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3성 (1)
"놀다가 다시 공부하려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네. 하루가 아니라 이틀이면 좋았을 텐데."
강의가 모두 끝났을 때, 막시밀리안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토해 냈다.
하루 일정의 외부 견학이 끝난 바이에른은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다음 강의 시간까지 레포트를 제출해야 하는 것만 빼면 평소와 같은 분위기였다.
다만, 그 가운데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는 생도가 한 명 있었다.
"레이시스, 강의 끝났어."
"...아, 흡."
자신의 팔뚝을 툭툭 치는 유리아의 손길에 레이시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발견 유적에서 반신 카일로스의 파편과 조우한 그녀는 치열한 싸움 끝에 아침이 다 되어서야 겨우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
카를은 하루 정도는 자신이 책임질 테니 쉬라고 했지만, 왕녀로서 결격 사유 없는 품위를 지켜야 하는 법.
재빠르게 씻고 단장을 마친 뒤 강의를 들으러 나왔다.
물론 몸을 빼앗긴 후유증과 고되었던 일정 때문에 계속해서 졸음이 쏟아졌다.
어떻게든 허벅지를 꼬집으며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텨 냈지만, 오늘 강의가 전부 끝날 무렵에는 살짝 방심한 것인지 결국 졸고 말았다.
"별일이 다 있네. 레이시스, 네가 강의 시간에 졸기도 하고."
"어제 좀 힘들었거든요."
"카를이 그렇게 고생시켰어?"
"카를은...!"
쿵.
카를이 언급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레이시스는 무릎을 부딪치고 말았다.
괜한 이목을 끌까 싶어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어깨를 들썩였다.
겨우 괜찮아졌을 때 슬쩍 옆쪽을 바라보자 친구들과 함께 앉아 있었던 카를은 이미 떠나고 없는 듯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유적을 좀 돌아보느라 시간을 많이 썼거든요."
"어디 갔는데? 위블렘 사원?"
"거기도 가긴 했어요."
레이시스는 잠시 주위를 살펴보며 유리아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은 새로운 유적을 발견했거든요."
"...진짜?"
"네. 도시 뒤쪽 산 중턱에 덩그러니 놓인 가고일 동상 쪽에서요."
"아, 뭔지 알 것 같아. 거기 아무것도 없지 않나?"
"가고일 동상 쪽이 출입구였어요. 안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더군요."
"...."
유리아는 살짝 입을 벌렸다.
그건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비밀 통로였다.
'역시.'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 그런 비밀 통로를 발견하는 건 불가능했겠지.
카를도 분명 히든 피스를 노리고 미발견 유적을 공략하러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안쪽에는 뭐가 있었어?"
"금화랑 보석 같은 거요. 그런데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일부밖에 챙기지 못했어요."
레이시스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관해서는 말해도 괜찮다고 이미 협의를 한 부분이었다.
바이에른이나 동아리 쪽에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긴 그렇지만, 유리아라면 어차피 카를과도 한배를 탄 입장이라 문제가 없다고 했다.
'공식적으로 언급되는 게 아니라면 문제가 없다고 했었죠.'
유적 쪽은 세간에 발표하지 않은 채 일단 카를이 거느리고 있는 이들로 조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 뒤에 유의미한 것이 발견된다면 학회에 보고할 것이고, 아니라면 그대로 묻어 둬야 하겠지.
아무래도 잊힌 반신의 재단이다 보니 여러모로 애매해지는 문제들이 있었다.
"부럽네. 한몫 단단히 챙겼을 것 아니야?"
"적지는 않겠죠. 망명 자금은 대충 채울 수 있을 듯해요."
"그건 다행이네."
유리아는 작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레이시스의 의중을 떠보고자 슬쩍 말을 이었다.
"혹시 아티팩트 같은 건 없었어? 미발견 고대 유적이니까 그런 것도 있을 법한데."
"아티팩트요?"
레이시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보석이나 재화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긴 했었다.
성채의 서재에서는 기원을 모르는 서적들도 잔뜩 있었고.
"그래도 아티팩트로 보이던 건 딱히 없네요. 카를도 따로 챙긴 건 없고."
"흠, 그런가?"
유리아는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발견하지 못했든가.
아니면, 레이시스 모르게 챙겼든가 둘 중 하나였다.
유리아는 당연히 후자 쪽을 염두에 두었다.
그 정도 유적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할 리 없을 테니까.
카를이라면 분명 무슨 아티팩트라도 가져왔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씨앗이면 대박인데.'
씨앗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유리아 자신은 지금껏 배운 모든 마법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만큼 치트에 가까운 히든 피스였으니까.
물론 극히 희박한 확률로 나타나는 만큼 카를이라도 그걸 손에 넣는 건 쉽지 않을 터.
"보상 받으면 한턱 쏘는 거다?"
"네, 카를도 불러서 같이 가요."
레이시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강의 전부 끝났죠? 카페나 가서 한숨 돌릴까요?"
"난 모임 있어. 레이시스, 넌 그냥 들어가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눈만 봐도 피곤해 보여."
"...네?"
레이시스는 두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유리아, 당신이 참여하는 모임도 있어요?"
"무슨 뜻으로 물은 거야?"
"아니, 그렇잖아요. 친구라고 해 봤자 저나 주위에 있는 몇몇밖에 없으면서. 괜히 허세 부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얌전히 가서 쉴 테니까."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하네."
유리아는 손가락을 들어 레이시스의 미간에 딱밤을 때려 주었다.
하지만 마법사인 그녀의 공격이 얼마나 아프겠나.
레이시스는 피식 웃으며 맞은 부위를 문질렀다.
"농담이에요."
"알아."
유리아도 작게 웃었다.
체면과 예의를 중요시하는 레이시스가 저리 허물없이 말해 올 정도로 자신을 친애한다는 것이었으니.
"다른 마탑 출신의 생도들이랑 회동이야. 대충 잡담하고, 교수들 험담 좀 하고 그런 모임."
"아하, 그런 거군요."
레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 출신의 마법사들은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았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따로 과제도 많았고, 실험, 실습 등등 여러모로 일반 생도보다 몇 배는 더 하드하게 굴려졌다.
"하여튼 난 가 볼게."
"네, 내일 봬요."
손을 흔들며 유리아를 떠나보낸 레이시스는 곧 미간을 찌푸리며 목을 두들겼다.
어제의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아 근육이 뭉친 것이었다.
"수련으로 풀고 싶은데."
땀을 한 번 쭉 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잠시간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던 레이시스는 슬쩍 손가락을 옮겨 카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 *
"오늘은 쉰다고?"
"네, 어제 쌓인 피로가 좀처럼 풀리질 않아서...."
"하긴, 아침에 돌아왔다고 했잖아?"
"대체 뭘 탐사하고 다닌 거야."
아침까지 탐사했다는 말에 게일이 헛웃음을 지어 왔다.
어깨를 으쓱여 준 카를은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스터디를 다음 시간으로 미뤘다.
오늘은 어제 유적에서 새로이 얻은 힘을 탐구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 말이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한 카를은 연무장을 하나 빌렸다.
도중 레이시스에게 연락이 왔지만, 적당히 대답하고는 곧바로 이쪽에 집중했다.
'정도와 마도, 그리고 신성.'
사실 마음 같아서는 아무 핑계나 대고 2, 3일 정도 자리를 비우고 싶었다.
녹스의 본부라면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기운을 발산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카데미 쪽에는 알게 모르게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마도사나 소드 마스터 급만 되어도 예민하니 말이지.'
어설프게 군다면 그들의 시야에 포착될지도 몰랐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방법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방법을 시도해 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사아아아─.
연무장 가운데 자리 잡은 카를은 두 눈을 감은 채 호흡을 내쉬었다.
아직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짙게 남아 있었다.
반신(半神) 카일로스와의 싸움은 그만큼 고된 것이었으니.
'정면에서 부딪쳤다면 내가 이길 확률은 2할 정도려나.'
거기에 레이시스의 몸까지 빼앗긴 상황이었다.
승산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녀석은 거기에서 더 욕심을 부렸고, 자신의 몸까지 빼앗으려 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심상의 세계로 끌어올 수 있었고.
"후우."
재차 숨을 토해 낸 카를은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명천신공, 천마신공, 그리고 아직은 이질적인 새로운 기운까지.
카일로스에게서 빼앗은 신성의 잔재는 너무나도 선명한 존재감을 흩뿌리며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카일로스의 자아는 이미 완벽하게 흡수하여 소멸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끄럽게 떠들며 호시탐탐 이쪽의 몸을 빼앗으려 노려 오지 않았을까.
'이걸 어떻게 키우느냐가 관건이군.'
정도의 기운은 명천신공이.
마도의 기운은 천마신공이.
일극은 혼원일극신공을 통해 이루어 내면 되었다.
하지만 신성력?
애초에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 것인지 정보가 없었다.
'신성력은 신앙을 통해 신이 내려 주는 힘이다. 하지만 반신 카일로스는 완전한 신이 아니야. 본디 반쪽짜리 신일뿐더러 그 본체마저도 조각조각 나뉘어 봉인당해 있다.'
그런 와중 단순히 신앙을 보인다고 해서 힘을 내려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어느 신의 성직자가 될 마음도 없었지만.
'신성에 관해 더 조사가 필요해.'
심신을 가라앉힌 카를은 의식의 더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누군가는 무의식, 누군가는 심상이라 부르는 그러한 세계까지.
최초에는 텅 빈 공간이었다.
하지만 카를이 손을 뻗자 하늘과 땅이 생겨났고, 무수한 초목이 발아래를 뒤덮었다.
카를은 그 위에 내려서며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원에서는 생의 말미에서나 가능했던 경지거늘."
심상의 세계.
인간은 저마다 각자의 심상을 그 안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내부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존재는 한정되어 있었다.
일정 경지 이상의 고수만이 그곳에 출입할 자격을 허락받으니 말이다.
중원 시절 카를은 천하제일살수를 달성하기 직전에서야 겨우 그 자격을 부여받았다.
자의로 심상에 공간을 구축했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공간.
바꿔 말하자면, 상상하는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공간이라는 소리였다.
"그 덕에 경지가 비약적으로 올랐지."
현재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인해 몇 번이고 심상의 세계와 연결되어 그 루트를 뚫었다.
본래 카를의 경지로 이곳까지 도달하려면 적어도 1, 2년은 더 필요로 했을 터.
하지만 악마와의 만남, 그리고 카일로스 덕분에 훨씬 더 일찍 심상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늘은, 없나."
카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둘러보았다.
카일로스가 이 안으로 침입했을 때 느껴졌던 천마의 기척을 오늘은 느낄 수 없었다.
주변을 얼려버리던 빙백목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고.
아쉽지만, 언젠가 또 조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인 카를은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성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알아가는 방법은 역시 이것밖에 없지."
다른 기운은 봉인한 채 오로지 신성만으로 싸운다.
최대한 실전과 가까운 환경을 조성한다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모든 감각이 극대화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을 몰아칠 상대는, 역시 한 명밖에 없었다.
저벅.
저 앞쪽에 있던 나무의 뒤에서 검은 가면을 쓴 이가 기척을 내며 걸어 나왔다.
"...오싹해지는군."
카를은 살짝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불가살(不可殺) 무악.
과거 온전했던 경지의 자신이 그곳에 서서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141화 3성 (2)
불가살(不可殺) 무악.
과거의 자신을 이리 여유롭게 찬찬히 뜯어볼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눈동자, 그리고 피부를 저미는 듯한 살기와는 별개로 그 얼굴을 비롯한 외형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잘생기거나 반대로 너무 못생긴다면 인간으로서 특성이나 개성이 잡히기 마련.
조용히 주위에 녹아들어야 하는 살수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수려한 외모라 불리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만, 저 때의 외모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스릉.
카를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손에 쥔 것은 신검(神劍) 천뢰.
과거보다 더 나은 두 가지 중 하나는 병장기의 수준일 것이리라.
불가살이었던 적에는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병장기만을 손에 쥐었다.
썩은 나뭇가지가 되었던 적도 있었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혹은 올곧게 편 손가락인 적도 있었다.
대상을 죽일 위력만 낼 수 있다면 딱히 무엇도 가리지 않았지.
신검과 비슷한 무기를 탈취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 빼앗아 온 적은 있었지만, 그 주인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불어 익힌 무공까지.'
불가살 무악은 오로지 비음흑살공만을 단련했다.
살수로서는 손에 꼽는 일류 무공이었기에 다른 걸 익힐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혼원일극신공의 비급을 탈취하고 기억해 둔 것은 자신을 배신한 살막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쓸데없는."
카를은 고개를 흔들어 과거의 잔재를 털어 냈다.
중요한 건 불가살 무악의 존재지 그의 역사까지 가져올 필요는 없었다.
사아아아.
카를은 얼마 남지 않은 신성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쪽은 딱히 구결이나 심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법사가 마나를 다루는 것처럼 단순한 루트를 이용해 활성화했다.
'다행히 반발은 하지 않는군.'
카일로스의 힘은 새하얗고,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신성력이라 함은 당연히 순백의 색이 연상되었지만, 카를에게 들어온 신성 역시 푸르스름한 빛깔에 가까웠다.
"돌아가면 갤런에게 조언을 구해 봐야겠군."
전직 성직자 출신으로 녹스에서 유일하게 종교와 신성에 조예가 있는 존재였다.
그라면 어떻게 신성력을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고 다룰 수 있는지 알고 있지 않을까.
일단은 스스로 적응하는 것부터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파아아앗.
새파란 빛무리가 카를의 전신으로 퍼지며 은은한 광채를 뿜어냈다.
허공에 만들어 낸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을 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단으로 몰리기에 딱 좋군."
마치 스스로 신이 된 것 같은 고고한 모양새.
너무나도 눈에 띄는 그 모습에 카를은 곤란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도 기존의 기운에 반발하거나 이질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비록 적은 기운일지라도 자신의 몸에 완벽하게 안착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었다.
시작은 맛보기로 불가살의 전력을 온몸으로 겪어 볼 생각이었다.
일전 미발견 유적의 시련에서 싸운 건 자신과 비슷한 실력대의 불가살이 나왔다.
시련 자체에서 난이도를 맞춰 준 것으로 카를에게서는 그것이 상당한 불만으로 나왔다.
'실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상대와 싸워야 하거늘.'
심지어 가상의 공간으로 현실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환경이지 않은가.
물론 그 과정에서 정신적 고통과 피로를 입을 수 있지만, 그런 것에 나약한 소리를 내뱉는 시기는 이미 중원에서 극복했다.
저벅.
신성력을 두르고 천뢰를 든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면서 상대를 바라보자....
푹.
예측하지 못한 시점에 시퍼런 칼날이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후미에서 기습을 당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허공에 흩날리는 핏방울을 본 한 박자 이후의 일.
카를은 울컥 피를 토해 내면서도 자신의 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쉬악!
허공에 새파란 궤적이 남으며 날카로운 공격이 쇄도했지만, 불가살은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커헉."
카를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급적 실전과 같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차.
그 가운데 심장을 꿰뚫리는 느낌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절그럭.
심상의 세계인지라 자신의 상처 역시 마음만 먹는다면 말끔하게 수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를은 그 마음을 억눌렀고, 체내를 돌아다니는 신성만을 움직여 심장을 치료해 나갔다.
사아아아─.
신성력은 신성력이라는 걸까.
솟구치던 핏줄기가 점차 멎어 들고 가쁜 호흡이 조금씩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미약한 기운으로는 반으로 쪼개진 심장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카를은 창백한 얼굴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부지런히 움직이거라. 주인이 죽는 꼴을 보기 싫으...."
서걱.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재차 보이지 않는 공격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이미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카를은 사선으로 천뢰검을 들며 사각에서의 기습을 막아 냈다.
아니, 막아 냈다고 생각했다.
"...!!"
옆구리가 갈라지며 내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카를은 재차 자리에 주저앉은 채 자상을 틀어막았고, 재차 피를 쏟아 내며 반쯤 죽어 가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수위를 더 낮춰야겠군.'
한 번 당할 때마다 조금씩 불가살의 경지를 낮춰 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것에 적응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수월하게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는 순간이 생길 터.
이제 그때부터는 다시 경지를 올려 가면 되는 일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수련법이야."
입안에 고인 피를 모두 토해 낸 카를은 쓴웃음을 지었다.
불가살이었을 시절에는 자신의 상대로 검왕(劍王)을 불러왔었다.
남궁세가의 가주로 벽력을 흩뿌리는 그 절대고수는 자신이 마주했던 이 중 가장 강했던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카를은 과거의 자신을 선택했다.
힘 대 힘의 싸움으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건 과거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었기에 더 의미가 있는 수련 방법이었다.
서걱.
촤악!
푹.
그 뒤로도 카를의 몸에는 수많은 상처가 새겨졌다.
어느 것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가 없었으며, 바닥에 흘린 피만 하더라도 이미 치사량을 넘어갔다.
웅웅웅.
신성의 힘은 그런 주인의 몸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상처를 치료했다.
베인 부위를 봉합했고 떨어져 나간 살점으로부터 비롯된 출혈을 막았으며 쇠해 가는 기력을 보충해 주었다.
'그런가.'
일련의 과정 속에서 카를은 신성의 원리를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신성은 완전성을 지향한다.'
새하얀 빛이 쏟아지면 상처가 회복되고 부상이 낫는다.
단순히 신성력의 힘이 치료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성은 그 자체로 완전하려는 특성을 지녔다.
그렇기에 불완전한 무언가에 닿는다면 그걸 완전한 상태로 수복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다만, 회복할 수 있는 범위는 시간의 경과나 상처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터.
카를은 회복 불능의 판단을 받은 부상자들의 모습을 여럿 보아 왔다.
오래된 전쟁에서 입은 부상이나, 아주 어릴 적에 입은 상처들은 치료할 수 없었다.
그건 그 자체로 완전한 형태를 잡았기에 고정된 것이 아닐까.
'신성력의 힘을 사용하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치료할 수 있는 범위도 달라지겠지.'
말단 성직자나 교황의 힘이 똑같다면 그들이 칭송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위 성직자로 넘어갈수록 치료할 수 있는 범위가 더 커지지 않을까.
"내 신성은 반신으로부터 직접 빼앗아 흡수한 것인데, 어디까지 가능할지 궁금하군."
여타 성직자들처럼 신앙을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라 신격의 힘을 찬탈해 빼앗은 것이었다.
그런 만큼 조금 더 원론적이고 근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량의 기운만으로도 순식간에 자잘한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후우."
온몸에 쌓인 격통에 카를은 깊은 한숨을 토해 내었다.
적잖은 부담을 동반하는 수련법인지라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래도 신성이 어떤 힘인지 조금은 깨닫게 되었기에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스륵.
카를은 의념을 이용해 자신의 모든 부상과 부담을 지워 냈다.
재차 말끔해진 모습으로 되돌아옴과 동시에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던 불가살도 움직임을 멈춘 채 그 앞에 내려섰다.
"이렇게까지 당해 본 적은 오랜만이군."
반신 카일로스와 싸울 때도 그리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거의 대등하게 싸웠고 심상의 세계에 진입한 뒤에는 천마와 빙백목의 개입으로 무탈하게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아르테니아에 와서 이렇게까지 걸레짝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을까.
카를의 검과 몸에서 치솟던 신성이 사그라들며 다시 원래 형태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 직후 다시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건 선명한 잿빛의 기운.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한 카를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세를 풍기며 불가살을 바라보았다.
"전력으로 부딪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말이야."
혼원일극신공의 전력이라면 불가살의 일격도 막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은 자신했으나.
푹.
이전과 다름없이 무탈하게 자신의 가슴을 꿰뚫으며 튀어나오는 한 자루의 검에 카를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괴물같이 강했군."
언제쯤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카를 본인도 그것이 궁금해졌다.
* * *
외부 견학은 주중에 진행되었기에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카를은 곧바로 녹스에 복귀했고 휴식 중이던 갤런 포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신성을?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유출의 우려가 있어 보고에는 적지 않았다. 그보다 전직 성직자였던 네 시선으로는 어떻지?"
"으음."
갤런 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미발견 고대 유적에 반신 카일로스의 신격이 남아 있던 것도 놀라울지언대, 그 힘의 일부를 마스터가 흡수했다고?
'기가 차는군.'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퍼포먼스였다.
실제로 카를이 새파란 신성의 힘을 뽑아내자 갤런 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 일단 사과하지."
"...무엇을?"
갑작스러운 갤런의 말에 카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언을 구한 건 자신 쪽인데 어째서 그가 사과를 하는가.
"사실 난 마스터가 인간으로 폴리모프해서 유희 생활을 즐기는 드래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신성을 사용하는 걸 보니 아니로군."
"...드래곤?"
카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법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음을 깨달았다.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이상하지는 않았겠군.'
카를도 마찬가지로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고, 아직 너희들에게도 여러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너희와 같은 인간이다."
"그래, 지금 확실히 알았어. 드래곤은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니까."
"그런 건가?"
"당연히.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가 마나로 똘똘 뭉친 녀석들이다. 애초에 신성을 받아들이지 못할뿐더러 억지로 사용하려 하면 엄청난 반작용을 겪겠지."
"흐음."
"그건 분명 신성력이 맞아. 반신 카일로스의 것인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더없이 순수한 신성의 힘이군. ...심지어 내 것보다 더."
갤런은 손을 들어 올렸다.
순백의 빛이 그 위에 깃들며 고결한 느낌을 주었다.
카를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신성이었다.
"그렇다면...."
"신성력의 수련 방법은 있다. 물론 마스터가 했던 것처럼 제 살과 정신을 깎아 먹는 법은 아니야. 다들 미쳤다고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수련하는지 알아?"
무식한 방법.
갤런의 따끔한 질책에 카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은 그저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거늘.
'역시 범인(凡人)은 이해하지 못하는가.'
카를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따름이었다.
142화 3성 (3)
갤런 포는 녹스에 들어온 뒤로 평범한 일상을 포기했다.
애초에 녹스라는 조직 자체가 음지에서 비일상을 향유하는 이들의 집합체가 아닌가.
당장 마스터인 카를 본인의 정제부터가 심상치 않았는데 말이다.
조직이 더 커지면 어딘가에 감도는 은밀한 음모를 파헤치거나, 세계에 잠들어 있는 비밀을 밝혀내는 일도 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실제로 올해 들어서는 그런 일들에 엮이는 경우가 많아졌지.'
솔직히 적성에 잘 맞긴 했다.
갤런 자체가 역사나 미스테리, 그리고 음모 같은 걸 파헤치는 데 전문이었으니까.
성직자가 된 이유도 적성 때문에 있었지만, 그와 관련해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성력과 상성이 잘 맞고 무투에 재능이 있던 것은 덤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책임과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신성의 역사나 유적의 탐사를 할 수 있는 녹스는 갤런에게 있어서 최고의 직장이었다.
심지어 농땡이가 아니라 마스터의 명령을 받아 특파되는 것이었으니.
'솔직히 아직 마스터가 무슨 목적으로 그것들을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달리 흥미 본위로 역사를 탐방하는 건 아닐 것이다.
단순히 취미라기에는 녹스의 자원 상당 부분을 그쪽에 투자할 정도였으니까.
애초에 비밀이 많은 남자니 무언가 목적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갤런은 그저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즐기기로 했다.
설령 녹스의 '4'번이라는 넘버로 죽는다고 할지라도.
하지만 마스터가 갑작스럽게 가져온 소식은 그로서도 경악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신격을 흡수했다니.'
비록 반신이라 할지라도 감히 인간과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마스터가 비범한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반신의 힘까지 흡수할 줄은.
그게 인간의 몸으로 가당키나 한 것인가.
갤런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걸 포기했다.
실제로 신성력까지 보여 주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이 전면에서 부정당했지만, 오히려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일단 드래곤은 아니군.'
갤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포함한 녹스의 간부는 갤런을 유희 중인 드래곤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갤런도 그쪽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고 있었고.
하지만 신성력을 사용하는 걸 보니 드래곤은 아니었다.
'그낭 태생 자체가 우리와는 다른 존재다.'
흔히 말하는 영웅 역시 제각기 특이한 설화를 지녔다.
마스터 역시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대충 이해가 되었다.
"아쉽군. 마스터가 양지의 사람이었다면 대륙 역사에 길이 남는 명성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딱히 음지에 치우쳐 있지만은 않은데 말이지."
"하긴, 카를로스라는 이름은 건재하니까."
제국 귀족의 핏줄임과 동시에 바이에른에서도 착실하게 명성을 쌓고 있었다.
이론 수석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고대 유적과 역사 쪽에서도 제법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운 덕에 학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으니.
그쪽에서는 새로이 나타난 신성이라 취급받는 것 같았다.
'대체 속에 무엇이 있기에 인간의 몸으로 이 정도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는지.'
까도 까도 속이 나오는 양파와도 다름이 없어 감탄만 흘릴 뿐이었다.
"하여튼, 본 주제로 돌아가서."
"그래. 신성력을 수련하는 방법에 관해서다."
갤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인내와 고난을 겪는 것이다."
"...내가 썼던 방법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
캬를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상의 공간을 통하면 몸의 상처 없이 그런 수련법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제 살 깎아 먹는 그런 무식한 방법이 아니라, 정신적인 수양을 뜻하는 거다. 마스터는 가끔 너무 투박해."
갤런은 드물게 진심을 담아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할지라도 아닌 건 아닌 법이니.
더욱이 이건 마스터의 안위와 직결된 문제였다.
인내와 고난이라고 몸을 혹독하게 몰아넣으면 분명 후유증이 생겼다.
설령 그 심상의 공간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라도.
'그런 방식의 수련은 결국 본인을 피폐하게 만들어.'
스스로 겪어 보았던 갤런이었기에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마스터는 녹스의 중심.
그러니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 세력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퀸이 괜히 마스터를 애지중지 싸고도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정신 쪽이 중요해. 면벽 수련을 하고, 성경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이 기본이 되는 것이지. 육체적인 정신적으로 완성되고 난 뒤에 하는 것이야. 그게 아니라면 그냥 제 몸에 하는 고문에 불과해."
"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갤런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럼 반신 카일로스에 관해 공부라도 해야 하는 건가."
"아니지. 마스터가 흡수한 이상 그건 마스터의 힘이다."
"...나보고 성경을 쓰라고?"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흠."
갤런은 턱을 긁적였다.
"신성 모독에 가까운 말이지만, 성경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아니다. 신에 관한 일화나, 선교의 설파, 교리가 섞인 이야기, 깨달음을 주려는 내용이지. 굳이 따지자면 자서전이라 할 수 있겠군."
"...흠."
카를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설령 작성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남에게는 보여 줄 수 없으리라.
불가살(不可殺) 무악의 시절부터 작성해야 할 터이니 말이다.
똑똑.
그때 누군가 방문에 노크했다.
안쪽으로 고개를 슬쩍 들이 밀은 퀸이 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다과를 준비했는데, 괜찮으신가요?"
"물론."
카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퀸은 종종걸음으로 안에 들어왔다.
마스터가 그리 좋은 것인가.
해맑게 웃던 퀸의 모습을 보던 갤런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어렵다면, 신도를 만드는 것도 괜찮겠어."
"신도?"
"...?"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카를은 흥미 어린 시선으로 갤런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재촉하는 그 시선에 갤런은 퀸을 향해 눈짓했다.
그녀에게 말해도 되겠냐는 뜻에 카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신성을 흡수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소수일수록 좋았다.
하지만 퀸이라면 알아도 무방했기에 큰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곧 갤런은 카를을 대신해 이번 외부 견학의 유적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퀸은 놀란 표정으로 카를을 돌아보았다.
"신격을 흡수하셨다고요?"
"정확히는 파편, 그 일부다."
"하지만 신격이지. 아마 격으로만 따지자면 어지간한 추기경이나 팔라딘보다 높을 걸?"
"교황급은?"
"나도 거기까지는 다다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교황 급에 올라가면 신격의 일부를 끌어와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이 얼마나 그를 총애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중원과는 달리 신이 실존하는 세계였으니 말이다.
인간을 살피며 가끔 직접 힘을 내려 주었고, 그것이 신성력이라 불렸다.
중원에서는 절대로 바랄 수 없는 기적.
애초에 살수였던 자신 따위에게는 그런 힘을 내려 주지 않았을 테지만.
'살수의 신이라면 모를까.'
만일 살수의 신이 있다면 중원제일 살수였던 자신은 교황이라고 쳐도 되지 않을까.
카를이 실없는 생각을 하던 중 갤런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둘에게 말했다.
"미약하나마 신격이 있다는 건 이론적으로 신성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돼. 실제로 마스터는 신성을 사용할 수 있고. 그러니 신의 흉내를 내는 것도 조금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신도를 만들어라, 그 소리군."
"그래. 첫 번째 신도로 퀸만큼 걸맞은 인재는 없겠지. 신도의 첫 번째 조건은 무조건적인 신뢰와 믿음, 즉, 대상을 믿는 신앙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게 가장 큰 조건이자 걸림돌이야. 사람은 누군가를 믿는 데 모든 것을 내려놓는 건 힘드니까."
갤런은 가감 없이 말했다.
자신도 온전한 신앙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이득에 따라, 필요에 따라 섬긴다는 마음이 섞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보아온 퀸은 맹목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카를을 위했으며 집착했다.
사랑도 믿음의 한 방식이니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까?
갤런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신도가 되는 의식도 필요하겠지. 재물을 마치거나, 시련을 통과하거나, 혹은 대리인과 교접을 통해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거나, 어찌 되었든 신이 내린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면...."
"할래요."
잠자코 갤런의 이야기를 듣던 퀸의 두 눈이 무섭게 뜨였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카를도 움찔할 정도였으니.
아차한 갤런은 애매하게 웃으며 자신의 실언을 정정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쪽은 극소수였어. 정상적인 종교도 아니었고."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잖아요?"
"...뭐, 가장 쉬운 건 접촉하는 것이긴 해. 영성을 직접 내리는 것으로 신과 신도의 길이 개통되고 힘이 부여되거든."
갤런은 자신의 정시 부근과 하늘을 가리켰다.
그도 그렇게 신과 연결되며 신성력을 부여받았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카를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갤런에게 물었다.
기대감 섞인 퀸의 시선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으니.
중의적인 의미가 섞인 물임에 갤런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퀸과 마스터의 영혼을 연결한다는 이미지로 기운을 엮어 봐. 이건 나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추상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군."
"그러면 내 신성을 키울 수 있는 건가?"
"이론적으로는. 신의 힘은 결국 신도의 숫자에서 나온다. 각 종교에서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하며 신도의 숫자를 늘리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 신의 힘을 내려 주는 만큼 신앙이 돈독해지고, 그것이 곧 신의 격이 되었으니까."
자신이 믿는 신은 신도와 격에 그리 욕심이 없는 신이었지만 말이다.
현재 대륙에 자신 말고도 신도가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흠."
갤런의 이야기를 정리한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퀸에게 시선을 주자 그녀는 카를 앞에 앉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카를은 그 위로 손을 뻗었고 곧 새파란 신성이 치솟으며 퀸의 머리 위에 닿았다.
웅웅웅.
새파란 신성이 방안을 밝혔다.
잠시 뒤에 퀸은 두 눈을 감은 채 무언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따뜻해요."
"그건 그냥 마스터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도다."
"마스터랑 연결되는 느낌이에요. 마스터께서 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요."
"흠."
갤런은 둘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퀸의 말을 듣고 설마, 하는 기대감을 가졌으니 영혼의 형태는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퀸, 그건 그냥 네 착각인 듯한데. 마스터와 네 영혼은 여전히 별개의 것이다."
"...이것저것 토 좀 달지 말아요. 갤런, 당신이 뭘 안다고 그렇게 확정 지어요? 마스터와 제가 연결되었을 수도 있잖아요."
"...나, 그래도 성직자였는데."
퉁명스러운 열렬한 추종자의 비난에 갤런은 두 손을 들며 쓴웃음을 지었을 따름이었다.
143화 3성 (4)
카를은 주말 동안 녹스에 머물며 갤런 포의 조언에 따라 신성을 수련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신체를 접촉하는 것으로 신도를 영입하거나, 명상이나, 성경, 혹은 기도문의 공부, 그리고 갤런의 종교에서 내려오는 자체적인 수련법 등등.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단전 구석에 똬리를 튼 신성이 반응하는 일은 없었다.
결국 헛되이 시간을 날리고 돌아온 카를은 다시 바이에른에서의 일상을 시작했다.
'조언을 구할 만한 이라면....'
성직자는 안 된다.
혹여나 자신의 몸에 깃든 신성을 눈치챌 수 있으니 경험이 아니라 지식 쪽으로서의 조언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간 주변을 물색하던 카를은 제법 적당한 대상을 찾을 수 있었다.
신성과 관련된 쪽은 아니지만, 반신 카일로스에 관해 알고 있을 법한 사람을.
"반신(半神) 카일로스?"
제국의 역사 I 강의와 함께 카를이 속한 고대 유적 탐사 동아리의 고문인 레블릭 교수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카를을 반기면서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세간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름일 텐데...."
"동아리 선배들이 남긴 기록에서 우연하게 찾았습니다."
"아하, 그것이 남아 있었지요."
레블릭 교수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존재를 두고 아직 학계에서는 여러 가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건 알고 있지요?"
"네. 실존과 거짓의 대립이 가장 큰 걸로 압니다."
"가장 크다고 해도 미약해요. 애초에 영웅들이 대적했다는 적은 마계에서 중간계를 침공한 마왕이었다는 쪽이 정설이니까요. 반신의 존재는 그리 임팩트가 없죠. 그래서 소수만 파고들은 이야기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레블릭 교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아무래도 대다수의 의견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내려온 영웅들의 위세를 생각하면 대륙의 위기가 닥쳐왔다는 쪽이 더 개연성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신의 존재는 여러모로 애매하니 말입니다."
"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반신 카일로스의 존재를 실제로 보고 겪어봤지만, 모르는 사람은 이것이 현실적인 반응일 것이다.
애초에 카를 역시 동아리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존재일 터이니.
"저도 그렇게 많이 아는 건 아닙니다. 곁가지로 공부한 부분이라 남들이 아는 정도로만 인지하고 있으니."
"얼마 전에 한 문헌에서 토호슈 지방과 반신 카일로스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찾았습니다. 혹시 이처럼 카일로스와 연관점이 있는 지방을 찾을 수 있을까요?"
카를은 그 부분에 희망을 걸었다.
반신 카일로스의 신격은 영웅들에 의해 갈가리 찢긴 채 조각조각 나뉘어 대륙 곳곳에 봉인당했다.
그걸 하나하나 흡수한다면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반신격에 버금가는 신성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쉽지는 않겠지.'
첫 신격을 흡수하는 데도 꽤 고생을 겪었다.
그때마다 천마나 빙백목이 나서서 카일로스의 신격을 무찔러 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마 이제부터는 자신이 직접 카일로스와 싸워 쓰러뜨린 뒤 그 힘을 흡수해야 할 테지.
"흠."
카를의 질문에 레블릭 교수는 서류 더미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이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듯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관련 자료를 어디에서 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찾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급한 일은 아니니 천천히 해 주셔도 됩니다."
"아니요, 카를 군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들어주어야죠. 요즘 카를 군 덕분에 제 어깨가 많이 올라갔답니다."
레블릭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카를의 활약으로 인해 학회에서 자신의 위세가 많이 올라갔다.
우수한 제자의 공적은 스승의 명성이 되니 말이다.
다른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자리할 때도 꽤 자랑하며 써먹기도 했으니 이 정도는 기꺼이 봉사해 줄 수 있었다.
"며칠 뒤에 제가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보다, 카를."
"네."
"이 이후의 진로는 결정했나요?"
"으음."
카를은 입을 닫으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레블릭 교수에게서는 이미 자신의 조교로 바이에른 대학원에 등록하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아직 다른 교수들은 간을 보고 있는 걸 생각하면 생도 1학년에게 그러한 제안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크게 메리트가 없어.'
카를이 유적 탐사 동아리를 선택한 건 바이에른 내부에서도 영웅의 흔적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졸업 이후에는 굳이 이쪽에 얽매일 필요 없이 그간 얻은 정보를 토대로 녹스를 움직이면 되었다.
"그럼, 감사합니다."
반신 카일로스의 이야기 이후.
한바탕 대학원과 향후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카를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
"아, 나왔네."
문밖에는 점심 식사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유리아와 레이시스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요?"
"...대학원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엑."
유리아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대학원에 갈 것 아니지?"
"고민 중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해 두지 않았으니."
"아니야, 대학원은 진짜 아니야."
유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배고프다. 일단 먹으러 가자. 너 기다리느라 지쳤어."
"가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좋아!"
산다고 해봤자 교내 식당이었지만, 유리아는 기분 좋게 제일 비싼 메뉴를 골랐다.
어차피 이번 유적 탐사로 인해 한몫 두둑이 챙겼다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얻어먹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부럽네. 나도 보석이나 재화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리아 양도 뭔갈 찾았습니까?"
"나?"
식사 중 유리아는 히죽 웃으며 품에 손을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레이시스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뭔가를 발견했어요? 저한테는 그런 소리 없었잖아요."
"놀래켜 주려 했지. 자, 이거야."
유리아는 테이블 위해 작은 목함을 꺼내 놓았다.
달칵.
뚜껑을 열자 안쪽에 담겨 있는 거무튀튀한 열쇠 한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열쇠?"
"레프리의 열쇠라고 하는 고대 아티팩트야. 사용자의 마력에 따라 무엇이든 열 수 있지. 잠긴 문이든, 봉인된 결계든, 심지어 추상적인 무언가라도."
"...오."
"호오."
레프리의 열쇠.
유리아의 설명에 카를은 흥미를 보였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용 가치가 엄청나게 높은 아티팩트였다.
잠입 임무나 마법의 파훼 쪽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을 터.
"...."
유리아는 그들에게 레프리의 열쇠를 보여 주면서도 카를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플레이어였다면 레프리의 열쇠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쪽 유적을 털면 가장 보편적으로 나오곤 하는 유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신기해 보이는 표정인 탓에 그녀로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모르는 건가?'
연기를 잘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모르는 것인지.
'혹시 여기까지 진도를 나가지 않은 건가?'
유리아는 아차 했다.
플레이어라고 해서 모두 자신처럼 이 게임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하드 플레이어만 있진 않을 것이다.
플레이하던 도중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면 모를 수도 있을 터.
"혹시 파실 의향 있으십니까?"
"나중에. 당분간은 좀 쓸 때가 있거든. 대여 형식으로라면 생각해 볼게."
"알겠습니다. 추후 연락드리죠."
"좋아."
유리아는 카를의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쓰는지는 묻지 않았다.
레프리의 열쇠를 사용할 곳은 뻔했으니까.
'적당히 용돈벌이만 해도 만족이니까.'
설마 먹고 나르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바이에른 아카데미라는 무대에 함께 묶여 있는 처지니까.
식사 후 카를은 남은 시간 수련을 하고자 했다.
레이시스는 당연히 그 옆에 따라붙었고, 유리아는 함께 하지 않겠냐는 카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난 남은 과제가 있어. 그리고 땀 흘리기 싫거든?"
"알겠습니다."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더불어 레이시스를 흘깃흘깃 바라보는 걸 보니 묘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었기에 레이시스와 함께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캉! 캉!
식후인지라 가벼운 대련으로 수련을 대신하기로 했다.
레이시스는 제법 익숙해진 창궁무애검법의 초식을 펼치며 압박했고, 카를은 단조로운 검술로 그녀의 공격을 파훼했다.
처음에는 적당히 몸을 풀기 위한 대련이었지만, 검을 휘두르다보니 어느새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레이시스는 한껏 진지해진 얼굴로 검을 찔렀고, 카를도 그녀의 기세에 맞춰 제법 무거운 검을 휘둘러 주었다.
캉!
이쯤 되었다 싶을 때.
카를은 강하게 힘을 주어 레이시스의 검을 끊어냈다.
한창 무아지경의 경지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레이시스는 짤막한 탄식과 함께 검을 멈췄다.
"...죄송해요. 너무 과열됐네요. 가벼운 몸풀기였는데."
"그만큼 창궁무애검법이 레이시스와 잘 맞는다는 겁니다. 실력이 계속 성장하는 걸 보니 보기 좋군요."
"그런가요?"
레이시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문득,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중 지난 주말 갤런이 했던 이야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레이시스."
"네."
"저를 믿습니까?"
"...갑자기요?"
레이시스는 뜬금없는 카를의 질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뭐. 믿냐, 안 믿냐를 따지자면 믿는 편이죠?"
그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카를 덕분에 점수를 얻은 적도 많았고, 새로운 검술을 배우게 되었으며, 많은 돈까지 벌게 되었다.
레이시스로서는 줄곧 자신에게 도움만 된 카를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신앙에 가까운 맹목적인 믿음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퀸과는 다른 성질의 믿음일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은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퀸과 달리 레이시스의 몸에는 카일로스가 한 번 거쳐 지나간 적이 있었으니까.
"레이시스 잠시."
"네?"
"두 눈을 감아 보시겠습니까?"
"...!"
카를의 말에 레이시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뭐, 뭔가요? 갑자기 왜?"
"절 믿어 주신다면 따라 주십시오."
"으음...."
레이시스는 잠시간 주춤거리면서도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자국 거리 앞까지 다가온 카를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살짝 떨리는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
카를은 얕게 숨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단전에 머무른 신성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툭.
그러고는 손을 뻗어 땀에 젖은 레이시스의 머리 위를 덮었다.
정말 크게 놀란 듯 몸을 떠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사정은 나중에 설명하면 되는 일.
카를은 갤런의 말처럼 서로의 영혼이 이어지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음."
하지만 역시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군.'
갤런도 주류 종교에서 벗어난 사이비였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며 짤막한 숨을 토해 냈을 찰나.
파아아앗!
카를의 눈앞이 순식간에 새파란 빛으로 뒤덮였다.
144화 3성 (5)
-레이시스, 넌 특별한 존재다. 넌 알포람 왕실의 부흥을 위해....
-공주, 당신을 사모하오.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손에 피를 묻힐 수 있소.
-까불지 말지어다. 아무런 힘도 없는 주제에 고작 핏줄 하나만으로 왕녀 행세를 하느냐? 너는 그저 알포람의 공주로서 왕국의 미래를 위해 그 몸을 바치면 되는 것이다.
-...아가씨, 기억하셔야 합니다. 알포람 왕실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가씨 본인 말고는 없습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정체 모를 목소리들에 카를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흔들어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에 힘을 주고 멍한 정신을 각성시켰다.
동시에 방금 들었던 목소리들이 내뱉은 말을 복기했다.
'이건....'
레이시스를 향해 내뱉어진 말들.
어째서 그것들이 자신의 귓가로 들려오고 있던 것일까.
카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세계.
곧 두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이 기대한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진짜로 될 줄은 몰랐거늘."
자신을 둘러싼 이 공간은 분명 현실이 아니었다.
레이시스의 머리에 손을 올린 것으로 무언가 변화가 발생한 것이 분명할 터.
신격을 흡수했다고 해서 진짜 신이 된 건 아닐 것이다.
흡수한 카일로스의 신격은 일부일 뿐이고, 그것으로 신을 자처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겠지.
그래도 갤런의 말에 따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퀸에게는 실패했지만, 레이시스면 다르지 않을까.
자신과 엮인 유대와 신뢰는 아무래도 퀸 쪽이 더 깊었다.
그럼에도 레이시스에 기대를 한 건....
"역시 카일로스의 영향이로군."
자신과 레이시스 모두 그 몸과 정신에 카일로스가 드나들었다.
추측하건대 서로 연결이 되려면 신성을 강제로 주입해야 하는 건가?
"하긴, 성직자도 비슷할 터이니."
신이 신성력을 내려 주어야 그 힘을 쓸 것이 아닌가.
자신과 레이시스도 아마 비슷한 구조로 엮여 버린 것일 터.
저벅.
카를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 백색의 공간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발산한 신성을 다시 거두어들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잠시 주변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레이시스?"
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면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재단이나 비슷한 구조물을 찾아 나섰지만, 아쉽게도 이 백색 공간에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은 듯싶었다.
그래도 레이시스의 존재는 머지않아 찾을 수 있었다.
저 멀리, 한 인영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
"...이런."
다만, 상태가 이상했다.
카를은 즉시 땅을 박찼고 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이동했다.
"...."
그 앞에서 발견한 건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
본인이 맞다면 레이시스의 어릴 적 모습이 분명해 보였다.
카를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레이시스."
다행히 부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간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려는가 싶더니 카를을 향해 물었다.
"누구신가요?"
"...아."
몸만 어려진 게 아니라 정신까지 바뀌어 버린 건가?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레이시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다."
"...제국의 귀족분이시군요."
레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앞에서 예의를 갖췄다.
"알포람 왕국의 공주인 레이시스 알포람이라고 합니다."
평소와 다른 앳된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제법 어여뻤다.
왕국의 공주답게 어릴 적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는지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혹시 카를로스 님께서 저를 여기로 데려오신 건가요?"
"카를이라고 불러도 된단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 다. 나 역시 눈을 뜨니 이곳에 있었다."
"으으음."
레이시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눈을 떴는데 이러한 공간에 있으니 당황할 만도 할 터.
하지만 감정 변화를 크게 드러내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카를 역시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신과 신도의 연결, 공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 혹시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건가?'
인간이 가장 순수할 순간은 아이였을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레이시스가 저런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겠지.
반대로 두 번째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은 때가 너무 묻어 아이로 돌아가지 못한 걸까?
잠시간 주위를 둘러보던 레이시스는 카를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에, 연락할 곳이 없을까요? 왕궁에 연락을 보내면 마중을 나와 줄 텐데. 그러면 카를 님도 돌아가실 수 있어요."
"아쉽게도 그런 곳은 찾기 힘들어 보이는구나. 일단 움직여 보는 것이 어떻...."
철컥. 철컥. 철컥.
카를의 목소리 사이로 기분 나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녹슨 풀 플레이트 메일의 관절이 삐걱이며 서로 부딪치는 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리니 뒤를 바라보자 저 멀리 녹슬어 있는 기사 한 명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사?'
영문 모를 상황에 카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왜 기사가 나온 걸까?
"...히익."
카를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그 모습을 바라본 레이시스는 이내 기겁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손은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기사가 많이 무서운 듯싶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바닥을 짚다가 나중에는 카를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카각.
가까이 다가온 기사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녹슨 검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을 때, 이쪽을 노리는 명백한 살의가 느껴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를은 겁에 질린 레이시스를 품에 안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또한 시련인가.'
어렵지 않게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레이시스가 과할 정도로 떠는 것을 보니 잠재의식에 내재한 공포라는 소리일 터.
소위 말하는 트라우마였다.
어렸을 적에 기사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건 처음 들었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공포는 다른 법이니.
'레이시스를 내 신도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해결하라는 소리인가?'
덜덜 떠는 레이시스의 등 뒤를 쓸어내려 주며 신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진정시켜 주던 카를은 일단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탁!
가볍게 땅을 박차며 기사와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의미 없는 행위였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절그럭.
백색 공간에 기사가 솟아났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거의 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숫자가.
꽈악.
잠깐 눈을 떴다가 그 광경을 목도한 레이시스는 질겁하며 더더욱 카를의 품을 파고들었다.
'마나는, 사용할 수 없군.'
카를은 레이시스를 더욱 단단히 안은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신성과 마나는 상극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신성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에서는 마나나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듯했다.
반면 신성은 현실보다 조금 더 자유자재로 운용이 가능했다.
비록 미약한 기운이라 할지라도 없는 것보단 나았기에 천천히 끌어올리며 온몸에 둘렀다.
"레이시스."
"...네."
"눈을 감고 귀를 막아."
"...."
레이시스는 그 말에 따랐다.
카를의 가슴에 얼굴을 깊게 묻고 작은 두 손으로 귀를 꽉 막았다.
혹시라도 저 무서운 기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사용할 수 있는 건 팔 하나와 다리 두 개.'
한쪽 팔은 레이시스의 몸을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그러니 격렬한 움직임은 힘들었고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주의까지 해야 했다.
'쉽군.'
물론 카를에게는 그리 장애가 될 것이 없기에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퍽!
힘껏 내질러진 주먹이 녹슨 투구를 박살 냈다.
재밌게도 갑주 안에 들어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해골이나 뼈다귀 정도는 있을 줄 알았거늘.
신성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 그따위 불경한 것들은 용납지 못하는지 텅 비어 있을 따름이었다.
콰직, 쿵.
카를은 마치 바람처럼 유려하게 움직이며 기사들을 박살 냈다.
격렬하게 움직인다면 레이시스가 힘들어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이용해 짧고 간결하게 기사들을 부숴 나갔다.
그렇게 5분가량이 지났을까.
제자리에 멈춰 선 카를은 레이스스의 등을 톡톡 쳤다.
그때까지 눈을 감고 귀를 꽉 막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를을 바라보았다.
"자."
카를은 등 뒤의 풍경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제 너를 괴롭히는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아."
수십, 수백 개의 잔해가 박살이 난 채 백색 공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레이시스는 잠시간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다가 천천히 카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아아앗.
눈 부신 빛이 주위를 휩쓴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를의 의식은 다시 한번 날아갔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원래 있었던 연무장 가운데로 돌아온 상태였다.
"...."
다만, 그 품에 레이시스가 힘껏 안겨 있다는 점이 달랐다.
백색 공간 안에서 어렸을 때의 그 자세로 카를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 채 팔을 두르고 있었다.
"레이시스."
"...으음."
카를이 안쪽에서와같이 그녀를 부르자 굳게 닫혀 있던 눈이 꿈틀거리며 서서히 열렸다.
밝은 빛을 내는 한 쌍의 눈동자가 카를을 응시했다.
곧 레이시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를 님?"
"레이시스, 여긴 현실입니다."
"...아."
그 말에 슬쩍 옆쪽을 둘러 본 레이시스는 곧 상황을 파악했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안겨 있던 카를로부터 힘껏 도약한 뒤 거의 터지기 직전의 얼굴로 입술을 덜덜 떨었다.
"아니, 그건 아니라고 해야 하나. 조금 전의 저는 저이면서 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제가 말하고도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뭔가 여러모로 이상한...."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얼굴, 귀, 목덜미, 그리고 손등까지 새빨개진 그녀의 모습에 카를은 작게 웃음을 토해 냈다.
"그보다 뭔가 달라진 건 없습니까?"
"...달라진 거요?"
카를의 물음에 레이시스는 덥석 그것을 물며 화제를 전환했다.
물론 아직 새빨개진 몸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아니요? 딱히 변한 건...."
"그렇습니까."
카를 본인도 크게 느껴지는 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아쉽게도 시련에 실패했다는 건가.
'어렵군.'
차라리 마법이었더라면 술식이나 계산을 통해 과정과 결과를 검산했을 텐데.
신성은 미지의 영역인지라 하나하나 찾으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
그때 카를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자신과 레이시스를 연결하는 아주 가느다란 실선이.
팅.
천천히 손을 들어 튕겨 보자 잘게 떨리며 선명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레이시스, 이게 보이십니까?"
"어떤 거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혹시 몰라 그것을 붙잡고 레이시스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레이시스 정도의 실력자가 이 실을 보지 못할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카를은 그 실을 붙잡고 가볍게 신성을 불어넣었다.
145화 3성 (6)
"...으야앗?!"
카를은 레이시스와 이어진 가느다란 실선에 신성을 주입했다.
그와 동시에 레이시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몸은 마치 감전이라도 잔뜩 경직된 채 손끝만 부들부들 떨었다.
"레이시스?!"
카를은 당황하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실험하고자 가볍게 신성을 보내 본 것뿐인데 설마 이런 반응이 되돌아올 줄은.
반쯤 석상이 되어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눈을 확인했다.
'...이 빛은.'
자신과 달리 레이시스는 신성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휘몰아치고 있는 새하얀 광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엇?"
레이시스 역시 뒤늦게 깨달은 듯 몸을 움직이며 자신의 얼굴과 몸을 더듬었다.
"이건 뭐죠?"
"레이시스."
카를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고 시선을 마주했다.
"몸은 어떻습니까? 이질감이 느껴지거나 어지럽진 않습니까?"
"네? 딱히 그런 기미는 느껴지지 않는데요...."
"지금 그 몸에 서린 힘이 느껴집니까?"
"...네."
레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신 카일로스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왔을 때 느꼈던 힘과 아주 흡사한 기운이었다.
그녀 역시 왕족으로 신성력은 몇 번 접해 보았기에 그 정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몸에 서린 신성을 바라보았다.
"제가 카일로스의 신성을 흡수했다는 건 기억하고 계시겠죠."
"네."
"그래서 신격의 일부를 얻었고 지금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여 주셨죠."
"아마, 그 영향인 듯합니다. 다른 신들처럼 제 힘을 내려 줄 수 있는 신도를 만들어 버린 듯한데...."
"제가 카를의 신도가 되었다고요?"
레이시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방금 그 이상한 공간에서부터 일어나던 현상이 카를과 연결되던 과정이었다고?
잠시간 생각하던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신과 신도의 관계처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흡수한 신격은 일부일 뿐이고, 레이시스와의 연결도 불완전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아니, 사람보고 기생충이라니요."
"농담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카를은 작게 웃음을 토해 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생각했어도 참 적절한 비유이지 않은가.
레이시스도 그것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피식 웃었다.
웅웅.
앞으로 뻗은 팔 위에 새파란 기운이 치솟았다.
마나와 뒤섞여 움직이는 그 힘은 아무런 이질감 없이 그녀의 몸을 거닐 뿐이었다.
레이시스로서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지만, 바로 옆에서 지켜본 카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나와 같이 사용한 겁니까?"
"네, 함께 사용이 되네요. 능숙해지면 서로 섞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네?"
카를의 반문에 당황한 건 오히려 레이시스 쪽이었다.
그냥 되는 건데 그걸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신성과 마나는 상극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레이시스는 어떻게...."
"아."
레이시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다른 색의 물감이 뒤섞이듯 혼합되어 있는 신성과 마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 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하다는 듯 말하는 레이시스를 보며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시스를 꼭 영입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듯했으니.
* * *
"...신성과 마나가 합쳐질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오랜만에 진행된 마법 스터디 가운데 유리아는 카를의 질문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인 주제인 「사계」의 할당된 오늘치 연구는 이미 끝난 뒤.
보통은 다음 일정까지 수다를 떨거나 마법 모의전을 하곤 했다.
오늘은 수다 쪽인 듯 유리아는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으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뜬금없는 이야기네. 혹시 외부 견학 때 뭔가를 발견한 거야?"
"...음."
카를은 잠시 고민했다.
보아하니 레이시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 그녀에게 다른 이야기는 발설하지 않은 듯했다.
레이시스와 달리 유리아에게는 그러한 것을 말해 줄 유대가 없었기 때문.
더군다나 알포람 왕국을 제외하면 얽매이는 것이 없는 레이시스였지만, 유리아는 마탑이라는 단단한 뒷배가 있었다.
'즉, 우선순위가 명확하다는 소리지.'
포섭이 불가능한 존재.
하지만 카를로서는 이 천재 마법사의 견해를 듣고 싶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녹스의 간부 중에서도 뛰어난 마법사는 있지만, 유리아 같은 케이스는 특별했으니 말이다.
"이건 레이시스밖에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그녀에게도 발설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서 유리아 양에게도 비밀로 한 것입니다."
"역시 무언가 있었구나."
유리아는 눈을 빛냈다.
사실 그녀는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레이시스는 어설프게 재화나 보석 따위를 얻었다고 둘러대었지만, 카를이 갔는데 고작 그 정도로 끝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레프리의 열쇠를 보여 준 것인데 아쉽게도 카를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숨기고 있던 게 있었어. 뭘 얻은 거려나. 지도? 아니면 씨앗?'
씨앗이면 좋겠다.
만약 씨앗의 가치를 모른다면 자신이 비싼 값을 주고 매입할 생각도 있었다.
일단 그건 손에 넣는 순간 말도 안 되는 효과를 발휘하는 마스터 피스였으니까.
그렇기에 유리아는 잔뜩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이것입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카를은 빈손을 내밀었다.
유리아가 텅 빈 손바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찰나, 새파란 빛이 그 위에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어."
유리아의 머리가 잠시간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터라 일시적으로 사고가 마비되어 버린 것이었다.
"신성력?"
보편적으로 보이는 순백의 신성은 아니었다.
다소 푸르스름한 빛깔이 섞여 있긴 했어도 이건 신성력이 분명했다.
"혹시 성물이나 다른 아티팩트를 손에 넣은 거야?"
"아닙니다. 그쪽에서 얻은 건 이 힘 자체입니다."
"신성을 손에 넣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유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상식을 부정하는 소리였다.
본인 고유의 신성을 가지게 되는 건 최소 반신 급에 다다른 이후부터였다.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안쪽에서는 다른 경우가 존재하지 않았다.
"반신 카일로스라는 존재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는 있지."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 스토리에 엮여 있는 비중 있는 캐릭터를 모르는 플레이어는 없을 테니.
"카일로스는 고대 영웅에게 패배하고 그 신격이 조각조각 나뉘어 대륙 곳곳에 봉인 당했습니다. 제가 조사했던 유적에도 그의 파편이 존재했죠."
"...설마, 그 가고일 동상 아래쪽에?"
"네. 고생 좀 했습니다. 자칫 잘못했다면 레이시스와 저 둘 다 죽을 뻔했죠."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살짝 무모한 일이긴 했다.
심상의 세계로 끌어들인 덕에 잘 풀리긴 했지만, 앞뒤 생각하지 않고 던진 도박수가 너무 많았다.
"반신 카일로스를 쓰러뜨리고 그 신격의 일부를 흡수했습니다. 신성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겠죠."
"하지만 이건 누군가에게 부여받은 걸로 보이진 않는데?"
"원류는 카일로스의 것에서부터 나왔지만, 제게 적응되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처음 얻었을 때와 비교해서 빛깔이 조금 옅어졌습니다."
그래도 레이시스와 엮인 부분은 비밀로 했다.
그런 것까지 전부 말할 의무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신성과 마나가 합쳐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유리아는 팔짱을 낀 채 고뇌에 잠겼다.
'씨앗이나 지도를 얻은 건 아니네. 설마 내가 먼저 얻어서 다른 둘을 얻을 기회가 사라진 건가?'
카를이 카일로스의 존재를 알고 가고일 동상을 찾아갔던 건 아닌 듯했다.
레이시스의 말에 따르자면 주변 땅을 헤집다가 정말로 우연찮게 그 통로를 발견했다고 했으니까.
그러고 정말로 모르니까 자신에게까지 물어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디까지 말할까.'
유리아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잠시간 고민했다.
신성에 관해서는 대충 알고 있는 지식이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 이후 성직자 쪽도 해 보려고 빌드를 공부한 적이 있었으니까.
"신성력과 마나가 상극이긴 한데, 또 아예 섞일 수 없는 건 아니거든."
"아예 섞일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래. 실제로 아주 드물게 마나와 신성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백만 명 중에, 아니 천만 명 중에 한 명 정도 나타나는 이레귤러지."
카를은 입을 꾹 닫았다.
그 이레귤러를 바로 근처에서 발견하게 될 줄은.
"그리고 애초에 마나와 신성 역시 한 근원에서 출발했거든."
"둘이 원래 하나였다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원류가 동일하다는 것이지. 에테르(Ether)라고 들어 봤어?"
"처음 들어 봅니다."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모를 거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테니까."
"가설 중 하나입니까?"
"가설이라기 보다는, 하여튼 그런 걸로 알고 들어 줘. 굳이 믿지는 않아도 되니까."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않아도 된다곤 했지만, 유리아가 거짓을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종종 신선한 관점에서의 말을 내뱉곤 했으니.'
종종 기존 마법사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곤 했다.
마법을 보는 관점의 차이인지, 아니면 그 천재성으로부터 기인하는 이질감인지는 몰랐다.
"세상 모든 힘은 근원인 에테르라는 것으로부터 기인해. 마나, 신성력, 정령, 심지어 마족이나 악마의 힘인 마기까지."
"그렇다면 그 에테르는 무엇으로부터 오는 겁니까?"
"나야 모르지. 애초에 거기에 존재했을 뿐이니까. 아, 이거 외부에는 이야기하면 안 돼? 성국에서 게거품을 물면서 달려들 내용이니까. 아마 자칫 잘못하면 이단심문관까지 와서 널 심문할걸?"
"알겠습니다."
카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발설할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하여튼 원래 주제로 돌아가면."
유리아는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근원은 에테르다. 그러면 거기서 모종의 가공을 거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변한다는 거야. 마법사인 내가 지닌 마나와, 카를 네가 지닌 신성. 그리고 오러도 그 갈래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지. 이론상 가공을 되돌리고 원류로 만들면 다시 합칠 수 있게 되겠지."
"하지만 그건 둘을 합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음, 그렇게 되나?"
가공된 기운을 덜어내고 에테르로 변환해서 합한다면 서로 합친다는 의미가 퇴색되었다.
'하지만 혼원일극신공은 다르다.'
각 기운의 성질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합해서 일극에 이르렀다.
'어째서 신공은 가능하고 다른 방법은 불가능한 것이지?'
카를은 움직임을 멈춘 채 상념에 빠져들었다.
주변에 유리아가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망각한 채로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눈치챈 건 유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말을 하던 도중 카를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카를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져 있었다.
내면의 사고에 집중이 들어갔다는 것인데, 보통 무언가의 깨달음을 얻을 때 저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물론 일반적인 경지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아니, 다 좋은데 그걸 왜 하필 내 연구실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 유리아는 그런 카를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146화 3성 (7)
깨달음.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누구나 몇 번 쯤은 거쳐 지나가는 과정이었다.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처럼 역사가 오래된 문파들이라면 그런 깨달음조차 구조적인 과정을 띠었다.
특정한, 혹은 무언가의 트리거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깨달음의 영역에 진입하기도 했다.
아주 오랜 시간 데이터를 쌓아 온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시도들.
중원의 거목이 더욱 깊게 뿌리내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것들에서 있지 않았나 싶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은 분명 리스크가 존재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닌 인위적인 깨달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단점이 있기 마련이었다.
카를이 분석하기로는 그러한 형태의 깨달음은 일반적인 깨달음보다 고점이 훨씬 낮았다.
물론 벽을 뛰어넘기에는 충분했지만, 귀중한 기회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재능이 부족한 자의 경지를 강제로 올리거나, 가로막힌 벽을 조금 더 수월히 넘어가게 하기에는 탁월했기에 비일비재하게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우연에 가까운 순간 툭 하고 던져진 무언가의 화두로 인해 영역에 진입하는 쪽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
카를은 내면을 관조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내뱉어진 유리아의 말에서부터 비롯된 깨달음의 시작.
그 기회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웅웅웅.
단전에 존재하는 세 개의 기운이 서로 뒤섞이며 불규칙한 형태를 이루었다.
합일에 도달했다가 다시 흩어지고, 서로 뒤섞였다가 분리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며 기이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생각을 잘못했어.'
유리아의 말에서 깨닫는 점이 많았다.
카를은 정도와 마도, 그리고 신성을 처음부터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리아의 말에 따르자면 그 모든 건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나왔다.
에테르라는 것이 실제한다고 하지 않더라도, 무공의 관점으로는 자연지기로 귀결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설령 신성이라고 할지라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
무공의 자연지기, 마법의 에테르.
어떻게 보면 결을 같이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나뉘었다가 다시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즉, 완성된 정답이 존재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굳이 자신이 형태를 잡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결과를 이끌어 낼 터.
애초에 하나였으니 하나로 돌아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카를은 먼저 자신의 사고 안에 박힌 틀을 부수고 형태를 버렸다.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하며 기운을 모으는 것을 끝으로, 그 어떤 자아도 개입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모든 내기를 내버려 두었다.
'오만한 생각이었어.'
혼원일극신공.
천마신공이나 명천신공을 뛰어넘는 신공절학이기에 오히려 선입견이 들어 있었다.
고금제일의 무학이면 응당 이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로.
무신(武神)이 만든 무공을 알량한 자신의 지식으로 재단하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 사고방식 때문에 경지에 오르지 못해 그간 쩔쩔매고 있던 것일 터.
설령 자신이 보기에 불완전한 형태일지라도, 그것 자체로 균형을 이룬 완벽한 형태가 되는 것이었다.
'과거를 버리자. 더는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과거를 잊는 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얽매인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잊지 않으면서도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카를은 끊임없이 그것을 되뇌면서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했다.
파아아앗!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불규칙한 균형을 이루며 무작위로 뒤섞여 있던 세 개의 기운이 돌연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번의 조절 끝에 정답을 찾아가 완성에 다다른 것이었다.
츠즈즈즈.
카를의 몸에 상서로운 서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그의 전신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체내를 순환하던 내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와 주변을 뒤덮었다.
잿빛 와류의 향연.
마치 변태 직전의 누에를 감싼 고치처럼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사아아아─.
그런 카를의 머리 위.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나타나며 형태를 잡을 듯 말 듯 존재감을 흩뿌렸다.
하지만 결국 완성되지 못한 채 뿜어진 모든 기운이 다시금 카를의 코와 입을 향해 흡수되어 사라졌다.
"...."
다시 자리에 앉게 된 카를은 두 눈을 깊게 감은 채 모든 감각을 음미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성취감이었다.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하늘을 향해 다가가는 첫 번째 단계.
무공으로 따지자면 일류를 넘어선 절정이요, 이쪽에서는 구도자를 일컫는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든 것이었다.
이윽고 모든 기운과 깨달음을 갈무리한 카를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 적색 눈동자에 서리던 정광 역시 내부로 숨어들었고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
중원에 있을 적 이미 한 번 넘었던 경지였기에 조금 더 수월하게 마무리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당시에는 자신을 무인이라 생각하지 않고 살수라 여겼기에 크게 중요시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깨달음의 편린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다.
스승도, 사형제도 없이 홀로 모든 것을 이룩해야 하는 위치였으니 말이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연구실 입구에서 우두커니 멈추어 서 있던 유리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카를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보셨습니까?"
"...당연히. 누가 네 옆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거야."
유리아는 경직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카를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을 전부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어렴풋하게 느끼긴 했지만,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깨달음을 얻어서 벽을 넘는 과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카를이 보인 그 반향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경지였다.
도대체 어떤 벽을 뛰어넘어 어떠한 경지에 다다른 것일까.
"...."
반면 잠시간 주위를 둘러보던 카를은 곧 유리아의 배려를 깨닫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결계를 쳐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외부의 이목을 끌 뻔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카를은 유리아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경지를 넘어서는 파동은 주위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심지어 스무 살, 신입 생도가 벽을 넘어서 마스터에 다다랐다.
제국 전체, 아니 대륙 전체에 화제가 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장 바이에른에도 소드 마스터나 마도사 경지에 올라선 이가 적지 않았으니 유리아가 결계를 쳐 두지 않았더라면 이쪽의 파동을 눈치챘을 것이다.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보다시피 유리아 양의 조언 덕분에 벽을 넘어섰습니다."
"...설마 마스터에 다다른 거야?"
"부족한 몸이나마."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위에 있던 펜을 하나 집어 들었다.
웅웅웅─!
잿빛 기운이 치솟았다.
이미 유리아에게는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보였기에 그것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
유리아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소드 마스터의 전유물인 오러 블레이드.
펜대 위로 치솟은 오러가 선명한 칼날의 형태를 띠며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착각할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 온 뒤로 수도 없이 본 것이었으니까.
'아름답군.'
카를은 카를대로 자신이 만들어 낸 강기에 빠져 있었다.
본래 강기의 운용은 초절정의 경지부터 가능했다.
하지만 혼원일극신공의 공능 덕분에 절정의 경지에서도 불완전하나, 사용이 가능했다.
물론 그것 역시 카를이 이미 한 번 지났던 경지였기에 사용법이 익숙한 이유도 있었다.
'혼원일극신공도 동시에 3성을 이루었다. 앞으로는 성취가 더 빨라지겠군.'
카를은 미소를 지었다.
줄곧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뛰어넘었으니 이제부터는 탄탄대로가 펼쳐지리라.
당장 단전 내부에서 웅혼하게 자리 잡고 있는 혼원기의 힘도 얼른 자신을 시험해 보라며 재촉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적이 등장해도 수월하게 쓰러뜨릴 수 있을 터.
'그러니 더욱 정신을 붙들어야 한다.'
신공의 2성까지는 지금껏 자신이 쌓아 온 경험과 지식으로 어찌어찌 가능했다.
하지만 3성부터는 오로지 감각에 의존해야만 했기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무신을 제외하고는 강호의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미지의 경지.
아무리 카를이라고 할지라도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얼마나 지났습니까? 아직 저녁은 안 된 것 같군요."
카를은 벽에 쳐진 커튼을 들추며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 어두워지진 않았다.
깨달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길어 꽤 지났으리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은 듯했다.
그러자 유리아는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를에게 말했다.
"어제 우리 스터디 4시쯤 끝났지?"
"그렇습니다."
"지금 아침 7시야. 곧 강의 시작할 시간이라고."
"아."
그 말에 카를은 화들짝 놀랐다.
그렇다는 건 거의 15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아닌가.
"감사합니다. 이건 추후 반드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깨달음의 단초가 되는 조언을 던져 준 것도 모자라 자신의 호법까지 서 주다니.
유리아에게는 큰 빚을 졌다.
카를은 진심을 담아 유리아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아? 결계를 치긴 했는데 혹시나 외부에서 눈치챌까 봐."
마법과 사역마까지 뿌리며 밖의 동향을 조사했다.
카를이 저렇게 된 것이 자신의 연구실 안이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엮이게 될 것이 아닌가.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분명 귀찮아질 것이 뻔했기에 결계를 몇 겹으로 두르며 보안에 철저하게 신경을 썼다.
'그건 그렇고....'
유리아는 길게 호흡을 토해 내며 심신을 가라앉히고 있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충동에 휩싸였다.
'물어볼까?'
카를도 플레어인지 말이다.
조금 전에 보였던 그 이펙트는 정말로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자신이 이 게임을 하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효과였으니 말이다.
'레이시스에게는 창궁무애검법을 알려 줬었지.'
카를이 익힌 무술도 어쩌면 무공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무공을 해금한 걸까?
'무공은 아직 나도 다다르지 못한 루트인데.'
이 세계관에 무공이 존재하긴 했다.
고대 7 영웅 중 중원에서 온 고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리아조차 아직 그 루트를 공략하지 못했다.
아마 몇 번은 더 연구하고 플레이해야 겨우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싶은데.
고대 영웅과 관련된 콘텐츠는 거의 끄트머리에 가서야 나오니 말이다.
'만일 카를이 플레이어라면.'
적어도 자신보다는 훨씬 더 고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되었다.
'살짝 무서운데.'
이때까지의 관계로 보아 곧바로 적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이 있었다.
자신이 획득한 히든 피스나 알고 있는 지식을 빼앗기 위해 공격해 올 수도 있었으니.
"...."
카를이 만들어 낸 오러 블레이드를 본 유리아는 손을 꽉 쥐었다.
아직 자신은 마도사에 다다르기까지 조금 더 남아 있었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네.'
빨리 카를에게 자신이 플레이어라고 밝힐 수 있는 날이 오길, 유리아는 고대했다.
147화 호출 (1)
막시밀리안은 최근에 부쩍 자신의 실력이 늘어난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였지?'
바이에른에 입학 후 환경이 바뀌어서 자극을 받았나?
아니, 그건 아니었다.
학기 초에는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고, 성장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그 이후에는 강의를 들으며 단련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급진적으로 상승을 이뤄낸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 그때부터였어.'
치료라는 명목으로 카를에게 진짜 딱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을 즈음일 것이다.
그 이후 앓던 이가 쏙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해지더니 근육이 더 탄탄해지고 오러도 잘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덩달아 올라간 가전 검법의 성취도 가로막고 있던 벽을 단숨에 뛰어넘을 정도였으니.
'아버지도 내 나이대에 나와 같은 경지에 오르진 못했다고 들었는데.'
카를의 주먹이 특효약이었나?
막시밀리안은 함께 수련 중이던 카를을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게일."
"왜?"
"카를, 요새 좀 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카를이?"
게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의 기행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수련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 드물었다.
계속해서 카를을 흘깃흘깃 훔쳐보는가 싶더니 이제는 이상한 헛소리까지 하지 않는가.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조금 더 길어진 것 같은데. 기르는 건가?"
"그건 그냥 자란 거잖아. 그거 말고 분위기가 좀 바뀌었달까. 그런 것 있잖아."
"분위기?"
게일은 그 말에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같은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게일이 보기에 카를의 모습은 이전과 같았다.
그냥 평소의 카를인데, 뭘 저리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게일의 표정에 막시밀리안은 짤막한 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바보는 맞긴 해. 수련이나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곧 기말인데 또 나보다 점수 낮으려고?"
"...그럴 수야 없지."
막시밀리안은 두 눈을 부릅뜨며 재차 검을 움켜쥐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학기의 기말을 향하고 있었다.
'시간 참 빨라.'
특히 자신은 중간고사 때 실수한 부분이 여럿 있었다.
점수를 만회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 했기에 정신을 붙들었다.
다른 생도들 역시 시험 기간이 점차 가까워질수록 귀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대비하기 시작했으니 자신 역시 방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막시밀리안은 카를을 훔쳐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학기 초에는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따라잡힌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듣자 하니 레이시스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다던데, 그것 덕분에 이처럼 빠르게 성장한 건가?
그래도 일단 그런 것을 제외하고 막시밀리안이 카를을 주시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확실해. 분위기가 바뀌었어. 예전에는 그래도 카를의 기척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눈으로 직접 보고 있어도 희끄무레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감각이 이상해진 건가 싶어 옆을 바라보았지만, 열심히 대검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고 있는 게일의 기척이 더없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변화는 자신보다 카를 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테지.
"...."
물론 카를 역시 그런 막시밀리안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게일에게 했던 말까지 전부 들으면서 말이다.
'기감이 예민하군.'
이전에도 느꼈던 것이었다.
대련 중에도 슬쩍슬쩍 몇 번 테스트를 해봤는데 막시밀리안은 실제로 다른 생도들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
그래서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느낀 것이겠지.
'조금 더 주의해야겠어.'
카를은 유리아 덕에 심득을 얻어 절정의 경지에 진입했다.
각 경지마다 강해지는 고점이 존재했으나, 혼원일극신공의 성취 덕분인지 기존의 경지보다는 곱절은 더 강해져 버렸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실상 낼 수 있는 무위는 초절정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터.
이전에 흡수한 빙정처럼 녹스를 통해 공수해 꾸준히 섭취한 영약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신공의 효능은 카를로서도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대로 꾸준하게 성장한다면 앞으로 몇 년 이내 입신지경을 바라보는 벽에 다다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지.
그때가 되면 불가살(不可殺)의 경지는 한참이나 뛰어넘었을 것이다.
'중원에서는 족히 수십 년은 더 걸렸던 경지를 이렇게 빨리 오르게 될 줄이야.'
2회차의 삶이라는 것이 이토록 체감되던 때가 없었다.
끼익.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연무장의 문이 열렸다.
"아, 카를. 여기 있었군."
다들 평소처럼 레이시스나 유리아가 카를을 부르러 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의 얼굴이 나타나자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모았다.
탁.
연무장 안으로 들어온 루이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좌중에 손을 흔들고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스윽.
카를은 검을 내렸다.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며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루이스, 무슨 일입니까?"
"호출이야. 다들, 잠깐 카를 좀 빌려 가도 되지? 바이에른의 일이라."
"상관없기야 한데...."
막시밀리안은 말끝을 흐리면서도 흥미 어린 시선으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루이스 정도 되는 이가 전령으로 올 정도의 일이라면 제법 큰 행사일 텐데.
또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계획되는 건가?
막시밀리안은 나중에 무슨 일인지 알려 달라며 카를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카를은 검을 보관함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파아앗.
그 직후 클리어 마법을 통해 땀과 체취를 날려 버리고는 멀끔해진 모습으로 루이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응."
카를은 루이스와 함께 연무장을 나섰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멀어진 뒤에야 그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발푸르기스의 밤."
"아."
루이스의 말에 카를은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발푸르기스의 밤』
제국 아카데미의 연합 행사로 1년의 성과와 아카데미의 우열을 가루는 치열한 전쟁이었다.
"벌써부터 준비하는 겁니까?"
"정식 소집은 방학이 끝날 때쯤 할걸? 지금은 주축이 되는 일부만 불러모으는 걸 거야. 인원 추천도 받고 말이지."
탁.
루이스는 주먹으로 카를의 팔뚝을 살짝 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즉, 카를 너도 바이에른 생도의 주축이라는 소리지."
"영광이군요."
"영광은 무슨. 이론 수석에, 실기 점수도 많이 올라왔지? 30위 안에 드는 거로 기억하는데, 맞나?"
"아슬아슬하게 걸쳤습니다."
"그래도 진짜 실력은 그 정도가 아니잖아?"
루이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슬쩍 찔러보았다.
카를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건 이미 아는 이들은 아는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고고하신 왕녀님이나 잿빛 마탑의 천재가 들러붙어 있진 않을 테니까.
'실제로 지금까지의 전적도 그렇고.'
그렇지 않고서야 에렌달 숲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는 활약까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의 생도는 카를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며 멋모르는 감탄을 내뱉었을 뿐이었지만.
적어도 루이스는 카를이 애초부터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가문 때문인가?'
카를의 위로 두 형제가 있었다.
첫째인 카를로스는 휘몰아치는 불꽃 기사단에 입단해 정식 기사가 되어 활동 중이고, 4학년인 다리우스는 졸업 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둘 다 실력이 뛰어났으니 카를이 가주의 자리를 거머쥐는 건 지극히 낮은 확률이었다.
'그러니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 그런 것인가?'
루이스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카를의 처지가 제법 공감이 되었다.
"카를."
"예."
"우리는 언젠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렇군요."
카를은 갑작스러운 내뱉는 루이스의 모습이 의문이었지만,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어 주며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너도 여러모로 고생이었을 거로 생각하는데, 앞으로가 더 힘들 거야.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어질 만큼."
"루이스도 그렇습니까?"
"난, 이미 그 단계는 넘어갔지만, 정말로 하루에 수십, 수백 번은 더 때려치우고 싶었지. 저 빌어먹을 자리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 대목에 이르러 카를은 루이스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눈치챘다.
'내가 가주의 자리를 노리고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잘못 짚어도 한참은 잘못 짚었지만, 카를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쪽으로 유도해서 파고들면 되는 부분이었으니까.
'뜻하지 않게 좋은 정보를 얻었어.'
볼프스부르크의 후계 자리는 루이스가 꽉 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 또한 아닌 듯했다.
호펜하임 쪽은 단단했기에 섣불리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 보였지만, 볼프스부르크는 그 부분으로 공략을 감행하면 소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끼익.
집합 장소는 연무장이었다.
루이스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를이 그 뒤를 따랐다.
안에는 이미 여러 생도가 모여 있었는데,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카를을 보며 손을 들었다.
"다 왔군."
"...다리우스 형님?"
"여기서는 선배다. 못난 동생아."
"4학년은 행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카를은 고개를 갸웃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여하는 건 보통 1, 2, 3학년뿐이었다.
4학년 생도의 참여가 금지된 건 아니지만, 졸업반은 졸업 준비로 바쁘기에 대부분 기피되었다.
"학장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셨다. 난 어차피 어디에 입단하거나 그러지 않으니까."
다리우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귀찮게 엮였다고 말했다.
'모종의 거래가 있었군.'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런 형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리우스는 짐짓 무식하고 저돌적이며 무책임하게 일을 할 것 같지만, 실상 저 곰 같은 덩치 아래 여우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교활하고 까다로운 여우가.
절대로 손해 볼 일을 하지 않았고 신중했으며 미래 가치를 더없이 중요하게 여겼다.
가주 자리를 시원하게 포기한 것도 형님과 경쟁해 봐야 재미가 없으리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
괜히 형제간의 의가 상하느니 우호적인 관계로 옆에 붙어서 쪽쪽 빨아먹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리우스가 구태여 귀찮은 자리에 나온다.'
이전 에렌달 숲의 외부 실습 때도 그렇고 뒤에서 여러모로 거래가 오간 것이 틀림없었다.
"또 무엇을 받기로 하셨습니까."
"뭘 받기는. 내가 꼭 무언가를 대가로 이 자리에 참여한 것이라고 생각하네."
"아닙니까?"
"우리 어여쁜 후배님들을 서포트하러 온 것이지. 겸사겸사 우승도 시켜줄 겸."
다리우스는 고개를 들어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 일선에 나설 생각은 없다. 난 어디까지 고문에...."
생도들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점차 짙어졌다.
"우리 후배님들을 단련시켜 주는 교관 역할이니까."
148화 호출 (2)
다리우스가 바이에른 대표팀의 고문, 교관 역할로 합류한 건 다름이 아니었다.
-다리우스, 에렌달 숲에서의 일도 있잖니. 네가 고생 좀 해 주렴. 예전부터 카를은 얌전해도 그 주위가 말썽이 많았잖아. 그러니까 바이에른을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좀.
-흠, 아들아, 카를을 부탁한다.
-사랑하는 내 아들 다리우스. 부디 카를을 잘 챙겨 주렴. 너도 잘 알잖니. 카를이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해....
에렌달 숲 이후 가족들과 편지로 소식을 전할 때마다 연신 카를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적혀 있었다.
형이 된 도리로서 카를을 잘 살피라거나, 어디 아픈 곳이 없는지 들여다보라거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눈치를 주는 탓에 귀찮아질 지경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20살, 성인이면 어른이었다.
당장 결혼하고 집안을 잇거나 작위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카를 자체도 워낙 똘똘하기에 또래 남자들처럼 위험천만한 짓을 저지르거나 사서 고생하는 일은 알아서 잘 피해 갔다.
카리우스 형님이 말한 대로 그 주위가 말썽이라 에렌달 숲 때처럼 휘말릴 뿐이었지.
'...그리고 최근 살펴보면 많이 성장한 것 같은데.'
다리우스는 팔짱을 낀 채로 대련 중인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현재 바이에른 대표팀에 들어갈 1학년 생도 10명을 소집한 상태.
각기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1학년의 주축이 되는 이들만 소집한 것이었다.
카를이 그 명단에 포함된다는 걸 봤을 때는 솔직히 말해 조금 놀랐다.
이론 쪽으로는 우수한 성적을 거둔 건 맞지만, 실기 쪽으로는 아직 미흡할 텐데 아무래도 우수생이라 교수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덕이 아닐까 싶었다.
캉! 캉!
현재 카를의 상대는 레이시스.
네리안에 이어 차석인 그녀는 문무 양면으로 흠잡을 곳이 없는 생도였다.
그런 그녀의 검을 힘겹게나마 받아넘기는 것만 보아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 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실상은 달랐지만.
-타이밍이 늦습니다. 반 호흡 더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면 제 손에서 검을 떨어뜨릴 수 있었을 겁니다.
카를은 줄곧 밀리는 형세를 유지하면서도 레이시스에게 전음으로 조언을 보냈다.
현재 그녀의 검은 창궁무애검법의 형식을 차용한 것.
한 검법을 낱낱이 분해하면 굳이 초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 형태를 빌려 올 수 있었다.
수준 높은 고수들이 무공의 유출을 피하기 위해 곧잘 사용하는 방법으로, 카를 역시 비슷한 방법을 통해 레이시스의 검을 봐주었다.
쉬악!
카를의 피드백을 곧바로 수용한 레이시스의 움직임이 한 박자 빨라졌다.
그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생도들이 감탄을 토했을 정도로 날카로운 기세였다.
캉!
종래엔 카를의 검이 그 손아귀에서 튕겨 날아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으니.
둘 중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만.'
레이시스는 짤막한 숨을 토해 내며 검을 거두었다.
언제쯤 카를에게 피드백을 듣지 않는 수준에 오를 수 있게 될까.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목표가 너무나도 높았기에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대단하군."
"검술로는 네리안, 레이시스, 루이스 이 셋이면 우승은 손쉽겠어."
"3등까지 수상이니 상위 포지션을 전부 차지해 버린다면 다른 아카데미랑 격차를 많이 벌릴 수 있겠네."
발푸르기스의 밤.
대표적인 행사 중 하나는 바로 무투 대전이었다.
검, 창, 도, 박투 등등....
무술로 엮을 수 있는 분야기만 한다면 그 어떤 것이든 허용이 되는 대회였다.
가장 많은 점수를 주는 종목이기도 했으며, 우승할 시 아카데미와 함께 생도 본인의 명예가 드높아지는 것도 말할 것 없었다.
"흠."
다리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과거 황금 세대라 불렸던 자신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마법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유리아가 있으니 오히려 이들이 더 우세하지 않을까.
"좋아. 테스트는 여기까지. 그러면 1학년 대표팀에서 팀장과 부팀장을 정해야 하는데, 혹시 희망자 있나?"
그 말에 레이시스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대표팀의 팀장, 위치나 명예나 다른 생도들 역시 바라는 자리일 것이다.
일단 팀장의 자리는 크게 추려서 세 명으로 좁힐 수 있을 터.
'네리안 군, 나, 루이스 군.'
네리안 군은 귀찮아할 것이 분명했으니 제외였다.
바이에른의 강의 중에서도 자리에 매인 추가 점수를 적극적으로 챙기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루이스 군이라는 소리인데....
'루이스 군의 성격상 팀장이 안 된다면 부팀장 자리를 맡게 될 성향이 커.'
위에서 군림할지언정 누군가의 밑에서 서포트할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 부분을 잘만 공략한다면.
'팀장 레이시스, 부팀장 카를.'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흠흠."
레이시스는 가볍게 목청을 가다듬은 뒤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 떨어진 옆쪽에 있던 루이스도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고.
"레이시스와 루이스 후배님 둘인가. 그럼 둘 중 한 명이...."
"셋입니다."
"...."
누군가 다리우스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무리 가장자리에 있던 네리안이 물망초 빛깔 머리카락을 흔들며 손을 든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레이시스의 표정은 굳었고, 루이스는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셋이라. 그러면 투표로 하는 것이 낫겠군."
다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힘으로 서열을 정해 승자에게 팀장 자리를 주려 했다.
그편이 가장 깔끔하고 가시적으로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3명이라는 애매한 숫자가 되어 버린 이상, 생도들의 투표로 뽑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다들 1분을 주겠다. 아카이브를 통해 누굴 뽑을 것인지 내게 메시지를 보내도록."
다리우스의 말에 다들 황급히 아카이브를 켜서 누군가의 이름을 작성해 나갔다.
최소 몇 달간 바이에른의 1학년 대표팀을 이끌게 될 사람은 누가 될 것인가.
"...."
카를은 메시지를 작성하면서도 네리안의 표정을 흘깃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지?'
그가 지금껏 파악해 온 네리안의 성격상 이런 귀찮은 일에 관여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설 만큼 대표팀 팀장 자리에 메리트가 있는 걸까?
카를은 다리우스에게 보내는 메시지 위에 레이시스를 적었다.
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그것을 지우고는 네리안 쪽으로 바꿔 적었다.
'이편이 더 재미있겠군.'
레이시스와 루이스가 붙는다면 높은 확률로 루이스가 뽑힐 확률이 컸다.
타국의 왕녀인 레이시스에 반해, 루이스는 제국의 귀족이었으니까.
하지만 거기에 명실상부한 수석인 네리안이 더해진다면?
"...결과가 나왔군. 1학년 대표팀 팀장은 네리안 생도다."
짝짝짝짝!
가벼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리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좌중에 감사를 표하고는 다시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럼 부팀장은...."
"제가 뽑아도 되겠습니까."
다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리우스가 부팀장을 선별하려던 때 다시 손을 들어 올린 네리안이 끼어들었다.
"팀장으로서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직접 선택하고 싶습니다."
"뭐, 그래도 되겠지."
다리우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누가 뽑히든 대세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
네리안이 어쭙잖은 생도를 뽑을 일도 없을 테고, 누가 뽑힐지 오히려 다리우스도 궁금한....
"부팀장 자리에 카를로스 생도를 뽑겠습니다."
"...카를을?"
"예."
"...."
다리우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우수한 녀석들도 많은데 왜 굳이 카를인가.
생도들 역시 애매하다거나 모호한 표정을 짓곤 했으나, 큰 반발은 없었다.
"하긴, 이론 수석이니까."
"서포트는 잘하겠네."
"카를도 맡을 게 많을 텐데. 이론 수석인 만큼 발표회도 전담할 테고."
"나야 뭐, 상관없지."
"네리안에게 선택받으면 그것도 살짝 불편하긴 해. 원체 혼자 다녀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도 어려우니까."
잠깐 웅성거리더니 다들 수긍하는 눈치이긴 했다.
팀장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랐겠지만, 네리안이 뽑힌 이상 상관없다는 분위기였다.
"...."
레이시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등 뒤에서 네리안을 노려보았다.
'아니, 왜.'
카를을 빼앗아 가는가.
자신이 원하던 형태를 팀장 자리만 바꾸어 네리안이 홀라당 먹어 버렸다.
다른 생도도 아니고 왜 하필 카를을 가져가는가.
'...설마.'
분노에 차 있던 레이시스의 눈이 돌연 휘둥그레 떠지며 바로 옆에 있던 카를 쪽으로 향했다.
"카를."
"예."
"네리안 군이랑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어요?"
"...부팀장 자리에 관해서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도 살짝 당황스럽군요."
네리안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대놓고 선택할 줄은.
'슬슬 본격적으로 영입하려 하는 것인가.'
카를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레이시스를 녹스에 영입하려 점찍어 둔 것처럼 네리안 역시 호펜하임으로 자신을 데려가기 위하여 작업해 두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
그런 모호한 카를의 표정을 본 레이시스는 다시금 소매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어.'
설마 네리안 군이 그런 쪽의 취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남은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홀린다는 제국의 격언은 몇 번 정도 들은 적이 있었다.
네리안은 말할 것도 없는 미남이었고, 카를 역시 어디 가서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학기 초부터 흥미를 보였으니 그러한 마음이 싹트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터.
'내가 지켜야 해.'
레이시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 본인은 아직 무슨 상황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이미 네리안은 행동을 개시했다.
조금만 방심한다면 아무리 철두철미한 카를이라고 할지라도 홀라당 넘어가 버릴 수도 있을 터.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아무리 검술이나 마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대책이 필요하겠어.'
네리안은 강적이었다.
레이시스는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하고는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돌아가는 즉시 유리아에게 상담한다.'
자신보다 머리가 더 뛰어난 유리아라면 무언가 대책이 있지 않을까.
"...."
부팀장으로서 임명 후 옅은 미소와 함께 카를을 바라보는 네리안의 모습을 보니 그 의심은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좋아."
팀장과 부팀장.
네리안과 카를.
둘을 모두 선출한 다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지금 모인 생도들이 대표팀의 주축이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추천을 받아 다른 생도들도 선별 과정을 거칠 예정이지. 한 사람당 1, 2명씩 다른 생도의 이름을 써내도록. 가깝거나 친분이 있어도 상관없다. 이름이 적힌 모두가 선발되는 건 아니니까."
추가 인원의 선발.
카를은 이미 생각해 둔 이름이 있기에 망설임 없이 아카이브를 켰다.
149화 기말고사 (1)
발푸르기스의 밤, 1학년 대표팀의 임시 소집이 지난 후 바이에른은 본격적인 시험 기간에 접어들었다.
날이 갈수록 생도들의 얼굴은 초췌해졌고 교정의 분위기는 어두워져 갔다.
중간고사에서 부족한 점수를 얻은 생도들은 이번 시험에서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
비단 1학년뿐만 아니라 다른 학년의 생도들 역시 허덕이는 가운데, 오로지 카를만이 여유 넘치는 분위기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사락.
이제는 루나와의 회동 장소로 고정된 바이에른 도서관의 자리.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보고 서류를 읽으며 천천히 움직였다.
"라한 세력의 대부분은 큰 반발 없이 장악 및 흡수했습니다. 서부 3상업 지구는 전부 영역에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관건은 라한을 내세우는 것이다. 휘하 연합에 들어온 이들도 몸통이 라한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잘 포장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녹스는 흑막에 있는 배후로서 있어야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라한이라는 좋은 몸통을 얻은 이상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좋을 터.
마인들의 수장, 베샤가 배교자라 칭한 루카스는 자신에게 한 번 크게 당한 이후 다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일단 당초 목표였던 서부 3상업 지구 장악은 달성했으니 이제부터는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할 예정이었다.
'가장 큰 목표는 두 가지.'
첫 번째는 녹스의 세력 확장.
두 번째는 고대 영웅의 조사.
일단은 녹스의 세력 확장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야 그 영향력으로 영웅과 관련된 유적이나 전승을 조사할 수 있었으니.
"일단 고대 영웅 쪽은 미뤄 놓고 반신 카일로스에 관한 정보를 최우선으로 수집한다. 이쪽은 상대적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아 눈을 피하며 정보를 모으기 쉬울 테니."
다만,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정보를 모으기 어려웠지만, 녹스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파헤칠 수 있으리라 카를은 믿었다.
"네."
루나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뒤쪽에서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두꺼운 서재 사이로 레이시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 카를. 여기 있다고 들어서요. ...어? 루나 선배님도."
"레이시스 후배님. 여전히 카를만 졸졸 따라다니네."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꾼 루나가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를 놀렸다.
"아, 아니에요. 오늘은 다 같이 스터디를 하자고 해서."
"스터디라. 좋을 때네."
"선배님들은 안 하시나요?"
"우리는 정보가 유출될까 봐 그런 건 하지 않는 추세지."
"아하. 그런데 뭘 하고 계셨어요?"
"아."
그 말에 대답한 건 카를이었다.
카를은 손에 쥔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관리하는 조직의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조직?"
레이시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다.
아니, 애초에 카를이 조직을 관리한다는 이야기도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듣는 것이었다.
혹시 루나 선배도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 시선을 돌렸다.
"조만간 같이할 수 있길 기대할게."
그러자 루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대답해 주고는, 카를에게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퇴장했다.
이미 녹스 내부에서도 레이시스의 영입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적당히 떡밥을 뿌리기에는 좋은 타이밍이었기에 카를이 물꼬를 틔운 것이었다.
"카를, 혹시 바이에른 내에 따로 사조직을 만든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제가 옛날부터 만들어 온 조직이죠. 루나는 제가 먼저 투입한 조직원입니다. 루나를 제외하고 여럿이 더 바이에른에서 활동 중이죠."
"그건...."
어째서 그런 것인가.
레이시스는 눈치껏 뒷말을 삼켰다.
그런 예민한 것을 물어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으니까.
잠시간 할 말을 고르던 그녀는 곧 무언가를 퍼뜩 깨닫고는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 설마 토호슈 영지 외부 견학 때 나왔던 사람들도...."
"맞습니다. 사실 라이프치히의 가신이 아니라 제 수하였습니다."
"아하."
레이시스는 감탄을 토해냄과 동시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대체 카를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신에 지닌 무력만 해도 놀라울 지경인데 휘하에 이런 세력까지 지니고 있다니.
당장 카일로스의 신전을 빠져나온 뒤 보물을 회수하고 뒷수습하기 위해 내려간 이들만 해도 수십이 넘었다.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귀족이라면 물밑에서 사조직을 운영하는 건 기본적인 일이지만, 카를은 작위도 받지 못한 귀족 가문의 혈통에 불과했다.
'그런데 카를은 대체.'
어떻게 그 정도 규모의 조직을 홀로 만든 걸까.
그리고, 어째서 자신에게 그러한 비밀을 알려 주는 걸까.
"...."
레이시스는 입을 꾹 닫았다.
카를이 자신에게 해코지하려는 속셈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나쁜 마음을 먹었더라면 이미 이용하고도 한참 남았을 터.
하지만 그는 이제껏 자신에게 도움만 주었을 뿐, 무언가를 원하거나 가져간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쪽이 더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복잡해 보이는 레이시스의 표정에 카를은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건 레이시스만 아는 이야기입니다. 유리아는 물론, 제 형제나 부모님도 알지 못해요."
"...저만요?"
"네. 이전에 신성을 시험할 때 서로의 의식이 공명한 적이 있잖습니까. 그때 레이시스가 살아온 기억의 일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랬죠."
레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힘든 과거를 누군가에게 보여 준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그것도 가장 의지하고 있는 카를에게 여과 없이 보여 주었으니 근래도 밤잠에 떠오를 때면 이불을 걷어차곤 했다.
"레이시스는 자유를 원하죠. 돈을 모으고 실적을 쌓으려는 것도 그와 관련된 맥락이고."
카를은 일부러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왕족이나 주요 직위에 있는 이들은 모종의 맹세나 계약으로 묶여 있을 수 있었으니까.
혹여나 레이시스에게 피해가 갈까 돌려 말하자,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어쩌면 제가 그 문제에 대해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와준다?"
"왕녀, 레이시스 정도 되는 위치에서 본국의 속박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적습니다."
타국의 귀족과 혼인, 혹은 망명.
그중 가장 현실성 있는 부분인 혼인 쪽이었다.
유력한 귀족과 혼인하게 된다면 어렵지 않게 알포람의 간섭을 쳐 낼 수 있을 터.
다만, 망명 쪽은 본인의 능력과 실적이 입증되어야 하기에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런 가운데 카를이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
레이시스는 숨을 들이켰다.
손끝은 잘게 떨리고 시선은 어디에 줄지 모른 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머릿속에 피어난 생각을 억누르기에 바빴다.
'이건 거의 청혼 아니야?'
라이프치히 백작가.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맹주.
그곳이라면 자신을 받아 주기에는 충분한 힘을 지녔다.
'더군다나 나와 카를은....'
모종의 관계로 엮여 있었다.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인 관계가 아니라 정말로 엮인 물리적인 관계로 말이다.
카일로스에게서 얻은 신격의 힘이 발현되어 형성된 연결은 믿음의 형태가 물질화된 것이라고 했다.
만일 누군가 상대를 배신하게 되면 그 연결은 끊어질 것이다.
적어도 카를과 자신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즉, 신뢰에 관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배신할 일도 없고, 설사 배신하게 되더라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
레이시스는 카를에게 붙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인지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드륵.
카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런 레이시스의 손을 놓아주며 작게 웃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지금은 지금을 즐기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레이시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에른에 입학한 이후부터는 세상일에 복잡한 생각을 가질 필요 없이 삶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알포람의 치정 싸움도, 권력 다툼도, 후계들의 은은한 견제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
곧 레이시스의 얼굴이 차분해지는 걸 확인한 카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떡밥만 던져 놓은 뒤 더 밀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사실 이제껏 얻은 신뢰라면 레이시스를 회유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터.
하지만 얼기설기 쌓은 탑으로는 그 지속성을 오래 기대할 수 없었다.
아주 천천히 스며들 듯, 그녀의 삶에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가장 확실하면서도 어려운 방법이었다.
* * *
"...."
막시밀리안은 반쯤 죽은 눈으로 펜대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막시밀리안만이 아니었다.
게일, 에이미, 리엔 그들 모두 초췌한 낯짝으로 양피지 위에 시험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슨, 시험 한 번 치르는 데 참고해야 하는 논문이 이렇게 많은 거야."
"중간고사 때는 맛보기라더니 진짜였군."
"이걸 앞으로 4년 내내 해야 한다고?"
시험 하나를 치르기 위해 공부해야 할 논문이 책상 앞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걸 읽는 데도 꼬박 하루가 다 필요할 것 같은데, 더 좌절스러운 점은 시험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막시밀리안은 무기력한 모습으로 펜을 긁적이다 슬쩍 시선을 옮겼다.
초췌한 모습의 자신들과 달리 한차례 스터디를 끝낸 후 여유로운 모습으로 토론 중인 이들이 있었다.
"이쪽 이론을 사용하면 술식을 3배 정도 단축할 수 있어."
"교수님이 강의 중에 그 술식은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마 사용하면 별로 좋아하진 않으실 겁니다."
"아, 그래? 좋은 정보 고마워."
"매번 잠만 자니까 이런 함정에 걸리죠."
"하하."
카를, 레이시스, 유리아, 그리고 배신자 포저스까지.
카를과 레이시스는 원래 이론이 뛰어났고, 유리아와 포저스는 마법사로서 머리가 명석했다.
아직 기본 이론에 허덕이는 자신들과 달리 이미 이쪽을 섭렵하고 심화의 단계로 가서 교수님이 어떤 식으로 문제를 출제할 것인지 예측하는 경지에 다다랐으니.
솔직히 말해서 저들 사이에 흘러나온 말을 반절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카를."
"예."
"이번에도 이론 수석을 노릴 거야?"
슬쩍 옆구리를 찌르며 물어온 유리아의 말에 카를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도전할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상징성이 있으니."
이론 수석이라는 명예는 자신이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일단 머리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니 교수진들은 물론 생도 사이에서도 경외를 받았으니.
가능한 졸업 때까지 완전무결한 이론 수석을 얻는 것이 목표였다.
'흠.'
반면 유리아는 입술을 짚은 채 고민에 잠겼다.
'솔직히 이번 시험에서는 제치려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1학년 1학기 기말시험.
그 문제 중 하나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이걸 지적하면 추가 점수를 받아 카를보다 더 많은 점수를 얻는 것이 가능할 테지.
그걸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연계 퀘스트도 열릴 테고.
'하지만....'
카를이 굳이 이론 수석에 집착하는 걸 보니 무언가 필요한 업적작이나 연관 퀘스트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걸 방해하면서까지 하는 게 맞는 것인가.
'이건 좀 고민을 해 봐야겠어.'
유리아는 아직 카를이 무서웠다.
150화 기말고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