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40-45

40화. 악마의 속삭임

제드가 베어 넘긴 유렌의 머리.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페르다는 마법 화살을 쏘아 터트려 버렸다.

파삭!

산산이 부서진 머리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으악!"

제드가 반사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혹시 입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닌지 퉤퉤거리며 페르다에게 소리쳤다.

"아니! 왜 갑자기 머리를 터트리고 그러십니까?!"

페르다가 뺨에 묻은 피를 엄지로 슥 닦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확실하게 해야지."

"아니, 머리랑 몸통만 분리해도 죽는데 굳이 확인 사살을 그렇게 해야 합니까?"

"악마가 문제가 아니야. 적어도 섭정이 갑자기 칼을 잘 다뤄서 목을 베어 냈다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아, 그건 그렇네요."

제드는 자신이 베었던 유렌의 시체를 보았다.

한 번 찌르고 일격에 베어 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3위계 마법사가 질척하게 싸운 것치고는 너무 물리적이다.

제드는 폭발로 인한 죽음으로 위장하기 위해 절단면을 훼손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밑 작업까지 끝난 제드가 원망 어린 눈으로 페르다를 보았다.

"두 눈만 필요하다면서요?"

"그래서 두 눈만 가져왔나?"

제드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돌았다고 그 말을 믿습니까?"

역시 대도의 재목.

대충 말해도 찰떡같은 일솜씨가 믿음직스럽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늦었군."

"다사다난했습니다. 사람들 눈 피해서 이동하고 하다가 운 나쁘게 좀 걸렸는데...."

그때를 떠올리는 제드.

안 좋은 듯하다가도 씨익 웃었다.

"뭐 그 인간을 만나서 더 안전하고, 뒤탈 없게 끝낼 수 있게 됐네요."

"누굴 만났나?"

"척결단의 카를이라고 하던 사내입니다. 섭정님이 꿰어 낸 그 남자."

페르다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입에서 '아' 하고 소리가 나왔다.

카를.

페르다의 손에 개 목걸이가 채워진 사내였다.

"그 남자 덕분에 더 수월해졌습니다. 지금은 창고지기 대타로 입장했죠."

"그렇군."

"그것보다 다리는 괜찮습니까?"

제드가 페르다의 다리를 턱짓하며 물었다.

피가 흐르는 속도가 느려졌지만, 여전히 출혈 상태였다.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제드가 그의 다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일단 지혈부터 합시다. 일단 붕대 같은 걸로 압박이라도 해야죠."

"손수건 있으니 내가 알아서 하마."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페르다가 붕대를 자기 다리에 감았다.

그대로 매듭을 지어 고정하면 되는데 그 매듭이 허술했다.

안 그래도 힘이 약한 페르다가 빈혈 상태에서 꽉 매는 게 힘들었다.

"줘 보십시오."

보다 못한 제드가 그의 손을 치우고, 손수건으로 단단하게 환부를 고정했다.

"죽을힘을 다해서 지혈했다...라는 걸로 합시다. 죽기 직전에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래, 나쁘진 않겠군."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업고 이곳에서 벗어납니까? 그러면 추가 화물에는 요금이 좀 붙을 텐데."

페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의뢰대로 했으면 좋겠군. 저기 검은색으로 된 표지와 은색 사슬이 보이나?"

페르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네, 보입니다. 그거 가져가면 됩니까?"

"가미긴의 강령술을 호송할 때 쓰던 황금 비단이 있을 거야. 그 책으로 감싸서 우리가 타고 온 마차까지 안전하게 가져다 놓도록 하게."

제드는 가져온 천으로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을 감쌌다.

그의 눈은 페르다의 다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누구 안 불러도 돼요?"

"걱정할 필요 없다."

"아니, 피 이 정도로 흘렸는데, 걱정돼서 그렇죠. "

"사람은 이 정도로 죽지 않아."

제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다.

페르다가 괜찮다고 연달아 말하긴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두기엔 부상이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자네는 정보를 찾았나?"

"아직입니다. 밑에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려서 그거부터 처리하려고 왔죠."

"그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찾도록 하게."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예? 섭정님이 죽게 생겼는데...."

"그건 네 인생을 바쳐서라도 원하던 정보이지 않던가?"

추악한 여자들에게 꼬리 치고, 사기도박을 치면서 귀족들에게서 돈을 갈취한 것은 그에게 명확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제드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다.

적안족은 멸족당했고,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것은 어렸을 적의 자신뿐.

기억하는 것은 여동생이 괴한의 손에 끌려가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남은 가족이 없는 그에겐 그 희망만이 전부였다.

"계약은 계약이다. 내 일을 잘 수행하는 건 네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조건에서 이루어진 거지."

"...."

제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독하게 먹은 마음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제드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며, 페르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죽지 마십시오."

제드가 움직였다.

그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데도, 발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역시 떡잎부터 다르군.'

그런 감탄을 하면서 페르다는 벽에 기대었다.

페르다는 장식장에 기댄 채로 숨을 골랐다.

마나는 다 떨어졌고, 빈혈 상태에 정신은 완전히 몰린 상태였다.

유렌이 봉인 창고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기록되었고, 제시간에 나오지 못하면 긴급 출동할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20분 정도인가?'

1분도 촉박한 지금으로선 너무나도 긴 시간이다.

특히 이런 공간에서의 20분은 말할 것도 없다.

페르다는 약해졌고, 약해진 먹잇감은 포식자에게 더없는 먹잇감이었으니.

그리고 저주받은 마법서의 불온한 기운이 페르다를 잠식하려 들었다.

-나랑 놀지 않을래?

-나와 계약하는 게 어때? 세상을 부수는 힘을 줄게.

-이리 오도록 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거두어 줄 테니.

유치한 말투에서 근엄한 말투까지 페르다의 전신을 더듬으면서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려 했다.

단순히 듣기만 한다면, 참으로 강하거나 기묘한 힘을 지니고 있을 것 같은 놈들이다.

하지만 페르다는 잘 알고 있다.

이놈들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잡다한 악마들.

대가도 조건도 형편없으며 주는 힘조차도 형편없다.

'고작 이딴 것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래서일까.

이런 긴장감 넘치는 상황 속에서도 하품이 나왔다.

그들이 품은 악의는 페르다의 빈틈을 파고들기엔 역부족이다.

잠시 후, 그 목소리들이 일제히 멎었다.

페르다의 철통같은 정신력에 물러선 것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격이 높은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다.

'왔군.'

잠시 후, 페르다의 시야 속의 어둠이 짙어졌다.

생리적인 불길함을 느끼기 무섭게, 오싹한 한기가 페르다를 감쌌다.

곧 누군가가 페르다의 앞에 모습을 보였다.

-빌어먹을 필멸자 녀석.

푸른 피부에 흰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노인.

백내장이 낀 듯이 하얀 눈으로 페르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렌과 계약을 맺었던 대악마, 마르바스였다.

-감히 막 계약을 마친 내 물건에 손을 대? 악마에게 원한을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나?

페르다는 그를 보며 물었다.

"어떤 의미지?"

-이 마르바스에게 개망신을 준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혹한 지옥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갗이 부르트고 혈관이 어는 고통을 1백만 년을 걸쳐서 치러야 한다!

마르바스가 윽박질러 댔다.

그러더니 마르바스가 짚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쳤다.

지옥의 서리가 바닥에 흩뿌려진다.

-만회할 기회를 주마. 나와 계약해라. 내 새로운 계약자의 빈자리를 네가 들어가도록 해라. 어떠냐?

페르다와의 계약.

그것이 그가 이 자리에 와서 협박하는 이유였다.

"거절하지."

-내 서린 원한을 받겠다는 것이냐? 대악마를 화나게 만들고 살아 돌아가는 자는 없다.

"화가 나긴."

페르다는 그의 속셈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구실을 만들고 싶어서 그 잡놈과 계약해서 원한을 만드는 척하는 것이지 않나?"

악마의 꿰임에 넘어가는 개수작 중 하나였다.

겸사겸사 그 역량을 시험하면서 본 계약자를 꼬드기려는 것이다.

험악한 인상을 쓰던 마르바스가 호통치는 대신 웃음을 흘렸다.

-클클클... 보통 놈이 아니군. 그래서 계약할 마음은 없는 게냐? 특별히 네 대가는 싸게 해 주도록 하마.

창고 떨이하듯이 말하는군.

"물론 없다."

-아쉽게 됐군. 자네처럼 특출난 영혼이 내 것이 된다면, 참으로 기쁠 텐데 말이야. 날 필요로 하게 되는 날에는 더욱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거다.

원한을 가진 사람답지 않게 쿨하게 퇴장한다.

시야는 여전히 좁았으며,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없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이곳으로 다가왔다.

-귀공이 보여 준 그 힘은 참으로 놀라웠소, 페르다 발드로바 공.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목소리.

어둠을 뚫고 다가온 것은 정장을 입은 두꺼비였다.

-이 몸의 이름은 모락스. 와서 계약을 맺으시는 건 어떻겠소? 귀공에게 힘과 권력을 쥐여 주도록 하겠소. 위대한 공왕령을 만들기 위해 귀공에게 모든 것을 빌려주도록 하겠소.

두꺼비의 커다란 입이 휘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대가는 언젠가 치르겠지만 말이오.

일곱 대악마 중 하나로 계약과 대가의 악마, 모락스.

악마 중에서 가장 많은 힘을 주는 악마로, 참으로 매력적이라 할 수 있는 자이다.

비실비실한 사람도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으며, 마법에 재능이 없는 자들도 순식간에 대마법사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 말로는 반드시 처참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모락스의 저주다.'

페르다는 이미 그 비극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러니 입에 남는 것은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뿐이었다.

"네놈이 무슨 짓을 할지는 다 알고 있다. 재미없으니 꺼지도록."

-흐흐흐.... 지금은 물러나겠지만, 언젠가 이 모락스의 이름을 부를 날이 올 것이오. 그때를 기다리도록 하겠소.

두꺼비 신사가 모자를 기울이며 다시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곧 누군가가 페르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자기, 안녕?

질척하고 음란한 목소리가 귀를 속삭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과 커다란 가슴.

영락없이 올리비아 아르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 아르켄이 아니다.

하반신은 인간의 것이 아닌 뱀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보여 준 건 아주 멋있었어. 설마 마르바스의 계약자에게 그런 한 방을 먹일 줄 몰랐거든.

음욕과 환각의 악마, 시트리.

"그렇군."

-왜 그렇게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어? 제국 제일의 미인을 앞에 두고 있는데. 별로인가 봐?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고혹적인 모습은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페르다에겐 아니었다.

한창 정력이 넘치는 나이에 뽀얀 나신을 보고 있음에도 평온함만이 돌고 있었다.

모락스와 마르바스에 비교하면 그녀가 주려는 힘은 제일 허접하다.

-역시 별로 안 좋아하나 보네. 자기는 드래곤과 결혼했다고 했지?

"그래."

-그렇게 그 드래곤이 좋으면, 두 명을 안을 수 있다면 어떨 거 같아?

페르다가 잠깐 생각하다 시트리를 보며 말했다.

"얘기해 봐라."

-이 올리비아 아르켄의 모습을 할 수 있던 이유가 뭐겠어? 나 같은 악마에겐 이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라는 말씀이야.

그녀가 진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우리 자기는... 발드로바의 모습을 보고 싶은 건가?

페르다의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 흔들림에 결국 시트리에게 넘어갔다.

"발드로바의 모습을 해 봐라."

-후훗, 귀여운 남자네. 알겠어.

시트리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추었다. 그녀의 손을 따라 모든 것이 변했다.

금발은 적발로, 머리에는 두 쌍의 뿔이, 그리고 두 눈은 황금색 사백안이 드러났다.

-어떠냐? 짐의 이 아름다운 용모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발드로바의 모습을 재현한 시트리.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페르다는,

"그게 아니다."

얼굴에 실망감만이 어릴 뿐이었다.

-뭐?

"내 약혼자는 그렇게 날렵하게 생기지 않았다. 좀 더 눈매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음, 그런가? 이렇게 말이야?

페르다의 말대로 얼굴을 고치는 시트리.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페르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다, 좀 더 순한 눈이다. 그리고 입술도 그렇게 두툼하지 않아."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이렇게 말이지?

"왜 내 의미를 못 알아듣는 거냐? 내가 어려운 걸 요구했나?"

-이렇게?

그렇게 대악마 시트리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꾸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그렇게 한참을 시도하던 시트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는 짙은 혐오감이 자리잡혔다.

-미친놈.

"왜 그러냐? 원한다면 계약해 주마! 내가 원하는 그대로를 전부 구사하기만 하면 된다. 어렵지 않다."

-꺼져! 너 같은 변태랑 엮이면 내 앞날만 불쌍해지지!

음욕의 대악마인 시트리조차도 질린다는 얼굴로 픽 하고 사라졌다.

'발드로바를 대신할 수는 없는 모양이군.'

솔직히 말해서 페르다는 조금 홀렸고, 그 홀림에 슬쩍 넘어갔다.

그녀가 그리우면 대신 보는 것으로도 나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런 대용품조차도 불가능한 여자였다.

'괜히 했어.'

시트리의 못난 변장술 때문에 괜히 발드로바의 모습만 눈앞에 더 아른거렸다.

사무치게 그립고, 고독해져 울적해지기까지 했다.

'아아 나의 왕이시여.'

페르다는 속으로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당신은 이토록 세상을 사랑하는데, 세상은 당신을 이용하려 듭니다.'

유렌이 페르다를 공격한 이유는 발드로바의 분노를 사기 위해서다.

자칫하면 제국이 전복할 수 있는 그 계획이 결코 유렌의 원한으로 이루어진 것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페르다는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페르다의 슬픔은 그를 더욱 독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모든 일에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제국의 흑마법사 쥐새끼들을 지하 수도에 숨기고,

유렌에게 섭정의 죽음을 사주하여,

기울어 가는 제국이 속절없이 무너트리고,

피를 나눈 가족들이 전부 죽기만을 기도하는,

재앙의 씨앗에서 피어오른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

'올리비아 아르켄.'

그때였다.

페르다의 시야가 완전히 개이며 오감이 좁아졌던 오감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계단을 타고 급하게 내려오는 것이 들렸다.

긴급 상황에 출동한 기사와 마법사들이 틀림없다.

"빌어먹을 알테시여, 이게 무슨 일이야!?"

"저건... 발드로바 섭정이 아닌가?!"

"숨이 붙어 있나?"

"예, 숨이 붙어 있습니다!"

"얼른 사제님을 모셔와라! 긴급 사항이다!"

"섭정이시여!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잘 들린다.

그러니깐 이젠 좀 자야겠다.

41화. 동류

페르다는 꿈을 꾸었다.

두루뭉술하고 뒤죽박죽으로 된 흐름이 아닌 기억을 바탕으로 한 회상의 꿈.

페르다에게는 언제 적 있었던 일.

그러나 너무나도 사소하여서 기억의 저편에 방치해 두기만 했었던 일이었다.

그 사소한 기억의 풍경은 발코니에서 시작했다.

발코니 너머에는 제국 벽 안쪽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국에서 품었던 폭탄이 마침내 터지고 곳곳에서 반란의 행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발코니 난간 위에 서서 그것을 넋 놓은 사람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비운의 여인처럼 말이다.

-제국이 불타고 있어요. 아주 활활....

페르다는 그런 여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제 행복하신가요?

페르다를 향한 물음.

마치 이 모든 것이 페르다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듯한 원망이 섞여 있다.

페르다는 그 뻔뻔함에 같잖다는 웃음을 흘렸다.

"저들은 너 때문에 죽는 것이다, 올리비아 아르켄.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저들은 저렇게 고통받을 필요가 없었다."

올리비아 아르켄.

제국 제일의 미녀이며, 독실한 알테의 신자.

순수함의 결정체라 불리는 그녀가 바로 제국에 칼을 들이민 장본인.

그녀가 주도하지 않았더라면, 커다란 성벽 안쪽에는 비명이 울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녀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오라버니를 꾀어내고 민중을 일으키게 된다면... 예, 충분히 해낼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반란은 손쉽게 끝이 날 일이었을 테죠.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청안에 금발 머리, 올리비아 아르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남자가 균형을 무너트린 겁니다.

그러나 그런 환한 웃음과는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는 새빨간 얼룩들이 자리를 잡았다.

피다.

그것은 올리비아의 피가 아니었다.

이 방의 주인, 침대에서 엉거주춤하게 바지를 내린 채 죽어 있는 저 1황자의 피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저 단검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1황자는 올리비아의 손에 죽었다.

2황자는 반역자가 되었으니, 이 반란에서 실패하면 공개 처형당할 것이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죽지 않을 것이다.

-대신 황제 폐하의 노리개가 되겠죠. 싸구려 경매장에 올려져서 제 몸뚱이를 볼모로 삼아 충성을 얻으려고 할 거고요.

나의 사랑스러운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올리비아가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제안할게요.

올리비아가 손을 내밀었다.

착 달라붙는 실크 장갑은 붉게 물들다 못해 새빨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런 더러운 경매장에 올라가기 전에... 저를 안아 보시겠어요?

페르다는 대꾸하지 않았다.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한참을 손 들고 있던 올리비아가 포기했다.

-역시 당신은... 저를 싫어하는군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페르다는 올리비아가 싫었다.

그녀를 처음으로 봤을 때, 그리고 마주칠 때마다 선명하게 느꼈다.

-이유가 뭔가요?

그 감정은 페르다가 억지로 증오심을 짜낼 때나, 질투 같은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넌 나와 비슷하다."

동류감에서 느껴지는 혐오였다.

페르다는 자신을 내쫓은 로스노바를 증오했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자신의 혈족들을 증오했다.

자신을 똑 닮은 그녀의 일생이 페르다에겐 거부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페르다는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군요. 저와 같아서 서로 영원히 평행 세계를 달리는 건가요?

올리비아는 체념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얼굴에 자리를 잡은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 웃음은 올리비아의 가면이었다.

페르다보다 더욱 많은 세월을 거치며 만든 원한과 살의를 가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두꺼운 가면.

죽는 순간까지도 결코 깨지지 않을 물건이다.

-아쉽네요. 당신이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의 미소가 슬프게 어그러졌다.

-진심으로요.

올리비아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불타오르는 제국의 아래로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 * *

페르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설고 화려한 천장이 반겼다.

고개를 기울여 보니 황궁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벽에 둘러싸고 있는 근위대들과 단장급 기사까지.

"어머, 일어나셨군요?"

감미로운 목소리가 페르다를 반긴다.

금발 머리의 여인이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올리비아 아르켄.

제국 제일의 미모답게 웃는 것만으로도 수십 다발의 꽃이 그녀를 감싸는 듯하다.

페르다는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얼마나 의식을 잃었습니까?"

"음, 3시간 정도 지났네요."

"3시간...."

이상하다.

3시간 동안 있었던 것치고는 몸이 너무 상쾌했다.

루리에게 치료를 받았을 때는 이런 기분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혹시 저희 알테 교단의 치료를 받아 보시는 건 처음이신가요?"

"예."

"후훗, 역시 그러시군요. 황궁 내의 사제들은 전부 주교급 되는 인물들이죠. 그분의 빛을 빌려서 치료하면, 마치 새 몸을 얻은 것처럼 움직이실 수 있답니다."

"그렇군요."

그런 감탄을 하는 이유도 페르다는 전생에 단 한 번도 남에게 자신의 치료를 맡긴 적이 없었다.

그 누구도 믿지 않았고, 죽으면 죽었지, 누군가에게 자기 몸에 손을 대게 하진 않았다.

'어째서 사제의 치유가 최고로 취급되는지 알 거 같군.'

성에도 이처럼 상주하는 사제를 들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구조팀들의 보고에 따르면...."

올리비아가 주제를 봉인 창고 쪽으로 돌렸다.

"마법 조사관, 유렌 씨가 죽고 섭정님께서 크게 다쳤다고 나왔습니다."

"예."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유렌의 시신에는 빙환술서가 들려져 있었고, 마르바스의 계약자에게 일어나는 피부색의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것인가요?"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조사관이라는 사람이 악마의 꿰임에 넘어갈 줄이야.... 운 좋게도 살아남으시게 되었군요."

올리비아가 그윽한 눈빛을 하며 슬쩍 페르다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페르다는 그녀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페르다의 손도 기사 집안의 자제답지 않게 작은데, 그녀의 손은 더욱 가느다랗고 작았다.

"말씀대로 마법 조사관, 유렌이 타락했고, 저를 공격했습니다."

페르다는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인과가 잘못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타락을 했기 때문에 저를 공격한 게 아닙니다. 애초에 그자는 저를 죽이려고 했었고, 저를 죽이기 위해 타락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죠."

"어음... 처음부터 섭정님을 죽이려 했단 말이죠?"

어렵다는 듯이 쩔쩔매는 눈동자.

하지만 페르다는 알고 있다.

이미 그녀는 이 상황을 전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것을 바라는 것은 올리비아뿐이니까.

"예. 애초에 그는 저를 공격하기 위해서 봉인 창고에 저를 들였습니다."

"어째서요?"

"저를 죽이기 위해서죠. 봉인 창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죽여야만 했다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에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을 죽인다니... 그런 잔혹한 짓을 하다니요? 섭정님을 죽여서 얻는 게 대체 뭐라고요?"

"글쎄요."

페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묻는다.

"부디 당신이 알려 주시겠습니까?"

올리비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서로가 지닌 푸른 눈동자가 한참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단순히 눈이 맞는 것 이상으로 그 눈 속에서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며 서로를 응시하던 중, 올리비아가 손을 들었다.

"기사단장."

"예."

"잠시 사적인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둘만 있고 싶군요."

"둘만... 말입니까?"

"예. 둘만요."

기사단장이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올리비아가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기사단장을 보았다.

"부탁드릴게요?"

그 눈을 보던 기사단장이 마치 홀린 듯이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황녀님의 뜻대로 하지요."

"고마워요, 정말로...."

방에 배치되었던 근위대들이 우르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기사단장을 향해 습기를 머금었던 푸른 눈동자가 한 번 깜빡였다.

그 순간, 제국의 꽃, 순수의 결정체는 단번에 사라졌다.

"제가...."

둥실둥실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놀라우리라 만큼 착 가라앉았다.

페르다조차도 반사적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람이 달라졌다.

"유렌에게 섭정님 암살을 사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눈치가 빠른 여자다.

단순히 명성으로 인한 편견이 아니라 정말로 뛰어난 여자였다.

페르다는 그녀가 당연히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물쩍하게 넘기리라 생각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어 있는 듯한 이 상태에서 페르다에게 최적의 대답을 내놓았다.

이 사태에서 책임을 묻고 한바탕 뒤엎으려 했던 그에겐 역으로 한 방 먹은 셈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은 처음이네요. 특히 남자랑은 말이죠."

"그래서 알려 주시겠습니까, 황녀시여?"

페르다는 비꼬듯이 억양을 강하게 넣었다.

올리비아도 더 이상 멍청하게 웃지 않았다.

"일단 유렌과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는 저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 줬죠."

마법 조사관은 봉인 창고를 드나들 수 있다.

그곳에는 금지된 마법과 흑마법들, 그리고 위험한 정보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 정보 중에서는 제국의 치부가 될 수 있으며, 약점이 되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유렌의 행동은 과한 충성으로 인한 어긋남이었다고 하면... 제 말을 믿으실 건가요?"

"저는 방금까지만 해도 죽을 뻔했던 사람입니다."

그 말을 믿겠냐.

올리비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그와 한번 이야기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제국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것, 정확히는 황제의 권위를 흔들 수 있을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하고요. 어떻게 하면...."

그녀는 오랜 꿈을 품은 소녀처럼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표정이었다.

"황제를 죽일 수 있을까... 하고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뒤틀린 듯한 감정 표현에 섬뜩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다는 그녀에게 공감했다.

입안이 씁쓸했다.

"공왕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네, 제가 생각하고 있던 시나리오 중 하나였습니다. 그분은 아르켄 가문에 크게 한번 실망했잖아요? 그분을 한 번 더 실망시킨다면, 황제가 고개를 조아려도 살아남기가 힘들 테니까요."

"그럼 제가 죽으면 완벽하겠군요."

"그럴 리가요."

그녀가 슬며시 얼굴을 앞으로 기울였다.

과하지 않은 은은한 향수가 체취처럼 풍겨 왔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마주한 순간에도 저는 그 계획이 틀렸다는 걸 확신하게 되는걸요."

"어떻게 말입니까?"

"섭정님은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눈 밑 애교살에 가려진 통찰력이 푸르게 빛났다.

"느껴져요. 당신의 깊은 곳에서 저를 혐오하고 있는 것을. 처음에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말이에요. 어린애처럼 자기 감정을 드러내기 싫어서 싫어하는 게 아니라 저를 정말로 싫어하는...."

그녀가 빙긋 웃었다.

"순수한 여자는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살짝 머리가 비고,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그런 여자. 남자들은 이런 여자에게 껌뻑 죽던 것 같았는데 말이죠."

페르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도 딱히 원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뒤로 뺐다.

"제게 간이고 쓸개고 빼 주려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정작 저 자신을 보는 사람은 없죠."

페르다는 그녀를 싫어한다.

그래서 그녀의 몸짓과 화술에 넘어가지 않고, 꿋꿋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저는 그런 사람이 필요해요. 노예가 아닌 동료 말이죠."

"노예가 더 편할 텐데요?"

"유렌은 제게 있어서 노예였어요. 노예의 과한 충성심은 늘 문제를 일으키거든요. 시키지도 않은 일에 저를 기쁘게 하려고 앞서가는 경우가 많아요."

올리비아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지방 귀족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백만 송이 장미를 가져왔더군요."

세기의 로맨티시스트다.

"그건 누굽니까?"

"모릅니다. 이름을 묻기도 전에 바로 처형했으니까요."

그리고 제일 불쌍한 놈.

"저를 원한다고 제 성을 팔고, 영지민들을 노예로 팔아 버린 자는 원하지 않아요. 제 궁극적인 목적에 있어선 있어 봐야 쓸모도 없는 것들이니까요."

겉으로 듣기엔 서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르다는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반란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한다.

"그러면서도 제국의 흑마법사를 키우려 했습니까?"

"어머, 그것도 절 의심하고 있었나요?"

자기 입을 가리면서 눈을 깜빡인다.

당연하다.

그녀는 제국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자니까.

"흐음...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 섭섭하네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얼마나 진심인지 보여 드리면 되는 거겠죠?"

그녀가 페르다의 손에 올린 자기 손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올리비아의 몸에서 마나가 돈다.

마나가 돌면서 능숙하게 오른팔을 타고 응집시켰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페르다는 또렷하게 그 증거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하얗게 빛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뭔지 아시나요?"

"...성흔이군요."

신의 성흔.

교단의 신도가 절대적인 맹세를 할 때, 신이 내려 주는 축복으로 소유자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만큼 함부로 주지 않으며, 강렬한 소망과 자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건 복수의 맹세라고 부르는 문양입니다. 알테의 교리에 따라 복수는 빛의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굽어살피지 않으며, 사리사욕을 채우며 빛의 뜻에 반하는 자들을 향하라 하셨지요."

그녀가 보호할 대상은 서민들.

그리고 그녀가 복수해야 할 대상은 황제와 오라버니들.

그 말을 즉, 흑마법사와도 연관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흑마법사를 끌어들였더라면, 저렇게 성흔이 밝게 빛날 리가 없다.

"흑마법사로 몰리는 선동꾼들이 너무 많아서 요즘은 그 본질이 흐려지긴 했지만, 흑마법사들은 벌레 같은 종자들입니다. 이용해 먹고도 싶지 않아요."

"그렇군요."

"그리고 황실이 무너지기를 바랐다면 흑마법사들을 쓰는 얄팍한 수를 쓰지 않았을 겁니다. 흑마법사들이 설쳐 봐야 시민들만 다치고, 시민들이 다치면 황제의 권력만 강화될 뿐이니까요."

올리비아는 자기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추측을 늘어놓았다.

"흑마법사가 들어와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작은 오라버니겠네요."

"2황자 말씀이시군요."

"네. 군부가 강화되는 걸 가장 바라고 있는 분이죠. 정벌을 나가는 이유도 더 많은 군사 세력을 끌어모으기 위해서고요. 외부 세력이 들어오는 것에 필요성만 제기해도 만들어 낸 인맥들을 안으로 들이는 것을 막지 못할 테니까요."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 새삼 생각이 깊다고 감탄하게 된다.

그녀가 보기처럼 멍청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페르다가 제국에 얼쩡거리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황제를 죽였을 것이란 확신도 들었다.

"아무튼, 그 증명으로 유렌의 죽음에 관한 책임을 묻지 않도록 제가 힘을 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방을 벌이다가 소실된 책도 처리하도록 하고요. 그렇게 앞으로도 제가 증명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역시 이 여자는 이미 알고 있다.

페르다 또한 봉인 창고에 목적이 있어서 접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성흔을 새긴 자가 흑마법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그냥 놓아줍니까?"

"어머? 빛의 신, 알테께선 의심보단 확신을 좋아하시니까요. 어떤 경로로 유출되었는지도 모르는데, 신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섭정님을 함부로 의심하면 교리에서 어긋납니다."

즉, 파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

"그러니 부디 앞으로도 제게 협력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올리비아 아르켄이 제안했다.

"지방 영주들이 황제의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방치되어 있는 극동부는 특히 골이 깊죠. 섭정님께서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협력해 주신다면, 극동부에 대한 지원과 발언권에 이, 올리비아 아르켄이 힘을 실어 드리도록 하겠어요."

포개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에 색기가 더해졌다.

"분명 좋은 협력자,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유혹의 빛이 짙어졌다.

어째서 남자들은 여자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건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남자의 본능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제가 힘을 쓰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그런데... 힘을 쓰신다니요?"

올리비아의 물음과 동시에 복도가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침입자 발생! 1급 경보 발령이다! 전부 전시 준비 태세로 돌입한다!

빠르게도 왔군.

페르다는 올리비아의 손에서 자신을 손을 빼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페르다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그녀에게 묻는다.

"제가 순수한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네? 아, 그렇죠."

"좋아합니다, 순수한 사람."

그 말을 남기고 페르다는 밖으로 걸어갔다.

42화. 역린

발드로바 공왕령의 발드로바 성.

그날 루리는 발드로바의 앞에서 주간 보고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페르다 님이 제국에 무사히 도착하고 황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최신 내용입니다."

바로 페르다의 동향 보고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발드로바는 한숨을 놓았다는 듯이 콧바람을 뿜어내었다.

-그렇구나.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다.

"...그렇다고 몇 번이고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지간한 몬스터들이 그 마차를 노리진 않는다고 말입니다."

극동부는 버려진 땅으로 취급해 개발되지 않은 구역이 많았다.

그래서 우거진 숲이 많으며, 나무가 많은 만큼 몬스터도 많았다.

이동하다가 몬스터를 마주치는 것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배는 넘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페르다가 타고 있는 마차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마차를 만들 때, 그 안에 드래곤의 비늘을 한 장 숨겼다.

야생의 본능이 강한 몬스터들은 그 드래곤의 냄새와 기운에 접근하는 것조차 꺼릴 것이다.

몬스터에 대한 습격은 전무, 그리고 혹시나를 대비하여 콘실러스 백작의 기사인 아르웬을 호위로 붙여서 이동했기 때문에 습격을 받아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발드로바는 안심하지 못했다.

그녀는 공왕령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당장 눈앞에 벗어나서도 불안해하는 것이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인데, 그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땅으로 간다는 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밥은 잘 먹고 다니고 있겠지?

-근처에 얼쩡거리는 몬스터들은 없겠지?

-아픈 데는 없을 테지?

출발한 지 고작 여섯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루리가 들었던 질문이었다.

'무슨 병든 병아리를 돌보는 것도 아니고.'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연약한 생물로 취급하며 전전긍긍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초에 가까울 때부터 존재했던 불멸자의 눈에는 18살 먹은 성인 필멸자가 바닥의 개미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페르다의 몸은 일반인보다 약한 수준이었다.

루리는 어쩔 수 없이 페르다의 마차에 자신의 정령을 붙여 3시간마다 보고하게끔 했다.

그리고 루리는 이 보고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갈수록 제왕의 위엄과 멀어지신다.'

원래도 제왕과는 거리가 먼 드래곤이었다.

루리는 발드로바의 두 얼굴을 알고 있었다.

발드로바가 레드 드래곤의 모습을 할 때는 언제나 엄숙하고 진지한 어투를 구사한다.

외롭고 고독한 수호자였던 그녀의 모습은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만든다.

반면, 그녀가 인간의 모습을 할 때는 그 긴장감을 모두 내려놓는 상태가 된다.

얼굴과 표정, 몸짓,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위엄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여인이 된다.

'그 모든 모습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 경계가 허물어지지만은 않았으면 하는 루리였다.

그런데 페르다가 발드로바의 삶에 들어올수록, 용의 모습에서조차도 위엄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만감이 교차했다.

루리는 주인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리고 동시에 위상으로서 위엄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페르다.'

전부 그 남자가 들어오면서 이렇게 변해 버렸다.

고마운 점이 많지만, 그만큼 미운 점도 많은 남자였다.

"돌아오시는 길은 보고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발언에 발드로바가 들썩하고 움직였다.

-어째서냐?

"페르다 님이 가는 길이 안전하다는 걸 알았으니, 오는 것을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는 길이 또 험난할 수 있는 것이지 않겠느냐?

또 손주 보는 할머니 같은 소리를.

"그러면 마중을 나가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음....

발드로바가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가지고 있는 걱정에 비해서 그녀는 인간과 대면하는 것이 여전히 껄끄러웠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루리는 못을 박았다.

"페르다 님에 관해서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18살은 저희 눈에는 어린애지만, 인간들의 사회에선 어엿한 성인입니다."

-그건 알고 있느니라.

"그리고 주인님께서 하시지 못했던 일들도 대신해서 잘 처리하고 있죠."

-그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님이 건재한 만큼, 페르다 님이 위협을 받는 순간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발드로바를 달래던 때였다.

조용하던 레어 속에서 바람이 일어나더니, 하얀 형상을 빚어냈다.

상급 바람의 정령, 토르멘타가 루리의 옆에 얼굴만 만든 채로 둥둥 떠 있었다.

"페르다 님의 소식이 들어온 모양입니다. 잠시...."

-알겠다.

발드로바가 자세를 고쳐 잡고 루리의 말을 기다린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던 루리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너무 놀란 나머지 큰 소리로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루리는 다시 목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그것을 듣지 못한 발드로바가 아니었다.

-왜 그러느냐?

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정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인님."

발드로바의 황금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녀의 말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냐? 짐의 약혼자에게?

그녀의 인내심에 한계에 달한다.

힘의 위상이 평정을 잃어 간다.

우드득—.

발톱이 바닥을 부수며 파고 들어간다.

쿠그그극—.

발드로바의 감정이 동요하면서 동굴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른대로 말하거라. 짐의 약혼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이다.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

불과 힘의 주인이라 불리는 그녀가 억눌렀던 힘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정령의 이야기를 듣던 루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정치적인 내용일 뿐입니다. 그 내용을 빠르게 전언하려고 온 것일 뿐이고요."

-그럼 약혼자는 괜찮은 것이냐?

"예."

동굴의 진동이 멎었다.

몸을 일으켰던 발드로바가 한숨을 놓으며 다시 똬리를 틀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게냐?

"집중했을 뿐입니다.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음... 그런 것이구나. 아니다, 괜찮다.

발드로바는 루리를 믿고 놀란 가슴을 추슬렀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지 내의 문서들이 아직 쌓여 있기 때문에...."

"그래, 가도록 하거라."

루리는 그대로 발드로바의 레어에서 나왔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렇게 동굴 밖으로, 숲으로 천천히 이동하다가 표지판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이쯤이면 되겠지.

발드로바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다고 싶을 때쯤, 그녀가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토르멘타."

얼굴만 보였던 상급 바람의 정령이 그녀의 부름에 소환되었다.

-예, 주인님.

"당신의 권속이 전언한 내용 중에서...."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단 하나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합니까?"

바람의 정령 토르멘타가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무표정하고 사무적인 얼굴, 그 너머에서 감춰 두었던 진한 동요가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전해 들었던 소식은 단순히 정치적인 내용이 아니다.

-예. 봉인 창고에서 마법 조사관의 습격당하여 부상을 입었다라고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 급보를 받았고, 저는 그대로 전달해 드리는 겁니다.

극동부의 섭정이 황궁 내에서 부상을 입었다.

보통 인간들의 정치라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가 어찌어찌 풀릴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상대는 드래곤의 배필이 될 자다.

'그것도 주인님의 약혼자다.'

발드로바는 무슨 일이 생겼다는 의심을 할 때 크게 동요했다.

만약 거기서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면, 단순한 외교와 정치 같은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이성을 잃은 주인님이 움직이게 될 것이고....'

다른 드래곤들도 움직이게 된다.

그건 무조건 막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드래곤은 움직여선 안 된다.'

하지만 드래곤 스폰은 다르다.

"알겠습니다."

루리의 등 뒤에서 날개가 뻗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그녀의 날개는 그 어느 때보다 컸으며, 힘차게 뻗었다.

투웅—!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루리의 신형이 사라졌다.

바람과 강철의 주인, 실버 드래곤.

날기 시작하면 결코 눈으로 좇지 못하기로 유명하여, 은색의 혜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힘을 부여받은 자인 만큼, 루리 또한 아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루리의 가슴속에 답답한 감정이 자꾸만 솟구쳐 왔다.

그는 왜 봉인 창고에는 들어갔는가?

그리고 황궁 내에서 그가 왜 죽을 뻔했는가?

'그만큼 주인님을 우습게 보았단 말인가?'

루리는 제국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핏줄을 지닌 3황자가 애초부터 발드로바를 이용하려고 접근했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귀족들이 가문에서 파문하는 구실로 삼기까지 했다.

모독이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다.

그러나 루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루리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발드로바가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불행한 것은 당연하다고 믿었고, 걸었던 희망도 구질구질하게 붙잡지 않고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야 겨우... 그 희망을 잡았더니.'

감히 드래곤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어?

빠드드득-

5분 정도를 전속력으로 비행한 루리의 눈에는 제국의 모습이 들어왔다.

페르다가 일주일에 걸쳐서 도착했던 그곳이 그녀에게는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은색 눈동자가 황궁을 향했다.

'뭐가 됐든 상관없다.'

누군가가 이 사태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하늘을 가르던 은색의 혜성이 황궁 안으로 떨어졌다.

* * *

"1급 경보! 황궁에 있는 전 기사와 마법사들에게 알린다! 모두 전시 태세로 들어가 왕궁 정원 입구로 집결하라!"

낙하 장소는 왕궁 정원.

자다가 날벼락 맞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부랴부랴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페르다도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태연하게 걷는 모습을 본 기사 하나가 페르다를 향해 검을 뽑아 들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이 황궁에서 처음 보는데?"

정의감과 사명심이 투철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어리버리해 보이기도 했다.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일세."

"페르다 발드로바? 아! 오늘 오신다는... 못 알아보아서 죄송합니다, 섭정님!"

"괜찮네. 지금 왕궁 정원 앞으로 집결 중인가?"

"그렇습니다. 1급 경보 사태이니, 부디 방에서 피신해 있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함께 가는 편이 나을 거야."

"예?"

"황궁 정원 쪽으로 안내해 주게. 지리를 잘 모르니까 말이야."

"안 됩니다. 1급 사태에 섭정님께서 위험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페르다는 그 말에서 느꼈다.

이놈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놈이라는걸.

"이미 나 때문에 자네들이 위험해지는 거야."

"섭정님 때문에...?"

무슨 말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얼굴.

그런 멍청한 얼굴에 한숨을 지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아, 저는 말콤이라고 합니다. 피치 힐 출신이라서 성은 없습니다."

"그래, 피치 힐의 말콤 군. 자네의 그 알량한 이해력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게. 자네가 해야 할 건 지금부터 가야 할 곳을 내게 안내하는 것뿐이니까."

"그, 그치만 저는 신민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데...."

"말이 잘 안 통하는 친구군. 자네는 자네 목숨을 잃는 게 나은가, 아니면 더 좋게 일을 끝내고 싶은가?"

"저는 제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

상상 이상으로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다.

본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자와는 상종하면 안 되는 법.

"그냥 내가 알아서 가겠네."

"앗,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정말로...!"

말콤이라는 사내를 뒤로한 채 페르다는 움직였다.

계속해서 안 된다고 말은 하지만, 감히 손은 대지 못하기에 주변만을 맴돌 뿐이었다.

황궁 정원 앞, 정확히 황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많은 기사와 마법사가 모여 있었다.

"3기사단! 밀집형 방진!"

"5기사단! 밀집형 방진! 날개진을 형성하라!"

기사단장의 지휘에 맞춰 움직여 입구를 차단한다.

"2마법사단! 방어 준비!"

"3마법사단! 폭격 마법 준비!"

마법사들도 공격 준비를 마치고, 침입자를 마주할 준비를 했다.

"침입자 이동! 입구로 향해 오고 있습니다!"

감지 마법을 펼치고 있던 마법사가 소리쳤다.

"전구우우운! 준비 태세!!"

긴장감이 팽팽하게 돌았다.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은 장미 덩굴로 만든 벽.

잠시 후, 은색의 섬광 따위가 직사각형 형태로 번쩍였다.

번쩍임과 함께 덩굴벽이 사각형 문 형태로 무너져 내렸다.

침입자가 모습을 보였다.

그것을 뚫고 나온 것은 은발의 메이드복 소녀였다.

'루리로군.'

페르다의 예상대로였다.

이 상황에서 황궁에 침입자가 있다면, 가장 먼저 그녀가 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은색의 날개와 치마를 빠져나온 두툼한 꼬리.

뒤로 번개 형태로 뻗은 한 쌍의 뿔.

그리고 본능적인 위협을 건드리는 진한 오오라.

"드, 드래곤!?"

누군가의 외침에 사기가 팍 꺾여 나간다.

드래곤은 물론 스폰조차 보지 못했던 자들은 그 분위기에 동조했다.

"겁먹지 마라, 상대는 그저 드래곤 스폰일 뿐이다!"

드래곤 스폰.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아 승천식을 거친 후에 만들어지는 드래곤의 수하들이다.

그들 개개인이 잘 훈련된 기사급이며, 기본적으로 인간 기사 서너 명은 때려눕히고도 남는 존재들이다.

지휘관은 고작 스폰에 불과하다고 소리쳤다.

다만 황궁 기사들의 사기를 잡기 위해 한 말이었을 뿐, 그 지휘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드래곤 스폰이 궁중 마법사의 결계를 단번에 부수고 안으로 들어온다고?'

황궁은 인간이 만들어 낸 장소 중에서 가장 안전하게 만든 장소이다.

공중에서 내려오는 낙하물들을 막는 마법진은 무려 세 겹으로 이루어졌으며, 전부 뚫지 못하면 다시 마법진이 형성되어 공중에서 침투하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운석조차도 뚫지 못하고 소멸한 방어막을 저 소녀가 단신으로 뚫어 냈다.

'그리고 드래곤 스폰이 이만한 드래곤 피어를 만들기도 하나?'

이게 드래곤 스폰과 마주해 봤던 기사들도 헷갈리게 만드는 요소였다.

드래곤 스폰은 드래곤 피어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저 소녀는 드래곤 피어를 발산하고 있었다.

마치 역린을 건드린 드래곤처럼.

손발이 벌벌 떨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방진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며, 마법사들 중에서는 집중이 끊어지고 캐스팅이 취소되기까지 했다.

"으아아아...."

주변을 맴돌고 있던 말콤도 드래곤 피어에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동시에 그의 눈에는 믿기지 않은 것을 목도했다.

'섭정님은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거지?'

식은땀을 흘리지 않는 것은 물론 유일하게 두 다리로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

그것을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자네 이름이 말콤이라고 그랬나?"

말콤에게 넌지시 말을 던지는 페르다.

"예? 아, 예... 그, 그렇습니다."

"자네가 맞았군."

"예?"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에는 루리가 있었다.

루리의 눈도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그녀는 페르다에게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43화. 화나네

황궁을 침입한 루리의 행동은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성으로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마법진을 부수고 모든 마법사와 기사들을 소집시킨 것은 그만큼 심각한 사태라는 것을 인지하고 경각심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드래곤의 부군이 다치게 되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아주 작은 경고였다.

그렇기에 루리는 평소에 숨겨 두었던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두었다.

꼬리와 뿔, 그리고 사백안까지.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걸 알면 상대의 지휘관이 루리에게 소속을 물을 것이다.

루리는 발드로바 공왕의 시종이라는 대답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페르다 님은 어차피 안전할 것이다.'

황궁 내에서 다쳤다고 해도 상주하고 있는 사제들이 있을 터.

그들은 전부 개개인이 주교급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어 상처를 입은 페르다를 치료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루리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안심이 되지 않았다.

불멸자와 필멸자는 다른 만큼 드래곤 스폰과 인간도 차이가 있다.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상처를 치유해도 깨어나지 못한다면?

봉인 창고 속에서 웬 악마가 저주라도 걸어 버렸다면?

그 꼬드김을 이기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계약이라도 하게 됐다면?

발드로바의 슬픔으로 이어지는 그러한 근심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주인의 근심은 곧 종의 근심이기도 하다.

루리는 그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이성을 유지했다.

루리는 감성이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루리는 그렇게 자신의 앞길을 막는 황궁 정원들을 모조리 썰어 버리면서 앞길을 텄다.

장미 덩굴 벽까지 부수고 나자 시끄럽게 움직였던 기사들이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에서 루리는 익숙한 사내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페르다.'

회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훤칠한 키를 지녔지만, 여리여리한 몸.

그러나 나이에 맞지 않는 진중한 표정까지.

페르다 발드로바.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자신이 알고 있던 페르다 그 자체였다.

부상을 입었다는 정보와 다르게 무탈해 보였다.

'무사하시구나.'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근심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근심이 빠져나갔으니 안심을 해야 할 터.

하지만 평소에 느꼈던 해우감과는 조금 달랐다.

찌든 때가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뿌듯함.

미치게 만드는 불안감을 해소하면서 드는 안심감.

루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그 두 개가 아니었다.

'...화나네.'

화가 났다.

커다랗게 자리 잡았던 근심과 걱정의 빈자리를 분노라는 감정이 채웠다.

'섭정이라는 자가, 발드로바의 약혼자라는 자가, 쓸데없는 장소에 가서 문제를 일으키고 다치고 있어?'

루리는 그렇게 팽팽했던 이성의 끈이 놓이면서 드래곤 피어를 발산했다.

페르다를 향해서 말이다.

애꿎은 기사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새우등이 터지는 중이었다.

"지, 지휘관! 얼른 지시를...!"

이렇게 대치만 했다간 싸움을 하기도 전에 무너져 버린다.

황궁을 지키는 기사단은 싸우든지 퇴각하든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고, 고...."

지휘관이 공격 신호를 보내려던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깐, 기다리게."

바들바들 떨고 있는 지휘관과 다르게 침착한 사내의 목소리.

"내가 해결하도록 하지."

"예? 실례지만 공께선...?"

"페르다 섭정일세. 오늘 초대받은 사람이지."

페르다는 턱짓으로 루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저기 있는 메이드 소녀는 발드로바 공왕의 시종일세."

"아, 그렇습니까?"

기사단장의 긴장감이 약간이나마 풀어졌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발드로바 섭정이었으니, 이야기가 통한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잠시 시간을 주겠나?"

당연히 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마법진을 뚫고 내려와서 드래곤 피어까지 발산했는지.

그 모든 경위가 궁금했지만, 사태 수습이 먼저였다.

기사단들이 방진을 유지하며 뒤로 물러나고, 페르다가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걸어갈 때마다 드래곤 피어는 더욱 진해졌다.

무표정한 얼굴에 점점 주름이 잡히고 목에는 핏대가 세워졌다.

'진짜 드래곤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군.'

그녀와의 거리가 5보를 두고 멈췄다.

루리가 검지로 바닥에 원을 그리는 시늉을 하자, 새하얀 바람이 루리와 페르다가 서 있는 바닥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위로 올라와 반구 형태로 페르다와 루리를 덮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루리가 코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열이 오르면서 쌓인 압력을 빼는 듯했다.

"여기서는 외부와 단절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바깥에 새어 나가지 않습니다."

"그렇군."

"그러니까... 그냥 이야기하겠습니다."

루리가 울컥하는 감정을 그대로 토해 냈다.

"돌았습니까?"

너무나도 솔직하게.

"공왕의 약혼자라는 자가, 자신의 위치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허튼짓하고 다니는 겁니까?"

"필요한 일이었다."

"그건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필요하신 일이라고 해도 이 소식이 주인님께 들어갔다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겁니다. 자각하고는 있습니까?"

"알고 있다. 그리고 네가 얘기하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어째서입니까?"

"넌 주인을 아끼니까. 움직이는 걸 바라지 않을 테니."

만약 발드로바 성에서 누군가가 온다면, 루리가 가장 먼저 오리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예. 저는 주인님을 받들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페르다 님은 생각만큼 주인님을 사랑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나 또한 그분을 아낀다."

"그러면서 봉인 창고에서 다친다는 소식을 전하게 만듭니까? 뭐, 그건 제가 백번 양보한다고 칩시다."

루리는 페르다가 가까워지면서 더욱 화가 났는데, 그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런 그조차도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루리는 페르다의 손목을 잡고 코를 가져다 댔다.

"그런 분이 손에서 여자의 향수 냄새를 풍기고 다니시는군요?"

"...."

페르다의 손목을 흔들며 물었다.

"어떤 년입니까?"

"...올리비아 아르켄."

"그 천박한 몸뚱이를 가진 제국의 꽃 말입니까?"

루리의 표정에 한층 더 깊은 독기가 들어갔다.

덩달아 손목을 쥐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이명이 있긴 하지."

페르다는 앞에 걸 못 들은 셈으로 쳤다.

다친 것도 모자라서, 약혼자가 제국 제일의 미인과 손을 잡았다.

루리의 전신이 떨렸다.

페르다를 올려다보던 시선도 버틸 수 없다는 듯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신은 여자의 손이라면 일단 잡고 보는 그런 남자입니까? 주인님께 접근한 것도 그저 손 한번 잡아 보려고 그런 거였고?"

"넘겨짚지 마라. 그 여자가 멋대로 잡은 것이다. 그 여자와 이야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어울려야만 했던 것이고. 나라고 좋아서 그런 게 아니야."

"...안 믿습니다."

루리의 왼손이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화가 나 있는 그녀를 보던 페르다가 체념한 얼굴로 그녀에게 묻는다.

"한 대 때리고 싶으냐?"

"...."

"한 대 쳐도 좋다.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그제야 바닥으로 떨어진 루리의 눈이 페르다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페르다의 각진 턱과 뺨이 보였다.

툭툭 던지는 말이 얄미워서 한 번이라도 때려 보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던 저 얼굴.

감정은 가라앉지 않고 자꾸만 솟구쳤다.

결국 루리가 손을 뻗었다.

페르다는 사형수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몇 초가 지나도 뺨에서는 알싸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페르다의 옷깃이 꼬깃거리며 움직였다.

"그래서... 원하시는 건 얻었습니까?"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확은 있었다."

"그렇습니까?"

정리를 마친 루리가 손을 떼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는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부디 주인님을 실망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알겠다."

루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페르다의 표정을 살폈다.

죽어 있는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안심했다.

"그럼."

루리가 다시 손짓하자, 반구의 공간이 풀려나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루리는 기사단을 스윽 보다가 그대로 날갯짓하며 황궁에서 벗어났다.

숨을 죽여서 지켜보던 기사와 마법사들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만을 올려다보았다.

"...상황 종료."

"후아아아!"

"후욱, 후욱...."

멋대로 들어온 침입자들을 그대로 보내 주는 꼴이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지적하지 못했다.

"근데 이거 그냥 보내도 괜찮은 겁니까? 침입자인데?"

눈치가 없는 한 명만 빼고.

* * *

1급 경보가 풀리고, 지휘관은 페르다에게 걸어와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사태를 수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네. 내가 오히려 미안하군. 내 부주의로 일어난 일인데, 발칵 뒤집혀 버렸으니 말이야."

"아닙니다. 드래곤의 분노를 살 수 있었던 일을 유혈 사태 없이 넘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요. 섭정님은 이 일을 어떻게 하셨으면 좋으시겠습니까?"

문제를 제기한다면, 제기하는 대로 반박하면서 질척한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페르다가 바라는 일은 아니었다.

올리비아 아르켄이라는 협력자가 생긴 이상, 제국의 황족에 쓸데없는 적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

"자네 말대로 묻어가도록 하지. 누가 잘못했느니 따지지 말고 말이야. 덕분에 드래곤 스폰 한 마리가 마법진을 깨부수고 들어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 마침 마법부 놈들이 자기 밥그릇만 챙기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구실이 생겼고요."

지휘관은 잘됐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중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그 내부는 만만치 않은 싸움터임은 확실하다.

"이야기는 일단락된 것 같으니, 이만 가 봐도 되겠나?"

"용무가 끝나셨다면... 물론입니다만, 황궁에서 하룻밤 쉬시고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오늘 부상도 입으셨고, 이틀 정도는 경과를 보면서 푹 쉬다가 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직 해가 떠 있지만, 곧 있으면 노을이 진다.

지휘관의 말대로 오늘 하루라도 쉬는 편이 나았다.

"미안하네. 바쁜 몸이라서 말이지."

"아, 일정이 있으시군요? 이해합니다."

딱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페르다는 이 불편한 공간에서 벗어나 빨리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아, 그리고 말이네."

페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지휘관에게 말했다.

"예."

"여기 있는 기사 한 명을 내가 데려가고 싶은데 괜찮겠나?"

"기사... 말입니까?"

너무 갑작스러운 요구였으며,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황궁의 기사는 개개인이 뛰어난 인재였으며, 줄을 세우면 끝에 드는 꼴찌조차도 다른 왕국에 가면 뛰어난 기사로 활약할 수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상대는 공왕의 약혼자다.

바로 거절하기엔 예법에 맞지 않았다.

"어떤 녀석이 섭정님의 눈에 드셨는지요?"

"내가 봤던 녀석인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군."

페르다는 그 사내를 찾으려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머지않아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엎드려 뻗친 상태로 선임들의 갈굼을 듣고 있었다.

"말콤, 너 이 새끼! 방진 만들 때 너 빠졌었지?"

"야이 새끼야! 우리가 새빠지게 있는 동안 넌 뭐 했냐? 잤냐?"

"아, 죄, 죄송합니다! 그때, 섭정님을 막는다고...."

"섭정을 막아? 그래서 막았냐, 이 자식아!?"

"내가 봤을 때 분명 정원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못 막았습니다! 귀족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해서...!"

"1급 경보 상황에선, 황족 다음으로 우리가 먼저인 거 몰라?!"

"아, 몰랐습니다!"

"모르면 군 생활 끝나!? 너 정말 끝장나 볼래!?"

페르다는 땀을 줄줄 흘리며 얼차려를 받는 사내를 가리켰다.

"저 녀석이군."

"...저 폐급 말입니까?"

지휘관은 진심이냐는 얼굴을 했다.

"유명한가?"

"안 좋은 쪽으로는 저리 가라입니다. 저놈 어떻게 해서 황궁 기사단에 왔는지 모르지만, 쓸모없는 놈입니다. 검술도 못하고, 당나귀같이 생긴 말이나 몰고.... 그거 빼면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놈입니다."

"그런가?"

"안 그래도 내쫓을까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그런데도 드립니까?"

지휘관이 걱정스레 묻는다.

인재를 빼 가서 걱정되는 게 아니라 폭탄을 돌리는 기분이라 걱정이 된다.

그러나 페르다는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좋군. 포장해 주게."

"알겠습니다."

황궁의 기사는 개개인이 소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 말콤은 예외였다.

* * *

해가 희뿌연 서쪽 산 너머로 떨어지면서 노을이 질 무렵,

발드로바 성 공무용 마차가 제도를 벗어났다.

동시에 마차 아래에서 숨죽여서 숨고 있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우!! 진짜 끝이네요."

제드였다.

봉인 창고에서 나온 그는 어찌어찌 탈출하여 마차까지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고생했군. 물건은?"

"여기 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 열어 봤고요."

제드는 속에 품고 있던 황금색 보자기를 꺼냈다.

황금 비단으로 감싼 은색 사슬에 묶인 검은 표지.

평범한 방법으로는 페르다가 이 사슬을 끊고 열어 볼 수는 없다.

당장에 볼 생각도 없었으니, 페르다는 다시 천으로 감싸고 옆에 두었다.

"근데 말입니다. 저희 문제 안 되는 거 맞겠죠? 아무리 그래도 봉인 창고에서 책을 빼 왔는데 조용해질 리가 없을 텐데...."

"괜찮다. 조력자가 생겨서 더 수월해졌으니."

"그게 누굽니까?"

"올리비아 아르켄."

제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 제국의 꽃이랑 이야기하고 왔습니까? 진짜 엄청 예쁘고 순수하다던데 어떻습니까?"

"속이 음흉하더군."

"귀족 아가씨니까요.... 은근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많은 귀족들을 상대해 온 제드였지만, 그래도 부럽다는 눈을 거두지 못했다.

마성의 매력을 지닌 여자다웠다.

히히힝!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던 찰나, 기사들이 있는 곳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허이, 어허이! 거 아저씨! 줄 똑바로 맞춰 이동하라니까? 말들끼리 가까워지면 개판 난다고 몇 번을 말해!"

"아, 죄, 죄송합니다! 로시 이놈아! 집적대지 말라니까!"

제드는 처음 듣는 목소리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짐을 부랴부랴 싸서 안장에 한가득 실어 올린 사내가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굽니까, 저건?"

입은 것은 떠돌이 기사 차림인데, 어설픈 티가 너무 난다.

옷차림에서도 그렇지만.

"웬 당나귀나 타고 있고...?"

그는 말이 아니라 당나귀를 타고 있었다.

"말콤이라고 하는 녀석이더군. 황궁 기사면서 동시에 견습 기사지. 표본으로 쓸 생각이다."

"표본?"

페르다의 말에 제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표본."

그저 간단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44화. 발상의 차이

페르다가 무사히 발드로바 성으로 귀환했다.

아르웬은 성문 앞까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콘실러스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정문에서는 루리가 페르다와 그 일행을 반겼다.

"여정은 어떠셨습니까?"

사무적인 물음이었고, 페르다도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편안했다. 습격도 없었고, 호위까지 붙어 있어서 심심하진 않았군."

"그렇군요. 그런데 가실 때보다 한 명이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성에서 출발했을 때는 제드와 페르다, 그리고 마부 정도였는데, 웬 짐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내가 하나 딸려 왔다.

"섭정님! 제 짐수레에 실었습니다, 이제 섭정님의 짐도 실으면 됩니까?"

수레에 자신의 짐을 풀고 있던 말콤이 뒤늦게 루리를 발견했다.

"히익! 당신은 그때 그 침입자!?"

말콤이 기겁하며 벌벌 떨었다.

드래곤 피어 같은 것에 노출된 것이 아니었다.

설령 뿜어내고 있다 하더라도 발드로바 성으로 오기 전에 저항 반지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냥 겁이 많은 것이다.

"한심한 놈이 늘어났군요."

루리는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한 놈도 맞지만, 훌륭한 표본이지."

"무슨 표본입니까?"

"실험에 쓸 표본 말고 더 있겠나?"

"...흑마법이라도 연구하십니까?"

"연구는 해야 하지만, 그쪽은 아니다."

페르다를 그렇게 말하고는 성안으로 발을 들이려 했다.

그러자, 루리가 페르다의 앞길을 막았다.

"왜 그러지?"

"왜 그러냐니,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루리의 시선이 또르르 굴러가더니 페르다의 오른손에서 멈췄다.

"그 악취를 품고 성에 발을 들이는 것은 중범죄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

페르다는 그 말에서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페르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전신을 훑었고, 그녀의 주머니에서 슬쩍 흘러나온 물건을 발견했다.

그것은 녹색으로 염색된 거친 타월.

저 타월에 닿으면 때를 머금은 피부를 그대로 벗겨 버린다.

물론 그 살을 깎는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팡! 팡!

루리의 손을 따라 움직이는 타월에 새하얀 폭발을 일으켰다.

아아.

이때만을 기다려온 건가....

루리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페르다의 손에서 다른 여자의 냄새가 묻어 있다는 사실이 발드로바에게 착각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런 착각은 사전에 배제해 둬야만 한다.

그렇게 이해하긴 했지만, 페르다는 기사들의 비명을 잊지 않았다.

악마를 마주한 어린애처럼 내지르던 비명.

페르다라고 그들이 견디지 못한 것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페르다의 눈동자가 슬쩍 다시 한번 더 루리를 보았다.

그녀는 우려하는 페르다와 반대로 기대감에 찬 얼굴이었다.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최소한 그 공간 단절 마법 속에서 했으면 좋겠군."

형을 앞둔 사형수의 유언처럼 말했고, 루리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페르다 님의 마조 취향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

뭔가 대꾸할 만한 힘이 없었다.

페르다는 루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목욕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루리와 페르다, 둘만의 비밀이 되었다.

* * *

몸이 번질번질하게 닦인 페르다는 겨우 옷을 걸쳐 입었다.

예민한 피부가 섬유에 닿을 때마다 저릿저릿하다.

'참아야 해.'

이제부터 페르다는 집중해야만 한다.

그는 책상 위에 얹어진 책을 내려다보았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

모략의 악마는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며, 그림자를 수족처럼 다루어 상대의 허를 찌르는 마법에 특화된 마법.

은밀함을 강조하는 마법서인 만큼 봉인하기도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형상 고정 마법 처리가 된 은색의 사슬을 걸어 놓지 않는다면, 그 형상이 녹아 버리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였다.

'그림자가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

쉐도우 핸드를 다룰 때도 제3의 손이 된 것처럼 여겨야 하듯이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진한 환상통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들이 있다.'

가장 큰 메리트는 그림자술을 사용하는 데, 마법진이 필요없다는 것.

그리고 단순히 마법으로 만들어진 손으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실제 수족처럼 써먹을 수도 있다.

그 말은 페르다가 쉐도우 핸드를 통해서 또 다른 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력에서는 크게 힘을 발휘하진 못한다.'

모략과 은밀의 악마인 바르바토스의 성격답게 다른 흑마술의 쉐도우 서클과는 궤가 다르다.

'대신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다.'

전면전에서 약한 반면 수싸움에서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그 많은 흑마술 중에서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을 택한 것이었다.

'읽으려면 이 은사슬을 풀어야 하는데.'

은사슬을 풀려면 마법을 풀어야 하고, 마법을 풀기 위해서는 룬을 해독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에키드나를 찾아갔다.

"이 사슬을 풀어 줬으면 하는데 될 것 같나?"

"무, 물론이죠. 당장 해 드려야죠, 헤헤."

에키드나는 헤실거리면서 페르다를 보았다.

왕자에게 푹 빠진 소녀와 음침한 상상을 하는 마녀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표정이었다.

"고맙군. 대가는 어떻게 하고 싶나?"

"대, 대가요? 딱히 필요 없는데요오??"

"일을 처리해 줬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 줘야 하지 않겠나?"

일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는 것.

그것이 마녀와 일하면서 뒤탈 없이 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대가라...."

에키드나의 눈알이 또르르 굴러갔다.

페르다 옆에 서 있는 금발의 소녀.

모리였다.

"그, 그럼 모리와 하룻밤 같이 자게 해 주실 수 있나요?"

모리와 동침이라.

동성끼리의 하룻밤이라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는 어디까지나 마녀다.

그것도 음침하게 침을 질질 흘리는 마녀.

"괜찮겠나?"

페르다가 모리를 보며 물었다.

모리가 가져온 쪽지로 대답했다.

-에키드나의 행동 패턴으로 보아, 그녀와 동침 시, 업무 능력 하락률 30%로 예측됩니다.

30%면 너무 크다.

어떤 행동 패턴을 보였으면 30%나 하락할까 싶었다.

"그건 받아들일 수가 없겠군."

"엣, 그러면 어쩔 수 없고요...."

이야기 꺼내지나 말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에키드나.

페르다는 실망하고 있는 에키드나에게 생각해 놓은 것을 제안해 보기로 했다.

"제드와 함께 있을 시간을 주는 건 어떻겠나?"

"제드님을?!"

에키드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잔뜩 흥분한 나머지 콧김을 뿜어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서 어, 얼마 정도의 시간을...?!"

"이 정도로 하지."

페르다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그녀는 크게 만족했다.

"30분씩이나! 음음...! 그것도 좋아요! 그걸로 하죠! 딜!"

"...알겠다."

페르다가 손가락 3개를 보인 것은 3시간을 의미했다.

하지만 스스로 1/6을 깎아 버리고도 만족해 버렸다.

'3시간이라 말했으면 오히려 역효과일 수도 있었겠군.'

뭐든 과하면 문제가 생기는 법.

첫 대가를 기준으로 잡을 수 있었으니, 페르다는 그것을 바탕으로 대가를 조정해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럼 어디 한번 볼까요?"

에키드나는 신이 난 얼굴로 그림자술서를 작업 테이블에 얹었다.

알이 커다란 안경을 끼고는 그 서적을 관찰했다.

단순히 외견뿐만이 아닌 오감으로 서적을 이루고 있는 요소를 최대한 관찰했다.

"음, 재질은 단단하지 않고 진흙처럼 무른 편, 냄새는... 쓰읍~. 하아, 지옥에서 올라온 유황 냄새는 각별하네요. 구리구리한 게 있잖아요? 겨드랑이에서 나는 듯한 그 묘한—."

"그만."

"앗, 네. 히히...."

더러운 이야기로 삼천포로 빠질 뻔한 것을 막고, 원래 일에 집중시켰다.

책에 대한 파악은 마치고, 다음은 은색의 사슬으로 넘어갔다.

그녀가 사슬에 가볍게 마력을 주입하자, 사슬에서 푸른색으로 글자가 솟아났다.

룬이었다.

"으음...."

에키드나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남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여자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버넬이랑 비슷한 과로군.'

자신의 일에 집중할 때는 진중해진 모습으로 그 룬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룬을 만들 수 있다면, 룬을 해석할 수도 있다.'

에키드나가 하는 것은 설치된 함정을 파악하고 해체하는 것과 비슷했다.

룬을 해석하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마법인지 파악할 수 있고, 강제 해주를 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도 파악할 수 있다.

"형상 고정 마법에 강제 해주 하면 해주자를 강타하는 함정 마법까지 걸어 놨네요. 일반 마법사면 죽겠는걸요? 그리고 여기 이 시그니처는... 알테 교단인 거 같고요."

"풀 수 있겠나?"

그러자 에키드나가 배시시 웃었다.

"풀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용."

"어째서지?"

"형상 고정 마법을 풀게 되면 이 책이 언제 도망갈지도 모르잖아요? 섭정님은 이 책을 한 번만 읽고 그만두실 생각이신가요?"

페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을 전부 얻었다고 해도 이 책이 어딘가로 풀려나는 것은 껄끄럽다.

"그러니 조금 조건을 느슨하게 해 보는 걸로 하죠."

"어떻게 말인가?"

"형상 고정 마법의 조건을 푸는 거죠. 단순히 이 책을 이대로 봉한다가 아니라 일정 수준의 형태만 허용한다는 느낌? 그렇게 해서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말이에요."

"진행해 보게."

"알겠습니닷!"

에키드나가 그 룬을 향해 펜대로 찍으며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그녀의 앞에 원형 마법진이 펼쳐졌다.

최소 5위계의 마법으로 보이는 마법진.

그녀는 그 마법진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이것저것 조작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조작한다라....'

페르다가 대마법사였던 시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법을 파괴하고, 다시 써서 묶어 낸다는 것이 더욱 쉽고 보편적이다.

'룬 메이커들은 다른 모양이군.'

마법 자체를 건드릴 수 있고, 흐름을 알고 있다.

그러니 부수는 것보다 조건을 느슨하게 풀어낸다는 발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를 이렇게 하면... 됐어요!"

펜대로 룬을 톡 하고 치자, 마법진이 룬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동시에 단단하게 동여매어 놓은 은색의 사슬이 에키드나의 힘에 사르르 풀려나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좀 읽어도 되겠나?"

"네! 물론이죠!"

"두꺼운 책 몇 권 좀 가져다주게."

"책 말이죠? 자, 잠시만요!"

우당탕탕.

뒤적뒤적.

그의 말대로 두꺼운 사전 몇 권을 들어 보였다.

"근데 왜요?"

"앉은키에 맞출 필요가 있어서 말이지."

"앉은키?"

페르다는 세 권 정도를 의자 위에 얹었다.

모리의 앉은키에 맞도록 조정한 것이다.

"이 정도 높이면 괜찮겠나?"

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을-."

"자, 잠시만요!!"

시작하려던 순간, 에키드나가 끼어들어 모리를 감쌌다.

"설마 책을 읽히시려는 게 우리 모리였나요? 죽음보다 가혹한 짓을 어린아이에게?"

"그럼 내가 왜 데려왔겠나?"

"모리가 저를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나요?"

에키드나가 모리를 보며 헤실거렸고, 모리는 쪽지에다가 적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에엑... 우리 분명 치, 친해졌다 생각했는데에... 저만 진심이었나요??"

-그렇습니다.

딱 선을 그어 버리는 모리.

청천벽력과도 같은 확인에 눈물을 훌쩍이는 에키드나.

"이 일은 이 아이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치만 악마가 쓴 악마어를 접하는 건...."

"그래, 사람이 점점 미치게 되지."

"그걸 알면서도 시키시는 건가요?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에키드나가 모리를 껴안으며 뺨으로 머리를 비볐다.

업무 효율이 왜 떨어지는지 알 것 같다.

"상관없다. 어차피 이 아이를 물들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저, 정말인가요?"

에키드나가 묻고, 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불안감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당긴다.

"시작해라."

페르다의 지시에 모리가 책을 펼쳤다.

그 순간, 책 속에 품어 있던 무언가가 발산하기 시작했다.

알싸한 유황 냄새가 나며, 불결한 것이 온몸을 훑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악마가 쓴 악마어라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경이오,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낙인이 찍힌다.

고오오—.

페르다와 에키드나는 그 문자에서 눈을 멀리했다.

악마어는 지옥 그 자체에서 만들어진 것.

악마가 쓴 악마어를 접하는 사람은 지옥의 편린을 보게 된다.

지옥의 편린은 접한 사람은 낙인이 찍힌 듯이 평생 악마들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것은 평생 끝나지 않을 시험.

끝나지 않을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하면, 악마 추종자가 되어 버리거나 광인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악마들이 이 세계로 통하는 매개체가 되어 버리며, 지배에 한 발을 디디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악마어라는 것은 글자의 본질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페르다도 악마의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 악마어를 접해 본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림자술의 쉐도우 핸드를 익힐 수 있었던 것도 악마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다 익히면서 전부 지워 버렸지만.'

가장 좋은 것은 마법을 익히고 해석까지 마친 후, 악마어를 머릿속에 지워 버리는 것이었다.

페르다가 지옥의 마법들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은 이유였다.

'이젠 악마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배운 사람이 있었고, 대신 해석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노예 현자, 모리.

그녀가 페르다의 대필가가 될 것이다.

모리는 그 악마어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서 붉디붉은 불꽃이 지펴졌다.

그녀의 눈이 창이 되어 모리를 들여다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리를 흔들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리가 완전무결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완전무결한 자도 자칫하면 흔들리는 게 악마라는 존재다.

그녀에게는 자아가 없다.

자아를 손잡이로 삼아 흔들어야 하는데, 손잡이가 없으니 그들이 모리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펜대를 잡고 종이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옥의 창이 열린 상태에서도 궁극의 이성을 유지하며, 해석을 이어 갔다.

마지막 장까지 악마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빠르게 해석을 마친 모리는 책을 그대로 덮었다.

모리의 오른손에는 원본이

왼손에는 해석본이 쥐여져 있었다.

"전부 끝냈나?"

페르다가 확인차 묻자, 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다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네가 본 것들을 전부 잊도록 해라."

그 순간, 붉은 불꽃이 비치던 눈동자는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명령 한 번으로 정말로 전부 잊어버린 것이다.

순수한 인간이었다면 말 한마디만으로는 불가능한 지시.

노예 현자인 모리만이 가능한 일이다.

잠시 후, 모리의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내 들고 있었다.

해석을 위해서 너무 많은 힘을 써 버린 탓이다.

"오늘은 일찍 자도록 해라."

페르다의 허락이 떨어지자, 괴로워하던 모리가 등받이에 기대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에키드나, 모리를 방으로 데려다주겠나?"

"물론이죠!"

음흉한 눈길로 보고 있는 에키드나.

"으흐, 으흐흐, 으흐흐흐...!"

그것도 모자라서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능률 30%가 하락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페르다는 말을 덧붙였다.

"방에 눕히고 나오도록 해라. 그 이상 접촉은 허락하지 않겠다. 알겠나?"

"다, 당연한 일이죠! 절대 다른 마음 안 먹었답니다!? 절대로요!?"

그렇게 말했지만, 너무나도 아쉬워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는 꼴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페르다는 그녀가 완성해 놓은 해석본을 들어 보았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술에서 알고 있는 쉐도우 핸드 파트부터 읽어 보았다.

'내가 이해한 대로 써 놨군.'

그걸로 해석본만 보는 것으로 마법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페르다는 초장으로 돌아갔다.

'이 마법서를 얻었어야 하는 이유.'

바로 마나 연공법이었다.

3서클에서 4서클로 도달하는 방법 중 하나.

'쉐이프 오브 쉐도우.'

그 페이지가 페르다의 눈에 들어왔다.

지옥의 마도서, 그중에서 대악마의 저서를 읽고 있음에도 부작용이 하나도 없었다.

'평범하게 4서클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걸리던가?'

4서클부터 진짜 마법사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 단계이다.

그만큼 어렵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몇 년은 공을 들여야만 가능한 작업.

레드 서클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위험하면 오히려 위험했다.'

애초에 레드 서클은 단계가 높아질수록 그 광기와 위험성이 증가하여, 리스크가 큰 편이었다.

'내가 그걸 신경을 쓰던 사람이었나?'

증오심을 위해 강해졌으며, 강해지기 위해서 도전을 불사한 것이 페르다였다.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발드로바를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페르다는 곧바로 연공법을 진행해 보기로 했다.

연공법은 각 효과를 지닌 만큼, 진행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차단된 방을 촛불로 밝힌다.

그리고 초 하나를 머리 뒤에서 비추어 길고 진한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그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걸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림자를 이용한 마법뿐이지만, 후에는 그림자 자체가 되기도 하며, 남의 그림자가 될 수도 있다.

상식을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하며 그것을 다루는 것이 바로 바라는 것이었다.

'그림자가 내가 되며, 내가 곧 그림자가 된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촛불의 움직임에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페르다의 몸이 순간적으로 바닥에 눌러붙어 있는 감각을 느꼈다.

마치 벽에 갇힌 것처럼 좁고 답답한 곳에서 평면적으로만 움직였다.

영(影)에 완전 집중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

페르다는 그 감각을 고스란히 가지고 단전 속에 도는 서클로 향했다.

그렇게 1시간가량을 집중했다.

영 속에 마나를 끌어내려 도는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느낌이 없군.'

페르다의 상태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레드 서클에 있어서 차분함은 제동 장치와 다름없다.

'당장엔 무리겠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미련 없이 포기했다.

페르다는 아직 젊었으며, 그에겐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암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달이 기울어 있는 밤이었다.

서쪽으로 떨어졌으니 자정은 훨씬 넘어갔을 터.

며칠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배에서 울린 허기진 소리만이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소리칠 뿐이었다.

45화. 서민 샘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