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알트하우젠 (5)
"그럼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얼마간 더 피 튀기는 실전과 같은 대련을 치른 직후.
카를은 검을 거두며 생도들에게 끝을 알렸다.
"앞으로 여러분이 어떻게 수련하는지에 따라 이후 성취가 달라질 겁니다. 오늘 섭취한 마나 비즈가 더더욱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제대로 흡수회지 못해 그대로 소실될 수도 있습니다."
너희들이 하기에 따라 달렸다.
그 말에 생도들은 입을 다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자리에 있었던 카를과의 대련은 그들에게도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카를의 실력에 대한 경악, 그보다 훨씬 부족한 자신에게는 실망, 그런 카를이 내려주는 가르침을 향한 기대, 그리고 카를이 말한 거대한 음모라는 것에 관한 흥미까지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카를이 자리를 떠난 뒤 생도들은 허물어지듯 쓰러져 내렸다.
실전에 가까울 정도로, 아니 실전보다 더 혹독하게 두들겨진 탓에 전부 기진맥진한 것이었다.
"너무 맞았더니 이제 팔에 감각도 없네."
막시밀리안은 반쯤 울상이 된 채 굳어 버린 팔뚝을 두들겼다.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너무 꽉 움켜쥔 탓인지 그대로 고정되어 손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다른 이들도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 하나씩 가지고 있긴 마찬가지.
하지만 그리 어두운 표정은 아니었다.
저렇게 대단한 카를이 자신들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으니까.
"...그나저나, 카를은 대체 정체가 뭘까?"
저마다 몸을 돌보고 있던 와중 에이미가 툭 하고 내뱉었다.
카를과 맞서 싸우던 와중에도 줄곧 들던 의문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인지 하나둘씩 고개를 들며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유리아랑 레이시스, 둘은 입학시험 때도 카를이랑 같은 파티였지?"
"네."
"응, 마궁 탐사를 같이 했지. 테러리스트들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그때는 어땠어?"
"어땠냐고 물어도...."
유리아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그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당시에는 이론 수석을 빼앗긴 탓에 색안경을 잔뜩 낀 채로 카를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싸가지 없어 보였지. 자기가 뭔데 저렇게 하나. 그런데 지금 보니까 좀 달라 보이긴 해. 확실한 주관과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행동했구나."
유리아는 카를이 자신과 같은 플레이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비범한은 여러 히든 피스와 게임의 지식으로부터 비롯된 것.
하지만 그건 카를과 둘만의 비밀이었다.
부모, 형제, 심지어 언젠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는 연인에게도 밝히지 못할 가장 은밀한 비밀.
어차피 말한다고 해도 같은 처지에 있는 카를을 제외하고는 믿어 주지도 않을 테지.
그러니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에이미의 말에 대답했다.
"레이시스. 레이시스는, 카를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래서 카를의 실기 능력이 훨씬 더 오른 것이고."
이번엔 레이시스 쪽으로 의혹의 화살이 돌아왔다.
혹시 먼저 알고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시선에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먼저 알고 있었어요. 카를이 지닌 강함이 생도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다는 걸."
"...역시."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죄송해요. 카를 본인이 함구하고 있는데 제가 말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면 검술을 가르쳐 준다는 것도?"
"네. 학기 도중 여러 일을 겪으면서 카를이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제가 적극적으로 카를에게 부탁해 검술을 알려 달라고 한 거죠. 덕분에...."
수석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레이시스의 눈앞으로 바이에른에서의 1학기의 생활이 스쳐 지나갔다.
고작 몇 달 정도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고 느껴졌다.
그 가운데는 카를이 있었고, 또 자신도 있었다.
"실력이 오른 게 아니라 감추고 있던 걸 드러낸 건가. 하긴, 이상하긴 했어. 내가 좀 힘들어하긴 했어도, 카를이 너무 갑작스럽게 강해졌으니까."
막시밀리안도 이제야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에렌달 숲에서 돌아온 이후 괴물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할 때, 새벽부터 카를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아무리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수인 카를에게 그렇게 당한 것이 말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면 대충 이해가 갔다.
'오죽 답답했으면....'
막시밀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력을 숨긴 것에는 여러 목적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 그것을 드러내 자신을 두들겨 팬 것으로 일깨워 주었으니 어찌 실력을 숨겼다고 타박할 수 있겠는가.
"그래,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렇겠죠, 카를이니까."
다른 생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카를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자신을 속인 거냐며 따져 묻기에는 너무 많이 친해졌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자신들보다 월등히 강해진 실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카를은 카를이었으니까.
"...."
한결 편해진 표정의 생도들과 달리 홀로 불편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다름아닌 레이시스, 그녀는 생도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바로 직전에 있던 싸움을 복기했다.
'형편없었어.'
각오와 결심을 다졌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카를에게 부딪쳤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하는가.
'증명하지 못했어.'
카를은 그 이후 따로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가 세운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뜻.
속이 꽉 막히며 무언가를 잘못 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마음 같아선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자신이 잘못한 걸 가지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자, 그럼 가자. 어쨌든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했으니 좀 쉬어야지."
"예정대로 바다에 갈 거지?"
"당연히. 알트하우젠에 왔으니 바다는 꼭 가야지."
"카를도, 가려나?"
"내가 물어보고 올게. 안 간다고 해도 끌고 올 테니까. 설마 안 가겠어?"
"끌고 올 수나 있고?"
"...아버지한테 부탁이나 해 보지."
에이미의 반문에 막시밀리안은 살짝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강하지 않을까?'
조금 전 연무장에서 보였던 기세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도 카를은 자신들을 여전히 친구로 대해 주고 있었다.
알트하우젠에 와 놓고 바다에 가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
그렇기에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책임지고 카를을 데리고 오겠다며 연무장을 떠났다.
* * *
깊은 밤이었다.
실력을 드러낸 카를과의 치열한 전투를 끝낸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막시밀리안은 성공적으로 카를을 끌어내었고, 그대로 바다에 가서 방학의 자유로움을 한 껏 만끽했다.
저택에 돌아와서는 알트하우젠 가문에서 열어 준 연회를 즐겼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똑똑.
그 가운데 유리아는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은밀히 누군가의 방문을 두드렸다.
얼마간 기다리자 문이 열리며 누군가 그녀를 반겨 주었다.
"오셨습니까."
"다른 애들은 없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까요. 다른 분들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카를은 슬쩍 복도를 살피며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를 위해 열렸던 문은 다시금 굳게 닫혔다.
"후우."
짤막한 숨과 함께 사일런스 마법을 해제한 유리아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 밤중에 다른 남자의 방을 찾아간다니, 누군가 보면 이상한 생각을 품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녀로서는 오지 않을 수도 없었다.
'플레이어 간의 회의니까.'
카를은 바다에서 피서를 즐기던 도중, 아까 연무장에서 말했던 이야기에 관해 상의하고 싶다며 말해 왔다.
시각은 모든 일정이 끝난 후 늦은 밤.
유리아는 살짝 긴장했지만, 그래도 카를을 믿고 방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응, 목마르네."
카를은 준비한 와인을 따르며 그녀에게 내밀었다.
"사계 쪽은 놀랐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완성도를 이뤘을 줄이야."
"기본 골자만 잡은 거야. 아직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많아. 너도 느꼈다시피 아직은 입력된 명령밖에 수행하지 못하고."
"그래도 일반 아티팩트와 달리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에 엄청난 메리트가 있지 않습니까. 제 시선으로도 마나의 흔적이 남는 걸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그 부분은 철저하게 관리했으니까."
카를의 칭찬에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편 유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머금었다.
창밖에서 불어온 선선한 바람과 달콤한 와인, 그리고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카를까지.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좋은 기분이었다.
낮에도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난 이후라 더 그런 감상이 들은 것도 있겠지만.
"그래서, 할 이야기라는 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현재 정세에 관해서입니다. 우선, 흑마법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까 들었지. 마물들을 움직여서 라이프치히 영지를 습격했다고."
"마물만이 아닙니다. 고대의 기사를 깨워서 악마로 만든 뒤 풀어놓으려 했습니다. 랜슬롯이라고 아십니까?"
"원탁? 알지, 호수의 기사."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아 같은 이해자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터놓고 할 수는 없었을 테니.
"목적지는 황궁, 리베라 황제라고 했습니다."
"흐음."
"그래서 그 이후로 대륙 전반에 걸쳐 알아보았는데, 흑마법사들의 행적이 전부 묘연해졌다는 걸 파악했습니다. 제국이나 성국도 그 부분을 주시하고 있더군요."
흑마법사의 존재는 시대별로 받아들이는 형태가 달랐다.
어떨 때는 무조건적인 척살령이 내려졌고, 어떨 때는 받아들이면서도 철저한 무시와 차별이 존재했다.
지금은 굳이 따지자면 후자 쪽에 가까웠다.
그래도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기에 물밑에서 철저한 감시와 조사를 하고 있던 차.
갑작스럽게 흑마법사 무리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성국 측에서 조만간 흑색 마탑에 공식적으로 서신을 보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고 하더군요."
성국이 보내는 공식적인 서신과 질문.
그건 단순한 외교가 아니었다.
수십 명의 팔라딘과 추기경, 그리고 신성력으로 무장한 성군이 주축이 된 사절단의 압박이었다.
만일 정말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대로 흑색 마탑을 쓸어버려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터.
아무런 일도 꾸미고 있지 않아도 딱히 상관은 없을 터다.
성국의 군세가 흑색 마탑의 영역을 밟은 것만 해도 흑마법사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될 터이니.
"...."
유리아는 카를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런 정보들은 어떻게....'
그녀 본인도 여러 정보 길드와 연계하며 물밑으로 대륙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다음 에피소드로 진행될 타이밍을 파악하기 위해서.
하지만 카를은 이쪽보다 훨씬 더 깊고 빠르게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부른 거지?"
유리아의 물음에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이 본제였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응."
"흑마법사들은 마왕을 소환하는 데 성공합니까?"
181화 알트하우젠 (6)
흑마법사들이 마왕을 소환하는 데 성공하느냐.
그리 어려운 물음은 아니었다.
"그런 분기점도 있었지."
"...분기점?"
카를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묻자 유리아는 짤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아, 맞다. 미안해. 기억이 안 난다고 했었지."
"괜찮습니다. 그보다 분기점이라는 건...."
"말 그대로야. 미래를 결정하는 선택지의 단계지. 세이브 로드 개념은 기억나? 선택지가 떠오르는 상황을 저장해 놓고, 여러 분기점을 경험해 볼 수 있게 해 놓았거든."
카를은 대충 이해했다는 듯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를 말하는 것인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니 편리한 능력이로군.'
고작 게임에 그 정도 능력이 소모되는 것인가.
새삼 유리아가 있었던 그 '지구'라는 곳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여러 루트가 갈려. 카를, 네 말처럼 마왕과 마계 군세가 중간계에 들이닥쳐서 싸우는 루트도 있었고, 반신들이 대립해서 난리가 나는 경우도 있었고."
"반신과 마계 모두 중간계에 난입해서 활개를 치는 루트도 있었습니까?"
"하드 모드에는 있다고 하더라. 노멀 모드에서는 난이도가 너무 올라가서 두 요소가 양립하는 건 막아 놨고."
설명을 이어 나가던 중 유리아는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두 눈을 번뜩이며 물어보았다.
"카를, 넌 반신의 추종자들 뿐만이 아니라 마계도 난입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유리아에게는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전 반신의 추종자뿐만이 아니라 수도에서 활동하는 악마와 마족, 그리고 마인까지 모두 만난 적이 있습니다."
"...!"
카를의 말에 유리아는 화들짝 놀랐다.
카를이 물밑에서 움직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활동력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다 녹스의 활동 중이겠지?'
하지만 그것까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카를이 자신에게 녹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도 있을 테고,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해 올 수도 있을 테니까.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것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자신도 카를에게 전부 말한 건 아니니 이쯤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마인은, 그렇다고 쳐도 악마나 마족까지?"
"정확히는 마인을 통해 만났다고 하더군요. 제가 지닌 능력 중에는 상대의 정신에 간섭해 파괴하는 힘이 있는데, 마인에게 파고들던 중 고위 악마로 보이는 존재와 만났습니다."
심상의 세계가 아니었더라면 대립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존재였다.
마찬가지로 이쪽의 심상에 깃들은 반신 카일로스조차 녀석보다 강하진 못했다.
"제국 수도까지 올라와 활개를 치고 다닐 정도라면, 대륙 곳곳에 퍼져 있겠죠. 그들의 존재가 흑마법사와 관련이 없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결국엔 다 같은 마계 추종자들이니까."
마인이나 흑마법사나 악마, 마족과 계약해 힘을 얻는 것은 똑같았다.
그러니 과거부터 성국이나 대륙에서 그들을 배척하고 정리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으니.
흑색 마탑의 흑마법사는 마족과 계약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흑마법을 연마한다며 말하긴 했지만, 속이 시커먼 이들의 말을 쉽사리 믿어 줄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성국에서 무력 행사에 가까운 행동으로 나선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난잡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주신이 되고 싶어 하는 반신의 추종자들과 마계 군세의 침입, 그리고 원래부터 대륙에 자리하고 있는 열강들의 욕심까지.
카를은 잠시 머릿속으로 최악에 치달은 미래를 그려 보았다.
'...어느 쪽이든 암울하군.'
그나마 자신이 깃든 이 몸이 약소국이 아니라 대륙을 호령하는 리베라 제국이라는 것이 다행인 점일까.
예정했던 것보다 더 부지런히 힘을 길러 둘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아카데미 계획도 수정해야겠군.'
본래는 정상적으로 졸업할 때까지 4년간 바이에른에 체류할 생각이었다.
다른 생도들과 친목을 다지고, 여러 방면으로 인맥을 쌓으며 '카를로스'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낙관적으로 있을 순 없을 듯했다.
'가장 중요한 건 카일로스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다.'
반신(半神) 카일로스.
그의 힘과 유적은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현재 녹스는 고대 영웅이 남긴 흔적의 탐색을 중지하고, 모든 역량을 카일로스 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가올 혼란에서 살아남으려면 반신의 힘 정도는 손에 넣어야 할 테니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만약, 만약 말입니다."
"응."
"유리아가 사계를 완성한다면 반신에 맞먹는 힘을 낼 수 있습니까?"
"...."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유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로서의 최종 루트에 들어가기 위해선 사계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이건 혼자만 간직해야 하는 비밀.
그렇기에 섣불리 입에 담기에는 여러모로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아, 말하기 곤란하다면 말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아. 너도 많이 말해 줬는데 나도 이건 말해 주어야 공평하겠지."
하지만 유리아는 기꺼이 출혈을 감수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지금 만들고 있는 사계는 오로지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 시스템이었다.
카를이 탐낸다고 하여도 빼앗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기껏해야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무력화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스르륵.
유리아의 손 위로 작은 구체가 나타나 떠올랐다.
잿빛 마탑과 유리아가 지금까지 쌓아 온 마법의 정수인 『사계』
마법을 시스템화시켜 자동적으로 사용하게 만들어 주는 이 세상에 없는 신기였다.
"사실 사계는 과정에 불과해."
"과정에 불과하다?"
"잿빛 마탑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고 있지?"
""영원"의 대마도사 아닙니까."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영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정복하고 이터널 학파라는 새로운 분류를 만들어 냈다.
이터널 학파는 시간이 흘러 잿빛 마탑으로 바뀌었고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영원"이 만든 마법의 정수는 삼라만상이라 불리는 시스템이야. 그리고 사계는 그 열화판이고. 즉...."
"사계는 삼라만상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카를이 말을 뺏자 유리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완성의 경지는 삼라만상이 되겠지. 하지만 그게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어. 게임과 현실에 다른 점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정말로 파괴적인 최고위 마법을 흩뿌리는 오브제가 될 수도 있겠고, 아니면 새로운 경지로 이끄는 계단이 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둘 다가 되겠고."
유리아는 후자 쪽을 기대했다.
대마도사 위에 있는 경지는 반신에 근접하는 위치였다.
즉, 그쪽 루트를 밟는 것으로도 반신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죽어라 사계를 연구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고.'
유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카를을 바라보았다.
"카를, 넌 다시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
갑작스러운 물음에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유리아가 말한 고향과 자신의 고향은 서로 다른 곳이었다.
그녀는 '게임'으로 인해 휘말려 유리아가 되었고, 자신은 죽음 끝에 카를로스의 몸으로 빙의했다.
서로 다른 상황, 다른 조건으로 인한 가운데 이 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니 고향에 대한 향수도 그리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래도 방법은 찾아 놓을 생각입니다. 가지 못해서 안 가는 것과 갈 수 있는데 가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또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고."
지금의 카를로서는 중원에 돌아갈 이유가 하등 없었다.
당장 녹스를 운영하는 것도 바쁜데 중원에 돌아갈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흉수인 나락살은 심장을 터트려 가한 폭혈에 의해 죽었으니 복수할 대상도 없었고.
'굳이 따지자면 살막이 남아 있긴 하지만.'
살막은 어차피 없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중원으로 돌아가 살막을 지워 버려도 얼마 후 또 다른 살수 조직이 스스로 살막의 이름을 칭하며 활동하기 시작하겠지.
중원은, 무림은 그런 곳이었다.
"그래도 돌아가 보고 싶긴 합니다.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물론, 아르테니아에서 모든 일이 끝나면 중원에 되돌아갈 마음이 있었다.
적어도 죽는 건 원래의 고향에서 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쪽에서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천하제일살수가 아니라 천하제일고수로.'
혼원일극신공의 무공을 익힌 자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이야기였다.
애초에 저쪽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르테니아에 온 것처럼 누군가의 몸에 빙의해 갈 필요도 없을지 모르고.
지금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빠른 시간 내에 무림을 제패하며 정말로 천하제일고수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를, 얼굴이 무서워."
"아, 죄송합니다."
잠시간 천마와 무림맹주, 그리고 소림의 방장과 무당의 장문인을 비롯해 구파일방, 오대 세가의 수장들을 발아래 꿇리는 상상을 해 보았다.
자신은 그런 허영심은 없는 줄 알았지만, 막상 그 상황을 상상하니 가슴이 절로 떨려왔다.
'무인은 어쩔 수 없는 무인인가.'
무인으로서 지니는 호연지기는 2회차의 삶이라도 막을 수 없는 노릇일 터.
"아, 너무 마셨나 봐. 살짝 어지럽네."
카를과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 2병을 순식간에 다 비워 낸 유리아는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녀에게 물을 따라 주고 창문을 연 카를은 어느덧 밤이 더 깊어졌음을 깨달았다.
'이야기에 너무 심취해 있었군.'
내일도 내일의 일정이 남아 있는 와중 휴식은 중요했다.
자신은 일주일을 밤새 수련해도 괜찮았지만, 마법사인 유리아에게 체력은 중요한 문제였으니.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리아도 쉬어야 하니."
"그래, 그럴까?"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살짝 비틀거렸고, 카를이 옆을 부축하며 바로 세워 주었다.
"...."
자신의 팔을 붙잡는 딱딱한 손길에 유리아는 입을 꾹 닫았다.
술에 취한 탓일까.
일렁이는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큐어 마법으로 숙취를 날려 버렸다.
"...후우."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유리아는 카를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문가에 섰다.
"그럼 돌아갈게. 너도 잘자."
"좋은 밤 되십시오."
달칵.
유리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어두운 복도로 나갔다.
조금 전까지 정신이 없었던 탓인지 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발동하는 걸 깜빡했지만, 어차피 밤이 늦었으니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해 사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복도의 끝.
목이 말라 잠시 아래층에 내려갔다 온 레이시스가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어? 어?"
깊은 밤.
술에 취한 모습으로 카를의 방에서 나온 유리아의 모습에 레이시스는 한동안 우두커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182화 알트하우젠 (7)
수련과 휴식의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카를 역시 생도들에게 피 나는 수련을 강요하진 않았다.
'이들도 학기 중에는 다들 열심히 해 줬으니.'
열심히 하는 이들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해 봤자 부작용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각자 알아서 잘해 주었으니 자신이 조금씩만 돌봐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알트하우젠에 온 첫날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며 생도들에게 테스트 운운하는 것으로 압박을 가한 건 그들에게 현실을 자각해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카를도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달려!"
알트하우젠은 눈 부신 햇살과 더불어 널찍한 해변을 비롯한 바다 관광지가 유명했다.
수련을 끝낸 그들은 하루의 햇살이 가장 쨍쨍할 때 해변에 나와 즐거운 시간을 한껏 만끽했다.
카를 역시 그들과 어울려 물놀이를 하다가 파라솔의 그늘 아래로 되돌아왔다.
본래는 라이프치히로 되돌아갔을 때 쉬려고 했지만, 녹스의 일정과 더불어 갑작스러운 마수의 습격으로 인해 제대로 휴식하지도 못한 채 바삐 움직여야 했다.
이번 일정이 끝나면 다시금 여러모로 바빠질 예정이었기에 마지막으로 숨 고르기를 하는 것이었다.
"...."
그런 카를과 달리 생도들은 진심으로 바다를 즐기며 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늘 아래 모래사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있던 카를은 슬며시 몸을 일으키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쉴 틈을 주지 않는군.'
녹스의 수하가 이쪽을 향해 은밀히 전언을 전해 온 것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퀸 선에서 처리하라고 했을 터인데, 자신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소리겠지.
카를은 가볍게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생도들은 신나게 놀고 있으니 한동안 자신을 찾진 않겠지.
화장실이나, 다른 곳에 잠시 갔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어?"
하지만 그런 카를의 생각보다 더 유의 깊게 그를 지켜보고 있던 시선이 있었다.
바로 어젯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고뇌하던 레이시스 본인이었다.
밤이 깊었을 때 목이 말라 식당에 물을 가지러 가던 그녀는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며 카를의 방에서 나오던 유리아의 모습을 목격했다.
일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며 손발이 잘게 떨려 왔다.
'대체 왜?'
왜, 그녀가 카를의 방에서 몰래 나온 것일까.
주위를 휙휙 살피고 기척을 죽인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남들에게는 들키기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복도 끝에 우두커니 서서 유리아가 사라질 때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시스는 돌연 한 가지 충동에 사로잡혔다.
'유리아와는 무슨 관계인가요?'
다시금 굳게 닫혀 버린 카를의 방문을 열고 본인에게 그렇게 직접 묻고 싶었다.
의혹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이에른 학기 중에도 묘한 기류가 서로 흘렀고, 마법 스터디도 갑작스럽게 맺어졌다.
거기에 학기 마지막 날, 종강 파티에서 손을 잡고 정원에서 들어온 둘의 모습까지.
'유리아는 아니라고 했지만....'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게 무엇이 아니라는 걸까.
그렇기에 레이시스는 자신의 방에 돌아온 뒤에도 날이 밝을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수련이 끝난 뒤에는 그대로 바다에 끌려 나왔고, 복잡한 마음에 제대로 놀지도 못한 채 붕 떠 버린 마음으로 해변가를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은밀하게 자리를 비우는 카를의 모습을 포착했다.
혹시나 싶어 바다를 바라보자, 유리아는 튜브에 얹힌 상태로 둥둥 떠서 바다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둘이 따로 만나려는 건 아닌 듯한데, 누굴 만나러 가는 걸까.
자박.
카를의 뒤를 쫓은 건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레이시스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고, 카를의 신형이 인파에 묻혀 사라지기 전에 겨우 그 꼬리에 따라붙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대로변을 지나 상가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길목으로 넘어갔다.
필사적으로 기척을 숨긴 채 그 뒤를 따랐지만, 골목이 꺾이는 자리에서 카를을 놓쳐 버렸다.
"...아."
레이시스는 짤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제야 겨우 냉정해지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카를도 눈치챘겠지.'
카를 정도의 실력자가 자신이 뒤쫓아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모습을 지워 버린 건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신호일 터.
어깨를 축 늘어뜨린 레이시스가 낙담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을 찰나.
툭.
"...!!"
자신의 바로 뒤에 있던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이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카를인 줄 알았다.
기척 없이 자신의 뒤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카를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누구, 세요?"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건 생전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보라색 머리카락, 왕녀인 자신조차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에 왼쪽 눈가에 찍힌 매력적인 눈물점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여성이었다.
"그건 이쪽에서 묻고 싶은데요. 누구신데 여기까지 들어오신 거죠?"
"...아앗."
레이시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사유지였다면, 자신은 그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가 되었다.
그렇기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저는...."
"농담이에요, 레이시스 양. 직접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죠? 카를 님에게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답니다."
"앗."
신원 불명인 여성의 입에서 튀어 나온 카를의 이름에 레이시스는 몸을 굳혔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카를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눈빛.'
카를의 이름을 말할 때 눈동자에서 스쳤던 그 기색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것이었다.
퀸은 포식자 앞에 선 아기 새처럼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이시스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굳게 닫혀 있는 건물의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가죠. 카를 님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제가,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그건 레이시스 양의 선택이죠. 여기까지 카를 님을 따라왔잖아요? 떨쳐내려면 해변에서부터 모습을 지워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꼬리를 남기며 그녀가 따라올 수 있도록 인도한 걸 보면, 생각보다 레이시스를 많이 아끼는 것이리라.
"그러니 레이시스 양이 선택하세요. 들어갈지, 말지."
"...."
레이시스는 잠시간 고민했다.
눈앞의 여성은 왕녀인 자신보다 더 기품있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그리고, 그만큼 위험하고 치명적인 느낌 또한 동시에 주었다.
카를이 엮여 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섣불리 결정을 내려도 되는 걸까.
하지만 레이시스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들어갈게요."
카를 혼자 보낼 수는 없다.
당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어제 유리아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 용기는 없지만, 이름 모를 아름다운 여성을 따라 이곳까지 무슨 일로 왔냐고 물을 용기는 있었다.
카를이라면 그 정도 투정은 용서해 줄 테니까.
"좋아요, 가죠."
퀸은 자연스럽게 레이시스의 어깨를 감싸쥐며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곧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고 문을 밀자 잠금이 풀리며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
레이시스는 제법 긴장했다.
카를에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면모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살면서 지금까지 만나 본 남자 중 그처럼 비밀스러운 이는 없었으니까.
'거느리고 있는 조직이 있다고 했지.'
토호슈 영지에서 뒷수습을 해 주었던 이들이 카를이 속한 조직의 수하들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여성도 그중 한 명인 것일까.
철컥.
하지만 레이시스의 기대와는 달리 드러난 내부는 평범했다.
여러 사람이 바쁘게 돌아다녔고, 물건이 잔뜩 담긴 상자와 짐을 옮기며 일하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평범한 상회로 보이는 모습이었으니.
"가죠. 3층이에요."
"아, 넵."
레이시스는 퀸과 나란히 한 채로 계단을 올라갔다.
정확히는 퀸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것이었겠지만.
똑똑.
3층 도착해 노크하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쪽에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서류를 살피고 있던 카를이 앉아 있었다.
문가를 흘깃 본 카를은 퀸 옆에 있는 레이시스의 모습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데려온 이유는?"
"레이시스 양의 결정에 맡기라고 하셨잖아요. 그녀도 연관된 일이니까."
"저도요?"
레이시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둘에게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퀸이 카를에게 시선을 보내며 허락을 구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반신 카일로스, 기억하지? 토호슈 영지에서 레이시스 양과 카를 님이 갔던 유적지."
"아, 네. 고생 많이 했죠."
"이곳 알트하우젠에서도 카일로스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의 전승이 발견되었거든."
"정말요?!"
놀람을 토하는 레이시스의 모습에 카를은 입술을 매만지며 퀸이 가져온 서류들을 살폈다.
수도에 있어야 할 퀸까지 직접 이곳으로 오게 만든 최중요 사안.
녹스의 사업을 제외하고 가장 우선순위에 올려 둔 반신 카일로스의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겠군.'
정말로 운이 좋았다.
퀸은 카를이 알트하우젠에서 보낸 일정을 검토하기 위해 영지와 관련된 기록을 살폈다고 했다.
그러던 와중 반신의 전승에 관한 고사를 확인했고, 곧바로 그 부분을 중점으로 파고들었다.
제법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되자 그녀 본인이 만사를 제치고 카를에게 보고하기 위해 알트하우젠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겸사겸사 마스터도 보고.'
퀸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바다로 유명한 관광지이기에 주변에 녹아들기 위해 그녀 역시 수영복을 착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첫 만남에서 어울린다는 칭찬을 받았기에 지금은 제법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꼬맹이 생도의 어리광을 너그럽게 받아 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건, 진짜군. 바이에른에서 본 적이 있는 문헌이다. 그곳에서는 반신이라 적혀 있지 않았는데 설마 알트하우젠에도 존재할 줄이야."
자신의 지식과 퀸의 보고를 대조해 본 카를은 이 문헌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는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위치겠네요. 두루뭉술한 표현만 나와 있고, 정확한 위치는 표시되어 있지 않아요. 추측하기로는 바다 안쪽 어딘가인 것 같은데."
"높은 확률로 절벽과 이어진 모종의 던전일 테지. 조사해 볼 가치는 있겠어."
"...."
카를과 퀸의 대화를 지켜보던 레이시스는 내심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를이 말을 편하게 하다니.'
바이에른에 입학한 이후 카를은 누구에게나 경어를 사용해 왔다.
누군가에게 이리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처음 보는 모습.
...슬쩍 퀸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이 여성과 긴밀한 관계라는 것인가.
'나한테도.'
나한테도 말을 편하게 해 주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 카를의 모습도 제법 색다른 매력이 있었으니까.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거기서, 레이시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네? 저요?!"
카를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던 와중, 갑작스럽게 지목당한 레이시스는 화들짝 놀랐다.
183화 해저 유적 (1)
"...알트하우젠 해저에 유적이 있다고요?"
한껏 바다를 만끽하고 배를 채우로 밖으로 나온 막시밀리안은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있었냐는 듯한 그의 시선에 다른 생도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모를 만도 해요. 저도 고대 문헌을 보다가 찾은 거라서요. 확실하지도 않고. 방금 문득 생각났어요."
"바다밖에 없는 이곳에 유적이라...."
레이시스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두 눈을 빛냈다.
알트하우젠은 바다로 유명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바다밖에 없었다.
한철 계절의 시기가 끝나면 그 뒤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사시사철 바다를 보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알트하우젠의 고민이었다.
'거기에 유적이 발견된다면....'
해저 유적.
말만 들어도 두근거리지 않는가.
제대로 된 것만 하나 발견해도 토호슈 영지처럼 유적 관광지로 개발할 수도 있을 터.
해저 유적이니 바다와 연계해 팔아먹기도 괜찮을 것이다.
"좋은데. 카를, 어때. 가능성 있는 거야?"
"그쪽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나가다 본 것 같긴 한데 제 전문 분야는 아닌지라."
"고대 영웅과는 관련 없다는 거야?"
"영웅보다는 신 쪽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카를의 물음에 레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레이시스도 잘 몰랐다.
카를과 퀸의 부탁으로 해저 유적의 발굴을 시도하려는 것이고.
"진짜로 있다면 좋겠는데, 음."
잠시 고민하던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들어 카를과 레이시스를 바라보았다.
"당장 발굴하고 싶은데 영주인 아버지한테도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 특히 제국은 유적 쪽에 좀 철저하게 관리하는 터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하죠."
카를과 레이시스도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국에만 신고한다면 유적 발굴은 불법이 아니다.
그렇기에 바이에른의 유적 탐사 동아리도 미발견 유적지를 공략해 낼 수 있고.
정말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면 제국으로부터 포상금과 함께 학계 공적이 뒤따라왔다.
하지만 발굴 과정에서 유적을 훼손한다면 도리어 처벌을 받을 수 있기에 보통은 적당한 증거가 나오면 제국 쪽에 신고해 넘겨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도 포상금은 두둑하게 나왔고, 발굴 이후의 공적도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쪽은 카일로스의 신전이다.'
고대 영웅과 관련된 쪽이 아니니 제국 측에서는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그 이후의 상황도 예상대로 흘러갔다.
"답신을 받았다. 이쪽의 관리하에 발굴을 진행해도 문제없다는구나."
알트하우젠 자작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나저나 정말로 이쪽의 도움이 없어도 되겠느냐?"
"발굴 도움은 데메이라 상회 쪽에서 도와주기로 하셨어요. 카를과 함께 일하고 있는 쪽이라."
"제시한 조건은 괜찮다만...."
알트하우젠 자작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카를은 유적 발굴에 다른 이들이 끼는 건 원하지 않았다.
생도들과 데메이라 상회로 위장한 녹스의 조직원들.
소수의 인원으로도 발굴은 충분했기에 문제는 없었다.
'결국, 카일로스와 싸우는 건 나 혼자가 될 테니까.'
토호슈 영지에서는 형편없이 밀리다 심상의 세계에서 겨우 끝을 보았지만, 지금은 우세를 점할 자신이 있었다.
경험이라는 것은 중요한 요소를 차지했으니 말이다.
"흠."
사실 알트하우젠 자작으로도 거절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었다.
발굴에 들어가는 비용은 메데이라 상회에서 전부 대고, 추후 발생하는 이득은 영지 쪽에 돌린다고 하였다.
말 그대로 허가증만 내주고 아무런 지출 없이 이득만 챙길 수 있는 상황.
설령 제대로 된 유적이 아니더라도 이쪽에 손해는 없었다.
'하지만 상회는 아무런 이득이 없이 움직일 곳이 아닌데.'
알트하우젠 자작은 카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메데이라 상회와 라이프치히 가문이 깊게 연결된 것은 알고 있었다.
작금 제국 수도에서 유행하는 마나 비즈를 파는 곳이 메데이라 상회였고, 그와 더불어 라이프치히와 연결되었다는 것이 수면 위로 떠올랐으니까.
"그리고 이것을...."
카를은 쐐기를 박고자 알트하우젠 자작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무엇인가 싶어 자작이 받아 들자 안쪽에 자리한 작은 구슬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뇌물까지.'
알트하우젠 자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할 필요가 없음에도 이런 선물까지 안겨 주다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히 하고 가도록 하지. 만일 귀책 사유가 생길 경우엔...."
"메데이라와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허가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카를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알트하우젠 자작의 동의를 얻는 건 번거롭고 불필요한 과정에 불과했다.
생도들에게 알리지 않고 녹스만 움직여 은밀히 유적을 조사하면 끝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시밀리안의 아버지이고, 이번 기회에 생도들도 경험을 쌓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 계획했다.
카를이 생도들을 움직여 키워 내는 건 장기적인 계획 중 하나였으니까.
"우린 뭘 준비해야 해?"
"준비는 메데이라 상회에서 전부 해 올 겁니다. 저희는 무장만 신경 쓰면 됩니다."
"좋아, 간편해서 좋네."
"발굴은 내일 곧바로. 그러면 오늘 하루까지만 쉬도록 하죠."
* * *
본래 알트하우젠에 와서는 다른 생도들과 편히 휴식하려 했었다.
하지만 카일로스의 신전으로 의심되는 유적이 발견된 이상 그럴 수가 있을까.
'아직은 미약한 신성이지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오리진의 뱀파이어를 상대했을 때도, 흑마법사들이 소환한 호수의 기사 랜슬롯을 상대했을 때도 신성의 큰 도움을 받았다.
고작 한 조각의 신격을 흡수했음에도 이러할진대, 한 조각의 신격을 더 흡수한다면 이보다 많은 신성을 운용할 수 있을 터.
더불어 혼원일극신공의 기운도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나올 적은 마계와 관련된 녀석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쪽의 준비도 빈틈이 없어야 한다."
"이미 신성과 관련된 무구들을 매입하고 있습니다."
카를의 말에 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퀸은 보고 이후 수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이쪽은 카를이 있으니 그에게 맡기고 다시 수도로 돌아가 녹스의 업무에 집중해도 상관 없었다.
하지만 퀸은 어물쩍거리며 계속해서 카를의 옆에 있다는 의견을 은연중에 표시했다.
'그녀도 쉴 때가 필요하긴 하겠지.'
카를은 그것을 허락했다.
이대로 다시 올려 보낸다면 또다시 녹스의 업무에 파묻혀 지낼 것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휴식을 부여하는 것이 낫겠지.
원래는 메데이라 상회를 운영하는 제인이 그 역할을 맡을 셈이었지만, 녹스의 2인자인 퀸이 나서자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양보했다.
"준비는 만전을 기했겠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퀸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들은 현재 메데이라 상회의 일원으로 영지의 공식적인 발굴 작업에 나온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녹스의 가면도, 복장도 갖추지 않은 채 상회 직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직원들도 모두 인상이 평범하거나 순한 이들로 데리고 나와 생도들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도록 조성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최소 블랙 라벨의 실력자.
퀸은 내친김에 간부들까지 호출하고 싶어 했지만, 카를은 너무 과전력이라며 그만두었다.
퀸이 자리를 비운 와중 다른 간부들은 수도에 있어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을 테니.
"카를!"
"준비하려고 일찍 나간 거야?"
"어, 그쪽 분은...."
카를은 메데이라 상회와 준비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저택을 나왔다.
생도들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장소에 나온 것이었고.
메데이라 상회의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카를 옆에 함께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모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가워요. 메데이라의 미르엘이라고 합니다."
퀸은 옷자락의 끝을 가볍게 올리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상회 직원과 같지 않은 기품에 모두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미르엘 양은 타국의 귀족 출신이십니다."
"아하."
"어쩐지."
생도들은 그제야 납득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기품은 쉽사리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
이미 그녀와 일면식이 있는 레이시스는 슬쩍슬쩍 눈치를 보며 침묵했고, 유리아는 마안으로 메데이라 상회 쪽을 보며 속으로 흥미를 표했다.
'전부 심상치 않은 강자네.'
메데이라 상회로 꾸민 녹스의 조직원들이라, 유리아는 예측했다.
직원 한 명이 익스퍼트 중견급 이상에 저 퀸이라 불리는 여성은 어쩌면 자신보다 더 강한 실력자였다.
'생각보다 더 강한 조직이겠는데.'
유리아는 입술을 매만지며 녹스의 평가를 더욱 상향했다.
카를이 물밑에서 만든 조직인 만큼 꽤 저력이 있으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의 전력까지 갖추고 있는 건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갑작스러운 발굴 계획이었으니 조직의 최정예가 출동한 것도 아닐 테지.
'소수 정예라고 하더니 정말이네.'
유리아가 그들을 눈여겨 보고 있을 때, 막시밀리안이 손을 들며 물었다.
"유적은 바다와 이어지는 절벽 쪽에 있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곧바로 이동하죠."
알트하우젠 자작과 다른 조사관들은 제국으로부터 허가를 받기 위해 전날 이미 한차례 그곳을 다녀갔었다.
하지만 생도들은 발굴을 위해 휴식을 취했기에 이번이 초행길이었다.
철썩.
해변으로부터 이어진 길을 쭉 따라가니 모래사장이 끝나고 우뚝 솟아오른 절벽들이 점차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동안 쉴 새 없이 몰아친 파도 때문에 생겨난 가파른 절벽의 향연이었다.
알트하우젠은 해변뿐만 아니라 절벽의 풍경으로도 유명했다.
카를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그런 절벽 중에서도 가장 험하다고 알려진 절벽인 '파쿠름' 쪽이었다.
"이 아래로 내려가면 절벽 중간에 구멍이 있을 겁니다. 다들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럼 저희가 먼저 들어갈게요. 길을 표시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휙.
퀸을 비롯한 메데이라 상회의 직원들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리며 내려갔다.
그들의 가벼운 몸놀림에 생도들은 그제야 직원들이 범상치 않은 실력자라는 것을 깨닫고 감탄을 토해 냈다.
"상회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분들만 모셨습니다. 유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어지간한 용병이나 모험가보다 뛰어난 분들일 겁니다."
"뭐, 무슨 일이 있어도 카를이 있으니까."
막시밀리안은 씩 웃어 보였다.
이미 한차례 카를의 강함을 맛본 그들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있어도 카를이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메데이라 상회의 직원들은 부가적인 요소였다.
"다들 그럼 몸에 밧줄을 묶으십시오."
카를의 말에 생도들은 허리춤에 밧줄을 결박했다.
혹시나 누가 실수해서 절벽 밑으로 떨어져도 끌어당기기 위한 보험이었다.
제일 앞쪽의 레이시스부터 맨 끝의 막시밀리안까지.
유리아와 포르저의 비행 마법으로 안전하게 들어갈 테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한 것이었다.
"가죠."
생도들은 조심스럽게 절벽을 타고 내리며 해저 유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84화 해저 유적 (2)
유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절벽 중턱에 있었다.
매끄럽게 깎인 경사 위쪽으로 부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온 턱.
이미 그 위에 도착한 메데이라 직원들이 생도들을 기다렸다.
"다들 한층 주의하도록 해. 생도들에게 정체가 노출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퀸의 말에 조직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메데이라에 고용된 실력자들.
유사시를 제외하고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보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카일로스의 포획은 마스터인 카를의 몫이었으니까.
휙.
절벽 위쪽부터 내려온 밧줄로부터 레이시스가 가장 먼저 내려왔다.
뒤이어 에이미, 리엔에 이어 마지막으로 막시밀리안까지.
비행 마법으로 속도까지 낮춘 덕에 모두 무사히 착지했다.
"이곳입니다."
퀸이 손을 뻗어 절벽을 매만졌다.
그러자 단단한 벽 안쪽으로 손이 스르륵 사라지며 통과되었다.
"결계...!"
흔히 보기 힘든 현상에 생도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유적이 맞나 보네요. 입구에 결계까지 쳐진 걸 보면."
"그럴 겁니다. 동아리에서 예전에 갔었던 미발견 유적에도 결계는 없었는데."
레이시스의 말에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발견한 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의 영지가 이곳 알트하우젠이 아니었더라면 쉽사리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겠지.
"그럼, 저희가 앞장설게요. 생도 분들은 모두 조심히 따라와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선두에 선 레이시스의 인사에 가볍게 미소를 지은 레이시스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메데이라 상회의 직원들이 그 뒤를 따랐고, 생도들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아아아.
결계를 통과하는 감촉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넘어가는 느낌과 비슷했다.
서늘하면서도 뭔가 오묘한 기운이 피부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카를은 그것이 카일로스의 신성과 닮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대로 왔군.'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카를이 눈짓하자 퀸은 수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수색을 시작하겠습니다."
탓.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함께 들어온 8명의 인원 중 5명이 자리를 박차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모두 제 한 몸 지킬 수 있는 실력자들.
더불어 뛰어난 눈썰미를 지니고 있기에 카일로스와 관계된 공간을 찾아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터였다.
"자, 저희도 가죠."
유적 내부는 기다란 길이 쭉 이어져 있는 동굴이었다.
녹스의 조직원들이 흩어진 건 곁가지로 뚫려 있는 작은 굴들.
생도 일행은 가장 큰 길을 향해 그대로 쭉 나아갔다.
"바다에 있는 절벽인데도 습하진 않네요."
"아직 유적에 들어간 게 아니니까요."
"들어간 게 아니라고요?"
퀸의 말에 막시밀리안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결계를 넘어 절벽 안쪽으로 들어왔는데 아직 유적지가 아니라니.
그러면 이곳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동굴은 통로에요. 이곳에서 발견한 유적이 해저 유적이라는 건 들으셨죠?"
"해저, 아."
해저 유적.
바다 밑에 있다는 소리였다.
이 절벽은 바다 위쪽에 위치해 있었으니 해저 유적이라면 그리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이 길을 쭉 따라가면 다른 길이 나옵니다. 그곳에 유적과 이어지는 길이 또 있어요."
생도들은 퀸의 안내를 들으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카를도 기감을 확장한 채 동굴 안쪽을 훑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이곳은 단순한 통로인지 특별한 건 찾아볼 수 없었다.
툭.
이윽고 길이 끝났다.
안쪽에서 나타난 건 거대한 회랑.
발아래는 넓게 뚫린 동굴과 잔잔하게 물결치는 바닷물 일부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빛이...!"
"해저에는 이렇게 스스로 빛을 내뿜는 생명체가 있다더군요. 햇볕이나 외부 공기에 닿으면 죽는다던데, 이렇게 선명하게 살아 빛을 내는 걸 보면 오랫동안 노출되지 않았다는 증거겠죠."
닫힌 공간이라 내부가 어두컴컴했음에도, 바닷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메랄드 빛 광채 덕분에 곳곳에 환하게 보였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그 광경은 아름답다고까지 할 수 있었으니.
감탄하며 그것을 바라보던 레이시스는 자연스럽게 카를의 팔을 붙잡고 몸을 기댔다.
"...."
퀸의 시선이 한순간 그런 둘에게 향했다.
샛노란 불꽃이 튀었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을 터.
신분을 숨긴 채 마스터의 유적 탐색을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레이시스를 향해 일갈이 토해져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참자, 참아.'
레이시스는 마스터가 선정한 최우선 순위의 포섭 인물.
그러니 녹스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호감도를 쌓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기강을 잡고 교육하는 건 그 뒤의 일.
퀸은 그때가 제법 기대가 되었다.
"바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해저 터널이 나올 겁니다. 그곳으로 2분 정도 쭉 헤엄쳐 가면 목적지인 해저 유적이 있을 거예요."
퀸이 눈짓하자 녹스의 조직원들이 먼저 몸을 날리며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망설임 없이 안쪽으로 헤엄쳤고, 별탈 없이 바다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면."
고개를 끄덕인 퀸 역시 가볍게 몸을 날렸다.
생도들만 남게 되었을 때 카를은 좌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수영을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설마. 수영은 기본이잖아."
카를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바이에른에도 수영장은 있었다.
하드한 트레이닝을 하고 수영을 하면 근육을 풀어 주는 효과도 있기에 곧잘 즐기곤 하였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걸 확인한 카를은 바다 밑을 가리켰다.
"저희도 가죠."
풍덩.
곧 생도들도 하나둘씩 바다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유리아는 입술을 꽉 깨문 체 몸에 마법을 둘렀다.
'수영은 서툰데.'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못했지만, 유리아는 수영이 서툴렀다.
더불어 이런 어두컴컴한 공간이나 좁은 틈은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숨이 콱하고 막혀 오는 것 같지 않은가.
"...."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서툴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마법으로 보조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몸을 날렸다.
풍덩.
생각보다 차가운 바닷물이 몸을 감쌌다.
의복에 달린 체온 조절 기능 덕분에 버틸만은 했지만, 잠깐 정도는 흠칫해지는 느낌이었다.
쉬아아악.
유리아는 헤엄칠 것 없이 마법으로 자신의 몸에 기류를 일으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바다 밑으로 들어가자 미르엘의 말대로 해저 터널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핏 보아도 자연적으로 만들진 구조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몸을 움직여 안쪽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좁은 통로에 숨이 턱하고 막혀 왔다.
보글보글.
그 탓에 입안에 머금고 있는 산소를 토해 내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에 유리아는 당황하며 손을 휘둘렀다.
'산소, 산소를....'
마법으로 공기를 일으켜 재차 호흡을 이어 나가려 했지만, 손끝이 떨리고 시야가 좁아진 탓에 술식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유리아의 마법 실력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실수였지만, 좁고 어두운 통로에서 오는 압박감 때문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와....'
레이시스는 터널에 가라앉으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다른 생도들은 이미 저 앞으로 가 버린 뒤.
점점 차오르는 호흡 가운데 그들의 뒷모습밖에 보이질 않았다.
위험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바로 쪽팔림이었다.
자신이 오지 않는 걸 확인하면 곧바로 되돌아와 자신을 구해 줄 테지.
수영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이런 위기에 처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
탁.
유리아의 상념이 끝나기도 전.
누군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두 눈을 크게 뜨자 앞서 간 줄 알았던 카를이 그곳에 있었다.
사락.
카를은 유리아의 어깨를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곤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툭.
맞닿은 입술 사이로 숨결이 흘러 들어왔다.
한계까지 차오른 호흡이 안정되었고 좁아져 가던 시야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유리아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비정상인 상태였다.
'...!!!'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설마 입맞춤으로 산소를 넘겨 줄 줄이야.
예상하지 못했기에 반응조차 못했고 얌전히 그대로 카를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차디찬 바닷물이 닿지 않았더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터.
사락.
그 직후 카를은 유리아의 어깨를 팔로 휘감은 채 함께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호흡이 회복되었으니 나머지는 혼자 갈 수 있었지만, 유리아에게는 저항할 여력이 남아 있질 않았다.
곧 뭍에 도착하기 직전, 카를은 유리아를 놓아주며 위쪽으로 밀어주었다.
다른 생도들의 이목이 있었으니 도움 받았다는 걸 알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카를의 배려가 고마운 반면,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여전히 정신이 없는 유리아였다.
"...푸하."
겨우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밖을 향해 나아갔다.
이미 도착한 생도들은 젖은 물기를 짜내거나 말리고 있던 차.
유리아의 전신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며 순식간에 원래의 뽀송뽀송한 상태를 되찾았다.
"유리아, 나도...."
"나도 부탁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생도들도 그녀에게 부탁했다.
잠시간 입술을 매만지며 우두커니 서 있던 유리아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완드를 들었다.
"어? 어, 앞으로 서."
한 박자 늦게 카를이 물에서 걸어 나왔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애초에 물에 젖지 않은 듯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상태였다.
"...."
유리아는 에이미의 몸을 말려 주면서도 그런 카를의 모습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 자신도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이 있을 테지.
하지만 이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모습에 눈가를 꿈틀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고?'
그래도 이쪽은 첫 키스였는데.
아니면, 자신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태연한 척을 하는 건가.
휘이이잉.
카를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마법으로 따뜻한 바람을 만들어 내 몸을 말리고 있는 레이시스 쪽이었다.
"그런 바람으로 말리면, 한 세월이 걸릴 겁니다."
"머리카락만 마르면 충분해요. 움직이기에 불편해서 그러니까."
그런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면 나머지는 유리아에게 부탁해서 건조시키든가.
작게 웃은 카를은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도와주시게요?"
"이건 나중에 레이시스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카를은 레이시스의 몸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
가벼운 열양지기가 일어났고 전신에 묻은 바닷물을 순식간에 증발시키며 뽀송뽀송한 상태로 되돌렸다.
"와."
레이시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바닷물에 뛰어들기 전보다 더 뽀송뽀송한 상태가 되었다.
"저도 나중에 할 수 있다고요?"
"마나 운용법 중 하나입니다. 무공과 같은 갈래죠.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흐음."
사용할 방법이 많아 보이는 기예에 레이시스는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퀸은 가볍게 헛기침을 토해 내며 주목을 끌어모았다.
"자, 이곳이에요. 알트하우젠에 존재하는 고대 신의 해저 유적. 준비가 끝났으면 들어가도록 하죠."
185화 해저 유적 (3)
유적의 입구는 커다란 벽이었다.
암석 표면을 매끄럽게 깎아 의도적으로 길을 막아 놓은 구조물 형태로 손잡이나 개폐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앞에서 유심히 입구를 살피는 막시밀리안의 모습에 게일은 친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네가 본다고 뭘 알겠나. 뒤로 나와 있어."
"왜, 찾아볼 수도 있지. 여기 봐. 뭐라고 작게 적혀 있는데?"
"어?"
모두의 시선이 막시밀리안의 손끝을 따라 향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형태의 문자가 벽 위에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뭐라고 쓰인 거지?"
"이젠 진짜 나와 봐."
"제가 좀 살펴볼게요."
퀸이 앞으로 나아가 막시밀리안이 발견한 문자 쪽을 살폈다.
물론, 그녀로서도 알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고고학이나 고대 문헌 쪽은 전공이 아니었으니.
그래도 기껏 앞으로 나왔으니 조금 더 알아보는 척하고 있자, 퀸의 귓가로 한 줄기 전음이 도착했다.
-천둥, 비, 바람.
"천둥, 비, 바람이라고 적혀 있네요. 뜻은 해석이 가능한데,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천둥, 비, 바람."
"날씨를 말하는 건가?"
"으음."
퀸의 말에 다들 고민에 잠겼다.
그러던 중 레이시스의 시선이 카를에게로 향했다.
"어떤 것 같아요."
"천둥, 비, 바람. 연관성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폭풍 아닐까요?"
"그렇겠군요. 그러면 폭풍처럼 이 벽을 후려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다소 갑작스러운 카를의 말에 레이시스는 당황했다.
조금 더 인텔리적으로 입구에 적힌 문자를 풀이할 줄 알았는데 폭풍처럼 후려치라니.
"다들 뒤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진짜로 치게요?"
레이시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영문을 모르던 생도들과 녹스의 조직원들은 그 말에 따라 카를의 뒤로 물러났다.
쉬아아악!
카를의 손 위로 세찬 마력이 치솟기 시작했다.
곧 주먹을 말아쥐는가 싶더니 이내 벽 위를 힘껏 후려쳤다.
콰아아앙!
유적 내부에 커다란 후폭풍이 휘몰아칠 정도로 거센 여파였다.
매끄럽던 벽면이 움푹 파였고 타격당한 지점 주위로 선명한 금이 퍼져 나갔다.
"설마...."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막시밀리안이 혀를 내둘렀다.
설마 진짜로 후려치는 것으로 문이 열리겠는가.
저적.
하지만 곧 그 뒤에 벌어진 상황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저저적─.
굳게 닫혀 있던 벽이 반으로 쪼개지며 양옆으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쪽으로 보이는 내부의 풍경에 생도들은 물론이고, 퀸과 녹스의 조직원들도 혀를 내둘렀다.
"아니, 정말로 폭풍처럼 후려치라는 것이 해답이었다고?"
"운이 좋았습니다."
카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정말로 폭풍처럼 벽을 두들겨 패라는 것이 정답은 아니었다.
그곳에 쓰인 문자의 의미는 카를도 알 수 없었으나, 벽면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입구를 여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일로스의 신성을 주입하면 되는 것이로군.'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카를의 눈에는 그 위에 은은하게 흐르는 신성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기운에 반응해 출입을 허락하는 기능을 지닌 결계일 터.
구태여 그 위를 후려친 것은 신성을 감추기 위한 방법이었다.
자신이 카일로스의 신성을 흡수한 건 극소수만이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어쨌든 열렸으니 들어가죠."
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녹스의 조직원들이 앞으로 나아가 통로의 안전을 확보했다.
안으로 넘어가는 와중 유리아는 양옆으로 활짝 열린 벽을 살폈다.
'단단해.'
물속에서 카를과 있었던 일은 잠시 기억 한구석으로 미뤄 두었다.
지금은 이 해저 유적의 조사가 더욱 중요했으니 말이다.
'뭘로 만든 거지?'
사락.
유리아는 그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카를이 후려친 덕에 갈라져 있긴 했지만, 상당히 단단한 재질이었다.
은은한 항마력도 느껴지는 걸 보니 쉽사리 부서지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듯한데 카를은 어떻게 이걸 부순 것일까.
"...."
슬쩍 앞을 걸어가는 카를을 보다가 조용히 뒤따라 걸었다.
아직 이곳은 유적 입구에 불과하니 말이다.
"여기부터 시작이군요."
입구를 통과한 퀸이 허리를 숙이며 바닥을 매만졌다.
길 위에 붉은 융단이 깔려 있는 걸 보니 이곳부터 본격적인 신전이 시작된다는 소리일 터.
딱.
퀸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근처에서 환한 빛이 치솟으며 어두운 실내를 밝혔다.
"신전 입구네요. 장식은, 처음 보는 형태인데.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붉은 융단 앞쪽으로 성벽과도 같은 구조물이 둘려 있었다.
저 뒤쪽과 다른 건 이곳의 입구는 뻥 뚫려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섣불리 들어가지 않은 채 주위를 조사했다.
"흐음."
에이미는 성벽 위에 조각된 정교한 조각상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고대 시절 유적지인데 이 정도 기술력이라니.
고대의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무슨 신인지 알겠어?"
"전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고대에 숭배받던 신이라는 것밖에 적혀 있지 않아서."
유리아의 물음에 카를과 레이시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둘 다 카일로스를 숭배하는 신전임은 알고 있었지만, 아까 전과 같은 이유로 이들에게까지 밝힐 필요는 없었다.
유리아도 카일로스의 신전은 본 적이 없기에 그저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살필 뿐이었다.
"그러면 더 들어가 보죠."
안전을 확보하고 마킹까지 해 둔 뒤 내부로 들어갔다.
신전 입구에는 32개의 계단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모종의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왜 33개가 아니라 32개일까. 33이 더 완벽한 숫자 아니야?"
"이 아래 하나 더 묻혀 있을 수도 있지."
종교에 관해 기본 지식은 있던 생도들의 의아함을 표했다.
하지만 카를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반신이라 그런 것이로군.'
33개는 신을 의미하는 숫자.
아직 완전한 신에 이르지 못했기에 32개의 계단을 사용하며 여지를 남겨 둔 것이었다.
실제로 32개의 계단 이후 신전 내부로 들어가는 공간까지 제법 격차가 있었다.
추후 완전한 신에 이른 직후 하나의 계단을 더 추가할 예정일 터.
그렇게 안쪽에 들어가자 생도들은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와!"
"이게 다 뭐야?!"
안쪽에는 어마어마한 재물이 쌓여 있었다.
금화, 보석, 갑옷, 그리고 휘황찬란한 무구들까지.
그 익숙한 풍경에 레이시스는 카를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호슈 영지에 있던 카일로스의 신전도 같았다.
카일로스가 있는 공간 안쪽에 들어가기 전, 수두룩하게 쌓인 재물들이 있었지.
"건드리지 마세요!"
생도들이 재물들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으려 하는 찰나.
퀸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까지 나긋나긋하던 그 목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
압도된 생도들이 우뚝 멈추어 섰을 찰나, 퀸은 그들을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 보통 이런 재물에 마법이나 장치가 걸려 있기 마련이거든요. 저주에 걸리거나, 함정이 발동할 수도 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막시밀리안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이곳에서 발견된 재화에 누구보다 신나던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메데이라 상회와 생도들에게 배분하긴 하겠지만, 법규상 가장 큰 몫을 분배받는 건 알트하우젠일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살짝 들떠서 금화 사이에 꽂혀 있는 보검을 쥐려고 했는데 퀸의 제지 덕분에 손을 멈췄다.
"그럼 어떻게 하죠?"
"조사를 해야 할 듯하네요. 잠시간 기다려 주시겠어요?"
곧 녹스의 조직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이질적인 요소의 조사에 나섰다.
카를도 생도들과 함께 제자리에 선 채 주변을 쭉 훑었고, 그대로 퀸에게 전음을 보냈다.
-왼쪽 천장 위의 크리스탈. 그리고 저 끄트머리에 있는 홍옥을 부수면 된다.
"이것이네요. 곧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쉬악.
퀸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두 자루의 비수를 내던졌다.
하나는 왼쪽 천장 위의 크리스탈, 다른 하나는 홍옥을 부쉈다.
동시에 주위를 뒤덮고 있던 이질적인 파장이 사라지며 바닥에 쌓인 보물들이 조금 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
확실한 차이에 생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토했다.
퀸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챙기셔도 됩니다."
"와, 이 검 좀 봐."
"아무리 못해도 상급 마나석 같은데 신전에 이런 게...."
생도들은 신이 났다.
기껏해야 유물 정도를 발견할 줄 알았는데 이런 보석들까지 나오다니.
그러던 사이 카를은 퀸에게 눈짓을 보내며 은밀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지?'
슬쩍슬쩍 그를 바라보고 있던 유리아는 그런 카를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곧 입을 열어 카를을 부르려 할 찰나, 한 줄기 전음이 그녀에게 도착했다.
-이곳은 위험하기 때문에, 저 혼자 가야 할 듯싶습니다. 유리아는 생도들을 부탁하겠습니다.
"...."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카를의 목소리에 유리아는 우뚝 멈춰 섰다.
곧 카를의 신형이 산더미처럼 쌓인 보화 뒤로 사라지고 나서야 짤막한 숨을 토해 내며 손을 거두었으니.
"에휴."
짤막한 한숨만이 보물들 사이에서 흘러나갔을 뿐이었다.
* * *
다른 이들을 뒤로한 채 홀로 안쪽까지 걸어 들어온 카를은 마치 내부를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멈춰 선 곳은 보석이 쌓인 내부의 끄트머리, 허름한 문의 앞에서였다.
'저쪽과 똑같군.'
피식 웃음을 흘린 카를은 가볍게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문이었지만, 밖에 있던 문보다 더 강력한 결계가 걸려 있었다.
카일로스의 신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강한 힘을 주어도 꿈쩍하지 않았을 터.
작금 이 세상에는 오로지 카를밖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탁.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고개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
내부는 널찍한 공동이었다.
토호슈 쪽은 마치 의식을 행하는 제단과 같은 형태였는데,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줄기 빛이 내리쬐는 중앙의 구조물을 빼고는.
쪼르륵.
그곳에 자리한 남성이 찻잔에 홍차를 따르고 있었다.
반신 카일로스의 신격, 너무나도 느긋한 그 모습에 카를은 두 눈에 이채를 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유로운데."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건 자네가 내 신격을 지녔다는 소리니까. 한잔하겠나?"
카를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로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해 주었다.
저쪽에서 만났던 카일로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
사뭇 친절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양새였다.
"왜 그렇게 보는가?"
"다른 너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라서."
"어딜 먼저 만나고 왔지?"
"토호슈."
"토호슈, 아, 토센 지방이겠군. 그쪽에 있는 녀석이 좀 괴팍하긴 하지. 고생 꽤 했겠어."
카일로스는 피식 웃으며 가득 찬 찻잔을 카를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카를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내 신격도 흡수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인가?"
186화 해저 유적 (4)
신격을 흡수하기 위해 이 유적에 들어온 것인가.
카일로스의 물음에 카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순순히 흡수되어 줄 것인가?"
"자네 하기에 따라 갈렸지. 내 시련을 통과하든, 기준에 부합하든, 아니면 목적이 일치하든."
"기준과 목적은?"
"어려운 길을 가려 하는가."
카일로스는 차를 마시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기준은, 아쉽게 되었군. 자넨 아직 내 눈에 차진 않는다네. 평범한 인간이 내 신격을 흡수한 건 대단한 일이지만, 아니 신격을 흡수한 것으로 이제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 순 없겠군. 하여튼 그 정도로는 기준에 차지 못해. 그리고 내 목적은...."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마찬가지로 자네는 닿을 수 없는 것이네. 차라리 내게 몸을 내놓는다면 모를까, 자력으로는 절대로 달성할 수 없지."
"말이 길군."
카를 역시 찻잔을 들어 단숨에 내용물을 비웠다.
안쪽에 담긴 건 평범한 홍차였다.
애초에 아무리 강력한 독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혼원일극신공을 익힌 카를에게 영향을 끼칠 순 없었으니.
자신의 힘에 자신감을 표출한 것이었다.
"시련은 무엇이지?"
"드디어 마음에 드는 대답이 나왔군."
카일로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들 앞쪽으로 작은 거울 하나가 일렁이며 떠올랐다.
내부에 비친 모습은 이 밖에 쌓인 재화를 정리하며 유적 내부를 조사하는 일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명."
"...."
"딱 1명일세. 자네 일행 중 1명을 죽이게."
카를은 빈 찻잔을 매만졌다.
상대가 내건 시련의 의도를 해석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일로스는 의도 따위는 없다는 듯 소탈하게 웃으며 거울 안쪽을 가리켰다.
"신격을 지닌 나 또한 하나의 생명이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토센 지방의 신격까지 합하면 2개의 목을 내놓으라고 하고 싶은데, 그건 그쪽 머저리가 저지른 것이니 너무 과하겠지."
카일로스는 두 눈을 빛내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딱 한 명의 목숨만 주게. 그러면 순순히 자네에게 흡수되도록 하지."
"...하하."
카를은 짤막한 웃음을 토해 냈다.
정말로 손쉬운 일이었다.
녹스의 조직원? 바이에른의 생도?
그중 한 명을 죽여서 카일로스에게 제물로 바치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으니까.
'쉬운 일이기에 하면 안 되는 것이겠지.'
하지만 카를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 세상에 쉬운 시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련이고, 그런 유혹을 참는 것 자체가 시련에 속할 것이다.
유혹에 저버려 쉬운 길로 향했다가는 결국 마성에 잡아 먹혀 버릴 터.
"그러지."
그렇기에 카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로스가 조금 더 짙어진 미소로 입을 열 찰나....
서걱─!
한 줄기 참격이 테이블을 가르고 그에게 쇄도했다.
콰아아앙!
엄청난 여파가 회랑 내부를 뒤흔들었다.
어느새 뽑혀 나온 천뢰검이 벽 한쪽에 기다란 흔적을 그려 낸 것이었다.
"어이쿠."
분명 그 궤적에 휘말렸을 터인 카일로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물러나며 엉거주춤 자리에 섰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는 생채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손쉬운 시련이지 않은가. 내 눈에는 자네에게 숨겨진 비정과 냉정이 보인다네. 이제껏 수많은 피를 묻혀 온 자네라면 손쉬운 내용일 터인데. 아니면, 저들에게 그만큼 정이라도 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카를은 어깨를 으쓱이며 카일로스의 말을 긍정했다.
수하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생도들에게 더 정이 들어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은 건 다름이 아니었다.
척.
카를은 천뢰검을 카일로스에게 겨누며 입을 열었다.
"내 길은 내가 정한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니까. 신격이니, 하는 것도 상관없다."
남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위해 칼을 휘두를 것이다.
아르테니아에 온 직후 자신에게 한 결심이자 각오였다.
그렇기에 녹스를 만들었고, 바이에른에 입학했으며, 지금 이 자리까지 도달했다.
고작해야 신격 따위로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까.
"하하하하!!"
카일로스는 웃음을 토했다.
"자네도 많이 뒤틀려 있군. 내 시대에도 정신이 나간 이들은 여럿 봐 왔는데, 자네만큼이나 비정상인 이는 처음 보았어.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감히 인간의 몸으로 신격을 흡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겠지."
"...."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를 살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토호슈에서 상대했던 녀석보다는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녀석은 패도적이었지.'
하지만 눈앞의 카일로스는 부드러우며 여유마저도 느껴졌다.
그것은 그가 강자이기에 보일 수 있는 분위기.
하지만 그걸 느낄 수 있다는 건 카를 역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륵.
카를은 손에서 검을 놓았다.
그러자 천뢰검이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며 카일로스를 향해 겨눠졌다.
"호오?"
검 끝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느낌에 카일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찰나, 한 줄기 빛살이 그에게로 닥쳐갔다.
따앙─!
엄청난 소음이 울려 퍼졌다.
한순간 내부의 공기가 출렁이고 바닥에 깊은 족적이 남겨졌을 정도의 여파.
카일로스의 신형은 제자리에서 세 걸음 정도 뒤로 밀려나 있었다.
휙.
검을 회수한 카를은 짤막한 숨을 토해 냈다.
'아직은 힘드나.'
이기어검.
검의 최종 경지인 심검(心劍)의 바로 아랫 단계로 카를은 불가살이었을 적 말미에나 이 경지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살수가 이기어검을 사용할 일이 무엇 있겠는가.
기껏해야 비수를 날리는 정도에서 끝날 터인데.
그래도 살수를 버린 지금이라면 이기어검은 아주 좋은 공격 수단이 될 터.
사실 현재 카를이 이룬 경지로는 이기어검을 직접 시도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과거에 이룬 경지가 있기에 시도를 해 본 것인데, 아직 이기어검을 사용하기에는 경지의 성취와 내공의 양이 다소 부족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건?"
카일로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경지는 부족했지만, 위력만은 진짜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카를이 펼칠 수 있는 이기어검은 단 일 초뿐.
그래도 어지간한 공격보다는 더 강한 위력을 내었다.
"영광으로 알도록. 이곳에 온 뒤로는 처음 시도해 보는 것이니 말이야."
카를은 천뢰검을 다잡으며 미련을 버렸다.
이기어검은 내공을 더 쌓고 어검을 익숙하게 한 뒤에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는 생소한 무학일 테니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시도가 성공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는 서서히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쿠웅─!
잿빛 귀화가 타올랐다.
동시에 카일로스 역시 손을 뻗으며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촤아아악!
녹색빛의 신성이 치솟으며 그의 손안에 십자 형태로 쥐어졌다.
본인의 몸보다 더 긴 검신이었지만, 카일로스는 능숙하게 그것을 다루며 카를에게 겨눴다.
"토센 쪽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난 그리 쉽지 않은 상대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좋다."
휘릭.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천뢰검에 휘감기며 선명한 강기의 형태를 이뤘다.
이제는 완전히 동화된 기운과 검의 조화.
강기를 넘어서 어검에 가까운 형태를 이루며 선명한 존재감을 발했다.
"앞으로 너와 싸우는 데 좋은 예행 연습이 될 테니."
이곳의 싸움은 고작 과정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말뜻을 깨달은 카일로스의 입가가 비틀어질 찰나, 카를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캉!
다시 나타난 곳은 바로 앞.
카일로스는 어렵지 않게 검을 휘둘러 카를의 검을 막아 냈다.
'기이한 기운이로군.'
녹색 빛을 내뿜는 눈동자가 잿빛 기운으로 향했다.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완전한 중도의 기운.
자신의 기억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후대의 시대가 이리 발전했나 싶으면서도 흥미가 동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자신의 유적을 뒤지며 신격을 흡수해 나가는가.
'아니, 오히려 좋다.'
카일로스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신격이라는 건 쉬이 흡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릇을 넘어선다면 역으로 신격에게 몸을 빼앗겨 버리게 될 터.
지금 당장은 신성을 얻어서 좋아라 하겠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독을 품고 있음을.
쉬아아악!
카일로스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일어난 녹색 불길이 파도처럼 카를을 덮쳤다.
사사사삭.
강기에 휩쌓인 천뢰검이 거세게 휘둘러졌다.
내부 전체를 휩쓸며 닥쳐오는 공격이었기에 피할 길이 없던 차.
검막을 만들어 막아 내려는 것이었다.
검기로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방어력을 지닌 강기의 검막 위로 녹색 불꽃이 쏟아져 내렸다.
카일로스의 신성은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물들이며 내부로 침투하려고 했다.
하지만 카를 내부에는 이미 그의 신성이 있었기에 대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감히!"
신성이 서로 상쇄되는 것을 본 카일로는 노성을 터트렸다.
"내 힘으로 내게 대적하려하는 것이더냐!"
이것만큼은 쉬이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소롭기도 했고, 짜증이 나기도 했으며, 분노가 머리까지 차올랐다.
쉬아아악!
카일로스가 쏘아 낸 불꽃을 완전히 상쇄한 카를은 천뢰검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떨까."
키이이잉─!
날카로운 비명 같은 고성이었다.
잿빛 기운이 순식간에 흑색으로 뒤바뀌며 농밀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혼원일극신공과 명천, 천마신공은 서로 상관 관계에 있었다.
하나의 무공이 경지가 오르면 다른 무공도 덩달아 함께 끌어 주는 견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혼원일극신공이 비약적으로 성취가 있었을 때, 천마신공 역시 하나의 벽을 뛰어넘었다.
팟. 팟. 팟. 팟.
카를의 등 뒤로 시커먼 불길 여러개가 치솟았다.
마화(魔火)의 정수가 천마신공의 발현과 함께 구현된 것이었다.
쉬아아악!
카일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천마신공의 불길이 카를로부터 쏟아져 내렸다.
더욱 더 거세게 이 내부를 전부 불태워 버릴 것처럼.
"이 어찌 사이한...!"
생전 처음 맛보는 천마신공의 기운에 카일로스는 손끝을 부들부들 떨었다.
혼원일극신공과는 차원이 다른 사이한 기운이었다.
아니, 마족보다 더 하고 악마보다 더 깊은 심연이었다.
세상에 이런 기운이 존재한다니.
카일로스는 생각을 바꿨다.
'안 된다. 녀석은 악마보다 더 한 존재로다. 중도의 잿빛을 이루기 위해 내 신성을 흡수하려는 것이구나.'
신격의 신성은 오롯이 고고한 것.
하지만 다른 무언가와 뒤섞이는 순간 그 조화가 뒤틀렸다.
그것이 저 악마보다 더 한 마기일 경우에는 말할 것이 없겠지.
-하아아아!
카일로스는 육체를 버리고 영체의 형태로 탈피했다.
더는 물리적인 공격이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 순간 카를은 두 눈을 빛내며 신성과 마화가 뒤섞인 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치이이익.
식지 않은 열기가 그의 호신강기를 녹이며 몸을 태웠지만, 카를은 멈추지 않은 채 카일로스에게 다가가....
쉬아악!
입을 벌리고는 그의 영체를 빨아들였다.
187화 신성 대결 (1)
심상의 세계.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공간에 카를은 천천히 내려섰다.
토호슈 영지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만신창이였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카일로스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툭.
지상에 내려선 카일로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 외로 동요하지 않는 모습에 카를은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놀라지 않는군?"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 모종의 수법을 지녔으리라 예상했지. 정공법으로는 절대로 토센에 있는 날 이기지 못했을 테니까."
"너무 자만하는 것 아닌가. 내 불꽃에 육신까지 버리고 도망쳤으면서."
"버리는 척을 한 것이다. 네 숨겨진 패를 보기 위하여. 이것만 깨부수면 승기를 잡을 수 있으니."
"그래서, 잡을 수 있겠나?"
"흠."
카를의 말에 카일로스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일렁이는 연녹색 빛무리가 솟아나더니 십자 형태의 검을 이뤘다.
일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을 때 카를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등 뒤로 검을 내질렀다.
콰앙!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카일로스는 카를이 자신의 공격을 막지 못한 채 튕겨 나가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너무나도 멀쩡하게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검을 쥐고 있었다.
"...그런가."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난 카일로스는 미간을 좁히며 카를을 응시했다.
"이곳은 네 잠재의식이 만든 세계로군. 고유의 공간을 구축해 완전한 지배 아래에 놓은 것이다."
"심상이라 부르는 곳이지. 네 다른 신격도 이곳에서 흡수당했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때는 천마와 빙백목이라는 존재가 도움을 주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카일로스를 힘으로 찍어눌러 주지 않았더라면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아아아─.
이곳에서는 외부의 개입이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전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카를은 혼원일극신공의 십성 공력을 전부 끌어올리며 천뢰검을 움켜쥐었다.
구구구궁.
대지가 잘게 떨리며 막중한 기세가 흩뿌려졌다.
자신의 신성조차 밀어내는 해일과도 같은 기세에 카일로스는 두 눈을 서늘하게 떴다.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군. 설령 파편으로 나뉘어 있다고 할지라도 네 눈앞에 있는 건 엄연한 신의 조각 중 하나."
파지지직.
움켜쥔 주먹을 중심으로 세찬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카일로스는 그런 주먹을 비틀며 카를을 향해 조소를 흘렸다.
"한낱 인간의 잠재의식을 무너뜨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긱, 기기긱.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카를의 심상이 만들어 낸 초원의 풍경이 찢겨 나가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점차 주름이 잡혔다.
그 너머에 보이는 건 칙칙한 무채색의 공간뿐.
심상으로 꾸며지지 않은 완연한 잠재의식의 세계였다.
핏─!
하지만 카일로스는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움켜쥔 손을 물리고 고개를 꺾지 않았더라면.
주륵.
자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저 궤적을 피하지 못했을 테니.
탁.
천뢰검을 다시 손안으로 회수한 카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 공간의 좋은 점이 바로 이것이지. 아무리 많은 힘을 소모해도 바닥나지 않는다는 것."
심상의 세계에 난입한 상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카를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모든 기술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척.
주먹 쥔 손을 들어 두 팔을 교차하며 수결을 그렸다.
그러자 천뢰검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카일로스를 향해 겨누어졌다.
"...."
카일로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의 뺨을 훑었다.
영체인 이상 육체에 구애받는 영향이 적을 터인데도 스친 것만으로 피가 났다.
'저 검의 성능? 아니면 내 신성을 흡수한 결과? 그것도 아니라면 저 녀석 특유의 기운 때문인가?'
어찌 되었든 무시하지 못할 것만은 분명했다.
이곳에서 쓰러진다면 그대로 잡아먹혀 토센 지방의 파편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테니까.
'그건 녀석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의,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이 바로 무의식, 잠재의식이라 불리는 공간이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공간인 만큼 파훼당한다면 영혼뿐만이 아니라 육신까지 상대에게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만일 여기서 저 녀석의 영혼을 꺾고 육신을 차지한다면....
"그 지긋지긋한 봉인에서 해방되어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
그러면 자신의 신격을 다시 하나로 모아 합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곧 다가올 라그나로크를 대비하기 위해선, 서둘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
카일로스는 두 눈을 감았다.
곳곳에 봉인된 신격마다 기질과 성격이 달랐다.
토센 지방에 봉인된 녀석은 다혈질 성격으로 분명 앞뒤 재지 않고 녀석에게 들이박았을 터.
패배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카일로스는 두 손을 모았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로 가슴 앞에 손을 모으더니 손가락으로 삼각형을 그리며 신성을 분출했다.
파아아앗!
짙은 녹색 빛깔의 휘광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카를의 영역에 대항하고자, 딛고 선 땅 위에 신성으로 성지를 만들며 권역을 구축했다.
펄럭.
등 뒤로 4쌍의 날개가 펄럭이며 깃털을 흩뿌렸다.
신격의 활성화, 이것이 카일로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필살기였다.
"고작 인간 주제에 신격에 맞먹으려 드는가."
마치 신이 인간을 훈육하듯 널리 퍼진 목소리가 이 공간 안에 메아리쳤다.
카일로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고 저 멀리 천뢰검과 함께 멈추어 서 있는 카를을 향해 겨누었다.
웅웅웅!
손가락 끝에 녹색 빛이 서렸다.
동그란 구체로 응집된 신성이 일순간 허공을 꿰뚫으며 매서운 기세로 쏘아졌다.
피융─!
한 박자 늦게 거센 여파가 터지며 대지가 갈라졌다.
쏘아진 레이저는 얇디얇은 굵기임에도 땅 위에 깊고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웅웅웅!
카를 역시 가만히 있진 않았다.
두 손을 앞으로 뻗자 두둥실 떠오른 천뢰검의 검신 위로 작열하는 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혼원일극신공으로 펼친 극한의 어검술이었다.
강기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우며 벨 수 없는 것이 없다고 알려진 최고의 절기.
의지로 상대를 베는 심검(心劍)을 제외하면 분명 맞설 수 있는 것이 없을 터였다.
쩌엉─!
하지만 쏘아진 이기어검과 카일로스의 레이저가 서로의 중간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한 치의 물러남 없이 밀고 밀어내며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아갔다.
콰직.
거대한 두 기운의 충돌에 내부 균형이 어긋났다.
공간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심상에 따라 만들어진 초원의 풍경이 무너져내리며 두 기운을 중심으로 수렴했다.
쉬아아악!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초원의 널따란 풍경이 이기어검과 신성의 충돌로 만들어진 충돌 지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위에 남은 건 칙칙한 무채색의 세계뿐.
...콰앙!
이윽고 카일로스가 쏘아 낸 레이저를 모두 해소한 카를은 천뢰검을 회수했다.
"...."
내공이 부족하진 않았다.
앞서 말했듯 이 공간 안에서는 어떤 초식이든 마음대로 펼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정신력이었다.
까득.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의 통증에 카를은 이를 갈았다.
차라리 어디가 아프다면 감각을 차단하거나, 다른 쪽에 고통을 주어 상쇄하려 할 텐데 정신적인 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마나를 소모하지 않는 대신 정신력의 소모가 크다.'
카를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디 가서 정신력이 꿇린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살수로서 극악무도한 훈련을 받았고, 종래에는 감정마저 지워져 살인 도구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런 카를조차 정신이 뒤흔들리며 버거워할 정도였으니, 카일로스의 저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잡는다.'
여기서 카일로스를 쓰러뜨린다면 자신은 또 한 번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렇다면 경지에도 변화가 생기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잠깐만."
그렇기에 다시금 이기어검을 펼쳐 카일로스를 압박하려던 카를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손을 멈췄다.
"그렇군, 괜한 힘을 뺄 필요가 없었어. 애초에 이러면 될 것이었는데."
"...?"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거두어들이는 카를의 모습에 카일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목숨을 걸고 싸워도 모자랄 판국에 어째서 멈추는 것인가.
하지만 그 직후 벌어진 상황에 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파아아앗.
카를은 자신이 흡수한 카일로스의 신성을 힘껏 끌어올렸다.
평소에는 내공과 마나의 반발을 생각해 최대한 조심스럽고 최소한의 기운만을 사용했다.
오리진 때처럼 마족 계열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섣불리 다른 기운과 섞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만약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 부작용은 이 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 될 터이니.
다행히 기존 세계의 상식과 달리 내공과 신성은 큰 반발 없이 서로를 받아들였고 혼원일극신공의 이름에 걸맞게 하나로 뒤섞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신성을 다루는 것도 익숙해져야 해.'
카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손에 신성을 담아 대상을 치유하거나 버프를 주는 것뿐이었다.
카일로스의 신격을 흡수하고 신성을 다루려면, 당연하게도 이 힘에 익숙해져야 했다.
"흠, 이렇게 하는 것이었나."
카를은 앞뒤 가리지 않고 신성력만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카일로스의 신격을 흡수한 이후에는 처음으로 발휘하는 전력이었다.
카일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10개의 손가락을 모아 가슴 앞에서 삼각형의 형태를 그렸다.
"감히 내 힘으로 내게 맞서겠다는 것이냐! 우습기 짝이 없군. 신성의 제어는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하물며 얼기설기 따라 한 것으로는 흉내조차...."
파아아앗!
카를의 행동을 부정하며 악담을 퍼붓는 모습과 반대로, 카를이 일으킨 신성은 서서히 선명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신성 마법도 익혀 두어야겠군.'
카를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일반 마법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효율을 보이는 것이 신성 마법이었다.
연줄을 통해 공부한다면 익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지.
일단 지금은, 카일로스의 흉내로 충분했다.
펄럭.
카일로스의 것보다 살짝 작고 다소 조잡한 형태이지만, 분명 날개의 윤곽을 이룬 모습이 카를의 뒤에서 나타났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경건함과 성스러움에 천사라고 오해했을 정도였으니.
자신의 기운으로 자신의 앞에서 신성의 모습을 끌어낸 카를의 모습에 카일로스는 이를 갈았다.
"인간에게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놈은 방금 그것을 넘었다."
휙.
카일로스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동시에 허공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열리며 신성으로 만들어진 수천, 수만 발의 탄환이 오로지 카를만을 놀리며 떨어져 내렸다.
쾅! 쾅!
한 방 한 방이 오의나 절초를 받아 내는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카를은 자신이 끌어낸 신성으로 몸을 지켰다.
'내공으로 막아 냈더라면 피해가 적지 않았겠군.'
신성의 약점은 마기가 아닌 신성이었다.
같은 힘에는 극단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듯 활짝 펼쳐진 날개 위로 쏟아지는 폭격은 원래 위력에서 채 반 절도 되지 않았다.
"...어."
"어떻게라는 말은 그만하지.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식상하거든."
놀람마저도 빼앗겨 버리자, 카일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188화 신성 대결 (2)
어떻게 빼앗은 신성을 저리 능숙하게 다루는 것인가.
카일로스가 카를에게 놀란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신성은 여타 다른 힘과는 달랐다.
마나와 오러 같은 경우에는 단련을 통해 추가하거나 끌어낼 수 있지만, 신성력은 처음부터 그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소위 말하는 신앙의 증명.
얼마나 신을 믿느냐에 따라 신성의 척도가 결정되며, 간혹 신이 쓰임에 따라 추가적인 힘을 부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신격의 신성을 이용하는 것은 다르다.'
본인이 신성을 내리고 사용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빌리는 것이 아니라 신성의 본질을 이해하고 다룰 줄 알아야 저리 사용하는 것인데.
"설마 성직자였나."
"설마."
카를은 어깨를 으쓱였다.
신박한 오해였다.
자신을 살귀도 아니고 성직자라고 오해할 줄이야.
'그럴 만도 하긴 하겠군.'
카를은 몸에 서린 신성을 능숙하게 다뤄내며 카일로스를 바라보았다.
"궁금하나? 내가 어떻게 이 힘을 다룰 수 있는 것인지."
당연히 그 이면에는 꾸준한 수련이 있었다.
갤런은 정식으로 임명받는 성직자가 아니라 단기간에 신성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고 했었다.
하지만 카를은 신성을 다루는 것이 내공을 다루는 것과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 내공과의 반발만 조심한다면 지금처럼 살짝 서툴게나마 상대의 공격을 받아 낼 정도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심상의 공간 안에서 한정이었지만.'
현실에서 이렇게 강한 신성을 운용한다면 후폭풍이 꽤 있을 터.
그리고 완전하지도 않았기에 카일로스의 공격에도 당한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애초에 심상의 공간이 아니었더라면 감히 시도해 보지도 못할 수단이었다.
파앗.
카를은 다시금 기운을 바꾸며 신성이 아니라 천마신공의 마기를 끌어 올렸다.
카일로스는 재차 신성으로 무장했고 이번에는 기다란 창을 꺼내 들며 카를을 향해 투척했다.
쩌엉─!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공격이었다.
카일로스의 손을 떠나는 동시에 자신에게로 닥쳐왔으니.
두 팔을 교차한 채 천마신공의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카를이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쭉쭉 뒤로 밀려 나가던 그의 몸이 겨우 멈춰 섰을 때, 원래 있던 자리보다 상당히 멀리 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카를은 자신의 살갗을 파고든 순백의 창을 응시했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막아 낼 수 있었음에도 온몸으로 받아 낸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몸으로 체득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지.'
신격의 신성을 다루려면 그 본인의 방법을 빼앗아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더군다나 이쪽은 정보가 거의 없어 아예 처음부터 무공의 체계를 정립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최대한 많이 손속을 섞어야 했다.
'리미트는, 내 한계가 오기 전까지.'
카일로스의 파편을 흡수해 나갈수록 다른 파편을 흡수하는 것도 더 수월해질 것이다.
이쪽은 여러 파편을 품은 반면, 상대는 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신격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카일로스가 신성으로 싸우는 방식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굳이 천마신공의 마기를 흩뿌리며 카일로스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었다.
휘릭.
카를의 손짓에 따라 천뢰검이 가볍게 회전했다.
어느새 저쪽으로 회수된 백색 창이 다시금 쏘아질 준비를 하며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었다.
"롱기누스(Longinus)."
"...들어 본 적이 있다. 신살의 무구를 일컫는 이름이라지."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우습군. 반신이어도 신인 주제에 신살의 무구를 다루다니. 아니면, 주신이 되기 위해 다른 신들을 죽이고자 그것을 손에 쥔 것인가?"
핏─!
카를의 대답에 화답하듯 롱기누스가 쏘아졌다.
천뢰검 역시 앞으로 쇄도하며 맞섰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벌어졌다.
파각.
어검 특유의 새하얀 빛을 내뿜던 천뢰검의 검신이 롱기누스의 창날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단숨에 허공을 꿰뚫은 그 창끝은 재차 카를을 찔렀고 한층 더 두꺼워진 천마신공의 호신강기에 막혀 움직임을 멈췄다.
"...."
카를은 미간을 찌푸렸다.
토호슈 영지의 카일로스와 싸울 때도 부러지지 않았던 천뢰검이었다.
어차피 심상의 의지라 진짜 검이 아니었지만, 검이 부러졌다는 건 곧 자신의 의지가 롱기누스에 밀렸다는 소리였다.
"...아니, 신검(神劍)이기에 그런 것인가?"
하지만 카를은 곧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름은 그 존재를 설명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신검(神劍) 천뢰.
정말로 신이 내린 검이 아닐지라도 같은 울림의 이름을 지닌 이상, 롱기누스의 극상성인 영향을 받아 파훼되었다는 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한 재미있는 구조에 카를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탁.
그렇기에 천뢰를 지우고 그 이전에 자신이 쓰던 애검, 흑아(黑牙)를 꺼내 들었다.
새카만 검신이 매력적인 검이었다.
재차 이쪽을 찔러 들어온 롱기누스에 맞서 이기어검을 쏘아 보내자, 이번에는 부러지지 않고 제대로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
카각, 카가가각!
검과 창이 카를의 앞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며 맞서 싸웠다.
이기어검을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내공과 정신력이 소모되었다.
그와 비견되는 롱기누스를 다룰 정도라면 상대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카일로스의 얼굴에는 한 점의 피로도 보이지 않았다.
신격의 대단함인가 싶었지만, 카를은 곧 롱기누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흐름이 보인다.'
두 눈에만은 천마신공이 아니라 신성력을 담았다.
읽어낸 것은 롱기누스에 서린 인과.
새겨진 것은 필중의 꿰뚫림이었다.
'신언(神言)인가.'
신성력으로 세계에 강제를 부여해 지정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동력을 가하는 것으로 보였다.
비슷한 예로 드래곤의 용언이 있었다.
격이 높은 드래곤은 단순히 말하는 것으로 세계에 명령해 조화와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보다 더 격이 높은 신격이라면 세계의 의지를 조작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신성의 새로운 방법을 깨우친 카를은 두 눈을 빛냈다.
'하지만 당장 사용하는 것은 무리다. 익숙지도 않고, 섣불리 사용했다가 어떤 반동이 닥쳐올지도 모른다.'
어떤 마법이나 주술보다 격이 높고 세련된 술식이 필요했다.
완벽한 상황과 구도를 갖춰야 세계의 의지에 명령을 내려 현상을 일으킬 수 있을 터.
말 그대로 전지전능한 신이 되는 길이었기에 마음이 크게 동했다.
'현재 롱기누스의 창에 부여된 의지는....'
필중과 관통.
즉, 자신에게 닿고 꿰뚫을 때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카일로스는 아무런 소모 없이 관망하는 반면, 자신은 이기어검의 유지로 인해 막대한 내공과 심력이 깎여 나갔다.
'...관망한다?'
카를은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롱기누스가 공격하는 사이, 다른 공격을 추가로 더한다면 자신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터인데 어째서 카일로스는 움직이질 않는 걸까.
'아니, 못하는 것인가.'
한 번에 하나의 신언만을 사용할 수 있다?
분리된 신격으로는 그것이 한계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페이크일 수도 있으니 그 부분은 아직 불확실한 요소로 남겨 두었다.
'그렇다면.'
이기어검과 롱기누스가 치열하게 맞붙는 가운데, 카를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롱기누스의 끝을 툭, 하고 건드렸다.
스륵.
그러자 백색 창이 사라지며 다시금 카일로스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군."
카를이 씩 웃으며 고개를 들자, 낭패 어린 카일로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신언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어떤 식으로든 명령이 이행되면 되는 것이다. 필중에 꿰뚫으라는 것이 손가락 끄트머리의 살갗을 파고들든, 가슴의 심장을 관통하든 말이야."
"...."
카일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감탄의 기색마저 서린 채 카를을 향했다.
"그것이 보이나?"
"내가 좀 특별해서 말이야."
카를은 자신의 두 눈을 톡 치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이 싸움을 유지할 여력이 그리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심상의 세계에서라도 이기어검을 너무 많이 남발했다.
슬슬 머리가 지끈거리며 한계에 가까워져 감을 호소했기에 마무리를 지어야 할 듯싶었다.
"이미 깨달았겠지만, 넌 날 이기지 못해."
카를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했다.
카일로스의 상대가 까다로운 건 다소 생소한 기운인 신성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토호슈 지방에서는 아직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순수한 무력으로도 밀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카를은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벽을 뛰어넘었고, 전생에 이뤄 둔 것들로 인해 상승 무학들을 가져다 사용할 수 있었다.
더불어 신성까지 파고들어 연구했으니 생소하다는 이점마저 사라져 버렸다.
"하아, 완패로군."
카일로스는 롱기누스를 손에 쥐며 어깨를 으쓱했다.
점차 사그라드는 그의 투기에 카를은 눈에 이채를 발했다.
"날 테스트한 것이었나?"
"당연히."
카일로스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느 미친놈이 반신의 신격을 흡수했나 궁금해서 말이야."
"결론은?"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다. 토센의 녀석이 흡수당한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하하!"
카를은 웃음을 터트렸다.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카일로스의 모습이 마음에 든 것이었다.
"이미 하나의 신격을 빼앗긴 이상 내게는 선택지가 없는 셈이거든."
카일로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반신 카일로스는 모든 신격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야 비로소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파편의 한 조각이 카를에게 흡수된 이상 카를을 죽여 다시 빼앗거나, 아니면 그를 통해 하나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라그나로크에서 다른 반신들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순 없을 테니까.
"그러면 순순히 내게 흡수되겠다고?"
"지금은 말이야."
카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정말로 특별한 인간이다. 적어도 이제껏 내가 봐왔던 인간 중에는 너 같은 부류는 없었지."
"칭찬으로 들으마."
"칭찬이면서 악담이기도 하다. 감히 인간 주제에 반신의 신격을 흡수하려 하다니."
카일로스는 툴툴거리면서도 재차 고개를 돌려 흉흉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반신이다. 모든 신격이 하나로 모이는 그 순간 네게 또다시 시련이 닥쳐올 것이다. 날 잡아먹고 반신의 신격을 얻을 수 있을지는, 네 그릇이 지닌 크기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걸 굳이 말해 주는 이유는?"
"네가 말한 신언을 말해 억제력을 싣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파편을 모으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수행하게 될 테니."
카일로스는 씩 웃었다.
마치 자신의 신격이 하나로 모이면 너 따위는 언제든 처치하고 몸을 빼앗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잊지 말아라. 난 언제나 네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츠즈즈즈.
카일로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곧 연록 빛으로 변한 그는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카를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
두 눈을 감은 채 흡수되는 신격의 파편을 느낀 카를은 어렴풋하게 남은 신격의 숫자를 헤아릴 수 있었다.
'30, 아니 40개가 조금 안 되겠군. 많이도 조각내어 놓았어.'
카일로스가 말한 라그나로크가 발발하기 전까지 모든 파편을 모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듯싶었다.
물론, 이 몸을 넘겨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