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 35-40

35화. 아르켄 제국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것은 없다.

그 슬로건을 내세운 아르켄 제국은 고드윈의 죽음 이후에 번영기를 누려 왔다.

초대 황제인 제프리 아르켄 위대한 용사였으며, 전술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몇백 년을 걸쳐서도 무너지지 않는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선언은 실제로 현재까지도 증명하고 있었다.

현 아르켄 제국의 황제인 고드프리 아르켄은 가장 무능하며, 욕심이 많은 왕이었다.

다른 왕국이었다면 3년 안에 쫄딱 망해 버렸을 탐욕이 그윽하고, 변덕스러운 정치를 무려 40년째 이어 가는 중이었다.

그는 여전히 집권하고 있으며, 제국은 아직 건재하다.

가히 황제의 권위는 하늘에서 내려온다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황제의 권위는 창고에서 나온다.'

선대 황제들이 쌓아 올린 재보와 성스러운 유물들이 제국을 지탱하는 중이다.

그 창고를 손댈 수 있다는 것은 그 권위를 나눠 받을 수 있다는 뜻.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귀족은 단 한 명도 없다.

'황금에 눈이 멀었고, 황금에 복종한다.'

제국의 황제가 무능한 만큼 아부 떨며, 잘못된 길을 가는 만큼 치켜세우고 있다.

썩어 가는 속도는 박차를 가할 것이며, 초대 황제의 천년 제국의 기반은 무너지고, 몰락은 가속할 것이다.

"그래서 어디를 털 생각입니까?"

제드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봉인 창고다."

"봉인 창고...."

봉인 창고.

값어치가 비싼 보물과 성스러운 힘을 담은 유물들을 보관해 놓는 보물 창고가 있다면, 봉인 창고는 반대로 악하고 공개되어선 안 되는 것들을 봉인해 둔다.

그리고 그곳에는 악마들이 남기고 간 마법 서적, 그리고 악마 추종자들이 개발한 책과 마법 용품들이 봉인되어 있다.

제드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갔다.

보물 창고를 터는 것도 사지로 들어가는 건데, 봉인 창고라고 하면 불판이 추가되는 것과 다름없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뭘 훔칠 계획이신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안 될 건 없었다.

"대악마의 술서 중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이라는 것이다."

지옥의 일곱 대악마 중에서 그림자와 모략의 악마라고 불리는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

제드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누굽니까, 그게?"

"모르나?"

"그 망할 아몬 추종자들도 가끔 언급은 되는데 바르바토스라는 악마는... 들어 본 적도 없네요."

지옥의 일곱 대악마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잘 들어 보지 못하는 가장 영향력이 낮은 악마였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애초에 다른 악마들처럼 추종자를 거느리는 악마가 아니니까."

그것은 거론되기도 힘들 정도로 허접하다기보다는 의도된 것에 가까웠다.

바르바토스는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는 악마다.

자기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인지도가 낮은 편이 유리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입단 의식이나 엄청난 대가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조건이 어마어마하지만.'

그림자를 다루기 위해서 조건이 모든 대악마가 남기고 간 마법 중에서 가장 까다롭다.

페르다가 사용했던 가장 낮은 위계의 마법인 '쉐도우 핸드'조차도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그래서 바르바토스를 추종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그 마법서를 노리는 사람 또한 적었다.

'그러니까 복병으로 쓰일 수 있다.'

인지도가 낮은 마법인 만큼, 그에 대한 대처를 못 한다는 것이니까.

마법사들은 허를 찌르는 수 싸움이 가장 중요하다.

"그 그림자술이라는 걸 훔친다 치고...."

제드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껄끄러움을 내뱉었다.

"거기까지 어떻게 갑니까?"

페르다는 다리를 꼬며 말했다.

"네가 말해 봐라. 만약 너라면 어떻게 갈 수 있을지 말이다."

"저한테 떠넘기시는 겁니까?"

"네 분야니까."

"전 좀도둑이 아닙니다. 훔친 거라곤 여자의 마음밖에 없죠."

"헛소리 그만하고 말해 봐라."

"흐음...."

제드가 턱을 짚으며 숨소리를 흘렸다.

5분 정도 침묵하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제국의 창고를 도둑질하려는 놈들은 여태까지 많긴 하죠. 그중에서 그나마 반쯤 성공했다고 하는 무리도 10명이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건대, 적어도 20명 정도가 필요하고 1년 정도 작업해야 할 거예요. 그 도둑놈들을 20명 고용하실 겁니까?"

"아니."

20명에 1년이라니.

그럴 여유가 없다.

"그럼 얼마나 걸립니까?"

"당장."

제드는 잠깐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은 겁니까, 하고 되묻기에는 입만 아플 것 같았기에 넘겨 버렸다.

"당장에 시행하고, 뒤탈이 없이 하려면... 그걸 저 혼자 털어야 한단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겠지."

"10명이서 도전했는데도 실패한 곳을 어떻게 제가 합니까?"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진지한 눈으로 대답했다.

"자넨 할 수 있어."

제드는 어처구니가 없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엄살이 심하군.'

제드 스왈로우.

지금은 여자나 홀리고 다니면서 껄떡거리는 제비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대도의 재능이 있다.

그의 업적으로는 그 누구도 뚫지 못했던 제국의 보물 창고를 들어갔다는 점.

'그것도 계획 없이.'

공식적으로 3번인데, 제드의 주장에 따르면 12번이나 이미 들렀다고 한다.

그는 이미 감시 체계의 허점을 알고 있으며, 공략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것도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니.'

지금 당장 대도의 명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지금 당장은 그는 여자에게 치근덕대는 껄떡쇠지, 도둑과는 거리가 머니까.

페르다도 전부 감안하고 계획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판은 어차피 내가 깔 테니까."

"섭정님께서 말입니까?"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지와 중지로 눈을 가리켰다.

"네게 필요한 것은 눈 두 개뿐이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지. 이해했나?"

"...어째 더 불안해집니다."

그렇게 말하니 제드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의 경험상으로는 간단한 준비물을 준비하라는 것만큼 큰 역량을 요구하는 작업은 없었으니까.

'정말 이 인간을 따라도 되는 건가?'

상류층의 데뷔를 도와준다는 것에 홀려서 오긴 했지만, 가면 갈수록 요구 기준치가 높아지는 것만 같았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군."

"안 하게 생겼습니까, 누구는 목숨이 달렸는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제드.

생각이 깊어지니 골이 아파지는 것이리라.

'장고 끝에는 언제나 악수를 두는 법.'

그가 거절하게 된다면,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은 포기해야만 한다.

아니면, 더욱더 복잡해진다.

'그 카드를 꺼내야겠군.'

페르다는 저울질하기 쉽게 만들어 주기로 했다.

"봉인 창고에는 제국이 감추고 싶어 하는 치부가 들어 있다."

"...그렇습니까?"

대꾸하는 것과 다르게 그걸 왜 이야기하냐는 얼굴이었다.

"그중에는 적안족에 관한 이야기도 있을걸세."

"!"

끙끙거리고 있던 제드는 온데간데없다.

그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확실한 겁니까?"

"자네와 계약을 어길 생각은 단 하나도 없다네."

제드는 자신을 따돌리거나 이용만 해 먹으려 든다면 떠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니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까짓것 해 보죠."

모든 것은 페르다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 * *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 페르다는 콘실러스 백작을 찾아갔다.

"섭정님을 뵙습니다. 제국에 가실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네."

"무슨 일로 가시는 건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자네에게 그걸 물어볼 참이었어. 마땅히 갈 일이 없지만 가야 할 일이라서 말이야."

"아아, 그런 느낌이시군요."

콘실러스가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

"테살로스 월처의 빈자리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적임자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있네. 적임자가 있는데, 그 적임자가 나타나질 않는군."

"명을 주신다면, 수소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징을 말해 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찾고 싶진 않았다.

괜히 찾고 있는다는 말에 숨어 버리게 되면 그게 더 곤란하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짧게 말했다.

"보자마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자가 있을 걸세."

"숨이 막힌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구체적으로는 필요 없다네. 자네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것이 느껴질 거야. 그 기사에게 자리를 주면 된다네."

"알겠습니다, 섭정님의 뜻대로 하지요."

방랑 기사들을 모으기는 실패했지만, 여전히 영지의 수호자들은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그가 관심이 있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콘실러스는 다른 궁리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대공의회에 관해서 문의를 드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대공의회 말인가?"

"예. 세르데스의 모든 왕과 공작급 이상의 귀족들은 자격을 갖추고 그곳으로 가는데, 신원을 확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황제 폐하나 그 아래의 혈연들에게 참석 의사가 있다고 하시고 들르는 편이 좋겠지요."

황제나 황자들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족속들이지만, 페르다는 앞으로 그들과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좋네. 그걸 이유로 삼아 가야겠군. 지금 제국의 정세는 어떤가?"

"개판이 따로 없습니다."

콘실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삼파전 구도로 세력을 만드는 중이지요."

"삼파전의 중심인물은?"

"제국 황제와 황자, 그리고 2황자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황제가 제 아들과 싸우고 있다는 말인가?"

콘실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는 걸 알지만 그렇습니다. 한때는 황자와 2황자가 황제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정치를 펼쳤었지요."

"그런데 실패했겠군."

"예. 황제가 무능하다고 하지만, 자기 권력에 관해서는 칼같습니다. 황자와 2황자 간에 있는 계승권 문제로 싸움을 붙여 버려서 무마해 버렸지요."

기존에 있던 적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면서 새로운 적을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갈등만 빚어낸다면, 힘은 점차 약해지고 그 본질을 잃어버릴 것이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오랫동안 해 처먹은 데엔 이유가 있다.

"표면상으로는 일단 삼파전이라는 뜻이로군."

"표면상... 예, 표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

페르다가 어째서 표면상이라는 단어를 썼는지 의아했지만, 파고들지는 않았다.

페르다는 그 세 인물에 관해서 생각하다가 콘실러스에게 물었다.

"자네라면 그 세 명 중에서 어디에 붙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가?"

"저로 말씀을 드리자면 2황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이유는?"

"2황자는 언제나 국방력을 중시하고, 실제로 많은 곳으로 가서 몬스터들을 격퇴하고 제국의 영역을 확보하는 중입니다. 마물 퇴치에 관해서도 관심이 있으니, 초대 황제에 비견될 만큼 뛰어납니다."

콘실러스가 말하는 대로였다.

실제로 2황자의 주축은 황자가 섭외하지 못한 군벌들이었다.

부족한 세력은 무용담으로 채우려는 생각이다.

"물론 그도 정답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국방력에 신경을 썼더라면, 이 극동부에 손을 내밀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겠지."

그의 의견까지 들은 페르다는 결정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황제, 1황자, 2황자에게 세 통의 편지를 써 보도록 하지."

"제가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제국은 아직까지 섭정보다는 콘실러스 백작이 더 영향력이 더 있다고 믿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페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발드로바 섭정의 이름으로 보내도록 하지."

"뜻이 그러시다면...."

페르다가 세 통의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그들의 뜻이 궁금해서였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며, 절실한 사람이 손을 뻗는 법.

페르다는 그들 중에서 누가 자신에게 손을 뻗을 것인지 궁금했다.

콘실러스 백작이 물러선 것도 그와 똑같은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콘실러스 백작에게 부탁할 것은 따로 있네."

"말씀만 하십시오."

"무연고 시체가 혹시 있나?"

이름도,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시체.

"무연고 시체라면... 예, 있을 겁니다. 최근에 한 구의 시체를 영지 인근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타이밍도 좋군.

"잘됐군. 그자를 화형 해 버리게."

"화형...말입니까?"

콘실러스는 눈을 끔뻑였다.

화장도 아니고, 화형이라니.

콘실러스가 차마 마음에 담아 두지 못해 그에게 물었다.

"혹시나 묻는 말이지만... 그것은 이 극동부를 위한 일이겠지요?"

"물론이다. 적어도 내 사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최대한 빌어먹을 놈인 것처럼 태워 버리게. 그러면 충분하니까."

"허허, 신이 노하시겠습니다."

콘실러스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제국 국교인 알테의 신자들이 지니는 애뮬릿이었다.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나?"

"그렇지요."

아무 죄 없는 시체를 훼손한다는 게 껄끄럽지만, 콘실러스는 군말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이 극동부의 영지가 번영하기를 바라기 위해선 페르다를 믿을 필요가 있으니까.

* * *

페르다는 석 장의 편지를 제국에 보낸 후, 마차에 올라탔다.

당장 답신을 받기에는 당연히 무리였고, 페르다는 답신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게 편지를 보내는 핵심이었다.

'일방적인 소통에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가 중요할 뿐.'

동행하는 사람은 제드, 그리고 콘실러스 백작의 밑에 있는 기사 아르웬과 그 휘하 병사들과 함께했다.

일주일 꼬박 움직인 끝에 그들은 마침내 평원에 놓여 있는 거대한 성벽을 발견했다.

'아르켄 제국.'

초목과 잘 가꾸어진 밭이 어우러진 제도의 풍경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창밖을 내다보던 제드가 흥분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국은 볼 때마다 멋있습니다. 오는 맛이 있어요."

"그렇군."

모든 귀족과 백성들이 제국 수도를 원한다.

로스노바 가문 또한 그 중앙 귀족들이 되고 싶었던 가문이기도 했다.

정작 페르다는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저 안이야말로 인간 껍질을 뒤집어쓴 몬스터들의 소굴이오, 진정한 지옥의 시작인데 무엇 하러 들어가려 한단 말인가?

그렇게 위대한 성문의 앞에 도달했다.

페르다는 자신의 신분을 초병에게 알려 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초병이 확인을 위해 위병소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 통과하라는 지시가 없다.

"저희 시작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요?"

제드가 슬쩍 불길한 말을 던졌지만, 페르다에겐 그렇지 않았다.

"이건 청신호다."

"청신호?"

"귀족을 기다리게 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지."

잠시 후, 백색의 고급스러운 마차가 성문 안쪽에 섰다.

마차를 갈아탈 일이 생겼다는 것은 제국의 궁전으로 들어갈 일이 생겼다는 것.

그 말은 즉, 자신의 편지에 화답했다는 의미이다.

선두에 선 기사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섭정이시여! 저는 황실 소속 제5기사단장, 마르코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군."

"이쪽으로...!"

페르다는 그의 안내를 받아 마차를 갈아탔다.

타고 있던 제드도 갈아타려 하자, 마르코가 막아 세웠다.

"죄송합니다만, 귀공은 누구십니까?"

"고용인입니다만?"

마르코의 얼굴이 싸늘하게 일그러졌다.

"고용인은 마차에 탈 수 없소. 황궁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초대받은 자뿐이오."

"어, 그렇습니까?"

"물러서시오. 이 마차는 황궁으로 가는 곳이니."

제드는 머쓱하다는 얼굴로 마차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길을 따라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페르다 혼자뿐이었다.

'사치스럽기 짝이 없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하던가.

페르다의 마차도 화려하게 꾸몄지만, 황실 전용 마차는 차원이 다른 안락감이 느껴졌다.

페르다는 슬쩍 시선을 돌려 창 너머에 비치는 풍경을 보았다.

제국의 대로답게 깨끗하며 웃음이 넘치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모든 귀족이 꿈을 꾸는 장소답게 희망이 가득 찬 모습이었다.

제도로 들어서는 귀족들이 수도에서 벗어나는 순간 열병을 앓는다는 이유가 있다.

행복이 있다면, 그만한 불행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불행은 지금 페르다를 노리고 있었다.

페르다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예사롭지 않은 눈길을 포착했다.

골목길에 몸을 숨긴 남자가 마차를 흘끗흘끗 보고 있었다.

'이 마차를 노리고 있다.'

주변을 경계하는 병사들은 그 사내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

초기 제압이 분명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습격 전에 제압하는 건... 가능하겠군.'

제 몸을 지키는 것은 오직 자신뿐.

페르다는 반사적으로 마나 구체를 생성했다.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은밀하게 반격할 준비를 마쳤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 사내가 튀어나와 마차를 가로막았다.

히히힝!

말들이 크게 놀라며 멈춰 섰다.

36화. 악마 추종자

마차를 멈춰 세운 사내가 페르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감춰 놓았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페르다의 손에 감긴 마나 구체를 사출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마나 구체가 날아가려던 찰나, 페르다는 멈췄다.

그가 품은 것은 무기가 아닌 천 조각이었다.

"황제는 신민들의 믿음을 저버렸다!"

마차를 기습한 것은 시위를 위해서였다.

"신민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제 배를 채우며 무능한 정치를 이어 가고 있다! 우리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저들은 빛의 아들이 아니다!"

사내의 행동은 의도대로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기사단장 마르코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나! 얼른 제압해!"

"예!"

무기를 들고 있던 병사들이 마차에 올라탄 시위꾼을 끌어 내리고, 몽둥이찜질을 시작했다.

"악! 악! 신민들이여! 일어나라!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이 자식이! 닥치지 못해!?"

매타작을 맞고, 연행돼 가는 사내.

피를 줄줄 흘리면서 대로에서 벗어났다.

제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외면하며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어이쿠, 하하! 이거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기사단장 마르코가 사과했다.

웃으면서 이 상황을 무마시키려는 기사.

페르다는 그 웃음에 어울리기보다 연행되어 가는 남자에 시선을 두었다.

"저 사내는 뭔가? 억울해 보이더군."

"억울해 보인다니요. 저런 모습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저들은 악마 추종자들입니다."

"악마 추종자?"

"예."

마르코가 진지하게 말했다.

"요즘 황금기에 접어들면서 악마들이 득세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되지도 않는 선동으로 황제 폐하에 대한 음해를 서슴지 않는 중이지요."

마르코가 그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페르다도 알고 있고, 마르코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저 남자는 악마 추종자가 아니다.'

그는 적어도 사흘은 제대로 먹지 못해 보였다.

쫄쫄 굶고 있고,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 죽기 살기로 나와서 만행을 부르짖은 것일 뿐이리라.

페르다는 여타 다른 귀족들과 다를 게 없는 반응을 보이기로 했다.

"그렇군."

몰랐다는 듯이 놀라는 것도, 이해했다는 듯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페르다는 그저 관심이 없다는 듯한 제스처를 보냈다.

그래야지 이들은 안심하게 된다.

기습 시위가 무산되고 마차는 다시 굴러갔다.

페르다는 번영을 누리는 수도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제국이 필요한 것인가?'

페르다는 실제로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멸망하든, 계속 썩어 들어가든, 혁명을 일으키든.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발드로바는 다르다.

그 여인은 누구던가.

그 누구보다 거친 바닥을 거치며 세르데스 대륙을 수호해 온 육신을 지녔지만, 정신은 온실에서 자란 화초와도 같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순수한 여인이다.

그녀의 시선에서 제국의 행동은 악이며, 용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마물들을 막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니까.

그리고 이토록 머리가 복잡한 일을 시키는 것은 학대나 마찬가지다.

'안의 일은 내가 해야 할 일.'

페르다는 발드로바를 위해 결정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세 장의 편지를 썼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쓰레기인 놈들이며, 거기서 우위를 따져서 차악을 선택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차라리 주사위를 굴리는 게 낫다.'

페르다는 그 주사위를 세 통의 편지로 대신했다.

먼저 손을 내미는 놈에게 간다.

그것뿐이었다.

마차가 황궁으로 들어서고, 페르다는 마차에서 내렸다.

화강석으로 만든 커다란 기둥 으리으리한 궁전의 풍경.

신이 사는 장소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커다랗다.

황실 근위대가 손님을 반기기 위해 정렬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페르다를 반기러 온 위대한 피를 이어받은 자가 서 있었다.

페르다는 그 인물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 버렸다.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런 부정의 문구가 애써 침입해 오는 현실을 막아 보려 했다.

'일부러 뽑지도 않은... 자가 나온다라....'

그도 그럴 것이 페르다를 마중하러 나온 사람은 황제가 아니었다.

1황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2황자도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발드로바 섭정."

일부러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은 아르켄 제국의 황녀.

"올리비아 아르켄이라 하옵니다."

올리비아 아르켄이었다.

"제국의 황녀님을 뵙습니다."

반사적으로 예를 차리는 페르다.

고개를 숙인 페르다는 여전히 거대한 손아귀에 흔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운명.'

모든 마나는 운명에 따라 정해진다는 마나 운명론.

페르다는 요즘 들어서 그 운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렇기에 지금은 이렇게 생각했다.

운명이라는 것은 정말로 정해진 것이 아닐까?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은 황녀가 그에 답한다는 것이 말이다.

'역시....'

의심은 확신으로 기울었다.

'제국은 몰락해야 하는 운명인가 보군.'

* * *

올리비아 아르켄.

제국의 황금 장미라 불리는 이 여자는 실로 아름답다.

금발 머리에 푸른색 눈동자.

어머니를 닮아 큰 가슴에 잘록한 허리는 남심을 사로잡으며,

순진무구한 눈빛과 행동은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외모에서 주체할 수 없이 매력을 뿜어내는 이 여자는 지위를 내려놓아도 참으로 탐이 나게 만드는 여성이었다.

무릇 남자라면 올리비아 아르켄에게 대접받아 보는 것이 소원이리라.

"무엇을 준비해 드려야 할지 몰라서 제가 좋아하는 홍차를 드리겠습니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올리비아가 찻잔을 권하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황제 폐하와 오라버니들께선 공무로 바쁘기에 제가 직접 나왔는데, 혹시 기분 나쁘거나 하시진 않으셨을까요?"

고개를 슬쩍 떨구며 푸른 눈동자로 올려다본다.

애처로운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공무로 바쁜 게 아니다.

페르다가 쓴 편지가 하찮은 것이라는 듯이 버린 것일 뿐이고, 황녀는 그것을 덥석 물어 버린 것일 뿐.

"아닙니다. 세르데스 대륙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는 올리비아 아르켄을 접견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뿐이네요. 부족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올리비아가 빙긋 웃으며 서로 힘내자는 듯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대공의회에 참석하고 싶으시다고 말씀을 하셨더군요? 혹시 어딘지 아시나요?"

"예. 화이트 드래곤, 블랑카로스의 절대 구역, 통칭 화이트 하우스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질서와 창의 주인인 화이트 드래곤, 블랑카로스가 만들어 낸 절대적인 중립 지대.

전쟁을 중재하거나 대륙을 아우르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는 곳이다.

'한때는 내 이름도 입방아에 오르긴 했지.'

국가나 단체의 문제에 집중하는 장소에 한 인물에 대해서 논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페르다가 그곳에 입방아가 오른 것이다.

대공의회에서 찍혔더라면 틀림없이 페르다는 공적으로 지정되고 집중적인 포화를 당했을 것이다.

시련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페르다조차도 거기서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다는 거기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아르켄 황제.'

황제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무능한 듯하지만, 자신의 권력과 연관이 되면 귀신같이 머리를 쓰는 인간이었다.

황제는 페르다에게 붙었고, 그 대가로 페르다는 황제의 집권에 심지를 굳혀 주었다.

"대공의회는 공작급 이상의 관료들 참석이 가능하죠. 페르다 씨의 배우자, 발드로바 님께서는 공왕이시고, 무려 레드 드래곤이시니 페르다 씨는 그 대리인으로 참여할 수 있으십니다!"

"대리인으로 참석하면 좋은 눈으로 보는 사람이 없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슬쩍 자신이 없는 척 떠보는 페르다.

올리비아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무려 극동부의 수호자이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의견을 피력할 자격은 충분하답니다."

역시 올리비아다.

당장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말은 잘도 한다.

조금만 생각해도 페르다가 기분 나빠할 만한 일인데도, 감히 화를 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그런 마성이 있는 여자다.

"그리고 어차피 드래곤들은 대리인을 세워서 오는 게 기본적입니다."

"대리인이면... 스폰이겠군요."

"스폰도 있고, 그냥 인간인 분들도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는 모르기에 페르다는 그녀에게 물었다.

"대리인으로 내세워서 오는 드래곤들은 누구입니까?"

"흐음... 글쎄요. 워낙 유동적이라서요. 용들이 아시다시피 한 치 앞을 모르는 자들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다가 돌연 자기 입을 손으로 감추며 깜짝 놀랐다.

"어머, 이거 제가 험담을 해 버렸네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괜찮습니다. 얘기하십시오."

"어, 음, 그러니까... 일단 고정적으로 참석하는 분들은 실버윈드 님와 오로사그라도 님, 이오르가 님, 스토레우스 님 정도예요."

강철과 바람의 주인, 실버 드래곤

신앙과 빛의 주인, 골드 드래곤

마법과 물의 주인, 블루 드래곤

폭풍과 번개의 주인, 그레이 드래곤

'스폰이 아닌 인간을 세운다는 건 골드 드래곤, 오로사그라도겠군.'

오로사그라도는 중서부 쪽에 자신의 성국을 지은 드래곤이며, 자신이 곧 신앙인 자다.

누구든 자신을 믿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는 스폰을 만들지 않았다.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올리비아의 눈썹이 요염하게 파도쳤다.

"공왕님의 부군께서 참석하신다니 저희 제국에는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아직은 섭정일 뿐입니다. 그만한 지위는 없습니다."

"공왕 전하와 결혼하시게 되면, 페르다 님께서도 그 지위를 얻으시지 않나요?"

"결혼해도 섭정은 여전할 겁니다."

"어머 왜요?"

올리비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반짝였다.

"저는 권력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순수히 저희 공왕령을 살피기 위해서 자리에 선 것이죠."

"아아, 그렇군요. 음, 음...."

찰나의 순간, 올리비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곧 착각이라는 듯 다시 둥실둥실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엄청난 애처가시네요. 저도 페르다 님 같은 배필과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올리비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황제 폐하, 저희 아버님은 말이시죠. 제가 결혼하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 같단 말이에요. 다들 혼사가 정해질 때인데, 저는 아직도 혼자.... 너무 슬프답니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우는 시늉을 하면서 그윽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올리비아.

그녀의 몸짓이 어쩌면 당신 같은 남자에게도 갈 수 있다는 뉘앙스였다.

물론 페르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짓이었다.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인연이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오는 법이니 말입니다."

"후훗,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대공의회에 대해서도 들었겠다, 페르다는 진짜 목적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오늘 오다 보니, 제국에서 악마 추종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습격했더군요."

"어머, 그런가요? 무서워라...."

바들바들 떠는 올리비아.

"안 그래도 요즘 들어서 아주 흉흉하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몰래 하녀들과 간식거리를 사 먹으러 드나들었는데, 악마들이 득세하고 있다면서 경비를 삼엄하게 하기 시작했어요."

"확실히 시국이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위대하신 빛인 알테의 가호를 받는 몸이지요! 그 빛이 황제를 굽어살피는 동안 제국을 위협하는 것은 없습니다."

머릿속에 꽃밭이 든 여인네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순분자들은 마물들과 같습니다. 제때 처리해 놓지 않으면 대지를 오염시키고, 못 쓰는 땅으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죠."

"으음.... 그건 인정합니다. 저희 신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악마 추종자들은 근절될 필요가 있어요."

올리비아가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페르다는 여기서 그녀에게 제안했다.

계획의 초석을 깔 시간이다.

"그러니 이참에 그 악마 추종자들을 처리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 아지트를 찾으려고 방방곡곡 뒤져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국의 병사들이 무능하다기보단 제국이 쓸데없이 넓은 게 크다.

국소적으로 한꺼번에 급습하지 않는 이상 세력을 진압하는 것은 힘이 든 곳이다.

그러니 페르다는 그에 대한 준비를 해 왔다.

"최근 저희 영지에서도 악마 추종자가 있습니다. 그자의 소지품에서 이런 것이 나왔더군요."

페르다는 천으로 감싼 종이를 꺼내어 테이블에 얹었다.

그 종이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었다.

올리비아가 그것을 서슴없이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이건... 대체 뭐죠?"

"악마어입니다."

"꺄악!"

올리비아는 화들짝 놀라며 그 종이를 놓쳐 버렸다.

마치 불결하다는 듯이 향수 바른 손수건으로 자기 손을 닦았다.

"어째서 악마어가... 이것들은 정말로 악마 추종자들이나 쓸 수 있는 거잖아요?"

"예. 저희 성의 서기관에게 보여 주니, 악마어라고 했습니다. 자세한 해독은 마법 조사관에게 맡겨야 할 일입니다."

올리비아가 그 악마어가 적힌 종이를 내려다보더니 무언가 고뇌하는 얼굴을 했다.

조금 전까지 보여 줬던 순진무구함은 온데간데없다.

바보짓을 하면서 내숭이나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끝에 올리비아는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뒤에서 병풍처럼 서 있던 집사가 고개를 숙인다.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 마법 조사관을 불러오도록 하세요. 급한 일입니다."

* * *

악마는 세르데스 대륙에서 금지된 존재이며, 예외는 없다.

그래서 악마어를 접하면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제국 내에서는 이단과 악마술에 관해서 조사하는 마법 조사관과 모든 정보를 기록 보관하며, 연구하는 선임 학자들뿐이다.

마법 조사관, 유렌이라고 소개한 이 남자는 페르다가 건네준 종이를 보고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확실히 악마어가 맞습니다."

"어머머...."

올리비아가 신음을 흘렸다.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과 반대로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도 아시나요?"

"예. 이건 위치를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곳이...."

유렌이 지도를 아공간 수납장에서 꺼내 펼치며 한 곳을 지목했다.

"정확히 제국 수도의 지하 수도 안쪽을 의미합니다."

37화. 파리 같은 목숨

마법 조사관, 유렌의 눈이 페르다에게 돌아갔다.

눈동자 안에는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섭정님께 죄송합니다만, 이것을 어디서 얻으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페르다는 대답했다.

"콘실러스 백작의 영지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방인이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숨겨서 경비원이 잡았다던 모양이더군."

"그 이단 분자는...."

"고문하기도 전에 혀를 깨물고 죽었다고 하네. 사후 발동되는 마법이 있을까 봐 그대로 화형에 처했고."

무연고 시체를 태운 것은 이를 위함이었다.

"잘하셨습니다. 더러운 흑마법사 무리는 죽어서도 곱게 죽지 않지요."

조사관이 혀를 쯧 하고 찼다.

악마 추종자들을 더 조사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처는 완벽했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의 악마어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제국 안에는 생각보다 위험한 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각한 일인가요?"

올리비아가 물었고, 유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글자의 이해도만 봐서는 최소 5서클에 도달한 흑마법사가 틀림없습니다."

"5서클이면 어느 정도죠?"

"제가 5서클의 마스터 메이지입니다만, 흑마법사의 5서클은 6서클인 아크메이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지옥의 마나를 끌어와 자신의 힘으로 쓸 수 있을 테니까요."

"6서클! 대마법사장과 맞먹는 수준이란 말씀이시군요...!"

실제로 대륙에 이름을 떨쳤던, 그리고 지금 떨치고 있는 흑마법사들은 실제로 5서클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많은 대가를 치르고, 6서클을 넘어서는 힘을 얻어 내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내가 얻을 그림자술서도 그렇고.'

혹여나 속내를 들키지 않을까, 페르다는 그 생각을 재빠르게 집어넣었다.

"속전속결로 움직이지 못하면 제국이 크게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런...!"

올리비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질겁했다.

"그 정도의 흑마법사라면... 제국에 들어오는 것도 힘들 텐데, 어떻게 이 제국 안에 있는 것이 가능한 거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경비 체제가 좋다고는 해도 완벽하진 않으니...."

마법 조사관도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계속해서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추종자라면 진즉에 걸렀을 텐데 말이지요...."

제국의 감시는 언제나 큰 위협을 최우선으로 막아 내는 것을 위주로 한다.

자잘한 것들은 막지 못해도 5서클의 흑마법사가 안으로 들어왔더라면, 틀림없이 긴급 경보가 울렸을 것이다.

그는 무엇 때문이다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한 마법사가 제국 수도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만한 악마어를 구사하는 추종자라면 수도에 있는 것보다 마을로 위장해서 살아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종이에 써진 악마어의 출처는 어디냐?

다름 아닌 모리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만상서고가 들어 있으며, 그중에는 악마어 사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페르다가 시킨 대로 번역해서 적었을 뿐이었다.

'위조된 증거품이긴 하지만....'

악마어는 진짜이며, 그 내용도 진짜이다.

흑마법사들은 실제로 하수도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국에서 테러를 준비하고 있는 것도 확실했다.

* * *

제국의 지하 수도는 넓다.

초대 황제가 위대한 인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외관을 만들기 위해 신경을 쓴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지하 수도였다.

도시의 외관보다 더욱 복잡한 것이 지하였다.

그러나 공사라는 것은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은 법이다.

'예를 들면 홍수를 대비한 지하 저수지 같은 것들.'

그러나 막상 돈이 많이 들고, 홍수가 날 만한 기후가 아니다 보니, 공사를 멈추는 그런 것들.

그런 곳은 파낸 땅을 메우기보다는 벽을 쌓아서 방치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국의 지하 수도 안에는 그런 공간들이 많이 있었다.

페르다가 알고 있는 장소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제국의 지도에서 서서히 잊히게 되는 그런 장소.

그리고 음지로 쫓겨난 쥐새끼들이 새로운 거처를 찾으면서 발견되는 그런 장소.

'수도를 테러하기 위해 모이는 반동분자들의 집결지.'

양지로 드러나는 것들을 치는 일은 아주 잦았지만, 오늘처럼 직접 지하 수도로 들어가 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곳에 기사단과 마법 부대가 에워싸며 기습을 준비했다.

모든 것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져야 한다.

까딱하면 사상자가 생길 수 있으며, 사상자가 생기는 순간 흑마법사들에겐 진흙탕 싸움이 된다.

마법 부대는 침묵 마법과 집중 방해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고, 기사들은 방해받은 마법사들을 모두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벽을 만지며 이동하던 작업부가 돌연 멈춰 서고 포인트를 가리켰다.

"여깁니다. 이쪽 벽 너머에 돌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좋아, 물러서라. 하워드."

"옙!"

전쟁 망치를 든 거구의 기사가 벽 앞에 섰다.

플레이트아머와 체인 메일 너머로 울긋불긋한 근육이 느껴진다.

그가 전쟁 망치를 크게 휘둘렀다.

"흡!"

쿠웅-!!

일격에 벽이 단번에 무너져 내린다.

"꺄악!"

"어, 어 뭐야!?"

"뭔데? 무슨 일인데?"

안쪽에서 당황하는 음성이 혼란을 빚고 있었다.

그 혼란에는 또 다른 혼란을 줘야 하는 법.

"빛의 이름으로!"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황제 폐하 만세!"

"빛이여!"

기사들의 함성과 함께 안으로 돌입한다.

그 이후에 들려오는 것은 비명이었다.

"끄아아악!"

"꺄아아악!"

남녀를 가리지 않는 비명.

펑펑펑!

그리고 울리는 폭발음.

쇠가 부딪히고 무언가가 찢겨 나가는 소리가 울린다.

페르다는 모든 것을 바깥에서 지켜보며 기다렸다.

격렬하게 뒤엉키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페르다는 누가 이겼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임 돌격대장이 먼저 밖으로 나와 마법 수사관인 유렌과 기사단장에게 보고했다.

"충성! 기사단 이상 무! 저항하는 45명을 단죄하였으며, 12명을 포박하였습니다."

"도주자는?"

"1명 있습니다! 단상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선 주동자인 듯합니다."

"멍청한 것들! 가장 놓치면 안 될 것을 놓치면 어쩌잔 거냐!? 상대는 5서클일 수도 있는 마법사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소지품들은 전부 챙기지 못하고 도주해도 오래 못 갈 것 같습니다!"

"뭐 됐다. 소지품은 무엇이 있던가?"

"안쪽에 두었습니다."

귀중한 욕심을 부리는 기사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래도 흑마법사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진 않았다.

귀중하다 해도 저주가 들러붙어 있기라도 한다면, 자기 목이 떨어질 것이다.

"그래? 그러면 됐지."

마법 조사관이 다행이라는 듯이 빙긋 웃는다.

"잘됐군."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했던 페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들어가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명색의 섭정에 신고자였으니, 귀중한 대접을 받아도 마땅하다.

유렌은 앞길을 터 주었고, 페르다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들의 살육 현장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페르다는 그들의 모습을 하나씩 눈에 남았다.

'흑마법사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그냥 빈민들이군.'

해진 천으로 만든 천막, 원형을 잃어 가는 냄비와 스푼.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해 흑마법사들의 편에 선 이들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밥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이유가 있지만 말이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을 찾은 사람만큼이나 값진 영혼은 없다.

이들은 전부 제물이 될 운명이었으리라.

페르다는 그렇게 시체를 넘어서 주동자의 방으로 향했다.

이 지하 저수지 속의 리더답게 비교적 잘 꾸며져 있었으며, 마법 용품들도 놓여 있었다.

"여기 불온서적이 있군요."

유렌이 책상 위에 올려진 책을 보며 말했다.

인간의 머리 가죽으로 만든 표지는 마치 책 속에 갇혀서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표지를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가미긴의 강령술이로군.'

불사와 군단의 악마, 가미긴.

그가 마법으로 만든 네크로맨서들의 물건이다.

실제로 이 책을 지니고 있었던 주동자는 5서클에 도달하여 본격적으로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실패한다.'

페르다는 그들이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킬 때, 하수도에 시체들을 쌓아 놓고 그대로 폭발시키고 혼란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죽고, 죽은 만큼 불사자의 군단을 양성하며 도시 내부를 휘젓는다.

무너져야 하는 제국에 혼란을 빚을 재목이었지만, 페르다는 그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무엇보다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폭발을 통해서 시체들을 생성하는 것까진 좋지만, 그들의 전략은 너무나도 안일하다.

첫 번째로는 기사들의 저력을 너무 저평가했다는 것.

두 번째는 대중들을 향한 테러라는 점이었다.

그로 인해 악마 숭배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짙어지고 혼란보다는 결속이 더욱 강해진다.

즉, 결속력을 부수기 위해서 내리찍은 망치질이 외려 단단하게 만든 셈.

'그러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제국을 약화하지 못하면 아무 쓸모도 없다.

그러니 화근을 미리 제거해 두는 것이었다.

"충성! 포박한 악마 추종자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부 굶주리고, 의기가 꺾여 있었다.

그들은 전부 자비를 바라는 눈으로 유렌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유렌은 그들을 혐오하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머지는 전부 연행하도록 해라. 황궁 형무소로 신줏단지를 모시듯이 데려가야 한다. 폐하의 빛을 거부하고, 흑마법에 취하는 자들의 말로를 똑똑히 보여 줘야 하니 말이다!"

"충성!"

관용 없는 처분.

빈민들이 화들짝 놀라며 유렌을 향해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저, 저희는 악마들에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배가 고팠을 뿐입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빛의 이름으로 자비를...!"

"시끄럽다! 이단 주제에 감히 빛의 이름을 올려!?"

그 말을 한 사람은 한 대를 얻어맞고 말았다.

"하다못해 제 아이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부탁입니다, 나으리."

젖먹이를 안고 있던 여인이 애원했다.

유렌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진심으로 악마를 추종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허기에 질려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뭣들 하고 있어!? 얼른 끌어내!"

그러나 제국의 신민들은 많고, 그들을 살려 놓을 이유보단 죽일 이유가 더 많다.

'파리 같은 목숨이로군.'

들키면 기사들에게 죽고, 계속 있어 봐야 흑마법사들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들.

거대한 힘에 휩쓸려야 하는 그들에게 페르다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법 수사관은 그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의 손에는 강령술서가 들려 있었다.

흑마법서의 처리법에 따라서 황금비단으로 감싼 후, 수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유렌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인피를 어루만지며 그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페르다의 시선을 느끼고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이거 흑마술에 심취한 사람처럼 보였겠군요. 하하...."

"조금은 그렇더군."

"하하 부끄럽습니다. 그냥 안 그래도 부족했던 실적에 한 줄을 올릴 수 있게 되어서 좋았을 뿐입니다."

아차 싶었는지 강령술서를 실크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그리고 페르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섭정님의 신고 덕분에 오늘도 신민들이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닐세. 나도 나 좋으라고 하는 것일 뿐이니까."

"제국을 위한 일이 좋은 일이지요, 하하!"

어물쩍하게 넘어가려는 속셈이 보였다.

"그래서 내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는가?"

페르다는 말에 뼈를 집어넣고 물었다.

"해 드릴 수 있는 것 말씀이군요. 물론입니다!"

다른 놈들이라면, 포상금이나 협박을 해서 쫓아 버리겠지만, 상대는 공왕의 약혼자에 섭정.

그 지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줄 필요가 있었다.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뭔가를 떠올리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섭정님께서도 마법사시지요?"

"그렇다네."

"그러면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유원지 같은 곳에 데려가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법 수사관이 이렇게 제안했다.

"봉인 창고에 한번 들러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페르다의 계획에 마침내 첫발을 디디는 순간이 찾아왔다.

* * *

제국의 창고는 황궁 지하에 있다.

수많은 경비와 경보 마법을 거쳐서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대륙에서 가장 삼엄한 장소이다.

페르다는 마법 수사관인 유렌과 함께 동행하지 못했더라면 절대로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창고지기가 유렌을 보고는 미소를 머금으며 경례를 올렸다.

"충성! 마법 조사관님! 오늘도 고생하십니다."

"자네도 매번 고생하는군. 압수 물품이 있어서 봉인 창고로 들어가야 하는데, 기록해 두게나."

"알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동행분은...?"

옆에 서 있는 회색 머리에 푸른색의 눈동자를 가진 청년.

그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뒷짐을 쥔 채로 서 있었다.

대답은 유렌이 대신했다.

"어허, 이분은 극동부의 공왕의 약혼자일세. 비록 섭정이긴 하지만, 극동부의 책임자시지."

"아, 아... 그렇습니까?"

"그러니 알아서 잘하도록 하게. 알겠나?"

"예, 물론입니다. 기록에서 빼 두겠습니다."

별다른 기록 없이 장부를 덮어 버린다.

"융통성이 넘치는 청년이로군."

"하하 물론이죠. 이 바닥에서 융통성이 없으면 못 살아남습니다. 게다가...."

유렌이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융통성이 있다고 해서 나쁜 것도 없으니 말이죠."

잠시 후, 페르다와 유렌은 또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은 석문과 문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수정구였다.

"진실의 보주라고 하는 겁니다. 혹시 아십니까?"

"묻는 것에 제대로 대답할 때만 녹색 빛이 점등하는 물건이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값진 유물이지요."

그 수정구가 사람을 인지하고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유렌은 익숙한 듯이 그곳으로 걸어가 손을 얹었다.

손을 얹음과 동시에 방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은 악마들을 추종하며, 그들의 결의에 따르고 있지 않음을 맹세합니까?

묵직하고 위엄이 있는 그 목소리는 마치 심판을 내리는 신과도 같았다.

유렌이 대답했다.

"맹세합니다."

-이 창고에 들르는 것이 사적인 욕망으로 기인한 것이 아님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당신은 제국에 충성하고 있음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세 개의 질문이 끝이 나고, 속의 연기가 소용돌이쳤다.

잠시 후, 푸른색은 녹색으로 바뀌어 점등하였다.

-증명되었습니다.

유렌이 그곳에서 손을 떼고 페르다를 보며 말했다.

"여기에 손을 얹어 주시겠습니까?"

"나도 해야 하나?"

알고 있지만, 잡아떼는 페르다.

그편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 방에 들어와서 맹세의 보주에 증명받지 못하면 통과 못 합니다. 혹시...."

유렌이 가늘게 눈을 뜨며 물었다.

악마 추종자들을 향하던 그 눈빛과 결이 비슷했다.

"켕기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페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욕심이 많은 인간이다 보니 두 번째 질문에서 걸리지 않을까 싶군."

"하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가지고 나가겠다 같은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여전히 허접하지만 확실한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옛날에도 내가 저걸 했었지.'

세 번 정도를 했지만, 페르다는 전부 붉은색으로 빛나며 실패했다.

그래서 결국엔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었다.

페르다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적인 욕망이 가득하고, 제국에 충성하고 있지도 않았다.

스스로 잘 알고 있음에도 페르다는 당당하게 진실의 보주에 손을 얹었다.

-당신은 악마들을 추종하며, 그들의 결의에 따르고 있지 않음을 맹세합니까?

위엄 있는 목소리가 페르다를 짓누르려 들었다.

38화. 봉인 창고

아르켄 제국, 황궁 지하 감옥.

근무자 복장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 소리쳤다.

"어이, 교대 시간이다!"

"아, 씨... 빨리빨리 안 다니고 뭐 하냐?"

"뭐라는 거야, 정시 나팔 울리기도 전에 왔는데."

"어후, 이 씹새끼, 내가 나중에 네가 했던 짓 고대로 돌려준다."

근무자는 치를 떠는 얼굴을 하며,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그것보다 오랜만에 이 감옥에 사람들이 좀 생겼구만."

"그러고 보니 너 출동 나갔지? 이것들 정말로 악마 추종자들이 맞냐?"

사내는 근무를 하면서 느꼈던 것을 묻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악마 추종자라는 것 대신 굶주린 빈민이라는 느낌밖에 없었다.

"잡아 온 놈들은 모르겠는데, 악마 추종자들이랑은 같이 있었어."

"이야 진짜 악마 추종자야? 그거 그냥 선동꾼들 때려잡을 때나 쓰던 거 아냐?"

"그놈들은 진또배기인 모양이야. 급습해서 잡았지."

"진짜 악마 추종자가 나타나고, 나라에 망조가 드나 보네."

그러자 교대자가 째려보았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내가 너 신고하면 바로 악마 추종자로 잡혀간다?"

"어이구, 무서워라. 그만하고 교대나 빨리하자고. 나 오늘 애슐리 만나러 가야 해."

"그 술집 작부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원...."

교대자가 근무자용 수용인원 표를 확인하다가, 혀 차는 것이 멈췄다.

"야, 이 새끼 이거 빠져 가지고 숫자도 제대로 안 헤아렸네?"

"무슨 소리야?"

"포로는 12명을 잡았다고 보고했잖아."

교대자가 총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왜 13명이 되어 있냐?"

"무슨 소리야? 데려올 때만 해도 13명이었는데?"

"뭐 인마? 우리가 직접 12명 포박해서 안으로 들였다고 보고했는데, 우리가 틀렸겠냐?"

"너야말로 내가 틀렸다는 소리냐? 난 하나씩 집어넣으면서 셌어! 직접 한번 와서 봐!"

"어쭈? 1골덴빵 떠?"

"10골덴도 할 수 있어, 이것아!"

"오케이! 10골덴. 준비나 해 놔라, 이 자식아."

둘은 확신에 찬 상태로 이단자들을 가둔 감옥으로 걸어갔다.

탈진해 쓰러져 있는 무리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오른쪽 끝에서부터 왼쪽 끝까지 전부 헤아리고 나서 승패가 결정되었다.

"12명 맞잖아, 이 병신아!"

교대자가 근무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뭐? 그럴 리가?"

믿기지 않아서 근무자도 따라 헤아려 보았다.

"어?"

그의 말대로 12명밖에 없었다.

"이 새끼, 발칵 뒤집힐 짓을 했네. 너 근무 중에 술 마셨냐?"

"조, 조금 마셨어, 인마."

"조금은 무슨! 어우, 영창 보낼 새끼! 근무 중 음주에 근무 태만으로 영창 가기 싫으면, 10골덴 준비해 놔라, 알겠냐?"

"아오. 씁.... 이상하네."

근무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창살 안을 보았다.

힘이 없는 빈민들은 그저 자신들이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 * *

한편 황궁 내,

"역시 쉽지 않구만."

갈색 머리에 각진 턱과 뚜렷한 이목구비.

잘생겼다는 말 대신 여자깨나 울려 봤겠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을 법한 관상.

제드 스왈로우.

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눈이 필요하긴 개코나. 필요하지, 그래."

그는 몹시 언짢은 상태였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과정.

그 모든 것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만 구사 가능한 스킬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른 어디도 아니고 황궁이다.'

누군가가 빠져나갔다는 걸 아는 순간, 바로 비상이 걸린다.

비상이 걸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륙제일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제드를 잡기 위해 몰려들 것이고, 그러면 제드는 빼도 박도 못하고 정말로 잡힌다.

그러니 정말 물 흐르듯이 나타나고 사라져야만 했다.

전혀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러니 제드는 자기 경험을 살려서 방법을 강구했다.

'파티장에서 파트너를 버리듯이....'

상대가 분위기에 취해 있을 때 슬며시 사라지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보고 있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고, 모든 것이 끝나서야 겨우 눈치챌 수 있게 된다.

과정 자체는 생각보다 쉬웠다.

아니, 오히려 파트너를 파티장에서 버리고 오기보다 쉬웠다.

적어도 제드 스왈로우의 가명을 울부짖으면서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리진 않으니까.

'은근 자질이 있긴 할지도.'

그렇게 탈출한 제드는 미리 파악했던 대로 하인들의 탈의실로 몰래 들어갔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가 있나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안에는 모든 사이즈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제작된 유니폼들이 있었으니까.

'여기서 죽어 나가는 게 한둘은 아닌 모양이네.'

파리 같은 목숨이다.

기본 수십은 죽어 나가며, 죽어 나가는 순간 바로 교체되는 인생.

하인을 소모품에 가까운 취급을 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제드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페르다 발드로바.'

자기 상관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그 인간에게 무엇이지?'

말투를 보면 직설적이다 못해 무례한 모습인 사내.

하지만, 그 무례한 것 자체도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제드는 그가 말하는 뉘앙스에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처음 대하는 인간 같은 느낌이지.'

소통이라는 것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고, 일방적인 대화만 해 본 사람.

그런 사람이 소통하려고 시도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들이 페르다에게도 나타났다.

그걸 느낄 수 있었을 때가 바로 다과회 전, 그가 조언을 구할 때였다.

-여자들과 이야기는 어떻게 하는 거지?

설마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질문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드는 신이 나서 자신이 했던 일들과 경험을 바탕으로 페르다에게 조언해 주었다.

그 조언을 바탕으로 다과회를 마친 페르다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네는 그 얼굴이 있어서 참 다행이군.

그게 욕인지 칭찬인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이번 작전에서는 페르다가 자기 여동생과 관련이 있는 문서가 있다고 내걸었다.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지금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되겠지.

"후우, 좋아. 이제 일하러 가 보실까?"

거울을 두어 번 정도 확인한 후에 제드는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에 첫발을 내디딘 그 순간,

"거기, 너."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 그 복도에는 제드밖에 없었다.

"너 누구냐?"

제드는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두 눈만 필요하긴 개뿔.

* * *

페르다는 진실의 보주에 손을 얹었고, 진실의 보주가 페르다에게 물었다.

-당신은 악마들을 추종하며, 그들의 결의에 따르고 있지 않음을 맹세합니까?

페르다는 그 물음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진실의 보주는 무슨.'

페르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봉인 창고에는 이 봉인 창고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기록되어 있다.

박아 놓은 것은 진실의 보주는 사람을 꿰뚫어 보고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도구가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맹세의 문구를 읊는 목소리.'

마력이 담겨 있는 저 목소리.

진실의 보주에 정신이 팔린 순간 아주 잠깐 의식을 흔드는 저 목소리가 모든 것이다.

보주는 저 목소리의 내용을 들었을 때, 흔들렸는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일 뿐이었다.

'곡해하면 그만.'

뭐든지 증오하고 보자고 생각했던 페르다였기에 아주 능숙한 일이었다.

-당신은 악마들을 추종하며, 그들의 결의에 따르고 있지 않음을 맹세합니까?

다시금 묻는 목소리.

"섭정님? 괜찮으십니까?"

유렌까지도 이상하다 싶은지 페르다에게 묻는다.

이제 대답을 해 줘야만 한다.

페르다는 악마의 고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악마의 것이 아닌 발드로바의 것이었다.

"맹세한다."

두 번째 질문이 날아온다.

-이 창고에 들르는 것이 사적인 욕망으로 기인한 것이 아님을 맹세합니까?

이 모든 것은 발드로바를 위해서이다.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맹세한다."

-당신은 제국에 충성하고 있음을 맹세합니까?

'제국은.'

무너져야만 한다.

"맹세한다."

잠시 후, 푸른색으로 빛나던 진실의 보주가 판별을 시작하고 빛깔이 바뀌었다.

-증명되었습니다.

바뀐 빛은 녹색.

페르다는 그곳에 손을 떼어 냈다.

'이딴 게 봉인 창고의 통과 절차라니.'

허접하다 싶지만,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허를 찌르는 절차다.

페르다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그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참 웃긴 물건이지요?"

페르다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유렌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래, 웃긴 물건이군."

그 웃긴 물건을 뒤로하고 페르다와 마법 수사관이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타고 한참을 내려갔다.

끝없는 나선의 계단을 타고 내려가 마침내 첫 번째 봉인 창고에 발을 들였다.

그곳은 수납장과 그 안에는 봉인된 구리 파이프 관들이 쌓여 있었다.

기록 봉인소였다.

외부에 유출되어선 안 되는 제국의 치부, 혹은 대륙이 멸망할 수 있었던 대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곳이었다.

페르다는 이곳에 있는 기록을 이용해 제드를 꿰어 냈다.

'지금쯤이면 도달했다 생각했는데, 아직인가?'

연락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으니, 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알아서 잘할 거라는 믿음만 놓고 가야만 했다.

'어쩌면 그 녀석이 필요 없는 작전일 수도 있었겠군.'

스스로 던진 말이긴 하지만,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었다.

제드는 이 계획에서 무조건 필요한 사람이었다.

"보셔도 재미없는 것들뿐입니다. 게다가 알 필요도 없는 것들투성이지요."

하찮은 것이라는 듯한 말에는 섣부르게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물론 페르다는 거기에 손을 댈 마음이 없었다.

분위기라도 환기할 겸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이런 곳에 들어오면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던가?"

유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보고 싶은 충동이 가끔은 듭니다. 이래 보여도 학자 기질이 있는 사람인지라서요."

"그래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굳이 알 필요 없는 것들을 제가 알아서 스스로 곤란해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썩어 빠진 제국에서 보기 힘든 전문적인 신념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니 마법 수사관이 될 수 있기도 한 것이었다.

잠깐의 외관만 구경하고 그들은 곧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중요한 것은 이보다 더 밑에 있는 두 번째 봉인 창고.

유렌과 그곳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내려가면서 페르다는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냄새.'

진득한 악의와 저주의 결정체들이 흘리는 신음과 유혹의 속삭임.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시체를 둘러싼 뱀장어처럼 페르다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유렌도 점점 깊어지는 것을 의식하며, 페르다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여기서 대답은 '물론이다.'가 아니다.

"뭐가 말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유렌이 의심을 뒤로하고 다시 걸었다.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보여선 안 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둔감함을 보여 줘서 기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둠이 진득해진다.

촛불로 어떻게든 주변을 밝히려고 하지만, 그 어둠을 전부 물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생리적인 혐오감과 위험을 직감하고 물러설 정도로 특이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유렌이 앞장서서 들어간다.

페르다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거대한 장막을 뚫고 들어간 것처럼 페르다의 시야는 확 개였다.

"...허."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봉인 창고라고 하기엔 악마 숭배자들의 비밀 창고 같았다.

그중에서 한 물건이 페르다의 눈에 꽂혀 들어온다.

다른 잡것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중앙 전시대에 올려진 책들 중 한 권.

진득한 어둠보다 깊어 보이는 검은 표지에 은색 사슬로 봉해져 있는 물건.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

은밀한 악마라는 이명이 있지만, 나름대로 대악마에 속하니 봉인된 강도가 높다.

"어떻습니까, 이곳은?"

유렌의 물음에 페르다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악마들의 장소라 그런지, 확실히 역겨운 기운이 풍기는군."

"하하, 억지로 격식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역겨움보다는 경이로움이 가득하죠."

경이롭다.

그래, 실로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저주받은 마법서와 주술서가 뿜어내는 고밀도의 마나.

그것이 전신을 감싸고 있으면 누구든 황홀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압도적인 힘이 자기 몸에 돌 것만 같은 기분.

그건 가뭄 속의 단비와도 같으며, 오욕의 한계에서 해소된 것보다 강렬할 것이라 속삭인다.

"아니, 역겨울 뿐이네."

그러나 페르다는 단호하게 나왔다.

실제로 증오심에 살아왔을 때에도 이런 마나를 한 번도 좋다고 여겨 본 적이 없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은 부숴 버리는 것이 한창 증오심에 사로잡혔던 페르다였다.

그리고 이 마나는 페르다의 것이 아니었으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유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이상하네요... 당신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조금 정도는 홀릴 만도 한데 말이죠...."

그가 눈을 돌려 페르다를 응시했다.

눈빛이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봉인 창고에 도는 이상한 기류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감추고 있었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뭐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저희 둘이 있다는 것이니까요."

유렌이 들고 있던 가미긴의 강령술서를 바닥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서는 감춰 두었던 역겨운 살의가 가득했다.

이 방과는 참으로 어울리는 모습이다.

"제가 이곳에 오면서 시나리오를 하나 썼습니다."

"한번 들어는 보지."

"섭정의 요청에 의해 함께 봉인 창고에 들렸는데, 이 봉인 창고에 있던 홀림에 넘어갔고, 저는 어쩔 수 없이 섭정을 처리했다... 라는 시나리오인데, 어떻습니까? 참으로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페르다는 그것을 들으며 턱을 짚었다.

페르다는 자신을 죽이겠다는 그 말에서 공포 대신 의문이 먼저 들었다.

"여기는 흑마법에 홀리면 가차 없이 사람을 죽이는가?"

"흑마법에 예외는 없습니다. 전능한 빛의 아래에는 자비가 없죠."

유렌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이 설령 공왕의 섭정이라 할 지라도요."

참으로 쓸데없이 깐깐한 나라다.

"내가 죽으면, 자네도 살아나가지 못할 텐데?"

"제 걱정은 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과는 다르게 빠져나갈 구멍이 꽤 많이 있으니까요."

공왕의 섭정을 죽이는 데 빠져나가는 구멍이라.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빠져나가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

거기서 나오는 이점이 무엇인가였다.

'내가 죽으면 어떤 꼴이 날지 알면서도 저러는 듯한데....'

예비 약혼자일 때와는 다르게 페르다는 지금 약혼자인 상태다.

발드로바의 성을 따르는 것에서부터 레드 드래곤과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

그 가족을 죽인다는 것은 복수를 낳을 것이 분명하고, 그 복수는 제국을 향할 것이다.

단순히 재산 좀 갉아먹어 보겠다고 오는 척결단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행위였다.

'오히려 그것을 바란다는 건가?'

제국을 넘어서 대륙이 발칵 뒤집힐 수도 있는 일을 서슴없이 행하려는 자가 황궁 안에 있다.

문득 자신이 거쳐 왔던 진실의 보주가 떠올랐다.

그는 모든 맹세에서 통과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봉인 창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여기 들어온 이후로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한 것이다.

'역시 제국 놈들치고 좋은 놈이 없어.'

궁지에 몰린 지금 이 상황 속에서 페르다의 입에는 웃음이 걸렸다.

"왜 웃습니까?"

"별거 아니네. 그냥 내가 쓴 유치한 시나리오가 설마 이루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않아서 말이야."

"그쪽이 쓴 시나리오?"

미소를 짓던 유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섭정을 꿰어 내어 함정에 빠트리려 했던 수사관의 폭주를 막아선 시나리오를 그렸었지. 자네 것과 다르게 내 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군."

페르다는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서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마법 수사관을 죽여야만 했다.

그가 실제로 청렴하든, 아니든 페르다에겐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자네 덕분에 마음에 짐이 생길 거라는 생각은 덜었군. 쓰레기를 청소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유렌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당신 따위가 저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한 말은 보편적인 마법사의 통념에선 상상 이상의 모독이었다.

그는 5서클에 도달한 마스터 메이지.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것은 물론 제국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을 만큼 높은 자리이다.

그러나 페르다의 서클은 고작해야 3서클, 매직 워커일 뿐이다.

"못 믿겠으면."

페르다의 오른손에 마나가 응집했다.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나?"

페르다의 손에서 빠르게 마법이 사출되었다.

모든 마법사가 예상할 수 없는 빠른 구체가 유렌을 향해 날아들었다.

39화. 마법사의 불문율

파치직!

유렌의 앞에서 전격 폭발이 일어났다.

그의 앞에는 푸른색 장막이 빛나고 있었다.

4위계 마법인 매직 실드.

반사적인 대응으로 부상은 하나도 없었으나, 그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기 바빴다.

'방금 건... 엘레멘탈 볼트인가?'

3위계 마법인 엘레멘탈 볼트.

마나 샷보다 강력한 위력을 지녔으며, 부여하는 속성에 따라서 효과가 달라지는 기본적인 마법이다.

'부여한 속성은 번개니 라이트닝 볼트겠군.'

번개는 속도에 특화된 마법으로 적의 허를 찌른다.

엘레멘탈 볼트에서 부여되는 것도 속도이며 다른 속성보다 평균 3배는 더 빠르다.

'마치 신궁의 화살이 날아오는 듯했다.'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더라면, 어디 한쪽이 날아간 것은 확실했다.

'저게 3서클의 마법사라고?'

페르다는 3서클에 도달한 마법사지만, 그렇다고 과소평가도 하진 않았다.

그는 레드 서클의 소유자며, 레드 서클 소유자는 언제나 적성 속성에서는 강한 힘을 지니었다.

그가 1서클에서 테살로스 월처를 이겼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동 레벨의 마법사 중에서는 그래도 최대한 높은 급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어쩌면 4서클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과소평가였다.

그는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 위력의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쓴 거지?'

유렌의 눈이 페르다를 훑어본다.

어쩌면 그가 무언가의 도움을 몰래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있을 리가 없다.

이 봉인 창고에 들어오기 전에 무기를 소유하는 걸 허락할 리가 없으니까.

'연산을 보조하는 완드나 스태프 따위도 없이 순수하게 자기 머리로 저 정도의 캐스팅 속도를 낸다?'

캐스팅 속도를 올리는 방법은 반복과 숙달만이 답.

그 반복과 숙달이라는 것도 단순히 학부 시절의 깜지 쓰듯이 하는 것이 아니다.

마나의 경로를 그리는 것이 숨을 쉬듯이 당연해져서 자다가 마법을 써 버릴 정도로 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 것은 유렌에게는 불가능하다.

페르다의 천재성은 경외할 정도였다.

"무슨 마법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군."

페르다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유렌을 자극했다.

"참고로 엘레멘탈 볼트일세."

"건방진 어린 새끼가."

유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위가 높다고 해도 마법사로서는 3서클에 불과한 애송이다.

유렌의 손에서 마법진이 그려졌다.

"어디 계속 건방 떨어 봐라!"

서로 목숨을 건 결투에는 작위고 나발이고 더 이상 없다.

유렌의 손에서 완성된 마법진이 사라지지 않고 공중에 떴다.

'지속 집중형 마법진이군.'

마법을 사용하면 마법진의 마나가 마법의 형태로 변환되는 보편적인 소모형 마법진.

지속 집중형 마법진은 마법진의 마나를 소모하지 않고 계속 그리고 있는 상태에서 마나만 주입하여 마법을 발사하는 형태이다.

5서클 마법사라면 당연히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마법진은 나와 똑같은 엘레멘탈 볼트.'

형태와 새겨진 문구로 유추하였고, 그의 생각대로 새하얀 얼음송곳들이 마법진에서 생성되었다.

아이스 볼트였다.

"어디 이것도 피해 봐라!"

게다가 단발이 아니라 연발식이었다.

페르다는 장식대 뒤편으로 몸을 던져 그 공격을 피했다.

새하얀 돌 장식장에 얼음이 부딪쳐 부서진다.

어찌나 꽁꽁 얼었는지, 이어지는 폭격에 장식대가 부서지려 했다.

'역시 지속 집중형은 성가시군.'

열세가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마음에 빈틈을 보인 찰나의 순간, 페르다를 향해 기어 오는 음습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힘이 필요한가?

악마들의 유혹이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터무니없는 대가를 바라며, 계약해 버리는 것들.

'내 재능을 엿보았군.'

악마들도 눈이 있다고 함부로 유혹하지 않는다.

물론 페르다는 그 목소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전투에 집중한다.

'마나는 무한하지 않았다.'

상대도 페르다도 마나가 무한하진 않다.

돌 장식대가 부서지기 전에 아이스 볼트의 폭격이 끊겼다. 무섭게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법진을 올려다보았다.

지속 집중형 마법진을 없애는 방법은,

'상대의 집중을 흩트리는 것.'

재차 폭격을 가하려는 순간, 페르다는 준비한 마법진을 상대에게 뻗었다.

"라이트닝 볼트."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번개 탄환.

속도는 뛰어나지만, 경로는 빠른 만큼 정직하다.

마법진의 방향을 읽은 유렌의 앞에는 푸른 장막이 생성되었다.

파치직!

매직 실드에 닿은 페르다의 라이트닝 볼트가 소멸한다.

속도가 빠르지만, 파괴력 자체는 낮은 마법이었다.

'속성 두 개를 결합할 수만 있으면 뚫었겠군.'

파괴력이 가장 높은 어둠과 속도에서 최강인 전기를 결합하는 것.

3서클밖에 되지 않은 그에겐 아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페르다가 마법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가 마나 주입하는 걸 멈췄지만, 아이스 볼트 세 개가 페르다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매직 인터셉트.'

상대가 사용한 마법을 가로채는 기술로 마나로 만든 실을 세 개의 얼음송곳을 가로채 본다.

페르다는 8서클의 대마법사였지만, 지금은 3서클의 마법사다.

빠르게 날아오는 세 개를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나를 포기하면 두 개를 취할 수 있다.

'급소에서 먼 곳을 포기한다.'

이성적이고 빠른 판단.

포기한 그 아이스 볼트는 페르다의 대퇴부를 크게 찢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오며, 고통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상관없다.

유렌이 만들어 낸 두 개의 얼음송곳이 이번에는 주인에게 송곳니를 들이민다.

"돌려주도록 하지."

페르다의 손에 마법진이 그려진다.

똑같은 라이트닝 볼트.

그러나, 그 라이트닝 볼트는 아이스 볼트의 뒤편에서 사출된다.

"라이트닝 볼트."

푸슝!

번개 같은 속도를 얻어 뻗어 가는 아이스 볼트.

유렌이 만든 푸른 장막을 꿰뚫었다.

파창!

아이스 볼트가 소실되며, 푸른 장막이 깨진다.

유렌은 눈을 크게 떴다.

'내 방어막이 깨졌다고?'

아이스 볼트의 견고함과 라이트닝 볼트의 속도가 결합하면서 충격을 버티지 못했다.

그런 당황도 잠시, 유렌은 죽음을 직감한다.

그에게는 아직 아이스 볼트가 한 발 남았다.

"라이트닝 볼트."

이번에는 유렌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얼음송곳.

"으아아!"

유렌은 집중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몸을 날렸다.

지속 집중형 마법진이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

유렌은 머리에 핑핑 도는 아드레날린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허를 찔렸군요. 진짜로 3서클 마법사가 맞습니까?"

페르다가 대꾸했다.

"그걸 내게 직접 들어야만 할 정도로 자네는 허접한 마법사였나?"

"당신이 하는 행동들이 전부 그렇게 만들어서 말입니다. 궁중 대마법사, 그 늙다리도 당신같이 3서클에서 대응하라면 못 할 겁니다."

"그 늙다리는 그래도 이 황궁에서 가장 지혜로운 편이지."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못 보긴.

황제가 고개를 조아리기 전까지 대치했던 게 그 늙은이였다.

페르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렌이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나무 막대에 둥근 수정을 꽂아 넣은 마법 도구.

완드였다.

마나만 흘려보내면 내부에 새겨진 마법진이 반응하여 마법을 사출한다.

그가 그 물건을 꺼낸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실력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건가?"

"비웃을 거면 마음껏 비웃으십시오. 전 당신만 제거하면 그만이니!"

마나를 주입하고 마법진이 드러났다.

페르다는 그 마법진의 형태를 빠르게 읽었다.

'대강 보니 4위계 마법이 새겨진 모양이군.'

그의 예상대로 마법진은 4위계의 마법이었다.

마법진의 마나들이 모여들어 새하얀 냉기를 뿜으며 뾰족하게 깎여 나갔다.

형상은 그가 난사했던 아이스 볼트와 비슷하다.

하지만 단순한 아이스 볼트의 느낌이 아니다.

페르다의 눈에 깃든 통찰력이 빛을 발하였다.

'안에 냉기를 과하게 머금었어.'

아이스 볼트를 흉내를 낸 프로스트 봄이다.

어딘가에 닿거나 부서지는 순간 안에 있는 냉기가 뿜어져 나올 것이다.

어쭙잖게 피하려 하거나, 방어하거나, 가로채려 한다면, 역으로 당한다.

'그러니 격추해야 한다.'

페르다는 손가락에 머금었던 마나 구체를 튕겨 프로스트 봄에 접촉시켰다.

푸슈우욱!

증기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와 주변을 얼어붙인다.

페르다의 마나 구체도 그대로 얼어서 바닥을 굴렀다.

마나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파괴적인 마법이었다.

'내 프로스트 봄을 간파했군.'

놀랍진 않았다.

매직 인터셉트를 할 정도의 실력이 있는 마법사가 눈속임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유렌은 그사이에 다른 마법을 영창 하였다.

"제국의 방패여!"

고농축된 마나로 그려지는 마법진이 형상을 빚어 그대로 방패가 되었다.

5위계의 방어 마법, 이지스.

과거 이지스라는 불리는 용사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 낸 것으로 철통같은 수호를 자랑한다.

저 방패는 유렌의 지시 없이 마법에 스스로 인지하여 움직일 것이다.

'골치 아픈 놈.'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만큼 성가신 마법은 없다.

'...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하지만 페르다는 잘 알고 있었다.

골치 아픈 놈일수록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기다렸다.

놈이 자신의 마법을 과신하고 있는 순간을.

'지금.'

그때는 유렌이 완드로 프로스트 봄을 구사하던 그 순간이었다.

동시에 페르다의 손에서 두 개의 구체가 생겨났다.

하나는 정상적인 마나 샷,

그리고 다른 하나는 더욱 많은 마나들로 뭉쳐서 만들어 낸 마나 봄.

'설마....'

마나 봄을 보자마자, 유렌의 직감이 뇌리에 꽂혀 들어온다.

불길한 생각을 부정해 본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고작 3서클일 뿐인 마법사가 5위계 마법 파훼법을 안단 말인가?

그렇게 부정했으나 페르다의 구체가 유렌을 향해 날아들었다.

덮쳐 오는 초구는 마나 봄.

이지스의 방패가 그 마나 봄을 감지하고 움직였다.

퍼펑!

그 일대가 마나로 자욱하게 번진다.

그와 동시에 방패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유렌은 눈을 크게 떴다.

'이지스의 파훼법을 알고 있다고?'

마법사의 싸움은 패를 꺼내는 것.

그 패가 뭔지 모르면 모르리라는 것을 상정하고 내는 경우가 많다.

아니 그 상정이라는 것은 사실상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이다.

모든 경우의 수, 규격 외의 상황까지 대비하여 수를 고른다면 어떤 마법도 쓸 수가 없다.

유렌은 그 규격 외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구는...!'

프로스트 봄을 노릴 것이다.

한번 시전된 마법은 마법사의 의지로 꺼트릴 수 있다.

하지만 완드나 스태프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도중에 멈추는 방법은 없었다.

페르다는 프로스트 봄이 완성되는 순간을 노려 접촉시킨 다음에 그대로 폭발시킬 것이다.

'그렇게 둘쏘냐!'

유렌은 재빠르게 매직 실드를 시전했다.

그의 전방에는 푸른 장막이 뒤덮었다.

라이트닝 볼트 한 발로는 뚫을 수 없는 방어 마법.

마나 구체가 프로스트 봄을 건드릴 수는 없다.

만들어진 프로스트 봄은 다른 곳으로 던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페르다가 시전한 마법은,

'라이트닝 볼트?'

똑같은 번개 화살이었다.

유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뚫을 수 없을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이지?'

위력이 뛰어나도 자신의 장막을 뚫을 만큼 힘이 없다.

유렌이 그 답을 찾으려 하자, 그제야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배경 속에 묻혀 있는, 더욱 어두운 무언가가 페르다의 등 뒤에 달려 있었다.

마치 그가 숨기고 있었던 팔 같았고, 그것은 바닥 낮은 곳에서 던지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아."

시야 속에 들어오는 것은 얼어붙은 마나 구체.

프로스트 봄의 여파에 얼어붙어 아주 단단하다.

금속 탄환 대용으로 써도 될 정도로.

시야의 사각에서 그 구체를 챙겨 온 것이다.

"라이트닝 볼트."

그의 경로에 올라오는 그 순간, 번개가 쏘아졌다.

라이트닝 볼트가 단단한 얼음덩어리를 싣고 날아온다.

파창!

매직 실드가 깨졌다.

유렌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래도 유렌은 노련한 마법사다.

적을 앞에 두고 눈을 감지 않는다.

그의 시야에는 페르다가 아껴 두었던 마나 구체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방법을 찾아야...!'

그러나 그때는 이미 마나 구체가 프로스트 봄에 닿은 직후였다.

푸슈우욱!

새하얀 증기가 터지며 일대가 서리밭이 되었다.

증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즉사했겠군.'

위력을 가늠해 보면 유렌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의 방어는 무력화되었고, 마법에 저항력이 있다고 해도 냉기 폭탄을 직격해서 맞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페르다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곳은 봉인 창고이며,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

'악마들은 그 의지를 실현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퍼석-

서리가 잔뜩 껴 있는 얼음 마법사, 유렌의 형상이 움직였다.

얼어붙은 옷과 완드가 얼음 조각이 되어 부서지지만, 그는 부서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그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크히히힛...!"

광기를 머금은 웃음소리가 황홀경을 부르짖었다.

"아아. 악마의 힘을 얻는다는 건... 이런 것이었군요."

악마의 힘에 심취한 자들이 내뱉는 전형적인 소리였다.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마르바스의 빙환술이었다.

'혹한과 파멸의 악마, 마르바스.'

일곱 대악마 중 하나이자, 혹한 지옥의 대군주.

얼음 마법사인 유렌에게 딱 어울리는 악마였다.

'폭발 직전 마르바스와 계약을 했고, 살아남은 모양이군.'

마르바스에게 영혼을 팔면 극한의 추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진다.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피를 너무 흘리면서 대퇴부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초인적이었던 집중도 이제는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 그 자신만만하시던 섭정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자, 다시 싸워야지요?"

유렌이 페르다를 조롱했다.

모든 것이 페르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악의들이 다시 한번 더 움직이기 시작했다.

봉인 창고에 있던 모든 악마의 서적들이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영혼을 바쳐라. 그렇다면 저 하찮은 것을 죽일 힘을 주마.

-너를 모욕하는 저놈을 불태울 수 있는 힘을 주지! 내게 영혼을 바쳐라!

-자네에게 힘을 주겠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은 법이지 않겠나?

악마들의 속삭임이 페르다를 휘젓는다.

그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이다.

페르다의 몸이 벼랑 끝에 몰렸다는 증거였다.

숨을 색색거리기만 했던 페르다가 입을 열었다.

"죽기 직전에는...."

페르다의 입에서 미소가 걸렸다.

그가 보였던 몇 안 되는 웃음과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인다더군."

유렌은 갑자기 헛소리해 대는 페르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내게 지금 보이는 것이 뭔지 아는가? 자네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는가?"

"뭔 개소리입니까? 날 사랑한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페르다의 푸른 눈동자가 유렌을 응시했다.

마법을 사용하면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죽지 않은 그 빛은 긍지였으며. 두 눈동자는 유렌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내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지."

그 순간, 유렌의 직감이 한 번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남자를... 이길 수가 없다고?'

악마, 마르바스와 계약한 그인데도 이 남자는 이길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러면 악마를 판 자신은 뭐가 된단 말인가?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음에도 3서클 마법사를 이기지 못하는 자신은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마음을 다잡으려는 순간, 페르다가 묻는다.

"마법사의 불문율이 뭔지 알고 있나?"

마법사의 불문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후의 수단을 죽는 순간까지도 알려 주지 않는다.

즉,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와일드카드를 의미한다.

"그래서 최후의 마법을 쓰겠단 말입니까? 당신에게 그만한 마나는 더 이상 없을 텐데요?"

유렌의 말대로였다.

지금 페르다에게 남아 있는 마나는 고작해야 엘레멘탈 볼트 한 번 쓰는 수준뿐이었다.

대퇴부에 흘러내리는 피는 지혈도 하지 않아 이제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

궁지에 몰린 것은 유렌이 아닌 명백히 페르다였다.

페르다는 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함부로 넘겨짚지 말게. 내가 언제 마법이라고 한 적이 있던가?"

마법이 아니다?

그 순간 유렌의 등 뒤에서 기척을 느꼈다.

"이거 아직 늦진 않았네요."

난데없이 들려오는 것은 남성의 목소리.

유렌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경비병 옷차림한 갈색 머리의 사내가 서 있었다.

'경비병...일 리가 없다.'

이런 보안 구역에 경비병 따위가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명백한 침입자다.

그것도,

이 봉인 창고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무리가 아닌 상당한 실력을 지닌 침입자.

먼저 움직인 것은 그 사내였다.

민첩하게 거리를 좁혀드는 사내.

'대응해야 한다.'

유렌이 마법진을 그렸다.

그 순간, 그 사내의 평범했던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어 빛났다.

'뭐야? 왜 마나들이...?'

그 빛이 응시하는 자리, 마법진에 모이던 마나들이 강제로 흩어진다.

'설마...!'

그의 머릿속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리라 생각한 종족이 떠올랐다.

"네놈은 적안족이냐?!"

다른 말로는 메이지 킬러.

사내의 손에 들린 단검이 목을 관통한다.

"컥 커억!"

정확하게 기관지와 동맥을 파고들었다.

그가 뱉을 수 있는 것은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페르다가 그 사내에게 친근하게 말했다.

"조심하게. 악마에게 자기를 판 놈이야."

"알고 있습니다."

사내는 단검을 양손으로 움켜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이래 봬도 악마랑도 연이 깊어서요."

관통한 단검을 그대로 뽑아 크게 원호를 그렸다.

유렌의 시야가 뒤집혀 하늘을 날았다.

아직 끊기지 않은 의식 속에서는 페르다가 보였다.

그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라이트닝 볼트를 시전하고 있었다.

"잘 가게. 긍지 잃은 짐승이여."

40화. 악마의 속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