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기말고사 (2)
사각사각.
조용한 강의실 가운데 글자를 써 내려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얼마간 여유가 남아 있던 시험 기간도 어느새 빠르게 지나갔고, 드디어 기말고사 첫날이 도래했다.
생도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각자 열심히 시험 문제를 푸는 중이었다.
"...."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올곧은 자세로 푸는 생도가 있는 반면, 어렴풋한 기억을 끌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거나 몸을 비틀며 발악하는 생도도 있었다.
레이시스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속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막힘 없이 펜을 휘두르며 시험지를 요리했다.
'생각보다 난이도가 있어.'
과연 바이에른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1학년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비가 없다니.
어설프게 공부한 생도들은 전부 박살 내 버리겠다는 듯 문제 하나하나에 날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카를은....'
그리 어렵진 않겠지.
레이시스는 슬쩍 시선을 옮겨 자신의 대각선 앞쪽에 앉아 있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부정 방지 시스템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음에도 막힘 없이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을 카를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나도 할 수 있어.'
공부는 빈틈없이 했다.
검으로는 카를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지만, 공부로는 그래도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삑.
어느새 시험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알림이 떠올랐다.
생도들의 펜 소리가 더욱 거칠고 급박해졌고, 여기저기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레이시스는 이미 모든 문제의 답안을 완벽하게 작성했고, 검토까지 마쳤다.
카를 역시 전부 끝낸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손을 멈추고 있었다.
삑!
"제국의 역사 시험을 종료하겠습니다. 생도 여러분은 책상 위에 시험지를 두고 퇴실해 주시길 바랍니다."
"...."
바이에른의 시험은 칼 같았다.
답안을 전부 작성하지 못한 생도들이 어떻게든 한 글자라도 더 작성하려 했지만, 모종의 힘이 시험지에 대한 간섭을 막아 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생도들이 할 수 있는 건 한탄과 탄식을 내뱉는 것뿐.
생도 대부분이 머리를 감싸 쥐며 시험장 밖을 빠져나왔다.
"...."
카를 일행도 한쪽에 모였다.
물론,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난이도에 답을 전부 채우지 못한 이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었다.
"죽겠다."
"첫 시험부터 이래 버리면."
막시밀리안과 에이미가 창문에 기대선 채 거의 영혼이 빠져나갈 듯한 모습을 보였다.
"카를, 시험 난이도는 어땠어? 난 진짜 받자마자 어지럽던데."
리엔의 물음에 카를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난이도가 높아진 건 확실해 보였습니다. 중간고사 때와는 비교할 수 없더군요."
"그렇지? 나 3문제 못 풀었는데 석차 많이 떨어지려나."
"...난, 5문제."
"난 6문제."
일단 문제를 다 풀어야 부분 점수라도 받을 텐데.
시간이 부족해 모든 문제를 풀어 보지도 못했다.
논리력과 사고력을 요구하는 문제가 많아 그곳에 상당한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진짜?"
"네. 이 정도 난이도라면 평균 점수가 상당히 떨어지겠죠. 오히려 그런 부분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잘 한 겁니다. 스터디를 통해 계속 공부했으니 말이죠."
"그렇지?"
"하긴, 우리가 어려우면 다들 어려울 테니까."
"그런데 첫 과목부터 이렇게 난이도가 높으면 어지럽긴 해. 다른 강의도 다 비슷한 수준으로 나온다는 소리 아니야."
카를을 제외한 생도들은 모두 푸념을 내뱉었다.
마법사인 포져스도 일단 전부 풀긴 풀었지만, 상당한 곳에서 부분 감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 임시 점수 떴다."
"제발, 제발...."
바이에른의 시험은 보통 시험이 끝난 직후 곧바로 채점에 들어갔다.
전통 깊은 시스템으로 이루어졌기에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은 지극히 적었다.
"카를."
다른 곳에 있던 레이시스와 유리아가 일행에 합류했다.
"점수는 어떻게 나왔어요?"
"지금 확인해 보려 했습니다."
레이시스의 물음에 카를은 아카이브를 켜서 자신의 점수를 확인했다.
[제국의 역사 I]
1학기 기말고사 105.7/100 (1)
총평: 역사 해석에 관해 신선하며 충격적인 관점이 돋보이는 해설이었습니다. 부디 이 점에 관해 기말고사가 끝난 후나, 방학 시즌에 제 연구실로 와서 한 번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점수창을 꺼 버렸다.
워낙 자신을 좋아하는 교수님인지라 어떻게든 자신의 연구실로 꿰어 내려 그랬다.
심지어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교를 하지 않겠냐며 강력 권유해 오시기도 했으니까.
평범한 생도였다면 큰 영광이라며 기꺼이 수락했겠지만, 카를은 조교 자리에 시간을 빼앗길 여유가 없었다.
"1등입니다."
"아, 혹시 점수가."
"105.7점이군요."
"큭."
레이시스는 주먹을 움켜쥐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나도 100점 넘었는데 5등이네. 이게 말이 돼? 레이시스, 너 몇 점인데?"
"104.1점이요. 3등이네요...."
"그럼 2등은."
"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볕에 물망초 빛깔의 머리카락이 반짝이며 빛이 났다.
네리안은 평소와 같이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카이브를 확인하며 말했다.
"105.4점. 0.3점 차이인가."
0.3점.
아주 간소한 차이로 2등을 차지했음에도 네리안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카를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가는 호선이 그려져 있을 정도니까.
"...."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시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슬쩍 걸음을 내디뎌 카를과 네리안 사이에 끼어들었다.
"2등이시네요. 축하드려요."
"레이시스, 3등인가?"
"네. 아쉽게도 이 과목에서는 제가 졌네요. 다른 강의에서는 절대로 지지 않을 테니까요."
"재밌군."
네리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카를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뒤쪽에서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막시밀리안은 네리안이 떠나자 겨우 숨을 내쉬었다.
"같은 생도여도 네리안 앞에서만 서면 숨 쉬기도 어려워."
"그만큼 분위기가 있으니까."
"맞아, 누구와는 달리."
"...그, 누구가 누굴까?"
막시밀리안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자 에이미는 시치미를 떼며 레이시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레이시스도 축하해. 이번에는 수석을 노려보는 거야?"
"네. 쉽지는 않겠지만요. 일단 이론 수석은 카를이 가져갈 테니까 실기에서 대적해야 할 텐데...."
"쉽지 않겠지."
팔짱을 낀 게일이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안은 문무 양면으로 완벽한 생도였다.
1학년 수준은 아득히 뛰어넘었기에 그보다 잘 하기보다는, 실수를 기대하는 쪽이 훨씬 가능성이 클 터였다.
"하긴, 이론도 둘 다 최상위권이니까 근소한 차이일 테고 실습에서 판가름 나겠네."
유리아가 손을 들어 강의를 손에 꼽았다.
"기본 행정이랑, 국제 정세는 레이시스, 네 점수가 네리안보다 높았지?"
"네, 하지만 실전의 이해 쪽에서는 매번 고꾸라져서."
레이시스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중간고사 때도 그렇고 네리안 쪽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점수를 얻은 탓에 격차가 많이 벌어졌다.
"거기에 네리안만이 아니라 다른 생도들도 있다 보니."
네리안의 라이벌은 루이스.
그리고 그 외에도 최상위권을 노리는 무서운 생도들까지.
네리안과 싸우기 위해서는 그들 모두를 꺾고 정점에 오를 필요가 있었다.
"특히 이번 실전의 이해는 사흘간 이루어진다고 했지."
"점령전이라고 했나? 또 귀찮은 시험 방식이네."
막시밀리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도들끼리 무작으로 팀을 이루어 상대 생도를 쓰러뜨리거나 진영을 공략하는 방식의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미 학기 중에 여러번 실습을 했지만, 사흘이나 각을 잡고 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다들 우려가 컸다.
"그래도, 에렌달 숲에서 했던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
카를의 말에 다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바이에른에서 벌어지는 시험과 달리 에렌달 숲 쪽은 진짜로 생명의 위협이 있었다.
실제로 마력 폭주에 휘말려 죽어 나간 생도도 10명이 넘었으니 말이다.
입학식 이후 500으로 시작한 생도 숫자가 실습으로 인한 사망, 혹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줄어들어 벌써 470명대에 육박했다.
"뭐, 어쨌든 다들 분발하자고. 누구와 팀이 될지 모르니까."
* * *
타다다닥.
바이에른에서 한창 기말고사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수도 폴포아르델의 뒷골목에서는 로브를 뒤집어 쓴 인영이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었다.
"잡아!"
"저기 있다!"
뒤이어 십수 명의 인원이 그 뒤를 맹렬하게 추격하며 힘껏 땅을 박찼다.
툭, 투둑.
어두워진 하늘 가운데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한차.
젖어 버린 옷이 무거워지며 달려 나가던 이들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도 곧 막다른 곳에 가로막혔으니.
로브인은 자리에 멈춰선 채 자신의 뒤를 쫓아오던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솎아냈어도 미꾸라지가 남아 있었을 줄이야."
험상궂은 남성이 천천히 검을 뽑아들며 로브인에게 다가왔다.
"어디에서 보냈지? 그것만 순순히 말해 준다면 고통 없이 죽여 주마."
그들은 라한의 조직원이었다.
라한은 녹스의 도움으로 서부 3상업 지구를 장악하며 외부에 달라붙은 끄나풀과 배신자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내실을 다지는 데 외부의 눈이 붙어 있으면 이쪽의 움직임이 들켜 버리니 말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끄나풀을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배 밖에 간이 넘치는지 아직 대놓고 활동하던 녀석이 남아 있었다.
"녹스는...."
로브인이 입을 열었다.
예상과 달리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에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녹스는 어떤 녀석들이지?"
"허."
남자는 손에 쥔 검의 검등으로 목을 벅벅 긁었다.
이 미친 녀석을 보았나.
자신의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역으로 질문을 내뱉다니.
"녹스를 파려 했나. 내가 또 녹스는 잘 알고 있지."
남자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섬뜩한 빛을 내비치는 검을 들어 올렸다.
사실 말단 조직원에 불과한 그가 녹스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겠는가.
자신들의 보스가 녹스와 깊은 친분을 지닌 관계라 조직을 장악하고 서부 3상업지구를 점령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밖에는 몰랐다.
그럼에도 눈앞의 여성을 놀리고자 농을 내뱉은 순간.
"그래? 그러면 너 하나로 충분하겠군."
"뭐?"
서걱.
피가 튀었다.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느꼈다.
주춤하며 목을 매만졌지만, 자신의 목은 멀쩡했다.
헛것이라도 봤나 싶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등 뒤에서 무언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너, 너희...!"
자신을 따라온 수하들이 모두 목이 잘려 나간 채 바닥에 쓰러진 것이었다.
'빌어먹을.'
상대를 잘못 골랐다.
너무나도 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남자가 몸을 돌려 도망칠 찰나.
탁.
손을 뻗어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챈 여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녹스에 관해 아는 걸 모조리 털어놓도록. 특히, 그 수장이 누구인지."
151화 기말고사 (3)
실전의 이해.
담당 교관인 프라하 교관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허공에 띄워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현재 시험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말고사의 실습 영상이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중으로, 어떤 생도들의 팀이 이길지 흥미가 넘쳤다.
"프라한 교관은 어떤 팀이 이길 것 같습니까?"
"음."
다른 교관의 질문에 그는 턱을 매만지며 유심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팀의 전력은 지금까지 측정한 생도의 성적에 따라 최대한 밸런스 있게 구성했습니다. 그러니 전략을 잘 짠 팀이 이기지 않을까 싶군요."
실전의 이해 시험은 워낙 인원이 많은 만큼 인원을 2번으로 나눠 진행되었다.
현재 시험장에 투입된 인원은 220명으로, 각각 10명씩 팀을 이뤄 22개의 팀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시험의 내용은 사전에 공지했던 대로 점령전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22개의 팀은 각각 진영이 주어졌고, 해당 진영을 지키며 상대 팀 생도를 쓰러뜨리거나 진영의 상징을 빼앗아 점령하는 것으로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뭐, 우승이 유력한 팀이야...."
프라한 교관은 슬쩍 말을 꺼내며 시선을 돌렸다.
우승이 유력한 팀은 당연히 최상위 생도들이 포진한 팀이었다.
네리안, 레이시스, 루이스, 유리아 등등....
생도 사이에서도 수준 차이가 크게 벌어진 만큼, 한 명의 구심점만 있다면 손쉽게 다른 생도의 팀을 격파할 수 있었다.
-크헉!
실제로 시험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네리안이 이끄는 파티가 엄청난 기세로 상대 생도들을 쓰러뜨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아예 점수를 쓸어 담을 기세로 나아갔기에, 진즉 낌새를 눈치챈 다른 팀들은 그들과 멀찍이 거리를 벌려 피하는 실정이었다.
"뭐, 한 번 당한다고 해도 만회할 기회는 충분합니다. 그런 시스템이니."
리타이어된 생도는 중앙의 시험관으로 소환된다.
원한다면 다시 투입되어 못다 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사흘간 계속되는 시험이었기에 이론상 한 번도 리타이어되지 않고 진행하기는 어려웠다.
타다다닷!
시험장의 외각.
카를은 수풀에 몸을 숨기며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곧 저 앞쪽의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 후,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네리안 파티가 통과했습니다.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는 것 같으니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적겠군요."
그 말에 뒤쪽에서 납작 엎드려 있던 다른 생도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들 머리에 붙은 풀과 이파리를 떼어 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 초부터 네리안 파티에 쓸려나가면 상위권을 차지하기 어려우니까. 팀은 공평하게 짠다더니 뭐가 공평해."
"맞아요. 저기는 재앙이에요, 진짜로."
카를은 쓰게 웃으며 네리안이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네리안 파티는 극히 공격적인 전술을 추구했다.
네리안을 중심으로 나름 준수한 실력을 지닌 육체파 생도들이 뭉쳐 정면에서 이기기는 버거운 파티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론 성적까지 포함해서 기괴한 밸런스가 되었어."
"그나마 이쪽이 가장 균형 잡힌 파티라고 할 수 있겠군요."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파티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22개의 팀이 섞인 만큼 각 팀마다 최상위권 생도가 한 명씩 포함되었다.
카를의 팀에는 마법사인 유리아가 포진했고, 그 뒤를 이어 상위권 성적인 카를, 나머지는 중하위권을 포함해 총 10명이 되었다.
유리아를 제외하고는 다른 클래스였기에 카를도 말을 섞어 본 적이 없던 이들이었다.
"전략은 어떻게 해야 하죠?"
"흠."
누군가의 질문에 유리아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말이 점령전이지 사실 섬멸전이나 다름없어. 점령하는 것도 공간이 아니라 이 상징이니까."
앞으로 뻗어진 손에 핑크색 구체가 두둥실 떠올랐다.
이 구체가 팀의 핵심으로 누군가 이것을 탈취해 일정 시간을 보유한다면 그 팀의 진영을 점령한 것이 되었다.
점수를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상대 팀의 상징을 빼앗아 점령하는 것이니, 네리안 팀이 눈에 불을 켜고 닥치는 대로 싸움을 걸고 다니는 이유가 바로 그러했다.
"나도 싸움에 자신이 없진 않거든? 네리안이나 루이스, 그리고 레이시스 파티만 피하면 어떻게 될 것 같으니 한 번 해보자."
"그럼 진영을 정해야겠군요."
카를은 일행을 보며 전력을 정리했다.
"전위, 중위, 후위, 각각 셋씩 하는 것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후위의 역할은 상징을 지닌 유리아 양의 호위만 담당해 주십시오. 리타이어되어도 중앙 시험관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 점수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유리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셋씩이면 아홉인데, 한 명은?"
"저는 척후를 맡겠습니다. 동시에 배후에서 기습해 적을 교란하거나 시선을 끄는 쪽으로 움직이겠습니다."
"흠."
카를의 설명에 생도들은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같은 숫자끼리 이루어진 파티였으니 한 명이 빠진 공백을 채울 수 있을까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유리아나 카를의 순위가 훨씬 더 높았으니 잠자코 따르자는 생각이었다.
'...라는 생각이 뻔하네.'
유리아는 속으로 콧김을 내뿜으며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합을 맞춰 보는 것이기도 했고, 아직 이들의 수준을 잘 몰라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어려웠다.
즉, 이 파티에서 자신과 합을 맞출 수 있는 존재는 카를이 유일했다.
'운이 좋았어.'
유리아는 남몰래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마법사인 그녀의 특성상 전위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다른 생도와 함께 팀을 이뤘다면 여러모로 애매했겠으나, 카를과 같은 팀이 된 이상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뭘 하지 않아도 그가 전부 알아서 해 줄 테니 말이다.
자신이 할 건 뒤에서 마법을 딸깍 사용하는 것으로 카를이 벌어 준 틈을 타 상대를 요격해 점수를 빨아 오면 되는 일이었다.
"자, 그럼 움직입시다. 제가 연락을 보낼 테니 다들 주의해 주세요."
카를은 가볍게 땅을 박차 나무 위에 올라탔다.
그 표홀한 움직임에 고개를 끄덕이던 생도들은 모두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와, 몸놀림이 진짜 가볍네."
"사냥꾼의 아들인가?"
"바보야. 귀족한테 무슨. 라이프치히 가문의 셋째잖아. 변경 쪽의 영지니 이런 숲은 익숙하겠지."
그들이 있는 곳은 초목이 우거진 깊은 숲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시험 기간 내내 길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곳으로, 카를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길을 찾는 것도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유리아 양. 저희가 반드시 지켜 드릴게요."
"맞습니다. 위험하면 무조건 제 등 뒤에 와 주십시오."
그 사이 함께 후위에 서게 된 생도들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평소 대화할 일이 거의 없으니 이번 기회에 환심을 사 두려는 것이었다.
"...다들, 고마워."
유리아는 살포시 웃으며 감사를 전하면서도 꺼지라고 말하고 싶은 충돌을 억눌렀다.
'나도 참 성격 많이 죽었다.'
이런 가식적인 말들을 격렬하게 싫어하는 유리아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시험에서 이런 태도라니.
진지하게 할 생각이 있는 걸까 이 녀석들은.
치직.
-전방에 파티를 발견했습니다.
"가자."
유리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고 벌벌 떨며 숨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점수를 따고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 역시 상대 생도의 팀을 쓰러뜨려야 했다.
사락.
곧 카를이 지시한 곳까지 나아온 그들은 조심스럽게 숲길을 지나고 있는 다른 생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잘 골라 왔네.'
흘깃 생도들의 수준을 파악한 유리아는 아카이브의 통신을 통해 자신의 파티에게 말했다.
"선공은 내가 시작한다. 그 즉시 바로 습격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곧 수결을 엮으며 마법을 발현한 유리아는 망설임 없이 다른 파티 위에 샛노란 낙뢰를 꽂아 버렸다.
우르릉─!
땅이 뒤틀리고 파편이 튈 정도로 거센 여파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어차피 이 일대에 일루전 필드가 펼쳐져 있기에 죽거나 다칠 염려는 없었다.
그러니 유리아도 마음 놓고 공격을 시전하는 것이었고.
"크악!"
"꺅!"
"...컥!"
천천히 전방을 경계하며 나아오던 전위가 그 공격에 휘말려 땅을 뒹굴었다.
타격이 큰지 몸을 가누지 못했고, 그 사이를 노린 생도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아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다들 그래도 실전 경험은 몇 번 있던 터라 손속에 망설임은 없었다.
상대 생도가 공포에 떠는 눈동자로 바라봐 왔음에도 물러나지 않은 채 힘껏 검을 휘둘러 그 목을 베어 냈다.
리타이어되어 버린 생도는 그대로 땅에 쓰러져 중앙의 시험관으로 전송되었다.
"...후."
이윽고 상대 팀을 전부 쓰러뜨린 그들은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온전한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를은 생도들이 있던 자리를 뒤적거리더니, 바닥에서 새빨간 색의 구슬 하나를 쥐어 들었다.
"이것이군요."
"상징을 들고 있는 생도가 쥐고 있어야 점령이 되나 봐."
"아, 드리겠...."
"됐어, 카를 네가 가지고 있어."
휙.
유리아는 자신이 쥐고 있던 핑크빛 상징을 카를에게로 던졌다.
카를이 그것을 받자, 새빨간 빛을 내고 있던 상징이 자신들의 것과 같은 핑크색으로 물들었다.
"...과연, 그런 식으로 되는 거구나."
"제가 가지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네가 지니고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야. 다른 파티도 내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공격해 올 테고. 유사시에 혼자 몸을 내뺄 수 있잖아?"
"흠."
카를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파티가 전멸한다면 함께 리타이어되어서 같이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이쪽에 거는 기대가 큰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죠."
고개를 끄덕인 카를은 두 개의 상징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시 주변을 정찰하러 가려는 찰나....
쉭!
몇 명의 생도가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며 그들을 포위했다.
"...이런!"
뒤늦게 적습을 깨달은 생도들이 유리아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서며 진영을 구축했다.
"...."
유리아도 황급히 스태프를 들었지만, 곧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레이시스? 막시밀리안? 둘이 같은 팀이 되었어?"
"어? 유리아? 거기에, ...카를까지."
"카를?"
선두에서 사냥감을 노려오던 레이시스와 막시밀리안의 움직임이 굳었다.
그들과 같은 파티의 다른 생도들은 질 좋은 먹잇감을 눈앞에 둔 듯 군침을 흘리고 있었지만, 카를의 실력을 알고 있는 둘은 입술을 깨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죠?'
'나라고 뚜렷한 방법이 있으리라고는....'
포위했다고 생각했는데 함정에 걸린 것이었나?
레이시스는 등골에 흐르는 땀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진정해요, 카를. 그쪽과는 싸우고 싶지 않아요. 순순히 물러갈 테니 보내 주시지 않겠어요?"
"흠."
카를은 손에 쥔 검을 바라보았다.
굳이 실력을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제자가 직접 찾아와 모습을 드러낸 이상 조금은 보여 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기에 고개를 들며 싱긋 웃었다.
"레이시스가 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하겠습니다."
152화 기말고사 (4)
"...."
레이시스는 눈동자를 굴렸다.
호기롭게 이쪽 파티를 습격한 것치고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조금 더 정보를 파악하고 습격할 걸 그랬어.'
현재 이 점령전의 폭풍의 눈인 네리안이 멀어진 상황에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상대 파티의 후미를 점한 뒤 그대로 기습할 생각이었지만, 카를의 얼굴을 본 순간 모든 계획이 엉켜 버렸다.
"레이시스 양?"
다른 생도들이 주춤하며 멈춰 서 있는 레이시스를 바라보며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처음 계획과 달리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탓!
레이시스는 카를이 움직이기 전 먼저 땅을 박차 선수를 치는 선택을 했다.
아직 카를이 생도들 앞에서 실력을 숨기고 있던 터라 그 부분에 희망을 걸은 것이었다.
캉!
카를은 기꺼이 그녀의 기세에 어울려 주며 수풀 뒤로 물러났다.
레이시스의 판단으로는 상태 파티 중 가장 강한 카를을 묶어 두는 것으로 다른 생도들에게 파티 공략을 부탁한 것이었지만....
"...레이시스 양?"
남겨진 생도들은 주춤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쪽 파티에는 레이시스와 마찬가지로 최상위 권에 속한 유리아가 남아 있었으니까.
"뭐, 레이시스의 판단이 잘못된 건 아니야. 그저 너희들의 운이 나쁘다고 생각해."
우르릉─!
뇌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다수의 전투에서 마법사의 유무는 절대적인 전력을 판가름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물론 레이시스의 파티에도 마법사가 있긴 했지만, 현재 1학년 중 톱을 달리는 그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크악!"
샛노란 벽력이 지상에 내리꽂힐 때마다 생도들이 휩쓸리며 전부 무력화되었다.
"막아! 절대로 유리아 양에게 도달하게 둬서는 안 돼!"
"카를 군이 레이시스 양을 묶어 둘 때까지 버텨!"
유리아 파티는 원래 구상했던 형태와 달리 오로지 유리아를 지키는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확실하게 상대 생도를 끝장낼 수 있는 공격력을 지닌 건 유리아가 유일했으니.
"빌어, 먹을...."
그렇게 약 5분 후.
모든 생도가 리타이어하며 유리아 파티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후우."
적지 않은 마나를 소모한 유리아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팔을 내렸다.
'이것도 꽤 지치네.'
일루전 필드라고 해도 정말 아무런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검에 베이거나 찔리는 건 몰라도 마법 쪽은 정신에 확실한 대미지를 주었다.
정도 이상의 대미지를 주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마법사들은 일정 수위 이상의 마법을 금지당했다.
애초에 실력이 뒤떨어지는 마법사라면 모를까, 유리아에게는 억지로 수준을 낮추는 것이 더 심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상징은 없네요."
"레이시스가 가지고 있겠지."
"카를 군이 걱정이군요."
생도들이 고개를 돌려 레이시스와 카를이 사라진 숲을 바라보았다.
이쪽 파티를 위해 적장을 끌고 시간을 벌러 유인하다니.
서로 간에 실력 차를 생각하면 진즉 패배해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은데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것이리라.
"...도우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됐어. 레이시스가 오면 우리도 귀찮아져. 차라리 빠르게 리타이어시키고 빠르게 합류하는 쪽이 더 편해."
"카를 군이 상징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앗."
유리아는 뒤늦게 싸움이 벌어지기 전 진영의 상징을 카를에게 넘겼던 걸 떠올렸다.
"빨리, 빨리 카를을 찾아...!!"
* * *
캉! 캉!
그 무렵 카를은 숲 안쪽에서 레이시스와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쉴 새 없이 틈을 쪼개며 떨어져 내리는 칼날을 쳐내며 힘껏 땅을 박찼고, 군데군데 보이는 허점에 검을 찔러 넣으며 백중지세를 이뤘다.
프라한 교관이 그 모습을 목도했다면 생도 수준이 아니라며 칭찬했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흡!"
레이시스의 머리카락을 닮은 오러가 치솟으며 수풀의 나무를 베어 내는 것으로 길목을 막았다.
뒤이어 닥쳐온 오러를 정면에서 받아 낸 카를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오러의 발출에 관해서 제가 뭐라고 가르쳤습니까?"
"...단기 결전일 때만. 위력은 강하지만, 소모량이 많기에 남발하기에는 좋지 않다고."
"굳이 지금 오러를 사용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카를은 검을 날카롭게 세웠다.
연무장에서 비무를 하는 것보다 이런 환경에서 싸우는 것이 실전 감각을 기르기에는 더욱 좋았다.
더군다나 이쪽은 시험장 외곽이라 줄곧 느껴지던 외부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
그러니 카를로서도 적당히 자신의 실력을 낼 수 있었다.
"...레이시스의 파티는 전멸한 것 같은데."
"상관없어요. 상징은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
"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늦게 떠올렸다는 듯 품에서 핑크색 상징을 꺼내며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평가를 통과하면 이 상징을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되나요?"
"파티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세간의 시선으로 레이시스와 제가 맞붙는다면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까요. 빼앗겨도 뭐라고 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심지어 레이시스가 작정하고 자신을 노려 오지 않았는가.
보통은 파티 중 가장 강하며 순위가 높은 유리아가 상징을 지니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석일 테지만.
그 사실을 꿰뚫어 본 레이시스 쪽이 고평가되지 않을까.
"좋아요."
절그럭.
레이시스는 한층 더 진중해진 표정을 지으며 검을 다잡았다.
수석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전멸한 자신의 파티원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평가를 통과할 생각이었다.
쉬악!
크게 발을 내디디고 검 끝이 반원을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창궁무애검법이 본격적으로 발현되었다.
'창궁무애검법은 공간을 장악하는 검법이다.'
카를은 자신의 주위를 쪼개며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레이시스의 검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의 각 문파와 세가의 무공에는 특징이 있었다.
화산은 변화를, 무당은 균형을, 남궁은 공간을 추구했다.
창궁무애검법 말고도 유명한 섬뢰검법이나 제왕검형도 마찬가지였다.
섬뢰는 이름처럼 벼락과도 같은 검으로 공간을 쪼개는 것이고, 가주 직계로만 전승되는 제왕검형은 말 그대로 제왕이 되어 공간을 지배했다.
창궁무애검법은 굳이 따진다면 섬뢰검법과 제왕검형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날카로움과 속도를 살리면서도 부드럽고 유려한 궤적으로 여성이 사용하기에도 적합해 남궁세가 출신의 여고수들 대다수가 즐겨 쓰는 검식이기도 했고.
캉! 캉!
창궁무애검법에 맞선다면 그 너머에 있는 적은 점차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이 좁아지는 듯한 착각을 받게 되었다.
레이시스가 검을 휘두르는 영역은 점차 넓어지는데 정작 이쪽은 운신할 자리도 마땅치 않아 연신 주춤하며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파훼하는 방법은 간단해.'
영역은 곧 가상의 경계.
그 선을 망가뜨린다면 인지에 혼란이 오게 되었다.
툭.
카를은 사문(死門)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레이시스는 눈을 빛내며 그 틈을 노렸고, 질풍처럼 다가와 카를에게 검을 내질렀다.
퍽!
하지만 검에 찔린 카를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니겠나.
그것이 비음흑살공의 귀영신보라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카를이 알려 준 허초라는 개념의 동작임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노림수는...!'
쉬악!
레이시스는 곧바로 몸을 회전하며 자신의 뒤를 쓸어버리듯 검을 휘둘렀다.
정면에서 시선을 교란 후 후미를 점하는 건 카를이 즐겨 쓰는 기습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검에 걸리는 감촉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래?'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위기감을 느낀 레이시스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침과 동시에 프라한 교관의 오의인 아라크네를 전개했다.
넓디넓은 하늘 아래 거미줄이 펼쳐졌다.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있는 본인을 지키기 위한 거미줄이.
뒤? 없다.
아래? 없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위!!"
레이시스는 확신을 담아 검 끝을 하늘로 세웠다.
창궁무애검법의 절초를 펼치며 맹렬한 기세로 오러를 흩뿌렸고, 하늘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카를은 옅은 미소를 토해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정답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날 꺾기엔 모자라다.
마치 그렇게 말하듯 카를의 검 위에 푸르스름한 검기가 치솟았다.
마치 오러는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듯 하늘로 치솟은 레이시스의 오러를 전부 박살 내버리고는 지상을 향해 쇄도했다.
"큭!"
레이시스는 황급히 땅을 박차며 쇄도하는 검기들을 피해 냈다.
하지만 전부 피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카를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을 터.
근처에서 터진 폭발에 휘말려 허공으로 튕겨 날아갔다.
툭.
낙법조차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레이시스는 충격을 각오하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땅에 닿기 직전 누군가 자신의 몸을 품에 안으며 멈춰 세워 주었다.
"...카를."
"합격입니다. 창궁무애검법의 성취가 뛰어나군요."
카를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재능은 차원이 달라도 통하는 것일까.
남궁세가의 심법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가르쳐 준 지 아직 1달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레이시스의 성장은 엄청난 속도를 거듭했다.
설마 마지막 순간에 2성을 돌파해 3성에 다다를 줄은.
"창궁무애검법을 전개하는 도중에 아라크네를 사용한 겁니까?"
"네. 그렇지 않으면 카를의 기척을 찾아내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즉흥적인 판단이었지만, 좋았죠?"
"좋았습니다."
카를은 순순히 인정해 주었다.
아라크네는 프라한 교관의 오의.
그것 하나를 펼치는 데도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할 터인데 설마 창궁무애검법과 함께 펼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아, 죄송해요. 일어날...."
뒤늦게 카를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자각한 레이시스는 비틀거리며 그곳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카를은 그녀의 어깨를 꾹 누르며 움직임을 멈췄다.
"회복한 뒤에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조절을 잘못한 탓에 리타이어 직전이라."
"...아."
레이시스는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꽤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섣불리 움직였다면 그대로 시스템에 의해 리타이어 판정을 받았을 터.
"그리고."
카를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레이시스의 손에 올린 채 조심스럽게 쥐여 주었다.
"될 수 있으면 다른 파티에게 빼앗기지 말아 주십시오. 다시 찾으러 가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잠깐만요, 찾으러 가겠다고요?"
"...."
카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상징을 빼앗긴 상황에서 자신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면 생도들이나 감독관에게 의심을 살 터.
'평가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면 벌칙으로 레이시스의 상징을 빼앗았겠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카를은 쥐고 있던 검을 역수로 쥐어 자신에게 찌르는 것으로 대미지를 주었다.
삐빅.
곧 체력이 줄어들었고 몸이 무거워질 정도의 정신적인 피로가 쌓였다.
"수석, 응원하겠습니다."
[카를로스 생도 리타이어]
아카이브에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눈앞이 어둠으로 물들었고.
"일어나렴. 중앙 시험관이란다."
미리 고지받았던 대로 중앙 시험관에서 정신을 차렸다.
"...."
카를은 가볍게 고개를 떨쳤다.
의식을 잃어 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일까.
아니, 몸이 무거워지고 잠에 빠져드는 감각은 이미 한차례 겪어 본 죽음과 정말로 흡사했다.
'이 시스템을 만든 것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 사람 역시 죽음을 경험해 본 것이 아닐까?
153화 기말고사 (5)
사흘간 이어진 「실전의 이해」 강의의 기말고사인 점령전이 모두 끝났다.
1등은 단 한 명의 리타이어도 내지 않고 다른 파티를 박살 내고 다닌 네리안의 파티.
확고한 만점을 받으며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했다.
2등은 아쉽게 한 단계 차이나는 점수로 인해 격차가 벌려진 레이시스 팀이었다.
카를로부터 받은 상징을 시작으로 네리안 파티를 피해 닥치는 대로 생도들을 학살하고 다녔다.
네리안에 이어 2번째로 생도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을 정도로 잔학무도했으니.
"아, 겨우 10위권 안에 들었네. 다행이야."
유리아는 파티의 성적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시스에게 상징을 빼앗긴 이후 그들 역시 분투했다.
특히 카를이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려는 듯 적극적으로 나섰고, 사흘간의 강행군 끝에 겨우 8위를 차지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레이시스에게 상징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괜찮아.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도 카를 네 덕분에 점수를 많이 올렸잖아."
"맞아,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
"맞아요."
유리아는 물론 다른 생도들은 카를의 탓을 하지 않았다.
네리안에 이어 차석을 차지한 레이시스를 단독으로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 자리에 누가 있다고 할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신 카를은 실책을 벌충하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실제로 막대한 실적을 쌓았다.
다들 10위권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싱글벙글한 상태였다.
유리아를 제외하고서는.
'레이시스에게 정말로 무언가 있는 건가?'
유리아는 다른 생도들과 대화하는 카를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알포람의 왕녀, 공주 속성으로 재능이 넘치는 대기만성형 캐릭터이긴 해도 그 이외에는 딱히 주목할 만한 점이 없을 텐데.
자신은 그저 레이시스라는 사람이 좋아서 곁에 있을 뿐, 딱히 그녀를 이용해 먹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었다.
'...아니면, 설마 최애캐인가?'
이쪽이 더 현실성 있는 이유이지 않을까.
게임을 좋아해서 플레이하다 보면 어느새 빠져드는 캐릭터가 하나둘씩 있기 마련이었다.
더욱이 게임이 현실이 되어 버린 지금은 좋아하던 캐릭터를 만나 무언가라도 하나 더 주고 싶은 마음이 크겠지.
'그래, 그럴 수 있겠어.'
레이시스가 카를의 최애캐라면 그간 보인 행보도 납득이 갔다.
기이할 정도로 보이는 편애, 검술도 알려 주고 여러 편의를 봐주거나 다소 어리광으로 보이는 행동도 받아 주었다.
사심이 없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런 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유리아?"
"...어? 어. 왜 그래?"
"절 빤히 보고 계셔서 그랬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움찔하며 말을 돌리던 유리아는 곧바로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이번 수석은 누가 될지 궁금해서 말이야. 레이시스도 노력을 많이 했잖아? 이론 쪽은, 카를 네가 도와주기도 했고."
"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시스는 반드시 수석을 따내겠다는 집념으로 시험 기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
오죽했으면 창궁무애검법의 수련도 잠시간 멈췄을 정도로 말이다.
'네리안을 제치고 딱 한 번만이라도 수석을 해 보는 것이 목표라고 했지.'
학년이 더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최상위권에서도 격차가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레이시스는 객관화가 잘 되어 있기에 자신의 재능이 네리안에 비해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다.
노력으로는 절대 커버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간극이 서로 간에 존재했으니까.
그래서 차이가 가장 좁은 1학년 때 이를 악물고 수석에 도전해 보는 것이었다.
"그럼 오늘부터 이틀간 휴일이네. 카를, 넌 뭐해?"
실전의 이해 시험이 사흘간 진행된 만큼, 생도들에게 일시적으로 휴일이 주어졌다.
그 사이 혹시 또 레이시스와 함께 일정이라도 있는 걸까.
슬쩍 떠보기 위해 질문하자 카를은 어깨 스트레칭을 하며 대답했다.
"일정이 있습니다."
"레이시스랑?"
"레이시스?"
카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레이시스의 이름이 왜 나오는가.
"레이시스와는 나눈 대화가 없습니다. 영지 쪽에서 운영하는 상단 쪽의 일이 좀 있어서 그곳에 갈 것 같습니다."
"아, 아하...."
그러고 보니 카를은 라이프치히 가문의 소속이었다.
자신과 같은 플레이어라는 인식이 있어서 그런지 가문이나 귀족이라는 것에 살짝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시험 기간인데 고생이 많네. 수고해."
"유리아도 수고했습니다."
카를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신 대신해서 생도들을 이끌고 뭉치느라 상당한 심력을 소모했을 것이다.
마탑의 후계자니, 잿빛 수선화이니 해도 고작해야 20살의 풋내기였으니까.
그녀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겠지.
"그러면, 이만."
카를은 생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한 후, 기숙사로 되돌아갔다.
사흘간의 시험으로 인한 여파를 씻어 내리고 다시 말끔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뒤 바이에른을 나섰다.
"...."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와중 그는 창가에 기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사흘간의 점령전은 과거 중원에서 있었던 살수의 훈련법을 떠올리게 했다.
'다만, 우리 쪽이 더 지독했지.'
바이에른처럼 일루전 필드도 없었고, 식량도 주지 않았으며, 리타이어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보급되는 건 비수 한 자루와 하루에 두 번 정오와 자정에 공급되는 아주 적은 식량뿐.
시험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할 정도로 혹독한 환경이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더라?
'기억에도 없군.'
한 달간 늪지대와 진흙탕을 기어다니며 악착같이 버틴 것밖에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덜컹.
마차가 멈추고 회상이 끝났다.
밖으로 내려선 카를은 폐부를 훑는 서늘한 공기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적습이 있을까 사흘간 한숨도 자지 않았기에 정신이 살짝 피로했으나, 이 정도 무게감은 오히려 감각을 더 날카롭게 해 주었다.
저벅.
약속된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새로이 설치된 녹스의 거점이 나타났다.
물류 창고로 위장한 이곳은 카를을 위해 만든 장소이자, 수도 양지를 향해 뻗어 나가기 위한 중심지였다.
[메데이라 상회]
녹스와 연결되어 카를이 운영하는 상단의 주체는 데메라 상단이었다.
메데이라 상회는 타국에서 제국의 진출을 위해 수도에 입성했다는 설정으로, 카를의 새로운 신분을 위해 만들어 낸 곳이었다.
물론 상회 역할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녹스의 유통 경로를 통해 해외에서 값비싸게 팔리는 장식품이나 희귀 물품들을 안전하게 가져와 웃돈을 주고 수도에 풀어 놓았다.
비싼 건 비쌀수록 돈이 되었고, 제국의 수도인 폴포아르델에는 돈이 썩어 나는 부자가 수도 없이 많았다.
카를은 그들의 요구와 수요를 맞춰주며 돈을 갈퀴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끼익.
창고 앞쪽으로 들어가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초도 무엇도 없었지만, 곳곳에 실력이 뛰어난 녹스의 조직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녹스의 마스터인 카를이 방문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마스터."
최상층, 5층 집무실에 들어가자 그를 맞아 준 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퀸, 밖에서 보니 얼굴이 더 좋아 보이는군."
"어머."
바이에른의 시험 기간 때문에 카를은 한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보던 차 갑작스러운 칭찬에 퀸은 미소를 지어왔다.
"말씀하신 대로 휴식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답니다."
"길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이틀 운영할 것이 아니니까."
카를은 녹스가 일정 궤도에 오른 이후부터 항상 퀸에게 휴식을 강조했다.
조직 운영의 초반에는 소수의 인력에게 업무가 과중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틀도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고 판단 하나하나가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녹스는 라이프치히 및 인근 지방의 음지를 모두 장악했고, 수도에 진출해 서부 3상업 지구를 집어삼키는 성과를 이뤄냈다.
당초 바이에른의 입학 당시 계획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성과였으니.
카를이 직접 개입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간 퀸을 비롯해 녹스의 간부와 조직원들이 열심히 준비한 덕도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 두라고 하도록. 곧 세력 확장을 다시 시작하면 잠잘 시간도 부족해질 테니까."
라한을 통해 서부 3상업 지구를 장악한 뒤 오랜만에 얻는 휴식이었다.
이제 이 영역에서는 자신들에게 배짱을 부려 올 이들은 없기에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참, 신입들은 어떻지?"
"좋습니다. 엑스가 잘해 주고 있어요. 이전 기수보다 평균적으로 뛰어난 것 같아요."
"다들 노력해야겠군."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철저한 실력제로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간부진 쪽은 크게 바뀌는 것이 없었지만, 그 아래 구도는 실력에 따라 상중하가 나뉘었다.
자신만 있다면 당장 간부에게 테스트를 신청하거나, 상위 계급의 조직원에게 랭크전을 걸어 점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래야 서로 간에 더 자극이 되고 발전이 있는 법.
'기수나 연차에 집착하는 조직은 결국 안에서부터 썩기 마련이다.'
무림맹이 그랬고, 여러 문파가 그랬으며, 살막도 마찬가지였다.
연륜과 역사는 존중하되 절대적인 기준은 결국 실력이었다.
쌓아 올린 시간이 많다는 것을 우위로 두기에는 세상이 너무 각박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치열하게 발버둥 쳐야 했다.
물론, 카를은 예외였다.
녹스는 오로지 카를을 위한 조직.
간부진이 바뀌어도 그 수장인 카를이 바뀌는 일은 절대 없을 터.
"상회 쪽은?"
"데메라, 메데이라 모두 순조롭게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라한 쪽으로 들어가는 지출이 늘었다 보니 장기적으로 본다면 조금 조심해야 할 듯합니다."
"흠."
조직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카를이 괜히 어린 나이부터 상단 쪽과 돈에 손을 댄 이유가 있었다.
더군다나 라이프치히를 벗어나 수도와 각기 다른 영지 쪽에 거점을 만들고 인원을 늘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추가 지출이 늘어났다.
더불어 현재는 라한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흡수하는 것으로 그쪽까지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흑자 전환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디르센은 그리 무능한 녀석이 아니니까."
당장 전쟁의 여파로, 라한 전체 세력의 30%가 줄어들고 적지 않은 사업장이 날아갔다.
그렇기에 카를은 이것을 투자라고 생각했다.
라한이 정상적으로 복구된다면 다시 그쪽으로 돈을 빨아들일 수 있을 터.
두 개의 상단도 순조롭게 성장 중이고, 미래도 나름 기대가 되었으니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다만?"
집무실 탁자에 앉아 서류를 들추고 있던 카를은, 말꼬리가 늘어지는 퀸을 바라보았다.
"근래 라한을 파고들어 녹스를 캐기 시작한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예상했던 일이긴 한데."
무언가 있느냐.
카를의 시선에 퀸은 머뭇거리면서도 대답했다.
"마스터를 직접 지칭해서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흘려 오는 세력이 있다고 합니다."
154화 오리진 (1)
"나를?"
카를의 두 눈이 가늘게 뜨였다.
현재 외부에는 녹스보다 라한의 이름이 더 적극적으로 퍼져 있었다.
라한이 서부 3상업 지구를 장악하자 새로이 수장에 오른 디르센을 만나기 위해서 각지에서 전령을 보내고 있을 정도로 활발했다.
물론 아는 사람은 그 가운데 녹스의 공이 컸던 것을 인지하고 있긴 했으나, 세간의 인식은 어디까지나 잘 드는 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라한의 간부와 주요 조직원들은 녹스의 진짜 모습과 두려울 정도로 강한 걸 알고 있었지만, 하나뿐인 목숨과, 라한의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넘어갔다.
쉽사리 떠벌리고 다는 이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간다는 것쯤 정도야 뒷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였으니까.
'그런 가운데 날 찾는다라.'
카를은 손가락으로 팔걸이의 끝을 치며 고민했다.
"세력에 관해 파악된 점은?"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곳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문제는...."
퀸은 계속해서 말을 머뭇거렸다.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카를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이상했지.'
지금까지 들어 본다면 굳이 자신에게까지 보고해야 할 사안인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카를이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퀸의 판단을 믿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무언가 드러나지 않았어도 퀸이 의심한다면 타당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오늘 보게 된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퀸."
카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퀸에게 다가갔다.
퀸은 조금씩 뒷걸음쳤고 곧 그 등이 벽에 닿았다.
슥.
카를은 손을 뻗어 퀸의 목덜미를 쓸어올렸다.
조금만 손가락에 힘을 준다면 그대로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위치.
한 쌍의 눈동자에 새빨간 광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녹스의 간부들에게는, 특히 퀸 네게는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내 빈자리를 채우며 항상 열심히 해 주고 있으니까."
"...."
"퀸,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지?"
"...신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
퀸은 바로 앞에서 보이는 카를의 얼굴에 호흡을 가늘게 내쉬었다.
평소였다면 마스터의 모습이 이렇게 가까이 있어 가슴이 두근거렸겠지만, 지금은 전신을 옭아매는 느낌에 손끝이 잘게 떨려 왔다.
"말하도록. 무엇이 널 이토록 망설이게 하고 있는 것이지?"
"...녀석들에게서."
퀸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오리진(Origin)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오리진?"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오리진은 퀸의 가문을 멸망시킨 흉수, 그리고 카를에게는 반드시 죽여야 할 남자가 속한 세력이었다.
허나 제국 남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야 할 녀석들이 어째서 수도에 모습을 비쳤는가.
"이미 세컨드가 대응하러 나섰다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보고를 숨겨 죄송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퀸은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전했다.
"...."
카를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뇌나, 암시가 풀린 건 아니다.
애초에 퀸에게는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망설인 이유는....
'날 위한 것이었군.'
카를이 녹스를 육성하며 승승장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라이프치히 내에서는 적수가 없었지만, 다른 영지나 도시로 확장을 하며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개중에는 카를이 무시할 수 없는 강자도 있었고, 실제로 여러 번 패퇴와 시행착오도 겪었다.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건 오리진과의 전쟁에서였다.
녀석들의 퀸의 가문을 멸망시킨 세력인 것을 알아낸 카를은 겸사겸사 남부에 진출할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오리진의 세력은 이쪽에서 측정한 것보다 훨씬 깊었고 카를도 심한 상처를 입었다.
종래엔 씻을 수 없는 원수 관계를 지게 된 존재도 있었다.
'더불어 세컨드의 부상을 숨긴 건 동료와의 유대 때문인가. 이건 조금 생각해 봐야 할 일이로군.'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만일 가까운 동료가 배신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결국엔 카를의 편에 서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 존재할 흔들림과 리스크는 너무나도 큰 악재.
카를은 녹스의 간부급은 조금 더 유기적이고 창의적이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위 조직원들처럼 금제를 빡빡하게 걸지 않았다.
꽉 막혀버린 조직은 안쪽에서부터 괴멸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세컨드의 상태는?"
"일주일 정도 요양하면 털고 일어날 수준이라고 합니다."
"흠."
세컨드는 녹스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일단 그녀가 부상을 입었다는 시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강자가 나왔다는 소리겠지.
"...마스터, 말씀드리기 외람되오나 녹스의 성장세가 궤도에 오른 지금, 오리진과의 충돌은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북부의 녹스가 몇 년간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것처럼, 남부의 오리진 역시 세력을 키웠을 것이다.
그러니 제국의 수도, 폴포아르델에 진출할 생각을 했겠지.
"라한의 고삐를 쥐고 3상업 지구를 장악하는 것만 해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
장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는 일이었다.
객관적으로 현재 라한은 기존 세력의 덩치보다 상당 부분이 줄어 있는 모양새.
누군가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기회를 엿본 다른 세력에게 뒤통수를 당할 수도 있기에 자중하는 것일 뿐.
다른 상업 지구의 정세까지 파악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다만, 녀석들이 먼저 전쟁을 걸어오는 경우에는 다르지."
카를은 고개를 들었다.
희끄무레한 기척 몇 개가 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쪽이 눈치챘다는 걸 파악한 것일까, 금세 자리를 박차며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퀸, 꼬리를 밟혔군."
"...이런!"
"내가 정리하겠다. 넌 녹스의 전원을 불러들이고 전쟁에 대비하도록."
쉭.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카를은 순식간에 그곳을 박차고 나갔다.
'녹스의 거점이 들킨 건 크게 상관없다.'
문제는 '카를로스 라이프치히'와의 연결성이었다.
평소였다면 조금 신중을 기했겠지만, 이동 거리가 짧았기에 카를은 신분을 숨기는 절차를 간소화했다.
작정하고 파고들어 루트를 조사한다면, 녹스가 바이에른의 생도이자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잡아낼 수 있을 터.
'그 관계성이 밝혀지는 건 아직 시기상조다.'
쉭.
순식간에 건물의 지붕으로 뛰어오른 카를은 엄청난 속도로 도시의 상공을 질주했다.
혼원일극신공의 3성, 소드마스터와 비견되는 절정의 경지에 오른 뒤 그의 육체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원래였더라면 따라잡는 데 더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눈 깜빡할 사이 적의 후미에 도달했다.
"...!!"
경악한 적의 뒤통수를 잡고 곧바로 천마신공의 탈혼백을 시전했다.
곧바로 죽여버린다면 혹여나 누군가 기억을 읽을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 정신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기억 자체를 아예 삭제해 버리고는....
서걱─.
가차 없이 그 목을 베어 냈다.
아까 전 느껴졌던 기척은 모두 셋.
비음흑살공을 전문으로 익힌 퀸조차 탐지해 내지 못할 정도라면, 이들 역시 특별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스륵.
아니나 다를까 다른 한 녀석은 바닥을 물로 만들며 사라지려 하지 않는가.
카를은 곧바로 손을 뻗어 엄청난 삼매진화를 일으키며 주위를 적시는 물을 모조리 기화시켜 버렸다.
"...컥!!"
탈혼백을 시전할 여유조차 없었기에 그대로 머리를 꿰뚫어 뇌를 파괴했다.
뇌가 없어진다면 읽어낼 기억도 존재하지 않을 터.
'남은 건 한 명.'
이들의 수장인 듯, 한 차원 더 빠른 속도로 자신과 멀어지며 거리를 벌렸다.
잠시간 짤막한 숨을 토해 낸 카를은 천마신공을 거두어들인 뒤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했다.
쿵─!
허공을 박차자 카를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질주했다.
쾌(快)로는 중원 제일 못지않은 천마신공과 비교해도 확연하게 차이 나는 속도였다.
5초도 지나지 않아 그 후미에 따라잡은 카를은 다른 녀석들을 처리할 때처럼 손을 뻗었지만....
캉!
처음으로 쇳소리와 함께 적지 않은 반동을 일으키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휘릭.
도망치던 이가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러더니 얼굴에 뒤집어쓴 복면을 벗으며 혀를 메롱 내밀었다.
"아이 씨, 더럽게 빠르네. 그냥 도망치려고 했는데."
"...."
상당히 젊은 외모였다.
육체의 나이로만 따지자면 자신과 같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이 정도 기세라니?
"놀랐어, 이번엔 정말로 놀랐어. 다들 알고 싶어 하는 녹스의 정체가 설마 그 라이프치히의 유약하기로 소문난 셋째 도련님이었다니."
"...."
카를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쪽도 가진 정보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찔러보는 식으로 아무것이나 말을 내뱉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이름이, 카를로스였던가? 애칭이 카를이었지? 어이, 카를 도련님. 소꿉장난을 들킨 감상은 어때. 손발 끝이 부르르 떨리나? 귀족 가문의 자제가 뒷골목에서 음지 흉내를 내다 세간에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카를은 냉정하게 상대의 모습을 살폈다.
흩날리는 찬란한 금발,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새빨간 눈동자.
일전 맞서 싸웠던 '그 남자'와 상당히 비슷한 특징이었다.
서로 풍기는 기질은 정반대였지만.
"아스칼리온에게 내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
"들었지. 리온이 그러더라.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놓아주었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그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패줄 것이라고. 리온도 당신 정체를 궁금해하던데 알려 주면 정말 좋아하겠지?"
스릉.
카를은 대답하지 않은 채 아공간 주머니에서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다.
신검 천뢰(天雷).
필살의 각오를 마음에 세운 차.
경망된 언행과 젊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저 안쪽에는 정체 모를 것이 숨어 있었다.
아스칼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처럼 2회차를 산 것도 아닌데 대체 젊은 나이에 그런 막강한 힘을 손에 넣은 것일까.
"그런데 소꿉장난치고는 스케일이 꽤 큰데. 수도까지 진출했을 줄이야. 녹스의 이름을 몇 번 듣기는 했는데 설마 녹스가 그 녹스일 줄은. 아, 연초에 일어났던 바이에른 입학시험의 테러도 네놈들 소행이야? 황제가 관련자들은 전부 잡아 죽이라고 엄명을 내려 놨던데. 그 끄나풀이 사실 라이프치히의 핏줄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면...."
저적.
보이지 않는 궤적이 허공 위에 새겨졌다.
남자는 즉시 손을 뻗어 가볍게 휘둘렀고, 강철조차 가볍게 베어 낼 참격을 너무나도 손쉽게 상쇄해 냈다.
"미안한데."
그는 카를을 향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쪽은 네가 소꿉장난하며 드잡이질했던 어쭙잖은 녀석들이랑은 다르거든."
"글쎄."
혼원일극신공이 휘몰아쳤다.
2성과 3성의 차이점은 크게 말하자면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기의 발출 속도.
천뢰가 휘둘러지지 않았음에도 재차 보이지 않는 참격이 작렬했고.
서걱─!
남자의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솟구쳤다.
155화 오리진 (2)
"...오러 블레이드?"
가슴의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였다.
그럼에도 남자는 물러나지 않은 채 제자리에 우뚝 서서 미간을 찌푸리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20살인데 마스터라고?"
"...."
카를은 무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남자가 놀란 것처럼 그 역시 내심 놀란 상태였다.
'상체를 일도양단해도 이상하지 않을 참격이었다.'
신검 천뢰에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담긴 참격.
어지간한 강자가 아니고서야 쉽사리 그것을 막아 내긴 힘들 것이다.
남자 역시 자신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했고, 그대로 가슴 부위에 공격을 허용했다.
'하지만 이 단단함은 대체....'
호신강기도, 오러막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육체의 단단함.
어지간한 쇠붙이보다 더 질긴 감촉이 검끝에서 느껴졌다.
절그럭.
카를은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어찌 되었든 다른 녀석들과는 다른 수준의 강자인 것은 확실하니 사로잡아서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흐음."
그사이 남자는 가슴팍에 난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새빨간 피가 끓으며 깊게 파여 있던 자상이 점차 회복되어 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말끔한 모습으로 나아 버렸다.
"아스칼론이 기묘한 녀석을 수하로 들였군."
"하하, 정말로 비싼 돈을 주고 날 고용했지. 나도 그 값은 열심히 하고 있다고."
"네 이름은?"
"그래, 그쪽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이쪽의 이름을 알려 주는 게 예의겠지."
스륵.
남자의 신형이 어둠과 동화되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끄트머리에서 반밖에 남지 않은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바나베."
카를은 즉시 검을 들어 좌측 사각을 향해 휘둘렀다.
캉!
분명 소리는 저 앞에서 들려왔거늘, 바나베의 기척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라 있었다.
'손? 무투가인가.'
천뢰를 쳐 낸 건 날카롭게 세워진 수검(手劍)이었다.
규격 외로 단단한 신체를 믿고 육탄돌격을 해 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쪽도 방법이 있지.'
거리는 이쪽이 우위에 있었다.
바나베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집요하게 거리를 좁히며 카를의 복무를 노려 왔다.
탁.
허공에 천뢰를 내던진 카를은 마찬가지로 손을 뻗었다.
단단함은 부드러움으로 꺾으면 되는 법, 유능제강의 묘리로 바나베의 손을 부드럽게 밀쳐 내며 그 관절을 움켜쥐었다.
"어딜!"
바나베는 설마 카를이 검을 놓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렵지 않게 그 다음수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관절기로군.'
뻔한 생각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신체라도 관절은 단련이 어렵기 마련.
그렇기에 보통 자신을 상대했던 이들 역시 그쪽을 노려오곤 했다.
'그대로 머리를 박살 내 주마.'
바나베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반대쪽 주먹을 움켜쥐어, 곧바로 카를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그 주먹이 목적을 완수하기 직전,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저저적─!
엄청난 냉기가 전신을 급습했다.
눈앞에 치솟는 빙결의 결정과 새하얀 기류에 바나베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얼었다고? 내가?'
그의 신체는 단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중원식으로 말하자면 금강불괴에 이어 한서불침의 경지까지 이르렀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속성 마법의 공격 정도는 웃으면서 맞아 줄 수 있었지만, 뼛속까지 파고든 이 냉기는 머릿속에 거센 경종을 울렸다.
'이건, 위험하다.'
바나베는 즉시 붙들린 팔을 격렬하게 흔들어 속박을 풀어냈다.
그러면서 다급히 마력을 운용했고 순식간에 몸의 반절을 잡아 먹은 냉기를 털어 내려 했다.
"극음지기다.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 테지."
"...!!"
하지만 카를은 그런 녀석을 내버려두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탁.
허공을 부유하던 천뢰를 낚아채고는 그 끝을 날카롭게 세웠다.
천원검법 이 초식 천뢰(天雷)
검의 이름과 똑같은 초식이 그 끝에서 펼쳐졌다.
극성에 다다라 어렴풋하게 울려 퍼진 뇌성과 함께 새하얀 빛이 허공을 갈랐을 때.
"...커헉!"
바나베는 피를 토해 내며 건물 아래로 틀어박혔다.
"힉, 히익...!"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던 굉음에 집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거실 한복판으로 떨어진 바나베의 모습에 기겁하며 몸을 더 움츠렸다.
"퉤."
입안에 서린 피를 토해 낸 바나베는 붉어진 안광을 들어 근처에 있던 먹잇감을 발견했다.
덥썩.
그대로 달려나가 머리를 부여잡고는 강하게 힘을 주었다.
사아아아─!
새빨간 기류가 바나베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천뢰 초식에 당해 입은 자국이 점차 회복되어가며 원래의 육체를 되찾았다.
"끄, 으으으아아아...!"
반대로 바나베의 손에 붙들린 사람은 마치 몸의 피가 전부 빠져 나가는 것처럼 피부가 거뭇거뭇해지며 온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쉬악!
옥상에서 뛰어내린 카를이 녀석의 팔을 베어 내려 했다.
하지만 바나베는 붙잡고 있던 목을 놓으며 여유로운 몸짓으로 물러났다.
"어이쿠, 이런. 조심해야지."
"...."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의 정기를 흡수하는 수법은 중원에도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건 당연히 흡성대법.
상대의 내공과 정기를 빨아들여 자신의 양식을 삼는 무공이었다.
'이건 좀 다른 것 같은데.'
카를은 과거 불가살 시절 흡성대법과 채음보양을 사용하는 마두와 조우한 적이 있었다.
색마로 소문난 무림공적이었는데 녀석이 사용하던 흡성대법과는 느낌이 살짝 달랐다.
마치 피를 빨아들인 것 같은....
"뱀파이어로군."
카를은 결론을 내렸다.
새빨간 안광, 녀석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적색 기류, 그리고 피를 전부 빨린 것 같은 사람의 흔적까지.
"하하하. 그것까지 알려 줄 생각은 없었는데."
단단한 신체가 뱀파이어의 특성인 것은 잘 모르겠다.
대신 기척과 모습을 숨기는 것에 능하고, 수도를 휘둘러 공격하는 건 기록에 적힌 뱀파이어의 특성과 일치했다.
"마늘이라도 가지고 나올 걸 그랬나."
"그런 낭설을 믿나? 왜, 십자가도 꺼내 오지? 마침 저기 있군."
바나베는 벽 옆에 걸린 십자가를 가리켰다.
십자가와 마늘, 모두 뱀파이어를 상대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무기였다.
하지만 저런 모습을 보니 실제로 통용되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말뚝인가."
카를은 손에 쥔 천뢰를 들어올렸다.
신검 정도의 말뚝이라면 뱀파이어를 소멸시키기 충분할 것이다.
그런 카를의 말에 바나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과장되게 한숨을 토해 내었다.
"심장에 말뚝을 박히면 사람은 당연하고 드래곤도 죽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해답처럼 말하는 꼴이라니. 뱀파이어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군."
쉬악─!
바나베가 정체가 밝혀져 너스레를 떠는 사이, 카를은 순식간에 그의 지척으로 접근했다.
찰나 십수 개의 궤적이 허공에 난무하며 녀석의 몸을 베어 갈랐다.
저저저적─!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담은 공격이었다.
이전보다 더 깊은 자상을 남겼지만, 바나베는 그리 큰 타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이걸로는 날 죽이지 못하는데 어떡하지? 이래서는 네 파란만장한 바이에른의 생활을 지키지 못할 텐데."
툭.
카를은 멈추지 않았다.
천뢰가 화마에 휩싸이며 아까와는 다른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천원검법 사 초식 난염(亂炎)
엄청난 열기에 공간이 일그러지며 카를의 모습이 왜곡되었다.
바나베는 어둠 가운데 새빨간 눈동자를 움직이며 그의 기척을 훑었다.
캉!
바로 지척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힘껏 팔을 휘둘렀다.
동시에 신검이 튕겨 나갔으나, 카를은 멈추지 않고 재차 공격을 가했다.
쉬사사삭!
빛무리가 작렬했다.
다만, 주위에 뻗치는 여파는 최소한으로 줄인 채 오로지 바나베에게만 공격을 집중했다.
이미 커다란 소란이 일어난 가운데 더 이목을 끌면 귀찮아질 테니 말이다.
"그렇게 주변 신경을 쓰면...."
"말이 많군."
일섬(一閃).
허점을 노린 카를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바나베는 찰나 그 움직임을 놓쳤고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서걱─!
아무리 단단한 육체라 할지라도 신검의 참격을 제대로 맞는다면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나베의 오른팔이 베여 나가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촤아아악!
잘린 팔 부위에서 뿜어진 핏줄기에 카를은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팔 한짝이 잘려 나갔으니 녀석도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할 터.
그러니 그 사이 심장을 갈가리 찢어 놓을 생각이었다.
'카를로스의 신분에 이어 혼원일극신공까지 노출되었다.'
가능한 사로잡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선 쉽사리 제압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무력화부터.'
이 정도 강함을 지닌 뱀파이어라면 단번에 죽지는 않을 터.
그렇기에 카를은 녀석의 심장을 향해 천뢰를 찔러 넣었지만, 곧 공격을 멈추고는 옆으로 몸을 굴렸다.
파가가각─!
그와 동시에 허공에 비산한 핏방울이 날카로운 총탄이 되어 조금 전까지 카를이 서 있던 곳에 틀어박혔다.
"쯧."
바나베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비등비등한 상대를 쓰러뜨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치열한 싸움 가운데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렇기에 그 타이밍을 노렸거늘 잽싼 몸놀림으로 피해 버렸다.
툭.
카를은 땅을 딛고 섰다.
하지만 그 역시 완벽하게 피해 낸 것이 아니었다.
어깨를 타고 흐르는 핏줄기에 카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후우...."
긴 숨을 토해내고 들뜬 머리와 몸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숨을 멈추며 땅과 수평이 되도록 검을 들어올렸고 기수식의 준비를 마쳤다.
완전한 살의(殺意), 바나베도 그것을 느꼈기에 웃음기를 지우고 자신의 힘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녀석의 공격으로는 날 죽이지 못해.'
설령 심장을 찔린다고 해도 그 순간 뿐이었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치명상을 줄 순 없었으니까.
설령 뼛속까지 얼어붙는 냉기라고 하여도 말이다.
스륵.
바나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기화되며 주변을 향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카를은 그것 하나하나가 바나베의 감각이 되고 있음을 파악했다.
그렇지 않고서라면 녀석의 눈으로 자신의 기척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한 번에 간다.'
검끝을 세우고, 가볍게 자리를 박차며 앞으로 돌진했다.
바나베 역시 피하지 않았다.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앞쪽에 피로 된 장막을 세우며 자리에 버티고 섰다.
쩌엉─!!
이전과 달리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지며 건물 자체가 가라앉았다.
서로의 운명을 건 최후의 격돌이었으니 여파가 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파각─!
바나베는 자신이 만들어낸 피의 장막을 깨부수고 들어온 검신의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공격력은 발군이군.'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검이 장막을 부수고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꿰뚫었음에도 바나베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을 뻗어 검을 단단히 붙잡는 것으로 녀석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았고 주위로 뿌려 놓았던 피를 발산했다.
"오너라, 나의 시종들이...."
하지만 그의 부름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이 붙잡은 검신을 내려다보아야 했으니.
파아앗.
검신이 청색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소 생소하지만, 그 위에서 느껴지는 건 신성(神性)의 기운.
천천히 고개를 들자 검을 찔러 넣은 카를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해 왔다.
"짤막한 것 치고는 좋은 여흥이었다, 뱀파이어."
156화 오리진 (3)
"크아아악!"
어두운 도시 가운데 처절한 절규가 메아리쳤다.
바나베는 몸을 비틀며 발버둥 쳤지만, 천뢰검에 서린 신성은 녀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족에 속하는 뱀파이어는 신성과는 정반대의 성질을 지녔다.
더욱이 심장을 찔린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주입당한 신성을 버틸 수 있을까.
자신의 가슴을 찢으면서까지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것을 두고 볼 카를이 아니었다.
콱.
다리를 들어 녀석의 어깨를 밟고 천근추의 수법으로 찍어 눌렀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대로 억누르자 바나베의 몸이 끝에서부터 검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이기 아쉽긴 하지만.'
이런 마물류에게는 아쉽게도 탈혼백의 수법이 통하지 않았다.
인간을 베이스로 한 마인까지는 가능했다.
하지만 그 이외의 종족에게는 아직 경지가 부족했기에 정신 간섭이 불가능했다.
이 정도 수준의 강자라면 고문으로 입을 여는 것도 힘들 테고, 풀려나게 되면 리스크가 더 크니 빠르게 제거하고 다른 실마리를 찾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지.
"오리진에 뱀파이어가 있다라."
카를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스칼론과 만난 건 대략 이 몸으로 15살 무렵이었다.
당시 녹스는 라이프치히의 신흥 조직으로 이름을 날리며 본격적인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다음 세력권의 중심이 되는 타 영지에서의 권리를 두고 한 조직과 충돌했다.
그것이 바로 오리진이었고, 카를과 검을 맞댄 이가 아스칼론이었다.
'킹이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많이 위험했겠지.'
어쩌면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르테니아에 온 이후로 그만큼 위험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남자를 본 적은 없었다.
과거 중원 시절 불가살이었던 자신과 비슷한 결의 살귀(殺鬼) 느낌을 받았으니까.
당시에는 경지가 낮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바나베를 거느린 것을 보니 아스칼론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
바나베의 소멸이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카를의 주위로 몇몇 인원이 내려앉았다.
전부 녹스의 간부들로 퀸을 비롯해 급하게 출격해 지원을 나온 듯싶었다.
수하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카를은 바나베의 몸을 완전히 소멸시키고는 천뢰검으로 잿더미 사이를 뒤적거렸다.
그러자 가슴 부근, 심장이 있던 자리에 놓인 붉은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러디 스톤!"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카를의 질문에 갤런 포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혈족에 속하는 뱀파이어의 심장이다. 이걸 파괴하지 않는 이상 뱀파이어는 계속해서 부활하지. 그래서 죽이기 더 까다롭고."
"리치의 라이프배슬과 비슷한 것이로군."
"설마 이걸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혹시 오리진의 조직원이라는 게 이것이었습니까?"
"바나베라는 녀석이었다. 나인, 잿더미의 샘플을 채취하도록."
"네."
나인이 손을 뻗어 아직 쓸려가지 않은 잿더미를 쓸어 담았다.
고위 혈족의 뱀파이어 정도 되는 표본은 녹스의 소중한 실험 재료로 쓰일 예정이었다.
곧 검 끝으로 흠집이 난 블러디 스톤을 들어 올린 카를은 그것을 빼낸 뒤 갤런에게 던졌다.
"신성 결계로 봉인할 수 있겠나?"
"가능은 한데. 파괴하지는 않는 건가?"
"쓸 만한 곳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보다 부활할 가능성은?"
"피를 적시면 아마 부활할 테지."
"그럼 잘 관리해야겠군. 그것은 맡기겠다."
카를의 지시에 갤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이 내려진 이상 고민하지 않고 따르면 되었다.
그것이 녹스였기에.
카를은 시선을 돌려 퀸을 바라보았다.
"세컨드는?"
"묶어 두었어요. 나오겠다는 걸 겨우 말렸죠."
"그래. 요양은 중요하니까. 당분간은 나오지 말고 회복에 집중하라고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잠시간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를은, 짤막한 침묵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건은 불문에 부치겠다. 날 위해, 녹스를 위해 내린 네 판단이니까."
그러니 존중은 해 주겠다.
다만, 두 번은 없다는 카를의 시선에 퀸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는 바는 알고 있다.'
당시 녹스는 애써 이룩한 조직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애초 녹스는 카를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직이니 카를이 부상을 입거나 없어지게 된다면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그러니 오리진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보고하기를 꺼린 것이겠지.
'내가 패배할 것을 염려에 둔 것인가.'
카를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에 당했던 것이 아직 퀸에게는 큰 충격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혼원일극신공이 3성에 이른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거기에 신성의 힘까지 손에 넣었으니, 아스칼론이 마족이라 할지라도 대적이 불가능한 상대는 아니었다.
"바나베가 없어졌으니 오리진은 다시 녹스와 거리를 둔 채 살펴보겠지."
"어찌 되었든 녀석들이 수도에 진출했다는 건 확실하네요."
"적어도 우리보다는 먼저 진입해서 자리를 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세력들 위주로 후보를 추리도록."
"알겠습니다."
현재 문제는 오리진이 녹스보다 먼저 이쪽을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녹스는 오리진이 어디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는지, 또 그 규모는 얼마가 되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눈을 뜨고도 얻어맞을 수가 있기에 앞으로의 행보에 제동이 걸려 버렸다.
"나도 나름대로 조사해 보지."
카를은 어둠으로 물든 도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뱀파이어 관련이라면 자신 역시 찔러볼 곳은 있었으니까.
* * *
실전의 이해 강의의 대규모 시험에 따라 바이에른 전체에 이틀간의 휴일이 주어졌다.
원래는 실전의 이해 강의를 수강한 생도들에게만 해당되는 휴일이었는데, 형평성의 문제가 재기되어 다른 학년의 생도들 역시 함께 휴식에 들어갔다.
사실 말만 휴식이었지 대부분 잠도 자지 않은 채 남은 시험공부에 매진 중이었지만.
휴일 중 하루는 벌써 끝이 났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기에 교정을 돌아다니는 생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저벅.
평범한 생도와 달리 밤에 더 생기가 넘치는 레이첼은 기숙사를 나와 바이에른 도서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아침은 이제부터 시작이었기에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차, 돌연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 앞에 불쑥 솟아났다.
"...."
아무런 기척조차 읽을 수 없었다.
발걸음을 옮기던 레이첼은 제자리에 멈춰 섰고,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
그림자 속에서 솟아난 건 가면을 쓴 괴한이었다.
그는 변조된 목소리로 레이첼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레이첼이라고 했나. 뱀파이어여."
"...."
숨기고 있던 종족이 언급당했음에도 레이첼은 눈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이전과 같은 무표정으로, 바나베의 것보다 한층 더 불그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눈동자로 괴한을 응시했다.
"내 정체로 협박해 봤자 아무런 소용 없어. 이미 바이에른에서는 알고 있으니까."
"딱히 협박할 생각은 없다. 그저 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니까."
"...묻고 싶은 것?"
"오리진이라는 조직에 관해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레이첼의 얼굴이 팍 찡그려졌다.
동시에 그녀는 땅을 박차며 괴한을 향해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캉─!
분명 맨손임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충격이 부닥쳤다.
카를은 가볍게 손을 내밀어 레이첼의 공격을 흘려 내는 것으로 살짝 물러났다.
'완력으로만 따지자면 바나베보다 더 윗줄이겠군.'
고위 혈족의 뱀파이어, 아니, 혹시 진조의 혈족인가?
어쨌든 심상치 않은 내력을 숨기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소란을 끌어서 좋을 건 없을 텐데."
카를은 고개를 들어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아담한 체구, 아무런 감정이 없는 표정, 그리고 새빨간 눈동자.
일전 에렌달 숲의 일로 상처를 입고 입원했을 당시, 마주쳤던 그 모습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비록 스쳐 지나간 인연에 불과하지만, 카를이 알고 있는 유일한 뱀파이어.
같은 뱀파이어인 바나베의 실마리를 찾는 건 이쪽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반응을 보니 오리진을 알고 있는 것 같군.'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그 이름은 어디에서 들었지?"
"이곳에서."
"...이곳?"
"수도에 오리진이 진출한 걸 모르고 있었나?"
"오리진이?"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연기하는 것 아닌 듯했다.
오리진을 알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지만, 녀석들이 수도에 진출한 것까지는 알지 못한 듯했다.
어떤 부분에서 연관점이 있는 것일까.
'밤이라 그런지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분위기와는 딴판이로군.'
당시에는 자신의 피 묻은 붕대를 보며 군침을 다실 뿐이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또렷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은 얼마 전 오리진과 충돌한 직후다. 그 과정에서 바나베라는 뱀파이어를 죽였지. 정확히 말하자면 무력화시켰다. 블러디 스톤을 확보했으니까."
"...바나베가."
"아는 뱀파이어인가?"
"그 전에."
레이첼은 호락호락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넌, 누구지?"
"녹스."
카를은 자신의 가면 끄트머리에 있는 황금빛 초승달을 가리켰다.
레이첼은 그 문양을 알고 있는 것인지 두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입학 테러에 관여한 세력 중 하나였었나?"
"정확히는 테러를 막은 쪽에 속하지. 내 덕분에 생도들이 살았으니까."
카를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선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레이첼, 너는 오리진과 무슨 관계이지?"
"내가 왜 알려 줘야 하는데?"
"대답 여하에 따라...."
스릉.
카를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어둠 사이로 천마신공의 기운이 스멀스멀 퍼져 나오며 이 주위의 공간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인 레이첼조차 섬뜩해질 정도의 압박감.
카를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네 생사 여부가 갈릴 테니까."
"...."
레이첼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소란이 났으면 누군가는 와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의아하리만큼 주위가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소란을 억누른 것처럼 말이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건가?'
레이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소란을 일으키든, 소란에 휘말리든 어느 쪽으로는 자신의 손해가 너무 컸다.
애초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조건으로 바이에른에 들어온 것이니 말이다.
결국, 짤막한 숨을 토해 낸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오리진의 소속이었다. 정확히는 그쪽에 붙들려 있었지. 오리진의 권속이었으니까."
"...권속?"
카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레이첼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모르는 건가? 오리진은 조직의 이름이면서 그 수장의 이름이다."
"그렇다는 건...."
레이첼은 카를의 의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리진, 진조의 핏줄을 이은 최고위 흡혈귀야. 성국, 바티칸에서도 주시하고 있는 이름이기도 하고."
157화 기말고사 (6)
진조의 핏줄.
카를은 레이첼의 말을 곱씹었다.
'애초에 오리진이 진조의 핏줄을 이은 뱀파이어로부터 비롯된 조직이었다?'
사실 쉽사리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베샤 같은 마인 세력처럼 어느 조직에 숨어들어 섞일 순 있지만, 흑마법사도 아니고 악마 숭배자도 아닌, 마족 자체가 중간계에 활동하면서 세력을 세웠다.
정말로 그 말대로라면 성국에서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마족이라면 치를 떠는 이들이었으니.
"오리진의 활동 시기는 내가 알기로는 10년도 넘게 지속되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성국의 시선을 피해 왔다고?"
"성국도 알고 있어. 다만, 건드리지 않고 있을 뿐. 결국 오리진을 잡지 못하면 허사가 되는 문제니까. 당신도 오리진을 직접 본 적은 없지?"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직접 본 건 그 수장이라고 생각했던 아스칼론뿐.
설마 그 위에 다른 이가 더 있었을 줄이야.
'누군가의 밑에서 일할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불가살 시절의 자신도 살막이라는 조직에 얽매여 있었다.
중원제일살수자 살막의 특급 살수인 건 맞지만, 세력 안쪽에서는 살막주보다 서열이 낮았다.
물론, 실제 취급은 그러지 않았지만.
"내가 오리진에서 나온 건...."
"레이첼? 누구랑 그렇게 대화를 하고 있어요?"
"...."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이첼은 고개를 돌렸다.
도서관 쪽에서 온 세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기다려도 안 오길래 찾으러 왔는데, 혼자 뭐 하고 있어요?"
레이첼은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카를이 서 있던 곳은 텅 비어 버린 채 아무런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꿈을 꾼 건 아니었다.
분명 가면을 쓴 괴한이 찾아왔고 자신에게 오리진에 관해 물었다.
'귀찮아지겠는데.'
레이첼은 뺨을 긁었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오리진은 내버려두지 않을 터.
"...잠깐, 밤이랑 대화를 좀 하고 있었어."
"또 무슨 헛소리에요. 빨리 와요. 해야 할 공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으."
레이첼은 세이라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카를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 * *
짤막한 이틀의 휴일이 모두 끝나고 바이에른은 다시 시험 기간에 접어들었다.
실전의 이해를 비롯해 굵직한 시험을 전부 마친 카를에게 남은 건 교양 과목뿐.
지금은 실전 마법의 활용 강의의 시험을 진행 중이었다.
시험 방식은 간단했다.
이 반년간 자신의 마력 제어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상대 생도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증명하면 되었다.
다만, 마법전은 아니었다.
'블루 웨이브'라는 이름의 게임으로 체스를 본떠 만들어진 마법사들의 유흥이었다.
"자, 여러분은 군주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모두 동일한 세력으로 구성되어요. 얼마나 마력을 세밀하고 디테일하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상대 기물을 쓰러뜨리고 진영을 장악할 수 있느냐가 달라집니다. 반년 동안 테크닉을 익힌 생도분들이라면 좋은 성과를 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작은 체스판 위에 두 생도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카를의 상대는 한해 선배인 2학년 생도.
"흠."
후배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의욕을 보이며 손을 뻗었다.
시험이 시작되자 흑과 백의 기물이 체스판 위에 나타나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루 웨이브가 체스와 다른 건 말을 움직이는 데 특별한 규칙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턴이나 제한 없이 행동이 가능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상대의 킹을 공략해 쓰러뜨리면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다다다닥─!
선배 생도는 시험을 그리 오래 끌 생각은 없는지 전군을 한 번에 진격시켰다.
일시에 전선을 밀어붙여서 기물 하나하나를 제어하는 역량의 차이로 승리를 따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카를 역시 이쪽에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쪽도 이론 점수가 일부 포함되는 강의니까.'
네리안, 레이시스, 그리고 루이스를 비롯한 최상위권 생도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모든 시험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혹은 만점을 따냈고 지금 역시 순조롭게 기세를 이어 가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카를 역시 긴장해야 할 정도로 추격해 왔기에 남은 시험에서는 조금 진심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며 전군을 돌격해 오던 선배 생도의 입에서 의문성이 튀어나왔다.
허둥지둥하며 물러날 것으로 생각했던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카를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장벽을 세워 공세를 막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좋아. 카를 생도 정말로 훌륭한 컨트롤입니다. 추가 점수를 드리도록 하겠어요."
시험장을 돌아다니며 채점하고 있던 교수가 입가에 미소를 활짝 꽃피우며 카를을 칭찬했다.
선배 생도는 이를 악물며 그런 카를을 저지하려 했지만, 시작부터 심력을 쏟아부은 탓에 금세 한계에 도달해 버렸다.
"...아, 아아아!"
박살, 박살, 또 박살.
자신들의 기물이 박살 나 버리는 걸 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곧 모든 영역이 카를의 걷으로 뒤덮였고, 카를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선배 생도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우울한 대답이 되돌아왔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카를은 동정하지 않았고 조용히 다음 상대를 찾아 헤맸다.
"...."
다들 그런 카를의 시선을 피했다.
이론 수석과 마력 제어의 연관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일단 수석이라는 점에서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어 보였다.
일단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약자를 상대해야 되었기에 대부분 카를과 상대하는 걸 기피했다.
"레이시스."
"...!!"
막, 시합이 끝난 레이시스는 카를의 부름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와 상대했던 생도는 곧바로 도망친 찰나, 카를이 빈 자리 앞에 가서 섰다.
"어떻습니까. 저와 하시겠습니까?"
시험은 총 다섯 명의 상대와 싸워야 했다.
다들 이제 막 첫 상대가 끝난 터라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레이시스는 평소와 달리 땀을 뻘뻘 흘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게, 카를, 제가 카를을 피하는 건 아니지만...."
"농담입니다. 레이시스의 점수를 깎아 먹을 순 없죠. 이 과목은 저도 양보하지 못하는 강의니까요."
"아."
레이시스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검술은 물론이고 마력 제어나 마법 쪽 역시 카를에게 이길 자신이 없었다.
대체 한 사람의 몸으로 저 모든 걸 어떻게 다 잘하는가 싶을 정도로 불공평하지 않는가.
"제가 양보해 드린 만큼 꼭 수석을 차지하셔야 합니다."
"네, 꼭이요."
1승을 따낸 레이시스는 주먹을 꽉 쥐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네리안과 근소한 차이가 예상되는 지금, 1점 1점이 소중한 상황이었으니.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소망을 이루어주며 호감도를 쌓고 싶었지만, 고의로 그러는 건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 역시 성적의 관리가 필요했다.
"흠."
카를은 레이시스를 떠나 시험장을 돌아다니다 곤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자신의 상대를 해 줄 용의를 보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사색이 된 채 납작 엎드렸으며, 누군가는 간절한 시선으로 애원해 오기까지 했다.
'이래서는 시간 안에 5전을 못 채울 것 같은데.'
뺨을 긁적이며 우두커니 서 있자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카를로스 후배."
"아, 하네스 선배님."
일전 실습 당시 같은 팀이 되었던 3학년 생도였다.
더욱이, 녹스의 스카우트 후보로 뽑아 놓은 대상이기도 했고.
'생긴 것에 비해 두뇌파라고 했었지.'
강의 중에서도 항상 우수한 모습을 보였다.
그라면 제법 좋은 상대가 되지 않을까.
"어때, 나와 하지 않겠나? 나 역시 너처럼 다른 이들이 전부 피해서 말이야."
"좋습니다."
카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승리를 따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카를로서 정해 놓은 상한선을 뛰어넘는다면, 기꺼이 상대를 인정하며 승리를 양보해 줄 생각이었다.
'이 나이대에서는 그편이 호감을 사기 더 쉬울 테니까.'
하네스라면 그러기 충분한 가치가 있는 생도였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나머지 시험에서 빈틈 없이 만점을 따내 수석 자리를 유지해야겠지만.
"흑, 백, 고르도록."
"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생부터 음지에서 살던 부류라 그런지 백색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카를은 흑을 선택했고 자연스럽게 하네스는 백의 진영을 엮었다.
곧 시작된 전쟁은 이전과 달리 단조로운 분위기로 흘러갔다.
카를도 하네스도 섣불리 공격하지 않은 채 서로의 수준을 살피며 빈틈을 살피는 쪽의 전략을 펼쳤으니까.
'이래서 바이에른이 좋아.'
카를은 속으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중원에 있을 적 각 문파의 유망한 후기지수가 모인 정천학관은 솔직히 교육 기관이라기보다는 친목을 도모하는 곳이었다.
바이에른처럼 진지하게 공부하거나 자신의 무예를 갈고닦는 이는 소수였다.
오죽했으면 살수였던 자신이 정도 무림의 앞날이 걱정된다며 속으로 탄식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반면 바이에른은 다르다.'
이쪽은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자부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고, 더 발전하고자 하는 의욕까지 차고 넘쳤다.
당장의 수준을 따지자면 정천학관 쪽이 높은 건 부정할 수 없겠지만, 1, 2년만 지난다면 바이에른에서 박차고 나가 선두를 점할 터.
중원과 아르테니아의 차이점은 그쪽에서도 오지 않는가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세계가 우위에 있고, 열등하다는 소리까지는 아니었지만.
'...음.'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하네스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마치 살수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째 표적을 감시하며 때를 기다린 것처럼.
어느새 닥쳐온 군세가 마치 화살처럼 가슴 아래를 찔러 들어왔다.
'확실히 전술에 관한 이해도도 제법 있군.'
하네스는 군벌 가문의 출신으로 집안 모두가 제국군에 속했다.
하지만 그리 높은 위계는 아니었다.
끽해야 주류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인 탓에, 일군의 한 부분을 맡는 선에서 그쳤다.
하네스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고 바이에른에서 공부하는 것을 택했다.
장자도 아니고 승계 순위가 많이 밀려있기에 가문에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포지션.
녹스에 들어오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성적도 우수하고, 성격도 양호하다. 문제는 본인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자신이 지닌 목표와 녹스의 방향성이 맞아떨어져야 스카우트의 진행이 가능하다.
세뇌와 암시는 그다음의 이야기.
디르센 같이 이용하다 버릴 것이 아니라면, 수하들 쪽은 가능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다른 녹스의 간부들을 영입할 때도 꽤 공을 들였지.'
각자 원하는 것과 충족하고 싶은 목표, 결핍과 결여를 녹스에서 채워 주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이 조직에 애정을 갖고, 도리를 다하지 않겠나.
물론, 그렇게 해주어도 배신하거나 뒤통수를 치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전부 죽었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고 하여도 신뢰를 저버리는 순간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158화 기말고사 (7)
"...졌다."
하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아슬아슬한 격차였다.
서로의 군세가 엎치락뒤치락 진흙탕 싸움을 계속했고, 한 마리의 병사가 남을 때까지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승리를 따낸 건 당연히 카를이었다.
'아슬아슬했군.'
카를은 이마에 서린 땀을 훔쳐 내며 내밀어진 하네스의 손을 맞잡았다.
"제 특기가 마력 조작인데 이만큼 힘들었던 상대는 선배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론 수석에게 인정받다니, 부끄러운 일은 아니군."
후배에게 패배했음에도 하네스는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바이에른은 철저한 능력제 사회.
학년이 많고 경력이 길어도 후배에게 뒤집히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대륙에서 내로라 하는 천재들이 모인 곳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수석을 도전하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경쟁자가 쟁쟁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꼭 수성하길 바라지."
하네스는 그 말을 끝으로 깔끔하게 퇴장을 했다.
등장만큼이나 담백한 남자가 아닌가 싶었다.
'마음이 동하는걸.'
카를은 저런 유형을 선호했다.
힘든 일을 시켜도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임무만을 수행하는.
불평과 불만이 많은 자는 밑에 거느리기 어려운 부류였다.
차라리 상관으로 둔다면 편한 쪽을 찾아가는 습성 때문에 낙수를 받을 수 있지만, 어찌 되었든 위로든 아래로든 하네스와 같은 타입은 누구나 원하는 인재상에 가까웠다.
'자, 그러면....'
카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몇몇 생도들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네스와의 치열한 접전으로 인해 심력과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으리라 판단한 것이었다.
카를은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작게 웃어 주었다.
'점수가 제 발로 찾아오다니.'
이만큼의 기대가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이론 수석 자리는 공고하게 지켜 내야겠지.
레이시스도 순탄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으니 자신 역시 보여 줄 생각이었다.
"...졌다."
"졌습니다."
"큭...."
연달아 5번의 승리를 따낸 카를은 만점에 추가점수까지 얻어 내며 시험을 종료했다.
그렇게 이틀 뒤까지 연이어 시험이 계속되었고, 하나둘씩 모든 시험을 끝낸 생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학년 생도들은 어지간하면 오늘 시험이 끝나기 마련.
그렇기에 모두 카페테라스에 모여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늘어져 있었다.
"...불태웠다."
"점수를 태운 건 아니고?"
"그래도 나름 잘 봤거든."
게일의 놀림에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들며 반박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중간고사에서 본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받았다.
'전부 카를 덕이지.'
막시밀리안의 시선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던 중인 카를에게로 향했다.
그가 억지로 자신을 데려다가 지식을 주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얻은 점수의 반절도 얻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기말 고사는 극악에 가까운 난이도였다.
"여기저기 곡소리가 나는 걸 보니까 시험이 많이 어려웠나 봐."
"그렇긴 하지. 나도 스터디를 하지 않았으면 많이 어지러워질 뻔했어."
에이미와 리엔 역시 시험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진 걸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이론도 이론이지만, 실습 쪽에 다양한 항목이 추가되어 준비하는 데 곤혹을 치뤘다.
특히 사흘간 치러진 실전의 이해 강의의 점령전은 일단 씻을 시간조차 없다는 점에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잘 끝났으니 괜찮습니다. 이제부터는 방학이니까요."
"그렇지."
카를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기말고사까지 모두 끝났기에 더는 바이에른에 매여 있을 필요는 없었다.
물론 바이에른에서 진행하는 학습이 있었지만, 1학년부터 그런 것에 매진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를, 혹시나 말하는 건데 바이에른의 심화 학습을 신청하지는 않았지?"
"아, 그렇지 않아도 교수님께서 권유하셨습니다."
"하게?"
"아쉽지만 저도 방학 때는 일정이 있어서 거절했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영지 쪽의 일도 있어서...."
라이프치히 영지는 겨울도 겨울이지만, 날이 좋아지는 봄, 여름 같은 경우에도 마수의 침입이 들끓었다.
카를 정도의 전력이라면 어지간한 기사에 달하는 수준.
라이프치히의 핏줄로서 영지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겸사겸사 본단도 점검하고 말이지.'
라이프치히 영지 쪽은 녹스가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제 작년 말과 같이 잡음이 새어 나오지 않게 무력적인 쪽으로 전부 찍어 눌러 산하에 들였다.
수도로 향하는 공급처의 심장이 되는데 이쪽부터 문제가 생긴다면 귀찮아지니 말이다.
"어, 그럼 못 놀러 가는 거야?"
"가능합니다. 미리 말씀만 해 주신다면 시간을 빼놓겠습니다."
"다행이네. 그럼 어디를 갈까. 바다? 산? 아니면 다른 곳?"
"당연히 바다지."
"나도 바다에 한 표. 남부 쪽에 내려가서 햇볕을 쬐면서 위스키 한 잔 마시면 그만한 행복이 없다."
"남부의 밤바다가 그렇게 예쁘다는데. 이참에 가 볼까?"
"그것도 좋겠지. 카를, 유리아 양이랑 레이시스 양도 괜찮으시려나?"
"저기 오고 있으니 물어보도록 하죠."
카를의 시선을 따라가니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온 레이시스와 유리아가 그들에게로 합류하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같은 그룹이 되어 버린 구성이었다.
"레이시스, 성적은?"
"지금 계산해 보게요."
에이미의 말에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레이시스는 아카이브를 켜서 곧바로 점수 계산에 들어갔다.
바이에른은 보통 시험이 끝난 직후 곧바로 점수를 알려 주는데, 정정이나 이의 제기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최종 결과와 큰 차이가 없었다.
레이시스 같은 경우에는 거의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기에 정정할 것도 없었지만.
"...714.5."
총 7개의 강의에서 만점을 얻었고, 14.5점이라는 추가 점수를 획득했다.
중간고사 때와 비교해도 성장했다고 할 수 있는 점수였기에 기대가 컸다.
"1학기 합산은?"
"중간고사의 점수가 698.2점이었으니까 1,412.7점이에요."
"어마어마하네."
막시밀리안은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저기에서 대충 400점을 빼면 얼추 비슷해지지 않을까.
최상위권은 만점을 대부분 만점을 뛰어넘은 점수대인지라 어나더 클라스라 할 수 있었다.
"네리안 군의 중간 점수가 707.1점이었지?"
"네. 그러니까 네라인 군이 705.6점 아래로 나오면 제가 1등을 할 수 있어요."
"흠...."
카를은 턱을 쓰다듬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 학기의 점수만 보자면 레이시스가 어마어마하게 노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창궁무애검법까지 배워가며 학업에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레이시스가 성장한 것처럼 네리안 역시 성장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쪽은 혈통도 혈통이었고 재능 역시 뛰어났으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타입이었으니까.
"결과는 언제 나오지?"
"정각에 발표한다고 했어요."
정각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3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들 테라스에 앉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아카이브를 확인했고 점차 줄어드는 시간에 집중했다.
"...."
생도 중 가장 긴장한 것은 당연히 레이시스였다.
1학년 1학기, 이때가 아니라면 네리안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할 테니.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면 서로의 격차가 커질 것이고, 졸업 때까지 권능까지 지닌 네리안의 뒷모습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삑.
곧 정각이 되었다.
레이시스는 떨리는 손끝으로 1학기 기말 시험의 순위 결과를 확인했다.
[1. 레이시스]
[2. 네리안]
[3. 루이스]
[4. 유리아]
.
.
.
"...!!!"
레이시스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카를이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에서 데스 나이트와 리치를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 주었을 때보다 더더욱 놀란 표정이었다.
"와!!!"
"축하해, 레이시스!!"
다른 생도들도 레이시스가 1학기 기말 시험의 순위 1등을 차지한 것을 보고 모두 환호를 내지르며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레이시스는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고 총합계를 계산했다.
"...아, 그래도 1학기 수석은 따내지는 못했군요."
네리안의 점수는 712.1점.
1학기 기말로만 따지면 레이시스보다 2점가량 낮은 게 되었다.
하지만 중간까지 합한다면 1학기 전체 성적을 두고 압도적으로 수석을 차지했으니.
"그래도 1학기 기말 시험의 1등을 한 게 어디야."
"맞습니다. 기말 수석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카를은 몇등이야?"
"전 13등입니다."
"...카를도 엄청 올랐네."
막시밀리안이 혀를 내둘렀다.
입학시험에서는 50등에서 시작하더니 중간 고사에서는 20등 중반, 기말에서는 10등대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 정도라면 2학기부터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 최상위권에 안착하는 게 아닐까.
"난 겨우 30위권 안에 들었네."
막시밀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성적을 확인했다.
바이에른은 1학기마다 성적에 따라 클래스가 바뀌었다.
상위 50명의 생도씩 나뉘어 인원을 구성하는데, 성적이 떨어진다면 그대로 하위 반으로 쫓겨 나게 되는 구조였다.
다른 이들은 다 A클래스에 있는데 자신만 B클래스로 내려간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터.
가까스로 안정권을 지켰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흠."
유리아는 1등이 떨어졌다.
원래는 레이시스에 이어 3등을 공고히 하려 했지만, 실기 쪽의 점수에서 루이스에게 밀렸다.
'점령전 때문인가.'
레이시스에게 상징을 빼앗긴 탓에 점수의 소실이 조금 있었다.
그 근소한 차이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이처럼 기뻐하는 레이시스의 모습을 보니 별로 상관이 없어졌다.
어차피 수석의 업적작은 깨진 지 오래였으니 이 순위를 유지하는 것만 할 생각이었으니까.
"이론 수석은 또 카를이구나."
"...압도적이긴 하네. 1학기 총 이론 수석은 범접할 수가 없어."
"조금 열심히 했습니다."
카를은 생도들의 칭찬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이론 차석은 레이시스였는데, 총합을 계산하면 그녀와 비교해도 30점 이상이 차이났으니 네리안과 레이시스 사이에 있는 격차 이상의 간극이 서로 사이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었다.
"카를, 다음 학기부터 잘하면 10위권 안쪽에도 들 수 있겠는데요?"
기분이 좋아진 레이시스는 카를에게 우스갯 소리를 던졌다.
사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이나 네리안 따위는 가볍게 제치고 압도적으로 수석을 차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바이에른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이론 쪽은 1학기의 고점을 갱신한 것으로 역대 점수 기록을 전부 깨부쉈다.
그러니 실기까지 잘한다면 정말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갈 수 있을 텐데.
어째서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레이시스는 카를이 못내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성적이니까.'
카를에게서 검술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카를이 여러 시험에서 자신을 위해 점수를 양보해 주지 않았더라면.
1학기 기말에서조차 네리안에게 밀려 2순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겠지.
탁.
책상 밑으로 손을 뻗어 카를의 손을 움켜쥔 레이시스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159화 고백 (1)
바이에른의 1학기가 모두 끝났다.
아직 시험이 남은 선배 생도도 있긴 했지만, 1학년 생도 대부분은 지긋지긋했던 시험의 주박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했다.
곧바로 고향에 내려간 이도 있었고, 밀린 잠을 몰아 자는 생도도 있었으며, 방학 기간 동안 진행될 추가 학습을 신청하는 생도도 존재했다.
탁탁.
카를은 전자에 가까웠다.
지금은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기숙사의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다시 바이에른에 돌아오는 건 방학이 끝날 무렵인 「발푸르기스의 밤」의 임시 소집 기간이지 않을까.
"할 일이 많군."
대충 짐의 정리를 끝낸 카를은 어깨를 가볍게 스트레칭해 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피곤에 찌들어 있던 바이에른 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찬 생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다들 즐기려는 듯 평소의 그 절제된 분위기가 없었다.
당장 1학년 생도만 해도 저녁에 종강 연회가 잡혀 있으니 당연한 소리였지만.
"...."
방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카를은 혼원일극신공의 운기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오리진을 대비하는 것이다.'
녀석들도 슬슬 바나베가 어떻게 되었는지 파악했을 것이다.
단순히 정찰만 하려 했던 의도는 아닐 터.
충분한 견적이 나온다면 예전처럼 녹스를 집어 삼키려 할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바나베를 쓰러뜨린 것이 영향을 끼치겠지.'
바나베는 꽤 높은 급의 뱀파이어로 보였다.
녀석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말살했으니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까.
더욱이 어쩌면 라한에 깃들어 있던 마인들과도 커녁센이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
베샤를 비롯한 마인들의 소식이 끊어졌기에 알아보라고 바나베를 보냈을 수도 있었고.
마인이든 마족이든 다 마계의 끄나풀이 아닌가.
같은 카테고리로 묶어 생각해도 그리 큰 문제는 없을 터.
'현재로서 가장 효율적인 대비 방법은, 성물을 소지하게 하는 것이다.'
마기와 신성력은 극상성이었다.
물론, 힘 대 힘으로 부딪힐 경우에는 더 많은 기운을 보유한 쪽이 우세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신성력이 마기를 압도했다.
녹스의 블랙 라벨 정도의 실력자라면 성물을 지닌 것만으로도 마물과의 싸움에서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터.
'이 부분에 관해서는 갤런에게 부탁해 놓았지.'
일반적으로 성물을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검이나 무기에 성수를 뿌리거나 바르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렇게 한다면 신성의 효과를 제대로 보기 어렵다는 것.
일반적인 마물은 괜찮겠지만, 바나베 정도 되는 괴물이 나온다면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 것이다.
갤런에게 방법이 있다니 일단 그쪽에 일임하고, 카를도 그 외적으로 방법을 찾아볼 셈이었다.
가장 좋은 건 성직자를 영입하는 것이었지만, 어느 성직자가 녹스 같은 뒷세계 조직에 들어오겠나.
갤런 정도 되는 남자가 아니고서는 말이다.
'녹스의 일이 끝난다면 라이프치히 쪽이다.'
곧바로 영지에 내려가 녹스의 시설 및 구조를 개편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살막의 방식을 차용해 나름대로 발전해 왔지만, 녹스의 세력이 커질수록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압도적으로 부족한 숫자가 바로 그 단점이었다.
음지의 다른 조직과 녹스를 비교하면 그 실질적인 숫자는 40%도 되지 않았다.
물론, 개인의 실력이 월등하고 세뇌와 암시가 깃들어 있어 배신할 염려가 없긴 했지만.
녹스를 키우려면 그 방식을 어떻게 해서는 개선해야 했다.
'지금의 방식으로는 화이트 라벨을 길러 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2, 3달에 한 번씩 수십 명의 인원이 충당되긴 하는데, 싸움 한 번 나면 그와 비슷한 숫자가 죽어 버렸다.
그렇다고 사리게 된다면 녹스의 확장에 제한이 걸릴 터.
대안으로 라한 같은 조직을 내세우는 것으로 방패막이를 했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똑똑똑.
생각이 깊어질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카를은 서둘러 운기를 끝냈고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에는 평소보다 한층 더 각을 세운 제복을 차려입은 막시밀리안이 있었다.
"카를, 자고 있었어?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던데."
"아, 벌써 시간이...."
카를은 창밖에 보이는 노을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운기를 하며 사고에 너무 집중해 있던 탓일까,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 버린 듯했다.
그래도 오늘만 날이 아니었기에 곧바로 재킷을 걸치며 막시밀리안과 함께 나갔다.
"평소보다 더 힘을 주고 꾸민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오늘은 기필코 한 명 꼬시고 만다. 학기 마지막 날이잖아. 다들 가드가 많이 내려갔을 때를 노려야지."
"에이미에게 권유할 생각이십니까?"
"...에이미? 갑자기 그 이름이 왜 튀어나와?"
막시밀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걔는 그냥 친구야. 서로 그런 사이로 의식한 적은 한 번도 없고."
"그렇습니까?"
카를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전보다 둘이 더 가까워진 것 같기에 슬쩍 찔러본 것인데 이런 반응이라니.
막시밀리안도 내심 느끼고 있던 걸까?
"하여튼, 이런 좋은 방학을 홀로 보낼 수는 없지. 카를 너도 마찬가지고."
"저도?"
"그래. 레이시스 양이랑 많이 친해졌잖아. 유리아 양도 그렇고. 아니면 다른 생도를 소개해 줄까? 주위에서 계속 슬쩍 찔러보던데. 너랑 레이시스 양이 정말로 교제하는 관계냐고."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한 번 도전해 봐. 솔직히 카를, 네가 꿀리는 건 없잖아."
막시밀리안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라이프치히 가문의 핏줄을 이은 제국의 귀족.
얼굴은, 분하지만 자신보다 살짝 잘생겼다고 인정했다.
성적도 이론으로는 레이시스를 뛰어넘을 정도로 우수하고, 실기 역시 상위권에 도달했다.
레이시스가 1학기 기말 수석이자 타국의 왕녀이긴 했지만, 카를이 못한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레이시스 쪽에서 기다리고 있을걸? 계속 그렇게 질질 끌면 비호감만 쌓여."
"...하하."
카를은 머쓱한 미소를 흘렸다.
막시밀리안은 그런 카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힘껏 잡아당겼다.
"내 말을 믿어 보라니까. 그리고 함께 여행이라도 가자. 방학 때."
"그게 목적이었군요."
"나 혼자 가면 긴장되잖아. 말동무할 사람도 필요하니까. 카를, 너도 그렇지?"
카를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왔네."
"막시밀리안, 그리고 카를까지."
에이미와 리엔이었다.
카를에게 팔을 두르고 있던 막시밀리안도 손을 들어 인사하려 했지만, 이내 제자리에서 우뚝 섰다.
"드레스입니까. 두 분 다 잘 어울리시는군요."
"고마워."
"어때? 여자들만 깜짝 파티로 드레스를 준비해 가자고 상의했거든."
"솔직히 남자 생도복은 정장으로서 괜찮은데 여자 생도복은 조금 밋밋하잖아?"
에이미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회전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붉은 색의 드레스 자락이 나풀거리며 살짝 올라갔다.
"...."
막시밀리안은 그때까지 제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는 모양새.
카를은 슬쩍 그의 눈앞에 손을 움직이며 막시밀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막시밀리안, 침 떨어집니다."
"...흡."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고개를 떨쳐 내며 가볍게 헛기침을 토해 냈다.
"잘, 잘 어울리네."
"칭찬이 늦어."
에이미는 작게 웃으며 그런 막시밀리안의 옆구리를 향해 장난스럽게 주먹을 내질렀다.
"게일이랑 포셔는 어디 있습니까?"
"먼저 가 있는다고 하던데. 저녁을 못 먹었다네."
"어지간히 배고팠나 보군."
막시밀리안은 옆구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에이미에게 손을 뻗었다.
"...?"
에이미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보며 갸웃하다 막시밀리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뭔데?"
"에스코트, 해 준다고. 연회에 가는 거잖아?"
"흠."
에이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라면 카를에게 해 달라고 자리를 옮겨 갔을 테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러기 싫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그 손을 붙잡았고, 함께 걸어가기 위해 나란히 섰다.
"그럼 저희도."
"어머, 고마워라."
카를의 손에 리엔 역시 작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는 함께 연회장에 도착하자 이전과는 상당히 분위기가 다른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1학기 마지막 연회라고 상당히 힘을 줬네."
"그러게. 이 정도면 저택에서 개최하는 거랑 동급이라고 봐도 되겠어."
먼저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온 막시밀리안과 에이미가 감탄을 토해 냈다.
연회의 개최를 맡은 건 당연히 루이스 쪽이었다.
애초에 그는 이런 행사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1학기 과정을 거치며 성격이 살짝 바뀌긴 했어도, 이런 기회를 놓칠 남자가 아니었다.
탁.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연회장 내부의 모든 불빛이 꺼지며 단상 위로 주목되었다.
곧 그 위로 올라간 루이스는 다른 남자 생도들과 달리 멋들어진 정장으로 꾸며 입은 모습이었다.
"치사하게 혼자만 꾸몄네. 그치?"
"하하."
귓속말을 해 오는 막시밀리안의 말에 카를은 가볍게 웃음을 내뱉었다.
"루이스입니다. 모두 연회에 참석해 준 걸 감사하게 생각하며, 한 학기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공교롭게도 학기의 시작과 끝에 진행되는 연회 모두 루이스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번 학기는 저로서도 예상치 못하게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인연들을 만났고, 새로운 경험도 했습니다. ...여전히 제 라이벌인 네리안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했지만 말이죠."
자조적인 그 말에 다들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네리안과 루이스의 라이벌 구도는 바이에른 이전부터 유명했던 것이었으니.
'많이 달라졌군.'
카를은 샴페인을 홀짝이며 그런 루이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네리안에게 밀린 열등감 덩어리가 꽉꽉 뭉친 채 응어리져 있었더라면 지금은 어딘가 그 족쇄들을 홀가분하게 떨쳐 낸 느낌이었다.
조금 전에 했던 말 그대로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아카데미 전체로 보자면 아직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지내 왔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게 된 이상 서로 모든 것을 만족하고 마음에 들어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찬란한 우리의 앞날을 위하여."
미리 정해 온 인사가 아닌, 즉흥적인 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툭툭 내뱉는 대단히 과감한 언사였다.
하지만 생도들 모두 학기의 마지막 날이라는 감상에 젖으며 루이스를 따라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짱!
곳곳에서 잔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를 역시 옆에 있던 생도들과 잔을 부딪치며 교류를 나눴다.
그 뒤로는 평범한 연회의 시작이었다.
이미 안면을 튼 생도들뿐만 아니라 이야기할 접점이 없었던 다른 생도들까지 인사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
그렇게 어느덧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찰나.
잠시간 바람을 쐬러 나가려던 카를의 뒤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카를, 할 말이 있어."
딸꾹.
술에 거나하게 취한 듯 보이는 유리아가 그곳에 서 있었다.
160화 고백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