유에는 정말로 아쉬운 감정도 있으나, 역시 제 몫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중책에 앉는 것만큼 좋은 권력은 없었다.
핸슨은 그가 기사 자리에 앉아 그의 위세를 업고만 싶었다.
물론 발드로바는 그런 얄팍한 수조차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지금 일도 충분히 즐거운걸.'
무엇보다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는 발드로바였다.
기사 같은 것보다 뭔가를 짓는 일을 하고 싶었다.
비록 돈을 적게 받는다 해도, 건물 하나가 세워질 때마다 나오는 뿌듯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기사가 되는 것보다 이런 곳에서 머물러 있는 게 좋았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가의 고성이 터졌다.
"이런 개씹...!"
이목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무장한 남자 무리가 한 명의 소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의 보호자로 보이는 좀 더 큰 소녀가 벌벌 떨고 있었다.
"네 동생 관리 똑바로 안 해!? 그딴 걸 왜 들고 다니게 두는 거야? 너 때문에 내 옷이 더러워졌잖아!"
"죄송합니다, 모험가님. 그 세탁은 제가 해 드릴 테니까 부디 옷을...."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3실링이라고!"
"어,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비싼 옷을 더럽혀서...."
"말로는 누가 못 해? 빨리 배상해."
"네, 네??"
"귓구멍 막혔어?! 3실링 내놓으라고!"
소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당장 내일 먹을 밥이 걱정인데, 3실링이라는 돈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인부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마디씩 던졌다.
"요새 저런 놈들이 많이 늘었구만."
"원래 모험가들을 위한 곳이지 않나? 모험가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지."
"제국에도 모험가는 많지 않나? 저렇게 무례하게 구는 놈은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 놈들이면 진작에 쫓겨났으니 그런 거지. 목소리만 크고, 실속이라고는 없는 것들. 그러니깐 브론즈나 실버에 머무르는 거 아니겠나?"
뒷담을 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 반장들.
그러나 차마 모험가들과 대립할 깜냥은 없었다.
"그, 도, 돈은 갚도록 할게요. 여기서 묵고 있으니까 차곡차곡 돈을 모아서...."
"그딴 걸로 언제 3실링을 벌어? 내가 늙어 죽는 게 더 빠르겠네."
"이 오빠가 3실링 빠르게 버는 법 아는데, 가르쳐 줄까?"
"그게 무슨...."
음흉한 손길이 그 소녀를 향했다.
무슨 짓을 당할지 본능적으로 직감한 소녀가 몸을 움츠렸다.
"저런 추잡한 새끼들이—!"
반장들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자리에 일어서려던 순간, 한 박자 빠르게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옷 기사였다.
무게가 있는 플레이트 아머인 만큼,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반장들의 발을 묶을 정도였다.
그녀가 저벅저벅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비록 원래 갑옷보다 작아졌지만, 그래도 크기가 아주 큰 편에 속했다.
그리고 그 크기는 무뢰배 모험가들을 긴장케 했다.
"너, 너 뭐야?"
"...."
"이, 씹새끼야!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내가 쫄 것 같아?!"
발드로바가 주먹을 들었다.
공격이라 생각했던 무뢰배들이 움찔거렸으나 그 주먹이 펴졌다.
그 안에는 들어 있는 것은 은화 3개였다.
3실링.
그 값을 대신 지불하는 것이었다.
잔뜩 졸아 있던 무뢰배들이 뒤늦게 체면을 차리면서 말했다.
"이거 먹고 떨어져라? 그래, 뭐 그래 주지! 어이, 애새끼, 운 좋은 줄 알아!"
공갈 협박하던 무뢰배들은 그 돈을 받아 들고 소녀를 던지듯이 풀어 주었다.
어린 소녀의 몸은 발드로바에게 안겼다.
어린 소녀는 그 품에 포옥 안긴 채로 있었다.
발드로바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허공만 끌어안다가 손을 내렸다.
그때, 그 소녀의 언니가 다가왔다.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
"...."
"돈은 반드시... 어떻게든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깐 제 동생을 부디...."
울 것 같은 소녀.
바구니를 든 손이 여전히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발드로바는 그대로 어린 소녀를 넘겨주었다.
언니는 눈물을 훔치며 동생을 끌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발드로바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돈은 왜 주시고 그럽니까? 저런 것들 한 방씩 때려서 보내 버려도 모자란데!!"
"...."
핸슨이 따지고 들려 했고, 발드로바는 가만히 그를 보았다.
핸슨은 그가 통나무 11그루를 들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라는 걸 떠올리고 언성을 줄였다.
"기사님께서 같은 모험가시고, 뜻이 있으신 듯하니, 소인이 따지고 드는 것은 무용한 짓이겠지요."
발드로바도 그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어린 소녀를 붙잡는 그 모습을 보고는 화가 치밀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고, 한 방 세게 때려 줘서 엉엉 우는 걸 보고 싶었다.
하지만 폭력으로 이어질 수는 없었다.
발드로바는 잘 알고 있다.
'내가 힘을 쓰면... 누군가는 죽어.'
죽음은 누군가에게 슬픔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공포로 이어진다.
몇십, 몇백 년을 걸쳐서 그녀가 느꼈고, 경험했던 것이었다.
'그런 건 싫어.'
그래서 가능하다면 그 상황을 무마하면서 넘어가고 싶었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수단은 역시 돈이었다.
그래서 그 모험가가 원하는 대로 돈을 쥐여 주었다.
상황은 그걸로 넘어갔다.
아무 일도 없이.
발드로바는 그걸로 만족했다.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땡땡땡!
갑자기 마을에 크게 울리는 경종 소리.
"뭔 소리야 이건?"
"마을 중앙에서 울리는 거 같은데?"
그 종이 무슨 의미인지는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위험을 알리는 소리임은 가늠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저 종이 정말로 위험을 알리는지였다.
모두가 얼어붙은 채 서 있을 때, 치안대장이 검을 뽑아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실제 상황! 싸울 수 있는 사람들 빼고 전부 건물 안으로 대피하세요! 마물들이 몰려옵니다!"
"마, 마물?"
"아이고야! 동부는 동부라더니!"
"반장님들은 얼른 인부들한테 정보 전파하고 대피시키세요! 실제 상황입니다!"
반장들이 분주하게 소리를 치면서 대피시켰다.
발드로바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있었다.
'마물....'
그녀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드는 듯했다.
마물이 몰려오는 지금, 그녀는 어떤 선택도 할 수가 없었다.
"갑옷 기사님 맞으시죠?"
"...."
"지금 손이 필요합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이 도시를 위해서 싸워 주시겠습니까?"
"...."
어떤 의사도 표하지 않자, 윌리엄이 재차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치안대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위험한 상황입니다! 헤스티아 마을이 자칫하다가 붕괴할 수도 있어요. 모든 게 허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기사님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윌리엄이 호소한 끝에 발드로바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뒤를 따라간 자리에는 혼란에 빠진 도시의 풍경이 들어왔다.
모두가 겁에 질린 채로 물건을 바리바리 싸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창을 들고 갑옷을 입은 치안대들이 어설프게 윌리엄을 향해 뛰어왔다.
"충성! 대피는 7할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마저 정리할까요?"
"아니, 그쯤이면 됐다! 치안대! 내 앞으로 방진을 형성하라!"
창을 든 치안대들이 도로 위를 서서 창을 들었다.
그들은 전부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무늬만 병사들인 군대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당장 모험가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치안대장.
이사벨라의 전음 소리가 들렸다.
-서쪽 방향 골목 하나에 늑대 마물이 들어설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그곳으로 모험가를 보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윌리엄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눈에 익은 모험가 무리 하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모험가님! 서쪽 골목길 방어를... 어디 가십니까!? 얼른 전장에 합류하시고—."
"뭐, 돌았어? 내가 여기에 목숨이나 바치려고 모험가가 된 줄 알아?"
"유사시에 모험가들이 동원된다고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알 게 뭐야! 난 참여 안 해!"
"치안대면 치안대답게 너희들이 알아서 지키라고!"
"난 못 봤어. 아무것도 못 봤으니까."
한몫 챙기겠다는 일념을 안고 왔으나 당장 눈앞의 공포에 겁먹어 꽁무니 빼기 바빴다.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사기를 갉아먹는 거대한 똥까지 뿌리고 갔다.
'저 망할 놈들.'
윌리엄으로선 혈압이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치안을 어지럽혀도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안 된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양심이 있는 소수의 모험가와 치안대가 고작.
'괴력의 갑옷 기사.'
당장에 믿을 건 이 사람밖에 없었다.
치안대가 안전하게 대로를 막으려면,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윌리엄은 선택했다.
"기사님."
"?"
"서쪽 골목에 병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곳에 마물이 들어오는데, 막아야 합니다."
"...."
"혼자서 가능하시겠습니까? 혼자서 불가능하시다면 4명 정도를 차출해서—."
발드로바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마치 그 지원은 필요 없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신호였다.
그러고는 말없이 움직였다.
동쪽으로.
"기, 기사님? 그쪽이 아니라...."
아차.
서쪽은 저쪽이구나.
그렇게 부족했던 자리를 채웠다.
본대의 전력은 크게 잃었으나, 윌리엄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시끄럽게 울리던 경종 소리의 주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숲에서 튀어나와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커어엉!
일반 늑대보다 2배는 큰 늑대 마물이 무려 15마리.
그중 세 마리가 대로에 모습을 보였다.
윌리엄은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창을 꼿꼿하게 세워라! 앞으로 1보 전진한다!"
그의 말을 듣고 조금씩 움직였다.
그들의 앞에 놓인 저것은 죽음이다.
누가 당당하게 죽음 앞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적어도 덜 훈련된 병사인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늑대들은 미숙한 병사들의 공포를 맛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들의 본능은 알고 있다.
조금만 깊게 파고들면 무너질 형태라는 것을,
-컹!
"어어? 오,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야!"
창대를 파고들며 안으로 들어오는 늑대 마물 한 마리.
두려움 없이 치고 들어오는 마물의 힘에 보병들은 당황하며 쓰러졌다.
"으, 으아악!"
잡아먹힌다 생각하는 그 순간,
붉은 검기가 늑대 마물의 머리를 날카롭게 후려쳤다.
-깨갱!
너덜너덜해진 머리로 뒤로 물러나는 늑대 마물.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이는 다름 아닌 윌리엄이었다.
그는 쓰러진 치안대 병사를 일으키고 소리쳤다.
"일어서! 창을 똑바로 들어라! 살고 싶다면, 창을 단단히 세우고 체간을 낮춰라!! 놈들의 움직임만 방해하기만 하면 된다!"
윌리엄이 자신의 가슴을 쳤다.
플레이트 아머의 소리가 쇠북처럼 울렸다.
"너희들의 목숨은 내가 책임진다!"
100화. 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