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베아트리체의 검 (1)
꽈아악.
검은 손들이 카를의 몸을 조르며 그 살결을 힘껏 뒤틀었다.
마치 빨래의 물기를 짜듯 피를 쥐어 짜내기 위하여.
주륵.
녹스의 가면 밑에서 토해져 나오는 새빨간 피에 흑마법사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 가운데 카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고통에 겨운 목소리로 녀석에게 물었다.
"넌, 대체...."
"아아."
카를의 질문에 흑마법사는 두 팔을 들어올리며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곧 대륙에 내 이름이 뒤덮이게 될 것이다. 죽음을 내리는 벨루아라고."
"벨루아?"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간 축적되었던 우리의 울분과 고통, 그것이 거센 화마가 되어 대륙을 휩쓸어 버릴 테니. 감히 그 누가 내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쿵.
흑마법사 벨루아가 발로 바닥을 찍자 어둠을 뒤덮은 마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흑마법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상생을 해야 한다고? 흑색 마탑의 탑주라는 녀석이 머저리 같은 소리를 내뱉기는. 애초에 세상이 먼저 이쪽을 배척했는데 어째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
입가에 지어져 있던 웃음이 금세 분노로 뒤바뀌며 늘어져 있던 마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손가락 한 번 까딱한다면 거센 화마가 되어 이 숲을, 라이프치히를 그대로 불태워 버릴 터.
"오너라, 베아트리체의 기사여! 성녀의 목을 찢고 그 심장을 부순 죄로 지옥 가장 깊은 곳에 떨어진 검이여! 함께 이 대륙을...!"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주문을 외우던 벨루아는 돌연 움직임을 덜컥 멈췄다.
그의 시선이 옮겨 간 곳은 여전히 검은 손아귀에 속박되어 있는 카를이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지? 쇳덩이조차 찌부러뜨릴 수 있는 압력으로 조이고 있는데."
"내 몸이 쇳덩이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 아닐까."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카를은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녹스의 가면 사이로 번뜩이는 새빨간 안광이 벨루아를 직시했다.
"으, 으으으...."
천마신공의 귀화.
그저 흑마법을 익혔을 뿐인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기운에 벨루아는 아랫입술을 떨며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뿌득, 뿌드득.
카를은 가볍게 팔다리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그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검은 손들이 찢겨 나가며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툭.
바닥에 내려선 카를은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벨루아가 했던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흑마법사들이 대륙에 복수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넌, 대체?"
"그것까진 알 필요는 없다."
서걱.
카를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무형의 참격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 벨루아의 목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대답도 듣지 못한 채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을 때, 카를은 주위를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제인데."
소환 마법은 이미 발동하는 중이었다.
매개체는 아마 흑마법사들의 목숨과 피일 터.
이미 발동 중인 술식을 파괴하는 건 꽤 고난이도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스릉.
그래도 못 할 건 없었기에 천천히 검을 빼 들며 천마신공의 마기를 집중했다.
파아아앗.
오러 블레이드, 흑색 검강이 그 위에 나타나며 선명한 칼날의 형태를 이루었다.
카리우스나 다리우스가 보았다면 경악할 만한 광경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경지를 뛰어넘은 마스터의 전유물이었으니까.
쉬악─!
천뢰검이 무정한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압도적인 밀도를 자랑하는 검강은 그 가운데 걸린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흑마법사들의 시체도, 그들이 의식을 치르던 마법진과 제물이 바쳐진 재단도 모두.
콰아아앙!
그곳에 남은 건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흔적과 아무런 상처 없이 오롯이 서 있는 카를 뿐이었다.
휘릭.
가볍게 검을 휘둘러 먼지를 털어 낸 카를은 몸을 돌렸다.
일단 원흉을 제거했으니 영지와 이 숲을 배회하는 마수들도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겠지.
나머지는 돌아가서 천천히 정상화가 이루어지길 기다릴 뿐이었다.
"돌아가면 문책부터 해야겠군."
카를은 고개를 까딱였다.
흑마법사들이 나타났는데 녹스에서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녹스 비선망에 문제가 있거나 누군가 태만했다는 소리가 되었으니.
만일 문제가 없다면 조금 더 구조를 다듬을 생각이었다.
이와 같은 일이 또 있어선 안 되었으니.
"...."
그렇게 다시 나무 위를 박차며 앞으로 나아가던 중, 카를은 자신의 곁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자리에서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아무것도 없는 어두컴컴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달이 없다?'
오늘은 하프 문이었다.
반으로 쪼개진 2개의 달이 하늘에 매달려 있어야 했지만, 저 위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칠흑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
"...."
필시 흑마법사들의 술수에 휘말린 것이리라.
아까부터 앞으로 나아가도 풍경이 바뀌지 않던 것도 그 탓이겠지.
그렇기에 카를은 입을 열어 등 뒤까지 부닥친 기척에게 말했다.
"넌, 누구지?"
-....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세한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시커먼 연기를 마구잡이로 뭉친 것 같이 생긴 모습이었으니까.
'벨루아가 분명....'
베아트리체의 기사.
성녀의 목을 찢고 그 심장을 부순 죄로 지옥 가장 깊은 곳에 떨어진 검이라고 했었다.
베아트리체라면 카를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당장 바이에른 아카데미 입구로부터 광장까지 펼쳐져 있는 것이 그 유명한 베아트리체의 거리였으니까.
과거 대륙을 어둠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낸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성녀.
고대 영웅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더욱 유명했다.
다만, 대륙을 구한 것 이외에 그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래된 것인지, 아니면 소실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베아트리체의 기사라고 했었나."
쿵.
베아트리체라는 말에 반응한 것인지 연기 위에 한 차례 파문이 일었다.
"흑마법사들에게 소환된 것이라면 다시 돌아가도록. 녀석들은 내 손에 모조리 죽었으니."
카를은 검집 위에 손을 올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지막 흑마법사인 벨루아를 죽이고 마법진과 재단, 제물까지 모조리 파괴했는데도 소환 마법이 깨어지지 않은 것인가.
흑마법 중 가장 악랄하면서도 강력한 흑마법이 시전자 본인의 목숨을 바쳐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려 10명의 흑마법사가 제 목숨을 희생한 것이니 그만한 강함을 지닌 이가 소환된 것일 터.
대륙을 불태우리라 호언장담을 했으니 어느 정도로 강할지는 카를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체는.
"뭐?"
-...베아트리체는, 어디에 있지?
연기가 일렁이며 마치 사람의 입처럼 말을 토해 냈다.
카를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누군지 모를 이의 질문이 고뇌했다.
'골이 아프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카를은 고민에 잠겼다.
베아트리체, 성녀, 고대의 인물, 검, 죽음, ...배신?
곧이곧대로 베아트리체가 죽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은 확실했다.
'눈앞의 존재는 베아트리체가 어디에 있느냐 물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베아트리체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간 폭주하거나 광란을 일으킬 우려도 있었다.
그렇기에 침착하게 말을 고르던 카를은 평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모른다."
-모른다....
연기는 카를의 대답을 따라 했다.
다만, 한 번이 아니었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끊임없이 그 말을 반복하고 되뇌며 메아리처럼 읊었다.
-모른다고─!!!!!!!
갑작스럽게 일갈이 토해졌다.
마치 사자후를 쓴 것처럼 숲이 들썩일 정도의 여파였다.
카를은 내공으로 귀와 몸을 보호하고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틀렸나?'
조금이라도 낌새가 느껴진다면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기 위하여.
-모른다. 아니, 나는 알고 있다. 내 손으로 그녀를 죽였지.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던 베아트리체를. 죽어가는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모든 걸 이해한다는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으니. 그렇다면....
일렁이던 연기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난, 어째서 그녀를 죽였지?"
"...."
카를은 호흡을 중지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다는 것이 맞을 터.
조금 전까지 희끄무레하게 느껴지던 연기의 기척이 선명해지며 메아리가 아니라 육성 그대로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대답해라. 난 어째서 그녀를 죽인 것이지?"
"...내가."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서 이런 의미 없는 문답을 계속하는 것일까.
"그것을 어찌 알지?"
"모른다라. 너는 아는 것이 없군."
연기 사이로 드러난 얼굴이 피식 웃었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가운데 빛바랜 금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카를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는 옅은 푸른색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으니.
"다시 묻겠다."
스릉.
남자가 손을 뻗자 연기에서부터 한 자루의 검이 뽑혀 나왔다.
새하얀 검신 위로 거뭇거뭇한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카를은 그것이 베아트리체의, 성녀의 혈흔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하아."
카를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제멋대로인 질문은 흘려 넘기며 조금 전 자신이 찢어 죽인 흑마법사들에게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족속들이 빌어먹을 것을 남기고 갔군."
"그건 대답이 아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물었나."
카를 역시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어둠 사이로 드러난 천뢰검이 주변으로 퍼진 연기를 밀어내며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생사에 관한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묻는 것이지."
카를은 고개를 기울이며 눈앞에 나타난 남자에게 말했다.
"내가 묻지, 넌 나보다 강한가?"
쉬악─!
검이 휘둘러지는 낌새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기다란 참격이 휘둘러지며 조금 전까지 카를이 있었던 자리를 타격했다.
파스스.
검은 불꽃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형환위로 남자의 참격에서 벗어난 카를은 근처 나무 위에 걸터앉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베아트리체의 검이라고 했나. 너와는 그리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넌,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날 죽인다고?"
"베아트리체의 검은 그러한 의미이니."
"...베아트리체를 죽인 장본인이 그렇게 말하나?"
콰아아앙!
엄청난 충격파가 그 주위를 후려쳤다.
카를은 훌쩍 자리를 벗어나 숲을 내달렸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풍경에 입술을 씹었다.
'공간이 닫혀 있다. 다른 종류의 결계인가? 아니면 공간 마법?'
흑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마법에 갇힌 것일까.
아니면 눈앞의 남자가 이루어 낸 조화일까.
다른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서둘러 돌아가려 했었지만, 이래서는 쉽사리 몸을 빼내지 못할 듯싶었다.
"...안 되겠군."
짤막하게 숨을 토해 낸 카를은 천마신공을 거두고는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했다.
잿빛 기운이 전신에 타오를 때,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미친 살인귀를 영지에 풀어 놓을 순 없으니."
171화 베아트리체의 검 (2)
이 세계, 아르테니아는 양파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도 까도, 새로운 것이 나오는군. 참으로 흥미롭기 짝이 없어."
타다다닥.
나무 사이를 뛰어넘으며 빠른 속도로 숲을 질주하던 중.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녀석을 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중원에도 망령이니, 원혼이니 하는 것은 있었지만, 실질적인 능력을 지니지는 않았지.'
카를은 살수로서 수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에게 온 의뢰는 산 사람뿐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다시 죽여 달라는 의뢰도 있었으니.
괴력난신, 괴이,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무언가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간을 비롯해 이종족 같은 온갖 요소가 뒤섞인 아르테니아에서는 흔한 것일지는 몰라도, 중원에서는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져선 안 되며 마주치는 것조차 피해야 할 존재들이 많았다.
물론, 카를은 그들을 죽이는 데도 실패함이 없었다.
그랬더라면 중원제일살수라는 별호를 얻지 못했을 터이니.
쉬아아악─!
기다랗게 휘둘러진 검강이 굵직한 나무를 베어 가르며 뒤쫓아오던 연기를 가격했다.
그러자 희끄무레한 검은 연기밖에 없는 허공에서 불쑥 검이 튀어나오더니 손쉽게 그것을 상쇄해 버렸다.
'가볍게 내보인 게 저 정도라면.'
적어도 이쪽에 밀리는 하수는 아니라는 소리.
카를은 즉시 앞으로 질주하던 것을 멈추고는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녀석에게로 쇄도했다.
솨사사삭!
천원검법 팔 초식 천봉(千峯).
이 초식 천뢰의 섬격이 잘게 쪼개져 숲 위로 떨어져 내렸다.
눈으로는 쫓아갈 수 없는 쾌검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그리 힘들지 않게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툭.
그 앞에 멈춰 선 카를은 천천히 천뢰검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이름 없는 기사는 아닐 텐데."
"내 이름을 묻는가."
연기가 갈라지며 남자의 모습이 다시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선명해진 느낌에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점차 힘을 회복하고 있는 건가?'
처음 마주했을 때는 시체를 보는 것처럼 창백한 모습이었다.
지금 역시 창백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흐릿하던 외형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선명해진 느낌이지 않은가.
쉬악!
어찌 되었든 길게 끌어선 안 된다는 것은 분명했다.
녀석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기습적으로 땅을 박차며 지척으로 쇄도해 검을 휘둘렀다.
캉!
두 자루의 검이 충돌했다.
카를은 거대한 절벽을 때린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짤막한 숨을 토해 냈다.
"랜슬롯. 그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렸지."
"...호수의 기사?"
"날, 알고 있느냐. 그리운 이름이로구나."
카를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기사왕 아서와 원탁의 기사.
제국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과거 브리튼 공국이라 불렸던 약소 도시에 있었던 전승으로 알고 있었다.
'옛 전설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국의 역사와 고대 영웅을 조사하며 알게 된 이야기로, 학계에서는 가상의 전승이거나, 지방 설화에서 파생된 가설로 취급받고 있었다.
카를이 관련 분야를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
"기쁜 이야기로군. 아서의 죽음으로 우리가 세운 업적이 무너진 줄 알았거늘.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 있는 것인가."
랜슬롯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껏 보였던 살의와 광기가 잊힐 정도로 순수한 미소를.
'성녀 베아트리체와 원탁의 기사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건가.'
이 부분은 돌아가면 연구할 가치가 있을 듯했다.
둘이 연관이 있었다는 건 카를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니까.
캉!
카를의 검을 쳐낸 랜슬롯은 자신의 검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어째서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내가 이 땅에 다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해야 할 일은 명백하구나."
파아아앗!
새파란 기운이 검 위로 치솟으며 어두운 주위를 밝게 물들였다.
흑마법사들이 소환했다기에는 너무나도 밝고 깨끗한 기운이었으나, 곧 그 위로 음험한 마기가 뒤섞이며 점차 오염되기 시작했다.
"찬란했던 시대는 저물었고 원탁의 위명 역시 바닥에 꺾여 버렸지. 다시 그 이름을 세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람은 죽는 법이고 이름은 잊히는 법이니. 원탁이 역사의 뒤안길로 향했다면, 그것 또한 운명. 허나...."
랜슬롯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끊어졌어야 할 핏줄의 명맥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카를은 천천히 그 시선을 따라 녀석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가늠했다.
'라이프치히 저택?'
설마 백작인 아버지를 노리는 것일까?
라이프치히 가문도 시초로 올라가면 영웅의 반열에 들어선 존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원탁과 관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가증스러운 리베라의 피가."
"...."
리베라.
카를은 무언가를 퍼뜩 깨달았다.
랜슬롯이 바라보고 있는 건 라이프치히 저택이 아니라 제국의 수도인 폴포아르델이 있는 쪽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리베라 제국의 황제인 브랜틀리 폰 리베라가 있는 황궁이겠지.
"황제를?"
"무섭고도 무섭도다. 원탁이, 브리튼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싸웠음에도 리베라의 권세는 여전하구나."
"...."
카를은 미간을 찌푸렸다.
리베라 제국의 역사는 천년을 조금 넘었다.
고대 영웅과 맥락을 같이하니 베아트리체 성녀나 원탁의 기사와는 시대가 맞지 않았다.
그런 카를의 생각을 짐작한 듯 랜슬롯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리베라가 처음부터 제국이었겠느냐. 그들은 처음 브리튼의 옆에 붙은 작은 도시로부터 출발했다. 그 핏줄 특유의 탐욕과 영악스러움으로 주변 세력을 집어삼키고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지."
도시에서 왕국으로.
왕국에서 제국으로.
그 역사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길고 길게 이어져 지금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카를은 천뢰검을 들어 랜슬롯에게 겨누었다.
"우리가 누리는 권세가 자신들의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건가."
"설마."
랜슬롯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누구처럼 추잡스럽게 남을 질투하거나, 욕심부리지 않는다. 그저 있는 것을 소중히 하며 일상에서 오는 작은 것에도 감사를 전하지. 그런 브리튼을 불태운 건...."
리베라였다.
카를은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역사에 있어서 강대국은 악역이기 마련이다.'
제국에게 있어서 리베라라는 이름은 신성하며 고결하고 자랑스러운 것.
하지만 그 주변까지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땅을 넓히려고, 인재를 빼앗으려. 자원을 수탈하고 빼앗기 위해.
명분과 명목을 지어내며 불필요하며 무의미한 싸움을 몇 번이나 일으켰겠는가.
랜슬롯의 말이 사실이라면 브리튼은 그 여파에 휘말린 곳 중 하나이리라.
다만, 브리튼에는 원탁이 있었고 전설의 기사왕이라 불리는 아서가 있었다.
"그게 베아트리체 성녀와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간단하다."
쉭.
허공으로 내질러진 가벼운 일격.
카를은 검을 세워 그것을 막아 내면서도, 뒤쪽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전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당시 중간계는 마계로부터 침공을 받았다. 그 탓에 대륙 각국은 전쟁을 멈추고 힘을 모았지. 연합군을 결성했고 마왕의 군세를 막아 내기 위해 전쟁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가 문제였다.
교활하게 다른 국가를 앞세운 이들은 전력을 보존했고, 향후 10년간은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복구에 집중하자는 조약을 어기고는 약소해진 국가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었다.
리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마. 그렇기에 리베라는 악이다. 반드시 없애야 할."
"흠."
카를은 입가를 비틀었다.
"그러면 다른 이들은 어떻지? 리베라에 속한 시민들은?"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모든 것은 저 저주받은 혈통에게서 비롯된 것이거늘."
"설령, 제국의 귀족이라 할지라도?"
"리베라의 피가 섞여 있다면 단죄할 것이로다. 설령 성자나 성녀라 할지라도."
"...아쉽군."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랜슬롯이 황제만을, 리베라 제국의 핏줄만을 노린다면 순순히 보내 줄 생각도 있었다.
이 정도 강자와 맞붙는 건 그에게 있어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이프치히 역시 리베라의 핏줄이 섞여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과거 선대 당주 중 황족과 혼인해 일가를 이룬 이가 있으니까.
그 핏줄은 대를 타고 옅게나마 카를에게까지 이어졌을 터.
그렇다는 건 아버지인 라이프치히 백작이나, 다른 형제들까지 위험해진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황제만을 죽이겠다면 모를까, 그 핏줄까지 건드리겠다면 놓아줄 순 없겠군."
어차피 황제 곁에는 자신보다 더 강한 기사가 많다.
그러니 굳이 여기서 드잡이질을 할 필요 없이 놓아준다면 저쪽에서 처리해 줄 테니까.
하지만 카를은 검을 고쳐 잡으며 서서히 자신의 힘을 끌어 올렸다.
콰앙─!
천원검법 이 초식 천뢰(天雷).
랜슬롯이 발하는 검푸른 빛으로 물든 숲 가운데 샛노란 벽력이 터졌다.
이번에는 랜슬롯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고, 바닥에 선명한 흔적이 남았다.
"...."
랜슬롯은 깊어진 두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카를을 향했다.
"기묘한 검술을 쓰는군. 새로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가?"
"굳이 따지자면 다른 세상이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척.
랜슬롯은 다시금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주위에 흩뿌려지던 연기가 돌연 그의 몸에 몰려들며 두꺼운 갑주를 만들어 냈다.
한눈에 보아도 쉽게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형태의 갑주였다.
"호수의 요정에게서 부여받은 가호는 사라졌으나, 그래도 단단함을 자랑하는 내 방패이지."
탁탁.
랜슬롯은 자신의 가슴팍을 손으로 툭툭 치더니 몸을 낮추고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보아라, 이것이 원탁의 일좌이니."
"...기대되는군."
칠익이니, 팔익이니 하는 녀석과 싸운 적은 있었지만, 전설로 치부되는 원탁의 기사와 싸우게 될 줄은 카를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슬쩍 뒤쪽의 기척을 가늠했다.
영지를 나온 직후 이곳에 오기까지 녹스의 호위가 자신의 뒤를 밟았다.
공간이 격리된 걸 알게 되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시도를 했을 터.
'대역이라도 보냈으면 좋겠군.'
짧은 시간 안에 이곳을 벗어나는 건 어려워 보였다.
블랙 라벨의 간부라고 할지라도 이 결계를 넘어오는 건 불가능할 테니 차라리 저쪽에 자신의 대역을 보내 빈자리를 채워 주는 쪽이 옳았다.
콰아아앙─!
랜슬롯이 땅을 박차며 엄청난 기세로 돌진해 왔다.
마치 마상에 탄 기사가 거창을 든 채로 달려오는 것과 같은 압박감.
피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인지함과 동시에 이쪽에 다다른 상태였으니.
천원검법 일 초식 중경(重鏡).
카를은 유려하게 검을 뻗었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배로 받아치는 초식.
문제는 상대의 힘이 예상했던 걸 한참이나 웃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카가가각!
천뢰검 표면에 불똥이 튀며 듣기 싫은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카를의 신형은 계속해서 밀려 나갔고, 랜슬롯은 더욱더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던 차.
파앗!
돌연 카를의 검에서 새파란 기운이 치솟았다.
172화 베아트리체의 검 (3)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불합리한 것들과 맞서 싸울 순간이 종종 있었다.
중원에서 살수로 살아갈 무렵에도 마찬가지였다.
살수는 돈을 받고 대상을 처리해 주었다.
항상 쉽고 약한 상대를 고를 순 없었고, 명성을 얻고 경지에 오른 이후에는 항상 까다로운 대상이 주어졌다.
'순수한 무력으로 싸우면 내가 밀린다.'
그렇기에 항상 무력 이외의 점에서 대상을 공략해야 했다.
상대의 습관, 행동 양식, 사고, 교우 관계 등등 여러 요소를 파악해 하나의 줄기로 엮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인간이 아니라면 심리적인 저항감이 허물어지는 곳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
카를은 그 부분을 귀신같이 포착했고 날카롭게 파고들어 상대의 목을 베어 냈다.
'공략해야 할 점은 두 가지.'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랜슬롯의 무력은 분명 자신보다 더 뛰어났다.
과거 성녀 베아트리체의 기사로 있었던 실력자이니 마스터의 경지는 가볍게 뛰어넘었을 터.
그래도 흑마법사들의 소환 마법은 영구적이며 완전하진 않을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힘에 제약이 있을 터이고, 중간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에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불확실성에 의지하며 싸움을 이어 나가기에는 여러모로 변수가 많았다.
그러니 확실한 요소 딱 두 가지.
'하나, 기운의 상극.'
카를은 내기를 세밀하게 제어하며 두 개의 기운으로 나눴다.
하나는 명천신공과 천마신공이 합일을 이룬 혼원일극신공.
다른 하나는 카일로스로부터 빼앗은 신성.
천뢰검 위에 혼원일극신공으로 검강을 만들고, 신성으로 그 겉면을 코팅하듯 둘렀다.
'혼원일극신공은 아쉽게도 신성을 띄지 않으니.'
명천신공, 천마신공, 신성.
이 세 가지를 합일한 혼원일극신공은 이전보다 더 깊은 무게를 지녔지만, 조화를 이룬 합일 상태라 뚜렷한 신성을 띄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기에 효과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의도적으로 카일로스의 신성을 분리해 낸 것이었다.
'이렇게 한다면...!'
혼원일극신공의 힘을 살리며 신성으로 상대의 기운을 파훼할 수 있었다.
쩌억─!
예상했던 대로 천뢰검이 이전과 달리 제대로 된 위력을 내며 랜슬롯의 검을 쳐냈다.
주변 공간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질 정도로 거센 여파가 퍼졌을 때, 랜슬롯은 마기로 얼룩진 눈동자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신성? 팔라딘은 아닌 듯한데."
"내가 좀 비밀이 많은 남자라."
휘릭.
혼원일극신공과 신성의 조화.
자신의 수법이 먹힌다는 걸 확인한 카를은 멈추지 않고 연이어 공세를 이어 나갔다.
캉! 캉!
시퍼런 궤적이 허공에 새겨지며 물 샐 틈 없이 랜슬롯을 압박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계속해서 우위를 점하던 상대의 기세가 처음으로 주춤했고, 점차 뒤로 밀려나며 몸을 휘감고 있던 마기가 깎여 나갔다.
'지금!'
카각.
검을 엮어 앞으로 튕겨 내자 가슴팍이 드러났다.
힘껏 땅을 박찬 카를은 그 지척까지 쇄도하며 힘껏 일장을 뻗었다.
하지만 랜슬롯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유심히 카를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그도 손을 뻗어 카를의 일장과 마주했다.
콰앙!
묵직한 반동이 터지며 주변 땅을 뒤엎었다.
카를은 나풀거리는 자신의 소맷자락을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건가. 마나를 신기하게 다루는군."
마치 누군가 잡아 뜯은 것처럼 거칠게 뜯겨 나가 있었다.
랜슬롯의 기운이 이쪽의 장력을 파고들어 팔뚝을 헤집은 것이었다.
물론 랜슬롯 본인도 멀쩡하진 않았다.
그의 마기로 이루어진 갑주가 팔꿈치까지 파괴되어 창백한 맨살이 드러나 있었으니.
"그래서."
서로의 손을 맞잡은 상태에서.
카를은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요소 중 다른 한 가지를 입에 담았다.
"성녀 베아트리체는 왜 죽였지?"
"...."
랜슬롯의 표정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카를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시선은 어둠으로 물들었고 서늘한 살기만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까지 물으니 내가 더 궁금하긴 하군. 랜슬롯이여, 기사를 자처하며 어째서 베아트리체를 죽였나. 당대의 성녀로 칭송받는 이를 죽이는 건 그리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요소.
첫째는 상극의 기운으로 우세를 점하는 것이고.
둘째는, 격장지계로 상대의 흥분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상대의 역린은 베아트리체.'
고맙게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자신의 입으로 나불나불거렸으니 이용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감히."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였다.
잔잔하게 형태를 잡던 마기가 서서히 끓어올랐고 화산이 터지듯 주변으로 흘러내리며 이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 이름을 입에 담다니."
"아무것도 알지 못한 건 네놈이 아니었나. 아니면, 알면서도 물어본 것이고?"
카를은 검 끝을 기울이며 조소를 흘렸다.
"왜 그런지 알려 주지 않겠나? 나도 나름대로 역사에 관심이 많거든."
츠즈즈즈.
카를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서히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암류보를 밟으며 천천히 들끓는 랜슬롯의 빈틈을 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
랜슬롯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저 넋을 잃고 가만히 있는 것으로만 보였겠지만, 카를은 일절 방심하지 않은 채 칼끝을 벼렸다.
'이 주변 공간은 녀석에게 장악당해 있다. 살의를 드러내며 나아간 순간 포착당해.'
그러면 저 해일과 같은 분노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어디 간 좀 봐 볼까.'
카를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직접 닥쳐 가지 않고 검강을 쏘아 보내는 것으로 상대의 상태를 살폈다.
콰아아앙!
기다란 궤적이 랜슬롯 주위를 휩쓸었다.
처음에는 막는 것도 포기한 듯 가만히 있었지만, 불쑥 손을 내밀은 그는 자신에게 닥쳐온 검강을 맨손으로 붙잡으며 새빨갛게 물든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다.
"이제 보이는군."
쉭.
동시에 랜슬롯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카를 역시 다시 어둠 속을 가로지르며 거리를 벌렸지만, 뒷덜미를 붙잡는 손길에 두 눈을 부릅떴다.
콰아아앙!
머리부터 바닥에 박혔다.
이런 식으로 무력화된 것은 올해 처음이지 않을까.
녹스의 가면이 부서져 내리며 얼굴의 일부가 드러났다.
카가가각!
카를은 힘껏 검을 휘둘러 자신의 목을 붙잡은 랜슬롯의 팔을 베어 내려 했다.
하지만 강기가 휘몰아치는 천뢰검이라 할지라도 녀석의 팔뚝을 반절 정도 파고드는 것에 그쳤다.
"너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입에 담았다."
"우습군."
카를은 피를 토해 내면서도 조소를 흘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카가가각!
강기가 요동치며 녀석의 팔을 더더욱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랜슬롯의 검이 카를의 복부를 찔렀다.
푹.
힘껏 허리를 비튼 카를은 검의 궤적에서 장기를 빗겨 내며 최소한의 상처로 그것을 받아 냈다.
물론 검에서 치솟은 마기가 내부를 진탕시켰지만,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으로 그것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탓!
결국, 녀석의 팔을 베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카를은 손을 뻗어 마찬가지로 랜슬롯의 목을 움켜쥐었다.
파아아앗!
혼원일극신공과 어우러진 신성이 녀석의 몸에 직접 작렬했다.
검으로 베는 것보다 이쪽이 더 효과가 좋을 터.
치이이익.
자신의 몸이 녹아내리며 끓고 있음에도 랜슬롯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오로지 카를만을 응시했다.
'...먹힌다.'
하지만 카를은 자신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이를 악물며 신성을 불어 넣었다.
'기운이, 약해.'
하지만 카일로스로부터 빼앗은 신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갤런의 말에 따르자면 신을 믿는 신상에 따라 신성이 강해진다고 하는데, 카를로서는 카일로스를 믿을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자신을 믿었다.
'명천신공과 천마신공.'
심상의 공간.
그 안에서 카일로스와 싸울 때 자신을 대신해 나서 주었던 존재들.
명천신공이 형상화된 것 같던 그 커다란 세계수와 아마도 천마신공을 만든 초대 천마의 그림자를.
저저저적.
점차 미약해지는 신성과 함께 명천신공의 극음이 손끝에서 퍼져 나오며 랜슬롯의 육신을 얼렸다.
마찬가지로 신성에 뒤덮여 약해져 있던 그 몸은 안쪽부터 얼어붙기 시작했고 종래에는 힘을 줄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되었다.
마무리를 가한 것은 천마신공의 불꽃이었다.
화륵.
한 줄기 마화(魔火)가 치솟아 올랐다.
극음지기로 뒤덮인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질 좋은 장작을 찾은 듯 순식간에 덩치를 부풀리며 랜슬롯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스륵.
카를의 손아귀를 붙잡은 손이 서서히 풀려나갔다.
곧 랜슬롯의 형상은 머리부터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고, 커다란 덩어리의 형태로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
카를은 그대로 넘어졌다.
상당한 기력이 소진되었기에 바닥에 뻗은 그대로 누워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사아아아.
동시에 주위를 뒤덮고 있던 이질적인 기운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아마 랜슬롯과 함께 펼쳐져 자신을 가두던 모종의 결계일 터.
들끓는 내기를 진정시키고 피를 토해 낸 카를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참패로군."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패배.
비록 생사를 건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상대의 강함을 과소평가했고 치명적인 상황에 다다랐다.
마스터에 오른 직후 누구든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자만심이 불러온 결과.
그것은 카를의 목과 복부에 선명한 잔향을 남겼다.
스륵, 툭.
복부에 박힌 검을 빼내자 마찬가지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상처를 지혈하고 포션을 먹은 카를은 엉망이 되어 버린 자신의 꼴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싸게 막은 것인가."
원탁의 기사, 랜슬롯.
본래의 강함이 얼마였는지는 몰라도 도시를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강자였다.
정면에서 상대했더라면 어지간한 마스터로는 싸움이 불가능했겠지.
신성의 기운으로 찍어 누르고 베아트리체를 운운한 것으로 평정을 무너뜨려 만든 틈으로 겨우 승리를 취했다.
"...."
카를은 곧바로 눈을 감은 채 운기에 들어갔다.
급한 건 체내에 들어온 마기를 정리하는 것.
남은 신성과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이용해 이 이질적인 마기를 몰아내며 정상화에 들어갔다.
"...후우."
이윽고 한 차례 운기를 끝냈을 때 카를은 서서히 눈을 떴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랜슬롯과 싸우며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결계 안쪽이라 시간의 흐름이 밖과 달랐던 걸까.
숲 밖에서 느껴지는 부산스러운 기척도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을 보니 영지를 덮치던 마수 무리도 어느 정도 정리된 듯싶었고.
"꼴이 말이 아니군."
카를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자리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온몸에 얼룩진 피와 전투의 흔적.
그래도 자리를 비운 개연성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당분간 외출 금지를 당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찰나.
"...?"
카를은 수북하게 쌓여 있던 랜슬롯의 잔해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재 사이를 훑자 은백색 표면을 지닌 무언가가 드러났다.
"펜던트?"
펜던트 형태의 목걸이였다.
안쪽에는, 무언가 사진이 걸려 있었던 듯 다 타 버린 잿가루만 흘러내렸을 뿐.
"...."
그 안에 서린 기운에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진가는 펜던트 쪽인 듯했다.
173화 방학 (9)
촤아악!
대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새빨간 핏방울이 치솟았다.
벌써 수십 마리째 마수를 베어 가른 다리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대체 몇 마리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
카를을 비롯해 그의 수하들이 주변 마을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규합하고 얼마 있지 않아, 한 무리의 마수들이 그곳을 습격했다.
문제는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
목책을 정비하고 함정을 설치한 덕에 마수들이 침입할 경로는 한정되어 있었다.
라이프치히의 병사들과 자경단으로 어찌어찌 막아 낼 수 있었지만, 전투가 계속해서 지속된다면 언제까지 버틸지 장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도 그렇고....'
다리우스는 마수들을 베어 가르면서도 흘깃흘깃 주변의 기척을 훑었다.
주변 마을로 달려간 전령들이 곧잘 돌아온 반면, 카를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음에도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마수 무리와 마주쳤나?'
도망을 다니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이쪽만 해결한다면 자신이 도우러 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 잘못되었다면....
촤악!
다리우스는 또 한 마리 마수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냈다.
마치 자신의 나약한 생각을 채찍질하려는 듯 이를 꽉 깨물며.
"형님이 빨리 와 줘야 할 텐데."
마수 무리는 마을뿐만이 아니라 영지도 공격 중이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쉽사리 병력을 빼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었지만, 그 부분은 형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키잉.
그런 가운데 돌연 마수의 움직임이 돌변했다.
광기에 가득 차 미친 듯이 날뛰던 녀석들이 갑작스럽게 제자리에 우두커니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동족과 시선을 교환했고 종래엔 직전까지 맞서 싸우고 있던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저벅.
그러더니 힘없이 다리를 움직이며 몸을 돌리더니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아니라 마을을 습격하던 이들 전부.
"지금이...!"
"잠깐."
지휘관들이 총공격을 내리려는 찰나, 다리우스는 손을 뻗어 그의 말을 막았다.
전쟁에 관해서는 병사들의 경험이 더 많을지 몰라도, 마수 사냥에 관해선 자신 역시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살의와 광기가 느껴지지 않아.'
떠나가는 마수들의 뒷모습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직전까지 보였던 모습과는 아예 다른 모양새.
부서진 목책을 넘어 마을을 떠나는 와중 구태여 공격해 벌집을 쑤실 필요는 없었다.
척.
마침내 마수들이 전부 떠났을 때 다리우스와 병사들은 병장기를 내리며 짤막한 숨을 토해 냈다.
"녀석들이 왜 떠났을까요."
"...어찌 되었든, 우리는 할 일을 한다. 우선 부상자를 수습하고 목책을 정비하도록. 마수들이 다시 공격해 올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명령을 이행했다.
그 가운데 어둠 너머를 응시하고 있던 다리우스는 입술을 깨문 채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숲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자리를 비운 사이 마수들이 다시 들이닥친다면 마을은 더 이상 버텨 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다그닥, 다그닥.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저 멀리, 한 무리의 인영이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리우스는 즉시 마을 밖으로 뛰쳐나가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형님!"
"다리우스! 마을은 괜찮느냐!"
"한 차례 마수의 습격을 받았지만, 어찌어찌 막아 내긴 했어! 그보다 마을을 좀 지켜 줘! 난 카를을 찾으러 갈 테니!"
"카를? 카를을 찾으러 가? 설마 마을에 없는 것이더냐?"
"전령들과 함께 주변 마을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 했는데, 떠난 이후로 보이질 않아. 아무래도 마수 무리와 마주친 것 같은데."
"이런...."
카리우스는 낭패가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루덴 경. 마을을 방어해 주십시오. 저는 다리우스와 함께 노어 숲을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눈이 밝은 병사들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기사 루덴이 눈짓하자 날렵한 분위기의 병사들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한 카리우스가 그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설 찰나.
바스락.
근처에 있던 수풀이 들썩이며 인기척이 느껴졌다.
챙!
루덴은 물론 근처에 있던 카리우스와 다리우스, 그리고 다른 이들까지 모조리 검을 겨누었다.
이곳은 바로 직전까지 마수가 범람하던 곳이었으니까.
툭.
하지만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카를이었다.
"카를!"
"무사했었구나, 다행이...."
다리우스는 깊은 한숨을 토하며 동생을 향해 다가갔다.
"정의"의 시련을 통과하고 그 검까지 물려받은 동생이 고작해야 마수에 당할 리는 없을 터.
하지만 어렴풋한 어둠 가운데 드러난 동생의 모습은 그리 좋은 꼴이 아니었다.
"이런, 상처가."
"의무병! 치료를!"
"...괜찮습니다."
카를은 입가를 닦으며 좌중을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강제로 근처 나무에 기대어 앉혀졌고, 몸에 난 상처를 확인받았다.
"마수에게 당한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이 널 이렇게 만들었느냐."
카리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카를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꿰뚫린 관통상이었다.
뼈와 내부의 살이 드러날 정도로 깊은 걸 보니 까딱 잘못했다면 목숨을 잃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흑마법사들입니다. 마수를 조종해 영지를 습격하도록 시킨 건 노어 숲에 숨어든 흑마법사들이었습니다."
"...흑마법사?"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거라. 흑마법사들의 위치는 어느 쪽이지?"
다리우스는 곧바로 달려 나갈 듯 다리를 굽히며 말했다.
카를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로 큰 문제였다.
흑마법사는 단 몇 명으로 하나의 영지를 망가뜨릴 수 있는 위험 분자였으니까.
하지만 카를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형님들을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전부 죽었으니까."
"설마...."
"흑마법사들과 싸우느라 생긴 상처인 것이냐?"
"싸우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흑마법사들이 무언가를 소환하려는 의식을 치르고 있었더군요. 그걸 방해했을 뿐입니다. 흑마법사들은 의식을 실패해서 전부 죽었는데, 소환진에서 튀어나온 마물과 싸우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물은...."
"소환이 불안정했는지 시간이 지나자 사라졌습니다. 숲 안쪽에 흔적이 전부 남아 있으니 날이 밝고 난 뒤에 확인해 보면 될 듯합니다."
카를은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짤막한 숨을 토해 냈다.
랜슬롯과의 격렬했던 사투는 이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숲에 흔적이 남질 않았다.
숲에 남아 있는 건 흑마법사들이 소환 마법의 의식을 진행한 흔적과 조금의 전투 흔적뿐.
상황을 꾸미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녀석들에게 덮어씌우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흑마법사라니."
"이거, 예삿일이 아니군."
"그렇다면 영지를 공격하던 마수들이 물러난 것도 흑마법사들의 죽음으로 세뇌가 풀린 덕이겠군요."
루덴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추고 발걸음을 돌리는 마수들의 모습은 이질적이기 그지없었으니까.
흑마법사들의 죽음으로 세뇌가 풀려서 제정신을 찾았다는 것이 유력해 보였다.
"잘했다. 네가 수많은 사람을 구했어."
카리우스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보냈다.
"형님, 그래도 일단 카를을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상처도 심하고 흑마법사들에게 당했다 보니 후유중이 있을지도 몰라."
"그렇군. 얼른 돌아가서 신관에게 검사를 받도록 하자. 아버지께 보고도 드리고."
"알겠습니다."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급처치를 받은 덕에 이전보다 움직이기 한결 수월해진 건 덤이었다.
"...."
형제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숲을 떠나던 중, 카를은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아 있었기에.
하지만 자신의 흔적은 완벽하게 지웠고 그 과정에서 실수는 없었다.
그러니 단순 기분 탓이라고 여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 * *
마수의 습격으로 인해 라이프치히 영지에 내려진 비상사태는 동틀 무렵에 끝을 맞이했다.
기사들과 함께 성벽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라이프치히 백작은 카를과 그 형제들이 가져온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노어 숲에 흑마법사가 있었다고?"
"당장 기사단을 보내 조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흑마법사는 바퀴벌레 같은 족속들. 의식을 치르던 녀석들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라이프치히 백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의 지독함은 그 역시 과거에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영지에는 존재해서는 안 될 암 덩어리였으니, 발견한 즉시 뿌리 뽑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방침도 흑마법은 용납지 않는 것이었으니.
동이 트자마자 성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기사단이 노어 숲으로 향했다.
반대로 저택에 귀환한 카를은 대지 교단의 사제에게 치료를 받았다
사아아아.
새하얀 신성이 몸에 스며들자 잔여 마기가 씻겨 나가며 육신은 다시 원래의 활력을 되찾았다.
대지 교단의 사제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라이프치히 백작에게 말했다.
"흑마법사들의 마기는 지독하군요. 제가 보유한 신성의 반절을 사용한 끝에 겨우 정화했습니다. 며칠간 성수나 포션을 섭취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고맙소."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감사드리는 바이지요. 간악한 흑마법사의 음모를 꿰뚫고 저지까지 하셨으니."
사제의 말에 카를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깝군. 나머지는 마공을 이용해 흡수하려 했거늘.'
랜슬롯에게 당한 마기가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신성으로 해소하지 못한 마기는 신공의 힘으로 잡아먹으려 했지만, 형제와 부모의 성화 탓에 성직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몸 안쪽의 기운까지는 완전히 정화하지 못했으니 아쉬운 대로 이쪽을 흡수하면 될 터.
"잘했다, 카를.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저택에서 요양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카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급한 일은 대충 끝났고 나머지는 보고를 받으면 끝이었다.
그리고 방금 대지 교단의 사제에게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으며 깨닫는 바도 한가지 있었다.
'다른 종교의 신성을 흡수하니 카일로스의 신성에도 영향이 가는군.'
그 주인의 성정답게 다른 신의 신성을 흡수하려는 걸까, 아니면 배척하려는 걸까.
소량밖에 남지 않은 카일로스의 신성이 조금이나마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제님."
"예, 카를로스 도련님. 말씀하시지요."
"나중에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 신성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는데."
"오호."
그런 카를의 물음에 사제는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실상은 신성의 비밀과 운용법을 베껴 가려는 의도였지만, 카를의 질문을 종교와 신에 관한 질문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대지 교단의 사제는 가슴 앞에 성호를 그으며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교회의 문은 어린 양들에게 활짝 열려 있으니 말이지요.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제들이 친절히 맞이해 줄 겁니다."
라이프치히 백작이 어여뻐하는 막내 도련님이다.
종교적인 이유를 제외하고서라도 라이프치히에 뿌리를 내린 지부로서는 가깝게 지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예, 그러면 그때는 잘 부탁드립니다."
다만, 그것이 어린 양인지 아니면 속내를 감춘 음험한 늑대인지는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174화 신사업 (1)
흑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한 카를은 그대로 저택에서 며칠간 요양하는 시간을 보냈다.
체내에 들어온 대지 교단의 신성력과 랜슬롯의 마기를 연구하는 시간을 보냈고, 머지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흠."
랜슬롯에게 당했던 상처는 말끔히 회복한 상태였다.
내부를 파고든 마기는 천마신공으로 전부 흡수한 뒤였기에 느껴지던 이질감도 사라졌다.
'다른 마기라 할지라도 천마신공과 잘 어울리는군.'
천마신공으로 악마의 마기를 흡수한다는 건 처음 시도하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름만 비슷하지 아예 다른 성지를 품은 기운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스터 경지에 오르며 모종의 깨달음이 있었고, 악마나 마족의 마기 역시 혼원일극신공을 이루는 갈래의 하나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마기 자체를 흡수했다가는 신체나 정신이 오염될 터이니 비슷한 기질인 천마신공을 이용했으니.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시너지를 보이고 있었다.
"카를, 더 쉬지 않아도 괜찮겠느냐.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을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마기는 대지 교단의 사제 덕분에 전부 씻어 냈고, 이제 흉터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침 식사 와중 우려를 표하는 아버지의 말에 카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라이프치히에 돌아온 지 1주가 지났다.
이 이후로는 외부 일정이 계획되어 있기에 오늘부로 얼마간 밖을 떠돌 생각이었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문제없을 겁니다."
"카리우스, 넌 떠날 채비는 다 하였느냐."
"식사만 마친 뒤 곧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서둘러야죠."
카리우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영지를 습격한 마수 무리 때문에 그는 기사단으로의 복귀를 얼마간 유예했다.
휘몰아치는 불꽃의 기사단 역시 영지의 사정을 헤아려 주어 카리우스의 휴가를 늘려 주었다.
하지만 이제 마수도 대부분 토벌되었고, 남은 무리도 노어 숲 깊은 곳까지 도망쳤기에 더는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카를, 넌 언제 출발할 거니?"
"저도 식사 후에 곧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수도로 갈 예정이었지? 그럼 같이 가자꾸나."
"알겠습니다."
카를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에른의 다른 생도들을 만나기 전에 수도의 녹스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여름 방학의 가장 큰 과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향후 녹스의 성장 발판이 달린 사안이었으니까.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카를은 부모님과 가문의 가신들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섰다.
"하암."
밤늦게까지 수련을 하다 잠이 든 다리우스 역시 떠나는 두 형제를 배웅하고자 마차에 동석 중이었다.
다만, 연신 하품을 내뱉는 꼴이 조금만 방심한다면 그대로 잠에 빠져들 모습이었다.
"그리 졸리다면 저택까지만 배웅해도 되는데."
"됐어. 하나도 아니고 둘이 가는데 게이트까지는 나가야지."
"난 그렇다 쳐도 카를은 방학이 끝나기 전에 다시 돌아올 예정이잖아."
"그때는 내가 없을 거야. 일주일 후에 다른 곳으로 수련을 떠날 생각이니까."
"수련? 어디로?"
"아직 정확히 정해지진 않았는데 학기가 다시 시작할 때까지 진득하게 머무르려고."
"끝날 무렵에는 얼굴이라도 비추고 가거라. 부모님께서 쓸쓸해 하신다."
"쓸쓸은 무슨."
다리우스는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세 형제가 도란도란 떠드는 사이 마차는 곧 텔레포트 게이트 앞에 멈춰 섰다.
라이프치히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그들은 순번을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게이트에 섰고 다리우스의 배웅을 받으며 수도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
"이제 이쪽 걱정은 그만하고. 형님 앞길이나 신경 쓰셔. 괜히 다른 곳에 한눈팔았다가 선임들한테 혼날 수도 있으니까."
"네가 나에게 조언하기에는 백 년은 이르다."
끝까지 티격태격하는 형제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린 카를은 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카를, 너도 몸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편지 보내라."
가벼운 작별 인사를 끝으로 카를은 순식간에 제국의 수도, 폴포아르델에 도착했다.
"...."
게이트 밖을 나서자 라이프치히와는 차원이 다른 인구 밀도가 그를 반겼다.
조금 전까지 입가에 서려 있던 훈훈한 미소를 순식간에 지워 낸 카를은 단조로운 걸음걸이로 게이트를 나섰다.
"마스터."
발 디딜 틈도 없는 인파 사이 누군가 카를의 앞에 다가섰다.
별다른 특색 없는 여성의 모습으로 변장한 나인이었다.
그녀는 카를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보폭을 맞추며 나란히 앞에 섰다.
"준비는?"
"완료했습니다. 다만, 세븐이 실신했습니다. 아무래도 잦은 야근으로 인해 몸에 무리가 간 듯합니다."
"세븐답군."
카를은 피식 웃었다.
명령을 완수해 내기 위함이라기보단, 연구 자체에 푹 빠져서 쉬는 것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세븐은 괴짜 기질이 있는 마법사이자 연구자였으니까.
"가도록 하지."
카를은 나인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다만, 이번에는 녹스가 아니라 메데이라 상회 쪽의 건물이었다.
메데이라 상회는 타국에서 들어와 라이프치히를 기점으로 성장해 수도까지 진출했다는 배경을 지녔다.
그 과정에서 라이프치히 가문의 핏줄인 카를로스 라이프치히와 인연이 생겼고, 상회의 셋째 후계자인 갈락 메데이라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는 배경을 구축했다.
실상은 갈락 메데이라 역시 카를의 비밀 신분이었지만.
이곳에서 카를의 포지션은 메데이라 상회의 초기 투자자임과 동시에 파트너, 그리고 보증인이었다.
타국의 상회가 제국에 들어와 활동하기 위해서는 제국 귀족의 보증이 필요했다.
라이프치히 백작은 카를을 위해 기꺼이 가문의 이름을 빌려주었고, 메데이라는 그것을 발판으로 세력을 부풀려 결국 수도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철컥.
상회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열리며 내부가 드러났다.
양옆으로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직원들이 카를의 상회 방문을 환영했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내부 조직원이 모두 녹스의 관계자인 것은 아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끄나풀도 있었기에 카를은 라이프치히 가문의 핏줄이라는 역할에 충실하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그때 위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검은 원피스 위로 새빨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작금 메데이라 상회 폴포아르델 지부의 총책임자이자, 내부에서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 점찍어지고 있는 제인 지부장이었다.
카를의 또 다른 신분 중 하나인 갈락에게는 몇 살 터울의 누이로, 진짜 신분은 녹스의 블랙 라벨 중 한 명이었다.
블랙 라벨은 단순히 무력만 강할 필요는 없었다.
상재나, 공부, 마법을 비롯해 다른 연구에서도 특출난 능력을 지녔다면 얼마든지 올라올 수 있는 위치였다.
제인은 뛰어난 상재(商材)로 블랙 라벨에 오르고, 녹스의 기둥뿌리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제인 지부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봐야 고작 몇 주인데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바로 올라가시죠. 새로운 사업 아이템은 이미 준비해 놓았어요. 직접 보고 판단해 주시죠."
제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감을 표출했다.
물론, 의도적인 연출로 일꾼 사이에 숨어 있는 다른 끄나풀들로부터 소문을 퍼트리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대 중입니다."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인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상회의 최상층에 다다라 지부장실로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하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 내부는 상회에서 유일하게 카를이 직접 설계한 곳으로 외부의 침입이나 감청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애초에 카를 본인의 감각을 속이고 이곳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준비는?"
"이것입니다."
달칵.
곧바로 공손한 태도를 취한 제인은 준비한 상자를 꺼낸 뒤 뚜껑을 열어 카를 앞에 내밀었다.
안쪽에 들은 건 고운 포장지에 쌓인 엄지손톱만 한 작은 단약이었다.
"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가를 비튼 카를은 그것들 중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몇 번 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르르 녹아 액체가 되어 버리더니 목구멍 안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동시에 적잖은 내기가 단전에 들어서며 선명한 존재감을 보였다.
잠시간 눈을 감은 채 그것을 음미하던 카를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군."
"...아!"
제인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찼다.
녹스의 재정 일축을 책임지는 메데이라 상회의 야심작.
그것은 다름 아닌 중원의 단환 종류였다.
'처음에는 무엇을 유통할까 고민했었지.'
대륙의 내로라 하는 상회는 저마다 강세인 품목이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유통만 해서는 대륙의 손꼽히는 상회로 거듭나는 건 불가능했다.
어느 하나든 주력이자 강세로 미는 품목이 있어야 단단히 자리를 잡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후발주자인 메데이라는 카를의 경험과 재능 넘치는 천재들의 경영 전략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지만,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특출난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처음에는 중원 문화의 물품이나 양식을 팔려고 했지만.'
그것들은 기껏해야 한 때의 유행을 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베껴 가거나 카피하기도 쉬웠고.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다름 아닌 영약 사업이었다.
이곳 아르테니아에도 영약이나 비슷한 부류가 있긴 했지만, 그리 흔하지 않았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나석이겠지.
당장 빙정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 빙결의 결정이 단순히 장식품 같은 사치 물품으로 돌아다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도처에 귀중한 물품들이 널려 있다는 소리지.'
그러니 카를은 아르테니아의 것들로 영약을 제조하기로 하였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중원의 재료와 아르테니아의 재료를 비교해야 했고, 비슷한 것들을 찾아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단번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함과 동시에 선두 주자로 나설 수 있을 터.
다른 곳들은 감히 따라 하지 못한 채 메데이라가 내려주는 영약만 유통해야 할 것이다.
"일단 3개의 모델로 구축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수련을 돕는 증진단, 급한 상황에서 내공을 채워 주는 비상단, 병에 걸린 몸의 기력을 회복시켜 주는 활력단입니다."
"말한 대로 여력은 두었겠지?"
"그렇습니다. 시중에 풀 제품은 모두 1.5세대의 물품입니다. 녹스에서 사용할 예정인 영약은 3세대까지 개발이 완료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질 좋은 영약을 풀 생각은 없었다.
카를이 노리는 건 주로 낮은 랭크의 모험가나 용병들.
포션과 함께 필수로 사용하는 소모품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며 천천히 시장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다만,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양산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최신 버전의 영약은 녹스에서 사용하고, 양산이 성공한 열화판부터 값싼 가격에 풀고 점차 시간이 지남에 성능이 뛰어난 영약도 풀어 갈 생각이었다.
"시장 전반을 장악함과 동시에 귀족들 쪽으로도 영향력을 흩뿌리는 것도 중요하다. 몸에 좋다면 독도 마다하지 않고 먹을 이들이 수두룩하니까."
돈이 썩어나는 부호들.
제국에는 그들이 지척에 널려 있었다.
건강과 정력, 이 두 가지만 제대로 공략한다면 대히트를 치는 것도 아닐 터.
"마나 비즈(Mana Beads). 이것이 앞으로 우리 상회의 주력 물품이 될 것이다."
175화 신사업 (2)
사흘.
녹스가 메데이라 상회를 통해 내놓은 마나 비즈의 소문이 폴포아르델 사교회에서 퍼진 데는 단 사흘이면 충분했다.
"마나 비즈는 있지 않았나? 그리 효율이 좋진 않아서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이번에 나온 건 다르네. 한번 먹어 보겠나?"
"메데이라 상회라. 거기 장식을 몇 번 산 적이 있어서 알고 있지. 라이프치히에서 올라온 곳이었던가?"
"처음에는 국외에서 들어왔다고 하던데. 그래도 제국 쪽으로 무게를 옮긴 듯하더군."
"하긴, 다른 곳에서 파는 것보다 제국 내부가 압도적일 테니까."
"수도까지 진출한 걸 보면 나름 저력이 있는 듯한데?"
귀족들은 새로운 마나 비즈의 출현에 제법 관심을 보였다.
기존 마나 비즈는 너무 비쌌고 성능도 떨어져 비효율적이었다.
비상시에는 차라리 포션 한 병을 더 마시는 게 나았을 정도니까.
값은 포션보다 비싸고, 성능은 포션보다 떨어지고.
휴대성이 간편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점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 한번...."
까득.
재미난 것을 좋아하는 귀족 한 명이 누군가 꺼내 놓은 마나 비즈를 입 안에 넣고 깨물었다.
설령 마나 비즈가 엉망이거나 잘못된 것이었어도 해결할 자신감이 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어떤가?"
"블루 비즈는 포션과 같은 효과였지? 마나를 보충해 준다고 하던데."
"자네, 말 좀 해 보게."
"...."
다른 귀족들의 재촉에도 마나 비즈를 씹은 그는 움직임을 멈춘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입 안에 들어간 비즈를 계속해서 씹으며 음미할 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얼굴은 괜찮은데."
"어이, 이봐. 여기 치료사를...."
"괜찮네."
마나 비즈를 씹어 넘긴 귀족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명백한 놀람이 깃들어 있었으니.
"어떤가?"
"이게 마나 비즈라고?"
귀족은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비즈를 꺼내 쥐었다.
"마나 포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데?"
"볼품이 없었군."
"하긴, 원래도 포션 쪽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래도 새롭게 출시한 것이니 이전보다는 괜찮지 않은가?"
다른 이들의 말에 귀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대네. 마나 포션 쪽이 뒤떨어진다고. 예전 것과 비교도 안 되는 성능이네. 메데이라 상회라고 했나? 어이! 이걸 가져온 분은 누구신가? 곧바로 구매하고 싶은데!"
"...그 정도라고?"
"잠깐, 나도 하나 먹어 보지."
"아니, 이건...."
"마나 비즈라, 이 정도 효과라고?"
마나 비즈의 효과는 확실했다.
기존에 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되었고, 같은 가격대의 포션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가성비를 지녔다.
특히 보관도 쉬웠기에 번잡스럽게 포션병이나 파우치로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는 것이 강점이었다.
"이건 획기적입니다! 이 작은 비즈에 저 정도 마나를 농축하다니!"
"기운도 깨끗합니다. 정제 기술력이 엄청나군요. 아마 제국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 아닐까."
"당장 매입해야 합니다. 곧 이 사실이 알려지면 수요가 엄청나질 겁니다."
제국 마탑을 비롯해 명망 있는 연구자들 역시 마나 비즈가 안전하고 효과가 뛰어나다는 의견을 쏟아 내었다.
영약과 약초를 뭉쳐 만든 것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 기반에는 녹스의 치밀한 여론 조작과 수많은 뇌물이 오간 덕도 있었지만, 마나 비즈의 효과는 확실했기에 부정적인 의견은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입과 펜대에 막대한 금화가 처박혀 움직임을 멈췄지만.
"좋군."
일주일.
수도가 열광하며 마나 비즈의 주문이 쇄도하는 데는 단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심지어 제국 황실, 기사단, 마탑, 바이에른 아카데미까지 앞다투어 주문을 넣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물량은 어떻게 풀까요?"
"위쪽부터. 최우선 순위는 황실과 관련된 곳으로 시작한다. 바이에른 아카데미도 풀어 주고."
"알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든든한 연줄을 많이 만들 수 있겠네요."
메데이라 상회의 수장인 제인은 기쁜 미소를 지었다.
"나머지는 퀸에게 명령을 받으며 처리하도록."
"받들겠습니다."
뼈대는 세웠으니 나머지는 살을 붙이면 되는 일이었다.
상재 쪽은 자신보다는 퀸이 더 적합했으니 그녀를 필두로 밀어주면 되는 것일 터.
"조심히 옮겨!"
"오늘도 주문이 미친 듯이 왔군."
"우리도 보너스도 있다는데?"
"그건, 정말인가?"
상회에서 일하는 일반 직원들도 활기가 넘쳤다.
상회가 잘되면 그들 역시 적잖은 돈을 벌 수 있으니 기대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음지에 뿌리를 내렸고, 메데이라 상회는 양지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했다.
서로 함께 시너지를 내어 차근차근 제국의 빛과 어둠 가운데 세력을 키워 나갈 계획이었으니.
끼익.
조용히 상회를 나선 카를은 단조로운 발걸음을 옮겼다.
일주일간 상회에서의 일정을 끝냈으니 다음 일정을 위해 이동해야 했다.
베아트리체의 길을 넘어 카를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바이에른 아카데미였다.
"아, 왔네."
"카를!"
아카데미 입구에 유리아와 레이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방학이 시작되고 몇 주가 지난 날이었다.
고향이나 가문으로 돌아간 생도들과 달리 둘은 여전히 바이에른에 체류 중이었다.
유리아는 바이에른에서 진행하는 연구와 과제가 남아 있었고, 레이시스는 구태여 알포람 왕국으로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돌아오라는 서신은 연이어 날아들었지만, 가 봤자 또 쓸데없는 혼담 이야기나 나눌 것이 분명했기에 전부 모아 불에 태워 버렸다.
"두 분 다 잘 지내셨습니까."
"과제랑 연구에 파묻혀서 일만 했지."
"전 잘 지냈어요. 카를도 얼굴이 더 깔끔해진 것 같네요. 고향에 내려갔다가 오니 좋으셨나 봐요."
"그것도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마수의 습격이 있었던 터라."
"마수?"
"흑마법사들이 마수를 움직여서 공격해 오더군요."
"그사이에 또 그런 일이."
레이시스는 그런 일이 있었냐며 놀란 표정을 지은 반면, 유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흑마법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할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건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고 일단 이동하죠. 텔레포트 게이트의 예약 시간이 곧 다가옵니다."
"그러자."
그들은 수도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다른 영지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제국의 동남쪽에 위치한 알트하우젠.
널찍한 바다와 관광지, 그리고 검술로 유명한 곳이었다.
"오."
텔레포트 게이트에서 내려서자마자 짭쪼름한 공기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햇살은 따사롭다기보단 뜨거웠고 건조했다.
"이곳이 알트하우젠인가요."
"입구에서 기다린다고 했었는데, 아, 저기 있군요."
레이시스와 유리아에 이어 게이트에서 내려선 카를은 입구 쪽에서 기다리던 이들을 발견했다.
"카를!"
막시밀리안을 비롯해 평소 어울리던 생도 친구들이었다.
방학 도중 한 곳을 정해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는데, 생도 중 한 명의 영지인 이곳 알트하우젠으로 결정되었다.
넓은 바다로 유명했고, 주변 시설이 잘 발전되어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덥지? 얼른 저택으로 가자."
"알트하우젠의 햇볕에 1시간 서 있으면 바싹 말라 버린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둘도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자자, 마차에 타자."
카를과 레이시스, 그리고 유리아.
막시밀리안, 에이미, 리엔, 포르저, 게일.
널찍한 마차에 7명의 생도가 탑승한 채 알트하우젠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바다로 유명한 관광지답게 많은 사람이 여행을 와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인파에 레이시스는 혀를 내둘렀다.
"알포람에도 바다로 유명한 곳이 있긴 한데, 이 정도 인파는 아니에요. 어마어마하게 많군요."
"응? 이 정도는 많은 것도 아닌데요? 아직 본격적인 여행 시기가 아니라서 맛보기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맛보기요?"
레이시스는 막시밀리안의 말에 한 번 더 놀랐다.
이 정도 인파가 맛보기라니, 과연 제국다운 스케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참, 다들 이것 좀 봐 주십시오."
레이시스와 마찬가지로 창밖을 구경하던 카를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다들 무언가 싶어 시선을 모으자 카를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쪽에서 나타난 건 6개의 작은 구슬이었다.
"어? 이건!"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당연하게도 마법사인 포르저였다.
마법사답게 마나 비즈를 알고 있었고, 근래 도는 소문 역시 주워 들은 바가 있었다.
"이게 뭔데?"
"마나 비즈. 최근 다시 유행하고 있거든."
"마나 비즈? 그거 별로 안 좋은 거 아니야? 포션에 비해 떨어져서 사장되어 가는 분야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건 맞는데, 이번에 메데이라 상회에서 새로 내놓은 것이 있어. 그것 때문에 수도가 난리가 났지. 너희들이 이곳에 있어서 소문이 늦은 거야. 이걸 6개씩이나 구하다니."
포르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아도 하나를 구매하는 데 걸린 대기열이 까마득했다.
그 역시 연줄을 이용해 어떻게 좀 빨리 구매할 수 없을까 알아보았지만, 마탑이나 유명한 세력 쪽에 납품할 것도 밀리는 와중에 일개 생도에게 차례가 올까.
어떻게든 연구해 보고 싶어 손가락만 빨고 있을 찰나, 카를이 그것을 손수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 귀한 걸 어떻게 구했어?"
"메데이라 상회와 라이프치히 가문은 밀접한 관계입니다."
"아! 메데이라가 처음 들어온 곳이 라이프치히라고 했었지!"
"맞습니다. 저희 쪽으로 들어와서 제국 수도까지 진출하는 것을 도왔죠. 그래서 사이가 좋습니다. 저도 사업 일부에 일조하고 있고요."
"...대단하네."
포르저는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가 대단한 건 알고 있는데 제국 수도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메데이라 상회까지 연줄이 있다니.
"마나 비즈라면 저도 알고 있는데 이건 색이 다른데요? 보통 파란색이 아닌가요?"
"색별로 효과가 다릅니다. 블루 비즈는 단순히 마나만 보충해 주는 것이고, 레드는 체력과 활력, 기력을 보충, 그린은 마나의 흐름을 더욱 원활하게 만들어 수련 시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카를이 그들 앞에 꺼내 든 마나 비즈는 그린이었다.
생도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시중에 파는 것보다 더욱 효과를 끌어 올린 특제품.
섭취한다면 방학 동안에는 큰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도들을 향한 카를의 호의였다.
"일단 그린이고, 매물이 확보되면 다른 쪽도 드리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관계자라 손쉽게 구할 수 있거든요."
"마나 비즈라."
달칵.
손을 뻗어 그린 비즈를 꺼낸 유리아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살폈다.
원작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요소였다.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것이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닌 듯한데.
이런 걸 또 만들어 내다니 카를에 관해 한층 더 호기심이 짙어졌다.
"잘 먹을게."
"고마워, 카를."
생도들이 하나씩 마나 비즈를 집어 갔다.
물론, 이것 역시 미래를 향한 투자였을 따름이었다.
176화 알트하우젠 (1)
알트하우젠 저택에 도착한 카를과 그 일행은 먼저 막시밀리안의 아버지인 알트하우젠 자작과 인사를 나눴다.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라고 합니다."
알트하우젠 자작은 요즘 두껍게 몸을 키워 가는 막시밀리안과는 달리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성이었다.
막시밀리안에게 물려주었다시피 얼굴은 제법 미형이었고, 나이를 꽤 먹었음에도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
"카를이라고 했었지. 반갑네, 아들에게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이론 수석에 성적도 최상위권이라고."
아버지와 아들의 성격이 비슷한 것인지 쾌활한 분위기로 인사를 전해 왔다.
특히 이론 수석이라는 성적에 관심이 가는지 더욱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카를을 맞아 주었다.
"아, 유리아 양과 레이시스 양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네. 막심이 참 좋은 친구를 사귀었어."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큰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막시밀리안의 미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정작 아들 본인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부끄러운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지만.
"알트하우젠에 놀러 와 주어 고맙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들놈에게 무엇이든 말하고, 재미있게 놀다 가도록 하게."
"배려 감사합니다."
"뭘, 아들 친구들인데. 그럼 재미있게 놀게나."
알트하우젠 자작은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카를은 막시밀리안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와 똑 닮으신 것 같습니다. 성격도 외형도."
"외형은 인정하는데 성격은 내가 조금 더 진중하지. 아버지는 어디 가서 실없다는 소릴 많이 들으시거든."
"쾌활하고 친근감이 있으시다는 것이죠. 막시밀리안이 더 잘 자라면 아버지와 비슷해질 것 같습니다."
"난 저렇게 푼수인 성격으로는 되기 싫어."
막시밀리안은 툴툴거리면서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버지를 칭찬해 주는데 기분 나쁜 아들이 있을 리가.
"자, 그럼 곧바로 바다에 가자! 라고 하고 싶지만, 다들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지?"
막시밀리안의 말에 생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카를이 선물해 줬는데 사용해 봐야지."
"마나 순환을 부드럽게 만들어서 수련에 도움을 준다고 했지?"
"난, 나중에 먹고 싶은데. 연구를 하고 싶어서 말이야."
다른 이들과 달리 포르저는 살짝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그는 마나 비즈를 섭취하는 것보다는 직접 연구해서 어떤 식으로 개발을 한 것인지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카를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머지않아 물량을 더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더 드릴 테니 지금은 드셔도 괜찮을 겁니다."
"...부탁 좀 할게."
포르저는 머쓱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쉬이 구할 수 없는 품목인 만큼 온전히 카를의 연줄을 이용해 얻어야 했으니.
미안하면서도 고마웠기에 살짝 머뭇거리며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뭘, 친구끼리."
탁.
막시밀리안은 그런 포르저의 목에 팔을 감싸 안으며 쾌활한 모습으로 말했다.
"카를이 준 건데 생색은 왜 네가...."
"그런 시시콜콜한 건 그만 따지고 얼른 가자. 나도 마나 비즈의 효과를 시험해 보고 싶으니까."
그들은 곧 막시밀리안을 따라 알트하우젠 저택에 딸린 전용 연무장으로 향했다.
바이에른 아카데미에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규모의 연무장에 다들 감탄을 토했다.
"시설은 여기가 훨씬 좋네."
"천장이 막혀 있는 건 햇볕 때문에 그렇습니까?"
"응. 안 그러면 수련하는 것보다 먼저 햇볕 때문에 쓰러질 거야. 알트하우젠의 태양은 뜨겁기로도 유명하거든."
"하긴, 바다 같은 곳이 아니라면 버티긴 쉽지 않을 테지."
마법으로 내부 공기 순환과 온도까지 관리되고 있어서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곧 선물 받은 마나 비즈를 꺼내 든 게일은 그것을 손에 쥔 채 카를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 그냥 먹으면 되나?"
"적당히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튼 채로 섭취하시면 됩니다. 천천히 호흡을 내쉬며 마나 비즈의 기운을 전신에 퍼트리는 것이 제일 효과가 좋은 사용법이라고 하더군요."
"좋았어."
파각.
생도 중 게일이 제일 먼저 카를이 준 마나 비즈를 씹으며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1시간이면 충분하겠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나도...."
하나둘씩 마나 비즈를 입에 넣고 연무장에 가부좌를 틀었다.
카를과 옆에 있던 레이시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나 비즈를 꺼내 들었지만, 카를이 은밀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레이시스는 이걸 먹으십시오.
-네?
갑작스러운 전음에 레이시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시에 카를이 내민 손에 쥐여 있는 황금빛 구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골드 비즈입니다. 다른 생도들에게 준 마나 비즈의 상휘 호환이죠. 시중에 나도는 제품은 아니니 비밀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아....
레이시스는 입술을 달싹였다.
또 다른 생도들과 달리 자신만 특별대우를 해 주는 걸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카를을 향한 감사와 다른 감정이 꿈틀거리며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뭐라도 더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옅게 웃고 있는 카를의 표정에 그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골드 비즈를 받아 들었다.
파각.
카를이 더 신경 써 주었으니 좋은 성과를 내야 했다.
그렇기에 각오를 다지며 골드 비즈를 씹었고, 자리에 앉아 운기에 들어갔다.
츠즈즈즈.
박살 난 골드 비즈의 안쪽으로부터 선명한 마나가 기혈을 타고 흘러들어오며 서서히 퍼져 나갔다.
순수하면서도 깨끗한 기운.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기술이었다.
'마나가 쌓이고 있어.'
골드 비즈를 통해 흡수한 마나가 마나 하트에 쌓이며 축적되었다.
이전보다 한층 더 묵직해진 무게에 레이시스가 기쁨의 숨을 토해 냈을 때, 바로 직전에 카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천히 호흡을 내쉬며 마나 비즈의 기운을 전신에 퍼트리는 것이 제일 효과가 좋은 사용법이라고 하더군요.
천천히 호흡을 내쉬며 마나 비즈의 기운을 전신에 퍼트려라.
레이시스는 카를의 말에 따라 심장에 모은 마나를 퍼트렸다.
손발의 끝, 옆구리, 어깨, 어디랄 것 없이 골드 비즈로 얻은 마나를 퍼트리며 천천히 전신을 장악해 나갔다.
츠즈즈즈.
레이시스의 몸 위로 서리는 아지랑이에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던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킨 대로 하는 모양이로군.'
다른 생도들은 마나 비즈를 통해 적잖은 마나를 새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효능대로 마나 순환이 부드러워져서 수련에 톡톡한 효과를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레이시스에게는 그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레이시스. 제가 알려 드린 마나 운용법을 사용하십시오. 이제부터 대답하면 안 됩니다.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계속해서 운기를 해야 합니다.
-....
귓가로 들려온 전음에 레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운기에 들어갔다.
카를이 알려 준 창궁무애검법을 더욱 잘 펼치기 위한 마나 운용법.
심장의 밑, 배꼽 아래에 단전이라 불리는 부위에 마나를 모으고 천천히 움직여 나갔다.
핏, 핏, 핏, 핏.
카를은 그런 레이스스의 등 뒤로 다가가 몇 줄기의 지풍을 날려 혈도를 타격했다.
레이시스는 자신의 등 뒤로 닿는 섬뜩한 감촉에 몸을 움찔했지만, 곧 카를이 한 것임을 깨닫고는 마나 운용에 집중했다.
-절대로 집중이 깨지면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나 운용을 계속해야 합니다.
카를은 마지막으로 전음을 보내며 팔짱을 풀었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하며 레이시스의 몸에 작업을 개시했다.
핏. 핏.
먼저 내가기공의 구결에 따라 혈도를 자극했다.
레이시스가 조금 더 원활하게 운행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기맥을 열어 놓은 뒤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아주 극소량 주입했다.
사아아아.
정과 마, 그리고 신성이 합치진 일극의 기운이 기맥을 따라 레이시스의 몸을 누비기 시작했다.
목표는 혈도와 기맥에 쌓인 탁기와 노폐물들.
아무리 깨끗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체내에 쌓이는 탁기와 노폐물은 어쩔 수 없었다.
숨을 쉬면서, 음식을 먹으면서, 몸을 움직이면서 쌓이는 모든 것들이었으니까.
카를은 그것들을 모두 잡아 먹었고 레이시스의 체내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카를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이제부터는 그 역시 전력을 다해 집중해야 했다.
마스터의 초절정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면 감히 시도하지 못했으리라.
쿵─!
꽉 막힌 혈도에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부닥쳤다.
레이시스는 자신의 몸속에서 들려온 커다란 소리와 진동에 화들짝 놀라며 마나 운용을 중단하려 했다.
-집중!
하지만 귓가를 파고든 한 줄기 전음에 이를 악물며 다시 마나 운용에 집중했다.
카를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닐 것이라는 굳은 믿음과 함께.
'후우.'
카를 역시 짤막한 숨을 토해 내고 다시 한번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움직였다.
쿵! 쿵!
굳게 닫힌 성벽의 문을 두드리듯 끊임없이 혈도를 두들겼다.
너무 많은 힘을 주면 혈도 자체가 터져 버려 레이시스가 큰 내상을 입을 것이고, 이도 저도 아닌 기운으로 시간을 끌면 그녀의 내부에 적잖은 충격이 갈 것이다.
그러니 가장 빠르며 효율적으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몇 번이나 했음에도 여전히 어렵군.'
카를은 이를 악물었다.
녹스의 블랙 라벨들에게도 해 준 과정이었다.
이것을 하고, 안 하고는 마나를 운용하는 데 큰 차이가 존재했으니.
문제는 한 번 하는 데 많은 심력과 기운을 소모해야 했기에 간부 중 일부밖에 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콰앙!
재차 기운이 충돌하자 레이시스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카를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레이시스라면 견딜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더 몇 번을 두드렸을까.
콰아아앙─!
엄청난 충격과 함께 굳게 막혀 있던 혈도의 문이 열리며 활짝 개방되었다.
막혀 있던 둑이 터지듯 세차게 약동하는 격류에 카를은 짤막한 숨을 토해 내며 레이시스의 등 뒤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대로 제가 알려 드린 마나 운용을 5번 더 하시고 끝내시면 됩니다.
강적과 싸운 듯 카를의 등 뒤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카를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깃들어 있었으니.
'레이시스의 임독양맥을 타동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생사현관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상위 경지를 노리는 무인이라면 반드시 타동해야 했지만, 홀로 그것을 깨뜨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렇기에 대부분 스승이나 다른 높은 경지의 고수가 나서서 도와주기 마련.
하지만 레이시스에게 그런 것을 해 줄 수 있는 건 카를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가 책임을 지고 레이시스의 임독양맥을 타동해 준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제야 조금의 여유를 얻은 카를은 시선을 돌려 다른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저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었어도 꽤 괜찮은 성과를 얻은 듯 적잖은 마나가 새로이 쌓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중에 몇 배로 다 뽑아 먹을 테니.'
다들 무럭무럭 성장하길.
이것만은 카를의 진심이었다.
177화 알트하우젠 (2)
"...아."
임독양맥이 타동된 레이시스 다음으로 눈을 뜬 것은 다름 아닌, 막시밀리안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가문의 지원으로 몸에 좋다는 건 전부 먹었지만 마나 비즈 같은 걸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를이 가져온 거니까 범상치 않긴 하겠지?'
그래도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이 작은 구슬을 하나 먹는다고 해서 무언가가 크게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막시밀리안의 눈동자에는 감탄이 서려 있었다.
"이거 뭐야? 이런 건 생전 처음 보는 건데."
심장 부근에 묵직한 기운이 새롭게 들어섰다.
어지간해서는 무언가를 먹는 것으로 이렇게까지 마나를 쌓는 건 어려운 일인데 대체 어떻게 한 걸까.
막시밀리안의 의문은 한 박자 늦게 눈을 뜬 포르저가 해소해 주었다.
"말했잖아. 기존에 있었던 마나 비즈와는 궤를 달리하는 상품이라고. 그래서 수도에서 엄청난 화제를 끌 수 있었던 거지. 놀랍지 않아? 이렇게 순수한 마나를 인위적으로 쌓을 수 있다니."
"그럼 이것만 계속 섭취하면 마나를 무한정으로 쌓을 수 있는 건가?"
"그건 아닐걸. 사람이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는 법이니까. 어때?"
포르저의 시선에 카를은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마나 비즈라고 해서 무한정으로 마나를 늘려 주지 않습니다. 연이어 섭취 시 효과가 현저히 떨어질 겁니다."
영약으로 내공을 늘리는 방법에 존재하는 한계였다.
물론, 수준급의 영약은 지속적으로 섭취해도 그 효과가 완만하게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소림의 대환단, 무당의 태청단, 화산의 자소단처럼 이름 있는 영약들은 재차 복용해도 적잖은 내공을 얻을 수 있을 터.
하지만 녹스에서 개발한 마나 비즈는 그러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기껏해야 골드와 블랙 비즈 정도 수준이지.'
골드와 블랙은 2급 영약이라 불리는 소환단이나 마정단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래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기에 제국 수도가 한차례 마나 비즈로 들끓는 것도 당연지사.
생도들에게는 큰 기연이 되었다.
"좋군. 몸이 더 가벼워진 느낌이야."
"이게 마나 비즈라고? 한 번밖에 못 하는 게 아쉽네."
"부작용은 없는 거야?"
에이미의 물음에 카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게 섭취하면 마력 과부하가 올 수 있긴 한데, 일반적인 방법으로 복용했을 땐 큰 문제가 없습니다."
위급시 잠력을 폭발시켜 강한 힘을 얻게 하는 마나 비즈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기력이 쇠하고 정기가 상하는 정도로 며칠간 요양한다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정도만 설정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마약으로 분류되어 황실로부터 눈총을 받을 수 있으니까.
"자, 그럼...."
카를은 고개를 들어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임독양맥을 타동한 레이시스도 막 눈을 뜬 차.
가볍게 숨을 토해 낸 유리아, 밝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잡담을 나누는 막시밀리안과 게일, 여전히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포르저, 그리고 손을 주억거리며 새롭게 얻은 마나를 움직이는 에이미와 리엔까지.
'모두 7명.'
고대 영웅과 같은 숫자였다.
이들은 카를이 뽑은 후보로 바이에른에 입학을 계획했을 때부터 준비한 앞으로의 발판을 다질 초석이었다.
'이들을 고대 영웅과 같이 실력과 명성을 얻은 강자로 만든다.'
카를 본인은 일선에 나서지 않고 암중에서 이들을 통해 조율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나 비즈를 통해 당근을 주었으니 이제는 채찍을 줄 차례.
"마나 비즈를 통해 얻은 마나는 얼마간 끊임없이 움직여서 수련해 주어야 본인의 것으로 완전히 흡수가 됩니다. 지금은 단순히 마나 하트에 체류 중인 것이죠."
"그러네. 순수한 기운이기는 해도 아직 이질감이 느껴져."
막시밀리안의 말에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드리는 것입니다. 신체 내외부에 큰 자극을 받으며 수련하는 것. 그러니 다들 검을 뽑으십시오."
스릉.
카를은 허리에 찬 천뢰검을 뽑으며 생도들에게 겨누었다.
마나 비즈의 복용을 연무장으로 잡은 건 다름이 아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으니.
"...."
카를의 저의를 눈치챈 레이시스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있던 검을 향해 손을 뻗어 갔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유리아 역시 이미 주문을 외우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만, 다른 생도들은 아직 카를의 말뜻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뚱히 그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뭐야? 수련이라도 하자고?"
"난 좋지. 한 톨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얼른 해야 할 테니까."
"아아, 바다 가고 싶었는데. 그러면 수련 이후에는 바다 가는 거다?"
다들 별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지만, 카를은 입가를 비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쉽게도 마나 비즈까지 투자한 이상, 여러분께서는 강해지셔야겠습니다."
쿠웅.
소드 마스터, 초절정에 다다른 카를의 기세가 일부 해방되었다.
발산된 기파가 연무장 내부를 뒤덮었고 안쪽에 자리한 생도들의 몸을 찍어 누르는 압박이 되었다.
"...!!"
생전 처음 맛보는 어마어마한 기세에 생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치 숲속에서 커다란 곰이나 호랑이와 마주친 것만 같은 본능적인 위기감.
섣불리 호흡을 내쉴 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는 가운데 카를은 천천히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제가 여러분께 마나 비즈를 드린 건 단순히 교우 관계를 위해서거나 순수한 호의가 아닙니다. 느끼신 분도 있겠지만, 대륙에 이상한 것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악마, 마족, 마인, 이단을 신봉하는 배교자들, 영웅의 잔재와 유리아나 자신과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까지.
"저는 지금 이 세상이 과도기에 다다라 있다고 느꼈습니다. 얼마 전 저희 영지를 습격한 흑마법사들도 그렇고, 여러분께 말하지 않은 여러 일들에서도 그렇게 느꼈듯."
연무장 끝까지 걸어가 생도들을 돌아본 카를은 손에 쥔 검을 천천히 내리며 생도들을 압박하던 기운을 조금씩 거두어들였다.
"현실에 안주하면 변화하는 격류에 휩쓸려 죽을 겁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겠죠. 저는 여러분이 살아남길 바랍니다. 그러니 어서 덤비십시오. 제가 살아날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
좌중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막시밀리안은 두 눈을 잘게 떨었고, 게일은 역시 그랬다며 고개를 끄덕였으며, 포르저와 에이미, 리엔은 카를에게서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기세에 압도된 상태였다.
스릉.
그 가운데 천천히 검을 뽑아 드는 사람이 있었다.
한 치의 걸리적거림 없이, 듣는 이의 귀에 쾌감을 주는 발검 소리가 들려왔을 때.
쉬악─!
생도들 사이로 질풍이 치솟으며 레이시스의 신형이 카를에게로 쇄도했다.
'빨라!'
바로 근처에 있던 막시밀리안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옆을 스쳐 지나가던 레이시스의 속도가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빨랐던 것.
뒤이어 들이닥친 질풍이 피부를 훑을 때가 되어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캉!
적막으로 가득했던 연무장 가운데 날카로운 고성이 울려 퍼졌다.
힘차게 휘둘러졌던 레이시스의 검은 천뢰검에 가로막힌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카를은 한 손으로 내뻗은 천뢰검의 뒤로 고개를 내밀며 생도들에게 말했다.
"계속 그렇게 얼을 타면 이 싸움이 끝났을 때 제법 힘들 겁니다. 잘못하면 방학이 끝날 때까지 침상에 누워 요양해야 할 수도 있겠군요."
파아아앗─!
그와 동시에 카를의 발밑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초고열의 불꽃으로 레이시스에게 영향을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카를만을 집어삼키는 뱀의 주둥아리였다.
"카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이미가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지만, 가벼운 손짓으로 불길을 훑어 낸 카를은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콰앙.
가볍게 내디딘 진각에 어마어마한 기파가 그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왔다.
바로 앞에 있던 레이시스는 들소에 들이받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뒤로 튕겨 날아갔다.
카를은 곧 그녀를 넘어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에이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큭!"
정신을 차린 막시밀리안이 검을 휘두르며 에이미의 앞을 막아섰다.
휘둘러진 검을 막아 내고 곧바로 카운터를 날릴 생각이었지만, 일격을 막아 냄과 동시에 막시밀리안의 무릎이 바닥에 꿇려졌다.
쩌억!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검을 짓눌렀다.
어깨가 부러지고 다리가 빠질 것만 같은 충격.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부족합니다. 다리우스 형님이라면 이 일격을 받아내고 반격까지 해 왔을 겁니다. 형님을 동경한다면 더욱 강한 독심이 필요합니다."
"으으으아아아아!"
막시밀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핏발 선 눈으로 검을 들어 올리며 자신을 찍어 내린 카를을 떨쳐 내려고 했다.
하지만 힘의 차이는 아무리 대단한 각오라고 해도 어찌할 수 없었으니.
쉬악!
보다 못한 게일이 옆에서 대검을 휘둘러 카를을 쳐 냈다.
툭.
가볍게 뒤로 물러난 카를은 조용한 걸음과 함께 바닥에 내려섰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막시밀리안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카를을 노려보았다.
노어 숲의 실습에서 돌아오고 난 뒤 카를에게 얻어맞았던 건 나름대로 이해가 되었다.
그만큼 자신은 한심했고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현실을 바라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더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막시밀리안의 질문에 카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오늘 이 자리는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시험입니다. 각자의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탈락한다면...."
카를은 고개를 들어 생도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맞췄다.
더없이 무정(無情)한 눈빛에 저마다 몸을 흠칫 떨며 침을 꿀꺽 삼켰다.
'카를이 저런 애였나?'
이제껏 보였던 카를과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카를은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고 자신들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거늘.
생전 처음 보는 카를의 모습에 모두가 낯설음을 느끼며 머뭇거렸다.
"싸울 거 아니면 모두 빠지세요!"
재차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역시 레이시스였다.
고민 따위는 버린 채 카를의 말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날 선 검초를 뿌리며 카를을 압박했다.
쉭, 쉬아악!
일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날 선 파공성과 함께 줄기찬 검기가 사방에 쇄도했다.
뒤쪽에서 보던 생도들은 그 위험천만한 모습에 입을 틀어막았지만, 카를은 검조차 휘두르지 않은 채 가볍게 다리를 놀린 것만으로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다들, 아직도 모르겠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던 유리아는 그런 생도들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저게 진짜 카를이야. 물론,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인 모습도 가짜는 아니겠지. 저것도 카를이고, 그것도 카를이고."
툭.
막시밀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친 유리아는 옅게 웃었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고 카를이 시키는 대로만 해. 언제 카를이 틀린 말 한 적 있어?"
178화 알트하우젠 (3)
카를은 자신을 바라보는 생도들을 향해 냉정한 시선을 보냈다.
'레이시스를 10으로 기준을 세우고 평가한다면....'
막시밀리안, 포르저가 6, 게일과 리엔이 5, 에이미를 4로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창궁무애검법을 배우고 골드 비즈로 인해 마나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레이시스라면 이들 모두와 싸워도 어렵지 않게 이기지 않을까.
물론, 유리아를 제외하고 말이다.
'유리아는....'
솔직히 말해서 가늠이 되질 않았다.
포르저처럼 단순한 마법사로 규정하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숨기고 있는 것이 여러모로 많은 듯했으니.
더욱이 그녀에게는 이 세상을 '게임'으로 플레이했던 것의 지식이 남아 있었다.
여차할 경우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단을 여럿 구비해 놓았으니 다른 이들과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건 안 되겠지.
"...."
연무장 안쪽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카를의 공격이 진심이란 것을 깨달은 생도들 역시 각자 무기를 꽉 쥔 채로 진지하게 싸움에 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철두철미하네.'
유리아는 흘깃 연무장 주위를 바라보았다.
혹여나 이쪽의 소란이 밖으로 새어 나가 문제가 될까 봐 소음과 기척을 차단하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이러면 정말로 기감이 예민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훈련 정도로 느끼겠지.
실상 그 안쪽에 펼쳐지고 있는 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싸움이었지만.
'그럼 어디 실력 좀 한번 볼까?'
유리아는 스태프를 손에 쥐었다.
다른 생도들의 실력이야 뻔했다.
마나 비즈라는 건 게임에서도 없었던 것이었기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약적으로 힘을 키워 주는 건 아니었다.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크고 작은 도움이 될 터.
유리아가 주목한 건 카를과 레이시스 쪽이었다.
'카를은 둘째치고 레이시스가 얼마나 싸울 수 있는지 궁금한걸.'
창궁무애검법이라는 무공과 함께 카를로부터 피나는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카를이 본색을 드러낸 이상 레이시스도 실력을 숨기지 않겠지.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레이시스가 예상을 뛰어넘는 활약을 펼쳐서 카를에게 한 방 먹여 주고 싶었다.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파아아앗!
유리아의 손길에 따라 솟구친 새빨간 불꽃이 다시금 카를의 주위를 감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몇 번 넘게 바싹 구워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뜨거움일 텐데.
일렁거리는 불길은 카를에게 닿는 것조차 못하고 있었다.
탓!
기습적으로 자리를 박찬 카를이 불길을 파헤치며 달려들었다.
표적은, 연이어 자신에게 위협적인 마법을 사용한 유리아.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능숙하게 마법을 펼쳐 미끄러지듯 자리에서 몸을 내뺐다.
'...예상보다 빨라!'
하지만 생도 사이를 뚫어내며 이쪽에 닥쳐오는 카를의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진짜로 자신들을 두들겨 패려고 하는 것일까.
스케이트를 타듯 빠르게 바닥을 미끄러지며 이동하는 와중, 힘껏 스태프를 휘둘렀다.
촤아아악!
회전하는 얼음 송곳 십수 개가 치솟으며 추격자의 발목을 붙잡았다.
근처로 생도들이 얽혀 있던 탓에 표적을 정확하게 노려야 했다.
팍, 퍼억!
카를은 손날을 휘두른 것으로 자신에게 쏘아진 공격들을 모조리 무력화했다.
그렇게 발을 묶인 잠깐의 틈 사이 게일과 에이미가 카를의 양옆을 노리며 쇄도해 왔다.
"하아아아!"
묵직한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커다란 대검과 파공성조차 들리지 않은 채 쾌속한 속도로 찔러오는 날카로운 검.
카를은 몸을 가볍게 허공으로 띄운 채 회전하는 것으로 피할 구멍이 보이지 않았던 공격들을 흘려냈다.
캉!
오히려 게일과 에이미가 충돌하게 만들었으니.
팍!
손을 뻗어 둘의 가슴팍을 밀쳐 내자 저항할 틈새도 없이 자리에서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게일!"
"...빌어먹을, 무지막지하구만."
게일은 얼얼한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이미 쪽은 재빨리 검을 회수해 카를의 공격을 막은 덕에 충격이 조금 덜했다.
쉬악!
하지만 카를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던 중의 게일에게 닥쳐가 그의 머리를 노리며 매서운 기세로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캉!
둘 사이로 끼어든 막시밀리안이 가까스로 검을 받아 냈다.
이를 악물며 무릎을 꿇을 각오를 했지만, 다행히도 아까와 달리 버틸 만한 충격이었다.
'마나가...!'
마나 비즈를 통해 얻은 마나가 자신의 것에 녹아들며 적과 싸우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를이 말한 대로 자극을 통해 마나를 흡수하는 과정에 다다른 것이었다.
'인정하자.'
카를의 실력이 자신들과 비교했을 때 월등하게 높은 건 알겠다.
모두와 싸우면서도 표정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고 호흡조차 덤덤했으며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분명 카를은 이쪽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조절'해 주고 있었다.
'분통이 나는 이야기지만...!'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 악역을 자처했다는 이야기.
문득 유리아가 바로 직전에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고 카를이 시키는 대로만 해. 언제 카를이 틀린 말 한 적 있어?
맞다.
바이에른에 입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카를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보다는 우릴 위해 준 적이 많으며 항상 배려해 주었지.
실력을 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금 불편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카를이니까 그것도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좋아."
막시밀리안은 망설임을 버렸다.
카를이 말했듯 이곳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입증하는 자리.
그러니 사생결단을 할 적을 만났다는 각오로 카를을 상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호오.'
막시밀리안과 맞서고 있던 카를은 순식간에 달라진 그의 기세에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에게 진심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수로서 임무를 했을 때도 가장 손쉽게 표적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친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짤막한 시간이라도 매일 같이 인사를 나누거나, 혹은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라고 할지라도 정이 들어버리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해할 리 없다.'
말 한 번 나눠 본 적이 없어도 자신의 일상에 녹아든다면 그런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자리를 잡혔다.
카를은 자신이 가르쳤던 살수들에게 그 틈이 가장 손쉽고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살수로서 가르침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캉! 캉캉!
중심을 붙잡은 막시밀리안은 진중한 기색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리우스를 동경해서 그런지 예전보다 더 그의 검세를 닮은 형태로 변해 있었다.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고 압도하며 궁지에 몰아 사냥하는 그 우악스러운 검법을.
다만, 상대가 자신보다 더 강자라면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이곳에 다리우스 형님이 있었더라면 싸움의 방식을 바꿨을 겁니다. 다수라는 이점을 이용해 조금씩 깎아 나가는 방법으로."
휘릭.
카를은 검을 고쳐 쥐었다.
원래 사용하던 검식을 버리고 마찬가지로 다리우스처럼 강검을 휘두르며 막시밀리안의 검에 대응했다.
쩌엉─!
몸을 짜르르하게 울리는 충격에 막시밀리안은 이를 악물며 뒷걸음질 쳤다.
카를의 말대로 자신의 공격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모두!"
그러니 주변에 있던 생도들을 향해 외쳤다.
이미 준비하고 있던 이들 역시 둘 사이로 난입해 전력의 공백을 메웠다.
쉬악!
가장 실력이 뛰어난 레이시스가 전위를 맡았다.
창궁무애검법의 검초가 서슬 퍼런 오러와 함께 허공에 펼쳐졌다.
카를은 자신이 정한 기준으로 생도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저걸 정면으로 받아 내며 다른 이들의 공격까지 감당하는 건 무리였기에 슬쩍 뒤로 물러서자 머리카락이 하늘로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콰아아앙!
샛노란 낙뢰가 돌연 카를이 있는 자리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이전에 사용되었던 마법과 마찬가지로 호신강기가 치솟아 오르며 그의 몸을 보호했다.
"그것도 예상했어...!"
포르저가 수결을 이으며 완드를 앞으로 내질렀다.
그러자 발밑에서 솟구쳐 오른 나무 덩굴이 카를의 발목을 옭아매며 다리를 이어 순식간에 몸통까지 타오르기 시작했다.
파직.
카를은 떨어지는 낙뢰에 저항하면서도 발을 떨쳐 넝쿨을 찢으려 했다.
하지만 바닥과 거의 반쯤 납작 엎드린 채 닥쳐오던 에이미가 기슴적으로 그의 등 뒤를 찔렀다.
'살수의 재능이 보이는데.'
카를은 그런 에이미의 동작을 눈여겨 보였다.
평소 보이는 분위기는 밝고 명랑한 그녀였지만, 싸울 때의 기도는 무섭도록 고요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만 자세하게 싸움 방식을 알려 준다면 적막 가운데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암검(暗劍)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일 그것을 대성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무서운 존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예외의 일면이로군.'
서로 진심을 지닌 채 맞서 싸워 본 적이 없었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새로운 얼굴이었다.
쿵.
카를은 천뢰검을 들어 자신의 허리를 베어 오는 게일의 대검을 막아 냈다.
다만, 허공에 몸을 살짝 띄운 채 저항하지 않고 온전히 그 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리에서 이탈하고자 했다.
'이건 실책이다.'
카를은 가라앉은 눈으로 게일을 바라보았다.
낙뢰와 넝쿨 모두 자신의 발목을 묶으려는 마법이었다.
그런 가운데 다들 일시에 공격해 와도 모자를 판국에, 홀로 흐름을 깨고 이런 공격을 가해 넣는다?
'살짝 실망인데.'
그런 기색이 눈동자에 드러났는지 카를의 얼굴을 본 게일이 크게 소리쳤다.
"지금!"
쐐애애액!
찰나의 사이.
한껏 힘을 모으고 있던 막시밀리안의 전력을 다해 검을 흩뿌렸다.
동시에 빗나간 검초를 회수한 레이시스 역시 허공을 밟고 뛰어올라 카를의 백회를 노려 왔고.
그제야 카를은 게일의 노림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구잡이가 아니었군.'
게일은 애초에 두 마법으로 자신의 발을 묶지 못할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흐름을 끊는 공격을 통해 부스럼을 만들어 낸 것일 터.
뒤는 실력이 뛰어난 레이시스와 막시밀리안에게 맡긴 채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사고가 뛰어나.'
동료를 믿는 것보다 주어진 전력과 상황 판단을 더욱 냉정하게 보았다.
경험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린 게일의 모습에 카를은 이례적으로 자신의 평가를 수정했다.
휘릭.
카를의 검이 부드럽게 허공을 노닐었다.
상대가 강검으로 온다면 이쪽은 유(柳)의 묘리로 받아치면 그만.
그 궤적에 휘말린 창궁무애검법과 막시밀리안의 전력이 각자 궤도를 이탈하며 다른 방향으로 빗나갔다.
-이 정도로는 안 됩니다.
카를은 레이시스에게 전음을 보내 경고했다.
창궁무애검법에 골드 비즈까지.
레이시스는 이곳에 있는 생도 중 가장 많은 투자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 겨우 조금 뛰어난 수준을 보인다면 카를이 세운 기준에 턱없이 모자랐다.
절그럭.
그런 카를의 말에 레이시스는 결심 어린 표정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179화 알트하우젠 (4)
레이시스는 누군가를 죽일 정도로 미워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러번 피를 보았으니까.
절그럭.
죽일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죽을 각오 역시 함께해야 했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살의는 언젠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왔으니.
자신에게도, 주위에 있는 생도들에게도, 그리고 저 앞에서 엄청난 기세를 내뿜고 있는 카를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를도 그런 경험이 있을까.'
누군가를 미워해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저러한 살기를 내뿜을 수 있을 것이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고 검을 쥔 손이 떨려 왔다.
자신도 그러할진대 다른 생도들은 오죽 힘들겠는가.
길은, 자신이 열어야 했다.
생도 중 카를의 기세에 정면으로 저항할 수 있는 건 카를에게서 창궁무애검법을 배운 자신뿐일 테니까.
-이 정도로는 안 됩니다.
조금 전 카를이 보내온 말을 복기하며 천천히 검 위에 마나를 둘렀다.
마치 흘러가는 바람처럼 시원한 기류를 풍겨내며 생도들을 짓누른 살기에 저항하며 카를에게 나아갈 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쉬아아악.
레이시스는 창궁무애검법을 익힌 뒤로 자신의 주위를 스치는 바람의 기류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이 검법을 익히면 그러한 것이 보이나 했는데, 카를은 그렇지 않다며 창궁무애검법과 자신의 궁합이 잘 맞아서 보이는 현상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는 건 즉, 카를 역시 이 기류를 읽어 내지 못한다는 것.'
활로는 그곳에 있었다.
그러니 레이시스는 천천히 검을 휘두르며 연무장 안으로 바람을 흩뿌렸고 내부에 흐르는 모든 기류를 자신의 것으로 장악했다.
사아아아.
두 눈동자에 푸른 빛이 깃들었다.
그 광경을 본 카를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역시 상성이 좋아.'
창궁무애검법.
남궁세가의 무공은 하늘과 연관이 깊었다.
비전검법인 제왕검형은 하늘 그 자체를 의미했고, 극쾌검식인 섬뢰검법과 제왕진천뢰는 떨어져 내리는 벼락을 본떠 만들었다.
창궁무애검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넓은 하늘 그 자체를 선망하는 한 줄기 바람의 자유로움을 검법의 형태로 형상화한 것이었으니.
레이시스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쩌면 그녀가 남궁세가의 무공과 잘 맞지 않을까 싶어 전수해 준 것이었는데 정답이었다.
'창궁무애검법의 경지가 일정 이상으로 오르면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였지.'
바람의 기류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청안(淸眼).
남궁세가에서도 직계 혈족이나 극소수의 재능있는 이에게만 발현되는 현상이었다.
남궁한 역시 창궁무애검법의 대성을 이뤄낸 청안의 소유자였다.
'청안은 과정일 뿐 완성에 다다르면 또 한 번 형태가 바뀐다.'
남궁한 역시 그러했다.
자신이 살수가 아니고 순수한 무인이었더라면 그에게 패배했을 터.
그러니 그 경험을 살려 레이시스의 완성을 도울 생각이었다.
저벅.
앞쪽에서 대치하고 있던 레이시스가 드디어 준비를 마치고 걸음을 내디뎠다.
보통의 무인은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 왔다.
그것을 쇄도라고 했고, 스치는 소리를 파공성이라 하였다.
하지만 레이시스의 움직임 뒤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암류보나 살수의 걸음걸이를 익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옷깃이 허공에 스치는 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청안의 단계가 시작되었다.'
어렴풋이 보이던 기류의 흐름을 읽어 내는 것이 드디어 초입에 들어섰다는 소리였다.
언제쯤 발현될까 싶었는데 이쪽에서 자극을 주려던 것이 성공한 듯했다.
레이시스가 휘두르는 검 역시 소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음(無音)의 일격, 숙련된 살수라 할지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을 터인 궤적이 이쪽의 목을 노리며 닥쳐왔다.
캉!
카를은 그 검을 가볍게 쳐내며 내심 감탄했다.
레이시스의 청안 때문이 아니라 그 눈동자에 서린 진실된 살의 때문이었다.
'정말로 날 죽이려고 검을 휘둘렀군.'
이쪽에서 보낸 전음에 그녀 역시 각오를 다진 것일 터.
죽일 각오로 검을 휘두르지 못하면 언젠가는 죽는다.
비록 살수는 아닐지라도 검을 든 이라면 전부 똑같은 운명에 얽매여 있었다.
망설임을 버려 가는 것이 고수가 되어 가는 과정 중 하나였으니.
어깨에 이고 있던 짐을 하나 내려놓은 레이시스의 모습에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선물을 하나 주어야겠지.'
파앗!
천뢰검에 서린 기세가 변했다.
새하얀 오러가 치솟아 오르며 주변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한기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바람조차, 흐르는 기류조차 얼려버리는 극음지기의 발현에 레이시스의 청안이 살짝 떨렸다.
'바람이 멈췄어.'
바람은 끊임 없이 움직인다.
그걸 사람의 힘으로 멈춰 세웠다고?
카를이 보인 신기에 가까운 재주에 동요를 드러냈을 무렵, 천뢰검이 가차 없이 휘둘러졌다.
저저저적─!
허공을 쪼갠 연무장 위로 줄기줄기 쏟아져 내렸다.
그 안에 담긴 서슬 퍼런 기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이시스가 소리를 질렀다.
"모두 피해요!!"
그러면서 그녀 본인은 땅에 두 다리를 단단히 고정한 채 한 발자국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쉬사사삭!
검 끝이 매섭게 휘둘러지며 허공에 벽을 생성했다.
창궁무애검법으로 펼치는 완벽한 형태의 검막이었다.
콰아아앙!
빗발친 검기가 그 위를 강타했다.
"...."
내부가 빗발치는 듯한 충격에 일순간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레이시스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고는 뒤쪽에 있던 생도들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큰 공격은 그녀가 막아 주었으니 카운터는 맡긴 것이었다.
타다닷!
잠시간 카를이 보인 신위에 놀라 굳어 있던 생도들 역시 정신을 차리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쳐 볼 심산이었다.
'설마 죽이진 않겠지.'
막시밀리안은 거의 방어를 도외시한 채 공격을 날렸다.
어디 한 군데 잘려도 죽을 정도로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동귀어진의 각오로 대검을 기다랗게 휘둘렀다.
곧 천뢰검이 움직였다.
막시밀리안은 카를이 자신의 공격을 쳐 내면 어떻게든 찰거머리 같이 달라붙어 그의 궤적을 옭아매려 했다.
하지만 카를의 대응은 간결했다.
"...!!"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천뢰검이 움직인 곳은 그와 반대편으로 공격한 게일의 쪽.
막시밀리안의 검을 막은 것은 내밀어진 손이었다.
휘릭.
카를의 손목이 한 바퀴 가볍게 돌자 막시밀리안은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겨우 정신을 다잡고 보니 어느새인가 자신의 몸이 거꾸로 뒤집혀 있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으아악!!"
머리부터 그대로 곤두박질친 그는 비명을 내지르며 땅을 굴렀다.
너무나도 성대하게 튕겨 나간 막시밀리안의 모습에 게일이 소리쳤다.
"막심!"
"한눈팔 틈은 없을 텐데요."
"...!"
찰나의 틈이었다.
그 간극에 파고 든 카를은 검을 역날로 세운 채 게일의 몸을 힘껏 가격했다.
쩌엉!
하지만 그 공격은 간발의 차이로 실패했다.
게일의 몸 위로 생겨난 실드가 가까스로 카를의 속도를 따라잡아 공격을 막아 낸 것이었다.
"포르저 나이스!"
"유리아 양!"
"다 됐어, 나도 슬슬 제대로 싸워 볼까."
유리아는 잿빛 구체를 손에 들어올린 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생도들에게는 생소한 것이겠지만, 함께 연구에 참여했던 카를만은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계(四季)! 프로토 타입을 완성한 건가?'
유리아라는 마법사의 목표.
마법의 자동 발동 시스템.
그 기원은 잿빛 마탑을 세운 고대 영웅 중 하나인 "영원"의 대마도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다.
"영원"은 삼라만상의 모든 마법을 다뤘고,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이 되어 스스로 의지를 지녔다.
유리아가 재현하려는 건 그것의 극히 일부.
물론, 지금 그녀의 손에 쥐인 것은 아직 조악하고 볼품 없는 수준이었지만, 일반 마법사의 시선에 본다면 말도 안 되는 기술과 이론들이 얽혀 있어 기적을 구현해 냈다.
쩌억.
아무런 전조도 없이 떨어진 무형의 참격에, 카를은 검을 들어 올렸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면 그 전조가 있기 마련이다.
시동어든, 캐스팅이든, 하다못해 마력의 흐름이든.
하지만 사계는 이미 완성된 마법이 저장되어 있기에 현상만 나타날 뿐 아무런 여파를 흘리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운 점이었지.'
카를은 유리아가 모든 연구의 성과를 자신과 공유하지 않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더욱이 방학에 들어서며 잠시 중단되었는데, 설마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기능을 높여 왔을 줄이야.
파앗.
옷깃이 불에 타올랐다.
아까 전에 들이닥쳤던 마법보다 더욱 빠르고 은밀하게 치솟으며 순식간에 카를의 몸을 뒤덮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카를에게로 침범할 수 없었지만, 로브의 끝자락이 살짝 그을린 것을 본 그의 두 눈이 깊어졌다.
"시퀀스 7 발동."
유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실행 데이터를 모조리 얻어 갈 생각인 듯 카를을 향해 가차 없는 맹공을 퍼부었다.
어차피 자신이 진심으로 공격해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테고, 주위에 결계도 둘려 있어 거리낄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콰아앙!
낙뢰가 떨어졌다.
연무장 바닥이 살짝 내려앉으며 비명을 토해 냈다.
그 위로 매캐한 악취가 풍겨 나오는 독극물이 떨어져 내렸을 때, 카를은 자리를 박차며 뛰어 올랐다.
마법의 영역을 벗어나 태세를 가다듬기 위해서였지만, 그것마저 유리아의 노림수였다.
저저저적.
바닥이 쪼개지며 양옆으로 갈라져 버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틈새가 생기며 카를이 발 디딜 공간이 없게 만들어 버렸으니.
꽈악.
사계의 보옥을 쥐고 있던 유리아는 무방비 상태로 그 사이에 떨어져 내리는 카를을 보며 희열에 찬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저 잘난 낯짝에 한 방 먹여줄 수 있겠구나.
이 함정은 아무리 카를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발판을 찾을 순 없을 테니.
'다음 시퀀스는....'
땅에 가두고 어스 퀘이크로 주변을 뒤흔들어 패닉을 주고, 다시금 원소를 이용한 연계 공격으로 자신의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맹공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나면 카를은 언제나처럼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겠지.
'대단합니다. 역시 유리아군요.'
라고 말하며 태연한 기색으로 걸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그 첫 단추를 꿰기도 전에 유리아의 예측은 빗나가 버렸다.
"어?"
카를은 갈라진 땅 밑으로 추락하지 않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을 터인데.
그는 사뿐히 허공을 딛으며 오롯이 섰다.
신기에 다다른 허공답보.
지속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내공이 소모되었지만, 지금의 카를에게는 그리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
이것이 전부냐.
그런 카를의 시선에 유리아는 발끈하며 사계의 보옥을 들어 올렸다.
전부가 아니다.
비장의 수도 있었고, 여차할 때 사용할 필살기도 아직 남아 있었다.
그걸 쓴다면 아무리 카를이라도 방심하진 못할 터.
"...됐어, 여기까지만 할게."
하지만 유리아는 그것들을 발동하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이런 대련에서 써먹기에는 너무 아까운 마법들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카를 역시 그대로 살짝 아쉬움을 표했다.
'안 넘어오는군.'
어떤 수를 숨기고 있을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듯싶었다.
180화 알트하우젠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