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 60-65

60화. 악마와의 거래

"슬슬 인간들과 용들이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두컴컴한 회의실.

서로의 정체조차 가늠할 수 없는 그 안에서는 비밀스러운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눈치채고 있다니?"

"대륙 마물의 증식을 마족의 재림으로 연관시켜서 발의한 것 때문에 그런가?"

"어떤 놈이 그런 의심을 하고 있단 말이오?"

"에스콜레이아 쪽이더군."

"에스콜레이아라면 대륙 지성의 집합체, 지식의 등대가 아니던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대수롭지 않은 듯이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온갖 지성들이 모인 만큼 해괴한 자들도 많은 곳이오. 대륙의 높으신 분들이 쉽게 믿진 않을 테지."

"실제로도 그다지 동조하는 기색은 없었소. 그 두 개가 연관되었다 하더라도 귀족 나으리들을 설득하진 못하니까."

"그래도 그 두 개를 연관시켰다는 점에서 신경 쓰이긴 하는구려."

"결론은 어떻게 됐나?"

"그래서 백룡 블랑카로스가 직접 보류하더군."

"시간은 벌었군그래."

"인간들이라면 몰라도 용들은 지금 조사를 시작하고 있을 거요. 발각된다면,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진압되겠지."

모두가 고개를 떨구며 침음을 흘렸다.

공들여 온 만큼 좌절도 큰 법.

"어떻게 하시겠소? 내 생각엔 지금이라도 눈속임을 하는 편이...."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오랜 침묵을 지키던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열띤 분위기를 한 번에 휘어잡았다.

그가 이곳의 대장이었다.

"어째서입니까?"

"백룡은 그걸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걸 바란다니?"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움직인다면, 대공의회에 내부의 적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눈치챌 거란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예정대로 가는 겁니다. 그러는 편이 낫습니다. 세월을 걸쳐서 터질 게 터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면 충분합니다."

"그,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변수라고는 댁들의 입밖에 없습니다."

모욕적인 발언이지만, 서로의 눈치만 슬쩍 볼 뿐.

그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의견이 그러시다면...."

"그것 말고 다른 것은 특이 사항은 없습니까?"

"다른 것이 있다면 역시...."

굳이 더 떠올리려고 용을 쓰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의 인상에서 강렬하게 남았던 인간은 하나.

"페르다 발드로바라는 사내가 있습니다."

그가 짚은 인물에 깜짝 놀랐다.

"발드로바의 애송이 약혼자 말인가?"

"용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멍청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뭐가 있소?"

"소문을 들었을 땐,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하지만 직접 보니깐 사뭇 다르더구려."

중년은 마족 추종자이기 전에 한 명의 귀족이었으며 영주였다.

"아무래도 그자를 경계해야 할지 모르겠소."

"경계 태세는?"

"걸어 다니는 요새, 알베르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지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섣부른 판단 같소."

"알베르도, 그 망할 학살자가 위협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5년이었소. 그런데 임기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 것을—."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그깟 애송이한테 바짝 쫄았다니. 나이를 허투루 먹으셨군."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봤으며, 그 사내 또한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모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면을 쓴 한 남자가 회의실로 걸어와 의자에 앉은 귀족에게 귀띔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령이 방금 안타까운 소식을 보냈소."

실패에서 오는 당혹감.

"에스콜레이아 덧씌우기는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소."

덧씌우기는 작전명이었다.

마족 중 도플러를 이용하여 고위 귀족들의 자리에 서는 작전.

이 중에서는 이미 덧씌우기로 침투한 자들도 있었다.

"그걸 막아 낸 것이 다름 아닌 페르다 발드로바라고 하는군."

방금까지 그를 조롱했던 자들은 입을 쩍 벌렸다.

모든 사람들이 짜고 친 것처럼 일제히 시선을 대장 쪽으로 돌렸다.

남자의 복잡한 얼굴은 슬쩍 미소로 바뀌다 씁쓸하게 구겨졌다.

그들의 대장 또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짜증이 났다.

"도플러의 존재가 알려진 것 같습니까?"

여유 한 점 묻지 않은 질문.

인간을 둔갑하는 마족이 있다는 건 단순히 음모가 탄로 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폭탄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곳곳에 심겨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이 다름없으니까.

희망 한 줌 없이 철저하게 이성으로 사고하여 내린 결론을 말했다.

"탄로가 날 것 같습니다."

"흠...."

대장은 손가락으로 얼굴을 톡톡 쳤다.

"에스콜레이아 덧씌우기의 총책임자가 누굽니까?"

"...."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제, 제가 이번—."

그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손을 들었던 사내의 목이 날아갔다.

몸이 그대로 고꾸라져 바닥에 쓰러진다.

"허억...."

"흐읍...."

혈향이 진하게 풍기는 곳에는 침묵과 공포가 자리잡았다.

"전령."

"예."

비보를 전하러 온 남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대장은 그 사내에게 무언가를 던져 주었다.

검은 액체가 든 주사기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배틀혼 자작입니다."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가면을 쓴 전령이 그 주사기를 자신의 목에 꽂았다.

순식간에 검은 마네킹이 된 그 사내는 잘린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거침없이 흡수했다.

배틀혼 자작이 죽고, 새로운 배틀혼 자작이 그 자리를 꿰찼다.

순식간에 비워진 공백에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죽던 그들의 자리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도플러에 관한 연구는 마무리 짓도록 하세요. 속 좋게 연구하는 시기는 이제 끝입니다."

"알겠습니다."

"남은 재고들은 폐기 자료와 관련된 인물들을 전부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예."

정리하는 방법은 아주 쉬웠다.

그들의 연구 시설은 산 아래에 있다.

산을 무너트리면 그만이다.

* * *

"대공의회가 끝이 났는데, 돌아가시지 않는 겁니까?"

루리가 물었다.

"일이 생겼다."

"발드로바 님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알고 있다. 기다리게 하는 게 내 마음에도 걸린다."

"그런데도 가지 않으실 겁니까?"

"중요한 일이다."

마물이 등장했다거나 그런 일들을 시답지 않게 만들 정도로 중요했다.

발드로바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들을 제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담긴 곳이다.

그것은 루리도 알고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실버윈드의 영역입니다."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고즈는 페르다 님을 증오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또한 알고 있다."

"마족은 공동의 적입니다. 하지만 적의 적은 친구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영역에 들어오신다면... 피를 손에 묻혀야만 합니다."

실버윈드는 마족을 증오한다.

페르다도 발드로바를 괴롭히는 마족을 혐오한다.

그러나 페르다를 반기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일을 은밀하게 진행하는 것이다."

"...."

"위험하지만, 끝난다면 뒤탈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루리의 입술이 계속해서 달싹였다.

가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이 입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가실 겁니까?"

"그래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너는 돌아가도록 해라."

"...."

"내가 없는 동안, 부군을 지키는 것이 네 일이다."

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당연히 그 말에 거부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좀처럼 입에 나오지 않았다.

루리는 그의 뜻을 거스를 자격이 없었다.

"무사히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루리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페르다는 비밀 원정을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기동을 위주로 물자를 최소한으로 잡고, 중규모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조금 무리를 한다고 해도 하루는 걸릴 것이다.'

하루.

한 나라를 공격하는 데 있어선 빠르지만, 일개 연구 시설은 늦다.

게다가 상대 측에서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에스콜레이아 총장 납치도 실패했다는 것이 이제 귀에 들어갔을 터다.

그들은 발 빠르게 모든 상황에 대비할 것이다.

'루리 정도 되는 속도로 모두를 안고 날아가면 좋겠지만.'

그곳은 실버윈드의 영역이다.

루리가 실버윈드와의 대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미 경험했다.

페르다는 루리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래선 안 된다.

'이 일은 최대한 우리 선에서 끝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전력.

'연구소장이 5서클의 마법사라고 했었던가?'

그 휘하 연구원들은 전부 1,2성 쯤 되는 보조원에 불과하고, 연구소장이 강한 마법사라고 하였다.

어떤 마법을 구사하며 어떻게 싸우는지도 알아내면 좋았을 테지만, 고문으로는 없는 정보마저 캘 수는 없었다.

'그 마법사를 내가 맡아야 하겠군.'

물론 정면 승부는 해선 안 된다.

페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를 생각해보았다.

'영창을 하지 않아도 다룰 수 있는 그림자.'

구현될 때는 쉐도우 핸드의 형태로 하지만, 문어다리 촉수나 혹은 양피지처럼 납작한 형태로도 가능하다.

빛이 없을수록 그 위력이 강해지며, 빛이 강렬하면 형체가 부서질 정도로 약해진다.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기술도 아니다.'

은밀함과 모략이 중심인 바르바토스의 마법이다.

정면 승부보다는 수 싸움과 상대의 허를 찌르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쉐이프 오브 쉐도우에 의하면 이것은 몸의 일부.'

그림자를 몸의 일부로 쓰며, 그렇게 인식된다.

'그렇다는 건 마법 또한 쉐도우 핸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능한 일이었지만, 마법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단순히 실제 팔이랑 비슷함을 넘어서 마력이 흐르는 마력 통로와 회로까지 구현하는 것이니까.

페르다는 구현해놓은 쉐도우 핸드 하나에 마력을 집중해보았다.

마력이 발바닥 아래로 흘러 이어진 검은 그림자를 타고 움직여 검은 손에 응집되었다.

마법진을 그리기 위한 일련의 단계를 거쳤다.

검은 손에서 푸른 입자들이 뿜어져나오면서 하얀 마법진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이걸로 언제 어디서든 상대에게 기습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진 완성 시간은 평균보다 4배 정도로군.'

능숙한 마법사라면 눈치채는 순간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다.

상대가 어떤 타입인지, 그리고 전장이 될 장소는 어디인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들어가지 않는 이상, 무모한 도박수였다.

'그 점에 대해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예측보다는 기지.

무수히 많은 가설을 내세우는 것보다 즉각적인 반응이 중요하다.

그건 페르다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러한 수단이 있다는 사실만 알아둔 채로 자리에 누웠다.

잠을 청하려 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민을 안는 것보단 내일을 기약하는 편이 나았다.

그때였다.

눈을 붙이려던 그 순간, 페르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페르다의 직감이 주변에 이상을 감지한 것이다.

'음....'

성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당연하다.

발드로바의 성은 제국 황제들보다 더욱 뛰어난 차단 마법이 겹겹으로 둘러진 장소다.

누군가의 침입이 쉽게 용인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백작가의 저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발드로바 성에 비하면, 바닷물에 썩어 가는 그물망처럼 허술하다.

'누가 오는 거지?'

페르다는 그 마나의 울렁거림을 듣고 느꼈다.

곧 알싸한 유황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안녕, 달링?"

한 번 들어 본 적이 있는 요염한 목소리.

음욕의 악마, 시트리였다.

"꺼져라."

"어머, 너무 매정하네. 우리가 그런 사이였어?"

그녀의 뱀 혓바닥이 입술을 스윽 훑으며 다가왔다.

"너와 계약할 생각은 없다, 시트리."

"나도 너와 계약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너 같은 부류들은 딱 질색이거든. 다루기도 어렵고 다룬다고 제대로 다뤄지지도 않을 놈들."

"그럼 뭐 하러 시간 낭비를 하고 있나? 꺼져라."

"성급하긴. 비즈니스를 하러 왔어."

페르다의 얼굴은 더욱더 구겨졌다.

"악마와 비즈니스를 하는 멍청이가 있나?"

"있지. 여기."

그녀는 검지로 페르다를 살포시 가리켰다.

페르다는 귀를 막으려 양손을 들었다.

"당신이 습격하려는 연구 시설은 6시간 이내로 모두 파괴될 거야."

그의 손이 멈췄다.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정보였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얼굴은 하지 마. 명색의 대악마가 그것도 모르겠어?"

시트리는 페르다의 반응을 즐겼다.

"그래서 어떻게 알고 있지?"

"왜 이래, 달링. 내가 개처럼 부리는 것들은 대부분이 고위 귀족들이야. 평범한 쾌락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덩치 큰 아기들 말이야. 개중에는 마족과 손을 잡은 애들도 있단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던 이야기였다.

에스콜레이아 총장 납치를 진행했던 것이 그 증거였으니까.

"총장 납치는 실패했고, 그 총장이 되어야 할 놈은 생포되었지. 만에 하나 고문으로 장소를 불어 버린다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상황이잖아?"

"그러니 파괴해 버리는 것이로군."

"지금 출발해도 늦을 거야.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수단들을 전부 합해 봐야 하루 내지 이틀은 걸릴 테니까."

"빠르게 움직인다면, 지금도 움직일 수 있다."

"그 꼬마 스폰을 이용해서? 물론 가능하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실버윈드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화이트 하우스에 있을 때, 페르다가 멋대로 실버윈드의 영역에 발을 들일 때부터 그들에겐 이미 적이었다.

구실이 생긴다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곤란하다.

시트리는 현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와서 비즈니스를 하자고 말하는 것이겠지.

"얼굴을 보니깐 이야기가 이제 잘될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내 직감이 맞을까?"

시트리가 대답을 재촉했다.

페르다의 푸른 눈동자가 의중을 읽히지 않으려 고요하게 움직였다.

"내게 뭘 해 줄 수 있지?"

시트리가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팍에다가 손을 집어넣었다.

그 안에서 두툼한 두루마리 스크롤을 꺼내었다.

"밴딩 브리지 마법이 새겨진 스크롤이야. 무슨 마법인지 알아?"

"차원 내 두 공간을 잇는 마법, 텔레포트 계열이지."

"어머, 지적인 남자네. 맞아. 그 명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는 있지?"

어지간한 감지 마법조차 싸구려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으며, 공간과 공간을 잇기 때문에 지속성이 있다.

은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그의 상황과 딱 맞은 마법이다.

"그것뿐인가?"

"더 필요하다면, 내 하수인들이 실버윈드의 잡것들과 놀아 주고 있을게. 그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연구 기밀까지 털어갈 만큼 시간을 주도록 하지."

먼 거리를 단번에 이동하고, 시간까지 벌어 준다는 것이 시트리의 조건.

조건이 너무 좋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렇기에 덥석 무는 대신 그 제안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상대는 악마다.

악마는 자신에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절대로 불리한 계약은 하지 않는다.

이만큼 파격적이라는 것은 상응한 난이도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게 뭐지?"

"그 시설 안에는 멍청한 악마 하나가 있어."

"멍청한 악마?"

"그래. 남자를 홀리러 가랬는데, 그 남자한테 홀딱 반해 버린 멍청한 아이야."

"그게 가능한가?"

"그러니깐 말했잖아, 멍청한 악마라고."

시트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걔가 거기서 죽으면, 지옥에도 못 와. 완전히 소멸되어서 공허로 빠져 버리거든. 그러니 걔를 데리고 나와서 밖에서 좀 죽여 주겠어? 지옥으로 역소환되게?"

"아주 정이 넘치는 제안이로군."

"어쩌겠어? 같은 악마들끼리 챙겨 줘야지. 온정이라는 게 있잖니?"

"지나가던 개가 웃는 소리를 하는군."

시트리는 음욕의 악마다.

가장 온정과 거리가 멀다.

"참나, 그래. 사실대로 말해 줄게. 내 딸 중 하나야."

"그렇군."

"나이가 찼으니 독립시켜야 하는데.... 하아, 어쩌겠어? 엄마가 구해 주는 수밖에 없지. 치마폭으로 감싸 줘야 하는데, 치마가 너무 얇고... 짧아서 말이야."

시트리가 유혹하듯이 치마를 나풀거렸다.

"네 제안은 곧 구출과 동시에 우리들을 돕겠다는 소리로군."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어때? 참 좋은 제안이지 않아?"

페르다는 재차 생각해 보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문장뿐이었다.

악마와 거래를 하지 마라.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고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나?"

"지옥 대악마, 시트리의 이름으로 맹세할게. 너희들을 함정에 빠트릴 의도는 없어. 그 아이를 구출하면 너희 임무는 그걸로 끝이야."

시트리가 확답했다.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비즈니스 하도록 하지."

"생각보다 시원하게 나오는구나? 좋아."

시트리는 공중에 띄웠던 스크롤을 침대 옆에 놓았다.

"끌어 줄 수 있는 시간은 지금부터 2시간. 한 번에 8명이 들어갈 수 있고, 8명만 나올 수 있어. 반드시 명심하도록 해."

그 말을 남기고 시트리는 어둠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갔다.

그녀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지자, 동시에 페르다의 방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콘실러스 백작과 무장한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섭정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안에서 악마의 침입이 감지되었습니다, 잠시 수색을—."

"아니, 그럴 필요 없네. 그 악마는 갔으니까."

"혹시 악마가 무슨 말을—."

"그리고 원정은 취소일세."

"예? 그게 무슨...."

페르다에겐 당장 설명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니 명령할 뿐이었다.

"1시간 이내로 작전을 시작할걸세. 정예병들을 소집하게."

61화. 잠입

콘실러스 백작 영지에 악마가 침입했다.

그 사실에 한번 발칵 뒤집히는가 싶었지만, 오경보로 발표하고 가라앉혔다.

이제부터 그들은 은밀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우리들이 향할 곳은 6시간 후에 파괴된다."

"6시간 후에 파괴된다면 지금 움직여도 너무 늦겠군요."

그들은 어제 하루 종일 원정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기동력을 높인 군장을 착용했고, 마법도 준비했다.

그렇게 해서도 걸리는 시간은 하루였다.

하지만 정작 작전지는 아침 해가 뜸과 동시에 없어진다.

"그 정보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콘실러스가 물었다.

"이곳에 침입한 악마에게 전해 들었다. 시트리더군."

"시트리라면 대악마 시트리 말입니까?!"

음욕과 환각의 악마.

유혹과 싸우며 정절을 지켜야 할 기사들에게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악마였다.

"악마의 말은 도무지 믿을 족속들이 아닙니다."

"괜찮네. 믿을 수 있을 거야. 그 악마와 거래를 하기로 했으니."

"악마와 거래를...?"

페르다가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악마와 거래라는 두 단어에는 언제나 한 가지 문장만 존재한다.

악마와 거래하지 마라.

공기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악마가 온 것도 모자라서 거래까지 했다니.

"의심하지 마라, 제군들."

콘실러스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경고했다.

"그대들이 입고 있는 그 검과 갑옷은 모두 발드로바 섭정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걸 잊었는가?"

질서는 곧바로 돌아왔다.

페르다의 은혜를 떠올렸다기보다는 콘실러스 자체의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의심스러운 것은 콘실러스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걸로 망설일 수는 없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콘실러스가 물었다.

"거래 내용이 무엇입니까?"

"마족 연구 시설에 악마 하나가 갇혀 있다더군. 그 악마를 풀어 주는 대가로 수단을 지원해 줬다."

"대악마 시트리가 풀어 달라고 요구할 정도라면 위험한 악마처럼 들립니다만...."

"자신의 딸 중 하나라고 하더군. 그 수많은 악마들 중 하나를 풀어 주는 대신 마족의 실마리를 얻는 셈이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아낀다더니. 악마에게도 정은 있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군."

페르다는 자신이 들고 있던 스크롤을 꺼내어 책상에 얹었다.

"그 거래를 받아서 이 스크롤을 받았다네. 우리들의 이동 수단이지."

콘실러스는 직접 보는 대신 전속 마법사에게 손을 까닥였다.

전속 마법사가 페르다가 보여 준 스크롤을 살피며 말했다.

"이건 8인이 왕복할 수 있도록 설정된 밴딩 브리지로군요. 이 정도 높은 수준의 마법을 제공받다니...."

"문외한이라 그런데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기본적으로 텔레포트 마법 중 하나인 텔레포트 도어와 유사합니다만, 작동 방식이 다릅니다. 차원 하나를 거쳐서 만들어지죠. 그 말은 즉, 일반적인 감지 마법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이 마법 자체는 지옥을 경유한단 소리로군."

"지옥을 경유한다고 하지만, 영향을 받을 확률은 극히 낮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콘실러스는 조금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지옥.

그 안에는 7개의 영역과 그곳을 다스리는 일곱 대공작이 존재한다.

죽은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이 영역은 발을 들이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다만 악마가 직접 준 스크롤이니 함정이 있는지 면밀히 살펴봐야—."

"아니. 마법 자체에는 이상이 없다."

페르다는 딱 잘라서 이야기했다.

올해 나이 40에 들어서는 이 마법사는 젊은 섭정이 탐탁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백작님께서 쓰는 것이고, 또 경험에서 나오는 연륜이라는 것이 제게는 있기에—."

"연륜은 나 또한 만만치 않게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이 스크롤에는 함정이 없어.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그만두지."

마법사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썩어 들어갔다.

18살짜리 애송이가 연륜을 운운하는 건, 괜히 말싸움을 하기 싫어서 말을 자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페르다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페르다는 쓸데없는 실랑이를 접어 두고 펼쳐진 지도의 한 군데를 가리켰다.

"우리가 텔레포트 될 장소는 이곳일세. 동굴 안쪽이라고 하더군."

"연구 시설에서 가깝군요. 접근한다면, 10분 이내에 가능하고, 연구 시설을 파괴하기도 전에 저희가 탈취할 수 있습니다."

노련한 장교인 콘실러스가 머릿속에서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총 8명이라 하였으니, 둘은 밴딩 브리지를 확보하는 수비조, 그리고 나머지 6명은 2개조로 각각 임무 하나씩 맡으면 될 것 같습니다. 기사 5명과 마법사 1명을 선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제드를 데려갈 것이니, 5명만 선별해 주게."

"알겠습니다."

소집한 기사들을 스윽 보다가 한 명씩 뽑았다.

"한스, 마르코, 코윈, 빌리, 필립.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호명된 기사들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명을 받아들였다.

전장에 나가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명예로운 순간임을 아는 자들이었다.

페르다는 슬쩍 제드를 흘겨보았다

호위 임무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그의 눈이 노쇠한 개처럼 축 늘어졌다.

"제드 경. 움직이도록 하세."

"에."

그는 명예고 무엇도 없었다.

어쩔 수 없어서 가는 것일 뿐.

까라면 까야지.

* * *

작전 개시 10분 전,

북부의 혹한을 대비하여 방한 장비를 단단히 갖춘 채 다시 작전실로 모였다.

선별된 인원을 바탕으로 콘실러스가 작전 개요를 설명했다.

"이번 작전은 정보 탈취와 구출이 주된 임무이다. 3개 조로 나눌 것이며, 코윈 필립, 입구 확보를, 섭정과 나, 그리고 마르코는 정보 탈취를, 그리고 한스, 빌리, 제드 경은 구출을 맡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구출해야 하는 대상의 특징이 있습니까?"

"악마에 분홍색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분홍색이면 확실히 눈에 띄겠군요. 뿔이 달리고 검은 자를 가지고 있는 악마를 구출하도록 해라. 알겠나?"

"예!"

"그럼 마지막 점검에 들어간다!"

마지막까지도 점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금 들어가는 곳은 적진.

적진 속의 적진이다.

조금만 실수해도 모든 것이 수틀리게 될 테니 군기로 단단히 무장했다.

이야기를 듣던 제드가 떡 진 머리를 긁적이며, 페르다에게 슬쩍 다가갔다.

"섭정님."

"왜 그러지?"

"그 우리가 들어가는 곳, 8인 게이트지 않습니까? 8명이 가고, 8명이 돌아오는 곳이잖아요?"

"그래."

"그러면 그 악마 년은 구출 못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8명이 들어가니, 나올 수 있는 것도 8명.

안전하게 빼내오려면 8명이 아닌 7명이 되어야 한다.

"그 점에선 걱정할 필요 없다. 악마들은 죽으면 지옥에 역소환되니까."

"아, 그러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되는 겁니까?"

그 말을 듣고 페르다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그 자리에서 죽이지 말고 내게 데려오도록 해라."

"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역소환만 시키면 끝일 텐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

그러자 페르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면 너무 쉽게 끝이 난다."

그리고 쉬운 일은 언제나 뒤가 좋지 않은 법.

적어도 페르다 자신의 인생은 그래 왔다.

* * *

작전 시작 10초 전,

"게이트 오픈!"

콘실러스의 지시에 따라 마법사가 스크롤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스크롤에 있는 마법진이 마력을 흡수하면서 새하얀 빛을 발하였다.

잠시 후 스크롤 위, 허공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산들바람을 맞은 샘처럼 움직이던 공간은 점점 펼쳐지더니 원형 형태로 또 다른 공간을 비추는 창문을 만들어 냈다.

어두운 동굴, 그리고 그 앞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는 바깥 모습이 보였다.

털가죽 코트로 단단히 무장한 콘실러스가 입을 열었다.

"투입!"

입구를 확보하는 수비조 두 명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잇따라 움직인다.

잘 훈련된 군인이자 기사답게 일사불란하게 길을 확보했다.

"밴딩 브리지 작동 시간은 한 시간. 그 안에 내부를 파악하고, 구출과 정보 탈취를 시도한다."

"예!"

"작전 개시!"

수비조를 제외한 2개 조가 각자 맡은 바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살아서 봅시다."

"재수 없는 소리 하는구만."

"형님 죽으시면 형수님 제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어디 한번 해 봐라. 무덤 파고 다시 돌아와서 네 거시기를 잘라 버릴 거니까."

형제애 깊은 기사들이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흩어졌다.

촉박한 시간인 만큼, 눈보라 속에서도 속보를 유지하여 걸었다.

콘실러스는 노쇠하지만, 기사로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그조차도 북부의 눈보라는 뚫기가 만만치 않았다.

'섭정님께선 어떠시지?'

페르다의 몸은 기사가 아닌 마법사.

마법사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축에 속할 정도로 여리다.

혹여나 바로 낙오된 것이 아닌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았다.

'잘 따라오시는군.'

놀랍게도 거리가 벌어지는 기색이 없었다.

조금은 배려해서 걸으려 했던 콘실러스가 생각을 바꾸었다.

"속도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콘실러스도 사정을 볼 필요 없이 빠르게 움직였고, 뒤따라가던 페르다 또한 그 속도에 맞춰 걸어갔다.

'날씨가 거지 같군.'

페르다는 이 상황이 속으로 내키지 않았다.

가뜩이나 어두운데 시야가 앞을 가리고 있다.

무거운 털 코트인 데다가 눈이 내리고 맞바람까지 맞고 있는 상황.

평소였다면 페르다는 바람에 날아가 버려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으리라.

그러나 그러지 않은 것은 그의 몸을 지탱해 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쉐도우 핸드.

페르다의 코트 속에는 쉐도우 핸드가 바닥을 짚고, 코트를 어깨 위에 들어 올리면서 몸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몸 전체를 덮을 수 있어서 다행이군.'

그림자의 힘은 어둠에 비례한다.

그림자가 약하면, 페르다의 근력보다 못한 수준이 되지만, 강하면 일개 병사의 근력은 가능하다.

게다가 어두운 공간에서라면 쉐도우 핸드를 몇 개나 꺼낼 수 있었다.

'손 여러 개로 땅을 짚는 게 짐승처럼 걷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겉은 그럴싸해 보이니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이곳입니다."

콘실러스가 슬쩍 눈을 치우자, 반딧불이처럼 은은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안에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콘실러스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길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알겠네."

좁은 틈을 능숙하게 들어가는 콘실러스.

잠시 후, 그 웃음소리는 뚝 끊어진다.

"넌 뭐, 커흑...."

"무슨 일이야, 갑자기 커억...!"

죄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단말마를 내며 쓰러졌다.

그 이후로 두어 번 정도 더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고, 멀어졌던 발소리는 다시 돌아왔다.

"길을 터놨습니다. 부디."

콘실러스가 정리한 길에 있는 곳은 버려둔 창고로 향하는 복도.

그 복도에는 일방적인 살육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항은 없었다.

죽은 경비들의 무장은 전부 외투와 함께 걸려 있는 상태였다.

살인적인 눈보라를 뚫고 올 멍청이는 없는 데다가 이곳에 침입한 여태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속된 말로 이곳은 꿀 자리였다.

콘실러스는 미리 수색해 얻은 약도를 확인했다.

"마르코, 생활관 쪽을 맡아라. 나는 행정반과 순찰조를 맡겠다."

"알겠습니다."

"아니."

페르다가 불쑥 끼어들어 생활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생활관은 내가 맡도록 하지."

"괜찮겠습니까? 60명이 넘습니다. 까닥하다간—."

"나는 마법사일세."

그 한마디로 우려의 목소리를 죽였다.

"섭정님의 뜻대로."

마르코와 콘실러스는 행정반과 순찰조를 정리하러 움직였으며, 페르다는 생활관으로 움직였다.

페르다는 품에 넣어 둔 단검 한 자루를 꺼내었다.

생활관의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것은.

드르르렁!

크어어어!

짐승 같은 코골이 소리.

'오랜만에 듣는군.'

페르다의 머릿속에서 문득 떠오른다.

마법사 밑 생활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들었던 소리.

그 소리에 밤잠을 몇 번이고 설쳤지만, 감히 불만을 말하진 않았다.

똥 냄새가 풍기는 화장실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나았으니까.

페르다는 벽에 걸려 있는 양초를 들고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페르다는 초를 기울여 그들 하나씩 살펴보았다.

'전부 인간이로군.'

제각기 다른 얼굴에 코골이까지.

전부 제 개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마족을 추종한다.'

마족은 세상이 파괴되길 바라는 혼돈.

세계의 적.

소외받은 자들조차 소외하는 족속들.

'발드로바의 적.'

간단하게 요약되는 그들의 특성.

그리고 이렇게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버림받았다는 뜻이었다.

"에이씨... 뭐야? 나 오늘 비번이야, 인마...."

"...."

"불 안 치우냐? 너 씨발 이 개 같은 새끼가 내가 눈 뜨면 너... 응?"

게슴츠레 눈을 뜬 청년이 페르다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넌 뭐야? 여기서 본 새끼가 아닌데, 뭐 하는 읍...?"

사내의 입이 막혔다.

검고 형체가 없는 무언가가 그를 단단히 구속했다.

저항하려고 해 보지만, 신음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페르다는 무심한 눈동자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게."

잘 벼려진 단검이 불빛에 번뜩였다.

"선택에 대가를 치르는 것일 뿐이니까."

페르다는 입을 살짝 오므린 채로 촛불에 가져갔다.

들숨에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요동친다.

마치 그들의 앞날처럼.

훅—.

* * *

"순찰조 전부 처리했습니다."

"행정반도 정리를 마쳤다네. 이제 남은 곳은 생활관이로군...."

그때, 어둠 속에서 페르다가 걸어 나왔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뒷짐을 지며 걸어왔다.

"처리했나?"

"예."

"그러면 이 근방은 전부 처리가 된 거 같군."

"섭정님?"

"왜 그러지?"

"얼굴에 피가 묻었습니다."

"아. 고맙네."

페르다는 무덤덤하게 검은 장갑으로 훔쳐냈다.

콘실러스가 브리핑했다.

"행정반 정리했고, 순찰조까지 모두 제압했습니다. 생활관을 제외하면, 병영에 남은 사람은 더 이상 없습니다."

"정보는?"

"행정반에 있는 것은 고작해야 서번트급에, 고기 방패로 쓸 것들의 인사 정보뿐입니다. 정보를 파쇄한 흔적은 없었으니, 간부동 쪽에 자료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몇 분 남았지?"

"40분입니다. 적어도 30분 안에 나머지 정리를 해야 합니다."

"서둘러야겠군."

좋은 정보를 얻고 구출을 성공해도 돌아가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휩쓸고 간 자리를 내버려둔 채 연구소장실로 발을 옮겼다.

연구소장실은 안쪽은 한밤중인데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빠짐없이 챙겨라. 곧 있으면 지시가 떨어질 것이다."

"예!"

"그건 이리 줘! 최근에 궁금해하셔서 가져가야 한다."

분주하게 서류와 물건들을 분류하고 있는 모습.

연구 시설을 파괴하기 전,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하수인을 부리고 있는 사람은 여성 다크 엘프였다.

'다크 엘프라....'

검은 피부를 제외하면 마족의 특징보다는 엘프에 가까운 종족들.

용마 전쟁 이전에 고드윈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나가려 했었다.

마족이 아니지만 마족에 못지않은 사악한 본성을 지닌 자들이다.

'린네라고 하던가?'

이 연구 시설의 총책임자이자, 최고 연구원.

도플러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이곳을 어떻게 기습하면 될까?'

그 생각은 깊게 할 필요도 없었다.

마법사부터 처리하면 그만이다.

"라이트닝 볼트."

피슝!

마법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62화. 검은 약

페르다의 손아귀에서 벗어 나간 번개 탄환이 머리를 꿰뚫는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모두가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어, 뭐, 뭐야!?"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적군.

페르다의 선제공격에 이어 콘실러스와 마르코가 일어서 적진으로 발을 들였다.

"크악!"

"크억!"

콘실러스와 마르코가 가장 앞에 있던 남자 두 명을 베어 넘긴다.

그제서야 그들은 상황을 파악했다.

"기습이다!"

"도, 도망쳐!"

그들이 혼란에 빠지려던 찰나, 여성이 소리쳤다.

"이런 멍청한 것들! 어차피 퇴로는 없다! 무기를 들어라!"

다크 엘프, 린네 소장의 명령에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착용했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린네 소장은 스태프를 들었다.

"감히 이곳을 습격하다니! 저격한 놈도 순순히 모습을 드러내라!"

페르다는 그 말에 순순하게 모습을 보였다.

린네 소장이 눈을 크게 떴다.

"회색 머리에 푸른 눈, 너는... 페르다 발드로바로군."

그녀는 페르다를 알아보았다.

"놀랄 노 자로군. 내 보금자리를 부순 놈 낯짝이나 한번 보자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직접 행차하다니."

"기쁜가?"

"기쁘다면 기쁘군.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게 됐으니 말이야. 모두 죽여라!"

하수인들이 페르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콘실러스와 마르코의 몸에서 고요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기사의 마나, 오러가 전신을 감쌌다.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는 일당백을 자랑한다.

일개 서번트급 20명을 상대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부웅—!

마르코와 콘실러스가 궤적을 그릴 때마다 하수인들은 맥없이 쓰러져 갔다.

결집력 없는 용병 무리나 다름없던 하수인들은 금방 사기를 잃었다.

다크 엘프가 그 모습을 보며 분노했다.

"이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비서!"

"예? 예!?"

"이리 와라!"

손짓에 얼 빠진 비서가 다가갔다.

다크 엘프는 메고 있는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검은 액체가 든 주사기였다.

다크 엘프는 비서의 목에다가 꽂아 버렸다.

"켁!?"

검은 액체가 비서의 몸속에 빨려 들어간다.

"으극... 으게게게겍!?"

주입당한 비서는 전신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경련하기 시작했다.

콘실러스가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하고 소리쳤다.

"마르코! 저게 변하기 전에 막아야 한다!"

"맡겨 주십시오!"

마르코가 검을 들고 변이하는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림없다!"

다크 엘프의 손바닥이 마르코를 향했다.

그녀의 손에서 마법진이 그려졌다.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마법.

포스 러쉬였다.

퉁!

"으억!"

손바닥 앞의 공간이 압축되더니, 그대로 충격파가 되어 마르코를 튕겨 낸다.

사내의 변이를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으겍! 게게겍!"

기괴한 소리를 내던 사내의 몸이 부풀어 오른다.

동시에 피부가 짙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옷을 찢고 회색 곰 정도의 크기가 되어서야 성장을 멈추었다.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피부에 붉은 눈, 그리고 뾰족한 이빨.

여실 없는 전형적인 마족의 특징이었다.

"마족...!"

"그 중에서 바운서로군."

속박 마법조차 완력으로 끊어내는 육체 특화의 마족들.

마르코와 콘실러스는 그 모습에 위압감을 느꼈다.

"그헤헤헤!!! 나도! 나도 그분의 은총을 받았다!!"

바운서가 장난감을 받은 어린애처럼 흥분하며 날뛰었다.

힘 조절에 익숙하지 않아 바닥을 내리찍을 때마다 방이 쿵쿵 울렸다.

그 진동이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기사들조차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페르다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페르다의 눈은 다크 엘프의 가방을 향하고 있었다.

'저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주사만 들어 있을 리가 없다.

'저 물건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한다.'

페르다는 눈을 돌려 콘실러스에게 명령했다.

"백작, 저 바운서를 맡아 주게. 할 수 있겠나?"

콘실러스가 대답했다.

"이 정도의 벽도 넘지 못하면,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겠습니까?"

"제 검은 섭정님의 것입니다!"

콘실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 감화되어 마르코도 용기를 내며 검을 잡았다.

"그대들의 뜻은 잘 알았네."

페르다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너무 어렵게 갈 필요는 없지."

그의 손에 그려지는 마법진.

페르다는 마법을 영창했다.

"프렌지."

검은색으로 물든 마법진이 번개의 형태로 쏘아져 바운서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헤헤! 그... 그엑?"

그 마법에 당한 바운서가 실실 웃다 말고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윽... 그아아악!! 아아악! 아프다! 아프다아!!"

근육 괴물이 머리를 부여 싸매며 날뛰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크억!"

"뭐 하는 거야?! 우린 아군이라, 푸엑!"

병아리 농장에 미친개를 풀어놓은 듯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하수인들은 순식간에 갈려 나간다.

"너무 아파! 아프다고오!"

그 분노가 이젠 다크 엘프에게 향하려던 그 순간, 엘프는 얼른 주문을 외웠다.

"리스트레인!"

룬 형태의 주문이 바운서의 머리를 관통했다.

미쳐 날뛰던 바운서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어어, 소, 소장님?"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군. 알아먹었으면 얼른 저 잡것들이나 쓸어버려!"

"예, 옙!!"

정신을 찾은 바운서가 두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장님 앞에서 이런 개망신을 주다니, 이 자식들! 용서하지 않겠다!!"

마르코와 콘실러스가 전위에서 그 공격을 받아 내었다.

쿠웅!

"으윽!"

"흠!"

묵직한 울림과 함께 밀리는 두 사람.

그러나 버텨 낸다.

버텨 냈기에 반격할 수 있었다.

퍼석—!

인간의 살과 뼈 정도는 무처럼 베어 내는 오러.

그 오러가 겨우 살갗을 뚫는 수준으로 단단해졌다.

"으하하하! 강해졌다! 나! 강하다!"

두 기사와 바운서의 싸움은 치열한 접점이 이루어졌다.

팽팽한 싸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는 것은 바로 마법사들.

페르다와 다크 엘프의 조력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다크 엘프가 먼저 마법진을 펼쳤다.

그녀가 구사하려는 것은 슬러그 타임.

오러를 두른 두 기사를 둔화시켜 바운서에게 기회를 주는 마법이었다.

"슬러그 타—."

그녀는 주문을 채 맺기도 전에 공격을 감지했다.

육안에 보이는 것은 마나로 만들어진 탄환.

그것이 정확하게 마법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윽!?"

마력을 불어 넣은 마법진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마나 샷으로 마법진을 부순다라...."

린네 소장은 충격에 빠졌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아함을 억지로 감춘다.

'마력 맹점을 꿰뚫어 보고 쓸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는데....'

린네 소장의 눈동자에서 푸른 이채가 돈다.

페르다의 마력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녀는 틀리지 않았다.

'고작 4서클에 도달한 애송이 섭정이 마력 맹점을 다룬다고?'

그렇기에 의문은 증폭했다.

방금 사용한 슬러그 타임처럼 복잡한 마법에선 치명적인 기교였다.

"뭐 하고 있나? 얼른 마법을 써 보게."

페르다는 그녀를 도발했다.

"추악하게 자연의 은혜를 버리고 인간의 마법을 구사하는 엘프가 마법에 밀리면 어떻게 하나?"

"네놈은 해 봐야 4위계쯤 되는군. 같은 4위계끼리 너무 자만하는 것 아닌가?"

페르다도 마력을 응집시켜 그녀의 서클을 가늠해 보았다.

크기는 페르다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거짓말하진 말게. 자네가 5위계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네."

"눈구멍은 가죽이 모자라서 뚫은 게 아니다, 섭정. 4위계 정도 되었으면, 마나 회로를 파악하는 능력 정도는—."

"내가 아퀴나스 학파의 연공법을 사용한 놈도 못 알아보는 바보처럼 보이나?"

페르다의 말에 다크 엘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페르다가 말을 가로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지. 외려 기분 나빠지니."

페르다 또한 마법진을 준비했다.

4위계 중에서 강한 매직 블라스트.

강한 만큼 캐스팅이 오래 걸리고 복잡한 마법이다.

그러나 페르다는 이미 능숙한 마법사였다.

모든 과정이 다른 마법사들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마법을 쓰는 것에서 뜻은 명확했다.

상대를 얕본다는 의미이다.

"같잖은 도발을!"

하지만 그 마법진은 얼마 가지 못해 제힘을 잃었다.

페르다의 의지가 아니었다.

"맞다, 네 말대로 5서클이다."

린네가 숨겨 놓았던 비밀을 들켰지만, 그렇다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래서 네놈처럼 마력 맹점 같은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지."

서클에서 이미 차이가 나는 이상, 찍어 누르면 그만.

더욱 순수하고 등위가 높은 마나로 마법진의 형태를 와해한다.

그렇기에 실제로는 페르다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상대는 아퀴나스 학파의 연공법을 쓴다.'

아퀴나스 학파는 저단계의 위계를 포기하고 마나를 압축하는 화력주의 학파.

상대를 눈속임할 수 있으며 고위계의 마법 효과가 증대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크 엘프의 몸을 들여다보면 4위계 수준의 마나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5위계의 고순도 마나가 압축된 상태.

체급 싸움으로 간다면 페르다의 패배는 이미 기정사실이다.

"그것 아나?"

페르다는 언제나 위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체급이 안 된다면 기교로,

기교가 안 된다면, 그다음 수단으로.

그 수단도 안 되면 잇몸으로라도.

그렇게 싸워 왔던 페르다였다

"자네 책상 밑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라고 물으려던 순간, 책상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책상 아래 어두운 곳에 밝혀지는 푸른빛.

그것은 틀림없이 마법진의 일부였다.

"어떻게 여기에 마법진을—!?"

"라이트닝 볼트."

콰직!

번개 한 줄기가 나무 책상을 부수고 솟아올랐다.

다크 엘프의 머리를 그대로 관통했다.

"크아악!"

마법을 사용한 것은 페르다의 쉐도우 핸드.

페르다는 난전의 상황 속에 그림자를 책상 밑까지 이동시키는 데 집중했었다.

매직 블라스트를 사용했던 것도 그녀의 집중을 흩트리기 위함이었다.

'잘 먹혀들었군.'

실전에서 얼마나 써먹을 수 있을까 조금 고민했었던 페르다였다.

하지만 자신의 카드를 얼마나 잘 감추고 있으면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게 확실해졌다.

"참으로 실망스럽군."

페르다가 말했다.

"아퀴나스 학파는 상대에게 모르는 정보를 줘서 우위를 점하는 학파지. 그런 학파의 연공법을 쓰는 주제에 상대에게 허를 찔리다니."

그것은 조롱이었으며, 동시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이었다.

"뭐... 나도 마땅히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진 못했군."

페르다에겐 이것이 린네 소장을 절명시킬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러나 린네 소장이 바닥에 쓰러지는 대신 자리에 주춤거리다가 다시 우뚝 섰다.

"끄으으윽...!"

신음하는 린네 소장.

그녀는 왼쪽 눈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가누었다.

페르다는 상흔을 살폈다.

라이트닝 볼트가 턱 아래를 뚫고 눈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생존 본능이 대단하군. 즉사시킬 생각이었는데, 공격을 그대로 피할 줄이야."

"젠장할! 이 망할 단명종 새끼가!!"

독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다크 엘프.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이 수모는 반드시 기억하겠다!"

다크 엘프는 최후의 수단으로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긴급 탈출 마법이었다.

그 스크롤을 찢자, 그녀의 몸 주변에서 빛이 확 터져 나오더니 그녀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어어, 소장...님?"

다크 엘프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자실 쳐다보는 바운서.

마법사를 잃은 바운서는 손쉽게 제압당했다.

격전을 치른 마르코와 콘실러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바운서를 내려다보았다.

"후우, 후우.... 마족과 싸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찬가지라네. 이렇게 늙어서야 겨우 보게 될 줄이야."

"사사로운 이야기는 나중에 하게. 이제 20분밖에 안 남았으니."

"예."

채 가시지도 않은 싸움의 열기를 안은 채로 수색을 시작했다.

연구 시설을 버리기 전, 정보 분류 작업을 진행 중이었던 만큼 극비 정보와 사사로운 정보는 어느 정도 나뉜 상태였다.

그들은 그곳을 뒤졌고, 페르다는 소장이 사라진 자리 쪽으로 움직였다.

'긴급 탈출 마법은 소지품까지 이동하지 못한다.'

신속한 효과를 지닌 만큼 모든 것을 버려두는 마법.

소지품은 물론 옷까지도 함께 이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허물처럼 벗어 던진 옷.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연금술 가방.

페르다는 그 가방을 열어젖혔다.

보이는 것은 일지와 함 하나.

함 속에는 격자 형태로 주사기 앰플이 들어 있었고 각각 라벨이 붙어 있었다.

-도플러

-부쳐(시제)

-다크 소서러(시제)

.

.

.

전부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나이트급 마족들의 이명.

총장 납치 사건으로 알게 된 도플러를 제외하고도 새로운 이명들이 눈에 보였다.

'비단 위협적인 게 도플러뿐만이 아니었군.'

여태까지 본 것은 숲이 아닌 나무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대강 이 정도면 됐고, 기록에는 뭐가 있지?'

페르다는 가방에 있는 일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상형 문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암호인가.'

일지를 빼앗겨도 함부로 해석할 수 없도록 놓은 문자였다.

페르다는 직감했다.

이 안에는 여기 널브러진 정보들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이 숨겨져 있음을.

페르다는 샘플 가방에 일지를 집어넣고 그대로 잠갔다.

"백작, 원하는 건 전부 얻었다."

"알겠습니다."

정보 탈취는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들은 은밀하게 빠져나와 복귀하는 길을 올랐다.

* * *

한편, 연구동으로 향했던 세 명.

방한 장비를 껴입은 제드는 몸을 싹싹 비비면서 눈보라를 뚫었다.

"어우씨, 졸라게 춥네. 뭐 이딴 산골짝에다가 집을 짓고 난리래?"

"조용히 좀 하십쇼. 그러다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어이구, 걱정 마십쇼. 오크 새끼 한 마리가 하울링해 대도 들리지 않을 날씨니까."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불평을 쏟아 내었고, 기사들은 묵묵히 그 불평을 들으며 걸었다.

그들도 곧 지정된 포인트를 찾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하네."

생활동과 다르게 연구동은 이미 비워진 상태였다.

남은 것이라고는 쓸데없이 부피가 큰 물건과 쓰레기.

그리고 통째로 매몰시키기 위해 준비한 폭약이었다.

"그 악마 말이 맞았네. 정말로 6시간 이내에 전부 박살 낼 작정이었구만."

"글쎄요."

"그럼 아니라는 겁니까?"

"내 말은 그게 지금 당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 악마 새끼들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빨리 움직입시다."

그들의 임무는 악마 구출.

연구에 쓰일 실험체들은 연구동에 가둬 놓았다고 하였다.

귀찮게 포로들까지 이송할 리는 없을 터.

폭약과 함께 묻어 버릴 작정으로 방치해 놓았을 것이다.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이게 대체 뭐야?"

다만 두 눈으로 목격했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63화. 페넬로페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일반적인 감옥과 달랐다.

쇠창살로 구역을 나눈 것이 일반적인 감옥.

그곳에는 관처럼 생긴 항온기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으며, 그 안 속에는 한 명씩 갇혀 있었다.

갇힌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오크, 엘프, 고블린, 보기 힘든 희소 종족들까지 전부 핏기 하나 없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그것을 관찰하던 기사가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 사람들 전부 살아 있습니다. 전부 숨은 붙어 있는 상태에요."

"얼른 구출합시다!"

항온기를 열려던 것을 보고 제드가 막아섰다.

"뭔 구출입니까? 우리가 구해야 할 건 악마 하나예요."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걸 지켜봐야 합니까? 그건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그러고도 기사입니까, 제드 경?"

제드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눈보라 속에서 천천히 죽거나, 터져서 꿱 하고 죽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나마 후자가 낫죠. 나는 악마 새끼나 찾으러 갑니다."

방을 나서려던 제드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 낙하산이에요."

쓸데없는 동정은 하지 마라.

제드가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죄책감 하나씩 안고 떠났지만, 제드에게 그런 사사로운 감정은 남지 않았다.

그렇게 항온기가 있는 방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런 면밀한 관찰이 무색하게 곧바로 특정해 낼 수 있었다.

쿵쿵쿵!

"으하아아앙! 풀어 줘! 풀어 달란 말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곳에 가두는데!"

쿵쿵쿵!

시끄럽게 날뛰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왠지 저거 같지 않습니까?"

"제발 아니기만을 기도하고 싶네."

그들은 진원지로 향하였고, 요란하게 들썩이는 항온기 하나를 발견했다.

"이거 열어!! 당장 열란 말이야아아!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나 대악마 시트리의 딸 페넬로페야!"

"하 씨 맞네."

목적을 달성해도 탐탁지 않은 얼굴.

그렇게 세 기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항온기의 문을 열었다.

문을 쿵쿵 치며 난동을 피우던 악마가 당황했다.

"뭐야, 진짜 열었어? 잠만 타임! 타임! 흐아아아! 때리지 마세요! 이번엔 조용히 있을게요! 진짜, 진짜루 이번에는...응? 뭐야? 간수들이 아니잖아?"

눈을 슬금슬금 뜨면서 자신을 둘러싼 사내를 지켜보는 페넬로페.

"네가—."

"진짜 간수들은 어디 있는데? 당신들 누구야? 나 죽이러 온 거야?"

"네가 페넬—."

"잠시만요! 나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저 새끼들이랑 아무 관련도 없어요! 살려 주, 커흡!"

제드가 페넬로페의 입을 막아 버렸다.

항온실을 가득 채웠던 소리가 단번에 죽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에는 예 아니오만 허용한다.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면 돌려라, 알겠냐?"

"읍읍."

"입 다물라고, 이년아."

"...."

칼을 들이밀자 얌전해지는 페넬로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이 페넬로페가 맞나?"

끄덕끄덕

"확실하지?"

끄덕끄덕

"네 어미 되는 대악마, 시트리와 거래를 했다. 너를 이곳에서 빼내는 조건으로 여기 이 시설에 침투했거든. 얌전히 따라와라."

"읍읍?!"

"아아, 예랑 아니오만 하라고 했다."

"우으으읍! 읍읍!"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는데요?"

"이거 할 말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가? 야, 분홍 머리. 잠깐만 풀어 줄게. 3초 안에 간결하게 대답해라."

제드는 그 경고와 함께 입을 떼어 내었다.

"잠시만요내이야기좀들어봐요제가말이죠여기에잡힌건말이에요제가잡힌게아니라사실은으브브븝!!"

"쓸데없는 소리였네. 재갈 물리고 가져갑시다."

"그러죠."

속사포로 내뱉던 여인은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묶인 채로 들렸다.

와중에 너무 발버둥 치는 바람에 기사에게 한 대 얻어맞고 기절했다.

* * *

눈보라를 뚫고 걸어가던 중.

페르다는 머리 위에서 묘한 기류를 느꼈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콘실러스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방금 느끼셨습니까?"

"아, 느꼈네."

"무엇을 느끼셨단 말입니까?"

걷기도 힘든 마르코는 주변에 신경을 쓸 새도 없었다.

"바람 이외의 바람."

"바람 이외의 바람?"

"실버 드래곤 스폰들이다. 이 산의 침입자를 찾고 있구나."

가뜩이나 안색이 창백했던 마르코가 더 시퍼렇게 질렸다.

"그럼 큰일이 난 거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아. 우리 머리를 지나갔다는 건 아직 우릴 찾지 못했다는 소리일 테니."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당장에 기사 2명분의 전력이 하늘 위에서 유성처럼 떨어진다면, 가망이 없으니까.

"속도를 높이겠습니다."

페르다는 콘실러스가 뚫은 길을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백색 시야 속에서 검은 상 하나가 가까워졌다.

나왔던 동굴로 다시 돌아왔다.

그곳에는 제드를 포함한 6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타깃은?"

"가져왔습니다."

제드는 옆에 기절한 분홍 머리를 툭툭 찼다.

분홍색 머리에 백색 피부.

악마답지 않게 백옥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양뿔 형태의 뿔과 검은자 눈, 박쥐 날개와 긴 스페이드 꼬리가 그녀를 명실공히 악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빠르게 끝났군."

"연구동은 비워진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없더군요. 저 혼자만 가도 충분했었을 겁니다. 생활동은?"

"큰 고비는 없었네. 서로 특이 사항은 없는 것 같군. 복귀하도록 하지."

각자 임무까지 마친 것을 확인하고 게이트에 오르기 시작했다.

페르다는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했다.

'쉽게 끝이 났군.'

남은 시간은 이제 3분 정도.

마치고 돌아가면 딱 되는 시간이었다.

촉박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널널한 것도 아닌 적당한 시간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 잘 풀렸어.'

거래의 균형이 딱 맞아떨어졌다.

희한한 일이었다.

악마는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만 하니까.

"빨리 움직여야겠습니다."

게이트를 지키던 마법사가 말했다.

"무슨 일인가?"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던 실버 드래곤 스폰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예.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빨리 흔적을 지워라! 흔적을 지우고 즉시 이곳을 탈출하도록 한다!"

발드로바 공왕령의 사람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들켜선 안 된다.

분주하게 가져온 도구로 자취를 지우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2분.

페르다는 생각했다.

이 남은 시간 안에 자신이 찜찜한 이유를 풀어야만 했다.

"우음... 우우우?"

두리번거리며 깨어나는 페넬로페.

그러다가 제드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부븝! 부부브!"

"가만히 있어 봐. 편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부읍! 부부부부!!"

제드가 단검을 들어 올리자, 고개를 필사적으로 젓는 페넬로페.

눈물 콧물 줄줄 흘리는 그 모습은 틀림없이 두려움을 의미했다.

페르다는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잠깐."

제드의 단검이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재갈을 벗겨 봐라.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봐야겠군."

"들을 이야기는 없을 텐데...."

제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재갈을 벗겼다.

"우읍, 푸하! 고마워요. 아니, 그것보다 아까 한 말에 대해서 제가 보충을 해야 하는데요! 제가—."

"닥쳐라. 네가 말할 건 내가 정한다. 아니면 목을 따 버리겠다."

"히익! 그러지 마세요! 죽이지 마세요! 뭐든지 대답할게요! 네!"

"그거다."

페르다는 페넬로페를 보며 턱짓했다.

"왜 죽는 걸 두려워하지?"

"주, 죽는 게 무섭지 않은 존재가 있나요?"

"세르데스에서 죽은 악마는 지옥에 역소환되는 것일 뿐이지 않나? 잠깐 고통스럽겠지만, 너희들에게는 집에 돌아가는 것밖에 안 되지. 안 그런가?"

"그, 그렇긴 하지만 저는 상황이 좀 달라요! 전 돌아가면 진짜 죽는다구요!"

페넬로페는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니깐 제가 구출되기보다는 건 어머니가 저의 죽음을 바란다는 거예요! 전 지옥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살려 달라고 아등바등하며 울고 있는 페넬로페의 모습.

"그러니깐 널 왜 죽이려고 하는지를 말해라."

"왜냐하면 제가 그러니까...."

페넬로페는 말을 골랐다.

"머리 굴리지 마라. 사실대로 얘기해."

"아니, 이건 사실대로 얘기할 수가 없어요! 사실대로 얘기하면 안 되니까요! 흐아아앙! 답답해 돌아버리겠어어어! 내 대가리는 왜 이렇게 나쁜 거야!?"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일.

그녀는 알고 있지만, 절대로 발설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악마, 시트리가 그녀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지목하는 것이 뭐가 있던가?

페르다는 생각했다.

분명 답이 있는 문제였다.

언제 한번 들어 봤을 법한 이야기.

시답지 않은 잡담처럼 흘려버렸을 이야기.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정말로 중요했던 이야기.

악마와 거래하지 마라.

"그래."

그 순간, 페르다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번뜩임.

페르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너였군."

"섭정님!"

제드가 목청 터질 듯이 소리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발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빨리 오셔야 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몇 분? 30초랍니다!"

페르다와 페넬로페의 대화를 지켜보고는 그를 재촉했다.

모든 판단을 마친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드 경."

"예?"

"이 짐 덩어리들을 잘 부탁하네."

"네? 그게 무슨...."

페르다는 자기 가방을 제드에게 던졌다.

"우옷?"

갑작스레 던진 가방을 받아 드는 제드.

탁월한 반사 신경으로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또 다른 물건이 제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은 분홍색 털이었다.

"우끼야아앗!?"

"크억!"

제드의 몸과 부딪혀 그대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제드를 밀어 버린 것은 바로 페넬로페의 몸뚱이.

그녀를 받아 든 제드는 눈을 크게 떴다.

이 벤딩 브리지는 8인만이 탈출할 수 있다.

"섭정—."

차원 문이 닫혔다.

제드의 외침이 끊긴다.

추운 산지 속에 남겨진 것은 페르다 혼자뿐.

정말 홀로 남겨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출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러나 페르다의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온다.

그놈이.

그 순간 놀랍게도 휘몰아치던 눈보라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신 들려오는 것은 눈을 밟는 소리.

곧 새하얀 눈보라를 뚫고 들어오는 신형.

달빛 하나 들지 않는 날임에도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라? 이거 진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네."

은색 머리카락과 뾰족한 뿔, 그리고 은색 눈동자.

의심할 여지 없는 실버 드래곤 스폰.

자신의 머리 위에서 돌고 있던 그놈이 틀림없었다.

"분명, 얘기를 들었을 때는 쥐새끼 한 마리가 있을 거라 했는데... 좀 다른 쥐새끼가 있네?"

그가 실실 웃었다.

독 안에 든 쥐를 본 고양이처럼.

"만나서 반갑습니다, 발드로바 섭정."

* * *

발드로바 성으로 복귀한 루리는 곧바로 청소부터 시작했다.

무려 20일을 방치해 놓았다.

정령들에게 기본적인 청소를 맡겨 놓은 상태였지만, 감독이 없으면 열심히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늦은 야밤에 청소를 진행했다.

"청소 마쳤습니까?"

-뀨웅.

"수고했습니다. 돌아가도록 하세요."

-뀨웅!

퇴근이라는 말에 신나는 정령들.

루리를 도와 청소하던 정령들이 역소환되었다.

이윽고 방에는 그녀 홀로 남았다.

루리는 자신이 청소한 방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침실.

정확히는 발드로바와 페르다가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합방하게 될 장소였다.

약혼자인 지금으로선 먼 이야기.

그러나 루리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루리는 메이드다.

메이드의 업무는 주인을 이루고 있는 환경을 조정하고 맞추는 것.

그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50명이 넘는 시종들이 상주해야만 가능하다.

완벽함을 원한다면 100명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성에는 루리를 제외하면 시종은 없다.

그러나 충분했다.

그녀는 약한 인간 메이드들과 다르게 드래곤 스폰이었다.

실버 드래곤의 스폰들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강자였다.

그녀의 능력은 이 성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몇십 년이 지나도 따로 큰 공사가 깔끔함을 유지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것.'

완벽함을 유지하는 것.

완벽하다는 것은 예상 안에 있다는 것.

예상 안에 있다는 것은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이 성에서 그녀가 통제하지 못하는 요소는 없다.

그녀의 삶은 완벽한 원을 이루고 있었다.

'페르다....'

적어도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페르다 로스노바.'

페르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외견만 고작 자신보다 좀 더 나이 든 풋내기 귀족.

기대할 것이라고는 없는 삼류인간 중 하나.

'아니었지.'

페르다는 예상과 달랐다.

예상과 정반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었다.

오만한 행동을 하지만 언제나 책임을 지는 것이 보였다.

감정도 없는 사이코패스처럼 보이지만, 발드로바의 앞에 설 때는 뭣 모르는 소년처럼 보였다.

나이에 맞지 않으면서, 나이에 맞는.

정의하려고 해도 정의할 수 없는.

불완전체.

'변수....'

그래.

지금 이렇게 잔잔한 흐름을 망가트리는 것도 그 변수 때문이었다.

루리는 변수가 싫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은 그녀를 무력하게 만든다.

무력한 것은 싫었다.

그러니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페르다는 배제할 수 없었다.

그는 발드로바의 약혼자였으니까.

그렇게 모든 것은 변하기 시작했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쁜 건 아니었어.'

그건 좋은 변화를 의미했다.

정체되었던 영지는 발전하기 시작했고, 페르다도 차츰 인지와 명성을 굳히는 중이었다.

루리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들을 거침없이 진행하면서 모든 것을 바꾸는 중이었다.

그 놀라운 업적들에 느끼는 감정은 미묘했다.

그 감정은 이미 루리도 알고 있었다.

'조바심.'

그 18년 밖에 안 산 꼬맹이보다,

몇백 년을 더 살았고,

몇백 년을 더 봉사해 왔는데.

한 남자가 고작 1년도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을 바꿀까 봐.

모든 것을 빼앗을까 봐.

그렇기에 그녀는 실버윈드와 만나려 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와중에 그들 또한 변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변하지 않았다 해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그녀는 무력했다.

상황에서, 힘에서,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 밖을 벗어났다.

'그리고... 내가....'

그 팽팽한 도화선에 불이 붙어 버리고 말았다

쓸데없이 실버윈드와 접촉해서,

쓸데없이 페르다가 고즈와 대면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상황을 좀 더 유하게 해결했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페르다가 좀 더 거칠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대놓고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원만하게 갔을지 모른다.

그래.

일을 키운 것은 페르다였다.

그렇게 남 탓이나 하면 속이 편할 문제였는데, 루리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애초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테지.'

모든 것의 시발점은 루리다.

그런데 그녀가 뱉었던 말은,

"누가... 당신에게 도와 달라고 했습니까?"

꾸욱.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도 서먹하지만 그 서먹함은 더욱 오래갈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그를 바라보고,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루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

그것이 루리의 감정마저 파고드니 혼란스럽다.

멍하니 서 있는 루리의 앞에 바람이 일렁였다.

바람의 정령 하나가 급하게 현신하여 루리의 곁에 섰다.

-뀨웅! 뀨웅!

허둥지둥거리고 있는 정령.

루리는 콘실러스 백작의 성에 상황을 감시하러 간 정령임을 알아차렸다.

"말씀하세요."

바람의 정령은 당황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으려 했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변수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64화. 딜레마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몰아치는 눈보라.

문득문득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하지만 그보다 더욱 싸늘한 분위기가 페르다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그의 눈은 침입자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섭정님."

그가 눈을 밟으며 능청스러운 얼굴로 자기 소개한다.

"저는 실버윈드의 자식들 중 하나인 아벨이라고 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대공의회가 열렸을 때 문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죠."

"...."

"이런 외곽지에서 무슨 짓을 하고 계십니까? 북부 눈 맞이하면서 관광이라도 즐기러 오셨습니까?"

"...."

"흠, 그런데 그 관광을 온 것치고는 너무 멍청한 짓인 거 같습니다. 나물 캐러 온 멍청한 노인네가 아니라 섭정 정도 되면 여기가 실버윈드의 영역이라는 걸 아실 텐데."

"...."

아벨은 페르다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며 조롱했다.

페르다는 그의 걸음에 따라 안쪽까지 뒷걸음질 쳤다.

"왜 말이 없으십니까? 혹시 너무 무서우셔서 쫄아 버린 겁니까?"

"신기해서 그럴 뿐이다."

"예? 뭐가 신기합니까?"

"눈앞에 보이는 짐승이 말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신기하지 않을 수 있더냐?"

페르다의 앞에는 아벨밖에 없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아벨은 더욱 진하게 웃었다.

어슬렁거리던 발걸음이 바닥에 내리닫는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후웅—!

바람과 소리를 남겨 둔 채로 페르다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는 크게 웃었다.

"참 짓궂으신 농담을 하십니다. 하하!"

아벨은 검지손가락으로 딱밤 튕기듯이 페르다의 가슴을 쳤다.

빠득!

"커흡!"

흉악한 소리와 함께 부러지는 뼈.

페르다는 고통을 토했다.

"어이쿠! 아프십니까? 장난으로 톡 쳤는데요?"

"쿨럭, 쿨럭!"

"아니, 근데 진짜 톡 하고 쳤는데, 갈비뼈가 부러지면 어떻게 합니까? 예? 섭정이나 되는 사람이 몸이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합니까? 밤에 거사를 치를 때는 몸이 남아나지 않겠습니다."

페르다는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마치 침을 뱉듯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네놈은 말이 뒤지게 많구나."

"이야, 진짜 놀랍습니다. 고즈 님께 겁도 없이 개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건 단순히 블랑카로스 님을 뒷배로 둬서가 아니군요."

아벨이 페르다의 멱살을 잡아 들었다.

그가 손톱을 들어 보이며 경고했다.

"그런데 실버윈드의 자손에게 자꾸 깝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자비랑은 먼 족속들이거든요?"

페르다는 여유로운 얼굴로 남아 있는 마력을 확인해 보았다.

4위계 마법을 몇 번 사용할 만큼의 마력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드래곤 스폰을 이길 수 있나?'

무리다.

이건 다크 엘프와 싸웠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절대로 불리한 기색을 표하지 않았다.

페르다는 반응으로 코웃음을 쳤다.

"실버윈드의 자손은... 악마와 거래를 권장하는 족속들이었나?"

"무슨 소립니까?"

"시치미 떼지 마라. 네가 시트리의 뒤처리를 해 줄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마 노렸던 건 우리가 구출해야 할 악마겠지."

목을 움켜잡았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살짝 괴로울 정도였다.

그가 동요했다는 의미이다.

페르다는 마저 입을 놀렸다.

"그년과 붙어먹어서 뭘 할 생각이었지? 수백 년 동안 지킨 규율이 질려서 난잡한 성생활을 누릴 생각이었나?"

"하! 우리가 당신들처럼 번식하고 애나 키우는 짐승들인 줄 압니까? 그런 재미없는 짓보단 싸우는 게 더 낫죠!"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지금 왕좌에는 어울리지 않는 놈이 앉아 있습니다. 그놈은 자신이 실버윈드의 후계자라 자칭하며 아버지의 혼을 머금고 있죠."

고즈 실버윈드를 향한 반역의 칼날.

"희한하군. 네놈에게도 어울리지 않는데."

"아아, 알고 있습니다. 고즈에게 대적하면 몇 초도 안 돼서 피떡이 되어서 죽어 버리겠죠. 고즈 대장은 그 정도 강하니까요."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루리 실버윈드는 다릅니다."

알고 있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당신은 그 꼬맹이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아십니까?"

"그 아이가 강한 건 알고 있다."

"단순히 강한 게 아닙니다. 기동여단 실버윙의 대장이자 친위대인 고즈 대장에게 유일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실버윈드 님의 후계자를 누가 이을 것인가 거론되었을 때에도 두 분이 거론되었을 정도죠."

"그래서 고즈가 그 아이를 죽이려 하는 건가?"

"아뇨. 고즈 대장은 곁에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발드로바와 실버윈드. 둘 간의 전쟁이 시작되면, 루리 실버윈드가 누구 편에 들 것 같습니까? 발드로바의 편을 고수하게 된다면, 그녀는 죽어야만 합니다. 고즈 대장은 그 죽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의외였다.

여태까지 전쟁하지 못했던 이유가 루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니.

지금 고즈가 어쨌든 그런 말을 꺼낸 아벨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런데 넌 고즈와 다르군."

"루리는 칼을 쓰지 않는 전사입니다. 그런 전사에게 할 행동이 뭐가 있겠습니까?"

"칼을 뺏는 것이겠지."

"맞습니다. 명검을 쥐고 있는데도 쓰지 않는 건 그것 자체로도 죄악이죠. 그리고 저는 루리 실버윈드가 쓰고 있지 않는 그 검을 쓰려고 할 뿐입니다."

이해했다.

시트리와 거래를 한 조건이 바로 이것이었다.

고즈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루리.

그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대가로 뒷바라지를 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드래곤 스폰이라 해도 시간 앞에는 무력한 것이었다.

그의 탐욕이 전부를 죽이려 들고 있다.

'루리....'

페르다는 그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가슴 안쪽에서 묘하게 짜증이 올라왔다.

그 짜증은 살의라는 형태로 자리 잡는다.

그 짜증이 입술을 비집고 웃음으로 튀어나왔다.

"참으로 놀랍군."

"하하, 죽을 때가 되니깐 그제야 아부 떨 여력이 생긴 겁니까?"

"아니. 자신이 약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없다면 그것을 빌릴 수 있는 것도 기본이야."

페르다는 따라 웃어 주었다.

"너 같은 꼴통 새끼한테 그런 기본을 생각할 머리가 있다는 게 내겐 너무 놀라운 일이란 거지."

뿌득!

페르다의 검지를 꺾었다.

"끄으윽...."

"아가리를 진짜 함부로 놀리시는군요. 안 되겠습니다. 당신은 좀 더 가지고 놀아 봐야겠네요."

그가 꺾인 검지를 놔두고 이번에는 중지를 잡았다.

"뭐 그래야지, 루리 그년이 굴복할 테니 말입니다."

"루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다."

그 아이는 인간을 싫어한다.

그리고 페르다를 싫어했다.

뭘 해도 마음에 차지 않았고, 뭘 해도 싫어했다.

그러니 협박을 해도 그녀에게 바뀌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 애가 오기 전에 넌 죽을 것이다.

그때였다.

눈보라를 뚫고 들어오는 또 다른 소리.

새하얀 눈발 속에 보이는 것은 자그마한 신형.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루리였다.

페르다가 그렸던 루리의 표정과 사뭇 달랐다.

그녀는 동요하고 있었다.

* * *

루리가 정령에게 들은 이야기는 간단했다.

페르다가 잠입을 위해 악마와 거래를 했다는 것.

그리고 함정에 빠졌다는 것.

적어도 정령이 본 것은 그러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렇기에 루리는 빠르게 콘실러스 백작의 영지로 날아갔고, 페르다가 어느 위치로 갔는지 확보했다.

그렇게 걸린 시간은 총 5분.

페르다를 재빨리 데리고 탈출할 계획을 안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곳에는 실버 드래곤 스폰.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페르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루리의 몸에서 위협적인 살기가 뻗었다.

드래곤 스폰임에도 희한하게 드래곤 피어를 뻗을 수 있을 만큼 강인했던 루리의 살기.

그 살기가 아벨을 노리고 있었음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의 등장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루리 실버윈드. 다시 보는군요. 저를 기억하십니까?"

"당신은 퍼시벌과 있었던 사람이군요."

"어우, 역시 기억하시는군요. 뭐 2주도 안 되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만."

아벨이 빙긋 웃었다.

루리는 그 미소가 껄끄러웠다.

지금 이 자리를 당장이라도 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불쾌감이 들수록 루리는 독한 표정을 지었다.

"페르다 님을 풀어 주십시오."

"싫은데요?"

"싫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전쟁이라도 일으키시려고?"

그 말에 루리가 주춤거렸다.

"당신은 실버윈드의 영역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이 인간도 마찬가지고요."

"...."

"저는 정당한 명분이 있습니다. 루리 실버윈드. 당신도 실버윈드라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영토를 침범한 자들을 체포하거나, 너무 거세게 저항을 한다면...?"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내뱉었다.

"즉결 처형.... "

"잘 아시는군요! 예! 처형이지요!"

아벨이 신난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약혼자를 죽이면, 발드로바 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실버윈드 전체가 그분과 대적해야만 합니다."

"해 보십시오!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전쟁이 일어나겠지요!"

아벨이 낄낄 웃으며 조롱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실버윈드의 자손들은 죽어 나가고, 당신의 주인이 또 다른 죄책감을 안게 되겠죠."

"읏...!"

"그러고 싶습니까? 그러고 싶다면 마음껏 떠벌리고 다녀보시지요!"

루리가 크게 동요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허를 제대로 찌르고 있었다.

"루리. 이놈은 악마의 사주를 받았다."

"악마의...?"

뚜둑!

"어이구,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하시네. 당신 목숨이 내 손에 달렸다는 거 모르시나? 왜 이렇게 깝치시지?"

루리의 시선에는 한층 깊은 혐오감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벨에게는 그 혐오도 귀여운 수준이었다.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칩시다. 그래서 진술하려거든 진술해 보십시오! 저놈이 악마에게 홀렸다. 악마에게 홀려서 무단 침입한 두 놈을 잡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듣지 않을 겁니다."

떳떳한 듯이 굴었다.

아니, 표면상으로 그는 떳떳할 수밖에 없었다.

"제 몸에는 악마와 거래한 흔적 따위는 없을 테니까요."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페르다 또한 시트리와 거래했지만, 계약을 맺었다는 인장이 없었으니까.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심증뿐.

그러나 그 심증을 믿어 줄 리가 없다.

변절자 루리와 친위대인 아벨.

누가 발언하는가에서 이미 차이가 났다.

"여기서 나를 죽여도 됩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저는...."

"아버지를 배신한 주제에 지키고자 했던 것도 못 지키게 되겠군요. 참으로 무능하지 않습니까?"

아벨은 계속해서 그녀를 자극했다.

루리의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능한 루리. 당신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루리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그를 내버려 두면 전쟁이 일어난다.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아도 전쟁이 일어난다.

그녀가 지켜 왔던 성이 무너져 내린다.

변수.

그녀는 변수를 통제할 수 없다.

늘 그래 왔으니까.

"제가...."

떨리는 입술로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게 유일한 방법이다.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작은 희생.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루리는 무릎을 꿇었다.

조롱하며 웃고 있던 아벨도 놀란 기색이었다.

"하하... 진짜였어."

아벨이 몸을 떨었다.

"진짜로 루리 실버윈드가 무릎을 꿇는구나."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너지지 않는 북부의 벽.

서리거인들의 악몽.

그 명성의 중심에 있는 루리 실버윈드가 고작 말 몇 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아벨의 입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루리 실버윈드의 힘은 이제 내 것이다.

그러한 성취감도 잠깐.

"네 뜻이 그렇다면."

그때 들려오는 것은 페르다의 목소리.

"하도록 하지."

동시에 아벨의 몸이 순간 크게 들썩였다.

"쿠헉!"

아벨이 그대로 피를 토해 냈다.

전신에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멱살을 쥐었던 페르다도 놓았다.

아벨은 선명하게 느꼈다.

무언가가 자신의 심장을 크게 짓누르는 것을.

루리의 짓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녀가 정령술이나 간단한 마법을 쓸 수 있지만, 외상 없이 안을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은 변수는 딱 하나였다.

아벨은 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가지고 놀고 있었던 페르다가 그 자리에 우뚝 서있었다.

그는 푸른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의 짓이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것은 딱 하나.

그것은 어둠.

드래곤 스폰의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칠흑의 어둠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루리가 왔다.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는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바람 정령 하나를 남겨 두고, 그 정령에게 보고를 들은 것이겠지.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재빠르게 쫓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 빠른 대응이다.

그러나 최악이었다.

누구보다 든든한 원군이었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악수 그 자체다.

아벨이 루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아벨은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루리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벨은 루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똑똑하다.

'거래가 이거였나?'

페르다는 그것이 악마의 조언임을 직감했다.

'악마가 이야기했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이야기.'

그러나 동족이 이야기한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

딜레마.

발드로바와 실버윈드의 자손들 사이에서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어느 쪽도 버릴 수 없다.'

페르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루리는 무릎을 꿇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두 가지의 선택을 모두 안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

그리고

'최악의 선택.'

이제야 알겠다.

'이런 식으로 루리를 엮어 낸 것이냐?'

악마의 계략과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

그 모든 것이 평화를 지키려 했던 아이에게 마수를 뻗은 것이다.

'그래서 발드로바의 곁에 남지 않았던 것이냐?'

평화를 사랑하기에,

발드로바를 사랑하기에,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냐?

그때였다.

페르다의 몸속에 있던 마나 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발드로바를 생각하며 그녀를 애타게 찾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각이었다.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것은 페르다의 심장을 어루만지고, 단전 속 서클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무력한 루리의 얼굴에 발드로바의 얼굴이 겹친다.

그녀가 괴로워하고 있다.

그것이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보고만 있을 거야?

아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저것은 발드로바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리가 사라진다면, 발드로바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절제의 사슬이 부서진다.

레드 서클에 만들어졌던 마나들이 은밀하게 전방위로 뻗어 갔다.

어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모든 것은 페르다의 손아귀에 있었다.

동굴도.

루리로.

아벨도.

그리고 그의 내장 속마저도.

"쿨럭, 쿨헥!"

아벨이 주저앉으며 괴로워했다.

그의 입에서는 피를 쏟아 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폐가 망가졌다.

"이 개, 개자, 쿨럭!"

동귀어진이라도 하려고 움직이려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다.

짙은 어둠과 폭주하듯 움직이는 레드 서클.

드래곤 스폰을 제압하는 덴 충분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했던 아벨이었으나,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나를 죽이면...."

아벨이 피를 토하며 말했다.

"모든 실버윈드들이 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할 거다."

드래곤 스폰을 죽인 대가는 만만하지 않다.

평생을 추적당하며, 내일 아침에 깨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삶.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삶.

"상관없다."

페르다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너희 족속들이 하는 협박은 이제 신물이 나는군."

페르다는 손을 들었다.

검게 물든 그의 손바닥은 마치 무언가를 올려 둔 것만 같았다.

밑바닥이 둥글고 손바닥에 꽉 차는 물건을 쥔 것처럼.

마치 심장을 쥔 것처럼.

"너희들이 그렇게 전쟁을 바란다면, 나도 피하지 않겠다."

페르다는 주먹을 쥐었다.

65화. 소금과 모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