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용의 브레스
약속의 한 달.
공왕과의 약혼식까지 3일 남았을 무렵.
루리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종이와 펜을 가리키며 말했다.
"약혼식에 쓰일 서약문 한 장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형식적으로 쓰이는 게 있지 않던가?"
"물론 있긴 합니다만...."
그때, 루리의 목구멍이 꿀렁거렸다.
브레스 대신에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되삼켰다.
"비공식적인 약혼식인 만큼, 허례허식 없이 진행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직접 쓴 서약문을 읽는 것으로 대체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맨티시스트로군."
"말이 좋아 로맨티시스트지요. 마구간에서 결혼하는 것보다 못한 수준입니다. 뭡니까? 서약문을 직접 쓴다니... 무슨 소꿉장난도 아니고."
툴툴거리는 루리.
끝내 작은 가슴 속으로 넘겼던 것을 내뱉고 말았다.
"하아아아...."
브레스다.
허탈한 브레스가 바닥을 뚫을 기세로 내리 앉는다.
'인간과 약혼인데 비공개 약혼식에 서약문조차도 서로 쓰게까지 했으니....'
드래곤에게 복종하는 스폰이라 할지라도 감정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저렇게 한숨을 쉬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지배자의 지위보다는 발드로바 자체에 충성하고 있다.'
만약 전자를 더 중요시했다면, 페르다는 이렇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마음만 먹었다면, 페르다를 죽이려고 시도하거나 함정에 빠트려서 흠을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던 루리였다.
하지만 루리는 그런 저급한 수법은 쓰지 않았다.
'도와줬다면 오히려 도와줬지.'
루리의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이번 약혼이 잘 안 되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발드로바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그 모순 속에 갇힌 채로 있었으니 저렇게 짜증이 나는 것이겠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페르다는 동정의 눈길을 잠깐이나마 던져 주기로 했다.
"뭡니까, 그 눈은?"
"참으로 딱하구나, 싶어서 그런 것이다."
진심 어린 동정에 루리는 얼굴을 구겼다.
"당신 같은 인간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아직은 손님이니 그러라 치고, 사흘 뒤에는 부군이 될 텐데, 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지금과 별반 다를 건 없을 겁니다. 혹여나 제게 명령을 할 수 있을 거란 착각에 사로잡히시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지. 그런 의도로 물어본 것은 아니다."
"그래도 때려 달라고 한다면, 거침없이 때려 드리겠습니다."
"그건 내 쪽에서 사양하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힘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조절도 잘합니다."
"? 필요 없다."
루리는 앙증맞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저 앙증맞은 주먹은 침대를 부수고 바닥까지 부쉈다.
장난이라도 그런 말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튼 약혼을 진행하면 이제부터 성내에 사용인들을 들이셔야 할 겁니다. 영지를 이끌어 갈 대신들도 선출해야 하고요."
"사용인과 대신 말인가? 그걸 내가 해야 하나?"
"예. 발드로바 공왕의 아래에 있는 영지와 기타 잡무들을 부군이 담당하게 될 테니까요."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권력을 잡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더니? 권력을 잡으라 하는 건가?"
"권력을 잡는 인간이 싫은 게 아니라 권력에 눈이 먼 인간이 싫을 뿐입니다."
아르켄 제국의 3왕자는 권력에 눈이 멀어 죽음을 면치 못했다.
"권력이라는 것은 본래 관심이 없는 자가 잡아야 하는 법이지요. 더욱 큰 권력을 바라지 않기에 민생을 살피니까요.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인간입니다."
페르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생이 좋지 않나?"
"현 영주들을 보셨다면 아시다시피 개판이 따로 없습니다."
페르다는 의회에 모였던 영주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살이 찌고, 둔하기 짝이 없는 몸.
제 목이 달아날까 봐 무서워 벌벌 떠는 모습은 도살장 속에 갇힌 돼지들과도 같았다.
"기둥이 되어야 할 자들은 죄다 제 배를 불리기 바쁩니다. 최전선에 서 있으니,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사창가를 드나들고, 값비싼 음식을 먹는 데 여념이 없죠. 지금 불만도 최전방의 군사력으로 쉬쉬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큰 폭동으로 터질지 모릅니다."
"몰랐군. 그런 상황인 줄 말이야."
민생.
그 단어를 듣고 보니 페르다는 한 가지 의아함을 느꼈다.
"발드로바 공왕께서는 인간이 행복한 것을 바라시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직접 나서서 한마디만 하면 거의 모든 게 종식되지 않는가?"
"그럴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거지?"
"...."
루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싸늘했고, 드래곤 피어를 주체할 수 없이 발산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역린을 건드린 용과도 같았다.
"그 점에 대해선 지금은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충분히 아실 수 있는 일이니까요."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한 걸음을 물러서기로 했다.
"그러도록 하지. 그러면 서약문을 내가 쓰면 되는 건가?"
"예.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루리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하아아아아.
한숨 소리가 바닥을 타고 페르다의 귀로 들어왔다.
페르다는 루리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서 펜대를 잡았다.
'서약문이라....'
처음이 절반이라고 했다고, 페르다는 첫 줄에서 막혔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지를 물어봤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일단 나중으로 미루도록 할까?'
서약문 대신 페르다는 서신 몇 장을 적기로 했다.
그는 영주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대들이 무엇을 하는지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네.
하지만 이제 눈곱 이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때였다.
그게 문제였다.
'영주들에게 그렇게 관심 없다고 말했는데, 간섭하려 들면 반발이 있을 테니.'
페르다는 첫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자각하고는 있었다.
거기서 거짓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미지는 더 안 좋아지는 셈.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서신을 한 편씩 보내기로 했다.
자신이 어쩌면 내정에 간섭할 수도 있다는 내용.
그는 마지막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답장하지 말게. 그대들을 존중하니 말이야.
그리고 모든 영주들의 답신이 그날 바로 돌아왔다.
* * *
약혼식 당일.
페르다는 자기 능력을 보였고, 동시에 자기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증명했다.
더 이상 태클을 걸 것이 없는 루리는 얌전하게 그 약혼식을 받아들였다.
"견장이 삐뚤어졌습니다. 그리고 기껏 풀을 먹여 놓았는데, 바지를 구겨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대신 그녀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걸로 날을 시작했다.
"네 위치에 손과 눈이 있으면 나도 참으로 좋겠군."
"하나 장만하시지 그럽니까?"
"자네가 하면 될 것 같은데."
루리는 한 발짝 물러났다.
그녀의 양손도 뒤로 쏙 감춘다.
"손대기 싫습니다. 저는 제가 모시는 주인님의 시종일 뿐이니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십시오."
"음, 정말 개 같군."
"저랑 싸우고 싶으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언제든지 진심으로 싸워 드리겠습니다."
"아니, 충직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루리는 으르렁거리지만, 페르다는 트집 잡는 것을 받아 주면서 그녀의 지적을 하나씩 처리했다.
'약혼식인가....'
뭔가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장가를 간다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 감정 중 하나다.
장가간다는 기쁨.
혹은 팔려 간다는 슬픔.
페르다는 그 두 개의 감정 중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날로 돌아오고 난 이후로 계속 이러했지.'
레드 서클의 소유자답지 않은 고요한 마음.
'나는 그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약혼을 해 버린 것은 아닌가?'
그저 의무에만 충실한 기계적인 행동이 아닌가 의심했다.
압도적인 분노와 증오가 사라지며, 다른 감정들조차도 희미한 페르다였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발드로바와 대면해도 되는 것인가?'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 한편에 맴돈다.
'막연한 불안감인가....'
페르다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막연함은 인간의 약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아직 인간이로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할 뿐이다.
페르다는 그 사실만을 떠올리기로 했다.
* * *
약혼식은 발드로바의 레어 앞에서 진행했다.
수백 다발의 초로 안을 밝힌 레어의 안속.
발드로바가 안쪽에 있는 철문과 거리는 고작 20걸음 정도 남겨 둔 채로 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식을 위해 준비를 마친 루리가 문에 대고 노크했다.
"주인님, 식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러자 거대한 철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그 사이에서 공기가 빠져나오고 바깥의 공기와 희석되어 페르다의 코와 입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읍."
숨이 꽉 조여 온다.
마물과 싸울 때의 살의는 없음에도 그것만으로도 공포라는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페르다가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그대로 기절해 버렸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루리가 페르다의 상태를 훑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버티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그럼 약혼식을 진행하겠습니다."
루리는 그런 페르다의 상태를 무시하고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건 이미 얘기된 이야기였으니, 페르다는 자세를 바르게 앉고 숨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필멸과 불멸은 오늘 하나가 되어 하늘의 권위도 시간의 풍파도 가를 수 없는 금색의 실을 이으리라."
루리가 앞에 놔두었던 대접과 술상을 페르다의 앞에 놓는다.
루리가 정성스럽게 술병을 잡고 맑은 술을 흘려 보내며 문구를 읊었다.
"필멸은 미지에 벗어나 공포를 씻어 내림으로써 하나가 되리라."
사전에 들었듯이 페르다는 대접을 받아 술을 들이켰다.
투명도만큼 깔끔하고 청명한 맛이었다.
'역시 술은 잘 못 마시겠어.'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단 한 번도 술을 즐기지 않은 페르다였기에, 이 술이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첫술을 페르다가 들이켜고, 절반 남은 술을 대접에 부어 철문 앞으로 가져갔다.
"불멸은 무한한 흐름의 덧없음을 지우며 하나가 되리라."
이제 발드로바가 술을 들이켤 차례였다.
스르륵
거대한 철문 사이로 튀어나오는 것은 페르다의 몸보다 커다란 발톱이었다.
마물들의 몸뚱이를 찢어발겼던 그 무시무시한 무기.
그 발톱이 조심스럽게 약혼주가 담긴 대접으로 내려갔고,
달그락—!
그대로 엎어 버린다.
"...."
"...."
당황스러운 침묵이 흐른다.
발톱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철문 안으로 돌아갔다.
원래 이런 식인가 싶어서 페르다는 루리 쪽을 슬쩍 보았다.
"...식을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다시 진행되었다.
약혼문을 읽고, 페르다가 먼저 술을 마시고, 다시 발드로바의 차례가 돌아왔다.
달그락—!
그렇게 발톱이 작은 약혼주를 3번 정도 엎었다.
페르다는 슬슬 위기가 찾아왔다.
'몇 잔 마셨더니, 취하는군....'
페르다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오감의 끈이 점점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직감이 느껴진다.
빠득—.
그때, 어디선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동굴이 무너지기라도 하나 하고 걱정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페르다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면 그것은 틀림없이 루리의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잠깐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리가 살짝 벌려진 틈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뭔가 따로 준비하려는 건가 싶은 마음에 기다리려던 찰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주인님!"
난데없이 날아오는 루리의 호통성.
페르다의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필멸자와 결혼하겠다고 난리 친 것도 주인님이셨고, 약혼도 하겠다 한 건 주인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이 충직한 종인 루리가 어쨌습니까?"
그녀가 요 사흘 동안 계속해서 삼키고 삼켰던 브레스를,
"참았습니다!"
열렬하게 뿜어 대기 시작한 것이다.
"공왕으로서 마땅히 공개해야 할 약혼식도 비공개로 해서 참았습니다! 그리고 대면하지 않고 이렇게 약혼을 맺는 것도 참고 참았습니다!"
점점 커지는 목소리.
그 어느 때보다 분노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약혼자와 대면하기가 무섭다고! 그렇게 숨어서! 약혼을 방해하면! 도대체! 저기 있는! 약혼자가! 뭐가! 됩니까!?"
거친 숨소리와 찍 소리도 내지 못하는 발드로바.
그 너머에 들려오는 건 깊은 한숨과 다시 루리의 목소리였다.
"당당히 나와서 약혼자분을 맞이하십시오! 또 한 번 더 약혼주를 엎어 버리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노성을 지르던 루리가 다시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사무적이고 무표정했다.
페르다는 무심코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그리고 루리는 페르다의 시선을 통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들리셨습니까?"
"아마 저 멀리 있는 다른 영주들까지 들었을 테지."
"...하아. 뭐 어쩌겠습니까?"
루리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 충분히 유추하실 수 있듯이 주인님께서는 대인 기피증이 있으십니다."
"대인 기피증이라면...."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무섭다는 말이죠."
"...."
"누가 들었다면 우스운 일일 겁니다. 세계를 구한 위상이 필멸자들을 무서워해서 숨는 꼴이라니."
"꽤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는군."
"어차피 알아야 할 일입니다. 당신이 싫다고 영원히 이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일이죠."
그녀의 은색 눈동자가 쓱 내려오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신의 반려가 될 몸입니다. 그 말은 곧 그분의 약점은 당신의 약점이기도 하단 뜻이고요."
"연대 책임이라는 건가?"
"결혼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페르다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은 연대 책임이라.
어째서인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연대 책임이라는 단어가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잠시 후, 닫혀 있던 문이 다시 열렸다.
거대한 발톱이 다시 나오는 것인가 싶었지만, 그의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페르다는 자신의 반려가 될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응?"
그는 육성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갑옷?'
그것도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사람.
투구는 드래곤의 머리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졌음에도 한순간 드래곤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고 위압적이다.
마치 드래곤이 두 발로 걷고 다니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모습이다.
놀라운 것은 갑옷의 디테일도 있지만,
'엄청나게 크군.'
무엇보다 신장이었다.
페르다의 키는 180cm로 장신에 속하는데도 그의 머리 한참 위까지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컸다.
신장만 따지면 240cm. 갑옷을 빼면 220 정도 되지 않을까?
'드래곤의 폴리모프는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답다 들었건만.'
그 미의 기준이 인간들에 속하면 220cm짜리 미인이 있다는 것인데....
속에 있는 것은 사실 남자가 아닐까?
"마지막 약혼식을 진행하겠습니다."
불길한 추측을 하기 무섭게 루리가 다시 식을 진행했다.
페르다는 이미 3잔이나 들이켰던 약혼주를 다시 마셨다.
술기운에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번에도 엎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일은 없어 보였다.
루리가 엎거나 쏟지 않도록 아예 헬멧을 잡고 들어 버린 것이다.
차갑고, 딱딱한 껍질 속에 감춰진 그녀의 모습을 페르다는 보았다.
그렇게 해서 처음 보았던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의 얼굴은
"아."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짓게 만들었다.
11화. 다시 느껴 보면 그만이다
맹인과 코끼리의 이야기가 있다.
요약하면, 세 맹인에게 코끼리의 특정 부위를 만지게 해서 코끼리가 어떤 것인가 설명해 보라 했는데, 전부 대답이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부분으로는 전체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일부만을 봤음에도 전체를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것도 있는 법이다.
페르다의 경우에는 지금 이 순간, 보고 있는 발드로바의 미모였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고작 턱과 입술뿐.
도자기처럼 깨끗하고 맑은 턱선이 페르다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 위에 놓여 있는 입술은 마치 아침 이슬 맞은 사과처럼 붉고 윤기가 돌았다.
그 하관만 봐도 페르다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반려가 될 사람은 여자라는걸.
그리고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절세의 미인이라는 것을.
그런 정보들이 흘러들어 온 페르다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몰랐다.
그렇기에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발드로바가 입술 사이로 약혼주가 흘러들어 간다.
좁은 틈새로 천천히 흘러 들어가 마침내 잔을 비워 낸다.
그 순간, 페르다는 자신의 몸속에서 이변을 느꼈다.
페르다의 몸속에 각인되어 있던 드래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었다.
-필멸은 미지에 벗어나 공포를 씻어 내림으로써 하나가 되리라.
루리가 말했던 문구 그대로였다.
드래곤을 향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었다.
'정말로 평범한 인간들을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구나.'
서로서로 마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약혼식의 핵심이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바라 왔던 기대감과 좌절되면서 느꼈던 고통을.
페르다가 지그시 바라보자 드래곤 머리를 본뜬 헬멧이 페르다 쪽으로 슬쩍 움직였다.
눈구멍이 이곳을 흘긋 보더니 휙 돌아갔다.
'너무 쳐다보긴 했군.'
페르다는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다음은 서로를 향한 서약문을 낭독하겠습니다."
루리는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로 페르다에게 바통을 넘겼다.
발드로바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기다렸다.
페르다는 천천히 숨을 뱉으며 성대의 떨림을 청명한 소리로 바꾸었다.
"당신은 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페르다는 이 문장을 쓰기 위해서 하루가 걸렸다.
그만큼 페르다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첫 문구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나 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온 답은,
"당신은 내게 심장을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심장을 통해 당신을 엿보며 배웠습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
"당신이 수없이 배신당하고, 음해를 받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수없이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잘그락.
페르다가 서약문을 읊을 때마다 갑옷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당신은 고고하게 의무를 다하였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것에 등 돌리지 않으며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당신의 그 고결함이 저를 바로 잡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서약하겠습니다. 당신이 내게 심장을 주었듯이 이번에는 제가 당신에게 심장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왕, 나의 모든 것이시여."
그것이 페르다의 서약문에 적힌 내용의 끝이었다.
"이건 서약문에 쓰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페르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발드로바를 보았다.
드래곤 머리의 눈과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인다.
잘그락잘그락.
갑옷을 입은 그녀가 공손하게 손을 모은 채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당신 같은 미인과 약혼할 수 있게 되어 너무나도 영광입니다."
철 투구가 크게 들썩였다.
루리는 무표정하게 페르다를 보았다.
다만 그녀의 손발은 오그라들다 못해 뒤틀리는 중이다.
"이제 예비 신부의 서약문 낭독이—."
루리의 말이 끊긴다.
발드로바의 손이 멈추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
발드로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뭔가를 준비한 것인가 싶어 가만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발드로바는 자신의 레어로 돌아갔고.
쿠웅—.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
"...."
낭독 없이 그대로 돌아가 버린 발드로바.
굳게 닫혀 버린 문을 바라보고 있는 페르다와 루리.
"...약혼식은 성사되었습니다."
그대로 식은 마무리되었다.
발드로바의 서약문 낭독은 없었지만, 필요한 것은 다 했으니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하죠."
루리는 그렇게 페르다를 불러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일방적으로 끝난 상황에 그는 진지한 얼굴로 철문 쪽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페르다 님?"
루리가 다시 한번 더 그에게 묻는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골똘하게 생각하던 페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만 혹시 사흘 정도 폐관을 해도 되겠나?"
"폐관이라 함은?"
"말 그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혼자 시간을 보내겠다는 뜻이지. 간섭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식음을 전폐하며 방에 틀어박히겠다 선언.
그건 루리에게 이렇게 들렸다.
'충격이 어지간히 큰 모양이로군.'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서약문 낭독.
그러나 낭독을 혼자서만 하게 되었고, 상대는 철문 안으로 들어간 상황이다.
그러니 페르다는 부끄러운 것이 틀림없었다.
"알겠습니다."
루리의 입가에 초승달처럼 휜 미소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 * *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이걸로 주도권은 주인님에게 넘어오셨습니다."
루리는 발드로바의 레어로 들어가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었다.
발드로바는 다시 드래곤이 된 상태였다.
그녀는 똬리를 튼 채로 고개를 날개 아래에 처박고 있었다.
약혼식을 계속 망쳤던 발드로바였지만, 그녀의 결정적인 행동이 루리에겐 큰 의미 부여가 되었다.
"설마 그런 작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일방적인 히트 앤드 런을 말입니다."
-....
"그렇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을 직접 읽게 만들어서 쪽팔리게 만든 다음 일방적으로 끝내 버리시다니. 상대 측에서 기세가 틀림없이 끊겼을 겁니다."
-....
"...하지만 그런 의도로 하신 것은 아닌 모양이군요."
진심으로 좋아하던 루리의 표정이 그녀의 침묵에 따라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 갔다.
날개 아래에 얼굴을 감추었던 발드로바가 고개를 들었다.
-짐도... 서약문을 낭독하고 싶었다. 반려자를 맞이하는 자로서....
"...알 것 같습니다."
루리는 애써 외면했던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도 만만치 않은 준비를 한 흔적이 있었다.
페르다가 서약문을 쓰기 위해서 몇 페이지의 종이를 구겨서 버렸는지 그녀는 알고 있다.
'10장이었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1장의 서약문.
많지도 않고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발드로바가 적은 서약문은.
'무려 20장.'
그것도 앞뒤로 빡빡하게 적어 넣어서 20장이었다.
그것을 적기 위해 희생된 종이의 숫자만 해도 3권 분량이 넘어가는 수준이다.
악명 높은 공왕답지 않은 순수한 소녀 감성.
약혼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봤다간 곤란하기 딱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발드로바의 시종으로 몇백 년이나 함께했던 루리였다.
이건 한숨을 한 번 내쉬는 것으로 그칠 만한 수준이다.
"그렇게 좋으시면서 왜 정작 시작하면서 하시지 않은 겁니까?"
-그건....
발드로바의 입이 달싹였다.
-볼 수가 없었다.
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볼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었느니라.
흉악한 드래곤의 얼굴과 목소리로 수줍은 소녀의 대사를 내뱉었다.
-회색 머리에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날렵한 눈매와 부드러운 목소리....
"...."
-그걸 보다가 그만...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느니라.
"...이 루리의 머리도 새하얘집니다."
-그대도 짐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냐?
루리는 당장이라도 고막을 뚫어 버리고 피 토를 해 버리고 싶었다.
"아무튼."
더 들었다간 다시 한번 더 호통을 칠 것 같아 루리는 주제를 돌려 버렸다.
"이제부터 예비 부군께서 안주인의 역할을 시작할 겁니다. 이 성과 산하 영지를 관리할 겁니다."
-그건... 짐 또한 잘 알고 있는 일이니라.
"그리고 인간이란 권력을 잡게 되면, 변하기 시작합니다."
-....
권력.
그 말에 들떠 있던 발드로바도 따라서 차분해졌다.
3황자.
자기 손에 의해 죽은 3황자가 아직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수십 년 전의 일이라고 하지만,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그녀에겐 어제와도 같은 일이었다.
"그것이 필멸의 존재들이 시간을 따라 흐르면서 살아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언제나 실망할 각오를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주인, 위대한 지배자시여."
-알겠다....
발드로바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하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인간을 마주했던 순수한 소녀는 다시 불멸자로 돌아왔다.
경사스러운 날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루리로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개선문을 통과하는 전쟁 영웅이라 할지라도, 한낱 인간임을 자각해야 하듯이.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언젠가 변질하거나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이 드래곤 스폰이자, 발드로바의 충신인 루리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 * *
약혼식을 끝마친 페르다는 곧바로 폐관에 들어갔다.
수치심과 충격을 받아 방에 틀어박히는 것이라 생각하는 루리와 다르게 페르다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를 보면서 느꼈던 이 감정.'
페르다가 막상 낭독문을 쓰고 있을 때의 그는 그저 생각대로 써 내려 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말하게 되면서 페르다는 수면 바닥에 가라앉던 무언가가 떠오름을 느꼈다.
끝엔 낭독문에 없는 사족까지 덧붙여 버릴 정도로.
'어째서 그런 짓을 해 버린 걸까?'
페르다는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을 해 버리면, 분명 당황하리라는 것도.
식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도.
'하지만 해야만 했다.'
그것은 이성적이지 않은 충동으로 기반을 둔 것이다.
지금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늦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그런 충동이 들었고, 페르다는 그 충동에 이끌렸다.
끝내 발드로바를 당황하게 해 버렸고, 약혼식은 예정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페르다는 그 의문을 안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는 오감을 되새김질하며 그때 보았던 것과 느꼈던 감정을 퍼 올렸다.
페르다는 헛다리를 짚지 않게 수십 번을 되뇌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역시 그때였다.'
약혼주를 술을 들이켜기 위해 잠깐 보았던 그녀의 모습에 페르다는 넋이 나갔다.
그때의 감정이 자신을 순간 자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대마법사였던 페르다가 아닌 한 명의 사내, 페르다로.
'하지만 이걸 뭐라 불러야 하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페르다는 최고로 고조되었던 그 지점만을 떠올린다.
오직 그 답만을 얻기 위해 반복하고 반복하기만 한다.
그 순간, 페르다는 꿈틀거림을 느꼈다.
단전 아래에 이미 만들어 놓은 원 속에서 거칠게 회전하는 느낌.
그 원동력은 커지면 커질수록 가슴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레드 서클이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흐르는 급류.
동시에 그를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거친 폭류였다.
'위험하겠는데....'
페르다는 그 정답을 찾는 대신 감각에 집중한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딴생각을 해서 레드 서클의 움직임을 잠재우기.
혹은 그 감정에 집중하여 더욱 격동시키기.
'잠재우는 편이 최선.'
격동시키는 것은 목에 칼을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는 위험한 선택지이다.
그건 대마법사였던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발드로바 공왕에 걸맞은 품격을 만들기 위해선....'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발드로바의 영지에 발을 들인 페르다의 각오였다.
'해 보자.'
페르다는 정신을 일점에 집중시켰다.
두 번째 서클을 만드는 것은 첫 서클을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첫 서클을 만들 때의 그 막연한 어려움은 없어서 더욱 쉽게 묘사된다.
'그만큼 쌓아 올릴 정도로 마나가 없어서 문제지.'
서클을 뚫는 것은 알을 깨는 것과 같다.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선 스스로 껍질을 깨부숴서 증명해야만 한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단단한 부리와 힘.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마나와 정신력이다.
페르다에겐 그 두 조건이 갖춰진 상태.
'우선은 집중을....'
페르다는 눈을 감고 자세를 잡았다.
의식을 저 아래 속으로 떨어트린다.
그와 동시에 오감이 옅어진다.
심장 박동의 소리도, 피부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도 사라진다.
마침내 페르다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 남은 건 온전한 의식뿐이었다.
페르다는 마음속에서 선을 그었다.
그 선이 길잡이가 되어 요동치는 마나는 긋는 선을 따라 움직인다.
마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자연스럽게 새로운 장소로 인도한다.
큰 강에서 만들어진 개울은 점점 커지며, 마침내 새로운 원 형태의 껍질이 된다.
'그렇게 덧씌운다.'
만들어 놓은 원을 감싸는 또 다른 원.
그것의 형태를 천천히 빚으면서 서클의 형상을 뚜렷하게 잡는다.
장정 48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서 빚는 것만을 집중하여 페르다는 완전하게 만들었다.
페르다의 단전 속에 돌고 있는 두 개의 원.
페르다는 2서클의 마법사, 스펠 블로워가 되었다.
"흠...."
며칠 만에 2서클의 마법사가 되었지만, 페르다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감정이 해후되어 버렸군.'
새로운 길이 열리고 2서클이 되며, 페르다의 감정이 해후되었기 때문이다.
그 간질이는 감정은 페르다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느끼는 흥분감도 덩달아 사라졌다.
'이게 레드 서클의 단점이긴 하지.'
더 큰 자극을 바라야 하고, 자극이 사라지면 정체된다.
그러니 감정에 잡아먹히는 괴물이 되거나, 되도 못 한 것이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다시 느껴 보면 그만이다.'
비록 그 해답을 알아내지 못해 아쉬우나 조급함은 없었다.
다시 그녀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 이 감정은 다시 한번 더 벅차오를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페르다는 미소를 지었다.
* * *
"틀어박힌다고 하셨을 때, 예상은 했습니다만... 그새 2서클이 되신 겁니까?"
"그렇게 됐다."
사흘의 시간 안에 2서클에 도달한 마법사.
이곳에 온 지 고작 한 달 하고 조금 됐을 텐데, 그는 일반인에서 순식간에 2서클이 되었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성장력.'
고작 해 봐야 2서클 따리임에도, 성장치만 놓고 보면 경외할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제 여기가 내가 집무할 곳인가?"
"예. 어디까지나 대행으로서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요."
페르다와 루리가 서 있는 곳은 공왕의 집무실이었다.
갈색 고목으로 인테리어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집무에 있어서 최적화되었는데, 동시에 그 사람의 위엄조차 묻어 나오는 공간이었다.
페르다가 그곳을 첫발을 디뎠을 때, 앞에는 틀림없이 왕이 있을 것이라 착각해 버릴 정도.
그 정취를 느끼던 페르다가 루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약혼자가 된 지금부터는 뭘 하면 되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인재 등용입니다. 공왕께서 활동을 시작하시니 그 자리를 채워 넣어야죠."
"그래 들었지. 그런데 그걸 내가 독단적으로 정할 수 있는 건가?"
"물론 페르다 님은 안 됩니다."
루리가 테이블에 올려진 것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가능합니다."
발드로바 공왕의 옥새였다.
옥새에는 그 사람이나 다름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괜히 옥새를 왕 보듯이 하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인재 등용이라...."
지금 당장에 누굴 뽑으라고 한다면, 시간을 달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적어도 이틀의 여유를 가지며 천천히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 있군."
그러나 페르다의 펜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12화. 더없는 적기로군
인간의 기억은 유한하며 불안정하다.
하지만 숨을 쉬는 것을 잊지 않듯이 반드시 기억하는 게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페르다의 경우에는 증오하는 대상이었다.
그냥 이름이 아닌 자신이 증오하고 복수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 목록, 즉, 살생부였다.
증오하기 위해 그들의 업적을 파고들었다.
복수하기 위해 그들에 대한 흠을 눈여겨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청 터무니없는 짓이긴 하군.'
거기에 증오하게 된 이유를 떠올리면 피해망상으로 가득하다.
얼굴을 붉힐 정도로 좀스러운 일이었다.
'어찌 됐건 과거로 돌아온 지금으로선 좋은 정보들이 되었지.'
페르다는 미래에 거물이 될 자들의 약점과 강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만약에 이런 일을 했더라면, 더 잘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인재들.
다른 재능에 좀 더 빨리 눈을 돌렸더라면 대성했을 그런 인물들.
'출중한 인물들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 인물들을 모두 뽑자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탐이 나는 인간의 숫자만 해도 100명이 넘어가는데, 그들 모두가 어우러져서 활동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일단 우선순위를 정해야겠군.'
공왕의 약혼자이자 대행이 된 지금 페르다는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았다.
'발드로바 왕령 전체는 현재 방치된 상태다.'
공왕은 직접 나서지 않고 영주들에게 자치를 맡겼다.
영주들을 감시할 사람이 없었으니, 그로 인해 민심이 많이 기운 상태.
'민생 쪽을 살피는 일을 해야겠지.'
그렇게 페르다가 할 일이 정해졌지만, 결정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왕이 지방 영주에게 간섭해서 반발하거나 내전이 일어나는 일은 빈번하니까.
'그 점은 원만하게 해결됐으니 상관은 없지.'
페르다는 서신을 보냈을 때만 해도 당연히 윗머리들이 반발할 거라 예상했다.
물론 그 예상은 화려하게 빗나갔고, 페르다는 남은 14명의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받았다.
'효수해서 성문에 걸어 놓는다는 루리의 행동이 제대로 먹혀들었던 모양이군.'
영주들은 페르다를 무시해선 안 된다는 걸 인지했으니, 지금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내부는 일단 그 정도로 해 두고, 이제 외부의 위협인가?'
대표적인 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몬스터들과 마물들.
공왕의 영역은 마왕으로 인해 오염된 대지를 인근에 둔 극동부 지역.
그에 인접한 이 지역도 점점 오염이 번지고 있었다.
'그 주된 원인 중 하나는 마물.'
마기에 빚어지거나 오염된 마물은 어디에나 있는 그런 부류의 몬스터다.
심지어 중부 대륙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녀석들인데, 마의 땅이 걸치고 있는 극동부에서는 당연히 더 많이 보일 수밖에 없는 생물이다.
'마물의 존재는 대지를 오염시킨다.'
마물이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대지 황폐화는 가속화한다.
생명은 꽃피울 수 없으며 존재하는 생물조차도 오염시키는 존재.
그렇기에 어딜 가든 마물 퇴치 의뢰는 항상 긴급으로 진행된다.
'그 마물들로부터 사상자와 토지 오염을 줄일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식량도 늘어나게 될 것이고, 민생도 회복될 것이다.
바깥주인인 발드로바가 외부의 위협을 막는다면, 페르다는 내부의 위협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역시 기술.'
잘 훈련된 병사뿐만이 아닌 민간인들도 효과적으로 마물을 사냥할 수단들을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페르다는 그것을 기준으로 두고 살생부 속에 있는 인물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해서 추려 낸 인물은 총 4명이었다.
"그러니 이 인물들을 최우선으로 섭외해야 한다."
페르다가 건넨 종이를 보는 루리는 그 이름들을 확인했다.
-버넬 마르퀴스
-제드 스왈로우
-에키드나 필리아즈
-헬루스 포비다스
루리는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인간들의 이름이 적혀 있군요."
"모를 수도 있는 일이지. 지금은 두각을 내지 못한 인물들이니."
"인재를 등용하라고 했지, 동네 친구들을 불러서 관직 놀이하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루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루리의 감정이 묻은 드래곤 피어가 페르다를 감싸고 있었다.
'변화가 확실히 있긴 하군.'
약혼식을 마친 이후로는 드래곤 피어에 대한 효과가 확실히 약해졌다.
그래도 께름칙한 건 여전했다.
14살쯤 돼 보이는 여자가 노려보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자네는 내가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나?"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더 그렇습니다."
"모순되는 말을 하는군."
"아무튼, 이 인간들에 대해서 이야기라도 해 주시겠습니까? 헬루스 포비다스를 빼면 3명은 제가 듣도 보도 못한 사람입니다."
헬루스 포비다스는 물의 현자라 불리는 마법사다.
그가 하는 조언은 무척이나 지혜로워 왕과 영주들이 그를 아낀다고 세간에 알려졌다.
"장담하는데, 헬루스 포비다스보다 위에 있는 세 명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말씀을 해 보시죠?"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이 버넬 마르퀴스는 에스콜레이아라는 도시에 산다."
도시 이름을 듣자, 루리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학자입니까?"
"그래."
에스콜레이아는 대륙 중동부 쪽에 있는 도시로, 학자들의 도시로 통한다.
양계장에 가는 이유는 닭이나 달걀 찾는 것밖에 없으니, 루리는 단번에 학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학자들에게는 칭호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
"아카데미에서 졸업하게 되면 받는다고는 들었습니다. 그거랑 뭔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있다. 이놈은 '엉망진창'이라는 칭호를 받은 놈이니까."
"저희 성을 개판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입니까? 약혼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내시는 건 좋지 않은 선택입니다만?"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학자들의 칭호인 만큼 부정적인 단어는 잘 쓰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데 대놓고 엉망진창이라고 불린다는 건, 주변 사람들도 못 참을 정도라는 뜻.
"그런 칭호를 받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것을 한다는 것이지."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는 건 시도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물론이지. 하지만 그걸 끊임없이 시도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는 건 바보 아닙니까?"
"신념이 있는 사람이지."
"우직한 바보군요."
부정할 수 없었다.
페르다도 그를 처음 봤을 때는 바보라고 생각했으니까.
주변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만의 길을 걷는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고고했다.
'그렇게 우직한 바보는 해내고 만다.'
모두가 안 될 것이라 저주해도, 시간 낭비를 한다고 비난해도, 그가 정성껏 걸어온 외길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때의 그는 항상 이런 후회를 입에 담아 왔다.
-좀 더 연구를 많이 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쯤 더 많은 것들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당연한 일이다.
'어떤 바보가 성공할 수 없는 것에 투자한단 말인가?'
설령 돈을 허공에 뿌리고 다닐 만큼 돈이 많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엉망진창이라는 칭호를 가진 바보를 지원하는 멍청이가 되고 싶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다는 이 남자를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뭘 연구하는 인간입니까?"
그는 훗날,
"마물 사체를 활용한 마력석 정제 및 동력원 가공법."
마도공학의 시대를 열게 될 선구자가 될 사내이다.
* * *
중앙에는 지식의 나무라 불리는 하늘을 찌르는 세계수 한 그루와 그 중심으로 5개의 대서고가 에워싸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 있어 햇빛 한 점 잘 들지 않는 곳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지식의 나무에는 잎사귀가 자라지 않아 사실상 거대한 기둥과 다름없었다.
그 기둥 아래의 도시에는 전형적인 물 냄새, 퀴퀴한 냄새 대신 커피와 홍차가 지독하리라 만큼 진하게 풍겼다.
그 냄새에 익숙한 수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람 하나가 움직일 거리를 어떻게든 순환로로 만들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전부 옆구리에 책 세 권씩 끼고 있으며, 입에는 갓 구운 토스트를 물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군요."
"모든 학자와 그 고용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이렇게 좁은 곳에서 살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을 안주하는 것보다 더욱 큰 가치를 찾는다더군."
"이해를 못 하겠군요."
"나도 마찬가지다."
페르다와 루리는 거리를 스윽 둘러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수백 명이 몸을 부딪치며 움직이는 중이다.
전부 검은색 로브에 열에 아홉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여기서 이제 한 명을 찾는 겁니까?"
"그렇지."
"한 달은 넘게 걸리겠습니다."
숨은그림찾기 난이도로 치면 극상에 가까우리라.
막막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인 만큼, 노점상들도 벽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 위주로 판매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강물 흐르듯이 움직이면서 스쳐 지나가듯이 하나씩 사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노점상들이면 알지도 모르겠군.'
페르다는 그렇게 생각하고 루리를 보았다.
"...."
그녀의 눈빛이 평소에 보던 것과 사뭇 달랐다.
사무적이고 무표정한 얼굴.
화가 날 때를 빼면 그 어떤 표정도 보여 주지 않았던 그녀의 또 다른 표정이었다.
그녀는 과일 절임을 팔고 있는 노점상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눈동자에는 은빛이 반짝였다.
한참을 그렇게 보더니 가느다란 목이 위아래로 꿀렁였다.
꿀꺽
그녀가 보인 일련의 행위는 한 가지를 의미했다.
"먹고 싶나?"
"...저를 뭐로 보십니까?"
루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볼멘소리를 냈다.
평소보다 더욱 동요한 반응이다.
"저는 단지 저쪽에 있는 노점상이 뭔가를 알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번 물어보는 게 좋겠군."
페르다는 루리와 함께 그 노점상 쪽으로 향했다.
루리의 눈은 과일 절임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실례하지."
"귀공자와 귀여운 메이드 꼬마 아가씨로군. 뭐 드릴까?"
"사람을 한 명 찾고 있다. 혹시 알고 있으면 좋겠군."
"사람? 여기 지천으로 널린 게 사람이우, 사람! 여기에 있는 안경쟁이만 수만 명이고, 내게 과일 꿀 절임 꼬치를 사 가는 놈들만 해도 수천 명이 넘는데,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을 하겠수?"
노점상이 기대를 머금은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페르다는 유리막 너머에 있는 과일 절임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꼬치를 좀 사면 기억이 돌아올 것 같은가?"
"하하, 그래 주면 고맙지! 그래도 일단 이야기는 들어 봅시다. 누굴 찾으시는 거요?"
"엉망진창이라 불리는 학자일세."
노점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엉망진창 말이오? 그러면 빨리 얘기하지 그랬소?"
"알고 있나?"
노점상이 씨익 웃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이 도시에는 수십만이 넘게 살고 있소. 하지만, 그중에서 '엉망진창'이라 불리는 남자가 어디에 사는지 모르면 간첩이요. 길 가는 사람들 잡고 물어보쇼. 아마 다 알 거요."
"그러면 굳이 그 과일 절임을 살 필요가 없겠군그래?"
"...!"
그 대화를 듣고만 있던 루리가 갑자기 흠칫하고 떨었다.
"그래도 약간의 성의를 보여서 사는 게 좋지 않겠소? 행색을 보건대 돈도 많으신 나으리 같으신데.... 가끔 이런 군것질도 즐거운 법이오? 동화 5개에 꼬지 세 개 주겠수다."
"맞습니다. 호의를 베풀었으면 그에 맞는 보상을 하는 것도 중요한 법이죠."
루리가 슬쩍 끼어들어 상인 편을 들었다.
호의를 보였으면 그에 맞게 답해 주는 것이 도리.
페르다도 그 부분은 동의했기에 과일 꿀 절임 꼬치 3개를 구매했다.
"먹어라."
끈적한 꿀 덩어리들을 루리에게 건네주었다.
"페르다 님은 안 드십니까?"
"난 애가 아니다."
"하? 저도 애가 아닙니다만?"
"알고 있다."
"그러면서 저한테 전부 주는 건 웃기지 않습니까? 애 취급하는 거지 않습니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할 겁니까?"
"그래서 먹기 싫으냐?"
"...."
루리는 무척이나 분한 얼굴을 하면서도 페르다가 쥐고 있는 꼬치를 받아 들었다.
루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꿀 범벅이 되어 있는 열매를 쏙 빼 먹었다.
은색 눈동자가 더욱더 밝게 반짝였다.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녀석이었군.'
페르다는 루리가 자신처럼 감정이 메말라 버린 녀석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겉보기에 어울리는 애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과일 꿀 절임을 하염없이 입속에 쑤셔 넣고 있던 루리의 볼은 가을철의 다람쥐처럼 빵빵해졌다.
페르다의 시선을 의식해 눈을 굴렸다.
은색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좁혀지더니 컵을 가슴 쪽으로 잡아당긴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안 줄 겁니다?"
"안 먹는다."
* * *
모든 생물에겐 계급이 있고, 부유한 사람이 있으면, 빈곤한 사람도 있다.
지식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념 아래에 건설된 에스콜레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에스콜레이아에도 부유가가 있으며, 동시에 빈민가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빈민가 중에서도 최빈층이 사는 구역도 또 따로 있다.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으며 하수구와 쥐똥 냄새가 들끓는 그런 곳.
악취가 끊이지 않아 함부로 문 열기도 두려운 그런 장소.
버넬 마르퀴스가 사는 장소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루리는 자기 신장보다 낮은 곳에 있는 창문을 보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용케도 사는군요."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살 수 있다. 화장실에서도 잘 수 있더군."
"로스노바 가문에선 그런 생활을 하셨습니까?"
"그땐 더 지옥이었지."
돈이 없었던 시절, 돈 밝히는 스승한테 모든 돈을 뜯겼을 당시였다.
페르다는 그때 사람은 똥내와 오줌 지린내가 올라오는 화장실에서도 잘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안에 있는 것 같나?"
루리는 페르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기척이 느껴지긴 합니다."
와장창!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난잡한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첨언했다.
"그리고 뭔가 한바탕 진행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선객이라...."
지금 들어간다는 것은 곧 트러블에 휘말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없는 적기로군."
페르다는 그대로 뒷짐을 지면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13화. 계산은 철저하게
버넬 마르퀴스.
나이 27세.
베리타스 아카데미의 525기 졸업생.
부여받은 호칭 '엉망진창'.
거주지 에스콜레이아의 슬럼가 반지하(전 거주자는 못 버티고 일주일 만에 뛰쳐나감)
지니고 있는 자산 금화 72개.
"내 돈 언제 갚을 거야, 이 새끼야!"
-72개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덩치 큰 사내 둘, 그리고 비교적 덩치가 작지만, 얼굴이 험악한 남자.
그리고 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로 그들의 만행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벌벌 떨었다.
커다란 안경을 쓰고 몸이 빈약한 사내는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저,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십시오.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실험이라서 결과가 조금 더 늦을 것 같습—."
"장기는 얼마나 더 장기로 해 달라고? 1년 줬잖아? 1년 안에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서?"
"나, 나올 수 있다고 해, 했죠. 하지만 그 마물 사체를 수집하기도 어렵고 제가...."
"아아."
사채업자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끊어 버렸다.
"변명은 필요 없다. 그래서 지금 걸로 돈으로 바꿀 수 있냐 없냐?"
"그, 그게 아마 돈은 안 될 겁니다.... 여전히 변수가 존재해서...."
"하아...."
버넬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남자는 사채업자였다.
은행에서 신용 대출도 받지 못하는 놈들에게 고금리로 돈을 빌려준다.
대부분 연구가 끝나기 전에 가로채는 것이 바로 그들의 목적.
"내가 씨발 똥을 제대로 밟았구나."
눈을 딱 감고 버넬 마르퀴스에게 빌려준 돈을 회수도 못 하게 생겼다.
사채업자가 다 해진 의자를 자신의 앞으로 끌고 와 앉아 시가를 물었다.
"좋아. 빚 갚는 거 좀 더 유예해 줄게."
"저, 정말입니까?"
"네가 지금 연구하는 걸 포기한다는 조건이다."
"...예?"
사채업자가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보니깐 아카데미에서 1학년 때는 좀 날랐다며? 성적표 보니깐 클래스가 아니라 기수 전체에서 수석이었더구만?"
"아, 네, 그때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대충했던지라 수석을 먹긴 했습니다만...."
대충이라.
수석이라는 자리를 대충이라고 표현하는 놈은 이놈밖에 없다.
"그러니깐 다른 거 하자고. 다른 거 대충해서 성과를 만들면 될 거 아냐? 내가 너 말고 다른 따라지들한테 받은 프로젝트가 몇 개 있거든? 그걸 너한테 줄 테니깐 마무리해서 가져와. 그러면 빚은 없던 걸로 하는 거야. 어때?"
"저... 다른 실험이랑 병행할 수는 없습니까? 그 정도라면-."
투웅!
단검이 바닥으로 날아와 정확하게 고간 앞에 꽂혔다.
"히이익!"
"좋게 이야기하니깐 눈에 뵈는 게 없네. 요즘은 그놈의 인륜이라는 거 때문에 장기값이 아주 비싸다고 하더라고. 그 얼마 받는다고 하더냐?"
"최소한 숨만 붙는 조건으로 하면 이자는 전부 갚을 것 같은데요?"
"어때? 장기 팔고. 넌 하던 실험 계속하는 거야. 그러긴 싫지?"
"네, 그건 좀...."
"그럼 연구 포기하고 내 걸 해."
"그것도 좀...."
퍼억!
사채업자의 발이 버넬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이 새끼가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야!?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그럼 뒤져 이 새끼야! 살 가치도 없는 개 같은 새끼!"
"윽! 윽! 윽!"
무력하게 웅크리며 구타를 받는 버넬.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는 속으로 절규했다.
'누가, 누가 좀 구해 줘요!'
시궁창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장미를 바라는 그의 기도는 언제나 닿지 않았다.
"그쯤 하지."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덩치와 사채업자의 구타가 멈추었다.
자신들이 부수고 들어온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버넬도 그들 따라서 시선을 들었다.
"거,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끼어들어서 미안하게 됐다만, 그만뒀으면 좋겠군."
버넬이 그토록 바라던 구원의 빛줄기.
그 색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아아....'
버넬은 절망했다.
그 사내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버넬을 구해 줄 리가 없으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구타하고 있던 사채업자가 자기 머리를 쓸어 올리고, 혀를 날름거렸다.
"행색을 보니 어디서 오신 도련님 같은데, 지금은 방해하지 마쇼."
"미안하네만, 방해를 좀 해야겠군."
그 회색 머리의 남자는 버넬,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사내에게 볼일이 있어서 말이지."
* * *
페르다가 반지하로 들어갈 때쯤에는 이미 구타가 진행되고 있었다.
주인을 문 개처럼 처맞고 있는 모습을 본 페르다는 이렇게 생각했다.
'타이밍도 참 좋군.'
한창 구원의 빛줄기를 바라고 있을 상황 속에서 등장할 수 있다니 말이다.
"그쯤 하지."
그렇게 페르다는 사채업자의 구타를 멈췄다.
버넬은 뒷전이 되고, 사채업자는 삐딱한 자세로 페르다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에스콜레이아에 있는 범생이 자식들과는 좀 다른 부류인데... 타지인이오?"
"그래. 타지에서 왔지."
"저 자식이 당신한테도 돈을 꿨나?"
"아니."
"그럼 차례는 지키쇼. 내가 선객. 저놈 손 좀 봐 주고 난 뒤에 만나든 해."
"친절하기도 하군. 내가 그 돈을 청산해 준다면 어떤가?"
약간의 침묵.
사채업자가 미묘하게 걸리는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이자까지 합쳐서 금화 72개요. 갚을 수 있소?"
"물론 가능하다."
"그럼 돈만 갚으시오."
금화 72개.
발드로바 성의 영주가 된 페르다로선 그 돈이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다.
먹던 갈비를 던져 주듯이 쉽게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페르다의 푸른 눈이 굴러 웅크리며 피를 흘리는 버넬을 향했다.
그의 모습을 본 페르다가 이렇게 제안했다.
"이렇게 하지. 이놈 패 잡고, 기물 파손으로 깎아서 50개로 땡처리하는 거야. 어떤가?"
사채업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미치셨소? 우리가 부순 것만 해도 금화 3개밖에 안 하는 물건들이오"
"그런가? 그러면 49개만 받아 가게. 자네가 두들겨 팬 그 남자를 금화 20개 정도면 거저 주는 거니까."
"돌았소? 좀 친목을 다졌다고 금화 20개를 태우라고?"
"협상 결렬인가?"
"협상이고 나발이고 갈취하는 거지 않소?"
"결렬이군 그래."
페르다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면 자네들도 그대로 돌려받아서 청산하도록 하게, 루리."
뒤에 서 있던 루리가 움직여 앞으로 나왔다.
"정확하게 똑같은 상태로 만들어 주게."
"...."
"약속은 이행할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하아, 알겠습니다."
은발 사이드 테일 업의 메이드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왔다.
"뭐야 꼬맹이?"
"이런 빈민가에서 꼬맹이를 데리고 다니는 도련님이라니, 바보 아냐?"
덩치들은 음흉하게 비웃었다.
커다랗고 교양은 쌓지 못한 그들과 다르게 사채업자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 꼬맹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 꼬맹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 심상치 않은 꼬맹이가 감추고 있던 힘의 일부를 꺼내었다.
꼬맹이의 은색 눈동자가 이채를 발하였다.
삐이이—!
그들의 귀에서 동시에 울리는 이명.
"윽!"
"으억!?"
"무, 뭐야?"
덩치와 사채업자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억... 어억...."
"모, 몸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게 고작.
몸은 돌덩이가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루리는 그들을 스윽 보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덩치 쪽으로 다가갔다.
"우선 네놈부터 손 좀 보겠습니다."
루리가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덩치 한 명을 이루는 공간이 신기루처럼 일그러지더니.
퍼퍼퍼퍽!
마구 난타하는 소리가 터지더니 덩치가 쓰러졌다.
"우욱 우우욱...."
온몸에는 멍투성이에 코피를 질질 흘리며 바닥에 신음한다.
딱 버넬이 당한 만큼 됐다.
'뭐야 저건?!'
아직 서 있는 덩치와 사채업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의 세계에선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눈이 다른 덩치 쪽을 향했다.
"다음은 네놈."
"어어...?"
퍼퍼퍼벅!
사채업자가 그 현상을 두 번째로 보고 있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얼굴이었다.
공기가 일그러진 후에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구타.
'마법!'
파악했지만, 그 파악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법이긴 한데! 저런 마법이 있다고?'
소녀가 구사하는 마법은 마법진도 없고, 그냥 손가락을 휙 휘두르는 것뿐이다.
저런 파괴력이 나오는 마법을 구사한단 말인가?
"다음... 할 것도 없고 네놈이군요."
"으... 으아아!"
사채업자가 최후의 발악을 해 본다.
부들부들 떨면서 굳어 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 드는 것이다.
그의 시야 앞이 일그러졌다.
퍼퍼퍼벅!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사채업자.
두둑!
"아악!"
한 번 더 터지는 비명.
넘어지면서 그의 오른손 검지가 꺾여 버린 것이다.
"악! 내 손가라아악!"
계산에도 없었던 변수가 발생한 상황.
"개새끼야! 똑같이 만든다며! 손가락은 아니잖아!!"
지랄 발광을 해 대는 사채업자.
보였던 험악한 얼굴로 어린애 땡깡을 부리고 있었다.
사채업자의 대장은 첫 밑 자금 마련을 공갈 협박으로 시작했었다.
그 진가가 지금, 이 순간 발휘되는 중이다.
참으로 기가 찬 순간이었지만, 페르다는 아니었다.
"그러게. 참으로 곤란하게 됐군."
페르다의 표정은 심각하게 되었고, 그것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사채업자는 묘하게 쎄한 감각을 느꼈다.
"자네는 자네만 손가락이 꺾여서 뭔가 불공평하다, 이 말이겠지?"
"그, 그래, 이 개새끼야! 손가락 어쩔 거냐고!"
페르다가 루리 쪽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신사분께서 억울하시다는군."
"알겠습니다."
그 억울함을 달래는 방법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는 것.
혹은 그와 똑같은 짓을 하는 것뿐이다.
페르다는 보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뽀각!
"끄아악!"
뽀각!
"으아악!"
다른 두 덩치의 손가락도 그대로 똑같이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일단락되었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던 루리.
"루리."
페르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예."
"아직 남지 않았나?"
"...진심입니까?"
루리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고,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은 철저하게 해야지."
루리는 이해를 못 하겠단 얼굴을 했다.
철저하게 계산을 해야 한다면 아직 한쪽이 남았다.
"어...?"
버넬 마르퀴스.
뽀각!
"끄아악!"
그대로 버넬의 검지마저 부러트렸다.
땡깡을 부리던 사채업자도, 그 부하들도 그 광경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뭐, 뭔데?'
'저 범생이 자식 손가락은 왜 꺾어?'
'버넬의 편인 거 아니었어?'
뼈가 울리는 고통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공평하게 가자고 해서 버넬마저 손가락을 꺾어 버렸다.
그들 전부가 똑같은 상태가 되도록 말이다.
'미친 개 또라이 같으니!'
거기서 페르다를 향한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페르다는 그들의 상태를 스윽 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에는 된 것처럼 보이는군. 너무 과하게 처벌받았다 싶은 애들이 있으면 말하게."
페르다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전부 공평하게 처리해 줄 테니 말이야."
"어, 없습니다!!"
"이,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가?"
페르다는 루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치마 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었고, 페르다는 그 주머니를 사채업자에게 던져 주었다.
정확히 금화 69개, 물건값은 뺀 것이었다.
"그러면 빚도 청산했으니 이제 나가도록 하게."
"가, 감사합니다."
그들은 뒤도 보지 않고 냅다 줄행랑쳐 버렸다.
그들이 사라진 곳을 보던 페르다가 루리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마법에 능숙하군."
"기본 중의 기본을 썼을 뿐입니다."
"그 기본 중에 치유 마법도 있나?"
"어느 정도 할 줄은 압니다."
"그러면 저기 뒹굴고 있는 버넬을 좀 치료해 줬으면 좋겠군."
"끄으윽... 됐습니다."
고통에 신음하던 버넬이 손을 휘저었다.
"회복 마법을 너무 많이 받으면 나중에 회복 마법에 내성이 생깁니다. 나중에 정말로 필요할 때, 회복 마법이 안 들어가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안 되니까... 이 정도는 참겠습니다."
"학자답게 이성적인 판단이로군."
버넬은 그대로 자기 손가락을 잡았다.
"끄으으윽...!"
두둑!
제자리로 돌리고 난 후, 다시 한번 더 까닥인다.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후우...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손가락을 꺾긴 했습니다만....
그 말을 목구멍 너머로 집어삼키고 페르다에게 묻는다.
"귀하의 이름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페르다 발드로바라고 한다."
"발드로바? 그건 레드 드래곤의 이름이지 않습니까?"
"맞네. 그분의 반려가 될 사람이지."
"응? 서, 설마?! 그 공왕과 약혼했다는 것이 바로...?"
버넬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다시 무릎을 꿇고 그대로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 그 고고공왕의 부군을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아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신경 쓰지 말게."
"그리고 아직은 부군이 아닙니다. 발드로바의 성만 쓸 뿐이죠."
루리가 슬쩍 끼어들어 정정했다.
버넬이 자기소개했다.
"저는 버넬 마르퀴스라고 합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엉망진창이라 불리는 학자고요. 틀림없이 아시고 오셨을 테지만요. 하하...."
"그래, 자네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다네."
"그런 못난이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오셨는...지요?"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건 귀찮으니 직설적으로 말하지. 자네가 하는 연구에 관심이 있어서 그렇다네."
"제, 제 연구 말입니까?"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도 바보 취급을 했던 자신의 연구에 관심이 있다니?
"발드로바 성에 오면 자네가 지금 하는 연구에 무조건 지지를 약속하지."
"예?"
"원하는 재료, 연구 비용, 시설, 따지지 않고 지원하겠다는 말이다."
"허, 허억!"
무조건 지지.
학자 중에서 그 누구도 받아 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지원 조건이었다.
그래서 기쁘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저기서 어떤 조건을 걸고 자기에게 하려는 것인가 하고.
버넬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조조조, 조건이 무엇입니까?"
"자네의 연구. 그걸로 무기를 만들 것이네."
버넬의 표정이 굳었다.
"무기...말입니까?"
"그래. 자네의 연구로 말이야."
방금 전까지 좋아라 쾌재를 불러 대던 버넬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습니다."
"자네 빚을 탕감해 준 사람에게 할 소리인가?"
"제,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건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평화로운 세르데스 대륙을 원합니다.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순조롭지 않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버넬 마르퀴스는 평화주의자니까.
"전쟁의 도구는...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 뿐입니다. 그러니 제 은인이라도 그건 할 수 없습니다."
페르다는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자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꾸지 않을 생각이로군?"
버넬은 그 말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죽이겠다느니, 불구로 만들어 버리겠다느니 협박은 숱하게 들어왔던 버넬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죽음이 자신의 등 뒤에서 포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게."
페르다가 검지로 먼지가 자욱한 바닥을 쓱 쓸었다.
"자네가 이렇게 쥐 시궁창 같은 곳에서 속 편하게 연구만 하는 건 누구의 덕이라 생각하나?"
"이건 제가 선택한 겁니다."
"아니지. 자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자네처럼 하찮은 것이 선택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네."
버넬은 슬쩍 긴장하고 말았다.
지금 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선명하게 깃들어있었다.
"나의 반려가 될 발드로바 공왕께서는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전선을 나가신다네. 이 도시쯤은 우습게 파괴하는 그런 마물들과 싸우시지. 그럴 때마다 무엇을 걸 것 같나? 약간의 영토? 극동부의 영지민들? 아니면 내 목숨?"
페르다는 자기 가슴에 손가락을 찌르며 답했다.
"아니, 자기 자신을 걸고 나간다네. 자네가 그 같잖은 신념을 위해 적들에게 목숨을 버리지만, 그분은 목숨을 숭고한 검으로 삼아 적들을 베어 평화를 만들고 있다네."
페르다는 전선에 나가 싸우는 발드로바의 모습을 항상 지켜보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그 모습을 몰래 눈에 담았다.
지금 이 순간 발드로바의 모습이 다시 페르다의 눈에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페르다의 손가락은 무심코 자신의 가슴을 후벼 팔 정도였다.
무력하게만 지켜봐야 하는 그에게 남는 것은 죄책감이었다.
"그러니 난 그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라네."
페르다의 눈 깊은 곳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그러니 자네의 생각이 어찌 됐든 간에 나는 자네에게 무기를 만들라고 할 것이고 말이야."
14화. 제비덫
버넬은 마이 웨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 좁은 아카데미 속에서도 그는 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고, 수재에서 낙제생 언저리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그런 마이웨이의 버넬조차도 이 남자 앞에선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압도적인 아우라....'
깊은 심연의 나락으로 들어가는 듯한 눈동자.
하지만 그것은 텅 비어 있지만은 않고, 발드로바를 향한 애정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그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만 같은 그런 사람.
버넬은 자신의 목숨을 잃을 것 같은 지금 상황에 입을 열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걸로 제 신념이 흔들릴 거라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인 법.
버넬은 그런 협박을 했다고 해서 당장에 자신의 마음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으아아! 주주죽는 거 아냐?'
버넬은 그대로 눈을 감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손가락을 비틀까?
아니면 사채업자처럼 복날의 개처럼 두들겨 팰 작정인가?
페르다의 손이 버넬의 어깨에 닿았다.
"알겠네."
페르다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지가 멀쩡한 버넬이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어, 그, 예?"
"알겠다고 하지 않았나?"
"...끝입니까, 그게?"
"그래.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네. 난 자네를 오늘 하루 만에 설득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 그, 그렇군...요?"
페르다는 루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루리는 폭이 넓은 치마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었다.
"받게."
"이게 무엇입니까?"
"임명장."
"임...명장?"
"자네를 우리 발드로바 성에서 공식적인 수석 연구원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적힌 임명장이지. 조건은 내가 말한 그대로 갈 걸세. 바뀌는 건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뿐이지."
페르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발길을 돌렸다.
"천천히 생각하게. 그리고 결정했다면 언제든지 공왕령에 오게. 가지."
"예."
페르다와 루리가 그대로 문밖을 나섰다.
질척거리지 않고 정말로 사라진 것이다.
그가 남기고 간 임명장이 또르르 굴러 버넬의 발치 앞까지 굴러왔다.
홀로 남은 버넬은 그것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 * *
"버넬이라는 그자, 정말로 믿어도 되는 겁니까?"
마차 안, 반대편에 앉아있는 루리가 물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과일 꿀 절임 꼬치가 들려 있었고, 왼손에는 컵 5개 정도가 그녀의 입안에서 처형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도 된다."
"그런 이상론자들은 아집을 무덤까지 끌고 갈 텐데요."
"만들 거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평화를 원하는 자는 언제나 전쟁을 준비하는 법이라 했으니까."
"누굽니까, 그런 말을 한 녀석은?"
누구긴.
'그놈이다.'
페르다가 보았던 미래의 버넬 마르퀴스가 그렇게 말했다.
지독한 평화주의자 행세가 얼마나 위선적인 행위였는지 그는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영입했다고 가정하고... 다음은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페르다는 당연히 다음 목적지도 정해 놓았다.
"할림으로 간다."
"할림이라면... 남부에 있는 유흥의 도시지 않습니까?"
루리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 썩어 있었다.
평소에도 받는 시선이 좋지 않았지만, 이젠 벌레와도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도 그런 게 그 도시는 타락과 유흥의 성지이기 때문이었다.
"경유할 거면 다른 도시로 잡으십시오."
"아니, 거기가 종착지다. 그곳에 내가 찾는 사람이 있으니까."
"유흥지에 있단 말입니까?"
"틀림없이 있을 거다."
"사심 하나 없는 거 확실합니까?"
"없다."
루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페르다를 보았다.
페르다가 하는 말이 거짓 한 점이 없다는 것이 루리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수상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인간이 정직하고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누구를 찾으러 가는 겁니까?"
"제드 스왈로우다."
루리가 쥐고 있는 명단에 적혀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자는 뭐 하는 인간입니까?"
"제비족이다."
"...제비족?"
"그래."
약간의 침묵.
루리는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점검하고는 그에게 다시 묻는다.
"...귀족이나 부유층 아낙네들 꾀어서 사기 치는 망나니 자식 말입니까?"
"그리고 도박꾼이지."
"...."
"왜 그렇게 보나?"
말을 이어 갈수록 썩어 들어가는 루리의 표정.
짙은 어둠과도 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히히힝!
"어어? 말들이 갑자기 왜 이래?"
급기야 죄가 없는 말을 놀라게 만들어 버렸다.
이유 없이 날뛰는 말 때문에 가는 길이 험난해질 것 같은 상황.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고 못다 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적안족이다."
루리가 뿜어내던 아우라가 쏙 들어갔다.
그녀가 보인 감정은 놀람에 가깝다.
"적안족이라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 혈통을 지닌 족속들이 맞습니까?"
"맞다."
"사변으로 인해 멸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그것이 세간에 알려진 정보지."
세간이라.
루리는 단순히 세간이라는 단어로 가볍게 넘어갈 레벨이 아니라는 걸 안다.
적안족이 살아 있다는 조짐이 보였다면 곧바로 보고가 올라왔을 터.
그렇다면 루리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루리가 대놓고 물어본다.
"그냥 알고 있는 거다."
자세한 내용은 회피했다.
깊게 파고들고 싶지만, 루리도 그 이상 물어볼 명분이 없었다.
'제비족에 도박꾼... 하지만 적안족.'
정말 미묘한 밸런스였다.
버넬 마르퀴스로 따지면 그보다 최악의 인간이며, 동시에 최고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해야 하나, 찬성해야 하나.'
선택의 기로에 선 루리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뇌가 죽지 않도록 꿀 절임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면서 더욱 활발하게 돌려 본다.
페르다는 그녀가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거들어 주기로 했다.
"남부 지방이라 달콤한 디저트를 많이 판다고 하더군."
"일단 가 보도록 하죠."
* * *
남부는 1년 내내 더운 지방으로,
작열하는 태양으로 인해 대지가 메말라 극남부 지방으로 가면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존재하지 않는 극열의 사막이 펼쳐진다.
할림은 그런 남부 지방의 특색을 살려서 만든 유흥 도시였다.
낮은 덥지만, 밤은 선선하여 밤 문화가 발달하였고, 많은 귀족과 부유층들이 방문한다.
에스콜레이아에서 커피와 홍차 냄새가 많이 났다면, 여기서는 달달한 설탕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온다.
페르다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루리의 코는 하루 종일 즐겁기만 했다.
페르다가 향한 곳은 카지노였다.
루리는 페르다가 바꿔 먹은 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져온 전 재산을 털어서 바꾼 것이었다.
"사심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없지."
"정말 없습니까?"
"입만 아픈 이야기군. 그 수레나 끌고 따라오도록 하게."
루리의 눈총을 받으면서 페르다는 묵묵히 카지노를 걸었다.
문란한 복장의 여성들과 말초적 쾌락을 즐기고 웃는 사람들.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돈으로 산 유토피아 속에 사는 이들 사이를 엄숙히 지나갔다.
그런 그들 사이에 보이는 한 청년.
칙칙하고 음욕스러운 아우라 가운데에 반짝이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밝은 갈색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이 슬림하면서도 유약해 보이지 않았다.
그 청년의 주변에는 사람이 따라 붙어 있었다.
그가 웃으면 사람들은 웃었고, 안타까워하면 동시에 안타까워한다.
그 사내는 청중을 지배하고 있었다.
'제드 스왈로우.'
뛰어난 언변력과 외모로 많은 귀족들에게 호감을 산다.
그들이 사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였다.
'뭐, 너무 욕심을 부려서 결국엔 걸리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되지 않았다.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 놓는다고 하던가?
그러나 스왈로우는 그 세 개의 굴속에 또 세 개를 더 파서 위기를 모면하는 남자였다.
'탈출 불가능이라는 상어 섬이나 북부 극지의 얼음 감옥에도 탈출했으니.'
그는 명실공히 대도였으며, 불가능이 없는 남자였다.
'뭐 그것도 적안족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지만.'
적안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은 모두 붉은 눈동자가 특징인데, 그들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존재한다.
사물이나 공중에 잔재하는 마나를 흩어지게 만드는 능력.
그래서 마법사에게 있어선 적안족이 천적이었다.
지금 페르다가 보고 있는 이 남자의 눈 색은 짙은 검은색.
평범한 인간의 눈이다.
그러니 적안족이라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설령 적안족이라는 걸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저 남자는 절대로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 것이다.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내게 꼭 필요한 인재다.'
페르다는 뒷짐을 진 채로 조용히 그곳으로 걸어가 착석했다.
이방인의 등장에 제드가 넉살이 좋게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이런 새로운 친구가 오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제드입니다."
"만나서 반갑군. 페르다라고 한다."
"여기 사람들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전부 시체 매처럼 뜯어먹을 생각밖에 안 한다고요?"
"하하! 내가 한 포커 좀 치지!"
"자네는 금화 40개 잃어 놓고 그런 소리를 하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들 중에서 돈을 제대로 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따지도 않았는데 웃게 만든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관중을 지배하는 그의 언행과 아우라.'
하지만 페르다에게 있어선 진한 가식의 가면으로 보일 뿐이었다.
"포커는 좀 치신 적이 있습니까?"
"족보만 대충 안다네."
"뭐 천천히 배우면 되는 법이죠. 안 그렇겠습니까?"
"세상에 초보 없이 고수가 어디 있겠나 허허!"
"그래, 나도 오늘 여기서 처음 배웠어. 이제 좀 감을 잡는 참이라네!"
스스로 호구임을 자랑하는 이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번 쳐 보도록 하지."
"그럽시다. 여기서 이렇게 떠들면 뭐 합니까?"
게임이 시작되었다.
페르다는 조금씩 땄다.
도박판에서 초심자의 운이 적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페르다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제드가 페르다를 끌어들이는 과정이었다.
'떡밥을 잘 뿌리는군.'
손기술이 좋은 남자다.
나름 눈썰미가 좋다고 생각하는 페르다, 자신조차도 어디서 속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능숙하다.
페르다는 그것에 어울려 주었다.
다만, 그에게 천천히 피를 빨아 먹히진 않을 것이라고 은연히 보여 주면서 외려 그를 끌어들인다.
"흠, 슬슬 게임을 끝내야겠는데요? 시간이 많이 흘렀네."
제드가 그렇게 말했다.
"음? 그런가?"
"자네가 그렇다면 뭐."
"마지막 판은 화끈하게 가 봅시다. 하하!"
제드가 패를 돌리고, 마지막 게임이 시작되었다.
"자, 배팅합시다. 100!"
"금화 200개!"
"화끈하시네! 다들. 200 받고 400 갑니다!"
제드의 차례가 끝이 나고 페르다에게 턴이 돌아왔다.
"올인."
남아 있는 칩을 모조리 밀어 넣었다.
대강 봐도 값어치가 금화 2,000개는 넘어간다.
장내가 술렁인다.
"찔끔찔끔 걸던 양반이 갑자기 올인을 때려?"
"마지막이라고 너무 가는 거 아냐?"
페르다는 손깍지를 끼고 테이블에 올리며 다시 한번 더 대답했다.
"올인."
패를 만지작거리던 중년들이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꽁무니를 뺐다.
"오늘만 게임이 있나, 내일도 있지. 덮겠네."
"나도 덮지."
돌고 돌아 다시 제드의 차례가 왔다.
"무슨 자신감으로 거는 겁니까?"
그가 눈웃음을 치며 묻는다.
페르다는 그를 슬쩍 내려다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이번 게임은 내가 이길 거거든."
"그리 자신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자네는 그 패를 스스로 덮을 테니까."
제드가 등받이 몸을 던지며 실실 웃었다.
"왜 내가 덮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돈을 잃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내가 놀음하기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꼬맹이가 있어서 말이야."
"꼬맹이한테 잘 보이려고 돈을 잃어 줘야 한단 말인가요? 그건 좀 너무한데. 그럼 애초에 이 자리에 오지 말았어야 하지 않겠소?"
제드가 피식 웃었다.
도박꾼의 허세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비단 그것뿐만은 아니다."
"응?"
"나는 자네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거? 내가 원하는 게 뭐요? 이렇게 예쁜 여자랑 술, 그리고 돈이 있는데."
옆에 있는 여성을 끌어안았고, 여자는 좋다고 꺄르르 웃어 댔다.
어느 변방의 귀족 부인이 틀림없다.
페르다는 그에게 말했다.
"그 많고도 많은 여자들 중에는 에밀리아라는 여성은 없지."
능청스러운 가면에 금이 갔다.
패를 쥐고 있는 손에는 미세한 떨림이, 입꼬리는 씰룩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신경전이 오갔음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제드는 능숙한 도박꾼이었다.
"...받습니다."
접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칩을 밀어 넣었다.
다 이긴 게임을 놓치지 않는다.
"스트레이트 플러쉬입니다. 그쪽은?"
페르다는 자신의 패를 보였다.
"K탑일세."
"K탑!"
"족보도 안 된 거로 허세를 부렸단 말인가?!"
중년들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기염을 토했다.
이긴 것은 제드.
돈을 전부 잃은 페르다는 미련을 남길 필요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귀족 나리."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나려던 순간, 제드가 그를 불러세웠다.
"당신 돈 제가 다 따 버렸으니까, 위로주라도 한잔받으시죠? 술 마실 나이는 되시는 거 같은데?"
그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탈이 좋지는 않았다.
"사 드릴게."
그 미소에서는 살의가 묻어 있었다.
"그러지."
모든 것은 페르다의 의도대로 돌아갔다.
* * *
웃음과 환희로 가득한 카지노.
영원히 꺼지지 않는 태양을 두고 시간을 잊어버린 채로 향락을 즐기는 땅.
페르다와 제드는 그곳을 등지고 함께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카지노를 벗어나 호텔 복도에 들어간 순간.
"너 뭐야?"
웃음이 넘치던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내리 앉았다.
페르다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 주었다.
사실 입을 떼고 싶어도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나에 대해서 알고 있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맞아. 지금 단계에선 중요하지 않지. 따분한 자기소개는 집어치우자고."
제드가 품속에 감춰 놓았던 물건을 꺼내었다.
단검이었다.
"그 이름을 언급한 이유에 대해서 말해."
제드의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저 눈이 바로 메이지 킬러라 부르는 적안족의 특성이었다.
'저 눈에 닿은 마법진은 전부 무효화 된다.'
메이지 킬러라 부르는 족속들의 등장은 보통 마법사들이라면 공포에 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페르다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제드 스왈로우. 네 정체를 만천하에 까발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눈을 거둬라."
"너도 그 새끼들이랑 한패지? 맞지?!"
"나는 이성적인 대화를 하러 왔다."
"내 동생 어쨌어!? 이 개새끼야!!"
웃음의 가면을 쓴 사내가 분노의 민낯을 보인다.
페르다조차도 그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 이상 내게 살의를 보이지 마라."
페르다는 나지막이 경고했다.
"내 메이드는 내게 충직하지 않은 녀석이다. 그래도 내가 위험하다면 너를 주저하지 않고 죽일 것이다."
그 경고는 순수히 제드를 위한 것이었다.
"난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니 살의를 거두어라."
15화. 잘하는 걸 하면 돼
제드는 페르다의 말에 시선을 흘긋 돌렸다.
그가 말하는 충직하지 않은 종은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저 어린 소녀를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눈치 하나로 먹고사는 직업이었으니, 제드도 살의가 어디를 향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살의는 내가 아니라 저놈을 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루리는 페르다가 돈을 잃었다는 그 사실에 무척이나 짜증이 난 상황이었다.
발드로바의 전 재산과 비교하면 큰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인이 펑펑 쓰기엔 적은 돈도 아니다.
그것도 할림에서.
도박장에서 쓰일 만한 돈은 아니었다.
페르다는 그걸 멋대로 뿌려 댄 것이다.
그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제드였기에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좋아."
제드의 손에 들린 단검이 회전하더니 그대로 뒷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야기부터 먼저 해 보자고.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민감한 대화를 하기엔 장소가 좋지 않군.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가지."
"따라와라."
제드는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는 카지노 내 호텔에서 가장 비싼 방에서 투숙하는 중이었다.
화려한 방과는 다르게 그가 꺼낸 것은 싸구려 럼주였다.
"내가 좋아하는 술이야. 귀족 도련님의 입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마셔 보겠어?"
페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마법사인데 술을 안 마신다고?"
"마법사이기에 술을 안 마실 뿐이다."
"술을 즐기지 않는 마법사라니, 별종이로구만?"
종일 생각과 집중을 해야 하는 마법사들에게 탈출구는 여자와 술이었다.
그중에서 술이 싸게 먹히니 병나발을 부는 마법사들이 한둘 아니다.
페르다는 앞만 보고 달려가야 했기에 술을 마시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금주가 버릇이 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아낸 거지?"
"정보를 찾다 보니 알게 되더군."
"그 정보의 출처는?"
물론 본인의 입이었다.
말해 봐야 믿지 못할 것이니, 페르다는 둘러대기로 했다.
"지금 말해 봐야 의미가 없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만 중요할 뿐이지."
"이런 식으로 떠볼 생각이었으면, 그냥 뒤지더라도 널 죽일 걸 그랬나?"
"떠보는 게 아니다. 너에 대해서 알고 있다. 불쌍한 여자들한테 뜯어먹고, 귀족들한테도 뜯어먹고 그렇게 야금야금 돈을 모아 가면서 상류층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 아닌가?"
"...."
"네 여동생인 에밀리아를 찾기 위해선 출세해서 상류의 연줄이 필요하니 말이야."
포커페이스에 능숙한 제드는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동요하고 있었다.
페르다가 한 말에는 조금의 추측도 없는 확신만이 가득했으며, 그 확신은 정확하게 제드의 의도를 맞히고 있었다.
"대단하네. 마법을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니...."
"어렵진 않다. 한때는 나 또한 너와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페르다가 가문에 쫓겨났을 때 했었던 상상이었다.
로스노바 가문보다 더욱 위대해져서 그들을 발치 아래에 두는 것.
순진했던 페르다는 처음에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겠노라 다짐했었다.
'결국 실패했지만.'
페르다는 레드 서클의 보유자라는 이유로 마법학회에서 받아 주지 않았다.
제드는 미망인 후작 부인의 노리개라는 이름으로 흠이 되어 입회를 실패했다.
"그 발판을 내가 만들어 주겠다."
"당신처럼 새파랗게 어린 귀족이?"
새파랗게 어린 귀족들.
능력이 출중하여 세간에 주목받는다 해도 금세 미끄러지고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 귀족들이 바닥이다.
연줄이 약할수록 어릴수록 더더욱 힘들다.
페르다처럼 갓 성인이 되었으면 바람 앞에 둔 촛불만큼 위태로운 상황.
그러나 페르다는 보편적인 마법사와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일단 그는 공왕의 부군이다.
"자기소개를 다시 해야겠군. 내 이름은 페르다 발드로바다."
"발드로바라면... 레드 드래곤 이름이잖아?"
그러자 제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귀족 세계에서 그건 파면을 의미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레드 드래곤이랑 약혼을 해?"
"그 미친놈이 바로 나일세."
"...진짜?"
페르다의 표정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제드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민망하다는 얼굴을 했다.
"젠장. 그만큼 중요한 정보였으면 진작에 내 귀에 들어왔을 텐데.... 카지노에 있으니깐 시간 감각이 흐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네."
변명을 슬쩍 늘어놓고는 화제를 돌렸다.
"어찌 됐든 발드로바의 서방이라고 하면... 기둥서방 취급당해도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니겠어?"
"그래. 네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려는 상류계에도 들어갈 수 있을 거다."
고개를 숙였던 제드가 슬쩍 눈을 들어 페르다를 보았다.
"난 뭘 하면 되는데?"
페르다는 루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버넬 때와 같이 임명장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너의 그 능력으로 내 밑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수행원이 되는 것이다."
"어떤 임무?"
"잡다한 것에서 큰일까지 다양하다. 다만, 능력 밖의 일은 시키지 않는다."
그 말을 곰곰이 씹던 제드가 묻는다.
"...시다바리라는 거군?"
"수행원이다."
"시다바리잖아, 그게."
"그럼 선택해라. 상류사회로 갈 수 있는 시다바리를 할 것인지, 되지도 못하고 비웃음만 당하는 졸부 취급당하는 멍청이가 될지."
"...."
기분 나쁘게 말하긴 했지만, 페르다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졸부 취급을 당하는 제비가 될 것인지, 힘들어도 입지가 있는 시다바리가 될 것인지.
제드는 머리를 굴려 계산해 보았다.
"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신고할 건가?"
페르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를 신고하면 내가 얻는 게 뭐지?"
"당신은 마법사잖아? 난 적안족이고. 그리고 적안족은 이제 존재해선 안 되는 것들이지. 당신이 더 유리해보이는데?"
혈통을 타고나면 마법을 파훼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지닐 수 있는 족속들.
고양이와 쥐만큼이나 명확하게 천적이 나뉘어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득이 될 건 없다."
"마법사들이 우리 혈족이 멸망했을 때, 사흘 밤낮으로 축제를 벌였다고 들었다. 당신은 아닌가?"
"바보 같은 질문이군.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적안족을 무서워하는 건 귀신이 무섭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 짓이나 다름없다. 그건 마법사로서 실격이지."
거만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다.
하지만 제드는 그 대답이 거슬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특이한 놈이네.'
어린 나이에 저런 행동을 하면 지위에 기대거나 혹은 자신의 잠재력을 과신하는 오만함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페르다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외견만 보면 갓 성인이 된 애송이나 다름없는데....'
하는 짓은 입지를 잘 굳힌 고위 귀족과도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걸 줄 수도 있는....'
남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 제드조차도 의심이 들게 할 정도로.
"하 젠장."
제드는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악마랑 계약한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되게 찝찝하면서도 솔깃한 게 열받네."
제드가 입안에 침묵을 굴리며 임명장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좋아. 해 주겠어, 귀족 나으리. 대신 조건이 있어. 그 정도는 되겠지?"
"말해 봐라. 지금 적어 주지."
페르다는 가슴 주머니에 꽂아 둔 펜을 꺼내 들었다.
제드가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말했다.
"첫 번째로 임무에 따라서 상응하는 금액을 지급해 줄 것.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내 일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해."
"물론이다. 보수는 지급해 주지."
"둘째, 당신이 나를 따돌리거나 이용만 해 먹는다고 생각이 든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당신을 떠나겠어. 그래도 되겠지?"
"그래도 된다. 너를 속여 가면서 기만할 생각은 없다. 그게 끝인가?"
"그래, 지금은."
사실 제드는 한 가지 더 항목을 추가하고 싶었다.
그 짓도 여동생을 찾기 전까지만 하겠다는 계약.
'그게 괜히 시간을 끌어 버리는 족쇄가 될 수도 있어.'
그러니 제드의 조건은 그 두 개로 끝을 냈다.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추가하도록 하지."
페르다는 펜을 잡고 임명장 공란에 한 가지를 더 적어 넣었다.
"우리의 계약은 기한은 네 여동생을 찾을 때까지다."
제드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되는 건가?"
"네가 여동생을 찾았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 후엔 네 의사에 맡기도록 하지."
깔끔하기 짝이 없는 말투와 조건들.
욕심 한 점 부리지 않는 모습에 제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이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기한까지 스스로 정해 주기까지 했다니.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제드는 페르다라는 인물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져 갔다.
수없이 날뛰어도 자신의 손바닥에 있다는 듯한 여유로움.
산전수전 다 겪은 진정한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는 덕목들을 갖추고 있었다.
'에밀리아를 알고 있다는 것은 께름칙하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알고 있어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인물.
능력이 어찌 됐든 지위는 믿을 만한 자리에 올라 있었다.
지금으로선 제드가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알겠어. 아니, 알겠습니다."
고용인이 되었으니 높임말을 쓴다.
그렇게 모든 조건이 정해졌다.
페르다가 그렇게 기한을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억지로 붙잡아 봐야 좋을 건 없다.'
그의 수행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붙잡아 가면서 노예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붙잡는다 해도 잡힐 리가 없었다.
그는 악명 높은 감옥을 몇 번이고 탈출한 대도니까.
'그리고... 찾아서 모든 게 끝나는 것도 아니지.'
페르다 임명장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 제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곧바로 임무를 주도록 하겠네."
"벌써 말입니까?"
"자네가 가져간 돈으로 의뢰를 하나 맡고 싶군."
"그건 제가 따간 돈 아닙니까?"
"원래는 자네한테 의뢰를 맡길 돈이었지. 폴드하려고 하면 알려 주려 했던 걸 알려 주지 않았나? 의뢰로 치는 편이 자네나 나나 좋을 걸세."
"뭐, 첫 의뢰는 무료 같은 느낌도 나쁘진 않겠네요. 그래서 뭘 시키실 겁니까?"
"자네에겐 극히 간단한 일이지."
페르다는 루리가 지니고 있던 이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에키드나 필리아즈
"잘하는 걸 하면 되네."
* * *
볼일을 마치자, 페르다의 마차는 할림을 벗어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버넬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제드까지 끼여 동행이 되었다.
"역시 공왕의 부군이 되는 사람의 마차라 그런가, 엄청 편하군요? 내부도 넓고, 도로 상태가 나빠도 내부는 덜컹거림이 없이 안정적이고."
"...."
"거기다가 예쁘고 아담한 시종까지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미소를 짓는 제드.
슬쩍 그녀가 앉은 자리에 손을 올리며 몸을 기울인다.
천성적인 제비 같은 행동이었다.
"우리 통성명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메이드 숙녀분 정체가 어떻게 되는지요?"
"친절하게 설명해 드리죠."
정체가 무엇이냐는 말에 루리는 드래곤 피어로 대답했다.
"흐억!"
치근덕대려던 제드가 그녀에게서 떨어지면서 자기 가슴을 부여잡았다.
적안족이라 해도 제드는 인간이었고, 드래곤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었다.
"허억.... 이, 이건... 드, 드래곤?"
"드래곤 스폰이다. 발드로바 공왕의 전속 시종이지."
"드래곤 스폰이 드래곤 피어를 낸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리고 뿔과 꼬리도 없지 않습니까?"
"그만큼 강한 드래곤 스폰이라는 뜻이지."
"기껏해야 하프 엘프나 하플링 쪽일 줄 알았는데...."
제드는 문득 단검으로 페르다를 위협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단검으로 설쳐댔으면 정말 국물도 없었을 것이다.
제드는 셔츠를 손으로 팡팡 튕기며 식은땀을 식혀 냈다.
루리는 그런 제드를 한심하다는 듯이 흘겨보고는 다시 다소곳하게 앉았다.
"걱정하지 말게. 저렇게 포악해도 손에 먹을 걸 쥐여 주면 얌전해지니까."
"누가 얌전하다는 겁니까?"
페르다는 루리의 반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네는 얌전하기보다는 개 같은 아이지."
"허? 또 욕하시는 겁니까?"
"칭찬일세. 견종 중에 치와와라는 아담하지만 용맹한 개가 있더군. 너와 닮았다 생각한다."
"제발 한 대만 때려 달라고 부탁해 주시겠습니까?"
"그건 싫군. 아픈 건 사양이니."
끊임없이 자극해 대는 페르다와 썩어 가는 루리.
만약 평범한 사람이 그 드래곤 피어에 직격했다면 지금쯤 숨도 못 쉬었어야 할 상황.
그러나 페르다는 평온하기 그지없고, 오직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제드는 이렇게 말했다.
"저 그냥 마부랑 놀고 있을게요.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자리가 편한 게 대순가.
마음이 편한 게 최고지.
* * *
에키드나 필리아즈를 찾기 위해 페르다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가던 중 더 이상 마차로 들어갈 수 없는 길까지 움직이게 되었다.
"이 이상은 못 들어간댑니다. 길도 좁고 해서."
"그럼 걸어야겠군."
"꽤 먼 거리지만, 가파르진 않으니 산책한다 생각하고 걷도록 하죠."
어쩔 수 없이 페르다는 자리에서 내렸고, 루리와 제드를 뒤에 세워 걸었다.
뒤를 따라오는 둘은 가벼운 산책 정도쯤으로 걷고 있지만, 페르다는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체력 단련을 좀 해야겠습니다?"
"놀랍게도... 이게 최대일세."
"좀 더 노력하면 체력은 좀 더 붙지 않겠습니까?"
"한때 기사 가문이었고, 이것 때문에 공왕의 약혼자가 됐다네."
"아, 그래서...."
제드는 머쓱함에 볼을 긁적였다.
"뭐, 업어다 드립니까?"
"사양하지."
페르다는 힘겨워하면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아 정신력으로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깊은 숲 한가운데에 세워진 집 한 채가 보였다.
"저기로군."
"마녀의 집답게 음기가 장난 아니네요."
"이제 자네가 들어갈 곳이기도 하지."
"알고 있습니다. 흠흠...!!"
제드는 몸을 풀면서 임무를 진행할 준비를 했다.
"후우, 첫 임무로 마녀를 꼬신다라...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군요."
"너무 긴장할 필요 없네. 그냥 그 얼굴만 있으면 되니까."
"얼굴 빼면 시체라는 듯한 소리처럼 들립니다?"
페르다는 제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대답했다.
"그 얼굴을 빼면 시체가 될 수도 있긴 하지."
"하, 계속 무시하시네? 알겠습니다. 한번 지켜보십시오."
제드는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모양을 잡았다.
제비족 모드로 들어간 제드는 그대로 마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에키드나 필리아즈. 이 여자는 뭡니까?"
제드가 멀어질 때쯤, 루리가 물었다.
"마녀일세."
"마녀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주술적으로 자매가 되어서 하나가 되는 족속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녀가 되면 필리아즈라는 성을 받게 되고요."
"그래, 잘 아는군. 사탕 하나 먹게."
"제가 애인 줄 압니까?"
루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사탕을 받아 입안에서 굴렸다.
"제 말은 굳이 마녀를 데려오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마녀를 데려오는 것은 위험한 행위였다.
특히 필리아즈의 성에 얽힌 이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마법에 재능을 가진 여성 중에서 레드 서클을 보유한 마법사들만이 마녀가 될 수 있다.
레드 서클은 격한 감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부분 여성이 레드 서클을 각성하면 남편에 대한 한과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만들어진다.
즉, 마녀란 남성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과 혐오감을 지닌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집단이다.
"그래서 마녀들은 도통 말이 안 통하고,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맞긴 하지."
"그 음침한 족속들에게 이단으로 찍힐 정도면, 버넬 같은 인간 과입니까?"
버넬이라....
"버넬보단 내 약혼자와 비슷한 느낌이겠군."
"마녀 따위가 저의 주인님과 비슷하다니. 함부로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냥 가깝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눈을 부릅뜬 채로 으르렁거리는 루리.
그녀를 아무리 봐도 개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에키드나가 필리아즈에서 이단으로 찍힌 이유 덕분에 영입할 수 있는 거니까."
"덕분에 말입니까?"
그 의문이 던지기 무색하게 마녀의 집으로 들어갔던 제드가 나왔다.
그가 들어갔는지 고작 3분 채 되지 않은 상황.
제드도 머쓱하다는 얼굴을 하면서 머리를 긁적이며 이곳으로 돌아왔다.
"어음...."
에키드나 필리아즈 특이 사항.
"절 보더니 뭐가 됐든 무조건 하겠다는데, 이거 맞습니까?"
심각한 얼빠.
16화. 사람이 아닌 도구
에키드나 필리아즈.
나이는 불명.
필리아즈에 소속되었지만, 이념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자매들에게 제명됨.
제명 사유: 얼빠에 금사빠
검은색 산발 머리에 고스족 화장을 한 듯한 다크서클.
검은 입술과 빛 한 방울 받지 않은 듯이 창백한 피부.
그리고 전형적인 마녀 같은 음침한 기운.
가만히 있으면 그래도 미인계에 속한다고 생각이 드는데, 마녀 특유의 느낌이 모든 것을 망쳤다.
그래서 마녀 같냐고 한다면,
"안녕하세요. 에키드나입니당."
그것과는 상반되는 어린애 같은 말투가 마녀 특유의 분위기마저 깨게 했다.
"으헤헤...."
사람이 좋은 듯이 미소를 짓는데, 어색하기 짝이 없어서 그마저도 음침하게 느껴질 정도.
모든 것이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기 힘들게 했다.
그녀는 제드를 보고 무조건적으로 수락했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이야기는 해야 했기에 페르다는 마녀의 집으로 들어가 그녀와 대면했다.
"무조건 하겠다고 했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는 알고 있나?"
"아뇨. 그래도 상관없어요."
에키드나의 거무튀튀한 동공이 폭풍우의 바다처럼 출렁였다.
"이, 이렇게 잘생긴 분들이랑, 귀여운 아가씨랑 함께할 수 있는 게 저, 저는 행복해서리... 으헤헤헤. 시키시면 개가 되겠습니다."
목소리에서 마녀 특유의 광기가 점점 섞여 들어갔다.
루리는 인상을 구겼고, 제드도 께름칙함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담담한 건 오직 페르다뿐이다.
"에키드나 필리아즈. 너는 골렘을 제작하고 있지?"
"네? 아, 네. 그런데요?"
"그 골렘 제작을 우리 발드로바 성에서 진행해 줄 수 있겠나?"
"무, 물론이죠. 가능합니다. 헤헤. 시키시면 개가 되겠습니다. 멍멍."
정말 묻지도 따지지 않고 수락을 연달아 외치고 있었다.
이 모습은 페르다도 예외였다.
'과거면 그래도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이때가 제일 심각했군.'
페르다가 알게 되었던 계기였을 때가 정신 차린 수준으로 그녀는 엉망진창이었다.
"페르다 님."
루리가 슬쩍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고작 골렘 만드는 년을 구하려고 한 겁니까?"
"저, 저기 들리는데요?"
"그래, 고작 골렘이지."
"드, 들린다니까요?"
진흙이나 돌덩어리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생물체.
간단하게 걷는 수준으로 움직이는 게 고작으로 덩치와 내구도만 빼면 시체다.
괜히 골렘 같은 놈이란 욕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네가 만든 골렘이 있나?"
"네? 이 있긴 한데... 아, 아직 덜 만들어서 부끄러운데...요?"
"상관없다. 내가 부끄럽진 않으니."
"앗, 그러면... 보여 드리겠습니당!"
에키드나가 손뼉을 짝짝 쳤다.
그러자 옷장 속이 벌컥 열리더니 그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건장한 남성을 형태로 만든 목각 인형이었다.
눈은 큼지막하며 보석을 뿜어낼 것처럼 반짝였고, 입술은 날렵하다.
어린아이가 왕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려 놓은 것만 같은 얼굴과 몸매였다.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본 에키드나는 몸을 배배 꼬았다.
"으헤헤. 아직 덜 만들어서 부끄러운데...."
"얼굴을 좀 더 다듬어야 하긴 하겠네."
"아뇨. 인형 자체는 완성인데요?"
"...이게?"
제드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저게 완성형이라고?
골렘이 삐걱거리면서 바깥으로 나왔고, 그의 얼굴이 슬쩍 에키드나를 보았다.
에키드나는 싱긋 웃는다.
끼익- 끼익-
뻑뻑하게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나무 골렘.
그 골렘이 찬장 위에 있는 차를 꺼내어 타기 시작했다.
거기서 놀라운 것은 골렘이 정확하게 물건 하나를 집고 고른 것이었다.
"찬장에 수많은 차들이 있는데, 어째서 저걸 가져왔지?"
"음, 그러니깐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면... 아, 좀 따분한 이야기니까 풀어서 얘기하지 말고, 음 으음...."
양손을 꽉 쥐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에키드나.
페르다는 대신 대답할까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잠깐만요. 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말을 고르는 데만 3분 정도가 걸리고, 식은땀을 뻘뻘 흘린다.
끝내 에키드나는 정리를 마치고 말했다.
"쉽게 말해서 제 기분을 살피고 제가 좋아하는 차를 가져오는 거예요. 오늘은 제가 기분이 좋아서 다즐링을 가져왔고요."
"골렘이... 말입니까?"
루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에키드나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에헤헤. 그렇게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마법을 만드는 중이에요."
"마법을 만든다... 그렇다는 건 룬을 직접 그린다는 뜻이군요?"
"네, 맞아요, 꼬마 아가씨! 그거 어어엄청 공부했어요!"
인간을 무시했던 루리도 이번만큼은 경이라는 감정을 품었다.
정교한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함축시키는 과정, 룬 메이킹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룬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세르데스 대륙을 통틀어 10명도 되지 않는 장인의 영역.
그녀는 단순한 골렘 제작자나 음침한 마녀가 아닌,
'룬 메이커.'
마법을 창조하는 힘을 지닌 마녀였다.
루리가 다시 페르다 쪽을 보았다.
혐오가 가득했던 처음과 다르게 이번에는 경이가 담겨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인간들을 알고 있는 겁니까?"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녀를 기억하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증오로 기인된 것이었다. 심각할 정도로 재능을 낭비하고 있는 인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내가 각혈할 정도였지.'
에키드나 필리아즈는 심각할 정도로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런 열망이 그녀를 레드 서클로 인도했다.
그러나 마녀 특유의 음침함과 그녀의 모자란 대인 능력 때문에 에키드나는 결국 남자를 만나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다.
마녀의 음침함이나 대인 능력을 키우면 된다는 다른 사고와 다르게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귀지 못하면 남친을 만들어 내면 되는 거 아냐?
다른 마녀들처럼 박제로 만들거나, 꼭두각시로 활용해 버리는 것은 껄끄럽다.
인간과 마녀 그 어디 사이에 있는 사고방식으로 골렘을 통해 인간과 유사한 물건을 만들겠다는 게 그녀의 해답이었다.
그녀의 노력은 술식 명령어와 룬을 만드는 것에 통달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룬 메이커가 되었다.
'대마법사였던 나조차도 못한 룬 메이킹을 고작 남친 만드는 데 썼다.'
페르다는 지금도 각혈할 것만 같았다.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고작 남친이라는 걸 만들겠다고 개발하고 앉았다니.
'하지만 그 덕분에 유동적인 명령 체계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골렘 병사들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연금술의 극의라 할 수 있는 인조 생물, 호문쿨루스.
학습을 통해서 자기 일을 배울 수 있으며,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영역의 일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체 생산이 한정되어 있으며, 인간처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양산이 가능하지만, 복잡한 움직임과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단점을 지닌 골렘.
그 두 개의 장점만 고스란히 가져온 것이 바로 에키드나의 골렘이다.
'극동부 전선에서 마물을 몰아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버넬 마르퀴스가 이끄는 마도공학만큼이나 혁신적인 기술들이 제시될 수 있었다.
"그럼 이야기는 다 된 것 같군. 임명장을 주도록 하지."
"이, 임명장요?"
"발드로바의 수석 연구원일세. 수석이 이미 하나 더 있긴 한데, 자네와는 과가 달라서 서로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야."
"아, 그 그런가요?"
또 다른 한 명이 더 있다.
그 말을 듣고 흑색 눈동자가 또르르 구르더니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 남자예요?"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기된 얼굴에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남자다."
"그... 잘생...겼나요?"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는 듯이 눈을 반짝이는 에키드나.
"안경을 끼고 있는 평범한 학자처럼 생겼다."
"아, 그런가요? 뭐 상관은 없습니당...."
아쉬워하는 에키드나.
그녀의 눈이 흘긋 제드를 보았다.
천성 제비라고 제드는 반사적으로 싱긋 웃어 주고 말았다.
"으헤헤, 으헤헤헤...."
음흉한 기운에 제드의 얼굴은 점차 굳어 갔다.
뒷걸음질 치고 싶은데 물러날 길이 없었다.
"곧바로 출발할 수 있겠나? 아니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가?"
"아뇨. 그 아공간 수납 마법이 있어서 다 집어넣고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 헤헤...."
아공간 수납 마법은 5위계 마법.
그녀는 지금 5서클 이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잘생긴 남자를 향한 집념이 어마무시하다는 뜻.
"잘됐군. 마차를 타고 자네들끼리 먼저 발드로바 성으로 출발하도록 하게."
제드가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같이 안 가십니까?"
"아직 데려와야 할 사람이 하나 남았다."
"그럼 같이 가시죠? 저 수행원인데."
"그럴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러지 말고...."
제드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같이 갑시다. 제발."
제발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나와 저 여자 둘이서만 남겨 두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페르다는 알고 있다.
미래의 에키드나가 만들어 낸 완성형 골렘.
그 모습은 제드 스왈로우의 형상을 띠고 있다는 것을.
그녀를 일편단심에 빠트리게 된 것은 제드 스왈로우의 외모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계속 붙여 놔야 한다.'
에키드나의 광기가 누그러지기 위해서는 제드를 붙여 놔야만 했다.
다만 그 집착으로 인해 제드에게 어떤 미래가 닥쳐올지는 불분명했다.
그리고 관심도 없었다.
알아서 하겠지.
* * *
그렇게 페르다는 3명의 인재를 등용하는 데 성공했다.
마도공학의 선구자, 버넬 마르퀴스.
대도, 제드 스왈로우.
룬 메이커, 에키드나 필리아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인물은,
"물의 현자, 헬루스 포비다스로군요."
앞서 제시되었던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루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었다.
나이는 40대 중반으로 늦깎이 마법사.
하지만 총명한 지혜와 혜안을 통해서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으로 유명하여 '물의 현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시골 마을에서 저택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언제나 물과 함께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욕주의.
"아르켄 제국에서 억만금을 줘도 안 하겠다고 하는 인간을 이번에는 어떻게 회유하실 작정입니까?"
현재 페르다의 영입 스코어는 2번 성공, 1번 보류된 상태.
상대를 몰랐으니 예측이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상대였다.
루리는 페르다의 능력으로는 회유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권위를 세우거나 겁박을 해서 데려올 것 같진 않은데....'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는지 내심 궁금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페르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의 현자는 관심이 없다."
루리가 미간을 구겼다.
"그럼 왜 온 겁니까? 물의 현자라고 딱 써 놓고, 물의 현자 집까지 찾아와 놓고는 물의 현자를 데려오려는 게 아니라니요?"
"내가 찾는 건 이름이 없다. 그래서 그 대용으로 헬루스 포비다스라는 이름을 썼을 뿐이고."
"절 속인 겁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표독한 얼굴로 노려보는 루리.
"절반만 그렇다."
페르다는 저택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사용인들이 쓰는 뒷문은 덜 닫은 듯이 비스듬하게 열려 있었다.
그것을 보던 페르다가 물었다.
"보통 평범한 아낙네들은 빨래한다면 어디서 하나?"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페르다는 그녀를 위아래로 스윽 훑었다.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무표정한 소녀가 보였다.
"일단 시종이지 않은가?"
"시종도 급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법으로 다 해결합니다. 개울가 같은 곳에서 빨랫방망이나 두들기고 있는 꼬맹이가 아닙니다."
"개울가로군 고맙네."
루리의 조언 아닌 조언대로 개울가로 향했다.
그녀의 말대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 망할 천치 같은 년! 그것도 못 해!?"
물 흐르는 소리만 조용히 나는 곳에서 중년 여성의 폭언이 울렸다.
그곳에는 뚱뚱한 중년 여성과 삐쩍 마른 소녀가 하나 있었다.
시골 사람들치고는 깔끔하기 짝이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귀족의 시종이라는 게 확실하게 느껴진다.
뚱뚱한 중년이 소녀의 빨랫감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소리쳤다.
"빨래를 두들기고 짰으면 그걸 넣어야지. 그걸 왜 내가 매번 말해 줘야만 알아들어!? 두들기고! 짜고! 넣어! 알겠어!?"
금발 머리의 소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이런 멍청이를 내가 가르치고 앉았다니! 내가 무슨 천벌을 받아서... 어휴!"
중년 시종은 가슴을 치면서 인상을 구겼다.
소녀는 겁먹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공허한 눈동자로 그것을 내려다보더니 묵묵하게 그녀가 시킨 일을 다시 할 뿐이었다.
"골칫거리인가?"
중년 시종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페르다를 훑고는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고, 나으리. 죄송합니다. 제가 못 볼 꼴을 보여 드렸습니다. 하하. 저희 아둔한 시종 하나를 교육한다고 그만 언성을 높여 버려서...."
"그게 교육이었나?"
"물론 귀족 나으리께선 이해하실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충격을 줘야지 그래도 알아듣지 않겠어요? 그러니깐 이렇게 하는 거죠."
페르다의 눈이 슬쩍 소녀 쪽을 향했다.
그가 턱을 짚으며 소리를 흘렸다.
"흠, 그건 교육이라고 하기엔 그냥 짜증을 내는 것밖에 보이지 않더군. 그리고 그 꼬마를 교육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자네 명령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중년 시종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이해를 못 하겠는데...."
"내가 보고 들은 거로 이해하면, 자네는 빨래를 치고 짜라는 걸 반복하게 만들어 놓았다네. 하지만 그걸 어디에다가 놓아야 하는지까지는 알려 주지 않은 것 같군. 그걸 알려 줬더라면, 틀림없이 계속 일을 했을 걸세."
"어이구, 제가 그런 걸 일일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나요? 사람이라면 좀 눈치도 생기고 요령껏 해야 하는데, 아둔하기 짝이 없어서...."
중년 시종이 소녀를 째려보았다.
소녀는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주무르는 걸 반복할 뿐이다.
"그래. 자네가 사람으로 봐서 문제라는 거야."
"무슨 말인가요? 이 애가 도구라도 된단 소리신가요?"
"자네가 다루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도구라고 생각했더라면, 좀 더 달랐을 걸세. 도구가 생각하길 바라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시종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루리도 페르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먹고 자는 도구가 어딨나요? 도구면 창고에 처박거나 버리면 될 텐데...."
"왜 버리지 않았나?"
"버린다고 버려지겠어요? 물의 현자님께서 아끼는 녀석이에요."
"흠, 그런가?"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르는 들개 새끼 같은 년."
쉬지 않고 저주를 퍼붓는 시종.
페르다는 그걸 담담하게 들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버리기 힘들다면, 내게 양도하는 게 어떻겠나?"
17화. 신의 치부를 엿보는 것
시종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예? 나으리께서 거둬 가신다는 말씀인가요?"
"생각해 보게. 자네 말대로면 이 아이는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 하고 계속 이럴 걸세. 그러면 자네가 또 뒤처리해야 하겠지. 안 그렇겠나?"
"...."
시종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실제로도 그러는 중이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네에게는 그 아이에게 명령할 권한이 있어. 그렇지 않나?"
"네, 그렇죠?"
"자네에게 비슷한 권한이 있다면, 이 집에서 꺼지라고 할 수 있겠지."
"음... 그래도 아끼는 아이인데."
"말로는 아끼는 아이일세. 하지만 생각해 보게."
페르다가 시종을 유혹했다.
"보석이라는 것은 빛나는 만큼 흠이 잘 보이는 법이야. 장기적으로 바라보면 누가 힘들 것 같나? 그대의 주인은 이제 현자라는 칭호를 듣고 팔자를 피시는 중이라네. 그런 분의 결함을 수정하고 덮어 주는 것이 충직한 시종의 결단이 아니겠나?"
"...."
시종의 눈빛이 달라졌다.
페르다의 설득이 묘하게 맞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고민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넘어왔다는 것.
페르다는 결정타를 먹이기로 했다.
"그 결정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페르다는 금화 3개를 꺼내 시종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어, 어머! 어멈머머머...!!"
시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려 금화가 3개.
평민들은 평생 밭을 갈면서 일해도 금화 1개를 쥐어 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걸 무려 3개나 받았으니, 시종의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주인님의 흠을 덮으려면 저런 놈 따위는...!'
시종이 헛기침을 하더니 곧 비굴하게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으리. 제가 어찌하면 될까요?"
"간단하네. 모든 언어에는 힘이 있지. 명령만 내리면 된다네. 지금부터 네 이름을 버리라고 말이야."
"아이고 알겠습니다. 꼬맹아. 그거 내려놓고 이리 와!"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의 옆으로 걸어갔다.
"자, 빌어먹을 꼬맹아. 지금부터 자알 들으렴."
시종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네 이름을 버리는 거야. 그리고 지금부터 네 주인은 이분이 되실 거고. 그러니 이제부터 이분을 따라가렴. 알겠지?"
소녀의 눈동자가 스윽 페르다를 올려다보았다.
초점이 없는 공허한 눈동자가 페르다에게 의문을 던지는 듯했다.
페르다가 그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겠나?"
페르다의 질문에 소녀는 답한다.
끄덕끄덕.
"그래, 확인됐군."
페르다는 고개를 들어 중년 시종 쪽을 보았다.
중년은 금화를 만지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일이 성사되었으니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을 알려 주겠네."
"재미난... 사실 말인가요?"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이제는 사실을 알려 줄 차례였다.
"자네가 그렇게 내친 소녀가 우둔하기 짝이 없는데 왜 자네의 주인이 아끼는지 말이야."
"그야... 반반하니깐 그런 거라고...."
"아니. 자네 주인인 헬루스 포비다스는 큰 가슴을 가진 여성을 좋아한다네. 그리고 시답지 않은 농담에 꺄르르 웃어 대며 좋아 죽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열등감이 지독한 남자지. 똑똑한 여자들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머리가 빈 여자들을 좋아하는 거야. 그리고 반반하다고 해도 이렇게 목석같이 어린 시종을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다네."
중년 시종의 얼굴이 점차 굳어 간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이야기의 맥락이 자신이 실수했다고 소리치는 듯했다.
"사실은 이 소녀가 그대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혜안의 원천이라 한다면 믿겠는가?"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렇게 우둔해 빠진 녀석이 어떻게...."
눈동자 속에 혼란이 깃든다.
시종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눈치 없고 욕망만 가득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금화 3개를 다시 내밀었다.
"저, 취, 취소하겠습니다. 돈 돌려드릴 테니 그 아이를 다시—."
"아니. 필요 없다네. 그리고 설령 돌려준다고 해도 자네는 살아 돌아갈 수 없어."
"어, 어째서?"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해 버렸지 않았나? 지금 그대가 들은 것은 신의 치부를 엿본 것과 같다네. 이것도 이해했으면 좋겠네."
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치부를 들여다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
시종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걸 자네에게 알려 준 이유는 그나마 호의를 베푸는 걸세. 그 돈을 가지고 얼른 도망가라는 의미지."
페르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갑게 조언했다.
"주인에게 잡히는 순간, 자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 * *
"인간이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다고 믿나?"
페르다가 루리에게 물었다.
루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인간은 세월을 축적한 지식으로 살아간다 생각하지만, 그런 축적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지식의 축적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번뜩임이 있기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불멸자의 시종다운 견해였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야. 하지만 틀린 말도 있지."
"어떤 부분이 말입니까?"
"수맥이 없는 곳을 백날 판다고 우물을 팔 수는 없는 법이라 했다. 제아무리 깨달았다 해도 없던 지혜가 샘솟는 것은 불가능한 법이지."
페르다는 명단의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헬루스 포비다스.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지금 하시는 말의 의미는 그렇다면 물의 현자는 허수아비고...."
루리가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키 높이에 비슷한 금발 머리 소녀가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몰라 맹하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얼굴이다.
"이 맹한 꼬마가 그 원천이라는 뜻입니까?"
페르다가 목줄을 당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노예 현자라고 들어 봤나?"
인류는 지식을 저장하고 압축하여 과거를 배워 미래를 개척한다.
몸으로 부딪치지 않는 페르다의 세계에선 그렇게들 부른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며,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한다.
그것이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의 핵심이며, 그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나아간다.
지식과 지식을 결합하여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거나.
탐험과 탐사를 통해 잃어버린 기술을 발굴하거나.
혹은 신에게 간청하여 원하는 대답을 얻거나.
그리고 들여서는 안 되는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이거나.
'그것 중에 역시 가장 효과가 좋은 건 금단의 영역이지.'
신이 미소를 짓는 것도,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닌 신의 치부를 엿보는 것.
페르다가 들인 이 소녀도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자였다.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지혜를 갖추는 만큼 어마어마한 대가가 필요했고, 그 대가는 실로 간단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자문을 할 수 없게 된다.
실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누구인지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와 연결되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생각을 할 수 없으므로 살아남는 것이기도 하였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며, 스스로 사고할 수 없는 궁극의 지식과 지혜.
궁극의 도구.
"그렇게 탄생하는 게 노예 현자다."
"힘을 대가로 자신을 잃는다니, 정말 멍청한 선택이로군요."
"그래, 정말 멍청한 선택이지."
페르다는 씁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루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금단을 얻었길래, 이런 겁니까?"
"간단하다."
페르다는 그녀의 머리를 톡톡 쳤다.
"만상서고."
"만상서고?"
"이 자그마한 머릿속에 에스콜레이아의 책보다 더 많은 책이 담겨 있다면 믿겠나?"
"...."
루리는 슬쩍 그 소녀를 보았다.
마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며, 불길한 기운도 없는 평범한 소녀.
길가에 마주쳤다면 천치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단순히 스쳐 갈 만한 아이였다.
인류 지성의 집합체라 부르는 만상서고보다 더 많은 책이 있다니.
믿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반발하진 않았다.
어차피 선택한 것은 페르다였고, 페르다의 몫일 뿐이니까.
"나를 보거라."
페르다가 소녀에게 지시했다.
소녀의 눈동자가 페르다를 응시했다.
"네 이름을 부여하기 전에 네게 최우선 순위 명령을 내리도록 하겠다."
페르다가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이 명령은 너의 호흡이며, 너의 심장 박동처럼 기억될 것이며, 절대불변의 진리가 될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다는 주문을 읊듯이 그녀에게 명령했다.
"위대한 힘의 지배자,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 공왕은 네 존재의 시작이자 너의 종말이 될 것이다. 너는 그분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나 페르다 발드로바는 발드로바 공왕의 대행으로서 명령권을 가지며 네게 명령하게 될 것이다."
끄덕인다.
"그러나 발드로바 공왕의 신념에 어긋나거나, 반 하는 행동을 한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주 짧은 침묵과 함께 다시 입을 연다.
"최후의 수단, 반기를 드는 것을 허용한다. 모두 기억했나?"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모리다."
소녀는 모리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소녀의 눈동자에서 묘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 *
"버넬 마르퀴스를 제외하면 모두 영입하시는 데 성공하셨군요."
발드로바 성의 집무실.
"조만간 녀석도 올 거다."
"장담하십니까?"
"그렇게 말해 놨는데도 오지 않는다면, 나도 포기를 해야지."
무조건 가져야 한다 같은 집착이나 열정 같은 것이 없었다.
마치 세월처럼 흘러가는 인연은 흘러가게 두어 버리는 그런 느낌.
'불멸자들의 행동이나 다름없네.'
그 두 개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루리조차도 헷갈릴 정도였다.
루리는 4개의 이름과 4개의 줄이 그여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이 4명이 지금은 끝입니까?"
페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한 명이 더 있다."
"누구입니까, 그게?"
페르다는 자신이 생각해 두었던 인물의 이름을 기재했다.
-루리 발드로바.
"바로 너다."
페르다가 그렇게 말했다.
루리는 진심 어린 혐오감이었다.
"저는 당신의 편에 설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조금 친해졌다고 해서 착각하진 마십시오."
페르다는 그녀의 충성심을 간과하지 않았다.
"괜찮다. 내가 바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네가 예전처럼 똑같이 나를 경계하고 미워하는 일에 가깝다."
"...그게 뭡니까?"
"만약 모리가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면, 그 선봉에 서는 것은 네가 되어야 한다."
"...."
루리의 표정이 굳었다.
조력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크게 동요했다.
"그 말은...제가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다."
"어째섭니까?"
페르다가 대답했다.
"드래곤 같은 불멸의 존재와 다르게 인간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
루리가 무심코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언젠가 자신이 한번 발드로바에게 했었던 말이었다.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바뀌게 되고 눈이 흐려진다. 내가 그렇게 될 때는 공왕을 위해서라는 변명을 늘어놓고 내 욕심만 채우려 할지 모른다."
묘하게 슬프게 어그러진 눈동자.
그것이 스르륵 올라가며 루리를 향했다.
푸른색 눈동자가 그윽한 감정을 담으며 바라본다.
루리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분의 시종인 네가 나를 감시해야만 한다."
이 남자는 자신의 목숨마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의 왕, 나의 약혼자가 상처받지 않으시도록 말이다."
루리는 떨리는 입술로 힘겹게 말을 꺼내었다.
"...주제도 모르는 인간들 같은 말을 하는군요."
무심코 내뱉어 버리는 독설.
루리는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말씀을 들어 보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고맙군. 역시 충직한 드래곤 스폰이로군."
"그러나 한 가지 모르시는 것 같기에 정정해 드립니다."
루리는 자신의 성 부분을 지웠다.
그 말은 즉 그녀가 발드로바의 스폰이 아니라는 뜻이다.
"제 진짜 이름은 이렇습니다."
-루리 실버윈드.
"그럼 이만...."
루리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고, 페르다는 루리의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예상치 못했군.'
루리가 적어 놓은 성은 페르다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다.
드래곤 스폰은 승천식을 마치면, 그 드래곤의 이름을 성으로 받게 된다.
페르다가 로스노바에서 발드로바가 된 것처럼, 루리 또한 이어받은 자의 성을 지니게 된다.
그녀는 발드로바가 아닌 실버윈드.
'그 말은 실버 드래곤 스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눈치를 챌 수 있는 일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일 수 있는 기동력.
바람 계열의 마법.
모든 것이 실버 드래곤의 피를 이으면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이 페르다의 머릿속에선 아다리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버윈드는 발드로바의 손에 죽었다.'
블랙 드래곤, 고드윈을 죽인 이후, 발드로바는 폭주를 했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실버 드래곤인 실버윈드였다.
'그로 인해 앙숙지간이나 다름이 없지.'
발드로바가 악룡이 된 이유도 실버윈드의 세력 입김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많은 스폰을 거느리고 있으며 인망도 뛰어났다.
'실버 드래곤 스폰이 레드 드래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라....'
페르다는 팔걸이에 손을 얹은 채로 턱을 톡톡 쳤다.
'그렇다는 건 충직한 척을 하고 있단 뜻인가?'
페르다는 곧바로 부정했다.
'루리는 누구보다 충직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홀로 있는 주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도맡아 하고 있는 그녀는 단순히 의무감으로만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실버 드래곤 스폰으로서 피를 거부하고 있다는 건가?'
그것도 부정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 말이 인간 사회보다 드래곤 사회에서 더욱 절대적인 요소였다.
'알 수 없군.'
페르다는 자신의 미래를 되짚어 보았다.
생각해 보면 몇 가지가 걸리는 게 있었다.
발드로바를 죽이기 위해 그녀에게 갔을 당시였다.
'그때 루리는 없었다.'
지어 놓았던 성은 반파되었고, 레어 속에 있는 것은 죽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발드로바뿐이었다.
그녀가 죽어 가는 순간에도 루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연유를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예전 페르다에게는 관심 밖의 영역이었으니, 알 도리가 없다.
지금으로선 충직하기 짝이 없는 그녀는 언젠가 발드로바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사실만 알 뿐.
'알아 둬야 할 일일지 모르겠어.'
좋든 싫든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의 반려에게 슬픔을 가져올 일이었으니 페르다는 망설이지 않았다.
* * *
다음 날, 마차 한 대가 발드로바 성 앞에 도착했다.
버넬 마르퀴스가 도착한 것이다.
18화. 낙장불입
페르다는 외로운 산 꼭대기 위에 올랐다.
그가 루리에게 부탁해 꼭대기를 오를 때는 오직 한 가지 목적뿐이었다.
발드로바의 싸움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크롸아아아!
우렁찬 포효가 천지를 뒤집는다.
오늘 그녀는 1백여 마리의 마물의 진군을 저지했다.
예전이었으면 숨도 못 쉴 타이밍이었을 텐데, 지금은 먼 산을 바라보듯이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 술의 효능이 확실하군.'
용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들이 뿜는 피어조차도 페르다의 몸을 크게 간섭하지 못했다.
그렇게 놀라는 한편 궁금해지는 것도 있었다.
"다른 이들은 이걸 어떻게 견뎌 내지? 성내에 있어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아티팩트가 있습니다."
루리는 치마 속에서 반지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은으로 만든 평범한 반지인데, 그 안에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페르다는 그 문자를 읽을 수 없었다.
"성의 고용인들의 위치를 추적하고 드래곤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해 주는 물건입니다. 고용인 100명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성내에서 생활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내가 마신 것과 비슷한 효과인가?"
"그보다는 떨어집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아직 용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도 많은 준비를 했군."
"쓸데없이 많은 준비를 했죠."
"흠...."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다가 페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게 100개나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진작에 내가 낄 수 있는 것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안 줬지?"
루리의 눈동자가 스르륵 한 바퀴 회전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물어본 적이 없으셨잖습니까?"
루리가 약혼자 이전의 페르다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싫어하는 거 같긴 하지만.'
지나간 일로 뭘 하겠는가.
페르다는 눈을 돌려 발드로바를 내려다보았다.
예전과 좀 다른 것이 있다면, 할 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시선을 돌린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 있는 한 쌍의 뿔과 하늘 위로 솟은 또 다른 한 쌍의 뿔.
폭군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위용 넘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황금색 눈동자마저 페르다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느껴지는군.'
약혼주를 들이켠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 실이 페르다와 발드로바를 잇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페르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발드로바는 그 시선을 피해 자신의 레어로 돌아간다.
'또 곤란하게 만들어 버렸나.'
약혼자가 되었지만, 실제로 그녀와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하려고 하면 피하는 기색만 보이고,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고작.
'대인 기피증...이라.'
마물을 찢고 발기는 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바바리안 그 자체였으니 조금도 믿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다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술이 먼저 떠올랐다.
'참으로 애가 타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여인이다.'
메마른 사막 가운데에 솟아오른 오아시스.
영구 동토 속에 희미하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의 온기.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고작이라니.
눈앞에 사과가 있지만, 영원히 먹지 못하며, 물이 있지만 영원히 마시지 못하는 허기와 갈증의 고통을 겪는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적어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건만.
"이야기하는 건 아직도 안 된다고 하던가?"
"예.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지시입니다."
"한 달이 넘게 지났는데."
"산 세월에 비하면 눈 하나 깜빡하는 정도로 짧은 시간입니다."
불멸자와 필멸자의 시간은 다르다.
페르다는 조급함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는 기다려 주는 것도 부군의 몫이겠지.'
인내심을 가지기로 했다.
아직 페르다도 살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루리가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페르다 님."
"왜 그러나?"
"손님이 오셨습니다."
페르다가 볼 수 없는 영역의 아래.
기다란 선 같은 것이 성 앞에 서 있는 것만 겨우 보였다.
페르다의 눈이 되어 지켜보던 루리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버넬 마르퀴스 씨가 도착한 것 같습니다."
* * *
버넬 마르퀴스.
그와 다시 재회했을 때는 더욱 엉망이었다.
빚이 상환되고, 귀찮은 패거리들이 더 이상 건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림마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저기, 생각해 봤는데요...."
"결론만 말하게."
페르다가 거칠게 나왔다.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기엔 지금 성미가 급한 상태이니."
버넬 마르퀴스의 변덕에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페르다의 단전 속에 레드 서클이 핑핑 돌고 있었다.
그 고조감을 버넬 때문에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말씀대로... 무기를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신념을 굽힌 건가?"
"물론 신념을 굽힌 건 아닙니다. 말씀대로 무기를 만드는 것도 평화를 유지하는 게 맞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 비난이 두려웠을 뿐입니다."
버넬 마르퀴스는 손에 쥔 임명장을 보며 말했다.
"무기를 만들겠습니다. 극동부의 마물들을 치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무기가 인간들의 전쟁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적어도 제가 이렇게 살아 있을 동안에는 말입니다."
"그건 약속할 수가 없겠군."
페르다는 거짓말을 하는 대신 현실을 말해 주었다.
"그렇...습니까?"
버넬도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우물 안의 개구리이긴 하지만, 그가 있는 곳도 엄연히 사회였으니,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무기 개발은 누가 먼저 앞서가는가에 따라 전쟁의 판도가 뒤집힌다.
그런 바닥에서 마도공학은 혁신적인 기술이 되고 가속화할 것이다.
"죄책감에 너무 사로잡힐 필요는 없네. 그냥 이렇게 생각하도록 하게. 검을 만들면 뭐로 막아야 하나?"
"검을 만들면.... 그걸 막을 방패와 갑옷을 만듭니다."
"그 갑옷과 방패마저 뚫는 검을 만들었네. 그러면 좌절하고 멈춰 서서 파멸을 지켜보는 게 맞나?"
버넬은 그제야 이해했다.
"아뇨. 더 뛰어난 갑옷과 방패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네는 무기를 만들지만, 동시에 방패를 만드는 것이지. 전쟁을 막고 싶다면, 계속해서 개발해 내야만 해. 멈추게 된다면...."
"상대가 한발을 앞서겠군요."
멈추지 않는 레이스를 시작하는 것이다.
버넬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 그려졌다.
그의 콧속에 아련한 향기가 남아 있었다.
커피와 홍차, 그리고 잉크.
에스콜레이아가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그곳에선 적어도 단칸방이 그의 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선 안 돼.'
마도공학은 꼭 이뤄 내고 싶은 그의 소망이었다.
"물론 후에 여유가 된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쓰이도록 연구하는 걸 허락하겠네. 일단 최우선은 극동부의 전선을 밀어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네. 그걸 먼저 개발한다면, 자네에게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이 없어."
"아, 알겠습니다."
"이 정도는 이야기가 된 것 같고...."
페르다는 본격적으로 버넬의 연구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가 시작하는 그 연구에 필요한 것부터 말해 보게."
"도구보다는 우선 마물의 사체가 필요합니다."
"마물의 사체 말인가?"
"거기서 제가 관찰을 먼저 해야 합니다. 도구는 그 사람 다음 문제고요."
버넬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진척도가 높아질 겁니다만... 아무래도 마물을 생포하는 건 쉽지 않죠, 하하!"
가만히 듣고 있던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생포하면 되는 건가?"
"네, 생포... 어... 잠시만요, 생포하시려고요?"
버넬이 놀라 물었다.
"진척도를 높이려면 그려야지 않겠나? 아직 갈 길이 먼데, 첫발은 크게 떼어야지 않겠나?"
"꽤 힘들 텐데...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전하."
"섭정이라 부르게. 그게 공식 호칭이 되었으니. 그리고 감사할 건 없다네."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사흘 내로 출발할 테니 준비하도록 하게."
"예? 어딜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말하고 그런 소리를 하면 되나? 생포하러 가야지?"
"저, 저희가요??"
버넬이 커다랗게 눈을 떴다.
동공은 점처럼 쪼그라들 기세였다.
"그러면 여기서 가만히 앉아서 생포해 오기까지 기다리려고 했나?"
"어.... 대부분은 그렇...죠?"
"우스운 농담이로군. 학자의 욕심 하나 때문에 몇십 명이 죽어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보고만 있겠는가? 이럴 때는 직접 움직여야지."
페르다는 그런 버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이 학자들의 신념 아니던가?"
"그, 그렇긴 합니다만...."
"가만히 앉아 있는데 진리가 입에 떨어지길 바라면 안 되지. 몸뚱이를 좀 굴리도록 하게."
"으으윽...."
"그때 동안 잘 준비하고 있게. 자네가 최상의 조건이어야 하니까."
버넬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괘, 괜히 왔다!'
낙장불입이었다.
* * *
페르다와 버넬은 말을 타고 어디론가 움직였다.
난 길을 따라 움직이자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무리가 보였다.
30명의 부하들이 일사불란하게 정렬하고 있으며, 선두에서 선 남자는 하프 플레이트 갑옷에 말을 타고 있었다.
페르다를 기다리고 있는 안내역이었다.
아르웬이 말에서 내려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발드로바 공왕의 부군,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님을 뵙습니다. 저는 아르웬이라 합니다. 콘실러스 백작님의 명을 받아 모시게 되었습니다."
"만나서 반갑군. 명령은 제대로 하달받았나?"
"그렇습니다. 마물을 사냥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페르다는 그 말을 정정했다.
"사냥이 아니라 생포일세. 우린 마물을 생포하러 가는 거야."
"죄송합니다. 온 공문을 잘못 읽어 준 것 같습니다."
사실 잘못 읽은 것이 아니다.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라 그만 자신이 정정함으로써 되물었을 뿐이었다.
"괜찮네. 마물의 위치는 어디에 있지?"
아르웬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마물 특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수는?"
"최근까지 확산한 범위를 고려하면 한 마리가 고작입니다."
"그렇군. 그럼 생포하기가 쉽겠군."
"그게 말입니다...."
아르웬이 심각한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 갔다.
"개체 크기가 아무래도 회색곰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저희가 처치하기도 까다로운 크기입니다."
그러니 생포는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페르다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크기가 크면 클수록 좋은 법이지. 반드시 생포해야겠군."
페르다는 옆에 있던 버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네의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군그래."
"하하...그, 그렇군요."
어색하게 웃는 버넬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거 말하지 말라고!!'
버넬의 눈이 슬쩍 병사들 쪽으로 굴러갔다.
온갖 원망의 시선들이 버넬을 향해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범인이었구나.'
'마물을 죽이는 것도 힘든데, 뭐? 생포해?'
'잡다가 죽기만 해 봐라. 네놈이 죽을 때까지 꿈자리를 사납게 만들어 주지!'
그 저주가 버넬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메아리치는 듯했다.
"하하하...."
버넬은 웃었다.
웃을 수 있을 때 웃어야 했다.
* * *
아르웬이 선두에 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은 당연히 두고 가야 했다.
마물을 자극해 버리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법에는 어느 단계까지 올랐나?"
아르웬의 뒤를 따라가던 페르다가 버넬에게 물었다.
버넬이 대답했다.
"3서클이 한계입니다."
"블루 서클인가?"
"예. 당연히 마법사라면 블루 서클을... 혹시 레드 서클이십니까?"
"그래."
버넬이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이놈의 입이 방정맞아서 원.
"아, 죄 죄송합니다! 괜한 말을...."
"상관없네. 3서클이란 말이지?"
3서클을 지칭하는 호칭은 매직 워커.
4서클의 벽을 뚫지 못한 마법사들이 많아 매직 워커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4서클, 메이지 이상의 마법사들이 매직 워커라고 하면 사생결단을 보자는 말과 똑같았다.
"매직 샷을 구사할 수 있나?"
"예. 구체 생성이나 사출까지는 가능한데 유효 사거리는—."
"생성만 할 줄 알면 되네. 몇 개까지 가능하지?"
"어... 12개입니다."
"크게 만들면?"
"크게 만들면 4개 가능하고요."
3서클 평균으로 마나 샷을 15개 구사할 수 있다.
"평범한 3서클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는군."
"하하... 그렇죠."
아프면서도 웃긴 이야기였다.
버넬의 첫 꿈은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할 줄 아는 건 마법이 아니라 공부뿐이었던 거고.'
그 공부마저도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꿈을 꾸면서 망치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네. 자네가 서포트만 잘하면 되니까."
"서, 서포트 말입니까?"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할 걸세. 자네는 내 지시에 맞춰서 간단한 일만 수행하면 그만이야. 이해했나?"
"서, 서포트 말씀이시군요. 어떻게...."
"간단하게 할 거네.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버넬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섭정님. 혹시 서클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 말인가? 2서클이지."
"2, 2서클이시라고요?"
"왜 그러나? 자네보다 아래인 게 놀랍나?"
"그게 놀랍다면 놀랍긴 한데, 그런 의미는 아니고...."
버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나가 보이던 게 그냥 그대로였던 거였어?'
버넬은 페르다가 여태까지 잘 감춰 놓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2서클따리였다니.
'2서클이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페르다의 계획이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아르웬이 손을 들었다.
"녀석의 기척이 잡힙니다."
"그런가? 수고했네. 포획 직전에 부르도록 하겠네. 대기하고 있게나."
"예?"
아르웬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페르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공문을 읽는 놈은 날 잡아서 질책하도록 하게. 나는 안내와 생포에 도움을 줄 장병들이 필요했을 뿐이라 했네. 그대들이 생포하고 싶은 건가?"
"저희가 해야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의기 충만한 기사의 자세로군, 그래."
페르다는 아르웬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를 지나쳤다.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게. 자네는 콘실러스 백작의 기사, 더 나아가 공왕령의 소중한 기사이니."
페르다는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가죽 장갑을 착용했다.
"가도록 하지. 신호를 하면 바로 생포할 수 있도록 준비만 해 두게. 버넬."
"예, 옙!"
페르다는 뒷짐을 지며 여유롭게 걸어갔다.
사지로 들어가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자태는 고고하기 짝이 없었다.
'으아아아 죽는다 죽어!'
반면 버넬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사신 그 이상 그 이하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깊은 숲을 10분 정도 걷다가 페르다와 버넬은 마침내 보고받았던 마물을 발견했다.
'오염체로군.'
단순히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기괴한 생물이 아닌 동물에게 덧씌워지는 형태의 마물.
원래는 곰이었으나, 지금은 곰이었던 것이라고 불릴 수준으로 망가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 비합리적인 생물체.
그렇게 말하는 듯한 외견이었다.
"우욱...."
"게워 내지 말게. 눈치를 채면 곤란하니깐."
"웁, 웁...."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페르다는 목표물에 눈을 고정했다.
"이제 마나 샷을 손가락에 띄우도록 하게."
"예."
구역질을 삼킨 버넬은 말대로 순수한 마나 구체를 생성했다.
"그리고 내 지시에 맞춰서 하나씩 내게 가볍게 던지도록 하게나."
"예?"
곰이 아닌 섭정에게?
"섭정님 쪽으로 말입니까?"
"그래. 던지게."
버넬은 그의 말대로 눈 딱 감고 하나를 던져보았다.
"어?"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9화. 최후의 마나
검을 잡은 자들의 싸움은 직관적이고 평등하다.
그래서 검투사라는 직업이 아직까지 세르데스에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직관적이기에 단순하고, 단순하기에 눈에 보인다.
그 때문에 그 상황 속에서 수싸움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세계는 검과는 정반대였다.
추상적이고, 명확한 격차가 존재하는 세계다.
서클 간의 격차에서 너무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것이 문제였다.
서클 하나만 더 올라가도 승률이 95% 이상으로 기우는 것이 마법사의 부조리하게 정직한 세계이다.
그러나 남은 5%의 이레귤러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10년의 세월을 쌓아도 단 하루 만에 부정해 버리는 그런 압도적인 재능.
지금 버넬 마르퀴스가 보고 있는 페르다 발드로바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매직 인터셉트?'
상대가 발현한 마법, 혹은 사출한 마법을 자신의 의지로 가져와 역으로 돌려주는 기교.
마법사들의 싸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최소 5서클에 도달한 마법사들이 하는 기교... 아닌가?'
마법에 대한 이해도와 마나를 다루는 것에 숙달된 마법사, 5서클 마스터 메이지만이 사용했고 그래 왔다.
그러나 페르다는 자신조차도 무시할 수 있는 2서클이었다.
'아니, 이론상으로는 2서클도 가능하다고 듣긴 들었어.'
2서클, 스펠 블로워.
본격적으로 주문을 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나라는 실을 통해서 마법을 짜내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그 마법은 조잡하며, 위력이 약하고 정밀성이 떨어져 주문을 분다고 할 정도로 비하당하는 단계이다.
'그러니 이론은 이론일 뿐이지.'
이론만 존재하는 것은 마법계에서 수두룩한 일이다.
'그런데 매직 인터셉트를 한다고? 정말로?'
가능은 한 일.
하지만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
만약 저것이 매직 인터셉트라 한다면, 버넬은 지금 마법사 역사에서 새로운 역사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과거로 돌아와서 오늘 처음으로 매직 인터셉트를 시도해 본 페르다의 평가는 이러했다.
'역시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군.'
마나 워커가 점에 통달한다고 한다면, 스펠 블로워는 선이다.
그 선을 통해서 면을 만드는 것, 즉 마법을 짜내는 것이 가능한 단계이다.
'할 줄 아는 것은 매직 샷뿐.'
2서클에서 사용하는 마법은 대마법사가 되면서 잊어버렸고, 지금도 딱히 익혀 놓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게 곧 모든 것.'
간단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마법이다.
마나를 원소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닌 순수한 마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적어도 마물에게는 말이다.
'마물 생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해 봤다.'
마족 추종자, 테살로스와 협업했던 당시 그가 요구했던 것이 마물을 생포하는 것이었다.
죽이는 것은 간단하지만 생포하는 것은 어려웠다.
테살로스와 지식을 공유하면서 마물에 대한 특징들을 함께 공유해 왔다.
'그렇게 해서 결국 알아냈지.'
가장 간단한 결론이었다.
인간이 망가진 마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그 인간은 망가지거나 죽게 된다.
반대로 망가진 마나를 삼는 암 덩어리 같은 괴물들은 순수한 마나가 외려 독이었다.
페르다는 그 독을 심장 속에 주입하는 것이었다.
마나를 뿜는 것이 사라지고, 중독되면서 마물이 가지고 있던 초재생과 압도적인 힘은 잠깐 멈춘다.
쉽게 말해 끊임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 사이에 목재 조각을 끼워 넣는 것과 같다.
'언젠가 부러지겠지만, 잠깐은 제동을 걸 수 있다.'
페르다는 첫 구를 곰 마물의 얼굴 쪽으로 던졌다.
날아온 방향을 알 수 없도록 곡사로 사격하여 정확하게 정수리 위에 떨어트렸다.
쾅!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지금 머리가 곤죽이 되어 버렸을 만한 상황.
-꾸어어엉!
그러나 곰 마물은 포효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쳐들었다.
녀석은 마력 중독으로 내구도가 더욱 단단해진 상태였다.
머리가 찌그러지긴 했지만, 유의미한 대미지는 아니었다.
페르다가 버넬에게 지시했다.
"큰 거로 하나 준비해라."
"넵!"
버넬이 큰 구체를 빚는 동안, 페르다는 곧바로 두 번째로 사출할 구를 준비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곡사.
위에서 떨어지는 곡사가 아닌 옆으로 크게 휘었다.
쾅!
곰 마물의 머리가 크게 휘청거렸다.
-꾸어어엉!
제대로 약이 오른 곰 마물이 포효성을 터트렸다.
적을 탐색하기 위해 앞발을 들썩인다.
페르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페르다의 손가락에는 네 개의 구체가 빚어졌다.
"지금."
버넬은 페르다의 사격로로 던졌고, 페르다는 그 구체를 낚아챈다.
손가락에 띄운 네 개의 구체와 함께 곰 마물의 가슴부로 직선으로 날렸다.
쾅!
한 개의 마나 샷이 공중에서 터진다.
그 밀어내는 힘이 가중되며 네 개의 구체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페르다가 만들어 낸 작은 세 개의 구체가 나선 형태로 회전하며 먼저 가슴부에 착탄한다.
콰과광!
세 개의 폭발이 일어났다.
연속적인 폭발에 가슴부의 가죽이 찢어지고, 살갗이 드러난다.
그리고 버넬이 만든 큰 구체가 속살에 닿았다.
'깊게.'
가속한 힘과 회전력이 살 안쪽을 파고든다.
'더 깊게.'
그리고 마침내 터진다.
콰앙!!
커다란 폭발이 곰 마물의 몸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흐억!"
버넬은 꼴사나운 목소리를 내며 깜짝 놀랐다.
'내 마나 구체가 이만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던가?'
터진 것이 자신이 던진 구체라는 건 알고 있다.
버넬이 사출했다면 단 한 번도 낼 수 없었던 폭발력.
2서클의 마법사인 페르다는 자신의 것처럼 아주 쉽게 다루고 있었다.
페르다의 눈은 흙먼지 너머를 응시한다.
'보여라.'
시계가 트이고 표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곰 마물의 몸이 성하지 않았다.
검은 가죽이 벗겨지고 검보라색 살갗이 유린당하였다.
안에 있는 내장과 뼈를 훤히 드러냈다.
페르다의 눈이 심장을 포착했다.
'여전히 뛰고 있군.'
모든 생명력의 근원은 저 심장.
심장이 힘차게 펌프질하고 있었다.
크게 두근거릴 때마다 곰 마물의 살갗도 점차 수복되고 있었다.
'초재생까지 제대로 갖췄어.'
단순히 내구도만 단단한 게 아니라 회복까지 다른 마물들에 상회한다.
'속전속결이 필요하다.'
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무방비한 상태.
만약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면 페르다의 패배로 이어진다.
'거칠게 나가야겠어.'
판단을 마친 페르다가 손가락에 구체를 생성하며 버넬에게 소리쳤다.
"버넬! 구체를 만드는 대로 던져라!"
"옙!"
페르다가 심장을 향해서 맹공을 퍼부었다.
-그윽. 그윽.
심장에 직격탄을 맞은 곰의 몸이 움찔거리며 숨을 토해 냈다.
페르다의 구체가 심장을 때리고, 닫히는 살갗을 억지로 찢어 벌리는 것을 반복했다.
페르다의 마나가 먼저 떨어지는가, 곰의 재생력이 멈추는 것이 먼저인가.
서로가 구멍 하나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부피가 크니, 확실히 제대로 안 되는군.'
승리가 확언할 수 없다.
5서클의 마법사였더라면 정말 손쉽게 처리해 낼 수 있을 텐데, 2서클과 3서클의 마나 양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페르다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 * *
'기분 나빠.'
버넬은 구역질을 할 것만 같았다.
진한 기름 냄새를 계속 맡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하다.
마나가 빠져나가는 감각은 정신을 흐리게 만들어 집중을 부수고 있었다.
'학자가 된 이후로 이만큼 마나를 써 본 적이 있던가?'
없다.
학자는 필요한 것에만 몰두하는 힘이 필요했고, 그 힘에 온전히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버넬은 항상 몸의 절반 이상 마나를 유지했다.
페르다가 맹공을 퍼붓고 그 템포에 맞춰 버넬은 마나를 쭉쭉 뽑고 있었다.
그의 마나는 이제 20% 정도 남았다.
구체를 3개 정도 더 빚으면 고갈할 것이다.
그 의문은 페르다에게도 향했다.
'섭정님도 마나를 많이 쓰셨을 텐데, 어떻게 아직도 마법을 쓰는 거지?'
눈대중으로 봐도 버넬 자신보다 더 많은 구체를 던진 상태였다.
버넬은 고개를 들어 페르다를 보았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코, 코에서 피가!'
마법을 쓰고 있는 마법사가 코피를 흘린다는 것의 의미는 간단했다.
'과부하!'
정신을 한 곳에 쏟아부으면서 나오는 이상 현상.
자신 능력의 이상으로 많은 힘을 쓸 때 나타난다.
'저렇게 했다간 마나 버닝 아웃이 올 텐데...!'
최후의 경우에는 평생 마법 연산도 하지 못하는 폐인이 될 수가 있는 가장 위험한 상황이었다.
'지팡이 하나 없이 오더니 역시나....'
마법사의 지팡이는 마나를 형성하는데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한다.
페르다는 그런 보조 역할이 없이 순수하게 머리로만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는 중이다.
과부하가 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코에서 피를 흘릴 정도면 당장이라도 말려야만 했다.
"버넬."
페르다는 침착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옙?"
"집중해라."
버넬의 혼란은 그 목소리에 의해 사라졌다.
'그래 침착하자. 블루 서클을 가진 놈이 침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 거야?'
참으로 우스운 꼴이었다.
레드 서클을 가진 페르다가 침착하고, 블루 서클을 가진 버넬이 당황하고 있다.
'정말 나는... 아무 각오도 없었구나.'
버넬은 생각했다.
프로젝트를 놓지 못한 만큼 나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했던가?
'아니. 그러지 않았어.'
그저 연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구해 주는 마물을 가지고 연구를 해서 평화를 가져다주면 된다고 말이다.
페르다는 버넬의 연구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었다.
마법사의 인생을 종 친다는 버닝 아웃조차도 무릅쓰면서 말이다.
'나도 걸어야 해...!'
버넬은 웅크리고 있는 자기 모습을 직면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발판으로 삼아 크게 도약했다.
"그으으윽!"
버넬은 마나를 쥐여 짜내었다.
자신의 생명력을 마나로 치환하여 바꾸는 것이다.
"섭정니이이임!"
그 자신감이 없던 버넬이라 생각할 수 없는 용맹한 포효성을 터트렸다.
"제 최후의 마나를 받아 주십시오오오!!"
커다란 구체가 페르다 쪽으로 넘어왔다.
"고맙네."
페르다는 그 마나 구체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곰 마물에게 던졌다.
콰아앙!
곰 마물의 안쪽에서 폭음이 터졌다.
마물의 움직임과 재생력이 완전히 멎어 들었다.
'심장은?'
심장이 터져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페르다는 집중해서 가슴부를 관찰했다.
'뛰고 있군.'
녀석은 겨우 숨이 붙어 있을 정도가 되었다.
초재생 능력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지금이다! 힘줄을 끊고 포박시켜라!"
아르웬과 그 수하들이 돌격하여 곰 마물을 공격했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
그렇게 단 한 명도 희생하지 않고, 마물을 생포해 내었다.
페르다는 그러는 동안 버넬의 상태를 보았다.
"괜찮은가?"
페르다가 물었다.
버넬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나 버닝 아웃이 온 것이다.
장기가 끊어지는 고통일 텐데도 그는 웃고 있었다.
"하하... 어, 어땠습니까, 제, 제 진심?"
페르다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멍청한 짓을 했군. 목숨을 거는 짓을 하다니."
"서, 섭정님이 그러는데, 제가 어찌...."
못 하겠습니까?
그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페르다는 그를 조심스럽게 눕혀 두었다.
"괜찮으십니까, 섭정님?"
"마물 포박은?"
"예. 마물의 상태는... 양호합니다. 그대로 성까지 운송하겠습니다."
"고맙군. 그전에 급한 일부터 하도록 하지. 영지에 마법사가 있나?"
"예. 그렇습니다."
페르다는 자신의 발치 아래에 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을 데려가서 마력 주입을 좀 부탁하겠네. 우리 성까지는 거리가 머니, 자네들에게 부탁하도록 하지."
아르웬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섭정님께서는 응급 처치가 필요 없으십니까?"
"뭐가 말인가?"
아르웬이 자기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코피가 나십니다."
"코피?"
페르다는 자기 코를 훔쳤다.
지금은 차갑게 식어 버린 피가 묻어 나왔다.
"그렇군."
집중하고 있던 페르다도 몰랐다.
아르웬이 품속에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마법을 무리하게 쓰시면 코피가 난다고 들었습니다. 어지럽거나 한다면 최우선으로 치료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괜찮네."
페르다는 손수건으로 자신의 코를 닦았다.
몇 번 툭툭 두들기자 코피는 금세 멎었다.
"내가 무모하긴 해도 멍청하게 몸을 버려 가면서 싸우는 사람은 아니라네."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는 쓰겠지만, 절대로 자신의 목숨을 걸진 않는다.
실제로 그는 마나 구체를 3개 정도 더 생성할 여유가 있었다.
"그냥 마나가 폭발하면서 자갈돌 하나가 얼굴에 날아들었는데 그게 코를 때린 모양이야."
그러니 페르다는 과부하까지 해 가며 자신을 버린 버넬이 그저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20화. 당근과 채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