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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160-170

160화 고백 (2)

"...할 말?"

카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에는 유리아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것인지 조금 떨어져 있음에도 그녀의 숨결을 통해 술 냄새가 풍겨 올 정도였으니까.

"일단 물이라도 마시면서 진정하시는 게 좋겠습...."

"됐어. 일단 따라와!"

유리아는 덥석 카를의 손목을 붙잡고는 거침없이 이끌었다.

사람의 이목이 많은 연회장을 나서 인적이 드문 아래쪽 정원까지 말이다.

하늘에 걸린 초승달 때문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평소보다 음영이 짙었다.

밀회를 즐기고 있는 생도들도 여럿 있었기에 쉽사리 들어갈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음에도 유리아는 카를을 데리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아."

철썩.

거듭되는 카를의 부름에 유리아는 정원 중간에 있는 분수 표면에 얼굴을 담갔다.

그러고는 흠뻑 젖은 상태로 다시 일어나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카를을 향했다.

"이러면 된 거지?"

"...어, 음."

카를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이러는 것일까.

평소답지 않은 그녀의 행동에 미간을 좁히다가 주변 기척을 느끼고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카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아가 이럴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요 반년간 바이에른에서 활동하면서 이성 관계에 얽히지 않도록 주의를 해 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생도 중 가장 깊은 관계를 쌓은 레이시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왕녀라는 장벽이 존재했고, 은연중 카를도 레이시스가 그런 낌새를 보일 때마다 적절하게 거리를 두는 것으로 눈치를 주었다.

그렇기에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건만, 설마 유리아 쪽에서 먼저 행동에 나설 줄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상황은 상정에 없었기에 많이 난처했다.

높은 확률로 유리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라 어색해질 테고, 눈치가 빠른 레이시스나 다른 생도들은 자신과 그녀 사이에 있는 묘한 기류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터.

'가급적 잘 타일러 봐야겠군.'

남녀의 마음은 한철에 피어오르는 불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뜨거운 사랑도, 영원할 것 같은 감정도.

사소한 계기나 한순간의 실수로 사그라들기 마련.

더욱이 살수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카를에게는 더더욱 공감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널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 이미 눈치채고 있지?"

유리아의 얼굴은 아까와 같이 불그스름했지만, 그래도 취기에 흔들리는 눈동자는 아니었다.

상당한 결심을 하고 자신의 마음을 전해 오는 것임을 확인한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앞에 바로 섰다.

"네.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이제 너도 피하지 않는구나."

유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손발 끝이 떨리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금껏 홀로만 간직한 채 숨겨 왔던 이야기를 꺼낼 때가 드디어 도래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리아가 정말로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습니다."

"너도 눈치채고 있었구나. 하긴, 어울려 지낸 시간이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지."

"레이시스는 알고 있습니까?"

"모르지.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레이시스라면 조금은 눈치채고 있을지 모르겠네. 워낙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아이니까."

"...."

잠시간 서로 간에 침묵이 흘렀다.

카를은 속으로 조심스럽게 할 말을 골랐고, 유리아는 그간 꾹 참아 왔던 말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이윽고 흘러가던 구름이 희미한 달빛을 가렸을 때,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내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죄송하지만, 저는 당장 누군가와 연애할 생각은 없....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유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카를에게 되물었다.

연애? 갑자기 그게 무슨 이야기인 것....

"...."

유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회 중에 갑작스럽게 끌고 나와, 생도들이 밀회를 즐기는 정원에서 묘한 분위기로 할 말이 있다며 선포한다?

그녀는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분노를 토해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런 게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카를은 대답하지 않은 채 유리아가 한 말을 곱씹었다.

'플레이어.'

중원에는 없는 단어였다.

아르테니아 식으로 풀이하면 게임의 참가자 정도는 되겠지.

주로 체스나, 그런 스포츠 종목에서 통용되는 단어였다.

'무슨 뜻이지?'

하지만 1차원적으로 해석되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랬더라면 유리아가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와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었을 테니.

잠시간 머리를 돌리던 카를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짤막한 한숨을 토해 냈다.

"저는 또. 영락없이 그쪽이 고백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라고."

유리아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억누른 채 작게 대답했다.

조금 전 크게 소리친 탓에 주변의 기척이 부산스러웠다.

그렇기에 황급히 이쪽의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결계를 쳐서 소리를 차단한 상태였다.

"일단 그 부분은 알겠습니다. 그리고 유리아가 플레이어라는 부분은 저 역시 짐작하던 사실이었습니다."

"...그 말은?"

"저 역시 플레이어입니다."

"...!!"

유리아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카를은 그녀의 그 반응을 보고 자신의 대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제부터는 대답을 신중히 해야 한다.'

도대체 플레이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녀가 이때까지 꽁꽁 숨겨 온 것일까.

그리고 왜 이제 와서 자신에게 그런 사실을 토로하며 고백하는 걸까.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입학시험 때부터 이론 수석을 빼앗아 가더니 너도 업적작을 노리고 있었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다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유리아 양은 어떻게 플레이어가 되신 겁니까?"

"...어떻게 플레이어가 된 거냐고?"

그게 무슨 질문이냐는 유리아의 표정에 카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최대한 조심히 의문을 던진 것인데 살짝 엇나간 듯했다.

"그냥 신작 게임이 나와서 한 거지. 아, 어떻게 이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냐고. 난 그냥...."

유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법사 하려고 캐릭터를 선택하니까 이 몸으로 눈을 뜨더라. 깜짝 놀랐지. 그런데 넌 무슨 캐릭터를 한 거야?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라는 캐릭터는 처음 보는데."

"저는...."

카를은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 자신의 동요를 숨겼다.

유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만약에라도 정말 1%의 진실이 섞여 있다면.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게임, 캐릭터, 선택.

그리고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라는 캐릭터는 처음 본다는 말까지.

무언가 설명이 될 것 같으면서도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정보의 공백이 그 과정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큭."

카를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살짝 웅크렸다.

그러자 깜짝 놀란 유리아가 다가와 살피던 중, 카를의 코와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발견했다.

"카를, 너 왜...!"

"죄송합니다."

카를은 살짝 창백해진 안색으로 얼굴을 문질러 피를 닦아 냈다.

그러고는 살짝 가라앉은 표정으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저는, 이전의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이 없다고?"

"정확히는 소실되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카를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원래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라는 이 몸은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라이프치히 영지에 유행하던 돌림병에 걸려 어릴 적에 사망이 예정되어 있었죠."

"...설마."

"네. 그 죽은 몸에 제가 들어간 것 같습니다. 예전의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어서 여기까지 오는 데 어렵진 않았지만, 자세한 걸 떠올리려 할 때마다 이렇게 반동이 옵니다. 무언가의 부작용 같은데, 유리아는 그런 게 없으십니까?"

"난, 없어."

유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원래 몸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마법을 익히 뒤로는 비약적으로 기억력이 좋아져 잊고 있던 사실까지 기억났다.

"혼자인 줄 알고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유리아를 찾아서 다행이로군요."

"너도 고생 많이 했겠구나."

유리아는 조심스럽게 카를의 얼굴에 묻은 나머지 핏자국을 닦아 주며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연민과 동정이 깃들었다.

그걸 본 카를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블러핑이 제대로 먹혀들어 갔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대체 무엇이지?'

카를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신은 분명 중원에서의 삶 이후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라는 몸으로 새로이 눈을 떴다.

하지만 유리아는 그녀의 말에 따르면 '게임'이라는 것에서 캐릭터를 선택해 들어왔다는 것인데.

아르테니아라는 세상 자체가 누군가 만든 모형 정원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일까.

'적어도 중원은 아니다.'

카를은 유리아의 출신지를 유추하려 했다.

일단 중원 쪽은 아니었다.

중원에는 게임이라는 단어도, 캐릭터라는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는 건 중원과 아르테니아, 두 세상과는 다른 또 다른 제3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카를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긴.'

중원과 아르테니아.

이미 두 개의 세상이 있었다.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오히려 하나만 더 있는 것이 이상했다.

다른 세상이 더 존재해도 그리 부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닐 터.

'그렇다면 나와 유리아 말고도 다른 이세계인이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

아직 그러한 낌세를 보인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카를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닦아 주던 유리아를 향해 물었다.

"유리아, 혹시 저 말고 다른 플레이어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어. 보통 플레이어는 히든 피스나 숨겨진 유적, 보물들을 찾아 헤맬 테니까. 그런 곳을 위주로 돌아봤는데 나와 너 빼고는 움직인 흔적이 없었어."

"그렇다는 건 일단 저희 둘만 있다는 소리군요."

"그래. 그런데...."

유리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떼고는 카를을 향해 물었다.

"나, 안 죽일 거지?"

"...예?"

느닷없는 말이었다.

카를은 진심으로 당황해 하며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아니, 그렇잖아. 원래 이런 상황의 클리셰는 이제 자기가 혼자 전부 독점하기 위해서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는 그런 거니까."

"유리아는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니, 난 할 수 있다면 협력하려고 했지. 그래서 카를이 플레이어라고 의심해도 계속해서 곁에 있던 거고."

"저도 비슷합니다. 더군다나 저는 기억이 소실된 탓에 정보의 공백이 많습니다.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협박하거나 살해해도 독점할 수는 없으니까요."

"후우...."

유리아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기에 이런저런 장치를 많이 준비해 뒀거든. 만일 네가 날 죽이려고 했다면 바로 조치할 수 있도록."

"...그렇습니까?"

"어?"

유리아의 말에 카를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161화 고백 (3)

"...!"

유리아는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카를이 표정을 싹 바꾸며 손을 뻗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유리아는 아차 했다.

솔직히 말해 아직 취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분수의 물로 깨웠다고 해도 카를에게 자신이 플레이어임을 고백하기 위해 마신 술의 양이 적지 않았다.

설마 그것이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마, 마법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긴 했다.

곳곳에 설치해 둔 함정과 마법을 발동시킨다면 몸을 빼낼 여유는 충분히 벌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보다 먼저 카를의 손이 유리아의 머리를 덮었다.

탁.

유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슬며시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장난입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군요."

"야이, 씨!!"

무심코 욕까지 내뱉을 뻔했다.

동시에 자신의 머리를 뒤덮은 손을 쳐 내려 했지만, 카를은 별것 아니라는 듯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유리아도 고생했습니다. 혼자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힘들었겠군요."

첫 만남부터 날을 세우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 세계의 주민들과 달리 자신은 이방인이었으니 이질감을 느낀 것이겠지.

학기 초에 생도들과 섞이지 못하고 붕 떠 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

유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것 정도야 별일 아니었다.

마탑에 있는 스승님도 곧잘 그러시곤 했으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데, 어째서 무언가가 이렇게 울컥 치솟는 것일까.

이 세상에 들어온 지 벌써 몇 년째일까.

처음으로 시원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나니 가슴이 한결 가벼워졌다.

'술, 술 때문에 그래.'

이게 다 술이 문제다.

유리아는 머리 위에 있던 카를의 손을 붙잡았다.

카를은 눈치껏 손을 치워 주려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것을 끌어당기며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툭.

그러더니 카를의 품 안에 고개를 묻고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카를은 아무런 말 없이 그런 유리아의 등을 쓸어내려 주며 위로했다.

'...하긴.'

카를은 쓴웃음을 지었다.

중원에서 사망 직후 이 몸으로 깨어났을 무렵 얼마나 당황했던가.

자신은 훈련받은 살수였다.

그럼에도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감각을 곤두세우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유리아는 마법사가 되기 전에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훈련을 받은 자신도 그러했는데 덩그러니 다른 게임 속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보냈겠지.

"...킁."

곧 다 울었는지 코를 먹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을 보니 부끄러워진 듯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유리아는 얼굴을 문지르더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카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흠, 흠흠."

헛기침까지 토해 내더니 살짝 눈치를 보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척 다시금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이야기인데."

"말씀드렸다시피 제 기억은 불완전합니다. 지금의 성격도 카를로스 라이프치히의 것에 영향을 크게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확인할게. 카를, 네가 아는 건 어디까지야?"

"바이에른 이후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흠."

생각에 잠긴 유리아의 모습을 보며 카를 역시 그 '게임'이라는 것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빙의해 그 인생을 사는 걸 말하는 것이겠지.'

사람의 인생을 조종할 수 있다니.

중원에서도 그런 장치를 본 적이 없었다.

"바이에른 다음에는 대륙 전쟁, 그리고 라그나로크가 있겠네."

"대륙 전쟁, 라그나로크...."

시작부터 살벌한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일단 처음부터 설명해 줄게."

유리아는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튀어 오른 마력이 각기 다른 색의 원을 그리며 3개로 분열했다.

하나는 성호를 그리며 신성 왕국의 표시를, 하나는 연록 빛 X자를, 하나는 실타래처럼 엉킨 푸른 빛의 형태를 이루며.

"고대 시대는 알고 있지? 대략 1천 년 전의 세계. 지금 7영웅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활동하던 시대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라그나로크가 일어났어. 공석인 주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에 존재하는 세 명의 반신이 전쟁을 일으킨 거야."

"...반신."

카를은 이미 한 명의 반신을 알고 있었고, 직접 만나서 싸우기까지 했었다.

"아즈리아스, 베르투아스, 그리고 카일로스."

"카일로스라면."

"그래. 이번에 토호슈 영지 쪽의 유적에서 카를 네가 발견한 숨겨진 유적지의 주인이지."

유리아는 짤막한 숨을 토해 냈다.

"거기서 씨앗을 발견했으면 얼마나 좋아."

"씨앗은 무엇입니까."

"응? 그것도 모르고 거기에 간 거야?"

"예."

카를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아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면 얼마나 운이 좋았던 거야. 다른 의미로 대단하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는 카를의 앞쪽으로 한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토호슈 영지는 기본적으로 유적 이벤트가 발생해. 플레이어는 거기서 5가지 히든피스를 얻을 수 있지. 다른 3개는 쓰레기이긴 한데, 레프라의 열쇠랑 씨앗이 기록된 지도는 레어 이상의 등급이지."

"씨앗을 심으면 무언가 나오는 겁니까?"

"신성력."

"...."

유리아의 말에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반신(半神)이 될 수 있는 스타터팩이야. 그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마법도 기꺼이 버렸을 텐데."

유리아는 아쉽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인간이 반신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애초에 반신들도 원류는 인간이었는걸."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기에 카를은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보통 인간의 경우에는 이룰 수 있는 경지의 끄트머리에 다다라서 한계를 돌파해야 해. 검이면 검, 마법이면 마법. 물론 엄청 힘든 일이겠지. 이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서 셋밖에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씨앗이 있다면 반신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그래. 물론, 그래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정석적인 방법보다는 훨씬 낫겠지. 하아, 그렇게 생각하니 이론 수석을 빼앗긴 게 아쉽네. 특전을 얻을 수 있었다면 마법 쪽의 경지를 더 높일 수 있었을 텐데."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 수석을 이루고 받을 보상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그건 바이에른 내부와 관련된 질문이었다.

유리아가 의심을 살 수 있었기에 호기심을 억눌렀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기점이로군.'

카를이 아직 밝히지 않은 건 3가지였다.

녹스의 존재와 카일로스의 신성, 그리고 유리아와는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중원 쪽의 이야기는 어떠한 경우에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은 같은 플레이어라고 생각해 주는 것이 편했으니까.

"그러면 천 년 전에 있었던 라그나로크에서는 누가 이겼습니까?"

"아즈리아스. 지금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라고 불리고 있어. 신성 왕국도 그렇고 대륙의 반절이 넘는 숫자가 대지의 종교를 믿잖아?"

"그렇다면 그걸로 끝이 아닙니까? ...잠깐만. 대지의 여신이 굳건한데 또 라그나로크가 일어난다는 건."

카를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대륙 전쟁과 라그나로크.

그건 분명 미래형의 이야기였다.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신의 자리는 완전하지 않아. 그래서 다음 주기의 라그나로크에서 매듭지어지겠지."

아즈리아스는 주신의 자리고 공고해지길 원할 것이고, 다른 두 반신은 자신이 주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기회를 엿볼 것이다.

"플레이어는 그중 한 세력을 정해서 승리로 이끌면 돼. 그러면 게임 엔드. 어쩌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거기까지 가 보려고 하는데."

"유리아, 당신은."

카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겁니까?"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시원시원하게 말을 해 오던 유리아도 이 대목에서는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슬쩍 카를의 시선을 피하곤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며 옷자락을 꼼지락거리며 만지기 시작했다.

"이곳도 나름대로 정이 많이 들었거든. 스승님도 계시고, 마탑의 다른 분들도 있고, 레이시스도 있고, 카, 카를 너도 있으니까."

"...."

카를은 자신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미 그에 대한 답변은 한참 전에 내린 후였다.

'일단 돌아갈 길부터 확보한다.'

솔직히 말해 당장 중원에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혼원일극신공의 성취가 하늘에 닿고 녹스의 세력이 안정적으로 확장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고려해 보겠지.

'날 이곳으로 보낸 이들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그 대가는 피로 받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나락살과 심복들은 이 손으로 직접 죽였으니, 살막주를 비롯해 얽힌 이들에게도 복수를 해야 했다.

"...카를?"

"아, 죄송합니다."

카를은 유리아의 부름에 무심코 흘러나오던 살기를 흩어 버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두 곳의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응. 일단 하나는 베르투아스라 불리는 반신이야. 물밑에서 이미 큰 조직을 이뤘고, 성국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어. 오죽하면 도미니온이라는 이단심문관이랑 척살 부대까지 운용하면서. 아마 그 끄나풀이 바이에른에도 있을걸? 관련 에피소드도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성국과는 물과 기름의 관계로군요."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 자신을 습격했던 루카스의 조직은 높은 확률로 베르투아스를 신봉하는 교단일 것이다.

베샤도 그들을 배교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정교가 신성 왕국이라고 한다면 루카스 쪽이 배교자가 될 테지.

"카일로스는...."

유리아는 잠시간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쪽은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세력이랄 것이 없는 쪽이거든. 본래 반신 쪽이 본체인 교단이라."

"아예 없는 겁니까?"

"추종자들이 있긴 한데 유의미할 정도는 아니니까. 보통은 성국이나 베르투아스의 구도야. 그쪽을 흑막이라고 보면 될 것 같네."

"유리아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겁니까?"

"난 당연히 성국이지. 거기가 그나마 깨끗하거든. 베르투아스 쪽은, 신성력을 쓰긴 하는데 구리구리한 놈들이라."

유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을 믿는다는 놈들이 악행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비위가 약한 이들은 그쪽 스토리를 하면서 토를 몇 번이나 했다고 불평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군요."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유리아에게 이끌려 이 정원으로 들어왔을 때까진 별일 아닌 헤프닝인 줄 알았지만, 바이에른에 입학한 후로 가장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니야. 앞으로 협력할 관계인데 뭐. 도와줄 거지?"

"당연합니다."

카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안쪽에서 유리아의 중요도가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다.

지금 말해 준 것 말고도 다른 정보를 품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혹시 게임과 이 세계가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흠,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아, 하나 있다."

"무엇입니까."

"원래 고대 영웅이라는 건 4영웅이었거든? 그런데 들어오니까 7영웅으로 바뀌어 있더라. 그쪽 3명도 우리랑 같은 플레이어였으려나?"

"...확실히. 그럴듯한 이야기로군요."

"나도 흥미로워서 따로 알아봤는데 자세한 정보는 없더라. 뭐, 고대 영웅이니까 어쩔, 앗."

조금씩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하던 중 유리아의 발이 꼬였다.

옆에 있던 카를이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을 터.

"미안, 긴장이 풀려서."

"그럴 만도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다."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의 수위가 높아졌다.

더 있다간 불편해질 것 같았기에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렇기에 카를의 에스코트를 받아 다시 연회장으로 되돌아갔다.

"...앗."

도중 레이시스와 마주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162화 방학 (1)

학기가 모두 끝났다.

아직 시험이 남아 있는 극소수의 생도와 대학원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밝은 얼굴로 바이에른을 나섰다.

툭.

카를 역시 고향인 라이프치히로 내려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던 중이었다.

추가 학습을 신청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바이에른을 떠났어도 괜찮았지만, 바나베를 쓰러뜨린 이후 오리진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원래 일정보다 며칠 더 이곳에 머물렀다.

'당분간 눈치를 살피려는 것인가.'

카를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미 녹스의 대부분은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었고, 대외 업무는 라한에서 총괄해 처리 중이었다.

녹스의 도움으로 무탈히 모든 구역을 수복한 라한은 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주고 있었다.

"일단 라이프치히부터 시작해서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수도의 일은 수도의 일이고.

라이프치히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녹스의 개편 역시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개편이라고 해 봤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녹스가 앞으로 더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짐을 전부 싼 카를은 문가에 내놓았다.

잡다한 것은 바이에른에서 보내 줄 터이니 그는 꼭 필요한 것만 챙긴 채 기숙사를 나섰다.

"아, 오늘 돌아가는 거야?"

밖으로 나서던 차, 수련을 하고 왔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던 막시밀리안과 마주쳤다.

"부모님이 빨리 내려오라고 성화셔서 말입니다. 어차피 할 일도 있으니 일단 먼저 내려가 보려고 합니다."

"그래, 잘 다녀오고. 어차피 조만간 다시 보게 될 테니까 그때 봐."

"막심도 좋은 시간 되십시오."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해 주었다.

그들 일행끼리는 날짜를 맞춰 방학 중 다시 모이기로 했었다.

여행지는 바다가 유력했고, 게일이나 에이미 쪽의 별장으로 갈 예정이었다.

다들 귀족 가문의 출신이니 별장 몇 채 정도는 지녔으니 말이다.

녹스의 일을 끝내고 이동하도록 일정도 넉넉히 잡았으니 별문제는 없을 터.

그대로 바이에른을 나와 텔레포트 게이트의 이용 차례를 기다리던 카를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레이시스에게 연락하는 걸 깜빡했군."

저번 종강 연회에서 자신과 유리아가 함께 들어오는 걸 보고 묘한 오해를 한 듯한데.

유리아가 별일 아니었다며 얼버무린 탓에 해명할 기회도 없게 되었다.

그 뒤로는 녹스의 일로 바빠 만날 기회가 없었고, 아카이브를 통해 몇 마디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다.

'방학에도 창궁무애검법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겠지.'

카를이 아는 레이시스라면 더 열심히 했지, 나태해질 성격은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 편지라도 남겨 볼까 싶었지만, 어차피 함께 여행할 때 보게 될 테니 일단은 이동하기로 했다.

라이프치히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니 더는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럼 라이프치히 영지로 텔레포트 하겠습니다. 멀미에 유의해 주세요."

마법사의 주의를 받으며 게이트 가운데 들어가자 눈 부신 빛이 주위를 감쌌다.

곧 텔레포트가 끝났을 때 카를은 자신이 수도 폴포아르델에서 고향인 라이프치히로 돌아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경지에 올라야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텔레포트는 언제 겪어도 매번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자신의 미천한 지식으로는 텔레포트의 작동 원리의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한 상황.

무공과는 다른 쪽이었기에 마법적인 지식이 더 필요해 보였다.

'대륙에서 자력으로 원거리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건 몇 안 된다고 했었지.'

마도사, 그것도 경지가 아주 높은 대마도사라 꼽히는 몇 명만이 가능한 기예라고 했다.

게이트의 도움 없이 원거리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다면, 전쟁이나 유사시 상황에서 상대 적진을 단독으로 돌파하여 그 중심에 대단위 마법을 쓰고 유유히 빠져나오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터.

그렇게 보니 새삼 마법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무공과 함께 마법에도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어.'

바이에른에서 1학기를 보내며 무공은 빠르게 진보했지만, 마법 쪽은 성취가 미미했다.

유리아와 하는 마법 스터디도 대부분 이론 쪽에, 그녀의 연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활용 방안이 적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유리아의 내막을 꿰뚫고 진심으로 협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마법 쪽도 조금 더 긴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와아아아!!!

잡다한 생각과 함께 텔레포트 게이트 밖으로 걸음을 내디딘 카를의 귓가로 엄청난 환호가 들려왔다.

일순간 움찔하며 허리춤에 있던 검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이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계심을 거두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펑! 펑펑! 펑!

귀를 먹먹하게 하는 환호성과 더불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폭죽이 솟구치며 허공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게이트 앞쪽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는데, 카를은 그 선두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

"카를."

카를의 아버지이자 라이프치히 백작 이오스 라이프치히가 두 팔을 벌리며 아들을 맞이해 주었다.

어머니 셰릴 역시 몇 달 만에 돌아온 막내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텔레포트 게이트에서 내려온 카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가문의 기사, 그리고 가신들까지 총출동해서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듯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위치한 광장에 돌아다니는 시민들 역시 라이프치히 백작가의 행렬을 구경하며 점차 몰려들기 시작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환영해 주실 필요는 없는데."

"그럴 수가 있겠느냐."

이오스 백작은 험상궂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활짝 웃으며 자신의 아들을 반겼다.

"바이에른에서 서신이 왔다. 카를, 네가 압도적인 성적으로 1학년의 이론 수석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구나. 이보다 어찌 더 기쁠 수 있을까."

"설마 나보다 더 높은 점수로 1학기를 끝낼 줄이야."

이오스 백작 옆에 있던 장남 카리우스도 웃으면서 카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휘몰아치는 불꽃 기사단에 입단한 그는 카를의 복귀에 맞춰 첫 휴가를 내었다.

평소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짧은 것이 이제는 어엿한 기사의 티가 나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자자, 얼른 들어가자. 널 위한 연회도 준비해 놓았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카를은 마차에 탑승했고 그대로 저택을 향해 복귀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마차를 따라 기사단과 가신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며 마치 축제를 여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다만, 둘째 다리우스는 아직 아카데미에 머물러 있었다.

올해 졸업 예정이기에 관련 안건으로 일정이 있어서 며칠 뒤에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이오스 백작이 카를처럼 환대를 해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돌아온 도련님을 위하여!"

"아하하하! 라이프치히에서 이론 수석이 나오다니. 참, 놀랄 일이야!"

"카를 도련님이 원래 머리가 비상하지 않으셨나. 그것이 바이에른에 가서 개화된 것이지."

"듣자 하니 건강도 다 회복하셨다는데, 역시 라이프치히의 핏줄이로다."

연회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이오스 백작, 기사, 가신들까지 모두 술에 취해 신나게 떠들고 있을 때, 정작 주인공인 카를은 저녁이 끝날 무렵 적당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북부의 연회는 모두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 정석이었으니까.

구태여 미련하게 동틀 무렵까지 어울려 줄 필요는 없었다.

끼익.

오랜만에 방으로 돌아온 그는 조용해진 방의 테라스에 기대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군."

카를은 아직도 불빛으로 환한 연회장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도중 실습 때문에 한 번 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학기를 끝내고 돌아오니 정말로 고향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고향 집이라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스로 그런 감상을 품은 것조차 신기하게 느껴졌다.

중원에 있을 당시에는 어땠는가.

살막을 소속이라고 여기긴 했지만, 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 발걸음 닿는 대로 떠돌다가 임무가 내려오면 가서 수행하고 다시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그나마 조금은 사람답게 살았던 건 정천학관에 머물렀던 때가 아니었나 싶었다.

'나도 조금씩 바뀌고 있는가.'

타성에 젖었다.

그렇다고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자신은 이번 생에서 살수였던 과거를 탈피하고자 하였으니까.

불가살 무악에서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로.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자신의 속내를 다른 이들에게 털어놓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었다.

휘릭.

손안에서 글라스를 굴린 카를은 테라스에 기댄 채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빛을 바라보았다.

예로부터 북부의 하늘은 별빛으로 아름다운 것이 유명했다.

지금 역시 검푸른 하늘 가운데 무수히 많은 빛들이 선명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게임이라."

유리아는 이 세상을 게임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녀가 하던 게임과 똑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진짜라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것은 틀림없었다.

'만일 게임이라면 그 주체는 주신이 되겠지.'

반신들이 전쟁까지 일으키며 주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목적이 바로 그것에 있다면?

그저 게임의 캐릭터가 아닌 실존하는 인물이 되기 위함이라면?

절그럭.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카를은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어느 쪽도 속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유리아가 거짓을 말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너무 파격적인 이야기였기에 어느 정도의 검증은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녀가 알려 준 히든 피스라는 것들을 찾아보는 것.

사기적인 능력을 지닌 아이템들이 잠들어 있는 곳들을 파본다면 그 말의 실효성을 따져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이프치히에도 있다고 했었지.'

방학 초에는 고향에 내려간다고 하니 이곳에 있는 히든 피스를 하나 알려 주었다.

재미있게도 이전 실습으로 공략했던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에 있는 것인데, 그곳에서 나오는 보스 몬스터는 2층의 데스 나이트, 그리고 3층의 리치였다.

하지만 유리아의 말에 따르면 숨겨진 4층이 있었고, 그곳에 자리한 보스를 쓰러뜨리면 히든 피스라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왜 저번에 왔을 때 시도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유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거기는 내 레벨로는 무리거든. 최소 소드 마스터, 마도사 급이 파티를 이뤄서 가야 공략할 수 있어. 여유가 생기면 카를, 너도 한 번 시도해 봐. 대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해. 2, 3층과는 확연하게 다른 수준이니까.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이미 철저하게 조사를 마친 자신도 모르는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의 비밀.

그것이 진짜임을 입증하면 유리아의 말에도 설득력이 실리는 것일 터.

"...앞으로 며칠간 많이 바빠지겠군."

라이프치히 가문의 행사에 참석해야 했고, 녹스의 개편도 해야 했으며,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 4층 공략도 준비해야 했다.

그 이후에는 또 다른 일정이 있으니 적어도 모든 일을 닷새 안쪽으로 해치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일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겠지.

탁.

글래스를 모두 비운 카를은 테라스의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또다시 도래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163화 방학 (2)

"어때, 일단 마스터가 명령한 대로 진행 중이야. 견적은 대충 두 달 정도로 걸릴 것 같더군."

초목이 울창한 숲 가운데 여러 장정이 목재와 벽돌을 나르며 공사를 하고 있었다.

희귀 약재의 재배와 채취를 위한 대규모 시설을 구축 중이었다.

물론, 그것은 표면적인 역할이었고 실상은 녹스의 새로운 본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기존 녹스의 본부는 라이프치히 영지 음지에서 수도의 플릭과 같은 형태로 지하에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구조적인 한계가 생겼고 결국엔 자리를 옮기게 될 수밖에 없었다.

라이프치히 영지는 수도처럼 가용 면적이 넓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라한을 장악 후 서부 3상업 지구의 정리를 끝냄과 동시에 이곳 역시 개편의 준비를 시작했다.

"위치는 적절하군."

"굴을 파기에도 딱 좋아. 도주 경로도 이전보다 더 많이 만들어 놨고. 도시 쪽은 너무 갑갑했어."

엑스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공감했다.

뒷골목의 음지답게 여러모로 우중충한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수도 쪽도 재미있는 일이 많던데. 끼지 못해서 아쉽군."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새로 충원된 화이트 라벨들의 실력의 수준이 높더군."

"내 정수를 담아 가르쳤지."

엑스는 자신감을 보였다.

전직 기사단장인만큼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거기에 카를이 전해 준 살막의 방식까지 곁들이니 과정은 혹독할지라도 확실한 결과가 돌아왔다.

"그리고 단독으로 이곳을 맡길 수 있는 건 엑스, 당신밖에 없다."

카를은 엑스를 바라보았다.

표면적으로는 킹, 퀸, 잭, 그리고 에이스에 해당하는 엑스트라 넘버들이 다른 블랙 라벨의 간부들보다 훨씬 강했다.

하지만 엑스 역시 그들에 뒤지지 않는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카를이 믿고 단독으로 단독으로 녹스의 본부를 맡기고 수도로 올라온 것이었다.

'엑스가 없었다면 간부 둘을 이곳에 보냈어야 할 테니.'

즉, 엑스는 엑스트라 넘버에 올라도 무방한 실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엑스를 부여받은 건 다른 이들과 달리 모종의 계약으로 묶여 있는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외부 쪽은 대충 이 정도고, 이제 안쪽으로 가지. 지하는 이미 공사가 끝났으니."

"그러지."

카를은 엑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 쪽에는 이미 영지 시찰을 나간다고 일러둔 상태였기에 의심을 사진 않았다.

카를이 어릴 적부터 상단과 연계해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건 가문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끼익.

엑스는 아직 외관의 공사 중인 건물의 문을 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중심부의 벽을 조작하자 일부가 뒤로 밀려나며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위장은 건물이 완성되면 추가로 할 예정이라더군. 그래도 외부에서 억지로 열려고 하면 붕괴하는 시스템은 갖추고 있다니 큰 문제는 없을 듯해."

"어차피 접근하는 녀석은 없을 테니 괜찮겠지."

카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라이프치히에서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이에른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적대 세력은 연초 무렵에 아예 뿌리를 뽑고 갔으니 말이다.

이제는 전부 녹스의 영향 아래 바짝 엎드린 채로 숨죽이거나 다른 곳으로 도망친 상태.

더욱이 뒷세계의 소식은 양지보다 몇 배는 더 빨랐다.

녹스가 라한과 손을 잡고 서부 3상업 지구를 장악한 후 안정적으로 수도에 진출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 그 위상이 더더욱 올라갔다.

타 영지의 음지에서도 이름을 떨칠 정도였으니, 라이프치히를 비롯해 제국 국경 인근의 세력권에서는 공고히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탓에 가문에서도 주시받게 되었지만.'

카를은 엑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쓴웃음을 흘렸다.

녹스의 세력이 커지고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자 가문에서도 점차 경계하며 주시하기 시작했다.

힘을 쥔 조직 아래로 암흑가가 집결하고 활개 치고 다니기 시작하면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으로서도 골치가 아파지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현재 이오스 라이프치히는 한평생 음지 부류와 타협해 본 적이 없는 외골수의 성격.

차라리 창칼을 겨누었으면 겨눴지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충돌할 생각은 없으니까.'

카를은 이미 녹스가 라이프치히 가문과 엮이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둔 차였다.

조금이라도 낌세가 있을 것 같은 영역이나 사업은 건드리지 않았고 철저하게 그들을 우회해서 확장을 시도했다.

암흑가는 양지로 나서지 않는다.

그 불문율만 지킨다면 지켜보는 선에서 그칠 테니.

이오스 백작은 외골수였지만, 필요악의 존재를 모르는 머저리는 아니었다.

"내부 구조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본래 기지와 비슷하군."

엑스의 말에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애초에 저쪽과 같은 형태로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그였다.

녹스의 조직원이라면 누구나 익숙할 구조를 그대로 가져왔다.

본래 기지는 예비로 사용하거나, 유사시 폐기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설령 유출된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함정이나 구조물을 설치하면 되는 일.

애초에 개미굴처럼 복잡했기에 하루이틀 분석한다고 해서 쉽게 조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인데."

끼익.

엑스는 여러 방 중 한 곳의 문을 열었다.

내부는 널찍한 연무장이었다.

이제 막 공사가 끝난 차였기에 텅텅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엑스는 손등으로 벽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퉁퉁.

"세븐이 새로 만들어낸 소재를 두른 덕에 외부로의 유출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더군. 실제로 꽤 난리를 피웠는데도 외부로 여파가 거의 새어 나가지 않았어."

"흠."

여러 소음이 존재하는 도시와는 달리 숲은 때때로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위쪽의 시설이 있다고 하여도 소리의 공백이 생기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할 터.

만일 지하 시설에서의 소음이 새어 나간다면, 조직의 위치가 노출될 염려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세븐의 신소재 개발 덕에 그러한 염려를 차단했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어때? 몇 달 동안 보지 못했는데. 마스터의 성취도 궁금하고 말이야."

"...그것이 주 목적이었군."

"당연하지."

카를의 말에 엑스는 씩 웃어 보였다.

"잊지 않았겠지. 내가 녹스에 있는 이유를. 바로 마스터를 꺾기 위해서니까."

전직 기사단장 출신의 엑스는 늑대와도 같은 남자였다.

자유로운 몸이 되길 바랐고, 강자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던 중 카를과 만났고 치열한 싸움 끝에 무참히 꺾여 버렸다.

그 뒤로 카를과 계약 후, 그를 꺾을 때까지 녹스에서 종사하겠다는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과거의 경험을 살려 훈련소의 소장을 맡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실상은 투견(鬪犬)이지.'

카를은 엑스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격, 온몸에 꿈틀거리는 근육과 더불어 투박한 기세까지.

반대로 얼굴은 꽤 곱상하게 생긴 것이 오히려 미스매치가 되어 제법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중원이었더라면 이름난 싸움꾼으로 소문이 나지 않았을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카를은 엑스를 향해 말했다.

"그래, 그간 당신이 쌓은 공적을 보상해 주어도 괜찮겠지. 오전에는 여유가 있으니 진득하게 어울려 주지."

쾅─!!

카를이 대답함과 동시에 연무장 내부에 엄청난 진동이 휩쓸었다.

조금 전까지 카를이 서 있던 자리 위로 커다란 대검이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엑스는 대검이 박혀 있는 바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세븐이 이 공간의 테스트도 겸해 달라고 했거든. 내구성은 얼마나 되는지 말이야."

"일단 기존보다 훨씬 튼튼한 건 틀림 없군."

한 줄기 검은 연기와 함께 몇 발자국 옆에서 나타난 카를은 대검의 주위로 자글자글하게 퍼져 있는 균열을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건물이었더라면 방금의 일격으로 폭삭 주저앉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금이 간 정도로 막아 냈다면 세븐의 신소재가 성공적인 역할을 해내었다는 소리였다.

"그럼, 나도 사양하지 않고."

스릉.

카를은 천천히 천뢰검을 뽑아 들었다.

바닥에서 대검을 뽑아 든 엑스는 흥미 어린 표정으로 그의 손에 쥐인 검을 바라보았다.

"그게 말로만 듣던 "정의"의 검인가?"

"그래, 영웅이 남긴 유산이지."

"롱소드라 아쉽군. 대검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대검도 있었다. 애초에 "정의"가 남긴 검은 한 자루가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황궁 지하에 직계 혈족만 들어갈 수 있는 은밀한 공간에 잠들어 있지. 관심 있나?"

그 말에 엑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양하지. 난 아직 죽기 싫다. 제국에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는 똑똑히 알고 있으니까."

"현명하군."

카를은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아직 "정의"가 자신과 같은 이세계인인지, 아니면 유리아와 같은 플레이어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영웅 쪽도 알아볼 가치는 충분했기에 조사는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애초에 유리아가 말한 게임에 존재하는 영웅은 4명이라고 했었고.'

무슨 차이로 3명이 추가된 것일까, 그것 역시 못내 궁금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갔는지만 파악해도 자신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터.

'일단은.'

쩌엉─!

카를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 커다란 대검을 받아 냈다.

대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날 선 파공성이 휘몰아쳤다.

엄청난 무게가 검 위를 짓눌렀지만, 그는 흘려내지 않고 모든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물러나지 않았다.

"하아아아압!"

엑스는 기합까지 토해 내며 대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 팔에 꿈틀거리는 근육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 커진 것 같은 근육의 모습에 카를은 감탄했다.

"훈련은 게을리하지 않았나 보군."

"당연하지. 마스터를 꺾는 것이 내 목표니까. 그다음은 킹이고 말이야."

"글쎄."

카를은 대검을 막아 세우고 있던 검의 궤도를 살짝 틀었다.

"이 정도로는 아직 가능할 것 같진 않은데."

천원검법 일 초식 중경(重鏡)

상대의 힘을 되받아쳐서 2배로 돌려주는 검초.

힘의 방향이 역행하기 시작했을 찰나, 엑스는 익숙하다는 듯 경합을 끝내며 거리를 벌렸다.

이미 숱한 대련을 하며 카를의 검을 분석했기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아니, 있을 터였다.

"...."

분명 곧바로 검을 떨쳐 냈음에도 대검을 타고 들어온 막대한 충격에 엑스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몇 달, 아니, 거의 반년 만에 벌이는 비무였다.

마스터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은 화이트 라벨의 육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수련에 매진했다.

애초에 서로간에 격차가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따라잡았다고 생각했거늘.

'내 착각이었던 건가.'

꽈악.

엑스는 대검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믿는 것은 불굴, 꺾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강함.

비록 여러 번의 패배를 겪었을지라도 마음이 무너진 적은 없었다.

평생을 함께해 온 신념을 다시금 되새기며 카를을 향해 매서운 기세로 대검을 휘둘러 갔다.

164화 방학 (3)

1학기가 끝나고 수많은 생도가 바이에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유리아 역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분주하게 짐을 싸며 빠진 것이 없는지 여러 번 체크하고는 의자에 걸어 놓았던 외투를 어깨에 걸쳤다.

다만,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달리 고향인 잿빛 마탑으로 내려가는 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허리춤의 파우치를 두드렸다.

안쪽엔 마나 포션과 여러 비상용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마법으로 공간 확장 및 경량화가 되어 있는 상태라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방을 나간 유리아는 저 반대편에 있던 호실의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레이시스, 준비는 끝났어?"

-네, 잠시만요.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평소 입던 바이에른의 검은 제복이 아닌, 움직이기 편한 사복으로 무장한 레이시스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검대에 매인 검집의 결합까지 확실하게 체크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죠?"

"응, 텔레포트 게이트 예약 시간이 있으니까. 워낙 사람이 몰려서 1분이라도 늦으면 바로 밀려나더라."

원래 수도의 텔레포트 게이트는 이용자가 많기로 유명했다.

거기에 바이에른의 학기가 끝난 터라 생도 및 관계자까지 더해져 일시적으로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

웃돈을 주고 순서를 양보해 주는 암표까지 활발하게 돌아다닐 정도였다.

"두근거리네요. 단둘이 레이드를 가는 건 오랜만이지 않아요?"

"그렇네. 작년에는 종종 돌아다녔었는데. 대학부에 입학한 후에는 거의 단체로 움직였으니까."

"고등부 때는 유리아의 친구가 없어서 그랬죠."

"...."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공격에 유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종강 연회 때 카를과 함께 슬쩍 빠져나갔다가 돌아온 걸 들킨 이후로 좀 뭐랄까.

'표독스러워진 것 같은데.'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평소와 같았지만, 공격할 각이 보인다면 서슴지 않고 찔러 들어왔다.

지금처럼 말이다.

"...아니,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그러네. 계속해서 그걸 마음에 담고 있는 거야?"

"네, 알고 있어요. 몇 번이나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 아무 일도 없었겠죠."

레이시스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설령 종강 연회가 가장 고조되었을 무렵, 동시에 3시간 가까이 자리를 비웠어도.

뭐 때문에 운 것인지는 몰라도 눈가가 퉁퉁 붓고 붉어져 있는 상태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손을 잡고 정원에서 걸어 들어오다 자신과 마주쳤어도.

"아무 일도 없었겠죠."

"...."

재차 비꼬듯 말해 온 레이시스의 모습에 유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뒤끝이 기네.'

유리아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인 건 맞았다.

레이시스가 카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 미안한 감정은 있었지만, 자신 역시 카를과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새로운 유대를 맺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플레이어니까.'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해야 했다.

"자자, 얼른 가자. 늦겠다."

"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둘러대던 유리아 씨."

"진짜 언제까지 그럴래?"

유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종강 연회 당시에 카를과 나눴던 대화를 회상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어.'

최악의 경우 카를이 자신을 적대할 위험도 존재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

오히려 카를의 상황을 알게 되어 계획을 수정할 수 있었다.

'설마 기억을 잃었을 줄이야.'

그런 가운데서도 그 정도의 강함을 이룩했다는 것에 놀람이 들 정도였다.

물론, 서로 속내를 전부 털어놓은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이 숨기는 것이 있는 것처럼, 카를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겠지.

...그리고, 우연히 유리아는 카를이 숨기는 것 중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 시트러스 향기.'

카를의 품에서 울었을 때 은은하게 맡아지는 체취가 있었다.

이전에도 몇 번 접촉한 적이 있었기에 카를이 사용하는 향수라고 생각했으나, 그것 말고도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었다.

대체 무엇일까.

며칠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녀는 한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그때 그 사람이야.'

입학시험 당시 발생했던 테러에서 마물의 독에 당해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온몸에 독이 퍼져 의식을 잃기 직전,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위험하지 않았을까.

'날 발견했던 생도들도 마물이 없던 구역에서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고 했었고.'

보험을 들어 놓긴 했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희생된 다른 생도들처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될 뻔했다.

아니,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

의식을 잃기 전이었지만, 분명 자신을 안아 든 사람에게서 희미한 시트러스 향기를 맡았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긴 했지만.'

단지 비슷한 향수를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의심할 점이 너무 많았다.

녹스(NOX).

자신을 구해 준 그 남자가 속해 있는 조직이라고 하였다.

황제의 지시로 입학시험에서 일어난 테러가 샅샅이 조사되었기에 어느 정도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연관된 조직은 기사들이 직접 나서서 섬멸했으나, 녹스는 몸을 잘 숨긴 것인지 그 이후로 다른 소식이 없었다.

연관성은, 라이프치히 쪽에서 발견했다.

라이프치히를 기반으로 확장해서 수도로 진출한 음지의 세력, 흑막으로 있는 건....

'카를밖에 없잖아.'

물론 억측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부터 구리구리한 냄새가 풀풀 풍겨 왔다.

당장 녹스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시기도 카를이 플레이어로 빙의한 직후의 일이었으니까.

아직 조사할 시간이 부족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유리아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라고 판단했다.

'내심 말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카를은 끝까지 녹스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 것이겠지.

물론, 이쪽 역시 여러 비밀을 숨겼기에 상관은 없었다.

'차차 이야기를 나누면서 밝혀 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다만, 레이시스 쪽에겐 좀 미안한 상황이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와 선망하는 사람이 모두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밝히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녀가 충격받을 수도 있었고, 예민한 비밀이라 괜한 파장을 나을 우려도 존재했다.

"왜 그러신가요? 아무 일 없으셨던 유리아 씨."

"...."

자신이 딴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또 툭툭 건드려 왔다.

저렇게 계속 같은 걸로 놀리니 유리아로서도 심술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레이시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볼 찰나, 유리아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더니 살짝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 아무 일이 없진 않았...."

"...!!!"

레이시스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 머리카락이 허공에 치솟을 정도였다.

예상보다 더 좋은 반응에 피식 웃은 유리아는 성큼성큼 걸어가 레이시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농담이야, 얼른 가자."

"...지, 진짜로 농담이죠?"

유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전과 같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을 뿐.

"유리아!!"

친구의 뒤를 따라가며 내뱉은 레이시스의 다급한 외침만이 그 자리에 맴돌았다.

* * *

검과 대검이 부딪쳤다.

사방으로 솟구친 충격파가 천장과 벽을 때리며 주변을 뒤흔들었다.

평범한 연무장이었다면 벌써 수십 번은 더 무너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븐의 신소재로 건설된 새로운 본부의 시설은 큰 무리 없이 멀쩡한 형태를 유지했다.

휘릭.

벌써 수십, 수백 번은 더 튕겨 나갔던 엑스가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으며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가볍게 숨을 토해 낸 그는 두 손으로 대검을 움켜쥐며 사나운 미소를 흘렸다.

"수도의 물을 먹더니 어째 검이 더 빠르고 무거워진 것 같군. 정말 나도 따라갈 걸 그랬어."

"그랬더라면 더 재미있었겠군. 어쩌면 그토록 갈망하던 벽을 넘어설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

엑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소드 마스터, 평생 검을 휘둘러 온 이들이 갈망하는 경지였다.

본인 스스로 느끼기에도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았다.

그렇기에 기사단장 직위에서 내려와 강자들을 찾아다니며 싸우는 것으로 자신을 단련하던 것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벽을 넘어서고 그 경지에 다다르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마스터를 쓰러뜨리는 순간 그것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보여 주도록 하지. 네가 그토록 갈망하던 빛의 편린을."

"...뭐?"

엑스의 반응에 카를은 씩 웃으며 가볍게 검을 들어 올렸다.

혼원일극신공이 3성에 다다르며 카를은 소드 마스터와 비견되는 경지에 올랐다.

익힌 무술의 뿌리만 다를 뿐 실상은 소드 마스터라 해도 다를 바가 없었다.

파아아앗─!

카를의 검에 심상치 않은 형태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 앞에 선 엑스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천뢰검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빛을 바라보았다.

"그건...!"

엑스는 넋을 잃은 채 놀람을 토해 내려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내리는 카를의 신형에 기겁하며 대검을 들어 올렸다.

천원검법 이 초식 천뢰(天雷).

섬전이 번뜩였다.

카를이 익힌 천원검법 중 가장 빠른 쾌검이 펼쳐지자 서로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엑스는 카운터를 포기했다.

이건 튕겨 내거나 쳐 낼 수 있는 성질의 공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검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넓적한 검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두 눈은 쏘아지는 검 끝을 끝까지 따라갔다.

그토록 선망하던 경지를 바로 눈앞에서 볼 기회는 흔하지 않았으니까.

파앗─!

카를은 손목을 뒤틀어 허공을 꿰뚫으며 찔러진 쾌검의 궤적을 빗겨 냈다.

천뢰검이 엑스의 오른쪽 얼굴의 옆을 찔렀고, 쏘아진 여파가 허공을 찢으며 저 뒤쪽에 있던 벽까지 가격했다.

콰아아앙!

아무래도 이 정도 충격까지는 버티지 못하는 것인지 벽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카를은 그 광경을 보며 멋쩍은 표정으로 검을 거두었다.

"세븐에게 말해서 자재를 넉넉하게 확보해 달라고 해야겠군."

"...."

엑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우뚝 선 채 자신에게 닥쳐온 검의 궤적을 복기할 뿐.

옅은 미소를 지은 카를은 엑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비켜섰다.

이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에 말이다.

'우직한 남자로다.'

자칫 잘못했으면 얼굴에 검이 꿰뚫려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이 선망하며 집착하는 경지를 엿보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

무(武)에 관한 열망과 열정은 지금껏 카를이 만나 본 이들 중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저거, 지린 거 아니야?"

문가에서 모습을 드러낸 갤런이 연무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멈춰 있던 엑스를 가리켰다.

천뢰검을 검집에 넣은 카를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무의식의 자아에서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지렸다고 해도 깨어났을 즈음에는 다 말라 있겠군."

"마스터도 악질이네. 엑스가 그 말을 들었다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을 거야."

"공격받는 건 네 쪽이 되겠지. 그보다, 그건?"

"가져오긴 했는데...."

갤런은 미간을 찌푸리며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스터, 정말로 괜찮겠어? 블러디 스톤을 이렇게 사용해도."

165화 방학 (4)

갤런 포는 성직자였다.

비록 대륙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신일지라도 신앙과 교리가 존재했고, 신자와 교회가 있었다.

다만, 기존의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마계 세력에 엄청날 정도로 적대적이었다는 것이었다.

"내 종교의 교리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었지. 설령 손에 피를 묻힌 악인은 용서해도, 그 마음속에 깃든 악마는 용서하지 말라고."

"사람과 죄는 다르다는 뜻인가?"

"그렇게 해석하는 게 정석이겠지만, 마음을 심장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어서 말이지.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악인의 심장을 꺼내 짓이기는 것으로 참회하고 속죄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분들도 계셨다."

"제정신이 아니군."

"내 말이.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런 시대였다고 하니 말이야. 당시 이쪽의 세력도 나름 있었고."

하지만 극단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시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시대의 퇴색과 함께 그의 종교도 패퇴했고 결국엔 빛이 바랜 기록으로 남아 버렸다.

"재밌는 시대였어. 마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마음에 깃든 악마도 없어질 것이라고 마계 침공을 계획하기도 했었으니까."

"어떻게 되었지?"

"흑마법사들을 잡아다가 마계로 가는 게이트를 열려고 했었지. 기겁한 제국의 황제가 그 수뇌를 전부 붙잡아 처형한 탓에 미수로 그쳤지만."

"현명한 황제였군."

"그 덕에 지금도 우리가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지. 신을 섬기는 교단이 마계와의 길을 잇는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면, 농담으로도 남아 있질 못했어."

갤런은 쓴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그리던 문양의 작업을 끝냈다.

녹스의 본부에 있는 작업실.

그 바닥에 갤런이 그린 기이한 문양의 진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갤런의 종교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사악을 멸하고 죄악을 짓밟는 불꽃을 소환하는 신성 마법이었다.

"말했다시피 이 불꽃은 보험의 성격이야. 내가 판단하기에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과감하게 사용할 거야."

"프로메테우스의 불꽃이라고 하였지. 부디 내 몸을 태우는 일이 없길 바라겠다."

"말했잖아. 사악과 죄악만 태우는 불꽃이라고. 마스터의 그 마기(魔氣)에 반응이 없었으니까 괜찮겠지."

이미 천마신공과의 반응 테스트도 마쳤다.

악마의 마기와 천마신공의 마기는 이름만 같을 뿐 그 성질은 아예 다르다고 할 수 있었으니.

"그럼, 하도록 할게. 솔직히 난 마스터가 뭘 한다고 하는 건지 반절도 이해 못 했지만."

갤런 포는 방구석에 고양이의 눈동자를 닮은 묘안석을 내던졌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더니 방 한가운데 놓인 블러디 스톤에 핏방울을 뿌렸다.

"...."

그와 동시에 카를은 가부좌를 틀고 긴 숨을 내뱉으며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했다.

'도박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갤런의 신성 마법, 그리고 진법과 혼원일극신공까지.

모든 준비를 갖춰 두고 블러디 스톤에 피를 흘림으로 바나베를 부활시키려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오리진의 정보를 캐묻기에는 지금이 적당한 때다.'

앞으로는 굉장히 바빠질 것이다.

개인적인 수련, 그리고 녹스의 개편, 생도들과의 여행도 잡혀 있었고, 그 이후에는 바이에른 쪽의 행사인 발푸르기스의 밤 소집에도 응해야 했다.

본래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나중으로 미뤄 두려고 했지만, 마침 갤런이 다른 임무 때문에 잠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야 했었기에 겸사겸사 일정을 잡았다.

사아아앗─!

방안에 뿌연 운무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묘안석으로 구성한 간단한 진법이 발동했고, 혼원일극신공이 주변을 장악하며 새로운 공간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혼원일극신공의 3성.'

그 공능은 공간의 구축에 있었다.

물론, 자유자재로 주변 영역을 손에 넣고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경지가 더 올라간다면 모를까, 지금 단계에서는 여러모로 준비가 많이 필요했다.

"...."

카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앞에 보이는 건 만장절벽과 천혜의 산세.

뒤쪽에는 거센 폭포가 자욱한 안개를 뚫고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공기에 카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중원의 풍경은 정말로 오랜만이었기에 그리운 느낌마저도 들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도시나 저잣거리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싶었지만, 아직 이 조화에 익숙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자연의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한계였다.

그런 것들도 차차 익숙해지면 가능할 터.

스르륵.

돌연 옆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카를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블러디 스톤 위로 시커먼 재가 모여들며 덩어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카를은 다시 고개를 돌려 산세를 감상했다.

갤런의 말에 따르자면 뱀파이어가 온전히 부활할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했으니.

"...허."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귓가에 들려오는 선명한 목소리에 카를은 팔짱을 풀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나체 형태의 바나베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날 살린 것인가? 네가?"

"그래."

"이곳은...."

바나베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르겠군. 라니아의 숲인가. 읽히지 않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려 한 듯싶었다.

하지만 진법과 혼원일극신공의 조화로 형성된 공간이니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을 테지.

펄럭.

바나베는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의복을 만들어 내 몸에 걸쳤다.

기다란 로브 자락이 등 뒤로 흩날릴 찰나, 새빨간 눈동자로 카를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서 날 되살린 것이지?"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하하."

바나베는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순순히 말해 줄 것 같나? 신성력을 쓴다는 건 놀라긴 했지만, 그걸로 날 죽이는 것 이외에는...."

퍽.

순식간에 자리를 박찬 카를은 바나베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나베 역시 순순히 당해 주지 않겠다는 듯 두 손을 교차하며 그것을 막으려 했다.

"...쯧."

하지만 허공에 스치는 새파란 신성력을 보고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사아아아.

단지 그 편린에 스쳤을 뿐인데 의복과 피부가 녹아들어 갔다.

바나베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의 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네게서는 신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성을 사용한다는 건, 대체 무엇이지?"

"뱀파이어 주제에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건가?"

카를은 흥미를 보였다.

뱀파이어는 신앙을 판별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러자 바나베는 피식 웃으며 상처를 회복하고는 말을 이었다.

"눈을 보면 되는 일이지. 맹목적으로 신을 쫓는 녀석들은 보통 눈이 맛이 가 있거든. 하지만 네놈은 누군가를 신봉하고 믿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 건가."

카를은 피식 웃었다.

절대적이진 않지만, 나름 경험에서 온 데이터인 듯싶었으니.

"좋아, 그러면 신성은 사용하지 않도록 하지."

카를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카일로스의 힘이 흩어지며 새파란 신성의 불꽃이 사라졌다.

"...?"

바나베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녀석에게 패배한 건 예상치 못한 신성력의 일격 때문인데.

'만용이라도 부리는 건가.'

기운의 상성이 아니라면 우위는 이쪽에 있다.

바나베는 그렇게 판단하고는 천천히 몸을 낮췄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눈앞의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다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쿵─!

절벽에 파문이 일고 바나베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몸에 둘린 로브가 확 펼쳐지니 핏줄기가 쏟아져 내리며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쥔 카를은 바나베를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곧 천마신공의 마기가 치솟아 오르며 주먹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강타했다.

콰앙!

절벽이 뭉개졌다.

몸을 비틀어 그 여파를 피해 낸 바나베는 카를의 몸을 뒤덮은 시커먼 불꽃을 보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또 마기를!"

"마기이긴 하지만, 네놈의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카를은 앞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휘몰아치던 마기가 응축되더니 그 앞에서 작은 구체의 형태를 이뤘다.

핏─!

마치 총알처럼 쏘아진 그것은 단숨에 허공을 가로지르며 바나베의 몸에 박혀 들었다.

퍽! 퍼퍼퍽!

지풍에 강기를 담은 마탄(魔彈)의 수법.

핏줄기가 치솟으며 바나베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컥!"

바나베의 두 눈이 핏줄이 터졌다.

이전에도 저 마기에 얻어 맞은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무게감이 달랐다.

'신성 때문에 약해져서 그런 것일까.'

블러디 스톤에서 부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도 상대의 힘이 예전보다 한층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흠."

카를은 손가락을 털며 바닥에 추락한 바나베에게로 걸어갔다.

'신공의 성취 덕분에 천마신공과 명천신공 역시 경지가 높아졌군.'

천마신공과 명천신공의 성취는 혼원일극신공의 성취에 미미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막대한 영향을 끼친 듯했다.

당장 천마신공은 같은 경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의 밀도가 차원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콰악.

카를은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바나베의 몸을 짓밟으며 말했다.

"협력해 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원하는 건 네놈이 지닌 기억이니까."

"...뭐?"

덥썩.

바나베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카를은 녀석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곧바로 천마신공의 탈혼백을 시전하자 바나베의 두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엄청난 절규가 절벽 위에서 메아리쳤다.

'역시.'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통하지 않았을 터인 탈혼백이 힘겹게나마 바나베의 정신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정도 이상의 힘을 사용한다면 바나베가 백치가 되어 버릴 터.

하지만 딱히 상관 없었기에 카를은 탈혼백의 수위를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팟─.

그렇게 어느 기점에 다다른 순간.

바나베의 절규가 뚝 그치고 카를의 정신이 어디론가로 링크되었다.

처음에는 탈혼백의 시전이 성공하여 그 의식 속에 들어온 줄 알았지만, 곧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여긴.'

진법의 안쪽도, 바나베의 의식도 아니었다.

설마 자신의 심상 안으로 바나베가 빨려 들어온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질적인 기운들을 보니 그것 역시 아닌 듯했다.

"...오랜만이로군."

"...."

돌연 등 뒤에서 익숙하지만,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붙잡고 있던 바나베의 머리를 놓아 준 카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이쪽과 같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스칼론."

그와 만난 것도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혼원일극 1성의 경지로 맞붙어 처참하게 패퇴했다.

하지만 3성에 이른 지금은 다를 터.

"...."

아스칼론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가늘어진 눈으로 카를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조만간 만나지."

서로 사이에 많은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스칼론은 짤막한 말을 내뱉었고, 카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가도록 하겠다."

166화 방학 (5)

카를은 저택에 머물 땐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침과 저녁은 가족과 함께하는 편이었다.

백작 내외도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아, 남들보다 일주일은 늦게 시작한 방학이라니."

전날 밤에 돌아온 다리우스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졸업 준비 때문에 원래 일정보다 며칠 더 바이에른에 체류하게 되었다.

심지어 얼마 쉬지도 못하고 다시 떠나야 하는 일정 때문에 심기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게 미리 해 놓지 그랬어. 옛날부터 넌 꼭 시일이 닥쳐야 몰아서 한다니까."

그런 다리우스의 면전에서 유일하게 잔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 건 맏형인 카리우스였다.

실제로 반박할 말도 없었기에 다리우스는 투덜거리며 거칠게 나이프를 움직였다.

"어디 기사단에 들어가거나 취직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곱게 졸업시켜 주지. 뭐가 그렇게 복잡한 것인지 모르겠다."

"바이에른이잖아.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인 만큼 졸업 심사도 까다로우니까."

"형님은 한 번에 통과했잖아."

"난 학기 초부터 철저하게 준비했으니까. 휘몰아치는 불꽃 기사단의 입단도 있었으니 여러모로 배려를 받았지."

"형님 덕분에 더 고생했어. 교수들이 카리우스의 반만이라도 하라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던지."

"내게도 편지를 부치셨더구나. 제발 네 동생에게 말 좀 해 달라고."

우애가 돈독한 형제들의 대화에 가족들은 다들 쓴웃음을 지었다.

바이에른에 입학하기 전부터도 그러더니 졸업하고, 졸업에 가까워진 지금도 그리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특색이 더 뚜렷해졌지.'

개성 넘치는 형님들이다.

카를은 카리우스와 다리우스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래도 벌써 둘이나 졸업하는구나. 이제 카를만 졸업하면 되겠어."

이오스 백작의 말에 두 형님이 카를을 바라보았다.

"카를이라면 잘할 겁니다."

"1학기 성적만 따지자면 형님보다 높았지?"

"나도 깜짝 놀랐다. 설마 10위권까지 올라갈 줄이야."

카리우스는 동생에게 흐뭇한 표정을 지어 주었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이는 아카데미였다.

그런 가운데 이론으로는 압도적으로 수석을 거머쥐고, 실기 쪽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라이프치히 가문에서는 이보다 더한 경사가 없었기에 돌아왔을 때 연회를 열어 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은 되었다.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말거라."

"카를, 아버지의 눈에는 아직도 네가 돌림병으로 골골대고 있는 그때의 모습으로 보이나 보다."

다리우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리 말했다.

함께 바이에른에서 카를의 활약을 지켜보는 그로서는 제법 웃긴 이야기였기에.

'허약한 도련님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카를은 과거의 잔재를 전부 떨쳐 버렸다.

어찌 보면 가끔 자신보다 더 과감한 모습을 보여 주었을 정도로.

"이해하렴. 네 아비가 워낙 걱정이 많았어야지. 다리우스에게 날마다 보고하라고 말하려는 걸 겨우 말렸다."

"...부인, 그리 말하면 내가 뭐가 되오."

"그만큼 카를을 아끼셨다는 거죠. 카를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음식을 씹고 있던 카를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카리우스의 손길에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였던 그라도 느꼈을 만큼 라이프치히 백작 내외는 카를에게 애정을 쏟았으니까.

"형님, 기사단으로 복귀 일정은 언제야."

"2, 3일은 여유가 있을 듯한데. 왜?"

"2, 3일이라. 그럼 식사 후에 시찰 어때. 슬슬 마수들이 기승을 부릴 때가 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였는데 잘 되었네. 아버지, 그래도 되겠죠?"

"기사들을 붙여 주마. 정찰 선에서 끝내도록 하여라."

"기사까지는 괜찮습니다. 저희끼리 조용히 다녀올게요. 카를, 너는 어때?"

"저도 가겠습니다."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부터는 녹스 쪽에 가기로 했지만, 어차피 기지 공사 중이라 그리 급한 일은 없었다.

여유가 있을 때 가문의 행사에 참여해 놓는 것도 괜찮을 터.

식사를 마친 카를은 방으로 돌아와 무장을 점검했다.

"정의"에게 받은 천뢰검을 패용하고, 움직이기 편하도록 주요 부위에 경갑만 착용했다.

준비를 마친 뒤 저택 로비로 나가서 기다리자 형님들이 밖으로 나왔다.

카리우스는 카를과 비슷한 차림새였고, 다리우스는 경갑도 착용하지 않은 채 등에만 대검을 매고 있었다.

"그래도 뭣 좀 입지."

"됐어, 걸리적거리니까."

"그러다 눈먼 창칼에 다쳐도 모른다."

카리우스의 타박에도 다리우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정찰 정도에서 다칠 일은 없다는 걸 자신했으니.

'흔히 보이는 유형이지.'

후기지수 중에도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대부분 끝은 좋지 못했지만.

그들과 다리우스가 다른 점은, 확고한 실력이었다.

다리우스는 적어도 후기지수 정도는 뛰어넘는 실력을 지녔으니까.

"이럇!"

말에 올라탄 그들은 힘차게 달리며 저택을 빠져나갔다.

라이프치히는 분기별로 산맥과 숲의 정찰을 실시했다.

마수들의 활동 범위와 생태를 확인하고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본래는 실력 좋은 사냥꾼이나 기사들이 함께 따라붙어야 했지만, 카리우스와 다리우스는 그런 이들이 불필요할 정도의 실력자.

카를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종종 이들과 함께 정찰에 나서곤 했다.

다그닥다그닥.

이제 막 아침이 지난 시간인 터라 도로는 한산했다.

막힘없이 그곳을 주파한 그들은 손쉽게 영지를 빠져나갔다.

"흠, 이 익숙한 공기. 그리웠다."

가슴이 빵빵해지도록 숨을 들이 내쉰 다리우스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세 형제 중 가장 외부에서 날뛴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다리우스였으니.

실전 경험을 쌓는다는 명목으로 영지를 몰래 빠져나가 홀로 마수의 요람이나 둥지를 휩쓸고 오기도 하였다.

경험이 적을 땐 자주 다치곤 해서 많이 혼났지만, 실력을 쌓은 뒤에는 완전 범죄를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자!"

그렇기에 누구보다 라이프치히 영지 인근의 지형에 밝은 다리우스는 선두에서 형제들을 이끌며 박차고 나갔다.

영지 밖은 울창한 노어 숲, 그리고 숲과 이어지는 아모스 산맥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지 밖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작은 촌락이나, 사냥꾼들의 기지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살아갔다.

그들 역시 제국의 시민으로 라이프치히 가문에서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거의 반년 만인가."

"연초에 마지막으로 왔었으니까."

노어 숲과 맞닿은 곳에 작은 촌락 하나가 있었다.

200 인구가 조금 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라이프치히에서는 정찰의 전초 기지로 곧잘 사용하곤 했다.

끼익.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닫혀 있던 목책이 열리며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들이 나왔다.

"아, 다리우스 님."

"카리우스 님과 카를로스 님도 계시군."

이미 몇 번 왕래가 있었던 덕에 병사들은 라이프치히 3형제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선두에서 말을 몰던 다리우스는 그들의 모습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입구를 닫고 있지? 한창 작업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아."

병사는 멋쩍은 얼굴로 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약초꾼이 근방에서 마수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당장 1시간 전의 일이라 일단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다리우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슬슬 활동 시기이긴 했다.

그래도 지금과 같이 계절이 좋을 땐 도처에 놀린 먹잇감을 사냥하며 민가까지 내려오진 않는데.

마수는 몬스터와 달리 지능이 높았기에 겨울과 같이 혹독한 환경이 아니라면 인간의 영역을 잘 침범하려 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해서 토벌대가 구성되면 자신들의 둥지가 쓸려나갈 것을 알기 때문에.

"일단 들어오시지요."

"됐어. 정찰하려고 온 거니까. 위치나 좀 알려 주겠나?"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쭉 가면 조금 넘어가면 표식이 있을 겁니다."

"그래, 너무 걱정하진 말고. 그렇지 않아도 슬슬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우리가 온 거니까."

"자경대도 곧 출동할 예정이었습니다."

"아니, 마을을 지켜. 마수가 빈집을 노릴 수 있으니까."

정찰은 이쪽으로 충분했다.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자 다리우스는 말머리를 돌려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들었지?"

"그래. 벌써 마수가 여기까지 내려올 줄은."

"오늘 오길 잘했군요."

카를은 대답을 하면서도 기감을 넓게 퍼트려 숲 안쪽을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리 단위로 움직이는 마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 정도는 충분하겠군.'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카리우스와 다리우스 선에서 무리 없이 충분히 처리 가능한 숫자였다.

"가자. 아, 말을 부탁해."

"네."

숲을 이동하기에 마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말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달릴 수 있었으니까.

"카를, 너도 이제 성인이니까 한 사람의 몫은 해 주리라 믿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충분합니다."

"그래, 그래야 라이프치히지. 뭐, 바이에른에서 보였던 실력들만 보여 줘도 충분해. 경험이야 너도 많이 쌓았으니까."

정찰이나 사냥을 처음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는 다른 기사들이나 형제들이 카를을 보호해 줬다면, 이제는 한 사람의 검사로서 누군가의 지킴 없이 제 몫을 다해야 하는 때가 찾아왔다는 소리였다.

"여기로군."

북서쪽으로 10분 정도 이동했을까, 선두에 가던 다리우스는 나무 위에 꽂혀 있는 막대기를 발견했다.

근처 바닥을 수색해 보니 확실히 이질적인 발자국이 찍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군."

"적어도 두 자릿수는 되어 보이는데."

"왜, 겁나나, 형님?"

"설마."

다리우스의 도발에 카리우스는 씩 웃으며 허리춤에 매인 자신의 검을 툭 쳤다.

"내친김에 어때. 만나게 된다면 누가 더 많이 쓰러뜨리나 내기라도 할까?"

"저도 껴도 됩니까?"

"카를도?"

"카를도 이제 남자가 다 되었으니 말이야. 내기에 껴도 충분하겠지."

"...그건, 무슨 소리인데?"

의미심장한 다리우스의 말에 카리우스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다리우스는 몰랐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몰랐어? 카를, 그 알포람 왕국의 왕녀님과 그런 사이잖아."

"...뭣."

카리우스는 놀람을 토해 냄과 동시에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 뒤에서 다리우스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동생을 향했다.

"발뺌할 생각이거든 하지 말아라. 이미 바이에른 내부에 도는 소문은 전부 확인했으니까."

"...하하."

카를은 쓴웃음을 토해 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훅 들어온 펀치였다.

'하긴, 모를 수가.'

1학기 중간시험, 실전의 이해에 있었던 점령전 당시 레이시스와 나란히 찍혔던 사진은 바이에른 내부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자신과 레이시스가 친밀한 관계라며 소문이 났던 것에 쐐기를 박는 듯한 것이었으니.

아무리 다리우스라고 해도 동생이 관련된 것을 흘려 넘길 정도로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타국의 왕녀라. 그러면 카를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건가?"

"아니, 듣자 하니 왕녀 쪽에서 제국으로 망명을 오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아무래도 내부 사정이 좀 복잡한 모양이야."

"그때 보았던 그 여성분이 맞지? 카를, 잘 되었구나."

두 형제는 이미 기정사실이라고 여긴 듯 카를을 향해 우르르 말을 쏟아 냈다.

"하하, 예...."

반박을 포기한 카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쓴웃음만 지을 따름이었다.

167화 방학 (6)

스륵.

검푸른 털을 지닌 마수 한 마리가 숲 안을 거닐었다.

샤벨 타이거는 본래 단독 행동을 하는 개체로 유명했다.

일반적인 숲에서는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으니 무리를 짓지 않고 고고하게 홀로 움직였다.

문제는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 병사로는 막기 힘들었고, 합격진을 구성해야 겨우 견딜 수 있는 수준의 힘과 체격이었다.

점차 주변에 자신의 체취야 흔적을 묻혀 가며 영역을 넓혔고, 인간 마을에 다다랐을 때는 야음을 틈타 습격해 먹잇감들을 사냥했다.

스윽.

마침내 마을을 발견한 샤벨 타이거가 근처 나무에 몸을 문지르며 자신의 체취를 남겼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마을로 내려와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근거지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찰나, 체취가 남겨진 나무 위에서 한 인영이 뚝 떨어져 내렸다.

쉬아아악.

매서운 파공성과 함께 섬뜩한 궤적이 휘둘러졌다.

샤벨 타이거는 그 즉시 몸을 비틀며 자리를 박찼지만, 옆구리에 긴 자상을 입고 말았다.

-크르르.

검은 털 위로 핏줄기가 꿀렁꿀렁 흘러내렸다.

훌쩍 자리를 박차고 뒤로 물러난 샤벨 타이거는 곧바로 몸을 낮추며 상대의 강함을 가늠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수풀에서 튀어나온 대검이 녀석의 목을 가차 없이 갈라 버렸다.

서걱.

온 신경이 눈앞의 상대에게 향해 있던 터라 반응조차 못 한 기습이었다.

가볍게 대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 낸 다리우스는 쓰러진 샤벨 타이거의 몸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알던 것보단 훨씬 큰데?"

"우두머리 개체인 듯싶구나. 일격에 죽이려 했는데 설마 그걸 피해 낼 줄은."

"나도 형님을 의심했잖아. 기사단에 들어가서 녹슬어 버린 게 아닌가 하고."

"까분다?"

카리우스의 말에 다리우스는 씩 웃으며 슬쩍 몸을 내빼고는 쓰러진 샤벨 타이거의 시체로 향했다.

"어때, 막내야. 뭔가 보여?"

"딱히 특별한 점은 없습...."

두 형제가 투덕거리는 틈을 타 샤벨 타이거의 몸을 조사하던 카를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잠시만."

스릉.

뽑혀 나온 천뢰검이 샤벨 타이거를 향해 휘둘러졌다.

카리우스와 다리우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지켜보던 와중, 카를은 그 커다란 몸 안에서 주먹만 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혹시 이게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이게 뭐지?"

"마석? 아니, 그런 것 치고는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닌데."

마석과 비슷한 형태의 결정이 샤벨 타이거의 몸 안에서 나왔다.

문제는 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이 카를에게는 굉장히 익숙하다는 것.

'마기다.'

천마신공의 마기가 아니라 베샤나 다른 마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마기였다.

애초에 마수라는 족속이 대륙 곳곳에 흩어진 마기에 오염된 개체이긴 했지만, 지금껏 수도 없이 도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이 나온 적은 없었다.

"잠깐만. 형님, 이거 마기 아니야?"

"...네게도 그리 느껴져?"

"데스 나이트나 구울들이 이런 기분 나쁜 기운을 풍기고 있었지. 결정 형태로 보는 건 처음인데."

다리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대체 뭐야?"

"몸에 다른 상처는 없습니다. 누군가 강제로 심은 건 아닌 듯하군요."

"그렇겠지. 이런 크기의 샤벨 타이거의 몸에 마기의 결정을 이식하는 정신 나간 녀석이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카리우스는 검 끝으로 조심스럽게 마기의 결정을 건드리며 살폈다.

"보통보다 더 밀도 높은 마기를 흡수한 탓에, 몸 안에서 결정까지 빚어졌을 가능성이 높겠군."

"그렇다면 큰일 아닙니까?"

카를 역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숲 안쪽에 무언가가 발생했다는 소리이니."

"조사해 볼 가치는 있겠군. 서두르길 잘했어."

"흠."

카리우스는 잠시간 결정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다리우스는 맏형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눈치채고는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복귀 때문에 그러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깊게까지 가 볼 생각은 없으니까. 형님의 일정에 맞춰서 우리도 복귀하고 나머지는 가문에 보고하면 돼."

"괜찮다. 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마. 그리고 기사단도 그리 야박하진 않다. 가문의 일이라면 유예는 더 얻을 수 있을 테니."

"거, 그러다가 찍히는 거 아니야? 백작 가문의 자제라고 가문을 핑계로 복귀하기 싫어서 뻗댄다고."

"내가 너인 줄 아느냐."

카리우스는 동생의 말에 쓴웃음을 토해 냈다.

"하여튼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일단 조금 더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카를, 너는...."

"함께 가겠습니다."

"에잉, 쯧."

다리우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당장 샤벨 타이거의 수준만 보아도 꽤 위험해질 것 같은 사안이니 마기의 결정과 함께 돌려보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선명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카를의 모습을 보니 좋은 말로 타일러도 들어먹지 않을 듯했다.

'그래, 라이프치히 핏줄의 고집은 어디 가지 않는 법이지.'

다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결정을 챙겨 들었다.

"이건 시체와 떨어진 곳에 두고 돌아갈 때 챙겨 가야겠다."

"마기에 다른 마수들이 이끌리지 않을까?"

"나라면 결정보다는 샤벨 타이거의 시체에 더 혹할 것 같은데. 이 정도 크기면 뜯어 먹을 곳도 많으니까."

"그러면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아야겠군요. 이곳은 마을과 가까우니 말입니다."

카를은 샤벨 타이거의 머리를 붙잡고는 질질 끌며 발을 옮겼다.

유약한 줄로만 알았던 동생의 터프한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린 첫째와 둘째는 도와주겠다며 그 옆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흠.'

마을과 꽤 떨어진 곳까지 나아와 샤벨 타이거의 시체를 내던진 카를은 손을 툭툭 털며 생각에 잠겼다.

대륙에 발생하는 마기는 마계로부터 역류하는 것이다.

이것이 학계 정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노어 숲에만 발생하는 현상이라면 원인을 찾아내 해결하면 되었다.

하지만 대륙 전역에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다면?

'마계에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소리겠지.'

자연적으로 역류하던 마기의 양이 급증했다.

그건 어떤 식으로 보아도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자, 일단 옮겼고."

"빠르게 가 보자. 숲과 산맥 쪽은 비교적 해가 빨리 지니까."

"산맥 앞쪽까지 돌아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네."

라이프치히 세 형제는 그 뒤로 노어 숲을 누볐다.

사소한 흔적도 놓치지 않으려 주의했고, 산맥에 다다를 때까지 구석구석 뒤지며 마수나 마기의 흔적을 쫓았다.

"없네."

"다들 다른 곳에 있나?"

하지만 샤벨 타이거 한 마리를 마주한 이후로 줄곧 헛물만 들이켰다.

그렇다고 아예 무의미한 수색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흔적들로 인해 올해는 작년보다 마수의 활동이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다른 마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에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만 돌아가지. 밤이 되면 위험해지니까."

"형님, 차라리 밤에 더 수색할까?"

"그건 안 돼. 숲의 불문율을 어기지 말아라."

"...하긴."

다리우스는 평소와 달리 순순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어 숲의 밤은 위험했다.

애초에 마수의 활동 시간이 해가 진 다음일뿐더러, 야음에 가려져 움직임을 놓치기 쉽기에 위험에 빠질 우려가 더 컸다.

물론, 다리우스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오늘은 카를까지 와 있었기에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마을로 돌아가서 쉬도록 하자. 오늘만이 날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 결정도 챙겨 가야지."

세 형제는 다시 산맥으로부터 떠나와 마을 쪽으로 향했다.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며 곳곳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마을 근처, 샤벨 타이거를 쓰러뜨리고 마기의 결정을 묻어둔 곳에 도착했을 땐 완전히 어두컴컴해진 뒤였다.

"결정은, 무사하고."

행여나 마기에 오염될까 끈으로 결정을 결박해 들어 올린 다리우스는 마을 쪽을 가리켰다.

"오늘은, 한 잔 어때? 아버지나 어머님의 시선도 없으니까."

"...나쁘지 않지."

다리우스의 말에 카리우스는 씩 웃음을 끄덕였다.

가족과 마시는 술도 맛있었지만, 형제끼리 나누는 술잔의 맛도 각별했다.

특히 낮 동안 숲의 수색으로 고생을 한 터라 더욱 맛있어질 터.

하지만 코끝을 스치는 이질적인 냄새에 그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피 냄새?"

"거기에 타는 냄새까지...."

카를은 두 눈에 내공을 끌어 올리며 앞쪽을 주시했다.

어두컴컴한 숲을 넘어 목책 안쪽의 마을 안에서 희미한 연기와 불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잠시간 서로 마주 보던 셋은 누구랄 것 없이 자리를 박차며 마을로 쇄도했다.

카를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마을 쪽의 기척을 가늠했다.

'마수가 습격했군.'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자신 정도의 기감으로 진즉 마을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다니.

'아니.'

숲에 감도는 이질적인 기운이 기감을 흐트러뜨리고 있는 걸까?

단순히 기분 탓이라 여겼거늘, 평소보다 감각이 조금 저하된 느낌도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을 구해!"

콰앙!

목책 한쪽을 부수며 진입한 카리우스의 말에 따라 다리우스와 카를이 힘껏 자리를 박차며 쇄도했다.

"끄아아악!"

"한쪽으로 모여!"

"불, 불을 지펴서 경계선을 구축해! 마수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마을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잘 훈련받은 자경단이 필사적으로 막아 세웠지만, 작정하고 쳐들어온 마수 무리의 위세는 압도적이었다.

벌써 마을 곳곳에 물어 뜯겨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쉬악─!

카를은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매섭게 천뢰검을 내질렀다.

자경단의 방패를 물어뜯고 있던 샤벨 타이거의 몸이 양단되며 바닥을 굴렀다.

그럼에도 방패를 놓지 않고 그대로 물고 있으니, 녀석들이 끈질김을 엿볼 수 있었다.

촤악!

카를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실력을 전부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라이프치히 가문의 혈족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부지런히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

그 옆쪽에서 함께 마수를 도륙하고 있던 다리우스가 놀랄 정도의 기세였다.

'성장한 건 알고 있지만, 저렇게까지나?'

맏형인 카리우스조차 단번에 일격으로 베어내지 못했을 정도로 질기고 두꺼운 녀석이었다.

비록 오러를 둘렀다고 해도 저렇게 종잇장을 가르듯이 베어 버린다고?

툭.

이윽고 마수 대부분이 처치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 중앙에 보여 상태를 살폈고, 자경단은 남은 마수의 수색과 목책의 보수를 위해 다시 움직였다.

스륵.

볏짚으로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카를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막내야. 네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구나."

"그러게. 놀라울 정도인데. 이러다가는 곧 따라잡히겠어."

"아."

카를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심코 힘이 더 들어간 듯한데.

물론, 그럴 때를 위한 핑계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카를은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이 검 덕분에 그렇습니다."

168화 방학 (7)

"검?"

"그러고 보니 못 보던 검인데."

두 형제 모두 검사답게 검을 향해 관심을 드러냈다.

검신을 깨끗하게 닦아 낸 카를은 가까이 있던 카리우스에게 자신의 검을 넘겨주었다.

"흠."

카리우스는 천뢰검을 손에 쥐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생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검이었다.

"잠깐 줘 봐."

다리우스는 제 형으로부터 천뢰검을 받았다.

보이는 것보다 조금 묵직한 감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제 형님보다 검을 보는 눈썰미가 더 뛰어난 다리우스는 이질적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듭이나 검을 단련한 방식이 처음 보는 형태인데?"

검의 장식이나 손잡이는 카를에게 맞게 달았을 터.

하지만 그 이외의 형태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카를은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천뢰검은 아마 "정의"와 함께 중원에서 넘어온 검일 터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러를 일으켜 보시겠습니까."

"...어?"

다리우스는 동생의 말대로 천뢰검 위에 오러를 일으켰다.

그러자 평범해 보이던 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며 서늘한 한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쉬악!

내친김에 이리저리 휘둘러 보며 손맛을 다졌다.

곧 움직임을 멈춘 다리우스는 들뜬 한숨을 토하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이거, 대체 어디서 얻었느냐."

예사롭지 않았다.

가문의 보검부터 명검이라 불리는 것들도 모두 잡아 보았는데 이런 느낌을 주는 검은 없었다.

마치 검과 자신의 몸이 연결되는 듯한 그런 감각이었으니.

평생 대검을 고집하던 다리우스의 가치관이 뒤흔들릴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다.

""정의"의 검입니다. 이름은 천뢰(天雷)라고 하지요."

"천뢰? 고대어인가? ...아니, 그보다 정의의 검이라고?"

"카를,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겠니?"

다리우스와 카리우스가 두 눈을 부릅뜨며 물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카를은 타이밍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이 내게 지니고 있던 이미지도 쇄신할 겸.'

미발견 고대 유적지에서 "정의"가 남긴 문제를 풀었고, 황궁의 비고로 가서 시련을 통과해 전승이 담긴 검을 얻었다.

카를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유적 탐사 동아리가 거둔 성과에 관해서는 이미 유명하게 퍼져 있었다.

하지만 카를이 "정의"의 시련을 해결하고 그 검을 얻은 것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가족들까지 말이다.

"..."정의"의 시련을 통과하고 검을 얻었다니. 그러면 형식상으로 카를 네가 그분의 후계자가 된 것이 아니야?"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의"의 후계자라.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가 내린 시련을 통과해 전승과 검을 손에 넣었으니 꽤 적당한 타이틀이 될 터.

황궁도 자신에게 우호적이었으니 추후 필요해지면 적절한 패로 사용해도 괜찮아 보였다.

"혹, 네 실력이 빠르게 늘은 것에 검의 영향이 있느냐?"

"그건...."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 흘러나왔다.

카를은 다리우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어렸을 적부터 몸이 허약해서 여러모로 힘들었는데, 검을 얻고 난 이후로부터는 그런 게 싹 사라졌습니다."

카를은 어릴 적 돌림병을 앓았다.

그 덕에 원래 카를은 사라지고, 빈 육신에 불가살 무악이 들어갔다.

아르테니아라는 세상을 파악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 병약 공자라는 타이틀은 효율적이었다.

그렇기에 성인이 될 때까지 연기를 계속했는데, 슬슬 그 껍질을 깨뜨리는 것이 움직이기 편할 터.

"이제는 거뜬합니다. 형님도 바이에른에서 보셨죠?"

"그렇긴 하지."

다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대충 아귀가 맞춰지네.'

바이에른에 입학한 카를은 어느 기점부터 자신이 알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터프함과 강인함은 물론이고 같은 생도들을 웃도는 압도적이며 폭발적인 성장력까지 말이다.

""정의"라면 모든 것이 설명이 돼. 그러니 그렇게 강해졌구나. 그렇다면 혹시 이론 쪽도...?"

"전 원래 똑똑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론 수석으로 입학하지도 못했을 테고요."

카를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검이 신검이라고 불리는 데 이유가 있긴 했지만, 지성까지 똑똑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대단하다. "정의"의 계승을 이었다니."

카리우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카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허약해서 골골대기만 하던 동생이 이렇게까지 성장하다니.

더욱이 고대 영웅 쪽에는 그저 지식으로 관심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기연까지 손에 넣었을 줄이야.

"형님, 긴장하셔야겠네."

"긴장? 왜?"

""정의"잖아. 카를이 단기간에 이렇게 강해진 것이 안 보여?"

"...아."

다리우스의 말에 카리우스는 무언가를 퍼뜩 깨달았는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카를."

"예."

"혹시 라이프치히의 영주가 되고 싶느냐?"

"...."

카를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한껏 분위기를 잡고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었는데 고작해야 라이프치히의 영주라니.

'하긴.'

카리우스는 어릴 적부터 맏형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아 왔다.

그의 목표는 기사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완성에 이르러 라이프치히 영주와 백작위를 물려받는 것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더라면 진작 손을 썼겠지.'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형제간의 암투에는 관심이 없었다.

백작 자리에 눈이 멀어 형제들을 죽이기에는 비효율적이었으니 말이다.

'라이프치히는 지금 이 상태가 딱 조화롭다.'

솔직히 말해선 정이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생 피붙이 하나 없이 중원을 떠돌며 살던 카를에게 있어 가족이라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니 말이다.

전직 살수로서 말하기는 무엇하나,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잠깐 생각도 했었지만, 영주 자리는 형님께 양보하겠습니다. 저는 다리우스 형님처럼 여러 곳을 여행하거나, 다른 분야를 연구하는 쪽이 더 좋습니다."

"뭐? 하하하!"

자신에게 양보하겠다.

곧 카를의 말이 짓궂은 장난이란 걸 깨달은 카리우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양보는 고맙게 받으마. 혹시라도 네가 영주 자리에 관심이 있다면 후계자 교육이 필요했으니 말이야."

"만일 제가 원한다고 했으면 양보해 주셨을 겁니까?"

"나도 최선을 다하겠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카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존중은 해 줬을 것이다.

자신의 목표는 라이프치히 영지를 더욱 풍성하고 강하게 만드는 것.

카를이 그 자리에 더 걸맞은 인재라면 기꺼이 양보할 마음도 있었다.

'카를도 잘할 것 같긴 하지만.'

명석한 두뇌와 과감한 실행력까지 겸비했다.

더욱이 생도들에게 인망도 두터운 것 같으니 자격은 충분히 갖추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것만큼은 자신도 순순히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한계까지 부딪쳐 본 뒤 모든 것이 통하지 않았을 때가 되어서야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겠지.

"또 모르지. 카를이라면 공적을 세워 새로운 작위를 받을지도 모르고."

다리우스는 카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의"의 시련을 통과하고 그의 검을 얻었다. 이 말만 퍼져 나가도 제국이 출렁일 것이다. 고대 영웅이 갖는 의미는 그 정도이니.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세간의 주목을 받을걸?"

"혹시 우리 말고 이 사실을 더 아는 이가 있느냐?"

"레이시스가 있습니다. 그녀도 당시 동행했기에."

"그녀라면...."

카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겠구나. 왕녀라면 사리 분별은 될 테고, 카를 네게 나쁜 일을 하진 않을 테니."

"...하하."

카를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완전히 레이시스를 그런 관계로 생각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저쪽도 슬슬 정리가 끝나 가는군."

"일단 살펴봅시다."

그들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마을의 수습도 어느 정도 끝난 듯했다.

부상자들은 치료를 마쳤고, 시신들은 한쪽에 모였다.

곳곳에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가운데 마을 사람들은 라이프치히 형제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도련님들 덕분에 더 큰 피해 없이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 마수들의 시체는?"

"이쪽입니다."

마수의 시체는 사후 관리도 엄중히 처리해야 했다.

피와 고깃덩어리부터 다른 마수들을 끌어들였고, 시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구울이나 좀비로 변해 다시 일어났으니 말이다.

사지를 조각조각 내어 잘라 흩뿌리거나, 아예 부활하지 못하도록 불로 태워 버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의 명에 의해 마수들의 시체를 태우지 않고 한쪽에 모아 두었다.

서걱.

다리우스는 대검을 휘둘러 마수의 배를 갈랐다.

거침없이 손을 뻗어 그 안쪽을 뒤지는가 싶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빼 들었다.

"그건...."

"이 녀석도 있네. 형님,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아까 쓰러뜨린 샤벨 타이거보단 작은 크기였지만, 마기의 결정이 몸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수를 오염시킨 마기가 내부에 결정을 이룰 정도의 크기를 이루었다는 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농도의 수치를 넘어섰다는 뜻.

카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근처에 있던 자경단에게 물었다.

"마수가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까?"

"...어."

동료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자경대원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더 강하고 사나웠습니다. 본래는 네다섯이 둘러싸면 한 마리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었는데 일곱은 넘게 달라붙어야 겨우 상대했으니까요."

"보통 이렇게 대놓고 마을을 습격해 오지도 않습니다. 마수는 일반 몬스터보다 지능이 뛰어나서 마을을 건드렸다간 보복이 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다리우스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해야 한두 마리가 내려와서 몰래 들어오는 정도인데 마수가 군집 행동을 한다?"

"...혹시, 누군가 조종하는 이가 있다거나?"

카를의 말에 다들 시선을 모았다.

"마수를 조종한다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마기의 농도를 넘어섰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마기의 수위를 높이고 마수를 부릴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마수는 무리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상대했던 샤벨 타이거도 홀로 돌아다녔고요. 지금 보십시오."

카를은 쌓인 마수들의 시체를 가리켰다.

같은 종족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의 마수가 함께 합을 이뤄 마을을 습격했다.

"몬스터라면 모를까, 마수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지. 나도 그 부분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던 차다."

"일단 이 주변을 수색하는 것이 좋겠군. 자경단 중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날 따라오도록."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의 공격은 이것으로 전부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마을을 나서기 전, 누군가 격렬하게 말을 몰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루덴 경?"

"...카리우스 도련님!! 영지가!!"

귀청이 찢어지라 이쪽을 불러오는 외침에 세 형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169화 방학 (8)

"영지? 루덴 경, 영지가 어떻단 말입니까."

"후, 후우...."

세 형제의 지척까지 다다른 라이프치히 가문의 기사, 루덴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골랐다.

"영지가 마수 무리에 의해 공격받고 있습니다. 도련님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가주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병사들도 오는군요."

"급한 대로 소수만 끌고 왔습니다. 서둘러 복귀하시지요."

"흠."

카리우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지에 마수 무리가 습격해 왔다는 건 이곳에도 여파가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아니, 여파는 이미 있었지.'

직전까지 이어졌던 갑작스러운 습격 역시 그 여파와 관련 있지 않을까.

"루덴 경."

"안 됩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한 덕에 영지 쪽은 큰 피해가 없지만, 곧 풀려난 마수들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질 겁니다."

즉, 이곳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영지를 공격할 정도니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마리에 달하는 규모일 터.

그 정도라면 작은 마을 하나 정도는 한 시간 안에 쓸려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도련님께서는 저와 함께 돌아가셔야 합니다. 라이프치히 가주의 지엄한 명령입니다."

루덴은 한 치도 물러남 없이 카리우스에게 맞섰다.

아무리 카리우스가 천재라 불리고 뛰어난 실력을 지녔어도 수백, 수천 마리의 마수에 휩쓸리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적어도 소드 마스터에는 이르러야 그 정도 숫자를 도륙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하지만 카리우스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곳을 떠난다면 마을은 필연적으로 지옥이 되어 버릴 터.

"형님."

다리우스는 그런 카리우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일단 돌아가서 병력을 끌고 나오도록 하는 게 좋겠어. 아버지께서도 거부하시진 않을 테니."

"하지만 그사이에...."

"정 그러면 병력을 나눠 형님은 돌아가고, 우리는 이곳을 지키면 되잖아. 어떻습니까, 루덴 경."

"...."

루덴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다리우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최중요 인물은 후계자인 카리우스 형님이지 않습니까. 저와 카를은 일단 이곳에 남아 주변 마을의 인원을 규합하며 농성에 들어가겠습니다. 형님이 병력을 끌고 올 때까지."

영지 밖의 마을은 이곳 하나가 아니었다.

당장 근처만 해도 비슷한 규모를 이룬 마을이 수두룩했다.

"...."

잠시간 카리우스를 바라보던 루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들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좋아, 그럼 형님은 얼른 가서 병력을 끌고 나와. 이 주변은 나와 카를이 챙기고 있을 테니까."

"...다리우스."

카리우스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맏형이 되어서 이리도 답답한 꼴을 보이다니.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감이 드는 반면, 명쾌한 해답을 내려 준 다리우스에게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겠느냐."

"걱정하지 마. 여차할 경우 한 몸 건사할 실력은 되니까. 카를도 마찬가지고."

"대신 서두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정말 마수를 제어하는 이가 있는 것 같으니."

"그렇구나. 그 부분도 아버지께 전달드리마."

카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정리된 것을 본 루덴은 뒤늦게 합류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1조만 날 따라온다, 나머지 4조는 이곳에서 도련님들을 도와 마수의 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은 금이었다.

루덴은 카리우스와 함께 라이프치히 영지로 복귀했고, 다리우스는 남은 인원을 통솔하며 지시를 내렸다.

"자경단은 마을 주위에 바리케이드 건설에 집중하도록. 병사들은 자경단을 돕고 주변을 조사하도록 하고. 십인장들."

"예."

마을에 남은 인원은 40명.

총 4명의 십인장이 있었다.

"다들 말은 탈 줄 알지? 지금부터 돌아다니면서 주변 마을의 전령 역할을 하도록 이곳을 중심으로 모이도록 말이야."

같은 병사라고 할지라도 십인장 정도 되면 한가락 하는 실력자라고 할 수 있었다.

마수와 맞닥뜨려도 죽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을 터.

곧 4명의 십인장이 말을 타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정말 홀로 가도 괜찮겠느냐."

그런 가운데 다리우스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말에 올라탄 채 마을을 떠나려는 카를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리우스 본인은 자경단과 병사들의 제어를 위해 마을에 남아야 했다.

혹시라도 그사이 마수가 쳐들어온다면 지휘할 사람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괜찮습니다. 이것도 있으니."

카를은 자신의 옆구리에 매달린 천뢰검을 툭 쳤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다리우스의 미간에 생긴 골은 점차 깊어졌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려 봤자 들을 생각은 없겠지."

"이 주변만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안전이 우선이다. 여차할 경우 그것을 사용해라. 내가 구하러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비상 상황에 사용하는 신호탄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중이니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면 훤히 볼 수 있을 터.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워워."

하지만 마을을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멈추고는 안장에서 내리며 작게 속삭였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안전한 곳에 있거라."

푸르릉.

말은 알아들었다는 듯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작게 웃은 카를은 녀석의 입가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쉬아아악.

이런 숲은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직접 뛰는 것이 훨씬 빨랐다.

더욱이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은 초목이 울창한 노어 숲의 심처였으니까.

'마기가 느껴져.'

루덴 경이 라이프치히 형제를 찾으러 왔을 무렵부터 숲 안쪽에서부터 강렬한 마기의 기운이 스멀스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수 무리의 근원지인 줄 알았는데, 마기 사이에 섞여 있는 끈적이면서도 음습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흑마법사의 마기다.'

마나가 제각기 다른 것처럼 마기 역시 달랐다.

악마, 마족이 달랐고, 그들에게 영혼을 넘긴 대가로 힘을 얻은 마인의 것이 달랐고, 흑마법사와 마물들이 또 달랐다.

카를은 과거부터 그 모든 유형과 싸운 적이 있었기에 비교적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비롯된 마기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노어 숲에 숨어들었다?'

나뭇가지를 박차며 노어 숲의 안쪽으로 달려 나가던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라이프치히 같은 국경이나 지방 도시들은 외부인의 등장을 다소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스쳐 지나가는 이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지만, 낯선 얼굴이 곧잘 보이기 시작한다?

만일 의심할 점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녹스로 이야기가 흘러 들어왔을 것이다.

'특히 흑마법사같이 구리구리한 녀석들인 더더욱 말이야.'

그런 녀석들은 어딜 가나 티가 나기 마련이다.

흑마법사도 사람인 이상 먹을 식량과 생필품이 필요할 터.

하지만 이제껏 녹스 쪽에는 아무것도 들어온 정보가 없었다.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아마 십중팔구 저쪽에 그 원흉이 있지 않을까.

툭.

마기의 근원지 근처에서 멈춰 선 카를은 녹스의 가면을 쓰며 능숙하게 기척을 감췄다.

어둠과 완전히 동화되며 밤에 녹아들었고,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한 줄기 바람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악마, 마인, 이교도, 이제는 흑마법사인가.'

하긴, 앞쪽에 비하면 흑마법사가 더 세간에는 유명하긴 했다.

과거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성국을 비롯해 대륙에서는 흑마법사를 배척했는데.

지금은 저 대륙 끄트머리에 검은 마탑이라는 흑마법사들의 성지가 생길 만큼 세력을 부풀렸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공공연하게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앞으로 나아가던 카를은 곧 걸음을 멈춰 섰다.

어느 영역을 기점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침입자용 결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 손쉽지.'

다른 이들이라면 결계의 허점을 찾거나, 강행 돌파를 계획했을 터.

하지만 카를에게는 비음흑살공이 있었다.

중원에도 결계와 같이 침입자를 알려 주는 진법이나, 기관들이 여럿 존재했다.

중원 제일의 살수였던 카를은 아무리 험악한 기관진식이라 할지라도 들키지 않고 드나들 자신이 있었다.

웅웅.

기이한 파동이 카를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기관진식과 달리 결계는 마나의 이질적인 흐름과 움직임으로 색적하기 마련.

그러니 이질적인 흐름을 상쇄하는 것으로, 존재 자체를 감춰 버리는 수법이었다.

저벅.

안쪽으로 한 발자국 들어갔음에도 결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예 물리적으로 막아버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침입자를 경고는 결계는 파훼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존재가 감지된다면 흑마법사들이 설치한 함정과 저주들이 쏟아져 내리겠지만.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발걸음을 옮긴 카를은, 곧 공터에 모여 있던 인영들을 발견했다.

"아우슈. 데카. 베르...."

총 7명의 흑마법사들이 모여 피로 쓰인 마법진 위에서 무언가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나무 위쪽에서 마법진의 술식을 분석하던 카를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소환 술식으로 보이긴 하는데 파악하기는 어렵군.'

흑마법 쪽에는 조예가 없었다.

그쪽은 기감이 예민한 마법사라면 들킬 염려가 있기에 애초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과정도 지저분하기에 수하로도 들이지 않았고 말이다.

퍽!

그때, 돌연 주축을 이루던 흑마법사 한 명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주문의 실패인가, 아니면 무언가의 현상인가.

'후자 쪽이겠군.'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또 한 명의 머리가 터져 나갔고, 흥건한 피가 마법진을 뒤덮으며 땅을 적셨다.

퍽. 퍽.

그렇게 두 명의 흑마법사가 남게 되었을 때, 카를은 행동을 개시했다.

'뭘 소환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좋은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직접 그 사이에 끼어들어 의식을 망칠 속셈이었다.

쉬악.

거리낄 것 없이 가까이에 있던 흑마법사의 뒤를 점한 뒤 검으로 목을 그어 버렸다.

촤악!

저항할 틈 따위는 없었다.

숙련된 살수의 솜씨에 목을 베인 흑마법사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며 절명했다.

파아앗!

동시에 허공에 맴돌던 마기가 일렁였다.

카를이 즉시 땅을 박차자 그 위로 검은 덩어리들이 떨어지며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냈다.

뒤이어 홀로 남은 흑마법사가 머리에 쓴 후드를 내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침입자는 없었는데?"

"네놈의 결계가 형편없었나 보지."

"흠."

흑마법사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굳이 흑마법 계열이 아니어도 어느 마법사가 그렇듯 창백한 피부에 퀭한 두 눈을 지녔다.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흑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부족한 피는 네 것으로 충당하면 되겠군. 굳이 내 목숨을 바칠 필요도 없이 말이야."

"무엇을 소환할 생각이지?"

"그야, 직접 보면 알 것이다."

덥썩.

카를은 자신의 사지를 붙잡는 손길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돌연 허공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이 팔다리를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감사를 전하지. 난 아직 죽기 싫었거든."

흑마법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가락을 휘저었다.

170화 베아트리체의 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