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 85-90

85화. 사보타주

평화의 시대라 노래하는 시대임에도 전쟁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 위해, 누군가는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사람 대, 사람.

집단 대 집단.

국가 대 국가.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패배자는 그보다 많은 것을 잃는다.

밀 농사를 짓던 평화로운 소마을 또한 그러했다.

가을의 황금 맛을 보지도 못한 그들은 황야를 누벼야 하는 난민 신세가 되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평야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서 체온을 나누며 겨우내 버티던 중이었다.

사절로 보냈던 세 남자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반겼으나, 그 반가움도 오래가진 못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희망의 빛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 마을도 안 되겠습니다."

"자기들도 먹을 게 없댑니까?"

"뭐 뻔하지 않습니까? 자기들도 겨울을 나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겨울은 인심을 야박하게 만든다.

가을의 풍요로움 끝에는 잔혹한 인내의 시간이 남아 있는데, 그 잔혹함을 넘기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난민이 되어 버린 이들에게는 사실상 죽음만이 도사릴 뿐.

"우라질 것들, 같은 인간에 알테 신자라면 조금이라도 먹을 걸 주지...."

"망할 것들에게 심판의 빛을...."

"그만들 하십시오."

마을을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커지자, 사내가 나섰다.

그 사내는 하프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있으며, 유일하게 무구를 지니었다.

"제 살자고 하는 짓인데 어쩌겠습니까? 그놈들도 먹을 게 없을 거요. 요즘 제국이 개판이다 보니 탐관오리들이 날뛰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에게 무기도 있고... 조금만 달라고 하면 그래도...."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두 발로 걸어 나왔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가야 합니다."

"간다니요. 여기서 더 어딜 간답니까?"

그들은 드넓은 평야를 내다보았다.

겨울의 대지는 메마르고 피폐하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땅은 죽음뿐이다.

"남부로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거긴 따뜻하기라도 하니까."

극북부에는 얼음의 땅과 서리거인이 있듯이 극남부에는 불의 땅과 용암거인이 산다.

그곳에는 추운 겨울이라는 개념이 없다.

이장은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남부 낮은 덥지만, 밤은 더 춥다고 하더군요. 일교차를 우습게 보았다가 죽은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 마을에서 말하길 남부의 도적들도 이때만을 노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못 이겨 남부로 넘어오는 난민들은 그들이 처음이 아닐 것이다.

도적들은 이때를 노려서 그들의 재물을 강탈하거나 노예로 팔아넘기기 위해 준비 중일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자는 겁니까?"

사내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낀 피난민들.

답답한 건 이장도 매한가지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등불이 되야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으니까.

3분 정도의 고민을 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극동부로 갑시다."

사내의 선택에 모두가 경악했다.

"극동부라면 마의 땅 말씀인가요?"

"거기는 사람도 살지 못하는 곳이라 했는데, 거기로 말입니까?"

사내는 그들을 보며 설명했다.

"방금 전, 갔던 마을에서 알려 줬습니다. 제국에서 극동부에 일손들을 찾는다고 말이죠. 그곳의 섭정이란 자가 마을을 만든다고 하던 모양입니다. 일당도 괜찮게 주고, 잘 수 있는 자리도 충분하다고 하더군요. 분명 먹을 것도 충분할 겁니다. 공헌하면 틀림없이 그곳의 주민으로 받아 주겠죠."

"그렇다고 마물들이 몰려오는 그 땅으로 가자니...."

반발감에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꺼려한다.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멍청한 선택지에는 희망을 보였으면서, 가능성이 있는 선택지에는 우유부단한 모습이라니.

사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럼 다들 여기서 이러다가 죽을 겁니까?"

"...."

"다른 마을을 들쑤시고 다녀도 똑같을 겁니다. 우리가 도적질을 하지 않는 이상 돈 몇 푼으로 식량 사는 건 쉽지 않을 테고, 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짓을 하는 걸 용인하지 않을 거고요."

"...."

"극동부에 가면 그나마 일자리가 있을 겁니다. 적어도 오늘 하루를 넘길 수 있는 식량 살 돈을 주고, 묵을 수 있는 거주지도 줄 겁니다. 오늘내일하는 우리들에게는 충분히 배부른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극동부에 반발감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했다.

사내의 말대로 마땅히 대안이 없었다.

신을 저버리며 난민 도적 무리가 되어 버릴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위해 불모지로 향할 것이냐.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조금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만 했다.

* * *

이사벨라가 페르다의 집무실로 들어와 보고했다.

"보고드립니다. 화이트 브릿지라는 마을에서 온 난민들이 30명 있습니다."

화이트 브릿지. 대륙 중서부 쪽에 위치한 마을로 유레이 공작령에 있는 땅이었다.

"이번이 유레이 공작령 쪽의 3번째 난민이로군. 가용 인력은?"

"총 6가구가 왔는데, 노동 가능한 인력 15명, 노인 1명, 소아 14명입니다."

"전문 인력도 있던가?"

"화이트 브릿지가 본래는 채석장 인근에 있는 마을입니다. 그들 중 일부가 채석공이라 건축에 지식이 있다고 합니다."

"채석공이면 쓸만하겠군. 알겠네. 앞으로 몇 명까지 더 수용 가능한가?"

"확인해 본 바로는...."

이사벨라가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대답했다.

"300명 더 수용이 가능하겠군요."

"건물이 많군."

"아주 많습니다. 본래라면 이 정도 난민이 모여들었으면 절반이 천막생활을 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

문을 활짝 열자 차가운 바람이 이때다 싶어 훅 들어온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페르다의 얼굴에 남은 수분을 핥아 댔다.

피부 너머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죽음의 계절이 점점 가까워진다.

'난민들도 넘쳐 나지.'

가장 난민들이 많아지며, 많이 죽는 시기.

그것은 곧 인구가 모자란 극동부에는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페르다는 집무실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원래라면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가시밭만이 보여야 할 곳.

그곳에 탁 트인 평야와 건물들이 보였다.

어지러이 놓인 숲들만이 보였어야 할 자리에는 사람이 사는 건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 온 30명의 난민들이 옹기종기 화로에 모여 있는 것도 보였다.

페르다의 승인이 떨어지면서, 그들에게 구호 물품을 나눠 주는 공무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굶주림에 수척한 얼굴에는 감동의 눈물이 흐르고, 기쁨의 미소가 피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300명이 인구수를 형성하며 마을이 되었다.

'마을의 이름처럼 되어 가는군.'

불을 지키는 여인, 헤스티아.

이사벨라가 제시했던 후보군들을 모두 제치고 압도적으로 1위를 받아 낸 도시의 이름.

벌써 20채의 건물이 지어지고, 공용 공간으로 만들어졌던 건물들은 상가와 여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여러 호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부의 지원이 가장 컸지.'

할림에서 지원을 해 주겠다는 말만 들었을 때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원래 지원이라는 것도 숟가락만 살짝 얹어 놓고 음유시인이 읊어 줘야 할 이력서에 한 줄 긋는 정도니까.

하지만 할림에서 교류단이 찾아왔을 때,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인부 수백 명과 일렬로 쭉 늘어진 건축 자재들, 그리고 코끼리까지.

파스칼 상회가 지원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이사벨라가 무엇을 요구할지 겁이 날 수준이라고 했던가?'

모든 일을 담담하게 처리하는 이사벨라가 그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전폭적인 지지인지 알 수 있었다.

여하튼, 그렇게 남부에서 공수해 온 자재들로 뚝딱뚝딱 자신들의 건물 양식을 쌓아 올렸다.

불과 2주 사이에 사절단이 묵을 장소와 교역소가 만들어졌으며, 10여 채의 건물이 늘어났다.

'그것 말고는 역시....'

커다란 통나무 묶음이 공중에 뜬 채로 둥실둥실하는 곳.

자세히 보면 그 가운데에는 건장한 남자의 신형이 보였다.

공사장에서 어울리지 않는 갑옷 차림을 한 저 남자.

저 남자가 어찌 됐든 가장 큰 공헌자였다.

'대체 넌 누구냐?'

불쑥 튀어나와서 통나무 열 개를 짊어지고 후다닥 옮겨 버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저 뚜껑을 열어 본 사람의 제보를 받아 보고 싶지만, 그 누구도 그 갑옷 안을 본 적이 없었다.

일이 끝나면 곧바로 사라진다.

가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일하다가 중간에 어디론가 쌩하고 달려가 버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받는 돈 이상의 일을 하고 끝낸다.

'가진 자로서의 의무...인가.'

약자를 위한 봉사.

사람들은 단순한 노동에서조차도 훌륭한 기사도를 지녔다고 칭송했다.

'작위 하나 받으려는 수작일 가능성이 높아.'

순수한 마음으로 행한다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다.

페르다는 일단 그가 해 온 봉사의 가치만큼 요구할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이외 특이 사항은 없던가?"

"특이 사항이라 하면... 지금 당장엔 크게 문제가 아닙니다만 한 가지가 있긴 하군요."

"무엇인가?"

"식량과 마물 공급 선에 문제가 생겼는지, 예정 납품일보다 나흘 정도 늦고 있습니다."

나흘.

교통 환경도 좋지 않고, 이동 수단도 한정되어 있으니.

그러나 페르다에겐 이것도 충분히 큰 문제였다.

페르다는 스테판에게 모든 것을 최우선으로 공급받기로 했다.

최우선이라는 단어는 납품 예정일에 맞춰서 모든 것을 공급해 준다는 뜻을 포함한다.

하루도 아닌 나흘이나 늦어지고 있다는 건 계약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스테판.'

그는 상인으로서 머리는 잘 굴러가는 남자였다. 계산도 확실하며, 제시하는 전략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스테판은 소극적이고, 타협적인 성향을 지니었다.

페르다가 벌여야 하는 일에서 그 성격은 크게 걸림돌이 된다.

'스테판을 버려야 하는가?'

페르다에겐 아쉬운 것이 없었다.

스테판이 투자한 것은 재보로 돌려주면 그만이다.

또한 할림에서 적극적으로 성장을 돕고 있으니, 그곳과 파트너를 맺어도 되는 것이 실정이다.

내심 할림도 그것을 바라고 있는 중일 것이다.

'버리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다.'

어떻게 할까.

페르다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페르다 님."

루리가 페르다를 불렀다.

"스테판 파스칼 님이 페르다 님을 뵙기 원합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하더니.

"들라고 전해라."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페르다가 알고 있던 남자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스테판 파스칼.

기업을 이끄는 2세답게 첫 대면에서는 얼굴에는 살이 붙어 부티가 흘러내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살이 온데간데없다.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난민처럼 초췌해져 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전시회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섭정님."

페르다는 일단 내색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공급 물량이 늦어져서 그렇죠. 예, 그 부분에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다시 입을 연다.

"저희... 파스칼 무역회사와 연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계약 해지 요청이었다.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얼굴을 짚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페르다도 계약 해지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스테판이 먼저 꺼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페르다는 새로운 걸 얻으면 그만이지만, 스테판은 모든 걸 잃는다.

이 합리적이지 않은 판단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그러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왜?"

그에게 물었고, 스테판이 대답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더 이상 아닌 것 같습니다."

페르다가 묻는다.

"자네가 감당하는 영역이 어디인가?"

"제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자네에게 바라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네. 모든 것은 그대로지."

"...."

"바뀐 건 지금 자네의 마음이겠군."

스테판은 대답하지 못했다.

페르다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납득이 된다면 언제든지 해지해 주겠네. 그러니 말해 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스테판의 말이 입술을 비집고 억지로 튀어나왔다.

그는 자신의 일을 털어놓았다.

아버지와 만찬에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할림을 두고 있었던 형제 간의 마찰.

그로 인해 잃었던 것들.

페르다가 알지 못했던 스테판의 속사정을 그제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머칫이 자네에게 화를 냈고, 자네는 이 할림의 권한을 독점하겠다 했나?"

"...예."

"그래서 본래 호위를 하던 용병들이 전부 빠져나갔고, 개판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제국 내의 시스템을 이해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상권이 가장 발달된 만큼 용병도 회사 형태로 굴러간다.

머칫 파스칼이 설립한 파스칼 용병회사는 단언컨대 업계에서 톱이었다.

소속된 용병 숫자만 1만이 넘어가며, 그곳에서 하청을 주는 중소까지 합치면 3만이 넘는다.

그런 머칫 파스칼과 마찰을 빚었으니 그 대가도 큰 것이다.

스테판의 손에 들렸던 검과 방패가 한순간에 모두 사라진 셈이다.

"그 공백을 채웠는데도 미덥지 않았다고, 사건들이 터지고 있었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보안이 허술하면 체계는 무너져 내린다.

페르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해야 할 물품도 빼앗긴 것이다.

마치 유리창 없는 전시장 꼴이었다.

"그래서... 공왕령을 향하던 마차도... 습격을 당했습니다."

이제는 납품이 늦어진 이유도 드러났다.

"이틀 전에 알았습니다. 마차가 습격을 당해서 전부... 샌디도, 코벤도...."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는 스테판.

그 사건이 결정적으로 마음이 꺾이게 된 계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못하겠습니다. 저는 애초에 이런 걸 할 그릇이 못 되는 인간이었습니다. 파스칼 상회를 가지고 싶다는 것도, 마도공학을 독점하려는 것도... 전부 제가 가져선 안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

"그러니 포기하겠습니다. 섭정님. 여태까지 이 못난 놈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

"그 독점."

말을 마치기도 전에 페르다가 끼어들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었나?"

"도, 독점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게 우리가 지켜야 할 이익에 필요했던 일이었나?"

이 지경이 된 지금 스테판은 생각했다.

필요한 일이었...나?

굳이 자신이 독점하겠다고 하지 않고 파이를 나눠 먹어도 충분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자네가 생각했던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대답해 보게."

스테판은 페르다의 말대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는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말이군."

"...."

"처음으로 싸워 보았으나, 그 끝에는 좌절해 버린 것이고."

"그렇습니다."

"실패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가?"

스테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계약 해지로 이 상황을 피하려던 것이고?"

"회피하던 것이 아닙니다."

"그건 회피일세. 고통에 직면하는 대신 타협하고 있지."

"그 사건은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스테판은 허탈하게 웃었다.

동공에는 초점이 없었다.

"능력도 없는데, 쓸데없이 욕심도 많고, 무언가를 쥘 용기조차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 봐야...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삼류 같은 놈이죠."

자괴감과 자기혐오.

그의 굽은 등 뒤에는 얼마나 많은 짐들이 찍어 누르는지 보였다.

페르다,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래서 내게 손을 뻗지 못한 것인가?"

"...예."

자신의 무능함만이 커질까 봐.

치부를 보이고, 그 치부를 경멸할까 봐.

두려움은 커지고 커지고, 그를 짓눌러 끝내 두 다리를 무릎 꿇렸다.

"스테판."

"예, 섭정님."

"내가 요구한 건 딱 하나일세. 뭔지 기억하나?"

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의 뇌리에 또렷하게 박혀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말했었으니까.

"파스칼 상회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했던 계약일세. 자네는 그 계약을 위해서 무엇을 했나? 물건을 공급했지."

"그렇습니다."

"공왕령 전체에 부족했던 보급들을 채우고, 길을 텄다네. 그런 과정들은 결코 쉽지 않았을 일이지 그런데도 자네는 인내했네."

"...."

"파스칼 상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말이야."

스테판은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이 울컥하는 감정을 드러낼까 봐, 백치인 것처럼 입을 꾹 다문다.

페르다의 말은 이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계약을 했다네."

"...."

"자네는 우리들에게 물건을 공급하고, 나는 자네를 파스칼 상회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

스테판을 압박했던 그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압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네가 상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 싸운다면, 나는 기꺼이 자네의 편을 들어 준단 말일세."

대신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묻겠네."

페르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자네는 진심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가?"

스테판의 시체 같았던 눈동자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포기하고 내려놓을 작정으로 왔던 모든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스테판은 상인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무소유의 행복 따위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실패는 발판으로 삼아, 성공으로 도약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끄흐흑...."

스테판은 눈물을 흘렸다.

목구멍을 차고 올라오는 이 설움과 함께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던 자신의 본심을 꺼내었다.

"파스칼 상회의...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스테판은 대리석 바닥에 코를 박은 채로 흐느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오열한다.

페르다는 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사벨라 행정관."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이사벨라가 안경을 치켜세웠다.

"말씀하십시오."

"극동부 공왕령 전체 모든 귀족들을 극동부 전선 연합회장으로 소집해 주게."

"알겠습니다. 소집 사유는 어떻게 기재해 놓을까요?"

페르다는 담담하게 말했다.

"공왕령 전체를 향한 사보타주."

86화. 도적과 난민

극동부 전선 연합회장.

1년에 한 번을 제외하면 크게 모일 일이 없는 극동부에서 두 번째 소집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페르다는 14명의 영주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일부는 첫 소집에 느꼈던 풍만한 느낌들이 사라지고 어느새인가 턱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페르다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스테판이란 청년이 있다네."

스테판이라는 청년.

곧 19살이 되는 꼬맹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코웃음 칠 어휘 선택조차도 녹아들 정도로 무게감이 있었다.

"그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는 자네들도 잘 알 것이라 믿네."

"알고 있지요."

"덕분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곧바로 찾으러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에 대한 덕담을 하나씩 늘어놓는다.

극동부에서 자급자족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적당하게 넘어가거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면서 살아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테판은 그들의 삶을 개선할 여지를 만들어 준 좋은 상인이었다.

"자네들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그 청년에게 한 가지를 약속했기 때문일세."

페르다는 검지를 펼쳐 보였다.

"나는 그에게 상회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 약속했지."

"상회의 주인 말입니까?"

"파스칼 공자 정도면 충분히 파스칼 상회의 주인이 되고도 남지요."

"나 또한 그리 생각하지. 그런데 청년이 이제는 그 꿈을 포기할 정도로 힘든 모양이더군."

잠깐의 정적.

본래라면 콘실러스가 이 상황에서 바람을 집어넣을 테지만, 그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실질적인 여론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저희가 나서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의감이 투철해 보이는 자작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그에 의기투합한 다른 영주가 덩달아 일어서서 외쳤다.

"그렇습니다! 이 극동부가 누구 덕분에 좀 살 만해졌는데, 모르쇠 할 수는 없지요!"

"그 은혜를 갚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태양의 심판을 받아도 모자랄 것들입니다!"

"암, 암!"

그 이외에도 떨떠름하게 동조하는 이들의 얼굴도 보였다.

페르다는 그 얼굴을 자세하게 기억해 놓았다.

"공들의 뜻은 잘 알았군. 파스칼 무역회사가 안정될 때까지 그곳에 군대를 파견하여 호위를 요청하고 싶네. 물론, 이 공왕령 방위에는 지장이 없는 선에서 말이야."

"물론입니다! 저희 상비 방위군 30명을 파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35명을...!"

"40명을...!"

충성심을 증명하는 경쟁이 과열되는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최대 30명까지만을 허용했다.

그렇게만 해도 400명이 순식간에 모였으며, 기사 또한 15명 정도 차출되었다.

페르다는 그 약조된 문서들을 콘실러스 백작에게 건네주었다.

"부탁하겠네."

"섭정님의 뜻대로."

상단 용병 문제는 절반 정도 해결된 셈이다.

나머지 절반은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는가에 달린 일이었다.

그사이에 페르다는 자신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루리."

"예."

"습격이 터진 장소로 데려가 줄 수 있겠나?"

"제가 페르다 님의 셔틀인 줄 아십니까?"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툴툴거리면서 페르다의 양어깨 사이에 손을 스윽 집어넣고 끌어안았다.

"꽉 잡으십시오. 놓치면 안 잡아 드릴 겁니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날아가는 루리.

발드로바 성에서는 이틀이 걸릴 거리였으나, 1분도 되지 않아서 그곳으로 도착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공왕령에서는 조금 먼 장소이며, 주인이 없는 땅이었다.

그만큼 가치가 없으며 위험한 땅이란 뜻이다.

흉흉한 계절인 만큼 현장 또한 잔혹하게 유린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공왕령의 사람들이 주위를 지키며 현장을 최대한 보존해 놓은 상태였다.

사건 수색을 진행하는 건 마법진을 유지를 위해 파견된 드래곤 스폰들.

지휘하는 것은 이사벨라 행정관이었다.

그녀가 페르다와 루리를 발견하고는 꾸벅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루리 양도 같이 왔군요."

"예, 어쩌다 보니."

루리는 이사벨라가 내키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흔히 보이는 소속 간의 갈등보단 이사벨라 자체를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피해 규모 현황은 어찌 됐나?"

"공왕령 안으로 움직이던 마차는 총 10대, 그중에서 마물을 싣기 위한 마차 3대와 나머지는 콘실러스 백작 영지에 있는 지부에 입고할 물품을 배달하는 마차 7대였습니다."

온전한 3대는 마물 사체를 실은 마차였다.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불결한 물건들을 실었는데, 건들지 않는 게 당연하다.

"피해 인원은?"

"12명의 상인 중 11명 사망, 1명 실종이고, 22명의 인부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고용되었던 20명의 용병들 중 2명이 사망했습니다. 직원들은 전멸이라 할 수 있고, 용병들은 대부분 살아 나갔습니다."

"전형적이군."

모두가 죽어도 용병은 살아 돌아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특이 사항은 없던가?"

"있습니다."

이사벨라는 시체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검흔이 하나씩 있는 시체들은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페르다는 당연히 시신 수습을 위해 저렇게 해 놓았으리라 생각했다.

"올 때부터 저렇게 있었습니다."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예. 혹시나 싶어서 상단 쪽 정찰꾼에게 물어보았는데, 자신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루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세르데스 대륙 인간들의 수준이 올라갔나 봅니다. 도적놈들이 이렇게 예의가 바를 줄이야."

"그러게 말이군."

페르다는 그들의 상태를 보았다.

전부 일자 형태로 누워 있으며, 가슴에 손을 얹은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수고를 들일 이유가 있는가?

"이상한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무기를 든 인부들이 있으나 전투흔이 없습니다."

"전투흔이 없다는 건...."

"전부 일격에 살해. 그러니깐 기습을 당한 것입니다."

페르다는 금세 이해했다.

"애초에 용병들이 아니라 도적들을 고용했군."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형적이었다.

그 전형적인 시나리오조차도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루리는 그 점을 눈치채고 페르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페르다 님, 상인들을 기습했으니 분명 도적질을 하러 온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도적질을 당한 것치고는 너무 겸손하게 끝난 것 같습니다만."

루리는 귀중품이 실린 마차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저기에 있는 물건들은 건드리지도 않고 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황금 촛대가 보관된 통은 활짝 열려 있어 나 여기 있소 라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귀중품이 담겨 있는 마차는 거의 건들지도 않았다.

전부 도난당한 것은 신선 제품.

일부 도난당한 제품은 보존 식량과 무구.

그리고 가장 가치가 있는 보석과 귀중품들은 딸랑 4개가 끝이었다.

"루리 양, 제가 대답해 드리자면, 아마 도난 방지 마법 때문일 겁니다."

"도난 방지 마법?"

루리가 혼잣말하듯이 물었다.

"루리 양을 위해 설명해 드리자면, 일부 고가 물품에는 상인 이외의 자가 접촉하는 순간, 그것을 추적할 수 있는 마력 꼬리표가 달라붙습니다. 현대 상인들이 보험을 위해서 자주 이용하는 방법이지요."

"그렇군요."

범죄자의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추적 마법.

그런 마법이 있다고 해도 건드릴 놈은 건드리는 것이 이치였다.

"혹시 도난당한 귀중품들은 전부 그 추적 마법이 걸리지 않은 물건인가?"

"확인해 본 결과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누구지?"

"그 점을 설명하길 상인들 말고는 모른다고 합니다."

페르다는 턱을 짚으며 생각해 보았다.

"죽은 용병 둘."

"예."

"혹시 그 추적 마법에 걸려 있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사벨라는 마력을 발산하여 두 구의 시신을 확인했다.

페르다의 예측은 정확했다.

"섭정님의 말씀대로 추적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과욕을 부린 놈을 죽인 모양이로군요."

주어진 상황들을 종합해 보니 페르다는 새로운 추측으로 도달했다.

"그 실종된 상인 놈이 주동자일 가능성이 높겠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실제 중소 규모의 상회에서 간간이 일어나는 방식이니."

상인 하나가 애초에 스테판을 뒤통수칠 작정으로 도적 떼를 끌어들인 것.

전멸당한 것처럼 위장하여 적당히 해 처먹고 빠지는 그런 그림이었다.

러프로는 그려졌지만, 그럼에도 페르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다 이사벨라에게 묻는다.

"애초에 약탈은 생각이 없었다면 어떻겠나?"

루리와 이사벨라가 물었다.

"약탈할 생각이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약탈은 부차적인 요소이고, 살인과 음모가 주 목적이라는 거지. 이런 식으로 내부의 분열로 쓰러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말이야."

"살인과 음모라...."

페르다의 말을 듣고는 이사벨라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옆으로 스윽 기울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녀는 도난 품목들을 페르다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살인이 목적이라 한다면 굳이 신선 식품들을 모조리 가져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식량이 모자라서 가져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루리의 말에 이사벨라가 반박했다.

"식량이 모자랐다면 비상식을 전부 챙겼어야 합니다. 도망쳐야 하는 입장에서 신선 제품을 훔치는 건 삼류조차 하지 않을 행동입니다."

이사벨라의 말대로였다.

신선 식품은 부피가 크며, 보관하기도 어렵다.

히트 앤 런으로 빠지려면 보관에 용이한 비상식을 전부 털어 갔을 것이다.

"그걸 가져갈 만한 것들이라면 식량이 궁한 것들, 난민들이겠지."

"도적과 이음동의어입니다."

그들도 협력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

이사벨라의 말에 페르다 또한 동의했다.

'찝찝하군.'

페르다는 이 짜증 나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굴렸다.

평소보다 더욱 의심하고, 조금의 의심도 함부로 남기지 않으려 했다.

그때, 수사를 돕던 드래곤 스폰 하나가 이사벨라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좋은 소식입니다. 확인해 보니 추적 마법 꼬리표가 붙은 자가 한 명 있다고 합니다."

이상한 이야기였다.

과욕을 부리다가 추적 마법이 걸렸던 용병 둘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뭘 훔쳐 갔나?"

"상인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갔다고 하는군요. 이걸로 그 도적들을 추적할 수 있을 듯합니다."

"금화 한 개 말인가?"

"예."

페르다가 다시 물었다.

"금화 한 개만 있던 주머니 속에 한 개를 꺼내 갔단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확인해 보니 여비로 쓰일 5골덴 중, 경비로 쓰인 1골덴 30실링을 빼고 남아 있는 금화 중 하나입니다."

3골덴 하고 70실링이 있는 주머니에서 고작 금화 한 개를 꺼내 갔다는 말.

"어디로 향하고 있나?"

"놀랍게도 공왕령 안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로 놀라운 상황이었다.

추적 마법에 걸리지 않으려 용을 쓰다가 금화 하나 때문에 걸리다니.

모순 덩어리들이다.

완벽하면서 허점을 보이고,

잔혹하면서 예의가 바르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개가 뒤섞여 있는 혼돈이다.

어쩌면,

그 멍청한 도적놈이 해답을 직접 줄지 모른다.

"바로 추적조를 편성하여, 모조리 생포하도록 지시를—."

"아니."

페르다는 이사벨라의 말을 끊었다.

"잡아 오게 시킬 필요는 없다. 우리가 움직이도록 하지."

"저희가 말입니까?"

이사벨라는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섭정님의 지위로 일개 도적 떼를 소탕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만. 이런 건 하수인들에게 맡기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이런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루리가 이사벨라의 뜻에 동조하며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 만류를 들었다면 페르다가 아니었다.

"직접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다. 그리고 이 일에선 의심의 여지를 남기고 싶진 않아."

"의심 말입니까?"

"그래, 의심이 남아선 안 돼."

오직 페르다만이 알고 있다.

복수는 깔끔할 때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

"이건 스테판을 위한 복수극이다."

복수극은 깔끔해야 한다.

남을 위한 복수극은 평소보다 더욱 깔끔해야만 한다.

그것이 페르다가 가지고 있는 지론이었다.

* * *

늦은 저녁.

남긴 흔적을 따라 추적하자, 보이는 것은 도적으로 추정되는 자들의 야영지였다.

흉악하고 비열한 범죄자들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그곳에는 40명 남짓 되는 사내와 여인, 그리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닥불 앞에 모여 있었다.

"이제 먹으면 돼요?"

"안 돼. 좀 더 익혀야 해."

"배고파 죽을 거 같아! 들어 봐요. 꼬르륵꼬르륵 거려요!"

"배 아파 죽는 것보단 나아요."

꽤나 가까워졌음에도 페르다와 이사벨라가 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신경은 모닥불, 정확히는 그 위에 올려진 냄비에 향해 있었다.

"됐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터트리고, 어른들은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들은 자신들이 하루살이처럼 덧없이 사라질 운명임을 잊어버렸을 만하다.

이사벨라나, 페르다나, 루리나.

전부 손가락 한 번 까닥이면 이들은 우습게 날아갈 것이다.

페르다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대신 바닥에 구르는 냄비 하나를 발로 찼다.

퉁! 퉁!

냄비에 집중하고 있던 사내들이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구르며 이곳으로 날아오는 냄비.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서 한 남자와 두 여인이 보였다.

"...."

"...."

잠깐의 정적.

그 정적을 깨고 움직인 것은 수염이 난 사내였다.

그 남자가 허둥지둥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모닥불의 빛이 은은하게 반사되었다.

행색과 어울리지 않게 잘 벼려진 검.

페르다는 그것이 상단에서 잃어버린 검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뭣들 해!? 무기를 뽑아!"

그 지시에 움직여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무기를 뽑으려 들었다.

"그만!"

일제히 멈춘다.

그 말을 꺼낸 것은 하프 플레이트를 입은 사내였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지둥거리는 다른 난민들과 다르게 그에겐 통찰력이 있었다.

"모두 검을 내려십시오! 검을 내리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짚어요!"

"그게 무슨—."

"살고 싶다면 얼른 하십시오!"

사내의 말에 모든 남녀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짚는다.

전의보다는 굴복이 익숙한 자들답게 빠르게 움직였다.

실로 빠른 판단력이었다.

대화를 위해서 하나 정도는 본보기로 삼을 생각인 페르다로서는 한 방 먹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페르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난민 무리를 이끄는 대장인 윌리엄이라 합니다. 귀빈의 이름은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님이십니까?"

그가 물었다.

말투가 삼류 도적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 맞다."

"그리고 약탈 건의 조사를 마치고... 저희들을 추적해서 이곳으로 오신 것이겠죠."

"그래."

수사팀을 파견하여 이 일을 수사할 것이라는 자각은 있던 모양이었다.

"틀림없이 사건에 자초지종이 궁금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드릴 테니, 부디 아이들에게 먼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허해 주시겠습니까?"

그가 정중하게 묻는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코웃음을 쳤다.

"남의 곡식을 축내는 쥐새끼인 주제에 감히 인간인 척 동정을 구하는 것이냐? 너흰 먹을 자격이 없다."

페르다는 그들을 스윽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움직이는 자는 모두 죽인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두 말이다."

페르다는 자신이 발로 찼던 냄비를 그대로 깔고 앉았다.

"제대로 고해라. 그렇지 않는다면, 아이들부터 죽여 주마."

87화. 생도 윌리엄

자신을 윌리엄이라 소개했던 사내가 천천히 설명했다.

"저희들은 유레이 공작 영지 아래에서 봉사하는 농민들입니다. 아시다시피 대공의회 이후, 유레이 공작님께서는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고향을 버린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잘 알고 있다. 이미 너희 같은 놈들은 100명 가까이 들어왔으니까."

"저희 또한 그 극동부에 꿈을 위해 왔습니다."

"그 꿈에 상인의 마차를 습격해서 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나?"

"물론 그 일은 섭정님께서 충분히 오해하실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말을 잘못하는 순간 목이 날아간다.

윌리엄은 침을 꿀꺽 삼켜 목소리에 호소력을 실었다.

"맹세컨대, 저희는 결코 그 습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저희가 그 마차를 발견한 것도 누군가가 알려 줬기에 가능했습니다."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

"예."

윌리엄이 그 사건을 해명했다.

"저희가 공왕령으로 향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왔습니다. 행색이 저희와 비슷하지만, 그들은 무장했더군요. 혹여나 저희에게 남은 물건을 뺏을 도적인가 싶어서 경계했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절을 베풀었죠."

"어떤 친절인가?"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줄 수 있다고 말입니다."

페르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그걸 믿을 만큼 멍청해 보이지 않는데."

"그만큼 절박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사람이 절박하면 뭔들 못하겠는가?

이해하기로 했다.

"계속 말해라."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저희가 도착한 곳은 섭정님께서 보셨던 그 참혹한 현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 있었고, 신선한 식량들이 바닥에 구르고, 몸을 지킬 무기가 놓여 있으며, 귀한 보석들도 있었습니다."

페르다는 그 말에서 의도를 간파하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보석 이야기를 굳이 했다는 건 너희들이 결백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건가?"

"하지만 앞서 말씀을 드렸다시피 저희는 배가 고픈 난민들입니다. 당장에 배가 고팠을 뿐이었고, 황금은 먹을 수가 없었죠. 그렇기에 저희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먹지 못하는 것도 털어갔더군."

페르다는 없어진 무기들을 떠올리고 물었다.

"무기를 챙긴 건 남은 여정에 제 몸을 지킬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습격이 있었으니, 저희를 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말입니다."

"식량은 썩어 갈 것이 분명해 거둬들인 것이며, 무기를 지킬 수단이 필요했다. 그런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그건 그런 이유들이 있다고 치지. 그러면 자네가 챙긴 그 금화는 뭔가?"

"예?"

"우리가 난민을 거부할 때를 대비해서 챙긴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시치미 떼지 말게. 우리가 어떻게 너희들을 찾아서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하나?"

윌리엄은 정말로 영문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단순히 뻔뻔한 것인지, 아니면 금시초문인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페르다 님."

그때, 불쑥 이사벨라가 끼어들었다.

"그 금화는 윌리엄이라는 자가 가져간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군가?"

이사벨라는 고개를 숙인 난민 무리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장소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들 중에서 유독 바들바들 떨고 있어 확신할 수 있었다.

"윌리엄. 저 쥐새끼를 불러서 이리 데려오게."

"예."

윌리엄은 페르다가 지목한 남자를 일으켰다.

고개를 떨구었던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제 발 저린 도둑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윌리엄이 그를 보며 다그쳤다.

"주머니 뒤집어 보게."

"...."

"뭣 하나 얼른 보여 드리지 않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집는 사내.

땡그랑—.

그 안에 튀어나온 것은 금화 한 냥.

페르다는 금화를 집어 들었다.

통화로 쓰이는 그 금화가 틀림없었다.

"난민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돈치고는 꽤 거금이지 않나?"

윌리엄은 배신감에 어린 표정으로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에반스! 내가 분명히 귀중품은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죽은 자의 재보를 함부로 건드리면 화를 당한다지 않았어!?"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얼마 없고 또 언제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금화 하나가 있으면 괜찮겠다고 생각해서...."

"멍청한 것! 그 행동 때문에 지금 상황이 얼마나—!"

"그만."

페르다는 그들의 말싸움을 끊었다.

"촌극은 집어치우고, 무릎을 꿇어라."

윌리엄과 사내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에반스라 불린 사내는 떨었으며, 윌리엄은 자신이 했던 일들을 늘어놓으며 간청했다.

"섭정이시여. 부디 이 우매함으로 벌어진 실수를 너그러이 눈감아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나?"

"비록 수사에 해가 될까 봐, 묻어 주지는 못하였지만, 시신들을 전부 수습해 놓았고, 그들을 위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마차가 향하는 방향이 콘실러스 백작령이라는 것을 알고, 제가 그곳으로 직접 가서 신고까지 했습니다. 저를 데려가신다면, 그자들이 저를 알아볼 겁니다."

"신고도 했고, 장례도 했으니 너희들이 해 준 것에 눈감아 달란 말인가?"

"부디 이 어리석은 자들의 외도를 용서하시옵고, 기회를 주십시오. 이들의 가슴에는 신이 있습니다."

윌리엄이 신념이 가득 찬 목소리로 호소했다.

그러나 윌리엄을 내려다보는 페르다의 눈은 한없이 차갑기만 했다.

"너희들이 공왕령에 소속된 상인의 재보를 건드린 이상, 단순한 난민으로 볼 생각은 없다. 너희들은 공왕령에 숨어들려는 쥐새끼이며,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는 자들이다.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정리했다고 한들, 너희들이 상인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쳤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배가 고팠기에 그랬다라는 건 핑계일 뿐이다. 너희들은 다시 절박해진다면, 또 훔치고 훔치게 되겠지. 내 말이 틀렸나?"

차마 딱 잘라서 대답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불편한 정적 속에서 페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

한 줄기의 희망에 고개를 드는 윌리엄.

"그게 무엇입니까?"

"죄를 범한 자가 응당한 벌을 받으면 된다."

페르다는 옆에 놓여 있는 검을 에반스라는 사내의 앞에 던졌다.

"네 피로 죄를 씻어라."

"그, 그게 무슨...."

"너무 어려운 말을 했나? 간단하게 말해 주지."

페르다는 검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자결하란 뜻이다."

에반스의 얼굴에 핏기가 싸악 가셨다.

"네가 죽으면 나머지가 산다. 그건 충분한 거래지 않더냐?"

"저, 저는...."

"섭정이시여!"

윌리엄이 끼어들었다.

"어리석은 놈이긴 하나, 심성은 착한 자입니다. 이 지독한 겨울에 동료들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썼을 뿐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지 않겠다. 얼른 끝내도록 하라."

페르다가 단호하게 굴지만, 윌리엄은 끈질기게 나왔다.

"제가 이 난민들의 대표입니다. 부디 제 팔 한쪽을 가져가시고 노여움을 멈춰 주실 수 없겠습니까?"

"팔 한 짝?"

페르다는 불쾌하다는 얼굴을 했다.

"같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걸로 부족하다면, 다른 것을...."

"내가 말했지 않나? 너희들은 쥐새끼다. 어린 쥐새끼 한 마리가 곳간을 털었다고, 어미 쥐새끼 팔 한 짝을 날리면 성이 찰 것 같으냐?"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혐오감.

"어미든, 새끼든, 대장이든, 부하든 쥐는 쥐일 뿐이다. 목숨엔 목숨이다. 에반스의 목숨을 대신한다면 네 목숨뿐이 될 것이다."

목숨.

윌리엄은 슬쩍 에반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겁에 질린 채로 떨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윌리엄은 눈을 감고 짧게나마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윌리엄은 순순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에반스의 앞에 놓인 칼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난민들이 반발했다.

"무, 무슨!"

"그건 안 됩니다!"

"어떻게 저희를 끌어오셨는데...!"

파앙—!

"꺄악!"

페르다의 손에서 폭음이 웅성거림을 잠재웠다.

"다음은 없다. 대신 죽고 싶다면, 떠들어 보거라. 말한 대로 쥐새끼에는 쥐새끼다."

그 이상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제 목숨이 남보다 귀한 줄은 안다.

몇 분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페르다는 같잖다는 듯이 말했다.

"이자는 너희들을 위해서 나섰는데, 너희들은 이자를 위해 나설 용기조차 없구나."

페르다는 앞에 놓인 검을 옆으로 밀어내었다.

대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 친히 너를 고통 없이 끝내주도록 하겠네. 남길 말이 있나?"

죽음을 목전에 둔 윌리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이 무사히 공왕령에 데려가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잘 들었다."

페르다의 손에 마력이 응집했다.

마력의 충격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쿠웅!

커다란 격음과 함께 윌리엄의 몸이 맥없이 쓰러졌다.

* * *

윌리엄은 본래 흔한 농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민들의 대장이 될 필요도 없던 자였다.

그는 기사 생도였으며, 생도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내였다.

그는 명예를 알았으며, 가진 자의 의무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무예도 출중하여 허드렛 왕과의 전쟁에서도 무훈을 쌓아 올렸다.

모두가 그가 기사가 되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의 기사 임명식이 머지않았던 날, 정확히 그가 기사가 되기까지 한 가지의 시련만을 남겨 뒀을 때였다.

그날, 허드렛 왕과 벌였던 전쟁이 대공의회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패배로 끝난 자들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해진다.

특히 유레이 공작의 영지민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패배자인 유레이 공작에게는 6만 골덴의 배상금이 걸려 있었다.

평시 귀족이었다면, 뭣도 아닌 돈이었겠지만, 이미 이 전쟁을 위해서 돈을 썼던 유레이 공작에게 6만 골덴은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기엔, 이미 늦어 버린 상태였다.

그는 끝내 돈을 갚기 위해서 주변 마을들을 쥐어짜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마을을 버린 난민들이 늘어났다.

유레이 공작이 그걸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인구가 곧 국력인 법이다.

유레이 공작은 난민들을 추적해 모조리 잡아 노예로 만들었으며, 일부는 보란 듯이 잔혹하게 처형했다.

단결이라는 이름 아래의 폭정이 시작되었다.

윌리엄 또한 그런 임무에 동참해야 했다.

그가 생도에서 기사가 되는 마지막 시련으로 노예 추적을 맡은 것이다.

윌리엄은 병사들을 이끌었고, 끝내 난민들을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

임무를 맡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의기가 충만하였다.

난민들은 해악이다.

영지가 혼란스러울 때, 돕지 못할망정 도망치는 시민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분탕 종자이며, 악의 세력이자, 그들은 필히 벌을 받아야 마땅한 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전에 둔 것은 이상과 다른 복잡한 현실이었다.

아니, 복잡할 것도 없었다.

책과 명예를 쌓아 올리면서도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은 것이었다.

공작령을 혼란에 빠트리려던 자들은 초췌했으며, 힘이 없었다.

살과 가죽밖에 남지 않았고, 통통해야 할 아기도 울 힘이 없어 숨을 헐떡이는 게 고작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부지깽이와 삽따위에 불과하다

그들 모두가 무장한 군대에 억지로 맞서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윌리엄은 자신이 관철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백성은 영주에게 봉사한다.

왕은 백성들을 위함으로써 존재한다.

백성을 위하지 않는 왕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간단했으나 지독한 임무 속에서 윌리엄은 고뇌했다.

마지막.

마지막 딱 한 번만 눈먼 장인이 되어 모르는 척하면 그의 인생은 잘 풀리게 될 것이다.

그는 끝내 선택했다.

난민들을 향해야 할 검은 자신을 따르던 병사를 향했다.

윌리엄은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에게 검상을 입혀, 배신당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들을 보내었다.

그 후, 윌리엄은 자신이 타고 왔던 말의 목을 베었고, 그 고기로 난민들을 먹였다.

기사는 될 수 없었으나, 윌리엄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검을 든 이유였음을 의심치 않았기에 그는 지금 이 죽음마저도 헛되이 여기지 않았다.

* * *

"으헉!"

윌리엄은 지독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일어날 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저, 저승인가?"

"이승이라네."

"으헉!"

한 번 더 깜짝 놀라는 윌리엄.

자신을 모욕하고 혐오하던 그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페르다가 있다.

"1시간 기절했군."

그의 눈동자에는 그때 보았던 것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자신이 다른 세계로 와 버린 것은 아닌가 싶었다.

"저, 죽은 게 아닙니까?"

"죽을 리가 없지. 자네의 머리를 때린 건 흔한 스턴 마법이었으니까."

"어째서 저를 죽이시지 않고...?"

"잘 훈련된 기사를 죽이기엔 아까워서 그런 것일 뿐이네."

윌리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페르다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나? 너무 티가 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그렇군요...."

어찌 보면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다.

하프 플레이트 갑옷에 검까지 차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사는 아닙니다. 잘 쳐줘도 기사 생도에 불과한 나부랭이입니다."

"기사 생도라 할지라도 난민들에게 섞여 있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주군을 배신한 것이로군."

그 말에 윌리엄은 떫게 웃었다.

"죽어 마땅한 일을 했습니다. 기사가 자신의 주인을 배신하다니...."

그것은 명백히 반역이었고, 윌리엄도 부정하지 않았다.

"상관없네. 자네는 생도 나부랭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만...."

"정식으로 기사가 된 것도 아니었으니, 배신 또한 없는 법이지. 자넨 그저 흔한 탈영병에 불과한 사람일세."

페르다는 기사 집안의 사람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죽다 살아온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군."

"말씀하십시오."

"가치가 있는 일이었나?"

페르다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난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스튜를 나눠 먹고 있는 중이었다.

"너는 저자를 위해서 희생했지만, 저들은 너를 위해서 누구도 희생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들을 위해 희생할 가치가 있었던가?"

페르다가 말하는 건 윌리엄도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었던 그때, 대신 죽을 자는 침묵을 깨라고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침묵을 깨지 않았다.

배신감이 느껴질 법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윌리엄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저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죠."

주군은 배신했으나, 신념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렇군."

페르다는 흐뭇해하는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가 있었다.

금화 한 개를 훔쳤던 남자, 에반스였다.

"에반스라고 했나?"

"예? 예, 그렇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는 네 어리석은 행동에 대신 죄를 짊어졌다. 그 말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제, 제가 빚을 진 것입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목숨을 빚졌지. 그러니 이제부터 너는 윌리엄의 충직한 하인이 돼야 할 것이다. 그가 죽는다면, 거지 같은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도록 하지. 이해했나?"

"예, 예! 알겠습니다요! 그 말을 심장에 새기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윌리엄 경."

"예,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를 떠나보내던 순간, 귀에 맴도는 한 음절의 단어.

"경...?"

경.

기사들만이 가질 수 있는 호칭.

그러나 윌리엄은 기사가 되지 못한 자이다.

아니면 단지 페르다가 착각해서 붙여 버린 것인가?

아니면 그를 한 명의 기사로서 제대로 봐 주고 있다는 뜻인가?

지금의 윌리엄으로선 선문답에 그칠 질문이었다.

* * *

마차 습격 사건에 있어서는 별다른 수확이 없이 흐르는 듯했다.

페르다는 루리와 함께 성으로 복귀하려던 그때, 이사벨라가 페르다를 불렀다.

"섭정님. 탐문 중에 증인이 될 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투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듯했다.

그녀의 옆에 선 것은 여인과 아이.

페르다는 여인에게 물었다.

"할 이야기가 있나?"

"송구하옵니다만, 소인이 아니라 제 아이가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대화해야 할 상대는 여섯 살배기 코흘리개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저 이안이요."

"얘, 입니다 해야지. 섭정님 죄송합니다. 아이가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

"자잘한 호칭은 신경 안 쓴다. 이안, 내게 할 이야기가 있나?"

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 아저씨랑 기사 아저씨가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인데요."

"사신 아저씨?"

여인이 대신 대답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렇게 봤다고 합니다."

"그렇군. 계속 얘기해 보거라."

"네. 그러니깐 그 사신 아저씨가 말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데, 거기서 뭔가 떨어트린 걸 봤어요. 아무도 못 본 거 같아서 제가 엄마 주려고 몰래 넣어 놨었어요."

"뭘 떨어트렸더냐?"

"이, 이겁니다."

보관하고 있던 여인이 무언가를 꺼내어 페르다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스카프였다.

녹색 원단으로 만든 그 스카프는 겉보기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듯했지만, 귀퉁이에 박혀 있는 문양의 모양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페르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자기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독특한 천칭 모양의 문양은 파스칼 가문의 문양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칼 두 자루가 뒷배경으로 있는 것은....'

틀림없다.

파스칼 용병회사의 것이었다.

88화. 참으로 뻔뻔하십니다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면서 밤이 찾아왔다.

윌리엄이 이끄는 난민 무리를 뒤로한 채 페르다는 성으로 돌아왔다.

페르다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반대편에 있는 사내를 보았다.

그곳에는 스테판이 있었다.

몰린 사람 특유의 초췌함은 어느 정도 지워졌지만, 눈알은 여전히 퀭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페르다는 그를 보며 말했다.

"좋은 소식이 있네."

"어, 어떤 좋은 소식입니까?"

스테판이 초조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페르다는 천천히 종합한 정보를 그에게 말해 주었다.

"스테판, 자네가 고용한 용병들은 생각 이상으로 악질적인 의도를 품고 있었네."

그들은 삼류 용병이 아니라 대놓고 분탕을 치려고 조직된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합류 포인트에서 모든 상인과 인부들을 살해했다.

화물들을 전부 어지럽혔고, 내용물 일부를 끄집어내어 보여 강도 사건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강도 사건으로 만들자니 너무 리스크가 컸지."

"도난 방지 마법 때문이겠군요."

본부장이었기에 스테판도 잘 알고 있었다.

귀중품에 걸려 있는 도난 방지 마법들.

손을 대는 순간 범죄자 낙인이 찍혀 버리는데, 암살자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강도 사건이 되려면 귀중품이 없어져야 하는데, 귀중품이 없어지지 않는 아이러니한 사건은 암살이라는 게 더 크게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용병 두 놈이 초석을 깔았어."

"어떻게 말입니까?"

"귀중품 상자들을 억지로 뜯고 부숴서 꺼냈을 테지."

"그래도 추적 마법이 걸릴 텐데, 어째서 그런 멍청한 짓을...."

"아마 그놈들도 함정에 빠졌을 걸세. 정보를 주지 않았든, 평소에 탐욕이 많든 숙청하는 김에 그랬을 테지."

스테판은 그 말에 납득하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귀중품들을 꺼낸다는 게 아무래도 초석인 듯한데, 그게 무엇을 위한 초석이라는 겁니까?"

페르다는 곧이어 다른 말을 꺼내었다.

폰이었다.

"난민들을 강도질에 합류시키기 위한 초석."

초겨울의 추위에 벌벌 떨면서 움직이는 난민들.

제국에서 출발한 용병들이었으니, 난민들이 희망을 찾아 극동부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윌리엄이 이끄는 난민들을 발견했다.

계획대로 난민들에게 밥을 준다는 말로 꼬드겨 일말의 희망을 주었다.

"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거기로 움직일 걸세. 어찌 됐든 그들은 당장 먹을 게 필요했으니까."

설령 거짓이라 해도 배가 고픈 이들에게는 밑지고 보는 정보였으니 급한 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인심 넘치는 배급소가 아닌 참혹한 살육의 현장이었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난민들이 한바탕 헤집기만 해 주면 됐다네."

페르다는 난민의 말을 검지로 까닥이며 말했다.

"그들의 시야에는 뭐가 있겠는가? 먹을거리, 무기,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단 한 번 볼까 말까 한 황금으로 만든 귀한 보물들이 있네. 지금 당장 필요한 것, 가지고 싶은 것 그리고 가지고 싶지만, 평생을 걸쳐서는 가지지 못할 것들이 한 곳에 놓여 있지."

욕망의 신전 속으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테판은 그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암살은 난민들이라는 요소를 통해서 강도 사건으로 바뀌게 된다.

약탈 대부분을 난민들이 진행했으니, 당연히 주동자들은 난민이라 생각하고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귀찮은 잔당은 굳이 추적하지 않을 것이다.

본보기로는 이미 충분히 당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이야기의 메인 주제였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는 강도 사건으로 위장하려고 했던 암살 사건이라는 것.

그 말은 즉, 이 앞에 하려고 했던 일들은 모두 실패했다는 말이었다.

"난민들은 그 보석들을 건드리지 않은 거군요?"

"변수가 있었지."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걸세. 아니, 예상 범위에 넣기에는 너무 희박하고 말이 안 됐지. 마른하늘에 벼락을 맞은 격이야."

페르다는 기울이던 폰의 옆에 나이트 말을 얹었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기사가 그 무리의 리더로 있었지."

윌리엄.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그 남자는 의무와 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황금을 돌처럼 보았으며, 시신을 수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비록 물품에 손을 대긴 했으나, 생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만 했으며, 1골덴 안쪽의 범위였다.

관대히 넘어갈 만한 일이다.

"그것으로 암살이라는 걸 확실하게 확정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파악한 사건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다음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그 암살을 사주한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가장 유력한 것은 이 남자로군."

페르다는 파스칼 회사 인사 서류를 건네주었다.

"12명의 상인 중 유일하게 실종자인 프랭크 폰테인이라고 하는 자일세."

"프랭크 폰테인."

그 이름을 듣자, 스테판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별로 마음에 들지 사내는 아닌 모양이로군."

"10년 전부터 이곳에서 일해 왔고, 늘 지점장이 되지 못하고 이런 마부 짓이나 한다고 한탄해 댔으니까요."

"그래서 이유가 뭔가?"

"거창한 이유라 할 것도 없습니다. 실적 부진일 뿐이죠. 그냥 상인으로서 자질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스테판이 그 얼굴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몇 번 꼰대 나으리처럼 굴어서 이래저래 많이 부딪쳤습니다. 저도 안 되겠다 싶어서 자를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죠."

"왜?"

"밑에 자식이 다섯 있었습니다."

"물러 터졌군."

"그러게 말입니다."

꾸그그긋

인사 명부가 구겨졌다.

"이놈이... 제 상인 11명이나 죽이라고... 사주했단 말입니까?"

약간의 온정.

그 물러 터진 온정 때문에 다른 가족들을 죽이는 이 사달이 터진 것이란 말인가?

"그렇진 않네."

페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프랭크 폰테인이라는 자가 연루되어 있다고 확신하지만, 주동자는 될 수가 없어."

"확신하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주제가 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은 했지만, 스테판은 납득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난민들의 발자국을 제외하고 12명의 발자국이 오갔다고 보고 되어 있다네. 그 말은 용병 32명이 이 암살에 가담했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약탈한 금액은 많게 잡아도 200골덴이지. 32명이서 잘 나눠서 갖는다 치면 3골덴 하고 25실링 정도겠군."

3골덴 25실링이면 꽤 많은 돈이다.

하지만 손에 피를 묻히며 번 돈치고는 작다.

"그것도 싸구려 인력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들은 자신의 흔적을 없애는 데 솜씨가 좋은 것들이야. 그런 놈들은 얼마 받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최소 인당 50골덴은 받고 시작하지. 싸게 잡았다 해도 전부 합치면 1천 골덴이 넘어가는 일이야."

"1천이면... 프랭크의 재정 상태로는 영혼까지 끌어모아도 안 될 돈이로군요."

스테판은 프랭크의 인사 서류를 내려놓았다.

"저를 흔들려는 배후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 배후는 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들인지...."

"그게 바로 좋은 소식일세."

페르다는 코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배후를 파악할 수 있었지."

페르다는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얹었다.

그것은 녹색 스카프.

어린 난민 소년의 손에 들렸던 물건이었다.

"이건...."

스테판은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형님 회사 직원들의 물건인데... 어째서 섭정님의 손에 들려 있습니까?"

"난민 중 한 꼬마가 작당질한 놈 중 하나가 스카프를 떨어트린 걸 보고 주웠다고 하더군."

"설마 그 배후가... 그 배후가...."

스테판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페르다나 스테판이나 지금 그 대화에 나올 이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충격에 휩싸인 스테판은 끝내 손에 들었던 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파창!

깨지고 내용물이 흘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페르다도 그 사사로운 것을 내버려두었다.

스테판은 양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몰랐다.

"...확실한 겁니까?"

"그렇다고 하더군."

스테판이 손을 뻗어 그 스카프를 건네받았다.

충격에 쪼그라든 동공이 스카프의 자수를 찬찬히 훑었다.

그의 시선에 고정된 것은 파스칼 가문의 문양.

그 뒤에는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하고 있다.

몇 번을 확인했지만 틀림없다.

가품이 아닌 파스칼 용병회사의 것이었다.

"형님 회사는 말입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스테판이 말했다

"파스칼 용병회사와의 계약은 악마와 계약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모르겠군."

"한번 계약하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스테판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걸렸다.

그러다가 곧 일그러진다.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걸리는 족족 표정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파스칼 용병회사와 계약이 끝나면 잠잠하던 도적 떼들이 곧바로 마차를 노린다고 합니다. 마치 누가 일부러 알려 준 것처럼 말입니다."

스테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신기한 일이긴 했습니다. 계약 만료 이후에 첫 상인들의 출정은 반드시 꼬이니까요. 강도를 당하든, 용병이 강도가 되든, 도망을 치든... 그렇게 열에 여덟은 언제나 화를 당하고, 그 여덟 중 일곱은 다시 형님과 계약을 맺으러 옵니다."

"그게 머칫의 자작극이라 생각하나?"

"필요가 수요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전 사업에서는 그 필요를 상대방에게 어필해야 하는 일입니다."

스테판은 최근에 머칫과 빚었던 마찰을 떠올렸다.

그가 말했다.

자신이 없으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보자고.

이건 단순히 소문에 있는 습격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악질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스테판과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선배이면서 아버지였으며, 후배이면서 동생이었고, 동기이면서 친구였다.

머칫은 그들을 앗아갔다.

단지 자신을 거슬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스테판의 손에 있던 스카프가 구겨진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괴롭다.

울고 싶은데, 울음은 나오지 않으며,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목은 메인다.

미친 듯이 괴롭고, 괴로운데, 이 괴로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더욱 답답하기만 하다.

그때였다.

루리가 방으로 들어와 페르다의 옆에 섰다.

"페르다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밤중에 말인가?"

그녀의 눈은 흘긋 머리를 싸매는 스테판을 향했다.

"예. 정확히 스테판 님과 페르다 님, 두 분을 뵙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저, 말입니까?"

"누구인가?"

루리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그 둘을 경악게 했다.

"머칫 파스칼이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섭정님."

머칫 파스칼이 응접실 반대편에 앉아 페르다에게 인사했다.

두 형제를 놓고 보았을 때, 페르다는 이렇게 생각했다.

'같은 피가 흐르는 게 맞나?'

기름기가 흐르며, 백옥 같은 피부를 유지하는 스테판.

상인답게 부티가 흐르고, 의자에는 커다란 복숭아 덩어리가 박힌 자국이 남아 있을 법한 범생이 타입이었다.

그러나 머칫은 구릿빛 피부에 짧고 거칠어 보이는 리젠트컷을 했다.

굵은 목과 넓은 어깨, 정복을 입었으나, 위협적인 근육의 라인이 깡패 두목처럼 느껴졌다.

머리와 눈 색이 달랐다고 한다면, 둘이 형제라고 직접 소개하지 않는 이상 남으로 봤을 것이 틀림없다.

"어서 오게. 머칫 경."

"경이라니. 그냥 잡졸들을 이끄는 십인장 수준의 나부랭이입니다."

머칫이 머쓱하다는 얼굴로 겸손을 떨었다.

극악무도한 빌런의 등장과는 거리가 멀게 호기로움이 느껴졌다.

페르다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지금 자기가 용의자로 뽑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니, 당연히 이쪽에서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거라는 듯이 굴고 있었다.

"동생 놈이 지금 많이 힘든 상황이라 해서 찾다가 보니, 이렇게 성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늦은 밤에 이런 환대를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힘들 때, 가족을 찾는 것도 좋은 일이지."

가벼운 잡담을 마친 머칫이 눈을 굴려 스테판 쪽을 보았다.

스테판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칫은 스테판을 위로했다.

"스테판이. 소식 들었다. 동부 상단이 궤멸당했다면서?"

"...."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녀석들이 네게 얼마나 충성하는지 알고 있는데, 그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겠구나."

"...."

"일단 우리 쪽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비보를 전해 두게 했다. 장례식도 이쪽에서 준비하도록 하마.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 있도록 해라."

그가 하는 말은 세상 좋은 형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 내막을 모르는 자들에게나 한해서였다.

스테판은 눈먼 장님도 귀머거리도 아니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간이었기에, 그 두꺼운 낯짝 속에 감춰진 것을 안다.

"참으로... 뻔뻔하십니다."

"응?"

스테판이 울분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침착하게 다시 말을 꺼내었다.

"형님이 사람을 보내 전부 죽이라 하셔 놓고, 왜 사람 좋은 척을 하고 앉았습니까?"

"...뭐?"

머칫의 한쪽 눈썹이 승천했다.

스테판의 마음속 불씨가 거칠게 타올랐다.

89화. 과거사

"스테판이."

머칫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려운 상황인 만큼 형이 이해하마. 나중에는 살인마 취급한 거는 마음 추스르고 사과하도록 해라."

그가 좋게 타이르듯이 이야기했지만, 스테판에게는 어린애 취급이나 마찬가지였다.

"웃기지 마십시오. 제가... 제가 헛다리 짚고 있다고 지금 그러는 겁니까?"

"넌 진심으로 형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냐?"

"증거도 이미 있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스테판은 손에 쥐고 있던 스카프를 꺼내었다.

파스칼 용병회사의 문양이 머칫의 눈에도 들어왔다.

"형님의 수법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필요가 수요를 만든다는 그 더러운 수법 말입니다! 제가 그 무역로를 독점하겠다고 한 이후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장사치 새끼들이 하는 헛소리를 믿는 거냐?"

"한 명이 아닙니다. 형님과 계약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하는데, 제가 어떻게 짚지 않을 수 있습니까!?"

머칫이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그 인간들이 당한 것들은 형이 그랬을지 모르지."

순순히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다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네 일에 이 형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이 잘난 스카프 말이냐? 이런 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그가 스카프를 팔랑이다가 테이블 위로 휙 던졌다.

"우리 상회 등록된 용병만 1만 명이고, 스카프 재고는 2천 개가 넘어. 누구 하나가 빼돌려서 우리 용병단이 그랬던 것처럼 꾸밀 수도 있는 일이다. 나보다 똑똑하면서 이런 생각도 못 하는 거냐?"

"제국 법정에 가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법정까지 가자고? 아예 멸망전을 해 보겠다? 이 새끼, 진짜 많이 화가 나긴 했구나. 가족끼리 법정까지 끌고 가겠다니 말이야."

"그놈의 가족 타령 그만하십시오. 당신이 힘들 때만 가족 타령하고, 먹을 때는 남남이지 않습니까?!"

"나 혼자만 배불리 먹으려고 했다는 소리냐? 어이, 스테판이. 네가 힘들 때도 내가 충분히 도와줬잖아. 편의도 봐주고, 해 줄 거 다 해 주는데, 씨X 뭐가 문제야?"

"아까 전부터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이끄는 그 도적 새끼들이 내 직원들을 죽인 그게 문제라고!"

"이 새끼가 진짜 끝까지 내 직원들을 삼류 찌꺼기로—."

"머칫 파스칼."

목에 핏대가 잔뜩 선 머칫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페르다가 그 이름을 부르자, 페르다가 보고 있었음을 알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섭정님. 가정사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 점은 신경 쓰지 않는다네. 미안하지만 이 이야기는 잠시 중단하고 나가 줄 수 있겠나? 스테판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네."

"물론입니다. 소인은 잠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머칫은 순순히 인사를 하고 그대로 물러났다.

머칫이 자리를 비우자, 스테판이 그 자리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볼 것도 없습니다. 저놈의 짓입니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스테판."

"지금 당장 잡아서 추궁해 봐야 합니다. 33명이나 죽여서 속이 후련했냐고 말입니다."

"그러고 싶었는데, 자네의 모습을 보니 안 되겠더군."

"제 모습? 제 모습이 뭐 어때서 그렇습니까?"

페르다는 냉철한 눈으로 쓱 보면서 대답했다.

"피와 복수를 갈구하는 귀신이나 다름없군."

"복수. 그 복수를 위해서 지금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과 맞지 않은 복수라는 게 문제지. 지금 하려는 복수는 자네 과거에 있는 원한까지 끄집어내고 있지 않나?"

"저는...."

아니라 하고 싶었지만, 페르다의 말에 조금은 냉정해질 수 있었다.

"맞는 말인 거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형님에게 어렸을 적에 시달렸던 일이 많았습니다."

"말해 보게."

"어디 맞고 왔을 때, 제 근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목검을 들고 단련시키겠다고 죽도록 팼었습니다."

페르다는 작게나마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사생아 취급당하던 페르다는 그런 험한 꼴을 몇 번이고 당했었다.

"그리고 저는 그...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그만두죠."

"아니. 그러지 말게."

페르다는 한탄을 멈추려던 것을 막았다.

"지금 자네가 머칫에게 지닌 분노를 모조리 표출하도록 하게."

"예?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도움이 될 테니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럼 명령으로 바꾸지. 얼른 그가 했던 일들을 저주하고 소리지르게."

페르다의 요구에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스테판은 억지로 그 이름을 내뱉는다.

"머칫... 이... 이.... 개...새끼...."

답답하게 시작했으나 상관없었다.

"이...."

구멍이 뚫린 보처럼 감정의 표출은 순식간에 과격해진다.

"이런... 더러운 새끼가!!!"

스테판이 눈 뒤집혀 왁왁 소리치기 시작했다.

"젠장 그 망할 새끼!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더니 그런 식으로 나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어!? 어!?"

"...."

"네놈도 똑같이 만들어 줄게! 어릴 때 내 뼈를 박살을 냈던 것처럼 당신의 뼈도 아주 박살을 내 버려 줄 테니까!"

그 이후로도 과거에 쌓였던 원한들을 줄줄이 소리치면서 날뛰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있자, 스테판은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크켁! 켁!"

"한 잔 마시게."

"켁켁...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는 스테판.

기운이 쫙 빠진 사람처럼 늘어졌다.

"조금 나아졌나?"

"예, 섭정님 덕분에... 화병은 면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눈이 좀 트였겠군. 다시 이야기를 진행해 보도록 하지."

스테판은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고, 페르다는 그에게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머칫 파스칼의 소행처럼 느껴지지 않는군."

"...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용병회사의 스카프를 주고 범인이 머칫이었던 것마냥 떠들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아니라니?

"그럼 왜 제 형을 저주하라고 하신 겁니까?"

"자네가 가지고 있는 그 앙심들에 사로잡히지 말란 뜻이었지. 이성을 흐릴 수 있는 것들을 계속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지 않던가?"

페르다의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맞았다.

그토록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저주하고 해 본 적이 있던가?

어렸을 때는 입에 주먹을 넣고 울기 다반사였으며, 어른이 되어선 홀로 책상 구석 칸에 숨겨 둔 술이나 홀짝 마시면서 엉엉 우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은 고성으로 쏟아 낼 수 있었다.

"파스칼 용병회사와 계약하는 것은 악마와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지?"

"예."

"자네는 그걸 원래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네 형이었던 머칫 파스칼을 의심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 의심을 내게 보여 준 적이 없었다네."

페르다는 차분하게 물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때는 정신이 없었고...."

"그런 이유가 끝인가? 단지 생각하지 못했다고?"

페르다의 질문에 스테판도 고개를 저었다.

비단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스테판은 생각했다.

어째서 이 짓을 했을 때, 머칫을 가장 먼저 의심하지 않았는지.

'머칫 파스칼.'

가족이자 원수.

어릴 때부터 끓어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었다.

머칫은 그 기질을 살려서 용병대장이 되었다.

그에게는 카리스마가 있으며, 리더십이 있다.

리더십이 있다는 것은 시정잡배에게 없는 중역의 무게를 안다는 것이다.

상인이 또 다른 경영권자를 분석하듯이 그의 모든 것들을 데이터된 사실로만 판단해 보았다.

그러자 답은 놀라우리라 만치 명료하게 나왔다.

"...가능성이 작았습니다."

"이유는?"

"형님이 자신과 계약하지 않는다면, 보복한다는 건... 솔직히 말해서 미신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무덤을 파는 행위였죠. 사실은 싸구려 용병들을 기용하고, 위험 지역에 들어가서 봉변을 당했던 것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냥 비지떡을 사 놓고 애꿎…은 남 탓을 하는 것들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스테판은 감정에 휘어 잡힌 나머지, 그런 기초적인 것도 놓치고 말았다.

"그러니 스카프 하나로... 그 의심이 확실할 수는 없다는 게 지금의 제 의견입니다."

스테판은 스스로 결론짓고도 믿기지 않았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가 한 짓이 틀림없다고, 잔혹하게 복수를 해 주겠다고 생각했던 스테판이었다.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판단했으며, 그 감성에 사로잡혀 눈이 멀었다.

만약 페르다가 그걸 떨치게끔 하지 못했더라면, 머칫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스테판이 허탈함을 삼키고 있을 때, 페르다는 그 대답을 듣고 루리에게 말했다.

"머칫 파스칼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다오."

기다리고 있던 머칫이 자리에 앉았고, 다시 삼자대면이 되었다.

감정으로 격앙되어 터지려 하던 것과 다르게 차분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머칫 파스칼. 스테판과 이야기는 끝냈지만, 자네가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말해 주게."

"말씀하십시오, 섭정님."

"이번 스테판에게 일어난 습격과는 연루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는가?"

페르다가 간담이 서늘하다고 느낄 정도로 싸늘하게 물었다.

머칫은 검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제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제 가족이 소중한 만큼 남들도 소중하다는 것 말입니다. 저와 제 직원들은 남을 지키기 위해서 돈 받고 검을 듭니다. 검을 들고 돈을 받으면 그것은 삼류 양아치요 도적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고맙네."

머칫의 말을 들은 페르다가 테이블에 올려진 스카프를 턱짓하며 말했다.

"이 스카프가 용병회사의 개입과는 관계가 없다면, 자네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다는 것이겠군."

"저와 제 동생 사이를 말입니까?"

머칫이 눈을 부릅떴다.

얼굴에서 보이듯이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감히 어떤 자식이 겁도 없이 가족을 건드리려 했단 말이야?"

"저는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차분해진 스테판이 대꾸했다.

"누구인가?"

"제 누이인 틸다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또 다른 가족의 이름.

"표면적으로는 단돌로 상회면 충분하다는 듯이 굽니다만, 누구보다 파스칼 상회를 가지고 싶어 하는 년입니다. 아주 진득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방해해 왔죠. 게다가 저와 형님, 둘이서 이간질당해서 좋을 것도 그년뿐입니다."

"그래, 그년이면 확실히 이러고도 남습니다."

가족에 상당히 애착이 강했던 머칫또한 자기 누이라는 말에 동조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틸다 파스칼은 자네 가족이 아니던가?"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가족이라 할 수도 없는 년입니다."

머칫은 분개하면서도 피를 억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와이프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뭔 짓을 하려 했는지 아십니까? 제 와이프에게 임신 축하를 빌미로 독을 보냈더군요. 다행히 제가 멋도 모르고 먹어서 고생했습니다만, 와이프가 먹었으면 틀림없이 유산을 했을 겁니다. 귀여운 구석 하나 없어서 짜증이 나는 누이긴 했습니다만, 그때 제대로 선을 넘었죠."

그 말에 놀란 것은 스테판이었다.

"5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확실하지는 않아서 아무한테도 얘기는 안 했다. 난리 피워 봐야 그년이 좋아할 것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히 한바탕 뒤집고 죽일 년 살 년 하면서 날뛰는 것이 머칫의 성격이라 생각한 스테판에겐 놀라운 이면을 본 셈이었다.

"하여튼, 능력도 없는 년이 욕심만 많았습니다. 자수성가할 능력이 없으니, 노총각인 앙리 단돌로를 꿰어 내서 단돌로 상회를 먹은 후 아버지 회사를 잡아먹으려 하는 거겠지만요."

머칫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혈관이 흉악하게 솟아올랐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섭정님?"

머칫이 물었다.

"저희가 당장이라도 엎어서 그년을 여기로 끌고 올 수도 있습니다."

"용병회사 이미지만 더 안 좋아지지 않겠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마녀 같은 년을 화형대로 밀어 넣을 수 있으면, 제가 악마가 돼도 상관없습니다. 가족들에게 손을 댔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지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

거친 바닥에 굴렀던 용병인 만큼, 분노라는 활력소를 쓰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직접 해를 가하는 짓을 해선 안 됩니다."

그 말을 한 것은 스테판이었다.

"뭐? 스테판이, 너 바보냐?"

"생각해 보십시오. 폭력을 휘두르는 건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악질적인 짓을 시작했다는 건 분명히 그 녀석의 계획이 시작되었다는 거니까요. 최악의 경우엔 파스칼 가문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하긴...."

평소 틸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둘이었기 때문에 설득하는 데 긴말이 필요 없었다.

"악의 하나는 진득한 녀석입니다. 틸다의 짓이라는 확증이 나오기 전까진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됩니다."

"그럼 어쩌자고?"

스테판이 날뛰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말했다.

"우선은 이 오해를 풀지 못하고 돌아가는 걸로 하는 겁니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주는 거죠. 그렇다면 분명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년의 꼬리를 잡아내자 그 말이로군."

머칫이 무릎을 탁 쳤다.

"좋아. 찬성이다. 어디 그년을 제대로 끌어내보자고."

"알겠습니다."

원수가 될 뻔했던 두 형제가 공동의 적 앞에 의기투합했다.

90화. 악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