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외부 견학 (3)
가고일 석상 안에 나타난 통로의 깊이를 알아보기 위해 카를은 발광석을 그 안에 던졌다.
절그럭.
은은한 적색 빛을 내는 발광석은 초입 부분을 지나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희미한 잔영만 남을 정도로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툭.
정말로 한참이 지나서야 지면과 부딪쳐 아주 작은 소음을 흘렸다.
카를이 아니었더라면 인지조차 하지 못했을 아주 작은 소리였다.
"깊군요."
"네, 전 중간부터 아예 보이지도 않았어요."
"대충 저희가 올라온 산의 높이만큼 길이 뚫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로 깊어 보이네요."
레이시스는 산세를 돌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곳까지도 꽤 올라왔는데 그만한 높이의 통로가 가고일 석상 안에 잠들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조사대가 발견하지 못한 게 의아하네요. 이 정도 깊이의 구멍인데."
"저도 그렇군요.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발견하고도 내버려 둔 것인지 모르겠지만."
카를은 부서진 석상 주변을 유심히 바라보다 레이시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전 일단 내려가 볼 생각입니다. 레이시스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도요.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유적이 잠들어 있나 한번 보기는 해야죠."
레이시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따라가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여차할 경우를 대비해서요."
"그건 괜찮습니다."
카를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수풀 사이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저분은...."
"라이프치히의 호위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귀족인지라 외부 활동에 나설때는 호위가 붙습니다."
"하긴, 그렇네요. 저도 알포람에 있을 땐 따로 호위가 있었으니까."
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호위를 전부 물렸다.
괜스레 왕녀의 티를 내는 것도 싫었고, 이쪽의 신상 정보가 새어 나갈 염려도 있었으니까.
'애초에 그럴 만한 충성심을 지닌 사람도 없고.'
레이시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자조 어린 말을 내뱉는 사이, 카를은 호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예."
호위의 정체는 가면을 벗은 녹스의 조직원이었다.
평범한 외모를 지닌 남성은 카를의 말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다시 자리를 떠나 수풀로 돌아갔을 때, 그의 귓가에 한줄기 전음이 흘러 들어왔다.
-철저히 감시해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도록.
-존명.
확실하게 명령까지 내린 카를은 배낭에서 긴 줄을 꺼내 석상의 구멍 안쪽으로 내던졌다.
꽤 깊은 구멍이니 원래는 턱도 없었겠지만, 가방에서 나온 줄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와, 계속해서 늘어나네요?"
"저장한 줄을 이어 붙일 수 있는 마법 도구입니다. 아티팩트라고 할 정도는 아니죠. 편리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그 정도면 아티팩트죠. 지금까지 들어간 것만 해도 길이가 어마어마한데요?"
"모자라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밧줄은 모자라지 않았다.
쉬지 않고 아래로 밧줄을 넣었을 때, 손끝의 감촉을 통해 밧줄이 지면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슬아슬했군.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모양이야.'
내려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 곤란해졌다.
"혹시 밧줄 타기는 잘하십니까?"
"평범한 정도예요."
"아마 내려가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릴 겁니다. 불빛도 희미할 테고 한 번 실수하면 위험해지겠죠."
"으음...."
카를의 경고에 레이시스는 난색을 표했다.
패기롭게 나서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 깊고 어두운 곳에 밧줄 하나만 의지한 채 안전히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카를 혼자 보내기도 싫었기에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군요."
"어떻게 하려...꺅!"
카를은 레이시스의 허리를 당기며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아래로 이어진 밧줄을 손에 쥐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러는 편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어디든 좋으니 안정되는 곳을 꽉 붙잡으세요."
갑작스럽게 카를과 밀착하게 된 레이시스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는 자세를 살폈다.
"...네."
딱히 잡을 곳이 없었기에 자세 그대로 카를에게 안기듯 그의 목뒤로 팔을 뻗어 꽉 붙잡았다.
서로 간에 몸이 완전히 밀착해 심장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마주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랬더라면 아마 새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
더불어 카를의 온기와 함께 그 특유의 시트러스 향기까지 느껴졌다.
가끔 검을 배울 때 어쩔 수 없이 밀착하던 순간 맡을 수 있던 향기였는데, 오늘처럼 선명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조용히, 입을 닫은 채 카를의 품에 안겨 있던 순간, 레이시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나, 땀 흘렸는데.'
왕가의 혈통답게 품위를 지켜 주는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를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것을 꿰뚫고 땀 냄새를 맡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골이 송연해지며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려는 찰나, 준비를 끝낸 카를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내려가겠습니다."
"앗...!"
카를은 가볍게 땅을 박차며 줄을 쥔 채 가고일 몸통 안쪽으로 진입했다.
촤아아악!
줄을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반쯤 추락하듯 미끄러지며 안쪽 통로를 시원하게 내달렸다.
"으, 아, 앗...!"
엄청난 속도와 더불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레이시스는 비명을 내질렀다.
체취고 땀 냄새고 할 때가 아니었다.
붕 떠 버린 온몸의 감각에 소름이 끼친 그녀는 카를의 목을 더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그래도 카를의 움직임을 보고자 두 눈을 크게 뜨려 했지만....
사아아아!
그마저도 어두컴컴한 바닥과 미친 듯한 속도로 내달리는 카를의 움직임에 겁을 먹고 1초 만에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
그래도 카를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 덕분에 조금 진정되었다.
...자신이 안겨 있는 와중에도 평온하기 짝이 없는 심장 박동은 조금 거슬렸지만.
물론 카를 정도의 실력자라면 생체 리듬 정도는 알아서 조절할 수 있을 터.
그래도 심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기에 조금 과감해졌다.
콱.
"...!"
밧줄 하나에 의지한 채 통로를 내려가던 카를의 몸이 움찔했다.
자신에게 안겨 있던 레이시스가 돌연 이쪽의 목덜미를 물어 버린 것.
물론 물어뜯을 정도로 깨문 것이 아니라 가벼운 자국이 남을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갑작스러운 기행에 진심으로 당황했다.
'...뱀파이어인가?'
처음으로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얼마 전 바이에른에서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생도와 조우한 적이 있었다.
피를 옮긴다면 뱀파이어 권속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설마 레이시스가 그 권속이 되어 버린 건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살짝 깨물고 만 선에서 그쳤기에 격하게 움직이던 와중 실수를 했거니 넘기며 아래로 내려가는 데 집중했다.
촤아아악!
어느 정도 지면과 가까워지자 카를은 밧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새하얀 연기가 솟구치며 마찰력이 극대화되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손 가죽이 찢어지고 살이 익어 버렸겠지만, 내공으로 보호되고 있는 손은 생채기 하나조차 남지 않았다.
툭.
이윽고 바닥에 도착했다.
짤막한 숨을 토해 낸 카를은 조심스럽게 레이시스를 몸에서 떼어 내 바닥에 놓아주었다.
빠른 속도로 내려온 터라 다리가 풀렸을 수도 있었기에 잡아 주려 했으나, 우려와 달리 레이시스는 금세 균형을 잡으며 자신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를은 아직도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레이시스, 제 목은...."
"실수예요, 실수."
레이시스는 새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전혀 실수가 아닌 듯한 모습에 카를은 헛웃음을 토해 냈다.
저 위에서부터 여기까지 떨어진 것이니 이 정도 투정은 받아 주어도 괜찮겠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툭툭.
"천장의 높이가 낮군요. 머리를 조심해야겠습니다."
"낮다기보다는 지반이 떠내려온 듯한 느낌이네요. 세월이 지나면서 땅이 가라앉았나 봐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이 위에 산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렇네요. 첨탑을 땅속에 세웠을 리도 없고. 원래 첨탑이 있던 곳이 세월을 따라 점차 뒤덮이며 이렇게 되어 버렸다는 쪽이 자연스럽겠어요."
어떻게 생각해도 저쪽은 정상적인 출입구가 아니었다.
그저 안쪽으로 연결된 통로를 강제로 개봉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일단 가 보시죠."
카를은 발광석을 꺼내 들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재퀸스의 안경을 통해 확인하니 내부가 전부 은은한 푸른색으로 뒤덮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유적은 확실하단 소리인데.'
어떤 유적이고 어떤 것이 잠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네. 고대 영웅이라고 해도 짧게는 몇백 년, 길게는 1천 년 정도인데. 여기는 생각보다 더 낡았어요."
"확실히. 관리가 되지 않은 걸 감안하더라도 처음 보는 양식입니다."
카를은 더듬더듬 주변을 훑으며 조사를 시작했다.
영웅과 관련된 유적은 그 특유의 분위기가 존재했다.
미발견 유적지의 사원도 그랬고, 황궁에서 보았던 검의 무덤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이곳은 그곳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아예 다른 유적을 발견할 걸 수도 있겠네요?"
"다른 유적이라."
"영웅이 대적했던 존재도 있잖아요. 그쪽에 관련해서는 아직 풀린 정보가 없으니까."
"마왕입니까?"
"마왕이 아닐 수도 있죠."
"흐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조사를 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차, 그들은 다른 곳과 이어진 새로운 통로를 발견했다.
"문?"
"크군요. 대전으로 이어지는 문 같습니다."
아치 형태의 문이 통로 끝에서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재퀸스의 안경으로 유심히 바라보자 그 안쪽에서부터 선명한 노란색 빛깔이 흘러나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창고, 는 아닌 것 같은데."
"보물이나 보화가 숨겨진 곳도 노란색으로 표시되어요."
"도굴꾼 짓을 하러 온 건 아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긴 하죠."
카를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끼이이익.
녹슨 경첩이 신음을 토해 내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안쪽은 먼지투성이였다.
이전까지의 통로는 나름대로 움직일 만한 곳이었는데 이곳은 시간의 경과가 그대로 남아 곳곳에 쌓여 있었다.
"윽."
"조심하십시오. 공기에 독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네, 그래야겠어요."
레이시스가 마스크 장비를 착용한 사이, 카를은 먼지를 휘저으며 곳곳에 쌓인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절그럭.
묵직한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수북한 먼지가 쌓여 있는 건, 다름 아닌 금화였다.
'설마 이게 다.'
카를은 고개를 들어 레이시스를 바라보았다.
"레이시스, 제 뒤로."
"네."
곧바로 그녀를 부른 뒤 손을 뻗어 가볍게 바람을 일으켰다.
화아아앗!
내부에 쌓여 있던 먼지가 순식간에 카를의 손으로 몰려든바.
주먹을 꽉 움켜쥐자 사람의 머리만 한 구체가 되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어, 어어."
"보물 창고였군요."
그래도 아직 먼지가 많이 남아 있었으나, 양옆에 쌓인 보물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녹스의 자원에 큰 도움이 될 터.
카를은 흐뭇한 표정으로 금화를 하나 주워 들었을 찰나, 레이시스가 아직도 굳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 저기...."
"저기?"
앞쪽에는 다른 곳으로 향하는 또 다른 문이 달려 있었다.
왜 그러는가 싶어 재퀸스의 안경으로 바라보자.
"...이건."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시커먼 오오라가 그 안에서부터 풍겨 나오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131화 외부 견학 (4)
스윽, 스윽─.
카를과 레이시스가 가고일 석상의 주변을 파헤치고 있을 무렵.
유리아는 위블렘 사원의 지하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오후 피크 시간대가 지나가자 번잡했던 사원의 내부도 어느덧 한산해졌다.
사람이 몰리는 관광 코스 시간만 피하면 되었기에 유리아는 애초부터 느긋하게 일정을 잡았다.
"이쯤일 텐데...."
지하 5층.
관광객에게 출입이 허락된 마지막 층의 벽에 착 달라붙어 있는 그녀는 조심스럽게 틈새 사이를 훑으며 천천히 전진해 나갔다.
일행은 없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탐색을 하지 않았겠지.
이번 외부 견학은 혼자 돌아보겠다는 말에 레이시스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쪽에 약속을 잡으러 갔다.
아마 카를에게 권유하러 갔겠지.
에이미나 다른 생도들 역시 함께 다니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유리아는 다녀올 곳이 있다며 전부 거절했다.
'히든 피스를 다른 사람들이랑 공유할 수는 없으니까.'
위블렘 사원의 외부 견학 이벤트는 원작 스토리에 없던 전개였다.
원래는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오면 찾아와 혼자 여유롭게 탐색하려고 계획을 짜 두었다.
하지만 무언가로 인한 나비 효과인지 예정에는 없던 외부 견학이 생겨났다.
'나로서는 시간을 아꼈지.'
그러니 굳이 귀찮게 두 번 일할 필요 없이 오늘 끝장을 보려는 것이었다.
틱, 티딕.
손끝에서 발산된 마력이 벽의 틈 사이를 훑으며 공간을 탐색했다.
당연히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찾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유적 같이 숨겨진 곳을 조사하기 위해 마탑에서 커스텀해 온 마법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날을 준비해 왔다.
"여기서부터는 가챠인데."
위블렘 사원의 지하에서 나오는 히든 피스는 총 5개.
일정 확률에 따라 그중 하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가장 실용성이 높은 건 열쇠이긴 한데, 지도가 나오면 좋겠다."
게임과 달리 현실이 되어 버린 지금 역시 히든 피스가 남아 있을까.
그러한 의문은 이미 옛적에 해소되었다.
그녀는 유리아의 몸으로 마탑, 그리고 바이에른으로 오기 전까지 이미 몇 개의 히든 피스를 손에 넣었다.
물론 게임과 이 세상의 정보가 전부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 볼 생각이었기에 유리아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삐빅.
"아!"
드디어 무언가를 찾았다.
유리아는 마력 파장에 걸려든 감각을 따라 천천히 손을 뻗었다.
더듬거리던 손끝이 도달한 곳은 지면과 맞닿아 있는 벽의 경계.
그 표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달칵.
유리아는 설렘을 억누르며 벽돌을 빼냈다.
주위에 누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물이 전시된 곳과 반대편 통로였기에 한산해진 지금은 유리아 본인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꿀꺽.
손끝에 딸려 나온 건 작은 목함이었다.
게임대로 모습을 드러낸 히든 피스에 유리아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그 뚜껑을 열었다.
"...아."
그리고 나지막한 탄식을 토했다.
목함 안쪽에서 나온 건 거무튀튀한 열쇠였다.
장식도, 표식도 없었다.
감정 마법으로도 해석할 수 없다는 판정이 나왔다.
고대 시대의 유물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마 자신의 스승인 마탑주 정도는 되어야 이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터.
물론 유리아는 열쇠의 정체와 사용법을 알고 있었다.
"레프리의 열쇠라.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 중에는 그래도 제일 좋은 게 나왔네."
레프리의 열쇠.
마력을 주입하고 돌리면 그 어떤 자물쇠라도 흔적 없이 열 수 있는 유물이었다.
아니, 자물쇠뿐만이 아니었다.
'잠겨 있다.'라는 개념이 통용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열 수 있었다.
결계, 봉인, 심지어 시간과 개념의 인과까지도 말이다.
그렇다고 자유자재로 열고 다니는 치트키도 아니었다.
사용자의 마력과 이해, 그리고 수준에 따라 열 수 있는 잠금장치의 수위가 달라졌으니까.
그래도 상당한 이용 가치가 존재하는 유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도가 나오지 않은 건 아쉽네."
유리아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유물은 열쇠였지만, 극히 드물게 낡은 지도 한 장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지도에는 이곳 토호슈 지방에 존재하는 한 유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씨앗」이야말로 치트키 급의 아이템이었다.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지금 자신이 익힌 모든 마법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극히 적은 확률로 나오는 것이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게임으로도 뽑아 본 적이 없는 레어 아이템이었으니까.
"그래, 열쇠면 어디야."
열쇠만 챙겨 품에 넣은 유리아는 빈 목함에 쪽지 한 장을 남겨 둔 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혹시 자신과 같이 게임 속에 들어온 다른 사람이 발견하면 이쪽에 접촉해 올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전까지 발견한 히든 피스 쪽에도 모두 같은 쪽지를 남겨 두었다.
'일단 한 명 발견한 것 같지만.'
유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카를이 자신과 같이 이 게임 속으로 들어온 빙의자라고 확신을 내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밝히며 접촉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것이고.
'보험이 더 필요해.'
현시점에서 무력의 수준은 카를 쪽이 월등히 높았다.
물론 「사계」를 사용한다면 쉽게 밀리진 않겠으나, 자신의 비원은 아직 미완성의 단계.
아직 연구가 더 많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제는 카를의 도움이 필수가 되어 버렸다.
미래에 닥쳐올 재앙을 막아 내기 위해서는 슬슬 카를에게 자신도 이 세상의 빙의자임을 알려 합치고 손을 잡아야 할 터.
'조만간.'
그 사실을 밝히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유리아는 두 주먹을 꽉 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검은색은 무엇을 나타내는지 아십니까?"
카를은 손에 쥐고 있던 금화를 안주머니에 넣으며 옆에 있던 레이시스에게 물었다.
심각한 얼굴로 재퀸스의 안경을 만지작거리던 레이시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설명서에는 분명 3개밖에 적혀 있지 않았는데, 검은색은 처음 봐요."
"어찌 되었든 좋은 건 아닌 것 같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누가 어떻게 보아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그런 색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붉은색으로 표시되는 함정보다 더 위험한 것일 터.
문틈 사이로 스멀스멀 풍겨 나오는 검은 줄기는 무언가 음습하며 음험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음."
레이시스의 질문에 카를은 잠시 고민했다.
중원이었다면 고민도 하지 않은 채 물러났을 것이다.
변수의 차단과 보신주의가 최우선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중원이 아닌 아르테니아.
불가살이었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다.
'고대 영웅의 유적과는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지.'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거대한 유적이 지하에 잠들어 있는 걸까.
카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이시스에게 물었다.
"안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궁금하긴 해요. 뭐가 있길래 이런 거대한 시설이 만들어진 것인지."
레이시스도 슬쩍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혼자였다면 모험은 하지 않았겠지만, 카를의 존재가 선택지의 폭을 넓혀 주었다.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에서 보스 몬스터였던 데스 나이트와 리치를 상대로 보였던 카를의 신위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으니.
카를은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스트레칭해 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가볍게 둘러보는 것으로 하죠. 여차하면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합시다."
"저, 버리고 가면 안 돼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은 카를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익숙한 검의 형태를 본 레이시스의 두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그 검이죠?"
"네. 황궁에서 "정의"의 유산으로 받아 온 검입니다."
"이름이...."
"천뢰(天雷)."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벼락이라고 했던가요. 여전히 발음하기 어렵네요. 창궁무애검법 만큼은 아니지만. ...아, 설마 창궁무애검법이 "정의"의 검술이었나요?"
뒤늦게 무언가의 공통점을 파악한 레이시스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건 아마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정의"와는 관련이 없진 않습니다. 아마 같은 곳에서 나온 검술일 테니까요."
카를이 추정하기로 "정의"는 화산파의 고수로 보였다.
황궁 검총에 무수히 남아 있는 그 흔적 중 가장 뚜렷한 경지를 보인 건 다름 아닌 매화검법이었으니까.
어떤 연유에서 중원을 떠나 자신처럼 이 세계로 넘어오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검과 검흔을 남긴 것으로 보아 후대에게 전하려 했던 유지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아직 밝혀진 것은 없었다.
수많은 의문이 쌓여 있었고 날이 갈수록 그 개수가 늘어갔다.
하지만 조급해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경지가 상승하고 녹스의 세력이 커진다면 손에 닿는 정보들도 많아질 테니.
철컥.
카를은 검대에 천뢰를 달았다.
기존 검보다 한층 더 묵직한 느낌이 들었으나, 신검이라는 이름을 지니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할 터.
카를이 "정의"의 검을 얻었다는 소문은 황궁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았다.
율리안 황태자의 배려 덕에 극소수만 아는 사실로 남은 것이었다.
영웅의 유산을 얻었다는 소문이 외부로 퍼진다면 한차례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나로서는 좋은 일이지.'
영웅의 유산도 얻고, 영웅을 동경하는 율리안 황태자와의 친분도 쌓고.
카를로서는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결말이었다.
"그럼 가 보도록 합시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네!"
카를과 레이시스는 굳게 닫힌 문의 양옆으로 섰다.
재퀸스의 안경을 통해서는 여전히 불길한 검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카를은 개의치 않은 채 거침없이 손을 뻗었고 강한 힘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려 갔다.
동시에 안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류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어?"
레이시스는 한쪽 눈을 감은 채 재퀸스의 안경으로 문가와 안쪽을 면밀하게 살폈다.
조금 전까지 보던 광경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풀풀 풍기던 검은 기류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진 것처럼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벽과 바닥을 훑어보아도 묻어 나오는 건 세월의 흔적을 따라 쌓인 두꺼운 먼지뿐.
툭.
문을 완전히 안쪽으로 밀어 넣은 카를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전까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서늘한 공기가 그의 피부를 스쳤다.
뒤따라 안쪽으로 들어온 레이시스도 그것을 느꼈는지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람이 불고 있어요."
"공기가 순환한다는 소리군요. 이곳이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습니다."
앞서 있던 첨탑은 이 공간을 지키기 위한 초소이지 않을까.
사아아아.
카를은 기감을 확장했다.
앞은 빛 한 점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
저 뒤쪽과 달리 안력을 돋운 눈으로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탁.
"...."
어느 기점에 다다르는 순간 사방으로 뻗어져 가던 그의 기감이 단단한 벽에 부딪힌 듯 가로막히고 말았으니.
'재미있군.'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평범한 존재가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132화 외부 견학 (5)
"일단 전체적인 시야부터 확인해 놓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조명을 설치할까요?"
"조명탄부터 쏘도록 하죠."
카를은 배낭에서 길쭉한 조명탄을 꺼내 들었다.
폭죽처럼 쏘아진 그것은 허공으로 날아가 일정 시간 동안 주위를 밝히는 역할을 했다.
레이시스도 마찬가지로 조명탄을 꺼내 들었지만, 살짝 주저하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안쪽에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섣불리 조명탄을 쏘았다가는 저희가 왔다고 광고하는 꼴이 될 것 같아요."
"그런 의도입니다.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리액션을 취해 준다면 좋겠군요."
"왜 그런 건가요?"
"괜히 기습당하는 것보다는 정면에서 부딪치는 쪽이 더 깔끔합니다."
카를 혼자 이곳에 왔다면 모를까 레이시스까지 동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측 불가능한 위협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더 큰 위협이 될 터.
최대한 카를이 지켜 주겠지만, 그라고 해서 전능하지는 않았다.
'물론 구태여 말할 이유는 없지만.'
카를에게 중요한 건 유적의 발굴과 더불어 레이시스와의 유대를 쌓는 것.
그녀가 스스로 민폐라 깨닫고 물러나게 되면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서로 고난과 난관을 헤치며 나아가는 쪽이 훨씬 그림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안에 무언가가 잠들어 있다면 문을 열고 들어온 시점에서 느꼈을 겁니다."
"...무언가 느끼셨군요."
"어렴풋한 감각이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정체 모를 존재가 있는 건 확실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를은 곧바로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레이시스도 뒤따라 조명탄을 발사했고 내부는 곧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어? 신전이 아니네요?"
"신전이라기보다는 성 같군요."
카를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대 유적인 만큼 당연히 신전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곳 역시 신전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곳은 어떻게 보아도 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으음, 그러면 지금까지 저희가 돌아본 곳이 성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네요. 가고일 첨탑은 외부를 감시하는 초소로 쓰였을 테고. 돌아온 길을 보니 나선 형태로 되어 있었어요. 이 성을 빙 두르는 성벽이 지하에 그대로 파묻힌 거군요."
"일단 가 봅시다."
조명탄 덕분에 전체적인 구조는 대충 파악했다.
자세한 건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았기에 카를과 레이시스는 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조명탄이 꺼지고 다시 주위는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았다.
랜턴과 야명석에 의해 의존했지만, 가시거리가 짧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시스는 카를의 뒤에 바짝 붙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시스."
"네."
"이걸 한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카를은 유리병에서 작은 완두콩만 한 무언가를 꺼내 레이시스의 손에 올려 주었다.
"이게 뭔가요?"
"여러 약초와 물약을 혼합해 정제한 약입니다. 먹으면 일시적으로 밤눈이 밝아집니다."
"부작용은 없나요?"
"딱히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 양분이 상당해서 하루에 3개 이상 먹으면 체중에 영향이 갈 수 있다곤 했는데."
"으음...."
체중에 영향이 간다.
그건 레이시스에게 있어서 크나큰 부작용이었다.
"2개까지는 괜찮은 것 맞죠?"
"저도 종종 먹곤 합니다."
카를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시스도 알겠다며 단숨에 그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풀을 짓이긴 듯한 씁쓰름한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잠시간 기다리자 머리 쪽으로 무언가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어두컴컴했던 어둠의 색이 점차 녹색으로 뒤바뀌며 사물의 윤곽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어? 정말로 보여요."
"사람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구분이 가능해질 겁니다. 알약 하나당 2시간 유지가 가능하다니 일단 더 가지고 계십시오."
"네, 감사해요."
레이시스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거리낌 없이 주위를 살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카를의 옆에 착 달라붙어 성의 형태를 조사했다.
"별다를 것 없는 성이네요."
"세월이 오래 지났을 텐데 건물 자체는 그리 시간의 풍파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법이나 무언가의 장치로 보호되고 있군요."
"...그러고 보니."
레이시스도 그 말을 듣고 무언가가 퍼뜩 떠오른 듯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풀, 잡초가 있어요. 파릇파릇하진 않아도 살아는 있네요. 파묻혀 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에요."
"시간이 멈췄다."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때까지 보인 모습으로 보아 시간이 멈춘 성이라고 설명하는 게 가장 정확할 듯싶었다.
당장 어느 방의 문이 열리며 병사나 사용인들의 모습이 나타나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성을 지키는 가디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카를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성 안쪽에 들어오니 기다란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몇 걸음마다 무장한 병사의 석상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단순한 장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숫자가 상당했다.
"석상을 조심하십시오."
"유사시에 움직인다는 소리군요."
"그럴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직관적인 형태니까요."
부수는 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발목을 잡거나 시간을 끄는 정도로 사용된다는 소리일 테지.
진짜 가디언은 다른 곳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성 안쪽의 복도를 한 바퀴 전부 돌아보았다.
중심에 있는 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탁.
카를의 손이 허공에서 막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왜 그러시나요?"
"앞에 벽이 있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 정말이네요."
레이시스도 손을 내밀어 그 위를 매만졌다.
"부숴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길이 있는 걸까요?"
"다른 길을 찾더라도 막혀 있을 겁니다. 아마 이 내부 전체를 감싸는 결계 같군요."
"그러면 부수는 수밖에 없겠네요."
레이시스는 검을 빼 들며 의욕을 보여 주었다.
결계가 있다는 건 내부에 무언가 존재한다는 소리였으니까.
"...."
카를은 다시금 결계를 두들겼다.
돌아온 반동이 상당히 기묘했다.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베어 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이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잠시간 고민하던 카를은 고개를 돌려 레이시스에게 물었다.
"레이시스."
"네."
"혹시 돈이 필요하십니까?"
"...돈이요?"
갑작스러운 카를의 물음에 레이시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카를은 그녀를 바라보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돈과 명예, 어느 쪽이 좋습니까?"
"...."
여전히 의미가 불명한 질문이었다.
레이시스는 잠시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그 의미를 파악했다.
"...유적을 공개하지 않으실 생각이시군요."
"예."
카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발견 유적, 비록 영웅과 관련된 것이 아니지만, 이 정도 규모의 유적을 발견했다면 아마 큰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학계가 다시 한번 출렁이겠고 카를과 레이시스의 이름이 계속해서 언급되며 명예가 쌓일 터.
'반대로 함구한다면.'
명예는 얻지 못하는 대신 이곳에 쌓인 보석과 재화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합법적으로 정리하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적잖은 돈을 만질 수 있게 될 터.
"이 결계를 열려면 필연적으로 유적에 손상을 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학계에 보고할 것이라면 지금 돌아가는 쪽이 맞습니다. 발견한 재화도 상당하니 제법 괜찮은 보상도 받을 수 있겠죠."
"하지만 카를은 저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시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레이시스의 의중을 물어보는 겁니다."
"...저는 묻지 않아도 카를이 하자는 대로 따라갔을 텐데."
카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자신이 레이시스를 존중하고 있다는 뜻을 비치기 위하여.
"미발견 유적을 발굴하는 데는 신고가 필요합니다. 동아리 때는 바이에른 차원에서 사전에 고지를 해 두었지요. 물론 신고하지 않았더라도 단순한 발굴 쪽은 괜찮지만, 그 과정에서 유적에 손상을 입혔을 경우에는."
"처벌이 크죠."
"이 유적을 묻어 두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가고일 석상을 복구해놓거나, 아니면 통로 자체를 막아 두면 되니까요. 저 밖에 쌓인 보석의 처리도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레이시스도 돈이 필요하잖아요?"
그 말에 레이시스는 어깨를 움찔했다.
가장 친한 유리아밖에 모르는 사정을 카를도 알고 있었나?
"...제 사정을 알고 계시나요?"
"자세히 모릅니다. 레이시스가 알포람 왕국의 출신이라 흘러나온 이야기를 듣고 짐작했을 뿐. 제가 머리 하나는 비상하지 않습니까."
카를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하자 레이시스는 작게 웃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카를은 레이시스의 영입을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녀의 사정을 자세하게 파악해 나갔다.
'제법 복잡했지.'
여러 명의 왕비, 수많은 핏줄, 득세한 귀족, 그리고 허수아비에 가까운 무능한 왕까지.
레이시스는 정실의 딸로 정통한 계승권과 핏줄을 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인 아버지는 무능하고 욕심이 많은 어머니는 다른 자식을 왕으로 세우고자 많은 유력자와 손을 잡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왕비에게, 왕실에게 있어 레이시스는 정략적으로 높은 값어치를 지닌 왕실의 혈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바.
제국과의 결속이나 파벌의 존속을 강화하기 위한 제물로 이용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이미 여러 굵직한 곳으로 혼담이 오고 갔지.'
당장 바이에른 내부만 따져 보아도 네리안의 호펜하임이나 루이스의 볼프스부르크 가문도 관계가 있었다.
네리안과 루이스 둘은 정략결혼을 거절했지만, 다른 형제들과는 아직 이야기 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신부로서는 그녀보다 더 나은 조건이 없을 테니까.'
알포람 왕국이라는 배경, 왕가의 사위라는 타이틀, 그리고 레이시스 본인도 뛰어난 사람일뿐더러 그 외모까지 아름다웠다.
욕심이 많은 귀족이라면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기꺼이 정략결혼을 감행하지 않을까.
"레이시스가 제국에 망명 준비를 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타국의 왕족이 제국민이 되는 방법은 2가지.
제국의 귀족과 결혼하거나, 작위를 얻는 것이었다.
전자는 당연히 기피할 테니 공적을 세워 작위를 노리고 있을 터.
동아리에 소속되어 영웅의 유적을 발견하고 학계적으로 이름을 드높이는 것도 그러한 준비 과정일 것이다.
"저는...."
그렇기에 카를은 레이시스에게 직접 선택하라며 선택지를 주었다.
이 정도 규모의 유적지를 발견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녀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카를의 결정에 따를게요."
"제 결정에?"
"네. 카를은 안쪽을 조사하고 싶죠? 그깟 명예 따위 제 손으로 직접 얻으면 그만이에요. 이미 많은 신세를 졌는데 제 이득만을 위해 고집을 부릴 순 없죠."
"...하하."
카를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100%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으나, 레이시스의 진심은 충분히 전해졌다.
그렇기에 주먹을 말아 쥐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물러나십시오."
"네."
고개를 끄덕인 레이시스가 냉큼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났을 때.
쩌어어엉─!
카를의 철권이 앞길을 가로막은 결계 위를 힘껏 후려갈겼다.
133화 외부 견학 (6)
주먹이 결계를 강타했다.
처음 느낀 건 물리적인 단단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눈앞에 펼쳐진 결계는 성 안쪽을 지키는 개념적인 방벽이었다.
'돌파하기 가장 까다로운 부류 중 하나군.'
지정된 시퀀스를 통해 결계를 해제하거나, 마법적인 지식으로 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내공까지 실어 후려쳤음에도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해 보이지 않는가.
카를은 손을 툭툭 털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러다 벽이 먼저 무너질 것 같은데요? 저 뒤도 결계로 막혀 있겠죠?"
"그럴 겁니다. 그리고 이미 금이 가 버려서 이제 무르지도 못합니다."
카를은 레이시스에게 조금 더 뒤로 물러나라며 눈짓한 뒤 재차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세상의 이치는 간단하다.'
단단한 것이 더 단단하다.
부서지는 건 덜 단단한 것.
설령 마법과 같은 결계라 할지라도 섭리와 이치 안에 있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의 주먹이 결계를 부수지 못한 건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내 마법적인 지식으로는 이 결계를 해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리아라면.
어쩌면 그녀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마탑주의 제자일뿐더러 함께 마법 스터디를 하면서 슬쩍슬쩍 드러나는 현기는 동년배의 실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니.
하지만 자신의 얄팍한 마법 지식으로는 결계의 파훼는 불가능했다.
꽈아악.
그러니 각자의 특기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움켜쥔 주먹 위로 새하얀 기류가 치솟았다.
명천신공의 기운이 응집되자 주변의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며 극음의 여파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척.
두 다리를 굳건히 땅에 디디고 움켜쥔 주먹을 앞으로 들어 올리며 어깨를 비틀고 허리에 힘을 주었다.
중원의 고수가 보았다면 완벽한 정권의 자세라 칭찬했을 터.
그렇게 내지른 정권이 재차 결계 위를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여파가 이 공간 전체를 휩쓸었다.
그래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성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고 복도와 다른 건물의 벽도 쩍쩍 갈라지며 신음을 토해 냈다.
하지만 결계는 여전히 멀쩡했다.
카를은 혀를 차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안 되겠군."
타격으로는 한계가 있다.
위력이 더 강한 천마신공을 사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
이쪽에서 개념적인 결계로 지키고 있으니, 자신 역시 개념적인 힘으로 파훼해야 함이 옳을 듯싶었다.
"레이시스, 여기를 나가서 아까 있던 방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아예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그렇게나요?"
"어떤 식으로 여파가 되돌아올지 몰라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카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레이시스는 안쪽으로 들어왔던 통로를 지나 다시 보물이 쌓여 있는 방까지 나갔다.
문까지 완전히 닫힌 뒤에서야 카를은 가볍게 숨을 토해 내며 두 손을 뻗었다.
사아아아.
명천신공과 천마신공.
두 힘이 카를의 양손을 통해 결계 위로 흘러나왔다.
혼원일극신공은 본디 상극의 성질을 지닌 두 힘을 합일해 일극으로 다다르는 과정을 수련하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원래 정도와 마도의 기운은 섞일 수 없다.'
그걸 이뤄 주기에 고금제일의 신공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개의 기운을 일으키고 신공을 운용하지 않는 것으로 반발을 의도한다면?
'굳이 주먹으로 후려치고 검을 휘둘러 벨 필요도 없어지지.'
상극의 기운이 밀어내는 힘.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저적, 저저적.
아니나 다를까.
명천신공과 천마신공의 힘을 견디지 못한 결계에 균열이 퍼져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대단한 결계라고 할지라도 이것까지는 감당하지 못하겠는지 항복을 선언했다.
파각.
이윽고 유리가 깨어지듯 파편이 되어 부서져 내린바.
물리적인 결계가 아니었기에 조각이나 다른 흔적이 남지 않았다.
툭툭.
가볍게 손을 턴 카를은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끝났습니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타다닥.
레이시스는 거의 달려오듯 빠른 걸음으로 카를의 옆에 도달했다.
그러고는 활짝 열린 성의 안쪽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셨어요?"
"주먹으로 때리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을 주어 깨뜨렸습니다. 힘의 반발을 이용한 묘리라고 할까요."
"흐음."
"일단 들어가죠."
마침내 둘은 그 안으로 입성했다.
입구를 넘어서자 초입부터 눈에 띄는 건 제법 이질적인 형태의 구조물이었다.
"...이건."
"조각상이군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는 되는 것 같습니다."
성의 입구를 넘어서자 회랑이 나왔다.
손님을 맞이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로비, 통로로 쓰이는 널찍한 중심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수십 개는 될 법한 조각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상아를 깎은 것인가?'
카를은 가까이 있던 조각에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이목구비가 없다.
모습도, 자세도 다르고, 완성되지 않은 것들도 더러 존재했다.
슥.
카를이 조심스럽게 그 표면을 쓰다듬자 레이시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살아 있는 사람으로 만든 조각인가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살짝 겁을 먹은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카를은 작게 웃음을 토해 내며 대답했다.
"겉에 깎아 낸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의 작품인 건 확실해 보이는군요."
처음 보았을 때는 카를 역시 인신공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사람의 흔적으로 보이는 건 없었다.
칼의 흔적이 보이는 걸 보니 이건 정말로 무언가를 깎아 만든 조각이 분명했다.
"혹시 신전에서 인간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신을 믿는 신도,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현대의 의미로는 신도를 말하죠. 하지만 고대로 넘어가게 되면 신의 형상을 뜻합니다."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이라는 존재를 빚었다.
그렇기에 유적에 존재하는 인간의 조각은 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적 탐사 동아리에서 갔었던 유적에서 조각과 동상이 있었죠. 그때와 무엇이 다른지 아시겠습니까?"
"...얼굴, 이목구비가 없어요. 거기는 옷도 걸치고 있고 뭔가를 들고 있기도 했는데. 여기는 아무것도 없네요. 어째서일까요?"
"얼굴은 누군가를 알아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름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죠."
카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이곳의 주인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졌거나, 이름을 잃어버린 존재가 아닐지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신전을 짓지 않고 성으로 형태를 구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격이 격하되어 신전을 지을 수 없는 온전한 신에 이르지 못한 상태가 되었기에.
"보이는 것으로 해석하자면 대충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전부 꿰맞추기라 엉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일단 영웅의 유적은 아닌 게 확실하네요?"
"그것도 아직 모릅니다. 거꾸로 해석하자면 인간이되 신이 되고 싶은 욕심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고대 영웅은 거의 신급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 명성이 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레이시스는 조각을 빤히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어렵네요. 그런 작은 단서들을 가지고 하나하나 추론해야 하는 건가요."
"동아리에서 발견했던 유적은 제법 친절하게 잘 나와 있는 편이었습니다. 보통은 이렇죠."
물론 카를에게는 친절하지 않았다.
신전에 들어가는 순간 자격의 증명이라며 또 하나의 자신과 싸우게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제법 재미있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여기서 볼 건 다 봤으니까 올라가 봅시다."
"네. 위층부터 샅샅이 훑고 내려오죠."
성의 본관은 총 3층으로 되어 있었다.
빛이 깃들지 않아 어두컴컴하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제외하면 당장 누군가 살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태가 좋았다.
그렇기에 카를과 레이시스는 3층부터 하나하나 뒤지며 수색에 나섰다.
"침실이네요."
"여기도 침실입니다."
"전부 손님용 방으로 보여요. 보통 이런 성에서 성주나 귀족은 저 위쪽의 별채를 따로 가지고 있거든요."
"특별한 건 없어 보입니다."
재퀸스의 안경으로도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던 중 카를은 노란빛이 흘러나오는 창고를 발견했다.
끼익.
레이시스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쪽을 살펴봤다.
무언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그리 비싼 건 없어 보였다.
대부분 생활용품이나, 성을 관리하는 데 쓰이는 도구들의 여분으로 보였다.
"챙길 만한 건 없네요."
"역사적으로는 값어치가 있겠군요. 당시의 생활 양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들이니."
"하긴, 보물은 밖에 있는 거로 충분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레이시스는 별 미련 없이 문을 닫았다.
똑.
하지만 그 순간 귓가에서 들려온 이질적인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 바로 옆에 있던 카를은 갑작스러운 레이시스의 행동에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못 들었어요?"
"어떤 걸 말입니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요."
"...물방울?"
카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소리가 들렸다면 자신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그녀를 유혹하거나, 그녀에게만 듣는 것이 허락된 것이라는 소리인데.
똑.
"저쪽이에요!"
갑작스럽게 무언가를 발견하자 레이시스는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자리를 박찼다.
카를은 주변의 기척을 훑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두 번이나 들은 것이니 착각은 아닐 것이다.
겁을 먹고 환청을 들을 만큼 심약한 성격도 아니었으니 분명 무언가 존재한다는 소리일 터.
'느껴지는 건 없는데.'
레이시스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종래엔 아예 달리는 것처럼 되어 성의 복도를 힘껏 가로질렀다.
3층 끄트머리에서 그 아래층인 2층 반대편까지.
상식적으로는 물방울 떨어지는 것을 듣기 어려운 거리였다.
"여기, 여기에서 들려와요."
"흠."
3층은 전부 침실이었다.
2층은 명패가 적혀 있었는데 알아볼 수 없는 글자인 걸 보니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공간인 듯싶었다.
"열게요?"
레이시스는 곧바로 손을 뻗어 문을 양옆으로 밀었다.
내부는 서재였다.
아니, 도서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제법 큰 규모였다.
"와."
레이시스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책장에 꽂힌 서적들은 전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쓰여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정도 고대 서적을 발견한 것은 학계에 크나큰 업적을 세울 수 있을 터.
"이건, 보고해야겠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정도 규모의 서재라. 대단하군요."
카를도 크게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정도로 방대한 양의 기록이라면 고대의 양상을 재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간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밝혀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똑.
그때 다시 한번 물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이, 그리고 정수리에 무언가 떨어진 것처럼 축축한 느낌이 드는 것과 함께.
스윽.
레이시스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졌다.
그와 동시에 손바닥에서 묻어 나온 새빨간 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피?"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녀가 서 있던 바닥이 아래로 꺼졌다.
마치 빨려 들어가듯 레이시스의 몸이 구멍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차, 하는 순간 벌어진 일.
"...!!"
바로 근처에서 수많은 서적을 보며 감탄을 토해 내던 카를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곧바로 땅을 박찼으나.
슈욱.
아래로 통하는 구멍은 금세 닫혀 버리고 말았다.
134화 외부 견학 (7)
"이런."
카를은 미간을 찌푸렸다.
레이시스가 빨려 들어간 구멍 부위를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아예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버린 것 같았다.
"...."
카를은 두 눈을 매섭게 떴다.
서재에 들어오고 나서야 이런 장치가 발동했다는 건 누군가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나였다면 분명 반응했다.'
레이시스를 내버려 두고 그런 곳에 들어갈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상대 역시 그것을 간파하고 그녀만을 휘말리게 한 것인가.
카를은 구멍이 생겨났던 부위를 매만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10초 주겠다."
쿠웅.
레이시스가 없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시커먼 천마신공의 기운이 그의 전신으로 치솟아 오르며 서재를 향해 스멀스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저쪽으로 통하는 구멍을 만들어 내든, 레이시스를 뱉어내든."
콰앙!
카를을 중심으로 뿜어진 기파가 서재를 휩쓸었다.
책장이 무너지며 찢어진 서책들이 나부꼈다.
카를은 마기로 뒤덮인 악귀가 되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경고했다.
"선택하도록. 소중한 집이 무너지는 꼴을 보기 싫다면."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입가를 비튼 카를은 천천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레이시스는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부터 점찍어 두고 교우 관계를 쌓아온 소중한 인재.
유적이나 유물 따위는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지만, 레이시스 같은 인재는 쉬이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러니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
콰아아앙!!!
새카만 마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마치 역류한 물줄기가 홍수를 일으키듯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레이시스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당장 이곳을 전부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쿠구궁.
범람한 마기가 서재뿐만이 아니라 성 밖까지 흘러넘치며 뒤덮기 시작했다.
존재하던 모든 걸 태워 버리며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되돌려 버리는 모습이 혼원일극신공 이전에 고금제일무공으로 칭송받던 천마신공의 위엄을 증명하는 듯했다.
저벅.
무너져 가는 성채의 복도에서.
카를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마화를 쏟아냄과 동시에 주변이 파장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부에 존재하는 함정이나 시스템이 발동한 것일 터.
쿵, 철컥.
아니나 다를까 복도 곳곳에 놓여 있던 병사들이 단상 위에서 뛰어내리며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소롭다."
카를은 코웃음을 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고작 이딴 것으로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으려는 걸까.
쉬아아악!
병사들은 육중한 체형과 달리 재빠른 속도로 쇄도해 왔다.
하지만 카를은 움켜쥔 주먹을 뒤로하며 가볍게 허리를 비틀었을 뿐.
곧 마기가 응축된 주먹이 앞을 향해 내질러졌다.
콰아아앙!
화권(火拳)이 쏘아졌다.
일직선상의 복도 위로 뿜어진 불줄기가 단상 위에서 내려선 병사들을 전부 휩쓸어 버렸다.
병사들은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한 채 전부 겁화의 열기에 스러져 소멸한바.
카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절그럭.
병사들이 움직일 때와는 무게감이 사뭇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 다음은 기사인가."
풀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육중한 기사가 손에 배틀 엑스를 쥔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카를은 피식 웃으며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스릉.
천뢰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동시에 주위를 맴돌던 마화가 그 위에 휘감기며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어 냈다.
쉬아아악─!
기사는 병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주변을 뒤덮은 불길을 순식간에 베어 가르며 닥쳐와 카를에 지척에 다다랐으니.
높게 치켜든 배틀 엑스의 섬뜩한 날은 세월의 여파마저 베어 버린 듯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저저저적.
하지만 카를의 움직임이 한 박자 더 빨랐다.
마치 홀로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무광(無光)의 참격이 몇 번이고 작렬했다.
와르르르.
조각조각 나뉜 기사의 몸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 옆을 나뒹구는 배틀 엑스를 날카롭게 노려본 카를은 고개를 번쩍 들며 성채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로군."
성채 전체로 뻗어 나간 마기가 어느 곳을 기점으로 막히는 것이 느껴졌다.
카를은 그 즉시 땅을 박찼고 복도를 매섭게 가로지르며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조금만 기다려.'
레이시스가 어디로 가 버렸든.
그곳에 다다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 *
"...으윽."
레이시스는 신음을 토해 냈다.
눈을 뜨며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어두컴컴한 실내의 풍경이 들어왔다.
머리를 비롯해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이 꼭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
잠시간 비틀거리고 있던 그녀는 두 눈을 번쩍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바로 직전의 기억이 생생했다.
분명 카를과 함께 서재를 수색하던 중 발밑에 생긴 구멍에 휘말려 어디론가 떨어지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레이시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옆에 있던 벽을 더듬었다.
'몸은 괜찮다.'
여기저기 멍이 들고 까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긁힌 정도에 불과했다.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기에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자 조금 넓은 공간이 나왔다.
천장으로부터 희미한 불빛이 비치고 있어 내부의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원형 돔?"
무언가를 보관하는 창고인 듯 내부에는 여러 석상이 놓여 있었다.
저택의 로비에 놓여 있던 것처럼 대부분 인간의 형태였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이곳에 있는 것들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듯한 자세라는 것이었다.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어.'
두 손을 맞잡거나, 팔을 활짝 벌리고, 바닥에 엎드려 있거나, 땅을 짚고 있는 이들 전부.
시선만은 저 너머 어디로 이어졌는지 모를 통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시스는 조심스럽게 석상들을 살폈다.
역시 어떻게 보아도 저택의 로비에서 봤던 것들과 같은....
스윽.
"...!!"
레이시스는 흠칫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분명 저 앞쪽을 바라보던 석상의 눈이 자신을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깜빡이며 자세하게 확인하자 분명 이쪽을 향해 움직였던 눈동자는 다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대체 뭘까.
성채에서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석상이 아니야.'
조심스럽게 그 위를 매만졌다.
로비에 있던 것들은 그저 차가운 감촉만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이 석상에서는 미약한 생명력의 잔재가 남아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석화의 저주? 아니, 누군가와 함께 순장되어 버린 건가?'
고대 시절, 사람을 살아 있는 채로 주인과 함께 묻는 순장 문화는 만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대체 누가 왜 이렇게 했는지 레이시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카를...."
미약하게 그 이름을 불러보아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리 카를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린 자신을 단번에 찾아낼 수는 없을 터.
'어떻게 하지?'
이곳에 머무른 채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일단 조사차 앞을 돌아봐?
[오너라.]
"...!"
그때 귓가에 들려온 나지막한 속삭임에 레이시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내부의 풍경은 아까와 변함이 없었다.
[오너라, 아이야. 나의 품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저 안쪽으로부터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
레이시스는 몸을 낮춘 채 슬쩍 뒷걸음질 쳤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부름에 순순히 다가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카를이 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현상을 유지하며 시간을 끌어야 할....
화아아앗!
일순간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무릎을 꿇은 석상들이 사라졌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펼쳐졌다.
...아니, 아무것도 없진 않았다.
저 위쪽 홀로 우두커니 놓여 있던 재단의 형태가 선명하게 보였으니.
[나의 흔적이 묻어 있구나. 아이야, 네가 살던 시대에도 나의 사원이 있는 것이냐.]
"당신은."
레이시스는 검대에 매인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신가요."
[아이야. 내 사도들이 간증하는구나. 네가 내 사원에 들어왔었노라고.]
"제가요?"
레이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원?
위블렘 사원을 말하는 건가?
아니, 그쪽은 영웅을 기리는 사원이었다.
지금처럼 정체 모를 존재를 위한 사원이 아니었는데.
"당신은 영웅이라 불리신 분 중 하나였나요?"
레이시스는 나지막한 기대를 담아 그에게 물었다.
상대가 고대 영웅이거나, 그가 남긴 흔적이라면 적어도 이쪽의 적은 아닐 테니 말이다.
[영웅.]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레이시스는 두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주변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가증스러운 이름을 내 앞에서 입에 담는 것이냐!!!]
쿠웅.
공기가 단번에 무거워졌다.
살의가 담긴 것처럼 날카로운 예기마저 느껴졌고 레이시스의 피부를 쿡쿡 찔러왔다.
황급히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날카로움이었다.
[가증스러운 작자, 배신자, 신의를 저버린 버러지,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수치스러운 자!]
쿠우우웅.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레이시스는 비틀거리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그 질문에 모든 변화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땅을 뒤흔들던 진동도, 피부를 찢을 듯 날카롭던 적의도, 등골을 스치던 기이한 감각도.
모두 원래 그랬던 것처럼 사라진 채 평온한 분위기로 되돌아왔다.
[그렇구나.]
"...네?"
[내가 누군지는 아이야, 네가 찾아내어야 하는 문제란다.]
"그게 무슨."
레이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가 누구의 성인지, 왜 만들어진 곳인지, 어째서 땅에 파묻혀 있는지.
아직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는데 당신이 누구인지 나보고 알아내라고?
[그래, 그 가증스러운 영웅들은 날 이렇게 불렀지.]
팟.
그때 사원의 벽 한 곳에 푸른 불빛이 들어왔다.
그곳에서 일렁거리는 불길의 형태는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저건.'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
카를의 고향인 라이프치히 영지.
바이에른의 실습으로 레이드를 갔었던 그곳의 것과 똑 닮은 형태였다.
[이치를 통달한 자.]
팟.
새로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거짓과 진실을 가르는 자.]
팟.
[궁핍하고 부족한 자들의 구원자.]
팟.
[...그리고, 자신들을 영웅이라고 칭하는 가증스러운 작자들에게 배신당한.]
팟.
사원의 불꽃이 전부 피어오르며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동시에 레이시스는 재단 위에 서 있던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아아아.
남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레이시스가 고개를 들었을 찰나 사라진 그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누구일 것 같으냐.]
"...."
레이시스의 눈이 잘게 떨렸다.
고대 영웅들은 누구와 싸워 대륙을 지켜 낸 것인가.
그 설을 두고 학계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레이시스는 그걸 두고 마계에서 중간계를 침략한 마왕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반대로 다른 존재를 주장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주신의 자리를 두고 창조주와 격돌했던.
"반신(半神)...."
[이런.]
남자는 손을 뻗어 레이시스의 입을 막았다.
[너무 쉽게 맞히는구나. 이래서야 문제를 낸 의미가 없는걸.]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레이시스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어디, 네 친구도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자꾸나.]
135화 외부 견학 (8)
"...아."
레이시스의 두 눈이 커졌다.
일순간 등 뒤로 카를이 나타난 줄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다른 곳의 풍경을 비추는 반투명한 물결이었다.
-콰아아앙!
성채 전부가 시커먼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화재라도 난 것일까?
하지만 그 가운데서 모습을 드러낸 카를의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흑염(黑炎)이라. 보기 드문 불꽃이로군. 나조차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야. 신살자의 재능이라도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
레이시스는 남자에게 제압당한 상태에서 눈동자만 굴려 물결 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카를은 말 그대로 미친 사람처럼 날뛰고 있었다.
손짓 한 번이 있을 때마다 지금껏 자신들이 지나온 성채가 모조리 시커먼 불길에 휩싸여 녹아내렸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과격한 모습에 절로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아이야, 저 녀석에게 있어 네가 제법 소중한 듯싶구나. 사람이라면 응당 재물에 눈이 멀 수밖에 없거늘, 그것보다 네 값어치가 더 높다는 말이 아닌가.]
"...!"
남자의 말에 레이시스는 움찔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붉게 물들이는 것까진 숨기지 못했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할 정도로 애송이는 아니었다.
"당신의...."
[음?]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레이시스가 추론하기로 이 창백한 남자의 정체는 반신(半神) 카일로스.
창조신과 이 세상의 주신 자리를 두고 격돌 끝에 영웅들의 손에 봉인되어 이제는 고대 문헌으로밖에 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사칭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분위기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니, 사람은 맞는 걸까?
'끄응.'
어떻게든 남자의 손에서 탈출하려 몸부림을 쳤지만, 어째서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허락된 건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과 입을 여는 것뿐.
손이라도 움직여 주어야 검을 뽑든 말든 할 텐데 보이지 않는 손이 전신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아이야, 주제 넘는구나.]
남자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맞추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아 보이는 무기질적인 눈동자에 레이시스는 흠칫 어깨를 떨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신의 안식을, 방해한 건 죄송합니다. 사죄할 수 있다면 사죄드리고 싶어요."
[사죄라.]
그녀의 말에 남자는 금세 표정을 풀며 빙긋 웃음을 지어 왔다.
[네 눈에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느냐.]
"...."
레이시스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푸르른 눈, 그리고 헐벗은 상체와 근육질 몸까지.
입을 열어 대답하려던 찰나, 이미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는지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성체라. 마지막 모습이 그러했던가. 그 모습은 익숙지 않아서 말이지.]
화아아앗.
남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옅은 빛을 내뿜는 은백색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어졌고 근육질로 뒤덮여 있던 몸은 홀쭉해지며 여성의 형태로 뒤바뀌었다.
펄럭.
종래엔 검은 드레스까지 걸치며 몸을 빙그르르 돌렸으니.
겨우 그의 손에서 해방된 레이시스는 기침을 토해 내며 뒷걸음질 쳤다.
"...어?"
다만,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눈가를 잘게 떨었다.
헐벗은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완전무결한 외모를 지닌 백발의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손을 뻗어 레이시스의 뺨을 어루만지며 작게 속삭였다.
[내 안식을 방해한 사죄로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였지.]
"...."
레이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까와 달리 자유롭게 움직일 순 있게 되었다.
여성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허리에 매인 검으로 손이 갔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적의를 꾹 눌러 참으며 손을 멈췄다.
"무엇을 하면 될까요?"
자신의 직감에 따르면 눈앞의 여성은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
함부로 거스르거나 대적하면 안 된다는 느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조심해야 해.'
상대가 진짜 반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막아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적어도 카를이 올 때까지는....
[나는 화신을 원한다.]
"...화신?"
여성은 드레스 끝자락을 잡더니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대의 나는 이미 사장된 이름일 것이다. 신격으로도 존재하지 않겠고, 신전에서 그 이름이 불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겠지.]
"...."
[그 간악한 창조주가 내버려 두었을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도 날 봉인하기 위해 많은 피해를 보았다.]
"피해?"
신화의 이야기.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녀의 말에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을 터.
레이시스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여성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이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이세계의 존재는 이미 정설이다.
영웅 말고도 여러 형태로 이 세상에 오갔다고 기록된 바가 있으니.
물론 공식적으로 밝혀진 건 없었고 학계 이론으로만 거론되는 이야기였다.
[창조주는 주신의 자리를 건 싸움에서 내게 패배하기 전 마지막 묘수로 이세계의 존재들을 소환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 패착이지.]
여성은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탓에 인과율이 많이 무너졌어. 내가 이렇게 봉인되었음에도 창조주는 아직 주신의 자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그러니 내게도 기회가 남아 있다는 말이지.]
"...."
기회가 남아 있다면 또 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소리인가.
레이시스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여성과 거리를 벌렸다.
'화신이 되어라.'
화신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반신 카일로스의 수중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과 비슷한 말일 것이다.
레이시스는 절대로 자신의 몸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내 화신이 되어라. 잊혀진 내 이름을 다시 대륙에 떨치고 창조주에게 이 몸이 부활했음을 소리쳐 성토해라!]
사아아아!
여성의 손이 재차 뻗어 왔다.
이전처럼 목덜미를 쓰다듬으려는 손길이었지만, 그 위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렇기에 레이시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검을 뽑아 들었다.
챙!
날 선 궤적이 그녀 앞을 지켰다.
줄기줄기 뿜어져 나온 마력이 벽을 이루었고, 레이시스는 곧바로 창궁무애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흠.]
반신 카일로스는 그런 그녀의 당찬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이 몸의 명령만 따르는 인형 따위는 화신으로서 실격이노라.]
"누가 당신의 인형이 된다고."
[아이야, 방금 네 입으로 말했을 터인데. 사죄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인형이 된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말이 상충되는구나. 허나, 좋다. 종복을 꿇어 누르는 것 역시 신격을 바로 세우는 일. 특히 아이야, 너는....]
카일로스의 새파란 눈동자가 레이시스를 직시했다.
[그릇이 넓도다. 신격을 담기에는 충분해 보이는구나.]
"...!"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레이시스는 망설이지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쉬아아악!
다소 조급한, 그만큼 날카로운.
창궁무애검법의 초식이 사방을 찢어발겼다.
줄기줄기 뿜어진 검기가 사방을 가격했고 재단을 무너뜨리며 자욱한 먼지를 피워 올렸다.
타다다닥!
레이시스는 곧바로 몸을 돌려 땅을 박찼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카를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싸우지는 못해도.'
도망치는 건 자신 있다.
이럴 때를 위해 체력 훈련은 쉬지 않고 열심히 해 왔으니까.
하지만 문을 나서기 직전.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느냐.]
귓가에서 들려오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동시에 자신의 전신을 옭아매오는 차가운 손에 붙들리고 말았으니.
[시간은 많도다. 아이야, 천천히 이 몸의 신격을 전해 주도록 하마.]
"...."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레이시스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젖어 들었다.
* * *
콰앙!
성채의 첨탑이 무너졌다.
카를은 날 선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
없다.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시스의 기척도, 그녀를 끌고 간 존재도.
'성채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이 전부를 불태워 버렸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즉, 성채는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일 테지.
진짜 중요한 곳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했다.
"...."
한숨을 토해 낸 카를은 제자리에 우뚝 선 채 두 눈을 감았다.
천마신공까지 사용한 상황.
이제는 정말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사아아아.
천마신공과 더불어 명천신공의 기운이 풀려나와 그의 몸을 뒤덮었다.
혼원이 일극에 도달했을 때 조화에 이른 잿빛 기운이 퍼져 나와 주변에 스며들었다.
'이 성채의 주인은 누구지?'
악마? 몬스터?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존재?
어찌 되었든 이 공간 전체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주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그것을 찾아낸다면....
'찾았다.'
카를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저 멀리, 위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모종의 마법을 통해 이쪽을 감시하고 있던 것일 터.
마법의 종류는 간파해내지 못했지만, 저쪽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사아아아!
뻗어 나간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마법과 연결된 길목을 찾아 나섰다.
위쪽에 뻗어 있으니 천장 너머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마법과 이어진 통로는 지하 쪽을 가리켰다.
'밑, 더 밑, 한참은 더 아래군.'
그렇다면 분명 연결된 통로가 있을 것이다.
카를은 곧바로 지하의 기운을 훑었고, 성채 본관 쪽에서 아래쪽으로 뚫린 통로를 발견했다.
쿵.
즉시 땅을 박차고 뛰쳐나간 그는 마화에 불타 무너진 본관에 다다랐다.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고 바닥을 내려치자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 앞에 드러난 것은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작은 통로.
카를은 망설임 없이 그 위로 몸을 던졌다.
쉬아아악!
지상에서 가고일 석상에 난 구멍을 통해 들어왔을 때보다 더 깊은 통로가 이어졌다.
이러다가는 아르테니아의 끝에 다다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카를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천근추의 수법으로 속도를 더 높이며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바닥에 다다랐을 때.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착지했다.
아마 저 위쪽까지 땅이 출렁거렸을 정도의 여파일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주위를 훑었다.
'레이시스의 향.'
그녀가 즐겨 쓰는 라임 향수의 잔향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카를은 즉시 그 흔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고 곧 커다란 돔 형태의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원인가?'
아니,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볼품이 없는데.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보던 중 무너진 파편들의 흔적이 얼마 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쉬아악!
즉시 그 흔적을 따라 몸을 날렸고 그 끝에서 익숙한 기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시스!!!"
돔의 끝.
레이시스가 허공을 바라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카를은 안도감에 그녀를 힘껏 부르며 달려 나갔지만.
툭.
어느 기점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춘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레이시스 양?"
136화 외부 견학 (9)
살수가 대상을 탐색하는 요소 중에는 기질이라는 것이 있었다.
사람의 걸음걸이, 체취, 평소 팔다리를 흔드는 각도와 성격, 조금 더 자세히 파고들면 그날 기분에 따라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종합한 감각적인 영역이었다.
경지에 오른 살수라면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대상이 어떤 상태에 놓였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카를은 그 방면에서 가히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살수로서 천하제일에 이르렀고 수십 년에 달하는 경험을 쌓았다.
그러니 평범한 인간 중에서는 그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물며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의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있을까.
'이 기운은....'
평소 레이시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깔끔한 것이었다.
왕녀답게 기품이 있었고 기세를 갈무리하는 법도 제대로 배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무런 기운도.
"레이시스 양."
"...아, 카를 군."
이쪽의 부름에 레이시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돌아보았다.
얼굴, 목소리, 움직임, 태도 모두 원래 그대로였다.
그 모습에 잠시 이질감을 느꼈던 카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우두커니 서 계셔서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아, 죄송해요. 떨어지면서 머리를 좀 다쳤는지 조금 힘들어서 잠깐 쉬면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어요."
"이 주변은 레이시스 양이 그런 겁니까?"
"네. 뭔가 있었거든요. 카를 군이 오기 전까지 절 공격해 와서 쫓아내기 위해 싸웠어요."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카를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출구는 저쪽입니다. 성채 본관으로부터 이곳 지하로 내려오는 길이 있더군요. 성채는 아마 눈속임이고 이쪽이 본래 목적인 것 같은데, 일단 다친 곳이 있으신 것 같으니 한 번 밖에 나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러는 편이 좋겠어요. 너무 늦으면 다른 사람들도 걱정할 테니."
레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은 그런 그녀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서두르자며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단이 있는 공간을 나가기 직전.
"...."
레이시스는 히죽 미소를 지으며 앞서 걸어가고 있던 카를의 등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주 날카롭고, 은밀하게.
손끝이 노리는 방향은 카를의 심장이 있는 부근이었다.
퍽!
망설임 없이 쇄도한 찌르기가 카를의 등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피가 튀기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의 몸은 시커먼 연기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
레이시스는 두 눈을 부릅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을 열며 카를을 찾으려 했지만, 그 직후 바로 옆에서 닥쳐오는 묵직한 기세에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쩌엉!
엄청난 충격파가 터졌다.
제법 힘을 담아 후려쳤음에도 상처 하나 없이 훌쩍 물러나 피해 내는 레이시스의 모습에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와 거리를 벌리며 바닥에 내려선 레이시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폭한 남자로다. 자신이 아끼는 여자에게 그리 망나니처럼 주먹을 휘두르다니."
"넌, 누구지?"
"글쎄, 내가 누구일까. 누구이길래 네 여자의 몸에 깃들어 있을까."
얼굴과 목소리는 분명 레이시스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과 표정은 평소 그녀의 모습과 달리 익살스럽기 그지없었다.
'눈동자가.'
푸른 에메랄드와 같던 청안이 섬뜩한 붉은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악마인가?'
그런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간의 몸을 뺏고 의태하며 농락하는 존재는 몇 없을 테니까.
그러자 레이시스는 마치 카를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이 몸을 그런 저급한 것들과 같은 취급하지 말도록."
"그러면 그 몸에서 나와 직접 모습을 보이지. 레이시스를 괴롭히지 말고."
"그럴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얻은 몸이거늘."
레이시스는 히죽 웃으며 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그 위에 새하얀 빛이 응어리치며 길쭉한 형태를 잡았다.
곧 한 자루의 검이 되어 그녀의 손에 움켜 쥐였으니.
"...."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카를 역시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스릉.
신검 천뢰(天雷).
날 서린 검신 위로 잿빛 기운이 치솟았다.
저 존재가 레이시스의 몸을 빼앗은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 희망은 있을 것이라는 미약한 가능성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여전히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를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시스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재차 카를의 손에 쥐인 검을 직시했다.
마치 보지 못할 것을 보았다는 듯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를 악문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 "정의"와는 무슨 관계이지?"
"...."
카를은 대답하지 않은 채 검을 더욱더 높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속내는 상당히 놀란 차.
레이시스에게 깃든 존재가 정의를 언급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천뢰를 알아봤다고?'
아니나 다를까 레이시스의 시선이 천뢰에 꽂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검, 본 적이 있다. 꺼드럭거리기 좋아하는 그 검사가 달고 다니는 검 중 하나였지."
"...마치, 직접 보았다는 말투인데."
"하!"
카를의 말에 레이시스는 코웃음을 흘렸다.
"직접 보기만 했을까. 스스로 영웅이라 자처하는 그 가증스러운 녀석들 때문에 이 깊디깊은 무저갱에 파묻히게 되었거늘."
무엇이 그토록 화가 나는 걸까.
평소 온화한 성격의 레이시스가 토해 내는 분노의 성토인지라 더욱 이질감 있게 느껴졌다.
"재밌군, 재밌어. 그 검을 받았다는 건 "정의"가 남긴 시련을 통과하고 인정받았다는 소리겠지. 억겁의 시간을 지나, 날 찾아온 것이 영웅의 후계라니."
쿵!
레이시스는 땅을 박찼다.
기습적으로 휘둘러진 빛의 궤적을 따라 수십 줄기의 검격이 카를을 향해 쇄도했다.
쉬사사삭!
항거할 수 없는 폭우.
그것을 막아 내고자 카를은 검 끝을 날카롭게 세우며 자신의 앞에 검막을 펼쳤다.
잿빛 기운이 휘몰아치며 두꺼운 방벽을 세웠으나, 쏟아지는 빗줄기의 무거움이 너무나도 막중했다.
쿵, 쿠우웅.
백색 폭우에 직격당할 때마다 카를의 몸이 한 걸음씩 뒤로 밀려 나갔다.
핏.
어마어마한 여파를 흘려내지 못한 탓에 곳곳이 상처로 물들었고 핏줄기가 내비치며 의복을 붉게 물들였다.
'엄청난 수준의 검술이다.'
카를은 속으로 혀를 차며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빗줄기가 부닥칠 때마다 신검을 타고 들어오는 충격이 손목을 짜르르하게 울렸다.
아마 이제껏 싸웠던 이 중 가장 고강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높은 수준의 무학이 담긴 공격이었다.
사아아아.
쏟아져 내린 빗줄기가 다시금 레이시스의 손 위로 모여들었다.
그 사이 여유를 되찾은 카를은 짤막하게 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들었다.
"후."
치명상은 없었다.
이 정도 상처는 혈도를 짚을 필요도 없이 호흡을 내뱉고 근육을 조이는 것으로 출혈을 막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강할지도 모르겠군.'
심지어 레이시스의 몸이 인질로 잡혀 있어 최대한 상처 없이 쓰러뜨려야 했다.
불합리에 불합리를 더한 싸움.
카를은 쓴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절그럭.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레이시스를 가지고 싶었으니.
이 정도로 포기할 정도라면 애초에 욕심조차 내지 않았다.
"...."
레이시스는 여전히 꺾이지 않는 카를의 기세를 보고는 히죽 웃었다.
어둠 가운데 시뻘건 안광이 번뜩이며 호를 그리더니 천천히 입이 열렸다.
"좋아."
그녀는 검을 들어 카를을 겨눴다.
"넌 이 여자를 구하고 싶겠지."
"...."
"난, 내 격을 받아 줄 몸이 필요하도다. 네 몸을 내어 준다면 이 여자를 해방해 주지. 어떤가?"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카를은 오히려 이것을 기회라고 여겼다.
"...설령 그렇게 한들, 내가 순순히 몸의 주도권을 넘겨주리라 생각하나?"
"하핫, 좋은 자신감이다. 좋다, 버티면 인정해 주도록 하지."
레이시스 아니, 반신 카일로스는 피식 웃었다.
감히 인간 주제에 신격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영혼의 파장을 보니 평범한 존재는 아닌 것 같았지만, 비범함을 말하자면 감히 반신에 비할 수가 있을까.
"...."
카를은 기세를 가다듬었다.
저 녀석의 제안에 따라야 할까.
현시점에서 레이시스에게 아무런 피해 없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긴 했다.
그리고, 정신력으로는 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스륵.
카를은 검을 내리며 레이시스에게 말했다.
"맹세해라. 레이시스를 해방하고 내 몸으로 들어와 패배 시 순응하겠다고."
"그러마, 고대의 조약에 따라 맹세하도록 하지."
레이시스는 성호를 그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렇게 손쉽게 넘어올 줄이야.'
저 정도 경지에 있는 실력자의 몸에 들어가는 건 시도부터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리 순순히 넘어올 줄이야.
일단 안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수월했다.
영혼의 격으로 싸운다면 어떤 존재도 반신격을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
마나의 울림을 느낀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거두었다.
맹세가 적용된 이상 설령 악마더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기면 큰 피해를 보았다.
오히려 상위 존재일수록 더욱 강력하게 속박되기에 이걸 믿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레이시스 역시 빛의 검을 놓고는 단숨에 카를에게 다가갔다.
순식간에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까지 거리를 좁힌바.
카를이 잠시간 멈칫거리자 그녀는 귀엽다는 듯 손을 뻗어 목을 붙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풋풋하구나. 아직 입을 맞춘 적도 없는 것이냐. 가만히 있도록 하여라."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접근했다.
아니, 닿기 직전 레이시스의 입 안쪽으로부터 새하얀 숨결이 뿜어져 나와 카를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아아아.
반신 카일로스는 환희에 찼다.
무저갱의 시간은 밖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이곳에서 썩어 있었던가.
반신이 아니었더라면 정신은 이미 마모되어 존재 자체가 사멸했을 터.
[하지만 난 견뎌 내었고 버텨 내었다!!]
심지어 자신을 찾아온 영웅의 후계를 현혹해 그 몸을 빼앗았다.
쉬아아악!
심상의 세계에 근접했다.
곧 카일로스는 자신의 신격을 떨치며 내부에서 자신의 장악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쿠웅.
새하얀 벼락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갔다.
카일로스는 잔뜩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고개를 들었다.
[좋구나! 확실히 영웅이 후계로 선택할 만한 그릇이다! 내 신격을 담아도 끝이 보이지 않으니! 대체 어디서 이런...!]
-어리석다.
콰아아앙!
돌연 머리 위에서 새카만 흑뢰(黑雷)가 떨어져 내렸다.
세상 높은 줄 모르고 신격을 뿜어내던 카일로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서 파묻혔을 정도로 강렬한 여파였다.
[...커, 헉!]
널찍한 크레이터 가운데 카일로스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건, 이 힘은 대체 무엇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심상의 세계, 저 하늘 높이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존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적통은 아니더라도 본좌의 명맥을 이은 계승자. 어찌 이계의 신격이 그 정신을 탐하게 내버려 둘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가, 빙백목(氷白木)이여.
파스스스.
돌연 주위가 냉기로 가득 찼다.
그건, 세계수였다.
무성한 이파리와 줄기가 모두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세계수가 돌연 카일로스 앞에 나타났다.
[이건 대체....]
카일로스는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계의 신격? 어찌 인간의 몸으로 두 개의 신격을....]
심상의 공간에 이러한 마귀들이 자리하고 있다니.
대체 이 인간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137화 외부 견학 (10)
카를이 레이시스의 몸에 깃든 존재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인 건 나름대로 승산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심상의 세계에서는 내가 유리해.'
이 안쪽의 싸움은 이미 겪어 본 기억이 있었다.
음지에서 마인 무리를 이끌던 베샤. 그리고 녀석의 배후에 있던 악마와 이곳에서 한차례 격돌하지 않았던가.
카를은 레이시스의 몸에 깃든 것이 그때 조우했던 악마에 준하는 존재라고 판단했다.
어째서 이 깊숙한 지하 성채 신전에 봉인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쓰러트리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는 없다.'
녀석은 심상의 세계로 끌어들여 주도권을 바탕으로 우위를 점해야 했다.
일단, 이 안쪽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다.
콰아아앙!
녀석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심상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힘을 흩뿌렸다.
푸른빛이 섞인 백색의 벼락이 사방으로 줄기줄기 뿜어져 나가며 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가볍게 호흡을 내뱉은 카를은 혼원일극신공의 힘을 끌어올리며 나서려 했지만, 모종의 존재가 그의 걸음을 막아 세웠다.
-가만히 있거라.
"...!!"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
심상의 세계에서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기에.
'누구지?'
지금 이 안에는 자신과 저 존재밖에 없을 터인데 이 목소리의 주인은 대체 누구일까.
카를은 그 말에 거부한 채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지만, 곧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천마신공의 기운이었다.
자신보다 월등하게 높은, 격차조차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경지의.
아니, 천마신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익힌 것보다 더 원류에 가까운 무언가가 이쪽의 발걸음을 막으며 허락하지 않았다.
적의는 없었다.
그렇기에 카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
카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위쪽에서 시커멓게 응집되어 있는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역시 천마신공이라는 감탄밖에 들지 않았다.
콰아아앙!
그 사이 지상에서는 백색 여인을 향해 엄청난 공세가 퍼부어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마기와 별개로 지상을 뒤덮는 푸르스름한 빙결의 결정이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저 가운데 뻗어나 있는 거대한 거목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파스스스.
뻗어 나간 가지에서 뿜어진 한기가 주위를 전부 얼려 버리며 여성을 압박했다.
카를은 그 기운이 명천신공의 극음지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마신공이 극에 달한다면 수라의 형태로 구현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명천신공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어째서 나무의 형태로 구현되어 있는 걸까.
가만히 서서 구결을 복기해 보아도 저런 거목과 어울리는 부분은 없었다.
'명천, 하늘을 밝힌다.'
천마와는 정반대 느낌의 이름이었다.
하늘을 밝힌 빛으로 지상을 굽어살피는 것인가?
그래서 그 양분을 받고 자라나 저런 거목이 뿌리를 내린 것이고.
'이건 좀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끼워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다.
천마신공은 몰라도 명천신공은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것 또한 착각이었던 듯싶었다.
그리 단순한 것이었다면 천마신공처럼 신공이라 불리지 않았을 터이니.
어쩌면 경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크아아악!]
카를의 고민 가운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천마신공과 명천신공의 힘에 의해 지상에 처박힌 여성이 피로 물든 채 절규를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같잖은! 원류조차 아닌 편린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손을 뻗는가! 이곳은 네놈들이 속한 세계가 아니다! 이 인과율은 저 녀석이 직접 감당하게 될 것이다!]
-우습구나.
피를 토하는 절규에 화답하듯 하늘에 응어리진 마기 역시 입을 열었다.
카를은 그것을 올려다보는 순간 깊은숨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대체 어떤 무학에 다다라야 저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카를은 개안을 한 기분이었다.
이런 것이 기연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본좌가 그러한 것을.
카를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천마신공이 아니라 신공 자체에 깃들어 있는 천마 그 자체라는 것을.
천마신공이라는 절세무학을 정립하고 지금의 천마가 있게.
그 장본인은 아니어도 사념과 의념의 일부가 구현되어 자신의 심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임을.
-신경 쓸 것 같은가?
콰아아앙!
재차 엄청난 마기가 쏟아지며 지상을 짓눌렀다.
여성의 몸이 뒤틀리며 점차 짓뭉개지기 시작했다.
기를 쓰며 저항하는 듯싶었지만, 힘의 격차가 나는 듯 그대로 바닥에 파묻혀 버렸다.
스윽.
지상을 짓누르던 마기가 소멸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 자신의 역할은 끝이라는 듯 심상의 세계에 응어리진 새카만 마기가 사라져 갔다.
지상에 뿌리를 내린 채 굳건하게 빙결의 결정을 흩뿌리던 빙백목 역시 그 끝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되어 흩어졌다.
"...아."
카를은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는 손을 뻗었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을 가득 채우던 기척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마지막의 잠깐, 자신에게 시선이 머물다 떠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앞은 내 판단에 따라 알아서 하라는 것인가.'
카를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언행 모두 천마다웠다.
동시에 가슴이 두근거려 왔다.
천마신공만으로도 저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언데, 혼원일극신공으로는 대체 어떤 곳까지 오를 수 있는 것일까.
툭.
카를은 지상에 내려섰다.
크레이터의 중심, 뒤틀린 관절과 찢긴 몸으로 어떻게든 일어나려던 여성이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크윽, 컥.]
제대로 말조차 나오지 않는지 피를 토해 내며 호흡을 억눌렀다.
그 비참한 모습을 보며 카를은 입가를 비틀었다.
"개운치 않군. 본래는 내 힘으로 꺾으려 했는데."
[넌, 네놈은, 대체, 몸에 무엇을?]
"나도 모른다. 대신 네 정체가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겠군."
영웅을 향한 일방적인 증오.
제 입으로 운운한 신격.
그리고 지하 성채와 신전의 봉인.
모든 요소로 도출해 낼 수 있는 이름은 지금으로서는 단 하나뿐이었다.
"반신(半神) 카일로스. 영웅들에게 패배한 악신이 이러한 곳에 봉인되어 있던 것인가."
[하!]
카일로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코웃음을 쳤다.
사실 카일로스에 관한 정보는 지극히 적었다.
세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바이에른에 입학하기 전에는 카를 역시 알지 못했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건 동아리 선배들이 남긴 고대 문헌의 해석본에서였다.
레이시스가 그것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기에 카를도 함께 조사했고 카일로스라는 이름을 접했다.
물론 학계의 가설 중 하나로 영웅이 대적했던 존재에 관한 추론일 뿐이었다.
'허나, 설마 진짜로 존재할 줄은.'
반신에 이른 존재가 자신의 심상에 들어왔기에 신공들이 반응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난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카일로스는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카를을 향해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놈에게 깃든 이계의 신격이 그랬던 것처럼 내 신격은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지.]
"나뉘어 봉인당한 것인가. 흔히 있는 일이로군."
악신이라 불리던 존재다.
자신이 영웅이라고 할지라도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도록 조각조각 나뉘어 흩뿌렸을 것이다.
스윽.
카일로스는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으로 이마의 피를 닦아 내고는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영웅에도 근접하지 못한 네 힘으로는 날 어찌할 수 없어.]
"과연, 그럴까 궁금한데."
카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에게는 신공이라 이름 붙은 힘이 무려 3개나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엇비슷하게나마 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헌데 궁금하군. 영웅들은 어째서 당신을 끝내지 않고 봉인만 해 두었을까."
[...영웅, 영웅, 영웅!]
카일로스는 신경질을 냈다.
[그놈의 영웅 소리 좀 작작해!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는 전부 포장된 것이다! 정의의 편이라고? 그딴 건 없어! 전부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나선 추악한 놈들의 짓거리일 뿐이지.]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 영웅에게 대적했지?"
질문의 순서가 바뀌었다.
문헌에 적힌 기록은 고대 악신이 주신의 자리를 두고 창조주와 격돌했고 영웅들이 창조주를 도와 고대 악신을 격퇴했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카를은 교묘하게 그의 편을 들어주며 자극하는 것으로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길 원했다.
[난 굳이 따지자면 대의를 위해서 나섰다.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은 이미 멸망했겠지. 그마저도 결국엔 둘 다 허탕을 치고 말았지만.]
카일로스는 이를 박박 갈며 증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카를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미소로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영웅을 자칭하는 가증스러운 작자들은 끝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날 억겁의 시간 동안 이곳에 가두었다. 그러니 나도 이제 나를 위해 살겠다.]
파아아앗!
그 사이 힘을 회복한 것일까.
카일로스의 몸에서 푸른 빛이 솟구치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인간과 반신의 맹세가 성립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큰 오산이다. 감히 인간 주제에 내게 제약을 강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추하군."
카를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것이 반신이라는 존재인가.
인간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에 합당한 격과 기품을 갖추는 것이 당연한 법이거늘.
하지만 카일로스는 여전히 일그러진 미소와 함께 카를을 내려다보았다.
[이 세계에서 나가는 즉시 네 앞에 있는 여인의 목숨을 끊어 주마. 과연 그것을 두고도 그리 여유로울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파아아앗!
빛무리로 변한 카일로스가 심상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사방으로 뿜어졌다.
하지만, 카를은 허락지 않았다.
힘의 격차를 이용해 단숨에 녀석을 찍어 누르진 못해도 이 공간에 대한 통제권은 그가 지니고 있었으니까.
'모든 출구를 닫는다.'
형성된 모든 출입구가 폐쇄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단단한 쇠사슬로 이 세계를 감싸는 의념까지 구현했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 이상 카일로스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으리라.
쩌어어엉!
힘껏 세계의 벽과 몸을 부딪친 카일로스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가소롭구나. 네놈이 그 이계의 신격들처럼 날 몰아세울 수 있을 것 같더냐?]
"신격? 아, 신공을 말하는 건가."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주기에 신공절학이라 이름 붙여진 것인가.
작금 보인 천마의 편린도 굳이 따지자면 마선(魔仙)이라고 할 수 있을 듯싶었다.
"...."
천천히, 혼원일극신공을 일으키며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던 카를은 불현듯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너무나도 드높은 존재를 눈앞에 둔 덕에 가장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눈에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것이었다.
"혼원, 그래서 혼원이구나."
카를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이 단순한 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혼원이 고작 2개일 필요는 없었다.
2개든 3개든 4개든, 아니 100개든.
그 모든 것이 혼원이다.
혼원을 합쳐 일극으로 가는 것까지가 일극으로 향하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정도와 마도, 그리고 신성."
이 세 가지를 합친 일극의 형태는 어떻게 나올까.
쉬아아악!
카를의 손에서 엄청난 흡입력이 발생했고, 곧 카일로스의 빛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138화 외부 견학 (11)
혼원에 일극이라.
카를은 그 구결을 끊임없이 되뇌며 카일로스의 빛을 빨아들였다.
[...뭣, 무슨!]
반신(半神) 카일로스는 당혹스러운 비명을 토해 냈다.
고작해야 인간이었다.
이계의 신격을 두 개나 담을 정도로 그릇이 큰 건 인정하겠으나, 아직 영웅의 반열에도 이르지 못한 애송이가 아닌가.
그럼에도 자신의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고?
[미친 짓을...!]
빨아들이는 것과 흡수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감당하지 못할 힘을 받아들이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
하지만 카일로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위험하다.'
이 녀석은 이미 2개의 신격을 영혼에 품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가지고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그러고도 넓은 그릇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상식을 자행할 수 있는 존재이니 2개의 신격을 뛰어넘어 3개도 품을 수 있다는 소리이지 않을까?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카일로스는 몸을 비틀었다.
비록 조각 중 하나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반신에 이른 격이었다.
고작해야 이런 풋내기 한 명에게 흡수당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가.
[으아아아!!]
카일로스는 절규를 토해 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들썩이며 그의 전신에서 세찬 빛이 뿜어져 나와 카를을 향해 쇄도했다.
호신기로 몸을 두른 카를은 상대의 공격에 단단히 대비했으나, 반신은 반신이라는 듯 손쉽게 방어가 파훼당했다.
잿빛 호신기는 단숨에 부서졌고, 그 몸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렸다.
하지만 카를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심상의 공간에서 이따위 공격은 무의미한데 말이지."
영향을 받는 건 상대뿐이다.
그것도 심상과 의념이 익숙하다면 손쉽게 피해 낼 수 있지만, 다행히 카일로스는 이 공간에 익숙지 않아 보였다.
'의념을 담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내게 큰 피해는 없어.'
무너진 몸을 복구하기 위해 심력이 좀 소모될 뿐 진짜로 몸이 깎이거나 상처 입는 건 아니었다.
촤아아악!
빛의 검이 치솟았다.
푸른 빛이 감도는 궤적이 주위에 난무했고, 재차 지반을 무너뜨리며 이곳의 지형을 한차례 바꿔 놓았다.
카를은 심력 소모를 피하고자 훌쩍 뒤로 물러나며 천뢰를 날카롭게 세웠다.
번쩍!
검 끝에서 섬광이 터졌다.
천원검법의 이 초식, 천뢰(天雷)의 초식이 발현된 것이었다.
검의 이름과 같은 이 검초는 천원검법 중 최속의 초식.
카일로스가 휘두른 빛의 검을 튕겨 내기에는 충분했다.
퍽!
물론 카를도 무사하진 못했다.
서로의 검이 충돌한 반동으로 검을 쥔 손에 걸레짝이 되어 버렸으니.
손가락은 뒤틀렸고 근육은 찢겨 나갔으며, 뼈마디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카를이 가볍게 손을 비틀자 넝마 상태였던 상처가 단숨에 회복되었다.
'이곳에서 승부를 보아야 한다.'
카를은 재차 허공을 박찼고 끈질기게 카일로스에게 따라붙으며 녀석의 힘을 갉아 먹었다.
현실에서 이렇게 싸웠다간 자신도 그렇고 레이시스의 몸도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만일 심상의 공간에서 놓쳐 버린다면 레이시스의 몸에 해를 가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파아아앗!
2성의 극성으로 운용된 혼원일극신공의 기파가 심상의 공간을 휩쓸었다.
천마신공이라 할지라도 고작 2성으로 이 정도 위력을 낼 수 없거늘 차원이 다른 기세였다.
하늘에 휘몰아치며 연신 자신을 찍어 누르는 잿빛 기류에 카일로스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힘은 또 대체 무슨....]
신격이 2개뿐이 아니었다고?
앞선 2개의 힘과 더불어 저 잿빛 기류에서도 모종의 신격이 느껴지지 않는가.
카일로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리도 신들의 사랑을 받는단 말인가!]
심지어 이번 신격 같은 경우에는 그 형태의 편린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불가해의 존재.
적어도 지금의 자신보다는 아득히 높은 격을 지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3개의 신격. 이것을 가지....'
그때 무언가를 눈치챈 카일로스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그렇구나! 네놈 역시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이계에서 온 존재로군! 그래서 영웅의 후계로 인정받았고 그런 힘을 사용할 수 있던 것이야!]
"깨닫는 것이 늦었다."
카를은 천뢰검을 다잡았다.
카일로스가 말하는 이계의 신격이라는 것에는 제법 흥미가 생겼다.
신공에만 그러한 것을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신에 다다를 수 있는 무공에만 느끼는 것일까.
일단 천마신공, 명천신공, 그리고 혼원일극신공까지 모두 신격으로 인정을 받았다.
영웅들에게선 그러한 언급이 없는 걸 보니 이와 비슷한 무공을 익힌 이들은 없어 보였다.
'매화검법 같은 건 쳐주지 않는 것인가?'
황궁의 지하, 영웅들의 유적에서 보았던 "정의"의 검총에는 여러 가지 무공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대부분 구파일방이나 오대 세가에서 볼 수 있는 최상위 무공들이었는데 그것들로는 신에 다다를 수 없다는 이야기일까?
'이것도 한 번 알아봐야 할 일이로군.'
신(神).
중원에서는 그 경지가 하늘에 가까워졌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그 별호를 붙였다.
검신, 무신, 마신, 모두 비슷한 것으로 진짜 신이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아르테니아에서는 신이라는 존재가 실존했다.
천계에 머물며 중간계에 강림하거나 신도들에게 신성력이라는 힘을 내려 주어 개입과 간섭을 하였다.
중원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혀 신성에 다다른다면, 자신도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걸까.
촤아아악!
생각은 생각대로.
검은 검대로 움직였다.
혼원일극신공의 기파가 재차 거센 벽력을 만들어내어 카일로스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육 초식 진천(振天)
천원검법의 절초이자 위력만으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초식.
카일로스는 빛의 검을 들어 막아섰지만, 처음과 같은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쿠웅!
물론 전력을 다해 펼친 진천의 초식이라 할지라도 천마의 위용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카일로스를 쓰러뜨리기에는 충분했기에 그를 지상에 날려버렸다.
[...컥.]
천마와 빙맥목의 힘에 당한 여파가 큰 것인지 카일로스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애써 신성을 내뿜으며 공격해오는 듯싶었지만, 최후의 발악이었던 듯 이제 자신의 몸조차 수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툭.
그 위에 내려선 카를은 재차 녀석에게 손을 뻗어 신성을 흡수했다.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아무런 저항과 방해 없이 카일로스의 빛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반신격이라는 것인지 그 전부를 흡수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바.
체내로 들어온 압도적인 빛의 향연에 카를은 깊은숨을 토해 냈다.
'이것이 신성이라는 것인가.'
굳이 비유하자면 새로운 기운을 머금은 영약을 먹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중원에서는 흡성대법으로 상대의 힘을 흡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새로운 기운이 체내에 가득 차자 카를은 허공에서 가부좌를 튼 채 내기를 운용했다.
사아아아.
신성을 천천히 움직이며 그 형태를 관조했다.
확실히 마나와는 다른 형태였다.
천마신공, 명천신공, 그리고 혼원일극신공 모두 자연지기, 마나를 가공해 만들어진 힘이거늘.
신성력은 그 자체로 완전한 형태라 느껴졌다.
'하지만 신성력의 종류도 한 가지가 아니다. 사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어떤 신을 믿느냐에 따라 발현되는 성질이 달랐어.'
대지의 신, 전쟁의 신, 대장장이의 신....
저마다 보이는 신성도 달랐고 사용할 수 있는 범위나, 효용도 달랐다.
가령 대장장이의 신이 신성으로는 치유 능력이 극히 낮았고, 전쟁의 신의 신성으로는 밭에 뿌린 농장에 축복을 걸기도 힘들 것이다.
자연지기나 마나처럼 그 기반은 신성이라는 하나로 묶여 있되, 어떤 무공을 선택하냐에 신의 종류에 따라 성질이 갈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왜 마나와 신성이 상극이라고 했는지는 알겠군.'
아직 둘이 섞이지 않았다.
단순히 체내에 함께 있는 것뿐인데 피가 들끓으며 거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제는 마법사가 될 수 없고.
마법사는 사제가 될 수 없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위치였기에 어느 한 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상관 없어.'
혼원에 일극이라.
혼원일극신공은 이미 물과 기름과도 같은 정도와 마도의 기운을 서로 뒤섞었다.
섞을 수 없는 걸 섞은 신공의 공능이라면 마나와 신성력도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파지지직.
그때 카를의 주변으로 하얀 스파크가 터졌다.
머리카락이 들썩이고 등골이 서늘해졌을 정도의 여파.
카를은 마나와 신성을 섞으려 한 반작용인 줄 알았지만, 곧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네놈에게 흡수당할 줄 알았느냐!]
카일로스는 최후의 불꽃을 불태우며 소리 질렀다.
반신으로서 인간에게 순순히 흡수되는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밖에서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아예 카를에게 흡수되어 날뛰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쿠웅!
카를의 몸이 들썩였다.
아직 섞이지 않은 가운데서 신성이 발작하며 그의 체내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
카를은 이를 악물었다.
손해는 감수할 작정이었다.
애초에 카일로스를 흡수하지 못한다면 자신과 레이시스 모두에게 해를 끼칠 터.
이쪽이 가장 효율적이고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전부 흡수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카를은 신성을 기억했다.
기틀을 세우고 기반을 마련해 놓았으니 일부만 흡수하더라도 차차 키워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이 신성에서 카일로스라는 자아를 지워 내는 것.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었기에 다소 난항이 예상되었다.
쿠웅!
카를은 단전에서 천마신공과 명천신공의 기운을 발출했다.
혼원일극신공을 움직인다면 힘 대 힘으로 찍어 누르기에는 편하겠으나, 그 기운을 흡수할 때 새로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니 세 개의 기운을 뒤섞어 진흙탕 싸움을 만든 뒤에 기운이 줄어들었을 때 합쳐서 흡수할 생각이었다.
쾅! 쾅! 쾅!
카를의 몸이 들썩이며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심상의 공간 밖, 현실에서는 쓰러진 레이시스를 부축해 품에 안고 있는 자세였다.
그런 카를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피가 새어 나왔고, 귀와 코에도 핏줄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으음."
카일로스에게 정신을 장악당해 의식을 잃고 있던 레이시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에 피로감이 남아 있었지만, 카일로스가 카를 쪽으로 옮겨 간 덕에 탈 없이 정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
눈을 뜨자 바로 앞에서 보이는 카를의 모습에 레이시스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카일로스에게 정신을 빼앗겼다는 부분까지만 기억했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 많았다.
'이번에도....'
카를이 자신을 구해 줬다.
레이시스는 본능적으로 카를의 몸을 안으려 했으나,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카를?"
139화 외부 견학 (12)
심상의 공간에서 발생한 여파는 모두 가상의 것이기에 어지간해서는 외부로 표출되지 않았다.
즉, 도를 지나친 충격이 가해지면 현실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소리였다.
"...."
카를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안쪽으로 들어온 카일로스는 마치 지금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은 채 빛을 흩뿌렸고 카를의 체내를 엉망으로 망가뜨리며 뒤집어 놓았다.
'빌어먹을 새끼.'
반신이라는 주제에 하는 짓은 악마보다도 더 악랄했다.
여기서 더 내버려두면 기맥이 상할 수도 있기에 카를도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솨아아아─!
천마신공의 격류가 사방으로 뿜어지며 발작하는 새파란 빛을 찍어눌렀다.
힘에는 힘으로 상대해 주겠다는 듯 일절 봐주지 않은 채 머리채를 부여잡고 그 뒤통수를 힘껏 가격했다.
[으하하하! 그래, 어디 해보자! 누가 더 버틸 수 있는지!]
'끝까지 발악하는 것이냐.'
패배를 인정하고 승복하는 것까지가 승부의 끝이었다.
하지만 끈덕지게 자신을 늘고 물어지는 반신이라는 존재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좋다.'
그렇기에 카를 역시 각오를 다지며 심호흡을 토해 냈다.
'이제는 신성 전부를 날려 버려도 상관없다. 네놈의 자아만 없앨 수 있다면.'
신성의 기운은 이미 기억했다.
마치 영약을 먹었을 때처럼 세맥 곳곳에도 그 흔적이 남았으니 추후 시간을 들이고 노력한다면 손톱만큼이라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카일로스의 것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신성을 재현할 수 있을 터.
쉬아아악!
세차게 뿜어지던 천마신공과 명천신공이 서로 합일해 선명한 잿빛 기류를 이루었다.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혼원일극신공의 힘에 카일로스는 재차 두 눈을 부릅떴다.
[또! 이 빌어먹을 신격이...!]
카일로스는 발악했다.
체내에 들어온 이상 힘껏 발작하면 카를의 움직임이 멈칫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다른 두 개의 신격까지는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지만, 저 잿빛 기운 앞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이기 어려웠다.
[...커억.]
종래에는 파도에 휩쓸린 사람처럼 나가떨어지더니 거센 풍랑에 파묻혀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카를은 방심하지 않은 채 녀석의 빛을 끝까지 추격했고 그 잔재마저 소멸할 때까지 끈질기게 휩쓸어 버렸다.
'후우.'
심상의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카를의 심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누군가와의 싸움에서 지친다는 건 정말 오랜만에 겪어 본 일이었기에 그는 피로감이 섞인 숨을 토해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심상의 공간에서 일어난 여파가 현실까지 영향을 끼친 듯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마치 심한 고문을 당한 것처럼, 아니, 강철로 된 가시밭길을 맨몸으로 구른 것처럼 여기저기 찢어지고 꿰뚫린 상처가 가득했다.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에 쓴웃음을 지으며 움직이려던 카를은, 자신의 가슴 앞쪽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뒤늦게 레이시스의 존재를 눈치챘다.
"...."
레이시스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카를을 안아 주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무서운지 손끝을 덜덜 떨면서도 자신의 등을 끌어안은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붙잡고 있었다.
"...붙잡아 주소서. 자애로운 빛이여, 당신의 신도를 굽어살피사...."
믿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레이시스는 카를이 눈을 떴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레이시스."
"...아."
카를이 그 등을 살짝 어루만져 주자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던 레이시스는 피투성이가 된 카를의 모습을 보고는 재차 울음을 터트리더니 그의 목에 매달렸다.
"카를, 카를 맞죠?"
"저 맞습니다."
"다행, 다행이에요. 카를마저도 몸을 빼앗긴다면...."
"제가 그럴 리 없잖습니까."
카를은 웃음을 토해 내면서도 레이시스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많이 무서웠으리라.
홀로 함정에 빠져 반신 카일로스 앞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고 몸까지 빼앗겨 버렸으니.
정신을 차리니 앞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보고 또 걱정이 든 것이겠지.
"이제 괜찮은 거예요?"
"그런 것 같습니다."
"...."
레이시스는 천천히 맞잡은 손을 풀며 카를에게 한 발자국 떨어졌다.
카를을 꽉 안고 있던 탓에 온몸에 피가 묻어 버렸지만, 그것보다 다른 쪽이 더 부끄러운 것인지 입술을 우물거리며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만, 카를의 관심사는 다른 쪽에 있었다.
'체내에 남은 카일로스의 힘은 대략 1할 정도인가.'
그 많던 신성의 힘은 혼원일극신공의 격류로 인해 카일로스의 자아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1할이면 생각보다 많이 남겼기에 만족감이 들었다.
사아아아.
천천히 신성을 끌어올리자 카를의 손끝으로 새하얀 빛무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래도 그 반신 덕분에 재미난 능력을 얻은 것 같습니다."
"신성력을 쓸 수 있게 된 거예요?!"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어오는 레이시스의 말에 카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로스의 신도가 되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녀석의 존재에서 남게 된 잔재를 흡수했습니다. 이걸 신성력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애매하군요."
"하긴, 본래 신성력은 신이 부여한 힘이니까요. ...어찌 되었든 그것도 카일로스로부터 부여된 힘이니까 신성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레이시스는 괜찮다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무슨 말을 할지가 궁금합니다."
이단으로 몰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찬란한 빛이 피어난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신성에 관해 해박한 사제나 성직자가 본다면 기존과 다른 신의 힘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터.
"그러니 가급적 사용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네, 괜히 이교도로 몰리면 귀찮아지니까요."
과거 이교도나 마녀의 사냥이 성행했던 야만의 시대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물밑에서는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과거보다는 그 경계가 많이 희석되었다.
어떤 신을 믿느냐는 스스로 선택과 신앙에 따라 갈리는 추세였으니까.
당장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름이 아니었던 신을 섬기던 성직자인 갤런 포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일단,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으음, 그러고 보니 몸이 조금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하네요."
"기억나실지는 모르겠지만, 카일로스가 레이시스의 몸을 이용해 저와 한차례 격돌했습니다. 그 여파가 쌓여 있는 것이겠죠. 잠시 이쪽으로."
카를은 손을 뻗어 끌어낸 신성을 레이시스의 몸에 부여했다.
신성이라고 해서 옷에 묻은 핏자국이나 그런 흔적까지 지울 순 없었으나, 체내에 쌓인 피로와 이물질을 청소하는 것이야 손쉬운 일이었다.
"어? 몸이 가벼워졌는데요?"
"일단 신성이니 이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카일로스라는 존재가 어떤 성향의 신이었는지는 카를도 잘 알지 못했다.
동아리실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던 건 영웅과 적대한 반신이라는 이야기뿐.
그대로 레이시스의 전신을 훑으며 꼼꼼하게 치료해준 카를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다행이로군.'
혹여나 카일로스가 빙의했던 후유증이나 여파가 남아 있을지 걱정했다.
당장 심상의 세계에서도 천마와 빙백목이 나선 것을 가지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인과율의 운운을 하지 않았던가.
'인과율이라.'
카를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내친김에 신성으로 상처를 치료하자 전신에 난 흔적들이 아물며 깨끗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작 이따위 상처로 인과율 운운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대체 어떤 식으로 닥쳐온다는 것일까.
체내를 관조해 보아도 새로 응어리진 신성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대륙 곳곳에 봉인되어 있는 카일로스의 신성을 전부 흡수한다면.
반신 격의 자리를 노릴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럼 시간도 오래되었으니 챙길 것만 챙겨서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더는 있고 싶지 않아요. 여러모로 기분 나쁜 곳이었어요."
레이시스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찌푸린 얼굴로 재단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순한 유적인 줄 알았는데 설마 고대 전승에서나 나오는 반신이 존재할 줄이야.
"또 뭐가 나오진 않겠죠?"
"그러진 않을 것 같습니다."
카를의 말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레이시스는 검까지 뽑아 든 채 어둑어둑한 재단을 뒤지기 시작했다.
주위는 텅 빈 공간이었기에 제물을 바치는 재단을 제외하고는 조사할 곳이 없었다.
천천히 재단으로 접근해 곳곳을 살폈고, 신을 위해 바쳐진 작은 보석과 재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생한 값으로 챙겨 가는 것 치고는 많이 아쉽네요. 제 몸을 빼앗은 값이라도 좀 받고 싶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아, 그리고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카를은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시스를 찾느라 위쪽 성채 전부를 천마신공으로 휩쓸어 버렸다.
성채에 남은 재산을 비롯해 그 밖에 쌓인 보화까지 영향을 끼친바.
건질 수 있는 건 소수에 지나지 않을까.
"아.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레이시스는 카를이 말하고 싶은 걸 짐작했는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카일로스가 보여 줬거든요. 카를이 성채에서 날뛰고 있는 걸."
"...보셨습니까?"
"네."
레이시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또다시 부끄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을 위해서 값비싼 재화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유적을 뒤로한 채 날뛰는 카를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카를은....'
레이시스는 슬쩍 카를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그를 훔쳐보았다.
온몸이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어 지저분했지만, 왜인지 그 모습마저 야성미가 넘치는 듯했다.
"레이시스."
"...."
"레이시스?"
"...아, 네!"
집중해서 그 몸을 훑고 있던 레이시스는 뒤늦게 카를의 부름을 깨닫고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아직 정신에 무언가...."
"아니,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멍을 때렸어요.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레이시스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격렬하게 부정했다.
차마 카를의 몸을 살펴보느라 집중했다고는 말하지 못했기에 달아오른 얼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자신의 건재함을 피력했다.
"일단 이쪽 통로를 통해 위로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꽤 깊은 것 같던데 오래 걸리겠네요."
"괜찮으시다면 내려왔을 때처럼 단번에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아."
레이시스는 단번에 카를의 말을 이해했다.
그때는 유적 탐사 쪽에 시선이 쏠려 있었기에 괜찮았지만, 지금은 왜인지 아까보다 더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 잘 부탁해요."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카를은 손을 뻗어 레이시스를 품에 안고는 와이어로 단단히 고정한 뒤 가볍게 땅을 박찼다.
카를의 몸에 매달린 레이시스는 다시금 그 등 뒤를 꼭 붙잡으며 빠르게 멀어지는 지상을 바라보았다.
'유리아에게 미안한걸.'
아무래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말하지 못할 추억을 쌓은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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