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30-35

30화. 내가 무엇으로 보이나?

페르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반란 모의와 조장은 무슨 관련이 있지?"

"기업과 의탁하여 병사들을 무장하고 있으며, 제국과 잇는 도로를 건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침략을 원활하게 하려는 작정이지 않습니까?"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페르다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보급과 무역의 활성 및 원활화, 유사시 제국에서 지원받을 때 용이하니, 도로를 개선할 뿐이다. 그리고 파스칼 무역회사와 계약을 맺은 만큼 그들을 위해서 도로를 만들 필요가 있지. 적이라고는 마물과 몬스터밖에 없는 땅에서 도로로 무엇을 한다고 그런 트집을 잡는 건가?"

"여태까지 동부는 도로가 없어도 꾸준히 방어해 왔습니다. 지금 하는 것은 과잉 무장이며, 제국을 향한 위협 행위입니다."

"방어라...."

그 순간, 페르다의 차분했던 감정이 확 치고 올라왔다.

"자네들은 단 한 번이라도 극동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극동부에 발을 들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극동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페르다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다.

극동부 전선 연합 회의에 몇 번이나 참여하긴 했지만, 뒤늦게 나서야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애초에 극동부 경계선은 예산과 병력, 그리고 사기까지 모두 부족한 상태였네. 지금 겨우 25% 정도 채워 넣은 상태지. 그런데 그게 과잉 무장으로 보이던가?"

"현재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무장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무장을 늘린다는 것은 그런 의미지요."

"억지 부리지 말게. 솔직히 말해서 발드로바 공왕령에서 마물을 방어한 것은 전부 나의 약혼자, 발드로바 공왕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일 뿐이야. 그분이 없었더라면 이미 시체나 다름없지. 극동부의 병사들은 더 좋은 무기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네."

"억지를 부린다니!"

카를이 말꼬리를 잡으며 언성을 높였다.

"저는 지금 감사장이라는 신분으로 왔습니다! 제국 황제를 보듯이 해야 한다는 것도 모릅니까?"

고성을 터트리며 위협하는 카를.

페르다의 기세를 꺾으려 시도했지만,

"지금."

페르다의 조용한 목소리가 카를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는 찻잔을 들고 다리를 꼰 상태로 카를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푸른색 눈동자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 앞에서 언성을 높인 건가, 카를 경?"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카를은 그 기에 눌리지 않았다.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화가 나는 것은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그의 성격이었다면, 카를은 지금쯤 시체가 되어야 마땅했다.

아니, 잔혹하게 파괴하고 부숴 버릴 것이다.

그런데도 참고 있는 것이다.

'발드로바가 여태까지 집 지키는 개밖에 되지 않았던가?'

그녀를 취급하는 모습이 상상 이상이었다.

페르다도 은연히 알고 있긴 했다.

그녀를 두려워하지만, 근원에서 오는 두려움은 없었다.

페르다는 당장 서 제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페르다는 좀 더 멀리 보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약혼자, 발드로바를 위하여.

결국 기세로 찍어 누르려 했던 카를은 꼬리를 말았다.

"본격적인 조사가 이어진다면, 제국의 법에 따라서 섭정을 처벌할 수 있습니다."

페르다는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그럼 막도록 하게."

"상부 쪽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홀로 힘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가?"

페르다는 아쉽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성실히 조사받고 광명을 찾도록 하지."

카를이 답답하다는 얼굴을 하며 겨우내 입을 열었다.

"...시작되면 막을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지. 자네는 자네 일을 다 했다네. 돌아가 보도록 하게."

결국 카를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 정도 되는 분이 자꾸 모르는 척하시는군요."

어쭙잖은 연극을 하는 것을 그만두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의 탁한 눈동자가 페르다를 향했다.

"좋게 넘어갑시다. 로스노바 가문의 사람이라면 우리 척결단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않습니까?"

"당연히 잘 알지. 영주들 상대로 도적질이나 하는 기사 것들이지 않나?"

"그렇게도 불리죠, 예."

모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는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상부에 드릴 돈과 제게 주실 약간의 수수료만 내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한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정도?"

그가 가지고 있는 손가락을 전부 펼쳤다.

"10만 골덴이면 충분할 겁니다."

"흐음, 10만이라...."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루리가 주전자를 가지고 다가와 따뜻한 차를 다시 채워 놓았다.

"한 가지 묻겠네."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페르다의 물음에 카를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한다.

"발드로바 섭정이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이나? 나는 자네가 나를 개X으로 본다고 생각하는데."

"개, 개X?"

대놓고 육두문자가 날아오니 카를은 당황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어찌 섭정을 그런 식으로...."

"걱정하지 말게. 나는 이미 발드로바의 기둥서방이라는 것과 로스노바의 폐급 아들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네. 나를 개X으로 보는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

애초에 척결단의 사람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그런 의미였다.

"나는 다 알고 있다네."

페르다는 명예로운 기사들을 좋아했다.

그중에서 으뜸은 영주들의 부패를 감시하는 척결단이었다.

"자네들이 어떻게 건실한 영주들을 나락으로 빠트리는지 말이야."

그러니 그 실체를 깨달았을 때는 누구보다 실망했다.

"자네들에게 돈을 주게 되면 나는 뭐가 되겠나? 아, 이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입막음하기 위해 돈을 냈다고 하겠지. 그렇게 자네들이 치기 좋은 호구가 하나 만들어지는 거겠지."

발을 들이는 순간, 그곳에 얽히게 된다.

마치 진득한 늪에 뛰어들어 버린 것처럼 자력으로는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자네 같은 것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게 될 거야. 마치 어머니한테 쫄래쫄래 걸어가 과자 사 먹을 용돈을 요구하듯이 내게서 돈을 찔러 달라고 말이지."

비슷한 요구와 비슷한 협박이 주변에서 쇄도하기 시작한다.

영주가 돈이 많아도 무한하지 않다.

요구를 들어주자니 감당이 안 되고, 수습하자니 더욱 많은 돈과 힘이 필요로 한다.

그렇게 영주는 세금을 올리고 주변을 착취하기 시작할 것이다.

멀쩡한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고 진짜로 부정부패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제국의 부패는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내가 자네들에게 돈을 줄 것 같은가?"

페르다는 맹세했다.

발드로바가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지키겠노라고.

이까짓 개망나니 것들의 노리개로 휘둘리게 둘 리가 없다.

"그러니 마음대로 하게. 그 잘난 반란 모의 및 조장을 열심히 찾고 딴지 걸도록 해. 나는 그대들에게 1골덴은커녕, 1쿠페도 줄 의향이 없으니 말이야."

예상 이상으로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페르다.

그러나 카를은 이런 상황에도 익숙했다.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

척결단에게 돈을 주지 않고 버티려 했던 영주들을 말이다.

"그럼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하지만 척결단을 반하면 예외 없이 찍어 눌렀다.

공왕의 지위를 업은 자라고 할지라도 상대는 막 섭정이 된 애송이.

"듣자하니, 최근에 귀족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테살로스 월처에 관한 이야기다.

없는 죄가 아닌 실제로 있는 죄를 꺼내기로 한 것이다.

"살해라니 가당치도 않군. 결투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잡아가는 게 제국의 법이던가?"

"결투 끝에 일어난 죽음은 명백히 살인입니다. 그것을 지켜본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보았지. 지금 여기도 있네."

페르다는 슬쩍 루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해 봐라. 내가 살인을 했나?"

루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처형이었습니다. 마물을 가지고 몰래 흑마법을 연구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으니, 즉결 처형도 마땅하지요."

"그렇다는군."

"그건 결투와 관련이 없는 죄목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시종에게 말을 시키는 것은 효력이 없습니다."

"그럼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카를이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 증인을 모시고 오는 중입니다. 곧 이 성에 도착하실 겁니다."

"증인이라...."

페르다는 차를 홀짝일 뿐이다.

"누군지 꼭 만나 보고 싶군."

페르다는 뭘 하든 상관없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무슨 짓을 해도 흔들리지 않으니 카를도 약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여유로울지 보자. 네놈은 내 발밑에서 싹싹 비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최후에 웃는 것은 자신이라는 믿음.

카를은 그 믿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카를이 모셔 왔다는 그 증인이 응접실로 발을 들였다.

그는 흰 수염이 자글자글한 연로한 영주.

그는 이 극동부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며 지위가 페르다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

-페르다 발드로바는 제 권력에 취한 멍청이요, 조만간 발드로바의 화를 입게 될지도 모를 정도로 오만하지.

페르다 발드로바를 혐오하는 반세력자이자, 자신들이 출동을 결심하게 만든 정보의 출처원이기도 하였다.

"아이고, 콘실러스 백작님 어서 오십시오!"

카를이 살가운 목소리로 입구에서 그를 반겼다.

그러나 콘실러스는 카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페르다를 향하고 있었다.

콘실러스는 그곳으로 걸어가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섭정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페르다는 담백하게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시오, 콘실러스 백작."

평범한 귀족들 간의 인사.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카를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인사를 하는 것 정도는 흔하다.

하지만 대면하거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서로 묵례를 하는 것이 일반적.

지금처럼 예를 차리는 것은 귀족 사회에서 정말로 자신의 존경을 표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냥 예를 차린 것일 뿐이다.'

카를은 뻘쭘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지금으로서 옳았다.

'콘실러스 백작은 우리 편이야.'

콘실러스 백작은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이다.

극동부에서 줄타기만 하는 노인네이며, 최근까지 어린 섭정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

'극동부의 모든 영주가 그랬다.'

검증까지 마친 상태였다.

페르다는 영주들을 죄목으로 협박했고, 그 공포로 억눌러 통치하려는 자다.

공포는 사람을 위축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에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배신할 수 있다.

그런 정보조차 콘실러스에게서 받았으니 틀림없이 협력할 것이다.

인사를 받은 페르다는 손으로 빈 의자를 정중하게 가리켰다.

"앉도록 하게. 연로한 자를 이렇게 무릎을 꿇게 두고 싶진 않군."

"예."

콘실러스 백작이 자리에 앉았고, 카를도 따라 착석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가 이야기를 주도하려 들었다.

"콘실러스 백작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시기가 어쩐지 절묘하게 맞았을 뿐이지."

콘실러스가 허허 웃으면서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카를이 따라 웃으며 이야기의 주제를 잡았다.

"콘실러스 백작님. 테살로스 월처의 사건에 대해서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콘실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때의 참관인으로 지켜보았지."

"그렇습니다. 발드로바 섭정이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증언해 주시겠습니까?"

"그 이야기 말인가? 그래, 그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지...."

"그렇습니다. 그때의 증언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콘실러스 백작의 눈이 슬쩍 페르다를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드로바 섭정은...."

그가 이어 대답했다.

"그 결투에서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네."

"...예?"

카를이 예상했던 대답에서 한참 빗나갔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하,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다시 말해 주지. 그 결투에서 발드로바 섭정은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네."

콘실러스는 제국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날, 테살로스 월처는 발드로바 영주를 죽일 작정으로 마법식을 발현하였고, 발드로바 영주는 그것에 대항하여 제압하기만 했다네. 당시의 섭정님의 경지는 1서클. 그리고 그는 4서클의 마법사였지. 승패가 확실할 만큼 차이가 났다네. 그러나 월처 애송이는 '적당히'를 몰랐지. 그런데도 그가 졌다네."

"그렇습니다. 졌지요. 졌지만, 귀족 살해로 이어졌고—."

"아니지, 그건 그렇게 볼 수가 없어."

콘실러스 백작이 카를의 말을 끊었다.

"결투가 끝났을 때도 어쩌면 그가 마법으로 죽이려 할 수도 있었다네. 결투의 당사자들만 느낄 수 있는 살기라는 게 있어. 상대가 공격하기 전에 반격을 가한 것일 수도 있단 말일세. 마법사의 세계는 그런 심오한 것이니깐. 그렇지 않습니까?"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후까지도 자신의 마지막 수단을 감춘다. 그게 마법사이긴 하지."

"귀족이 귀족을 죽이려 했으니, 미수에 그치더라도 생살여탈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영주들이 내린 결론일세."

뭐야, 이거?

말이 다르잖아.

31화. 말 잘 듣는 개

"잠시만, 콘실러스 백작님! 저희는 황실의 대리인들입니다."

혹시나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더 강조해 본다.

당신의 출셋길과 앞날이 우리에게 달렸다고.

콘실러스는 안타깝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군. 그래. 제국에서 이런 일로 불러서 생사람 잡도록 하다니 말이야."

"엇, 대, 대체 그게 무슨...."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빌어먹을 놈이라는 듯이 잔뜩 이야기하던 것은 틀림없이 콘실러스 백작이었다.

인제 와서 마음을 돌린다고?

'설마....'

카를의 눈동자와 페르다와 콘실러스 백작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귀족 세계에서 그런 끈끈한 일이 있을 리가 없다.

"뭣 하나?"

"예?"

페르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얼른 다음 증인을 불러 보도록 하게."

페르다는 셈하듯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아직 증인은 많이 남아 있다네. 죽어 버린 테살로스 월처를 제외하면 13명이 남아 있군. 그것들을 전부 불러와서 증언시켜 보게. 그중에서 하나라도 내가 유죄라고 하면 자네 역할은 끝이지 않은가?"

99가 아니라 해도 1이 맞다고 한다면, 보낼 수 있는 것이 척결단의 힘이었다.

그러나 카를은 그 13명을 전부 불러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극동부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콘실러스 백작이 부정했다면, 그 밑에 있는 자들도 부정할 것이다.

"증인을 못 부르겠다면 더 꺼내 보게."

"무 무엇을...."

"나를 까 내리고 협박하기 위해서 가져온 죄목들이 더 있지 않은가? 그걸 꺼내 보란 말일세."

주객전도한 분위기.

카를은 억지로 오기를 부려 보았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이, 이 아이를 납치했다고 드, 들었습니다."

긴 생머리를 지닌 여자아이의 몽타주.

흐리멍덩한 눈동자만 봐도 모리임을 알 수 있었다.

'모리를 찾는 것이라면 헬루스 포비다스로군.'

헬루스 포비다스가 정확하게 페르다를 지목했다면, 여시종을 찾았다는 의미였다.

"그렇군."

물론 그 협박 자체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였다.

카를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뭐라도 해야만 했을 뿐이었다.

"미안하네만, 그 아이는 내가 사들였다네. 그 시종에게 동의를 받았고, 소유권을 이전받았지. 납치라고는 할 수가 없다네."

"...."

"그래도 주장하겠다면 그 당사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래서 다음은 뭔가?"

카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제외하면 전부 하찮은 것들이다.

잔돈 몇 푼을 더 쥐여 달라고 슬쩍 떠보는 정도의 내용들.

그에게 남은 카드가 더 이상 없다.

"그럼 내가 이야기해야겠군."

페르다의 차례로 넘어갔다.

그가 콘실러스 백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콘실러스 백작."

"예. 말씀하십시오, 섭정이시여."

그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반응했다.

"이자가 내게 대놓고 금전을 요구하더군."

"허허, 그렇습니까? 먼 길을 왔으니 여비 정도는 챙겨 주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여비로 요구하는 것이 10만 골덴일세."

"허허, 꽤나 큰돈이로군요."

"그 돈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

"저마다 가치가 다르니 확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군. 자네들의 영지민들에게 쓰이는 돈으로 따지면 얼마가 될 것 같나?"

"저희 영지민들이 10년은 밥걱정 없이 보낼 수 있는 돈이겠군요."

"그렇군."

페르다의 푸른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저자는 홀로 영지민들의 10년을 빼앗아 가려 한 거로군?"

"그렇습니다."

콘실러스가 따라 카를을 흘겨보았다.

실실 웃던 그의 눈동자에는 또렷한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천인공노할 짓을 했지요."

"아... 아아...."

쥐새끼를 궁지에 몰려고 불러들인 고양이마저도 한통속이었다니.

역으로 당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카를은 벌벌 떨기 시작했다.

"공의 생각은 어떻소? 이 사내를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소?"

"제국의 이름을 달고 금품을 요구하는 자들이라니. 한낱 기사가 할 만한 짓은 아닙니다."

"그렇지? 그리고 자신을 황제 보듯이 보라고 요구하더군."

"허허허! 설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일개의 기사 따위가 감히 황제 폐하와 맞먹으려 들다니 말입니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겠나?"

"테살로스와 똑같은 신세가 되어도 할 말이 없겠지요. 테살로스 월처가 이마에 구멍이 뚫렸지요?"

"그렇다네."

그들의 일방적인 이야기에 카를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그 둘을 번갈아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그 전에... 금품 요구와 황족 사칭 건으로 제국에 정식으로 항의를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좋은 이야기로군. 하지만 이렇게 어린 것이 항의를 해 봐야 들은 체나 하겠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준비하도록 하지요."

척결단이 더러운 짓을 한다는 것은 대부분 귀족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문제로 만든다면 달라진다.

노년까지 최전방을 지키는 콘실러스 백작의 발언은 감히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콘실러스 백작....'

카를의 눈에 배신감이 어렸다.

자신을 함정에 빠른 것은 저기 저렇게 웃고 떠들고 있는 노인네의 작품이다.

'나를, 척살단을...! 함정에 빠트린 것이다.'

콘실러스와 페르다 발드로바가 서로 짜고 쳐서 이 사달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카를이 최후의 발악을 해 보려 했다.

"저, 저희는 직속 부대입니다! 그렇게 항의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그럴 것 같은가?"

페르다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자네의 가치는 어디까지인가?"

"제 가치...?"

"자네를 감싸는 게 더 편할 것 같나, 아니면 개인의 일탈로 인해 바로잡겠다고 목을 치는 편이 더 편할 것 같나?"

물을 필요도 없다.

압도적으로 후자가 낫다.

"그리고 자네가 어떻게든 살아간다 해도 자네 혈족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아마 자네의 동생들이 손수 자네 목을 베러 올 것이네."

"그게 무슨...."

"생각해 보게, 하베스트 가의 장남. 자네 밑에 동생이 둘이 더 있지? 그 둘과 사이가 좋다고 해서 제 형의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다녔는데도 가만히 있을 것 같나?"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먼저 태어났단 이유로 카를이 누리는 것을 꼴 시리다는 듯 보던 놈들이었으니까.

기사의 명예를 알고 있다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 벨 것이다.

그저 출세에 목이 마른 속물이라면,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벨 것이다.

살려 놓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이득인 카를은 그야말로 좋은 먹잇감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카를은 뒤늦게 깨달았다.

'드래곤이 문제가 아니었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비웃고 있었던 이 섭정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말해 보게."

페르다의 목소리에 화들짝 깨어났다.

그는 늘 그렇듯이 차갑게 묻는다.

"이제 내가 무엇으로 보이나?"

얼음 칼날이 자신의 목 앞에 놓인 것 같은 날카로운 서늘함.

대답을 잘못하는 순간 그 칼날이 자신의 목을 베고 오체분시해 버릴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떨던 카를이 힘겹게 대답했다.

"위, 위대하신 발드로바 섭정님입니다."

그 목소리에서 굴복감이 묻어 나왔다.

"그래, 발드로바 공왕령에서 공왕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자지."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떨고 있는 카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나는 자네가 척결단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악마와도 같은 달콤한 속삭임.

"자네는 척결단의 주인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숭고하게 척결단을 위해 죽겠는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척결단에 숭고함이란 없다.

카를은 고개를 조아렸다.

"부디, 제 충성을 받아 주십시오."

페르다는 그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갈대 같은 충성은 필요 없네."

카를의 심장이 바닥에 내리 앉았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내게 필요한 건 말 잘 듣는 개야."

"개... 말입니까?"

"시키는 것만 하고,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개 말이야. 가끔 던져 주는 뼈다귀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얌전하게 주인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이지. 그렇다면 자네는 출셋길을 열 수 있을 거야, 이해했나?"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개가 되겠습니다. 섭정님의... 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페르다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도록 하게. 자네를 위한 개 목걸이를 만들어야 하니 말이야."

"...예."

그의 창백해진 낯빛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카를이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이제부터 자신이 데리고 온 부하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만끽하는 중일 것이다.

물론 당사자는 사형 전 최후의 만찬일 뿐이니,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페르다는 콘실러스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콘실러스 백작은 척결단이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하였다.

"척결단이 저렇게 자신 있게 온 것은 자네 때문이란 소리군."

콘실러스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변명할 여지 없이 죽어 마땅한 짓을 했습니다."

"상관없다. 그래서 그 서신에는 뭐라 대답했나?"

"청렴하며, 극동부를 위하는 성군이다...."

콘실러스 백작이 씨익 웃었다.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상은 가지만 물어본다.

"척결단은 메뚜기 떼와도 같습니다. 먹이 냄새를 맡으면 몰려와서 모조리 헤집고 사라지지. 극동부는 지금 발전을 꾀하고 있지요. 저들은 항상 약한 자들을 먼저 공략하여 서서히 집어삼킵니다. 발을 들이면, 이미 끝장이나 다름없습니다."

척결단의 주요 전략 중 하나였다.

힘이 없는 곳부터 서서히 고립시킨 후 먹는다.

"하지만 섭정님께선 이미 테살로스 월처로 인해 이미지가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페르다는 표면상으로 이미 고립된 상태였다.

귀족들이 페르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 벼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그것에 확신만 준다면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나를 제대로 이용해 먹었군."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모든 것은 제 계획이었으니, 처벌하셔야겠다면 부디 이 늙은이를 처벌하소서."

페르다는 손을 저었다.

"아니 괜찮네. 그대는 영지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서 어슬렁거리는 개들을 처리한 셈이지 않던가?"

"그러나 섭정을 떠본 것은 기분이 나쁜 일이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했으니 상관없다네. 자네가 공왕에게 충성하기만 한다면, 나를 어떤 식으로 이용해도 상관없다네. 나는 왕의 권위를 누리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야. 나의 왕을 위해서 헌신하기 위해 온 것이지."

"아아...."

귀족들의 겉치레 정도는 가볍게 간파할 수 있는 콘실러스 백작이다.

페르다는 뼛속부터 진심인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말해 보게. 그대는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나?"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제국에게 충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공왕 전하보다 제국의 황제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었던 사람이지요."

콘실러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의 사실을 이야기했다.

"늙으면 사람이 겁이 많아집니다. 그래서인지 세월이 흐르다 보면 제가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올라섰는지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망각했던 것을 다시 떠올렸나?"

"예. 섭정님 덕분에 눈이 뜨였습니다."

콘실러스가 창문 너머를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오염된 땅, 마의 대지가 펼쳐졌다.

위치가 높아 자신의 성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저는 이 자리에 오를 때부터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받았습니다. 제국에 충성하는 것은 제국이 신민들을 지키기 위함이기 때문이지, 저를 올려 줬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결한 귀족이로군."

"과찬이십니다."

콘실러스가 허허 웃었다.

콘실러스는 이 극동부의 대변인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들의 가슴에는 불을 지피는 것이 없었다.

병사들이 숱하게 죽어 갔음에도, 얻어 가는 것은 닳아 가는 자신의 마음과 두려움뿐.

"콘실러스 백작."

"예."

"공의 가슴엔 아직도 그 신념이 깃들어 있는가?"

"그렇습니다."

페르다가 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해 주게. 이 동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네."

콘실러스는 그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섭정님이 아닌 바로 접니다."

콘실러스가 무릎을 꿇으며 그 손에 자신의 양손을 조심스레 얹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쥐었던 그 손은 거칠며 투박하였다.

"이 죽음만이 도사리는 동부를 이끌어 주십시오. 저는 언제나 공왕 전하께 충성을 다하며, 섭정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 * *

카를은 숙취에 찌들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감춰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죽자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퍼마신 것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는 대신 죽을 것 같은 숙취와 아침 햇살만이 그를 반겼다.

'젠장할....'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용기도 없다.

그러니 도살장에 갇힌 돼지처럼 앉은 채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페르다인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려 했으나,

"아, 안녕하세요?"

음침하기 짝이 없는 검은 머리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이 여자는?'

그런데 범상치가 않았다.

복장만 보면 이 성에 고용된 관리 중 하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평범함에서 감출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당장이라도 뒤로 물러나고 싶게 만들었다.

그녀가 엉거주춤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 공왕님을 대신해서 제가 대리인으로 계약할 거고요. 그리고... 으음...."

검은 눈이 스윽 카를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듣던 대로 잘생기시진 않았네요."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

웬 시비인가 싶지만, 그는 화를 낼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제 이름은 에키드나 필리아즈라고 해요."

"...필리아즈?"

숙취가 확 깼다.

'필리아즈? 그렇다는 건 필리아즈 소속의 마녀라는 소리잖아?'

필리아즈.

레드 서클을 각성한 여성들에게 나타나며, 계약을 진행하면 반드시 마녀가 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남성을 극도로 혐오하며, 필리아즈 이외에는 절대로 협력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마녀를... 영입해서 쓰고 있다고?'

대체 어떻게?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비명 같은 물음을 억지로 삼킨다.

카를의 머릿속에는 페르다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 그 계약서고요.... 천천히 읽어 보실래요?"

"예."

카를은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한 장씩 확인했다.

'허점... 허점을 찾아야....'

하지만 무리였다.

법률에 빠삭하지 않은 카를이 수십 장이나 되는 계약서를 혼자 검토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 마녀다....'

계약에 있어서는 악마 다음으로 가장 추악하다고 불리는 마녀.

개 목걸이를 채운다고 했을 때, 대강 계약 마법을 진행하리라 생각했지만, 설마 마녀를 이용해서 할 줄이야.

카를은 석 장 정도를 읽다가 포기하고, 한 장씩 자신의 이름을 기입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어차피 자신이 개가 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마지막 페이지까지 서명을 마치자, 그 계약서가 빛나기 시작했다.

"윽."

카를이 살갗 아래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신음했다.

그 따끔거리는 느낌이 손목에 계약의 문양이 새겨졌다.

그걸로 이 음침한 마녀와의 계약이 완성되었다.

"네. 확인했고요. 앞으로는 그... 말조심 잘하셔야 해요?"

"무슨 말조심... 말입니까?"

"그, 예상은 했지만, 역시 잘 안 읽으셨네.... 그러니까... 음... 섭정님 뜻에 반하는 짓이나, 이 계약에 대한 암시를 던지려 시도한다면... 머리가 빵!!"

어깨가 들썩.

"하고 날아갈 거예요. 항상 생각 조심, 말조심하고 다니셔야 해요?"

저능아같이 말을 더듬으면서도 죽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 대니 외려 더욱 살벌하게 느껴졌다.

5위계의 계약 마법은 계약서 내에서 절대적인 효력을 갖는다.

계약에 빈틈이 없으면 강제 해약을 해야 하는데, 그 해약하는 과정조차도 까다롭고 번거롭다.

'위계는 둘째 문제다.'

카를은 마녀와 계약했다.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제국에서 참수당하는 것은 물론.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던 동생들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

무조건 숨겨야만 한다.

"...."

"에헤헤, 대,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흠칫.

불길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색하게 짓는 저 웃음에는 살의 없는 광기가 보였다.

그래서 더욱 섬뜩했다.

"예, 예 물론입니다!!"

"네, 대답 들었고요. 이제 가시면 돼요. 바이바이~."

카를은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그곳에서 벗어났다.

에키드나는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카를을 향해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밖으로 겨우 빠져나와 한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계약이 빨리 끝났군."

호랑이 굴에 벗어나니 또 다른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호랑이는 카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척살단의 일원이자, 발드로바 공왕령에 충성을 맹세한 개에게 첫 임무를 주도록 하겠네."

카를은 이제 피할 수 없었다.

"임무가 무엇입니까?"

페르다가 대답했다.

"헬루스 포비다스."

물의 현자라 불리우는 남자.

"그자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게."

그놈도 코를 꿸 생각이었다.

32화. 제안을 하나 하도록 하지

이름 없는 시골 마을.

그와 이질적이게 화려한 저택 속에는 한 남자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척살단이 도착했겠군."

헬루스는 기분이 좋았다.

척살단이 어떤 놈들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떨쳐 내는 것보다는 돈을 조금 쥐여 주고 보내는 게 나은 그런 악질적인 족속들.

그런 인맥을 두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년을 돌려받으면... 제국 쪽에 몸을 담그는 편이 낫겠군."

중립을 고수한 것은 어디까지나 정체를 들킬 위험이 있다는 있어서였을 뿐.

그 소녀가 다시 한번 더 납치를 당해 버린다면 낭패다.

'그나저나 페르다 발드로바인가 하는 놈은 그 아이가 뭔지 알고 있는 건가?'

그 소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소녀에게 있어서 규칙은 절대적.

헬루스 포비다스의 말 이외에는 듣지 않도록 했으니, 말귀도 못 알아먹는 천치에 불과했다.

무사히 반환된다면, 그 소녀의 용도를 모른다는 뜻이 된다.

'후우, 잘되겠지.'

위스키를 따고, 크리스털 잔에 따라 부었다.

그 순간, 마차 한 대가 섰다.

그가 슬쩍 커튼을 들추고 바깥을 보았다.

아주 반가운 인물이었다.

'카를 경!'

헬루스는 버선발로 뛰쳐나가 그를 반겼다.

"어서 오게! 카를 경!"

"...."

"허허, 이렇게 늦은 밤에 찾아올 줄이야. 임무는 어떻게 됐나?"

"...."

"이 사람이 왜 말이 없나? 응? 이렇게 왔으니 술이라도 한잔하지, 그래. 그 아이는 어쨌나?"

"타십시오."

"타라고? 어, 응 그러지."

헬루스는 마차에 올라탔다.

푹신한 고급 마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를이 올라타고 문을 닫아 버렸다.

"...출발하십시오."

마차가 움직인다.

헬루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카를 경, 어디로 가고 있는 겐가?"

"...."

"뭐라고 대답해 보게! 지, 지금 이건 납치하고 있는 거 아닌가!"

헬루스는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카를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건가!? 마음대로 하게! 제국에는 영원히 갈 일이 없을 테니, 그렇게 알도록 하게!"

"...하아."

가만히 앉아 있던 카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를이 고개를 들고, 동시에 손도 들었다.

짜악!

군살 박힌 손바닥은 몽둥이와 다를 바 없었다.

"악!"

"시끄러, 이 돼지 새끼야."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카를 경?"

"무슨 짓이긴."

짜악!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당신이 그 데려오라는 그 여자애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거 아냐?"

"꼬마? 그 꼬마는 자네가 좋은 명분으로 쓴다고—."

"알 게 뭐야!"

짜악!

"내가!"

짜악!

"그것 때문에 여기 왔다고, 씨발!"

화풀이에 불과한 폭력이었지만, 헬루스를 얌전하게 만드는 데는 논리가 충분했다.

헬루스는 입안이 헐고, 코피를 줄줄 흘렸다.

"어쨌든 그 꼬맹이 몽타주를 준 덕분에 당신도 빼지 못하는 상황 됐으니깐 얌전히 따라오라고."

카를은 하늘을 향해 한숨을 토해 냈다.

씨발 내가 왜 이런 짓을.

카를은 한탄을 입안에 삼키고 등받이에 몸을 던졌다.

헬루스는 세상 얌전하게 자세를 잡고 끌려갔다.

속에는 의문이 쌓여 갔지만, 헬루스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그가 벗어날 방법 따윈 없다.

그는 현자가 아니니까.

정처 없이 움직인 끝에 마차가 멈춰 섰다.

그의 몸이 짐 덩이처럼 들려지고 어디론가 움직인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한 고성의 알현실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길을 잇고 있으며, 벽에는 붉은 용의 인장이 박힌 배너가 걸려 있었다.

그 배너의 아래에는 새파랗게 어린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헬루스는 오늘 그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이나 그가 뿜어내는 이 오라가 멋대로 입술을 움직였다.

"페, 페르다 발드로바...."

"그건 반말이고."

"그... 발드로바 섭정...님을 뵙습니다."

18세 꼬맹이 섭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듣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를 올려다보는 이 순간은 거인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카를에게도 반항했던 철부지였지만, 페르다에겐 감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옆에는 언젠가 한번 보았던 소녀가 서 있었다.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어린 여종.

그토록 찾아내려 했던 지식의 원천.

'이토록 아름다운 소녀였던가?'

뚱뚱한 여인네에게 맡겼을 때는 전혀 몰랐다.

머리를 정갈하게 빗고 옷까지 차려입으니 영애, 규수가 따로 없다.

"자네가 물의 현자, 맞나?"

"물의 현자는 무슨... 그냥 골방의 늙은이나 다름없는 매직 워커일 뿐입니다."

"멍청한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단 똑똑하군."

그 대답을 들은 페르다가 진심 어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네 하인은 죽었나?"

"...예."

"그래, 누구든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앗아 가면 용서할 수가 없는 법이지. 그런 나도 용서하기 힘들지 않나?"

"용서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죄는 이 어리석은 놈이 지었습니다."

"무슨 죄인가?"

"...."

"죄를 지었다면서 그 죄를 모르는 건 거짓을 고하는 것이지 않나? 나는 빈말을 싫어해."

절대 자신의 입으로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억지로 내뱉는다.

"어린 것을 이용하여 제가 현자인 것처럼 떠들어 댔던 것이 저의 죄입니다."

헬루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니... 부디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정중하게 예를 차리며 굴복한다.

그러나 페르다의 눈에 비쳐지는 것은 무관심이었다.

그가 죽든 살든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자네는 현자 흉내를 내면서 살아왔지만, 그래도 똑똑하지. 그러니 이것도 잘 알 거라 믿네."

페르다가 그의 귀에 대고 물었다.

"자네가 여기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권력을 맛본 자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하는 법이지. 그러니 권력 싸움이 가장 지독하고 더러운 법이야. 자네가 맛본 권력은 얼마 크던가?"

"...."

"마을에서는 존경을 받고, 제국조차도 자네를 원하고 있지. 그걸 놓고 돌아갈 수 있을까?"

"잊, 잊을 수—."

"아니, 이대로 보낸다면, 자네는 권력을 찾기 위해 움직일 거야. 이건 자네가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이라 그런 거니까."

온몸이 떨렸다.

서늘한 날씨인데도 땀이 비 오는 듯했다.

아, 여기서 나는 죽는구나.

"그러니 자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도록 하지."

모든 공포가 사라지고 한 줄기의 빛이 떨어졌다.

헬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현자로 살고 싶지 않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페르다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물건을 바닥에 놓았다.

수정구였다.

"통신 수정구일세. 북부 설산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만년빙의 정수를 담아낸 고급 수정구지. 제국 것보다 뛰어난 재료야. 어쭙잖은 것들은 물론 제국 마법사들도 감히 도청이나 추적은 불가능해."

그가 수정구를 톡톡 치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안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모리의 정신이라네."

"모리라면...?"

"자네가 데리고 있던 이 아가씨의 이름이지."

페르다는 모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소녀는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정말로 자신의 이름이 된 것이었다.

"자네는 이 아이의 지식을 바라지. 그러니 바람대로 현자로 살도록 하게. 밤에는 유흥에 젖고, 낮에는 되지도 않는 지혜를 나눠 줘도 되네."

제안하는 것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삶.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으나 감히 덥석 물 수가 없었다.

달콤한 보상에는 치명적인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

"저는 뭘 드리면 되는 겁니까?"

"자네의 영혼."

모든 것.

"내 개가 되도록 하게."

헬루스는 사람들과 엮이기 싫어했다.

금방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싫은 것이 있었다.

자신의 돈을 잃는 것.

명성을 잃는 것.

그 모든 것을 지탱해 준 것은 권력.

권력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

페르다의 말대로였다.

자신은 이미 누려 왔던 권력을 갈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이미 권력의 개였으며, 그것을 위해선 뭐든지 할 것이다.

설령 악마든 뭐든.

그렇기에 헬루스는 다시 한번 더 고개를 조아렸다.

"당신의 충직한 개가 되겠습니다."

* * *

페르다는 성내 지하실로 내려갔다.

에키드나의 실험실은 성의 바닥에 있었다.

방문을 여니 마녀의 음침함이 음산한 안개처럼 흘러나온다.

다른 게 있다면 마녀 특유의 약초방 같은 냄새와 부글부글 끓는 솥단지가 없고, 잉크 냄새와 돌먼지 냄새만 가득했다.

"어서 오세요, 섭정니임!"

헤실헤실 웃으며 반기는 에키드나.

대형견이 제 주인을 반기듯이 달려온다.

다른 점이 있다면 페르다조차도 흠칫하게 만드는 음침한 오라를 뿜어낸다는 것이다.

"계약은 어떻게 됐나?"

"아, 물론 잘 해결했습니다! 섭정님이 말씀하신 개 목걸이 잘 채웠습니다! 에헤헤 처음에 덩치가 크고 은 갑옷을 입은 개라길래 뭔가 했는데, 설마 기사일 줄 몰랐어요!"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는 에키드나.

실제로 '갑옷을 입은 개를 묶을 목걸이'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진짜 개 목걸이를 가져왔었다.

페르다는 그때부터 에키드나와 이야기할 때 비유하는 것을 그만뒀다.

"계약서는 어디에 있지?"

"여, 여기에 있습니다!"

에키드나가 수납해 놓은 계약서를 꺼내어 페르다에게 보여 주었다.

페르다는 그 내용을 슬쩍 보다가 에키드나에게 물었다.

"이 내용들, 자네는 이해하고 있나?"

"헤헤, 엄청 많이 적혀 있는데 저 이게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용."

머쓱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에키드나.

악질적인 계약 마법을 잘 다루는 것들을 꼽으라면 역시 악마와 마녀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는 법.

애초에 에키드나가 남자 친구를 만들지 못했던 이유가 이런 계약의 교묘한 문구나 빠져나갈 수 없는 절차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려워서 전대미문의 학습형 골렘을 만들었다...라.'

간단한 게 어려워서 힘든 길을 택했는데, 그 길이 정답이었던 유형.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계약 자체를 진행한 건 에키드나였지만, 그 계약의 내용을 쓴 것은 모리가 담당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만상서고.

그 속에는 악마들이 써 놓은 계약서의 사본들도 있었다.

페르다는 그것을 바탕으로 조항을 만들라 지시했고, 모리는 3시간에 걸쳐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진정한 개 목걸이는 완성됐군.'

그렇게 해서 두 마리의 개를 얻었다.

제국에 스며든 개와 생각보다 똑똑하고 멍청한 개.

페르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에키드나의 책상 위에 계약서를 얹었다.

"골렘 제작은 어떻게 되고 있나?"

"그게요. 아직도 좀 멀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녀를 보조하는 골렘을 보니, 아직도 에키드나의 얼굴을 보고 차를 타 주는 수준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뭔가가 눈에 보이는 발전이 있다면, 얼굴의 형태가 허접한 그림에서 점점 바뀌고 있었다는 점.

아직은 제대로 알 수가 없었지만, 그건 틀림없이 제드 스왈로우를 닮아가는 중이리라.

페르다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넌지시 물었다.

"얼굴만 깎는 데 정신이 팔린 것은 아니겠지?"

"어어어! 그그그그럴 리가요! 외형은 언제나 생각이 안 난다~ 싶으면 건드리는 거랍니다?!"

허둥지둥하는 것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페르다는 당장 재촉하진 않았다.

'문장을 룬으로 압축한다는 과정 자체가 힘든 일인데, 그걸 해낼 수 있는 마녀다.'

당장에 성과를 내기에 힘든 일이었으니, 페르다도 딱히 그녀가 느슨해졌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 좀 하지."

"네, 알겠습니다. 근데, 섭정님?"

볼일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중 그녀가 잡았다.

"왜 그러지?"

"그, 3서클에 도달하셨죠? 지금 대충 보이는 기운을 보면 전에 봤던 것보다 더 강해서요."

"맞다."

"그렇다면 혹시 적성 찾기 한번 해 보지 않으실래요?"

에키드나가 책상 위에 놓인 수정석을 들어 보이며 제안했다.

적성 찾기라.

오랜만에 들어 보는 것이었다.

"적성 찾기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찾는 것 말하는 것인가?"

"이제 3서클에 도달하셨으니 마법 진로도 찾을 겸 말이에요오. 마법사들이라면 한 번씩은 하잖아요?"

3서클, 매직 워커.

본격적으로 마법다운 마법이 쏟아지면서 마법을 치환하여 원소를 부리고, 변환하는 과정이 시작된다.

거기서부터 자기 적성을 찾기를 시작하며 페르다도 그 시기쯤에 한번 측정해 보았다.

적성 찾기는 딱 심심풀이에 가까운 것으로 취급받는다.

블루 서클의 소유자인 경우에는 조금 더 적성이 높다 정도로 가볍게 알아 가는 정도에 그친다.

마나 자체의 성질이 균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드 서클의 소유자는 다르다.

감정을 기반으로 한 마나는 그 적성이 거의 모든 것이었다.

"해 보도록 하지."

"앗, 그러면 준비해 드릴게요!"

에키드나가 손가락을 허공에 휘저으며 주문을 읊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온 마나가 공중에서 마법진을 그린다.

그리고 그 마법진이 점차 작아지면서 진하게 빛나더니 일정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룬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간단한 것조차도 한 달이 걸릴 작업인데, 이 여자는 즉석에서 만들어 내었다.

과연 룬 메이커.

에키드나는 그 룬을 수정석에 박아 넣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군."

페르다는 그 수정석을 집었다.

사용법은 알고 있었다.

페르다의 마나가 룬에 반응하면, 룬을 통해 수정 안에서 색깔과 형태를 띨 것이다.

'그때의 나는 어둠과 전기였던가?'

증오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속성.

어둠은 파괴력이 높다.

전기는 속도와 관통력이 높은 마법이다.

그 두 개의 장점을 결합해 버린 페르다의 마법은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지금은 다를 것이다.'

그때의 마음과 지금은 다르다.

그 예로 페르다의 마력은 지금 발드로바를 억제할 수 있지 않던가?

틀림없이 속성 또한 예전과 달라졌을 테니 그 길 또한 달라질 것이다.

페르다는 자신의 마나가 반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나가 룬에 반응하여 수정석 안쪽에서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불을 다루면 넘실거리는 불꽃이 보인다.

물을 다루면 푸른색으로 찰랑거리는 물방울이 생긴다.

페르다의 눈앞에 보인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수정 안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있는 모든 것을 족족 집어삼키는 듯한 빛깔이었다.

페르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어둠....'

그리고 그 속에서 미약하게 튀어 오르는 푸른 스파크.

"어머, 전기도 있으시네요?"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니, 달라졌다고 한다면.

'이토록... 어두웠던가?'

수정석 안쪽은 그때 보았던 것보다 더욱 어둡다는 것이었다.

33화. 마나 운명론

발드로바의 일과는 실로 간단했다.

적이 나온다.

찢는다.

포효한다.

집으로 간다.

공왕이라는 이름보다는 야만 전사에 가까운 행적들.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을 수호하는 데 힘을 써 왔으며, 그 행동에 대해서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 그녀였지만, 최근 들어서 한 가지를 주저하게 되었다.

-크롸—.

바로 포효하기였다.

전투의 고양감과 승리를 선언하는 데 아주 적합한 그 포효성이 최근 들어서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아....

쥐꼬리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발드로바는 해방감을 불완전 연소시키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곳으로 발드로바의 눈동자가 슬쩍 돌아갔다.

그녀의 시선은 외로운 산의 꼭대기를 향했다.

발드로바가 전장에 나설 때면, 언제나 외로운 산 정상에는 페르다가 항상 있었다.

'오늘도... 오지 않았나?'

그러나 그 꼭대기는 평평하게 다져 놓은 자리만 보일 뿐.

언제나처럼 내려다보러 오지 않았다.

발드로바는 그런 페르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가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조급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되어서 자신이 꼴사납게 보이니까.

차라리 그가 보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 차라리 나을지도.'

발드로바는 날개를 펴고 움직여 자신의 레어로 돌아왔다.

극동부의 외로운 산.

그곳을 그녀의 터전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역시 인간에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긴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루리가 그녀를 반겼다.

"고생하셨습니다 주인님."

발드로바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지나쳤다.

가벼운 인사에도 반응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루리는 철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별일은 아니니라.

발드로바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똬리를 틀었다.

"그러지 마시고 소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힘이 되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음....

-페르다는... 짐이 질린 게냐?

"...예?"

루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도 그가 오지 않았더구나.

발드로바는 그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보다 더욱 큰 허전함이 자리를 잡았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하루다.

그런데 뭔가가 큰 것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고작 해 봐야 두 번입니다. 일주일이죠. 발드로바 님이 거친 세월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물론이니라. 짐도 알고 있다.

고작해 봐야 일주일, 고작해 봐야 두 번....

그 고작이라는 단어가 어찌 이리도 무거운 것인가.

"페르다 님은 근래에 들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페르다는 최근 들어서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상인들과 협력하고, 지방 영주들이 안건을 올리는 것을 처리하기도 하니까.

집무실에 한번 들어가면 달이 하늘 위에 높이 뜰 때쯤이야 밖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전에도 계속 나오지 않았더냐?

발드로바의 말대로였다.

얼마나 바쁘든 간에 페르다는 발드로바가 싸운다는 말을 들으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면 언제나 미소를 지어 주었다.

-분명... 짐이 눈길도 주지 않으니 정이 떨어진 것이 틀림없다.

우울함에 머리를 푹 숙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루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싫어진 것이라면, 그렇게 바쁘게 움직일 리가 없다.'

페르다는 발드로바의 아래에 있는 것들을 보살피기 위해 움직였다.

그 원동력은 틀림없이 발드로바에 대한 애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루리.

"예, 주인님."

발드로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들이 한다는 그것 말이다.

"다과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 말이다.

루리는 그녀의 말에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황자 사건 이후로 인간들과 접촉을 피했던 발드로바.

-페르다에게... 다과회를 제안해 줄 수 있겠느냐?

그녀가 자신의 약혼자와 대면하겠다고 크게 한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 * *

페르다는 겹친 세 개의 원을 지닌, 3서클의 마법사가 되었다.

1서클은 점이며,

2서클은 점과 점을 잇는 선을 그리는 것.

그리고 3서클은 선을 다루어 면으로 직조하는 자들.

그 면이 바로 마법진으로 본격적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단계였다.

'매직 라이브러리도 망가졌으니.'

매직 라이브러리는 머리 한 군데를 순수하게 마법과 술식으로만 가득 채우는 기억법.

5서클에 도달해서야 세울 수 있는 것이며, 페르다가 과거로 회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래도 마법은 내 몸속에 있다.'

무의식의 영역 아래에 있는 마법들.

마치 무너져 내린 도서관을 홀로 뒤적거리듯이 무작위로 마법을 그려 보기로 했다.

오른팔에 자신의 마나를 집중시켰다.

3겹으로 겹쳐진 서클만큼 마나의 이동은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마법진 그리기.'

진짜 마법사이며, 동시에 마법사가 아닌 단계.

마법진을 그리기 위한 본격적인 연습을 하게 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계는 구체화.'

페르다는 기억 속에 정형화되어 있는 마법진을 떠올렸다.

보통 이 단계에서는 마법 서적에 그려진 마법진을 보면서 주문과 함께 구체화한다.

숙달하면 할수록 그 구체화 과정은 짧아진다.

그러나 페르다는 이 구체화를 다르게 했다.

목적도 모른 채로 무의식에 의존하여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낚싯대를 호수 안으로 던져 넣듯이, 기다리고 기다린다.

끝내 먹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대물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느껴진다.'

그러면 두 번째로 넘어갔다.

'정형화.'

페르다는 자신의 손 위에 펜대가 춤을 추고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 펜대의 움직임을 따라서 간단한 마법진이 페르다의 손에 생성되었다.

'세 번째 단계 실현화.'

틀이 만들어졌으니, 본격적으로 마나를 주입하는 단계.

완전해진 마법진은 마나의 성질을 결정하면서 빛깔이 변한다.

은은한 푸른색을 띠던 마법진이 화악 하고 빛을 뿜어내었다.

'이 마법은....'

페르다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검지와 중지만을 펼친 채로 벽 한 곳을 가리켰다.

그렇게 마지막 단계.

영창.

"엘레멘탈 볼트."

페르다가 마법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날카로운 전기 소리가 울렸다.

파지직-!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번개 탄환.

마나 샷과 더불어 기본적인 공격 마법인 엘레멘탈 볼트였다.

'위험했군.'

제대로 조준하지 않았더라면 저 움푹 파인 자국은 페르다의 신체 일부가 묻어있었으리라.

'무의식에서 꺼내는 작업이 좋지만은 않군.'

그런데도 페르다는 멈추지 않았다.

무의식에 담겨 있는 마법일수록, 손에 익을수록, 그가 애용하였다는 뜻이니까.

머리를 비우고 안쪽으로 들어가 또 다른 마법을 탐색해 보았다.

'느껴진다.'

페르다는 다시 감각에 몸을 싣고 마법진을 그렸다.

구체화, 정형화, 그리고 실현화까지 넘어갔다.

그러자 은은한 푸른색을 띠던 마법진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속성은 어둠.

즉, 순수 흑마법이다.

그 어둠 속성의 마법 중에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뭐가 있던가?

그 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페르다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마법진을 띄운 손을 촛불 쪽으로 가져갔다.

그 끝에서야 이름이 나왔다.

"쉐도우 핸드."

그 순간, 촛불에서 그늘졌던 그림자 부분이 용암처럼 부글거렸다.

페르다의 그림자가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마치 허물을 벗은 듯이 페르다의 팔에 분리되었다.

마법으로 만든 또 다른 손이었다.

'부작용도 제대로 느껴지는군.'

3위계에서 비슷한 마법으로 매직 핸드라는 기술이 있다.

분리되어서 공중에 뜨는 매직 핸드의 경우에는 덧씌우는 것, 장갑에 가까웠다.

오른손에 연결시킨 후, 그 오른손의 움직임을 모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쉐도우 핸드의 경우에는 덧씌우는 것이 아닌 나는 것이었다.

새로운 손이 아예 생겨나는 것이었다.

'대가가 없는 대신 큰 조건이 있다.'

마나 대비 고성능인 흑마법이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다.

마법을 사용할수록 정신이 오염되는 '대가'.

마법을 사용할 때 정신을 필요로 하는 '조건'.

새로운 손이 생기면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조건이다.

이것이 내 손인가, 아니면 가상의 손인가 하는 혼란을 겪게 된다.

그것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면 쉐도우 핸드를 사용하는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셈.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마법사는 지독한 환상통을 겪게 된다.

페르다에겐 그런 위험성도 의미가 없었다.

쉐도우 핸드의 조건은 이미 숙달한 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완전히 내 팔이라는 느낌은 아직 없군.'

페르다는 그 검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으로 파도를 그리며 유연한 정교한 행동들로 시험해 보았다.

원래 있던 손처럼 자연스럽다.

페르다는 눈을 돌려 선반 쪽을 올려다보았다.

평소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10걸음을 걸어야 할 만한 거리.

페르다는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팔은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상식을 깨부수는 페르다의 상상에 따라 그림자 손이 한계치를 벗어나 쭉 늘어났다.

10걸음을 걸어야 할 거리만큼 뻗어 그대로 선반에 올려진 책을 집고 돌아왔다.

'3위계의 마법이지만, 3위계가 쓰기엔 버거운 마법.'

세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만큼, 많은 상상력과 정신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흑마법의 본질.

고성능이지만, 그 성능에 따른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그 수준에 미치지 않는다면, 미쳐 버리기에 십상인 마법들이다.

'4서클에 도달하면 좀 더 안정적으로 되겠지.'

페르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중얼거렸다.

"다음 단계라...."

페르다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향상심이 필요로 할 때였지만, 지금 그에겐 평소와 같은 자극이 없었다.

'그녀를 완전히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4서클 분량의 마나.'

발드로바의 혈기를 완전히 짓누르기 위해 필요한 양의 마나였다.

그걸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가 턱 막혔다.

맥없이 3서클에 도달해 버린 것도 이유겠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최근에 하게 된 적성 찾기 때문이었다.

'마나 운명론....'

페르다는 돈에 욕심이 많은 스승 밑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중에서는 마법 운명론이라는 게 있었다.

블루 서클보다는 레드 서클의 소유자들에게 와닿는 이론이었다.

그 내용은 다른 시간대의 자신이 다른 목적과 사건으로 각성해도 가지고 있는 속성은 불변한다는 것으로 운명론에서 파생된 이야기였다.

'쓸데없는 논쟁거리였지.'

유토피아의 증명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었다.

괜히 인간관계 정리 주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 본 페르다였기에 그것을 감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가문을 향한 적개심과 세상을 향한 증오심은 없다.'

오직 그녀를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을 했던 페르다였기에 그 속성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어둠과 전기.

페르다가 과거에 썼던 마법 그대로였다.

'처음에 이런 속성이라고 알았을 땐 어땠었지?'

어쨌긴.

기뻐했다.

블루 서클이 제대로 다룰 수 없는 두 개의 속성이 있다.

바로 빛과 어둠이다.

빛은 성직자들에게서 올곧은 마음을 통해 발현한다.

어둠은 페르다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기인하여 발현한다.

어둠 속성에 적성이 맞다는 것은 빛의 마법과 타인을 회복시키는 계통의 마법을 쓸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다른 레드 서클 소유자들에 비해 다른 원소 마법들이 큰 폭으로 저하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엘레멘탈 마스터들에 못지않게 빛을 제외한 모든 원소를 다루었다.

'그러나 지금은....'

좋지 않았다.

발드로바와 얽혀진 지금의 이야기는 달랐다.

페르다가 과거에 활약할 수 있었던 이 축복은 이제 저주처럼 느껴졌다.

'발드로바는 어둠의 위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나는 어둠 속성을 지니었다.'

마나를 주입함으로써 영향을 주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안정이 아닌 페르다가 하는 것은 어둠으로 고통받는 그녀에게 또 다른 어둠의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주는 것이 끝내 파멸로 이어진다면, 그것을 위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녀를 죽였던 마나가 그녀를 다시 또 죽이는 것이라면....'

마나가 변하지 않듯이, 운명 또한 변하지 않는다면.

'이런 내가 그녀의 옆에 있어도 되는가?'

한때 대마법사였으며, 천지를 호령했던 페르다에게도 그것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런 미지의 앞에 섰을 때, 페르다는 언제나 도전했다.

하지만 지금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할 뿐이었다.

마법사의 탐구는 마법으로 직결된다.

페르다의 그 깊은 고민은 무의식 속에서 또 다른 마법을 이끌어 냈다.

느낌이 가는 대로 다시 한번 더 마법을 정형화했다.

그 마법진이 정형화되어서야 겨우 눈치챘다.

'이건 무슨 마법이지?'

단순히 잊어버린 것이 아닌 정말로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수식에 빼곡하게 박혀 있는 룬어들.

그 복잡함만으로 따지면 6위계 마법들에 비견될 수준.

그러나 6위계였다면 정형화에서 망가졌을 것이고, 이렇게 보일 리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 자신의 무의식 속에 꺼낸 마법이다.

쉐도우 핸드, 엘레멘탈 볼트도 전부 무의식에서 꺼냈지만, 뒤늦게라도 이름을 알아냈다.

그런데, 이 마법은 손바닥 위에 둥둥 떠 있는데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이름이 없었던 것처럼.'

뭔지 모르겠다.

페르다는 발현되어 있는 쉐도우 핸드를 이용해 벽장에서 마법 복사 용지를 꺼내었다.

페르다가 유지하고 있는 마법진 위에 그대로 얹었고, 모양과 문양을 복사했다.

그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알려고 노력해 보지만, 그의 지식 안에서도 분석할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노크했다.

-루리입니다.

페르다는 복사 양피지를 말아 한곳으로 몰아 두었다.

"들어와라."

문을 열고 어린 여종이 들어온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근심이 많은 얼굴이시군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

마법진과 자신의 생각을 얼버무렸다.

루리가 굳이 알 필요는 없는 문제라 생각했다.

"다과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점심을 먹던 중, 루리가 그런 질문을 던졌다.

"다과회 말인가? 누구와?"

"주인님 말고 누가 더 있겠습니까?"

평소보다 거칠게 나오는 루리.

"주인님께서 '직접' 주선해 달라는 요청이 와서 이렇게 여쭤보는 겁니다. 원하신다면 오늘 오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약혼자와 다과회인가...."

페르다는 머릿속에 상상이 되었다.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우아하게 차를 드는 모습을.

화사한 분위기 속에서 발드로바가 낀다니.

'무조건 가 보고 싶긴 하군.'

무조건 진행해라.

평소라면 그렇게 대답했을 페르다였으리라.

"좋은 생각이지만, 조금은 시기가 맞지 않을 것 같군."

"...예?"

루리는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페르다는 한 번 더 대답했다.

"굳이 너무 앞서갈 필요 없다는 소리다. 당분간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미루도록 하지."

"...."

페르다는 늘 그렇듯이 차분하게 말했다.

루리가 페르다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을 상대로 밀당하는 겁니까?"

"밀당?"

"주도권을 쟁취하려고 하는 연인 간의 싸움 말입니다. 페르다 님에게 푹 빠지게 만들려는 수작을...."

"그런 게 아니다."

연인에 관해서는 그렇게 고차원적인 발상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럼 무슨 일 있습니까?"

"딱히 없다."

"평소에 만나고 싶다 노래 부르시던 분이 그러시는 거 보면 죽을 때가 아닌가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대답하실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페르다가 평소와 다른 만큼 루리도 집요하게 굴었다.

뒷간까지도 따라올 기세.

그래도 무시를 해 버릴까 싶었지만,

"주인님이 질리신 겁니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페르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주인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최근까지 자기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자기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까 질려서 그런 거 같다면서 말입니다."

질린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페르다도 그녀를 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예전 같지 않았을 뿐.

"질리신 게 아니라면 그에 맞는 대답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루리의 충직한 눈동자가 은색으로 빛이 났다.

페르다는 입안에서만 돌고 있던 말을 꺼내었다.

"...최근에 고민이 많을 뿐이다."

"장님이 와도 알 겁니다. 그게 무슨 고민입니까?"

"내 마나에는 어둠이 깃들어 있다. 그 어둠이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심란해 있었다."

"그렇습니까?"

루리는 장갑을 벗고는 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한번 해 보십시오."

"네게 말이냐?"

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스폰입니다. 새 발의 피 수준이겠지만, 주인님에게 해가 되는 것 정도는 판별할 수 있으니 해 보십시오."

페르다도 더 고민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어린아이의 작은 손.

하지만 그 손은 마냥 보드랍지 않았다.

페르다는 그 손을 향해 자신의 마나를 주입했다.

"어떤가?"

깊게 느끼고 있던 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뭘 느끼라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마력이 흘러들어올 뿐이지 않습니까?"

"딱히 느껴지는 건 없나?"

"없습니다."

페르다가 발산한 마나량은 마나 샷 한 개 분량이었다.

발드로바의 경우에는 이 정도의 양에서도 이미 반응했다.

"조금 더 흘려보내지."

이번에는 5개의 분량이다. 이 정도면 마력 회로에 닿아 뭔가를 느낄 수준의 양이었다.

루리의 표정도 미묘하게 변화가 일어났다.

"이젠 어떤가?"

"말씀대로 뭔가가 느껴지긴 합니다만, 해롭다는 감각은 없습니다. 그저 마나일 뿐이니까요."

루리가 미간을 구기며 어이없다는 듯이 페르다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께서 고작 이 정도로 쓰러질 것이라 고민해서 겁을 먹게 만든 겁니까?"

"...그래."

"사람을 개로 만들고, 손가락도 꺾어 버리면서 주인님에 관해서는 엄청 겁이 많으시군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의 위상,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

그런 그녀지만 페르다의 앞에서는 한 송이의 꽃처럼 연약한 여인일 뿐이다.

그 여자를 해칠 수 있다는 염려는 페르다에겐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다.

"지금 부군이 될 자로서 그런 하찮은 고민 탓에 주인님의 근심을 덜어 드리지 못할망정 근심을 만들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네가 옳다."

"후우...."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고, 루리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둘 사이에 끼이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페르다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어쩌긴.

"그 초대에 응하도록 하마. 약혼자께서 친히 요청했는데 묵살할 수는 없지."

직면하는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루리는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나간 사이, 페르다는 한쪽에 몰아 놓았던 양피지를 슬쩍 보았다.

'당장에 알아봐야 근심이 될 뿐이겠지.'

모리에게 물어 마법진의 종류를 찾을 수도 있다.

룬어에 정통한 에키드나에게 해석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마법진은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그 양피지를 고이 접어 책 한 권 사이에 넣어 버렸다.

자연스레 잊혀지다 문득 책을 꺼내다 튀어나온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잊어버리기로 했다.

* * *

'하여간 쓸데없는 곳에 손이 가는 사람이네.'

긴 복도를 걷던 루리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건방지게 초대를 거절했는데, 그 사유도 하찮다.

'평소는 거침없이 나가는데, 주인님 앞에서는 왜 그러는 거지?'

어떻게든 얻어 내는 사이코가 되지만, 발드로바에 관해서는 바보 겁쟁이가 따로 없었다.

'자기 마나가 발드로바 님을 해친다니....'

루리는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루리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페르다가 잡았던 그 손에는 아직도 그게 남아 있었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묘한 기분이 들지만, 무해한 감각임은 틀림없다.

'굳이 그걸 언급해서 겁먹게 할 수는 없으니....'

루리는 다시 장갑을 끼고 움직였다.

충직한 시종도 눈 감을 새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34화. 다과회

페르다는 귀족이다.

그는 로스노바라는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작위로는 자작이며, 휴스턴 공작의 봉신가였다.

명예로운 기사 가문인 만큼 페르다는 기초 예절을 엄격하게 받아 왔다.

비록 공왕의 약혼자라는 이름으로 가문에서 쫓겨났지만, 아득바득 대마법사가 되면서 대귀족에 못지않은 지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런 페르다였지만, 정작 사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로스노바 가문에서는 사생아라 기회가 없었고, 대마법사일 때는 어울리길 거부했다.

'남이 준비한 것은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

그는 몇 번이나 독살을 당할 뻔한 이후로는 타인이 준비해 준 음식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

설령 독으로는 죽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보단 증오로 굴리다가 버리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페르다의 인생 처음으로 맞이하는 다과회였다.

때는 다과회 1시간 전,

"이곳은 결혼 이후에 페르다 님과 주인님이 갖가지 여가를 즐기실 수 있는 오락실입니다. 이곳에서 다과회를 진행할 것입니다."

루리는 페르다를 먼저 약속 장소에 안내하고 하나씩 알려 주었다.

에스코트를 해야 하는 것이 페르다의 몫이었으니, 최대한 주변을 먼저 인지시켰다.

페르다는 테라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부가 보이는 곳이군."

"어디까지나 오락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해 놓을 방아니까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해가 떠도 우중충한 빛깔인 마의 대지는 자연스럽게 생각이 깊어지는데, 이 장소는 그저 평화롭게만 느껴졌다.

떨어지는 해를 보면서 여유를 느끼기엔 딱 좋은 장소다.

"그리고 다과회는 여기서 진행될 겁니다."

테라스의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놓인 두 개의 의자와 하나의 테이블.

그 위에는 인원수에 맞게 두 개의 찻잔과 보냉 마법이 처리된 티어 트레이와 장식해 놓은 디저트가 놓여 있다.

화려하고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이 과자들은 뭐지?"

"마카롱, 몽블랑, 페이스트리... 뭐 다양한 이름들을 가진 것들입니다. 제국 황실 출신 파티시에들을 선별해서 만들 수 있는 150여 종의 디저트 중 제가 20가지를 선별했습니다."

"그렇군."

꽤나 고생했다 싶으면서 넘어가려다가 페르다는 문득 그녀가 한 말을 곱씹어 버리고 말았다.

직접 선별했다는 것은....

"그 의미는 직접 먹어 보았다는 의미인가?"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150가지를 전부?"

그것을 강조하자, 루리가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군요. 제가 사심이나 채우려고 먹어 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페르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에스콜레이아에서 루리가 꿀 절임을 맛있게 먹고 있던 것을 봤던 페르다였기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루리는 인상을 팍 구겼다.

"실례되는 생각을 하시는군요. 저는 이 다과회를 준비하면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혹여나 놓친 것은 없는지 고심하면서 한 번 더 음미하고 엄선해서 내놓았습니다. 노고도 이런 노고는 없는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디저트를 300개나 먹어 버렸단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 무덤덤한 얼굴.

의심 많은 페르다도 그 철통같은 얼굴에 넘어갔으리라.

결정적인 실수만 범하지 않았더라면.

"입에 설탕 가루가 묻어 있다."

페르다의 말에 루리가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입에서 나온 새하얀 가루.

그것을 슬쩍 보더니 자연스럽게 입에 쏙 집어넣었다.

"독이 있는지 없는지 판별할 필요가 있었을 뿐입니다. 주인님은 허접한 독에 당하지 않지만, 페르다 님은 인간이시니까."

"그렇군."

"안 믿으시는군요. 저를 돼지 취급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돼지일 리가 없지 않나? 네 충성심은 개와도 같은데... 굳이 말하면."

페르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돼지겠구나."

"정말 한 번만 때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약이 바짝 오른 얼굴을 하는 루리.

아픈 걸 좋아하지 않는 페르다로선 그런 소리를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루리가 해를 슬쩍 보더니 한발 물러섰다.

슬슬 약속 시간에 가까워졌다.

"주인님을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사나운 눈빛을 보내는 루리.

"트레이에 손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는 아니니까.

루리가 발드로바를 데려오기 위해 오락실 문밖으로 나섰다.

페르다는 얌전히 발드로바를 기다렸다.

'이게 두 번째 만남이 되겠군.'

페르다의 기억 속에 있는 만남은 온전히 그녀의 얼굴을 본 것뿐이었다.

처음 약혼식 때는 턱을 본 것이 고작이었고, 그녀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때는 페르다는 정신이 없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라.'

문득 드는 감정은 막막함.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나....'

페르다는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평범한 만남이었으면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면 될 터.

지금 이 만남의 이유는 발드로바의 불안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페르다는 그에 대한 해답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이 방면에서 일가견이 있는 사내, 제드 스왈로우를 불렀다.

-그거 말입니까? 그냥 모르는 척하시는 게 좋습니다.

제드 스왈로우.

그는 제비족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여자를 꼬신 남자다.

-굳이 해명할 것 없이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되는 겁니다. 거기서 우울한 소리를 해서 쓸데없이 분위기를 가라앉힐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냥 모르는 척하고 분위기를 띄워 보십시오.

페르다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질린다고 사과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런 다과회에서 그런 우울한 분위기를 원치 않으리라.

'모르는 척하는 게 가장 맞을지도 모르겠군.'

문제를 수면 위로 내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발드로바 공왕께서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

페르다는 마음을 다잡고 그녀를 기다렸다.

-주인님께서 들어가십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루리의 목소리.

동시에 문이 열린다.

페르다는 준비한 인사를 꺼내며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

페르다의 말문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제아무리 페르다라고 해도 그것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색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

한 폭의 그림으로는 담기조차도 모독일 만큼 아름다웠던 그녀의 얼굴.

은 없었다.

'용기사?'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한 명의 용기사였다.

인간의 태생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도록 디자인된 투구와 갑옷.

물론 페르다에게 그 두려움 대신 당혹감이 자리를 잡은 상태.

동시에 그 갑옷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약혼식이었군.'

약혼주를 엎고, 한 소리를 듣다가 나왔을 때 보았던 갑옷이다.

그렇다는 건 저 안에 있는 것은 발드로바가 틀림없다.

왜 저 갑옷을 입고 나온 거지?

페르다는 슬쩍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루리를 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루리는 지그시 바라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제발 묻지 말아 달라는 그런 제스처였다.

생각을 마친 페르다가 다시 정중하게 예를 차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의 왕이시여."

그러자 양손이 다소곳하게 모이고 용 머리 투구가 앞으로 살짝 까닥였다.

행동거지는 막 사교를 데뷔한 어설픈 영애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절그럭절그럭.

그녀가 뻣뻣한 움직임으로 카펫을 밟고 안으로 들어와 페르다의 반대편에 앉았다.

끼이이익—.

의자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상당히 무거운 갑옷임에도, 의자는 부서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페르다는 제드가 했던 조언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이 자리를 먼저 제안해 주셔서 무척이나 기쁩니다."

끄덕.

돌아오는 것은 한 번의 까닥임 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그 침묵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멈췄다.

식은땀이 나고, 호흡도 힘들어졌다.

페르다는 어렵게 다시 입을 열어 대화를 이끌어 가려 했다.

"용의 위상에 걸맞은 갑옷이십니다."

끄덕.

그녀가 다시 한번 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

아예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화두를 던졌다.

발드로바는 손가락으로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좋으셨군요. 다행입니다."

끄덕.

페르다는 죽을 것만 같았다.

한숨을 내쉬어 긴장을 풀고 싶은데, 감히 그럴 수도 없다.

긴장되는 가슴은 끓어오르는데 단단하게 봉한 솥단지처럼 답답하게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루리는 우린 차를 잔에 따르며 철저히 병풍 역할을 수행했다.

바짝 타들어 가는 목에 수분이라도 보충하자.

페르다는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투구에 취수구가 있던가?'

문득 그녀는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녀는 가만히 앉은 채로 바닥에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그 갑옷을 입고도 드실 수는 있으십니까?"

"...."

그녀가 자기 투구를 슥슥 만지다가 입술 쪽을 톡톡 쳤다.

그리고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이 고개를 든다.

마치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벗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리도리!

그녀가 세차게 거절했다.

어떻게든 얼굴을 보여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닌 척하고 대화를 이어 가려던 페르다도 이 어색한 기류가 힘겹기 시작했다.

'다과회를 제안하고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차라리 대화라도 했더라면, 덜 어색했었을 텐데, 대화하는 것조차도 거부하고 있었다.

'역시 화가 난 것이겠지.'

발드로바는 여태까지 페르다가 자신을 질려 한다고 생각하게 했다.

불안하게 만들었던 주제에 너스레나 떨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그녀에게 사과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달그락!

발드로바의 갑옷이 크게 들썩였다.

"제가 감히 공왕께 근심을 들게 했는데, 이런 식으로 너스레나 떨고 있었다니. 한심한 생각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사과부터 해야 했던 것인데...."

-....

"비난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나빴던 것이니,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

"그, 그렇지 않아요!"

페르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투구 속에서 소리가 크게 울렸다.

말투에서부터 갭이 느껴졌지만, 그를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목소리 그 자체였다.

투구 속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묵직한 전사의 목소리였다.

"그게...."

발드로바도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듯 투구 입 쪽을 가렸다.

"그게... 제가, 말 안 하는 건... 제가 화가 난 것도, 페르다 씨가 잘못한 것도 아니에요."

무서운 용기병의 머리가 부끄럽다는 듯이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 그냥 페르다 씨한테 말을 모, 못하겠어서... 대답을 못 한 것일... 뿌뿐이에요...."

"아."

페르다는 그제야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약혼식 때 루리가 말해 줬던 것이었다.

'대인 기피증.'

그녀는 인간이 어렵다.

그래.

그걸 알고 있는데도, 왜 화가 났다고 생각을 했었을까?

자신의 것에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까먹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하시길."

"아니에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이렇게 불러 놓고 입 꾹 다물고 있고...."

"아닙니다, 제가...."

서로 사과를 거듭하기만 하다가 대화가 퍽 하고 끊겼다.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페르다는 감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침묵을 깰 수 있는 마법이라도 있을까 하고 몰래 탐색했다.

"그...."

말문이 트인 발드로바가 힘겹게 대화 주제를 꺼내었다.

"제가 이렇게 갑옷을... 입은 건요."

페르다는 그녀가 말을 마칠 수 있도록 기다렸다.

"루리가... 제 표정이 다 드러난대요."

페르다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이 다 드러난다 하심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표정으로 다 드러난다고 해요. 그래서... 페르다 씨를 보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우물쭈물거리다가 끝내 말을 맺었다.

"그래서 입었어요오오."

끝말이 휘익 하고 새어 버렸고, 발드로바가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포개었다.

"참으로... 바보 같...죠?"

묵직한 전사의 목소리가 가녀리게 떨렸다.

그녀의 행동거지를 보면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이 힘든지.

'참으로....'

감추지 못한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순수하기에 껍데기를 뒤집어쓰든, 묵직한 소리를 내든, 심장으로 느꼈던 본질마저 감출 수 없던 것이다.

'아름답다.'

그렇기에 아름답다.

페르다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떨고 있습니다."

발드로바가 고개를 들어 페르다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을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거짓말."

발드로바가 그렇게 말했다.

"예?"

"그렇다면서 별로 안 떨고 있는걸요... 저는 말도 더듬고 그러는데, 페르다 씨는 멀쩡해 보이잖아요"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억지로 떨지 않는 척하는 거죠."

"그런 건가요?"

그녀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발드로바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털어놓았으니, 이번에는 페르다가 털어놓을 차례였다.

"제가 요 근래 당신을 보지 못한 것은 저도 두렵기 때문이었습니다."

"뭐가 말인가요?"

"제 안에 있는 마나에는 어둠이 깃들어 있습니다."

"어둠...?"

"예. 제 마나에는 어둠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둠이 전하를 해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페르다의 눈동자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

푸른색 눈동자는 사파이어처럼 빛나고 있었다.

"당신을 볼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

대답이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발드로바는 손가락을 꼼지락대고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무언가 고조되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한 행동.

"페르다 씨는...."

그리고 절제하려는 목소리.

"제가 걱정되었던 것이군요?"

"예. 주제넘었지요?"

"아니에요. 그건... 조금 기뻐서...."

그제야 보였다.

그 모든 행동은 가녀린 아녀자 같은 것을.

"그게 기쁘십니까?"

위협적인 투구가 가볍게 까닥였다.

"저 여태까지 루리를 빼고 누군가가 저를 걱정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은 제가 강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실제로도 그렇구요. 그런데... 페르다 씨는 제가 다칠까 봐 두려워하시잖아요? 그래서... 그게 이상하게도 기쁘네요."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그때 페르다 씨가 건네줬던 것은...."

주체할 수 없는 혈기로 고통받고 있던 날,

"제가 느꼈던 것은... 단 한 번도 그런 걸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감각이었어요."

발드로바는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그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몸속을 도는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만약 누군가가 저를 안아 준다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런 것이 저를 나쁘게 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습니까?"

"네."

다시금 꼼지락거리는 손.

배배 꼬이는 다리.

엄숙한 말투와 다르게 소녀 같은 행동이 눈에 너무 띄었다.

"저는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요. 페르다 씨랑 마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해요.... 그 너무 행복해서...."

발드로바의 목소리가 딱 끊어졌다.

"아."

뭔가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을 자각해 버린 것처럼.

"괜찮으십니까?"

"그... 그 죄송한데... 저 이, 일어나도 되, 될까요...?"

"예?"

"그, 그게 저, 이, 이상은, 더, 더, 그, 소, 소리 질러 버릴 것 같아서, 그러면 민폐니까, 죄, 죄...."

부들부들 떨던 발드로바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죄송해요오!"

사과와 함께 그대로 테라스에 몸을 던져 버렸다.

페르다와 루리는 그곳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바닥과 까마득하게 먼 높이.

그러나 그 누구도 발드로바가 다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병풍처럼 서 있기만 하던 루리가 입을 열었다.

"뭐, 이 정도면 다과회는 성공했다고 봐도 되겠군요."

티어 트레이에 있던 디저트를 자신의 입에 쏙 집어넣었다.

페르다는 그녀가 떨어진 자리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

그리고 불현듯이 깨닫는다.

'발드로바는 이토록 소소한 여자였다.'

약혼자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순수한 여인.

그런 여자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무게에 억지로 왕의 행세를 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이 또한 알고 있다.

그 소소함조차도 너무나도 과분하다는 듯이 그녀를 억누르려 든다.

몰려오는 마물들,

제국의 부패,

그녀의 과거,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끊임없이 시험하며 짓눌렀다.

'나는 맹세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바라기만 했던 것을 이루어 주겠노라고.

끝내 발드로바의 이름에는 두려움의 대명사가 아닌 환희의 이름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페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력이었다.

'때로는 과감하게.'

필요하다면 잔혹하게.

발드로바를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더 이상 그를 흔들 수 없었다.

사명감이 연료가 되어 사그라들었던 그의 마음속을 지폈다.

* * *

다음 날, 페르다는 제드를 불러 자신의 계획에 관해서 얘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제드가 이렇게 물었다.

"제정신입니까?"

상당히 무례한 발언이었지만, 놀랍게도 제드가 고심한 끝에 고른 말이었다.

그만큼 페르다의 계획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제국의 창고를 털겠다고요?"

35화. 아르켄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