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 (4)
당초 사흘로 계획되어 있던 실습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라이프치히 가문의 지원과 카를의 경험 덕분에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다고 하여도 경이로운 속도였다.
금요일 아침에 출발했던 레이드가 오후에 막 접어드는 시간대에 끝이 나게 되었으니.
넉넉한 휴식 시간을 갖게 된 생도들은 모두 기분 좋은 모습으로 라이프치히 저택에 들어섰다.
"다들 고생이 많았네. 푹 쉬다 가시길 바라지."
"어머어머, 일단 전부 씻는 게 좋겠어요."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카를의 아버지인 라이프치히 백작과 그 부인께서 맞아 주었다.
카를은 그들의 바람대로 노천탕을 준비해 주었고 모두 던전 레이드의 피로를 씻어 내며 그곳에 몸을 담궜다.
"하아, 녹는다...."
온천에 머리만 빼놓은 에이미가 흐물흐물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찬가지로 밖에 펼쳐진 절경을 바라보던 리엔이 그녀를 향해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고생했으니까 오늘 한잔할까?"
"...내가 술은 잘 안 마시지만, 오늘 같은 날은 빼놓을 수 없지."
오늘 말고도 휴일은 이틀이나 남았으니 마시고 죽어 보자.
그렇게 목욕을 마친 후 나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음식들이었다.
애지중지하게 키웠던 막내가 아카데미에 가더니 친구들까지 저택으로 데리고 왔다.
라이프치히 백작 내외로서는 그것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렇기에 특별히 신경 써서 대접을 준비했고 생도들은 오랜만에 앞뒤 신경 쓰지 않은 채 신나게 놀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음, 흠흠."
기분이 좋은 건 레이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최소 하루 반나절에서 이틀은 레이드 일정을 잡고 갔는데 이쪽은 카를 덕분에 얼마 걸리지 않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역시 카를을 리더로 추천하길 잘했어.'
괜히 어설프게 하는 것보다는 성격이 똑 부러지는 카를에게 맡겼던 것이 다행이었다.
휴식이 거의 없던 강행군이라 조금 힘들었지만, 바짝 하고 쉬는 것이 레이시스의 스타일과 맞았다.
"...."
연회가 끝나고 돌아온 뒤.
한잔 거나하게 걸친 유리아는 이미 뻗어 있었다.
이번 레이드에서 특히 고생하던 것이 그녀였다.
망령 특성상 한 번 다치게 되면 꽤 성가셨기에 뒤에서 다른 생도들이 다치지 않게 열심히 서포트했으니.
평소에는 거칠게 해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이것저것 꼼꼼하게 신경 쓰는 스타일이라 심력의 소모가 컸을 것이다.
그것 역시 유리아가 상냥한 사람이라는 증거였으니까.
"하암."
레이시스는 술을 마시진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드 때문에 피로가 쌓인 것인지 절로 하품이 나왔다.
가볍게 산책을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다 싶어 방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카를?"
"...음."
"그렇게 차려입고 어딜 가는 거예요?"
카를의 모습은 아까 낮에 던전 레이드 할 때와 같았다.
검은 상·하의에 황토색 로브, 그리고 황실에서 얻은 정의의 검까지.
영락없이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차림새였다.
"아까 데스 나이트가 조금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데스 나이트요? 쓰러뜨렸잖아요. 라이프 배슬도 회수했고."
"그게 아니라 제가 알던 것보다 조금 더 강해진 느낌이라서요."
"강해진 게 문제가 되나요?"
"이쪽 망령은 일정 주기로 폭주를 하곤 합니다. 그때가 되면 망령들이 사나워지고 더 강해지지요. 아직 몇 년 남은 거로 아는데 갑작스럽게 폭주가 일어나면 피해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걸 확인하러 간다는 소리군요."
"그렇습니다. 조용히 혼자 갔다 올 테니 레이시스 양은...."
"잠시만요. 기다려 주세요. 절대 혼자 먼저 가지 말고."
레이시스는 카를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곧바로 방에 돌아갔다.
돌아갈 때 입기 위해 준비해 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무장까지 완벽하게 챙겨 든 다음 다시 밖으로 나왔다.
행여나 카를이 먼저 갔을까 걱정했는데 신신당부했던 것이 효력이 있었는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죠."
"...괜찮으시겠습니까? 오늘 많이 무리해서 피곤할 텐데."
"저는 한 거 별로 없어요. 다른 아이들이 고생했죠."
레이시스는 방문을 닫으며 슬쩍 유리아를 확인했다.
옷을 갈아입느라 제법 부스럭 소리를 내었는데도 깨어나지 못한 걸 보니 정말로 많이 피곤했던 듯싶었다.
"저도 좀 찌뿌둥하던 차였어요. 온천이나 한 번 더 갈까 싶었는데 땀 한 번 더 빼고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사실은 많이 피곤했다.
일행 중 카를을 제외하고 가장 실력이 뛰어나던 그녀였으니 활동량도 왕성하게 가져갔다.
하지만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카를에게 가자며 재촉했다.
"...."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 뒤에서만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던전이 리셋 되려면 24시간이 걸리는 거 아니에요? 데스 나이트를 쓰러뜨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3층에 갈 겁니다. 리치와 싸워 보면 제 느낌이 착각이었는지 알 수 있겠죠."
"3층이요?!"
레이시스는 소리를 내었다가 황급히 주변 눈치를 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거기는 위험하다면서요. 2층도 버거웠는데 3층까지 가면...."
"생도 수준에서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실력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알단 가시죠. 밤이 그리 길지 않으니 확인만 하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알았어요."
레이시스는 가볍게 마나로 몸을 순환하며 피로를 씻어 냈다.
카를은 곧바로 땅을 박찼고 순식간에 저택을 나서며 평야를 내달렸다.
타다다닥!
레이시스도 곧바로 그 뒤를 따랐고 둘은 머지않아 성벽 쪽에 다다랐다.
쉭!
카를은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성벽을 뛰어넘었다.
그 표홀한 움직임에 입을 벌린 레이시스는 헛바람을 토해 냈다.
'어떻게 사람이 저리 쉽게 성벽을 뛰어넘지?'
잠시간 성벽을 노려보던 레이시스는 가볍게 숨을 토해 내며 몇 번의 도움닫기를 통해 성벽을 뛰쳐 올랐다.
탁! 탁! 탁! 탁!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성벽을 이렇게 뛰어넘어 본 적이 있어야 가늠이라도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벽을 박차자 정말로 성벽을 뛰어넘으며 건너편에 내려설 수 있었다
"...."
오히려 성벽을 넘어온 본인이 '이게 되네'라는 표정으로 카를 앞에 착지했다.
"그럼 가시죠."
"알겠어요."
여기까지 오니 제법 자신감이 붙었다.
레이시스는 먼저 달려나가는 카를의 뒤를 쫓으며 힘껏 다리를 놀렸다.
"...."
하지만 그 자신감이 꺾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 빨리 달리지?'
싸우는 도중 잠깐잠깐 가속하며 템포를 빨리 가져가는 건 자신도 할 수 있었다.
마나로 몸을 가볍게 하고 스텝으로 속도에 변주를 주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 반칙이지 않은가.
"...."
아무리 힘껏 발을 놀려 보아도 점차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단련은 쉬지 않고 열심히 했는데,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나?
괜히 따라온다는 생각도 들고 분한 마음에 오기가 생겨 어떻게든 따라잡고자 다리를 놀렸다.
"...아."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카를의 신형은 어느덧 저 멀리 앞서 나갔고, 자신은 계속해서 느려졌으니 결국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말 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다리를 멈추려고 할 찰나, 부드러운 기운이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계속 달리십시오."
"...카를?! 언제 왔어요?"
"레이시스 양이 너무 느려서 함께 가려고 왔습니다."
"제가 느린 게 아니라 카를이 비정상적으로 빠른 거예요. 1학년 중에는 상위권이었다고요."
레이시스는 괜히 심술이 나서 투정을 부렸다.
카를이 잘못한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카를은 그 투정에 옅은 미소를 지어 주면서도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해 왔다.
"그대로, 몸을 이끄는 흐름에 발을 움직이세요."
"...이렇게요?"
"예, 그렇게."
본래라면 마차를 타고도 1시간이 넘게 걸렸을 거리다.
하지만 카를과 함께 달리니 고작 10분 만에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막혀 있네요."
"출입 시간이 끝나면 폐쇄하니 말입니다. 여길 이렇게 하면...."
달칵.
카를이 자물쇠를 조작하자 잠금이 풀리며 입구가 열렸다.
능숙해 보이는 그 모습에 레이시스는 기가 찬 표정으로 물었다.
"한두 번 해 보신 솜씨가 아닌데요?"
"제가 뭐든 빨리 배우는 스타일이라. 가시죠."
철컥.
다시 잠금을 걸어 놓고는 사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시스의 말대로 아직 24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던전은 리셋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까 전 사방을 휩쓸며 나아갔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바.
덕분에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5분도 안 되어서 1층을 주파하고 그것보다 더 짧은 시간에 2층을 넘어섰다.
"...."
3층은 1, 2층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더 꺼림칙하고 더 소름 돋는 기분이 곳곳에서 느껴지며 자신의 정신을 현혹하는 듯했다.
"3층의 보스 몬스터가 리치인 만큼 정신 쪽에 착란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카를은 이걸 전부 다 공략했어요?"
"전 혼자 3층까지 레이드가 가능합니다."
"하하...."
별 대수롭지 않게 말해 오는 카를의 모습에 레이시스는 짤막한 숨을 토해 냈다.
낮에 자신들이 했던 고생이 무색해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와요!"
"제 뒤에만 계십시오."
파아앗!
카를은 가볍게 손을 뻗어 명천신공의 기운을 흩뿌렸다.
그러자 허공이 얼어붙으며 닥쳐오던 정체불명의 덩어리들을 무력화했다.
"...이건."
"스티지라고 하는 마물입니다. 생소한 녀석이라 저도 정체를 알아내는 데 애를 먹었죠."
콰직.
카를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밟아 깨트렸다.
그 뒤로도 비슷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몬스터가 닥쳐오면 카를이 손을 휘둘렀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이건 마치.'
네리안의 빙결의 권능과도 같지 않은가.
솔직히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더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를의 모습에 섣불리 질문을 던지기 어려웠다.
"도착했습니다."
"...여긴 더 괴상하게 생겼네요."
2층의 보스룸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이하게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잠시 떨어지라는 손짓에 뒤로 물러나 있자, 카를은 주먹을 꽉 쥐고는 허리를 뒤틀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힘이 보스룸의 문을 후려갈기며 단숨에 터트려 버렸다.
그러고는 가볍게 안쪽으로 걸어 나가자 2층과는 다른 새빨간 불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츠즈즈즈.
그와 반대로 카를의 몸에 실린 새하얀 빛의 광채도 강해지기 시작한바.
촤아아악!
리치가 들고 있던 낫이 지상을 향해 쇄도했다.
레이시스는 그 섬찟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카를은 천뢰검을 꺼내 쥐고는 가볍게 휘둘렀을 따름이었다.
쩌저저적.
눈앞의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 불길함을 흩뿌리던 새빨간 불꽃과 기다란 낫을 쥐고 있는 리치까지, 전부.
101화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 (5)
♠
◆ ♥ ♣
"카를, 혹시 네리안과 숨겨진 형제, 그런 거예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레이시스는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모든 걸 얼려 버리는 빙결의 권능.
호펜하임 가문의 혈계 전승으로 이어진 그 힘과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
"아."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 오는 레이시스의 모습에 카를은 깜빡했다.
명천신공의 극음지기를 둘러댄 건 유리아 쪽이었다.
레이시스에게는 애초에 말한 적이 없었기에 저리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리아 양한테는 말한 적이 있었는데 헷갈렸습니다."
"유리아요?"
레이시스는 레이시스대로 놀랐다.
갑자기 유리아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가.
"마법 스터디를 할 때 여러모로 조언을 조금 받았습니다. 네리안 군의 빙결의 권능과 비슷한 형태로 발현되는 이 힘은 제가 돌림병에서 죽다 살아난 뒤로 얻은 것이라. 그렇게 오해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돌림병."
죽다 살아난 사람이 모종의 각성 상태에 이르러 새로운 힘에 눈을 뜨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며 레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건 쓰러뜨린 건가요?"
"잠깐 멈춰 놓은 것뿐입니다. 이 정도로 쓰러질 정도면 데스 나이트에 이어 3층의 리치도 공략하자고 했을 겁니다."
쩌저적.
아니나 다를까.
명천신공의 결빙에 깨어져 나가며 리치가 다시금 자유를 되찾았다.
녀석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손에 쥔 낫을 기다랗게 휘둘러 카를을 썰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촤아아악!
공동 천장부터 벽, 그리고 바닥까지.
오로지 카를을 처참하게 썰어 버리기 위한 참격이 기다란 흔적을 남기며 쇄도해 왔다.
탓!
레이시스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보아도 자신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카를의 방해는 되지 않기 위해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
휘릭.
카를은 손에 쥔 천뢰검을 역수로 세우며 바로 옆에서 들이닥치던 낫을 막아 냈다.
카가가각!
서슬 퍼런 죽음의 낫과 신검이 한 치의 밀림 없이 그 자리에서 대치했다.
레이시스는 처음에 카를이 낫에 베여 나가는 줄 알았다.
바닥에 새겨진 저 깊숙한 자국만 보아도 얼마나 강한 힘이 담겨 있는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카를은 제자리에 우뚝 선 채 기어코 녀석의 낫을 막아 냈다.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튕겨 내기까지 했으니.
쉬악!
낫을 뒤로 돌린 리치가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혼탁한 청록색 혼령이 뿜어지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쇄도해 카를을 노려 왔다.
'흠.'
쏟아지는 혼령을 보며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시스가 없었다면 천마신공으로 한 번에 휩쓸어 버렸을 텐데.
아쉽게도 명천신공은 힘 싸움을 하기에 적합한 기운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
다시금 검을 고쳐 잡고 기수식을 취한 카를은 매서운 기세로 궤적을 그렸다.
천원검법 오 초식 봉마(封魔).
봉마의 초식 자체가 사마외도의 기운을 찍어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리치가 내뿜은 혼령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닌바.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며 카를의 정신을 현혹하려던 혼령들이 신검에 엮여 모조리 잡아 먹혔다.
파스스스.
일렁이는 명천신공의 기운 끝에서 부서진 혼령의 마기가 마치 파편처럼 흩날렸다.
콰아아앙!
날 선 포격이 카를의 머리 위에서부터 꽂혔다.
응축된 마기가 마치 전함의 레이저 포처럼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붕붕붕-!
동시에 리치는 손에 쥔 낫을 돌리며 회전력을 극대화했다.
이윽고 모든 힘이 집약된 그 꼭지점은 카를의 머리를 쪼갤 듯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쩌억!
카를은 건재했다.
엄청난 힘이 응축된 리치의 낫을 막아 내며 눈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지만, 그가 딛고 선 대지에 균열이 일어나며 한계를 호소했다.
"...."
레이시스가 보기에는 감히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경이로운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겨우 숨만 내쉬며 식은땀이 가득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카를이 이렇게 강하다고?'
문득 시험 전에 카를과의 대련에서 제법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당시 프라한 교관님으로부터 받은 아라크네의 기술이라면 다소 불리하더라도 좋은 싸움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제로 그런 줄 알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아예 바뀌었다.
카를은 자신의 수준으로, 생도의 수준으로 감히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정체를 숨긴 것도 아니고 다른 신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저리 강한 거지?
파아아앗!
공동 안에 검붉은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단지 멀찍이서 보고만 있는 것으로도 온몸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드는 그런 불꽃이었다.
촤아아악!
흘러넘친 불꽃이 소낙비가 되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카를은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 검을 회전했고 자신에게 쏟아진 빗방울을 모두 걷어 냈다.
츠즈즈즈.
리치의 턴이 지나갔으니 이제 카를의 차례가 온바.
명천신공의 기운이 천뢰검 위로 솟아오르며 벽력의 기운을 엮었다.
천원검법 이 초식 천뢰(天雷).
쐐애애액!
아래에서 위로.
순리를 거스르는 역행의 검이 허공을 베어 가르며 리치에게 도달했다.
쩌엉!
리치 역시 낫을 휘둘러 카를의 검이 더는 올라오지 못하도록 찍어 눌렀다.
카를은 곧바로 검의 기수식을 바꿨다.
천뢰가 막힐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움직임.
애초에 천뢰는 리치에게 닿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츠즈즈즈.
사 초식 난염(亂炎).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극저온의 불꽃이 리치의 마기를 집어삼켰다.
팅!
리치는 낫을 크게 휘둘러 지척까지 쫓아온 카를을 밀어내려 했다.
리치의 공격 패턴 특성상 위력을 내기 위해서는 거리를 벌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허공으로 날아오른 카를은 리치의 낫을 부드럽게 튕겨 내며 발판이 없는 상태에서 절초를 전개했다.
우르릉─!
같은 벽력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지향하는 바가 바뀌었다.
천뢰가 최속을 노린다면 진천은 최강에 닿아 있었다.
육 초식 진천(振天)
콰아아아앙!
공동을 뒤흔드는 뇌성이 사방에 떨침과 동시에 극음의 벽력이 리치의 몸에 직격했다.
녀석은 벽에 처박힌 채로 몸을 움직여 곧바로 수습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 치명적인 틈을 두고 볼 카를이 아니었다.
저저저적.
뒤이어 이어진 수십, 수백 번의 무작위 참격.
교단의 주구와 가호로 인해 신성이 깃든 궤적이 리치의 몸을 가차 없이 베어 갈랐다.
사아아아....
한계 이상의 타격을 받은 리치의 몸이 더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카를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녀석의 라이프 배슬을 박살 내고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지상에 착지했다.
철컥.
천뢰검까지 다시 집어 넣은 뒤에야 이 싸움이 자신의 승리로 끝난다는 걸 세상에 고했다.
"흠."
하지만 리치를 쓰러뜨린 카를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데스 나이트는 분명 기존 개체보다 강해진 것처럼 느껴졌지만, 리치는 이전과 비슷한 수위를 유지한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착각이었나?'
그건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했기에 기세를 거두며 투기를 가라앉혔다.
'의미 없는 싸움은 아니었어.'
검대에 매인 신검의 존재가 든든했다.
첫 실전에서 천뢰검을 익숙하게 다뤄 낸 것만으로도 이 싸움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리치의 낫을 막아 낸 직후 주춤하거나 조금은 밀려났겠지만, 신검의 효능 덕분인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리치를 계속 압박할 수 있었다.
'괜히 정의가 찾으라고 한 게 아니로군.'
일단 검 자체는 나무랄 것이 없었다.
중원에 있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뛰어난 검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아직 손에 전부 익지 않았는데 완전히 길들어진다면 또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끝났습니다. 돌아가죠."
카를은 그대로 레이시스와 함께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을 나왔다.
몇 시간 뒤에 다시 던전이 리셋될 테니 완전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었다.
"...."
레이시스는 카를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었으니.
* * *
던전에서 느낀 이질감이 착각이었다는 걸 확인한 이후에는 카를도 휴식에 들어갔다.
다른 이들과 함께 온천을 즐기고 맛있는 음식을 나눴으며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월요일이 되어 바이에른으로 떠나야 하는 날의 이른 새벽.
카를은 홀로 저택을 나와 라이프치히 시내로 들어섰다.
익숙한 골목을 따라 작은 후문을 열고 들어가자 언제나 그렇듯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그 2층에는 녹스의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스터."
진즉 카를의 기척을 느낀 엑스가 문을 열고 나와 맞아 주었다.
왕국 기사단장 출신의 엑스는 마흔이 넘어선 나이임에도 여전히 전성기 못지않은 육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녹스에게 없어선 안 될 인재로 신입 조직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전담하고 있었다.
"얼굴색이 더 밝아졌군. 술은 완전히 끊었나?"
"3개월은 더 됐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 하도록. 내가 수도로 떠나기 이틀 전에 마시는 걸 봤는데."
"...끄응."
시작부터 한 방을 먹은 엑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거의 끊었어. 지금 한 달 하고도 보름째 마시지 않고 있으니까."
"최고 기록 경신 중이로군."
"저번에 두 달이 넘은 적 있다."
"도중에 마신 걸 퀸이 봤다지.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할 셈인가?"
술과 관련해서 말하는 족족 격추되는 엑스는 이래선 본전도 찾지 못하겠다 싶었는지 주제를 바꿨다.
"수도로 올려보낸 아이들은 어떻지? 제법 재능 있는 원석들을 발굴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않아도 세컨드가 극찬을 하더군. 어떻게 가르쳤는지 근성 하나는 최고라고 말이야."
"당연하지. 누가 가르쳤는데. 내게 남은 건 그것밖에 없으니 누구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어, 으하하하."
엑스는 가슴을 두드리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사실 그는 이전에 한 번 좌절을 맛보았다.
덕분에 절망에 빠져 살았고 육신이 망가질 정도로 술에 찌들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를 구원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카를이었으니.
엑스의 술병을 치료하고 체내 독소를 빼내는 과정은 이제껏 그가 해 왔던 추궁과혈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마스터도 많이 성장한 것 같은데."
엑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카를의 전신을 구석구석 살폈다.
어깨의 넓이, 얼굴의 윤곽, 팔다리의 길이나 전체적인 신장까지.
수도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때보다 훌쩍 큰 것 같았다.
"아직 한창 자랄 나이니까."
"...진짜로 20살이 맞는 건가? 마스터는?"
"그래."
적어도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로는 20살이 맞았다.
그 안에는 터무니없는 괴물이 숨어 있었지만.
"뭐, 그건 됐고. 이제 슬슬 조직의 확장을 생각하고 있어서. 네게 자문을 구하러 왔다."
102화 성장통 (1)
♠
◆ ♥ ♣
"조직의 확장이라. 지금 수도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건 수도에 진출하며 내실을 다지는 것이지. 내가 말하는 확장은 연합을 뜻한다."
"흠."
엑스는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시도해 볼 법하지. 라이프치히와 지방 쪽은 이제 고착 상태에 이르렀으니 말이야."
위험이 될 만한 조직은 전부 정리했고, 기반이 될 인프라도 완성했으며, 수도에서 무너져도 몇 번이고 재기할 만한 자원을 축적했다.
사실 수도 진출의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지방 영지에서 왕노릇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태생적으로 채워야 하는 그릇이 있었다.
자신은 기사단이라는 작은 내용물도 감당하지 못해 삐걱거리고 부서졌지만, 마스터는 적어도 이쪽에서 가늠할 수 있는 깊이는 아니었다.
"애초에 수도 진출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에 걸쳐 시도했음에도 부진했으니."
"하지만 그때는 당신이 없었지. 난 그 차이가 현재 성과를 가른 것이 아닌가 싶네."
카를도 동의하는 바였다.
자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따라 녹스 조직원의 작전 수행률이 천차만별로 갈렸다.
좋은 조직은 수장이 부재중에 있어도 모두가 제 몫을 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녹스의 모든 인프라와 힘이 자신을 중심으로 나오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대체하고자 연합을 구성하는 것이지. 외부 세력은 내가 없다고 해도 삐걱거리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진 않을 테니."
생각해 보면 수도 진출의 본격화는 타이밍부터가 좋았다.
아카데미 입학에 맞춰 서부 3상업지구 두 곳을 밀어 버렸는데, 입학시험에서 일어난 테러와 겹쳐 다른 조직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
그사이 남은 곳도 야금야금 갉아먹고 결국엔 라한의 반절까지 잡아먹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물론 완벽한 건 아니다.'
중간중간 잡음이 있었다.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녀석들도 있었고, 의미 불명의 세력이나 조직 역시 정황이 포착되었다.
그런 부류와 엮이기 시작한 이상 조금만 방심해도 폐부 깊숙이 날카로운 칼날이 찔러 들어올 터.
"그러니 그 충격을 완하하기 위해 연합을 엮으려는 것이지."
"말이 좋아야 연합이지 결국엔 고기 방패군."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구조다. 존속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우리 주위에 둘려 함께 살아가는 것이니까."
"뭐, 난 괜찮다고 본다. 그 방파제가 제 역할만 해 준다면 말이지."
"첫 케이스가 라한이다."
"서부 3상업지구의 얼굴 마담을 자처하기엔 딱 좋겠군."
라한 밑에 녹스가 들어간 것처럼 구도를 짜고 있다.
실제로 외부에 비춰지는 모습 역시 자신이 디르센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일 테지.
바로 대척점에 있는 투르가조차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좋군. 설령 디르센과 투르가가 싸우다 자멸한다고 해도 제3의 인물을 후계로 내세워 라한의 명백을 이어 나가면 되니까."
"녹스로서는 손해가 없는 일이지."
"다 좋아. 다 좋은데 딱 하나만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자고."
"무엇이지?"
"쿠션은 말 그대로 쿠션이다. 솜이 꺼지면 교체하거나 버려야 하지. 역할이 끝났는데 괜히 애착을 지녔다간 내 꼴이 되는 것이다."
주객전도를 경계하라는 소리였다.
괜히 헛바람이 들어 녹스를 등한시하고 손에 넣은 장난감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녹스든 장난감이든 결국엔 제 역할을 하게 되지 못할 테니.
그 모든 건 녹스가 성장하기 위한 원동력과 발판에 불과했다.
"말에 뼈가 들어 있군."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내가 어떻게 몰락했는지 알고 있겠지?"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를 물밑에 두고 얼굴마담을 내세워 연합을 구성하는 것으로 규모를 부풀린다.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세력, 혹은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도록 매력적인 비전을 품어야겠지.
녹스의 기반이 건재한 이상 카를이 무너질 일도 없었다.
필요한 건 시간뿐.
'녹스가 순조롭게 성장하고 아카데미의 4년이 지난다면....'
엑스는 잠시 그 광경을 상상했다.
어쩌면, 정말로 제국의 이면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큰 손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생각은 정리되었나?"
"덕분에."
카를은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직 운영 방침을 누군가의 조언이나 훈수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엑스에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건 그것이 맞는지 스스로 되물음과 동시에 더 나은 방향이 없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카를에게 있어 블랙 라벨들은 또 하나의 자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럼 다음은 수도에서 보도록 하지."
"난, 안 가. 그 빌어먹을 곳엔. 목숨이 위험해질 정도에나 부르도록. 그 이외에는 이곳에서 얌전히 신입들이나 키우고 있을 테니."
제국 수도라면 여전히 격렬하게 거부하는 엑스의 모습에 카를은 피식 웃어 주며 자리를 떠났다.
* * *
월요일, 새로운 주가 시작되는 첫날.
카를 파티의 생도들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아카데미에 복귀했다.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을 말끔하게 공략했고, 수많은 사령 계열 몬스터의 표본, 그리고 보스 몬스터인 데스 나이트까지 처치하는 공적을 세우며 당당하게 최상위권을 차지했다.
기말시험에서 반전을 노려 수석을 겨냥하고 있는 레이시스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점수였다.
"...."
하지만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별로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에서 카를의 진면목을 보았기 때문일까.
고작 이런 점수에 연연하는 자신이 어리고 유치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점수에 구애받지 않고 홀가분하게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는 카를의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난 왜 점수에 집착하는 걸까?'
강의를 듣는 와중에도 레이시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알포람 왕국의 왕녀라는 타이틀 때문에?
이름만 왕녀지 왕실 내의 취급은 보통 귀족만도 못하다.
그렇기에 악착같이 공부해서 제국으로 유학을 온 것이니까.
'나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이라서?'
알포람 왕국, 왕녀, 외모....
갖가지 요소를 빼고 나면 나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스스로 이룩한 것 없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선물들만이 가득했다.
그것을 얻을 기회조차 없던 누군가는 배부른 투정이라며 힐난할지도 몰랐다.
'그것도 맞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조금 더 힘든 상황이었다면 이런 한가한 고민과 고찰 따위는 하지 않고 있었을 테지.
정상을 노리기에는 부족하고 아래로 가기에는 어중간하게 뛰어나고.
결국, 시험의 성적처럼 항상 애매한 것이 자신의 위치였다.
그렇다면 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언젠가 팔려 갈 정략결혼을 위한 커리어?
아니면 스스로 족쇄를 풀고 자유를 거머쥘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
하나도 모르겠다.
부모님도 알려 주지 않은 것이고 공부를 가르쳐 주는 교사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자신은 어느 이정표를 따라 나아가야 할까.
"표정이 왜 그래? 고민 있어?"
"...."
유리아와 식사 도중 얼굴에 티가 났는지 들키고 말았다.
레이시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잿빛 마탑의 후계자, 마법사.
명확한 목표가 있고 방향성 또한 뚜렷하다.
자신이 원하고,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는 것 자체로 축복이 아닌가 싶었다.
"무슨 일 있냐고."
"...유리아."
"응."
"유리아는 마법을 왜 배우는 거예요?"
"갑자기?"
우수에 젖은 눈으로 생뚱맞은 질문을 던져 오는 레이시스의 모습에 유리아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러지? 카를한테 차이기라도 했나?'
물밑에서 도는 소문은 대충 알고 있다.
레이시스와 카를의 관계가 예사로운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가십 거리는 관심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기 마련.
교우 관계가 적은 자신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바이에른 아카데미 전체가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흠.'
그런 정보를 토대로 유리아는 레이시스의 사고를 유추해 보았다.
평소 좋아하던 스테이크도 깨작깨작 먹고, 무슨 말을 걸어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겨우 입을 열어서 한다는 말이 마법을 왜 배우냐고?
'진짜 카를한테 차였나?'
생각해 보니 그것 말고 레이시스에게 이런 충격을 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레이시스는 겉으로 보기에 순둥순둥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이미지였지만, 내면에는 아주 지독한 고집의 악마가 살고 있었다.
그런 악마를 이렇게까지 동요하게 만들 정도라면 파란만장한 청춘의 어긋남밖엔 없겠지.
"...뭐,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아?"
"...."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지. 그러다 레이시스 너처럼 무언가에 턱 하고 걸리면 그것이 신경 쓰여서 돌아 버릴 것만 같은 기분도 느끼는 거고."
"...유리아, 당신도."
"응?"
"그런 기분을 느꼈나요?"
레이시스는 고개를 들었다.
카를은 유리아에게도 마법 공부를 하며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고 했다.
유리아 역시 잿빛 마탑의 후계자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을 터.
카를과의 격차에서 무슨 기분을 느꼈을까.
"나도 느꼈냐고...?"
유리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괜히 파스타 면만 꾹꾹 찔렀다.
'난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저쪽에서도 이쪽에서도 한 가지에 정신이 쏠려 있어 그것에 매몰되어 살았다.
돌이켜 보니 꽤 무미건조한 삶이지 않은가.
남들 다 하는 연애도 못 해 보고.
그렇기에 레이시스의 감정에 십분 공감은 못 하겠지만.
...믿었던 것에 배신당한 기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있긴 했다.
"가슴이 턱하고 막혔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더라. 그냥, 막 현실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결국엔...."
유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졌다.
여기까지 말하고 싶던 건 아니었는데.
멍하니 있던 레이시스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그녀는 살짝 초췌해진 눈으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유리아,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군요."
"...아, 뭐. 난 너랑은 살짝 다를 테지만, 대충 결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 함부로 공감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하면서도 말이야."
횡설수설 둘러대는 유리아의 모습에 레이시스는 작게 웃음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 다시 손을 움직였고 스테이크를 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큰 위로가 되었어요. 결국엔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성장통이라는 것이겠죠."
"그래.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절반이 여자면 절반은 남자일 것 아니야?"
"그렇...?"
스테이크를 씹던 레이시스는 맥락이 이상해진 이야기에 고개를 들어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우리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어...."
설마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 올 줄 몰랐기에 유리아는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여기서 내빼는 것도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바.
차라리 여기서 더 직설적으로 충격 요법을 가하는 게 후유증이 없을 수도 있었다.
"카를한테 차인 건 너무 신경 쓰지 마. 그 녀석 눈이 옹이구멍인 것뿐이니까.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날 거야."
툭.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레이시스는 나이프를 떨어뜨리며 더듬거리는 말투로 되물었다.
"...예? 저, 카를한테 차였어요?"
103화 성장통 (2)
♠
◆ ♥ ♣
1학기 중간시험 이후.
갑작스럽게 이어진 실습도 마무리되었고 바이에른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 공략은 카를 일행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중간시험에서 답안을 밀려 써 점수를 많이 깎아 먹은 막시밀리안의 경우는 기말시험에서의 역전을 바라볼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당시 시험의 난이도가 터무니없이 어려웠기에 대부분 낮은 점수대에 분포가 몰려 있었다는 점도 한몫을 했고.
그렇게 전체 순위 39위에 자리하게 된 막시밀리안에게는 최근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
대각선 앞자리.
카를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집중해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카를은 이번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입학시험에서는 턱걸이로 50위를 했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실기도 잘 보아서 그런지 단숨에 20위권으로 뛰어올랐다.
특히 이론 성적 쪽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만점은 물론이고 추가 점수까지 부여받아 공고한 성벽을 세웠다.
입학시험에 이어서 유례 없는 고점이라나 뭐라나.
성적의 검증을 위해 교수와 교관들이 따로 모여 판별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솔직히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좀 엇비슷해야 질투하고 뭘하든 그럴 것이 아닌가.
하지만 카를의 레벨은 감히 자신들이 재단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카를은 그냥 옆에 있으면 든든한 그런 존재였다.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고.'
평소 공부나 그런 쪽에서 받는 자잘한 도움은 정말로 감사하고 있었다.
카를이 아니었더라면 순위가 3, 4등은 더 깎였을 테지.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건 에렌달 숲의 실습 이후 겪었던 트라우마 쪽이었다.
카를 덕분에 그 지옥에서 빠져 나와 다시 정상적은 삶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막시밀리안은 카를을 향해 한 가지 의심을 품게 되었다.
'혹시 카를이 나보다 강한가?'
학기초부터 이때까지.
서로 겨뤄 왔던 모든 대련이나 실습 점수, 그리고 결과까지 모두 자신 쪽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이론은 상대가 안 되어도 이쪽은 더 나았기에 가끔 잘난척하며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물론 카를이 약한 건 아니었다.
생도 중 상위에 들 실력은 충분히 있었었으니까.
머리가 똑똑한 만큼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신체 능력이 뒤떨어지는 걸 인정하고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새벽에 있었던 '그' 대련에서 막시밀리안의 자부심은 산산 조각이 났다.
'신물이 토해져 나올 정도로 얻어맞았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핑계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일단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숲에서 돌아온 뒤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매일 새벽마다 몸을 혹사헤 컨디션과 신체가 엉망이었다.
계속해서 그 괴물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린 탓에 정신적으로도 많이 피폐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처참하게 얻어맞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친구가 아니라 그냥 원수를 쥐어 패듯 때리던데.'
혹시 평소 자신에게 쌓인 것이 있었던 걸까?
내가 그렇게 밉상이었나?
그래도 그 이후로 정신을 차리고 겨우 트라우마를 떨쳐 낼 수 있었다.
오히려 충격 요법이 잘 통했는지 조금씩이지만 실력도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그때 얻어맞았던 충격과 공포가 뼛속 깊이 남아 있었다.
이제 완전히 회복했기에 다시 카를에게 대련을 신청해 만회하고 싶어도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했다.
"막심,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대놓고 쳐다봤던 걸까.
시선을 느끼고 물어온 카를의 물음에 막시밀리안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카를, 단련장이라도 갈까? 새로운 기구가 들어왔다는데."
"오늘은 일정이 있습니다."
"일정?"
"네. 형님이 부르셔서."
"다리우스 선배님이 부렸다면 어쩔 수 없지."
게일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던 막시밀리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넌 아무 일정 없겠지?"
"...난, 없어."
"그래. 오늘은 카를 몫까지 중량 좀 땡기자고. 카를, 너도 이따 올 수 있으면 같이 하자."
"알겠습니다."
카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강의 이후 다리우스로부터 시간을 내 달라는 부탁을 들었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설마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일까?
'졸업에 맞춰 결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했었지.'
바이에른에 입학할 정도면 보통 부유한 집안의 자제라고 할 수 있었다.
미래에 관한 걱정이 없으니 일찍이 가정을 이루는 것이 기본적인 느낌이었다.
카리우스도 기사단 쪽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던데.
다리우스는 분명 졸업 이후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렇기에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마음이 바뀌었나?
'하긴, 사람을 바꾸는 데 사랑만 한 것이 없긴 했지.'
중원에 있을 시절, 진심으로 남을 사랑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바뀌는 경우는 종종 봐 왔기 때문에 어떤 느낌인지는 대충 인지하고 있었다.
카를은 강의 이후 곧바로 다리우스를 찾아갔다.
바이에른의 건물은 전공과 분야, 그리고 학년별로 구분되어 있기에 다른 건물로 넘어가야 했다.
목적지는 4-A의 클래스룸.
4학년 생도는 졸업반이기에 아카데미에서의 일정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카리우스처럼 기사단에 입단 테스트를 받거나, 외부 일정을 치르기 위해 나가 있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끼익.
천천히 문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보자 한적한 내부의 풍경이 보였다.
안쪽에 있는 건 대부분 여성진으로, 카를이 문을 열자 신나게 떠들던 것을 멈추고는 그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
카를 역시 안쪽을 바라보았다.
강의 이후 4-A의 클래스룸으로 오라고 했으면서 정작 그 본인이 보이질 않았다.
안쪽에 사람이 있어 들어가기도 뭣하니 다시 문을 닫고 나왔다.
다리우스가 올 때까지 그대로 거기서 기다리려 할 찰나, 닫혀 있던 문이 슬쩍 열리며 몇 개의 얼굴이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1학년이지? 누굴 찾아왔어?"
"얘, 걔잖아. 1학년 이론 수석."
"아, 카를로스라고 했나? 그러면 다리우스의 동생 아니야?"
"다리우스의 동생이라고? 생긴 건.... 아, 그러고 보니 머리랑 눈 색이 똑같네."
"다리우스보다는 카리우스 선배랑 분위기가 더 비슷한데?"
"피부 좋은 것 봐. 형이랑 아예 딴판이네."
"난 다리우스도 괜찮은데. 하는 짓은 투박해도 야성미가 있잖아."
"너무 투박해서 탈이지."
자신을 앞에 두고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내는 그들의 모습에 카를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1학년 카를로스입니다. 다리우스 형님을 만나러 왔어요."
"다리우스라면 아까 누가 불러서 나가던데? 여기서 만나기로 했으면 들어와서 기다려도 돼."
"맞아. 들어가자, 들어가자."
"자, 자."
문 사이에서 여성들의 팔이 튀어나와 카를의 몸을 옭아맸다.
마치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에게 붙잡힌 듯한 느낌.
카를은 반쯤 강제로 끌려가 자리에 앉혀졌다.
"뭐 먹을래? 디저트 정도는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먹어도 괜찮거든."
"와, 머리카락 고운 것 봐. 그런데 손질이 제대로 안 되어 있네. 누나가 좀 살펴봐도 될까?"
"그러면 난 피부 톤 정리 좀 해 줄게. 원래 좋은 피부일수록 더 열심히 관리해 줘야 해."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건 별로 선호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리우스의 동문이기에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반쯤 체념한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드륵.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클래스룸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으로 들어온 다리우스는 생도들 사이에 앉아 있는 카를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왔군. 미안하다. 잠깐 저쪽에 일이 생겼다고...."
다리우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머리에 핀까지 꼽힌 채 다뤄지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그제야 확인한 것이다.
"...남의 동생을 장난감처럼."
"꾸며 주고 있는 거라고. 누구랑은 다르게 곱상한 외모니까. 카를도 동의했고. 그렇지?"
"남자면 남자답게 생긴 게 제일이다. 가자, 카를."
"그러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형님이 왔다.
카를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에 덕지덕지 꽂힌 핀을 빼내며 그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래, 잘 가."
"나중에 또 놀러와?"
"다음에는 다리우스가 없을 때!"
생도들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카를은 다시 한번 더 그녀들에게 고개를 꾸벅여 주고는 다리우스를 따라 클래스룸에서 나왔다.
다리우스는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카를, 너 원래 남이 네 몸에 손을 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형님의 학우분들 아닙니까. 괜히 서로 기분 상할 바에 조금 참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형님이 이렇게까지 늦을 줄은 몰랐지만."
"...미안하다."
다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매번 습관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는 것이었지만, 이미 한계치에 다다라 있던 카를은 가볍게 그 움직임을 피하며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래서 누굴 소개해 주겠다는 겁니까?"
"앞으로 중요해질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아도 네게 꼭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왔지."
"으음."
정말로 교제 중인 사람인 걸까?
카를은 본 적이 없었지만, 다리우스도 나름대로 여자깨나 울리고 다녔다고 했다.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이윽고 다리우스의 발이 어느 문 앞에서 멈췄다.
가볍게 노크하고는 문을 밀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카를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가자 처음 보는 생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름이....'
얼굴이 눈에 익은 걸 보니 녹스에서 정리한 명단에 들은 생도인 듯했다.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떠올리며 카를은 제 형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남자도 좋아하셨습니까?"
"...녀석들에게 시달리더니 정신이 나갔나 보군. 헛소리 그만하고 인사나 해라. 어이, 알렉."
"아, 다리우스 선배님."
알렉이라 불린 생도가 일어나 그들을 맞아 주었다.
옅은 갈색 머리에 수려한 외모를 지닌 남성이었다.
'알렉디마, 2학년 7위.'
문무양면으로 흠잡을 곳이 없는 우수한 생도였다.
집안은 대대로 제국 행정 쪽을 책임지는 귀족 가문.
졸업 이후에도 탄탄대로가 약속된 유망한 인재 중 한 명이었다.
"네 부탁대로 데려왔다. 구워삶는 건 네 몫이야."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카를로스 군, 반가워. 2학년 알렉디마라고 한다."
"카를로스입니다. 편하게 카를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럼 카를 군."
알렉디마는 호남형 미남이었다.
얼굴 자체는 부드러워 보이는 미남이었지만, 그 눈동자에 깃든 빛은 절대로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네 형님께 부탁해서 만남을 청한 건 다름이 아니야. 바이에른은 매년 2학기 시작과 동시에 학생회의 선거를 시작한단다. 그해 2학기부터 다음 해 1학기까지. 1년을 책임질 회장을 선출하기 위해서지."
"그렇군요."
카를은 그제야 다리우스가 자신을 알렉디마에게 소개해 준 이유를 깨달았다.
'내 커리어를 위해서인가.'
첫째 카리우스는 기사단 입단이 예정되어 있었다.
추후 영지를 물려받게 될 것이고 커리어 적으로 크게 구애받을 이유가 없었다.
둘째는 내키는 대로 살아갈 것이니 신경 쓸 것이 없던바.
셋째인 막내는 가장 애매한 포지션이었다.
무엇을 하려고 해도 가문의 힘이나 연줄을 사용하기 어려울 테니 이런 식으로 길을 만들어 주려는 것이었다.
대충 이해했다는 카를의 표정을 본 알렉디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눈치챈 것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함께 학생회 도전하지 않겠어?"
104화 성장통 (3)
♠
◆ ♥ ♣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카를은 학생회 권유를 다른 생도에게 미뤘다.
"학생회?"
카를의 이야기를 들은 루이스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1학기 중간시험이 막 끝난 차.
발 빠른 후보는 슬슬 다음 학생회에 도전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는 시기였다.
루이스도 어쩌면 권유가 오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였는데 설마 같은 학년의 생도, 그것도 카를이 먼저 말해 올 줄은 몰랐다.
'역시 흥미를 보이는군.'
알렉디마의 학생회 파티는 다리우스가 신경 써서 만들어 준 자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카를이라고 해도 아카데미 생활, 그리고 녹스의 관리를 하면서 학생회 업무까지 보는 건 다소 무리한 이야기였다.
2, 3학년으로 올라가면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할 듯싶었다.
'녹스 쪽도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상황이니까.'
이제 막 수도에 파고든 것이지 안정적으로 정착한 것이 아니었다.
라한을 잡아먹고 서부 3상업 지구를 발아래에 두어야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겠지.
여차할 경우를 대비해 바이에른 내에서도 어디 한 군데 묶이는 건 지양할 생각이었다.
그런 면에서 유적 탐사 동아리는 최적의 조건이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렉디마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많이 아쉬웠다.
그러니 현재 상황을 최대한 이득이 되도록 활용하기 위해 지금과 같은 구도를 구성했다.
'알렉디마는 현시점에서 학생회장 자리에 가장 가까운 생도라고 했다.'
다리우스도 그것을 알고 자신에게 소개해 준 것일 터.
그러니 카를은 그 자리에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더 좋은 카드를 꽂아 넣기로 한 것이다.
생도 카를로스를 높게 평가하면서, 학생회 타이틀에 관심이 있고, 알렉디마의 눈에도 충분히 차는 그런 인재를.
다행히 루이스도 생각이 있었는지 권유하자마자 은근히 관심 있다는 티를 내었다.
"알렉디마 선배라면 나도 잘 알고 있지. 사교회에서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으니까."
"제 형님과 친분이 있으셔서 제안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저는 어울릴 것 같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왜? 이론 수석이라는 타이틀이 있는데. 생도들의 신임을 얻기에는 그만한 것도 없겠지."
"그러면 또 필요 이상의 주목을 받지 않습니까. 그건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엔 충분히 즐기는 것 같던데."
루이스가 씩 웃어 왔다.
실전의 이해 서바이벌 시험 당시 레이시스와 찍혔던 사진을 말하는 것일 터.
카를은 그 말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닫았다.
'정말로 순수한 호의였거늘.'
설마 시험장 구조가 그런 식으로 되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를 배려해서 그렇게 한 건데 설마 이런 상황이 될 줄이야.
레이시스에게 좀 미안해지긴 했는데 이미 벌어진 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처음에는 성적 덕분에 그런 줄 알았는데.'
시험 직후 아카데미 교정을 거닐 때면 평소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농도가 짙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카를은 당연히 이론 시험의 고점을 갱신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이쪽 분야에서는 유례없는 점수를 얻었으니 말이다.
집무실로 불려 가서 교수님과 교관님들께 칭찬 세례도 받았다.
당연히 생도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상이 올라간 줄 알았는데....
'그간 열심히 쌓아 온 이미지가 이렇게 뒤덮일 줄이야.'
예의 바르고 착실했던 이미지가 순식간에 사랑꾼으로 변모했다.
물론 일시적인 것임을 알기에 자신만 변함없이 행동한다면 머지않아 되돌아갈 터.
조금 이것을 이용할까 싶다가도 레이시스 쪽에서 거부감을 느낄까 봐 침묵을 택했다.
"좋아. 알렉디마 선배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지."
"잘 될 겁니다."
"잘 되면 나중에 보답할게."
실전의 이해 서바이벌 테스트에서 네리안과의 피 튀기는 혈전 이후.
루이스는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가호인가.'
눈으로만 보이던 바람의 궤적이 조금씩 자신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이쪽을 봐 달라고, 자신을 느껴 달라고.
가끔 밤이 깊었을 때 홀로 정원을 산책할 때면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피부 위로 느껴졌다.
이것이 정말로 바람의 가호를 각성하는 전조가 맞다면 이제는 네리안에 꿀릴 필요 없이 대등하게 나설 수 있다는 소리.
동시에 살짝 주춤하던 볼프스부르크 가문의 위세를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학생회도 나쁘지 않겠지.'
수석 자리는 빼앗겼지만, 네리안은 아카데미 활동에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다.
동아리도 형식상 가입했을 뿐 제대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네리안과 라이벌인 자신이 적극적으로 교내 활동을 펼친다면 이쪽의 명성이 더 올라가 역전하고 말 터.
"...."
루이스의 표정에 어린 그러한 생각들을 파악한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고.
며칠 뒤 루이스가 알렉디마 쪽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알렉디마에 루이스라면 무난하게 당선되겠지.'
1학년 생도 중에서는 네리안, 레이시스, 유리아, 루이스, 그리고 이론 수석인 자신까지.
이렇게 5명이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이스를 제외한 넷은 선거에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바.
다른 진영에서 1학년 생도를 스카우트해서 내세우긴 했지만, 루이스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애초에 알렉디마 자체도 이름값이 있는 선두 주자였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무난하게 당선될 테지.
'난 연줄을 통해 그 달콤한 과실만 따 먹으면 되는 것이지.'
그야말로 책임 없는 쾌락이었다.
* * *
"카를, 여기 이 술식은 어때?"
그날 강의가 모두 끝난 후.
카를은 유리아와 마법 스터디를 진행 중이었다.
서로 여유로울 때는 1주일에 한 번, 바쁠 때는 2주일에 한 번 간격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참고로 유리아는 마법사 중에서 1등이라는 성적을 거머쥐었다.
전체로 따진다면 네리안이 수석, 레이시스가 차석,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3등을 거머쥔 루이스의 뒤를 따라 4등에 이름을 올렸다.
어떻게 보면 입학시험 때와 비슷하거나 더 떨어진 성적이었지만, 정작 유리아 본인은 별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오히려 시험이 끝났다며 홀가분해하고 있었다.
"음, 이쪽은 제2법칙으로 하는 건 비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다른 술식의 활용을 고려해 봐야겠군요. 잠시 적당한 걸 찾아보겠습니다."
현재 카를이 하고 있는 작업은 유리아의 숙원이자 테마인 「사계」의 술식을 가다듬는 것이었다.
전체적인 틀을 짜는 건 유리아의 몫이었다.
아무리 카를이 명석하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한들, 마법을 전공으로 하는 그녀보다 뛰어나기 어려웠다.
지식의 총량과 활용, 그리고 숙련도 쪽에서 터무니없이 뒤처졌으니까.
그러니 그 지성을 살릴 수 있도록 이미 구축된 술식 중 오류나 비효율적인 부분을 찾아내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
스터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0.71%의 효율을 개선한바.
0.71%이라면 미미해 보였지만, 막대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후우, 오늘은 이 정도만 하자."
"수고하셨습니다."
유리아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작업한 술식을 조심스럽게 정돈했다.
완벽에 가까운 정밀함을 요하는 작업이다.
하나라도 실수하면 참사를 초래하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카를의 도움으로 많은 부분을 개선할 수 있었다는 것일까.
'카를이 도와주고 나서부터 효율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올랐어.'
이론상 0.1%의 효율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30%의 진보를 이뤄야 했다.
오늘까지 개선된 효율은 0.71%.
혼자 힘으로 했다면 적어도 반년은 더 걸릴 작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인데 그럴 수는 없으니.
'대체 얼마나 똑똑한 거야?'
자신도 「사계」의 술식을 되짚어 보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그는 어렵지 않게 맥락을 짚어 냈다.
물론 디테일한 부분까지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쳐도 경이로운 능력이었다.
만일 카를이 마법을 전공했더라면....
'대단했겠네. 어느 마탑이든 최연소 마탑주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겠어.'
어쩌면 자신을 차기 마탑주로 점찍은 스승님조차 눈독을 들이지 않았을까.
잠시간 머뭇거리던 유리아는 카를에게 말했다.
"카를."
"네."
"이번 방학 때 뭐해?"
"...이제 막 중간시험이 끝났는데 벌써 방학 계획을 짜고 있습니까?"
"원래 계획은 일찍 짜면 짤수록 좋은 거야. 아직 일정이 없으면 마탑에 놀러 오라고 하려 그랬지."
"저번에도 말씀하셨죠. 그런데 마탑이라는 곳에 놀러 가려고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마탑이라고 다 딱딱하지는 않아. 물론 마탑마다 다르긴 하겠는데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고리타분한 곳은 아니야. 여가 시설도 충분하게 설치되어 있고. 폐쇄적인 곳이라 외부에서 들어오지 못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렇군요."
카를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간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었던 마법사들은 마탑을 두고 여러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는 마탑을 고리타분한 군집이라 했었다.
마탑주의 결정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며 그곳에 속한 마법사는 하나의 부품일 뿐이라고.
그 어느 것보다 마탑주와 마탑의 명예가 중요한 곳이고 그것을 위해 다소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마탑의 소속원이라면 참고 넘어가야 했다.
그게 싫으면 이제 쫓겨나거나 나가면 되는 것이니까.
'폐쇄된 곳인 만큼 배척과 정치질이 더 심하다고 했는데.'
그런 것이라면 카를도 꿇릴 건 없으나 구태여 지금 상황에서 마탑에 소속될 생각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이제 막 수도에 진출한 녹스였으니 말이다.
"그럼 방학 때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응,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레이시스나 다른 애들도 함께 초대할 생각이니까."
"마탑주 후계자를 친구로 둬서 좋군요."
"그렇지?"
유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준 건 카를이 처음이었기에.
그렇게 서로 웃고 이야기하고 있을 찰나, 그녀는 문득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카를, 혹시."
"예."
"레이시스랑 무슨 일이 있었어?"
"아하."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유리아의 모습에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전의 이해 테스트 때 있었던 일은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응, 그거야 워낙 유명하니까."
"오해이신 것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으음, 오해."
"어차피 끝난 테스트였기에 인도적인 배려를 했을 뿐입니다. 레이시스 양도 피곤해 보였고, 그 사이에 제 호의가 들어갔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지만, 굳이 불필요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렇, 지."
"그 이후로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 쪽을 공략하는 실습까지는 괜찮았는데...."
"널 피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걸리는 건 두 가지였다.
'리치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소문을 의식하고 그런 건가.'
어느 쪽이든 그리 걱정은 들지 않았지만, 카를은 이런 건 직설적으로 대화해 해결을 보는 성격이었다.
"...그랬구나."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아는 깊게 고개를 끄덕인 후 카를을 바라보았다.
"알았어, 그러면 나한테 맡겨. 내가 가서 말해 볼게."
105화 성장통 (4)
♠
◆ ♥ ♣
세상에는 사람의 힘으로 거스르는 것이 불가능한 어쩔 수 없는 일이 분명 존재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그러했고 운명끼리 부딪치는 교집합이 그러했다.
그리고 매주 한 번씩 돌아오는 '실전 마법의 활용' 강의 역시 레이시스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순리였다.
"아,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정숙해 주세요."
잔잔한 교수님의 목소리와 함께 강의가 시작되었다.
1부는 보통 이론 수업으로 강의실에서 진행했다.
1학기 절반이 지난 만큼 생도들의 고정 자리가 암묵적으로 정해진바.
레이시스는 자신의 옆에 앉은 카를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았다.
"...."
서로 아는 얼굴이었기에 강의 첫날부터 바로 옆자리에 앉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전까지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근래 카를에게 조그마한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레이시스는 강의 시간 내내 몸을 비틀며 카를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카를에게 느끼는 감정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실전의 이해 서바이벌 테스트로 인해 여러 말이 퍼져 부끄러웠던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건 외부 실습 때 목격했던 카를의 어마어마한 강함의 지분도 컸다.
'아직도 눈앞에서 계속 떠올라.'
리치를 상대로 홀로 대등하게, 아니 압도적인 싸움을 벌였던 카를의 모습이.
자신이었더라면 몇 번 휘두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을 텐데 그는 한치의 밀림 없이 던전을 주파했고 보스 몬스터인 리치까지 손쉽게 쓰러뜨렸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광경이었기에 아직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물론 내가 받아들이고, 않고 카를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단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기에 마주하는 것이 살짝 어려워졌다는 소리가 되었다.
"...?"
그런 레이시스의 시선을 느낀 카를은 슬쩍 고개를 골렸다.
그러고는 왜 그러냐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시스는 그런 카를의 모습에 괜히 자신이 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저리 강하고, 어째서 그걸 숨기고 있는 걸까.'
머리로는 대충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생각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처럼 마법에 중요한 건 결속과 밀도입니다. 서로 상반된 속성을 지녔고 상대 쪽에 우위가 있다고 할지라도 결속과 밀도를 올린다면 그 결과가 바뀔 수 있어요."
레이시스는 짤막하게 고개를 저으며 강의에 집중했다.
애초에 마법 쪽은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 강의를 신청해 조금이라도 보완하려던 것이 아니었나.
잡념을 지우고 강의에 정신을 집중하며 신중하게 필기해 나갔다.
"자, 그러면 잠시 쉬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이다음은 방금까지 했던 강의를 토대로 실습을 할 예정이니 다들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짤막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레이시스는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가볍게 세수를 한 다음 잡념을 지우고 강의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원래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차, 다른 생도들과 함께 밖에 나가 있던 카를도 돌아왔다.
"레이시스 양."
"...네, 카를."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이요?"
"저를 좀 피하시는 것 같기에."
"아."
티가 났나.
레이시스는 무안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하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동아리도 그렇고 다른 곳도 그렇고 평소와 비교하면 마주치는 빈도가 줄어들었으니까.
그만큼 카를이 이쪽을 의식해 주는 것 같아 기쁘긴 한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어려웠다.
"...그냥, 조금 요즘에 컨디션이 좀 좋지 않아서요. 나름대로 혼자 생각할 문제도 있고."
"혹시 그 사진 때문에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배 분들께 말해서 전부 삭제 조치했습니다. 어딘가로 퍼질 염려는 없을 겁니다."
"그건, 고마워요. 아무래도 신분상 그런 사진이 돌아다니면 저도 조금 곤란해지거든요."
아카데미의 남녀가 서로 마음이 맞으면 교제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쪽은 타국의 왕녀라는 특성상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제국 쪽의 시선도 그렇고, 알포람 쪽의 시선도 그렇고.
특히 바이에른으로 오면서 신신당부를 들었지 않은가.
아카데미의 경력은 타이틀일 뿐 이곳에서 한눈을 팔면 안 된다고.
추후 있을 정략결혼에 누가 되지 않도록 처신을 잘 하라고 말이다.
그런 가운데 카를에 기대어 자고 있는 사진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물론 호들갑을 떠는 걸 수도 있지만, 원래 귀족이나 왕족 세상이 그런 사소한 호들갑 하나로도 뒤집힐 수 있었으니.
'그냥 아예 망명해 버리고 싶네.'
복잡한 머릿속에 레이시스는 속으로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니에요. 카를 탓도 아니고. 그냥 제가 속이 좀 어지러워서 그런 거니까. 괜히 신경 쓰게 했네요. 미안해요."
레이시스는 어렴풋한 미소를 지으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일반 생도를 뛰어넘는 힘을 지녔다면 자랑하고 싶을 법도 한데.
이미 이론 쪽으로도 압도적인 점수를 얻어 입학시험부터 정규시험까지 수석 자리를 공고히 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전체 수석인 네리안을 꺾고 유례없는 성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인데.
정말 무서운 자제력이 아닌가 싶었다.
"자, 이번 시간에는 공지했던 것처럼 실습을 실시하겠습니다."
파아아앗.
교수의 손짓에 따라 강의실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부 공관이 크게 확장되더니 책상과 의자가 전부 사라지고 원형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이 주위를 빙 둘렀다.
마치 금방이라도 검투사들이 튀어나와 혈전을 벌일 것만 같은 원형 투기장의 형태였다.
쿵. 쿵.
경기장 가운데 받침대로 보이는 두 개의 기둥이 튀어나왔다.
그걸 본 레이시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실습 내용을 유추했다.
'일대일로 마법전을 하는 건가?'
이론 강의 때 나왔던 내용이 결속과 밀도.
그러니 그걸 토대로 실습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자신은 없었다.
이 강의를 수강하는 생도 수준으로 따진다면 자신은 분명 하위권에 들어갈 테니.
툭.
경기장 양측에 툭 튀어나온 구조물 위에 교수가 올라섰다.
그는 객석에 있던 생도들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한 명을 호명했다.
"하네스 생도. 좀 도와주겠습니까."
"예."
"아래로 돌아서 올라오면 됩니다."
지목당한 하네스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객석 아래로 이동했다.
경기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는지 곧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브리드 교수처럼 구조물에 올라 서로 마주 섰다.
"발푸르기스의 밤에도 정식 종목인 아이스 브레이킹입니다. 선배 생도라면 이미 몇 번 보았겠고, 1학년 생도도 관심이 있다면 찾아봤겠죠."
발푸르기스의 밤.
매해 2학기 중간, 제국 내부에 있는 아카데미의 생도 대표들이 모여 서로의 우열을 가르는 행사였다.
올해는 황금 기수로 평가받는 1학년 생도들 덕분에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먼저 양측에서 랜덤 속성으로 이루어진 골렘이 등장합니다."
쿠웅.
가벼운 손짓에 교수의 앞과 하네스 생도 앞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골렘이 나타났다.
곧 두 골렘은 서로가 있는 구조물을 향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양측에 있는 사람은 각자의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골렘을 지키고 상대의 골렘을 저지하거나 파괴하면 됩니다. 다만, 이때 상대 마법사를 다치게 하는 건 엄금하며 그 즉시 실격 처리되니 조심해야 합니다. 마법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골렘에 한정돼야 합니다."
카를은 흥미 어린 시선으로 서로의 진영을 향해 전진하는 골렘을 바라보았다.
'발푸르기스의 밤.'
그 행사 역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었다.
이론 수석이자 상위권에 든 자신이라면 거의 무조건 뽑힌다고 할 수 있는바.
2학기가 시작되어 인원이 선별되면 발푸르기스의 밤을 준비하기 위한 특훈이 시작될 것이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진심인 아카데미는 입학 직후부터 특훈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있는 만큼 각 아카데미의 우열을 가리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자, 하네스 생도."
"예."
하네스는 교수의 말에 손을 뻗어 마법을 펼쳤다.
가장 빠르게 캐스팅할 수 있는 팬텀 불릿의 연발이 허공으로부터 아이스 골렘을 타격했다.
쾅. 콰콰아앙. 쾅.
충분한 위력이 담긴 팬텀 불릿은 아이스 골렘의 몸을 깎아내며 그 전진을 막아 냈다.
브리드 교수는 그 광경을 가리키며 생도들에게 말했다.
"어떤 수단을 써도 됩니다. 구덩이를 파든, 넝쿨을 키워 발을 묶든, 불길로 녹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법'으로 상대의 골렘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골렘은 지키면서 말이죠."
투웅.
허공에 생겨난 배리어가 쏟아지던 팬텀 불릿을 막아 냈다.
동시에 아무런 예고 없이 떨어진 벼락이 하네스의 골렘 머리에 꽂혔다.
콰아아앙!
몇몇 생도의 몸이 움찔했을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둥그런 골렘의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바.
하지만 움직이는 건 문제 없기에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보다시피 골렘은 마법에 관해 상당한 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강한 위력을 지닌 단발성 공격보다는 지속적으로 몸을 갉아 먹거나 디버프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곤 합니다. 즉, 공격 마법을 잘 쓰지 못해도 머리만 잘 쓴다면 충분히 상황을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다는 소리지요."
딱.
브리드 교수가 손가락을 튕기자 쇠약 마법이 골렘의 몸을 감쌌다.
걷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그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다리에 균열이 일며 겉에서부터 쩍쩍 갈라졌다.
어떤 마법을 어떻게 사용하고, 또 그 뒤에 무슨 조합으로 시너지를 내느냐가 이 경기의 관건이었다.
"일부는 골렘에 직접 개입해 속도를 올리거나, 불규칙한 움직임으로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경우도 있으나 앞서 말했듯 마법 내성이 상당하기에 그런 식의 활용은 어지간한 실력이 있지 않은 이상 힘들 겁니다. 디버프 계열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요."
다만, 물리적인 타격은 불가하다.
그 사실에 카를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단단한 배리어라 할지라도 자신의 검기를 받아 내는 건 불가능할 터.
아니면 지풍을 팬텀 불릿처럼 쏘아 보내 골렘을 깎아 볼까?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가 관건이로군.'
마법 사이에 교묘하게 섞은 무공.
어차피 이 세상에 무공은 생소한 분야라 대부분 잘 모르겠지만, 마법에 통달한 이는 수두룩하게 많았다.
그 이질점을 포착해 내어 부정행위로 간주한다면 괜히 제 살을 깎아 먹는 것이었기에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할 듯싶었다.
"자, 설명은 여기까지로 충분하니 돌아가면서 실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쿵. 쿵. 쿵.
브리드 교수의 손짓에 경기장 내부에 추가 구조물이 여러 개 올라왔다.
한 번에 다수의 생도들이 실습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
"각자 짝을 지어서 올라가도록 하세요. 앞쪽 기둥에 마나를 주입하면 자동적으로 골렘이 만들어질 겁니다. 실제 시합처럼 랜덤 속성으로 나오게 설정해 놓았으니 번갈아 가며 시합해 보도록 합시다."
교수는 생도들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성적에 따라 추가 점수를 부여하겠습니다. 다들 힘내 주세요."
106화 성장통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