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50-55

50화. 대공의회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

페르다의 대답을 들은 에르데스가 몸을 뒤로 뺐다.

살벌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호탕한 웃음소리로 넘어갔다.

"그래? 너랑은 이야기가 통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늙다리들이랑 다르게 젊기도 하고. 앞으로도 자주 이렇게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네?"

"연락 먼저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면 이쪽이 먼저 할게. 황자! 이만 다른 곳으로 가 볼게! 미인은 바쁜 법이라잖아?"

"예, 물론입니다! 살펴 가시지요!"

에르데스가 잔을 들고 자리를 떴다.

그녀의 뒷모습이 충분히 멀어지는 것을 본 알렉산더가 고개를 돌렸다.

"혹시 마법협회와 사연이 있나?"

"없습니다."

많긴 하지만, 그것도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자네를 나무랄 생각은 없네. 풀리지 않은 일이나 앙금이 남아 있으면 빨리 해결하는 게 좋으니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페르다는 알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똥줄이 타는 중이었다.

무능한 1황자가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막대한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이 바로 마법이었다.

"그것보다 요즘 극동부에 마물 사체들을 많이 수입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네."

뜬금없이 던지는 대화 주제에 페르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매립할 장소가 없어서 매번 태우는 것도 번거롭다 싶었는데, 그 시체들을 옮겨 주니깐 참으로 고마운 일이야."

알렉산더가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그의 표정은 이야기와 다르게 긴박함이 느껴졌다.

'뭘 하고 있는지 내게 실토해라.'

페르다는 고민했다.

마력석 제작에 관해서 함구하기로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지금 당장에 공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여겼다.

대충 둘러댈 생각을 하고 왔었지만, 막상 알렉산더의 눈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왕위가 탐나서 제 아비에게 칼을 겨눈 놈이다.'

뭐라 자기변호를 열심히 하던 간에 그는 욕심이 많은 후레자식이다.

그건 불변의 진리다.

그는 왕위에 눈이 먼 놈이었다.

1억 신민의 위에 군림하고 싶어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에르데스에게 아부를 떨어 댔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에르데스는 내가 테살로스의 일을 계승하는 줄 아는 것이다.'

어찌 됐든 연결고리가 있는 사항이었으니까.

페르다는 고민했다.

둘 다 거지 같은 선택이었고, 그중에서 덜 거지 같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사실은 마물 사체를 이용하여 마력석을 제작하는 방안으로 연구 중입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알렉산더도 솔깃한 이야기였는지, 귀를 기울인다.

마법에 관련되면 일단 돈이 된다.

"마력석? 그건 어떤 건가? 마법사들이 쓰는 그... 수정구와 비슷한 것인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이 물건은 순수히 마나를 품고 있는 물건이죠."

"호오...."

페르다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들을 알렉산더에게 이야기했다.

"이를테면, 마법사의 마력을 보조한다던가?"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마력을 보충하거나 마법사가 직접 써먹지는 못합니다."

"아, 그런가?"

"게다가 아직 효율도 7% 정도라 하였고, 실제 마법사들이 쓰기엔...."

"아아, 그런가? 대단하군."

감탄사를 연신 뱉어 대는 알렉산더.

그러나 품고 있던 흥미가 한 줌씩 툭툭 떨어져 나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무튼... 그게 흑마법과는 관련이 없는 것은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물론 연구를 하다 보면 여러 영역에 손을 뻗어야 하지. 의도라는 게 있지 않던가? 내 말은 그중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그 의도가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줄 수 있나?"

집요하게 구는 알렉산더.

앵무새마냥 그럴 수 있다고 몇 번을 더 대답해 주려던 그때였다.

페르다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기도 전에 아련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페르다는 이 냄새를 알고 있다.

"초면에 너무 몰아붙이시네요, 오라버니."

고운 음색은 사내들의 고개를 자연스럽게 돌리게 만든다.

올리비아 아르켄이었다.

제국의 꽃답게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색기를 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올리비아를 보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누이가 왔구나! 그러고 보니 섭정은 이미 한 번 만났겠군. 나 대신해서 여동생이 반겼으니 말이야! 누이가 대접을 잘해 줬는지 모르겠어?"

알렉산더가 옆에 선 올리비아의 어깨에 슬쩍 손을 얹었다.

"어머? 그런 걱정을 왜 하실까요?"

올리비아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얹으려던 알렉산더의 손이 어깨선을 타고 스르륵 내려갔다.

"그야 문제가 생겼으니 그러지 않겠느냐? 제국 황실에 큰 문제를 말이야."

"기우였을 뿐이죠. 페르다 님께서는 넓은 아량을 지니신 분이니까요."

"위태로운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는 문제지. 제국 창고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나라가 발칵 뒤집힐 뻔했던 건 어떠냐?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정계에 서면 위험한 일밖에 없을 것 같구나."

"그런가요? 하지만 일은 원만하게 수습되었어요. 아 참,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께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시겠어요? 1급 경보가 발령되자마자 꽁무니가 빠지게, 아니, 대피를 하셨으니까요."

천연덕스러운 얼굴에 나비처럼 파닥이는 속눈썹.

서로 웃으면서 칼로 거침없이 찌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듣고 있는 사람들이 괴롭게 만드는 지경.

'둘 다 탈이 좋군.'

페르다는 그 모습에 감탄할 뿐이었다.

아르켄 가문 사람들의 유전적 특징이기라도 한 것일까 싶었다.

"그게 표준 절차지 않겠나? 제국의 후계자가 죽으면 제국이 무너지는데, 제국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지."

"아아, 그렇죠. 물론이죠. 어련하시겠어요. 후계자라니."

초승달처럼 휜 눈웃음을 지으며, 부채로 입을 슬쩍 가린다.

아니, 가리는 척하며 비웃음을 슬쩍 드러내어 속을 자극했다.

"야심 차게 반역의 칼날을 들이밀다가 꼴사납게 물러나신 분다운 처세긴 하네요."

"허허, 이 여우 같은 년이 분에 넘치는 것들만 잔뜩 가져서 남자나 홀리고 다니니 요녀 소리를 듣지."

"가지고도 써먹지 못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예를 들면...."

올리비아가 슬쩍 알렉산더의 고간 쪽을 내려다보았다.

"아버님께서 손녀가 보고 싶으시다던데, 언제 손주를 안겨 주실지."

알렉산더의 얼굴이 웃음과 다르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다가 슬쩍 페르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조심하도록 하게.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지. 혹시 알겠나, 그 가시에 맹독이 있을지 말이야."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충고했다.

페르다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한심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가시에 찔린 주제에 말은 많군.'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올리비아가 죽기 직전에는 알렉산더의 침실에 있었다.

마지막에는 제 누이를 탐하려다가 찔려 죽지 않았던가?

알렉산더도 결국 올리비아의 미모에 홀려서 넘어간 놈이다.

그런 놈이 얘기하니 한심하게 느껴졌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나? 그러면 다행이로군. 그렇다면 조금 웃도록 하게. 자네 얼굴이 너무 경직되어 있지 않은가?"

알렉산더는 페르다의 등을 톡톡 치면서 넉살 좋은 사람처럼 친근한 미소를 자연스럽게 띠었다.

그가 웃으면 주변 귀족들도 함께 웃었다.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집에 가고 싶군.'

발드로바의 얼굴이 아른하게 그려졌다.

"그래서 요컨대, 아직은 써먹을 데가 없단 말이로군?"

"예."

"알겠네. 극동부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 이제 나도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겠네."

물론 거짓말일 것이다.

중앙 귀족들에게 점수 따기 바쁜 1황자가 극동부에 관심은 무슨.

"황자님께서 관심을 가져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페르다도 거짓말로 대답할 뿐이다.

"의회가 시작되기 전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도록 하게. 마침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군."

알렉산더는 잔을 들고 그곳으로 향해 걸어갔다.

이제 좀 한숨을 돌리겠군.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누군가가 슬쩍 옷깃을 잡아당겼다.

올리비아였다.

그녀는 여전히 페르다의 옆에 서 있었다.

"더 볼 사람은 없습니까?"

퉁명스럽게 물었다.

"별로 중요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았거든요."

올리비아의 어깨가 페르다에게 맞닿았다.

"곧 있으면 위대한 드래곤의 대리인들이 올 거예요."

용의 대리인들, 그러니 드래곤 스폰들이 온다는 뜻이었다.

'드래곤 스폰이라.'

페르다는 드래곤 스폰과 마주친 적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마법의 주인인 블루드래곤의 스폰 정도를 스쳐 가듯이 본 게 고작.

루리 이외의 드래곤 스폰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궁금합니다."

페르다가 대답했고, 올리비아는 생글생글 웃었다.

"그럼 함께 가시죠."

올리비아가 손을 쓱 내밀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수줍은 여인네처럼 움직였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설렐 이 상황 속.

"뭡니까?"

페르다는 그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어머? 에스코트해 달라는 거잖아요? 혹시 여성 혼자 가게 둘 건가요?"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움츠려진 어깨가 무방비한 소녀의 몸짓이었다.

페르다는 슬쩍 한발 물러섰다.

"저 임자 있는 몸입니다."

"임자가 있든 없든 해야 하는 거랍니다? 서로 신뢰를 돈독하게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않겠어요?"

"제드 경에게 맡기겠-."

"혹시 여자가 삐진 거 보셨나요?"

올리비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좋지는 않아요?"

"...."

페르다로선 알게 뭔가 싶었다.

그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올리비아는 한 뼘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제국 내에서 협력자로서 서로 신뢰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 않으시나요? 서로 많은 비밀을 품을 텐데, 그 정도는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은근슬쩍 협박하면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올리비아.

하지만 지금 당장 제국 내부에 협력자는 올리비아밖에 없었으니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것도 걸린다.

"하아, 알겠습니다."

"진작에 그렇게 하셔야지요."

페르다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내밀었다.

대충 잡는 시늉만 하자는 생각과 다르게 올리비아는 그의 손을 움켜잡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페르다는 슬쩍 루리 쪽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아니, 미묘하게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주 얼굴을 보는 페르다가 아니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그런 수준이었다.

물론 루리는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 않고, 시종답게 행동했다.

그래서일까, 더욱 불안하다.

'때 밀리는 건 싫은데.'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고통밖에 남지 않은 사교계였다.

페르다는 반쯤 체념한 상태로 올리비아를 이끌고 창가로 향했다.

블랑카로스의 영역 바깥에는 황금으로 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안에서 내린 것은 종교적인 예복과 관을 쓰고 있는 노인과 성직자들.

"저분들이 누구신지 아시나요?"

올리비아가 페르다의 팔뚝에 손을 집어넣어 단단히 고정했다.

"오도그라사도 신성 제국 쪽이군요."

"맞아요."

골드 드래곤, 오도그라사도.

오도그라사도를 우상으로 떠받들어 만들어진 종교를 토대로 만들어진 나라.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을 지니긴 했지만, 실제로는 성국과 그 주변 왕국의 연합에 가깝다.

오도그라사도에겐 스폰이 없다.

그렇기에 교황과 4명의 교주가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푸른색의 포탈이 열렸다.

그 포탈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북서부 특유의 서늘한 모습이다.

그곳에는 푸른 머리를 하고 끄트머리가 둥근 뿔을 지닌 드래곤 스폰들이 걸어왔다.

"이오르가의 스폰들이군요. 이번 대공의회에도 빠지지 않고 오셨네요."

마탑의 주인이자, 대륙을 감시하는 눈이라 불리우는 이오르가 세력들.

실제로 마법사보다는 연구가들에 어울리는 이들은 귀족들처럼 우아하게 걸어왔다.

"아, 저기도 오는군요."

올리비아는 고개를 들고 하늘 쪽을 보았다.

푸른 하늘에서 이질적인 점 다섯 개가 이곳을 향해 날아왔다.

그것은 마치 은색 빛을 뿜어내는 혜성처럼 거침없이 날아왔다.

페르다는 그것을 루리를 통해서 본 적이 있었다.

'실버윈드.'

날아온 기세와 다르게 착지는 사뿐하게 하며 블랑카로스의 영역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페르다는 그 존재들을 확인하고 슬쩍 눈길을 돌렸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루리는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여태 느꼈던 것과 사뭇 다른 감정이 담겨 있다.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셋이서 끝인가 봐요. 아무래도 오늘 스토레우스 쪽에선 참여하지 않는 모양이네요. 뭐, 골칫거리가 없어서 다행이지만요."

"악명이 높은 모양이군요."

"악룡이잖아요? 난동꾼이 따로 없어요. 그것들은 싸움 붙이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드래곤 스폰들이 모여들면서, 구경하던 주변인들이 하나둘씩 움직였다.

대공의회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제 움직이도록 하세요."

올리비아가 고정했던 팔을 풀며 말했다.

그녀의 신분은 공주.

황자들이 가지고 있는 참정권은 그녀에게 없었다.

페르다는 의회장으로 움직이는 인파들을 따라 걸었다.

전 대륙에 퍼져 있던 권력가들이 모인 대공의회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51화. 망할

대공의회장.

세르데스 전 대륙에 퍼져 있는 지성체들의 대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넓은 자리와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대공의회장에는 정해진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세력이나 인근 동맹들과 함께 앉으며 세력의 규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때는 참으로 팽팽했군.'

페르다의 눈에는 마치 한 장의 세력 지도를 보는 듯했다.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는 아르켄 제국.

그에 대응하기 위해 왕국들은 연합의 형태로 비슷한 규모를 꾀하고 있었다.

아직 대륙의 밸런스는 유지 중이라는 뜻이다.

아르켄 제국 소속인 페르다는 아르켄 제국 세력들이 있는 곳에 착석했다.

대공의회장은 연회장에서 느꼈던 화려함은 없었다.

화려함에 들뜨지 않도록 최대한 절제한 디자인으로 여타 다른 의회들과 비슷했다.

반구 형태로 둘러싼 자리는 중앙을 향해 이목을 집중시키게끔 유도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 중앙 자리에는 이 대공의회장의 주인이 앉아 있었다.

'화이트 드래곤, 블랑카로스.'

새하얀 머리카락에 백안, 그리고 세월의 흐름은 닿지 않은 미청년의 얼굴.

그 하얀 빛이 얼마나 이질적인가 하면, 광채를 뿜어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것이 바로 드래곤들이 가지고 있는 불멸의 미였다.

'과연 드래곤인가.'

페르다가 그를 보고 있자, 가만히 있던 그의 눈동자가 굴렀다.

착각인가 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블랑카로스는 페르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백색 눈동자는 차가우며, 순수하다.

그 시선에 닿는 순간 페르다의 몸속에 있는 서클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절대적인 강자에게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경고.

특이하게도 그 경고에는 불쾌감이 없었다.

그가 그의 영역에 발을 들였을 때처럼.

그의 등 뒤에는 비슷하게 백발인 세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그들은 블랑카로스가 승천식으로 만든 세 명의 스폰들이다.

혀, 천칭, 그리고 손.

블랑카로스가 손을 움직였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절도있게 서 있던 여인이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녀가 바로 블랑카로스의 혀.

화이트 드래곤의 뜻을 대변하며, 이 의회의 절차를 진행할 대리인이었다.

목소리가 회의장에 크게 울렸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 오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약간의 허례허식과 함께 본격적으로 회담에 올라온 의제들을 읊기 시작했다.

"허드렛 왕과 유레이 공작의 분쟁 중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시작은 간단한 분쟁.

말이 분쟁이지, 규모는 전쟁이었다.

그러자 한 사내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대한 질서의 주인의 대리인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입회에 앞서 일을 바로잡고자 정정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 모든 사태는 허드렛 왕의 침략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며, 참사입니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일어났다.

지목당한 허드렛 왕이었다.

"죽은 것은 우리 영지민이 먼저 죽었소. 그 복수를 하겠다고 마을 사람들이 움직인 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소?"

"군대를 들인 것은 허드렛 왕 당신이지 않소!"

"정숙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중재를 위한 장소. 제출받은 증거를 바탕으로 최종적인 보상이 결정될 것입니다."

블랑카로스의 혀가 둘의 싸움을 차단하면서 길어질 법한 말싸움을 막았다.

"각 측은 준비해 놓은 증거들을 제출하십시오."

허드렛과 유레이 측에서 모아 놓은 증거들을 문서화하여 제출했다.

중재의 목적은 전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한 일.

제출된 문서가 한 장씩 날아오르며, 블랑카로스의 앞에 펼쳐졌다.

각 나라와 영지의 대신들이 두 달에 걸쳐서 썼던 것들을 모두 읽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블랑카로스가 한 소년을 보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소년은 천칭을 들고 있었다.

그가 바로 블랑카로스의 천칭이었다.

소년이 들고 있던 천칭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블랑카로스의 손이 문서화를 시작했으며, 혀가 판결을 했다.

"판결! 유레이 공작은 허드렛 왕에게 6만 골드를 배상한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패소 판결을 받은 유레이 공작은 길길이 날뛰었다.

"말이 안 됩니다! 침략한 것은 저 녀석들인데, 어째서 제가 배상을 해야 하는 겁니까!?"

"포로를 두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사제들의 의무를 제지했다는 점에서 전쟁법에 저촉되었다고 판단. 그 모든 것을 저울질한 결과, 유레이 공작에게 과실이 더욱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레이 공작이 반박했다.

"그건 다른 나라들도 하는 행위입니다! 틀림없이 허드렛 왕의 기사들도 그런 짓을 했고요! 그런데 저희라고 못 한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블랑카로스의 혀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더 설명해 주었다.

"이곳은 절대적인 중립 구역이며 법과 질서를 준수하는 곳. 이곳에서 중재를 요청했다면, 세르데스 대륙법과 질서에 따라 움직입니다. 관행보다는 증거가 우선입니다. 똑같은 행위를 했다면 똑같은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즉, 상대가 먼저 했고 그걸 받아쳤다 하더라도 증거가 없다면, 유레이만 한 것이 된다.

수집한 증거가 얼마나 결정적인가에 따라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기에 충분하다.

유레이는 악에 받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블랑카로스의 혀가 그 앞에 놓인 결과 확인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레이 공작, 분쟁 조정이 끝이 났으니 확인 서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레이 공작은 그 문서를 내려다보며 분노와 설움에 사로잡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서에 서명하는 순간,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니까.

억울하든 아니든, 그는 이제부터 가해자가 된다.

'그 효력은 절대적.'

한번 정해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고 불복할 수도 없다.'

이곳에 앉은 자들은 전부 증인이자 심판관들이며, 동시에 약탈자들도 될 수 있었다.

대공의회에서 판결이 난 것에 불복하는 것은 그들에게 뜯어먹힐 구실을 주는 것.

어제의 적은 여전히 적인데, 어제의 동료는 오늘의 적이 되어 버릴 수 있는 상황.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유레이 공작은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필체가 지진이 난 듯이 떨렸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 순간인가.'

정보가 없는 페르다로선 그렇게 추측하는 게 고작이었다.

"억울했으면 직접 끝장을 봤어야지."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페르다는 그 말에 작게 공감했다.

배상을 확실하게 받고 싶었다면, 분쟁 조정 따위를 하는 게 아닌 한쪽이 멸망하는 멸망전을 봐야만 했다.

어설프게 끝장내면 외려 보복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치다.

블랑카로스의 혀가 다음 분쟁 안건으로 넘어갔다.

이후로 몇 개의 분쟁이 더 있었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드워프와 엘프들의 갈등.

드워프 사이에서도 왕조와 혈통에 따른 내분 등등....

영원히 해결되지 않으며, 해결할 의지도 없는 그런 언쟁만이 오가는 분쟁을 끊임없이 보류해 가며 싸웠다.

그렇게 2시간을 끝에 끝없는 싸움을 종결했다.

"중재 조정 건은 더 이상 없으니, 의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에스콜레이아의 총장이 발의한 것으로...."

혀가 숨을 삼키며 한 템포 끊다가 말했다.

"의제는 마물의 증식과 마족의 재림 가능성입니다."

에스콜레이아는 거대한 학자들의 도시인 만큼 그들의 수장은 시장이 아닌 총장이었다.

대머리 총장이 단상 위에 섰다.

오랜 학구열로 불태우면서 자기 모근마저 사라진 모습이었다.

"깊은 어둠의 주인이자, 대륙을 혼돈으로 이끈 고드윈이 죽은 지 138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그래프를 보시면...."

총장이 마법으로 자신의 그림을 영상화하여 허공에 띄웠다.

그는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죽음과는 다르게 마물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 현재까지 그려진 그래프입니다."

상승 그래프.

하지만 그 상승치 자체는 크지 않았다.

그 그래프의 모습을 보고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별로 많이 올라가고 있지도 않는구려."

"증가 수치가 많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 않소?"

"어디까지나 예상 수치일 뿐이지 않소이까? 실제로는 더 떨어질 수도 있고, 너무 과민한 듯하군."

의견은 거의 반반에 가까웠다.

약간 증가한 것 두고는 호들갑이다.

그 호들갑을 떨 만큼 중대한 일이다.

그런 식으로 갑론을박하며 싸운다.

자세히 들어 보면, 대륙의 안녕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서로 구실을 찾으려는 것밖에 없었다.

'무장을 위한 구실.'

경각심을 세워야 한다는 측은 무장을 하기 위해서.

호들갑이라는 측은 그들의 무장과 쓸데없는 지출을 막기 위해서다.

대륙은 부서지든 말든 알 바가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중요할 뿐.

그때였다.

"말조심들 하지 그래!"

누군가가 차원이 다른 박력으로 책상을 치고 일어났다.

그러나 박력과는 거리가 먼 앳된 목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에르데스 로톤이 있었다.

"여기에 무려 발드로바 공왕님의 약혼자께서도 계신다고! 너희들이 그렇게 입을 놀려서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아?"

모든 사람이 페르다를 찾기 위해 머리를 휘저었고, 페르다를 발견한 자들은 그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페르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망할 X.

"발드로바의 대리인 말인가?"

"잠잠하던 그 악룡이 대리인을 이끌고 왔단 말인가?"

페르다 발드로바에 대한 루머들을 한마디씩 읊으며 수군대는 사람들.

가뜩이나 맨발로 가시밭 걷는 얼굴이던 총장은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듯 난처해 보였다.

이 지경으로 만든 에르데스를 슬쩍 보았다.

그녀는 행복한 얼굴을 했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방화범처럼.

나서야 할 때가 있기에 오긴 했지만, 지금은 분위기를 좀 더 살피고 싶었다.

이목이 쏠린 김에 페르다는 할 말을 하기로 했다.

"극동부에 끊임없이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이야기와는 결이 맞지 않는 듯하니 따로 발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섭정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지금 얘기하는 것은 극동부를 제외한 대륙의 발생 빈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총장이 구원의 손길을 잡은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발언권이 아주 약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해서 지금 추측으로는... 누군가가 의도로 마물들을 소환하고 만들어 낸다, 즉, 마족 추종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마족 추종자...."

"악마 추종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인들이지 않소?"

마족 추종자들과 악마 추종자들이 멸시되는 사회지만, 둘은 명확하게 다르다.

악마들은 이 현세를 지배하기를 원한다면, 마족은 이 현세가 파괴되길 원한다.

악마 추종자들은 얻을 것이 있지만, 마족 추종자들은 얻을 게 없는 것들이다.

순수한 악의 덩어리 그 자체라는 뜻이었다.

"그것들이 얻는 것이 뭐란 말이오?"

"마족들의 바람이라면, 흑룡 고드윈의 재림이지 않겠습니까?"

흑룡 고드윈의 재림!

단순히 마물이 늘어났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호들갑이라고 비판하던 자들도 말을 아꼈다.

모든 사람의 주의는 이미 앞자리를 차지하는 드래곤 스폰들에게 옮겼다.

"재림인가...."

의장 블랑카로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질서의 주인이 입을 열기 무섭게 분위기는 그의 손아귀에 쥐여졌다.

"어떤가?"

블랑카로스가 드래곤 스폰들을 향해 물었다.

가장 먼저 질문을 문 것은 실버윈드의 스폰이었다.

은발 머리의 그들은 몸 곳곳에 흉터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것은 북부를 지키는 실버윈드의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마물의 증가 추세와는 다르게 지금도 꾸준히 잔당들을 소탕하는 중입니다. 맹세하건대 흑룡 고드윈을 향한 증오심은 우리만 한 자들이 없을 겁니다."

"그대들의 실버윈드에 대한 충성심은 언제나 높게 사고 있지. 이오르가는?"

이오르가의 대표, 젊고 세련된 여인이 기품이 있는 여인이었다.

얼굴은 20대 초반에 들어선 여인의 생기가 넘쳤지만, 세월로 다져온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세르데스 대륙에 특별한 마력의 변동은 감지 못했습니다. 차폐될 수 있는 공간도 꾸준히 모험가들을 통해서 보고 받는 중이고요. 대륙을 뒤집어 버릴 만한 큰 사건이었더라면, 저희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오도그라사도의 사제가 이어받았다.

"저희 황금 비늘 교단에서도 꾸준히 마족의 동향을 살피는 중이며, 딱히 문제로 삼을 것은 없다고 봅니다."

대공의회에 참석한 세 용의 대리인이 전부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전부 대륙의 안위에 가장 우선으로 걱정하는 수호룡들의 대리인이었다.

한낱 인간들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며, 말의 무게가 다르다.

그들의 말을 들은 블랑카로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블랑카로스의 혀가 대신하여 대답했다.

"이 의제의 결론은 당장에 문제로 삼을 필요가 없지만, 지속적인 상승세에 따라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내리겠습니다. 이의가 있습니까, 에스콜레이아 총장?"

"없습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던 총장이 고개를 저으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호들갑이라고 결론을 내리기도 애매한 사항이었으니 보고만으로도 만족했다.

"다음 발의자는 페르다 발드로바...."

블랑카로스의 혀가 말을 멈춘다.

총장이 발의했던 것을 읽었을 때의 뜸 들임과는 달랐다.

이것을 공표해도 되는가 하는 망설임.

그 망설임이 블랑카로스를 향해 시선을 옮기게끔 했다.

블랑카로스는 혀의 시선을 의식하고 블랑카로스가 눈빛으로 대답한다.

블랑카로스의 혀가 지시받았다.

"의제는 적룡 발드로바의 지위를 수호룡으로서 인정...입니다."

대공의회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그 안에 있는 것은 공작급 되는 인물들.

한 나라 정도 되는 영토를 다스리며, 무력을 지닌 이들이다.

그런 이들조차도 숨을 죽일 정도로 민감한 일이었다.

이미 한 번 이목을 끌었던 만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감히 발의하지도 않으며, 참여하지도 않을 만큼 민감한 사항이었다.

자살행위다.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았다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그 발의를 한 페르다는 보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걷는 모습은 마치 곡예를 보는 것과도 같았다.

보는 사람은 아찔한데, 정작 걷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까지도 같다.

단상에 올라선 페르다는 의회석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뻔하다.

"첫 의회 참석인데도 건방지게 발의를 하게 된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입니다."

그들을 한 번씩 스윽 보다가 입을 여는 것.

"이 발의를 보면 잘 알겠지만, 저는 여기서 누군가를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발의를 던진 만큼 소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52화. 그럼에도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의 반려자가 되실 분인 발드로바에 관해서입니다."

개중에 담이 적은 자들은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런 표정을 볼 때면 오히려 자신감을 얻었다.

"동부의 끝자락, 본래는 만물이 누빌 수 있었던 땅은 흑룡, 고드윈으로 인해 황폐해지며, 마물들이 끊임없이 빚어지는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페르다는 그 자신감으로 자신의 언어에 힘을 실었다.

"위대한 적룡, 발드로바는 150년 동안 아무 대가도 없이 그 동부의 마물들과 싸움으로써 봉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 반려자에게 붙은 이명이 무엇입니까?"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름.

그러나 그 공포가 옅어지면서 멸시되었던 이름.

조롱되었던 이름.

"폭군, 악룡입니다. 마물은 언제나 저 먼 마의 땅에서부터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분의 비늘을 벗기고, 살가죽을 찢습니다. 그 발톱은 여러분들의 터전과 가족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런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눈물짓는 고통 속에서도 침묵을 유지하며, 꿋꿋하게 싸웠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짐승 또한 은혜를 받으면 보답을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분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이 자리에서 입을 열었습니다."

페르다의 시선이 주변을 읽어 갔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정해져 있었다.

관심이 없는 놈에서 관심이 있는 놈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보려고 계산하는 놈들.

그러나 그들의 눈은 언제나 한 곳을 향했다.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드래곤 스폰들.

신비의 주인이자, 위상이며 불멸자들의 하수인들이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이라 했나요?"

그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실버 드래곤 스폰들의 반발인가?

그렇게 생각한 것과 다르게 기품 있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푸른 머리에 뾰족하지 않은 뿔.

'에리카 이오르가라고 했던가?'

이오르가 스폰들의 수장인 에리카 이오르가였다.

밝은 푸른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날렵한 턱선과 진한 인상.

스폰의 수장이 아닌 제국의 공주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한 동작으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페르다 섭정. 이오르가의 대표이자, 푸른 눈의 탑주, 에리카 이오르가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첫 대면에 쓴소리로 시작하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발의가 발의인 만큼 저 또한 빙빙 돌리지 않겠습니다."

에리카의 눈이 페르다에게 들어왔다.

맑은 하늘색에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동공이 페르다를 향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의제에 대해서 결론은 '안 된다'로 간단하게 날 발의입니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 박힌 신념이 페르다를 향했다.

좋지 않았다.

그 눈은 대공의회 모든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고 있으니까.

"150년 전, 용마전쟁이 일어나면서 12년 동안 고전하게 만든 고드윈의 심장을 발드로바 님이 뚫어 버리며 전쟁 영웅이 되었습니다."

부드럽고 이성적인 말투.

그러나 페르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죠. 발드로바 님께서는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주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많은 종족이, 많은 생명이 죽었습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에리카가 페르다에게 물으며 동시에 말을 덧붙였다.

"발드로바 님의 부군이 되시는 만큼, 그리고 이 발의를 던진 만큼 많은 조사를 해 왔다고 믿습니다."

대답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모른다고 하면 스스로 함정에 빠질 뿐이다.

페르다는 사실대로 말했다.

"고드윈이 일으킨 용마전쟁 기간에 일어난 피해의 절반...입니다."

반나절 만에 절반의 숫자가 죽었다.

이건 모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가장 큰 참사였다.

"네, 절반이죠. 그것도 12년에 걸친 피해가 반나절 만에 일어난 결과입니다. 그리고...."

에리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어디론가 시선을 끌었다.

고즈 실버윈드였다.

"실버 드래곤의 수장, 실버윈드마저 그로 인해 타계하셨습니다."

고즈 실버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말보다는 주먹인 다혈질 기질이 다분한 자였다.

그가 입을 열면 어떤 저주를 퍼부을지, 감당할 수가 없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발의자인 페르다는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기죽을 거라면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드윈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그 당시에는 총력전, 세르데스 전 병력이 고드윈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였으며, 많은 장병과 짐승들이 모여들었을 때입니다. 그 속에서 날뛴다면 손쉬운 먹잇감이 되는 건 불가피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서 날뛰었고 희생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됐든 악룡 고드윈이 죽인 숫자에서 절반을 반나절 만에 죽였습니다."

"12년간 세르데스 대륙을 지독하게 괴롭힌 고드윈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실버윈드 님을 살해하셨죠. 누구보다 남을 아끼시던 용감한 전사이자, 최고의 지도자인 그분을 말입니다."

하루 만에 최흉의 악룡과 최고의 수호룡을 동시에 죽음을 몰고 간 발드로바.

그 두 사태가 동시에 일어났으니, 발드로바의 입지가 붕 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페르다에게는 증거가 있었다.

"그 폭주는 발드로바의 의지도 아니며, 힘의 위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질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악룡, 고드윈의 심장에 깃든 혼돈에 오염되어 일어난 사태일 뿐입니다."

페르다는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모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드윈의 심장에는 혼돈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혼돈에 가장 가까이 접촉한 것이 바로 발드로바 님입니다. 심장에 깃든 근원을 직접 파괴했으니, 좋든 싫든 그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에리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확실히 고드윈 님과 가장 근접한 것은 발드로바 님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에리카가 다시 한번 더 분위기를 장악한다.

"그 자리에서 싸운 것은 발드로바 님만이 아닙니다. 모두가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고드윈에게 거리를 주고, 상처를 입은 자들이 훨씬 많습니다."

페르다도 알고 있었다. 기록을 교차 검증함으로써 발드로바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다는 사실을.

"섭정의 말대로라면, 자리에 있던 모든 용도 영향을 받아야만 합니다. 깊은 부상을 입었던 이오르가 님도 말이죠. 하지만 그분은 아직 건재하십니다."

에리카가 눈길을 돌렸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노인이었다.

"오도그라사도 님께서는 정정하신지요?"

노인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오도그라사도 님께서는 빛나는 황금빛 신앙을 두른 분이십니다. 고드윈의 얄팍한 수에 당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단호한 부정에 에리카가 고개를 들었다.

"보십시오. 당신의 말대로라면 용마전쟁에서 많은 이들이 침식당하고 오염되었어야 합니다."

"...."

"심장을 파괴했기에 그 혼돈이 스며들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십시오. 그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선 다른 분들과 다르게 발드로바 님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에리카가 목소리에 감정을 실어 넣었다.

"그분은 무언가를 지키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피를 맛본 짐승과도 같습니다. 그분이 일깨운 파괴하려는 본성을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 본성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이 마의 땅에서 흘러나오는 마물들이고 그것을 택한 이유는 가장 뒤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마의 땅에 근접하면서도 마의 땅을 없애려는 의지 또한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페르다는 에리카가 점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벽이었다.

그냥 벽도 아니었다.

북부에 있는 벽.

얼음의 대지 너머에서 오는 서리거인과 악마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거대한 벽.

그것을 서리장벽이라 부른다.

페르다 또한 그 벽을 본 적이 있었다.

벽 너머의 것에는 자비와 관용이 존재하지 않았다.

에리카의 주장은 그 벽과도 같았다.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으며, 접근하는 것들에게 베푸는 것은 오직 무관용과 무자비뿐.

'어째서.'

페르다는 궁금했다.

'어째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일까?'

발드로바를 철저하게 소외시키려는 몸부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즈 실버윈드가 분노했더라면 틀림없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관계도 없는 이오르가 쪽에서 재고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굴고 있었다.

페르다는 분위기를 읽었다.

그의 눈이 무심코 대공의회 전체를 훑었다.

그런 그녀의 뜻에 동조하는 귀족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편인 것마냥 굴어 댔던 알렉산더는 숨을 죽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득이 있을지 모른다는 정치적 계산을 하는 중이리라.

'가증스럽군.'

페르다의 눈에는 모든 것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벗겨 먹기 위해, 안달이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정치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인간이라는 게 뭔지는 안다.

주목받고, 공격받는 순간 모두가 합심하여 무너트리려 한다.

페르다한테 발드로바라는 이름이 없었더라면 하나둘씩 페르다를 뜯어먹으려 어슬렁거렸을 것이다.

페르다는 언제나 유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속이 끓어오른다.

끓어오르면 끓어오를수록 페르다의 얼굴은 싸늘하게 일그러졌다.

애초에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런데도 쉽지 않다.

이 상황을 똑바로 직면하고도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니.

페르다는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격동을 느낀다.

버리고 잠재웠던 분노가 페르다를 조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묻는다.

'발드로바. 나의 심장이시여....'

당신은 이렇게까지,

모든 모함과 모멸을 받아들이고도,

당신이 사랑하고자 하는 것을,

꿋꿋이 사랑하며 지켜야만 합니까?

그러자 격동하던 심장은 놀랍도록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분노의 조소가 멎었다.

꺾여 버릴 것같이 가녀리고,

새벽녘 촉촉한 땅을 뚫고 솟아오른 떡잎처럼 부드러운,

그러나 얼어붙은 자신의 마음을 녹이고,

가슴 깊숙한 곳에 새겨져 버린,

그 마음이,

페르다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럼에도,

"그렇다면."

모든 이들을 사랑하노라고.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페르다의 말에 에리카가 물었다.

"증명을 하시겠다니, 무엇을 말인가요?"

"그분이 극동부를 거점으로 삼은 것은 단순히 자신의 파괴 본능을 풀기 위한 해우소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단상 위에 선 페르다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소리쳤다.

"극동부의 대리인으로서, 발드로바 공왕령의 섭정으로서, 발드로바의 약혼자로서, 이 자리를 빌어 선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페르다가 해야 할 일은 지극히 간단했다.

우직한 그녀의 날개를 펼치게 도울 뿐.

당당하게 고개를 들며, 큰 소리로 또박또박 한 음절씩 그들의 귀에 박아 넣는다.

"마의 아버지이자, 혼돈의 근원, 흉룡 고드윈이 더럽힌 이 땅을 정화하여 탈환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의 땅 정복 선언이었다.

페르다의 파격적인 선언에 대공의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의 땅을 정복하겠다고?"

"불멸의 위상들조차도 불가능했던 땅을 말인가...?"

모두가 놀라며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마전쟁 이후 마의 땅이 만들어지면서 그곳을 정복하려던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정복을 꿈꾸며 발을 들였던 사람들은 전부 실패했다.

무려 1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시도했으나 좌절되어 방치된 그 땅을,

"위대한 힘과 불의 위상이신 발드로바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 땅에 출현하는 마물들의 근절입니다. 그 마물의 근절의 주목표자, 최종은 마의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어린 섭정이 야심 차게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이 대륙의 평화를 바라는 것인 만큼, 저 또한 힘을 실어 악룡이 오명이라는 걸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행동하겠습니다."

페르다의 그 야심 찬 한마디에 대공의회를 크게 흔들었다.

페르다는 오늘 처음 의회에 참석한 공왕의 대리인이었다.

18세에 젊고 경험이 없으니 건방지기 짝이 없다고 한 소리 하기엔 충분했다.

어딜 가나 경험과 나이는 눈에 밟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페르다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은 페르다가 겉으로는 발드로바의 위상을 등에 업었기에 그런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달랐다.

어쩌면 저 넓은 남자가 해낼지도 모른다는 그런 희망이 숨겨져 있었다.

"이 의제는...."

블랑카로스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회의장을 울렸다.

동시에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드래곤 스폰들 조차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도록 하지, 섭정."

블랑카로스가 직접 입을 열어서 페르다에게 요청했다.

페르다는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리인을 내세워 모든 것을 진행하는 블랑카로스가 직접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말의 무게는 남다르다.

"이 자리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페르다는 지금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이걸로 그의 데뷔식은 끝이 났다.

페르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블랑카로스의 입이 진행했다.

"다음 의제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이후로 시답지 않은 것들이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페르다에겐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일 뿐이었으며, 귀담아듣지 않았다.

'에리카 이오르가.'

그녀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복수의 마법사였던 페르다의 버릇이 무의식적으로 뼈 안쪽에 깊게 그 이름을 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무용한 짓이다.'

페르다는 오랜 버릇을 무시하려 했다.

그때였다.

-페르다 섭정, 들리시나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에리카의 목소리가 페르다의 귀에 울렸다.

텔레파시 마법을 쓰는 것이다.

-귀공의 의견은 잘 들었사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페르다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응집시킨 후, 머리에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

-귀공의 의견은 저, 에리카 이오르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한—.

뚝—.

선이 끊어지듯이 머릿속의 울림이 멈췄다.

페르다는 그녀가 이어 놓은 텔레파시를 끊어 버린 것이다.

갑작스런 통신 단절에 에리카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슬쩍 고개를 돌려 페르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한 눈빛.

페르다는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꺼져.'

그녀가 다시 한번 더 텔레파시를 쏘았다.

-잠시만요, 페르다 섭정. 감정적인 상태인 건 잘 알겠습니다. 차단하지 말고 제 말을 들어 보시면—.

그럴 때면 페르다는 다시 차단할 뿐.

-아니, 말을 들으라—.

텔레파시가 날아오면 또 차단.

그렇게 회의가 끝이 나는 장정 30분 동안 서로 메시지를 보내고 차단하는 싸움을 했다.

53화. 허락할 수 없는 선례

공작급 이상들만이 모이는 의회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페르다는 다른 귀족들을 따라 의회장을 나왔다.

"섭정님."

페르다를 기다리고 있던 제드와 아르웬이 다가왔다.

페르다의 안색을 살피던 제드가 물었다.

"안에서 무슨 모욕이라도 당했습니까?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신데."

"모욕이라면 모욕을 당했지."

발드로바가 악룡이라는 모욕을 듣고도 넘겨야만 했으니까.

복수로 대마법사가 된 남자가 차오르는 감정을 무시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입방아에 오르지 않는 편이 낫다.

페르다는 대화 주제를 돌렸다.

"루리는?"

"루리 양은... 그러게요. 어디로 갔지?"

"회담이 끝나기 전에 볼일이 있다고 해서 자리를 옮겼습니다. 어디 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파악을 해 뒀어야 했는데...."

"아닐세. 그렇게 쉬운 여자는 아니니까."

페르다는 추궁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디로 갈 건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루리가 미리 말했던 대로라면 실버윈드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움직였을 것이다.

'이야기라.'

페르다는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고즈 실버윈드가 보낸 눈빛을 떠올렸다.

서투르기 짝이 없는 절제심으로 분노를 죽이고 있었다.

만약 페르다가 그곳에서 실버윈드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난투극이라도 펼쳐지지 않았을까?

블랑카로스의 중립 구역이 아니었다면 더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잘될지 모르겠군.'

페르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님?"

새하얀 공간 속에 어울리는 새하얀 남자.

중립 구역 절대자의 심복답게 절도 있는 자세.

블랑카로스의 손이었다.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동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석에 말인가?"

"예. 조금 전 발의 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십니다."

특이한 일이었다.

블랑카로스는 중립을 위해서라도 사석에 인간을 부르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지.'

중립의 위치에 서겠다는 블랑카로스가 멋대로 의안을 넘겨 버렸으니, 발의자에게 보충이 필요했을 것이다.

애초에 페르다가 그 부당함을 참은 이유도 이 순간 때문이었다.

"알겠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페르다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

블랑카로스의 접견실은 드래곤의 처소답지 않은 장소였다.

드래곤이라면, 화려하면서 커다란 크기.

어떤 황제들도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며 웅장해야만 한다.

대공의회장만큼은 틀림없이 그 위엄에 걸맞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블랑카로스의 접견실은 달랐다.

인간미가 넘치는 장소였다.

쓸데없이 크지 않으며, 쓸데없이 웅장하지 않다.

소영주의 집무실처럼 작고 실용적인 모습이었다.

"어서 오도록 하게."

끄트머리 대리석 책상 앞에 앉은 블랑카로스가 육성으로 그를 반겼다.

안으로 들어서던 페르다의 발걸음이 끊기고 말았다.

그 안에는 블랑카로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하얀 공간 속에 푸르게 빛나는 존재.

에리카 이오르가.

그녀가 자리 하나를 차지한 채로 앉아 있었다.

에리카는 페르다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사나운 인상이 페르다를 보자, 그는 한층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뒤에 서 있던 제드와 아르웬은 괜스레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왜 저렇게 노려본 댑니까? 뭐 잘못하셨습니까?"

페르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잘못을 한다니 그럴 리가 있겠나?"

"그런 거 같은데요?"

페르다는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에리카를 무시한 채 블랑카로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블랑카로스 님께서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만...."

페르다가 에리카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년과는 할 이야기가 없는데.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푸흡...."

"크흠!"

폭언을 던지는 페르다와 뒤에서 병풍처럼 서 있다가 장대하게 뿜어내는 제드와 아르웬.

드래곤 스폰이라 해도 대표의 지위는 드래곤에 버금간다.

페르다는 방금 드래곤에게 '이년'이라고 한 셈이었다.

제명에 살고 싶지 않다고 안달이 난 인간이 할 짓이다.

"흐으음...."

"뭐, 이, 이년...?"

블랑카로스는 예상했다는 듯이 침음을 흘렸다.

당사자 에리카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페르다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인내했다.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대화하기 위함이고, 무엇보다 이 공간에선 무력을 쓸 수 없다.

에리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뵙겠습니다, 페르다 섭정. 시시한 전음 따위 말고 육성으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죠."

"마음대로 하십쇼."

페르다는 귀를 막았다.

에리카가 짓던 미소가 싸악 사라졌다.

"자꾸 유치하게 그럴 건가요?"

"정당한 겁니다. 제 약혼자를 모독했으면서 좋은 소리를 듣기 바라십니까? 제가 이오르가 님을 물도마뱀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헉."

"크흠흠...."

숨이 넘어가는 제드와 아르웬.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 말에 에리카는 인내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 애써 심호흡을 했다.

"이걸로 서로 모독한 걸로 치도록 하죠. 제가 폭언했다는 사실은 추가로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페르다는 귀에서 손을 뗐다.

모욕을 참고 넘겼으니, 그녀가 대화할 의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우선 시종들은 물리고 윗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둘 다 물러나도록."

"예!"

페르다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속보로 물러났다.

하얀 공간 속에는 3명의 남녀만이 남았다.

"서로 감정이 격앙된 만큼, 간단명료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발드로바 님의 편입니다."

"참 믿음직스러운 말이로군요."

페르다가 그 말에 비아냥거렸다.

"이오르가 전체는 발드로바 님을 견제하고 있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핵심 간부들은 발드로바 님의 공헌을 언제나 높게 사는 중입니다."

퍽이나.

"믿지 않으시는군요. 저는 그 전쟁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모든 용이 싸우는 그 광경을 이 두 눈으로 목격하고 느꼈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아직도 제 눈에 생생합니다."

그녀의 팔에 돋은 잔털이 쭈뼛하고 섰다.

"고드윈이 이 대륙과 동귀어진을 하려던 그 순간을 유일하게 막아선 그분의 모습은...."

그 말을 들은 블랑카로스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 전투에 참여하여 본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에리카가 말을 이어 갔다.

"악룡, 수호룡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을 파괴하려던 고드윈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이는 것은 리스크가 컸습니다. 모든 용이 알고 있었죠. 그리고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발드로바 님은 순수하게 그곳에 몸을 던졌습니다. 검은 덩어리가 붉은 창에 찔려 흩어지던 것과 같았죠. 물론... 그 끝이 또 다른 비극을 이어가면서 참혹하게 끝이 나 버렸지만요. 그렇다고 해도 악룡이라는 이름을 살 필요는 없는 분이셨습니다."

"헛소리인 마냥 조롱하면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걸 봤는데 그걸 믿으란 겁니까?"

"그러니 모독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했어야만 했던 일입니다."

"욕보이는 걸 해야만 했단 말입니까? 그게 말이나 됩니까?"

"제가 그 주장을 조롱하고 무마하지 않으면 위험하니까요!"

"뭐가 말입니까?"

"실버윈드요."

또 다른 드래곤의 무리.

페르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실버윈드를 떠올렸다.

"제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실버윈드가 나섰을 겁니다. 그 머리에 얼음덩어리밖에 들지 않은 족속들이 이 회담을 개판으로 만드는 것은 사양이에요. 당신이 그 극동부 정벌을 선언하기도 전에 용들의 전쟁을 요구했을 거예요."

"오직 날 감싸기 위해서 모든 것에 태클을 걸고 조롱했다는 겁니까?"

에리카가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이걸 이야기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

"비단 페르다 섭정, 당신만을 위한 건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본성이 아닌 고드윈에게 침식되어 광증이 된 것이라면...."

한순간, 에리카의 눈빛에서 상처 입은 짐승이 보였다.

"완전한 존재가 불완전해졌다는 선례는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에요. 대륙의 균형이 붕괴될 만큼 말이에요."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이해했다.

어째서 그렇게나 발드로바에게 적대적으로 굴었던 것인지.

그리고 블랑카로스가 일방적으로 끝내 버린 것인지.

페르다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던졌다.

"이오르가 님께서도 똑같은 증세가 있는 모양이로군요."

에리카는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그 증세가 위화감에 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고드윈과의 싸움에 후유증을 겪는 이들은 드래곤 스폰들 중에서도 많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요 30년 동안,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시기 시작했어요. 불안정해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됐습니까?"

"동면에 들어가신 상태입니다. 방도를 찾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는 걸 선택하셨죠."

마법의 위상인 이오르가가 부재라는 뜻.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문득 궁금했다.

"그렇다면 오도그라사도 님도?"

"그건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스폰을 두지 않고, 자신이 곧 신앙이신 분이 자신의 치부를 그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으실 테니까요."

신앙으로 무장한 자들은 당연히 온전하다고 믿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뒤가 맞는다.

이건 단순히 발드로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용의 사회를 흔들 수 있는 문제였다.'

페르다가 어느 정도 납득한 눈치를 보이자, 에리카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추어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본성이 악룡이 아니라, 고드윈 때문에)흔들리고 있다는 주장이 먹혀든다면, 모두가 위험한 상황이에요. 발드로바는 물론 다른 이들의 지위가 흔들립니다. 자룡 그리고 전룡처럼 혼란을 일으키는 것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 치료제를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페르다는 더 들을 것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당신이 겁쟁이에 불과하다는 것밖에 없겠군요."

"겁쟁이...라고요?"

에리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격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깐이었다.

페르다의 눈을 본 순간 압도당하고 말았다.

"최후에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가 물었다.

"무슨 최후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게 숨기고 숨기다가 최후에 들통나게 될 위기,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습니까?"

"그건...."

"제 약혼자의 목숨마저 팔아서라도 당신들이 가진 비밀을 숨기려 하겠죠."

"제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거라 생각하시나요!?"

"그럼 아닙니까?"

에리카는 대답하지 못했다.

긍정할 수도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주먹만 꽉 쥘 뿐이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죠. 가 봐도 되겠습니까?"

페르다는 블랑카로스에게 물었다.

해결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도록 하게."

블랑카로스의 허락이 떨어지고 페르다는 걸어 나갔다.

에리카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드래곤 스폰의 수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인간에게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꼴이 우습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오게 된다면, 에리카는 또 똑같이 굳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페르다의 혐오감 어린 눈동자.

그 속에는 그녀의 먼 미래가 담긴 편린을 보았다.

* * *

세르데스 인류 마법학회.

학회장실에 앉아 있는 것은 건방진 어린 여자가 아닌 건장한 사내였다.

"으어어어...."

그 사내는 지옥에서 올라온 구울 같은 소리를 내면서 펜대를 놀리고 있었다.

학회장, 에르데스가 남긴 서류들을 나흘을 걸쳐서 쉬지 않고 하는 중이었다.

"으어어... 엉?"

잠시 후, 그의 앞에 동그란 원형의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그 현상이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원래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반기겠지만, 루에게는 그런 사고조차 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블루 군! 나 왔어!"

해맑은 인사를 건넨 것은 에르데스였다.

"벌써 다녀오셨습니까?"

"회담 끝나자마자 칼같이 퇴근했지. 나만 따돌리고 재미가 없는 거 있지?"

"그런 것치고는 행색이 좀 이상합니다만...?"

회담에 다녀온 사람이 아닌, 관광지를 다녀온 사람처럼 주렁주렁 달고 왔다.

"깐깐하긴. 끝나고 도시 쪽에 관광 좀 하고 왔다, 떫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루는 한숨을 내쉬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서류를 결재하고 책상 위에 엎어졌다.

"일은 다 끝난 거야?"

"밀린 건 일단 다 됐습니다."

"이것 봐. 이렇게 일 분배가 확실하니 얼마나 좋니? 쉬는 건 내가 하고, 일하는 건 블루 군이 한다. 일 분배가 확실하잖아?"

"확실하긴 한데, 이상한데요...?"

"게다가 간 김에 근처 들러서 특산 명물 꿀빵도 사 왔다고? 이런 천사 같은 상사가 어딨니?"

어떠냐는 얼굴로 눈썹을 들썩였다.

그래, 맛있는 거라도 먹자.

루는 건네준 상자를 열었다.

"...비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 아, 너무 맛있어서 다 먹어 버렸나 보다. 쏘리. 상자는 잘 버려 놔?"

루는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퇴직할게요."

"아아, 그렇겐 못 두지. 블루 군은 내게 1천 년은 더 봉사해야 해. 거부권은 없어. 그게 우리가 한 계약이잖아."

"이런 젠장할."

루는 희망을 잃은 얼굴로 꺼이꺼이 울어 대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뭐가?"

"페르다 발드로바라는 그 남자 때문에 간 거 아닙니까?"

"그 남자? 음...."

검지로 턱을 짚으며 고개를 살랑살랑거리다 대답했다.

"특이했지."

"특이...하다고요?"

루가 눈을 크게 떴다.

"인류 최강의 대마법사라는 분께서 특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특이했습니까?"

"그렇게 띄워 줘도 아무것도 안 나오거덩? 그냥 뭔가 신기하더라고."

에르데스는 책상에 걸터앉으며 루를 내려다보았다.

"그 인간은 레드 서클을 가졌더라?"

"레드 서클!"

"게다가 흑마법도 배웠더라고. 냄새가 폴폴 났어."

"흐, 흑마법이요!?"

루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흑마법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그 사람 사, 살아 있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무슨 시도 때도 못 가리고 발광하는 살인귀라도 되는 줄 아니?"

"뭐, 학회장님께서 별다른 문제도 안 만들고 나오신 걸 보면... 그 사람은 정말로 특이한 인간인가 보네요."

"당장에 손을 댈 수가 없었어. 미치광이 용의 남편인데, 잘못 건드렸다가 어떤 꼴을 당하려고?"

찜찜함에 눈썹이 구겨지는 에르데스.

바닥에서 떨어진 다리는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블루 군. 블루 군의 부모가 만약 홀연히 떠났으면 어땠을 거 같아?"

"어... 글쎄요. 화가 나지 않을까요?"

"화만 났을까? 응? 그냥 으아! 나를 버린 부모, 용서 못 해! 같이 소리만 쳤을까?"

"학회장님은 그러실 거 같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서럽기도 하겠죠."

에르데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맞아. 흔히 말하는 감정이 소용돌이친다는 표현이지.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느낄 수 없이 압도되어서 짓눌리는 게 보통 인간들이지. 우열을 가린다고 해도 그 하나에만 사로잡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그렇겠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제 아둔한 머리로는 이해가 잘...."

"빡지 50장 써 볼래?"

"아, 잠시만요. 기억이 날 거 같기도 한데...요?"

"멍청하긴. 고작 그런 걸로는 레드 서클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뜻이야."

"아, 저 정말로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멍청한 주제에 고집만 있어 가지곤. 넌 100장이야."

"켁! 너무하십니다! 없는 동안 공무도 다 해 놨는데!"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법이지."

루는 꿍얼거리고, 에르데스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은 페르다 발드로바가 레드 서클을 지니기 어렵다는 뜻인가요?"

"맞아."

"그치만 감정이라는 건 상대적인 요소지 않습니까?"

"맞아. 잣대는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페르다라는 놈은 내 범주를 아득히 넘어섰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입니까?"

"레드 서클이 만들어지는 건 감정이라는 저울이 부서지면서 만들어져. 하지만 그 사춘기는 저울이 부서질 수가 없는 나이야. 분노로 인해 저울이 부서지기 위해서는 아침마다 꼿꼿하게 서는 이유조차도 분노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어야 할 정도로 망가져야 하거든?"

"어음... 좀스런 비유긴 합니다만, 그래도 가문에 쫓겨난 사건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로도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발드로바의 약혼자가 되었다.

사실상 사형 선고인 그것은 페르다의 설움을 터트리기엔 충분했다.

"그 녀석은 받아들였어."

"그 말씀은?"

"받아들인다는 건 이성이 있다는 뜻이야. 그 말은 즉, 분노가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하시는 말씀은 저울이 망가질 계기가 없으니 레드 서클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거겠네요?"

"맞아."

"그런데 섭정에게는 레드 서클이 있죠."

"그렇기도 하지."

"조건이 충분하지도 않은데, 레드 서클이 만들어졌다...."

"그것도 1년 채 되지 않아서 4서클을 성취했어."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들도 있었죠."

테살로스 월처의 처형.

제국 창고 속에서 일어난 전투.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흑마법이 있어."

"흑마법...."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던 중, 루는 불현듯이 깨달았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

그녀의 밑에서 무려 10년의 세월을 봉사해 온 그는 마침내 에르데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발드로바 섭정이... 악마와 계약했다고 보신다는 말씀입니까?"

결론에 도달한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냄새가 나지 않아?"

54화. 나비와 보석

대공의회가 끝이 나고는 뒤풀이가 진행 중이었다.

회담 전의 분위기보다 더욱 삭막하게 느껴졌다.

회담 전에는 풀어져서 서로의 정보를 탐색한다면, 지금은 무리들끼리 결속력을 보이는 중이었다.

'어린애들 같군.'

말싸움하고 난 이후에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부릴 수 있는 칼을 쥐었다는 것이다.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제국답게 공작급 이상만 30명이었다.

제국이라는 큰 틀이 아닌 그 안에 있는 파벌들끼리 서로 어울리는 중이다.

무한한 관심을 보이던 알렉산더가 페르다를 발견하고 살갑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던가?"

"발의 건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만 나누고 왔습니다."

"아아, 그렇지. 이번 설마 극동부를 정벌하겠다고 야심 차게 대답할 줄은 몰랐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게. 발 벗고 도와줄 테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걸로 대화는 끝이 났고, 알렉산더는 다시 자신의 무리에서 대장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귀족 사회에 눈치가 빠른 제드는 알렉산더의 태도를 보며 알아차렸다.

"1황자랑 틀어지셨습니까? 대공의회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더니...."

"도움이 안 될 거 같으니 무시하는 거지."

페르다는 그 무리에서 미련 없이 벗어났다.

애초에 그 무리와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곧이어 또 다른 남자가 페르다에게 허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에스콜레이아 총장, 버나드 웨인이 위대한 힘의 위상의 배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류의 보고 지식의 총재를 뵙습니다."

마족 추종자들의 출현이라는 의제를 꺼낸 남자.

페르다는 무심코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혹시 언짢은 일이 있으십니까? 표정이...."

"아니...."

버나드의 반질반질한 머리가 샹들리에의 불빛에 반사되었다.

"머리가 너무 눈부셔서 그렇습니다."

"크흠... 그건 넘어가도록 하고, 오늘 일에는 감사드립니다."

"감사?"

"제국 황자님이 나서는 바람에 의제가 흐려질 뻔했던 일이 있지 않습니까? 직접 나서 주셔서 덕분에 말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 그 일인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물 가지고 정치질을 하는 것들을 혐오해서 말이니. 저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소신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래서 발드로바 섭정님과는 이야기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어색한 웃음을 짓는 버나드 총장.

마치 흉계를 꾸미는 사람처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버나드는 애초에 흉계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쓸데없이 성실하고 책임감이 넘치는 인간이다.

"말씀해 보십시오."

"오늘 발표한 내용에 맞춰서 본래 기술을 발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상황을 보니 영 각이 잡히지 않더군요."

"기술?"

"제 인생을 바쳐서 연구한 것이지요. 마물 출현 예측 장치의 메커니즘입니다."

"마물 출현 예측 장치라...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군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에스콜레이아에서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비밀리에 진행했겠지만,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는 페르다는 한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누구한테 들어봤을까, 페르다는 마침내 떠올렸다.

'테살로스 월처.'

그가 말했었다.

마물 출현 예측 장치라는 것이 만들어질 뻔했지만, 끝내 사라졌다고.

그게 있었더라면, 이 작업의 기간을 절반 이상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페르다는 그런 테살로스의 집착을 한심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한심한 건 페르다 자신이었다.

"총장님."

"예."

"혹시 그 기술을 언제쯤 보일 예정입니까?"

"곧 선보일 예정입니다. 할림 아시는지요? 그곳에서 회장을 대여했고, 각지의 상인들을 모아서 출품 전시회와 설명회를 가질 생각입니다. 물론...."

총장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음흉한 귓속말을 찔러 넣었다.

"회포도 풀면서 다 함께 오락도 즐기고 말이지요."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겠군요."

"물론이죠. 누릴 것도 못 누리고 죽으면 억울해서 잠이 오겠습니까? 섭정님도 가능하시다면...."

"초대해 주시면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역시 남자시군요."

총장은 동질감이 담긴 음흉한 눈빛을 보내었다.

"알겠습니다. 초대장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과 인사를 드려야 하기에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에스콜레이아 총장과의 이야기는 페르다에게 큰 수확이었다.

상인들을 모아서 할림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

마물 출현 예측 장치라는 것도 원래는 있는 기술이었다는 것.

'그리고 총장에게 빚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정치는 싫어하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얻어 낸다.

그것이 페르다가 대공의회에 참석한 이유였다.

"제드, 아르웬."

"예?"

"예!"

똑같은 대답이지만 부호가 다른 둘.

"지금부터 에스콜레이아 총장을 몰래 감시하도록 해라."

"그 대머리 말입니까? 뭔 짓을 했길래, 그런 걸 시킵니까?"

"오늘내일이 없는 인간이니 허튼짓을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주변에 수상한 낌새가 없는지 그 주위를 맴돌면서 지켜보도록 하게. 최우선 사항이다."

"예."

아르웬과 다르게 제드는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라면 하겠는데, 이유가 뭡니까?"

"기사가 잔말이 많군."

"가라로 기사가 된 사람이라서요. 충성을 맹세한 분이 서임식 연회도 안 열어 준댑니다."

"잔말 말고 하도록 보수는 챙겨 줄 테니."

"쩝, 알겠습니다."

보수라는 말에 불만이 쏙 들어가는 제드.

애초에 그 말을 들으려고 내뱉은 불만이리라.

둘을 보낸 후, 페르다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대강 어떻게 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을 때, 페르다는 올리비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금테 두른 하얀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오도그라사도 성국 쪽인가?'

희한한 일이었다.

오도그라사도 성국과 아르켄 제국은 두 개의 태양은 공존할 수 없다는 명목으로 서로 배척하는 사이일 텐데.

거기다가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사제들과 어울린다니.

그때, 그녀가 시선을 의식했는지, 페르다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조심스럽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껄끄럽다.

하지만 굳이 누군가와 어울려야 한다면 그래도 올리비아가 무난하지 않을까.

페르다는 그렇게 생각하고 올리비아 쪽으로 걸어갔다.

진하게 아이 컨택을 하던 올리비아의 눈.

언제나 다를 바가 없이 밝고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페르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곳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관을 쓰고 있는 노인.

그리고 얼굴에 상처를 안고 있으며, 군인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중년이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으로 적룡 발드로바 님의 부군이 되실 분입니다. 이미 뵈셨지요?"

"허허, 알고 있습니다. 못 볼 수가 없었지요."

노인이 손을 새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껄껄 웃었다.

그의 소매 안쪽을 벗어난 팔뚝이 보였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가느다란 속이 드러났다.

굽 높은 구두를 신었지만, 여자인 올리비아보다 한참 작은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었으니 참으로 위태로웠다.

두르고 있는 옷조차도 무거워서 무너져 내리는 것은 아닌가 싶은 근심을 심어 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외견도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가 부릅뜨고 있는 두 눈에는 황금색의 광채가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마음속에 있던 한 줌의 신앙마저 모두 태워 버린 페르다조차도 그 눈 속에는 신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페르다는 기꺼이 존경을 보였다.

"기적의 아들, 성국의 아버지, 성황 그레고리오 님을 뵙습니다."

"만나서 반갑소, 페르다 섭정. 오늘 대공의회는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처음 발을 들인 사람치고는 대담한 발언을 했더구려."

"예. 마음에 드시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레고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자네가 하던 생각은 이 늙은이도 가끔씩 던져 본 질문이지. 모두가 멸시하는 악룡 발드로바는 동부의 수호자가 아닐까하고 말이야."

"그렇습니까?"

"나는 오도그라사도 님의 의지를 대변하여 이곳으로 왔다네. 그렇기에 매사에 신중해야 할 의무가 있지. 그러니 당장에 자네의 의견을 지지해 줄 수는 없어."

안타까운 소리를 흘리며 페르다의 팔뚝을 가볍게 쳤다.

"그러나 자네가 그 오해를 풀겠노라 의지를 보여 준다면, 황금빛 비늘의 이름으로 자네를 지원해 주지 않을 수가 없을 테지."

황금빛 비늘의 이름.

오도그라사도를 추종하는 자들이 하는 절대적인 맹세였다.

성황의 신분으로 그런 맹세를 던졌다는 것은 진심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그러나 페르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이 성국의 성황도 결국엔 이해관계가 우선이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탄복할 뿐입니다."

"자네의 뜻을 펼치도록 하게. 마음속의 신을 믿고 한 걸음 내디딘다면 틀림없이 답해 주실 테니 말이야."

인사가 끝이 나자, 대화를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끼어들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황님. 몸조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제국의 꽃에 황금빛의 은총이 따르기를."

의례상 인사를 끝낸 후, 올리비아는 페르다의 팔을 자연스럽게 감쌌다.

말도 없어서 페르다는 거부할 틈이 없었다.

"가시죠."

그녀는 페르다가 리드하듯 교묘한 몸짓으로 페르다를 움직였다.

그렇게 거리를 벌렸다 싶을 때 올리비아가 질문했다.

"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들었어요."

마음에 들지 않은 눈초리였다.

"그 의제는 페르다님이 직접 생각하신 건가요?"

"예."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싸늘한 문장과는 다르게 올리비아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얼굴만 봐서는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대공의회 첫 데뷔에서 할 얘기는 아니죠.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올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어요. 정립되지 않은 극동부의 이미지가 나쁘게 결정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구요?"

온실의 화초답지 않은 날카로운 칼날을 머금은 말투였다.

"황녀라는 자가 타국의 성황과 이야기를 나눴으면서 저를 나무라는 겁니까?"

"어머? 당신과 저를 비교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마치 나비와도 같은 사람이에요."

"나비?"

페르다가 묻고 올리비아는 생긋 웃었다.

올리비아가 손을 슬쩍 놓으며 저편으로 걸어갔다.

아니,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이리저리 살랑살랑 날아다니며, 주변을 맴돌아요.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지 못하고 그 꽁무니를 쫓아오게 되죠. 경박하지 않게 무게를 주고, 그렇다고 너무 철벽같지 않고 가볍게."

그녀는 정말 나비와도 같았다.

그야말로 외줄타기 곡예 같은 움직임이다.

그렇게 해서 페르다가 들고 있는 손을 향해 다시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그래도 마냥 나쁘지는 않았어요. 마의 땅을 정복하겠다는 그 선언이 이래저래 나쁜 인상만 심은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습니까?"

"보세요. 저 늙고 겁이 많은 얼굴을 말이에요. 연극 속에 단역에 불과했던 당신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잖아요?"

그것은 페르다 또한 느낀 바였다.

"지금은 아군이 없지만, 당신의 능력을 보이며 머지않아 당신에게 고개를 조아릴 거예요. 당신에게 1%의 실현 가능성만 보인다면 반드시."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뭡니까?"

"발드로바 공왕 전하께서는 남들과 다른 권한이 있거든요. 영토 확장이죠."

확장할 수 있는 땅은 오직 한 곳. 극동부. 마의 대지뿐.

그 누구도 탐하지 못하는 땅.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농담거리처럼 껄껄 웃어 버렸을 것이다.

실제 공왕령은 확장은커녕 줄어들고 있는 것이 실정이니까.

"그 불모지를 정화하고, 다시 우리들의 땅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제2의 수도가 될 거예요."

"제2의 수도...."

"제국은 현재 포화된 상태에요. 출세를 위해서 과수원, 논밭을 내팽개치고 상경하는 청년들이 많아요. 엠파이어 드림이라고 하죠."

"꿈을 품은 게 나쁜 것은 아니죠."

"맞아요. 나쁠 건 없어요. 하지만 지금 제국에선 그들은 헌신짝과 다를 바가 없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국 내에 들어오고 죽는지 아나요?"

"그렇게 말씀하셔 봐야 제 관심 밖입니다."

"아무튼, 그 땅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다면, 극동부는 단순한 오지가 아닌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거듭날 겁니다. 영토가 넓어지는 만큼 사람은 늘어나고 발언권도 확대될 것이고요."

동부가 커진다.

그 말에 올리비아에게 묻는다.

"제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올리비아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발드로바 님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견제하겠죠."

아르켄 제국은 수도에 지닌 강력한 힘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누군가가 죽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그녀의 말투에 무게가 실렸다.

이다음 말이 중요하다는 듯 페르다도 그 말에 집중했다.

"뭘 말입니까?"

"저는 나비이면서도 동시에 경매장에 올려진 보석이에요. 중앙귀족들에게 언젠가 팔려 가 버리게 될 보석이요."

그녀를 올려 준 황녀라는 이름은 발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족쇄였다.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단 황녀인 올리비아만 가지고 있는 비극은 아니다.

자식 교육에 엄격한 명문가들의 영애라면 대부분이 그러했다.

교육을 잘 받을수록, 미모를 잘 가꿀수록 자신들보다 명문가 집안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남자들은 남자들의 방식으로, 여자는 여자들의 방식으로 신분 상승을 꾀한다.

황녀는 황제가 쥐고 있는 궁극의 색이며 카드였다.

그걸 듣고 나니 불현듯이 깨달았다.

어째서 오도그라사도 성국과 친교를 맺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저는 성녀가 되어야 해요."

올리비아가 진하게 웃었다.

"성녀가 된다면, 황녀라는 가격표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요."

"그 누구도 독실한 성녀를 차지하여 신과 신민들의 분노를 받고 싶지 않을 테니까."

"맞아요."

올리비아는 맹세의 인장과 독실함, 주변의 인망까지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결정적인 결핍은 바로 황녀라는 신분이다.

'황녀를 벗어나 성녀가 된다면....'

올리비아는 단순한 황제의 도구가 아닌 자식이 되며, 세력 구도로 바뀌게 된다.

단순히 예쁘고 아름다운 꽃이 아닌 약자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구원자.

성직자들에게는 지지받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경매장에 올려진 보석 신세도 면할 수 있다.

불안한 세력 구도에서 안정적인 지지층을 형성한다.

듣기 자체는 좋은 이야기였지만, 페르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성녀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맹세를 저버리고, 색을 펼쳤다.

자기 혈육을 침대로 꼬드겼으며, 나라를 기울인 요녀가 되어 버렸고, 최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페르다는 그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해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눈에서 말하지 않은 숨겨진 메시지가 들려왔다.

저를 위해서.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가 보호 본능을 자극해 왔다.

페르다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히 할 겁니다."

그러나 당신을 위해서가 아닌,

"당신이 충분히 협력한다면 말입니다."

나의 약혼자를 위해서.

이 일은 어디까지나 계약에 따른 업무일 뿐이노라고.

"물론이죠."

페르다의 눈을 들여다본 올리비아는 순간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린 채로 나왔다.

꼴사나움에 얼굴이 붉어지려 했지만, 페르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페르다는 그녀의 팔짱을 풀어내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시나요?"

"슬슬 길 잃은 꼬맹이를 찾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길 잃은 꼬맹이?"

페르다는 올리비아의 손을 놓고 걸어갔다.

올리비아와 손을 잡았던 남자들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눈을 마주치면 그 속에 깃든 소유욕을 마주해야 했고, 손을 놓지 못해 자신이 놓아야 했다.

그런데 페르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걸어갔다.

제국 제일의 미인으로 칭송받지만, 페르다에게 안중이 없는 것이었다.

외려, 올리비아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놓지 못했다.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조력자.'

쓸데없는 것에 치중하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서 변수를 배제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올리비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조력자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정작 자신을 봐 주지 않는 건 생각만큼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섭섭한 감정이 몰아쳐 왔지만, 그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귀족들이 올리비아에게로 모여든다.

"아르켄 제국의 황녀, 올리비아 님을 뵙습니다."

"소인은 켄이라 합니다. 후스 공국의 공자로...."

페르다가 사라지기 무섭게 나비를 향해 모여드는 꽃들.

아니, 자신의 몸을 사기 위해서 더러운 돈을 들고 있는 짐승들.

올리비아는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진귀한 보석처럼 말이다.

55화. 변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