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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6-112

106화 성장통 (5)

◆ ♥ ♣

레이시스는 구조물 위에 섰다.

옆쪽에서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생도들끼리 골렘을 소환해 시합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한 건 당연하게도 카를이었다.

강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실습까지 온 것이었다.

...다른 생도들도 당연하게 여기는 듯 파트너를 권유해 오지도 않았다.

강의 시간에도 이곳저곳에서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동급생도 동급생이지만, 선배들 쪽에서도 제법 이야기가 돌아다닌 듯싶었다.

풋풋하니, 좋을 때니, 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귀에 들려왔다.

나쁘지 않게 봐 주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레이시스는 그보다 카를이 더 신경 쓰였다.

"전 준비되었어요."

"저도 준비되었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카를과 레이시스도 서로 마주 보고 시합을 시작했다.

앞쪽에 튀어나와 있는 기둥에 마력을 주입하자 경기장 바닥에서 골렘이 툭 튀어나왔다.

레이시스가 만들어 낸 건 평범한 스톤 골렘이었고, 카를 쪽에서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파이어 골렘이 나타났다.

'좋아.'

상성에서는 이득을 보았다.

스톤 골렘을 파괴하려면 물리적인 충격을 가해야 하는 반면, 파이어 골렘은 물이라는 뚜렷한 약점이 존재했으니까.

쿵. 쿵.

두 골렘이 육중한 발걸음을 옮기며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레이시스도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츠즈즈즈.

마력 회로에 술식을 세우고 마법을 확립 후 발산한다.

학기 초에는 팬텀 불릿도 어렵사리 쓰던 실력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기초 마법 정도는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선택한 건 물 속성 마법인 워터 캐논.

손끝에서 뭉친 동그란 물줄기가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통! 통!

허공을 가로지르며 쏘아진 워터 캐논은 파이어 골렘의 몸에 직격했다.

치이이익.

파이어 골렘의 몸체가 흔들렸다.

워터 캐논이 기화되어 치솟은 새하얀 김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파이어 골렘의 몸은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계속해서 갉아 나가면 금세 쓰러져 버릴 터.

직접적인 타격을 줘서 파괴해야 하는 스톤 골렘보다 더욱 손쉬운 상대였다.

촤악!

돌연 레이시스의 골렘 앞에 토벽이 치솟았다.

길목을 막아 목적지로의 진입을 늦추려는 카를의 시도.

하지만 레이시스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토벽 위에 워터 캐논을 쏘아 무르게 만들었다.

쿵.

젖은 곳을 몸으로 밀고 나온 스톤 골렘이 담담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레이시스는 워터 캐논을 연사하며 계속해서 파이어 골렘을 공략했다.

촤아악!

하지만 곧 허공에 배리어가 나타나 그녀의 공격을 막아 버렸다.

'읏.'

워터 캐논을 계속 쏘아 보냄에도 끄떡없는 배리어의 모습에 레이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배리어는 제법 고난이도 마법이었기에 아직 사용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저것을 뚫을 수 있는 마법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돌파해야 하지?'

기초 마법으로는 배리어를 뚫지 못할 텐데.

그녀는 난간을 붙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검이었다면 두 번, 아니 세 번 정도 휘두르는 것으로 산산조각 낼 수 있었겠지만, 마법은....

'아니,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탕! 탕! 탕! 탕!

레이시스는 손을 뻗고 팬텀 불릿을 쏘았다.

자신이 제일 잘하고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마법으로 승부에 나선 것이었다.

배리어 계열의 마법은 한 곳을 타격해 부수는 것이 정석적인 대응 방법이었다.

팬텀 불릿이 기초 중의 기초 마법이라 할지라도 잘만 가다듬는다면 어지간한 공격 마법 부럽지 않은 위력을 낼 수 있었다.

탕! 탕!

레이시스는 차분히, 그리고 또 정확하게 배리어 위를 가격했다.

그러자 반투명했던 그 표면에 실금이 생겨났다.

그 모습을 확인한 레이시스는 더욱 힘차게 팬텀 불릿을 쏘아 보냈다.

콰직.

퍼져나간 실금은 기어코 균열이 되어 배리어를 파괴해 버린바.

곧 그녀는 즉시 워터 캐논으로 마법을 바꾸어 파이어 골렘을 타격했다.

솨아아아.

그러자 이번에는 세찬 바람이 불어와 워터 캐논의 궤도를 비틀어 냈다.

"아앗!"

배리어도 아니고 이건 어떻게 뚫어야 하지?

투사체를 쏘아 보내는 마법인 이상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람의 궤도를 계산해서 쏘아 보내야 하나?

머리가 터질 것같이 복잡해졌다.

"...하하."

카를은 갈팡질팡하는 레이시스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걸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그는 가볍게 손을 내밀어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스톤 골렘의 몸 전체를 물로 적셨다.

그리고, 빙결 마법을 통해 단숨에 얼려 버렸다.

저저저적.

단순히 표면만 얼어붙었다면 스톤 골렘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걸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의 홈으로 파고든 물줄기가 모두 얼어붙었고 스톤 골렘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기긱, 기기기긱.

스톤 골렘의 몸이 뒤틀리며 기우뚱거렸다.

뒤늦게 그 모습을 본 레이시스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안 돼!"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곧바로 불길을 일으킨 레이시스가 얼어붙은 스톤 골렘을 녹이려 했지만, 그 행동 자체가 패인에 가까웠다.

파각.

급속 냉동 후 급격한 가열.

극단적인 온도 차에 타격을 받은 스톤 골렘의 몸이 버티질 못했다.

잠시간은 제대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곧 그 석재 표면 위에 균열이 생기며 파편이 갈라져 나왔다.

"엇?!"

레이시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뒤늦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했기에 패배하기 전에 먼저 상대의 골렘을 파괴하고자 했다.

촤아아악!

워터 캐논에 마나를 때려 박아 아예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수를 써온 카를이 모래 철퇴를 움직여 연약해진 스톤 골렘의 몸통을 가격했다.

파각─!

파편이 비산하고 그 커다란 몸이 주저앉았다.

스톤 골렘은 하체가 박살 난 상황에서도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곧 바닥에 엎어졌고 얼굴을 바닥에 묻는 것으로 행동을 정지했다.

삐빅.

두말할 것도 없는 카를의 승리.

제대로 손을 써보지도 못한 채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레이시스는 살짝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구조물 위에서 내려왔다.

다른 생도들의 차례였으니 자리를 내어주기 위하여.

그 뒤로 카를과 객석으로 돌아와서는 툭, 하고 내뱉었다.

"마법, 어렵네요. 나름 용을 써 본 건데 이렇게 허무하게 질 줄은 몰랐어요."

"허무한 건 아닙니다."

"아닌가요?"

"수 싸움에서 밀린 거지 마법의 활용 자체는 좋았습니다. 제 골렘도 타격을 많이 입지 않았습니까?"

"흠."

그랬나?

레이시스는 팔짱을 낀 채 기억을 되새겼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는 활발하게 치솟았던 불길도 자신의 워터 캐논 몇 방을 맞고 사그라든 느낌이었으니까.

더욱이 카를이 이런 걸로 거짓을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그간 열심히 했었지.'

학기 초, 처음 강의를 수강할 때는 마법의 입문 과정에 막 발을 들인 것과 다름이 없었다.

기초 마법인 팬텀 불릿을 사용하는 것도 어려워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제법 성장한....

"아, 교수님이 오시는군요."

다른 생도를 평가해 주고 있던 브리드 교수가 카를과 레이시스 쪽을 향해 걸어왔다.

"카를로스 생도."

"네, 교수님."

"훌륭했습니다. 마법의 연계가 매우 매끄러웠어요. 상대 마법을 방어한 수단도 그렇고, 스톤 골렘을 물로 적시고 얼려 버린 것도 마찬가지예요. 골렘이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하면 상대가 당황해서 불을 지필 것으로 생각했나요?"

"그렇습니다. 보통은 불꽃으로 녹일 생각을 할 테니까요."

"좋아요. 기초적인 연계지만, 상대의 심리를 꿰뚫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수 싸움으로 유리한 국면을 끌어냈습니다. 추가 점수를 드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레이시스 생도."

"네, 넷!"

레이시스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브리드 교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우려와 달리 브리드 교수는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잘했습니다. 마법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죠? 그럼에도 카를로스 생도와 어느 정도 공방을 나눴다는 건 자질이 뛰어나다는 증거예요. 노력도 아끼지 않겠죠. 기록을 보니 성장률이 가파릅니다.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이지요. 계속 그렇게만 하시면 될 듯합니다. 열심히 하시라는 의미로 레이시스 생도도 추가 점수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상과 달리 극찬이 왔다.

아래쪽에서 주먹을 꽉 쥐어 속으로 환호성을 토해 낸 레이시스는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 이만."

브리드 교수가 다른 생도들을 평가하기 위해 떠나갔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긴장을 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진이 빠지네요. 다른 아카데미 생도들도 이걸 연습하고 있겠죠?"

"저희가 조금 늦은 걸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곳은 1학기부터 본격적으로 특훈에 들어간다고 했으니."

"발푸르기스의 밤은 저도 나가고 싶은데, 마법 쪽은 안 될 것 같아요. 도저히 자신이 없어 가지고."

"사람마다 특기가 다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계신 겁니다."

"...카를."

"예."

"마법은 실력을 얼마나 숨기고 있어요?"

"마법을요?"

"네."

레이시스의 말에 카를은 뺨을 긁적였다.

"마법은 저도 잘 쓰지 못합니다. 주력이 검이라서."

"이제 카를의 겸손은 믿지 않기로 했어요. 격차가 너무 크잖아요?"

"하하하."

레이시스의 말에 카를은 웃음을 터트렸다.

마법은 정말로 보조 수준으로밖에 익혀 놓지 않았다.

혼원일극신공이 있는 가운데 무엇을 익히든 곁가지가 될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의심에 찬 레이시스의 눈초리를 보아하니 쉽사리 믿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입니다. 마법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면 유리아 양에게 들켰겠죠."

사실 들키긴 했다.

하지만 그건 내기를, 마나를 다루는 수준이 일반 마법사보다 훨씬 뛰어났기에 간파를 당한 것.

마법 실력 자체는 그렇게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마탑 출신의 생도, 그 중 정점인 유리아와 마법으로만 싸운다면 십중팔구는 패배하지 않을까.

'실제로 지기도 했고.'

얼마 전 스터디의 광경이 떠올랐다.

서로 가벼운 마법전을 벌였고 그 결과는 카를의 압도적인 패배로 돌아갔다.

아르테니아에 온 이후 처음으로 겪는 참패.

물밑의 조직도 아니고 아카데미의 애송이에게 밀려 버린 건 카를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흐음."

레이시스는 그런 카를에게 눈을 흘기며 입맛을 다셨다.

다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혼자 끙끙 앓으며 고민했던 것이 허무해질 정도였다.

카를은 카를이고 자신은 자신이었다.

카를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으며, 자신도 그걸 알게 되었다고 해서 카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얄팍한 인성을 지니진 않았으니까.

...단지, 조금은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카를이 왜 실력을 숨기고 있는지.

"됐어요. 저도 유리아에게 부탁해서 마법이나 알려 달라고 해야겠네요."

"흠."

"왜요? 유리아와의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것 같아 좀 그런가요?"

"아닙니다. 단지."

카를은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조심하십시오. 마법에 관련된다면 유리아의 손속이 제법 매서워집니다."

이미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카를이기에 해 줄 수 있는 충고였다.

107화 조우 (1)

◆ ♥ ♣

적막한 연무장 가운데.

카를은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바쁜 한 주간의 일정도 어느 정도 끝이 보일 무렵 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얻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정말 오랜만에 무공을 수련했다고 할 수 있었다.

카를 정도 되는 고수라면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무공 수련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렇게 홀로 독백을 곱씹으며 집중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기에 시간을 따로 내주는 것이 좋았다.

'내면을 가다듬는다.'

심상을 차분하게 유지했다.

모든 공부는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차분하게 내부를 관조하고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해 나갔다.

혼원일극신공의 3성은 여전히 닿을 듯 말 듯했지만, 언제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재미난 것은 경지를 올리는 데 무공 성취만 도움이 되었던 게 아니었다는 점이지.'

앞서 말했듯 카를 정도의 고수라면 일상생활에서도 숨 쉬듯 수련이 가능했다.

그런 가운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겪어 오는 과정이었다.

막시밀리안을 심마로 일깨워 주었을 때도 그랬고, 유리아나 레이시스 같은 이들을 상대할 때 역시 그러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이나 심리 역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며 긍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사람과 어울리며 지내 오는 것만으로도 무공의 밑거름이 된다니.

신공 절학의 공능인가.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하던 당연함인가.

'고수들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수련을 멈추고 강호에 출도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인가?'

살수였던 카를은 살행(殺行)과 그 준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홀로 시간을 보내 왔다.

애초에 익힌 무공도 정공이 아닌 터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희소식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사아아아.

명천신공과 천마신공이 동시에 운용되며 카를의 몸을 내달렸다.

정공과 마공은 각각 순리와 역행을 그렸다.

서로 뒤섞이지 않고 정반대의 길을 나아가며 대칭을 이룬바.

하지만 그 또한 결국엔 한 점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서로 다른 갈래에서 이어진 하나의 흐름.

곧 완전한 합일을 이룰지니.

'혼원에서 시작하여 일극이 되리라.'

상반된 기운을 녹여내는 혼원일극신공의 유일무이한 묘리.

그 결과물인 웅혼한 혼원기가 고고한 기운을 내뿜으며 기맥을 타고 흘렀다.

천마신공보다 더 패도적이고 명천신공보다 더 도도한.

완벽한 무공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

평상시라면 여기서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은 채 조금 더 과감한 시도를 해 보려 했다.

쉬아아악!

내기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기혈을 타고 질주하던 혼원기가 나선 형태의 와류로 변하며 거친 야생마처럼 내달렸다.

속도는 이미 한계를 돌파했고 이다음은 어떻게 될지 카를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물론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무공은 신공절학으로 그 수준이 올라갈수록 구조와 균형이 오밀조밀한 짜임새로 이루어지는 법.

그것을 역행하고 마음대로 폭주하는데 리스크가 없을 리가.

오히려 신공절학이기에 그 위험성은 더더욱 커졌다.

'하지만 할 만하다.'

카를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계산을 반복했다.

유리아에게도 자문을 구했고 구간별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론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물론 유리아는 무공에 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기나 마나 같은 기운의 운용에 관해서는 귀중한 조언을 해 주었다.

마법적인 지식으로는 이쪽보다 훨씬 뛰어났으니 말이다.

쉬아아악.

혼원기가 결국 카를의 통제를 벗어나 자의를 품은 채 질주했다.

여기서 강제로 멈추려 했다간 큰 내상을 입고 말 터.

터지든가 뚫든가, 아니면 멈춰 세워지던가.

그 셋 중 하나에 이르러야 최소한의 피해로 이 위험천만한 실험을 끝낼 수 있었다.

카를 역시 멈추지 않았다.

가속, 가속, 가속....

이미 기호지세에 이르렀다.

그는 속도를 포인트로 잡았다.

혼원일극신공은 명천신공의 깊이와 천마신공의 패도를 합친 기운이었다.

패도적이며 깊이가 있다.

필연적으로 묵직하며 진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속도가 느리다는 것.

하지만 무겁기에 한 번 속도가 붙으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괴물은 현재 카를의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움직이다가도 어느 순간 나선의 탄력을 받고 절정을 넘어 임계점에 다다랐다.

콰아아앙!

카를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몸이 들썩여졌을 정도의 큰 여파였다.

멈추지 않고 폭주하던 혼원일극신공이 결국 벽에 가로막혀 멈춰 세워지고 만 것이었다.

차라리 터지거나 뚫었다면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을 터.

그렇기에 아쉽기 짝이 없었다.

사아아아.

카를은 기세를 잃은 혼원기를 훑어 버렸다.

오늘은, 이 정도로 되었다.

모든 기운을 와해하고 갈무리한 그는 깊은숨을 토해 내며 두 눈을 떴다.

왈칵.

그리고 그대로 새빨간 피를 밖에 게워 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묵직한 혼원기를 거칠게 운용해 내부를 질주하다 벽에 부딪혔으니 말이다.

돌아온 반동은 카를이 감내해야 할 이자였다.

그나마 가벼운 내상으로 수습할 수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후우."

지친 기색으로 입가를 닦은 그는 손을 휘둘러 연무장 내부에 흩뿌려진 피를 지워 버렸다.

다시금 내상을 다잡기 위해 눈을 감으려던 찰나, 아카이브를 통해 레이시스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레이시스]: 카를, 뭐 하고 있어요?

근래 묘하게 자신과 거리를 두며 서먹서먹하던 레이시스는 저번 강의 이후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카를로서는 희소식이었기에 가벼운 손놀림으로 답장을 보냈다.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었습니다.

[레이시스]: 가도 되나요?

-괜찮습니다.

레이시스 정도라면 대련 상대로 괜찮을 터.

이쪽이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몰아쳐도 괜찮을 것이다.

레이시스 본인도 그것을 원해서 오는 것일 테고.

카를은 그녀가 오기 전까지 운기행공을 계속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연무장 문이 열리며 레이시스가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다.

"카를."

"오셨습니까."

막, 운기를 끝낸 카를은 짤막한 숨을 토해 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제대로 일어나기도 전에 비틀거리며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상 때문에 거나하게 피를 토해 살짝 현기증이 생긴 것이었다.

"...!!"

그 모습에 레이시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제껏 카를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놀란 마음이 더욱 컸다.

자리를 박차고 연무장 안으로 들어온 레이시스는 비틀거리는 카를을 부축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거예요?"

"...별것 아닙니다. 수련하다가 살짝 무리해서 그럽니다."

킁킁.

레이시스는 카를의 말을 가볍게 흘려들으며 냄새를 맡았다.

여긴 해도 희미한 피 냄새가 남아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괜찮습니다. 그보다 가볍게 대련이나...."

"아니요, 무리하는 건 안 좋아요. 몸도 성치 않은데 괜히 어울려 줄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지금은 의료실로 가죠."

"아니, 괜찮...."

카를은 그녀의 말을 부인하며 괜찮다는 걸 어필하려 했다.

하지만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쪽의 팔을 잡아당기는 그녀의 억센 손길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잘 아는데, 참으면 골병 생겨요. 그런 건 강함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것이에요."

"하하...."

카를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기어코 그를 의료실로 데리고 온 레이시스는 치료사로부터 포션을 받아 건네주었다.

두 눈이 쌍심지를 켜며 지켜본 탓에 마시지도 않을 수 없는 노릇.

그렇기에 카를은 포션의 뚜껑을 따고 단숨에 들이켰다.

"...."

그래도 포션이라고 불편하던 속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피를 토해 냈다는 건 기혈에 손상이 갔다는 것.

신체 내부에 물리적으로 찢어진 상처가 생겼다는 뜻임으로.

포션은 그러한 상처 회복에 특효약이었다.

카를이 포션을 말끔하게 비워 낸 걸 확인한 레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무리하지 마시고 쉬시도록 하세요."

"그러겠습니다."

카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빠르게 내상 수습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잠시 안정될 때까지 병상에 기대 상태를 지켜보기로 한바.

레이시스는 잠깐 짐 좀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

카를은 병상에 기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런 호의는 여전히 낯설었다.

무림, 특히 살수의 세계는 적자생존 그 자체였으니까.

증명하지 못한 자는 살아남지 못했고, 살아남을 자격 또한 없었다.

자신 역시 시간이 더 지나면 이런 타성에 젖어 저들과 비슷하게 되는 걸까?

그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지, 아니면 도태되는 길로 향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철컥.

그때 발 쪽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카를은 침상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

진심으로 놀란 카를의 두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작은 체구의 여성이 병상 끄트머리 난간을 붙잡은 채 몸을 기대어 있었다.

...잡념에 빠져 신경이 분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감각은 무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 여성이 병상을 흔들 때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누구지?'

복장을 보니 2학년 선배였다.

다른 생도들보다 한층 더 작은 체구, 동그란 앞머리, 조금 전까지 누워 있었던 듯 흐트러진 뒤쪽 머리카락까지.

곧 침상 난간에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는 흐리멍덩한 붉은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피."

"피?"

"피 냄새...."

여성은 입을 살짝 벌렸다.

"맛있...."

"레이첼."

찰싹.

여성 뒤에 나타난 누군가가 손날로 그 머리를 가격했다.

그러자 레이첼이라 불린 여성이 뒤로 나동그라지며 뻗어 버렸다.

뒤쪽에서 나타난 이는 연녹색 머리카락의 화사한 미인이었다.

앞쪽 선배와 마찬가지로 2학년 선배로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쓰러진 친구를 바라보았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어요? 제가 침대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죠."

"...배고픈걸."

"얼른 가요. 괜히 아픈 분 괴롭히지 말고."

"으음."

여성은 레이첼을 질질 끌고 병상에서 떼어 놓았다.

끌려가는 레이첼의 흐리멍덩한 눈이 카를을 향했다.

그 안에는 미련이라는 감정이 철철 흘러내렸다.

침까지 꿀꺽 삼키는 그 모습을 보자 카를은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미묘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미안해요. 레이첼이 조금 특이한 성격이라. 그, 아, 카를로스 후배님?"

"1학년 카를입니다. 세이라 선배님."

"절 아시나요?"

"도서관 사서로 계실 때 명찰을 봤습니다."

"아하,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세이라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이것부터 치워 놓을 테니."

"알겠습니다."

가볍게 눈인사로 작별을 고한 세이라는 레이첼을 끌고 치료실에서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카를은 둘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코를 문지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시체 냄새?"

우연찮게 재미난 이들과 마주한 듯싶었다.

108화 조우 (2)

◆ ♥ ♣

"마물 생태학? 우리 마물 조사 관련 과제가 있었나?"

제국의 역사 강의 시작 전.

막시밀리안은 카를 앞에 펼쳐진 서적에 관심을 보였다.

마족에 관련된 내용을 옮겨 적고 있던 카를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없습니다. 몬스터와 마물 생태학은 2학년에 올라가서부터 있으니까요. 이건 그냥 개인적인 흥미입니다."

"그렇구나."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은 평소에도 이런저런 서적을 많이 읽었다.

오늘은 그 주제가 조금 특이해서 관심을 보인 것뿐이었다.

"마물이라. 게일, 넌 마물 본 적 있어?"

"당장 우리가 얼마 전에 싸운 것도 마물이었다."

"아,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 그렇네. 거기 나오던 것도 마물이었지."

마물이라고 해서 거창한 존재는 아니었다.

생도들이 얼마 전 실습 때문에 갔었던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 역시 마물의 소굴.

스켈레톤, 구울, 레이스, 데스나이트나 리치 같은 것들도 다 마물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었다.

"데스나이트는 좀 강했지."

"마물 주제에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

"마물도 다양하니까. 그래도 좋은 경험을 했어."

"온천도 좋았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에이미가 말을 보태자 다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프치히 저택에서의 시간은 짧았지만, 좋은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더 가고 싶었기에 카를이 또 초대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사각사각.

그 본인은 여전히 필기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옮겨 적는 내용을 속으로 곱씹으면서.

'마물 역시 일반 몬스터처럼 등급이 나뉜다.'

몰락한 이교도의 사원에서 나왔던 건 대부분 하급 몬스터였다.

보스 몬스터인 데스나이트, 리치 정도 되어야 중급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그 정도는 익스퍼트 중, 상급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혼자서 사냥이 가능했다.

카를도 그리 힘을 들이지 않고 쓰러뜨렸던 것처럼.

사실 무력 수준으로만 따지자면 카를의 힘은 진즉 마스터를 상회했다.

명천신공과 천마신공이라는 중원의 신공 절학을 익혔으니 말이다.

더불어 혼원일극신공의 공능까지 합한다면 몇 단계 위의 고수까지 능히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건 무엇이지?'

카를이 현재 마물 생태학이라는 서적을 빌려 와 옮겨 적고 있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던 것.

바로 전날 의료실에서 스쳐 지나갔던 존재였다.

이름은 레이첼이라고 하였다

자신들보다 한 해 선배 생도로 알아본바 그리 유명한 이름은 아니었다.

'피를 향한 집착, 그리고 코끝을 스치던 시체 냄새.'

진짜로 시체 냄새가 났다는 건 아니었다.

그 기질에서 시체와 같은 향을 풍겼다는 것이지.

즉, 레이첼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인외의 마물이라면 설명이 된다.'

카를이 느꼈던 묘한 이질감과 모든 자료가 한 가지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뱀파이어」

홍옥과도 같은 눈동자와 햇빛을 흡수하지 못하는 창백한 피부.

그리고 본능적으로 갈구하는 피에 대한 집착.

설마,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카를은 그 작은 단서들을 흘려 넘기지 않았다.

'마주치게 된 계기는 우연에 가깝다. 레이시스가 날 강제로 의료실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인식조차 하지 못했겠지.'

아마 어지간해서는 말조차 섞을 일이 없지 않았을까.

녹스에서도 별다른 특이점은 찾아내지 못한 듯하고.

'생도 중에 인외의 존재가 있다.'

툭툭.

카를은 만년필의 끝을 가볍게 찍으며 생각에 잠겼다.

뱀파이어라.

자신이 잘못 보았을 리 없을 테니 정황상 거의 확실해 보이긴 하는데.

적어도 세간에 알려진 건 없었다.

바이에른은 과연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뱀파이어는 중급 마물이지만, 그 속성과 핏줄에 따라 그 이상도 가능하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는 그저 피를 탐할 뿐인 괴물이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근원인 진조의 피를 잇거나, 각성한 뱀파이어라면 상급 마물 이상의 포텐셜을 뿜어냈다.

마족으로 불리거나 고위 악마로 편입되어 이름을 부여받는 경우도 있다고 했으니.

의료실에서 마주쳤던 레이첼이라고 하는 뱀파이어는 적어도 그와 비슷한 개체인 건 확실해 보였다.

'마늘이 효과적이라고 하는데.'

몰래 따라다니면서 마늘 가루를 분사해 볼까?

괜히 짓궂은 생각이 들었지만, 자중하기로 했다.

필요 이상으로 이쪽에 이목이 쏠릴 수도 있으니까.

어찌 되었든 제법 주목할 만한 이야기였기에 마저 정리를 마쳤다.

관련 정보를 토대로 계속해서 조사를 이어 나가면 될 터.

직접 움직이는 건 루나가 할 것이다.

1학년 생도인 자신보다는 같은 선배 생도이 루나 쪽이 더 움직이기 쉬울 테니까.

"자,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곧 교수님이 들어오고 제국의 역사 강의가 시작되었다.

1학기 중간 과정이 끝나고 기말 심화 과정에 들어섰지만, 이쪽 분야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특히 역사는 카를의 전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영웅에 관련된 쪽으로 치우쳐져 있긴 했으나, 암기 과목인 이상 크게 걸리는 것은 없었다.

특히 유적 탐사 동아리에서 선배들이 남긴 방대한 자료 덕에 부족했던 부분도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충원되었다.

그 덕에 장래 루트 중 역사학자 쪽도 바라보고 있었다.

역사학자를 선택한다면 적어도 자유롭게 대륙 곳곳을 돌아다닐 구실은 생겼으니 말이다.

"자,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고...."

교수님의 발언에 생도들은 집중을 풀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꼿꼿하게 펴고 있던 허리도 기대고 뻑뻑한 눈을 비비며 각자 몸을 풀어 주었다.

장시간 앉아 있었던 만큼 피로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공지가 있군요. 다음 시간에는 아마 현장 체험을 갈 것 같습니다."

"오?"

"현장 체험?"

새로운 공지에 생도들의 집중력이 돌아왔다.

살짝 꾸벅거리며 졸던 이들도 현장 체험이라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며 두 눈을 크게 떴고.

"현장 체험, 즉 견학입니다. 토호슈 영지 쪽에 예로부터 제국 역사와 관련된 유적지가 여럿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겠죠. 다음 시간에는 그곳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그 이후 레포트를 제출해 평가할 테니 인지하고 있도록 합시다."

"큭."

레포트 제출도 예정되어 있다는 말에 막시밀리안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외부 견학이라는 말에 설레는 듯했다.

아카데미 생활도 좋지만,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았으니 말이다.

그런 생도들의 반응을 본 교수는 안경을 살짝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 강의뿐만 아니라 외부 활동이나 실습도 많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생도 여러분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목표이니 말이지요. 그러니 다들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교수님이 강의실을 떠났을 때 에이미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으으으, 현장 체험이라. 재밌겠네. 토호슈 지방은 나도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데 땅콩버터 아이스크림이 맛있었지."

"이름만 들어도 달 것 같은데."

"달긴 단데, 유적지 돌아보면서 먹으면 꽤 괜찮아. 관광 산업이 발달한 만큼 음식 수준도 높거든."

"그건 좀 기대되는데. 아예 하루 묵고 오는 거려나?"

"실습이 아니면 그러진 않을걸? 견학이니까 오전 오후 중으로 빨리 끝내고 복귀하는 걸로 할 거야. 아, 공지 떴다. 당일치기라네."

"그런가, 아쉽네."

탁탁.

다른 생도들이 대화하는 사이 카를은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저는 그럼 잠깐 동아리에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다음 강의에서 봐."

오늘은 동아리 정규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이쪽도 첫 번째 탐사에 이어 두 번째 탐사를 계획하고 있는바.

이번 역시 꽤 괜찮은 미발견 유적지를 찾았다기에 카를 역시 참여할 생각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유능하니.'

역사적 흥미와 자본이 합쳐지니 안 될 것이 없었다.

동아리 자체도 나쁘지 않은데 구성원 쪽도 훌륭했으니 이쪽에 비중을 실어도 손해 보는 건 없었다.

"그럼 나중에."

생도들과 인사를 마친 카를은 자리를 나섰다.

하지만 강의실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카를."

"루이스."

루이스 볼프스부르크.

그는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카를을 부르며 다가왔다.

"동아리에 간다고?"

"그렇습니다. 정기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

"시간은 많이 뺏지 않을 테니 잠시만."

"알겠습니다."

카를은 루이스를 따라갔다.

어차피 회의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그리 문제는 없었다.

강의실 앞쪽 교정을 걸으며 루이스는 카를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네 소개 덕분에 알렉디마 선배와 함께 2학기에 있을 학생회 선거에 나가는 것이 거의 확정되었다."

"잘 되었군요."

"그런데 정말로 내게 양보해도 되겠어?"

루이스는 그것이 의문이었다.

알렉디마 선배의 인망은 보장된 것이었다.

당장 선거에 나간다고 하더라도 최소 30% 이상의 표를 끌어올 수 있을 터.

1학년 생도 누가 들어와도 어렵지 않게 선전할 것이다.

'즉, 학생회 간부로 들어가는 것이 보증된 위치라는 소리지.'

루이스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던 기회였다.

가뜩이나 네리안을 따라잡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그였기에 큰 명예를 주는 학생회 감투는 자처해서라도 얻고 싶던 것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애초에 그런 쪽에는 뜻이 없기에."

"뜻이 없어도 성적을 생각한다면 염두에 두는 것이 좋아. 학생회 활동은 가산점이 꽤 들어올 테니까. 간부 자리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카를은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대충 자신을 불러낸 심중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날 꼬드기는 건가.'

학생회에 1학년이 들어가는 건 부회장 자리뿐만이 아니었다.

그 아래로 집행 쪽이나 여러 간부 자리가 남았기에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루이스는 자리를 양보해 준 것과 더불어 이쪽과 연결점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밑으로 오라는 것일 터.

부회장 자리는 많이 부담스러울 테지만, 그 밑의 자리는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보는 것이었다.

'제법 깜찍한 생각이로군.'

루이스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감사를 표하려는 것일 터.

하지만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지만, 정말로 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쉽게도 다른 활동들로 바쁘기 때문에."

"유적 탐구 동아리였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학업과 동아리, 그리고 학생회까지 함께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루이스는 순순히 포기했다.

본인이 힘들다는데 어떻게 강요를 하겠는가.

애초에 감사의 표시로 적당히 좋은 자리 하나를 내어 주려고 했던 것이었으니.

"대신 마음 바뀌면 언제든 말해. 너 하나 정도는 넣어 줄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래도 네 덕분에 물꼬를 틔웠어. 그렇지 않아도 학생회 쪽과 커넥션이 없어서 고민 중이었는데."

알렉디마 선배 쪽과는 연결점이 없어서 소개해 줄 사람을 찾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 카를이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줬으니 고맙지 않을 리가.

"괜찮다면 나중에 초대라도 하고 싶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지?"

"...네리안."

루이스의 말 도중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다른 곳을 가던 네리안이 대화 중인 루이스와 카를 사이에 나타난 것.

루이스는 웃는 낯으로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나랑 카를 사이의 이야기인데."

"흠."

네리안의 시선이 카를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추궁하는 물망초 빛깔 눈동자에 카를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루이스가 식사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식사?"

네리안은 잠시 둘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가도록 하지."

109화 새로운 유적

"...."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 나도 간다고?

'누가 보면 초대해 준 줄 알겠군.'

너무 당당하게 나와서 무심코 알겠다고 대답할 뻔했을 정도였다.

카를과 대화하던 중 갑작스럽게 끼어든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초대까지 가로채는가.

"...."

루이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네리안을 바라보았다.

네리안 역시 아무런 감정이 서리지 않은 표정으로 응시한바.

서로 한치의 밀림 없는 신경전을 벌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를 앞으로 나서서 그를 몸으로 가린 루이스였다.

"카를에게는 도움을 받은 것이 있어서 감사를 전하려는 거야. 원한다면 따로 자리를 만들어 보지. 셋이서 여유롭게 볼 수 있도록."

"번거롭게 그럴 필요는 없다. 감사는 충분히 전하도록."

"따로 자리를 만들게."

"굳이?"

"...."

루이스는 웃는 낯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가능한 한 좋게좋게 상황을 풀고 나중을 기약하려 했는데 상대가 그것을 거부했다.

'여전히 욕심이 많은 녀석이로군.'

네리안은 네리안대로 루이스가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그 휘하 패거리만 보아도 알 법하지 않은가.

자신의 입맛대로 다루기 쉬운 수족들만 잔뜩 모아 놓았다.

능력이 부족한 것들이 모여 루이스의 수발을 들고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는다.

끼리끼리 잘 어울렸기에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으나, 카를에게까지 그 마수가 뻗어 온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보검이라고 해도 모두가 잘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다.'

요리사가 쥐면 요리 재료를 썰고, 사냥꾼에게 주면 짐승을 찌른다.

각기 쓰임새와 역할이 다를지언데 어찌 루이스에게 카를이란 검을 줄 수 있을까.

'주제에 맞지 않다.'

루이스가 범인보다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카를을 쥐고 휘두르는 건 아까웠다.

"...."

그런 둘의 대치에 카를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유능한 척을 했나?'

가능하면 둘 모두와 인연을 쌓아두고 싶어 작업을 치던 것이었다.

호펜하임, 볼프스부르크 모두 제국에서는 내로라하는 명가였으니 말이다.

'중원으로 따지자면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정도 되는 위치라고 할 수 있겠군.'

가문의 이름으로는 최상급이었다.

네리안과 루이스는 가문의 직계 혈통 중에서도 후계 자리를 노리는 후기지수였고.

굳이 중원과 비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어느 한쪽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서 벌어진 상황.

조금 있으면 서로 주먹이라도 한 대씩 날릴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를 본인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 상황을 정리할 제삼자가 오고 있었으니까.

"카를?"

저 건너편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레이시스가 카를을 발견하고는 그를 불러왔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녀는 곧 아무런 말 없이 대치 중인 세 남자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리안 군에 루이스 군까지? 그리 어울리는 구성은 아니네요."

"레이시스 양."

"아, 카를. 동아리 회의 시간이 다 되어 가서요. 강의실에서 먼저 나가셨나 했더니 여기에 잡혀 계셨군요."

"메시지를 보내셨군요. 죄송합니다."

카를은 뒤늦게 아카이브의 메시지 알림이 떠올라 있는 걸 확인했다.

레이시스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루이스와 네리안을 바라보았다.

"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잠깐 두 분과 함께 대화 중이었던 터라."

"그럼 카를은 데려갈게요. 둘은 계속 이야기 나누세요."

레이시스는 네리안과 루이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카를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에게 끌려가는 와중 카를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둘에게 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그래, 나중에 이야기하자, 카를."

"그러도록 하지."

루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선약이 있던 상황에서 막을 구실이 없었기에 순순히 카를을 보내 주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없는 곳에서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얼마간 함께 걸어왔을까 레이시스는 카를의 손목을 놓아주며 고개를 돌렸다.

"제가 잘 끼어든 건가요? 분위기가 안 좋길래 그냥 저질렀는데."

"좋은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렇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한 대 칠 기세 같더라고요."

"둘이 원래 좀 그렇지 않습니까."

카를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리안과 루이스의 경쟁 관계는 입학 초기부터 유명하던 것이었으니.

레이시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동아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회의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도착했는지 이미 부원 대부분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왔군."

"차기 회장을 빼놓고 회의를 진행할 수는 없지."

"자자, 앉으시고. 그럼 다들 온 것 같으니 시작하겠습니다."

카를은 그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적당히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는 당연한 것처럼 레이시스가 착석했다.

"자, 동아리 정기회의 주제는 다음 유적 탐사에 관해서다!"

탁.

동아리 회장인 데인이 벽을 한 번 때리자 위쪽에서 종이가 파르르 풀려 나오며 아래쪽으로 활짝 펼쳐졌다.

"오?"

"지도?"

"이건 상당히 큰데."

벽면에 펼쳐진 건 한 장이 거대한 지도였다.

그 커다란 규모에 다들 감탄을 토해 내며 의자를 조금씩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옆에 선 데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좌중에 말했다.

"루이든 교수에게 부탁해 물밑에 돌아다니는 유적지의 흔적이나 지도를 수배했지. 원래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인데 이번엔 운이 좋았어. 상태도 꽤 좋았으니까. 지도가 진짜라는 검증은 이미 끝냈다."

"어디 있는 건가요?"

"제국 남부 비어른 지방이다."

"비어른이라면...."

익숙한 지명에 레이시스는 입술을 매만졌다.

반면 옆에 있던 카를은 나지막한 감탄성을 토해 내며 입을 열었다.

"영웅들의 전쟁이 일어났던 곳이군요."

"그래, 유명하지."

"다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특정하지 못했다. 다음 주부터 우리가 고용한 이들이 탐색을 시작할 거야."

카를은 정말로 감탄 어린 시선으로 데인을 바라보았다.

'생도 스케일이 아닌데.'

상인 가문의 출신이라 그런지 행동력이 장난 아니었다.

역사나 유적을 좋아하는 열정과 합쳐져 무서울 정도였으니 영웅들의 행적을 좇는 카를로서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규모가 좀 커서 내부를 탐사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더군. 학기 중에는 불가능하니 방학 때를 노릴 생각이다. 안전이 보장된 곳도 아니고 유적 특성상 함정이나 마물 같은 것이 남아 있을지 몰라 호위도 고용해야 하고. 다들 그 점을 유념하고 참가 신청을 해 주었으면 하군."

"흥분되는군요."

"방학 때라. 시간은 괜찮네."

"이번 역시 또 학회에 이름을 올리는 건가?"

위험할 수 있다는 데인의 경고에도 다들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럴 수밖에.'

이미 한 차례 영웅의 미발견 유적을 발굴해 낸 그들은 바이에른의 생도로 학회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관련 직종으로 나간다면 경력으로도 크게 쳐줄 터.

그런 가운데 새로운 유적지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가할 사람은 본인 장비만 단단하게 준비해 오면 된다. 나머지 경비는 동아리 쪽에서 해결할 테니. 참, 선배분들도 몇몇 참여할 예정이니 인지해 두고."

"꽤 대규모 파티가 되겠는데?"

"유적지의 규모도 그만큼 크니까 우리도 단단히 준비해 가야지."

"하긴, 그렇군."

데인의 말에 루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발견을 할지 모르니 단단히 준비해야 함이 옳았다.

"...저기."

그 가운데 레이시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말하게, 레이시스 후배님."

"혹시 동아리원이 아닌 생도도 참여가 가능한가요? 마법사라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마법사?"

"네. 유리아라고 저와 같은 1학년 생도입니다."

"잿빛 마탑의 후계자인 후배님 말인가. 그 정도면 오히려 우리가 모시고 싶군. 여러 마법적 장치도 되어 있을 테니 자문을 구할 수 있겠고."

데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몸값은 비쌌다.

그 정도 이름값을 지닌 마법사를 고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저쪽에서 참가를 신청해 준다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유리아가 간다고 했습니까?"

"유적지에 갔던 걸 말하니까 다음에는 꼭 끼워 달라고 했어요. 자기도 가고 싶다고. 영웅에 관해 흥미가 많대요."

"하긴, 당장 그 마탑의 시조부터 영웅이니 말입니다."

"그랬죠."

잿빛 마탑의 시조.

"영원"의 대마도사.

유리아가 영웅에 관해 흥미를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추천할 만한 이가 있으면 언제든 말해 주게. 아무리 그래도 그 전부 데려가는 건 힘들겠지만, 간부진에서 회의 후 고려해 보도록 하지."

데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규모 파티가 될 것 같으니 몇몇 정도는 추가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바이에른의 생도 정도 되면 실력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내 쪽에서는 루나 정도인가.'

아니면 개인 호위의 개념으로 블랙 라벨 중 한 명을 데려가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유사시를 대비해서 말이다.

'영웅의 전쟁과 관련된 유적이라.'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동아리실 가운데 카를은 팔짱을 낀 채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걸 남겨 두었을지 궁금했다.

황궁에서는 "정의"가 남긴 전성을 풀고 신검 천뢰(天雷)를 손에 넣었다.

무언가를 남기기 좋아하는 그들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분명 무언가를 또 남겨 놓았을 텐데.

'나로서는 전언 쪽이 더 좋지만.'

카를은 유품보다는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나 유언 쪽이 더 구미가 당겼다.

영웅들은 대체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과 싸웠는지.

...그리고, 가능하면 다시 중원에 돌아가는 방법도.

'기록에 따르면 영웅들은 전부 인간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렀다.'

단순히 입신지경을 일컬은 건 아니었다.

입신지경, 신이 되는 경지라고 하는 것도 비유일 뿐 정말로 전능해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무공을 휘둘러 상대를 죽일 수 있을 뿐.

카를은 중원에서 입신지경에 다다르는 건 실패했지만, 그들이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손에 목숨을 내어 주지 않았을 테니까.

'기대되는군.'

영웅들은 자신들의 전쟁터에 또 무엇을 남겨 두었을까?

* * *

탁탁.

세이라는 반납받은 서적을 가지런히 정리한 뒤 빈 책장에 꽂아 넣었다.

바이에른 서고의 사서를 겸한 그녀의 하루 일과는 단출했다.

정해진 시간까지 강의를 수강 후 그 이외 시간은 서고에 들러 사서 업무를 보는 것이었다.

비싼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라는 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돈이라면 썩어 넘칠 만큼 모아 두었으니까.

"세레나, 배고파...."

"레이첼. 아, 벌써 식사 시간인가요? 그리고 여기서는 세이라에요."

"단둘이니까 상관없잖아."

"평소 습관이 중요해요. 다른 사람이랑 있다가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알았어."

레이첼은 서고 카운터에 축 늘어져 공복을 호소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못 말리겠다며 미소를 지은 그녀는 레이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마저 정리하고...."

"걔도 맛있을 것 같더라."

"...걔? 누굴 말하는 거예요?"

"저번에 의료실에서 봤던 남자애."

"카를로스?"

"이름은, 몰라. 붉은 머리카락에 눈동자."

"...."

세이라의 두 눈이 가늘게 뜨였다.

레이첼의 '맛있다'는 그저 맛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미각은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에게 반응하는 것이었으니.

'카를로스. 카를로스, 라이프치히.'

눈에 몇 번 밟혔어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는데.

무언가, 있는 건가?

110화 전조 (1)

모종의 세력이 녹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식스의 습격, 그리고 카를과의 교전 이후 녹스는 디르센의 호위를 두 배로 늘렸다.

밀착 호위인 블랙 라벨 역시 둘씩 짝지어 나가도록 배정했기에 갤런 포와 식스가 함께 나왔다.

"하암."

현재 디르센은 휘하 조직 본부에 들어와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라한의 후계 다툼이 심화된 지금 세력을 다독이며 전선을 공고히 하는 것이 중요했으니.

디르센이 회의를 마칠 때까지 갤런과 식스는 바로 옆방에서 대기했다.

달그락.

갤런은 자신들에게 내어진 차와 다과를 즐겼다.

굳이 따지자면 적진임에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먹는 갤런의 모습을 식스는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갤런은 의심되지 않으십니까? 차나 다과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르는데."

"이 아저씨는 위장이 튼튼해서 괜찮아. 그리고 목마른데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고."

"하긴, 전날 과음하셨죠."

"과음이라니. 나한테는 그게 보통이라고."

갤런 포는 씩 웃었다.

그는 녹스에서 손꼽히는 주당임과 동시에 애주가였다.

하루의 끝을 술로 지새우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간만에 좋은 술을 구해서 말이야. 마스터가 아카데미에 나가 있는 것이 아쉬울 정도더군. 나와 대적이 가능한 건 녹스에서는 킹 아니면 마스터 정도인데, 둘 다 부재중이니. 나머지는 술을 즐기지 않고."

"아마 갤런이 상대라서 그럴 겁니다. 마스터께서 마시자고 했으면 다들 모였겠죠."

"...가끔 그렇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는 네가 싫어지려고 한다."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라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겠냐는 듯 한숨을 내쉰 갤런은 차향을 음미했다.

"식스, 너는 술을 안 마신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저는 예술가라 음주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예술가 중에 음주를 즐기는 이들도 여럿 있지 않나?"

"각자 지닌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죠. 저는 저로서 완벽하고자 합니다. 특히 재 예술은 섬세하니 말이죠. 손발 끝의 움직임, 그리고 의지와 정신 모두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술은 그 모든 걸 흐트러뜨리니?"

"예. 쉽게 말하자면 해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악까지 가는 건가."

갤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마치 에어링하듯 찻잔을 돌렸다.

"누군가에게는 해악이,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게 바로 술의 매력이 아니겠나."

"그렇습니까."

"너에게 예술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술이 바로 그러한 것이지."

"그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군요."

"나중에 관심이 있다면 말해. 한 번쯤 술로 정신을 리셋하는 것도 좋으니."

"저번에도 한 번 권유해 주셨던 것 같은데."

"그랬나? 아저씨가 되면 사소한 건 잊어버리고 넘어가기 마련이라."

"하하, 어쨌든 알겠습니다."

갤런은 피식 웃었다.

전혀 알겠다는 표정이 아니었으니.

아쉽지만, 당분간 이전처럼 홀로 술을 마셔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갤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갤런은 마스터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흠."

갤런은 차를 마시며 식스의 질문을 곱씹었다.

블랙 라벨이라고 해서 한날한시에 함께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제각기 들어온 시기가 달랐고 또 능력에 따라 받은 표시도 달랐다.

'아마 퀸이 제일 먼저였지.'

퀸, 세컨드, 그다음 킹이었나?

엑스트라 넘버는 대부분 초창기에 들어온 걸로 알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능력을 보여 주었기에 상위 넘버로 배정된 것이었다.

들어온 순서로 배정받았더라면 세컨드도 엑스트라 넘버였을 터.

반면 뒤늦게 들어온 잭은 노멀 넘버로 배정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네가 남한테 관심을 보이다니."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녹스에 아마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을 겁니다. 조직과 화합하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다른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니 말이죠."

"억지로?"

더없이 솔직한 그 말에 갤런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내가 처음인가?"

"그렇습니다."

"이거, 감사해야겠군."

"부담스러우시면 괜찮습니다."

"뭐, 별 이야기도 아닌데. 부담까지야."

갤런은 뺨을 긁적였다.

식스는 그런 갤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녹스는 지난 몇 년간 함께 움직이며 조금씩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대부분 과거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반면, 갤런은 다른 이들에 비해 알려진 것이 없었다.

'킹은 유명한 검객이었고 퀸은 몰락한 귀족 가문의 영애, 세컨드는 대륙 소수 일족의 후예였지.'

사람을 이해하는 건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적어도 식스는 그런 방식으로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떼어 놓고 보면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지만, 마스터를 중심으로 뭉쳐서 모였다.'

그러니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려면 마스터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당장 자신조차 술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는 사연을 품고 있지 않은가.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말이다.

달그락.

차를 한 모금 마신 갤런은 짤막한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성직자였다."

"...성직자?"

"지금은 없어진 교단이지. 이름은 말해도 모를 거야."

그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종교라는 건 말이지, 믿는 사람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거든. 하지만 보통은 대륙에 성행하는 굵직한 교단을 믿지, 지방 시골에서나 돌아다니는 작은 교단을 누가 믿어 주겠어? 이단이라고 돌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긴 하군요."

"당장 성직자였던 나조차도 우리가 진짜 이단인가 의심이 들었는데 평교도는 오죽했겠나. 망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 식스, 너는 신을 믿나?"

"저는 종교를 갖지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제 종교는 예술이겠군요."

"그래. 무언가를 믿는다면 그것 또한 네 종교가 될 수 있겠군."

누군가는 이단이라며 기함을 토해 낼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미 성직자의 신념을 잃어버린 갤런에게는 그리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마스터와는 영웅의 유적을 조사하다 처음 만났다. 마스터가 그쪽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건 알지?"

"예. 얼마 전에 그걸로 황궁까지 가셨죠. "정의"가 쓰던 검을 얻으셨다고 했는데."

"이름이 천뢰라고 했었나? 하여튼 신기해. 녹스 전부를 합쳐도 마스터만큼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군."

"그건 동감입니다. 하지만 저랑 갤런 둘의 힘으로는 모자라겠군요."

"더 열심히 해서 마스터의 측근이 된다면 말해 줄지도 모르지. 퀸 정도로 말이야. 그녀는 우리보다 마스터에 관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건, 많이 어려울 것 같군요."

식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알아준 마스터에게 감사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마스터라는 인간에 동화되어 녹스에 들어왔다.

물론 세월이 지나 쌓인 충성심도 있었다.

하지만 퀸처럼 자신의 모든 걸 내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맹목적이진 못했다.

"내가 영웅의 유적을 조사하던 건 교단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우리 교단이 "안식"의 섬기던 교단의 한 갈래라는 이야기가 있었거든. 그래서 방랑 생활을 하며 대륙 각지를 떠돌았지. 도중 마스터와 만난 거다. 첫 만남은...."

"첫 만남은?"

"솔직히 그리 좋다곤 하지 못하겠네."

갤런은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영웅의 유물을 앞두고 마스터와 대차했었다.

새카만 마기를 흩뿌리던 그를 악마 추종자나 마족의 계약자라고 착각했다.

그때는 그래도 아직 성직자 나부랭이라는 의식이 있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고.

"...처참하게 깨졌지."

반쯤 죽기 직전까지 갔을 거다.

마스터 역시 상처를 입긴 했지만, 자신과 비교하자면 긁힌 정도에 불과했을 터.

그 뒤로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녹스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게 그때 얻은 유물이다. 마스터가 양보해 줬지."

갤런은 손목에 찬 팔찌를 들어올렸다.

은백색으로 뒤덮인 무광의 팔찌.

심미안을 지닌 식스는 그것이 심상치 않은 힘을 지닌 아티팩트라는 걸 금세 파악했다.

"처음에는 많이 놀랐다. 그건 식스 너와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마스터에 관해서 말인가요."

"그래. 그 괴물이 귀족 가문의 핏줄인 것도 모자라 고작 10살이 조금 넘은 애송이일 줄은."

드래곤이 폴리모프해서 유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사실 지금도 거의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 않은가.

"재밌군요."

"식스, 너도 마스터와 싸웠나?"

"제 경우에는 싸움이라기보다는 공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스터에게 압도되었죠."

갤런과 달리 서로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다만, 격의 차이에 압도되었을 뿐.

이해받았고 구원받았다.

살아 생전 자신의 예술을 알아봐 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기에.

"그리고...."

말을 이으려던 식스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흔한 게 아닌데 아쉽군요."

"어쩔 수 없지. 나중을 기약하는 수밖에."

갤런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창문과 벽이 부서지며 괴한들이 난입한바.

서걱.

식스가 휘두른 손끝의 궤적에 따라 몇 명의 몸이 조각나며 핏줄기가 치솟았다.

갤런은 익숙하다는 듯 슬쩍 몸을 일으켜 그 범위에서 피해낸바.

그러고는 가볍게 몸을 돌려 닥쳐오던 적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욱."

다만, 숙취를 생각하지 못했는지 치밀어 오르는 토악질을 참지 못했다.

"자, 잠깐만. 식스."

"제가 맡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식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진 벽으로 나아갔다.

이미 안쪽으로 돌진한 적은 모조리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바.

"무슨 일이야!"

"적습?!"

뒤늦게 다른 곳에 있던 조직원들이 닥쳐오며 부서진 방을 바라보았다.

디르센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방을 바꿔 이쪽이 회의하고 있는 것처럼 꾸며 놓았는데 적들이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뒤늦게 자신이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디르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 갤런, 그쪽을."

"어, 이쪽은 맡겨."

창백한 얼굴로 입가를 닦은 갤런이 디르센 옆에 섰다.

동시에 식스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고 허공을 움켜쥐었다.

"밀어!!!"

기습에 실패한 적들은 총력전으로 나오기 시작한바.

식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좌중을 살폈다.

'녀석들은 아니다.'

일전 자신과 마스터가 교전했던 그쪽은 아니다.

고만고만한 수준을 보아하니 아마 투르가 쪽의 휘하 세력일 터.

곧 장내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아예 작정하고 닥쳐온 듯 거의 백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이곳에 뒤섞여 치열한 난전을 벌였다.

'갤런이 디르센을 보호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고.'

쉭.

식스는 가볍게 군중 사이를 가로지르며 그 가운데서 제법 기세를 풍기는 녀석들의 목을 베어 갈랐다.

간결하지만 확실하게.

녹스의 힘을 보이기에는 딱 좋은 자리였으니.

"...투르가 쪽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다는 소리겠군요."

촤아악.

손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식스는 쓰러진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습격은 라한을 집어삼키기 위한 본격적인 항쟁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였으니.

111화 전조 (2)

"투르가 쪽에서 움직였다고?"

"휘하 조직을 풀어 직접적으로 디르센의 압박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흠."

바로 직전에 올라온 보고에 퀸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녹스의 진출 당시부터 라한의 후계자인 디르센과 이인자인 투르가는 차디찬 냉전 중이었다.

전면전을 벌이면 괜히 자신의 힘만 깎아 먹는 것이니 서로 영향력을 키우는 것으로 몸집을 부풀리며 세력 싸움에 나섰다.

전면전은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

라한이 후계 싸움으로 삐걱거리면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 곳이 한둘이 아니니 말이다.

"그럼에도 녀석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슬슬 그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소리겠지."

"아무래도 녹스의 존재가 큰 위협으로 다가왔나 봅니다."

"그럴 수밖에."

서부 3상업 지구에서 급속도로 몸집을 키운 신생 조직이었으니.

원래대로라면 더 크지 못하도록 라한이 찍어 눌렀겠지만, 반대 파벌인 디르센 쪽과 덜컥 손을 잡아 버렸다.

투르가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었다.

"이쪽 준비는?"

"언제든 움직일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녹스의 조직원은 정보 탐색 및 경계를 위해 나가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본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전 식스와 카를을 습격했던 정체 불명의 조직의 정체를 밝혀낼 때까지 일시적으로 활동을 줄인 것이었다.

적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괜히 이쪽의 전력을 드러낼 이유는 없으니까.

"투르가 쪽에 그 녀석들이 관련되지 않은 건 확실하지?"

"그런 정황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계속 주시 중이니 다른 접촉이 있다면 곧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나인은 이미 투르가 쪽에도 정보망을 뚫어 놓았다.

뇌물로 회유하거나 약점을 잡아 협박했고, 사람을 바꿔치기해 직접 조직원을 심어 놓은 곳도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녹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일단 나가 있는 간부들한테 수고해 달라고 말해 줘.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건 후속 조치가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마스터께 보고는...."

"내가 할게. 설백아?"

삐익.

퀸의 부름에 집무실 한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설백이 날갯짓을 하며 한달음에 날아왔다.

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설백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카를에게 전달할 서한을 작성했다.

한편 조직을 습격한 적들을 모조리 도륙 낸 식스는 피 웅덩이 가운데 있었다.

"...."

잠시간 주변을 훑으며 남아 있는 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어깨를 으쓱이며 디르센 쪽으로 돌아왔다.

"회의실을 바꾸길 잘했군요. 작정하고 이곳을 공략한 걸 보면 내부에서 정보가 빠져나간 듯싶습니다."

"...노아, 자네 덕에 무사할 수 있었군."

"어차피 별것 아닌 놈들이었습니다. 회의실 안으로 들이닥쳤어도 쉽게 쓰러뜨리셨겠죠."

식스의 말에 디르센은 수십 구의 시체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이 정도 숫자가 한 번에 몰려든다면 감당하기 힘들었다.

즉, 식스가 아니었더라면 어떤 식으로는 피해를 입었을 터.

"이 빌어먹을 잡것들."

콱.

디르센은 잘린 조각을 짓밟았다.

암묵적인 냉전 체제는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간간이 암중에서 노려오던 건 자신 역시 그랬기에 넘어갔지만, 지금 이 습격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애초에 이딴 전력으로 날 공격하러 온 것도 우습군. 숫제 작정하고 노린 것보다 나쁘지 않은가."

"도발입니다. 수십 정도는 버리는 패로 쓸 수 있다는."

식스는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살인은 예술이었다.

그렇기에 섬세하며 미학이 깃들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러한 논의를 할 필요가 없는 무지렁이들.

그러니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밖에 없지."

디르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전면전이네. 저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온 순간 피할 수 없게 되었어."

디르센은 후계 파의 수장으로 공고히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투르가 쪽에서 이처럼 대놓고 도발을 해 왔는데 가만히 있는다면 수장으로서의 위치가 위험해졌다.

내부 파벌의 경합이란 바로 그러한 영향력의 싸움이었으니까

"큰일! 큰일 났습니다!"

그때 저 뒤쪽에서 디르센의 수하가 헐레벌떡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그가 무슨 일이냐며 시선으로 묻자 수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희 세력이 공격받는 중입니다. 너무 많은 곳이 공격받고 있어서 상황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뭐?!"

디르센은 기함을 토해 냈다.

고작 수십으로 이쪽을 습격한 건 이목을 가리기 위해서였나.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식스와 갤런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쪽의 일정을 노린 것 같군. 빨리 올라가세."

"그러시죠."

"으음."

디르센의 기반은 라한의 40% 정도 되는 지부와 예로부터 얽혀 있는 우호 세력, 그리고 녹스가 있었다.

서부 3상업 지구의 지배자였던 만큼 그 규모가 큰데 일시에 타격 받고 있다면 투르가 쪽에서 선수를 쳤다는 소리가 되었다.

빠르게 플릭을 벗어난 그들은 곧 지상으로 올라왔다.

위쪽은 자정이 훌쩍 지난 밤.

골목 곳곳에는 음지의 세력들이 도사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을 터.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쥐죽은 듯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플릭의 출구를 나와 거점으로 돌아가던 중.

식스는 손을 뻗어 디르센의 움직임을 멈췄다.

"왜 그러는가? 빨리 가야하거늘."

"아까 이쪽에 보고를 해 온 수하는 어디 있습니까?"

"뭐? 그게 무슨...."

디르센은 뒤를 돌아보다 말고 흠칫 굳었다.

분명 바로 직전에 위기를 알리던 수하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흠."

잠자코 있던 갤런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슬쩍 디르센의 뒤를 지켰다.

이곳에 있는 건 열명 남짓한 디르센의 직속 수하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조직의 병력이었다.

'디르센의 일정과 회의실 위치까지 새어 나갔다. 내부인의 소행이 확실한 것이겠지.'

'다만, 내통자는 개인이 아닐 수도 있다.'

거의 동시에 같은 결론에 다다른 식스와 갤런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부터...."

서걱.

디르센의 말을 끊고 돌연 피 분수가 일었다.

그의 직속 수하들의 등 뒤를 뚫고 저마다 병장기 하나 씩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뭣?!"

"컥!"

"배신이다!"

"이 새끼들...!"

느닷없이 배신당해 후미를 찔린 수하들이 당황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열둘에 달하는 인원 중 반절이 그 기습으로 순식간에 절명했다.

"이 뒤쪽으로."

"...."

갤런은 디르센을 자신의 뒤로 물러나게 했다.

이미 저쪽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린바.

어차피 녹스의 조직원은 아니었으니 죽어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이게, 이게...."

디르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결속을 다지며 의기투합하던 이들이 어째서 자신을 배신하는가.

심지어 저들은 아버지 대부터 라한과 손을 잡던 협력 조직이었다.

"용서하시오, 도련님."

"두론! 네 이놈!!"

"주류를 따라야지. 아무리 녹스라는 조직이 신흥 세력이니 강하니 해도 투르가 쪽이 더 믿음직스러운 건 어쩔 수 없거든."

두론이라 불린 민머리의 남성은 손에 쥔 나이프를 손안에서 돌리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조직의 계승은 순리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까. 부족한 아들보다는 이미 증명한 이인자가 더 좋지 않겠는가?"

"노아! 저 녀석을 죽여 주게!"

"저도 그러고 싶지만...."

식스는 양옆 건물 위쪽을 둘러보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애초에 이곳까지 인도한 것부터가 함정이었나.'

플릭 내부에서는 다른 조직도 있었기에 변수가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러니 투르가의 전면전을 운운하여 자신들을 밖으로 빼낸 듯했다.

확실한 덫을 준비하여 말이다.

툭. 툭툭.

야음이 깃든 건물의 지붕으로부터 몇몇 인영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가벼운 몸놀림을 보니 저마다 예사롭지 않은 실력자로 보였다.

촤악.

식스는 손바닥을 활짝 펼치며 천잠사의 가닥을 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온 갤런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내가 하지."

"괜찮으시겠습니까?"

"한바탕 토했더니 나아졌어. 그리고 네 기술은 전위보다는 보조가 더 낫잖나."

"그렇긴 합니다."

식스는 군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블랙 라벨의 넘버는 특수 보직이 있긴 했지만, 강할수록 숫자가 높았다.

즉, 단순한 강함으로 보았을 때는 식스인 그보다 갤런 포의 강함이 두 단계 위에 있다는 소리.

뿌득, 뿌득.

갤런은 손목을 풀고 어깨를 돌려주며 천천히 그들 앞에 나아갔다.

'인원은 전부 47명.'

플릭에서 함께 올라온 어중떠중이들이 35명.

이번에 새로 나타난 이들이 12명.

"몸 풀기에는 딱 적당한 숫자로군."

쉬악!

저쪽은 대답하지 않은 채 일시에 갤런을 향해 닥쳐왔다.

디르센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날 선 살기를 풀풀 풀리며.

꽈악.

안주머니에서 검은색 반장갑을 꺼내 낀 갤런은 주먹을 쥐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조금 덜 마실 걸 그랬군."

스팟!

선두에 있던 적과 갤런의 신형이 교차했다.

동시에 그의 주먹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휘둘러진바.

그 경로상에 있던 적의 머리가 순식간에 터져 나가며 피가 흩뿌려졌다.

"일단 한 명."

피해자는 그 한 명으로 그치지 않았다.

가볍게 풋워크를 밟으며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인 갤런은 양 떼 사이를 누비는 늑대처럼 거칠게 날뛰었다.

퍽! 퍽!

그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여지 없이 누군가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막거나 피하려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서 갤런보다 빠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툭툭.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오르는 것으로 템포를 조절한 그는 저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셋을 향해 물었다.

"그쪽은 안 덤벼?"

기세를 보니 저 셋이 이곳의 우두머리인 듯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멈춰선 채로 수하들만 갤런을 향해 달려들었다.

'힘을 빼놓으려는 수작인가.'

갤런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권투사 같은 직군은 전신을 움직이는 만큼 체력 소모가 빨랐다.

하지만 교단의 몽크인 자신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웅웅웅.

마나 대신 신성력이 체내를 돌아다니며 끊임없는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니.

그 움직임이 끊기는 건 믿음이 다했을 때, 그리고....

'마스터에게 찍혀 눌렸을 때밖에 없었다.

100전 99승 1패.

오로지 카를에게밖에 패배를 허용치 않았던 불패의 권투사가 바로 갤런이었기에.

쩌엉.

작정하고 내지른 정권에 부채꼴 모양의 파장이 퍼졌다.

앞쪽에서 달려들던 조직원들이 그 여파에 휘말리며 팔다리가 터져 나간바.

갤런은 그들의 머리를 밟으며 허공을 뛰어 넘었고 우두머리들을 향해 쇄도했다.

"흡!"

바위보다 단단한 주먹이 하늘에서부터 내려꽂혔다.

갤런은 자신의 주먹이 녀석의 골통을 깨부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쩌엉.

상대가 내민 주먹에 상쇄되어 막혀 버리고 말았다.

"...."

갤런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주먹이 막힌 것이야 그럴 순 있다.

하지만 맞댄 주먹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분명....

"마인(魔人)?"

악마와 계약해 자신의 영혼을 넘겨 버린 어리석은 자의 것이었다.

112화 전조 (3)