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집결 (3)
"이제 그만 되었다."
카를이 라한의 본진에서 홀로 날뛰고 있는 사이.
투르가는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았다.
"너도 네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설령 내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네 영향력과 힘으로는 조직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건 불가능했으리라는 걸."
"...."
디르센은 반박하지 못했다.
단지 보스의 핏줄일 뿐인 후계자의 위치가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근래 들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투르가의 말에 반박했다.
"아니, 오히려 좋다. 라한은 너무 쓸데없이 덩치가 커. 결속력도 약하고 충성심도 희미하다. 내가 보스가 되면 조직을 정리하고 내실을 다질 것이다."
"멍청한."
강단어린 디르센의 말에 투르가는 피식 웃었다.
무슨 이런 머저리가 다 있냐는 표정을 지으며 퀸에게 시선까지 보낸바.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암흑가의 조직을 그리 꿈과 희망이 넘치게 운영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쓰레기를 먹어도, 오물을 뒤집어써도 어떻게든 덩치를 키우고 몸을 부풀려야 한다. 흐름이 꺾이고 성장세가 끝나는 순간 조직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투르가는 날 선 어조로 말했다.
조카의 어리석음을 꾸짖듯 엄하게.
"내실을 다진다고? 세력이 커지고 보스가 단단하게 자리를 잡으면 조직은 알아서 튼튼해진다. 지금 라한의 결속력이 약한 이유? 보스가 부재중이고 버러지 같은 핏줄이 후계를 자처하며 조직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쿵.
투르가는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딴 어설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형님의 핏줄이라 조금쯤은 경의를 가지고 있었던 내가 수치스러워지는군."
모멸감 섞인 발언에 디르센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투르가에게 일갈을 내질렀다.
"그러는 당신은!!!"
웅웅거리는 고함이 내부에 잔뜩 울려 퍼졌다.
"도대체 무엇이 잘났지? 라한에 세운 공적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건 결국 조직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고 조직원을 갈아 넣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지 않나! 내가 풋내기라고? 그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딴 풋내기에 영향력이 흔들려서 조직을 양분한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능력은 인정하되, 결국 가슴으로는 내가 보스의 자리에 더 타당하다는 것을!"
"닥치거라!! 어디 뚫린 입이라고...!"
서로 치명적인 부분을 찌르고 찔려 버렸다.
수하들까지, 그리고 제삼자인 녹스까지 있는 가운데 절대로 물러날 수 없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끝난다.'
디르센도 직감했다.
이곳이 마지막 승부처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면으로 승부를 보아야.
결사의 각오를 마친 그의 얼굴에 이전에는 없었던 비장함이 맴돌았다.
"난 절대로 라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함께 불구덩이에 빠지게 될지라도."
"함께?"
투르가는 피식 웃었다.
"고작 녹스 따위를 믿고 내게 이빨을 들이미는 것이냐?"
철컥.
누군가 검집의 버틀을 해제했다.
회담장 내부는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으며 긴장감이 차올랐다.
느긋하게 상황을 관망하던 블랙라벨의 간부들 역시 태도를 바꾸었다.
"지금 여기서 해보자는 것인가?"
"회담을 꼭 말로만 할 필요는 없...."
투르가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찰나.
뒤쪽의 문이 열리며 조직원 한 명이 다급한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무엇이지?"
"...그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온 투르가의 모습에 조직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디르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퀸은 느긋한 모습으로 그 광경을 감상했다.
지금 이 상황에 변수가 생겼다?
그 원흉은 예상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짐작이 가능했다.
'마스터께서 나서셨군.'
귓속말을 듣는 투르가의 얼굴이 점차 다채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새빨갛게 변하며 터질 듯 달아올랐다.
곧 그는 주먹을 힘껏 내리치며 자신 앞에 있던 테이블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 버렸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회담에 응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
"...무슨 소리요."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감히 이쪽의 본진을 습격하다니!"
"...."
자신은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다.
디르센은 슬쩍 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번에도 자신은 모른다는 어필을 했다.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시치미 뗄 생각은 하지 말아! 녀석은 분명 검은 가면을 쓰고 있다고 했다!"
"어머, 그런가요? 검은 가면을 쓴 사람이면 모두 녹스의 소속인가 봐요. 앞으로 소속비라도 걷어야겠는걸요?"
"이 빌어먹을...!"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퀸의 모습에 투르가의 눈이 결국 뒤집혔다.
"모두 쓸어 버려!"
쿵!
전면전의 신호가 떨어졌다.
투르가 쪽에 있던 수하들이 소파를 뛰어넘으며 디르센에게 들이닥친바.
회담장은 순식간에 혼란으로 뒤덮여 나갔다.
* * *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의 기술을 파훼하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군. 그대, 이름은?"
"녹스."
"그건 조직의 이름이었을 텐데. 아, 그런 건가? 내가 조직이고, 조직이 바로 나다. 자의식이 대단한 타입이로군."
조롱하는 말에도 카를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쪽은 둘러댈 이름은 있나?"
"...베샤."
"흠."
어감이 독특한 이름이었다.
카를에겐 오히려 그쪽이 더 좋긴 했다.
진짜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면 특색이 강할수록 찾기 쉬워질 테니까.
"제국은 재미있군. 하나를 건드리면 주르르 딸려 나올 것이라고 듣긴 했는데. 설마 이런 작은 조직에도 자네와 같은 존재가 있을 줄이야."
"동감이다. 정말 쉽지 않군."
카를도 베샤의 말에 동의했다.
이제 겨우 상업 지구의 작은 구역을 하나 정리 중인데.
무슨 악마와 계약한 마인까지 등장하는 것인가.
'저 뒤쪽에는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군.'
더 큰 세력이나 암흑가의 주류 조직의 뒤에는 대체 무엇이 버티고 있을까.
"뭐, 그래도 재미는 있으니 되었다."
중원과는 다른 맛이 있었다.
살수였던 시절 카를은 따로 자신의 휘하 조직을 운용했다.
살행은 어차피 자신 혼자 하니 타인과 손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정보 쪽은 아니었기에 비선 체계를 구축했다.
당시에도 조직의 세력을 확장해 나갈 때 별별 이들을 다 만났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녹스를 만들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아아앗!
베샤가 손을 뻗자 그 위로 시커먼 불길이 타올랐다.
카를 역시 호응하듯 손을 뻗었다.
"그거라면 나도 가능하다."
천마신공의 마화(魔火)가 치솟았다.
자신과 같은 형태로 피어오른 새카만 불길에 베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 힘은 대체 무엇이지?"
"누구처럼 미련하게 영혼을 대가로 바치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지."
"...악마와 계약한 것이 아니라고?"
베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카를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동질감.
그렇기에 그 역시 자신과 같이 악마와 계약해 힘을 손에 넣은 동류인 줄 알았다.
그런 베샤의 착각에 카를은 피식 웃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악마는 아니다. 이름은 비슷한데, 천마라고 들어 봤을지는 모르겠군."
"...천마?"
악랄하고 강하기로는 악마보다 더한 존재가 아닐까.
인간의 몸으로 하늘이 내린 악이라 불리니 말이다.
쿵.
대화는 여기까지.
카를은 녀석의 신경이 흐트러진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은 없다.'
카를의 관심은 녀석의 힘보다 그 머릿속에 잠들어 있는 정보 쪽이었다.
아까 말한 그 배교자들에 관한 이야기부터 마인들의 꿍꿍이까지.
또 어떤 악마와 계약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악마의 힘을 내가 이길 수 있을지도 궁금하군.'
악마와 계약한 영혼을 탈혼백의 수법으로 빼앗아 올 수 있으려나?
천마와 악마, 누구의 영향력이 더 클지 궁금했다.
쩌엉.
힘껏 내질러진 정권을 맞고 튕겨 나간 베샤가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카를은 곧바로 땅을 박차며 그 뒤를 쫓았지만, 발 쪽에서 덜컥 걸리는 느낌에 멈춰 서고 말았다.
'속박?'
바닥에서 튀어나온 줄기가 다리와 발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동시에 베샤는 두 손을 합장하며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웠다.
"라하마."
푸슉!
날카로운 가시가 솟구쳤다.
지면을 꿰뚫고 기습적으로 올라온 그 날카로운 궤적이 카를의 심장을 노려왔다.
카를은 즉시 두 팔을 교차하며 호신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푹.
그럼에도 그 관통력은 막을 수 없었다.
천마신공의 호신기가 깨어져 나감과 두 팔에 구멍이 났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가슴을 꿰뚫리는 것은 막아 낼 수 있던바.
그는 힘껏 팔을 비틀어 가시를 부러뜨렸다.
스르륵.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지는 기운을 보며 가볍게 손을 털었다.
두 팔 가운데 구멍이 뻥 뚫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베샤는 그런 카를의 얼굴을 보고는 질린 듯이 말했다.
"인간이면서 인간 같지가 않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그런 사소한 감정은 이미 진즉에 버렸다."
카를에게 있어 고통은 그저 하나의 감각일 뿐이다.
그것을 차단하는 방법은 이미 옛적에 터득했기에 걸리적거릴 것은 없었다.
'힘줄은, 용케 피해 갔군.'
근육이 조금 손상되었지만, 이 정도면 버틸 만하다.
천마신공의 기운이 빠르게 움직이며 다친 상처를 회복시켜 나갔다.
스릉.
더 이상의 육탄전은 위험했다.
천천히 검을 뽑아 든 카를은 고개를 기울이며 베샤을 응시했다.
"선물은 제대로 받았으니 이쪽도 보답해 주지."
저저저적!
시커먼 궤적이 허공에 난무했다.
베샤의 입장에서는 일순간 검은 벽이 생겨났다고 착각이 들었을 정도로 밀도가 높은 공격이었다.
짝!
막는 건 손해가 컸다.
가볍게 손뼉을 치는 것으로 발밑에 어둠을 만들어 내 그 안으로 들어간 베샤는 곧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튀어 올랐다.
"재밌는 수법을 쓰는군."
"...!"
하지만 카를은 이미 그 기운의 기척을 읽고 후미를 잡은바.
공간을 이동한다고 해도 그 주체가 되는 기운을 숨기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었다.
쉬아아악!
천류혼섬의 초식이 베샤의 등 뒤를 노리고 쏟아져 내렸다.
무지막지한 마기가 폭발적으로 쏘아지며 녀석의 신형을 갈가리 찢으려는바.
짝.
다시 한번 손뼉을 친 베사 주위의 공간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공간이동은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왜곡해서 자신에게 닥쳐오는 공격을 막아 내려는 의도로 보였다.
'그렇다면....'
카를은 아직 베샤가 쓰는 기술을 전부 간파하지 못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잡 기술은 소용은 소용이 없는바.
팍!
손해를 감수하고 직접 그 왜곡을 뚫고 들어갔다.
그 탓에 팔과 몸이 뒤틀리며 피부가 찢기고 핏줄기가 튀어 올랐지만.
카를은 멈추지 않은 채 자신의 공격을 감행했다.
서걱.
한 줄기의 참격.
베샤는 설마 카를이 이렇게 무모하게 공격해 올 줄은 몰랐다는 듯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았다.
푸확!
가슴 부근에서 피가 터졌다.
결국 베샤는 버티지 못한 채 자리에 주저앉으며 피를 토해 낸바.
앞으로 고꾸라질 듯 엎어진 그의 모습에 카를은 피식 웃으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었다.
"같잖은 연기는 되었다. 엄살은 그만 피우고 이제 제대로 해보지?"
121화 집결 (4)
"...."
베샤는 입에 묻은 피를 닦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를의 모습이 보였다.
'흠.'
베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타난 것일까.
기존 암흑가의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두드러지는 존재였다.
제국 음지에 잠입해 영향력을 키워나가려던 자신들의 계획에도 제동을 걸어 버렸다.
'설마 디르센을 포섭했을 줄이야.'
자신들도 이용하기에는 디르센 쪽이 더 쉽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투르가의 세력을 전부 쳐 내기에는 소모가 클 것 같아 어렵사리 라한의 이인자인 투르가와 접촉했다.
하지만 투르가는 악마와 계약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며 자신들을 협박했다.
그렇기에 악마의 세뇌로 정신을 홀려 자신들을 충직한 수하라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당초 계획과는 모습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흐름은 비슷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빌빌거리던 디르센이 갑작스럽게 태세를 바꾸어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기 전까지는.
'별 생각하지 않고 외부 확장에만 신경 쓰던 것이 실수였다.'
디르센이 해 봐야 얼마나 갈까.
이미 라한의 주축 세력은 투르가의 손을 들어 주었다.
보스의 핏줄이라곤 하나 카리스마 하나 없는 이가 암흑가의 조직을 규합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투르가의 뒤에는 자신들이 있었다.
어지간한 암흑가 조직이라 할지라도 마인들이 나선다면 하룻밤 만에 정리해 버릴 수 있었다.
악마로부터 직접 힘을 받은 자신들은 평범한 방법으로 죽이지 못했으니 말이다.
현재 카를에게 치명상을 입은 가운데서도 멀쩡하게 살아 움직인 것이 그 증거였다.
스륵.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한 베샤는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은 이미 다 해지고 넝마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그는 기품을 잃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 정말로 우리와 같은 계약자가 아닌 건가?"
베샤의 시선이 카를의 팔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 자신의 마기에 꿰뚫린 상처였다.
회복이 되어 가고 있긴 했지만, 그 속도가 많이 더뎠다.
낮은 급이라고 할지라도 마인이라면 이미 눈에 띌 정도로 재생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정말로 우리와 동류가 아니라는 소리인가?'
베샤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저 주위에서 일렁거리는 기운은 악마의 힘인 마기와 더없이 비슷하거늘.
악마의 아류와 계약을 한 것인가?
어찌 되었든 자신들과 연관되어 있으리라 베샤는 확신했다.
"제안 하나 하지."
"제안?"
"녹스 역시 목적이 있으니 디르센을 포섭한 것이지 않은가."
"그렇지."
카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3상업 지구를 시작해서 제국의 음지를 먹어 치우기 위함이었으니까.
베샤는 손을 들어 그런 카를에게 내밀었다.
"손을 잡자. 디르센이든 투르가든 누가 라한의 보스가 되어도 상관없다. 우리는 이쪽 서부 3상업 지구가 아니라 라한의 이름이 필요한 것일 뿐. 조직의 주도권도 이 구역도 전부 다 주마."
"다 준다고? 그러면 너희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이지?"
"애초에 우리의 목표는 라한이나 이곳이 아니었다. 필요한 건 라한의 이름일 뿐. 목적만 이룬다면 곧바로 이곳을 떠나 다른 구역으로 옮겨 주지."
"어느 구역으로 옮길 예정이지?"
"동부 4구역."
"동부 4구역이라면...."
카를은 가면의 끄트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쪽은 카를도 잘 알지 못하는 구역이었다.
아무래도 암흑가가 폐쇄적인 분위기가 있다 보니 다른 구역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수면 위로 잘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부 3상업 지구의 터줏대감인 라한을 먹으려는 것이었고.
'지방 쪽은 문제없지만, 결국 수도에서의 싸움이다.'
제국의 지방 쪽은 활발하게 지부가 세워지며 여러 사업체를 통해 세력을 키우는 중이었다.
그런 곳들은 수도와 달리 녹스의 힘으로 충분히 제압 가능했기에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수도는 달랐다.
외곽을 무너뜨리는 것부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언제 들어갈 수 있을까.
"...."
카를은 가면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마인들이 라한의 이름을 빌리기까지 해 가며 하고 싶은 것.
동부 4구역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이토록 공을 들이는 걸까.
하지만 도무지 생각을 해봐도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았기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 때문이로군."
"...알고 있었나?"
"녹스의 정보력을 우습게 아는군."
카를은 짐짓 여유로운 척 코웃음을 쳤다.
다행히 이쪽에서 무작정 던진 미끼를 상대가 덥석 물었다.
"그래. 그건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아무래도 상징성이 있으니 말이야."
베샤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다각도로 접촉 방법을 꾀하고 있었는데, 꽤 까다롭더군.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카를의 두 눈이 가늘게 뜨였다.
'사람? 아니, 특정한 물건인가?'
개념이나 추상적인 존재는 아닌 듯해 보였다.
즉, 마인들은 실존하는 무언가를 손에 넣기 위해 동부 4구역에 발을 들이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인, 아니 악마와 관련되어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겠고.
"녹스는 이곳 폴포아르델의 음지에 세력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겠지. 우리는 동부 4구역에 진입하는 것만이 전부다. 그러니 손을 잡도록 하지."
"흠."
"원한다면 마력 서약서도 작성해 주겠다. 서약서의 효력은 절대적인 것을 알고 있겠지? 배신할 염려는 없다."
카를은 잠시 고민했다.
그 얼굴에 서린 갈등에, 베샤는 짙은 미소를 지은 채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곧 카를의 검이 섬전처럼 휘둘러지며 둘 사이의 공간을 베어 갈랐다.
서걱.
베샤의 머리가 하늘로 날았다.
허공을 부유한 채 카를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카를은 머리만 남은 베샤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곳도 4구역도 모두 독식하면 그만인데, 굳이 나눌 이유를 찾지 못하겠군."
배신당할 것이 뻔한데 말이다.
당장 편하자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폭탄을 끌어안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저저저적.
베샤의 입이 열릴 찰나.
카를은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둘러 녀석의 몸을 베어 버렸다.
형태조차 남겨 두지 않겠다는 듯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버린바.
온몸이 쪼개진 베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놈!"
파아아앗!
바닥에서 시커먼 기류가 솟구치며 조각난 베샤의 몸과 그 머리를 집어삼켰다.
찰나 후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온 베샤는 분노로 얼룩진 목소리롤 토해 냈다.
"예의와 품위 따위는 없는 녀석! 동종의 기운이 느껴졌기에 정중함을 갖췄거늘, 이래서 멋 모르는 인간 따위와는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너도 인간이지 않나?"
카를이 어깨를 으쓱이며 받아치자 베샤는 일갈을 내질렀다.
"나는 마인이다! 하등한 인간 따위와는 달라!"
카를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결국 노예 근성은 버리지 못했군. 타인에게 존재를 종속당해 있으면서 그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건가? 참으로 안쓰럽군."
"닥쳐라!"
"여기 개집 앞에 묶인 개보다 네가 잘난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적어도 저 개는 목줄이라도 스스로 끊어 낼 수 있지, 네놈은...."
카를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아아앗!
그러면서 천마신공의 기운을 일으켜 베샤를 압박했다.
'대충 파악했다.'
상대의 힘과 수위의 파악이 어느 정도 끝났다.
저들이 동부 4구역에서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건 라한을 먹고 난 이후 천천히 알아보면 될 것이다.
'악마와 계약한 이들은 영혼을 대가로 내건다지.'
즉, 악마들의 장난감 그 자체였다.
계약을 운운한 것도 분명 빠져나갈 방법이 있기에 내뱉은 것일 터.
쿠웅.
베샤도 지지 않고 마기를 내뿜으며 카를에 맞섰다.
억눌렀던 마기를 해방한 것인지 검붉은 기운이 용솟음치며 주위를 뒤덮어 갔다.
더불어 피부가 시커멓게 물들었고 머리에는 작은 뿔까지 자라났다.
카를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기괴한 생김새였다.
"이제는 인간도 아니게 되었군."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있을지 궁금하군.
쿵.
이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베샤는 땅을 박찼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
카를은 이곳저곳으로 눈을 돌리다 하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캉!
두 마기가 서로 충돌하더니 거센 여파를 내뿜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라한의 건물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깔렸지만, 누구도 나서서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쉭.
카를과의 충돌 이후 튕겨 나간 베샤는 다시금 자리를 박차며 가속했다.
재차 고속으로 움직이며 시야를 교란하는 것으로 카를의 신경을 분산시킬 셈이었다.
휘릭.
가볍게 검을 휘둘러 날을 바로 세운 카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재밌군."
치솟던 천마신공의 마기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렁거리던 불꽃의 그림자가 기어코 검 안으로 사그라들었을 때.
스륵.
카를의 몸 역시 어둠 가운데 녹아들었다.
극한의 움직임을 보이는 베샤와 반대로 그의 주위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같잖은 눈속임 따위!
콰아아앙!
마기의 폭격이 그 자릴 휩쓸었다.
어둠에 스며들었다면 어둠 자체를 날려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이미 무너진 잔햇더미가 파헤쳐지며 그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
건물 벽면에 붙어선 베샤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아무리 기운을 잘 속인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마안(魔眼)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보인다.'
녀석이 움직인 흔적들이.
저 시커먼 마기의 편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결국엔 자신으로 이어져 있...?!
푹!
가슴을 뚫고 나오는 섬뜩한 감각에 베샤의 눈이 부릅 뜨였다.
허공에 남은 흔적을 쫓아 뒤늦게 카를이 자신의 사각에 다다랐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 버리고 만 후였다.
"재밌는 눈을 가지고 있군."
카를은 베샤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 전 분명 그의 눈동자는 자신이 움직인 경로를 따라 발자국을 훑고 있었다.
천마신공의 기운을 읽어낸 것 같은데 이쪽의 마기와 저쪽의 마기 역시 일맥상통한다는 것일까?
-...놈!!!
몸속으로 검을 찔러 넣어 마화로 불태워도 어떻게든 저항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기에 혀를 찬 카를은 검을 비틀며 천마신공의 기운을 회수했다.
저적─.
-...?!
모든 것을 태울 것만 같았던 불꽃과는 별개로 차디찬 냉기가 베샤의 몸을 엄습했다.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그는 다소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카를의 검에서 극음지기가 치솟았다.
저저저적.
꿰뚫린 가슴의 부위로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인이라 할지라도 빙결이 되어버린다면 움직임이 정지하는바.
물론 그 질긴 생명력 특성상 죽지는 않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이, 이건.
베샤의 턱이 덜덜 떨렸다.
지옥의 불꽃과도 같은 뜨거움 직후 느껴지는 엄청난 추위에 몸이 적응하질 못하는 것이었다.
파아아앗.
카를은 명천신공의 극음지기를 녀석의 체내에 쏟아부은바.
이윽고 베샤가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것을 확인하고는 검을 놓았다.
"그러면."
탁.
손을 뻗어 베샤의 머리를 움켜쥔 카를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녀석이 들어있는지 좀 확인해 볼까?"
122화 집결 (5)
천마신공 탈혼백.
상대의 정신과 영혼에 간섭하는 마공의 정점이었다.
카를은 베샤의 존재 자체가 제법 흥미로웠다.
누군가에게 종속된 존재에게 탈혼백을 시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사아아아.
카를의 전신에서 뿜어진 마기가 베샤를 짓눌렀다.
명천신공의 극음지기로 인해 이미 무력화된 상태였다.
그 가운데 전신에 압박이 가해지자 베샤는 시커멓게 물든 피를 토해 내며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아, 안 돼...!
탈혼백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베샤의 눈이 마침내 뒤집혔다.
동시에 카를의 정신 역시 그 안쪽으로 빨려들어갔다.
툭.
정신을 차리니 시커먼 공간 안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 카를은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현상은 처음이로군.'
이 어두운 공간은 아마 베샤의 심상이 만들어 낸 세계일 터.
본래 탈혼백을 시전하면 제삼자가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대상의 정신과 기억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 심상에 직접 들어와 움직이는 경우는 천마신공을 익힌 이후 처음 겪는 현상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존재라 그런 것인가?"
휙.
카를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눈앞으로 베샤가 지닌 여러 기억들이 떠오르며 재생되었다.
"흠."
가장 가까운 기억은 조금 전 싸웠을 때의 광경이었다.
자신만만한 걸 보니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속으로 악마를 찾았고 힘을 달라며 간절히 부르짖었다.
파아앗!
악마는 그 간절한 외침에 응답해 힘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베샤는 그마저도 패배하며 이쪽에 사로잡혔다.
애초에 카를과 베샤의 격차는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혼원일극신공을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강함의 수준으로만 따진다면 에렌달 숲에서 싸웠던 칠악의 마티아스 쪽이 몇 배는 더 강했다.
녀석은 비록 순수한 무예가 아니라 잡기를 주로 휘둘렀지만.
"흠."
카를은 제자리에 우뚝 선 채로 베샤의 기억을 훑어 나갔다.
이제껏 봐 왔던 것처럼 품위와 기품에 집착하는 성격인 듯했다.
귀족 출신인 건가 싶은 의문이 절로 들 정도로.
녀석은 투르가를 포섭하고 조직을 움직이며 라한을 장악하려 했다.
스륵.
카를은 더더욱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고, 곧 익숙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루카스."
이전에 보았던 그 녀석이었다.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희미하게 떠오른 초승달을 배경으로 둘은 어느 호수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소리가...?"
하지만 그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탈혼백을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카를은 조금더 신공의 기운을 강화했다.
"...."
하지만 여전히 둘의 대화는 들려오지 않은바.
이런 경우는....
"설마 기억이 손상된 건가?"
그럴 리는 없다.
설령 잊어버렸다고 할지라도 탈혼백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기억까지 전부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지워 버렸다는 소리였다.
파지지직.
심지어 검붉은 스파크까지 튀어오르기 시작했으니.
카를은 곧바로 더 이전의 기억으로 옮겨 갔지만, 점차 그 장면이 일그러지더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었다.
조금 더 손을 휘적이다가 혀를 찬 카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훔쳐보는 건 여기까지라는 소리인가?"
사아아아.
주변에 내려앉은 어둠 가운데 핏빛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곧 하늘이 찢어지듯 휘몰아치더니 그 가운데가 열리며 새빨간 눈동자가 천천히 나타났다.
「넌.」
낮고 기괴한 목소리였다.
깊은 동굴 저편에서 말하는 것 같은 기다란 메아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섭혼술이로군.'
카를은 시야가 흐려지며 정신이 아찔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단지 눈동자를 바라본 것뿐인데 저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이 자신을 사로잡았다.
쿵.
카를은 즉시 천마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자신의 정신을 보호했다.
심상의 공간에서는 정신력과 의념의 차이로 강함의 수준이 나뉘었으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아마 시선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을까.
「넌, 무엇이지?」
"다들 그리 묻더군. 해 줄 대답은 뻔한데 말이야."
카를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사방을 짓누르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연덕스럽게 받아치자 눈동자에 서린 붉은 빛이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그 힘은, 대체 무엇이지? 어느 악마와 계약한 것이지?」
"하하."
악마 본인조차 천마신공을 보고 헷갈려 하는 것인가.
그 계약자에 그 악마 아니랄까 봐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카를은 웃음을 터트리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내가 네 장난감처럼 누군가에게 종속되었을 것 같나?"
쿠웅─!
천마신공의 기세가 다시 한번 치솟아 오르며 절정에 다다랐다.
베샤와 싸우면서도 보이지 않았던 전력이 지금 이 심상의 세계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치솟아 오른 마기가 이 세계를 뒤덮은 어둠을 전부 태워 버릴 듯 활활 타올랐다.
그 불꽃은 마치 악귀의 형상처럼 자리 잡으며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동자와 마주 섰다.
"네놈의 장난감들과 같은 취급을 하지 말도록."
쿵.
카를이 한 발자국 내디디자 심상의 세계 자체가 뒤흔들렸다.
뒤이어 손을 뻗으며 아무것도 없던 허공을 움켜쥐었다.
"녹스,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도록."
스릉.
분명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허공이었다.
하지만 카를의 의념에 따라 그 가운데 한 자루의 검이 모습을 드러내며 카를의 손을 따라 뽑혀 나왔다.
신검 천뢰(天雷).
정의로부터 받은 검이 의념에 의해 구현되며 올곧은 검신이 형성되었다.
파아아앗!
카를의 전신에서 휘몰아치는 모든 마기가 검신 위에 담겼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직시하며 검을 휘둘렀다.
천마신공 극의(極意)
「천류혼섬(天流昏閃)」
이곳은 이제 네놈만의 공간이 아니다.
베샤의 영혼이 악마에게 종속되어 있다면, 그 정신은 자신에게 제압당해 있었다.
그러니 카를 역시 이 심상 가운데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것이었다.
쉬아아악!
어마어마한 마기가 용솟음치며 하늘로 역류했다.
현실에서도 이처럼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드는 여파인바.
곧 날카롭게 쇄도한 천류혼섬의 참격이 눈동자를 공격했다.
콰아아앙!
세계를 뒤덮고 있던 어둠에 균열이 생겨났다.
심상이 무너져 내렸고 천류혼섬이 다다르기 전에 굳게 닫혀 버린 눈은 두 번 다시 뜨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너져 가는 세상 속 악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카를에게 고했다.
「다시 만나길....」
이전과는 달리 또렷한 목소리로.
「고대하도록 하지.」
그 말이 카를의 귓가에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내 이름은, 알로케스.」
「그대의 이름 역시 기억했다, 녹스여.」
천마신공의 기운을 다루는 자신을 인정해 준 걸까.
아니면 다른 종류의 악마라고 받아들인 걸까.
악마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는 사라졌다.
"...."
카를은 눈을 떴다.
어두운 밤 하늘, 앞쪽에는 무너진 라한의 건물이 보였다.
무너진 심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알로케스.'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카를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악마가 자신의 진명을 말하는 것의 의미를 모르진 않았다.
다만, 상대의 이름이 예상 외의 거물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설마 마왕 중 한 명이었을 줄은.'
아르테니아 대륙이 존재하는 중간계와 다른 차원.
마계에는 마왕이라 불리는 지배자가 있었다.
수십 명이 넘는 군주가 자신을 마왕이라 칭했고 그 죽음의 땅에서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알로케스 역시 중간계에 알려진 마왕의 이름 중 하나였다.
설마 마왕 정도씩이나 되는 이가 이와 같은 끄나풀을 움직이고 있을 줄은....
'아니, 어쩌면 탈혼백의 탓일 수도 있겠군.'
상식적으로 마왕 정도 되는 존재가 이런 뒷골목 음지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을 리는 없었다.
베샤가 계약한 악마는 그보다 더 밑의 마족인 하수인일 터.
하지만 탈혼백의 힘으로 영혼과 정신에 직접 간섭을 했고 그 탓에 마왕의 호기심을 끌어 버린 듯했다.
"마왕이라...."
어두운 심상의 세계도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거늘.
마왕이라는 절대자와 마주하게 되는 것 역시 색다른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차원이 다르군.'
고위 악마라고 해도 이전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에서 싸웠던 리치나 데스 나이트 같은 부류보다 조금 더 나아간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느껴지는 지성과 존재감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그 본체는 아마 절대고수에 버금가는, 혹은 뛰어넘는 강함을 지녔을 터.
혼원일극신공의 경지가 더 높아진다면 모를까, 2성의 경지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커헉."
카를이 마왕과의 만남에서 얻은 여운에 빠져 있던 사이.
탈혼백에서 해방된 베샤가 피를 토해 냈다.
단순한 각혈이 아니었다.
내장을 전부 토해 버릴 듯 엄청난 피가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
카를은 차가운 눈으로 베샤를 내려다보았다.
심상을 경험하게 해 주고 마왕과 만나게 해 준 것으로 녀석의 존재는 충분히 값어치를 했다.
'심상이 부서진 것도 모자라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인가.'
베샤는 바닥을 기며 몸부림쳤다.
턱을 덜덜 떨며 카를에게서 멀어지려 애썼지만, 도망쳐 봐야 바뀌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사락.
윤기가 흐르던 그 피부가 점차 메말라가며 푸석해졌다.
반짝거리던 흑발은 새하얗게 변하며 생기를 잃어 갔고 종래엔 한 가닥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젊고 아름다운 외모에서 늙고 추레한 모습으로 한순간에 변해 버린바.
악마로부터 버림받은 장난감의 비참한 말로였다.
"제, 제발...."
악마가 자신을 버렸다.
그 사실을 깨달은 베샤는 방향을 바꿔 카를의 앞쪽까지 기어왔다.
악마의 것과 닮은 기이한 힘을 사용하는 카를이라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전에 베샤의 고개가 떨어졌고, 절명해 버렸다.
파스스.
생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몸은 휘날리는 바람에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져 내렸다.
그 덧없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카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주변에는 아직 라한의 조직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한 채로 굳어 있었다.
'이들은....'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었다.
마인의 수장이 죽었고 자신의 신위를 보았으니 투르가 세력에 공포를 전해 줄 터.
그 매개체로서의 훌륭한 수단이니 기꺼이 살려 줄 생각이었다.
"네놈들은 제외하고 말이지."
쉬악!
카를은 기습적으로 땅을 박찼다.
베샤를 제외하고도 아직 곳곳에 남아 있는 마인이 존재했다.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도망쳐서 다른 곳에 소식을 전하기 위함인지.
퍽!
가장 가까이 있던 마인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녀석의 시신을 짓밟은 카를은 고개를 들며 좌중에 말했다.
"움직이면, 죽이겠다."
"...."
날 서린 경고에 주위에 있던 수십의 조직원이 굳었다.
마인들 역시 그 사이에 섞여 들으려 했지만, 카를의 시선을 피하지는 못한바.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고 느낀 순간 목숨을 걸고 땅을 박차며 뛰쳐 나갔다.
퍽! 퍽!
멈춰선 조직원들 사이로 머리가 터지는 섬뜩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카를은 마인 전부를 일격에 때려잡을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쥐새끼들이 파 놓은 굴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확인해야 했으니.
"멀리멀리 도망가도록."
그래야 한 번에 찾을 수 있을 테니까.
123화 집결 (6)
쿵─!
디르센과 투르가.
두 세력의 회담 장소가 무너져 내리며 커다란 폭발이 치솟았다.
회담을 진행하는 가운데 자신의 본거지가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투르가가 격분해 총공세의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크윽."
투르가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디르센은 당연히 최우선 표적이 되었다.
투르가 측의 입장에서도 디르센만 제거하면 어렵지 않게 라한의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까지는 내부의 여론과 라한이라는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해 자연스럽게 흡수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은 그 무엇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쉬아아악!
그 풍채만큼 커다란 대검이 디르센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투르가 본인이 직접 디르센의 목을 치기 위해 공격해온 것.
디르센 역시 검을 뽑아 들며 대항했지만, 서로 쌓아온 시간도 경험도 차원이 달랐다.
쩌엉.
전력을 다한 격돌에서 디르센은 형편없이 뒤로 밀려났다.
'빌어먹을.'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딱 한 번 막아 냈을 뿐인데도 힘에서 오는 격차 때문에 검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수하들과 녹스 쪽은 투르가의 사람들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는바.
즉, 투르가 본인은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했다.
꽈아악.
디르센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것마저도 견뎌 내지 못한다면 어찌 라한을 차지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그쪽에서 먼저 달려들기 직전.
턱.
누군가가 그 뒷덜미를 잡아채며 뒤로 내던졌다.
"어허, 도련님은 뒤로 빠져 있어. 후계자가 죽으면 이 모든 게 허사가 되어버리니까. 예쁜 딸을 두고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당신은."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에 디르센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곧 앞쪽에 나선 이를 확인하자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세컨드, 라고 했었지.'
녹스 내부에서 부르는 고유의 호칭이라고 했었다.
그간 자신을 보필해 온 건 노아와 갤런이라고 하는 사내.
녹스에서는 그 둘보다 더 높은 서열의 간부라고 했다.
일면식도 없는 가운데 디르센이 그녀를 알고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감사 인사가 늦었소. 내 딸을 구해 주셨는데."
"그런 건 됐으니까 일단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있어. 이 싸움은 일단 그쪽이 살아야 성립하는 거니까."
세컨드는 턱짓으로 저 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악마와 계약한 마인이라는 존재가 섞여 있는 이상 상대의 전력은 미지수였다.
어쩌면 녹스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에 다다를 수도 있는바.
라한은, 디르센은 녹스가 서부 3상업 지구를 무탈하게 집어 삼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우선적으로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어딜 가지? 네놈은 끝까지 한 조직의 보스로서도 자존심이 없느냐?"
"자존심은 무슨."
툭.
가볍게 자리를 박차고 허공을 뛰어넘은 세컨드는 매서운 기세로 투르가에게 달려들었다.
손에 쥔 백색 창이 무수히 많은 궤적을 만들며 내질러졌다.
오늘 만큼은 주먹이나 대검이 아니라 백호신공의 무공을 사용하는 걸 허락받은바.
상대의 전력이 미지수였기에 최대한 변수를 줄이고자 하는 카를의 판단이었다.
캉! 캉! 캉!
집채만 한 백호가 발톱을 휘둘러오는 것만 같은 공격이 연신 휘둘러졌다.
투르가는 섣불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찌푸린 눈으로 세컨드를 바라보았다.
'강하군.'
창 끝에 서린 저 새하얀 기운은 대체 무엇일까.
음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줍잖은 창잡이는 아니었다.
녹스의 저력이 이 정도나 되었던 건가.
"...."
투르가는 냉정하게 상황을 인식하고 주위를 살폈다.
'기세를 잡지 못한다고?'
디르센의 수하 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한참 전에 나가 떨어져서 무력화되었으니.
저쪽의 진짜 전력은 검은 가면을 쓰고 있는 녹스의 간부들.
하나 하나가 조직의 수장급으로 자신이 가리고 가려 뽑은 정예들조차 쉽사리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휘릭.
손에 쥔 대검을 한 바퀴 회전한 투르가는 세컨드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보스는 얼만큼 강하지?"
"나 따위보다 훨씬 더."
"흐음...."
투르가는 신음을 토해 냈다.
'나 따위라.'
자신을 막아선 걸 보아하니 무력으로는 이 가운데 가장 높은 서열을 지닌 존재인 것이 분명했다.
그런 존재가 보스와 자신을 비교하며 나 따위라고 언급했다.
충성심을 제쳐두고도 녹스의 보스가 조금 더 뛰어나다는 소리겠지.
'그래도 이쪽에는 베샤가 있다.'
그를 영입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 따른 일이었다.
동시에 외부인을 잘 믿지 않는 투르에게에 있어 큰 결심을 필요로 했다.
그만큼 베샤의 힘은 투르가에게 있어 매력적인 것이었으니까.
녹스를 등에 엎은 디르센이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와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건 베샤의 존재 덕분이었다.
"...?"
돌연 투르가의 인식이 흔들렸다.
자신은 왜 어째서 그렇게까지 베샤를 믿고 있을까?
평생을 함께 지내온 수하들조차 쉽사리 믿지 않는데.
어째서 외부에서 영입한 베샤를....
투르가는 고개를 털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이곳에 있는 녹스의 전력을 쓸어 버린 것.
주요 간부를 전부 처치한다면 아무리 녹스의 보스가 강하더라도 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쿵!
투르가는 억누르고 있던 기세를 해방했다.
라한이라는 작은 조직을 서부 3상업 지구의 패자로 올려놓기까지.
투르가가 세운 전공은 셀 수가 없었다.
그 기반에는 음지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무력이 깔려 있었으니.
쩌엉!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대검을 쳐낸 세컨드는 혀를 차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늙은 이가 힘은 무식하게 쌔네.'
그녀는 아직 녹스의 간부들과 싸우고 있는 마인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마인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쿠웅!
그때 지반이 작게 떨렸다.
딛고 선 발끝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선명한 진동.
그 가운데 세컨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스터...!"
저 멀리 희미하게 느껴지는 건 분명 마스터의 기운.
상대의 본진을 타격하며 본격적으로 힘을 드러내신 듯했다.
'그렇다는 건 저쪽에도 상응하는 강자가 있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세컨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마인이라고 해도 마스터의 상대가 될 리는 없을 테니까.
츠즈즈즈.
백색 창 위로 치솟은 백호신공의 기운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빨리 이곳에서의 싸움을 끝내고 저쪽에 합류하기 위해 진심을 보이려는 것이었다.
쿵.
즉시 땅을 박차며 쇄도했다.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로 투르가에게 달려들며 백호창법의 초식을 전개했다.
쩌엉!
전력과 전력이 부딪치자 주변이 뒤흔들리며 거대한 여파를 뿜어 내기 시작한바.
근처에서 싸우고 있던 이들이 휘말리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신났네."
멀찍이 여유롭게 전황을 살피던 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신성력이 서린 주먹으로 마인 한 명의 머리를 깨부순 갤런은 세컨드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도와주지 않아도 되나? 저 투르가라는 늙은이, 꽤 강해 보이는데."
"내버려둬. 세컨드도 몸 좀 풀어야지. 그리고 우리는 어차피 시간 끌기니까."
퀸은 슬쩍 고개를 돌려 라한의 본거지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그 진동, 마스터께서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증거였다.
이쪽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건 상대의 전력이 저쪽에 남아 있다는 소리.
그렇다는 건 자신들은 마스터께서 저곳의 상황을 정리하실 때까지 이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신나 하는데 어떻게 끼어들어."
캉! 캉캉!
세컨드는 쉴 새 없이 창을 휘두르며 투르가를 압박했다.
녹스 본부에 있을 때는 퀸이나 가끔 찾아오는 보스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의 창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좋은 샌드백이 눈앞에 생겨난 상황에서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조금 더!'
물론 투르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직격은 피했어도 세컨드의 몸 곳곳에 상처가 생겨난바.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은 피했기에 그리 문제 될 건 없었다.
"놈!!!"
크게 대검을 휘두른 투르가는 자신 주위에서 맴도는 세컨드를 떨쳐 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걸 사용할 수밖에 없겠군.'
베샤에게 받은 알약이었다.
다소 후유증이 남아도 단시간 힘을 증폭시켜 주는 부스터였다.
이미 수하들로 하여금 검증을 끝냈기에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사용해야 할 듯싶었다.
파각.
부스터를 입에 넣고 씹자 순식간에 그 체내를 통해 어마어마한 힘이 흡수 되었다.
파지직.
움켜 쥔 대검 위로 붉은 스파크가 튀어오르는바.
그 형태에 세컨드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에렌달 숲.
루나가 보고했던 그 괴물의 몸에 서린 기운의 묘사가 떠올랐다.
검붉은 스파크, 어쩌면 마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보고서에 쓰여 있던바.
설마 그곳에 악마 숭배자들까지 연관되어 있었나?
쿵.
돌연 눈앞에서 투르가의 신형이 사라져 버렸다.
기감을 활짝 연 세컨드는 즉시 자신의 옆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쩌엉!!
백색 기운과 검붉은 마기가 격렬하게 충돌하며 지반을 무너뜨렸다.
잔햇더미를 짓밟으며 올라선 투르가는 거친 호흡을 내쉬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좋군. 처음 써 보는 것인데 그 효과가 예상보다 뛰어나."
"미련한 녀석. 약물 따위에 의존하다니."
"이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뒷세계의 철칙이다. 애송이 따위가 무엇을 안다고."
투르가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라한을 이 자리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일단 부스터를 복용했으니 시간 제한이 생겼다.
서둘러 녀석들을 처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뎠을 찰나.
콰아아앙!
아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진동이 발밑에서 느껴졌다.
동시에 투르가를 비롯해 몇몇 그 수하들이 비틀거렸다.
"...."
투르가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에 지끈거리는 통증이 부닥치며 알 수 없는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이건.'
베샤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이때까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들이 다시 한 번 부각되며 의심의 씨앗을 싹트게 만들었다.
'내게 암시를 걸어 놓았다?'
정신을 현혹해서 기억을 조작한 것인가.
자신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대검을 쥔 투르가의 손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그 암시가 깨어져 나갔다는 건.'
투르가는 멍청하지 않았다.
이때껏 이용당했다는 것보다 자신에게 걸려 있던 암시가 끝났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뭐긴 뭐야, 마스터께서 네놈들의 우두머리를 처치했다는 소리지."
쩌억!
힘껏 휘둘러진 세컨드의 창이 투르가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한 박자 늦게 겨우 반응한 투르가는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기다리거라! 난 이용당했다! 베샤라는 녀석에게...!"
"상관없어."
세컨드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새하얀 광망이 감도는 눈빛으로 투르가를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서 죽어야, 우리 이야기가 완성되거든."
124화 집결 (7)
"...이런."
"베샤가 당했다."
투르가의 암시가 풀림과 동시에.
전장에서 싸우고 있던 마인들 역시 베샤의 죽음을 느꼈다.
"베샤가 죽었다고?"
"대체 누가?"
"아니,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하지?"
짜인 대로 계획을 수행하던 마인들 사이에 혼란이 감돌았다.
베샤는 이곳에 파견된 마인들의 수장이었으니까.
악마로부터 가장 많은 힘을 부여받고 상위 조직과 연결된 구심점이었다.
마인이라 할지라도 악마와 직접 소통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것이 가능한 건 마인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바.
나머지는 그저 명령에 따르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후퇴할까?"
"그러기에는 이 녀석들의 전력이 심상치 않아. 섣불리 등을 보인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녹스라고.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들이 튀어나온 건지."
녹스라는 조직의 존재도 눈엣가시와 같았다.
일반적인 암흑가의 조직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
수장인 베샤가 죽은 시점에서 까딱 잘못하면 자신들까지 쓸려 나갈 수 있었다.
"로난, 어떻게 하지?"
"...."
마인들의 시선이 이인자인 로난에게로 모였다.
로난은 얼굴을 구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담은 한참 전에 끝났고 싸움은 이미 절정에 다다르는 중이었다.
원래 계획은 베샤가 오는 것일 텐데 멍청한 녀석이 홀로 설치다가 당해 버린 듯싶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혼자 고상한 척, 기품있는 척하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가 버리는가.
마인과 악마 숭배자는 철저한 위계질서가 정립되어 있었다.
일 순위는 악마의 명령이고 이 순위는 상위 서열이었다.
그렇기에 수립된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수장인 베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여차하면 후퇴한다. 각자, 어떻게든 살아남아. 일단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지."
"누가 놓아준다고 했어?"
푹.
돌연 칼날 하나가 어둠을 찢고 불쑥 솟아올랐다.
귓가를 스치는 달콤한 목소리는 덤이었던바.
로난은 그 즉시 몸을 비틀었지만, 어깨 부위가 터져 나가며 허공에 핏줄기가 흩날렸다.
마기가 섞인 탓에 검붉은 색의 탁한 피가 땅을 적셨다.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했으나 로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마기가 해방되었다.
로난의 몸이 시커멓게 물들며 폭주하기 시작한바.
그것을 기점으로 다른 마인들 역시 자신의 힘을 드러내었다.
뒤쪽에서 투르가의 수하와 싸우던 갤런은 그 광경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개판이군."
"저는 오히려 좋습니다. 아, 저쪽은 대충 끝났군요."
근처에 있던 식스가 갤런의 말을 받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전장의 중심, 투르가와 세컨드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장소였다.
촤악!
쉴 새 없이 투르가를 몰아붙이던 세컨드가 기어코 치명상을 입힌 것이었다.
그 수하들은 다른 블랙 라벨들에게 붙들려 나아가지 못했고, 마인들은 애초에 투르가를 도울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라한의 예비 보스라 할지라도 백호신공을 전개한 세컨드의 힘을 견뎌 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컥!"
"보스!"
"안 돼!!!"
종래엔 그 허리가 뜯겨 나가며 몸이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뉘어 버렸다.
수하들이 애타게 투르가를 불렀지만, 그런다고 이미 죽어 버린 이가 되살아나기라도 할까.
몸이 뜯겨 나가 버린 탓에 포션이나 힐링 마법으로도 소생이 불가능했다.
세컨드 역시 그걸 노리고 과감하게 손을 쓴 것이고.
"...."
투르가가 죽자 그 수하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무기를 내렸다.
이제 전장의 구도는 녹스와 마인들의 싸움으로 되어 간바.
로난은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일단 이 녀석들을 떨쳐 내고 나라도 혼자 도망친다.'
가장 문제는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어 오는 저 여자였다.
퀸, 이라고 했던가?
떨쳐 내지 못하고 도망친다면 자신의 심장에 칼날을 박아 넣을 터.
화아아앗!
로난의 전신을 감싼 마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아예 이 주변을 휩쓸어 버리려는 것으로 퀸의 추격을 따돌릴 생각이었다.
툭.
하지만 그의 시도는 전장 가운데 내려앉은 한 존재에 의해 무마되고 말았다.
"...."
바로 직전까지 귀가 찢어질 듯 소란스럽던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고함을 지르며 상대를 몰아치던 마인들도, 어떻게든 마인을 갉아먹으려던 녹스도.
모두 입을 다물고 움직임을 멈춘 채 한 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슥.
죽음이 고개를 들었다.
입을 열어 날 선 말을 토해 낸 것도, 아니면 검을 들어 자신들에게 겨눈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곳에 존재했을 뿐이었다.
"...."
마기를 풀풀 뿜어내며 위세를 떨치던 마인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베샤가 죽고 난 뒤 마인의 수장이 된 로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무슨....'
숨조차 제대로 내쉬기 힘든 엄청난 살기가 폐부를 압박했다.
저 남자에게서 뿜어지는 기세는 또 어찌나 무거운지.
커다란 쇳덩이가 전신을 찍어 누르는 것 같았다.
'이 자다, 이 남자가 베샤를 죽였구나.'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악마에게 가장 많은 힘을 받은 베샤가 어째서 그리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인지.
이런 괴물과 싸웠으니 아무리 악마의 힘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쓸려 나간 것일 터.
이건 재앙이자 재해였다.
부딪치면 깨지고 맞서면 부러지는 그러한 존재.
엎드려 자비를 구하거나 웅크린 채 피해 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
장내는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투르가가 사망한 걸 본 그쪽 수하들은 진작 전의를 상실했고 마인들은 카를의 기세와 살기에 얽매여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가운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퀸은 환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주인을 맞이했다.
"마스터."
"퀸, 저쪽의 정리는 끝났다."
카를은 품에서 꺼낸 서류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투르가의 금고에서 마인들과 교류한 서류를 찾았다. 다른 곳에서도 이곳처럼 조직의 배후에 마인을 심어 놓았더군."
"곧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퀸은 정중하게 서류를 받았다.
"...."
로난은 그 뒤에서 모든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카를이 퀸에게 넘겨주는 서류가 무엇인지까지.
'이 미친 새끼.'
로난은 속으로 이미 죽어 버린 베샤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게 왜 남아 있는가.
다른 구역의 조직과 나눈 서류는 확인 후 폐기가 원칙일 텐데.
설마 조직 내에서도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던 걸까.
"...우."
로난은 입을 열었다.
거센 압박이 여전히 몸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내야 했으니.
하지만 그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
퍽!
로난의 머리가 터져 버렸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으깨진 모습이었다.
머리를 잃은 몸은 그대로 허무하게 뒤로 넘어가는바.
흘깃 뒤를 바라본 카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베샤는 몸을 조각내어도 다시 살아나던데. 마인 전부가 그런 건 아닌가 보군."
...파앗!
로난이 죽었다.
하지만 그 덕에 틈이 생겼다.
마인들은 목숨을 걸고 땅을 박차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주했다.
그 숫자가 모두 열셋.
카를은 고개를 들어 녀석들이 떠나간 방향을 가늠했다.
"정이 없는 녀석들이군."
"마스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많이 남겨 놓을 필요는 없다. 셋만 남기고 전부 추살하도록. 남은 이들은 풀어놓고 뒤를 쫓는다."
카를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정중앙에 걸린 달이 점차 기울어지며 내려오기 시작한바.
밤이 꺾이고 그 색이 바뀌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오늘 밤에 전부 끝낸다."
"존명."
쉭!
카를의 명령에 녹스의 간부들이 그 즉시 땅을 박찼다.
이미 이 주변에는 녹스의 조직원들로 구성된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는바.
하늘로 솟아오르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는 이상 이곳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저벅.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카를은 걸음을 돌려 엉거주춤 서 있던 디르센 쪽의 진영으로 향했다.
그 수하들은 경외감 어린 표정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
마찬가지로 우뚝 멈춰 서있던 디르센 역시 침을 꿀꺽 삼키며 카를을 응시했다.
웅웅.
카를은 탈혼백을 시전함과 동시에 고독에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굳어 있던 디르센의 몸이 움찔하더니 경직이 풀렸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지, 녹스 경?"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도움에 감사를 표하오. 이건 내가 라한을 흡수한 뒤에 확실하게 사례하겠소."
"기대하겠습니다."
카를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 뒤쪽에 있던 디르센의 수하들의 표정에 서린 불안함이 희석되어 가는 걸 느꼈다.
동시에 디르센을 향한 신뢰와 충성이 자리 잡았다.
당장 전력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함을 보이는 녹스의 수장과 대등히 대화를 나누는 디르센의 모습에 감화된 것이었다.
'애초에 이쪽의 하수인일 뿐이지만.'
디르센은 좋은 가림막이었다.
그를 앞세워 라한을 장악하면 자연스럽게 서부 3상업 지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녹스는 그 협력자로 라한의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암약하면 되었다.
다른 조직의 시선과 견제는 라한 쪽에서 감당해 줄 터.
녹스 자체는 큰 흠집 없이 세력을 키워가며 물밑에서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가도록 하지."
디르센은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간 투르가에게 빼앗겼던 왕좌를 다시 되찾을 순간이 도래했다.
뒤쪽에 있던 그의 수하들이 투르가의 시신을 수습했다.
디르센은 그 가운데 고개를 들어 남은 잔당에 물었다.
"그래서, 자네들은 어쩔 텐가."
"...."
투르가의 직속 수하들.
마인은 없었다. 그저 순수하게 투르가를 신봉하며 그를 따랐던 이들이었다.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는 것을 보니 이미 체념한 듯싶었다.
하지만 디르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함께 가지. 너희도 결국엔 라한의 소속이 아니더냐."
"...따르겠습니다."
대세는 바뀌었다.
라한의 이인자가 죽고 그 핏줄이 보스의 자리를 승계하게 되었다.
투르가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 수하들을 규합한 디르센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서부 3상업 지구의 뒷세계를 가로질렀다.
물론 그 바로 옆 최측근 자리에는 카를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는 중이었다.
"...."
카를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마인은 대부분 처리했지만, 아직 베샤가 배교자라 부른 이들이 남아 있었다.
특히 루카스 쪽은 카를도 제법 진심을 내야 하리라 예상되는 상대.
이쪽의 계획이 성공에 다다라가는 타이밍에 갑작스럽게 난입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는 달리 디르센이 라한의 본거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드디어."
디르센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투르가와 라한의 보스 자리를 두고 싸운 것이 벌써 몇 년째의 일이었는가.
그 기나긴 여정의 끝에 다다랐다는 사실에 감회가 색달랐다.
"...?"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분명 위풍당당해야 할 라한의 본부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윗부분이 날아가고 아래는 폭삭 주저앉아 있는바.
디르센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옆으로 향했다.
"내가 그런 것 아닙니다. 적들의 수장이 몸부림친 여파이지."
카를은 어깨를 으쓱이며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을 내뱉었다.
125화 재회 (1)
수장이 죽고 조직이 와해하였다.
마인들은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서열이 낮은 마인은 급조한 토굴에 숨어 환란이 지나가길 기다렸고, 서열이 높은 마인은 연줄을 통해 안전한 곳을 찾아 나섰다.
과거 성행했던 마녀사냥의 여파로 마인 세력은 보통 점조직으로 이루어졌다.
악마와 계약한 마인은 말 그대로 인류의 적이었으니까.
덜미가 잡힌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관계된 이가 모조리 소각당했다.
그러니 철저하게 신분을 감췄고, 만약 마인임이 드러난다면 목격자 전부를 죽여 입을 막았다.
끼익.
마인, 데슈아는 한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플릭에 위치한 주점은 새벽과 더 가까운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으로 시끌시끌했다.
"...."
호흡을 억누르고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데슈아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카운터로 걸어가 마스터를 불렀다.
"그 한량은?"
"가게 안쪽에 있습니다. 불러 드릴까요?"
"됐다. 내가 가지."
주점 너머에는 도박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곳곳에 깔린 테이블 위로 도박꾼들이 모여 패와 칩을 뿌리며 서로의 운을 겨뤘다.
도박장 안으로 데슈아는 눈을 돌리며 도박꾼들의 면면을 훑었다.
이윽고 누군가를 찾았는지 한 템포 빨라진 움직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이씨, 패 더럽게 안 붙네."
"또 시작부터 블러핑인가. 이번엔 안 속을 거네."
"블러핑이 아니...."
입에 시가를 문 채 킬킬거리며 웃던 남자는 자신의 더벅머리를 쓸어올리며 상대 도박꾼의 말을 받아쳤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데슈아의 모습을 보고는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폴드. 잠깐 자리 좀 비우지. 손님이 찾아온 것 같아서."
"손님? 어? 에이스 페어인데? 블러핑 맞았군, 이 빌어먹을 자식. 어디 애인이라도 온 건가?"
남자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데슈아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하며 도박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끼익.
도박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프라이빗 룸.
주로 VIP나 조직의 높으신 분들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밖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남자는 입에 문 시가에 불을 붙이며 서늘한 눈빛으로 데슈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정기 연락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을 텐데."
"...일이 틀어졌습니다."
데슈아는 침통한 얼굴로 남자에게 고했다.
이름은, 모른다. 그저 '남자'라고 말할 뿐.
매번 만날 때마다 얼굴과 직업이 바뀌었다.
지금처럼 도박꾼일 때도 있고, 웨이터, 사장, 때로는 주점의 손님으로 앉아 있던 적도 있었다.
'의존할 곳은 여기밖에 없다.'
상부로 올라가는 조직의 연결점.
데슈아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일이 틀어져?"
"베샤가 죽고 이쪽 세력이 박살 났습니다. 녹스라는 녀석들에게 밀려 다들 생사조차 불투명합니다."
"...."
남자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정도 사안이 아니라면 원칙을 어기고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베샤가 죽었다고? 확실해?"
"확실합니다."
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베샤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흠."
남자는 턱을 쓰다듬었다.
베샤가 좀 거만한 녀석이긴 해도 실력 하나는 확실했다.
뒷골목에서 묻힐 정도는 아니었는데.
"녹스는 보통 조직이 아닙니다. 일반 조직원이 간부 수준이고 간부는 타 조직의 헤더급을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그 보스는...."
데슈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들 사이로 파고들었던 녀석의 존재감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단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저희 전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 마스터 급이라는 소리군. 서부 3상업 지구는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녀석이."
사실이라면 큰 문제였다.
"바로 위쪽에 보고를...."
"보고는 걱정하지 말도록. 내가 보고 듣는 것이 바로 보고이니까. 남은 건."
남자는 고개를 들어 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직의 거점을 노출한 네놈의 처우를 어찌할까인데."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해. 꼬리를 달고 오지만 않았어도."
"예?"
남자는 피식 웃으며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존재만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며. 그러면 어째서 자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살려 두었지?"
저저저적.
남자의 말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벽이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이런 미친!"
데슈아는 즉시 검을 빼 들며 경악성을 토해 냈다.
분명 철저하게 확인했거늘 대체 어디서 꼬리를 밟혔는가.
"...."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따라붙는 기척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까지 도달했다는 건 데슈아가 이미 저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소리.
그러니 미련 없이 판단을 내렸다.
"데슈아, 네 똥은 네가 치우도록."
스륵.
그 말을 끝으로는 한 줄기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데슈아는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무리 그래도 이리 손쉽게 자신을 버려 버릴 줄이야.
"이 개...!!"
저저저적.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전.
수십 개의 선이 방을 휩쓸었다.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치솟은 궤적이 데슈아의 몸을 가로지른바.
시간이 멈춘 듯 그의 움직임이 정지해 버렸다.
툭, 투둑.
시커먼 마기로 물들어가는 피부의 표면 위.
수십, 아니 수백 개의 교차된 선이 그어지더니 모래 알갱이 크기로 조각조각 나뉘어 쏟아졌다.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데슈아 급의 마인을 단번에 죽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곧 그 무더기 위에서 치솟아 오른 새파란 불길이 녀석의 부활을 막으며 정화해 버렸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군요."
식스는 손가락을 당겨 허공에서 너풀거리는 천잠사를 회수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갤런과 달리 식스는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마인에게 치명상을 주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신성한 불꽃을 일으켜 데슈아를 죽일 수 있었던 건 갤런이 준 성수를 천잠사에 뿌려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더 뛰어난 효과에 돌아가면 성수를 몇 병 더 얻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한 명은...."
식스는 시선을 돌려 조금 전까지 한 남성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중개책일 줄 알았는데 느껴지던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 이 쓰러진 마인보다는 더 비중이 있는 위치라는 소리일 테지.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도주해 주어서 다행이군요. 천리추종향도 잘 퍼진 듯하고."
식스는 이곳에 도착 후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데슈아의 몸에 묻은 천리추종향의 잔향이 상대의 몸에 깃들 때까지 기다렸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씻어 낼 수 없었고 마법도 아니었기에 탐지도 불가능했다.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훈련받지 않은 이는 절대로 천리추종향의 냄새를 찾지 못했다.
오로지 녹스만 취급하는 특별한 물건이었다.
"마스터께서는 참 신기한 것을 많이 알고 계신단 말이야."
식스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도박장에서 굴러들어온 듯 녹색 칩 하나가 타들어 간 마인의 잔해 앞에 놓여 있었다.
마치 노잣돈을 상징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필요 없겠지."
식스는 칩을 손에 쥔 채 잔햇더미를 밟으며 밖으로 나왔다.
마인은 죽게 되면 그 영혼이 종속된 악마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저승에 가지 못하니 노잣돈도 필요 없지 않은가.
자박.
도박장을 빠져나가는 중 테이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직전에 누군가 쥐고 있었을 패가 나란히 그 위에 놓여 있었다.
4, 5, 7, 8.
우연처럼 정렬되어 있던 숫자에 피식 웃은 식스는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던 칩을 그 사이로 내던졌다.
* * *
디르센은 라한을 장악했다.
그가 가장 최우선으로 한 것은 투르가 파벌을 숙청한 것도, 수하들을 공치사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콕시는 지금 부로 라한에 종속되겠소이다."
"잘 생각했소."
디르센이 빼 든 칼날은 조직 내부가 아니라 밖으로 향했다.
서부 3상업 지구의 세력 구도는 원래 4파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메르보, 비르테르소, 콕시, 라한.
하지만 몇 달 전 녹스가 그 사이에 끼어들며 메르보와 비르테르소를 하룻밤 만에 밀어 버렸다.
그렇기에 녹스, 콕시, 라한만이 남아 있게 된 가운데 라한은 후계 싸움으로 내부가 시끄러웠다.
'콕시는 투르가 쪽에 배팅했다.'
베샤를 쓰러뜨리고 그 집무실에서 얻어낸 자료로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콕시는 당연히 투르가 진영이 승리할 줄 알고 이미 물밑에서 협약을 맺었던 듯했다.
다만, 콕시의 조력을 거부한 건 투르가 쪽이었다.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자신의 역량으로 승리해야 한다며 그 이후의 일들만을 상의한 것.
그래 놓고 마인들에게 이용당했으니 우스울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카를은 디르센을 움직여 남은 세력을 정리하게 했다.
'...괴물 같은 작자.'
콕시의 보스는 떨리는 손으로 협약서에 사인하며 슬쩍 카를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돌아가는 정황만 보아도 녹스와 디르센의 구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디르센이 녹스를 들인 게 아니라 녹스가 디르센을 잡아먹은 것이다.'
당장 지금만 해도 보아라.
디르센을 따르는 수하들이 전부 저 남자의 눈치를 보고 있지 않은가.
광택이 도는 검은 가면,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작은 달빛 문양.
투르가와 디르센의 구도를 기어이 뒤집고 서부 3상업 지구의 패자인 라한을 집어삼킨 저들의 존재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고작해야 서부 3상업 지구가 목적일 리 없다.'
라한 따위는 발판에 불과할 터.
녹스의 전력이 나선다면 콕시는 물론이고 라한이나 다른 조직들 역시 쉽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라한을 유지시키고 앞세우는 건 녹스의 존재를 가리기 위함이겠지.
'피바람이 불겠구나.'
콕시와의 협약을 끝낸 후 밖으로 나온 디르센은 카를에게 물었다.
"난 이대로 복귀할 생각이오. 아직 조직 내부가 뒤숭숭하니 기강을 바로 세워야겠지."
"녹스에서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카를의 눈짓에 대기하고 있던 갤런과 세컨드가 다가왔다.
투르가를 꺾었다고 해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채 앙심을 품고 있는 이가 있을 수도 있으니.
갤런은 혹시나 숨어 있을지 모를 마인의 색출을, 세컨드는 라한의 기강을 잡아 줄 역할이었다.
"녹스 경은...."
"저는 잠시 손님을 맞이하고 오겠습니다."
"선약이 있으셨군. 알겠소."
디르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한의 본부로 복귀했다.
정적을 꺾고 보스의 자리를 거머쥐었으니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기에.
디르센이 탄 마차가 저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카를은 뒤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슬슬 나오지."
"하하. 자네 눈은 못 속이겠군."
건물의 지붕 사이.
흰 가면을 쓴 남성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일전 한번 충돌했던 정체 모를 집단의 조직원인 루카스였다.
"이야, 정말로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네. 라한은 시커먼 놈들이 꽉 쥐고 있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리도 손쉽게 장악하다니. 내 수하들이 자넬 보고 배웠으면 하는군."
"성직자들에게 과한 걸 바라는 듯한데."
"...어디서 들었나?"
배교자.
베샤가 녀석들을 그렇게 지칭한 걸 꼬집자 루카스가 두 눈을 껌뻑였다.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베샤, 그 쥐새끼로군. 그새를 참지 못하고 나불거렸단 말인가. 녀석은 어찌 되었는가?"
"악마의 품으로 돌아갔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뭐, 당연한 이치겠지. 그 거만한 녀석이 순순히 라한을 내어 줄 리는 없을 테니."
루카스는 고개를 들어 시퍼런 광망이 서린 눈동자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제 서로에게 좀 도움이 될 만한 건실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하는데."
126화 재회 (2)
"건실한 이야기?"
카를은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서로 간에 할 건실한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까.
'이전과 변한 건 없나.'
카를은 루카스의 모습을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얗다.
주변은 깊은 어둠으로 시커먼데 녀석이 서 있는 곳만 다른 조명을 받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뜨였다.
가면 안쪽에서 웃고 있다는 뜻이었다.
"라한을 먹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한을 앞세워 콕시를 밑으로 들인 것도 그렇고. 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디르센 저 친구를 세뇌한 건가?"
"세뇌라니. 나와는 좋은 친구인데."
카를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고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쪽의 눈을 피해 몰래 디르센에게 접촉했던 것 같은데.
'통할 리가 없지.'
천마신공 탈혼백에 고독까지 사용해 디르센을 복종시켰다.
2중, 3중으로 보안을 걸어 놓은 것이니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 세뇌를 깨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랬다가는 아마 디르센 쪽에서 먼저 백치가 되어 버릴 터.
저들 입장에서는 디르센을 이용해 라한을 움직여야 할 테니 결국 세뇌를 푸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스릉.
카를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바닥으로 내려진 검 끝으로부터 시커먼 불길이 타오르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루카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밤이 늦었네. 자네도 베샤와 싸우느라 피곤하지 않은가. 라한을 집어삼킨 축하도 해야지. 수하들이 목이 빠지라 기다릴 텐데."
"그러겠지. 그래도 축하를 하려면 축하주가 필요할 텐데."
"축하주? 말만 하게. 내가 적당한 걸 사 주지."
"적당한 것이라."
카를은 피식 웃으며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네놈의 피면 충분할 것 같은데."
쉭.
카를의 신형이 사라졌다.
한숨을 내쉰 루카스는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투덜거렸다.
"뱀파이어도 아니고 무슨 남의 피를 탐하는가. 어렵게 사귄 친구가 이리도 까탈스러워서야 원."
파앗!
허공에 새파란 빛이 피어오르더니 길쭉한 형태를 만들며 한 자루의 검이 되었다.
루카스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 자신의 옆을 향해 휘둘렀다.
캉!
날카로운 고성이 울려 퍼졌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카를이 루카스의 사각을 기습해 온 것이었다.
"오늘은 정말로 싸우러 온 것이 아니네. 자네가 라한을 먹은 걸 순수하게 축하해 주려고 온 것인데."
"선물은 네 목으로 받지."
"에잉."
쩌엉.
응축된 마기의 참격이 건물을 박살 냈다.
잔해를 밟으며 뛰쳐 나간 루카스는 맹렬한 기세로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카를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떨쳐내기는 쉽지 않겠군.'
첫 만남에는 순순히 보내줬으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끈질긴 것인지.
루카스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손아귀 안으로 푸른 빛이 모여들었고, 카를을 향해 그것들을 흩뿌렸다.
파바바밧!
마치 암기처럼 쏘아진 빛들이 엄청난 속도로 곳곳을 꿰뚫었다.
카를을 향해서도 몇 개의 궤적이 날아갔지만, 비스듬히 세워진 마검(魔劍)이 모든 공격을 튕겨 냈다.
콰아아앙!
거리가 뒤흔들렸다.
음지라고 해도 이 정도 소란이 일어난다면 점차 그 여파가 번져 나갈 터.
그건 루카스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필요 이상의 이목을 끄는 건 지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카를을 상대로 조용히 처리하는 건 불가능했으니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적당한 곳이 있군."
루카스는 씩 웃었다.
마침 저 앞쪽 어느 플릭으로 향하는 출입구가 있었다.
카를이 막 점령한 라한 영역의 플릭이었다.
저곳이라면 소란이 번져도 이쪽에 손해는 없을 터.
쉬악!
루카스는 한차례 가속해 지하로 내려갔다.
"누...!"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보초를 단숨에 베어 가르고 안쪽으로 박차고 들어갔다.
"뭐야?!"
"습격인가?"
조금 전까지 세력 다툼 중이었어서 그런지 출입구 쪽에 포진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아무리 많아봤자 루카스에게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정도밖에 되지 않은바.
그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선두에 있던 이들을 베어 버리고는 호쾌하게 길을 열었다.
"크아악!"
"적이다!"
쿵.
뒤이어 카를이 한 박자 늦게 뒤따라왔다.
황금빛 달이 각인된 검은 가면.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기에 모두 카를의 등장에 주춤했다.
툭.
플릭에 내려선 카를은 주위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최대한 물러나도록."
"아, 알겠습니다."
이들 모두 자신의 자원이었다.
라한을 통합한 지금은 아무리 플릭이라도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 했다.
탓!
땅을 박차며 루카스의 뒤를 쫓은 카를은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외통수에 몰았다.'
도시를 벗어나 플릭으로 들어왔다는 건 이목을 끌어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소리.
더욱이 이런 닫힌 공간에 들어왔다는 건 이쪽은 얼마든지 쓰러뜨리고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지 않을까.
'재밌군.'
카를은 두 눈을 서늘하게 떴다.
저번은 녀석들의 정체를 조사하기 위해 놓아주었지만, 종교 세력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쿵.
루카스의 뒤를 따라 건물 위쪽 지붕에 올라선 카를은 시커먼 마기를 풀풀 풍기며 그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떤 신을 섬기지?"
"...말하면 놓아줄 건가?"
"경우에 따라."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군. 살기는 좀 죽이고 말하게."
핀잔을 주는 말에도 카를의 살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전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루카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말해 봤자 모를 걸세. 세간에 알려진 신은 아니거든. 사람들에게 잊힌 지도 오래되었을 테고."
"그렇다는 건 네놈 역시 성직자라는 소리인데."
"포괄적으로 본다면 그렇겠지?"
"성직자가 손에 피를 묻히는 음지의 일을 해도 되는 것인가?"
"윽, 아픈 곳을 찌르는군."
루카스는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모시는 신님이 많이 관대하셔서 말이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게 지론이지."
"악신이로군."
"어허, 아무리 그래도 신을 모시는 성직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기인가. 그리고...."
휘릭.
루카스는 손안에서 검을 돌렸다.
"이것저것 재면서 좋은 일만 하기에는 우리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말이야."
촤악!
돌연 바닥에서 새하얀 궤적 몇 줄기가 뿜어졌다.
카를은 한 발짝 옆으로 움직여 그것들을 피해 냈지만, 궤적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휘릭.
마치 기다란 실처럼 뿜어진 궤적들이 카를의 팔다리를 휘감았다.
죄인을 구속하는 봉인구처럼 손목과 팔목을 동여매더니 강한 힘으로 잡아당기며 움직임을 제한했다.
캉!
그런 가운데 루카스가 쇄도하며 카를의 면전으로 검을 휘둘러 왔다.
그는 손발이 구속된 상황에서도 검을 움직여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카를의 모습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네. 움직이기 상당히 힘들 텐데."
"더 대단한 걸 보여 줄까?"
파아아앗!
마기가 휘몰아쳤다.
베샤와 싸울 때처럼 제한이 풀린 천마신공의 기운이 주변을 휩쓸며 파멸적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손발을 묶은 실들도 점차 한계를 맞이하더니 새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끊어졌다.
"...허어."
루카스는 혀를 내둘렀다.
신성한 주박을 끊어내?
"자네, 혹시 악마와 계약한 마인인가? 쓰는 기운도 그렇고 의심을 하지 않을래야 안 할 수가 없는데."
"그랬더라면 베샤를 죽이지 않았겠지."
"그건 그렇긴 하네만...."
루카스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전신에서 시커먼 기운이 풀풀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고 마인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터.
"뭐, 마인이라면 마인인 대로 좋고 아니면 아닌 대로 좋네."
악마와 계약한 마인이라면 성직자인 자신과는 대척점.
물론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긴 했다.
카를이 사용하는 힘이 악마의 것이었더라면 자신의 신성이 분명 반응했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정말 기묘한 힘이란 말이야.'
루카스는 카를의 마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대륙의 북부부터 남부, 그리고 저 옆쪽의 서대륙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 온 루카스였지만, 카를과 같은 힘을 사용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다.
가공된 힘이거늘 어찌 저렇게 순수함을 보일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사로잡아서 해부해 보고 싶군.'
그 구조만 파악할 수 있다면 교단에 제법 도움이 될 텐데.
"...."
루카스가 속으로 음험한 상상을 하고 있을 무렵, 카를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미 베샤와의 싸움으로 인해 한차례 힘을 소모한 그였다.
사실 베샤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뒤 심상의 세계에서 악마와 조우한 것이 문제였다.
그런 특이한 존재와의 만남은 심력을 상당히 깎아 먹는 일이라는 걸 이번 일로 알게 되었다.
'그래도 문제는 없어.'
여차하면 혼원일극신공을 사용하면 되었다.
녹스의 카를은 대외적으로 천마신공만을 사용했기에 다른 힘을 선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루카스에게는 아직 알아낼 정보가 많이 남아있었으니 어느 정도 대등하게 균형을 이루며 저 입을 자극하는 중이었다.
힘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쏠린 걸 알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위기감을 느끼고 침묵하기 시작할 테니.
스팟─!
루카스로부터 기습적인 공격이 쇄도했다.
궤적을 따라 일어난 새파란 참격이 빛살처럼 닥치고 들어와 카를을 베어 갈랐다.
카를은 호신기를 일으켜 정면에서 그 공격을 버텨 내고는, 암류보를 밟으며 어둠 사이로 섞여들었다.
"하하, 자네와 같은 기운을 풀풀 풍기며 모습을 감출 수 있을 듯싶은가!"
캉!
루카스는 주먹을 움켜 쥐었다.
동시에 그의 등뒤에서 새파란 불꽃이 치솟아 오르며 기다란 몸을 지닌 한 마리의 거대한 뱀을 만들어 내었다.
"바실리스크."
쿵.
주인의 부름에 소환된 사역마가 플릭의 거리를 짓누르며 시퍼런 불길을 계속해서 토해 냈다.
그 가운데 허공을 디디며 뛰어오른 카를은 바실리스크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저저적.
응축된 천류혼섬의 참격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신성으로 보호되던 그 커다란 몸은 갈가리 찢겼고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뭐, 이 정도는 쓰러뜨릴 줄 알고 있었네."
바실리스크의 몸 가운데.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던 루카스는 자신이 만들어 낸 활의 시위를 놓았다.
쐐애애액!
한 줄기 궤적이 허공을 꿰뚫으며 맹렬한 기세로 카를에게 닥쳐 갔다.
카를은 이전과 같이 정면에서 그 공격을 받아 냈지만, 화살의 촉이 검에 닿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무게가 상당했다.
즉, 힘을 숨기고 있던 건 카를 뿐만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루카스 역시 기회를 엿보며 자신의 전력을 감추고 있던 것이었다.
파각.
화살과 충돌한 검에 균열이 일며 자글자글한 실금이 퍼져 나갔다.
카를은 천마신공의 힘을 더욱 끌어올리며 힘을 주었고....
쩌엉!
기회를 노린 루카스의 공격을 튕겨 내는 데 성공했다.
"...."
다만, 손에 쥔 검은 그 여파로 반토막이 나 버렸다.
"어떤가?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할 듯한데."
"...아니."
카를은 고개를 들어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오늘 여기서 끝내겠다."
그의 눈동자에는 잿빛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127화 재회 (3)
변수 차단.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 카를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였다.
서부 3상업 지구는 제국 음지의 전체로 따졌을 때 아주 작은 한 구역에 불과했다.
심지어 카를은 녹스의 간부들에게 중원의 무공까지 전수해 주었다.
전력의 전부가 수도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이틀의 시간만 주어지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을 밀어버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물밑에서 움직인 이유.
'바로 루카스와 같은 녀석들 때문이지.'
고작해야 상업 지구의 한 구역일 뿐이다.
그곳에 존재하는 조직원의 숫자를 전부 합쳐도 5천이 채 되지 않을 터.
하지만 제국 음지는 뿌리부터 얼기설기 얽혀 있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런 괴물이 툭 튀어나왔다.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고작해야 말단 음지 조직에 악마 숭배자들이 끼어 있거나, 이단을 믿는 배교자들이 숨어 있을 줄은.
'싸움은 기세로 끝내야 한다.'
오늘 밤, 카를은 라한을 정리했다.
투르가를 처리했고 녀석의 뒤에 도사리고 있던 악마 숭배자의 세력을 제거했다.
일차적인 위협 요소는 전부 정리한 것이나 마찬가지.
딱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면 루카스와 그가 속한 조직의 정체였다.
하지만 베샤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정보를 파악하게 된 이상 걸림돌이 아니었다.
'황궁이나 다른 유력 조직과 관련이 있다면 모를까, 이교도 집단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황궁은 여전히 바이에른 입학시험의 배후를 찾기 위해 수도의 암흑가를 수색 중이라고 했다.
이 정도 강자면 황궁에서 나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기에 의심했던 것이었다.
'내 신원도 노출되었었고.'
당시 드레이크를 막아 내느라 나섰던 탓에 적지 않은 생도들이 자신의 모습을 목격했다.
의도하고 한 행동이니 거리낄 건 없었지만, 우연한 상황이 맞물리며 황궁의 사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상대는 황궁의 끄나풀이 아니었다.
쿠웅.
플릭 안쪽.
생존에 민감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싸움의 여파를 느끼고 이미 자리를 피해 멀리 달아났다.
지켜보는 이도 없었기에 카를은 마음껏 자신의 진신절기를 펼쳤다.
'천마신공은 잘 막아 냈지만.'
혼원일극신공의 힘까지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
잿빛 기운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흘러내리며 잔잔한 기류를 흩뿌렸다.
천마신공처럼 패도적인 기세가 아니었음에도 루카스는 이전처럼 섣불리 달려들지 못한 채 신음을 토해 냈다.
"으음."
숨 막힐 듯한 대치가 이루어졌다.
루카스는 갑작스럽게 뒤바뀐 카를의 기세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이지?'
활화산처럼 뿜어지던 시커먼 마기가 돌연 색이 옅어지더니 잿빛으로 뒤바뀌었다.
마나의 색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일까?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카를의 능력에 루카스는 눈알을 굴렸다.
'그렇다고 한들 결국 마나다. 우위를 따지자면 신성력을 이기지 못해.'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 중 최상위에 있는 힘이 바로 신성력이었다.
신을 향한 믿음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기운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니.
웅웅.
루카스 역시 손에 쥔 푸른 빛깔의 검에 힘을 더하며 칼날을 바로 세웠다.
그로서는 가급적 싸움을 그만두며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카를 쪽에서 이리 끈덕지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
당장 쓰러뜨리는 건 쉽지 않아 보였으니 크게 한 방 먹이고 적당히 때를 보아 도주할 생각이었다.
'나로서도 녹스가 굳건하게 존재해 주는 것이 좋고.'
루카스에게 있어 녹스는 종잡을 수 없는 변수였다.
서부 3상업 지구는 영락없이 베샤 무리에게 빼앗긴 줄 알았는데 이처럼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와서 강탈해 가다니.
자신들과 상극인 마인 무리가 활개치고 다니는 것보단 나았다.
쉭.
루카스는 지붕을 박차며 카를에게로 달려들었다.
그가 움직이질 않으니 루카스 쪽에서 선공을 가한 것이었다.
쩌엉!
하지만 재차 검을 맞대는 순간.
"...!!"
검을 타고 흘러들어온 막대한 여파에 무언가 잘못됨을 깨달았다.
쿵.
균형을 잡지 못한 채 튕겨 나간 루카스가 지붕을 부수며 추락했다.
카를은 그 위쪽을 향해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쏘아진 검기가 잔해를 난도질했지만, 그 가운데서 루카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갑자기 또 무엇인가."
저 위쪽.
어느새 몸을 빼낸 루카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헛바람을 토해 냈다.
"자넨, 양파 같은 사람이로군. 까도 까도 새로운 게 계속 튀어나와."
"힘을 숨기고 있는 건 피차 마찬가지겠지. 내 쪽에서 먼저 보여주었으니 그쪽 걸 기대해도 될까 싶은데."
"흠."
루카스는 턱을 긁적였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오만하군."
카를은 피식 웃으며 검을 세웠다.
그 직후 그의 신형이 사라졌기에 루카스 역시 지붕을 박차며 기다랗게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뿜어진 오러가 사방을 헤집었다.
건물은 무너져 내렸고 거리는 초토화되어 버려 원래와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지?'
루카스는 재빨리 눈을 돌렸다.
이전과 달리 카를의 기척이 자신의 기감에 감지되지 않았다.
사용하는 힘이 달라져서 그런 것일까.
"...!"
거미줄처럼 퍼진 기감이 곧 카를의 기척을 잡아냈지만, 잿빛 궤적이 그보다 먼저 루카스에게 다다랐다.
서걱.
날카로운 참격과 함께 검을 쥔 그의 팔이 허공에 나부꼈다.
루카스는 헛바람을 토해 내며 몸을 뒤틀었으나, 이미 잘려 나간 팔은 주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바닥을 굴렀을 뿐이었다.
"...음."
팔을 잃고 검까지 놓쳐 버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루카스는 잘린 팔의 위쪽을 움켜쥔 채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
하지만 카를 쪽 역시 통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감촉이 이상한데.'
루카스의 허점을 찔러 팔 한쪽을 베어 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베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사람의 피륙을 베는 것보다는 두껍게 꼬아 놓은 짚을 가르는 듯한 느낌이....
"인형이로군."
카를은 단번에 상대의 정체를 간파했다.
발을 들어 잘린 팔을 힘껏 밟자 형태가 무너져 내리며 조각들이 으깨졌다.
흩어진 조각은 살점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들어진 무언가였다.
"흠, 들켜 버렸군."
루카스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항복의 자세를 취했다.
"양해해 주게.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서 말이야."
"네 목적은 무엇이지?"
이교도라고는 하나 성직자 주제에 인형의 탈을 쓰고 음지를 빌빌거리는 이유가.
어느 요소 하나 어울리는 것이 없기에 카를은 진심으로 의아했다.
그러자 루카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난 성직자네. 성직자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내가 믿는 신의 포교지. 어때, 관심이 있는가?"
"관심이야 있지. 다른 쪽이긴 하지만...."
쉭!
카를은 기습적으로 땅을 박찼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루카스의 목을 움켜쥐었고 녀석의 움직임을 억눌렀다.
"그렇게 거칠게 대하지 않아도 된다네. 어차피 정체도 밝혀졌고 떠날 생각이었으니. 아, 걱정하지 말게. 또 다른 몸으로 찾아오도록 하지."
"다른 몸이라."
카를은 피식 웃으며 루카스의 목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렇게 말하니 그쪽 얼굴이 더 궁금해지는군."
"미안하지만, 내가 좀 귀한 존재라서 말이야. 그러니 부득이하게 이런 꼴로 움직이는...."
콰아악.
루카스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인형과 연결된 통로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기이한 기운의 침입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무, 슨."
루카스의 말이 어눌해지고 행동은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카를은 녀석의 목을 붙잡은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천마신공 탈혼백.
솔직히 말해서 반신반의한 채 시도한 것이었다.
'인형에도 먹힐지는 모르겠는데.'
상대의 정신과 영혼에 간섭에 영향을 끼치는 술법.
반대로 인형은 짜인 육신에 의식을 불어넣는 술법이었다.
일단 정신적인 통로가 연결되어 있으니 그쪽을 통해 침입하면 되지 않을까.
카를은 대화를 통해 루카스의 방심을 유도했고 천천히 녀석의 기맥을 훑으며 역공을 가했다.
도중 들키고 말았지만, 침입하는 데는 성공한 듯싶었다.
슈아아악!
카를은 두 눈을 감았다.
조금 더 녀석의 회로에 집중하기 위해 의식을 가다듬고 탈혼백의 수위를 올렸다.
"너, 무슨, 멈...춰...!"
루카스는 카를이 자신의 회로에 간섭해 의식에 침입해 오고 있다는 걸 느끼고 인형과의 연결을 끊어 내려 했다.
그 탓에 몸 곳곳이 터져 나가며 과부화가 걸렸지만, 카를은 더욱 강하게 녀석을 움켜쥐었다.
사아아악.
기운이 역류했다.
그 사이, 퍼져 있는 건 기묘한 힘.
'신성력이로군.'
카를은 루카스의 신성력을 머릿속에 새기며 그 가운데를 헤엄쳤다.
대체 어떤 신을 섬기고 있기에 이런 짓을 꾸미는 걸까.
'인형, 인형술사라.'
칠익의 마티아스.
에렌달 숲에서 싸웠던 녀석은 숲에 괴물을 풀어놓은 이를 인형술사라 칭했다.
'또 있어.'
바이에른 입학 이후 개최되었던 생도 교류회.
자신은 한 웨이터가 어느 생도의 잔에 약을 타는 걸 목격했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갔고 누군가 웨이터의 몸을 움직여 수작을 부린 걸 알게 되었다.
'바이에른까지 잠입해 있다?'
그쪽도 높은 확률로 루카스가 수작을 부린 것일 터.
수도의 음지뿐만이 아니라 바이에른에도 마수를 뻗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추측일 뿐이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는 모두 동일인일 가능성이 상당해 보였다.
『내!』
루카스의 회로를 통해 저쪽과 연결된 정신으로 침입하던 중 커다란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신에서!!』
이전까지의 목소리와는 달리 처절하고 한이 맺힌 절규였다.
『썩 나가지 못할까!!』
엄청난 압박이 가해졌다.
일순간 카를의 정신이 뒤흔들렸을 정도로 거센 공격이었다.
'탈혼백이 밀린다고?'
카를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술 자체에서 고저가 나뉜 건 아니었다.
단지 상대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았기에 이루어진 현상.
자칫 잘못했다간 구도가 바뀌어 루카스의 정신이 이쪽을 침범당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만일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난다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이 없을 터.
카를은 미련 없이 연결을 끊었다.
'다시 보게 되는 날을 기대하지.'
자그마한 선물을 남겨 놓은 채.
* * *
"...."
루카스는 거처에서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역작이었던 인형을 버릴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까.
상대는 어떤 수법을 쓴 것인지 이쪽의 정신까지 침범해 역공을 해 왔다.
"당신, 괜찮아요?"
"...."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수건을 들어 얼굴에 흠뻑 뒤덮인 식은땀을 닦아 주려 했지만, 루카스는 거칠게 손을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화륵!
돌연 그의 얼굴 한쪽에 시커먼 불길이 치솟았다.
카를이 남겨 놓은 자그마한 선물.
역류한 천마신공의 기운이 선명한 흔적을 새겨 준 것이었다.
꽈악.
얼굴을 움켜쥔 것으로 마화(魔火)를 꺼뜨린 루카스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재밌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자극한 인간은.
"...정말로, 재밌어."
128화 외부 견학 (1)
"합!"
우렁찬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이에른의 연무장, 그 가운데서 레이시스는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카를이 알려준 창궁무애검법의 초식을 하나하나 익혀 나가는 중으로 정확한 자세를 잡기 위해 일 검, 일 검에 모든 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더불어 연무장 한쪽에 기대어 있는 카를이 그녀의 자세가 틀릴 때마다 지적해 주었다.
"오른팔의 각도를 더 벌려야 합니다. 검의 궤적이 더 넓어지도록."
"발을 내디디는 기세가 부족합니다. 무게중심을 조금 더 앞으로 하세요."
카를은 끊임없이 지적했다.
일단 틀을 만들어 놓아야 그 안에서 성장이 이루어지는 법.
잘못된 습관을 들인다면 추후 고생을 하게 되었다.
고치기도 힘들었고 뻗어 나간 가지가 비틀려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터.
"...허억, 허억."
갈수록 레이시스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는 것도 힘든데, 정확하게 자세를 유지하면서, 또 시시각각 들려오는 카를의 지적까지 신경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전신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졌지만, 레이시스는 정신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잠자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카를은 속으로 생각을 곱씹었다.
'서부 3상업 지구는 이제 전부 해결되었다.'
주말이 지나고 주중에 이르렀다.
마인의 수장인 배샤, 그리고 이교도 집단의 루카스까지.
둘을 모두 정리한 카를은 다시 바이에른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뒤처리는 수하들과 라한을 통합한 디르센이 깔끔하게 정리해 줄 터.
'루카스를 완벽하게 끝내지 못한 것이 아쉽군.'
이교도 집단의 인형술사.
아직 그 정체는 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어떤 신을 섬기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 앞에 나타났는지 등.
중요한 건 아직 하나도 알지 못했으니까.
'신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녀석들이 종교 집단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하나의 신념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해 관계로 모인 조직과는 다르게 믿음으로 똘똘 뭉친 맹목적인 신자들의 움직임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물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하수인들만큼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마인들 쪽은....'
만리추종향.
아르테니아에서 재현해 낸 그것이 이정표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마인 중 굵직한 기운을 지닌 녀석들에게만 뿌려 놓았다.
베샤의 말을 들어 보면 서부 3상업 지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것 같으니 종종 추종 향이 묻은 이들을 만나게 될 터.
그들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마인들의 조직이나 뿌리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녹스의 이름은 퍼져 버렸어.'
라한과 함께 서부 3상업 지구를 장악했으니 명성이 퍼지는 건 당연했다.
어차피 마인과 마주한 이상 그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악마들로부터 이야기가 오갈 테지.
천마신공의 힘이 녀석들에게 압도적인 상성을 발휘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마주치면 그 목을 뽑아 주면 될 뿐이었으니까.
반면 루카스 쪽은....
'선물이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군.'
의식은 쫓겨났지만, 그 통로를 이용해 마킹을 새겨 두었다.
아마 그 몸 중 어딘가가 마기에 타들어 가지 않았을까.
성수나 포션으로 치료해도 흔적이 남을 것이다.
감쪽까지 상처를 치료해도 상관 없었다.
신공의 마기로 이루어진 불꽃에 마킹을 당한 이상 마주치게 된다면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마인이든 루카스 쪽이든 앞으로 신중하게 접근해 오겠지.'
남은 건 서부 3상업 지구의 안정화, 그리고 녹스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었다.
당장 급한 일은 전부 끝났으니 당분간은 여유가 생겼다는 소리.
추후 화이트 라벨 한 명 한 명이 간부급이 될 수 있도록 수준을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후우."
한 차례 창궁무애검법 초식의 반복을 끝낸 레이시스가 깊은 숨을 토해 내며 검을 내렸다.
그녀는 흘러내린 땀을 닦아 내며 반짝이는 눈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실력이 빠르게 늘어 가는군요."
"그렇죠? 저도 스스로 느끼고 있었어요. 카를이 가르쳐 준 검술이 제 몸에 딱 맞아 들어가는 게. 마치 저를 위한 검술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카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잘 가르쳐 준 것도 있었지만, 레이시스 자체의 무재(武才)가 제법 뛰어났다.
이전에도 말했듯 재능으로만 따지자면 블랙 라벨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대로 창궁무애검법까지 순조롭게 익히고 성장한다면, 간부의 자리도 노려볼 법할 터.
역시 자신이 점찍은 인재였다.
"후우."
레이시스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뒤로 질끈 묶은 채 카를을 바라보았다.
"내일이네요, 외부 견학."
"네, 기대하고 있습니다."
"카를은 역사나 유적지를 좋아하니까요."
내일은 제국의 역사 강의에서 진행하는 외부 견학이었다.
토호슈 영지 쪽에 위치한 고대 유적을 견학하러 가는 터라 다들 분주하게 준비 중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전부 발굴이 끝난 유적들이긴 하지만.'
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특정 기운에만 반응하는 기믹이나 장치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정의"가 후인을 위해 남긴 유산이 하나뿐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견학 방식은 자유롭게 진행된다고 들었는데, 혹시 일행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조용히 혼자 돌아보려고 합니다."
당연히 막시밀리안이나 다른 생도들이 함께 다니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카를은 조용히 유적 조사를 하고 싶었기에 전부 거절하고 홀로 움직이는 걸 택했다.
아무래도 다른 시선이 있다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힘들 테니까.
"진지하게 조사해 보려고 하는 건가요?"
"네. 발굴이 끝난 유적이라고 해도 혹시 모르잖습니까. 우연히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고."
"하긴 카를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 검도 그렇고...."
신검(神劍) 천뢰.
황궁에 잠들어 있던 "정의"의 유산.
영웅이 남긴 시련을 통과하고 그것을 당당히 거머쥔 카를이라면 무언가 다른 걸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저도 도와드려도 될까요?"
"...레이시스 양이?"
"네, 방해는 하지 않을게요. 뭔가를 발견해도 지분이나 보상을 요구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궁금해서요. 또 어떤 게 잠들어 있을지."
토호슈 영지의 유적은 이미 뼈대까지 조사가 끝난 것들이었다.
하지만 카를과 함께라면 무언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전 카를의 진면목을 알고 있으니 거리낄 것도 없잖아요?"
진면목이라.
카를은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시스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 봤자 일부뿐이거늘.
물론 바이에른 전체로 따지자면 생도 중에서는 가장 자신의 본질에 닿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력도 제법 뛰어나고.'
향후 녹스로 스카우트할 계획이었으니 이런 쪽으로 호감도를 올려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그리고 함정 같은 게 있다면 수련의 명목으로 내세울 수도 있을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를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토호슈.
산골짜기와 유적, 그리고 계곡으로서의 여행지로 유명한 관광 영지였다.
쾌적한 봄날이 지속되는 만큼 토호슈를 찾는 관광객도 한가득 있었다.
바이에른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카데미에서도 외부 견학을 진행 중인지 다양한 제복을 입은 생도들이 거리 곳곳을 돌아다녔다.
달그락.
외부 견학이 시작되는 건 점심 이후인 오후부터였다.
일찍이 토호슈로 내려온 카를은 미리 전세를 낸 한적한 카페에서 차를 즐기며 거리를 구경 중이었다.
"마스터."
계단을 올라온 중년인이 카를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토호슈에 요양을 하러 온 관광객으로 위장한 나인이었다.
"수도 쪽은?"
"큰 이슈는 없습니다. 디르센은 잡음 없이 라한을 통합했고 정식으로 보스의 자리를 승계받았습니다."
카를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의 아버지인 라한의 보스는 와병 중이라 제대로 된 활동이 불가능했다.
경쟁자였던 투르가를 제거했으니 보스 자리에 올라서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수도의 정리로 바쁠 텐데 이쪽 일까지 시켜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마스터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쁠 따름입니다."
나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녹스의 정보 조직을 통괄하는 만큼 그녀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현재는 바이에른 내부로부터 시작해 수도의 음지 곳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은밀하고 어두운 곳으로 더 깊게 파고들며 녹스를 지탱할 중요한 근간이 될 터.
"일단 앉지."
"예."
나인은 자리에 앉으며 품에서 꺼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말씀하신 유적지의 자료입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세 곳을 선정했습니다."
"흠."
카를은 서류를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하루 동안 토호슈 영지의 유적을 전부 돌아다닐 순 없었다.
그러니 녹스를 움직여 미발견 유적이 남아 있을지 모르는 유력한 곳을 조사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가고일 첨탑인가"
"이 뒤쪽 레훌람이라는 산 중턱에 자리한 유적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첨탑만 홀로 세워져 있어 가장 유력한 곳으로 선정했습니다."
"제국도 찾지 못했다는 소리군."
"예. 그만큼 철저하게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국 유적 탐사대의 실력은 대륙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다.
토호슈 영지의 유적이 발굴된 건 이미 수십 년도 더 전의 일.
그런 가운데 가고일 첨탑 주변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존재하지 않거나 특수한 방법으로 감춰져 있다는 소리겠지."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위블렘의 사원.
토호슈 영지 중앙에 위치한 유적으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지상뿐만 아니라 지하로도 개미굴처럼 곳곳이 파여있어 숨겨진 공간이 많았다.
세 번째도 같은 사원으로 앞선 둘보다는 가능성이 조금 떨어져 보였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위블렘 쪽도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
"그쪽은 전쟁통에 피난처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숨겨진 보물이나 비밀의 방을 발견했었다는 말들도 많았습니다."
"흠."
카를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세 곳을 전부 둘러보기에도 시간이 빠듯했으니 가고일의 첨탑과 위블렘 사원으로 만족해야 할 듯싶었다.
'애초에 견학을 겸해서 찾으러 온 것이지.'
무언가 나오면 좋은 것이고, 나오지 않는다면 견학 자료로 공부했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유적에 관한 자료와 공부가 많아질수록 앞으로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이 두 곳으로 하지."
"남은 한 곳은 저희가 조금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가십니까?"
"슬슬 레이시스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어서."
"아."
나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자리에 퀸이 있었다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겠지.
내친김에 자신이 직접 따라나서며 함께 조사하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근처에 아이들을 배치해 놓겠습니다. 필요하실 때 언제든 불러 주시길."
"알겠다."
나인과 헤어진 카를은 곧바로 카페를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시스는 이미 그곳에 나와 있었다.
자유 견학인 만큼 바이에른 제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는데, 레이시스의 복장을 보는 순간 카를은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작정하고 준비해 왔군.'
가벼운 자켓에 둘린 경갑, 질겨 보이는 가죽 바지와 단단한 부츠, 그리고 허리춤에 달린 도구들까지.
유적 탐사라기보다는 도굴 쪽에 더 잘 어울리는 복장이었다.
"아, 카를!"
그런 카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발견한 레이시스는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129화 외부 견학 (2)
카를이 첫 번째 수색지로 선택한 건 위블렘 사원 쪽이었다.
이곳 토호슈 영지에서 가장 큰 유적지였기에 일단 이곳부터 시간을 투자해 돌아볼 생각이었다.
"바이에른 생도, 확인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유적지인 만큼 제국에서 직접 관리하며 관광 유적으로 활용했기에 입장료도 받았다.
다만, 생도 측은 바이에른에서 이미 프리패스 권을 끊어 놓았기에 따로 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툭.
사원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안쪽으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전 미발견 유적지의 사원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구조물이었다.
"와아!"
천장은 위쪽까지 뻥 뚫려 있고 지상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그 압도적인 규모에 레이시스는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로 크네요. 여기만 해도 제 궁보다 더 큰 것 같아요."
"제국에서 제일 큰 사원이라니 말입니다.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군요."
카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들 말고도 바이에른 생도로 보이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아무래도 제일 큰 유적지인 만큼 이곳을 시작 지점으로 삼은 듯했다.
"여길 전부 둘러보는 것도 일이겠군요. 워낙 규모가 큰 탓에 어디부터 봐야 할지...."
"그걸 대비해!"
앞서가던 레이시스는 카를의 말을 자르며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고는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카를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카를이 흥미를 보이자 레이시스는 살짝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뚜껑을 열었다.
"왕국에 연락해서 어젯밤에 급히 공구했어요."
"아티팩트, 입니까?"
"네. 재퀸스의 안경이라 불리는 아티팩트예요. 숨겨진 유적이나 장치를 찾아 주죠."
"비슷한 류의 아티팩트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군요."
카를은 가볍게 감탄했다.
유적 탐색과 관련된 아티팩트는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비쌌다.
카를도 녹스를 통해 몇 번 구입을 시도했는데 매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전부 허탕을 치고 말았다.
'현대 기술로도 만들기 쉽지 않다지.'
설령 현대 기술로 만들었다고 해도 탐지할 수 있는 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적뿐이라고 했다.
그 시대를 향유하는 마나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데, 재퀸스의 안경 역시 유물 취급을 받는 귀한 아티팩트일 터.
"이걸 이렇게 하면...."
달칵.
레이시스가 힘을 주자 재퀸스의 안경이 반으로 부러졌다.
아니, 분리된 것이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외눈 안경이 된 그것에 장식을 달고는 카를에게 손짓했다.
"얼굴 좀 가까이 와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카를은 순순히 레이시스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그녀는 손을 뻗어 눈가에 안경을 고정해 주었다.
단 안경, 모노클이라 부르는 형태.
레이시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잘 어울리네요."
"이렇게 분리해도 제 기능을 하는 겁니까?"
"네. 이게 정석적인 사용 방법이라고 했어요. 일반적인 사람의 시야로는 두 개를 전부 사용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오."
카를은 곧 레이시스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재퀸스의 안경을 통해 유적을 바라보자 그 테두리에서 새파란 빛깔이 비쳤다.
마치 무언가를 알려 주듯 은은하게 빛나며 유적의 모습을 한층 더 고급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파란 불빛은 유적이라는 걸 나타내고, 초록은 숨겨진 공간, 노랑은 창고, 빨강은 함정이에요."
"그렇군요. 유적지라 전부 파란색으로 보입니다. 아, 저긴 노란색이군요."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였다고 하네요. 이미 조사가 끝났겠지만, 그래도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혹시 모르잖아요? 천천히 돌아다녀 보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아티팩트까지 준비해 줄 줄은 몰랐기에 고마움도 있었다.
이런 부분은 왕녀가 아니었더라면 도움을 받지 못했을 터.
'가능성이 더 높아지겠어.'
솔직히 위블렘 사원 쪽은 워낙 유명한 유적지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 이후 카를과 레이시스는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도중 매점에서 파는 간식도 사 먹고, 가끔 아는 얼굴을 만나면 인사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경과했다.
"없네요."
"없군요."
카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돌아다니는 동안 제법 즐겼다는 것이 희소식일까.
두 시간을 써서 사원을 한 바퀴 돌았는데 딱히 특별해 보이는 건 없었다.
지하 쪽도 규모가 크니 둘러보고 싶었지만, 사람이 워낙 많았기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하긴 그래요. 수십 년간 물고 뜯고 맛보고 다 한 곳일 텐데 뭘 찾는 게 더 힘들겠죠."
밖의 경지가 잘 보이는 테라스의 난간에 기댄 레이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나 했는데 아쉽군요."
"다른 유적들도 비슷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찾아본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겠죠. 다음으로 생각하신 곳은 있으신가요?"
"있습니다."
"어디예요?"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적지가 아닙니다."
"...이쪽이 본 게임이었군요."
레이시스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카를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한창 때의 시간. 어차피 외부 견학은 자유 일정이었기에 원하는 만큼 둘러보다가 다시 바이에른으로 복귀하면 되는 것이었다.
조금 더 시간을 길게 끌자면 다음 강의가 있을 때까지 남아 있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저 위쪽에 레흘람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그 중턱에 놓인 가고일 첨탑이 다음 목표물입니다."
"산 중턱에 놓인 가고일 첨탑이라. 저는 처음 들어 보네요."
"전반적으로 유명한 곳은 아닌 것 같더군요. 이곳 토박이들에게나 좀 알려진 유적 같습니다.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고, 그쪽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군요."
물론 가고일 첨탑 쪽도 제국 차원에서 조사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일 터.
"좋아요, 가 보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위블렘 사원을 나온 둘은 곧바로 산을 올랐다.
카를은 나인이 챙겨 준 지도를 확인했고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초입 부분은 가벼운 산책로로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정규 코스에서 조금 벗어나자 가파른 산세와 우거진 초목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몬스터라도 나올 것 같은데."
"다행히도 그렇진 않답니다. 들짐승이라면 몰라도 몬스터는 없다더군요."
"그러면 다행이네요."
햇볕이 잘 들지 않아서 그런가.
그래도 분위기는 으스스했다.
"이 근처인 것 같습니다."
"아, 저기 있네요."
레이시스는 곧 가고일 첨탑을 발견했다.
이름 그대로 뾰족하게 솟은 탑 위에 가고일 석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첨탑?"
"첨탑이라고 부르기엔 많이 민망한 듯합니다."
다만, 그 높이가 매우 낮았다.
가까이 다가가도 살짝 올려다볼 정도의 높이였으니 말이다.
'주변 땅은 전부 죽어 있군.'
초목으로 가득한 산세와 달리 가고일 첨탑 주변은 풀 한 포기도 나지 않았다.
재퀸스의 안경을 끼고 바라보자 가고일 표면에서 푸른 빛이 솟아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적은 맞군요. 그럼 주변을 조사해 봅시다."
"네."
촤라락.
레이시스는 대답과 동시에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다란 삽이 펼쳐지며 그녀의 손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나.
"그것도 아티팩트입니까?"
"네. 단단한 땅이라도 쉽게 팔 수 있도록 해 줘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녀의 대답에 카를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 자신보다 더 본격적으로 준비해 온 것 같았기에.
푹.
카를 역시 가져온 장비로 첨탑 근처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다른 이들도 첨탑 주변을 조사했을 터.
하지만 그들과 달리 이쪽은 재퀸스의 안경이 있었다.
작은 단서라도 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거침없이 삽질을 해 나갔다.
푹.
그렇게 1시간 후.
"후우."
레이시스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허리를 폈다.
초인적인 육체와 힘을 가진 그들은 쉬지 않고 이 주변의 땅을 전부 헤집었다.
하지만 유적의 조각이나 그 흔적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네요. 이번엔 정말로 뭐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툭툭.
카를은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할까요? 다들 슬슬 이곳저곳 돌아봤을 테니 견학은 대충 마무리했을 텐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헛발을 짚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 이미 예상했다.
그래도 이 경험을 토대로 레포트를 작성한다면 점수는 받을 수 있겠지.
조금 아쉬운 것이지 손해를 볼 것은 없었기에 카를은 이만 조사를 끝내고자 했다.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슬슬 식당에 예약한 시간도 다가오고요."
"식당이요?"
"예. 수고해 주신 보답으로 저녁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레이시스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기대하지 않고 있던 이야기였기에 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가기 전에 어디라도 들려서 잠깐 씻고 가는 게 좋겠어요. 땀도 좀 닦고, 옷도 갈아입으려면. 드레스 코드도 맞춰 갈까요?"
"근처에 적당한 여관이...."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던 중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고히 서 있던 가고일과 눈이 마주쳤다.
"...."
신경에 거슬렸다.
이제껏 가고일의 주변만 조사했지 저 본체를 건드린 적은 없었다.
탁.
카를은 손을 뻗어 가고일 석상의 위를 매만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레이시스."
"네?"
꽈아악.
카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잠시간 심호흡을 내뱉는가 싶더니 그대로 가고일 석상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적잖은 충격과 함께 가고일의 상반신이 날아가 버렸다.
아예 산산조각이 되어 바닥에 흩뿌려진바.
남은 석상은 처참하게 부서진 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카, 카를...."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레이시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가고일 석상을 가리켰다.
"첨탑, 이라는 표현이 의심스러웠는데 역시 복선이었군요."
"...어?"
레이시스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카를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부서진 가고일 석상 안쪽으로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첨탑, 탑, 기둥이네요! 결국, 어디론가 향하는 통로죠!"
"네.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것 같습니다. 가고일 주변만 조사했다면 알지 못했겠죠."
카를은 가고일 석상을 손으로 짚은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내부의 일부가 비어 있다는 것을.
'조사꾼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나?'
카를은 허리를 숙여 부서진 조각을 쥐었다.
가볍게 내력을 주입해 보자 제대로 뭉치지 못한 채 흩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래서였군."
"네?"
"석상이 마나를 튕겨내 버립니다. 조사대도 저희와 같이 아티팩트로 조사했을 테니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겠죠."
"하긴, 그래요. 유적을 부술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
퉁퉁.
카를은 구멍 안쪽에 손을 넣고 가볍게 두드려 보았다.
내려가는 통로가 꽤 깊은 듯 소리의 울림이 달랐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옆에 있던 레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녁은 조금 나중에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130화 외부 견학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