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물꼬
인간의 쾌락을 두고 장사하는 만큼, 아흐메드 하심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자였다.
이런 유흥지의 영주라 생각하지 못할 만큼, 첫인상이 좋았다.
구릿빛 몸은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하였으며, 그의 눈에서는 광채가 나는 듯했다.
할림에서 흔히 보이는 흐리멍덩한 눈을 한 귀족들과 정반대였다.
아흐메드는 여급이 준비한 차를 직접 건네주며 말했다.
"아삼차입니다. 소문을 듣자 하니 차를 즐기신다기에, 술 대신 가져왔습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이렇게 사석에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대공의회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아주 인상적인 발언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극동부의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누가 못하겠는가?
"말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만이라니. 그런 세트가 노할 짓거리를 이 아흐메드 하심이 하겠습니까?"
세트는 남부 사막의 신이었다.
아흐마드가 길게 뻗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이외에도 섭정님께 직접적으로 드릴 수 있는 선물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아아."
손가락을 딱 튕기는 아흐메드.
"좋은 방법이 하나 있군요."
아흐메드가 옆에서 부채질하는 여시종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다.
여시종은 알아듣고 문밖을 나섰다.
아흐메드는 페르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희 도시에 오시는 분들이 도박을 즐긴다는 사실은 아시지요?"
"물론입니다. 저도 여기서 한 번 도박을 했습니다."
"가져온 돈만으로 승부를 마치고 가는 것이 아쉬운 분들을 위해서 준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전당포 말입니까?"
아흐메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흐메드가 할림의 영주라 부르지만, 그의 아래에서 운영되는 카지노는 12개 중 고작 2개뿐.
대신 모든 전당포의 운영은 아흐메드의 수하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만으로도 10개의 카지노를 합쳐서 얻은 수익보다 3배를 더 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저희들은 담보물을 잡고, 6개월의 시간을 드립니다. 6개월 이후에는 그 물건의 처분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지요."
"그 물건을 주시겠다는 말이로군요."
"그렇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이번 전시회 이후에 이루어지는 경매 또한 아흐메드의 전당포에서 꾸려진 물건들을 위주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리라.
그걸 언급했다는 이유는 전당포에 있는 물건을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전당포 수준을 넘어섰지.'
이 할림의 고객들은 대부분이 귀족들이며, 부유한 상인들이다.
단순한 보석은 물론 상황에 따라 가보로 쓰이는 진귀한 물품들까지.
'물론 그런 것들은 대부분 가문에서 빚을 내서라도 회수해 간다.'
가보를 내걸었다는 건 고리대금 장사나 마찬가지.
사실상 남아 있는 재보라면 보석이나 어중간한 효력을 지닌 매직 아이템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물건일지 기대가 되었다.
아흐메드가 저렇게 기대하라고 하니 어떤 건지 기대해 볼 가치는 있었다.
잠시 후, 무희복을 입고 있는 여시종 네 명이 정성스럽게 가마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만큼 정성스럽게 가져온 것은 틀림없이 누구도 손을 대선 안 되는 귀중품임을 의미했다.
페르다도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마 위에 올려진 것은 길쭉한 함 하나였다.
비수 하나가 들어갈 만한 사이즈였다.
아흐메드가 직접 그 물건을 꺼내어 탁자 위에 펼쳐 보였다.
"이건...."
페르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마법사로서 살아오면서 강함을 추구했었던 인생이었기에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역천의 번개를 맞은 세계수 가지... 아닙니까?"
아흐메드가 페르다의 추측을 듣고 놀랐다.
"정확합니다. 한눈에 알아보시는군요. 어지간해서는 알 수가 없는데...."
세계수 가지는 꺾이기 전까지는 순수한 마나를 머금는데 벼락에 맞으면 그 효력을 증폭시키는 효과로 변질한다.
번개를 주력으로 다루는 마법사라면 반드시 구해야 하는 지팡이 재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냥 번개를 맞고 떨어진 세계수는 1천 개가 넘기 때문에 희소성에서는 크게 떨어지는 편.
그러나 역천의 번개는 다르다.
'최초의 마녀, 루시 필리아즈만이 구사할 수 있는 번개.'
섭리를 거스르며,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지니었던 마녀, 루시 필리아즈.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역천의 번개이다.
푸른색을 띠는 번개와 달리 붉은색을 띠며 하늘을 찌른다.
그 역천의 번개를 맞은 세계수 가지는 총 7개.
1개는 에르데스에게 있으며,
1개는 푸른 눈 마탑에,
5개는 유명한 마법사 가문에 각각 나눠서 가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 유명한 마법사 가문들 중 2개는 가문의 몰락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 행방이 오리무중이던 게 이건가?'
가능성이야 여러 가지가 있다.
도박 중독에 빠진 마법사 자제가 주체하지 못하고 가보를 훔쳐서 넘겼다가, 쪽팔려서 잃어버렸다고 하든지,
아니면 정말로 도둑이 훔쳤는데 도박으로 탕진해서 여기다가 걸었든지.
그 과정이 어찌 됐든, 이 나뭇가지의 존재가 주는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120만 골덴.'
어지간한 왕들조차도 제시하기 힘든 금액이다.
워낙 역대급인 가격이어서 페르다는 기억하고 있었다.
번개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들에게는 몇 없는 아주 귀한 재료였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예, 예. 말씀하십시오."
"이 가지 얼마에 저당 잡혔습니까?"
아흐메드가 잘 물어봤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1만 골덴입니다."
무려 120배.
새삼 도박이 얼마나 인간을 망치는지 알 것 같았다.
120만 골덴이나 하는 걸 그런 헐값에 넘겨 버렸단 말인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흐메드는 이 물건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120만 골덴까진 아니더라도 50만 골덴 이상 받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볍게 선물이라면서 건네기엔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그 말은 곧 페르다가 그 거금보다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아흐메드는 나름대로의 계산을 끝냈으리라.
"이렇게 귀한 물건을 제게 주셔도 괜찮은 겁니까?"
"물건이란 본디 제 주인을 찾아가는 법이지요. 번개를 다루는 자에게 번개를 선물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늑대 마물 사태에서 썼던 마법은 라이트닝 스피어와 라이트닝 볼트.
그렇기 때문에 번개 마법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걸로 만든 스태프가 있다면, 도움은 되겠지.'
도움이 됐다면 됐지, 절대로 발목 잡힐 일은 없는 재료였다.
페르다는 아흐메드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런 선물까지 받아들였는데, 제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동지끼리 도와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같은 처지?"
"예, 우리는 같이 맨땅에서 일궈 내야 하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아흐메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페르다는 그를 따라 움직였다.
창밖을 나서자 보이는 것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 놓인 황무지였다.
"이 할림은 한때 메마른 대지 위에서 망해가는 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마법사들이 야욕을 펼칠 때, 저희 도시 또한 그 대상이었으니 말입니다."
마법사의 내정 간섭은 남부에 흔한 일이었다.
남부는 언제나 물이 귀하다.
그렇기 때문에 물 원소를 다룰 힘이 있다면, 대접을 받는다.
물을 넘어서 얼음까지 다룬다면, 부르는 게 값이다.
"그래서 나의 조부께서는 이 할림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법사가 흉계를 꾸미고, 신이 버렸다고 믿은 이 땅을 위해 온갖 헌신을 하셨지요."
아흐메드는 눈물을 머금었다.
마치 그 설움을 자신이 느껴본 적이 있는 것처럼 한이 서린 듯한 표정이었다.
"모두가 망할 것이라 저주했지만, 이 끝을 보십시오! 모두가 이곳을 불경한 땅, 신이 버린 곳이라고 했으나 그 누구도 저희들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굳게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일궈 낸 것입니다!"
황무지의 속성과 동떨어진 번영의 도시.
남부의 사막에 적응하는 많은 소도시가 존재하지만, 할림만큼이나 사치스러움과 문명화가 이루어진 땅은 없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압둘 하심께서는 늘 같은 처지에 놓인 형제를 도우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 하셨지요. 극동부는 저희의 형제. 똑같은 길을 걸으며, 똑같은 번영을 누릴 자격이 있는 형제의 나라입니다!"
세상을 불태워 버릴 듯한 열정을 보이는 아흐메드.
그 누구라도 그가 토해낸 열정에 감화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이 땅을 지키려면 365일 제정신이어야만 한다.
그건 선택이 아닌 필수.
단순히 고마워해서 이런 호의를 베풀었다는 건 사리가 맞지 않았다.
'아무래도 버넬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군.'
마도공학의 가치를 눈치챈 것이리라.
마물을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물건을 접할 수 있는 기회.
아흐메드는 그 기회를 감히 놓치고 싶지 않았다.
판단을 마친 페르다가 말했다.
"안 그래도 이 극동부의 정벌을 위해서 발드로바 성 휘하 마을을 건설하던 중입니다."
"그 또한 들었습니다. 인력과 자재가 아주 부족할 거라 생각합니다. 완공 예정일이 언제라 하였습니까?"
"기초 지반 공사와 상하수도에서 1년이 걸릴 것이고, 성벽까지 모두 둘러쌓으면 짧게 잡아도 5년이 걸릴 계획이라 하더군요."
"5년이라!"
아흐메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뜸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이렇게 말했다.
"2년."
"예?"
"저희가 건설 계획을 2년으로 줄일 수 있도록 자재와 인력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너무나 파격적이라서 현실성이 있는지도 감이 안 잡힌다.
무려 3년이라는 세월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부족한 것은 자재와 인력 뿐.
그 부분을 아흐메드가 채워 준다고 한다면, 도시의 건설은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런 도시 계획을 위해서는 역시 발드로바 성까지 직통하는 도로를 개간해야겠지요. 그 부분에서도 저희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도로야 이미 있지 않습니까?"
"그건 제국을 통하는 길이고, 직접적으로 오는 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가면 번거롭습니다. 무엇보다...."
아흐메드가 뜬금없이 주변을 살피는 척하는 간신배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제국 수도의 것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페르다는 조용히 그 말에 공감해 주었다.
과장되어 있는 몸짓에 비해 생각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파격적인 제안을 해도 되는 건가?'
3년 완공에 이어서 도로까지 만들어주겠다는 것은 귀족들 사이에서 '발전에 협력하겠다.'라는 것에 웃도는 수준이었다.
'모든 길이 제국을 통한다고 하듯이. 남부의 모든 길은 할림을 통한다.'
할림은 유흥지로 알려진 만큼 상업이 가장 활발한 장소였다.
각지에 모여드는 귀족들에게 팔기 위해 남부의 최상품들은 이곳으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즉, 페르다는 남부와의 교류를 직접적으로 성공하게 되는 셈이었다.
'버넬이 정말 생각 이상으로 도움이 됐어.'
이런 자리를 만들지 못했더라면, 결코 만들 수 없었던 기회.
혁신의 바람이 일으키는 발전이 페르다를 절로 미소 짓게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페르다는 방심하지 않았다.
아흐메드의 진짜 의도가 그다음부터 나왔다.
"이것들은 제공해 드린다는 의미였고, 이제부터 제가 제안 하나를 해 드리겠습니다."
아흐메드가 손을 내밀었다.
"저희 할림과 파트너십을 형성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 * *
아흐메드와 이야기를 마친 후, 페르다는 스테판에게 돌아갔다.
"흐하하핫!!!"
한편, 스테판은 버넬의 손을 잡으며 미친 듯이 웃어 대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흐하핫! 대박 났습니다! 대박!"
"예? 예?"
"여기 이거 보십시오!"
스테판이 꺼내 책상 위에 올린 종이 뭉텅이는 전투 투자 유치 제의서였다.
100골덴에서 1만 골덴, 가장 비싼 것은 10만 골덴까지도 있었다.
"상인들은 물론 귀족들까지, 전역에 퍼져 있던 귀족들이 전부 저희 상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게 좋은 건가요?"
"이런 문서를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저희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어중간한 제의를 하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으로 던졌다는 건 아주 의미가 큽니다!"
"주도권을 쥐었다는 말이군요."
"예!"
뒷전이 되어 버린 페르다가 조용히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앗, 섭정님 오셨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토록 원한다는데, 받아들이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죠! 지금 이 상황에 좋은 전략들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스테판이 신이 나 사업 모델 계획서를 페르다에게 건네주었다.
"큰손들이 지금 저희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마도공학계의 무기로 여러 곳에서 관심을 보이니, 이번에 새로 오신 행정관과 상의해서 부동산 경매와 투자 쪽 전략을 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은 돈, 돈, 돈.
이사벨라 행정관이 가장 우려를 했던 그 돈들을 채울 수 있는 수단들이었다.
"저, 이 정도 돈이면 새로운 상회를 설립해도 됩니다. 극동부를 아예 본부로 삼아서 하는 건데—."
"새로운 상회?"
페르다는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예. 기존에 있는 파스칼 무역회사 쪽이 아니라 완전히 동부에서 자율적인 상회를 기획하는 겁니다. 지분은 공작님께서 31% 버넬 씨가 20% 제가 20% 그리고 나머지 29%는 투자 유치자들을 들여서 하는 겁니다."
"우리 상회인데 외부인이 왜 필요한가?"
"대형 상회와 교역 조건을 뚫으려면 보통 회사 지분의 몇 퍼센트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대신 저희들도 그 회사의 몇 퍼센트를 사는 식이라 교환에 가까우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 쪽은 전문적인 상인이고, 상대하는 사람도 전문적인 상인들이었으니 복잡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페르다는 그 일에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어떠십니까?"
"마을이 활성화되는 방향이니 반대는 없다만...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유를 모르겠군."
페르다는 다시 한번 더 스테판이 준 내용들을 쭉 살펴보았다.
그런데 스테판이 소개한 전략 중에서는 이상한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비록 경제에 통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느낌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네가 제시한 것 중에는 뭔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느낌이 가득한 게 많군."
옆에 우물이 있는데 굳이 새 우물을 파는 듯한 느낌.
맨땅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페르다의 예감은 맞았다.
"예. 처음부터 시작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왜지?"
"파스칼 무역회사에 기대지 않고도 상회를 거머쥘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말에 페르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스테판은 그 눈에 괜스레 긴장하고 말았다.
"왜 파스칼에 기대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그 회사는... 아직 제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내뱉지 못하는 말.
그러나 페르다의 시선이 그 사실을 강제로 털어놓게 했다.
"그 회사가 제 것이 될 필요도 굳이 없으니까요."
"그렇군."
착!
페르다가 한참 보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스테판은 마치 자기 뺨을 후려치는 듯한 소리처럼 들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한층 더 차갑게 빛나는 듯했다.
"그럼 자넨 쓸모가 없겠군."
81화. 흔하디흔한
스테판이 뒤통수 한 대 크게 맞은 듯한 얼굴로 물었다.
"...예?"
페르다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똑같이 말했다.
"자네는 쓸모가 없겠군이라고 했다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와서 제가 쓸모가 없다는 건...."
"아흐메드 하심과 단둘이 이야기했네. 그가 파트너십을 제안하더군."
그 말을 들은 스테판이 적잖게 이해할 수 있었다.
"파트너십이면... 정말 큰 건수를 해내셨군요...."
스테판과 페르다의 단순한 협력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제안이었다.
남부의 가장 큰 도시, 돈이 모여드는 장소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도시에서 서로 동등한 지위를 제안한 것이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남부 쪽이 잃을 수밖에 없기에 페르다에게 유리한 제안이었다.
"제안... 받아들였습니까?"
스테판이 떨리는 목청을 애써 가다듬으며 물었다.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자네와 굳이 관계를 유지할 필요도 없어지겠지."
스테판의 가슴에 차오르는 것은 배신감이었다.
당연하다.
페르다의 말에 홀려서 공격적인 투자를 했었던 스테판이었다.
그가 울컥하며 따져 들었다.
"계약을 하지 않았습니까? 마도공학 산물들은 제가 독점할 권한이 있고, 그것에 서명까지 하셨습니다. 이걸 재판에 가져간다면 섭정님께서 불리하실 겁니다."
"그래, 이겨 봐야 고작 배상금 몇 푼 토해 내는 것이 고작이겠지. 아니, 그 몇 푼도 자네가 회수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 않겠나?"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건 자네도 마찬가지니까."
스테판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쳤다.
"제가 언제 배신을 했단 말입니까? 방금 설명한 부분에서 말입니까?"
스테판은 자신이 했던 설명들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해 먹으려고 했던 조항은 없다.
아니, 있긴 해도 그렇게 크지 않는 부분이었다.
상인과 영주 사이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공정한 관계, 그중에서도 영주에게 유리한 쪽으로 제안을 했다.
"내가 자네를 끌어들일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나?"
페르다가 말했다.
"자네가 협력하는 만큼, 나 또한 협력하겠다고 했지. 그리고 상단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겠다 했다."
"그렇습니다."
스테판도 그 말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약속했었지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뿐입니다. 파스칼 회사는 이제 필요가 없습니다."
"파스칼 무역회사의 가치가 얼마나 있나?"
"제국령에 있는 모든 물품의 절반은 이곳을 거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래, 그런 회사지. 제국에서 영향력을 내는 그런 회사."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싸늘해졌다.
"그런 회사를 자네 입으로 포기하겠다는 말을 했고."
"그런 회사라면 얼마든지 만들면 됩니다. 마도공학 쪽에서는 저희가 선구자이고, 연구만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스테판."
페르다는 스테판의 말을 끊었다.
"예, 섭정님."
페르다는 과일 바구니에 얹어진 포도알 세 개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여기에 있는 포도알이 몇 개인가?"
"세 개입니다."
"그래, 세 개. 각각 나, 버넬 군, 그리고 자네일세."
페르다는 자신이라고 칭한 포도알을 가리켰다.
"나는 자네에게 인맥이 되어 주기로 했지. 그리고 지금까지 그 인맥을 구축하려고 일하는 중일세."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버넬이라 칭한 포도알.
"그리고 버넬은 연구와 개발로 자네에게 신선한 물건들을 만들 수 있도록 아이디어 창고가 되어 주고 있어. 그리고 오늘 성공적으로 끝낸 그는 내일도 열심히 일을 할 걸세."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자네."
스테판의 포도알에 손가락을 얹어 굴렸다.
"자네는 돈을 가지고, 물량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이 체계에서 우리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거기서 굴려야 할 필요가 있다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네는 그 대륙 최고의 회사를 포기하려고 하고 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페르다의 손가락이 스테판의 포도알을 짓눌렀다.
"자네는 흔하고 흔한 상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이야."
연한 포도알은 손가락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마저 포기하고 타협해 버리는 것은 이 공왕령에 필요한 상인이 아니란 말일세."
스테판은 그 포도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페르다의 손가락은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그 포도알처럼 짓눌려, 벌레처럼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려운 걸 요구하지 않아. 계약을 이행하게. 파스칼 무역회사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스테판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또다.
아버지의 저택에서 느꼈던 이 압박감.
이제는 페르다가 주고 있었다.
"꼭... 그렇게 피를 봐야만 하는 일입니까?"
스테판이 파스칼의 주인이 되려면, 구도 속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용병 사업을 하고 있는 형, 머칫.
다른 대형 상회의 정략결혼으로 몸집 부풀리기를 시도하는 동생, 틸다.
그리고 아버지인 허먼 파스칼.
주인이 되려면 그들 모두를 설득하거나 꺾어야만 한다.
스테판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족끼리 싸움이라니.
서로 칼을 겨누고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바닥에서 나마저도 칼을 뽑아야 한단 말인가?
"싸우든 말든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
페르다는 냉철하게 대꾸했다.
"단지 자네가 발드로바 공왕령에서 필요한 인재라는 걸 증명해 줬으면 좋겠군."
* * *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사망자가 없는 전시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할림에서 경매가 이어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물건은 없었다.
그나마, 검 한 자루가 괜찮아 보여서 말콤을 격려해 줄 겸, 하나 사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받자마자 질질 울려고 해서 도로 뺏어 버릴까 했지만.'
제국에서 기사 시험까지 치러서 기사 자리에 올랐음에도, 기사라기엔 너무 모자란 청년이었다.
'뭐 그래서 필요한 거기도 하지만.'
그의 처분은 샘플로서 가치가 떨어질 때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어찌 됐든 할림에서의 일은 일단락되었다.
경매를 마지막으로 학자들은 전시회를 마무리하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만족한 자들도 있었고, 누구는 쪽박을 차서 한숨을 토하기도 했다.
버넬은 그런 상황 속에서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는 마차 안에서 일분일초도 아깝다는 듯이 마도공학 라이플의 도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실전에 적용해 보면서 여러 영감이 떠올랐는지, 전시회 준비만큼이나 빡세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할림을 떠날 준비를 하던 그 때에 페르다는 햇빛에 반사되는 눈부심을 느꼈다.
에스콜레이아의 총장, 버나드 웨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시회는 잘 보내셨습니까?"
"예, 사건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버넬 군을 찾고 있는데,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페르다는 슬쩍 마차 쪽으로 눈짓했다.
"괜찮으시다면 버넬 군과 이야기를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페르다는 버나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를 건드렸던 것에 죄책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사과하려는 생각인가?'
분노 상태로 몰고 가서 아주 열정적인 상태인데, 굳이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페르다로서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원동력이 있지 않던가?'
성공적인 발표회가 그에게 새로운 원동력이었다.
버나드 총장을 향한 분노는 없어도 된다고 판단했고 페르다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버나드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 그를 불렀다.
"버넬 군."
버넬은 그를 흘긋 쳐다보다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이야기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네에게 해 줄 말이 있다네. 나는—."
"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총장님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말이에요."
버나드의 입이 막혔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저도 학자이지 않습니까? 한때는 총장님 밑에서 수업을 들었고요. 총장님이 천재에게는 엄격하다는 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제게도 그랬을 테지요."
"...."
버넬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과거를 떠올리지만, 괴로움은 없었다.
"그때는... 정말 화가 많이 났습니다. 실망도 했고, 배신감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총장님의 말이 맞았으니까요."
버넬의 목소리와 눈빛에서는 먼 옛날에 느꼈던 경이가 묻어 나왔다.
"총장님의 말대로 전 시야가 좁은 인간이었습니다. 1%에만 집중해서 10%를 못 보았죠. 총장님께서 이번 기회를 주셨기에 시야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
"그러니까... 다음에는 총장님이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획기적인 물건을 가져오겠습니다."
버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리의 빛이."
그 말을 들은 버나드 총장이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에스콜레이아 아카데미 생도들이라면 알고 있는 문구였다.
버나드 총장도 따라 미소를 지으며 후창했다.
"널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 사이에 오묘한 감정은 여전히 남았으나, 증오라는 깊은 골은 더 이상 없었다.
버나드는 버넬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네의 이상이 천지를 뒤집어 버리게."
"그 끝에는 제가 차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버나드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버넬은 그 사과를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이상을 추구하며 진리로 나아가는 자들.
진리라는 하나의 신념으로 뭉쳐져 있다는 것을 확인한 채 그들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출발하겠습니다!"
선두에 선 말콤이 뿔피리를 불었고, 마차가 움직였다.
성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열흘.
이제 다시 가는 데, 열흘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따분한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페르다의 마음속에는 발드로바로 부풀어 올랐다.
'나의 심장이여,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그 질문을 던진 채, 마차는 하염없이 굴러갔다.
* * *
드래곤의 일상은 그들이 지닌 둥지, 그러니까 레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자신의 특징을 살려서 건축물을 짓는다.
그런 면에서 발드로바는 다른 드래곤들과 달랐다.
발드로바의 레어는 피신처이자, 지하 감옥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원래는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동굴.
그러나 그녀가 자리를 잡은 이후로는 건조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 똬리를 틀고 누워 있는 발드로바는 생각했다.
'심심하구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불멸자라고 하지만, 하루하루 흐르는 시간을 느끼는 순간 무료함이 온몸을 감싼다.
이런 어두컴컴한 곳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었던 것도 루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할 것도 없었지.'
언제 혈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그녀를 심심할 틈을 만들지 않았다.
이렇게 심심함을 느끼는 것도 혈기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였다.
조금 아프겠다 싶으면 페르다가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다.
-발드로바 공왕님을 뵙습니다.
-아, 바 반가워요!
-시작하겠습니다.
-네, 네!
'아니, 이건 대화도 아니었구나....'
대화라 하기엔 일방적이었다.
전부 일방적으로 페르다만 말했고, 발드로바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서 마물들을 죽이는 게 일과다.
그걸 대화의 주제로 삼으면 어떻게 될까?
-저는 오늘 나가서 마물을 죽였어요.
-그렇습니까?
-하나는 발톱으로도 찢어도 안 죽어서 내장에다가 크게 불을 질러 버렸어요.
-아....
-안속에 숨어 있던 마물 기생충들도 있던데 꼬물꼬물 잘 타들어 가더라고요.
-예....
'틀림없이 질려 버릴 테야.'
발드로바의 눈에 페르다의 표정이 절로 그려졌다.
마치 이런 것이 내 약혼자? 라는 듯한 눈을 할 거란 생각이 발드로바를 괴롭게 만들었다.
'변하고자 다짐했건만....'
반갑다는 말과 잘 가라는 말, 그리고 감탄사가 고작인 자신에게 몇 번이고 자책했다.
혈기로는 괴로운 일은 적어졌는데,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괴로움이 자리를 잡는다.
'페르다 씨를 보내 달라고 해 볼까....'
이번에는 뭔가 주제를 정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생각은 8번이나 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할 대화가 없으니까.'
심지도 않은 바닥에 새싹이 날 일이 없듯이 애초에 이야기할 주제가 없으니, 대화가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페르다 씨가 할림...이란 곳에 갔다고 했지.'
뭐든 간에 좋지 않은 장소임을 짐작했다.
그 할림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 루리의 표정이 좋지 않았고, 한숨을 내쉬었으니까.
대충 전쟁터 같은 곳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요즘은 일이 더 많아지기도 했고.'
이오르가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오르가....'
발드로바는 그 이름이 껄끄러웠다.
블루 드래곤, 이오르가.
이오르가는 발드로바를 유독 싫어했다.
무슨 말만 했다 하면 인상을 구기고 지적했으며, 의기를 꺾으려 들었다.
발드로바는 그녀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너무 어려웠다.
'이오르가는... 잘 지내고 있겠지.'
마지막으로 본 지도 오래되어서 얼굴은 희미했으나, 그녀의 형태는 기억했다.
머리도 좋고, 예쁘고, 많은 사람들에게도 존경받는 수호룡이다.
어떤 마을을 가도 두려움보단 선망을 받을 여자였다.
-마을....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다음 생각.
'그러고 보니... 인간의 마을도 본 지 참 오래됐구나.'
흘러간 종착지는 호기심.
인간의 마을을 구경해 본 것이 몇백 년 만일까?
요즘은 어떻게 생겼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을까? 아니면 많이 달라졌을까?
그 호기심이 멋대로 발드로바의 몸을 건드렸다.
그녀의 몸이 점점 줄어들어 이윽고 한 명의 여인이 되었다.
"가 보고 싶다...."
괜스레 치마를 만지작만지작하며 중얼거렸다.
나가야만 한다면, 반드시 인간의 모습을 해야만 한다.
발드로바는 드래곤의 모습으로 남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용의 모습은... 사람들이 무서워할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모습으로도 나갈 수 없었다.
'인간의 모습은 내가 무섭고....'
어느 한쪽도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
발드로바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벽에 놓여 있는 갑옷.
'저 갑옷이라면 아마도....'
괜찮지 않을까?
페르다를 만날 때도 저 갑옷을 입었으니, 이제는 익숙해졌다.
눈높이도 살짝 높아서 거부감도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거 좀 무섭지 않나...."
크기도 크고 근육질 형태였으니 위압적이었다.
무엇보다 발드로바 자기 모습을 조각한 갑옷이었으니, 머리는 드래곤인 자기 모습과 같았다.
모두를 벌벌 떨게 하는 위협적인 자신의 모습 말이다.
"위협적이지 않은 형태로는... 안 되는 건가...."
발드로바가 한탄하듯이 내뱉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듯이 갑옷이 꿈틀거렸다.
"어라?"
스르르륵—.
위협적인 드래곤 헤드의 형태가 뭉개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드래곤 헤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드래곤의 위엄을 위해서 만들어졌던 모든 요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뭐가 잘못되고 있는 것일까, 허둥지둥거리고 있는 사이, 갑옷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아...!"
발드로바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최종 종착지는 그녀의 눈에 익숙한 것이었다.
"평범하다."
화려하지도 않고, 적당히 때가 탄 하프 플레이트 갑옷.
평범한 사람들이 봐도 평범한 기사라고 여길 만큼 평범한 갑옷이다.
"평범해...."
발드로바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평범함은 금은보화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한 물건.
그녀는 홀린 듯이 그곳에 몸을 집어넣었다.
알을 깨고 나갈 시간이었다.
82화. 외출
가을의 높은 하늘과 형형색색 물들어 있는 단풍.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 낙엽이 되어 떨어지면서 바닥을 덮을 이불이 되어 가고 있었다.
늦가을이다.
'아름답다.'
수천 번 내려만 보던 풍경을 올려다보는 것은 신선했다.
그래서일까, 발드로바는 그 이상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속의 일부가 되어 가는 이 감각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외출....'
단순히 마물을 때려잡으려고 한 출정이 아닌, 기분을 내기 위해 움직이는 외출.
별것도 아닌 일인데,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실수해 버리는 건 아닐까?
실수하면 안 될 텐데....
그렇게 되뇌며 크게 심호흡하다가 그녀는 마침내 발걸음을 움직였다.
'페르다 씨가 만든 마을은 어떻게 생겼을까?'
몇백 년을 걸친 칩거 끝에 발드로바는 처음으로 마을이라는 것을 접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발드로바 성 아래에 지어지는 마을이었다.
'이게... 마을?'
발드로바의 마지막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석재와 흙,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집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천막들뿐이다.
천막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일을 하는 중이다.
'그사이에 엄청나게 퇴화했구나.'
발드로바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루리에게 들을 때만 했어도 분명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고 했는데....
마음을 쓰지 말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어이, 거기 형씨는 누구요?"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발드로바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친 바닥에 꽤나 구른 듯한 30대 남성이었다.
발드로바는 그 모습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단순히 인상이 사나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인간이 말을 걸었어.'
어디까지나 대인기피증에서 나오는 증상이었다.
페르다 이외의 인간이 서슴없이 다가와서 누구냐고 물었다.
발드로바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도망쳐야 하나?
"뭐야, 왜 말이 없수? 혹시 침묵의 맹세라도 한 형씨요?"
침묵의 맹세?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발드로바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납득했다.
"아아, 그렇구만. 알테에게 맹세를 한 기사로구만 그래. 발드로바 성에 기사 작위라도 받으려고 떠도는 사람이오?"
도리도리.
"그래? 그러면 기사 집안에서 모험가로 전향한 양반인 거 같은데... 아무래도 너무 빨리 온 것 같소이다. 지금 한창 마을 건설 공사를 하던 중이거든. 집부터 빨리 지어야 하는데 이거 원...."
혀를 끌끌 차는 사내.
발드로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으로 천막을 가리켰다.
집은 저기 있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엉?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마을이 다 지어질 때까지 잠시 머무는 곳이지 저건 집이 아니오!"
아, 저건 집이 아니었구나.
발드로바는 머쓱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양반이구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저건 임시 막사고 지금 필요한 건 공용 막사요. 겨울바람을 제대로 막아 주고 따뜻한 불에 손을 쬘 수 있는, 그런 집. 빨리 지어야 겨울 오기 전에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텐데 말이오."
"...."
"제국에 공고를 내려서 많이 데려오려고 한다긴 하는데, 개뿔 누가 지원했다는 소식이 없소. 왜 그런 줄 아시오?"
도리도리.
"최전방에 끌려간다고 싫다는 사람이 많은 거 아니겠소? 나 같아도 그러긴 했을 거야. 장벽 안의 세상도 험난한데 장벽 밖의 세계는 대체 어떻겠수? 벌벌 떨다가 제국 안에서 죽고 말지 하는 게 요즘 젊은것들이오. 패기가 없어 패기가."
"...."
"그래서 말인데, 형씨. 혹시 힘 좀 쓰시오?"
힘....
가진 것이라고는 힘밖에 없는 여자.
그래서 불과 힘의 위상이라 불리는 드래곤이다.
발드로바는 자신 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형씨 같은 사람들이 몇 명이 있거든? 내가 이번 공사에서 작업반장이란 말이지. 힘 좀 쓰면 우리 좀 도와주지 않겠소? 갈 곳이 있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이 극동부에서 일하고 싶으면 최대한 빨리 지어야 하지 않겠소?"
사내는 발드로바에게 노동 의뢰를 제안했다.
행색이 기사에 모험가였지만, 인력이 아쉬운 만큼 주저하지 않았다.
발드로바는 그 제의를 듣고 다시 주변을 쓱 보았다.
천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누비옷을 입고 있지만,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몸을 움츠린다.
'많이 추운 모양이구나.'
저런 천막 속에서 자면 더 춥겠지.
'그렇다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발드로바는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모험가 양반들이란... 아니, 하겠다고?"
끄덕끄덕.
"허."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별종이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실제로 작업반장이 그런 제안을 다른 모험가들에게 몇 번이나 했었지만,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가 이런 막노동을 하고 싶겠는가?
"알겠수다. 내 행정관에게 말해 두지. 내 이름은 핸슨이올시다. 반장이라고 부르면 되는데... 아, 침묵의 맹세를 했지. 작업이 필요하면 나중에 표찰을 줄 테니까 그걸로 날 대신 불러내도록 하시오."
끄덕끄덕.
"그러면 노동하기 전에... 그 갑옷은 벗는 게 어떻겠소?"
"?"
갑옷? 이거?
발드로바가 자기 투구를 가리켰다.
"그래, 그 갑옷."
달그락!
발드로바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거 입고 어떻게 일을 하겠소?"
도리도리!
"같은 남자들끼리 체면 차리는 건 아닐 거고, 뭐 얼굴 보여 주면 안 되기라도 한 거요?"
끄덕끄덕!
"허, 얼굴도 못 보여, 침묵의 맹세도 했어. 미스터리한 양반이구만."
핸슨이 몇 번이고 벗으라 하다가 포기했다.
옷차림이 별거 있겠는가?
그냥 힘만 잘 쓰면 장땡이지.
핸슨은 곧바로 작업에 투입되었다.
그는 발드로바와 함께 통나무 자재가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여기 보이는 통나무들 있지 않소? 그걸 전부 저쪽에서 톱질하는 양반 앞에다가 줘야 해. 간단하지?"
끄덕끄덕.
"자, 그러면 저쪽 끝으로 가 보쇼. 나랑 같이 들어야 하니깐 하나씩 수레에다가 싣는 겁니다. 자, 하나둘 으...쌰?"
이상하다.
힘을 주고 일어섰는데, 이상하게 저항이 없다.
이 목재가 깃털을 뭉쳐서 만든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상황.
핸슨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내려보았다.
통나무가 둥둥 떠 있었다.
반대편에 서 있는 기사가 혼자서 들어 올린 것이다.
그것도 한 손으로.
아주 가볍다는 듯이.
그 투구가 작업반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거 어디에 놔둬?
"어, 저기에 놔두면 되...는데요."
형씨라는 말이 쏙 들어가고 존칭이 튀어나왔다.
발드로바는 그대로 움직여서 통나무를 옮기기 시작했다.
통나무 끄트머리를 잡은 채로 그대로 움직였다.
힘깨나 쓴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기둥 끄트머리를 잡고는 버티지 못한다.
"혹시 안 무거우신가요?"
끄덕끄덕.
발드로바가 아무렇지 않다는 모습을 보이자, 핸슨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두 개도 드실 수 있습니까?"
발드로바는 고개를 끄덕였고, 2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똑같이 한 손으로 말이다.
"혹시 몇 개까지 더 드실 수 있는지...?"
"?"
발드로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녀도 모른다.
뭐 지금부터 알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식으로 한 개씩 번쩍 들어 올리며 총 통나무 10개를 쌓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이미 수레 두 대에 실을 분량을 혼자서 들 수 있었다.
"...."
핸슨이 멍청하게 입을 벌리며 그 광경을 보았다.
그 차력쇼에 놀란 것은 비단 핸슨만이 아니었다.
"뭐야 저거?"
"저걸 혼자서 다 들고 있어?"
자연스럽게 주변에 공사하던 사람들의 이목이 끌었다.
기사 갑옷 차림으로 통나무를 열 개씩이나 들고 있으니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게 아닌가?'
발드로바는 주목받는 시선에 덜컥 겁이 나 그만 통나무를 내려놓고 말았다.
발드로바의 행동에 핸슨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뭘 봐, 이것들아! 어서 너네들 일 안 해!?"
으르렁거리면서 위협한 끝에 각자 자리로 돌아가는 인부들.
핸슨은 발드로바에게 다가가 그녀를 달랬다.
"아이고, 기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사님을 볼거리처럼 여기는 것들은 이 핸슨이 직접 머리를 찍어서 고쳐 놓겠습니다요!"
핸슨이 손날 치기를 하면서 입으로 슈슉거렸다.
발드로바는 누구보다 절실한 A급 인재였다.
그렇게 어르고 달랜 끝에 발드로바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만약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더라고 그녀는 다시 할 생각이었다.
'빨리 집을 지어야 하니까.'
북부의 한기가 흘러 내려오기 전에 따뜻한 집에서 잘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잘 때만큼은 적어도 걱정 없이 잘 수 있도록.
그것이 생각이 짧은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구만. 수고하셨습니다요, 기사님!"
발드로바는 작업반장을 따라 해를 올려다보았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지 않나, 하는 마음에 작업하려 움직이려 했지만, 핸슨이 그를 만류했다.
"아아, 그만하셔도 됩니다. 지금 해가 지고 있지 않습니까? 해가 지면 자고 내일을 기약해야지. 모두 지치지 않았습니까?"
아아, 그렇구나.
발드로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슨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패를 반납하고 오늘 일당을 챙기러 오는 것이었다.
핸슨은 발드로바의 몫까지 제출하여 돈을 받아 내었다.
핸슨은 돈주머니를 받아 오면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것들 4명이서 일주일 동안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해냈는데, 15인분은 못 줄망정 10인분만 주겠답니다. 아주 더러운 것들 아닙니까?"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위에 있는 것들이 문제입니다. 그 페르다라는 그 섭정이라는 자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게 틀림없습니다! 나이도 어린 것이 쫌생이처럼 구는 게 아닌가... 흡!"
핸슨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저 투구의 그림자 너머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눈이 느껴졌다.
"아아,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님이신데 귀족분을 욕보이는 건 좀 그랬지요? 이해해 주십시오.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중년이 그냥 푸념하는 거지요."
"...."
"마음 같아선 제 사비라도 전부 털어 주고 싶습니다만, 일단 이걸로 봐주십시오. 대신 나중에 모험가님께 크게 도움이 되실 수 있도록 연줄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어떻겠습니까?"
모험가 업에 조금만 귀가 밝았더라면, 그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발드로바는 지금 이 남자가 하는 말이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허허! 역시 배포가 다르시구만요! 자, 여기 있습니다."
핸슨은 묵직한 주머니를 발드로바에게 내밀었다.
주머니 속에서 짤랑이는 소리가 귀에 익숙하다.
'금고에 쌓아 둔 금화랑 비슷한 소리야.'
쌓아 놓은 것을 발톱으로 톡 건드렸을 때 났던 소리랑 비슷했다.
발드로바는 그 주머니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기사님, 이곳은 처음인데 숙소는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제가 하나 평상을 마련해 드릴 수 있을 텐데...."
인간다운 체험을 하는 건 즐겁지만, 여기에 묵을 수는 없었다.
발드로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심코 외로운 산에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서 외로운 산의 반대편 쪽을 가리켰다.
"여기에 영영 떠나려는 겁니까?"
핸슨은 난감하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발드로바는 고개를 젓자, 그의 안색이 돌아왔다.
"아, 그냥 다른 곳에서 묵을 예정인가 보구만요. 알겠습니다. 공사를 도와주려거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기사님 같은 분이 있으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니 말입니다!"
발드로바는 무어라 대답을 못 하니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얼른 이 자리를 떠나자.
그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사님?"
"?"
"집으로 간다면서? 어디 가십니까?"
발드로바의 발이 외로운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차.
나 저쪽이 아니었지.
발드로바는 머쓱하다는 듯이 발길을 돌려 자신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런 모습에 핸슨은 폭소를 터트렸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몬스터 만나지 마시고요!"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마을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마을이 육안으로 안 보일쯤 되어서 발드로바는 크게 한 바퀴를 돌아 레어로 향했다.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3초로 순식간이었다.
커다란 철문을 밀고 들어와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발드로바는 그대로 누웠다.
그녀는 갑옷을 입은 채로 새까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뭘까?'
신기한 하루다.
그야말로 하루가 쏜살같이 흘러갔다.
힘들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움직이기만 반복했고, 사람들은 감탄했다.
'나... 도움 된 건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는 게 벙벙한 느낌.
발드로바는 가슴에 얹어 놓은 보따리를 풀어 보았다.
인부 한 명당 동화 10개.
열 명분으로 총 100개.
차곡차곡 쌓아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인간이 내게 준 돈.
'내게 고맙다고 준 돈.'
그들이 고마워했다.
'내일 또 보자고 했어.'
발드로바의 머릿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아닌 환하게 웃는 모습.
'인간들이 나를 원하고 있어.'
벅차오르는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이 기쁨을 함께 누리고만 싶었다.
"루리...."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잘 알고 있는 여자아이.
오랫동안 자신을 봉사해 온 마음씨 고운 아이.
"...에겐 말하면 안 돼."
입을 반사적으로 가리는 발드로바.
충직하지만 화가 나면 누구보다 무서운 아이다.
틀림없이 용의 품격이니 뭐니 하면서 잔소리할 게 분명했다.
서로 마음고생만 시키는 것만 늘릴 것이니 비밀로 한다.
루리 말고 다르게 공유해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럼... 페르다 씨?"
자상한 남자.
항상 그와 이야기할 주제가 필요했다.
이건 주제 중에서도 좋은 주제였다.
마음이 간지럽다.
괜스레 헤실 웃게 되고, 몸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 마음을 페르다가 긁어 줬으면 했다.
'역시 아니야.'
발드로바는 동화 주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페르다에게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마을은 페르다의 의지로 세워지는 마을.
차곡차곡 모아서 페르다가 깜짝 놀랄 만한 선물로 주고 싶었다.
훗날, 이 마을이 번영하게 된다면, 이 마을의 대들보를 세운 것은 자신이라고.
내 손으로 지어낸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파괴만이 아니라고.
그가 짓는 표정을 보고 싶다.
그가 어떤 칭찬을 할지 듣고 싶다.
그러니 꼭꼭 숨겨 보기로 했다.
그래도 이 마음을 계속해서 가슴에 두기만은 아까워 무심코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페르다 씨...."
발드로바는 그 이름을 애틋하게 내뱉었다.
"나... 페르다 씨에게 도움이 되었어요."
그것이 발드로바가 내디딘 한 걸음.
작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83화. 황금의 피
귀족의 다과회.
어떤 다과회든 결코 초라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다과회 당일에는 최대한 화려하게 장식하며,
그것이 곧 주최자의 재력이며, 역사이며, 역량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제국의 수도에서 이루어지는 다과회는 차원이 다른 규모와 스케일을 자랑한다.
차기 영주, 기사, 가주가 될 젊은 피들이 한곳에 모이는 만큼, 활기 또한 남다른 장소였다.
가문의 문양을 가슴에 달고 깔끔한 정복을 입은 영식, 공자들과 한 송이의 꽃을 뒤집어 놓은 듯한 형형색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 공녀들.
모두가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치장해 왔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욕망이 있음에도 그들을 꽃이 아닌 곁가지에 돋은 풀잎처럼 만드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제국에 있었다.
올리비아 아르켄.
금발에 푸른 눈,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 눈을 뜨는 것조차도 아름답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경국지색의 미인.
황제의 딸이며,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고금을 통틀어서 차지하고 싶은 신붓감이었다.
"저기, 올리비아 님이셔."
"이번 다과회에 참석하셨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어쩜 저렇게 아름다우실까...."
남자든 여자든 할 것 없이 감탄이 나오는 미모.
모든 영식들은 방황하는 척 곁눈질로 쳐다보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들의 신분으로는 감히 말도 걸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용기 없이는 미인을 차지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자들도 간혹 있었다.
"제국의 황녀님을 뵙습니다. 황금 여명의 수호자이자, 변방의 칼날으로서 제 소개를 해 드리고 싶은데—."
"죄송합니다만."
그의 말을 끊은 이는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영애님들과 모임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라서요. 골든 로즈 멤버만 이 자리 대화에 낄 수 있답니다."
"아, 예...."
"그럼."
사내는 결국 자신의 이름조차 말하지 못하고 쪽만 팔린 채로 돌아갔다.
앉아 있는 여인들은 패배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키득 웃었다.
"주제도 모르는 날벌레 같은 것들이 또 오는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머셀 공작님의 자제분조차 거부하셨는데, 고작 변경백 따위가 건방지게 아르켄 황녀님에게 말을 걸려 하다니."
후훗 웃으면서 씹어 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찻잔을 든 채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도 이 변방을 지키는 분이라면 적어도 인사라도 해 드렸어야 할 텐데요?"
"어머, 그런 건 필요도 없답니다!"
"맞아요! 아랫것들에게 제대로 하지 않으면 기어오른답니다!"
"어머, 그런가요?"
"예! 당연하지요!"
"아아, 역시 아르켄 황녀님은 어쩜 이리 순수한지...."
"정말 죽을 때까지 지켜 드리고 싶어요!"
껌뻑 죽어 가는 영애들의 몸짓.
그런 모습들을 순수한 척 지켜보는 올리비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지켜 주고 싶기는 개뿔.'
올리비아는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 알고 있다.
그걸 이용할 줄 알았으며, 동시에 보호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이 호위병들은 실제로 올리비아를 동경하며, 동시에 질투하는 자들이었다.
'남자들이 나만 보니까.'
제아무리 천금을 준 보석을 껴도, 저명한 디자이너가 해 놓은 옷을 입어도 압도적인 존재감 하나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명품들 입장에선 그녀의 존재감은 거슬릴 수밖에 없다.
도도하게 홀로 빛나면 시기와 질투를 사는 법.
올리비아는 그들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을 질투하는 자들로 자신의 주위를 채우기로 선택했다.
바로 '골든 로즈'라는 정예 사교 클럽의 형태로 말이다.
이것은 완벽한 공생의 형태였다.
'나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나를 지킬 수 있고, 호위하는 애들은 자기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접근할 수 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꽃을 지키고, 호위병들은 꽃을 향해 날아드는 신랑감을 선별하고 채 갈 수 있다.
연애가 시작되면 골든 로즈는 그만둬야 하지만, 그 자리는 계속해서 채워질 것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순환될수록 충성심이 높아지는 그런 구조의 사교니까.
"역시 황금의 피가 흐르는 혈통답게 모든 면에서 완벽하세요!"
황금의 피.
아르켄의 핏줄에는 제왕으로서 필요한 자격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생긴 말이었다.
올리비아는 그 단어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똑같은 황금의 피가 흐르는데, 정계에 손을 뻗는 대신 이런 꽃밭에 구르고 있지 않던가?
"네, 뭐, 그렇죠."
올리비아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떨떠름하게 대답해 버린 만큼, 영애들의 눈빛은 살벌해졌다.
"어, 죄,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가 감히 심기를 건드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
"어머, 혼스 가의 영애님께서 그럴 생각은 없으셨다 해도 저흰 안 좋게 들렸어요."
"맞아요. 어쩜 이런 자리에서 그런 주제를 꺼내시는 건가요?"
맞장구를 치면서 몰아가는 영애들.
혼스 가의 영애가 쩔쩔매기 시작했다.
약한 틈을 물고 늘어져서 낙오시키려는 속셈이다.
'하여간 뱀 같은 년들.'
올리비아는 그들을 혐오함과 동시에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어머, 왜들 그러시나요?"
"제가 아르켄 황녀님에게 무례를 끼친 것만 같아...."
"그럴 리가 있나요? 조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집중하지도 못하고 있다니...."
올리비아가 푸른 눈을 촉촉하게 적신다.
친위대들은 화들짝 놀라며 수습하려 안간힘을 썼다.
"아뇨. 그럴 리가요!"
"사색하는 올리비아 님 멋있었어요.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답니다."
호호 웃으면서 넘기는 여자들.
속으로는 착한 척이나 하는 년이라 씹을 것이 틀림없다.
씹을 테면 씹으라지.
끝까지 쓴 가면이야말로 진짜 얼굴이 되는 법이다.
누군가가 무거웠던 분위기는 다른 주제로 환기했다.
"그것보다 여러분들은 들으셨나요?"
"뭔가요?"
"이번 페르다 섭정님의 소식 말이에요."
그 말에 올리비아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분께서 이번 할림에서 대활약을 했다는 모양이에요."
"어머, 할림이라면... 그 불경한 땅 말인가요?"
"거기서는 엄청 남사스러운 복장을 한 여인들이 남자들을 홀린다고...."
"호호, 무슨 상상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랍니다! 에스콜레이아의 전시회가 있었대요."
"그 전시회만 있었을까요? 할림에 간 남자들은 죄다 혼이 쏙 빠진다고 들었는데...."
아낙네들의 이야기답게 삼천포로 빠지려 들었다.
"거기서."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이런 다과회는 많이 가졌어도, 남자 이야기에서 입을 연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예? 아, 그러니까 마물 균열이 생기면서 마물들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7마리의 늑대 마물이라고 합니다."
"어머, 7마리씩이나?"
"거기서 활약을 하셨다는데 무려 사망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가요?"
"오오...."
영애들은 그 말을 듣고 감탄사를 떨떠름하게 흘리며 눈을 끔뻑였다.
관심도 없는 이야기였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올리비아는 달랐다.
'기습이 일어난 상황 속에서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정말 기적에 가까운데.'
그녀는 전술과 전략에도 관심이 많았었다.
언젠간 하나의 군대를 운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여러 사료들을 살피면서 용병술에 감을 익혔으며, 상대해야 할 적들도 꾸준히 공부했다.
페르다가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 그녀는 알고 있다.
'흑마법을 쓴 걸까?'
소실된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제국 방문 당시, 수사관과의 격전 끝에 봉인이 느슨해졌고, 그 틈을 타서 사라졌다고 보고되었다.
그것도 올리비아가 힘을 써서 그렇게 보고 된 것일 뿐, 실상은 모른다.
'의문은 의문으로 둬야 하는 법.'
그것이 대의를 위해 올리비아가 하는 일이었다.
"듣자 하니 흑마법을 쓴다는 말이 돌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누구인가 보니, 말실수를 했던 혼스 가의 영애였다.
가십이 시작되자, 모두가 흥미롭다는 듯이 귀를 쫑긋 세웠다.
"흑마법 말인가요?"
"네. 그렇게 갑작스러운 순간인데, 페르다 섭정님께서 혼자 반응해 균열에서 나오던 놈의 머리를 관통했다고 해요."
"그런 반응 속도 때문에 흑마법을 부린다는 건 좀 억측이지 않나요?"
"상부에서 이야기하기로는 이 마물 균열을 일으킨 게 바로 페르다 섭정 본인이라는 것이죠. 할림에서 잘 보이려고 수작을 부렸다고 말이죠."
휩쓸리기 쉬운 영애들이 그 말을 들으며,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들을 지켜보는 올리비아는 속으로 질려했다.
"황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혼스 가의 영애가 바통을 넘긴다.
올리비아는 순진무구한 눈을 끔뻑였다.
"영애님."
"예, 황녀님."
"아무리 그래도 큰 부상 없이 백성들을 구해 주신 분을 흑마법사라고 몰아가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예? 어, 그게...."
혼스 가의 영애가 다시 쩔쩔매기 시작했다.
가십을 뜯으려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했다.
"그러게요. 참 눈치도 없으시네요."
"영애라는 분이 영웅께 악담이나 해 대고... 이거 제대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 부분이겠어요?"
혼스 가의 영애를 처음에 몰아갔을 때보다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
수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 골든 로즈에서 사실상 추방이며, 평생 다과회에서 겉도는 신세가 될 것이다.
'악의는 없어.'
이건 그녀가 판 무덤이었으니, 달게 받아야 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섭정님은 모든 걸 순조롭게 진행하시네.'
마의 땅 정복 선언 이후로, 이오르가가 지지했으며, 할림에서 활약까지 했다.
그 영웅의 행보를 당장에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는 제2의 수도를 반드시 만들어 낼 것이다.
'나도 뭔가를 해야만 할 텐데....'
그에 비해 올리비아는 진전이 없었다.
그녀가 제국에 세력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녀가 되는 것.
그러나 한다는 것이라곤 몸매를 가꾸고, 영애들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야 하며, 관심에도 없는 허례허식에 지식을 들여야 한다.
홍차의 맛은 어떻다느니, 과자는 어떻게 쳐서 만들었다느니.
황녀라는 신분은 이렇게나 답답한 것이었다.
'성녀가 되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지.'
수도승이 되어 평생을 헌신해도 될 수 없는 것이 성자와 성녀인데, 이런 영휘로운 삶을 누리면서 어떻게 가능할까?
'그래도 해야만 해.'
성녀가 되기만 한다면, 그 빌어먹을 황금의 피를 나 또한 가질 수 있게 될 테니까.
* * *
페르다가 돌아와서 마을 건설 진행 상황을 가장 먼저 보았다.
그의 앞에 보인 풍경은 이사벨라의 보고를 통해서 그렸던 미래와 달랐다.
"많이 진행되었군."
비운 시간은 3주 정도 되었는데, 무언가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됐고, 건물 몇 채가 올라갔다.
임시 거처로 쓰이던 천막을 모두 철거할 정도로 넉넉하게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예상했던 범위를 벗어났군요."
"예정보다 얼마나 앞당겨졌나?"
"두 달입니다."
"단순히 벗어났다는 수준이 아니로군."
푸른 머리의 드래곤 스폰, 이사벨라 행정관이 안경을 치켜세웠다.
지식의 위상들에게 가장 자존심이 긁히는 발언이었지만, 이사벨라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기존 인부들의 속도는 상정 내였습니다. 물론 인력 이탈과 공급 면에서도 고려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건 마른하늘에 떨어지는 날벼락과 같은 변수였습니다."
이사벨라가 단순히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페르다도 그걸 알기에 그녀에게 물었다.
"그 변수가 무엇인가?"
"갑옷 기사라고 하더군요."
"갑옷 기사?"
이사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떠돌이 기사인 듯한데, 침묵의 맹세를 했는지 근처 인부들은 갑옷 기사라고 부릅니다."
"흠...."
페르다는 적혀 있는 인적 사항과 지급 명세서를 보았다.
인적 사항은 겉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최대한 뽑아낸 수준이었다.
페르다는 그것을 보고 알아내었다.
"침묵의 맹세가 아니군."
"그렇습니까?"
"보통 침묵의 맹세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이름과 소속이 적힌 패를 받지. 의사소통하지 않아도, 자신의 이름 정도는 밝힌단 의미로 말일세."
페르다는 기사 가문이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침묵의 맹세를 한 자가 이런 떠돌이 생활은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공사판에서 노동을 하는 건 맞지 않았다.
그럼 돈이라도 빵빵하게 채워 주는 것일까, 페르다는 지급 명세서를 보았다.
"다른 인부들보다 이미 20배가 넘는 금액을 받고 있습니다."
무려 동화 200개의 가치로 은화 2개를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페르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적군."
이사벨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실 은화 30개를 쥐여 줘도 모자랄 정도의 인재지요."
"그러지 않은 이유는?"
"불만이 없어 보였습니다. 마치 자기가 돈을 받는 게 이상하다고 느끼는지 은화 2개 이상에서는 더 이상 받으려 하지 않더군요. 그런데 저희가 굳이 돈을 더 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흠...."
기사들의 월급이나 가치를 고려해 보았을 땐, 일급 2실링이면 어떤 가치가 있는가?
곧바로 고용주의 목에 칼을 겨눠도 할 말이 없는 착취였다.
자존심이 구겨지는 공사판에서 일하는데, 월급까지 적은 걸 보면 어지간한 성인들보다 대단한 인성이다.
'혹은 그만한 비밀이 있거나.'
안 좋은 과거가 있든지, 누굴 죽였든지.
그런데 그런 비밀을 가지고 있으면 은화 2개 넘어서는 받지 않는다는 게 의아해진다.
"정확히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는 건가? 공사법을 알고 있기라도 한가?"
"아닙니다. 기초적인 공사 지식은 없는 생초보지만, 힘만 있으면 쉽게 풀릴 일들을 도맡아 해 줘서 예상보다 한참 앞서서 건물들을 지어낼 수 있었습니다."
괴력이라.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한 인물을 떠올렸다.
"그 갑옷 기사."
"예."
"혹시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두껍고 무거워 보이던가?"
그 말을 듣고 이사벨라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뇨. 흔한 방랑 기사들처럼 하프 플레이트 차림이었습니다."
"그렇군."
페르다는 그가 걸어 다니는 요새, 알베르도라고 생각했다.
그를 본 목격담이 아직까지 없는 걸 보면, 무거운 몸뚱이로 은밀하게 잘 움직이는 모양이다.
'괴력이라....'
오직 힘 하나로 두 달이라는 시간을 앞당겨 준 사람이다.
"신경이 쓰인다면, 조사를 진행할까요?"
이사벨라의 제안에 페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그냥 내버려두어라. 괜히 조사하는 기색을 보여서 도망치게 만드는 건 그렇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르는 짓은 바보나 하는 것.
"다만, 그 남자의 가치는 간과할 수 없겠군. 계속 이용해 먹을 수 있도록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해 주게."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공왕령에 도움이 되는 인재라고 하면, 어떻게든 섭외한다.
섭외하지 못한다면 섭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래도 안 된다면, 단물을 빨아먹는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이 만들어지는 도시의 양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이 발드로바를 위해 짓는 이 마을을 위한 행동이다.
"그러고 보니."
이사벨라가 페르다에게 물었다.
"도시 이름은 무엇으로 짓겠습니까?"
"발드로바라는 이름으로 충분하지 않나?"
이사벨라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이미 이 성의 이름이며, 공왕령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입에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면 그 위엄은 자연스럽게 깎여 나가게 됩니다."
"그 목적이라 한다면, 안 되겠는가?"
"이오르가 스폰인 저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건은 완강히 거부할 것이니 부디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페르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포기하기로 했다.
어지간해서는 섭정의 뜻을 존중하는 그녀가 완강히 라는 단어를 썼다.
드래곤들 사이에선 이 일이 큰 의미를 가진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이름을 새로 지어야겠군."
"그래서 제가 공모를 해 보았습니다."
이사벨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서첩에서 종이를 꺼내 페르다에게 건네주었다.
"여러 좋은 이름들이 언급되었습니다만, 끝에는 두 개로 좁혀졌습니다. 마의 최전선, 디아리네 혹은 어둠을 밝히는 빛 같다 하여 알테리오스라는 이름으로 좁혔습니다. 어떠신지요?"
디아리네와 알테리오스.
"디아리네는 암울해 보이고, 알테리오스는 알테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군."
"실제로 그쪽을 겨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국은 알테 신자들이 9할이니 나쁘지 않을 겁니다."
유입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
전략에서 이점이 있겠지만, 페르다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알테교와 얽혀서 기분이 나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알테 신교는 이교에게 자비가 없다.
레드 서클을 지녔고, 적성 찾기에서 어둠이 나왔을 때는 페르다를 죽이려고 안달이 났었다.
그러니 최대한 알테교가 떠오르지 않는 편을 바랐다.
좋은 이름이 뭐가 없을까.
문득 페르다가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예전에 내 약혼자를 구하기 위해서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 이름이 뭐였지?"
"프로젝트: 헤스티아 말입니까?"
"헤스티아라...."
고대부터 내려져 오던 불을 지키던 여인의 이름이었다.
지금에서는 잘 쓰이지 않으며, 역사 시간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 스쳐 가는 인물이었다.
불을 지키는 여인이라.
나쁘지 않다.
"헤스티아는 어떻겠나?"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를 선호합니다만... 발랄한 것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군요. 반영하여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페르다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뇌었다.
헤스티아, 헤스티아....
어감도 입에 달라붙고, 뜻도 마음에 든다.
발드로바는 힘과 불의 주인.
이곳은 불을 지키는 자들을 위한 도시이며, 보루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 갑옷 기사란 작자를 최대한 뽑아 먹어야겠군.'
그가 마음을 돌리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한다.
그것이 페르다의 의지였다.
84화. 불화
콘실러스 백작의 영지의 아침은 아침 구보의 군가로 시작한다.
"어이! 어이!"
"하나둘! 하나둘! 군가 시작!"
"보아라, 우리가 왔다!
"목소리가 작다!"
"전진! 전진! 최후의 방어선! 물러설 곳은 없네! 마누라를 방패로 들어서 오늘도 전진! 전진! 영웅이 되면, 새 마누라를 구하러 가세!"
아침 구보 노래가 성 한 바퀴를 돌면서 울려 퍼진다.
매일 아침 성벽을 따라 뛰지만, 누가 인솔자로 뛸지에 따라서 난이도는 천차만별이 된다.
그리고 그중에서 아르웬은 극상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FM 중 FM이었다.
'어우씨, 그냥 반 바퀴만 적당히 뛰고 가지.'
'이 기사가 당직 걸릴 때마다 고통스럽네.'
달리는 중 군가를 끊임없이 불러야 함은 물론이며, 굽이치는 코스는 코스대로, 순찰을 명목으로 구석구석 추가 구역까지 돌아서 뛴 길이만 기본으로 2바퀴는 넘어간다.
"수고들 했다, 제군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일과를 할 수 있도록!"
"에...."
"목소리가 빠져 가지곤. 한 바퀴 더 뛰겠나?"
"아닙니다!"
"그럼 빛과 같이 해산한다! 잡히면 한 바퀴 더다!"
설마 잡힐까 봐 병사들은 부랴부랴 해산했다.
아르웬이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을 때, 성문지기가 다가와 그에게 경례를 올렸다.
"충성. 당직 사관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무슨 일이 있나?"
"그게, 발드로바 성에서 온 기사님이라 하는데, 당직 사관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발드로바 성.
그곳에 있는 기사는 둘이었다.
그중에서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한 명뿐.
아르웬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는데?"
"어이, 아르웬!"
"아니, 됐다."
물을 필요도 없이 그 남자가 손을 휘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웬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 사내를 보았다.
갈색 머리에 곱상하게 생긴 얼굴.
"오랜만입니다, 제드 경."
"어, 나도 오랜만. 잘 지내고 있지?"
"당신이 여기에 올 줄은 몰랐네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뭐 다른 건 아니고 그 기사 수행이라는 거나 좀 시켜 달라고 해서 왔지."
"기사 수행... 말입니까?"
아르웬은 그 요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낙하산 기사들은 하면 안 되냐?"
"안 될 건 없습니다. 오히려 낙하산일수록 수행이 필요한 법이지요. 단지 그쪽이 그걸 하겠다 할 줄은 몰라서...."
"그러게 말이다.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네."
제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담담하게 인정했다.
아르웬은 그 모습을 보고 새삼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하지 않던 짓을 하면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할림에서 늑대 마물이 나타난 건 알고 있지?"
"예. 거기서 섭정님께서 활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국이 아주 떠들썩해졌더군요."
떠들썩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성안에서 늑대 마물 7마리가 소환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사망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거기서 당신도 활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실프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적들을 농락하면서 시간을 끌었다죠?"
"농락은 무슨. 삐끗하면 죽는 바닥이라서 똥줄만 탔지."
"그래서 뭐가 문제입니까? 발드로바 님의 이름에 명성이 높아졌고, 그쪽은 여자 꼬실 수 있는 썰도 얻지 않았습니까?"
아르웬이 파악한 제드라는 인간상이 그러했다.
기사라는 것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며, 과장된 무용담 하나면, 영애 꼬시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 먹는 수준이라고.
"그 늑대 새끼가 섭정 쪽으로 돌진하고 있을 때, 내가 앞을 가로막았거든."
"섭정님에게 돌진했고, 막았다. 그리고?"
"그런데 그 새끼를 못 막았어. 한 대 치니깐 내 몸이 휙 날아가 버리더라고. 널빤지 조각처럼 말이야."
아르웬은 그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지 않습니까? 웬만한 기사들도 마물의 공격을 정면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는?"
"저는 막을 수 있죠."
"그러니깐 문제라는 거지. 다른 사람은 되는데 나는 안 된다는 거잖아?"
"저는 정식 훈련을 거치고, 엄선받은 기사지 않습니까? 제가 일반인들과 비교되면 안 되죠."
아르웬 딴에는 위로로 건넸지만, 제드는 괜한 걸 물었다는 듯이 인상을 구길 뿐이었다.
"그러니까 정면 승부로 상대를 막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정면 승부가 아니더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얻었으면 좋겠어."
"검술이나 호신술 쪽으로 말씀이시죠?"
"어."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제드 씨 나이가 어떻게 되죠?"
"27세. 곧 28세겠네."
"그 정도면 수행하기에 많이 늦지 않았습니까?"
"몸 단련은 옛날부터 꾸준히 하고 있는 중이야. 전투도 용병 생활도 꽤 했었고."
전투 실력이 뛰어나단 것은 아르웬도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에스콜레이아 총장 구출 작전을 진행할 때 그의 실력을 눈여겨보았으니까.
"단순히 몸을 단련한다는 문제가 아니죠. 마물 정도 되는 개체의 공격을 버티는 건 오러를 다루는 영역입니다. 그 수련만 몇 년을 꾸준히 해야 하는데, 그런 걸 이해하고 응용하기엔 이미 늦은 나이입니다."
"오러, 이거 말하는 거 맡지?"
제드는 주먹을 꾸욱 쥐면서 온몸에 집중했다.
그의 몸 표면에서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빛깔이 요동쳤다.
아르웬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태양의 플레어처럼 불안정하게 뿜어져 나오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오러였다.
"어떻게 사용하실 수 있는 겁니까?"
"용병 생활했다고 했잖아? 거기서 별별 사람들은 다 만나고 다니거든. 그래서 돼? 안 돼?"
"오러 교정만 거치고 훈련하면 될 겁니다. 오러를 방출할 수 있다는 시점에서 절반은 갔다고 볼 수 있으니."
아르웬은 단호하게 경고했다.
"그래도 힘들 겁니다. 버릇이라는 게 있는 거고, 그 버릇은 머리가 굳을수록 몇 배는 더 힘들 테니까요. 최악의 경우에는...."
그가 뜸을 들이며, 한층 더 진지함을 강조했다.
"검도 못 드는 폐인 상태가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폐인이 된다는 건 참으로 비참한 결말이었다.
제드처럼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산송장이 주는 공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건 이미 각오했어."
제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즉답했다.
"그렇게 할 가치가 있는 겁니까?"
"내가 뭔가를 지켜야 하는 순간이 올 때 또 이러고 싶지 않거든."
아르웬은 그제야 제드의 눈에서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보았다.
무력감에서 오는 후회.
단순히 페르다를 지켜 내지 못했다는 것보다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 말에 아르웬은 미소를 지었다.
제드는 그 웃음에 인상을 구겼다.
"뭘 실실 쪼개고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가볍게 체력 단련부터 하도록 하죠."
"뭔 체력 단련을—."
"가볍게 성 5바퀴만 돌고 생각해 봅시다!"
"5바퀴씩이나!?"
"콘실러스 백작님 휘하의 기사가 되려면 그 정도의 체력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몇 년씩 걸리면 안 되잖아요?"
"아니, 그렇긴 한데—."
"그럼 뜁시다."
아르웬이 달리기 시작했고, 제드는 그 뒤를 따라 이어서 달렸다.
어쩌면 이 남자와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 제드 씨. 훈련 끝나면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뭘?"
"편지를 써야 하는데, 제 머리로는 도저히 글귀가 안 나와서요. 제드 씨 솜씨면 어째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글이 무슨 쓸모가...."
제드는 말을 하다가 중간에 알아차렸다.
"설마, 대공의회 때, 그 뜨거운 눈길을 보냈던 아가씨냐?"
아르웬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얼굴.
"예, 뭐...."
"기사 정신이고 어쩌고 하더니 지도 결국 남자 새끼네! 언제부터 연락했어?"
"사흘 전에 편지가 왔습니다. 극동부에서 봉사하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면서 그런 이야기를 보냈더라고요."
"마음에 든다는 소리구만. 얼마든지 도와줄게. 말만 해. 내가 어떻게 늑대 마물 썰로 어떻게 여자 꼬셨는지도 제대로 알려 줄 테니까."
"네, 그러... 잠시만요, 늑대 마물?"
"어, 늑대 마물."
"그거 최근에 있었던 이야기 아닙니까?"
"맞아."
아르웬은 눈을 끔뻑였다.
"그런 고뇌에 빠지면서도 여자 꼬실 기력은 있었습니까?"
"어 뭐...."
제드도 별로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왜! 왜! 안 할 건데에! 해 주기로 했잖아! 마법 써 줬으니깐 나 정기 빨아먹게 해 주기로 했잖아! 하렘 뷔페! 해 주기로 했잖아아아악!!!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배게로 머리를 퍽퍽 때리며, 생떼를 부리는 페넬로페의 정당한 요구에 못 이겼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설명하고 싶지 않아, 제드는 짧게 대답했다.
"할 건 해야지."
"...."
"밥은 먹어야 하잖아, 안 그래?"
"...10바퀴입니다."
"뭐? 왜?"
* * *
스테판은 돌아왔다.
일이 잘 풀렸다는 사실에 기쁜 것도 잠시, 마차 안에서는 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페르다가 한 말이 그의 귀에 맴돌았다.
-그럼 자네는 가치가 없겠군.
파스칼 무역회사를 얻지 못한다면, 가치가 없다니.
자신을 영입한 이유는 오직 회사의 가치가 탐나기 때문이었나?
독립한다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그냥 성장도 아닌 폭발적인 성장이 가능했다.
페르다는 해 봐야 1년도 되지 않은 섭정.
그리고 경제 지식은 겉핥기 수준이다.
그런 그가 알 리가 없다.
이게 얼마나 공격적이고 파격적인 전략인지.
파스칼 상회 정도는 밭에 나는 순무쯤으로 보일 만한 것이라는 걸.
'말해서 무엇하리.'
스테판은 조금이라도 숨을 돌리고 싶었다.
책상에 앉아서 조금이라도 늘어지고 싶다.
"다녀오셨습니까?"
"어, 왔어. 근데 왜 이렇게 살벌하냐?"
"그야 그분이 오셔서...."
"나? 내가 왔다고 너희들이 이렇게까지...."
"아뇨, 본부장님 말고...."
그제야 이해했다.
이토록 살벌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다.
"혀, 형님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비서.
자각하니 스테판도 그들 따라 긴장했다.
할림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보고받은 상태였고, 그것으로 어떤 상황인지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나 다른 곳에 가야 한다고 말해 주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아니, 그러면 적어도 옷이나 좀 갈아입고 만나든 어쩌든...."
"본부장님."
비서가 횡설수설하는 스테판의 어깨를 잡았다.
"가셔야 합니다."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스테판의 마음.
그는 억지로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사형장의 문을 열 듯이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책상 앞에는 익숙하게 생긴 근육질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스테판이, 오랜만이다?"
건달 같은 인사를 건네는 저 남자는 스테판의 형인 머칫 파스칼이었다.
스테판은 실크를 뚫고 나올 듯한 알통의 굴곡이 눈에 들어왔다.
침이 꼴깍 넘어간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형님은 무슨, 형이라고 불러 인마. 백 명이 넘는 놈들이 다 날 형님이라고 불러 대서 피를 나눈 사이는 좀 더 친근해져야지 않겠어?"
"...아닙니다, 형님. 제가 어찌...."
"새끼 답답하긴."
머칫은 실실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할림에 갔다며?"
"예."
"무슨 이유로?"
"극동부의 전시회가 잡혀서 그곳을 지원해 줬습니다."
"거기 아버지가 손 떼라고 한 곳 아니었나? 아직도 붙들고 있어?"
"예. 충분히 사업적인 가치가 있어서 지원했습니다."
"아버지 안목보다 네 안목이 더 뛰어나다, 그 말이야?"
"제가 어찌 아버지를 모욕하겠습니까...."
"새끼가 아직도 줏대 없이 굴어 대네. 그냥 속을 시원하게 털어 내 봐. 답답하게 굴지 말고, 인마!"
책상을 쾅 내리치는 머칫.
서류의 산을 이루어도 무너지지 않던 책상이 그 일격에 금이 갔다.
머칫은 그 균열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씨, 너무 세게 내리쳤다. 나중에 물어줄게. 아무튼, 다 들었으니까 인마. 거기서 아흐메드 영주랑 교역도 틀었다면서?"
"예."
"거기 내가 여태까지 공들여 온 곳이라는 거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형이 뻔히 남부 공략하고 있는 거 알면서도 그렇게 꿀꺽하고 넘어가려고 그런 거야? 그 알짜배기를?"
스테판이 서둘러 변명했다.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알고도 있는데 먹었잖아."
"제가 거절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거래는 페르다 섭정님께서 주도하셨고, 성공하신 거래입니다."
"그래, 나는 뒷짐 지고 있었으니, 아무 관계도 없다?"
"관계가 없는 건 아닙니다만...."
말을 흐렸다.
머칫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뭐 어쩌겠냐? 가족끼리 너무 잡아먹으려 드는 것도 그렇지."
이야기가 그렇게 끝나는 것일까?
아쉽게도 그 바람은 들어주지 않았다.
"형은 많은 거 바라지 않아, 할림에서 통하는 물품을 무역하는 것만 같이 쓰면 돼. 그 정도는 괜찮지?"
"공동... 명의로 해 달라는 그런 의미입니까?"
"그래. 어차피 한 가족이 한 사업을 하는 건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할림으로 통하는 길은 노다지로 향하는 길이다.
둘이서 쓴다고 해도 충분히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
조금 물러서는 대가로, 조금 양보하는 대가로.
그러나.
지금의 스테판은 어째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스테판이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것은 전쟁을 알리는 초탄.
"제 사업입니다."
머칫의 얼굴이 싸악 굳었다.
"어이, 스테판이."
"예."
"지금 네 말은 이 형에게는 길도 안 빌려주고, 마차도 안 주겠다 뭐 그런 말이냐?"
한 마리의 호랑이가 노려보는 듯하다.
스테판의 다리가 후들거려 왔다.
머칫은 폭력을 휘두르는 데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폭력이 시작된다면 어디 한 곳이 부러져야 끝이 난다.
늘 그 대상이었던 스테판이었기에 그 아픔에 두려움이 컸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보다 더욱 컸던 것은.
'신뢰를 잃는다는 것....'
상인으로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어 주었던 페르다의 믿음.
후계자 구도 싸움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그에게 한 번 실망을 주었다.
그때, 페르다는 이렇게 말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마저 포기하고 타협해 버리는 것은 공왕령에 필요한 상인이 아니라고.
흔하디 흔한 상인들이 하는 짓이라고.
타협.
타협이라는 것은 갈등을 중재해 주는 좋은 도구이다.
그러나 페르다가 말하는 타협이 무엇인지 스테판은 그제야 깨달았다.
바로 이런 거였다.
처음에는 대가리만 들이밀다가 끝내 텐트 전체를 차지하는 낙타와도 같은 그런 것.
끝내 모든 것을 앗아 가 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들.
스테판은 자신을 믿는 자를 더 이상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렇기에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할림 건은... 제가 독점할 겁니다."
"...."
머칫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어도 무서운데, 그가 벌떡 일어나니 풍채가 위협적이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주먹이 자신의 배에 꽂혀드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감싼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그런 걸로 알겠다."
"...."
"대신 우리 사정을 안 봐주는 만큼 네 사정도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거다."
머칫은 스테판을 지나치며 어깨를 두드렸다.
"어디 나 없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한번 보자고."
그렇게 머칫이 밖으로 나갔다.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갔음을 깨닫기 무섭게 스테판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처음이었다.
그 무섭고,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은 형에게 대들었던 것은.
"후우...."
페르다는 스테판에게 파스칼 상회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겠노라 약속했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허먼 파스칼의 승인 도장?
아니면 그들보다 상회하는 돈과 인맥?
가장 필요한 것은,
'주인으로서 마음을 가지는 것.'
내 것을 내가 지키는 능력.
외압에 굴하지 않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스테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옳은 일을 한 거야."
그것이 설령 고통스러운 가시밭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85화. 사보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