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변절자
회담이 끝이 나고, 루리는 제드와 아르웬 몰래 벗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는 대공의회장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인간들이 어울리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며, 드래곤 스폰들이 모이는 장소가 어딘지도 알고 있다.
인간들과 다르게 드래곤 스폰들은 사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에게 아부를 떨면서 세력을 구축할 만큼 그들은 약하지 않기 때문이며, 동시에 용으로서 자존심이었다.
루리는 2층으로 향했다.
나선 계단을 올라가자, 그곳을 중심으로 12개의 문이 보였다.
세르데스 대륙의 12용.
악룡, 수호룡 할 것 없이 모든 드래곤들이 있다.
그 자리에는 물론 고드윈도 있었다.
루리는 실버윈드의 조각이 새겨진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
뾰족하게 돋아난 그 뿔과 날렵한 몸.
용맹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태.
이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이 넘었는데도, 그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아른거림은 루리의 마음을 연약하게 만들었다.
발드로바 성의 충직한 메이드.
바람을 부리며 아닌 것은 아니라 대답하는 똑 부러진 메이드는 그 자리에 없었다.
졸인 가슴을 양손에 품은 소녀는 힘겹게 문을 열 뿐이었다.
끼이익—.
문 경첩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보이는 것은 긴 복도.
그리고 그 앞을 지키는 병사들.
실버윈드의 전사들이었다.
떠들어 대던 전사들의 잡담이 끊어졌다.
그들은 루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넌 뭐냐, 꼬맹아?"
그중 하나가 멋도 모르고 루리를 보더니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실버윈드 님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의 냄새는 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온 첩자냐?"
"...."
"말을 했으면 대답을 해야지. 아니면 이 오빠랑 거칠게 놀고 싶은 거냐? 응?"
"아서라."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를 흩트린 것은 봉을 들고 앉아 있던 사내였다.
그 무리 중에서 대장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장! 제가 블랑카로스의 영역에서 사람을 죽이는 사고를 치겠습니까?"
"블랑카로스의 영역이라 다행인 줄 알아라. 밖이었으면 뼈도 못 추렸을 테니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이런 어린애도 못 이기는 등신으로 보이십니까?"
"어린애는 이기지."
그의 눈동자가 메이드 소녀로 향했다.
"네가 기동여단장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은 못 하니까."
"기동여단장이라면...."
자신만만했던 사내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설마 그... 칼날 바람의 루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얼굴을 본 적도 없지만, 그 명성은 자자했다.
같은 실버 드래곤의 스폰이라면 명성에 공포는 느껴 봤을 것이다.
사내는 얼어붙은 채로 물러났다.
뻗었던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돌아왔다.
루리는 그가 터 준 거리를 따라 걸어 봉을 어깨에 걸친 사내에게 다가갔다.
루리와 사내는 눈을 마주쳤다.
둘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다.
"오랜만입니다, 퍼시벌."
"오랜만이군, 제1기동여단 단장. 아니, 은퇴했으니 전 단장이라 불러야 하나? 아니, 그것도 안 되겠군."
퍼시벌의 목소리에 담겼던 호의가 메말랐다.
"당신은 그냥 변절자라는 단어가 어울려."
변절자.
세 음절의 단어가 루리의 가슴을 쑤시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을 각오했던 일이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야?"
"고즈... 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헛걸음을 했군,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깡!
사내가 쥐고 있던 검은 봉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200년 언저리 되는 사이에 많은 걸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루리 실버윈드. 언제부터 실버윈드의 자랑스러운 자식들이 대화라는 걸 하게 되었나?"
"...."
실버윈드는 태생적으로 거친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얼음 장벽보다 먼 곳에 있는 악마들과 서리거인을 잡았던 자들.
말보다는 행동.
몸의 대화가 더 가까운 자들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루리이기에 꾸벅 인사를 건네고 물러났다.
그녀가 몸을 빙글 돌리며 걸어갔다.
"잠깐."
퍼시벌이 그녀를 잡아세웠다. 반쯤 들린 발이 그대로 멈췄다.
"들어가라."
"?"
"수장님이 허락하셨다."
그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곧 진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루리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 섰을 때보다 더욱 진한 압력이 그녀를 짓눌렀다.
적대적인 눈빛이 창이 되어 그녀를 찌르는 듯하다.
그 눈빛을 받으며 무거운 어깨를 옮겼다.
그곳은 왕의 알현실과 비슷하게 정문을 바라보는 왕좌 하나가 놓여 있었고, 곰처럼 커다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과 다르다.
고급스러운 털 외투와 금반지.
살갗을 제대로 가리지 못한 곳은 의식으로 새긴 마법 문신들이 몸을 빼곡하게 채웠다.
모든 것이 그녀가 알고 있는 고즈 실버윈드의 것이었다.
'아니야, 다른 게 있어.'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루리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드래곤 스폰 간에도 상하 관계가 있지만, 그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느끼는 것은 절대적인 권위 앞에 섰다.
속에 잠들어있던 감각이 정답을 알려주었다.
'실버윈드 님의... 정수?'
실버윈드의 죽음 이후, 드래곤 정수를 실버 드래곤 스폰의 수장인 고즈가 흡수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안정하다.'
정수를 품었지만, 완전히 녹진 않았다.
그의 몸으로 실버윈드의 힘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두 다리로 겨우 서 있는 것이리라.
"발드로바는."
그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냐는 인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발드로바는 안녕하신가?"
그가 잔 속의 위스키를 굴렸다.
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극동부의 마물들을 몰아내고, 대륙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하시는 중입니다."
"그렇군. 네가 잘 보살폈기에 가능한 일일 테지?"
"...예."
"자랑스러운가?"
"...."
루리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고즈의 싸늘한 눈길이 루리를 응시했다.
"내가 어려운 질문을 했나?"
"아닙니다."
"그런데 대답이 없군."
지독한 폭풍우에 끝내 끊어진 밧줄이 끊어진 것처럼 대답했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래, 그렇군."
파창!
들고 있던 유리잔이 깨진다.
싸늘한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는다.
루리의 몸 또한 그 시선에 굳어 갔다.
"그래서 그년을 잘 보필해 온 변절자가 무슨 낯짝으로 왔는지 이야기를 해 주겠나?"
루리를 감싸고 있는 환경이 그녀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런데도 루리는 입을 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왔으니 해야만 했다.
"아직도... 발드로바 님을 증오하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고즈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네 주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내 앞에서 그 여자를 부를 때 '님'이라 부르지 마라. 너는 실버윈드의 피를 받은 스폰이다. 네 주인은 실버윈드, 오직 한 분이시다."
"저는 실버 드래곤 스폰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제 주인님입니다."
"그 여자가 주인이기 전에 네 주인은 실버윈드 님이시다. 실버윈드 님이 누구시던가?"
"위대한 바람과 강철의 주인입니다."
"그래. 그분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속도의 주인이셨지. 결코 흔들리지 않던 분이셨다."
고즈는 목에서 핏대가 바짝 섰다.
"그런데...."
루리는 그 담담한 목소리 속에서 느꼈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음을.
"그분의 목을 물어뜯었다! 그년이! 그 이빨로 목 안쪽을 파고들어 동맥을 끊었지! 그 살육의 현장을 이 두 눈으로! 이 가슴으로 느꼈다!"
"...."
"그년이 밉냐고 물었나? 그년을 향한 증오는 아직도 이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다."
루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차오르는 감정에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고즈는 루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콧김을 뿜어냈다.
"이 가슴에는 아직도 그분의 죽음이 생생한데, 넌 그렇지 않은 모양이로군."
"저 또한 보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 또한... 생생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루리 또한 마족들을 죽이기 위해서 용마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실버윈드의 죽음을 목도했다.
그녀도 스폰이기에 주인의 죽음을 느끼고 슬퍼했다.
"저도 제 주인님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실버윈드는 루리에게 있어서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발드로바가 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분을 증오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고즈는 그것을 부정했다.
"네가 우리가 느꼈던 것을 온전히 느꼈다면, 그편에 서 있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
"아주 조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그년에게 물들어 버린 거다. 네 근원을 잊어버린 거지."
고즈는 새 잔을 집고, 위스키를 다시 부었다.
"발드로바는 여전히 우리들의 적이다. 그녀가 이 세르데스 대륙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우리들의 증오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실버윈드 전체의 뜻이다."
"그렇습니까...."
예상한 일이다.
헛된 꿈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게 기회를 주겠다."
기회.
루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어쩌면 발드로바를 향한 그 증오를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고즈가 루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리 실버윈드. 일족의 품으로 돌아와라."
희망의 끈이 끊어졌다.
"품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발드로바 님의 곁을 떠나라는 뜻입니까?"
"섭정이 생긴 지금 네가 그 여자에게 봉사할 이유는 더 이상 없다."
"...."
"너는 실버윈드 님이 주신 일들을 모두 해낸 것이다. 그러니 일족으로 돌아와 전사가 되어라. 칼날 바람의 루리. 다시 기동여단 단장의 자리에 올라 북부에서 몰려오는 잡것들을 족치고 봉사해라. 그렇다면 네게 변절자라는 오명을 지워 주도록 하마."
가슴을 찔러 오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그녀가 짊어진 책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럴 수는...,"
당연한 거절이 입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 순간, 루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거절은 없다. 루리 실버윈드."
고즈의 몸에서 나오는 기백이 루리를 직접적으로 짓누르는 것이다.
"내 피에는 이제 실버윈드 님의 권위가 깃들어 있다. 권위에 대항하는 것은 드래곤 스폰으로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겠지?"
죽음.
권위에 따르지 않는 드래곤 스폰에게는 죽음뿐이다.
"네가 그 권위에 저항해 봐야 좋을 건 없을 거다. 그러니."
고즈의 검지가 바닥을 가리킨다.
"내게 무릎을 꿇고 복종하도록 해라."
고즈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루리가 식은땀을 흘린다.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심장을 움켜잡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말을 거부하면 스스로 심장을 뜯는 것과 같은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실버윈드의 정수를 극히 일부만 흡수했을 뿐인데도, 그 정도였다.
'움츠러들어선 안 돼.'
루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앞치마를 양손으로 붙잡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싣는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
그리고 그것이 고작.
"잘도 버티는구나."
진심이 어린 감탄이었다.
다른 스폰들이었다면, 진작에 무릎을 꿇었을 만한 힘이었다.
"그래. 그렇기에 실버윈드 님이 총애하셨을 테지."
고즈는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권위만으로 복종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고즈가 추구하는 완전한 복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떠나기 어렵다면, 결정하기 쉽게 만들어 주면 되겠나?"
고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네 정체를 그 섭정은 알고 있을 테지. 하지만 네가 그곳으로 가게 된 이유도 그 남자가 알고 있을까?"
"...!"
그녀의 얼굴에 자리 잡았던 평정이 깨진다.
땀에 절인 손이 앞치마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자는 네 정체를 듣고도 너를 감쌀 것으로 생각하느냐?"
페르다 발드로바.
그는 발드로바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위협이 되는 자에겐 가차 없는 남자였다.
'페르다 님이 그걸 알게 된다면....'
페르다는 어떻게 할까.
압박을 버티고 있었던 의지가 의심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공포가 압도한다.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을 만큼 숨을 조여 온다.
'나는 어찌해야....'
진득한 늪 속에 완전히 잠겨 들어간다.
그녀는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제발.
제발 누가 도와줘.
"불쑥 들어와서 실례이긴 하지만."
루리의 귀에 들려오는 대답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 시종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지?"
* * *
페르다는 루리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루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실버윈드와 대화를 하기 위해 갔다고 했다.
그러니 이 실버윈드의 조각이 새겨진 대문 너머에 있으리라.
페르다는 그 앞에 서서 생각했다.
'괜한 참견을 하는 것인가?'
발드로바의 시종.
그러나 실버윈드의 피를 지닌 스폰이다.
발드로바를 향한 분노가 있을 테지만, 루리에게는 악감정이 없을지도 모른다.
페르다는 그 가족 상봉에 참견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페르다는 대공의회에 있을 때, 고즈 실버윈드의 표정을 떠올랐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에리카의 경고.
-당신이 주시해야 할 적은 따로 있어요. 실버윈드요.
용은 불멸자다.
한번 품은 복수심은 절대로 놓지 않는다.
그것은 실버윈드도 마찬가지이다.
'실수인 걸까?'
루리가 떼를 써도.
발드로바가 부탁을 해도 거절했어야 하는 문제였을까?
페르다는 그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기에 스폰들의 휴게실에 다다랐다.
보이는 것은 내실 문을 지키고 있는 실버윈드의 병사들.
그리고 짙은 드래곤 피어.
확실하다.
괜한 참견은 아니었다.
페르다는 그 기운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댁은 발드로바 섭정이오?"
봉을 어깨에 짊어진 드래곤 스폰, 퍼시벌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루리가 여기 있나?"
"질문에 대답하시오."
"루리 실버윈드가 여기 있느냐 물었다."
퍼시벌은 물러서지 않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여기 있소."
"그럼 비켜라."
"이건 가족 문제요, 섭정. 끼어들 일이 아니오"
뭐든지 가족사에는 참견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용들의 사회에서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그 영역을 존중하지 않았다.
"날 막을 거라면 어딘가를 부러트려야만 할 거다."
페르다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면 블랑카로스의 손이 너희들을 제재하겠지. 실버윈드의 자손들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불명예를 감당할 수 있겠나?"
"...."
"자신 있다면 하도록 해라. 나는 잃을 각오를 마쳤다."
퍼시벌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부하들에게도 눈짓하여 그들을 완전히 물렸다.
페르다는 문을 열었다.
루리가 보였다.
고즈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려 하는 루리의 모습을.
그녀는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그 순간, 페르다는 모든 잡념들이 사라졌다.
그의 시야가 또렷하게 한 곳을 응시했다.
왕의 행세를 하고 있는 망나니의 모습을.
"불쑥 들어와서 실례이긴 하지만."
페르다가 입에 머금은 분노를 뱉었다.
"내 시종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지?"
56화. 이게 아닌데
페르다는 또렷하게 눈 뜬 채 고즈를 응시했다.
루리와 똑같은 은발 머리에 은색 눈동자.
대공의회에서 처음 눈 마주쳤을 때와 똑같은 얼굴을 했다.
"어서 오게, 발드로바 섭정."
"고즈 수장."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형식적인 예를 차린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 속에는 경의는 한 줌도 없었다.
"귀한 몸께서 들어오는 줄도 몰랐군. 보통이라면 부하들이 문을 직접 열어 줄 텐데 말이야."
뭘 멋대로 들어오냐고 물었다.
"딱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페르다는 내 맘이라 대답했다.
고즈의 눈이 현관 쪽으로 굴렀다.
그렇게 봐야 고개를 숙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건 우리 혈족의 일이다. 가정사라는 이야기지. 가정사에 외부인이 참견하지 마라."
"가족 싸움에 끼이는 것은 나도 사양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 발짝 앞으로 더 움직였다.
그리고 루리의 어깨에 가벼운 무게를 느꼈다.
페르다의 손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내가 사랑하는 분이 총애하는 아이다. 고작 가족 싸움 때문에 총애하는 아이가 상처받는 걸 지켜봐야 하나?"
페르다는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것은 곧 고즈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고즈는 그런 도전을 혐오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배짱 한번 좋구나."
고즈가 자리에 일어섰다.
그 순간, 그가 뿜어내던 기백이 한층 더 강해졌다.
루리는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다른 모든 실버 드래곤 스폰들도 따라 복종했다.
고즈가 루리를 턱짓하며 물었다.
"그래서 발드로바 섭정. 네가 사랑하는 자의 시종인 루리 실버윈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둘도 없는 약혼자의 시종."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
"그래, 네가 보고 있는 건 고작 그것일 뿐이지. 이년이 네게 모든 걸 알려 주진 않은 모양이구나."
무술과 싸움으로 다져진 거친 손.
그 손가락이 루리를 가리켰다.
"이년은 실버윈드 님께서 보낸 스파이다."
루리의 정체를 폭로했다.
"실버윈드 님께서 발드로바를 감시하면서 언제 약해지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심어 놓은 것이었지, 그분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도록 명령받았었다."
"그런가?"
"영 미덥지 않은 듯한 눈치군.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내가 적의를 보이는 자의 말을 믿는 멍청이로 보이나?"
"그래, 동감한다. 그러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겠나? 루리 실버윈드."
그 부름에 루리의 머리가 한층 더 무거워짐을 느꼈다.
"사실대로 말해 봐라. 내가 말한 것이 틀리기라도 했나?"
"저는 그런 게...."
"제대로 대답해라. 내가 틀린 말을 했나?"
고즈는 변명 한 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루리는 결국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저는 실버윈드 님의 명을 받아... 발드로바 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고즈 님의 말대로 발드로바 님을 감시하고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적이 돌았다.
루리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고개를 쳐들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페르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페르다가 정적을 가른다.
"놀랍진 않군."
냉소적인 말투.
루리의 발끝이 시렸다.
바닥이 사라지고 절벽 속으로 던져지는 기분이었다.
"실버윈드의 이름을 지닌 스폰이 발드로바에게 충성을 할 때는 당연히 이유가 있겠거니 했지."
경멸.
배신감.
부정적인 감정들이 진득한 늪이 되어 루리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래서?"
그 의문에 루리를 감싼 압박감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고즈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그래서냐?"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것이냐?"
루리는 고개를 들어 페르다를 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다를 바 없는 고집불통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즈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실버윈드 님이 심어 놓은 스파이다. 그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는데?"
"그래, 스파이지. 하지만 그런데도 내 약혼자가 가장 좋아하는 시종이다."
페르다는 뒷짐을 지고 가슴을 폈다.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린 그 순간에도 이 아이는 나의 약혼자 옆에 서 있었던 충직한 시종이지. 누구보다 발드로바를 위해 헌신해 온 스폰이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치다. 그 가치가 오늘 처음 본 네 말에 흔들리리라 생각하나?"
무릎을 꿇은 루리의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그 말에 하마터면 감정이 터져 버릴 뻔했다.
"그래, 믿든 말든 네 자유지. 실버윈드의 핏줄을 타고나지도 않은 인간에게 그걸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고즈의 눈동자가 한층 매섭게 빛났다.
"아까 전부터 상당히 건방지구나."
공기가 난폭하게 요동쳤다.
나라 하나를 날려 버릴 폭탄의 도화선에는 이미 불이 붙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인내심에 한계에 달한 고즈의 얼굴.
드래곤 스폰은 드래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도 아니다.
그들 모두가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용인 우월주의자들이다.
고작 인간 따위가 말대꾸하는 꼴이 결코 좋을 리가 없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굽혔을 것이며, 현명한 인간이었다면, 상황을 조절하기 위해 한발 물러섰을 것이다.
"예를 차려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 아니더냐?"
그러나 페르다는 물러서지도 굽히지도 않았다.
페르다의 눈에 푸른색의 이채가 돌았다.
발드로바의 섭정으로서 당당하게 동등한 위치에 서서 그에게 맞섰다.
"남의 시종을 겁박하고 이간질하려던 주제에 이래라저래라 가르쳐 드는 것이냐?"
이 대화에서 심기가 거슬린 것은 너만이 아니라는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고즈의 목에 핏대가 섰다.
루리는 알고 있었다.
그는 냉철한 지도자보다는 열혈적인 전사에 더욱 어울리는 자였다.
"지금 네놈의 목을 꺾지 못하는 것은 블랑카로스 님의 자비와 내 인내심이 있기 때문이다."
"실버윈드는 두려움을 인내심이라 부르던가? 내 약혼자에게 직접 맞서는 것은 무서우니 그 시종과 약혼자에게 기를 펴는 꼴이라니...."
가늘어진 페르다의 눈 속에는 짙은 경멸이 어렸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기 싸움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페르다가 던진 도발에 매서운 돌풍이 창문을 두들겼다.
진득하게 앉아 있던 고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참으로 부끄럽군. 고작 인간 따위가 기 펴는 꼴을 이렇게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니...."
고즈가 한 발을 내디딘다.
핏줄이 흉악하게 선 손이 뚜두둑 거린다.
"그 부끄러움을 이 자리에서 네 피로 씻도록 하지."
그의 손에 사정거리에 들어서려던 그 순간,
"그 이상 움직이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고즈의 앞에 섰다.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할 루리가 어느새인가, 고즈의 앞에 서서 막고 있었다.
"루리, 네년이...."
"발드로바... 님의 부군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본능에 대한 굴복으로 시달리는 중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일어설 수 있는 까닭은,
"이 위협은 발드로바 님에게 도전하시는 거라 알고 저도 대응하겠습니다."
결의.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 내고야 말겠다는 결의였다.
고즈는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북부의 전사에서 충직한 개가 됐군. 이젠 인간조차도 상전으로 모시고 있을 줄이야."
열이 잔뜩 올랐던 고즈는 외려 차분해지고 말았다.
창을 두들기던 바람이 멎었다.
고즈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위압을 풀었다.
"실버윈드의 대표로서 더 이상 개와는 할 이야기가 없군. 데려가도 된다, 발드로바 섭정. 이 이상 다시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페르다도 없던 일이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럼, 실례하지."
페르다도 더 이상 기 싸움을 하지 않았다.
"루리."
"예."
"나가도록 하지."
"...예."
그가 떨고 있는 루리를 데리고 나오며 사건을 일단락시켰다.
* * *
고즈는 페르다와 루리가 나간 자리에 눈을 둔 채로 상념에 잠겼다.
그의 망막에 비치는 것과는 다르게 그 눈에 자신의 앞에 대적하던 루리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칼날 바람의 루리.'
북부 얼음 장벽 너머에서 혹한의 존재들과 싸우는 실버윈드의 스폰들.
그중에 가장 악질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는 서리거인이었다.
극동부의 마물처럼 어디서 나는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나오며 인계에 서리를 뿌리기 위해 나오는 자들.
잘 훈련된 드래곤 스폰 5명이 겨우 붙어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까다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루리는 달랐다.
작은 체구로 동시에 세 명의 거인을 상대했으며 물리쳤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 있는 한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세르데스 대륙을 수호하는 자로서는 자랑이자 귀감이었다.
고즈도 그녀에게 위화감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
그녀와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꼴사나운 메이드복에 어린 여종 같은 몸가짐.
거기다가 멍청한 물음.
실낱같은 희망에 사로잡힌 채로 던진 질문은 칼날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것이 짜증이 났다.
저딴 게 한때는 내가 위협을 느꼈던 년이라니....
하지만 역시 그 무엇보다 짜증이 나던 것은,
'페르다 발드로바....'
자신의 앞에 대적했던 그 인간이었다.
짜증이 나는 인간이야 늘 있었다.
용들을 제 뜻대로 부릴 수 있다고 믿는 족속들.
권위만을 믿고 똑같은 인간처럼 대하는 것들.
그런 것들은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참수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그것이 용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런 인간과는 다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눈을 마주하고 있을 때 확실하게 느꼈다.
그는 누구보다 불멸자에 가까웠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즈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 건방진 놈이 있으면... 이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겠지.'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실버윈드의 죽음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복수를 향한 갈망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지금 와서 그가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었다.
'복수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 * *
루리는 묵묵히 페르다의 뒤를 따라왔다.
주변은 어찌나 조용한지, 구둣발 소리가 긴 복도를 타고 울렸다.
"이야기는 잘 되었나?"
"...."
루리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도 이야기해 보지 않겠나?"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널 도와준 사람에게 할 말이냐?"
루리가 신은 구둣발이 그 자리에 멈췄다.
루리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가."
습기에 찬 목소리가 소리를 쥐어 짜냈다.
"누가... 당신보고 도와 달라고 했습니까?"
"...."
적반하장.
그 말이 참으로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건 어쩌면 그녀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섣부른 욕심에 앞서간 것은 자신일 수도 있었다.
"그래."
페르다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내가 허튼짓을 했구나."
자신의 그대로 발을 돌렸다.
페르다는 홀로 그 자리에 나오려 발걸음을 옮긴다.
"방해해서 미안하다."
페르다는 다시 걸어갔다.
루리는 그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 *
실버윈드의 별실에서 나온 루리는 묵묵히 페르다의 뒤를 따라갔다.
어떤 말을 골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정은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슬쩍 올려다본 그의 등.
커다랗다.
자기 몸을 기대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같이 든든한 버팀목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아버지,
실버윈드처럼.
그러나 그 등 속에서 느꼈던 감정은 실버윈드와 사뭇 달랐다.
속이 끓었다.
내가 더 오래 살았는데,
내가 몇 번은 더 죽을 고비를 넘겼었는데,
어째서 저 등보다 못한 것이지?
"이야기는 잘되었나?"
페르다가 물었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그가 어깨너머로 슬쩍 보며 다시 물었다.
푸른 눈동자가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빛났다.
"뭐라도 이야기해 보지 않겠나?"
루리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른스러운 대처 대신 튀어나오는 투정.
"그게 널 도와준 사람에게 할 말인가?"
도와주다니.
만약 루리가 그때 나서지 않았더라면, 페르다는 목이 꺾이고, 대륙에는 재앙의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주제에 도와준 사람이라고 한단 말인가?
속으로 그렇게 페르다의 흉을 보았지만, 루리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애초에 이런 작은 희망에 기대지 않았더라면 있지도 않았을 일이라는 것을.
페르다가 나서 줬기에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을.
그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일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작은 인정조차도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말을 꺼냈다간 흐트러진 자신의 목소리가 드러날까 봐.
발드로바를 보필해 온 시종으로서 무능력함을 보일까 봐.
그에게 다시 한번 더 자신의 나약함을 보일까 봐.
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 쥐면서 고개를 들었다.
"누가...."
울분을 억누르고 소리를 내었다.
"누가 당신에게 도와 달라고 했습니까?"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서야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건 어른의 대처가 아니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
내세울 것이라고는 자존심밖에 없는 어린아이의 모습.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목이 막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던 페르다.
감정을 깊은 호수 끝자락에 떨어트려 놓은 듯한 저 눈동자.
저 눈동자가 루리의 마음을 더욱 깊은 곳으로 빠트리는 듯했다.
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리는 후회를 되새긴다.
"그래."
이게 아닌데.
"내가 허튼짓을 했구나."
내 말은 이게 아닌데.
"방해해서 미안하다."
페르다가 다시 걸어간다.
그녀의 시야 속에 복도를 타고 걸어가는 페르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를 잡아 보려고 무심코 뻗은 자신의 손.
그러나 그를 다시 잡기엔 너무나도 멀어졌다.
57화. 납치
대공의회 정기 모임이 끝이 났다.
사람들은 모여들었던 때처럼 다시 해산하기 시작했다.
공작급 이상이 움직이는 것답게 거대한 군대가 중앙 지역에 밀집했다.
이 상태에서 상대에게 국력을 과시하며, 점검하는 열병식을 겸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콜레이아는 그들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외교적 갈등에서 자유로운 지식의 도시.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움직임을 선호하여 마법사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마차(魔車)를 타고 있었다.
"우리도 마차(馬車)로 바꾸면 안 되겠나?"
버나드 총장이 조종사 역할을 한 마법사에게 불만을 토했다.
"또 그 소리십니까?"
"대공의회에 올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구만. 한 도시의 총장으로서 응? 가오가 좀 살아야지."
"아이고, 가오라는 말 쓰지 마세요. 거친 바닥에 구른 용병도 아닌데, 배 나온 아저씨가 그런 말 쓰면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닭장 같은 도시에서 말을 키울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거 하나 기르는 데 필요한 면적이 학자들 100명 더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서 태클 걸리는 건 뻔한 일인데."
"그래도 명색의 총장인데, 기는 살려 줘야지...."
"그러다가 감사장 날아오고 난리 치는 꼴 보고 싶습니까? 귀족의 세계에서 사치가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그걸 이해하는 놈들은 학자를 안 하죠."
"나도 마차나 타고 싶은데 에휴...."
"그렇게 징징거리면 저 그만둡니다? 집으로 칼퇴근해요?"
"에휴... 그래, 내가 잘못했다. 가자, 그래, 가."
상전이 따로 없네, 따로 없어.
총장이 마법사가 협박하면 아예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라니.
'차라리 효율을 따질 거면, 마법사가 없어도 마력을 충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버나드가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래, 마력을 불어 넣고 움직일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아?'
약간의 톱니바퀴과 지렛대를 이용하고....
조작만 하고 그런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은데.
버나드는 그렇게 자기 아이디어를 메모장에다가 스케치했다.
흔들림 없이 움직이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누가 길을 막아서고 있는 모양입니다. 행색을 보니 아무래도 도적인 거 같습니다."
길목을 가로막고 통행세를 징수하는 도적단들은 어딜 가든 있다.
"처리할까요?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마법사가 목 긋는 시늉을 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쓸데없는 유혈 사태는 피하도록 하세. 돈만 조금 쥐여 주도록 하게."
"돈을 왜 쥐여 줍니까?"
"다 먹고살려는 거 아니겠나? 적당히 주고 보내게."
"그러니깐 맨날 얕보이지...."
"뭐라고?"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마법사가 은화 몇 줌을 쥐고 마차에서 내렸다.
버나드 총장은 그 말에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지켜보았다.
은화를 들고 간 마법사가 거리를 벌린 채로 바닥에 은화를 던지고 이것 먹고 보내달라는 제스쳐를 보였다.
그러자 날카로운 섬광이 마법사의 몸통에서 터져나왔다.
"어?"
그리고 사선으로 터진 한줄기의 빛에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는 마법사의 상반신.
상반신이 있던 자리에 보이는 것은 비릿하게 웃는 걸인.
그리고 검.
"어어, 뭐, 뭐야!?"
총장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운전석에 앉은 마법사는 꼴사납게 반응하는 대신 마법을 준비했다.
그가 어째서 하루에 금화 50개를 받고 호위하는지 보여 줄 차례.
그러나 그에 무색하게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물체.
쨍그랑!
유리창을 꿰뚫고 들어오는 단검에 목이 꿰뚫렸다.
"이지, 커, 커억...!"
마법사의 영창이 실패한다.
그려진 마법진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순식간에 4서클 마법사 두 명을 처리했다.
총장은 얼어붙은 채로 걸인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은연히 느낀 것이다.
어차피 도망쳐 봐야 더 빨리 죽을 것이라고.
순식간에 4서클 마법사 두 명을 처리한 남자가 문을 연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았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반갑소, 에스콜레이아 총장."
"누, 누구시오?"
"내가 누구인진 알 건 없습니다.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요."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이어 가는 남자.
얼어붙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이번 대공의회에서 흑룡 고드윈의 재림의 조짐이 보였다고 발의한 사람이죠?"
"그렇소만...?"
"무슨 생각으로 그걸 했습니까?"
"대륙의 안전을 위해서 했소...."
"그로 인해 자신이 위험하게 될지도 모르는데도?"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은 해 둬야 할 것 같았기에...."
"아아!"
의문의 사내는 버나드 총장의 말을 끊으며 목에 칼을 겨누었다.
"우리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괜히 시간 끌면 그쪽만 아프니까."
단검에 묻은 두 마법사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총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림을 애써 억눌렀다.
"그래서 마족 출현 예측 장비를 발표하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걸 어떻게...?"
"듣는 귀가 있습니다. 어디든 말이에요."
사내가 씨익 웃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자신이 신뢰하는 학자 몇과 비서.
그리고 페르다 발드로바.
"페르다 발드로바!"
별안간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치는 총장.
"당신... 페르다 섭정이 보낸 자요?"
"글쎄요? 그자가 보낸 것 같습니까?"
"젠장! 그렇게 어린 놈이 그 눈빛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버나드 총장이 분개하며 소리쳤다.
사내는 대답 대신 끅끅거리며 웃었다.
"우리 총장님 생각보다 귀여운 사람이네. 생각보다 나쁘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뭐긴요."
그가 주사기를 꺼내 보였다.
"이런 말이죠."
커다란 주삿바늘은 흉기 그 자체.
그러나 총장이 두려운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타르처럼 끈적하고 검은 액체였다.
"안에 들어있는 그건 대체 뭐요?"
"백신입니다."
"백신?"
"그래, 백신. 이 세상을 사로잡고 있는 균 덩어리들을 전부 없애 버릴 약."
피스톤에 엄지를 올리고 주사를 준비하는 사내.
그가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버나드 총장이 아닌 자신에게.
"으윽...!"
괴로움에 신음하고 있는 사내.
그러나 죽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변이, 아니 진화였다.
덮였던 피부에는 주입했던 타르와 비슷한 것이 개기름처럼 올라와 피부를 덮었다.
그렇게 변이를 마친 사내의 형태는 말 그대로 검게 물들어 갔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마네킹이자, 새로운 고치였다.
그 속에서 찢어지며 빛을 발하는 붉은 눈동자.
입은 벌어지자 뾰족한 짐승의 치아가 위협적으로 드러난다.
"서, 설마...."
그 요소들을 종합하자, 총장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번뜩였다.
"마족...!"
사내는 마족이 된 것이다.
"으하하! 드디어 그분의... 그분의 은총이 이 몸에도 흐르는구나!"
사내는 자기 얼굴을 매만지며 황홀경에 빠졌다.
숙원을 성취한 사람처럼 쾌감에 빠진 사내가 다시 눈길을 돌려 총장을 응시했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생각에 그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어째서 당신처럼 실력이 있는 남자가... 마족 추종자로 있을 수 있소?"
마족 추종자들은 잃을 것이 없는 자들.
악마 추종자들보다 지독하기 짝이 없다.
"나도 한때는 명예를 아는 기사였습니다."
사내는 광소를 실실 흘렸다.
"그런데 명예를 아무리 챙겨도 간사한 소인배 말발에 넘어가는 왕을 섬기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더군."
그는 몰락 기사였다.
"그래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겠다 다 부숴 버리려고 합니다."
"마족이 되면... 인간 세상은 물론 이 세르데스 대륙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소.... 천국도 지옥도 갈 수 없는 잃어버린 영혼이 될 것이오. 그걸 알면서도 왜...?"
"그건 당신 생각이고."
사내는 단검을 들어 버나드 총장의 팔에 그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사내는 그 환부를 자기 손으로 압박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무색하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 마룬이시여...."
새까만 그의 몸이 점점 살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처럼 색만 변하는 것이 아닌 몸 일부는 늘어나고, 일부는 줄어든다.
끝내 버나드 총장에게는 아주 익숙한 형태로 탈바꿈하였다.
바로 버나드, 자신이었다.
"어떻소, 총장. 당신과 비슷해 보이시오?"
버나드의 모습을 한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생전 한 번도 지어 보지 않은 악의에 찬 미소를.
"내 연구를 어찌할 작정이오?"
"역시 총장쯤 되면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양이오?"
사내는 단검으로 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소? 당신이 마물 출현 예측 장치라는 걸 만든다는데, 마족들이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하나지."
연구를 망치고, 예측 장치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다.
"그, 그렇게 놔둘 것 같으냐!"
인생을 바쳐 온 연구를 잃어버린다는 말에 버나드 총장은 뒤늦게나마 용기를 내 보았다.
하지만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버나드는 날렵하게 움직여 목을 잡았다.
서서히 그리고 강력하게 그의 목을 조였다.
"컥, 커어억!"
"푹 쉬시오. 공허의 세계에 나 또한 뒤따라가리라."
그렇게 원본 버나드 총장을 죽이려던 찰나,
"기습이다!"
바깥에 보초를 서고 있던 남자의 외침이 마차를 뚫고 들어왔다.
위장한 버나드가 고개를 돌려 보자, 바깥에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걸인 행세를 하는 마족 추종자들과 격돌한 괴한들.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은 고작 두 명이었다.
갈색 머리와 금발 머리.
예상치 못한 기습에 사내가 조른 목을 풀고 물었다.
"너, 언제 호위를 붙인 거지?"
"컥, 컥, 무, 무슨 호위??"
버나드 총장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되묻는다.
그런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마족 추종자들은 금세 정리되었다.
산적으로 위장한 이들은 전부 떨거지에 불과하고, 두 명은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이었다.
"곤란하게 됐군."
사내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마법사 둘이라면 영창하기 전에 기습한다면, 순식간에 죽일 수 있지만, 기사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어렵다.
사내는 기지를 발휘하기로 했다.
바로 교란책이었다.
"여보게들! 조심하게!"
그는 마차 문을 박차고 나가며 처절하게 달렸다.
"저 안에! 저 안에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이 있어! 나를 죽이려고 한다네!"
겁에 질린 사람처럼 달려가는 사내.
한편으로는 역수로 쥔 단검을 단단히 팔뚝에 감추었다.
사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숨겨 놓았던 단검으로 기습을 가할 준비를 했다.
"얼른, 저기 있는 것을 해치워주크억...!"
사내는 얼마 가지 못해 고꾸라졌다.
그의 발목에는 단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갈색 머리의 손에 들려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단검이었다.
"끄아아악!! 이게 무슨 짓인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갈색 머리가 빠르게 달려와 버나드의 머리를 힘껏 걷어찼다.
뻐억-!
뼈가 끊어지는 듯한 아찔한 소리.
버나드 총장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금발 머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제드 경! 총장님께 무슨 짓입니까?!"
제드라 불린 남자가 쓰러진 총장을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그거 총장 아냐."
"무슨 소립니까!? 마법으로 의태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세게 걷어차면 분명히 죽었...어라?"
그의 호들갑도 마차에서 뒤늦게 나오는 버나드를 발견하고 멈췄다.
"어째서 총장님이 둘...?"
"하, 이 순진한 시골 친구 같으니. 좀 더 관찰력을 기르도록 해. 일단 이 남자 단단하게 포박하도록 해. 나는 저기 있는 진짜 모셔올 테니까."
"어... 알겠습니다."
아르웬은 가짜를 포박하고, 제드는 진짜를 마차에서 꺼내어 부축했다.
"무사하십니까?"
"어, 예... 무사합니다. 댁들은 발드로바 섭정의...?"
"소개가 늦었습니다. 발드로바 공왕령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 제드 스왈로우입니다. 여기 있는 순진한 친구는 아르웬 경이죠. 저희는 섭정님의 명을 받들어 총장님을 몰래 감시,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섭정의 부하라니... 내 뒤통수를 친 사람이 어째서 나를 돕는 것이오?"
"예? 무슨 오해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저희 섭정님이 계신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던지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버나드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마차를 몰아야 할 마법사는 죽었으니 마차는 움직일 수 없다.
가는 길은 멀고 이곳을 홀로 걷기엔 너무 위험하다.
버나드 총장은 체념했다.
"알겠소. 그대들을 따라가리라."
"그럼. 지혈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드는 버나드의 상처를 가볍게 치료했고, 아르웬은 포박한 또 다른 버나드를 묶어 말 등에 태웠다.
그렇게 사건이 일어난 곳을 방치한 채로 움직였다.
말을 몰고 있는 중에도 아르웬은 머리에 질문이 맴돌았다.
"제드 경."
"왜?"
"대체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주저하지 않고 공격했기에 허를 찌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르웬으로서 알 수가 없었다.
제드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광이 없더라."
"...예? 광?"
"저기 있는 가짜 놈, 총장의 반질반질한 머리까지는 구사하지 못하는 모양이더라고."
"...."
아르웬의 눈이 슬쩍 제드의 등 너머로 움직였다.
달빛에 은은하게 반사되는 버나드 총장의 머리.
"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 *
밤을 꼬박 달려 도착한 곳은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발드로바 섭정의 마차와 텐트가 있었다.
은발의 어린 여종이 그들을 반겼다.
"이쪽으로."
여종이 텐트를 슬쩍 들쳤고, 버나드는 안으로 들어갔다.
차갑고 냉혹한 야생의 바닥과 다른 온기가 피부에 닿는다.
겉모습과 다르게 몇 배는 더욱 큰 내부.
절대로 텐트 내부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늑하며, 잘 가꾸어져 있었다
'아공간 텐트... 엄청난 보물이지 않던가?'
요정 가루를 매개로 만들어야 하는 아공간 포켓 하나만으로도 보물인데, 텐트는 급 자체가 다르다.
그런 보물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제국급 왕.
혹은 드래곤뿐.
그가 드래곤의 배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인지하게 되었다.
"어서 오시오."
회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청년.
페르다가 그를 반겼다.
58화. 괴로우니까
페르다가 버나드 총장에게 물었다.
페르다는 술을 병째로 가져다주었다.
"이게 뭡니까?"
"필요하실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통째로... 말입니까?"
"힘든 날이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오늘은 힘든 날이다.
수십 잔 커피를 마셨을 때를 빼면, 단 한 번도 거칠게 뛴 적이 없던 심장이 갈비뼈를 두들기고 있었다.
진정할 수가 없었다.
버나드는 떨리는 손으로 병목을 잡아 그대로 들이켰다.
벌컥벌컥벌컥
무려 60도가 넘어가는 위스키.
목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독한 양주를 반병 비워서야 입에서 떨어졌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는 됐습니다."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이게 머리에서 도무지... 도무지 떨어지지 않아서 물어봐야만 하겠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어떻게... 어떻게 제가 위험에 처할 거란 걸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아냈긴.
지금은 죽어 버린 테살로스 월처가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기술이었다.
하지만 돌연 그 기술은 잘못된 것이라 발표했을 때는 누구보다 분노했다.
적절한 분노는 모든 것을 또렷하게 만들어 주었고, 테살로스 월처는 깨닫게 했다.
-버나드는 그때의 버나드가 아니었어.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버린 상황이었다.
입증할 수도 없으며, 기술은 사라졌고, 버나드는 최악의 총장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무튼, 페르다는 그 기억을 떠올렸고, 총장이 가장 위험할 때를 떠올려보았다.
그가 가장 위험한 순간은 역시 도시로 돌아갈 때였다.
'운이 좋았지.'
어쩌면 좀 더 길어질지 모르는 감시가 빠르게 해결되었으니까.
페르다는 그 질문에 대답했다.
"저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말에 버나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젠장, 다들 듣는 데가 있는데 왜 저만 듣지 못하는 건지...."
"비단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도시의 총장쯤 되는 사람이 군대도 끌지 않고 오지 않았습니까?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효율적이지 못하니까요."
"귀족들에게 효율은 멍청한 짓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이 되니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누가 에스콜레이아 총장을 습격해서 좋아한다고 그러느냐는 것들은 오늘부터 지옥을 맛보겠죠."
버나드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갔다.
분노와 취기로 그는 이성의 끈을 끊어 가고 있었다.
"설마... 마족이 저를 노리고 있을 줄이야. 얘기만 해도 망상증 환자라고 놀림당하는 그 마족이 앞에 나타나다니...."
금세 울 것처럼 습기를 머금었다.
"울지 마십시오."
"크흡, 흡, 죄송합니다."
페르다는 언짢은 표정으로 눈물을 닦는 버나드를 보았다.
"아무튼, 이걸로 알게 되었을 겁니다. 마족은 호시탐탐 이 대륙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
"이 대륙은 온전히 저희들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설령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족의 손에 넘어가선 안 됩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술과 감정에 취해 있는 버나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마족 출현 예측 장비라는 기술을 제게 빌려주십시오."
순간 버나드의 둥실둥실한 머릿속이 착 가라앉았다.
"빌려 달라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마물 출현 예측 장비를 제작할 수 있는 청사진과 메커니즘 말입니다."
정중하지만 그 말은 곧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았다.
그 요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이해했다.
"그런... 겁니까?"
버나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뭐가 말입니까?"
"제게 감시를 붙여 놓은 것도, 위험에 빠질 때까지 기다린 것도 그리고."
반 남은 술병을 톡톡 치는 손가락.
"이 독한 걸 제게 병째로 준 것도 전부, 제 기술을 얻어 내려던 속셈이지 않습니까?"
감성적으로 만들어 버리려 흔들어 놓는 개수작.
그렇게 새끼손가락에 위태롭게 걸린 이성의 끈 한가락마저 놓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페르다는 부인할 것이다.
으레 모든 귀족이 자신의 의도를 숨기듯이 잡아떼고 언쟁을 벌이려 할 것이다.
그의 말에 반박할 말들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맞습니다."
페르다는 순순히 인정했다.
한껏 감정이 올라온 버나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분개하며 언성을 높였다.
"힘든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들어서 원하는 걸 얻으려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발드로바 섭정!"
날뛰고 있는 버나드와 다르게 페르다는 차분하게 물었다.
"왜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왜 부끄러워해야 하냐니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사람 목숨을 그런 식으로 이용해서 호감을 얻어 내리라 생각했습니까!?"
"호감을 원했더라면 당신에게 사탕발림했겠지요. 되지도 않는 말로 당신을 홀렸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호감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페르다가 눈짓하는 곳은 버나드의 머리.
"제가 당신이 살았으면 하는 이유는 오롯이 그 기술이 당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쓸모가 있어서 살아남았다는 겁니까?"
"그 기술을 알기에 죽을 뻔했는데, 그 기술 때문에 살아난 것이 그리 놀랄 일입니까?"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쓸모가 있어서 죽을 뻔했고, 쓸모가 있기에 살아난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 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이다.
버나드는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은...! 당신은 인간도 아니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움직였다.
발바닥이 바닥을 찍어 누르며 문으로 걸어갔다.
"이곳을 벗어나면 당신은 죽습니다."
버나드의 발걸음이 멈췄다.
음산함을 머금은 그 말이 마치 올가미처럼 발을 묶는 듯했다.
"지금 절 협박하는 겁니까?"
"아뇨. 사실을 얘기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늦은 밤에 돌아다닌다면 마족이 아니라 몬스터에게 잡아먹힐 겁니다."
"이런 곳에 있을 바엔 차라리 잡아먹히고 말겠습니다!"
페르다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일궈 놓은 모든 것이 헛되이 무너질 겁니다."
버나드의 몸이 움찔거렸다.
무신경해 보이는 그 말은 페르다의 이기심이 아니었다.
버나드, 자신의 속마음이었다.
"총장을 습격한 그자는 총장을 흉내 냈다고 들었습니다. 총장의 모습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
"총장만이 알고 있는 것들을 소리소문없이 파괴하는 것이겠죠. 청사진과 기록들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을 겁니다.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
"그다음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무능한 총장의 얼굴을 한 자가 무엇을 할 것 같습니까? 그가 허락도 없이 책상에 앉고, 침대에 눕겠죠. 펜대를 휘갈기고, 승인 도장을 찍어 댔을 겁니다. 예산을 펑펑 쓰면서 당신과 도시를 무너트리려 할 겁니다."
"으으으...."
버나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버나드에게 있어서 에스콜레이아와 연구는 아내와 아들이었다.
그 아내와 아들이 자신도 모르게 부서진다고 상상하니 끔찍했다.
"끄흑 끄흐흐흐흑...."
버나드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몸을 웅크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는 고립되어 있으며 외롭다.
"저는 마의 땅을 정복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마족은 제 적이며, 사라져야 할 바퀴벌레 같은 족속들입니다."
페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기술이 필요합니다."
버나드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아는 페르다 발드로바는 3서클 마법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마법 명문가 귀공자들 특유의 고운 손이 아닌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는 기사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때는 기사를 꿈꾸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꿈은 좌절되었으며 공왕의 약혼자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버나드는 그 손바닥에서 명예와 신뢰를 느꼈다.
"제작하고 있는 물품의 청사진과 메커니즘을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버나드는 취기에 휘청거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이 지식은 온전히 제 것입니다. 그 점을 명확하게 해 주십시오."
버나드가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저작권이었다.
숟가락도 얹지 말라는 것이 그의 경고.
저작권이라는 것은 학자의 프라이드이며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 페르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신의 이름은 반드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 * *
페르다는 버나드 총장과 함께 콘실러스 영지로 향했다.
버나드가 에스콜레이아에 돌아갈 때, 아르웬이 한껏 대접한 다음, 호위해 갈 생각이었다.
"총장은 어떤 것 같나?"
페르다가 반대편에 앉은 콘실러스 백작에게 물었다.
"사제들 말로는 충격이 커서 하루는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고혈압이나 심장 마비에 죽는 것들이 처음으로 남의 손에 죽을 뻔했으니 말이지요."
"그런가?"
"그것보단 술을 너무 갑자기 많이 마셔서 몸이 망가지셨습니다. 어디서 폭음을 하신 것처럼...."
"내가 줬네. 자네가 선물해 준 그 술이지."
"그걸 병째로 주셨습니까?"
"그 자리에서 반 비웠더군."
"왜 그런 야만적인 짓을...."
"괴로우니까."
페르다는 차를 홀짝였다.
"죽을 만큼 괴로울 테니 줬다네."
"정말 죽지 않은 게 용합니다."
"안정을 취하는 것도 좋지만, 최대한 빠르게 에스콜레이아로 보내도록 하게. 그에게 받아야 할 물건이 있으니."
"아르웬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콘실러스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그는 불과 몇 시간 전, 페르다의 마차가 자신의 성에 입성할 때, 놀라운 것을 보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살아오면서 마물들은 몇천 마리 본 것 같지만, 마족은... 처음인 것 같군요."
"놀랄 필요 없네. 나도 본 적이 없었으니."
"무엇보다 인간의 흉내를 내는 마족이 있다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마족에는 두드러지는 특성이 세 가지가 있다.
뾰족한 이빨과 붉은 눈, 그리고 검은 피부.
"제 생각엔 도플갱어와 혼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플갱어라."
"모습이 없고, 그 모습과 목소리를 모방하는 것이라면 도플갱어밖에 없습니다. 버나드 총장은 혼란스러웠고, 경황이 없었을 겁니다."
"착각했을 수도 있단 소리군."
"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플갱어와 본판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겉모습을 모방하기 때문에, 옷 속에 있는 것들은 모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옷을 벗겨 확인하죠."
"맞다네. 그러나 이놈은 그 안까지 모든 걸 똑같이 구사했다더군. 성기까지 말이야."
"성기까지 확인을...?"
"어설프게 하면 된통 당하는 법이지."
"맞습니다. 어찌 됐든, 성기까지 똑같다고 한다면, 모방이 아닌 복제나 다름없군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닐세. 놈에게서는 버나드 총장과 똑같은 마나가 느껴졌어. 버나드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된 셈이지."
"그 자체가 되었다는 건... 구분하기 힘들었겠군요. 제드 경의 눈썰미가 탁월한 모양입니다."
"운이 좋았지."
그가 대머리였음에 감사하고, 그 머리를 반질반질하게 손질하고 다닌다는 것에 한 번 더 감사했다.
"그래서 그 도플갱어 마족 놈은 잘 데리고 있나?"
"예. 구속구를 단단히 채웠고, 사형 집행인에게 고문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아직도 하는 중인가?"
"예."
"몇 시간이 지났지?"
"도착하자마자 시작했으니 4시간 정도 되었을 겁니다."
페르다가 턱에 검지를 얹었다.
"정보를 뽑아 내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숙련된 기술자입니다. 이틀을 주신다면...."
"내 성미에 하루도 너무 긴 시간일세."
"최선을 다해 보라고 전해 놓겠습니다."
"아니."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미가 급하긴 하지만, 해결책이 있는데도 행패 부리는 건 효율적이지 않지."
"그 말씀은 직접 고문이라도 하시겠단 겁니까?"
"내가 그 방면에서도 조금 일가견이 있다네."
귀족이 고문에 일가견이 있다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놀랍지는 않았다.
페르다는 테살로스 월처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죽였던 인물이었으니까.
"연금술 공방 좀 이용해도 되겠나?"
"예. 그런데 독약 재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네. 어차피 만들 건 독약이 아니니까."
"아, 그렇다면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다...."
페르다는 공방으로 걸어갔고, 콘실러스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독약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약을 만들길래... 응?'
생각은 의문에 잡아먹혔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멀어져 가는 페르다의 등.
검은 옷을 입은 그의 등짝에서 무언가가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늙었더니 별 헛것이 다 보이는군.'
콘실러스는 눈을 비비며 대수롭지 않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콘실러스 백작의 성 깊은 지하 감옥.
사형 집행인이 검은 두건을 쓴 채로 제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버나드 총장의 모습을 한 사내는 처참한 몰골로 매달려 있었다.
강철로 만든 형벌대에 힘줄까지 끊었으니, 기사의 근력을 지녔다 해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사형 집행인과 죄수를 빼면 아무도 오지 않는 이 장소에 예상치 못한 귀빈이 안으로 들어왔다.
"발드로바 섭정님을 뵙습니다."
"자네 솜씨를 좀 봐도 되겠나?"
"예, 그러셔도 됩니다."
사형 집행인이 물러났고, 페르다는 걸어갔다.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은 부어 있고, 몸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멋지군."
페르다가 중얼거렸다.
"죽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게 하는 솜씨가 대단해."
"...과찬이십니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칭찬에 당황하는 사형 집행인.
이 구역은 그야말로 지옥에 근접한 불쾌한 구역이었다.
그런 곳을 서슴없이 들어와 내뱉은 말이 멋지군이라니.
"자네 역할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게."
"아직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만...."
"내 손으로 하도록 하지. 수고비일세."
페르다는 사형 집행인에게 금화 석 장을 건네주었다.
갑작스러운 거금에 어안이 벙벙하지만, 뭘 해야 할지는 확실했다.
사형 집행인이 나가고, 페르다는 의자를 끌고 와 묶여 있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직 의식이 있다는 거 알고 있다네. 마족이 됐으니 유약한 인간인 척하고 사는 건 그만둬야지 않겠나?"
그러자 고개를 축 늘어트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은 얼굴과 다르게 눈빛은 죽질 않았다.
페르다의 눈에는 흥미라는 빛이 돌기 시작했다.
59화. 거지 같은 삶
"우선."
페르다가 운을 뗐다.
지하에 어울리는 축축한 메아리가 울렸다.
"자네에게 참으로 감사한다네."
"...."
"그날 습격해 주지 않았더라면, 몇 날 며칠이고 버나드 총장을 감시해야 하는데, 그러면 쓸데없는 낭비가 있었을 테니까."
"그리 감사하면... 이거 좀 풀어 주시겠습니까?"
"그건 싫군. 자네에게 감사한 거지, 내가 멍청한 게 아니야."
페르다는 의자를 가져와 그의 앞에 놓았다.
"그 변신술은 아주 매력적이더군. 마법으로 흉내를 내거나 인지를 왜곡하는 것도 아니고, 도플갱어들처럼 어설프게 모방하는 것도 아니야."
"그리 신기하다면, 섭정님도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킥킥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나 또한 될 수 있나?"
페르다는 그 농담을 덥석 물었다.
"피만 있다면 가능합니다."
페르다는 품속에서 깨끗한 단검을 꺼내 자기 팔을 그었다.
새빨간 피가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되어 보게."
"...."
사내는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었다.
상당한 양의 피가 흘러 들어가자, 버나드 총장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페르다, 그 자체였다.
회색 머리에 푸른 눈.
기사가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던 유약한 몸.
멍이 들고 이빨이 부서졌지만, 틀림없이 페르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처를 수복하진 못하는 모양이군. 괴물 같은 치유력은 어찌 됐나?"
"내 역할은 그 인간이 되는 거야. 인간에게 그런 치유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철저하군."
일부러 마족들의 강화 요소들을 빼 버리고, 인간을 모방하는 데 힘을 쓰다니.
페르다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을 마주하고 있던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페르다 발드로바.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내 상상을 뛰어넘는구나...."
"무슨 의미지?"
페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보고 있는 건 너 자신이다. 너 자신이 망가지고 깨진 모습이지. 그걸 보면서도 즐겁다는 듯이 있군."
"즐겁진 않군."
"그런데도 눈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더냐?"
사내의 말대로였다.
페르다는 조금도 눈을 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부서진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너는... 로스노바 가문에 쫓겨났지?"
"...."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 몸으로 느낄 수 있어. 근육은 없지만, 뼈를 부수고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노력을 했었잖아?"
"...."
"하지만 네 아비는 그걸 못 알아준 거지."
"그래, 그걸로 약혼자가 되었다."
"아냐. 그건 널 내쫓으려고 내놓은 구실이었어. 너도 알고 있잖아?"
사내가 페르다의 얼굴로 비릿하게 웃었다.
"넌 재능이 없어 버림받았어. 나처럼 헌신짝마냥 버림받은 인간이지."
그의 눈이 호소하는 것은 동질감.
복수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감정에 느끼는 동질감이다.
페르다의 얼굴을 한 남자는 복수를 갈망하고 있었다.
신의를 저버린 왕에게 복수하려는 남자.
자식을 내친 아버지에게 복수하려는 남자.
그 분노라는 감정은 페르다가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버림받았지."
페르다는 그 모습에 혐오를 드러냈다.
"하지만 너랑 나는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달라."
"뭐가 다르냐?"
"영혼이다."
페르다는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내 영혼은 언제나 내 것이었다."
페르다가 그를 경멸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페르다의 말을 듣고 울컥하며 소리쳤다.
"내 영혼은 누구에게도 팔아넘기지 않았어. 이건 내가 정한 길이라고!"
"아니, 넌 영혼을 팔아넘겼다. 그 쓰레기들에게 자신을 품평하게 만들고, 헐값으로 만드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어. 그걸로 네 복수심은 개만도 못한 싸구려가 되었다."
얼척이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게 중요해? 어차피 복수만 하면 되는 거야. 내가 망가지더라도 그놈을 지옥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거야!"
"아니, 복수에는 영혼이 없으면 안 돼."
페르다는 가져온 파우치에 손을 넣었다.
"그게 설령 더러워지고 망가진다고 해도 내 영혼을 온전히 내 것으로 붙잡았을 때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가 꺼낸 것은 약병이었다.
색깔도 라벨도 없어 효능을 알 수 없는 약병.
총 7개.
"그러니 내 모습을 했다고 해서 나를 이해한 척은 그만두고."
그중 하나의 뚜껑을 열고 다가왔다.
"삶을 즐겨보게."
* * *
성 상층, 연금술 공방.
연금술사는 뒷정리에 한창이었다.
"들어가도 되겠나?"
익히 들은 노인의 목소리에 연금술사가 멈추고 고개를 조아렸다.
"콘실러스 백작님을 뵙습니다. 물론 언제든지 들어오셔도 됩니다."
"발드로바 섭정님께 공방 사용을 허락해 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백작님의 부탁을 소인이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콘실러스 백작이 슬쩍 들러 보는 시늉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발드로바 섭정님께서 무슨 약을 만든 건지 알고 있나?"
"여기 섭정님께서 요구하신 재료 목록입니다."
눈치 빠른 연금술사는 그가 쓴 목록들을 보여 주었다.
콘실러스가 그 목록을 쭉 훑어보았다.
그는 기사에 군인이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꽤 있었다.
그중에게는 연금술 지식도 있었고, 기초적인 것들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콘실러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회복약 재료인 것 같은데 맞나?"
콘실러스 백작의 질문에 연금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고작 회복약을 만들러 이곳에 왔단 말인가? 그 정도라면 자네에게도 부탁해도 될 일일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으려던 한숨이 쏙 들어갔다.
연금술사는 어버버거렸다.
"아니, 그게...."
"말해 보게. 조금 흉보는 수준이라도 용서할 테니."
"죽을죄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발드로바 섭정께서는 연금술은 조금 실력이... 아니, 그냥 최악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질색이 묻어 나왔다.
콘실러스 백작은 그 반응에 눈을 끔뻑였다.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인가?"
"예. 연금술은 완전 초짜, 아니 초짜보다 못한 짓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제 제자가 그랬더라면 당장에 귀싸대기를 때려 버렸을 정도입니다."
"흠...."
"헉,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무례를...."
콘실러스 백작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건 아마 미숙한 게 아닐걸세."
"그렇지만 제조와 용법에서 완전히 어긋납니다. 초짜가 아니고서야...."
"말해 보게. 제조법에 어긋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그러니까...."
연금술사가 기록했던 것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 섭정께서 한 행위 중을 집어 드리면, 휘젓기 속도가 너무 빨랐습니다."
"빠르면 어떻게 되나?"
"회복약의 효과가 감소합니다."
"그리고 다른 건?"
"식히는 과정에서 솥을 흔들었습니다. 약효가 고루 퍼지는 과정에서 흔드는 것은 회복 효과를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최악의 행위들을 계속해서 읊기 시작했다.
그는 짧은 공정에서 무려 20가지가 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연금술사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지켜보고 있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렇게 하나씩 집어 가니 보이기 시작했다.
연금술은 섬세하다.
과정 중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회복 효과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주스보다 못한 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페르다가 자행한 미숙한 행위들 전부 일관적인 효과를 이끌었다.
"전부 회복 속도와 회복력을 감소하게 만듭니다...."
초짜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의도된 방향이었다.
* * *
"끄으으윽!"
사내의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데, 혈관이 튀어나오고, 부러진 이빨을 깨물어 그마저도 부서지고 있었다.
"느껴지나?"
페르다가 빈 병을 살랑거리며 물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모든 것이 사내의 몸에 들어갔다.
"전신이 불타는 들판 같지 않나? 천천히 그리고 아주 뜨겁게 태우고 있는 것 같을 거야."
"끄으으윽... 내게 대체 뭘...?!"
말을 전부 잇지 못했다.
그러나 페르다는 대답해 주었다.
"거지 같은 삶일세."
"그, 그게 뭔...!"
"내가 지은 이름일세. 자네처럼 죽기를 각오한 놈들에게 주는 가장 고통스러운 삶이지. 그리고 느끼고 있는 것은 모진 고문으로 죽어 버렸던 신경들이 되살아나는 성장통이야."
"끄으으윽...!?"
"그래. 이건 자네를 죽이는 게 아니란 거지. 자네를 살리는 중이지."
"지, 지라아알...!"
이딴 게 회복일 리가 없다.
페르다는 빈 약병을 흔들며 말했다.
"신기하지 않나? 회복약은 효과가 좋을수록 굵고 빠르게 회복하지. 그래서 상급 회복 포션은 언제나 인기가 많아. 잘 정제되어서 전투 중에 먹어도 후유증이 없으니 말이야."
사내는 한때 기사였다.
전장에도 나섰었으니, 고급 회복약의 효과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반대로 싸구려 회복약은 고통스럽다네. 회복 속도도 느리고 회복력도 약하지. 내가 만든 건 그 싸구려 중에서도 제일 싸구려일세. 그래서 이렇게 누르면...."
페르다는 검지로 멍이 든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끄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형 집행인의 고문에도 견뎠던 그가 처음으로 외마디의 비명을 질렀다.
"되살아난 신경은 아주 예민하지. 손가락도 이 정도인데."
그가 사형 집행인이 두고 간 물건을 집어 들었다.
길고 끝이 뾰족한 물건.
바늘이었다.
"이건 어떨 것 같나?"
철컹철컹!
"그만, 그마아안!!"
그가 정신을 놓고 발악하기 시작했다.
"다 말할게! 다 말한다고!"
"뭘 말인가?"
"이 고문을 하는 목적이 있을 거 아냐 씨바아알! 다 말할게! 우리 본거지가 어딘지도 전부 말할 테니까! 이제 그만 해! 제발! 제바아알!"
5분.
사형 집행인의 고문을 견디던 그가 굴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참으로 빠르게 끝났다.
그래, 죽어가는 중에서 저항하는 법은 배웠어도 살아가는 것에 저항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을 테니까.
"아니야."
페르다는 그에게 질문하는 대신 입에 재갈을 물렸다.
"자네가 굴복하는 건 예정되어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는 빈 병을 내려놓고 옆에 놓인 병을 들었다.
찰랑거렸다.
예민한 그의 귀에는 폭풍우를 맞이한 파도 소리와도 같았다.
"좀 더 노래하도록 하게. 자네가 버렸던 거지 같은 삶을 좀 더 느끼도록 하게."
지하로 향하는 나선 계단.
그 아래에는 지옥에 빠진 악인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 * *
3시간 후, 페르다는 콘실러스와 다시 응접실에서 대면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네."
"그게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을 도플러라고 얘기하더군."
"도플러? 도플갱어에서 따온 말 같군요."
"맞네. 도플갱어보다 더욱 뛰어난 존재라는 의미로 도플러라고 하더군."
"자아도취라니. 마족답습니다."
콘실러스 백작이 허허 웃었다.
"마족의 정보를 얻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마족보단 인간에 가깝다는 게 컸지. 인간에 가깝지 않았더라면 내가 알고 있는 고문법이 먹히지 않았을 테니까."
"실로 대단하십니다. 저희로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을 만들어 내시다니...."
성에 30년 동안 근무했던 연금술사마저도 혀를 내두른 아이디어였다.
페르다는 정상적인 회복약을 제조할 때보다 몇십 배는 더 어렵고 정교하게 망쳤다.
그건 가히 예술이라 할 수 있는 경지였다.
"그 도플러라는 작자들은 버나드 총장이 최초는 아닐 테고...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도 아십니까?"
"10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하는군. 자기는 서번트급에서 막 나이트급으로 올라서 정확히는 모르는 것 같더군."
마족에 계열이 존재한다.
서번트급은 평범한 인간 추종자들로 버림말들이다.
나이트급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마족의 힘과 권능을 누린다.
"10년 전부터 시작했다면 이미 많이 숨어 있겠군요."
"에스콜레이아는 물론, 대공의회에도 이미 숨어 있을 걸세."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위대한 질서의 위상이신 블랑카로스 님의 구역에 혼돈의 무리가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버나드 총장이 대공의회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이미 알고 있어. 인간이든, 아니면 도플러든 마족 추종자가 안에 있는 건 기정사실이지."
콘실러스 백작도 그걸 이해를 했지만,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무리였다.
"온 대륙이 화합하는 대공의회가 이제는 신뢰를 잃어 가겠군요."
세르데스 대륙의 화합을 위해서 만들어진 자리인 대공의회.
블랑카로스의 절대 구역에 악룡 고드윈의 수하가 심겨 있다는 소리는 대륙을 흔들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엔 너무 파급력이 크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콘실러스는 페르다에게 물었다.
그는 어쩌면 이 사태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까.
"제일 좋은 건 역시 선제 타격하는 것이겠군."
"상대를 기습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전술이긴 하지요. 하지만 상대의 본거지를 알아야 기습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이네."
그 말의 의도를 뒤늦게 파악한 콘실러스 백작이 반색했다.
"설마 적의 본거지까지 알아내신 겁니까?"
"본거지는 아니지만, 핵심 시설이지. 그 녀석들을 만들어 내는 연구 시설에서 경비 대장 역할을 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남들보다 취약한 부분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바로 상대를 치러 가면 되겠군요."
상대의 위치를 알고 있었으니 조건 자체는 완벽하다.
"한 가지 문제가 있네."
"무엇입니까?"
"그 연구 시설이라는 장소가 실버윈드의 영역이더군."
"아아...."
콘실러스는 현재 실버윈드와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곤란하게 되었군요. 실버윈드 측에 협조를 요청하면 쉽게 풀릴 일 같은데...."
"해 줄 리가 없지. 그리고 요청하는 시간도 걸리지 않겠나?"
"맞습니다. 그렇다면 정보를 제공하는 편이 좋겠지만... 그마저도 탐탁지 않은 일이군요."
"단순히 토벌할 거라면, 산을 무너트려서 없애 버릴 수도 있는 일이지."
선제 타격하는 장소는 마족들의 집결지가 아닌 연구 시설이다.
즉, 군사가 아닌 정보가 핵심인 곳.
그중에는 도플러의 정보는 물론, 마족들이 세워 놓은 계획들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페르다는 결정했다.
"은밀하게 치고 무너트린 다음 빠져야만 하겠군."
자칫하면 전쟁이 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특수 작전.
페르다가 그 계획의 틀을 잡으려던 때, 느닷없이 콘실러스 백작이 선수쳤다.
"외람된 청입니다만, 이 늙은이에게 기회를 주실 수 있습니까?"
"기회 말인가?"
"예."
콘실러스 백작이 무릎을 꿇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제국의 방패이자, 위대하신 힘의 위상께 충성하는 기사로서 섭정님께 큰 힘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흰머리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전성기에는 제국에서 인정을 받았던 기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잃을 것을 모두 잃은 채로 스스로 좌천시킨 기사.
페르다는 그 청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내일 출발할 걸세. 바로 준비하도록 하게."
60화. 악마와의 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